진리는 땅에서 솟아나고
“진리는 땅에서 솟아나고 의는 하늘에서 굽어보도다”(시 85:11)
녹취자: 김명진
어제 인애와 진리가 만나고 의와 화평이 입 맞추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말씀드렸습니다. 여기에서는 “진리는 땅에서 솟아나고 의는 하늘에서 굽어보도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시편의 진리라고 번역된 말이 히브리어로 ‘에메트’라는 말인데 진리라기보다는 신실하심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을 맺으시고 그 언약에 충실하신 성품을 이야기 할 때, 그 때 그것을 신실함이라고 성경에 제시를 합니다. 그래서 제대로 하자면 “신실함은 땅에서 솟아나고 의로움은 하늘에서 굽어보도다” 이렇게 하면 정확한 뜻이 됩니다.
신실함이 땅에서 솟아난다는 것은 무엇일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비록 불순종하고 범죄해서 하나님을 멀리 떠났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신실하심,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배반하고 하나님과의 언약을 지키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것 때문에 당신의 언약을 파기하고, 보복하고, 불신실해지시고, 그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비록 하나님과의 약속을 파기해도 하나님께서는 그 약속을 파기하지 않고 당신의 약속에 충실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잘못해도 하나님께서 그대로 내버려 두신다는 뜻이냐? 그런 의미라기보다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뜨리고, 불순종하고, 범죄하고, 어리석은 길로 간다고 할지라도 그들을 징계하시고 책망하셔서 그들에게 커다란 시련과 환란이 오는 것도 사실은 하나님이 당신이 이스라엘과 맺으신 언약에 충실하기 때문에 생기는 효과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해서 불순종할 때에 그것으로 인해서 하나님이 관계를 끊어버린다고 하면 때리실 필요도 없고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때리실 때에는 늘 말씀드리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순종에 대해서 복수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자녀들이 뭘 잘못해서 야단을 치고 그럴 때에 자기 속상함을 분풀이 하고 화풀이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지 이 아이가 깨닫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올바른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책망하는 것이지 않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순종하고 그들에게 고통이 계속되고 시련과 괴로움이 계속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이 그들을 향해서 신실하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을 거스르고 악한 길로 달려가는 사람을 그냥 내버려두신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입증될 수 있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순종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 때에는 하나님도 한번 당신과 이스라엘 사이에 맺어진 언약을 잘 해보려고 하다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순종하고 빗나가고 그러면 하나님도 ‘나도 굳이 그럴 필요 없다’고 하면 불순종한 이스라엘 백성보다 좀 나은 하나님일 수 있지만 거의 비슷한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신실함은 하나님의 진실하심에서부터 나옵니다. 그 하나님의 진실하심으로부터 신실함이 나오고 이 신실하심은 바로 하나님의 진실하신 성품이, 진실이라는 것이 결국은 진리에 합치하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은 당신 자신이 진리이니까 하나님은 당신 자신에게 언제나 합치하십니다.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마땅히 내가 이런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과 실제의 나 사이에는 커다란 격차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 하나님은 이런 존재여야 하는데’라고 하는 것과 실제로 하나님 사이에 심각한 격차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신실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렇게 진실하신 분이기 때문에 당신이 우리에게 뭔가를 약속하셨을 때에 그 약속을 식언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렇게 식언을 한다고 하면 그분은 진실성이 의심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신실함이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를 한번 뒤돌아보면 하나님은 당신과 맺은 언약을 따라서 언제나 올곧게 직선으로 같은 태도를 가지면서 가시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의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지를 않고 약속에 충실하다가 어느 시점이 되면 불순종하고 배반해서 하나님을 멀리 떠나고 하나님이 다시 징계하시면 회개하고, 회개하면 다시 축복하시고, 축복하시면 번영이 오고, 번영이 오면 다시 교만해져서 불순종하고 또 그러면 하나님이 징계하시고 그러면 다시 회개하고, 회개하면 다시 복을 주시고, 그런 것들이 계속 되풀이 됩니다. 불순종과 죄로 말미암아 한 번에 끊어져나가지 않고 그것이 계속 된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과 맺은 언약에 대해서 충실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당신과 이스라엘 사이에 언약에 대해 충실하신 그 신실함이 보편적이라는 것입니다. 땅에서 솟아난다고 표현합니다. 어디고 땅이 아닌 것은 없습니다. 바다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토는 아니지 않습니까? 땅에서 모든 소산들이 납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땅으로부터 취하여졌습니다. 인간의 영혼을 제외하고는 모두 땅으로부터 만들어졌습니다. 그런 것처럼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그렇게 보편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땅 안에서뿐만 아니라 온 세계 안에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사는 곳에만 햇빛을 내려주시고 단비를 주시는 것이 아니라 악인들이 살고 죄인들이 사는 곳, 극렬하게 하나님께 대항하고 악을 행하는 곳에도 하나님이 양식을 주시고 햇빛과 단비를 주십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살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입니다. 결국 11절에 나오는 진리는 땅에서 솟아나고 하는 것은 10절에서 하나님의 인애와 진리, 의와 화평 이런 것들이 모순처럼 보이지만 그런 것들이 조화를 이루는 것처럼 결국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벗어나서 살 수 있는 피조물은 아무도 없다, 모든 피조물이 바로 이 하나님의 신실하심 안에서 존재하고 살아가는 것이라는 것을 여기에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의인은 하늘에서 굽어보도다” 여기에서 ‘체데크’(qd<x)라는 단어인데 ‘의’ 혹은 ‘의로움’이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악을 행하고 죄를 짓는 모든 것에는 뭐가 있겠습니까? ‘아, 하나님이 안계신가 보다. 내가 이렇게 한들 하나님이 설마 보시겠는가?’ 그것입니다. 아무리 철이 없는 아이일지라도 ‘지금 하나님이 나를 보고 계시구나, 나는 하나님 앞에서 살고 있구나.’라는 생각을 또렷이 하고 있다면 불순종하거나 죄를 지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어른이라도 아무리 신앙생활을 그동안 깊이 해온 경력을 가진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일단 그가 이런 하나님 면전의식을 상실하고 나면 무엇이든 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이 욕망덩어리의 존재인데 누가 완전하고 의운 사람이 있겠습니까? 인간은 악마가 저지를 수 있는 그 모든 것 까지도 다 할 수 있는 게 인간입니다. 다양한 방법으로 그것이 억제되고 다양한 방법으로 절제되니까 통제되고 있는 것이지 통제가 사라지고 나면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 신앙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자녀들을 감시하고 자녀들에게 뭘 한다고 하는데 어떻게 감시가 되겠습니까?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불가능합니다. 결국은 그들에게 신앙을 심어준다는 것은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의 면전 의식을 느끼는 것입니다. 옛날에 주일학교 할 때 불렀던 찬송입니다.
(찬양)
안 계신 곳 없이 계신 하나님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내려다보시네
그게 신앙입니다. 아이들이 어디에 가 있든지, 성도들이 어디에 있든지, 예배를 드릴 때뿐만 아니라 홀로 어두운 골방에 있어도 거기에서 하나님을 의식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면전 의식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의로우신 하나님,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리우데자네이루 도시에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곳에 예수님 상을 크게 만들어서 굽어보고 있는 상을 만들었더니 범죄가 현저히 줄어들었다고 합니다. 설마 예수님이 거기에 계시겠습니까? 안 계신 곳이 없는데. 어마어마하게 큰 상이 내려다보니까, 카톨릭 국가이지만 거기에서 예수님이 내려다보시니까 범죄가 현저히 줄어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사는 면전의식, 그것이 인간들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에 충실하면서 사는 비결입니다.
“의인은 하늘에서 굽어본다.” 하나님은 안 계신 곳이 없고 보지 못하는 곳이 없는데 신앙은 천차만별입니다. 어떤 사람은 거의 의식하지 못합니다. 짐승과 방불한 삶을 삽니다. 어떤 사람은 아주 명민하게 의식합니다. 하나님이 내려다보시거늘 내가 어찌하여 범죄 할 수 있겠는가? 의로우신 하나님의 면전의식을 가지고 그 앞에서 우리 자신을 진리의 말씀에 부합하도록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은혜를 많이 받을 때에는 하나님이 자신들을 내려다보고 지켜보신다는 의식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을 때는 하나님을 멀리 떠났습니다. 결국은 그들이 하나님을 많이 의식해서 순종할 때나, 별로 의식하지 못해서 불순종할 때나 하나님은 변함없이 언제나 거기 계셔서 그들을 내려다보시고 지키시고 살펴보시던 하나님이시라는 이야기입니다. 그 결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순종하고 악을 행할 때에도 하나님은 차라리 때리셔서라도 그들을 고치시고 돌이켜 다시 당신과의 언약관계로 돌아오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불순종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매우 아프고 쓰라린 것이지만 그러나 전체로 보면 그렇게 하나님을 멀리 떠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돌이켜 당신께로 향하여 살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계속 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의로우심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들이 이스라엘 백성처럼 불순종하고 하나님을 떠나기는 했지만 아주 하나님과 결별한 자들이 되지 않고 지금도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에 붙들려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할 때에 더욱 의지할 수 있는 분이 우리 하나님밖에 없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