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격적인 복음
“그를 내게 머물러 두어 내 복음을 위하여 갇힌 중에서 네 대신 나를 섬기게 하고자 하나
다만 네 승낙이 없이는 내가 아무 것도 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너의 선한 일이 억지같이 되지 아니하고
자의로 되게 하려 함이로라”(몬 1:13-14)
녹취자 : 장주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오네시모는 감옥 속에서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해서 구원을 얻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갇힌 사도바울을 위해서 열심히 그의 사역을 돕는 신복이 되었다고 오늘 바로 읽은 성경 앞 절에서 사도바울이 직접 고백하였습니다. 시간이 흐른 후에 사도바울은 이 사람이 빌레몬의 집에서 도망쳐 나온 노예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고 사도바울은 이제 이 빌레몬에게 커다란 손해를 끼치고 뛰쳐나온 이 노예 오네시모와 빌레몬 사이에 중재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빌레몬서는 그리스도와 하나님 앞에 커다란 손해를 끼치고 주님의 품에서 뛰쳐나온 죄인들과 그렇게 손해를 입으신 하나님 사이의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단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평화만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어떻게 평화가 이루어져야 하는지 그리고 그 평화를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중보자가 되어주셨던 것처럼 우리는 어떻게 그 모든 사람들 사이에 그런 평화를 이루는 중재자가 되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자신 사이에 이루어진 이 진정한 평화가 자신에게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이루어지고 또 모든 사람들에게 이루어진 그 평화가 각자의 사람들의 마음속에서도 성취되어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 사이에 온전한 평화가 이루어지는 것이 복음이 의도하고 있는 바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의 눈길을 끄는 본문은 두 가지 사실을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13절에서는 사도바울의 의중을 이야기하고 14절에서는 빌레몬의 의중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의 의중이라고 하는 것은, 이제 이 사람이 예전에는 빌레몬의 집에 손해를 끼치고 도망쳐 나온 노예로서 당시 로마법을 따르면 커다란 형벌에 처해질 사람 이었습니다마는 이제 회개하고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또 그 복음 안에서 사도바울을 사랑하여 그를 위해 하나님의 나라에 요긴한 일꾼이 된 것입니다. 사도바울의 의중은 이 사람을 빌레몬이 모두 용서하고 그의 자유로운 상태에서 자신 곁에 있으며 지금 하고 있는 일을 계속 하는 것이 사도바울의 의중이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일꾼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도바울의 모습을 봅니다. 그는 단지 하나님의 일꾼이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하나님의 일꾼으로 세우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신만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사람들을 잘 세우고 온전하게 하여 하나님을 거역하고 살던 죄인들이 하나님께 순종하고 사랑하며 사는 진실하고 거룩한 사람들이 되게 하는 것이 바로 사도가 의도했던 바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바로 사도바울이 하나님을 섬기는 이유였으니 그 섬김은 결국 그리스도의 교회를 온전한 주님의 몸으로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이 일을 위해서 사도바울은 오늘도 옥 속에 갇혀 있었던 것입니다.
이어서 사도는 빌레몬에게 기대하는 자신의 의중을 토로합니다. 네 승낙 없이는 아무것도 하기를 원치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도바울은 이 편지의 내용으로 미루어보아서 빌레몬이 일생동안 갚아도 갚을 수 없는 커다란 영적인 도움을 이 사람에게 주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빌레몬도 사도바울을 존경하고 사랑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목자인 바울과 그리고 그의 가르침을 따라서 신앙을 갖게 된 빌레몬 사이의 관계였습니다. 그렇지만 사도바울은 이 세상의 법의 질서를 존중했습니다. 이 세상의 법에 의하면 오네시모에 대한 소유권은 빌레몬에게 있었고 그 오네시모가 손해를 끼치고 도망쳐 나온 죄에 대해서 용서를 하고 자신 가까이에서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서 수고하게 할 것인지 하는 것은 빌레몬이 결정할 권한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사도바울의 질서에 대한 존중심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사회의 질서를 구성하고 있는 법적인 현실들을 잘 받아들이면서 사도바울은 오네시모를 향하여 빌레몬이 자비를 베풀도록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뒤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자신에게 명령할 수도 있지만 명령할 수 있는 권한도 있지만 그러나 그는 명령하는 대신 간청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바울의 태도였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왜 사도바울이 노예의 제도를 그대로 인정했는지, 왜 이런 노예제도에 대한 개혁을 시도하지 않는지, 이렇게 물을 수는 없습니다. 그는 사회개혁가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의 일꾼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사실상 사도바울이 전해준 복음의 이치를 따른다면 사실은 노예제도는 있으나 없으나 큰 문제가 교회에서 되지 않았습니다. 상전이 종을 종이라고 여기는 대신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라고 생각하도록 그렇게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세월이 많이 흐르고 이제 민주에 대한 의식들이 싹트고 난 후에 노예제도에 대한 반성이 이루어지게 된 점을 고려한다면 우리는 이러한 현실들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의 관심은 바로 이렇게 한 사람의 하잘 것 없는 노예였지만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변화된 삶을 살았을 때에 사도바울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아주 요긴한 동지였고 그리고 복음의 동역자였고 나아가서 자신의 마음을 가장 잘 이해하여 분신처럼 섬길 수 있는 신복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도바울은 왜 자신이 빌레몬의 승낙 없이는 이 오네시모를 자신의 가까이에 두는 일을 확정하지 않으려고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언급하는데 이는 너의 선한 일이 억지같이 되지 않고 자의로 되게 하려 함이라, 라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손해를 끼친 도망친 노예를 용서하는 것은 사도바울이 가르쳐준 복음적인 태도였습니다. 그리고 그를 용서해서 형제로 받아들여주고 사도바울 가까이에 머물러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위해 애쓰게 해주는 것은 훌륭한 봉사였습니다. 그렇지만 그 일이 마지못해서 사도바울의 강요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일이 되기를 사도는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빌레몬을 믿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그리스도의 복음이 큰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매우 인격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복음은 인격적이지만 그 복음을 적용하는 사람들의 삶이나 태도가 비인격적인 경우를 많이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권위가 있고 권세가 있는 것이지 자신이 그 권위와 권세를 가진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자신은 감추어지고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이 그 권위가 온전히 드러나게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복음사역자들이 해야 할 일이 아닐까요? 그래서 사도바울은 정말 놀라운 권위를 가지고 권세도 있는 사람 이었습니다마는 이 선한 일에 있어서 인격적으로 이 일이 이루어지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빌레몬이 자기 스스로 하나님이 주신 그 권한을 가지고 기쁜 마음으로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사도바울이 원하는 대로 오네시모를 대우해주기를 바랬던 것입니다.
우리는 진리에 대한 헌신과 사랑에 대한 예의가 공존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는 탁월한 열심을 가지고 있지만 자신과 같이 그런 열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멸시하는 것부터 배워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주신 그 은혜를 하나님의 은총으로 주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며 내가 저 사람보다 탁월한 믿음을 가지고 있거나 혹은 좋은 헌신으로서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것이 비인격적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권위는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에 있는 것이지 그 진리의 말씀을 따라서 살아감으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주는 데에 있는 것이지 그 사람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잘 받아들이고 의미를 알 뿐 아니라 그것을 인격적으로 적용하며 살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넘치는 확신은 좋지만 확신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이해할 수 있어야 하고 성결한 삶을 살아야 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이해할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죄는 미워하지만 그 죄를 지은 사람을 사랑할 수 있어야지 그것이 진정한 복음의 정신이라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이 훌륭한 일이 명령과 복종의 관계 속에서만 이루어지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 선하고 좋은 일이 빌레몬의 신앙 인격 속에서 결정이 되고 실행이 됨으로 그 모든 과정을 통해 빌레몬도 복음에 담겨져 있는 이 용서와 사랑의 의미를 터득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아름다운 일이 빌레몬의 마음속에서도 기쁨이 되고 오네시모의 마음속에서도 감격스럽고 또 중재자의 역할을 하고 있는 사도바울의 마음속에서도 감사가 충만해지는 계기가 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사도바울의 마음이 우리에게 복음을 가르치시고 그 복음대로 살라고 초청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전해주신 복음은 은혜의 복음이고 인격적인 복음입니다. 우리들이 이 복음의 정신으로 살 수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