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서 강해 12 (95. 2. 12)
사명자속에 깃든 편견
요나가 심히 싫어하고 노하여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 이다 여호와여 원컨대 이제 내 생명을 취하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 이다. (욘4:1~3)
4절에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의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하시니라.’ 지난시간에는 1절까지 이야기를 하고 2절은 못 들어가고 마쳤습니다. 좀 정리를 하고 그리고 진도를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요나가 니느웨로 가서 그렇게 하나님이 명하신대로 심판이 가까워온 것을 외쳤지요. 외쳤는데 전혀 기대 밖의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수많은 사람이 회개하고 뉘우치는 역사가 일어났는데 이것은 이스라엘에서도 본적이 없는, 말하자면 전대미문의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이에요. 가만히 보면 우리는 이 사실에 대해서도 무엇을 하나 깨달아 알 수 있느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다 전하고 나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사실 전하는 사람도 모르는 것이에요. 아무튼 왕으로부터 시작을 해서 폭풍과 같은 회개가 니느웨 전국을 휩쓸고 지나갔어요. 그 회개의 폭풍 속에서 엎드려지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통회 자복하는 이 엄청나고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 것이에요. 그런데 그런 회개가 어떤 특징이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두 주간에 걸쳐서 자세하게 그 니느웨 백성들에 대해서 자세하게 말씀을 드렸으니까 반복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오늘 우리들이 관찰하고자 하는 것은 그렇게 회개를 하니까 하나님이 내리시기로 한 재앙을 거두시고 그리고 그 백성들을 용서하시는 것이에요.
그렇게 되니까 4장 1절에서 요나의 반응이 나오는 것이에요. 요나가 심히 싫어하고 노하였다고 했는데 히브리 성경에 보니까 재미있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요나가 심히 싫어했다는 말이 뭐냐 하면 요나에게 그 사건이 커다란 재앙이었다고 나와요. 커다란 재앙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요나가 노하였다고 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진노하실 때 쓰는 단어하고 똑같은 단어에요. 진노하는 것이죠. 결국은 이것은 무엇을 보여주느냐 하면 아주 연구할 점이 이 4장 1절에서부터 3절까지에는 굉장히 많아요. 그래서 지난시간에 조금 1절을 두드리다가 시간이 너무 많이 가서 그냥 마쳤는데 오늘 한번 지난주 이야기를 기초로 해서 더듬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이 사건을 통해서 무엇을 알 수 있느냐하면 3장에서 니느웨 백성들에게 외치는 것이죠. 그것이 뭐냐 하면 ‘사십일이 지나면 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그러면서 선지자가 외치면서 니느웨를 지나간 것이에요. 그러면 결국은 이렇게 니느웨 백성들에게 사십일이 지나면 무너지리라고 외칠 때에 이 마음이 어떤 마음이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죠. 자, 우리가 추측 가능한 스토리는 이런 스토리입니다. 고국에 있을 때에 하나님이 그를 선지자로 부르시니까 그리고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고 하니까 이 요나가 싫다고 했습니다. 한편으로는 생명의 위협을 느꼈고 또 한편으로는 계속해서 자기네 민족을 괴롭히는 이 니느웨 백성들이, 앗수르 민족이 구원을 받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은 하나님께서 계속 가라고 그러시니까 다시스로 도망을 갔습니다. 그러다가 그가 이제 하나님의 추격을 받고 배에서 바다로 던져지고, 물고기의 뱃속에 들어가서 회개하는 장면을 보여주는 것이죠. 그렇게 회개를 하면서 그 때 그 회개는 참 진정한 회개였을 것이에요. 그리고 깊이 하나님 앞에 뉘우쳤어요. 문제는 무엇이었느냐 하면 이렇게 회개를 하고 하나님이 물고기를 명하셔서 요나를 토해낸 다음에 두 번째 요나에게 임하셨는데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고 했을 때 하나님은 아마 요나에게 가서 외치라고만 말했지 ‘혹시 주님 용서해주시는 것이 아닙니까?’ 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대답을 안 하셨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이 요나가 하나님 앞에 이처럼 두 번째 말씀이 임했을 때에 니느웨로 걸어가는 이 요나의 희망은 하나님이 갖는 희망과는 완전히 다른 희망이었어요. 그것이 뭐냐 하면 ‘그래 이렇게 집요하게 하나님이 나를 부르셔서 니느웨로 보내시는데 결국은 하나님이 내가 이렇게 순종함으로써 니느웨 백성들을 심판하실 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내가 외치는 이 사건이 심판을 위한 조건이 될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제 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뜻대로 이루어지지를 않은 것이에요.
자 보십시오! 요나가 이 사건을 보면서 심히 싫어하고 노하게 되었습니다. 분명히 요나의 마음속에는 이 백성들이 이 선포를 듣고, 돌이키고, 뉘우쳐서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된다고 하는 연민과 뜨거운 마음이 전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말씀은 그대로 살아서 역사하면서 사람들에게 회개를 촉구하고 그들로 하여금 뉘우치게 만들어서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야 말았다는 사실이에요. 그러니까 우리는 요나의 불순종을 보고 요나의 불순종을 뛰어넘어서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를 그대로 행하고야 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열심을 우리는 이 부분에서 읽게 되는 것이에요. 그렇지만 이런 식으로 사명을 감당해나가는 것은 본인에게 있어서 굉장히 불행한 일이에요.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시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을 이룰 때에 우리가 하나님과 한마음이 되어서 그래서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하나님의 뜻이 저지당하는 것을 슬퍼하고 아파하며 그러면서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어가면 우리들이 하나님을 섬기면 섬길수록 하나님과 더 가까이 되는 거예요. 신앙이 깊어져요. 그리고 우리가 영적으로 더 탁월한 사람으로 변해가요. 그러나 이런 것들이 이루어지지 못하면 아무리 커다란 일이 나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가 나를 통해서 성취된다고 하더라도 말하자면 내 영혼의 유익이 없는 것이에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잡히셨을 때 그 때에 많은 사람들이 이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처치할 것에 대해서 고민할 때에 그때에 대제사장이었던 가야바가 그 예수 그리스도의 잡히신 그 모습을 보면서 자기도 모르게 무슨 말을 했느냐하면 ‘한 사람이 죽어서 많은 사람이 평화를 누리는 것이 합당하지 않겠느냐.’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면서 성경은 말하기를 이는 자기도 무슨 말을 하는지 몰랐다고 했어요. 그는 부지중에 예수 그리스도가 대속의 죽음을 죽으시고 그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사람이 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을 얻게 되고 하나님과 새로운 생명을 누리게 되는 화해로 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예언했어요.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심으로 사랑하고, 따르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에 의해서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예언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는 사람들을 통해서도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서 죽으실 것이 이렇게 예언되었다는 것이에요. 그런 의미에서 그는 아주 적합한 때에 기가 막힌 예언의 말씀, 비록 사람들이 그 말에 깊이 귀를 기울이면서 그 뜻을 깨닫지는 못했지만 그러나 성령께서는 그를 통해서 하나님의 귀중한 예언의 말씀을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서 가장 적기에 토해내게 하셨던 것이에요. 그러나 본인에게 있어서는 그게 얼마나 불행한 일이에요. 하나님의 위대한 예언을 말하면서 그의 마음은 전혀 벅차오르지 않았어요.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셔서 그 한분이 죽으심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생명과 은혜를 누려야할 필요가 있다고 하는 이 놀라운 예언에 대해서 전혀 의미도 모르는 채 그는 그 말을 스스로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는 한 도구가 되어버리는 일밖에 하지를 못했다는 것이에요. 이것은 굉장히 불행한 일이에요.
그런 사람 중에 대표적인 사람 중의 하나가 또 누가 있지요? 가롯 유다가 있지요. 그는 모든 병을 고치고 귀신들을 내어쫒을 수 있는 놀라운 권세를 받은 사람이었어요. 그리고 다른 제자들과 함께 그 권능을 행사했을 것이에요. 그리고 다른 제자들과 함께 예수께 돌아와서 아마 그렇게 위대하게 성령이 자기를 통해서 역사하신 놀라운 일들에 관해서 예수 그리스도께 보고하고 그리고 칭찬을 받았을 것이에요. 그렇지만 그는 자기를 통해서는 그 일이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밖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일이 자기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던 것이에요. 그런 대표적인 케이스를 이 요나를 통해서도 보게 되는 것이죠. 그러니까 누구든지 자기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는 일 때문에 자기를 바로 보지 못하게 되는 일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들이 기억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과 저를 사용하셔서 일을 하신다고 하십시다. 크고 놀라운 일들이 일어난다고 하십시다. 그것이 꼭 그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인정해 주시는 증거가 되진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을 해야 되는 것이에요. 이런 위험은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거나, 하나님의 일을 하거나, 교회를 열심히 섬기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많이 나타납니다. 분명히 오늘 제가 말씀을 전할 때에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뉘우치고, 가슴 아파하고, 슬퍼하는 이런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내 마음에 동일한 역사가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요나는 전혀 니느웨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않고 사십일 후에 니느웨가 무너지라고 말할 때 요나가 바랐던 것은 진짜 니느웨가 무너져서 사람들이 그 건물에 깔려서 죽고 (이번에 지진 나는 것 봤지요.) 그렇게 무너져서 수많은 사람들이 건물더미에 깔려서 죽고 ,성벽에 깔려서 죽고, 돌 벽에 머리가 맞아서 죽어가고 하는 그 모습을 꿈에도 그렸던 것이에요. 얼마나 사악한 것입니까? 그러면서도 그는 마치 생명을 내건 선교사처럼 그렇게 이방 이스라엘에 대해서 악감정을 품고 있는 적대국의 한복판에 들어가서 그렇게 포부도 당당하게 ‘니느웨가 무너지리라’고 외치면서 그 니느웨 성을 지났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순교를 각오한 헌신자와 같았지만 그러나 가슴속에서는 기대하는 바가 하나님이 이 요나를 보낼 때에 거셨던 기대와는 전혀 다른 기대를 하면서(하나님하고 동상이몽이지요.) 그 길을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이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이런 일이 어떻게 이렇게 놀라운 신앙의 체험으로 말하자면 이 사람은 거룩한 하나님을 뵙고 하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고 회개의 경험으로 말하자면 그는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서 삼일 밤, 삼일 낮 동안을 죽을 각오를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죽음의 고비를 넘긴 사람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가 뉘우치고 다시 결심한 바로 말하자면 다시 한 번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그리고 생명을 걸고 니느웨로 다시 들어간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사람에게도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느냐? 일어날 수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게 얼마나 무서운가 하는 것을 보는 것입니까? 무엇 때문에 요나는 이렇게 단순한 사실을 몰랐을까? 왜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가서 이미 그렇게 외치게 되면 니느웨가 결국은 망하게 되고 무너지리라 이런 기대를 가지고 갔던 사람이면 자기가 그 말씀을 들고 니느웨 성을 지날 때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회개함으로 말미암아서 자기의 생명이 보전 받으리라는 그런 기대를 안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명의 위협이 도사리고 있는 이러한 니느웨 성 한복판을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들고 순종하면서 걸어갈 때에 그가 그러한 자기의 생명의 위협까지도 각오하면서 이 니느웨성 한가운데를 지나면서 복음을 전하게 되었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되었는데 이런 헌신된 마음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그가 그런 식으로 전혀 그렇게 패역하고 사악한 마음을 가지고 이런 길을 걸어가면서 이런 헌신된 삶을 살 수 있었는가?
그러니까 헌신된 사람 속에 교묘한 패역함이 더 많이 깃들여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해요. 왜 이 사람이 이렇게까지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나님을 지금 심문하는 거예요. ‘보십시오.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내가 이럴 우려가 있다고 내가 하나님께 말하지 않았습니까? 내말이 맞지요? 당신보다 내가 더 맞지 않습니까? 그래서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는데…….’ 결국은 내가 다시스로 도망한 것이 잘못되었다는 거예요? 잘못되지 않았다는 거예요? 여기서 얘기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 보면 내가 다시스로 도망한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었겠느냐는 것이에요. 그리고 오히려 나를 구원해내서 이렇게 다시 보낸 당신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냐고 따지면서 결국 마지막에는 주님이 은혜로우시고, 자비로우시고,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애가 크시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신다는 사실이 이 선지자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비난하는 조건이 되는 거예요.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겠는가? 가능하니까 여기 나와 있는 것이죠. 이것은 단순히 이상한 선지자 한 사람을 우리에게 소개하기 위해서 성경이 이 사건을 여기다가 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 사건을 통해서 우리에게 사실은 복음을 보여주는 것이에요.
다시 말하면 이 요나가 이처럼 우리로서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으리만큼 패역하게 하나님을 향하여 대드는 이러한 과정에까지 이르게 되는 이면에 가지고 있었던 배경이 무엇이냐 하면, 무엇 때문에 그가 이렇게 되었느냐? 그 원인이 있을 것 아니에요? 이 사람으로 하여금 이렇게 되게 만든……. 그것은 간단하게 얘기해서 편견이에요. 편견……. 편견이라고요. 그러니까 어때요?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 듣고 하늘이 열리면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어왔는데도 그 하나님의 말씀과 그 음성을 붙들고 살지 아니하고 자신 속에 있는 편견을 붙들고 사는 것이에요. 그 편견이 뭐에요. 하나님은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앗수르에게 대적이 되셔서 니느웨를 벌하셔야 한다. 하나님은 그래야지만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잘 드러나고 그래야지만 열방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넘보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하는 편견이었어요.
그러면 그 편견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이에요? 그 시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편견이었어요. 모든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편견을 이 사람도 가지고 있었던 것에 불과해요. 이 한사람이 특별한 생각을 한 것이 아니라 이 사람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지고 있는 그 보편적인 생각을 가진 한 사람의 대표자에요. 한 사람의 대표자에요. 그러한 편견을 그 시대에 가지고 있을 때 그 시대 속에서는 요나의 이야기가 하나님의 말씀보다 훨씬 더 설득력이 있는 이야기였어요. 만약에 대상이 하나님이 아니고 인간이었다면 사람들이 가편투표를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가편투표를 요나에게 던졌을 거예요. 그럴 정도로 요나가 가지고 있는 생각, 이것은 논리정연하고 그리고 나름대로 말하자면 구조물을 가지고 있는 것이에요 하나님은 이러해야 된다. 하나님이 이런 방향으로 역사하셔야 한다고 하는 그러한 구조물을 마음 안에 가지고 있는 것이에요. 그런 것들을 가지고 있으니까 헌신된 자리로 요나가 들어서고 커다란 헌신을 필요로 하는 자리로 들어서고 사명을 더 크게 주시면 주실수록 그는 더 커다랗게 하나님의 뜻과 자기의 뜻이 엄청나게 갈라져 나가는 것을 느끼는 것이에요.
선지자는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는 사람들에게 하늘의 계시를 가지고 와서 전해줌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뉘우치게 만들고 그래서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고, 순종하도록 만들어주기 위해서 하늘로부터 보냄을 받은 사람이에요. 그런데 그런 사명을 받은 선지자의 마음속에서 이런 강한 불순종과 불신앙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그 패역한 편견이 가슴속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에요. 자, 이런 정도로 된 상황에서 이 요나가 하나님께로부터 부름을 받은 선지자, 큰 은혜의 체험, 그가 맡은 사명, 그가 한 회개, 다시 회복된 것, 그래서 다시 사명의 자리로 서게 된 것, 이런 모든 것들이 하나님 앞에 제대로 평가받을 수 있는 모든 기초를 이 사람이 잃어버리고 있는 것이에요. 왜? 그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니느웨에 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에요.
여러분 순종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 순종은 하나님이 만들어놓은 그 틀 안에서 그냥 살아가는 것이 순종이 아니라는 사실을 여러분들이 기억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순종은 결코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그 어떤 틀이 있어서 그 틀로 또박또박 걸어가고 다른 길로 걸어가지 않는 그런 기계적인 복종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해요.
누가 그런 얘기를 해요. 상관의 명령에 가장 잘 복종한 군대는 역사상에 프랑스 군대였다고 해요. 그래서 우스갯소리로 어느 정도로 복종했느냐고 했더니 ‘앞으로 가’ 그랬대요. 그러니까 병사들이 앞으로 계속 가는데 앞에는 낭떠러지였대요. 앞으로가를 해놓고 마침 이 지휘관에게 손님이 찾아와가지고 이야기를 걸었대요. 그래서 이 사람이 ‘제자리에 서’를 잊었대요. 그래서 어떻게 되었느냐하면 앞으로 가라는 명령을 듣고 모든 병사들이 낭떠러지로 계속 걸어갈 정도로 완전하게 순종하는 그런 전통을 가진 나라가 말하자면 프랑스 군대였다고 해요. 과장이 좀 되었겠지요.
하나님의 세계에서는 이러한 기계적인 순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순종은 이런 순종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에요. 그래서 가끔 보면 뭔가 하나님 앞에 순종한다고 하면서 뭐라고 그러느냐하면 ‘나도 할 맘이 없지만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내가 이 자리에 있고, 내가 이 일을 하고, 그 다음에 이 사명을 감당한다.’고 해요. 그것은 굉장히 불행한 일이에요. 이것은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이에요. 순종에 대한 절대적인 오해에요. 그것은 순종이 아니에요. 참된 순종은 거기에 있어서 그 일을 행하면서 내가 그 일을 행할 때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우리가 행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요? 예수를 안 믿고 딴 길로 자꾸 불순종하고 가면 하나님께서 슬퍼하신다고요. 그렇지 않아요? 잘 믿고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살아가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 아니에요? 그 기쁨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면서 나도 느끼는 것이에요. 그것이 참다운 순종이에요. 그러니까 그런 의미에서 볼 때에 불순종의 범위는 상대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넓다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결국 무슨 뜻이에요? 요나가 다시 니느웨로 돌아온 것이 완전한 순종이었어요? 아니었어요? 완전한 순종이 아니었다라고 하는 것이에요.
탕자의 비유에서 나오는 집나간 탕자 말고 집에 가만히 있던 아들, 완전한 순종이었어요? 아니었어요? 절대 아니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집을 나간 그 탕자보다 훨씬 의롭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죠. 교회 안에는 사실 이런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이죠. 참된 순종은 이 일이 일어날 때 요나가 심히 기뻐하고 즐거워하여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 이러하겠다고 하신 말씀을 주께서 과연 이루셨나이다. 이제는 이 종이 여한이 없사옵나이다.’ 이렇게 나갔어야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큰 사명을 맡아서 감당해 나가기를 원하면서도 이런 식의 불순종의 요소들이 가슴 속에 살아있는 것이에요. 사람이 볼 때 그 니느웨 성을 걸어 다니면서 그 죽을 각오를 하고 사십일 이후에는 이 성이 무너지리라고 외치는 이 선지자의 모습 속에서 이러한 말하자면 교묘한 불순종이 그렇게 강력하게 이 사람의 인격과 삶을 사로잡고 있었으리라고 하는 것을 누가 기대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것은 거의 기대할 수 없는 일이지요. 그러나 그는 과연 이런 식으로 길을 걸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통해서 우리들이 한번 배워야 할 바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우선 완전한 순종은 금방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이 느끼시는 것과 동일한 그것을 내가 느끼면서 하나님 앞에 순종하는 그것이 내게 즐거움이 되어야 해요. 그리고 기쁨이 되어야 된다고요. 교회를 섬기는 것도 마찬가지죠. 그것이 의무가 되고 그것이 책임감이 되어서 하기 싫어서 그것을 감당하는 것은 하기 싫어서 도망가는 것보다는 그것이 날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불완전한 순종이에요. 그게 내게 기쁨이 되고 하나님 앞에 내가 순종할 때에 그 일이 내게 즐거움이 되어야 해요. 내가 악한 것을 버리고 선한 것을 찾아갈 때에 그 일이 내게 즐거움이 되고 기쁨이 되어야지 그것이 완전한 순종이에요.
또 하나 배우게 되는 교훈은 무엇이냐 하면 니느웨가 무너지기 전에 먼저 요나의 마음속에 있는 니느웨가 무너지는 일들이 일어났어야지 된다는 것이에요. 우리는 우리 속에 이러한 불신앙적인 이러한 요소들을, 우리로 하여금 불순종하게 하는 이러한 요소들을 굉장히 많이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커다란 사명을 주셔서 이렇게 니느웨로 요나를 보내셨음에도 불구하고 요나가 이렇게 하나님의 계획을 이렇게 이루는 도구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도 자기 속에는 어떻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자기 나름대로의 계획을 가지고 있었고 그 계획의 잣대를 가지고 하나님의 계획을 재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이것이 결국은 요나로 하여금 이렇게 불순종과 불신앙으로 가게 만들었던 것이에요. 보십시오. 요나는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계시를 만났지만 그러나 성경을 좀 더 깊이 연구해볼 필요가 있었어요. 왜? 그는 분명히 성경을 깊이 연구하고 이해했더라면 그는 틀림없이 이미 오래전부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닌 이방인들에게도 큰 은혜를 베푸시고 그들을 살리시고 그들을 구원하기를 원하시는 선교적인 열심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이 선지자가 깊이 깨달을 수 있었을 것이에요.
그러나 그는 그러한 식견을 가지지 못했어요. 문제는 무엇입니까? 이 선지자가 아무리 니느웨 사람들이 우리가 보기에 악을 행한다고 할지라도 그리고 악한나라라고 할지라도, 이 니느웨 백성들이 악하고 나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이들도 사랑하시고 이들을 고치고 치료하셔서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베푸시는 참된 돌이킴과 회개를 주시고 그래서 이방의 땅에서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실 것이라고 하는 이 평범한 신앙의 도리를 깊이 깨달았더라면, 그런 무지가 없었더라면, 그는 이렇게 붙잡히지 않을 수 있지 않았겠느냐는 것이죠.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어떤 사람이 불행한 사람이냐 하면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 앞에 깨어지고 교정되지 않는 사람들이야말로 제일 불행한 사람들이에요. 그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언제든지 이런 위험이 남아있는 것이에요. 그들은 열심히 충성하고 헌신하면 할수록 위험해요. 왜 그래요? 문제가 헌신보다 더 많기 때문이에요. 더 깊은 섬김의 자리로 가면 갈수록 그는 하나님을 자신의 손안에 넣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그 하나님을 역사시키려고 하는 욕망을 갖는다는 것이에요. 편견이 그렇게 무섭다는 것이에요. 그 시대가 이런 생각을 할 수는 있었을 것이에요. 그렇죠?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말하자면 사람들 사이에 통용되는 생각이지요. 그런데 그 생각이 하나님이 와야 할 자리로 올라가서 절대화 되어버리면 그것은 결국은 이데올로기가 되는 것이에요. 그것은 우상숭배와 똑같은 것이에요. 어떤 의미에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상들 그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놓고 하나님 앞에 판단을 받고 비판을 받아야할 것으로 보지 않고 절대적인 것으로 놓고 보는 이런 모든 사조 자체가 모두 이데올로기에요. 모두 타도되어야 될 우상들이라는 것이에요.
전도서 기자가 말한 대로 인간이 하나님을 어찌 다 알 수 있겠으며 그 오묘함을 사람이 어찌 다 측량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얼마나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인데 요나가 그 하나님을 어찌 다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요나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국수주의적인 그 생각에 하나님을 가두어두려고 했던 오류를 범한 것이에요. 이러한 편견이 이 사람을 일단 지배하고 나니까 그 다음에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은혜를 베푸셔도 전부 다 이 절대적인 생각에 여과를 받는 것이에요. 여과를 받아가지고 그래서 다 걸러 내어지고 자기에게 필요한 것들만 받아들여지는 것이에요.
좀 더 쉽게 예를 들어볼까요. 이런 얘기지요. 때로는 성령을 많이 체험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보다도 성령을 아주 많이 체험했기 때문에 성령체험에 대해서 풍부한 상식을 가지고 있고, 그리고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영적인 생활이다. 라는 확신이 굳어져버린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무슨 이야기를 하든지 간에 자기가 가지고 있는 그 필터에 하나님의 말씀을 다 걸러서 자기하고 사상이 맞는 것들을 받아들이는 것이에요. 그래서 결국은 어때요? 자기가 가지고 있는 이 틀도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오히려 걸러지고 검증을 받아야 하는데 그렇지가 않고 그것이 절대적인 필터가 되어가지고 그 다음에 모든 것들을 거르는 것이에요. 성경을 읽어도 항상 그렇게 걸러지는 것이에요. 열심히 하지요. 그러나 자기사상에 충실하지요. 하나님을 사랑하지요. 그러나 자기 사상을 훨씬 더 사랑해요. 하나님을 신뢰하지요. 그러나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각 속에서 나타나시는 하나님만을 훨씬 더 신뢰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어때요? 결국은 그 속에서 나온 것들로 계속해서 자신을 쌓아가는 것이죠. 그것이 점점 굉장히 커다란 집이 되어가는 것이에요. 그는 열심히 무엇을 배우러 다니면 다닐수록 더 열심히 하는 것이 쌓이는 것이에요. 그래서 그 틀이 완전히 굳어져서 흔들리지 않는 것이에요.
저는 전에 있던 교회에서 운동권에서 열심히 활동하던 청년들에게 말씀을 전한 적이 있습니다. 전혀 안 들어와요. 변화되는 사람도 물론 있었지만 그러나 상당히 많은 사람들은 들어도 변화가 안 돼요. 왜 그러느냐 하면 그 필터를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하면 그 말씀 속에서 자기가 가지고 있던 생각들을 가지고 걸러내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어때요? 공교롭게도 그런 그물에 복음은 다 걸러지는 것이에요. 그리고 자기가 가지고 있던 일부의 생각들이 받아들여지는 것이죠. 감화가 있어도 항상 그것은 신령한 감화가 아니라 부분적인 감동에 그치게 되는 것이에요. 말씀이 액면 그대로 우리의 마음속에 가서 닿을 때에 그 때에 우리의 심령 속에 진리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는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지 이것저것 걸러내면 그것이 말하자면 일리는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 자체가 힘이 있는 진리가 되어서 우리의 삶을 바꿔놓지는 못한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되는 것이에요.
자! 그 다음에 뭐 밤새도록 예를 들어도 수가 없지요. 예수를 믿고 복을 많이 받아서 부자가 된 경험을 가진 사람이 있다고 칩시다. 말씀이 균형 있게 폭넓게 핵심을 중심으로 그에게 들어가서 그래서 바르게 하나님의 믿음생활이라고 하는 이 집이 바르게 건축되지 않고 이상한 것 하나가 들어가서 잘못 세워진 사람들은 이런 위험을 갖는 것이에요. 예수를 믿고 성공한 사람, 그래서 돈도 많이 벌고, 그것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는 증거라는 이런 식의 체험의 증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것을 필터로 보고 다 겨냥하는 것이에요. 죽음과 고통과 질병과 가난과 모든 문제들을 다 이 각도에서만 설명을 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어때요? 다른 것들이 다 걸러내어지는 것이지요.
그 외에도 굉장히 많은 예를 들 수 있지요. 옛날에 일제시대 때도 일본에 기독교가 있었지요. 그러나 일본에 있는 기독교는 지금도 있어도 복음적인 교회가 많지 않아요.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인지 아세요? 기독교가 들어오는 것을 허용했어요. 그 대신 철저하게 군국주의라고 하는 그 틀을 갖다놓고 신학사상이 들어오거나 기독사상이 들어오면 그것으로 걸러내는 것이에요. 그리고 전부 다 그 군국주의라는 이념과 충돌을 일으키지 않을 수 있는 기독교로 바꾸어서 받아들인 것이에요. 그것이 오늘날 일본의 교회가 계속해서 성장하지 못하는 이유 중의 하나에요. 진정한 복음의 씨앗을 가지고 있는 교회가 뿌려지면 그러면 이북에서 우리들이 이전에 분단되기 전에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폭발적인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에요. 그런데 일단 걸러지면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힘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그런 것들을 가지고 있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는 엄청난 그 말하자면 도전이며 반항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그러한 기재들이 이 요나의 가슴속에 살아서 역사하고 있어요. 하나님이 선하고 은혜로우시고, 자비로우시고,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이에요. 어디를 향해서? 니느웨를 향해서는……. 이유는 무엇이에요. 내 마음에 그것은 싫다는 것이에요. 이유는 간단해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나는 너희를 사랑한다.’ 거기에 이유가 없었던 것처럼 요나가 ‘하나님은 니느웨를 향해서 은혜를 베푸시거나 자비로우시거나 노하기를 더디 하시거나 인자가 크시거나 뜻을 돌이켜 재앙을 거두시면 안 됩니다.’ 그 이유는 내가 싫다는 얘기에요. 그러니까 인간의 내면에 있는 그 불순종은 자기 깐에는 상당히 논리를 가지고 있다고 하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그 논리는 초등학교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아주 저급한 논리에요. 오히려 지배하고 있는 그것은 논리보다는 느낌이에요. 느낌. 그러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은 다 잘 먹고 잘살아야 된다고 하는……. 왜? 그러면 논리를 이야기 하지만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이에요. 이러한 말씀에 의해서 검증되어지지 않은 어떤 틀을 이 속에 붙들고 있는 것이 말하자면 하나님 앞에 한번 불순종하는 것보다 훨씬 더 문제가 커요. 그러니까 바르게 살아가려고 하다가 유혹을 받거나 잘못해서 불순종의 길로 떨어지는 것보다 훨씬 더 문제가 커요. 이것은 끊임없이 불순종을 양산해내는 기계의 역할을 한다고요. 이 잘못된 틀 속에서 뭐가 나오겠어요. 계속해서 불순종이 쏟아져 나오는 것이에요. 그것도 철저하게 삶의 밑바탕부터 뒤흔드는 불순종이 쏟아져 나오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예레미아 1장에 나오는 예레미아에게 하나님이 소명을 주실 때에 ‘뽑고, 파괴하고, 파멸하며, 무너뜨리고, 건설하며 심게 하기 위해서 너를 선지자로 세웠다.’고 했거든요. 그러니까 어때요? 먼저 결국은 이러한 것들이 우리의 마음속에서 이런 잘못된 편견과 불신앙의 편견들이 무너지는 일들이 일어나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자신 속에 있는 그릇된 것들이 늘 드러나기를 원하고 그리고 그것들이 파괴되고 그리고 무너지고 넘어뜨림을 당하게 되는 일들이 일어나기를 늘 사모하는 마음을 가져야 되는데 사람들은 그런 생각을 안 갖는 것이죠. 결국은 요나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그 생각의 틀 안에 하나님을 가두면서 이대로 움직여달라고 지금 떼를 쓰고 있는 것이죠. 그런데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지 아니하시리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고 현실을 보고 나니까 그 다음에 뭐라고 그러느냐하면 ‘여호와여 원컨대 이제는 내 생명을 취하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이것은 살인적인 생각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기뻐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는데 헌신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뜻이 자기에게 있어서 고통이 되는 것이에요. 아픔이 되요. 심지어는 마지막에는 ‘죽겠사옵나이다.’ 이것은 바꿔서 얘기하면 심하게 얘기하면 요나가 들으면 섭섭할지 모르겠지만 심하게 얘기하면 ‘내가 하나님 당신을 죽이고 싶습니다.’ 이것과 똑같은 것이에요. 그런 하나님을 죽일 수 없으니까 내가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사옵나이다. 이렇게 나오는 것이에요.
거기 성경에 보니까 ‘원컨대 내 생명을 취하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결국은 그 어떤 불순종의 극단을 보여주는 것이죠. 자기가 차라리 하나님의 뜻이 그 뜻대로 이루어질 바에야 차라리 내가 죽고 말지, 안보고 말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셨던 기도와 완전히 정반대되는 것이죠. 그러니까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짐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이 사람보고 주기도문을 하라고 그랬으면 뭐라고 그랬겠어요?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 절대로 이루어지면 안 되겠나이다. 주 뜻을 이루실 바에야 차라리 저를 죽이고 이루시옵소서.’ 누가? 하나님 앞에 부름을 받고 풍랑과 파도를 지나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도록 보내심을 받은 사람 속에 이런 불신앙과 불순종이 있는 것이에요. 요나에게만? 아니요. 저와 여러분들 속에 바로 이 요나의 그림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러분! 누구에게든지 건드리면 너무너무 아파하는 민감한 부분들이 있어요. 그렇죠? 그리고 그 부분이 그대로 양보할 수 없는 그런 부분들이 있지요. 그런 부분들은 누구든지 가지고 있어요. 점검해보세요. 그것이 정말 하나님 앞에 올바른 부분인지……. 여러분들이 굳게 확신하고 있는 것들이 있지요? 인생에 있어서 좌우명이라고 생각하고 그리고 모든 것을 다 양보하고 타협해도 이것은 양보하고 타협할 수 없다고 붙들고 사는 것이 있지요? 그것이 바로 이것일수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 아십니까? 가장 훌륭해 보일 수도 있어요. 왜? 하나님은 니느웨를 멸하셔야 된다. 왜? 그래야 만방 가운데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신 것이 드러나니까. 얼마나 논리 정연합니까. 그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이 편견이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된 것이고 하나님을 위한 편견이라고 생각했을 것이에요. 그러나 이 편견은 그야말로 불신앙으로부터 말미암은 편견이었습니다. 그런 편견……. 어떤 의미에서 여러분들은 전부 다 철학자들입니다.
A면과 B면 사이
확고한 견해가 성경에 기초하고 하나님이 심으신 것이면 그것을 가리켜서 견고하다고 말하고 하나님이 심지 않으신 것인데 여러분들에게 깊이 심겨져 있으면 그것을 완악하다고 성경이 표현을 해요. 똑같은 견고함인데 하나는 견고함이고 하나는 완악함이에요. 그게 무너지지 않고 계속 살아서 그 기계가 돌아가면서 그 기계 속에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수많은 불순종들을 양산해 나가고 그리고 교묘하게 그 기계가 돌아가면서 헌신된 우리의 삶속에서 끊임없는 불순종을 뿌리고 있다고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끔찍한 일입니까.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사람들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무너지지 않는 사람들이에요. 경우에 따라서는 생애 적으로 와장창 무너질 수도 있고 덜 무너질 수도 있지요. 그러나 늘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신의 오류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그리고 무너질 수 있는 그러한 말하자면 열린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때에 비로소 그러면 늘 무너지기만 하느냐하면 아니에요. 무너지면서 비로소 누가 와서 흔들어도 흔들릴 수 없는 그러한 굳건한 것들이 우리 속에 세워지게 되는 것이에요. 그것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은 견고해지고 우리의 신앙의 확신은 흔들리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의 편견, 그리고 여러분들이 가장 자랑스러워하고 있는 여러분들의 신앙의 특성들, 이런 것들이 바로 이것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까?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고 다른 사람에게는 없는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여러분들을 부러워하게끔 만들어줄 수 있는 그러한 신앙의 아주 뛰어난 장점들 그런 것들이 이런 큰 불순종에 이르는 도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은 기억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속에 있어서 그것이 말하자면 끊임없이 우리를 불순종으로 이끌어 가고 마지막에는 하나님께서 이러한 것들을 넘어서셔서 새롭게 역사하실 때에 그 때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가 되게 해달라고 평생을 기도해오던 그 사람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때에, 아파하고 속상해하고 시기나 하고 그리고 마지막에는 살인할 것 같은 분노를 품고 차라리 내 생명을 거두어달라고 하나님 앞에 깊이 말하자면 넘어지는 것을 본 것이죠. 이런 것은 사실은 좌절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생명을 거두어 달라고 하는 이 요나의 이 기도는 완전한 순종에 이르는 넘어짐이 아니에요. 완전한 순종에 넘어짐은 이런 것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어때요? 주님이 계속 그런 일을 하셔가지고 내가 가지고 있는 이 편견을 깨뜨리실 바에야 차라리 나는 이 편견이 깨뜨려지고 새롭게 되어서 하나님 앞에 사느니보다는 차라리 나는 이 편견을 붙들고 간직하고 죽는 것이 낫겠사옵나이다. 그러니까 그는 하나님을 섬긴 것이 아니라 자기가 가지고 있는 편견을 섬기면서 살아온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에요.
이런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고통이 무엇이냐 하면 바르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에요. 그리고 처음에는 그 말씀을 들으면서 은혜를 받는다고 하더라도 그 은혜를 받는 것을 가지고 신뢰할 수 없어요. 왜 그래요? 그렇게 은혜를 받고 회개를 하고 하다가도 어느 한 순간에 본질적인 문제를 건드리면서 더 깊이 들어가게 되면 점점 더 거리가 멀어지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결국은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편견을 붙잡고 사는 것이 훨씬 더 안전하고 그리고 편안하다는 느낌을 받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그것을 못 버리는 것이에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그런 사람들 아니었어요? 바로 그런 것 같아요. 그들이 하나님의 구원을 싫어했을까요? 아니에요. 하나님의 구원을 싫어하거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지고 계신 죄인들을 향한 긍휼히 여기는 마음, 그것을 싫어한 것이 아니었어요. 문제는 무엇이었어요? 그들은 나름대로 이것이 구원에 이르는 길이고,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들로서 살아가야하는 길이라고 하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에요. 그것이 뭐냐 하면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그 다음에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고, 그리고 절기를 지키고, 월삭을 지키고 하는 것이었어요. 그들에게 있어서 그런데 어느 한순간에 하나님의 말씀이신 그리스도가 나타난 것이에요. 그리고 ‘나를 믿어라 내가 곧 구원에 이르는 길이다.’ 라고 말하는 것이에요. 그런데 그것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다 버려야했어요. 그런데 어때요. 그렇게 모든 것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붙드는 것 보다는 그렇게 이레에 두 번씩 금식기도를 하면서 그렇게 율법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것이 훨씬 더 안전하다고 믿은 것이에요. 그러니까 결국은 그들이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무너지지 않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죠.
그러니까 오히려 그런 것들을 붙들며 살아갈 것이 하나도 없었던 창녀와 세리 같은 사람들은 붙들고 살게 없었어요. 그런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니까 할렐루야! 그러면서 붙들었던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이에요. 그러니까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제대로 모르고 신앙이 무엇인지를 잘 모르고 살아가던 그런 사람들이 때가 되면 회개를 더 잘해요. 그리고 단순하게 은혜를 받아들여요. 그러나 여기저기 가서 이상한 것을 배우고 이상한 것을 많이 생각하고 아무튼 말을 잘하는 사람들은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안 들어요. 그게 최대의 문제에요.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을 늘 가르치려는 사람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제일 가르침을 안 받으려고 하는 사람들이에요. 그게 바리새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문제에요.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의도적으로 창녀와 기생을 찾아간 것이 아니에요. 왜 그래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버린 것이에요. 그들이 자기가 가지고 있는 편견을 붙들고 사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하며 사는 것보다 훨씬 더 좋아했던 것이에요. 그리고 거기에 구원이 있다고 믿었던 것이죠.
그래서 가끔 보면 바리새인이나 그런 사람들이 혹은 창기나 죄인이 아니라 돈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감격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들이 되는 장면들을 성경에서 보여주잖아요.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이에요? 무너지는 것이에요. 다 무너지는 것이죠. 그러한 편견들을 따라서 살아가는 것이 어떻게 보면 굉장히 헌신적이고 엄청나 보일 것이에요. 언젠가 기회가 있으면 한번 설교를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 사람들이 이레에 두 번씩 금식기도를 했다고 했지요. 그리고 근채와 박하와 회향의 십일조를 드렸다고 그랬죠. 그랬는데 그러면 그들은 남에게 보이려고 했다고 나오는데 그러면 금식할 때에 100% 전부다 남에게 보이기만 하기 위해서 금식을 했다고 그래요. 여러분들은 그렇게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것은 가능하지 않아요. 여러분! 여러분들이 한번 실험을 해보세요.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 이틀을 금식을 해보세요. 그것이 되나?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거기에는 딱 잘라서 이것은 바리새인들의 금식은 100%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서 경건한 사람들의 금식은 100% 하나님에게 보이기 위해서 그런 식으로 이렇게 나누어 질수 없는 요소가 있었던 것이에요. 그것을 기억을 해야 되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렇게 금식기도를 하면서 사람들에게도 보이고 또 하나님에게도 드리고 이런 식으로 살아온 자신의 신앙의 틀 속에서 안주하는 것이 훨씬 더 쉬웠어요.
왜? 그리스도 복음은 우리를 껍데기째 홀딱 벗기는 것이에요. 그리고 벌판에 우리를 세우는 것이에요.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옷을 입으라고 말하는 것이에요. 그것을 모두 버릴 수 있는 용기가 없는 것이에요. 그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죠. 단순히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이 그렇지 못했던 이유를 현실적으로 명예를 잃어버리고 동족들로부터 버림을 받고 그런 것이 아니었어요. 그들이 정말로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고 믿을 때 그들은 그 모든 것을 기꺼이 버릴 수 있었을 것이에요. 그러나 그 틀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무지보다 더 무서운 것은 오해에요. 그러한 잘못된 편견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은 그것이 극도로 치우치면 그것이 이단이 되는 것이에요. 이단치고 모두 그 이단을 향한 뜨거운 동기는 모두 구원을 받고 싶다는 것이에요. 그것이 이단의 동기에요. 모든 이단의 동기는 그것이에요. 이 세상에서 잘 살고 싶다는 것은 이미 이단을 넘어서서 이교화 된 것이죠. 그러나 모든 이단의 아주 궁극적이고 간절한 열망은 어디에서 비롯되느냐하면 구원받고 싶다는 것이죠. 그래서 반드시 심판의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죠. 그리고 이렇게 해야지만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것이죠. 구원에 대한 열망이에요. 그런데 편견에 사로잡히는 것이에요. 그러니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보세요.
그런 것들이 사람들의 삶속에 계속해서 역사하는 것이에요. 헌신된 사람들 사이에도 역사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대화를 하거나 그 다음에 심방을 가거나 설교를 하거나 하면 조금 알지요. 이렇게 뭔가를 아주 자기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것과 같은 그러한 생각에 강하게 붙잡혀있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 사람들은 거의 100% 말씀을 듣고 성경을 읽으면서 거의 교정될 가망성이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에요. 굉장히 불행한 것이에요. 그러니까 그런 확신을 가지기까지 그렇게 설교를 듣거나 성경을 읽어서 변화될 수 없을 정도로 확신을 갖게 되기까지 그가 얼마나 많이 방황을 했겠어요. 그리고 책을 많이 읽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수많은 이야기를 주어서 듣고 하면서 결국은 확신을 가지게 된 것이겠죠. 그러나 여러분 그게 얼마나 불행한 일인지 보세요. 이것이죠. 하나님이 주신 그러한 말씀으로 말미암아서 올바르게 신앙의 집이 건축된 사람이 갖는 확신과 그 다음에 이렇게 하나님이 세워주시지 아니하는 잘못된 편견으로 말미암아 이렇게 성경을 빙자해서 이런 편견의 신앙의 집을 짓고 있는 사람들이 삶에 있어서는 겉으로 보기에는 별로 차이가 없을 수 있어요. 왜? 양쪽 다 주님을 열심히 섬기기를 원해요. 그렇게 뭔가 편견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 그렇게 설교나 말씀에 의해서도 교정될 수 없을 정도로 확신을 가진 사람들이 신앙을 떠나서 살 수 있을 것 같아요? 어림없어요. 어디를 가든지 신앙,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인생의 목표라고 말해요. 금식도 하지요. 기도원도 가지요. 또 헌금도 하겠지요. 그리고 하나님을 위해서 말하자면 모든 것이 헌신된 사람처럼 보일 수 있어요. 그러나 여러분 유의해야 되요. 왜? 그런 헌신된 삶 자체가 그 사람이 모두 올바르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은 아니에요.
그런데 그 양자의 차이는 뭐냐 하면 전자, 즉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올바르게 세워져서 그것이 견고하게 되어있는 사람들은 늘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지식으로 자기가 더 새롭게 건축될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기대와 그렇게 건축되어 가야한다는 열망에 타요. 그러나 후자, 그 사람들은 늘 말씀을 들을 때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각이 옳다는 것을 확인받기를 원해요. 확인받기를 원한다고요. 그러니까 새롭게 건축되어가고 그 다음에 변화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확인받고 싶어 하는 것이에요.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각이 옳다는 확인을 받고 싶어 해요. 확인받을 때 뛸 듯이 기뻐하지요. 그러나 그것을 은혜 받은 것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한 것이에요. 그래서 목회의 세계 속에서 가끔 목회자들이 깊이 신뢰하던 사람을 향해서 아니 네가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이유가 그런 오해에서 비롯되는 것이에요. 여러분 반짝이는 모든 것이 다 금이 아니에요. 은혜를 받고 하나님 앞에 감격하는 모든 것이 전부다 검증을 거쳐야 되는 것이에요.
여러분 우리교회는 비교적 그래도 순수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책을 읽거나 말씀을 듣거나 하면서 올바른 신앙의 견해로 돌아왔던 많은 사람들의 경우 가만히 이야기를 들어보면 아주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던 사람일수록 아주 더 큰 번민의 때를 지났음을 말해요. 여러해 전에 어느 자매한테 들었는데 제가 설교를 했었나? 집회를 갔었나? 지금 기억이 희미한데……. 아무튼 설교를 계속할 기회가 있었어요. 그런데 하는 말이 무엇이냐 하면 기도를 굉장히 많이 하고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서 왔다는 것이에요. 왔는데 말씀이 열리고 자기가 생각할 때도 뭔가 시간이 흐를수록 설교가 굉장히 부드러워지고 (부드러워진다는 것은 우리가 감정적으로 부드러워진다는 이야기가아니라 ) 물 흐르듯이 흘러나오고 그리고 뭔가 어떤 강한 힘이 지배하면서 말씀이 계속해서 열리면서 뭐가 이렇게 쏟아지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데 이상하게 그렇게 사모하고 눈물로 기도하다가 왔는데 말씀을 딱 떼고 설교자가 설교하러 올라와서 설교를 하기 시작하는데 첫 순간부터 말하자면 아니라는 생각이 자기에게 파고들어 온다는 것이에요. 그런데 이상하게 하나님께서 설교자를 더 감동시켜서 풍부하게 쏟아내면 쏟아낼수록 자기의 마음은 더 돌멩이같이 굳어간다는 것이에요. 얼마나 놀라워요? 그렇죠?
그러니까 성령의 역사가 강력하게 일어날 때에 사실은 그 속에서 강력한 불순종의 역사가 함께 일어나는 것이에요. 그것을 기억해야 되요.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보면 이런 사실들이 아주 잘 입증이 되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시잖아요. 다른 사람이 전할 때는 그냥 그렇게 지나가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쫙 말씀을 전하시면 좋아하는 사람은 할렐루야! 받아들이고……. 안 좋아하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일 기회를 찾는 것이에요. 그래서 순종하는 자와 불순종하는 자들을 정확하게 갈라내는 것이에요. 이게 바로 성령의 권능이 깃들여있는 말씀이에요. 성령의 권능이 깃들여있는 말씀은 모든 사람들을 회개시키시는 것이 아니에요. 그런 일은 아주 드물게 일어나요.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너무나 불완전한 설교자였지요. 오히려 참 권능에 붙잡힌 설교는 사람들에게 태도를 분명히 밝히지 않을 수 없게끔 만들어주는 힘이 있어요. 말씀을 아멘 하든지 아니면 싫어하든지 결코 성령의 권능이 역사하는 그 설교를 들으면서 무관심해진다고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에요.
그러면 아까 그 이야기로 돌아갑시다. 그러더라는 거예요. 시간이 흘러갈수록 점점 더 돌덩이처럼 굳어지는 것이에요. 온 몸에 소름이 돋았대요. 문제가 무엇이었느냐고 했더니 집회를 하러 갔는데 사람들이 이번 집회에 하나님이 무슨 말씀으로 우리를 인도하실까? 하며 나온 것이 아니라 전부다 정답을 하나씩 만들어가지고 나온 것이에요. 정답을……. 자기 나름대로……. 오늘 이제 선교에 대해서 설교를 한다고 하면 선교는 어떤 것인가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설교를 한다고 하면 예수그리스도는 누구인가에 대해서……. 다 정답을 가지고 있는 것이에요. 그리고 이제 설교가 시작되면서 1번부터 맞춰보는 것이에요. 그런데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과는 하나도 안 맞아요. 1번, 2번 틀릴 때는 이해가 가는데 3번, 4번, 5번이 틀릴 때는 포기하게 되다가 6번, 7번, 8번, 9번 계속해서 틀리게 되니까 화가 나고 11, 12, 13, 14, 15 계속해서 틀리게 되니까 나중에는 설교자가 미워지게 되는 것이에요. 마지막에는 21, 22........30번까지 하나도 정답이 없이 다 틀리게 되니까 마지막에 내리는 결론은 ‘사기다’ 이렇게 결론을 내리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마음이 막 돌같이 굳어지더라는 것이에요. 그러더니 돌같이 굳어지는데 그것이 점점 굳어지더라는 것이에요. 마치 파도가 밀려오면 그 조개가 더 단단해진다고 어느 시인이 표현했듯이 밀려드는 파도에 부딪히면서 그 부딪힘으로 말미암아 그 조개껍질이 더 단단해져가듯이 그렇게 더 강하게 옴츠러드는 것이에요. 녹아지지를 않는 거예요. 녹아지는 것이 아니라 강력하게 더 딱딱해지는 것이에요. 강하게 반발심에 사로잡히는 것이죠. 그런 고백도 들어보았어요. 그런데 그 자매가 하는 이야기가운데 재미있는 고백이 무엇이냐 하면 그러다가 나중에는 너무 괴로우니까 나중에 포기를 하니까 그 다음에는 설교로 들리지 않고 소리로 들리더래요. 소리……. 큰 소리가 났다가, 작은 소리가 났다가, 그 다음에 속삭이는 소리가 났다가, 막 우는 소리가 났다가……. 소리가 들리더라는 것이에요.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거기에 집중을 하니까 어느 한 순간에 자신이 무너지고 변화되는 역사가 오더라는 고백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가 자기가 가지고 있던 편견과 다를 때도 계속해서(사모하는 마음으로 매달리라는 것은 바라지도 않지만) 가만히 듣기만 해도 변화가 올 텐데 안 들어요. 그게 문제라고요. 자기가 가지고 있는 편견을 정당화시키고 그 편견이 도전받는 것이 너무 괴로우니까 듣지를 않는 것이죠. 이런 것들은 바로 이 선지자가 보여준 이 편견에 비교되는 바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선지자의 생명을 취하시는 것이 아니었어요. 원하시는 것은 선지자로 살게 하시고 그 생명으로 번성하게 하시고 그래서 하나님이 이루시는 역사를 보면서 하나님과 함께 즐거워하고 하나님과 함께 기뻐하도록 하는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였습니다. 우리는 요나를 보면서 하박국을 생각하게 되지요. 하박국은 미래에 일어날 하나님의 심판을 보았어요.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때에 갈대아 사람들이 망하고 그 하나님의 심판에 영향을 받아서 이스라엘 사람들도 멸망을 당했어요. 무화과나무의 잎이 마르고, 감람나무의 열매가 없고 외양간에 송아지가 없고, 포도나무에 소산이 없는 완전히 황폐하게 심판받은 땅이 될 것임을 보여주셨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 기뻐하는 것이에요. 왜 그래요? 이것은 하나님의 마음이에요. 하나님의 뜻이 그대로 이루어졌다고 하는 그것을 인해서 한없이 기뻐하는 것이에요. 너무나 대조적인 선지자에요. 그러니까 죽을 수밖에 없는 환경 속에서도 오히려 살아있어서 하나님을 노래하기를 기뻐하고 생명이 있어서 하나님을 찬송하기를 기뻐하는 사람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죠. 얼마나 놀라워요.
그러니까 우리들은 깊은 신앙으로 가고 헌신되고 은혜를 많이 받을수록 우리 속에 이런 잘못된 편견들이 우리의 신앙을 사로잡아서 우리로 하여금 불순종의 길로 가게하지 않도록 끊임없이 무너뜨려짐을 당하기를 기뻐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