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올에 있는 영혼 같이
“무릇 내 영혼에는 재난이 가득하며 나의 생명은 스올에 가까웠사오니 나는 무덤에 내려가는 자 같이 인정되고 힘없는 용사와 같으며 죽은 자 중에 던져진 바 되었으며 죽임을 당하여 무덤에 누운 자 같으니이다 주께서 그들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시니 그들은 주의 손에서 끊어진 자니이다”(시 88;3~5)
녹취자 : 허혜숙
이 시는 하나님을 향한 탄원의 시입니다. 깊은 영적인 침체 가운데서 죄와 씨름하며 하나님 앞에 몸부림치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시가 절망으로 일관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깊은 시련과 함께 영혼의 큰 고통을 경험했지만 살 길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모든 영혼의 곤고함이 어디에 있는지를 발견한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을 깊은 웅덩이와 어둡고 침침한 곳에 두신 분이 하나님이시며 그것은 자신의 죄 때문이라고 하는 깨달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적군의 위치를 정확히 알고 그 수가 얼마인지를 알면 그 전쟁은 그렇게 크게 두렵지 않습니다. 두려운 것은 나를 에워싸고 있는 적군들이 어디에 있는지, 그 수가 얼마나 되는지, 언제 나타날 지 알 수 없을 때 공포는 배가 되는 것입니다.
시인이 이 시를 짓기 전에도 이미 영혼의 곤궁한 시간들을 오래 지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는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몰랐습니다. 그러나 이제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이 토설하고 있는 이 영혼의 깊은 위기와 고통은 오히려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밝은 빛을 발견한 셈이 되는 것입니다. 새벽이 지나 아침 해가 동트기 전이 가장 어둡고 춥습니다. 바로 그 시기를 이 시인은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노래하고 있습니다. 영혼에는 재난이 가득하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악입니다. 자신의 영혼에 어떤 나쁜 일들이 일어나고 있고 그래서 그의 영혼이 혼란 속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의 생명은 스올에 가까웠다고 했습니다.
스올이라고 하는 것은 아직 천국과 지옥에 대한 견해가 아직 분명하게 발전하지 않았을 때에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서 가지고 있었던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의 관념입니다. 그들에게 스올이라고 하는 것은 죽음후의 사후의 세계를 그들도 믿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말하는 것처럼 악인이 고통 받는 지옥, 의인이 행복을 누리는 천국에 대한 관념이 명백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죽음 이후에 사람들이 스올에 들어가게 되는데 거기에서는 살아있는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닌 매우 음습하고 우울하고 침울한 그런 생기 없는 삶이 지속되는 것이 악인이 가게 되는 스올의 개념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람들에게 스올은 곧 자신들이 현세에서 경험하는 가장 고통스럽고 영혼의 생기를 잃어버리는 시간이 곧 그 스올을 현재적으로 경험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삶의 희망이 끊어지고 우울하고 음습한 곳이 스올이라고 보았습니다.
오늘 시인이 ‘나의 생명이 스올에 가깝습니다.’ 라고 하는 이야기는 ‘내가 죽게 되었습니다’라는 고백입니다. 그래서 그런 영혼의 생기가 사라지고 죽음의 기운이 엄습하는 그런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다고 고백을 하니 이 시인의 영혼의 곤고함이 얼마나 컸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는 ‘무덤에 내려가는 자 같이 인정되고 힘없는 용사와 같다’고 말했습니다. ‘죽은 자 중에 던진바 되었다’ 이렇게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시체들이 학살을 당하여 학살을 당한 사람의 시체들이 계곡에 가득할 때 그 시체 중에 하나로 여김을 받아서 사람들에게 들리어 휙 던져지는 그 광경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거기에 무슨 희망과 생기가 있겠습니까? 이 시인은 바로 그렇게 자신의 삶이 철저하게 생기를 잃어버리고 죽은 자 중에 한 사람인 것처럼 던져져 있었던 때가 자신에게도 있었다는 것을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이런 영혼의 깊은 침체 속에 두셔서 그래서 살아있는 것이 오히려 죽어있는 것보다 더 괴로운 상황을 맞이하시게 한 이유는 무엇일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러한 영혼의 깊은 침체의 시기를 통해서 그 사람의 신앙을 바라보십니다. 그런 영혼의 깊은 침체에서 신앙이 없는 사람들은 깊이 주저앉아 물러가 침륜에 빠지지만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그 영혼의 깊은 침체를 통해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삶의 고통이 얼마나 큰 지를 절실하게 경험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향해 주님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삶이 힘들고 어렵지만 주님 없이 살아가는 영혼의 곤고함 보다는 낫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좋은 것을 통해서도 우리를 깨닫게 하시지만 때로는 나빠 보이는 이 시련의 시간들을 사용해서 우리를 일깨우십니다.
시인은 오늘 이 시편 속에서 자신은 죽은 자들 중에 던져진 시체와 같고 무덤에 누운 자 같으며 주님이 기억해 주시지 않은 것 같이 주님의 손에서 끊어진 자들과 같이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사실 시인이 이렇게 정직하게 자신의 영혼의 위기를 인정하고 깊은 침체 속에서 자신의 절망적인 상태를 고백하는 것은 그의 영혼의 그 어두운 밤 그 흑암 속에서 하나님 한 분을 향하여 마음이 정돈 되고 있는 것을 보여줍니다.
자동차를 타고 천천히 달리면 뒤를 돌아다보지는 않지만 180도 전경이 눈에 다 들어옵니다. 그러나 차가 속도를 내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양쪽에 있는 사물들은 빨리 달려서 안 보입니다. 앞만 보입니다. 자동차 경주에서 거의 360km 속도로 달리는 경주에서는 눈에 보이는 각도가 불과 5도에서 10도 사이에 불과하답니다. 나머지들은 모두 지나가고 작은 점으로만 정 가운데 있는 사물들만 보이는 것입니다.
똑같이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영혼이 달음박질 하지 않을 때는 모든 것들이 보입니다. 그것들이 우리 마음을 끌고 그것들이 다 중요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인생의 유일한 희망이 우리 하나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영혼이 주님을 향해 달음박질 칠 때에는 주위에 있는 것들이 눈에 들어오지를 않습니다. 오직 주님 한 분밖에는 안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달음박질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마음이 하나님께도 있고 세상에도 있을 때에는 중요한 것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막상 시인처럼 영혼의 깊은 곤고함을 경험하고 하나님 앞에 살아야겠다고 몸부림을 치며 주께로 달려갈 때에는 사실은 예전에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일들이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이 시인의 절망적인 고백은 하나님 없는 낙심의 고백이 아니라 이런 저런 곳에서 희망을 찾던 마음을 돌이켜 하나님 한 분만을 향하고 있는 그 마음의 깊은 중심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마음을 모아서 우리 주님을 이렇게 간절히 찾는다면 여러분도 주님을 깊이 만나고 영혼의 새로운 힘을 공급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어떠한 위기와 시련 속에서도 낙심하지 말고 주님을 붙들며 살아야 할 이유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