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의 약속
“내가 그의 앞에서 그 대적들을 박멸하며 그를 미워하는 자들을 치려니와 나의 성실함과 인자함이 그와 함께 하리니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그의 뿔이 높아지리로다”(시 89:23-24)
녹취자: 허혜숙
시편을 보면 분명 시인이 하나님께 올리는 찬송인데 느닷없이 하나님이 당신 자신을 1인칭으로 말씀하시는 대목들이 자주 등장합니다. 이것은 시인이 시를 쓰면서 ‘하나님이라면 이렇게 말씀하였겠다.’ 라고 해석해서 그것을 묘사하기도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말씀들의 대부분은 시인들이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 속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들을 말씀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이 당신 자신을 우리들에게 직접 나타내 보이시는 일들을 자주 하셨는데 그 중의 하나가 하나님이 인간, 혹은 천사의 몸을 입고 나타나셔서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현인’이라고 합니다. 그런 경우도 있었고, 또 하나님이 꿈을 통해서 혹은 꿈도 아니고 현실도 아닌 이상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해주시기도 하고 하나님이 직접 그 음성을 모세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들려주시기도 했습니다.
그런 점들을 비추어 볼 때 그런 특별 계시가 매우 풍부하던 때였기 때문에 이렇게 시인들이 하나님을 찬송하다가 주님께로부터 직접 들려오는 말씀들을 기록한 것이 시편에 나오는 하나님을 일인칭으로 하는 대사들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 대사들이 계속 이어지고 있는데 “내가”는 ‘여호와’이고, “그는”은 ‘다윗’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다윗 앞에서 그 대적들을 박멸하며 미워하는 자들을 치려니와” 오늘 읽은 성경은 두 대상을 각각 나누어서 하나님이 다루시는 것을 보여줍니다.
첫 번째는 ‘대적들을 향해서’입니다. 그 대적들을 향해서는 하나님이 그 대적을 미워하는 자라고도 같이 묘사하는데 성경에서 ‘원수’라고 나오는 대목이나 표현이 같은 말입니다. ‘그 사람들에 대해서는 박멸하고 칠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일방적으로 시인을 감싸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로우심의 자연스러운 표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과 언약을 맺었다고 해서 항상 언제나 그들의 편만 드시는 것이 아니라 먼저 당신과 언약을 맺은 백성들을 의롭고 자비롭게 살게 하시고 또 그 사람들을 에워싸고 있는 모든 이웃들과 백성들이 똑같이 하나님 앞에 의롭고 자비로운 삶을 살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그것이 그렇게 되지 않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다루시는 것입니다. 양면성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보호하는 동시에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서, 그리고 열방의 백성들 속에서 하나님의 공의로운 통치를 실행해 가시는 것입니다.
시인이 많은 환란과 시련을 만나지만 그에게 있는 가장 큰 자산은 자신이 하나님과 한 편에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시인의 가장 커다란 자산이었습니다. 그가 비록 완전한 사람도 아니었고 무흠한 사람은 더더군다나 아니었고 똑같이 아담의 피를 물려받은 타락한 본성을 가진 인간이었지만 그러나 그는 전심으로 하나님께 속하고 싶어 했고, 그런 열망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도록 만들었습니다. 매일매일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신을 버리고 여호와께 속하기를 바랐습니다. 그리고 언약의 하나님이 당신 자신의 은혜로 그 일을 이루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는 비록 하나님과 같이 완전하지는 못하지만 그러나 항상 성향적으로 하나님께 기울어지고 하나님께 속하는 백성이었습니다. 그것이 이 시인의 가장 커다란 자산이었습니다. 왜? ‘내가 하나님 편에 서 있는 한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도 자신을 버리지 않으시고 자기를 지켜주실 것’이라고 하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남북전쟁이 한참 일어나고 있을 때 아브라함 링컨이 그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그 분이 그리스도인이냐 아니냐 그런 것으로 논쟁이 일어났었습니다. 언젠가 우리교회에 와서도 가끔 설교를 하신 웨스트 민스터 신학교 총장이신 피터 릴백과 저는 그 일을 가지고 한참 대화를 했었습니다. 그 총장님이 자기가 모두 조사를 해서 1200페이지짜리 아브라함 링컨에 대한 책을 썼습니다. 그것을 저한테 보내왔는데 그 책 속에서 이야기하기를, 아브라함 링컨이 ‘열심’이 있고 교회에 뿌리를 내린 그리스도인은 아니었지만 그가 죽기 전에는 정규적으로 교회에 출석하고 있었고 마지막으로 세례 받을 날짜까지 잡아놓았는데 결국은 링컨은 암살을 당하게 됩니다. 총장님은 링컨이 확실히 신앙이 있었다는 것을 단언 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전쟁이 일어나니까 남군이 훨씬 우세하고 전투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많이 염려하니까 링컨이 그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의 문제는 적군이 얼마나 많은가 그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편에 있는가 이것이 문제입니다.” 아직 세례도 받지 않는 사람이 한 말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가슴에 와 닿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대적이 얼마나 많은가?’ 우리는 그것을 헤아립니다. 왜냐하면 현실은 믿음이 없어도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현실은 설명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믿음은 믿음이 있어야지만 그 믿음의 눈으로 무엇인가를 볼 수가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앙이 깊다는 사람들도 먼저 와 닿는 것은 이성의 판단입니다. 그것이 수많은 대적들에게 에워싸이고 있습니다. 그 때에 우리는 두려워하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믿음의 측면에서 보면 원수가 얼마나 많은가 하는 것은 그리 큰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에게는 그 크고 작은 것이 아무것도 아닙니다. 콧김 하나로 온 대양의 물길을 물리칠 수 있는 하나님이신 것을 생각해 보면 대적의 크기는 우리에게 문제가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너무 쉬워서 태만해 하시는 일도 없고 너무 어렵기 때문에 행하기를 마다하시는 일도 없다는 것입니다. 시인은 그런 교훈을 시련 속에서 깊이 깨닫고 그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응답으로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신자의 삶은 옳으신 하나님, 좋으신 하나님, 불변하신 하나님, 영원하신 하나님이 위로가 되는 사람으로서 살아야 합니다.
두 번째는 대적이 아니라 이 시인 다윗을 향해 하나님이 어떻게 할 것인가를 말씀하시는데 “성실함과 인자함이 그와 함께 하리니” 시편 23편을 생각나게 만듭니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시 23:6). 이 구절의 의미는 어떤 일이 있어도 하나님의 선하심과 그 은혜가 폐기될 수 없게끔 결국은 당신이 사랑하는 자녀들을 추적해 온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들을 사로잡고야 만다는 것입니다. 은총의 승리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고 어떻게 전개될 수 있을까 아무것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놀랍게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면서 눈에 보이는 것보다 더 확실하게 믿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은 대부분 나타난 시점이 있고 나타난 것은 사라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믿음을 통해서 보는 실체들은 실제로 있는 것이고 영원으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에 더 확고한 믿음을 우리에게 갖게 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나의 성실함과 인자함이 그와 함께 하리니” 원수들에 대해서는 당신의 엄위하심과 진노를 보이시는 하나님이 시인을 향해서는 그를 성실하게 지키실 뿐만 아니라 자비롭게 대해주신다는 약속을 주고 계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그의 뿔이 높아지리로다” 이것은 큰 의미가 있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로 말미암아’ 이렇게 말씀하셔도 되는데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이렇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이름은 동격입니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보이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당신의 정체를 드러내실 때 그것을 종종 하나님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라는 표현으로 묘사를 하십니다. 어떻게 보면 이것은 하나님이 당신의 명예를 걸고 ‘반드시 이 일을 하시겠다.’라는 의미입니다. “그의 뿔이 높아지리라” ‘뿔’이라고 하는 것은 ‘영광’, ‘존귀’, ‘칭찬’, 그런 것들입니다. 뿔이 높아진다고 하는 것은 ‘영광스러워진다.’라는 것과 동격입니다. 하나님이 당신 때문에 당신 자신으로 말미암아 당신 자신이 시간과 공간 속에서 당신이 살아계심을 드러냄으로써 다윗이 원수들에게 에워싸이고 고통을 받고 있지만 반드시 그를 다시 영화롭게 하리라 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환난 날에 부르짖으라 그리하면 내가 너를 건져내겠고 영화롭게 하리로다” 하나님의 어떤 공식처럼 다가오는 것입니다.
오늘 새벽에도 일찍 깼습니다. 그래서 수요일 설교준비를 하면서 하나님의 그런 성품을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놀라우신 분인지 당신의 모든 좋은 것들을 우리들이 좋은 날에 보여주시지 않고 우리들의 나쁜 날에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나쁜 그 날이 좋은 날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그 찬란한 성품의 빛을 보았던, 그래서 그 하나님의 임재에 눈이 부셨던 모든 사람들은 한결 같이 남들이 겪지 않는 극도의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반짝이는 그 성품의 빛줄기들을 보았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심으로 우리 모두를 믿음으로 살도록 격려하십니다. 그래서 정말 시련을 당하면서도 그 깊은 속에서 솟아나는 기쁨을 다른 사람들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찬송)
우리 서로 받은 그 기쁨은 알 사람이 없도다
우리는 그렇게 고백하면서 믿음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한 순간도 우리를 놔두시지 않으시고 우리의 믿음을 평안한가 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내적인 분투나 시련, 혹은 시련이 아니면 쉽게 도달할 수 없는 하나님을 향한 큰 목표에 도전하게 하심으로써 우리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사모함과 은혜가 사무치도록 만들어주십니다. ‘그것은 너무 힘들다, 너무 싫다’ 그럴 것 같으면 사도 바울의 말대로 지구를 떠나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지 않았더라면 그런 속에서 아무 희망도 없이 사람을 원망하고 자신을 저주하고 욥처럼 자기가 태어난 날들을 저주하고, 자기를 태어나게 한 엄마를 원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그런 식으로 살다가 나쁜 의미로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죽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을 원망하는 눈빛으로 눈을 부릅뜨고 광야에서 메추라기 고기를 물고 죽어갔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죽을 것입니다. 어떻게 태어난 인생인데 우리의 인생이 그렇게 짐승처럼 살다가 죽겠습니까?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눈을 들어서 생각을 다르게 해야 합니다. 너무 어렵고 힘들고 육체적으로 더군다나 고통이 있고 아프고 할지라도 하나님에게 눈을 들어야 합니다. 이 모든 것들은 비유를 하자면 바이올린 한 개에 40억씩, 50억씩 하고 요요마가 쓰는 첼로는 78억짜리인가 한다고 합니다. 그런 악기들도 줄을 괴롭게 하지 않는 한 그렇게 아름다운 소리가 나지 않는 법입니다. 고난은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심성의 현들을 연주하는 하나님의 손입니다. 그래서 그 속에서 아름다운 노래들이 울려 퍼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꽃길만 걸어가면서 인생을 살았던 성공한 그리스도인들을 보면서도 감동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순간입니다. 그것은 감동이라기보다는 부러움 내지는 시기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꽃길을 걸었다고 한 사람이라도 그 사람이 진짜 신앙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야기 하는 것은 꽃길이 아니라 그 꽃길을 걷기까지 하나님이 자신에게 보여주셨던 시련과 고난을 이야기함으로써 자기와 함께하신 하나님을 드러내는 사람입니다. 그런 점에서 깊이 주님을 붙들고 의지하며 믿음으로 사는 여러분들이 되셔야 합니다. 감사로 하루를 시작하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