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순절 성령강림 1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행2:1-4)
오늘은 드디어 1장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이 오시리라고 약속하셨던 그 약속이 이루어지는 장면을 2장에서 장엄하게 기록을 하면서 본격적인 사도행전이 시작이 되고 있습니다. 사실 사도의 행전이라고 하는 말은 사도들의 행적이라는 말이거든요. 사도들이 행한 일들. 성령이 오셔서 그 강림하신 성령을 통해서 사도들이 행한 것 이외에는 별로 행한 것이 기념할 것이 없어요. 오히려 요한복음은 이렇게 끝맺고 있죠. 이 외에도 예수의 행하신 일은 많으니 그것을 다 기록을 하면은 세상이라도 그것을 다 둘 수가 없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사역을 모두 기록한 복음서의 결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행한 일은 너무나 위대하고 훌륭한 일이 많았기 때문에 그것들을 기록하면은 세상에도 다 둘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많은 일이었지만은 그러나 제자들이 행한 일들은 그렇게 많은 일들이 아니었습니다. 사도행전이 사도행전일 수 있었던 이유는 사도들이 성령을 받았기 때문이예요. 2장에서 드디어 오순절날이 이르매 그 유명한 성령강림사건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선 여러분, 이 2장에서 이야기하는 성령이 강림하는 사건과 그러면 도대체 이전에 있었던 성령은 어떤 것인가? 그 이야기를 먼저하고 그 다음에 이제 2장의 이야기를 해야 될 것입니다. 우선 여러분, 우리는 먼저 구약시대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구약시대에도 분명히 성령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성령을 받았습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세우실 때에 그 기름 부으신다라고 하는 모습은 그에게 하나님의 특별한 신이 그에게 임할 것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왕이나 선지자나 제사장으로 부름을 받은 사람들은 특별히 하늘로부터 부어지는 이런 성령의 은혜가 성령의 지혜와 성령의 권능이 그들에게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성령을 부으시는 것을 기름을 부으시는 것으로 이렇게 묘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기름을 붓는 가운데 성령이 임하는 이런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구약시대에 오신 성령과 신약시대에 오신 성령은 물론 다른 분이 아니예요. 동일하신 분이지만 역사하시는 방법에 있어서 매우 틀렸다라고 하는 것이죠. 역사하시는 방법에서 틀렸다라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구약시대는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시대예요. 물론 어느 정도 성령이 역사하시고 성자가 계시되기도 하였지만 그러나 시대는 전적으로 성부 하나님의 다스림을 입는 시대예요.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이 우리 위에 계시던 시대예요. 구약의 시대를 한 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이 우리 위에 계시던 시대였다. 그 위에 계신 하나님께서 아주 특별한 사람에게 성령을 내리신 것이예요. 그리고 성령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성령을 보내신 다음에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신 후 목적이 다하면 그 성령을 거두어 가셔요. 그런 시기에 성령이 역사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구약의 성도들이 성령에 대해서 특별한 은혜를 받고 체험을 하는 것은 아주 극히 제한적이고 그리고 오늘날에 우리들이 체험하는 이런 성령과 같이 그렇게 풍부한 성령의 체험을 구약의 사람들은 잘 할 수가 없었어요. 아주 특별한 사람들이 특별한 때에 특별한 목적으로 보냄을 받은 그 성령을 체험하고 그 성령을 따라서 하나님의 일을 했고 일이 끝나면 하나님이 그 성령을 불러 가셨죠. 그들은 늘 하나님이 성령을 거두어 가실 것 같은 그런 말하자면 두려움 속에 있었어요. 그래서 다윗이 말하기를 “주여 구원의 기쁨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옵소서”. 또 사울의 경우에는 여호와께서 주신 성령을 하나님이 거두어 가시고 그리고 하나님이 부리신 악신이 그에게 임하니라. 그 다음서부터 이 사울은 사이코가 되었어요. 정신병자처럼 되가지고 집요하게 다윗을 죽이려는 이러한 사람으로 변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다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이제는 아주 놀라운 성령의 역사를 드러내셨어요. 왜냐하면 그리스도 자신이 이 세상에 오심으로 시대는 새로운 시대를 여시게 되었는데 그 신약의 시대를 여시는 가장 뚜렷한 표준 중의 하나는 뭐냐하면 성령의 역사였어요. 그러니까 이 성령의 역사를 극히 제한적으로 경험하던 땅에 그리스도 예수가 오시고 나서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 거요. 그게 뭐냐면은 구약시대에 어쩌다가 한번 볼 수 있었던 문둥병자를 고치고 그리고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 같은 이런 초자연적인 역사가 예수님이 오시자 예수님 주위에 평범한 일처럼 따라 다녔어요. 어디서든지 죽은 자가 살아나고 병든 자가 일어났어요. 귀머거리가 귀가 열리고, 어눌했던 자들이 말을 되찾고, 보지 못하던 자들이 다시 눈을 뜨고 보게 되었어요. 이런 놀라운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지금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이 세대는 이전의 구약시대와는 엄청나게 틀린 시대라는 것을 보여주셨어요. 그러면서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이 오신 것이 하나님의 나라의 끝이다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어요. 시작이예요. 그리고 그 하나님의 나라의 새로운 시작을 당신이 시작하시고, 그리고 그 당신이 시작하신 그 하나님의 나라가 이후에 성령이 오심으로 말미암아 더 크고 놀랍게 이루어 질 것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 주셨던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셔서 병자들을 고치고 그 다음에 귀신들을 내어쫒고 하는 이 역사는 그 당시로서는 어마어마하게 충격적인 일이었어요. 그러니까 그렇게 삽시간에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이 나사렛의 젊은 청년 한 사람에게 집중되었던 이유예요. 물론 그 시대에도 영적인 세계가 있었음을 믿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또 천국과 지옥이 있고 악령이 있다라고 하는 사실들을 믿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예수는 안 믿어도 유대인들 중에는 귀신을 내어쫒는 그러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어요. 그러던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귀신들이 예수그리스도는 이 땅에 오셔서 악한 세력들과 더불어 다투신 적이 없으셨거든요. 언제나 명령하시는 거예요. ‘조용해’ 그러면 다 꼼작도 못하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가 명령하시니까 그 명령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역사가 일어난 거예요. 앉은뱅이가 된 사람이 있었어요. 자기가 앉은뱅이가 되고 싶어서 앉은뱅이가 되었어요? 못 일어나는데. 그 사람을 보고 ‘일어나라’ 그러니까 그 사람이 일어났다는 말예요. 일어나면 앉은뱅이가 아닌데 일어나라 명령하시니까 일어났어요. 질병과 고통의 모든 원인에 대해서 근본적인 치유의 권능을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남김없이 보여줌으로 새로운 시대가 왔다는 사실을 보여주어요. 그러면서 예수 그리스도는 새로운 시대가 왔으나 아직 완전히 온 것은 아니다, 천국이 왔다 그러나 아직 다 온 것은 아니다. 그러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행하셨던 그 놀라운 병자를 일으키고 귀신들린 자들을 내어쫒는 이 놀라운 이적의 역사들을 통해서 우리는 그것을 보면서 아, 이렇게 병이 낫는구나, 예수를 믿으면 이렇게 병이 낫는구나. 사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시고 싶어 했던 것은 그것이 아니예요. 그것이 아니예요. 그래서 저는 확실히 믿어요. 말하자면은 치유의 역사가 있어서 병을 고치는 은사를 받은 사람들, 혹은 은사를 받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성령이 특별히 임하시면 질병이 치유되고 변화되는 놀라운 경험들을 우리들은 갖고 있어요. 갖고 있고 그것을 깊이 믿어요. 그런데 오늘날의 문제는 뭐냐면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병자들을 고치고 귀신들을 내어쫒고 치유하셨던 그 사건이 너무 크게 보이니까 그 사건을 통해서 보여주고 싶으셨던 또 다른 명백한 진리가 있었거든요. 그게 진짠데 그 병을 고치고 일어나고 하는 역사만을 너무 크게 보니까 그 다음에 그것을 통해서 우리가 깨닫게 되기를 원하셨던 것들을 놓치는 실수들을 하고 있다는 거죠. 그니까 병고치고 귀신들린 자들이 일어나고 죽은 자들이 일어나는 이런 사건들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지 않았다거나 아니면 그런 병 고침의 역사가 오늘날도 계속 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일어날 수 있어요. 고칠 수 있죠. 병 고칠 수 있고 또 일어날 수 있어요. 우리 주위에는 그런 사람들 수없이 많이 만나게 돼요.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시고자 했던 것은 그것 이상이었어요. 그거를 보면서 신약의 막 병 고치고 일어나는 이런 기적들을 보면서 사람은 다 자기 문맥에서만 보니까 말이죠, 병에 걸린 사람은 이걸 보면은 전부다 완전히 병든 자의 복음이거든. 막 치유되는 역사가 일어나는 거요. 그런데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고자 하셨던 바는 그것 이상이었어요. 그것이 뭐냐면은 내가 옴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시대가 왔다, 새로운 시대가 왔다. 이제 질병에 굴복하고, 귀신들려서 고통하고, 그래서 그런 것들이 인간이 가장 약하게 생각하는 부분이었어요. 사망, 이 사망에 항거한 사람이 있어요? 아무도 없어요. 용감히 죽은 사람은 있거니와 그니까 용감히 죽는다는 것 용감히 사망에게 진 사람은 있어도 사망을 이기고 승리한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인간의 질병, 병원에 가서 막 고통하는 사람 보면은 배가 아파서 막 고통하는 사람을 보면은 배에 손이 가지요. 인간의 이 질병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이 질병 앞에서 인간은 한없이 나약해 지는 것이예요. 그리고 그 질병을 향하여 인간들은 의학적으로 애를 쓰기는 하지만 고칠 수 없는 질병 앞에서는 인간의 인간들이 포기하고 체념하면서 굴복하면서 살아요. 성경을 잘 읽어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두통을 고치셨다는 얘기 나와요, 안 나와요? 안나오죠. 감기를 안수해서 고치셨다는 얘기 나와요, 안 나와요? 안나오죠. 무좀에다 침을 발라서 무좀을 고치셨다는 얘기 나와요, 안 나와요?. 안나오죠. 그럼 여러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왜 그런 것은 예수님께서 고치시지 않으셨을까? 무좀약 바르고 감기약 먹으면 낫는다 말예요. 누가 어느 목사님이 몇 년 전에 모든 질병의 원인은 귀신이라고 해가지고 지금도 문제가 되고 있는데, 무슨 귀신이 아스피린을 그렇게 무서워해? 무슨 귀신이 아스피린을 그렇게 무서워해? 귀신 충만해가지고 감기에 들었는데 아스피린 두알 딱 먹으면 귀신이 모두 떠나는 거여. 그 귀신은 피곤하면 찾아오나? 무좀 걸린 사람하고 발을 맞대고 있으면 귀신이 전염이 돼요? 성경을 읽으면서 예수께서 고치셨던 병이 그런 감기나 두통, 무좀, 아니면 아폴로 눈병이라든지 이런 것들을 고치시는 이야기가 안 나온다는 거요. 그니까 그것부터가 벌써 만약에 만약에 그 병이 진짜 병든 자의 복음이라고 한다면 그러면은 우리들이 중풍병이나 아니면 귀신들리는 것, 앉은뱅이 이런 것들은 지금도 마찬가지고 그때도 마찬가지고 희귀한 병이예요. 그렇잖아요? 앉은뱅이 많이 봐요? 중풍병자 수만명에 한 두 사람 꼴이예요. 그렇죠. 그러면은 그 이후에 질병들이 훨씬 보편적이니까 그런 질병을 고치셔야지만 아 주님은 역시 병 고치시기 위해 오셨구나, 이럴 거 아니예요. 그게 아니라고, 그게 아니라고요. 그럼 뭐냐?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 주시고가 했던 바는 가장 인간의 힘으로 고칠 수 없는 질병, 일반적으로 그 질병의 지배를 벗어날 수 없는 그런 질병들을 고치시는 거요. 앉은뱅이. 무엇으로 앉은뱅이를 고치겠어요? 열두 해를 혈루증에 걸려서 피를 한없이 쏟는 자, 어떻게 고칠 수 있겠어요? 종양이죠, 종양. 자궁에 종양이죠. 어떻게 고칠 수 있겠어요? 그 다음에 중풍 걸린 자, 중풍 걸린 자가 완전한 회복을 하는 것은 거의 없잖아요? 물리 치료 같은 것으로 조금씩 나아질 뿐이예요. 풍을 맞아가지고 반신불수가 되었어요. 이 반짝은 내 마음대로 움직이는데 반짝은 내 마음대로 안 움직이는 거죠. 이게 중풍 아니예요? 그 사람들을 주께서 고치신 거요. 그것을 통해서 보여주셨던 바는 이전의 시대에는 그런 일들이 없었는데 그런 일들이 놀랍게 예수를 중심으로 일어난다 이거요. 그걸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바는 새로운 시대가 왔다, 그리고 그 새로운 시대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왔다. 그거를 보여주시고 싶어 하셨던 거요. 그러면 그 새 시대가 무슨 시대냐? 이제는 복음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하면 천국에서나 맛볼 수 있는 놀라운 영적인 특권들을 이 땅에서도 미리 맛볼 수 있는 이런 놀라운 역사가 예수로 말미암아 도래하였다, 그 사실들을 보여주시고자 했던 것이예요. 그런 영적인 새로운 시대가 열렸음을 보여준 것이었어요.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깊이 이 세상에 있는 의약으로 고칠 수 없는 병이 있는 사람, 그런 사람들에게 무슨 소망이 있겠어요? 두 가지입니다. 늘 찬송하다가 주님 앞에 가던지, 아니면은 주님이 치료해 주시든지 둘 중에 하나죠? 그렇죠. 이런 역사들을 하나님의 교회들은 어느 정도 책임을 가지고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새 시대가 열리는 거죠.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그런 놀라운 새 시대가 열리는 것들을 사람들이 경험할 때 더 놀라운 시대가 올 것을 주님이 다시 또 말씀하셨어요. 그게 뭐냐면은 성령의 시대예요. 그래서 구약의 시대기 하나님이 우리의 위에 계신 시대였다면은, 그 다음에 예수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던 시대, 성령이 오신 것은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신 시대, 이런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서 사람들은 예수님이 가고 없어도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보다 더 편만하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시던 병자들을 고치고 귀신들을 내어 쫒고 그리고 죽은 자와 방불한 자들을 살리는 놀라운 역사가 성령을 통해서 계속 되는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는 보여 주시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새로운 시대가 열린 것이예요. 그런데 오늘 2장 1절을 보니까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랬는데 원문 성경에는 여기에 ‘엔드(그리고)’라는 말이 붙어 있어요. ‘그리고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 이야기는 무슨 이야기예요. 앞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뭐가 나와요? 1장에서. 1장과 연결되는 것을 보여주시는 거요.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사건과 성령이 오신 이 두 사건은 사실은 두 사건이 아니라 같이 연결된 하나의 사건임을 보여주시는 거요. 그리스도 예수가 승천하시고 성령이 임하시는 것,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가 가면 너희에게로 보혜사 성령을 보내시는 것, 그가 내가 하던 일들을 계속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오순절 성령 강림사건이 일어나는데 이 오순절 날이 뭐냐면은 유월절 이후에 첫 번째 맞이하는 안식일부터 시작을 해서 50번을 세는 거예요. 그 50번째 날이 바로 오순절이었어요. 이것은 유대인들의 5대 절기 가운데 하나였어요. 그래서 이때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큰 절기로 지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2장에 나와 있는 이 기도하는 이 장소도 사실은 개인적인 마가 요한의 집이 아니라 성전이었을 가능성이 많다 이렇게 봅니다. 왜 그러냐면은 절기 때 사람들이 성전에 모이기 때문입니다. 근데 그렇게 오순절 날이 이르렀을 때 유월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상징하는 것이지만 오순절이 상징하는 바는 그렇게 해서 오순절날이 이르면은 처음 익은 곡식 단들을 가지고 안식일에 곡식 단을 가지고 흔들어요. 그래서 소위 말하는 요제를 하나님 앞에 드리는 거죠.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수많은 열매를 맺게 될 것을 보여주는 예표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렇게 드린 다음에 오순절날이 이르면은 떡 두개를 그렇게 떡을 만들어서 하나님 앞에 바쳐서 소제를 대신하는 그러한 규례가 있었습니다. 이것에 대해서 해석이 구구합니다만은 그러나 어쨋튼 분명한 것 하나는 성령이 강림하시는 것과 유월절과 오순절이 관계있었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것과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것과 성령이 오시는 것이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거죠. 오순절 날이라고 하는 것을 특별히 여기서 거명하고 있는 이유는 뭐냐하면 2장에서 임하는 성령이 구속사적으로 획기적인 사건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예요. 성령이 우리 안에 계셔요. 거듭난 사람 안에 계셔요. 그러나 그 성령은 또한 계시면서도 또 계속해서 우리에게 오신다는 것이죠. 계시면서도 계속해서 우리에게 오시고, 우리 안에 계시면서도 계속해서 오시는 성령이예요. 그래서 우리를 충만케 하고, 비범한 능력으로 우리를 채우시는 성령을 말하는 거죠. 그런데 그 성령이 이제껏 까지는 부분적으로 이 땅에 와서 사람들에게 필요에 따라서 성령이 오셨는데 이제는 온 세상에 오셔서 그래서 온 세상을 그 성령으로 말하자면은 붙드시고, 그래서 그 성령을 통해서 구원의 역사를 경륜하는 것을 보여주시는 거죠. 그런데 그 첫 번 성령께서 오신 사건, 그것이 바로 이 사건이라는 거죠. 쉽게 얘기하면 교회가 맨 처음 서고 12월 12일 날 처음 예배를 드렸잖아요? 예배는 매일 드리지만 그 12월 12일에 드렸던 그 예배는 반복될 수 있어요, 없어요? 전혀 반복될 수 없어요. 영원히 반복될 수 없어요. 한번밖에 드릴 수 없는 거죠. 그러나 그 예배는 다시 매일 똑 같은 형태로 하나님 앞에 드려지고 있어요. 성령의 오심도 마찬가지라는 거죠. 성령이 이렇게 우리 가운데 오셔서 그렇게 구속사적으로 오신 것은 그렇게 오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성령의 시대가 도래하게 되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성령은 지금도 간구하고 부르짖는 사람들에게 계속 오시는 것이예요. 그래서 오순절 2장에서 임한 성령이 3장, 4장, 6장, 7장 계속해서 성령이 다시 오셔서 사람들을 충만케 하시는 역사를 보여주시는 장면들을 우리들이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그래서 이 오순절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 바로 이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이 사건들을 깊이 주목해야 될 이유가 있죠. 그런데 이 오순절 날이 이를 때에 저희가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다고 그랬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성전이었을 가능성이 많다,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어쨋튼 한 곳에 사람들이 모였는데 다 같이 모였다고 그랬습니다. 우선 우리들이 성령이 강림하기 전에 그 상황을 우린 기억할 필요가 있어요. 때는 오순절 날이 이른 때였고, 그리고 상황은 모든 제자들이 즉 1장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올라가심을 보았던, 그리고 1장에서 가롯 유다를 대신해서 사도 노릇할 맛디아를 선택하는 일에 참여하였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한 곳에 모여 있었던 그때였습니다. 그 때에 성령이 홀연히 하늘로부터 임했다 되어 있습니다. 우선 성령이 임하시기 전에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한 곳에 모으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령은 때때로 개인에게 역사하십니다. 그래서 이렇게 예배와는 상관없이 홀로 산 속에서 깊이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또 홀로 고요히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이 임할 수도 있고, 성경을 읽거나 심지어는 경건서적을 읽을 때에 성령이 자기 가운데 홀연히 임하셔서 성령의 놀라운 충만함과 세례를 받는 적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은 오순절 성령이 임하실 이 때에 바로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을 때에 성령이 임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처음 나타났을 때에 “후우~~” 바람을 부시며 ‘너희는 성령을 받으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때에도 성령은 말하기를 ‘제자들이 모였을 때에’, 두 번째 주님이 나타나셨을 때도 ‘제자들이 한곳에 모여 있을 그때에’ 성령이 오셨습니다. 그리고 오늘도 바로 제자들이 모여 있을 때에 나타나셨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잠깐 말씀을 드려야겠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냐면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성령을 개인에게가 아니라 교회에게 주셨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성령 주심의 1차적인 것이예요. 보세요. 오늘날 교회 밖에서 성령을 체험한 사람들이 이상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때문이냐면은 성령이 교회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일 먼저 성령을 주신 것은 교회에 성령을 주셨다는 거요. 물론 교회가 성령을 무슨 전매특허를 가지고 붙들고 있는 것은 아니예요. 왜? 성령은 교회에게 주셨지만은 그러나 교회가 성령을 소유하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예요. 교회는 사람들에게 성령을 나누어 줄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예요.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은 교회에 성령을 주셔서 교회가 성령을 받게 하시고, 그 교회가 증거의 공동체가 되게 하시고, 그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이 일에 증인이 되게 하셨다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교회에 성령을 이렇게 위탁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이렇게 성령을 주신 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도전을 주느냐 하면은 한편으로는 교회가 이처럼 성령을 받은 그렇게 성령을 교회에 하나님이 주셨는데 오늘날 과연 그렇게 하나님께서 주신 성령이 교회 속에 역사하고 있느냐 이것을 우리들이 반문해 보게 만드는 것이죠. 왜 그러느냐 하면은 성령을 하나님이 교회에 주셨어도 교회가 성령을 슬프게 하고 하나님을 근심시키면 성령이 교회를 위해 처음 주실 때처럼 그렇게 뜨겁게 역사하지 않는다 말이죠. 또 한편으로는 성령을 교회에 주셨다고 하는 이 말씀은 또 한편으로는 우리의 신앙의 체험과 그 다음에 건전한 성령의 체험이 얼마든지 교회를 중심으로 일어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이렇게 교회를 중심으로 이렇게 은혜를 받고, 성령을 체험하고, 변화를 받고, 은혜를 받고, 복음을 전하는 이런 일들이 일어나야 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동안에 교회가 성령의 참된 능력을 잃어버림으로 말미암아 갈급한 많은 사람들은 이상하게 교회 밖에서 성령을 체험하고, 그리고 교회 안에서 그런 체험한 성령의 경험들을 수용해 주지 못하니까 교회 밖에서 이상한 운동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언제나 시대는 이와 같습니다. 그러나 교회 밖에서 일어난 성령 운동치고 건전한 성령 운동이 거의 없었어요.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아세요? 끊임없이 교회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그 위탁한 말씀으로 성령의 체험이 검증되어지고, 진리에 의해서 그 성령의 경험들이 해석되어지고, 그리고 그 신비한 체험들이 말씀에 의해서 통제되는 일들이 멀어지게 될 때에 그 때에 바로 이와 같은 일들이 일어난다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강하게 역사하는 교회일수록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뛰어난 교회가 되지 않으면 교회도 마찬가지로 위험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기 위해서 성령을 교회에 주셨던 하나님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사람들은 신앙의 한 가닥에 빠져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병을 고치는 것, 그것이 기독교 신앙의 전부인 것 같이 그래서 복음은 오직 병든 자의 복음인 것 같이 사람들은 착각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성령을 받고 그 성령이 더더군다나 인생에 있어서 만사형통과 축복으로 연결되어지는 이러한 내세 기복적인 신앙과 말려들게 되면 더 복잡한 문제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셔서 우리에게 증거하는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이라고 그랬어요? 죄에 대해서 증거하리라. 너희가 죄인인 것을 깊이 깨닫고 알게 되는 그런 역사가 성령을 통해서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역사보다는 이상하게 성령을 통해서 그 성령이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그래서 우리의 인생으로 하여금 행복하게 만들고 자아만족에 빠지는 이러한 잘못된 신앙의 체험으로 인도되는 일들이 교회 밖에서는 얼마든지 자주 얼마든지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늘 저희가 모두 다같이 한곳에 모인 이 교회 위에 예수께서 성령을 보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도전을 주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사모하면서 한 곳에 모여 기도하고 간구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령을 체험했던 많은 사람들에게 물어보세요. 기도하지 않고 기도를 많이 했음에도 불구하고 성령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은 많이 있어요. 있죠? 그죠? 요즘에는 안 그래요. 요즘에는 다 잘못 생각되었다는 생각을 해요. 옛날에 방언하면, 방언하면 물론 좋죠. 너무 좋은데 방언하면 우선 기도를 오래도록 할 수 있거든요. 밤새도록이라도 하니까. 그만두고 싶으면 그만두고. 이틀하라 그래도 하니까. 그런데 방언 받고 싶어가지고 간절히 그렇게 기도하는데도 하나님이 안주실 때가 있단 말이예요. 구하라 주실 것이요 그러셨는데 안 주실 때가 있단 말이예요. 근데 기도를 해도 안주실 때가 있지만은 성령을 체험했던 모든 사람에게 물어보세요. 기도하지 않고 성령을 받은 적이 있나 물어보세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주실 때는 반드시 그 사람에게 기도하게 하셔요. 사모하는 마음으로. 보세요. 너희가 악할 지라도 자식에게 좋은 것을 줄 줄을 알거든. 그런데 그 자식이 어떤 자식이예요? 떡을 주십시오. 생선을 주십시오. 그러는 자식을 향하여 부모도 준다는 거요. 마찬가지로 너희가 악한 자라도 자식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천부께서 구하는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지 아니하시겠느냐? 구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령을 하나님 앞에 간절히 구하며 기도할 때 성령이 부어졌다는 것을 오늘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약 열흘정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그때에 그 열흘 동안의 기간동안에 교회에 이렇게 미진한 부분들, 그러니까 구약시대의 12지파, 신약시대의 12사도, 이거를 통해서 완결된 가운데 성령이 역사하실 수 있도록 이렇게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서 사도들을 세우고 나머지 시간들은 전심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일에 전심을 쏟은 것입니다. 그때에 성령이 임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성령이 오셔서 여러분들에게 체험하게 해 주실 그때에 여러분들은 방언을 받게 될 것입니다. 갑자기 방언에 대해서 체험 없는 사람들은 이거 뭔 소리를 하나 방언같이 들릴거요. 방언같이 들렸어요. 옛날에 어느 전도사님이 말이죠, 평신도 시절 때, 교회 나온 지 얼마 안되었어요. 방언에 대해서 한참 설교해 주는데 저건 도대체 무슨 혀가 또르르 말리고 무슨 이상한 소리가 나오고, 아니 왜 멀쩡한 사람이 이상한 소리를 하나? 근데 기도해 가보니까 진짜 그러더라고. 막 기도회 하다가 막 알아들을 수도 없는 말을 따발총을 막 쏜다 말이예요. 근데 그것도 한참 기도하더니 세련되어 가지고는 그 다음에는 듣기가 좀 나은 말로 바뀌어요. 방언체험들을 하는 거죠. 근데 성령을 깊이 체험할 때 아! 이것이 아니구나! 성령이 자기에게 오셔서 방언을 하실 그때에 사람들은 뭘 경험하게 되냐면은 ‘아하! 하나님이 과연 살아 계시구나, 성령이 진짜 계시구나, 내가 진실로 죄인이구나. 이런 사실들을 깨닫게 되는 것이예요. 그래 내가 핍박을 받아야지, 어떻게 하면 핍박을 받을 길이 없을까? 그러면 받아져요? 핍박을 하라고 사정해도 세상이 핍박할 만한 사람을 핍박하지, 핍박할 가치가 없는 사람은 핍박을 안해요. 또 나는 핍박을 받을 것 같아도 막상 핍박이 오면 꼼짝 못하는 거죠. 옛날에 마치 이라크가 말이죠, 한판 벌이겠다고 큰소리 뻥뻥 치다가 항복 그러는 거와 같이 그러는 거죠. 근데 성령이 오시면 그거를 체험하게 되는 거요. 그리고 제가 말씀드리는 이 모든 것들이 다 체험하게 되는 거요. 체험이 있으면 이심전심으로 알게 되는 거요. 그러면서 알게 되요. 사람들이 기도할 때에 한참을 울면서 기도하고. 그리고 왜 사람들이 저렇게 기도할 때 자기도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그렇게 밤새도록 기도하는지를 그런 것들을 깨닫게 되는 거요. 그리고 성령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하시고 싶어 하시는 기도를 대신하게 하시는 것, 그것이 참된 중보기도거든요. 그니까 쉽게 얘기해서 누구를 위해서 기도하고, 누굴 위해서 기도해야지, 그런 노력도 우리에게 필요하죠. 그러나 때가 되면은 성령으로 우리를 충만해지게 되면은 우리의 기도 계획과는 상관이 없이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이끌어 가시는 거요. 생각지도 않았던 사람들을 위해서 막 기도하게 하시는 거요. 거기에는 이유가 있죠. 성령이 오실 때에 이런 일들이 일어난다는 거죠. 근데 이런 일들이 언제 일어나느냐 하면 모였을 때에, 교회에 함께 모여서 간구하고 기도할 때에 이런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모여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은 선택과목이 아니예요. 교회에 모이는 것을 교회에 모여 주는 걸로 생각하는데, 좀 나와 주시죠. 우리 전도사님 그렇게 전화하지 마세요. 좀 나와 주시죠. 아, 뭘 나와 줘? 교회가 자기들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교회를 필요로 하는 것이예요. 착각을 해도 대단한 착각 속에서 살아가고 있어요. 그러니까 어때요? 여기에 모였던 사람들은 성령을 체험했어요. 다른 사람들은 이 사람들을 통해서 성령을 체험했어요. 할렐루야. 야, 그 자리에서 성령이 처음 오는, 이렇게 얘기하면 이상하지만 오리지널 체험, 복사판 체험이 아니라 오리지널 체험, 직접적인 성령의 첫 번째 강림사건을 체험하는 이 역사가 얼마나 장엄했겠어요? 그러니까 옆에서 보던 사람들이 눈이 휘둥그래졌어요. 이게 뭐냐? 미쳤나봐. 그런 생각을 하는 거죠. 그것이 어떤 일을 통해서? 모여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그러니까 늘 하나님의 교회 가까운 곳에 있어서 있는 사람들은 물론 그러고도 안나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만, 가까이 있으면서 한 곳에 모이기를 사모하는 마음을 가질 때 그 때에 하나님이 이렇게 홀연히 임하게 하시는 성령을 체험할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지는 것이예요. 말씀드렸듯이 10일 동안 이 사람들이 기도를 했는데 뭐 그 해석가의 말이 맞다면은 여기가 성전이라는 것이 맞는다면은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서 기도하다가 그 다음에 이렇게 나와서 성전 쪽으로 와서 맛디아를 선출하고 그리고 오순절날 성전에 모이는 이러한 사건이 일어났겠죠. 그리니까 공개된 장소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방언하는 것을 본 거죠. 그런데 그 열흘 동안에 500여명이 너희는 기다리라고 들었는데 남은 사람은 120명 정도 밖에 안남았단 말이죠. 그리고 2장에서는 몇 명인줄 몰라요. 그러니까 어때요? 마지막 9일까지 기도하다가 9일 날 가버린 사람들은 땡치는 거죠. 가장 손해를 많이 본 사람들이죠. 아예 처음서부터 보따리 싼 사람들은 덜 손해를 본 사람들이죠. 그러나 사실은 오순절 날이 이를 때 성령 강림하고 그 성령을 체험했던 사람들의 축복이 워낙 놀라운 것이었기 때문에 그 성령의 축복의 견지에서 보면은 하루 일찍 보따리 싼 사람이나, 아니면 열흘 동안 기도안하고 놀았던 사람이나 둘 다 오십보 백보로 복이 없다, 그렇게 말할 수 있다 이거예요. 이게 바로 교회의 신비입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바는 이것이예요. 교회를 무슨 운동을 일으키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많이 모이면 마음이 뿌듯해지고, 물론 인간이니까 그럴 수 있죠. 물론 그럴 수 있어요. 그리고 성취감도 느낄 수 있고. 여러분도 예배드리러 나왔는데 서너명이 쭈그리고 앉아서 사람들이 다 죽어가는 소리로 “성령이~~” 그러는 것 보다는 사람들이 들어왔는데 꽉 차고 뜨겁게 찬양하면은 나도 모르게 가슴이 뿌듯하고 뭔가 될 것 같은 그런 생각을 하게 될거예요. 그렇죠? 물론 그런 심리적인 것도 있어요. 그러나 여러분, 그거는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예요.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에요.
보다 중요한 것은 원리적으로 볼 때에 교회에 성령을 체험하게 하시기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예요. 여러분, 교회가 한꺼번에 성령을 체험할 때에 함께 성령을 체험한 사람이 홀로 성령을 체험하는 경우보다 압도적으로 많아요. 그리고 홀로 성령을 체험한 사람들은 교회가 함께 성령을 건전한 말씀을 들으면서 체험한 사람들에 비해서 잘못될 확률이 압도적으로 높아요. 사람들은 늘 말씀이 아니라 심지어는 말씀이 아니라 늘 자기의 체험에 관심이 가 있는 것이예요. 그니까 늘 뜨거운 교회만 찾아다니죠. 너무 뜨거우면 안돼. 다 타버린다고. 뭐가 남겠어요? 그렇게 한 곳에 모일 때에 성령께서 교회에 오시는 놀라운 역사가 이루셨다는 거죠. 그러니까 제가 오늘 말씀을 드리는 것이예요. 언제일지 몰라요. 보름달이 뜨는 거야 보름에 뜨니까 훤히 알지만은 그러나 성령이 어느 시간에 오셔서 우리를 깊이 감화시키시고 우리의 인생의 문제들 우리의 영적인 많은 문제들을 한번에 사슬을 끊고 우리에게 자유함을 주실지 그 누구도 모르는 것이예요. 그러니까 늘 사모하고 기대하는 마음으로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을 마치 자기의 숙명처럼 생각해야하는 것이예요. 그것이 당연한 것이예요. 교회는 무엇을 여러분들에게 주기 때문에 교회 나오는 그런 곳이 되어서는 안되요. 그래서 나는 설교를 듣기 위해서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을 기뻐하지 않아요. 교회 생활은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예요. 여러분, 훌륭한 설교를 많이 들은 사람들이 놀랍게 변화되는 줄 아십니까? 저야 훌륭한 설교를 하지도 못하지만 전혀 그렇지 안습니다. 훌륭한 설교를 들은 사람들이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듣고 훌륭하게 반응한 사람들이 변화되는 것이예요. 세례 요한이 설교할 때 늘 경청해주던 청중 가운데 헤롯이 있었어요. 헤로디아와 결혼한 그 패륜아 말입니다. 성경에 마가복음 6장에 뭐라고 말하는 줄 아십니까? 그는 세례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여겼다 그랬습니다. 얼마나 설교자에 대한 최고의 대접입니까? 여러분 설교자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사람은 사람인데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사람, 사람은 사람인데 세상에 속하지 않고 하늘에 속한 사람이라고 여겨 주었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들을 때에 이상하게 그 세례 요한을 좋은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독설을 많이 퍼 부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여러분의 생각과 배치되고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상식에 어긋남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괴로운데도 아멘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그렇게 아멘으로 받아들였던 그 사람이 세례 요한의 목을 쳤어요. 그러니까 교회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어느 한 쪼가리를 취함으로써 신앙의 유익을 받는 곳, 그런 곳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그 말씀 앞에 훌륭한 반응을 하고, 훌륭한 반응을 해서 더 훌륭한 말씀을 주시도록 기도하고, 그 말씀 앞에 반응하는 대로 살아가고, 그 말씀을 따라서 모여 그 말씀을 기도제목으로 삼고 기도하고 성령이 우리에게 오셔서 주님이 우리를 새롭게 해 주시기를 언제나 교회를 중심으로 모여서 기도하고 간구하는 이것이 내 인생에 있어서 피할 수 없는 선택이라고 믿고 살아가는 것, 그것이 정상적인 교회생활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핵심이예요. 그래서 제가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는 것은 그것이예요. 교회에 모두 나온다고 해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예요. 그러나 여러분 한 곳인 교회를 중심으로 해서 모이고 그곳에서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그곳을 영적인 가정처럼 여기고, 그렇게 동거동락하며 그렇게 살아가며, 학개 선지자가 마치 성전을 건축할 때에 눈에 보이는 성전이 건축되면서 그 성전을 건축했던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 속에 부흥이 일어났던 것처럼 교회가 무너진 부분들을 수축하면서 우리의 마음들이 온전하게 되어지는 일들이 일어나고 부흥케 되면서 변화가 일어나는 이런 것이 바로 교회와 성령과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의 관계라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늘 여러분들은 그것을 기억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훌륭한 말이나 프로그램이나 좋은 설교 때문에 교회 왔던 사람들은 더 좋은 설교를 만나거나 더 훌륭한 프로그램을 보게 되면은 거기를 떠나가는 것입니다. 언제나 손님이예요. 그러니까 그거는 원리적으로 뭔가 잘못되었기 때문이예요. (앞면 맨 끝부분 : 무언가 내용이 약간 빠진 느낌입니다)
(뒷면) 그런데 다만 피할 수 없는 환경 때문에 매일 못나오는 것이예요. 언제까지 이렇게 생활하게 되어 있어요? 여기서 장송곡이 울려 퍼지고 목회자에 의해서 수의를 입고 관 뚜껑에 들어가는 날까지 그렇게 교회생활을 하게 되어 있는 것이예요. 그런데 세상이 이상하게 되어가지고 이건 마치 사회에 친목단체 하나 가입하는 것처럼 그런 식으로 교회 하나에 이름을 걸어놓고 강남에 있는 큰 교회들 30%이상이 미등록 교인들이예요. 바람처럼 떠돌아다니는 거요. 간섭받기를 싫어하고, 남한테 알려지는 것도 싫어하고, 그냥 헌금내고, 헌금이 아니라 회비죠, 어떻게 보면, 회비내고 그리고 신앙 생활하는 것 같은 그런 생활을 하는 거죠. 터치 받는 것 싫어하고 그리고 심방 오는 것 절대 싫어하고. 그거는 근본적으로 성령으로 자신이 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교회 생활과 그다음에 성령이 교회를 통해서 우리에게 오시는 이 일들이 어떤 관계가 있는지에 대한 이해가 희박하기 때문에 이렇게 뒤틀리고 비틀어진 신앙생활이 나오는 것이예요.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잠시 여유기간이 있을 수 있어요. 그러나 깊이 교회와 하나 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놀라운 변화를 주어지는 거요. 여러분 한번 걸어왔던 신앙의 경험들을 한 번 쫘악 뒤돌아 보세요. 여러분이 성령을 체험한 사건과 교회와 떼어 놀래야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가 있었던 것을 여러분 생각하시게 될 거예요. 분명해요 그리고 여러분들이 성령의 그 충만한 기쁨을 잃어버리고 구원의 기쁨도 잃어버리게 된 것과 교회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이예요. 한번 제 이야기를 그냥 평범하게 듣지 마시고 과거를 자꾸 추억해보면서 내가 언제 성령을 체험했고, 그때 교회가 어땠으며, 교회에 대한 나의 태도가 어땠으며, 성령을 잃어버릴 때 그래서 성령의 참된 기쁨을 상실하고 침체될 때에 그때에 교회가 어땠고, 교회에 대한 나의 태도와 그리고 교회 속에서 나의 신앙생활이 어땠는지 잘 검토해 보라는 것이예요. 그러면은 기가막힌 함수관계가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입니다. 바로 우리들이 이 1절을 읽으면서 이런 새로운 사실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촉구하는 바는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모이기를 힘써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여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사모하세요. 그리고 그렇게 모이기를 힘쓰고 사모하며 하나님 앞에 구할 때 나는 보증할 수 없지만 성경은 보증하고 있다. 반문하셨어요. 의심하는 사람들에게 반문하였어요, 어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생각해 보라,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없다. 그래서 이것들을 통해서 깊은 깨우침을 받으면서 교회생활에 대한 태도예요. 엄청난 변화가 와요. 정말이예요. 이것은 원리적으로 옳기 때문에 내가 말씀을 드리는 것이예요. 물론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교회다니다가 또 여기저기 말씀이 좋다는 곳에 가서 한 두번 말씀을 듣고 인생이 너무 곤고하고 결단을 요할 때는 특별한 신앙생활을 할 수는 있어요. 물론 인정해요 그러니까 부흥회도 우리들이 하고 또 부흥회도 가는 것이죠. 그러나 여러분 그런 생활이 오래 계속되는 것은 결코 원리적으로 올바르지 않습니다. 그리고 결코 우리의 신앙을 깊게 만들어 주지 않아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을 때에 예루살렘에서 내가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들을 기다리라고 말씀하셨는데 어디로 준다고 말씀 안하셨거든요. 근데 이상하게 그들을 한곳에 모으게 하시고 그곳을 하나님의 집이 되게 하시고 그곳에 성령을 주심으로써 말하자면은 이제 성령을 받아서 하나 된 그 교회를 통해 똑같은 성령의 체험의 역사가 일어날 것을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시는 것이죠. 그러므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예요. 그래서 한 마음이 되는 것이죠.
근데 이상해요. 그것도 무엇인가 온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죠. 성령의 체험이 온전하면 여기서 체험하고 저기서 체험하고 저기서 체험하든지 모이면 전부가 다 하나가 되어야 할 것 아니예요. 그런데 이상하게 하나가 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거예요. 오늘 그런 것들에 대해서 우리들에게 원리적인 하나님의 응답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거죠. 그러면서 이렇게 기도할 때에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지게 되었습니다. 홀연히였습니다. 말씀드렸듯이 홀연히, 홀연히. 사람들이 기도할 때에 오늘이 그날이라 생각을 못했습니다. 얼마를 더 기도해야 될지 얼마를 더 모여 있어야 할지 몰랐습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 뿐이었어요. 주님은 주시겠다고 말씀하셨고 그리고 주님은 그것을 줄텐데 ‘몇 날이 못 되어’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임박하다는 것만을 알고 있었어요. 그랬는데 오늘 홀연히, 보는 사람들에게나 홀연하지 이 기도하던 사람들에게는 필연이었습니다. 홀연히가 아니라 필연이었습니다. 과연 오늘 오시었구나. 임하셨을 때에 아니 성령이 왜 하필 오늘 오십니까? 그게 아니라 매일 오시리라는 사실을 기대하며 하나님 앞에 기도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대가 중요한 것입니다. 기도회로 모일 때에 막 전화를 하고 전보를 치고 구역장을 동원하고 난리를 치면 모을 수는 있어요. 성령이 역사하지 않아도 사람은 모을 수 있다고. 그러나 그렇게 해서 모이는 것 그 이상의 중요한 목표가 있어요. 그것이 뭐냐면은 사람들이 교회에 나올 때에 오늘이 그날이구나 그거를 기대하며 나오는 거요. 새벽기도 보면서 그걸 경험해요. 어떤 날은 강하게 역사해요. 어떤 날은 역사가 덜해요. 어떤 날은 굉장히 강력해요. 근데 그것이 홀수 날 온다든지, 받침이 있는 날 온다든지, 받침이 없는 날 온다든지, 그러면은 월, 화, 수, 목, 금, 토, 일 대신에 워,화수, 모, 그, 토 그래도 되네. 받침이 있는 날도 아니고, 받침이 없는 날도 아니고, 그 다음에 주일도 아니고 토요일도 아니고, 몰라요. 홀연히 임하시는 것이예요. 홀연이지만 홀연히 임함을 경험했던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하나님이 성령 주실 것을 기대하며 매달렸던 사람들에게 홀연히 임했지, 홀연히 올 것을 기대하고 홀연히 아무것도 안하고 있던 사람들에게 홀연히 온 것은 아니었단 말이예요. 착각하면 안되요. 얼마나 하나님은 기가막히시냐면은요, 성령이 강하게 역사하는데 그 자리에 다 성령을 체험하는데 한 두 사람만 성령을 체험을 못해요. 그게 왜 그래요? 다른 사람들은 전부다 필연히 기도하니까 홀연히 임한을 경험하는데 다른 사람은 홀연히 왔다가 홀연히 못보고 가는 거예요. 집회하는데 그런 것을 많이 봐요.
(예화) 90년돈가 성남으로 집회를 갔는데 그 때는 기운도 좋았는지 안수기도까지 했었어요. 마지막 날 저녁에 기도하는데 그 교회까지 영적으로 센 교회는 처음 보았어요. 사단의 역사도 세고 성령의 역사는 세요. 70명 앉았는데 어쩜 국민학교 6학년 밖에 안되어 보이는 얘들까지 그냥 간절히 하나님 앞에 성령주시기를 구하는 거였어요. 놀랍더라고요. 그리고 마지막 날까지 딱 가니까 성령을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데 안수기도를 하는데 막 방언하고 진동을 하고 그 다음에 회개하고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거예요. 성령의 역사가 이렇게 커브를 틀면서 지나가는 거예요. 쫘악 가다가 요렇게 요사람 하나 빼놓고 지나가는 거예요. 요렇게 빼놓고 지나가요 신기해요, 신기해요. 우리 볼 때는 신기해 보이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는 당연한 거예요. 주님이 이유 없지 않아요. 우리가 무슨 공로가 있어서 성령을 받는 것은 아니지만 주님이 오실만한 마음이 없어요. 하여튼 기가 막힌 간증거리예요. 요렇게 앉아 있는데 요렇게 가서 요렇게 요렇게 가서 한 사람 딱 내놓고 그 다음에 싹 쓸고 가다가 바둑 아다리 되는 것처럼 하나 싹 빼놓고 싹 넘어가서 쫘악 나가. 이런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거요. 그러니까 늘 하나님 앞에 필연적으로 성령이 오시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기대 속에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던 사람들. 누가 어느 청년이 집에다가 이렇게 써 붙여놨데. 액자에다가 ‘오늘은 만나려나?’ 이게 무슨 소리냐, 목사님이 가서 물어보았더니 ‘오늘은 주님을 만날 것인가?’ 그걸 써 붙여놓은 거래요. 맨 날 일어날 때마다 오늘은 만나려나? 그리고 가서 기도하는 거예요. 그런 기대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기대를 갖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우리의 마음이 주님이 부어주실 성령에 합당한 마음으로 변화되는 것이예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변화되는 거예요. 사람이 보기에는 어느 날 신통치 않던 사람이 뭐라고 중얼중얼 기도하더니 성령을 받았다, 정말 홀연히 받았어. 아니 그 애 같은 애가 어떻게 성령을 받지? 왜 못 받아? 필연적으로 그렇게 사모하며 기도해 왔는데.
성령은 홀연히 임하셨지만 그것은 홀연히가 아니었어요. 필연이었어요. 보는 사람에게나 홀연이었지 그들에게는 필연이었어요.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앞에 주일 하루 나와서 그리스도인으로 이름값 하는 사람들이 성령 충만하고 권능 충만하게 살아가는 사람 보았어요. 한번 데려와 봐요. 내가 당장 활딱 벗겨가지고 그것이 거짓말임을 드러내 보여 줄테니까. 성령 충만한 사람의 흉내는 낼 수는 있어요. 박수도 치고 말이야, 왕창왕창 그럴 수 있어요. 여러분 참으로 성령이 내면에 충만해지면 이런 역사는 어떤 사람들에게 일어나요. 그런 사람들은 그런 형식적인 신앙생활 할 수 없다는 것이예요. 그건 불가능한 것이예요. 마음속에서 하나님의 은혜주시고 그 하나님께서 새롭게 해주실 것을 간절히 기도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또 어떤 마음이 드는 것이예요? 이렇게 홀연히 임하실 성령을 기약 없이 기다릴 수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이예요? And 그랬죠?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사건이 성령이 오신 사건과 연결되는 것이예요. 여러분, 이 성령을 하나님 앞에 구하는 이 사건은 주님이 당연히 주셔야할 것들을 요구하고 청구하는 것이 아니예요. 왜? 주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모든 일을 했어요. 주님이 여러분들에게 못해주신 것이 무엇이 있어요? 안 주신 게 무엇이 있어요? 예수 믿고 나서 여러분들이 손해 본 것 있어요? 주님이 배상해 주셔야 할 것 있어요? 문둥병자와 같이 심령이 다 썩어 들어가고 인생이 만신창이가 된 사람들을 하나님이 살려 주셨어요. 구해 내셔서 하나님이 온전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셨어요. 그리고 이제는 세상 짐 버리고 그리고 뒤돌아 보지 말고 예수이름을 찬송하며 걸어가라 그렇게 우리를 앉은뱅이와 같은 자리에서 일으켜 주셨고 문둥병자와 같은 자리에서 치유함을 주셨어요. 그리고 우리의 마음속에 우리의 말 속에 끊임없는 독설과 악담과 미움과 시기와 인생을 향한 저주가 쓴물이 쏫아 나오던 우리의 내면의 세계를 변화시켜 주셨어요. 그래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그릇으로 만들어 주셨어요. 그래서 주님을 노래하고 하나님을 기뻐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주님이 그렇게 만들어 주셨어요. 무얼 잘못했어요? 주님이 안해주신 게, 못해주시는 게 무엇이 있어요? 주님 원망하고 미워할 게 무엇 있냐 말이예요? 그리고 주님이 또 뭐라고 하셨어요? 성령을 위해서 너희가 기도하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죽여 버리겠다 그러셨어요? 아니예요. 이 신앙생활 이상의 신앙생활을 바라나이다. 우리가 주님의 이 놀라운 은혜를 입고 한번 우리의 인생을 하나님을 위해서 살고 싶습니다. 무미건조하고 빈들에 마른 풀 같은 우리들을 새롭게 살리셔서 마치 쏟아지는 빗방울을 머금고 싱싱하게 살아나는 이 화초와 같이 피어나서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고 주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옵소서,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시옵소서, 이것을 사모하는 사람들은 성령을 구하라 말씀하셨어요. 그래서 하루 기도하고 나서 하나님이 성령을 안주셨다고 지금 하나님을 향해서 토라진 마음을 가지고 있는 거예요? 겨우 일주일 새벽기도 나오고 나서 성령 안주셨다고 하나님 그러실 수 있냐고 지금 하나님한테 심통부리고 있는 거요? 언감생심이지. 참 기가 막혀서 말이 안나와요. 십년을 그렇게 기도하고 안주셔도 감히 그 엄청난 일을 위하여 기도할 수 있게만 해 주신 것만해도 감사한데 언감생심 하나님 앞에 그 기도, 아이구 그 신통치도 않게 그거 몇 번 해놓고 눈물 몇 번 흘리고 나가지고 뭐 하나님이 성령 안주신 것을 향해서 마음이 토라지고 맨날 간절히 기도해도 하나님이 나는 사랑하지 않으시나봐, 그러면서 마음이 토라지고 하나님을 향해서 섭섭한 마음을 가져요? 에이, 전부다 교만해서 그래요. 겸비해보세요. 나같은 사람이 새벽에 하나님 앞에 나와서 감히 교회에 성령주시기를 기도하는 도구가 되었다는 자체만으로도 하나님 앞에 얼마나 감사한 일이냐 말예요. 그런 생각을 해야지. 진짜 깊이 기도한 사람들은 항상 주님이 성령을 자기에게 주시지 않을 때 끊임없이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어요. 왜 그러냐면은 하나님의 약속이 너무나 선명하시기 때문에 내 안에 무언가 주님을 슬프시게 하는 것들을 찾아내기 위해서 끊임없이 --- 그렇게 하나님 앞에 절박하게 기도했어요. 그러면서 하나님을 향해 툴툴대봐. 누구 손해예요? 하나님은 손해날 것 하나도 없어요. 여러분 통해서 못할 일들 다른 사람들 통해서 하시면 되요.
(예화)여러분, 그 옛날에 대우조선 파업할 때 여기 빨간띠 두르고, 수염 이렇게 난 사람, 막 이러던 사람 기억해요? 양동생 집사예요, 양동생 집사. 나중에 집사가 되었대요. 그때만 해도 집사가 아니었는데. 그래가지고 대우조선에서 말이야 막 이러다가 그 사람 요새 안보이죠? 수염 깍고 전도사가 되었다고 그래요. 전도사가 아니라 전도자가 되었어요. 요즘 뭐하십니까? 매일 전철에서 수염 깍고 그리고 이젠 예수 믿어라고 전도하는 것이 일이래요. 부인의 전도를 받고 그 후에 회심하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어요. 그 사람이 무엇이라고 하는지 알아요? 이렇게 말했어요. 하나님 아버지 매일 아침 기도하는데 중학교 중퇴거든요. 그 사람이. 상당히 있어 보이는데 말이죠. 한 건 하면 대단히 할 것 같은데. 꼭 임꺽정 비슷하게 생겨가지고. 그런데 이 사람이 뭐라고 하느냐면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 아버지 보시다시피 저는 중학교 밖에 나오지 못했습니다. 주의 종이 될 수도 없고 유창하게 하나님의 일을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매일 기도하는 기도가 있대요. 이 하나님이 쓰실려고 하는 사람들 중에서 이 열심을 다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거들랑 그 안하겠다고 하는 사람들을 억지로 쓰실려고 애를 쓰시지 마시고 나같은 사람을 대신 사용해 달라고. 그 기도를 완전히 응답을 안해 주시니까 다행이지 만약에 그 기도를 완전히 응답해 주시면은 우리는 완전히 실업자가 되는 거예요 하나님이 무얼 잘못했어요? 안해주신 것이 뭐가 있어요?
(찬양)
늘 울어도 눈물로는 못 갚을 줄 알아 몸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
간절히 언젠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주님이 우리에게 약속한 성령을 부으셔서 우리를 새롭게 하시고 놀라운 권능으로 무장시켜서 하나님의 위대한 사람들로 만들어 주셔서 이 어두운 땅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서게 하고 황무지와 같은 곳에 아름다운 꽃이 피어나게 하는 하나님의 도구들로 쓰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이 확신을 붙들고 하나님 앞에 홀연히 나타날 성령을 기대하며 필연적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한 곳에 모이기를 힘쓰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