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성찬과 십자가 신앙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고전 11:23-26)
녹취자 : 김미현
이번 주일은 추수감사절입니다. 그래서 필연적으로 성찬에 우리들이 참여하게 됩니다. 작년에 이 본문 말고 마태복음의 본문을 가지고 성찬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지만 오늘은 고린도전서를 통해서 성찬이 무엇이고 우리가 성찬 예식을 통해서 무엇을 기대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말씀드림으로써 우리의 삶에 있어서 다시 한 번 복음의 정신이 회복되고 그렇게 우리의 삶이 그 정신에 지배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참 아름다운 신앙의 유산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아름다운 신앙의 유산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우리 한국 교회의 신앙의 선조들이 가지고 있었던 두 가지 신앙입니다. 그 두 가지 신앙이 한국의 기독교 초석을 놓았습니다. 그리고 오래도록 한국 교회에 신앙적인 특징과 흐름이 되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 두 가지 신앙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는 내세신앙이고 또 하나는 십자가 신앙입니다. 글을 쓰면서 우연히 한국 교회에 순교자 가운데 대한신학교를 졸업하고 평양신학교를 나온 김예진 목사님이라는 분의 일대기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 글을 읽으면서 참 느끼는 것이 많았습니다. 그 목사님은 후암동에서 목회를 하셨는데 그리고 부흥회도 많이 다녔습니다. 참 재미있는 일화가 그분에 대해서 직접 본 분이 말씀하시니 그런가보다 하고 압니다. 부흥회를 다니고 오면 사례금을 줍니다. 돌아서 집으로 안돌아오고 그 때 사례금 얼마나 주었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을 받아서 남산의 다닥다닥 붙어있는 달동네 거기 흩어져 있는 교인들 집을 도는 것입니다. 누가 동행하는 사람도 없이 돌면서 가난하고 끼니가 간 데 없는 사람들 문을 두드리면서 아버지와 같이 다 양식 사주고 나눠주고 그리고 빈손으로 집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아주 청렴하고 거룩하게 목회하셨던 분인데 그분의 순교하는 마지막 장면을 아주 상세하게 기록한 것들을 보았습니다. 이제 공산군을 쳐들어오니 이분이 두 설이 있는데 한 설은 기도하러 올라갔다가 내려왔는데 사람을 만나서 복음을 전했는데 그 사람이 밀고를 해서 죽었다는 설이 있고 그런데 지금부터 얘기하려는 것이 훨씬 더 타당성이 있는 설 같습니다. 기록에 나옵니다. 공산군이 쳐들어왔는데 공산당이 그 교회에 목사 한 사람을 말하자면 매수를 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전직 목사인데도 공산당에 붙어서 목사였던 동료들을 모두 고발하고 색출하는 일에 앞장서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시시각각으로 체포가 될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고 생각이 되니까 광주 쪽으로 이제 피난을 가십니다. 더군다나 이분은 일제와 더불어 싸운 항일 투쟁의 전력이 있습니다. 그러니 더 요주의 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 도망을 갔는데 거기서 이제 밀고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거기로 간 것이 기도하러 간 것인지 모릅니다. 그러면 두 설이 절충이 됩니다. 확인할 수 없지만 거기서 잡혀서 오는데 공산군들이 무엇을 요구했느냐하면 “하루 동안 내가 너를 끌고 다닐테니 이렇게 하루만 말하고 다니면 너를 살려주겠다. ‘나는 미제의 앞잡이였으며 내 딸을 미국놈들에게 양공주로 주었습니다. 나는 민족을 배반한 놈입니다.’ 이렇게만 하루 종일 떠들어라 그러면 내가 네 목숨을 살려주겠다.”고 했는데 그 일사각오의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그까짓 죽음이 무섭겠습니까? 오히려 큰 소리로 “나는 민족을 반역한 적이 없고 우리 딸을 미군에게 준 일도 없다.” 그러면서 오히려 항거했습니다. 그러니까 끌고 오면서 술에 의해서 개머리 판으로 개패듯 팼습니다. 온 몸이 피투성이가 다 되었습니다. 그러니 이 분이 온유한 마음으로 무엇이라고 말했느냐하면 “아버지여 이들의 죄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이들은 자기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잘 모르고 있사옵나이다. 하나님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이 사람들도 다 내 핏줄이요, 내 한 동포이오니 하나님 이들을 용서해 주시고 이들을 예수 믿게 만들어 주시옵소서.” 그러니 끌고 가던 공산당이 열이 받치니 총대로 얼굴을 짓이겼습니다. 얼굴에 피가 낭자하게 흐르는 것입니다. 피가 낭자하게 흐르는 가운데에서도 “형제여 예수를 믿으시오. 주님 믿어야 삽니다.” 그런 어떤 소설적인 삶을 가능하게 했던 양대 신앙이 한국 교회에 흐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양대 신앙이 하나는 내세 신앙입니다. 내세 신앙이 무엇이냐 하면 ‘주와 함께 죽으면 그날에 주와 함께 산다. 주와 함께 수치를 당하면 그날에 영광으로 받는다.’ 그 내세의 신앙입니다. 확고한 내세신앙입니다. ‘죽어도 다시 살리라.’는 부활 내지는 내세 신앙, ‘그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히 살리라.’고 하는 이 내세 신앙, 이것이 그들로 하여금 정말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 사자와 같은 사람으로 만들어준 것입니다.
또 하나의 신앙은 그렇게 고난을 당하면서도 그런 식으로 반응 하면서 기꺼이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주도 고난을 당하셨으니 나도 주와 더불어 고난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 역사에 있어서 우리 한국 교회에 주어진 아주 특별한 축복된 양대 신앙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날에는 누가 내세 신앙에 불탑니까? 강남에 있는 바닥을 보십시오. 누가 내세신앙에 불탑니까? 천국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여러분 가슴이 설레 본 적이 있습니까? 사람들을 온갖 생각이 이제는 이 땅에서 어떻게 먹고 사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복음이고 기독교 신앙이라고 하는 것도 이제 문제는 그렇게 ‘이 땅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하는 문제에 이 복음이 어떠한 식으로 내게 도움을 줄 수 있겠는가 그런 식으로 복음이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을 너무 사랑하니까 미래에 대한 전망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내세는 괜찮습니다. 아프지만 않으면 여기도 돈 있고 집 있으니까 살만합니다.’ 이런 신앙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점점 더 세상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을 그렇게 사랑하니까 가슴 속에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도록 만들어주는 그런 불꽃같은 삶을 가능하게 만들어주는 그 진정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우리 속에 원동력으로 역사하지 않는 것입니다. 성경이 얘기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청교도들로 하여금 그렇게 평균 수명이 30세 초반밖에 되지 않는 그것밖에 안되었습니다. 질병과 그리고 온갖 핍박과 죽음의 위협이 기다리고 있고 평균 연력이 30세 조금 넘는 미래에 대해서 아무것도 낙관할 수 없는 그런 인생을 살면서도 사람들이 불안하지 아니하고 꿋꿋하게 거목과 같은 삶을 살 수 있게 만들어준 것이 바로 불굴의 내세신앙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힘을 다해서 하나님을 위해서 살고 신앙을 따라서 살다가 죽으면 하나님이 우리를 영원한 안식으로 우리를 불러들이시리라.’ 그리고 그것을 늘 그리워하고 사모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내세에 대한 확고한 신앙과 전망을 가지고 있으니까 이 세상을 살아갈 때 담대한 신앙을 가지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역자 생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사람이 목회를 하던지 어디를 가서 섬기던지 하면서 괜히 객기를 부리면서 수시로 집어 치우고 교회를 뛰쳐나오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니까 여기 신학생들도 몇 분 계시지만 교회 1년에 한 번씩 옮겨 다니고 그래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해서 이 다음에 무슨 목회를 하겠습니까? 한곳에 기도 많이 하고 일꾼으로 갔으면 거기 엎드려서 하나님이 “이제 가라.” 그렇게 손잡고 일으키실 때까지 죽었다고 엎드리고 하나님 앞에 섬겨야지 어려운 일이 있다고 넉달 만에 집어 치우고 6개월 만에 집어 치우고 1년 만에 집어치우고 세상에서 장사를 해도 그런 식으로 해서 돈 못 법니다. 누구 밑에 들어가서 일꾼 노릇을 해도 그런 사람은 주인에게 기쁨을 줄 수 없습니다. 입으로만 주님을 위해 산다고 하지 하나님의 주권을 그런 식으로 인정하지 않는데 되겠습니다. 그렇지만 또 반대도 주의를 해야 합니다. 언제든지 하나님이 부르시면 떠날 수 있는 각오를 하면서 그렇게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영원히 있을 것처럼 그러면서도 곧 떠날 사람처럼 그렇게 섬겨야 합니다. 그러니까 이런 길로 들어서려고 하는 사람들은 이런 길로 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삶 자체가 그렇지만 이 세상에서 예수를 따라가면서 산다고 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환영받을 생각으로 해서는 안 됩니다. 깡통 찰 각오를 하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삶을 감당해 나가야 합니다.
우리가 오늘날은 이 세상과 너무나 짝하기를 좋아하고 또 이 세상으로부터 버림받는 것이 너무나 두려워서 그렇게 전전긍긍해 하니까 미래에 세상에 대한 전망이 안보입니다.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라고 하는 그 “저 공중에 구름이 일어나고 큰 나팔이 울려날 때 주 예수 오셔서 이 세상을 심판해도 나의 영혼은 겁 없겠네.”라고 하는 이런 삶을 우리들이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청교도들은 그런 신앙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차피 이 세상에서는 완전한 행복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천국을 향한 소망들을 촉진하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이 땅에서 적당한 배신을 당하게 하시고 그리고 곤욕을 당하게 하시고 그리고 위기와 시련을 맛보게 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럼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그러면 이 세상의 삶을 소홀히 했느냐 이것이 바로 신비주의자들과 청교도들이 다른 생각입니다. 내세에 대한 소망을 더욱 굳건히 붙잡았기 때문에 그 내세에 대한 소망 때문에 오늘 오히려 힘과 능력을 얻어서 소망을 가지고 기쁨으로 이 세상에서 잠시 머물다갈 이 세상에서 힘을 다하고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섬길 수 있었습니다. 신비주의자들은 미래에 대한 전망에 푹 빠진 나머지 내세 신앙이 그들의 영혼 속에 주입되는 마약과 같이 되어서 이상한 내세 신앙이 삐뚤어진 방법으로 들어오게 되면 그 다음에는 온 몸에 힘이 쭉 빠져서 아무것도 하기 싫은 것입니다. 산속에 들어가서 노래나 부르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은 조심해야 합니다. 이런 신앙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신앙이 바로 십자가 신앙입니다. 예수의 뒤를 따라가는 이 일에 있어서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처럼 고난을 받아야 한다고 하는 철저한 사상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믿고 그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가기 위해서 세상에서 손해를 보고 고통을 보고 고난을 당하고 미움을 당하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아니하고 당연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때 상황이 진짜 그랬습니다. 그런 훌륭한 정신이 있었기 때문에 변절자들도 많이 생겼지만 그러나 믿음을 지킨 위대한 성도들을 교회가 많이 배출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일제시대의 그 고난을 이기고 말하자면 공산 치하의 그 핍박을 이길 수 있었고 그래서 그 순교자의 신앙들이 한국 교회에 전해 내려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결국 그들로 하여금 이런 십자가의 신앙, ‘주와 함께 고난을 받으러 가자.’하는 이런 신앙, 이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던 것은 그들이 늘 현재적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고난을 현재적으로 체험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느끼지 못하는 진리를 위해서는 우리 인생은 드릴 수 없는 것입니다. 역사를 보면 항상 우리의 신앙의 중심적인 요소가 무엇이냐를 가지고 논쟁을 하면서 이것을 항상 인격의 3요소를 가르고 싶어 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지식에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라고 하는 그런 생각만 가지고 내가 아멘하면 그것이 곧 믿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믿는 것이고 그렇게 믿으면 그것이 하나님 앞에 의롭다 인정함을 받는 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또 보다 더 많이 퍼졌던 것은 그 정적인 신앙입니다. 느끼기만 하면 모든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느끼는 것이다. 종교적인 체험이다. 그러니까 예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는 사실을 깊이 느끼기만 하면 그것이 곧 신앙이라고 생각합니다. 찰스 피니 같은 사람은 신앙을 의지에 두었습니다. 예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기 때문에 나는 예수를 위해서 올바르게 살아야 한다. 결단하고 살면 그것이 믿는 것이다. 사실은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이런 것들은 모두 신앙의 부분적인 요소에 불과합니다. 우리의 생래적인 구조 자체를 보면 우리가 무엇인가를 확신하고 행동할 때는 그런 식으로 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인격이 어떤 진리에 깊이 순복하게 될 때는 반드시 세 가지 요소를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깨닫고 그 다음에 깊이 느끼고 그 다음에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행동하도록 우리의 삶을 움직이고 우리의 삶을 그렇게 살아가도록 주장하는 그런 일들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우리의 인격 깊은 곳에 정서를 움직이는 것입니다. 명백한 지적인 깨달음이 있고 그 다음에는 그 정서 속에 부어지는 그 감정이 있고 그것들이 지식과 체험이 결합되어서 우리의 온 인격을 움직이고 우리가 끊임없이 그렇게 살려고 애를 쓰는 의지적인 삶 속에서 신앙이 구현되어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 가지 요소 중에 어느 하나도 무시되어서는 안 됩니다. 결국 십자가를 우리들이 그런 십자가의 정신으로 살아간다고 하기 위해서는 우리들이 그 십자가에서 이루신 하나님의 일, 그 십자가 사건이 우리에게 가져다 준 그 모든 축복들에 대해서, 축복들뿐만 아니라 그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앞에 지불하셔야 했던 우리의 죄 값에 대한 모든 지불들, 이런 것들을 깊이 체험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깊이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서 당하신 고난을 느끼고 체험하면서 그 십자가의 정신이 우리의 삶을 사로잡도록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에 있어서 올바른 신앙생활이 되고 그리고 그 신앙생활이 정말 살아있는 신앙생활이 되기 위해서는 하여튼 정상적인 신앙생활이 되기 위해서는 언제나 우리의 정서가 그런 성경에 나와 있는 진리들을 깊이 느끼는 정서가 우리 속에 살아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살아있지 않으면 마지막에는 교만해지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아는 것 같은데 아무것도 느끼는 것이 없고 느끼는 것이 없으니 모든 신앙의 아름다운 요소들은 삶을 통해 구현되지 않고 머리속에서 맴도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을 우리 자신이 하게 되면 우리는 그런 식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기독교를 전파하게 되는 것입니다.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너무나 연약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연약한 존재가 인간이기 때문에 우리들을 위해서 행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을 수시로 잊어버리며 사는 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고 하나님 앞에 응답을 받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체험했어도 금방 마음이 둔하여지고 무디어져서 자기가 어떠한 형편에서 하나님께 구원을 경험했는지 조차도 잊어버리고 사는 돌과 같은 인생이 바로 우리라는 말입니다.
(예화) 제가 한 번 성남에 있는 교회로 저녁 예배 설교를 하러 갔습니다. 여전도사님이 저의 제자입니다. 하는 얘기가 정말 너무너무 지겹다고 합니다. 왜 그러냐고 했더니 나이 먹어서 여성으로서 신학을 해서 개척 교회에 깃발을 세우고 하려니 그것이 남자도 어려운 일인데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육체적으로 얼마나 고단하고 사람들이 말을 그렇게 고분고분 듣습니까? 그러니 믿는 것은 기도밖에 없습니다. 기도 대장입니다. 열심히 기도해서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런 기도가 필요한 사람들을 보내시는 것입니다. 암 말기 환자, 심장병환자, 정신 돈 사람 이런 사람들을 보내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도하면 그래도 하나님이 그런데서 라도 말발을 안 세워주시면 목회가 안 되겠으니까 하나님이 그래도 은혜를 주셔서 희한하게 병을 낫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귀신 나가게 해주십니다. 그런데 무엇이라고 하느냐하면 자기는 요새 다시 병들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싶은 심정이라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그렇게 눈물을 흘리고 복수가 차서 배가 이렇게 돼서 병원에서도 나가라고 해서 들것에 실려 교회 와서 암환자들에게서 냄새가 엄청납니다. 그분을 안수를 해줘서 그렇게 병고치고 나니까 이제는 양복 빼입고 술집으로 돌아다니는 것입니다. 그 때 그 교만한 얼굴을 보면서 자기는 아주 배신감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면 안 되는데 그 사람이 너무 미워진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다시 병들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마라. 고쳐줄 때는 언제고 도로 병을 주라고 기도를 하느냐.”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인간에 대해서 너무 낙관적으로 생각해서 그렇습니다. 인간이 그렇게 되먹은 존재가 인간입니다. 하나님께서 완전히 죽을 자리에 있는 인생을 살려 주셨습니다. 여러분들은 무엇이 낫습니까? 암 말기에 안 걸려서 왔을 뿐이지 영적으로는 암말기보다도 더한 상태에서 온 사람들 있습니다. 몸 아픈 것이야 어떻게 잘라내고 산다고 하지만 영혼이 병든 것은 어떻게 잘라내고 삽니까? 죽기 전에 오죽하면 마음이 너무 괴로운 사람들이 자살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와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그리고 고침을 받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찬송합니다.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드리네. 주만 바라보고 살리라.’ 비디오를 찍어놓으면 증거 다 댈 수 있습니다. 그렇게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하나님 앞에 절규하듯이 회개하면서 몸부림칩니다. 그리고 이제 ‘주님이 나 같은 죄인 살려주셨으니 이번에는 내가 주님을 위해 살아야하지 않겠는가.’ 그 때는 주님을 섬기는 것도 즐거움이었고 주님을 위해서 핍박을 받는 것은 영광이었습니다. 그런데 정신이 그것을 몇 달도 안 되어서 금방 잊어먹는 것입니다. 살만하면 그 다음은 불평이 떠오르기 시작합니다. ‘나는 왜 팔자가 이렇고 무엇도 없고 무엇도 없고 무엇도 없고’ 불평과 불만으로 가득 차고 감사가 사라진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누구신지도 잊어버렸고 자기가 누구인지도 잠깐 잊어버린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하나님 참 교육학적으로 기가 막힌 분입니다. 유월절 제도를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현대 교육학자들도 그것을 보면서 무엇이라고 평가하느냐 하면 가장 사람들의 마음속에 강렬하게 과거에 일어난 어떤 일들을 반추시켜서 그 정신으로 돌아가게 만들 수 있는 가장 훌륭한 방법은 실연식 교육방법이라는 것입니다. real play 실연식입니다. 그러니까 그 옛날에 애굽의 압제 속에서 탈출하던 그 때 그 일을 그대로 반복하는 것이 유월절입니다. 어린양을 잡아서 그 피로 자기들이 구속함을 받고 그리고 쓴나물과 고기를 먹고 그리고 탈출할 준비를 하면서 그 예식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그 후손들이 그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져내기 위해서 얼마나 위대하고 놀라운 일을 했는지 직접 보지 못했지만 그 일들을 행할 때에 그들은 수천 년 전에 일어난 사건이 현재적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시공을 넘어서서 그러면서 자신들의 신앙의 대상이신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인 자기를 위해서 자기들을 위해서 행한 그 위대하고 놀라운 일을 반복하면서 그 자기들의 역사에 일어난 것은 아닌데도 그 시간을 초월해서 하나님이 행하셨던 역사가 시간을 초월해서 오늘을 살아가는 자신들의 삶 속에 투영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깊이 그것을 체험하고 느끼게 만들어 줍니다. 아, 그렇다. 우리는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통적으로 흘러 내려오는 신앙고백이 있습니다. 우리는 원래 유리하는 아람족속 이었는데 주께서 우리를 애굽에서 종살이하는 가운데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에게 기적을 베푸셔서 우리를 건지시고 그리하여 우리가 가나안 땅을 들어오고 거기에서 우리가 자리를 차지하고 번성하게 되는 그러한 신앙고백을 계속 전해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 신앙 고백의 의미를 그 예식을 통해서 생생하게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일들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행하셨던 성찬예식입니다. 사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데리고 다락방에 올라가신 것은 성찬 예식을 하기 위해서 올라가신 것이 아니라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올라가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유월절에다가 전에는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전망하고 바라보면서 만들어진 예식이었지만 이제 당신이 그 유월절의 예언대로 어린양으로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기 직전에 그 모든 예언을 성취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는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전망이 아니라 그 전망하는 바가 완전히 이루어진 성취된 사건을 이제는 전망하는 것이 아니라 뒤돌아보면서 그렇게 우리의 잊어버리기 쉽고 나태해지기 쉬운 우리의 신앙생활 속에서 그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행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구원 행동에 대해서 깊이 현재적으로 느껴서 그 정신에 사로잡힌 신앙생활을 해나가도록 만들어주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성찬 예식을 친히 제정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하나 여기서 먼저 이 세부적인 문제를 풀어나가기 전에 먼저 우리들이 하나 못 박고 지나갈 것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인 우리들을 향하여서 이 세상을 향하여서 행하신 모든 일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아야 할 중심적인 사건, 하나님이 구원의 역사를 이루심이 있어서 가장 중심적인 구원 행동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는 것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의 사건은 예수님의 생애에 있어서 중심적인 사건이 아니라 신구약의 모든 역사를 통틀어서 중심적인 사건입니다. 그러니까 두 개의 창조가 있는데 하나는 물질적인 첫 번째 창조이고 그 다음에는 그 망가진 세상이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신앙으로 재창조되는 새로운 나라가 건설되는데 그 재창조의 말하자면 기초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의 사건으로 놓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구체적인 행동이 이 역사 속에서 나타나시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피로 말미암아 구원함을 받는 그 놀라운 약속의 성취가 이제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라는 것입니다. 성경을 모두 다 짜고 나면 마지막에 한줌에 잡히는 진리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 사실 하나가 남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적용을 하자면 성경에 있어서 중심된 것은 우리의 삶에 있어서도 중심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 속에는 압도적인 교훈과 지엽적인 교훈이 함께 흐르고 있습니다. 중심 되는 커다란 메시지가 흘러가는가 하면 작은 메시지들이 흘러갑니다. 모두 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커다란 메시지를 놓치면 작은 메시지를 우리들이 붙잡아도 성경적인 신앙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커다란 메시지를 붙들고 있으면 그 커다란 메시지를 통해서 작은 하나님의 진리들을 찾아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 흐르고 있는 그 많은 진리들 가운데 중요한 것은 힘차게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시뻘건 강물을 이루면서 흘러가고 있는 그리스도 예수의 구속의 사건을 붙들지 않으면 성경에 나타나는 다양한 진리들을 하나씩 하나씩 마음에 드는 대로 끄집어내서 그것을 자기 원하는 방식대로 죽 엮어 놓으면 그 끄집어 낸 것은 성경적인데 엮는 것이 비성경적이면 마지막에 모두 그것을 실천하며 살아도 비성경적인 신앙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역사 속에 흘러가고 있는 가장 커다란 물줄기가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구속의 사건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통해서 성취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느냐하면 우리의 말하자면 신앙에 있어서 교리만 있어서 된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의 신앙생활 그 자체의 중심이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 사건이 우리의 중심 자리에 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언제나 그 정신에 지배를 받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가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강조한 것이고, 갈라디아 교회에 편지 쓰면서 강조한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여러 가지 많은 문제가 있었습니다. 분쟁하는 문제, 간음하는 문제, 파당을 가르는 문제, 세상을 사랑하는 문제, 사랑이 식어진 문제, 많은 문제들이 있었는데 교만한 문제, 그런 것들을 다루기 전에 2장에서 사도바울은 못 박습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근본적으로 교회에 있어서나 개인에게 있어서나 그 사람들이 생활하고 있는 영성의 깊이는 십자가에 대해서 얼마나 현재적으로 그것을 깊이 체험하며 살아가느냐와 비례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결국 영성이라고 하는 것은 영적인 감각만을 이르는 것이 아니라 영성이라고 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자신의 삶의 현장을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살아가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어 주는 신앙생활에 있어서 영적인 특성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우리에게 정직하게 얘기하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성경이 우리에게 정직하게 우리들이 성경을 볼 때 성경이 우리에게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 요구하는 삶이 무엇인가 하는 말입니다. 사람은 저마다 성경을 보면서 자신들의 생각과 그리고 자신들의 사고에 맞는 것들을 여기저기서 끌어내어서 다시 재조직하려고 하지만 그러나 편견 없이 우리들이 복음서를 다 읽고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을 우리들이 깊이 묵상을 하고 또 성찰한다면 분명한 사실 하나는 그리스도 예수를 믿고 그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 그 뒤를 따르는 데는 반드시 비용이 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비용은 결코 적은 비용이 아닙니다. 커다란 비용이 든다는 것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아내를 버리고 부모를 버려야 합니다. 자식을 버려야 합니다. 본토를 떠나야 합니다. 재물을 모두 팔아서 없애야 합니다. 이것이 정직한 신약성경의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디트리 버네프 같은 신학자는 “복음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복음서의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희는 나를 따라오너라. 그리고 나와 함께 죽으러 가자.” 이것이 복음서가 제자들에게 요구하는 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문제는 무엇입니까?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비용 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이 자꾸 이상하게 뒤틀린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니까 언젠가 제가 한번 말씀 드렸듯이 이제는 기독교에서 사용하고 있는 모든 용어에 ‘진정한’ 이라는 말을 붙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진정한 신앙, 아니면 통용되고 있는 유행하는 신앙이냐. 그 참다운 신앙의 중심 자리에 와있는 것이 이 십자가 신앙입니다. 그러니까 이 십자가는 우리가 우리의 영적인 삶에 있어서도 이 십자가는 중심 자리에 와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언제든지 이 십자가의 정신에 사로잡힌 삶을 살아가고 이 십자가에 대한 정신이 우리들을 지배해야 합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말하자면 내세 신앙도 이 십자가의 정신 안에 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거기가 끝이 아니라 그 다음이 끝입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그것이 십자가 신앙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내세 신앙도 엄밀하게 말하면 결국은 십자가 신앙 속으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십자가를 떠나고 내세 신앙을 갖게 되면 이상한 종류의 이단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고 못 박혀 죽으실 수 있었던 그 동기도 사실은 앞으로 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이 바로 우리를 위해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기 위해서 이 십자가를 지고 죽으면 그 영광이 자기를 위해 기다리고 있다고 하는 그 믿음이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기꺼이 십자가를 지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날 우리들이 생각해 봅시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 대해서 알고는 있지만 그러나 얼마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해서 사람들이 깊이 묵상하고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 대한 감격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냐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은 십자가 사랑입니다. 십자가에 대해서 감동받을 수 없는 사람이 마음속으로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그것을 유지하며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여러분!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 정서를 동반하는지 아십니까? 사랑은 뜨겁고 격렬한 정서를 동반합니다. 그래서 그 사람을 그 사랑을 잃어버리면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다 쓸데없는 것 같아서 사랑 때문에 사람들을 죽게도 만들고 사람을 죽이게도 만듭니다. 돈으로도 얻을 수가 없고 물질로도 살 수가 없습니다. 그 격렬한 정서를 동반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긍휼이 바로 그렇지 않습니까? 지난 사경회 때 나온 것이 그것입니다. 타오르는 하나님의 긍휼, 불타는 것, 불타는 것은 고통입니다. 가슴 속에서 막 불타오르고 있는 그 긍휼,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포함해서 마찬가지입니다. 너무나 메마르게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조지 휘필드는 말했습니다. “어떻게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설교할 때 설교자들이 눈물 없이 말할 수 있는지 자기는 그것이 이해가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그 십자가의 희생과 고난으로 주님이 그 십자가에서 자기의 몸을 다 찢고 피 흘리신 그 진리와 사실을 생각할 때 그 앞에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스스로 교만했던 마음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세상을 사랑하면서 세상에 있는 것들이 마치 모든 것들인 것처럼 생각하며 사랑하고 살아가다가 어느 날 눈을 들어서
(찬양)
그 형상 볼 때 내 맘에 큰 찔림 받아서
그 사랑 감당 못하여 눈물만 흘리네
고난 받은 형상이 우리의 심령 속에 파고 들어와서 투영될 때 그 때 우리는 인생의 진실에 대해서 알게 되는 것입니다. ‘아, 그렇습니다. 하나님 나는 영원히 용서받은 죄인일 뿐이옵나이다. 아무것도 아니고 내가 지금 하나님의 은혜를 입으며 하나님의 말할 수 없는 사랑을 받으며 아침마다 새로운 하나님의 성실을 의지해서 살아가게 된 이 모든 은혜도 사실은 받을 만한 아무 가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깨닫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깨닫게 될 때 그가 무엇을 인생을 살면서 자기를 위해서 꿍쳐둘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가 무엇을 위해서 살게 될 것인가 하는 것은 명약관화하지 않습니까? 신앙은 복잡한 생각이나 관념의 집적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왜 교만해집니까? 우리가 신앙의 세계에 대해서 알면 얼마나 알겠습니까? 그러면서도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허풍을 떨고 사람들을 판단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앞에서 자신이 누군가 하는 것을 깨닫는 현재적인 십자가 사건의 체험이 반복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순결하고 위대한 신앙을 살았던 모든 사람들을 이러한 신앙을, 십자가 신앙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현재에 역사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마음속에서 뜨겁게 역사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마음속에 있는 모든 교만과 타락과 하나님 앞에서 높아진 모든 마음들을 다 파하고 무너뜨려 버리는 것입니다.
(예화) 기독 신학대학에 가고 나서 얼마 안 되었을 때입니다. 그 때는 에프엠대로 했습니다. 레포트 사람 어떻게 많은지 산더미 같이 들어오면 그것을 다 읽었습니다. 그리고 거기다 평가도 써주고 그랬습니다. 레포트 한번 내면 일주일동안 붙들고 씨름해야 했는데 지금도 기억합니다. 이름을 모릅니다. 이름은 일부러 안봅니다. 그런데 맨 처음에 책을 팜플렛같이 만들었습니다. 처음에 무엇을 읽혔냐하면 ‘묵은 땅을 기경하라.’ 프린트를 해서 나누어주고 읽으라고 하는데 아주 레포트를 타이프를 쳐서 깨끗이 썼습니다. 요지는 두 페이지를 썼는데 ‘이딴 거 무엇 하러 만들어서 학생들에게 팝니까?’ 그러면서 하는 말이 지금도 선명하게 그 글이 잊혀지지 않는데 ‘이런 것 2-3일이면 못 만들 사람 누가 있습니까? 혹시 제 레포트에 대해서 불만이 있으시면 저를 불러 주십시오.’ 아주 도전적입니다. 그래서 이제 마음이 좀 상했지만 그런 놈도 있겠지 하고 일부러 이름을 안 봤습니다. 입력이 되면 점수에 영향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싸인을 하고 던졌는데 두 번째 ‘베델로 올라가자.’를 읽혔는데 똑같이 썼습니다. 왜 그러냐하면 글자체가 똑같습니다. 마지막에도 레포트에 불만이 있으면 자기를 불러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던졌습니다. 기억에 남습니다. 세 번째 ‘십자가에 도전’읽혔는데 그런데 참 놀랍습니다. 그 앞줄을 쓰면서 뭐라고 고백을 했느냐면 ‘내가 왜 이러는 걸까? 앞의 두 책을 읽으면서는 마음속에서 분노와 교수님에 대한 배신감이 들었는데 왜 이럴까? 나는 지금 무엇인가가 무너지고 있다.’ 그러면서 완전히 혼란 속으로 들어간 글을 써내려 갔습니다. 그러면서 ‘내 마음이 무엇엔가 지금 무너지고 있다.’ 십자가의 진리에는 이러한 위대한 힘이 있습니다.
그 십자가의 진리가 현재적으로 경험되면 그렇게 자기의 인간의 교만한 사상들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책을 많이 읽고 공부한 사람일수록 은혜의 물에 깊이 잠기지 않으면 아주 위험합니다. 사람 잡습니다. 지식만큼 은혜의 소금물에 들어가서 깊이 그 십자가의 은혜에 잠기지 않으면 그 신학의 칼이 번뜩거리면서 교회에 해를 입힙니다. 그런데 십자가의 사건을 현재적으로 깊이 경험하면 신학이고 뭐고 다 뒤바뀝니다.
(예화) 제가 알고 있는 사람 한 사람은 극자유주의 계통의 신학교에서 공부를 하다가 새빨간 자유주의 독일로 유학을 갔습니다. 첨단을 공부하려고 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역사하셔서 거기서 어떻게 공부를 하다 잠간 쉬면서 성경 공부를 하게 되었는데 거기서 완전히 사람이 목사가 다 되었는데 거기서 주님을 영접하고 깨뜨려진 것입니다. 그러면서 거기서 무엇을 발견했느냐하면 십자가 사건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가지고 있었던 여태까지의 신학이 전부다 틀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회전을 해서 아주 복음적인 신학을 공부하고 왔습니다. 그러니까 보수주의에서는 시작이 이상하기 때문에 인정을 못 받고 저쪽에서는 끝이 변했으니 변절자여서 인정을 못 받는데 ‘나는 사람이 인정하지 않아도 좋다. 나는 하나님을 만났고 그리고 이 복음을 전하면서 산다.’는 것입니다. 아주 정말 복음적인 사람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예외적이긴 하지만 가끔 그런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러니까 수십년 동안 공부를 해오고 이상한 사상과 생각이 잡동사니처럼 들어갔어도 그 십자가의 피에 한번 깊이 잠기기만 하면 새로운 신학이 나옵니다.
현재적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사건을 이렇게 체험하게 될 때에 우리의 삶에 획기적이고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 사실을 주님이 아셨기 때문에 이것을 이미 초대 교회 때부터 예수님께서는 이제는 유월절이 아니라 이렇게 그리스도 예수의 그 고난을 기리는 성찬 예식을 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성찬 예식의 의미는 결국 오늘 결론을 내리고 다음 주에 계속하겠습니다만 오늘 우리들이 하나 여기서 깊이 본문을 해설해 나가기 전에 먼저 깨달아야 할 것은 무엇이냐 하면 주님이 이 예식을 만들어 놓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복음 진리에 대한 특별히 그리스도 예수의 구속 사건에 대한 현재적인 체험이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사활을 건 중요한 문제라고 하는 사실을 주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찬에 참여하고 그리고 십자가의 설교를 듣고 그리고 십자가를 묵상하면서 아무것도 여러분들에게 와 닿는 느낌이 없다면 그것은 여러분 중대한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나는 안수를 받으면서 깜짝 놀랐습니다. 사람들이 안수를 받는데 울지를 않습니다. 얼마나 기다리던 날이고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엄청난 사건입니까? 성직으로 부름을 받는 사건입니다. 그런 일들이 거기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세례를 받으면서도 사람들이 그렇게 좀처럼 울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자기와 같은 죄인을 구속하셔서 하나님의 백성 삼으셨다는 이 복음의 깊은 감격이 사람들 속에 없는 가운데 이런 예식을 치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삶이 말은 복음을 말하는데 삶이 그 복음에 사로잡힌 삶을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연약함들은 결국은 궁극적으로 무엇 때문이냐 하면 역시 죄 때문입니다. 죄가 우리로 하여금 복음 진리에 대한 예민한 감각들과 체험들을 앗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죄를 깊이 회개하고 났을 때 마음속에서 완전히 회복되는 기능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성경을 읽어나갈 때 혹은 복음 진리를 묵상할 때 그것이 현재적으로 자기에게 깊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이전에는 그냥 그렇다고만 생각을 했는데 은혜를 깊이 체험하는 그 순간에는 그것이 자기에게 현재적으로 체험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이 언제인데 이제 와서 그것을 가지고 가슴아파합니까? 그런데 그런 일들이 일어납니다. 시공을 넘어서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그 고난의 아픔과 그리고 그 고난의 정신이 우리의 삶을 주관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정신이 우리 속에 끊임없이 재연되며 살아가도록 그렇게 경륜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자주 말씀드립니다만 갈라디아서 2장 20절이나 6장 14절에 나오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이 전부다 현재완료입니다. 사건은 과거에 일어났지만 그 사건이 오늘 살아가는 자신들에게 깊이 영향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현재적으로 체험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을 순교의 종소리가 들려오는 그 순간에도 깊이 머리를 조아리면서 하나님 앞에 흐느끼는 것입니다. 나같은 죄인을 위해서 그리스도 예수께서 죽으셨다는 사실을 한 번도 당연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부당한 것이다. 그리고 그 부당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긍휼히 여기시는 사랑, 그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게 하신 것이다.’ 그것을 현재적으로 깊이 느낍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성찬 예식에 참여할 때는 우리가 그런 연약함 때문에 이것이 우리에게 단순한 기념이 아니라 이 예식을 행하면서 다시 한 번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고난을 의미를 우리가 깊이 체험하고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을 우리들이 몸소 체험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속하신 그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놀랍고 그 사랑이 아니었다면 우리들이 얼마나 멸망 받을 죄인이었는가 하는 것을 느끼면서 그리스도 예수를 위해서 살기로 거룩한 피의 맹세를 새롭게 하는 순간입니다. 이것이 성찬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깊이 기도하고 그리고 깊이 묵상하고 세례를 받아야 할 사람들은 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그렇게 깊이 하나님 앞에 마음의 준비를 하고 그리고 그 성찬을 바라보면서 우리 자신 속에 복음 신앙이 회복되기를 하나님 앞에 사모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떡과 피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고 이것이 왜 성찬에서 도입되었는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이것은 우리가 다음 시간에 살펴보아야 할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시간에 결론을 맺자면 우리에게는 십자가에 대한 현재적이 체험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을 우리들이 현재적으로 느끼지 못하게 하는 것들이 바로 우리의 영적으로 무감각한 죄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 대해서 아무것도 느낄 수 없을 때는 우리 자신에 대해 깊이 경계하는 의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혹시 우리 안에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이 자원이 고갈되어 있지 않은가 그것을 깊이 생각하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정신이 우리를 주관하고 주장하도록 그렇게 새로운 계기로 이 성찬을 삼아야 한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