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자의 귀로
(1995년 온가족 여름수련회)
설교기간|1995년 7월 31일 - 8월 3일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아버지의 곁을 떠나(눅 15:16-18) 1995.7.31 온가족 여름수련회 1
2. 먼 나라로 떠나감(눅 15:13-16) 1995.8.1 온가족 여름수련회 17
3. 돌아오는 탕자(눅 15:16-19) 1995.8.2 온가족 여름수련회 28
4. 기다리는 아버지(눅 15:20-24) 1995.8.3 온가족 여름수련회 41
5. 새벽예배 모음①(시 103편) 1995.7.31 온가족 여름수련회 새벽예배 51
6. 새벽예배 모음②(시 107:19-21) 1995.8.1 온가족 여름수련회 새벽예배 53
7. 새벽예배 모음③(대하 20:20) 1995.8.2 온가족 여름수련회 새벽예배 57
8. 새벽예배 모음④(사 43:25) 1995.8.3 온가족 여름수련회 새벽예배 61
1. 아버지의 곁을 떠나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눅 15:16-18)
탕자의 귀로 (1995.7.31 온가족 여름수련회 1)
아버지를 떠난 삶 속에 부요함이라든지 풍부함이라든지 그런 것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거기에는 언제나 결핍이 있습니다. 가만히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생각나게 하는 방법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마다 그 겹핍을 결핍으로 느낄 수 있는 능력이라고 그럴까 이런 것들이 사람들마다 다 틀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 따라서 다루시는 방법은 다릅니다. 그래서 결핍을 결핍 가운데 있으면서도 그 결핍을 별로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벌써 내 마음이 하나님을 떠나기 시작하면, 내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기뻐하지 않기 시작하면 내 영혼 속에 벌써 궁핍이 시작이 됩니다. 그리고 결핍되기 시작합니다. 얼마나 하나님의 영적인 삶을 향한 감각이 얼마나 예민하신지 모릅니다. 그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오랫동안 익숙하게 그런 결핍 속에서 오래 살다가 보면 사람이 자기도 모르게 강해집니다. 그것은 좋은 의미에서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이제 강퍅해지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마음이 메마르고 그리고 심령이 곤고할 때, 이게 가끔이라도 은혜가 내려서 자기가 뭔가 크게는 아니더라도 조금이라도 깨닫고 자기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내가 정말 하나님의 은혜, 사랑의 관계로 돌아가야 한다는 그런 요구들을 내가 느끼게 될 때, 가끔이라도 그럴 때는 그런 요구가 계속 살아있을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내가 받아야 하는데 이런 삶의 모습으로 안 되는데 하는 그런 것들에 대한 이런 갈망들이 살아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오랫동안 시간이 흐르면서 그런 것들이 조금도 채워지지 않을 때가 되면 그러면 가슴 속에서 전혀 나중에는 그런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갈망이라든지 사모함이라든지 이런 것들이 거의 생기지를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서 굳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비가 오지 않은 땅처럼 딱딱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하나님의 말씀이 과연 그러한지 깨닫거나 은혜 받거나 하는 그런 일들이 더 힘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런 궁핍이 오게 될 때에 처음에 그런 궁핍들을 즉시 느끼면서 내가 지금 아버지를 내 마음에 떠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기뻐하지 않으니까 하나님께서 나에게 기뻐하지 않는 여러 가지의 모습들을, 증거들을 내게 이렇게 보여주시는구나. 하는 것들을 이제 깊이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깊이 느끼면서 매일매일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여튼 영적으로든지 육신적으로든지 하나님을 떠난 삶 속에는 언제든지 궁핍이 있게 마련입니다. 육신적으로는 하나님의 뜻이 있어서 한참 동안 잘 나가게 버려두실지 모르지만 그러나 영적으로는 마음이 하나님을 떠나고 나서 우리의 심령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기뻐하지 않으면 즉시 영적인 깊은 궁핍 속에 빠져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사람들은 여러모로 이야기를 합니다. 그것은, 쉽게 아이를 가지고 있는 가정주부들의 경우는 애를 둘씩 세씩 딸려서 애들한테 시달리고 하니까 언제 기도하고 교회에 나와도, 솔직히 말해서 제가 제일 안타까운 게 그것입니다. 어머니들이 아이를 데리고 와서 교회에 와서 은혜를 받고 하나님 앞에 새 힘을 받고 가야 하는데 이거는 애들을 데리고 와서 애하고 씨름을 하고, 그 다음에는 교회를 왔다가 그것도 주일을 지켰다고 그러고 가는데 주일을 지킨 것은 지킨 것이지만 돌아가는 얼굴이 전혀 은혜 받은 얼굴이 아닙니다. 그 모습을 보면 참 안타깝습니다. 그러면서 그게 6개월, 1, 2, 3년 해서 애가 이제 커서 자랄 만하면 또 낳습니다. 그러니까 또 시작되는 것입니다. 5, 6년 그러면서 바닥까지 내려가는 것입니다. 정말 그것은 보통문제가 아닙니다. 그런데 나중에는 우리의 교회뿐만 아니라 다른 교회에 집회를 가도 똑같습니다. 유아실을 이렇게 들여다보면 유아실에 있는 부모들은 나중에는 은혜받기를 포기했습니다. 애들하고 같이 놉니다. 과자도 먹고 그리고 어르고, 그래서 애가 처음에 울 때만 봐주다가 나중에는 포기하는 것입니다. 애가 가만히 잘 노는데 괜히 옆에서 울리고 그럽니다. 애가 잘 노는데 놔두고 말씀이나 들어야 하는데 잘 노는 애를 쫓아가서 과자를 빼앗아 먹었다나 어쨌다나 완전히 별천지입니다.
좋습니다. 인간적으로는 이해가 갑니다. 진짜 누가 그 무거운 짐들을 감당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면 그런 무거운 짐들을 다 감당하면서 애한테 시달리면서 잠잘 시간도 없는데 언제 성경을 읽고 언제 기도를 하고 교회에 오면 애들에게 시달리다 보면 머리에 두통이 생기는데, 어떤 때는 예배를 드리다가 가는 부모들도 있습니다. 집회에 가서 보면, 하다가 안 되니까, 애를 들쳐 업고 그냥 빙빙 돌다가 가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제일 안타깝습니다. 그래요.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그건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애를 갖다가 지하실에 넣어놓고 자물쇠로 잠그고 올 수도 없는 것이고, 뭐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남자는 어떻습니까? 남자는 더 불쌍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이른 새벽부터 일어나서, 새벽기도를 가는 것이 아니라 이른 새벽부터 일어나서 벌써 출근할 준비를 하고 꼭두새벽에 출근버스를 타러 나갑니다. 그렇게 나가서 있는 눈치 없는 눈치를 다 보면서 그 각박하고 치열한 경쟁사회 속에서 또 예수 믿는 사람이니 덥석덥석 남이 하는 대로 나쁜 일은 못하고 그러면서 거기서 뒤쳐지지 않기 위해서 근근이 한 달 동안 쭉 살아가는데 자기는 월급을 얼마나 받는지도 모릅니다. 회사 사장하고 부인하고 통장으로 돈이 왔다 갔다 하고 자기는 얼마를 받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면서 한 달 두 달 일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때 누가 그랬습니다. 어떤 아이가 그랬습니다. 자기는 이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이 자기 아빠라고 합니다. 왜 그러느냐고 하니까 우리를 먹여 살리기 위해서 그렇게 고생을 하는데 저녁 때 들어오는 아빠의 얼굴을 들여다보니까 지옥이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얼굴이 지옥입니다. 우거지상을 해서 자고 또 아침이면 일어나서 한술 퍼먹고 꾸역꾸역 헛구역질 하면서 또 직장에 나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삽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다 불쌍합니다.
그러면 고등학생들은 안 불쌍합니까? 마찬가지입니다. 팔자에 없는 그 공부를 해야 한다고 하면서 적성에도 안 맞는 공부를 하면서 고생을 하는 것입니다. 새벽에 언젠가 버스를 탔더니 학생이 만원버스 속에서 그 무거운 가방을 들고 꼭대기에다 두고 뭘 중얼중얼 해서 뭘 하나 봤더니 단어장에 뭘 써서 매달려서 그것을 외우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런 치열한 경쟁사회 속에 삽니다. 너나 할 것이 없이 다 불쌍합니다. 불쌍한 인간입니다. 믿습니까? 믿을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영적인 삶이라고 하는 것, 하나님과의 관계라고 하는 것은 정직합니다. 그래서 인간적으로는 이해가 되는 일들도 신앙적으로는 이해가 안 되는 수가 있습니다. 인간적으로는 충분히 그 모든 형편과 사정들이 이해가 되는데 그런데 하나님과의 관계로부터 멀어지고 있는 것은 멀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피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관계가 그렇게 멀어지게 되니까 그 멀어진 관계를 통해서 하나님을 떠나게 되고 그러면서 인간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떠나게 되고 거기서부터 인간의 모든 영적인 고갈이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얼굴에 그 스트레스가 꽉 차여있습니다. 그래서 건드리기만 하면 폭발할 것 같은 그런 모습입니다. 은혜가 충만해서 사람들을 용납하고 그러는 것이 아니라 건드리기만 해도 폭발할 것 같은 시한폭탄과 같이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이 세상에서 우리가 살아가면서 늘 급하게 해야 할 일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늘 급한 일들이 늘 중요한 일들은 아닙니다. 급한 일은 급한 일이지만 급한 것 보다 더 먼저 해야 할 일은 영적인 일입니다. 그러니까 자기의 영적인 삶에 대한 관리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으니까 이런 곤고함이 오게 되는 것입니다.
어쨌든 집을 나간 이 아들도 아버지의 집을 떠났을 때 그는 결핍을 깊이 맛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궁핍은 점점 심해져서 자신의 힘으로 견딜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그렇게 아버지의 집에 있을 때도 아버지가 생각이 나지 않았지만 아버지의 얼굴을 볼 때마다 생각나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빨리 죽어야 할 저 노인, 그것입니다. 빨리 자기가 유산을 받아야 하니까. 그 유산을 받아서 떠나와서 먼 곳으로 나가서 허랑방탕하고 그 돈을 다 쓰고 그러면서 인생을 희희낙락할 때는 아버지가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는 그 나라에서 모든 돈을 다 써버리고 거렁뱅이가 되고, 그래서 백성 중 하나에게 붙여 살고, 나중에는 돼지를 치는 목부가 되고, 그 목부가 되어서 그 돼지우리에서 쥐엄열매를 찾아야 하는 신세가 되었는데도 아버지가 생각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아버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가 하는 말이 “내 아버지의 집에는” 이 사람이 뭐라고 불렀습니까? “내 아버지”라고 불렀습니다. 드디어 이 사람의 마음속에 아버지와 의 관계를 향한 갈망이 생겨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내 아버지의 집에는” 하고 이제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한 사람이 한 인격이 좋으신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시작입니다. 아버지는 한 번도 이 아들에게 자기가 얼마나 좋은 아버지인지, 그리고 자기가 얼마나 훌륭한 아버지인지를 설명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원하는 것은 이 아들이 스스로 아버지와의 강요한 관계 속에서 산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이 아들이 아버지와 내가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것이 정말 한없는 축복이고 한없는 은혜라는 것을 깊이 깨닫고 체험하게 되도록 그 일을 기대하면서 아버지는 이 아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 아들이 그 큰 궁핍 속에서도 이제까지 생각하지 않았는데 이제 비로소 내 아버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내 아버지”라고 하는 말은 “나”라는 말과 “아버지”라는 말이 함께 붙어있는 것입니다. 관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전에는 그렇게 관계 자체가 싫었던 그것이 지금은 그 관계가 생각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그 관계를 생각하게 된 동기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내 아버지 집에는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서 죽는구나” 이 사람이 아버지와의 관계를 생각하게 되었던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하면 이 아버지의 집에 있는 풍족함과 자기에게 있는 이 궁핍함을 비교했을 때에 아버지의 부요함이 생각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자신이 견딜 수 있는 그 상황에서는 결코 하나님께 돌아가지 않습니다. 그리고 마음이 가난해지지를 않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결코 가난해지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을 말씀하시면서 제일 먼저 복되다고 선언을 하실 때 그 복되다는 선언을 받았던 사람들이 누군가 하면,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왜 하나님의 은혜는 평화를 만들고, 그리고 의를 위해서 고난을 받고, 핍박을 받고, 죽어가는 이런 사람들보다도 우선적으로 하나님께서 복되다고 말씀하시고 다른 사람들은 천국에서 얻을 수 있는 여러 가지의 축복들을 말씀하셨습니다. 땅을 얻는다든지, 아니면 위로를 받는다든지, 아니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일컬음을 받는다든지, 천국에서 누릴 수 있는 여러 가지의 요소들을 주었지만 그러나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천국 자체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뭐라고 하셨는가 하면 “마음이 가난한 자들은 복이 있나니 심령이 가난한 자들은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의 것이며” 천국을 통째로 누구에게 주셨는가 하면,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셨습니다. 그들에게 모두 주셨습니다. 그것을 보면 심령이 가난해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객관적으로 우리들은 그렇게 살아가는 그 인생이 너무나 불쌍하고 너무나 비참한데 그런데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는 사람들은 깊이 불쌍하고 그리고 너무나 피폐해가서 이렇게 살아가고 있지만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 얼마나 가난해지기 어려운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것도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시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일단 택하셨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그의 수중에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언제나 신앙생활에 있어서 깊이 인격적으로 그 하나님 앞에 승복하게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그 관계를 간절히 원하고 그 관계 속에서 살아가기를 사모하시는 것처럼 우리가 스스로 그런 하나님과 더불어 관계를 맺으면서 그 하나님과 함께 그런 관계를 유지하고 지키면서 살아가는 것들을 한없는 축복과 은혜로 여기면서 그렇게 하나님 앞에 나오기를 하나님께서는 간절히 바라고 사모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이 아들이 얼핏 보면 궁핍했기 때문에 아버지의 집이 생각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궁핍한 것은 여기서만 궁핍한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도 상당히 많은 날을 흉년이 들었기 때문에 궁핍하게 지냈습니다. 그런데 그 궁핍한 것을 통해서 하나님은 이 사람에게 아버지와의 관계를 생각나게 만들어주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다양하게 여러 가지들을 사용하실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을 통해서 우리가 우리 자신의 한계를 고백하고 하나님의 도우심과 그 은혜를 갈망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서 말씀하시는 바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그런 궁핍 속에서 그는 하나님 자신을 간절히 필요로 하지 않을 수 없게 그렇게 되었던 것입니다. 아버지가 생각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제 이 사람은 완전히 주려서 죽을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생명을 더 이상 지탱하고 자기의 가지고 있는 그 아집들을 더 이상 지탱할 수 있는 그런 힘들을 잃어버릴 수 있는 상황에 왔습니다. 그러나 궁핍이 이 사람을 변화시킨 것이 아닙니다. 궁핍이 이 사람을 변화시킨 것이 아니라 오늘 성경에 보니까 “그가 스스로 돌이켜 이르기를”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돌이키는 일들이 먼저 있었던 것입니다. 그 돌이키는 일들이 무엇인고 하니 아버지를 향해서 이전에 가졌던 생각들을 바꾸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해 이전에 가지고 있었던 생각들을 바꿀 때 그때 진정한 회개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뭐라고 지금 이야기 했습니까? 아버지를 향하여 가지고 있었던 생각을 바꾸는 것입니다. 이전에 아들에게 있어서 아버지에 대한 생각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이런 것이 아닙니까? 유산을 물려주기 위해서 존재하는 사람, 내 인생에 있어서 필요와 그리고 관계를 나하고 맺을 필요가 없는 사람, 오직 관계가 있다면 유산으로서 관계가 있는 사람, 그 아버지의 간섭을 받는 것은 나에게 기쁨을 주지 못한 이런 그림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버지의 집이 생각이 나고 그 아버지의 집이 그리워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동기는 결핍 때문에 아버지의 집에 있는 풍부함이 생각났지만 결과적으로 이 아들이 그리워하게 된 것은 아버지의 집에 있는 곡식들을 그리워하거나 아버지의 집에 있는 또 다른 유산들을 그리워하게 된 것이 아니라 이제는 아버지가 거기에 있기 때문에 그 집을 그리워하는 그런 생각에 전환이 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영혼에 진정한 변화를 위해서는 머리에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생각에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생각에 변화가 일어나지 않으면 영적인 변화는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혹시 영적인 변화가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진정한 변화가 아닙니다.
(예화) 예전에 작은 교회를 섬기게 되셨는데 말씀을 통해 성도들이 조금씩 모여지게 되었는데 이상한 것은 성도들의 변화가 없어 왜 그런가 하니 말씀에 집중을 하지 않는 모습에 걱정을 하시며 기도하시는 가운데 지혜가 떠올라 개인적으로 사람들 을 불러서 말씀을 듣는 태도들을 고치라고 하시면서 태도를 바꾸지 않으면 생각 에 변화가 있지 않고, 생각에 변화가 없으면 영혼에 변화가 일어나지 않고, 영혼에 변화가 없으면 신앙생활이 바꾸지 않고 그러면 인생이 전혀 바뀌지 않는다며 알려주시니까 성도들의 반응이 조금씩 바뀌면서 졸지 않으려고 하며 앞자리에 앉아서 예배를 드리려고 하는 등 변화가 있었다는 이야기
(예화) 신학교에 가셔서 신학생들을 향해 지난 주 목사님이 무슨 설교를 했느냐고 하니까 10명의 신학생들이 아무 대답이 없고 수요 예배까지 물어보니까 본문도 기억 하지 못했다는 이야기
그러니까 교회에서 이렇게 예배드리는 것을 보면 아예 설교하는 사람도 포기했고 듣는 사람도 포기한 것 같습니다. 그냥 참는 것입니다. 25분 동안 참는 것입니다. 눈을 지그시 감고 점잖게 가끔 고개를 끄덕이며 참는데 뭘 알아서 끄덕이는 것이 아니라 그래야지만 사람들이 안 조는 것으로 보니까 한 번씩 끄덕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세월이 흘러가는데 무슨 변화가 일어나겠습니까? 소리입니다. 스쳐 지나가는 소리입니다. 그런데 이것들을 하나님께서 아주 슬퍼하십니다. 그것을 기억을 해야 합니다. 루터가 멜란히톤이라고 하는 개혁자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당신은 설교할 때 설교를 듣고 교인들이 자신에 대해서 화를 내든지 아니면 당신을 향해 화를 내든지 둘 중에 하나를 할 수 있게 하라” 그러니까 그런 일들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깊이 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멍하게 있으면 안 되고 이 속에서 활동을 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잠자고 있으면 활동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오늘 왜 이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까? 보십시오. 아버지와의 관계로 돌아가기 전에 아버지의 집이 생각나고 그 모든 일들이 있기 전에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이 아들이 먼저 돌이키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돌이킨 것이 무엇인가 하면, 아직 한걸음도 아버지의 집을 향해 발걸음을 떼어놓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집으로 뛰어가지도 않았습니다. 그런 일들이 일어나기 전에 먼저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아버지의 집에 대한 생각이 바뀌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여러분들의 생각을 바꿔줍니까? 무엇을 통해서 여러분들이 오랫동안 자기의 것이라고 생각하고 자기가 살아가는 것이 옳다고 생각을 하고 그렇게 하면서 살아가던 여러분들의 생각이 잘못됐다든지 아니면 맞다든지 아니면 흔들리지 말고 그 생각을 붙들고 살든지 무엇에 의해서 여러분들이 확인을 받는가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거나 말씀을 해석하는 것을 듣거나 하는 가운데서 여러분들이 확신을 받게 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그런 것들에 대한 초점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예화) 어느 교회에 집회를 가셨는데 오랜 시간을 찬양으로 준비하는데 너무나 찬양이 뜨거워서 많은 사람이 은혜 속에서 찬양을 하고 난 다음 말씀을 전하시는데 아까와는 다르게 은혜가 사라지면서 그렇게 은혜 받던 사람들부터 시작해서 졸기 시작했다는 이야기
말씀이 깊이 들어갈수록 사람들은 더 차가워지기 시작했는데 그 이유는 집중을 해서 그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귀를 기울이면서 그것을 전해지면 논리의 순서를 놓치지 말고 그것을 붙들면서 한편의 설교를 다 듣고 나면 그 다음에 조용히 앉아서 백지를 펴놓으면 그것이 전부다 다 쏟아져 나와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말씀을 듣는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하나님과의 관계로 돌아가게 하시기 전에 제일 먼저 하시는 일은 무엇인가 하면 우리의 생각을 바꾸시는 일입니다. 그런데 너희의 생각을 바꾸고 그리고 네 인생을 바라보고 아버지와의 관계를 바라보고 생각하고 하던 것들을 너희가 바꾸고 그리고 고치고 그렇게 해서 너희가 내게로 돌아와야 한다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는데 ‘하나님, 예수 믿는 것이 무엇이 그리 복잡합니까? 그것 말고 그냥 보기나 좀 주십시오. 아니면 뜨겁게 해주십시오.’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이 하나님 앞에 바르게 서지를 않는 것입니다. 이 아들은 이 속에서 스스로 돌이키는 일들이 먼저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아버지의 집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집에서 자녀와의 관계가 아니라 품꾼과의 관계를 가지고 살아가는 그 집에 있는 머슴들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누리고 있는 그 풍부함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그 모든 궁핍함 속에서 고통 받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그 아버지 집의 부요함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대비해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속에서 내가 얼마나 가난한가 생각하게 되었고 이 모든 가난함의 원인이 어디에 있었는가 아버지의 관계가 깨어지는데 있었다는 사실을 이제 깊이 인정하도록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 다음 18절에 보니까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로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그는 먼저 18절에 보니까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로 가리라” 결심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돼지우리에서 엎드려서 그 옷에 똥칠을 하면서 쥐엄열매를 찾아 헤매다가 “내가 여기에서 일어나리라. 내가 일어나리라. 내가 일어나서 아버지의 집으로 가리라” 아버지는 지금 내게 와 있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나는 일어서리라. 신앙생활을 하면서 정말 우리가 진정한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원한다면 우리의 결심이 필요합니다. 마음에 정함이 있어야 합니다. “깨끗할 정”자가 아니라 “정할 정”자입니다. 마음에 정함이 있어야 합니다.
인간은 여러분들이 내가 참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고 그 하나님께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하고, 그런 말에 의해서 사람들은 감동을 받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말이 아니라 여러분들이 견고하게 서서 정말 이것이 예수 믿는 것이 아니다 하는 자기부정이 먼저 있은 다음에는 이 삶을 내가 고쳐야 되겠다고 하는 각오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여러분들에게 있어서 가장 커다란 숙제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 교회도 가만히 보면 매주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한 달이나 혹은 두 주나 석주 그렇게 보면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났어도 ‘아 하나님이 은혜를 주셨구나’ 그럴 때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와서 눈물을 흘리고 기도하고 그럽니다. 매 주는 아니지만 그런 일들이 수시로 일어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고쳐지지 못하는 것은 그것은 본인의 마음에 정함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깨달았습니다. 충분히 깨달았으면 그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것들을 자기가 숙제로 생각하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자신의 삶을 고칠 수 있는 마음을 정하는 일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뭔가 한다고 그러면 해야 되겠다는 그런 강인함 각오, 그리고 그 일을 행하기 위해서 내가 다른 일에 있어서 방해받지 말아야겠다고 하는 그런 마음에 정함이 필요한 것입니다. 마음에 정함이 없는 사람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아서 하나님 앞에 좋은 것을 얻을 줄 생각지 말라는 것입니다. 바람에 나는 겨와 같습니다. 그러니까 신앙생활이 일관성이 없습니다. 어떤 때는 은혜가 조금 가슴에 스치고 지나가면 내가 주를 위해서 죽기까지 따라가겠나이다. 베드로와 같이 그렇습니다. 조금 시련이 있게 되면 그 다음에는 다 잃어버리고 멀찌감치 예수가 어떻게 죽나 구경하기 위해서 뒤쫓아 가는 그런 비겁한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삶이 언제나 일관성이 없고 신앙생활에서 논리가 없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는 말은 무조건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십니다. 그러나 불쌍히 여겨달라는 것도 논리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불쌍히 여겨달라고 그래야 합니다. ‘주님, 주님은 나에게 이러이러한 것을 요구하셨고 나는 이러이러한 것들을 행했으며 이러한 일에 있어서 실패했고 이런 일에 있어서는 내가 하나님 앞에 떨어진바 되었고 이런 일에 있어서 이런 도움이 하나님의 필요한 가운데 있습니다. 나를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도무지 자기의 영적인 삶에 대해서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 합니다. 대충 살아가고 대충 살다가 어느 날 와서 막무가내로 하나님께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합니다. 배짱입니다.
오늘 이 아들을 보십시오. 이 아들은 먼저 ‘일어나리라’ 결심을 했습니다. 나중에 일어나기 전에 먼저 여기 일어난다는 말이 두 번이나 나옵니다. 하나는 마음속으로 하는 말이고, 하나는 실제로 행동으로 한 말입니다. 마음속으로 ‘나는 일어나리라. 내가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리라’ 옛 생활에 대한 청산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제 내가 아버지의 집으로 가서 굶어죽어도 이 돼지우리는 내가 있을 곳이 아니다. 일어나야 하리라’ 그리고 깊이 결단하고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 것 해보셨습니까? 안 된다고만 말하지 말고 그런 것을 한번 해보셨습니까? ‘하나님, 내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내가 오늘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이것들이 지금 심각하게 잘못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환경에 핑계를 대고 내가 여건에 핑계를 대면서 여태까지 살아왔고 하나님 무조건 불쌍히 여겨달라고 한 것도 한두 해를 해야지 이렇게 오랜 세월을 내가 이러고 살았지만 내 영적인 삶에 개선이 없습니다. 하나님, 도와주시옵소서. 내가 결심합니다. 그러나 나는 내 결심을 믿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를 도와주시옵소서. 내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겠습니다. 도와주시옵소서’ 그리고 일어서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아이를 가지고 있으면서 아이를 안 갖고 있는 사람보다 더 은혜를 받아야지 어쩌면 일주일 동안 그 아이를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고 생사를 걸고 교회에 나와야지, 주일 날 아침이면 아빠를 불러서 안수기도를 하라고 하면서 붙들고 ‘하나님, 이 아이의 마음을 온유하게 하시옵소서. 오늘 우리가 이 아이와 함께 은혜를 받게 해주시옵소서. 그런 사모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정해진 여건을 어떻게 할 것입니까? 그 모든 여건들을 그대로 인정하면서도 내가 하나님을 찾아가는 영적인 회복에 노력들을 포기할 수 없다고 하는 그런 사모함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11시 예배 시작인데 11시 땡 해서 헥헥 거리며 나오면 무슨 은혜가 되겠습니까? 일이 생기면 늦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매주 늦는다면 그것은 환경에 문제가 아닙니다. 고쳐야 합니다. 왜 저는 이해하지만 자신의 영적인 회복을 위해서는 뜻을 세우는 일이 필요합니다.
(예화) 예전에 섬기던 교회에서 말씀을 전하실 때 어느 자매가 있었는데 그 자매는 결심을 했는데 자기가 말씀을 들으면 화가 나고 고통스러웠지만 오기로 무슨 말인 지 들어보겠다며 집중하며 듣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그 자매를 말씀으로 깨트렸다는 이야기
집중의 힘이 놀라운 것입니다. 일어나야 되겠다고 할 때 아들의 모든 생각은 오직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쥐엄열매를 찾고 싶은 생각이 없는 것입니다. 입맛이 싹 가셨습니다. ‘이제 나는 일어나야 하리라. 그리고 오직 무릎에 힘이 없고 팔에 힘이 없어도 나는 일어나야 하리라.’ 그런 결심을 하고 그것을 실천을 해보고 그리고 그것을 가로막는 죄와 더불어 피 흘리기까지 싸워보고 그러다가 안 되면 안 된다고 하나님 앞에 나와서 안 됩니다. 그렇게 말해야 합니다.
정말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소중하게 여기시는 것처럼 하나님과의 관계를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면서 그 관계가 나의 삶 속에서 그대로 실현되고 그 관계에서 오는 축복들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일들이 내게 이미 그치고 있다고 하는 것들 때문에 고민하면서 그런 것들을 개선하고 바꾸어보려고 우리들이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아들은 마음 깊은 곳에서 영혼에서 우러나오는 결단을 하는 것입니다. ‘나는 일어나리라’ 그렇게 일어나리라고 하는 깊은 결단과 각오를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의 결심과 우리의 힘으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것을 굉장히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것을 그렇게 지탱해갈 수 있는 힘을 하나님께서 공급해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선한 결심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긍정적으로 응답하시는 것입니다. 그랬다고 여겨지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가치 있는 일을 위해서 뜻을 세우지 가치 없는 일을 위해서 뜻을 세우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가치 있는 일을 위해서 뜻을 세웁니다. 뜻을 세우고 그렇게 뜻을 세울 때 그 일이 가장 가치가 있다고 하는 것을 내가 삶으로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속에 있는 많은 생각들을 모두 아십니다. 그런데 어떤 때는 하나님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생각만으로는 만족을 안 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고백되기를 원합니다.
기도가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신 분이 우리 속에 무슨 생각이 있는지, 무슨 소원이 있는지 하나님이 그것을 모르시겠습니까? 그런데도 하나님은 다 아시면서 우리가 그것을 무릎을 꿇고 정한 시간에 하나님 앞에 나와서 그것을 입술로 논리를 세우고 이 속에 있는 것들을 다 끌어내서 하나님 앞에 말로 진술하고 그리고 도와달라고 하나님 앞에 간청할 때까지 응답이라고 하는 것은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마음속에 있는 많은 기도의 제목들을 가지고 있는 것들로 하나님이 다 알고 계시지만, 그러나 그것들을 표출해내기 원하십니다. 왜 그러십니까? 그러니까 그 이유는 그것들을 표출해내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뢰하고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나의 절박한 기도 제목을 향한 도우심이 거룩한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만 온다고 하는 그 의식에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놀라운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동일한 문제가 있는 데도 그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던 사람들은 그 문제가 이루어지면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셨다며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합니다. 그러나 그런 간절한 기도 제목이 속에 있으면서도 하나님 앞에 매달리지 않던 사람들은 그 일이 이루어지면 ‘어떻게 그렇게 이루어졌어?’ 하면 ‘운이 좋았지.’ 하며 삼천포로 가는 것입니다. 삼천포로 가는 말을 하면 큰일 납니다. 어느 국회의원이 잘나가다가 삼천포로 갔다니까 삼천포 사람들이 피켓을 들고 일어섰습니다. 왜 툭 하면, 잘못되면 우리 동네로 빠진다고 하냐면서. 우리 학교에 삼천포 출신이 하나 있는데 내가 그 이야기를 했더니 뱃살을 잡고 웃었습니다. 그 말은 그냥 하는 말인데 그것을 자기네 동네로 빠지냐고 하는지, 참 재미있습니다. 그런데 진짜 그렇게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마음속에 있는 기도 제목들을 기도도 없이 응답해주시면 응답해주실수록 계속해서 하나님을 의뢰하는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삼천포로 더 멀리 가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오염된 앞 바다까지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가 전심으로 뜻을 세우기를 기다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그것입니다. 뜻을 세우십시오. 하나님 앞에 이런 뜻을 세우는 일들을 하나님께서 굉장히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뜻을 세울 때 그것을 자기의 삶에 있어서 최고의 앞자리에 두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투자를 하는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 희생이 따라야 합니다.
그런데 이 아들이 그렇게 ‘일어나야 되겠다’라고 하는 깊은 결단을 한 다음에 ‘아버지께로 가리라’ ‘하나님이 오시면 안 되는가’ 우리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오신다는 표현이나 내가 아버지께로 돌아간다는 표현이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결국은 하나님과 다시 한 번 관계를 갖게 되는 것인데 이런 일들이 결국은 하나님은 우리로부터 멀어지시는 예는 없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은 거기에 계십니다. 그리고 거기서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곁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면 하나님이 그 자리에 안 계신 것이 아니라, 그리고 메모만 남겨놓고 하나님이 가셨습니다. ‘기다리다가 나는 간다.’ 그렇게 하시지를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거기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마지막으로 우리가 언제나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께로 돌아오고 아버지께로 돌아오고 이런 일들이 일어나게 되는데 그때에 이 아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내가 가서 아버지께 가리라” 일어나는 목적은 아버지께로 가는 것이 목적입니다. 하나님을 향해 찾아가는 삶입니까? 여러분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진정한 회복을 소망한다면 또한 하나님을 향해 가고 있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향해 가고 있습니까? 매주일 이런 삶이 하나님을 향해 가는 삶입니까? 여러분들이 그토록 사모하는 어떤 회복을 향해서 걸어가는 삶인가 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넘어지고 주저앉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뒤로 물러서서는 안 됩니다. 다시 일어나서는 한 걸음이라도 앞에 가서 하나님 앞에 쓰러지는 이런 각오를 가지고 우리들은 나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아들이 이 사건을 통해서 이런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 놀라운 생각에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내가 아버지의 집에서 죽지도 않은 아버지에게 유산을 달라고 해서 그것을 챙겨서 먼 나라에 가서 그곳에서 허랑방탕하고 그것을 가지고 타락된 삶을 살아서 돈을 다 허비해버리고 지금 이렇게 폐인이 되어서 여기에 이렇게 된 그것이 아버지와의 관계에서만 일어난 일이 아니라 하늘과의 관계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하는 인식에 전환이 생긴 것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그렇지요. 아버지에게만 가서 사과를 하면 된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그랬는데 하늘이 먼저 나옵니다.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그게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궁핍을 당해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야 되겠다고 하는 그 결심만 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집에 돌아가기 전에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진정으로 아버지와의 관계를 회복하고 아버지께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사람들마다 자기가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생각과 의식이 없다면 돌아가고자 하는 모든 결심이나 계획이나 모든 방법들이 하나님 앞에서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렇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잃어버리고 궁핍 가운데 빠지게 된 이 사건을 통해서 자기가 자기 자신의 죄에 대해서 깊이 깨닫게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첫걸음입니다. 자기 자신의 죄에 대해서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아들은 아버지께로부터 커다란 잘못을 했다는 의식만 갖게 된 것이 아니라 시간이 지나면서 이 사람은 하나님께, 아버지께 모두 죄를 얻게 되었다라고 하는 죄를 짓게 되었다라고 하는 그 인식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아버지와의 관계만 고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도 고쳐야 한다는 생각까지 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이전에 자기가 아버지의 집에서 유산을 타가지고 먼 나라로 가서 허랑방탕한 삶을 살기 그 이전에 그렇게 아버지의 집에서 유산을 물려받기 이전에도 아버지의 집에서 자기 속에서 자라고 있었던 그 죄, 그것이 결국은 아버지의 집을 떠나면서 구체적으로 자기의 삶을 통해서 드러나서 그 삶이 엉망진창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를 짓게 되었고 그리고 아버지를 향해 범죄 하게 되었고 하나님을 향해 범죄 하게 되었다라고 하는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게 될 때에 우리의 의식에 이런 진정한 변화가 오는 것입니다. 고통의 문제, 혹은 결핍의 문제가 우리를 하나님과의 관계로 돌아오게 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나게 하는 요인은 되었지만 그러나 끝까지 그 결핍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자기가 얼마나 커다란 죄인인가 하는 사실들을 깊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불순종하고 하나님께 범죄하고 그렇게 살아가게 된 그런 하나님 앞에 한없이 그 하나님을 향해서 범죄한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이 깊은 시련 속에서 눈물을 흘리는데 그 눈물이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자기 연민에 눈물입니다. 그러고 보면 정말 자기 자신이 그렇게 살아왔던 모든 삶, 이런 것들이 참 어떻게 보면 다 슬픕니다. 너나 할 것이 없이.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 가만히 생각해서 인생의 시야를 한번 ‘나는 참 불쌍한 사람이다. 나 같은 사람이 이 세상에 어디에 있을까?’ 그렇게 한 10-20분 깊이 생각하고 그것을 자극하는 찬송이나 그것을 자극하는 이야기를 누구로부터 들으면 은은하게 불을 꺼놓고 들으면 그러면 한없는 시름에 잠기게 되는 것입니다. ‘맞아, 내 인생 정말 막장이구나. 내 인생에 이 슬픔과 비애를 누가 알까? 인생 살 맛이 안 난다.’ 그렇게 시름에 잠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로 돌아가면서 흘리는 돌아가는 이 탕자의 눈물은 자기의 인생에 처지가 불행하고 슬프다고 하는 그런 눈물만이 아니라 여기서 흘리는 그 눈물은 다른 의미의 눈물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아버지와 다시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 나에게 있어서 얼마나 합당치 않는 일인가 하는 것의 인식입니다. 그래서 뭐라고 고백을 하는가 하면 “나는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일컬음을 감당할 수 없사오니” 이전에 아버지의 집에서 그렇게 유산을 나누어달라고 아버지를 조르면서 그렇게 살아가던 때에 과연 이 사람이 한번이라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겠습니까?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습니다. “아버지에게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할 수 없사오니” 그것이 아니라 나는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그런 관계가 싫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인생에 궁핍과 시련 속에서 깊이 찢기고 할퀴고 고통을 받고 난 다음에 마지막에 깨닫게 된 것은 자신의 인생을 붙들어주는 것이 물질이나, 자신의 꿈이나, 비전이나, 이 세상인심이 아니라 결국 자기를 붙들어주는 것은 오직 그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가 자기를 붙들어주는구나 하는 그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관계에 대한 한없는 가치를 부여하고 나니까 타락한 자신의 모습, 아버지와의 관계를 우습게 여기고 멀리 떠나갔던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 비참하고 부끄러워서 그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관계를 감당할 수 없다고 하는 깊은 한계를 하나님 앞에 고백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하나님께 돌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사람을 향해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부요함을 보이시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그 아들됨, 그 황홀한 구원, 그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이런 것들을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아들이 아버지께로 돌아가야 되겠다고 하면서 깊이 결심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행에 옮기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가 진짜 굽은 무릎을 펴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려고 할 때 얼마나 돌아가는 것을 가로막는 저해요소가 의식 속에서 많이 있겠는가 생각해보십시오. 뭐라고 그랬습니까? 이런 것이 아닙니까? 아버지의 재산을 다 삼켜버린 내가 무슨 명목으로 아버지를 뵈올 수가 있겠는가 하는 그 자존심, ‘내가 성공해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인간적인 생각, 내가 이렇게 돌아가면 형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내가 거지차림을 하고 돌아가면 그 품꾼들은 나보다 더 거렁뱅이가 왔다고 흉보지 않을까? 결국은 동네 사람들이 나를 볼 적마다 몇 년 전에 집을 나가서 타락하고 병드니까 겨우 아버지 집으로 기어들어 오는 놈이라고 낙인찍히는 것은 아닌가’ 온갖 생각들이 얼마나 저해요인이 많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가고자 할 때 우리들에게 이런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못하게 하는 수많은 저해요소들이 우리의 인생을 사로잡고 우리의 발목을 잡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께로 돌아가고자 하는 아들에게는 이제 아버지와의 관계를 속히 회복하고 그 관계로 돌아가지 않는 것은 곧 죽임이다. 진짜 죽임입니다. 내가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육신적인 죽음뿐만 아니라 이제 정신적으로도 황폐해져서 죽음입니다.
여러분, 이 아들이 방탕해서 자기의 가지고 있던 돈을 모두 잃어버리고 그리고 먼 나라 다른 나라에서 그렇게 고통을 받으며 돼지우리에 있을 때 그 나라에 누가 그를 위해서 울어줄 수 있는 사람이 있겠으며 누가 그를 불쌍히 여겨줄 수 있는 사람이 있겠으며 누가 그를 긍휼히 여겨서 그의 눈에 눈물을 씻겨줄 수 있는 사람이 그 나라에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가 바로 그 먼 나라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에서 누가 여러분들의 마음에 흐르는 눈물을 씻겨주고 고통스러운 돼지우리와 같은 처지 속에서 고통을 받고 고난을 받을 때 진심으로 여러분들의 고통과 같은 아픔으로 여러분들에게 다가와서 여러분을 일으켜 세워주고 그 눈에 눈물을 씻겨주고 마음에 고통을 덜어줄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없습니다. 희망을 갖지 마십시오.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완전한 아버지께로부터만 옵니다. 하나님만이 우리를 씻기실 수 있고 우리를 그 자리에서 구원하고 건지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또 혹시 이 세상에서 정말 너무나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서 우리와 같이 울어주고 우리와 같이 슬퍼하고 우리와 같이 그 고통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의 인생에 무슨 도움이 있겠습니까? 그에게는 우리를 건질 수 있는 힘이 없습니다. 우리와 함께 울어줄 뿐입니다. 우리와 함께 고통을 느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구원자는 아닙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만 말미암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곤고하고 상처받은 영혼을 누가 건져주실 수가 있습니까? 강도를 만나 것과 같이 모든 선한 것을 잃어버리고 찢겨진 심령이 되어 있는 사람들을 건져내어서 그들을 치료하고 고치실 수 있는 그 힘이 누구에게 있습니까? 누가 그 찢어진 가슴에서 새살이 돋아나게 만들고 그 상처를 싸매어서 건강한 몸으로 다시 태어나게 만들 수 있는 그 능력이 하나님 아버지 이외에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그 일을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만이 그 일을 하실 수가 있습니다. 믿습니까?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들이 그렇게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돌아가고자 할 때 가로막는 요인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너무나 많습니다. 그래서 어떤 때 우리는 ‘우리 홀로 아무 것도 얽매이지 않고 실컷 한번 하나님 믿어보고, 혹은 하나님 앞에 매달려봤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것은 우리의 생각입니다.
아이들이 겨울에 보면 한강에서 연을 날립니다. 연이 하늘로 치솟습니다. 하늘 높이 올라간 연이 교만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생각하는 것입니다. ‘더 올라가고 싶은데 왜 밑에서 당기는 건가’ 줄만 끊으면 하늘 높이 날아갈 것 같은데 줄을 끊으면 어떻게 됩니까? 내려오는 것입니다. 못 올라가게 막 잡아당기니까 그 당기는 힘으로 연은 하늘로 솟구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오늘이 말씀을 들으면서 그래도 뭔가 바람이 지나가는 소리 같다가도 ‘그래도 뭔가 정말 그런 것 같네. 내가 정말 그래야 되겠네.’ 하는 그런 생각이 드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면 여러분 속에 남들이 알 수 없는 인생에 무거운 것과 그런 얽매인 고통들이 있기 때문에 오늘 이 말이 여러분들에게 다가가고 이 탕자가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궁핍 속에서 돼지우리에 엎드려서 쥐엄열매를 찾으려고 하는 씨름하는 비참한 모습이 남의 이야기처럼 안 들리고 내 이야기처럼 들리는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방법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은 오늘 이 시간에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들을 일어나려고 할 때 가로막는 이런 모든 저해요소들, 그리고 우리들을 일어나지 못하게 가로막는 때로는 이전에 지은 죄가 너무 크기 때문에 너는 회복될 수 없다. 그런 어떤 사단의 송사, 그리고 이미 나는 하나님 앞에 정죄되었다라고는 이 포기감, 그리고 하나님이 너를 듣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어떤 거절에 대한 두려움 이런 것들이 우리에게 많이 있을지라도 하나님 앞에 떼를 쓰는 것입니다.
(찬양)
주 나를 박대하시면 나 어디 가리이까
‘주가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실지라도 내가 주의 전을 앙망하겠나이다’ 그런 신앙이 필요한 것입니다. 주님, 거절하셔도 어쩔 수 없습니다. 주님, 안면에 철판을 깔았습니다. 주 나를 박대하시면 나 어디에 가리이까 하는, 주님이 그것을 후한무치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얼굴에 철판 깔았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네 믿음이 크도다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만 완전한 긍휼이 있고, 세상에서는 얻을 수 없고, 내가 하나님에게서만 완전한 긍휼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관심을 가지시는 것은 여러분들의 지난날이 아닙니다. 오늘 간절히 하나님을 필요로 하고 그 아버지의 관계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간절한 사모함들이 없는 것이 오늘 하나님 앞에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지, 예전에 일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베드로를 보십시오. 베드로가 죽는 데까지 따라간다고 그러니까 주님이 뭐라고 그러십니까? “시몬아, 시몬아 사단이 너를 밀 까부르듯 까부르려고 너를 청구하였다. 내가 돌이킨 이후에 형제들을 굳게 하리라” 예수께서는 이미 베드로가 범죄 하기 전에 베드로를 용서하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를 회복시키실 때 그는 “네가 지금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셨습니다. 지금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문제가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지나간 날이 아니라 우리 속에 있는 환경이나 앞으로의 계획이나 이런 것들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큰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가장 작은 양보하지 않고 있는 신념입니다. 믿음입니다. 이상한 믿음입니다. 그것은 아버지와의 관계를 회복하지 않으면서도 내가 이 궁핍으로부터 벗어나는 모든 어떤 길이 아직은 못 찾았지만 어디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하는 이것을 하나님이 너무 싫어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맺는 일, 그 일을 하지 않고도 내가 이 고통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을 달라고 하나님 앞에 호소하니까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그 기도를 듣는 자체가 고통입니다. 그러니까 응답될 리가 없는 것입니다. 또 그렇게 응답해주시지 않는다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그러니까 이렇게 그 모든 문제들에 대한 오해를 하나님께서 풀어주시는 것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믿음으로 신앙으로 하나님 앞에 새롭게 반응하며 주 앞에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속은 그것입니다.
이 아들이 아버지 앞에 돌아갈 때 그 아버지가 ‘너 그러고도 내 자식이라고 돌아왔냐. 안 돼, 너 들어오지마’ 그래도 문고리를 붙들고 용서해달라고 매달리는 것밖에는 소망이 없다는 확신이 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야 나는 이제 너같이 스스로 내 곁을 떠났던 놈을 다시 아들로 삼을 수가 없어. 너는 머슴을 해라’ 그래도 기쁨으로 그 일을 하기를 원했습니다. 왜 그 아버지의 집에서 그 아버지의 다스림 아래서 그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들에게 있어서 그 자체가 기쁨이었고 즐거움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간절히 사모하고 그것을 원했던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 그렇게 죄를 많이 짓고 인생에 있어서 막장까지 다 갑니까? 그런 창기와 세리들, 이런 사람들을 그렇게 기뻐하시고 그들에게 놀라운 구원을 베푸셨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매일 창기와 세리들이라고 그러니까 실감이 안 납니다. 요즘으로 말하자면 타락할 때로 방탕하고 길거리에서 화장을 진하게 하고 야한 옷을 입고 사람들을 유혹하고 그러면서 담배를 피우고 술을 먹고 그 사람들을 유혹하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유혹해서 같이 자고 또 돈을 받고 또 이 방에서 저 방으로 옮겨 다니면서 영업을 하고 그러고 살다가 나중에는 에이즈에 걸려서 포기되어 보건소에 가서 있는 죽을 날을 기다리는 그런 사람들을 찾아오셔서 예수님이 은혜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이해가 갑니까? 왜 그렇습니까? 세상에서는 부패한 관리라고 낙인이 찍혀서 완전히 세상에 발붙일 곳이 없게 되어버린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는 그런 사람들이 모여 있는 교도소에 찾아가서 은혜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그들은 지나간 삶은 예수 앞에, 하나님 앞에 정말 방탕하고 타락한 삶입니다. 아버지께서 주신 훌륭한 건강과 좋은 몸들을 아버지를 섬기는데 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거역하고 육신의 소욕을 따라서 정욕을 따라 살며 방탕한 일에 아버지께서 주신 건강을 다 써버렸습니다. 아버지의 집에서 가지고 나온 그 재물들을 이 세상에서 타락하고 방탕하는 일들을 위해서 모두 다 써버렸습니다.
하나님을 향해 가졌던 좋은 마음과 하나님이 주셨던 신실한 하나님을 믿는 좋은 믿음들을 한순간의 즐거움을 얻는 대가를 지불하기 위해서 비용으로 다 써버리고 이제는 가난하고 빈털터리가 되어버린 비참한 존재로 남아 있게 된 것입니다. 그랬는데도 불구하고 비교적 오랜 세월을 하고 싶은 것을 참으면서 하나님을 향해서 금식하며 자기의 귀중한 제물을 하나님 앞에 바쳐온 서기관이나 바리새인이나 이런 사람들을 찾아오시지 않으시고 그렇게 일생을 방탕하게 살고 도대체 자기하고 자고 간 남자가 몇 명이지 생각도 나지 않을 정도로 수많은 남자들과 자고 그 몸으로 다시 에이즈를 옮기고 수많은 사람들을 인생에 구렁에 몰아넣고 그래서 이제 인생에 마지막을 기다리고 있는 시한부 인생에게 주님이 찾아가셨습니다.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시고 그들을 끌어안고 위로하시고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셨던 것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그렇게 품에 안으셨던 이유는 그들이 죄인이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회개하는 죄인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지나간 삶을 고개를 들 수 없는 삶이었습니다. 그 어떤 것도 지나간 삶 가운데 내세울 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고 자신들은 궁핍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하나님 앞에 떼를 쓰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 나를 박대하시면 나 어디에 가리이까. 주님, 나를 받아주시옵소서. 주님, 나를 버리시면 버린 그 자리에서 내가 다시 하나님을 찾아갈 수밖에 없나이다. 관계를 갈망하나이다. 도와주시옵소서’ 그랬던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그들을 찾아오셔서 관계를 맺으시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 하나님이 주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한없는 복락으로 누리면서 즐거워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온통 죄가 가득 찼지만 그러나 동시에 죄가 가득 찬 그 사람들의 마음속에 그 죄만큼 많은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 마음,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자 하는 마음, 하나님과 관계만 맺을 수 있다면 어떠한 희생이라도 치루고 싶어 하는 그 사모하는 마음 이런 것들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가득 차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한없는 하나님 속에 있는 사랑의 성품을 자극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정말 어떤 때는 여성 같은 분입니다. 섬세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마음속에 언어로 고백할 수 없지만 그런 하나님의 사랑이 없이 살아가는 삶의 피곤하고 고통스러운 이런 것들을 하나님 앞에 호소하면서 주님의 관계를 갈망할 때 하나님께서는, 말씀드렸잖아요. 주님이 필요로 하는 것은 우리 자신입니다. 그러니까 뭐라고 그러는가 하면 그 아들이 문을 열고 상거가 먼데 내가 가서 어떻게 이렇게 아버지의 유산을 탈취해온 이 손으로 대문을 두드리고 그 아버지의 집에 문고리를 잡을 수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면서 동구 밖에 서성거리고 있는데 아버지가 저 멀리 동네 어구까지 나와서 사면을 두루 살피며 그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전보를 치고 온 것이 아닙니다. 언제 올지 모르는데 언제 올지 모르는 아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찬양)
밤마다 문 열어놓고 마음 졸이시며
나간 자식 돌아오기만 밤새 기다리신다오
낮에는 일꾼을 내보내서 기다릴 수도 있을지 모르지만 밤에는 홀로 나가서 그 아들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직감적으로 아마 이 아들이 사람의 눈을 피해서 밤에 돌아오리라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밤이면 나가서 쭉 기다리는 것입니다. ‘어떻게 내가 이 손으로 아버지의 문에 문고리를 잡을 것인가’ 이렇게 생각할 때 상거가 아직까지도 굉장히 먼데 아들이 아버지를 먼저 알아본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아들을 먼저 알아본 것입니다. 만약에 아버지가 집을 나갔다가 평소에 많은 유산을 가지고 있는 아버지가 고운 베옷과 자색 옷을 입고 그리고 가마를 타고 오는 모습이 아니라 그 모든 것들을 다 잃어버리고 비참한 몰골로 동구 밖 어구에서 걸어오고 있었다면 이 아들은 아버지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에게는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이 어둠 속에서 걸어오는데 얼굴은 보이지 않고 음성은 들리지 않아도 그 아들이 자신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는 감각이 아버지에게는 있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부모와 자식의 관계입니다.
여기도 부모들이 있는데 수많은 아이가 울어도 자기 아이의 울음소리는 정확히 분별해냅니다. 그게 부모의 마음입니다. 아버지는 그 아들의 모습이 얼마나 변했겠어요. 건장하던 아들이 타락해서 병을 얻고 수척해졌습니다. 수염은 깍지도 못하고 더부룩해졌습니다. 머리는 감지도 못하고 갈 때 많은 유산을 가지고 입고 나가던 좋은 양복은 다 팔아먹고 이제는 거지 중에 상거지가 입는 그런 옷입니다. 갈 때는 향수를 뿌리고 갔지만 올 때는 돼지 똥이 덕지덕지 묻어있는 이런 모습으로 고개를 숙인 채 동구 밖 어구에서 어스름한 어두움과 함께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얼굴이 보이지 않고 들리는 음성이 없어도 아버지는 알았습니다. 내 아들이다. 달려간 것은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였습니다. 그리고 그를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와의 관계를 포기했고 싫어했지만 아버지는 아들과의 관계를 포기하지 않고 계속 기다린 것입니다. 언제까지, 돌아올 때가지, 사람을 풀어서 포박해오지 아니하고 스스로 깊이 깨닫고 인격적으로 그 아버지와 아들과의 관계가 얼마나 소중하고 그리고 거룩한 것인가를 깨닫고 돌아올 때까지 아버지는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하나님의 아버지의 마음인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 모습 그대로 당신 앞에 와서 오직 한 가지를 고백하기를 원하십니다. “아버지여 내가 죄인이옵나이다. 나를 용납하시고 이 세상에 모든 좋은 것보다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 되시고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것임을 오늘 깨달았습니다.” 그 고백만 있으면 하나님께서 오늘도 여러분의 모습이 보일 때 동구 밖 어구에서 기다리시던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맞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집으로, 그 부요함이 있는 그의 집으로 함께 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성경의 메시지입니다.
2. 먼 나라로 떠나감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눅 15:13-16)
탕자의 귀로 (1995.8.1 온가족 여름수련회 2)
어제는 우리들이 시작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아들이 아버지의 집에 있는 것이 싫어서 이제 먼 길로 나가게 되었는데 그 이전에 아버지와의 관계에 문제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드렸습니다. 그 후에 이제 아들이 요구하는 데로 결국은 아버지가 재산을 나누어주자 그 재산을 전부 다 현금으로 처분했습니다. 그래서 현금으로 바꿔서 그 돈을 챙겨서 며칠도 못 되어서 떠났습니다. 그러니까 아버지의 유산을 뭐 집이나 땅이나 이런 것들을 받았습니다. 받아서 그것을 순식간에 처분을 해서 현금으로 바꿔서 그래서 도회지로 나가게 되었습니다. 거기에서 그의 삶에 대해서 오늘 성경은 간단하게 허랑방탕한 삶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들이 하나 알 수 있는 사실 하나는 인간이 이미 어떤 행동이 있기 전에 그 이전에 벌써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그렇게 도회지로 나가서 그렇게 허랑방탕한 삶을 보내면서 자신의 모든 재물을 다 버리고 그렇게 허비하는 삶을 살기 전에 먼저 마음이 아버지의 집을 떠나는 일이 먼저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제 우리들이 풀지 못했던 하나의 답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 답은 왜 우리가 한번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은 것으로 충분하지 않고 매일 아버지와 우리와의 관계가 우리가 아버지를 기뻐하고 아버지가 우리를 기뻐하시고 그래서 그 아버지와의 완전한 교제 속에서 매일 살아가기를 힘쓰고 애쓰지 않으면 안 되는가 하는 것들이 바로 답이 여기에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느 날 갑자기 이 아들이 충동을 느낀 것이 아니라 이미 이렇게 유산을 정리해서 현금으로 바꿔서 그래서 도시로 가서 거기서 허랑방탕한 삶을 살고 범죄 하기 그 이전에 이미 오랜 기간 동안 이 마음에서 충분한 준비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타락할 수 있는 충분한 준비가 마음속에서 차근차근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가 아버지의 집에서 ‘애야, 밭을 갈러 가자.’ 그럴 때 함께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쟁기를 들고, 혹은 호미를 들고, 혹은 보습을 들고 그렇게 소를 몰고 아버지의 집을 따라 나갈 때 외관적으로는 적어도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우리의 마음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떠났는가 안 떠났는가를 가장 먼저 아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은 모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준비가 이미 마음속에서 차분하게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결국은 행동으로서 열매를 맺게 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신앙에 있어서 타락이라든지 아니면 우리의 믿음이 식어져서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집을 떠나게 된 이런 일들이 있기 전에 먼저 마음속에서 차근하게 하나님을 떠나는 일들이 준비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음이 일단 그렇게 아버지를 떠나고 아버지와의 관계를 기뻐하고 아버지와의 관계를 즐거워하지 않을 수 있는 그런 상황으로까지 떨어져버리면 그 사람이 기회가 안 주어져서 그렇지 기회만 주어지면 즉시 몸이 하나님을 떠나는 것은 아주 쉬운 일입니다. 아주 간단하게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아들도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미 오랫동안 그 아버지의 곁을 떠나고 싶어 하는 그런 마음들이 들기 이전에 이미 그 아버지가 자기의 아버지라는 사실이 전혀 기쁘지 않고 그리고 그 아버지의 모든 것을 풍족하게 가지고 계신 그 아버지가 자기의 모든 집안을 자신의 기업으로 주시고 그리고 거기서 그 기업을 바라보며 아버지와 함께 그 안에서 동고동락하고 사랑하고 기쁨을 누리며 그 아버지를 경외하고 살아가는 이 가족의 관계에 대해서 의미를 잃어버리고 기쁨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아버지와의 관계가 파괴된 것입니다.
얼마 전에 텔레비전에서 집을 나가는 가출 청소년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오늘날은 중고등부 학생들을 사역하는 것이 정말 어렵습니다. 엊그제도 어느 전도사님을 만났는데 학생이 70명 정도 되는데 금년에만 3명이 가출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가출을 했다가 돌아오는 애는 반드시 다시 가출을 한다고 합니다. 대부분이, 그러면서 하는 이야기가 전에는 부모가 자기를 때린다든지, 공부를 하라고 한다든지, 아니면 집안에 가정이 불화하든지 그래야 애들이 가출을 했는데 요즘은 부모가 그런 문제가 하나도 없는 데도 아이들이 가출을 한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하면 그것이 재미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인생살이 속에서도 부모가 부족한 것이 없어서 다 해주어도 부모에 대한 아무 불만이 없어도 그 아이들은 그 부모와의 관계가 깨지고 그러면서 가출을 합니다. 그런데 이 신앙의 세계 속에서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해주시고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시고 우리를 자비롭게 대해주심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부당한 대접을 받기 때문에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부족한 것이 없이 우리에게 해주셔도 사람들은 하나님의 곁을 떠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러는가, 이유는 간단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해주셔도 우리가 그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체험하지 못하면 주님이 우리를 아무리 사랑해주신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그것을 느끼지 못하면 그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삶을 붙들어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신앙에 있어서 체험의 요소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머리로만 하나님은 참 사랑이시고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분이시고 그리고 예수보다 더 좋은 분은 없다는 사실을 우리가 그냥 알고 있는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곁을 떠나지 못하게 하는데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할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의 관계는 우리 속에서 늘 체험되어져야 합니다.
쉽게 이야기를 하면 우리들이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때 성령이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라고 인치십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오심으로서 아 우리가 과연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구나 인 치시는 것입니다. 확실히 보증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한번 성령이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라고 인 쳐주는 것 가지고 우리의 신앙생활이 충분하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매일 언제나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를 깨닫게 해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아버지의 사랑을 느끼게 하셔서 아버지의 인자하심을 체험하게 하셔서 경험하게 하시며 기뻐하게 하시는 이런 일들이 우리 속에서 언제나 일어나야지만 우리가 이 신앙을 가지고 아버지의 곁을 떠나지 않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마음으로 이미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그 다음에 하나님과의 관계를 우리가 마음으로 누리지 못하게 되면 그 다음에 인간은 하나님의 곁을 신속하게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 속에는 하나님과 샬롬을 이루고 거기서 매일 아침에 일어나서 하나님의 자비로우심과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인해서 아주 기뻐하게 되고 그리고 그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깨닫게 되면 그런 것들이 우리에게 기쁨으로 밀려오고 이런 것들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이 바로 인간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그런 것들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에 있어서 부요해져야 합니다. 그래야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을 모두 잃어버리게 되면 그 다음에는 살아갈 수 있는 원동력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사람들의 마음에는 이미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고 그래서 하나님께로부터 어떤 은혜로 공급을 받고 그래서 그 하나님이 주시는 그 힘과 은혜를 통해서 내가 공급을 받으면서 그 안에서 기뻐하는 삶을 살지 못하게 되면 사람들은 이 마음에 있는 공허함을 옛날에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자기의 마음에 공허함을 달래던 그런 방법으로 자기의 마음의 공허함을 메꾸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또 잘 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하면 어제 말씀드렸듯이 이미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고 애굽에서 하나님의 권능의 손에 의해서 구원을 받아서 그 애굽의 거리를 지나고 그리고 홍해를 가르고 건너서 광야를 지나왔지만 애굽은 이제 새카맣게 먼 거리에 있지만 그러나 애굽에서의 생활 속에서 맛보았던 그런 입맛들은 다 살아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이 식어지게 되면 그 다음에는 자기의 영적인 삶의 미각이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예화) 예전에 먹었던 음식들의 맛이 예전과 같지 않아서 왜 그럴까 하는데 의사들의 말에 의하면 예전의 맛일 수가 없는데 그것은 나이가 먹으면서 미각의 세포가 죽고 살고 하는 변천의 과정이 있어서 옛날의 맛이 안 난다는 이야기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은혜를 충만하게 받고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어주신 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놀라운 은혜와 감격으로 다가올 때 그때 우리의 입맛이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찬양)
나 세상 자랑 버렸네 나 주님만 사랑하네
그것만 버린 것이 아니라 세상에 있는 노래도 버린 것입니다. 세상에 있는 노래, 세상에 있는 모든 좋은 것을 다 버리는 것입니다. 왜 맛이 없습니다. 병이 들어서 입맛이 싹 가시게 되면 고기를 갖다 주어도 나무토막을 씹는 것 같습니다. 다 맛이 없어지는 것 같이, 은혜를 받고 나면 세상에 미각이 다 바뀌는 것입니다. 옛날에 기분이 좋고 내 마음을 짜릿짜릿하게 하는 것들이 이제는 다 쓸데없는 짓 같고 그리고 오히려 견딜 수 없이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들어갈 일도 없지만 가끔 찻집에 들어가면 견디기 힘든 것이 그 노래입니다. 그 노래들이 옛날에는 고등학교 다닐 때나 혹은 졸업해서 밤새도록 라디오를 켜놓고 엎드려서 들으면서 낙서하고 그렇게 좋아하던 그 노래들이 이제는 싫어졌습니다. 그것이 왜 그런 것입니까? 예수 믿고 은혜를 충만하게 받았는데도 니나노 소리만 들으면 엉덩이가 들썩들썩 하는 것은 아직 성화가 덜 되어서 그런 것입니다. 그런 것입니다. 아주 싫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변한 것은 예수 믿기 전에는 음식점도 컴컴한 곳이 좋았습니다. 이제는 싫습니다. 컴컴하고 눅눅한 집이 싫고 환하고 밝은 그런 집이 좋습니다. 예수를 믿고 은혜를 받게 되면 입맛이 바뀌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 것들이 싫어집니다. 먹기가 싫어집니다. 그 입맛이 완전히 죽는 것이 아니라 눌려있는 것입니다. 쭉 가라앉아 있습니다. 그런데 은혜가 떨어지게 되면 옛날에 미각들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의 관계를 깊이 누리면서 ‘아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되어 주시고 그리고 그 하나님이 나의 참 친구가 되어주시는구나’ 그것을 인해서 늘 감격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예배를 나와도 예배다운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벌써 6일 동안 그 삶 자체가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삶이었기 때문에 그런 사람이 주일날 교회에 나와서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예배를 드리면 그 삶 자체가 예배였기 때문에 그 예배가 깊이 가슴 속에 스며드는 것입니다. 감격이 있고 은혜가 있는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삶을 잃어버리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그런 내적인 충만함과 은혜로 우리가 이렇게 신앙생활을 해나갈 수 있는 모든 힘들을 공급받으면서 사는 것들을 잃어버리고 그런 관계가 끊어졌을 때 그때에 우리들은 마음속에 그런 것들로 말미암아서만 충만해질 수 있는 것들을 가리지 못하니까 심령이 너무 공허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그런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 기도도 하고 성경도 읽어보지만 그러나 마음이 하나님을 떠나있기 때문에 그런 것들을 잠시 노력을 해도 쉽게 회복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이 나를 싫어하신다는 느낌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는 자리로 아직까지도 들어오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어제 이야기한 그 형제가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자기는 기도할 때마다 절망하는 것이 있는데 하나님 앞에 느끼는 거절감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거절하고 계시다는 느낌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 거절감이 우리를 굉장히 좌절시킵니다. 말하자면 고통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거절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 자기가 하나님을 거절하는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인간들은 그 마음에 공허함을 가릴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에 공허를 가릴 길이 없으니까 그 다음에는 이 공허한 것들을 세상적인 방법으로 채우는 것입니다. 그렇게라도 해야지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옛날에 자기가 심령이 공허하고 곤고했을 때 자기의 마음을 위로하던 그런 방법들을 다시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삶이 세상적인 삶으로 다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이 궁극적인 치료가 되는가. 치료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치료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정말 우리가 이전에 잃어버렸던 그런 관계들로 우리를 새롭게 돌아가게 하셔서 그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에 은총을 주셔서 우리의 영혼에 참된 만족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하나님 자신이 우리에게 깊이 깨닫게 할 때, 그때 우리 속에 진정한 치유가 있는 것이지, 그렇게 치유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세상적인 방법으로 세상에서 허랑방탕하고 그리고 타락한 삶을 살면서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아들이 세상에 나아가서 허랑방탕하게 매일 돈쓰고 하면서 뭔가 홀로 고요히 생각하려고 하면 그 아버지와의 관계가 생각나니까 허랑방탕하면서 자기를 그런 타락에 몸을 던지는 것입니다. 그 순간만큼 모두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그 순간만큼은 모든 시름을 잊어버리고 그 인생에 고민거리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다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으면 언제나 그 관계가 생각나는 것입니다. 언제나 원점입니다. 풀지 않고 내버려둔 문제는 언젠가 다시 아직 답을 달지 않은 빈 문제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일단 하나님을 떠나서 우리의 마음이 변화되고 그리고 우리가 세상에 있는 것들로 말미암아서 그렇게 우리 자신을 위로하고 우리 자신이 그 속에서 뭔가 공허한 것들이 채워진다고 하는 느낌을 받게 되면 그 다음에는 그런 행동들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들은 범죄입니다. 계속해서 범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상승작용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들이 자꾸 쌓여서 그 다음에는 하나님께 돌아가기 더 어려운 관계로 깊이 떨어져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어느 한순간에 은혜를 받고 그리고 마음이 열려서 하나님 앞에 깊이 기도하며 그 하나님이 나를 기뻐하고 그리고 내가 하나님 앞에 간구할 때 하나님께서 내게 은혜를 주신다고 생각될 때 그것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 하는 것을 사람들이 너무 모릅니다. 잃어버리고 오랜 세월동안 고통을 받으면서 그렇게 쉽게 그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까지 사람들은 그 속에서 계속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후에야 비로소 ‘아! 그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그 은혜가 얼마나 크고 놀랍구나’ 그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되는 것입니다.
진정한 변화를 위해서 먼저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런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누리며 살아가고 있다면 그것이 이 세상에서 무엇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그런 축복이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들이 깊이 인정하면서 그 관계를 지키기 위해서 힘쓰고 애써야 합니다. 그러니까 정말 내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 일만 하리라. 그리고 행여나 나의 부주의나 그리고 나의 범죄로 말미암아서 하나님과 내가 누리고 있는 이 관계가 손상되지 않도록 내가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되겠다. 그런 결심과 그런 사모함들이 늘 필요한 것입니다. 한번 하나님과의 평화를 회복하는 것도 힘들지만 한번 주신 하나님과의 평화를 늘 붙들면서 지키며 살아가기 위해서는 매일 매일 우리 속에서 작은 잡초와 같은 것들을 말씀을 통해서 걷어내고 뽑아내는 이런 일들이 언제나 필요한 것입니다. 매일 하나님과의 평화를 지키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아들이 결국은 마음이 아버지를 떠나고 아버지와의 관계를 기뻐하지 않게 되니까 그 다음에는 완전히 자기중심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 자기 중심의 삶은 무엇인가 하면 자기가 마음을 먹은 대로 자기가 원하는 데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지 못한 사람들은 아주 자유합니다. 모든지 자기가 원하는 데로 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왜 아버지가 어떤 마음을 갖고 아버지께서 이것을 기뻐하시는가 안 하시는가 그런 것들이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미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런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고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매일매일 살아가는 삶 속에서 우리가 행하는 어떤 일들을 기뻐하고, 슬퍼하고, 좋아하시고, 싫어하시고 하는 것들에 대한 분명한 태도와 계획을 가지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마음이 하나님을 떠나게 되면 그런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는 그런 영적인 감각들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은 깨어있는 삶을 통해서만 유지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서서히 그렇게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잃어버리도록 만드시며 그렇게 하지 않도록 우리가 하나님 앞에 깨어있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허랑방탕한 삶을 살았지만 그러나 그런 속에서도 분명히 그 순간순간 ‘아! 이렇게 사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것들이 순간순간 밀려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자기가 이미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못되어 있으면 ‘이게 아닌데’ 하는 것이 순간순간 가책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을 인정하기가 싫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외면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아들이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도시로 가서 그 많은 것들을 허비하면서 그렇게 살아가고 있을 때 그도 이런 생각들을 늘 했을 것입니다. 하지 않았을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시원한지 모릅니다. 여기에 위가 슬레이트입니다. 보통 더운 집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기가 막힐 때 온 것입니다. 작년에 여기에 사랑의 교회에서 280명이 와서 하는데 완전 찜통입니다. 선풍기를 두 개를 갖다가 틀어났는데 선풍기가 겸손해서 세워만 놓으면 고개를 푹 숙이는 것입니다. 겸손하려면 제대로 겸손해야 하는데 또 틀기만 하면 달달달 소리를 냅니다. 강사가 유별나서 못 키게 했습니다. 저쪽에서는 아이들이 떠들지요. 창문을 열어놓으려니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지요. 그리고 집회를 하는데 막 팍팍 찝니다. 그런데 지금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비가 쏟아지니까 시원합니다. 할렐루야. 얼마나 좋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갑자기 확 무너지는 것 같이 졸지에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사람이 있고 또 어떤 사람들은 참 뭔가 큰일이 일어나지도 않았는데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 같은 경우는 그런 경우입니다.
(예화) 박현배 학생의 이야기- 그가 다니는 교회에 가서 집회를 하셨는데 그 학생이 은혜를 받고 멀리서도 교회에 온다는 이야기
(예화) 예전에 서울에 밭 부지에 교회가 있어서 그 교회에서 새벽이면 종소리가 들리는 소리는 돌아오라는 소리로 들려서 교회에 가게 되었다는 이야기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 곁에 부르시기 전에 돌아오게 하기 전에 먼저 잘 나가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내버려두시다가 골탕 한번 먹어봐라 그러시면서 코가 깨지고 그렇게 해서 오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격적인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떠나서 그렇게 세상으로 나아갈 때 우리의 마음속에 먼저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신나게 세상에서 살아갑니다. 어떤 때는 잘 안 나가면 괜찮은데 어떤 때는 잘 나갑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공식대로 라면 아버지가 유산을 안 주었다든지 아니면 아버지가 유산을 주었는데 가지고 나가다가 엎어져서 코가 깨졌다든지 아니면 돈을 가지고 기차를 타려고 하는데 소매치기를 당해서 오갈 때가 없다든지 그럼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왔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 사람이 그런 식으로 해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왔으면 계속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겠습니까? ‘아! 재수 없이 내가 기차를 타는 바람에 내가 참 수준에 맞춰서 택시를 타야 하는데 수준에 낮게 기차를 타서 돈 가방을 다 털렸으니 이제는 나는 어떻게 할꼬.’ 그리고 그렇게 아버지의 집에 있는 것입니다. 그 아버지의 집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화) 김준홍 목사님의 간증 이야기- 감옥에 가셔서 어느 죄수의 말을 들었는데 그 사람이 감옥에 들어온 이유는 설탕을 비싼 가격에 팔았다는 이유인데 설탕 두 숟가락을 갈아서 마약이라고 속여 팔았는데 길거리에서 버스를 타려고 하다가 설탕을 산 사람을 만나 잡혔는데 자기가 수준에 맞게 택시를 탔으면 안 잡혔을 것이라는 이야기
수준에 맞게 내가 정말 택시라도 타고 갔으면 돈 가방을 안 잃어버리는 것인데 하는 생각만 하며 아버지의 집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돌아온 것은 돌아온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돌아온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이렇게 부르시기 전에 먼저 뭘 말씀하시는가 하면 그런 식으로 우리를 갖다가 넘어트리는 것이 아니라 그냥 나가게 내버려두십니다. 굉장히 많은 경우에 그렇습니다. 가게 내버려두십니다. 또 가게 내버려둔다고도 말할 수 있지만 그러나 가만히 보면 하나님이 가게 내버려두시는 것이 아니라 가면 안 된다고 하나님이 계속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잘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잘 나가는 것이 모두 잘 나가는 게 아닙니다. 순풍에 돛을 단 것처럼 잘 나갑니다.
요나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난겨울에 싫도록 요나하고 바다에서 놀았는데, 그것입니다. 배표를 사러 갔으면 배표를 파는 집이 문을 닫았다든지, 아니면 배가 풍랑으로 못 왔다든지 그러면 되는데 아주 순조롭게 배표를 샀습니다. 사고 탔습니다. 그리고 신나게 가는 것입니다. 순풍에 돛단배처럼 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내버려두십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은 수시로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나님의 곁을 떠나며 살면서 ‘아! 이것이 정말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이 아닌데’ 그게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우리의 마음속에 생각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아! 이게 아닌데’ 하는 그 순간적인 자기부정이 있습니다. ‘이렇게 사는 게 아마 아니지’ 그런 것이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하나님이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그렇게 하십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하다가 안 되면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 이제 사람들을 만나게 해주십니다. 만나는 사람들마다 그러면 안 된다고 그럽니다. 권면합니다. 깨닫게 해줍니다. 하나님 말씀으로 깨닫게 해줍니다.
(예화) 어느 목사님의 이야기- 부모와 완전히 관계가 깨진 어느 자매가 마음속에 부모를 향한 강한 원망을 가지고 사는데 집회에 가서 말씀을 듣는 가운데 내용이 부모를 향해서 결단하라는 내용이 싫었는데 몇 번을 참석하는 가운데 계속 같은 말씀을 통해서 결국은 무너져서 하나님 앞에 용서를 구했다는 이야기
하나님께서 때가 되면 우리를 자주, 그리고 어떤 때는 더 큰 음성으로 더 간절하게 하나님께서 권고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안 들리는 것입니다. 욕망이 워낙 강하게 되면 그 다음에는 다른 이야기들이 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이 일은 꼭 해야겠다는 욕망이 앞서게 되면 그 다음에 다른 이야기들은 일체 들리지 않습니다. 모든 일어나는 일과 모든 생각들은 자기가 하고 싶어 하는 그 일들을 어떻게 하면 합리화 시킬 수 있을까 하고 그런 일들만 찾으면서 계속해서 전진하는 것입니다. 결국 그렇게 될 때 하나님께서 그 다음에 우리를 위해서 할 수 없이 환경을 움직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아들이 아버지의 집은 떠나서 허랑방탕하게 다 써버렸습니다. 그렇게 써버리도록 하나님께서 놔두시는 것입니다. 다 쓰고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게 되어서 이제 비로소 돈이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돈이 떨어졌어도 그 고장에 큰 풍년이 들어서, 그럼 인심이 넘쳐나게 되면 어디에 가도 밥을 벌어먹고 사는 일에 지장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큰 흉년이 들은 것입니다. 그것은 아마 내 생각에는 그 사람 때문에 흉년이 든 것 같습니다. 아니 멀쩡하던 바다에 왜 요나가 타고 가는 배 근처에만 폭풍이 일어납니까? 히브리어 원문에 보면 “하나님이 바람을 발사하셨다”고 그랬습니다. 하늘에서 바람을 “피~후”하고 보내니까 거기에만 폭풍이 일어난 것입니다. 요나가 탄 배가 움직이면 폭풍도 따라가는 것입니다. 요나가 탄 배가 지나가면 폭풍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이 아들이 아버지 집을 떠나서 타국으로 가서 도회지의 삶을 살면서 거기서, 오늘 성경에 보니까 “먼 곳으로 갔다”고 그랬습니다. 왜 될 수 있으면 아버지의 간섭이 미치지 않는 먼 곳으로 가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하나님을 떠나게 되면 그 다음에 하여튼 아버지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먼 곳으로 가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잔뜩 먼 곳으로 가보고 싶어 해야 이사 가는 것이나 아니면 교회를 떠나는 그런 것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야말로 뛰어봐야 진짜 손오공 손바닥이지 어디를 가겠습니까?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도 거기서도 하나님이 붙드시는데 어디를 가겠습니까? 여기서 이렇게 살다가 미국에 가서 살면 새로운 하나님이 거기에 기다리고 계십니까? 똑같은 것입니다. 놀랍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정말 성실하게 신학교 다닐 때부터 열심히 교회를 봉사하고 목회를 하던 사람들은, 외국에 나가보니까 거기서도 교인들이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습니다. 틀림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주 확실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늘 헤매고 매일 제직들하고 싸움이나 하고 그러던 전도사는 지금도 거기에 가서 교회에 발을 못 붙입니다.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은 동일한 하나님이십니다. 믿습니까?
이 아들이 아버지를 멀리 떠나고 싶었던 것입니다. 아버지의 손길이 미치지 아니하는 곳으로 가서 자유를 누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그런 욕망들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결국은 그 속에서 큰 궁핍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삼중 사중으로 어려움이 겹친 것입니다. 우선 첫째는 무엇인가 하면 가지고 간 모든 돈들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허랑방탕해서 모든 것들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두 번째는 큰 흉년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흉년이 들어서 결국은 그 마을에 사는 사람들 중에 누구의 집에 붙어서 먹고 살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품꾼으로 봉사하면서 살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결국은 마지막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제일 혐오하고 싫어하는 짐승이 돼지입니다. 가증한 짐승입니다. 그 돼지를 치는 데까지 낮아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돼지를 치는 것으로 낮아지는 것입니다. 돼지를 치는 것으로 낮아지다가 나중에 마지막에 그것을 쳐도 밥을 제대로 안 주니까 쥐엄 열매라도 먹으려고 찾아보는데 돼지우리 가운데서 찾아보니까 그것도 먹을 것이 없는 것입니다. 거기까지 낮아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바는 하나님을 떠나는 자는 영육 간에 결국은 궁핍에 빠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잠시는 잘 나가는 것 같지만 그러나 결국은 잘 되는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떠나는데 잘 될 리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떠나서 하나님에게서 멀리 가서 간섭을 받지 않으면서 그렇게 살려고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하나님이 축복하실 리가 없습니다. 제일 먼저는 우리가 영적으로 곤고해지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을 떠나 살면 영적으로 곤고해지는 것을 자기가 알게 됩니다. 아무리 세상적으로 잘 나가고 그 다음에 좋은 일이 많이 생기고 신나는 일이 생겨도 영혼에 곤고한 것은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예화) 어느 집회에 가셨는데 어느 성도가 갈급한지 앞자리에 앉아서 말씀을 듣는데 그 성도의 몸 에 보석을 휘감고 나왔는데 그 모습이 곤고한 얼굴과 너무나 안 어울렸다는 이야기
이미 물질적으로 궁핍해지기 전에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에게는 영혼에 곤고함이 밀려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삶이라고 하는 이 무게 자체를 감당하기가 너무 힘들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고통스러워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조차 느끼지 못하면 아직 멀었습니다. 좀 더 익어야 합니다. 그런 고통을 느끼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마음이 하나님께로 그런 마음속에 느끼는 ‘아! 이게 아닌데 너무 내가 가난하다. 그리고 정말 주님이 이런 것 말고 정말 주님 자신이 나와 관계를 가지시고 나에게 은혜를 주셔야 내가 살 수가 있는데’ 그런 마음이 점점 커져서 그 마음속에 그런 것들이 커다란 갈망이 되어서 떠오르면 참 복된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그가 정말 인생을 하나님 앞에 결단하면서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매달리면서 결국은 우리가 야곱이 얍복 강가에서 자기의 고집으로 하나님을 꺾어보기 위해서 몸부림치다가 나중에 무너지는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 앞에 우리들이 뭔가를 구하기 위해서 간절히 매달리다가 그 과정을 통해서 그 하나님을 찾아가는 그 사모함 속에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아주 정말 얼마나 많이 잘못되고 하나님을 바르게 믿지 못하고 있는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고통스러우니까 사람들은 그런 단계를 거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멍하고 있다가 한번 불 받아서 쓰러지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캐나다에 가니까 그런 사람들이 줄줄이 서 있습니다. 참 안 되었습니다.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바뀌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뀔 때까지는 아무 것도 안 바뀝니다. 가만히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우리가 정말 그런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매달려서 기도하는 마음이 커지면 좋은데 그것을 자꾸 떠올랐다가는 사라지고 그렇게 반복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와서 꾸벅꾸벅 졸면서 예배를 드릴 때는 그런 것들을 잃어버리고 또 어느 날 졸다가는 가만히 눈뜨고 들어보니까 그런 것 같고, 가만히 생각하니까 자기의 처지가 너무 한심하고 불쌍한 것 같습니다. ‘아! 내가 정말 그래야 할 텐데’ 그러고 또 한 번 주여 하고 기도하고 나면 뭔가 그런가 하고 다시 세상에 돌아가면 다시 또 잃어버립니다.
그렇게 될 때에 정말 내가 하나님께로 돌아가고 그리고 ‘내가 이런 식으로 피상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정말 옳지 않다’ 그것을 우리의 마음 깊이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궁핍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여튼 인간이 궁핍은 못 견딥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는 견딜 수 있어도 궁핍은 못 견딥니다. 그리고 인간이 신앙이 없을 때 궁핍하지 못하면 사람들은 하나님을 찾을 필요를 별로 느끼지 못합니다. 영적인 삶이 이미 거의 죽어있을 때 그때 잘 먹고 잘 살고 잘 나가는데 하나님을 찾아야 할 필요가 뭐가 있겠습니까? 근심 걱정이 없으니까 하나님을 찾아야 할 그런 간절한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선교사들의 이야기가 재미있습니다.
(예화) 중국에서 온 선교사의 말에 의하면 집회에 참석한 많은 중국인들은 가난하고 어려운 삶에 그들의 마음이 궁핍해서 말씀에 위로를 받으며 은혜를 받기에 사도행전에 일어나는 놀라운 은혜가 있는데 그 반면에 구라파 사람들은 풍족한 생활에 하나님을 갈급한 마음으로 찾지를 않고 하물며 어려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조차 나라에서 충분한 보호를 해주기 때문에 갈급한 마음이 없어 하나님을 열렬히 찾지 않는다는 이야기
그때 하나님께서 궁핍하게 하십니다. 궁핍하게 하실 때에 인간은 궁핍을 진짜 못 견디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잘 살다가 가난해지면 죽어버립니다. 왜 죽는지 가난하더라도 그냥 살면 되지, 죽는 것보다 나을 텐데 못 견디는 것입니다.
이 아들은 결국은 아버지와의 관계를 생각나게 하는 방법이 무엇이었는가 하면 궁핍입니다. 그 궁핍이 웬만한 궁핍을 가지고서는 안 되었습니다. 철저한 궁핍으로 끌고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갖고 갔던 돈이 다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흉년이 들은 것입니다. 그리고 돼지를 치는 신세까지 내려간 것입니다. 거기서도 인간이라는 것이 궁핍해도 그렇게 쉽게 하나님께로 돌아가는가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들이 흔히 그렇게 생각하는데 어떤 사람이 하나님 앞에 얻어맞고 돌아왔다 그게 뭐가 그렇게 잘났는가. 그런데 사실은 그렇게 하나님 앞에 얻어맞는 사람들이 모두 돌아오는가 하면 아닙니다. 그렇게 돌아오는 사람은 또 소수입니다. 인간은 견딜 수 있는 한도까지는 하나님 없이 견뎌보려는 것이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러니까 이 아들도 보십시오. 돈이 다 떨어졌습니다. 돈이 다 떨어졌으면 집으로 갈 것이지 거기에 지금 고생하려고 온 것도 아니고 한번 신나게 놀아보려고 온 것인데 돈이 떨어졌으면 아버지의 집이 생각나서 돌아가야 할 텐데 안 돌아가는 것입니다. 안 돌아가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아버지를 내가 돈도 다 잃어버리고 내가 무슨 면목으로 아버지를 뵈올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신앙적으로 침체가 되어서 하나님을 떠나고 그리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려고 그럴 때 그런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까? 주님이 “돌아오너라.” 그럴 때 여러분들이 “하나님이 주신 은혜 다 잃어버리고 제가 무슨 면목으로 아버지께 가겠사옵나이까. 내가 다시 은혜를 벌어서 가겠습니다.” 그런 사람이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 것에 대해서는 가책도 받지 않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내가 다 잃어버렸습니다. 무슨 면목으로 하나님 앞에 서겠습니까? 그런 것은 없습니다. 항상 돌아가는 자기 자신을 대견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게 인간입니다. 한 번도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이 아들이 바로 우리의 그림자입니다. 똑같습니다. 아버지의 돈을 다 잃어버렸다든지 그런 것 때문에 미안해서 아버지께 못 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관계가 싫은 것입니다. 그 아버지와 관계를 맺으면서 그 아버지의 아들이 되고 그 아버지가 아버지로서 그 아들을 보호하고 지키기 위해서 내리는 여러 가지의 명령과 규제, 그리고 그의 대한 아버지의 지배권, 그 관계를 가지고 그 사랑에 얽매어서 살아가는 일 이런 것이 싫은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여러분이 대게 싫어하는 사람한테 사랑을 받아본 적이 있습니까? 나는 싫은데 그 사람은 나를 끔찍이 좋아하는 것, 그런 것을 경험해본 적이 있으면 한번 대답해보십시오. 경험이 있으십니까? 별로 없군요. 그러면 그 사람은 진심으로 사랑하지만 나에게는 고통입니다.
(예화) 예전에 직장에 다니실 때 어느 자매가 형제가 자기를 너무 쫓아다니는데 군대에 가서도 수시로 나와서 쫓아다녀서 안 만날 수는 없고 해서 만나면 할 수 없이 극장에 간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컴컴해서 안 보이니까 그런데 그 형제가 왜 만나기만 하면 극장에 가느냐고 해서 보기가 싫어서 그랬다는 이야기
진심으로 상대방이 사랑해주는데 그 사랑이 내게 싫은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하면 내가 그 관계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버지가 내리는 어떤 명령이라든지 그가 아버지의 명령을 따라서 밭을 갈고 무슨 논에 김을 매고 하는 이런 힘든 노동 때문에 싫은 것이 아니라 그 아버지와 관계를 맺는 자체가 싫은 것입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성경은 뭐라고 하는가 하면 “네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도다”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관계가 싫은 것입니다. 관계가 좋으면 뭘 시키든지 막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관계가 좋은데 뭐든지 기쁨으로 해주는 것인데 관계 자체가 싫은 것입니다.
아들이 아버지의 집으로 그렇게 쉽게 그런 궁핍을 당했으면서도 안 돌아간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하면 궁핍을 견디는 고통이 싫은 아버지와의 관계로 돌아가는 것보다 훨씬 더 참기가 쉬우니까 안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강도를 높이시는 것입니다. 궁핍의 강도를 그래서 한번 봐라 하시며 흉년이 들게 하셔서 궁핍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일자리가 없습니다. 그 고장 사람들도 일자리가 없는데 자기가 무슨 일자리가 있겠습니까? 하다가 결국은 목부가 되었는데 그것도 소치고 양치는 고상한 짐승을 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다 차지하고 마지막에는 그 더러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가증하게 여기는 돼지를 치는 목부의 신세가 된 것입니다. 그랬는데도 그 고통을 이기는 것이 그렇게 싫은 아버지와의 관계로 돌아가는 것보다 훨씬 더 견디기 쉽다고 생각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안 가는 것입니다. 나중에는 일을 해도 월급을 안 주어서 밥을 먹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나는 쥐엄 열매라는 것을 나는 보지 못했으나 사료용으로 쓰이는 것입니다.-그 쥐엄 열매를 먹으려고 돼지우리 바닥을 뒤지는데 거기에 있어서 만약에 그것을 먹었더라면 그래서 그날 저녁에 배부르게 헛간에서 잠들 수 있었더라면 아버지의 집이 생각이 났겠어요, 안 났겠습니까? 생각이 안 났을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얼마나 지독하고 모진 존재인지 모릅니다. 정말 인간이라고 하는 것이 정말 모진 존재입니다. 안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조차도 찾아보니까 그것조차도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그때 이 아들이 아버지의 집이 생각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아들이 첫 번째 궁핍, 두 번째 궁핍, 세 번째 궁핍이 계속되는 것들이 하나님이 그를 부르신 음성이었는데 그런데 그런 궁핍을 느낄 때 하나님 아버지에게 돌아가야겠다는 마음을 갖고 아버지와의 관계가 얼마나 복스럽고 얼마나 축복된 관계인가를 깨달으면 인생을 그렇게 고통하며 허비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여기서부터 끊김-애초에 음성 파일이 잘려서 복원 불가)
3. 돌아오는 탕자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눅 15:16-19)
탕자의 귀로 (1995.8.2 온가족 여름수련회 3)
하나님의 말씀이 모두 귀하지 않은 것이 없지만 그러나 우리는 오히려 널리 알려지고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진 성경들을 우리들이 선입견에 묶여서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오늘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바로 이 탕자의 비유도 그와 같은 성경구절 중에 하나입니다. 누가복음 15장은 잃어버린 자의 비유의 장이라고 불릴 정도로 잃어버린 비유에 대해서 쭉 나오고 있습니다.
특별히 여기에는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이야기가 세 개가 나오는데 하나는 잃은 양에 대한 비유고 또 하나는 잃어버린 드라크마의 비유이고 또 하나는 집을 나간 탕자의 비유입니다. 셋 다 결국은 잃어버린 자를 찾으시는 하나님의 방법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셋다 잃어버린 이유가 다 틀립니다. 앞에 길 잃은 양은 무지해서 자기가 꼭 그렇게 길을 잃어버리고 싶어서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잘 몰라서 길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잘 안 보이고 또 여러 가지의 이유 때문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양떼의 대열에서 이탈했기 때문에 그렇게 자기의 스스로의 힘으로 돌아올 수 없게끔 길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길을 잃어버리게 된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드라크마의 비유는 자기 의사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주인이 잘못 간수를 해서 잃어버려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의지와는 상관이 없이 잃어버린 자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마지막 세 번째 나오는 탕자의 비유는 자기 의지로 스스로 잃어버린 바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의지로 스스로 하나님께로 돌아온 것입니다. 그런 장면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잃어버린 비유를 거푸 말씀하시지 않을 수 없었는가 하면 그 무대가 바로 오늘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죄인과 세리, 그러니까 창녀요, 기생이었던 여인들과 또 그렇게 세금을 걷어서 착복하며 그 시대에 불의한 사람의 대명사처럼 여겨지던 그런 사람들과 더불어서 먹고 마시며 함께 교제하시니까 사람들이 너희 선생은 어찌해서 창녀와 세리들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어떻게 경건하고 거룩한 사람이라면 그럴 수가 있는가. 그랬더니 예수님이 그 말씀을 듣고 하신 말씀이 “인자의 온 것은 의인을 위하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위해서 왔다 그리고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으려고 왔다” 대답이 질문과 대답이 잘 맞지를 않습니다. “어째서 너의 선생은 죄인들과 더불어 먹고 마시느냐” 그랬더니 예수님이 “인자의 온 것은 의인을 위해서 온 것이 아니요 병든 자를 위해서 왔고 또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기 위해서 왔다” 그러니까 죄인들과 더불어 그렇게 교제를 나누시고 식사를 하고 하는 것들이 바로 하나님을 떠난 죄인들, 잃어버린 바된 죄인들을 하나님께로 찾으시는 방법 중에 하나였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게 참 신기합니다. 하나님이 잃어버린 자를 찾으시는 방법이 어떻게 예수님을 보내서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 친구가 되게 하시고 또 밥을 먹고 그리고 포도주를 마시고 그러면서 그들과 함께 생활하는 것이 죄인을 찾는 방법인가. 그것을 오늘 이제부터 시작해서 네 번에 걸쳐서 말씀을 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먼저 잃은 양에 대한 비유에서는 잃어버렸는데 그 양이 자신의 힘으로 돌아오고 싶어도 돌아올 수 없기 때문에 결국은 목자가 가서 그 양을 업어서 데리고 오는 장면이 첫 번째 나옵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예수를 안 믿고 신앙생활을 바르게 안 하고 잃어버린 바된 데는 여러 가지의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누구도 복음을 들을 수 없는 상황 속에서 태어나서 그렇게 철저하게 복음과 차단된 가운데 버려진 사람은 드라크마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또 예수를 믿는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바르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주는 자가 없어서 그래서 잘못된 길로 나아가는 것, 이것은 잃은 양의 비유입니다.
그러나 이제 세 번째의 비유는 좀 고차원적인 타락입니다. 다 알고 다 배웠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의지를 가지고 아버지의 집을 떠나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두 아들 이야기를 하는데 왜 두 아들의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그 두 아들의 이야기를 함으로써 하나님께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큰 아들에다가 비유를 하고 그리고 이제 죄인과 세리와 이런 사람들을 둘째 아들에다가 비교를 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는가 하는 것들을 이제 아버지의 사랑이 어떠한 것인가 하는 것을 동시에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선 두 아들이 있었는데, 한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두 아들 중에 한 아들이 아버지께 요청을 해서 내게 돌아올 유산을 먼저 주소서 했습니다. 구약에는 두 아들이 있을 경우에는 유산을 큰 아들에게 훨씬 더 많이 주고 작은 아들에게는 조금 줍니다. 그런데 그 유산이라고 하는 것은 부모가 죽었을 때, 그 다음에 죽고 나서 그 유언을 따라서 아니면 율법을 따라서 재산이 분배가 되었는데 아버지가 멀쩡히 살아있는데 유산을 나누어 주시옵소서 하는 것입니다. 요구 자체도 당돌했지만 우리가 관심을 갖고자 하는 것은 그 사람의 당돌한 요구가 아니라 왜 아버지의 집에 사는 아들이 아버지에게 유산을 나눠달라고 그렇게 당돌하게 요청을 해서 재산을 나누어서 집을 떠나게 되었는가. 그 이야기부터 우리들이 먼저 해야 될 줄 압니다. 여러분들이 성경을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에 기록된 사람의 마음으로 먼저 돌아가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둘째 아들의 마음으로 돌아간다면 이 아들이 왜 아버지의 집에 있다가 그 아버지로부터 내게 돌아올 유산을 미리 가불해달라고 이야기하면서 그러면서 그것을 달라고 그렇게 요청을 하고 그것을 가지고 떠나게 되었는가를 한번 생각해봅시다.
우리는 흔히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 아들이 이렇게 아버지 앞에 부당한 요구를 하고 그 재산을 나눠달라고 해서 그것을 가지고 세상에 간 이유는 이 사람이 아마 ‘세상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아니면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이 컸기 때문인가보다.’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알다시피 여러분들 이스라엘 사회는 이제 농업과 목축을 주로 하는 사회입니다. 가나안에 들어간 다음부터는 그 땅에서 농사를 짓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중요한 업이었습니다. 그렇게 농사를 지으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도회지의 삶이라고 하는 것들이 굉장히 그리웠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아버지의 곁을 떠나게 된 모든 이유를 미래에 세계에 대한 동경, 그리고 또 도회지의 삶에 대한 그리움, 시골 생활에서의 그 단조로운 것들에 대한 그 지겨움 이렇게 생각을 하고 해석을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거기에 있지 않습니다. 이 사람이 아버지에게 돌아올 유산을 미리 달라고 요청했던 것은 미래의 세계에 대한 동경이 강했기 때문이 아니라 아버지와의 관계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에게는 자기가 먼 나라로 가서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게 되기까지는 아버지가 자신의 아버지가 되고 자기가 그 아버지의 아들이 되는 것이 얼마나 귀하고 가치가 있고 소중한 관계인가 하는 것들을 몰랐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도시생활에 대해서 미련을 가지고 꿈을 가지고 이제 아버지와 함께 있는 그곳을 떠나서 재산을 가지고 허랑방탕한 삶을 살려고 시도를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신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를 믿고 신앙생활을 하지만 모든 세상에 대한 꿈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이제 예수를 믿고 나서는 신앙이 좀 들어가고 나면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노골적인 세상에 대한 노골적인 꿈, 그러니까 세상에서 한번 돈을 왕창 벌어서 한번 허랑방탕하게 한번 신나게 살아봐야 되겠다는 그런 노골적인 타락은 갖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 신앙이라고 하는 것들을 포장해서 그래서 그 포장 속에서 나름대로 자신의 육체가 가지고 있는 그런 즐거운 꿈, 그리고 자기의 인간적인 생각이 가지고 있는 그런 소망, 이런 것들을 성취하고 이루기 위해서 간절한 사모함을 가지고 그리고 이제 아버지의 곁을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다른 세계에 대한 모든 동경들을 예수 믿는 사람들도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쉽게 이야기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인도해서 광야를 거쳐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렇게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매일 같이 일어나서 우리가 애굽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그랬는가 하면 그것은 아닙니다. 홍해 앞에서 우리가 왜 애굽에서 도망을 나와서 이 죽을 고생을 하는가 사람들이 그렇게 모세를 원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했지만 하나님의 손이 홍해를 가르고 갈라진 홍해 사이로 마른 땅을 만드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너게 하셔서 물 건너편에 와서 그 이스라엘을 추격하던 애굽의 군대가 수장 당하는 장면을 보면서 거기서도 우리가 애굽으로 돌아갈걸 그랬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면서 “심중에 여호와와 같은 이가 누가 있는고” 하면서 그 애굽의 군대들을 수장시키시는 하나님의 그 위대한 능력을 모두 찬송하며 가나안을 향하여 진군하기로 결심했습니다.
항상 그랬던 것이 아니라 때로는 어려움을 만나거나 혹은 유혹을 만나게 될 때 그때에 늘 생각나는 것이 바로 세상이었습니다. 왜 세상이 생각이 나는가 하면, 예를 들자면 이런 것입니다. ‘고기가 먹고 싶다’ 이런 유혹이 올 때 그들은 즉시 옛날에 그 애굽의 고기 가마곁을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생각들은 체계적인 것이 아니라 언제나 단편적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고기가 먹고 싶다’ 그러면 그 고기를 먹는 것과 고기를 먹지만 그러나 거기서 자신들이 애굽 사람의 종이 되어서 학대를 받으며 인격적으로 모욕을 받으며 노예처럼 험하게 살아왔던 그 생활 전체가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그 한 부분이 떠오르는 것입니다.
그렇게 누리는 것,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세상을 생각하는 것도 세상 전체에 대한 생각이 마음에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 일부분이 떠오르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육체의 욕심을 따라서 마구 살아가지만 그러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그렇게 살 수가 없습니다. 그 때 탁 떠오르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세상에서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던 그것이 떠오르는 것이지, 그것과 함께 하나님을 떠나서 살아가던 그 많은, 예수 믿기 전에 세상에 살면서 지금 예수를 믿을 때보다 기분이 좋고 신나는 때도 많았습니다. 그렇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더 많은 날들은 예수 없는 삶 속에서 고통을 받으며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다가 마지막에는 주님이 부르셨지만 결국은 자기 입으로 지나간 모든 삶이 잘못됐다고 고백을 하고 이제 예수를 믿겠다고 그러고 자기가 자기 발로 와서 그렇게 눈물을 흘리고 예수 믿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셨지만, 하나님이 인도하셔도 마지막에는 우리 자신의 승복을 받아내십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게 되어서 신앙생활을 하는데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언제나 그렇게 떠오르는 것들은 옛날 생각을 하게 될 때 애굽을 그리워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단편적인 것이 떠오르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애굽에서는 참외를 많이 먹었는데, 그때는 마늘을 먹기 때문에 정력도 좋았는데, 부추도 먹었는데, 고기도 먹었는데 하면서 그런 식으로 단편적인 것이 떠오른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한 번도 자기가 무엇인가 애굽에 대해서 유혹을 받게 될 때에 애굽에서 자신들이 얼마나 비참한 삶을 살았는가 하는 것들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가 하면 언제나 너희들은 애굽에서 어떻게 지냈는지 생각하라. 거기서 네가 유리하는 족속으로 이 애굽 사람들에게 종살이를 하던 그 땅에서 내가 너희를 독수리가 그 새끼를 날개에 업어 나름과 같이 내가 너희를 업어서 날랐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자꾸 말씀하시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애굽을 생각하는데 은혜가 충만할 때는 그 애굽에서 자신들이 얼마나 고통 받았는가 그것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찬송하는데 은혜가 떨어지고 나면 애굽에서 우리는 고기를 먹었는데 그것만 생각나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우리는 참외도 먹고 수박도 먹었는데 아니면 부추도 먹었는데 마늘도 먹었는데 하면서 이제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입니다. 그 모든 일들이 일어난 것은 지난 세계에 대한 동경 때문이라기보다는 오늘 하나님과의 관계가 분명하지 않은데 그 원인이 있다는 것입니다.
두 아들 중에 유산을 나눠 달라고 요청했던 둘째 아들은 그 유산을 아버지께 요구해서 유산을 받아서 나간 것이 세상에 대한 동경 때문이라기보다는 아버지와 자신과의 그 관계가 바르게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 집에서 아버지와 더불어 아버지가 내 아버지가 되고 내가 그 아버지의 아들이 되어서 이 집에서 함께 동고동락하며 아버지의 품에서 아버지의 사랑을 받으며 사는 것이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가장 행복하다 그러한 소망이 윗사람의 마음속에 없었기 때문에 미래의 세계에 대한 동경을 이기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생활 속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를 붙잡아 주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단해서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가 되신 사실 속에서 그 관계가 가지고 있는 영적인 의미와 신앙적인 특성들을 깊이 이해하고 그리고 복음 안에서 그 관계를 통해 부어지고 있는 축복들을 우리들이 실질적으로 누리면서 그것들을 가지고 살아가지 않으면 이 세상에 대한 유혹을 이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언제나 사람들은 그 곳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출발해서 광야로 나와서 정말 하나님께서 물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므로 말미암아 시내반도로 이끄시며 거기서 11개월 동안 애굽의 묵은 구습을 다 털어버리고 율법까지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율법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 살고 어기면 죽는다는 추상과 같은 율법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렇게 하나님이 살아계신 표증을 낮에는 구름기둥과 밤에는 불기둥을 매일 같이 보면서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렇게 살았지만 그러나 입맛이 변한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고기 먹고 싶고 또 마늘과 부추가 생각이 나고 참외가 생각이 나는 그 입맛을 그냥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한번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온 것은 애굽을 떠난 것과 똑같습니다. 이젠 돌아갈 수 없습니다. 불가능합니다. 그렇지만 세상에서 맛보고 가지고 있던 그 세상을 좋아하고 사랑하던 그 입맛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언제, 하나님과 충만한 관계를 누리고 그 하나님 한분으로 내가 깊은 기쁨과 만족을 누리면서 그렇게 충만한 삶을 살면 그렇게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옛날 것이. 생각이 안 납니다. 왜 생각이 나지 않는가 하면 주님께로부터 매일 시원한 생수를 받아 마시는데 왜 그 더러운 구정물이 생각이 나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이 끊어져서 목이 마르게 되면 그거라도 먹어야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삼풍 사건 때 오줌을 받아먹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생시에 아마 그 사람 나왔을 때 지금쯤 가서 오줌 한 컵 받아다 주면서 그 때 오줌은 이 오줌보다 덜 좋지 않느냐. 이것은 맑은 물을 먹고 눈 오줌이니까 한 컵 먹어보라고 하면 먹겠습니까, 안 먹겠습니까? 먹을 리가 없을 것입니다. 왜 수도꼭지만 틀면 물이 쏟아지고 냉장고만 열면 깐깐한 물 웅진 코웨이 정수기에서 받아낸 시원한 물이 가득 있습니다. 누가 그것을 먹겠습니까? 먹을 리가 없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의 정수입니다.
그러니까 자기의 신앙을 위해서 무엇을 하려고 애를 쓰고 또 무엇을 가지려고 애를 쓰고 무엇을 바꿔보려고 애를 쓰고 수없는 노력을 하지만 그것이 신앙과 관계는 있지만 그러나 결정적으로 그 사람을 바꿔 놓지는 못합니다. 어려움에 빠져들게 되는 가장 큰 이유가 무엇이냐면 인생을 살면서 진공 속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잠시 떨어져 나왔지만은 그러나 잠시 떨어져 시골에 와 있어도 마음은 서울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에 가 있습니다. 그리고 또 집회가 끝나고 나서 가면 서울에서 우리의 인생 속에서 두고 왔던 모든 일들이 우리를 동일하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우리가 올바르게 하나님을 믿으면서 신앙생활을 할 수 없게 하는 그런 많은 요소들이 우리의 생활 속에서 일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이 우리를 늘 눌러오고 그리고 감싸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많은 어려움들을 당할 때 이제 우리들이 경험하는 실패는 무엇인가 하면 이런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많은 문제들에 대해서 우리들이 눈을 돌리는 것입니다. 새벽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사람으로부터 오는 갈등일 수도 있고 아니면 물질적으로 말미암는 고통일 수도 있고 여러 가지 많은 이유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모든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사람으로서 말미암아 어려움이 생기면 사람과의 관계에서 자기의 태도를 바꾸든지 그 사람을 바꾸어놓든지 아니면 그 사람과 나 사이의 그런 관계를 그렇게 만드는 여러 가지의 여건이나 문제를 바꾸어놓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물질 때문에 고통을 받으면 그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꿔서 오든지 아니면 벌든지 아니면 뭘 하든지 어떻게 수를 내야지 우리는 그 고통에서 놓임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무엇인가 하면 시간이 점점 흘러가면서 우리들이 그렇게 자기에게 벌어지는 모든 일들을 하나님과의 관계와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인가 하는 것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자기 힘으로 하는 것들을 풀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풀어보려고 하는 것 자체를 비난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살아야지 어떻게 하겠습니까? 문제는 그런 모든 것들을 그렇게 풀어가면서 궁극적으로는 그런 모든 문제들의 핵심 한가운데 하나님과의 관계가 있다고 하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데 마음이 일단 하나님과의 관계를 떠나게 되면 신앙생활을 하고 설교를 듣고 예배를 드리고 성경공부를 하는 것이 자기 인생에 도움이 전혀 안 되는 것입니다. 왜 도움이 안 되는가 하면 나는 지금 그저 고민하는 것이 사람과의 관계 때문에 고민을 하고 물질 때문에 고민을 하고 자식이 속을 썩여서 고민을 하고 남편이, 혹은 아내가 혹은 아니면 집안에 어려운 일이 생기고 고통이 생겨서 지금 내가 고민을 하고 있는데 그와 매일 이야기를 하며 들어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며 인생은 바람에 나는 풀과 같습니다. 우리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살아야 합니다. 맨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게 자신의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서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잘못이 무엇인가 하면, 그러면 누가 그 문제에 대해서 해답을 주겠는가. 다시 말해서 신앙이라고 하는 것, 교회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이 세상 속에서 늘 볼 수가 있는 것들을 다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육신의 눈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볼 수 없는 것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태까지 인생을 살아가면서 자신은 모든 인생의 고통의 문제가 부모를 잘못 만났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왜 내 자식 가운데 저런 놈이 태어나서 내 인생에 막판에 이렇게 애물단지를 안고 살아가는 것처럼 이렇게 고통을 받나. 그런 것, 아니면 왜 나는 이렇게 물질적으로 고통을 받는가 하는 그런 여러 가지의 문제 때문에 그 모든 인생의 문제가 비비꼬이고 고통을 받는다고 생각을 했는데 그런데 그것은 세상에서 보는 시각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에서는 그런 사람들을 향해서 많은 충고를 해줄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인생을 많이 살고 자식교육에 성공한 사람은 애를 어렸을 때부터 때리지 않고 키워서 그랬다. 그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당신이 사업을 잘못해서 수완이 없기 때문에 그렇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세상이 줄 수 있는 충고입니다. 인생의 모든 문제 한 가운데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언제나 역사를 생각하십시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끌어내신 다음에 광야에 가셔서 시내 산에서 모세를 불러올리시고 그에게 율법을 주시면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셨던 그 모든 율법가운데 핵심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이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음이 일단 하나님을 떠나가게 되면 입으로는 말을 하지 않지만 속으로는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가 되고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도대체 뭐 말라 죽은 거냐. 내가 지금 당장 급한 것은 이 세상에서의 문제해결이다. 그런데 일단 마음을 그렇게 먹게 되면 그 다음에는 해결로부터 이제 완전히 멀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잘못 믿으면 성격 파탄자 비슷하게 되는 것입니다. 정말입니다.
(예화) 예전에 신학교를 다니실 때 마음 좋으신 교수님이 들어오셔서 학생들을 향해 어디부터 시작해야 되냐고 물으시니까 뒤에 앉으신 어느 전도사 학생이 아무데서나 시작해도 된다고 하면서 본인은 잠을 잤다는 이야기
그런데 가끔 뭔가 만족스럽지 않을 때 학생들은 다른 책을 펴 놓고 공부를 합니다. 그러면 이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합니다. 강의는 역사 강의가 들리는데 자기가 공부하는 책은 어학 책인 것입니다. 말하자면 머리에 혼돈이 생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도 잘못하면 성격 파탄자 비슷하게 됩니다.
우리는 주위에서 예수 믿기 전에는 사람이 더 없이 좋은 사람이었는데 예수 믿고 나서 성격 망친 사람들을 가끔 봅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참 하나님께 영광이 안 됩니다. 예수 믿고 나더니 사람 버렸다고 하면 누가 예수를 믿겠습니까? 그런데 제대로 안 믿으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배우는 것은 이렇게 살라고 가르치는 것인데. 전에는 그런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열 번 자기 성질대로 살다가 두 번만 남의 기분대로 살아주면 세상 사람들은 그 사람을 좋다고 합니다. 호인이라고 합니다. 법 없이 사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게 세상입니다. 그런데 신앙을 가지고 보니까 하나님께서 성경을 주시면서 너는 이 틀 안에서 살아야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매일 배우고 매일 생각하는데 자기 사는 것은 그렇게 살지 않고 다르게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격이 이상해지는 것입니다. 뒤틀려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믿고 예수를 믿게 되었는데 모든 문제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봐야 됩니다. 그런데 이미 마음이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그래서 뭐라고 그러는가하면 하나님이 내 인생에서 무슨 도움이 되는가? 그렇게 하고 나니까 그 다음에는 떠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습니까? 그 사람이 신앙을 완전히 떠날 수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일수불퇴입니다. 늘 말하지만 한번 예수 믿으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최대의 실수는 예수를 믿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미 딱 붙잡았습니다. 그래서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 손 안에 있습니다. 자기가 아무리 그래봐야 소용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복음으로 돌아와서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를 점검하면서 그 관계 속에서 내가 그 하나님이 내 인생의 아버지가 되어 주시고 내가 그의 자녀가 되어서 살아가는 그 관계의 즐거움은 아무것이 없어도 그 관계의 즐거움이 그렇게 있어야지만 그래야지만 그 다음에 그 문제들을 헤치고 나아가고 이기게 하는 하나님의 은총과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도우심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은 나중 문제입니다. 그러면 거꾸로 해결하면 되지 않는가, 안 되는 것입니다. 엄 집사님이 시험을 많이 해보셨는지 웃으시는데 아무리 해봐야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안 해 주십니다. 그러면 왜 그러는가 하면 그 이유는 이것 때문입니다.
오늘은 이 탕자가 집을 나가게 된 것이 세상을 향한 동경이 아니라 아버지와의 관계에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 아들에게 있어서 아버지라고 하는 것이 단지 뭐냐고 하면 유산을 물려주기 위해서 빨리 죽어야 좋은 존재였습니다. 그러니까 솔직히 말해서 아버지한테 가서 “주십시오.”라고 말하기 전까지 얼마나 기다렸겠습니까? 순리적으로 그 유산이 돌아오게 되기를. 뭘 기다렸다는 것입니까? ‘저 노인은 죽지도 않나? 기력도 좋지. 왜 저렇게 오래 살지?’ 그러면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결국은 뜻대로 안되니까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관계가 무너지고 부서져 버렸기 때문에 그 미래에 대한 동경들이 자기를 지배하고 그 아버지의 집에 그렇게 살면서도 나중에 타락을 해서 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다음에 생각나는 게 누구입니까. 아버지였습니다. 세상에 어디에 가도 자기의 수중에 뭐가 있을 때에는 세상 사람들이 자기를 좋아했는데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고 나니까 사람들이 자기를 받아주지를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 여러분들이 무언가를 가지고 있거나, 여러분들이 그들을 위해서 무엇을 해 줄 수 있거나, 또, 여러분들이 그들을 위해서 베풀어 줄 수 있다는 것 말고는 그냥 여러분의 그 존재 그 자체 때문에 여러분들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누가 있습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있습니까? 심지어는 어떤 때는 부모들도 그것을 못할 때도 있습니다. 자기한테 뭔가를 해주는 자식들만 좋아하는 그런 철없는 부모도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여러분의 부모님 그 부모가 정상적인 부모라면 그러면 어떻습니까? 자식이 아무것도 없어도 자식이라는 이유 때문에 사랑합니다.
퀴즈 하나 냅시다. 삼풍백화점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갔습니다. 그 사람들이 죽어 가는데 그 중에서 죽었던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이 만약에 팔 다리가 모두 잘라지고 목숨만이라도 붙어 있으면 대부분의 가족들이 ‘그렇게 살기보다는 죽는 게 낫지. 차라리 죽여 주십시오.’ 그랬을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진심으로 자녀와 부모의 관계가 바로 되어 있으면 그 자식이 비록 팔 다리를 모두 잃어버리고 그렇게 식물인간인 것처럼이라도 살아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왜 부모가 그 자식을 사랑하는 이유는 그 자식이 부모를 위해서 성한 몸으로 무엇을 갖다 주기 때문에 그 자식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식이 자기에게 있다는 그 자체가 기쁨이고 즐거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죽었을 때 인간들이 가장 슬퍼하고 심지어는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같이 죽어버리기도 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관계가 끝나는 것이 그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관계가 잘못되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삼풍백화점 사건이 일어났을 때 제일 먼저 구출된 사람들이 미화원들이 있습니다. 청소하는 사람들이 우르르 구출되었습니다. 들리는 이야기에 의하면 그런 불평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다 늙었는데 거기서 죽고 2억 5천만 원 보상금이나 타서 자식들이나 잘 살게 하지, 뭘 또 거기서 살아 나와서.” 그런 이야기가 들립니다. 신문에 한번 났습니다. 그것은 어떤 것입니까? 관계가 깨진 관계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도 똑같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자신이 안고 있는 인생의 문제가 크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그것 자체에 눌려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돌아볼 힘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단 마음이 그렇게 떠나가고 나면 정말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자기 인생에 별로 도움이 안 되는 것입니다. 오늘 내가 은혜를 받았다고 해서 나를 괴롭히던 사람들의 마음이 갑자기 내일 아침에 변하는 것, 물론 그렇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쉽게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내가 하나님 앞에 은혜를 충만하게 받고 나니까 빚쟁이들이 모두 통회자복 하면서 여태까지 당신에게 빚진 이자를 받아간 것을 용서해달라고 이제 내 빚을 안 갚아도 된다고 그런 일들이 생겨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하실 수 있지만 그러나 쉽게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바라시는 바와 우리가 원하는 바가 너무 틀립니다. 아들과 아버지가 원하는 너무 틀립니다. 나중에 결론을 내리고 보면 이제 알겠지만 아버지가 벌써 이렇게 될 것을 다 아셨습니다. 이렇게 집에서 사람 구실을 못하는 자가 돈을 왕창 가지고 밖에 나가서 그것은 완전히 호랑이 코에다가 갖다가 바치는 것이지 뭐하는 것입니까?
(예화) 옛날 학교 다니실 때 동네에 불량배 같은 어느 형제를 만나 우연히 알게 되어 그의 말을 들으니까 그는 소년원에 들락거리며 산다며 자기가 예전에 자기 패거리들과 공원에 갔는데 어느 순진하게 생긴 학생에게 가서 돈을 뺏으려고 하니까 그 학생이 하는 말이 자기가 집을 나왔다며 자기의 가방을 보여주어서 보니 그 가방 안에 그 당시로서는 많은 사백만원이나 되는 큰돈으로 함께 있는 12명의 사람들이 최고의 옷과 신발 등을 샀다는 이야기
집에서 자기 구실을 못하고 사는 자식이 돈을 왕창가지고 그것도 그 애가 그것을 가지고 가서 장사를 해서 아버지 앞에 달란트 맡은 종처럼 충성스럽게 갖고 와서 이자까지 붙여서 아버지 앞에 갖다가 주리라 그런 생각은 하지도 않은 것입니다. 그럼 왜 얼마나 재산이 되었는지 모르지만 그 재산의 삼분의 일이나 되는 큰돈을 떼어서 둘째 아들에게 잃어버릴 각오를 하고 준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이것을 가지고 다 써버리고 그 아버지 앞에 돌아와서야 비로소 가장 이 세상에서 소중한 것이 무엇이냐고 이 아들에게 물었더니 돈이 아니라 뭐라고 그랬는가 하면 아버지와의 관계라고 했습니다.
(찬양)
때리시고 어루만져
위로해주십니다. 우리 주의 넓은 사랑, 그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깨달아야지만 이 아들이 비로소 아버지의 유업을 물려받을 수 있는 정상적인 아들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간단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 무엇인가 하면 이 비유에서 아버지께로부터 돈을 가지고 나가서 다 써버렸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보면 아버지의 집에서 유산을 가지고 온 것을 다 써버렸는데 어떤 사람은 건강을 다 써버려서 나중에는 병들어 죽게까지 버려 두시면서도 하나님께서 고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병에서 헤어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깨닫기까지 하나님께서 그를 끌고 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문제는 하나님께서는 그 문제를 통해서 당신과의 관계로 돌아오기를 원하시는데 우리는 그 문제 때문에 하나님께로 못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의 사이에 영원히 평행선입니다. 줄다리기를 해봐야 승부가 나겠습니까? 하나님과 줄다리기를 하는데 승부가 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꺾지 못하는 것입니다. 울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찬양)
울어도 못하네 눈물 많이 흘려도
죄를 씻지 못하니 울어도 못하네
힘을 쓰고 아무리 애를 태워도 안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보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것은 우리의 고통에 비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찾는 마음에 비례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신다고 하는 그 은혜에 대한 감격 때문에 흘리는 눈물과 자기 연민 때문에 흘리는 눈물은 갖지가 않습니다. 후자는 별로 도움이 안 됩니다. 물론 그렇게 울고 나면 마음은 좀 후련하지만 그러나 마음이 후련한 것 가지고 해결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는 무엇인가 하면 이렇게 무엇보다도 너희들은 나와의 관계를 보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라고 갔는데 그러나 가끔 큰 흉년을 만난 것입니다. 비가 제때 내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때는 메뚜기 떼가 와서 다 자란 곡물을 뼈도 안 남기고 싹 뜯어먹고 간 것입니다. 혹은 추수를 해서 다 쌓아났는데 블레셋의 군사들이 와서 다 털어갖고 간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일어날 때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는 너희는 나와의 관계를 돌아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신앙에 있어서 요체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을 먼저 하나님 앞에 고쳐야 하는데 그런데 자신을 고치려다가 보면 문제가 떠오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문제가 자신의 힘으로 고쳐질 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더 멀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여기에 나와 있는 둘째 아들의 경우에도 바로 그것입니다. 아버지가 자기 아버진데 그런데 그 아버지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한 번도 기뻐본 적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소중하게 생각되어 본 적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버지의 마음을 더 읽을 수가 없는 그런 마음으로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결국은 아버지에게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우리들이 하나 정리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 무엇인가 하면 이번 사경회를 통해서도 마찬가지고 앞으로 다시 서울에 돌아가서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마찬가지지만 우리들이 가장 먼저 생각해야 될 것은 여러분이 원하는 방식대로 문제를 풀어보려고 애를 써서 해결이 된 것이 있으면 그럼 하나님이 왜 해결을 안 시켜주시는가 해결된 것이 있으면 여기 오지를 않습니다. 하나님을 의뢰할 필요가 없고 예수를 믿고 신앙생활을 하려고 그렇게 애를 쓸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문제 때문에 고통을 받는다고 하지만 이나마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그 문제 때문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우리들이 하나님의 손을 바라보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고치고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문제를 능가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능력을 보게 하시고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들을 고치시고 새롭게 하시기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에게는 마음이 없고 자신의 문제를 고치려고만 하니까 해결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일단 마음을 그렇게 갖고 나면 기쁨은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목회를 하면서 보면 신비합니다. 말씀을 전할 때 막 얼굴이 해같이 빛나고 그 말씀을 먹으면서 그 기쁨과 은혜를 누리던 사람들이 어느 날 갑자기 얼굴이 완전히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그리고 간이 나쁜 사람처럼 얼굴이 시커멓게 되어서 기쁨도 잃어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지도 않습니다. 인간이 집중이 언제 집중이 되는가 하면 자기가 마음속에서 생각하고 있는 것과 딱 맞아 떨어질 때 집중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매일 돈 때문에 고통 하는 사람들은 돈 버는 이야기를 하면 눈이 동그래져서 불을 킵니다.
옛날에 직장 다닐 때도 화투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은 누가 어디서 죽었다고 그러면 옆에 전화국에서 사람이 죽었는데도 쫓아갑니다. 그 사람을 아냐고 그러면 자기는 모른다고 합니다. 왜 가느냐고 하니까 거기에 가야 화투를 한다고 합니다. 자기가 마음속에 관심이 있는 것을 이야기할 때는 스파크가 일어나면서 반짝반짝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평소에 하나님과의 관계, 하나님의 아들 이런 것이 관심이 아니라 온통 다른 잡생각들이 차 있으니까 그러니까 한번 하나님의 은혜를 잃어버리고 나니까 그 다음에는 말씀이 들어오지를 않는 것입니다. 느껴집니다. 벌써 위에서 말씀을 전하면 해같이 얼굴이 빛나고 그 은혜에 있는데 그런데 어느 날 맛이 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쉬었습니다. 그러면 붙잡고 사정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고요히 기도할 뿐입니다. 주여, 저 형제가 쉬었습니다. 주님, 어떻게 합니까? 파리나 끼지 말게 해주십시오.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시간이 흐르면 또 해보았으니까 안 된다는 것을 알고 깨닫고 그리고 하나님께 손을 들고 옵니다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하나님은 그것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주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시지 못하시니, 그게 하나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정말 무가치하다고 생각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생각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간에, 인생을 인생 자체가 누구를 위해서 쓰여질 인생입니까? 철원에 오더니 경치가 좋아서 입이 붙었나. 말을 못하네. 인생이 누구를 위해서 쓰여질 인생입니까? 그러니까 우리의 인생이 아닙니다. 우리가 막 살면 아버지의 집에서 가산을 갖다가 탕진한 사람보고 우리가 매일 누가복음 15장을 읽으면서 나쁜 놈이라고 욕하는데 그 놈이 바로 우리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생명과 하나님이 주신 인생입니다. 그것을 우리 마음대로 막 사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일평생을 다 그렇게 썼습니다. 강도질하고 사기치고 도둑질하고 그랬습니다. 그랬는데도 마지막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주여 당신의 나라에 임할 때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까 하나님께서 그 존재 자체를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과 우리 마음이 다른 것입니다.
심방을 다녀보고 그러니까 그 집에 자식들이 부모를 깍듯이 공경하는 집안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교육을 워낙 잘 받아서 아버지가 아파서 휠체어에 앉아 있는데도 아버지가 손을 들고 뭐라고 한마디만 해도 이런 자식들이 고개를 숙이고 꼼짝 못하는 것입니다. 교육을 제대로 받았습니다. 기강이 서 있습니다. 이런 집에 젊은 여성들은 시집가기 싫어합니다. 젊은 여성일수록 기강이 좋은 집이 좋은 시집자리가 아닌가 봅니다. 고달프니까. 또 하나는 아버지가 어머니가 돈을 가지고 있을 때 꼼짝 못합니다. 왜 자식들이 먹을 것이 없어서 그러면 집에 와서 먹을 것을 가지고 가는가 하면 그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수중에 논문서, 밭문서, 집문서를 다 쥐고 하나도 안 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큰아들 작은아들 할 것 없이 와서 그냥 김밥을 싸느라고 정신이 없습니다. 김밥 쌀 때 이렇게 말잖아요. 매일 무슨 때가 되면 그냥 무리를 해서 싸들고 오는 것입니다. 경쟁을 하듯이, 그럴 때 그런 집안에 초상난 곳에 가면 꼭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영구차를 세워놓고 거기서 싸우는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영구차 운전사가 하는 말입니다. 영구차 운전사가 나보고 한번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전도사님, 돈이 많은 집은 영구차를 세워 놓고 꼭 뒤에서 곡하고 나와서 눈물을 닦으며 몇이 모여서 삿대질을 하고 싸우는데 그것은 재산분배를 놓고 이제 싸우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우리는 이 세상에 있는 아버지를 그런 식으로 대하고 그렇지만 그런 태도를 가지고 이 세상에 있는 부모뿐만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도 그런 식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존재 그 자체가 하나님에게는 기쁨입니다. 그런데, 이 탕자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면서 그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나의 아버지가 되고 내가 그 아버지의 아들이 된 것이 얼마나 커다란 축복인가 하는 것을 깊이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이 하나님께로 돌아간다, 영적으로 회복된다 이런 모든 것들은 쉽게 이야기하면 하나님 아버지 할 때 여러분 속에 그 마음속에 사랑이 밀려오는 것입니다. 저 같은 경우도 사실 아버지께 사랑을 못 받고 자라왔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은 예수를 믿을 때도 하나님 아버지가 가슴에 잘 다가오지 않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사람들은 더 그렇습니다. 그런데 생각을 해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아버지가 당신 자신이 우리를 보며 우리가 거기에 살고 거기에 생명을 가지고 있다는 그 자체 때문에 그것 때문에 조건 없이 우리를 사랑하고 우리를 기뻐하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그렇게 생각하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것을 못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세상에서 정말 의지할 것이 없고 그리고 내가 너희에게 주는 사랑이외에는 정말 완전한 것이 너희에게 없다 그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 때로는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고통을 받게 합니다. 믿었던 사람으로부터 배신을 받게 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토록 사랑하던 물질 때문에 아픔을 당하게 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를 끊임없이 하나님 곁으로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이 모자라거나 아니면 기도를 작게 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 자신이 그렇게 변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정말 기뻐하시면 그러면 무엇을 안 주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그렇게 생각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땅을 두루 살펴보아도 당신이 우리를 생각하는 것 같은 마음으로 당신을 생각해주는 사람들이 없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간절히 사모하는 바는 우리 자신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는 바는 우리가 간절히 사모하는 바가 아버지 자신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때까지 끊임없이 부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만 얻으면 만족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는 무엇인가. 너희는 물가로 나아와서 그래서 그 물가에 심긴 나무와 같이 그냥 내가 내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서 다 이루어 놓은 그것을 너희들이 먹고 마시고 누리며 그 속에서 안식을 누리고 쉼을 얻으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바입니다. 믿습니까?
그러니까 오늘 아침 시간에 하나 결론을 내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모든 생각, 모든 문제에 대한 집착, 그리고 모든 고민들 그것을 여러분은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말고 그 모든 것들을 잠시 접어놓고 수없이 매달렸지만 해결이 안 되는 그런 것들이 아니라 그런 것들을 통해서 부르시는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정말 하나님 앞에 나중에 보시면 알지만 둘째 아들이 가지고 있었던 최고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것이 아버지의 집에 있으면서도 작은 아들하고 똑같습니다. 아버지의 아들로 살아있고 그 아버지의 집에 내가 이렇게 거하고 있다고 하는 것들에 대한 그런 참된 축복이나 이런 것들을 다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런 믿음들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시간에도 우리가 주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어 주신다는 것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를 우리가 온 마음으로 느끼며 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한없이 소중하고 귀해서 그 안에서 한없는 즐거움이 있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우리의 인생에 수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잠시 후면 그 인생의 문제들이 해결이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믿습니까? 그리고 또 우리의 인생이 이 땅에서 마감하는 날 그때 우리가 하나님 앞으로 가게 됩니다. 가게 될 때 이 세상에서 우리가 가지고 놀던 모든 것들을 다 버려두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 우리가 그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가 그 보좌 앞에 가서 하나님 앞에 그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 관계만이 살아서 남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을 다해서 여러분에게 권하는데 마음으로 하나님과의 그 관계를 붙들고 살려고 애를 써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세상을 이기는 길입니다. 믿음으로 승리하는 길이 바로 거기서 나오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기도하겠습니다.
4.기다리는 아버지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눅 15:20-24)
탕자의 귀로 (1995.8.3 온가족 여름수련회 4)
결국 아버지께로 돌아갑니다. 그렇게 돌아가는 일이 있고 나서, 여기에서 전체의 이야기의 초점이라고 그럴까 그런 것은 엄격한 의미에서 보면 돌아가는 아들이 초점이 아니라 기다리고 있는 아버지가 이야기의 초점입니다. 이 모든 사건, 이 모든 일들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고자 하셨던 것은 하나님이 이렇게 우리를 찾으신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언제나 탕자의 비유의 기사를 읽으면서 우리들이 잊지 말아야 될 것은 이야기의 초점이 돌아오는 아들이 아니라 기다리고 있는 아버지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역시 그 점을 보여줍니다.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는데 아직도 거리가 멀리 있는데 아버지는 직감적으로 저기서 절뚝거리면서 남루한 옷을 입고 아마 어둠 속이였을 것입니다. 그렇게 걸어오고 있는 그 아들을 즉시 자기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러니까 부모에게는 남이 갖지 못한 안테나가 있습니다. 감각이 있습니다. 더듬이가 있어서 목소리와 채취만 들어도 그것이 자기 아들인지 아는 것입니다. 어느 어머니는 아들이 방에 들어왔다가 간 것을 안다고 합니다. 냄새를 맡고 안다고 합니다. 대단합니다. 그게 바로 부모의 마음입니다. 관계가 그런 것들을 가능하게 해줍니다.
그런데 오늘 이 성경에 보니까 상거가 아직도 먼데 “봤다” 하는 동사가 나오는데 그것도 아버지였고, 그 다음에 아버지가 그를 보자 즉시 아버지는 어떤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까? 성경에 뭐라고 나옵니까? 아들을 보는 순간에 어떤 마음이 들었는가 하면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많은 감정 가운데 이유 없는 감정 가운데 하나가 사랑의 감정입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 불쌍히 여김을 받을만한 가치가 있고 없고 그런 것은 상관이 없이 아버지가 아들을 보았을 때 생각난 것이 자기에게 빼앗아간 유산이나 아니면 먼 나라에 돌아다니면서 타락해서 동네에서 누구의 아들이 눈도 안감은 아비의 재산을 빼앗아가지고 이방 먼 나라에 가서 허랑방탕하게 다 쓰고 그랬다고 하더라 하는 아들의 타락으로부터 비롯되는 자신의 불명예, 이런 것들이 생각난 것이 아니라 아들을 딱 본 순간에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 들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측은히 여기는 마음은 논리를 초월한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에 있어서는 논리가 필요하지만 사랑에 있어서는 사실은 논리보다는 측은히 여기는 아가페적인 감정이 더 귀하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런데 아들을 보자 아들이 빼앗아간 유산이나 그가 자기에게 안겨준 불명예라든지 이런 것들이 생각이 난 것이 아니라 아들을 보자 그 마음속에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들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아버지가 그 아들을 보았을 때 그 아버지는 아들 자체가 살아서 돌아왔기 때문에 아버지에게는 말할 수 없는 기쁨이었고 말할 수 없는 은혜였습니다. 그러니까 그 아들을 보는 순간에 측은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측은히 여기는 마음, 그것이 바로 아가페적인 사랑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랑의 마음이 들게 되면 그 다음에는 논리는 무너지는 것입니다. 어제도 그랬습니다. 죽일 놈이고 나쁜 놈인데 다 생각하면 자기의 오빠를 죽였는데 그런데도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 드니까 그 모든 논리가 무너지는 것입니다. 사실은 그런 논리적인 생각 때문에 사랑을 못하게 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그런데 측은히 여기는 마음은 그런 모든 논리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정말 맹목적적인 것인가, 그런 맹목적적인 것이 아니라 그렇게 측은히 여김으로 말미암아 다른 모든 것들이 생각나지 않고 내가 여기 있고 저기에 내 아들이 오고 있다고 생각이 나지 않았던 것은 무엇인가 하면 그만큼 그 관계를 갈망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관계에 대한 사모함과 관계에 대한 집념이 없으면 그 존재 자체가 귀하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친구도 마찬가지고 부부도 마찬가지입니다. 관계가 귀해야지 그 사람이 귀한 것이지 관계가 귀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그 사람이 뭐가 귀합니까? 아무 것도 아닙니다. 같은 집에서 밥 먹고 매일 그래도 그 사람이 남처럼 여겨지는 것입니다. 매일 얼굴을 같이 보고 그래도 남처럼 여겨지는 것입니다.
이 아버지에게 있어서는 돌아온 그 아들을 보는 그 순간에 아버지의 마음속에 있는 그 관계에 대한 열망이 아들이 아버지께로 돌아오자 그 모든 유산이나 잃어버린 그런 것들, 과거의 행적 그런 것으로 말미암아 자기가 가슴 아팠던 그 모든 것들 이런 모든 것들이 사라지고 오직 지금 그가 거기 살아서 와 있고, 와 있으므로서 말미암아 내가 소망하는 그 관계가 그 아들이 온 것을 통해서 다시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그 희망과 사랑이 아버지의 마음에 가득 차오르게 된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그렇게 그런 사랑으로 충만하고 가득 차게 되었을 때에 그때 아버지가 그를 한없이 측은히 여기면서 아버지가 달려갔다고 말합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고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른은 이렇게 뛰거나 울거나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체신이 없다고 그럽니다. 어른들은 기뻐도 입가에 미소를 지으면서 안 기쁜척하고 슬픈 일이 있어도 입술을 깨물면서 아래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눈물을 참고 그러는 것이 말하자면 정상적인 어른의 행동거지입니다. 그런 사고방식을 이스라엘 사람들도 똑같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의 문화와 우리나라의 문화가 상당히 일치하는 부분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런 모든 것을 버려두고 그리고 달려가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체통도 없이 막 달려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이를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가 지금 돌아온 것은 무엇을 하다가 돌아온 것인가 하면 돼지우리에서 돼지를 치다가 쥐엄열매를 찾다가 그것도 없어서 돌아온 몰골이니 말할 수도 없는 몰골인데 아버지는 기꺼이 그 아들에게 달려가서 그 아들을 끌어안고 목을 어긋나게 안고 그리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사랑, 존재 자체가 귀하니까 그 아이가 무슨 옷을 입었든지, 그가 무엇을 하고 왔든지, 그가 어떻게 더럽고 불결하든지 그런 것들이 문제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씻으면 되고 닦으면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그를 끌어안고 입을 맞추고 그리고 아버지는 말하지 않았지만 이미 이 행동을 통해서 아버지가 그 아들을 갈망하는 것은 오래 전부터 아들이 집을 나갔을 그때서부터 혹은 그 이전에 집을 나가기 전부터 그 관계를 얼마나 아버지가 갈망하고 있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불변의 갈망을 가지고 그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다리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마음이 뜨거워지다가 식어지고, 식어지다가 다시 생기고 하는 이런 순환을 되풀이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한결같은 갈망을 가지고 우리와의 관계를 갈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우리와의 관계를 갖고 그 관계 속에서 우리와의 관계가 가져다주는 풍성한 삶을 누리게 하려고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다리시는 것은 우리의 인격적인 결단입니다. 깊은 인격적인 결단입니다. 내가 하나님과 관계를 갖고 그 안에서 기뻐하는 이것이야말로 복되다고 하는 그런 깊은 인격적인 결단과 사모함들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 갈망은 낮에도 계속되었고 밤에도 계속되었고 언제든지 계속되었습니다. 언제나 그 자리에 와서 아버지는 그 아들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아버지에게 있어서 아들이 집을 나간 다음에는 아들의 문제보다도 아버지에게는 더 큰 문제는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세계의 역사가 뒤바뀌는 것보다도 더 소중한 것은 한 사람의 영혼이 하나님께 돌아오는 일입니다. 그것보다도 더 가치 있는 일은 아버지에게 없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오늘도 탕자를 동구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오늘도 우리를 그렇게 돌아오도록 기다리고 계신 것입니다. 그것은 형식적인 돌아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아들은 아버지를 기뻐하고 아버지는 아들을 기뻐하는데 그 아들이 아버지가 아들을 기뻐하는 마음을 알고 아버지를 즐거워하는 그런 관계가 풍성하게 이루어지기를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들이 하는 말이 뭐라고 그랬는가 하면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이것은 연습한 것입니다. 돌아오기 전에 내가 아버지께 가면 이 말을 꼭 해야지, 그리고 이제 연습한 것을 그대로 마음에 담았다가 와서 아버지 앞에 고백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은 무엇인가 하면 아버지를 즐겁게 하기 위한 말이 아니라 실존적인 고백입니다. 진심으로 자기 자신이 이 고백을 아버지 앞에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아들은 진정한 사랑의 고백이라고 그럴까, 아니면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자기가 누구인지를 아는 마음으로 드린 이 고백이 최초의 고백이었는지는 모릅니다. 그 고백은 무엇이었는가 하면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아버지의 아들이라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결국은 아버지의 곁을 떠나고 방탕한 삶을 살고 모든 궁핍 속에서 하나님께 돌아온 다음에 두 가지의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깊이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깨달은 사실은 무엇인가 하면 아버지가 나와 관계를 계속 맺고자 하시는데 내가 관계를 계속 하는 것을 내가 감당할 수가 없는 가치 없는 인간이라고 하는 자신의 무가치한 깊은 인식을 이제 탕자, 아들이 하게 된 것입니다.
우선 첫 번째로 하늘과 아버지에 대해서 죄를 얻었다고 나오는데 이 아들은 결국은 아버지를 떠난 방탕한 삶 속에서 오는 모든 육신적인 고통과 궁핍을 경험하고 결국은 그 하나님의 존재, 신적인 존재 그리고 이 세상에서 자기의 잘못된 삶이 무엇보다도 아버지를 진노하게 하고 아버지를 슬프게 했던 이 삶이 또한 그 육신의 아버지가 아니라 인생을 창조하신 관계에 있어서 창조주이신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불순종이었고, 반역이었고, 그에 대한 모독이었고, 죄악이었다고 하는 사실들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을 비쳐보는 모든 반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일어나지 않는 것들은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교회에 와서도 눈물을 흘리고 기도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만 그 사람들이 모두 자신의 모습을 하나님 앞에 비쳐봤기 때문에 눈물을 흘리고 회개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그 이후에 삶을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떠나갈 듯이 어깨를 들먹이면서 울면서 기도했는데 씻고 나서 며칠 지나고 나면 완전히 옛날 사람 그대로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 자신이나 아니면 우리 자신의 생각 속에 우리를 비쳐보아서 이런저런 후회들을 하는 것들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고 그리고 자신의 죄를 거룩한 하나님의 빛 앞에서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그렇게 자기에게 갈망하심에도 불구하고 그 관계를 저버리고 살아갔던 자신의 삶의 비참함을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탕자가 이런 회개를 깊이 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이제 자신의 한없는 무가치함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전에 아버지의 집에서 편안하게 먹고 살면서 아버지와 관계를 가지고 그 아버지의 사랑을 받으면서 산 것이 내게는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버지 없는 삶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없는 삶을 경험하고 거기서 오는 영혼의 궁핍과 육신의 궁핍과 죽음 직전에까지 이른 그 모든 고통을 경험하면서 이 아들은 하나님을 의뢰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하나님께 은혜를 받으면서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축복된 삶인가 하는 것을 아버지와의 관계 속에서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보면 어떤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게 되는가 하면, 이런 극적인 하나님과의 만남, 그런 사랑을 알고 싶어서 이게 밋밋한 삶이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내가 타락해보면 어쩌면 이런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의 생각이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바는 우리가 진심으로 타락을 하고 고통을 받아봐야지만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들이 그 사랑을 깨닫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그리고 생각을 하면서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그 고통 하는 세상과 그리고 하나님을 떠나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영육간의 곤궁함과 그 다음에 곤고함과 죄악의 사슬 속에서 매여서 어둠의 그늘 아래서 신음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삶을 보고 성경의 증언을 듣고 귀를 기울이면 그 하나님의 은혜와 그 관계를 누리면서 그 사랑을 받으며 관계의 풍성함 속에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축복인가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깨닫게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과 같은 사람은 깊이 타락한 것이 성경에 기록되지 않았어도 그는 경건한 부모 밑에서 태어나서 경건하게 훈련을 받고 경건하게 하나님을 찾았지만 그런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누리는 축복들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삶으로 보여준 사람입니다. 만약에 자기가 타락하기만 하면 즉시 하나님을 찾을 것이고 그러면 하나님이 나를 찾아오실 것이라는 그런 생각은 자기가 누구인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탕자는 돈이 떨어지니까 아버지가 생각이 났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이 돈이 떨어지면 하나님을 찾는가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은 생각보다 훨씬 완고합니다. 자기 자신의 전적인 무가치를 아버지 앞에 깊이 고백을 하면서 “나는 아버지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할 수 없나이다.” 쉽게 이야기하면 이제는 아들이 아버지 집에서 받는 대우, 그런 것들을 가지고 아버지, 나는 아버지 집에서 밥 세 그릇은 먹을 자격이 없습니다. 그것을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아들로 인정되는 것들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버지의 집을 떠날 때 가지고 있었던 이 생각들이 얼마나 바뀌었는가 하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집에서 유산을 받고, 아니면 많은 물질을 소유하고 부를 누리고 많은 것들을 소유하고 그것들을 누리고 좋은 집에서 살고 이런 육신적인 고통을 경험하지 않고도 편안하게 살 수 있는 그런데서 그 아버지 집에 있는 것들을 느낀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의 관계 속에서 아들의 특권을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아들이 말한 것은 무엇인가 하면 아버지의 집으로 내가 돌아갈 때 그 아버지 집에서 내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특권이 무엇인가 할 때, 먹고 입고 유산을 받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인정을 받고 아버지가 자기를 아들이라고 불러주고 사람들이 자기를 그 아버지와의 관계를 갖고 있는 아들이라고 불러주는 것, 이것이 가장 커다란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아들이 지금 생각이 바뀌니까 뭐라고 말하는가 하면 “나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할 수 없나이다” 이 감당할 수 없다는 뜻은 원래의 뜻을 이야기하자면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리질만한 가치가 없는 존재입니다” 그런 뜻입니다. 그것을 깊이 깨달은 것입니다.
이전에는 그 아버지와 관계를 갖고 있는 그 자체가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고 그래서 그 관계를 끊어버리기 위해서 먼 나라로 떠나버렸습니다. 유산을 정리하고 그리고 돈으로 바꾸어서 먼 곳으로 떠나서 아버지의 간섭과 관여가 미치지 않는 곳으로 나아가 버렸습니다. 그러나 그가 진정으로 회개하고 아버지가 누구이고 그리고 자기의 아들 됨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되었을 때에 이 사람은 깊이 인식하게 된 사실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일, 아버지의 집에서 내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특권은 내가 먹든지, 마시든지, 굶든지, 먹든지 그런 것들이 문제가 아니라 나 같은 인생이 아버지와 관계를 맺은 아들이라고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그 아버지에게 인정을 받는 것, 이것 자체가 나에게는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의 놀라운 특권이라는 사실을 이 아들이 깊이 느끼고 체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아들의 간곡하게 진심으로 털어놓은 말,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할 수가 없나이다” 그래서 어떤 사본에는 “나를 품꾼 중에 하나로 여겨주옵소서” 나와 있습니다. 그러니까 뭔가 온 마음과 영혼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신앙고백 차원의 고백을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하고 아버지께로 들려오는 뭔가의 답변, 반응을 기대를 했습니다. 숨을 죽이면서 기대를 했는데 재미있는 사실은 아버지가 이 아들의 간절한 고백, “아버지여 나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할 수 없나이다” 이렇게 고백을 했는데 아버지는 거기에 대해서 대꾸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무엇이라고 그랬는가 하면 전혀 그 아들의 발언과는 상관이 없이 종들에게 명령을 했습니다. 제일 좋은 옷을 가져다가 입혀라.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보니까 아들이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벌써 여기 다 나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옷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리고 반지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신발을 잃어버렸습니다. 그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그 아들이 결국은 세상 속에서 명예, 혹은 신분의 걸맞은 모든 것들을 다 잃어버린 것입니다. 옷은 신분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명예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에 어른들이 옷과 모자를 벗어놓고 누군가가 그 옷을 밟거나 그 옷을 넘어가거나 하면 인격적인 모독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에서도 이 옷은 그런 신분, 아니면 성도의 행실, 명예 이런 것들과 깊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벌거벗었다는 것은 수치입니다. ‘내게 네게 옷을 입히리라’ 하나님께서 명예를 회복시키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아버지를 떠나 살게 되면 이렇게 모든 명예와 그리고 좋은 행실들을 다 잃어버립니다.
여러분, 소금이 짠 맛을 잃어버리게 되면 밖에 던지우는데 밖에 던지우면 환영을 받을 것 같았는데 밖에 던지우자마자 사람들에 의해서 밟혀지는 것입니다. 소금은 길 밖에 나가지 않고 부뚜막에 있을 때 최상의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짠 맛을 유지하고 있을 때 소금은 최상의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거기가 바로 소금이 있어야 할 자리이고 그것이 바로 소금의 본분일 뿐입니다.
아들은 그 아버지의 집을 떠나고 아버지와의 관계를 청산하고 싶어 하는 그 순간서부터 모든 명예를 다 잃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신분에 걸맞은 그런 명예를 다 잃어버렸습니다. 그 아들이 마지막에는 이스라엘이 가증하게 여기는 돼지우리를 치는 목부의 신세까지 되었을 때 그는 바닥까지 내려갔습니다. 아버지께로 돌아오자 아버지께서 다시 옷을 입혀주신 것입니다. 그 옷은 품꾼의 옷이 아니라 아들에게 입히는 옷이었습니다. 즉 제일 좋은 옷, 아직까지 입혀본 적이 없는 가장 좋은 옷, 어쩌면 아버지는 이 아들이 돌아올 때를 기다리며 사람들을 시켜서 이미 가장 훌륭하고 좋은 옷을 만들어놓고 계셨는지도 모릅니다. 그 옷을 내어다 입혀라. 다 씻긴 다음에 그 옷을 입혔습니다. 그리고 손에다가 반지를 끼워주었습니다. 그때 반지는 그냥 반지가 아니라 반지의 도장이 새겨져서 찍으면 권한을 행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옛날에 ‘벤허’ 영화를 보면 그 벤허가 로마 귀족으로부터 양아들이 되면서 반지를 부여받습니다. 이걸 풀고 도장을 찍으니까 사람들이 그 문서를 보면서 벌벌 떠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시대에는 이 반지가 권리를 행사하는 인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제 무슨 권리가 이 아들에게 남아 있었겠습니까? 자기 몫의 유산을 미리 주었고 주니까 자기가 다 허랑방탕하게 다 쓰고 돌아왔습니다. 이제는 법적으로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는 다시 반지를 끼워주신 것은 그 의미는 다시금 그에게 돌아갈 유업을 인정했다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먹어 삼키고 왔는데 그러나 아버지께로 돌아와서 그 관계로 돌아가기를 원한다는 진실한 고백을 하자 그 아버지는 그에게 인장을 끼워준 것입니다. 이것이 그에게 얼마나 커다랗고 감격적인 사건이었는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아버지가 아들이라고 불러주는 것도 감당할 수 없는데 그 위에 옷을 입혀서 신분을 다시 회복시키시고 인장을 끼워주어서 권세를 주시고 그 다음에 잃어버린 신발을 다시 신기신 그렇게 완전한 권위 있고 위엄이 있고 존귀한 아들로 주님께서 세워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하게 살아가는 길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인정하고 그 분과 관계를 누리면서 살아갈 때 가장 존귀해질 수 있고 영예로워질 수 있고 권세 있어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신앙을 버리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싫어해서 세상 밖으로 나가게 되면 거기에서 모든 것을 다 소유할 수 있을 것 같으나 그러나 사실은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하나님의 자녀됨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이 우리를 사랑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버릴 때까지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어버리고 자기 앞으로 달려와서 그 품으로 안긴 사람이 세상에 매력을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세상에는 매력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은 꼭 그런 아들과 결혼하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제일 세상이 그 하나님의 자녀를 향하여 속이 탈 때는 언제인가 하면 아버지의 손을 놓을까 말까 그럴 때 세상은 집요하게 달려들어서 결국은 그 손을 놓고 자기의 품에 안기게 만드는 것입니다. 일단 그것을 놓지 않고 붙들고 있는 그 순간은 세상이 와서 무릎을 꿇고 세레나데를 부르면서 구애를 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태양입니다.’ 그러면서 막 숭배하는 것입니다. ‘와라’ 새끼손가락이라도 붙들고 있는 순간에는 그러다가 일단 딱 놓고 고개를 돌리고 품에 안기려고 막 달려가면 한번 안고 발로 차는 것입니다. ‘더러운 놈’ 그렇게 밟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도 끊어졌고 세상과의 관계도 끊어졌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멀어진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과 관계없이 세상 속에서 즐기면서 사는 사람들보다 훨씬 불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 세상도 이제 그의 편이 아닙니다. 그는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한번 하나님과 결혼했기 때문에 자기의 아내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세상이 압니다. 자기와 한번 밀회는 즐길 수 있지만 그러나 호적에 오리면서 부부가 될 수가 없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루어진 그런 관계들을 파탄시키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파탄시켜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멀어지게 만들어서 하나님을 위해서 살 수가 없는 사람으로서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으로 만드는 것이 세상의 목표입니다. 그러니까 그 목표가 달성되었으니까 이제는 더 이상 원하는 바가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일이 이루어지고 나서 이 아버지가 하는 말은, 그것으로 아버지의 마음이 풀리지를 않습니다. 그러니까 송아지를 잡아라. 황소보다는 송아지 고기가 맛이 있는가 봅니다. 송아지를 잡으라. 그리고 우리 함께 즐기자. 그러면서 하는 말이 왜냐하면 아들은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할 수 없다고 그랬는데 아버지는 아들이라 불렀습니다. 아들을 잃어버렸다가 다시 얻었노라. 아들이 언제 죽은 적이 있습니까? 죽은 적은 없습니다. 잘 살았습니다. 고생을 좀 해서 그렇지. 그런데 아버지의 눈에는 당신과의 관계를 끊고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죽은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말하기를 일락을 좋아하는 사람,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사실은 죽은 자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죽음의 의미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육체적인 죽음이지만 또 하나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것입니다. 구원은 받았지만 아버지의 아들이지만 그러나 그 관계를 누리지 못하며 사는 것은 죽음과 방불한 삶입니다. 지옥이 어떤 곳일까요? 지옥이 바로 그런 곳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것입니다. 그렇게 죽었다가 이 아들이 다시 살아 돌아왔다 그 고백을 통해서 아버지의 집을 떠난 아들을 아버지가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곁을 떠난 하나님의 자녀들을 하나님께서는 죽었다고 생각하시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은 우리가 죽은 자와 같이 살아가기를 원하시지 않습니다. 죽어 있는 사람은 감각이 없는 것처럼 영적으로 하나님을 떠나고 그 관계에서 끊어진 사람들은 죽음과 같은 신앙생활이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성경은 멀쩡하게 교회 잘 나오고 십일조 하는 사람들 보고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본질을 그러니까 자꾸 밖에서 찾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곳으로부터 시작을 하는 것입니다. 만져질 수 없는 하나님과의 관계로부터 시작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느낄 수는 있지만 손에 쥘 수가 없는 생명이 그 신앙을 모두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삶으로 표출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을 신앙적인 삶으로 이끌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게 하는 것입니다.
자, 죽은 사람은 그를 향해서 모욕하는 말을 해도 반응이 없고 발로 차도 소리가 없습니다. 아파할 줄 모릅니다. 기뻐할 줄 모르고 아파할 줄 모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고자 하는 마음의 소원도 없고 사랑함도 없고 그 다음에 아픔도 고통도 없고 갈망도 없는 이런 사실상의 죽은 자와 같은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탕자들입니다. 그런 죽어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어떻게 살 수 있겠는가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러니까 어떻게 하든지 그런 하나님과의 관계로 돌아가고 그 관계를 우리가 누리고 그 관계로부터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과 은혜와 능력들을 공급을 받아야지만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이 성립을 하는 것입니다. 죽어 있는 사람들이 그 형식 속에서 위로를 받으면서 왔다가 갔다가 하는 것이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죽어 있는 삶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이 비유를 통해서 우리에게 이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아버지는 한 죄인이 회개하고 돌아왔을 때에 아버지의 심정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한 아들이 회개하고 자기에게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자기에게 있는 제일 좋은 옷을 그에게 입혔습니다. 그리고 그 유산을 다시 소유할 수 있는 반지를 나누어 주었습니다. 아마 이 아들이 그 반지를 끼고 나가서 수표를 긁고 도장을 찍으면 지불은 아버지가 책임져 주셨을 것입니다. 그런 모든 권세를 주고 그런 것만 가지고는 만족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뭐라고 그랬습니까? 우리 모두 즐기자! 우리 모두 신나하자! 우리 모두 즐거워하고 기뻐하자! 왜? 죽었던 내 아들 하나가 돌아왔다.
그러니까 교회가 탕자들로 가득 찬 집단인지 아니면 하나님을 기뻐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이 모인 집단인지 하는 것을 가늠할 수 있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한 영혼이 구원을 받고 그가 회개하고 새 사람이 되었도다 할 때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살아있는 교회는 모두 자기 일처럼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아 그 형제가 하나님께로 돌아왔대! 오늘 저 자매가 전혀 주님을 몰랐었는데 회개하고 구원을 얻게 되었대! 오! 너무 놀랍구나! 야 그런 일이 일어났대! 이 소식을 모르고 있는 우리의 지체가 누구지? 내가 그에게 가서 빨리 알려줘야지. 야 너는 그 소식을 들었니? 아무개 형제가 전혀 하나님을 몰랐었는데 오늘 말씀을 듣고 회개하고 새 사람이 되었데. 뒤에 있는 자매가 어깨를 들썩이며 눈물을 흘리고 기도하는 그 형제의 모습을 보고 하나님 앞에 감사했대. 오! 할렐루야. 우리 모두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자. 이것이 살아 있는 교회입니다.
(찬양)
오 예수님 내가 옵니다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것입니다. “아이고 유별도 끔찍이 떠네. 아이고, 뭐 저 혼자 기도하나. 저 혼자 예수를 믿나. 공중도덕심도 없어. 뭐 저래. 아이고, 우리 교회 교인도 아니잖아. 어디서 굴러먹다가 와 가지고 유별은 혼자 떨고 있어. 아이고, 저 우는 것 좀 봐. 코나 닦고 울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는 “누가 아버지를 떠났대.”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가 “아이고 허랑 방탕하고 신나겠네. 나는 언제나 휴가 가나.” 그러는 것입니다. “누가 잘못된 죄의 길에 돌이켜서 회개를 했대. 아 우리 교회에서 그렇게 속 썩이더니 교회에 상처를 많이 주고 우리의 목회자의 마음을 아프게 하더니 몇 년이 지난 다음에 그 사람이 놀랍게 회개했대.” 그러니까 그런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리고 “오 주님 감사합니다. 우리가 오늘 즐깁시다. 기분입니다. 오늘 저녁 내가 내겠습니다. 아무개 형제가 회개했대. 내가 오늘 저녁 내겠습니다.” 그러면서 자기 일처럼 기뻐하는 것입니다. “어느 집에 가서 전도지를 전하니까 그 복음을 받아들이고 내일 우리 교회 나오겠대. 아 기쁘다.” 옆에서 ‘누가 저만 전도하나 나도 바빠서 그렇지 시간만 나면 너보다 더 잘한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교회가 처하고 있는 가장 큰 문제는 기뻐해야 할 일에 있어서 기뻐하지 않는 것입니다. 한 영혼이 하나님 앞으로 돌아왔다고 하더라. “오 주님 감사합니다.” 누가 실족해서 넘어졌대. “오 주여. 오 하나님. 어찌 이런 일이. 저 영혼들을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그게 교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멀리 떠나서 사니까 그런 하나님의 기쁨과 즐거움에 동참할 줄 모르는 것입니다. 이게 교회가 죽어 있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누가 나보고 그랬습니다. 목회의 소명이 무엇입니까? 그래서 목회라고 하는 것은 꼭 신학교를 가서 목사가 되어서 목회를 하는 것만이 목회가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주일학교 선생님이 되어서 한 영혼을 붙들고 전도하고 말씀을 가르치고 실족하면 위해서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고 그런 모든 것들이 아주 훌륭한 목회입니다. 구역장이 되어서 영혼들을 돌아보는 것이 훌륭한 목회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제 목회를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목회의 소명이 무엇이냐. 난 설교자의 소명과 목회자의 소명은 같은 선상에 있지만 약간 차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두 소명이 함께 있어야지만 훌륭한 목회자의 설교자가 될 수가 있습니다.
하나는 그 온 세상이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하나님을 알기를 원하는 그 불같은 마음. 그래서 이 속에서 울컥 울컥 피가 솟구치는 것처럼 진리의 말씀을 토해놓지 않고는 이 가슴이 눌려서 살 수 없는 것. 이런 것이 설교의 소명입니다. 그런데 목회의 소명은 그것하고는 약간의 색깔이 틀립니다. 그것은 전자만 가지고 있다면 그 사람은 부흥사를 해야 합니다. 어제 이야기를 했잖아요. 그 목회와 설교의 어려움을. 목회자는 그것만 가지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얻든지 아니면 다 지옥에 가든지 둘 중에 하나를 해라 맨날 그 이야기만 한다면 그 사람은 목회자로서 적합하지 않습니다.
목회자에게 그러면 목회의 소망이 무엇입니까? 그렇게 누가 물을 때 소명이 있는가 없는가 하는 증거가 무엇인가 하면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한 사람이 신기해 보이고 한 영혼이 하나님께로 돌아 왔다고 그럴 때 내 마음에 잔잔한 기쁨이 있습니다. 그것이 목회에 동참할 수 있는 자격입니다. 그것이 없으면 목회는 불가능합니다. 가르치는 아이들이 혹은 청년들이 혹은 주일학교 학생들이 구역 식구들이 다 떨어져 나가서 이리에게 찢기고 양의 사자에게 먹히고 이빨에 찢기고 하는데도 그냥 고소하다고 하며 내 말을 안 듣고 그 곳으로 가지 말라고 했는데 그 곳으로 가더니 씹혀 먹히고 있다니 참 안됐다. 내 말을 안 듣는 사람은 다 저렇게 돼. 그러는 것은 목회의 마인드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이 아버지는 그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나 혼자 즐거워하는 것 가지고는 안 되고 다 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송아지를 잡아라. 그리고 음식을 차려라. 풍악을 울려라. 풍류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야 빨리 전화해. 실내악단 좀 불러와. 불러와 가지고 가격이 얼마냐 가격이 문제가 아니라 다 오라. 그래. 자! 울려라. 동네 사람들 다 와서 그 사람들과 함께 먹으면서 야 즐거워하자. 무슨 일이 있습니까? 저 아들이 죽었다가 살아왔대. 먹고 마시고 하는 것입니다. 교회 속에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정서가 살아있습니다. 한 영혼이 하나님 앞에 돌아 왔을 때 기뻐하는 것입니다. 누가 여러분에게 와서 누가 은혜를 받았대. 그렇게 말하면 아이고 감사하네. 정말 감사하네. 주님의 놀라운 은혜구나. 그렇게 뺀질이 같이 이리 뺀질, 저리 뺀질, 차돌맹이처럼 미꾸라지처럼 빠져 나가더니 결국은 하나님을 만났구나.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가.
바울이 그랬습니다. “너희 중에 누가 실족하지 않으면 내 마음이 고통하지 아니하냐” 그러면서 그 집을 나간 자식, 하나 하나를 가지고 그 아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기뻐하고 슬퍼하시는 것이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그런 마음들을 하나님은 우리들의 교회가 나누어 갖게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는 볼품이 없는 그 한 추한 아들의 그렇게 환영하는 사람이 없는 서글픈 삶이었지만 아버지의 집에서는 모든 종들이 일어서고 아버지가 일어서고 그리고 박수를 치고 송아지를 잡고 잔치가 벌어졌던 것처럼 오늘도 여러분 하나가 하나님께 회개하고 주님과의 관계로 돌아가면 천국에서 하나님 아버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보좌 위에서 스데반의 영혼을 받으시는 것처럼 일어섰는데, 하나님이 일어섰는데 천사들이 누워있겠습니까? 천사들이 벌떡 일어났는데 신약의 성도들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세례 요한부터 시작해서 최근에 죽은 박 집사까지 모두 벌떡 일어나서 박수를 치며 할렐루야, 신약의 성도들이 일어났는데 구약의 성도들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아담부터 시작해서 마지막에 말라기 선지자까지 모두 일어나서 주님 앞에 영광과 찬송을 다 드리는 것입니다. 팡파레가 울려 퍼지고 손에 깃발을 들고 돌아온 탕자, 아무개 집사를 환영하는 것입니다. 돌아온 탕녀, 아무개 형제자매를 위해 끝이 보이지 않는 새카만 성도들이 환영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보이는 앞에서 옷을 입히고 신분을 회복시키시고 그리고 권세를 주시고 신발을 신기셔서 아버지의 집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며 거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돌아갈 만하지 않습니까? 기도하겠습니다.
5.새벽예배 모음 ①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여호와께서 공의로운 일을 행하시며 억압 당하는 모든 자를 위하여 심판하시는도다 그의 행위를 모세에게, 그의 행사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알리셨도다 여호와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자주 경책하지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 우리의 죄를 따라 우리를 처벌하지는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우리에게 그대로 갚지는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의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그것은 바람이 지나가면 없어지나니 그 있던 자리도 다시 알지 못하거니와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그의 의는 자손의 자손에게 이르리니 곧 그의 언약을 지키고 그의 법도를 기억하여 행하는 자에게로다 여호와께서 그의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그의 왕권으로 만유를 다스리시도다 능력이 있어 여호와의 말씀을 행하며 그의 말씀의 소리를 듣는 여호와의 천사들이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그에게 수종들며 그의 뜻을 행하는 모든 천군이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여호와의 지으심을 받고 그가 다스리시는 모든 곳에 있는 너희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시 103편)
오늘 이 시를 쓴 사람은 다윗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사람들로 말미암아 고통을 받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의 대부분의 고통은 이 세상에 있는 물질이나 환경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우리의 고통은 사람을 통해서 옵니다. 때로는 믿었던 사람을 통해서 배신을 당하거나 사랑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오히려 보복을 당하거나 그런데서 우리의 고통이 오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1995.7.31 온가족 여름수련회 새벽예배
다윗은 하나님을 믿으면서 살아갔지만 그러나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언제나 사람들로 말미암아서 고통을 당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이 다윗처럼 인복이 없는 사람도 거의 없을 것입니다. 늘 사람을 통해서 그의 인생에 고통이 왔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사람으로 말미암아 당하게 되는 그 고통은 우리가 선하고 악하고 심지어는 우리가 믿음이 좋고 나쁘고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우리가 사람으로부터 만남으로부터 고통을 당하게되고 어려움을 당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사람들로부터 고통을 당하고 어려움을 당할 때 이런 환경을 지나면서 다윗은 한 지혜를 배웠습니다. 그것은 사람들 속에서 사람들로 말미암아 고통을 받고 그런 속에서 큰 구설의 소용돌이에 휘말려서 고통을 받으며 오해를 받고 시련을 당하게 될 때에 이 다윗은 아마 배운 지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피하는 것이야말로 최선의 해결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은 그래서 오늘 말합니다.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두신 은혜, 곧 인생 앞에서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하나님께로 피하기 위해서 사람들로부터 도망하는 사람 그 사람을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신 그 놀라운 은혜를 경험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이런 신앙의 많은 요소들은 모두가 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경험을 통해서 체험을 통해서 신앙이 무엇이고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시는지를 인생들이 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다윗과 같이 하나님을 향하여 피하는 사람들에게 피난처가 되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말하기를 인생 앞에서 사람으로 말미암아 많이 고통을 받을 때 그 때에 하나님께 피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고 했는데 그 사람을 가리켜서 주를 두려워하는 자라 그랬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 그를 위하여 쌓아두신 은혜 곧 인생 앞에서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 깨달았던 것입니다.
오해를 받거나 비난을 받거나 혹은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원망을 받을 때에 그 때에 사람과 더불어 싸우고 사람과 더불어 다투지 아니하고 고요히 하나님께로 피하고 그 하나님 앞에서 사정을 아뢰며 그 하나님과 은밀히 교제를 나누면서 그 하나님으로부터 새 힘을 공급받으며 사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고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당신에게로 피하는 사람에게만 베풀어 주시는 축복을 베풀어 주신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놀라운 은혜를 이 시인에게 깊이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인생을 살아오면서 수없이 많은 세월을 보내며 그렇게 훌륭한 인복을 같지도 못했고 그랬지만 그렇게 사람들로 말미암아 고통을 받고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하나님께로 피하게 되니까 하나님께서는 그 때마다 이 시인에게 사람들로부터 배반당할 적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의지하게 만들었고 인생으로 말미암아 고통을 받을 때마다 하나님 안에 있는 평안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이 시인에게 하나님께서 깊이 알려주시는 그런 은혜를 오히려 받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들이 얼마나 많은 시간들을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기를 원하지만은 그러나 우리의 마음속에 이 사람들을 향한 원망과 미움이나 이런 것들 때문에 우리의 영적인 삶에 방해를 받는지 모릅니다. 우리들이 정말 이러한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져서 하나님 앞에 은혜받기 위해서는 우리가 여호와께로 먼저 피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고 그리고 사람들로 말미암아 받는 그런 모든 고통으로부터 우리들이 자유롭게 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과 더 긴밀해지고 하나님께로 피하는 이러한 신앙이 우리들에게 있어질 때에 그 때에 우리들이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그 참된 평안으로 사람들을 용서하고 사랑하고 이해할 수 있는 이러한 힘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 시간에 하나님에 그 은혜로우심, 그리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당신에게만 피하는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예비하신 그런 은혜를 충만이 여러분들이 느끼면서 하나님 앞에 여러분의 사정을 아뢰는 그런 시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6.새벽예배 모음 ②
“이에 그들이 그들의 고통 때문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가 그들의 고통에서 그들을 구원하시되 그가 그의 말씀을 보내어 그들을 고치시고 위험한 지경에서 건지시는도다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시 107:19-21)
1995.8.1 온가족 여름수련회 새벽예배
사람이 누구든지 인생을 살아가면서 고통의 문제만큼 인간을 힘들게 하는 것이 없습니다. 누구든지 참 이 고통의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누구든지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잃어버리고 그리고 좌절하기가 쉽습니다. 그런데 신앙의 영역에서 보면 이 고통의 문제만큼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을 참 신비하게끔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을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고통은 언제나 그 고통 자체가 아니라 그 고통 자체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고자하는 그런 메시지를 우리들이 받아야합니다.
(예화) 애벌레에서 나방으로 진화되는 과정이 천천히 이루어지는 모습을 보고 어느 부인이 가위로 껍질을 잘라주었는데 날아가지 못하고 땅에 끌리면서 날아가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 깨달은 사실은 아픔과 고통을 경험함으로서 하늘을 향해 날을 수 있는 강한 몸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은 이야기
그러니까 우리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고통의 문제를 그렇게 간단하게 동정심만 가지고 바라보는 것도 우리들이 삼가야 되는 일입니다. 오늘 여기서도 시인이 바로 큰 고통을 만났습니다. 인생을 살면서 그런 큰 고통을 만나게 되는데 그런데 그 고통 속에서 하나님이 자신의 고통의 문제를 치유하시는 것을 이 시인이 깊이 경험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치유하시는 데는 거기에는 몇 가지 정해진 순서가 있다는 것입니다. 엄격하게 이 절차를 따라서 고쳐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절차를 자꾸 뛰어 넘으려고 하는데 그것은 인간의 다급한 마음이고 하나님께서는 철저하게 그런 순서들을 밟으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고통가운데 있게 되었을 때 하나님의 치유를 경험하는 사람들은 그 고통의 문제를 하나님께 의뢰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신앙입니다. 하나님을 의뢰하는 마음입니다.
그러니까 그 고통이 크면 클수록 사람들은 말하자면 하나님 앞에 그 고통의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갑니다. 그런데 고통의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만 그러나 그 고통의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간구하고 기도하면서 개선이 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과 나 사이의 관계가 개선이 되는 것입니다. 바뀌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처음에는 몰랐지만 자신의 인생이 절박한 문제를 들고 하나님 앞에 늘 나아가서 간구할 때마다 무엇을 보게 되는가 하면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를 보게 되고 하나님의 그 사랑을 느끼게 되고 하나님만으로 자기가 만족하고 하나님 자체를 기뻐하지 아니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간구하고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정말 진실하게 예배를 드리게 되면 또 진실하게 기도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자신의 삶 전체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형식적인 예배와 형식적인 기도, 형식적인 신앙생활에 그 커다란 재앙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익숙해지게 되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예배 앞에 나오고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에, 하나님을 진심으로 찾을 때에, 자신이 어떤 삶을 살았는가를 보게 하시고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거울이 되게 하셔서 자신의 삶을 다시 고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예배와 기도를 통해서 다시 하나님 앞에 자신의 모습을 점검하고 또 다시 기도할 힘을 얻게 되고, 그리고 그렇게 기도하면서 삶을 바르게 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되고, 그래서 하나님께서 늘 우리를 인도하시고 고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깨어있는 신앙을 가지고 있을 때에는 하나님 앞에 제사드리고 하는 일들이 자신의 신앙에 엄청난 도움을 주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즉시 하나님이 자신의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신다는 사실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가면서 형식밖에 남지 않게 되면 그 다음에는 그런 것들이 전혀 자신의 신앙에 도움을 주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이 오늘날 우리들 가운데서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배하고 헌금하고 그러는 것들이 자기의 신앙에 거의 도움을 주지 않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람과의 관계가 어떠한지를 돌아볼 수 있는 그런 힘을 예배 속에서 상실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자기 자신이 그 형식적인 삶 속에서 탈피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비로소 그렇게 고통의 문제도 하나님께서 정하신 일정한 그 절차들과 과정들을 거치면서 하나님은 고통의 문제를 통해서 우리를 새롭게 하시고 또 우리는 그 고통의 문제를 통해 하나님 앞에 기도하므로 해결함을 받는 그런 관계로 나아가서 문제도 해결되고 하나님과의 관계도 해결되어져서 결국은 세월이 지나고 뒤 돌아보면 내게 고난당한 것이 유익이라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고난당한 후에는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도다 하면서 그런 고통스러웠던 시절로 인해서 오히려 주께로 더 가까이 다가왔다 이렇게 말 할 수 있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입니다.
그런데 그게 무엇인가하면 큰 근심 중에서 여호와께 부르짖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것이 내 힘으로는 안 돼. 정말 여호와의 그 은혜와 그 하나님이 손이 아니면 안 되겠다 그러면서 큰 근심 중에서도 하나님께 부르짖고 싶은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이 지점에서 실패하게 되면 그 다음에 사람은 둘 중에 하나를 해야 됩니다. 큰 근심 중에 낙담을 하던지 큰 근심 중에 자기의 방법대로 인생을 개척해 나가든지 둘 중에 하나를 해야 됩니다. 인간은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절대로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힘으로 해결해보려고 하고, 큰 근심 중에 낙심하는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그 지점에서 인간들이 하나님의 뜻을 쫒지 않으면 하나님은 기다리십니다. 언제까지. 하나님 앞에 부르짖을 때까지.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간절히 부르짖고 주의 도움을 구하고 그러기 위해서 당신 앞에 나아올 때 그렇게 하나님 앞에 부르짖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그 고통가운데에 건지시는데 먼저 어떤 일을 하시는가 하면 하나님께서는 저희들을 먼저 치려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인생을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이 고통의 문제는 단순히 그 고통의 문제만이 아니라 그 고통의 문제가 우리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좋게 변화를 시키든지 나쁘게 변화를 시키든지 변화를 시키십니다. 그래서 신앙의 영역을 떠나서라도 인생을 너무 많은 고통가운데서 살아온 사람들은 생각하는 것이나 느끼는 것들이 정상이 아닙니다. 지금 그런 고통을 받으며 살아온 사람들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고통은 우리를 정상이 아닌 사람들로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되는가하면 그런 사람들이 고통이 해결돼도 고통은 끝나고 환경은 해결되었는데 자신은 고쳐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옛날에 어머니들이나 할머니들을 보면 젊은 날에 시집살이를 하고 남편과 시부모들에게 학대를 당하고 요즘이야 그런 사람들이 있지도 않지만 옛날 시대에 살던 사람들은 그랬습니다. 나중에는 자기를 학대하던 시부모가 돌아가시고 이제 남편도 세월이 지나서 개과천선해서 정신 차리고 그리고 물질적으로도 넉넉하고 환경이 편한데 꼭 한의원에 가서 진찰을 해보면 화병이라고 그럽니다. 왜냐면 충격은 고쳐져도 환경이 오랫동안 고통을 줘서 망가진 우리 자신은 환경이 변해도 고쳐지지 않습니다. 그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우리 주위에 있는 그런 모든 것보다 소중한 것은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서 소중하게 여기시니까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먼저 그 자신을 고치시는 것입니다. 그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을 보내시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을 보니까 “말씀을 보내사” 하나님의 말씀을 보내셔서 그래서 우리의 환경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시고 또 한편으로는 우리의 영혼 속에 말씀을 보내셔서 그래서 우리를 고치고 치유하시는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우리를 치료하시는 것이 없으시면 우리는 계속해서 이 세상에서 평화를 만들고 샬롬을 만드는 그런 도구로 쓰여질 수 없습니다. 환경가운데 고통을 받게 되었지만 그러나 다 끝났습니다. 상황이 끝났지만 그러나 나는 아직 끝난 것이 아닙니다. 내 마음은 끝난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내게 상처를 주고 환경은 내게 상처를 주고 환경도 이미 다 정리가 되었고 사람들은 다 잊어버렸지만 그러나 환경이 끝나고 사람들은 잊어버려도 내 마음 속에는 이 고통의 문제가 가져다 준 상처는 해결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치유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보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말 그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을 치료하리라고 하는 간절한 소망과 사랑을 내 마음속에 지니고 있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치료하시는 역사들을 우리들이 경험하기가 어렵습니다.
(예화) 예전에 집회에 참석하셔서 말씀을 듣고 오시는데 어느 형제가 할 말이 있다며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부득불 따라오며 말하기를 요구해서 함께 하며 그의 말을 들으니 죄의 문제에 대한 고통의 문제였는데 그 다음날도 집회에 참석한 그 형제는 말씀을 듣는 순간에도 엎드려 말씀을 듣는지 안 듣는지 그런 모습을 보고 그런 태도는 그의 죄의 문제가 고쳐지지 않기에 마음이 아팠다는 이야기
하나님이 우리의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환경으로부터 우리를 건져 주시고 동시에 하나님은 말씀을 우리에게 보내셔서 그 말씀으로 우리를 고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치료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하나님이 우리 속에 있는 이런 모든 고통은 지나갔어도 고통이 가져다 준 그런 그 찌끼와 상처들을 하나님께서 새살이 돋아나게 하시고 변화시켜 주셔야 우리가 진심으로 마음으로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그 속에서 주님의 참된 사랑을 사람들에게 알리면서 살 수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10명이 있어 가서 마음을 두드리면 8명은 전부다 비정상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자기가 받았던 고통이나 이런 것들 때문에 이 속에 전부다 큰 상처를 안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다른 사람에게 또 상처를 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모든 해결은 그 상처를 능가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만나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고치시는 방법입니다. 그 말씀이 우리를 고치시고 그 말씀이 우리를 치료하시는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인생에 있어서 고통의 문제는 하나님의 능력에 손으로 건지시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말씀을 보내어서 우리의 영혼도 치료하시고 그래서 완전한 해결에 우리들이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일이 있기 전에 그 하나님의 완전한 해결을 바라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생각을 하나님 앞에 맡기고 그리고 전심으로 하나님을 구하는 주님의 손에만 우리의 인생에 문제를 향한 완전한 해결과 은혜가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 앞에 전심으로 도움을 구하는 것입니다.
주께서 상한 마음을 가지고 그리고 진실하게 하나님께 애통하는 사람의 간구의 기도를 주께서 귀를 기울이고 은혜를 베푸시지 않으면 하나님의 신실한 성품에 모순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 평범한 사실을 이미 오래 전에 시인이 경험했던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여러분들을 고통가운데서 건지시고 또 한편으로 그 고통가운데 하나님께서 말씀을 보내셔서 어두운 눈을 밝히고 그 말씀으로 우리의 마음속에 남아 있는 고통스런 찌끼들을 씻겨주셔서 그래서 우리들이 고통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 아픔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그 놀라운 은혜 이런 것들을 우리들이 가슴에 소유하고 있을 때 비로소 우리들이 사람들을 새롭게 하고 고치는 도구로 쓰여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7.새벽예배 모음 ③
“이에 백성들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드고아 들로 나가니라 나갈 때에 여호사밧이 서서 이르되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들아 내 말을 들을지어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 그의 선지자들을 신뢰하라 그리하면 형통하리라 하고”(대하 20:20)
1995.8.2 온가족 여름수련회 새벽예배
역대기에 기록된 이 본문은 여호사밧이라는 임금 때에 일입니다. 그런데 이 여호사밧은 지혜는 좀 부족했지만 그러나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뢰한 임금이었습니다. 그 임금 때에 모압과 암몬이라고 하는 요단강을 사이에 두고 건너편에 있는 이방 족속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모압과 암몬 족속들이 유다 나라를 치기 위해서 연합군을 만들어서 쳐들어 왔습니다. 쳐들어 왔을 때에 이 여호사밧이 제일 먼저 한 일은 작전회의를 소집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전, 새 뜰 앞에서, 그리고 유다와 예루살렘의 회중 가운데 서서 하나님 앞에 간구했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우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하늘에서 하나님이 아니시옵나이까 이방 사람들도 하나님의 손에 있지 않습니까? 우리를 국가적인 위기에서 건져주시옵소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탄원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선지자가 나와서 그 전쟁에서 이길 것이라고 그런 하나님의 계시를 들려주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왕이 전쟁을 하기 위해서 드고아 들로 나아갈 때에 이 왕은 백성들에게 두 가지를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 백성들을 전쟁으로 이끌고 갔던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을 신뢰하라.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면 너희가 견고히 서리라. 오늘날 우리들이 신앙생활에서 안고 있는 가장 안타까운 문제 중에 하나는 집회에 오거나 아니면 말씀을 들을 때 모두 짐승의 마음을 갖고 있지 않은 다음에야 가끔은 내가 이렇게 살면 안 되지. “주님 나도 어떻게 좀 변화시켜 주시옵소서” 변화를 향한 그런 갈망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한 번의 기도로 자기의 삶이 변하고 자기의 생각이 바뀌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바꾸시는데 우리가 견고하게 하나님을 바라보고 꾸준히 하나님을 추구해서 그 하나님에 의해서 우리 자신들이 바뀌는 그런 일들이 필요합니다. 견고함이 필요합니다. 그 견고함이 심각하게 결핍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잠시는 진지할지라도 그 진지한 것이 완전한 변화로 이어지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생각의 변화도 그렇고 사람들의 모든 것들이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진지하게 하나님 앞에 견고하게 서서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지만 무슨 변화도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진지해져야지만 뭔가 그 속에서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는데 그렇게 진지하고 견고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견고하지를 못하니까 언제나 쉽게 바람에 나는 겨와 같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좋은 것을 얻을 생각을 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이 골짜기를 보면 여기 골짜기가 우리나라에서 아주 유명한 골짜기입니다. 그 개울들이 이제 흘러내려옵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다가 관인면 지날 때 개울을 하나 건넜습니다만 거기도 보면 대단히 멋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정도가 아니라 저 위로 올라가보면 정말 계곡이 그림과 같습니다. 그런데 그 계곡들을 들여다보면 그 계곡 가장자리가 바위로 되어 있습니다. 바위가 있으니까 멋있는 것입니다. 바위로 되어 잇는데 얼마나 물이 지나갔는지, 몇 십 년, 몇 천 년을 지났는지 바위가 그 물의 흐름을 따라서 깎여있습니다. 하루아침에 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래도록 견고하게 서 있던 바위지만 오래도록 물이 쉼 없이 흐르니까 그 바위가 깎이는 것과 같이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바라본다고 뭔가 뜻을 정했으면 그 뜻을 견고하게 붙들고 나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어디서 나오는가 하면 하나님을 의뢰하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데서 나오는 힘입니다. 믿습니까? 그러니까 자기가 얼마나 오랜 세월동안 불순종하고 또 이 머릿속에는 쓸데없는 그 생각의 찌꺼기들이 잔뜩 쌓여 있는 것입니다. 덕지덕지 쌓여서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슴 속에는 얼마나 쓸데없는 것들에 대한 사랑이 오랜 세월동안 가시덤불과 같이 쌓여 있는데 감정적으로 어느 한 순간에 확 솟구쳐서 그 문제가 해결될 것같이 그렇게 하나님 앞에 나오는데 그렇게 견고함이 없습니다. 부흥회 때 막 이러고 나서 그리고 그 다음에는 하나님 앞에 나와서 지속적으로 간구하고 그때 가졌던 고민들을 오래도록 지속하면서 그러면서 하나님을 찾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약한 것입니다. 그 모든 것들은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않는데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사람들은 좋은 것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나와서 어느 한 순간에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면 정말 진지해지게 됩니다. 그리고 전에는 장난과 같이 신앙생활을 하던 것, 농담처럼 듣던 하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듣고 어느 한 순간에 깊이 회개하고 그리고 눈물을 흘리고 마음이 새로워지게 됩니다. 그것이 시작입니다. 그것을 출발점으로 해서 계속해서 자기 가운데 그 모든 신앙적인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그 힘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간구하고 하나님을 의뢰하는 이런 지속적으로 견고하게 하나님을 신뢰하는 이런 신앙에 서야지만 뭔가 변화가 오는데 하나님을 신뢰하는 그 믿음이 약하기 때문에 쉽게 모든 것들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이런 신앙이 우리들에게 있어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여호사밧은 오늘 그러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또 한 가지를 말하는데 “선지자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형통하리라” 그러니까 선지자를 신뢰하라는 것은 선지자 개인의 인격을 신뢰하라는 것이 아니라 선지자가 선지자일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이 그를 통해서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그 일들이 구체적으로 선지자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그 말씀이 우리에게 다가올 때 그 말씀에 대해서 우리들이 믿음으로 반응할 수 있는 이런 관계가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저는 정말 사심이 없이 이야기 하는데 여러분들이 우리 교회. 또 다른 교회에서 오신 분들도 있고 어쩜 앞으로 다른 교회에 가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디로 가든지 목회자와의 관계를 바르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으로부터 흘러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리고 마음으로 따르고자 하는 이러한 마음의 심성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이 하나님 앞에 반석과 같이 굳은 신앙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런 것들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마음속에 참 커다란 어려움들이 언제나 우리 신앙생활에 우리 자신이 굴레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 교회를 목회하고 있는 하나님의 사람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가 여러분들에게 할 수 있는 가장 최고의 일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감으로 해서 그 많은 양떼들이 자신의 삶을 보고 그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삶에 대해서 깨닫도록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그 일을 위해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향하여 무엇을 말씀하시는가 거기에 귀를 기울이고 그 말씀으로부터 변화를 받고 그 말씀을 깨닫고 깨달은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믿음으로 반응하고 하면서 우리의 믿음과 신앙이 자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목회자가 한 교회를 위해서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 일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하는 것들을 생각해야 합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 하는 일들은 대부분 이 세상에서 일을 하다가 일손을 놓고 퇴근하면 그것으로 모든 일들이 끝납니다. 그러나 여러분, 여러분들이 이제까지 신앙생활을 다른 교회에서 혹은 우리 교회에서 하면서 여러분들이 얼마나 목회자를 위해서 기도하는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 수 있는 사실은 목회자의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마르고 하나님의 계시의 음성이 들리지 아니하면 여러분의 영혼에 내리는 비도 그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극하고 심한 가뭄이 교회 안에 가득하게 됩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조금도 다름이 없는 그런 신앙생활을 형식적으로 영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지난 1년 반 동안에 약 오백 시간의 설교를 했습니다. 테이프가 제가 생각하기에 오백 개 정도가 됩니다. 외부에서 강사들이 거의 오지 않았습니다. 혼자 설교했습니다. 여러분, 한 사람이 살아온 인생의 한계가 있고, 체험한 신앙의 한계가 있고, 자기가 알고 있는 성경의 지식이 한계가 있는데 그렇게 많은 양의 하나님의 말씀을 토해놓으면서 끊임없이 매시간 예배를 드릴 때마다 완전히 다른 신앙의 세계와 말씀의 세계를 보여준다는 일이 얼마나 벅찬 일인지 여러분은 기억을 하셔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이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예언할 때 어떻게 왕부터 시작해서 모든 백성들까지 그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선지자의 말씀을 듣고 깊이 감화를 받고 이 난관에 처해있을 때 인간의 방법과 수단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뢰하고 선지자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의뢰하겠다는 신앙적인 반응을 볼 때에 이 선지자는 커다란 격려와 하나님이 자기를 사용하고 계신 큰 위로와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어디로 가든지 여러분들이 목회자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십시오. 하나님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시고 그리고 여러분들이 그 손에 의해서 창조된 하나의 피조물일 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목회자는 하나님을 대신해서 우리에게 진리의 말씀으로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그는 결코 여러분과 더불어 다투거나 여러분과 더불어서 어떤 일들을 놓고 줄다리기를 하면서 여러분과 인격적으로 다투고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늘 이 여호사밧이 국가적으로 큰 난국과 위기에 처했을 때 그는 신앙의 핵심적인 요소를 간단하게 말하는 것입니다. 애들아, 너희는 걱정하지 마라. 우리 하나님을 의뢰하라. 그리고 하나님이 말씀을 주셔서 우리에게 승리를 예언한 선지자를 신뢰하라. 그리고 그들은 전쟁터로 나아갔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지혜를 주셔서 매복을 하게 하시고 그래서 엄습해오는 적군들을 모두 진멸하고 그 땅에 평화가 오도록 하나님께서 만들어주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게 되고 말씀을 전하는 목회자와의 관계가 바르게 된 가운데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음을 가져야지 그것이 역사하는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아침의 시간에 우리 고요히 생각합시다. 주님, 항상 우리에게 하나님을 신뢰하고 환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보지 말고 하나님을 통해서 환경을 볼 수 있는 이런 믿음을 주시고 그리고 우리가 얼마나 진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목회자로부터 주님의 음성을 듣기를 원했는지 오늘 이 시간 우리의 마음을 깨닫게 해주시기를 하나님께로 그 선지자의 말을 청종하도록 부르시는 하나님의 요구에 대해서 우리가 좀 더 진지하게 반응할 수 있는 이런 신앙들을 우리에게 주시옵소서. 우리를 그 진리로, 그 말씀으로 우리를 빛 가운데로 인도하며 하나님을 신뢰하며 살도록 도와주시옵소서. 하나님 앞에 우리 같이 기도합시다.
8.새벽예배 모음 ④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사 43:25)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하시든지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 하십니다. 그것을 우리들이 잊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시기 위함이라.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거나 은혜를 주시거나 무엇을 주시든지 하나님은 목적이 없는 일은 안 하십니다. 거기에는 분명한 우리의 인생을 향한 목적이 있고 그리고 계획이 있고 요구가 있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혹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 세상에서 누리며 살 수 있는 여러 가지 물질의 축복을 주시고 또 건강을 주시고 이런 모든 하나님이 주시는 것들 속에 그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나름대로의 독특한 계획을 우리들이 깊이 알고 그리고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람으로서 그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인지를 알며 살아야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촉진되고 그리고 주님이 우리를 더 사랑하셔서 우리에게 더 많은 것들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에 보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축복이나 그 다음에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나 이런 것들이 하나님을 위해서 주신다는 것은 다 알겠는데 죄사함도 하나님은 당신 자신을 위하여 우리의 죄를 사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도말하시고 우리를 하나님과의 관계로 돌이키셔서 그 관계의 풍요함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도 사실은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서 하나님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서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한때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가 왜 하나님의 은혜를 쉽게 잃어버리는가 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셨을 때에 그 하나님의 계획을 묻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왜 하나님께서 하필이면 나 같은 사람에게 이렇게 깨닫게 하시고 그리고 내가 은혜를 받을 수 있도록 여기에 두셨는가. 그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인가. 그것을 늘 물을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은 이 43장 전체에서 계속하시는 말씀이 이 백성은 나를 위하여 지었다. 또 이 백성은 내 찬송을 부르기 위하여 내가 만들었다. 또 내 영광을 위하여 이 백성들을 창조했다. 이 백성들은 내 것이다. 이 백성들은 내 이름을 위하여 만들어진 사람들이다. 그렇게 43장 전편에서 간절히 하나님께서는 왜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시고 우리를 만드셨는가 그것을 계속 논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오늘도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지 않는다면 살았으나 사실은 죽은 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신앙의 눈을 가지고 바라볼 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지 않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무슨 부를 누리고 그리고 어떠한 영광을 가지고 살아가든지 간에 그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부러움의 이유가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바도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너희의 허물을 도말하고 너희의 죄를 기억지 아니하는 것도 그것은 바로 나를 위하여 하는 것이라고 하나님이 오늘 자신을 소개하십니다. “나는 너희의 죄를 도말하는 자다” 도말한다는 것은 깨끗이 지워버린다는 것입니다. 나는 너희의 죄를 깨끗이 지워버리는 자다 하면서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우리들에게 소개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는 우리의 삶을 향한 메시지는,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깨끗이 하는 분이시니까 누구든지 죄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나와서 사죄함을 받으라는 메시지입니다. 그렇게 죄의 용서함을 받은 사람들은 마땅히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서 사는 것이 기쁨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 그것은 우리가 늘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면서 또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지식을 따라서 우리가 매일매일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일들이 가능해지기 위해서는 우리는 이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너희는 내 마음을 나에게 달라” 그것이 주님의 음성입니다. 죄사함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마음을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마음을 드리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죄사함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갚을 수 있는 최대의 일입니다. 그래서 어제도 우리들이 살펴보았습니다만 우리의 삶이 떠나고 우리의 몸이 하나님의 뜻을 떠나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떠나기 전에 먼저 마음을 떠나는 일들이 있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 앞에 마음을 굳게 지키면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인생은 이제 잠시 지나갑니다. 그리고 속히 날아갑니다. 그때 우리의 인생이 허공을 치고 바람을 잡는 것 같은 그런 인생을 살면서 우리 머리에 흰머리가 돋아나고 그러면서 우리의 인생이 이렇게 끝나간다면 정말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불행한 일입니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우리들은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 그 일을 위해서 살아있는 사람들, 그런 삶을 부러워하고 그리고 내가 지금 이렇게 살아있는 것이 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어떤 도움이 되고 있는가. 그리고 정말 하나님 앞에 내가 이대로 이렇게 계속해서 살고 내 인생을 마치면 하나님 앞에 갔을 때 정말 그 하나님 앞에서 내가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이런 진지한 고민들이 우리의 삶 속에 늘 다가와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새벽의 시간에 하나님께서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너희의 죄를 사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나를 위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 이 아침의 시간에 기도할 때 “주님 우리 자신을 위하여서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위하여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우리로 주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탕자의 귀로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