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화와 헌신
(2005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5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향기로운 헌신 (민28:3~5) 2005. 1. 17 새해사경회 저녁 1
2. 자기깨어짐과 헌신(민28:3~5) 2005. 1. 19 새해사경회 저녁 21
3. 자기깨어짐과 헌신 (민28:3~5) 2005. 1. 20 새해사경회 저녁 41
4. 은혜 부음과 헌신 (민28:3~5) 2005. 1. 21 새해사경회 저녁 60
1. 향기로운 헌신
“또 그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여호와께 드릴 화제는 이러하니 열년되고 흠 없는 수양을 매일 둘씩 상번제로 드리되 한 어린양은 아침에 드리고 한 어린양은 해질 때에 드릴 것이요 또 고운 가루 에바 십 분지 일에 빻아낸 기름 힌 사분지 일을 섞어서 소제로 드릴 것이니”(민28:3~5)
마른땅처럼 보이는 본문이지만 저는 이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정말 크고 놀라운 이 은혜의 비밀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사실 10년 동안 설교를 들었습니다만 제사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설교를 들은 적은 별로 기억이 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부분적으로는 설교를 했지만 그러나 사실 복음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들이 이 구약의 레위기나 민수기, 출애굽기에 나오는 성전과 제사의식에 관한 이야기를 읽으면 사실 갑갑하고 은혜가 안 되지만 복음의 의미를 잘 깨닫고 교리적인 지식을 가지고 이제 들여다보게 되면 참 신기할 정도로 참 아름다운 보화가 많이 묻혀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들이 전체적으로 살펴보려고 하는 주제는 “성화와 헌신”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살펴보려고 합니다. 우선 본문의 배경을 보자면 이 민수기는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생활할 때 있었던 많은 일들을 모아놓은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이제 여기에 나와 있는 이 이야기들은 이제 모세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은혜를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해주는 내용들로 여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서 이 제사의 관한 내용은 이제 여러 차례 반복이 되어서 나오는데 여기에 기록된 이 제사 역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시 한번 간곡히 당부하는 내용으로 기록이 되어 있고 하나님이 또한 이제 모세에게 전해주는 말씀들로 이 속에 가득 차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이제 이 제사 제도를 이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당부인데 여기에서 제일먼저 언급되고 있는 것이 번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번제 중에서도 특별히 이제 잠시 후에 설명을 드리겠습니다만 상번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먼저 이 상번제가 뭔가 하는 것을 따지기 전에 이스라엘의 제사 제도에 대해서 한번 그저 기초적으로 한번 이해를 가져보는 것도 아마 여러분들이 앞으로 신앙생활을 하는데 도움이 되리라고 봅니다. 이스라엘의 제사는 일반적인 목적과 개별적인 목적이 있었는데 개별적인 목적이라고 하는 것은 제사의 종류가 아주 많은데 그러면 그 하나하나마다 사실 하나님 앞에 그 제사를 드리는 개별적인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것 말고 그 모든 제사를 다 통합할 때 그 제사가 갖는 전체적인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 일반적인 제사의 목적이 무엇이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인간이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서 도저히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는 불결한 존재들인데 그 더러운 인간들이 이 제사 제도라고 하는 방법을 통해서 자신의 불결함에도 불구하고 거룩하신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수단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제사 제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언약을 맺은 백성들이 당신과 언약을 깨트렸는데도 그것들을 제사를 통해서 용서해주시기도 하시고 혹은 더러워졌을 때 다시 성결하게 만들어서 하나님을 뵈올 수 있도록 하나님이 조치해주시기도 하시고 또 실제로 그런 헌제의 활동 속에서 하나님 앞에 신령한 하늘의 은혜를 공급받음으로 그때도 똑같이 죄와 유혹으로 가득 찬 세상이었는데 그것을 이기며 살아갈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공급받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에서 생명적인 교통을 누리심으로 말미암아 언약백성으로서의 독특한 내적인 질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살아갈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전체적으로 볼 때 이 제사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큰 은총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제사를 통해서 제일먼저 하나님이 죄를 용서해주시는 것입니다. 속죄 제사 같은 것이 대표적인 본보기입니다. 그래서 제사를 드리면서 자기의 죄를 이제 그 제물에게 옮겨 전가하도록 제사장이 기도를 해주고 그래서 그 제물이 죽임을 당하고 다시는 하나님 앞에 죄의 용서를 받아서 자신의 죄를 인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트려졌는데도 제사를 통해서 하나님이 은총을 베푸셔서 당신과의 관계를 다시 회복하도록 용서의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이러 용서의 길을 통해서 결국은 모든 이스라엘의 언약백성들이 하나님이 자신의 죄를 용서해주시는 은혜로운 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이 이런 제사를 통해서 더러워진 사람들을 다시 성결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구약에 보면 율법에 보면 이제 사람이 모르고 지나가다가 잘못해서 시체를 만졌다든지, 혹은 또 문둥병 환자와 접촉을 했다든지 사실 이것은 죄는 아니었습니다. 자기가 실수로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될 경우에는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불결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하나님이 어떤 것과 접촉하는 것을 싫어하셔서 그래서 우리에게 정결을 요구하시는 경우도 있지만 또 하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안녕과 복리를 위해서 하나님이 율법으로 제정해놓으신 적도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문둥병 환자와 같은 자와 접촉한 자가 감염이 되었는지 안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제사를 드릴 수 없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공동체 속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격리되도록 하나님이 조치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그 사람들이 모두 그런 불결한 것들로 차단되어서 하나님의 백성들로서의 공동복리가 촉진될 수 있다고 본 하나님의 특별한 복지적인 배려도 그 제사 제도 안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제사제도는 우리가 생각한 것같이 하나님에 의한 독선적인 요구상황으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그 속을 잘 위생학적으로 섭생학적으로 살펴보면 언약백성들의 공동체와 안녕과 그다음에 행복을 하나님이 많이 고려하셨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더 많이 이야기를 해주면 굉장히 좋은데 그러면 닷 세에 다 못 끝납니다. 한 오십 회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것은 나중에 책으로 보고 진도를 나갑니다. 그렇게 불결해질 때, 그러면 하나님이 이제 그들을 만나주시지 않으십니다. 그런 사람들이 제사를 드림으로 말미암아 다시 깨끗함을 얻어서 하나님 앞에 다시 나올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또한 어떤 것들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이 이 제사제도를 통해서 생명의 교통을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런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일생동안 자신의 인생의 문제를 극복해보려고 몸부림을 치고 울고불고 자살하려고 동맥도 끊어보고, 쥐약도 먹어보고 별짓을 다했는데 결국은 도저히 극복할 수 없었는데 한번 예배를 드리고 나서 이제 이 세상을 내가 살만하다. 진짜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구나. 이런 회복과 은혜를 경험할 적이 많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 것들이 결국 무엇이 가져다주는 효과입니까? 예배를 드릴 때 임하시는 말씀과 함께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신령한 은혜, 그 은혜의 힘이 우리로 하여금 그 많은 인생의 노력으로도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는 그것을 우리로 하여금 극복하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런 은혜의 힘이 신약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구약에서도 있었습니다. 지금처럼 이렇게 강력하고 놀랍지는 않지만 구약에도 그런 은혜가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유혹을 받고 시험이 많은 속에서도 올곧음을 유지할 수 있었고 또 범죄에서 넘어진 사람들이 다시 일어설 수 있었고 또 믿음의 길을 걸어가다가 너무 지쳐서 낙심한 사람들이 은혜를 공급받음으로 말미암아 다시 하나님 앞에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신적 생명이 제사를 통해서 인간에게 주입되는 것입니다. 그런 놀라운 은혜를 하나님이 제사를 통해서 공급해주신 것입니다. 이상 세 가지는 이제 하나님과의 관계인데 또 이 제사에는 어떤 유익이 있는가하면 언약공동체의 백성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힘이 있는 것입니다. 자 예를 들어봅시다. 이스라엘 백성들로 인간이니까 하다가보면 하나님의 한 백성이라고 하지만 싸울 때도 있고 치고 박을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때려서 누구를 부상을 입혔으면 어떻게 하고 죽였으면 어떻게 하고 뭐 그런 이야기가 나오는 게 그런 일이 일어나니까 그런 조항이 나오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이제 누구 네와 대판거리 싸웠습니다. 이놈의 자식 다시 보나 봐라. 그리고 서로 이를 악물었는데, 그러고 나서 이제 어느 때에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려야지 하고 갔는데 제사를 드리는 회막 문 앞에서 둘이 만났습니다. 그때 뭘 깨닫게 되는가 하면 우리가 아무리 원수로 살지만 그러나 우리가 떨어질 수 없는 사람들이구나. 깨닫게 됩니다. 그러니까 그런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렇게 해서 이 성격은 다르고, 태어난 곳도 다르고, 씨족도 다르고, 틀린 백성들인데 심지어는 그 속에는 애굽에서 쫓아온 다른 민족들도 있었습니다. 검둥이 같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함께 들어와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릴 때, 그때 그렇게 제사를 드리는 사람들이 각양각색의 사람들이었지만 그러나 한곳에서 같은 방식으로 같은 제사장에 의해서 섬김을 받으면서 제사를 드리게 됩니다. 그 속에서 언약적 연대가 이루어집니다. 그런 언약적 연대의 구체화입니다.
제사를 하나님 앞에 드리고 나서 거기에 나온 음식을 성중에 모든 사람들이 함께 나누면서 우리가 한솥밥을 먹은 한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거기서 공동체의 연대의식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이렇게 우리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이렇게 함께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이 자체가 하나님의 명령이고 요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의 독특성은 함께 한 장소에서 동일한 하나님을 경험함으로 말미암아 하나의 지역교회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백성들 속에 언약적인 연대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터넷이 아무리 발달되고 그래도 특별한 사정이 있으면 집에서 인터넷을 통해 방송을 들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지금도 여러분이 설교를 듣는 사이에 약 150명 이상이 전 세계에서 지금 이 설교에 접속해서 듣고 있습니다. 150개의 컴퓨터가, 최소한 2사람 이상 모여서 들으면 300명 이상이 듣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듣고 있는 가운데 충분히 교회에 올수 있는데도 그것을 듣고 있는 우리 열린 교회에 교인들도 있을 것입니다. 회개하십시오. 너희는 그러지 마십시오. 와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함께 하나님을 경험함으로 한 언약의 공동체를 이루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제사가 성경에 보면 무슨 제사, 무슨 제사가 아주 수없이 나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가지 수가 많으니까 도대체 뭔가 그러는데 제가 오늘 아주 깔끔하게 정리를 해드리겠습니다. 기록을 안 해도 됩니다. 주일날 되면 설교 요약본이 나오니까 사서 보시면 보다 상세하게 나옵니다. 그래서 왜 여러분이 제사를 보면서 그렇게 혼란스러운가 하면 구분이 안 되어서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제사를 두 가지로 구분을 합니다. 어떻게 구분하는가 하면 제사의 종류에 따라서 구분을 하고, 또 하나는 제사를 드리는 방식에 따라서 구분을 합니다. 여기에 속한 것이 여기에 속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는 제사의 종류이고 하나는 제사를 드리는 방식입니다. 무슨 뜻인지 아실 것입니다. 제사의 종류, 제사의 방식 이렇게 나누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이것이 방식에 따른 분류이다 이렇게 표를 하지 않고 이쪽 종류와 이쪽 종류가 섞여서 막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게 도대체 뭔지 모르겠고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간단합니다. 종류에 따르면 크게 다섯 가지 제사로 나누어집니다. 그 종류는 제일먼저 번제입니다. 두 번째는 화목제입니다. 번제는 하나님께 드리는 헌신의 상징이고 화목제는 그야말로 화목의 상징입니다. 그런데 그 화목의 상징이 다시 세 가지로 작은 구분으로 나누어집니다. 감사제, 서원제, 낙헌제 이렇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 크게 세 번째 속죄제가 있습니다. 이것은 죄를 지었을 때 자기의 죄를 용서받기 위한 제사입니다. 또 하나는 속건제가 있는데 이것은 아까 말씀드렸듯이 성물이나 이런 것으로 범죄하고 더럽혀졌을 때 하나님 앞에 깨끗하게 해서 성결을 회복하는 것이 속건제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제사가 소제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다섯 가지 제사는 그야말로 제사를 드리는 목적에 다른 구분으로 나눈 종류이고 그 다음에 이 제사를 드리는 방법이 네 가지가 있었습니다. 불로 태워서 드리는 제사가 있었으니 이 제사의 목적은 향기를 하나님께 올리는 것이었습니다. 이 제사를 화제라고 그러는 것입니다. 불로 드린다고 그래서, 두 번째는 제물을 높이 들고 제사를 드리는 거제가 있었습니다. 그다음에 전제가 있었는데 이것은 액체를 뿌리는 제사였습니다. 그래서 이 액체를 뿌릴 때 크게 세 가지가 쓰였는데 하나는 포도주, 피, 혹은 기름 이런 것들이 있었다고 나열이 되는데, 실제로 하나님은 피 제사는 이방신들에게 드리는 제사였기에 받지 않으셨습니다.
어쨌든 이렇게 액체를 뿌리는 것이었는데, 이 전제라는 말이 이제 신약으로 넘어오면 관제라는 말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빌립보서에 보면 사도바울이 이제 내가 관제와 같이 나 자신을 드린다. 그러니까 번제와 같이 활활 타오르는 순교의 순간에 자기를 던진다는 의미로 자기를 뿌려드리는 관제로 표시한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제물을 들어서 흔들어 드리는 요제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제사의 드리는 목적에 따른 분류는 번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 소제였고, 방식에 따르면 화제, 거제, 번제, 요제가 있었다는 겁니다. 아니 그걸 어떻게 외우나. 안 외워도 괜찮습니다. 그런 게 있다 이렇게 알면 됩니다.
그러면 이제 여기에서 우리들이 본문에서 다룰 이 제사는 상번제를 다루려고 합니다. 그럼 이 상번제란 무엇인가? 상번제는 우리말로 말하자면 늘 태워서 드리는 제사입니다. 그러니까 늘 이라는 말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번제는 상번제 말고 수시번제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선적으로 이 번제는 수시번제였습니다. 수시번제는 각 개인이 필요가 있을 때에 제사장 앞에 나아가서 제물을 드리고 자기 자신이나 자기 가족, 혹은 자신의 자녀들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특별한 헌신을 드리면서 하나님 앞에 태워드리는 제사가 수시번제였습니다. 수시번제를 드리지만 그러나 제사장들이 드리는 상번제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이 상번제는 아침과 저녁에 드리는 제사였는데, 이 제사를 드리기에 앞서서 제사장의 중요한 직무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제사를 드리는데 수시번제는 백성이 워낙 많으니까 제사가 그치지 않았겠지만 그러나 혹시 제사가 그친다고 하더라도 그 번제단의 불은 절대로 꺼지면 안 되었습니다. 그것을 계속 지키는 것이 이 제사장의 중요한 임무였습니다. 그러니까 언제 제사를 드린다고 할지라도 다시 불을 피울 필요가 없도록 그 번제 단에 항상 불을 준비하는 그것이 바로 제사장이 하는 중요한 임무인 것입니다.
이것도 가만히 복음의 교리를 가지고 명상해 보면 너무나 놀랍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헌신을 받을 수 있는 만반의 준비를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 저 주님을 위해 살고 싶은데요.’ 몇 번을 예기해도 주님이 잊어버리셨습니다. 그러다가 몇 달 지난 다음에 ‘너 주님을 위해서 살고 싶으냐? 난 잊어버렸는데. 글쎄. 너에게 무얼 시켜야 되냐? 참 고민이다. 하도 하겠다는 사람이 많아서. 그냥 아무렇게나 살아라.’ 하나님은 그러시지 않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깨닫고 사명을 알지 못해서 문제가 되는 것이지, 사명을 알게 되면 하나님은 진작부터 우리의 헌신을 받을 수 있는 만반의 준비를 가지고 계신 것 입니다. 이것은 모든 하나님의 일을 하던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것입니다. 특히 선교사들이 자기는 뭐 어떻게, 어떻게 하다가 불연 듯 결정을 해서 가게 됐는데 가고 보니까 하나님이 자기의 헌신을 받으실 수 있는 모든 준비를 완벽하게 갖추시는 선교 상황을 만나는 일이 아주 자주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보더라도 하나님이 우리의 헌신을 언제든지 받으실 수 있도록 불을 준비하고 계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얼마든지 깨닫게 됩니다.
이렇게 이제 임무가 있는데 이 상번제에 드리는 그 제물은 수시번제는 하나님이 너무너무 아름다운 분이십니다. 이 수시번제는 개인이 와서 드리니까 개인이 제물을 사가지고 와서 드려야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다 빈부의 차이가 있을 겁니다. 그러니까 수시번제에는 이제 돈이 좀 있고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수소부터 시작해서 그다음에 수양, 숫염소, 그리고 돈이 정말 없는 사람들은 비둘기를 가지고 와서도 번제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참 우리처럼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큰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하시는 이야기가 비둘기라도 드려라. 제가 그랬습니다. 오죽했으면. 선교헌금은 매주 드리면서 안 되면 일 달러라도 하자. 비둘기쯤 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절대로 그 제물의 크기를 보면서 제사의 중요성을 가늠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 제물을 들고 하나님 앞에 나오는 헌제자의 마음이 이 제물과 어떻게 합치되었는가를 보면서 하나님은 그 마음과 헌신의 제사를 열납으로 받으신 것입니다.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러니까 어떤 사람들은 헌신해야 되지 않습니까? 하면 나는 믿음도 없고, 약하고 그러는데 누가 큰 것 헌신하라고 했습니까? 이번에 이런데 우리가 좀 헌신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목사님, 저는 가진 것도 없고 지금 사업을 시작하고. 그래서 누가 큰 것 하라고 합니까? 비둘기입니다. 비둘기. 그러니까 그렇게 하나님 앞에 드리는 헌신이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자기중심을 향해서 바라고 계시는 하나님 앞에서 드리는데 그것을 하나님이 다 아시고 수소, 그러면 자기 자신을 정말 주님을 사랑해서 자기를 바치고 싶은데 가진 게 없는 사람은 결국 수소를 어떻게 마련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큰 것을, 우리나라 돈으로 한다면 한 4-5백만 원을 주어야 할 텐데, 여러분 한번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러 가는데 4-5백만 원을 지참해야 한다면 일년에 한두 번 나오기도 힘들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을 알고 하나님이 비둘기라도 가져오게 하신 것입니다. 산비둘기를 가져오든지 집비둘기 새끼를 가져오든지,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비둘기 몇 마리를 모아야지 소한마리 살까요? 아마 숫자도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제사를 드릴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이게 수시번제입니다.
그런데 이제 늘 드리는 상번제의 경우에는 딱 정해져있었습니다. 그것은 일년 된 흠 없는 수양을 드리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면 이 수 양을 두 마리를 아침에 한 마리를 저녁에 한 마리를 이렇게 드리게 되어 있는데 그것을 왜 수양을 상번제의 제물로, 상번제니까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로서 드리는 것이니까 사실은 소 한 마리를 잡아도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개인이 돈을 내서 하는 게 아니니까. 그런데 왜 하나님이 수양을 하셨을까? 이것에 대해서 저의 은사이신 김희보 목사님은 이런 설명을 붙이셨는데 아주 은혜로웠습니다. 이 수양은 이렇게 충직한 소의 온유한 성품과 비둘기의 평화를 사랑하는 이 모든 속성이 양속에 함께 나타나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 양을 택하셨고 그리고 그것이 일년 됨이라고 하는 것은 숙성한 양이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고, 흠 없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순전한 것이 제물이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이제 처음 주님을 믿고 은혜를 받고 그 다음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우리가 성숙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은혜를 받으면서 성숙한 신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잘 자라고 그 다음에 자라도 순전하고 깨끗하게 자라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런 사람을 제물로 삼으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면서 사용하십니다. 우리 예수님이 바로 그런 분이셨습니다. 요한이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로라” 하실 때 예수님이 갓난아이처럼 귀여울 때 세례 요한이 그렇게 말했던 것이 아닙니다. 30대쯤 되어서 성인으로 모두 성숙하실 때에 그때에 예수님이 오실 때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로다. 육체적으로는 성숙하셨고 그리고 그의 마음과 영혼은 순결하셔서 그래서 하나님 앞에 바쳐지는 훌륭한 번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이 상번제의 의미가 무엇일까? 우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이 수시번제가 자기가 헌제자이고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인데 이 상번제는 제사장이 이 제사를 하나님 앞에 드리기는 하지만 헌제자가 거기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면 헌제자가 누구인가 하면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 헌제자입니다. 그 헌제자가 누구인가 하면 이스라엘 전체가 헌제자입니다. 그래서 제사장이 개인의 자격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전체의 헌제자로서의 이스라엘 백성을 전체를 대표하는 사람으로서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끌어안고 내포적인 대신자가 되어서 그래서 하나님 앞에 이스라엘 전체를 대표해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상번제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대표해서 하나님 앞에 이 번제를 올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 제사장의 드리는 제사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하나님 앞에 헌제자로서 자기를 함께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 제사장 안에서, 이것도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그의 제사드림과 함께 우리 모두가 그 제사에 참여해서 죄의 용서를 받은 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 하나는 이제 이런 상번제를 통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과의 관계를 누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제사가 사실 믿음의 눈을 가지고 보지 않으면 사실은 이 제사에 나오는 이 모든 제사의 규례를 인간이 그대로 준수한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이 제사를 드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것을 보면서 사실은 하나님이 이런 제사를 자신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척 까다롭고 아주 힘들게 여겨집니다. 여러분, 어렸을 때 제사를 드리는 것을 보셨을지 모르지만 요즘은 뭐 인터넷에다가도 제사를 드린다고 합니다. 조상의 이름을 거기에 써놓고 인터넷에다가 여기는 굴비, 여기는 나물무침, 국 이렇게 해서 클릭하면 뚜껑이 열리고 그렇게 해서 하는데 사실 조상에게 기만하는 것입니다. 사실은 그것을 아무리 해봐야 서비스 한 몇 백 원만 내면 거하게 제사상을 차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우리 옛날에 제사를 드리는 것을 보면 시골에서 제사를 드리는 집 며느리를 비롯해 여자 분들은 죽어납니다. 두부도 쑤어야 하고 모든 것을 직접 갈아서 하는 그것을 또 살아서는 효도하지 않은 사람들이 죽으면 또 벅적지근하게 차립니다. 소 잡고 돼지잡고 생난리를 칩니다. 살았을 때 해드리지 돌아가시고 난 다음에 자기들이 먹으려고 잡는 것이지 무슨 조상이 와서 먹습니까. 그렇게 해서 하면 얼마나 힘든지 보십시오. 그리고 또 시간이 어떻고 무슨 과일은 동쪽에 놓고 서쪽에 놓고 숟가락이 틀렸다. 밥이 어떻다. 얼마나 규례가 까다롭습니까? 성경에 나오는 제사도 말하자면 그런 것입니다. 지키는 것이 불가능해보일정도로 어려워 보이는 규례인데 사실은 이 제사를 통해서 하나님은 당신 자신의 의미를 하나님의 백성들이 누리며 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면 하나님 앞에서 잘 헌신하면 헌신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들이 보면 아고, 저 사람이 저렇게 하나님의 일을 하니 코피 나도록 하니 힘들어서 어떻게 살까? 그래도 힘만 들면 하나님의 일을 섬기면서 살수 없습니다. 그 안에는 또 그렇게 하나님 앞에 자기를 제물로 드리면서 사는 사람들만이 맛볼 수 있는 말할 수 없는 평화와 행복이 그 속에 있는 것입니다. 알고 계실 것입니다. 뭐 봉사도 별로 안 하는 사람들이 아멘 합니까?
그래서 출애굽기 20장에 보면 뭐라고 말씀하시는가 하면 이게 번제다. 그런데 그 번제를 드릴 때 내가 너희를 만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하리라. 그래서 이 상번제는 결국 이스라엘 전체가 하나님 앞에 바쳐지는 헌신자로서 살아야 된다는 의무의 확인과 또 그렇게 살자는 다짐이 어우러진 헌신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고, 두 번째는 그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그들에게 큰 은혜를 부어주심으로 생명적인 교통을 누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제사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깊이 그 제사를 드리는 가운데 자기가 누구인지를 깨닫게 되고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살아야 할 백성들이며 그 전능하신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그분께로부터 죄의 용서와 정결함의 회복, 생명의 교통, 언약의 연대 이런 것들을 누리며 살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았기 때문에 그렇게 제사를 드리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으로서 행복을 깊이 경험하는 것이 바로 제사제도의 은총적 목적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 제사 안에 선택된 백성들의 삶과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가야 할 삶의 모든 모형들이 축소판으로 농축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나와서 제물을 가지고 와서 대신 용서를 빌면서 그 제물을 속죄의 제물로 바칠 때 그 제물이 불살라지고 태워지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깊이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자기와 같은 죄인인 자기를 하나님이 용서해주신 것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자신의 남은 인생이 자기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면서 이제 백성들이 화목하고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겠다고 하나님 앞에 다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죄를 용서받게 되고 불결하던 사람들은 깨끗함을 회복하고 그리고 정말로 자신에게는 없는 하늘의 신령한 은혜가 공급되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어두운 세상을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기 위해서는 결국 무엇이 필요한가 하면 하늘의 자원과 이 땅에 있는 자원이 골고루 필요합니다. 그 중에서도 훨씬 더 중요한 것은 하늘의 자원입니다. 땅에 있는 자원이 매우 부족해서 겨우 입에 풀칠만 하는 상황에 된다고 할지라도 하늘의 자원이 가득하면 하나님의 거룩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 있는 자원은 아무리 많아서 진짜 어마어마하게 많은 재물을 소유하고 높은 지위를 소유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 안에 은혜와 생명이라고 하는 하늘자원이 없으면 그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 땅에 있는 자원도 필요하고 하늘의 자원도 필요한데 하늘의 자원은 훨씬 더 중요합니다. 그런 하늘의 자원 곧 은혜라고 하는 천상의 자원을 이 제사 제도를 통해서 하나님께로부터 공급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예배 한번 잘 드리고 하나님 앞에 깊이 은혜 받고 일어서게 되면 정말 이 세상이 달라 보이지 않습니까? 아, 내가 진짜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지 되겠다. 그런 결심을 하게 됩니다. 이번 주에 나온 그 열린 교회 회심 이야기를 오늘도 제가 한 1시간 가까이 읽었습니다. 얼마나 은혜를 받았는지 모릅니다. 모두가 다 하나님을 만나고 끊어졌던 하늘자원을 공급받은 이야기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 있는 것은 많아도 하늘자원이 끊어졌을 때 얼마나 죽을 것 같이 고통스러웠는지를 보여주고 주님 앞에 다시 돌아와서 주님 앞에 예배할 때 다시 내려온 그 하늘의 은혜를 하늘의 자원을 통해서 자기가 어떻게 세상을 이기게 되었는지 간증하는 그런 평범한 사람들의 특별한 이야기들이 거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서 꼭 보십시오. 그런데 그런 것들이 이 제사 속에 잘 농축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사를 드릴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온전한 경배의 마음을 가지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제물을 가지고 가서 드렸듯이 그런 정신을 가지고 이번에는 자신을 제물을 삼아서 이 어두운 세상에서 하나님을 위해서 희생하며 타오르는 헌신자가 되는 것, 이것이 바로 언약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러면 이제 이렇게 되면 제사 제도에 대한 이해가 어느 정도 갈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이런 제사 중에서도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이 상번제 즉 수시번제가 아닌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헌제자로 해서 드리는 이 상번제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오늘 하나님 당신 자신의 입으로 우리에게 직접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첫 번째, 하나님이 당신 자신이 받으시는 이 상번제에 대해서 뭐라고 말씀하시는가 하면 “이는 나의 예물이요” 하고 말씀하십니다.
이 예물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를 갖추기 위해서 드리는 예물입니다. 그러니까 예물을 가지고와야 할 사람이 예물을 안 가지고 오거나 예물을 가지고 오기는 왔는데 그 예물이 그로부터 예를 받아야 할 자기 자신에게 심히 어울리지 않는 예물일 경우에는 그 예물을 가지고 그분을 만나러 가는 것 자체가 그에게는 모욕이 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예물입니다. 그래서 이 예물은 그야말로 하나님 앞에 찾아가는데 있어서 자신이 하나님을 향해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를 또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표시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바로 예물입니다. 그런데 이 상번제가 바로 언약공통체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드리는 예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약에 예물을 가지고 오지 않고 예복이 없으면 어떻게 됩니까? 그를 만날 수가 없습니다. 잔치를 베푼 사람의 초대를 받아서 왔는데 예복을 입지 않았습니다. 그럼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예복을 입고 예물을 가지고 온 사람들이 그들을 초청해준 사람을 만날 수 있듯이 이 상번제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체가 헌제자가 되어서 하나님 앞에 드리는 상번제는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예물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드리는 헌신적인 삶, 자신을 다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드리는 이 헌신이 하나님을 만나게 하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여러분, 민수기 12장에 보면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와 더불어 다투는 장면이 나옵니다. 사실은 한 집안 식구들이고 사실은 미리암으로 말할 것 같으면 모세가 죽을 상황이었는데 건져서 바로 공주에게 소개를 해주고 또 그 어머니를 들인 생명의 은인이 아닙니까? 그리고 일생동안 같이 사역해온 사람이 아닙니까? 그런데 하여튼 뭔 일이 생겼는지 그 시험에 들어서 뭔 일이라는 것이 구수 여인을 아내로 취한 것입니다. 구스는 지금의 에티오피아고 피부색이 검은 사람이었습니다. 그 여자를 아내로 취하니까 민족주의적 편견을 가지고 있었던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대적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는 이야기가 하나님이 모세에게만 말씀하시더냐. 우리에게도 말씀하셨다. 물론 그 사람들도 신령한 사람들이었고 하나님과 교통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미리암과 아론을 혼내주셨고 미리암은 하얗게 문둥병이 걸렸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에게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요지는 이것입니다. 모세와만 하나님이 말씀하셨는가 하셨지만 나는 너희들에게도 이야기한 것은 사실이지만 나는 모세와 그냥 얘기하는 정도가 아니라 대면하여 말한 친구 사이와 같았다. 왜 그러면 내가 그 모세는 특별하게 만나주었는지 아는가? 그가 나의 온 집에 충성되었음이니라. 헌신에 있어서 미리암이나 아론이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기를 다 불태우는 헌신 속에서 살았던 사람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이렇게 하나님을 위해서 잘 섬기고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는 사람들만 만나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아무 쓸모없고 죄 가운데 방황하던 사람도 하나님이 만나주십니다. 그래서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은혜 안에는 뭐가 포함되어 있습니까? 소명이 포함되어 있다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은혜를 주시면 하나님에게 소명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은혜를 주신 뜻을 따라서 하나님께 이제 자기를 다 드리며 하나님을 사랑하고 헌신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은혜를 받아서 구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안삽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만나기가 어렵습니다.
한번 잘 생각해보십시오. 인생을 살면서 어디에서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고 뺀질거리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마땅히 드려야 할 의무도 행하지 않고 지난 주일날 얘기했듯이 십일조 다 떼어먹고 그리고 나쁜 짓 하고 그리고 뺀질대고 그렇게 살다가 괴로우면 하나님 너무 괴로워요 그리고 오고 은혜를 주시면 다시 가서 뺀질거리고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과 제대로 만날 수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마음에 깊이 품고 주님을 위해서 녹는 마음으로 헌신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잘 만납니다. 내가 그래서 오죽했으면 교역자들 회의를 하거나 직원들 모여서 회의를 할 때 ‘그렇게 섬겨서 하나님을 만나겠는가?’
저는 진짜 저의 살아온 생을 이렇게 돌아보면 진짜 하나님이 이런 표어가 성립이 됩니다. 내가 없는 것처럼 하나님 앞에 살았을 때 하나님은 이 세상에 나만 있는 것처럼 대우해주셨습니다. 다시 한번 반복하겠습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나 자신을 잊어버리고 헌신할 때 하나님은 이 세상에 마치 나밖에 없는 것처럼 대우해주셨습니다. 이게 하나님의 백성들이 주님 앞에 드리는 헌신이 하나님 ,앞에 이렇게 아름다운 예물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으로서 예물에 대한 설명을 모두 끝난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그 다음으로 넘어가겠습니다.
그 다음에 보면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시는가 하면 더 심한 말씀을 말씀하십니다. 이 상번제는 나의 식물이란다. 여기서 식물이라는 것은 히브리말로 “레헴”입니다. 히브리말로 레헴은 베들레헴 할 때 그 레헴이고 레헴은 “떡”이라는 뜻입니다. 떡인데 그 떡은 우리가 먹는 이런 떡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빵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빵은 이스라엘의 주식이었으니까 우리말로 등가번역 한다면 나를 위하여 드리는 이 상번제는 나의 양식이니라, 사실 이것은 잘 들어보십시오. 이것은 기가 막힌 문학적 수사법을 구사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가 고대중동지방에 근동이었습니다. 중근동이라고 그러는데 거기에는 모두 우리조상들이 해온 것 같은 일반적인 제사방식들이 이행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조상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터줏대감에게 제사를 드리는 이런 것입니다. 그런데 이 제사를 드리는데 그 사람들이 무엇으로 드리는가 하면 먹는 것과 마시는 것으로 대부분 제사를 드렸습니다. 인신제사도 있지만 이제 일반적으로 먹는 것을 가지고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귀신인 신은 이렇게 고차원적인 도덕성을 가진 그런 신이 아니고 이 신은 먹지 못해서 걸근거리는 신들입니다. 그리고 때 거지로 몰려다닙니다. 귀신의 떼입니다. 웃으려고 하는 게 아니라 그 당시에 사람들이 생각하던 신들에 대한 생각입니다. 떼거지로 돌아다닙니다. 그래서 만약에 제때 밥을 안 준다든지 챙겨주지 않으면 훼방을 놓아서 인간 사이에 개입하는 것입니다. 이게 무엇인가 하면 이제 재앙입니다. 신들의 재앙입니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이 섬겼던 신들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조잡한 신들입니다. 장독대는 장독대 신이 있고 그 다음에 화장실에는 화장실 신이 있고 다 신이 있습니다. 그 신들이 그냥 떼거지로 몰려다니면서 뭘 뜯어먹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들이 뭐 복을 준다는 개념보다도 신들을 계속 잘 달래주지 않으면 심통을 부린다는 개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집을 지을 때도 터줏대감에게 제사를 드리는 이유는 공사비를 적게 들게 해달라고 그러고 기초를 팔 때 그 속에서 금이 나오게 해달라고 그렇게 드리는 제사가 아닙니다. 그냥 가만히만 있어라, 이것 먹고 그래서 집이 올라가는 것은 우리가 지을 테니까 훼방만 하지 말고 사람이 떨어지거나 벽이 무너지지만 않게 그렇게 잘해서 허가를 맡게 그렇게 해 달라. 그런 것으로 엎드려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 신이었습니다. 그런 신들에게 있어서 그 사람들이 드리는 제사는 그야말로 그 신들의 양식이 아닙니까?
그런데 그 똑같은 것을 너희들이 드리는 그 상번제는 내 양식이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이 당신 자신을 너무 낮추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의 유비입니다. 유비가 무엇인가 하면 유추해서 생각할 수 있도록 다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그게 무엇인가? 너희들이 지금 이 시대에 보고 있는 많이 떼거지로 몰려다니는 귀신들이 있지. 그들이 걸근대면서 찾는 게 무엇인가? 그게 바로 밥이 아닙니까? 그들은 그것을 먹기 위해서 미친 듯이 돌아다니는데 나는 그 귀신들처럼 떡과 술 이런 것을 받아먹는 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들의 헌신이 나에게는 양식이 된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성경구절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너희에게 모르는 양식이 내게는 있도다. 그런데 그 양식의 정체가 무엇입니까? 나를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이다. 그것이 양식이었습니다. 얼마나 기가 막힌 일치입니까? 이게 바로 상번제가 의미하는 것입니다.
상번제를 드릴 때 그 드리는 것을 하나님이 드시지도 않지만 드실 것도 없습니다. 왜 남김없이 다 태워야지 되었으니까.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그 속에 바쳐진 제물 자체가 아니라 그 제사 행위 속에 숨어있는 헌신의 의미입니다. 그래서 이 헌신의 제사를 통해서 아침저녁으로 제사를 드리면서 이스라엘 백성들 모두가 하나님을 위한 헌신자로 바쳐진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에게는 양식이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자, 여러분은 하나님이 은혜를 주실 때 배부르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은혜를 많이 받으면 배도 안 고픈 것을 아십니까? 안 고픕니다. 그래서 은혜를 못 받고 양심의 가책과 괴로움에 눌려서 이를 악물고 금식하면 사실 하루 금식하는 것도 그렇게 힘이 드는데 하나님의 은혜가 풍족히 임해서 주님의 손에 이끌려서 금식을 하면 일주일씩 기도원에 올라가서 금식기도를 해도 보따리를 다 짊어지고 씩씩하게 내려옵니다. 그게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가 우리에게 임할 때 우리의 영혼이 배부르고 아주 풍족하고 심지어는 육체에 새 힘이 솟게 됩니다. 자,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은혜를 구합니다. 하나님 저 은혜를 받으려고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저 너무 곤고합니다. 사실 이 말도 좀 문제가 있습니다. 무슨 은혜가 곤고를 해결해주는 진통제입니까? 그래도 하여튼 은혜가 싫다는 것보다 낫습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겠다고 하는데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면 우리의 영혼에 만족이 되고 그래서 그 은혜 때문에 우리의 영혼이 참 기쁘고 감사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실 때 우리는 배가 부릅니다. 쉽게 표현하면 만족이 됩니다.
그럼 한번 우리중심으로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해보십시오. 그럼 하나님은 우리가 어떻게 할 때 우리를 보시면서 아, 내가 너를 창조하기를 참 잘했구나. 내가 아직 네가 이 땅에 살아 거기 있는 것이 참 기쁘구나. 내가 너를 열린 교회에 보내준 것도 참 기쁘고 거기에서 집사로, 혹은 장로로, 권사로, 혹은 평신도로, 교역자로 그렇게 세워서 내가 너를 거기에 두었는데 아, 그게 정말 내가 만족이 된다. 아, 애야 나는 네가 거기에 있어서 참 좋다. 하나님이 언제 그런 생각을 하시겠습니까? 왜 꿀을 드셨나. 언제 하나님이 그렇게 아, 정말 만족이 된다. 그러시겠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만 사랑하며 하나님을 위해서 온전히 헌신하면서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뜻이 그 사람을 통해서 거기서 이루어지고 있을 때 그때에 좋습니다.
교회도 이렇게 일군들이 많은데 교역자, 직원, 그 다음에 위원장들도 계시고 부위원장도 계시고 하여튼 회장도 계시고 부회장도 계시고 뭐 많습니다. 그때 어떤 사람은 이렇게 보면 그 사람은 거기에 있어서 참 좋다. 저 사람이 거기에 있으니 걱정할 것이 없다. 거기서 하나님의 뜻이 잘 이루어지는구나. 그것을 볼 때 목회자로서 만족이 됩니다. 아. 참 좋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주셨을 때 언제 그렇게 아, 그렇게 참 좋다. 이제 만족하다. 너를 보니까 내가 진짜 배가 부르구나. 그게 언제입니까? 하나님을 위해서 살면서 거기서 하나님께 헌신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면서 살 때 그때 하나님이 그를 보시면서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어려운 말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려울 게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상번제는 나의 음식이니라. 음식의 결정적인 특징이 무엇입니까? 그것 없이는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간식은 안 먹어도 삽니다. 양식은 안 먹으면 죽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너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양식이 있는데 그것은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목숨 걸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위해서 자기를 다 던져서 완벽한 자기를 다 바치는 헌신의 삶을 사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의 죽으심이라 그게 예수님께는 양식이 된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는 당신 자신이 핍절해서 사실 수가 없었습니다.
오늘 우리들의 삶을 보십시오. 어쩜 그렇게 태만해져서 그렇게 살아서 무슨 은혜가 있겠습니까? 사는 날 24시간 중에 전부다 자기 자신만을 위하는 시간이고 자기 가족만을 위한 삶인데 그렇게 해서 회사는 왜 다니는지, 아니 월급을 주니까 회사에 다니지 회사 자체를 사랑해서 다니는 사람이 있으면 한번 손들고 나와 보라고 하십시오. 그게 뭡니까? 그렇게 살아서 마지막에 하나님 앞에 갔을 때 우리 인생의 많은 날들을 보냈어도 주님을 위해서 산 날은 없습니다. 그럼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놓으신 계획은 어디로 간 것입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놓으실 때는 우리를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을 어떻게 하든지 이 지구 한 모퉁이에서 봉사하면서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에게 재능도 주시고, 제물도 주시고, 시간도, 건강도, 젊음도, 가족도, 성도의 교제도,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도, 그리고 아름다운 목양의 관계도 모두 주셨는데 살아온 모든 날들은 다 자기가 벌어먹기 위해서 산 것입니다. 가족들을 위해서 살고 그래서 하나님을 위해서는 아무 것도 바친 날들이 없이 살았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항상 그 사람에게는 배가 고프십니다. 허기지신 것입니다. 그게 얼마나 허무한 삶입니까? 이 세상에 불신자보다 더 허무한 삶입니다. 왜 불신자는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니까 오늘은 먹고 내일은 마시자 그러고 삽니다. 모르니까 그렇게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다 알고 그렇게 살아서 마지막에 무슨 재미가 있겠습니까?
세 번째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이 상번제를 가리켜서 나의 향기라 그러셨습니다. 이것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집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자기를 하나님 앞에 다 드리는 헌신이 하나님이 훅! 하고 맡으실 때 향기로운 향기가 된다는 뜻을 가지는 것입니다. 먼저 그래서 자기를 모두 드려서 하나님을 위해서 섬긴 사람들은 하나님의 마음에 그들의 이름만 떠올려도 하나님이 기쁘십니다. 그래서 성경에 이 땅에 살아있을 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자라고 일컬음을 받았던 사람들 중에 게으름과 싫증 속에서 나태하게 살았던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이 땅에 살았을 때 그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자라 하는 칭찬을 받았던 모든 사람들은 자기는 없는 것처럼 다 자기를 들어서 하나님을 위해서 섬기며 헌신하며 하나님 앞에 더 많이 드리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자라 일컬음을 받았던 자들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하나님이 믿음의 사람들을 기뻐하신다는 증거가 나온다고 거기 수많은 기라성 같은 믿음의 위인들이 구름처럼 허다하게 등장합니다. 그 사람들의 공통된 특징은 거기에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사람들 중에서 평안한 별장 같은 곳에서 일생을 비단에 휘감겨서 호의호식하면서 살았던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모두 생사를 넘나드는 길을 걸었고 어떤 사람은 칼에 찔려 죽고 어떤 사람은 톱에 켜 죽임을 당하고 어떤 사람은 이미 떠나온 본향 돌아갈 수 있었으면 돌아갈 수 있었으려니와 보다 나은 본향을 사모했기 때문에 일생을 나그네라 일컬음을 받으면서 타관에서 방황하며 유리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왜 가고 싶은 본향이 있는 사람이기에 그랬습니다.
모세와 같은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백성들과 더불어 능욕을 받는 것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도 더 소중하게 여겼으니 이는 그리스도를 위해 받는 능욕을 그 모든 애굽의 보화보다도 더 낫게 여겨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고난 받는 것을 더 좋아했습니다. 그들이 왜 그렇게 고난으로 가득 찬 인생의 길을 걸어갔습니까?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하나님이 자기를 구원하고 불러주신 그 원래의 계획에 헌신하면서 살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랬던 것입니다. 가고자 하는 목적지가 있으니까 고난이 있으니까 고난이 있는 것이지 이리 떠밀리고 저리 떠밀리고 사는 사람들에게 무슨 고난이 있습니까? 죄로 말미암은 고생은 있을지 모르지만. 그렇게 하나님 앞에 살았던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는 너무 향기로운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들만 생각하면 너무 기쁘십니다.
제가 언젠가 여러분 앞에 교회사정을 알리는 글을 쓸 때 제가 그 글을 썼습니다. 10년을 열린 교회를 이끌어오면서 지금 있는 사람도 있고 떠난 사람도 있지만 교회가 정말 어려울 때 자기를 다 희생하면서 섬겼던 사람들은 나는 목회자로서 평생 동안 그들을 잊어버릴 수가 없습니다. 이름 석자만 생각하면 눈물이 납니다. 그리고 마음 진심으로 그들을 축복해주고 싶습니다. 그러니 나같이 사랑이 없는 사람도 그런 마음이 생겨나니 사랑의 원천이신 하나님이 당신을 위해서 그렇게 산 사람들을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이 우리의 헌신을 받으시는 것에 대해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어린아이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을 주어도 하나님이 다 기억하신다니 그러니 자기의 인생 전체를 하나님의 것이라고 생각하며 주님께 바치며 살았던 사람들은 하나님이 얼마나 그들을 귀하게 생각하시겠습니까? 얼마나 소중한 사람들이겠습니까? 그게 바로 향기의 첫 번째 의미입니다.
또 하나는 이 향기는 하나님 앞에서만 향기가 아니라 사람들을 향해서도 향기입니다. 그래서 이 향기가 많은 사람들에게 그렇게 하나님을 위해서 자기를 다 드리는 열심히 헌신해서 사는 사람들, 주님만 사랑하고 주님 앞에 자기를 번제처럼 다 태워드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통해서 주님의 거룩의 향기가 많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펼쳐져 나갑니다. 정말 얼마나 놀라운지 모릅니다.
다 옛날에 있었던 일입니다만 왜 우리 구역장을 하다가 어느 때가 되면 너무 힘들거나 개인적인 사정이 있어서 이번 해에는 좀 쉬고 싶습니다. 그런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또 우리 교회는 기분 좋게 받아줍니다. 그동안 애썼으니까 쉬어라. 그러면 그 사람은 구역원이 됩니다. 자기 구역장이 생길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럼 그런 지체들 중에서 한 1년씩 쉬는 것이 아주 큰 힘이 되는 지체들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말에 너무 용기를 갖지 마십시오. 아니 어떤 경우인가 하면 여러 번 봤습니다. 자기구역장이 한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깐에는 상당히 잘한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어떤 사정이 생겨서 쉬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구역장 밑에 갔는데 제대로 걸렸습니다. 아니 이 구역장이 섬기는 것을 일년을 보니까 자기는 구역장도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러면서 그렇게 설교를 들으면서도 변화되지 않던 사람이 자기와 같이 똑같은 위치에서 섬기는 사람이 그 실체화된 섬김의 현장을 보면서 하나님을 이렇게 섬겨야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깨트려지게 됩니다. 놀랍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바쳐지는 이 헌신 속에는 사람을 감화시키는 놀라운 향기가 전해있습니다. 그래서 항상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다 드리고 생명을 건 사명자의 주위에는 항상 그 사람의 헌신을 보면서 취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 하나님을 저렇게 사랑해야지 되는구나. 아, 정말 주님을 위해서 생명을 버리고 예수님을 위해서 목숨을 버린다는 것이 저런 뜻이구나. 그러므로 향기로서 생생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구원하신 이스라엘 백성들 하나님이 예수의 피로 건져내신 이 그리스도인을 향한 아버지의 뜻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정말 헌신되고 정말 아름답게 살아서 그래서 사람들이 우리를 보면서 하늘의 향취를 느낄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그런 사람들이 되기를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상번제를 통해 지시되고 있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자기를 전부 드리는 이 헌신이 얼마나 중요한 헌신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이 상번제를 드리게 되는데 이 상번제는 번제 하나로만 드려지지 않고 세 개의 제사가 함께 연합을 이루어서 상번제를 구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상번제를 이루는 삼제입니다. 상번제를 이루는 첫째는 무엇인가 하면 이 제사 자체가 불에 태워서 드리는 제사여야 한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곡식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드리는 이 소제가 또 상번제를 이루는 구성요건이 되는 것입니다. 원래 피 없는 제사는 없습니다. 성경에 분명히 피 없는 제사는 없나니 그랬습니다. 그런데 이 소제가 피 없는 유일한 제사입니다. 곡식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바치는 제사입니다. 그런데 이 제사는 단독적으로 드려지지는 않았습니다. 항상 이렇게 번제 같은데 끼어서 드렸기 때문에 사실상 피 없는 제사는 없다.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세 번째는 관제입니다. 즉 전제입니다. 그래서 드려진 제물 그 위에 마지막으로 술을, 포도주를 확 뿌려서 드리는 그 제사 그 세 가지가 합쳐져서 그래서 상번제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이렇게 상번제에 나타난 세 삼제, 상번제가 전체적으로 상번제를 구성하고 있는 삼제 화제, 소제, 번제 이렇게 나오는데 오늘은 화제까지만 내일은 삼일동안은 아마 소제를 다루게 될 것이고 마지막 5일 째는 전제를 다루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이 됩니다. 이제 첫 번째 여기에 등장하는 것이 화제입니다. 화제는 아까 얘기했듯이 제물은 일년 된 수양, 그리고 흠이 없는 수양을 드리게 되었는데 그래서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성숙과 순전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신앙생활을 하면서 헌신을 할 것인가 개인적으로 성숙해질 것인가. 이게 양자택일인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스개 소리로 어느 교인들이 우리교회 목사님은 교회에서 봉사하는 것 대게 싫어하셔. 우리 목사님은 제일 좋아하는 것은 참된 신자가 되는 것이야. 그런 마음을 가지고 한 사람도 참된 신자가 된 사람이 없습니다. 두개를 나누어서 그래서 딱 잘라서 그래서 나는 요즘 참 신자가 되기 위해서 애를 너무 쓰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헌신할 에너지가 없어. 그리고 내가 참 신자가 되지 않으면 내가 드리는 많은 헌신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 하여튼 열린 교회에 와서 설교를 몇 년 들으니까 느는 이 말이요, 표현이 아닙니까? 그러니까 청산유수입니다. 그러니 담임목사님에게 누가 말만 배우라고 그랬습니까? 다 배워야지, 그래서 그 성경적으로 보면 이 두 가지는 절대로 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새벽에 내적 순종과 외적 순종이 어떻게 나누어질 수 없는지 가르쳐드렸습니다. 이것도 똑같습니다. 내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마음이 하나님께 바쳐지는 헌신과 외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이 삶이 나누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종종 성경에 의해서 설교에 의해서 그렇게 섬기는 삶이 강력한 판별의 대상이 되는 이유가 무엇 때문인가 하면 내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바쳐지는 진정한 자기 드림이 없는 것을 외적인 섬김으로 포장하고 숨기고 위선하려는 것이 문제입니다. 위선하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면 누가 합니까? 남이 다 청소해놓은 예배당에 와서 가만히 예배를 드리고, 그 다음에 남이 다 해놓은 것을 와서 먹고, 남이 다 만들어놓은 교재 갖고 가서 공부하고, 남이 다 준비한 예배당에서 남이 다 준비한 설교를 듣고, 그리고 세상에 나가서도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그렇게 분투하면서 피 흘리면서 이 사회 속에서 더러운 것과 더불어 싸우고 쟁투하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애썼던 그 길, 살살 뒤돌아가면서 호박씨를 까고 그렇게 살아가는 그런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겠으며 어떻게 그 사람 속에 생명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죄의 용서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런 고난 받은 것이 없고 주님을 위해서 아무 것도 희생한 것이 없는데 그렇게 살아가는 삶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가 진정으로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이렇게 할 일이 많고 척박한 땅에 태어나서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알기 원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데 강물처럼 흘러가야 할 곳이 이렇게 많은데 어떻게 그렇게 살수가 있겠습니까?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이 제물을 드리는 시기가 언제인가 하면 아침과 저녁에 드리는 것입니다. 아침은 그야말로 “복개로”라는 히브리 단어인데 아침 일찍 해뜨는 시간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저녁이라고 하는데 사실은 히브리 성경에는 이렇게 나옵니다. 두개의 저녁 사이에 한 제사를 드린다. 이렇게 나옵니다. 학자들이 이것을 가지고 말이 많은데 아마 아침에 드리고 그다음에 여기 저녁이 있고 이쪽에 저녁이 있는데 그 다음날은 다시 아침에 드리는데 요사이에 드린다. 이것입니다. 그러니까 오후에 드리는 제사일 것이라고 봅니다. 여기에서는 의역을 해서 해질 때 드리는 제사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실 그 시간이 무엇인가를 규명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지만 어째든 하루에 두 번을 드리는데 아침에 한번 드리고 그 다음 드리는 제사는 저녁과 그 다음 저녁 사이에 드리는 제사입니다. 그래서 결국 하루에 두 번 드리는 것은 이렇게, 이렇게 배열이 되어 나가는 것이니까 결국 하루에 두 번 드리는 것이 맞습니다. 하나는 아침 일찍 드리고 또 하나는 저녁 때 드리는 제사라고 번역을 한 것입니다. 어째든 그렇게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게 됩니다. 아침에 제사를 드리게 됩니다. 그러면 모든 이스라엘 백성, 수백만의 사람들이 회막 앞에 모두 나와서 도열을 하고 예배를 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매일 하루에 두 번씩 하려면 그 사람들의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지 않고 제사장들이 제사를 드리게 하신 것입니다. 제사장들은 더 일찍 일어납니다. 그래서 모든 준비를 끝내고 아침에 하나님 앞에 정결한 마음으로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를 헌제자로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다 태워서 드리는 헌신의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침에 일어나서 눈을 뜨고 이렇게 보면 저 중앙의 성막에서 번제의 연기가 올라옵니다. 그때 생각합니다. 아, 그렇다. 제사장이 아침 일찍 일어나서 우리 모두를 위해서 이스라엘 전체를 헌제자로 해서 하나님 앞에 헌신을 상징하는 번제를 드리고 있구나. 아, 그렇다, 맞아. 우리는 하나님 앞에 하나님을 위하여 살기로 택정이 된 백성들이지, 우리가 비록 이 땅에 살고 그래서 이 땅에 있는 자원이 필요하고 그래서 때로는 전쟁도 하고 그래서 때로는 서로 경제활동도 하고 고통을 받으면서 살고 있지만 그러나 우리는 모두 한 공동체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부름을 받았고 우리 하나님만 사랑하고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며 살아야 할 사람들이구나. 아, 형제여 오늘도 우리 모두 여호와 하나님을 위해서 살자. 그리고 하루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쁘게 막 삽니다.
저녁때가 되어서 다 하고 오면 저쪽에서 다시 또 연기가 올라가고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립니다. 그것을 보면 오늘 하루가 정말 주님을 위해서 산 하루였는가. 오늘 하루 바쁘게 살았지만 이중에서 정말 내가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주님을 위해서 산 시간이 얼마나 될까?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하루 동안 주님을 위해서 살지 못한 것을 회개하며 그리고 휴식에 들어가는데 그 휴식도 내일 이제 주님을 위해 살기 위한 휴식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휴식을 포함한 모든 시간이 하나님의 것이고 심지어는 자신의 생명까지도 주님의 것이라고 하는 신앙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지고 있었고 그것을 이제 번제의 제사를 통해서 언제나 매일같이 확인을 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참 하나님이 얼마나 놀라우신가 하면 이런 하나님이 한번만 아니라 두 번씩 드리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아주 훌륭하게 하나님이 교육을 시키신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한번 돌아보십시오. 우리 모두 은혜 받은 사람이니까 만약에 살다가 보면 하나님의 은혜가 강물처럼 밀려올 때 내 생명도 주님께 드리겠습니다. 이제는 내가 주님의 뜻대로 살겠습니다. 내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하나님 이외에 이 세상에 있는 것 사랑하지 않고 살겠습니다. 나는 이제 주님의 것입니다. 안 그랬던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런데 너무 자주 잊어버립니다.
열린 교회 회심 이야기를 읽으면서도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아. 이때는 아름답게 간증했는데 미끄러졌지. 여기서 끝난 그 후편을 내가 알고 있지. 그런데 다시 또 회복했지. 그런 것입니다.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그렇게 약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것을 두 번이나 보여주시면서 그들로 하여금 이제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할 사람인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친절하게 교육을 하십니까?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 잊혀졌을 것입니다. 언젠가 주님을 만나셨지요? 죄악 된 인생의 길에서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주님의 뜻대로 살기로 다짐했을 것입니다. 잊어버리셨습니다. 사명을 떠나가고 다시 마음이 죄로 엉클어지고 이제 하나님을 만났던 은혜의 감격이 사라졌을 것입니다. 그 은혜의 감격이 사라진 한복판에는 떠나버린 사명지가 있고 하나님이 은혜를 주셨을 때 그 은혜를 유지하는 가장 중요한 길은 은혜를 주신 이유가 되시는 그 소명에 헌신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때 그가 가장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런 명령을 하나님이 누구에게 주셨는가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무엇인가 하면 믿지 않은 사람들에게 주신 계명이 아닙니다. 이것은 모두 하나님을 믿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뜻대로 살아야 할 백성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바로 그런 사람이 아닙니까? 우리가 불신자라면 이 하나님의 계명을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아니 주님을 만나지도 못하고 구원받지도 못했는데 헌신은 무슨 헌신입니까?
그런데 여러분도 이렇게 생각하실 것입니다. 헌신은 뭐 특별히 기도원에 가서 하나님을 만나고 뒤집어진 사람들이나 목회의 길을 걸어가려고 할 때 헌신이지 우리 평신도가 무슨 평범하게 사니까 평신도지, 무슨 놈의 헌신은 헌신인가. 헌신하려면 헌신도가 되어야지, 평신도인데. 그러잖아요. 그런데 아닙니다. 정말 아닙니다. 그 이스라엘을 헌제자로 해서 이스라엘 모두를 대신해서 제사장이 드릴 때는 그 안에 어린아이와 여자까지 모두 포함되어 있습니다. 주님이 구원하신 은혜 언약의 백성들인 그들이 하나님을 위해서 살고 하나님을 위해서 섬기지 않고는 그들이 결코 행복할 수도 없고 자기를 구원해놓으신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행복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아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제물만 보시는 것이 아니라 그 제물을 드리는 헌제자의 내면의 삶이 드리는 그 외면의 제물과 일치되는 것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제 마음은 그게 아닙니다. 그렇게 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하지 말고 하나님은 마음만 받으시는 분이 아니라 그 마음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그 제물까지 함께 받으실 때 비로소 우리가 하나님 앞에 바쳐진 헌신의 삶을 산다는 것을 입증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제 마음은 그게 아닌데, 마음이 그게 아니라 마음이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포장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향해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는 여러분의 삶의 현장을 보면 됩니다.
학개서 선지자가 나타나서 황무해진 짓다만 성전을 보면서 너희들이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한번 보라고 도전했던 이유도 바로 그것 때문이 아닙니까? 무너진 성전이 바로 하나님과 깨어진 관계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은 그게 아닙니다. 그렇게 말하지 마십시오. 경솔하게 그렇게 말하면 두 번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말씀하시지 네 마음은 그게 아닌 것을 내가 안다. 그래야지, 변명하고 핑계하고 그러니 일평생 주님을 믿으면서 아무 것도 한 것이 없고 마당 뜰만 밟으면서 남이 다 섬기고 봉사한 그것을 밟으면서 그러니 귀족처럼 대접을 받으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세상에 나가서도 야비하게 세상에 나가서는 가면을 뒤집어쓰고 핍박도 피하고 고난도 피하면서 그렇게 사는데 일생을 다 산 삶이 휘청거리면서 산 사람인데 거기 생명이 있겠습니까? 은혜의 감격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나타남이 있겠습니까? 그를 통해 영광을 받으실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살다가 죽으면 하나님 앞에 나가서 네가 나를 사랑했니? 네가 나를 위해 어떻게 섬기다가 왔니? 그러실 때 뭐라고 대답하겠습니까?
마지막으로 이 제사를 드릴 때 제사의 방식이 세 가지가 나오는데 이게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매우 큽니다. 첫째는 쪼갭니다. 쪼개는데 이 제물을 통째로 갖다 바치는 게 아니라 쪼갭니다. 머리를 자르고 그 다음에 사지를 자릅니다. 사각을 냅니다. 그 다음에 기름을 파헤칩니다. 다 분리를 시켜서 사각과 그리고 기름, 머리, 그리고 마지막에 정강이까지 따로 분리를 합니다. 쪼갭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헌신을 상징하는 이 번제에 바쳐지기 위해서 제물이 와서 그냥 죽임만 당하는 것이 아니라 갈기갈기 찢어져서 쪼개집니다. 여섯 조각으로 쪼개져야지만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제물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럼 한번 보십시오. 여러분, 주님을 위해서 자기가 제물로 바쳐지고 싶다. 주님을 위해서 살고 싶고 주님을 섬기고 싶습니다. 그럴 때 이렇게 하나님 앞에 바쳐진 제물이 되기 위해서 가장 필수적으로 제일 먼저 따라와야 할 것은 죽음입니다. 자기가 죽어야 하고 죽는 것을 지나쳐서 그 다음에 쪼개져야 합니다. 사지가 쪼개지고 육 등분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픕니까, 안 아픕니까? 아픕니다. 그래서 항상 하나님의 사명은 목숨을 걸고 주님을 위해서 섬기는 사람들은 모두 자신을 섬긴 자신을 섬기는 사역 속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봅니다. 열심히만 한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 자기 능력만 갖다가 쓸어 넣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일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기가 깊이 죽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사명을 맡게 되면 그 1-2년 봉사하고 나서 가슴이 산산이 찢어집니다. 그래서 이 사람을 미워하고 저 사람하고 싸우고, 이 사람하고 원수를 맺고 저 사람을 보기 싫어하고, 교회에 대한 원망, 하나님께 대한 원망으로 꽉 찼습니다. 마지막에는 내가 다시는 교회 일을 하나봐라. 그러면서 토라집니다. 왜 그렇습니까? 안 죽어서 그렇습니다. 안 죽은 사람을 하나님이 어떻게 쓰시겠습니까? 죽지 않은데, 쪼개지지 않은 제물을 하나님이 어떻게 쓰시겠습니까? 덜 익었어. 함량미달입니다. 죽으십시오.
예수님을 한번 보십시오. 죄 없으신 예수님이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면서 사실 때 당신이 그렇게 죽으시면서 사셨습니다. 예수님이 누구 멱살을 잡고 싸우셨습니까? 제자들이 다 예수님을 배반하고 도망갈 때 제자들의 이름을 수첩에 적어놓고 두고 보자. 예수님께서 그러셨습니까? 안 그러셨습니다. 그런데 왜 여러분들은 그렇게 하십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이 사명의 자리에 세워주셔도 사명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은혜를 많이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 가운데도 이런 사람이 나옵니다.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의 일생 전체는 주리신 생애였고 사지가 찢어지신 생애였습니다. 산산이 쪼개지신 생애였습니다. 그 헌신이 좋은 것 같으면 우리에게 차례가 왔겠습니까? 그 헌신이 달콤한 것 같으면 우리에게 차례가 왔겠습니까? 예수의 고난에 동참하고 십자가의 은혜를 알게 하시려고 사명을 주셨는데 왜 그렇게 떠납니까?
금년 연초에도 너무 마음이 아팠습니다. 이일은 이 사람에게, 이 일은 이 사람에게 시켜라. 부목사님들 전도사님들이 와서 그 성도는 이런 일을 안 한다고 합니다. 그 집사님은 이런 일을 못하겠다고 합니다. 아무개 장로님도 아니라고 합니다. 누구는 아니라고 합니다. 그래서 내가 마음이 너무 아팠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건져주셨는데 오히려 저는 주님의 무익한 종이오니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그래야지 뭘 안 하겠다고 그러는지 회개하십시오. 정말 하나님의 나라는 그대들의 헌신이 없어도 이루어집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누군가를 세워서 하십니다.
그런데 그런 은혜의 섬김으로부터 소외된 사람들, 십자가를 벗어버리면 자유가 있을 것 같지만 그러나 그렇게 해서 얻는 자유가 뭔지 나는 한번 묻고 싶습니다. 얼마나 뼈 빠지게 주님을 여러분들이 섬기셨기에 그렇게 생활을 하십니까? 그러면서도 여러분들의 삶에 하나님의 복이 있기를 바랍니까? 목회자의 마음을 그렇게 아프게 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눈물 흘리게 하고 그런 이기적인 삶을 살면서 하나님께 무슨 축복을 구합니까?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살아야 하나님이 복을 주시지, 그까짓 게 뭐가 그렇게 힘이 듭니까? 교회에 와서 한두 가지의 봉사가 뭐가 그렇게 힘이 듭니까? 이 세상에서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서 많이 희생하고 분투하고 죄와 타협하지 않기 위해서 고난을 받는다고 치지만 그 고난이 아무리 커도 주님이 주시는 은혜보다 큽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살아갑니까? 회개하십시오.
내가 여러분들을 향해서 섭섭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다 지나갔지만 나는 여러분들의 영혼을 너무 사랑하는 목자로서 여러분들에게 간곡하게 권합니다. 하나님이 정말 마음아파하십니다. 회개해야 합니다. 정말 회개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쓰시려고 하고, 하나님이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물질을 원하고, 하나님이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재능이 필요하다고 그러시고, 하나님이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그러시는데 싫다고 그러실 수가 잇습니까?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그럴 때 하나님께서 알았다. 내 일생 너를 안 쓰마! 그러면 여러분들이 또 어구! 감사합니다. 그럴 수 있습니까? 그렇게 하고 하나님 앞에 정말 영혼에 빚진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살면 안 됩니다. 어떤 축복도 없습니다. 신약이든 구약이든 하나님은 당신을 위해서 모든 것을 바치며 섬기는 사람의 편이었습니다. 자기를 위해서 당신을 위해서 자기가 쪼개진 사람, 그 사람들 편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제물을 바치기 위해서는 그 제물을 씻어야 했습니다. 물로 깨끗이 씻어야 했습니다. 이것을 뭘 의미하는가 하면 은혜에 의해서 정결해져야 합니다. 나는 이해가 안 가는 게 무슨 교회일 좀 하라고 맡겨놓으면 일하는데 정신이 팔려서 또 은혜 받는 데는 또 완전히 관심이 없고 마지막에는 자기가 이렇게 은혜를 못 받은 게 목사님이 일을 시켜서 그랬다고 그러고 화살이 나에게 돌아옵니다. 언제까지 그렇게 유아기적인 신앙생활을 하겠습니까? 그래서 다 집어치우고 혼자 와서 그림같이 예배를 드리면 그래 꿀같이 은혜를 받을 것 같습니까? 그래 다 그만두고 와서 홀로 조용히 예배를 드리고 가니까 꿀같이 은혜가 쏟아집니까? 졸지 마십시오. 예배 시간에, 자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그렇게 다루시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충성할 때 먼저 자신이 깨끗하게 씻음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많이 섬기는 사람일수록 땀만 흘리면 안 됩니다. 땀보다 더 많이 눈물이 흘러야 합니다. 자기가 부족하고 섬길수록 자기가 더럽고 자기가 불결하고 자기의 죄악 때문에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지지 않고 세상이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 많이 울며 아파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바로 진실한 헌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번제의 특징은 다 태워서드리는 것입니다. 화목제 같은 것은 제물을 남겨서 제사장도 먹고 백성들도 함께 나눕니다. 그러나 이것은 안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 혼자서 드시는 제사입니다. 그래서 다 태워드리는 것입니다. 이게 헌신의 정신을 보여줍니다. 조금 자기의 마음의 일부를 떼어서 하나님 앞에 바치는 그것 안 됩니다. 하다못해 주일학교 선생을 하고, 교회에 와서 화장실을 청소를 해도 자기를 다 태워서 자기를 다 드릴 때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번제를 보십시오. 남김없이 정강이 그리고 그 사지를 자른 모든 것, 기름까지 번제단에서 남김없이 다 태워졌습니다. 소 같은 것을 하나 태우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러갔겠습니까? 그것을 태우면서 그 수많은 연기 속에서 신실한 제사장들이 얼마나 많이 울었겠습니까? 이렇게 섬김을 받으셔야 할 주님, 우리 백성들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이 애굽에서 건져내어 이렇게 구원받았는데 이 백성들이 이렇게 자기를 다 태워드리기까지 하나님을 섬길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그렇게 기도하지 않았겠습니까?
다 태워드리는 모본을 가장 잘 보여주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33세 해를 이 세상에 와서 사시면서 머리 둘 곳 없는 생애를 사셨습니다. 자기 것도 없으시고, 좋은 집도 없으시고, 화려한 의복도 없으시고 그렇게 거칠게 일생을 사시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자기를 다 드리셨습니다.
머리 둘 곳조차 없으시던 혼자 기도하시던 주님 생각해요
안락과 상관없이 행복과는 관계없이 풍족한 누림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생애를 사셨습니다. 하나님이신데도 나그네처럼 사셨고 마지막에는 자신의 살까지 떼어서 주시고 피까지 쏟아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못 박혀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무엇이고 언약의 백성들이 어떻게 그분을 섬기면서 살아야 하는지를 온 몸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되겠습니까? 어떻게 얻은 구원, 이제 인생의 날은 저물어 가는데 주님 앞에 설날은 다가오는데 주님이 부르셨을 때 내가 너에게 구원의 은혜를 주었는데 나를 위해 어떻게 살았는가? 하고 물을 때 뭐라고 대답하겠습니까? 잘 살아야 합니다. 잘 살고 이렇게 자기를 다 태워드려서 주님을 섬기며 살면 이슬과 같은 목숨은 사라져도 우리가 주님을 향해 섬긴 아름다운 사랑의 섬김은 하늘에서 별같이 빛나고 척박한 이 세상은 우리를 통해서 흘러가는 강물의 해택을 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우리를 기뻐하실 것입니다. 이게 주님이 바라시는 바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2. 자기깨어짐과 헌신
“또 그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여호와께 드릴 화제는 이러하니 일년 되고 흠 없는 수양을 매일 둘씩 상번제로 드리되 한 어린양은 아침에 드리고 한 어린양은 해질 때 드릴 것이요 또 고운 가루 에바 십분지 일에 빻아낸 기름 힌 사분지 일을 섞어서 소제로 드릴 것이니”(민28:3~5)
이제 지난 시간에는 이렇게 상번제가 얼마나 중요한 것이고 또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말씀을 드리는 것과 함께 이 상번제는 세 개의 제사가 합쳐져서 상번제를 드린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첫째는 화제이고, 두 번째는 소제이고, 세 번째는 전제라고 말씀을 드렸고 화제는 불로 태워서 드리는 방식의 제사이고, 소제는 곡식을, 그리고 전제는 액체를 부어서 드리는 제사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는 상번제의 의미와 그 중요성, 그리고 상번제의 첫 번째 제사가 되는 이 화제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면서 화제가 드려지는 의미가 무엇이고 화제로 받쳐지는 제물들은 사각이 떠지고 그리고 기름과 그리고 머리와 이렇게 나누어지고 그 나누어진 것들이 각각 깨끗이 씻겨지고 그래서 그것들이 단위에서 다 태워드려지는 것이 상번제를 이루는 화제라고 말씀을 드리면서 그 번제가 가지고 있는 의미 대해서 함께 말씀을 나누며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오늘서부터 아마 3일정도 되지 않을까 생각이 되는데 집중적으로 이 두 번째 제사인 소제를 다루게 되고 그리고 마지막 날 하루 정도, 아니면 이틀 이제 전제에 대해서 다루면서 상번제에 대한 말씀을 마칠까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어째든 오늘은 이제 상번제를 이루는 두 번째 제사인 소제에 대해서 우리들이 한번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이 소제는 그야말로 곡식으로 드리는 제사였습니다. 다섯 종류의 제사 가운데 없는 유일한 제사였는데 이 소제는 혼자 드려지는 제사가 아니라 피 있는 다른 제사와 함께 곁들여 지내는 제사였습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이 소제는 독립적인 제사라기보다는 다른 제사를 더 온전하게 해주는 그런 의미의 제사라고 생각이 됩니다.
이 소제는 히브리말로 “민하”라고 표시하는데 이 히브리말에서 민하라고 하는 말은 곡물, 예물 이런 뜻입니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은 이 소제의 의미는 하나님께 특별한 화제가 하나님 앞에 태워서 자기를 드리는 것이고 그 화제가 이룩하고 있는 이 번제가 자기를 하나님 앞에 다 태워드리는 헌신을 의미한다면 이 민하 라고 하는 이 소제는 그런 자기 헌신이라기보다는 하나님께 예를 표하고 그 하나님께 매우 특별한 호의와 은총을 기대하면서 드리는 곡물과 같은 성격의 제사다. 이렇게 해석을 합니다.
그런데 이 소제가 이제 오늘과 내일, 길면 오늘과 내일 그글피 3일에 걸쳐서 우리들이 샅샅이 이 소제를 탐사하겠습니다만 이것을 깊이 들여다보면 이 소제가 가지고 있는 내용이 무궁무진하고 너무나 신비합니다. 그런데 이 의미가 다 드러나게 될 때 우리가 참으로 헌신하는 사람의 그 내면의 세계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만약에 이 번제, 화제로 드려지는 이 번제가 하나님 앞에 헌신하며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외적인 삶의 모습이 어떠해야하는지를 보여준다면 오늘서부터 우리들이 살펴보게 될 이 소제를 그렇게 자기 몸을 하나님 앞에 다 드리는 헌신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의 내면의 세계가 어떠해야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외면을 보여주는 이 번제의 다 태워드리는 제사와 그리고 이렇게 헌제자의 내면의 세계가 어떠해야지 되는지를 보여주는 이 소제를 함께 묶어서 상번제 속에 넣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데 있어서 우리의 내면만이 아니라 우리의 외적인 모습만이 아니라 내, 외과 일체된 가운데 하나님을 섬기면서 사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의 본분이라는 사실을 가르쳐주시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런 가르침을 그림을 그리자면 그게 바로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마음과 뜻과 성품과 네 목숨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둘째도 이와 같으니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계명을 바로 그려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소제는 그저 대체로 하나지만 굳이 나누어서 구분을 한다면 일반 소제와 초실 소제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일반 소제는 그저 일반 모든 소제를 가리키는 것이고, 초실 소제는 곡식이 처음 열매를 맺었을 때 그것을 하나님 앞에 드리는 소제입니다. 두 제사가 크게 차이가 날 것은 없지만 굳이 차이점을 찾아본다면 일반 소제에서는 생곡식의 가루를 곱게 빻아서 제물로 바친데 비해서 초실 소제는 처음 곡식 낟알을 잘 빻아서 하나님 앞에 바친 그런 차이가 일반 소제와 초실 소제의 차이였습니다.
이렇게 소제로 드리게 되었는데 이 소제의 제물은 가루로 드리지만 가루로만 드리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 서너 가지 요소가 첨가됩니다. 우선 첫째는 고운 가루입니다. 히브리말로 “쏠레트”라고 하는 단어인데 이것은 아마도 절구에 잘 빻은 다음에 채로 쳐서 내린 그런 가루로 여겨집니다. 이것을 얼마를 드리는가하면 에바 십분의 일이라고 하는 단위를 드리는데 지금 우리말로 계산하면 2.3리터쯤 되니까 그저 큰되 한대 조금 넘는 그런 정도의 가루를 하나님 앞에 소제로 바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그렇게 가루를 그냥 드리는 것이 아니라 그 가루에다가 기름을 넣어서 드립니다. 그래서 감람나무 같은 것을 빻아낸 기름을 거기에다가 섞어서 드리는 것입니다.
성경에 구체적으로 안 나오지만 뒤에 보면 그 가루를 기름가루라고 표현한 것으로 보여서 아마 거기에다가 기름을 섞어서 그래서 가루를 버무린 다음에 채로 곱게 쳐서 내립니다. 그래서 아모스서 9장에 보면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채질한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래서 채질을 해서 그래서 기름이 섞여진 가루를 내렸기 때문에 그 제사장이 가루를 떠서 그래서 번제단 위에 뿌리면서 제사를 드리게 된 것입니다. 이때 들어가는 기름이 힌 사분의 일인데 우리 단위로 약 0.9 리터 정도 됩니다. 그러니까 기름이 상당히 많이 들어갑니다. 그렇게 해서 가루를 내어서 하나님 앞에 드리게 되었습니다. 기름만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 유황과 소금이 약간씩 들어가게 됩니다. 이것이 잘 섞어서 그래서 하나님 앞에 드리는 소제물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참고로 이제 이렇게 됐는데 여기에 소금은 함께 섞은 것 같고 유황은 함께 섞여서 버무린 것 같지만 따로 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제 초실 소제 같은 경우도 보면 유황을 다 드리고 그 다음에 곡식은 일부만 한줌 떠서 드리고 나머지 가루는 제사장이 취하는 것으로 이제 이렇게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째든 이렇게 되는데 이 소제의 제사방식입니다. 제사 방식이 무엇인가 하면 아까 말씀드렸듯이 고운 가루 소제물과 그 다음에 기름과 유황, 소금을 잘 섞고 그 다음에 가루 한줌과 모든 유황을 이렇게 취해서 번제단에 불사르게 되고 그리고 거기에 특이한 것은 누룩이나 혹은 꿀을 절대로 넣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누룩이나 꿀을 넣지 못하게 한 것은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할 때 무교병을 먹었던 것과 같이 그런 이유에서 이 누룩을 넣지 못하게 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구약에서 이 누룩은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이게 발효물질인데 이제 이런 것들이 건강에 해를 입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제물의 경우에는 이렇게 발효물질을 넣어서 부풀리고 변형을 시킨 것이 하나님 앞에 질적인 변화를 가져왔기 때문에 순전하지 않다고 하나님이 보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누룩을 사용하는 것이 금지되어서 무교병을 먹고 또 무교병을 바치고 또 무교병을 만든 그런 예에 의해서 이 소제물의 가루에도 누룩을 넣지 못하도록 꿀도 넣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서 우리들이 배우는 교훈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 앞에 어느 한순간에 은혜를 받고 우리들이 열심히 헌신하는 것도 쉬운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헌신을 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처음 하나님 앞에 그 사명을 받았던 때는 그 마음가짐을 유지하면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께 봉사하지만 처음 하나님 앞에 받았던 그 마음을 잊어버림으로 말미암아 마치 그 사람의 마음 자체에 변질을 가져오게 된 것입니다. 순수성을 잃어버리고 변질을 가져오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다음에는 그 사람의 사역이 누룩이 들어가는 사역이 되고 그 사람의 섬김과 희생이 누룩이 들어간 것 같은 섬김과 희생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그 소제 물에다가 소금을 치기를 원하셨습니다. 이 소금을 특별히 언약의 소금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소금을 왜 언약의 소금이라고 그러셨을까? 이 소금의 특징은 물질이 변질이 되지 않도록 돕는 특성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언약의 소금, 그러면 이것은 한편으로는 하나님이 언약의 당사자로서 당신과 언약을 맺은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서 언약에 있어서 변함이 없으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보여주는 것이고 그리고 이 언약에 있어서 신실하심은 하나님의 진실한 성품에 기초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 크고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입었으니까 하나님께 헌신하며 살아갈 텐데 그렇게 하나님을 섬기고 헌신하면서 살아갈 때 변함없이 신실해야 할 것을 여기에서 지시하는 것입니다.
우리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왕년에 은혜 한번 안 받아본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왕년 이야기만 늘 하는 사람치고 금년에 신통한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왕년의 은혜는 왕년에 먹고 살았고 금년에는 금년 은혜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요즘에 사는 것이 재미가 없고 하나님 앞에 간증거리가 없으면 그 케케묵은 1-20년 심지어 3-40년 옛날이야기를 꺼내면서 그것으로 마치 퇴역한 군인이 지팡이를 짚고 과거에 용사 시절을 회상하듯이 그렇게 살아가겠습니까? 우리는 그렇게 살면 안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하나님께 생명을 건 모든 사람들은 날마다 새로운 간증을 써내려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날마다, 날마다 새로운 간증을 쌓아갑니다. 그래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에 관해서 자랑할 일이 너무나 많고 요즘 하나님이 자신에게 베푸신 은혜에 대해서 간증할일들이 너무나 많은데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한때는 그런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입고 하나님 앞에 어린아이처럼 착한 마음으로 헌신을 다짐했어도 많은 사람들이 그 순수성을 유지하지 못합니다. 신실함이 없습니다. 인내가 없습니다. 그리고 쉽게 변질이 됩니다.
저는 정말 그런 성도들을 보면서 너무나 마음이 아픕니다. 어떻게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인데 그렇게 미끄러지고 그렇게 뒤로 물러가서 부패해서 예전에 하나님 앞에 받았던 은혜를 많은 성도들에게 간증했는데 그 간증이 오히려 창피할 것 같이 그런 삶을 살아가는가 하는 것입니다. 모두가 하나님 앞에 신실함과 올곧음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소금이 빠진 삶입니다.
여러분, 식품점에 가보면 케이크나 이런 것 예쁘게 해서 냉장고에 넣어둔 것 얼마나 보기도 좋고 맛있어 보입니까? 한 이틀만 잘못 보관해보십시오. 뚜껑 열면 벌써 쉰내가 확 납니다. 생선 같은 것은 예쁘게 거기에다 꽃까지 매달고 풀까지 끼어서 형용색색으로 빛까지 비추는 냉장고에 있어 봐요. -맛있겠다.- 얼마나 예뻐 보입니까? 그것을 만약에 사다가 더도 말고 아침에 사다가 그 다음날 아침까지 방에다 한번 두고 보십시오. 뚜껑을 열면 더러운 쉰내가 확 납니다.
그게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아름답게 은혜를 받아도 신실해야 합니다. 이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100미터 달리기가 아니고 마라톤입니다. 끝까지 자라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우리에게 늘 당부하시는 말씀이 끝까지 견디는 자들은 축복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끝까지 견디는 자들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 끝까지 견디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많은 은혜를 약속하십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다가보면 하나님께로 은혜를 많이 받고 주님의 뜻대로 살고 하나님을 섬기면서 삽니다. 그렇게 못 살고 흔들리는 사람들은 모두 이유가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때는 그런 이유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보면 정말 눈물이 날 정도로 마음이 아픕니다. 저런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좀더 좋은 환경에 있었더라면 아마 저렇게 망가지지는 않았을 것인데 마음이 애달픕니다.
그러나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 인생을 다 살고 난 다음에 하나님 앞에 갔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여쭈어보십니다. 내가 너에게 70세이라는 인생의 기한을 주었는데 뭐 하면서 살았는가? 예, 20살까지는 세상을 모르고 살았지만 20세에 주님을 만나고 첫사랑에 들어와서 회심했습니다. 그래, 그 후로부터 50년 동안 어떻게 살았니? 하나님, 제가 어렸을 때는 부모를 잘못 만나서 그냥 부모를 미워하고 어려운 환경 속에서 너무나 고통을 받아서 주님을 섬길 수 없었고, 장가간 다음에는 이상한 마누라를 만나서 늘 속 썩어서 그래서 수시로 속을 뒤집어놓으면서 괴로워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적응이 되어서 그 마누라하고 살 정도가 되니까 이상한 애들을 또 하나님이 주시지 않았습니까? 애들이 수시로 가끔 와서 쑤시고 가는데 결국은 속이 다 뒤집혀서 그래서 젊은 세월을 다 보내고 눈뜨고 보니 60세이었습니다. 60이 넘어서 이제 애들도 다 시집 장가가고 이제 주님을 잘 믿고 섬길 나이가 되었는데 이제 기운이 없어서 섬기려고 해도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시원찮게 살다가 70세가 되어서 왔습니다.
그게 뭡니까? 이론적으로는 참 동정이 갑니다. 좋은 부모 밑에서 태어나고 정말 마음이 맞는 좋은 아내를 만나고 그리고 자기를 많이 사랑해주고 이해해주는 하회와 같은 그런 마음을 가진 남편을 만나고 그러면 천사와 같은 애들을 낳았더라면 좋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못한 게 참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얼마나 비참합니까? 그런 사람들 때문에 결국은 자기의 인생이 다 망가지고 70을 이 세상에 살면서도 한번도 하나님을 제대로 섬긴 적이 없이 이리 흔들리고 저리 흔들리면서 그러면서 일생을 이 구석, 저 구석에 처박히면서 살다가 간다면 인간적으로 이해가 가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개인적으로 얼마나 불행합니까?
그래서 어떤 환경을 만나든지 간에 내가 하나님과의 관계는 유지하고 나는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야 할 내 몫을 감당하며 살아야 된다. 그래야지만 뭐 평생 같이 살아. 부모도 잠시 만났다가 죽으면 헤어집니다. 아내고 남편이고 너무 힘들고 그래도 조금만 참으십시오. 다 헤어집니다. 그러나 그때까지 기다리면 안 되고 지금 은혜 받고 변화되어서 잘 살아야지, 자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속 썩여도 조금만 참으십시오. 다시 안 볼 날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까지 참으면 안 되고 기도를 많이 해서 변화시켜서 새사람을 만들어야지, 낳았으면 책임을 져야지. 그렇게 하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지 하나님 앞에 착하고 진실한 신앙생활이지, 모두 소금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신실해야 합니다.
어떻게 은혜를 받고 일년도 못되어서 미끄러지고 부패하고 왜 그렇습니까? 모두 이 머리 속에 든 것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왜 그렇게 미끄러지는지도 모르고 심지어는 자기가 그렇게 미끄러져서 이렇게 똥 싸고 있으면서도 자기가 그렇게 하고 있다고 하는 것도 인정을 안 하려고 합니다. 그런 바보 같은 신앙생활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러니까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부터 우리는 학교에 입학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학교에 입학하고, 기도학교에 입학하고, 순종의 학교에 입학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 앞에 하나씩, 하나씩 학생의 마음으로 배워가야 합니다. 그래야지만 우리의 거룩한 신앙생활이 이루어집니다. 이 소금 이야기를 하다가 좀 많이 나갔는데 어째든 간에 소금이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제 처음 등장하는 것이 고운 가루입니다. 오늘 고운 가루이야기만 하다가 끝내겠습니다., 이게 에바 십분의 일이니까 2.3 리터입니다. 그래서 낟알을 잘게 깨트려서 그것을 채로 쳐서 내린 그런 미세한 가루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자기를 다 드려 하나님 앞에 헌신하는 것, 그것이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아무 희망이 없는 애굽의 포로생활 가운데 하나님이 건져내주시고 광야에서 조상들도 알지 못했던 만나를 먹으면서 그 백성들이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와 사랑을 힘입으면서 이제껏 까지 왔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를 입으면서 그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의 특별한 보호와 사랑을 힘입으면서 이제 가나안까지 차지하게 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거기에서 심지 않은 포도원에서 열매를 따고 짓지 않은 집에서 살고 그리고 심지 않은 실과를 먹으면서 그 속에서 행복하게 살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만들어주신 것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베풀어주신 큰 은혜의 결과입니다. 이 은혜에는 항상 무엇이 내포되어 있었다고 말씀드렸습니까? 소명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소명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은혜 받은 그들을 특별한 일이나 혹은 특별한 사명으로 그들을 불러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소명하신다는 말이 희랍어로 “프라스칼레오”인데 그 말은 “앞으로 불러낸다.” 그런 뜻입니다. 사람이 많이 있는데 그 중에서 하나님이 특별히 은혜를 주시는 사람들은 불러내어서 은혜를 받게 하실 뿐만 아니라 그 은혜 속에 담겨진 사명을 따라서 살수 있도록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여러분들을 이 어두운 죄악 세상에서 건져내셨습니까? 교회당에 가서 의자나 하나 채우고 그리고 연보나 몇 푼해서 교회당 건물 유지비나 하게 하려고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이 세상에서 건져주신 것 같습니까? 하나님이 거저 여러분들을 구원해내셨습니까?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그 죄악 세상에서 구원내시고 여러분들을 하나님의 백성 삼으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당신의 외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했습니다. 여러분들이 지은 모든 죄를 자기 아들에게 짊어지게 하시고 여러분들이 지은 죄 때문에 그 아들로 형벌을 받게 하셔서 멸시와 욕을 당하시고 기시면류관을 치욕의 생을 살도록 하나님이 그렇게 아들을 벌주셔야 했습니다. 그 큰 희생은 이루 말할 수가 없이 큰 무한대의 희생이었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받은 그 구원의 은혜는 무한대의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가장 무서운 죄는 이 큰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 그것이 이 세상에서 가장 커다란 죄입니다.
여러분들은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 특별히 건져내어서 하나님의 그 크고 놀라운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해주신 것입니까? 겨우 주일날 교회에 나와서 그저 연보나 몇 푼 드리고 의자 하나 채워서 있다가 그렇게 돌아가는 그런 종교생활 때문에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그렇게 고난을 받으며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셨습니까? 그랬을 리가 없습니다. 그게 뭔지 가르쳐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여러분들을 구원해놓으신 이유는 이 세상이 망가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맨 처음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는 이 창조세계를 통해서 당신 자신의 영광을 온전히 드러내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이었습니다.
아주 좋은 비유를 하자면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이 아주 예쁜 집을 지었습니다. 그래서 마당을 넓게 해서 잔디를 심고 그리고 최신 수입자재로 예쁘게 집을 짓고 얼마나 하나님이 정성을 들이셨는지 문짝 하나, 유리창 하나, 그리고 마루 하나 놓고, 선반 하나 놓고, 댓돌 하나 까는 것도 하나님이 다 생각을 하셔서 최고의 정성을 들여서 그렇게 만들어놓으셨습니다. 그리고는 길거리에서 집도 없어서 헤매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이 너무 불쌍해서 하나님이 그들에게 그 집에 와서 살라고 그러셨습니다. 처음에 온 사람들은 너무 좋아했습니다. 진짜 너무 좋다. 그러다가 뭔가 삐져서 이 사람들이 집을 망가트리기 시작했습니다. 죄가 들어온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예쁘게 심어놓은 화단들을 다 망가트리고 마루에 구멍을 뚫어서 거기에 물을 붓고 붕어를 갖다 놓고 싱크대에 올라가서 똥을 눕고 변기에 가서 세수를 하고 이렇게 하면서 엉망으로 살다가 어느 날 주인이신 하나님이 오셔서 보니까 다 망가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보시고 이러면 안 되겠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제 자기의 집을 고치시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에는 하나님께 특별히 부름 받은 사람들을 하나님이 그 집에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원래 만들어놓으신 집을 그림으로 다 보여주시고 그리고 너희들이 가서 이 집에서 살면서 이 사람들이 망가트린 것을 너희들이 살면서 하나씩 고쳐라, 필요한 비용이나 모든 자원은 내가 공급해주마. 그리고 사람들을 보냈습니다. 그러니까 길거리에서 방황하고 얼어 죽을 것 같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그 집에 들어가고 나니까 너무 좋은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씩 고치면서 사는데 그 고치는 것이 힘들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 추운 겨울 엄동설한에 길거리에서 얼어 죽을 것 같이 그렇게 고생하던 자기 가족들을 살려주신 은혜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열심히 고치면 필요한 것들은 하나님이 언제나 공급해주셨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만들어놓으신 세상을 죄인들이 망가트린 것을 하나님 앞에 고치게 하려고 우리들을 보내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바로 그런 하나님의 계획 때문에 부르심을 받아서 하나님을 섬기도록 우리를 지명해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구원받고 났으니까 이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살지 않으면 큰일 납니다. 왜 큰일 나는가 하면 행복이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렇게 당신을 위해서 살지 않는 이기적인 사람들은 이제 다음에 보겠습니다만 그 사람들이 얼마나 나쁜 사람들인지를 하나님께서 보여주십니다. 그렇게 해서 회개하지도 않고 돌이키지도 않고 하나님을 위해 아무 것도 섬기지 않고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자기를 구원해놓으신 그 구원의 목적에 전면적으로 대치되고 있는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을 거스르며 살고 있기 때문에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이 땅에 있는 자원은 어떻게 노력해서 움켜질지 모르지만 재물과 함께 그들은 행복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여기에서 이렇게 하나님께 드리는 헌신에 있어서 이 소제물로 드려지던 이 고운 가루는 이런 헌신을 위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이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의 자녀의 보람은 하나님을 얼마나 섬겼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지위를 누리고 이렇게 하는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사람이 얼마나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았는가. 그것에 의해서 인생의 가치가 결정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섬기면서 사는 사람들은 내면의 세계가 달라야 합니다. 그래야지만 섬기면서 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결국은 사람은 자신의 성품대로 살기 때문에 성품이 하나님을 향해 깊이 깨트려지고 주님의 사랑으로 받아들여진 사람들만이 하나님을 위해서 살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변화되어야 합니다.
결국은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고운 가루는 낟알을 절구로 찧어서 많이 빻아서 그것을 채로 내려서 곱게 갈아진 가루입니다. 그 가루만 하나님 앞에 바쳐지게 되었습니다. 똑같은 곡식 알갱인데도 곱게 갈아지지 않은 것은 하나님 앞에 바쳐질 자격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결국 의미하는 바는 의심할 여지없이 자기 깨어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이 뭐 하는 세상입니까? 다 인간들이 자기 좋은 대로 살아가는 세상이 바로 이 세상입니다. 자기가 좋아하고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인간이 살아가려고 애를 씁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어떤 때는 다른 사람의 행복에 중대한 피해를 줍니다. 그럼 법이라는 것을 만들어서 큰 울타리를 쳐놓습니다. 그러나 그냥 비집으면서 어떻게 하면 그 법을 피해갈 수 있을지를 생각하고 뚫고 나가면서라도 어떻게 하든지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살고 제 소견에 옳은 대로 사는 것이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그런데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의 세계에서도 이렇게 자기 좋은 대로 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기는 믿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뜻대로 살고 싶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을 버릴 의도는 없지만 그러나 예수님만 따라갈 생각은 더더욱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진짜 구원받은 사람들인지 아닌지는 그 사람들이 하늘나라에 가봐야 압니다. 얼마나 많은 가짜들이 교회 안에 가득 있는데, 그래서 여러분들은 이 세상에서 교인들을 본받으면 안 됩니다. 진짜 제대로 된 신자를 보면서 살아야지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지 않으면 엉터리 같은 신자들이 수없이 섞여서 하나님의 말씀대로가 아닌 잘못된 신앙을 자신의 온 삶으로 가르칩니다. 자신이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고 자기 깨어짐 속에서 주님을 바르게 섬기면서 살아가지 않으면 자기만 하나님 앞에 구원을 받지 못하고 징벌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을 쓰러트리고 실족시키며 사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의 삶은 강물처럼 흘러가면서 많은 사람을 축복하고 그들로 하여금 복을 받게 하여 자신이 만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연결되어서 많은 사람을 축복의 근원이 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의 사명입니다. 그런데 그 반대의 삶을 살아갑니다. 흘러가는 곳마다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고 많은 사람들을 넘어트리고 쓰러트리는 그런 식의 신앙생활을 해나갑니다. 그런 사람이 정말 구원받은 사람들일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제 신앙세계에서도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기는 믿었지만 그러나 저 좋은 대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완고하기 짝이 없고 하나님의 말씀이 뭐라고 그래도 상관없고 그냥 제 좋은 대로 살아갑니다. 나쁜 사람들입니다. 아주 나쁜 사람들입니다. 그 중에 대부분은 구원 못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 나쁜 사람들이 어디 있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이제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자기의 생각을 꺾어야지 매번 그러지는 못하지만 대부분 그래야지, 그게 자식이지. 자식을 입양해서 와서 너 이제 우리 자식해라. 그리고 데리고 사는데 자기를 낳아준 부모도 아니고 그러니까 사실은 그렇게 살같이 순종하기는 어려운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집안에 입양이 되어서 자녀가 되었으면 부모가 너 하지 마라. 그럼 네, 이렇게 하는 거다. 네. 어머니 제가 몰랐습니다. 앞으로 잘하겠습니다. 이렇게 하며 자라야지 그게 그 집안에 입양해온 자식이지, 어쩌다 한번은 말을 듣지만 그것도 저 마음에 들 때만 말을 듣고 대꾸하고 제 멋대로 나두세요. 저는 원래 고아시절에 이렇게 살았습니다. 그리고 덤비는데 그게 과연 입양 들어온 자식일 수가 있습니까? 하물며 하나님이 우리를 의붓자식으로 입양하셨습니까? 하나님의 친 자녀입니다. 하나님이 직접 그리스도를 통해서 낳아주시고 그래서 우리를 주님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살면 됩니까?
옛날에 제가 아는 목사님 한분이 그러셨습니다. 자기네 교회 교인들을 이야기하면서 그중에 많은 사람들이 말씀의 은혜를 받고 사는데 누구 이야기를 하는데 늘 밥 먹을 때도 껄껄거리고 웃고 얼마나 말도 잘하고 의사소통도 잘되고 인간적으로 자기도 좋아한답니다. 그런데 막 이야기를 하다가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그러면 흥 하고 고개를 돌린다고 합니다. 이게 뭡니까? 그런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백년을 살아도 끊임없이 죄악의 고통 속에서 살다가 죽어버리는 것이지, 회개하고 돌아와야 합니다.
그러면 이제 이렇게 여기서 이야기하는 자기 깨어짐이라고 하는 것은 여기서 말하는 자기 깨어짐, 그럴 때 자기라고 하는 것은 옛 자아입니다. 옛 자아는 옛 성품과 옛 경향성, 옛 삶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옛 자아라고 하는 것은 결국 구원받은 백성들에게만 해당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전체가 옛 자아입니다. 새것이 있어야 옛 것이라고 부르지 그렇지 않았습니까? 새것이 있어야 옛것이 있지, 아니 새 양복, 그러면 헌 양복도 있는 사람이나 그러는 것이지 한개 밖에 없는 사람은 그렇게 못합니다. 그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니까 자기 부인이 있어도 아무리 나이가 많이 들었어도 부인이 하나밖에 없는 사람은 옛 부인이라고 하면 안 됩니다. 늙은 부인이라고는 그럴 수 있지만 옛 부인이 있는 사람들은 새 부인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옛, 새 이것은 서로 대조되는 개념입니다. 그런데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사람 자체가 그냥 하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자연인입니다. 그 자체가 우리들이 보기에 옛 자체 그대로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옛 사람의 성품이라고 하는 것이 정립이 안 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믿는 것이 거듭난 자녀들에게는 옛 자아와 새 자아 두개를 같이 있는 것입니다. 옛 자아와 새 자아가 있습니다. 옛 자아는 하나님을 믿기 전에 이전의 자기입니다. 그래서 예전에 자기라고 하는 것은 결국 무엇으로 이루어지는가 하면 성품과 경향성과 삶으로 이루어집니다. 삶은 그 경향성과 성품을 싸고 있는 껍데기고 그 껍데기 속에 내용물이 들어있는데 성품과 경향성입니다. 성품과 경향성이 있어서 어디론가 가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물질의 경향성이라고 하는 것이 그렇습니다. 물은 어떤 경향성이 있습니까? 흐르는 경향성이 있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흘러가려고 하고 높은데서 낮은 데로 내려가려는 경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게 물입니다. 불의 경향성은 어떻습니까? 어떻게 하든지 탈 수 있는 물질은 태워버리려고 하는 경향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불입니다. 그것을 어떤 환경에 의해서 잠시 못하게 할 수는 있지만 그러나 그 물과 불은 항상 경향성을 가지고 있고 그 경향성을 상실하는 즉시 그 물도 아니고 불도 아닙니다. 그런데 물이 하늘로 올라가는 방법이 있습니다. 끓이면 수증기가 되어서 하늘로 올라갑니다. 그것을 우리들이 물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게 마찬가지로 옛 사람의 경향성은 옛 삶으로 그대로 흘러가려고 합니다. 그것을 잠시 가두어놓을 수는 있지만 그러나 그것을 변질시켜서 옛 사람을 가졌는데 새 삶을 사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앞에 어떻게 하든지 그리로 흘러가려고 애를 씁니다. 그런데 그 경향성이 어디에 깃드는가 하면 성품 속에서 다 깃들여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 경향성이 성품 속에 곳곳이 배이고 그 성품은 다시 삶으로 껍질이 단단하게 싸여서 혼연일치가 되어서 옛 삶으로 흘러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옛 삶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그게 바로 하나님이 지어놓으신 집을 다 때려 부수고 그렇게 나쁜 짓 하며 하나님을 거스르며 살던 그 삶입니다. 그 삶을 살았을 때 그 성품이었고 그 악한 성품을 가진 사람이 악한 경향성을 가지고 하나님을 대적하며 살았으니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자기를 창조하시고 구원해놓으신 목적에 거스르는 삶이었습니다. 이것을 우리들이 불순종이라고 말하고 이것을 타락이라고 말하고 이것을 죄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그런데 이제 이렇게 흘러가는 경향성을 가지고 있는 상황인데 이 옛 사람과 대조되는 새 성품이 그 사람 안에 있습니다. 옛 성품은 예수님을 믿기 전에 원래 가지고 있었던 것이지만 새 성품은 예수님을 믿는 순간에 하나님께서 하늘로부터 집어넣어주신 새 성품입니다. 이 새 성품이 두 개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두개는 꼭 뭐와 같은가 하면 리브가의 태에 있던 에서와 야곱과 같습니다. 둘이 지겹게 싸웁니다. 그리고 둘이 화해를 안 합니다. 둘이 지겹게 싸우면서 결국은 하나가 하나를 정복해버리려고 몸부림을 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예수 믿는 사람들이 느끼는 많은 갈등입니다.
여러분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갈등을 느낄 때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자니 세상 사랑이 울고, 세상을 따라가자니 은혜가 켕기고 이렇게 해서 결국은 피곤하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예수를 안 믿을 때 내가 이렇게 고민이 없었는데 예수를 믿으면 복이 찾아온다더니 왜 이렇게 머리가 아프고 복잡하고 괴로운 일이 많은가 그러는데 그게 결국은 두 성품이 그 속에 부어졌기 때문에 분란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한 성품만 가졌을 때는 비록 악하고 더러운 삶을 살지만 거기 나름대로 평화가 있습니다. 왜 모두가 한편입니다. 한 통속이 되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옛 성품은 어떻게 하든지 뭉쳐지고 뭉쳐져서 그 자기 안에 깃들어있는 옛 경향성을 가지고 옛 삶을 살아가려고 애를 씁니다. 그래서 결국은 악한 사람이 선한 삶을 살 수 없고 선한 삶을 사는 사람이 악한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두 사이에 균형이 맞추어지고 일치를 이루고자 하는 그런 성향이 있습니다. 그렇게 인간이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제 이런 옛 성품이 깨어지게 되는 것, 이게 바로 자기 깨어짐입니다. 이 깨어짐은 곧 옛 자아에 대한 깨어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옛 자아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하나님을 믿기 전에 제 멋대로 살고 하나님을 거스르고 대적했던 불순종하면서 살았던 그런 것이 바로 옛 자아, 옛 삶입니다. 자기 사랑이라는 것은 이렇게 삐뚤어진 자기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은 문제가 안 됩니다. 그것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신앙생활하면서 자기 학대를 하는 사람이 있는데 아주 나쁜 일입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자기를 부당한 방법으로 사랑하니까 문제가 되는 것이지 괜히 자기를 학대하고 그러면 못 씁니다. 자기 자신을 잘 관리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충분히 사랑하며 살아가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은 그런 자기가 아니라 하나님을 거스르면서 살려고 하는 자기입니다. 그 자기를 끝까지 사랑합니다. 자기를 끝까지 사랑하면 누군가가 하나님의 은혜가 와서 그 못된 자기를 깨트려야지만 내가 새 사람이 되는데 자기를 깨트리려고 할 때 견디려고 그러겠습니까? 하나님 앞에도 막 대들면서 왜 내가 사랑하는 옛 자기를 왜 깨트리는가 하면서 막 대드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자기 깨어짐을 거부하는 신자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잘 기억하십시오. 우리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어도 악하기 그지없는 성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부단히 깨트려져야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깊이 깨트려지고 자기가 변화되어야 되는데 사실 요즘처럼 회개하지 아니하고는 모두 다 나쁜 사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은 이게 자기가 하나님 앞에 옛 자아를 따라 산다고 하는 것은 악한 경향성과 성품을 따라 산다고 하는 것은 이것은 나쁜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를 하고 자기가 깨트려지면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은 그런 자기 깨어짐과 진실한 참회의 생활이 없으면 나쁜 교인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선하다고 하는 것은 무엇이고 악하다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선하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만들어놓은 이 세상,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를 통해서 드러내고자 하는 하나님의 영광 그 계획이 있었습니다. 그 계획에 기여하는 상태가 선한 상태이고 그것을 파괴하는 상태가 악한 상태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기여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의 삶을 미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그것이 아름다움이고 그렇게 살지 않고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거스르면서 사는 삶을 미학적 관점에서 보면 추하고 더러운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자기 깨어짐이 없고 하나님 앞에 헌신이 없이 살아가는 자기 사랑으로 똘똘 뭉쳐진 삶은 하나님 앞에 매우 더러운 오물덩어리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달라고 그러는데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줄 수가 없습니다.
내가 언젠가도 여러분들에게 예를 들었습니다만 애인이 둘이서 만나는데 남자가 말쑥하게 하얀 양복을 차려입고 선글라스까지 끼고 그리고 멋있게 차려입고 나왔습니다. 그런데 손에는 고속도로에서 차에 치여 죽어 피가 뚝뚝 떨어지는 토끼를 품에 안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사랑하는 자매, 빨리 와서 내 품에 안겨, 토끼하고 같이 안아줄게. 그러면 오겠습니까? 사랑을 아무리 해도 오겠습니까? 사람이 변한 것이 아니라 자매는 그런 것을 싫어합니다. 왜 죽어가면서 창자가 터져 나온 피가 떨어지는 토끼를 안고 자기보고 거기 와서 안기라고 그러니까 말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기도해도 하나님은 나만 미워한다고 그러고 미워할 짓을 했으니까 미워하지. 똑바로 살아보십시오. 사랑받지, 다 자기가 잘해서 그렇게 해놓고 교리를 모르면 공손히 무릎 꿇고 제가 어떻게 해야지만 여기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 그렇게 물어봐야지 아무 것도 없는 부랑무식한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을 멋대로 난도질하고 하나님을 대들고 무식한 사람이 용감하다고 그렇게 해봐요. 자기만 손해지, 하나님 앞에 토라지고 원망하고 하나님을 이제 안 믿기로 했다. 누가 겁납니까? 엄청 겁나네요. 잘 났어요.
이게 자기 깨어짐의 특성이 있는데 그것은 자기 깨어짐에는 이중성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가 잘못된 자기, 하나님을 거스르고 하나님을 대적하면서 불순종하고 주님이 나를 하나님만을 위해서 헌신하고 주님을 섬기며 살라고 은혜를 주셨는데 그 하나님을 대적하면서 그렇게 이기적인 삶을 살 때 그것이 바로 자기의 옛 자아입니다. 그것이 이제 어느 한순간에 은혜를 받고 깨트려집니다. 이게 깨트려지면 그냥 옛 사람만 죽는 것이 아니라 옛 사람이 죽고 깨트려지면서 그 안에서 새 사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 사람이 죽는 것만큼 새 사람이 살아나고 옛 사람이 힘을 잃어버린 만큼 새 사람이 아주 강력한 은혜의 힘을 입어서 그래서 새롭게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깨어진다고 하는 것은 굉장히 커다란 고통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옛 사람도 사람입니다. 사람이니까 모든 사람은 안 죽으려고 하는 것이 본성입니다. 물론 가끔 가다가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그런 사람이 있지만 그것도 사실은 너무 살고 싶은데 뜻대로 안되니까 죽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고 싶다는 이야기는 지겹도록 살고 싶다는 이야기와 똑같습니다. 나 좀 제발 내버려달라고 하는 이야기는 많이 와서 간섭하면서 사랑해달라는 그 뜻입니다. 그러니까 그 옛 사람도 사람이니까 자기가 깨트려질 때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럽습니다. 여러분, 한번 어디 발목뼈라도 부러져본 적이 있습니까? 얼마나 아픕니까? 뼈가 부러졌는데 정신을 못 차립니다. 그렇게 옛 자아가 통증을 당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 앞에 팍 하고 은혜를 받고 깨트려진 다음에 강물처럼 하나님의 은혜가 밀려오지만 그러나 깨어지기 직전까지는 견디기 힘든 고통의 신음소리가 납니다. 이것을 그렇게 하나님 앞에 깨어지기 직전에 막 고통을 하면서 신음하는 그 모습을 가리켜서 요한 칼빈 선생은 뭐라고 그러셨는가 하면 “고집과 인내 사이에 있는 경험이라”고 그러셨습니다. 기가 막힌 것입니다. 고집은 나쁜 것이고 인내는 좋은 것입니다. 인내는 하나님의 뜻대로 내가 변화 받아야 될 텐데 그리고 고집은 내가 깨지면 어떻게, 그것입니다. 그 두개가 교체하는 지점입니다. 거기서 신음소리를 내는 것입니다. 아, 싫어. 그리고 나가자니 이 세상이 너무 견디기 힘들고 하나님 없이 살수 없을 것 같고 하나님, 나 다 깨트려주십시오. 하기에는 자아가 너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여기에서 아주 견디기 힘든 고통과 통증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이런 견디기 힘든 통증과 고통이 오는 게 이제 어디서 유례 되는가 하면 요한 칼빈 선생님 같은 분은 이것을 자기 부인에서 오는 자기 심판이라고 이렇게 묘사를 했습니다. 기가 막힙니다. 들어보십시오. 이제 설명할 테니까 우리들이 죄를 짓고 회개를 하지 않으면 하나님께 뭘 받습니까? 심판을 받습니다. 심판을 받으면 하나님이 그 죄에 대해서 심판하십니다. 그게 끝입니다. 세상 끝 날에 우리들이 산대로 하나님을 믿지 않고 불순종하면서 살면 하나님이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 심판을 받으면 믿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그 심판 자체가 목적입니다. 그것으로 끝입니다. 그렇게 심판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그들을 향해 하나님의 엄위를 드러내시는 것으로 끝납니다.
그런데 이제 회개는 또 다른 의미의 심판입니다. 회개는 자기 부인이 없으면 회개할 수 없습니다. 그럼 나는 부인이 없는데 어떻게 회개하나. 그 부인이 아니라 아내라고 하는 그 부인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총각들도 결론적으로 회개가 가능합니다. 너무 실망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자기를 부인하는 것, 내가 이것이 옳지 않다. 이것이 없으면 회개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뭘 잘못했는데 저는 잘못한 것이 없는데요. 저는 그 말씀에 해당되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그런 사람이 회개할 가능성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회개하는 사람은 반드시 자기 부인이 있습니다. 무엇인가 하면 내가 이렇게 했는데 내가 잘못했구나. 나는 하나님 앞에 뉘우치기 싫은데 아니야. 이것은 아니야. 잘못한 것은 나야, 하나님이 나에게 사랑해주신 것 밖에 뭐가 잘못한 게 있어. 그리고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회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부인의 경험 속에서 뭐가 들어오는가 하면 자기 처벌이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 앞에 내가 죄를 지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거스르는 삶을 막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한순간에 자기가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러면 안 되는구나. 하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내가 아니다. 내가 그렇게 살았지만 그러나 내가 이렇게 살면 안 되었다. 그런 것입니다. 그러고 나니까 어떻게 됩니까? 이미 자기는 그렇게 살았고 자기는 지금 죄를 지었고 지금 나쁜 사람인데 그렇게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처벌을 받아야 합니다. 처벌을 받아야 하는데 어떻게 처벌을 받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처벌받는 방식이 무엇인가 하면 자기가 이제껏 까지 살아왔던 것을 부인합니다. 이게 아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하나님이 내가 이렇게 사는 것을 그렇게 싫어하셨구나. 나도 이때 죄를 미워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죄가 내 안에 있어서 그 안에서 고통을 받게 됩니다. 이게 결국 자기 처벌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고통을 받는 것입니다.
회개의 경험이 유쾌한 것만이 아닙니다. 얼마나 강한 통증이 따르는지 어떤 날은 씩씩대고 막 그러다가 나중에는 자기 깨어지기 싫으니까 집어치우고 가버리는데 그런 사람들을 내가 비유하기를 아파서 도저히 살수 없어서 교회에 와서 웃통 다 벗고 드러누워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니까 은혜를 받기 시작해 드디어 복부를 절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갈라놓고 보니까 암 덩어리가 너무나 많은 것입니다. 그 다음에 말씀이 두 번째가 되어서 위에 것부터 하나씩 잘라내는데 어느 한순간에 반란을 일으킵니다. 나는 더 이상 못 참아. 그러면서 벌떡 일어나서 창자를 끌고 막 뛰어나갑니다. 그러니 무슨 좋은 결과가 있겠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꿰매고 가야지, 그래서 새 삶을 살지, 창자를 끌고 가봐야 누가 좋다고 그러겠습니까? 참 웃으면서 이야기를 하지만 눈물나는 경험입니다. 따라해 보십시오. 반쯤 고쳐진 사람, 안 고쳐진 사람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아직까지도 그러고 다닙니다.
생각을 해보십시오. 너무 가슴이 아픕니다. 그래서 자기 처벌이 이루어지 됩니다. 그때 자기의 죄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깊이 깨트려지는 순간을 통해서 뭘 깨닫는가 하면 이 죄가 이렇게 더러운 것이구나. 결국 이 죄가 마지막에 나에게 가져다주는 것이 잃은 것밖에 없구나. 하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때 막 수많은 고통이 밀려옵니다. 그런데도 그것을 끝까지 견디는 신자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거기서 은혜의 기름부음을 경험합니다. 그렇게 견디게 만드는 힘이 무엇입니까? 그 힘은 첫 번째는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입니다. 예전에는 주님을 알기는 알았지만 그러나 대충 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셨습니다. 나같이 쓸모없는 인간을 위해서 자신의 생애를 다 주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때 내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분은 우리 주 예수님밖에 없구나. 그런 생각이듭니다. 그 믿음이 그런 자기 깨어짐, 자기 처벌에서 오는 고통을 이기도록 만들어주는 동기가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입니다. 주님을 깊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막 고통을 당할 때 그렇습니다.
(예화: 아는 어느 형제가 나쁘게 살았는데 하나님이 어느 날 손을 보셔서 교통사고가 나서 미라처럼 병원에 누워있는 신세가 되었는데 그 형제에게 많이 아프지 않는 가하고 물으니 하는 말이 아프지만 주님께 불순종할 때 주님의 마음이 아프셨던 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닐 것이라고 하면서 아픈 게 은혜가 된다면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며 고통을 이긴다고 하는 내용)
이게 자기 깨어지는 고통을 이기게 만드는 또 하나의 동기가 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이제 이렇게 자기가 깨트려져야지만 그 후에 반듯이 하나님의 은혜의 회복이 있을 것이라고 하는 것을 믿는 사람들이 의지의 올곧음을 소유할 때 이 고통의 시간들을 더 잘 견디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가만히 보십시오.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해야겠다고 주먹을 불끈 쥐고 결심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마지막까지 모두 혼란과 어려움을 뚫고 지나가는 사람은 너무나 소수입니다. 그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이치입니다.
그런데 이제 자기 깨어짐의 정체가 무엇인가 하면 첫째는 죄에 대한 깨어짐이고, 또 하나는 이제 자기 의에 대한 깨어짐입니다. 오늘은 죄에 대한 깨어짐만을 이야기하겠습니다. 소제를 드릴 때 그 소제물이 낟알 그대로는 들여지지 못했고 그것을 빻아서 고운 가루로 짓이겨서 만들었을 때 비로소 하나님 앞에 바쳐진 소제물이 될 수 있었다는 사실은 무엇인가 하면 마음의 깨트려짐이 없이 겉으로 덤벙거리면서 하나님을 섬기는 위선적인 행동을 통해서는 하나님이 절대로 그 영광을 받으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특히 예수를 오래 믿은 사람들이 그 일에 주범입니다. 하나님을 꼭 그런 식으로 섬기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자기 깨어짐이 없는 하나님을 향한 헌신은 제 표현에 의하면 적선적 헌신입니다. 사실 하나님께 바쳐져야 할 헌신은 경배적 헌신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만이 영광을 받으실 분이고 나는 하나님 앞에 아무 가치가 없는 미천한 인간일 뿐이다. 나 같은 사람이 하나님을 섬기면서 사는 것도 나에게는 정말 큰 영광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하는 것이 경배적 영광입니다. 적선적 영광은 그냥 살다가 생각나니까 시골에 있는 노인네들에게 그냥 가끔 인심 쓰듯이 쌀값이나 부쳐주는 그것이 적선적 효도입니다. 적선적인 섬김입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섬김도 아니고 헌신도 아니지만 그러나 모양이 그러니까 이름은 붙여준 것입니다. 엉터리입니다. 그렇게 하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자신이 하나님을 많이 섬기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그런데 한번도 섬김을 받으신 적이 없습니다. 왜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 깨어져본 적이 없는 사람, 그래서 그 사람이 마음으로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는데 그가 뭘 하면서 살았든지 그게 자기 좋아서 한 일이지 하나님을 위해서 한 일이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옛 성품이라고 하는 것은 계속해서 자기 좋은 대로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좋은 대로 살려고 하고 그 옛 성품은 계속해서 자기 자신이 생긴 대로 그냥 가려고 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거스르려고 하는 것은 언제나 통증과 고통을 수반하게 됩니다. 거기에 자기의 부인이 있고 자기 처벌이 있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신자는 고통을 당하면서 비로소 아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주 엉뚱하게 짝이 없는 질문일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회개할 때 그렇게 아프게 하셨을까? 그런 질문을 바보 같지만 해볼 수 있습니다. 사실은 그런 질문을 해보면서 우리 신앙이 성장하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회개할 때 아주 달콤하게 하시지 왜 아프게 하셨을까? 많은 설명이 필요하지만 그러나 오늘 주제와 관련되어서 설명하자면 우선 성질상 그럴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결국 그 죄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깨트려지고 참회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경배하며 살아갈 본성과 대치되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통증이 수반될 수밖에 없는 것이고, 두 번째는 자기 처벌에서 오는 고통의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제 죄를 미워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애들이 성냥을 갖고 놀거나 라이터 같은 것을 가지고 놀려고 합니다. 그것 다시 못 만지게 하는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불을 켜서 손에 한번 대주면 됩니다. 뜨거워서 한번 울고 나면 그 다음에 줘도 도망갑니다. 하나님이 그런 효과를 누리면서 죄 속에서 자기 처벌의 고통을 받게 하십니다. 그러면서 깊이 깨트려지면서 결국 나를 꼬이고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길에서 이탈시키더니 결국 죄가 마지막에 가져다주는 것이 자기 처벌의 이 뼈아픈 고통밖에 없구나, 라고 하는 것을 깨닫고 그 다음에 이 죄의 정체를 보게 만들어주십니다. 그러면서 우리 자신이 가루처럼 곱게 부서져나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자기 깨어짐의 첫 번째가 죄에 대한 사랑에 대해서 깨트려지는 것인데 이 죄가 신자 안에 들어오고 신자 안에서 이 죄는 깊이 삶 속에 뿌리를 내리며 성장하려는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신자에게 죄가 이 안에도 물론 있지만 유혹을 통해서 자극을 받아서 우리 안에 죄가 들어오고 그렇게 들어온 죄가 우리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성장하는 방식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죄가 우리의 영혼 속에 들어와서 깊이 뿌리를 내리고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방식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자기 사랑에 똘똘 뭉쳐지게 하고 하나님 앞에서 깨트려짐을 거부하게 만들고 그래서 자기 사람으로 만들어서 하나님을 위해서 절대로 바치지 않고 하나님을 위해서 절대로 헌신하지 않고 살게 하는 그런 악한 경향성이 있습니다.
그 죄가 역사하는 방식이 세 가지인데 우선 첫째는 영혼 안에서, 두 번째는 마음 안에서, 또 하나는 삶 안에서, 영혼 안에서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미워하고 하나님께 항거하면서 살려고 하는 악한 경향성을 그 속에서 계속 유지합니다. 그래서 들어오면 영혼 안에서 큰 힘을 갖고 성장할 수 있도록 그렇게 진을 치면서 한번 들어온 죄가 나가지도 않고 그 안에서 성장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거스르고,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을 불신하고 그리고 자기를 하나님보다 더 사랑해서 하나님을 위해서 어떤 제물도 드리지 않는 이기적인 삶을 살아가려고 합니다.
두 번째는 마음 안에서 이 죄가 뿌리를 내리는 방법은 끊임없는 목숨을 불러일으킵니다.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가지려고 하고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누리려고 하고 나중에는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쾌락을 추구하기 위해서 이 마음속에서 정욕으로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자기 깨어짐이 없는 사람의 내면의 세계는 자기 욕망으로 꽉 차있는 것입니다. 어떤 도덕적인 이유에 의해서 그 사람이 더러운 범죄에 직접적으로 빠질 수 없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여러 가지 모든 정욕들, 하나님이 자기를 창조해놓으신 목적과는 관계가 없는 이 세상의 헛된 욕망의 노예가 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그게 마음속에서 계속 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정욕은 영혼 안에 깃들여 있는 죄가 역사하는 지체입니다. 이 죄가 역사할 때 이 죄가 툭 튀어나와서 죄가 역사하는 게 아니라 이 죄가 자기 고봉들을 막 조정합니다. 고봉들이 누구인가 하면 정욕입니다. 그래서 죄가 정욕을 데리고 가다가 이제 확 하고 조종을 합니다. 이 속에서 갑자기 질투심이 확 생깁니다. 사람을 대적하고 원망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납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확 지어냅니다. 막 음란한 마음이 확 들어와서 확 자기를 막 휘두릅니다. 그래서 사람을 보기만 하면 음란한 생각이 들어서 걷잡을 수 없는 생각으로 쫓아가게 만듭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에 물질에 대한 탐욕을 확 불러 일으켜서 정욕이 생겨나게 합니다. 그래서 나쁜 짓이라도 해서 신앙을 포기하더라도 그 악한 방법으로 재물을 손에 넣으려고 하고 이렇게 수시로 영혼 안에 있는 죄가 마음 안에 있는 정욕들을 가지고 움직이면서 이 사람을 문어발처럼 움직이면서 막 가는 것입니다. 이게 결국은 자기 깨트려짐이 없는 사람들의 신앙의 모습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모습이 세 번째로 삶 속에서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그런 정욕들이 수시로 밖으로 흘러나와서 삶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에 와서 신앙생활을 하고 드리는 모습을 보면 얌전하고 조용하게 있는데 실제의 삶은 엉망입니다.
(예화: 어느 교회에서의 실제 이야기- 교회에서 떨어진 어느 술집의 여주인이 전도자의 전도에 깊이 회심하고 은혜생활을 많이 하는데 자기의 집에서 외상을 지고 떼어 먹은 사람들이 그 교회에 많이 있었다고 하는 이야기)
결국은 속에 있는 이 정욕을 어느 순간에 단정하게 할 수는 있지만 하나님이 없고 사람들이 보지 않는 이 정욕이 역사해서 그 사람의 삶을 죄로 뒤엉키게 만듭니다. 그게 결국 자기 깨어짐이 없는 삶입니다. 낟알 그대로는 하나님 앞에 깨트려질 수 없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을 향한 꿈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고 불태워드리고 싶다고 그러지만 하나님이 그런 제사를 원하시지 않으십니다. 소제 없는 번제를 하나님이 받으셔서 상번제로 삼으실 수가 없으십니다. 하나님이 제일 기뻐하시는 제물은 자기 자신입니다. 뭐가 어렵고 뭐가 어렵다고 신앙생활 하는데 애로상황이 무엇입니까? 교회가 은혜가 없고 남편이 핍박을 하고 시어머님이 잔소리를 하고 애들이 속 썩이고 그대의 신앙생활의 가장 큰 원수는 그대 자신입니다.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제 이렇게 신자 안에는 죄에 대한 사랑이 있습니다. 사랑하니까 깨어지기 싫은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 길거리에서 어느 아이가 맞는데 왜 그렇게 때리니 애들아 때리지 마라. 그러고 지나갈 것입니다. 자기애가 맞아서 깨트려지면 그러면 눈에 보이는 게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것은 깨어지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것을 빼앗아가려고 해도 그것을 망치려고 하는 사람은 그러지 않았으면 원수가 아닌데 자기가 사랑하는 것을 깨트리려고 하고 망가트리려고 하면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있는데 자기를 너무 사랑해, 이 죄악 된 자기를, 깨트리지 않으려고 자기를 끌어안으면 결국은 자기가 원하든 원하지 않던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죄에 대한 사랑의 특성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기쁨입니다. 죄를 사랑하게 되면 죄를 기뻐하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 안에 있는 옛 자아를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 자아가 가지고 있는 것, 그 옛 자아에 어울리게 살아가는 것, 그 속에서 기쁨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말씀과 은혜를 통해서 자기를 깨트리시려고 할 때 거기에 대해서 전면적으로 반항을 하고 거스르고 순종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집착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하나님 앞에 깨트려지지 않은 사람들은 자기의 옛 사람에 대해서 많이 집착을 합니다. 그래서 자기가 이제껏 살아왔던 방식대로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의해서도 자신의 삶을 고치려고 하지 않습니다. 삶에 대한 태도도 바꾸려고 하지 않고 그리고 삶의 어떤 경향 같은 것도 바꾸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살아갑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서 나쁜 그리스도인의 대표적인 모습이 바로 어떤 모습입니까? 하나님이 뭐라고 그러시든지 나는 나대로 산다. 난 내 식대로 믿는다. 그럼 하나님은 나는 그런 사람이 필요 없다. 그러십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앙생활을 해나가기 위해서는 자기 식대로 믿으면 안 되고 자기 식을 포기하고 주님의 방식이 무엇인지에 귀를 기울이고 거기에 맞추어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게 바로 자기를 꺾는 것이고 자기를 깨트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집착입니다. 예전에 살았던 그 삶의 방식에 집착하고 예전대로 그렇게 살고 싶어 합니다. 강력한 집착입니다.
세 번째는 두려움입니다. 무슨 두려움인가 하면 내가 하나님 앞에 깨트려지고 나면 내 인생이 어떻게 되는 것일까? 하나님이 나를 깨트리시고 나면 은혜가 밀려올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래도 믿음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믿음이 좀 부족하더라도 죄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약간 결핍된 사람입니다. 그러나 죄를 깊이 사랑하고 그 정욕에 깊이 뿌리박고 있고 그리고 자기가 깨트려지지 않은 낟알과 같은 사람들은 두려움이 생깁니다. 왜냐하면 이제껏 까지 죄에 종노릇하고 죄에 붙어서 살았기 때문에 죄마저도 나를 버리면 이제 내가 어디로 갈까?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가면 되지 않나. 이렇게 말하는데 하나님께 갈 자신이 없는 것입니다.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탕자의 비유에서 나오는 그 탕자가 흉년이 들자마자 아버지의 집으로 가면 되겠구나 하고 달려갔습니까? 아닙니다. 흉년이 드니까 못 돌아갑니다. 그리고 돼지를 치는 목부가 되고 쥐엄열매라도 먹어보려고 몸부림치고 그 속에서 살았던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이렇게 하나님 앞에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자기를 다 드리는 헌신의 삶을 살기를 원하시고 또 하나는 그런 헌신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마음이 고운 가루처럼 깊이 깨트려지기를 원하시는데 그 깨트려짐의 정체가 죄에 대한 사랑에 관해서 깨트려지는 것입니다. 옛 자아가 가지고 있었던 자기의 옛날에 이 죄악 된 생활에 대한 사랑. 그것에 대해서 깨트려지는 것입니다. 그 깨트려지는 것이 어떤 방식으로 진행이 되는가, 이것을 말씀드리고 마치겠습니다.
우선 제일먼저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의 빛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들어오지 않으면 깨트려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혹시 깨트려지는 것처럼 통곡하고 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괴로워서 우는 것이고 깨진 것이 아닙니다. 아주 틀린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내가 은혜를 많이 받았는데 내가 왜 이렇게 하나님의 성품을 안 닮을까? 내가 왜 이렇게 많이 이겼는데도 은혜가 내게 안 밀려올까? 그러는데 그게 바로 겉으로는 울고불고 회개하는 것 같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의 빛에 의해서 깨트려지는 것이 아니라 죄 가운데 사는 것이 너무 힘드니까 어느 한순간에 너무 괴로워서 통곡할 수 있는 것입니다. 눈물을 닦고 다시 죄로 돌아갑니다. 그게 결국 회개해도 하나님이 나를 안 건져주시고 내버려두신다고 하는데 그것은 참된 회개가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말씀의 밝은 빛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깨달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내 영혼을 살리고 그 말씀이 나는 고치고 치료해서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나 자신을 드리고 헌신된 삶을 살수 있도록 그 헌신에 어울리는 자기 깨어짐을 가져올 것이라고 믿는 그 신앙이 필요합니다.
어떤 경우에서든지 하나님의 말씀의 빛이 없으면 그가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말씀의 빛이 있는 이것이 첫 번째 조건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려고 하지 않고 그 말씀 앞에서 자기를 비추어보려고 하는 정직함이 없는 사람들은 변화될 가능성이 거의 없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이렇게 강력한 빛이 비추고 나면 그 다음에는 죄에 대한 생각의 변화가 오기 시작합니다. 이런 것들에 대한 대표적인 것이 이런 것이 아닙니까?
슈퍼에서 파는 만두를 제가 꽤 좋아했습니다. 출출할 때 나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신문을 보니까 그게 다 쓰레기래. 그러니까 갑자기 후회가 되었습니다. 신문이 좀 과장해서 보도를 해서 안 그런 업체들이 많았다고 그러고 이제는 만두가 완전히 새로워졌습니다. 그리고 막 나오는데 아직도 안 삽니다. 왜냐하면 생각이 딱 달라진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의 빛이 들어오면 죄에 대한 생각이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왜 예수 믿는 사람들이 그렇게 그 죄의 마지막 결과가 어떤 것인지도 알면서 예전에 다 경험했으면서도 그렇게 미친 듯이 자꾸 죄로 미끄러지듯이 들어가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이 생각이 약을 먹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것을 말씀의 빛이 확 비추면 새로운 약을 불어넣어서 신자의 생각을 고쳐버립니다. 죄에 대한 생각을 고쳐버립니다.
세 번째는 이렇게 되고 나니까 죄에 대한 기쁨이 사라지게 됩니다. 그러니까 먹는 것을 보면 TV선전에 보면 어떻게 그렇게 입이 침이 돌게 그렇게 선전하는지, 맛대가리도 별로 없는 만두를 따끈따끈하게 기름이 모락모락 나면서 뜯어지면서 만두 속이 터지는 장면을 보여주면서 그것을 생각하면 우리가 또 TV에 나오는 그 사람이 먹는 것처럼 맛있겠다. 그 사람처럼 예쁘지는 않지만, 그리고 사먹습니다. 그런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만두의 실체를 보여주는 그 순간에 그 모든 기쁨이 싹 사라져버렸습니다. 그래서 죄에 대해서 진심으로 참회할 때는 이미 벌써 죄에 대한 사랑과 기쁨이 사라진 때입니다. 이 속에 남아 있지만 이 겉으로는 이미 사라진 때입니다. 이것을 만약에 여전히 가지고 있고 그것에 대해서 이렇게 걸떡이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회개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방식을 이끌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럼 이제 네 번째는 이 죄의 결과인 비참에 대해서 하나님이 눈을 뜨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이 사람이 깨트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전에는 이 죄를 지으면서 이 죄의 결과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을 안 했습니다. 그 마약을 하는 사람들이 그런 것입니다. 마약을 하거나 담배를 피는 사람들이 그 결과가 어떤지를 알게 된다면 절대로 그것을 할 수가 없습니다. 마약을 하면 나중에 이빨도 다 빠지고 막 드라큘라처럼 피가 나오고 여기 시커멓게 피부가 변하고 진하게 회장을 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흉악한 사람이 되는데 그런데도 그것을 하는 이유는 그 결과가 그렇게 무섭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의 빛이 비추게 되면 어느 한순간에 이 죄의 결과가 무엇인지를 보게 되는데 그것을 다른 사람 속에서 보게 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속에서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때로는 물리적인 환경을 사용하실 때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영혼에 대해서 눈을 뜨지 못하니까 물리적인 환경을 통해서 환란과 고난이 일어나서 생겨나서 믿었던 것들에 대한 모든 것들에 희망이 끊어지고 좌절이 생기고 사랑했던 사람이 배신하고 하면서 이 세상이 의지할만한 세상이 못된다는 것을 깨닫도록 만듭니다. 고립시켜버립니다. 그때 비로소 나는 도대체 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자기 속을 들여다보게 됩니다. 내가 마지막에 나 혼자 남았는데 이제 나는 뭔가. 이제 누구를 의지할 수 있을까?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때 하나님을 생각하게 되고 자기 자신의 내면을 보게 됩니다. 결국 자신의 영혼 안에 있는 죄의 결과들을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죄의 결과는 똑같습니다. 죄 자체가 이 삶이라는 껍데기 속에 들어있어서 성품이 있고 성품 안에 그 다음에 경향성이 깃들어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삶의 껍질 속에 마음의 정욕으로 마음 그 속으로 들어가면 영혼 속에 지배력을 가진 실제로 자리를 잡으면서 영혼과 마음, 마음과 삶으로 온통 휘돌면서 전체를 죄 가운데 이끌어갑니다. 그러니까 죄의 결과인 그 비참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다 있는 것입니다. 자기 삶에도 비참이 있고, 자기 마음에도 비참이 있고, 자기 영혼 속에도 비참을 보게 됩니다.
모르다가 어느 한순간에 말씀의 빛이 비추고 성령께서 그에게 강력하게 역사할 때 이제 소경이었고 보지 못했던 사람의 눈을 뜹니다. 그가 열립니다. 그가 깨닫게 됩니다. 그가 알게 됩니다. 그래서 그가 봅니다. 그래서 그가 결국은 예전에는 보지 못했는데 자기의 삶의 많은 실패들이 이 세상 사람이고 환경이고 이 세상에 있는 환경이 나에게 가져다주었다고 생각했는데 결국은 자신의 삶 속에 일어난 모든 고통과 시련, 괴로움과 그 모든 견디기 힘든 벼랑 끝에 서있는 이 고뇌와 모든 시련들이 결국은 죄의 삵이라고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죄가 자기에게 가져다주고 깨트려진 하나님과의 관계가 가져다준 비참한 결과라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 죄가 마지막에 나에게 남겨준 것이 과연 이것밖에 없단 말인가 그리고 통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을 보게 됩니다. 이제 하나님 앞에 자신의 몸이 산산이 더럽혀지고 깨트려진 것을 보는 것입니다.
그게 결국은 마음은 하나님을 너무나 원하고 인생의 벼랑 끝까지 가있는데 하나님을 부를 수 있는 마음의 자세가 되어있지 않습니다. 마음은 모두 더러움과 양심의 가책으로 물들어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찾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 마음의 눈이 아직까지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더 깊이 자신의 영혼을 보게 됩니다. 그때 자신의 영혼 안에서 비참함을 잃어가게 됩니다. 하나님이 살려두신 그 피로 구속해주신 새 사람이 자기 안에 거의 고사 직전에 그 죄의 강력한 법이 자신의 영혼 안에서 자기를 사로잡아오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어떻게 자신을 건질 수 있겠습니까? 주님이 그 크신 은혜를 주셨는데 내가 죄를 택하고 불순종하며 살아온 결과가 하나님 앞에 깨어지기를 싫어하며 살아온 결과가 마지막 이것입니다. 하고 깨닫게 됩니다. 거기에서 죄를 선택한 깊은 회개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 이런 과정을 통해서 죄에 대한 집착을 버리게 됩니다. 집착해봐야 마지막에 내게 찾아오는 것이 이것밖에 없구나. 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집착을 거기서 버리게 됩니다. 이제는 죄를 억지로 내가 싫다고 그래도 그러지 말아야지 결심을 해서가 아니라 이 마음속에서 그 죄가 마지막에 나에게 가져다준 것이 이 더러운 것이구나 하면서 깊이 깨달으면서 이 죄를 멀리 하고 싫어하게 됩니다. 이때에 이제 어떤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가 하면 두려움이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사랑은 두려움이 없나니 사랑은 모든 두려움을 내어쫒느니라” 그래서 죄에 대해서 깊이 깨트려지면서 참회하면 거기에서 아주 자연스럽게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생겨납니다. 왜 그럴까요? 예수님이 바로 자기의 죄를 인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셨고 자기가 그렇게 더러운 죄를 지었는데도 하나님이 자기를 용납해주시는 이유가 바로 자기가 그 죄를 지었을 때 자기는 그 죄를 해결할 수 없지만 예수님이 자기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셨기 때문에 거기서 주님을 향한 사랑에 생겨나게 됩니다.
자기가 깊이 깨트려지고 죄에 대한 사랑에 관해서 부서지게 될 때 곡식 알갱이같이 갈아지지 않아서 하나님 앞에 도저히 쓸모없던 그렇게 재물로 바쳐질 수 없었던 그 사람이 변화되어서 잘게 부스러지고 그렇게 될 때 하나님의 사랑이 강물처럼 흘러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사랑이 그 신자 안에 깊이 밀려오게 되면 자기가 가지고 있었던 인생의 계획표를 찢어버리게 됩니다.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뒤돌아보지 않겠네
그러면서 자기의 인생의 계획을 버리고 하나님의 계획을 온전히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래서 자기는 하나님의 그 계획을 따라서 살고 싶습니다. 주님이 나를 구원해주셨을 때 내게 주셨던 소명을 따라 살고 싶습니다. 그런 마음을 갖게 됩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얼마나 이기적으로 살아가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너무 너무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자기밖에 모르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주셔서 교회를 세우시고 그래서 흘러가서 두루 적셔야 할 이 세상이 너무나도 많은데도 많은 사람들이 냉담합니다. 어쩜 그렇게 냉담한지 모릅니다. 여러분 한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눈물을 흘려본 적이 있습니까? 여러분을 구원해주셨기 때문에 이제는 내가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지 되겠습니다, 라고 울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교회를 세워주시고 이 교회에 한 지체로 나를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내가 생명이 다하는 날 까지 이 교회와 함께 이 어두운 세상을 흘러가겠습니다. 나는 흘러가는 물일뿐입니다. 나는 두루 적시며 사는 사람일 뿐입니다. 하나님 앞에 그렇게 고백해본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이 땅에 있는 자원이나 하늘에 있는 자원, 내게 있는 재능이나 내게 있는 생명까지도 내 것은 하나도 없고 다 주님이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그렇게 고백해본 적이 있습니까? 나는 하나님 앞에 와서 이것도 달라. 저것도 달라. 그래본 적은 있지만 하나님 내가 가지고 있는 것 보리떡하고 물고기같이 이렇게 천한 것이지만 내게 없는 것은 몰라도 내게 있는 것은 주님의 것이니까 주님 마음대로 쓰십시오. 그러고 한번 들여다본 적이 있습니까?
왜 사람들이 그렇게 이기적인 삶을 사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왜 하나님 앞에 정말 인생을 값지고 보람 있게 살수 있는 길이 있고 또 그렇게 살라고 하나님이 구원해주시고 그 위에 은혜도 주시고 이 땅에 있는 자원과 하늘에 있는 자원도 주셨는데 하나님이 자기를 구원해놓으신 계획을 따라서 헌신하며 살지 않는 번제의 삶을 살지 않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왜 그렇게 삽니까? 그게 결국은 비뚤어진 자기 사랑 때문입니다. 이기심 때문에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더러운 삶입니다. 그렇게 살아서 이 땅에서 눈을 부릅뜨고 그렇게 죽으면 얼마나 비참한 죽음입니까? 이 세상에 태어났는데 한번도 주님을 위해서 산 적이 없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산 적이 없는 그런 삶, 세상보다 하나님을 한번도 사랑한 적이 없고 주님을 섬겼지만 순수하게 섬긴 적이 한번도 없어서 더럽고 그렇게 하나님 앞에 비참한 인생을 살다가 죽는 것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수치스러운 것인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모두 자기 깨트려짐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삶은 더러운 삶입니다. 우리 모두 그런 사람들에게 동정을 표합시다. 그가 아무리 많은 것을 가지고 있고 예전에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았어도 우리 모두 그런 사람들을 불쌍히 여깁시다. 그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해줍시다. 그런 사람은 아무 것도 가진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게 살아서 뭐하겠습니까?
그런데 이제 우리가 하나님 앞에 깊이 깨트려져서 죄를 사랑한 마지막이 무엇인지 깨닫고 우리 자신을 소제의 제물로 드리고 싶어 할 때 그래서 우리가 내면의 세계가 곱게 주님이 원하심으로 갈아져서 그래서 깊이 갈아진 가루가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받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래서 주님이 예전에 낟알과 같이 쓸모없었지만 이제는 고운 가루가 되어서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리는 사람들로 세워주실 것입니다. 그 하나님과 동행하고, 그 하나님을 섬기고, 그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하나님께 사랑을 받으며 일생을 사는 성도의 삶은 비뚤어진 자기 사랑에 매어서 이기심으로 가득 찬 채 이를 악물고 자기를 위해서 산 사람들의 삶보다 얼마나 아름다운 삶입니까? 나는 여러분들을 이 아름다운 삶으로 초대하고 싶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3. 자기깨어짐과 헌신
“또 그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여호와께 드릴 화제는 이러하니 일년 되고 흠 없는 수양을 매일 둘씩 상번제로 드리되 한 어린양은 아침에 드리고 한 어린양은 해질 때에 드릴 것이요 또 고운 가루 에바 십 분지 일에 빻아낸 기름 힌 사분지 일을 섞어서 소제로 드릴 것이니” (민28:3~5)
어제에 이어서 오늘도이 상번제는 구성하는 삼제, 번제와 소제, 그리고 전제 이 중에서 특별히 소제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어제 이루어진 설교를 잠깐 요약을 하고 그리고 계속 진행을 하는 것이 유익하리라 생각합니다. 소제라고 하는 것은 결국 피없이 곡식으로 하나나님 앞에 드리는 제사인데 그 제사는 단독으로는 드릴 수 없고 항상 이런 번제, 피있는 제사와 함께 하나님께 드려졌습니다. 그래서 이제 번제는 불로 태워드리는 화제로 이루어지고 그래서 일년 된 수양을 아침저녁으로 잡아서 그것을 사지를 자르고, 기름을 자르고, 그리고 목을 자르고 이렇게 해서 물로 깨끗이 씻은 후에 번제 단에 모두 태워서 바치는 그 화제의 방식으로 번제가 이루어졌고 그 번제 위에 소제를 드리게 되었으니 이 소제는 고운 가루로 그 가루 위에 기름을 붓고 그것을 섞어서 아마 채에 내렸던 것 같습니다. 그것을 성경에서 기름가루라고 부르는데 그 가루를 소금, 그리고 유황과 함께 이제 하나님 앞에 섞어서 번제 단에서 태워서 그 번제물과 함께 하나님께 향기로운 제사로 올리고 그 위에 번제를 부음으로서 상번제가 완성되는 것이었습니다.
이 상번제는 이스라엘 전체를 헌제자로 하여 제사장이 대표자가 되어서 하나님 앞에 드리는 번제로서 상번제라고 그렇게 일렀습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 바쳐지는 이 소제의 제물이 바로 가루와 그리고 기름, 유황과 소금이었는데 지난 시간부터 우리는 이 히브리 성경에 쏠레트 라고 나오는 이 고운 가루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고 있습니다. 이 가루는 결국 낟알을 곱게 빻아서 채로 쳐서 드린 가느다란 가루로 이루어졌고 그렇게 가느다랗게 빻아진 고운 가루만이 하나님 앞에 향기롭게 드려지는 상번제 중 소제의 역할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낟알로 존재하는 곡식이 아니라 으깨어지고 빻아지고 채로 쳐서 고운 가루가 된 것, 그 가루만이 하나님 앞에 드려질 수 있는 소제물이 되었다고 하는 그것은 곧 신자의 자기 깨어짐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불로 태워드리는 짐승의 번제가 하나님 앞에 자신의 모든 것을 불태워드리는 헌신한 삶이 외적 표현이라면 이 소제에 쓰여 지는 고운 가루는 그렇게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번제의 삶과 같은 신자의 생활이 실제의 내면에 있어서는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가루도 그런 것을 보여주고 기름, 유황, 혹은 소금도 모두그것을 보여주는데 이 가루는 곧 부서짐으로 말미암아 가느다랗게 빻아진 고운 가루이고 결국 그것을 위해서는 깨어짐이 필요했으니 이것은 헌제자의 외적 헌신의 삶에 어울리는 헌제자의 내면의 자기 부서짐이 필연적으로 동반되어야지만 그 사람의 헌신이 아름다운 헌신이 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면 어떻게 신자가 해야지만 그렇게 하나님 앞에 헌신적인 외적 삶에 부합하는 내면의 고운 가루와 같은 질을 소유할 수 있을까? 하나님께서는 신자의 내면에는 없는 밖으로 돌출된 행동에 의해서 절대로 영광을 받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선한 사람이 쌓은 그 선에서 선을 낼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다. 같은 선을 행해도 선한 사람이 선한 일을 행하면 선한 행위가 되지만 악한 사람이 선한 일을 행하면 뭐가 됩니까? 너무 잘 아십니다. 위선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밖으로 나타난 헌제자의 제물과 안에 있는 헌제자의 내면의 세계가 일치해서 모두 선할 때 하나님이 그의 제사를 기쁘게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제사를 기쁘시게 받으시는 사람은 반드시 그 사람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매우 싫어하는 사람인데 제사드릴 때만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사람,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고대 근동에서 이방신들에게는 그런 제사가 가능했으나 이제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에서는 그런 제사가 불가능합니다.
이 자기 깨어짐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두 가지 깨어짐을 가리키는 것인데 하나는 죄에 대한 사랑에 관해 깨어지는 것이고, 또 하나는 자기 의에 대해서 깨어지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내내 이 자기 깨어짐에 대해서 특별히 죄에 대한 사랑의 관해 깨트려지는 것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즉 신자가 자기 안에 있는 죄에 대한 사랑에 대해서 깨트려질 때 그 내면의 세계는 하나님 앞에 바쳐질만한 소제의 고운 가루가 된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이런 자기 사랑에 대해서 신자가 깊이 깨트려지는데 죄에 대한 사랑은 결국은 자기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자기 의도 결국은 자기 사랑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깨트려지는 것이 바로 이렇게 고운 가루와 같은 내면의 세계를 간직하는 비결인데 자기라고 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을 거슬려 살던 옛 자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자아의 특징은 자기를 끔찍이 사랑하는 것인데 이 자기가 사랑하는 자기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거스르고 구속의 계획을 거슬려서 자기 마음대로 살려고 하는 그런 자아입니다. 그래서 그 자아에 대한 사랑은 구체적으로 죄에 대한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 죄에 관한 사랑에 대해서 깨트려지기만 그런 하나님의 사랑이 밀려들어오고 인격의 참된 변화가 일어나서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며 살수 있는 아름다운 사랑이 될 수 있는데도 사람들이 이렇게 변화되지 못하는 이유는 그 죄에 대한 뿌리 깊은 사랑 때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죄라고 하는 것은 그 자체가 하나님이 자기를 향해 가지고 계신 뜻을 거스르면서 자기 마음대로 살려고 하는 악한 경향성입니다. 그래서 이 죄는 우리 안에 잠깐 들어올 뿐만 아니라 잠깐 들어온 후에는 영원히 우리 안에서 뿌리를 내리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이 죄는 우리 안에 뿌리를 내려서 죄에 대한 사랑을 불러일으키고 그 죄에서 도저히 떠날 수 없도록 만들고 그 죄를 사랑하게 역사하는 방식이 있는데 이 세 가지 방식이 바로 우리의 영혼 안에서 하나님을 거스르는 악한 경향성으로 자리를 잡고 우리의 마음 안에서 정욕을 불러일으키는 죄의 경향성을 돕고 그 정욕에 마음을 통해서 실제로 하나님을 거스르는 담대한 악한 삶이 흘러나오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세 번째로 그 악한 삶이 우리의 삶 전체를 휘감아서 우리의 내면의 세계도 악하고 우리의 살아가는 삶도 악한 그런 삶을 만드는 것이 죄의 계획이고 이런 철저한 죄의 계획 때문에 우리의 마음이 죄에 대한 사랑에서 깨트려지기 힘들게 된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죄를 신자 안에서 뿌리를 내리면서 세 가지 특성을 갖게 되는데 하나는 죄에 대한 기쁨이고 또 하나는 죄에 대한 집착이고, 또 하나는 그 죄를 버릴 때 자기 홀로 있게 될 두려움들, 이런 것들 때문에 죄는 우리 안에서 더 강력하게 뿌리를 내리고 좀처럼 죄에 대한 사랑에 있어서 깨트려지지 못하게 합니다. 더 많이 반복했으면 좋겠습니다만 시간이 너무 가기 때문에 이정도로 하고 그리고 죄에 대한 사랑에 있어서, 깨트려지는 방식에 있어서는 여러분들이 이제 곧 손에 넣게 될 이 설교 프레임이나 혹은 설교 테입을 참고하시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죄에 대한 사랑 때문에 우리가 낟알 그대로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게 얼마나 모순인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밖으로는 하나님을 섬긴다고 그러면서 살아가는데 안으로는 하나님을 거스르면서 자기 멋대로 살려고 하는 자아가 살아있습니다. 외적인 삶은 이 내면의 세계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삶이 아니라 어떻게 하다가보니까 살게 된 삶입니다. 이미 교회 안에 들어와 있기 때문에, 남다른 이목이 있기 때문에, 오랫동안 익숙해진 삶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나님을 섬기는 모습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렇게 될 때 사람들은 그런 시간들이 하나님을 섬긴 시간들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것들을 통해서 당신이 섬김을 받으셨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다. 이런 에피소드가 바로 마태복음 7장에 나옵니다. 거기 선지자들이 주님 앞에 나갔을 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이런 일도 하고 이런 일도 했습니다. 그럴 때 예수님께서는 나는 도무지 너희들을 모른다. 너희들은 모두 물러가라. 하나님께서 그들을 모르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일들이 가능하게 됩니다.
오늘 이 시간에 살펴보려고 하는 것은 바로 그런 죄에 대한 사랑과 함께 우리를 하나님 앞에 아무리 많은 헌신의 제사를 드려도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질 수 없게 되는 그런 사람으로 만드는 또 하나의 요인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드리면서도 조심스러운 것은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그렇게 죄를 사랑하고 죄에 대해서 전혀 깨어지지 않으면서도 하나님을 위해 넘치게 헌신하는 사람은 존재할 수 있구나. 이렇게 생각할까봐 저는 사실은 두렵습니다. 그러나 사실 그런 사람들은 너무나 소수입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자기의 죄에 대한 사랑에 깨트려져서 깊이 참회하고 하나님의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헌신적인 삶을 산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생각 속에서나 가능한 것이지 실제의 삶에 있어서는 가능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여러 가지의 원인들, 혹은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에 대한 깊은 무지 때문에 자신이 헌신적인 삶을 살고 있다고 착각하면서도 사실은 그 삶이 하나님께 바쳐질만한 헌신적인 삶이 아닌데도 그것이 자기가 하나님 앞에 바치는 최고의 헌신적인 삶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하나님의 시각에서 볼 때 헌신된 삶이라고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대게 보면 하나님 앞에 마음을 바쳐서 깊이 헌신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작용에 의해서 수많은 자기 깨어짐을 경험하고 죄에 대해서 회개한 사람들이 그렇게 헌신적인 삶을 살지, 죄에 대해서 회개하지도 않은 사람이 그런 삶을 사는 예는 드물고 혹시 그런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잠시 자기가 좋을 때 그런 삶을 사는 것이지 금방 싫증을 내고 그만두게 되는 것입니다. 또 타고난 성실성과 천성으로 그런 일을 꾸준히 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그 사람을 죄에 대해서 깨트려지지 않은 그 사람을 그런 삶이 그를 거룩하게 만들 수는 없다는 말씀을 덧붙이고 싶습니다.
자. 그렇게 되면 우리는 오늘 여기서 이제 두 번째로 자기 의에 대해서 깨트려지는 것이 바로 자기 깨어짐이라고 오늘 말씀을 드려야겠습니다. 자기 의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선 자기 의를 먼저 말하기 전에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많은 삶들이 있는데 하나님이 어떤 삶을 보시면서 아름답다고 보시고 또 어떤 사람을 바라보시면서 하나님이 추하다고 보시는지 우리는 이 하나님의 관점을 미덕과 사악이라는 말로 설명할 수가 있습니다. 자,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인간들을 만들어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 거기에 있는 인간은 하나님께로부터 만들어진 피조물이기 때문에 그 사람을 만든 데는 나름대로 하나님이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 목적이 바로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하는 것은 그 드러난 어떤 효과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하나님 되신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 이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 자신이 보시면서 즐거워하는 영광입니다. 우리가 어떤 작품을 잘 만들어놓고 그리고 자기가 만든 작품을 감상할 때 기뻐하게 되고 거기에서 성취를 느끼게 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실 때도 바로 그런 목적에 의해서 만드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자기 안에 있는 신성의 영광이 충만한 것을 당신이 만든 이 모든 세상 만물을 통해서 당신이 이런 아름다운 성품을 가지신 분이라고 하는 사실을 드러내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하나님이 당신의 영광을 위해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으니까 하나님의 영광은 이 모든 세계가 창조된 동기이지만 또 만들어진 이 모든 창조세계와 인간은 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계속 활동하게 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은 한번 딱 비추고 끝나는 영광이 아니라 그 속에서 인간이 이 세상을 잘 돌보고 다스리면 하나님의 영광이 점점 더 풍성하게 나타나서 그래서 하나님이 처음 창조하셨을 때보다 더 많이 하나님의 솜씨를 드러내는 피조세계가 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이유는 바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에서 더 많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도록 하나님이 만들어놓으신 피조세계를 창조의 목적에 부합하도록 잘 돌보게 하기 위해서 인간을 책임자로 선택하여 이 세상에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창조하셨을 때 그 세상은 앞으로 더 많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었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일단 선한 상태였습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선한 상태였습니다.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제가 이런 비유를 한번 들어보겠습니다. 자, 내가 어떤 사람을 좋아합니다. 이 사람이 내 마음에 꼭 들고 사랑스럽습니다. 나는 네가 참 좋다. 그러면 그 사람이 츄리닝을 입고 다녀도 좋고, 베옷을 입어도 좋고, 양복을 입고와도 좋고, 그 사람이 좋은 것은 그 사람이 입은 옷과는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빨간 옷을 입고 왔을 때는 굉장히 좋았는데 파란 옷을 입고 오니까 지겹게 싫다. 그러면 그 사람을 좋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좋은 사람이 그 좋은 상태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늙어도 그 사람이 좋으면 좋은 것입니다. 싸우지만 않았으면, 그런데 그 사람이 그런 면에서는 나에게 좋은 사람이라는 것이 변함이 없지만 그 사람이 이제 더 세련된 옷도 입고 머리 스타일도 바꾸고 화장도 하고 이렇게 해서 점점 더 세련되고 예뻐 보이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선하다고 하는 상태는 변함이 없지만 그 선한 상태는 점점 더 아름답고 예쁜 사람이 되어갈 수 있습니다.
이 세상도 말하자면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가 선했고 계속해서 선할 것이었지만 그러나 그 속에서 인간이 그 세상을 잘 다스리면 하나님의 영광은 더 많이 나타날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렇게 영광스러웠는데 죄가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모든 것들이 다 파괴되어버렸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이 세상을 수포로 돌아가게 하지 않으시고 우리 인간을 구원하셔서 원래의 창조의 목적대로 이 세상을 바꾸어놓고 회복시키시려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제일먼저 우리인간을 회복시키시고 변화시키셔서 내면의 상태를 재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있게 하시고 그 은혜의 힘으로 하나님이 원래 자기를 창조하신 목적이 무엇이고 하나님이 가지고 싶으셨던 세계가 어떤 세계였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하고 그렇게 망가진 세상을 보게 해서 그 세상을 하나님의 뜻에 맞는 세상으로 돌아가게 만드는 일들을 위해서 봉사하면서 살도록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신 것이고 우리 세상에 있던 사람들을 예수의 피로 택해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진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 이외에는 하나님 앞에 선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이 선의 기준이 바로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이기 때문에 그런 선을 받아들이고 그 선을 위해서 희생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 가운데는 없습니다. 그들이 비슷한 삶을 살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러나 그것은 어떤 면에든지 인간에게 유익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택한 것이지 하나님을 생각하며 선택한 삶은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그런 창조의 목적을 받아들이고 원래 있던 선한 상태로 돌아가기 위한 노력을 인간이 하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드리는 헌신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 일을 위해서 구체적으로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이 각자 자기의 일터에서 애쓰고 추구함으로 말미암아 전쟁과 같은 이 창조세계 회복의 사명을 완수해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마다 모두 똑같은 일로 부르시지 않으십니다. 한 나라가 전쟁을 한다고 할 때 총 들고 나가 싸우는 군인이 적을 죽이기는 하지만 그 군인이 충분히 적과 싸워 이길 수 있도록 공군 비행기가 날아가서 포격을 하고 포대가 대포를 싸서 그들의 진지를 부습니다. 비행기가 떠서 그들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병기 공장을 공격합니다. 그리고 조명탄 두 대가 조명탄을 발사해서 어두운 밤을 밝혀서 그들을 공격합니다. 그들을 공격하기 위해서는 총이 필요합니다. 군수공장에서는 총을 만들고 벌거벗고 나가서 총 들고 싸울 수 없으니까 저기 병천 공장에서는 군인들의 옷을 만들고 내복을 만듭니다. 그리고 그냥 싸울 수없으니까 밥을 먹어야 하니까 그러니까 밀가루로 반죽해서 빵을 만들기도 하고, 주먹밥을 만들기도 하고 심지어는 밥을 먹은 다음에 커피도 한잔 끓여 먹기 위해 커피를 제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심지어 그 속에 내선 박스를 뜯어보면 이쑤시개까지 나옵니다. 그런데 그 이쑤시개 하나를 만드는 사람부터 시작해서 총 들고 나아가서 피나게 전쟁에서 싸우는 사람들까지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공통된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전쟁으로부터의 승리입니다.
그러니까 그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섬기는 사람들이 얼마나 다양합니까? 내가 하는 일을 하지 않고 다른 일을 하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작은 교회당에 와서 한번 보십시오. 진짜 알록달록한 사람들이 다 모였습니다. 그냥 기도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부터 시작해서 그 다음에 이렇게 설교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 그 다음에 전도하기 좋아하는 사람, 컴퓨터 앞에 매달리기를 좋아하는 사람, 테프 만들기 좋아하는 사람, 커피를 끓이는 사람, 디자인을 하는 사람, 청소하는 사람, 자동차 운전하는 사람, 다 다양한 일을 합니다. 그래서 앉아서 그림을 그리고 커피를 끓이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오게 하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마치 군인들을 위해서 내복을 만드는 사람보고 그까지 내복을 만든다고 전쟁에서 이기는가 하고 말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그것은 무식한 이야기입니다. 이 모든 것이 다 합쳐져서 그래서 전쟁을 수행하듯이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해가는 것입니다.
모두 목사가 될 필요가 있겠습니까? 모두 목사가 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여기에 새카맣게 올라와서 한 사람을 놓고 설교하니 필요 없습니다. 목사는 성도 수백 명에 한명 정도만 나오면 충분합니다. 많이 나올 필요가 없습니다. 학교에 다닐 때 너도 나도 다 교수가 된다고 하는데 그러면 학생은 누가 되겠는가. 교수는 한반에 그저 한명도 많다. 한 학년에 그저 2-3명만 나오면 충분하지 않는가. 너도 나도 다 교수가 되겠다면 학생은 누가 되겠습니까?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잘 들으십시오.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잘 들으십시오. 이제부터입니다. 그런데 이런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 만약에 창조의 목적이라고 한다면 그런 비유를 하자면 그런 창조의 목적을 구현한 상태가 선입니다. 전쟁의 맥락에서 돌아가면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 선을 완성한 상태입니다. 그러면 그 전쟁에서 승리라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다양한 색깔의 사람들이 다양한 일을 하면서 그 전쟁에서 승리를 위해 기여합니다. 아까 이야기한 것대로 옷을 만드는 사람부터 시작해서 탄약 만들고, 이쑤시개를 만들고, 커피를 만드는 사람까지 다 있습니다. 그들이 위치는 다 달라도 각각 하나의 목적을 위해서 움직이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미덕입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 앞에 미덕을 가진 삶입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이 보시기에 정말 도덕적인 삶이고 미덕의 삶입니다.
그럼 사악한 삶은 무엇입니까? 이것을 거스르는 것, 그러니까 이쑤시개를 만드는 사람부터 시작해서 대포알을 만드는 사람까지 모두 하나, 하나 모두 헌신되게 일을 해서 나라를 전쟁에서 승리하는 상태로 나아가기를 원하는데 이것을 방해하거나 거스르는 것, 이게 사악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는가 하면 이런 사악한 사람들을 하나님이 돌이키십니다. 회개하게 하고 돌이켜서 다시 방향을 돌려서 그런 선한 상태를 만들어가는 일을 위해 헌신하도록 하나님이 기회를 주십니다. 그런데 끝까지 돌이키지 않으면 하나님이 심판해서 치워버리고 계속해서 흘러가도록 만드십니다. 이게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성경적으로 볼 때 좋은 사람이라고 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하면 그 목적을 품고 그 목적에 부합하게 계속 살아가는 사람, 이런 사람이 선한 사람입니다. 사악한 사람은 가끔 잘못하고 나쁜 짓 하는 사람이 사악한 사람이 아니라 그렇게 이 모든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창조세계를 변화시켜서 하나님의 선하신 상태로 돌아가게 하는데 거기에 방해하고 거기에 대항하는 사람이 바로 사악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실 때 아름다운 사람이 누군가 하면 이런 선한 상태를 향해 작용하고 나아가는 게 미덕인데 그 움직이는 모든 움직임의 첫 번째 작용은 인간의 영혼 안에서 일어납니다. 그런데 그런 영혼의 움직임을 가지고 계속해서 그 창조의 목적에 부합하는 세상이 되도록 하나님께 헌신하면서 살려고 하는 그런 내면의 세계의 질을 가진 사람들을 하나님이 보실 때는 예쁜 사랑을 하십니다. 정말 너무 아름답다. 정말 예쁘다. 그런 것입니다.
여러분, 넥타이 하나만 달리 매도 사람이 다르게 보입니다. 제가 지금 넥타이를 맸는데 아주 잘 어울리는 코디네이션이라고 할 수 없지만 그러나 80점은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제가 만약에 여기에다가 아주 새빨간 바탕에 노란 줄무늬가 있는 넥타이를 하고 왔다. 그럼 대게 썰렁할 것입니다. 설교 듣는데 방해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뭐하려고 저렇게 하고 왔나. 거기에다가 노랑 양복을 입고 여기에다가 하얗게 칠하고 여기에 오면 아마 영화 마스크에 나오는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게 왜 그렇습니까? 이거, 이거 다 색깔이 어울리니까 괜찮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거 하나만 새빨간 바탕에 노란 줄이 간 것을 매면 이거하고 잘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아름다운 게 아니라 추한 것입니다. 그러데 그런 빨간 넥타이도 불그스름한 양복 색깔이든지 아니면 새카만 양복 색깔에 이렇게 결혼식 같은 것을 할 때 하얀 넥타이에다가 새빨간 넥타이를 까만 양복 속에다가 입었다면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선을 향해서 움직이는 모든 영혼의 활동이 그것이 하나님 앞에 미덕이고 그런 미덕을 찾아서 살아가는 사람의 삶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너무 아름다운 것입니다.
여러분, 예쁜 사람이 되고 싶을 것입니다. 얼굴에 대패를 댄다고 해서 예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원판불변의 법칙으로 절대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 정말 아름다운 사람은 그 외모의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인 선, 그리로 향하여 움직이는 모든 영혼의 움직임, 그것이 구체화될 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헌신적인 삶이 되어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거기에 그런 삶을 살아가는 사람을 하나님이 보시기에 너무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 사람이 높은 지위여야 하는가, 그것은 아닙니다. 높은 지위에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미덕을 행하면서 살아가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추한 사람입니다. 하나님 앞에 높은 지위가 없습니다. 지구 한 모퉁이를 청소하는 청소부일수도 있고, 그냥 평범하게 집에서 아이들밥이나 해주고 빨래나 하는 그런 평범한 성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삶의 양태의 문제이지 질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사람의 양태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얼마나 높은 지위에 있는가, 그것에 의해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움이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더럽고 추한 사람이 높은 지위를 누리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나라는 그런 사람들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 하나님 앞에 그런 삶을 추구합니다. 그게 아름다운 삶입니다. 더러운 삶은 바로 그런 하나님의 목적을 거스르며 살아가는 것, 그러니까 신자가 죄 가운데 살면 말할 수 없이 역겹고 더러운 삶입니다. 불결하기 짝이 없는 삶입니다. 아주 하나님이 보시기에 혐오스럽고 더러운 삶입니다. 냄새가 나고 아주 불결하고 더러운 삶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를 아름다운 삶을 사는 비결입니다.
그럼 오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상번제를 가르치면서 산산이 깨트려지고 쪼개진 제물로 하나님 앞에 남김없이 다 타버리는 그 번제의 의미가 헌신이라고 가르쳤습니다. 뭘 위해서 헌신한다는 것입니까? 바로 그 목적을 위해서 헌신하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은혜 준 사람에게 헌신하는 것, 그것이 아닙니다. 자기를 예수 믿게 만들어준 교회의 목적을 위해서 헌신하는 그것은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에 헌신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그 모든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그 은혜가 그런 목적을 위해서 쓰여 지도록, 교회도 그런 목적을 향해 가도록, 우리 개인도 그런 목적을 향해 가도록 그렇게 모두 하나님 앞에 협력하면서 살아가는 가운데 그 일을 위해서 다 헌신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에게 있는 생명도 주님 때문에 주신 것이고, 그리고 자기에게 주신 그 놀라운 은혜도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것이니 이제 그 구속의 은혜를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을 위해서 그 모든 것들을 헌신하면서 살아가는 것, 거기에서 그 사람이 미덕의 사람이 되는 것이고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 아름다운 미덕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십니다.
오늘 가슴에 손을 얹고 가만히 생각해보십시오. 내가 오늘 이 땅에 존재하는 것이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가, 아니면 슬픔이 되는가? 내가 이 세상에 있어서 주님이 창조하신 세상이 더 빛나 보이는가, 아니면 더럽혀 보이는가? 하는 것을 진지하게 생각해보십시오. 그게 바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입니다. 그렇게 자기를 다 드려서 그 목적이 전해지고 나면 그 목적을 위해서 헌신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 삶 속에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그 신자는 복된 삶을 살게 되고 그 안에서 참다운 안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이제 문제는 그런 목적을 살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래서 자기를 다 드리며 헌신하려고하더라도 자기 자신이 깨어지지 아니하고는 그런 마음이 생길 수도 없고 또 그 마음이 계속해서 유지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이 나실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은혜로부터 미끄러졌을 때 은혜로 다시 돌아가기는 그렇게 힘들고 먼 길인데 돌아간 은혜에서 다시 미끄러지는 데는 시간이 안 걸립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돌아가는 길은 굉장히 힘든 길인데 그 길에서 다시 미끄러지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아주 쉽게 다시 미끄러집니다. 그것을 보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내 생명을 다 드립니다, 라고 하는 헌신의 각오도 중요하지만 끊임없이 자기 자신이 죄에 대한 사랑에 관해 깨트려지고, 의에 관해서 깨트려짐으로 말미암아 자기가 부서지는 일들이 함께 일어나지 않으면 하나님을 향한 헌신의 각오와 결단도 유지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게 인간입니다.
그럼 그런 미덕과 오늘 우리가 설교해서 언급하려고 하는 이 의는 무슨 관계에 있는 것일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원하시는 이 세상이 어떤 세상인가 하는 것을 하나님이 보여주셨어도 그것이 너무나 멀리 있는 목표이기 때문에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야지만 그런 목적에 부합하는 미덕의 삶을 살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 잘 모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이것입니다. 이 사람이 이쑤시개를 만들고, 이 사람은 커피를 끓이고, 이 사람은 재봉틀에서 군복을 만들고, 이 사람은 총알을 만들고, 이 사람은 대포를 만들고, 이 사람은 비행기를 만듭니다. 그런데 뭘 어떻게 하라고 하나도 가르쳐주지 않고 자, 우리 모든 것을 바쳐서 전쟁에서 이깁시다. 돌격! 이쑤시개를 만드는 사람이 어떻게 돌격을 하겠습니까? 이쑤시개를 들고 돌격하라는 것도 아니고, 그러니까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돌격 할 사람은 이 사람을 돌격하면 큰일 납니다. 누가 물건을 만들겠습니까? 돌격은 보병부대나 돌격을 해야지, 그럼 이 사람들에게 있어서 돌격! 이런 이야기는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이쑤시개를 계속 만들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빨 속에 집어넣다가 부러지는 그런 후진 이쑤시개 말고 진짜 제대로 쑤셔지는 이쑤시개를 만들라. 그래서 더 적은 비용으로 더 좋은 이쑤시개를 만드는 비결이 뭘까? 수입품을 능가하는 비결이 뭘까? 계속 연구해서 세계 최고의 이쑤시개를 만들어서 전쟁을 하다가 밥을 먹고 이빨을 쑤실 때 이쑤시개가 안 빠진 상태에서 꽂은 상태에서 전쟁하지 않도록 도와주라 이야기입니다. 런닝을 만드는데 팔이 뒤로 가지 않도록 똑바로 만들라고, 총알을 만들었는데 5개만 쏘면4개는 나가고 1개는 속에서 터져버리는 그런 총알 만들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기준을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이게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계명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뭘 보여주는가 하면 그 창조의 목적에 부합하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시기 위한 하나의 구체적인 계획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전쟁에 이기기 위해서는 돌격해서 아줌마부대부터 시작해서 백병전 하는 보병까지 다 돌격한다고 해서 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구체적인 계획을 하나님이 계명으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하나님의 창조의 아름다운 계획을 잘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구체적으로 계명을 지키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보다는 그것을 잘 몰라도 계명을 따라서 한 발짝, 한 발짝 순종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 더 미덕의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나하나의 계명도 지키고 원대한 하나님의 계획도 순종하면 더 훌륭한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계명이 있습니다. 그 계명을 따라서 살아가는 삶이 바로 의로운 삶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의로운 삶의 궤적이 다 그려지면서 미덕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미덕의 삶은 하나님이 보실 때 정말 아름다운 삶입니다.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이렇게 참으로 미덕을 행하는 존재가 되기 위해서 하나님이 주신 모든 계명을 따라서 살아가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최고의 가치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가장 소중하신 분이시고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만들어놓으신 그 계획이 가장 소중한 계획입니다. 이럴 수 있는 마음이 있어야지만 그 하나님의 계획을 다 받아들이고 그리고 그 미덕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지하실 교회에 어느 날 갔더니 물이 꽉 찼습니다. 물이 뭐 수시로 찼으니까. 그래서 급히 전화하면 달려 나올 수 있는 몇 사람에게 전화를 했더니 그 중에 몇 사람은 오기는 왔는데 물을 다 푼 다음에 왔습니다. 그래서 왜 무슨 사정이 있는가? 했더니 나중에 알았는데 밥 먹고 발 씻고 오느라고 늦었다고 해서 잘났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 자기 깨어짐에 있어서 그 깨어짐이 자기 의에 대한 깨어짐이라고 할 때 이것은 곧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하나님의 요구에 부합하는 미덕을 향하여 가는 하나님의 요구에 부합하는 삶이나 태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의 계명에 부합하는 삶이나 태도가 의로운 삶인데 그것을 왜 깨지라고 하는가? 그것을 집어치우라는 것인가? 그 뜻이 아니라 그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계명에 부합하는 그런 올바른 생활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보다 그것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을 못 만나게 하는 요인이 되는 것이고 자기 안에 단단한 자아를 깨트리지 못하게 하는 중요한 방해물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자기 의”라고 할 때 자기 의는 이미 “의”라는 말 앞에 “자기” 말이 붙어서 “의”라고 하는 것이 이런 미덕의 삶을 위한 하나님의 요구라고 한다면 그런 요구를 자기가 스스로 성취했다고 하는 확신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의에 빠진 신앙은 반드시 교만을 동반하게 됩니다. 그래서 자기 의에 빠진 신앙은 반드시 교만을 동반하게 되는데 이는 율법에 부합하는 삶을 사는 모든 선한 행위의 동력이 자기 자신 안에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결국 이 의는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워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의를 얻게 되는 방법은 오직 둘 중의 하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 첫째는 율법적인 의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선한 목적을 향하여 가도록 우리에게 주신 계명이 있는데 그 계명들 중에 한 가지가 율법입니다. 그것들을 행하며 그것들을 준행하면 그것이 율법적인 의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깊이 신뢰하게 되면 그것이 자기 의가 되는데 이런 자기 의에 빠지게 되면 결정적으로 자기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자기를 의롭게 해주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가 가슴에 다가오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율법적 의에 빠지게 되면 예수님을 의지하는 참된 은혜의 생명에서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의를 얻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방법으로 이런 자기의 말고 율법적인 의 말고 복음적인 의를 또 하나 우리를 위해 예비하셨습니다. 이 복음적인 의는 의로워지는 자원, 의로워져야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받아주시는데 의로워지는 자원을 자기 자신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둔 믿음이입니다. 그래서 이런 율법적인 의, 율법을 행함으로 말미암아 그 요구에 부합한 삶을 살지 못하지만 자신이 살았다고 생각하고 스스로 자기가 잘했다고 생각하며 믿는 그 의는 그들을 하나님 앞에 세워주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너희의 의가 바리새인이나 율법사들의 의보다 더 낫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없다. 사실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 입장에서 보면 절망적인 선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행하고 있는 의로운 행실과 삶이 평범한 신자들은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정말 수준 높은 희생이었기 때문에 그것보다 더 나아야한다고 하는 것은 결국은 자신들이 도달할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생각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하시고 싶으셨던 말씀은 그런 율법적인 의 말고 또 다른 의가 필요하다는 것을 가르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3장에서 이제는 율법의 의 말고 또 다른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 선언합니다. 하나님의 또 다른 의가 나타났으니 이것은 율법에서 말미암은 그런 의가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의다. 그런 것입니다. 이 의는 이런 이치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죄를 지었는데 이 죄를 지은 자들에게는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판을 하지 않고 하나님이 넘어가실 수가 없으십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못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이 능력이 없어서 못하시는 것이 아니라 더 큰 목적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대통령이나 왕에게는 자기가 원하는 사람에게 사인을 하면 그 사람을 풀어줄 수 있는 은전적 특권이 있습니다. 그런데 대통령이 자기 아들이 죄를 지어서 감옥에 갔습니다. 법적으로 보면 대통령이 우리 아들을 살려줘, 그리고 도장을 찍어 보내면 석방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감히 대통령이 그러지 못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렇게 할 수 있는데 자기가 못한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하면 나라의 법이 무너집니다. 더 큰 목적이 있기 때문에 차라리 자기 아들이 감옥에 가는 것이 낫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가 지은 죄를 그냥 용서해주실 수가 없으니까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대신 십자가를 지시고 하나님은 우리가 지은 죄를 예수님으로 대신 감당하게 하셔서 형벌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입니다. 그렇게 해서 결국은 예수님이 율법의 요구를 이룬 것입니다. 죄를 지은 우리를 향한 율법의 요구는 네가 죄를 지었으니까 죽어라 이것입니다. 그랬더니 예수님이 내가 제물이 되어서 이들을 대신하여 죽으마.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율법의 요구를 예수님이 이루어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율법이 우리에게 시비를 걸 수 있는 처지가 안 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의라고 하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갔을 때 우리는 그 모든 율법을 다 행할 수 없었지만 그러나 구원의 문을 두드리며 하나님 앞에 나아갑니다. 그런데 네가 어떻게 여기에 나왔는가 하고 물으면 우리가 의롭기 때문에 왔습니다. 네가 어떻게 의로운가? 우리는 의롭지 않지만 예수님이 의롭게 살지 못한 우리의 모든 율법의 죄의 요구를 짊어지고 대신 죽으셨으니 우리가 그 피로 의롭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고백을 하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것을 보고 하나님이 우리를 받아주신 것입니다. 이게 바로 복음적인 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결국은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이런 복음적인 의를 소유해야지만 하나님 앞에 자기가 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신자의 마음에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고 나는 온전히 죄인일 뿐이라고 하는 인식은 없고 내가 하나님 앞에 이런 계명도 지켰고 이런 일도 했고 이렇게, 이렇게 하나님을 섬겼으니까 나는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질 만 하다고 생각하는 이런 사람들은 예수의 생명이 그 안에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교만하고 형식적인 신자들에게서는 자기 깨어짐을 볼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얼마나 죄인인가 하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죄에 대한 사랑에 관해 깨트려지는 것과, 자기 의에 대해서 깨트려지는 이 두 가지는 결코 나누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 앞에 자기는 아무 공로가 없고 예수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으니 그래서 내가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일생을 살고 하나님을 위해 많이 일했지만 그러나 내가 자랑할 수 있는 것은 내가 행한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시고 그리고 나를 위해서 모든 고난을 감당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그분만이 나의 자랑입니다. 왜냐하면 그분만이 나의 의이기 때문입니다. 깨닫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진짜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헌신하며 살아갈 수 있는 신자들에게 요구되는 내면의 세계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상번제를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위해 어떻게 헌신하며 살아야 할 것인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수양을 잡아서 네 다리를 자르고 그리고 기름을 잘라내고 목을 쳐서 목을 잘라낸 것은 결국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세상을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에 대해서 그렇게 찢어지기까지 헌신하며 살라고 하는 하나님의 요구입니다. 바로 그 일을 위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부르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부르신 것은 결국은 우리 인간들이 하나님이 창조해놓으신 이 세상에서 살면서 최고의 가치와 보람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이 다시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해지고 주님을 아는 세상이 되는 그 일에 기여하는 것이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행복한 일이고 인간은 그 안에서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고 그 안에서만 행복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런 교리적 사실은 이제 하루하루를 살아가면서 자신이 먹고 입고 살면서 자기의 이름만을 보존하고 자기의 행복만을 위해서 살아가는 모든 성도의 삶을 쓰레기와 같은 삶이라고 규정하는 것입니다. 그는 살아있을 때만 의미가 있지 주님 앞에 갔을 때 그것은 어떻게 펼쳐놓을 수도 없는 부끄러운 삶입니다. 그것은 죄악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사랑에 감동을 받은 언약의 백성들이 자기만을 위해서사는 것 이외 어떤 삶도 없다고 하는 것을 그가 이 세상에서 죽어있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결코 산적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죄입니다.
하나님이 구원해놓으셨을 때 그 백성들에게 원하는 삶은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는 삶입니다. 나같이 쓸모없는 죄인을 구원해준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고 그 은혜의 감흡하면서 자기에게 주신 모든 이 땅의 자원, 하늘의 은혜의 자원을 주님을 위해 허비하면서 살면 주님이 더 채워주십니다. 더 부어주십니다. 그래서 더 많은 하나님의 사랑과 하늘자원을 누립니다. 이 땅의 자원을 소유합니다. 그래서 더 많이 하나님께 드립니다. 그러면서 강물처럼 흘러가는 삶을 사는 사람들을 통해서 이 세상이 고쳐지는 것입니다. 그런 삶을 살라고 하나님이 불러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어쩜 사람이 그렇게 이기적인지.
하나님이 쓰시겠다는 데. 세상을 가지고 있으면 그것이 여러분의 것입니까? 생명이 있으면 그것이 여러분의 것입니까? 재능이 있으면 그것이 여러분의 것입니까? 여러분에게 기도의 은혜가 있으면 그것 또한 여러분의 것입니까? 여러분 생명까지도 하나님 앞에 바쳐진 것입니다. 마지막 날에 주님이 부르실 때 뭐라고 변명하시겠습니까? 내가 너를 위해 준 구원의 은혜를 넌 어떻게 나를 위해 썼는가? 내가 너를 이제 구원해서 끝없이 은혜를 부어줌으로 망가진 이 세상을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게 하기 위해서 너를 강물처럼 흐르는 백성이 되게 하려고 너에게 은혜를 주고 죄의 용서를 주고 말씀의 깨우침을 주었는데 내가 너에게 부어준 하늘자원, 내가 너에게 이 세상에서 준 땅의 자원을 어디다 썼는가 하고 물으실 때 여러분은 뭐라고 말하겠습니까?
이렇게 될 때 우리는 이제 이런 의에 대해서 마음속에 이런 혼란이 생겨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게 무엇인가 하면 마음속에서 자기 의가 깨트려져야지만 고운 가루처럼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헌제자가 된다. 그것과 의로운 삶의 실천은 어떤 것이 있는가? 지금 오늘 설교자가 성경을 풀면서 자기 의가 깨트려져야지 된다고 하는 것과 그리고 성경이 이야기하고 있는 의로운 삶을 어떻게 우리가 조화롭게 생각을 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이것을 여러분들에게 정리를 해드리려고 합니다.
소제물의 제물처럼 하나님 앞에 곱게 깨트려져서 완전히 형체로 이루어질 때까지 고운 가루가 되기까지 갈아져버려야 할 것은 바로 자기 의인데 이것은 하나님 앞에 나아감에 있어서 자기의 의로운 행실을 의지하는 확신입니다. 이것을 깊이 깨트려져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다시 두 가지로 나누어집니다. 소극적인 의미에서 또 적극적인 의미에서 각각 나누어서 생각할 수 있는데 소극적인 의미에서는 이런 것입니다. 나 죄가 뭐가 있나. 나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다 살았어. 마가복음 10장에 보면 부자인 젊은 관원이 예수님 앞에 나아옵니다. 어찌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그랬더니 예수님이 십계명 말씀하셨습니다. 이것도 하고 이것도 하라. 다 말씀하셨습니다. 그랬더니 이 젊은이의 얼굴에 희색이 돌았습니다. 예수님, 그런 명령을 준행함으로서 영생을 얻을 수 있다면 영생은 제 것입니다. 어려서부터 제가 그 계명을 다 지켰습니다. 이게 바로 소극적인 의미에서의 의입니다. 율법에서 우리에게 행하라고 한 것, 금하라고 한 것들을 자기가 지킴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요구 조건을 스스로 만족시켰다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물론 정신 나간 사람 이외에는 내가 완벽하게 만족시켰다. 예수님 다음으로 내가 이 세상에서 잘났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사람은 정상적인 사람들 가운데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자기가 그렇게 선언하는가 안 하는가가 문제가 아니라 자기 마음속으로 이정도면 내가 하나님 앞에 잘못한 것이 뭐가 있는가? 하나님이 나를 받으실 만 하다고 하는 것이 자기 의입니다.
적극적으로는 무엇인가 하면 사실 이 적극적인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이 적극적인 것은 이미 이제 율법이 더 이상 우리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니까 이제 자기 의가 이런 식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방법으로 나타납니다. 자기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는가 안 했는가, 주님의 계명을 모두 잘 지켰는가 안 지켰는가 하는 그런 것들은 이제 현대에 와서는 케케묵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자기만큼 하나님을 위해서 열심히 섬긴 사람이 없다고 하는 그런 의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이런 실제 여러분의 삶을 보면 전자에 의해서 빠지는 자기 의보다는 후자에서 빠지는 자기 의가 훨씬 더 많습니다.
자기는 좋은 신자라고 스스로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자기는 교회에서 아주 쉽게 이야기하면 3대째 예수를 믿었다는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모태신앙을 이야기하는데 모태신앙 너무 좋아하지 마십시오. 모태신앙이 잘못되면 전도도 못해. 기도도 못해. 그런 못해 신앙이 됩니다. 그것부터 시작해서 옛날에 교회를 질 때 집 판 것부터 시작해서 그 다음에 이제 5년째 성가대 한번도 빠지지 않고 나와서 봉사한 것부터 시작해서 주저리주저리 한이 없습니다. 결국은 그런 모든 고백을 통해서 은근히 자기 자신은 많이 헌신했고 그것만으로도 하나님이 자기를 받아주셔야지 된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 모두 다 지푸라기와 같은 모두 쓸모없는 의입니다. 그 모든 넝마와 같은 의입니다.
사람들 속에 그래서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그래도 잘 섬기고 있고 그리고 훌륭한 섬김의 업적을 이루었다고 생각하는 자부심이 있는 사람치고 자기 깨트림을 경험한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많이 섬기고도 마지막의 고백은 그러나 주님 앞에 무익한 종일뿐입니다. 왜냐하면 많이 섬겼지만 나를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받아지게 만드는 것은 하나님을 많이 섬긴 것은 하나님을 많이 섬긴 헌신적인 삶이 아니라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사랑, 그 은혜라고 하는 것을 깊이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를 향한 하나님의 최고의 명령은 거룩한 삶입니다. 그리고 그 거룩한 삶의 구체적인 모습은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준수하며 살려고 하는 의지의 올곧음을 통해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 삶은 의로운 삶이고 도덕적인 삶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의로운 삶의 무용론을 이야기하기도합니다. 흔히 인용하는 구절이 무엇인가 하면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인간은 모두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의롭게 살고자 하는 인간의 도덕적인 노력도 쓸모없는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를 향한 하나님의 기대는 그들이 의로운 삶에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그 의로운 삶의 열매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명 하나 하나를 순종하면서 살아감으로 말미암아 맺혀지는 삶의 열매입니다. 그들 속에는 참된 미덕을 향하여 가는 영혼의 움직임이 반영되어 있고 그것은 올곧은 똑바른 길을 지향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삶입니다. 그것이 바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이쑤시개를 만드는 공장에 있는 사람은 자기가 정말로 자기 군인이 전쟁에서 반드시 승리하도록 만드는 최고의 애국심을 다른데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좋은 이쑤시개를 만들므로 말미암아 보여주었습니다. 옷을 만드는 공장에 있는 사람은 자기 나라가 반드시 이 전쟁에서 승리하는 마음을 한 땀 한 땀 정성스럽게 뜯어지지 않는 탄탄한 군복을 만듦으로서 자기 애국심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대포알을 만드는 사람은 최고의 대포알을 만드는 그것에 의해서 애국심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하나의 의무를 이행하면서 훌륭하게 살아가는 그 삶 속에서 맺혀지는 열매가 의로운 열매입니다.
그래서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의 의로운 삶의 열매는 참된 미덕을 향하여 가는 의로운 열매입니다, 그들이 의로운 삶의 열매를 맺히기 위해서는 구체적으로 가슴에 품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 서있는 이 자리에서 하나님이 내게 요구하시는 바가 무엇이고 그리고 하나님이 내게 주신 계명이 무엇일까? 그것을 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뭐라고 그러셨습니까?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을 것이요. 그리고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도 내 제자가 될 것이라.”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뭘 품으면? 계명을 마음에 품으면 의의 열매가 맺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의로운 삶을 살아서 참된 미덕을 향해서 가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멀리 있는 비전만 품으면 안 됩니다. 창조의 세계를 극복해야 합니다. 그게 뭔데? 참으로 애국합시다. 그래서 참으로 영화 한편 보고 나서 가슴이 복받쳐서 대한민국! 요즘 그렇게 소리를 지르던 사람들 다 어디에 갔습니까? 그 사람들이 탈세하고 말이지, 줄 세치기 하고, 엉터리 물건 만들고 그러면 안 됩니다. 그런 애국심도 필요하지만 구체적으로 삶의 윤리가 필요하고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삶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애국심을 가슴에 한번 품으면 손해날 것이 없지만 그러나 구체적으로 그 애국심을 구현하면서 살기 위해서는 돈이 조금 남아도 이쑤시개를 똑바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문이 박해도 군인이 필요하다고 그러면 자기 집을 팔아서라도 옷을 계속 만들어 보내야 합니다. 대포알을 만들려고 그러는데 구리가 없으면 그러면 자기 집의 전선이라도 뜯어서 아니면 솥단지라도 녹여서 대포알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각자각자 속에 있는 그 나라를 위한 애국심이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그것이 삶 속에서 나타내보이기 위해서는 반드시 희생이 필요합니다. 그게 바로 의로운 삶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이 그렇게 의롭게 계명을 지키면서 기뻐하면서 살아가는 삶을 우습게 아시는가?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의 역사를 보십시오, 하나님은 의로운 사람과 함께 구원의 역사를 써가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의 역사는 사람의 이름을 이어놓은 구원의 역사가 됩니다. 성경이 포함하고 있는 역사가 그렇게 무구한 역사라고 할지라도 그 성경 속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펼쳐갈 때 하나님이 사용하셨던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몇몇 사람의 이름을 이으면 구약이 줄달음질치고, 몇몇 사람의 이름을 이으면 신약의 역사가 줄달음질쳐서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오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특별한 사람들입니다. 왜 특별한 사람들입니까? 하나님이 특별히 선택하고 특별히 은혜도 주셨지만 그들이 모두 분투하며 산 사람들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 주님을 기쁘시게 한 증인들 중에 놀면서 신앙생활을 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역사에 이런 시련 속에서 이런 희생을 마다하고 그리고 마땅히 참된 신자가 되기 위해서 치러야 할 모든 희생을 마다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분투했고 그리고 이 어두운 세상에서 참된 신자가 되기 위해서 희생하고 고난을 당해야 한다는 것을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고난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왜? 한번의 신앙의 정절을 지키기 위해서 영원한 죽음을 택했습니다. 한번 주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서 주님 앞에 한번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는 수없이 일생동안 치욕스러운 짐을 지고 고난의 길을 갔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 앞에 의로운 삶의 열매가 자기를 통해 나타나기를 바라는 그 치열한 열심 때문에 그들이 그 고난의 길을, 순종의 길을 걸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애를 썼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이 망할 때도 죄인이 많아서 망한 것이 아니라 의인이 없어서 망했습니다. 심지어는 유다 나라가 다 망하고 포로로 끌려갈 때도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 거리를 사방으로 돌아다니며 너희가 한명이라도 의로운 사람을 찾을 수 있는지 한번 찾아보라고 그러셨습니다. 결국은 그런 의로운 사람을 발견할 수 없게 되자 하나님께서 니느웨이를 정리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의로운 열매를 맺으며 살아가는 삶이 아무 것도 아니라고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데도 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소금과 같은 존재가 되라고 하나님이 부르셨더니 설탕 같은 존재가 되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신앙의 가치와 길을 따라 살기 위해서 어려움을 당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예수 믿는 것이 뭔가 내 멋대로 살아가는 이 인생길에 있어서 도움을 주기를 바랍니다, 그러니까 그런 참된 신앙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언제나 가짜 신앙입니다. 씹어보고 자신의 입맛에 맞으면 삼키고 틀리면 뱉습니다. 결국 주인이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입맛입니다. 그러고 살아갑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습니까? 생명은 참된 기독교 안에 있는 것이지 가짜 기독교 안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그러고 살아갑니다. 그러고 나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너나 나나 다 똑같은 놈들인데 의롭게 살아가려고 폼 잡는 놈들이 더 나쁜 놈들이다. 이런 어거지 같은 논리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하나님이 주신 그 많은 은혜들을 자기의 색욕거리로 삼고 그리고 욕심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살아갑니다.
오늘날 왜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께 그런 많은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순종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희생이 필요하기 때문에 안 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이 분명하게 말하지 않습니까? 예수의 피로 구원을 받아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반드시 하나님을 위해서 헌신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분의 나라의 영광과 그리고 이 땅의 회복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죄악 되고 타락한 세상을 비난하지 말고 거기에 자기를 던져서 그런 망가진 세상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자기를 보냈다고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세상을 고치려고 하는 것이 되어야합니다.
젊은이들이 입사원서를 쓸 때 예수 믿는 사람들이 모인 회사나 가려고하고 집어치우십시오. 거기는 더 썩었습니다. 그러려면 교회 안에 계속 있지 뭐 회사에 입사를 합니까? 아무데면 어때. 하나님이 주신 그곳에 가는 것이지. 그 사람은 돈을 벌려고 모였지만 우리는 의에 길을 걸어가려고 모인 사람들입니다. 망가진 곳이니까 더 가야지 됩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 배워야 합니다. 고난을 받지만 그러니까 하나님이 은혜를 주십니다. 그래서 고쳐집니다. 세상을 고치기 위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자기 자신이 망가진 것을 좋아합니다. 그럼 희망이 없습니다. 자기 자신이 망가진 것을 좋아하면 망가진 세상에서 사는 것이 편안합니다. 싫어합니다. 어떤 사람이 그렇습니까? 자기 깨어짐이 없는 사람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잘못된 옛 자아가 자신의 삶을 죄로 이끌어갑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밖에 아무것도 아닌데 그런데도 자기 자신의 의를 의지합니다. 그렇게 의로운 그리스도 예수의 공로에 의해서 구원함을 받았으면 이제는 그 은혜가 이 세상 무엇보다도 소중한 것이며 자신의 생명을 천하보다도 귀하게 여겨주셔서 자기를 죄에서 구원해주신 하나님을 위해서 헌신하며 살아야 마땅한데 안 삽니다. 그리고 그렇게 헌신하며 살지 않는 것에 대해서 후회하거나 아파하지 않습니다. 이기심으로 똘똘 뭉쳐져서 남이야 고난을 당하든 말든,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에서 아파하시든 말든, 주님을 위해서 그 선한 목적을 위해서 미덕의 길을 걸어가며 수많은 신앙의 동지들이 고난을 당하고 피를 흘리든 말든, 자기는 숨어서 육신의 영달을 도모하고 안락하고 편안한 삶 중에 단 하나도 양보하지 않고 살아가려고 합니다. 사악한 삶입니다. 교회에 나와도 나쁜 사람입니다. 십일조를 내도 나쁜 사람입니다. 근본적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온전한 헌신입니다.
누가 그 죄에서 구원하셨습니까? 자기가 그렇게 사랑한 자기가 자기를 위해 십자가에 매달렸습니까? 그렇게 사랑한 세상이 자기를 위해서 고난을 당했습니까?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불러내었고 그리고 내가 이 땅을 너희에게 주어 누리게 하였으니 이제는 너희는 나를 위해 헌신하고 나와 함께 이 망가진 세상을 고치고 이 메마른 세상을 위해 흘러가자, 주님이 부르시는 게 부당합니까? 그러면 어떻게 은혜를 좀 받아서 편안한 삶을 살까? 그래서 새마을 성공 수기 같은 간증이라도 한번 써볼까. 그래서 예수 믿고 나서 하나님 앞에 조금 어떻게 알랑알랑 하고 아부했더니 하나님이 눈이 머셨는지 마구 복을 부어주셔서 그래서 부자가 되고 배터지게 살았더라. 그런 간증이나 남기려고 하는 심보나 가지고 있는 사람들, 절대로 예수의 생명에 가까이 접근할 수 없습니다. 나쁜 신앙생활입니다.
내 평생에 힘쓸 그 큰 의무는 주 예수의 덕을 늘 기리다가
숨질 때에라도 내 할 말씀이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주님 앞에 나아갈 때 내가 이러 저러한 하나님의 요구를 다 들어드렸으니까 나는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질 만하다. 그리고 나처럼 불철주야 예수 위해 산 사람이 없으니 주님이 나를 특별히 받아주실 것이야. 이렇게 생각하는 이런 자기 의를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은 주님 앞에 나아갈 때는 자기가 아무 것도 아닌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주님이 나의 사랑하는 아들아, 부르실 때 하나님 사실은 그렇게 주님이 저를 불러주신 것을 저는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사랑스러운 아들로서 살 때보다도 주님을 거슬리는 패역한 죄인으로 살던 때가 더 많았습니다. 그래서 입으로는 주님을 섬긴다고 하였지만 살아온 모든 길이 탐욕과 죄악에 섞였고 나 자신은 깨트려지지 않았고 그래서 내 마음은 하나님 앞에 바쳐지지 못한 적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아파하는 것입니다. 그게 자기 깨어짐입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더러운 죄인을 아들로 불러주시고 이렇게 쓸모없는 죄인 하나님을 위해 아무 것도 섬긴 것이 없는 불결한 인간을 이렇게 사랑해주시니까 내가 어떻게 이 좋은 하나님의 사랑을 배신하랴. 하나님이 내게 주신 사명이 무엇일까? 내가 그것을 이루면서 살아야지, 하나님이 내게 살라고 하시는 계명이 무엇일까? 그것이라도 이루어드리면서 살아야지. 이렇게 살아가는 삶이 자기 의를 자랑하는 삶이 아닙니까? 하나님이 정말 원하시는 삶입니다. 이렇게 살면서 의로운 삶의 열매를 맺는 사람들은 그런 열매가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과는 비교 할 수 없을 정도로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습니다. 그분의 사랑을 많이 받습니다. 어쩌면 이렇게 예수 믿는 사람들이 냉담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어쩌면 이렇게 예수 믿는 사람들이 이기적일 수가 있겠습니까? 물질에는 눈이 멀고 자기 행복에 눈이 멀어서 자기를 위해서 생명 버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죽으심의 의미를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인 것 같습니다. 왜 그렇게 살까요? 그렇게 살아서 이 세상에서 그런 사람들이 얼마나 더 행복해질 수 있을까요? 우리 모두 그런 사람들을 동정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든 주님의 자녀들이 이렇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주님을 기쁘시게 하며 순종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삶을 가만히 돌아보십시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신자가 되어서 마지못해 해야 되는 의무들은 우리들이 어느 정도는 갖고 있습니다. 헌신적이라고까지 말할 수없지만 어느 정도 합니다. 주일이면 교회에 나오고 십일조 생활을 하고 그나마도 이기심 때문에 안 하는 사람이 있지만 나쁜 신자들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십일조 생활을 하고 물질도 하나님 앞에 드립니다. 그런 삶을 삽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것을 충분하다고 그러십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정말 원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했더니 자기를 먼저 깨트려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시편 51편에서 뭐라고 그랬습니까? 수소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고 수없이 자기의 죄를 정결케 하기 위해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러고 나서 내린 결론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는 바로 나 자신을 드리는 것이구나. 그래서 나 자신이 가장 훌륭하게 뭉쳐있는 것이 내 마음 안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구나. 하나님이 이것을 드리기를 원하시는구나. 그러면서 깊이 깨달은 것입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덮으면서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한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 이제껏 까지 형식적인 신앙생활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렸다고 칩시다. 그것은 이미 흠 없는 제물이 아니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하여튼 드렸다고 칩시다. 그러나 지금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그저 목 부러지고 다리상한 절름발이 양 한 마리 죽여서 드리는 그런 종류의 헌신을 원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애들아 너희의 마음이 갈아지어라. 고운 가루로 낟알이 갈아진 것처럼 그렇게 갈아지어라. 죄에 대한 사랑에 대하여 갈아지고 그리고 너 자신을 하나님 앞에 의롭다고 보는 그 모든 자기 의에 대해서 갈아지어라.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는 아무 것도 필요한 것이 없으며 그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으신 고난의 십자가 이외에 어떤 것도 나를 하나님 앞에 세워질 수가 없다고 생각하여라. 주님이 원하시는 삶을 향한 주님의 음성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자기만을 사랑하고 죄에 대해서 깨트려지지도 않고 자기의 의에 대해서도 부서지지 않고 하나님을 향한 가슴 저미는 헌신도 없이 자기만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의 삶이 더러운 삶입니다. 너무 비참한 삶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원하시지 않으십니다. 정말 하나님이 바라시는 삶은 그런 삶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진정으로 바라시는 삶, 주님이 정말로 원하시는 삶은 그런 삶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은 아무 것도 모르면서 어두움 속에서 그냥 살아도 우리는 알았습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이 세상에 오셨고 어떻게 자기의 힘으로는 하나님께 찾아갈 수 없는 더러운 우리 같은 죄인을 위해 찾아오시고 구원해주셨는지 깨달았습니다.
이제는 그 예수님이 일생을 사시면서 자기를 헌신하신 그것이 바로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어떻게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야 할지를 보여주는 훌륭한 모본이 됩니다. 그분이이 세상에 오셔서 이 세상을 많이 사랑하셨지만 그 사랑하신 사랑의 방식이 오늘날 우리가 세상을 사랑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그분은 세상을 사랑하셨지만 자기가 유익을 누리고 만족을 누린 대상으로서의 세상이라고 보고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도와주어야 할 세상이라고 보고 세상을 사랑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죄인들도 그 세상 안에 있었기 때문에 사랑했습니다. 가난한 자들도 사랑하시고 병든 자들도 사랑하시고 창녀와 세리들까지 끌어안으셨습니다. 그분은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고 심지어는 배가 고프셔서 무화과나무를 보시며 먹을 것이 있을까 하고 구하셨던 적도 있는 분이셨습니다. 사마리아에서 죄 많은 여인에게 한모금의 물을 받아 마시고자 하셨던 적도 있는 그런 가난한자의 삶을 사신 분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분의 일생은 영혼들을 끌어안고 강물처럼 흘러가는 인생이었습니다. 그분이 많은 재산도 없고 그리고 훌륭한 이 세상에 학부를 가지신 적도 없지만 그분이 지나가시는 곳마다 생명은 물 되어 사람들의 가슴에 흘렀고 죄인들은 그 물을 먹고 용서를 경험하고 병든 자들은 나았고 가난한 자들은 주님에 의해서 섬김을 받으며 배부르고 그리고 목마름을 면했습니다. 진리에 목마른 사람들은 그분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그 수많은 은혜의 말씀을 먹으면서 소생의 은혜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게 우리가 살아야 할 삶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 모두 주셨고 생명까지도 우리를 위해 다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도 그런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이 깊이 깨트려져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 드릴 수 있는 최고의 아름다운 제사입니다. 미래의 내 인생은 어떻게 될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살지 않으면 죽을 것입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주님께 맡기십시오. 그러고 자신을 깊이 깨트려 주님의 손에 맡기면서 어떻게 하든지,
이 생명도 달라시면 십자가에 놓겠으니
허울뿐인 세상 속에 참 빛을 심게 하시고
허울뿐인 세상 속에 밀알로 남게 하소서
그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가진 재물이 없고 높은 지위가 없어도 우리의 인생을 마치는 그 날에 너는 정말 이 세상에서 나를 섬기며 살았구나. 하늘위에서 너를 내려다보며 네가 이 세상에 있는 것이 그렇게 아름다웠고 그리고 네가 흘러간 삶의 발자취마다 그 생명의 물을 먹고 사랑하는 수많은 영혼들을 보면서 내가 즐거워했노라. 바로 창조주 하나님이 그렇게 우리를 인정해주셔야지 만 이 땅에 먹고 마시고 숨쉬는 우리의 삶이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 기여하며 살기 위해서 우리는 깊이 깨트려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그 말씀의 빛으로 성령의 은혜로 죄에 대한 자각으로 깊이 깨트려져서 그 목적을 따라 살지 않았던 자기를 엄중하게 처벌하고 그리고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아야 새 사람이 다시 살아서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자기 깨어짐의 신자들이 될 때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주님께 기쁨이 될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4. 은혜 부음과 헌신
“또 그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여호와께 드릴 화제는 이러하니 일년 되고 흠 없는 수양을 매일둘씩 상번제로 드리되 한 어린양은 아침에 드리고 한 어린양은 해질 때 드릴 것이요 또 고운 가루 에바 십 분지 일에 빻아낸 기름 힌 사분지 일을 섞어서 소제로 드릴 것이니”(민28:3~5)
우리가 번제는 하루만 받고 그 다음에 화제 한번만 받고 그리고 소제를 지난 이틀 동안에 걸쳐서 살펴보았습니다. 소제에 드려지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오늘 성경 본문에 의하면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하나님 앞에 바치는 고운 가루, 그리고 오늘 살펴보게 될 기름 이렇게 됩니다. 그래서 고운가루는 곡식 낟알을 빻거나 갈아서 만든 아주 가느다란 분말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는 헌제자의 내면이 어떠해야 하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헌제자의 내면의 세계가 하나님 앞에 깊이 깨트려져서 고운 가루처럼 갈아졌을 때 그가 드리는 헌신의 화제가 하나님 앞에 향기로운 제사가 된다. 이 말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언제나 헌제자와 그 헌제, 헌제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제사를 올린다는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언제나 제사를 드리는 사람의 내면의 세계와 그 사람이 드리는 제사 사이에 일치가 있기를 원하십니다. 그 일치가 나쁜 일치면 당연히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고 그 일치가 아주 좋은 일치일 때 즉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최고의 정성을 들여서 최선의 것으로 하나님께 경배할 때 하나님이 헌제자도 받으시고 그가 드리는 제사도 받으시는 분이신데 그 제사를 통해서 은혜의 교통과 생명을 함께 누리고 그래서 세상을 이기며 살아갈 수 있는 은혜의 힘을 공급받는다는 것이 이 제사제도입니다. 또 죄를 용서받기도 하고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그 깨트려지는 분말이 결국은 번제가 하나님 앞에 자기를 다 태워드리는 헌신을 의미한다면 이 소제는 자기 깨어짐을 의미하는데 자기 깨어짐은 다시 둘로 나누게 되는데 하나는 죄에 대한 사랑에 관해 깨트려지는 것이고, 또 하나는 자기 의에 대해 깨트려지는 것인데 이 두 가지를 각각 이틀 저녁과 삼일 저녁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제 소제, 세 번째로 오늘 마지막 시간입니다만 이렇게 곱게 갈아낸 분말, 가루가 약 2.3리터 정도 되는 그런 가루였습니다. 그 위에 하나님께서는 빻아낸 기름을 부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힌 사분지 일을 부으라고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0.96리터쯤 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 기름을 그 가루 위에 붓고 거의 반죽 수준이 됩니다. 그렇게 붓고 아마도 그렇게 기름을 섞은 가루를 채에 쳐서 내려서 고운 가루로 만든 것 같습니다.
그렇게 고운 가루를 그 번제 위에 뿌려서 태워서 하나님 앞에 드리는데 그런데 이제 이 번제에서 쓰여 지는 기름이 무슨 기름인가 하면 결국 기름이라고 하면 동물성 기름과 식물성 기름 둘 밖에 없는데 동물들의 기름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먹거나 가정에서 사용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께만 바쳐지게 되어 있었고 만약에 그 기름을 자신들이 사용하거나 먹으면 그 백성 중에 끊어지리라고 하는 아주 중대한 하나님의 징벌이 있었습니다. 왜 그러셨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제 생각에는 섭생학적으로 볼 때 그 동물의 기름을 먹는 것이 인체에 좋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렇게 금하셨고 또 동물의 그 기름이 하나님 앞에 태워서 드려질 때 사실은 그 동물의 몸에 모든 부분보다도 가장 향기로운 냄새가 많이 나는 부분이었습니다. 번제 자체가 하나님이 그 향기를 흠향하시기 위한 제사였기 때문에 어째든 하나님이 그 기름을 당신에게만 다 태워서 드리도록 제사장도 먹을 수 없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제사의 규례를 정해놓으셨습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여기에 붓는 기름은 동물성 기름이 아니라 식물성 기름입니다.
그런데 오늘 여기는 무슨 기름이라고는 말하지 않고 그냥 빻아낸 기름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 빻아낸 기름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감람유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올리브 열매를 통해서 낸 그 기름을 사용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감람나무는 성경에서 매우 신령하고 축복된 의미가 있는 나무로 묘사가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 하는 나무로 묘사가 됩니다. 노아의 홍수가 났을 때 그 물이 말랐는지를 재어보려고 할 때 두 번째 날아갔던 새가 감람나무 잎을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시편에 보면 언약성도의 집안에 사랑스러운 자녀들을 감람나무에 비교했습니다. 그리고 또 신약성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감람나무에 비교했습니다. 어느 곳에서도 이 감람나무가 부정적으로 사용되지 않고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받는 사람들, 혹은 하나님이 특별히 선택하신 메시야를 가리키는 비유로 사용된 것입니다.
이 올리브 열매는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아주 흔하고 많이 볼 수 있는 열매였습니다. 그 열매의 기름은 아주 신선한 것으로 여겨져서 백성들이 먹고 바르기도 하였지만 특별히 이 기름은 성소의 불을 밝히는 등잔으로도 사용이 되어지고 오늘 소제를 드리는데도 짜서 드리는 그런 기름으로 사용되기도 하고 왕이나 선지자나 제사장으로 그를 세울 때 그에게 임하실 성령을 상징하면서 그에게 기름 부을 때 사용하는 성유로 사용되기도 하였습니다. 바로 이 기름을 그 고운 가루위에 뿌려서 그래서 그것을 섞어서 고운 가루를 만들어서 하나님 앞에 소제로 드리라고 하나님이 분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기름이 어떤 방식으로 만들어졌는가 하는 것을 살펴보면 그 속에서 우리가 아주 놀라운 메시지를 찾아내게 됩니다. 사실은 저는 이 부분을 히브리어 성경으로 여러 번 읽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때는 모두 스치고 지나갔는데 사실 얼마 전에 다시 한번 이 민수기를 히브리 성경으로 보는 가운데 정말 무릎을 칠만한 놀라운 발견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오늘 여러분들에게 조금 나누어드리려고 합니다. 싫으면 그만두고요. 우리말의 성경으로는 아무리 봐도 알 수가 없습니다. 여기 그릇도 똑같은 단어인데도 여기에서는 이게 빻아낸 이라고 되어있고 또 레위기 28장에는 찧어낸 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찧어낸다. 빻아낸다. 뭐 비슷하겠지만 어째든 뭘 의미하는지 정확하게 개념이 다가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부분을 히브리어 성경으로 보면서 하여튼 그날 아침에 쏟아지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정말 은혜를 받았습니다. 여러분들도 은혜를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여기에 보면 빻아낸 기름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게 히브리 성경에 보면 “쎄맨 카티투” 라는 단어로 두 단어로 엮어져 나옵니다. “쎄맨”이라고 하는 것은 “기름”이라는 뜻이고 “카티투”는 분사형 비슷한 것입니다. 그래서 영어로 말하자면 비튼,beat 두들겨 맞은, 아니면 탁 하고 깨진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쎄맨 카티투를 직역하면 “깨어진 기름”이라는 뜻입니다. 좀 이상합니다. 두들겨 맞은 기름, 깨어진 기름, 그러니까 사실 기름이 두들겨 맞았다는 뜻이 아니라 그 기름을 짜는 방식이 두들겨 맞은 방식으로 기름이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일반적으로 기름을 내는 방식이 아니라는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올리브로 기름을 내는 방법은 그 올리브를 깨트려서 그 다음에 압착기에다 집어넣습니다. 프레스입니다. 여러분, 오늘날 보면 참기름을 만들 때 참깨를 볶아서 틀에다가 집어넣고 돌리면서 짭니다. 지금은 기계로 돌리지만 옛날에는 건장한 남자들이 팔뚝으로 돌렸습니다. 막 돌리면 이제 짜지면서 기름이 흘러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참깨를 가지고 가서 기름 좀 내달라고 그러면 이제 으샤, 으샤 그러면서 누르되 힘을 조금 덜 주고 그래서 기름을 담아서 간 다음에 진짜 힘을 발휘하면 한 병 더 나옵니다. 아니 실화입니다. 진짜 그렇습니다.
그러다가 또 마음이 나쁜 사람은 참깨가 비싸니까 이제 짜낸 다음에 깻묵에다가 다시 한번 콩기름을 넣고 한 번 더 눌러서 한 번 더 짜면 어째든 거기서 참기름 냄새가 섞일 것입니다. 색깔은 콩기름인데 냄새는 참기름 냄새가 납니다. 이게 전부다 다 가짜 참기름입니다. 그렇게 압착기에다 넣어서 짜는 방식이 이 올리브유를 채집하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래서 민간에서는 백성들이 모두 그렇게 눌러서 압착해낸 그 기름을 가지고 먹기고 하고 볶기도 하고 가루를 넣어서 떡도 만들고 부쳐서도 먹고 얼굴에도 바르고 그렇게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여기에서는 그런 기름이 아니라 쎄맨, 정확하게 말하면 쉐맨입니다. 쉐맨 카티투 그런 기름을 거기에다가 부어라. 이 쉐맨 카티투가 사용된 것은 기름을 제사장이나 선지자나 왕이나 이런 사람들에게 부을 때 쓴 기름은 어떤 식으로 냈는지 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 하나, 이 기름이 하나님의 성소를 밝히는 등잔용으로 사용될 때도 이 쉐맨 카티투를 사용했습니다. 쉐맨 카티투로 기름을 내는 방법은 올리브열매를 탁 하고 깨트리는 것입니다. 절구같이 이렇게 탁탁 칩니다. 그러면 이게 자연적으로 깨트려지면서 프레스 같은 것으로 꽉 누르지 않아도 탁 깨트리면 거기서 기름이 졸졸 흘러나옵니다. 그것을 모아서등잔불도 밝히고 그리고 여기에 소제에 고운 가루 위에 붓는 기름으로 사용했습니다.
그럼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채집하기가 얼마나 어려웠겠습니까? 그냥 집어넣고 빻아서 이렇게 저렇게 막 눌러서 짜서 기름이 나오면 줄줄 나오면서 거기 불순물도 좀 섞여 나오면 이렇게 받아놓았다가 채 같은 것으로 걸러서 쓰면 되는데 이것은 그게 아니라 탁 하고 깨트리면 기름이 나옵니다. 그것을 하나, 하나 다 모아야합니다. 너무 많이 깨트리면 되겠습니까, 안 되겠습니까? 기름하고 부서진 올리브 열매하고 완전히 곤죽이 되어버리니까 그것을 하나하나 채집하는 게 얼마나 어려웠겠습니까. 그러니까 그 기름은 바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릴 때 쓰거나 성소용으로만 사용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성소에서 사용되는 그 증거궤, 회막 앞에서 사용되는 그 등불의 기름은 바로 그런 쉐맨 카티투를 사용했습니다.
그럼 우린 그런 생각을 합니다. 아니 뭐 하나님의 집에서 좋은 것을 쓴다고 하니까 그것이 이해가 간다고 그러는데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이 여러모로 생각해주셨습니다. 예를 들자면 이동하는 중이기 때문에 이동식 성전을 명령해주셨습니다. 그렇게 합리적이고 이스라엘의 형편을 헤아리시는 분이 왜 그렇게 복잡하게 기름을 낸 것을 가지고 꼭 성소에 불을 밝히라고 그랬는가. 이야기하면 좀 긴데 그래도 조금은 하고 가야지. 뭔가 하면 탁 깨트려서 나온 그 기름은 그야말로 순수한 기름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집어넣고 압착기 같은 것으로 눌러서 꽉 짜면 아무래도 그 기름 속에 불순물이 섞이게 됩니다. 그러면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옛날에 시골에서 호야를 사용했습니다. 호야가 뭔지나 아십니까? 등잔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램프. 그런데 거기에다가 기름을 싸구려를 넣으면 그 호야에 유리관이 금방 시커멓게 됩니다. 그런데 비싸고 좋은 기름을 넣으면 며칠을 켜도 호롱에 투명한 것이 그대로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성소에서 불을 밝히는데 그 기름이 압착을 해서 짜낸 기름이면 불순물이 섞여 나왔을 것이고 그러면 결국은 타오를 때 두 가지 문제를 일으킵니다. 그름이 나고 그 다음에 기름이 순수해야지만 순전한 빛이 나옵니다. 거기에서 성소에서 이야기하는 그 등잔 빛은 계시의 빛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계시의 빛이 선명하게 똑바로 비추어야지 그게 뭐 좀 하나님의 말씀도 섞이고, 세상 사상도 섞이고, 자기 인생철학도 섞이고, 개똥철학도 섞여서 그래서 타기는 타도 하여튼 아쉬우니까 키기는 키는데 희미하게 보이지도 않고 뭐 좀 볼라 그래도 코 구멍이 새카매지는 그런 식의 말씀이라고 할 것 같으면 그게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들이 누리게 되는 영생을 밝혀주기에 적합한가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소에서 그렇게 쉐맨 카티투를 사용한 것입니다. 거기까지만 하겠습니다. 더 나가면 시간이 걸리니까,
다시 이리로 돌아오면 바로 그런 기름을 바로 고운 가루에다가 부어서 그것을 섞어서 기름가루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럼 여기서도 똑같은 질문인데 그게 한 힌이 0. 96리터입니다. 그러면 압착기로 내려짜면 금방 짜는 것이지만 그렇게 올리브를 깨트려서 흘러나오는 기름을 채집해서그것을 한 되를 만든다고 그러면 그게 얼마나 힘든 것입니까? 한번 제사를 드릴 때마다 한통씩 부어야 됩니다. 그렇게 힘들게 하나님께서 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이 소제는 하나님이 떡 해먹으려고 하는 제사가 아닙니다. 그럼 소제는 무엇인가 하면 가루에다 기름을 넣어서 고운 가루로 만든 것이 그것이 제사장의 손에 한 움큼 들려져서 번제 위에 뿌려져서 거기서 확 태워져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그 가루에 섞인 기름이 압착하는 방식으로 짜내서 불순물이 들어온 기름일 경우에는 뜨였을 때 그름이 나고 그 다음에 어떻든지 간에 좋지 않은 냄새가 나든지 순결한 그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만드시고 싶은 것은 그 기름과 가루가 어우러져서 그 번제 단 위에서 확 태워질 때 거기서 나오는 그 순결한 향기를 하나님이 맡고 싶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다가 압착하는 방식으로 짜내서 불순물이 들어간 그 기름을 거기에다가 뿌리면 되겠습니까? 안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기름을 매우 특별한 방식으로 짜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기름이 무엇인가? 여러분들이 삼척동자라고할지라도 이 기름이 나오면 아! 이것은 성령을 가리키는 것이구나. 라는 정도는 여러분들이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성령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자기 깨어짐이라고 하는 것, 내면의 세계가 고운 가루가 된 것처럼 철저하게 자기가 깨트려질 때 그 내면의 세계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마음이 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 자기 깨어짐이라고 하는 자체가 이미 성령에 의한 깨어짐입니다. 물론 깨어짐 중에는 성령의 은혜와 아무 상관이 없는 깨어짐도 있습니다. 조금 있다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성령님의 은혜에 의해서 깨트려진 것입니다. 깨어진 것 자체가 성령님의 간섭하심에 있어서 깨트려지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간섭하시지 않으셨는데 사람이 자기의 죄를 깨달으면서 내가 왜 이렇게 죄인일까? 나는 죄에 대한 사랑이 너무나 깊어. 어떻게 내가 이럴 수 있을까? 예수님이 내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셨는데 내가 바로 예수님을 죽게 한 그 죄를 사랑하다니 성령님의 역사 없이 그렇게 고백할 수 있습니까?
그러니까 이미 자기 깨어짐 자체가 이미 성령님의 의한 역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자기 깨어짐이 성령님의 역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제 이 고운 가루위에 소제의 기름을 붓도록 명령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깨어짐 자체가 성령의 은혜지만 그 위에 하나님의 성령의 은혜에 지속적인 부으심이 있을 때 그 산산이 자잘하게 부서진 그 죄에 대한 사랑과 자기 의에 대한 자부심이 성령의 은혜에 의해서 섞여서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께서 원하시지 않았던 마음의 질서들이 무너지고 하나님이 원하셨던 새로운 마음의 질서들이 이 속에서 빚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께 자기를 다 태워드리는 그 번제에 부합하는 헌제자의 내면의세계가 형성이 되어서 제사에 어울리는 내면의 세계가 갖추어지게 되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은 헌제와 헌제자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게 됩니다.
그런데 이제 이렇게 기름이 성령을 의미하는 것인데 그런데 오늘 이 기름을 압착하는 방식으로 짜낸 기름이 아니라 순결한 기름으로 깨트려서 흘러나온 그 기름을 채집한 기름을 이 소제에 사용했다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점들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그게 무엇인가 하면 이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경험하는 영적인 많은 역사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모두 다 순결하신 성령님으로 말미암은 영적인 작용입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들이 경험하는 영적인 현상이나 우리 안에 혹은 우리 밖에 일어나는 많은 영적인 작용들 중에는 진짜 순수하게 성령으로 말미암은 작용도 있지만 사실은 성령으로 말미암은 작용이 아닌데도 그것이 영적인 작용인 것처럼 착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본성이나 정신에 속한 작용인데도 그것이 영의 작용인 것처럼 착각하고 그것을 믿고 혹은 그것을 자랑하고 혹은 그것을 신뢰합니다. 그러니까 이것들은 잘못된 것입니다.
또 심한 경우에는 영의 역사이기는 한데 사실 그것이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 악한 영의 역사인줄 모르고 그것이 마치 성령의 역사인 것처럼 오해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적을 앞세워서 자신들에게 성령이 자신들에게만 함께 하는 것처럼 선전하는 많은 이단들에 빠진 것이 바로 그런 영의 역사와 그런 영의 작용에 의해서 현옥되었습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영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순수하게 영적인 것, 즉 쉐맨 카티투의 기름으로 비유될 수 있는 순수한 성령의 역사가 아니기 때문에 결국은 그들이 깊은 자기 깨어짐 속에서 은혜에 의해 섞여 그 내면의 세계가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질 만한 아름다운 헌제자의 내면의 세계가 못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영의 역사, 자기 안에 일어나는 모든 영적인 작용을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다 받아들여서는 안 되고 그것이 참으로 성령인지를 시험하고 그리고 그렇게 해서 옳다고 판단된 작용들만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순수함을 가져야 합니다.
제가 여러분들을 훈련시키는 것에 이렇게 말하는 것에 대해서 아주 경고합니다. 주님이 오늘 제게 말씀하시기를, 주님께서 제게 말씀하셨는데, 이런 말을 함부로 사용하지 말라고 제가 여러분들에게 누차 말합니다. 물론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셔서 주님을 믿는 여러분들,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고 설교를 듣는 여러분들, 특별히 하나님 앞에 마음을 드려 기도하는 여러분들에게 어떤 당신의 뜻을 전달해주실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전달해주실 때 그것은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지만 하나님이 내게 하신 말씀이 될 수 있고 설교자가 외친 설교이지만 설교자는 사라지고 오직 그 설교자를 도구로 해서 하나님이 내 영혼에 직접 말씀하신 것일 수 있습니다.
때로는 환경을 이용해서 하나님이 이런 메시지를 우리에게 보내시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경솔하게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시기를 주님이 오늘 아침에 내게 말씀하셨는데 이런 표현들을 함부로 쓰는 것은 이렇게 옳지 않고 분별되지 않은 영적인 모든 작용들을 가장하거나 혹은 영적인 작용들이 아닌 단순한 정신적인 작용들을 영적인 작용으로 해석해서 자신의 생각을 성령님이 들려주시는 음성으로 둔갑시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때 그런 신앙의 모습을 보는 어린 신자들이 넘어지는 것은 매우 심각합니다. 왜냐하면 열등감을 느끼게 됩니다. 왜 저 사람에게는 저렇게 하나님이 말씀하시는데 나에게는 말씀하시지 않으실까? 때로는 종교적인 허영을 만들어내어서 외식에 빠지게 합니다. 나도 그러면 오늘 성경을 읽다가 뭘 깨달았는데 그것을 내가 성경을 읽다가 생각이 났는데 라고 말하는데 저 사람은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하니까 둘이 서로 권위에 있어서 게임이 안 됩니다. 나도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이렇게 해야지만 되겠다. 이런 생각을 하게끔 만듭니다. 이런 모든 것들은 옳지 않은 것입니다.
여러분, 잘 보십시오. 성령의 은혜를 아무리 많이 경험했다고 하더라도 순결하지 않은 영의 역사를 경험하는 곳에서는 철저한 자기 깨어짐에서 오는 복음의 자유가 없습니다. 그것을 여러분은 기억을 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이적을 보고 놀랍게 신비한 일,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눈을 감은 사람이 눈을 뜨는 놀라운 역사를 보게 되었다고 칩시다. 그게 어쨌다는 것입니까? 그게 자기의 영혼의 자유를 가져다줍니까? 두려움을 느낄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 쉐맨 카티투라는 이 단어, 깨트려서 만들어낸 감람유라고 하는 이 단어는 따라서 자기 깨어짐이 있는 성도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은혜가 순수한 성령의 역사라고 하는 것을 밝힙니다. 가장 신뢰할 수 있을만한 성령의 역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지성을 깨우치며 우리 가운데 역사하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종교 개혁자를 비롯한 많은 신앙의 사람들이 소위 이야기하는 꿈베르보의 신앙을 가졌습니다. 라틴어로 성령님이 역사하시되 꿈베르보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역사하시는 분이 성령님이시며 그 이외 성령의 역사를 신뢰할 수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성령이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에 순수한 성령의 은혜의 역사 아래서 신앙생활을 해나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이런 점에 있어서 깊이 이해하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말 성령의 은혜다. 이 성령의 은혜의 부으심이 없으면 자기 깨어짐도 쓸모가 없는 것입니다. 그 자기 깨어짐이 유지되고 그 자기 깨어짐이 계속해서 우리의 거룩의 영향을 미칠 수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에 보면 이런 고운 가루와 이 기름을 섞어서 라고 말했습니다. 히브리말로 “베롤라” 이것은 함께 섞이도록 계속 작용을 하고 휘젓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섞어서 하나님 앞에 소제물로 드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깊이 깨트려지고 부서지는 것도 성령의 은혜이지만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지 아니하고 그 위에 더욱더 충만한 성령의 은혜의 순수한 기름이 부어져서 자잘하게 갈아진 자기 깨어짐의 상태가 함께 섞어져서 그렇게 해서 자기가 하나님 앞에 깨트려진 사람이 구석구석, 갈피갈피에 예전에는 죄가 있었는데 이번에는 갈피갈피에 성령의 은혜가 스며들어서 그래서 그렇게 섞여진 상태의 사람의 헌신이 하나님 앞에 받음직한 소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아주 철저하게 갈아서 가루가 된 그 위에 기름을 부으라고 명령하셨을까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낟알 위에 기름을 부어버린다면 겉에는 기름이 묻고 속에는 기름이 스며들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 본질 자체가 기름이 섞어서 변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신자가 성령의 은혜를 경험하고 깨트려졌다고 할지라도 그렇게 깨트려지고 그리고 계속해서 은혜생활을 하지 않고 뒤로 물러가면 그게 변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결국은 개가 토했던 곳으로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던 웅덩이로 다시 돌아가는 것 같은 그런 처지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철저히 깨어져 가루가 된 그곳에 기름을 부으니까 그 기름이 갈피갈피 속에 모두 스며드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자신의 갈피갈피 속에 죄가 그렇게 스며들어서 인간의 본질을 죄 된 본질로 바꾸어놓았습니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죄가 철저히 인간의 본성에 스며들었던 것처럼 이번에는 성령의 은혜가 철저하게 스며들어야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철저하게 깨트려진 그 위에 이 순결하게 짜낸 감람유를 부어서 그것들이 깊이 스며들어서 이 가루의 본질을 변화시키는 그런 작용을 하기를 하나님께서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그렇게 쳐서 내린 고운 가루가 뿌려질 때 확 하고 타지 않겠습니까? 얼마나 잘 타겠습니까? 고운 가루도 잘 타는데 거기에 기름이 섞였으니 뿌릴 때 확 하고 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름 하나 나지 않고 순전하게 타오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름다운 향내만 하나님께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이 말씀의 비밀입니다.
그래서 회개는 죄에 대해서 깨트려지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서 살았다고 하고 하나님을 위해서 봉사 좀 한다고 하고 그랬다고 해서 교만했었는데 주님을 만나고 나서 산산이 부서지게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 부서지는 것이 대단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왜 그것이 진짜로 대단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부서진 그 위에 계속 성령의 은혜가 부어져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지만 그 사람이 진짜 하나님 앞에 본질적으로 새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럼 이제 여러분이 이해를 하였을 것입니다. 내가 그렇게 깨트려지고 회개도 경험하고 대굴대굴 구르기도 했는데 왜 그렇게 안 변하나. 그것은 깨어진 적이 없어서 안 변한 것이 아니라 그 위에 지속적으로 부어지는 성령의 기름이 없기 때문에 결국은 옛 사람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자기 깨어짐과 은혜 부으심과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우선 여러분, 자기 깨어짐이 우리가 여태까지 이야기한 자기 깨어짐은 성령님이 역사하셔서 우리를 죄에 대한 사랑에 관해 그리고 자기가 하나님 앞에 내세울 것이 있다고 믿는 자기 의에 관해서 깨트려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 자기 깨어짐이 신자에게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불신자에게도 이런 깨어짐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자기 깨어짐을 편의상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본성적 깨어짐이고, 또 하나는 복음적 깨어짐입니다. 본성적 깨어짐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이제 여러분들이 이만큼 인생을 사셨으니까 이제 제가 이야기를 하면 여러분들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받아들일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신앙생활을 해서 하나님께 깨트려진 그런 경험 말고 불신자인 시절을 한번 회상을 해보십시오. 하나밖에 없는 자식이라고 진짜 고명딸로 태어나서 엄마 아빠의 사랑을 듬뿍 받으면서 저 하고 싶은 대로 살았는데 좀 과하게 사랑을 받는 가운데 제대로 교육을 못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공부를 못해서 학교를 못 나왔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부모가 인생을 사는 참다운 태도가 무엇인지를 올바로 가르쳐줄 기회가 없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저 잘났다고 펄펄 뛰고 그리고 사랑받겠다고 하니까 그래서 애를 똑바로 가르쳐야지 되겠다고 마음을 가졌을 때는 너무나 많이 휘었고 그 휜 것을 똑바로 잡으려니까 엄청난 충격이 가해져야지 되었는데 부모로서는 사랑스러운 딸에게 그렇게 할 수도 없고 망나니처럼 막 자란 딸이 그렇게 부모가 충격을 가할 때 관계가 깨어지지 않으면서도 그 충격을 받아들이고 올바른 사람이 될 리가 없습니다. 그랬다면 어려서 교육을 잘 받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자식들 교육을 잘 시켜야 됩니다. 정말 잘 시켜야지 됩니다. 낳는 것만 문제가 아니라 기르는 것이 문제입니다. 돈을 많이 벌고 좋은 학교에 가서 큰 사업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람이 태도가 되먹은 올바른 사람이 되어야지, 그러고 나서 세상에서 마음을 가지면 안 되는 것이 없고 진짜 자기 부모도 자기 발톱에 때만도 안 여기면서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한번도 자신의 꿈이 좌절되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다가 좋은 학교를 나와서 좋은 대학을 가고 그리고 돈도 있겠다. 강남에 가서 대패를 밀고 정으로 쪼고 망치로 깨서 완전히 원판을 복구해버렸습니다. 그래서 새판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니 무엇인들 지겠습니까? 배도 뜯어내고 기름을 다 뽑아내고 완전히 신세대로 맞추어서 완전히 인공미인까지 만들었습니다. 그러니 집안이 번듯하겠다. 돈도 있겠다. 그 다음에 학교도 좋은 학교를 나왔겠다. 거기다 기도 꺾여본 적이 없이 자신감에 넘치겠다. 거기에다가 또 얼굴까지 조각을 했는지 성형을 했는지 누가 압니까? 그렇게 해서 완전히 새로운 상품으로 등장했습니다. 그러니 겉모습을 완전히 했으니 외부적인 조건이 너무나 좋습니다. 그러니까 더군다나 부자 집에 외동딸이고 부모님은 서금서금하게 늙었고 좀 어떻게 잘 스토리만 돌아가면 한몫 챙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건달들이 얼마나 모이겠습니까? 꼭 건달이 아니더라도 어떻든지 간에 잘 생기고 그만그만한 친구들이 모였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자매가 누군가를 좋아하게 됩니다. 좋아하게 될 때 아무리 자기가 인공포장을 해서 새 미인이 되었다고 하지만 속이 어디로 갑니까? 결국은 끼리끼리 택하는 것입니다. 자기 수준에 속한 사람을 택합니다. 얼굴 흰죽사발 개가 할타먹은 것처럼 멀끔하고 그리고 또 학교도 웬만한 데 나오고 그리고 이제 신혼살림이라고 강남에 아프트 하나 얻어서 시작합니다. 부족한 것이 하나도 없이 부모가 다 해주었습니다. 살겠습니까? 되겠습니까?
탤런트를 하다가 인기를 한 몸에 모으면서 잘 나가던 탤런트가 나중에 예수를 믿고 이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데 그 사람이 하는 이야기가 자기가 잘 나가던 때 자기랑 결혼하겠다는 사람이 너무나 많았는데 그 중에 한 사람과 결혼을 했는데 마지막 고백이 재미있는데 망가진 사람이 둘이 만났는데 될 리가 있겠는가 하고, 야 진짜 정곡을 찌르는 말이었습니다. 다 망가졌습니다. 사회적으로는 부자 집 딸, 그다음에는 잘 나가는 연예인, 그러니 둘이 뜨겁게 사랑하고 그러면 안 될 것이 없는데 망가진 사람 둘이 만났는데 새 삶이 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둘이 부딪히는 것입니다. 매일 싸우고 개판입니다.
또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시집가기 전에 직장에 다녔다고 칩시다. 직장에 다녔는데 누가 그렇게 해줍니까? 요즘 책에 나오는데 ‘공주 키우는 회사 없다.’ 그런 책이 나왔습니다. 우리직원들 하나씩 다 사서 읽어보십시오. 공주를 키우는 교회도 없다. 그러면서 자기 집에서 받았던 대우를 받으려고 하는데 직장생활에서 그게 가당키나 합니까? 웃긴다고 그러지. 자기가 회사를 차려서 사장이나 하면 모를까 웃긴다. 그러지. 사람 취급도 안 해줍니다. 그렇게 부딪히면서 괴로움을 당합니다. 가정에서 잘 교육을 받아서 빚어지지 않으면 거기서 그렇게 엉터리가 됩니다. 막 괴로운 것입니다. 그러다 인생에 대해서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게 장난이 아니네. 이 사람들이 왜 그렇게 날 싫어하는 것이야. 미모도 괜찮고 돈도 있는데 이것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닌가보다. 그래서 한달에 돈 백만 원 주는 것 관둬라. 때려치웠습니다. 그런데 시집을 갔는데 때려 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때려치웠습니다.
그러고 두 번째로 또 갔습니다. 남들은 한번 가는데 많이 하는 게 좋아서 또 갔다고 칩시다. 그런데 두 번째 만났는데도 또 그렇습니다. 이런 가운데 사람이 자꾸 환경에 부딪히면서 그때서야 비로소 똑같은 실패를 두 번 세 번 되풀이하고 공격을 당하고 사람들이 자기 때문에 불행하고 괴로워하는 것을 보면서 그때서야 비로소 내가 잘못된 것이구나. 그것을 부모가 가르쳐줄 때는 몰랐는데, 부모가 똑바로 안 가르쳐주고 말이지, 그때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고난을 많이 겪는 가운데 그렇게 날아갈 것같이 예쁘던 20대 중반의 꽃다운 처녀가 35세쯤 되었습니다. 그 다음에 애도 낳아서 지겹게 자기처럼 속 썩이는 자식을 둘이나 낳아서 달달 들볶여서 괴롭힘을 당하고 시집에서 시달리고 친정에서 시달리고 그동안에 어머니 아파서 돌아가시고 또 시동생까지 올라와서 지지고 볶고 하면서 아무튼 연단을 많이 받습니다. 그럼 어떻게 됩니까? 사람이 다른 사람이 됩니다. 물론 못 살겠다고 하면서 도망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뭐 그런 사람은 특별한 사람이고 대부분은 그런 가운데 얼굴에 독기가 빠지고 자존심도 많이 꺾어지고 그리고 이제 비로소 세상 물정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자기 깨어짐을 통해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가리켜서 본성적 자기 깨어짐이라고 그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의 나이는 거저먹는 것이 아닙니다. 산전수전 화생방전까지 다 겪고 나면 그 다음에 뭔가 사람이 달라집니다. 인생은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니라고 달라집니다. 그런데 이런 깨어짐은 그로 하여금 사회적인 세련미를 갖춘 사람으로 만들어갑니다. 그래서 인생의 고난의 골짜기를 많이 지나면서 이 생로병사와 희로애락을 겪으면서 살아온 사람들은 뭐가 달라도 다릅니다. 그게 바로 본성적인 자기 깨어짐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이 본성적인 자기 깨어짐은 항상 부작용이 뒤따릅니다. 예전에는 기고만장해서 펄펄 뛰고 자기 부모를 믿고 모든지 난리를 치고 그렇게 댕댕거리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자기보다도 더 강력한 남편을 만난 것입니다. 부모에게도 맞아본 적이 없는데 막 몇 달에 한번씩 날아와서 정신을 못 차리게 만듭니다. 자식을 낳았는데 이거는 진짜 부모면 뿔도 갖다버렸을 텐데 자기 새끼니까 갖다버릴 수도 없는데 이게 자기를 막 괴롭히고 자기를 연단시키는데 이것은 완전히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이렇게 시달림을 당하고 시어머님을 만났는데 시어머님은 자기도 까다롭다고 그랬는데 자기보고 덜 떨어졌다고 며칠에 한번씩 바가지로 욕을 합니다. 이 속에서 달달 볶이면서 결국은 자기 부족을 깨닫습니다. 본성적 깨어짐이 사회적 세련미를 가져다줍니다. 그런 가운데 이 속에서 일그러집니다. 남편이 밉고 시어머님의 시자도 싫은 것입니다. 진짜 시집을 향해서는 냉수 한잔 마시고 싶은 생각도 없습니다. 지긋지긋합니다. 그러면서 이 속에서 세련되어가기는 하는데 부작용이 생겨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냥 기가 센 사람이 꺾이고 그냥 막 남편이 때리고 시어머님이 지지누르고 이렇게 압박을 하면서 겨우 사회적 세련미를 갖춘 사람으로 만들었는데 속은 완전히 곪았습니다. 그래서 기가 펄펄 할 때는 정상이었는데 이제 남들이 볼 때 그래도 좀 철이 든 사람이 되었는데 이제는 정신병 치료를 받으러 다닙니다. 우울증, 이게 결국은 본성적 깨어짐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아이들을 야단칠 때도 인격을 모독하면서 막 그냥 충격을 가하면 애들이 변할 것 같지만 어림도 없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짐승도 그렇게 다루면 안 됩니다. 사람인데 그렇게 다루면 되겠습니까? 그럼 안 됩니다. 그래서 사랑하면서 이렇게 다루어야 합니다. 본성적 깨어짐이 그러니까 필요하기는 하지만 그것을 가지고는 안 됩니다.
그럼 우리가 얘기하는 깨어짐은 무엇인가? 복음적 깨어짐입니다. 그럼 복음적 깨어짐은 무엇인가? 이 복음적 깨어짐이 본성적 깨어짐하고 틀린 것은 처음부터 성령의 작용으로 시작됩니다. 그래서 환경이나 사람에 의한 압박을 하나님이 사용하시기도 하지만 그러나 근본적으로 그것을 움직이는 것은 성령의 작용입니다. 성령의 작용을 통해서 이제 우리 자신이 깨트려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성령님의 조명은 자기 자신과 죄에 대한 생각을 바꾸어놓고 그렇게 해서 죄에 대한 사랑의 비참함과 그리고 자기 의에 대한 신뢰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에 대한 경험을 상실한 것을 애통해하면서 자기의 죄와 교만을 회개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복음적 깨어짐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본성적 깨어짐이든, 복음적 깨어짐이든지 모두 인간의 본성에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기고만장하고 사람을 무시하고 제 멋대로 살았던 여자애가 어떻든 이제 다른 사람을 보며 눈치도 좀 보고 세상 이치도 생각하면서 대들어서 대판거리고 싸우고 싶은데도 웃고 인사하고 이럴 수 있을 정도로 삶의 태도가 바뀌었다고 하는 것은 이미 이 사람의 본성에 상당한 힘이 가해지고 영향이 미쳤다고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그냥 강한 어떤 힘에 의해서 영향이 미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자기 자신이 깨트렸다기보다는 일그러진 것입니다. 어떻든 자기 자신이 본성적으로 압박을 가해서 깨트려졌는데 아까 말씀드렸듯이 후유증을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복음적 깨어짐은 처음서부터 그런 힘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서 깨트려진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어느 한순간에 계속 자기 좋은 대로 살다가 너무 곤고하고 죽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오셔서 네가 나를 떠나서 멀리 나갔는데 네가 행복할 수 있겠는가. 내게로 오라. 내가 아직도 널 사랑한다. 그때 깊이 깨트려지는 것입니다. 사랑에 의해서 깨트려집니다. 사랑에 의해서 녹아내립니다. 그렇게 깨어짐도 결국은 그 인간 본성에 관계된 깨어짐입니다. 그렇게 깨어지는 그 깨어짐 위에 성령님의 은혜가 계속 부어질 때 그 깨어진 본성 사이사이에 성령의 은혜가 스며듭니다.
그런데 성령의 은혜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경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잘 들으십시오. 성령의 은혜는 반드시 경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뭐와 똑같은가 하면 신자의 내면의 세계 속에 스며들어온 죄가 경향성을 가지고 있는 것과 똑같습니다. 죄는 신자 안에 들어와서 하나님을 대적하고 그리고 하나님께 반감을 품고 하나님을 향해서 적의를 품고 그것을 행동으로 나타내보이려고 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은혜는 처음부터 어떤 경향을 가지고 있는가 하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사랑받기를 좋아하고, 주님의 창조의 목적대로 살고 싶어 하고, 나를 구원해놓으신 구원의 계획에 순종하면서 살고 싶고, 성경에 기록된 모든 하나님의 계명을 온전히 지키면서 살고 싶은 경향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해서 깨트려진 그 위에 성령의 은혜가 지속적으로 계속 부어지니까 은혜의 경향성이 이전에 가지고 있었던 죄의 경향성을 능가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 부서져버렸습니다. 이 경향성이 생겨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모든 계명에 순종하고 싶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고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것은 행하고 내가 아무리 하고 싶어도 하나님이 좋아하시지 않는 것은 버리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자기 깨어짐이 있는 신자, 복음적 자기 깨어짐을 경험한 신자 안에 들어온 성령의 은혜가 하는 역할입니다.
그런데 이제 자기 깨어짐과 지속적인 은혜가 이제 어떤 관계가 있는가 하면 이런 것입니다. 둘 다 성령의 역사인데 어느 한순간에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더군다나 자기 안에 죄에 대한 깊은 사랑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합니다. 그래서 죄에 대한 사랑에 관해서 깨트려집니다. 또 이제는 자기가 하나님의 계명을 상당히 잘 지킨 사람이다. 또 계명을 잘 지켰는지 모르지만 나처럼 헌신적으로 주님을 위해서 일을 많이 한 사람은 없다. 그렇게 생각하던 자만한 마음이 어느 한순간에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을 경험하면서 이것이 아무 것도 아니고 쓸모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것을 가지고는 나를 하나님 앞에 세울 수가 없고 이런 것을 가지고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 그리고는 나에게는 이 이상의 그 무엇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깊이 깨트려지게 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회개하게 됩니다. 그런 것이 자기 깨어짐입니다.
그 자기 깨어짐은 어떤 식으로 수행되는가 하면 자기 정죄와 자기 처벌을 통해서 깨트려집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자기가 이제껏 까지 몰랐는데 자기 안에 죄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더 가슴 아픈 것은 자기가 그 죄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이제껏 의지했던 계명을 잘 지키고 그리고 주님을 위해서 많이 희생하고 봉사를 많이 한 이런 것들도 하나님 앞에 좋은 것이기는 하지만 내가 이것을 의지하는 것, 그래서 나는 이렇게 했기 때문에 나는 하나님 앞에 특별한 대접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이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 얼마나 나쁜 것인가 하는 것을 철저히 깨닫게 됩니다. 그것이 나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그때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의 빛을 받은 신자가 정죄하는 것입니다. 너 나쁘다. 이렇게 죄를 사랑하는 너는 나쁘다. 그래서 내 안에서 하나가 되었던 자아가 마치 둘로 분리되어지는 것 같은 현상이 나타납니다. 예전에는 온 마음으로 죄를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한순간에 자아가 분리가 된 것 같습니다. 너 내 안에 또 내가 있구나. 그런데 네가 그렇게 죄를 사랑해. 그리고 잘난 척 해, 그래서 교만해. 그러면 예수님이 너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무엇인가. 바로 네가 사랑하는 죄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네가 도저히 하나님 앞에 의로울 수 없기 때문에 예수님의 요구대로 너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셨는데 네가 그렇게 잘났고 죄를 사랑하면 예수님이 너를 위해 죽은 것은 무엇인가? 그러면 너는 잘못됐다. 그리고 내가 내 안에 있는 또 다른 나를 정죄하는 것입니다. 정죄하면서 그를 심판하는 것입니다. 그 심판이 바로 회개의 고통입니다. 그 성령님을 통해서 자신의 잘못된 자아를 심판하는 것입니다. 그때 죽임을 당하는 것입니다. 정죄하는 것입니다. 깊은 고통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깨어지는 경험 속에는 항상 먼저 자기가 깨트려지는 깊은 아픔이 찾아옵니다. 누구든지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이런 자기 깨트려짐은 그 깨트려진 이후에 지속적으로 부어지는 성령의 은혜와 이 성화에 있어서 대조됩니다. 뭐가 대조가 되는가 하면 그런 성령에 의해서 자기가 죄에 대한 사랑과 자기 의에 관해서 자기 정죄와 자기 처벌을 통해서 통증을 느끼고 깨트려질 때 그것은 무엇인가 하면 삶의 방향을 바꾸게 합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그 죄를 사랑하고 하나님 앞에 교만하며 살았는데 콱 하고 깨트려지면서 방향이 바꾸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바뀐 방향은 한번 바뀌면 계속 가는 것이 아닙니다. 죄에 대한 사랑에 관해서 깨트려졌지만 그러나 아직까지도 이 속에 죄가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방향을 바꾸었는데 이 바뀐 방향을 계속 올바른 방향으로 가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깨트려진 자기 깨어짐 그 위에 지속적으로 부어지는 성령의 은혜입니다.
그러면 어느 한순간 성령에 의해서 깨트려졌는데 그러면 자기 깨어짐 그 이후에 지속적인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지는 그런 신앙생활이 없으면 어떻게 되는가? 탁 깨트려졌는데 조금 가다가 다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똑바른 방향으로 가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 이해가 되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왜 과거에 그렇게 막 산산이 깨어져서 무참할 정도로 부서진 것 같았는데 그런데 어느 날 보니까 다시 그렇게 깨트려진 그 길을 계속 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그때 어떤 생각을 하는가 하면 깨어진 것, 그것이 순 가짜인가. 그런데 사실은 가짜일 적도 있지만 그러나 진짜여도 그 이후에 성령의 은혜 안에서 계속 살지 않았기 때문에 방향은 바뀌었지만 그 바뀐 방향을 지속해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이 없었던 것입니다. 바뀐 방향을 지속을 못하고 가다가 다시 휙 돌아와서 다시 제 길로 다시 가는 것입니다. 자기 본성과의 싸움에서 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들이 중간 결론을 내면 그럼 뭐가 필요하다는 것입니까? 성령의 역사로 인한 철저한 회개와 자기 깨어짐도 필요하고 그 위에 계속해서 은혜 안에 살면서 그 은혜가 계속해서 그에게 부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자기 깨어짐 속에서 확 방향을 바뀌고 은혜의 힘으로 가던 신자가 그 은혜의 힘이 떨어져서 다시 옛 사람의 성품대로 돌이켰던 그 죄로 돌아가는 날을 집중적으로 다룬 그 시리즈가 무엇인가 하면 작년에 십자가 사경회 때 했던 은혜와 부패입니다. 그것을 이 시리즈와 함께 꼭 들으십시오. 왜 안 듣는지 이해가 안 갑니다. 여러분들이 30년을 가서 머리를 부딪치면서 피를 흘리면서 세상을 살아도 깨달아지는 이치인지, 왜 인생을 그렇게 삽니까? 아니 돌아가시오, 하면 그 표지판을 보고 가야지, 벼랑 주의하십시오. 그런데 아니 가보지도 않고 어떻게 알아. 그러고 가다가 보니까 바다 속이야. 그렇게 살면 안 됩니다.
그래서 결국은 뭐가 필요한가 하면 하나님 앞에 자기의 죄를 보고 깊이 깨트려지고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성령님의 은혜에 의해서 지속적으로 그 성령님의 은혜가 부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지속적으로 성령님이 부어진다. 말은 쉽지, 그러면 그냥 탁 깨트려져서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그런데 앞으로 가려고 하는데 은혜의 힘은 계속해서 은혜가 부어지지 않으면 은혜의 에너지도 떨어집니다. 죄도 마찬가지입니다. 죄가 아무리 힘이 있다고 하더라도 일단 죄가 더 이상 죄를 낳지 않도록 차단하고 은혜를 공급해주면 죄가 죽습니다. 그런데 계속해서 어떤 죄의 힘을 공급해주면 죄가 점점 더 강해집니다. 그러면 목사님, 말은 쉽지요. 탁 깨트려지는 것은 성령의 은혜다. 그래서 회개한다. 그러면 이해합니다. 그렇게만 되면 안 되고 바뀐 방향으로 계속 가기 위해서는 계속 성령님의 은혜가 부어져야 한다. 나는 주위에서 그런 사람을 많이 못 봤습니다. 좀더 눈여겨보십시오. 그래도 좀 있습니다.
그러면 계속해서 그런 은혜가 부어지는 것이 힘든 이유는 무엇입니까? 간단합니다. 이렇게 해서 방향을 바꿨는데 계속 은혜가 부어지는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방향을 바꿀 때는 커다란 죄와 싸웠지만 방향을 바꾼 후에는 이제 자기 안에 그렇게 자기 깨어짐을 경험하고도 살아남은 죄들이 있습니다. 그것들이 규합하려고 합니다. 그것을 철저히 감시하면서 그것을 하나하나 이기면서 가야지 됩니다. 그래서 뭐가 필요한가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 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바뀐 방향을 가는데 그렇게 하다가 왜 에너지가 떨어지는지는 은혜와 부패에서 나오고 그렇게 가는 사람이 어떨 때 그 에너지가 떨어지고 어떨 때 은혜의 에너지가 충전이 되어서 계속 부어지는 은혜 속에 살게 하는가, 그게 바로 죄와 은혜의 지배 시리즈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이 신앙의 세계에 있어서는 거의 유치원생 이하입니다. 너무 자존심이 상하게 발언을 해서 미안한데 유치원생도 아주 굉장히 많이 준 것입니다. 어떤 때 보면 정말 답답합니다. 그러니 조그만 지식이라도 있으면 그 지식을 가지고라도 하나님 앞에 온전히 순종하고 어린아이처럼 예수님을 따라가면 그래도 승리하는 삶을 살수 있는데 지식도 쥐뿔도 별로 없고 마음도 부패했습니다. 그리고 자기 안에 죄가 일어났는데 어떻게 다루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몇 십 년 전에 깨어진 것, 이제는 이미 벌써 거기다 말뚝을 꽂고 돌아섰는데 그것을 매일 무용담을 늘어놓듯이 옛날에는 내가 죄악 된 길을 가다가 요즘도 가면서, 뭐 옛날이야기만 합니까? 그러다가 주님을 만나서 깨트려지고 매일 쌍 팔년에 듣던 이야기입니다. 매일 그 타령이나 하고 요즘 어떻게 사는지를 얘기해주십시오. 그래서 뭐 엄청난 신앙의 과거를 가지고 걸어온 것처럼 말이지, 다 허영입니다. 뻥입니다. 진실한 성도들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 들어야 합니다. 이 중에 몇 사람은 안 그렇습니다. 그래도 내가 중학생쯤으로 쳐줄 사람도 있고, 고등학생 쯤 쳐줄 수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유치원 이하 영아부입니다. 심지어 뭐가 뭔지도 모릅니다. 퍼먹으면서도 뭘 퍼먹는지 모릅니다. 그러면서 허우적거리면서 삽니다.
그런 사람들을 돌보라고 교회를 세웠는데 그래서 어떻게 하든지 가르치려고 합니다. 그러고 어떻게 하든지 수술대에 눕혀놓고 말씀으로 좀 고쳐보려고 합니다. 그런데 배만 열고 도망갑니다. 사람 살려, 그리고 나잡네. 그리고 도망갑니다.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어떻게 해야지만 이 바꿔진 방향을 계속 유지하면서 살수 있는가? 그것을 부지런히 탐구해가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설교하는 이 모든 내용이 그 탐구의 과정에서 흘러나온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살아갑니다. 완전하지 않습니다. 조금씩, 조금씩, 나도 그런 생각을 합니다. 형편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아는 것보다 내가 너무 나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래도 위로가 되는 것이 조금씩 목회하면서 신앙이 자라는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아주 조금씩이지만 조금씩 신앙이 자라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과거에 살았던 내가 부끄러워질 때도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부지런히 탐구하면서 그러면서 가는 것입니다. 일평생을 그렇게 가야 합니다. 그런데 고달프다고, 아닙니다. 얼마나,
주 내 마음에 늘 계시고 나는 주님 안에 있어
저 포도비유 같으니 참 좋은 나의 친구
그렇게 해서 이제 깨트려지게 됩니다. 그럼 이제 오늘 궁금한 것은 그러면 이제 오늘 자기 의에 대해서 그리고 사랑에 대해서 깨어짐으로서 우리는 정말 진실하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헌신적인 삶을 살기에 적합한 그리고 또 헌신적인 삶을 살아도 그 헌신이 하나님이 받음직한 헌신이 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핵심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신앙생활의 목표는 하나님 앞에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진실로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하나님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최고의 봉사는 자기가 하나님의 마음에 꼭 드는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를 통해서 당신이 하고 싶은 모든 일들을 드러내십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무엇을 구하든지 하나님이 들어주시고 그리고 주위 사람들이 시기가 날정도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서 하나님이 동행해주십니다.
자기 의에 대해서 특별히 어떤 방식으로 자기 의에 대해서 깨트려지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제 자기 의에 대해서 깨트려진 삶을 이야기하면서 이제 우리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것은 신자가 아무리 자신을 헌신하고자 하는 신앙의 열정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곧 그리스도에 대한 인격적인 사랑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이라고 하는 그 자체는 하나의 인간에게 끊임없는 성취욕을 불러일으키는 마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의지가 약하거나 성취욕이 현저히 없어서 조금 뭘 해보다가 힘들면 집어치우는 의지가 박약한 사람들이 많은 것도 사실이지만 그러나 평균적인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삶의 의욕이 넘칠 때 일에 대한 의욕도 함께 넘쳐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하나님을 섬기다가 보면 처음에는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가지고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해서 그 일로 부름을 받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는 점점 영혼의 싫증 속에서 사라져가고 그 다음에는 오히려 일에 대한 사랑만 남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완전히 분리됩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의 신앙의 모습은 철저히 분리되어서 그래서 하나님을 향해서는 진실한 사랑이나 이런 것이 없는데 일을 하면서 흥미를 느끼고 거기에서 나름대로 성취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하나님께 대한 인격적인 사랑에 비롯된 헌신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너무나 분명하고 자기가 그 일을 아무리 즐겨한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그것으로서 자기의 의를 세우기 쉽고 그것을 통해서 오히려 자기의 의를 세우고 내가 그래도 하나님 앞에 이렇게 봉사하며 산 사람이라고 하는 생각 때문에 하나님 앞에 자기를 세우고 싶고 그렇게 자기를 세우기 때문에 결국은 하나님께 대한 그리스도께 대한 인격적인 사랑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 반대의 사람도 있습니다. 잘 들어보십시오. 어떤 사람인가 하면 이제 자기 성찰중심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께서 이런 저런 은혜를 주셔서 우리를 주님의 자녀 삼으시고 그 위에 분량은 다 다르지만 어째든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럼 은혜의 분량만큼 자신에게 소명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들은 크게 섬기고 은혜를 좀 덜 받은 사람은 자기 은혜에 맞게 섬기고 또 은혜뿐만 아니라 은사도 있습니다. 그러니 은사가 있는 사람은 또 그 은사대로 하나님을 위해 섬겨야지 그 은사가 있는데도 그것을 섬기지 않고 자신이 깊이 묻어두면 그 자체가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살면 하나님과의 평화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데 문제는 언제나 하나님과의 관계를 돌아보면 자신이 없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너무 죄가 많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뭔가 막 얽혀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때 무슨 생각을 하게 되는가 하면 내가 내 자신의 영혼도 이런데 내가 뭘 쥐뿔이나 섬기겠는가. 그리고 안 합니다. 그러면서 자기 영혼을 계속 들여다봅니다. 그런데 그렇게 들여다본다고 해서 그가 자기 의에 대해서 깨트려지고 하나님의 큰 사랑과 은혜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가 하면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10년 전에 고민하던 사람은 아직까지도 계속 고민만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삽니다. 그런 내면주의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어떻게 하는가하면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고 하는 것은 주제넘은 것이고 자신이 일체 하나님의 일을 하지 않고 자기의 죄 문제만을 고민하는 것은 워낙 거룩을 추구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죄가 많다는 이야기를 계속하고 자기 자신이 문제가 많다는 사실을 계속 말하는 것 그자체가 뭔가 다른 사람보다 훨씬 예민한 영적인 지각 속에서 자기를 분별하며 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 헛일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런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두 다 헛된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은 그런 자기중심적인 고민에 빠져서 그래서 계속해서 허송세월하고 있는 것입니다. 헛바퀴를 돌듯이 돌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면 안 됩니다. 우리 신앙의 변화와 개혁은 철저하게 총체적이어야 합니다. 기도만 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기도가 중요하지만 그 기도가 끊임없이 힘을 잃어버리지 않고 열렬함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말씀의 은혜의 감화가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삶을 개떡같이 살아보십시오. 주일날 와서 은혜를 받나. 계속 잡니다. 말씀이 다가오지 않습니다. 말씀을 들을 때 그 말씀이 자기의 가슴에 깊이 찔리며 적용되고 감화를 받는 것 자체가 하나님께서 그를 기뻐하시는 특별한 증거입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주일날 말씀을 듣고 일주일 동안 그 말씀대로 살기 위해서 분투하고 애를 쓰면서 부지런히 노력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일주일 내내 졸리면 자고 먹고 싶으면 먹고 화장실 가고 싶으면 가서 눕고 자기 좋은 대로 살았습니다. 지난 주일날은 어떻게 은혜를 받았을지 모르지만 그렇게 하나님도 없는 개떡 같은 삶을 살다가 그러다가 주일날 왔습니다. 말씀의 은혜가 됩니까? 말씀의 은혜를 못 받고 말씀의 은혜를 못 받은 사람이 성령님의 감화 있는 은혜를 경험했을 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조명도 없고 성령님의 은혜의 감화도 없는 사람이 자기 내면을 뚫어지게 들여다보면서 뭘 찾아내고 자기를 바꾸어보려고 하는데 쥐뿔이나 되겠습니까? 그렇게 해서 자기를 고칠 수 있으면 예수님이 이 세상에 내려오시지도 않으셨습니다. 그게 됩니까? 그러고는 되지도 않는 말도 안 되는 고민을 폼은 다 잡고 고민하고 허송세월입니다. 다 미친 짓입니다. 결국은 하나님 앞에 사악한 삶입니다. 뭘 들여다보는 것입니까? 뭐가 있습니까? 진짜 그렇게 죄가 미우면 하나님 앞에 죄를 용서해달라고 매달리고 그러고 지금 계속 짓고 있는 죄도 과감하게 돌이켜서야 합니다. 매일 무슨 연애를 하다가 실의에 빠진 중 고등학생처럼 말이지 매일 고개를 아래로 꼬고 한숨이나 쉬고 그러면서 가끔 훌쩍이면서 기도하는데 그게 무슨 회개인줄 아십니까, 자기 설음에 우는 것이지, 진짜 바꾸고 싶으면 삶 전체가 개혁이 되어야 합니다. 말씀의 빛 앞에 올려놓고 다 바꾸어야 합니다.
내가 오죽했으면 영혼의 변화를 받으려면 새벽부터 일찍 일어나십시오. 불 떨어지는 것은 나중 문제고 새벽에 일어나십시오. 해가 천장에 받칠 때까지 퍼질러 자는데 무슨 영혼의 변화가 오겠습니까! 새벽에 좀 일찍 일어나십시오. 저는 밤에는 강하고 새벽에는 약하고, 놀고 있네. 무슨 밤에 강해, 아니 낮에 동창이 밝을 때까지 퍼질러 잤는데 밤에 잠이 오면 그게 동물이지 사람입니까? 내가 오죽했으면 그랬습니다. 몇몇 사람이 그랬습니다. 밤에 잠이 잘 안 온다고 해서 수면제라도 먹고 자라고 안 되면 밤 9시쯤 되어서 고달프게 운동을 해서 골아떨어지게 해서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하나님 앞에 새롭게 기도하고 오늘 하루도 어떻게 한 시간도 허비하지 않고 주님의 뜻대로 살아야지 되겠습니다. 그렇게 삶 전체를 고쳐야 합니다. 매일 기도하는 것 같이 엎드려있고 매일 성경만 읽는 것 같은데 마음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무슨 기독교 룸펜같이 그렇게 살고 그러면서 무슨 나이는 먹어가고 왜 그렇게 허송세월하는지 나중에 진짜 슬피 웁니다. 우리 인생이 얼마나 바쁜데 그렇게 살아갑니까? 바보같이, 확실히 하십시오.
하나님 앞에 변화를 받고 싶으면 받고 싶다고 이야기하고 수술대 위에 누우십시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고쳐달라고 그러십시오. 받고 싶지 않으면 그냥 망가진 대로 그냥 뛰어놀면서 살다가 죽던지 태도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무슨 몇 년 동안 자기를 들여다보면서 한숨이나 쉬고 그러지만 개 코나 달라진 것이 뭐가 있습니까? 그렇게 해서 안 됩니다. 이 모두 다 하나님 앞에 진짜 자기가 깨어지지 않은 사람들의 모습은 반복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립니다. 모든 것은 총체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일단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자기 깨어짐을 깊이 필요하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은혜가 필요하다고 하면 삶을 전반적으로 돌이켜야 합니다. 어느 한 부분만 고치려고 하지 말고 전반적으로 고쳐야합니다. 그래서 자기의 삶을 하나님의 말씀의 빛 앞에 내놓고 뭐가 잘못되었는지를 눈을 똑바로 뜨고 들여다보면서 하나님이 아니시라고 그러시는 것들을 부인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마음을 모아서 하나님의 성령의 은혜를 깊이 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이 슬퍼하시는 삶을 계속 살면서 성령의 은혜를 구하는 것은 성령님을 놀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받고 싶으면 우선 성령님이 싫어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거기로부터 담대하게 돌이켜서야 합니다. 결단이 필요합니다. 그러면 결단을 내리고 믿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면 그 다음에는 하나님이 힘을 주십니다.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피할 길을 주시고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이제 어디까지 가야지 되겠습니까? 이제껏 까지 왔는데 어디까지 가야지 되겠습니까? 영혼의 침체, 자기 깨어짐이 없는 생활, 그 힘겨운 봉사와 헌신, 그러면서도 자신의 마음은 하나님께 드려진 적이 없습니다. 형식적으로 봉사했는데 이제 그것까지 집어치우려고 마음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그럼 집어치우면 뭘 할 것입니까? 그러면 무슨 영혼의 변화가 올 것 같습니까? 무슨 변화가 오겠습니까? 이제나 저제나 그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고 은혜로부터 멀어진 채 자기 죄를 사랑하고 자기 의 속에 묶여 살아가는 사람인데 무슨 변화가 일어나겠습니까? 그렇게 살면 안 됩니다. 깊이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부어지는 성령의 은혜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과거에 자기 깨어짐을 경험했다면 그 깨어질 때에 하나님의 은혜가 스며들었습니다. 조금만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순종하고 주님의 말씀대로 살았으면 은혜가 계속 부어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은혜의 자원은 마르고 이제 메마른 신앙생활을 해나갑니다.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앞에 정말 자기 자신의 마음을 갈아서 소제에 가루로 드리고 그 위에 성령의 은혜가 깊이 기름 부어져서 그래서 속속들이 스며들어서 새 사람이 되어서 살아가보십시오.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이전에는 우리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주님께 근심거리였는데 이제는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가는 것이 주님의 마음에 기쁨이 되지 않겠습니까? 바로 예수님이 이런 일들을 이루기위해서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성령님을 보내주신 것입니다. 지금도 그 예수님께 기도하고 이런 성령의 은혜를 구하는 사람들에게는 주님이 그런 은혜를 부어주셔서 자기 깨어짐과 함께 변화된 삶을 지속해나갈 수 있도록 성령님께서 도와주십니다. 그렇게 순종하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5. 헌신과 순결(민28:7)
“또 그 전제는 어린양 하나에 힌 사분지 일을 드리되 거룩한 곳에서 여호와께 독주의 전제를 부어드릴 것이며”
마지막 시간이니까 시간이 좀 없기는 하지만 대충 좀 정리를 하고 오늘 마지막 시간을 합시다. 상번제는 이스라엘 전체를 헌제자로 해서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제사이고 이 번제는 온전한 헌신을 상징하는 제사였습니다. 이 상번제는 세 개의 제사가 합쳐져서 상번제를 구성하는데 첫째는 불로 태워드리는 화제로서 번제물을 드리고, 두 번째는 소제를 드리게 되고, 세 번째는 오늘 드릴 이 전제를 통해서 이 상번제가 구성이 됩니다. 이렇게 모두 세 가지 다 한 셋트로 드릴 때 그게 이스라엘을 위한 상번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번제물을 제단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바칠 때 태워서 드리는 것이 있는데 이 번제는 남김없이 모두 태워드리는 번제였습니다. 이것이 온전한 헌신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고 그 다음에 소제는 다른 곳에는 더 나오지만 이 민수기에서는 이 소제에 쓰여 지는 대표적인제물 두 가지가 등장하는데 하나는 고운 가루였고 또 하나는 기름이었습니다. 그래서 고운 가루는 자기가 깊이 깨트려진 내적인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고 그리고 그 내적인 변화는 자기 깨어짐은 두 가지로 구성이 되는데 하나는 죄에 대한 사랑에 관해서 깨어지는 것이고 또 하나는 자기 의에 대해서 깨어지는 것이라고 말씀을 드리면서 이 두 가지를 각각 하루에 하나씩 말씀을 드렸고, 어제는 그 소제의 마지막 구성요소로서 기름을 섞는 것을 가지고 말씀을 드리면서 이 기름은 의심할 여지없이 성령이며 철저한 자기 깨어짐 속에 이 성령의 은혜가 스며들 때 완전히 새로 빚어진 사람이 되고 그런 내면의 세계를 가지고 자기를 불태워드리는 헌신의 삶을 살 때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삶을 살수 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요 짤막한 열개의 문장이 4일 동안의 메시지를 모두 농축한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마지막으로 전제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 전제는 상번제의 마지막 제사로서 액체를 부어서 드리는 제사였고 그래서 이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는 제물이 필요했는데 그 제물은 두말할 나위 없이 액체여야 했습니다. 성경에는 이 전제물로 사용되는 액체가 포도주, 독주, 그리고 기름, 그리고 마지막에 피까지 등장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제 이 피는 하나님이 전제물로 받지 않으신다고 말씀을 하심으로서 성경에 소개는 되고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이방제사를 염두에 두고 소개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제외하고 그 다음에 이제 기름이 나오는데 기름을 전제물로 부어서 하나님 앞에 바치는 제사는 야곱의 이야기에서 나옵니다.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거기에서 이제 하나님 앞에 기름을 부어서 제사를 드리는 장면이 나오는데 사실 이이야기는 율법이 시내산에서 주어져서 그 안에 제사 규례가 나오기 한참 전의 일입니다. 그래서 사실은 같은 레섹이라는 히브리단어이기 때문에 전제라고 번역을 했지만 그러나 그것이 정말 이 제사 법전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바로 이 규례와 맞는 전제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요지가 많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기름도 사용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이제 레위기와 민수기의 문맥에서 보면 포도주와 독주 두 가지가 아주 확실한 전제물로 등장을 합니다.
그런데 이제 문제는 어느 곳에서는 포도주를 전제물로 쓰는 것으로 나오고 그리고 여기 같은 곳에서는 독주를 전제물로 쓰는 것으로 나옵니다. 그래서 이것이 생각보다 아주 복잡한 논쟁이 얽혀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이 문제를 가지고 한번 풀기 위해서 살펴볼 기회가 있었는데 이제 그 모든 과정을 여러분들에게 다 설명을 드리면 오늘밤 늦도록 해도 독주 이야기를 하다가 끝이 안 나니까 정리를 해서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리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 독주라고 하는 것은 히브리말로 “쉐카”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이 독주가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서는 학설이 구구합니다. 그래서 먼저 구약에서 독주가 무엇이고 신약에서 독주가 뭔지 성경 전체를 한번 독주에 관해서 공부를 하고 그리고 독주를 전제의 제물로 하나님이 택하신 이유가 뭔가를 살펴보면서 본격적으로 오늘 우리 메시지를 하나님께 받으려고 합니다. 이 독주라고 하는 것은 히브리말로 쉐카르 라고 하는 단어인데 그럼 이 쉐카르 라고 하는 구약의 단어가 우리 말 성경에서 독주로 번역이 되었는데 영어 성경에서는 독주로 번역이 안 되고 아주 다양한 방식으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독주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논란이 벌어지는데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은 이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논란을 할 때 마지막에 도달할 수 있는 결론은 이 독주는 포도주와는 완전히 다른 곡식이나 혹은 다른 열매로서 만들어진 술이 아니라 같은 포도주로 만든 술인데 말하자면 독주가 매우 높은 술입니다.
자, 예를 들어봅시다. 지금 술에 대해서 그리스도인이니까 잘 모르시겠지만 샴페인도 포도에서 나오고 또 포도주도 포도에서 나옵니다. 그 이외에 여러 가지 많은 술들이 포도라고 하는 재료에서 쏟아져 나옵니다. 각각 도수가 다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독주는 포도주가 아닌 다른 종류의 술이지만 기본적인 재료가 포도입니다. 그 중에서 특별히 주정이 될 정도로 아주 강한 알코올 성분을 가진 그 술을 여기에서 독주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럼 그것도 나름대로 증거를 대야지 되겠습니다. 그래서 우선 여러 영어 성경에서 이 독주를 번역하기를 오래 발효된 포도주라고 번역한 성경이 여러 번 나옵니다. 그래서 포도 자체가 알코올 성분을 가진 것이니까 포도주와 독주 사이의 차이는 둘 다 알코올 성분을 가지고 있는데 독주가 훨씬 더 강한 알코올 성분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생각을 해야지 됩니다.
그 증거가 하나 나옵니다. 사무엘상에 보면 한나가 성소에 올라가서 기도를 합니다. 기도를 하는데 엘리 제사장이 보니까 이 사람이 거의 실성하듯이 기도를 합니다. 그래서 엘리 제사장이 그때 영안이 어두워졌으니까 너 포도주를 먹었구나. 그리고 이제 한나를 비난했습니다. 그랬더니 한나가 대답하는데 이상하게 뭐라고 대답하는가 하면 나는 독주를 마신 게 아닙니다. 그랬습니다. 이 두 사람의 대화를 보면 뭘 알 수 있는가 하면 포도주와 독주가 상당히 교보적으로 쓰였다고 하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 포도주는 그 사람들의 일상적인 음료였습니다. 왜냐하면 물이 귀하고 그리고 우물을 파도 대부분 쓴물이라서 마실 수가 없고 무리해서 그 물을 마시면 풍토병이 생깁니다. 그런데 반면에 포도는 무지무지하게 많았습니다.
여러분, 성경에 보면 에스골 골짜기라고 나옵니다. 그 에스골이라는 히브리 단어 자체가 영어의 clod 라고 하는 덩어리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그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을 정복한 이야기에 보면 그 포도 한 송이를 꿸 채에 꿰어서 둘이 들고 나오는 장면이 나옵니다. 아, 이것은 완전히 뻥이다. 그러는데 카일 델리치라고 하는 주석가가 자신의 주석 속에서 기록하기를 지금도 그때입니다. 그러니까 19세기입니다. 그때도 팔레스타인의 에스골 골짜기에 가면 한 송이에 4.5 내지 6킬로그램짜리의 포도를 볼 수 있다고 증언을 했습니다. 6킬로면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어린아이를 하나 낳아봐야 3킬로밖에 안되니까 그 두개만 한 것이니까 사실 그 시대에 진짜 그렇게 꿸 채에 꿸 수 있는 그런 포도가 있었다는 사실이 어느 정도는 믿어집니다. 그러니까 포도주가 지층으로 많은 곳입니다. 그러니까 차라이 물을 구하러 다니기보다는 차라리 그것을 짜서 포도주로 해서 먹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짜고 거기에다가 이제 설탕을 넣게 되면 포도주를 만들려고 애를 쓰지 않아도 저절로 발효가 되어서 포도주가 됩니다. 설탕을 안 넣고 포도를 사다가 따뜻한 곳에다 며칠 놔두면 포도에서 시큼한 냄새가 나면서 술기운이 돌아서 알코올에 워낙 약한 사람들은 그 포도송이 몇 개만 먹어도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하는 것이 이게 우리들이 경험하는 바입니다.
그런데 이제 이런 포도주에 대해서 성경 여러 곳에서 먹지 말라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물론 이제 민수기 같은 곳에 보면 나실인, 하나님 앞에 바쳐지기로 한 사람들은 그런 것을 먹지 못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심지어는 포도의 씨까지도 먹지 못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을 제외하고라도 여러 곳에서 우리말 성경에서 포도주로 번역된 것, 독주로 번역된 이 많은 것들 속에서 이것을 먹는 것을 금하는 장면들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런 술을 마시게 되면 판단을 그르친다. 등등의 권유상황들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이제 이렇게 나온 많은 경계의 대상이 되는 술들이 아마 강한 알코올 성분을 가진 독주였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약으로 넘어가면 똑같은 쉐카르 라고 하는 독주가 제일먼저 나오는 데가 몇 군데가 있는데 그 중에서 눈에 띄는 곳이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먼저 예언자로 왔던 세례 요한의 출생을 예고하는 가운데 누가복음 1장에서 “그가 올 텐데 그는 소주를 마시지 않을 것이요”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그것을 보면서 소주가 참 역사가 깊구나. 그런데 사실은 그게 아닙니다. 거기에 소주라고 번역을 했지만 그러나 사실 거기에 들어가 보면 희랍어로 시케라 라고 되어있습니다. 벌써 여러분이 희랍어와 히브리어를 잘 몰라도 쉐카르, 그 다음에 시케라 비슷합니다. 말하자면 음을 차음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게 열국에 공통적으로 있던 술이라고 하기보다는 히브리 사람들에게 독특하게 유통되던 술이 아닐까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소주라는 말로 번역을 했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이것이 바로 독주가 되는 것입니다.
신약에서는 이렇게 나옵니다. 그런데 이제 누가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하시다가 강도를 만난 사람을 선한 사마리아인이 도와줍니다. 그리고 그를 여관에 데리고 가서 이제 부비가 더 들면 도와주겠다고 주인에게 맡기고 치료를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포도주로 치료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더 결정적인 것은 디모데 전서 5장 23절에서 사도 바울이 사랑하는 아들 같은 목회자 디모데에게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이제부터는 물만 마시지 말고 네 비위와 자주 나는 병을 위하여 포도주를 조금 쓰라고 나옵니다. 이 번역이 좀 문제가 있습니다. 더 이상 물만 마시지 말고,
그러니까 물만 마시다 하는 단어가 “휘두라 포테이”라고 하는 단어인데 이것은 마시다, 라는 하는 그 속에 물이라는 말까지 아예 들어간 것입니다. 두 동사와 목적어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물을 마신다는 동사 자체가 휘두라 포테이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그것과 함께 그 뒤에 포도주를 조금 쓰라고 그러는데 쓰라는 단어도 안 나오고 포도주라는 단어도 안 나옵니다. 뭐가 나오는가 하면 물을 마시다. 라는 동사는 휘두라 포테이고 그 다음에 아무튼 우리 말 성경에서 포도주를 좀 쓴다. 하는 단어는 “오이노오” 라고 나옵니다. 그런데 이 오이노오 라는 단어가 아까 휘두라 포테이라는 단어 속에 이미 물이라는 말까지 들어간 동사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짝을 이루기 위해서 똑같이 오이노오 라는 단어 속에 그런 것을 먹다. 이 단어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이 오이노오라는 동사 속에서 함유하고 있는 목적어 휘두라 포테이에서는 물이라는 것이 그 속에 목적어로 가미가 되어 있는데 오이노오에서 들어있는 이 목적어는 도대체 무엇인가? 우리 말 성경에 아주 은혜롭게 번역을 했습니다. 원래는 그냥 마시다. 그것입니다. 그런데 포도주를 조금 쓰라. 포도주를 마셔라, 그럼 거기에 한국교회의 성도들이 담대함을 얻을까봐 좀 써라. 그때 한참 금주운동이 벌어질 때니까 그렇게 아주 교묘하게 지혜롭게 번역을 한 것입니다. 읽을 때는 은혜롭지만 조금 깊은 뜻을 파고 들어가 보면 문제가 됩니다. 조금만 더 들어갑시다. 그래서 이 단어를 가지고 권위 있는 사전을 찾아보면 놀랍게도 오이노오, 우리 말 성경에서 포도주를 쓰다. 이렇게 번역된 이 오이노오 라는 단어가 놀랍게도 마취시키다는 말로 나옵니다. “anesthetize”라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잘 들어보십시오. 그런데 “쉐카르”라고 하는 이 단어에 독주라는 이것이 바로 무엇인가 하면 사람을 마취시키는 성분이 있는 그런 술이라는 뜻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언에 보면 죽어가는 자에게는 독주가 좋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달려 돌아가실 때 성경기록에 보면 사람들이 갈대에다가 스펀지 같은 해융에다가 포도주를 묻혀서 예수님께 드리니까 예수님이 한번 입을 대보시고 거절하시고 마시지 않으셨다고 나옵니다. 그게 바로 포도주가 잠언에 나와 있는 성경구절과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무슨 관계가 있는가 하면 잠언에 나와 있는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죽어가는 사람에게는 독주가 좋고 그래서 이스라엘 속에는 어떤 전통이 생겨났는가 하면 사형 받는 사람들에게 사람들이 그 독주를 먹입니다. 그것은 마지막 자비의 행위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먹게 되면 고통을 잊게 되는 것입니다. anesthetize, 그래서 마취시키는 효과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죽어가는 사람에게 독주를 마시게 해주면 그게 자비로운 행동이고 하나님께 칭찬받는 행동이라고 하는 전통이 생겨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그것을 꿰서 드린 것이 그냥 우연히 생긴 일이 아니라 관습처럼 내려온 것입니다. 그래서 꿰어서 예수님에게 드린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에게 그것을 맛보시니까 그게 보통 평범한 술이었으면 예수님이 어쩌면 섭취하셨을지 모르는데 그게 마취성분이 있는 강력한 술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거절하신 것인데 왜 당신은 지금 하나님 앞에 진노를 당하며 고난을 당하고 계시는 중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당신이 회피하실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십자가라는 책에서 상세하게 해설했습니다. 이렇게 맞아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다시 신약으로 내려와서 그래서 예수님의 고난당하는 장면에서도 바로 그 포도주가 나오는데 그 포두주가 그냥 평범한 포도주가 아니라 마취성분이 있는 강력한 독한 포도주 중에서 독주와 같은 효과가 있는 포도주였고 그 독주는 바로 포도에서 만들어진 포도주와 유사한 것이었기 때문에 이 성경이 자꾸 포도주라고 기록한 것입니다. 사람의 보는 바에 따라서 해석이 다릅니다. 아, 예를 들자면 이런 뜻입니다. 술을 안 먹는 사람에게 자꾸 술 이야기를 해서 시험 들지 모르는데 소주하고 배갈하고 사실 색깔도 비슷합니다. 뭘 또 고개를 끄덕입니까? 집사가 되어서. 회개하십시오. 똑같습니다. 그런데 소주하고 배갈은 이렇게 불어서 성냥을 확 붙이면 불이 붙습니다. 45도가 넘습니다. 똑같이 말간 물 같은데 이 두개를 똑같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맛을 헷갈립니다. 똑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포도주와 독주라는 말이 왔다 갔다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강력한 도수가 알코올, 말하자면 독주라는 말이 많은 영어 성경에서 strong drink 라고 번역되었습니다. 강한 음료라고 번역되었습니다. 포도주가 싹 빠지고, 왜냐하면 그렇게 도수를 높이면 그게 포도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strong drink 라고 바뀐 것입니다. 어쩌든 그런 번역이 있습니다. 어째든 그렇게 해서 이제 예수님께서 그것을 거절하셨습니다. 그것이 독주였다는 것이 너무나 분명하고 마취효과가 있었다는 것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디모데전서 5장 23절에서 오이노오, 포도주를 쓰다는 이 말이 우리는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일차적으로는 anesthetize 그래서 마취시키다. 라고 하는 뜻이 있고 그것이 헬라 시대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많이 써진 오이노오의 의미였습니다. 그러면 그 다음에 이제 그것이 수동태가 되면 갯 드렁크 취하다, 그런 뜻이 되고 실제로 헤로토트스 같은 역사가의 글에 보면 이 오이노오 라는 단어가 말하자면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만취된 마취의 효과가 나올 정도로 완전히 술에 취한 그런 것을 가리키는 말로서 동사가 사용되었습니다.
자, 이게 그렇게 놓고 본다면 이제 의문은 이것입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이 비위와 자주 나는 병을 위해서 포도주를 조금씩 쓰고 라고 했는데 조금씩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포도주를 쓰고 에서 그럼 포도주가 아니면 그럼 무엇인가? 그것은 포도와 관계가 있다기보다는 물론 포도에서 나왔지만 그것보다 그 음료가 가지고 있는 강한 마취성분 내지는 제독성분 때문에 그것을 기대하고 조금씩 쓰라고, 왜 많이 쓰면 문제가 되니까. 포도주는 많이 먹어도 문제가 안 되니까. 그 사람들은 그게 음료였으니까. 물대신 마시니까. 한 사람이 최소한 하루에 2 리터 정도는 마시니까. 그것을 조금 쓰라고 하는 것은 늘 마시는 것을 가지고 위도 별로 안 좋은데 콜라만 마시지 말고 물도 좀 마십시오. 그렇게 말하지 않듯이 이것을 좀 쓰라는 이야기는 이렇게 권고를 안 하면 안 쓸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쓰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포도주는 아니라는 것이 제 결론입니다. 뭔가 마취성분이 있거나 약용성분으로 사용될 수 있는 강한 제독효과가 있는 어떤 강력한 알코올 성분의 그런 술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나는 독주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단언할 수 없지만 성경의 추론을 볼 때 그곳 쪽으로 훨씬 더 갑니다.
그런데 더 재미있는 것은 무슨 용도로 그것을 쓰라고 그랬는가 하면 두 가지 예를 드는데 비위와 자주 나는 병을 위하여 그랬습니다. 그런데 주석가들은 여기에 대해서 대부분 많은 사람이 침묵을 합니다. 전 생각을 하는데 비위라고 하는 것은 우리들이 알 수 있습니다. 소화기계통에 병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겨우 소화를 못 시키는 정도였다면 아마 사도 바울이 이 정도까지 근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더 궁금한 것은 뒤에 비위와, 그것은 그것이고 자주 나는 병인데 이게 희랍어 성경에 아스덴네이 아스라고 나오는데 이게 복수입니다. 그러니까 이 디모데가 한 가지 정도의 문제가 있는 사람이 아니라 비위 그러니까 그게 벌써 문제가 있습니다. 그 위에 자주 나는 병들을 위하여 그러고 나옵니다. 그래서 제 생각이 어떤 생각인가 하면 아마 여기서 이야기하는 이 오이노오 라는 단어를 그 당대의 문맥에 갖다놓고 공종하게 판단을 해볼 때 뭔가 이 디모데는 속병, 위장계통의 병을 포함해서 강력한 통증을 느끼는 질병을 알고 있었다고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신앙적인 차원에서 정상적으로 향락을 위해서는 먹을 수 없을 그런 강력한 마취성분이 있는 어떤 것을 술인데 그것을 조금씩 마셔서 통증을 감하도록 일반적으로 그런 것들을 많이 마시는 것이 크리스천 사이에 금기시되어 있고 구약에서도 독주는 마시지 못하게 되었으니까 그래서 마음의 자유로움이 없을 것 같아서 아버지로서 이제 이 디모데에게 너는 특별히 병이 많고 통증이 심하니까 그것을 조금씩 마셔서 마취효과를 가져도 괜찮겠다. 그래서 권한 것입니다. 저는 제 이이야기가 여태까지 나온 많은 이야기들을 종합해볼 때 가장 가능성이 있는 결론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러나 그것이 이렇게 생각하든 저렇게 생각하는가에 따라서 그게 뭐 핵심적인 죽고 사는 문제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그 포도주가 몇 도짜리 독주인가? 그게 문제가 아니라 의미가 문제니까 그렇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정리를 하면서 이것이 마음이 숙연해지면서 아, 이게 바로 성경이 우리에게 얘기하려고 하는 것이었구나. 이 다음에 천국에 가면 디모데에게 한번 물어보십시오. 내 이야기가 맞나. 뭔가 강한 통증을 느끼는 쉽게 고칠 수 없는 병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이노오 마취용으로서 통증을 진통제같이 사용을 하면서도 그것이 어떤 양리작용을 통해서 제독성분을 가지고 병을 치료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그 두 가지 같은 기대 속에서 일반적으로 상용하기는 꺼리는 어떤 강력한 독주를 조금씩만 쓰라고 사도 바울이 권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결국 그러면 이 독주라고 하는 것이 쭉 여기까지 구약과 신약의 모든 독주를 거의 다 여러분들이 띈 것입니다. 잠시 동안에, 그런데 이것이 결국 마지막에 의미하는 바가 뭔가? 그게 결국 순결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게 무엇인가 하면 강도를 만나서 상처를 당했는데 여기에 많은 병균이나 오염물질들이 들어옵니다. 그런데 그 포도주로, 그 포도주가 일반적이 포도주가 아니라 독주였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씻어내고 그래서 자주 나는 병과 고통을 가져다주는 어떤 연약한 병들이 있는데 그것들을 그 독주로서 진통과 치료의 효과도 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번제물을 태우고 소제까지 태우고 마지막에 전제를 부을 때 그 붓는 술은 우리가 지금 기록이 안 남았기 때문에 사실 그 당시 알코올 농도를 재고 그런 것은 없지만 딱 부었을 때 불이 확 붙을 정도의 강력한 술이었다고 봅니다. 부어서 물처럼 번제단의 불을 끄는 그런 술이 아니라, 양이 얼마큼이었는가 하면 0, 96리터입니다. 한 되박입니다. 그러니 그것을 부어서 번제단에 불이 꺼졌다고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렇게 뿌리는 것이 아니라 0,96 리터입니다. 주전자 하나입니다. 그것을 확 부은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그게 강한 술이 아니고 불붙을 정도의 술이 아니고 맹물 같은 정도의 술 같으면 물을 부으면 번제단의 크기가 정확하게 타오르는 불의 양이 어느 정도인지 모르지만 그러나 그런 문제도 있는 것입니다. 한 되박을 붓는다고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틀림없이 그것을 부었을 때 확 불길이 타오를 정도로 그렇게 강력한 알코올 성분을 가진 독주였습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바로 정결케 하는 그런 순결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독주를 사용해서 하나님께서 쓰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럼 이제 한번 잘 생각해보십시오. 제일먼저 이 제사의 모든 특징은 이렇게 독주를 해석을 해야지만 딱 맞아떨어집니다. 왜냐하면 들어보십시오. 번제를 드리는데 먼저 수양을 네 다리를 자르고 목을 떼어내고 기름을 분해해서 여섯 등분을 해서 물로 깨끗이 씻어서 태워드립니다. 그러니까 일부만 태우는 게 아니라 다 태우는 것입니다. 다 타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소제는 그 고운 가루를 다 드리지는 않습니다. 한 힌만 딱 취하는 것입니다. 2.3리터의 가루와 0.96 리터의 가름을 섞어서 만든 고운 가루를 한줌만 취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뿌립니다. 그러니 그 속에 반은 밀가루고 반은 기름입니다. 그것을 뿌렸을 때 반 정도는 안 되지만 하여튼 오 분의 얼마 정도 되는데 확 뿌리면 그게 사실은 손에 가루기는 하지만 그 속의 성분은 기름이 흠뻑 배어 있습니다. 타오르는 불 위에 던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남김없이 그렇습니다. 그 성분이 그 속에 기름이 오 분의 이부 정도 들어 있으니까 뿌리면 불 위에 떨어지기가 무섭게 확 타서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향기가 하나님께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맹물 같은 술을 부어서 불길을 끈다. 그래서 소제의 가루가 타지 못하도록 방해를 한다고 그러면 말이 되겠습니까?
이 번제 자체는 타서 올라가고 그 향기를 하나님께서 흠향하시는 것인데 그런데 거기다가 물 같은 술을 붓는다고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게 말이 되겠는가. 번제단에 불을 끄면 큰일입니다. 번제단의 불은 어떤 상황에서도 꺼지면 큰일 납니다. 그러니 생각해보십시오. 그렇게 해서 소제의 가루를 뿌릴 때 그게 거의 기름에 배인 가루이기 때문에 확 뿌릴 때 그 번제단의 불이 확 올라오면서 한번에 공중에서 다 타버리는 것입니다.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래서 그 기름이 또 순결한 기름이니까 하나님 앞에 향기로운 냄새가 쭉 올라갑니다. 그 사람의 전제를 붓는데 이것은 불길에 닿자마자 휘발유처럼 확 타서 다시 올라가면서 순간적으로 다 타서 증발해버리면서 술이 타는 그 향기로운 냄새가 하나님 앞에 쭉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이치에 딱 맞는 제사의 방식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우리들이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상번제를 늘 하루에 두 번씩 드리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이 번제가 의미하는 바는 우리 자신을 다 태워서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 그 목적의 완성을 위해서 자신들을 특별한 언약관계로 불러서 하나님께 헌신하며 살도록 만들어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언약백성들이 바로 그 목적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살게 된 것입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양한 직업에 종사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무슨 직업에 종사하든지 간에 바로 그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목적, 거기서 사람을 만들어놓으셨지만 죄 때문에 일그러진 그 목적, 그래서 구원받은 백성으로 다시 이 창조와 모든 세계가 여호와 하나님을 알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세상을 지으시고 인간을 만드신 목적대로 사는 세상을 위해서 무슨 직업에 종사하든지 거기 기여하면서 사는 것, 그 일을 위해서 자기를 다 태워드리듯이 헌신하면서 사는 것, 이게 바로 하나님이 그들을 부르신 뜻입니다. 그 일을 위해 헌신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번제물입니다.
그리고 그 위에 뿌려진 소제는 그렇게 자기만 다 바치는 일에 충성하는 사람들만 되어서는 안 되고 그렇게 외적으로 하나님 앞에 자기를 다 희생해서 섬기는 사람은 마땅히 내면의 세계가 자아가 철저히 깨져서 그래서 죄에 대한 사랑을 끊고 자기가 하나님 앞에 의롭고 잘났다는 모든 교만에 대해서 산산이 깨트려지고 성령의 은혜의 기름 부으심을 인해서 이 내면의 세계가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복종과 순종과 사랑, 이런 것들로 가득 차 있는 상태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게 하는 그 위에 순결케 하는 독주를 부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 드리는 헌신, 철저한 자기 깨어짐, 그 위에 부어지는 순결, 이것들이 바로 이 상번제의 핵심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자기가 하나님 앞에 온전히 자기를 태워드리도록 헌신하고 자기가 다 깨트려져서 하나님 앞에 주님이 기뻐하시는 성품이 되고 그 위에 순결하게 하나님을 섬길 때 마치 그 전제물을 뿌릴 때 불길이 확 일어나면서 모든 술을 다 태웠던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을 섬길 때 우리가 그렇게 순전하고 순결해질 때 우리가 섬기던 그 일에 하나님의 불길과 같은 축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여기에서 우리들이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이중의 순결을 성경이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중의 순결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는 헌제자의 내면의 순결이고, 또 하나는 그 사람이 섬기고 있는 일을 수행하는 헌제에 있어서의 순결입니다. 그러니까 헌제자의 순결, 또 하나는 헌제 행위의 순결 이 두 가지를 성경이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런 메시지들을 우리들에게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먹지 못하도록 금해져있는 강력한 마취성분이 있는 불붙는 그런 술을 부어서 그 소제 위에 뿌리도록 하나님께서 명령하셨습니다. 그것도 한 되박이나 되는 엄청난 양을 뿌려서 확 하고 타오르게 하셨습니다.
우선 제일먼저 생각할 것은 이중의 순결 가운데 먼저 헌제자의 순결입니다. 그러면 이 헌제자의 순결이란 이런 제사를 드리는 사람의 내적인 세계가 순전할 것을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헌제자는 하나님을 섬기면서 제사를 드리는 사람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가득 찬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순결이라는 것이 우리의 도덕적인 측면에서 보면 아무 죄도 짓지 않은 하얀 백지 상태를 순결이라고 하지만 그러나 성경적으로 보면 하나님 앞에서의 순결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신자의 마음에 꽉 차 있는 그 상태가 바로 순결의 상태입니다. 그래서 순결한 사람은 항상 뜨거운 사람입니다. 조금 있다가 설명하겠습니다만 이 순결은 신령한 열정과 아주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이렇게 헌제자에게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바는 무엇인가 하면 순결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 순결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자기 자신이 꽉 차있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남녀가 서로 사랑하게 되면 순결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뭐 요즘 보면 어느 교회에서 그런다고 하는데 남자들이 바람을 안 피겠다고 하는 서약을 받는다고 합니다. 백번 받으면 뭐 하겠습니까, 그렇다면 때려줄 것입니까? 아니면 수갑을 채워서 지하실에다 가두고 개밥을 주겠습니까? 어떻게 할 것입니까? 중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이런 것입니다. 한 사람의 남자가 한 여성을 깊이 사랑하면 그래서 그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 꽉 차면 이 세상에 여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한 사람의 여자와 나머지 사랑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이 사람이 너무 사랑스러운데 저 사람도 사랑스럽습니다. 어떻게 이 세상에 외로운 여자들이 많은데 하나만 사랑해줄 수 있는가. 그래서 그 사랑이 아무리 감동적이고 뜨거워도 순결할 수가 없습니다. 순결한 것은 하나의 사랑의 대상을 향한 사랑으로 꽉 차있을 때 그때 순결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받으시고 싶어 하시는 사랑이 바로 그런 사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있어서 첫 번째로 사랑을 받으시는 분이 되고 싶으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사랑을 받고 싶어 하시는 분이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둘째, 이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의 사랑이 전부이기를 원하십니다. 그게 바로 순결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뿌려진 이 불붙는 독주는 바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많이 헌신하고 또 자기가 많이 깨트려져서 또 자기가 성령의 은혜와 능력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끊임없이 순결해져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저렇게 열심히 섬기는 사람 설마 마음이 불결할까? 불결합니다. 저렇게 생명도 돌보지 않고 주님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이 자기가 안 깨졌을까? 그대로 있을 수 있습니다. 저렇게 스스로 자기가 깨트려져서 흐느껴 우는 사람에게도 불결함이 스며들 수 있을까? 있습니다. 그래서 번제가 드려질 때마다 전제가 함께 드려진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섬기는데 있어서 순결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이 순결해진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헌신의 대상이 되시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신자가 꽉 차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도 사랑을 받으시는 분이되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 사랑하는 사람으로 우리가 꽉 차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런 의문을 제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럼 목사님, 그럼 하나님만 사랑하면 남편은 사랑하지 않아도 됩니까? 그리고 자식들은 사랑하지 않아도 됩니까? 그것도 말이 안 되는 것이 성도 여러분 서로 사랑하십시오. 당신이 그래놓고 하나님 이외에는 아무도 사랑하지 말라. 그럼 말이 됩니까? 말이 됩니다. 설명을 해드릴 테니까 그냥 넘어갔으면 좋겠는데 친절을 베푸는 것입니다. 시간도 없지만, 자, 제가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경험하라는 책에서도 쓴 이야기인데 이런 것입니다. 어떤 여자가 한 사람이 있었는데 여러 가지 인생의 시련을 겪으면서 살아야 할 의욕을 잃어버리고 몇 번 죽으려고 자살을 했는데 그것도 운이 안 닿았는지 죽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사는 것이 지긋지긋하고 오히려 하루 종일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죽을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살아가다가 어떤 남자를 만나서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런데 이게 놀랍게 사랑에 빠진 것입니다. 둘이 너무 사랑해. 그럼 다시 죽을 생각을 하겠습니까, 안 하겠습니까? 안 합니다. 그러고는 이제 다시 떨치고 일어나서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 저 남자를 만나야지 되는데 이렇게 세수도 안 하고 오전 시간을 보내고 이렇게 밤이면 술이나 먹고 잠들고 그러면 안 되겠다. 그래서 이제 생활을 바꾸기 시작했습니다. 데이트도 하려니까 가서 머리도 자르고, 그리고 크림도 사서 바르고, 그리고 이렇게 하다가보니까 그 남자가 나를 좋아하기는 하는데 이 사람은 자기하고 지적인 수준이 게임이 안 되는 것입니다. 교양을 넓혀야겠다고 생각해서 책을 읽기 시작하고 잠깐 어디에 나가서 외국인을 만났는데 청산유수로 영어, 독일어, 중국어가 나옵니다. 이게 수준이 너무 안 된다. 그래서 나도 영어 회화라도 배워야지 되겠다. 그래서 학원에 가서 학원 증 끊어서 I'm boy부터 시작해서 배우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내가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은 것이 그것입니다. 그러면 그 여자의 사랑이라는 것은 그 남자밖에 없습니다. 온전히 그 남자만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다가보니까 헬스클럽에 가서 운동하다가보니까 이것도 괜찮습니다. 처음에는 억지로 의무감에서 했는데 해보니까 이것도 괜찮습니다. 나중에는 그냥 스트레스만 받으면서 영어 학원에 갔는데 어쩜 말문이 터지면서 옆에 있는 외국인하고 이야기를 나누니까 너무 기분이 좋습니다. 그 시간에 빠지지 않고 계속 갑니다. 그럼 내가 묻고 싶은 것이 그것입니다. 이 여자가 처음 이 남자를 사랑할 때는 사랑하는 게 100 이었는데 그런데 이제 그 남자가 관계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 이것도 배우고 저것도 배우고 했습니다. 그러면 그 남자를 100의 사랑에서 10을 떼어서 영어 학원에, 10을 떼어서 헬스클럽에, 10을 떼어서 무슨 교양서적을 읽는데 그런 것을 막 하다가 보니까 그 남자를 향한 사랑이 30% 정도 줄었습니까? 아닙니다. 그렇게 막 재미있게 헬스클럽에서 친구들을 사귀고 허리둘레를 재고 변한 것은 없지만 하여튼 그렇게 하면서 막 하다가 그 남자가 변심했다더라. 그래도 계속 헬스하고 영어 계속 배우고 그러겠습니까? 또 다시 죽어버리고 싶지. 그게 바로 문학적으로 여러분 이해가 가십니까?
이게 하나님만 사랑하면 그 하나님을 향한 사랑 때문에 교회도 사랑하고, 성도도 사랑하고, 남편도 사랑하고, 이 나라도 사랑하고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전기 줄에 마지막 콘센트 같은 것입니다. 그렇게 다 이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아주 간단하게 율법사가 계명 중 제일 큰 게 무엇입니까? 바보 같은 질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뭐라고 그러시는가 하면 제일 큰 계명이 이것이다.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을 다해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고 둘째도 이와 같으니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것이 바로 선지자의 율법의 강령이니라.” 그 강령이라는 말이 희랍어로 “크레마타이” 입니다. 박힌 못입니다. 못이 박혔는데 여기에 선지서도 걸리고 율법도 걸리고 다 걸리는 것입니다. 못이 없으면 다 떨어지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교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뭘 행하든지 간에 바로 그 계명에 걸려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거룩한 삶이라고 하는데 거룩한 삶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그 형상을 가진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둘은 나누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순결의 정의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꽉 찬 상태입니다. 주님 앞에 우리들이 헌신하는 삶을 살 때 우리의 내면의 세계가 그렇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면 이제 두 번째 헌제의 순결입니다. 헌제자는 그렇게 된다는데 헌제 행위에 있어서 순결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서 순결해지게 되면 순결하다고 하는 그 자체는 단순한 모방이 아니라 이미 순결한 사랑은 그 자체가 그 사람의 성향이고 경향성이고 지향성입니다. 그런 경향이나 성향 이런 것들, 지향성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도 모르게 자꾸 굽혀진다는 뜻입니다. 그런 성향이나 경향성, 혹은 지향성을 갖게 되면 그 사람이 하고 있는 일에도 그런 순결이 스며듭니다. 내가 아는 목사가 있는데 자기는 집에서 집안일을 잘한다고 나에게 자랑을 하고 사모님에게 잘해준다고 해서 어떻게 잘해주는가 하니까 설거지를 잘해준다고 자기 집 사람은 두 번 씻지만 자기는 세 번 내지 네 번을 씻는다고 해서 왜 그러느냐고 하니까 씻으면서 다 자기 집사람이 씻으면 자기가 물을 한번 붓고 다시 씻는다고 왜 그렇습니까? 청결한 경향성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저 같은 경우에는 시끄러운 것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설교하러 올라갈 때 소리가 나면 그러면 설교를 못할 정도로 방해를 받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뭔 소리가 나지? 아무리 들어봐도 안 들리는데 내 귀에는 들립니다. 그게 왜 그런가 하면 성향이 조용한 것입니다. 일단 사람이 목소리가 크면 난 진실성을 한 15%정도 디스카운트하고 그 다음에 듣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학교에 있을 때도 학생들과 상담하고 내가 중요한 이야기를 하면 저기에 있던 학생이 계속 의자를 끌고 내 앞으로 옵니다. 왜냐하면 중요한 얘기일수록 가청거리가 1미터 미만입니다. 1미터 밖에서는 안 들린다는 뜻입니다. 그게 성향입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조용히 이야기하기를 좋아하고 그런 사람은 시끄러운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싫습니다. 그것은 자기 안에 있는 성향입니다. 순결 자체가 그런 성향 내지는 지향성, 혹은 경향성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성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불결하게 일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불결하게 일하는 현장에 가서 너도 같이 일하자고 그러면 이 사람은 너무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너무나 괴로운 것입니다. 이 둘이 분리된다고 하는 것은 벌써 이 사람이 순결하지 않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분리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는가 하면 이 헌제자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순결로 꽉 차있으면 그래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꽉 차있는 상태면 그러면 하나님을 위해서 제사를 드리거나 헌제 행위를 할 때 그것이 어떻게 나타나는가 하면 순전함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기 때문에 나의 이 헌신의 행위를 통해서 나의 사랑하는 하나님이 나의 이 섬기는 행위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셔야 하고 나에게 일을 시키신 그 하나님의 마음에 만족을 드려야 한다고 하는 마음으로 자기에게 맡겨진 섬김을 구석구석까지 그것을 적용하는 것입니다.
그럼 결과는 어떻게 나오는가 하면 일을 보고 우리들이 순결하다고 하는데 그 순결이 이중적으로 적용이 될 때는 자기 개인에게는 순결로, 순결한 사람이 그 일을 할 때는 순전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만 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주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 돈을 빼돌리고 사기치고 협박하고 이러지 않습니다. 그것으로 딱 끝나고 나면 다시 또 순결해지고 그런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잘 모르시겠지만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많은 지출들을 10원까지 다 확인합니다. 그럼 사람들이 그럴 것입니다. 그래도 목사가 얼마나 쪼잔 하면 그것을 붙들고 주일학교 얼마 쓴 것까지 다 간섭하는가 하는데 그런데 본다고 해서 금액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섬김에 있어서 순전한 의심이 되는 지출들을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르칩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때로는 야단치고 때로는 보는 앞에서 내 돈으로 물어내면서 다시 이러면 혼난다고. 그렇게 합니다. 액수가 문제가 아닙니다. 밑에서 일하는 사람은 이상할 것입니다. 그런 큰 돈도 펑펑 쓰시다가 갑자기 작은 것 가지고 쪼잔 하게 목사님이 그렇게 안 봤는데 덩치에 안 어울리게 잘아, 그것은 경영의 문제만이 아니라 순결의 문제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초대교회에 공동체가 막 칙칙폭폭 거리는 기관차처럼 달려가다가 어디서 딱 멈추게 됩니까? 아나니와 삽비라에서 멈추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공동체의 순결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돈 문제만이 아닙니다. 돈 문제를 예를 들었을 뿐이지 돈 문제만이 아닙니다. 그러나 가장 객관적으로 부패하기 쉬운 부분들이 바로 그런 부분들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의 (?)리를 많이 넘어트리는 대표적인 욕망이 무엇입니까? 명예욕, 물질 욕이 아닙니까? 또 성욕도 물론 해당이 됩니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이것을 가지고 뭐 어떻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물질과 명예욕입니다. 이것이 종교적으로 적용이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재정적으로 투명하지 않거나 아니면 그렇게 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명예욕이 적용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어제 이야기한 것처럼 선거한다고 공고하니까 막 전화하고 난리쳐서 선거운동하고 안수집사 2개년 계획, 장로 되기 3개년 계획 세워서 진짜 있는 일입니다. 그래서 온전히 목사님에게 잘 보여서 나중에 뭐나 한번 해보려고, 그렇게 해서 뭐하겠습니까? 하나님이 인정을 안 해주시는 사람인데. 그런 식으로 이상하게 적용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안 됩니다. 그런 점에 있어서 순전해져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우리 교회에 직원들하고 교역자들에게 항상 하는 이야기가 그것입니다. 교회에 뭔가 발전적인 제안이 있으면 다 해라. 그러나 하나는 빼놓고 하라, 자기 자신에 관한 대우에 대해서는 스스로 아무도 말하지 말라. 순수함을 잃어버리게 된다. 저는 아무래도 더 많이 주셔야지 될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내가 살고 있는 집이 영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것은 안 됩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은 우리 목사님, 우리 전도사님 어려워서 어떻게 해요. 하면서 주고 본인들은 오히려 그것을 사양하고 그런 교회의 모습이 아름다운 모습이지 또 금년에도 엄청 달라고 하겠지. 어떻게 좀 빼낼까? 이러면서 으르렁거리면서 싸우는 교회가 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왜 이 문제를 얘기하는가 하면 뭔가를 합리적으로 해결한다고 하더라도 자기 자신의 이익에 관한 문제를 거론하면 그것이 나중에 순결의 문제로 이어지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그래서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꽉 차있는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일평생 섬기고 헌신하면서 살 텐데 그 순결이 하나님을 섬기는데 있어서 순전함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일평생 하나님 앞에 자기를 다 태워드리듯이 헌신하는 그 사람이 내면의 세계에 있어서는 하나님께 온전히 바쳐진 사람이고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순결하게 꽉 차있고 그가 섬기는 일에 있어서는 일체의 모든 깨끗함과 순전함으로 행해서 그래서 섬김과 그 섬기는 자의 내면의 세계가 전부가 순결하고 순전한 삶으로 온전히 이루어진 삶, 그런 사람을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하든지 이렇게 하면 안 됩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더 내가 훨씬 더 교회에서 순전하게 일하고 있는데,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우리의 표준은 누구 옆에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오늘날같이 이 불신앙이 창궐한 이런 시대에는 누가 옆에 있는 사람을 기준으로 삼는다고 하는 것은 바보 같은 일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정말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그 순결이 무엇이고 순전한 섬김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면서 그 길로 가야지 됩니다. 물론 우리가 거기에 완전히 합치할 수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 길을 향해 끊임없이 가려고 하고 못 가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면서 하나님 앞에 뉘우침으로 깨트려지고 그래서 못 가게 한 자기 사랑과 자기 의를 부수고 그리고 주님의 성령의 은혜로 새로워지고 또 다시 하나님 앞에 자기를 태워서 헌신하고 다시 하나님 앞에 순결해지도록 전제의 바침을 드리고 이렇게 반복하면서 온전한 사람으로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이것이 이중의 순결입니다. 이때 하나님의 은혜의 강력한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순결이 없는 헌신과 순결이 있는 헌신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이처럼 하나님 앞에 자기를 다 태워드리는 헌신의 섬김이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향기로운 제사같이 되기 위해서는 반듯이 자기를 순결하게 하는 전제의 작용이 필요합니다. 헌제 자가 하나님 앞에서 순결하게 될 뿐 아니라 그런 순결한 내면의 세계가 자기가 섬기는 모든 일에 있어서 순전한 동기로 스며들게 해야 합니다. 이때에 우리들이 이런 순결을 유지하지 못하는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가 무엇인가 하면 자신이 부당한 대접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그 순간에 그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일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 앞에서 일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비교하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서 자기 자신이 순결의 중대한 위협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이렇게 하나님 앞에 섬길 때 헌제 자가 하나님 앞에 순결하게 될 때 헌신의 삶 그 자체가 순결한 내면의 세계에서 이루어져서 순전함으로 이루어져야지만 되지 그렇지 않으면 헌제의 섬김은 물론 헌제자 자신도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지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자기가 하나님 앞에 섬기는데 있어서 자기의 마음이 순결하지 않아서 하나님 앞에 드리는 자신의 섬김이 거절될 때 그것은 곧 하나님 앞에 자기 자신이 거절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하나님 앞에 헌제의 섬김을 드리고 그러는데 하나님이 그 제사를 거절하시고 그 다음에 그 제사를 드리는 사람 자체를 거절하실 때 어떻게 됩니까?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창세기에 나오는 첫 번째 살인의 동기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아벨은 아벨대로 제사를 드리고 가인은 가인대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성경에 뭐라고 나오는가 하면 하나님이 아벨과 그 제물은 받지 않으셨다고 나옵니다. 그래서 제물과 제사를 드리는 아벨이 함께 묶여 있고 또 제물과 그 제물을 드린 가인이 함께 묶여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벨의 제사가 하나님께 흠향되었다고 하는 것이 아벨이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졌다는 뜻이고 가인의 제사가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하는 이야기는 하나님이 가인을 거절하셨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하나님이 거절하시니까 그 다음에 어떻게 됩니까? 가인의 마음이 순식간에 아주 강퍅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중대한 책망을 받습니다. 그리고 아무 죄도 없는 아벨을 단지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고 그 제사가 드릴 때 열납 되었다는 이유 때문에 그 아벨을 미워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은 들판에서 그 아우를 때려서 죽임으로서 인류 첫 번째 살인자가 되었습니다. 이게 바로 마음의 순결함이 없이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의 결국입니다. 그것이 바로 인류 최초의 살인의 계기가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고 사명을 받았을 것이 아닙니까? 은혜는 그 자체가 소명을 내포하고 있다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사명을 감당해나가는데 거기서 하나님을 위해서 헌신하도록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일에 하나님의 축복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 일에 축복이 없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기뻐하시지 않는다는 증거입니다. 물론 아주 드문 경우에 하나님이 매우 기뻐하시는 사람에게도 그를 특별히 연단하시기 위해서 예외적으로 평탄하게 일을 이루도록 하지 않고 여러 가지 난관과 어려움에 처하도록 만든 적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입니다. 하나님을 정말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득 찬 순결함이 있고 그래서 그분께 온전히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을 자기 안에 있는 순결함을 순전함으로 적용해서 온전히 자신이 섬겨드리고자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깨트려지는 사람에게 그 섬김의 축복이 없다고 하는 것은 그것은 이상한 일입니다.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 가슴이 아픈 것은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그런 식으로 확인하려고 들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기 섬김이 제대로 안되는 이유를 여러 가지 환경과 여건 탓으로 돌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무엇인가 하면 자기에게 맡겨진 사명은 이 땅에 있는 환경과 자원만 있으면 저절로 이루어지는 비즈니스와 같은 것이라고 하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왜? 안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모두 환경이고 모두 사람 탓이고 모두 돈이 없어서 그렇다고 할 것 같으면 그러면 그것들은 하나님이 안 주셔도 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저절로 일이 된다면 그러면 그에게 맡겨진 사명은 전혀 영적인 특성이 없는 이 세상에 있는 자원만을 결합해서 돌리면 이루어지는 일입니까? 여러분들이 아무리 신앙이 어리다고 할지라도 이런 이야기에는 동의할 수 없을 것입니다.
결국은 하나님을 한참 섬기다가 그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거기에 축복이 없습니다. 그러면 적당한 시기에 집어치우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이야기가 감당도 제대로 못하는 사람이 맡고 있는 것이 너무나 죄스러워서, 그 이야기는 잘 감당을 못하면서도 잘 해보려고 하는 사람에게 돌을 던지는 것입니다. 저 사람들은 양심이 없기 때문에 매우 부족한 모습인데도 거기에 달라붙어있는 것이고 나는 상당히 바른 양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부족함을 너무 많이 느끼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만두었다. 자기는 그렇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생각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려고 하는데 잘 안되고 잘 하려고 하는데 여러 가지 부족한 것이 있고 자기 안에 있는 죄와 여러 가지 순결하지 않은 것이 있어서 비비면서 괴로워서 씨름하는 것, 그것은 잘 못하고 있지만 아직 고무신을 거꾸로 신은 것은 아닙니다. 집어치우고 떠나간 것은 고무신을 신고 방향을 바꾼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 누구를 나무라는 것인지, 나쁜 사람입니다. bad christian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일을 그런 식으로 대하고도 복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누가 복을 주십니까? 그런 식으로 하나님의 사명을 대하고 여러분들이 복을 받으실 것 같습니까? 해보십시오. 만약 하나님이 복을 주시겠다고 그러면 내가 가로막겠습니다. 만일 그런 사람들이 축복을 받고 이 세상에서 변영을 누리면서 떵떵거리면서 살고 영적으로 충만해진다면 누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죽도록 충성하겠습니까? 나는 하나님이 해주신다고 하더라도 막겠습니다. 이런 엉터리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 이상 하려고 들지 않습니다. 나의 뼈마디 속에서 우러나오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그런 식으로 하고 은혜를 요구하는데 그 은혜를 받아서 뭘 하겠는지 나는 묻고 싶습니다. 곤고해서? 곤고함을 좀 풀어보기 위해서, 무슨 은혜가 우리 마음에 청량제입니까? 마음을 풀어주고 기분 좋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은혜가 존재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래서 하나님이 한번이 아니라 여러 번 기회를 주셨습니다. 이일을 하다가 집어치우면 또 다른 일을 주시고 그 일을 하다가 집어치우면 또 다른 사명을 주시고 또 다른 사명을 주셨습니다. 한번도 생명을 걸고 순결한 헌제자가 되어서 자기 깨어짐의 정신을 가지고 자신의 사명을 감당해나가면서 거기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확인하고 살고 죽으려는 사람이 있습니까? 어떻게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쓰겠다고 그러는데 싫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내가 한번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은 누구입니까? 어떻게 하나님이 여러분들의 소유를 쓰시겠다고 그러는데 난 못합니다. 난 드릴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그런 마음을 가질 수가 있습니까? 여러분들이 여러분의 것입니까? 사도 바울이 뭐라고 그랬습니까? “사나 죽으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것이다.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라.” 그렇게 하고 나는 말씀을 잘 정리됐고, 아니 왜 정리를 하는데, 뭐 하려고 정리하는데. 뭐 이단에 빠지지 않게,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은 그런 식으로 살면 사도 바울이 와서 설교를 하는 교회에 가도 결국 쓰레기 같은 신자로 종지부를 찍고 맙니다. 머리 속에 무슨 죄 죽임의 교리, 죄와 은혜의 지배의 교리 줄줄이 있을 것입니다. 아, 그거 끌어안고 지옥가나, 없고 지옥가나 마찬가지입니다. 뭐 공연히 그것을 배우느라 시간만 낭비했습니다. 아니 왜 그렇게 삽니까?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 묻고 싶습니다. 진짜 하나님 앞에 자기에게 맡겨진 사명을 위해서 목숨을 걸어보셨습니까? 생명을 걸어보셨습니까? 그래서 그곳에서 하나님의 축복이 없을 때 하나님이 나의 신앙의 현주소가 이것밖에 안 됩니다. 내가 이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내 섬김의 복을 안 주시는군요. 그래서 내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고 또 함께 섬기면서 주님을 얘기하도록 부르던 사람들 사이에 분열이 생기고 깨어집니다. 하나님, 내가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지지 않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 내가 총체적으로 바뀌어야 될 텐데 어떻게 해야지 되겠습니까? 나의 이 불결을 어떻게 해야지 되겠습니까? 기도해본 적이 있습니까? 참을 수 있을 때까지만 참는 것은 인내가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수없이 사명을 맡고 있어도 대접받고 편하고 또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보다가 안 되면 집어치우고 어떻게 하나님의 축복을 무슨 권리로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그 사명과 섬김이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제사인데 하나님이 그것을 거절하셨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도 거절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맡겨주신 사명이 다 엉망이 되고 거의 열매가 없고 하나님의 축복의 불길이 거의 사라졌는데 그 속에서 하나님 앞에 살아있는 영혼을 가진 섬기는 사람이 거기 있다고 하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여러분들의 축복이 없는 사역의 현장, 여러분들에게 축복이 없는 사명의 자리에서 여러분들은 하나님 앞에 거절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순결한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리고 여러분들이 행하는 그 섬김이 과연 그 섬김 구석구석에 순결한 내면의 세계에서 흘러나오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 그것이 동기가 되어서 순전함이 깃들어있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렇게 하고 하나님 앞에 무슨 축복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있을 수 없습니다. 구약에서나 신약에서나 하나님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 가까이 계십니다.
그런데 정말 이상합니다. 어쩌면 그렇게 남의 눈에는 뚜렷하게 보입니다. 그 사람에게 무슨 일을 맡겨도 마지막에는 다 쭈그러들어서 빈털터리가 됩니다. 무슨 일을 맡겨도 처음에는 다할 수 있을만한 일을 주었는데 시간이 지나서 그 사람이 계속 맡고 있으면 다 쭈그러들어서 빈껍데기가 되어서 결국은 사역 자체가 폐기됩니다. 그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라 여러 번 반복되었는데도 그 사람이 깨닫지 않습니다. 자기는 심각하게 하나님이 자기의 헌신을 안 받고 계시다, 그러면 그 일이 한번이 아니라 두 번 세 번 반복하면 그러면 하나님이 나를 기뻐하시지 않는구나. 이것을 생각하면서 깊이 본질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지고 고민해야 합니다.
그렇게 고민하면서 자기의 사명을 개별적으로 감당해나가려고 애를 쓸 때 그 일이 하나님을 향한 경건이나 사랑을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마음으로 개별적인 마음을 감당해나가려고 할 때 자기 안에 죄가 죽습니다. 그런 효과가 나타납니다. 막 하나님 앞에 떨리는 것입니다. 오늘도 내가 영혼들을 가르치는데 누구도 감화를 받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싫어하시는구나. 이제 나의 이 목양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축복이 사라지고 있구나.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엎드려집니다. 나의 죄가 너무나 많고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순전함을 잊어버렸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제 나의 섬김에서 하나님이 복을 거두시는군요.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이제는 일을 하고 안 하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까짓 것 뭐 이 사명지가 아니면 저 사명지로 갈수 있지, 그런데 거기로 가면 거기서 만나는 하나님이 또 틀린 하나님입니까? 여기서 관계하던 그 하나님이 장소만 바뀌었는데 여기서 안 기뻐하신 사람이 저기로 갔다고 해서 거기서 하나님이 기뻐하십니까? 그러면 이게 단순한 일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가 신앙인으로서 아니면 인간 존재로서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이 존재가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드리는 헌신이라고 하는 제사가 하나님께 거절당합니다. 그러면 제사를 드린 자기 자신을 하나님이 안 기뻐하시고 떠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것보다 더 큰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죽는 거야 오늘 죽을 수 있고 내일 죽을 수 있습니다. 그게 뭐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되겠습니까. 아무 때나 죽어도 죽는 것은 마찬가지지,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는 문제가 됩니다. 그런데 그런 식으로 고민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사명을 우습게 생각하는 사람치고 하나님께 사랑받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 머리 속에 뭐가 들었든지, 과거에 어떤 기가 막힌 신앙의 경험을 가졌든지 그런 무용담이 어떻든지 그것과 상관없이 지금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면의 세계가 순결할 뿐만 아니라 그 순전함이 자신의 삶 속에 적용되어서 섬김 구석구석에 배어든 사람, 그래서 그의 섬김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확인하고 그 섬김에 하나님의 축복이 없을 때 자기 자신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는 그 무엇이 자기에게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그래서 고민하고 하나님 앞에 시련하고 내가 어떻게 변하면 하나님이 나를 받아 주실만한 사람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나는 나의 섬김에도 하나님의 축복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러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하나님이 바라시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사명을 감당해나감으로서 성화되어가는 것입니다. 왜? 일만 기계처럼 하면 코피 흘리고 일하다가 교회마당에서 엎드려져 죽어도 성화 안 됩니다. 그 성질머리 그대로 갖고 죽고, 그 강퍅한 마음 그대로 끌어안고 죽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감당하면서 그 속에서 하나님의 관계를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면 내가 사명을 감당해나가는 이 자리에서 하나님의 축복이 없습니다. 영혼을 맡겨주면 회심의 역사가 없고 무슨 일을 맡겨주든지 하나님의 축복이 없습니다. 그것을 확인하면서 자기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점검하는 것입니다. 아, 내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지 않구나. 한두 번이 아니라, 한두 해가 아니라 이렇게 많은 날 동안 하나님이 사명을 맡겨주셨고 또 여러 가지 사명을 맡겨주셨는데 그 어느 사역 속에서도 하나님의 축복이 없구나. 하나님이 복주시지 않는구나. 그러면 하나님이 하나님 앞에 내가 잘못되었구나. 물론 거기에는 이 땅에 있는 자원이나 기회의 문제를 풀 수 있었는데도 못 푼 여러 가지 요인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본질적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무엇입니까? 나의 무엇을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으시기에 나에게 이런 상황이 벌어지게 되었습니까? 저를 도와주십시오. 어떻게 해야지 되겠습니까? 그리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게 될 때 깨어집니다. 그것이 일을 향해서 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일로 부르신 하나님 앞에 깨어집니다. 아, 그래 맞아. 내가 열심히 일했으나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없구나. 그리고 가만히 돌아보니까 사역을 감당하면서 여러 가지 불의한 욕심도 있었구나. 그리고 하나님 앞에 탐욕도 있었구나. 그리고 회개합니다. 그때 그 사람이 정결하게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이 맡겨주신 사명을 잘 감당해나가지 않으면 점점 나쁜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맡겨주신 사명을 잘 감당해나가면 처음에는 부족한 사람이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좋은 신자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사명의 자리를 맡겨주셨는데 이런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지 않습니다. 눈물 한번 흘려보는 적이 없이 오히려 지체들을 향한 원망으로 꽉 찹니다. 자신만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기가 하고 있는 일만 매우 많은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고 대접도 못 받는 일에 자기가 애를 쓰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그나마도 다 끊어져서 파괴됩니다. 그래서 제가 이런 하나의 경고를 만들어봤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없는 사명의 현장에는 영혼이 망가진 사명자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이중의 순결, 섬기는 자의 내적인 순결, 거기에서 비롯되는 섬김 그 자체의 순전함이 사라지게 되면 가장 큰 문제가 벌어지는 것이 신령한 열정이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신령한 열정이라고 하는 것은 본성적 열정과는 다른 것입니다. 본성적 열정이라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사람들이 아무 것도 아니고 그냥 무슨 특별히 내기를 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재미로 윷놀이를 하는데도 씩씩거리고 막 팔뚝 걷어붙이고 막 싸우려고 그러고 막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팔뚝 맞기 화투치기를 할 때도 핏대를 내면서 막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본성적 열정입니다.
그럼 신령한 열정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일하고자 타오르는 마음의 뜨거움입니다. 그 기원은 성령님이 지켜주시는 불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근본적인 동기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동기 자체가 성령으로부터 말미암은 열정이고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부터 비롯된 열정이니까 순결 그 자체가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가득 차 있는 마음의 상태니까 순결이 식어지면 하나님을 향한 사랑도 식어지고 그렇게 되면 신령한 열정이 떨어집니다. 왜 사람이 본성적 열정이 남아 있는데 신령한 열정이 뚝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일이 생기는가 하면 일을 잘 행해야지 되겠다는 본성적인 열심은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갈피갈피에서 이것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지 되겠다고 하는 그 사명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번 가르쳐드렸습니다. 한 사람이 일하면 그는 일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사람이 사랑하면 그가 일하는 곳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일하면 그가 일하는 것입니다. 그가 일하고 있을 뿐이라 그 뜻입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가 일할 때 그는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 뜻입니다. 이런 신령한 열정이 가슴 속에서 식게 되면 사역 전체에 불이 꺼지기 시작하고 그 다음에 영혼의 어두움이 드리워지기 시작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에서 잘 보십시오.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지 못한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축복을 못 받은 것이 아니라 저주를 받았습니다. 다시 한번 반복하겠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을 잘 못 섬겼던 사람들, 중요한 사명으로 불러내어졌는데 그가 하나님 앞에 그 사명을 잘 감당하지 못했을 때 더 많이 누릴 축복을 못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들을 거절하시고 미워하십니다. 그럼 이런 신령한 열정을 잃어버리는 것은 순결을 상실하는 것과 관계가 있다고 하는 것은 총론적으로 말씀을 드렸는데 구체적으로 어떨 때 어떻게 되면 이런 신령한 열정이 사라지는가? 신령한 열정이 감퇴되어서 결국은 그 하나님을 섬기는 사명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축복의 길이 사위어가게 되는가. 그것은 이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문제는 적극적으로 혹은 소극적으로 나누어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적극적으로 이럴 때 하나님을 향한 순결이 사라지고 그리고 우리의 모든 헌신이 드려지는 현장에서 축복의 불이 꺼지기 시작합니다. 우선 첫째는 하나님을 섬기고는 있지만 자기가 불순종하고 있는 영역들을 알면서도 방치할 때, 모르기 때문에 손을 못 대는 것은 좀 낫습니다. 그것도 영향은 주지만 그러나 내가 이 부분에 있어서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고 있다고 하는 것을 또렷이 알게 되었는데도 그것을 손대지 않고 그냥 방치하면서 그냥 섬겨보려고 애를 쓸 때 처음에는 차이가 안 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두 가지 현상이 나타납니다. 우선 첫째는 헌신하는 이 사람의 마음속에서 신령한 열정이 식기 시작합니다. 처음에 그 사명을 맡았을 때 잘 해서 우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려야지 되겠다고 하는 뜨거운 열정이 식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자기가 섬기고 있는 일에 서서히 하나님의 축복이 사라지는 광경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때로는 하나님이 놀랍게 막 부어주시면서 한순간에 딱 그치면서 하나님의 축복이 어제로 딱 끝나고 오늘은 완전히 축복이 없는 것처럼 그렇게 되는 경우도 있고 그러나 보다 더 많은 경우에는 저수지에 물이 줄듯이 서서히 하나님의 축복의 증거들이 빠져나가게 됩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됩니까? 사람들이 오래 되면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어제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전도사 때는 수련회를 가는 날은 아무 것이나 막 먹입니다. 그러다가 집에 오기 직전에 고기며 생선이며 좋은 것을 남겼다가 잘 먹입니다. 그러면 집에 가서 엄마가 물어봅니다. 야, 수련회 괜찮았니? 은혜 받았고 식사는 잘 했니? 또 부모들은 자라나는 아이니까 걱정을 합니다. 아, 엄마 말마. 우리 이번 수련회 매일 고기만 먹었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고기하고 좋은 것을 주다가 마지막 날이라서 빨리 끝내고 와야지 되어서 라면을 끓여주고 왔더니 그 앞에 좋은 메뉴를 다 잊었습니다. 행복하게 식사를 했는데 이번 수련회 밥이라도 좀 먹었니? 그러니까 엄마, 라면 끓인 것만 계속 먹다가 왔어. 멀리 있는 것은 생각을 안 하고 바로 전 것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됩니까? 잘 들어보십시오. 서서히 하나님의 축복이 빠져 나가니까 옛날에 하나님이 막 부어주셨던 생각은 잊어지고 바로 어제, 그제, 전 달이 이제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서서히 죽 떠먹은 자리에 표가 안 나듯이 서서히 되어서 하나님의 축복이 마지막에 다 꺼지는 것입니다. 그때에 사람들은 나의 섬김의 현장이 나만 이런 것이 아니라 오늘 이런 것이 아니라 원래 이렇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더 이상 기대를 갖지 않습니다. 그래서 불순종하는 영역을 방치하고 있으면 이 신령한 열정이 꺾이기 시작합니다. 그때 뭐가 필요하겠습니까? 전제의 독주 부음이 필요합니다.
두 번째는 사역의 성공, 섬김의 성공을 위해서 타협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을 책임감이 있는 사람들은 잘 해내야지 되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잘 해내기 위해서 세상과 타협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사명에 있어서 본말이 전도된 것입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네가 이 일을 해서 나에게 영광을 돌려라.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사명을 맡기셨으면 그 사명이 너무나 소중한 이유가 무엇 때문인가 하면 그 사명을 주신 하나님의 그 일에 관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일을 잘하겠다고 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 일을 할 때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 죄악 된 방법, 혹은 하나님이 명백히 기뻐하시지 않는 신앙의 본질을 양보한 방법을 택해서 그 일을 잘 이루어보려고 하는 그것은 이미 그 일에 자기에게 맡기신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그 일을 보는 사람이 아닙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사명은 매우 귀하지만 그러나 그 사명과 내가 하나님과 관계하고 있을 때 그 사명이 소중한 것이지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거나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일을 하면서까지 그 일을 하는 것이 정말 옳은 것인가. 옳지 않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때에 섬김에 있어서 하나님의 축복의 불이 꺼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그리스도보다도 자신이 하고 있는 섬김을 훨씬 높일 때 그때 이제 신자는 내면의 세계가 굳어지기 시작하고 하나님의 맡겨주신 사역의 불길이 꺼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의 사역이 아무리 중요하고 훌륭하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영원히 일일 뿐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목표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일로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주신 그분의 뜻을 준행하기 위해서 그 일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거룩한 일이라고 하는 것은 그 일과 하나님이 거룩하신 분으로서 간섭하고 계시기 때문에 거룩한 일이 되는 것이지 관계에서 끊어지고 나면 거룩한 일이 아닙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성구라고 합니다.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일이 거룩한 일입니다. 거기에 봉사하고 있습니다. 밖으로 끌어내면 폐품이 됩니다. 공장에 있을 때는 가구였습니다. 여기 올라오니까 성구가 된 것입니다. 밖으로 끌어내면 폐품이 되는 것입니다. 다 부스면 쓰레기가 되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그 다음에는 이제 소극적으로는 우선 첫째는 그리스도와 인격적이고 진실한 관계의 증진이 없이 기능적으로만 자신의 섬김에 개입하게 될 때 그때 신령한 열정은 식기 시작하고 사역에 있어서 하나님의 축복의 불길은 꺼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맡겨주신 일을 잘 하기도 원하시지만 그 일을 잘하면서 충성된 사람이 되어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이 우리의 인격을 바꾸어놓고 일이 우리를 새사람이 되게 만들 수가 없습니다. 우리를 새 사람 되기를 만드시는 분이 그 일을 통해서 우리를 간섭하시고 계시는 하나님 때문입니다. 일을 통해서 하나님이 맡겨주신 섬김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돈독해지고 더 깊고 진실한 신앙을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 깊은 인격적인 교제를 갖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의 증진이 없이 일에만 익숙해지고 기능적으로 거기 관여하게 될 때 처음에 있었던 신령한 열정들은 서서히 감퇴되기 시작하고 사역에 있어서도 축복의 불이 꺼지기 시작합니다.
또 하나는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이 모든 섬김의 동기가 되지 않을 때 그때 사역의 불도 꺼지기 시작하고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주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도 감퇴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더 설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너무나 분명한 것입니다. 그러나 일을 지속적으로 하는 것은 육체적인 열심만 있으면 되고 인간적인 책임감만 있어도 그 일을 끝까지 붙들고 수행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일에 행함에 있어서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이 동기가 계속해서 유지되게 한다고 하는 것은 끊임없이 자기를 점검하고 말씀과 성령의 은혜에 의해서 자기를 어거하고 자기를 하나님 앞에 복종시키는 끊임없이 자기 깨어짐이 뒤따르지 않으면 계속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그 일을 하면서 항상 주님의 마음을 읽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 일을 하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이게 어떻게 쉬운 것이 아닌 것을 알 수 있는가 하면 예수님이 여러분들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시고 여러분들을 구한 것이 보통일입니까? 특별한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그 놀라운 회개를 했고 그리고 세상사랑 다 줘도 주님과 안 바꾼다고 하는 고백을 한 것입니다. 그 주님과 만난 구원의 위대한 역사가 더 큽니까, 그 후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사명이 더 큽니까? 두말할 필요도 없이, 그렇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구원해주신 그 은혜를 능가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한참 시간이 지나고 보면 객관적이고 아주 냉담한 마음으로 구원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죄의 지배아래 있는 신자의 특징이 무엇인가 하면 구원을 일상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기본으로 주는 것이고 그 다음에 뭐 좀 없데. 뭐 복이 터졌다고 하든지, 부자가 되었다든지 뭐 그런 것 없데.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볼 때 그것보다 더 작은 일에 대한 감격이 그를 끝까지 주님을 사랑하도록 붙들어준다고 하는 것은 쉬운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이 더 이상 동기가 되지 않기 시작할 때 처음에 가지고 있었던 신령한 열정의 불들은 꺼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마지막은 사역에 대한 섬김에 대한 조급함으로 영혼의 싫증과 타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나에게 그런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이제 열심히 설교사역을 하고 있을 때인데 자기가 하나 권면하고 싶답니다. 그래서 뭔가 하고 물었더니 당신은 은혜는 많이 받았지만 너무 바쁜 것 같다고 그러면서 좀더 한가하게 시간을 가지고 그리고 주님을 묵상하면서 그렇게 살라고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정말 고맙다고 그리고 나도 그렇게 하려고 노력을 하고 있는 중이라고 충분히 내가 그 충고를 받아들였다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거기에다가 단서를 달았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그 이야기는 충분히 인정하지만, 그것은 즉시 이야기한 것이 아닙니다. 즉시 이야기를 하면 얼마나 기분이 나쁘겠습니까! 그 후에 만나서 나와 관련되지 않고 다른 이야기를 하다가 그것도 충분히 맞는 이야기지만 그리고 몇 달 후에 이야기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뭐라고 그랬는가 하면 이런 생각을 해봐라.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했기 때문에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게 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일을 너무나 많이 했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사람도 있고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었기 때문에 주님을 깊이 안 사람이 있었는가 하면 시간적인 여유가 있었기 때문에 타락한 사람도 있다. 그러니까 그것도 같이 한번 생각을 해야지 된다.
역설적으로 설교자들은 세 가지 책을 잘 읽은 사람이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계시의 책인 성경의 책에 달통한 사람들이었고, 또 하나는 인간 마음의 책에 아주 익숙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죄인의 마음과 진실한 성도의 마음을 꿰뚫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늘 의 사같이 섬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또 무슨 책에 익숙해졌는가 하면 자연의 책에 깊이 이해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전설적인 찰스 스펄젼은 설교를 준비하기 위해서 늘 호숫가를 찾았고,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설교를 준비하기 위해서 종종 깊은 산속을 찾았다고 하는데 조나단 에드워즈는 1733년에 생애적인 변화를 받을 때 건강을 위해서 숲 속으로 들어가 말을 몰고 있을 때 그 숲 속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모세는 가시나무 떨기 그 광야의 자연 속에서 주님을 만났고 밧모 섬에서 요한은 푸른 바다와 완전히 인적이 끊긴 절해고도의 자연으로 에워싸인 섬에서 말일에 이루어진 위대한 계시를 보았습니다. 바울은 회심한 이후에 아라비아 광야에 갔으니 그 역시 자연 속에서 주님을 알아갔고 세례 요한도 주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다음에 광야에서 받기까지 광야에서 자랐고 예수님도 사역을 시작하기 첫 번째 발걸음을 광야에서 자연과 함께 하나님과 독대하면서 40일을 마시지도 먹지도 않으시면서 하나님 앞에 자연과 더불어 시간을 보내셨습니다. 엘리야의 그 놀라운 회복도 역시 그런 자연 속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렇게 자연 속에서 놀랍게 쉼을 얻음으로 말미암아 회복되거나 주님을 깊이 만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고 또 찾는 사람들이 되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들에게는 특징이 있었는데 그들은 어느 자연 속에 있든지 간에 하나님을 향한 싫증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열렬함과 신령한 열정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외로운 옥 속에 있으면서 사도 바울은 복음을 아는 계시의 놀라운 증거를 경험했습니다. 아라비아 광야에서 복음의 이치를 터득하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싫증으로 꽉 찬 사람이 있다고 할 것 같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도 요한처럼 바다의 절해고도의 섬에 보내면 어떻게 하든지 거기서 바다낚시나 할 것이고, 그리고 세례 요한처럼 광야에 보내면 꿀 따 먹으로 뛰어다닐 것이고, 또 그 사람이 만약에 영혼에 대한 싫증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이 조나단 에드워즈처럼 숲 속으로 들어가면 삼겹살이나 구워먹지 뭐 하겠습니까! 그러니까 결국 문제가 되는 것은 영혼의 열렬함을 가지고 있으면 사람들에게 부딪히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일에 있어서 너무 헌신해야지 되기 때문에 순간순간 사역 속에서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여러분들에게 가르쳐준 경건의 기술 가운데 시간을 정해놓고 하는 이외에 수시로 하나님을 찾는 기회가 필요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너무나 섬기는데 바쁘고 힘겨울 때 잠시 눈을 감고 차 속에서 주님을 이름을 간절히 부릅니다. 내가 이 일을 안 할 수가 없습니다. 그게 내가 감당해야 할 일입니다. 지금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싶은데 이 일이 나를 어떻게 놔주지 않을까. 그때 그 일을 기쁨으로 하면서 하나님 앞에 이렇게 헌신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찾는 시간을 충분히 갖지 못한 것을 호소하면서 그에 못지않은 은혜를 달라고 하나님 앞에 빌 때 우리 눈에서 눈물이 흐르는 것입니다. 그런 영성을 유지하고 있으면 그가 좀 바쁘다고 할지라도 영혼에 손해를 보지 않고 주님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사역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전설적인 설교자 조지 윗필드 같은 사람이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감당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영혼의 싫증과 섬김에 대한 조급함이 타협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는가 하면 빨리 해야지 되는데, 더 많이 해야지 되는데, 그런데 영혼이 하나님을 찾기 싫어합니다. 그런데 기도 시간을 빼서 여기에 집어넣고, 성경 읽는 시간을 빼서 여기에 집어넣고,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할 시간을 빼서 여기다 집어넣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너무 바빠서 기도할 시간이 없고, 그것은 거의 맞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서 섬김에 대한 조급함 때문에 영혼의 싫증과 야합을 해버립니다. 그렇게 될 때 신령한 그 일이 이 속에서, 섬기는 자의 내면의 세계 속에서부터 꺼지기 시작하고 그 신령한 은혜의 불길이 축복의 불길이 섬김의 현장에서 서서히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필요한 것이 독주를 붓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제물을 거기에 붓는 것입니다. 사위어 타는 그 번제단 그 위에 한 되박이나 되는 그 전제에 그 독주를 부을 때 그 모든 것을 태우면서 불길이 확 타오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섬기는 이 섬김이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이 있어서 충천하는 화염과 같은 부름의 역사가 있어서 그냥 이를 악물고 노력해서 하나씩, 하나씩 이루어지는 그 일도 우리는 해야 되는 것입니다. 부름이 없는 날에도 우리는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그래서 섬기면서 우리의 눈에 눈물이 흘러야 합니다. 하나님, 하늘을 열어주십시오. 하늘을 활짝 열고 미력한 죄인들이 하나님을 섬기는데 하나님의 축복이 없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마음에 기쁨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많은 자원을 낭비하면서도 하나님과 영혼을 조금밖에 섬기지 못하고 많은 자원들을 가지고 애쓰면서도 우리는 강물처럼 흐르지 못하고 실개천밖에 흘러가지 못합니다.
오호! 주님 우리가 어떻게 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 될 수 있겠습니까?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존재, 이 땅에 살아있는 모습만 봐도 주님의 마음에 기쁨이 되고 우리 살아있는 것이 주님의 마음에 즐거움이 되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있겠습니까? 원하시면 내 뼈를 갈고 원하시면 내 살을 깎아서라도 주님이 원하시는 그 사람, 주님이 사랑하시는 그 사람, 무엇이든지 맡겨주시면 하나님이 그 섬김도 받으시고 그도 받으시는 그런 사람이 되겠습니다. 하나님 제가 어떻게 해야지 되겠습니까? 그리고 하나님 하늘의 문을 열어주십시오. 우리의 섬김이 충천하는 화염과 같게 해주십시오. 수많은 영혼들이 돌아오고 주님을 멀리 떠났던 악한 죄인들, 이 세상에 그 무엇으로도 고쳐질 수 없었던 희망이 없는 죄인들이 회개하고 주님께로 돌아와 주님을 위해 사는 위대한 역사가 일어나서 망가진 이 세상이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도록 하나님 우리가 거기에 기여하는 사람들이 되도록 하나님 도와주십시오. 어떻게 내가 변해야 내가 섬기는 여기에 주님의 축복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하나님 앞에 깊이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돌아봐도 하나님 앞에 내세울 것이 없습니다. 진짜 주님이 하늘로부터 뻗어 내리는 손에 의해서 나를 갈고 부스어서 그 은혜로 다시 빚어주시지 않고는 도저히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 모습 이대로 주 받으옵소서
날 위해 돌아가신 주 날 받으옵소서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엎드립니다. 나는 나 자신을 깨트릴 수 없고 주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것은 깨달았는데 내 자신의 힘으로는 주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으로는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간절히 내 모습 이대로 주 받으옵소서, 나도 기뻐하지 않고 주님도 기뻐하지 않는 모습이지만 주님은 사람을 고치시는 분이고 망가진 죄인을 새롭게 하시는 분이시니까 그 사랑으로 나를 사랑해주십시오. 나는 공로 없으나 날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예수의 그 구속의 공로로 인하여서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날 도와주십시오. 그리고 간절히 기도할 때 우리는 깨어집니다. 주님의 손으로 우리를 빚으십니다. 이것이 헌신과 성화의 관계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이 놀라운 상번제의 계명은 시내 산에서 주어졌습니다. 시내 산에 그들이 다다랐을 때 그들은 바로의 압제에서 구원받은 사람들이었고 광야 길을 오는 동안에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보면서 주님이 도와주신 은혜를 경험하며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을 향해 늘 자신을 태워드리고 깊이 깨트려져서 주님의 은혜로 다시 빚어지고 나아가서 너희 자신을 독주의 전제로 순결하게 하라는 이 상번제의 명령이 주어졌습니다. 그들이 시내 산에서 이 계명을 받았지만 우리는 갈보리 언덕에서 그 계명을 받습니다. 거기에서는 두려움 속에 나타나는 하나님 밖에는 없었지만 갈보리 언덕에는 우리 모두 지푸라기 같은 인간들의 죄를 짊어주시고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의 고난이 거기에 있습니다.
우리의 죄를 위해서 다 못 박히시고 주님이 만드신 세상에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헌신하지 않는 우리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죄악 된 경향성을 따라 살면서 깨트려질 줄 모르는 반역 때문에 주님이 거기서 못 박히셨습니다. 순결해질 줄 모르는 사악하고 불결한 죄인들을 대속하시기 위해서 흠 없으신 그분이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셨습니다. 시내 산에서는 돌비가 주어졌으나 이제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쓰시던 그 율법을 갈보리 언덕에서는 우리의 가슴에 사랑의 율법으로 쓰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가슴에 예수님의 사랑이 새겨진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마음속에 깊이 새겨진 이 사랑의 율법을 가지고 예수님이 나를 위해 이 언덕에서 피 흘리고 고난을 당하고 죽으셨으니 이제는 내가 얼마를 이 땅에 살아있든지 내게 주시는 하늘의 자원과 땅에 있는 자원, 그리고 마지막에 쓰시겠다는 내 생명까지도 남김없이 모두 쪼개졌던 번제물처럼 쪼개지고 보혈로 깨끗이 씻겨져서 한 방울도 남김없이 다 태워졌던 번제물처럼 나를 태우면서 헌신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섬길 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그 보혈의 십자가를 의지해서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죄에 관한 사랑에 깨트려지고 자기를 스스로 뽐내는 자기 의에서 깨트려져서 산산이 부서지고 은혜의 성령이 우리의 마음속에 끊임없이 부어지고 우리를 그 깨어진 가루와 같은 마음으로 우리를 빚어서 주님이 원하시는 형상을 만들고 그렇게 섬기면서도 아침저녁으로 이 독주의 불붙는 전제를 드려서 우리의 마음속에 아침 이후에 저녁 제사 이후에 돋아났을지 모르는 모든 불결과 하나님을 위해 순전하지 않은 것들을 다 태워버리는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그 모습이 바로 우리들이 꿈에도 그리워하는 진실한 성도의 모습입니다. 우리 주님이 바로 그렇게 사셨습니다. 머리 둘 곳 없는 생애를 사시면서 자기를 다 바치셔서 이 땅에 있는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고 고생하는 백성들을 섬기셨고 위로는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셨습니다. 자기의 옥체를 다 찢어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고 자기의 옆구리에서 흘린 그 피를 우리를 위한 전제로 모두 쏟아부어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그리고 어떻게 하나님을 섬겨야지만 섬기는 우리도 거룩해질까요? 이제는 여러분들이 이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삶으로 대답해야 할 시간입니다. 우리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성화와 헌신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