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단과 하나님의 계획
(2014년 주일오전)
설교기간|2014년 09월 28일-10월 05일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8년 01월 05일
목 차
1. 나의 믿음, 순금 같이 되어(욥 23:10) 2014.09.28 주일오전 1
2. 예수의 죽음을 짊어질 때(시 119:67) 2014.10.05 주일오전 9
십자가에 감춰진 은혜 1 (2015.10.19 가을말씀사경회 새벽)
연단과 하나님의 계획(2014.9.28 주일오전1)
연단과 하나님의 계획(2014.10.5 주일오전2)
연단과 하나님의 계획(1) 2014. 9. 28 주일오전예배
< 나의 믿음, 순금 같이 되어 >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욥 23:10)
I. 본문해설
- 대부분의 고난이 무지 속에 다가옴
- 하나님의 성품과 자신에 대한 무지
- 보복 아닌 순전함을 위해 고난주심
- 엘리바스의 회개 요청과 욥의 호소
II. 연단하시는 하나님
A. 나의 인생길이 있음
- "내가 가는 길을"(derek immadi)
- "나와 함께 하는 한 길" 내길+인생
- 우리를 개별존재로 창조하신 섭리
- 인류 전체 안에 나의 인생계획 있음
- 내 인생의 의미 물으며 살아가는 길
- 꽃처럼 향기나는 지위 아닐지라도
- 그 의미는 관계 안에서 행복에 있음
B. 나를 아시는 하나님
- "그가 아시나니"(ki yadah)
- "알다"(know)의 완결형 동사의미
- 당신 자녀들을 향한 앎은 곧 사랑임
- 단지 지식 아니라 행복에 대한 관심
- 독수리 날개로 업어 나르심(출 19)
- 성자를 아시는 하나님(요 10:15)
- 자기 양을 아시는 예수님(요 10:14)
- 주께 기억된 존재임을 잊지 말라
C. 단련 받을 때가 있음
- "단련하신 후에는" (bechanani)
- "그가 나를 단련하셨다" (pretst)
- "bachan" 흑연도가니에 금 제련함
- 금이 녹는 온도 1063, 쇠는 1535도
- 용암온도 700~1200, 유리 4~5백도
- 태양표 면 6천, 태양 중심 1.5억도
- 광석녹음과 마음녹음, 재료분리
- 산의 장작과 불 조각: 대가의 명품
- 명품 신자로 만들어 행복하게 하심
D. 나를 순금 같게 하심
- "순금같이"(kazzahab) 정제된 금
- 단지 태도 아닌 인간본성의 거룩함
- 행복을 소유와 행함 아닌 존재에 둠
- 거룩한 성품 안에 하나님이 거하심
- 순금상태는 수 없는 연단 반복 통함
- 순금과 같이 태어나는 사람은 없음
- 끊임없는 연단 통해 거룩 정결해짐
- 우리는 외적행복 주님은 내적성결
- 존재의 울림을 주는 불변하는 생활
III. 적용과 결론
- 수많은 삶의 사태와 고통스러운 시련
- 탁월함은 시련의 불변적 의미발견
- 매 순간 신앙을 행사함으로써 깨달음
- 좋으신 하나님이 그대를 기억하심
- 불같은 시련 속에 자기 사랑을 태움
- 하나님께서 당신 자녀와 함께하심
연단과 하나님의 계획(2) 2014. 10. 05 주일오전예배
< 길 찾게 하는 연단 >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
(시 119:67)
I. 본문해설
- 하나님 말씀의 영광을 노래한 장임
- 22개 단상의 두문법으로 이루어짐
- 다양한 삶의 사태와 고난을 사용함
- 명철과 지식의 소중함을 깨닫게 됨
II. 고난 당하기 전의 삶: 그릇 행함
- 히“shogeg”-going astray: 갈 길을 잃다
- 자신의 참 모습을 직면하기 어려움
- 주 말씀으로 늘 깨우치시는 하나님
- 매일의 삶에 몰두함과 죄의 속임들
- 외적생활이나 고백과 다른 실제 삶
- 거룩한 일에 힘쓰나 동기가 변질됨
III. 고난 당한 후의 삶: 말씀지킴
- "지키다" shamarti – 파수, 사수하다
- 말씀지킴: 계명의 준수(믿음+생활)
- 범죄하지 않음+하나님 뜻을 이룸
- 내면의 경외심과 외면의 공경이 일치함
- 마음의 길을 따라 흐르는 인간의 삶
- 고난 통해 마음 상태와 방향 바꾸심
IV. 고난과 영혼의 변화
- 신앙으로써 삶의 사태와 고통을 해석함
- 동물과 인간 차이는 고통의 의미를 물음
- 모든 고통들이 연단의 계기가 되지 않음
- 고생~상처, 고난~연단, 신앙의 반음
- 환경과 자기 반응을 객관적으로 성찰함
- 마음은 자기편이라 객관적 진리 필요함
- 삶의 사태를 받아들이고 믿음을 행사함
- 연단 속에서 그리스도의 고난을 생각함
V. 적용과 결론
- 하나님은 환경으로도 말씀 하신다
- 자신으로부터 이탈해 객관적으로 보라
-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은혜를 받으라
십자가에 감춰진 은혜 1 (2015.10.19 가을말씀사경회 새벽)
연단과 하나님의 계획(2014.9.28 주일오전1)
연단과 하나님의 계획(2014.10.5 주일오전2)
연단과 하나님의 계획(2014.9.28 주일오전1)
십자가에 감춰진 은혜 1 (2015.10.19 가을말씀사경회 새벽)
십자가에 감춰진 은혜 1 (2015.10.19 가을말씀사경회 새벽)
연단과 하나님의 계획(2014.9.28 주일오전1)
연단과 하나님의 계획(2014.10.5 주일오전2)
1. 나의 믿음, 순금 같이 되어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욥 23:10)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우리는 순탄한 삶만 살다가 가는 것은 아닙니다. 너무나 많은 생애 순간들이 우리가 원하지 않는 삶의 사태들 속에 전개됩니다. 그리고 고통은 바로 그 속에서 느끼는 인간과 인간의 정신과 영혼의 아픔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선하신 하나님이 우리 인간들이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그렇게 고통을 당하게 허락을 하실까? 특히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이 당신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돌아가시게 하면서 까지도 사랑하셨는데 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이런 저런 고통이 끊이지 않는 것인가 하는 신정론들의 의문들을 제시하게 됩니다. 저는 이제 이런 일련의 문제들을 변론을 위해서가 아니라 어떻게 우리 자신의 삶을 성숙시키는데 유용한 수단으로 사용할 것인가 하는 것을 연단과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시리즈로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엘리바스가 욥에게 회개를 촉구하고 하나님과 화목하라고 요청한 후에 나온 욥의 대답을 다루는 문맥 안에 있습니다. 여기에서 욥은 내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만나서 내가 그러한 죄와 잘못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아뢸 수가 있을까? 그렇지만 어디를 봐도 하나님이 안 계시는 구나 그런데 확실한 사실 한 가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가는 길을 아시고 또 그가 자기를 연단하신 후에는 순금과 같이 되어서 나아올 것이라고 하는 신앙적인 확신이었습니다.
II. 연단하시는 하나님
A. 나의 인생길이 있음
우리가 읽은 이 구절에는 적어도 간과하고 넘어갈 수 없는 네 가지 결정적인 메시지가 숨어있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주제, 곧 연단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이 하나의 주제에 통합될 수 있는 내용입니다. 첫째는 우리 인생에 각자 자기의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그러나 그가 나의 가는 길을 아시나니” 그랬습니다. 우리말 성경에서 ‘나의 가는 길’이라고 번역된 이 부분은 히브리어로 ‘데레크 임마디’(דֶּרֶךְ עִמָּדִי)라는 두 개의 단어로 되어 있는데 직역을 하면 ‘내가 가는 길이 아니라 나와 함께하는 한 길’ 그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데레크’(דֶּרֶךְ)라고 하는 것은 인생길을 나타내는 은유입니다. 그런데 오늘 욥은 “그가 나와 함께 하는 한 길을 아시나니”라고 말합니다. 즉, 개별적인 존재로 태어나서 자기 개인의 인생길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우리 인생의 의미를 나 혼자만을 생각하면서 물을 수는 없습니다. 산상 세미나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의 인생의 의미라고 하는 것은 끊임없는 관계 속에서 답변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나라와 어떤 관계를 맺고 또 나라가 나에게 무엇인가? 국가란 나에게 무엇인가? 국가란 무엇인가? 또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생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가족이란 무엇인가? 교회란 무엇인가? 이런 끊임없는 공동체적인 의미 속에서 내 인생의 의미가 발견되는 것이지 그 모든 것과의 단절 속에서는 나의 인생의 의미라는 것도 찾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질문하는 힘은 이게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능력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인생에 대해서 질문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답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자신의 삶을 지탱할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자면, 우리는 잘 사는 것에 대해서 공부했습니다. 나만 잘 살아서 되는 것이 아니라 나와 관계를 맺은 모든 공동체들이 그 공동체로서 잘 살고 잘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하지 거기에 관계 맺고 있는 나도 행복해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이란 무엇인가 라고 하는 질문에 답하지 않으면 잘 사는 것에 대해서 답할 수 없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엄청난 힘을 미치고 있는 국가는 무엇인가? 과연 국가는 잘하고 있는가? 이 사회는 무엇인가? 이 사회는 정말 잘하고 있는 것인가? 이런 질문은 고차원적이고 남의 행복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나의 행복과 직결된 질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책임 있는 민주 사회 시민으로 더욱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삶을 사는 방식입니다. 그런데 무슨 뜻을 세운 것처럼 사람들은 거의 공부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국가가 무엇인가? 사회가 무엇인가? 이런 것에 대해서 질문할 줄 모릅니다.
그러면 국가란 무엇인가, 사회란 무엇인가, 어떤 인생이 잘 사는 인생인가 라고 하는 것에 대한 그런 지식은 하나도 없느냐 있습니다. 있는데 그 지식의 나부랭이들이 너무나 인생을 주체적으로 살아가기에는 너무나 허접한 것들입니다. 그 지식을 여러분이 대부분 어디서 주워들었습니까? 조선, 동아, 중앙일보, KBS, SBS, MBC, 그렇지 않으면 한겨레신문, 아니면 그것보다 더 접속하기 편한 인터넷에서 주워들은 이야기들입니다. 그런 허접 쓰레기 같은 정보들을 가지고 여러분이 거기에 여러분의 인생을 건다면 너무 무책임한 것입니다. ‘그럼 목사님 그런 것도 안 봅니까?’ 다 봅니다. 그렇지만 아무것도 믿지는 않습니다. 물론 지금 비가 오고 있다 그것은 믿습니다. 누가 죽었다더라 믿습니다. 미국 대통령이 죽었다더라 믿습니다. 유 병언 씨가 저절로 죽었다더라 그것은 안 믿습니다. 안 믿습니다. 그럼 실체가 무엇인가? 모릅니다. 무엇인가 감추고 있다는 것이 있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그래서 내가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뭐냐 하면 그 언론이 이쪽에 있는 언론이든, 저쪽에 있는 언론이든지 간에 그 언론과 대중 매체 앞에서 자신이 밀가루반죽 같은 존재가 되면 안 됩니다. ‘무엇이든지 나를 빚어라. 내가 기꺼이 되리라.’ 그것은 예수님에게나 그렇게 하는 것이지 이것은 조중동이나 한겨레나 무슨 인터넷이나 이러한 찌라시나 이런 것에 자기를 그렇게 맡기는 것은 무책임한 것입니다. 그럼 국가란 무엇인가? 얼마나 중요한 질문입니까? 그것을 알아야지만 너는 잘못하고 있다라고 야단을 칠 수도 있고 저항을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의 인간의 존재는 이 끊임없는 공동체와의 관계 속에서 우리 자신이 규정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을 충분히 인정하면서도 우리 자신의 개별적인 인생은 없고 그 모든 구조 속에서 우리는 그냥 하나의 부속품일 뿐이라는 생각은 성경적인 인생관이 아닙니다. 회사에는 우리 그럽니다. ‘너 불평 그렇게 많아. 너 그만 둬. 너 그만둬도 일할 사람은 많아.’ 그 사람 그만둬도 아무나 갖다 놔도 제품은 생산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인생은 그러한 인생이 아닙니다. 인류가 생겨난 이래 지구상에서 살다가 간 사람의 숫자가 과학자들이 1천억 명쯤 된다고 합니다. 그 1천억 명 중 지문이 같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비록 이 세상에 눈에 띄지 않고 잡초처럼 태어났다가 이슬처럼 사라져가는 인생이라고 할지라도 나의 인생은 지문과 같아서 다른 사람에 의해서 얼마든지 대치될 수 있고 다른 사람에 의해서 살아내어질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인생이 아닙니다. 단 한번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바로 그 의미를 하나님 앞에서 물으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길 가다가 나면서부터 소경이 된 자를 만나셨습니다. 제자들은 이 사람이 소경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그러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다.” 다시 말해서 이 세상에서 정말 쓸모없어 보인다고 생각되는 그런 사람들조차도 각기 하나님이 그 사람을 그 사람으로 창조하신 아주 독특한 목적을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났고 그 목적을 지닌 인간은 존엄하고 가치 있는 인간으로 인식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늘 말씀드립니다. 기독교인의 높은 신앙심은 삶의 우연적인 껍질에 얽매이지 않고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으로서 그의 존엄과 가치를 인식하는 데에 있습니다. 그러면 내가 걸어가도록 하나님 앞에 지정된 인생의 길, 어떤 사람은 모든 사람들에게 박수갈채를 받는 탁월한 지위에 오르기도 하고, 어마어마한 재산을 모아 수하에 수많은 사람들을 지배하기도 하는가 하면 유별난 재능을 타고나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박수를 치며 기꺼이 팬이 되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사람이 못 됐다고 해서 나의 인생은 가치가 적고 다른 사람 누구든지 다 살아낼 수 있는 그러한 의미 없는 획일화된 내가 소속된 공동체의 한 부속품일 뿐이다 라고 생각하는 그것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진정한 휴머니즘이 아닙니다. 그래서 자신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나 이외 어떤 타자에 의해서도 대치될 수 없는 개별적인 인생의 길을 가지고 그 길을 통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실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나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셨다는 데서 가슴이 떨리는 존중심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때에 거기에서 하나님 앞에 끊임없이 자기 인생의 의미를 물으며 살 수 있는 자신감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여러분을 높은 지위와 많은 재물을 줄 것이라고 약속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아무 의미도 발견하지 못했던 우리의 인생의 길에 그런 의미를 발견하며 하나님 앞에서 그 의미를 물으며 살 수 있는 힘을 주는 종교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비록 꽃처럼 향기 나는 아름다운 지위는 아닐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나의 티끌 같은 삶의 존재를 물으며 순간을 지나면서도 영혼과 관련을 맺고 이 세상에 썩어 없어질 사물들과 관계하면서도 그 사물 속에 담겨있는 불변하시는 하나님의 성품과의 관련된 의미를 물을 수 있는 그런 삶을 하나님 앞에서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아무도 간 적이 없고 지금도 가는 사람이 없고 앞으로도 결코 반복될 수 없는 단 하나밖에 없는 여러분의 인생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셨을 때에 바로 우리의 인생길에서 만나는 그 모든 삶의 사태들 속에서 우리는 의미를 발견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 의미에 대한 답을 주는 존재로 창조하신 것입니다.
식물학자들의 이야기인데 우리는 이렇게 나무의 향기나 꽃의 향기가 꽃 자신이 즐거워서 내는 거라고 생각하지만 식물학자들의 이야기는 곤충이나 외부의 침입에서 자기를 보호하기 위한 방어수단이라고 합니다. 그것도 맞는 말이 뭐냐 하면 소나무에서 솔내음이 나지만 소나무를 막 이렇게 흔들어서 턴 다음에 냄새를 맡으면 냄새가 더 잘 납니다. 허브도 마찬가지이고 꽃도 마찬가지이고 괴롭히면 막 향기를 내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막 괴롭히면 향기가 나기는 나는데 똥내가 납니다. 그게 문제입니다. 그런 자신의 인생길에 대해서 깊은 애정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어차피 삶의 사태는 우리 맘대로 전개되는 것이 아니니까 그러한 존중심을 가지고 우리의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B. 나를 아시는 하나님
두 번째는 나를 아시는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랬습니다. ‘야다’(יָדַע)라는 동사가 쓰여져 있는데 영어의 ‘know’입니다. 여러 번 말씀드렸습니다. 히브리어에는 과거, 미래, 현재가 없습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시제는 없고 시상만 있습니다. 끝난 것이면 완결형, 계속되고 있는 것이면 미완결형입니다. 끝난 것은 과거에 끝났어도 완결형, 지금 막 끝났어도 완결형입니다. 미래에 끝났어도 완결형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나와 함께 하는 길을 그가 아셨나니’ 완결형입니다. 이미 나의 길이 있기 전에도 하나님은 나를 아셨고 그리고 나의 인생에 가는 길은 하나님의 지식에서 배제된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 ‘안다’라고 하는 이 말은 그냥 아는 것이 아니라 체험적으로 아는 것이고 사랑으로 아는 것입니다. 단지 우리를 그냥 아시는 게 아니라 우리를 진심으로 행복하기를 바라는 관심을 가진 앎입니다. 여러분이 자신의 자식들을 알듯이 그렇게 아시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19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보호가 얼마나 탁월했는지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독수리가 그 새끼를 업어 나름과 같이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구원하였느니라” 이렇게 말입니다. 오래전에 이게 무슨 말인지가 궁금해서 책들을 찾아봤는데 나는 동물학자가 아니니까 이게 정말 그런 건지 어떤 건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 책에 의한 설명은 생물학적인 설명을 주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당시의 믿음을 설명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모든 새들이 자기의 새끼를 옮길 때에 이렇게 발톱으로 옮깁니다. 그런데 독수리는 새끼를 자기 날개에다가 얹는다고 합니다. 날개를 큰 거는 독수리가 날개 하나가 1.5m~2m 가량이 되는데 날개에다가 얹는데 여기 날개에다가 얹었다가는 날아가다가 새끼가 떨어지므로 양쪽 날개를 아무리 움직여도 움직임이 없는 어깨 위에다가 얹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린 새끼들은 발톱으로 엄마의 털을 꽉 붙들고 그리고 날아가는 것입니다. 유능한 사냥꾼을 만나면 새들이 자기 새끼들을 이렇게 나르기 때문에 어미를 맞추지 않고도 새끼를 떨어뜨릴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독수리는 밑에서 사냥꾼이 아무리 보아도 새끼가 보이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어미 새를 맞추기 전에는 새끼를 죽일 수가 없습니다.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업어 나르신 것처럼 그렇게 구원하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요한복음 10장에 보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아신다고 되어 있고, 또 같은 10장에 예수님이 자기의 양떼를 안다고 되어 있고, 또 같은 10장에 양떼도 목자를 안다고 되어 있습니다. 각각 대상은 다르지만 안다 라고 하는 이 동작이 하나의 통합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으로서 그의 행복을 진정으로 염려하는 그런 종류의 알다, 앎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개별적인 인생길이 있는데 하나님은 그 모든 길을 아신다는 것입니다. 객관적으로 그냥 알려지기만 한 것이 아니라 사랑과 관심을 가지고 우리가 진심으로 행복해지기를 원하는 염원을 가지고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길을 알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과 올바르게 관계를 맺기만 하면 하나님이 나를 이미 알고 계시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그렇게 큰 위로가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안다 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그것을 그냥 내버려 두는 의미에서의 앎이 아니라 알고 언제든지 우리를 돕고 우리를 사랑하고 우리의 행복을 위한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우리의 인생을 아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하나님은 알 뿐만 아니라 능력이 있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 하나님의 아심 속에서 사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인생에서 만나는 수많은 사태들 때문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주님을 아시는 것입니다.
저의 생애에서 특별히 눈물을 많이 흘렸던 때가 여러 번 있지만 그 중에 정말 기억이 나는 때는 신학대학원 다니던 시절이었습니다. 공부하랴, 교회 섬기랴, 최선을 다했지만 어쨌든 늘 마음에는 슬픔이 꽉 찼습니다. 그래서 조그만 건드려도 눈물이 쏟아지던 그런 3년의 시간들이었습니다. 어느 날 연구를 하다가 신학대학원 시절에 쓴 책을 펼쳤습니다. 구약 책이었는데 깨알같이 메모들이 많이 되어 있고 선생님이 가르쳐 주신 내용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책을 넘기는 곳곳에 내 글씨가 있었습니다. 히브리어로 썼는데 ‘야다 엘로힘 오티’(하나님은 나를 아신다.) 넘겨도 계속 나옵니다. ‘하나님은 나를 아신다.’ 아마 내 생각에 수업하다가 너무 괴로울 때마다 거기에다가 그렇게 적었던 것 같습니다. 그 사실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나를 아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버려두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깊은 확신, 이것을 붙들고 인생의 가장 힘든 시기들을 지낼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도 이 하나님,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하는 주님의 말씀을 붙드는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C. 단련 받을 때가 있음
세 번째는 단련 받을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이 말합니다.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그럽니다. 이 ‘단련한다’라는 말은 히브리말로 ‘바한’(בָּחַן)이라는 말인데 원래 이것은 ‘제련하다’라는 뜻입니다. 원래 금을 만드는 것이 현대의 다양한 방법들이나 더 과학적인 방법들이 있겠지만 기본적으로는 금이 있는 금맥을 찾아서 캐내는 작업이 아니라면 대부분 금이 섞인 광석을 부셔서 거기에서 금을 많이 함유한 광석들을 먼저 가려내고 그것을 불에다 재련해서 금과 금이 아닌 것들을 구별해 내는 과정이 바로 재련의 과정이고 그것을 많이 해서 순도를 높여서 99.99%까지 간 것을 순금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100%는 인간의 힘으로 못할 것입니다. 그것을 순금이라고 그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할 수 있는 과학적 근거가 뭐냐 하면 금이 녹는 온도는 1063도입니다. 그런데 쇠가 녹는 온도는 1535도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화산이 폭발할 때 바위 녹은 물들이 막 쏟아져 나오는데 물론 거기에는 바위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게 700도에서 1200도 정도 되고, 유리가 녹는 온도는 400~500도, 그리고 또 태양의 표면은 6000도쯤 되지만 중심의 온도는 약 1억 5천만도 정도 됩니다. 인간의 유사 이래로 금의 가치에 눈을 뜬 사람들이 오랜 세월동안 포기하지 않았던 꿈이 있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쇠로 금을 만드는 것, 이게 연금술입니다. 그게 결국은 아무도 그렇게 한 것이 없습니다. 나중에 과학이 밝혀낸 바에 의하면 원소의 변화가 일어나서 금이 되려면 50억 도의 열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런 열이 지구상에는 없습니다. 불가능합니다. 자, 그러면 이제 어떡하냐 하면 광석을 놓고 뼈를 갑니다. 1053도가 되면 금이 녹아내립니다. 쇠는 남을 것입니다. 그러면 쇠에서 금이 분리가 됩니다. 그런데 1053도 속에 녹은 금 속에는 450도에서 녹은 유리도 포함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그것을 다시 고체로 만들어서 다시 열을 가합니다. 그러면 1053도가 되기 전 400도와 500도에서 유리가 녹고, 700도에서 1200도 사이에 바위가 녹습니다. 모래가 녹습니다. 그런 식으로 해서 빼냅니다. 그것을 계속해서 반복하면서 이 순수한 금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제련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게 끊임없는 열을 가할 때 그것은 고통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런 금을 제련해서 더 순전한 금을 만들듯이 당신의 자녀들의 마음을 제련하셔서 더 순수한 신자의 마음으로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똑같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고통스러운 연단을 반드시 통합니다. 그런 연단의 고통을 당하기 전에는 옳은 것과 그른 것, 좋은 것과 나쁜 것, 이런 것들이 다 섞여 있습니다. 자기 마음속에서 분리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불같은 연단을 당합니다. 그때 마음이 녹으면서 올바른 것과 올바르지 않은 것, 하나님의 것과 나의 것이 분리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객관적으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회개와 자기 정죄, 자기 미움, 자기 부인, 이런 것들이 생겨나면서 연단을 당하기 전에는 한 덩어리였던 자신의 마음속에 수많은 불순물이 있다는 사실들을 발견하면서 그들을 분리해서 이해할 수 있는 말하자면 지각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순전한 신자의 마음으로 변해가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은 물론 이웃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능력이 생겨나게 되고 그래서 좋은 것들은 그 관계를 통해 받아들이고 잘못된 것들은 자기를 희생해서 고칠 수 있는 존재의 영향력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끊임없이 행복해지는 데에 관심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도 세속적인 의미에서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순전하게 하시는데 관심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를 끊임없이 제련하시고 단련하시는 것입니다. 때로는 건강을 잃어버림으로 하나님이 여러분을 단련하실 때도 있고, 여러분이 의지하고 사랑하던 물질을 거두어 가심으로써 단련을 받을 때가 있는가 하면 사랑하던 사람들을 데려가심으로써 여러분을 단련하실 때도 있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이것은 불같은 시련으로 다가오고 그 속에서 믿음으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붙들고 하나님 앞에 그 연단을 감당해 나가고자 하는 사람들은 그 연단 속에 담겨져 있는 하나님의 큰 뜻을 발견하고 변화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존재의 울림이 있는 그리스도인들, 성경에서 산처럼 서 있는 큰 하나님의 자녀들 중에 연단을 받지 않는 사람들이 어디에 있었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 불같은 연단들을 통해서 그들은 정결한 사람들이 되어 갔고 하나님의 사랑에 붙들린 사람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렇게 연단 속에서 이기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D. 나를 순금 같게 하심
마지막으로 나를 순금 같게 하십니다. 여기에서 순금이라고 하는 ‘자하브’(זָהָב)라는 단어는 정제된 금을 가리킵니다. 좋은 금입니다. 이것은 단지 우리의 태도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 자체에 도입되는 어떤 거룩한 변화를 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행복이 소유에 있다고 믿고 혹은 자기를 실현하는 데에 있다고 믿던 사람들인데 하나님은 우리의 진정한 행복이 팔복의 사람들처럼 그렇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존재가 되는 데에 있다는 것을 일깨우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그 거룩한 성품 안에서 행복의 원천이신 하나님이 함께 거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행복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연단하게 하시는 이유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말합니다. “고난당한 것이 나에게는 유익입니다.” 또 뭐라고 말합니까? “고난당하기 전에는 제가 그릇 행하였는데 고난을 당한 후에는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라고 말입니다.
순금의 상태는 불순물이 섞여 있는 금광석이 끊임없는 제련의 순간들을 반복함으로써 도달하게 되는 것인데 우리는 외적인 행복을 추구하지만 주님은 어디서든지 이 세상의 삶의 사태에 얽매이지 않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으며 살아갈 수 있는 그런 내적인 인간의 경향성들을 바꾸시는 것입니다. 그런 존재의 울림을 주는 불변하는 삶을 살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런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커다란 바위산이 있었습니다. 이 바위가 그 속에 붙어 있었는데 어느 날 사람들이 오더니 커다란 드릴로 구멍을 팝니다. 엄청난 고통을 바위가 느꼈는데 그 구멍 속에다가 화약을 집어넣더니 폭발을 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세월동안 함께했던 그 바위 큰 몸으로부터 찢어지는 고통을 느끼면서 동료들과 함께 떨어져 나왔습니다. 막 한 덩어리였던 것이 찢어지면서 여러 개의 조각들로 나뉘어지면서 엄청나게 굴러 떨어져서 저 아래로 처박혔습니다. 사람들이 와서 돌을 보기 시작하더니 고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옆에 있는 동료들을 보니까 옆에 있는 바위를 자르는 기계로 끌려가더니 잘려지는 것입니다. 비명 소리가 들렸는데 한번 딱 자르니까, 두 번 자르니까 이렇게 네모난 돌이 되었습니다. 그러고 차곡차곡 쌓아 올려집니다. 집을 짓는 건축 재료로 쓰려는 돌이었습니다. 유독 이 바위가 보니까 자기는 많은 사람들이 와서 계속해서 뭐라고, 뭐라고 이야기를 하더니 그것을 트럭에 싣고 어디론가 가는 것입니다. 컴컴한 어느 공장 같은데 들어가더니 하여튼 사람들이 모두 자는 밤중만 빼 놓고는 이른 아침서부터 저녁때까지 괴롭히는 것입니다. 큰 망치로 두들기는가 하면 날카로운 정으로 쪼기도 하고, 그리고 숯돌을 가지고 갈기도 하고, 날카로운 둥근 톱을 가지고 와서 깎아내기도 하는 작업을 몇 달 동안 계속 하는 것입니다. 바위는 생각했습니다. 같은 산에서 떨어져 나와서 두 번 톱질을 당하고 양지바른 곳에 모여 있던 그 동료 바위들은 이런 고통을 안 겪으니 얼마나 행복할까? 어느 날 이제 자기를 다 괴롭혔는지 빗자루 가지고 와서 막 쓸더니 이제 끝났나 했더니 막 시퍼런 불이 치솟는 토치를 가져와서 자기를 이제 말하자면 불에 튀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바위가 졸도를 했습니다. 그리고 얼마나 세월이 흘렀을지 시간이 흘렀는지 정신을 차려서 눈을 뜨고 보니까 빨간 카페트가 깔려있는 어느 방에 자기가 놓여 있습니다. 고개를 이렇게 돌려보니까 아주 예쁘게 깎인 나무 받침 위에 자기가 놓여 있습니다. 그리고 눈이 부시도록 환한 불빛을 자기가 한 몸에 받고 있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자기를 바라보면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면서 고개를 끄떡거리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게 무언가 그랬더니 자기 앞에 자기를 설명하는 표지판이 있었는데 이렇게 써있었답니다. “대가의 명품이니 손대지 마시오.”
III. 적용과 결론
하나님은 이렇게 좋으신 하나님으로서 우리를 사랑하시지만 그 하나님은 불같은 시련 속에서 우리가 자기 사랑을 태워서 하나님 앞에 순금과 같은 존재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연단이 없었더라면 그냥 그저 그렇게 살아갈 사람이 그렇게 살을 찢는 것 같은 치열한 연단 속에서 가짜 행복을 버리고 참 행복의 근원이신 하나님 전부를 주시고 싶어서 그런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 속에서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연단하시는 것입니다. 고통 가운데서도 이렇게 신앙으로 그 연단을 잘 이기고 정금 같은 사람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2. 길 찾게 하는 연단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시 119:67)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시편 119편은 하나님 말씀의 영광의 장이라고 불립니다. 22개의 신앙적인 가르침을 두문법의 형태로 구성하고 있는 시편입니다. 두문법이라고 하는 것은 히브리어의 22글자 알파벳이 있는데 각 글자가 맨 앞에 오도록 시를 지은 것입니다. 맨 처음 알파벳부터 마지막까지 한 절에 8절씩 배당해서 22 곱하기 8, 176절로 끝나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해하기 쉽도록 말하면 1절부터 8절까지는 우리말로 하자면 ‘가’로 시작하고, 9절부터 16절까지는 ‘나’, ‘다’, ‘라’, ‘마’, ‘바’, ‘사’ 이런 식으로 해서 시를 지었는데 이것은 시를 읽을 뿐만 아니라 암기하기에 좋도록 하기 위해서 이러한 특별한 작시법을 이용한 것입니다.
시편 119편은 비록 표제에는 저자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많은 학자들이 아마도 시편 119편은 다윗의 시일 것이다 라는 저작권에 대해서 동의를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119편을 읽으면서 도대체 이 시를 다윗의 생애에 언제쯤 지었을까 여러 번을 생각해 보아도 시의 내용만을 가지고는 이 저작의 시기를 확정하는 것이 쉬울 것 같지를 않았습니다. 아마 누구도 저작시기를 쉽게 확정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어쩌면 아주 어린 시절에 지은 시부터 시작을 해서 산전수전을 다 겪은 노년에 이르기까지의 시들이 기억의 사슬처럼 엮어져서 119편을 구성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시편 전편이 하나님 말씀의 영광을 노래하고 있지만 단지 달랑 하나님의 말씀 하나만을 향한 찬송이 아니라 다양한 삶의 사태들과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상호작용을 한 이 시인의 신앙을 통해서 표출되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시인은 시련과 온갖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을 아는 명철과 지식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었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살 때에는 그가 만난 수많은 시련과 연단들이 그에게 평안한 삶을 살았더라면 가져가 줄 수 없는 어떤 아름다운 것을 주었다고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II. 고난 당하기 전의 삶: 그릇 행함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라고 말합니다. 한 마디로 고난당하기 전의 그의 삶은 그릇 행하는 삶이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말 번역은 문제가 있습니다. 히브리어 성경에 보면 이 “그릇 행하였다”라고 하는 이 구절이 ‘쇼게그’라는 단어로 되어 있습니다. ‘샤가그’라는 동사의 분사 형태입니다. 이 ‘샤가그’라는 동사는 그릇 행한다기보다는 ‘going astray’ ‘길을 잃어버리다’ 혹은 ‘work astray','길을 잃은 상태에서 무언가 행하다’ 이런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삶의 방향성과 관련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인은 자기가 고난당하기 전의 삶을 가리켜서 갈 길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살고 행하던 삶이었다고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무엘하 11장까지만 보면 다윗은 순결한 믿음의 사람이었고 그보다 하나님께 더 사랑을 받은 사람이 없고 그보다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이 없을 정도입니다. 그는 단지 믿음만 좋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구약에서 최고의 지성을 가진 인물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철학자였습니다. 하나님을 잘 믿는 신앙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를 한 움큼 두루마리 속에서만 읽어내는 사람이 아니라 이 두루마리 속에서 펼쳐지는 웅장한 계시의 빛을 통해서 아래로는 이 땅에 있는 미물들로부터 위로는 공중의 운행하고 있는 하늘의 아름다운 별과 달과 천체에 이르기까지 가득 찬 하나님의 ‘에메트’ 신실하심과 진리, 그리고 ‘헤세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읽어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 다윗에게는 눈을 뜨며 만나는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의 아름다움이 녹아있는 경이로운 세상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노래합니다.
(찬양)
하늘 위에 주는 높이 들리며
주의 영광은 주의 영광은 주의 영광은 온 세계 위에
그러나 그도 길 잃은 것 같은 삶을 살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는 평범한 사람들이 감히 생각할 수도 없는 끔찍한 살인의 죄를 저질렀고, 간음죄도 저질렀고, 하나님이 너무나 싫어하시는 인구조사를 실시함으로 수많은 백성들을 온역으로 죽음을 향해 내몰기도 하였습니다.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끊임없이 인생을 살아가지만 자기의 참 모습과 직면하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우리가 매일매일 우리의 삶을 영위해 가지만 정말 여러분 자신이 삶의 주체입니까? 여러분이 매일매일 삶을 살아가지만 여러분 자신이 정말 그 삶의 주인이 되고 있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의 인생의 주인이다라고 하는 신앙주의에 배치되는 인본주의로서의 질문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하더라도 우리의 삶의 주체는 주님과 함께하는 우리일 것입니다. 그런 주체가 되고 있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매일매일 인생을 살아가도 우리는 데카르트처럼 회의하고 사색할 수 있는 끝까지 사색을 하고 옳은 것이 무엇인지를 판단해서 행동하지는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데카르트와 같이 특수한 사람들뿐이지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은 파스칼이나 스피노자가 말한 것처럼 매일매일 꿈틀거리는 욕망이 삶의 에너지가 되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욕망이 하나님을 향한 순결한 까리따스의 사랑이든지 자신을 인생의 주인삼고 살아가는 정욕적인 사람, 꾸삐티다스든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실제로 현실적으로 그런 것들이 매일매일 우리의 삶을 영위하게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정직하게 직면하는 일이 너무나, 너무나 어렵다는 것입니다. 매일 매일의 삶에 몰두하는 속에서 우리의 삶을 추동하는 것은 선하고 하나님을 향해 거룩한 욕망만이 그 일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끊임없이 샘솟듯 솟아나는 육욕적인 욕망도 우리의 삶의 추동력이 되고 그래서 그것들이 우리의 삶을 이끌어 가는 에너지를 제공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육욕적으로 우리의 삶을 추동시키는 그 힘들이 그 속에 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죄는 우리 안에 스며들어 오자마자 놀랍도록 우리의 본성과 친화력을 가지고 우리의 영혼의 기능에 정상적인 활동에 방해를 제공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완전한 판단을 흐리고 명철이 사라지게 만들고 양심을 무뎌지게 만들고 그래서 결국은 우리 자신이 생각하는 주체로서의 자신의 삶을 영위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정말 우리가 우리의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까? 아니면 누군가가 끊임없이 우리를 조종해서 그 조종에 움직이면서 우리는 누군가에 의해서 살아가게끔 그렇게 조종당하고 있는 존재입니까? 아침에 눈을 뜨면 만나는 조간신문으로부터 시작을 해서 눈을 떼지 않고 매일 저녁 들여다보고 있는 TV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한시도 이동 중에서도 눈을 떼지 않는 수많은 인터넷의 매체들을 통해 들려오는 세상에 대한 소식들과 이 모든 것들은 결국은 누군가의 시각에 의해서 기술된 것입니다. 실제의 사실을 기록으로 옮기는 동시에 그것은 기록자의 편견을 따라서 조작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여러분의 뇌 속에 파고들어서 아무 저항도 없이 그것에 의해서 움직이는 사람들이 되고 맙니다. 그것은 자신의 주체성을 가지지 못한 삶입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 이 세상의 지식들과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언론이나 매체들을 통해서 우리들이 마음대로 주물러져서 형성될 수 있도록 밀가루 반죽 덩어리와 같은 사람이 되어서 어떻게 우리가 주체성 있는 삶을 살 수 있겠는지 나는 여러분에게 묻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에 대해서 성찰하고 자신의 삶과 존재의 의미에 대해서 진지하게 묵상할 수 있는 시간들은 현저히 사라지고 있습니다. 눈만 뜨면 누군가에 의해서 마치 조종을 받는 것처럼 그렇게 미친 듯이 활동하며 움직이지만 그것의 의미는 무엇이고 그리고 그것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합니다. 다시 말해서 오늘 이 시편 기자가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쇼게그’의 상태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회심하기 전에 그 분의 글을 통해서 제가 기독교 신앙을 갖기로 결심하는 계기가 되었던 적이 있습니다. 지금은 다 은퇴하시고 연로하신 철학자이신데 그 분이 대학교 교수로 계셨습니다. 아침에 학교 정문에 이렇게 서 있는데 학생 하나가 헐레벌떡 뛰어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 왜 이렇게 뛰냐?” 그랬더니 “저 교수님 늦었습니다. 빨리 가야 됩니다.” “늦으면 왜 안 되는데? 왜 그렇게 빨리 뛰는데?” “빨리 가야 출석을 부르죠.” “출석을 부르면?” “으례 학점이 나오죠.” “학점이 나오면.” “졸업을 하죠.” “졸업을 하면?” “그래야 취직을 하죠.” “취직해서 뭐할 건데?” “취직해서 장가를 가죠.” “장가 그렇게 가고 싶어?” “가야지 아기를 낳죠.” “아기 낳으면 어떻게 할래?” “그 애 기르고 나이가 들겠죠.” “나이가 더 들면?” “죽죠.” 그러면 중간에 다 빼고 “너 지금 왜 뛰었니?” 죽으려고 뛴 것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사는데 이것은 주체성 있는 삶이 아닙니다. 그래서 매일 매일의 삶에 몰두하느라고 과거도 반성할 시간이 없고 현재를 성찰할 시간도 없고 미래를 예지할 시간도 없습니다. 그리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자신의 참 모습을 직면하기에 매우 어려운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이러면서 우리의 외적인 생활이나 외적인 생활은 제법 경건해 보이고 주일을 지키고 또 다른 사람이 나를 보고 경건하다고 말하고 예수밖에 모르는 교회에 미친 사람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우리의 마음은 전혀 그렇지 않은 적이 얼마나 많습니까? 입술로는 신앙을 고백하지만 실전은 그 고백과 현저하게 다른 삶을 살면서 결국은 내가 하고 있는 일은 거룩한 일인데도 동기가 변질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것이 ‘쇼게그’의 상태입니다. 살아가지만 길을 잃었고 고백은 올바르게 하지만 삶에 있어서 길을 상실한 사람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것이 시인이 고난당하기 전의 모습이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시인만의 고백이겠습니까? 우리가 매일매일 우리의 삶 속에서 경험하고 있는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III. 고난 당한 후의 삶 : 말씀지킴
그러나 오늘 시인은 고난을 당한 후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고난당하기 전의 삶의 특징은 갈 길을 잃은 삶이었는데 고난당한 후의 삶은 말씀을 지키는 삶이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순종하고 주님의 말씀이 우리의 삶의 좌표가 되지 않은 모든 삶이 길 잃은 삶이라는 것이 이제 명확해지지 않습니까? 오늘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이 말씀이라는 단어가 히브리어에 복수로 나오지를 않고 단수로 나옵니다. 여기에는 상당히 깊은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많은 믿음의 규칙과 여러 가지 교훈들을 주시지만 그것은 궁극적으로 하나의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기 위한 수단입니다. 더 놀라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신약 성경에 하나님의 뜻이라고 할 때에 그 뜻이라는 단어가 ‘펠레마’라는 희랍어입니다. 그런데 언제나 하나님과 관련해서 단수로만 사용됩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이 이 세상에 있는 인간과 세계에게 다양한 의지를 가지고 계셔도 그 모든 의지들을 통합되었을 때에 궁극적으로 성취되어야 할 하나님의 뜻은 하나다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 하나님의 말씀도 바로 그런 의미라고 나는 믿습니다. 그래서 시인이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라고 할 때에 이 말씀이라고 하는 것은 도둑질 하지 마라,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 이 한두 개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 세계에 대해 보여주신 흠 없는 계시 그리고 인류와 그리고 나 개인을 향해 하나님이 계시해 주시는 하나님의 선하고 기뻐하고 온전하신 뜻, 그것을 지키나이다 내가 그것을 모두 이루었다 함이 아니라 내 마음의 중심이 예전에는 찢어져서 하나님도 섬기고 세상도 섬기고 나도 사랑하고 율법도 사랑했는데 이제는 하나님을 향해 그 마음이 온전히 모두어져서 그래서 그것을 지키게 되었습니다 라는 뜻입니다.
우리 어린 시절에 비디오도 없고 게임기도 없던 시절에 가지고 놀던 장난감이 있었습니다. 할아버지 돋보기입니다. 아이들이 그것을 가지고 와서 겨울에 햇살을 쫙 모아서 그래서 먹지에다 대고 비추면 한참 기다리고 있으면 불이 붙기 시작합니다. 그게 아이들의 놀이였습니다. 추운 겨울이지만 그 비춰오는 햇빛은 아무 열기가 없는 것같이 느껴지지만 그것을 집약해서 모았을 때 어느 한 지점을 불붙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 시인이 바로 그렇게 자신의 마음과 성품을 다해서 하나님이 세계와 자신을 향해 가지고 있는 선하신 궁극적인 목적을 향해 그 말씀을 향해 자신의 마음을 모두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지킨다’라고 하는 단어는 ‘샤말티’라고 되어 있는데 ‘샤마르’라는 단어입니다. 구약 성경에 아주 많이 나오는 동사 중 하나입니다. 적의 공격으로부터 성을 파수하고 지키는 것도 ‘샤마르’라고 불렀고 그리고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에 어긋나지 않도록 자신을 거기에 합치시키는 태도나 행위도 ‘샤마르’라고 불렀습니다. 심지어는 높은 망대 위에서 사방을 감시하면서 누군가가 이 성을 공격하는지를 탐색하는 것조차도 ‘샤마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면 이 시인이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라고 하는 이것은 구체적인 삶 속에서 행위로 나타나는 실천입니다. 적어도 이 시인이나 혹은 구약성경이 보기에 그 하나님을 향한 보이지 않는 경외심은 구체적으로 삶 속에서 그것에 순종하고 자기를 합치시키는 행동으로 나타나야 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 즉 하나님을 야레한다 라고 하는 이 추상적으로 보이는 이 단어 속에는 ‘샤마르’, 지금 내가 구체적으로 어느 시간과 공간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그 뜻을 준행하는 삶의 고백과 하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어떤 샤마르의 삶이 없는 야레의 공경은 공허한 것이고 그것은 진실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시인이 말씀을 지킨다고 했는데 무엇을 지키는 것입니까? 도대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다고 했는데 그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두 가지로 요약이 되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 나오는 많은 계명들은 두 가지로 나누어집니다. 첫째는 뭐냐 하면 믿음의 규칙입니다. 즉, 하나님의 백성이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를 성경이 제시하고 있는 규칙들이 있습니다. 나는 비록 지혜의 능력이 현저히 떨어져서 왜 그것을 믿어야 하는지를 다 이해할 수 없지만 살아계신 하나님을 내가 알고 그를 신뢰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그 규칙은 이해할 수 없지만 그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선하심에 대한 신뢰 때문에 기꺼이 그것을 받아들여 믿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우리 이러한 믿음의 규칙이 선악을 판단하고 정의로운 삶을 살아가게 하는 초석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이들에게 선과 악을 교육하는 가장 좋은 시기는 2, 3, 4, 5살입니다. 그때에 엄마 아빠가 그가 행하는 행동이 선인지 악인지를 판단해서 희로애락을 정확하게 표현해야 합니다. 그래야지만 이 아이의 마음속에 선악에 대한 관념이 뚜렷이 생겨납니다. 왜 옆에 있는 친구가 가지고 있는 물건을 슬며시 가져왔는데 엄마한테 그렇게 혼이 나야 되는지를 모릅니다. 몰라도 상관이 없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아 이것은 잘못된 것이구나’하는 것을 선취적으로 먼저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월이 많이 흐른 후에 비로소 이 아이가 왜 그런지에 대해서 터득을 할 수도 있고 영영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이 올바른 삶이다라고 하는 규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웃에게 손해를 입히지 않고 살아갈 가능성이 많아지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수많은 믿음의 규칙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이것에 대한 믿음이 없이는 다른 많은 계명들을 행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에서 뭐라고 말합니까?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을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고 말합니다. 그런 하나님이 믿으라고 주시는 규칙들, 이것을 받아들이는 믿음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척도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지킨다’라고 할 때에 제일 중요한 것은 잘 믿는 것입니다.
두 번째, 생활의 교훈입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너는 이렇게 살아라, 이렇게 믿어라와 함께 이렇게 살아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이렇게 되라고 하는 교훈과 일치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다 라고 하는 것은 죄를 짓지 않는다 라고 하는 것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하나님이 이 세계와 나를 향해 가지고 계신 기쁘신 뜻을 성취해 드리면서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내면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내면의 경외심과 외면의 공경하는 샤마르의 삶이 일치할 때에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삶인 것입니다. 높은 산골짜기에서부터 계곡을 타고 흘러 벌판을 가로지르는 냇물의 달음질과 강물의 도도한 흐름을 생각해 보십시오. 인간의 삶도 결국은 마음의 길을 따라 흐르는 강물과 같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 사람이 살아가는 삶은 그 사람됨의 펼침이고 살아간 그 사람의 삶을 접을 때 그 사람의 사람됨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과거를 이해할 때 현재 그 사람이 왜 그런 삶을 살고 있는지를 알 수 있고, 현재 그가 살아가는 삶을 관찰할 때 미래의 그의 삶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하는 것을 예측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사랑하시지만 때로는 고난을 당하게 하십니다. 그런데 오늘 시인은 고난당하기 전에는 길 잃어버린 삶이었는데 고난당한 후에는 샤마르의 삶이라고 고백을 합니다. 똑같은 사람인데 어떻게 이 사람이 고난당하기 전의 사람과 고난당한 후의 사람이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요? 그러면 우리가 당하는 고통에는 우리를 이렇게 바꾸어 놓는 어떤 모종의 신비한 힘이 그 안에 있는 것일까요? 그래서 우리는 여기에서 고난과 영혼의 변화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IV. 고난과 영혼의 변화
고난 혹은 고통이라고 하는 것은 자신이 원하지 않는 삶의 질서 속에 있는 괴로운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자신이 행복하고 편안한 상태가 있고 그것은 사람마다 각기 조금씩은 다르지만 완전히 다르지는 않습니다. 누구든지 편안한 환경과 좋은 음식 그리고 편안한 의복과 깨끗한 환경 그리고 넉넉한 자원들로 육체의 에너지를 보호할 수 있는 환경 속에 있을 때 사람들은 행복감을 느낍니다. 또 정신의 욕구가 채워질 때에 그 행복은 훨씬 더 배가 됩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빼앗겨 버릴 때 인간은 고통을 느끼게 됩니다. 짐승이나 인간이나 고통 받을 때에 괴로움을 표명하는 것은 꼭 같습니다. 그렇지만 짐승은 고통을 받으면서도 그 의미를 물을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 고통 속에서 의미를 물을 수 있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의 유일한 존재입니다.
자, 고통을 받을 때 의미를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자, 우리의 삶은 요동치는 배를 타고 항해하는 것처럼 출렁거립니다. 내 원하는 대로 삶의 사태가 전개되어 행복할 때도 있고 내 원하는 것과는 정반대로 뒤움치는 물결 속에서 고통을 받을 때도 있습니다. 만약에 내 뜻대로 내 인생을 항해할 때 헤헤거리고 교만해져서 말할 수 없이 행복하고 그리고 좌절하고 시련에 빠질 때에 죽을 것처럼 괴로워한다면 우리의 마음은 요동치는 우리의 삶의 사태 속에서 호떡을 뒤집는 것같이 수시로 뒤집히는 삶이 될 것입니다. 안정감이 없는데 그 안에서 인간이 행복을 느낄 수 있겠습니까? 원래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항구적인 특성을 가져야지만 행복입니다. 항구적인 특성을 가져야 행복입니다.
우리 후배 하나가 있었는데 요즘 군대 안 그러는데 옛날 군대입니다. 육군 참모 총장이 화력 시범을 보러 온다는 전갈이 왔습니다. 헬기를 타고 별 넷을 단 육군 참모 총장이 참모들을 다 거느리고 온 것입니다. 그 부대가 발칸포가 들어와 가지고 발간포를 운영하는 부대였는데 그 화력이 정말 대단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모형 비행기 하나를 그 부대에서 엄청난 돈을 들여서 그것을 무선으로 띄운 것입니다. 붕 하고 날아가게 만들고 그 날아가는 그 모형 비행기 뒤에다가 모형을 매달았습니다. 그래서 이제 부대장이 말하기를 저 모형 비행기는 어마어마하게 비싼 거니까 뒤에 매달려 가는 것을 쏴라 그러면 이제 모형 비행기는 다시 내리고 그 다음에 또 달고 계속 쓸 수 있지 않냐고 했습니다. 우리 후배가 같이 들어온 동료가 일등병이었습니다. 군기가 바짝 들었습니다. 발간포에 탁 올라가서 별이 여러 개의 은하수처럼 떠가지고 지켜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드디어 비행기 웅 떴습니다. 얘가 온 힘을 다해서 가르친 대로 막 쏴가지고 그 수천만 원짜리 되는 모형 비행기를 박살을 내서 떨어뜨린 것입니다. 그랬더니 참모 총장이 자리 위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막 박수를 치는 것입니다. 그때 부대장을 부르더니 “잘 했어 저 놈 휴가 줘. 휴가. 포상 휴가 줘.” 그러고 간 것입니다. 그래서 1주일 포상휴가를 갔다 오고 그 다음에 영창에 한 달 있었답니다. 군대니까 상관이 휴가를 주라는데 안 주면 큰일 나니까 일주일 포상 휴가를 갔다 오고 돌아온 다음에 한 달 영창에 다녀왔습니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 1주일 동안의 포상 휴가가 정말 휴가였을까?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항구성이 있어야지만 행복한 거지 오늘은 행복하지만 내일 뒤집힐 거라면 그거는 행복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의미를 묻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이 고통을 당하는데 이 의미가 무얼까? 그것은 요동치는 삶 속에서 발견하는 것이지만 그 의미는 그 위에 있는 것입니다. 마치 요동치는 바다위에 떠 있는 샛별과 같은 것이라고 할까? 그래서 그 인생의 의미를 요동치는 삶 속에 살아가지만 바깥에서 자신의 인생을 내려다보면서 의미를 파악하면서 온갖 시련과 역경 속에서도 그것을 견디며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얻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의 유익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겪는 모든 고통과 괴로움이 연단의 계기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고생을 하면 상처로 남고 고난을 당하면 연단이 되는데 고난과 고생의 차이가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은 바깥에 있는 것이 종류가 다른 것이 아니라 내게 일어난 나쁜 일들을 어떻게 주관적으로 해석하면서 사느냐에 따라 고생도 되고 고난도 되는 것입니다. 그 고생은 그런 해석 없이 생으로 살을 찢는 것같이 당하는 동물적이고 짐승적인 고통입니다. 그것은 항상 상처를 남깁니다. 그래서 누구하고 관계의 고통이 있으면 원한 맺히는 것입니다. 죽여 버리고 싶을 정도로 미운 것입니다. 그때 그 사람을 죽일 능력이 없으면 자기가 죽고 싶을 정도로 괴로운 것입니다. 그런데 고난은 뭐냐 하면 이렇게 내게 일어나는 나쁜 일을 가지고 누군가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 속에 담겨진 의미를 물으면서 하나님 앞에서 참고 그것에 대응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신앙의 반응을 하게 되고 이때에 자기를 에워싼 환경과 또 이에 대한 자신의 반응을 객관적으로 성찰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 사람이 다 나를 버려도 끝까지 나를 배신하지 않는 내 편이 하나 있습니다. 그게 내 마음입니다. 내 마음은 언제나 내편입니다. 그래서 누가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사람들은 묻습니다. 어떻게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킬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자신을 향해서 날마다 그 일을 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언제나 내편이기 때문에 내 눈으로 나를 보는 것 말고 진리의 빛을 받아서 그 객관적인 진리로 나를 볼 수 있는, 보아야 하는 필요성이 있습니다. 그때 비로소 삶의 사태들을 받아들이고 믿음으로 그 삶의 사태들에 대해 반응할 수 있는 신앙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의 이런 저런 많은 고통들이 생겨납니다. 그것을 칼빈은 십자가라고 불렀습니다. 우리의 죄와는 상관없이 순결한 믿음 때문에 당하는 애매한 고난도 있고, 우리가 뿌려놓은 씨를 스스로 거두면서 고통을 받는 인과응보의 고통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느 것이든지 간에 그 속에서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하나님의 말씀의 빛으로 비춰보고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께서 당하신 그 고난에 자신의 고난을 투사하면서 자신이 당하고 있는 고난의 의미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물을 때에 우리는 비로소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우리의 정과 욕심이 못 박히는 자기 죽음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2000년 전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기운이 오늘 나의 영혼 속에 스며들어올 때 나는 비로소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것만큼 그리스도의 생명에 참여하는 부활의 능력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겉 사람은 날마다 후패하나 속사람은 새롭도다 라고 고백한 사도 바울의 의미인 것입니다. 형통하고 모든 것이 맘대로 잘 나가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만은 아닙니다. 그런 때에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알지 못했던 사람이 쓰라린 시련을 당하고 고난을 당합니다. 이전에 없던 불같은 연단을 당합니다. 마음속에 날마다 사형 선고를 받은 것 같은 절망을 느끼면서 그 안에서 자신이 죽는 경험을 합니다. 이 속에서 객관화 할 수 없었던 자기 자신을 객관화하면서 볼 수 있는 안목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리고 비로소 예전에는 몰랐던 자기 자신 속에 있었던 또 다른 자기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고백하게 됩니다.
(찬양)
우리 죄와 강퍅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 하시네
V. 적용과 결론
오늘 이 설교를 듣는 여러분 중에는 지금 불같은 고난을 당하고 있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시련을 당하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저녁에 눈을 감으면 아침에는 이 세상에서 뜨고 싶지 않은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모든 것이 여러분 마음먹은 대로 형통하고 망가진 영혼으로 갈 길을 잃은 인생을 살게 내버려 두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일까요? 아니면 여러분 한 대 때려 정신 차리게 만들어서 옳은 길로 들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게 하는 것이 더 좋은 것일까요?
여러분이 길 잃은 자처럼 하나님이 지정하신 삶의 궤도에서 이탈할 때 하나님이 여러분을 때리시는 것은 하나님이 여러분을 향해 얼마나 선하신 분이신지를 입증하는 훌륭한 증거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도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녀들은 징계하신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없다면 하나님 앞에 사생자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주님이 여러분에게 시련을 주시는 것은 그릇 행하며 살고 있는 여러분의 마음을 때려서 하나님께로 돌이키기 위해 그래서 그 말씀에 붙들려서 오늘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인생을 삶으로 여러분을 행복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자기의 백성들과 지성적으로 교통하기를 원하시는 분이시지만 그 지성이 눈멀고 귀 먹었을 때 하나님은 종종 그의 환경을 통해서도 말씀을 하십니다. 그래서 종종 하나님의 말씀에는 마음이 녹지 않던 사람들이 고통스러운 환경 속에서 가슴을 찢으며 내가 하나님을 멀리 떠나 그릇 행하였나이다 라고 고백을 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다윗이 바로 이런 일에 증인이었습니다. 그의 깊은 회개와 거룩하신 하나님의 용서는 바로 이런 끊임없는 이탈의 과정, 고난당하기 전에는 그릇 행했지만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다시 주님께로 돌아오는 회개의 과정을 통해서 일어난 영혼의 변화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말씀드립니다. 여러분이 어떠한 삶의 처지에 있든지 두 가지 사실을 굳게 붙드십시오.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라는 사실과 하나님은 언제나 당신의 말씀으로 우리를 이끄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굳게 붙드십시오. 그래서 오늘도 극한 시련과 고통 속에 있는 여러분은 무엇보다도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시간을 많이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마음을 열고 ‘주여 종이 여기 있나이다. 하나님이여 말씀하옵소서.’ 그렇게 충심으로 낮아져서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영혼에 변화가 온다면 오늘 여러분이 당하는 고난은 이후에 여러분에게 말할 수 없이 커다란 축복을 가져다주는 하나님의 놀라운 도구가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