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주의 성화론과
청교도들의 마음 지킴의 교리
이렇게 엄청나게 큰 주제를 가지고 짧은 시간에 불과 2시간 만에 여러분에게 마쳐야 되겠습니다. 갖고 계신 강의안에 목차를 한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1부가 개혁주의 성화론 이고 성화란 무엇이고 교리의 중요성 그리고 성화의 핵심인 거룩, 성화에 대한 입장이고, 2부는 청교도들의 마음지킴의 교리인데, 1부를 다룬 후 2부에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이 세세한 것을 모두하려면 밤을 새야 되기 때문에 마음지킴의 교리는 핵심적인 것들을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더 자세한 것은 마음지킴의 교리 Tape를 활용하시면 되리라 봅니다. 마음지킴의 교리가 책으로 작성되고 있는데 2월 쯤 370페이지 분량의 책으로 나오리라고 봅니다. 기도하고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신실하신 하나님 오늘 이 시간에도 저희들에게 은혜를 내려주시고 특별히 오늘 교회사 속에서 많은 사람들의 진리의 빛을 던져주었던 성화의 교리를 저희들이 살펴보려고 합니다. 주님 은혜를 내려주시옵소서. 이 말씀을 훌륭하게 깨달을 수 있는 훌륭한, 아름다운 준비를 하도록 저희를 축복해 주시옵소서. 성령이 오늘 이 시간에도 우리의 모인자리에 오시옵소서. 그래서 역사해주시옵소서. 우리 각자에게 진리에 대한 깨달음의 빛을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우선 성화가 무엇인가. 성화를 안토니 후크마(Anthony A. Hoekema)라고 하는 학자는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성화란 우리의 책임 있는 참여를 포함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서 죄의 오염으로부터 우리를 건지시며 우리의 본성전체를 새롭게 하여 우리가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삶을 영위할 수 있게 하시는 성령의 은혜로우신 사역이다. 여기서 몇 개단어가 아주 중요한데 책임 있는 참여라는 단어와 죄의 오염 이라는 단어와 본성 전체를 새롭게 라고 하는 것과 성령의 사역 이라는 이 부분이 빼놓을 수 없는 핵심적인 교리의 진술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문제를 거론하기 위해서는 이제 칭의와 성화의 문제를 이야기해야 하는데 칭의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께서 의롭지 않은 사람들을 의롭다하시며 사면의 판결을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죄에 대한 형벌을 면제시켜주는 것을 가리켜서 칭의라고 부르는 것이죠.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두 가지 측면을 아울러 가리키고 있습니다. 객관적으로는 칭의의 측면을 가지고 있고 주관적으로는 성화의 측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었을 때 그 죄는 그들에게 특히 아담에게 두 가지 문제를 낳았는데 우선 첫째는 죄를 범해서 하나님의 계명을 어겼다고 하는 범법 사실과 두 번째는 그 죄를 지음으로 말미암아서 온 세상에 재방 둑이 터지듯이 죄가 물밀듯이 밀려들어오게 되었고 그러한 부패가 자신 속에 내재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좀 어려운 말로 표현해서 - 죄를 지어서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것에 대한 책임을 Guilt 혹은 죄책이라고 부르고 그렇게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그 인간 내면의 세계 속에 남아 있을 수밖에 없는 부패성을 가리켜서 Pollution, 오염이라고 부릅니다. 죄책의 문제는 원죄와 관련됩니다. 아담이 언약의 머리로서 죄를 지었기 때문에 아담과 같은 인간의 생육방식에 의해서 태어나는 모든 사람들이 그 언약에 참여하고 있고 그래서 그 원죄가 전가된다고 하는 것이죠. 그러므로 인간은 태어나서 죄를 지음으로 죄인이 되어 간다기보다는 처음부터 죄인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죄짓는 방법을 가르쳐주지 않아도 인간은 본성적으로 죄를 지을 수 있는 훌륭한 본성을 갖고 태어나는 것이죠. 그래서 태어나는 인간 속에 역시 두 가지가 공존하는데 하나는 원죄의 죄책과 또 하나는 그 죄로 말미암은 유전된 부패성이 그 인간 안에 내재한 상태로 태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고 믿는 순간에 죄책의 문제는 하나님이 칭의를 통해서 단번에 해결해 주십니다. 너는 이제 의롭다는 것 이죠. 그래서 칭의는 상태적인 선언이 아니라 법정적인 선언이고 이것은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렇게 해서 원죄의 문제는 해결되었는데 부패성 즉 오염의 문제는 하나님이 순식간에 해결하시는 것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해결하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주님을 영접하고 구원을 받는 그것이 단지 원죄에 대한 책임을 하나님이 사면해 주시는 정도가 구원이냐. 그것은 아니라는 거죠. 거듭남으로서 그 사람에게 원죄의 죄책에 대한 하나님의 칭의가 선언될 뿐 아니라 그의 영혼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의 죄를 용서해주시고 이제껏 까지 죽었던 영혼 속에 새 생명을 심으시는 것입니다. 그 생명이 얼마나 놀랍고 강한지 예전에 죄의 상태를 놀랍도록 혁신해서 다른 사람의 내면의 세계가 되게 만들 정도로 강력한 하나님의 영적 생명을 그 사람 속에 심으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개혁자들은 이렇게 설명을 합니다. 죄가 지배한다는 것과 죄가 영향을 끼친다는 것은 다른 것 이라고 본거죠. 예를 들자면 일제 시대 때 나라가 전부 일제치하에 있잖아요. 그러면 일본순사가 최고입니다. 칼 찬 순사가 지나가면 벌벌 떠는 거죠. 그런데 어느 날 그 순사들이 돌맹이에 맞으면서 도망가는 사태가 발생했어요. 언제 그랬죠? 해방이 된 다음 입니다. 이제까지는 일본이 우리나라를 지배하고 있었는데 떨리는 목소리로 히로이또 국왕이 항복을 선언한 후에는 모든 백성들이 이제 일본이 망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제는 더 이상 일본순사를 무서워하지 않고 칼을 차고 지나가도 돌맹이를 던질 만큼 담대해졌습니다. 만약 예전에 돌맹이를 던졌으면 단칼에 베었을 텐데 이제는 그 돌맹이를 맞으면서 도망 다니는 신세가 되었다라고 하는 거죠. 일제의 지배가 끝난 상태, 죄의 지배가 끝난 상태인 것입니다. 주님을 영접하기 전에는, 거듭나기 전에는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죄의 지배를 받으며 살았는데, 구원받고 난 다음에는 그렇게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셨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정죄함이 없고 이제는 자유로운 백성이 된 것이다 이것이죠.
그러면 죄의 모든 문제가 완벽하게 해결이 되었냐. 그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거듭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을 때 하나님이 다만 당신의 강력한 영적 생명을 심으셔서 일제가 우리나라를 지배한 것처럼 죄가 지배하지 못하도록 그 결박을 풀어주셨고 이속에서 영적 생명이 강성하게 살아나면 그런 죄들을 계속 몰아내면서 죄의 지배대신 하나님의 은혜 안에 지배를 받으면서 살아가는 놀라운 은혜를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문제는 뭐냐 하면 부패한 본성이 남아있다는 거죠. 완벽하게 새롭게 된다는 것이 아니라 부패한 본성이 남아 있다는 거죠.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렇게 물으시겠죠. 바울은 왜 고린도서에서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말했습니까? 그것은 뭐냐면 하나님이 부패한 본성까지 완전히 새롭게 해주시지 않았지만 거듭남으로 말마임아 그리스도와 연합되고 그 연합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 안에 심어놓으신 영적 생명의 놀라움이 예전의 죄의 지배를 받고 살아가는 상황과 비교하면 이 사람이 좀 변해서 이 사람이 되었다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새롭게 창조된 사람이 된 것처럼 그렇게 엄청난 질적인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죄와 싸울 수도 없고 죄와 싸와서 이길 수도 없어요. 그런데 그렇게 바꿔놓으신 것입니다. 옛날에 6ㆍ25가 나고 나서 인천상육작전을 해서 위에서 아래로 처내려가고 아래서 위로 아군이 올라오니까 공비들이 지리산에 갇혔어요. 그게 바로 남북으로 나뉜 거죠. 한때는 2만5천명이 넘게 거기서 생활했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제는 전쟁도 끝났고, 전부다 대학민국의 주권이 미치는 땅이기 때문에 누구도 괴뢰군을 무서워하면서 살지 않습니다. 근데 빨치산들이 지리산에 흩어져 살다고 겨울이 되고 먹을 게 없으면 민가로 내려와서 사람도 헤치고 고추도 뺏어가고 닭도 잡아가고 돼지도 끌어가고 이러는 거죠. 무슨 이야기냐 하면 괴뢰군들이 지배하지는 못하지만 수시로 내려와서 안 좋은 영향을 끼치는 거예요. 그런 일은 신자의 내면세계 속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적인 입장에서 보면 항상 양쪽에 치우치기를 거부하는 입장입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거듭남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 안에 심어놓으신 놀라운 영적 생명, 그리스도와의 연합된 통로를 통해 흘러내려오는 하나님의 은혜의 끝없는 생명력 - 이것들을 굉장히 놀랍게 평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절대로 과소평가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우리 안에 있는 죄의 영향력도 과소평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결론을 이야기하자면 그렇게 하나님이 죄와 사망의 결박에서 우리를 끊어주셔서 우리 안 에 두신 죄의 지배를 종식시키시고 은혜의 통치를 시작하셨거든요. 그 은혜의 지배를 시작하셨으니까 은혜의 법칙을 따라서 자신의 영혼을 관리하면서 건강하고 아름다운 신앙생활을 해나가면, 죄와 부패한 본성을 계속 죽이면서 성결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아서, 하나님이 인간을 이 세상에 창조하셨을 때 기대하셨던 원래의 목적을 따라서 살 수 있게 되는 것이죠. 그리고 예수그리스도께서 그렇게 우리를 원래의 인간의 창조목적으로 돌아가게 하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셔서 우리를 구속하신 것이죠. 천당 보내 실려고 한 것이 아니라. 그것은 삶의 결과인 것입니다. 사는 날 동안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 하나님을 즐거워하면서 살 수 있게끔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성화란 바로 이렇게 주님이 거듭나게 하셔서 죄의 지배를 종식시키시고 은혜의 지배를 시작하셨지만 내안에 빨치산처럼 남아있는 부패한 본성을 끊임없는 성령의 은혜의 역사로 이것을 본질적으로 계속 새롭게 하심으로서 우리가 점점 더 점점 더 성품에 있어서나 삶에 있어서 주님을 닮고 주님과 더 깊이 연합된 삶을 살게 하는 성령의 점진적인 은혜의 작용을 가리켜서 성화(Sanctification)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거듭남은 하나님이 누구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으시고 혼자하시는 사역이지만 신학적으로 협동의 사역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는 방법에는 보존과 협동과 통치가 있는데 여기에서 말하는 협동이라는 것은 어떤 일도 하나님이 못하시는 일이 없지만 하나님이 미리 정해놓으시기를 이러이러한 일은 나 혼자 안하고 사람들과 함께 할 것임을 정해놓으신 것, 이것이 우리의 성화의 삶입니다. 하나님께서 혼 성화를 시키시는 것이 아니라 성화되려고 애쓰는 사람에게 은혜를 주셔서 그 사람을 성화시켜 나가는 것입니다. 도대체 그러면 성화가 하나님의 은혜로 된다는 건가 우리의 힘으로 된다는 건가. 존 오웬 이라는 청교도는 자기의 책 속에서 이런 반문을 제기했습니다. 성화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한다면 우리의 노력이 필요 없을 것이고 성화가 우리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라면 하나님의 은혜가 무용지물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결코 그렇지 않고 하나님이 성화되려고 욕구를 가진 사람들에게 성화될 수 있는 힘을 주시고 성화되고자 하는 욕구는 하나님이 주신 은혜에 대한 믿음의 신실한 반응 이라는 거죠. 그러니까 하나님이 아무리 은혜를 주셔도 그 은혜에 대한 반응이 없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문제를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아 그러면 하나님이 오십이고 내가 오십이고, 이렇게 해서 내가 성화를 해나가는 거구나’ 주도권을 하나님이 쥐고 계신 겁니다. 한편으로는 하나님이 이끌어 가시는데 순종하고 한편으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명백하게 깨닫고 자기 속에 있는 내면의 부패성과 싸우고 삶으로 드러나는 악, 죄 그 뿌리를 찾아서 싸우면서 하나님의 은혜로 자신의 본성이 새로워져서 새 사람, 새 삶을 살게 되기를 갈망하되 자신의 힘으로 이것이 모두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거나 하나님이 혼자 하실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아무 노력도 하지 않는 양 극단을 모두 버리고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성화되려고 애를 쓰면서도 항상 이것은 내 힘에 의해서 성화되는 것이 아니라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성화될 수 있을 뿐이다 하면서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살아가는 태도가 성화에 대한 올바른 태도라는 것입니다.
이문제와 관련지어서 오늘날에 성화교리가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주신 구원이라는 의미 자체를 정적인 것이라고 해석하는 경향이 있는 것이죠. 구원이라는 문제와 관련해서 우리가 잘하는 질문이 뭐예요? ‘목사님 질문이 있는 데요 정말 우리가 구원받으면 그 구원이 취소 안 되고 하나님 나라 갈 수 있나요?’ 그렇죠. 그러면 즉각 이런 질문을 하는 거예요. ‘그러면 주님을 영접하고 믿은 다음에 죽을 때 까지 죄만 짓고 나쁘게 살다가 죽었는데 그 사람도 천국에 가나요?’ 이렇게 물어보는 거예요. 구원을 떡볶이 식으로 생각을 하는 거죠. 그런 식으로 질문을 하는 거죠.
그런데 성경적인 관점에서 보면 그렇지 않아요. 우리는 구원은 곧 천국 가는 것, 그리고 멸망은 지옥 가는 것 이렇게 간단하게 생각하거든요. 신앙 그 자체가 너무 피안적 인거죠. 현세의 삶에서 어떻게 믿음을 고백하고 살아야 하는가 하는 고민을 뛰어넘어서 불교신앙에서 극락으로 가냐 음부로 가느냐 하는 것처럼 획일적인 구도를 갖고 본다 그거죠. 그게 아니라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삶과 죽음 전체를 포괄하는 거예요. 그래서 삶과 죽음 전체를 포괄해서 살아가는데 있어서 역시 구원이라는 맥락에서 다 봐야 한다는 겁니다. 목숨을 갖고 살아있지만 영적으로 보면 죽은 것이거든요.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 자체가 지옥의 삶을 미리 가불해서 맛보면서 살아가는 삶이거든요.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살라고 인간을 지어놓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죠. 그래서 결국은 구원 그러면 단순한 죽음이후의 영혼의 구원의 문제가 아니라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에 인생이 얼마일지는 모르지만 정말 하나님이 죄가 들어오기 전에 처음 인간을 창조 하셨을 때 기대하셨던 인간의 원래적인 목적으로 돌아가게 하는 그것이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구원의 의미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오늘날 그렇게 구원받은 사람답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즉각적인 칭의의 구원만으로는 그렇게 살 수 없다는 거죠. 그리고 성경이 보는 관점자체는 이 두 가지가 절대로 분리된다고 보는 것이 아니라 동전의 앞뒷면과 같은 성격을 갖고 있다고 본 것입니다. 만약 그 사람이 진정으로 즉각적인 구원을 받은 사람이라면 그 사람에게는 성화되고자 하는 욕구가 있다는 거죠. 그러니까 아까 말한 바와 같이 즉각적인 구원은 받았는데 일생동안 계속 죄 가운데 살면서도 만족하게 살다가 죽었다면 즉각적으로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이 말한 견해인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이후의 신자의 최고의 소명은 뭐냐 하면 거룩한 사람이 되고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성화되어감 으로서만 내적으로는 하나님과 자신을 그리스도 예수의 죽으심을 통해 믿음으로 말미암아 원리적으로 이루어놓으신 그리스도와 자신과의 연합을 원리적인 연합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연합을 공고히 하면서 살아갈 수 있게끔 해주고 그리고 외면적으로는 그렇게 내면의 본성이 진실하게 변하고 하나님의 생명에 잠겨있음으로 말미암아 거기에서 의롭고 거룩한 착한 삶의 열매들이 맺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죠.
그리니까 비유하자면 이런 것 입니다. 도덕주의가 뿌리가 죽어있는 나무에다가 사과를 실로 매다는 것이라고 한다면 신비주의나 관조주의적인 성화관은 뿌리만을 생각하고 열매에 대해서 고려하지 않는 그런 것이 바로 양 극단에 치우친 성화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성화되지 않으면 그 사람이 이 세상에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될 수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가 만약에 성화되지 아니하면 그는 결코 이 세상에서 인간의 근본적인 목적인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 하나님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그런 삶을 살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들이 성화되어야할 목표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기도 한 동시에 신자의 행복을 위해서 꼭 필요한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바로 우리들이 성화되어야할 필요성을 이야기 해주는 것입니다. 결국은 성화 없이는 신자의 참된 행복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세요. 신앙생활 이제까지 해오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깨닫고 은혜생활 잘 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 앞에서 날마다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주님을 더 잘 섬기면서 살고 그 속에서 기쁨을 누리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으면서 자기의 불결과 더러움을 뉘우치면서 조금이라도 예수님을 닮아가려고 애쓰는 그때에는 굉장히 어려움이 많죠. 신앙의 고민도 많고 회개하면 가슴이 아파오고 눈물도 많이 나고, 내가 정말 이렇게 예수님을 믿어도 되나, 어떤 때는 교회당에 나설 때 마음이 무겁고 하나님 앞에 너무 죄송스러워서 고개를 들 수 있는 그런 고민 아픔도 있어요. 그런 것은 모두 생명에 이르는 고민이요 아픔이요 근심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을 때에만 여러분들이 정말 예수님 때문에 행복하고 예수님께 사랑을 많이 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지 그런 거 모두 접고 ‘이때 이정도 죄지으면 어때, 예수님도 아마 사람들이 나만큼만 살면 춤추실 꺼다. 내가 뭐 어차피 목사가 될 것도 아닌데’ 이런 생각하면서 사는 동안에 그는 절대 행복하지 않았어요. 행복했다면 그것은 주님 때문에 행복한 것이 아니라 그것은 그렇게 신앙을 양보하면서 살아가는 가운데 얻는 잠시 취하는 세상의 즐거움과 만족 때문에 즐거운 것이지 하나님 때문에 행복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의 신자의 생애에 있어서 모든 것을 잃어버려도 포기할 수 없는 최상의 삶의 목표는 진정한 크리스챤, 참된 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 참된 신자라는 것이 뭐냐면 계속 성화되어서 주님이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우리를 구속 하셨을 때에 고치셔서 우리를 이 세상에 두시려고 했던 그 상태에 가장 가깝게 다가가는 신자가 되는 것, 그것이 Real Christian, 진정한 신자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만 하나님을 즐거워할 수 있고 그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실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은 다음에 이런 목표는 제쳐놓고 예수님께 응답받아서 돈도 벌어야지, 좋은데 시집도 가야지, 돈 많이 벌면 조금 떼서 선교도 해보지 뭐 이런 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지금 뒷다리 긁고 있는 것입니다. 남의 다리 긁고 있는 것이예요. 아무 소용이 없는 거죠. 번지수를 잘못 찾은 것입니다. 기복신앙을 이야기할 필요도 없습니다. 기본적인 것이라는 겁니다. 기독교 신앙의 구도가 이런데 예수님 때문에 복을 받아보겠다고 하면서 자기의 인간적인 야심을 채우겠다는 식으로 신앙에 접근하면 문제가 복잡해지는 것입니다. 얼마 냈더니 얼마 복을 받았다 이런 식이 된다는 거죠. 물론 하나님이 진실하게 신앙생활하면 복도주시고 건강도 주시고 여러 가지 축복들을 하나님이 주시죠. 그렇지만 그런 것들이 하나님이 우리를 예수 믿게 하는 궁극적인 목표가 아니라는 겁니다. 궁극적인 목표는 우리를 참 사람 되게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을 위해서 봉사할 수 있는 최고의 섬김은 뭐냐 하면 자신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어떤분이시고, 그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각 성도들이 성화되어 감으로서 교회가 진정으로 교회되어 가는 겁니다. 한 두 사람이 나와서 교회의 제도를 뜯어고쳐가지고, 장로 제도를 뜯어고치고, 목사제도를 뜯어고치고, 교회 제정 운영하는 것을 뜯어고치고 이런다고 해서 교회가 참 교회된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물론 그런 개혁도 해야 하지만 교회가 온전하게 되는 것은 머리되신 그리스도께 온성도가 붙어있기 때문에 그 성도들 한사람 한사람이 성화되어가서 그렇게 됨으로서 온전하게 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온몸이 다 종창이 나고 병신이 되었는데 입만 살아서 ‘때려부숴, 고쳐, 새롭게 해!’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이 새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다 나아야죠. 그렇기 때문에 한사람의 성도가 성화되어간다는 것은 곧 교회를 세우는 일입니다. 개인의 성화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교회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문제입니다. 이런 데에서 강력한 소명을 느껴야 하는 겁니다. 제가 많은 그리스도를 만났거든요. 예수 믿었어요. 그래서 물어 봤어요, 구원받았냐. 그랬더니 구원받았다고 확신한데. 좋다 그러면 너 왜사냐? 구원받았는데 왜사냐, 너 사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떻게 영광을 받으시냐. 그랬더니 하는 말이 주님을 사랑하겠어요. 그런 이야기 하나 마나지 그런 건 기본이죠. 사업을 열심히 해서 돈을 벌어서 선교에 기여하겠대요. 자기는 뭐 신학교 가겠대요, 자기가 재능이 있는데 꽃꽂이를 잘하기 때문에 꽃꽂이를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싶데요. 자기는 뭐 잘하는 것이라고는 노래밖에 없어서 CCM가수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모두 좋다 이거예요. 그런데 이것은 모두 지엽적인 것이지 전체는 아니라는 것이죠. 예를 들면 이런 거죠. ‘야 임마 엄마가 너 나았어. 엄마가 너 낳느라고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니? 열 네 시간을 진통하고 그래도 안나오니까 배를 갈라서 너를 낳는데 낳아 노니까 너 숨 안 쉰다고 해서 거꾸로 들고 생난리를 치고 그렇게 해서 널 길렀다’ 그랬더니 애가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엄마 가엷은 어머니 나를 그렇게 나으셨네요. 엄마 너무 사랑해' 하면서 막 우는 거예요. 그래 너 엄마 그렇게 사랑하고 엄마은혜를 그렇게 못 잊는데 너 엄마를 위해서 뭐해줄래? 그랬더니 ‘엄마 내가 사탕 먹다 남은거 하나 줄께’ 아주 눈물을 흘리면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또 하나 나이가 조금 먹으면 ‘엄마 옛말에도 있잖아, 딸 때문에 비행기 탄다고. 내가 비행기 태워줄께.’ 틀린 이야기는 아니지만 좀 썰렁하죠. 그게 뭐냐면 부분적이긴 한데 총체적인 것을 위해주는 것은 아니라는 거죠. 그런 거 하면 안 된다 그렇게 말할 수는 없지만 그게 정답은 아니라는 거죠. 뭔가 조금 비켜간 거죠.
그러면 가장 좋은 것은 뭐예요? 엄마 나를 그렇게 고생해서 나으셨는데 제가 모든 것을 엄마를 위해 드리겠습니까. 그렇지만 그것가지고 어떻게 충분하겠습니까. 가장 좋은 것은 내가 이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 어머님이 눈감으실 때까지 내가 이 세상에 살아가는 것이 너무 자랑스럽고 내가 어디에 가서 살든지 나의 존재 때문에 어머니 아버지의 존재 때문에 누가되지 않게 살려고 합니다. 이게 어떤 의미에서는 정답에 훨씬 가까운 거죠. 하나님도 그거 원하신다 그거죠. 신학교가요, 가스펠도 부르고 꽃꽂이도 하고 가서 태권도도 가르치고 영어도 가르치고 다 하라 이거예요. 그런데 그게 다라면 너무 슬프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왜 사느냐고 하면 그런 목표가 분명하지 않은 겁니다. 다음서부터 분명해야 합니다. 구원받은 이후의 나의최고의 소명은 내가 이 세상에 사는 것이 주님께 기쁨이 되고 .. 그러면 이렇게 또 반문한다고. 아니 그럼 우리가 죄 조금 진다고 하나님이 안 기뻐하시나요? 그것 말고-왜 한 10년 속 썩이다가 1분 기쁨 드리고 20년 속 태우게 하다가 한 30초 기쁨을 주는, 그래서 전체 다 합쳐봐야 몇 시간 되지도 않은.. 왜 그런 인생을 사냐는 겁니다. 그건 아니라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구원받은 사람들은 그 구원이 진정한 것이면 성화의 소망에 불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 죽으셨는데 내가 이렇게 살아가서 어떻게 하나, 무엇인가 주님을 섬기고 싶다. 그 섬김을 통해 주님의 몸인 교회가 더 온전해질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소원 가운데 살아야 하는 겁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사람의 최고의 소명은 성화입니다. 주님을 닮기 원합니다. 주님처럼 살기를 원합니다.
세 번째 성화의 핵심부에는 거룩이 있는데, 거룩이 뭐냐는 거죠. 히브리말로는 카도시 라고 말하고 희랍어로는 하기우스라고 의미하는데 이건 두 가지를 의미하는 거예요. 하나는 피조물과 창조주이신 하나님 사이에 있는 무한한 질적 차이, 두 번째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무한한 도덕적인 차이. 사랑이 인간에게도 있는데 그 사랑은 너무 왜곡됐어. 저한테 조금만 잘해주면 막 좋다고 하는데 그렇게 좋다고 해도 한번만 싫은 소리하면 팍 돌아서서 죽여버리고 싶은 미운마음으로 돌변하는 것.
이렇게 사랑이 부도덕하고 도덕성에 있어서 완성도가 현저하게 낮아서 어떤 때는 그 욕망이 짐승의 욕망과 같이 꿈틀거린다 이거죠.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완전하다는 거죠. 이 두 가지가 거룩이예요.
그래서 그 하나님의 거룩을 맛보게 되면 어떤 효과가 있냐면 첫째는 하나님과 자기사이에 무한한 차이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하나님 앞에 엎드려 버리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위대하신 하나님이시고 나는 얼굴을 들 수 없는 초라한 피조물일 따름입니다. 이것은 거룩의 첫 번째 요소가 미치는 효과입니다. rm리고 또 하나는 거룩을 경험하게 된 모두가 자기 자 신이 정말 더럽고 불결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철저하게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거룩의 두 번째 요소가 끼친 결과라는 거죠.
그래서 이것이 우리에게 적용된 주관적인 의미로서는 첫째,(5페이지 마지막입니다)현재의 죄된 행위로부터의 구별이며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성별입니다. 따라서 성경적인 ‘거룩’은 죄짓지 않고 사는 도덕적인 생활이 아니라 (줄치세요)죄가운데 있는 모든 것으로부터의 영적 성별이며,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바쳐짐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거룩해지는 길이 뭐냐? 이것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서 거룩해져 간다라는 거죠. 특히 이 문제를 강조했던 사람이 칼빈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과 죽음 안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와 연합되었기 때문에 점차적으로 거룩하게 되어 간다. 그러니까 거룩은 바로 그러한 연합의 결과라고 볼 수 있는 거죠. 그래서 그리스도와 연합된 가운데 우리의 성화는 점차 진보하게 되고 이점은 고린도 전서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바울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화를 가져오셨을 뿐 아니라, 그 자신이 바로 우리의 성화이시다. 따라서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다면, 우리는 성화되는 과정에 있다. 이처럼 성화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서 성령의 주도적인 사역으로 이루어진다.」 이 부분을 교리적으로 잘 정리해 두셔야할 필요가 있습니다.
신자가 되는 순간에 예수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이루어집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고 부르는 건데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영적으로 접붙여지는 거죠. 연합이 되게 되면 포도나무 가지를 접붙이면 처음에는 매달려 있지만 접붙여져서 뿌리에서 끌어올린 물이 가지를 타고 뻗어나가듯이 그렇게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생명의 능력이 연합을 통해서 그 사람 속에 흘러들어오는 것이 성화의 궁극적인 동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쉬지 않고 강조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상관없이 자기가 성결하게 살려고 노력하고 애쓴다고 해서, 자기 혼자 그렇게 한다고 해서 성화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금욕주의는 접근방법이 다릅니다. 금욕주의는 그리스도 없이 자신이 스스로 욕망을 제어함으로서 자기가 스스로 죄를 죽임으로서 자기를 정결하게 할 수 있다는 거죠. 그러니까 아니라는 거죠.
영혼에 그런 자정작용이 없다 이거예요. 욕심을 억제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죄를 죽이는 것은 로마서 8장에 의하면 성령이 하시는 일입니다. 영의 역사 없이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서 성령의 은혜가 주어짐으로서 죄를 계속 죽이면서(오염을 죽여가면서)하나님의 생명이 풍성하게 역사하게 되는 것이 성경이 바라보는 성화의 원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그런 연합을 통해서 하나님의 생명이 흘러들어온다면 그것을 그런 원리이기 때문에 예수님자신이 성화이고 그리고 그 은혜가 바로 성화라고 이야기 하는 거죠. 그렇다면 그렇게 흘러들어오면 되지 않냐. 그런데 우리가 성화의 의무 성화의 소명을 느껴야할 이유가 뭐가 있느냐 이거죠. 그렇게 묻는 사람에게 이런 반문을 제기하는 거죠. 성경에서 나오는 수많은 ‘내가 거룩할지니 너희도 거룩할 찌니라, 영과 육의 모든 더러운 것으로부터 너희를 정결하게 하라 거룩 하라, 거룩 하라, 진실 하라, 참되라, 자라가라, 육체의 정욕을 멸하라, 의롭게 살아라.’와 같은 이런 끊임없는 명령형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이냐는 거죠. 그러니까 연합되어서 그렇게 은혜가 흘러들어오고 그 은혜가 우리를 성화되게 만든다면 하나님이 명령하실 필요도 없는 것 아닙니까. 우리가 하는 게 아니니까요. 그게 아니라 이거죠.
뭐냐 하면 원리적으로 우리들이 믿는 그 순간에 그리스도께 접붙여져서 생명을 공급받으면서 살게 되는데 누구에게든지 아무리 막되 먹은 그리스도인에게라도 그 생명의 능력은 공급이 됩니다. 내가 성화의 명령에 순종하면서 살면 이 능력이 충만하게 공급이 되면서 말하자면 부패성에 비해서 강력한 은혜의 효력이 죄를 누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 속에 있는 부패한 본성 즉 오염을 제거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성 그 자체가 성결한 사람으로 변해가는 것입니다.
예화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담배를 피잖아요. 담배를 피면 처음에는 좋아서 피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피는 거 보면서 재미로 피거든요. 처음에는 담배한번 피고 주저앉아서 눈물을 쏟으면서 제체기를 몇 번씩 하잖아요.
그러다 한 갑, 두 갑, 세 갑 피우다 보면서 제법 필 줄 알게 되죠. 그러다가 1년 2년, 3년, 4년 태우게 되면 담배가 몸에 배게 되죠. 밥을 먹으면 담배를 찾아요, 안되면 쓰레기통이라도 뒤져서 담배를 피워야 되는 거죠. 그러다 그 사람이 끊었어요. 끊으면 금단현상이 오게 되죠. 한 2년 3년이 지나고 담배를 안 피우는데도 저쪽에서 담배냄새가 나면 ‘아 맛있다’이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제가 세례를 받고도 한 갑 반씩 담배를 피웠는데 담배 끊고 약 3년 정도 담배피우는 꿈을 꿨어요. 어느 날 아침인데 직장에 나가는데 차를 탔거든요. 좌석버스 타는 앞에서 담배를 피워. 앞에 사람이 담배를 후하고 피는데 나도 모르게 ‘흠~하~’하더라는 거죠. 3년이 지났는데, 지금은 어떻게 되었느냐. 지금은 10m 바깥에서 담배를 피워도 그 음식점에서 도로 나와야 됩니다. 토할 것 같아서 견딜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무슨 이야기예요? 3년까지는 본성이 아직 변화되지 않는데도 절제를 하고 있는데 지금은 장기의 질서 속에서 냄새 자체를 받아들이지 않은 거예요. 친화성이 아주 사라져 버리는 거죠. 그렇게 시간이 걸린다는 이야기입니다.
본성이 새로워진다는 말이 그런 말입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죄를 짓지 말아야지 이러는데 나중에는 죄에 대해서 혐오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 사람이 거룩해져 가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죄에 대한 혐오감을 가지고 살아갈 때 하나님의 거룩에 대한 갈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연합을 통해서 흘러들어오게 되는데 내가 순종하면서 살고 자꾸 죄와 더불어서 싸우고 성화되려고 애쓰고 자기 깨어짐이 있고 회개하고 이렇게 되면 연합이 곤고해지면서 거침없이 은혜의 물이 흘러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를 효과적으로 죽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착각까지 드냐면 ‘어쩌면 내 안에 죄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 경험을 한사람이 사도 바울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안에 예수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미 사도 바울이 완전에 도달한 것 같은 느낌을 받은 겁니다.
그런데 반대로 이런 연합을 가지고 있는데 내가 불순종하고 성화 안 되려고 하고 죄의 달콤함을 맛보고 은혜를 공급받을 수 있는 통로들을 거부하고 기도도 안하고 성경도 안 읽고 예배도 대충 드리고 말씀의 깨달음이 와도 절대 순종하지 않으며 짐승같이 막되 먹은 삶을 살아도 연합은 어디로 날아가지 않고 그대로 있습니다. 그런데 흘러들어오는 물이 너무 작고 이속에서는 죄가 이미 엄청난 영향을 가지고 암 덩이처럼 커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은혜가 안 흘러 들아 가는 것은 아닌데 그 은혜 가지고는 그 죄를 죽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마음 전체가 죄 덩어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불신자라도 이렇게 악한 생각을 하고 이렇게 막되 먹은 삶을 살 수 있을까. 그런데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은혜 가운데 있을 때 살아있는 것 같이 자기 안에 살아있는 것 같이 자기가 아닌 어떤 죄의 존재가 살아서 역사하는 것 같은 것입니다. 그것을 사도바울이 뭐라고 했냐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누가 나를 사망의 몸에서 구해내랴’ 그것이 죄에 완전히 내면적으로 진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착각이 드냐면 ‘도대체 구원받은 것이 무엇인가, 예수님이 이 지경이 되었는데 나를 왜 안도와 주시나’ 하는데 그것이 하나님이 세워놓으신 영적인 원리입니다.
마음을 지키면서 성화의 삶을 매일매일 살아가면 계속 영적인 삶이 진전하고 거룩해져 가고, 숙명적으로 비참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계속 변화가 오는 것입니다. 성장은 더뎌도 계속 가는 것입니다. 더 열렬히 매달리고 열렬히 순종하면서 은혜 가운데 살면 아주 급속하게 한 달 만에 혹은 일주일에 한번씩 만나도 아주 다른 사람으로 변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 가운데 빠져도 역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그 의무를 다하지 않는 사람은 실천적으로 무신론을 택한 사람입니다. 어떠한 생명도 없습니다. 잠시 펑펑 눈물 흘리고 회개하면 어쨌다는 겁니까. 다시 몇일 있다가 옛 삶으로 돌아가는데, 은혜 가운데 계속 거하면서 성장을 해야 하는데 성장이 안 되는 것이죠. 좀더 쉽게 믿을 수 있는 길이 없을까. 쉽게 믿어보라구요. 교회 가서 수다나 떨고 몰려다니면서 극장 구경이나 다니고 그런 거나 해보라구요. 마지막에 남는 게 뭐가 있겠냐구요. 그게 뭡니까 교회 안에 짐승이지. 하나님의 은혜가 없는데 무슨 삶이 달라지겠습니까.
그러면 교회의 역사 속에서 성화에 대한 입장이 어땠는가를 살펴보겠습니다. 제일먼저 거명할 사람이 아우렐리우스 어거스틴 이라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아마 어렸을 때 역사 속에서도 들어본 사람일 것입니다. 엄청나게 천재적인 학자 였습니다. 교회 역사에 나타난 성화교리의 틀을 마련한 교부가 어거스틴 입니다. 그의 신학의 화두는 '은총', 라틴어로서 ‘그라티아(gratia)’ 였습니다. 그는 신자의 즉각적인 구원뿐만 아니라 성화의 전 과정을 모두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총이라는 주제 아래서 보았습니다. 성화에 있어서 인간이 성령의 사역에 협력한다는 것은 인정했지만, 협력할 수 있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의 신학은 은총의 신학이라고 불리 웁니다.
당시의 펠라기우스라는 당시의 어거스틴과 맞서는 유명한 논적이 있었는데 이 사람들은 정 반대로만 말했습니다. 인간은 타락한 존재가 아니라 상당히 가능성이 있는 존재이며 따라서 인간은 자기 자신 스스로 회개할 수 있고 돌이킬 수 있고 또 인간은 하나님이 이미 주신 이성이나 지성이 위대하고 하나님의 형상이 파괴되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가 바르게 살 수 있다고 마음을 먹으면 바르게 살수 있다고 주장하며 은총 운운하는 것은 자기가 자기할일을 하지 않고 하나님께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엄격한 도덕주의로 나가게 되었습니다. 도덕적인 실천을 강조하는 인본주의적인 신학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은 펠라기우스는 이단으로 정죄되고 어거스틴의 은총의 교리가 승리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후대의 많은 신학들이 어거스틴의 신학을 못자리로 삼아서 끌어들여오게 되는데 그것이 뭐냐면 은총의 교리입니다. 창조에서 종말까지 모든 것을 은총의 구도에서 보는 것입니다. 우선 이 세상을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 자체가 무에서 유로 창조된 것이듯이 인간도 무에서 유로 창조되었으므로 존재 자체가 하나님 앞에서 빛 덩어리 라는 것입니다. 흙으로 창조하셔서 생기를 불어넣으셔서 사람이 되었고 흙을 만드시고 영혼을 주신분도 하나님이시므로 자기 것은 하나도 없고 인간의 창조서부터 은총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타락했는데도 버리지 아니하시고 예수님을 보내주신 것도 은총이라는 겁니다. 구원을 받아서 이제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 하는데 인간의 살 능력이 없어서 하나님께서 그렇게 살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 힘을 주시는데 살고 싶어 하는 마음을 갖게 해주시는 것도 인간이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한 것 이라는 겁니다.
이것은 이 사람의 개인적인 체험에서 많이 반영이 되었습니다. 이 사람이 굉장히 똑똑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당시의 모든 지성인들이 혹하고 빠져들었던 철학이 있었는데 그것이 마니교였습니다. 이 마니교는 이원론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어서 물질과 하나님이 동재하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모든 구도를-선과 악도-이원론적인 구조로 보았습니다. 선의 대표자이신 하나님이 악과 싸워서 결국은 승리한다는 개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역사자체가 이원론적으로 가다가 합쳐져서 하나님의 승리로 끝나는 역사관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중대한 문제가 나오는데 하나님과 물질이 동재한다고 한다면 물질은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도 물질로부터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고 말해야 되는데 그렇게 되면 물질과 하나님이 동격이라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창조행위 없이도 이미 있었던 것이 있다는 이야기 인데 그러면 그것은 어떻게 있게 되었냐는 문제가 또 제기되는 것입니다. 결국은 이런 식으로 동시적인 선재를 이야기하는 것은 하나님의 초월성을 부인하는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식의 철학에 빠진 것이죠. 그쪽 철학이 아주 굉장한 거예요. 그래서 그런 철학들을 쭉 섭렵하면서 도대체 성령의 교리를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방탕하게 되다가 극적으로 회심을 하게 됩니다. 아이들이 뛰어놀면서 부른 동요를 들으면서 ‘들어라 집어라 읽어라’ 이런 소리를 들으면서 성경을 펼치다가 로마서를 보면서 회심을 하게 되고 암부로시우스라는 당대의 밀란의 설교자를 들으면서 깊이 회심을 경험하고 크리스천으로 개종하는데 그 뒤에서 모니카라는 그의 어머니가 그렇게 오랜 세월을 눈물로 기도했다는 그 이야기가 역사 속에서 아름답게 전해 내려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이런 경험을 갖고 있는데 또 어떤 일이 있었냐면 회개하고 돌아왔는데 17살 때 이미 벌써 사생아를 낳았습니다. 그니까 수없는 여성 편력 속에 산거예요. 그런데 회개하고 돌아와서 로마의 양가집 규수와 혼약을 맺는데 아내 될 자매가 로마의 법정 결혼 연령에 2년이 못 미치는 겁니다. 그 2년 동안의 욕정을 못 참고 다시 범죄의 늪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다가 다시 거기서 놀랍게 하나님 앞에 구출을 받고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그가 완전히 회심하고 새사람이 된 다음에 길거리를 걸어가는데 옛날에 같이 놀던 자신의 내연의 여자가 ‘어거스틴, 어거스틴, 저예요.’그러니까 어거스틴이 이야기했던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너는 너지만 나는 옛날에 내가 아니란다.’ 그러면서 완전한 회심을 하게 됩니다.
이런 신앙의 경험을 갖고 있고 또 하나 펠라기우스와 싸우다 보니까 이 사람은 무엇을 깨닫게 되냐면- 이 사람의 은혜의 교리를 성경이 충분히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거든요. 모든 것을 은혜로라는 말이 성경에 얼마나 많이 나와요- 인간은 전적으로 무능하다 그것도 좋은데 오직 하나님의 은총밖에 없다. 이렇게 되니까 어떻게 되냐면 인간은 가만히 피동적인 위치에 서서 하나님께로부터 쏟아지는 은혜만을 받는 존재로 해석되어지고 만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으로 하여금 그렇게 열렬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게 만드는 도구로만 그의 신학이 사용되었으면 아무 문제가 없는데 그게 아니라 이렇게 은총만을 계속 강조하고 성화를 위한 인간의 노력을 강조하지 않고 혹시 그것을 신학 속에서 인정하더라도 그렇게 할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라고 해버리니까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성화되고자 하는 노력 같은 것들이 너무 무시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그 사람을 성화시키는 은총이라는 것 그 자체가 인격적으로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 속에서 진실한 참회와 깨어짐,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죄와 분투하며 살아가는 과정에서 인격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 하늘로부터 일방적으로 부어져 내리는 거룩하고 신령한 에너지처럼 해석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실제로 그가 그렇게 해석을 한거죠. 그러다 보니까 인격 안에서 그리스도와 인격적인 연합을 통해서 인격을 통해서 영혼에 흘러 들어온다고 하는 인격 대 인격의 관계를 통한 영적인 연합, 거기서 흘러들어오는 성령의 은혜가 인격이라는 것이 무시된 가운데에 영적으로 신령한 에너지 같은 걸로 해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슨 이야기가 나오느냐면 그 에너지가 어떻게 들어오느냐는 문제가 나옵니다.
그런 애매한 길을 열어놓고 어거스틴이 끝나고 그 다음에 천재적인 신학자 한명이 나오는데 그 사람이 ‘토마스 아퀴나스’라는 사람입니다. 그가 쓴 유명한 책이 무엇입니까? 신학대전이라는 책입니다. 이 사람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의 체계를 가지고 기독교의 모든 진리를 해명해 보려고 노력했던 사람입니다. 아주 걸출한 그리고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신학 대전이 카톨릭에서는 신학 교과서로 되어 있는 것이죠. 어거스틴도 이미 토대를 마련했고 이 토마스 아퀴나스에 내려오면서 이런 것들이 더 세련되게 묘사가 되는데 무엇이냐면 ‘그렇다면 그렇게 신자를 거의 일방적으로 성화되게 만드는 하늘로부터 부어지는 거룩하고 신령한 에너지 같은 힘은 누가 주장하느냐. 교회가 주장한다고 본 것입니다. 교회가 그것을 열었다 닫았다고 하는 것이죠. 그러면 무엇을 통해서 그렇게 열었다 닫느냐. 성례전을 통해서, 미사와 성찬 이런 것들을 통해서 열고 닫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나오는 교리가 소위 이야기 하는 그라티아 인퓨자, 즉 주입된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영어로 말하자면, Grace Infused, 주입된 하나님의 교리라는 것이 나오게 됩니다.
그런데 이제 토마스 아퀴나스 이전 어커스틴의 사상 속에 까리따스와 큐피티다스 라는 개념이 나오는데 까리따스가 뭐냐 하면 성도가 하나님을 향해 가지고 있는 지고지순한 사랑, 쉽게 이야기 하자면 오늘날 이야기 하는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아가페의 사랑, 그 사랑 때문에 사람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는 그 사랑을 이야기 합니다. 큐피티다스는 무엇이냐면 인간 속에 내재되어 있는 자기 사랑인데 그것은 욕정으로, 정욕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 까리따스가 인간에게 임함으로서 뀨피티다스를 몰아낸다는 것입니다. 그 까리따스가 어떻게 내려 오냐면 인간은 아무 공로 없고 그냥 가만히 있을 뿐인데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그 신령한 에네르기로서 성화의 은총이 물 붙듯 부어질 때 까리따스가 충만하게 되고 그 까리따스가 가득 참으로서 큐피티다스는 물러나게 된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어떻게 되냐면 그것이 없으면 신자도 아니잖아요. 그런 은총이 쏟아 부어지지 않으면 그 사람은 아무 희망이 없는 인간이 라는 것이죠. 그렇게 부어지는 은총의 에네르기를 교회가 소유하고 있다는 것이죠. 이것을 가지고 온 교회의 지체들을 거의 노예화 하는 작업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죠. 저하고 정 반대의 입장이죠, 제 입장은 뭐예요? ‘교회 왜 왔냐, 와서 머릿속으로 엉뚱한 생각이나 하고 잠이나 자고 말씀 전혀 안 듣고 가면 더 좋아지는 게 아니라 더 나빠진다 마음이 더 강팍해진다’ 이렇게 이야기 하면 그러면 죄인들이 어떻게 생각 하냐면, ‘그럼 나 나오지 말지 뭐’ 그럼 이제 내가 뭐라고 말해요? ‘그건 하나님을 막보는 거다. 그것은 배교적인 태도다’ 예배드리러 나왔는데 잠도 오고 죄 된 생각이 밀려들고 하면서 이러면 안 되는데 이러면 안되는데 그러면서 예배드리고 가면 예배의 유익은 못 받지만 노골적으로 하나님한테 대든 것은 아닌데 왜 냐오냐고 자꾸 물으니까 나 안나오지 그건 배교적인 행위라는 것이죠.
엄마 아빠가 애들 야단 칠 때 가만히 있는 게 아니라 딴 짓하는 거예요. 이러면 조금 기분 나쁠 것 아니에요. ‘자식이 엄마가 야단치는데 딴 짓하고 있어’ 그리고 딱 때리니까 그다음에 가만히 있으면 그런가 보다 하잖아요. 그런데 딱 때렸는데 ‘낳으면 다야? 왜패!’ 이게 아까 그것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장으로 접어드는 것입니다. 똑같은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불순종도 등급이 있고 반항도 계급이 있는 것이죠.
그래서 뭐라고 하냐면 그냥 오기만 해라 졸다가든 술 먹고 오든 미사에 참여하기만 하면 성화의 은총 적 에네르기가 네 영혼 속으로 주입된다는 것이죠. 그런데 그것은 네가 느낄 수도 있고 못 느낄 수도 있다. 그러니까 이제 교회에서 짜르면 완전히 끝나는 것이죠. 성화의 은총이 딱 막히는 것이죠. 영혼의 생명을 교회가 쥐고 있다고 보는 겁니다. 평신도와 사제와 성인, 이 3계급으로 나뉘는데 성인은 죽은 사람이고 사제들이 그것을 쥐고 있는 겁니다. 꼼짝 못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거죠. 이것이 중세시대 천년을 암흑기로 몰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성화의 어두운 시대로 접어들게 되는 것입니다.
책 한번 보세요. 다 한 이야기지만 이거죠.
성화 역시 이러한 신학적인 맥락에서 이해되었습니다. 즉, 죄인을 성화시키는 은총의 에너지는 그리스도의 속죄의 공로를 자원으로 삼기는 삼는데 그것을 나눠주는 것은 교회다 이것이죠. 성례전을 통해서 죄인들에게 주입시켜주는데 그 주입된 은혜로 말미암아 신자들은 거룩한 삶을 살게 되고 여기서 성령의 열매가 맺히니 교회에서 성례전을 안 베풀어 주면 너는 희망이 없는 희망이 없는 인간이다 라고 되는 거죠. 이러한 원리를 통해서 주어지는 은총적인 에너지의 분여는 용서받지 못할 죄에 의하여만 중지되며, 다른 죄로 말미암아도 장애는 있을 수 잇는데 그 장애는 참회를 한다든지 보석-죄를 짓는 것에 대해서 보상을 하는 행위로서 선행을 하는 것입니다- 같은 행위를 통해서 그 장애가 제거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면의 진실한 참회나 영혼의 진실한 뉘우침 이런 것들이 다 제거되어 버리고 교회가 그 전권을 쥐고 은총적인 에너지를 주입시킬 수도 있고 뺄 수도 잇는 것입니다. 마치 아무 힘없이 누워있는 환자 들을 향해서 은총의 주사를 줄 수도 있고 안 줄수도 잇는 그런 상황으로까지 가게 할 수 있는 것이 교회라고 본 것입니다. 그것이 주입된 은혜의 교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화 그 자체를 그렇게 교회를 통해 주입되는 그리스도의 속죄에 기초한 은총이라고 본것입니다. 성화의 교리가 얼마나 왜곡되었는지를 볼 수 있는데 그 문을 사실 어커스틴이 열어준 것입니다. 어거스틴의 신학을 우리들이 깊이 인정을 하면서도 역시 한시대에 태어나서 자기 나름대로 한계를 갖게 되는 것이다 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종교개혁시대에 오는것이죠. 마틴 루터입니다.
성화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 했어요. 이러한 카톨릭의 견해를 철저히 배격하고 하나님의 은총을 이 사람도 아주 많이 말해요. 그러나 이 사람이 말한 은총은 인격적인 관계를 통해서 부어지는 은총을 이야기하기 때문에 그들이 말한 것처럼 비인격적이고 천적이고 신비한 에너지로서의 은총의 관념을 거부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교회에 의해서만 전매특허처럼 하나님의 백성에게 베풀어진다는 관념도 거부합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의 신학의 화두가 은총이었다면 루터의 신학의 화두는 신앙이었습니다. 어거스틴이 은총의 빛 아래서 성화를 이해했다면 루터는 신앙의 빛 아래서 성화를 설명한 것입니다.
그러면 은총과 성화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마틴 루터는 은총이라는 것이 비인격적인 거룩의 에너지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용서하시는 사랑 안에서 죄인들에게 아버지이신 하나님이 마음을 열고 값없이 베풀어 주시는, 즉 인간의 공로에 상관없이 그들을 불쌍히 여기심으로서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총애’라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 신학에 있었던 성화에 관한 왜곡된 견해들을 바로 잡는 일을 루터가 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성화되게 하는 인격적인 은총이 그대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매개체를 갖고 주어지는데 그 매개체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붙들게 되고 그래서 여기에 믿음이라는 개념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말하냐면 「루터는 성령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화를 위한 그리스도의 인격적인 은총은 원천적으로 ‘하나 님의 말씀과 함께’(cum vero)나타나며, 부차적으로는 성례전을 통해서도 진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성례전도 그냥 참여함으로서 얻게 되는 것이 아니라 성례전에 담겨있는 의미를 깨닫고 그 성례전 속에 성령이 역사하실 때에 그런 효과를 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인은 일방적으로 부어지는 하늘의 에네르기를 통해서 거룩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을 통해 하나님께 의롭다 여김을 받게 되고 성령의 지속적인 역사를 가능하게 하여 우리를 죄에서 구원할 뿐 아니라 죄의 지배와 영향력 아래서 우리를 건져냄으로 우리를 성화 시키신다.」
그래서 루터의 경우에는 성화라는 개념이 약합니다. 성화라기보다는 의화(義化)라는 말을 씁니다. 근본적으로 마틴 루터의 관심은 인간의 성화보다는 칭의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의 신학의 맥락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고행을 하고도 알 수 없고 평안을 누릴 수 없었는데 그리스도의 의가 자기에게 전가되고 그것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된다고 하는 화두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개인적인 체험을 바탕으로 해서 이 사람에게 있어서 화두는 신앙입니다. 신앙은 그 하나님의 은총을 받는 손이라는 것입니다. 신앙이 없으면 안된다라고 하는 것이죠. 이 신앙이 구원과 모든 것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죠.
그러다 보니까 약간 주관적으로 되는 경향이 없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터가 신학 속에서 명백히 한 공로는 전에는 성례전을 통해서 저항할 수 없이 인간에게 신비적으로 주입된다고 생각했던 인간을 거룩하게 하는 성화의 은혜가 성령의 도구를 통해서 인간에게 전달된다는 것이죠.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그 캄캄한 시대의 교부들의 신학을 공부하고 성경을 연구하면서 세운 것입니다. 오랫동안 잃어버렸던 신앙의 이정표를 공개적으로 세우는 작업을 하는 것입니다. 그 공로를 무시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성화보다는 어떻게 희망이 없는 죄인이 신앙을 통해 용서를 받고 하나님의 의로운 자녀가 되는 것인가에 대해 관심이 쏠려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원받은 후에 너무도 감사해서 거룩한 사람이 되어가는 모든 과정 자체를 의로운 사람이 되는 과정, 칭의의 과정으로 본 것입니다. 성화의 개념을 칭의 속에 집어넣은 것이죠. 우리는 칭의는 칭의 대로 이야기하고 성화를 이야기 하는데 이 사람의 경우에는 칭의속에서 당연한 결과로서 칭의를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이사람의 경우에는 성화라는 말보다는 의화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인간의 행위 없이 신앙에 의해 거룩해진다고 믿었으나, 이 신앙을 통하여 획득하는 구원과 양심의 평안을 얻는데서 그치지 않고 끊임없이 거룩하게 되어가도록 죄와 싸워야 한다고 보았다. 이것은 그대로 성화의 개념인데 의화의 개념으로 본것이죠. 그래서 완전한 성화에 도달할 수 없지만 신자는 그렇게 실천하는 것이 구원 받은 자로서의 의무라고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칼빈이 나와서 이 모든 것들을 정돈을 합니다.
「그는 칭의와 성화를 별개로 보는 구원관을 거절하고, 이 모든 것은 거듭남과 함께 들어가게 되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관계 속에서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단지 칭의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성화를 위해서도 그리스도를 신실하게 붙잡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 두 가지가 모두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신 이유이기 때문이다.」그러니까 제가 성화에 관해서 설교를 하면서 성화의 원동력으로서의 그리스도의 현재적인 체험에 대해 많이 이야기 하고 있죠? 칼빈이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 받을 때만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성화되어 가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어져 가는 건데 그렇게 거룩하게 되어져 가야할 자신의 동기 자체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고난에서 본다라고 하는 것이죠.
오늘날 놓치고 있는 것이 그것입니다. 칭의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필요하다는 것은 인정하는데 칭의는 반복 되는게 아니거든요. 한번에 끝나는 거예요. 그니까 어떻게 생각 하냐면 십자가는 구원받을 때 필요하지 예수 믿을 때 십자가가 또 필요 한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죠. 그런데 이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화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상,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현재적인 경험이 절대적으로 필요 하다는 것이죠. 그리스도 때문에 거룩해지고 싶어 하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더 온전해지고 싶어 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기위해서 더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은 것, 그것이 신자의 소망이라고 하는 것이죠.
그다음에 나오는 이야기는 「신자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하여 의롭게 되었다고 할지라도 자발적으로 거룩한 삶을 살 능력은 없다. 따라서 칼빈은 성화를 단순한 칭의의 산물이라고 보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신자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하나가 됨으로써 우리 자신의 삶을 살지 아니하고 그리스도의 비밀스러운 능력으로 생기를 얻어 그가 우리 안에서 사시고 자라나신다. 이렇게 함으로써 영혼이 육신을 소생시키는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그의 지체들에게 생명을 부여 하신다”고 본 것 입니다. 킬빈은 구원을 통하여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된 것은 단지 칭의가 아니라 성화를 위한 것이라고 강조한다. 이게 중요한거죠. 칭의의 궁극적인 목적은 거룩한 삶을 통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성화다 이것입니다. “실로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피로 우리를 깨끗케 하시는 것도 아니고-충격적 아닙니까? 칼빈이 로마서 강해에서 직접 한말입니다- 더욱이 그의 속죄를 통하여 하나님을 우리와 화해케 하시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일은 우리를 그의 성령의 참여자가 되게 하심으로 이루어지는데, 바로 그 성령께서 우리를 거룩한 삶에 이르도록 새롭게 하시는 분이시다”」 이게 배경을 모르면 칼빈이 진정 이런 이야기를 했나 라고 생각하게 되는데, 여기서 이야기 하는 우리를 깨끗케 하신다고 하는 이야기가 뭐냐 하면 칭의의 면에서는 그의 피로 우리가 깨끗해 졌는데 우리들이 존재와 삶으로 깨끗해지는 것은 그렇게 주님을 한번 영접 했다고 해서 영원히 깨끗케 되는 것이 아니라는 그것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것은 하나님과 화해시키는 것이었지만 그것이 우리를 영원히 실제적인 삶에서 화해를 누리게 살아가게 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성화가 필요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들을 위해서 속죄 제물로 죽으시고 하나님과 여러분 사이는 화목되었죠. 그런데 기도 안 될 때 있잖아요. 그렇게 사랑스럽던 하나님이 두려울 때도 있잖아요. 그렇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행복했는데 이제는 하나님 만나기 싫고 도망가고 싶은 적 있잖아요. 하나님이 내 삶을 안 봤으면 하는 적도 있잖아요. 그것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적으로는 화해가 안 되고 다시 불화하는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것 아닙니까. 그것은 그리스도의 단번의 속죄사역을 통해서 다 이루셨지만 그런 실제적인 삶에서 하나님과의 화해를 누리면서 살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속죄를 믿는 칭의의 구원만으로 안 되고 성화의 삶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루터가 성화 자체를 칭의 속에서 끌고 들어가서 설명한다고 했는데, 킬빈은 거듭남에 대해서 많이 말하지 않습니다. 거듭남, 한번에 주어진 칭의에 대해 신학에서 분명하게 말하기는 하지만 그의 관심은 그것보다는 그는 중생(regeneration)이라는 말보다는 신생(new birth)이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새로 태어난 것이죠. 중생은 인간의 공로와는 상관없이 하나님이 한번에 새롭게 하는 것인데, 신생은 그것이 아니라 칭의부터 시작해서 성화과정까지 모두 포함하고 새사람이 되는 모든 과정 자체를 신생이라고 본 것입니다. 칼빈의 관심의 포커스는 후자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당신이 혼자 일방적으로 거듭나게 하셨다 이것보다도 그렇게 시작하셨지만 그렇게 시작하신 것을 인간의 성화의 삶을 통해서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난 것 같은 삶을 사는 것. 그 동적인 과정 그것을 칼빈은 신생이라고 불렀고 칼빈의 신학에서는 중생(regeneration)이라는 개념보다 신생(new birth)이라는 개념이 훨씬 우등하게 자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칼빈의 관점이 그 이야기를 하는거예요. 뭐냐면 칼빈은 성화를 하나님의 선물인 동시에 하나님의 명령된 요구라고 본거죠. 이렇게 함으로서 어거스틴의 신학을 바로 잡은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무조건 하나님의 선물이라고만 보고 어떻게 할 수없이 하나님으로부터 일방적으로 부어지는 은총이라는 것만 계속 송영처럼 감탄하면서 강조한거죠.
따라서 성화에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모든 능력과 은혜에 믿음으로 참여하는 것 뿐 만이 아니라, 몸과 영혼을 모두 기울여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하고 제사장으로서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제물로 봉헌하며, 자기를 예수 그리스도께 굴복시켜 그의 죽으심과 부활과 일치시키고 세상과 죄악에서 욕구를 포기 하는 것을 포함한다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뜻이냐면 예수님이 자기같이 아무 희망 없는 인간을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죽으신 것이 너무 감사하므로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은혜를 무엇으로 갚느냐는 것입니다. 마치 어거스틴이 인간의 창조를 설명하면서 몸도 흙으로부터 왔고 흙도 하나님이 창조하셨고 인간의 영혼은 하늘로부터 왔으니까 인간의 존재 자체가 은총 덩어리이고 빚 덩어리라고 본 것처럼 똑같은 개념을 칼빈이 말하는 것입니다. 그냥 있는데 주님이 완전히 살려서 새사람 만들었다 이거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자기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완전히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피로 새로 사셨다. 다 주님의 것이고 온통 빚 덩어리라 이것이죠. 제가 설교 시간에 빚 덩어리라는 이야기 많이 강조하잖아요. 그 빚 덩어리가 은총의 덩어리라는 것입니다. 그런 은총을 입었는데 어떻게 그냥 있냐 이거죠. 그럼 어떻게 해야되느냐, 하나밖에 없다 이것입니다. 너 다시 다 도로 하나님께 드려라 그게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반응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냐면 이번엔 자기 자신이 제사장이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제물을 드리는데 그 제물이 뭐냐 하면 자기 자신이에요. 자기 자신을 드리는 것입니다. 남기고 드리는 것이 아니라 다 드리는 것입니다. 이 강의의 뒤편에 보면 ‘Car meum tibi offero Domine prompte et sincere'라고 적혀 있는데 이것은 ‘나의 마음을 주님께 드립니다. 기꺼이 진심으로’라는 고백입니다.
그러니까 칼빈의 이야기는 믿는 사람이 죄를 지으면서 사는 것은 굉장히 희귀한 일이라는 겁니다.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면 그는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 사람이라는 것이죠. 존재 자체가 이미 은총의 덩어리이고 빚 덩어리여서 제사장이 되어서 이제 내가 갚을 것 뭐있습니까 몸밖에 바칠 것이 없습니다 하며 자기를 번쩍 들어서 죽여서 주님의 제단에 바치는 것이라는 것이죠. 그런 삶을 성례전 적인 삶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죄와 더불어 싸우고 마음을 지키면서 살고 성화되기 위한노력이 힘들다고 생각되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총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반역죄를 지어서 단칼에 죽여야 하는 사람인데 살려줘서 집에서 불도 떼고 물이나 길으면서 살라고 했는데 그가 그 일에 종사하면서 ‘나는 신분의 상승도 없고 맨날 물동이만 길으면서 살아야하나’ 그러지만 자기가 반역죄를 저질러서 단두대 앞까지 갔던 것을 생각하면 ‘이렇게 사는 것도 나랏님의 은혜다’고 생각하며 살 것 아니냐는 것이죠. 이런 정신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화의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자기를 성례전적으로 하나님 앞에 봉헌하는 데에는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위해서 자신을 다 드리면서 죽으심으로서 그 은총의 빚을 입어서 내가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것이 포함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이 십자가의 개념이 성화에서 떠날 수가 없는 개념이 되는 것입니다. 이게 이렇게 다 연결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칼빈이 하는 이야기가 어느 정도냐 하면 이미 죽은 거라는 겁니다. 사정 볼 것 없이 노예를 다루듯이 반쯤 죽여서 복종시켜서 하나님께 드려야 된다는 것이죠. 사도바울이 ‘날마다 나를 쳐서 복종시키노라’라는 것이 그것입니다. 인본주의자의 입장에서 보면 자기 학대가 아니냐고 말할지 모르겠지만 그건 모르고 하는 소리입니다. 하나님의 은총 안에 거하는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무한한 은총의 빚 덩어리라는 사실을 생각하고 자신의 육체적인 큐피티다스를 죽임으로서 하나님의 까리따스가 자기 가운데 충만해서 하나님의 은총 안에서 살아가는 삶이 인간에게도 진정으로 행복한 삶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라고 하는 것이죠. 그 싸움이 무한정 계속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계속하면 죄는 점점 죽고 은혜는 점점 강성해진다는 겁니다.
서울시내에 간첩이 얼마나 될 것 같아요? 요즘은 모르겠는데 한참 냉전 시대 때 서울시내에만 천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라디오 방송 청취하고 무전 치는 것을 바탕으로 숫자가 정확하게 나온다고 합니다. 그래도 누가 가서 '까불지마 나 이북에서 내려온 간첩이야' 이런 사람 있습니까 없잖아요. 맞아 죽을 라구. 여기 대한민국 국권이 지배하니까 감히 못나서는 거예요. 근데 만약 5만 명쯤 된다고 생각 해봐요. 떼거지로 몰려다니면서 ‘간첩, 간첩, 간첩만세!’그러면서 다닐 꺼에요.
그러니까 뭐냐 하면 영원히 신자가 자기 안에 있는 죄의 정욕을 완전히 죽일 수는 없어요. 그건 거의 이 세상에서 불가능해요. 그러나 거의 영향을 못 미치도록 그렇게 은혜로 죽이면서 살 수 있는 거예요. 그게 죄 죽임의 상태입니다. 결국 신자는 성화를 통해 아무 사심 없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가능해지는데, 왜 그렇습니까? 자기 자신의 본성이 새로워졌기 때문입니다. 사심 없이 하나님을 못 섬기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꾸 자기 욕망과 더러운 마음이 생기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이것은 그가 자신의 불어로 된 저작 속에서 즐겨 사용한 두 단어에 의하여 잘 표현된다. 순전(rondeur et integrite)이 그것이다. ronduer 는 온전하다, integrite는 정결하다 그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순전이라고 묘사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로 내면의 순전을 얻는 것을 우리 신앙생활의 첫 번째 목표로 삼아야 한다.」 왜? 그렇게 마음이 순전하게 되었을 때에만 사심 없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화는 필연적으로 자기를 드리는 헌신을 통하여 촉진됩니다. 그래서 칼빈은 이러한 헌신을 성례전적인 자기봉헌으로 이해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자기 봉헌은 우리의 전 존재와 전 소유를 엄숙하게 전체적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외경과 떨림에 의하여 동기가 부여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이 외경은 ‘하나님의 위엄에 대한 외경으로부터 나오는바 자발적인 두려움(vountary fear)'인데, 이 외경적 두려움(reverential fear)는 주로 하나님의 긍휼과 부성적 사랑에 의하여 고취되고, 이것이 성화의 동기가 된다」라고 하는 것이죠. 그래서 뭐냐 하면, 내가 이렇게 내 욕심이 끌리는 대로 살면 하나님 앞에 굉장히 나쁜 사람이 될 것이다 라고 하는 두려움 그리고 그런데 심판이 있을 것 이라는 두려움과 두 번째는 하나님이 아버지로서 나를 얼마나 사랑해주셨는가,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불쌍히 여기시는가하는 이 두 가지, 하나님의 위엄과 하나님의 사랑에 마음에 감동을 받는 것이 성화되어가는 동기가 되는 거죠.
그런데 그 두려운 위엄과 사랑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진리가 무엇입니까? 십자가입니다. 여기서 이것이 다시 또 만나는 것입니다.
「칼빈은 성화 교리에 있어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을 말할 때 이중적 죽음(duplex mortification)에 대하여 말하는데, 이는 한편은 ’우리 주변에 있는 환경적 요소‘들과 관계가 있고, 또 한 편은 내면적인 것으로 ’육적인 이해력과 의지를 죽이는 것'과 관계가 있다. 그는 그리스도의 죽음의 이중적 교제와 교통(duplex est societas et communicatio mortis Christi)에 대하여 말하는데, 이 교제의 내면적인 것은 죄 된 육체를 죽이는 것(mortification of sinful flesh)이고 외면적인 것은 삶에 있어서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우리 주변에 있는 환경적 요소’들과 관계가 있고, 또 한 편은 내면적인 것으로 ‘육적인 이해력과 의지를 죽이는 것’과 관계가 있다.」이게 무슨 뜻이냐면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보면서 그와 이미 이룬 연합을 더욱 공고히 하고 그렇게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그렇게 주님이 자기를 위해 화목하게 죽으셨으니까 내가 하나님과 의 평안을 누리면서 생명 속에서 살고 싶다고 할 때에 인간은 끊임없는 죽음을 경험해야 된다는 겁니다. 외면적인 죽음은 환경과 관계가 있다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 안락한 삶을 거부하고 신앙을 양보하면서 이 세상에서 형통하게 살아가는 것을 거부하고 하나님께 불명예를 끼치고 불순종 하면서 잘살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그것을 고난을 받더라고 버려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게 환경과 관련된 것이고, 또 하나 다른 길은 그런 기회들이 올 때에 그렇게 살려고 하는 자신의 성향을 끊임없이 죽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죽이는 것은 성령이 죽여주시는 것입니다. 성령이 자기를 죽이시도록 허락하고 끊임없이 죄와 더불어 분투하고 거룩해지고자 할 때에 말씀을 도구로 해서 성령님이 오셔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웃기지 않아요? 10년 20년 동안 동일한 죄에 빠져서 그것을 끊을 수가 없는 거예요. 근데 어느 한순간에 하나님의 말씀이 확 깨달아지면서 성령님이 역사할 때 그것을 토해놓으면서 거기에서 돌이키는 것입니다. 그것은 죽었다 살아나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성령님만이 하시는 일인 것입니다.
「칼빈은 인간 안에 있는 정욕(concupiscence)는 단순한 욕정(lust)이나 욕망(desire), 욕구(appetite)가 아니라고 보았다.」여기서 정욕이 아까 이야기한 꾸피티다스를 이야기 하는것입니다. 「정욕은 그러한 것들을 불러일으키는 보다 근본적인 마음의 성향이다. 그리고 인간은 바로 이러한 정욕의 덩어리라고 보았다.」 신자는 구원받아서 하나님의 생명의 원리가 심기워져 있는데도 잔재가 아직까지 남아있는데 이것을 은혜로 계속 싸우면서 제거하고 억누르지 않으면 기승을 부리면서 우리 안에 암덩이처럼 번져 간다는 겁니다.
「따라서 신자는 이러한 본성적인 것들과 싸우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의 참 된 삶을 누리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자기부인이 필요한데, 이는 본성적인 정욕을 죽이는 것과 ‘육체’로부터 일어나는 모든 충동과 제안을 부인하는 것을 의미한다.」본성적인 정욕을 죽이는 것은 장기간에 걸쳐서 하나님의 은혜안에 있음으로 본성이 변화되어가는것이고, 순간순간 마음속에서 욕망은 일어나고 충동은 일어나는데 마음은 그것을 원하는데 머리로서 그렇게 살면 안된다는 것을 생각하고 주님의 은혜를 힘입어서 그것을 거절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거절하려고 할 때 성령이 역사하셔서 그를 도와서 그것들을 이길 수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일 우리의 성화에서 하나님을 닮고 우리의 이웃을 사랑하기를 원한다면 ‘우리 자신의 본성’에 속하는 모든 것을 죽이고 대적하여 싸우며 없이하려고 해야 한다. 우리의 악한 본성을 이처럼 거칠게 다루고 우리의 본성적 경향을 대적하도록 스스로 채찍질함으로써만이 그리스도를 진실하게 따르는 자의 표지인 참된 단순성과 고결함에 이를 수 있다”」
오늘날 심각합니다. 브라이언 채플이라는 사람이 최근에 ‘Holiness by Grace’라는 ‘은혜로 말미암는 성화’라는 책을 썼습니다. 우리나라에도 번역되 나왔는데, 거기서 그 사람이 지적을 합니다. 요즘 미국에서 많은 영향을 끼치는 작가 가운데 필립 얀시 라는 작가가 있습니다. 그분의 글을 전적으로 비난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필립 얀시를 비롯한 몇 몇 분들을 중심으로 소위 이야기하는 ‘그라치아’(은혜 운동)라고 하는 운동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필립 얀시가 쓰신 책 가운데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브라이언 채플이라는 미국 카비넌트 신학교에 학장을 하신 분인데 그분이 이야기하는 것이-전적으로 저도 공감을 합니다만- 그것은 그럴 수 있고, 분명히 오거스틴이 하나님의 은총의 국면을 드러냄으로서 기독교의 틀을 바르게 세웠듯이 그런 면이 있다 이거죠.
그런데 항상 배경이 있는 것입니다. 그 전에 무슨 일이 있었냐면 은혜가 그렇게 강조되지 않을 수 없을 때에는 뭐가 있냐면 항상 율법주의가 있는 것 아닙니까? 그 이전에 뭐가 있었냐면 신앙을 이야기하면서 하나님이 너희를 구해주셨고 네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까, ‘이러이러한 삶을 살아야 한다. 그게 옳다. 그렇게 사는 건 그리스도인이 하면 안 되는 거다. 그런 걸 했으니까 너 죄 지은 거다. 그건 나쁜 거다. 그렇게 불순종하면 하나님이 싫어하신다.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너희들이 이렇게 살라고 명령하신다.’ 이런 것들이 주어지는데, 그런 것들이 교회에서 주어지는 것도 올바른 것이죠. 성경 전체가 구원받은 사람이 어떻게 살라고 가르치는 것이 대부분이잖아요? 그런 것들이 주어지는 게 문제가 아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뭐냐하면 계속해서 은혜가 주어지고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서 사람들이 참된 복음에 깨뜨려 질 때에는 ‘너 이렇게 살아라 그러면 너무 감사한거에요. 내가 지금 깨뜨려져서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과 은혜를 알고 ‘몸밖에 드릴것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나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럴 때 ‘너 그렇게 은혜 받았을 때 이렇게 살아야해, 너 그렇게 살면 하나님께서 안 기뻐하셔’라고 이야기 해주면 너무 기뻐하는 거예요. 그렇지 않겠습니까? 자기는 주님 사랑하고 주님 뜻대로 살고 싶은데 누군가 자기에게 그렇게 살면 안 되고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가르쳐 주니까 그게 보석보다도 더 귀한 거 아니냐 이거죠.
그런데 그런 은혜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고, 교회 나오는 것도 간신히 나오는데 ‘이렇게 살아라, 이렇게 살면 안 된다’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돌이켜 살 마음이 없는데 ‘이렇게 살면 안 된다’라고 말하니까 죄의식 밖에 생기는 것이 없고, 은혜를 못 받은 사람한테 ‘이렇게 살아라’ 하니까 살수도 없고 간신히 흉내를 내기는 내는데, 내면은 하나도 안 변하고 사과나무에다 사과를 실로 매달아 놓은 것처럼 되 버렸다 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이렇게 해라’라고 하면 그렇게 하는 것을 아멘하고 받아드릴 수 있는 영혼의 변화까지 고려를 하라는 건데, 그것은 무시된 채 그냥 막 바로 행동으로 갈려고 하는 것이 나오는 거예요. 그것들이 무한한 부담으로 다가오고 그렇게 못한 사람은 죄의식을 느끼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구원이라는 감격이 모두 사라지는 것입니다.
이번에 은혜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게 무슨 우려할 상황을 가져오냐 하면 은혜의 개념이 말이죠, 그들로 하여금 그런 은혜의 개념을 가르쳐줘도 영혼에서 변화가 일어나면 은혜에 대한 무한한 감사인데 자신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고 ‘하나님은 다 용서해 주시는 분이다’ 그러면 어떻게 생각해요 ‘그러면 뭐 그렇게 고민할 필요 없네’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방종적 은혜로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놀랍게 되기 때문에 그렇게 안달하면서 살 필요 없다. 이런 식으로 무 율법주의를 가져오는 거예요. 이번엔 정반대로 튀는 겁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이렇게 놀라운데-그래가지고 어떤 개념들이 가득차냐하면 ‘그리스도인의 의무는 이런 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요구 하십니다’ 이런 것을 이야기하는 것 자체에 대한 거부감을 갖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다 율법일 뿐이다. 그저 내가 은혜 받은 대로 하나님 앞에 살면 되는 거다. 누가 그 규율을 정하는데, 내가 알아서 한다 이거예요. 하나님이 무슨 뒷방 늙은이냔 말이죠. 해주는 대로 하나님이 받으시는 거냐 이거죠. 그리고 실지로 무엇을 해주나요, 주일예배를 제대로 출석을 해, 헌금을 제대로 드려, 자기 몸을 드려, 한번의 자기 깨어짐이 있어, 변화가 있어, 자신의 삶 전체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슬퍼하는 것이 있어, 이것이 무엇이냐 이거죠.
결국은 그 놀라운 은혜를 어거스틴같은 사람이 해석했던 관점이 아니라 완전히 자기 죄에 대해서 위안을 느끼는 방편으로서 은혜로서 해석을 해버리는 상황이 된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제 설교를 계속들은 어떤 사람들 중에 바보 같은 탈 신학적인 비판을 받았는데, 아니 당신 설교에는 뭐 그렇게 해야 되는 것도 많고 하면 안 되는 것도 그렇게 많느냐 이거에요. 이것은 다 율법이다 이거죠. 이것은 결국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살겠다는 겁니다. 이것이 우상숭배지 무엇입니까. 자기의 경배 받으시는 하나님이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의 상상 속에서 그리고 있는 하나님인데 그게 무슨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의 삶이냐 이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은혜을 해석하면 성경을 이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키는 대로 살면 되는 것이죠.
결국 존 오웬도 지적을 했듯이 이런 모든 것이 배교적 형상이라는 것입니다. 존 오웬이 배교적 현상에 대해서 세밀하게 분석하고 배교하는 원인에 대해 분석하고 배교하지 않을 길에 대해 다 이야기하고서 마지막 내리는 장엄한 결론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모든 것들은 다 방법론에 지나지 않고 하나님의 교회에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진리의 말씀이 그의 영혼 속을 새롭게 해서 심기워지지 않으면 배교는 막을 수 없다.는 것이 결론입니다. 그러니까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이야기 했듯이 제일 무서운 사람이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고 잘 알지도 못하고 날뛰는 것입니다. 그게 제일 위험한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안됩니다. 제대로 된 책을 읽고 성경이 과연 그러한가 생각하고 이야기하고 신앙적으로 판단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강의의 하이라이트가 되겠습니다. 뒷부분에 보면 오늘날의 성화에 관한 대표적 네 견해가 나옵니다.
첫째는 웨슬리주의의 완전론이고 두 번째는 케직(Keswick)의 가르침입니다. 케직은 영국에서 케직 사경회가 열립니다. 거기서 설교자들이 실제적이고 경건한 것, 성경자체에 대한 것을 가르치고 신학이 상당히 보수적이며 영향을 많이 미치는 그런 사경회입니다. 그다음에 개혁주의의 입장이고 체이퍼주의의 입장입니다. 체이퍼는 세대주의자고 달라스 신학교에 있었던 조직신학 교수입니다.
먼저 네 개의 그림을 비교해 보세요. 구원받은 것이 맨 왼쪽이거든요. 개혁주의를 제외하고는 구원받은 다음에는 그가 부정적인 상태에 들어갑니다. 무조건 거듭나기만 해서는 안됩니다. 거듭나기만 해서는 주님을 영접했지만 성화되지 않은 사람이고, 좌절한 그리스도인이고, 육체에 속한 사람입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를 이야기합니다. 이것을 전부 가리켜 second blessing이라고 하는데 두 번째 축복이 주어져야 된다는 거죠. 그리스도를 단지 믿고 구원 받은 것만으로는 성화되지 않은 상태에 있다가 2차 은혜가 임하는데 마음을 비우고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열열히 기도로 구하면 성령을 하나님이 주신다는 거죠. 그때에 비로서 그리스도인은 완전히 자기를 다 드리게 되어서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아까 이야기한 까리따스-완전한 사랑이 생겨남으로서 그때의 그리스도인은 완전해서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겁니다. 여기서 인간이 전혀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이 의도적인 동기를 가지고 악한 본성에 의해서 죄를 짓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다만 모르고 짓던가 계획적이 아니고 우연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본성적인 죄성 때문에 짓게 되는 경우는 있지만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그리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2차적인 축복을 받은 사람은 완전한 그리스도인 이 된다고 본 것이고 죄와 관계없는 상태에 들어가게 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것도 웨슬리의 성령 체험과 관련되는 겁니다.
이 성령론은 그런 점에서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문제가 무엇이냐면 모든 거듭난 교인은 거듭나자마자 전혀 성화가 안 된 채 이 두 번째 축복이 오기 전까지는 바닥을 기는 그리스도인일 수밖에 없냐. 그런데 모든 사람의 회심을 이것으로서 획일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케직의 가르침입니다. 이것은 회심을 통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면 겨우 좌절한 그리스도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어떤 계기를 통해서 전적으로 자기를 surrender, 복종시키면서 나는 전부다 주님 것이라고 하면서 자기를 다 드리고 온전히 헌신하는 계기가 있게 되면 그때부터 승리의 생활이 이루어지는데 내적인 안식과 외적인 승리가 주어지게 된다. 그래서 아주 충만한 영적인 삶을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워치만 리같은 계열이 이런 쪽이고 구원파 쪽도 이런 계열이며, 앤드류 머레이 같은 분도 제가 좋아하고 존경하는 분인데 이런 신학적인 약점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에 죄와 더불어 분투하고 싸울 필요는 없는 것이라는 것이죠. 헛수고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도저히 그 죄를 이길 수가 없다고 하는 거죠. 흘러가는 물에서 까불고 장난치면 더 물에만 빠질 뿐이니까 숨을 들여 마시고 가만히 엎드려 있으면 물 따라 흘러가면 성화가 된다는 것이죠.
그런데 지금 상당히 유행하고 있는 교리가 이런 교리입니다. 그래서 성경공부 교재 같은 것 보면 ‘자신을 주장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십시오. 그러면 여러분 안에 주님이 살아 계시기 때문에 주님이 모두 주장하실 것입니다. 당신이 만약 성화가 되지 않은 것은 온전히 복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잖아요.
이런 교리가 당시, 특별히 19세기에 영국에서 팽배했었습니다. 그때 스미스라는 사람이 이런 교리를 영국에 광범위하게 퍼뜨렸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성화되지 않는 이유는 자기를 복종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기가 죄를 죽이고 죄와 싸운다는 것은 말하자면 하나님의 주권을 침해하는 거라고 보고 자기는 능력이 없으므로 다 맡겨야 한다. 성화가 안되는 것은 성화시키려는 하나님을 자꾸 방해하기 때문이라고 본 것입니다. 이러다 보니까 신앙이 자꾸 관조적이 되는 것입니다. 자꾸 자신의 내면의 세계만 드려다 보게 되는 것입니다. 정말 내가 다 엎드렸나, 안 엎드렸나, 다 복종했나, 안했나, 계속 보면서 자기 자신을 응시하는 관조적인 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죄와 더불어 싸우고 분투하고 자신의 완고함과 더불어 씨름하면서 그것을 꺽는 역동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이 없고 마치 참선하는 것처럼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교리를 아주 혹평한 사람이 누구냐면-청교도들의 신학에서 해결을 본 사람인데-그 중에 하나가 Holiness라는 책이 있는데 그 책에 보면 그 서문에 이런 교리의 가르침을 받고 대학 때 계속해서 구원이 너무나 초라하게 느껴지는데 주위에서 하는 이야기가 그렇게 힘없는 삶을 사는 이유는 널 주장하기 때문이다, 자기는 자기 자신을 거의 포기 했는데도 자꾸 그렇게 이야기한다 이거죠. 그래서 상당히 많은 세월 동안을 무기력하게 보내며 그리스도의 구원이 겨우 이런 것인가 하는 거죠. 그때 이 사람이 두 권의 책을 읽게 됐는데 존 오웬의 전집 제 6권과 존 라일의 Holiness라는 두 권의 책을 만납니다. Holiness의 책장을 열자마자 그러한 교리가 얼마나 허무맹랑한 것인가 하는 것을 굉장히 유능한 필치로 써내려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박이 다 끊어지는 겁니다. 그리고 존 오웬으로 들어가니까 인간이 어쩌다 그러한 상태가 되는지를 설명하는데 이 스미시즘에서 이야기하는 가르침하고 완전히 상반된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그 교리와 결별하고 불에 덴 아이가 다시는 불을 쳐다보기도 싫듯이 그 해괴 망칙한 교리 때문에 내 젊은 날들을 너무 어둠 속에서 지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로이드 존스 목사님도 그 교리를 가리켜 고약한 교리라고 설명을 했습니다. 종교 개혁자들에게 지지받을 수 없는 교리고 청교도들은 말도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 교리입니다. 성경의 가르침에서 치우친 것입니다.
그런데 스미시즘이 환영을 받았던 이유는 당시 영국 사람들에게는 너무 편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맡기기만 하면 된다, 얼마나 좋습니까. 끊임없이 싸우십시오, 죄와 더불어 싸우되 피 흘리기 까지 싸워야 합니다, 아까 칼빈이 얼마나 과격하게 이야기 합니까, 그냥 막 거칠게 다뤄야 한다는 거죠, 그 육체의 소욕을 봐주고 이래서는 안되고 반 죽이면서 다뤄야 한다는 것이죠. 이렇게 이야기 하면 신앙생활이 얼마나 가혹합니다. 그런데, 그냥 맡기 십시오.
그런데 그 가르침을 케직 사경회에서 전파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배경이 있습니다. 청교도들의 운동이 한시대가 지나간 다음에 다시 복음의 불길이 꺼지기 시작하면서 18세가 계명주의 시대가 오면서 신앙이 자유주의화 되어갔습니다. 그때 무슨 일이 일어났느냐 하면 신앙을 보존하기 위해서 교리에 매달려서 싸움하지 말고 그것보다는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고 생명력 있는 삶이 중요한 것이 아니냐. 그러면서 일어난 운동이 소위 이야기하는 데보치오 모데르나(번역하면 오늘의 경건운동) 라는 운동이 구라파 쪽에서 일어나게 되고 이것이 경건주의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독일의 할레대학을 중심으로 여러분들이 잘 아는 슈패너와 프랑케, 이런 사람들에 의해서 교리보다는 성경자체를 객관적으로 보면서 은혜를 받으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경건주의가 굉장한 호소력을 얻으면서 불길처럼 번져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의 성화관이 어떻게 되냐면 상당히 종교개혁자들의 성과는 물려받으면서도 성화관 자체가 굉장히 감정적이고 내면적인 것으로 바뀌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자기가 변화되어야 한다는 교리적인 투철한 신념 같은 것이 많이 삭제되고 자기가 하나님 안에서 무엇을 느끼느냐, 개인적인 내면의 은밀한 그리스도와의 교제 이런 것들이 강조되는데 그런 것들이 초기에는 철저하게 성경연구를 통해서 진리를 공급받으면서 된다고 하는 개혁주의적인 신념을 상당히 물려받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 고리가 끊어지면서 자꾸 명상과 기도 이런 것들을 통해서 감정적이고 자기 중심적으로 흘러가게 됩니다. 그러면서 그 후에 그 경건주의 일파에서 신비주의 운동이 펼쳐져 나오고 그 물의 마지막 물을 먹은 사람이 워치만 니 라고 하는 중국의 지도자입니다. 그러니까 그의 신학속에는 분명히 그런 개혁주의 적인 유산이 없는 것은 아닌데 무엇인가 석연치 않은 경건주의적인 말기의 신비적인 요소들이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오늘날에도 굉장히 넓게 퍼져 있습니다.
이것은 설명하기가 굉장히 쉽습니다. ‘나 어떻게 성화되지?’-‘맡겨’, ‘성화가 왜 안되지?’ - ‘다 맡기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네가 고집을 쓰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이렇게 간단합니다. 그런데 개혁주의 쪽으로 가게 되면 이렇게 구도가 간단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부패성을 이야기하면서 원죄와 타락부터 이야기하면서 부패성의 원인, 그 부패성의 질병적인 상태, 그것에 대한 치유, 그것을 치유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주권이 어떻게 역사하고 인간이 어떻게 협력하는가, 치료의 방편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성령의 도구가 되는가 하는 문제들이 계속해서 교리의 체계를 가지고 엄청난 양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간단한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까? 더군다나 우리나라 사람은 더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 나라 사람은 개혁주의 성화론이 마음에 안 드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하기에는 머리가 너무 복잡하기 때문이죠. ‘맡겨’ 얼마나 편합니까
그 다음 ‘체이퍼주의’입니다. 체이퍼주의는 자연적인 상황에서 예수님을 영접하면 필연적으로 육체적인 신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받아들이면서 영적인 사람이 되어 간다는 것이죠.
그러면 개혁주의 입장은 무엇이냐, 거듭나고 영적인 성장을 통해 거룩하게 되어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곡선은 획일적인 것이 아니라 앞으로 많이 올라가다가 뒤에 천천히 갈수도 있는 것인데, 성화의 정도에 따라서, 성화의 노력이나 상황에 따라서 완만해 질 수 있고 급해질 수도 있는데 영적으로 성장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김목사의 입장은 무엇인가 하는 생각이 들꺼에요. 저는 개혁주의의 입장에 서있습니다. 왜 제가 1번, 2번, 4번이 아니라고 보냐면,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제 2의 어떤 강력한 경험을 가진 사람이 아니면 모두 좌절한 그리스도인이고, 육적인 그리스도인이고, 실패한 그리스도인이라고 성경은 이야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예수의 신앙이 우리 신앙의 중심이 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깊이 경험하는 뒤집어지는 사건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한쪽 면만 보는 대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의외의 이야기가 되겠지만 들어보십시오. 살아가다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깊이 경험하고 뒤집어지는 역사가 일어나서 울고불고 몇 달을 했는데, 그 후에 그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그의 신앙의 중심에 심겨지지 않는 일도 있을 수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그렇게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 대한 극적인 경험은 없었지만 어려서부터 거듭나고 주님을 믿으면서 예수님 이외를 사랑하면 큰 일 나는 줄 알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을 태어나서 한번도 의심해본 적이 없고, 그러면서 나를 위해 돌아가신 주님위해 살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간구하고 뉘우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 그에게 그런 강력한 경험이 없어도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자기신앙의 중심에 서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극적인 경험을 갖고 있는 사람은 그 극적인 경험 하나 때문에 자신이 그리스도 예수께 붙잡히는 신령한 삶을 사는 것도 사실 때문에 겸비해져야 되고, 그렇게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장엄한 경험이 없는 사람은 그런 것 없이도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자기의 삶의 중심이 될 수는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이상의 십자가에 대한 강력한 체험을 통해서 자신이 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 사로잡힌 삶을 살아서, 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가 자신의 신앙에 중심이 되는 신앙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말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느 쪽에 서있든지 간에 그 자체를 가지고 너무 좌절하거나 괴로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감격적으로 경험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죄를 지어야 되나보다 하고 타락하고 싶다고 말하는 것은 그것은 웃기는 이야기라 이것입니다. 자기가 타락한다고 돌아온다는 보장도 없는데 말이죠.
그러면 이제 여러분들이 이런 의문을 제시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메일로 저한테 보냈습니다. ‘영적 그리스도인, 육적 그리스도인’을 썼을 때였는데, 당신의 견해는 자기가 보기에 개혁주의가 아닌 것같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편지를 받아본 다음에 제가 답장을 썼습니다. 당신은 내 책을 안 읽은 것 같다. 표지만 보고 편지한 것 같다. 내가 당신을 상대로 논문을 쓸 수는 없고 나한테 책을 읽으면서 뭐가 잘못되었는지를 지적해서 이상한 것을 질문을 해라, 그러면 내가 명쾌하게 답변을 해주겠다, 이랬더니 답장이 안 왔습니다. 영적 그리스도인과 육적 그리스도인이라고 표지를 쓴 것이 쓸데없는 오해를 빚어낼 수 있으므로 어떻게 보면 그렇게 쓸 필 요는 없었는데 라고 하는 생각이 최근에 들었습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모든 것을 영적인 성장의 맥락에서 이야기 할 수 있는데 제가 그 책에서 다루려는 것이 모든 유아상태에 있는 그리스도인이 모두 잘못된 그리스도인이라고 이야기하려고 했던 것은 아닙니다. 거기서 다루려고 했던 것은 병적인 유아상태를 다루는 것입니다. 성장 과정에 있는 유아상태가 아니라 이렇게 3번의 그래프에서 계속 가다가 안가고, 굉장히 오랜 세월동안 수평선을 그리면서 가는 것이죠. 이것은 자연적인 성장의 과정이 아니라 질병적인 결함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처방을 성장이라고 하는 맥락에서 이야기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거기서보면 유아상태를 이야기하면서 두 개를 명확하게 구분합니다. 건강한 유아상태도 있다, 그런데 이 책에서 다루려고 하는 것은 병적인 유아상태를 다루는 것이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그 모든 것이 성장의 과정에서 이야기하는 것이라는 겁니다.
Second blessing을 이야기 하면서 단번에 뭐가 부어지면 확 올라간다, 성장이라는 것이 그렇지 않습니까. 제가 중학교 1학년에서 2학년 올라갈 때 10cm크고 2학년에서 3학년 올라갈 때 10cm컸는데 그 후로부터 여태까지 5cm 밖에 안 컸습니다. 작년하고 올해하고는 키가 전혀 차이가 없고 오히려 다리 뼈가 망가져서 2cm가 줄었습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성장이 쭉 가는 것이, 기계도 아니고 가능하냐는 것이죠, 자기가 마음을 지키고 말씀 잘 먹고 신앙생활 하면 쭉 올라갈 수 있는 거고, 그게 잘 안되면 평행할 수도 있는 거지만 반대로 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상태의 문제를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수준의 문제를 이야기 하는 것이니까. 그런데 거의 이 시점에서 동적으로 그리면 멎는 수가 있고 성장도 아니고 퇴보도 아닌 상황이 계속 되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성장 과정에 있는 유아 상태가 아니라 병적인 현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성장이라고 하는 개혁주의의 맥락에서 다룬 거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해서 성장하게 해주는 결정적인 역할이 뭐냐면 그리스도에 대한 체험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사람이 처음 주님을 영접할 때 그리스도에 대한 체험이 없었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이때도 있었는데 다시 그 체험에 의해서 그가 그 **에서 벗어나고 히브리서 5장 13절을 중심으로 다섯 개의 교리를 진술해 가는 거라 이거죠. 그러니까 이런 모든 문제들을 보는 맥락에서 이것을 이야기 하는 것 이라는 겁니다. 그런 관점에서 여러분들이 이 책을 봐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마음 지키는 교리는 잠깐만 요약을 하고 끝내겠습니다. 마음지킴의 교리는 결국은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아까 말씀드렸듯이 종교개혁자들이 중세시대에 있었던 신비적이고 비 인격 적인 에네르기로서의 성화의 은총을 거부하고 세운 것이 뭐예요? 인격적인 관계를 통해서 하나님이 성화의 은혜를 내려주시고 그 성화의 은혜를 통해서 인간이 거기에 협력함으로서 성화되어 간다고 본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내려주신 은총에 대해서 신앙으로 반응하고 그 동일한 하나님의 목표에 대한 참여의식을 갖고 헌신하게 만드는 것이 뭐냐면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그 마음이 결국은 인간 전체의 지성과 인격과 모든 것들을 움직이는 심장부라고 본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냐면 이 마음이 밀봉된 상태로 우주 공간에서 불변하게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보는 것과 듣는 것 심지어는 행하는 것 더 나아가서는 영혼의 변화가 마음에 변화에 아주 결정적인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죽은 심령을 가진 사람에게는 딱딱한 마음이 있고 죄를 범한 심령에게는 죄에 대해 적극적이고 친화적인 마음이 있고 신령한 영혼 속에는 신령한 마음이 있습니다. 이게 항상 삼투압 작용처럼 영혼의 상태가 마음에 영향을 미쳐서 영혼의 상태와 똑같은 마음이 되게 하고 심령은 그 마음의 상태와 어울리는 심령이 되려고 하는 균형 작용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때에 마음이 끊임없이 노출되어서 좋은 방향, 나쁜 방향으로 은혜와 죄에 의해서 자극을 받는다는 겁니다. 이렇게 자극을 받을 때에 이것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이 지켜주시기도 하지만 아까 성화교리와 똑같습니다. 하나님이 지켜주시지만 지킬 마음을 가진 사람의 마음을 사용하셔서 역사해 주십니다
자유당 시절 때 박인수사건 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어떤 남자가 사기를 쳐서 56명 가량의 여자를 농락해서 정조를 유린했습니다. 고발을 해서 판결을 내렸더니, 판사가 ‘법은 보호할 가치가 있는 정조만을 보호한다’고 판결을 내렸습니다. 그게 한국의 판례상에 남는 유명한 판결입니다. 자기들이 돈과 권력에 눈이 멀어서 그 남자 좋다고 가서 더러운 짓한 그런 여자들의 정조는 법이 보호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죄와 하나님을 향한 성결의 욕망이 같이 있지만 인간이 그 마음에 대한 주관자는 인간입니다. 하나님이 주관하시지만 또한 인간이 그 마음의 주인이므로 그때 인간이 선택을 하는 것입니다. 아담의 타락도 아담이 책임져야 할 이유가 이것입니다. 그 마음이 먼저 보암직하고 먹음직하다고 마음이 기우니까 그 마음이 기우는 데로 그 영혼이 범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이런 것 들이 있는데 이것에 계속 영향을 받을 때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하나님께 호소하면서 말씀의 은혜를 받으면서 말씀으로 분별하면서 살면 마치 자동자 핸들이 운전자 손안에 들어오는 것처럼 마음을 딱 잡고 자기 원하는 데로 갈수 있다는 것입니다.
근데 어느 순간에 자기가 그렇게 살기 싫은 거예요. 그러면서 혼돈된 상태가 되는 거예요. 그때 인간은 결국 마음을 지키지 못하면 마음을 통해서 노도와 같이 죄가 들어오면서 인간의 마음이 우리의 전 삶과 영혼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리고 되고 죄에 삼킨바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세상 끝날 때 까지 신자는 자신의 마음이 곧 성화의 사령부기 때문에 그 마음을 지키기 위해서 성을 지키는 것처럼 피나게 분투하면서 마치 예수님이 ‘나의 영혼을 아버지께 부탁 합니다’라고 했던 것처럼 우리는 매일매일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의 손에 부탁합니다’ 라면서 성을 사수하는 군사처럼 그렇게 자기의 마음을 지키면서 살아야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마음지킴의 교리가 계속 펼쳐져 나가는 것입니다.
나머지는 Tape를 참고하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