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을 쇄신케 하는 사유
(2005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5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6월 5일
목 차
1. 인식: 표상과 실제(엡 1:18) 2005.7.26 교직원예배 1
2. 영생과 아는 것(요 17:3) 2005.8.2 교직원예배 10
3. 날로 새로운 영혼으로(고후 4:16) 2005.8.9 교직원예배 15
2005.7.26 교직원예배
1. 인식: 표상과 실제
너희 마음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엡 1:18)
녹취자: 박지성
우리가 무엇을 보든지 보는 작은 것을 가지고 우주로까지 확대해서 생각할 수도 있고, 선한 것을 보면서도 선한 쪽으로 생각할 수도 있고 또 악한 쪽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보느냐에 따라서 우리들이 무엇을 느끼게 되고, 거기에서 무엇을 연상해서 생각하게 되고, 결국 자주 많이 생각하는 것을 따라서 인생의 향로도 정해지게 됩니다.
우리들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후에는 예전에 추구하던 옛사람의 삶을 버리고 새사람의 삶을 이어가도록 지정되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우리 안에 있는 옛사람은 죽고 새사람이 새롭게 살아야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많이 보고 그것을 통해서 많이 연상하고 계속 자극을 받게 되면 우리가 비록 천적성품을 분여받았다 할지라도 지상적인 세상에 속한 사람의 삶을 이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천상의 가치가 있는 것들을 보고 그것을 매일 지각하고 거기에서 신령한 자극을 받아서 우리의 마음이 움직이고 감동을 받게 된다면 우리는 이 땅에 살고 있으나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들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새사람과 옛사람이 함께 있고 우리들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어도 옛 성품의 무거운 짐을 지고 새사람의 길을 가야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끊임없이 하늘에 속한 신령한 것들을 보고, 그것에 의해서 자극을 받고, 끊임없이 이 하늘에 속한 것들을 지각하면서 살게 된다면 여전히 우리 안에는 옛 본성이 남아있고 지상에 속한 가치를 따라 살려는 그러한 성향들이 남아있다 하더라도 결국 천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 에베소서를 보면 에베소교회 교인들에게 사도바울이 간절히 기대하면서 하나님께 비는 바가 있습니다. 그것은 저희 마음의 눈이 열리는 것이었습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들 인간을 포함해서 모든 것들은 다 선한 것들입니다. 악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물이 나쁜 것이 아니고 사람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미친 듯이 물속에 뛰어들어서 풍덩 빠져 죽어버리는 그 행동이 악한 것입니다. 이렇게 따지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악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것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모두 좋아보였기 때문에 창조하셨습니다.
문제는 그것들을 향한 인간 안에 있는 마음의 작용이 악하기 때문에 결국 악으로 빠져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약 인간의 영혼 안에 있는 그런 악의 경향성들이 제거된다면 세상은 아름답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날을 모든 피조세계가 탄식하며 하나님 앞에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육신적인 눈을 통해서 많은 사물들을 지각하게 됩니다. 이렇게 각막 속에 맺히게 되는 것을 표상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 표상은 실재와 일치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육신의 눈으로 사물을 보지만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게 만드는 것은 우리의 육신의 눈이 아니라 우리 마음의 눈이 함께 열려야만 사물을 정확하게 보고 그 사물의 실재를 있는 그대로 인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는 것은 정태적인 개념에서 사물을 스틸사진을 찍듯이 탁 찍어서 “이것은 컵이다”라고 인식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태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사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것이 컵이다”라고 이야기해도 이야기하는 동안 벌써 이것은 내가 봤을 때의 컵이 아닙니다. 시간 속에서 끊임없이 변해가는 것입니다.
불변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이라는 존재 하나밖에 없습니다. 나머지는 모두 다 변합니다. 그 이유는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무로부터 창조 받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무로부터 창조가 되었기 때문에 그 창조가 비록 완전하다고 할지라도 그 자체 안에 결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간의 흐름 속에 종속됩니다. 시간이 먼저 있고 피조세계가 창조된 것이 아니라 물질이 창조되면서 동시에 시간이 함께 들어온 것입니다. 그 이전에는 시간이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시간의 흐름을 타고 물질이 계속 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어떤 물질을 볼 때 그 물질 하나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물질이 처음 생겨난 것과 시간이 흐르면서 어떻게 변하는가에 대한 모든 것들을 함께 인식하는 능력을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주셨습니다. 꽃이 피어있는 나무를 보면 벌써 묘목이 생각나고, 씨가 생각나고, 고목이 생각납니다. 그 모든 것들을 한꺼번에 볼 수 있는 인식의 능력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것은 비단 물질적인 세계에 속한 것들만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적인 세계에 속한 것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들을 이런 의미에서 파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을 보면 세상에 있는 물질이나 명예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나쁜 것은 뭐냐면 그것들을 향해서 마땅히 갖지 말아야 할 과도한 욕망을 갖는 그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욕망에 눈이 멀게 되면 그 사물이 가지고 있는 전체적인 생성과 소멸의 과정이 한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생성과 소멸의 과정이 한눈에 모두 들어 올 때 비로소 그 사물이나 그 일에 대한 실재가 무엇인지 정확한 인식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 육체의 눈으로 보는 표상과 우리 마음의 눈으로 보는 그것의 생성과 소멸에 이르는 전 과정을 알아 낼 수 있는 실재에 대한 이해의 폭의 격차가 줄어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표상하고 있는 것들이 실재에 대한 인식과 완전히 합치하지는 않지만 거의 합치하게 됩니다.
그렇게 거의 합치하게 될 때 우리는 그러한 사물에 대해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마땅한 태도를 갖게 되고 부당한 태도를 갖지 않게 됩니다. 올바른 태도로 그 사물과 그 일을 대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들이 항상 그 일과 사물 자체에 매몰돼 버려서 눈이 머는 일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마음의 눈이 닫히게 되면 그 모든 것들에 대한 아주 분명한 이해를 상실하게 됩니다.
마음속에서 어떠한 욕망이 생겨납니다. 물질에 대한 욕망이라든지 아니면 성에 대한 욕망이라든지 명예에 대한 욕망이라든지 어떤 사람에 대한 미움이라든지 어떠한 육망이 마음속에서 확 하고 생겨납니다. 그래서 육신의 눈으로 그 실체를 딱 봤습니다. 보는 것을 통해서 이 욕망들은 자극이 되고 생겨납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본질에 대해 사도요한이 설명할 때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라고 말했습니다. 눈으로 그것을 보면 생겨납니다.
그것을 딱 보면서 이 사람의 마음이 욕망으로 가득 차게 되면 이 세상에 있는 사물들이나 혹은 자기가 욕망하는 것을 보면서 그것의 원래 실체가 무엇이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욕망이 마지막에 발전하면 어떻게 될지를 평소에는 알았는데 이 욕망에 가려져 버리면 자기가 탐닉하는 그 욕망의 대상, 그 일, 그것이 가지고 있는 그 생성부터 마지막 결과까지가 한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실재에 대한 인식은 사라지고 표상이 강하게 자리를 잡는데 이 표상이 육체의 욕망에 부합하는 쪽으로 정보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에 어마어마한 행복이 있는 것 같은 그런 착가들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러면서 자기 안에 있는 죄의 광기를 자극합니다. 그래서 열정적이 됩니다.
이런 위험은 죽는 날까지 우리에게 항상 있습니다. 죽는 날까지 항상 우리는 이런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매일 그런 가능성이 실현되는 것을 우리 안에서 봅니다. 이것을 해결하는 길은 우리 마음의 눈을 뜨는 것입니다. 마음의 눈을 뜨게 되면 사물을 인식할 때 그것이 가지고 있는 표상에 속지 않습니다. 그 실재를 정확하게 인식해내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들의 경험을 통해서도 인식될 수 있고 혹은 아직 경험하지 못했지만 하나님께서 권위를 가지고 우리에게 이렇게 믿으라고 가르쳐주시는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통해서 그 모든 일의 결국을 우리들이 볼 수 있습니다. 그 마음의 눈을 뜨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눈에 맺히는 표상 때문에 속지 않습니다. 실재를 정확하게 인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소위 이야기기하는 “인테그리타스”, 전일성 혹은 일자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순수한 존재입니다. 그리고 하나님만이 처음도 없고 끝도 없는 분이시지만 그 본질 전체가 하나이십니다. 나머지 무로부터 창조된 모든 것들은 그 안에 존재론적인 결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 시간의 흐름을 타고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시간의 흐름을 타고 존재한다는 이야기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생성하고 소멸하는 변화를 겪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체 안에 부패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하나님 이외의 모든 것들이 이런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진실이구나’하고 믿는 그 순간 벌써 내가 그렇게 믿었던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은 이미 변천해서 아까 내가 믿고 신뢰했던 그것이 아닙니다. 끊임없이 변화합니다.
그래서 결국 그것에 우리의 영원한 가치를 둘 수가 없고 거기에 우리의 마음과 영혼의 닻을 내릴 수 없습니다. 그것은 허상입니다. 끊임없이 닻을 내려도 끊임없이 자신이 닻을 내린 그 지점에서 이미 이동한 것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붙잡을 수 없는 상태가 됩니다. 그렇게 끊임없이 마음의 닻을 변천하는 것에 내리려고 하면 결국 그 사람의 삶이 어떻게 되겠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끊임없이 닻을 내리지만 끊임없이 표류하는 삶이 될 것입니다.
(예화) 여러분도 경험해 봤겠지만 바둑을 한참 두다보면 사람들이 앉은 것도 돌로 보입니다. ‘이렇게 이렇게 아다를 치면 저 사람은 죽었구나. 저기 한 사람만 더 앉으면 뒤에 한 줄은 다 죽는데….’ 이런 생각이 떠오릅니다. 그러니 이 눈을 지배하는 것이 얼마나 생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눈을 뜨고 보는 이 세상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똑같은 세상에 눈을 뜨고 살아갑니다. 누가 좋은 옷을 입은 사람을 보고 ‘나도 그 옷 한번 입어 봤으면…’하는 마음을 안 갖겠습니까? 욕망의 정도는 다르지만 누가 나보다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고 명예를 가지게 됐을 때 ‘나는 절대로 그렇게 되기 싫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나도 그랬으면 정말 좋겠다’라고 생각하며 우리들이 하는 얘기로 “넌 참 좋겠다”고 말합니다. 누가 나보다 얼굴이 더 예쁘게 생겨서 많은 사람들에게 호감을 줄 때 ‘나는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사람이 되기 싫어’하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특히 자매들의 경우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아마 그날 저녁에 화장품이라도 바꿔 볼 생각을 할지 모릅니다. 누가 그런데서 자유로울 수 있겠습니까? 정도의 차이는 다르지만 모든 사람들이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특징 자체가 세상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떤 한 사람의 개별적인 특징이 아니라 보편적인 특성입니다. 그리고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는 것이 세상 사람들의 보편적인 특성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특성들이 신자들 안에도 있다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의 표현에 의하면 우리가 비록 신자가 되었어도 죽을 때까지 묵은 옛사람을 끌어 다녀야 한다는 것입니다. 묵은 옛 사람이 우리 안에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에 그 옛사람이 바로 이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을 자꾸 사랑합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 잘못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세계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고 존재론적으로 볼 때 하나님 존재 이외에 우리 자신을 포함한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은 그분의 주권에 절대적으로 의존되어 있습니다. 존재론적으로 의존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가치론적으로는 그분 밑에 가치에 있어서 종속되어있는 하위의 가치입니다. 그리고 본질에 있어서는 아까 말씀드린 데로 인간을 포함한 하나님 이외에 무로부터 창조된 모든 피조물은 결국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것도 실재에 있어서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그것을 사랑하게 되면 사랑하는 만큼 눈이 멀게 됩니다. 마음의 눈이 감기게 됩니다. 그것은 천상의 가치를 바로 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누구시고 우리를 불러주신 그 성도의 유업이 무엇이며 우리가 무엇을 위해서 이 세상에 창조되었고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할 것인가라는 인간의 본분이 망각됩니다. 본분이 망각되기 위해서는 우리들이 애써서 의식적으로 외면해야 될 대상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눈에 보이는 실재로서 이 세상에 오셔서 참으로 인간이 어떻게 이 세상에 주님으로부터 창조된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고 기여해야 되는지 그래서 인간이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는지를 의심할 여지없이 명백하게 보여주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의 눈이 감겨도 신자들의 경우 예수님을 부인 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애써 그분의 생애와 그분이 우리를 위하신 일과 그분의 인격을 외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삶은 천적 생명을 분여 받은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적합한 삶이 아닙니다. 그래서 거기에는 어떠한 안식도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일을 많이 한다고 하더라도 그일 자체가 우리의 마음을 열어주지는 못합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위대한 것은 하나님이 그에게 지성,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라틴어로 “멘스”라고 불리는 지적능력을 주신 것입니다. 이 지적능력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을 건네시고 당신의 계시의 말씀을 전달해 주십니다. 그래서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누리는 삶의 질은 주님이 주신 이 지성 곧 지적능력을 어떻게 하나님의 뜻에 맞도록 끊임없이 개발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어거스틴 같은 사람은 심지어 신앙도 잠정적인 것이라고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이것은 인간의 지적능력이 탁월해지면 믿어야 될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다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지성을 통해 그 모든 것들을 다 파악해서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고 내가 이렇게 믿을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해 무릎을 꿇게 됩니다. 그런데 평범한 모든 인간들이 아직은 이렇게 완벽하게 철학을 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런 연약한 사람들을 위해서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권위를 가지고 이성을 초월하는 계시를 주십니다. 그러면 아직까지도 지적능력이 모자라 그것을 다 이성적으로 파악할 수 없는 사람들은 그것을 파악할 수 없기는 하지만 그렇게 명령하시는 하나님이 참 좋으신 사랑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근거로 그렇게 살아갑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신자가운데 믿음이 필요 없을 정도로 완벽한 철학을 통해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도달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 앞에 갔을 때는 그것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하늘나라에는 믿음이 없습니다. 믿음과 소망이 다 사라지고 사랑만 있습니다. 믿음과 소망은 필요가 없습니다. 더 이상 소망할 것이 없고 더 이상 믿을 것도 없습니다. 모든 이성이 다 증거 해서 믿을 필요가 없습니다. 아름다운 상태입니다.
그렇지만 일단 믿음으로 받아들였으나 믿음만을 붙들고 사는 것은 아름다운 삶이 아닙니다. 내가 이해할 수 없어서 믿었지만 그 믿음만을 붙들고 사는 신앙은 힘이 없습니다. 일시적으로는 있을 수 있으나 힘이 없습니다. 그래서 안셀무스가 말한 바와 같이 아멘하고 믿게 된 다음에는 왜 내가 그것을 믿을 수밖에 없는지 끊임없이 이성적으로 추론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 마음의 눈이 놀랍게 열립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멘스”라는 지적능력을 주셨는데 이것을 지성이라고도 부르고 저의 표현에 의하면 지적능력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 “멘스”는 두 가지로 구성됩니다. 하나는 “라치오”라는 이성입니다. 이성은 사물과 사물 사이에 존재하는 이 관계들을 추론해 내고 일과 일 사이에 이루어질 결말들을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추론해내는 능력입니다. 또 하나는 “인텔리겐차”라는 오성입니다. 혹은 우리말 성경의 표현으로는 총명입니다. 이 총명은 눈에 보이는 실재, 눈에 보이는 잘못된 표상에 현혹되지 않고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는 통찰입니다. 그래서 비록 이 세상에서 학문을 많이 못했어도 이 총명이 뛰어난 사람은 세상이 허무하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리고 또 세상이 허무하기 때문에 막 살아도 안 된다는 사실을 압니다. 이렇게 절도와 정의를 따라서 살게 만들어 주는 것이 총명입니다. 이 두 가지가 마음의 눈을 구성하는 요소가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런 기능을 주셨지만 항구적이지는 않습니다. 우리 영혼의 상태에 많이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영혼의 상태가 은혜가 떨어지고 죄에 의해서 물들게 되면 비록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멘스”라는 지적능력을 주시고 이성 곧 “라치오”, 그리고 총명이라고 일컫는 “인텔리겐차”를 주셨지만 늘 흐려지는 것입니다.
비유를 하자면 안경이 있는데 도수가 내 눈에 딱 맞습니다. 안경 자체의 질에 어떤 변화가 온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때가 껴서 안경의 능력은 그대로이지만 써도 보이지를 않습니다. 안경 자체가 변하지는 않았는데 때가 껴서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닦아내는 것이 필요합니다. 영적으로 우리들이 은혜를 받고 하나님 앞에 깊이 우리의 영혼이 변화될 때 우리의 이 지적능력 “멘스”에도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성에 더렵혀진 유리창이 닦이고 “인텔리겐차”의 더러운 유리창이 닦이면서 보게 됩니다.
오늘 은혜를 받고 보는 세상이 어제의 세상과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 눈은 똑같은 표상을 우리에게 전달해 줍니다. 그러나 마음의 눈이 그 실재를 다시 분석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눈으로 전달되어 오는 표상을 다 믿지를 않게 됩니다. 그 눈에 의해서 잘못 된 표상을 보고 넘어지거나 혹은 잘못 된 길로 걸어가는 오류를 범하지 않도록 우리 스스로를 보호해 준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미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의 눈이 어두워지면 무엇으로 밝게 하겠느냐” 재물을 사랑하게 되면 마음이 그렇게 됩니다. 재물이라는 표상을 보면서 어리석은 부자가 뭐라고 했습니까? “와! 이거 굉장하구나! 몇 해 동안 먹을 수 있는 곡식이 생겼군. 어떻게 할까?” 표상은 “이것은 몇 날 동안 먹고 즐길 수 있는 재산이다. 물질이다. 네 것이다. 그러고 넌 그때까지 살 수 있을 것이다.”라고 전달해 줍니다. 그래서 창고를 짓고 온 힘을 거기에 기울이며 자기가 호의호식 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게 사실이 아니라는 것은 그날 밤에 하나님이 그의 영혼을 데려가시므로 표상이 거짓이라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부자가 그랬던 이유는 속에 있는 “멘스”가 모두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바로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성도 작용하지 않고 “인텔리겐차”도 작용을 안 해서 그것을 보지 못하는, 쉽게 얘기하면 눈에 보이는 감각기관이 육체의 욕망을 타고 들어와서 맺혀진 그릇된 상들을 극복 할 수 있는 영적 안목이 사라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일평생 신자의 기도제목은 능력이 있는 사람이 되기를 사모하는 것이 아니라 현자가 되기를 사모해야합니다. 능력이 있는 사람이 되기를 사모하지 말고 정말 하늘의 지혜를 가진 분별력이 있는 사람이 되길 사모해야합니다. 그리고 유능한 사람이 되기를 사모하기보다 순결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해야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도우십니다. 끊임없이 도우십니다. 그리고 최소한 그렇게 살면 자기 자신의 영혼에 대해서는 망가지지 않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의 눈에 맺히는 모든 이러한 상들로 헛된 가치에 우리들이 복종하면서 살았던 과거의 세월들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동안에 우리는 주님을 섬길 수 있는 고귀한 시간들을 상실했고 그래서 결국은 우리의 인생을 많이 낭비하게 되었습니다.
사도바울이 늘 에베소교회를 향해서 간절히 기도하며 “하나님이 너희에게 마음의 눈을 열어 주셨으면 좋겠다. 이미 어느 정도 열려있지만 그러나 더 많이 열어주셔서 세상 사랑이 너희의 마음의 눈을 감기지 못하도록 육체에 속한 것들에 대한 사모함이 너희의 영혼의 눈을 감겨서 육체의 감각기관을 통해서 전달되는 이 세상의 모든 사물들에 대한 그릇된 표상들을 믿지 않도록 그렇게 하라.”고 했습니다.
성경에서 볼 때에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이렇게 지혜롭게 된 사람을 의미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지혜를 이야기 할 때 신령적인 지혜와 본성적인 지혜를 이야기합니다. 제가 여러분을 섬기면서 지혜로운 사람이 되라고 항상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신실하게 섬기다 보면 점점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서 이 세상에서 매우 쓸모 있는 사람이 된다고 여러분들을 권고했습니다. 그래서 충성하면 하나님께서 지혜도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대부분 본성적인 지혜입니다.
잠언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지혜로운 사람에 대한 한없는 찬양, 찬양이라면 좀 이상하지만 지혜로운 사람에 대한 많은 칭찬들 중의 상당수는 바로 이런 본성적인 지혜입니다. 이것은 자꾸 개발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잘 하게 됩니다. 이것이 매우 더딘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피곤하게 하고 조직으로 하여금 그 사람에 대해서 싫증이 나게 만듭니다. 이것도 굉장히 중요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고 말씀하시고 혹은 또 “지혜로운 청지기”라고 하실 때 그 지혜는 그런 지혜도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런 본성적인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자기에게 맡겨진 일에 2~3년 종사하고 나면 자기분야에서 뛰어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사람이 성공한 삶을 살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사회에 나가면 계속 도태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지혜를 이야기 할 때 그것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만 말한다면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지혜와 이솝우화에 나오는 지혜 사이에 무슨 차이를 발견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또 하나의 지혜를 이야기하는데 이것은 신령적인 지혜입니다.
2005. 08. 02 교직원예배
2.영생과 아는 것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를 보낸 자를 아는 것이니이다 ...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느끼는 가장 큰 어려움은 누구나 다 공감하는 어려움은 무엇이냐면 왜 이렇게 샘솟는 듯한 신앙생활이 아닐까 이지요. 그래서 샘은 끊임없이 솟아나잖아요? 그래서 샘처럼 우리 안에서 끊임없이 솟아나서 샘처럼 솟아나는 기쁨으로 이 세상의 슬픔을 이기고 솟아나는 소망으로 현재의 고난을 극복하고 솟아나는 사랑으로 미움을 극북하고 솟아나는 신령한 것들에 대한 경험들이 세상에 대한 사랑을 지워버리게 만들고 이렇게 되어야 되잖아요. 그리고 또 그런 것들이 신앙생활이라고 우리들이 배우잖아요. 근데 그게 잘 안된단 말이죠. 그래서 가끔 은혜를 받으면 다시 그 샘이 열려서 솟아나고 다시 그 샘이 막히고 그런 것이 되풀이 되고 그러는 가운데 우리는 그런 현상들이 신앙의 일반적인 모습이다 생각하고 숙명처럼 받아들이지요.
그런데 사실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교훈을 생각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이 바로 영생이라는 개념이에요. 예수님께서 표현하시기를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다 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래서 이 영생의 개념은 그냥 수학적인 긴 길이동안 절대 죽지 않고 살아있다 그런 개념이 아니에요. 그렇게 생각하면 지옥에 가는 사람들도 영생하는 것이지요. 영원히 죽지 않으니까요. 또 이것도 아니에요. 영생은 천국에 도착해서 우리들이 누리게 될 행복한 삶을 가리키는 거다 그것도 아니에요. 중요한 것은 천국에 가서 영생을 누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이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영생을 누리게 하셔서 이 세상에서 남다른 삶을 살게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세상에 태어나서 자기 욕망의 노예가 되어서 먹고 마시고 살다가 죽지만, 영생을 소유한 사람들은 영생을 원천으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면서 망가진 이 세상을 고치면서 창조의 목적에 부합하도록 살아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영생은 영원으로부터 끊임없이 흘러들어오는 하나님의 생명이라고 정의할 수 있어요. 그래서 그 하나님의 생명은 죽은 후에 누리는 것이 아니라 지금 현재 거듭남과 함께 우리 속에서 누리면서 살도록 하나님이 그렇게 지정하신 것이에요. 그리고 우리 모두 그런 영생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에요. 그러나 그 영생을 얼마나 이 세상에서 풍부하게 소유하고 있는지는 사람마다 달라요. 그것이 은혜로 나타나요. 그것이 끊임없이 솟아나요. 이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생명이에요. 그런데 우리 모두가 이런 영생이 샘물처럼 계속 솟아나고 하나님의 생명이 이 속에서 계속 솟아나기를 바래요.
그런데 그것이 어떻게 해서 우리에게 계속해서 솟아나느냐? 그래서 뭐라고 했냐면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를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그러니까 영생은 곧 아는 것입니다 라는 결론에 도달해요. 이 영생이 솟아나는 것이 뭐냐하면 지식에서 솟아나는 거예요. 그래서 한 번 주님을 믿을 때에도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놀라운 영원하도록 있는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부어지도록. 그런데 그게 무엇을 통해 부어지냐 하면 지식을 통해 부어진다 이거예요. 무슨 지식이냐 하면 우리 하나님과 그 분이 보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를 정확하게 알고 아멘 하고 믿는 거예요.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내가 이성적 지식으로 입증할 수 없죠. 자연적 이성으로 파악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 그분을 의지하고 그분이 보내신 그리스도 예수의 구속을 의지하는 것 이외에는 이 세상에 어떤 구원의 여망도 없ㄷ다 라고 하는 것을 깨닫는 거예요. 그 때에 그 분이 당신 자신에 관해서 말씀하시는 바가 마음에 소망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자연적 이성을 포기하고 그분께 자신을 온전히 던지면서 아멘 하고 그 분을 믿는 거예요. 믿으면 지식이 생겨나게 되는 거예요. 이제는 누가 뭐래도 하나님은 살아계시며 자기를 찾는 자에게 상을 주시며 그리스도는 그 분이 보내신 아들이시며 그분이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는 사실이 내 마음 속에 지식으로 남는 거예요. 여기에서 콸콸 영생의 샘이 쏟아지는 거예요. 말할 수 없는 기쁨과 은혜 , 진짜 하나님의 생명이 내 안에 와서 나를 위해 섬기시는 것 같은 놀라운 신령한 축복들이 내 안에서 쏟아져 나오는 거예요. 이게 은혜의 경험이에요. 쫙 쏟아져 나오는 거예요.
그런데 너무나 많은 신자들이 여기가 끝이라 이거예요. 그래서 어떻게 되요? 그 다음엔 도저히 전일성을 잃어버리고 일자성을 잃어버리고 그리고 부패하게 되는 거예요. 하나님 이외의 모든 것은 부패에 복속되어 있고 변화에 종속되어 있어요. 참된 본질의 특성을 잃어버리면서 결국 부패하게 되는 거예요. 그리고 그런 첫사랑을 회복하려고 하지만 잘 되지 않아요. 이런 것은 영생을 누리며 살아가는 신자의 태도가 아니라는 것을 여기서 얘기하고 싶어요. 그러니까 뭐냐하면 오늘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결정적인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를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믿어서 아멘 하고 믿어서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고 하는 사실과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들과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죄를 위해 돌아가셨다고 하는 사실을 , 단순한 복음적 사실을 믿게 되었어요. 그렇게 해서 지식을 얻게 되었어요. 그러나 그것은 아는 것이 아니에요. 그러면 그것은 전혀 아는 것이 아니냐? 아니에요. 전혀 모르는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정확한 표현을 쓰자면 인식론적 미완결의 상태에요.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도 알았고 예수님이 나의 죄를 위해 못 박히셨다는 사실도 아셨는데 이것은 가장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첫 발을 떼어 놓은 거예요. 인식론적으로 아직 미완결의 상태에 있는 거예요. 그렇게 남겨두면 영생이 계속 영생하도록 우리 속에서 솟아나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그것은 아는 것이 아니에요.
그러면 참으로 아는 것이 무엇이냐? 참으로 아는 것은 이제 나의 자연적인 이성을 가지고는 도저히 파악할 수 없는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 그가 자기를 찾는 자에게 상 주신다는 사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는 사실, 이것들을 받아들이게 되었어요. 그러면 결론은 난 거예요. 문제는 결론은 났는데 왜 그분이 하나님이실 수밖에 없는가? 왜 그분이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실 수밖에 없으며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그를 믿음으로 상을 받게 되는가? 또 예수 그리스도는 어디에서 오셨으며 그분이 왜 하나님의 아들이실 수밖에 없고 2천 년 전에 죽으신 그분이 왜 오늘 나의 삶과 관계가 있는가? 이것은 아직까지도 이러한 질문이 해결되지 않고는 자기가 진짜로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았다 라고 말할 수 없는 거예요.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이 아시는 것처럼 완전하게 알 수는 없어요. 그건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것이에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계시의 말씀으로 우리를 도우시는 것이에요. 뿐만 아니죠. 예전에는 자연적 이성밖에 없었는데 하나님이 우리를 거듭나게 하심으로 우리 안에 성령님을 보내셔서 성령님이 우리 영혼의 어두움을 환하게 밝히고 지성을 쇠락하게 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자연적 이성의 추론이 아니면 알 수 없다고 생각하던 것들을 볼 수 있는 영혼의 눈을 열어 주시는 거예요. 이것도 모두 이성적 추론의 대상이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을 찾아가는 거예요. 그렇게 하면서 이 지성적 미완결의 상태가 완결되어 가는 거예요. 비유를 하자면, 집의 커다란 건물의 외관의 굵은 선으로 그려진 것이 믿음이 가져다 준 지식이라면 그 다음에 주님을 끊임없이 알아가는 이 이성적 탐구를 통해서 계시의 도움과 성령의 조명을 받으면서 주님을 탐구해가는 이성적 탐구의 과정을 통해서 상세하게 유리창이 그려지고 치수들이 나오고 색깔이 입혀지는 거예요. 그러면서 완전한 건물의 투시도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해서 하나하나 알아갈 적마다 하나하나 새로운 사실을 깨달을 적마다 하나님이 하나님이실 수밖에 없다는 사실, 그분이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 그분의 피가 참으로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다는 사실, 그 구원이외에는 우리에게 어떠한 소망도 없다 라고 하는 사실, 이 사실 하나하나 이성적으로 깨달아 갈 때마다 거기에서 찬란한 빛이 들어오는 거예요. 그것이 영생의 힘이 되는 거예요. 막 솟아나는 거예요. 그러면서 인식론적 미완결의 상태가 완성을 향해 가는 거예요. 이건 끝나는 게 아니에요. 심지어는 하나님이 이미 계시해 준 것을 기초로 이것을 깨달아 가는데도 여전히 완결되는 게 아니에요. 그래서 사도 바울이 뭐라고 했어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요. 붙잡았다 함도 아니라. 그러면서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고난에 참예하는 것을 알고자 하여 계속해서 추구해 가는 거예요. 그러면서 빛이 들어오는 거예요. 그러면서 주님을 알아가는 거예요. 그 속에서 이 지성이 철저하게 온 생각이 모두 거기에 헌신하는 거예요.
오늘 아침에도 일어나서 눈뜨자마자 이런 묵상을 했어요. 하나님만 생각하게 하시옵소서. 우리는 너무나 모르는 것이 많아요. 하나님을 생각하게 해 주시옵소서. 그러면서 주님에 대해 하나씩 하나씩 이성의 치열한 추론을 통해서 하나씩 하나씩 알아가는 거예요. 거기에 끊임없이 영생이 들어오는 거예요. 영생이 끊임없이 거기서 솟아나는 거예요. 그래서 그 사람에게 새로운 은혜와 놀라운 빛을 주는 거예요. 이제 기독교의 거대한 인식론과 관련이 있는 거예요. 여러분 이런 질문을 하면 여러분을 대답하기 굉장히 어려울 텐데... 천사들이 싫증을 낼까요? 안낼까요? 천사들에게 싫증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천사들도 싫증을 느낄 수 있어요. 그러면 중생하고 하늘나라에 간 성도들도 싫증을 느낄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중생하고 하늘나라에 간 성도들의 완전한 상태가 천사의 완전한 상태를 능가한다고 말할 수 있어요? 없어요? 어려운 질문이죠? 천사에게도 싫증이 있으니까 천사들이 타락한 거예요. 모든 적대감을 품는 것은 싫증이 먼저 있고나서 적대감을 품는 거예요. 사랑하다가 한 순간에 갑자기 눈 깜작할 사이에 적대감으로 변하는 것은 없어요. 항상 싫증이 먼저 있어요. 그러면 천국도 싫증의 가능성이 있다고 봐야 되요. 천국이 싫증의 가능성이 있다면 천국일 수 있어요? 없어요? 천국일 수 없죠. 아 무료해. 지상에서 죄도 짓고 고달프게 살 때가 역시 역동적이었어. 그러면 안 되잖아요.
천국의 싫증이 없는 이유를 유능하게 밝힌 사람이 에드워즈예요. 지식에서 그 비밀을 찾는 거예요. 날로 새롭게 천국에서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간다는 거예요. 신자가 완전하게 되었다고는 하지만 지식이 완전할 수는 없잖아요? 완전하다는 것은 하나님이잖아요. 인간 범위에서 완전하다고 하는 것인데 그 속에서 성도들이 천사들도 마찬가지로 함께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매일매일 새롭게 배워가는 거예요. 조그만 지식의 빛이 주어질 때 겉잡을 수없는 강력한 기쁨의 빛이, 영광의 빛이 그들에게 들어오는 거예요. 그게 영원히 계속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아는 지식은 하나님이 영원히 조금씩 보여주셔도 영원히 다 보여주실 수 없는 지식이에요. 똑같이 지옥도 그런 논리에 의해서 무시무시한 두려움과 생전처음 당하는 고통들이 계속 증폭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절대로 고통에 면역이 된다든지 인식이 싫증을 낸다든지 하는 일은 없다 이거예요. 매일 처음 당하는 것 같은 무시무시한 공포와 견딜 수없는 두려움 속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진전되어 가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가슴에 손을 얹고 진지하게 생각해 보세요. 그대들이 영적으로 성장하고 있는지를 진지하게 물어보라는 것이지요. 그 영적인 지속적인 성장을 위해서는 여러분들이 진짜 하나님과 그를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삶을 살아야 해요.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분들이 지성적으로 철저히 헌신하면서 살아야 해요. 마치 일생을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이성을 통해 알아가는 것이 말하자면 여러분들에 있어서 인생의 본분인 것처럼 살아가야 해요.
마지막으로 여기에서 여러분에게 이런 질문이 떠오르는 거예요, 우리 주위에 보면 주님에 대해서 열심히 공부하는 것 같은 데도 삶이나 모든 인격의 변화가 우리가 동의해 줄 수 없는 사람이 있는데 그것은 어떻습니까? 그것은 토마스 아퀴나스라고 하는 사람이 명쾌하게 설명을 하는 거예요. 하나님을 우리들이 안다 라고 할 때 우리의 지성이 하나가 아니라 두 종류로 나뉘어요. 사변적인 지성과 실천적인 지성으로 나뉘는 것이에요. 이미 내가 다 옛날에 한 얘기에요. 하나님의 용서를 이해할 때도 관념적인 이해와 경험적인 이해가 있다고 말씀드렸잖아요? 똑같은 거예요. 영혼은 어떤 사물을 인식할 때 그 인식을 통해서 들어오는 지식을 order 질서를 잡아주는 데 어떤 지식들은 사고 기능 안에서만 질서가 잡히는 것으로 끝나고, 어떤 지식을 사고기능 안에서 질서가 잡힐 뿐 아니라 행동을 향해 다시 질서가 더 잡힌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머릿속 에서만 질서가 잡혀서 있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offer 행동으로 쏟아져 나올 수 있도록 질서가 잡혀져 있는 것이에요. 사고 기능 안에서만 질서가 잡히는 것을 사변적 지성이라고 얘기를 해요. 그리고 행동으로 쏟아져 나올 수 있도록 질서가 잡혀있는 지식을 실천적인 지성이라고 얘기를 해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알아감으로서 영생을 누리게 하는 그 지식은 사변적 지성이 아니라 실천적 지성이라고 하는 사실은 너무나 분명한 것이에요.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들이 바라보는 사물들의 참된 본질을 깨닫지 못하게끔 우리의 눈을 가리는 위험한 눈꺼풀이 있어요. 그것이 뭐냐하면 지식의 유희예요. 그 지식의 자랑을 위해서 지식을 습득하게 될 때 그것이 실천적 지성이 될 가능성은 전혀 없어요. 오히려 그것들은 눈꺼풀이 되어서 우리로 하여금 사물을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들이 되는 것이에요.
무엇을 말하려고 오늘 여러분들에게 이런 설교를 하는 것 같아요? 저는 늘 느끼는 바였지만 최근에 와서 더 많이 느끼게 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상당히 많은 신령한 변화를 경험한 사람들이 더 이상 신앙적으로 성장하지 않는 것이에요. 오늘 여러분 주위에서 보십시오. 생애적인 은혜를 받으면서 계속 영생의 샘물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상당수가 처음 교회에 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변화를 받고 있는 사람들이에요. 여러분들도 모두 한때는 그랬어요. 그렇게 영적으로 어느 정도 성장한 다음에 더 이상 성장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 여러분들이 잘 알라는 것이지요.
여러분들은 그동안 많은 말씀을 들으면서 여러분들 안에 많은 부패성이 있다는 것도 배워오셨어요. 그러나 여러분 이렇게 하나님과 그를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이 지식적인 탐구가 없이는 죄와 싸우는 여러분들의 싸움도 결코 이길 수 없어요.
우리 중의 어떤 형제가 저한테 그런 질문을 했어요. 죄 죽임의 교리에서 죄가 맨 처음 시작될 때 그 때에 마치 더러운 짐승을 보는 듯이 보는 즉시 찔러 죽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러고 싶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해요? 똑같은 이야기죠. 그래서 더 많은 빛이 필요한 거예요.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우리의 생각과 지성이 우리의 영혼과 자기 자신을 지키는 일에 헌신적이지 않아요. 그러니까 향도로 선 생각과 지성이 정신을 못 차리는 거예요. 그리고 생각의 방탕으로 흘러요. 그리고 그건 그렇게 방탕하게 내버려두고 그리고, 우리의 모든 신앙과 영혼이 올바르기를 원하는 거예요. 그렇게 될 수가 없어요.
그래서 구도의 길이라는 것은 그런 것이에요. 끊임없이 주님을 알아가요. 교만하면 안돼요. 이미 알았다 나는 상당한 지식을 소유했다 이제는 나에게 있어서 지식이 문제가 아니다 은혜의 불만 받으면 된다 그런 식의 교만한 생각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에요.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그분을 매일매일 배워 가십시오. 부지런히 독서하고 명상하고 테입을 듣고 그랬으면 좋겠어요. 기도하겠습니다.
3.날로 새로운 영혼으로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고후 4:16).
우리의 겉 사람은 시간이 지나가면 늙어갑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존재, 무로부터 창조되지 않은 모든 존재는 시간의 흐름에 종속됩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본래 가지고 있었던 전일성들을 상실하면서 변천하고 후패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 맥락에서 볼 때 인간의 겉 사람 자체가 무로부터 창조된 일개의 피조물이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서 부패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똑같은 피조물이라도, 시간의 흐름에 종속되는 처지는 마찬가지라고 할지라도, 인간의 그러한 성질은 다른 것보다도 훨씬 더 심하다고 생각됩니다. 예를 들어 나무를 한 번 생각해 보시죠. 우리 인간은 자라서 18-23살까지 활짝 꽃피고 그때부터 의학적으로 늙어간다고 합니다. 23살부터 갱년기가 시작된다는 거지요. 그렇게 서서히 늙어가다가 50, 60년 지나면 볼품없는 모습으로 늙어갑니다. 그래서 한 때 은막에 이름을 날렸던 아름다운 여배우들이 늙은 후의 자신의 모습을 영원히 감추어버리곤 합니다. 그때 그 기억들만 팬들의 가슴 속에 남아 있기를 원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면 나무가 50년 되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튼실하겠습니까? 500년 쯤 되면 더 멋있습니다. 그리고 아마 6백 7백년 혹은 미국에 가면 1200년씩 된 나무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는 데 장관입니다. 그렇게 세월이 많이 흘러도 전성기를 구가합니다. 그거에 비하면 인간은 너무나 짧습니다. 겉 사람이 후패하게 되는 것이 얼마나 비참한가 하는 것을 보여주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 인간은 이런 후패함에 적극적으로 항거합니다.
그래서 세상에 있는 자원을 더 많이 가지고 후패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그러나 흐르는 시간 속에서 후패하게 되는 이 육신의 본성을 누가 이길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저는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의 생명을 죄가 들어온 이후에 이렇게 짧게 하시고 이렇게 급속하게 늙게 하신 것도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예전에 900살씩 살던 시대에 지금처럼 늙지는 않았습니다. 900세, 800세 이렇게 살던 사람들이 60세 이후에 거의 힘을 쓰지 못하고 똥오줌을 받아내는 가운데 나머지 850, 750, 600년을 살았을 리가 없기 때문이지요. 그러니까 타락 이후에 특히 노아홍수 이후에 인간의 생태에 엄청난 변화가 찾아왔고 그래서 인간은 아주 급속도로 늙음에 종속되게 된 것이지요.
죄 때문에 이렇게 되었지만 이것을 통해 인간이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가 하는 것을 더 많이 깨닫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자신의 늙음을 통해 세월의 흐름을 통해서 겉 사람의 후패함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은 본성의 빛만으로도 이 세상이 얼마나 허무하고 시간이 변천하면서 종속되어진 것들이 얼마나 아무것도 아닌지를 깊이 깨닫게 됩니다. 날마다 시간에 복속되어 후패해가는 자신의 육신을 보면서 그 육신의 후패를 렌즈 삼아서 시간에 종속된 모든 것들을 보는 것이지요.
그래서 결국은 자기가 그렇게 목숨을 걸고 붙들고 싶어 하는 이 세상의 행복도 지나가는 것이고 자기가 그렇게 모으고 싶어 하는 이 세상의 자원도 후패해져 가는 것이고, 그리스도와 하나님이외에 아무것도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 가운데 영원한 것은 없다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되는 것이지요. 그렇게 자각하라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후패함을 허락하신 것이지요. 우리의 육신의 후패함 속에서 낙망하고 낙심하고 좌절하는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런 생각이 아닙니다. 오늘 사도도 똑같은 우리와 똑같이 갱년기도 거쳤을 것이고 노년기도 거쳤을 것입니다. 이 편지를 쓸 때 아마도 대충 보면 사도로 부르심을 받고 30년 안 된 정도의 세월이 지났을 것입니다.
그 때 이 사도가 우리들이 경험하는 모든 것을 다 경험했지요. 그리고서 자신의 육체가 후패해져 가는 것을 깊이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모든 것들을 극복하게 만들었던 관점이 무엇이냐 하면 인생의 참된 기쁨과 내밀한 행복을 겉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속사람에서 찾은 것이지요. 그래서 오늘 보니까 “우리의 속사람은 날마다 새롭도다.”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남과 동시에 우리의 겉 사람과 속사람은 대조를 이루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우리의 겉 사람은 시간에 종속되었기 때문에 창조하실 때의 그 원래적 전일성을 잃어버리며, 부패라고 하는 요소가 들어와요. 그래서 우리 육신이 계속 늙음에 종속되어서 삭아가는 거예요. 그런데 영혼을 구원을 계기로 전일성을 회복해 가는 거예요. 그런 전일성을 회복해 가면서 죽어있는 영혼이 계속 살아나면서 전일성을 회복해가는 거예요.
놀라운 기쁨을 그 자신의 내면의 세계를 보면서 찾았던 거예요. 그것 때문에 행복해 했던 거예요. 그래서 마치 이 육신이 영혼의 씨눈을 위해 썩어져야 할 밀알로 보았던 것이지요. 자신의 겉 사람이 후패해가는 것만큼 자신의 속의 새 사람이 날로 장성하여 언젠가 썩을 육신이 썩지 않을 영혼에 삼킨바 되어서 썩지 않을 찬란한 몸으로 다시 입게 되는 영화의 그날을 사모했던 것이지요. 그 속에서 기뻐했던 것이지요.
그러니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한편으로는 육신이 전일성을 잃고 계속 썩어져가고 한편으로는 우리 안에 있는 속사람이 전일성을 회복하면서 계속 살아나요. 그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겉 사람이 계속 썩어가는 것을 밀알이 썩어가는 것이 씨눈에 싹이 트는 것처럼 기뻐할 수 있는 거예요. 그래서 눈에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다는 고백에 동참을 하는 것이지요. 신자의 기쁨이 여기 있는 것이지요.
우리의 일생은 속히 지나가고 바람과 같아요. 그리고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 세상이 얼마나 철저히 소망이 없고 썩음에 종속되는 것인지 우리들이 똑바로 알게 된다면 우리는 후패해가는 우리의 육신으로 인해서 낙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관심이 점점 더 우리의 속사람에게 쏠립니다. 우리의 이 속사람이 새롭게 되기 위해서는 얼마나 우리 속에 있는 또 한사람이 죽어야 해요. 겉 사람은 우리의 눈에 보이는 육신이지만 옛사람은 우리 속에 있는 또 다른 본성이에요.
그래서 이 옛사람이 죽는 것만큼만 우리의 속사람이 새로워져요. 그래서 날마다 이렇게 우리 안에 있는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고 죄에 대해 죽고 자기 의에 대해서 깨뜨려지고 이렇게 될 때 우리 속사람이 계속 새롭게 살아나는 것이지요. 그렇게 하지 않고는 신자가 어디에서도 행복할 수 없는 것이에요. 많은 사람의 박수와 갈채, 사랑을 받아도 주님의 사랑이 없으면 행복할 수 없어요. 모든 재물과 수많은 자원을 끌어안고 있을지라도 그것이 이바지 할 수 있는 것을 기껏해야 겉 사람뿐이에요.
이렇게 하면서 우리는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이 가져다 줄 수 있는 것들이 얼마나 한계가 있는지 깨닫게 되는 것이에요. 눈에 보이는 것들이 우리 영혼에 기여할 수 없는 것들이 거의 없다는 것을 깨달아요. 그래서 정말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우리의 속사람이 계속 새롭게 살아나는, 얼마나 새롭게 살아나는지, 날마다 아침마다 새로운 것이에요. 그래서 오늘 깨달아 알게 된 하나님의 성품은 어제 알지 못했던 또 다른 새로운 하나님의 성품, 어제와는 또 다른 깨달음과 인식 속으로 우리들이 날마다 들어가게 되는 것이에요. 하나님 앞에 새로워지게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이런 마음을 가지고 날마다 새롭게 되어가야 해요. 날마다. 그래서 언젠가 우리의 육신이 완전히 썩고 우리의 겉 사람이 더 이상 자기를 지탱할 자원이 고갈 되었을 때, 그 육신의 껍질을 깨고 거기서 나온 우리의 속사람이 보좌위에 계신 예수를 보게 되는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욥의 고백이었어요. 나의 이 육신의 껍질을 벗고 내가 하늘에 계신 보인을 보노라 그런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에요.
어떤 지위에 오를까 이 세상에 태어나서 무슨 일을 할까 얼마나 많은 사람을 거느릴까 목회를 할까 떡 장사를 할까 시집을 갈까 독신으로 살까 이런 것들은 모두 삶의 양태에 지나지 않아요. 본질이 아니에요. 중요한 본질은 영혼이 하나님을 응시하며 그분을 인해서 만족하면서 사는 것이에요. 그것은 환경에 의해서 그렇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가난할 때 주님을 바라보던 사람은 물질이 많아질 때 주님을 버릴 염려는 있어도 주님을 더 뜨겁게 사랑하는 것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삶의 많은 양태들이 있어요. 그건 영원한 것이 아니에요. 그래서 우리는 그 모든 것들 속에서 항상 자신의 속사람을 봐요. 그리고 주님이 오셔서 만져주시기를 바라면서 매일매일 사는 것이에요. 그래서 자신의 옛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고 주님이 주신 새 사람은 그 못 박힘 속에서 다시 살아나고 가는 길은 쉬운 길이 아니에요.
우리 안에 여전히 자기 사랑이 있어요. 후패해져가는 우리의 모습이 여전히 우리를 낙심시켜요. 그리고 깊이 절망하게 만들어요. 우리가 늘 승리하느냐 하면 그렇지 않거든요. 양심의 송사와 우리의 정죄들이 고개를 들어요. 주님도 나를 떠나가신 것 같은 느낌도 받게 되요. 그래서 우리에게 믿음이 필요한 것이에요. 우리 안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것을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룰 것을 굳게 믿고 있는 모습 그대로 주님 앞에 나가서 은혜와 긍휼을 구하면 일흔 번의 일곱 번도 용서하시고 우리가 주의 형상을 닮기까지 공급해 주시는 자원을 아끼지 아니하겠다 하신 그 약속을 붙들고 사는 거예요.
그 사람은 아침마다 새로워질 수 있어요. 날마다 속사람이 새로워질 수 있어요. 어제 몰랐던 주님을 깨닫게 되고 그저께 느끼지 못했던 하나님의 사랑을 영혼 속에 느끼면서 삶의 양태에 관계 받지 않고 어디서든지 주님을 섬기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되는 것이에요. 우리 인생의 모든 불행과 고통의 궁극적인 원인은 하나님 밖에서 복을 찾아보려고 하는 것이에요. 하나님 밖에서 또 다른 행복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 행복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참된 행복을 촉진시키거나 심지어는 무엄하게도 대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거기에서 우리의 속사람은 계속 못 박혀요. 겉 사람이 후패해져 갈 뿐 아니라 우리의 속사람도 함께 부패해져가요. 못 박혀야 할 우리의 옛 성품은 살고 살아야 할 우리의 새 성품이 고난을 당하는 거예요. 그 때 우리는 후패해져가는 우리의 겉 사람과 함께 죽어가는 우리의 속사람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겉 사람은 육신적 부패함에 종속되어 썩어가고 속사람은 영적 부패함에 종속되어 썩어가요. 그래서 우리는 마음 둘 곳이 없고 위로받을 곳이 없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에요.
참된 행복은 예수 안에 있어요. 하나님 안에만 있어요. 나는 확신해요. 여기에 있는 여러분들 중에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게 되었을 때 칭찬을 많이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이 있을 거라고 생각을 해요. 왜?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았기 때문에.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날마다 거기 있어서 그렇게 날마다 주님을 섬기면서 산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지요. 그렇게 살아갈 수 있게 만드는 힘이 우리의 속사람이 새로워지는데 있다라는 사실을 누가 부인할 수 있겠어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 이렇게 날마다 새로워져가서 여러분들이 살아 있는 것이 여러분들의 마음에 기쁨이 되도록 여러분들이 하고 있는 일이 그분의 마음에 즐거움이 되도록 살면서 주님을 섬기고 그 섬김 때문에 기뻐하시는 하나님 때문에 즐거워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에요. 잠시 살면 곧 고단한 삶이 끝나고 바울이 고백한 바와 같이 눈에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그렇게 영원에 전망을 가지고 살아온 사람들로서 주님 앞에 칭찬받게 되는 것이지요. 여러분들이 그렇게 살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영혼을 쇄신케 하는 사유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