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화의 문맥에서 본 갈라디아서 6장 17절
이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갈6:17)
녹취자: 김경애
알다시피 이 갈라디아서는 갈라디아 교회를 향해 쓴 편지인데 그들이 바울이 전해준 복음을 버리고 유대교에서 개종한 완전주의자들의 꼬임을 따라 율법으로 돌아가려는 시도가 있는 가운데 쓴 편지였습니다. 그래서 친절한 인사도 없이 바로 ‘너희들이 우리 주 예수께서 전해주신 복음 이외에 다른 것을 너희들이 전하면 하나님의 저주가 있을 것이다.’ 라는 무서운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격정적으로 1장, 2장, 3장을 써내려가다가 편지 후반부에 와서는 다시 이 갈라디아 교회 교인들을 향한 목회자로서의 말할 수 없는 애정이 솟아납니다. 그래서 어조를 누그러뜨리면서 이제 그들에 대한 사랑을 표현합니다.
그러는 가운데 이제 이 글의 말미에 이런 의미 있는 이야기를 합니다. ‘이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라고 말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이야기하는 이 예수의 흔적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느냐는 것입니다. 이 예수의 흔적은 ‘스티그마타투예수’ 라고 나오는데 이 예수의 흔적에 관한 해석은 크게 두 가지 해석으로 나뉘는데 우선 육체적 해석과 형상적 해석으로 나뉩니다. 육체적 해석은 다시 세 가지 정도로 나뉘고 형상적 해석과 갈리게 됩니다. 먼저 육체적 해석은 여기서 이야기하는 예수의 흔적이라는 것이 실제로 사도 바울의 몸에 입은 물리적 상처를 의미한다는 견해입니다. 세 가지 견해로 나뉘는데 가장 보편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견해가 핍박설입니다. 즉 핍박으로 말미암아서 그의 몸에 나게 된 상처가 있는데 그것을 여기에서 예수의 흔적이라고 표현했으니 ‘예수의’ 라고 되어있는 ‘투예수’는 ‘스티그마타’의 원인을 가리키는 소격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제 판단으로는 이 견해가 맞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알다시피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초인적인 사역을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40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고 돌로 침을 당하고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긴 사람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그의 몸에는 그 고난의 흔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것은 충분히 인정을 하는데 여기에 나오는 ‘스티그마타투예수’가 바로 그러한 핍박을 통해 몸에 입게 된 상처를 의미할 가능성은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문학적으로 보면 지금 이 사도는 아주 뛰어난 수사학적 기교를 가지고 신학적 개념들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그 앞의 문맥을 보면 사도가 갈라디아 교회에 있는 교인들에 대한 고통을 표합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할례를 받아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을 지켜야한다. 예수만 믿는 것으로는 구원을 얻느냐는 반론이었습니다. 그래서 14절에서 자랑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내게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랬는데 그 앞에 그 사람들이 자랑한 것은 육체의 할례를 그들이 자랑한다고 되어있습니다. 육체의 할례를 자랑하는데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만을 자랑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과 복음 그 다음에 육체와 영혼, 그 다음에 할례와 예수의 흔적, 이것을 수사학적으로 대비시키면서 그 대비 속에서 신학적 개념들을 녹여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문제가 생겨납니다. 무슨 문제가 생기느냐하면 여기 ‘내 몸에’ 라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엔소마티무’ 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알렌 코올 같은 사람도 또 헤르만 리델보스도, 랄프 마틴 같은 사람도 모두 이 물리적 핍박설을 지지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는 가장 중요한 단서가 ‘엔소마티무’ 라는 ‘나의 그 몸 안에’ 그런 뜻입니다. 영어 성경에 보면 On my body. 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흔적이라는 말 자체를 아예 ‘엔소마티’ 라는 말로 딱 한정해버리니까 이것은 의심할 수 없이 물리적인 몸을 가리킨다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만 보면 안 되고 다른 사도 바울의 서신에서의 ‘엔소마티무’ 와 같은 용례를 생각해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엔소마티무’ 라는 한정어구 때문에 육체에 새겨진 물리적 상처설을 이야기한다면 해석이 안 되는 것이 고린도후서 4장 10절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10절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우리가 우리 몸에 예수 죽인 것을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나타나게 하려함이라.’ 라고 되어있는데 이 부분이 사실 번역 상에 조금 문제가 있는데 여기에서 이 ‘엔소마티무’와 똑같은 형태의 구절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 몸에 예수 죽인 것 그랬는데 우리말 성경에 보면 예수님을 죽인 어떤 가책 같은 것에 대한 보상으로 우리가 계속 핍박을 받고 고난을 받으며 산다는 해석학적 인상을 줍니다. 사실은 그것이 아니라 희랍어 성경에 보면 예수를 죽인 것이 아니라 예수의 죽음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우리 몸에 예수의 죽음을 짊어지는’ 그랬습니다. 제가 반문하고 싶은 것이 어떻게 우리 육체의 물리적인 몸에 예수의 죽음이라는 추상명사를 짊어질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몸에’ 라는 그 한정어구 때문에 이 ‘스티그마타’가 물리적 상처의 흔적 이라는 해석은 무리라는 것이 저의 결론입니다. 또 반론이 제기됩니다. 갈라디아 6장 17절에 나와 있는 ‘가졌노라’는 단어는 ‘바스타조’ 라는 단어이고 그리고 고린도후서 4장에 나오는 단어는 ‘페리페로’ 라는 단어입니다. ‘페리페로’는 짐 같은 것들을 짊어지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고 ‘바스타조’는 소유한다는 의미입니다. 사실 많은 학자들은 이 두 단어에 차이가 별로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육체적 해석은 무엇이냐 하면 로마 가톨릭의 신비주의적인 해석과 연결을 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승에 의하면 아시스의 프란시스 같은 사람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더니 어느 순간에 하나님이 은사로써 그에게 보상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기도를 한참 하는데 기도를 하고나니까 이마에서 피가 흐르고 두 손에 구멍이 뚫어져서 피가 흐르고 발에서도 피가 흘렀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것들은 건전한 주석적 작업에 의해서 내려진 결론이 아닙니다.
그 이후에 별로 지지를 못 얻고 있지만 또 한 가지 육체적 해석의 갈래가 있는데 이것은 무엇이냐 하면 ‘컬트마크’라고 봅니다. 제의적 문신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당시에 그 많은 이방종교 속에서 자기의 신들에게 자기를 바치는 의미로 문신을 새겼는데 사도 바울이 그 예수님께 자기를 바치는 의미에서 그러한 타투를 했을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별로 지지를 못 얻고 있습니다. 특히 헤르만 위델프트 같은 사람들에게 신랄하게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것이 아니라고 본다면 그러면 여기서 이야기하는 ‘스티미마타투예수’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저는 이것이 형상적 해석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이야기하는 내 몸의 예수의 ‘스티미마타투예수’는 몸에 새겨진 물리적 상처가 아니라 영혼과 정신의 특성이라고 보아야한다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들이 그 당시 로마 시대에 있었던 노예제도를 생각해보아야합니다. 로마 이전에 희랍의 노예제도와 로마의 노예제도는 많이 달랐습니다. 희랍의 노예제도는 노예의 인권을 상당히 존중해주는 제도였습니다. 더욱이 폴리스시절에는 마케도니아가 강성해서 헬라를 이루기전에 폴리스시대 때에는 이 노예들은 상당한 권리를 인정받았습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의 대화편에 보면 법정을 향해 가면서 소크라테스가 대화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대화를 나누는 사람이 누구냐 하면 바로 자기 아버지를 법정에 고소한 사람입니다. 왜 고소를 했느냐하면 아버지가 노예를 죽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어떻게 인간으로서 노예를 죽일 수 있느냐면서 아버지를 고발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당시의 어떤 기록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노예 주인이 노예가 하도 말을 안 들으니까 ‘노예보고 밭을 가라고 몇 번 이야기했는데 이 자식이 말을 안 듣는다. 아 인생사는 것이 괴롭다. 오늘도 할 수 없이 노예는 놀고 내가 밭 매러 나간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그만큼 노예에 대해서 인간적인 권리가 주어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개인적으로 문명사적으로 볼 때 우리가 파악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가장 인간 본성을 최대한 신장하면서 사람답게 살았던 그 시대가 물론 기독교적인 관점이 아니라 일반관점에서 보면 그 희랍의 폴리스시대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어쨌든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에 로마로 넘어가면서 부터는 문제가 틀려지게 됩니다. 로마는 아주 헬라에 비해서 강력한 중앙집권제 국가가 되면서 도시국가적인 특성들이 남아있기는 했지만 그러나 노예 자체가 이 제국을 떠받히는 강력한 노동력 제공의 수단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을 아주 엄격하게 대했습니다. 그래서 그때에 유행하던 습관이 물론 모든 노예가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노예에게 문신을 새기는 습관이 있습니다. 삐리에이지에서는 이제 ‘스티그마’를 몸에 난 타투 혹은 브랜드 그래서 말하자면 화인 이런 것들로 해석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노예들이 몸에 흔적을 새겼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큰 가문에서는 자신들의 노예에게 공통적인 문장을 새긴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새겨서 그들로 하여금 도망하지 못하도록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스티그마’의 습관에 대해서 사도 자신도 익숙해져있었고 이 수신자들도 아주 익숙해져있는 상태에서 이 ‘스티그마타투예수’ 라고 이렇게 딱 이야기할 때에는 수신자들은 벌써 금방 알아들었던 것입니다. 그런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이야기하는 ‘스티그마타투예수’ 하면 예수의 흔적들이란 뜻인데 ‘스티그마’들이라는 것인데 이것은 예수와 ‘스티그마’의 관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소유격으로 쓰였습니다. 그야말로 소유격입니다. 그러면 노예의 몸에 ‘스티그마’가 있으면 그 ‘스티그마’가 의미하는 것은 뭐냐 하면 그 ‘스티그마’를 찍은 ‘스티그마’가 표명한 그 주인에게 이 노예가 소속되어 있다는 것이고 그 사람의 재산이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소유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제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이렇게 장황하게 설명을 했겠습니까? 저의 판단으로는 ‘스티그마타투예수’라는 이 독특한 표현은 이러한 당시의 노예제도의 문맥에서 ‘스티그마타’ 제도를 염두에 두고 해석을 한다면 이 ‘스티그마타투예수’라는 표현은 ‘둘로스크리스토투’의 또 다른 표현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서신서를 기록할 때마다 항상 자기 자신의 정체에 대해서 밝혔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둘로스크리스토투’ 혹은 ‘둘로스크리스토투예수’ ‘둘로스큐리오’ 이렇게 뒤에는 주던 예수든 예수 그리스도이던 여러 가지 명칭이 나오지만 어쨌든 자기 정체성은 ‘둘로스’ 즉 노예라는 것입니다. 지금은 노예가 존재하지 않으니까 실감이 별로 나지 않는 시대에 우리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당시에는 노예가 실제로 존재하던 시대였습니다. 우리가 종이라고 그러는데 종이라고 그러면 사람들이 굉장히 높이 떠받드는 개념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언어에 이상한 의미가 들어가는 것입니다. 심지어 거기에 종님까지 들어가니까 이제 복잡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원래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종이라고 표현하면 정확하게 노예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노예입니다. 가장 천한 그런 노예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면 궁금한 것은 이 ‘스티그마타투예수’라는 표현에 있어서 이 ‘스티그마’가 바로 ‘스티그마둘로’ 즉 ‘노예의 스티그마’ 라고해서 그래서 결국은 이 ‘스티그마타투예수’가 ‘둘로스크리스투예수’의 또 다른 표현일 뿐이라는 것을 우리들이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는데 그러면 이 표현 이러한 자기 정체성은 사도 바울이 어디서 가져온 것일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구약의 에벳야웨 사상에서 들어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김세윤 박사님은 이제 예레미아 등등의 본문을 예를 들면서 이제 갈라디아 1장 15절에서 16절 사이에 보면 ‘그 모태로부터’ ‘또 선택하시고’ ‘기뻐하시고’ 등등 동사들이 예레미아 1장의 소명기사에 나오는 것과 아주 유사하기 때문에 바로 그러한 전통을 가지고 들어온 것이라고 해석을 하십니다. 그런데 사실은 예레미아 만이 아니라 구약의 모든 선지자들의 자기 정체성은 이미 예레미아 이전에도 에벳야웨였습니다. 선지자의 비조를 이야기할 때 우리들이 둘을 이야기할 수 있는데 하나는 일반적 선지자 그러니까 개별적으로 소명을 받아서 선지자가 되는 그런 고유한 의미의 선지자의 비조는 모세입니다. 모든 선지자들의 아버지가 되는 것입니다. 사무엘에 와서는 직임화가 되어 즉 Office 가 됩니다. 그래서 선지자 학교가 만들어지고 거기에서 선지자가 어떤 목표를 가지고 양육 받고 길러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 자체가 어떻게 보면 좋은 것이겠지만 어떻게 보면 하나님의 강력한 계시가 끊어진 상태에서의 그런 선지자의 양성방식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로 말하자면 하나님을 못 만난 사람들이 신학교에서 올망졸망 자라서 복음사역자가 되려는 것과 아주 유사한 것입니다. 거기에서 나오는 선지자들은 그렇게 뛰어난 선지자들이었을 가능성은 별로 없습니다. 그러니까 학습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선지자가 사실 구약에서 이야기하는 고유한 의미의 선지자는 아닙니다. 그래서 선지자들이라고 그러면 이 사람들은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고 그의 영광스러운 임재 속에서 소명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 소명에 관한 기사들이 구약에 항상 선지서들이 기록되면서 앞에 계속 나옵니다. 이것이 바로 서신서에서 기록하고 있는 그 서신서 기자들이 밝히고 있는 사도 바울만이 아니라 베드로도 마찬가지이고 밝히고 있는 자기 정체성 ‘둘로스크리스투’와 짝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둘로스크리스투’ 사상은 구약에 나오는 에벳야웨 사상이 기독론적인 해석의 과정을 거쳐서 그래서 새롭게 신약 쪽으로 자리매김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구약에 나오는 선지자의 소명기사는 우리가 많이 연구해야할 영적 가치가 있는 부분입니다. 신약에 보면 ‘둘로스크리스투’의 자기 정체성을 설명할 때 대개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로 말미암아 사도된 나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 주의 사도된 바울은’ 등등 이런 식으로 나옵니다. 이렇게 되듯이 정형적인 표현이 구약에도 소명기사 속에 항상 나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와이예히데바르엘로힘’ 혹은 ‘아도나이’ 등등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그때에’ 그리고 ‘여호와의 말씀이’ 혹은 ‘하나님의 말씀이 누구누구에게’ 혹은 ‘누구누구 위에’ 혹은 ‘누구누구 속으로’ ‘누구누구를 관통하여 임하였더라.’ 이런 문구가 나옵니다. 이 두 개도 잘 비교해보면 아주 재미있는 Contrast 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뭐냐 하면 신약에 나타난 기독론적 해석의 과정을 거친 ‘둘로스크리스투’는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이미 이루어진 자기 정체성에 관심이 있고 그리고 구약은 그 이미 이루어진 자기 정체성 이전에 자기에게 그런 정체성을 가져다주게 하는 과정에 관심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예히데바르엘로힘의 의미입니다. 예히는 하야 동사의 주식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여기에 대표적인 것이 이제 호세아 1장 4절에 보면 호세아의 소명기사를 이야기하면서 이렇게 나옵니다. ‘비로소 여호와의 말씀이 호세아에게 임하느니라.’ 그 부분은 ‘떼히라뜨 에베이 아도나이 에베 호세아’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처음으로 말씀하셨느니라.’ 라고 나오는데 그 호세아에게 라는 부분이 전치사 베를 동반해서 베호세아 라고 나옵니다. 우리말로 직역하면 영어로 말하자면 ‘Into 호세아’ 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호세아속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는 장면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물론 이 하나의 전치사를 가지고 우리가 어떤 교리를 세우는 것은 무리가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베’ 라는 전치사만 동반되는 것이 아니라 on, upon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알’ 혹은 to, for 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엘’ 같은 to, at, for 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레’ 등등의 다양한 전치사가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이 ‘베’ 만을 특징적으로 사용해서 이것으로 교리로 세운다는 것은 무리가 있지만 그러나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데’ 혹 그 말씀이 호세아를 관통했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불러주시는 이 소명의 체험은 그것은 아주 강력한 영적 경험이 동반된 임재의 경험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한 이해 없이는 구약의 선지자직의 소명에 대한 공정한 이해에 도달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제가 지금부터 10년 전에 ‘설교자는 불꽃처럼 타올라야한다.’ 라는 책에서 그 바이에히 라는 부분을 한 50페이지에 걸쳐서 다루었습니다. 그만큼 엄청난 의미를 가지고 있는 단어입니다.
그러면 이 둘로스크리스투를 이해하기 위해서 계획에는 없었지만 조금만 더 설명을 하고 진도를 나가겠습니다. 그러면 이 소명기사 바이에히데바르엘로힘 혹은 디베르아도나이 등등의 표현으로 시작되는 이 ‘예히’를 동반하는 그 소명기사는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며 그것이 이 선지자가 선지자로서 에벳야웨가 되는데 있어서 어떻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가하는 문제를 모두 설명 드릴 수는 없지만 조금만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이스라엘 나라가 왕이 세워졌지만 왕을 세울 때에 사무엘의 마음에 있었던 구도는 신정적 왕정국가를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왕이 없는 하나님의 직접 통치를 받는 신정국가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호세아서에서 보면 하나님이 왕을 주신 것 자체가 분노했기 때문에 왕을 주셨습니다. ‘내가 분노함으로 너희에게 왕을 주고 진노함으로 내가 그 왕을 폐하겠노라.’ 그러니까 왕이 등장한 것도 하나님의 분노 때문이었고 또 그 왕을 폐하여버린 것도 하나님의 진노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직접 통치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서 왕을 허락하셨을 때에 그 명령을 받들었던 이 사무엘의 마음속에 그리고 있었던 나라는 신정적 왕정국가였습니다. 이 왕정국가에서 이 신정적 통치를 구현하기 위한 세 솥발이 있었습니다. 솥발과 같은 기구가 있었으니 왕과 선지자와 제사장이었습니다. 왕은 그야말로 통치하고 그 통치인데 왕도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구도는 여호와의 종이어야 했습니다. 에벳야웨여야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부분은 우리들이 연구를 좀 더 많이 해야 합니다. 어쨌든 이 세 솥발 모두가 그 고백이 ‘나는 에벳야웨입니다.’ 그 고백을 해야만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야지만 형식적인 왕정을 통해서 실질적인 신정통치가 구현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왕도 ‘에벳야웨입니다.’ 라고 고백을 해서 하나님이 자기에게 맡기신 권력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받드는데 이바지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제사장은 당연히 에벳야웨입니다. 그러니까 나는 하나님의 종입니다. 라고 하는 고백 속에서 제사의 직분을 감당해나가야하는 것입니다. 선지자는 그런 맥락에서 보면 선지자를 가리켜서 하나님께서 ‘My servant the prophet.’ ‘나의 종 선지자’ 아모스서에서 특별히 그렇게 말하셨습니다. 이 표현은 선지자에게만 매우 독특하게 묻어있는 개념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세 솥발과 같은 기구 모두에게 이 개념이 스며들어와야지만 왕정인 이 나라 안에서 실질적으로는 신정통치가 구현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신정통치가 구현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오늘날 여러분들이 이렇게 주의 종이라고 그럴 때 그러한 개념을 이해하면서 쓰는지가 조금 궁금합니다. 그것이 에벳야웨의 사상입니다. 그러면 제사장과 선지자는 여러 점에서 아주 Contrast를 이룬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제사장의 관심은 죄지은 백성들을 그래도 하나님 앞에 데리고 나가서 하나님 앞에 용납되게 하는 것에 관심이 있으니까 세워진 입각점 자체가 굉장히 많이 백성들 쪽으로 기울어져있고 그리고 백성들을 제사라는 제도를 타고 하나님께 나아가게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인습과 전통에 서있는 사람입니다. 입각점을 많이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 문제도 사실은 더 토론의 여지가 많습니다. 어떤 토론의 여지냐 하면 진짜 참 제사장이 되면 그 Spirituality는 이러한 양태적인 입각점인 차이에도 불구하고 절대적으로 선지자의 Spirituality 와 일치를 이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선지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선지자의 경우는 조금 틀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백성들 앞에 나오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에게 있어서는 인습과 전통 이런 것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 그 현재성이 훨씬 더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마치 제사장과 선지자 사이에 갈등이 있는 것 같은, 제사를 열심히 드리는데 선지자가 나타나서 그것은 다 쓸데없는 짓이라며 그리고 무차별 폭격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장면들이 자유주의자들에게 아직까지도 선지자직이나 제사제도가 세팅이 안 되었다는 그런 갈등으로 비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해석을 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선지자의 관심은 그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궁금한 것은 이것입니다. 뭐냐 하면 만약에 선지자는 백성들 앞에 나아온다고 할 때 그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사람인데 이 사람 속에 그 말씀을 들어야하는 죄악된 백성들 속에 있는 똑같은 세계관, 똑같은 인생관, 그리고 똑같은 성공, 똑같은 전망, 역사에 대한 해석 이런 것들을 가지고 있다면 다른 메시지를 선포할 수 있었을까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문제에 부딪히게 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 에드워즈 제이영이 친절하게 자기의 책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우리는 흔히 선지자의 예언 그러면 하나님께로부터 이렇게 초자연적으로 위탁된 말씀을 Repeat 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사실 선지자에게 있어서 그런 기능은 아주 부차적인 기능이었습니다. 선지자는 오히려 위탁된 말을 그대로 사람에게 Repeat 해주는 기능이 선지자에게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예를 들자면 요나에게 위탁된 니느웨의 멸망에 관한 예언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이사야에게 주어진 행동예언 같은 것이 있는데 그것은 부차적인 것이었고 그런 의미에서 선지자들은 엄밀한 의미에서 펑춘텔러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개인적으로 선지자라는 말보다는 예언자라는 말이 훨씬 적합하다고 보고 그 예자도 미리 豫자를 쓰는 것은 선지자들의 정체성에 조금 부합하지 않고 미리 예자 말고 예금, 적금할 때 쓰는 맡길 預자를 쓰는 것이 훨씬 선지자가 가지고 있는 독특한 Task 즉 그 임무에 부합하는 명칭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이제 그러면 도대체 선지자라는 사람들이 하늘로부터 떨어진 사람들은 아닙니다. 그 시대 속에 태어나서 살고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만약에 그가 선지자가 안 되었더라면 일반적으로 다른 선지자들에 의해서 영적으로 각성되고 깨어나야 할 잠자는 백성들 가운데 한 사람일 것 아닙니까? 일반적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모든 사람들에게 나와서 하나님의 시각에서 역사를 해석하고 이렇게 하는 그것이 사람들에게는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을 이야기하려느냐하면 이 예언자들의 중요한 직무는 미래에 일을 단순히 예언하는 것이 주된 기능이 아니라 모세의 율법을 가지고 모세의 시대가 아닌 또 다른 시대의 Context 속에서 그 율법의 정신을 구현했을 때의 삶의 표준을 선포하고 거기로 사람들을 부르는 것입니다. 그 방법으로써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생각나게 하고 하나님의 심판, 하나님의 위로, 하나님의 축복, 이런 다양한 기재들을 사용해서 그들을 그 표준을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치 모세의 율법이 선지서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이 관계는 복음서가 서신서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관계와 아주 유사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라는 세팅이 생겼을 때 예수님의 시대와는 다른 시대에 살고 있는 다른 세팅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사도의 관심사는 무엇이었습니까? 뭐냐 하면 예수님이 살아계셨더라면 이 바뀐 Context 속에서 우리에게 어떤 삶을 살고 무엇을 믿으라고 말씀하셨을까하는 것이 관심사고 그것이 이론적인 형태를 가지고 논리적인 형태를 가지고 제시된 것이 바로 이 서신서입니다. 똑같이 선지서가 그런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우리가 바로잡아야할 부분인데
그러면 이제 말씀드리려는 핵심으로 들어갑니다. 그러면 그 시대에서 태어나서 선지자들이 모두 똑같은 시대에 속한 사람들이었는데 그럼 어떻게 그들과는 전혀 다른 전망을 가지고 역사를 보고, 그리고 인생을 보고,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익숙해진 죄와 악에 대해서 아주 부들부들 떠는 그런 혐오감을 가지고 외치고 그리고 그것을 위해 모든 백성들의 한 피를 나눈 동포이었으면서도 마치 전적인 타자인 것처럼 그들을 하나님 앞에 탄핵할 수 있었느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소명체험의 핵심을 이루는 부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최초의 부르심과 함께 하나님의 말씀이 임할 때 그것은 강력한 영적인 하나님의 임재를 동반했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거룩하심 속에서 모든 자연적 초월성과 도덕적 완전성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거룩의 두요소입니다. 그래서 그런 초월성과 도덕성을 함께 경험하게 되는데 초월성에 대한 생각은 하나님과 선지자를 비롯한 이 모든 세상의 인간들 사이에 있는 불연속성과 연관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뭐냐 하면 하나님은 하나님이실 뿐이고 너희가 아무리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다고 해도 너희는 인간일 뿐이다. 둘 사이에는 전적인 타자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도덕적 완전성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관계되는 또 하나의 특성인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에게서 발견될 수 있는 모든 도덕적 가치들이 대부분 인간들 속에서도 발견됩니다. 그런데 인간들의 그것과 하나님 안에서 발견되는 그것은 범접할 수 없을 정도의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무엇인가 좋은 일을 행해도 그것이 하나님 안에 있는 의의 성품을 반영하지만 두 개를 비교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런 것과 연관되는 것입니다. 그런 불연속성을 이제 언약관계를 통해서 극복하면서 그래서 특별한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더 많은 설명이 필요하지만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체험하면서부터 그것이 이 지성으로부터 시작해서 이 모든 영혼의 기능들을 강력하게 쇄신시키는 그런 놀라운 경험으로 이 사람을 완전히 내적으로 새사람을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다메섹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다메섹 Experience 다메섹의 체험이라는 것이 신약시대에 일어난 체험이지만 그 형태자체가 아주 구약적인 전형적인 선지자의 소명형태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가 삼위를 교통하게 하는 중재자로서의 제 2위 인격이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로 그것이 기독론적인 전환을 가지고 왔다는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이 지점도 굉장히 신학적인 시사점이 많은 지점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삼위 하나님과의 아름다운 연합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많이 강조하는데 엄밀하게 말하면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한 삼위 하나님과의 연합입니다. 그렇게 이야기해야합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이야기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자 안에 있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이야기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한 많은 증거들이 성경에 나타납니다. 예를 들자면 마태복음 28장에 보면 ‘그러므로 너희는 모든 족속에게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그것도 역시 똑같이 밥티제테에이스토오노마 그러면서 성부, 성자, 성령이 나옵니다. 직역을 하면 세례를 줄때에 세례를 주는 사람이 삼위 하나님을 대리하여 준다는 개념이 아니라 그 수사 속에서 세례를 주는 사람은 관심에서 소외되었고 세례를 주는 행동을 통해서 나타나는 결과가 포커스 속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뭐냐 하면 세례를 주면 그 세례가 그 각 사람 즉 세례 받는 사람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 속으로 연합을 시킨다는 개념입니다. 이 오노마 라는 이 이름은 구약의 쉔인데 이것은 성경에서 이름과 이름의 소유자는 완전히 일치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이름이나 하나님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하나님의 이름을 사랑하는 것 사이에는 아무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거기서도 이름의 신앙이 나옵니다만 어쨌든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강력한 체험을 통해서 기존에 가지고 있던 모든 세계관과 이런 것들을 다 완전히 여호와 하나님을 중심으로 이것들이 유일 신앙을 중심으로 전부 다 쇄신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다메섹의 경험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래서 김세윤 박사님이 쓰신 박사논문이 바로 거기에 포커스를 맞추어서 그 사도 바울의 모든 기독론과 구원론 이 모든 양파껍질 같은 신학을 벗기고 벗기고 계속 들어가면 코어가 나오는데 다메섹 Experience입니다. 거기에서 바로 복음전도자로서, 기독론적 신학자로서 강력한 Divine Enforcement 즉 신적인 강제력을 경험하게 되었다는 그것이 곧 사랑의 강제력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저의 해석입니다만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선지자가 소명을 받는 그 순간에 강력한 영적인 임재를 통해서 이 사람이 이 세계관과 인생관과 이런 모든 것들이 전부 다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에게 적용한다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우리가 굳이 Second Blessing을 이야기하지 않아도 문제는 뭐냐 하면 우리가 회심하고 영접할 때에 그때에 우리에게 들어오게 되는 이 신적인 진리의 빛이 그것이 우리의 모든 인생관과 우주에 대한 생각이나 모든 것들을 바꿔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자신의 Miscellany 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인간이 중생하게 될 때에 그 중생이라는 것, 회심과 중생이라는 것은 곧 인식론적으로 말한다면 아름다움에 대한 지각이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Beauty 지각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 아름다움을 예전에는 보지 못했었는데 그 새로운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지각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Sense가 생겨나게 되고 그 아름다움이 가져다주는 지각 때문에 그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름다움이 뭐냐 하면 Eternity 즉 영원입니다. 그 영원이 뭐냐 하면 진리입니다. 진리 자체가 선입니다. 그 자체가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영원이요, 진리요, 선이요, 참이신 그 하나님을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게끔 사람의 형상을 입어 내려오신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Incarnation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인간에게 이해될 수 있도록 내려오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러한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이 생겨나는 것이 중생한 사람의 특징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소명의 체험도 그와 유사한 체험을 갖고 있어야하는 것입니다. 새롭게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생관 자체가 틀린 것입니다. 여러분 부분적으로도 여러분들이 경험했을 것입니다. 주님을 깊이 만나고 이제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세상의 사랑과 즐거움을 다 버렸습니다. 세상의 명예와 이런 것들을 아무것도 아니라고 다 쓸어 담고 불쌍한 영혼들에 대한 생각에 가슴을 치밀고 그 다음에 온 땅에 울려 퍼지는 하나님의 이름을 보고 내가 내 생명을 다 버려서라도 여호와의 이름이 온 땅에 높아지는 그런 날들을 보겠다는 사모함이 생겨났습니다. 그때에 일반적으로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인생관이나 우주관을 공유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공유할 수 없습니다. 그것을 무한대로 확장시켜서 생각하면 됩니다. 선지자는 그런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된 사람들이 에벳야웨인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이 그러한 성부 하나님에 대한 경험이 기독론 중심적으로 다시 구속사적으로 기독론 중심적으로 전환되어서 그래서 그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게 되고 그래서 그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그 영광과 그 비치는 광휘, 그 거룩한 광채를 통해서 삼위 하나님의 그것을 보게 되었고 그래서 그것에 사람들이 철저하게 매이게 된 것입니다. 이게 바로 둘루스크리스토스 사상이고 스티그마타투예수는 그것의 또 다른 표현을 당시의 노예제도의 문맥을 이용해서 아주 생생한 그림처럼 수신자들의 가슴속에 확 꽂아줄 수 있는 기가 막힌 수사학적인 기교를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궁금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그러면 도대체 그런 Divine Enforcement, 신적인 강제력 세상의 가치관이나 이런 모든 세상적인 사상과 결별하게 만드는 그 어떤 강한 그 무엇 그 강한 무엇이 도대체 그 기원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약백성으로서 하나님 앞에 섰을 때 그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 앞에서 느끼던 두 가지 감정이 있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티모르에트파스나치오. 즉 두려움과 그 다음에 이끌림입니다. 굉장한 두려움입니다. 초월적인 존재인 그분이 그렇게 초월적이지 못한 유한한 존재에게 나타나실 때 그 질적인 격차로 말미암아 느끼는 그 무서운 떨림, 그러면서도 이상하게 그 무섭고 두려운 떨림인데 그것을 피하고 싶지 않은 어떤 사랑의 이끌림, 바스키나치오 이 두 가지를 언약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느꼈던 것입니다. 그런 강한 이끌림 자체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사랑 속으로 들어가는 이끌림입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여기에서 에벳야웨 혹은 불루스크리스투 라고 이야기할 때 비인격적으로 학대를 하면서 주인에게 대해서 막 벌벌 떨던 그 당시의 그런 종두를 여기에 대입시키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세오경에 나오는 귀 뚫은 종 이 사람이 해방될 때가 되었는데 ‘나는 주인이 너무 좋습니다. 주인같이 자비로운 분을 어디서 만날 수 있겠습니까? 나는 평생 종이 되겠습니다.’ 그러면 귀를 뚫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주인은 그를 기둥에 귀를 뚫은 다음에 신분은 노예인데 노예처럼 대하지 않고 가족처럼 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분은 노예인데 대해주는 것은 가족처럼 대해주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에벳야웨 속에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벳야웨 사상에서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친밀함입니다. 그래서 아모스서에서 뭐라고 그러느냐하면 ‘내가 나의 행하고자하는 일을 어찌 나의 종들에게 미리 보이지 아니하겠느냐’ 하면서 친밀함을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모세는 하나님의 종이었지만 누구 보다고 하나님과 가족관계속에서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비난받을 때 온유함이 지면에 승할 수 있었던 근거도 바로 그런 것입니다. 이게 그대로 기독론적인 해석의 과정을 거쳐서 둘로스크리스투에 그대로 투사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에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자기정체성을 밝힌 모든 사람들의 특징이 뭐냐 하면 신분상으로는 하나님의 종인데 그 Intimacy 친밀함에 있어서는 Family 라는 말입니다. 벌써 이것만 통해서도 우리가 엄청난 시사점을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종처럼 열심히 일할뿐만 아니라 똑같이 하나님의 종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과의 가족관계에서의 친밀함을 누리면서 살아야하는 것입니다. 이게 선지자의 특권인 동시에 선지자의 의무입니다. 이것에 의해서 선지자와 선지자가 아닌 사람들이 구분되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선지자 안에서도 이 친밀도에 의해서 그 사람의 급수가 나뉘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민수기 12장에 나옵니다. 어떻게 나옵니까?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에게도 말씀하시지 아니하셨느냐?’ 그러면서 백성들을 선동할 때에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내가 너희들에게는 꿈과 이상으로 나타났지만 내 종 모세와는 친구가 대면하듯이 대면하여 말하느니라.’ Intimacy 자체가 그들이 경험한 것과 모세가 경험한 것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언자의 권위를 이룬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생각해보십시오. 오늘날 여러분들이 권위라고 생각하는 것이 어떤 것입니까?
그러면 생각해보십시오. 오늘날 여러분들이 권위라고 생각하는 것이 어떤 것입니까? 여러분들 제발 그러지 마시기 바랍니다. 큰 교회! 언제 한번 목사님들의 모임에 갔는데 이름을 대면 다 아는 굉장히 큰 교회를 하는 목사님이 오셨습니다. 비슷한 연배의 목사님들이었는데 내가 옆에서 보기에 무안할 정도로 90도 각도로 절을 하고 쩔쩔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이 가신 다음에 ‘연배가 어떻게 되십니까?’ 그러니까 ‘우리 동창입니다.’ 야, 큰 교회의 위력이 이렇게 대단한 것이구나! 그 목사님이 자기 교회가 크다고 절대로 거들먹거리실 그런 분이 아니신데 쉽게 말하면 알아서 대우해주는 것입니다. 알아서 기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기분이 묘했습니다. 그것은 아닙니다. 제가 지난학기에 와서 여러분들과 사무엘서를 가지고 영혼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설교했습니다. 생생하게 기억이 나는데 그런 관점에서 보면 사실 그런 것들은 양태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권위를 그런데서 찾는 것입니다. 박사학위를 어디서 했느냐? 몇 개를 했느냐? 아니면 교회에 청빙을 받아서 갔는데 그 교회의 교인이 얼마나 모이느냐? 또 그 사람이 교회의 정치계에서 얼마만한 능력을 가졌느냐? 그렇게 하고 또 잘하는 사람들은 은근히 그 뒤에 줄을 서고 말입니다. 그것이 전부 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진짜 3급, 4급, 5급짜리 선지자들이나 할 노릇이지 진짜 하나님께로부터 부름을 받는 그런 사무엘 선지자 학교에서 낙제점을 받은 사람들이 할 행동이지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부르짖는 그런 예언자에 할 행동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안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분들의 교회도 커지고 교계에서 힘도 쓰고 그럴 때 어깨 좀 낮추고 더 많이 머리를 숙여서 당회장이 되면 당회의 종이 되고 노회장이 되면 노회의 종이 되고 총회장이 되면 총회의 종이 되고 좀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복음의 정신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면 이제 서서히 정리를 해야겠습니다. 그러면 성경이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신자의 영광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우리가 교회를 목회를 하고 신학교 교수를 하고 또 신학교를 나왔는데 아무래도 그 길이 아닌 것 같아서 다시 가게를 하고 사업을 하고 그래도 괜찮습니다. 그럴 수도 있습니다. 제가 사실 신학교에서 강의를 하면서 내보낸 학생들이 약 200명쯤 됩니다. 그래서 중도 포기하도록 제가 권유를 해서 지금 보면 빵집을 하는 사람도 있고 자동차 파는 사람도 있고 행복하게 잘 삽니다. 심지어 어느 학생은 ‘제가 고등학교 때 서원했는데…….’ ‘뭐라고 서원했는데?’ ‘주의 종이 되겠다고 서원했는데…….’ 그래서 ‘내가 이렇게 떠나면 하나님의 재앙이 오는 것이 아닐까?’ 제가 책임집니다. 그냥 가십시오. 아무 상관없습니다. ‘제가 서원을 했는데요.’ ‘뭐라고 서원했는데?’ ‘저는 주의 종이 되겠습니다.’ 목사만 주의 종입니까? 그러면 아니 빵가게를 하고 가게를 하는 사람들은 주의 주인이냐? 그것도 다 종입니다. 심지어 ‘저는 선교사가 되겠다고 서원을 했는데요. 그래서 그것이 걸리는데요!’ ‘서원할 때 주님이 뭐라고 하시던?’ ‘아무말씀 안하셨습니다.’ ‘그것 봐라. 괜찮은 거야! 그냥 가!’ 그렇게 돌려보낸 학생이 이백 명쯤 됩니다. 그것은 삶의 한 양태입니다.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무엇을 소유하는 것, 어떤 지위에 오르는 것이 우리의 존재를 아름답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성도의 가장 큰 복은 그리스도를 닮은 형상을 자신이 얼마나 많은 정도로 소유하느냐는 것입니다. 이 형상을 철학적인 의미에서 해석해보면 질료와 형상이 만나서 존재를 이룹니다. 질료는 물리적인 재료이고 형상은 그 물리적인 재료들로 하여금 어떤 본성을 가지고 작용을 하게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똑같이 우리도 우리의 육체와 또 우리에게 많은 지위, 자원 이런 것들이 질료로 주어질지라도 형상이 예수의 형상을 닮게 되면 그 모든 것들을 사용해서 예수님을 위해서 창조주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에 기여하는 방식으로 그 모든 것들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들이 우리에게 주어졌어도 기본적으로 이 예수의 형상이 아닙니다. 아닌 것만큼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과 이탈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은 악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악이 가는 곳에는 궁극적인 목표라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자기의 욕망의 추동을 따라서 행동하면서 살아가는 그 속에서 사람들은 많은 혼란에 빠지고 고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에게 가장 사모해야할 바는 무엇이냐 하면 예수의 흔적을 많이 지닌 사람이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가장 사모해야할 바입니다.
아침마다 교회의 마당에 나와서 성경을 묵상하는 것이 기도와 함께 제 하루생활의 기쁨이고 즐거움인데 교회마당이 참 예쁩니다. 나무그늘 아래서 그렇게 있는 것이 참 기쁩니다. 어느 날 거기에 앉아서 성경을 묵상하고 있는데 예고 없이 어느 후배가 찾아왔습니다. 뜬금없이 ‘목사님! 생명력 있는 목회의 비결이 무엇입니까?’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죽음입니다.’ 맑은 눈망울로 깜빡깜빡하면서 그것이 무슨 뜻이냐는 듯이 묻습니다. ‘목회자의 자기 죽음입니다.’ 모든 좋은 진리의 깨달음은 자기 죽음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가끔 선배목사님들을 만나면 목회가 너무 행복하다고 그럽니다. 그런데 나는 이해가 안갑니다. 나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런 분들 앞에 서면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마음입니다. 그런데 나에게는 그런 날이 안 올 것 같습니다. 나에게 있어서 목회는 행복하지 않습니다. 가슴앓이입니다. 설교는 영원히 이국의 언어입니다. 설교하는 시간은 어떻게 보면 행복할 수 있지만 어떻게 보면 책임져야할 수많은 언어들을 토해놓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위선자가 되는 것입니다. 존 오웬 목사님이 자기의 책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교회를 세우시고 천사가 아니라 연약한 인간에게 목회를 맡기신 것은 그로 하여금 참으로 하나님을 믿는 것이 무엇인가? 참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성도들이 볼 수 있게 하기위해서 하나님이 그 사람을 세우신 것입니다. 만약에 그 사람이 그런 창조의 목적을 따라서 덕성스러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면 그의 목회의 성공은 바벨탑일 뿐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는 23년 동안 정들었던 노스햄튼 교회를 신학적인 논쟁 속에서 결국은 그 교회를 마지막으로 떠나면서 성도들에게 그런 설교를 남겼습니다. 그 고별설교의 제목이 ‘그리스도의 날에 다시 만날 분쟁하는 교회의 목사와 성도들’ 이라는 제목이었습니다. 그 설교 속에서 그런 이야기를 남겼습니다. ‘그러므로 목회자의 직무는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을 탐구하는 것과 온 힘을 다해서 탐구한 말씀대로 사는 것이며 교회는 이 두 가지 일에 목회자가 전념하게 하기 위해서 모든 환경과 편의를 제공해야합니다.’ 라고 했습니다.
저는 신학교 교수로 있던 어느 날 하나님이 불현 듯 개척을 명하셔서 그래서 응답받은 지 채 한 달이 되기 전에 지하실에 25평이 되는 작은 방을 얻어서 7명의 성도와 함께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그리고 12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저는 지금도 그렇지만 정말 교회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우리교회에 항상 이야기하는 것이 ‘나를 오라고 그러는 데는 참 많지만 내가 갈수 있는 데는 여기밖에 없다.’ 그렇게 이야기하는데 저는 교회밖에 몰랐습니다. 내 꿈과 소망 그리고 내 생명이 있는 동안 교회였습니다. 그랬는데 그리고 나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드리면서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또 사실 어느 정도는 그랬던 것 같습니다. 목회하기 전에는 강남에 집도 한 채 있었는데 지금은 무주택자이고 제가 아마 책을 써서 번 돈을 모았더라면 작은 빌딩을 하나 샀을 것입니다. 그런데 없습니다.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기도하는데 주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얘야, 네 몸에 나 예수의 흔적이 있느냐?’ 이것이 이 구절을 보게 한 모티브였습니다. 그것이 그렇게 들었는데 기도할때마다 주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처음에는 시냇물 흘러가는 소리처럼 들리더니 시간이 지나면서 폭포수 같은 굉음이 되어서 들렸습니다. 그러면서 깊은 자기 깨어짐을 경험했습니다. 인정하기 싫었지만 헌신하면서 살아왔고 교회밖에 모르고 살아왔지만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이 없었습니다. 혹은 현저히 없었습니다. 나를 예수 표라고 알아보기에는 너무 희미한 흔적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노예가 명목적으로는 노예라고해서 그것이 노예입니까? 로마시대 때에 전쟁을 하면 진나라에서 사람들을 데리고 옵니다. 이 사람들이 다 귀족출신이거나 아니면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거나 자유민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을 노예로 하사하는 것입니다. 그런다고 해서 그 사람이 노예일수 있겠습니까? 손이 곱고 노예들에게 섬김만 받던 사람이 노예일수 있습니까? 그들이 진짜 로마를 위한 노예가 되기 위해서는 신분이 노예가 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그 안에 노예 됨이 충만해야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시대에는 그런 사람들을 노예로 길들여주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게 바로 ‘둘라고고’ 라는 ‘내 몸을 쳐서 복종시키노라’ 할 때 그 단어의 유래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Guide into Slavery.’ 라는 뜻입니다. 노예 살이 속으로 그를 데려간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쳐서 복종시켜서 자유인의 기질, 내 맘대로 할 수 있다는 모든 기질을 다 빼버리고 주인에게 철저히 예속된 존재로 바꾸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스티그마타투예수라고 하는 것이 바로 그렇게 되어가는 과정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 과정의 결과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틀린 것은 로마의 노예를 길들이는 사람은 무서운 채찍으로만 길들였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호세아서에서 이야기한바와 같이 우리를 사랑의 줄로 묶으시는 것입니다.
(찬양)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갑니다. 고통 가운데 계신 주님 변함없는 주님의 크신 사랑 영원히 주님만을 섬기리.
그런데 제가 도달된 결론은 허울만 노예였습니다. 내안에는 자유인의 정신, 내 마음대로 살고 싶은 혈기, 그리고 내 마음 내 뜻대로 살고 싶은 자유로운 기질들이 충만해있었습니다. 그 만큼 내 안에서 예수님께서 속박을 당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많이 깨뜨려졌습니다. 불 꺼진 교회당에서 울고, 아침밥을 먹다가 울고
(찬양)
우리 죄악과 강퍅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하시네.
오늘 여러분들에게 한권씩 나누어드리는 책, 자기 깨어짐은 그런 사연이 있는 책입니다. 그런 깨어짐을 경험하고 나서 도대체 내 안에 이런 깨어짐이 일어났는데 물론 예전에도 있었지만 이것의 신학적인 정체, 철학적인 정체, 인간학적인 정체가 무엇일까? 도대체 무엇일까? 그리고 써내려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모두 지나가는 것들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얼마나 예수를 많이 닮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청교도 로버트 맥체인이 말하기를 신자가 이 세상에서 받을 수 있는 최고의 복은 그리스도를 많이 닮는 것입니다. 예수를 많이 닮으면 그러면 설교는 너무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냥 평소에 생각하던 대로 느끼는 대로 이야기하면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본을 보이기 위해서 피나는 분투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생긴 대로 살면 예수의 향기가 거기에서 묻어 나오는 것입니다. 모든 자원, 지식, 기회, 경험, 모든 것들이 다 오직 하나를 위해서 사용되는 것입니다. 그냥 예수님을 닮기를 원하는데 닮기를 원하는 것만큼 섬기기를 원하고 사랑하기를 원할 테니까 무엇을 하나님이 주셔도 그 목적을 위해서 사용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주셔서 망가진 이 세상을 고치면서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우리가 그렇게 주님을 계속 닮아가는 것입니다. 저에게는 그 이후로 아주 단순한 소원이 생겨났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언젠가 나도 은퇴하지 않겠습니까? 속히 그날이 오기를 기대하고 있지만 올 텐데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예상보다 빨리 올수도 있고 더디 올수도 있고 그 안에 죽어버릴 수도 있지만 언젠가 열린 교회에서 설교를 듣지 못하게 될 날이 올 것이다. 그날에 대해서 소망이 생겼습니다. 어떤 소망이냐 하면 두 가지 소망인데 30년을 열린 교회에서 목회를 했는데도 성경을 펼쳐서 본문을 읽으면 30년 설교를 들은 성도들이 무슨 설교가 쏟아질지 학문적으로 예측할 수 없는 설교의 내용을 갖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언제 그 설교단에서 마지막에 내려오든지 그 날이 살아온 날 중에서는 예수님을 가장 많이 닮은 날이 되고 앞으로 살아있을 날 중에서는 가장 적게 예수를 닮은 날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우리의 인생의 수고를 모두 마치고 주님이 우리를 오라고 부르시는 그날이 이 땅에 살아있던 날 중에는 주님을 가장 사랑하는 날입니다. 우리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장 많이 가진 날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는 그래서 마지막 그날에 예수의 형상이 우리 안에 가장 충만하게 담긴 그날이 되어서 죽음의 강을 건너 그분의 품에 안기는 그런 사람이 되는 것 그것이 우리의 양보할 수 없는 비전이 되어야합니다. 목회라는 수단을 이용해서 자기의 영광을 구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고 비전이라는 미명하에 자신의 꿈의 성취를 사명이라는 미명으로 호도하는 이런 일들이 허다한 이때에 여러분들은 아주 올바른 정신을 소유한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많이 가지고 스스로 여러분들이 에벳야웨, 둘로스크리스투가 되어서 백성들의 눈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고 주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무릎을 꿇고 그들의 발을 씻기고 그야말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그렇게 섬기다가 하나의 밀알처럼 사라져갈 때 이 세상에서는 여러분들을 하찮게 여겨도 우리 주님은 여러분들을 받으시기 위해서 보좌에서 일어나실 것입니다. 그날에 꼭 여러분들이 그런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같이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