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소금교회 사경회 셋째날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시 23편)
녹취자: 최영순
이어서 시인은 하나님을 자신의 목자라고 고백하게 된 네 번째 이유를 말합니다. 그것은 바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자기를 건져주시는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을 자신의 목자로 인정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시간이 없기 때문에 5절만해도 오늘 다 못할 것 같아서 5절로 넘어가겠습니다.
그리고 시인은 네 번째 이유를 말하는데 그것이 바로 “주께서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부으시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목자로 고백하며 살 수 밖에 없었던 네 번째 이유인 것입니다.
그러면 5절은 23편 전체에서 문학적으로 어떤 위치에 놓여 있는 것입니까? 여러분, 밤하늘의 불꽃놀이를 보신 적이 있습니까? 펑하고 대포를 쏘면 대포 끝에서 불꽃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가느다란 빛줄기를 내며 하늘 높이 솟아 오른 후 맨 꼭대기까지 도달한 다음 불꽃은 작렬하듯이 폭발하며 아름다운 광경을 연출해 냅니다.
시편23편 1절부터 4절까지가 올라가는 불꽃이라면 5절은 작렬하듯이 폭발하는 불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4절까지만 해도 충분히 하나님을 자신의 목자로 고백하며 살아야 하지만 5절에서 하나님이 보여주신 더 크고 놀라운 은혜 때문에 시인은 터질 듯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자신의 목자로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믿고 있고 자신이 이 세상 불신자보다 더 좋은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할지는 모르지만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예수 믿는 사람들이 안 믿는 사람보다 행복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기독교 신앙생활에 있어서 이런 단어들은 거의 실종되었거나 잊혀진 망각의 단어입니다. 환희, 감격, 기쁨, 희열, 이런 단어들 말입니다. 최근에 여러분들이 이런 단어들 중에 하나를 경험해 본적이 있습니까? 감격, 환희, 희열, 벅차는 기쁨, 이런 것 말입니다.
우리는 이런 것들을 회복해야 합니다. 우리가 만약에 이런 삶을 살지 않고 기독교 신앙을 말한다면 세상 사람들은 우리에게 이렇게 반문합니다. 그래서 당신은 예수 믿는 것이 인생 사는데 도움이 됩니까? 요즘말로 살림에 보탬이 좀 됩니까? 하고 말입니다. 이 희열과 감격, 기쁨, 환희 속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현존은 가장 우렁찬 선포입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우리가 믿는 신앙의 길은 가장 복되도다” 라고 하는 선포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인은 왜 그렇게 하나님 앞에 감격하고 있나 했더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명백하게 잔칫집의 문맥입니다. 신랑 신부가 시집 장가를 갈 때에 주인은 좋은 포도주를 내어 오고 잔에 가득찬 술잔을 함께 따르며 건배하면서 기쁘기 짝이 없는 주인이 넘치도록 술을 부어 주었고 포도주가 잔에서 거품을 품으며 흘러 넘치고 잔과 잔이 부딪히며 하객과 함께 모두 기뻐하는 광경입니다. 시인이 이것을 통해서 무엇을 말하고 싶었겠습니까?
하나님이 자신에게 먹을 것을 공급해주시고 침체된 영혼을 죽음의 상태에서 살려 주시고 인생의 위기 속에서 자신을 건져주셨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이렇게 자기를 가슴 벅차게 해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나의 목자이십니다. 그리고 나에게는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 이렇게 고백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상징처럼 사용되고 있는 나의 잔이라고 불리우는 잔은 사실 인간 영혼 안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감각 내지는 ?(6:29) 따띠스라고 해서 하나님에 대한 신의식, 하나님 아니면 채워질 수 없는 갈망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18세기에 채스터턴이라는 영국의 사상가가 있었는데 이 사람은 자기의 책 속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한 남자가 사창가의 문을 두드릴 때 그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고 있는 중이다” 라고 말입니다. 이 세상에 극단적인 쾌락과 이것을 추구하는 도덕적 부패를 징그러운 뱀을 보듯이 기독교인들이 생각하는데 죄를 혐오한다는 면에서는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쾌락에 빠져 죄를 짓고 있는 현대인을 뱀 보듯 해서는 선교가 안 됩니다. 그것은 얼마나 하나님을 멀리 떠난 사람들이 하나님 아니면 채워질 수 없는 갈망을 거짓 하나님으로 채우고자 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죄의 아주 두드러진 특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하나님이 아니면 채워질 수 없는 것들에 대한 갈망을 하나님을 싫어하니까 하나님을 만나서 고유하게 채우기는 싫고 그것들을 다른 방법에서 찾는 것입니다.
요새 우유주사라고 해서 미다졸람 주사문제로 발칵 뒤집혔습니다. 그 주사가 여러분들은 뭔지 모르시지요? 저는 잘 압니다. 병원에 가서 링거를 맞으면서 그 주사를 함께 놓아 달라고 하면 놓아줍니다. 그런데 맞으면 미끄러지듯이 잠이 듭니다. 정말 달콤합니다. 불과 10초안에 잠이 드는데 시간은 두 시간에서 세 시간까지 조절합니다. 미다졸람 주사를 계속 맞으면서 잠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쾌감을 맛보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아침 8시부터 밤 11시까지 그 주사를 맞으러 돌아다닌 답니다. 이것은 쉼이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오늘날 자살하지 않습니까? 청소년들만 1년에 수없이 많이 자살합니다. 자살의 심리가 뭔지 아십니까? 자살의 심리야 살기 싫으니까 그런 것 아닙니까? 아닙니다. 아우구스티누스라고 하는 교부에 의하면 인간의 자살에 대한 선택은 너무나 너무나 살고 싶다는 갈망의 표현이 자살이랍니다. 너무나 너무나 지금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살고 싶은데 그 꿈을 이룰 가능성이 전혀 없을 때 인간은 자살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살합니다. OECD 국가중에서 1위입니다. 이것은 국민소득과 관계없고 국민소득이 늘어나도 더 많은 사람들이 자살을 선택할 겁니다. 더구나 우리나라같이 치열한 경쟁사회 속에서 인간이 매몰되는 사회에서는 더 많은 사람들이 자살을 선택할 겁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살하고, 어느 통계에 의하면 자살한 사람의 75%가 크리스찬입니다. 물론 그 사람들은 자살할 만큼 인생 벼랑 끝에 가서 예수 믿는 사람이 된 사람들일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최근 자살한 연예인의 70%가 그리스도인입니다. 이것은 너무나 너무나 죽고 싶다는 것이 아니라 너무나 너무나 이것과는 다른 삶을 살고 싶다는 표시입니다.
그러면 결국 쾌락에 매몰되고 쾌락과 인간의 욕망을 위해서 미친 듯이 날뛰는 이러한 현상들, 우리가 시계를 2,3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봐도 이렇게 성폭행이 전 도시를 휩쓸고, 젊은이들이 객기에 그러는 것이 아니라 엊그제는 신문을 보니 83세 먹은 할아버지가 아이들을 데리고 성추행한 기사가 나오는데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소돔과 고모라때 처럼 거의 미쳐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결국 채스터턴의 관찰에 의하면 하나님을 너무 필요로 하는데 그 하나님이 아니면 채워질 수 없는 갈망을 약물이나 성적쾌락, 학교에서 아이들이 집단적으로 폭행하고 이지메를 하고 투신하는거 우리가 학교 다닐 때는 상상도 할 수 없었습니다. 단호하게 얘기하지만 우리 고등학교 다닐 때만 해도 그런 것은 없었습니다. 못난 아이들이 아이들에게 대접을 못 받는 경우는 있었습니다. 공개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은 없었습니다. 아이들이 왜 그렇게 친구를 괴롭히냐면 하나님 아니면 채워질 수 없는 갈망을 그런 식으로 행동하면서 채우고자 하지만 채워지질 않습니다.
로이드존스 목사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오늘날 쾌락의 현상과 부도덕으로 달려가는 극단적인 욕망 극대화의 이 상황을 우리가 정말 그리스도인이라면 이것을 죄악시하면서 죄를 정확하게 인식하면서 두려워하고 증오하는 것은 올바를 태도이지만 사람들 자체를 하나의 병자로 생각하며 접근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의 죄악을 능가하는 사랑을 가지고 그렇게 하나님이 아닌 것들을 향해서 자신을 만족시키려고 하는 병적인 증상 속에 통곡하고 있는 영혼들을 볼 수 있는 선교적인 마인드가 교회에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그런 부도덕을 용납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적어도 하나님의 사랑으로 죄와 죄를 지은 사람을 분리해서 생각할 수 있는 사랑의 정신이 교회 속에 깃들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시인은 하나님 아니면 채워질 수 없는 영혼의 갈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가득 채워주시는 환희를 경험한 것입니다.
어느 병원에서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강북의 수유동에 어떤 병원이 있었는데 어느 의사가 당직을 서고 있는데 새벽에 택시가 온 것입니다. 사람들이 내리자마자 병자를 부축해서 떠매고 응급실에서 들어오며 이 사람 좀 살려달라고 했습니다 뭐냐고 하니 갑자기 쇼크로 쓰러졌답니다. 의사가 눕혀 놓고 진찰해 보니 다시 살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불가능한 상황입니다. 완전히 돌아가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한 시간쯤 지나고 나니 가족들이 울고불고하며 새벽에 택시타고 온 것입니다. 하얀 천으로 덮어 놓았는데 의사가 그러는 겁니다. 자기가 20년이 넘도록 의사 생활을 했는데 대개 사람은 태어날 때는 두 주먹을 쥐고 태어나고 죽을 때는 펴고 죽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공수레공수거라고 합니다. 수없는 시신을 보아 왔는데 이 사람처럼 독특한 자세로 죽은 사람은 처음 본 것입니다. 한 손은 펴고 한 손은 쥐고 죽은 것입니다. 해부학적으로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가족들은 울고 불고하는데 의사는 궁금했습니다
유족들이 나간 다음에 손가락을 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화투 두 장이 후두득 떨어지는 것입니다. 탁 펴보니 의사가 자기도 모르게 삼팔광땡입니다. 그게 무슨 뜻인지 여러분은 경건해서 잘 모르겠지만 화투 잘 치는 사람에게 물어보니 두 장을 놓고 서로 끝 수를 다투는 게임인데 판돈을 건답니다.
어떤 분들은 초보적인 이야기를 길게 하냐고 하겠지만 10명이 화투를 치면 만원씩 내면 10만 원이 쌓입니다. 두 장씩을 나눠 주고 패를 갈라서 랭킹이 위에 있는 사람이 가져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똑같은 패가 둘 나오면 땡입니다. 약속하기에 따라 다른데 사람들이 패를 들고 나는 가망이 없다고 기권하면 그 사람은 죽는 것이고 10사람중 5명이 나는 한 번 겨뤄보겠다고 만원을 내면 나머지 4사람도 만 원을 내야 합니다. 안 내면 기권하는 것이고 그것을 세 번까지 할 수 있답니다. 과장이지만 10사람이 아무도 안 죽겠다고 하고 계속 대면 30만원까지 올라갑니다. 마지막에 패를 펴서 1등이 가지고 가는 것인데 1등이 만약에 똑같은 패가 두 개가 나온 사람이면 그럴 경우에는 배팅한 금액만큼 한 배를 내놓아야 합니다. 3만원씩 더 내놓으니 57만원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삼팔광땡일 경우에는 세 배를 내놓아야 합니다. 그러면 돈은 다시 141만원의 판돈이 됩니다. 이 사람이 장삿집에 가서 밤새도록 화투를 쳤는데 계속 잃은 것입니다. 그러다가 새벽에 끝발이 붙었는데 돈이 이만큼 쌓였는데 패를 주었는데 펴보니 삼팔광땡이 들어온 것입니다. “당신 펴봐” “나,나 삼”하다가 심장마비로 죽은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 얘기를 듣고 웃었지만 후손들에게 그 죽음을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엄마 우리 아버지 어떻게 돌아가셨어?” “심장마비로 죽었단다.” “왜? 나라를 지키다가?” “아니, 화투치다가 삼팔광땡 들어와서 너무 충격받아 심장마비로 죽었단다.”
태어날 때는 아무데나 태어나도 괜찮습니다. 그걸 문제삼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죽을 때 어디서 죽었는가는 문제가 됩니다. 여러분은 웃었지만 화투 두 장이 뭐라고 그걸 붙들고 삼팔광땡을 보고 얼마나 충격을 받았으면 심장마비가 일어나겠습니까? 여러분들은 그 사람보고 웃었지만 여러분이 뭐가 다릅니까? 그 사람은 조그만 동양화 보다 가슴 졸이며 심장마비로 죽었는데 여러분들은 집문서, 땅문서, 학위 그런거 펼치다가 심장마비로 죽고 그러지 않습니까? 뭐가 다릅니까? 어떤게 다릅니까? 한쪽은 동양화이고 한쪽은 등기부등본인데 무슨 차이가 납니까?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볼 때에는 그 인간이 그 인간이지 차이가 없습니다.
우리가 정말 불행한 것이 이 세상에 있는 자원이 부족하기 때문에 불행하다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그것이 아니라 모든 자원을 사용할 수 있는 우리의 하늘자원이 부족하기 때문에 우리의 인생은 불행해지는 것입니다. 하늘자원이 제가 둘째 날 말씀드렸던 우리의 영혼에 관련된 자원입니다. 그 생명과 사랑, 진리와 은혜, 이런 것들을 충만히 누리면서 살아가는 삶이 우리 안에 정말 차고 넘칠 때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우리의 심령에 평안이 되는 것이고 우리의 생명을 이어가게 만드는 원동력이 됩니다.
시인이 그것이 가득 채워지는 것을 경험한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에서 어떤 사람이 정말 희열에 찬 삶을 살까요? 어떤 사람이 환희에 가득 찬 삶을 살아갈까요? 어떤 사람이 가슴이 저리도록 감격스러운 삶을 살아갈까요?
돈 많은 사람 아닙니다. 돈 많은 사람이 근심이 없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세속적인 근심이 없는 것입니다. 돈 있는 사람은 또 다른 근심이 있습니다. 지위가 높은 사람, 아닙니다. 지위가 높은 사람은 근심이 많습니다. 오바마 대통령을 보면서 참 고달픈 인생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지난 번 선거에 나왔을 때에는 카랑카랑하고 머리가 새까만 전형적인 곱슬머리의 흑인 청년같지 않았습니까? 지금은 흰머리가 하얘가지고 얼굴도 푹 절었습니다. 깊은 주름을 숨길 수가 없습니다. 담임 목사도 힘든데 미국 대통령은 얼마나 힘들겠나 생각하면 가엾습니다. 그런데 한 번 더 하겠다고 저렇게 싸웁니다.
이 세상에 권력이 있는 사람들은 권력 때문에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결국 정말 환희에 찬 삶을 사는 사람들은 하늘자원으로 가득 찬 사람들입니다. 여러분들이 예전에 하나님 없이 방황하고 혹은 하나님 믿으면서도 제대로 믿음생활 안 해서 방황하고 힘들었을 때 주님 깊이 만나고 하나님 십자가의 은혜를 경험하며 살 때 지금보다 가난하고 어려웠을 때도 기쁨과 희열이 있고 감사가 있는 삶을 살았습니다. 하늘로부터 오는 떡이 있었습니다.
(찬양)
생명의 양식을 하늘에 만나를 맘이 빈 자에게 내려주소서
낮고 천한 우리 긍휼히 여기사 주여 주여 먹이어 주소서
주여 먹이어 주소서
하늘로 부터 하나님의 생명의 양식이 내 영혼에 매일 부어질때 가난해도 세상사람들이 부럽다고 하지 않아도 내 안에 있는 차고 넘치는 영혼의 잔에 희열이, 기쁨이, 감사가 주님을 위해 살게 만들었고 하나님 사랑하게끔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신앙의 원리입니다. 그런 가치를 추구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인생을 올바로 살아갈 수 있는 신령한 자원을 하늘로부터 공급받으며 살아가는 삶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시인이 이렇게 자신의 영혼에 빈 잔이 가득찬 것처럼 하늘의 생명과 사랑으로 가득 찬 가운데 살아가야 하지 않습니까? 우리의 인생을 사는데 있어서 어찌 행복하고 달콤한 날만 있겠습니까? 저는 하나님 사랑 정말 많이 받으며 살았습니다. 여러분 열 명 모아놓고 간증하면 밤새도록 울고 웃기고 할 수 있습니다. 다 듣고 나면 “목사님 한 편의 드라마입니다.” 그렇게 간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맑은 날만 있는 인생을 살아왔느냐고 물으면 단연코 “아니다”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사람 속에서 상상해 볼 수 있는 모든 고통과 괴로움을 다 체험하면서 어린 날부터 파도처럼 헤치며 여기까지 살아왔습니다. 조금 전에 첼로와 바이올린을 연주하셨습니다. 여러분들은 그 소리 들을 때 참 좋지 않습니까? 전 특히 첼로 소리를 좋아합니다. 바이올린은 고음으로 올라갈 때 마음의 갈피갈피에 면도날이 지나가는 것처럼 뮤지컬한 쾌감을 느끼게 합니다. 우리는 즐겁지만 바이올린 줄로 보면 누군가가 와서 못살게 긁어대는거 아닙니까? 너무나 긁히면 줄이 끊어지지 않습니까? 모든 이치가 그렇습니다. 누군가가 그렇게 괴롭힘을 당하면서 아름다운 곡조가 나옵니다.
로스앤젤레스에 가면 언덕 위에 갯디뮤지엄이라고 미술관이 하나 있습니다. 거기에 한 번 갔습니다. 제가 건축에 대해 관심이 많아서 나를 초청한 목사님과 올라가서 차를 한 잔 마시면서 구경시켜 주는데 한 시간 구경하고 소감이 어떻냐고 해서 갯디뮤지엄의 건축에 대한 나의 소견을 말했습니다. 이런 것은 너무 아름답게 잘했고 이런 것은 이랬더라면 더 좋았을거라는 나의 견해를 말했습니다. 얘기를 하다가 제가 질문을 던졌습니다. 인공으로 된 물 길이 있는데 약간 높은 곳에서 물이 내려옵니다. 그런데 사이사이에 조각물로 돌을 여러 개를 박았습니다. “목사님, 잘 내려오는 물길에 조각품들을 왜 바닥에 박았을까요?” 그 분은 신학을 전공하신 분이니까 “목사님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요.” 그래서 내가 “소리입니다. 소리. 그것들을 제거해 버리면 물이 아무 소리를 내지 않고 흐릅니다. 그것을 박아 놓음으로 물이 다양한 소리를 내며 흘러내리니까 옆에 있는 돌로 된 벽에 음향이 부딪히며 쉼터 전체를 물소리로 아쿠아스틱 시스템에 의해서 채우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이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맑은 날만 없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정말 기쁘게 해드렸던 종들, 하나님이 눈에 넣어도 안 아팠던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의 인생 전체를 언제나 양탄자길로만 인도하셨습니까? 잔디밭으로만 인도하셨습니까?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사랑 많이 받고 하나님의 눈에 넣어도 안 아팠던 사람들은 하나님이 마구 굴리셨습니다. 시련과 고난의 골짜기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며 폭풍이 있는 들판을 지나고 마라와 같이 쓴 물을 먹어야 하는 광야의 한 복판을 지나게 하셨습니다. 그런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울려 퍼질 수 있는 영혼의 수많은 가락을 경험하게 합니다. 그래서 마치 아름다운 화현이 줄을 튕기며 아름다운 곡조가 울려 퍼지듯이 영혼의 아름다운 가락이 울려나오게 하셨습니다.
그런 인생길을 시인이 걸어왔고 첫째 날 제가 마지막 1절 하반절을 해설하면서 다윗이 얼마나 마음 둘 곳 없는 불행한 사람인지를 서술해드렸습니다. 그런 사람이 내 잔이 넘치나이다 하라 고백하니까 이 희열과 환희, 이 가슴 벅찬 감격은 분명히 이 세상에 있는 자원들을 통해 온 만족이나 기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즐거움들은 우리들이 탐닉하고 누릴 때 영혼에 해가 되지 않는 기쁨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대부분 탐닉하고 즐거워하고 깊이 빠질 때 그것은 우리의 영혼에 정도에 차이는 있지만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취미를 갖고 특기를 갖는 것은 좋지만 거기에 지나치게 몰입을 해서 신앙의 원리를 뒤틀리게 할 정도로 탐닉하는 것은 좋은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아우구수티누스는 자기의 책에서 “우리가 아무리 탐닉하고 사랑해도 우리에게 해가 될 리가 없고 부작용이 될 리가 없는 대상이 꼭 하나가 있나이다” 하고 고백을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생명과 사랑과 희열이 시인의 마음에 가득 넘치게 되었을 때 시인이 가슴 벅찬 감동으로 “하나님은 나의 목자이십니다. 그리고 나는 당신의 양떼가 되는 것이 가슴 벅찬 행복입니다.”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도대체 시인이 무엇을 경험했길래 영혼의 빈 잔이 가득 넘치는 환희와 희열, 감격을 경험했을까요? 우리는 어떻게 하면 희열과 감격, 환희에 참여할 수 있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어느 여론조사 기관에서 이십대 청년들에게 가장 원하는게 뭐냐고 했더니 78%의 젊은이들이 감동을 받고 싶다고 했답니다. 사실은 아무리 많은 감동을 받아도 해로울 것이 없는 감동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옵니다.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은 물론이지만 어린이를 기를 때 어려서부터 간절히 기도해서 최소한 일곱 살 이전에 회심을 목표로 하십시오. 일곱 살 이전에 십자가 복음을 체험하고 자신이 죄인인 것을 절실히 회개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밖에 구원이 없다는 것을 깊이 경험하고 난 다음에 아이에게 두 가지를 가르쳐 주십시오,
하나는 성경과 또 하나는 과학을 가르쳐 주십시오. 과학은 기독교의 세례를 받은 과학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다우신 분인지를 보여주십시오. 우주와 하늘, 별과 생물들의 세계, 과학의 세계, 이런 모든 것을 보여주면서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다우신 분이신지를 아이들에게 보여주십시오. 성경을 통해서는 하나님의 영적이고 도덕적인 아름다움, 과학책을 통해서는 하나님의 자연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줍니다. 이 자연계를 통해서는 하나님이 당신의 아름다움을 자연적 아름다움으로, 도덕세계를 통해서는 당신의 도덕적인 아름다움을 영이신 한 하나님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그걸 볼 때 정말 희열에 가슴 벅차는 희열을 경험하게 됩니다. 아이들을 그렇게 교육시켜야 합니다.
인간으로 태어나서 자식을 낳아서 그 아이를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기본적인 교육을 시키고 확실히 회심해서 하나님 사랑하며 살게 만들어 주면 부모로서 거의 완벽하게 모든 역할을 다 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인정받는 부모가 됩니다.
그런데 오늘은 주제가 아니라서 잘 못하겠는데 여러분 자녀들의 영혼이 어떤지 생각해 보십시오. 회심하지 않은 자녀를 둔 부모가 많습니다. “언젠가 철들면 예수 믿겠지” 철들수록 안 믿습니다. 철들기 전에 복음을 전해서 확실하게 그리스도인이 되게 해야 합니다.
참척이 뭔지 아십니까? 부모는 자식의 장례식에 가는 게 아닙니다. 새끼가 엄마보다 아빠보다 먼저 죽은 게 어마어마한 불효입니다. 그 장례식에 부모가 나타나는게 아닙니다. 참척의 상태에 있는 가정들이 너무 많습니다. 여러분이 자녀를 위해서 정말 눈물로 기도해야 합니다. 삼십 년 후에 이 교회가 이만큼 모이려면 삼십 년 후의 사회는 지금보다 훨씬 악하고 반 신앙적인 사회가 될 것이기 때문에 여러분 아이들의 신앙이 여러분 신앙보다 좋아야 삼십 년 후에 이 교회가 유지됩니다. 기억하시겠습니까? 인구가 줄어드는 것 까지 계산하면 더 힘든 결론이 나옵니다.
그런 영혼의 빈 잔이 채워지는 놀라운 환희를 시인은 경험했는데 그것이 무엇 때문인지 오늘 두 가지로 간략하게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주께서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가 첫 번째입니다. 두 번째는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기 때문입니다.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셨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아직까지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상을 영어의 ‘prize’로 알고 있습니다. 학교 졸업식때 교장선생님이 상장주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이 아니라 히브리어로 ‘쇼한’ 이라는 단어입니다. ‘쇼한’은 테이블을 가리키는데 식탁(eating table)입니다. “주께서 원수의 목전에서 원수의 면전에서 나를 위하여 한 밥상을 차려 주셨나이다." 히브리어 원문에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하면 원수라고 단수로 번역되어 있는데 히브리어 성경에는 ‘쪼래라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나를 괴롭히는 많은 사람들의 면전에서 내게 한 밥상을 차려 주셨기 때문에 내 잔이 넘칩니다. 그 뜻입니다.
이 구절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의 식사와 신앙에 대한 생각을 이해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식사에 대한 생각이 우리나라 사람들의 그것과 아주 유사합니다. 여러분, 우리 어렸을 때에는 대가족 제도였습니다. 저희 할머니께 말씀을 들으니 시집살이 하며 사실 때 한 가족이 제일 많았을 때가 사십 이명 이었답니다. 사십 이명이 한 집에서 사는 것입니다. 요즘 젊은 여성들 거기 며느리 된다면 매일 단체급식 하니까 굉장히 좋아할 것입니다. 우리는 사십 이 명 까지는 아니지만 꽤 사람들이 많은 집에 살아보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온 식구가 같은 상에서 밥을 먹지 않습니다. 사랑채 트면 사십 명이 올라가 밥을 먹는 것이 불가능하진 않은데 절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안방에 상이 차려지는데 그 상에는 나를 기준으로 볼 때 할아버지, 할머니, 우리 아버지가 들어가시고 삼촌이나 고모, 심지어 우리 엄마도 거기 못 들어 가십니다. 나는 조그만 손자니까 할아버지 한테 가서 먹겠다고 하면 애교로 깍두기로 받아주긴 하는데 그 상은 할머니, 할아버지, 우리 아버지 정도가 들어갑니다. 거기는 반찬도 다릅니다. 건넌방에 어머니, 삼촌, 고모 등이 모여서 밥을 먹습니다. 마루에 상이 차려지고 며느리들은 마루에서 먹고, 저 밑 댓돌 아래 내려가면 멍석을 깔고 머슴들이 먹습니다.
이것이 한 번도 변하지 않고 그대로 됩니다. 그러다가 할머니,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내가 장가를 가고 나이가 듭니다. 그러면 어머니, 아버지가 들어가시고 집사람은 남겨놓고 나는 올라가는 것입니다. 승진을 하는 것입니다. 이게 뭘 보여주냐면 가족의 계급을 보여 준다기 보다는 하나의 질서를 보여줍니다. 가족의 질서보다 더 중요한 것은 종과 상전사이에 있는 위계질서입니다.
우리나라 사회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양반이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되면 상민들과 함께 잠은 잘 수 있으나 밥은 같이 먹는 법이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잠을 자는 것은 그런 표시가 없는데 한 상에서 밥을 나누는 것은 형제됨, 가족됨의 사인입니다. 똑같은 문화를 이스라엘 백성들이 공유하고 있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먹는다는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바리새인들에게 비판을 받으신 중요한 죄목 가운데 하나가 너희 선생님은 어떻게 새리와 죄인과 함께 먹으시느냐 그 얘기는 죄인과 창기들과 예수는 함께 밥을 먹으므로 한 형제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거룩함을 표준으로 볼 때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에 마지막 하신 일이 제자들을 데리고 삼일 금식기도 하신 것이 아니라 잔치를 차려놓으시고 최후의 만찬을 베푸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와 다시 만나시던 디베라 바닷가 만남도 아침 식사 자리로 이어지게 됩니다.
라오디게 교회를 향해 주신 말씀 속에서 교회의 회개를 촉구하며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또 먹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계속 나오는 이야기는 먹는 이야기입니다. 먹는 것이 뭐가 그리 중요하냐면 그것은 형제됨의 맹약입니다. 이것은 밥을 같이 먹는 사람들이 생명적인 관계에 있다는 암시이고 표징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선교역사를 전공하신 교수님으로부터 직접들은 이야기인데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옛날 초창기 중국 선교가 시작되었을 때 말도 많고 하니까 여기서 다 익히고 가질 못하고 무조건 보따리 풀고 살면서 언어를 익히고 문자를 그려내고 해서 소수부족의 언어들을 bible translater해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때 중국에 들어갔던 초창기 선교사들의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기도 많이 하고 가서 손짓, 발짓하며 내가 당신들과 같이 살고 싶다고 의사 표명을 하면 선교 언어학에서는 세 시간 같이 놔두면 언어가 통한다고 봅니다. 어쨌든 손짓, 발짓 다해서 의사소통이 되었습니다. 나중에 잠깐 기다리라고 하더니 수염나고 머리 긴 촌장이 와서 다 듣고 나더니 동네 노인들을 모읍니다. 이 사람들이 부족회의의 원로입니다. 장시간 토론하고 이방인들을 가족으로 받아들이기로 결정을 했습니다. 활짝 웃으며 다가옵니다. 이 사람들을 데리고 어디론가 갑니다. 우리로 치면 마을회관으로 갑니다. 동네사람들이 모두 모여 잔치를 합니다. 이방인들에게 맛난 식사를 대접합니다.
중국은 날아다니는 것은 비행기 빼고, 다리있는 것은 책상 빼고, 물 속을 돌아다니는 것은 잠수함 빼고 다 먹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모든 눈에 보이는 것은 식자재입니다. 접시를 가져왔는데 저도 한 번 당황했는데 전갈을 한 접시 튀겨 왔습니다. 저는 하나도 못 먹었는데 같이 있는 분들은 정말 쩝쩝거리며 잘 드셨습니다. 뱀 요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지금도 만주 쪽에 가면 우리는 결혼식 때 국수를 하지 않습니까? 거기는 그게 아니라 뱀국을 끓입니다. 여러 마리를 사다가 동태 자르듯이 토막내서 무를 넣고 푹 끓여서 먹어야지만 진짜 결혼식이다 합니다. 풍습입니다.
접시가 왔는데 도저히 서구인으로서는 상상해 본 적도 없는 음식이 옵니다. 구더기 요리한 것, 뱌퀴벌레 요리한 것, 어떤 사람은 홍콩 가서 스프가 너무 맛있길래 계속 먹었는데 마지막에 뚜껑을 열어보니 바퀴벌레와 거북이가 들어있었답니다. 못 먹겠다고 하니까 갑자기 화기애애하던 분위기가 싸늘하게 얼어붙으며 끌려가서 죽임을 당합니다. 죽는 순간에도 자기가 왜 죽는지 모릅니다.
형제가 되었다 해서 받아 주었고 식사가 밥먹는 시간이 아니라 형제됨을 맹약하는 시간입니다. 그런데 약속을 깬 것입니다. 같이 살고는 싶은데 형제는 될 수 없다고 하니까 죽이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주 유사한 식사 습관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20여 년 전입니다. 히브리어 성경으로 제가 시편 23편을 읽고 있다가 5절에 와서 가슴이 물밀 듯이 밀려왔습니다. ‘베푸시고’라는 단어 때문이었습니다. 히브리어로 ‘아라크’라는 단어입니다. 히브리어의 아라크라는 단어는 원래 군대에서 잘 사용하던 단어입니다. 흩어진 군인을 줄맞춰 세우거나, 공격하고 수비하기 위해서 대형을 정리하는 것을 가리켜 아라크라고 했습니다. 물건 두 개를 놓고 정리하는 것이 아니라 다수의 많은 물건을 질서대로 정렬하는 것을 가리켜 부릅니다.
한 집에 손님이 간다고 할 때 그 집에서 음식을 준비하는 광경을 보면 그 집에 오는 손님이 대단한 손님인가, 별 볼일 없는 손님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어느 집에서 딸이 시집을 갔습니다.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을 했는데 장인, 장모 마음에 사위가 눈에 차지 않습니다. 그래도 결혼식을 올렸고 신혼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친정집에 인사를 하러 가기로 했습니다. “여보, 아침 좀 차려줘” “뭘 아침을 차려 귀찮은데 우리 엄마가 맛있는거 많이 해놓았을 거야.” “엄마, 박서방하고 같이 갈게 우리 점심 좀 줘야해.” 엄마가 시큰둥하더니 “알았다 점심 안 주겠냐 오너라” 남편이 “밥 좀 줘”해도 “아이 맛있게 먹어. 참아. 귀찮은데” 결혼 첫 날부터 아침을 챙겨주다가는 일생동안 구속을 받을 것 같으니까 길들이기를 시작한 것입니다.
선물하나 싸들고 “엄마”하고 가니 전부치는 소리도 안 들리고 음식냄새도 나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어디 가시고 엄마는 나무베개를 베고 주무시다가 게슴츠레 일어나셨습니다. “엄마 우리 왔어.” 앉자마자 “엄마, 우리 배고파. 빨리 먹고 집에 가야 돼” 하니 엄마가 부스스 일어나 부엌으로 가서 찬장을 열어 보더니 불과 한 15초도 안 되었는데 밥상을 차려오셨습니다. 아침에 누가 먹다가 눌어 붙었는지 귀 떨어지고 밥풀까지 말라붙은 밥상에 누가 먹다 남은 밥인지 펌프물에 몇 번을 헹구어 큰 숟가락 하나 꽂아서 반찬이라고는 수많은 젓가락의 공격을 받은 흔적이 있는 고추장 하나 올려 놓은 것입니다. 그만 밥상을 빨리 내려 놓는 바람에 사발의 물이 쏟아져 상에 흘렀습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나는 네가 여기 온 것이 너무 싫다. 정말 다시 보고 싶지 않다.” 그 뜻입니다. 이해 가십니까?
이것은 아라크의 밥상이 아닙니다. 주께서 원수의 목전에서 시인에게 베풀어주신 그 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교인이 1100명 모일 때 까지는 등록하는 사람마다 다 따라다니면서 심방을 했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도저히 할 수 없었습니다. 월요일부터 돌아다녀도 심방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포기했습니다. 심방을 하면서 제일 싫어하는 것이 집에서 밥 차려 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그 자매들이 밥을 하기 위해서 얼마나 신경을 많이 쓰고 힘이 드는지를 압니다.
제가 사실은 요리를 좋아합니다. 지금은 시간이 없어서 못합니다. 교회 개척하기 전에는 일주일에 한번 제가 요리하는 날이 있습니다. 애들이 신나서 젓가락 들고 따라다녔는데 우리 집사람을 요리를 다 가르쳐서 주부를 만들었습니다. 김치 담그는 것부터 시작해서 하나씩 하나씩, 그래서 요즘도 나보고 사부라고 합니다.
나물 하나를 무쳐도 시장에 가서 사서 뿌리를 자르고 다듬고 삶고 깨를 빻고 무치고 이것이 얼마나 힘든지 알기 때문에 그런거 낭비하지 말고 꼭 대접하고 싶으면 음식점에 가서 짜장면이나 갈비탕같은 간단한거 먹으면 된다. 너무 비싼데는 안 간다 간단한거 먹자 그 주의입니다. 거의 심방가도 밥을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교회 와서 은혜 정말 많이 받은 오십 대 초반 자매 집으로 심방을 가게 되었는데, 교역자들이 아무개 집사님이 밥을 집에서 대접한다고 해서 너무 힘드니까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랬는데도 내 명령을 어기고 밥을 차렸습니다. 그런데 정말 대단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전국으로 집회를 다녀보면 음식이 가장 발달한 곳이 전라도입니다. 전라도에 있는 교회에 한 번 갔는데 그 곳 장로님이 점심을 대접한다고 집회 끝나고 40분을 달려 어느 한식집에 갔는데 그렇게 비싸지도 않은 돈이었는데 삼분의 일 정도 코스가 나왔는데 더 이상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그릇이 몇 개나 나오나 세고 있었습니다. 8명이 점심을 먹었는데 그릇이 200개가 넘었습니다. 그 집은 한꺼번에 공장처럼 만들어 배열하는거 아닙니까? 이 집은 밥상을 차렸는데 셋이서 교자상을 들고 오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고 내가 너무 마음이 상해서 “왜 이렇게 하냐? 나같은 인간이 뭐라고 이렇게 많은 시간과 돈을 드려 이 음식을 차리고 있느냐. 이 신간에 말씀을 듣고 기도를 해야지.” 그랬더니 이 자매가 까칠하게 “목사님, 기도도 했고 말씀도 읽었거든요 아무 소리 말고 드세요.” 그래서 카리스마에 눌려 가만히 앉아서 먹는데 젓가락이 사정거리에 닿질 않습니다. 나를 한 쪽으로 놓고 자신은 사정거리 닿지 않는 곳에 서서 이것을 먹고 싶다 그러면 집어 줍니다. 그 밥상이 지금도 내 생애 받아본 최고의 밥상이었습니다.
어떻게 했냐고 하니 일주일을 기도했고, 일주일 전부터 장을 보기 시작했고 ,5일전부터 본격적으로 만들기 시작해서 3일전부터 요리하기 시작해서 새벽에 일어나서 낮까지 음식을 만들었답니다.. 먹으면서 마음속으로 ‘이것은 저 자매가 나에게 준 밥상이 아니다. 하나님을 너무 사랑해서 내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섬기는 것이다. 나를 향한 섬김이 아니다.’ 그 밥상이 바로 아라크의 밥상입니다.
원래 아라크가 ‘배열하다’ ‘정돈하다’ 그런 뜻입니다. 얼마나 많은 밥상, 쉽게 얘기하면 원수들이 시인을 해치려고 달려왔다가 하나님과 마주하고 있는 진열된 상의 규모를 보면서 시인이 하나님 앞에 VIP라는 것을 파악한 것입니다. 함께 밥상을 마주하는 것 자체를 가지고도 이 시인은 나와 가족관계에 있는 식구다. 누구든지 이 시인을 해치는 자는 나를 해친 것으로 간주하겠다는 하나님의 보이는 메시지입니다. 그 복음이 생명적인 관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렇게 설교를 하니 어떤 사람이 “목사님, 정말 하나님이 커다란 교잣상에다가 시인이 배고플 때 온갖 요리를 차려서 줄로 달아 내리셨냐요?” 물어봅니다. 그런 빈곤한 문학적 상상력으로 어떻게 신앙생활을 합니까? 말이 되는 질문입니까? 도대체 무슨 뜻입니까? 시인은 하나님과 동행하기는 했지만 그런 식으로 기적의 밥상을 먹었다는 얘기는 성경에 나오지 않습니다. 이것은 원수들이 보는 목전에서 자기의 영혼에 베풀어 주셨던 하나님의 말씀의 성대한 만찬 그것입니다.
(찬양)
주 여호와는 능력의 주 내 영혼의 치료자
말씀으로 고치시네 주는 나의 치료자
은혜와 긍휼을 열방 중에 비치소서 빛 되신 주의 말씀
그렇게 하나님이 이 시인의 영혼에 내리시는 성대한 말씀의 식탁이 있었습니다. 굶주려서 제사장이외에는 먹을 수 없는 진설병까지 먹으며 허기를 채우는 가난한 시절을 지난 시인이지만 하나님의 은혜의 식탁, 진리의 말씀의 식탁위에 아라크의 밥상을 차려주셨기 때문에 시인은 가장 고통받는 그 날에 오히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주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 하리요”라고 담대하게 노래할 수 있었습니다.
세상을 이길 힘은 세상과의 싸움에 있어서 문제는 세상으로부터 발생했지만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은 세상자신에게서 나오지 않습니다. 이것을 확실히 경험한 사람이 그리스도입니다. 그럼 어디에서 나올까요?
(찬양)
험악한 세상을 이길 힘이 하늘로 부터 임함이로다
그래서 어느 인생길로 가야할지 알 수 없을 때 그 말씀 속에서 지혜의 빛을 발견하고 어디로 가야할 지는 알지만 그 길을 걸어갈 힘이 없을 때에도 하나님은 그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험악한 세상을 이기고 시련과 고난을 이기며 살아갈 수 있는 은혜의 힘을 우리에게 부어주십니다.
고단한 우리의 인생길을 걸어가노라면 우리에게 고통을 주는 사람들이 왜 그렇게 많은지 절대로 용서할 수 없는 사람, 내 가슴에 칼을 꽂은 그 사람, 일평생 마음속에 피 묻은 칼을 품고 살았던 사람인데도 하늘로부터 부어지는 이 말씀의 식탁, 나로 하여금 그 피 묻은 칼을 내려놓고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게 만들어줍니다.
시련과 역경을 당하며 죽어 버리고 싶은 고통스러운 과정을 지나면서도 그 모든 고통을 그대로 내버려두셨는데도 하나님이 성대한 말씀의 식탁을 차려 주셔서 그것을 먹고 기운을 차리기만 하면 폭풍과 같은 시련 속에서도 밤이면 눈을 감고 새벽이면 하늘나라에서 뜨고 싶은 고통스러운 인생의 고난 길을 걸으면서도 하나님을 찬송할 힘이 생겨납니다.
(찬양)
주의 인사는 끝이 없고
주의 자비는 무궁하며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큼이라 성실하신 주님
인생의 모든 문제는 세상에서 생기지만 문제에 대한 해답, 문제있는 세상을 이기며 살아갈 수 있는 힘은 세상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오는 식탁에서 누리는 것입니다. 5월이 되면 여기도 마찬가지겠지만 전 두 달 정도 가정에 대한 설교를 합니다. 깨어진 가정이 너무 많으니까요.
어느 해였습니다. 교인이 가정의 달이 다가 오니까 생각할 때마다 기도가 나오는 친구에게 연락했습니다. 그리고 한 번 만나서 우리 한 번 이야기 해보자고 불렀습니다. 자매를 교회로 인도했습니다. 이 사람은 일평생 한 번도 교회에 가보지 않은 사람인데 남편과의 관계가 완전히 틀어져서 이혼서류를 이미 다 썼고 자긴 도장을 찍었고 남편 도장만 받으면 끝나는데 남편이 끝까지 안 찍으려고 해서 장롱 속에 넣어두고 사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생전 처음 예배당에 왔습니다. 친구가 옆에 앉아서 함께 예배를 드렸는데 주일 설교 제목이 ‘이혼을 생각하는 그대에게’ 였습니다. 그 날 정말 하나님이 은혜를 부어주셨습니다. 이 자매가 그 날 생전 처음 와서 회심을 한 것입니다. 펑펑 울면서 하나님 앞에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집으로 돌아가 “여보 ,나 좀 봐.” 남편은 벌써 스트레스가 쌓였습니다. 또 도장 찍어달라고 할 텐데 남편이 어슬렁어슬렁 와서 “왜?” 부인이 남편을 바라보고 있다가 갑자기 문 앞에서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그러더니 막 울면서 “여보 ,정말 내가 잘못했어. 당신을 이렇게 만든 건 나야. 내가 아내 역할을 못해서 내가 정말 나쁜 아내였어. 나를 용서해줘.” 눈물로 빈 것입니다. 남편도 무릎을 꿇고 “아니야 내가 잘못했어.”
한 여자가 시집을 와서 애를 둘이나 낳고 다 컸는데 안 살겠다고 이혼서류를 가져다가 빈칸을 가득 메울 때에는 그것이 하루아침에 생긴 감정이 아닙니다. 최소한 내가 보기에는 그 정도로 결심을 하려면 상처를 받은 거부터 시작해서 구체적으로 이혼을 생각하기로 한 단계부터 시작해서 결단할 때 까지는 최소한 5년 이상의 세월이 흐른 것입니다.
그러면 그 자매는 이러한 이혼을 피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헤라클리투스라는 철학자가 말하길 “성격은 운명이다”라고 잘라 말했습니다. 개꼬리 3년 묻으면 황모가 됩니까? 20년이나 살아보았는데 그 인간이 새 인간이 되겠습니까? 인간적으로 생각할 때는 아무런 길이 안 보입니다. 오죽했으면 남편이 “한 번만 용서해줘. 잘 할게” 감언이설을 다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의 식탁을 딱 한 번 받더니 인생의 탈출구가 보이는 것입니다. “아 아게 아니구나. 내가 이 남자를 이렇게 외롭게 했구나. 나는 이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한 적이 없구나.” 자매들이 그러겠지요 왜 우리에게 불리하게 여자예만 드십니까? 시간을 많이 줬으면 남자예도 들지요. 그러나 그만하고 가야 됩니다.
그러니까 시인이 이렇게 감격한다는 이 식탁에 대해서 생각해 보라는 겁니다. 이렇게 우리의 인생을 한 번의 예배로 바뀌는 상황이 있을 수 있냐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어떤 자매는 남편이 바람을 펴서 별거했습니다. 그러다 남편이 예수 믿고 변화되었습니다. 부인을 찾아와서 전도를 했습니다. 가정이 합쳐졌습니다. 남편이 속 썩여 파탄내놓고 전도한다면 어느 사람이 받아들이겠습니까? 설명할 수 없는 일이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일어난 것입니다. 이 세상은 이해할 수 없는 은혜의 세계, 진리의 세계라는 것입니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오늘 설교를 듣는 여러분 가운데 인생의 벼랑 끝에 서 계신 분들 계실 겁니다. 이 세상에 벼랑 끝으로 미끄러져가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몰리다 몰리다 벼랑 끝까지 왔고 뒤에 1미터만 남았어도 하나님 안 믿어볼 텐데 이제는 끝입니다. 발뒤꿈치에서 흙이 부스러지기 시작하고 그 뒤에는 밑도 보이지 않는 낭떠러지이기 때문에 피할 길이 있겠습니까?
여러분 오늘 은혜를 많이 받고 돌아가면 문제가 해결된 것처럼 보입니다. 끝까지 예수 안 믿고 속 썩이며 술 먹던 남편이 은혜 받고 집에 가면 두 손 들고 무릎 꿇고 대기하고 있겠습니까? “여보 내가 잘못했어. 당신이 얼마나 천사처럼 나한테 내가 못 되서 당신 핍박하고 술만 먹고 예수도 안 믿었는데 .흑흑흑. 이번 주에 등록하고 열심히 믿을게. 흑흑흑” 가 보십시오. 그 인간 그대로 있습니다.
애들 속 썩여서 공부 안하고 가방 뒤져보면 이상한 물건이나 나오고, 이렇게 은혜 받고 가면 지금까지 은혜 못 받았기 때문에 저 녀석이 저렇다. 오늘 은혜 받고 가면 애들이 무릎 꿇고 열심히 공부하면서 눈물 글썽이며 “저 열심히 공부해서 서울대 갈게요.” 그럴 거 같지요? 그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지만 안 일어날 때가 많습니다.
그런 사람을 사랑하고 용납하고 그들의 고통을 나의 고통처럼 끌어안고 살게 만들어 주는 힘이 하나님의 말씀의 식탁에서 나옵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만이 그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시인이 자신의 잔이 영혼의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앞뒤로 당해도 이렇게 비밀스러운 말씀의 식탁에서 배부르신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늘자원으로 여러분의 인생을 이기길 바랍니다. 벼랑 끝까지 몰려서 발뒤꿈치가 벼랑 끝에 걸려서 바위도 부스러지며 흙이 떨어지는 순간까지 왔습니다. 무슨 변화가 있겠습니까?
어느 성도가 꿈을 꾸었습니다. 벼랑 끝에 서 있더랍니다. 원수들이 밀려와서 도저히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답니다. 자기는 하나님이 자기 앞에 오셔서 원수를 물리쳐줄 줄 알았답니다.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시더니 “뛰어내려라” 허공을 향해 몸을 던지며 “주여”하고 뛰어 내렸더니 천사가 날개를 달아주었답니다. 사람이 생각하는 방법으로만 하나님이 인생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정말 말씀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여러분들의 영혼의 빈 잔이 넘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시편에 보면 그 영혼의 빈 잔이 가득 찼던 두 번째 이유에 대해 나오는데 “내 머리에 기름을 바르셨기 때문이옵나이다”라고 나옵니다. 머리에 기름을 바른다는 것은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신전국가를 떠받치던 세 솥발과 같은 세 개의 직인이 있었습니다. 그 첫 번째가 왕, 두 번째가 선지자, 세 번째가 제사장이었습니다. 이들은 반드시 기름부음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섬기도록 부름을 받은 인물들이었습니다.
기름부음은 문자 그대로 기름을 붓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이 사건은 단순한 의식행위가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성경과 관련 있습니다.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구약시대에 성령의 경륜과 신약시대의 성령의 경륜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신약시대에 성령이 역사하시는 경륜은 성령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교회에 오시고, 교회에 오신 성령은 영적인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접붙여지는 모든 사람들에게 분여되어, 그 성령이 내주하심으로 결코 떠나가시지 않는 그것이 신약시대의 셩령의 역사하시는 경륜이었습니다.
그러나 구약시대에는 그렇지 않고 성령이 언제나 하나님이 지정하여 일을 시키게 하는 그 사람에게 한시적으로 임하셔서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신 후에 하나님의 성령은 다시 떠나십니다. 어떤 경우는 하나님이 그가 범죄했기 때문에 떠나시는 경우도 있고, 주권적으로 임하셨다가 떠나시는 경우도 있고, 성령이 임하실 때에는 특별한 지혜와 능력, 하나님과의 친교, 담대함, 용기 이러한 하나님을 섬기기에 적합한 초자연적인 특성들이 일시적으로 그 사람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약시대의 성령이 역사하시는 방식이었고 이것을 표징한 것으로서 하나님이 기름을 붓게 하셨고, 기름을 부을 때 실제로 하나님의 영이 임하여 그를 그렇게 하나님의 일에 적합한 사람으로 거룩하게 구별시키고, 그 일을 하기에 적합한 자질을 갖게끔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다윗은 일평생 세 번 기름부음을 받았고 그 세 번 중에서도 첫 번째 기름부음 받은 사건이 다윗에게는 가장 인상적인 사건이었을 것입니다. 이 때 여호와의 신이 충만히 임했고 권능은 그와 함께 했습니다. 그리고 생전 떠나지 않고 성령의 은혜는 다윗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탁월한 지혜와 용기, 믿음, 결단으로 사랑으로 그 나라를 통치하고 다스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이것은 신약시대로 예표들을 적용해 본다면 신약시대의 신자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을 충만한 성령의 은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든 사람들을 그리스도인 되게 하실 때 동일한 체험의 양상을 가지고 획일적으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인이 된 모든 사람은 공통점이 있는데 그 사람은 성령이 그와 함께 하시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일반 섭리 속에서 사랑해 주실 때도 있지만 영적인 축복으로 사랑해 주실 때도 있고, 때로는 이 축복이 넘쳐서 초월적이고 강력한 부흥의 경험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막달린 대학의 총장이었던 토마스 굿인이라는 청교도 신학자는 그런 비유를 들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는 언제나 같은 관계가 있지만 어떤 순간에 아버지는 아들을 꼭 끌어안고 반복해서 입을 맞출 때 아버지의 특별한 사랑을 느끼는 때가 있는 것처럼 종종 성령께서 우리에게 그런 특별한 은혜를 주실 때가 있다. 그런 성령의 체험이 없이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라고 하는 성령 세례적 견해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지만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경험하게 될 때 그의 삶이 더 성결해지고 열렬해져서 온전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사실은 인정합니다.
저는 스물 한 살에 회심하고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그 이전에는 부모님이 신앙을 가지고 있진 않았지만 함께 사는 고모님들이 일찍 예수를 믿었기 때문에 기어다닐 때부터 교회에 다녔습니다. 열여섯 살 때까지 교회에 다녔지만 회심이 없었고 교회의 부조리한 것을 보면서 결국은 교회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치열하게 방황한 청소년기를 보냈습니다.
매일 아침마다 죽음을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으로 오늘도 살아야 한다는 현실이 견딜 수 없는 무게감으로 다가왔습니다. 교회에서는 그런 것을 가르쳐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떠나게 되었고 혹독한 방황기를 거쳤습니다.
그 때 나의 구원은 책읽기였습니다. 책을 읽으면 도움이 되는 것 같았습니다. 나만 혼자 이런 고민을 한다 생각했고 사람들은 이런 고민을 안 한다고 생각했는데 문학작품을 보니 나와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즐거움을 느꼈지만 그들이 답을 가르쳐 준 것은 아니었습니다. 철학책에서 답을 찾고자 했습니다.
여러분도 아이들이 어렸을 때 문학전집을 많이 읽혀야 합니다. 인생이 얼마나 많은 문제점을 알고 있는가에 눈을 떠서 자기가 사는 현실보다는 훨씬 스펙트럼이 넓은 인생의 파장대가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인생의 비극들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길이 무엇인가를 어려서부터 고민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어렸을 때 유행가 부르면 커서도 팝송 부릅니다. 초등학교 때 동요를 좋아하게 만들면 중학교 때 반드시 가곡을 좋아하고 고등학교 때 클래식을 좋아하게 되듯이 문학을 초등학교 때 잘 읽히고 중학교 때까지 읽히면 고등학교 가서 사상서와 철학서에 대해 눈을 뜨게 됩니다. 그 속에서 이렇게 문학이 제시했던 수많은 문제들에 대해서 철학과 사상이 어떻게 답을 찾아 갔는지에 대해 관심을 갖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좋은 신앙으로 양육하면서 답들이 가지고 있는 한계와 유익을 공정하게 느끼도록 만들어 줄 때 정말 훌륭한 자녀들이 될 것입니다. 엄마 아빠가 책을 읽어야 합니다. 매일 TV나 보고 부부싸움이나 하고 먹을거나 사먹으러 다니니까 아이들이 배우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책을 가지고 오래서 가져오긴 했는데 저는 책장수도 아니고 서점에서 인터넷으로 파는 겁니다. 우리 교회 서점에서 직원들이 들고 왔습니다. 사라는 얘기가 아니라 엄마 ,아빠가 조용히 앉아서 “너 왜 공부 안 하니? 책 좀 읽어라.”하지 말고 딱 한 달만 조용히 침묵한 가운데 저녁에 두 시간씩만 텔레비전 끄고 책을 읽어 보십시오. 아이들이 처음 한 주는 불안해 하다가 이 주는 가책을 받고 삼 주째엔 고민을 하다가 사 주째에는 태도가 변합니다. 한 마디도 하지 마십시오. “야, 엄마 좀 봐라. 빨리 와 봐. 책보고 있잖아. 안 보여? 엄마가 열심히 하는데 너도 열심히 해야지.” “오늘 시작했쟎아. 오늘” 그렇게 너무 뻥치면 애들이 감동이 없습니다. “엄마 뭐해?” “응, 그냥 심심해서 철학책 보고 있어.” 그러면서 천천히 아이들에게 그리스도인이 어떤 교양 속에서 품격있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줘야 합니다.
1월부터 책을 몇 권이나 읽으셨습니까? 손 때 묻은 책들이 차곡차곡 쌓입니다. ‘아, 내가 참 부족했구나. 하나님 당신의 말씀이 맞습니다.’ 메모를 해 놓으면 애들이 다 봅니다. ‘우리 엄마 대단하구나. 이런 책 읽으면서 사유하는 사람이구나. 맨날 밥주걱 들고 욕하는 줄 알았더니 한 수 하는구나’ 한 달 두 달 석 달이 가면 교양이 엄마 얼굴에 흐릅니다. 그러면 애들이 가서 자랑합니다. 자기는 안 읽어도 “우리 엄마는 책 많이 읽는다. 우리 동네에서 최고의 현자야.” 조용히 앉아서 책 읽는 모습을 보여줘야 합니다. 그것이 교육입니다.
뭔지도 모르면서 정말 많이 읽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믿고 보니 다 쓸데없는 것이었습니다. 요즘에는 목사가 되고 설교자가 되고 나니 그 허무한 지식들이 이렇게 하나님의 학문을 탐구하는데 유익하게 사용되리라고는 미처 몰랐습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방황을 하다가 어느 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습니다.
전도하는 사람 들이 특별히 있기도 했지만 그 영향보다는 밤을 세워 공부하고 있을 때 였는데 새벽이면 먼 뒤가 넓은 밭이었습니다. 뎅그렁 뎅그렁 교회 종소리가 들립니다. 어쩜 크게 들리며 내 마음을 울리는지 모릅니다. 새벽에 공부하다가 항상 4시가 되면 집에서 나와 들판으로 나가 기지개를 켰습니다. 새벽안개가 깔려 있는데 뎅그렁 뎅그렁 멀리서 교회 종소리가 들립니다.
(찬양)
깊이 스며와 닿는 구원의 저 종소리
그리고 겨울, 봄, 가을이 지나고 늦가을이던 어느 날 제가 스스로 교회를 찾아갔습니다. 교회는 20평되고 교인은 30명 모였고 누덕누덕 기운 방석을 차가운 콘크리트바닥 비닐장판위에 놓고 예배드리는 손바닥만한 교회였습니다. 피아노도 없어서 어떤 자매가 삐거덕거리며 풍금을 치며 수요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거기서 나는 생전 처음 고향에 온 것 같은 안식을 느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교회간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젊은 청년이 열심히 다니니까 목사님이 세례를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학습도 안 받았는데 어떻게 세례를 받습니까?”했더니 “넌 어려서부터 교회에 다녔으니 괜찮다.” 순종하고 세례 받았습니다. 세례의 모든 것을 통과하고 가만히 생각해 보니 예수님과 결혼하는 건데 연애까지는 몰라도 결혼을 하기엔 내가 너무 더러운 신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밤마다 30분 걸어서 교회 가서 촛불 켜 놓고 매일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나 같은 사람이 정말 주님의 신부가 되는 것이 가능합니까? 내가 교회 언저리에서 주님을 믿는 것 까지는 할 수 있지만 과연 제가 주님과 결혼하고 당신의 신부가 될 자격이 있습니까?’ 매일 일주일 동안 가서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그리고는 어느 날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추수감사절 때 였을 것입니다. 목사님이 내 앞에 오시더니 장로님 드신 물 대접에 손을 넣어 내 머리에 찍으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예수를 믿는 자 김남준에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 생전 처음 경험했습니다.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포근한 기운이 확 내려오기 시작하면서 내 마음이 내 몸이 깃털처럼 하늘을 향해 떠 있는 것 같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해 감격의 눈물이 한없이 쏟아졌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데도 한참을 기도하다가 눈을 떠보니 사람들은 많이 돌아가고, 주일 오후에 태양이 예배당 유리창도 없는 비닐 창문을 두드리고 있었습니다. 그 때 마치 하늘로 날아 오른 것 같이 깃털처럼 가벼워진 영혼을 느끼면서 아무 소원도 없습니다. 전에는 꿈도 많았습니다. 이런 사람이 되어야겠다. 학자가 되어야겠다, 영문학을 전공해야겠다. 다 필요 없고 오직 하나, 주님이 나 같은 인간을 위해 이렇게 사랑하셔서 십자가에서 자기를 다 주고 죽으셨으니 내가 이 세상에 얼마를 살든지 주님 앞에 순결한 신부가 되어서 주님만 사랑하며 살 수 있다면 거기가 어디든지 무엇을 견뎌야 되든지 나는 상관이 없다 고백했습니다. 그게 저의 첫 번째 성경의 체험이었습니다.
이후로도 그 보다 훨씬 많은 극적인 경험을 많이 하며 예수를 믿어왔지만 성령의 은혜를 깊이 경험할 때 나타나는 결정적인 마음의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hunger for holiness' 거룩해지고자 하는 치열한 갈망이 이 속에서 우러나옵니다. 그래서 세속적인 신자는 예수 때문에 행복해지길 원하지만 정말 변화된 신자는 예수님을 위해서 거룩한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빕니다. 왜냐하면 그 안에서 가장 이 세상에 빼앗아갈 수 없는 행복의 상태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 번을 경험했지만 결과는 항상 똑같습니다.
(찬양)
조롱하는 소리와 세상 유혹 속에도
주의 순결한 신부가 되리라
내 생명 주님께 드리리
주님의 뜻대로 나 평생 살리라
똑같은 고백이 나옵니다. 항상 거기에는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 앞에 티끌같은 인간에 대한 깨달음과 낮아짐, 완전하신 하나님 앞에 불결하기 짝이 없는 자신의 죄 있는 상태에 대한 자각과 회개가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온 몸을 불사르게 다 내어줄지라도 단 1초만이라도 주님의 마음에 깊은 사람이 될 수 있다면 주님이 나의 몸이 마음에 들지 않으신다면 살이라도 깎아내고, 주님이 내 뼈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뼈라도 잘라서라도 주님의 마음에 기쁨이 되고 싶다는 생각 외에는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께서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머리에 바르셨을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오늘 이것은 여러분에게 두 가지로 적용이 됩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아직까지도 교회에 다니지만 진정으로 거듭나고 회심한 사람이 아니라면, 오늘 설교가 좋은 것 같긴 하지만 거의 경험해 보지 않은 하늘의 언어처럼 들린다면, 오늘 여러분이 깊이 회개하고 오늘 하나님이 여러분 앞에 말씀의 식탁을 차려 주시고 여러분들의 머리에 기름 부으시는 일이 있기를 간구하는 사람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여러분이 이미 설교자가 말하는 이러한 경험들을 한 사람들이라면 오늘 은혜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지 한 번 물어보아야 합니다.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의 식탁은 환희와 감격, 희열이 되고 있습니까? 정말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삼아도 그 분의 아름다운 속성을 다 쓸 수 없는 은혜의 감격이 여러분 마음 안에 있습니까? 그것을 유지하며 살고 계십니까? 오늘도 성령의 인도아래 살아가십니까? 그 은혜, 그 사랑, 그 성령의 은혜로 매일매일 살아가고 계십니까? 이 세상에 내가 모든 것을 잃어버려도 하나님의 은혜에서 사랑에서 멀어지고는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 무언가 당신이 제게 주실 수 있다면 이것을 주십시오라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시겠습니까? 그런 삶을 살아가고 계십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어두운 세상의 빛으로 부르셨습니다. 정말 교회 이름 잘 지으셨습니다. 이름을 그렇게 지으셨으니 여러분들이 그렇게 살아내는 것만 남지 않았습니까? 확실히 단언할 수 있는 한 가지가 있습니다. 한 사람의 영혼의 빈 잔이 이 주님의 은혜와 사랑, 진리로 충만하게 차서 넘치면 그는 원하지 않아도 이 세상의 빛입니다. 그리고 그는 반드시 빛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 진리와 은혜와 사랑을 깨닫고 빛으로 사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