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역자수련회 (1)
(녹음상태 안좋음)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빌 1:20-24)
녹취자: 김경애
오늘날은 목회자라고 하는 목사도 너무나 XXX 체험했기 때문에 그 예수 그리스도가 그것을 알았기 때문에 자기가 깨닫고 체험한 XXX 우리 성경에 보면 사도 바울의 간증서가 많이 있습니다. 감히 어떻게 예수님처럼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화 된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인간이 되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계시된 하나의 참 인간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사도 바울이 첫 번째 XXXX 다양하게 표현합니다. 오늘 그것이 분신처럼 되는데 그것이 도가 저 멀리 있는데 내가 그것을 끊임없이 수도함으로써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영적인 생명이 살아있어서 예수 안에서 계시된 두 번째 삶이 뭐냐 하면 나로 만족하지 않고 내 이웃 모든 사람이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에서 전하는 것이 복음전도입니다. 그 회심을 절실하게 기도하는 일도 그 회심을 통해서 그것이 끝이 아니라 그 길로 갈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끝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끊임없이 신학적인 분쟁이 일어나는데 구원파입니다. 성화의 길입니다. 세속주의적인 자기욕심에 빠진 사람을 자기를 완성시켜나가는 것입니다. 굉장히 좋은 말입니다. 그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천지를 모두 주관하고 있는 것에 일치시킴으로써 자기를 참된 XXXXX 많은 것들이 있는데 그중의 첫 시작이 자신의 자각을 가지면서 XXXXX 그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쟤가 회장이 되었대! 저 사람이 총장이 되었대! 저 사람 총회장이 되었대!’ 그것은 아닙니다. 양명은 당대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후대에 이루어집니다. 그러니까 선비는 당대에 자기의 존재를 인정받으려고 하는 것을 아주 추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니까 외롭게 진리를 말하고 참 인간의 도를 말합입니다. 그러나 당대에는 항상 거치는 돌입니다.
그리스 역사에 보면 어느 폴리스에서 있었던 일인데 책 이름을 지금 잊어버립니다. XXXXXXX 그래서 직접 민주주의였기 때문에 와서 우리 조개껍질을 던져버리고 모두 모아서 표를 계산을 해서 많이 얻는 사람이 XX이 되는 것입니다. 그중에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굉장히 덕이 있는 사람입니다. 저 사람만 보면 짜증이 난다는 것입니다. 의인이라는 소리는 지긋지긋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서있는 존재 자체가 아우라입니다. 이렇게 살면 안 될 것 같습니다. 불편한 것입니다. 교회에서 보면 좋아하겠습니까? 그렇게 당대에 인정을 받지 못합니다. 후기로 흘러가면서 XXX 사실은 인간으로 태어나는 선비들의 입장에서 보면 입신양명이 삶의 목표입니다. 뭐냐 하면 입신은 아까 이야기한 자기의 완성이고, 양명은 이웃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이웃을 완성하는 계기가 무엇이냐 하면 사랑입니다. 그렇게 짐승처럼 인생을 살아갈까? 살아가는데 진리의 빛입니다. 그러면 가지고 있는 내가 너에게 빚 진 사람이라고 하고 그리고 삶의 모본을 보이는 것입니다. 사랑의 본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참된 인간의 도리로 돌아오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것을 모든 힘을 다해서 가장 넓은 곳에 서며 가장 올바른 곳에 서며 가장 넓은 길을 향하는 것 이것이 무엇이냐 하면 큰 뜻을 얻으면 이웃과 함께 그 길을 걷고 뜻을 얻지 못하면 혼자라도 그 길을 가는 것입니다. 세상의 부귀와 그의 마음을 어지럽힐 수 없고 이 세상의 권력과 무력이 그를 굴복하게하지 못하게 하는데 우리는 이런 사람을 가리켜 대장부라고 합니다. 그냥 주먹질 잘하는 사람이 대장부가 아니라 XXXX 중요한 단어가 있는데 ‘전하 그러시면 도리가 아닙니다.’ 조선시대 선비들의 죽음은 좌절의 표현입니다. 좌절이란 긍정의 표현입니다. 그것이 대장부의 언어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똑바로 길을 걸어가는데 굽히지 않을 수 없는 의를 버리지 않고는 그 길을 걸어갈 수 없습니다. 그것이 의를 취하고 목숨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를 믿으라고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 사람이 떠나면 다음 사람이 ‘전하 그것은 도리가 아닙니다.’ 그러면 유배지로 갑니다. 유배지에서 조용히 침묵하며 사약을 내리는데 선비는 죽는데 그것은 굴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막 쏟아져 나오는 피로써 그것이 길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죽는 것입니다.
XX를 구하는 사람은 공명을 하찮게 여기고 공명을 추구하는 사람은 부귀를 탐하지 않는다. XX를 탐하는 사람은 아무것도 못할 짓이 없는 사람이다. 할 수만 있으면 모든 사람과 함께 그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는 것입니다. 또 단두대에 칼이 뚝 떨어져서 목이 잘리는데도 그것이 대의의 길이라고 생각하면 똑바로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끝이 자기의 신념을 따라서 죽는 것입니다. 모든 유학자가 선비는 아닙니다. 연암 박지원의 호질이라는 책에 보면 호랑이가 와서 XX를 남기는데 거기에 보면 유학자인데 밤마다 그때는 토해놓고 밥벌이를 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구이지학이라고해서 선비들의 추잡한 것을 본 학문입니다. 입구 자에다가 귀이자입니다. 이곳으로 듣고 이곳으로 토해내서 삯을 받아먹고 사는 사람입니다. 온몸으로 사물을 인식하고 진리를 파악하고 온몸으로 생각하고 온몸으로 체험하고 온몸으로 그것을 따라서 사는 것 그 대신 삶을 너무너무 사랑하지만 그러나 친구처럼 가까운 것입니다. 훈련을 해야 합니다. 그 아우라는 맨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몰랐습니다. 영락없는 무극신앙입니다. 이스라엘입니다. 한자어로 음란하다할 때 음자입니다. 모든 유학자가 선비가 아닙니다. 학문이 이 세상에서 출세를 하고 부귀를 얻는 수단일수 없습니다. 뭐냐 하면 모든 학문과 사색생활의 중심 그 경외심을 가지고 학문을 하는 것입니다. 다 떨어진 남루한 옷을 입고 그리고 범접할 수 없는 뚜벅뚜벅 걸어가는 자신의 신념을 살아가는 인간입니다. 모든 인류가 예를 들자면 데카르트는 꼬깃도에구루숨에서 시작하는데 아까 같은 사람의 견해로 보면 미친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 자체가 그렇게 아무것도 상관없이 자신 속으로 파고들어가서 XXX 으로서 자기를 파악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인간은 관계 속에서 파악되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게 꼬깃도 에구루숨 같이 비합리적인 전제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으로부터 떨어져 나오면 인간은 누구인지 설명할 수 없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설명하는 것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에 무슨 도움이 되느냐는 것입니다. 나도 20세 때에 죽도록 심취해보았고 밤새도록 친구들 앞에 거품을 물고 떠들 수 있었던 지혜의 양이 있었지만 그것이 인생에 무슨 도움을 줄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인간이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자기를 완성해가는 과정이 이웃을 세우는 과정과 결코 분리되지 않습니다. 일치해야합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신앙생활은 10년 20년이 지났는데 인격이 개떡입니다. 그것은 참다운 섬김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으면서 섬기면 섬기고 다른 사람과 덕에 이르러 덕이라는 말이 영혼의 힘이라는 것이 삶속에서 영혼의 힘이 나오는 것입니까? 무인도에 혼자 있는데 영혼의 힘이라는 것은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있는지 없는지, 강한지 약한지, 악덕인지 미덕인지,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파악되고 있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인간이라는 것은 결국은 관계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고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찾으면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모든 질서를 하나님이 실제론적인 삶을 기독교론XXXX 이 선비정신을 기독교에 덧입히자는 것이 아니라 원래 목사가 그런 사람들입니다. 학문을 하지 않는 목사가 하나님과 관계없는 학문을 합니까? 경건이기는 한데 이웃과는 분리된 경건이고 지식과 동떨어진 경건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모든 것이 다 통합을 이루면서 하나로 연결이 됩니다. 그 속에서 끊임없이 자신이 ‘내안에서 그리스도가 온전히 되어가고’ 라고 고백하고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이것이 너희에게 더욱 좋은 것이니’ 그러면서 자신이 살아있는 것이 이웃에 티끌만큼이라도 행복에 도움이 되게끔 사는 것이 자기 자신의, 목사의, 그리스도인의 이상이고 꿈입니다. 삼천 명, 사천 명 아니면 나 같은 것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럴 수 있고 안 그럴 수도 있습니다. 오늘 장로들이 더 성장할 것을 어떻게 보느냐고 하니까 어느 장로가 앞으로 확률로는 뭐라고 그러는데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습니다. 잘되면 좋을 것입니다. 그것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받고 그 사람이 사역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왜 나쁜 것이겠습니까? 우리는 그 일을 하기 위해서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XXXX 그리고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어떻게 설교단에 올라갔을 때만 진리의 사람이냐는 것입니다. 자기 혼자 산속에 있을 때도 진리의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기회가 있으면 그것을 그대로 원래 생각하던 것을 말하고 살아가는 삶을 이야기하고 기회가 없으면 그것을 조용히 실천하고 언젠가는 우리는 물러날 것입니다. 누구든지 정말 괜찮은 사람은 은퇴할 때 최고 정점의 상태에서 은퇴를 하는 것입니다. 아까운 상태에서 은퇴를 하는 것입니다. 설교가 진짜 별로였습니다. 인격적으로는 훌륭하셨습니다. 지금 설교가 그런 설교를 들어볼 수 없을 정도로 무르익었습니다. 은퇴합니다. 그것이 인생입니다. 바보 같은 사람은 자기가 너무 아깝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혼자만 그렇습니다. 나이가 든다는 것 자체가 정상입니다. 그것을 받아들여야합니다. 인생이라는 것은 어느 한순간에 잠깐 꽃피우고 사는 것입니다. 큰 교회를 할 수도 있고 작은 교회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행복은 일의 크기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XXXX 나는 목회를 하면서도 주일날 정신없이 교인들이 좁은 예배당에 삐지고 빠져나가고 난 다음에 혼자 예배당에 서있을 때 가슴이 텅 빈 것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XXX이 크고 활발하다는 것과 자기 자신이 하늘의 기쁨으로 가득 찬다고 하는 것은 관계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그 진정한 목사의 길은 혼자 있을 때나 여럿이 있을 때나 사역을 할 때나 사역에 이상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어제도 설교를 했지만 한 사람의 기도는 그 사람의 인격입니다. XXXXX 그리고 한 사람의 사람됨과 그 사람 삶은 그런 점에서 너무 XXXX ‘이 사람이 잘하고 있는가?’ 는 어느 정도 평가를 해야 할 것입니다. 누가 강요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따끔한 말 한마디에 충격해서 새기고 생각하며 그런 경우에는 자기를 찾아서 입신해가는 것입니다. 입신해가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 사람의 덕을 그 사람을 기억할만한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외로운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XXXXXXX 그렇게 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은 담임목사가 사역을 위해서 지적을 한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자기의 반성을 통해서 입신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그것입니다. 이 세상에 누가 온전한 사람이 있겠습니까? 어차피 우리는 XXX 될 수 없는데 같은 실수를 세 번 네 번 하는 계속하는 사람을 키워서 쓰고 싶어 하지 않고 잘 준비 XXXX 자기는 준비를 하지 않습니다. 세상이 나를 기다려주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다른 사람을 대할 때는 그렇게 생각하고 그런 면이 있다는 현실을 인정하고 그렇게 쓰기에 합당한 사람이 되도록 자기를 완성하는 그 기쁨이 부귀를 누리거나 혹은 공명을 얻는 것에서 보람을 느끼면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기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내 인생을 다시 한 번 더 살겠느냐고 할 때 절대로 그렇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목사님 감사할 수 있는 목회겠네요?’ 그것은 아닙니다. 제가 끊임없이 진리를 토해내기 위해서 하나의 시련이 끝나고 한 개의 날을 괴롭혀 진리를 깨닫고 끊임없이 괴롭히면서 고통을 받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나는 그것이 끝나는 순간 이 세상에서 그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도 끝나는 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이 뭐라고 그랬습니까? ‘지금도 내 안에 있는 싸움이니’ 라고 했습니다. 어느 순간이라도 그 도를 찾고 걸어가는 사람을 XXXXX 너무 ‘아멘. 마라나다.’ 그럴 수 있어야합니다. 자신은 사람들이 도를 가르치는 것은 쉽습니다. 뭐냐 하면 확실히 공부를 잘하고 똑똑한 사람은 설교도 잘합니다. 내가 외국에서 학자들을 수없이 불러서 강단에 세웁니다. 적어도 학자도 논리적으로 말이 되면 허튼 소리하는 사람들은 공부를 안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공부를 하면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자기가 전하는 도에서 그 도의 향기가 나와야합니다. 그 도에 자기의 진액을 발라야합니다. 그러면 설교단에 서서 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하면서 처절하게 몸부림치면서 사는 XXXX 무섭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가 설교를 통해서 세워주는 어떤 진실 앞에서 무서움을 느끼게 만들어주어야 합니다. 나는 이런 존재가 되어서는 안 되겠구나!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고 하는 무서움을 느끼게 만들어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도를 닦는 것입니다.
그러한 두 가지 고민 즉 입신과 양명에 대한 고민입니다. 수기와 치인에 대한 고민, 자기완성과 이웃 완성에 대한 고민은 같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가 자기의 결심문의 1번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10대 때 쓴 것입니다. ‘나, 이웃은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립니다.’ 그 길을 가는 것입니다. 참 신자는 XXXX 나와 이웃은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는 그런 완전한 사람이 있습니까? 상상할 수 없이 부자였습니다. 나는 그 사람이 부귀를 찾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복을 던져주지 그러면 유감이고 6명의 노예를 거느렸던 것도 유감입니다. 은수저가 아니면 밥을 먹지 못했다는데 유감입니다. 공동의회 때 사모가 손을 들고 사례금을 올려달라는 것도 유감입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그냥 인간적인 것들이 묻어나오는 것입니다. 누가 거기로부터 자유롭다고 이야기 할 수 있겠습니까? 김남준 목사가 은퇴하고 난 다음에 ‘이 나쁜 녀석’ 하고 전기를 쓴다면 세상에 쓸모없는 목사를 만들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우리 중 누구는 안 그렇겠습니까? 여수 애양원에 내려갔다가 기겁을 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곳에서 손양원 목사님을 죽도록 미워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이 얼마나 모자란 사람이면 XXXX 내가 이 이야기를 하니까 많은 사람들이 뒤집어졌습니다. 그 사람이 절절이 그 이야기를 하니까 알려진 손양원 목사님하고 원래 실제의 손양원 목사님하고 다르다는 것입니다. 절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만이 아실 것입니다. 역사에 전해진 손양원 목사님을 뒤바꿀 정도는 아닐 것입니다. 물론 그분이 가지고 있는 흠이나 XXXXXX 결국 무슨 이야기냐 하면 그런 것이 아무것도 없으면 좋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도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십니다. XXXXX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름을 드높여 당신의 덕을 선전하게 하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