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복의 사람
(2013-2014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13-2014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4년 5월 1일
목 차
1. 팔복산에 오르자(마 5:1) 2013.10.27 주일오전 1
2. 가르치신 예수님(마 5:2) 2013.11.3 주일오전 10
3. 심령이 가난한 자(1)(마 5:3) 2013.11.10 주일오전 19
팔복의 사람 1 (2013.10.27 주일오전)
4. 심령이 가난한 자(2)(마 5:3) 2013.11.24 주일오전 29
팔복의 사람 2 (2013.11.03 주일오전)
5. 애통하는 자의 복(1)(마 5:4) 2013.12.1 주일오전 38
팔복의 사람 3 (2013.11.10 주일오전)
6. 애통하는 자의 복(2)(마 5:4) 2013.12.8 주일오전 48
팔복의 사람 4 (2013.11.24 주일오전)
7. 온유한 자의 복(1)(마 5:5) 2013.12.22 주일오전 55
팔복의 사람 5 (2013.12.01 주일오전)
8. 온유한 자의 복(2)(마 5:5) 2013.12.29 주일오전 65
팔복의 사람 7 (2013.12.22 주일오전)
팔복의 사람 6 (2013.12.08 주일오전)
9.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복(1)(마 5:6)2014.1.19 주일오전 78
팔복의 사람 8 (2013.12.29 주일오전)
10.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복(2)(마 5:6) 2014.1.26 주일오전 88
팔복의 사람 9 (2014.1.19 주일오전)
11. 긍휼히 여기는 자의 복(1)(마 5:7) 2014.2.2 주일오전 97
팔복의 사람 10 (2014.1.26 주일오전)
12. 긍휼히 여기는 자의 복(2)(마 5:7) 2014.2.9 주일오전 109
팔복의 사람 11 (2014.2.2 주일오전)
13. 마음이 청결한 자의 복(1)(마 5:8) 2014.2.16 주일오전 118
팔복의 사람 12 (2014.2.9 주일오전)
14. 마음이 청결한 자의 복(2)(마 5:8) 2014.2.23 주일오전 127
팔복의 사람 13 (2014.2.16 주일오전)
15. 화평하게 하는 자의 복(1)(마 5:9) 2014.3.2 주일오전 137
팔복의 사람 14 (2014.2.23 주일오전)
16. 화평하게 하는 자의 복(2)(마 5:9) 2014.3.9 주일오전 149
팔복의 사람 15 (2014.3.2 주일오전)
17. 박해 받는 자의 복(1)(마 5:10) 2014.3.16 주일오전 159
팔복의 사람 17 (2014.3.16 주일오전)
팔복의 사람 16 (2014.3.9 주일오전)
18. 박해 받는 자의 복(2)(마 5:10) 2014.3.23 주일오전 172
팔복의 사람 18 (2014.3.23 주일오전)
19. 고난 받는 팔복의 사람들(1)(마 5:11) 2014.3.30 주일오전 179
팔복의 사람 19 (2014.3.30 주일오전)
20. 고난 받는 팔복의 사람들(2)(마 5:11) 2014.4.6 주일오전 191
팔복의 사람 21 (2014.4.13 주일오전)
팔복의 사람 20 (2014.4.6 주일오전)
21. 기뻐하는 팔복의 사람들(1)(마 5:12) 2014.4.13 주일오전 198
22. 기뻐하는 팔복의 사람들(2)(마 5:12) 2014.4.27 주일오전 212
팔복의 사람 219
팔복의 사람 1 (2013.10.27 주일오전)
팔복의 사람 2 (2013.11.03 주일오전)
팔복의 사람 3 (2013.11.10 주일오전)
팔복의 사람 4 (2013.11.24 주일오전)
팔복의 사람 5 (2013.12.01 주일오전)
팔복의 사람 6 (2013.12.08 주일오전)
팔복의 사람 7 (2013.12.22 주일오전)
팔복의 사람 8 (2013.12.29 주일오전)
팔복의 사람 9 (2014.1.19 주일오전)
팔복의 사람 10 (2014.1.26 주일오전)
팔복의 사람 11 (2014.2.2 주일오전)
팔복의 사람 12 (2014.2.9 주일오전)
팔복의 사람 13 (2014.2.16 주일오전)
팔복의 사람 14 (2014.2.23 주일오전)
팔복의 사람 15 (2014.3.2 주일오전)
팔복의 사람 16 (2014.3.9 주일오전)
팔복의 사람 17 (2014.3.16 주일오전)
팔복의 사람 18 (2014.3.23 주일오전)
팔복의 사람 19 (2014.3.30 주일오전)
팔복의 사람 20 (2014.4.6 주일오전)
팔복의 사람 21 (2014.4.13 주일오전)
팔복의 사람 22 (2014.4.27 주일오전)
팔복의 사람(1) 2013. 10. 27 주일오전
< 팔복산에 오르자 >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마 5:1)
I. 본문의 배경
II. 기독교, 병고침 그 이상
-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심
- 삼중사역: 가르침, 전파, 고치심
- 소문 듣고 모인 병자들
- 산에 오르심: 기적 없음, 오직 말씀
III. 무리를 바라보심
A. “보시고” (Ἰδὼν)
- "사물의 배후를 통찰하다"
- 육적인 비참함: 육신의 눈으로 봄
- 영적인 비참함: 영혼의 눈으로 봄
- 우리 자신을 영적 안목으로 보자
B. 병고침 이상의 것
- 영혼에 필요한 것이 무언지 보이심
- 소유가 아닌 인격에 있음을 보이심
- 인격은 곧'사랑됨'←영적변화로
- 인격의 특징: 삶의 열매로 나타남
- 팔복의 사람됨+천국백성으로 삶
IV. 산에 오르신 예수님
A. 왕처럼 좌정하심
- "산에 올라앉으심": 섬김과 대조
- 왕처럼 좌정하심: 진리+권위
- 섭리적 축복: 진리 깨닫는 도구임
- 불행의 근본원인을 고치는 기독교
- 복 있는 자: 왕적권위아래서 배움
B. 산에서 듣다
- 유서 깊은 천국 복음산에서 선포함
- 하나님을 향한 영혼의 응시→믿음
- 영적축복은 말씀을 깨달음에서 옴
- 생각함→하나님과 홀로 대면함
- 마음의 집중과 영혼의 진정한 변화
C. 무리들이 나아옴
- 병고침과 번영에만 관심 있지 않음
- 어둠 속에서도 진리의 손길을 붙듦
- 신앙과 인생에 대해 깊이 생각하라
V. 적용과 결론
팔복의 사람(2) 2013. 11. 03 주일오전
< 가르치신 예수님 >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마 5:2)
I. 본문해설
II. 가르치신 예수님
- "가르쳐"(ἐδίδασκεν)
A. 영혼의 필요를 채우심
- 병고침 이상으로 필요한 것
- 육신의 곤고함을 통해 영혼을 보심
- 육신: 양식+치료를 필요로 함
B. 진리의 말씀을 가르치심
- 잠세적인 인간 존재: 양식과 치료
-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맺고 살기를
- 천국백성의 정체과 생활 가르치심
- 외적조건 아니라 믿음으로 들어감
III. “입을 열어...이르시되”
- "입을 열어"(ἀνοίξας τὸ στόμα)
A. 예수안에 가득찬 진리
- 마치 큰 댐의 수문이 열린 듯 쏟아짐
- 예수 마음에 가득찬 진리+자기화
- 영혼을 인도할 신자의 사명: 말씀
- 가장 아름다운 삶: 마음을 진리로
B. 진리전달: 불멸의 수단
- 말(언어): 영혼의 움직임의 결과
- 말 안에 깃든, 영혼을 움직이는 힘
- 기능: 객관적 진리+주관적 경험
- 교회사명: 신적지혜, 언어로 표현
- 목회사명: 그 이해와 실천을 도움
- 신적 지혜와 지식에 목마른 자 되라
IV. 결론
- 잠세적인 것들(건강, 양식): 기적으로 주심
- 영원한 것들(천국, 구원): 말의 가르침으로 주심 - 말씀으로 영혼을 살리심
팔복의 사람(3) 2013. 11. 10 주일오전
< 심령이 가난한 자(1) >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마 5:3)
I. 본문해설
- 팔복과 산상수훈의 구조
- 심령이 가난한 자와 팔복의 구조
- 팔복의 사람됨: 영적변화와 은혜
II. “복이 있나니..”
A. “복”의 구분
- 와
- μακάριος의복: 신령+언약+은혜
- 천국의 성격, 참된 행복을 말해 줌
- 하나님께로부터, 관계 속의 행복
B. 현재적으로 누림
- "있나니"(ἐστιν)
- 천국의 두 국면: 미래+현재
- 미래의 천국⇒현재로 침투함
- 맛보기로 누림: 더욱 사모함
- 이 세상 비참은 하늘자원의 부족
III. “심령이 가난한 자”
A. “그 심령이”(τῷ πνεύματι)
- "가난한" 모든 사람들에게가 아님
- 물질적 가난이 주 긍휼의 동기가 됨
- 기적의 양식과 치료를 베풀어주심
- 그것이 곧 하늘나라를 받은 것 아님
- 하늘자원을 받는 좌소 마음의 중심
B. “가난한자들”
- “οἱ πτωχοὶ”
- 파산선고를 받음
- “πτωχός”: "움추러들다" ptosso
- 당시의 "가난한자들"의 비참
1. 자기를 의존하지 않음
- 첫째 복: 자기 중심성을 버린 회귀
- 불행: 존재와 가치질서를 전도함
- 죄의 본질: 자기중심+자기행복
- 자기의와 사랑에 대한 깨어짐
- 자기 불신과 미움: 사랑의 회귀
2. 하나님을 절대 의존함
- 자기의 비참한 상태인식: 무조력
- 신적 도움을 갈망함: 긍휼+자비
- 절대의존: 성화결과× 영적변화
- 신앙에 있어서 영적 수준과 상태
- 은혜 아래서만 겸비와 의존 가능
- 심령의 가난함: 대체 불능의 가치
IV. 결론
- "상한심령"의 제사가 있는가?
- 진정으로 하나님을 찾으라
팔복의 사람(4) 2013. 11. 24 주일오전
< 심령이 가난한 자(2) >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마 5:3)
I. 본문해설
- 심령 영혼이 기능하는 좌소
- 마음의 질이 삶을 결정 함
- 영혼의 아름다움과 선한의지
II. 가난한 마음의 행복
A.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 "왜냐하면 그 하늘나라가 저희 것이기 때문이다"
- "호티(hoti)" 강력한 이유
- "그 하늘의 나라": 하늘~신적통치
B. 인간의 최고 행복
-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음
- 천국의 질서 즐거워하며 사는 것
- 세상 아닌 심령의 변화에서 시작됨
- 삶에 대한 새 해석과 힘의 공급 있음
III. 가난한 마음이 되는 길
- 인간, 하나님 의존하도록 창조됨
A. 표상들로부터 벗어남
- 표상: 사물+욕망적 해석
- 그릇된 희망과 절망을 줌
- 표상들로부터 벗어나도 속임 있음
- 많은 종교와 신념, 자기 수련 택함
B. 선행하는 은혜가 작용함
- 죄: 하나님으로부터 독립 하려 함
- 하나님의 독립미와 인간의 의존미
- 소극적: 삶의 허무, 영원의 인식
- 적극적: 죄의 비참, 용서를 바람
- 은혜와 인간의 의지 작용의 신비
C. 하나님 안의 행복을 생각함
- 하나님께 대한 우주 만물의 의존
- 하나님 밖에서 행복하려다 불행해짐
- 만복의 근원이신 하나님
- 당신 떠난 자들의 극한불행과 비참이 하나님의 극적인 사랑을 입증함
- 하나님 안에서의 행복을 생각하라
D. 기도로써 그 마음을 표현함
- 간절한 기도, 최고의 표현
- 전적인 자기 불신과 하나님 의존함
- 전적 의존에서 순종할 의지 준비됨
- 자기 깨어짐: 자기 의+ 자기 사랑
- 하나님의 온전한 통치를 구하게 됨
- 말씀: 통치하시는 신 의지의 표현
IV. 적용과 결론
- 심령 가난한 자에게 천국을 전부 줌
- 죄인용서, 비참한자 긍휼히 보심
- 하나님을 바라라!
팔복의 사람(5) 2013. 12. 01 주일오전
< 애통하는 자의 복(1) >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마 5:4)
I. 본문해설
- 심령이 가난한 자의 친국
- 애통: 가난한 마음의 나타남
- 얻는 방식 차이: 천국과 세상 나라
II. 애통하는 자
A. 애통한다는 의미
- "애통하는 자": πενθοῦντες
- πενθέω : 슬퍼함, 죄를 확신함
- 통한히 여김, 근심함
B. 애통하는 이유
1. 자신의 죄 때문에
- 천국의 소망과 자신의 실존
- 신적 통치에 대한 반항: 자신임
2. 하나님 나라 때문에
- 주의 이름, 통치, 의지가 온전히 실현되지 못하는 현실에
슬퍼함
- "내 눈물이 시냇물 같이 흐르나이다" (시119:136)
- 실현될 나라와 현실 사이에서
- 내 안에 이뤄진 나라만큼 갈망함
III. 애통하는 자의 복
A. 신적 위로를 받음
- παρακληθήσονται: 파라클레오
- παρα + καλέω : 옆에서 부르다
- "왜냐하면"(ὅτι): 강한 이유
-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 동정 못 할이 아니요‥
시험을 받으시되 죄는 없으심"(히4:15)
- "교회가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더라"(행9:31)
B. 지극히 연약한 인간
- 선한 일에 강함은 은혜의 산물
- 주님이 붙들어 주실 때만 강함
- 강인함과 연약함이 서로 교차함
- "힘에 겹도록‥살 소망까지 끊어지고"(고후1:8)
- 위로가 필요한 때에 없으면 절망하거나 강팍해짐
⇒악과 싸우다
- 죄와 그 나라 위해 애통하는 자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으심
IV. 적용과 결론
- 죄와 그 나라 위한 애통: 천국 임함
- 당신위해 흘린 눈물 외면치 않으심
- 애통하게 하는 은혜를 구하라
팔복의 사람(6) 2013. 12. 08 주일오전예배
< 애통하는 자의 복(2) >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마 5:4)
I. 본문해설
- 가난한 마음의 표현인 애통함
- 애통의 이유: 자기 죄+하나님 나라
- 신령한 복이 인격적 특징에 있음
- 인격적 특징이 영혼의 변화에서 옴
II. 애통함과 은혜의 작용
- 팔복은 행위로 성취한 것이 아님
- 선행하는 은혜 없이 애통할 수 없음
- 팔복은 행위 아닌 인격적 특징
- 인격: 마음에 작용하는 지속적 경향성
- 본성의 변화와 영혼의 변화
- 신령한 복과 애통하는 신앙의 인격
III. 애통하는 마음에 이르는 길
A. 하나님의 사랑을 숙고함
- 자신의 죄인됨과 예수님의 구원을 생각함
- 자신의 불순종과 하나님의 신실함
- 천국의 소명과 죄에 대한 자신의 사랑
- 거기로부터 스스로를 구할 수 없는 무능
- 율법으로 상함+복음으로 애통함
B. 하나님의 나라를 숙고함
- 창조주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함
- 세상 모든 인간들을 사랑하고자 하심
- 하나님 통치를 벗어나 행복을 추구함
- 자유와 자율 추구: 신적 관계를 버림
- 결과의 비참함으로부터 자신을 구하지 못함
IV. 적용과 결론
- 애통하는 마음의 최고표현: 기도
- 위로하시는 하나님: 용서+소망
- 사랑 때문에 소망을 잃지 않게 하심
- 애통하는 마음에 기도의 능력 있음
- 하나님의 사랑을 의지하며 살아감
팔복의 사람(7) 2013. 12. 22 주일오전
< 온유한 자의 복(1) >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마 5:5)
I. 본문해설
- 가난함과 애통: 하나님께 대함
- 온유함: 사람에 대한 태도
- 가난한 마음과 애통함
- 온유함은 애통의 결과임
II. 온유한 자는 누구인가?
A. 온유함이란 무엇인가?
- praeis:(Greek) 길들여 온순해 짐
- 아리스토텔레스: 분노에 있어서 중용
- 성경: 신령하고 인격적인 변화
1. 자연적 성품이 아님
- 타고 나거나, 환경에 의한 개발이 아님
- 환경에 의한 유순함: 무능과 비겁을 항상 포함함
- 하나님과 관계에서: 하나님과의 평화와 만족에서 비롯됨
- 무골호인을 의미하지 않음: 모세의 경우(민12장3절)
2. 신령한 성품을 가리킴
- 구원 받은 사람 안에 있는 신령한 은혜의 결과
- 장기간의 성화의 결과만은 아님
- 갑작스런 회심과 온유를 경험함
- 성화는 온유함의 안정과 지속을 가져옴
- 가난한 마음⇒애통함⇒온유함
- 자신의 무가치함을 인식한 자들의 천국
- 온유함과 태도의 일관됨=하나님+사람
B. 온유한 자의 나라
- 심령의 가난+애통함⇒하나님
- 온유함⇒사람에 대한 태도
- 온유함의 원인
1. 거룩함에 대한 인식: 미천함+죄인됨에 대한 인식
2. 사랑에 대한 인식: 자신의 무가치와 영혼에 대한 사랑
⇒신적 형상애
- 하나님 안에서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를 소중히 여김
:신애+형상애
- 온유함의 불변성과 가변성
- 원리: 영혼에 새긴 십자가의 복음
- 실재: 하나님의 은혜 아래서 거함
III. 적용과 결론
팔복의 사람(8) 2013. 12. 29 주일오전
< 온유한 자의 복(2) >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마 5:5)
I. 본문해설
- 온유함: 신령한 은혜 작용의 결과
- 심령의 가난함과 애통함의 결과임
II. 온유한 자의 특성
A. 하나님을 향하여
- 신적 섭리에 맡김: 무위, 무책임×
- 섭리 속의 신적 인도를 발견해 감
- 온유함: 신적평화와 사랑의 열매
- 하나님의 주권: 선을 가장 잘 이룸
- 그리스도의 모본: 아버지 뜻 이룸
B. 사람들을 향하여
- 모든 사람에 대해 관용함(빌4:5)
- 악을 쉽게 용납하고 불의와 타협×
- 사람들을 부당하게 미워하지 않음
- 자기 이익 때문에(눅23:34): 용서
- 죄 때문에(요8:3-11) 죄를 미워함
- 미워할 죄사랑 사랑할 사람 미워함
- 팔복: 모두 까리따스 사랑의 특성
- 진리, 선,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임
- 특히 그 사랑이 사람들에게 나타남
- 진리 훼손치 않는한 관계를 소중히
- 서로의 다름은 아름다움의 가능성
III. 땅을 기업으로 주심
A. “땅”의 의미
- "땅"(gen)≡(히)erez: 땅, 거민
- 흙으로부터 취하여진 인간 창조
B. “땅”의 성경적 가르침
1. 구약: 신적 관계가 땅 상태에 반영
- 땅을 주리라는 약속: 평화와 안식
- "땅":육적왕국⇒영적왕국으로
- 그리스도 안의 안식과 평화 바라봄
- 땅에 대한 탐욕경계(사5:8, 레25)
- 땅 중심의 주종관계 형성을 금하심
- 땅은 신적 평화를 실현하는 공공재
2. 신약: 왕국 개념의 변화
- 물리적 땅 아닌 하나님의 통치
- 땅이 기업되는 방식도 변화됨
- 하나님의 자녀의 감화력+영항력
- 예수께서 땅을 기업으로 얻으심
- 육적 이스라엘vs영적 왕국 도래
IV. 적용과 결론
- 소금과 빛으로 부르심
- 모든 것 잃어도 땅을 얻은 사람들
- 신적 평화와 사랑으로 온유하라
팔복의 사람(9) 2014. 01. 19 주일오전
<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복(1) >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마 5:6)
I. 본문해설
- 주림, 목마름: 대체할 수 없는 욕망
- 만족 없음: 설탕물 같은 세상 욕망
- 참된 만족과 행복: 하나님께로 옴
II.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A. “의”(δικαιοσύνη)란 무엇인가?
- 경건함(6:1), 공의(행24:25), 의롭다 인정(갈2:21), 무죄(27:4)
1. 율법에 부합한 상태
- 하나님과의 종교적 관계 속에서
- 이웃과의 사회적 관계 속에서
2. 은총에 덕 입은 상태
- 완전한 하나님 앞에 의로운 자 없음
- "의인" 상대적인 의미(창6:9)
- "사함, 가림" 사죄-은혜(시32:1)
3. 대속에 덕 입은 상태
- 불의한 인간들을 위한 예수의 대속
- 인간 불의에 댓가를 형벌로 치루심
- 오직 믿음으로써 그 의에 참여케 함
- "율법 행위 아닌 믿음으로"(롬3:)
B. “주리고 목마른 자”
- 대체할 수 없는 근원적인 두 갈망
- 의로운 자 아닌 갈망하는 자 복됨
- 주님인한 행복은 의를 갈망할 때
- 결국, "의"를 갈망한다는 것은?
a. 하나님 뜻에 부합한 세상 갈망
b. 십자가 은혜로 구원 받길 갈망
- 천국엔 주 뜻이 온전히 이루어짐
III. 우리는 의를 갈망하는가?
- "너희가 알지 못하는 양식"(요4:)
- "양식은 뜻 행하며 온전히"(34vs)
- 회심하던 때의 순수함를 생각하라
- 신자의 기쁨은 주의 뜻 성취에 있음
IV. 적용과 결론
- 의를 갈망하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
- 그대의 심령을 기경하라!
팔복의 사람(10) 2014. 01. 26 주일오전
<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복(2) >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마 5:6)
I. 본문해설
- 의에 대한 갈망은 천국 백성의 특징
- 의에 대한 갈망
a. 인간들이 주의 뜻대로 삶
b. 예수 믿고 구원 받음
- 자기 안에 이뤄진 천국을 입증함
II. 의를 추구하는 자의 만족
- "배부를 것임이요"
- 원래 의미: "그 틀이 채워질 것이다"
- 주림과 목마름으로부터의 만족
A. 우주적, 종말적 만족
- 천국은 주의 뜻 온전히 실현된 곳
- 마귀 일 멸하러 오심(요일3:8)
- 십자가 화목 원수됨 끝남(엡2:16)
- 피조물간 갈등이 끝남(사11:6~8)
- 인간+만물 영광 회복함(엡1:10)
- 성도의 지복 누림
a. 지복의 직관
b. 만물의 신적 영광 봄=무한정동
B. 국지적, 현재적 만족
- 이미 도래한 천국+미도래의 천국
- 국지적으론 주의 뜻 성취됨: 기쁨
a. 순종함 위해 택하심(벧전1:2)
b. 맘으로 믿어 의 이름(롬10:10)
- 온전한 신자⇒참인간⇒창조목적
- 만족을 주심: 타인인해+자기인해
- 불완전한 세상 안에서 온전한 만족
- 하나님사랑⇒그 뜻 이뤄짐이 기쁨
- 하나님 영광위해 살 때 참 만족주심
III. 배부르지 못할 양식을 구함
- 채워지지 않는 인간 욕망의 갈증
- 기름으로 불을 끄려는 어리석음
- "세상을 사랑치 말라"(요일2:15)
- 자신을 섬김⇒자아는 행복 근원×
- 하나님 자신이 행복: 만족의 원천
IV. 적용과 결론
- 탈 없이 만족 추구할 대상: 하나님
- 오직 하나님 뜻의 성취를 추구함
- 하나님과의 평화 속에서 살라 z
팔복의 사람(11) 2014. 02. 02 주일오전
< 긍휼히 여기는 자의 복(1) >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마 5:7)
I. 본문해설
- 의의 갈망에 이은 천국백성의 특징
- 세상에서의 정의추구: 긍휼배제
- 종교개혁: 신적 의의 새로운 발견
- 사랑으로 완성된 정의로운 공동체
II. 긍휼히 여기는 자
A. “긍휼히 여기다”의 의미
- 신약: eleemones 구약: racham
1. 인간 구원의 동기(딛3:5)
- 하나님의 신실하심의 근거가 됨
2. 인간 상호 간의 요구(마18:33)
- 신적긍휼에 빚진 자로서의 사랑
B. 사랑의 속성 중 하나임
- 오래참음+자비+긍휼
1. 오래참음: 원치 않는 질서를 견딤
⇒ 관계의 지속을 원하기 때문에
2. 자비: 친절과 호의
⇒ 타자가 행복하기를 바라기 때문에
3. 긍휼: 현재적 비참을 깊이 공감함
⇒ 타자의 고통이 제거되길 바람
III. 긍휼히 여기신 예수님
- 백성들 바라보시는 마음(마9:35)
- 날때부터 소경을 고침(요9:1-41)
- 죄보다 죄인의 비참 봄(요8:3-11)
- 탕자의 비유와 긍휼(눅15:11-20)
- 무리를 불쌍히 여기심(마9:35-36)
IV. 적용과 결론
- 하나님께로부터 긍휼을 입은 자들
- 신적 긍휼을 베풀며 안식을 얻게 함
- 긍휼의 마음이 은혜 작용에서 온다
- 하나님을 바랄 수 밖에 없다
팔복의 사람(12) 2014. 02. 09 주일오전
< 긍휼히 여기는 자의 복(2) >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마 5:7)
I. 본문해설
- 팔복은 자연적 성품의 찬양 아님
- 그리스도와 성령을 통한 변화임
- 인간의 덕 아닌 신적 속성의 발로
- 사랑의 세 국면: 참음+자비+긍휼
- 죄인의 비참한 상태에 대한 연민
II.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요”
A. 변함없는 긍휼
- elethesontai: 수동태
1. 불변하시는 하나님
- 대상에 따라 변화하지 않으심
- 사랑할 대상 있기 전에 사랑이심
- 불변하는 하나님의 속성: 긍휼
2. 변화하는 인간 경험
- 영원 전에 긍휼히 여길 대상없음
- 죄 때문에 초래된 비참이 사용됨
- 긍휼 통해 하나님 찬란하게 현시
- 그 긍휼의 절정: 십자가(롬5:8)
- 항상 긍휼 베푸나 돌아온 후 경험
B. 신자에게 경험됨
- 인간 비참은 천국 특성의 발현 기회
- 죄의 비참: 전쟁터의 부상자 같음
- 긍휼이 여기는 주체는 하나님이심
- 긍휼히 여기며 살 때 경험되는 긍휼
- 용서가 대표적인 예: 동기는 긍휼
- 참된 긍휼: 동정 아닌, 관계적 긍휼
- 신적 긍휼 경험은 그리스도와 연합
III. 긍휼히 여기는 자의 행복
A. 긍휼로써 천국을 보여줌
- 죄의 유입 후 인간과 하나님의 대조
- 인간: 포악+무자비(라멕-창5:23)
- 하나님: 긍휼+은혜(요일4:9-10)
- 이질적 특성을 통해 천국을 알게 함
- 악인조차도 모두 사랑받고 싶어함
- 무한한 용납 긍휼한 마음에서 나옴
B. 하나님의 긍휼을 자원 삼음
- 긍휼의 경험은 신적사랑을 알게 함
- 용서의 경험을 통해 하나님 사랑 앎
- 매일 눈앞에 있는 죄와 비참을 느낌
- 긍휼 필요 없는 인간 없음: 하나님 앞에서만 모든 것이 용납됨
⇒회심자
- 긍휼히 여기는 자에게 긍휼 경험됨
IV. 적용과 결론
- 신적 긍휼과 인자를 힘입어 살아감
- 긍휼 베풂으로 어둠 속 빛을 삼으심
- 하나님의 은혜가 절대로 필요하다
팔복의 사람(13) 2014. 02. 16 주일오전
< 마음이 청결한 자의 복(1) >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마 5:8)
I. 본문해설
- 긍휼: 사랑의 극치, 봄: 복의 극치
- 긍휼: 대인 사랑, 청결: 대신 사랑
- 까리따스: 지성과 의지 상태 말함
II. 마음이 청결한 자
- hoi kathalaroi te kardia “그 마음에 있어서 청결한 자들"
A. “청결한 자”
- (Gr.)katraros⇒(Hb.)taher
1. 그리스문학: 물리적 의미로 출발
- 섞임 없는: 물, 우유, 술 등: 순일성
- 비능률 제거: 제사의식: 순수지성
2. 구약 성경: 의식적 정결(레12:4)
- 출37회+레34회: 도덕적 정결(창20:5-6): 심령적정결(욥4:7)
⇒의식적 정결+삶과 마음의 정결⇒거룩한 하나님께 대한
경외 표현
3. 예수님 당시: 완전히 외적인 문제 제의법+결례법의 준수에
집중됨
a. 제의법 준수: 정결과 신적기쁨
b. 아론의 자손: 혈통, 결함을 규정 제의적 규정
- 외적결함 142종 규정 ⇒ 예수님의 관점이동: 하나님 뜻
B. “마음이”
- te kardia "그 마음에 있어서" dat
- 예수 그리스도의 정결: 내적인 일, 영적나라에 합당한
영심지의 정결
- 영혼+마음이 순일한 상태: 지정의
- 영혼의 용도: 상부-하나님앎+도덕지도,하부-감각+육체지도
- 마음의 용도: 행동 산출하는 공장.
생각명정+정서순수+의지 올곧음
- 마음: 신적 간섭+인간 자율의 만남
III. 마음 청결한 자의 나라
A. 청결한 마음
1. 정의: "창조 시 마음에 고유하지 않은 것의 섞임이 없는 상태”
- 동기와 욕구들이 하나님 사랑 거스르지 않음
(하나님뜻 의지상 성취갈망)
2. 순간적 도달과 항구적 유지 구원하는 단회 은혜와 성화의 은혜 끝없는 성화 필요 속 하나님 의지함
B. 정결해지는 길
1. 속죄의 씻음
- 물로 씻어(출30:20), 피를 뿌려(레7:14) 정결케 됨
⇒예수의 피로!
- 죄인들을 씻어 천국 백성되게 하심
2. 은혜의 씻음
a. 불완전한 세상의 불결과 침투: 죄와 은혜의 갈등 속에 삶
⇒은혜씻음
b.신적사랑의 충만과 심령의 청결분쟁: 영원에 대한 무관심+이기심.
c. 사랑은 영원,진리,선을 아는길 앎으로 사랑하고 사랑함으로써 앎
IV. 적용과 결론
- 회심 시, 심령의 청결함을 생각하라
- 구원하신 하나님 사랑에 감격했음
- 천국백성: 삶의 동기 복음으로 변화
- 순전한 사랑으로 구별된 삶을 살자
팔복의 사람(14) 2014. 02. 23 주일오전
< 마음이 청결한 자의 복(2) >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마 5:8)
I. 본문해설
- 천국백성의 특징⇔Is과대조
- 내적정결: 순수한 신적 사랑 충만
- 마음청결: 지식+사랑
II. “하나님을 본다”는 의미
A. “보다”의 뜻
- opsontai: "볼 것이다"
- 물질 아닌 영적 사물, 사태를 만남
- 부활을 보이심(고전15:5), 당함(마27:4), 부활의 주를 봄(마28:7),
엘리야가 나타남(마9:4)
B. 물리적 의미가 아님
- 존재 방식의 초월성
- 자연 사물과 다름
- 영적 사물과 다름
- 볼 수 없는 영적사물
- 하나님을 본 사람 없음(요1:18)
III. 마음 청결한 자의 복
A.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함
- 하나님의 영광: 본체, 발산, 효과
- "주의 영광 보이소서"(출33:18)
- "주의 얼굴 뵈오리니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다"(시17:15)
- 세계에 전개된 속성을 영광에서 봄
- 영광이 전개된 속성들 원천 알게 함
- 그 핵심은 하나님의 지혜+사랑임
B. 만물 안에서 주 영광을 봄
- 신비의 체험 속에서만 보지 않음
- 하늘이 주 영광 선포함(시19:1-4)
- 그의 영광 온 땅에 충만함(사6:3)
- 청결한 마음이 주 영광 흔적 발견함
- 청결한 마음+지식(여행과 지식)
- 회심 후 신비롭게 느낀 지난 인생길
C. 하나님 앞에 사는 행복을 누림
- 범죄한 다윗: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시51:11)
- 최고의 찬송제목: "온전한 중에 붙드시고 앞에 세우심“(시41:12)
- 하나님 앎=신적친교(고전13:12)
- 사랑하는 자에 계시함(요14:21)
- 신자의 최고 행복: 하나님을 누림
- 인생의 사태들을 극복할 힘을 주심
IV. 적용과 결론
- 삶의 상황들로 우리 마음을 보이심
- "모든 것이 나의 죄 때문입니다"
- 다시 정결케 하시는 주님을 바람
- 우리 모두 그 사랑 안에서 살자
팔복의 사람(15) 2014. 03. 02 주일오전
< 화평하게 하는 자의 복(1) >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마 5:9)
I. 본문해설
- 마음의 청결함에 이은 7번째 복
- 신적 사랑의 충만⇒관계의 효과
- 내면과 생활의 통합적 이해 요구
II. “화평하게 하는 자”
- eirenopoioi=eirene+poios(1)
- Gr-Ro문맥:안전+사회정의+경제 부 가진 자로 화해 도모한
지배 계급
A. 평화란 무엇인가?
1. 일반적: 전쟁과 다툼 없는 평안
2. 유대적: 다윗 왕국의 신적 질서
3. 당대적: JR함락 후, 유대 민족 안에서 분쟁 없는 사회적
관계 뜻함
4. 성경적: shalom-평화와 온전함
B. 평화 실현의 영역
1. 자신과의 관계: Aug. 마음의 정염 고르지 않아 죄 지음,
좋은 사람은 지혜+용기+정열이 조화 이룬 사람
2. 교회와의 관계: 회복될 세상의 표본, 의인이자 죄인임⇒
영원에 대한 무관심+이기심으로 분쟁이 일어남
3. 이웃과의 관계
- 성전 뜰: 이방인-여자-Is-제사장
- 경계 넘는 자 죽임: 하나님 원치 않는 수많은 장벽들과 혐오,
교만함
- 화평케 하는 자로 삶: 빛과 소금임
4. 하나님과의 관계
- 참 평화의 토대: 하나님과의 화목
- 천국백성: 적대감⇒사랑과 긍휼
- 예수 안에서 제시된 하나님과 샬롬
- 까리따스를 모든 평화의 자원 삼음
III. 평화-천국의 질서
A. 세상나라: 자기 사랑의 투쟁
- 타락 후: 세상 나라와 하나님 나라
- 가인의 살인-에녹성-라멕의 포악
- 각자가 자신을 주인으로 삼은 나라
- 자기 질서 강요: 자원, 경쟁과 탐욕
- 평화를 원하나 분쟁이 그치지 않음
B. 하나님 나라: 하나님 사랑의 질서
- 마음의 청결함: 신적 사랑의 충만
- 신적 사랑에로 회귀함: 복음필요
- 천국과 세상의 내적갈등: 신의지
- 가난, 애통하게 하사 청결케 하심
- 그 사랑 충만시 천국 백성의 삶 가능
IV. 적용과 결론
- 화평케 하는 자: 신적 경륜의 도구
- 창조시 만물의 순수함을 고양해 줌
- 천국 백성의 소명: 왕국을 실현함
- 영원에 잇대어 순간을 삶에 행복함
팔복의 사람(16) 2014. 03. 09 주일오전
< 화평하게 하는 자의 복(2) >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마 5:9)
I. 본문해설
- 화평함은 청결한 마음의 결과임
- 까리따스가 관계 속에서 나타남
- 화평케함은 변화된 성향의 결과
II. 평화 - 천국의 질서
- 평화: "인간의 이성적 요소가 동물적 요소를 지배한 질서“
(Augustine)
A. 세상나라: 자기 사랑의 투쟁
- 타락 후: 세상나라와 하나님나라
- 가인의 살인-에녹성-라멕의 포악
- 각자가 자신을 주인삼고 사는 나라
- 자기 질서 강요: 자원, 경쟁과 탐욕
- 평화를 원하나 분쟁이 그치지 않음
B. 하나님 나라: 신적 사랑의 질서
- 마음의 청결함: 신적사랑의 충만
- 신적사랑에로 회귀함: 복음 필요
- 천국과 세상의 내적갈등: 신의지
- 가난, 애통하게하사 청결케 하심
- 그 사랑 충만시 천국백성의 삶 가능
III.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됨
A. “하나님의 아들”
- hyoi theu (sons of God)
- 히브리어에는 형용사가 부족함
- 다른 명사와 연계하여 특성을 제시
- "시온의 아들"(애4:2), 우레의 아들(막3:17), 바나바(행4:36),
빛의 아들(요12:36)
- 법적상속자
- "하나님의아들"
a. 신적성품: 평화의 주(롬15:13,빌4:9)
b. 신적 영광에 참여함(눅20:36)
B. “일컬음 받으리라”
- klethesontai: 신적 의지의 미래
- 하나님의 상속자임이 드러남
- "한 노인을 구하고 교회 지은 얘기"
- 존재를 통해 하나님을 인정케함
- 상속할 나라를 현재적으로 누림
IV. 적용과 결론
- 진리 위한 싸움 아니면 평화하라
- 불화: 진리 아닌, 이기심과 편견
- 그리스도, 평화의 왕으로 오셨음
- 거룩한 은혜는 평화의 질서를 줌
- 질서에서 벗어난 자 긍휼히 여김
팔복의 사람(17) 2014. 03. 16 주일오전
< 박해 받는 자의 복(1) >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마5:10)
I. 본문해설
- 마지막 8복이 박해와 관련됨
- 화평이 적극적 성품이라면, 박해를 참음은 소극적 성품임
- 신자가 늘 세상의 환영 받지는 못함
II. 박해 받는 팔복의 사람
- dediogmenoi "패주시키다, 구박하다"의 분사현재완료 수동태
- 팔복의 사람과 세상의 이질감
- 초대교회: martus-증인=순교자
- "충성된 증인 안디바‥죽임을 당할 때에‥믿음 버리지×"계2:13
- 핍박의 불가피성: 예수 따름이 십자가(마16:24),미움(막13:9)
- 세상의 정신과 다른 그리스도인들
- 자기를 주인, 하나님을 주인삼음
- 윤리 이상, 다른 삶의 방식과 평판
- 초대교회: 직업에서 순결을 지킴
- 악의적 비난과 모함: 온유한 인내
III. “의”를 위한 박해
A. “의”
- dikaiosunes
- 율법에 부합함: 종교+제사+사회
B. 팔복의 사람: 그 의에 부합한 인격
- "그냥 그리스도인이라서 싫다"
- 개척교회와 퇴폐업소
- 터툴리안<변증> 그리스도인 이름만 자백 받으면 끝이다.
- 팔복의 인격: "거룩함"-빛 싫어함
- Alcibiades와 Socrates의 대화 "너와 함께 있을 때 내 자신
인식해"
C. 죄와 허물로 인함 아님
- 결코 완전하지 않은 그리스도인
- 죄와 허물 발견시 악의적인 공격
- 응보와 박해 불분명: 주님은 아심
- 핍박 두려워 않음: 삶으로 입증함
- 비밀스러운 하나님의 위로와 사랑
"그렇게 주님 대적치 말라고"Ter.
IV. 적용과 결론
- 예수 믿음은 곧 귀의임: 가치의 전환
- 예수 따름: 예수 아닌 것과 갈등의미
- 소망 가운데 답변준비(벧전3:15)
-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는 이유 따라 삶
- 상한 갈대처럼 주님을 의지하며 삶
팔복의 사람(18) 2014. 03. 23 주일오전
< 박해 받는 자의 복(2) >
“의를 위하여 박해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마5:10)
I. 본문해설
- 박해받는 자에게 천국을 약속하심
- 심령 가난함이 현재 천국 누림 시작
- 박해를 받음은 미래 천국 누림 보장
- 팔복의 인격이 불의한 세상과 맞섬
- "천국이 그들의 것이라"
II. 천국의 두 차원
- 하나님의 두 창조: 지상+천상
A. 지상적 차원
- 자연 사용, 도덕 목적 이룸: 사회
- 인간 안에서 두 세계 교통케 하심
- 지상에 짓밟힌 하나님의 창조 뜻
- 신자가 하늘자원으로 회복해 감
- 신앙과 사랑 입증, 절대의존 회복
B. 천상적 차원
- 타락 후, 두 세계 단절⇒생명 없음
- 하나님 없이, 자기 주인삼은 세상
- 죄와 고통과 대조되는 천상세계
- 신앙의 균형: 역사성+초월성
- 타계적 신앙이 아닌, 지상 세계에 천국 건설 위한, 소망의
원천삼음
- 천국 묵상의 힘: 이기심, 교만, 헛된 세상사랑 버림+십자가 짊
이유
III. 천국을 누리게 하심
A. “그들의 것임이요”
- 신자: 세상에서 나그네에 불과함
- 부활까지 잠시 머물 낙원, 영원히 세상에 이루어질 천국,
그들 소유
- 나그네의 설움, 셋방살이의 고통
B. 천국 누림의 방식
- 현세적 번영과 부 아님: 매개체임
- 주신 복보다 복의 근원 하나님 사랑
- 도덕적인 사람은 양심의 자유 있음
- 그러나 박해 받는 자는 신적평화를
- 마음을 물 같이 쏟게 함: 장위교회
- 박해 받는 자의 기도, 예배, 교제!
- 리차트 범브란트: 천국⇒지상에
- "지하교회 성도들과의 성찬기억"
- 20세기 기독교의 순교자: 3천만명
- 일제, 의병들의 피 어린 항쟁: 나라
- 회유:"내 설교, 내 글이 빛을 잃음“
IV. 적용과 결론
- 신자의 삶은 전쟁터에서 싸우는 것
- 많은 번민&괴롬 ☜ 영적목표상실
- 신앙의 본질적 가치를 붙들자.
팔복의 사람(19) 2014. 03. 31 주일오전
< 고난 받는 팔복의 사람들(1) >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마5:11)
I. 본문해설
–8번째 복의 범위: (견해1) 10절 (견해2) 10~12절
- 사실상 팔복의 선언은 10절로 끝남
- 11절 이하는 팔복의 사람이 존재론적으로 이 세상에서 받게
되는 고난를 가리킴
II. 고난 받는 팔복의 사람들
- 팔복의 사람이 세상 속에서 받는 고난
A. 세상에서 의를 추구함
- 종교적 의와 사회적 의: 부분적 합치가 있음
- 거룩함의 결과인 도덕성과 중첩됨
- 사회적 의에 무관심 할 수 없는 이유
- 대주그룹사건, 여군자살
- 의로 인류 궁극적 문제 해결 불가
B. 하나님 나라를 추구함
1. 성경적 “의”
- (1)율법합치 (2)덧입혀진 은총 (3)대속으로 발전⇒
여호와 자신이 이스라엘의 의가 되심(렘33:16)
2. 천국통치의 핵심: "의"
- 천국은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요 의와 평강과 희락임(롬14:17)
- 구속을 통한 은혜의 통치 결과임
3. "의"이신 그리스도
- 의를 입혀주심(벧후1:1), 율법의 마침되심(롬10:4).
- 여호와의 의가 우리 의의 근거가 됨
- 구약의 여호와의 사상(렘33:16)
III. 예수 닮음과 순례자의 고난
A. “나로 말미암아”
- 복음 전파만 아닌, 존재론적 고난
- 팔복의 사람은 곧 예수의 작은 분신
- 팔복의 인격을 부분적으로 좋아함(자신들의 이익과 관련됨)
- 전체를 좋아하는 것은 불가능함
- 팔복의 사람⇒예수의 작은 분신임
- 의=신적통치 추구=예수의 인격
- 의롭고 거룩한 사람 요한의 죽음
- 헤로디아와의 결혼비난(막6:18)
B. 팔복의 사람과 그 “의”를 보임
- 신자의 존재가치: 임할 천국 보여줌
- 변화된 영혼+인격+치열한 삶으로
- 복음과 성령으로 영적 변화를 유지함으로써
- 불의한 사회와 악에 항거함으로써
- 조수아의 간증, 킬링필드: 인류의 양심은 무엇을 했나?
- 이 땅에서 천국의 통치를 먼저 보여줌
IV. 적용과 결론
- 팔복의 사람: 이 세상에 살지만 다가올 하나님 나라의 사람
- 진실하고 순전한 신자: 세상의 사랑을 기대치 말라
- 신자의 가치: 세상의 칭찬 아닌 천국 보여줌
팔복의 사람(20) 2014. 04. 06 주일오전
< 고난 받는 팔복의 사람들(2) >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마5:11)
I. 본문해설
- 팔복의 사람: 존재론적인 박해
- "소금, 빛" 모두 신자의 다름 의미
- 예수 닮음: 천국 통치 핵심-의
II. 신자를 박해하는 세상
A. 예수 때문에 당함
- "나로 말미암아"(eneken emou)
- "나를 위하여", "나 때문에"
- against 예수 닮은 성품+삶의 방식
B. 핍박하는 방식
- "욕하고"(oneidisosin): 모욕, 창피, 비난, 꾸중하다⇒얕잡음
- "박해하고"(dioksosin): 핍박, 패주, 추격하다⇒힘으로 이김
- "거짓으로"(pseudomenoi): "그릇되게", "옳지 않은 방식으로“
"사실 아닌 것으로써"⇒진실 외면, 진리 안에 있지 않기에 가능함
- "모든 악한 말"(pan poneron): 모든 악한 것들, 단순히 말
아니라 악한 일: 저주, 악담포함⇒독한미움
- "너희를 거슬러": 이익에 반하여
III. 하나님의 나라에 반역함
A. 예수 고난을 보여줌
- 모욕, 박해, 거짓증인, 저주받음
- 왜? 예수가 도입하는 천국 거부함
- "회개하라 천국이‥"(마4:17)
- 기원전 6~5c, Aristides: 도편추방제(클레이스테네스, 10년간)
민회결정
- 3월경 6천 득표자 추방 문맹자
- "몰라요. 의인이란 말이 지긋지긋해요~"
-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요3:20)
- 진리와 사랑 드러냄으로 박해 당함
B. 우리 고난을 보여줌
- 위선, 타협, 변절자: 박해가 없음
- 진리와 선: 모든 이들의 것이 아님
- 복음적 거룩함은 진리와 선의 핵심
- H.B Workman<초대교회의 박해> 디오클레티안의 박해:
발가벗긴 여자들
- 황소의 공격, 말들의 능지처참, Ignatius: 짐승들에 던져짐
비엔나의 상투스
- 리용, 국부태움 불에 녹인 납을 등에 부음, 죽도록 맞은 상처
위에 식초와 소금을 뿌림, 화형에 처하며 머리에 찬물을 뿌림
- "거룩하다"는 이유로 박해를 받음
- 박해받음은 경외의 표현이다.
IV. 적용과 결론
- "복이 있나니‥"(makarioi)
- 세상적 복이 아닌, 천국의 지복을 의미
- 그리스도 고난에 참여하는 복임
- "그 뜻이 이뤄지이다 외치며‥"
팔복의 사람(21) 2014. 04. 13 주일오전
< 기뻐하는 팔복의 사람들(1) >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마5:12)
I. 본문해설
- 고난 받을 수밖에 없는 팔복의 사람
- 소망 중 기뻐하고 즐거워하길 촉구
- 완성될 천국에서 누릴 행복과 상급
- 현재 삶 속에 침투해온 기쁨과 행복
II. 선지자들과 비교하심
A. 신정국가와 선지자
- 왕, 제사장, 선지자: 신정정치
- "그 선지자들"(tous propetas)
- 신적계시의 전달자: 지식과 회개
B. 고난받는 선지자들
- 선지자직의 기원: 족장⇒모세
- 직임적 선지자들: 사무엘 이후
- 선지자의 특징: 소명+계시+성령
- 악한시대: 더욱 선명한 계시주심
- 포도원의 악한 농부들: 의+공평(사5:7, 마21:34~36, 37~39)
- 예수의 죽음: 선지자들에 대한 이스라엘의 미음의 연장(마23:35)
C. 이스라엘: 제사장 나라 됨
- "제사장 나라" 삼으심(출19:6)
- "제사장 나라"의 핵심가치:
a. 거룩함: "내가 거룩하니‥너희도"(레11:45, 벧전1:16)
b. 헌신함: "너희도‥기쁘게 받으실‥제사를 드릴‥"(벧전2:5)
c. 중재함: "나로‥복음의 제사장 직분을‥"(롬15:16)
III. 하나님의 나라와 삼직의 통합
A. 기독론적 통합
- 신적통치의 구약적 분광⇒ 구속사적으로 기독론적 집광
: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안에서 나타남
- 왕처럼 다스림+선지자처럼 깨우침+제사장처럼 죽으심(자기헌제)
B. 구원론적 적용
- 구원받은 천국 백성들로 삼직 계승
1. 왕직: "왕 같은 제사장"(벧전2:9). 온전한 실현은 미래의
천국에서 그리스도의 심판과 통치에 참여함으로 이뤄짐
(마19:28,고전6:3)
2. 제사장직+선지자직의 통합
- 현재적으로 실현하며 살도록 소명
- 이미 성취된 그리스도의 구속제사
- 제사장직의 구원론적 적용의 전환
- 백성과 하나된 제사장의 긍휼심정
- 인격과 삶으로써 사상과 윤리 통해
- 하나님 지혜 드러내는 선지자 직분
- 거룩함으로 사랑 진리 드러내는 삶
IV. 적용과 결론
- 선지자: 타락한 시대의 진리 전달자
- 어두운 밤하늘, 충천하는 화염처럼
- 하나님 뜻 전함: 선지자의 존재가치
- 선지활동: 거룩함+소명+영광체험
- 세상의 미움보다 큰 하나님의 은혜
- 왕이심에도, 제사장의 마음으로, 선지자로 사셨던 그리스도처럼
팔복의 사람(22)끝 2014. 04. 27 주일오전
< 기뻐하는 팔복의 사람들(2) >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마5:12)
I. 본문해설
- 선지자처럼 핍박받는 팔복의 사람
- 그럼에도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삶
- 영원한 하늘나라의 행복을 생각함
II. 신자의 삶: 기쁨과 즐거움
A. 기쁨과 즐거움
- kairete kai agalliasthe: 명령
- "즐거워‥환희하라" 기쁨+찬양
- 존재론적 핍박을 기쁜 삶으로 이김
- 신자의 즐거움: frui와 uti
- 섭리를 통해 하나님의 성품을 누림
- 세상사 통한 잠세적 행복의 불안정
- 세상이 알 수 없는 원천에 기쁨의 근거를 가질 때 가장
선교적 삶이 됨
- 영적 복을 섭리적 복으로 대치함
B. 신령한 세계와 행복
- 가시적 사물들 하나님 관념에서 옴
- 사물들: 신적 관념+연관 가르쳐 줌
- 신자의 기쁨: 신적 지식+신적 사랑
- "탈 없이 사랑할 이 당신뿐이니~"
- 천국의 행복: 지애의 점증+상급임
III. 천국에서 상급이 있는가?
A. 천국의 상급에 관한 견해들
1. 상급 없다는 견해
- 상급사상이 R.C 공로사상에서 옴
- 선행 격려한 accomodatio일 뿐임
- 인간 탐심을 천국 삶에 투영한 것
2. 상급 있다는 견해
- 상급사상의 성경적 근거를 강조
- 마 5:12 "하늘에서 너희 상이‥"
- 마 10:41, 눅 6:23, 빌 3:14, 고전 15:41 "해의 영광이‥"
- 상급 약속 바람을 신적 신뢰로 봄
- 천국서 지성 차별 있음 고려할 것
- 탐욕이 배제된 영광 돌리는 차등
B. 상급 받는 팔복의 사람들
- 그들이 행한 바를 따라 상급을 받음
- 그들의 행함과 사람됨은 일치 이룸
- 존재론적 박해의 삶: 영광 돌린 삶
- 선지자의 임무: 하나님 뜻의 선포
- 선지자: 선포+행동+성품의 일치
- 그 상급이 무엇일지 알 수 없으나 온전한 지식과 사랑일 것임:
차별성
- 이 땅에서 지애 행복의 무한 확대임
IV. 적용과 결론
- 자기위해 살다 불행히 죽을 사람들
- 그 이름 위해, 남을 위해 살게 하심
- 변화된 성품으로 세상의 빛으로 삶
- 존재론적 박해가 신자의 존재감임
- 거기서 영원한 하나님의 상급바람
- 그들이 진정 복이 있도다!
팔복의 사람 219
팔복의 사람 1 (2013.10.27 주일오전)
팔복의 사람 2 (2013.11.03 주일오전)
팔복의 사람 3 (2013.11.10 주일오전)
팔복의 사람 4 (2013.11.24 주일오전)
팔복의 사람 5 (2013.12.01 주일오전)
팔복의 사람 6 (2013.12.08 주일오전)
팔복의 사람 7 (2013.12.22 주일오전)
팔복의 사람 8 (2013.12.29 주일오전)
팔복의 사람 9 (2014.1.19 주일오전)
팔복의 사람 10 (2014.1.26 주일오전)
팔복의 사람 11 (2014.2.2 주일오전)
팔복의 사람 12 (2014.2.9 주일오전)
팔복의 사람 13 (2014.2.16 주일오전)
팔복의 사람 14 (2014.2.23 주일오전)
팔복의 사람 15 (2014.3.2 주일오전)
팔복의 사람 16 (2014.3.9 주일오전)
팔복의 사람 17 (2014.3.16 주일오전)
팔복의 사람 18 (2014.3.23 주일오전)
팔복의 사람 19 (2014.3.30 주일오전)
팔복의 사람 20 (2014.4.6 주일오전)
팔복의 사람 21 (2014.4.13 주일오전)
팔복의 사람 22 (2014.4.27 주일오전)
팔복산에 오르자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마 5:1)
녹취자: 장소연
I. 본문의 배경
아시는 바와 같이 마태복음 5장과 6장, 그리고 7장은 산상수훈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어떻게 해서 예수님이 이 유서 깊은 산상수훈을 우리들에게 주셨는지 보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기독교가 병 고침 이상의 그 무엇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II. 기독교, 병고침 그 이상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시며 그들에게 회당에서 가르치셨고, 천국 복음을 전파하고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소문은 수리아에까지 퍼졌고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종 병에 걸려서 고생하는 사람들과 귀신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까지 데리고 왔고, 예수님은 그들을 고쳐주셨습니다.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다와 요단강 건너편에서까지 수많은 무리가 이 병 고침의 기적을 보며 예수님을 따라 다녔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에 하신 세 가지 대표적인 섬김이 있습니다. 첫째는 소수의 사람들에게 진리의 말씀을 가르치시는 것이었고, 다수의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하시는 것이었고, 또 각종 병에 걸린 사람들을 고쳐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삼중 사역이었습니다. 이 소문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모였고 특히 여러 가지 질병에 고통 하던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여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일찍이 누구도 본 적이 없는 놀라운 기적으로 병자들을 고치셨습니다. 예수님의 손에는 수술하는 도구나 의약품이 들려있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순전한 기적이었고, 그리고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이 세상에 임하셨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병을 고침을 받고 기적을 본 모든 사람들이 신앙을 소유하게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산에 올라가 앉으셔서 그 유서 깊은 산상수훈을 말씀하려고 하셨습니다. 이때에는 병 고침을 받고 따르던 수많은 무리들 중 많은 사람은 돌아가고, 일부만 남아서 예수 그리스도를 원래 따르던 무리들과 함께 이 산에 올라갔습니다. 여기서는 병을 고치는 기적도 없었고, 그리고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오직 거기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전파하시는 하나님의 말씀만이 있었고, 그 말씀을 듣고 깊이 감화를 받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만 있었습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에게 기독교가 병 고침과 기적, 그 이상의 무엇이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육신의 어려움들을 해결하고 고통을 치유해 주는 그 이상의 무엇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산상수훈의 맥락에서 보면 앞에 일어난 그 모든 기적적인 치료의 사건들은 사람들에게 이 말씀을 들려주기 위한 전주곡에 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III. 무리를 바라보심
A. “보시고” (Ἰδὼν)
예수님께서는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셨습니다. 정확하게 말씀드리면 ‘예수께서 보시면서’ 혹은 ‘무리를 보실 때에 예수님은 산에 올라가 앉으셨고, 제자들은 나아왔다’ 이렇게 성경에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께서는 무리들을 바라보셨습니다. 여기에 보시고 라고 번역된 이 단어는 원래 그리스어로 ‘이돈’이라는 단어입니다. 그리스어 혹은 희랍어라고 부르는 이 언어는 신약성경에 기록된 언어입니다. 이 ‘이돈’이라는 단어는 분사형태인데 ‘보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육신의 눈을 가지고 눈에 보이는 사물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물의 배후를 통찰해서 육신의 눈에 보이지 않는 그 어떤 의미들을 직관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육신의 비참함은 예수님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볼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종류의 비참은 누구의 눈이든지 육신의 눈을 가진 사람에게는 보이는 법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장님을 고쳐주시고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우시고 문둥병자를 온전케 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비참함은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것을 바라보셨습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비록 병 고침을 받고 중풍에서 일어나고 간질에서 고침을 받고 귀신 들린 데서 놓임을 받았지만 여전히 그 육신으로 보이는 비참함 그 너머에 있는 영혼의 비참한 상태를 보셨습니다. 예수님이 마태복음 10장에서 제자들을 불러 사도로 삼으실 때 많은 무리를 보시며 가슴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프셨던 이유도 바로 그들이 영적으로 유리하고 고생하였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무리를 바라보셨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우리가 근거 없는 낙관을 가지고 생활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 앞에 가난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되어서 매달리지 않는 모든 것들도 우리 자신이 이런 영적인 안목을 가지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꾸 우리의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만 보고 그것이 만족하면 넉넉한 마음이 되어서 “나는 평안하다.” 그리고 “나는 괜찮다.”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이 교회에 매주일 나오는 것, 육신의 눈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이런 저런 일에 봉사하는 것, 여러분 누구든지 육신의 눈으로 보이는 것이고, 또 여러분을 잘 알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은 여러분을 칭찬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 영적인 시각으로 여러분을 바라보실 때 영혼의 형편은 하나님 앞에 고스란히 드러나게 됩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지금 어떤 모습입니까? 여러분의 몸은 교회에 나오지만 여러분의 보이지 않는 영혼은 이 세상을 방황하고 있지 않습니까? 육신의 눈으로는 여러분이 경건한 신자이지만 이렇게 영적인 시각으로 꿰뚫어보면 하나님께 반항하고 추루한 죄인의 모습이 아닐까요? 여러분은 물질도 많고 모든 것이 넉넉하여 나는 부족한 것이 없다고 말하지만 그러나 사실은 여러분이 헐벗고 가난한 영혼인 것을 알고 계십니까? 다른 사람의 잘못을 지적하고 비난하지만 여러분은 그들보다 훨씬 더 커다란 죄를 짓고 있는 것을 여러분 자신은 모르지만 하나님은 알고 계시지는 않을까요? 신앙의 깊이라고 하는 것은 이처럼 영적인 눈으로,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없는 그 무엇을 뛰어넘는 배후를 통찰하고 그곳에서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를 생각하며 반성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신앙의 깊이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시각을 가지고 예수님이 여러분을 바라보실 때에 어떤 모습인지를 생각하고 주님의 은혜를 갈망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B. 병 고침 이상의 것
예수께서 무리를 바라보신 것은 병 고침 이상의 그 무엇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병 고침 이상의 그 무엇을 여러분에게 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한 15년 전인가 전국의 의사들이 모두 모여서 기독교 의사들이 수련회를 하는 곳에 제가 강사로 간 적이 있습니다. 지금은 그때보다 훨씬 젊고 패기만만했습니다. 그래서 설교를 하면서 말도 되지 않는 이야기를 했던 것 같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당신들이 열심히 환자를 고쳐주는데 그 중에는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을 고쳐서 살리기도 하지 않느냐. 그런데 당신들이 만약에 그 사람들의 육신만 고쳐주면 매우 나쁜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요즘 같았으면 그렇게까지 설교하지 않았을 텐데 의사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니 인술을 베푸는데 나쁜 짓을 하고 있다니’ ‘단지 그 사람이 계속 죄를 짓고 하나님께 대항하고 살았는데 그래서 이제 죽게 되었는데 당신들 앞에 찾아왔으면 그러면 육체만 고쳐줄 뿐만 아니라 마음과 정신도 고쳐줘서 이제는 그런 삶을 살지 않게 해줘야지 그냥 육신만 고쳐주면 죽으면 더 이상 하나님께 대항하지 않을 사람들이 건강을 회복하고 가서 더 힘차게 반항하며 살지 않겠느냐.’ 설교를 하고도 집에 오면서도 무언가 말이 되는 것도 같고 안 되는 것도 같고 그랬습니다. 그 이상의 무엇이 필요하다고 하는 생각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팔복과 산상수훈의 위대한 설교를 통해서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셨고,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우리의 외적인 것 너머에 정말 필요한 내면의 그 무엇이 우리에게 있어야 되는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많은 것을 소유함으로써 자신이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외로움은 좋은 친구를 소유함으로, 결핍에서 오는 고통은 물질을 더 많이 소유함으로써 그리고 낮아진 자존감은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음으로써 획득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런 외적인 자원들을 많이 가지고 있으면 행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느 정도는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최종적이고 궁극적인 해결이 될 수 있을까요? 결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이 비유가 적절한지는 모르지만 저는 이런 비유를 들고 싶습니다. 어떤 사람이 커다란 질병에 걸렸습니다. 어차피 죽습니다. 그런데 돈이 많으면, 사랑하는 사람들이 주위에 많이 있으면 조금 품위 있게 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좋은 병실에서 사람들의 정성껏 간호를 받으면서 최신 약품을 써서 고통을 줄이면서 그러면서 또 매일매일 씻겨주고 이렇게 해서 조금 우아하게 죽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차피 죽습니다. 그러나 그런 자원도 없으면 지난 번 신문에 보니까 자기 부모를 영안실에 와서 안치시켜놓고 부조금만 다 받고 부모 시체는 거기에 놔두고 그리고 장례비용도 안 치르고 도망간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너무 품위가 없게 죽는 것입니다. 죽어서 시체가 됐는데도 자식에게 버림을 받은 것은 품위가 없습니다. 이런 차이는 있을지 모르지만 어차피 죽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궁극적인 해결이 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병 고침 이상이 그 무엇이 무엇이냐면 많은 사람들은 행복을 자신의 소유와 지위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조금 성숙한 사람이라야 겨우 다른 사람들과의 인간관계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오늘 진정한 행복이 외적인 환경이나 자신의 소유가 아니라 사람됨에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다음 주서부터 설교하게 될 이 팔복은 영어로 ‘Beatitudes’라고 이야기합니다. 라틴어로 ‘beatitudo’라고 하는데 이것은 뭐냐 하면 지복입니다. 즉,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행복 중에 최고로 지고한 행복, 그것을 팔복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 복이 어디에 있냐하면 사람됨에 있다는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 무엇을 소유한 사람이 아닙니다. 애통하는 자, 어떤 지위에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온유한 자, 어떤 커다란 학문을 도통한 사람이 아닙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르게 되는 것은 주위에 좋은 친구들이 있어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무언가 어마어마한 기적을 보았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엄청난 학식을 통해서 거기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무엇인가 획기적인 사건, 어마어마한 축복을 받은 일이 있기 때문에 화평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것도 역시 기적적인 신앙을 통해서 여기에 도달하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격이라고 하는 것은 곧 사람됨이고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만나고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비밀을 안 영적인 변화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사람됨은 곧 그의 모든 삶의 궁극적인 원인입니다. 즉 한 사람이 살아온 인생의 발자취는 그 사람의 인격이 그려놓는 궤적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의 사람됨은 결국 삶이라는 열매를 통해서 나타나게 되고 살아가는 그 삶은 또한 그 사람의 사람됨을 형성해서 결국 궁극적으로는 인격과 삶의 열매가 일치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인격적으로 훌륭한 사람도 잠시 휘청거리는 삶을 살 수 있으며 또 삶의 열매가 뛰어나 보이는 사람도 인격적으로 미흡한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일시적인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인격이 훌륭한데도 삶이 약간 흔들렸다면 일시적으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원래 그 사람은 그런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악한 인격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선한 행동을 했다면 일시적으로 그 마음이 흔들려서 실수하듯이 선을 행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위선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마지막에 일치를 이루게 되어 있고 그래서 그 사람의 사람됨은 그 사람의 살아간 삶의 열매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병 고침 이상 그 무엇을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고 싶으셨던 것은 ‘너희는 팔복의 사람이 되어라. 이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 나를 만나고 진정으로 그 영혼이 변화된 팔복의 사람들이 되라. 그래서 너희들이 이 세상에 살지만 사실은 하늘의 백성으로 살아가라.’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무리를 바라보시며 주시고 싶으셨던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에게도 이것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주님을 깊이 만나고 변화되어 이렇게 팔복의 사람들이 된다면 이 세상의 어떤 일도 나쁜 일이 있을 수 없습니다. 모든 것들은 여러분과 관계를 맺으면서 변화될 것이고 변화되지 않는 그 현실 속에서 팔복의 사람들이 된 여러분은 이 땅에 살아야 할 분명한 소명을 발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행전에서 믿음의 사람들이 핍박을 받을 때에 더욱 맹렬하게 그들의 신앙이 불타올라 하나님의 나라의 성취에 대한 열렬한 열망으로 이어졌던 이유이기도 한 것입니다. 지금까지 여러분은 오랜 신앙생활을 해 왔습니다. 여러분은 이 신앙생활의 진수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여전히 병을 고치고, 부자가 되고, 섭리 속에서 하나님이 주신 좋은 것들을 받는 것, 거기에 여러분의 신앙에 대한 모든 평가가 달려있다고 생각한다면 여러분의 사고방식은 천국 백성의 사고방식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병 고침 이상의 그 무엇을 이 무리들에게 주시고 싶으셨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이 되어 그 나라의 백성답게 이 세상에 살아서 주님의 이름을 이 세상에서 높이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이 이런 사람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IV. 산에 오르신 예수님
A. 왕처럼 좌정하심
예수님은 이 팔복의 말씀, 더 길게는 산상수훈 전체를 말씀으로 베푸시기 위해 산에 오르셨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은 그 산위에 왕처럼 좌정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원래 과장이 심한 사람들이니까 여기에서 산이라고 하는 것을 여러분은 백두산이나 아니면 장백산처럼 생각하면 안 되고 동네에 있는 언덕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 언덕위에 예수님 앉으셨고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 예수님의 발아래 앉았습니다. 예수님은 그 산 위에 왕처럼 좌정하셨습니다. 허리를 굽혀 제자들의 발을 씻기고, 병든 자의 헌대를 어루만져주고 기도해주시던 종처럼 섬기시던 그 모습과는 대조가 되는 모습으로 그렇게 산 위에 올라가 앉으셨습니다. 왕처럼 좌정하셨습니다. 예수님 이외에 아무도 말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왕처럼 좌정하신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선포하기 시작했고 그것은 일찍이 이 사람들이 들어보지 못한 영적인 권위가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바로 어떠한 기적도 일어나지 않는 이 팔복산에서 산 아래에서 큰 기적이 일어날 때 행했던 것보다도 더 근본적이고 놀라운 일을 지금 사랑하는 백성들의 마음속에 행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기독교는 인간의 모든 고통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지만 단지 그 외면적인 고통만을 해결해 주는 종교가 아닙니다. 오히려 기독교의 관심은 그 모든 질병의 궁극적인 원인을 고쳐서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행복한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는 것이 기독교의 진정한 목표인 것입니다.
며칠 전부터 감기기운이 있는지 편도가 부었습니다. 병원에를 갔다 왔는데도 약을 먹는데도 내리지를 않습니다. 이것은 저의 몸에 감기 바이러스가 들어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맨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보이지 않아도 우리는 그것이 만들어 내는 증상들을 볼 수 있기 때문에 감기 바이러스에 나의 몸이 오염되었다고 하는 것을 금방 알게 됩니다. 목이 붓고, 콧물이 나고, 열이 나고 기침이 나고 쉽게 피곤해집니다. 뼈마디가 쑤시고 하면 이것은 눈에 보이지 않아도 감기에 감염된 것입니다. 유리창 안쪽에 있어서 지나가는 바람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빨랫줄에 널어놓은 빨래가 흔들리는 것을 보면 바람이 얼마나 세게 부는지를 알 수 있듯이 말입니다.
기독교는 이렇게 인간이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모든 육체의 고통, 자원의 결핍 때문에 겪는 모든 괴로움, 인간관계의 파괴로 말미암아 겪는 인간의 소외와 미움, 그리고 무지와 모든 결핍들이 그 자체가 아니라 보다 근본적인 원인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그 궁극적인 원인이 바로 죄이고, 이 죄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깨뜨렸기 때문에 그 결과로서 인간은 영혼의 죄가, 영혼이 죄로 감염되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지고 하나님의 생명을 힘입어 살 영혼이 결핍 상태에 있기 때문에 여러 가지 증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우리의 마음속에서 솟아나는 수많은 죄와 그리고 이 세상에서의 물질적인 불균등과 결핍, 그로 말미암는 고통, 육체의 질병 그리고 이 세상의 자연적인 재앙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불행한 원인을 근본적으로 고치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굶주린 사람들에게 떡을 주어야 합니다. 아픈 사람들을 치료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하고 외로운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 주는 것이 천국 백성의 삶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에게 모든 것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천국 백성의 사고방식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섭리적인 축복이 있고 영적인 축복이 있습니다. 섭리적인 축복은 사물들의 질서를 움직여서 우리를 그런 결핍과 인간관계의 파괴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주시거나 혹은 그것들을 어느 정도 고쳐주시고 완화시켜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축복은 하나님이 사물들의 질서를 움직이시는 게 아니라 우리의 영혼을 직접 어루만지셔서 그 진리로 말미암아 우리의 영혼을 행복하게 고쳐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섭리적인 많은 축복들은 영적인 의미를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어떤 사람은 그것을 읽을 수 있고 어떤 사람은 그것을 읽지 못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섭리 속에서 축복해 주셨을 때 사명을 발견하지만 어떤 사람은 그런 섭리적인 축복을 받고도 사명을 발견하기는커녕 자기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 도구로 삼아서 신앙을 이용하게 됨으로 하나님이 주신 축복 때문에 오히려 타락하고 미끄러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의 축복은 우리로 하여금 진리를 깨달아 영적인 축복으로 나아가게 하는 도구입니다. 정말로 복이 있는 사람은 이렇게 그리스도 예수의 왕적인 권위 아래서 모든 생애 속에 일어나는 사건들을 통해 진리의 말씀을 배우고 그 속에서 영적인 위로를 받고 하나님 앞에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진정으로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시편 1편에서 “복 있는 사람은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이로다”라고 말했습니다. 어떤 일이 있든지 간에 시련과 고통 그리고 고난과 핍박 속에서도 모든 섭리 속에서 일어나는 삶의 상황들을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일에 사용하고 거기에서 자신의 영혼을 시시때때로 어루만지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며 영적으로 변화되는 사람들, 이 사람이 진정으로 복된 사람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팔복산에 왕처럼 좌정하셨고, 그 모든 사람들은 그 발아래 고요히 앉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병 고침 이상의 놀라운 행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이십니까? 그 예수 그리스도가 지금 이 예수 그리스도처럼 여러분의 마음의 산 위에 좌정하고 계셔서 왕처럼 말씀하시고 여러분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은 그 예수 그리스도의 발 앞에 굴복해 그 음성을 들으며 그 분께 복종하고 있는지 살펴보기를 바랍니다. 여기에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약하고 비천하지만 그리고 신앙이 있다고 해도 그 신앙은 거미줄 같아서 시련과 폭풍이 나의 삶을 뒤흔들어 놓을 때, 사랑하는 사람들이 죽음의 강을 건너 내 곁을 떠날 때에도 때로는 나의 삶은 근본부터 요동칠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들을 주님을 위해 포기하여야 할 때도, 때로는 우리의 인생이 뿌리부터 흔들리는 충격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의 마음속에 왕처럼 좌정하고 계시다면 그래서 변화하는 우리의 모든 삶 속에서 그 모든 것들을 사용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만 한다면 내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그 분의 발 앞에 부복해 그 진리의 말씀에 충성스러운 신하처럼 귀를 기울인다면 우리는 지금 어떠한 형편에 있든지 간에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찬양)
폭풍우 흑암 속 헤치 사 빛으로 손잡고 날 인도하소서
우리의 육신의 부모는 종종 우리를 버립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 우리 아버지는 그렇게 하시지 않습니다. 언제나 거기 계셔서 버림받은 우리들을 영접하시고, 우리를 정복하고 지배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하나님 통치 받는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들이 되게 하시려고 우리 마음 안에 왕처럼 좌정하셔서 우리를 통치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렇게 우리의 마음 안에서 먼저 이루어지는 것이니 여러분이 예수님을 만나고 깊이 변화되어 그 분을 여러분의 마음속에 왕으로 모시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B. 산에서 듣다
이 위대한 천국 복음의 산에서 울려 퍼졌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르던 많은 무리들은 산에서 그 복음을 들었습니다. 왜 많은 사람들이 몰려다니는 저자거리가 아니라 성문 앞이 아니라 유대인들이 많이 모인 회당이 아니라 이 고요한 팔복산에서 이 유서 깊은 산상수훈을 베풀어주셨을까요? 나는 이 본문을 볼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합니다. 4장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어마어마한 인산인해를 이루며 모였습니다. 병 고침을 받는 기적의 현장을 보며 소리치고 박수를 치며 기뻐하고 눈물도 흘렸을 것입니다. 상당한 시간이 지나간 후에 사람들은 돌아갔고,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정말 병 고침 그 사건을 통해 그 너머에 그 이상의 무엇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 산에까지 올라왔습니다. 기적적으로 베풀어 주신 물고기와 떡이 담긴 도시락도 베풀어지지 않았고, 거기에서 눈먼 자가 눈을 뜨고 귀신들린 자가 소리를 지르며 완치되는 기적도 없었습니다. 고요히 들려오는 예수님의 왕 같은 선포만 있었고 아무도 거기에 토를 달거나 대항하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온전히 집중된 마음으로 상당히 긴 시간 동안 베풀어졌을 이 천국 복음을 듣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들을 번잡한 거리, 그리고 수많은 삶의 상황들이 있는 집에서 떼어내어 이 산에 불러 예수님은 수많은 병자들을 고쳐줄 때에 정말 예수님이 보여주시고 싶으셨던 그 진리를 베풀어 보여주시기 시작하였습니다.
여러분 믿음이 무엇입니까? 에이든 윌슨 토저라고 하는 작가는 요한복음 3장을 해설하면서 믿음은 하나님을 향한 영혼의 응시라고 정의하였습니다. 마치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뱀에게 물려 죽어가고 있을 때에 구리뱀을 만들어 지팡이 끝에 매달아 높이 들었을 때 그것을 바라본 이스라엘 백성들은 나음을 얻었던 것처럼 그렇게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인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응시하는 것이 믿음이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마음의 집중과 영혼의 진정한 변화가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복잡한 시내 거리에서 떼어내어, 삶의 수많은 사연들이 있는 가정에서 그들을 불러내어 한적한 이 산에 모으셨고, 그리고 병 고침으로 만족하던 사람들은 모두 돌아가도록 내버려 두시고 그 이상의 무엇을 찾는 사람들, 그래서 하나님을 진정으로 하나님으로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이 천국 복음을 베풀어 주셨던 것입니다. 마음의 집중은 영혼의 진정한 변화의 가장 중요한 조건입니다. 마음이 집중하여 우리가 지성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으려고 하고 무슨 말씀이든지 복종하려고 하는 의지의 헌신이 있을 때에 여기에서 우리는 보다 깊은 생각을 하게 되고, 하나님과 홀로 대면하는 기회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마음은 어디입니까? 매주일 예배당에는 나오고 설교를 듣지만 여러분의 마음이 저자 거리와 같이 시장 바닥과 같이 흩어져서 들려지는 천국 복음은 여러분의 귀에 도달하기도 전에 흩어져 버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세상에서 들려오는 잡다한 소리들이 너무 커서 여러분을 진정으로 하나님의 나라로 이끌 진리의 말씀은 정작 여러분의 마음의 귀에 들리지 않는 것은 아닙니까? 깊이 생각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이 시간에도 당신에게 마음을 집중하고 이렇게 자신의 모든 행복이 하나님 안에 있다는 것, 하나님 바깥에서 인간이 행복해 보려고 하기 때문에 결국은 마음의 영혼의 고른 상태가 무너지고 그리고 마음은 출렁거리며 하나님의 진리의 평강으로부터 멀어진다는 사실을 기억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여러분이 이렇게 유서 깊은 천국 복음이 산에서 선포된 것처럼, 갈릴리 새벽 해변에서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처럼 여러분의 마음이 구별되어 하나님의 음성만을 듣는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은 어떤 마음입니까? 정말 세상도 없고, 나도 없고 이 산에서 오로지 말씀하시는 한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행복을 얻어 보려고 했던 이 청중과 같은 마음의 상태인지 한번 자신을 살펴보시기를 바랍니다. 만약에 그런 마음이 아니라면 여러분은 깊이 하나님 앞에 자신을 성찰하며 은혜를 구하여야 합니다. 흩어지는 여러분의 마음에 조각난 파편들로는 절대로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과 천국의 복을 누릴 수 없습니다. 마음을 다해 주님의 얼굴을 구하고, 그 은혜를 위하여 매달리는 가난한 심령이 되기를 바랍니다. 일주일 동안 이 예배를 위해 얼마나 기도하셨습니까? 매시간 이 팔복산에 올라 예배를 위해 기도하고 자신의 영혼의 변화를 위해 진지하게 하나님 앞에 매달린다면 여러분은 불과 몇 주가 지나지 않아서 주님을 깊이 만나고 새 인생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C. 무리들이 나아옴
예수님이 그렇게 좌정해 앉으셨을 때 무리들이, 제자들이 나아왔습니다. 여기에서 제자는 12명의 제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열렬히 따르던 많은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병만 고쳐주니까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오직 육신의 병을 고치는 이 세상에서의 번영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병 고침만 받고 예수님이 진정으로 그들에게 베풀어 주시려고 했던 천국 복음은 듣지 않고 가버렸지만 어떤 사람들은 이 병 고침과 문제의 해결은 단지 보다 더 깊은 진리로 인도하는 수단이었을 뿐이고, 예고편이었을 뿐이고 더 깊은 그 속에 진리를 알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미신 이 진리의 말씀은 당시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던 편견과 잘못된 신앙을 생각하면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아주 작은 외침이었고, 칠흑 같은 동굴 속에 비치는 실낱같은 빛이었으며 아무도 볼 수 없는 칠흑 같은 한 밤에 누군가를 향해 내미는 진리의 손길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 진리의 손길을 붙든 것은 아니지만 누군가가 진심으로 이 천국의 진리를 외치며 이 진리의 손길을 내밀었을 때 누군가는 이 손길을 붙들어 주는 사람이 있다는 확신을 가지셔야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예수님의 선포를 들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그 손을 붙들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V. 적용과 결론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우리의 인생과 깊은 관계가 있지 않습니까? 신앙과 인생의 관계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오늘 은혜를 받고 나의 영혼이 변화되는 이것이 나의 삶이 무슨 의미를 갖는지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생각하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진정으로 변화를 받는 일 없이 힘겹게 여러분의 인생을 살아가고 신앙을 등진다면 그래도 여러분은 인생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행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여러분은 하나님 바깥에서 행복을 찾으려고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바깥에서 행복을 찾으려는 사람은 잘못된 행복을 찾든지 혹은 하나님께 반항하면서 행복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의 행복의 근원이 하나님이시거늘 하나님을 대항하면서 행복해질 수 있다면 잠시는 행복이지만 그것은 더 큰 불행의 원인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하나님 안에서 행복해지는 길이 팔복산에 오르는 것임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이 설교가 계속되는 열주 내지 열서너 주 동안에 온 마음을 집중하고 이 설교가 끝나기 전 여러분이 정말 복 있는 사람이 되도록 그렇게 변화된 새로운 주님의 사람이 되도록 하나님 앞에 매달리며 헌신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가르치신 예수님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마 5:2)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오늘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팔복을 도입하는 마지막 구절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병 고침을 받은 많은 무리들 중 당신을 따르던 사람을 데리고 팔복산에 올라가 앉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나아올 때에 예수님께서는 천국복음을 가르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산상수훈입니다. 이 산상수훈과 예수님께서 산에 앉으신 광경에 고리가 되고 있는 이 짧은 말씀을 통해서 오늘 우리들이 신앙생활에 있어서 치명적으로 중요한 한 가지를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II. 가르치신 예수님
제일 먼저 오늘 이 도입부에서 성경은 예수님이 가르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가르치신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에디다스켄’(ἐδίδασκεν)이라고 되어 있는 ‘가르치셨다’라고 하는 이 과거 동사는 무언가 알지 못하는 새로운 지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여 깨우치는 동작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A. 영혼의 필요를 채우심
예수님께서 병 고침을 받은 많은 사람들이 그들 중 일부가 산에 오르셨을 때에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심으로써 그들의 영혼의 필요를 채우셨던 것입니다. 그들은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이었지만 그래서 예수님이 말할 수 없는 연민의 정으로서 그들의 질병을 고쳐주사 온전케 하셨지만, 그들에게는 육신의 병 고침 이상 그 무엇인가 필요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곤고한 육신, 병든 몸을 바라보면서 속히 치료받고 싶다는 마음을 가졌겠지만 예수님은 육신의 그 비참한 형편을 보면서 그보다 더 비참한 그들의 영혼의 상태를 바라보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으로 하여금 무리를 바라볼 때 가슴이 미어지게 만들었던 원인이었던 것입니다. 육신의 질병, 가난, 깨진 인간관계와 무지, 이 모든 인간을 불행하게 하는 원인들과 악들은 근본적으로 영혼이 병든 상태에 있는 징후입니다. 그래서 육신은 양식과 치료를 필요로 했지만 영혼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진리의 말씀을 필요로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그들의 병든 영혼을 진리의 말씀으로 치료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이들에게 가르치셨고, 이들은 이 말씀을 들었던 것입니다. 자, 이것이 바로 매우 중요한 기독교의 치명적인 진리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삶에 드러나는 각종 많은 악들과 고통의 문제들로 인해 혼란스러울 때가 있을 것입니다. 왜 하나님의 자녀들인데 죄가 없는 애매한 사람들인 것 같은데 왜 이런 저런 고난을 겪고 병들고 비참하게 죽어가는 것일까라고 하는 것 말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인간 사회 속에 있는 이러한 비참과 악들을 보면서 하나님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 확실하다고 단언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이 악과 인간이 경험하는 모든 고통은 외면적인 하나의 현상이고, 이것들은 보다 깊이 뿌리를 추적해 가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못되어 있는 영혼의 질병 상태와 연관이 있습니다.
B. 진리의 말씀을 가르치심
인류는 무엇인가 이 세상을 행복하게 해 보려고 무던히 애를 썼고 모든 노력을 경주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좀 더 나은 사회를 위하여 좀 더 철저한 법을 만들고 사람들을 교육시키고자 하였고 도덕을 가르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영혼의 질병의 상태가 너무나 깊으면 이 모든 치료책들이 잘 효과를 발휘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겉으로 드러난 병세가 아주 작고 가벼울 경우에는 대게 의사들이 바르는 약을 처방해 주지만 워낙 그것이 뿌리가 깊을 때에는 언제나 우리에게 주사를 놓거나 근본적으로 약을 먹거나 더 본질적으로 우리의 체질을 바꾸도록 권고합니다. 이처럼 이 세계에 드러난 악과 모든 비참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망가진 영혼의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에 현실 사회와 자신의 삶의 외면을 이 세상에 있는 자원으로 조금씩 바꾸고 개선해 보려고 하는 노력들은 약간의 도움은 주지만 언제나 미봉책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친히 질병을 고쳐주시고 먹여주신 사람들을 당신 앞에 나아오게 하여 이 진리의 말씀을 그들에게 들려주심으로 그들의 병든 영혼도 또한 함께 고치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일들을 진리의 말씀으로 가르치심으로 성취하고자 하셨습니다. 시간과 공간 속에 잠시 있다 살아가는 인간 존재는 영혼과 육체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둘 사이를 떼어놓을 수 없을 정도로 구분은 되지만 갈라놓을 수 없을 정도로 밀접하게 연관을 가지고 있고 그래서 이 세상에 있는 자원을 통해 우리의 육신을 공궤하여 어느 정도 행복한 삶을 살고 인간의 죄에서 오는 극심한 통증들을 어느 정도는 완화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죽어야 할 그의 영혼을 이 세상에 있는 자원으로 구원한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잠시 그 통증을 잊게 할 수는 있으나 궁극적으로 자신을 질병 상태에 몰아놓았던 하나님과 자신 사이의 깨어진 관계를 새롭게 고칠 수는 없기 때문에 세상의 자원으로 인간이 진정한 행복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셨고, 인간은 하나님을 멀리 떠나 죄짓고 악한 자들이 되었으나 하나님 앞에 돌아갈 능력은 없었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하나님과의 관계를 고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으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은총이 드러났고 이 은혜를 힘입은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믿음을 통해 구원을 얻도록 길을 열어주셨던 것입니다. 이로써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얻게 되고 이렇게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고치게 될 때에 잠시 후면 그 모든 육신의 증상들도 고침을 받을 수 있는 길을 하나님이 열어 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망가진 영혼들을 고칠 그 방법으로 진리의 말씀을 가르치셨고, 이것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이시면서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이유였던 것입니다.
일평생 그 분의 별명은 진리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그것이 일평생 예수님이 당신 자신을 사람들에게 소개한 방식이었고, 예수님의 사도들이 예수님을 소개할 때에 잊지 않았던 예수님의 별명이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하나님의 말씀만이 진리의 참된 반영이고, 이 하나님의 말씀만이 망가진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올바로 고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오늘도 천국 백성의 정체성과 그들의 생활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가 선행을 행하는 외적인 조건을 통해서 들어갈 수 있는 나라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들어가는 나라이고 하나님이 그들을 고치실 때에 그들이 어떤 사람으로 변화될 수 있는지 그 내면의 질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자, 여러분, 여러분의 오늘 신앙생활의 최대 관심을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모두 진리가 그리워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사람들은 아닙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멀리 떠나 방황할 때에는 진리의 맛도 몰랐고, 그리고 그 진리가 없기 때문에 여러분의 영혼이 곤고하다는 사실도 몰랐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다양한 상황과 형편을 주셔서 그 속에서 하나님의 도움을 바라지 않을 수 없는 마음을 갖게 만들어 주셨고, 이것이 바로 신앙의 동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다고 할지라도 그 구원을 자신의 공로도 자랑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그 믿음조차도 주님의 은혜로 주신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방황하고 고통을 받을 때에 여러분은 어디로 돌아가야 할지 몰랐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으며 하나님만이 우리의 영혼의 구원자이시며 그 구원자이신 하나님이 예수를 메시아로 이 세상에 보내셨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삶의 주권을 믿으며 그 주권을 행사하며 살아온 결과가 비참한 죄와 영혼의 깊은 곤고함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예수 그리스도를 굳게 따르기로 다짐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깊은 결단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말씀을 붙들었고 그 진리가 여러분을 그 모든 영혼의 질병 상태에서 건져내었던 것입니다. 사단의 권세는 깨뜨려지고 사망의 결박은 풀어졌습니다. 원수 되었던 하나님과의 관계는 사랑받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여러분은 어디 어느 곳에 가든지 성령이 함께 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진리의 말씀을 통하여 일어났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도대체 무엇을 믿으면서 살고 계십니까? 오늘 여러분의 곤고하고 병든 삶의 문제들을 여러분은 어떤 방식으로 해결하려고 하고 있습니까? 정말 여러분은 아직까지도 이전에 하나님 모를 때 살았던 방식에 따라서 이 세상에 있는 자원으로 여러분의 인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성경이 만약에 이것을 지지하였더라면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병을 고치고 그들의 아픈 데를 모두 고쳐준 다음에 이제 모든 것이 끝났으니 너희들은 행복하게 살라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고침을 받은 그들도 다시 질병에 들어갈 수 있고, 배불렀던 그 사람도 다시 그 다음날이면 배고플 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것은 모두 그들의 인생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 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병든 육신을 고쳐주시는 과정을 통해 아무 희망이 없는 육신의 질병을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의 손이 고쳐주는 것처럼 우리의 병든 영혼도 오직 이 예수의 진리로 말미암아 살림을 받을 수 있다고 하는 확신을 갖게 하시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고자 하는 자는 진리를 등지십시오. 그러나 살고자 하고 사람들이라면 진리 앞으로 나아와야 하고, 이 하나님의 말씀의 빛 아래서 사는 것 이외에 우리가 진정으로 생명이 있는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길이 없다는 확신을 가져야 될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완전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낙심하고, 때로는 이 세상에 있는 자원들의 부족으로 인해 고통을 받고, 때로는 사랑하는 사람들의 배신을 당하여 슬퍼하기도 하고 스스로 불순종하여 죄 가운데 빠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거기가 우리의 끝은 아닙니다. 수많은 믿음의 위대한 증인들이 모두 우리가 걸어갔던 그런 길들을 걸어갔습니다. 아무도 완전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온전하게 된 사람들 중에는 아무도 완전하지 않은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때로는 넘어져도 언제나 거기서 일어났고 쓰러져도 아주 짓밟히지 아니하고 주님의 말씀을 붙들고 일어섰습니다. 쓰러질 때는 언제나 우리 자신의 연약함 때문에 쓰러졌지만 일어설 때에는 언제나 하나님이 당신의 말씀을 보내어 쓰러진 우리를 일으켜 세우고 다시 붙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찬양)
이곳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부르셨네
주의 얼굴 구할 때 역사하소서
나는 똑같은 믿음의 순례의 길을 걷는 사랑하는 동료들인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절망은 없습니다. 그것은 모두 마귀가 우리에게 가르쳐 준 것이고, 그리고 하나님을 거스르는 이 세상에서의 믿음 없는 마음이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뛰어넘어 우리를 붙들고 계신 그리스도 예수 그 품에서 진리의 말씀을 받는다면 여러분은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III. “입을 열어...이르시되”
이어서 예수님은 입을 열어 이르셨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라고 하였습니다. 춘천에 가면 소양 댐이 있습니다. 거기 홍수가 나서 물이 꽉 차면 장관입니다. 거기서 배를 타면 설악까지 배를 타고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왜 그런지 비도 많이 오지 않지만 물을 그렇게 담아두지 않는데 일설에 의하면 금강산에 있는 댐을 터트려 쏟아지면 그것을 말하자면 수공을 대비하기 위해서 수위를 항상 낮춰놓는다고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예전에 물이 가득 찼을 때에는 거기서 배를 타면 굽이굽이 지나서 설악까지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그런 아름다운 호수였습니다. 물이 꽉 차면 할 수 없이 댐의 수문을 열어야 됩니다. 댐의 수문을 열면 그 문이 열리자마자 그 어마어마한 물이 그 수문을 통해서 쏟아져 나오고 수백 미터 절벽 아래로 물이 떨어지고 물이 바닥에 떨어져서 튀어 오르는 것만 해도 몇 백 미터가 될 정도로 그렇게 장관인 폭포의 광경이 연출됩니다. 그 광경은 미국에 있는 나이아가라 폭포 같은 것들은 아무것도 아닌 애들 장난입니다. 어마어마합니다.
A. 예수 안에 가득 찬 진리
나는 이 5장 2절을 보면서 언제나 그런 광경을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언제나 말이 없으신 분이었다가 이 팔복산에서 모든 사람들이 와 예수의 발 앞에 아마 앉았을 것입니다. 거기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고 오직 예수님의 큰 음성만이 울려 퍼졌을 것입니다. 예수님 손에는 아무 책도 들려있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 성경은 양피지에 두루마리로 만들어서 사용을 했는데 그게 어마어마한 분량이었기 때문에 수레에 싣고 다닐 정도였고 개인이 소장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그리고 회당에나 있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예수님의 손에는 성경을 가지고 다니실 수가 없었습니다. 중세 시대에 성경을 양피지에 필사하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성경 신구약 한권을 필사하려면 200마리의 양을 잡아서 가죽을 만들어서 그래서 한 사람의 필경사가 18개월 동안을 밤낮으로 베껴야지만 한권의 성경이 완성되고 이것이 당시에 커다란 집을 하나 팔아도 다섯 권밖에 성경을 못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합스부르크가의 어느 왕비가 당시 399권의 책을 가지고 있었는데 중세의 최대의 장서가 중의 한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더욱이 중세가 그랬으니 시대를 거꾸로 돌려 예수님 시대도 들어가게 되면 그 당시에 손에 들고 다니는 이런 성경이 있었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원고도 없고 손에 든 것도 없이 조용히 예수님은 말씀을 전하기 시작했고 입을 열자마자 예수님의 입에서는 청산유수와 같은 진리의 말씀들이 폭포수처럼 한량없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마치 큰 댐의 수문이 열린 듯 쏟아지기 시작했고, 이 예수님의 말씀은 끝없이 강물처럼 흘러가 5장을 적시고 6장에 넘쳐 7장에까지 흘러갔습니다. 이것이 산상수훈입니다.
어떻게 예수님이 이렇게 기탄없이 마음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입을 열자마자 쏟아낼 수 있었을까 이 질문에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니까요 라고 대답을 하는데 틀린 대답은 아니지만 그러나 완전히 맞는 대답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물론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탁월한 지식을 가지고 계셨지만 어릴 때부터 성경을 사랑하고 이 말씀을 배웠습니다. 묵상했습니다. 그리고 그 진리를 따라 사시고 이 진리를 자신에게 적용하심으로 이 진리는 자신의 것이 되었고 그래서 이 속에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쏟아져 나올 때에 마치 큰 댐의 수문이 열린 것처럼 거침없이 하나님의 말씀의 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처럼 이렇게 거침없이 예수님 안에 있는 가득한 진리를 댐의 수문이 열린 것처럼 쏟아낼 수 있는 사람이 우리 모두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불쌍한 영혼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할 신자의 사명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데 있다고 하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는 자기의 글속에서 전도란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사람들을 권하는 것이라고 정의하였습니다. 전도받기 전까지는 하나님 아닌 다른 것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불행해진 사람들을 그들에게 하나님만이 최고의 선이시며 아름다움이시라는 사실을 일깨워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심으로써 그들을 하나님사랑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질서로 돌아가게 만들어 주는 것이 전도라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영혼을 인도할 사명을 우리들에게 주셨고, 그래서 우리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진리의 말씀으로 인도하기 위해서는 이 진리가 우리의 마음에 가득차고 자기 자신의 내면화가 이루어져서 진리를 말하지만 남의 진리를 말하는 것처럼 들리지를 않고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삶을 말하는 것처럼 들리도록 그렇게 살아갈 소명을 주님께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가장 아름다운 삶은 높은 지위나 혹은 빼어난 외모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더욱이 잠시 있다 사라져갈 이 세상에서의 지위나 그리고 직분에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가장 아름다운 삶은 마음을 진리로 가득채운 삶입니다. 그래서 그 진리에 부합하는 삶을 살고 진리를 통해 자신이 빛나고 자신의 삶을 통해 그 진리가 증거 되는 일체의 삶을 사는 사람들은 이렇게 누구에게나 입을 열면 기탄없이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흘러나와 곤고하고 병든 사람들의 영혼을 치료하고 고치는 하나님의 수단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진리의 말씀을 가득 머금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B. 진리전달: 불멸의 수단
마지막으로 이 하나님의 짧은 말씀은 진리를 전달하는 불멸의 수단에 대해서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그 진리를 전달하는 불멸의 수단이 말씀, 혹은 입을 통하여 전파되는 말이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라고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말로 사람들에게 무엇인가 내용을 전달하는 것은 원시적인 수단이고 이제는 새로운 방식을 사용하는 시대가 되었으니 새로운 방식을 사용하자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미 미국에서는 오래전부터 예배 시간에 설교를 포기하고 설교할 시간에 드라마를 한다든지 영화를 보여준다든지 하는 일들을 하기 시작했고,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시도들이 여러 교회들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설교하는 시간에 설교 대신 여러 사람들이 나와서 토크쇼를 하는 교회도 있다고 하니 이것은 이미 벌써 하나님의 진리가 예배 시간에 전달되는 방식에 대한 심각한 회의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심리적으로 볼 때 이 말은 말하는 사람의 영혼의 움직임의 결과입니다. 그래서 말은 단순한 소리가 아닙니다. 소리는 아무 뜻이 없지만 이 말속에는 말하고자 하는 사람의 활발하게 움직이는 영혼의 움직임들이 그 안에 깃들여 있고, 이것들은 전달하고 있는 언어 그 이상의 어떤 힘을 우리에게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은 우리의 영혼에 힘을 주기도 하고, 또 말은 우리의 영혼을 거의 죽음의 상태로 데려가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지난 한 주간 동안 살면서 누군가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으면서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을 정도로 낙심한 적이 없습니까? 혹은 모두 죽어가는 것 같은 비참한 지경에서 위로와 사랑의 말을 듣고 다시금 인생을 살아야겠다는 소망을 발견한 적은 없습니다. 말이 가지고 있는 이 놀라운 힘들을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단지 전달할 다른 현대적인 수단이 없기 때문에 말씀으로 입을 열어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이 자체가 진리를 전달하는 하나님의 영구한 그리고 불멸하는 수단이기 때문에 이것을 사용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상천 이 하늘위에 뛰어난 탁월하신 분이심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들을 수 있도록 사람의 말로 우리에게 직접 음성으로 들려주시기도 하였고, 하나님은 또한 선지자를 세워 당신의 말을 대신하는 대언자들로 삼으셨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가장 위대한 일이 바로 말을 통하여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사람들에게 들려주신 것이었고 그리고 이것을 통해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이 모든 착한 행동의 의미를 이해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말은 객관적인 진리를 우리에게 전달해 주는 수단이 될 뿐만 아니라 이 말 속에 성령님이 역사하실 때 그 말씀은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는 강력한 힘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병든 영혼을 고치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죽어있는 영혼을 다시 살아나게 하는 놀라운 은혜를 우리에게 주는 수단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여러 해 전이었습니다. 한 7~8년 전에 편지를 한통 받았습니다. 어디 사는지도 알 수 없고, 누군지도 알 수 없는 자매가 편지를 썼습니다. 한 두어 통 편지를 받고 제가 한통 답장을 보낸 기억이 납니다. 지금은 그 사람이 어디서 살았었는지 누구인지도 다 잊어버렸습니다. 이제 시집을 가서 아이들을 둘 낳고 고단하게 살아가는 30대의 주부였습니다. 그래서 이제 밤중에 시어머니를 모시고 같이 사는데 그 가정의 내막은 잘 모르지만 어쨌든 아이들과 시어머니와 함께 자게 되었는데 아마 남편은 어디 갔었던 모양입니다. 어쨌든 모르겠습니다. 한참 잠을 자다가 새벽에 깼는데 시어머니가 일어나서 컴퓨터를 켜고, 컴퓨터를 보고 있더랍니다. 그래서 이제 자는 척 하고 이렇게 보니까 시어머니가 컴퓨터에 앉아서 노인네가 뭐하시나 했더니 컴퓨터를 켜 놓고 한참동안 들여다보시고 울기도 하고, 보기도 하고 그리고 슬며시 잠자리에 드시더랍니다. 그래서 이튿날 며느리가 물어봤답니다. “어머니, 밤에 젊은 애들도 아니고 오밤중에 일어나서 컴퓨터는 왜 키셨어요?” 그랬더니 그때서야 그 시어머니 하는 말이 “내가 밤에 잠이 안 올 때면 열린 교회 사이트에 들어가서 설교를 듣는다.” 근데 이 며느리는 그때까지 시집와서 시어머니가 전도를 했지만 교회를 안 나가고 있었습니다. “너도 한번 들어 보거라.” 그랬답니다. 그리고 며칠 지났는데 진짜 자는데 말똥말똥하고 잠이 안 오더래요. 그래서 이제 올라가서 컴퓨터를 틀어놓고 그리고 설교를 들었답니다. 아이들도 잠들고 모든 가족이 잠든 시간에 이어폰을 귀에 꼽고 설교를 들었는데 이 사람이 아마 태어나서 처음부터 끝까지 들은 최초의 설교였을 것입니다. 그 밤에 혼자서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자기가 구원받았다는 것을 확신하기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다음날 자신에게 일어난 것이 무엇인가 생각하고 다시 한 번 그 일을 해보리라고 맘먹고 그리고 자신이 확실히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과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 그리고 구원 받았다는 것,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고 두 달 동안을 기도하고 망설이다가 이제 어느 교회에 등록해서 출석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두 번째 편지에서 받았습니다.
제가 말씀드리려고 하는 요지는 이것입니다. 이 세상으로부터 온 것은 하늘로부터 온 것을 위해서 이바지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육신은 땅으로부터 왔지만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께로부터 왔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있는 자원이나 삶의 환경이 고통 하는 우리의 영혼의 아픔을 잠시 통증을 잊게 해줄 수는 있지만 하나님 없어 목마르고 지친 영혼을 해갈시켜 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직 진리를 통해서 가능하고 이 진리는 시대가 아무리 많이 흘러가도 하나님은 언제나 인간의 언어를 가지고 이 진리의 말씀을 전달하는 것이기 때문에 교회의 사명은 이 하나님의 지혜를 언어로 표현해서 말로 전달하고, 말로 가르치고, 글로 이해를 시키고 이렇게 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고 목회를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것을 실천하고 그 말씀을 자신의 삶에 적용하면서 사는 구체적인 길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배워가는 그것이 바로 목양이고 목회라고 하는 것입니다.
IV. 결론
그러므로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말씀드립니다. 여러분의 영혼이 곤고합니까? 여러분의 영혼이 고단합니까? 여러분의 마음 둘 곳이 없는 외로운 삶을 살고 있습니까? 물론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도 어느 정도는 그러한 고통을 경감시켜줄 수 있는 무엇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영원한 치료일 수는 없습니다. 곤고하고 삶의 희망이 없는 것 같을 때 오랜만에 찾아오는 사랑하는 친구, 그리고 처음으로 그 친구와 마주하면서 나를 다 받아주고 있다는 느낌,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과 나누는 한 끼의 맛있는 식사는 자살하고 싶은 사람의 마음까지도 바꾸어 놓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은 오직 하나님의 진리에 달려있고 그 진리를 우리들이 받아들이고 우리의 마음이 변화하는 것 없이는 궁극적인 해결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에 목마른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오래 예수를 믿고 신앙생활을 했다고 할지라도 여러분은 심령이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롭게 되어야 할 심령이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이미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고 할지라도 여러분의 영혼은 날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그 진리 안에서 새로워지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이 어떤 처지에 있든지 오늘 하나님의 진리에 대해 어떤 미각을 가지고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보기를 바랍니다. 그 옛날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허덕거리고 목마른 사람들이 되고 있습니까? 그래서 그 진리의 말씀을 너무너무 사모하고 그 진리의 말씀을 그리워하는 사람이 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잠시 있을 우리의 육체가 연약할 때에는 우리에게 건강을 주시기도 하고 양식을 베풀어 주시기도 하고 그래서 예수님은 기적으로서 이 일들을 행하심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우리의 육신이 이렇게 하나님의 돌보심을 매일매일 힘입어 살아가는 것처럼 우리의 영혼도 주님의 도움을 필요로 하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십니다.
우리 가만히 보면 넉넉하고 여유 있는 지금보다 오히려 가난하고 고통을 받던 때에 하나님 잘 믿었던 사람이 많습니다. 그 이유 중의 하나가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너무 어렵고 고통을 받는데 신앙은 있습니다. 그리고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없어서 그러니까 만원만 뜻하지 않은 수입이 들어와도 감격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나에게 주셨다고 확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신학교 다닐 때에 하여튼 너무 가난하고 눈을 뜨면 마주하게 되는 것이 결핍이었습니다. 그래서 아이를 하나 낳는데 얼마나 분유를 잘 먹는지 얘가 좀 식욕이 덜 했으면 경제에 도움이 될 텐데 그것도 마음이 아픕니다. 그래서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데 3학년 때 앞을 봐도, 뒤를 봐도 아무 희망이 없는 것 같은 상황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가정생활 좀 어떻게 해결해 달라고 하나님 의지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그 학기에 장학금을 아주 풍성하게 타게 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제가 섬기던 교수님이 당신 집에 오라고 하면서 심부름을 몇 가지 시키시더니 “김 전도사, 곤궁하지? 이거 좀 보태서 써라.” 그러면서 봉투를 하나 내미시는데 얼마가 들었는지 너무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교수님 댁을 나와서 밤중에 길거리 보도블록 위에 앉아서 봉투를 열어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25만원이 들었습니다. 그때 그게 등록금 전체의 절반 금액이었으니까 지금으로 따지만 한 150만 원 정도 되는 돈이었을 것 같습니다. 봉투를 들고 한없이 울었습니다. 그 돈 없어도 고통스럽지만 살았는데 그것은 나에게 돈이 아니라 하나님의 위로였습니다. ‘주님이 나를 버리시지 않았구나.’ 그래서 그때 마음속에 나도 일생을 살면서 할 수만 있으면 저 선생님처럼 정말 곤고한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그것은 정말 돈이 아니었고 위로였습니다. 다른 돈 같았으면 제가 썼을 텐데 하나님의 위로였기 때문에 그대로 아내에게 갖다 주고 하나님의 위로를 전했습니다. 우리 부부가 돈이 아니라 위로를 받았습니다.
(찬양)
이 벌레 같은 나 위해 큰 해 받으셨나
그런데 나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지금 누가 나한테 25만원을 넣어주면 내가 보도블록위에 앉아서 그 봉투를 세어 보면서 눈물을 펑펑 흘릴까? 아마 안 그럴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제는 그렇게 곤궁하지 않으니까 하나님이 뭘 주셔도 논리적으로는 하나님께로부터 왔다 그러지만 절실한 감사는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부요하고 형통할 때보다 가난할 때 신앙생활을 잘하는 측면도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난하고 힘들 때 조금 기도했다면 풍족하고 여유로울 때는 더 많이 하나님을 의지하며 영혼의 각질이 끼지 않도록 그렇게 우리 자신을 하나님 앞에 다듬고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항상 우리에게 기억하라, 잊지 말라 그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할 수 있으면 여러분 지금 힘들고 어려우면 가장 힘들고 어려웠던 때, 그래서 인생의 벼랑 끝에서 주님을 불렀던 때, 거기서 주님을 찾으며 어떤 마음으로 팔복의 사람이 되었었는지를 생각하면서 그렇게 여러분을 깨운 그 말씀이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다음 주부터 시작되는 이 팔복의 본론의 말씀에 여러분이 깊이 들어가서 이 설교가 끝나기 전 여러분이 이 팔복의 사람에 이르는 영적인 변화를 체험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1)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 5:3)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이제 제일 먼저 팔복의 말씀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 팔복은 산상수훈의 제일 앞부분에 나오는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산상수훈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백성들의 생활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첫 머리에 팔복이 등장합니다. 팔복은 무엇을 가지고 있는 상태가 아니라 어떤 사람이 된 상태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의 영적이고 정신적인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것이 장고한 세월의 성화와 그리고 훈련을 통해서 도달될 수 있는 상태인 것처럼 생각하고 심지어는 이것은 단지 예수님이 이상적으로 우리에게 제시한 바람직한 신자의 상태일 뿐이지 실제 여기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라고까지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이 이 팔복의 상태가 성화와 무관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장고한 세월의 성화의 결과라기보다는 영적인 변화의 결과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영적으로 변화를 받고 하나님의 은혜 아래에 있을 때에 비록 영적인 수준이 매우 낮은 신자라도 이와 같은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분명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팔복을 말씀하신 직후에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II. “복이 있나니..”
A. “복”의 구분
예수님께서는 이 의미 깊은 팔복의 첫 머리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라고 말입니다. 제일 먼저 “복이 있나니”라고 하는 이 구절입니다. 이것은 시편 1편에 나오는 “복이 있는 사람은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라고 한 그 문학적인 구조와 꼭 같은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 복을 구분해서 우리에게 제시합니다. 특별히 구약 성경에서는 복을 지칭하는 대표적인 두 개의 단어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데 첫째는 ‘베라카’라는 단어이고 두 번째는 ‘에쉐르’이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베라카’는 물질적인 유익으로부터 얻는 기쁨의 축복부터 시작해서 정신적인 즐거움에 이르기까지 아주 범위가 넓은 의미에서의 복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이 ‘베라카’의 복은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들만이 아니라 이방 백성들도 이 복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 한 예로 보디발의 집에서 종살이를 하던 요셉 때문에 그 보디발의 집이 복이 받았다고 할 때에 사용된 단어가 바로 이 단어입니다. 이에 비해서 ‘에쉐르’의 복은 신령한 복이고 물질과 우리의 육체에 대한 복이라기보다는 정신적이고 영적인 복이고, 하나님과 언약 관계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만 받을 수 있는 복이었고, 하나님의 신령한 은혜에 의해서 우리 영혼이 어루만져 주시는 그런 의미의 복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복이 있나니’라고 하는 이 단어가 희랍어 성경에 ‘마카리오이 호이’라고 나오는데 이것은 ‘마카리오스’라고 하는 단어의 복수형입니다. 바로 이 ‘마카리오스’라고 하는 단어는 ‘베라카’가 아니라 ‘에쉐르’를 옮겨 놓은 희랍어 단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는데 그 복은 영혼의 축복이고, 은혜로운 축복이고, 하나님께 구원받은 자들에게 베푸시는 영적인 축복이고, 신령한 행복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한마디의 말씀으로 예수님이 말씀하시려고 했던 천국의 성격은 분명해집니다. 그리고 인간이 추구해야 할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가 하는 것도 매우 또렷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인간의 불행과 고통은 이 세상에 있는 자원의 결핍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무지가 있는 곳에 지식을, 질병이 있는 치료를, 그리고 궁핍한 곳에 물질이 주어지면 그러면 사람들은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것들이 어느 정도는 인간의 비참한 상태를 개선해 줄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천국의 성격을 완전히 보여주지는 못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 안에 살아가는 것이 행복한 이유는 하나님의 나라가 먹고 마시고 입는 이 모든 것들을 해결해 주기 때문에 행복한 것이 아니라 그 하나님 나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직접적이고 친밀한 통치를 받는 데에 행복이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불행은 하나님 바깥에서 행복해지려고 하는데서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처음부터 그 행복을 하나님께로부터 얻고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그 복을 누리면서 사는 그 안에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정말 우리들에게 하나님이 주시려고 하는 진정한 복이 하나님 자신이 그 복의 근원이기 때문에 우리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유지하며 사는 것이 우리의 삶을 궁극적으로 행복하게 하는 최종적인 원인이 된다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하면서까지 자신이 행복해지려고 할 때에 행복해지려고 한 그 기대와는 달리 본인은 비참한 악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점에 있어서 분명히 해야 되는 것입니다. 예전에 자신을 주인 삼고 자기 행복을 위해 미친 듯이 살던 사람들이 그래서 죄 짓고 하나님을 멀리 떠나 비참해졌던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구원을 받은 후에 이번에는 예수를 힘입어서 옛날에 얻었던 행복을 찾아보려고 할 때에 이제 문제는 복잡하게 되고 신앙의 원리들은 얽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모든 부조화와 모순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복이 있나니”라고 하는 이 말씀은 우리에게 기독교의 본질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잘 보여주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본질은 사람을 외면적으로 행복하게 하는 데에 사명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기독교의 본질은 인간의 불행과 비참의 문제를 궁극적으로 해결하는데 있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고쳐서 그 분께로부터 오는 생명과 충만한 사랑을 누림으로써 궁극적으로 이 불행과 결핍의 문제를 해결하여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속에서 살아가게 하는 데에 기독교 신앙의 대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의미에서 복된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여러분도 아직까지도 여전히 이 세상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예전에는 내 힘으로 얻어 보려고 하다가 불행해지기만 하고 얻지 못한 세상의 행복을 이번에는 예수님을 해결사 삼아서 이 세상의 복을 얻어 보려고 한다면 여러분은 신앙의 문을 잘못 두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려고 했던 복은 바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서 그 끊임없는 생명과 사랑을 공급받음으로 이 모든 죄와 그 비참으로부터 벗어나는 궁극적인 행복이었습니다. 여러분이 신앙 안에서 이 복을 발견하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B. 현재적으로 누림
성경은 “복이 있나니”라고 말합니다. 희랍어로 ‘에스틴’(ἐστιν)인데 현재형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이다음에 행복을 누리게 되는 것이 아니라 심령이 가난한 만큼 즉각적으로 현재적으로 그 복을 누린다고 하는 것입니다. 천국은 크게 두 가지 측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현재적인 측면과 미래적인 측면입니다. 현재적인 측면이라고 하는 것은 원래 하나님의 나라는 미래의 이루어질 나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셔서 우리 모두를 죄의 그 결과인 비참으로부터 완전히 구속하시고, 이 세상의 마귀를 멸하고 죄를 도말하실 때에 영원한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는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확실히 이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은 현재가 아니라 미래의 차원에 속한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이것이 미래에만 있고 지금은 그 천국과 아무 상관이 없는 시대라면 미래에 이루어질 그것만을 바라보면서 현재를 헤쳐 나가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미래에 임하게 될 하나님의 나라가 미리 침투해 들어와서 오늘 우리들이 일정한 한도 안에서 미래에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의 통치를 앞당겨 받는 사람이 있게끔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세상은 미래에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가 앞서서 침투한 가운데에 미래에는 종식될 세상 나라가 아직은 남아있는 긴장관계 속에서 사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이런 것들은 우주적으로 보아도 분명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만드신 이 자연의 모든 세계들이 아름답지만 여전히 이 자연세계 속에는 악이 존재합니다. 이것을 자연 악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 질서로부터 이탈해서 커다란 재앙과 자연의 재해들이 일어나고 이로 말미암아서 인간은 고통을 받습니다. 그런가 하면 이것은 인간의 세계 속에서도 나타납니다. 교회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모임을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미 앞당겨 누리고 있기 때문에 천국에 속한 사람처럼 선하고 은혜롭게 자기를 희생하며 남을 사랑하며 삽니다. 그러나 은혜가 떨어진 어떤 사람은 아직은 남아있는, 아직은 사라지지 않은 이 세상의 통치의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에 여전히 이기적이고 악을 행하고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써 교회를 혼란스럽게 합니다.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우리의 마음 안에서도 이것은 똑같이 일어납니다.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통치가 이미 임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고, 예수님만 사랑하고 싶고, 예수님께만 순종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가 하면 은혜가 사라지고 나면 이렇게 갑갑하게 주님의 지배를 받으며 살기보다 나를 주인 삼고 하나님께 불순종하면서라도 자유롭게 살고자 하는 악한 욕망이 우리의 마음속에서 움직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한편으로는 미래에 임할 나라가 이미 우리에게 온 것이고, 한편으로는 미래에 완전히 사라질 나라가 아직까지도 남아있는 이 혼재의 상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하늘나라를 현재적으로 누리지 못하고 미래에서나 누릴 수 있게 만들어 주셨다면 지금 이 시대를 빛과 소금으로 사는 것은 매우 어려운 것이고, 불가능한 것이기까지 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미래의 천국을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성령 안에서 오늘 누리게 하심으로써 아직은 완성되지 않았지만 완성될 그 나라를 앙망하면서 이 세상에 속했으나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갈 용기와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시계를 한 50년 전으로 거꾸로 돌리면 우리나라는 이 세계에 비슷한 국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지독하게 가난했습니다. 나는 여러분이 그 역사적인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참 좋겠습니다. 얼마나 가난했는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가난했고, 여러분이 50년 전에 만약에 우리의 생활의 참상을 본다면 이게 어느 나라일까 하고 궁금해 할 것입니다. 온 도시에는 거지들이 넘쳐나고 결핵 투성이의 나라였습니다. 심지어 시장에 가면 미군들이 신고 다니던 군화를 볶아서 파는 음식점이 있었습니다. 안 믿어지시죠? 그것을 고기라고 먹었습니다. 그렇게 가난하던 시절에 먹고 살기 어려우니 아이들 간식 같은 것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아이들은 올망졸망 수많은 아이들이 갈 데도 없고 어울릴 데도 없으니까 그냥 땅 바닥에서 구슬치기, 망까기, 딱지치기, 땅따먹기하면서 땅하고 노는 것입니다. 새카만 아이들이 오후에 네 시쯤 돼서 배가 고플 때가 되었는데 저기 골목 끝에서 엿 장수가 나타나고 가위를 요란하게 짤랑거리면서 나타납니다. 아이들이 새카맣게 몰려갑니다. 그러면 아저씨가 엿 판을 가운데 놓고 일장 연설을 합니다. “이 엿으로 말할 것 같으면 울릉도에서 해온 호박엿인데 무지하게 맛있다. 내가 너희를 파송하노니 가서 고물을 가져와라.” 그리고는 그것을 조그맣게 잘라서 캔디 반 만하게 잘라서 입에다가 넣어줍니다. 그러면 단거라는 것을 맛도 못 보는 애들이 달콤한 엿이 혀 사이에서 녹아가지고 목구멍을 적시면서 다 빨려 들어갈 때 아이들은 거의 환각 상태가 되고 세상의 모든 만물이 고물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집에 가서 자고 있는 할머니 고무신, 형이 잠깐 보다가 내 놓은 책, 엄마가 땜장이 아저씨 오면 때우려고 걸어놓은 냄비, 심지어 개가 먹던 밥그릇까지 들고 와서 다 엿을 바꿔 먹습니다. 그리고 한 10분 동안 즐겁게 먹고 그날 밤 골목 여기저기서 터지는 소리가 들립니다. 실화입니다. 때리기도 그때는 왜 그렇게 심하게. 어른들이 악에 받쳐가지고 애를 패도 툭툭치는 게 아니라 저러다 죽지 그럴 정도로 패는 것입니다. 무시무시합니다.
그런 맛보기를 하나님이 우리에게 먼저 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들이 누리는 성령의 은혜, 말씀을 통해 깨닫는 성령의 은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격, 이런 것들이 바로 하늘나라에서나 맛볼 수 있는 것인데 하나님이 맛보기로 주셔서 그래서 이제 우리들이 이 험한 세상에서 미래에 임할 나라가 침투되어 오고 종식될 나라가 아직 남아있는 이 긴장 속에서 하나님 의지하며 살 수 있는 원동력으로써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이 오후의 시간에 이렇게 나와서 마음을 모으고 하나님 앞에 말씀을 기다리고 예배를 드리는 것도 바로 이런 험한 세상을 이기면서 살아갈 수 있는 그 천국의 맛보기를 우리에게 주셔서 그래서 그 힘으로 이 비참한 세상에서 하늘 자원을 힘입어서 살아가도록 도움을 얻기 위해서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배드리고 주님을 경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말씀을 생각해 봅시다. 정말 여러분은 우리 주님이 보실 때에 복이 있는 상태입니까? 정말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어서 결핍과 고통으로 가득 찬 세상을 지나면서도 능히 그 모든 시련과 괴로움을 이기며 살아갈 수 있는 그 무엇이 하나님께로부터 공급되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 보실 때에 ‘아 그대는 복이 있는 사람이구나.’ 라고 말하실 수 있는 상태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세속적인 그리스도인은 예수 때문에 행복해지고 싶어 하지만 경건한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힘입어 거룩해지기를 바라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여러분의 인생에 당면한 문제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정말 하나님께서 이 기독교 신앙을 통해서 여러분에게 주시려고 하는 하늘나라를 지금 현재적으로 누리면서 살고 있는지 물어보시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정말 이 땅에서는 아직까지도 죄의 영향으로 나의 부족으로, 자원의 부족으로 비참과 슬픔이 있지만 하늘나라의 신령한 은혜의 복을 충만히 누림으로 어두운 세상에서 빛으로 맛없고 아무 무미건조한 세상에서 소금으로 사는 성도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III. “심령이 가난한 자”
A. “그 심령이”(τῷ πνεύματι)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런 복을 누구에게 선언하셨습니까? 말씀하십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말합니다. 희랍어 성경에 ‘토 푸뉴마티’(τῷ πνεύματι)라고 되어 있는데 정확하게 말하면 “그 심령에 관한한” 혹은 “그 심령에 있어서 가난한 자는 복되도다.”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유독 여기서 예수님이 그냥 가난한 자라고 말씀하지 않고 그 심령에 있어서 가난한자라고 한정하신 것은 우리에게 하늘나라의 본질, 기독교 근본적인 정신이 무엇인지를 훌륭하게 보여줍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에 물질적으로 가난한 사람들, 육체적으로 질병 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더 불쌍히 여기신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비록 열렬한 신앙이 없어도 그렇게 가난하고 굶주리고 병들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예수님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기적의 양식을 먹이시고 이적적인 치료를 베풀어 주심으로 그들을 굶주림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질병에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렇지만 만약에 그것이 전부였다면 예수님은 오늘 무리들을 데리고 산에 올라가 앉으셔서 입을 열어 이 유장한 산상수훈의 복음을 가르치실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에게는 물질적으로 가난한 모든 사람들이 복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가난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들이 모두 심령이 하나님께 가까이 나와 있는 것도 아니고, 주님의 나라를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성경적으로 볼 때 부하고 가난한 것은 중립적입니다. 가난한 것 자체가 덕이 될 수도 없고, 부유한 것 자체가 부끄러움이 될 수도 없고, 더욱이 그것이 공로가 될 수는 더더욱 없습니다. 무엇을 위한 가난함이냐, 무슨 동기에서 부자가 되기를 원하느냐 이것에 의해서 부자와 가난함의 도덕성이 판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물질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아니라 그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 이 사람들이야 말로 하나님의 나라를 통째로 받을만한 사람들이다 라고 말씀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애통하는 사람에게는 위로를, 온유한 사람들에게는 땅을 기업으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에게는 배부름을, 긍휼히 여기는 사람들에게는 긍휼히 여김을 받게 해 주실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들은 모두 하나님의 나라에서 누리는 복의 일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애통하는 자에게는 위로를 주셨지만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그 천국 자체를 통째로 주어 버리셨습니다. 그러니까 심령에 가난함이 없는 애통은 위선입니다. 심령에 가난함이 없는 온유함이라고 하는 것은 자연적인 기질입니다. 심령에 가난함이 없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라고 하는 것은 육욕적인 정의감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심령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자리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토 푸뉴마티’라고 되어 있는 이 단어는 ‘푸뉴마’의 변형입니다. 직역을 하면 영혼이라는 뜻입니다. 이 ‘푸뉴마’는 인간 마음을 움직이는 기원이 되는 핵심적인 자소입니다. 그래서 이 인간의 마음의 핵심적인 자리에서 인간은 하나님을 사랑하기도 하고 자기를 사랑하기도 하고 어떤 인간을 죽도록 사랑하기도 하고 미워하기도 하며 자기를 주인 삼기도 하고 자기를 정죄하여 하나님 앞에 굴복시키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한 사람의 삶은 마음이 무엇에 의해서 장악되어 있느냐에 달려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면 오늘 여러분의 심령은 누구의 것입니까? 그리고 오늘 여러분의 심령에는 무엇이 가득 차 있습니까? 그 심령의 보좌에는 누가 앉아서 여러분의 마음을 통치하고 있습니까?
(찬양)
우리의 심령 주의 것이니 당신의 형상 만드소서
사랑과 충성 늘 바치오리다
이 심령이 예수의 것 되시기 바랍니다.
B. “가난한자들”
“이 심령이 가난한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호이 푸토코이’(οἱ πτωχοὶ)라고 하는 이 단어는 원래 ‘파산선고를 받은 사람들’ 이런 뜻입니다. ‘푸토코스’라고 하는 이 단어는 ‘가난한’, 혹은 ‘가진 것이 없는’, ‘파산선고 받은’, ‘비참한’ 이런 뜻인데 동사 ‘푸토소’(πτωχός)에서 왔습니다. 그리고 이 단어는 ‘움츠러들다’라는 뜻입니다. 가난한 사람은 움츠러듭니다. 어디 가서 내 놓을 것이 없습니다. 친구들과 어울려 밥을 먹으러 가도 가난한 사람은 움츠러듭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돈을 낼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사람은 예나 지금이나 기를 펴지 못합니다. 그러니 그 당시에 가난한 자들은 지금에 비해서 얼마나 더 비참했겠습니까?
빚을 많이 져서 법원에 의해 파산 선고를 받았습니다. 집달리들이 밤중에 들이닥쳤습니다. 그리고는 온 집안에 빨간 딱지를 붙였습니다. 이것은 압수가 되어 나라의 것이 되었으니 이제부터 당신 물건이 아니니 손대지 말라 하는 뜻입니다. 만약에 손을 대면 처벌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는 이제 옷가지 몇 개, 이불 한두 개 싸가지고 길거리로 쫓겨났습니다. 때는 추운 겨울이었고, 어두운 밤이었습니다. 눈보라가 거칠게 몰아치는 밤중에 아이들과 함께 길거리에 쫓겨났고 흔들리는 보안등 아래에 가족들이 모였습니다. 사면을 돌아보아도 오늘 이 추위를 피하기 위해 신세를 질만한, 도움을 줄만한 사람이 떠오르지 않았고 어떻게 이 가족들과 어디로 피해야 할지 대책이 없었습니다. 아이들은 춥고 배고프다고 울기 시작하고 아내의 눈에도 이슬이 맺혔습니다. 이 상태가 바로 ‘푸토코스’의 상태입니다.
심령이 이렇게 파산선고를 받은 것 같아서 아무것도 도움을 받을만한 데가 없는 절체절명에 이른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천국을 통째로 주신 것입니다. 여기에 신약 복음의 말하자면 진수가 담겨있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잘 섬기는 공경이 강조되었는데 이상하게 신약에서는 이 공경도 강조되지만 이 공경을 위해서는 믿음이 있어야 된다는 것이 수없이 강조됩니다. 그 믿음의 본질을 이 ‘푸토코스’라고 하는 단어가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 그래 나도 그렇게 되리라고 믿어.’ 이것은 하나의 지식적인 동의입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자신의 영원한 운명과 관련된 사안에 있어서 다른 어떤 곳으로부터도 구원의 도움을 받을 길이 추호도 없는 상태에서 살든지 죽든지 벼랑 끝에서 하나님만을 의지하지 않을 수 없게 된 ‘푸토코스’의 상태, 이 상태에서 하나님을 향한 정신의 활동이 신뢰로 나타나는데, 의존으로 나타나는데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그러니까 이 믿음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주어진 구원의 길 이외에는 아무 데도 구원의 길이 없다, 나는 아무 가치가 없고 그 분이 내미시는 은총의 손길 이외에는 나에게 추호의 희망이 없다는 마음을 동반한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 예수님은 천국의 일부가 아니라 천국 그 자체를 통째로 주어서 누리게 하신 것입니다.
1. 자기를 의존하지 않음
이렇게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의 결정적인 두 특징이 있는데 첫째는 자기를 의존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첫 번째 복은 이제껏 살아온 자기 인생에서의 자기중심성을 버리고 하나님 중심성으로 회귀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모든 불행과 고통의 궁극적인 뿌리이고 원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하나님 없이 살 때에 자기가 이 온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하고 최고의 가치는 자기의 행복이라고 믿습니다. 이 두 개를 가장 높은 곳에 놓고 나머지는 그 아래에 배열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인생의 벼랑 끝에서 그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제껏 까지 자기를 임금 삼으며 자신이 시키는 대로 살아서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자기를 자기만큼 사랑해 주는 사람은 없다고 굳게 신뢰하며 자아와 일치를 이루면서 살았는데 복음의 빛이 들어오면서 이 일치를 이루는 연합이 깨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결국 그렇게 자기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자기에게 순종하며 자기를 행복하게 해 주는 사람은 자기밖에 없다고 믿고 살아온 그 결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그분께로부터 오는 모든 천국의 복락을 누리지 못하며 살아가는 비참한 상태가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자신에 대한 철저한 배신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푸토코스’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자기를 믿고, 신뢰하고 그리고 자기를 사랑하던 이 마음이 깨뜨려지면서 믿을 수 없는 것이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나를 나의 인생의 주인으로 삼은 것이 인생의 최대의 실수였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그러면서 자기를 거부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자기 부인입니다. 그리고 자기를 처벌합니다. 그리고는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상식보다 성경의 진리를, 자기의 육욕보다 성령의 인도를 더욱 신뢰하며 하나님께 돌아가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가난한 심령을 가진 사람의 특징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자기를 의존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씩씩하게 사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하나님 없이 씩씩하게 살아가는 그것이 하나님께는 최대의 반항입니다. 얼마나 더 많이 여러분 자신에게 배신을 당해야지만 자기를 향한 의존을 버릴 수 있을까요? 충분히 피해를 입고도 여전히 하나님보다는 자기를 의존하려고 하는 그 마음은 결국은 가난한 마음이 아닙니다.
2. 하나님을 절대 의존함
이 가난한 마음의 두 번째 특징은 반대로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마음입니다. 자신의 비참한 상태를 절실하게 인식할 때 아무도 자기를 도울 수 없다는 사실을 절대적으로 깨달을 때 하나님의 도우심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은 하나님의 도움을 받을만한 선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무조건 하나님이 자기를 불쌍히 여기고 자비롭게 대해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심령의 가난함입니다. 그리고 이 심령의 진실한 가난함은 그 무엇에 의해서도 대체 불능한 절대적인 가치 그리고 이것이 바로 종교개혁자들이 발견했던 믿음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의롭다 함을 얻게 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언젠가 교회의 문을 두드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가난한 마음이 되어 무릎을 꿇었던 때가 있습니다. 인생의 벼랑 끝에서 자신을 주인 삼으며 자기에게 복종하며 노예처럼 산 결과가 얼마나 비참한지를 깨달으며 나를 십자가에 못 박기로 다짐하고 예수와 함께 살기로 작정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 우리의 마음이 어땠는지 아십니까?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찬양)
나를 사랑하사 자기 몸 버리신 예수 위해 산 것이라
그때 우리는 교리적인 지식도 지금만 못했고, 신앙생활도 세련되지 않았습니다. 수준은 낮았지만 상태는 너무 좋았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심령이 언제나 주님을 찾을 때에는 파산 선고를 받은 사람처럼 우리 예수님 의지할 수밖에 없었고, 가난한 심령이 되어서 하나님의 말씀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얻어먹고 싶은 그런 마음으로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처음 사랑의 때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오늘 예배를 드리는 여러분의 그 자리는 지난주에도 앉았던 자리입니다. 한 달 전에도 앉았던 자리입니다. 그렇게 예배를 드리며 병든 여러분의 영혼, 여러분의 힘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삶의 현실들을 생각하며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하나님의 부어주시는 사랑이 아니면 나는 이 시련을 이기실 수 없습니다.’라는 마음으로 세상도 간곳없고 구속한 주 만 보이던 그런 눈물의 예배, 간절한 기도,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하나님 한분에게만 몰입하게 만드는 그런 간절한 주님을 향한 파산 선고 받은 것 같은 마음의 때 언제였습니까?
한 사람이 잘 살면 잘 삽니다. 그러나 한 사람이 비록 잘 못 살아도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면 죄가 있으면 하나님이 그들을 용서해 주시고, 진리의 빛이 모자라면 깨닫게 해주십니다. 능력이 없으면 능력을 주시고, 외로우면 하나님이 친구를 보내어 주십니다. 이 세상에는 인간 이외에는 하나님을 닮은 영혼을 가진 피조물이 없다는 점에서 인간은 무한한 존재의 가치를 가지고 있고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한 영혼이 천하보다도 귀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모든 사람이 절대적인 의미에서 동일한 가치가 있다고 하는 의미는 아닙니다. 하나님이 수많은 사람을 만나셨지만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났을 때 그렇게 기뻐하시며 “내가 그를 만나니 그는 내 마음에 합한 자라, 내가 그에게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던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습니다. 한 사람의 가치는 그의 사회적인 지위나 물질의 소유, 그리고 바람처럼 사라져갈 외모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에 한 사람의 가치는 그의 마음입니다. 마음에 상처를 받아 상하고 깨어져 당신만을 의존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이 보실 때에 대체할 수 없이 좋은 것으로 가득 찬 마음이고 이렇게 절대적으로 가난한 마음으로 주님의 얼굴을 구하는 사람은 추호도 하나님께 불순종이나 반역을 꿈꾸지 않습니다. 다윗은 이런 사실에 위대한 증인이 되었습니다. 순결한 삶을 살던 다윗은 범죄 했고 그리고 일찍이 경험한 적이 없는 영혼의 깊은 어두움 속에서 매일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에게는 많은 재물들과 제사장들이 있었고, 그래서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제사를 드렸지만 하나님은 차갑게 그 제사를 거절하셨습니다. 살을 에는 것 같은 고통스러운 연단의 과정을 통해서 이 시인은 지금으로부터 3000년 전에 복음의 진수중 하나를 깨닫게 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정말 기뻐하시는 제사는 애꿎은 짐승을 죽여서 드리는 제사가 아니라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으로 올리는 제사라고 하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통절하게 자기의 죄를 회개했고, 하나님은 어디 한군데 의지할 데 없이 어린 아이처럼 통곡하며 눈물로 침상을 띄우고 요를 적시는 이 시인의 회개를 받아주셨습니다. 그가 어린 아이처럼 마음을 찢으며 두려움 속에서 하나님을 향해 떨며 울부짖었을 때 그는 하늘의 영광을 본 위대한 철학자도 아니었고, 위대한 예언자도 아니었으며 수없는 전쟁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승리를 쟁취했던 위대한 장군도 아니었습니다. 그냥 하나님의 품을 멀리 떠나 방황하고 있는 상하고 찢어진 한 마리의 양에 불과했고 그래서 그는 하나님 이외에 자신을 구원해 주실 분이 없다는 사실을 자각하며 그는 자신의 왕의 신분도 잊어버리고 매일 눈물로 침상을 띄우며 하나님 앞에 통회하는 심령이 되었던 것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받아들일 마음, 주님이 싫어하시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버릴 마음, 그래서 어디로 가든지 하나님을 따르고자 하는 그 마음,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긍휼을 의지하는 어린 아이 같은 사람의 마음의 사람이 되었고 이것이 하나님께는 믿음으로 보였고 그래서 그의 믿음은 하나님의 자비를 불러와 그 모든 죄에서 깨끗함을 입었던 것입니다.
IV. 결론
문제는 도대체 우리가 언제 이렇게 상한 심령이 되어본 적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터질 것 같은 안타까움으로 우리의 가족들을 위해서 눈물을 뿌리며 기도한 적이 언제입니까? 우리의 가족의 구원받지 못한 영혼이 내 영혼의 고통인 것처럼 아파하고 괴로워하며 차라리 나의 생명을 거두시더라도 우리의 가족들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기도하던 심령의 가난함이 지금도 여러분에게 남아있습니까?
(찬양)
우리 죄와 강퍅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 하시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마음에 없이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일만 마디의 기도, 형식적으로 드리는 일천 번의 예배보다 심령 깊은 곳에서 주님께 목 말라하며 주님의 얼굴을 구하는 마음이 있는 한 번의 이 예배는 주님을 만나기에 적합한 충분한 제사입니다. 산처럼 보이는 여러분 앞에 있는 인생의 문제들을 사실은 문제가 너무 크고 높아서 여러분이 고통을 받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마음이 너무 높고 그리고 주님 의지하기 않기 때문에 고통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는 마음으로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목마른 것처럼 그렇게 주님의 얼굴을 구할 때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이 언제까지나 당신을 찾으며 눈물을 흘리며 매달리는 그 광경을 버려두실 수 없는 성품을 가지신 하나님이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모두 소유와 지위에 미친 시대에 오늘 팔복산에서는 인간의 진정한 행복이 소유와 지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심령의 상태에 있다고 하는 주님의 외침이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오늘 다시 한 번 하나님 앞에 여러분의 인생의 벼랑 끝에서 예수님을 만나던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때 여러분이 얼마나 가난한 마음이었는지, 어린 아이처럼 얼마나 간절하게 주님을 찾았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다시 그렇게 주님을 찾고 주님을 만나는 사람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2)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 5:3)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팔복 가운데 첫 번째 복을 두 시간에 걸쳐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심령은 영혼이 기능하는 중심적인 자리이고, 결국 이것을 통해서 인간의 마음의 품질이 삶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무엇을 소유하고 어떤 지위에 오름으로써 행복해질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오늘 예수님께서는 진정한 행복이 인간의 지위나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심령에 있음을 오늘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그 심령으로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은 사람이 되느냐가 행복의 가장 중요한 조건임을 말씀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인간이 어떠한 사상을 갖든지 그들에게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누구든지 행복하기를 원하지 스스로 불행하기를 원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한 인간의 불행의 원인도 가만히 살펴보면 인간이 행복해지려고 몸부림친 그 이유 때문에 불행해지는 것도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이 행복은 인간의 최대의 관심사이기 때문에 행복에 대한 관점이 올바르지 않을 때에 인간은 역설적으로 지독하게 행복하려고 몸부림친 바로 그것 때문에 인간은 불행에 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이러한 관심사를 제일 먼저 다루시면서 가난한 마음의 행복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II. 가난한 마음의 행복
A.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희랍어 성경에는 “왜냐하면 그 하늘나라가 저희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말입니다. 여기 ‘왜냐하면’이라는 ‘호티’라고 하는 희랍어 단어는 강력한 이유를 나타냅니다. 다시 말해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왜냐하면 천국이 저희 것이기 때문이다.”라는 말씀입니다. 진정한 천국이라고 하는 것은 그 하늘의 나라, 다시 말해서 하늘은 하나님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그래서 하늘 영광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키는 유대식 표현이고, 하늘나라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유대인들의 관념을 잘 드러내주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하나님이 다스리고 통치하시는 나라입니다.
B. 인간의 최고 행복
여기에서 우리는 인간의 최고의 행복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의 최고의 행복은 바로 그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고, 하늘나라는 바로 이렇게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은 그 안에서 하나님의 한없는 통치와 은총을 기뻐하면서 살아가는 삶을 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천국의 질서 속에서 하나님을 즐거워하며 사는 거기에 인간의 참된 행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물질이나 소유가 아닌 심령의 변화에서 하나님의 통치는 시작되고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가운데 인간은 그 통치에 복종하며 살 수 있는 하나님의 거룩한 생명과 사랑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렇게 인간을 창조하실 때부터 그 인간이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에 깊이 덕을 입어 하나님이 인간을 이 세상에 창조하신 뜻을 따라 살도록 하나님이 힘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이 세상에서 스스로 얻을 수 있는 자원이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께로부터 흘러나오는 은혜와 생명으로 말미암아 공급될 수 있는 자원이었습니다.
인간의 모든 불행은 바로 이렇게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창조된 인간의 영혼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모든 거룩한 은혜와 능력을 힘입어 살지 못하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육체는 어차피 잠시 있다 사라질 필멸의 존재이지만 영혼은 하나님과 함께 불멸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를 떠나서는 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베푸신 구원의 도리에 천착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중생하고 회심하는 것은 하늘의 문이 열리는 것이고, 은혜의 샘이 터지는 것이고, 하늘로부터 예전에는 받지 못했던 신령한 하늘의 자원을 공급받아 이기며 하나님 앞에 살아갈 능력을 얻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천국에서 누리는 것이고 하나님의 통치와 하나님과의 생명적인 관계없이는 그 어떤 것도 얻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심령이 가난한 자들에게 이러한 행복을 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애통하는 자에게는 위로를, 온유한 자에게는 땅을,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배부름을 얻게 해주시지만 심령이 가난한 자들에게는 천국을 통째로 주셔서 그 하나님을 누리며 살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바라보실 때에 가장 인간의 영혼이 아름다울 때가 두 번 있습니다. 한번은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할 때이고 또 한번은 인간이 죄에 대해서 깊이 회개하며 하나님을 앙망하고 그리워할 때입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인간을 당신 의존하며 사는 존재로 창조하셨고, 인간의 범죄는 바로 그 하나님을 떠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가난한 마음은 바로 그 죄로 말미암아 잃어버렸던 하나님께 대한 절대 의존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하나님 아니면 그 어떤 것으로도 자신의 가난한 심령이 채워질 수 없다고 하는 하나님을 향한 갈구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바로 이 갈구 속에서 열렬한 기도가 나옵니다. 바로 이 갈구 속에서 목숨을 건 예배가 나옵니다. 바로 이 갈구 속에서 자신이 하나님의 형상인 그리스도 예수를 온전히 닮고자 하는 깊은 몸부림이 나오는 것입니다. 바로 이 가난한 마음속에서 죄를 미워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그리워하는 주의 순결한 신부의 몸부림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 구절을 읽을 때마다 많은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아, 그래.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이렇게 큰 은총을 베풀어 주시는구나. 나도 정말 가난한 마음이 되고 싶다. 어떻게 무엇을 해야지만 내가 가난한 마음이 되어서 천국을 통째로 누릴 수 있겠습니까?’라고 묻습니다. 매우 어려운 질문입니다. 왜냐하면 어떻게 보면 가난한 마음이 되는 길은 인간이 자기의 노력만으로는 이룰 수 없는 그 무엇이기 때문입니다.
III. 가난한 마음이 되는 길
A. 표상들로부터 벗어남
그러면 어떻게 해야지만 우리가 가난한 마음이 되어서 천국을 누릴 수 있을까요? 첫째는 표상들로부터 벗어나는 것입니다. 표상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사물에 대한 해석입니다. 그런데 그 해석이 사물에 대한 올바른 해석이 아니라 하나님을 거스르며 살려는 인간의 욕망에 의해서 비뚤어진 해석입니다. 그리고 이것들은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도 그릇된 희망, 혹은 잘못된 절망을 우리에게 안겨줍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이런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높은 지위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심성이 올바르고 그 마음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얼마나 연약하고 무능한 존재인지도 알고, 또 매일매일 죄에 노출된 존재라는 사실도 너무나 잘 압니다. 그래서 매일매일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하나님을 의존합니다. 그러면 높은 지위에 올랐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나에게 왜 남다른 높은 지위를 주셨을까? 그리고 여기서 이 지위를 가지고 내가 어떻게 위로는 하나님을 올바로 섬기고 이 세상에는 불행하고 고통 받는 많은 사람에게 나의 지위를 통해서 하나님의 정의를 올바르게 하고 내가 할 수 있는 한 자비를 베풀어서 많은 사람들이 골고루 행복을 누릴 수 있게 할까’라고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는 자기에게 주어진 권력, 지위, 물질, 이 모든 사물들이 올바른 자리에서 각각 무슨 관계를 갖고 있는지가 자신에게 알려지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는 표상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그릇된 욕망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런 사람이 지위를 얻게 된다면 그러면 아래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자기가 이용하거나 지배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보이고, 자기에게 주어진 모든 권한, 물질, 이런 모든 것들은 자신에게 자기의 욕망을 성취할 수 있는 수단으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 안에서 자신에게 그런 지위를 주신 하나님을 섬기면서 행복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것을 우리에게 주신 것과는 다른 의도를 가지고 잘못 이용하면서 행복해지려고 애쓰게 됩니다. 이때에 그 지위나 물질, 이 세상에 있는 자원이나 사람들에 대해서 자신의 욕망을 가지고 잘못 해석을 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표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표상들에 인간이 사로잡히게 되면 죄의 한 가지 특성인 죄의 두 가지 놀라운 작용 방식이 있는데 하나는 지성에 관해서는 속임이고, 의지에 관해서는 강압하는 힘이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입니다. 술을 계속 먹다보면 술에 인이 박힙니다. 그래서 술을 생각을 하면 그것을 끊지 않고는 베길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의지와 욕망에 강압하는 힘입니다. 그런데 죄는 인간을 자꾸 속이는 놀라운 특성이 있습니다. 표상은 이러한 그릇된 희망과 잘못된 절망을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표상에 사로잡히면 하나님 앞에 대단히 위험한 영혼의 상태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잘못된 희망을 가짐으로써 하나님을 의지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또 이런 표상이 반대로 절망을 가져다주면 자기의 삶에 일어난 모든 사태들을 비관적으로 해석해서 하나님 앞에 자신이 버림받았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조차도 자신을 이 비참에서 구원해 줄 수 없다고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너무나, 너무나 다른 삶을 살고 싶은데 자기의 힘으로는 도저히 이 자기가 원하지 않는 삶의 자리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때에 인간이 죽음을 택하게 됩니다. 그래서 인간이 신앙을 가질 때에도 모든 것들이 아주 집중해서 보이고 그 신앙의 관계 속에서 모든 것을 해석하게 만들어 주는 놀라운 집중력이 있고 또한 절망할 때에도 아주 놀라운 집중력이 있어서 그 속에서 결국 인간이 좌절하고 자살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많은 종교와 사상들은 인간에게 타이릅니다. 너무 극단적인 욕망에 사로잡히지 말도록 표상에서부터 벗어나도록 우리를 타이르고 권고합니다. 그래서 비록 진실한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어느 정도 이 사물이 가져다주는 욕망적인 해석으로부터 조금만 자유롭기만 해도 인간은 훨씬 안정적인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하나님의 공평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종교와 신념, 자기 수련을 기독교 신앙 대신 택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천국을 누릴 수 있는 가난한 마음이 되기 위해서는 단순히 그저 욕망을 억제하거나 표상으로부터 잠시 벗어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성경의 진리를 통해서 모든 사물들의 빛을 비추어 그 진리의 빛 아래서 그것이 갖는 가치와 의미들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필요한 것이 뭐냐 하면 진리의 빛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인간이 진리의 밝은 빛을 받지 않는다면 인간은 필연적으로 육체와 영혼 중 육체만을 편애할 수밖에 없는 존재다.”라고 말입니다. 진리의 밝은 빛은 우리에게 그 모든 표상들로부터 벗어나게 만들고, 그래서 잠시 머물다 사라질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영화로운 것들이 하나님과 올바로 관계를 맺지 않는 한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표상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진리의 밝은 빛이 여러분을 비추도록 허락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을 모으고 뜻을 하나님께 집중해서 “나는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없는 비천한 존재이오니 하나님 주님의 말씀의 밝은 빛으로 짐승 같은 나의 마음을 비추어 주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진리의 밝은 빛을 지난 한 주간동안 얼마나 받으셨습니까? 정말 이 진리를 통해 하나님의 아름다우심과 그리고 하나님의 밝은 진리의 빛 아래서 나의 추루한 욕망과 육체의 욕심들의 껍질이 벗어져서 하나님 나에게 왜 이런 지위를, 왜 이런 물질을, 왜 이런 건강을, 왜 이런 젊음을, 나에게 왜 이런 좋은 관계들을 주셨는가를 그 의미를 여러분의 마음속에 새길 수 있었습니까? 혹시 비누로 표범의 얼룩을 지울 수 있다고 해도 인간의 그릇된 희망과 절망에 물들어 버린 이 표상은 인간의 외적인 행위로는 정결케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가장 비참한 죄인이라도 그의 마음을 비추는 진리의 참된 빛 때문에 흘리는 회개의 눈물은 그의 마음을 씻어 모든 욕망적 표상으로부터 벗어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매일 주님의 말씀의 빛 아래서 다시 태어나야 하는 존재입니다. 아침마다 그 진리로 새롭게, 저녁마다 그 말씀으로 온전케 되어서 그래서 매 순간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는 이 모든 사물에 대한 욕망적인 표상에서 자유로워질 때에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을 의존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의 빛을 구하며 눈물 흘려 보신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 제가 깨닫지 못하기가 짐승과 같사옵고 내 마음에 있는 욕망의 출렁거림이 나의 통제를 벗어나고 있사오니 오 주여, 오늘 이 시간에도 주의 말씀에 기이한 법을 나에게 깨닫게 하사 이 모든 거짓된 표상에 속지 않도록 나를 일깨우시옵소서.”라고 기도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B. 선행하는 은혜가 작용함
두 번째는 선행하는 은혜가 작용하여야 합니다. 결국 인간과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는 것은 환란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 같은 것들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의 지나온 삶을 돌아보면 지금보다 훨씬 고통스럽고 아프고 괴롭던 그 때에 하나님의 충만한 사랑을 느끼던 때가 있었습니다.
(찬양)
폭풍우 흑암 속 헤치 사 빛으로 손잡고 날 인도 하소서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시련을 능가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작용하였기 때문입니다. 죄는 하나님과의 절대적인 의존으로부터 독립하려는 인간의 자만심입니다. 하나님은 온 땅과 모든 만물 위에 초월해서 그것들과 전혀 관계가 없이 존재에 있어서 그것들을 의존하지 않고 당신 스스로 홀로 독립해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아름다우신 분이시지만 하나님 이외에 모든 피조물들은 이렇게 하나님을 의존하는데서 떠날 때에 더럽고 아주 추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원래 ‘아름답다’, ‘추하다’라고 하는 것은 위치와 관계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푸른 하늘을 나는 새들과 그리고 풀밭 사이를 뛰어다니는 다람쥐는 참 예쁩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안방에서 그렇게 날아다니고 뛰어 다닌다면 더럽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아름다움은 하나님이 지정해 주신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지정해 주신 자리는 하나님과 관계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의존하면서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아름다움입니다. 사람은 그렇게 생각 안할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의존하고 있을 때에 가장 아름다운 존재가 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마음에 먼저 작용할 때에 우리는 가난한 마음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임할 때에는 항상 소극적으로는 우리가 집착하던 삶이 얼마나 허무한지를 보게 만들어 주고 그리고 영원에 대한 인식을 도입해서 우리가 표상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것에 마지막이 영원에 비하면 얼마나 허무한가 하는 것을 깨닫게 만들어 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복음만 사용하셔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율법을 사용하셔서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셔서 우리의 비참을 보게 하시고, 사물의 불완전한 그리고 한계를 보게 하셔서 영원한 하나님의 두려운 심판 앞에서 우리가 하나님 없이 사랑하는 것들에 대한 손을 놓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가 임할 때에는 제일 먼저 외로운 마음이 우리의 마음속에 외로움에 대한 생각이 찾아옵니다. 그래서 은혜가 없을 때에 내가 믿고 의지하던 모든 것들이 하찮은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그러면서 하나님 한분을 갈망하는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적극적으로는 그렇게 나를 사랑하셔서 자기의 아들까지 내어주신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으로부터 내가 떨어져 나온 이 죄의 비참이 나의 잘못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용서와 은혜를 갈망하는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찬양)
우리를 사랑하신 자비의 주 아버지
주께로 나갈 때에 기도 들으사
우리 죄와 강퍅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 하시네
여러분도 언젠가는 불 꺼진 이 예배당 어느 한 곳에서 누구도 어루만질 수 없는 영혼의 고통 속에서 하나님 한분만을 앙망하며 주님의 은혜를 눈물로 구하는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나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한계 앞에서 주님의 도우심이 아니면 무엇으로도 고칠 수 없는 상처와 고통 속에서 우리 주님 한분을 앙망하며 마음을 물처럼 하나님 앞에 쏟던 때가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힘으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먼저 작용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마음이 되려는 사람들의 마음에만 이런 선행하는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래서 이렇게 가난한 마음이 되는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이렇게 가난한 마음이 되어서 이 세상에 있는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잃어버릴지라도 하나님께 소유되고 싶어 하는 가난한 우리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의지의 산물이기도 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의지 작용의 신비로운 연합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은혜를 간절히 구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C. 하나님 안의 행복을 생각함
세 번째는 하나님 안에 있는 행복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이 행복에 대한 생각은 당연히 지금 하나님을 멀리 떠난 자신의 비참과 대조를 이룹니다. 그래서 지금 하나님을 멀리 떠나 비참한 나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을 때에 얼마나 큰 행복을 누리면서 살았는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결국 하나님을 본뜰 수밖에 없는 존재이고, 하나님을 올바르게 본뜰 때에는 참다운 행복에 이르지만 하나님을 그릇되게 본뜰 때에 인간은 견딜 수 없는 비참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어떤 의미에서 행복해지려고 몸부림치면 몸부림칠수록 불행해지는 존재이고 자신의 행복에 아랑곳하지 않을 때에 오히려 진정으로 행복해질 수 있는 존재인 것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하기를 “참으로 인간이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요, 자기를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는 것이야 말로 자기를 사랑하는 길이다.”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성경은 모든 행복의 근원이 오직 하나님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은 만복의 근원이 하나님이심을 믿고 회심은 다시는 하나님 바깥에서 행복을 찾지 않겠노라고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돌이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은 늘 애통하고 그리고 늘 의에 주리고 목마르지만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불행한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애통과 목마름과 그리고 그 주림이 자신의 행복을 위한 주림과 목마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안에 행복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멀리 떠난 자들은 극단적으로 불행해지고 비참해지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을 떠난 사람들이 그 극단에 비참과 불행 속에 버림받도록 내버려 두시지 않습니다. 언젠가 천국과 지옥도 모르고 이 세상에서 나 자신의 행복만을 찾아서 방황하고 죄 짓고 불행해졌던 우리에게 하나님이 어떠한 사랑을 보여주시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눈물을 흘리며 우리의 죄를 참회하고 십자가에 나타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기로 다짐했을 때 그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행복을 위해 사는 것이 얼마나 불행한 것인지를 깨닫게 되었고, 하나님 그 분 안에만 우리의 참다운 행복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매일매일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 안에서, 성령의 위로 안에서 누리는 행복은 바로 하나님만이 우리의 행복의 근원이시라는 사실을 보여준 훌륭한 증거였습니다.
(찬양)
주님과 같이 내 마음 만지는 분은 없네
오랜 세월 찾아 난 알았네 내게 주 밖에 없네
하나님 밖에 비참을, 하나님 안에 있는 행복을 생각하고 주님께 돌아가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D. 기도로써 그 마음을 표현함
마지막으로 가난한 마음이 되는 길은 기도로써 그 마음의 열망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생각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스치듯 잠시 표상으로부터 벗어났을 때 주님의 선행하는 은혜가 우리에게 매우 조금 작용하기 시작할 때 우리의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떠난 비참과 하나님 안에 있는 행복이 스쳐갈 때 그때 우리는 그 기회를 굳게 붙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마치 모닥불을 피우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의 불을 붙여야 합니다. 모닥불을 붙일 때에 큰 나무의 불을 붙이는 것이 아니라 작은 마른 나무 이파리, 작고 가느다란 가지들을 모아서 작은 불씨로 불을 붙이고 이윽고 더 큰 나무들을 얹어 놓아서 활활 타오르는 불이 되게 합니다. 마찬가지로 이렇게 하나님이 작은 은혜와 깨달음을 주셨을 때 그것을 불씨 삼아서 간절히 정신을 집중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셔야 합니다. 이때 우리의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하고 그리고 간절한 기도가 나옵니다. 하나님을 향한 원망하는 마음이 물같이 녹기 시작하고 자기를 신뢰하였던 것이 자신의 잘못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하고 죄와 불행,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하나님이 자신을 버리신 적이 없다는 복음에 대한 깊은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어디에 있느냐고, 주님이 나 같은 인간을 거들떠나 보겠느냐고 낙심하는 사람들에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사랑은 여기에 있나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기의 독생자를 화목제물로 주셨음이라”고 말입니다. 여기에서 전적인 자기 깨어짐을 경험하게 됩니다. 나를 믿고 살았던 자기 의와 자기 밖에는 사랑할 줄 몰랐기 때문에 자기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살을 찢고 피를 흘려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눈물 한 방울 흘릴 수 없었던 돌 같이 굳어진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이 녹아들게 됩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이 자신을 버렸다고 믿었던 바로 그 지점에서 들려오는 우리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찬양)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그리고 자기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십자가에서 못 박아 내어주시기까지 사랑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 없이도 능히 살 수 있다고 믿었던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은 죄인인지를 깨닫습니다. 그리고 진정한 행복이 바로 그 아버지의 집에서 그 아버지와 함께 동행하며 그 사랑 안에서 그 하나님을 매일매일 의지하면서 사는 것임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오랫동안 잊혀졌던 하나님의 사랑과 영광, 그리고 죄와 은혜에 대한 감각이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빛이 다시 어두운 지성에 비추기 시작하고 무릎을 꿇고 마음을 쏟을 때에 우리의 마음속에서 물같이 기도가 흐르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비로소 정말 가난한 마음이 되어서 주님을 어떤 일이 있어도 떠나지 않을 것과 그리고 주님의 집에서 종으로 살아가는 그것이 이 세상에서 부귀와 영광을 누리며 사는 것보다 낫다는 사실을 느끼게 됩니다. 어차피 우리의 인생은 부분적으로는 우리의 죄 때문에, 부분적으로는 이 세상의 불완전성 때문에 고통과 눈물로 얼룩진 곳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바로 그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만들어 주셨고, 하나님 대신 이 세상을 사랑하며 사는 그 마지막이 얼마나 비참한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간절한 기도로 그 마음의 작은 은혜로운 움직임들을 표현하는 사람들을 가난한 마음으로 이끌어 가십니다.
IV. 적용과 결론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여러분의 마음이 어떤 마음입니까? 정말 여러분이 이 세상에 있는 것들로 부요해져서 가난한 마음으로 멀어졌다면 하나님이 여러분의 마음을 움직이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남이 알지 못하는 많은 죄 때문에 이제 낙심하고 절망해서 하나님 앞에 버림받은 것처럼 느꼈다면 사실은 그것도 여러분의 마음이 부요해서 그렇습니다. 비참한 고통 속에 있는 딸을 위해서 예수님께 몸부림치며 매달리던 수로보니게 여인의 가난함을 기억해 보십시오. 멸시를 받으면서도 “당신 밖에는 나에게 희망이 없습니다.”라고 몸부림치자 그의 비참은 하나님의 은총을 나타내는 수단이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이 어떠한 사랑으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삼으시고 우리의 인생의 굽이굽이를 지나 여기에 이르게 하셨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의 인생의 발걸음 하나하나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가 아닌 것이 없고 주님이 우리를 위해 흘리신 보혈이 묻지 않는 곳이 없었습니다. 눈을 들어 우리 하나님을 바라보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어서 이 한해를 누리며 사는 이 세상에 발을 딛고 있으나 마음으로는 하늘에 사는 여러분이 되셔서 여러분이 이 땅에 존재하는 것이 하나님에게 기쁨이 되고 죄로 비참한 이 세상에 희망이 되도록 그렇게 주님께 간구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애통하는 자의 복(1)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 5:4)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이어서 예수님은 팔복 중 두 번째 복을 설파하셨습니다. 애통하는 자가 받는 위로의 복이 그것이었습니다. 이 애통은 바로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보이는 첫 번째 반응입니다. 여기에서 이 애통은 단지 고통 받고 슬퍼하는 모든 것을 통칭하는 것은 아닙니다. 팔복 전체가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 침투해 들어온 상태에서 누리게 되는 복을 의미하기 때문에 이 ‘애통하다’라고 하는 이 동사도 당연히 하나님의 나라라는 개념과 연관시켜서 해석하여야만 되는 것입니다.
II. 애통하는 자
A. 애통한다는 의미
저는 이번 시간과 다음 시간에 걸쳐서 애통하는 자의 받는 복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제일 먼저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그러면 여기에서 ‘애통한다’라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애통하는 자’ 라고 하는 이 단어는 희랍어로 ‘펜둔테스’(πενθοῦντες)라고 하는 분사입니다. 이 단어는 ‘펜데오’(πενθέω)라는 단어에서 왔고, 이 단어의 의미는 ‘슬퍼하다’, 특별히 죄와 관련해서 ‘죄를 확신하고 슬퍼하다. 양심의 가책을 느껴 괴로워하다.’ 이런 뜻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어떤 사태에 대해서 통한히 여기거나 염려하고 근심한다는 의미로 ‘펜데오’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B. 애통하는 이유
1. 자신의 죄 때문에
이런 각도에서 ‘애통하다’라고 하는 이 동작을 인격적인 특징과 관련짓고 이것을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는 맥락에서 이해하게 되면 애통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대별되게 됩니다. 첫째는 자신의 죄 때문에 애통하는 사람들이 이러한 신령한 복을 누린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섰을 때, 그래서 하늘나라의 소망을 발견하게 되었을 때 그는 즉시 그 나라에 들어가기에 적합하지 않은 자신의 실존을 대면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너무나 크고 위대해서 환란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나 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끊어놓을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는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끊어놓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그 풍성한 자원을 온전히 누리면서 살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실질적인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 앞에 하나님 없이 살아가던 자신의 삶을 돌이켜 주님의 통치 아래에 살기를 원하는 마음이 생겼다 할지라도 자신 안에는 하나님의 통치에 끊임없이 반항하며 살고자 하는 교만한 죄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한편으로는 그리스도를 통해 도입된 나라가 자기 속에 침투했고, 또 한편으로는 그 나라를 대항하는 반대의 죄들이 우리 안에 있다는 사실을 보면서 우리는 이 세상 나라의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와 불신앙이 함께 존재하는 것과 꼭 같은 그림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신의 죄 된 현실을 직시하면서 그렇게 하나님의 통치에 온전히 복종하며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살고 싶지만 그럴 수 없도록 죄 가운데 있는 자신을 발견하며 하나님 앞에 애통하게 되는데 이 애통은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를 고칠 수 없는 자기의 무능함에 대한 슬픔이며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어떤 은혜가 없이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절망감에서 오는 간절한 마음의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은 이미 마음에 이런 눈물이 가득 찬 사람이고, 애통하는 사람은 이 눈물주머니가 터져서 쏟아져 흘러내리고 있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마른 땅을 걸어가는 것 같은 팍팍함을 느끼는 것, 마음에 어떤 신령한 기쁨이나 행복, 하나님의 거룩한 터치의 경험에서 오는 감미로움을 느끼지 못하고 살아간다면 그것은 여러분에게 이 세상의 자원이 모자라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여러분이 하늘의 자원이 부족하기 때문이고 환경을 능가하고 그 시련을 극복하게 하는 하늘의 기쁨과 신령한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여러분이 맨 처음 주님을 믿었을 때에 여러분의 삶 속에 늘 있었던 회개의 은혜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어두운 예배당 한 구석에서 이 세상에 있는 자원들의 부족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은 자신을 많이 사랑하시고,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기까지 불쌍히 여기셨는데 자신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자기의 죄에 대해서 회개해 보십시오. 그러면 언제나 하나님의 큰 사랑과 용서의 은혜는 죄보다 더 크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이웃의 범죄와 악은 오래도록 기억하고 그리고 즉시 전파하지만 그 사람의 진실한 회개는 그것만큼 멀리 퍼져 소문이 나지는 않습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을 때에 온 나라에 즉시 그 추한 소문이 울려 퍼졌고, 자기를 사랑하던 많은 사람들은 등을 돌리고 자기를 존경하던 백성들은 모욕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눈물로 통곡하며 회개하였고, 밤마다 이불을 적시고 침상을 띄워서 그가 회개한 시간은 범죄 한 것보다 훨씬 길었고 절실했지만 그의 범죄는 소문이 났어도 회개는 소문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가혹할 정도로 오랜 세월동안 그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미운 물건이 되었습니다. 그때 이 시인은 자신의 소망이신 하나님 한분을 의지하게 되었고, 주위 사람들의 평가와는 상관이 없이 다윗은 차라리 범죄 하지 않았더라면 알 수 없었을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의 위대한 세계를 발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을 특별히 사랑하고 하나님께 사랑을 받았던 인물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대부분 모두 하나님의 용서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를 깨달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참다운 경건은 죄에 대한 회개로부터 나오고 진실한 회개는 언제나 하나님 앞에 죄의 의미를 깨닫고 애통하게 만들어 줍니다. 그러나 이 애통은 자신을 향해서는 절망하지만 하나님을 향해서는 희망을 갖는 애통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자신의 죄 때문에 애통하고 있다면 그의 마음속에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를 미워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애통하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한 인간의 영혼이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때가 두 번 있습니다. 한번은 일체의 더러운 욕망 없이 하나님을 순수하게 사랑하는 때이고, 두 번째는 비록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그 죄를 진실하게 뉘우치는 때입니다. 두 번째의 경우는 비록 그 사람 안에 죄가 남아있지만 그가 그 죄를 미워하며 회개하기 때문에 주님은 그 사람 안에 죄가 있어도 그것을 그 사람의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죄 때문에 애통하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하늘의 신령한 위로가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죄 때문에 슬퍼하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그 슬픔이 지나고 나면 이 세상 다른 곳에서는 받을 수 없는 하늘의 거룩한 기쁨이 그의 마음속에 메아리쳐 울려 퍼지는 것입니다.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주님이 베풀어 주신 사랑에 비해서 나의 허물과 죄가 크다는 이유 때문에 진실하게 뉘우치고 눈물로 회개하던 때가 언제인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 앞에 여러분의 죄를 의식하면서 하나님께 진심으로 용서를 받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회복하고 싶은 사랑의 열망을 느껴본 때가 언제입니까? 어떤 한 사람이 지금 매우 나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이렇게 자기의 죄를 향해 애통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은 언젠가는 반드시 좋은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탁월하게 좋은 사람이 있다고 할지라도 자신의 죄에 대해서 진실하게 애통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들은 언젠가는 반드시 나쁜 사람이 되고야 말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회개할 것이 없는 의로운 사람들을 부르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죄인과 세리들과 가까이 하신 이유는 그들이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보다 도덕적인 삶을 살았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객관적으로 보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더 종교적이고 도덕적이었을지 모르지만 죄를 지은 세리와 창기들이 더 많이 자신의 죄를 인해 애통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바리새인과 서기관에게서 거절당한 하나님의 나라가 그 죄인들에게 주어졌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그래서 진실한 회개는 언제나 생명에 이르는 문이고, 진실하게 자신의 죄를 향해 애통하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하나님 앞에 순전하게 살고자 하는 강력한 소원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먼저 애통하는 자가 되기 바랍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여러분의 자신의 죄를 깊이 깨닫고 하나님 앞에 애통하는 사람들이 되십시오. 그러면 그렇게 하지 않고 살아갈 때 도저히 받을 수 없는 하나님의 큰 은혜와 놀라운 사랑이 여러분의 심령에 넘칠 것입니다.
2. 하나님 나라 때문에
두 번째는 하나님의 나라 때문입니다. 자, 심령이 가난한 사람 그리고 온유한 사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긍휼히 여기는 사람, 마음이 청결한 사람, 화평케 하는 사람, 의를 위해 박해를 받는 사람, 이 모든 사람의 박해와 청결, 온유와 가난함, 이 모든 이유는 언제나 하나님의 나라와 관련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 모든 고난과 고통의 이유도 하나님의 나라의 시련이고, 여기에서 오는 어떤 마음의 변화도 이미 임한 하나님의 나라와 아직은 완전히 실현되지 못한 하나님의 나라의 현실성 사이에서 갈등하기 때문에 오는 결과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경험을 보더라도 분명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꼭 같은 인성을 지니신 분이었지만 죄는 없으신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회개해야 할 이유가 없었고, 자기의 죄 때문에 애통해야 할 이유는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생애는 슬픔과 고단한 노역의 연대기였고, 그리고 애통하며 하나님 앞에 기도하신 생애였습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이 웃으셨다는 기록은 나오지 않지만 우셨다는 기록은 세 번이나 등장합니다. 복음서에 두 번이 등장하고 히브리서에서 한번 나타나는데 이것은 모두 무엇인가 예수님이 바라고 꿈꾸는 세상과 당신 앞에 놓여있는 이 현실로서의 세상 사이에서 갈등을 느끼셨고 그 갈등이 하나님 앞에서의 애통으로 이어졌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특히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를 그린 것으로 생각되는 히브리서 5장에 나오는 기록은 이와 같은 사실을 훌륭하게 입증합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고 했습니다. 특별히 그렇게 간구와 소원을 올렸던 대상이신 하나님이 자기를 능히 육체의 죽음에서 구원하실 자라고 믿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예수님이 십자가의 고통을 피하게 해 달라고 흘린 눈물만이 아니었습니다. 개인의 행복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의 모든 인류의 죄를 짊어지시고 대신 형벌을 받는데서 오는 깊은 고통의 눈물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눈물은 예수님 자신의 십자가를 피하게 해 달라는 눈물의 기도라기보다는 죄의 무게와 이 죄를 짊어지고 죽어야 할 수밖에 없는 인간들의 영혼에 대한 연민에서 오는 통곡이었고, 눈물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세상에 계실 때에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기를 간절히 원하셨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바라셨으며, 동시에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이 땅에서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원하셨지만 그러나 아직 그렇게 되지 못한 현실 때문에 슬퍼하고 애통하신 생애였습니다.
이런 눈물은 예수님의 마음속에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이미 예수님이 오시기 오래 전에 있었던 시인에게서도 이와 유사한 눈물과 애통을 느낍니다. 아마도 다윗이 저자로 여겨지는 시편 119편 136절에서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들이 여호와의 율법을 지키지 아니함으로 내 눈물이 시냇물같이 흐르나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 시인은 자신의 생애에 일어난 자기의 행복과 관련되는 어떤 사사로운 욕심의 좌절 때문에 슬피 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의 주변을 돌아보면서 짓밟히는 여호와의 율법과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면서 살아가는 이웃들을 보면서 그의 마음속에는 애통함이 가득하였습니다. 그리고 눈에서는 눈물이 시냇물처럼 흐르고 있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이 시인의 눈에서 흐르는 이 뜨거운 눈물을 무엇이 멈추게 해 줄 수가 있을까요? 잘 차려진 한 끼의 호화스러운 밥상이나 예쁜 옷 한 벌, 그리고 훌륭한 집 한 채, 그에게 허락된 높은 지위 하나가 이 눈물을 멈추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의 소원은 이 세상에 있는 어떤 자원들이 아니라 하늘과 맞닿아 있었고, 하나님의 율법을 무시하며 살기까지 영혼이 곤고한 사람들, 그들의 무법한 행실로 말미암아 짓밟히는 하나님의 이름 때문에 흐르는 눈물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세상에 있는 것들로 그치게 할 수 있는 눈물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지금보다 더 가난해지고 더 병들고, 더 고통을 받아도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율법을 기뻐하고, 그 율법을 지키며 이스라엘 백성답게 사는 그 현실을 본다면 즉시로 그 눈에 시냇물처럼 흐르던 눈물은 멎고 마음의 기쁨이 가득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시인을 언제나 이렇게 고통스러운 눈물을 흘리게끔 내버려 두시지는 않으십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통치가 이 땅에 실현되게 하기 위하여 애통하는 사람에게 베푸시는 궁극적인 위로는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과 함께 주어질 것이기만 그때에 맛보게 될 하나님의 거룩한 위로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미리 침투하여 지금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애통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나라를 이 땅에 회복하기 위해서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렇게 살지 않는 어떤 사람도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신령한 위로를 베풀어 주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단지 하나님을 믿고 구원을 받는 은총만이 아니라 그 은총의 계획에 따라 살아가야 할 그 무엇이 그들 속에 주어졌습니다. 이것이 바로 소명입니다. 그래서 나는 오늘 이 예배당을 가득 채우고 예배를 드리는 여러분에게 다시 한 번 마음 깊은 곳에서 외칩니다. 여러분은 절대로 무위도식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구원받은 여러분에게는 그렇게 살 수 있는 권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그렇게 무위도식하면서 살 때에 가장 큰 피해자는 교회도 아니고, 하나님도 아니고, 그렇게 안일하게 살아가는 여러분 자신의 영혼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아무것도 하는 일이 없으면서 나태하게 살아가면서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애통하는 마음으로 예배드리는 사람을 본적 있습니까? 삶에 주님을 위한 어떠한 목표도 없고 교회와 이웃을 위한 어떠한 목적도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 애통하며 울부짖는 기도를 올리는 것을 본적이 있습니까? 불가능합니다. 삶은 기도의 초점과 일치할 때에 폭발적인 에너지를 얻게 되고, 기도는 삶과 초점이 맞을 때에 열렬함을 획득하게 됩니다.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치열한 갈망 속에서 충천하는 화염과 같은 기도가 쏟아져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은 아주 발달한 카메라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특별히 조작해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대고 누르면 어린 애가 찍어도 모두 잘 나옵니다. 그러나 사실은 카메라를 찍는 맛이 없습니다. 옛날 카메라는 조리개를 맞추고, 거리를 맞추고 해서 그래서 찍기 때문에 자기가 찍어도 찍은 순간, 순간 다 다른 사진이 나오고 기술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이 찍은 사진은 볼 수 없을 정도로,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특히 아무리 구도를 훌륭하게 잡고 예쁜 풍경을 찍었어도 초점이 맞지 않는 사진은 추호의 예술적인 가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삶의 초점과 기도의 초점이 일치할 때 삶은 폭발적인 에너지는 얻게 되어서 자신이 도저히 그런 삶을 살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그런 삶을 살 수 있는 놀라운 힘을 얻게 됩니다. 그런가 하면 삶과 기도의 초점이 일치할 때에 우리가 상상하지 못했던 뜨거운 열정이 우리의 마음속에서 솟아나서 그래서 충천하는 화염과 같은 열렬함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무위도식하는 사람들에게는 성실한 예배의 참석은 있을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열렬한 기도, 눈물 흘리는 참회, 목표에 대한 뜨거운 헌신과 그것이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불타는 하나님의 열정 같은 것들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모두 하나님의 나라의 실현을 위해서 헌신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나는 여러분과 같이 젊은 시절에 회심하기 전이었어도 저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평탄하고 그저 부족한 것이 없는 삶을 살면서 의미가 적은 인생을 살 것이냐? 삶과 죽음 사이를 오가다가 사망의 낭떠러지로 떨어질지라도 의미가 큰 삶을 택하냐?”라는 질문에 대해서 나는 불신자 때에도 단 3초도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내려오기 전에 잠시 전 더글러스 스위니 교수가 쓴 책을 잠깐 몇 페이지 읽다가 내려왔는데 거기에 보니까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열정을 소중하게 생각하라 그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무엇에도 도전받지 않는 마음은 죽은 마음입니다. 더욱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서도 하나님이 자기 같은 사람을 그렇게 사랑하신 것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위한 목표도 없고, 불타는 마음도 없는 것은 사실상 영적인 식물인간의 상태입니다. 신앙을 떠나서 이 세상에서 자기가 종사하는 영역에서 괄목할만한 업적을 이루어 이웃과 사회에 유익을 준 사람의 자전적인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그들 중에 아무도 되는대로 살았기 때문에 그러한 성취에 도달한 사람들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 때문에 애통하는 사람들이 되십시오. 그리고 만약에 여러분이 아직도 애통하여야 할 이유를 발견하지 못했다면 오늘 당장 우리 주님께 간절히 여쭈어 보십시오. 주님이 나 같은 인간을 무엇 때문에 창조하셨습니까? 어디에 쓰시려고 짐승이 아니라 사람으로 만드셨나요? 그리고 나보고 어떻게 살라고 십자가 사랑으로 구원해 주셨습니까? 내가 어디에 서서 어떻게 주님을 위해 살아야 할까요 물어보십시오. 아무도 그렇게 진실하게 기도하는 사람 중 응답받지 못하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나라 때문에 애통하고 하나님의 복을 누리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III. 애통하는 자의 복
A. 신적 위로를 받음
이렇게 애통하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복에 대해서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입니다. 우리말 번역에서는 생략되었지만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라고 하는 문장 바로 앞에 희랍어 성경에는 ‘호티’(ὅτι)라는 단어가 첨가되었습니다. 이것은 ‘왜냐하면’이라고 번역될 수 있는 접속사로서 강력한 이유를 표명하는 것입니다. “애통하는 자들은 복이 있다. 왜냐하면 그들이 반드시 위로를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라는 것입니다. 당연히 이 위로의 주체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이 위로는 인간적인 위로가 아니라 신적인 위로입니다. 혹시 사람을 통해서 위로가 온다고 할지라도 이 위로가 사람 자신으로 것으로부터 오는 위로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온 위로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라고 하는 이 단어는 희랍어로 한 개의 동사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파라클레데손타이’라고 하는 단어인데 이 단어는 ‘파라칼레오’(παρακληθήσονται)라는 단어의 변용입니다. 팔라칼레오라는 단어는 다시 ‘파라’(παρα), ‘옆에서, 곁에서’라고 하는 전치사와 ‘칼레오’(καλέω), ‘부르다’라고 하는 동사의 합성어입니다. 다시 말해서 ‘위로를 받다.’라는 말은 ‘옆에서 부르다.’라는 의미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보혜사 성령님을 희랍어로 ‘파라클레이토스’라고 말하는데 이 단어가 바로 ‘파라칼레오’에서 온 명사입니다. 그래서 ‘파라클레이토스’는 옆에 있어서 우리에게 스승처럼 가르침을 주시고, 또 부모처럼 우리를 도와주시고, 또 변호사처럼 우리를 위해 중보해 주시고 변호해 주시는 성령님이시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위로가 어떤 성격의 것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4장 15절은 중보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에게 한 중보자가 있으니 이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시는 분이 아니요 우리와 한 결 같이 시험을 받으시되 죄는 없으신 분이시라”고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우리 곁에 계셔서 우리를 가르쳐 주시고, 우리에게 도움을 주시고, 우리가 죄에 대하여 율법과 양심의 송사를 받을 때에 그것을 변호해 주시는 방식으로 위로를 주시는데 이 위로는 성령의 고유한 사역으로 성경에서 제시됩니다. 사랑은 성부, 은혜는 성자, 위로는 성령으로부터 각각 우리에게 베풀어져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 수 있는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자신의 죄 때문에 낙심하게 될 때에 일시에 수많은 공격이 시작됩니다. 현실적으로는 자기의 죄에 빠진 현실을 비난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정죄하는 손가락질이 있지만 그의 마음속에서는 사람으로부터 오는 비난보다도 더 큰 작용이 일어나게 되는데 두 가지 방식으로 발생합니다. 첫째는 율법의 정죄입니다. 마음의 양심에 새겨진 율법과 혹은 성경에 기록된 율법을 가지고 우리의 죄에 대해 가차 없이 판단을 내릴 때에 그 형벌은 언제나 죽음입니다. 그리고 율법은 이렇게 우리에게 가차 없는 형벌을 내립니다. 두 번째는 양심의 송사입니다. 양심은 인간의 의식 속에 붙어서 그가 지은 죄에 대해서 끊임없이 고발하는 마음의 작용입니다. 이 양심도 일체의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나 자비심이 없이 집요하게 우리의 잘못에 대해서 송사합니다. “네가 그렇게 하고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느냐? 네가 그렇게 살고도 감히 예배할 수 있느냐? 너의 예배는 거절될 것이고, 너의 기도는 하나님께 상달되지 않을 것이며 너에게는 어떤 희망적인 미래는 없을 것이다.”라고 끊임없이 송사합니다. 이러한 율법의 정죄와 양심의 송사 앞에서 어쩔 줄 모르고 두려워 떨면서 하나님과의 관계로부터 멀어진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종종 사단도 이것을 이용해서 이 율법의 정죄와 양심의 송사를 잘못되게 적용하도록 우리를 그릇 이끕니다. 그래서 결국 어떤 한 사람이 죄를 짓고 자살을 결심하거나 회복할 수 없는 깊은 배교의 길을 들어서게 될 때에 이것 역시 율법의 정죄하는 작용과 양심의 송사하는 작용을 사단의 계교에 빠져 잘못 사용하기 때문에 온 것입니다. 성경은 바로 이렇게 끊임없이 시달리는 정죄의 현실, 송사의 상황 속에서 믿음의 눈으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미 이루어진 사실을 직시하면서 믿음으로 하나님의 사랑에 소망을 두고 나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위로의 은총이 베풀어진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B. 지극히 연약한 인간
뿐만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사는 사람들이 언제나 강한 사람들은 아닙니다. 그래서 어느 한 순간에 이제 “너는 혼자다, 너를 돕는 모든 사람들은 떠났고, 너 앞에 놓여있는 현실은 네가 감당할 수 있는 분량을 넘어선 것이다.”라고 선언합니다. 이 집요한 공격은 때로는 자신이 가장 사랑하던 동역자를 통해서 오기도 합니다. 이때에 눈앞에 현실을 바라보면서 믿음이 없어서 절망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힘과 분량을 넘어선 현실이기 때문에 도우시는 하나님을 앙망하는 사람들을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더욱이 주님을 향한 절대 의존의 마음으로 통절하게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그래도 하나님의 나라가 자신을 통해서 이루어지게 해 달라고 눈물로 애통하며 간구하는 사람 가까이 계셔서 도우시고 가르치시고 변호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위로인 것입니다. 이 위로는 애통하는 많은 사람들, 자신의 죄와 아직 실현되지 못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눈물 흘리며 애통하는 사람들에게 충만하게 나타나는데 이것이 진정한 교회의 성장으로까지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9장 31절에서 말하기를 “교회가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나아가더라” 다시 말해서 이 거친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건설이라는 목표를 가지고 치열하게 부딪치면서 싸우며 나가는데 나가게 하는 이 강한 힘이 어디서 오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몇 해 전에 극지의 탐험과 탐사와 개발을 위해서 만든 쇄빙선이 있습니다. 쇄빙선이야 늘 있지만 차세대 쇄빙선으로 많은 돈을 들여서 첨단기술로 만든 쇄빙선입니다. 쇄빙선은 문자 그대로 얼음이 있을 때에 얼음에 막혀서 못 가는 길을 얼음을 부수면서 길을 내면서 길을 가는 배가 쇄빙선입니다. 그 힘이 얼마나 놀라운지 1m되는 두께의 얼음이 얼어있는 바다를 그 얼음을 깨뜨리고 바닷길을 내면서 항진을 계속 할 수 있다고 하니까 엄청난 기능입니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는 당연히 이 쇄빙선의 역학적인 구조와 엔진은 일반 배에 비해서 달라야 합니다. 특별히 그것을 깨고 지나가게 하는 큰 힘은 엔진에서 나옵니다.
시련과 박해 모함과 핍박, 이 세상 사조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계속 앞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두 개의 놀라운 힘을 사도행전 9장에서는 주님을 경외하는 것과 성령의 위로라고 말합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우리는 여기에서 지극히 연약한 인간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즉, 한 인간이 어떤 선한 일에 대해서 불굴의 강함을 보여줄 때에는 그것이 자신의 의지와 결단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그리스도인의 강인함과 연약함은 종이 한 장 차이이고, 이 둘은 끊임없이 교차합니다. 사도 바울이 누구였습니까? 신약 성경의 절반을 기록한 지성적인 저술가인 동시에 이방인 선교의 아버지였고 능력으로는 죽은 사람도 살려낼 수 있는 사도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그가 고린도 지방에 전도하러 갈 때에 그는 고백했습니다. 힘에 겹도록 고생하였으며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의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은 줄 알았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의무만을 가지고는 하나님을 위해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매일매일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성령의 위로입니다. 위로가 꼭 필요한 때에 없으면 비참하게 절망하거나 아주 돌처럼 강퍅해지게 마련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옳은 일을 위해 분투한다고 할지라도 이렇게 성령의 위로가 시시때때로 주어지지 않으면 악과 싸우다가 자신도 똑같이 악한 사람이 되기가 십상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하나님의 신적인 위로가 필요한 이유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렇게 자신의 죄를 인하여 애통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통곡하는 사람들에게 그런 삶을 사는 사람들이 아닌 누구도 경험할 수 없는 하늘의 충만한 위로를 주십니다. 이런 위로가 마음에 넘치게 될 때에 우리는 이 세상 사람들이 모두 나를 버려도 외롭지 않는 담대한 확신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찬양)
이 세상의 친구들 나를 버려도
나를 사랑하는 이 예수뿐일세
예수 내 친구 날 버리지 않네
온 천지는 변해도 날 버리지 않네
시시때때로 주만 봅니다
IV. 적용과 결론
사업을 크게 하는 어느 회사의 사장을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불신자였습니다. 그러면서 사업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이 분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자기 회사에 취직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많이 있지만 대부분이 월급 타려고 하는 사람이고 정말 회사를 사랑해서 자기와 함께 생사고락을 함께하며 이 기업을 발전시키려고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런데 아주 드물게 그런 사람을 일생에 한두 번 만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럴 때에 마음이 어떠냐 그랬더니 자기는 이 세상의 사장이고 그는 직원이지만 그가 만약에 아파서 누웠는데 콩팥이 필요하면 자기가 한쪽을 잘라서 기꺼이 주고 싶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세상의 욕심을 가지고 사업을 하는 사람들도 자기를 위해서 분투하고 충성하는 사람을 위해 장기라도 떼어줄 정도의 애정을 느낀다면 완전하신 하나님이 자신의 죄를 인하여 애통하고 하나님의 나라의 실현을 위해서 충성하는 사람들을 어찌 고아와 같이 버려두시겠습니까? 사람들은 그를 버릴지라도 하나님은 그를 영접하실 것이며, 그에게는 모든 소망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에 하나님만 버리지 않으시면 그는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 말합니다. 여러분의 인생에 가장 커다란 실수는 하나님 바깥에서 행복해지려고 하는 것입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그런 가능성에 희망을 두는 것입니다.
월요일마다 전도사님들이 모여서 공부를 하는데 제가 가르치다가 그 중에 결혼한 사람들이 몇 있어서 물어보았습니다. “그래 장가가니까 좋아?” 그러니까 “네, 좋습니다.” 결혼한 지 일주일 된 사람이었습니다. 6개월 된 사람에게 “좋아?” 그러고 물어보니까 “네. 좋아요” 1년 된 사람이 있었습니다. 2년째 접어들고 이제 막 아기를 낳았는데 “장가가니까 좋아?” 그러니까 “(고개만 푹)” 그런 것입니다.
(찬양)
주님의 사랑이 내 마음 중심에 있으니
유혹이 흔들어도 무너지질 않네
주님과 함께 있을 때 두려움 사라지네
주님이 항상 나를 지켜 주시니
하나님은 죄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애통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천국이 이루어지게 하십니다. 당신을 위해 흘리는 그 애통하는 눈물을 외면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지만 이런 애통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다음 시간에 계속하겠습니다.
애통하는 자의 복(2)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 5:4)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가난한 마음의 첫 번째 나타남은 애통함입니다. 이 애통함은 일반적인 모든 의미에서의 애통이라기보다는 신령한 은혜로 말미암아 마음이 변화된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애통함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신령한 은혜가 그의 심령을 변화시켜 주님의 은혜에 목마른 가난한 마음이 되게 합니다. 그러면 그는 하나님과 자신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자신의 죄 때문에 애통하게 되고 또한 이미 자신에게 임했으나 아직까지도 그 하나님의 나라를 거스르고 살아가는 이 세상의 현실 때문에 애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에서 예수님이 ‘복이 있나니’라고 하신 이 신령한 의미의 복은 무엇인가를 소유하고 어떤 지위에 오르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하늘의 신령한 복은 인격적인 특징이고, 한 사람의 인격적인 특징이 이렇게 가난하고 애통하는 심령으로 나타나기 위해서는 그의 영혼의 무엇인가 변화가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신령한 위로의 축복이 보증되어 있는 이 심령의 애통함은 또한 하나님의 은혜의 작용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사이에서 많은 격차를 느낍니다. 현재 직설법으로 우리를 향해 예수님이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도 빛이 아니고 소금이 아닐 때가 많은데 주님은 너희는 빛이요, 소금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은 아마도 현재 우리가 그러하다기보다는 그런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는 예수님의 마음의 소원인 것처럼 해석을 합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을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분명히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일차적으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변화를 받아 팔복의 사람이 된 예수님을 따르던 청중들을 의미하는 것이고 이차적으로는 오늘 이 말씀을 읽고 있는 우리들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관건은 이것입니다. 세상의 빛이 되고 소금이 되는 것은 많은 시간의 훈련과 많은 시간의 노고를 통해서 점차적으로 도달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것은 즉각적인 변화입니다. 한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영혼이 변화된다면, 그래서 자기 밖에 모르던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가난한 마음을 갖게 되고 또 이 세상의 지위와 소유만 손에 넣으면 부족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던 사람이 자신의 죄에 대해서 애통하고 예수께서 이미 도입하셨지만 반항하는 수많은 인간들 때문에 성취되지 못하는 하나님의 나라 때문에 애통하게 된다면, 그래서 온유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되어서 악한 자들까지도 그 사랑의 인격으로 굴복시키며 평화를 이룰 수가 있다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되어서 이 땅의 정의와 공평이 하수같이 물같이 흐르게 되기를 원한다면, 마음이 청결한 자가 되어서 우리 하나님을 뵈올 수 있게 된다면 등등 이 모든 팔복의 요건을 가진 사람들이 될 때에 그 사람들은 굳이 이 세상에서 애쓰지 않아도 그는 소금이요 빛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이러한 놀라운 영혼의 변화, 그 마음과 심령의 변화를 통해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들인 사람들이 바로 비록 배우지 못했고 그리고 여전히 가난하고 병든 자들이라고 할지라도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따라서 어떤 한 사람이 이렇게 하나님이 위로해 주실만한 애통하는 심령이 되는 것은 반드시 은혜의 작용이 필요한 것입니다.
II. 애통함과 은혜의 작용
팔복은 행위로 성취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앞서 행하시는 은혜의 작용이 없이는 누구도 가난한 마음을 가질 수도 없고 누구도 선행하는 은혜 없이는 애통하는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 팔복은 행위가 아닌 인격적인 특징입니다. 인격이 무엇입니까? 한 사람이 인간으로서 가지고 있는 품격입니다. 그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인간으로서의 품격은 마음의 작용하는 지속적인 성향입니다. 즉, 한 사람의 마음이 바람직한 방향으로 끊임없이 작용을 하게 될 때에 그는 훌륭한 인격의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한 사람의 마음속에 작용하는 지속적인 성향이고 또 마음가짐입니다. 말과 행동과 그 모든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는 모든 힘은 바로 마음에서 나오고 이 마음은 바로 영혼의 변화로부터 비롯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마음속에 지속적으로 덕스러운 사랑의 성향을 갖게 될 때에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는 그가 인격적으로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본성은 천성입니다. 그리고 이것들은 부단한 습관을 통해서 형성되기도 하지만 또한 태어날 때부터 부여받기도 합니다. 그래서 인간의 본성은 어떤 의미에서 운명과 같아서 좀처럼 변하지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이제 가난하고 병들었던 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 예수의 소문을 듣고 이 사람들이 모두 신실한 사람이 되기로 다짐했던 것은 아닙니다. 병들고 아무 희망이 없는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서 무엇인가 은혜를 입어 자신들이 병 고침을 받고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는 길이 없을까 하는 마음에서 예수님을 기다리고 고대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오신다는 소문을 듣자 사람들은 그 예수님께 모였고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모든 질병들을 일일이 고쳐주셨습니다. 병들었던 사람들이 병이 낫고 놀라운 기적을 체험하게 되자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가르치는 많은 교훈들이 믿음성 있게 그들의 마음속에 다가오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바로 당신이 전하시는 말씀을 믿게 하실 요량으로 사람들에게 기적과 놀라운 일들을 행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이 기적은 진리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은 당신의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을 믿게 하시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게 되었고 이때 이들의 마음속에 육신의 질병을 고친 것보다 더 놀라운 초월적이고 기적적인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것입니다. 이전에는 이 세상에서 먹고 누릴 수 있는 물질과 적절한 지위가 있으면 충분하던 사람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그리움이 생겨났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에 대한 목마름이 생겨났습니다. 가난한 심령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심령의 파산 선고를 받은 것 같은 갈망이 생겨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런 사람들의 마음속에 천국이 이루어지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자기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진 사람들은 그리고 이 하나님의 나라가 얼마나 행복한지를 아는 사람들은 아직도 자신 안에 남아있는 자기의 죄를 보면서 애통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죄를 짓고 행한 것은 자신이지만 자신은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추호의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죄는 자기 안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를 끊임없이 파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이 세상을 바라보면서 그 사람들은 하나님이 이렇게 좋으신 분이시고, 이렇게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뜻을 모르고 제멋대로 살아가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그들에게도 그리스도 예수의 말씀이 필요하고 그들에게도 회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마는 그것은 자신들이 직접 행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 모든 것을 움직이는 권능이 있는 하나님 아버지께 호소하기 시작했고, 애통하는 마음이 되었던 것입니다. 죄인들을 만나면 예전에는 그들을 미워하였지만 이제는 그 죄인들이 바로 자기와 같은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에게 악을 행하는 사람들에게도 온유한 사람들이 될 수 있고 핍박하는 사람들에게도 따뜻하게 대해줄 수 있는 너그러운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놀라운 변화가 그들 속에 일어났던 것은 먼저 그들의 마음속에 작용한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한번 이 팔복의 사람이 되었다고 해서 영원히 팔복의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교리를 아는 것이 매우 적고 성경에 배운 것이 별로 없음에도 불구하고 작은 복음의 진리 하나에 깊이 변화된 후 팔복의 사람이 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매일매일 이런 가난한 마음으로 애통하는 심령으로, 온유한 마음으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마음으로, 그리고 청결한 마음으로, 핍박을 받고 견디는 그 모든 속에서도 화평케 하고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해 비는 평화의 삶을 통해서 우리는 이 팔복의 사람으로서 자신이 매일매일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작용입니다.
오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오래도록 성경을 배우고, 오래도록 설교를 듣고, 오래도록 교회를 섬겼습니다. 그러고도 남아있는 죄는 여전히 있습니다. 이런 죄들은 산전수전을 다 겪고 살아남은 죄들입니다. 좀처럼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것들이 우리로 하여금 가난한 마음 없이 예수를 믿게 만들고 애통하는 일이 없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아무리 오래도록 하나님의 사랑에서 멀어진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이 은혜가 작용하기만 하면 그들도 역시 애통하며 주님의 위로를 받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주님의 은혜를 받고 팔복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빕니다.
III. 애통하는 마음에 이르는 길
A. 하나님의 사랑을 숙고함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애통하는 자가 될 수 있을까요? 다시 말해서 어떻게 하면 애통하는 마음에 이르게 될까요?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첫째는 하나님의 사랑을 숙고하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은 정반대편에 서있는 자기의 죄인 됨을 직시함으로써 그 사랑을 많이 생각하게 됩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그 큰 사랑 앞에 얼마나 커다란 죄인인지를 대조해서 생각하면 애통하는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자신은 그 큰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구원 얻은 자녀가 되었는데도 여전히 불순종하고 하나님께 반항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데도 끊임없이 하나님을 떠나려 하지만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어 끊임없이 우리를 찾아 나서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전에는 주님을 모르고 천국과 지옥도 알지 못한 채 모질게 주님께 반항하던 인간들이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후에도 여전히 주님을 거스르고 불순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제나 신실하셔서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끊임없이 변덕스러운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다가는 불순종하고 불순종하다가는 주님께 돌아가고 돌아갔다가는 다시 주님을 멀리 떠났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거기 계셔서 우리에게 자비와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진심으로 우리의 죄를 뉘우치고 하나님께 돌아갔을 때 하나님이 거기에서 떠나가신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 지에 대하여 생각하도록 만들어 줍니다.
여러분이 처음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회심을 하였을 때에도 그러했습니다. 정말 여러분이 하나님께 심판 받을까 봐 두렵고 지옥의 형벌이 무서워서 회개한 것이 아니라 나를 그렇게 사랑하시는 하나님께 어쩌면 그렇게 긴 세월을 모질고 표독스럽게 반항하며 주님의 가슴에 못을 박으며 살았는지를 뉘우치면서 흘린 눈물이요, 애통이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비천한 우리 자신을 스스로 구원할 수 없이 절대적으로 무능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이 끊임없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면서도 스스로 그 상황이 고통스러우면서도 하나님께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그런 인간을 하나님께서는 불쌍히 여기신다는 사실에 대하여 생각해 보십시오. 언제나 거기 계셔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또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참 사랑으로 돌아올 때까지 일체의 오래 참으심으로 기다리시는 것을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들으면서도 예전에는 눈물 흘리며 참회하고 그리고 구원받지 못한 가족을 위해 애통하고 하나님이 맡겨주신 사명을 잘 이루기 위해서 부단히 자신과 싸우며 하나님 앞에 눈물을 흘리던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애통하는 신앙의 인격은 사라지고 거칠고 시기심으로 가득차고 불만과 이기심으로 가득찬 사람이 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심령은 딱딱하게 굳어 하나님의 참 사랑과 은혜로부터 현저히 멀어진 가운데 사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이 우리에게 무슨 나쁜 일을 행하셨습니까? 우리를 위해 주님이 안 주신 것이 무엇이 있었습니까? 만약에 우리가 무엇인가 고통스러운 상황에 있다면 이것은 우리의 잘못으로 말미암아 초래된 것이지 우리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주신 것이 아닙니다. 자기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기까지 내어주신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무엇이 아끼는 것이 있다고는 우리는 믿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반역과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마치 집을 나간 부모가 그 자식이 돌아오기를 노심초사 기다리며 밤을 지새우는 것처럼 그렇게 우리를 사랑으로 기다리시는 분이었습니다. 종종 우리가 하나님을 멀리 떠나면 주님은 영원히 당신을 떠나 불행해지지 않도록 때로는 우리에게 어려움을 당하게 하셔서 당신에게로 부르시지만 그것은 주님이 우리를 당신의 품으로 부르시기 위한 사랑의 회초리였지 우리가 주님을 거스른 것에 대한 분노의 복수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우리에게 일어난 좋은 일들만이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가 아니라 나쁘고 고통스러운 일까지도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가 되어서 다가옵니다.
(찬양)
때리시고 어루만져 위로해 주시는
우리 주의 넓은 품으로 어서 돌아오오 어서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숙고할 때 우리는 주님을 멀리 떠난 우리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 애통하는 마음이 됩니다. 그리고 어찌하든지 모든 것을 버리고서라도 하나님의 그 사랑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B. 하나님의 나라를 숙고함
두 번째는 하나님의 나라를 숙고하는 것입니다. 자, 우리 앞에 펼쳐진 이 불완전하고 모순된 세상을 보십시오. 곳곳에 난리와 기근과 재앙의 소문이 들립니다. 아침마다 눈을 뜨면 많은 사람들이 전쟁과 전쟁의 위협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서로를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부르며 살도록 사랑으로 창조되었건만 주님이 주신 탁월한 지성을 악한 일에 사용함으로 이 세상은 죄와 악에 물들어 가고 있습니다.
이런 속에서 창조주 하나님이 맨 처음 창조하신 아름다운 세계를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세계는 선하지 않은 것이 아무것도 없었고 그것들은 모두 각자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 아버지를 기리며 영광의 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위로부터는 끝없는 우주 속에 흘러가는 수많은 별들과 거대한 천체들로부터 시작해서 발아래로는 땅에 구르는 돌멩이 한 개, 풀 한포기까지 창조주 하나님의 선하심과 영광이 깃들여져 있었습니다. 그것은 각각 자기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을 자기에게 알맞은 가락으로 노래를 불러 영광을 돌리고 있었습니다. 그 모든 세계의 피조물들이 웅장하게 울려 퍼지는 합창처럼 아름다운 곡을 연주하고 있었고, 이 모든 것들 앞에는 이 모든 창조주가 지으신 이 세계의 모든 사물들이 하나님을 찬송하며 높이도록 지휘하고 있는 사람이 있었으니 이것이 바로 인간이었습니다. 이 인간만이 유일하게 창조주 하나님을 알고 그 하나님과 온전히 교제할 수 있도록 영혼을 가진 인간으로 빚어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수많은 만물들은 자신들이 어디로부터 왔는지 알지 못하고 각각 창조주 하나님을 노래하지만 인간은 유일하게 그 모든 것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면서 그들이 만들어 내는 수많은 노래의 가락들을 교향악처럼 연주해서 그 하나님의 영광을 향한 찬송이 온 땅과 하늘위에 메아리치게 하도록 지음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앞에 펼쳐진 이 현실을 보십시오. 주님이 창조하신 목적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운행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사랑하며 살아 행복하여야 할 인간들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채 사람들과 갈등하고 서로 미워하고 다투며 살인과 폭력, 질시와 그리고 다툼들이 끊임없이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모두 자신의 상처를 말하고 위로에 목마르지만 어느 곳에서도 다른 사람들의 눈물을 씻겨주고 위로하려는 사람은 찾을 길이 없고, 모두가 위로 받고자 하는 사람들이고 상처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위로하시는 이 은혜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이 하나님을 멀리 떠난 이 세상입니다. 그런데 소수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선포된 하나님의 십자가의 복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그들의 마음속에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도입되었습니다. 자신의 죄를 인해 애통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용서하심으로 그들에게 위로를 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멀리 떠난 죄인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하신다는 사실, 자기는 하나님 없이 살 수 있다고 믿을 때조차도 하나님은 자신 없이 살 수 없는 분인 것처럼 그렇게 때리시고 어루만지시면서 우리를 찾아오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이 위대하고 거룩한 위로는 이 세상의 인간들이 베푸는 위로와는 비교될 수 없는 탁월한 것입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게 해 달라고 눈물로 애통하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지금은 비록 그 나라가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그러나 결국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위대한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사실, 하나님의 놀라운 영광이 충만하게 나타나서 주님의 은혜를 드러낼 것이라고 하는 소망을 주심으로써 위로하십니다. 지금은 비록 눈물을 흘리고 하나님 앞에 애통하는 심령으로 그 나라가 이루어지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만 그러나 이 나라는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는 천국의 소망 때문에 위로를 받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충천하는 화염과 같이 솟아오르는 위대한 기도는 아름다운 말이나 그리고 미사여구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애통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이 기도야말로 비록 신음하는 소리라 할지라도 충천하는 화염과 같이 능력이 있으며 하나님의 거룩한 성령의 은혜, 하나님의 거룩한 부흥의 축복이 부어지게 만들어 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입니다.
IV. 적용과 결론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그러므로 오늘 울어야 할 상황 속에서 웃는 사람들은 언젠가는 눈물 흘리고 애통하게 될 것이지만 지금 애통하고 슬퍼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커다란 위로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묻는 그때에 바로 이렇게 애통하는 사람들을 어루만지시고 위로하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 안에서 하나님이 바로 지금 여기에 나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영광을 갈망하며 애통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이 세상의 소금이 되게 하시고 이 세상에 빛이 되게 하십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애통하는 심령으로 비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나는 생각했습니다. 만약에 우리들이, 모든 성도들이 하루에 한 번씩 혹은 교회에서 혹은 어디서든지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며 자기의 죄를 인해 애통하고 이 세상에 아직까지도 하나님을 모르는 많은 사람들이 당신의 복음의 빛 아래에서 살게 해 달라고 슬프게 애통한다면 얼마나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겠습니까? 지난 한 해 동안도 하나님은 많은 영혼을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그 중의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영접하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예전에 주님을 거스르던 악한 사람들이 변화되어 단정한 사람이 되었고 무위도식하는 신자가 변하여 주님을 위해 충성스러운 일꾼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베풀어 주신 주님의 은혜를 말로 다 할 수 없이 감사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만약에 우리가 더 많이 애통하는 기도를 우리 주님께 올렸다면 이 세상의 우리를 통해, 이 교회를 통해 당신의 나라를 완성해 달라고 애통하는 심령이 되어 하나님 앞에 매달렸더라면 하나님은 더 놀라운 열매를 주셨을 것입니다. 아직까지도 주님을 믿는 사람은 소수이고 하나님 없는 이 세상에서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이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아니면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주는 소망을 보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은 한 해가 저물어 가는 시기에 우리가 주님의 은혜를 간절히 갈망해야 할 때입니다. 주님의 은혜가 우리의 심령을 충만히 채우도록 주님의 사랑이 우리의 심령에 변화를 주시도록 빌어야 할 때입니다. 주님의 교회에 이러한 애통함의 은혜가 충만하게 넘쳐서 모든 성도들이 이 세상이 알지 못하는 하늘의 위로를 받고 천국의 소명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 되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빕니다.
온유한 자의 복(1)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 5:5)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심령의 가난함과 애통함에 대해서 말씀하신 후에 온유함에 대해서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가르쳐 주신다기보다는 복을 선언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심령의 가난함이 거룩하신 하나님에 대한 갈망을 나타낸다면 애통함은 그 좋으신 하나님과 자신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죄 때문에 애통하고 그 관심이 이 땅 전체로 확장되어 주님이 오셨지만 이 세계에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애통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온유함이 바로 이 두 복 다음에 나타나는 것은 이렇게 하나님을 향한 갈망과 회개의 애통을 경험하고 난 뒤에야 도달할 수 있는 성품이 바로 온유함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온유함과는 거리가 먼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온유함이라고 하는 것은 전투적인 사람들에게 밥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오늘날 온유함을 덕으로 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이것은 치열한 경쟁에서의 패배자를 의미하는 것이고 또, 용기와 결단, 그리고 투쟁하는 힘의 모자람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는 ‘복이 있나니’라고 말씀하셨을 때 이 복이 그러한 사고방식을 가진 세상 사람의 기준에 부합하는 복이 아님을 밝히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바로 신령한 의미의 복이고 하나님과 언약 관계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시는 영적인 복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심령이 가난한 자에 대해서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갈망을 뜻하는 것입니다. 애통함에 대해서 말씀하셨는데 이것 역시 하나님 앞에서 우는 것을 뜻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향한 태도가 결정되었을 때에 인간을 향해 나타나는 천국 백성의 첫 번째 인격적인 특징이 온유함이라고 하는 것을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II. 온유한 자는 누구인가?
A. 온유함이란 무엇인가?
그러면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했는데 진정으로 온유한 자는 누구일까요? 먼저 온유함이라고 하는 것이 도대체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프라에이스’(πρᾳεῖς)라고 되어 있는 이 희랍어 단어는 원래 그리스 사람들에게 있어서 짐승을 길들여서 온순해지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였습니다. 예를 들자면, 말은 원래 야생마였었는데 그 야생마를 잡아다가 때리고 훈련을 시키고 혹은 어르고 이렇게 해서 주인의 뜻대로 움직일 수 있는 가축이 되도록 만들었을 때 그렇게 길들여져 온순하게 된 말의 상태를 온유함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온유함은 무조건 온순하고 유순한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자기의 윤리학적인 저술에서 이 온유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온유란 인간이 어떤 사안에 대해 분노를 발함에 있어서 중용을 취하는 것이 온유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온유라고 하는 것은 일체의 분노도 없고, 정의감의 표현도 없고, 줏대로 없이 모든 사람에게 좋은 것이 좋은 것이다 라고 하는 태도를 가리켜서 온유함이라고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1. 자연적 성품이 아님
성경도 온유함에 대해서 이러한 해석을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 온유함을 이렇게 사람들을 대하여 너그럽고 자애롭고 폭력적이지 않은 마음의 태도를 의미하는 것으로 묘사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온유함은 사람에게 대한 특징이기는 하지만 사람에 대해서만 온유함이 작용하는 것은 아닙니다. 온유한 사람은 하나님이 그를 어떠한 섭리 속으로 이끌든지 불평하거나 원망하거나 하나님께 반항하지 않습니다. 요셉과 같은 사람이 대표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조금도 잘못한 것이 없는데 형들에 의해서 애굽의 종으로 팔렸고, 보디발의 집에 끌려간 후에도 성심성의껏 종의 의무를 다했지만 모함을 쓰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런 모든 하나님의 섭리를 온순하게 받아들이고, 그 하나님의 섭리에 원인이 되었던 사람들을 모함하거나 보복하거나 미워하지 않는 이 모든 태도도 온유함의 특질 속에 속하는 것입니다.
아무튼 이러한 온유함은 바로 이런 성경에서 말할 때 신령하고 인격적인 변화입니다. 그런 점에서 성경이 가르치는 온유함은 그리스 철학이나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본성에 가까운 덕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온유함은 자연적인 성품이 아닙니다. 생래적으로 성격이 부드럽고 유순한 사람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라고 말씀하셨을 때에 예수님의 마음에 염두에 둔 온유한 사람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라고 하는 이 본문에 대한 최악의 설교는 자연적인 성품이 유순한 사람이 돈을 많이 벌고 부동산을 소유하게 되었다 라고 예화로 드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성경 말씀은 그것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타고 나거나 혹은 환경에 의해서 온유해지도록 온유한 사람처럼 비슷하게 되도록 강요를 받았기 때문에 그런 사람이 되어 버린 것, 이런 것은 오늘 예수님이 ‘복되도다’라고 선언하셨을 때에 그 온유한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성격이 까칠하고 그리고 항상 반대의견을 많이 내세우는 사람인데 엄격한 조직 속에 들어가서 박해를 받고 일자리를 위협받게 되면 자기 의견이 점점 없어지고 다른 사람의 의견에 대해서 조직의 질서에 대해서 순종적이 됩니다. 군대가 대표적입니다. 의견도 많고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비판도 잘하다가 군대에 가서 몇 번 얻어맞고 영창 좀 들락거리고 나면 그러고 나면 자기 의견을 다 접고 순종적인 사람이 되게 됩니다. 무엇도 모르는 사람들이 회사에 들어가서 이렇게 저렇게 까불다가 몇 번 얻어맞고 왕따가 되고 난 후에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이런 것이 올바른 처세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어서 여러 사람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고 거기에 자신을 양보하게 됩니다. 이런 것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온유한 것처럼 보이지만 오늘 천국 시민의 자격으로서의 이 온유함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환경에 의해서 부드러운 사람이 되도록 강요를 당해서 획득된 유순함은 언제나 무능과 비겁함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것들은 우리의 눈으로는 본성적인 유순함과 신령한 변화로 말미암는 유순함 사이에 구별이 매우 어려울지 모르지만 그러나 확실한 것 하나는 전자의 사람들은 땅을 기업으로 갖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신령한 복을 받을 사람들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온유함은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고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 칡이 얽어진들 어떠하리 하고 살아가는 그저 아무런 줏대도 없고 사람만 좋은 무골호인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온유함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누리는 온전한 평화,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고 내가 하나님과 함께 동행함으로 나에게는 아무것도 모자라는 것이 없다라는 만족에서 비롯되는 온유함, 더 나아가서는 우리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자기 같은 사람을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사셨기 때문에 자기가 이런 평화와 만족을 하나님께로부터 받고 있다는 감읍하는 마음에서 비롯되는 마음의 여유와 너그러움인 것입니다.
민수기 12장에는 모세가 자기의 형제들인 미리암과 아론에게조차 대적을 당하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구스 여자를 아내로 취한 것을 빌미삼아 미리암과 아론은 모세에 대해 반감을 품었고 나아가 백성들까지 선동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절대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민족주의적인 편견이었습니다. 구스 여자가 흑인이었음에 틀림이 없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의 선민의 기준을 혈통으로 기준 삼고 있었기 때문에 모세의 이러한 행실이 그들이 생각하기에 하나님의 율법에 거스른다고 잘못 판단하였던 것입니다. 모세는 이 모든 일에 있어서 정당했고 그랬기 때문에 그는 온유함을 유지했습니다. 이에 대해서 성경은 말합니다. ‘비난 받을 때에 모세는 그 온유함이 지면에 있는 모든 사람들보다 더 나았더라’고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모세는 하나님 앞에 정당하게 행하였다는 하나님과의 평화와 만족이 있었고, 그래서 미리암과 아론이 백성들을 선동하여 자기의 지도력에 도전할 때에도 위급함을 느끼거나 혹은 마음이 요동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 자신은 옳고 하나님이 자기를 인정해 주실 것이라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모든 지면위에 있는 어떤 사람보다도 더 나은 온유함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이런 온유함을 모세가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일을 행하는데 있어서 어떤 방해를 받았습니까? 줏대 없고 모든 사람을 용납하는 무골호인과 같은 사람이 되어 버렸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자신을 향한 비난에는 모세가 이처럼 온유하였지만 그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고 주님께 반항하였을 때에는 어쩌면 무서운 사람으로 돌변했고, 그리고 결단과 용단을 내리는데 있어서 추호의 주저함이 없는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바알 브올의 사건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우상을 섬기고 간음을 한 그 사건을 두고 모세는 준엄한 심판을 명했고 그리하여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이 비느하스의 자손들의 칼날에 죽어갔던 것입니다. 이런 것은 바로 온유함이 그저 자연적인 기질이나 혹은 줏대 없이 모든 사람에게 언제나 좋다고 하는 그러한 야합하는 비겁함이나 무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히려 진정한 온유함은 옳지 않은 일에 대해서 자신의 태도를 분명히 하거나 혹은 책망할 때에 아주 정확하게 그 정도와 분량에 맞게끔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여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온유한 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온유하신 바로 그 분이 비둘기파는 자들과 돈 바꾸는 자들의 상을 뒤엎으시며 채찍으로 그들을 후려치시며 진노하시고 책망하셨습니다. 바로 이러한 사실에 미루어 볼 때에 성경이 말하는 온유함은 자연적인 성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성경은 이 온유함을 신령한 성품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이 ‘복되도다 온유한 자들이여’ 라고 말씀하실 때에 바로 그 진정한 복이 있는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 바로 그 사람들입니다. 구원 받은 사람 안에 있는 신령한 은혜의 결과가 바로 이 온유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이 온유함은 장기간에 걸쳐서 지속적인 성화를 통해서 겨우겨우 우리의 마음속에 맺히는 인격적인 특성이 될 것이기 때문에 나처럼 신앙이 박약하고 예수 믿은 지 얼마 안 되는 사람에게 그런 온유함을 기대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입니다. “냅둬 이대로 살다가 죽을게.”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문맥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시면서 가르치시고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그 소문이 온 수리아에까지 퍼졌고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각종 병에 걸려서 고통 하는 자와 귀신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 다시 말해서 그 당시 의학으로는 도저히 고칠 가능성이 없는 인생 막장에 있는 병자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고쳐주셨습니다.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다와 요단강 건너서편에서까지 많은 무리들이 와서 이렇게 병 고침을 받았고, 그 중의 대부분은 돌아갔지만 그 중의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산에 오르셨을 때에 함께 따라와 예수님의 발 아래 앉아 그 유장한 산상수훈의 교훈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병을 고쳐주셨을 때 정말 예수님이 들려주시고 싶어 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천국 복음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너희는 심령이 가난한 자들이 아니란다. 너희는 애통하는 자도 아니고, 온유한 자도 아니고 의에 주린 자도 아니고 청결한 자도 아니고, 화평케 하는 자도 아니고 박해를 받는 자들도 아니니 너희들은 말고 이런 사람들이 있단다. 그리고 이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은 이러이러한 복을 받을 것이지’란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말씀은 ‘너희 심령이 가난한 자들이여 복되도다. 천국이 너희의 것이다.’ 라고 하는 말씀이 예수님의 마음에 있으셨던 말씀입니다.
왜 그런 결론에 도달할 수 있을까요? 이 말씀을 마치신 후 예수님은 즉각적으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너희는 세상의 빛이니’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심령이 가난하지 않은 사람이 자신이 죄를 인하여 애통하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세상의 소금이요, 이 어두운 세상의 빛일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이것은 당신을 따르던 무리들을 향하여 주신 말씀이었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들이 방금 예수님을 만났고, 병 고침을 통해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사실을 깨달았지만 이 예수님의 병 고침과 가르침을 통해서 자기가 진정으로 갈망해야 할 분이 하나님이시고, 또 자신이 자신의 이 모든 질병과 이 세계의 비참함이 자기의 죄 때문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자신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이 죄에 대해서 애통해야 한다는 사실을 회개의 복음을 통하여 배웠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온유하게 되는 것은 장기간의 성화의 결과라고만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경험을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다투기 좋아하고 이웃과 불화하던 사람이 깊이 회심하고 그리고 은혜를 받고 나면 잠시 동안 마음이 매우 온유해지고 너그러워지게 됩니다. 어린이 회심집회에서 아이들이 회심을 하게 되면 가장 뚜렷한 윤리적인 특징 중의 하나가 동생하고 싸우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제일 큰 죄는 엄마 말 안 들은 것하고, 아빠는 잘 안 나옵니다. 엄마 말 안 들은 거하고 그 다음에 동생 괴롭힌 것입니다. 그렇게 온유한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그렇게 회심을 했어도 지속적으로 은혜를 받으면서 성화의 삶을 살지 않으면 온유한 마음이 있었다가는 금방 사라져 버리는 게 문제입니다. 그래서 매일매일 하나님의 말씀 앞에 깨뜨려지고 은혜를 받는 기도생활, 말씀생활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면 닮아갈수록 이 온유함은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인격의 특징이 됩니다. 그런데 그런 성화 생활이 없이는 항상 있었다가는 사라지고, 사라졌다가는 나타나는 우연적인 특징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은혜를 받고 나면 막 한없이 너그럽다가도 은혜가 사라지고 나면 아주 까칠하고 자기 이익에 철저한 사람이 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온유함의 가변성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단체는 자기가 꼭 그 단체에 필요하다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이지만 천국은 자기가 아무 가치가 없으며 자기 같은 사람이 이 나라에 들어오게 된 것은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라고 인식하는 자들의 나라가 천국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이런 온유함을 지속적으로 일관적으로 유지하며 살기 위해서는 주님을 깊이 만나고 회심하는 일과 함께 하나님께로부터 끊임없이 은혜를 받고 자신을 복종시켜 그 은혜에 기꺼이 굴복하며 살려고 하는 의지적인 노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는 것입니다.
자, 이렇게 본다면 온유함이란 결국 하나님과의 온전한 평화와 만족에서 오는 사람을 향한 너그러움과 그리고 자비롭고 친절함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갑작스러운 회심을 통해서도 얻을 수 있는 것이며 반드시 장기간의 성화의 결과만은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다만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신이 죽고 다시 태어나는 이 은혜로운 생활이야말로 이 온유함을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인격의 특성들로 가꾸어 가게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천국은 바로 이러한 온유한 자들의 나라입니다. 자, 이렇게 보면 오늘날 우리들이 살아가는 이 세상은 온유함과는 얼마나 거리가 먼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치열한 경쟁 사회에서 온유한 자가 된다는 것은 곧 루저가 된다는, 패배자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리고 이렇게 온유한 사람들은 이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치열한 경쟁사회 속에서 살아가기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는 오히려 투쟁하라 경쟁하라 다투라 이기라 승리하라 이런 것들을 압박받고 있는 현실 속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온유한 사람은 결국은 결코 높은 지위에 이를 수 없고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온유하기보다는 오히려 전투적이고 투쟁적이고 호전적이고 경쟁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어야지만 이길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암시받고 있습니다.
초등학교 다녔을 때에 아이들이 지금도 많이 싸우지만 정말 싸웠던 것 같습니다. 왜 그렇게 싸웠는지 모르겠습니다. 늘 맞고 돌아오는 아이를 가지고 있는 부모는 정말 속이 상합니다. 그래서 아이가 맞고 들어와서 울면 아이를 야단치면서 ‘너는 손이 없냐 발이 없냐? 왜 너는 맞고만 다니냐’고 나무랍니다. 실제로 제가 어렸을 때 살던 골목에서 있었던 일인데 아이가 초등학교 4학년쯤 되었는데 늘 맞고 옵니다. 계집애들한테까지 맞고 옵니다. 그러니까 엄마가 하도 속이 상하니까 ‘너는 손이 없냐 발이 없냐’ 그러고 야단을 칩니다. 그리고 ‘남이 한 대 때리면 너는 두 대 때리란 말이야’ 이렇게 교육을 시키는데 안 됩니다. 그 사실을 아빠가 알고 하도 열이 받쳐서 아이가 맞고 들어오면 항상 물어보았습니다. ‘너는 몇 대 맞았냐?’ ‘세대 맞았어요.’ 그러면 여섯 대를 세차게 때렸습니다. 항상 맞으면 두 배로 때렸습니다. 그랬더니 얘가 완전히 돌변하는데 최고의 싸움꾼이 된 것입니다. 왜? 어차피 맞으니까 여기에서 맞든지 저기에서 맞든지 어차피 맞으니까. 이게 도가 지나쳐 가지고 초등학교 6학년하고 싸웠는데 초등학교 6학년을 때려 눕혔습니다. 4학년하고 6학년은 키 차이가 굉장히 나는데 기왓장을 들어서 머리를 찍어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안 되면 돌멩이로 머리통을 찍어서라도 내가 얘를 이겨야 된다, 왜냐하면 내가 여기에서 10대 맞고 가면 집에 가면 20대를 두들겨 맞으니까 그러니까 어차피 이놈한테 맞으나 아빠한테 맞으나 마찬가지이니까 그래서 싸우는 것입니다.
유치해 보일지 모르지만 우리의 자녀들에게 이런 식으로 교육을 시키지는 않지만 그러나 정신적으로는 이런 방식의 교육을 우리 자녀들에게 암시적으로 시키고 있지 있습니까? 그래서 아주 어려서부터 우리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경쟁상대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것들은 바로 오늘날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삶의 현실입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은 그런 식으로 이 세상을 얻을 수는 없다고 말합니다. 물론 다른 사람보다 일시적으로는 경쟁을 해서 좀 더 높은 지위에 올라갈지도 모르고 더 많은 재물을 소유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것이 곧 예수님이 말씀하신 땅을 하나님께로부터 기업으로 받는 방식은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심령의 가난함이라면 애통함은 자기가 발견한 좋으신 하나님과 자기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죄로 말미암아 흘리는 눈물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에 대한 태도라면 이 온유함은 하나님과 특히 사람을 향한 친절하고 여유로운 태도인 것입니다. 그래서 위로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그래서 그 사랑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를 발견한 후에 하나님이 자기와 모든 인류를 사랑하시는 것과 같은 동일한 마음으로 자신의 이웃들을 사랑함으로 그들도 하나님 사랑 안에서 살게 하는 것이 바로 이 온유함인 것입니다.
B. 온유한 자의 나라
그러면 이 신령한 인격의 특징으로서의 온유함은 어디로부터 비롯되는 것일까요? 이것은 제일 먼저 거룩함에 대한 인식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얼마나 미천한 인간인가 하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예전에는 자신이 천상천하의 유아독존 하는 존재인 줄을 알았는데 자기는 들풀에 매달린 이슬처럼 잠시 있다 사라지는 존재이고 또 그것도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 태어나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시시각각 만나는 수많은 사태의 변동 속에서 자신이 자신을 지킬 수 없는 미력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우주의 수증기 한 방울, 작은 불빛 하나에도 소멸될 수밖에 없는 미천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때 자기중심성은 여지없이 멀어지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 모든 우주와 세계의 중심에 계시며 자신은 그 하나님을 의존하면서 살도록 창조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에 그때에 우리는 자기중심성과 편협함에서 오는 거친 성품을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한번 질문을 해보겠습니다. 여러분과 가까운 사람이 무엇인가 여러분의 생각에 어긋나는 행동을 했을 때에 여러분은 마음이 상하고 때로는 분노하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다음 두 가지 경우 중 어떤 경우에 해당할 때 여러분의 마음은 더 분노하게 됩니까? 첫째 내 이웃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 했을 때, 둘째 내 이웃이 내가 가지고 있는 인생관에 불순종했을 때 둘 중의 어느 것이 더 여러분의 마음을 분노하게 만듭니까? 여기저기서 자신의 이웃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불순종한다는 소식이 들려와도 별로 분노하지 않던 사람이 자기의 인생관과는 달리 자기와 가까운 사람이 수시로 약속 시간을 어기는 것을 보고 분노하고 그 사람을 자신과의 관계에서 정죄해 버리는 일은 너무나 쉽지 않습니까? 늘 집안을 청결하게 가꾸기를 좋아하는 엄마들이 아이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을 때에는 매를 들지 않지만 아이들이 쓰레기로 방을 어지럽혔을 때는 빗자루를 거꾸로 듭니다. 이것은 무엇인가 앞뒤가 뒤바뀐 가치의 기준이 여전히 자기중심이 된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온유함을 기대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만약에 그런 사람의 인생관에 비위를 맞추며 그 사람의 입맛에 맞는 행동을 한다면 한없이 너그러워질지 모릅니다. 이런 것은 바로 하나님의 거룩함에 대한 인식이 올바르지 않은데서 오는 가치의 전도인 것입니다.
자기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죄인인지를 깨닫고 하나님이 얼마나 도덕적으로 완전하신 분이신지를 깨달을 때에 거기에서 자신은 정말 더러운 죄인이요,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밖에는 기대할 것이 없고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 이외에는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여기에서 그는 진정으로 온유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자기의 이익과 관련되어서는 한없이 너그러울 수 있는 사람, 그러나 하나님의 공의와 하나님의 법에 어긋나는 것을 보면 그 사안의 중대함에 따라 분노할 줄도 아는 사람이야말로 진정으로 균형 잡힌 온유한 사람인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이 온유함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인식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죄인인지를 깨닫고 자신이 얼마나 무가치한지를 깨달은 후에 그런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통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영혼을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신적인 아가페의 사랑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때 비로소 자신이 얼마나 가치 없는 인간인지를 깨닫게 되고 자신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모든 피조물들을 감싸 안고 마지막에는 다시 하나님 자신에게로 돌아가는 하나님 사랑의 우주적인 회기의 과정 속에 자신이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물려받았으니 또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이 사랑을 하나님 때문에 이웃에게 흘려보낼 뿐이라고 하는 겸손함으로부터 비롯되는 이 인격적인 특징이 바로 온유함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관련된 일에는 사람들이 어떻게 잘못된 행동을 하든지 한없이 너그럽고 티끌만한 자신의 물질적인 이익과 그리고 자신이 애착하는 것에 대해서는 과도할 정도로 집착하는 이 모습은 결코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온유함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기적인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 되는 것이 불가능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부르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그러면서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가리켜 말씀하시기를 ‘나는 마음이 온유하니 네 멍에를 나와 함께 지고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무골호인 같은 인생을 사신 분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그 분이 그렇게 온유하다고 말씀하신 분이 부당하게 비둘기 팔고 돈 바꾸는 자들을 성전에서 내쫓으시기 위해서 폭력을 휘두르신 분이었고, 그리고 회칠한 무덤과 같이 외식하는 바리새인을 향해 준엄한 경고를 마다하지 않으신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진리 안에서 모든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께 용납되었고, 심지어는 간음하다 현장에 붙잡힌 여자도 예수님께서는 옳고 그름에 대해서 명확하게 가르쳐 주신 후에 나도 너희를 정죄하지 아니 하노니 다시는 가서 범죄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하나님 앞에 범죄한 사람들조차도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기셨는데 이것은 예수님께서 죄에 대해서 너그러우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자, 의사들은 대부분 자기의 가족을 수술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외적으로 어떤 의사가 암에 걸린 자신의 아들을 수술한다고 칩시다. 아들의 배를 갈랐고, 장기 여기저기에 붙은 암세포들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정성껏 이제 그 암세포들을 시술하는 도구들로 떼어내기 시작합니다. 아들은 한없이 사랑하는 아들이었지만 아들의 몸속에 있는 암세포는 이 아버지에게 있어서 가장 싫어하고 미워하는 물건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암세포를 아무리 미워해도 아들에 대한 사랑은 그것에 의해 훼손되지 않았고 아들을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오히려 암세포에 대한 미움은 아버지의 마음에 더 크게 작용하였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죄와 그와 함께 하는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서 율법 중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이냐고 묻는 이 율법사의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을 다해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고 둘째도 이와 같으니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로부터 사랑을 받았다는 진실한 인식은 자신이 무가치한 존재이고 다만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이 사랑을 다른 사람을 향해 흘려보냄으로써 궁극적으로 하나님께로 그 사랑이 돌아가게 하는 도구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사람에 대한 사랑이 어떻게 일치를 이루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 하나님 안에서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를 소중히 여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반드시 하나님을 닮은 인간의 영혼에 대한 사랑과 일치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영혼에 새겨진 십자가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온유하게 된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의 허물을 보고 무엇인가 자신의 고통을 발견하게 되면 우리는 금세 사람의 허물과 죄를 보게 되고 정죄하게 되고 또한 자신에게 중요성을 부여하게 되지만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깊이 묵상하고 나면 자신은 스스로 주인을 삼을 수 없는 미천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모든 좋은 것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 사실을 매일매일 가슴에 새기고 사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모든 신령한 온유함의 원천인 것입니다.
이 천국 복음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이 모든 천국 백성의 인격적인 특성은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복음과 동떨어져서는 어떤 것도 설명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팔복의 특징은 먼저 예수님이 당신의 인격 안에서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여주신 것이었고, 그렇게 보여주셨을 때에 예수님의 마음에 있는 의도는 이 사랑에 감읍하여 그들도 예수 닮은 인격을 가진 사람이 되고 그래서 이것을 모든 사람에게 두루 비추어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하고 보이게 하는 것임을 예수님은 알려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안에서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를 소중하게 여기며 그 모든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의 일치를 추구하며 살아가는 것이 천국 백성의 삶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두꺼운 성경의 모든 인간의 삶을 향한 가르침은 바로 이러한 사랑의 정신에서 비롯된 하나님의 교훈이라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매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의 빛 아래서 하나님의 은혜와 무가치한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과 낮고 천한 자신 사이를 구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매일매일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은혜 아래에서 살아가는 성화의 생활이 요청되는 것입니다. 매일매일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살지 못하면 한때 회심과 더불어 온유함을 누렸던 사람도 마음이 곧 거칠어질 것이며 그래서 하나님이 백성으로서의 인격적인 특징을 사람들에게 온전히 보여주지 못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통치의 성격은 이것입니다. 진리에 있어서는 추호의 양보도 없는 엄정함이 있지만 사랑에 있어서는 자신을 죽이고자 칼을 든 원수까지도 용서하고 용납하는 관대함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나라가 바로 하나님의 나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미 온유하게 된 사람은 이미 벌써 하나님의 은혜가 그에게 임한 사람이고 천국의 성품으로 그의 인격에 영향을 받은 사람입니다. 이렇게 온유한 사람들은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온유한 사람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돈을 많이 벌고 높은 지위에 오르고 큰 권력을 얻게 된다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만약에 그것이었다고 한다면 예수님께서는 굳이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마까리호이 프라에이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이것은 이 세상에 일반적인 물질과 세속의 번영의 복이 아닌 신령한 복인 것입니다. 이 온유한 사람들은 이 거친 세상에서 지는 자 같아도 이기는 자요 무명한 자 같아도 유명한 자요, 사람들에게 짓밟히는 자 같아도 결국은 사람들을 굴복시키는 자입니다. 예수님의 손에는 짧은 칼 한 자루 들리지 않았고 평소에 몽둥이와 회초리를 가지고 다니시지도 않으셨습니다. 그 분은 단지 입을 열어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선포하시는 분이셨습니다. 바로 그런 분에 의해서 칼과 창을 가진 수많은 나라와 왕의 권세들이 굴복하게 된 것만을 보아도 이렇게 온유한 자가 누릴 신령한 복의 크기가 얼마나 크고 위대한 것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지 않습니까?
III. 적용과 결론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종종 많은 돈과 큰 권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어쩔 수 없이 굴복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까지도 굴복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에 그런 사람들은 지속적으로 영향을 끼치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를 그렇게 많은 돈과 큰 권력으로 무릎을 꿇게 하지 않았을지라도 오류에 빠졌을 때 생각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려움에 처했을 때 그 분은 어떻게 행동하셨을까 반성하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이미 우리의 마음을 지배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이런 방법으로 이 온 세계에 왕들과 수많은 권력자들과 그리고 수많은 전쟁에 능한 군인들을 정복하시며 당신의 나라를 이루어 가셨고, 급기야 예수님의 그 온유함이 우리 또한 그 분 앞에 굴복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눈물 흘리며 참회하며 다시는 죄의 길로 돌아가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따르겠다고 눈물을 흘리며 다짐하게 됐던 때에는 주님의 칼을 우리의 목에 겨누셨을 때가 아니었습니다.
(찬양)
멸시와 욕 가시관 쓰셨네
마지막 피 한 방울 날 위해 흘리셨네
지금도 주님의 뜻을 떠나 냉담한 가슴을 안고 불순종하는 여러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그 분은 수많은 사람들의 목을 친 피 묻은 칼을 여러분의 목에 겨누며 내게로 돌아오라고 협박하시지 않습니다. 마치 우리가 아무리 불순종하며 당신을 떠나도 당신은 아무 힘이 없는 것처럼 십자가에 매달린 채 ‘하나님 아버지 저희의 죄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라고 기도만 하고 계시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사실은 하나님께로 돌아온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예수님의 그 눈물 젖은 피투성이 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서 그 모습이 양손에 피 묻은 칼을 들고 고함을 치며 분노에 이글거리는 눈빛보다도 우리에게는 더 호소력이 있는 주님의 온유함인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이 주님의 이 온유함에 사로잡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때리고 후려치시는 무서운 징계 때문이 아니라 언제나 거기 계셔서 집을 나간 탕자를 기다리던 아버지처럼 일체의 온유한 마음으로 당신께 돌아오라고 부르시는 그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 품으로 돌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온유한 자의 복(2)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 5:5)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온유함은 자연적으로 타고난 유순함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씀을 드렸습니다. 예수님이 세 번째 복으로 말씀하신 온유함은 바로 하나님 앞에 구원받은 자녀들이 신령한 은혜의 작용으로 말미암아 생겨난 새로운 성품입니다. 이 온유함이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있는 심령의 가난함, 자신의 죄와 이루어지지 못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애통함의 결과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II. 온유한 자의 특성
A. 하나님을 향하여
저는 오늘 이 시간에 지난시간에 이어서 온유한 자의 인격적인 특성과 그리고 땅을 기업으로 주신다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온유함이라고 하는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의 작용으로 말미암아 생겨난 성품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사람 모두를 향하여 그 고유한 특성들을 드러내게 됩니다. 온유한 자가 하나님을 향하여 이 온유함을 적용할 때에 그것은 제일 먼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 자기 자신을 내어 맡기는 복종과 그리고 헌신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온유함이 하나님의 섭리에 자신을 기꺼이 내어맡기는 것이라고 해서 이것이 곧 운명처럼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거나 혹은 자기에게 일어난 모든 나쁜 일들을 하나님의 뜻으로 돌리고 전적으로 책임을 회피한다는 그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 온유함은 하나님이 자신의 인생 속에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 속에 어떤 뜻을 가지고 계시다고 믿고 그 하나님의 선하시고 자비로우신 인격에 대해 신뢰하는 마음을 가진데서 오는 부드러운 태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온유함은 한 사람이 하나님과 온전한 평화를 누리고 또 하나님께 사랑을 받고 자신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는 성격의 열매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이 당신 자신의 뜻을 우리에게 보이실 때에 우리가 이것을 섭리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당신의 뜻을 알리시는 방법이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계시이고, 하나는 섭리입니다. 계시는 “모든 사람에게 밝히 나의 뜻은 이러이러하다.”라고 표명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계시라고 하는데 이것은 바로 드러난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나 섭리는 감추어진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언인지 잘 알 수가 없지만 일단 그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믿음으로 살아가고 나면 세월이 흐른 후에야 하나님의 이런 뜻을 이루시려고 나를 그런 길로 인도하셨구나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하나님의 섭리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런 하나님의 섭리를 겸손하게 받아들이며 자기를 내어 맡김으로써 온유한 삶을 살았던 본보기로서 요셉을 거론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는 그렇게 잘못한 것이 없었지만 형들의 시기심에 의해 노예로 팔려갔고 팔려간 그곳에서도 열심히 봉사했으나 모함을 받아서 또한 옥 속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인생 굽이굽이마다 그에게는 자신의 인생을 불행하도록 고통 가운데 변화시켜 그렇게 시련을 당하도록 만들어주는 원인을 제공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요셉이 그들 중 아무도 원망하지를 않습니다. 보디발의 집에 팔려가서 자기를 노예로 판 형을 원망했거나 혹은 보디발의 아내의 간교를 거절하자 옥에 갇혔을 때에 자기는 너무 억울하게 옥에 갇혔고 진짜 범인은 보디발의 아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자기가 옥에 갇혔을 때에 왕에게 복직되면 반드시 당신의 이 억울한 사정을 얘기해 주겠노라고 약속했던 약속을 저버린 그 술 맡은 관원장에 대해서도 불평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요셉에게는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자신이 이련 시련을 당하는 모든 인생의 과정을 통해서 이루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이 있다고 믿는 신앙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어렸을 적에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계시적인 비전이었는데 섭리를 통해서 드러나게 될 비전이었습니다. 해와 달과 열한별이 자신에게 절하는 꿈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섭리를 믿으면서 거기에 최선을 다해 자신을 맡기면서 사는 사람들의 온유한 모습입니다. 그래서 그는 어디에 가든지 과거에 자기에게 일어난 불행한 일들이 상처가 되어서 현재의 사람들과의 관계를 파괴하는 것 같은 그런 어리석은 행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모두 그에게 하나님의 축복으로 되돌아 왔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화목한 가운데 그 완전한 평화 속에서 사랑을 누리고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자신을 어떻게 처분하시든지 그 분의 뜻에 자기를 온전히 맡겼던 온유함의 모본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비록 하나님이셨지만 여전히 사람이셨기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으셨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할 수만 있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겨주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뜻대로 하지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하나님께 자기 자신의 생명까지도 맡기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완전하시고 선하시고 아름다우신 하나님 아버지를 온전히 의뢰하는 그 아들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향한 일체의 온유함이었습니다. 예수님 오시기 700여 년 전에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시면서도 일체의 불평을 하지 않고 자기를 기꺼이 버려 순종하실 것에 대해서 말씀하시기를 그는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과 같았다고 예언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었습니다.
한 해 동안 살아온 여러분의 모습은 어땠습니까? 하나님이 명령하시는 바가 여러분의 소원과 부합할 때에는 기쁨으로 주님을 섬긴답시고 따랐지만 하나님이 혹시 더 큰 선을 위해서 여러분이 원하시지 않는 길을 가라고 명령하실 때에는 불평도 하고 하나님 앞에 앙탈도 부리고 때로는 하나님께 거역하기도 했던 것이 우리의 모습이 아닙니까? 이것은 바로 우리에게 온유함이 얼마나 결핍되어 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자아가 강한 것을 자랑하는 사람이 있지만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죽은 것만큼 자랑스러운 것이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내가 죽음으로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충만하게 사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B. 사람들을 향하여
이렇게 온유한 인격이 사람들을 향하여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리고 온유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관계들 속에서 그 온유함을 발휘함으로 이미 있는 관계는 그리스도 안에서 돈독하게 하고 없는 관계는 새롭게 형성하면서 하나님이 주신 자원들을 그 관계들을 통해 흘려보냅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하고 자신 앞에 결핍이 있는 사람들을 향해서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자원들을 나누면서 그러면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데 이바지하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빌립보서 4장 5절은 말합니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고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가장 소중한 미덕중 하나는 온유함인데 온유한 사람은 모든 사람에 대해서 관용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관용이 남의 악을 쉽게 용납하고 불의와 손쉽게 타협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이 관용은 사람들을 부당한 방식으로 미워하거나 혹은 폭압으로 다루지 않는 부드러움과 너그러움의 사랑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자기의 이익 때문에 남을 쉽게 원망하거나 작은 이익 때문에 사람들과의 관계를 쉽게 파괴하지 않습니다. 누가복음 23장 34절에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매달리신 체 기도하셨습니다.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악한 군인들을 향해 아버지 하나님께 중보의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저희들이 하고 있는 일의 의미를 저들이 모르고 저 일을 하고 있으니 하나님은 저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는 간절한 탄원이었습니다. 당신은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려 죽어 가심에도 불구하고 지금 현재적으로 당하고 있는 당신의 고통보다는 저들이 그 큰 악을 행함으로 미래의 하나님께로부터 당하게 될 그 큰 심판의 고난을 생각하며 현재의 아픔보다는 미래에 저들의 심판의 아픔을 기억하며 하나님께 눈물의 탄원을 올리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한 성품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온유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무조건 악을 쉽게 용납하고 남의 불의를 타협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어떤 일에도 분노할 줄 모르는 사람이야말로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온유한 사람들은 적어도 자기의 이익 때문에 남을 비난하거나 혹은 다른 사람이 죄를 지었다는 이유 때문에 사람까지도 미워하는 그런 악을 행하여 주님의 마음에 고통을 드리지는 않습니다.
요한복음 8장에는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들려온 여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자는 변명할 수 없이 모세의 율법을 범하였고 이런 사람들은 율법에 의하면 돌로 쳐서 죽이도록 되어 있습니다. 종교 지도자를 비롯한 유대인들의 손에는 날카로운 돌멩이들이 들려 있었고 명령만 떨어지면 이제 이 돌멩이로 여자의 머리를 쳐서 피를 묻힐 수간이었습니다. 한 순간에 이 여자의 죄를 판단했을 때에 이들의 마음속에는 죄가 아닌 죄를 지은 이 여자에 대한 증오와 미움이 펄펄 끌어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제 재판이 이루어지기를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누구보다도 거룩하신 분이었기 때문에 이 여자가 지은 그 죄는 끔찍이 미워하셨지만 그러나 그 여자는 지극히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모세의 율법을 존중히 여기면서도 복음의 의의를 이룰 수 있는 신적인 지혜를 그들에게 보여주셨는데 그것은 바로 ‘이 여자가 이 일을 행한 것은 분명히 죄이다. 그리고 이 여자는 형벌을 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너희 중에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자를 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때 완악한 그들이었지만 예수님의 이 정곡을 찌르는 율법과 복음의 조화는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 완악하기 그지없던 이 사람들이 모두 돌멩이를 내려놓고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무죄한 자이시기 때문에 율법을 따라서 이 여자를 충분히 돌로 칠 수 있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자격을 갖추신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여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범죄하지 말라’고 말입니다.
사람들은 참 이상했습니다. 미워해야 할 죄는 사랑하면서 사랑해야 할 사람은 미워했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이 남의 죄를 정죄할 때 자신은 그 죄와 아무 상관없이 하나님보다도 더 높은 위치에 있다고 착각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죄를 사랑하면서도 죄에 대한 증오가 아닌 사람에 대한 증오를 나타냄으로 율법으로 복음을 깨뜨리기도 합니다. 때로는 복음이라는 미명하에 하나님의 율법을 무력화시키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 어떤 것도 팔복에서 말하는 온유한 사람의 고유한 특성은 아닌 것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죄에 대한 미움 때문에 사람도 함께 미워하거나 사람에 대한 사랑 때문에 죄도 함께 사랑하는 그런 일은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따라 죄를 미워하되 그 사람을 한없이 불쌍히 여기는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이 바로 온유한 사람이고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 사람과 관계를 맺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하심, 그리고 의로우신 정의를 함께 힘입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나타나는 팔복의 특성 심령이 가난하고, 애통하고, 온유해지고, 의에 주리고, 목마르고, 긍휼히 여기고, 마음이 청결하고, 화평케 하고, 의를 위해 박해를 받는 이 모든 인격의 특성들은 모두 인간 스스로 불러일으킨 인간에 의해 개발된 특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산물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먼저 이미 우리 안에서 신령한 작용을 시작한 성령의 은혜로 말미암는 새로운 변화 받은 특성인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에 이 팔복은 이미 하나님이 우리 안에 까리따스의 사랑을 주셔서 그 사랑이 움직이고 있는 특성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닌 것입니다.
온유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나와 다르다는 이유 때문에 그를 무시하거나 멸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온유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하나님이 나와 다르게 만드셨다는 사실에서 하나님을 찬양할 이유를 발견하게 되고 나와 다른 사람이 있기 때문에 내가 그 사람 때문에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그 다른 사람도 나 때문에 아름다워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속이 좁아터지고 온유함과는 거리가 먼 사람은 항상 죽이 맞는 친구를 찾아서 몰려다니며 당을 이루지만 온유한 사람들은 자기와 생각이 다른 사람과도 교제하고 대화하고 그래서 그에 의하여 좋은 일에 대해 설득을 당하고 좋은 것에 대하여 다른 사람을 설득하는 일에서 기쁨을 느낍니다. 그리고 서로를 통해서 배우고 서로의 교제를 통해서 서로가 서로를 온전해지게 하는 데까지 나아가는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이것이 바로 온유한 자의 특성인 것입니다.
여러분 지난 한 해 동안 살아오면서 온유하지 않았기 때문에 혹은 한때는 온유했으나 온유함을 잃어버리기 때문에 결단이 나버린 우리들의 관계가 얼마나 많이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자신을 향해서는 수없이 커다란 잘못을 끊임없이 용서하면서도 남을 향해서는 작은 잘못 하나에 관계 자체를 아예 파괴해 버리고 마는 그러한 폭력적인 성격을 가진 사람들이 우리들이 아니었습니까? 그래서 어떤 신학자는 우리에게 말했습니다. ‘어떻게 다른 사람의 죄는 미워하고 그 사람은 사랑할 수 있느냐고 사람들은 묻습니다. 그러나 똑같은 일을 우리 자신에게는 매일매일 하고 있습니다.’ 감동이 안 됩니까? 사람들은 묻습니다. 어떻게 죄는 미워하고 사람은 사랑할 수 있느냐고 말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렇게 어려운 일은 우리에 대해서는 매일매일 하고 있습니다. 치열한 경쟁 사회에서 인간관계가 많지만 모두 이용하고 써먹는 관계, 어느 하나도 우리를 우리 존재 자체를 사랑스럽게 생각하고 우리의 소유나 우리의 지위, 우리의 미모,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식이나 재능 같은 것 상관없이 우리 존재 그 자체를 생각하고 이름을 불러주는 그러한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목말라 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그런 신실한 온유함으로 사람들에게 다가갈 때 사람들은 그 속에서 향기를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무엇인가 자기의 외로움과 고통을 털어놓고 싶은 그런 말하자면 사모함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생을 사는데 누구도 자기에게 와서 무엇을 털어놓는 사람이 없다면 온유함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제가 아주 어렸을 때 읽었던 책입니다. 여러분보다 더 어렸을 때인데 박목월씨가 쓴 책이었습니다. 무슨 책인지는 기억이 안 납니다. 기차를 타고 여행을 하는데 강릉 쪽으로 여행을 하는데 어느 여학생이 맞은 편 자리에 앉았답니다. 그래서 이제 말동무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디 사는 박목월 선생님 아니시냐고’ 그래서 ‘그렇다고’ ‘저는 어디 사는 누구인데요.’ 그러면서 이야기를 하고 갔습니다. 그런데 그 여학생이 대학생으로 보이는 여학생이 그런 질문을 했습니다. “선생님 인생을 살면서 죽고 싶을 정도로 괴로울 때는 어떻게 하셨어요?” 처음 만난 사이에 뭐 그런 이야기를 주고받을 그것도 저명한 분이니 심리학적인 나포가 잘 형성이 안 되어 있을 것 아닙니까?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건 뭐 그렇게 쉽게 길 가다가 만난 사람한테 털어놓을 사정은 아닙니다. 그냥 슥 지나가는 이야기로 듣고 피상적으로 이야기를 했는데 며칠 후에 그 여학생이 설악산에서 자살한 시체로 발견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때 후회를 한 것입니다. 그 자매가 마지막 자살의 문을 두드리기 전에 마지막으로 자기에게 누군가에게 물어보고 마음을 털어놓고 싶은 사람이 자기였는데 그때 자기가 정말 마음을 다해서 대답을 해 주었더라면 그 여학생의 죽음을 막을 수 있었을 텐데. 미리 알았더라면 그렇게 했겠지만 뭐 그 분을 비난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 것입니다.
사람들은 니체가 말했듯이 모두들 혼자인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모두 다 자신이 혼자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외로움을 아주 직면하면서 철저하게 느꼈던 사람들이 실존주의자들이었습니다. 오늘날 그런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서로 이야기를 해도 눈을 마주보지도 못합니다. 그리고 각자 무슨 동창회라고 모여도 탁자 밑에다가 아이폰 놓고 두드리면서 이야기를 합니다. 가상의 사람들과 교통하기 위해서 눈앞에 있는 사람은 무시해 버리는 것이 오늘날 현실입니다. 사람들의 외로움은 점점 깊어집니다. 이럴 때에 온유한 사람은 사막에서 만나는 오아시스와 같습니다. 한번 온유하다고 해서 어느 날 와서 남들이 자신의 모든 고통스러운 사정을 털어놓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온유한 인격으로 사람들을 대하면 사람들은 점점 더 많이 그 사람에게 매력을 느끼게 될 것이고 모든 사람들에게 이용당하고 차갑게 거절당하던 자신이 온유한 그 사람 앞에서는 용납되는 기분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라고 말씀하셨던 중요한 한 이유인 것입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지난 한 해 동안도 여러분보다 더 곤고하고 괴로운 사람들이 여러 번 여러분에게 교제의 문을 두드렸으나 여러분은 여러분 삶에 코 박고 바쁘게 사느라고 다른 사람의 신음소리에 귀를 기울일 여력이 없었습니다. 여러분이 각기 자신이 이 세상에서 제일 외롭고 아픈 사람인 것처럼 가슴을 부여안고 살아가고 있는 동안에 여러분보다 더 비참한 처지에서 신음하는 사람들이 여러분과 함께 교제할 기회를 잃어버렸고 그리고 소외당했습니다. 그래서 교회 나와도 이름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허울만 하나님 안에서이지 실제로 그 안에 온유하게 서로 교통하고 자기를 용납해 주는 사람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여러분이 깨어진 가족 관계에 직면해야 하는 명절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여러분 지난 한 해 동안도 여러분 가족들 속에서 얼마나 온유한 삶을 살았습니까? 그들이 고통스러우면 그 고통에 귀를 기울이고 아프면 그들의 아픔에 귀를 기울이는 대신 여러분의 작은 아픔은 크게, 남의 큰 아픔은 아주 사소하게 생각하며 마음의 문을 닫고 교통하지 않은 채 살아오기가 일쑤가 아니었습니까? 그래서 여러분이 예수를 믿으며 살았지만 여러분의 믿지 않는 가족들에게 끼치는 영향은 미미했고 아니 더 심지어는 하나님에 관한 그리스도 예수에 관한 잘못된 인상을 심어주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은 이렇게 온유한 자들을 통하여 당신의 나라를 펼쳐 가신다고 하는 복음적인 사실을 알려주는데 실패하지는 않았습니까?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사시면서 사람들을 향해 어떻게 대하셨는지 한번 생각해 보기를 바랍니다. 버림받았던 사람들, 그리고 아무 희망이 없다고 쓰레기처럼 버려졌던 사람들을 예수님께서는 찾아가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자비와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찾아온 것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그 사람들에게 찾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고, 이웃이 되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당신을 통해 하나님이 주신 구원의 복음을 전해 그들 모두를 하나님과 화목한 사람이 되게 하려고 희생의 삶을 사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온유한 자의 삶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약에 우리가 마음속에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진정한 영적인 만족, 하나님과 화해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오는 기쁨이 없다면 우리는 결코 온유한 사람이 될 수가 없습니다. “예수 안에서 내가 받은 이 사랑은 한이 없고 충분하고 나에게는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라는 신적인 유열 속에서 사는 사람들은 언제나 여유가 있습니다. 그들은 돈이 많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도와주는 게 아니라 하나님과의 평화와 만족에서 오는 여유가 자신을 내어주어 다른 사람을 기꺼이 섬기도록 만들어 주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 온유한 사람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하나님의 나라도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의 나라인지를 이 세상에 펼쳐 보이시는 것입니다.
지금보다도 더 가난하고, 더 하는 일이 많고 바쁘고 그리고 더 열심히 하나님을 위해 헌신할 때에도 여러분의 마음속에 은혜가 있었을 때에는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너그러울 수 있었습니다. 용납하고 이해하고 남의 유익을 위해서 자신의 즐거움과 편리함을 기꺼이 희생할 수 있는 그런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을 향해 사람을 향해 우리를 유순하게 하고 하나님의 뜻과 섭리에 온전히 복종하면서도 사람들을 향해 한없이 용납하고 그들의 아픔까지도 끌어안고 긍휼히 여길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그 온유함이야 말로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현저한 인격적인 특징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온유한 사람이 되도록 주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III. 땅을 기업으로 주심
A. “땅”의 의미
그러면 온유함이 이처럼 중요한 것이라면 상급도 꽤 많겠네요. 성경이 말합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입니다. 이 성경 구절에 대한 최악의 해석은 천성이 너그러운 사람들은 부동산을 많이 얻게 된다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해석은 바로 이 본문에 등장하고 있는 중요한 신학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한 단어, 땅에 대한 이해가 현저히 부족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현상인 것입니다. 땅이라고 번역된 이 단어는 희랍어로 ‘겐’(γῆν)이라는 단어인데 이것은 히브리어 ‘에레츠’($r,a)의 등가어입니다. 다시 말해서 ‘겐’이라는 단어를 예수님이 말씀하셨을 때에, 또 유대인들이 들었을 때, 마태가 이것을 기록하였을 때에 이 마태의 기록자 마태의 마음속에 있었던 단어는 이 ‘에레츠’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에레츠 역시 에레츠에 대한 마태의 이 이해는 예수님께서 이 ‘겐’이라고 하는 단어,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아람어로 말씀하셨을 텐데 이 ‘에레츠’라는 단어에 담긴 예수님의 이해를 계승하는 것이었다고 봐야 됩니다.
그러면 이제 ‘겐’이라는 단어, 이에 상응하는 단어인 히브리어의 에레츠라고 하는 단어는 구약 성경에서 그렇게 간단한 단어가 아닙니다. 어마어마한 신학적인 개념을 담고 그래서 구약 성경 전체의 역사를 면면히 흐르고 있는 아주 중요한 개념입니다. 이 에레츠라고 하는 단어는 땅 ‘earth’를 가리키지만 동시에 그 땅에 사는 사람들도 가리킵니다. 그래서 에레츠는 땅인 동시에 거주민, 사람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땅과 사람이 얼마나 분리될 수 없는 그런 신학적인 신토불이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선 인간이라고 하는 보통 명사이기도 하고 하나님이 처음 창조하신 그 사람의 고유 명사이기도 한 아담이라는 이 단어는 ‘아담아’, ‘땅’이라고 하는 히브리어 단어에서 나왔습니다. 혹은 흙이라고 하는 단어에서 나왔고, 이 아담아, 혹은 아담이라는 단어는 에돔 하고도 어근이 같은 것인데 붉다는 의미입니다. 팔레스타인인의 지형이 진흙이 많기 때문에 지질이 붉은 색의 토양이 많습니다. 그러니까 ‘붉다’라는 말과 흙, 땅이라는 말이 교차적으로 사용이 되면서 아담아 라는 단어가 유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 역시 에레츠의 의미를 계승하고 있는 것입니다.
B. “땅”의 성경적 가르침
하나님이 이 모든 세계는 무로부터 창조하셨는데 이 모든 세계보다도 더 중요한 인간은 놀랍게도 무로부터 창조하지를 않으시고 거기에 있는 흙을 취하여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심으로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면서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이 흙으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흙과 인간이 운명 공동체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후로부터 인간은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아주 정확하게 땅과 인간의 관계에 반영이 됩니다. 그래서 이제 땅에 대한 성경적인 가르침을 보면 구약에서는 인간과 하나님이 맺는 관계가 땅의 상태를 규정합니다. 그래서 땅의 상태를 보면 인간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나쁜 상태에서 좋은 것으로 변하거나 좋은 상태에서 나쁜 것으로 변하는 것과 발맞추어서 땅이 나쁜 상태에서 좋은 상태로 회복되거나 좋은 상태에서 나쁜 상태로 말하자면 퇴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 이러한 사실은 역대하 7장에 보면 잘 나타납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지었고, 하나님 앞에 일천 번제를 드렸고, 하나님은 그 제사를 매우 기쁘게 받으시면서 솔로몬의 성전과 이스라엘을 축복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축복하신 그 축복의 절정의 순간에 무엇을 말씀하시냐 하면 ‘만약에 너희 땅에 큰 재앙이 일어나서 황폐하게 되면 너희가 이 성전을 향하여 죄를 회개하면 나도 이 땅을 고쳐줄 것이다.’ 라는 말씀 속에서 이와 같은 신학적인 사실은 아주 분명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사실 이 땅에 대한 이야기는 굉장히 긴 설명을 필요로 하지만 오늘 우리의 설교의 목적이 이 온유한 자의 복을 설명하는 것이기 때문에 간략하게 말씀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선택하여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만드셨습니다. 그를 이스라엘의 믿음의 조상으로 선택하시기 전 그는 그저 갈대아우르에서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섞여서 우상을 만들고 섬기며 살아가던 집안의 자식이었습니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하나님이 유독 아브라함을 선택하셨고, 그리고 그에게 주신 명령은 바로 본초 친척 아비의 집 곧 땅을 떠나라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에게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와 같이 자손들을 많게 해줄 것이라고 약속하지만 그 약속은 그 땅에서 이루어질 약속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면서 이 땅을 떠나라고 명령하시면서 동시에 약속을 주시는데 그 약속이 바로 땅에 대한 약속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약속은 아브라함 때에는 이루어지지 않고, 많은 세월이 흐른 후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이 형성되어서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나라를 이루게 되었을 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가나안 땅을 약속하십니다. 이 땅을 주시리라고 하는 이 약속은 단순히 그냥 땅을 주겠다는 약속이 아닙니다. 이 땅을 주시리라고 하는 이 약속은 바로 이제 너희는 땅을 중심으로 주종관계가 형성되어 남의 나라에서 종살이하던 삶을 청산하고 안식을 얻게 된다는 의미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과의 평화에서 비롯되는 완전한 안식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에게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 가까운 광야 생활 끝에 가나안 정복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본격적으로 가나안을 정복하기 직전에 그들은 모세의 인도를 따라 미리 그려놓은 가나안의 지도를 가지고 제비뽑기를 합니다. 지파별로 차지하게 될 땅을 먼저 정하고 당연히 그 지파에서는 다시 그 지파에게 할당될 땅을 나누어 족속별로 분할하고, 족속들은 다시 가문별로 분할하고, 가문은 다시 가족별로 분할하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하고 이제 함께 정복을 시작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약속대로 삽시간에 가나안 원주민들을 몰아내고 그 땅을 차지하게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바로 그 땅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심으셨던 것입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이제 광야 생활 애굽에서의 노예 생활을 청산하는 진정한 안식이고 하나님과의 평화를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자, 중요한 것은 바로 지금부터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그런 땅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셨을까요? 더 정확하게 말해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신 후에 그들을 많은 연단 끝에 40년 동안 광야에서 인도하시고 일정한 크기의 땅을 주셔서 거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토를 삼아 나라를 건설하게 하신 하나님의 의도가 무엇이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매우 중요한 질문이고 이 질문에 대한 답 없이는 5장 5절에 대한 어떠한 해석도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무얼 원하셨을까요? 자, 문제는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그 땅은 바로 하나님과의 평화와 구속의 안식을 누리는 땅이었습니다. 그 땅 안에서 하나님과 평화가 이루어지고 하나님과 평화가 이루어진 그것이 사람들 속에 그대로 실현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에 의해서 정의가 완성되고 정의에 의해서 사랑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독특한 공동체를 지상위에 세우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내가 너에게 땅을 줄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 땅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거기에서 안식을 얻게 하리라 하신 이 말씀은 곧 너희에게 그리스도 예수를 줄 터인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는 나와 평화를 누리고 안식을 얻게 되리라고 하는 말씀과 동일한 말씀이었던 것입니다.
자, 좀 더 설명을 진전해 보겠습니다. 이 세상 나라는 각각 창과 칼과 무력으로 정복을 해서 큰 나라를 만듭니다. 그리고 그 큰 나라는 오직 한 사람을 행복하게 하고 그를 떠받들기 위해서 존재합니다. 그래서 그 나라의 모든 법과 제도와 질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왕 하나를 섬기기 위한 질서로서 구축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런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만약에 이스라엘도 그런 식으로 세워지는 나라였다면 하나님이 접근을 달리 하셨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리고 그 평화를 사람들 속에서 확대하고 하는 이 일들이 땅을 토대로 이루어지지만 하나님의 계획은 이 땅을 무한정으로 확장해서 그 일들이 이런 왕국의 정복과 그리고 왕국의 건설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나라가 하나님이 보여주고 싶어 했던 하나님의 나라의 궁극적인 모습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만약에 그것이 궁극적인 목적이었다면 하나님은 그 일을 하실 때에 가나안 땅이라고 하는 작은 땅을 주실 것이 아니라 그 후에 엄청난 군대들을 일으키시고, 그리고 알렉산더와 혹은 이순신과 넬슨 제독과 이런 역사상 유명한 군인들을 일으키셔서 전 세계를 무력으로 정복하게 하셨어야지 맞습니다. 어리석게도 이런 꿈을 꾸고 있었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사람들이 바로 다윗 왕국의 재건을 꿈꾸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다윗 시대뿐 아니라 또한 예수님 시대에도 이런 사람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육적인 왕국과 영적인 왕국을 혼돈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 하신 것은 영적인 의미에서 이제 하나님과의 평화가 이 땅에서 어떻게 이루어져야 되는지를 보여주고 그것이 인간의 힘으로 오는 나라가 아니고 영적이고 신령한 권세로 오는 나라라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육적인 이스라엘의 껍질이 깨어져야만 됐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을 정복할 때에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최고의 믿음으로 정복했고, 하나님과의 평화가 이루어졌습니다마는 가나안에 들어간 지 5~6년밖에 지나지 않아서 벌써 그들은 타락의 징조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 그렇게 하나님이 땅에 건설하게 하신 그 나라가 하나님 나라에 완전한 이상을 보여준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불가능한 일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결국은 그들은 하나님이 세우신 그 나라를 세속적인 방식의 나라로 바꾸려고 하였고, 이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가져와서 결국은 하나님이 왕들을 폐하시고 이스라엘 나라를 멸망하게 하신 원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가나안에 들어가고 나서 그들이 하나님을 떠나기 시작했을 때부터 하나님이 주신 땅에 얽힌 이 신학적인 깊은 비밀들을 온전히 붙들지를 못했습니다.
이사야서 5장 8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가옥에 가옥을 연하고 토지에 토지를 이어서 가지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화가 있을지어다”라고 말입니다. 이 땅은 하나님이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땅은 각자에게 주어진 구역이 있고, 그것을 넘어가서 다른 사람을 침략하는 것도 죄이고, 또 자기의 것을 잃어버리는 것도 하나님 앞에는 책망 받을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성경에 나오는 유명한 경계표 사상입니다. 하나님이 각 족속에게 그 경계를 주시고 그 경계 안에서 경계를 따라서 살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날의 일본 사람들이 자신의 침략을 침략에 대한 정의가 불분명하다고 말하면서 볼멘소리를 하면서 자신들의 침략을 정당화하고 약탈당한 사람들에 대해서 말하자면 죄의식을 갖지 않는 저런 행위들은 성경적으로도 정죄를 받아야 마땅한 잘못된 판단입니다. 하나님이 절대로 기뻐하시는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한국 교회 사회에서 보면 일본의 패망을 확신하던 그리스도인들이 많았습니다. 반드시 저것은 적그리스도의 나라다 반드시 망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확신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레위기 25장에 보면 이 땅에 대한 하나님의 아주 오묘한 섭리가 드러납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어떤 식으로든지 이스라엘은 땅을 중심으로 주종 관계가 형성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는 토지 사상입니다. 고대로 돌아가 보면 땅은 어떤 재화를 생산해 내는 유일한 수단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땅에서 나니까 그리고 곡식과 농산물이 재화의 근본이었으니까, 또 광물질도 결국은 땅에서 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까 그렇게 해서 어떤 소득을 하고 인간의 식생활을 해결할 수 있는 자원들을 생산해내게 되는 땅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은 곧 사람들이 그에게 종속되어서 노예로 살아가야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누구도 땅을 독점적으로 소유하고 그 땅을 중심으로 계급사회가 형성되는 것을 금하셨습니다. 그것이 레위기 25장에서 강력히 요청하고 있는 희년 사상입니다. 그래서 희년이 되면, 그러면 안식년이 7번이 돌아온 때가 되면 그러면 그 희년에는 자기가 땅을 정당한 이유로 빼앗겼어도 아무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되찾아 올 수 있고, 또 정당하게 자기가 빚이나 이런 것에 팔려서 남의 집에 종으로 들어갔다고 할지라도 희년을 맞을 때에는 해방되어서 그에게서 풀려나게 하심으로써 누구도 일시적으로 재화가 없다는 것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종노릇할 수 없도록 그것이 운명처럼 신분이 계승되지 못하도록 하나님이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땅에 대한 사상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땅을 가지고 섭리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신약에 와서는 결국 이 땅이 궁극적으로 물리적인 땅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승화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에 와서는 왕국 개념의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이제는 보이는 물리적인 땅 안에 눈에 보이는 나라를 세우심으로써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리는 역사를 실패하게 하시고 그 대신 그것이 깨뜨려져 파괴됨으로써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을 때에 많은 열매가 맺는 것처럼 육적인 이스라엘이 뭉그러지고 썩어서 깨뜨려짐으로 그 안에서 그리스도의 나라가 서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는 물리적인 땅이 아니라 예전에는 물리적인 땅을 통하여 하나님의 통치를 펼치는 것이었다면 이번에는 반대로 각 사람 속에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이 전해져서 그 안에 영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인격의 변화가 일어나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뀌어서 그래서 그들이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들임으로 궁극적으로 옛날의 그 땅이지만 새로운 도덕의 질서를 구축하는 것이 하나님이 신약에서 제시하시는 왕국의 개념입니다.
그리고 땅이 기업이 되는 방식도 이제는 다릅니다. 예전에는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 가나안 원주민과 전쟁을 했습니다. 그래서 물리적으로 그들을 창칼로 무찔러서 죽여서 쫓아내고 그리고 그 땅을 차지하고 말뚝을 박음으로 이스라엘의 땅이라고 하는 것을 선포를 했습니다. 지금은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존 오웬 목사님은 자신의 책 속에서 원래 이 창조하신 모든 세계는 하나님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들만이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것은 맞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하나님 안 믿는 사람들이 더 많은 땅을 가지고 있습니다. 법원에다가 소송을 낼까요? 저 사람들은 하나님의 친자가 아니다 라고 하는 소송을 낼까요? 우리가 진정한 하나님의 상속권이 있는 하나님의 자녀이고 증인은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이시다 라고 소송을 내면 법원에서 무엇이라고 할까요? 그래서 이제는 그런 육적인 방법으로 다시 가나안을 정복하던 방식과 같은 방법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것은 우리에게 두 가지 사실을 제시해 주는데 하나는 일반 은총적인 차원에서의 제시이고, 또 하나는 특별은총적 차원에서의 제시입니다. 일반은총적 차원에서는 어떻게 생각해야 될까요? 무슨 뜻이냐 하면 이제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밥 벌어먹기 위해서 사업을 하고 직장을 다니고 그러는 사람은 없어야 되겠다는 이야기입니다.
자, 예를 들어봅시다. 이번에도 신문을 보니까 회계 법인에서 감사의견서를 내기를 거절한 여러 회사들이 상장이 폐지될 말하자면 기로에 놓였다고 합니다. 그게 무슨 뜻이냐 하면 회계 법인이 가서 회계 감사를 하는데 회사 돈을 워낙 개판으로 쓴 것입니다. 의견서를 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견서를 내지 못했다 그런 이야기는 왜 그러냐 하면 말할 수 없이 개판이다 그러니까 이 회사는 말하자면 불법에 가깝게 경영을 하고 있다고 하는 무언의 항의입니다. 그러면 그 회사는 이제 세무서의 감찰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자, 예를 들어봅시다. 이제 여러분이 회사에 들어갔습니다. 치열한 경쟁을 치루고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청운의 푸른 꿈을 안고 입사를 했는데 가보니까 경리부로 들어갔습니다. 무얼 시키냐 그러니까 이중장부 담당입니다. 만날 가짜 영수증 모으고 거짓 회계 서류를 작성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 할 만한 일일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런 일을 하고 있습니다. 당장 사표내고 때려 치려니 눈만 감으면 셋넷 올망졸망한 애들이 떠오르고 그리고 한 아내가 떠오릅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복잡한 것입니다. 그리고 방황을 하는데 어떤 사람이 큰 꿈을 가지고 그 회사를 인수했습니다. 그리스도인입니다. 와서 보고를 이렇게 봤더니 하는 말이 “세상에 하늘 아래에 이런 회사가 어디 있냐? 어떻게 이렇게 개판으로 경영을 하냐?” 그러더니 부르는 것입니다. “야, 너 담당 업무가 뭐냐?” “2중 장부 써서 세금을 포탈하는 것입니다.” “야, 당장 집어치워라. 다 없애버리고 여태까지 포탈한 금액 모두 신고해서 세금으로 얼마 내야 하는지 찾아봐.” 모든 것을 정석으로 돌려놓는 것입니다. 그러면 수많은 범법자들을 이제 정상인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매년 회계감사 받을 때마다 가슴을 졸이면서 양심에 어긋나는 행동을 해야 될 이유가 없고, 교회에 와서 표리가 부동한 자신의 생활을 인해서 양심의 가책을 받아야 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자기는 그렇게 많이 기도했는데도 응답이 안됐는데 사장 한 사람이 바뀌니까 한 번에 해결이 됩니다.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됩니까? 그러니까 있는 것은 있는 것이고 없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힘이 없고 미력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사회 개혁의 한계와 권력이 있고 힘 있는 사람이 할 수 있는 한계가 어떻게 다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해야 되냐 하면 이제는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간 세상이니까 어쩔 수 없지만 공정한 룰을 따라서 정당하게 경쟁을 해야 됩니다. 그러면 저 사람들은 부정당하게 경쟁을 하려고 하잖아요. 그래서 쓰지도 않은 돈을 비자금을 형성해서 정치권의 뇌물로 바치고 기업의 특혜를 업고 이러면서 회사를 불려서 돈을 많이 벌게 해 줌으로써 자기가 훌륭하고 유능한 경영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번에 있었던 원전 비리 사건을 한번 보십시오. 이 세상에 정신이 있는 사람들인지 이해가 안 갑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범죄 행위를 하고 가짜 테이프를 이렇게 시험서까지 조작을 해 가지고 국민의 목숨이 달려있는 이 어마어마한 사건을 그렇게 해서 번 돈이 대체로 몇 백억이었다고 하니 그게 얼마나 나쁜 짓입니까? 그 사람들이 과연 회개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세상은 그런 식으로 부당하게 경쟁을 합니다. 우리도 그 경쟁을 이기기 위해서 똑같이 부당한 방법으로 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어떻게? 정당한 방법으로 해야 합니다. 그러면 부당한 방법으로 경쟁하는 사람과 정당한 방법으로 경쟁하는 사람이 과연 승산이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믿음이 필요하고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고 그렇게 결론을 낸다면 여러분은 할 일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가만히 누워 있어야 합니다. 밥이나 먹고 말하자면 할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치열하게 싸우면서 자신으로 말미암아서 이 세상이 무엇인가 하나님이 뜻하는 세상으로 변화되어 가도록 이바지하면서 사는 것이 사업하는 사람의 삶이고, 직장 생활하는 사람이고 그래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많은 것들을 차지하고 난 후에는 하나님이 원하는 질서로 돌려놓아야지 자신이 그 일을 계승해서 똑같은 일을 하려고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특별히 은총적인 차원에서 우리에게 주는 적용은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물리적인 땅이 아닌 하나님의 통치를 이 땅에 펼치심으로써 각 사람들 마음속에 이기심을 타파하고 온유한 마음을 갖게 함으로써 모든 사람에게 선을 행하고 사랑을 베풀려고 하는 마음을 갖게 될 때에 그리스도는 사람들의 마음을 얻으셨고 사람들 마음속에 왕 노릇 하시기 때문에 그가 종사하고 있는 모든 영역에서 당신의 왕 되심을 이룩해 가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거기에 이바지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땅을 기업으로 우리에게 주신다고 하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여’ 라고 하는 말은 이렇게 온유한 삶을 사는 사람들은 바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복음의 거룩한 감화력과 신령한 은혜의 영향력을 끼치게 될 것이다. 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방법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 분에게는 단 한 평의 땅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 스스로 말씀하시기를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나는 새도 깃들 곳이 있지만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자, 예수님이 머리를 두시는데 과연 몇 평의 땅이나 필요했겠습니까? 발을 뻗고 누우셔서 머리를 두실만한 장소도 없이 그렇게 땅에 관한한 완전한 무소유의 삶을 사셨습니다. 예수님께 감화를 받아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헌신하던 사도들, 마지막에 순교하기까지 헌신하였던 사도들도 역시 누구도 이 땅에서 땅을 넓히고 이 세상의 영토를 확보하려고 했던 사람들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마지막에는 목숨까지도 다 잃어버렸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오히려 한 평의 물리적인 땅 위에도 당신의 깃발을 꽂지 않으신 채로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살아계셔서 온 세상에 어디에도 당신의 통치가 미치지 않는 곳이 없도록 만드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왕국의 개념입니다.
그런 점에서 역사적으로 로마 가톨릭이 다시 물리적인 땅 위에 교회에 깃발을 꽂기 시작한 것은 하나님의 나라의 개념을 거꾸로 돌려놓은 시대착오적인 계산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온유한 사람이 복이 있도다.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이 말씀의 본래적인 의미도 우리도 그렇게 예수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사도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가 그렇게 예수님을 본받아 온유한 사랑의 사람들이 될 때에 우리도 이 세상에 땅 한 평 없이 사라진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그리스도의 영향력을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심을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것을 오늘 예수님이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IV. 적용과 결론
똑같은 의미로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팔복의 사람들을 향하여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고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오늘 이 두 번의 설교를 통해서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이것입니다. 이 온유함은 자연적으로 부드러운 유순함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서 변화된 신령한 은혜의 작용의 결과인 인격적인 특성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골호인을 의미하지도 않습니다. 진리에 대한 애매모호한 태도나 어떤 사람을 향해서도 잘못을 지적할 줄 모르는 그러한 겁 많은 비겁을 의미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이 온유함은 하나님의 모든 뜻을 선한 것이라고 믿고 거기에 자신을 내어 맡기는 기꺼운 복종과 순종, 모든 사람의 다름을 인정하고 그것을 인하여 오히려 자신이 아름다워질 수 있다고 믿고 그들을 용납하고 사랑하고 친절히 대하는 것,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만드는 것,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이 신령하고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의 영향력이 끼쳐 그들 모두가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갈망하는 사람들로서 살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온유한 사람들이 하여야 할 일이고, 또 이렇게 무한한 경쟁과 치열한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온유한 사람이 그리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사면을 돌아보십시오. 거칠고 황폐한 경쟁사회 속에서 이긴 사람은 분투하는 승리의 과정으로 말미암아 마음이 거칠어져 있고 지고 패배한 사람은 그 패배하였다는 열등감 때문에 마음은 우그러져 있습니다. 승리한 사람이나 패배한 사람이나 어디에서도 온유함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오직 이 온유함은 그리스도인의 특성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경쟁을 통해 승리해서도 얻을 수 없었던 하나님의 나라의 아름다운 성질들, 패배하고 우그러진 사람들도 얻을 수 없었던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위로를 전달하는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깊이 부흥을 만나 영적으로 변화를 받아야 하고 매일매일 위로부터 베풀어 주시는 신령한 은혜를 충만히 누리며 은혜 안에서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여러분을 소금으로, 빛으로 이 세상에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복(1)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마 5:6)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네 번째 복을 말씀하십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라고 말입니다. 주림과 목마름은 무엇으로도 대치할 수 없는 욕망입니다. 채워지지 않는 배고픔과 갈증을 느끼는 상태가 어떻게 복 있는 상태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는 그렇다고 말씀하십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눈만 뜨면 넘쳐나는 이 세상의 정보들은 우리에게 유혹으로 다가옵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행복해지라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더 많은 큰 욕망을 가지고 더 많은 것들을 소유하고, 소비하고 자기를 성취함으로써 행복해질 수 있다고 우리를 가르칩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해서 얻게 되는 행복과 만족은 뜨거운 여름날 긴 행군 끝에 온 몸에 땀이 흐를 때에 마시는 차갑고도 진한 설탕물 한 사발과 같습니다. 처음 한 모금 마실 때에는 시원한 맛에 갈증이 가시는 것 같지만 모두 마시고 난 후 단 기운이 우리 속에서 물을 요구할라치면 우리는 예전보다 더 깊은 갈증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닌 곳에서 만족과 행복을 얻으려는 인간의 모든 노력이 이와 같이 어리석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행복 그 자체이시고 만족 그 자체이시기 때문에 그 하나님을 멀리 떠나 행복하고 만족을 얻으리라고 기대하고 시도하는 것 그 자체가 스스로 모순된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모두들 자신의 행복과 만족을 욕망의 극대화 그리고 그 욕망을 채우는 것에서 찾는 시대에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무엇인가 채워지지 않은 갈망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님의 복을 누리는 사람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신 말씀입니다.
II.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A. “의”(δικαιοσύνη)란 무엇인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라고 말씀하실 때에 이 의라고 하는 것이 무슨 뜻일까 가 우리에게 제일 커다란 관심사로 다가옵니다. 희랍어 성경에 ‘디카이오쉬네’(δικαιοσύνη)라고 되어 있는 이 단어는 성경에서 가장 풍부하고 심오한 의미를 담고 있는 낱말 가운데 하나입니다. 아마 이 오후의 시간을 모두 할애해서 이 의에 대해서 여러분에게 설명을 해도 끝나지 않을 정도로 그렇게 풍부한 신학적인 그림을 가지고 있는 단어가 이 단어입니다. 좀 더 과장해서 말하자면 성경 전체가 이 의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이 의는 성경에서 가장 심오한 뜻을 내포하고 있는 단어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예수님이 이 산상수훈 속에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하신 이 말씀을 해석하고자 하는 맥락에 있습니다. 이 맥락에 제한을 받으면서 필요한 만큼만 이 의에 대해서 여러분에게 말씀을 드리는 것이 이 설교의 의도에 부합할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목적을 본문에 의해 제한을 받으며 의에 대해서 간략히 말씀드리자면 다음 세 가지로 요약이 됩니다.
1. 율법에 부합한 상태
우선 세 가지를 말씀하기 전에 ‘디카이오쉬네’라고 하는 희랍어 단어가 신약성경에서 어떻게 번역되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마태복음 6장 1절에 보면 이 ‘디카이오쉬네’라고 한 단어는 ‘경건함’이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로 해석이 되었고, 사도행전 24장에서는 ‘하나님의 공평한 의, 심판을 통한 정의’ 이런 의미로 사용이 되었습니다. 갈라디아 2장에서는 좀 다른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바깥에서 무엇인가 덕을 입어서 올바르게 된 상태를 가리켜서 ‘디카이오쉬네’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마태복음 27장에서는 어떠한 책망 받을 것도 없는 무죄하고 순결한 상태를 가리켜서 ‘디카이오쉬네’를 사용하였습니다. 이 단어는 신약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이미 구약성경에 깊은 뿌리를 두고 있는데 이 단어에 맞먹는 히브리어 단어가 ‘체데크’(qd<x,) 혹은 ‘체다카’(hq;d;x])라는 단어입니다.
신구약 성경을 모두 정리하면서 이 의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다음 셋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율법에 부합한 상태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가장 넓게는 예수님의 가르침까지 포함하는 신구약 성경 전체이고 좀 더 좁게 보면 구약성경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더 좁게 보면 모세 오경을 가리키고, 그리고 가장 좁은 의미에서 보면 십계명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십계명을 중심으로 외연이 팽창되면서 성경을 이루어 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율법 속에서 우리에게 많은 믿음의 규칙과 생활의 교훈들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 율법들은 다음과 같이 두 가지 관계를 규율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과의 종교적인 관계를 규율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너희는 나를 이렇게 믿어라, 나를 이렇게 예배하라, 나를 이렇게 섬겨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어떤 규칙과 명령의 형태로 주어지는데 이것들을 율법의 계명이라고 말합니다. 이 계명은 하나하나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총체적으로 그 계명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의지에 기초합니다. 신앙이 어렸을 때에는 계명은 알지만 그 계명을 주신 본래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잘 모를 수도 있습니다. 그럴 경우에는 몰라도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사실을 믿으면서 순종하고 그 말씀을 따르면 율법에 부합하는 상태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아이가 일단 설탕 맛을 알게 되면 사탕을 먹고 싶어서 안달을 합니다. 그런데 엄마는 절대 못 먹게 합니다. 그리고 뺏습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몰래 먹으면 야단을 쳐서라도 그것을 못하게 합니다. 사탕을 먹지 못하게 하는 엄마의 개별적인 금지의 명령은 아이를 충치로부터 보호하려고 하는 보다 높은 엄마의 의지가 있는 것입니다. 아이는 그것을 어렸을 때는 이해를 못합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사물들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서 엄마의 그 의지를 알게 되는데 이것을 가리켜서 철이 든다고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과의 종교적인 관계를 규율하는 명령은 대게 금지의 명령과 그 다음에 긍정의 명령으로 요약이 됩니다. 그 하나하나는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그 분께로부터 오는 생명과 사랑을 충만히 누리면서 살게 하는 데에 하나님의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사람들과의 사회적 관계 속에서 율법은 규율합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 사람들을 창조하실 때에는 아무렇게나 짐승처럼 물고 뜯으며 살아가라고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는 개별적으로 창조하셨으나 그 창조된 인간들이 서로를 알고 이해하고 사랑하면서 홀로 있는 것보다는 아름다운 공동체를 만들면서 인류 전체를 창조하신 목적에 공동체적으로 이바지하면서 살아가도록 사회를 만드신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회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의지가 있고, 이 의지의 높은 것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그 명령은 구체적이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웃에게 이런 일을 행하라. 이런 것은 하지마라. 이런 일을 하면 이런 벌을 받을 것이요. 그리고 이런 일을 해서 이웃을 섬기면 복을 줄 것이다.”라는 구체적인 계명의 형태로 말씀하십니다. 이 두 가지가 모두 뭉친 것이 모세오경입니다. 좁은 의미에서는 이게 십계명입니다. 그리고 이 계명들은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는 마음으로 동일하게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성취될 수 있는 하나님의 정의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율법에 부합한 마음과 생활의 상태가 바로 의라는 개념입니다.
2. 은총에 덕 입은 상태
자, 그런데 이제 문제가 있습니다. 무슨 문제가 있을까요? 과연 인간이 그렇게 많은 하나님의 요구에 온전히 부합하는 상태에 도달할 수 있을까요? 어떤 사람은 상당히 더 근접하고, 어떤 사람은 아예 거리가 멀 수는 있지마는 완전히 거기에 부합해서 이제 ‘의로워졌다’ 혹은 ‘의롭다’라고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또 다른 의를 우리에게 제시합니다. 이것이 바로 은총에 덧입힌 상태입니다.
성경에 보면 인간이 도저히 그런 율법에 의해 부흥할 수 없는데도 어떤 사람을 의인이라고 칭하기도 합니다. 창세기 6장에 보면 하나님이 노아를 당대의 의인이요 완전한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것은 절대적인 의미에서 의인이요 완전한 자이기 때문에 율법에 의해 완벽하게 합치된 상태의 의를 획득한 사람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것은 상대적이고 비교 우위적인 그런 의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완전하신 하나님 앞에서는 결함투성이인 인간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율법을 주실 때부터 처음부터 그 율법을 통해서 우리를 구원받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의도는 없었던 것입니다. 오히려 그 율법을 통해서 우리가 정말 은총에 의해서 덧입혀지는 의가 없다면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알게 하시려고 율법을 주셨고, 또 구원받은 후에도 그 율법에 완전히 합치하는 삶은 살 수 없지만 그 율법의 계명들을 통해서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나를 돌보시면서 궁극적으로 나를 향해 가지고 계신 높은 의지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읽을 수 있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율법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인간으로서는 그 율법에 부합한 상태가 아닌데 하나님에 의해서 의로운 상태인 것처럼 받아들여지게 만드는 방법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시편 32편에서 거론하고 있는 복입니다. “죄의 사함을 받고 허물에 가리움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나니”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죄가 있는데 하나님이 용서해 주셔서, 또 허물이 있는데 하나님이 그것을 없는 것처럼 간과하셔서 사실은 완전하고 의로운 사람이 아닌데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질 수 있는 사람인 것처럼 은총으로 덧입혀진 상태를 가리켜서 성경은 의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3. 대속에 덕 입은 상태
그러면 의에 대한 목마름은 한편으로는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고 나를 구원하신 그 궁극적인 의지에 부합하고자 하는 목마름이 의에 대한 갈망이라고 할 수 있고, 또 한편으로는 자신은 그런 상태에 도달할 수 없으니 하나님이 나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허물을 사해 주셔서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있는 상태가 되도록 간절히 하나님 앞에 갈망을 갖는 것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상태라고 중간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은총에 의해 덧입혀진 의의 개념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부활 사건을 통해서 활짝 핀 꽃처럼 만개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의의 세 번째 개념입니다. 대속에 덧입혀진 상태입니다.
인간은 어쨌든 하나님의 율법에 반하여 행동했고 언약을 어긴 파괴자가 되었습니다. 이후로는 자신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영원한 본성에 힘으로서 끊임없이 율법에 대항하고 하나님의 의지를 거스르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 사람을 하나님이 그래도 “괜찮다.”라고 하시면 하나님의 자비는 빛날지 모르지만 완전하고 의로우신 하나님의 성품은 무시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러한 인간의 불의를 면제하거나 삭제하지 않으시고 그대로 남겨두시고 대신 범죄한 그 값을 치룰 수 없는 인간 대신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의 몸을 입혀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율법을 어긴 모든 죄를 담당하고 십자가에서 우리가 율법을 어긴 대가를 율법의 심판에 따라 형벌로 당하셨는데 이것이 십자가에서의 죽음입니다. 그러니까 이 십자가에서의 죽음은 사실 우리가 하나님의 율법을 어긴 것에 대한 율법의 판단을 따르는 하나님의 저주입니다.
그렇게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어긴 우리의 모든 죄 값을 치르심으로써 우리를 의롭게 하신 것이 아니라 먼저 당신이 하나님께로부터 의를 받으십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졌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라고 말하고 그리스도가 마음대로 처분하실 수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의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제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자기들이 율법을 범한 죄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고 그 죄의 심각한 결과를 십자가의 끔찍한 고난에서 보고 회개하고 오직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것 이외에는 하나님 앞에 의롭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길이 없다는 사실을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당신의 의를 나누어 주십니다.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어떤 경우에라도 하나님 앞에 넉넉히 받아들여질 수 있는 대속의 의를 덧입은 상태가 되게 하시는데 이게 바로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려고 했던 궁극적인 하나님의 의의 나타남입니다. 결국 우리는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써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이 의에 참여하고 그리스도는 그 의를 우리에게 전가시키심으로써 우리 모두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3장에서 성경은 말하기를 “우리의 구원은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나는 것이다.”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B. “주리고 목마른 자”
길게 논의한 이 하나님의 의에 대한 이 신학적인 개념들을 모두 정리해서 오늘 마태복음 5장 6절의 이 문맥에다가 적용을 시키면 결국 다음과 같이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뭐냐 하면 이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은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원래의 계획대로 세상이 돌아가기를 바라는 그 일에 대한 목마름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은 궁극적으로는 당신이 영광을 받으시기 위함이지만 인간들을 지으심으로써 그 인간들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사람들과 올바른 관계를 맺으면서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며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고백 속에서 인류가 한 몸처럼 살아가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인류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하나의 공동체적인 목표를 가지고 창조된 인류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 형성된 국가와 정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이 만든 단체들은 이 목적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작용하고 움직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것이 완전히 이루어진 세상이 아닙니다. 한편으로는 그리스도를 통해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침투해 들어왔지만 한편으로는 아직까지도 완전히 끝나지 않은 세상 나라가 건재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으로 이 세계를 지배하던 세상의 왕 마귀는 등뼈가 부러지고, 척추가 망가져서 기어 다니는 신세가 됐지만 아직까지도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그런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너희여 복이 있나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결국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은 원래의 정체성은 세상 나라에 속했지만 그러나 육체적인 정체성은 이 세상의 어느 나라엔가 소속되어 있고 넓은 의미에서는 하나님을 대항하는 이 세상 나라 속에 장소적으로 위치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나라이지만 오늘 어떤 사람은 대한민국 국적을 가지고 있고, 어떤 사람은 중국, 어떤 사람은 캄보디아, 어떤 사람은 영국, 어떤 사람은 스리랑카의 국적을 가지고 이 설교를 듣고 있습니다. 그러한 나라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이런 하나님이 원래 이 세상을 창조하신 원래의 계획과 질서에 위반하는 현실 속에서 순응하고 살아가면 세상이 보기에 만만하고 쉬운 사람들로 살아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신 목적에 위배하며 살려고 하는 위배된 채로 작용하려고 하는 이 세상에서 끊임없이 항거하면서 모든 인간들의 삶과 만물들의 질서를 하나님이 의도하셨던 원래의 상태로 돌려놓는데 이바지하면서 사는 삶이 바로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부름을 받은 그리스도인의 소명입니다. 이러한 것들의 거취는 모든 이 세상의 풍조와 세상의 시류들과 얼마만큼 양보하고 얼마만큼 싸우느냐 그리고 지금 싸우느냐, 힘을 축척하고 다음에 싸우느냐 하는 문제는 그때그때의 상황과 자신의 신앙이 결정할 문제이지만 어떤 식으로든지 거기에 순응하면서 사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의 정체성을 반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때로는 어마어마한 권력을 가진 이 세상의 단체가 우리를 현저하게 억압하고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에 어긋나도록 불평등과 폭력을 강요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 구조를 따라서 그들과 함께 다른 사람을 억압하고 불의를 행하고 거짓을 양산하는 악을 더해서는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수시로 당신을 따라오는 길이 삶과 죽음 사이를 결단해야 되는 길인 것처럼 말씀하셨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때로는 국가가 어마어마한 권력을 가지고 도저히 돌이킬 수 없는 방식으로 그리고 돌이킬 일체의 전망이 없이 사악하게 인간을 폭압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매우 현저하게 하나님의 창조의 뜻과 반대되게 나라를 다스리고 주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신 질서와 정면으로 대치되도록 통치의 구조를 짜고 그리고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존엄성을 돌이킬 수 없는 방식으로 짓밟으려고 할 때 그런 정부는 전복되어야 합니다. 힘으로써라도 전복하여 그런 정부가 더 이상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를 악의 덩어리로 만드는 것을 막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상태를 무엇을 기준으로 할 것인가, 그리고 어느 시점을 돌이킬 수 없도록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를 짓밟는 시점이라고 판단하여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하나님은 인간에게 그런 권리를 주셨고 그리고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의가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갈망하며 살라는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부합하는 해석인 것입니다.
자, 그런데 두 번째 요약이 제시될 수 있는데 이것은 바로 아까 말씀드린 이러한 하나님의 창조에 부합하는 질서가 과연 법률이나 형벌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일제히 일어나는 어떤 국민적인 저항 같은 것들에 의해서 완전히 성취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두 번째 것이 주어져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그리스도의 대속에 의해 덧입혀진 모든 상태 속으로 인간들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아주 더 쉽게 이야기 하면 그렇게 끊임없이 사회의 구조와 불의들이 추방되고 외형적으로라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질서 속으로 다듬어져 가야되는 것과 함께 그것은 궁극적으로 이 세상을 바꾸는 해결책이 될 수 없기 때문에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자신이 얼마나 죄인인지를 깨닫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을 받아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그 충만한 사랑과 생명을 받아 진리의 빛을 따라 살 수 있는 사람으로 인간 자신이 근원적으로 개혁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목표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그리스도인, 천국 백성들이 주리고 목말라야 할 이 의는 또 한편으로는 단순한 사회의 개혁이 아니라 죄인인 인간이 하나님 앞에 근본적으로 새사람이 되어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했던 성경의 말씀처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령으로 말미암는 새 피조물이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일을 위해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고 결국 하나님의 나라가 온전히 이루어진다고 하는 것은 이 의가 온전히 이루어져서 껍질만 하나님의 창조의 의도대로 굴러가는 세상이 아니라 내용까지도 이 세상을 창조하고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을 온전히 사랑함으로써 그 온 인류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핏줄로 서로를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부르며 하나님의 창조의 궁극적 의지를 따라 사는 세상이 되는 것입니다.
III. 우리는 의를 갈망하는가?
문제는 정말 우리에게 그러한 의에 대한 갈망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더욱이 복음 전파와 관련해서 말하자면 정말 여러분에 이런 의에 대한 갈망이 있는가 생각해 보십시오. 교회가 커지고 어쨌든 사람들이 교회에 오고 있으니까 여러분은 예전의 개척교회를 할 때의 교인들처럼 복음 전파에 대한 열렬한 마음이 현저히 식었습니다. 사람들은 오고 교회는 공간이 없습니다. 아마 다음 주에라도 한 200명 한꺼번에 더 오면 난리가 날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교인이 그래요. “목사님 우리가 열심히 전도해서 한 300-400명 데리고 오면 목사님 되게 힘들 것입니다.” 힘들어 봅시다. 한번 사고 쳐 보십시오. 어떻게 하든지 감당하겠습니다.
(찬양)
이곳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부르셨네
주의 얼굴 구할 때 역사하소서
교회를 세우시고 이 땅 고쳐주소서
주님나라 임하시고 주 뜻 이뤄지이다
(예화) 어제 밤이 늦었는데 이상하게 잠이 안와서 추적 60분을 봤습니다. 그런데 참 보기를 잘했습니다. 늦게 잠자리에 든 것이 전혀 상실감이 안 느껴지는 프로였습니다. 그 추적 60분을 보는 내내 내 마음에서 눈물과 분노가 솟았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정말 북한을 위해 기도해야 되겠다. 북한은 경제가 매우 어렵습니다. 먹고 살 수가 없으니까 이 사람들의 드림이 뭐냐 하면 중국에 가서 돈을 벌어 와서 북한에 와서 잘 사는 것입니다. 몇 해 전에 제가 북한에 갔을 때에 대학 졸업한 남자 직원의 월급이 5달러였는데 제가 간 호텔에서 커피 한 잔에 5달러였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방법으로 경제가 마비된 것입니다. 그런데 재주 좋은 사람들은 중국을 부지런히 들어 다니면서 무역을 합니다. 그래서 상당한 돈을 법니다. 최근의 보도에 보니까 평양에 한 끼에 25만원에서 45만 원짜리 점심이 나왔다고 하니까 도대체 경제적으로 계산을 하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이제 그렇게 중국 돈을 많이 벌어오니까, 달러를 벌어오니까 그것을 그런 방법으로 북한 정부에서 소비처를 만들어서 그게 나쁜 줄을 알면서도 돈을 다 수집할 수 있는 장치를 만드는 것입니다. 북한에 있는 젊은 처자들은 중국 가서 식모살이라도 하는 것이 꿈입니다. 그런데 브로커들이 중국 가고 싶은 사람 하는 것입니다. 자격은 20살에서 32살 사이 젊은 여성입니다. 그러면 그 처자들은 무엇도 모르고 좋은 사람이 우리를 중국 보내준다더라 그래 가서 돈 좀 벌어 가지고 와서 가족들 먹여 살리자 그리고 갑니다. 얘네들을 군인들에게 브로커들이 돈을 먹이고 몰래 얘네들을 싣고 밤중에 압록강 중간에 있는 섬으로 갑니다. 그러면 중국 쪽에 있는 사람들이 공안의 돈을 먹이고 중국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나 중국 사람이 옵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을 인수해 갑니다. 그 가격은 얼마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중국 사람들이 걔네들을 데리고 가서 그 여성들을 필요로 하는 업소에 팔 때에는 12000위안에서 15000위안, 우리나라 돈으로 약 200만원에서 270만 원 정도 받고 파는 것입니다. 이 아이들은 그때까지 이 여성들은 팔려간 줄 모릅니다. 그리고 취업하는 줄 알았는데 사실은 취업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가는 곳이 채팅방입니다. 거기에 속옷 바람으로 던져지고 밖에서는 문을 걸어 잠급니다. 컴퓨터 하나만 있습니다. 거기에서 어떤 식으로든지 채팅을 해서 그 사이트를 방문한 사람들이 한 주에 35만원을 쓰게 만들어야 합니다. 못 벌면 채찍과 굶주림이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자가 물었습니다. “그렇게 일시키면 급료는 줍니까?” 그랬더니 그 사람들 하는 이야기가 “급료를 왜 줍니까? 쟤네들 한 명당 200만원에서 270만원을 주고 사왔는데 본전을 뽑아야죠.” 그러고 2년 정도 그렇게 무자비하게 가둬서 진을 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더 이상 이용 가치가 없고 그 다음에는 이제 여기에 너무 익숙해져서 탈출하거나 여기에 관한 정보들을 바깥에 누설할 염려가 있다고 판단이 되면 한 2년 뒤에 이 여자들을 다시 차에 태워서 자신의 힘으로 돌아오기 어려운 먼 지역에 돈을 받고 파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여자를 산 사람이 성매매를 시키든 똑같은 채팅을 시키든 그것은 그들이 알바가 아닙니다. 이렇게 해서 탈출의 기회를 잡지 못한 수많은 북한 여성들이 짐승처럼 살아가는데 그 무자비한 일을 자행하는 인간들이 누구냐 하면 북한에 있는 브로커, 탈북해서 중국에 정착한 조선사람, 그리고 최종적인 그 여성들의 소비자인 중국사람 이 셋이서 삼각으로 악의 축을 이루며 그 끔찍한 일을 자행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나오는 자매 한분은 3년 전에 딸을 그런 식으로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집요하게 그 딸이 팔려간 경로를 추적하면서 딸을 찾아갔습니다. 마지막으로 딸을 팔아넘긴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자기 딸을 왜 팔았느냐고 어디에 있느냐고 따지니까 나는 수수료 받고 넘겨줬을 뿐이기 때문에 나는 죄가 없으니까 마음대로 하라는 것입니다. 분노는 피 끓는 애원으로 바뀌었고 그래도 응답은 없었습니다. 여관방에서 하늘을 쳐다보며 눈물을 흘리며 쏟아놓는 이 중년 부인의 독백은 우리의 마음을 때립니다. “사람이 아니야. 사람은 그럴 수 없어. 돈에 미친 짐승이야. 사람은 그럴 수 없어.”
이런 현실을 보면서 분노하지 않는다면, 눈물이 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우리나라의 일이 아니라고요? 정도는 다르지만 매우 비슷한 일이 우리나라에도 물론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런 이것이 우리들이 살고 있는 세상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바로 이런 세상 속에 태어나서 이런 세상을 바꾸고 고치고 그래도 완전한 세상이 될 수 없기 때문에 그 사람들 하나하나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늘로부터 오는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을 힘입어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게 하려고 주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런 것을 갈망하면서 사는 삶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삶입니다.
진실한 그리스도인과 거짓된 그리스도인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무엇을 가지고 있느냐, 어떤 지위에 도달했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거짓된 그리스도인은 여전히 자기가 행복해지기를 원하지만 진실한 그리스도인은 거룩해지기를 원합니다. 거짓된 그리스도인은 예수를 이용해서라도 자기가 만족을 얻기를 원하지만 진실한 그리스도인은 자기를 소비해서라도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고 싶어 합니다. 끼니를 염려하는 제자에게 예수님 말씀하셨습니다.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양식이 있단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며 온전히 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땅에 사실 때에 간절한 소원이 하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날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그 뜻이 바로 의입니다. 그 의가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고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이름이 이 세상에서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기를 원하는 예수님의 마음의 간절한 표현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생애는 자기를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이 목표인 생애였고,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죽으시면서 까지 희생하시려고 했던 이유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실 때에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면 하나님을 멀리 떠났던 죄인들이 아버지께로 돌아오면 안 먹어도 배부르셨고 주무시지 않아도 행복하셨던 분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그 십자가의 피로 구속하신 것은 바로 우리도 그렇게 하나님의 의가 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을 우리의 양식으로 삼으며 살라고 우리를 구원해 주셨고, 무지한 우리의 마음에 진리의 빛을, 복음의 광채를 주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종종 말합니다. 이 세상이 얼마나 악한데 우리의 작은 노력으로 어떻게 그 악한 세상을 선한 세상으로 바꿀 수 있겠느냐고 말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선이 보편적이던 시대는 인류의 역사에 없었습니다. 진리가 대중의 환영을 받던 때에는 더더욱 없었습니다. 언제나 빛보다는 어두움이 다수였고 누룩보다는 가루가 많아서 누룩이 한줌 밖에 없었을 때에 가루는 서 말이나 되었습니다. 문제는 누룩이, 빛이, 소금이 얼마나 많아서 대중적이 되느냐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진실성과 순도였습니다. 그 빛이 참 빛이었느냐, 그 소금이 참으로 짠맛을 간직한 소금이었느냐, 그 누룩이 정말 살아있는 누룩이었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IV. 적용과 결론
캄캄한 밤바다에 풍랑이 일었습니다. 엄청난 폭풍우가 몰려오고 작은 배는 풍랑에 뒤뚱거리기 시작합니다. 오른쪽 뱃머리를 때린 파도는 포물선을 그리며 반대편 뱃머리로 떨어집니다. 흔들거리는 배는 창문까지 바닷물이 올라왔고, 모든 사람들은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혀 있을 때 사면은 칠흑같이 어두워 동서남북을 분간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저 멀리 빛나는 작은 불빛 하나 그 먼 섬에 등대 하나 때문에 풍랑의 위협 속에서 죽음의 고비를 넘나들던 승객들은 안전한 포구로 도착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이 어두운 세상에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신 이유입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여러분 중 대부분은 회심을 경험하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거스르고 마음대로 살던 인생의 날들을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피 묻은 십자가로 돌아올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눈물을 흘리며 우리의 죄를 회개했고, 예수님 이외에 우리를 참 생명으로 인도하실 분이 없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때에 회심하고 나자마자 우리의 마음에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의에 대한 갈망이었습니다. 이 세상이 여전히 그렇게 더럽고 하나님께 반항하고 허무한 것을 찾아서 주님께 아픔을 드리는 세상이라는 사실 때문에 고통스러웠고, 구원받은 은혜의 눈물이 가시기 전에 여러분의 눈에는 이 하나님의 참 생명으로 멀어졌기 때문에 대속에 의해 덧입혀지지 못한 수많은 잃어버린 영혼들이 생각이 났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정말 순수한 사랑의 말로였습니다. 그때 우리의 눈에는 처음으로 영혼 사랑의 눈물이 흘렀고 그리고 우리의 마음은 방금 만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 복음을 전할 수 있다면 그리고 저들도 나와 같이 이 좋으신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살 수 있다면 내가 이 세상에 어떻게 되어도 좋다는 마음을 가졌었습니다.
그때 회심의 그 순수함을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도 그런 마음이 여러 속에 불타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멀리 떠났고 죄의 낙에 빠진 이 세상에 대한 불쌍히 여기는 눈물이 있습니까? 이 세상의 사물들이 올바른 질서로 돌아가도 마음이 하나님께 반역하고 있기 때문에 온전한 하나님의 통치 아래서 살지 못하는 인간들을 보면서 그들의 마음속에 내 안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의 의가 그들에게도 이루어지게 해달라는 간절한 목마름, 그렇게 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주림이 우리 안에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은혜를 받아야 할 이유는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의를 갈망하고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와 통치를 그리워해야 할 우리의 마음이 사소한 단장품이나 이 세상에서 오고가는 행복들로 점령되어 있다면 그것은 구원을 얻은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서 가져야 할 그 마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쟁기를 마음 깊이 박고 그리고 힘차게 갈아엎어 그리고 거기에 하나님의 말씀의 씨앗이, 은혜의 단비가 심겨지고 씨앗이 심겨지고 은혜의 단비가 내려야 합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나 같은 죄인 살리신 하나님의 그 놀라운 은혜에 감격하면서 그러면서 나 같은 인간을 이 세상에 살려두시는 것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를 티끌만큼이라도 아름답게 하고 내가 이런 세상에서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이 나의 영혼이 하나님 앞에 아름다워지는 길이 될 수 있도록 해달라고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한 사람의 사람됨은 그 마음속에 타오르고 있는 욕망이 입증합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는 어떤 욕망이 타오르고 있습니까? 정말 지금이야 말로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여러분의 마음이 기경되어서 온전히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는 데에 티끌만큼 이바지하는 의미 있는 인생을 살게 해 달라고 기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복(2)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마 5:6)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이어서 예수님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이 받을 복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라고 말입니다. 의를 갈망하는 것은 천국 백성의 인격적인 특징입니다. 이것은 오래된 성화의 과정을 통해서만 획득되는 특징이 아닙니다. 방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사람의 마음속에는 이렇게 하나님의 뜻이 이 세상에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갈망이 있게 마련이고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께로부터 그 갈망이 채워지는 복을 받습니다. 결국 지난 시간에 꽤 긴 시간을 할애하여 의에 대해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 의에 대한 갈망은 결국 이 세상의 인간들이 창조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세상이 되는 것이고, 또 이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회개하여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되는 것에 대한 갈망이 바로 이 의에 대한 갈망인 것입니다. 누구든지 자기 안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의 품질 만큼만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의가 이루어지기를 갈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들려오는 국내외의 어두운 소식들과 그리고 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부끄러운 일들에 대한 소식들은 우리의 마음을 우울하게 합니다. 그러나 이런 인간의 죄와 불의에 대하여 침 뱉고 욕하는 것, 지나가면서 짓밟힌 사람들을 한 번 더 지나가는 것은 쉬운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그렇게 하나님의 의가 이루어지지 아니한 현실을 보면서 그 의에 목말라하고 그 의에 사무치는 그리움으로 그 의가 이루어지기를 갈망하면서 사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 자기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경험 없이는 누구도 짓밟힌 하나님의 의에 대해 애통해 하거나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인해서 가슴아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오늘 우리가 처한 현실 속에서의 이 많은 모순과 불의, 그리고 사회적인 악에 대해서 침묵하는 대신 온 몸과 마음으로 이 의를 갈망하고 자신이 먼저 이 의에 합당한 삶을 살고자 분투하면서 산다면 교회와 이 세상은 얼마나 달라지겠습니까?
II. 의를 추구하는 자의 만족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의에 주리고 목 말라하는 사람들의 복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병든 몸을 이끌고 당신에게 나아와 치료받기를 원하는 많은 사람들을 고쳐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들에게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는 그들이 바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이며 그들은 반드시 배부르게 될 것임을 예수님이 축복의 말씀으로 이들에게 주셨던 것입니다. 이 세상에 유명하고 권세 잡은 자들, 그리고 저명한 종교 지도자들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찢기고, 상처받고, 버림받고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와 치료받기를 원하는 병자들을 두고 예수님께서는 “너희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이여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라고 말씀 하셨던 것입니다. ‘배부를 것임이요’라고 되어 있는 이 말의 원래의 의미는 'they shall be filled.', ‘그들이 채워질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즉, 주림과 목마름으로부터 그들이 만족을 얻게 될 것이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에 이르기를 갈망하면서 사는 사람들의 그 목마름과 배고픔이 어떻게 만족을 얻게 된다는 말일까요?
A. 우주적, 종말적 만족
두 가지로 나누어서 설명할 수 있는데 제일 먼저 우주적이고 종말론적인 만족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실현된 곳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무엇 때문에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까? 하나님이신 그 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마귀의 일을 멸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성경은 요한 1서 3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죄를 짓는 자마다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난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입니다. 말하자면 인간이 죄를 선택하고 마귀의 지배를 받게 된 그 순간부터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에 반역이 일어난 것입니다.
여러분이 왕으로 있는 나라 한 구석에서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문이 여러분에게 들린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반란군들이 점점 숫자가 늘어나고 세력이 확산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리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당연히 군대를 파견하여 반란이 일어난 그곳을 먼저 진압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이미 침투한 이러한 인간의 반란을 제압하기 위한 사령관으로 보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마귀에 의해 마귀가 대적하고 있는 이 세상을 토벌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 그 하나님을 힘입어 이 세상에 마귀의 나라를 대적하기 위해 부름을 받은 사람들인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인간의 허물과 죄로 말미암아 깊은 간격이 있었고 하나님은 당신의 거룩하심 때문에 모든 인간들이 당신의 진노아래에 있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끊임없는 적대감이 있었고 이것으로서는 이 세상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세상으로 바꿀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화목을 이루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고 이것보다도 하나님의 사랑을 더 극명하게 보여주는 증거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말합니다. “사랑은 여기에 있나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자기의 독생자를 화목 제물로 주셨음이라”고 말입니다. 똑같은 내용을 사도바울은 에베소서 2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셨다”고 말입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이 세상을 위해 하신 일은 죄 때문에 깨어진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화목하게 하시고, 이것을 토대로 깨어진 사람들과의 관계를 화목하게 하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 의미를 안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평화를 갖게 되었고 그 평화의 힘으로 말미암아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있던 벽들이 허물어졌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의 참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것을 알고 그 사랑으로 화목케 하여 그들 모두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사람으로 한 공동체를 이루게 하셨으니 이것이 바로 교회인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과의 평화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뜻의 성취는 인간 세상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이사야서 11편에 보면 마지막 때에 하나님이 만물을 새롭게 하신 그때에 피조물들 사이의 갈등이 끝나고 얼마나 평화로운 세상이 될 것인지를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눕고 송아지와 어린 사자가 살진 짐승이 있어 어린 아이의 손에 의하여 이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요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 장난을 치고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어도 상함이 없을 것이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죄와 반역은 피조물들 사이에도 커다란 갈등을 가져왔고 평화로워 보이는 자연의 세계는 약육강식의 치열한 전쟁터입니다. 이 끔찍한 피조물들 사이의 갈등이 마지막 날에는 모두 끝나게 될 것입니다. 인간과 그리고 만물이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하게 될 것입니다. 이 사실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에베소서 1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머리로서 이 모든 인간과 세계의 창조의 근원이 되신 것처럼 또한 모든 인간을 구속하심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과 모든 세계가 재창조되어 하나님과의 평화를 인간과 모든 동물과 피조물 사이에 누리게 될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바로 이때에 성도들은 최고의 복락을 누리게 될 것이고 이 지복은 바로 하나님을 뵈옵는 지복이 될 것이며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영광을 온전히 회복함으로 말미암아 그것을 바라보는데서 느끼는 인간의 무한한 행복일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성경의 진리와 일반적인 진리, 신자와 불신자, 세상과 교회, 특별한 은총과 일반적인 은총이 모든 구별을 상실하게 될 것입니다. 모든 만물들은 하나님의 창조주로서의 영광을 찬란하게 드러내게 될 것이고 하나님이 계시해 주신 바를 깨달으며 느끼는 그 찬란한 은혜의 정동이 쉼 없이 계속되어 오늘은 어제와는 상대도 되지 않는 탁월한 기쁨 속에서 살 것이며 내일 만나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경험은 이제껏 까지 누렸던 하나님의 영광의 기쁨을 능가하는 점증하는 영광과 기쁨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날에 모든 성도들은 이제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졌기 때문에 더 이상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는데서 오는 목마름과 배고픔, 눈물과 탄식 같은 것들은 존재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이것을 우리에게 반드시 주시기로 약속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의에 주리고 목 말라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인격적인 특징이 우주적이고 종말론적인 그 날에 모두 성취가 되어 하늘의 기쁨에 참여할 장엄한 영광을 약속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이 완전한 나라가 임하기 전 하늘나라에 가는 사람은 거기서도 이 우주적이고 종말의 완전하게 성취될 하나님의 영광의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고, 거기에서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는 바로 이러한 우주적이고 종말론적인 의의 완전한 성취를 바라보며 이 세상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B. 국지적, 현재적 만족
두 번째로는 이렇게 의를 추구하는 자들을 하나님께서는 국지적으로 현재적으로 만족을 누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함께 이미 천국이 침투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아직은 이 세상 나라가 남아있습니다. 이 세상 나라를 힘입게 통치하던 마귀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허리의 뼈가 다 부러졌고 이제는 기어 다니는 신세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마는 여전히 영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 나라가 아직도 여전히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도 이미 임하였습니다. 여기저기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성령의 능력에 힘입는 사람마다 이 세상 나라가 능히 이기지 못하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이 세상 나라와 싸워 승리하고 있습니다. 우리 신자들은 바로 이렇게 이미 도래한 하나님의 나라와 아직 남아있는 세상 나라의 틈바구니 속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장소와 공간적으로는 이 세상 나라에 살고 있지만 그러나 영으로는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전 세계의 하나님의 의가 이루어지고 그 뜻이 온전히 성취되는 것은 우리는 아직은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도처에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한 무리들이 승리한 소식들이 들려오기도 하고, 주님의 의가 땅에 떨어지고 주님의 이름이 짓밟혀 그리스도의 나라가 잠시 패배한 것 같은 소식이 들려오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마음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져 기쁨과 그리고 영광 속에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마는 또 어떤 신자들은 부패하여 세상 나라와 다름없는 사람들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국지적으로 주님의 뜻이 성취되는 하나님의 나라의 성취의 기쁨을 시련의 기쁨을 현재적으로 누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로 택하신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우리의 의나 우리의 공로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주님이 우리를 택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께, 하나님아버지께 순종하기 위함이었다고 베드로전서 1장 2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삼으신 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주님의 의를 파괴하는 이 세상에서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의 의가 이루어지는데 티끌만큼이라도 이바지하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를 믿게 된 것이 바로 이렇게 하늘의 영광스러운 목적을 위하여 부름 받은 것임을 생각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수를 믿게 만드신 것은 바로 이 복음을 전하여 많은 사람들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로마서 10장 10절은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예수 믿는 사람으로 선택하여 불의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신 것은 우리가 목숨 붙어 있는 날 동안에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전파하고 사람들의 마음속에 이 예수 그리스도가 믿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이 복음을 우리의 말로, 삶으로 전파하고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의를 이루게 하시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비록 우리의 작은 전파로 온 세계 사람들이 모두 동시에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은 보지 못합니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많은 나라들이 우리의 선교적인 헌신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복음의 문을 닫고 하나님께 대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그렇게 살도록 헌신하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내버려두시지 않습니다. 어떤 식으로든지 그를 통하여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그곳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가능성이 없는 그 선교지에서 하나님을 믿어 구원 받는 사람들이 나타나도록 하나님이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불가능해 보이는 그 일을 하나님은 하십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에게 마음에 의에 주리고 목말랐던 그 사람들의 마음에 만족을 주시는 것입니다.
두 주 전에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난 것을 소개하겠습니다. 아시다시피 중국은 여전히 사회주의 국가이고 눈에 보이는 것보다는 훨씬 더 조직적으로 철저하게 기독교의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통제하고 있습니다. 한 10년 전부터 간절한 소원은 하여튼 책을 중국어로 번역을 해서 그래서 공안의 제제를 안 받고 자유롭게 중국 사람들에게 읽게 할 수 있는 길은 없을까? 정말 길이 안 생깁니다. 그리고 때로는 성취될지 안 될지도 모르는데 어마어마한 돈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다가 CRTS 학생 하나가 기도하는 가운데 소명을 받고 출판사를 차렸습니다. 그런데 정말 놀랍게 두 주전에 네 번의 심사를 거쳤는데 제 책 두 권이 중국 정부에서 출판을 해도 좋다고 허가를 받았습니다. 여러 권을 집어넣었는데 떨어지고, 떨어지고 또 집어넣고 또 떨어지고 그랬는데 두 권을 허락해 주었습니다. ‘게으름’, 아마 중국 사람들 게으른 것을 해결하는데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하나 봅니다. 그 다음에 이제 그것은 허락이 그래도 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그 다음에 ‘새벽기도’ 두 권이 허락이 났다고 두 주 전에 연락이 왔습니다. 그래서 그 책은 아무리 많이 찍어서 중국 각지에 배포를 해도 일체의 규제를 받지 않는 책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한참을 감격했습니다. 야, 이렇게 거의 불가능해 보이는 일인데도 그 일을 사모하고 얼마나 저도 기도를 했습니다마는 우리 선교팀 하고 그쪽에서 진짜 그 일을 하고 있는 지체들이 정말 열렬히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한번 집어넣었는데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에 슬쩍 또 집어넣었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합격을 했습니다. 그렇게 네 단계를 거친답니다. 그래서 이 책이 들어와서 우리나라에 무슨 해를 끼칠까를, 물론 그 사람들은 신앙이 없는 사람들이 검사를 합니다. 그래도 어쨌든 해서 통과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서부터는 기도제목이 생겼습니다. 어쨌든 제 책을 심사할 때 사람들의 눈을 멀게 해 주셔서 그래서 그냥 그렇게 돼서 책이 전파가 되어서 그래서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되는데 다들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절대 목사님 책을 거기서 내줄 리가 없다”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마음에 품고 간절히 사모하며 그 뜻이 이루어지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하니까 하나님이 부분적으로 이루어지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는 온전한 신자가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온전한 신자가 되어야지만 참 인간이 될 수 있기 때문이고 역사적으로 인간이 경험하는 모든 이 비참함과 비극은 참 인간이 되기를 포기하고 또 다른 사람이 되려고 하는데서 오는 결과입니다. 그래서 참 인간이 되어서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신 목적으로 돌아가려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만족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불완전하고 그리고 죄와 불순종으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의가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부분적으로나마 만족을 주십니다. 세상의 죄와 불순종을 보면 희망이 없는 것 같지만 그러나 믿음으로 하나님이 이 세계를 통치하신다는 것과 자기의 의를 구하며 하나님 앞에 목 말라하는 사람들에게 주님이 은혜를 주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간구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그 뜻이 이루어지도록 해 주셔서 그들에게 기쁨을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언젠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회개하고 하나님을 진실하게 사랑하던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때에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가족과 교회, 그리고 이 세상 사회의 불의를 보면서 사람들을 괜히 욕하고 그리고 짓밟는 대신에 마치 그 모든 악과 죄가 자기 때문인 것처럼 생각하며 가슴 아파하고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고쳐달라고 기도하던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거스르는 교회와 세상을 위해 마음아파하고 기도할 때에는 쓰라리고 고통스러웠지만 기도가 끝난 후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위로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기도가 모두 응답되어 온 세상이 다 하나님의 통치에 복종하지는 않지만 부분적으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은 우리들이 날마다 경험하지 않습니까? 만약에 하나님이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는 자들에게 그 기도에 응답하셔서 그들을 만족케 해 주실 수 없는 분이라면 무엇 때문에 하나님은 너희들이 기도할 때에 하나님의 이름에 거룩히 여김을 위하여, 그리고 그의 나라가 임하기를 위하여, 그의 뜻이 성취되기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을까요? 분명히 우리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간구한 사람들을 놀라운 방법으로 위로하십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이미 이루신 복음의 의의를 받기 전까지는 하나님 앞에 아무 희망이 없는 인간들을 우리는 너무나 많이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은혜가 넘쳐 저 영혼들이 나의 영혼처럼 느껴져 그들의 구원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 그들이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게 되었다는 소식이 들릴 때 우리는 온 세상을 얻은 것처럼 기뻤고, 그것은 그 동안 우리들이 흘렸던 눈물과 기도의 아픔을 모두 씻어내고도 남음이 있는 놀라운 위로였습니다.
여러분, 무엇인가 상처를 받고 가슴 아파하는 것은 언제나 우리에게 나쁜 기억을 남기고 우리의 마음속에 굽은 성향을 만듭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자녀를 교육할 때에 자녀들에게 많은 물질을 주고 비위를 맞춰줄려고 거기에 너무 많이 치중하지 말고 상처를 주지 않으려고 노력을 해야 합니다. 물론 완전하게 상처를 주지 않는 것이 불가능하겠지만 그러나 가능한 그렇게 하려고 애를 써야 합니다. 그것입니다. 그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에는 많이 상처를 주었어도 여러분이 자식을 위해 많이 헌신하면 그 헌신에 대한 감격이 자녀들의 마음속에서 상처를 씻어낼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부모는 종종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식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자식뿐만 아니라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참 신기한 게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을 위한 상처는 받으면 받을수록 이 마음속에 상처가 상처로 남지 않습니다.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이 베푸시는 놀라운 은혜 때문입니다. 영혼을 위해서 가슴아파했다는 사람, 그래서 너무 상처를 많이 받아서 나중에 나쁜 사람이 되었다는 이야기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교회에 아픈 부분을 위해서 가슴을 쓸어안고 섬김으로 기도하고 대신 고난을 받은 사람들이 교회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상처를 받아서 못된 인간이 됐다는 이야기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절대 그런 법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것들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시는 것들을 불쌍히 여기면서 상처받는 사람들에게는 상처보다 더 큰 하나님의 위로, 곧 하나님의 채우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면서 늘 눈물을 흘리지만 그들은 참 행복한 사람들이고, 늘 핍박을 받지만 그들은 늘 하나님께 높임을 받는 사람들이고, 그들은 늘 이 세상에서 무명한 사람들 같으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유명한 사람으로 기록된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당신의 뜻이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기를 복음이 전파되기를 목 말라하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지금 바로 현재적으로 그들에게 만족을 주셔서 주님의 사랑 안에서 살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III. 배부르지 못할 양식을 구함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심지어 그리스도인임에도 불구하고 배부르지 못할 양식을 구하며 채워지지 않는 인간의 욕망에 갈증을 느끼며 하나님 앞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맨 처음 주님이 그를 구원해 주실 때에 가슴에 간직했던 의에 대한 주림과 목마름은 사라지고 자신의 욕망으로 말미암아 갈증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지만 그 어디에서도 만족을 얻지 못합니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고 말입니다. 이처럼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결국 끊임없이 배고프고 목마르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의에 대한 배고픔과 목마름이 아니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진정한 배부름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잠시 자기를 섬겨 채운 욕망은 더 큰 욕망을 불러들이고, 그리고 그 욕망을 만족하게 함으로서 자신의 갈증을 해소해 보려는 사람들은 마치 타오르는 불을 기름으로 끄려는 사람처럼 어리석은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으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이 하나님의 의를 구하고, 하나님의 복음이 전파되는 일을 위하여 우리를 만드셨다는 사실을 가슴에 새겨야 합니다.
만약에 우리가 그렇지 않고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고 그것으로 우리의 주린 배를 채우려고 한다면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을 섬기는 종이 되어야 하고 죄를 위하여 애쓰는 노예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우리가 진정으로 행복을 얻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행복은 우리 자아도 아니고 더욱이 이 세상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우리에게 행복을 전달해주는 통로가 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자아도, 이 세상도 행복의 참된 근원은 아닙니다. 오직 참된 복의 근원은 하나님 자신뿐이시기 때문에 누구든지 하나님 자신을 누리지 않고 이 세상에서 행복하고 만족을 얻어 보려고 하는 사람은 결코 그 욕망을 이룰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은 집착하면 집착할수록 결국은 우리가 커다란 실망을 느끼게 되고 더더욱 만족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한분은 우리가 아무리 만족을 누리고 아무리 그 하나님 안에서 행복을 얻어 보려고 노력해도 우리의 영혼에 상처나 헛된 욕망을 남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신이 행복의 근원이시기 때문에 무엇을 하며 살든지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과 가까이 있는 사람들은 행복의 근원이신 하나님 자신을 누리며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교회는 이렇게 이미 이루어져 누리고 있는 행복과 그리고 아직은 누리지 못하고 있고 오히려 하나님을 향한 도전과 죄가 가득한 세상 나라 사이에 있습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은혜가 주님의 말씀이 교회에 가득할 때 교회는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고 복종하는 하나님의 나라의 아름다운 본보기가 됩니다. 그러나 일단 하나님의 이 은혜로운 통치와 질서가 사라지고 나면 그 교회는 이 세상 나라가 물밀 듯 밀려 들어와 자신들이 이 세상 나라에 속한 백성이라는 사실을 유감없이 드러냅니다. 그래서 커다란 악과 그리고 모든 사악한 죄가 하나님의 교회 안에도 넘쳐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의 사명은 이렇게 매일매일 하나님께로부터 거룩한 말씀과 은혜의 능력을 가득 채워 이 세상의 조류와 세상의 불의에 항거하며 사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이처럼 은혜를 주시고 말씀으로 깨닫게 하시는 것은 단지 하나님의 말씀과 사랑으로 만족하라고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만족을 얻은 후에는 다시 이 세상 나라의 질서에 항거하고 이 세상 나라의 질서와 다투며 살라고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주시는 은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 세상보다도 높은 가치를 따라 사는 거룩한 공동체이어야 하고 우리 모두 누구도 완전한 사람은 아니지만 온전하게 되려고 애를 쓰는 몸부림이 몸 교회는 가득하여야 합니다. 불의와 악은 용납하지 않더라도 그 불의와 악으로부터 돌이켜야 할 사람들은 끝까지 사랑함으로써 주님의 교회가 하나님의 의와 그 뜻을 성취하는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제일 먼저 하나님의 이 뜻이 온 세상에 충만하게 실현되기를 기도하기에 앞서 먼저 이 하나님의 뜻이 우리 각 사람 안에서 이루어지도록 그리고 하나님의 선한 의지가 주님의 교회 안에 충만하게 성취되도록 하나님 앞에 빌고 또 간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 많은 가슴 아픈 일들, 조국 교회 안에서 보편 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 모든 부끄러운 소문들과 그리고 모든 고통스러운 현실들을 깊이 끌어안고 자신의 문제 인처럼 고뇌하여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악 위에 침 한 번 뱉고 그리고 짓밟힌 그 위에 한 번 더 밟는 거 같은 쉬운 행동이 아니라 거기에서 떨어진 하나님의 이름, 거기서 짓밟힌 우리 아버지의 영광을 생각하며 주님의 착한 자녀로서 아버지의 뜻이 이 땅에 주님의 교회에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눈물로 갈망하고 그리워하고 목말라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은 그 뜻의 합치를 가져옵니다. 여러분이 세상을 사랑하면 세상의 뜻과 여러분의 뜻이 합치될 것이고,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곧 여러분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기를 간절히 사모하며 살라고 하나님은 오늘도 말씀으로 우리를 깨우시고 하나님의 성령의 은혜로서 우리의 마음을 자극하여 우리가 잃어버렸던 삶의 목표로 되돌아가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IV. 적용과 결론
교회가 이 세상을 위해 할 수 있는 최고의 섬김은 교회다운 교회가 되는 것이고,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을 향하여 할 수 있는 최고의 섬김도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어 하나님 앞에 주님을 온전히 사랑하고 그 분과 평화를 누리며 사는 사람이 얼마나 행복한지를 이 세상에 보여주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갈망하면서 사는 자들이 오늘 복되다고 말씀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자기 바깥에서 이루어지지 않는 하나님의 의, 자기 바깥에서 성취되지 않은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성취되기를 간절히 갈망하고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목 말라하고 산다면 그 사람 안에서 이미 하나님의 이 뜻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불행하고 고통스러운 것이 세상 사람들은 많이 가지고 있는 자원이 내게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했고, 우리가 고통스럽고 상처를 받는 것은 이 세상 사람들은 성취한 욕망이 끊임없이 이 세상에 의해 거절되기 때문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대신 세상에 아부했고 자기 사랑을 꺾고 십자가 사랑으로 돌아가는 대신 십자가의 고난이 없는 번영의 길을 예수 힘입어 택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세상이 누구입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바로 그 장본인이 아닙니까? 어떻게 우리들이 그런 세상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얼굴에 침 뱉은 세상의 입에 어떻게 입 맞출 수 있겠습니까? 결국 신앙의 마지막 숙제는 어떻게 사랑을 올바르게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을 향한 사랑은 언제나 우리가 하나님을 버릴 때까지만 유효합니다. 세상도 우리가 하나님을 버리기 전까지는 우리를 유혹하지만 이제 하나님을 완전히 버리고 자기 것이 왔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 우리는 세상으로부터도 버림을 받는 사람들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예수를 믿는 근본적인 이유와 그리고 내게 베풀어 주신 이 무한한 십자가 사랑이 주는 소명을 동시에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곳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부르신 그 뜻을 가슴에 새기고 그리고 티끌 같은 나를 통해 티끌 같은 하나님의 의라도 이 세상에 이루어지기를 갈망하며 살 때 우리는 이미 현재적으로 그 하나님의 충만한 채우심을 누리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세상이 이해할 수 없는 하늘로부터 오는 만족, 그리고 이 초라한 인간을 그래도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무한한 자비를 동시에 체험하며 살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에게 주는 하나님의 거룩한 행복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의 복(1)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마 5:7)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심령이 가난한 자들, 애통하는 자들, 온유한 자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의 복을 말씀하신 후에 예수님께서는 다섯 번째로 긍휼히 여기는 자의 복에 대해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것은 의를 갈망하는 천국 백성의 인격적인 특징에 이어서 또 다른 그 무엇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이 세상에서 정의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종종 긍휼히 개입할 여지가 없을 정도로 긍휼을 배제합니다. 의는 곧 정의를 가리키지만 그러나 그것은 또한 율법을 따라 행하는 인간의 요구로 성취할 수 없는 하나님 자신이 이루신 그 의를 덧입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종교 개혁은 바로 이렇게 하나님의 의에 대한 새로운 발견과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의는 바로 하나님의 정의와 입 맞추는 사랑이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공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이루어지고 그 십자가로 이루어진 그 의를 하나님의 율법의 요구대로 살지 못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전가해 주시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런 점에서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라고 하신 이 말씀은 팔복 중 가장 높은 봉우리를 가리킨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언급하고 있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도대체 누구일까요? 우리는 이 문제를 다루기 전 먼저 팔복의 설교를 맨 처음 시작할 때에 우리가 가슴에 새겼던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팔복의 설교에서 제시되는 천국 백성의 인격적인 특징이 너무나 고상한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초신자들은 거의 가질 수가 없고 높은 성화와 훈련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들만이 소유할 수 있는 사실상 평범한 사람은 도달할 수 없는 높은 수준의 영적 상태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물론 고도로 성화되고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로 단련된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특성들이 더 많고 오래 지속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처음 믿은 사람들에게는 이런 팔복의 성품이 쉽게 깃들 수 없다고 하는 의미는 아닌 것입니다.
이 팔복의 일차적인 회중은 예수님의 제자들과 마태복음 4장에서 병 고침을 받은 평범한 이스라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 나오는 이 팔복의 특징은 한순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변화된 모든 사람들 속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 백성의 인격적인 특징입니다.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하게 믿는 그 순간 사람들은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신앙의 견고함이 부족하기 때문에 그런 마음이 잠시 후에 뒤로 물러가 부패하게 된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인 것입니다.
II. 긍휼히 여기는 자
A. “긍휼히 여기다”의 의미
그러면 여기서 긍휼히 여기는 자, 긍휼히 여기다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본문에서 긍휼히 여기는 자라고 하는 단어는 하나의 희랍어 단어로 사용이 되었는데 ‘엘레에모네스’라고 하는 분사입니다. 이 단어가 ‘엘레오스’라는 긍휼, 그리고 이 단어의 배경이 되는 히브리어 단어가 ‘라함’이라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그야말로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그 불쌍히 여기는 것은 불쌍히 여기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어 주는 그 사람 때문에 생겨난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불쌍하게 보는 사람 마음속에 있는 어떤 성품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이 긍휼히 여기는 것에 대해서 성경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사실 두 가지를 이야기 하고 있는데 이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1. 인간 구원의 동기
첫째 이 긍휼은 하나님에게 적용될 때 그것이 바로 인간을 구원하신 동기가 된다는 것입니다. 디도서 3장에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멀리 떠나 멸망가운데 있는 우리들을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와 평화를 누리게 하심은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을 통해서였습니다. 왜 하나님이 스스로 당신을 멀리 떠나 죄 짓고 더럽혀지고 멸망 가운데 있는 우리들을 이렇게 대우해 주셨습니까? 그것은 우리의 의로운 행위를 보고 감동을 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당신 자신의 긍휼 때문에 그렇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의 동기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언약이 있는데 우리가 수시로 그 언약을 저버리고 불순종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죄를 짓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공의만을 적용하자면 그것에 대한 책임을 물으시고 우리와의 관계를 끊으셔도 됩니다. 그런데 그 관계를 계속하셔서 우리는 주님을 떠나도 주님은 언제나 거기 계셔서 우리를 기다리시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인데 우리를 어찌할 수 없는 죄인인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그 마음이 당신의 신실하심의 기초가 된다는 것입니다. 긍휼을 인간에게 적용할 때에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 상호간에 요구하시는 가장 중요한 덕목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천국 백성들에게는 이 긍휼의 삶이 없으면 그가 하나님의 요구하는 모든 것을 행해도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증거가 잘 드러나지 않는 것처럼 이 긍휼을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2. 인간 상호 간의 요구
마태복음 18장에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께 “우리에게 죄 지은 사람을 얼마나 용서해 주어야 되겠습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일흔 번에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 주라고 말씀하심으로 사실상 무한히 용서해 주도록 가르치십니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은 그것으로 부족하셨는지 그 유명한 일만 달란트 빚진 자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어느 임금이 누군가에게 일만 달란트를 빌려주었고, 그는 그 빚을 갚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빚진 사람을 불러다가 나에게 그 많은 돈을 빌려가고 왜 갚지 않느냐고 물었습니다. 이때 그 사람은 자신의 어려운 형편을 호소하면서 불쌍히 여겨달라고 애원합니다. 임금은 마음에 감동이 되어서 일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제 빚쟁이였던 사람이 부채에서 벗어나 홀가분한 마음으로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다가 자기에게 일백 데나리온 빚진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리고는 멱살을 움켜쥐고, 목을 움켜쥐고 어찌하여 너는 나에게 꾸어간 백 데나리온을 갚지 않느냐고 추궁하면서 그를 관하에 넘겨 옥에 가두었던 것입니다. 한 달란트는 예수님 당시에 6000데나리온이었고, 1데나리온은 장정인 남자가 해 뜰 때부터 해질 때까지 노동해야 받는 품삯이었습니다. 그러면 1 달란트는 당시의 인플레이션을 기준으로 볼 때 장정인 남자가 20년 정도 일을 해야 받을 수 있는 품삯이었습니다. 어마어마한 돈이었습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오늘날의 인플레로 환산해 본다면 한 사람이 10만 원 정도 노동을 해서 품삯을 얻는다면 1달란트는 약 6천일, 약 6억에 해당되는 돈이었고 따라서 1만 달란트는 약 6조원정도 되는 어마어마한 액수의 돈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끝맺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같이 너도 너의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셨던 것입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사람들 사이에 이 어마어마한 금전적인 거래가 있었을 가능성은 없고, 이것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께로부터 환산할 수 없는 죄의 빚을 탕감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자기에게 죄 지은 사람들을 그렇게 용서하며 사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해야 할 마땅한 바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긍휼에 빚진 자로서 어떤 긍휼의 삶을 살아야 할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하고 긍휼을 베푼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에 비하면 그것은 매우 사소한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B. 사랑의 속성 중 하나임
이 긍휼은 하나님의 사랑의 속성 중 하나입니다. 즉, 하나님의 사랑은 오래 참음과 자비, 긍휼 이 세 가지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구성 요소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사랑의 각각 서로 다른 국면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1. 오래참음: 원치 않는 질서를 견딤
첫 번째 국면은 오래 참음입니다. 오래 참는다는 것은 자신이 즐거운 것을 기뻐하면서 그것을 참는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대게 이 참는다는 것은 사실상 자신은 원하지 않는 질서인데 견디는 것을 참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입니까? 자기가 원하지 않는 일들이 생겨나는데 이것들을 견디지 않으려면 그 사람과의 관계를 끊어버려야 합니다. 그래서 오래 참는 것은 자기가 원하지 않는 고통스러운 일들이 좋아서 참는 것이 아니라 솔직히 말하자면 이것은 참지 않고 싶은데 이것을 참지 않으면 저 사람과의 관계를 단절해야 됩니다. 그 사람과의 관계에 고착하려는 마음 때문에 자기가 원하지 않는 질서를 견디는 것을 가리켜서 참음이라고 말하고 이것이 오랜 시간동안 계속되기 때문에 이것을 오래 참음이라고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유대인으로서 유대교 선생의 길을 가는 탁월한 학자였지만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알지 못했습니다. 그가 고린도전서 13장이라는 위대한 사랑의 서사시를 남긴 것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 것인지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서 선명하게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때 사도바울의 마음을 뒤흔들고 지나간 하나님 사랑의 놀라운 특성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오래 참으신 것입니다. 돌아보니 자기가 한때는 핍박자요, 포행자요, 그리고 강포하게 동족을 박해한 사람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이렇게 충성스럽게 주님의 일을 할 사람이 될 때까지 기다려 주신 것은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었고, 이것이 오래 참음으로 나타났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의 국면 중 그를 가장 크게 울린 것은 하나님의 오래 참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위대한 사랑의 서사시를 “사랑은 언제나 오래참고”라는 말로 시작하고 “모든 것을 믿고 바라며 견디느니라”고 끝을 맺었던 것입니다.
2. 자비: 친절과 호의
사랑의 두 번째 속성은 자비입니다. 이 정체는 타인에게 베푸는 친절과 호의입니다. 그리고 그 동기는 타자가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이것이 사랑의 두 번째 국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계속 불순종하고 하나님의 명령에 거역하는 악한 삶을 살 때도 아파하시면서도 그 모든 것을 오래 참으셨습니다. 우리가 그럴 가치가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사랑이시기 때문에 우리와 맺은 그 관계를 한 번에 끊어 버리실 수 없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가 지속되어 왔고 결국은 그 사랑에 감읍하여 우리의 죄인 됨을 고백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된 것입니다. 이에 비해서 자비는 우리가 행복하기를 바라시는 그래서 하나님이 베푸시는 모든 친절과 호의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랑의 두 번째 국면에는 가치가 없는 죄인에게 베푸시는 그 무한한 친절과 그리고 모든 좋은 것을 우리에게 주셔서 누리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배려가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오래 참음이 소극적인 것이라면 자비는 적극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간절한 소원은 여러분이 행복해지기를 바라시는 것이고, 여러분이 참으로 행복하기 위해서는 여러분이 하나님께로 돌아와 그 분과 평화를 누리며 그 사랑 안에서 사는 것 이외에는 진정으로 행복해지는 길이 없기 때문에 때로는 말을 듣지 않는 여러분을 때리시고 아프게 하시면서 까지 하나님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오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께로 아직 돌아오지 않을 때에는 시련을 만나고 고난을 당할 때 하나님 원망하고 미워했지만 아버지의 사랑으로 돌아오고 난 다음에는 그렇게 나를 때리고 아프게 하신 것이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의 또 다른 표현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3. 긍휼: 현재적 비참을 깊이 공감함
사랑의 세 번째 국면이 바로 긍휼, Compassion입니다. 이 긍휼은 현재의 사랑하는 사람이 처한 현재의 비참을 깊이 공감하는 감정이고 이 긍휼의 목적은 자신이 사랑하는 타자의 고통이 제거되기를 바라는 열망으로 나타납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세 번째 국면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 세 번째 사랑의 국면은 첫 번째와 두 번째에 비해서 가장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 사랑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말할 때에 그 사랑은 언제나 눈물을 머금은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나이가 많이 들어도 인생이 고달프고 힘들고 그리고 외로울 때마다 생각나는 이름이 있습니다. 엄마입니다. 어린 아이든지 나이가 많이 든 사람이든지 엄마라는 이름은 마음의 고향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그 엄마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긍휼의 그림자가 가장 많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긍휼은 간단하게 설명하면 어떤 사람이 비참하게 되었을 때 그 비참함의 원인을 따져 그 비참하게 된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은 긍휼이 아닙니다. 그가 비참하게 된 것은 분명히 원인이 있고, 그 대부분은 그 사람 자신의 잘못된 도덕적 선택의 결과 때문에 초래됩니다. 물론 그렇지 않고 타인에 의해서 어찌할 수 없이 타격을 입고 비참하게 되는 경우 많이 있습니다. 특히 오늘날과 같이 고도의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경쟁에서 밀려나고 패배해서 도덕적으로는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닌데 경쟁에서 패배하고 루저가 되었다는 이유 때문에만 비참해지는 경우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얼마든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긍휼은 그 사람이 비참하게 된 것에 원인을 캐어 그 사람에게 책임을 묻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 어디에서도 우리는 그런 긍휼을 쉽게 만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어려운 일을 당하게 되었을 때 주위의 사람들은 말합니다. 그렇게 어수룩하게 살더니 언젠가는 그럴 줄 알았어. 그렇게 나쁜 짓 하드니 그럴 줄 알았어. 싸다 싸.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엄마는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엄마는 자기 자식의 허물에 대해서 눈이 먼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자기 새끼가 고통 받는 상태가 되었을 때에 그는 자기 자식의 어떤 결정 때문에 그 고통이 당연하게 초래되었다고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자기 아들은 피해자이고 자기 딸은 다른 사람 때문에 책임과는 상관없이 비참하게 된 그 처지 자체가 가엾어서 목이 메는 이 세상에 거의 유일한 사람이 엄마입니다. 그래서 엄마라는 그림 속에는 내가 어떻게 살았든지 나의 비참함이 어떤 결과로 도래되었든지 간에 무한하게 그것을 품고 이해해주고 자기의 비참한 상태 자체를 아픔 속에서 공감해 주는 그 무엇이 들어있는 단어입니다. 물론 안 그런 엄마도 있을 것입니다. 삯군 엄마입니다. 생각보다 많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엄마는 자기 자식에 대해서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때에는 하나님 아버지를 하나님 우리 엄마라고 부르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III. 긍휼히 여기신 예수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위대하신 분이시라는 사실도 알고 엄격하신 분이시라는 사실도 알았지만 하나님이 얼마나 긍휼에 풍성하신 분이신지에 대해서는 잘 몰랐습니다. 성경이
(찬양)
주의 인자는 끝이 없고 주의 자비는 무궁하며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큼이라
성실하신 주님
예레미야의 책들도 가까이 했지만 하나님의 긍휼은 잘 몰랐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충분히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잘 모르는 하나님의 이 위대한 성품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고 듣고 만질 수 있도록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의 몸 입혀 이 세상에 내려 보내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긍휼히 여기시는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의 세 번째 국면을 배우게 되었고, 이것을 안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엄격하심과 무서우심 때문에 하나님께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 이런 하나님의 긍휼의 마음 때문에 하나님께로 돌아갔던 것입니다. 채찍과 후려갈기는 매질이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없었다면 그것은 양심의 소리 하나로 죄인임을 알면서도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었던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나 이 긍휼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게 하였던 것입니다.
마태복음 9장 35절에 보면 이제 예수님이 무슨 동기로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고 고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늘 자기 곁에 두셨던 제자들을 사도로 세우셨는지가 나타납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무리들을 보시고 마음이 심히 불쌍히 여기셨으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 같이 유리하고 고생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무리들을 보실 때에 예수님의 마음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프셨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스라엘 백성들이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고 고생하는 것은 그릇된 종교 지도자들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더 넓은 의미에서 본다면 결국은 인간들이 스스로 하나님을 버리고 불순종과 죄를 택했기 때문에 나타난 죄의 결과가 아닙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누구의 죄 때문에 그런 비참한 결과에 이르게 되었는지 원인을 규명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으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끓어오르는 마음의 정동은 그들이 지금 현재적으로 목자 없는 양같이 버림받고 고생하며 유리하는 비참한 상태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아픔과 고통이 당신의 것처럼 여겨졌고, 그래서 당신의 사랑하는 제자들을 사도로 파송하시면서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들에게 가라고 부탁하셨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9장에 보면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두고 논쟁이 벌어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인간이 겪는 질병과 변고는 모두 죄 때문이었습니다. 만약에 이 소경이 한참 인생을 살다가 소경이 되었으면 자기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소경이 되었을 것이라고 판단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면서부터 소경이었으니 죄를 지었다면 뱃속에서 지었을 텐데 그것은 아무래도 소경이 될 정도로 가혹한 형벌을 내릴만한 죄라고는 믿어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죄의 문제를 조상에까지 추적하게 되었고 그래서 저희의 부모의 죄 때문에 저렇게 된 것입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그렇게 그 비참하게 된 소경의 처지에 대해서 원인을 캐물을 수 있는 여유를 가진 것은 그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다시 말하자면 사랑이 현저히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거기에 관심이 없으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람이 날 때부터 소경이 된 것은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을 나타내 보이기 위하심이라”고 말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이 사람이 누구의 죄 때문에 소경이 되었다기보다는 이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은 이렇게 비참한 사람의 고통을 당신 자신의 고통처럼 느끼며 해결해 주시고 싶어 하신다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그의 눈을 뜨게 해 주셨던 것입니다.
이것보다도 더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긍휼이 극명하게 나타난 것은 요한복음 8장에 나타나는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들려온 여자의 이야기에서입니다. 이 사람은 음행하는 현장에서 붙들려왔고 따라서 사건의 진실을 서로 논쟁할 여지도 없는 현행범이었습니다. 그래서 여기에는 죽음을 눈앞에 둔 이 여자가 정죄를 받으면서도 단 한 마디의 변명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드러납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모세의 율법에는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고 명하였습니다. 선생님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이 여자의 죄를 심상하게 여기지는 않으셨습니다. 만약에 그랬더라면 “모세가 실수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이 여자의 죄를 심각하게 생각하셨고, 그 죄의 본질에 관해서 말하자면 돌로 쳐 죽이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율법에 쓰여진 대로 지금 행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는 그들이 생각지도 못하던 각도에서 이 문제를 접근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거라”고 말씀입니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이 여자가 지은 죄는 그런 커다란 너희의 진노를 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너희는 지금 죄에 대한 미움과 죄인에 대한 미움을 구별하지 못하고 있다. 율법의 원래의 정신을 그것이 아니다 라는 것을 가르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허를 찌르듯이 “돌로 치는 것이 모세의 율법이고 그것은 옳다. 그러면 너희 중에 죄 없는 사람이 이 사람을 돌로 치라”는 것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그 중 많은 사람들은 간음하다가 현행범으로 끌려간 적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끌려온 그 여자가 짓지 않은 다른 죄는 진적이 많습니다. 그러면 다른 죄 때문에는 이 여자가 그 사람을 돌로 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돌에 맞아 마땅한 죄를 수없이 짓고도 너희들이 지금 돌을 들고 서 있는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에 이제껏 있는 것이다. 그러면 그 하나님은 너희들만이 아니라 이 여자도 불쌍히 여기신다. 이것을 너희들이 생각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가르침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이 여자를 용서해 주시면서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하셨을 때 예수님의 마음속에는 이 여자가 처한 오들오들 떨면서 지금 돌로 쳐 죽임을 받아야 되는 상태에 있는 이 여자의 비참한 처지에 대한 공감이 왜 이 여자가 여기에 있게 되었는가 하는 그 지성적인 인식보다 훨씬 크게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였고, 그래서 그가 놓여있는 그 고통으로부터 그를 구해주기를 원하신 것인데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당신의 인격 속에서 드러내 보여준 하나님의 긍휼이었던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은 그 유명한 탕자의 비유가 실려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바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긍휼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우리들이 이해할 수 있는 가장 탁월한 언어로 그림처럼 보여주셨습니다. 두 아들이 있었는데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재산 중에서 자기에게 돌아올 유산을 나누어 달라고 요구했고 며칠이 안 되어서 재물을 다 모아가지고 먼 나라로 갔습니다. 며칠 새에 그 모든 일들이 이루어진 것을 보면 아버지께 유산을 요구하기 전에 아들은 그 모든 일들의 계획을 다 준비했고 실행을 할 만반의 채비를 갖추었습니다. 그는 이제 먼 나라에 가서 허랑방탕했고, 재산을 다 허비하고, 굶주린 자가 되어서 생존의 위협을 느낄 때에야 아버지의 집에 있는 풍족한 품꾼들을 생각하게 되었고, 아버지의 그늘 아래서 그 분과 관계를 맺으며 사는 것이 정말 행복한 삶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몰골은 초라했고 아마 육신의 병도 깃들었을 것이고, 떠나갈 때 화려함과 당당함 대신 비참한 거지의 모습으로 돌아왔을 것입니다. 그때에 먼저 본 것은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였습니다. 그를 보았을 때 아버지는 측은히 여겼고 그래서 달려가서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아들이 비참하게 된 것은 너그러운 아버지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유산을 나누어 주었고, 아들은 가지고 가서 허랑방탕했고, 결국은 비참한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것이 일의 결말입니다. 그러니 자식은 그렇게 돌아왔어도 싸죠. 그리고 마땅히 일어날 일이 사필귀정으로, 인과응보로, 자업자득으로 발생한 것이었습니다. 사랑이 없는 동네 사람들은 살아있는 아버지에게 죽었다고 치고 유산을 달라고 요구하는 이 아들을 보면서 혀를 찼을 것이고, 그리고 싸가지 없다고 그랬을 것입니다. 그리고 다 망하고 돌아왔을 때 동네 사람들은 일종의 만족감 같은 것이 있었을 것입니다. 아버지에게 사가지 없게 굴고 동네 사람들에게 박덕하게 하고 나간 그 자식이 어마어마한 성공을 거두었더라면 왠지 동네 사람들은 찜찜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고소하게도 망했습니다. 거지가 되었습니다.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비참하게 되어서 돌아왔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동네 사람들에게는 일종의 만족 같은 것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비참한 아들의 모습을 보는 그 순간 아들이 요구해서 날아가 버린 자신의 재산도, 그 아들이 자신의 가슴에 대못을 박았던 싸가지 없던 기억도, 하나도 없고 오직 아버지의 마음을 가득 채운 것은 내 새끼가 굶주리고 병들고 비참하게 되었다는 것 그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아들을 처음 볼 때에 아버지의 마음을 압도했던 정동은 비참의 정동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를 참을 수 없어서 아버지는 달려갔고 그리고 그를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변함없는 사랑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들이 오늘날 이렇게 우리의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 하나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매주 예배드리러 올 때마다 나는 오늘 예배드릴만한 자격이 있다, 오늘 만나서 내가 일주일동안 얼마나 잘 살았는지 우리 하나님께 자랑 좀 해야지 라고 할 만큼 자신만만한 때는 한 주도 없습니다. 매일매일 하나님 앞에 나아올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하고 그 무한한 사랑을 덕 입기에는 현저히 결함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결점과 우리의 죄악을 용서해 주시고 당신께 돌아오고 싶어 하는 우리를 날마다 처음 돌아오는 사람인 것처럼 감격적으로 맞이해 주시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이 긍휼히 여기시는 사랑 때문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순교의 종소리가 들려오는 인생의 황혼의 때에 그의 마음을 뒤흔들어 하나님 앞에 살 용기를 갖게 하였던 사실이 있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미쁘다 이 말이여, 죄인들을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임하셨다 함이로다 내가 죄인중의 괴수로다”라고 말입니다. 자기가 죄인중의 괴수였다는 사실을 생각하고 그런 자신을 사랑하고 용서해 주셔서 충성스러운 일군으로 삼으시고 지금도 여전히 불순종과 죄 가운에 살지만 용서해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생각할 때마다 사도의 마음속에는 삶과 죽음을 가르고 있는 그 줄이 의미가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라고 말씀을 하심으로써 바로 그 말씀을 듣는 우리들이 하나님께로부터 긍휼을 입은 자들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상기시키고 계십니다. 사람을 긍휼히 여기고 긍휼을 베풀어라 그들이 너에게 해준 것을 생각해서는 그럴 수가 없다.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고 가족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는 이 모든 사랑의 근원은 우리들이 사랑한 그 사람이 나에게 무엇을 해주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똑같은 액수의 돈을 직장 상사에게 갖다 바치면 뇌물이 되고 자기를 도와줄 것이 없는 어려운 처지에 있는 고아에게 가져다주면 자선이 됩니다.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상사에게 돈을 갖다 바칠 때에는 그가 너무 불쌍하고 비참한 처지에 있어서가 아니라 이 뇌물을 받고 나에게 무슨 혜택을 주기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그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마음속에 자기의 이익으로 가득 찬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비겁한 행동입니다. 그러나 고아에게, 노숙자에게 상사에게 바치는 돈과 똑같은 액수를 건넵니다. 이름도 모릅니다. 성도 모릅니다. 그리고 지금 헤어지면 다시 만날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줍니다. 왜? 나는 그가 왜 노숙자가 되었는지, 왜 고아가 되었는지, 그 사람의 삶에 무슨 결함이 있었는지, 그가 왜 감옥소에 들어가게 되었는지, 무슨 죄를 지었는지 관심이 없습니다. 다만 그가 그렇게 비참한 처지에 놓여있다는 그 사실이 가엾습니다. 그리고 바로 내가 하나님 보시기에 그렇게 비참한 처지에 있을 때에 하나님은 내가 왜 비참한 처지에 있는지 따지고 물으시면서 그냥 등을 돌리시지 않고 비참한 처지에 있는 내 인생의 눈물을 씻겨 주셨고, 나의 몸에 흐르는 그 피를, 그 상처를 닦아 주셨습니다. 그 사랑이 십자가를 통해 선명하게 다가왔고, 그래서 하나님의 그 긍휼하심 때문에 나의 나 된 것을 생각할 때 그 사람도 이러한 긍휼이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뿐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긍휼은 기독교인의 사랑의 거의 완성된 형태입니다. 오래 참음도 그 사랑의 끝이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냥 견디기만 하고 참기만 하는 것은 사랑의 완성이 아닙니다. 그 오래 참음을 넘어서서 긍휼을 실현하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사랑입니다.
IV. 적용과 결론
예전에 우리는 하나님을 멀리 떠나 우리 맘대로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왔고 왜 우리가 하나님 이외에는 쉴 곳이 없다고 고백을 하게 되었습니까? 율법의 몽둥이가 무서웠습니까? 아니면 양심의 정죄가 두려워서였습니까? 우리가 예전에 주님을 멀리 떠나 있을 때 죄짓고 불순종할 때에 양심은 언제나 우리를 후려쳤고 그 매질은 심히 아파서 우리의 온 마음을 피멍이 들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간 사람은 없습니다. 만약에 그것 하나로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다면 우리는 이를 악물고 한을 품은 체 하나님께로 돌아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그 모든 죄와 불순종에서 떠나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게 만들었던 것은 언제나 그것이 아니라 어머니 같은 하나님의 긍휼이었습니다.
(찬양)
우리를 사랑하신 자비의 주 아버지
주께로 나갈 때에 기도 들으사
우리 죄와 강퍅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 하시네
맨 처음에는 율법이 우리를 비추어 매질도 하고 정죄도 하고 우리의 양심의 채찍질로 피멍이 들기도 하였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주었습니다. 그러나 그것 자체가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렇게 불순종하고 죄를 지었기 때문에 너에게 당한 마땅한 심판은 사형이라고 하는 언도를 받았을 때 주님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당신의 십자가에서 우리를 바라보셨던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죄 있는 우리를 살리기 위해 죄 없으신 자기 아들을 죽이신 것은 죄 때문에 비참한 처지에 있는 것은 당연한 인과응보의 귀결이지만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랑의 마음이 차마 당신의 자녀들이 그렇게 비참한 처지에 놓여 고통을 받게 된 것을 차마 볼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은 언제나 눈물이 가득 고인 사랑입니다. 당신 자신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고 당연히 죄를 지어 마땅히 받은 인과응보의 비참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원인과 이유와는 상관이 없이 비참함에 처한 여러분 자신의 처지를 보면서 아파하시고, 고통스러워하시고, 여러분에게서 그 고통이 제거되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 어디에 우리를 이렇게 우리가 당한 비참함 자체를 응시하며 그 비참함 속에서 저 사람은 얼마나 외로울까? 얼마나 비참할까? 얼마나 가엾은 상태인가? 라는 것을 생각하며 울어주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나마 희미한 그림자가 우리 엄마들에게 남아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엄마를 통해 나타난 그 희미한 그림자보다 훨씬 크고 무한한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 스스로 외롭고 소외되었습니다. 누가 여러분을 소외시키셨습니까? 여러분은 지금보다 더 많이 소외되었을 때에도 외롭지 않은 때가 있었습니다. 온 인류가 나를 소외시켜도 하나님만 내 곁에 있으면 나는 왕따 당하는지도 몰랐고 오히려 나를 소외시킬 수밖에 없는 그 사람들의 상처가 아팠습니다. 시련과 고통가운데 있습니다. 사면을 돌아봐도 비참하고 불쌍한 여러분 자신의 처지 이외에는 어떠한 희망도 보이지 않습니다. 대부분 여러분 스스로 선택한 그 도덕적인 선택의 결과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은 싸다고 말합니다. 사필귀정이라고 말합니다. 어쩌면 이 말을 듣는 여러분은 정말 나쁜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뭐라고 해도 하나님 한분은 여러분이 왜 그런 처지에 이르게 되었는지 보다는 아파하는 여러분의 고통, 비참한 여러분의 처지에 주목하시고 그 비참함을 현재적으로 공감하십니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여러분의 그 고통을 제거해주고 싶어 하십니다. 당신이 대신 아파하는 한이 있더라도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누구일까요? 그 사람은 바로 이렇게 과거적으로 자신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손에 그 더러운 죄의 피를 묻힌 악한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자기를 용서해 주신 것이 긍휼히 여기셨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가슴에 새긴 사람입니다. 과거에 그것이 너무나 선명하게 새겨졌기 때문에 기꺼이 그리스도의 종이 될 수밖에 없었고, 그 사랑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사람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매일매일 반복되는 나의 죄와 불순종, 그 하나님의 거룩한 요구에 미치지 못하는 자신의 삶에도 불구하고 주님께 나아갈 때마다 불쌍히 여겨주셔서 다시 사랑해 주시고 자비를 베푸시는 그 긍휼 때문에 자신이 살아있다고 믿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가 매일 기도하고 매일 설교의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자고 다짐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이런 하나님의 은혜의 수단에 참여하지 않으면 이 하나님께로부터 매일매일 받고 있는 긍휼에 대한 감각들이 흐려집니다. 그래서 방금 일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 받고 가슴 벅차는 마음으로 길거리로 뛰쳐나오다가 자기에게 100데나리온 진 사람을 만나고 모가지를 움켜쥐고 당장 내놓지 않으면 감옥에 쳐 넣을 것이라고 말하는 그러한 한심한 사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두 가지를 물어봅시다. 최근에 너무 고통스럽고 아픈데 그것이 친구든 엄마든 이웃집 아저씨든, 누구든지 상관없이 애인이든 남편이든 자식이든 상관없이 이 사람이 이 사람만큼은 내가 왜 비참하게 되는지 묻지를 않는구나. 다만 나의 이 비참한 고통을 자신의 것처럼 아파하며 함께 해주는구나. 그런 것을 경험해 본 적이 있습니까? 프리드리히 니체는 자신의 책속에서 ‘알레이스트 알라인’ ‘모두들 혼자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살을 맞대고 사는 가족도, 남편도, 아내도, 때로는 내가 사랑하는 애인도 나를 그렇게까지는 받아주지 않습니다. 그러면 두 번째로 물어봅시다. 여러분이 최근에 누군가에게 그가 왜 비참한 처지에 이르게 되었는지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은 채 그냥 그가 그렇게 아프게 된 상태 자체가 너무 아파서 그 사람의 아픔이 내 아픔인 것처럼 느껴져서 한없이 누군가를 여러분의 품에서 쉬게 해 준 적이 있습니까?
(찬양)
예수의 넓은 사랑을 어찌 다 말하랴
그 사랑받은 사람만 그 사랑 알도다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그런 삶을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도달할 수 없는 높은 삶의 표준인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10년 20년 30년 50년 일평생을 이런 완전한 긍휼 속에서 살았느냐고 누가 묻는다면 우리 중 누구도 아멘이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은혜가 우리의 마음을 녹일 때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자기를 버리신 그 큰 사랑, 당신은 하나님의 진노 속에 죽어 가시면서도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들이 미래에 받게 될 형벌을 가슴아파하시며 저희들이 잘 모르고 이러니 용서해 달라고 비셨던 예수님의 마음이 우리 속에 이입될 때에 우리는 아무도 원수가 없었고,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내게 그렇게 끔찍한 악을 행하고 지나가 버리고 지금도 회개하지 않는 사람인데 그렇게 나에게 나쁘게 할 수밖에 없었던 그 사람의 망가진 상태, 아직도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나한테 와서 용서를 빌지조차 못하는 그 사람의 망가진 영혼 때문에 울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우리의 마음을 움직인 십자가의 그 긍휼히 여기는 사랑이었습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우리의 가족은 이런 사랑을 우리가 누군가에게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베풀며 그래서 그 가족들이 내 품에서 쉬도록 이런 사랑을 누구에겐가 요구하고 왜 나를 이렇게 긍휼히 여기지 않느냐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깊은 영혼과 육체의 상처를 가지고 마음 둘 곳이 없이 버림받은 채 살아가는 소외된 모든 사람들이 단 하루라도 자신의 품에서 쉼을 얻을 수 있도록 그 쉼 속에서 나와 함께 하시는 그리스도를 발견할 수 있도록 해 주라고 오늘도 우리를 불러 용서해 주시고 다시 사랑하시고 당신의 자비와 긍휼로 우리를 깨워주시는 것입니다.
꿈꾸고 생각해 보십시오. 이렇게 우리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넘쳐서 어찌할 수 없는 죄인들을 끌어안고 용서하고 긍휼히 여기면서 그렇게 살아갈 수 있다면 그래서 주님이 우리같이 무지 랭이 같은 사람들을 통해서 이 세상에 어두움 속에 빛으로, 맛을 잃은 이 세상 속에 소금으로 살아가게 하신다면 우리의 삶은 얼마나 아름답고 우리가 있어서 이 세상 사람들은 주님의 소망으로 넘치게 되겠습니까? 주님은 오늘도 여러분을 이렇게 긍휼히 여기며 살 수 있도록 충분히 긍휼히 여겨주십니다. 오늘 주님께 죄의 용서를 빌어 보십시오. 나의 비참한 처지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빌어보십시오. 여러분이 의로운 것 아무것도 없어도 하나님은 여러분을 어머니의 마음으로 내 새끼라고 부르시며 끌어안으시지 않습니까? 이런 무한한 사랑을 대가 없이 주신 것은 여러분도 그렇게 모든 불쌍한 사람을 긍휼히 여기며 살라고 베풀며 주시는 것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의 복(2)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마 5:7)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긍휼히 여기는 사람들의 복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입니다. ‘엘레데손타이’라고 하는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요”라는 단어는 “긍휼히 여기다.”라고 하는 똑같은 단어를 수동태로 변화시킨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사람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불쌍히 여김을 받을 것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로부터 불쌍히 여김을 받는 이 긍휼의 경험이야말로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들이 그리스도의 통치 속에서 누리게 될 최고의 행복 중 하나입니다.
팔복은 인간의 자연적인 성품이 아닙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와 성령을 통해 거듭난 사람의 변화된 성품입니다. 따라서 이 팔복의 나타난 특징은 인간의 덕이 아닌 하나님의 속성이 나타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는 세 국면이 있다고 지난 시간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래 참음과 자비와 긍휼이 그것이었습니다. 그 중 긍휼은 하나님이 죄인이 비참한 상태에 있는 것을 보며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이고, 이 마음은 어찌하든지 저 비참한 상태에서 그 죄인을 건져주고자 하는 소원으로 나타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 모든 이 세상의 인류가 이렇게 서로를 서로 불쌍히 여기면서 사는 세상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곳곳에 난무하는 비난과 그리고 악담들 그리고 포악과 무자비는 하나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그 마음과는 현저히 거리가 먼 상태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를 주시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삼으셔서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을 이렇게 긍휼히 여기면서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이렇게 긍휼히 여기는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으로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라고 그 복을 약속하고 계십니다.
II.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요”
A. 변함없는 긍휼
1. 불변하시는 하나님
그러면 우리는 이 긍휼히 여겨주시는 주체가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하게 됩니다. 변함없으신 하나님이 어떤 때에는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어떤 때는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지 않는 분인가 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먼저 우리는 하나님의 변함이 없는 긍휼에 대해서 먼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하나님은 영원토록 변함이 없으신 불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변함없으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들이 그 하나님을 믿고 신뢰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만물을 초월해 계시는 완전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당신과 관계를 맺는 이 세상의 사람들에 의해서 이런 분으로 저런 분으로 변화되시는 분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대상에 따라서 변화 하시는 분이 아니시라는 뜻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변화하신다면 예전에는 없으셨던 무엇을 지금 가지고 계실 텐데 지금 가지고 계신 것이 완전하다면 예전에 지금 가지고 계신 것을 안 가지고 계신 상태가 불완전한 상태가 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완전한 분이 아니십니다. 또 예전에 있었던 것이 지금은 하나님에게 없다면 그러면 예전에 가지신 것은 지금 없어도 되는 것을 예전에 가지고 계신 것이니 이 또한 하나님이 불완전한 분이시라는 의미가 됩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어떤 식으로 말해도 변화하는 분이라고 말하면 그 하나님이 완전하고 영원하신 분이시라는 사실과 모순이 됩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사랑이시라고 말합니다. 어떤 특정한 시간에만 사랑을 발휘 하신다면 하나님은 사랑하실 수 있다고 말해야지 하나님은 곧 사랑이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모든 만물들을 창조하시고 당신과 사랑을 나누실 대상으로서 인간을 지으셨습니다. 인간이 만들어지고 나서야 겨우 하나님이 사랑하셨다면 그 하나님은 사랑이신 하나님이실 수가 없고 사랑할 수 있는 하나님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조차 만들어지지 않은 하나님 홀로 계셨던 때에도 하나님은 사랑이셨을까요?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하나님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계셨고, 이 세 위격은 서로 완전하고 아름다우심으로써 서로를 사랑하시는 관계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세상의 만물이 창조되어 사랑을 나눌 인간이 없었을 때조차도 하나님 안에서 서로를 사랑하심으로 하나님은 사랑이셨던 것입니다.
2. 변화하는 인간 경험
긍휼은 바로 이렇게 영원히 불변하는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랑이라는 속성의 한 국면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창조되고 나서 하나님 안에 있는 이 영원한 속성이 발현되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특별히 영원 전에는 긍휼히 여길 대상이 없었기 때문에 긍휼이 발현되지 않았지만 인간이 하나님을 멀리 떠나 죄 짓고 타락한 다음에는 비참하게 되었고, 이런 비참한 인간의 형태는 하나님의 긍휼이 이 세상에 나타나는 훌륭한 배경이 되었던 것입니다. 비유하자면 어두운 밤하늘이 있었기 때문에 불꽃이 찬란하고 아름답게 보였던 것처럼 인간의 죄로 말미암는 비참이 온 세상에 만연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비참한 인간들과 관계를 맺으시며 그 비참함 속에서 건져주시는 긍휼이 찬란한 불꽃처럼 나타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죄 때문에 비참해진 인간들의 형편이 없었더라면 나타나지 않았을 하나님의 긍휼이 불꽃처럼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죄 때문에 비참한 세상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오늘날 우리들이 경험하는 가슴 벅차오르는 하나님의 사랑, 마음을 물같이 녹이며 하나님 앞에 매달리게 하시는 은혜의 경험, 그리고 돌이켜 우리가 회개할 때에 느껴지는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감격 같은 것들도 죄가 없었더라면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결국 인간은 하나님을 멀리 떠나기 위해 죄를 짓고 그 때문에 비참이 들어왔지만 하나님은 그 비참 속에 처한 인간들을 구원하시는 모든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얼마나 큰 사랑을 가진 분이신지를 혁혁하게 드러내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5장 8절에서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다”고 말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언제나 사랑이셨고 언제나 마음속에 긍휼을 간직하고 계신 분이었지만 인간이 타락하고 비참이 도입되고부터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는 그 모든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 마음 안에 있는 이 넘치는 긍휼을 아주 찬란하게 인간의 역사 속에 펼쳐 보이심으로써 모든 인간들이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던 것입니다.
B. 신자에게 경험됨
그런데 이 변함없는 하나님의 긍휼은 신자에게 경험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비참한 인간들을 긍휼히 여기시는 분이지만 죄인들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께 반항하는 동안에는 그 긍휼이 자신에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교만하였던 마음을 낮추고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온 그때에야 비로소 하나님의 넘치는 긍휼이 그의 마음속에 경험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당신을 멀리 떠나 죄로 말미암아 비참해진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그리스도 예수를 이 세상에 보내셨고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속에는 인간이 무엇 때문에 저렇게 비참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인간의 책임을 물으시는 대신 그 비참한 인간들을 그 고통스러운 상태에서 건져내고자 하는 하나님의 눈물로 가득 찬 마음을 가지고 이 세상에 오셨던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셨을 때에 그 구원의 열매가 어디에 나타났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일평생을 올곧고 의롭게 하나님 없이 구원을 찾던 사람들에게 나타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이 세상에서 죄인이라고 낙인찍히고 사람들에게 가진 것 없다고 짓밟히던 사람들, 자신도 어떤 구원의 길도 자신에게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에 관한 기쁜 소식을 들었을 때 그것 하나에만 희망을 걸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에게 그 구원이 나타났습니다.
죄로 말미암는 인류의 비참한 상태는 전쟁터의 부상과 같습니다. 화약이 발견되기 이전의 전쟁을 생각해 보십시오. 전투가 벌어지고, 칼과 칼이 맞부딪치고, 수많은 화살들이 오가고, 창이 서로를 찌릅니다. 전투가 끝났을 때에 둘 중 누구는 승리하였겠지만 한 사람의 부상도 없이 전쟁에서 승리하는 경우란 거의 없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 어쩌면 살아있는 사람보다 더 많은 사람이 죽었고, 죽은 사람의 수만 한 무수한 부상자가 생겨나고 그 중 대부분의 사람은 일평생을 불구로 살아가야 합니다.
죄가 인류에 남긴 비참함이 바로 그런 전쟁터의 부상자들의 모습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스스로 그 비참한 상태를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아셨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이렇게 당신을 멀리 떠나 비참해진 인간을 고통에서 건지시기 위해 구원을 베푸셨던 것입니다. 그런 긍휼을 베푸신 동기가, 그런 구원의 은혜를 베푸신 동기가 바로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이었습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우리들이 비참하게 된 것이 우리의 악한 의지와 하나님을 멀리 떠난 우리의 불순종 때문에 당연히 이루어진 귀결이라고 하나님이 생각하셨다면 그러면 우리가 고통을 당하고 비참하게 된 그 속에 있을 때에 전혀 불쌍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이 충만하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의 죄 때문에 비참하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누구의 잘못 때문에 우리가 비참하게 되었는가를 논리적으로 따지시기 이전에 당신의 형상을 닮은 당신이 사랑하는 인간들이 그렇게 비참한 가운데 고통을 받는 모습을 차마 보실 수 없었으니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사람들을 용서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사소하게 지은 죄를 일평생 마음에 간직하고 복수와 원한의 칼을 가슴에 품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우리에게 악을 행하고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채 비참하게 살아가는 그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갖는 그 사람들이 하나님께로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정치를 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오늘날 우리의 북한 문제도 이런 긍휼의 마음을 가지고 접근해야 된다고 하는 것은 매우 분명합니다. 저는 몇 주 전 굶주림을 피해서 중국에 팔려가는 북한의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를 여러분에게 설교 속에서 예화로 말씀드렸습니다. 그들이 구타와 성적인 착취를 당하며 고통 받는 이야기를 여러분에게 드렸습니다. 자, 어떻게 그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까요? 무력으로 북한을 통일하는 것도 한 방법일 수 있을 것입니다. 아니면 많은 돈을 가지고 중국으로 넘어가서 그렇게 PC방에서 착취당하는 여성을 제값을 주고 사서 한국으로 데려오는 것도 한 방법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니면 북한에 송금을 해서 그 사람들이 그렇게 무모하게 팔려가지 않을 수 있도록 경제적인 여건을 개선하는 것도 방법입니다. 탈북자의 증언에 의하면 여기서 100만원을 보내면 30만원이 북한에 있는 사람들 손에 들어간다고 합니다. 여러 다리를 거쳐서 커미션을 떼고 들어가는데 30만원이 들어가면 북한은 노동자들의 월급이 우리나라 돈으로 2달러 정도 밖에 안 된답니다. 그러니까 거기에서 만약에 300달러라고 그러면 어마어마한 돈이고 100달러면 장사를 시작할 수 있을 정도의 밑천이 됩니다. 그러면 그렇게 해서 사람들을 도울 것인가 하는 것은 각자의 정치적인 견해와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일단 그들을 정말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라고 하는 사실, 그리고 그것이 서로 견해는 다를지라도 어떤 식으로든지 실행에 옮겨져야 된다고 하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어제 신문에 법원에서 쌍용차 직원들 150여명을 해고한 것이 불법이었다고 판결이 났습니다. 우리는 그 모든 진실에 대해서 기업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맞는지, 노동자들의 이야기가 맞는지 100% 정확하게 판단할 위치에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 하나는 그 해고 사태로 수많은 가정이 풍비박산이 되고 여러 사람들이 자살을 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해고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회사가 커다란 손해를 보고 있는 것처럼 장부를 조작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물리적인 폭력이 아니라 제도와 그리고 경제적인 힘을 가진 폭력이고 이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비참 속으로 굴러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는 좌파적인 생각을 지지할 수도 있고, 우파적인 생각에 확고한 견해를 가지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민주 사회를 살아가는 각자의 인생관이고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입니다. 복음은 그 둘 중 어느 하나 편에 서라고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하나가 있습니다. 성경은 좌파와 우파 중 어느 하나를 택하도록 가르쳐 주지 않지만 그 모든 자신의 주장과 견해를 초월해서 그것이 물리적인 폭력이든, 제도와 법률에 인한 폭력이든 혹은 권력이나 혹은 금권에 의해 돈에 의한 폭력이든지 간에 어쨌든 인간의 악으로 말미암아 도래하게 된 모든 비참해진 사람들, 심지어는 그런 폭력을 행하면서 살 수밖에 없는 망가진 영혼을 가진 그 사람들의 비참한 상태들까지라도 불쌍히 여기면서 살도록 부름 받은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그런 긍휼과는 거리가 먼 세상이 되어 버렸고 이렇게 긍휼의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끊임없이 이용당하고 짓밟히고 치열한 경쟁에서 낙오자가 되는 것 같은 현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분명히 기억해야 될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하늘나라가 이미 도래하여 그 안에서 천국 백성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무슨 이유 때문이든지 간에 그것과는 상관이 없이 이렇게 비참한 고통 속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며 살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 돌아보십시오. 눈만 열면 눈앞에 펼쳐지는 신문과 방송, 그리고 클릭 한번 하면 들어갈 수 있는 인터넷에 있는 세상에서 우리가 이런 긍휼을 과연 찾아볼 수 있습니까? 자기와 조금 견해가 다르다는 이유 때문에 폭언과 욕설이 난무하고 이어서는 살해의 위협까지도 오고가는 무시무시한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강퍅해질 대로 강퍅해져서 이제는 욕설과 그리고 야비한 말을 섞지 않으면 사람들에게 별로 그렇게 감정에 호소가 되지 않는 그런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주 극단적이고 그리고 아주 극렬한 언어들이 만발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어디에서도 이렇게 자기를 낮추어 비참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한없이 불쌍히 여기며 그들을 감싸 안을 사람들이 발견되지 않습니다. 성경은 오늘 너희들이 이 어두운 세상에서 그런 사람으로 살아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III. 긍휼히 여기는 자의 행복
A. 긍휼로써 천국을 보여줌
그러면 그렇게 다른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는 사람들의 행복은 어떻게 나타날까요? 예수님께서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하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는 사람들이야 말로 하나님께로부터 매일매일 비참한 처지에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자기를 불쌍히 여겨주시는 하나님 사랑의 감격 속에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진정한 행복은 긍휼로써 천국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죄가 들어온 이후로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는 날카로운 대조가 성립하셨습니다. 인간의 포학과 하나님의 긍휼이 바로 그것입니다.
여러분은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이후 낳았던 아들 가인을 기억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바로 동생을 죽인 첫 번째 살인자가 된 것도 알고 계실 것입니다. 결국 가인은 여호와 앞에 쫓겨나게 되었고, 그 아내와 동침하여 에녹이라는 자식을 낳았고, 이때부터 가인은 하나님 없는 가족을 만들어 갔습니다. 성을 쌓았고 그 아들의 이름을 따라 이름을 에녹이라 하였으니 그의 관심사에서 하나님은 사라진 것입니다. 그렇게 시집가고 장가가고 번성하며 만들어진 나라가 이 세상 나라의 시작이었습니다. 그 가인의 가까운 후손 가운데 라멕이라는 인물이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아다와 씰라라고 하는 두 아내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자손들에게서 인류의 문명을 이끌어 가는 조상들이 태어났습니다. 라멕은 그 아내들에게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어라. 라멕의 아내들이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는 나의 상처 때문에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다. 가인을 위해서는 벌이 칠 배지만 라멕을 위해서는 칠십칠 배가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무슨 뜻인지 이해하시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라멕에게 상처를 내었습니다. 일부러 그랬을 수도 있고 실수로 그랬을 수도 있습니다. 어떤 소년이 라멕의 몸을 좀 상하게 하였습니다. 일부러 그랬을 수도 있지만 실수였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자기가 이렇게 상처를 입고 육신의 흠집이 나게 되자 이에 대해서 보복을 했는데 그것이 살인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가인이 죄를 짓고 하나님 앞에서 쫓겨날 때에 그가 누군가가 자신을 살해할 것을 혹은 해칠 것을 두려워할 때에 하나님이 가인을 해치는 자는 칠 배나 벌을 받으리라고 한 하나님을 조롱하듯이 가인을 위해서는 칠 배의 벌을 받지만 날 위해서는 일흔 일곱 배의 벌을 받게 되리라. 하나님이 그렇게 해 주신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그렇게 집행을 하겠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미워하고 있는 어떤 사람은 그 사람이 정말 잘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화해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은 여러분 때문이 아니라 그 사람이 여러분에게 커다란 잘못을 했기 때문에 관계가 깨졌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여러분이 그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는다면 여러분이 라멕과 다른 점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런데 라멕은 세상 나라에 속한 사람이고, 여러분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끊임없는 인간의 포학과 무자비는 온 인류의 어두운 밤하늘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을 이러한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렇게 포학과 무자비로 어두워진 이 세상에서 어떻게 빛으로 살아야 되는지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진정한 사랑이 사람에게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은 여기에 있나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의 죄를 속하시기 위해 화목재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고 말입니다. 결국 이 긍휼은 우리가 먼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그 긍휼을 기억하며 실천하는 것이지 그 사람이 내게 베풀어준 긍휼 때문에 그에 대한 보상으로서 그를 긍휼히 여겨주는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사랑은 사랑 때문에 그에게 베풀어 주었던 자신의 모든 덕을 잊어버립니다. 왜냐하면 그 자체를 사랑은 기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포학과 무자비로 얼룩진 인간의 죄의 어두움을 당신의 긍휼과 은혜로 밝히셨는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신 복입니다. 남을 긍휼히 여기는 사람들은 매일매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자기를 불쌍히 여기시는 은혜를 경험합니다.
악인이든 선인이든 그가 무슨 사상을 따르는 사람이든지 간에 공통된 특성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악인들조차도 모두 사랑받고 싶어 하고 긍휼히 여김을 받고 싶어 한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지위가 높고 큰 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모든 사람이 박수갈채를 보낼만한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또 어마어마한 돈을 가지고 있어서 무소불위의 힘을 발휘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누군가로부터 진실하게 사랑을 받고 긍휼히 여김을 받을 기회가 쉽게 찾아올까요? 아마 그를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는 사람들은 그가 가지고 있는 높은 지위와 엄청난 재산 때문에 접근이 불가능할 것이고 가까이 있는 모든 사람들은 다른 동기 때문에 그에게 아부하고 그를 높이고 찬사를 보낼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오늘날 재벌의 회장쯤 되면 옛날에 황제가 할 수 있었던 모든 일을 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만큼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가지고 있는 힘과 위력이 얼마나 큰지를 보여 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그래서 옛날에 김대중 대통령이 청와대에 들어가서 그런 이야기를 하더랍니다. 대통령이 되고 청와대에 들어와 보니 자기가 무엇을 요구해도 아무도 안 된다고 말하는 사람이 없다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대통령이 얼마나 엄청난 권력을 가진 사람인가 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말입니다.
자, 그렇게 돈 많은 사람들 곁에 수많은 사람들이 에워싸서 우리 같은 사람은 접근조차 불가능하겠지만 그가 돈을 모두 잃어버린 후에 권력자가 그 권력을 모두 다 상실한 후에도 여전히 남아서 그를 사랑하고 긍휼이 여겨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더욱이 단순히 돈과 권력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자신의 과오나 잘못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에게 짓밟힐 때에 그를 불쌍히 여겨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하나님께서는 다른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언제나 함께 계셔서 자기를 용서해 주신 하나님의 그 긍휼과 사랑이 매일매일 경험되게 만드심으로써 천국을 보여주는 삶을 살게 하십니다. 그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자기를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B. 하나님의 긍휼을 자원 삼음
또, 한 가지는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긍휼을 자신의 자원으로 삼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잘못을 매일매일 용서하며 그들의 비참한 형편에 대해서 불쌍히 여기는 사람들은 그런 사랑을 자기 자신 안에서 스스로 불러일으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그가 비록 다른 사람에게 매일매일 긍휼을 베풀고 그들을 사랑하지만 자신은 매일매일 자기 앞에 있는 죄와 비참을 봅니다. 이렇게 자신의 죄와 비참을 발견할 때에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랑이 있어서 이웃에게 긍휼을 베푸는 사람들에게는 매일 같이 그 비참한 자신을 불쌍히 여겨 주시는 하나님을 체험합니다. 이 세상에 긍휼이 필요 없는 인간이라고는 아무도 없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는 사람이라도 그 사람의 엄마는 그 사람을 불쌍히 여깁니다. 피를 섞은 부모가 아니더라도 이 세상에 손가락질 받는 사람들조차 우리가 그를 많이 알고 나면 사실은 그도 피해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 사람 안에 있는 많은 상처도 사실은 그 사람도 어쩔 수 없는 것들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나아가서 내가 만약에 저 사람의 자리에 있었더라면 나는 저 사람보다도 더 못한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어 줍니다. 이게 결국은 사람의 새 면모를 발견했다기보다는 그 사람과 대화하고 교제하는 가운데 그에 대한 사랑이 생겨났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손가락질하는 그 사람의 단점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긍휼이 필요 없는 인간은 아무도 없지만 어디에서도 우리를 그렇게 긍휼히 여겨주는 사람은 없습니다.
자, 한번 여러분에게 물어봅시다. 여러분은 마음속에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면 그 이름이 눈물이 되어버린 이름이 있습니까? 온 인류는 아니더라도 누군가를 생각하면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그 사람이 비참한 형편에 있는 것이 생각이 나서 그 사람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눈물 없이는 하나님께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할 수 없는 그런 사람이 여러분 마음 안에 있냐고 묻는 것입니다. 종종 우리는 기도가 부족했던 자신의 삶을 반성하고 기도를 해보려고 합니다. 맑은 정신으로 기도 제목을 모아보면 엄청난 기도의 제목들이 발견되고 대부분은 자신을 위한 기도의 제목입니다. 뜻을 세웠고, 시간도 마련했는데 기도를 하면 할수록 수많은 번뇌들이 머리를 스쳐가고 마음을 쏟으며 기도할 수가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때로는 노력을 해도 도무지 성벽을 주먹으로 두드리고 있는 것처럼 기도 속으로 진입이 되지를 않습니다. 그때에 나는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그렇게 하지 말고 자신보다 더 비참한 사람들을 한번 살피면서 그 사람들의 고통을 함께 느끼려고 노력하며 남을 위한 기도로 시작을 해보십시오. 그러면 놀랍게 기도의 문이 열립니다. 그리고 열심히 기도를 하다보면 자기가 적은 자기 자신을 위한 수많은 기도의 제목들은 이렇게 이루어져도 괜찮고 저렇게 이루어져도 상관이 없는 기도의 제목이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보십시오. 사람을 향한 긍휼의 눈물을 마음에 가졌을 때 우리가 아무리 우리 자신 안에서 죄를 많이 발견해도 언제나 하나님이 그 죄 때문에 비참해진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것이 우리의 마음속에 느껴졌습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나를 버려도 끝까지 나를 불쌍히 여기기 때문에 떠나지 않으시는 분이 내게 한분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감사하게 되지 않습니까?
(찬양)
예수 내 친구 날 버리질 않네
온 천지는 변해도 날 버리질 않네.
긍휼이 필요 없을 정도로 비참하지 않은 인간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정직한 양심의 빛으로 우리를 비추어 보면 언제나 우리는 비참한 존재들이고 논리를 초월한 하나님의 긍휼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람을 긍휼히 여기고 이 마음으로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님은 언제나 그런 자비와 긍휼을 경험하게 하심으로 더욱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하나님과 하나 되도록 만들어 주시는데 하나님의 백성들은 바로 여기에서 나오는 이 은혜의 자원을 가지고 용서할 수 없는 사람들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을 사랑하며 살아감으로써 무자비와 포학이 난무하는 이 어두운 세상 속에서 한 줄기 빛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IV. 적용과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이미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긍휼과 자비를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한때 하나님을 멀리 떠났던 죄인들이었고, 모질게 하나님을 대적하던 마귀의 자식들이었습니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일체의 우리의 공로 없이 하나님 자신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 때문에 우리 스스로 잘못해서 비참하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그것을 당연하다고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그렇게 비참하게 된 처지를 바라보며 마음 아파하시고 눈물을 흘리시며 우리에게 자비와 구원의 손길을 베푸셨던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내모신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주님을 입으로 부르면서도 주님이 싫어서 멀리 떠났고 주님보다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했기 때문에 하나님과 원수된 행동을 하였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어둠속에 가시에 찔리고 맹수들에게 찢겼습니다. 그렇게 피 흘리고 쓰러져 있는 하나님의 양떼들로부터 소외되어 있는 우리들을 주님께서는 찾아오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에게 필요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 없이 죄 가운데서 고통 받고 비참해진 것을 차마 보실 수가 없어서 사랑하는 아버지의 심정으로 선한 목자의 마음으로 고통 받는 우리에게 찾아오셨던 것입니다.
(찬양)
어둡고 캄캄한 그곳 가시밭길에
길 잃은 양 한 마리 떨고 있을 때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그 긍휼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죄 가운데 멸망하였을 것입니다. 이런 주님의 긍휼 때문에 우리가 행복하게 되었고, 마귀에게 짓밟혀 지옥의 불길 속에 던져질 우리들이 이제는 이 어두운 세상에서 미력이나마 빛으로, 맛 잃은 이 세상에서 소금으로 살 수 있는 사람들이 되게 만들어 주시지 않았습니까? 주님은 당신의 이 넘치는 긍휼을 언제나 사람을 통해서 우리에게 베푸셨고, 그 긍휼에 넘치는 섬김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를 긍휼히 여기는 사람들에게 무릎을 꿇은 것이 아니라 그 사람들 속에 계시는 그 위대하신 하나님을 알고 그 분께 무릎을 꿇는 사람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 내가 무엇을 행했던지 지금 하나님을 멀리 떠나 비참 속에서 살아가는 나를 어머니의 심정으로 아버지의 마음으로 불쌍히 여겨주시는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치 않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이미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그 긍휼을 기억하며 누군가를 위해 진심으로 눈물을 흘리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진 모든 사람들에게 당신도 그를 긍휼히 여겨 주신다는 것을 경험함으로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우리 주님 때문에 긍휼히 여기며 살아서 무자비하고 포악한 이 세상에서 한 줄기 빛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의 복(1)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마 5:8)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여섯 번째의 복을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뵈올 것임이요”라고 말입니다. 긍휼이 하나님 사랑의 극치라면 하나님을 뵈옵는 것은 천국 백성이 누릴 복의 극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인간을 향해 나타난 하나님 사랑이지만 청결한 마음은 하나님을 향하여 인간이 충만한 사랑을 가질 때에 그 마음의 순수한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II. 마음이 청결한 자
그러면 이 마음이 청결한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이 청결함을 얻을 수 있는지를 차례로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희랍어 성경에는 “호이 카탈로이 테 카르디아”(οἱ καθαροὶ τῇ καρδίᾳ)라고 나오는데 직역을 하자면 “그 마음에 있어서 청결한 자들은 복이 있나니” 이런 뜻입니다.
A. “청결한 자”
‘청결하다’라고 하는 이 희랍어 단어 ‘카탈로스’(καθαρός)라고 하는 단어는 구약성경에서는 ‘타헤르’(rhef;)라는 단어입니다. 원래 이 ‘카탈로스’라고 하는 단어는 그리스 문맥에서 물리적인 의미로 출발을 했습니다. 옷을 깨끗이 빨아 입어서 오염되지 않은 상태를 의미할 때 이 단어를 사용을 했습니다. 또 아무것도 섞이지 않은 맑고 순수한 물의 상태를 가리킬 때도 이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우유나 술 등에 아무것도 섞지 않아서 순수한 우유와 술의 상태를 가리킬 때도 ‘카탈로스’라는 단어를 사용을 했고, 심지어는 군인들이 전투에 적합하지 않은 요소를 모두 제거하고 전투하기에 적합하도록 정비되었을 때 ‘카탈로스’라고 하는 단어를 사용을 했습니다. 신에게 제사를 드릴 때에 규칙을 정확히 따랐기 때문에 허물 잡힐 것이 없을 때 이 단어를 사용했고, 지성과 관련해서는 사물들의 표상에 의해서 오류에 빠지거나 혹은 억견이 없이 무엇인가 진리를 관조할 수 있는 순전한 정신의 상태를 ‘누스 카탈로스’ 순수지성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서는 이 단어가 크게 세 가지 의미로 사용이 되었는데 레위기 12장 같은 데서는 의식적인 정결을 가리키는 것으로 사용이 되었고, 창세기 20장에서는 도덕적인 정결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 단어가 사용이 되었습니다. 심지어 욥기 4장 7절로 넘어가면 심령의 청결함을 의미하는 단어로도 이 ‘타헤르’라는 단어가 사용이 되었습니다. 결국 이 모든 구약의 논의를 종합하면 결국 청결, 카탈로스 혹은 타헤르라고 하는 이 단어는 하나님 앞에 제의적인 의미에서의 청결과 삶과 마음의 순수함과 깨끗함을 의미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향한 이스라엘 백성의 경외의 표현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균형 잡힌 구약에서의 청결에 대한 관념들이 결정적으로 붕괴되기 시작한 것은 이제 유대교의 가르침이 구약을 잘못 해석하면서 부터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당시에는 이미 유대교의 가르침이 보편화 되어서 구약에서의 청결에 대한 균형 잡힌 가르침이 와해되고 완전히 외적인 문제 즉, 제의법과 결례의 법을 준수하기만 하면 청결하다고 하는 사상으로 집약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이 당시 사람들은 제의법을 잘 준수해서 결례를 행하고 청결의식을 행하기만 하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을 정도로 깨끗하게 되고 이것이 하나님께 기쁨을 드린다고 생각을 하였던 것입니다.
이런 사실에 대한 가장 좋은 예가 아론의 자손들이 혈통적으로 제사장이 되었던 사건입니다. 아론의 자손만이 제사장 역할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비록 마음이 불결하고 도덕적으로 불결하더라도 아론의 자손은 계속해서 제사장의 역할을 할 수 있었지만 이 모든 것에 청결하였다고 할지라도 아론의 자손이 아닌 사람들은 제사장의 역할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론의 자손이라도 제사장의 역할을 할 수 없게 하는 제의적인 규정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의식적이고 외적인 결함 때문이었습니다. 율법은 142종류의 이러한 결함사항을 지적하고 있고 이것을 만족시키지 못하면 제사장 역할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 당시의 모든 유대인들의 관점은 이제 하나님이 주셨던 내적인 청결로서의 영적이고 정신적이고 심령적인 청결함과 그것의 표현인 외적으로 율법을 준수하고 의식법을 따르는데서 오는 청결함 사이의 균형을 상실해서 한쪽으로 치우치게 되었고 예수님은 바로 이러한 잘못된 관점을 이동하면서 청결에 관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설명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당시에 가지고 있는 청결에 대한 개념을 깨뜨리시기 위해서 청결의 그 앞에 마음에 있어서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B. “마음이”
우리말 성경에서는 마음이 청결함의 주어가 되었지만 희랍어 성경에서는 마음이 주어가 아니라 역격 제 3격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장소를 가리키는 역격으로서 그 마음에 관하여, 혹은 그 마음에 있어서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외적인 율법을 준수하는 것이 청결의 기준이 아닌 마음이 기준이 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고, 또 마음의 청결함이 없는 외적인 청결이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의 정신적인 특징이 될 수 없다고 못 박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청결에 대한 당시의 보편화된 잘못된 관점을 바로 잡기 위해서 이 말씀을 하셨고, 따라서 예수님이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말씀하셨을 때에 예수님의 이 선언은 유대교의 가르침에 익숙했던 많은 사람들에게는 매우 생소하고 또 의미를 깨달았을 때에는 충격적인 뜻으로 그들의 마음속에 다가왔을 것입니다.
III. 마음 청결한 자의 나라
A. 청결한 마음
예수님의 관점에 따르면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들은 청결한 사람들인데 의식의 율법을 준수함으로 외적으로 흠이 없는 그런 청결한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의 마음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내면의 세계에서부터 청결해진 사람, 육적인 이스라엘이 아니라 모든 마음속에 임하는 영적인 나라에 합당한 영혼과 그리고 마음과 지성의 청결함을 말씀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청결한 마음은 영혼과 마음이 무엇인가 불순한 것들이 섞이지 않은 순일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을 의미하였고, 이 속에서 인간의 지식과 그리고 정서와 의지가 아주 조화롭게 작용을 하고 있는 이 상태를 예수님께서는 청결한 마음이라고 보셨던 것입니다.
인간 존재는 영혼과 육체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이 육체는 흙을 빚어 사람의 몸으로 삼으셨고, 그리고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께서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는 동작으로 인간의 영혼을 창조하셔서 이 육체와 영혼이 만나 살아있는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인간존재는 영혼과 육체가 아울러 겸전하는 존재이고 이 둘 중 하나를 결핍하였을 때 그것은 참 인간의 존재가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인간의 육체는 영혼과 함께 불멸하도록 창조되었고 죄로 말미암아서 저주를 받음으로 사멸할 육체가 되었습니다마는 부활의 그날에 천국에 있었던 우리의 영혼과 만나 다시 영혼이 불멸하지 않을 몸을 입게 될 때에 우리의 구원도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영혼을 주신 것은 이 영혼으로서 육체의 모든 삶을 올바르게 지도하면서 그러면서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시고 인간을 사람으로 지으신 그 뜻을 성취해 가기 위해서 인간을 영혼과 육체를 아울러 가진 존재로 만드셨던 것입니다. 영혼의 기능에는 고급의 기능과 저급의 기능이 있습니다. 혹은 상부의 기능과 하부의 기능이라고도 합니다. 영혼의 상부적인 기능은, 고급의 기능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직접 믿음으로써 알지만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와 인간과 자기 자신에 대해서 지식을 가짐으로써 하나님을 알고 그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 그래서 선과 악이 무엇인지를 알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도록 도덕적인 결정을 내리는 것들이 바로 영혼의 상부적인 기능들입니다.
이에 비해서 영혼의 하부적인 기능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물질세계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의 몸은 자기 밖의 세계를 향해 활짝 열려있습니다. 눈을 통해서는 사물의 상들을 파악하고, 귀를 통해서는 거기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감지하고, 코를 통해서는 냄새를 맡고, 입을 통해서는 물질들의 맛을 봅니다. 그리고 온 몸의 피부를 통해서는 그 물질의 더움과 차가움, 딱딱함과 무름 등등의 감촉을 통해서 외부 세계에 대한 수많은 정보와 지식들이 인간의 감각기관을 통해서 속으로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들어온 이 정보는 맨 처음 조직되지 않은 하나의 커다란 덩어리처럼 들어오게 되는데 이것을 가리켜서 심리학에서는 지각이라고 부릅니다. 이 지각 위에 인간이 가지고 있는 지식과 생각이 부여될 때에 그렇게 들어온 정보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감지하게 됩니다. 이 감지하는 기준이 플라톤이 이야기하는 규범에 관한 것이든지 혹은 칸트가 이야기하는 범주에 관한 것이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어느 것이든지 이미 가지고 있는 어떤 규범이나 범주에 의해서 이 모든 정보들은 파악이 되고, 파악됨으로써 덩어리처럼 존재하던 지각들은 구체적인 형태를 갖추어서 이것이 내가 접촉하게 된 것이 어떤 사물이고 어떤 성질을 가진 물건인지를 파악하게 되는데 이런 것들은 영혼의 하부 기능들이 담당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가지고 하나님을 위해 쓸 것이냐 나를 위해 쓸 것이냐, 선한 일을 위해서 사용할 것이냐 혹은 이 지식을 악한 일을 위해 쓸 것이냐 하는 것은 영혼의 하부적인 기능이 담당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 상부적인 기능이 담당하는 것입니다. 죄가 들어옴으로 말미암아 이 상부적인 기능들은 완전히 와해가 되어 버렸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나게 해 주실 때에 상당부분 이것들을 회복시켜 주셨던 것입니다.
인간은 이처럼 영혼이 하나님의 쓸데가 있어서 만드셨고 이 영혼의 계도를 받으면서 육체를 지도해 가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육체의 생명은 영혼에 있고 영혼의 참 생명은 하나님이시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영혼은 우리들이 지각하고 파악할 수가 없습니다. 이 영혼은 영혼이 홀로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육체를 가지고 있는 동안 우리의 육체와 함께 영혼이 작용하기 위해서 마음이라는 기능을 사용합니다. 그래서 마음은 바로 영혼의 기능입니다. 바로 이 마음 안에서 고급한 영혼의 기능과 작용, 저급한 인간의 영혼의 기능과 작용이 함께 만나게 됩니다. 이 마음 안에서 하나님의 신적인 간섭과 인간의 자율이 만나고 하나님을 알고 순결한 삶을 꿈꾸고 선악을 판단하고 도덕적인 결정을 하는 고급한 기능과 쏟아져 들어오는 수많은 정보들을 보고 이것이 무슨 물건이고 사물이고 또 그것을 내가 갖고 싶다, 버리고 싶다, 얻고 싶다, 그리고 헤어지고 싶다고 하는 수많은 감정이 우리 속에서 한순간도 쉼 없이 계속 분출하게 되는 것입니다. 좋은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필연적으로 우리 마음속에 일어나고 출렁대는 수많은 영혼의 하부적인 기능의 작용들을 고급한 기능으로서 통제하고 그래서 그 모든 것들을 온전히 갈무리하여 방향을 결정짓고 그것들의 위치를 지정함으로 마음의 평정하고 안정된 상태를 유지하는 사람이 바로 훌륭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평정한 상태를 잃어버리고 인간의 마음이 어떤 욕망과 정념에 사로잡혀 일정한 규모를 잃어버리고 심하게 출렁대기 시작할 때 여기에서 인간의 많은 죄와 범죄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물론 또 그런 것들이 올바르게 통제될 때에 여기에서 아주 탁월한 정신 작용들이 나와서 예술이나 문학 같은 창작품들을 만들어 내기도 하는 것입니다.
아무튼 성경은 우리에게 영혼을 돌이키라, 영혼을 새롭게 하라고 가르치지를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보다는 우리의 자율이 개입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인간의 마음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마음은 하나님의 신적인 간섭과 인간의 자율이 만나는 곳이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이 마음은 하나님의 것이기도 하고 또 어떻게 보면 이 마음은 인간의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너희의 마음을 돌이키라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 너희의 마음을 할례 받으라.” 이렇게 다양한 표현으로 우리의 마음을 고치고 새롭게 하도록 강력하게 촉구하고 계십니다.
바로 천국은 이렇게 마음이 청결한 자의 나라라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 모든 논의들을 종합해 볼 때에 청결한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어서 인간의 마음이 본래 하나님이 의도하셨던 그 작용과 기능을 충실하게 이행하고 있는 상태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행동의 동기와 그리고 마음의 욕구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거스르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이 땅에서도 성취되기를 갈망하는 마음으로 가득 찬 상태를 청결한 마음이라고 부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이기적인 사랑을 온전히 파쇄하고 사랑이신 하나님께로부터 온 그 무한하고 큰 사랑이 자신 속에 흘러들어 그 까리따스의 사랑 안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그 사랑이 온 인류를 휘돌아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우주적인 하나님 사랑의 회기 안에서 그 흐름 속에 있는 그런 종류의 마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모든 욕망을 제어하고 그리고 마음을 모두 비운 그러한 상태를 정결한 마음이라고 부르고 심지어는 청결해지고자 하는 욕망이 있는 자신조차도 모두 내려놓고 잃어버림으로써 이 마음에 도달할 수 있다고 말하지만 기독교에서는 그런 식으로 인간의 마음의 청결이 이루어진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청결한 마음은 하나님을 모든 것을 다 비운 텅 빈 공허의 마음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 이외의 다른 것들의 사랑을 모두 버리고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사랑으로 가득 찼을 때 그 마음이 청결한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청결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언제나 살아계신 하나님을 뵈옵는 복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이런 의문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가득차서 마음의 성향과 동기, 욕구들이 하나님 사랑을 거스르지 않고 거기에 온전히 복종된 상태에 이르기까지 청결해지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라고 말입니다. 물론 그것은 얼마든지 가능한 것입니다. 마태복음 4장에서 각색 병이 들린 죄인들이 예수님께 왔고 예수님은 그들을 고쳐주셨습니다. 육체만을 고쳐주신 것이 아니라 영혼의 변화까지도 예수님께서 이루어 주셨고, 그래서 제자들을 포함한 이 모든 사람들을 가리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너희는 세상의 빛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4장과 5장 13절 이하 사이에 있는 마태복음 5장 3절부터 12절까지의 이 팔복은 예수님이 팔복산에서 자신의 설교를 듣고 있는 제자들과 방금 병 고침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얻기 위해 따랐던 많은 사람들의 어떤 영적인 상태를 염두에 둔 선언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너희는 복이 있나니 라고 하는 정도의 의미일 것이라고 저는 판단을 합니다.
이렇게 보면 결국 이렇게 청결해지는 것은 순간적으로 도달하는 청결함과 그 청결함을 일생동안 항구적으로 유지하면서 살아가는 것, 이 둘 사이에는 무엇인가 구분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즉,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 앞에서 자신의 죄와 비참에 대해 깊이 아파하고 그리스도께서 이 모든 죄를 해결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소식을 듣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었을 때, 그리고 자신의 죄와 불순종에 대해 회개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일 때 그들은 순간적으로 순수한 상태에 도달하게 되고 그럼으로써 그들은 처음 강력한 회심과 함께 탁월한 은혜의 지배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순간적인 도달을 통해서 그들의 마음에는 하나님을 향한 청결함이 깃들게 되고 그 속에서 그들은 그릇된 삶의 동기와 하나님 아닌 다른 것들에 대한 사랑을 온전히 십자가에 못 박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과 탁월한 교통의 때를 누립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처음 사랑의 때를 회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순간에 도달한 청결한 마음의 상태를 항구적으로 유지하고 살 수 있느냐의 문제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바로 이 일을 위해서는 한 번의 은혜가 아니라 매일매일 반복되는 성화의 은혜가 필요하고 그리고 자신 안에 남아있는 죄의 영향력과 불완전한 이 세상의 불결과 유혹으로 말미암아 매일매일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신의 영혼이 정결해지고 깨끗해지는 마음의 변화가 필요하고, 여기에는 하나님의 지속적인 은혜와 그 은혜를 따라 순종함으로 살아가려고 하는 성도의 온전한 헌신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 예수님께서는 어떤 것이든지 간에 “청결한 마음의 상태를 가진 사람들이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뵈올 것임이요” 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B. 정결해지는 길
그러면 이렇게 청결해서 하나님을 늘 뵈옵는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그 불결한 마음이 청결해 지는 길이 무엇일까요? 제일 먼저 속죄의 씻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출애굽기 30장 20절에는 불결하게 된 여인들이 물로 씻어 정결하게 될 수 있다는 기록이 나오고 레위기 7장 14절에는 피를 뿌려 정결케 된다는 말씀이 등장합니다. 이것은 모두 이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죄인들을 당신의 피로 속죄의 피로 깨끗이 씻어 그들을 정결하게 함으로써 죄인들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그 정결케 함을 힘입어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는 속죄의 사건을 예고하는 것입니다. 이 구약의 예언을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셨고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감히 마주할 수 없는 불결하고 더러운 마음을 가진 죄인들인지만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 피로 우리의 마음이 깨끗케 씻겨짐으로써 거룩하신 하나님의 보좌에 나아가기에 적합한 존재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께서 뿌리신 그 보혈의 길을 지나 휘장을 찢고 하나님 아버지 앞으로 난 새로운 은혜의 보좌에 이르는 거룩하고 산길을 걸어갈 수 있게끔 하나님이 특별한 은혜를 우리에게 허락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마음이 불결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도 못하고 그 분의 말씀을 깨닫지도 못하고 그래서 거룩하신 그 분을 뵈올 수 없는 무지한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파되게 하십니다. 그리하여 그들이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알고 십자가의 복음 앞에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유일한 구원의 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하나님은 그들의 마음을 열어 주어서 다시 청결한 마음으로 우리 하나님을 뵈올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대부분은 모두 이런 은혜를 경험했기 때문에 만진 적도 없고, 본적도 없는 하나님의 존재와 사랑을 눈앞에 볼 수 있도록 현존하여 존재하고 있는 이 모든 세계의 존재 사실보다도 더 확실하게 믿는 사람들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도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이 전파되어져야 하고 이로써 불결하고 더러운 사람들의 마음이 속죄의 피로 깨끗이 씻겨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알고, 그 하나님과 교제해야 할 선교적인 필요성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은혜의 씻음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한 순간 회심과 함께 청결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뵈옵는 상태가 되었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죄를 용서받은 사람들이지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죄의 요소들이 완벽하게 제거된 사람들은 아닙니다. 불완전한 세상의 불결과 신자 안에 남아있는 잔존하는 죄는 끊임없이 유혹과 굴복이라는 상호작용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을 불결하게 만들고 죄와 은혜의 갈등 속에서 우리는 수시로 우리의 마음의 눈이 어두워져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는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다시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보내시고 또 우리의 마음을 깨뜨려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통해 우리를 객관적으로 보고 우리가 사랑했기 때문에 파악하지 못했던 죄와 불결을 발견하고 뉘우칠 때에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씻김을 받게 되고 그래서 잠시 들리지 않았던 하나님의 말씀이 다시 들리기 시작하고 하나님께 올릴 수 없었던 기도의 문이 다시 열리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회복되고 주님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에 느껴지며 그 거룩하심과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눈들을 다시 열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우리의 마음이 청결하게 다시 씻겨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충만함과 심령의 청결한 상태는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충만한 사랑이 우리의 마음속에 있을 때에는 우리가 순수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이기심 없이 하나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세상과 이 모든 세계 안에는 수많은 갈등과 투쟁, 그리고 끝없는 다툼들이 일반화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인 교회에서조차도 분쟁이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이러한 분쟁의 원인은 두 가지인데 영원에 대한 무관심과 자기만을 사랑하는 이기심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영원에 대한 무관심과 자기만을 사랑하는 이기심들이 바로 교회와 이 모든 세상에서의 끊임없는 분쟁의 이유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창조 세계의 모든 사물들은 우리들이 보고, 냄새 맡고, 듣고, 만지고, 맛을 봄으로써 그 물질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고 이에 관한 정보를 수집함으로써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이 물질에 대한 이해를 갖게 되고 거기에서 지식과 앎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러나 영원을 아는 것은 그런 식으로 파악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영원은 시간을 초월하는 것이고, 시간을 초월한 것은 시간 안에 묶여있는 우리의 육체의 감각들이 파악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 누군가가 영원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영원을 보여줄 수는 없으며 설령 그 설명을 듣고 영원을 이해하게 되었다고 할지라도 그 영원을 알았다고는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 영원은 인간이 그 영원을 사랑함으로써 그 영원을 알게 되는 것인데 이것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 시간을 초월하시는 영원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영원, 진리, 선, 아름다움,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을 어느 각도에서 보았느냐에 달린 것입니다. 영원은 하나님을 시간이라는 각도에서 본 것이라면, 진리는 하나님을 참과 거짓이라는 관점에서 본 것이고, 하나님이 선이라고 하는 것은 윤리적인 각도에서 본 것이고, 하나님이 아름다우심이라고 할 때에는 하나님을 미학적인 각도에서 본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국은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는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제대로 알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시해준 범위 안에서 인간은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어느 정도 소유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결국 완전히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지식을 대신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주신 정보이고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게 될 때에만 비로소 영원이 무엇이고 진리가 무엇이고, 선이 무엇이고, 참된 아름다움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영원과 선과 진리에 대한 올바른 앎을 가지게 될 때에 우리는 이러한 영원에 대한 관심 때문에 잠시 적으로 이 세상에 있는 사물들에 대한 사랑에 얽매이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욕심이 많은 이웃들과 충돌을 피하게 되고, 이기심에 가득 찬 사람들조차도 결국은 하나님을 그릇되게 흉내 내는 것이고 그들을 사랑하는 것조차도 하나님의 거대한 회귀적이고 우주적인 사랑 안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우리는 그 이기심을 가진 사람들조차도 용납하며 살 수 있는 희생의 정신을 갖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천국 백성들의 영적이고 인격적인 특성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는 자기의 책 속에서 말하기를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한 최고의 선에 대해 알 수 없고, 최고의 선에 대한 사랑이 아닌 한 이웃을 진정으로 행복하게 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 이유는 아무리 이웃에게 선한 일을 해준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안 사람이 아니면 참된 행복의 근원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파악할 수 없고 그 사실을 파악할 수 없으면 아무리 이웃을 사랑해도 그 사람들을 영원한 행복의 원천이신 하나님께로 데려감으로 그들을 진정 하나님 안에서 행복하게 함으로 정의를 이루지는 못한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이처럼 결국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씻김을 받음으로 다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영혼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갖게 되고, 하나님을 멀리 떠난 인간의 이기심에 사로잡힌 욕망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를 깨닫게 됨으로써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는 순전하고 청결한 마음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청결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복이 있나니 저 땅이, 이 집이, 저 큰 빌딩이, 이 나라가, 저 나라가 그의 것이 될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사람들은 장원 급제할 것이요, 이 세상에서 승승장구해서 높은 지위에 오를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이런 것들로 보상을 해 주기엔 청결한 마음을 가진 사람의 덕은 너무나 높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아무나 얻을 수 없는 탁월한 복으로 청결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약속하십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라고 말입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바로 하나님이 주신 그 청결한 마음으로 하나님이 주신 천국 안에서 누리는 최고의 복락이라고 할 수 있는 하나님을 뵈올 것임이요 라고 하는 그 복을 누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천국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통째로 주셨다고 할지라도 거기서 하나님을 볼 수 없다면 그것이 어떻게 천국일 수가 있겠습니까? 거기가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일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데 그 나라가 하나님 사랑하는 사람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의 심령의 청결함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생각해 보기를 바랍니다. 이 청결함은 의식적인 율법의 준수를 통해서 저절로 획득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의식적이고 이 모든 정결의 규례들을 준수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내면의 변화, 내적인 혁명이 일어나야 합니다. 거기에 나의 아집으로 세워진 자아의 왕국이 무너지고 하나님의 왕국이 서고, 거기서 나를 사랑하던 사랑이 땅에 내려놓아지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우리의 마음속에서 분출하듯 솟아나 우리 모든 삶을 지배하는 욕구와 동기가 될 때에 그때 거기에서 우리는 마음의 심령의 청결함을 경험하게 되고 여기에서 그는 하나님의 모든 뜻들이 자신의 욕구와 일치하게 되는 것들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IV. 적용과 결론
대부분 우리는 언젠가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했고, 그래서 청결한 마음을 가졌던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도 없고 나도 없고 오직 구속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고 그 사랑 안에서 살기로 다짐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로 이런 사랑이 우리에게 있었기 때문에 우리들이 이 세상의 많은 시련과 핍박 속에서 주를 믿는 신앙을 부인하지 않았고 더 많은 시간동안 우리들이 유혹을 받고 이 세상에서 시련을 당했어도 우리의 믿음을 지키고 하나님의 사랑을 붙들며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도 여러분의 마음은 그런 청결함을 유지하고 있습니까? 어린 아이와 같은 순전함, 하나님이 살아 계시기 때문에 그리고 내가 그 하나님의 뜻 안에 있기 때문에 누리는 말할 수 없는 행복, 주님이 이미 내게 주신 것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나의 모든 것을 주님이 요구하실지라도 아까운 것이 없는 진정한 헌신과 거기에서 오는 얽매임이 없는 영혼과 양심의 완전한 자유 이런 것들이 아직도 여러분 마음속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찬양)
이 세상 나를 버려도 나 관계없도다
내 한량없는 영광은 십자가뿐이라
천국 백성은 삶과 죽음의 동기가 복음으로 변화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 복음은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 같은 죄인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사실입니다. 세상도 지나가고 우리의 정욕도 사라집니다. 그러나 주님을 향한 사랑은 시간을 넘어 영원한 세계에서도 지속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우리가 땅에 살아도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만나게 하는 통로이고 이 사랑으로 가득한 순결한 마음의 창을 통해서 우리는 이 세계 안에 계시나 이 세계 안에는 없으신 그 하나님과 교통하게 되고 이 세상 사람들이 전혀 알 수 없는 하늘의 자원들을 공급받으며 거칠고 어두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주며 살 수 있는 천국 백성들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시 한 번 맨 처음 이곳에서 주님을 만나고 누렸던 그 탁월한 은혜와 순결한 사랑의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다시 한 번 그 충만한 은혜와 사랑으로 새로워져서 온 마음을 다해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라”고 하신 소명을 이루어 간다면 여러분을 구원하신 우리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기쁘시겠습니까?
마음이 청결한 자의 복(2)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 5:8)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유대인들이 생각했던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님이 생각하셨던 하나님의 나라는 사뭇 달랐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키고 도덕적으로 행하는 것이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의 조건이라고 생각했지만, 예수님은 외적이고 의식적인 정결을 넘어서서 마음과 정신의 청결함을 요구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마음의 청결함이란 결국 마음의 생각과 모든 욕망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지 않는 하나님 사랑으로 가득 찬 상태임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마음이 청결한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라고 하는 복입니다. 이 복은 팔복 중 하나님 앞에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복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도 하나님이 있으니까 하나님의 나라이지 하나님이 없다면 그 나라는 이름뿐인 나라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II. “하나님을 본다”는 의미
A. “보다”의 뜻
그러면 하나님을 본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제일 먼저 ‘보다’라는 뜻을 살펴봅시다. 우리말로 ‘볼 것이요’라고 되어 있는 이 단어가 희랍어 성경에 ‘옵손타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 단어는 ‘옵타노’라고 하는 동사의 미래형이고, 이 단어는 ‘호라오’라는 단어의 동사에서 유래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B. 물리적 의미가 아님
희랍어 성경에 기록된 이 단어는 보기는 보되 육신의 눈으로 크기, 형체, 모양, 색깔을 가지고 있는 자연적인 사물을 볼 때에 사용되는 단어가 아닙니다. 오히려 이 단어는 영적인 것들을 보고 어떤 사물들의 배후를 통찰하는 그런 의미에서의 ‘보다’를 뜻합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고린도전서 15장과 마태복음 28장에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모습을 보이시고 또 부활하신 예수님을 뵈옵는다고 할 때에 이 단어가 사용 되었습니다. 또, 변화산에서 엘리야를 볼 때에도 그 엘리야가 나타나는 것을 마태복음 9장 4절에서 이 단어를 사용하였습니다. 또는 마태복음 27장 4절에서는 사람이 어떤 사태를 직면하게 되는 것을 가리켜 이 단어를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여기에서 하나님을 본다고 하는 것은 물리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계시지만 그러나 그 계시는 양식이 크기와 형체, 부피를 가지고 공간 속에서 시간과 함께 존재하는 자연적인 사물처럼 존재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또, 보이지는 않지만 장소가 국한되어 있는 인간의 영혼이나 혹은 천사와 같은 영적 피조물처럼 계시는 분도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계시다고 할 때에 그 기준을 물질이나 영혼에 있음과 없음을 판단하는 기준을 가지고 하나님을 보면 하나님은 어디에도 안 계신 분으로 파악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당신이 창조하신 이 모든 세계가 당신을 벗어날 수 없게끔 창조하셨고, 볼 수 없는 영적인 사물이 아니면서도 또한 하나님은 실제로 우리의 모든 삶 가운데 살아계십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1장은 말하기를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의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즉, 우리의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없는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통해 보여주셨다는 의미입니다.
III. 마음 청결한 자의 복
A.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함
그러면 하나님이 마음이 청결한 자들에게는 하나님을 보는 복을 주셨는데 그러면 이 하나님의 복은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을 본다는 것일까요? 세 가지로 설명할 수 있는데 첫째는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 자신이 영광이시지만 인간은 그 영광을 뵈올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당신이 매우 특별한 분이신 것을 알리시기 위해서 종종 이 세상의 어떤 특정한 장소에서 당신의 탁월한 영광을 일시적으로 보여주시는데 이것을 가리켜서 우리는 발산하는 영광이라고 부릅니다. 모세가 불붙으나 타지 않는 가시나무 떨기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본 것, 빽빽한 구름 가운데 에워싸인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두 볼 수 있었던 것,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지날 때에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시는 것을 보여주신 것, 이런 것들은 바로 하나님이 일시적으로 그들에게 보여주시는 당신의 임재의 영광입니다.
이 영광은 참으로 찬란해서 모든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탁월하고 위대한 분이신 줄을 알게 하고 하나님이외에 모든 사물과 인간들이 얼마나 티끌만큼 아무것도 아닌 존재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만들어 주시는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그러나 이 영광도 역시 물질을 설명할 수 있는 것 같은 방식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기에 요한 웨슬레는 하나님의 영광은 너무 찬란하여서 하나님이외에 다른 모든 것들을 어둡게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부정어법적으로 묘사하였습니다. 결국 이 하나님의 영광은 당신이 살아 계시다는 임재의 표를 어떤 사람들에게 특별히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33장에서 모세는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원컨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여주시옵소서.”라는 기도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상을 숭배함으로 하나님께 범죄 했고 진노하신 하나님은 이 백성을 모두 쓸어버리고 새로운 나라를 만들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는 하나님 앞에 생명책에 기록된 자신의 이름을 걸고 민족을 위하여 기도했고, 주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드디어 이스라엘 백성들은 회개하기 시작했고 모든 단장품을 버리고 하나님 앞에 매달렸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다시 은총을 약속하시자 모세는 그 은총 베푸신다는 증거를 보여 달라고 매달렸습니다. 그리고 그 간구가 “당신의 영광을 제게 보여주십시오.”라는 기도였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약속하시는 이 모든 시기에 모세는 하나님의 특별한 영광을 봄으로써 하나님에 대해 더 알고 자신이 하나님께 은총 입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시편 17편은 인간의 진정한 행복이 바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옵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뵈오리니 뵐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처럼 모양을 가지신 분이 아닌데 어떻게 하나님에게 얼굴이 있겠으며 손과 다리, 팔이 있겠습니까? 이것은 무지한 인간을 깨우치기 위한 눈높이의 언어구사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옵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본다는 의미이고, 하나님의 면전에서 산다고 하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설명할 수 없고 알 수 없지만 그 영광의 핵심은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지혜와 사랑을 이 모든 자연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 속에 펼쳐 보이십니다. 어떤 사람들은 눈이 어두워 보지 못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신앙이 있고 어두움에서 눈이 뜨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성품이 이 세상에 전개된 것을 봅니다. 자연 속에서도 발견하고, 역사 속에서도 발견하고, 자기의 마음 안에서도 발견하고, 다른 사람의 눈빛 속에서도 발견합니다. 그렇게 이 모든 세계 안에는 하나님의 성품이 전개된 흔적들이 있는데 그 흔적들을 추적해 들어갈 때에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본 사람들은 바로 그것이 자신이 이전에 경험했던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에 묻어있던 하나님의 성품의 전개의 흔적들의 본체라는 사실들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경험은 이 세상에서 알지 못했던 하나님의 흔적을 연역하도록 만들어 줍니다.
저는 살면서 다양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마는 35세가 되던 해에 이 하나님의 영광을 깊이 체험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난 후에 저의 깨달음이 이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공부한 신학이라고 하는 학문이 그려내고 싶었던 하나님이 이런 하나님이었구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만난 하나님의 영광이 총천연색의 찬란한 빛깔을 가진 영화였다면 가장 탁월한 신학자가 그려낸 하나님의 묘사는 빛바랜 흑백 사진과 같았습니다. 하나님은 마음이 청결한 사람들에게 이처럼 당신의 영광을 보여주셔서 그래서 말로 형언할 수 없는 하나님의 높으심과 위대하심, 거룩하심과 그 영광을 보여줌으로써 그래서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에 대해 새로운 생각을 갖고 새로운 인생을 살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형언할 수 없는 하나님의 영광을 본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그들을 정결하게 하시는 과정을 겪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청결한 사람들의 마음에 당신의 위대한 영광을 보여주시고, 그 영광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티끌 같은 존재이고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를 발견하게 하심으로써 올바른 가치와 존재에 대한 생각을 가지고 인생을 지혜롭게 살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마음이 청결한 자에게 이처럼 당신의 영광을 경험하게 해 주십니다. 그래서 일상적으로 신앙 생활하는 것도 훌륭하지만 그러면서 여러분은 그 속에서 이제껏 경험하지 못했던 하나님의 탁월한 영광을 볼 수 있도록 그래서 하나님을 향해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어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기도하는 일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B. 만물 안에서 주 영광을 봄
두 번째는 마음이 청결한 자들에게는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라고 했는데 이것은 바로 만물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본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을 초월적이고 신비적인 방법으로 우리에게 직접 보여주시고 경험하게 하시기도 하시지만 그러나 보다 더 많은 경우에는 하나님이 당신의 영광을 이 모든 세계 속에 있는 사물과 인간들에 대한 지식을 통하여 당신의 영광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에 당신이 그것을 창조하셨다는 낙관을 찍으셨습니다. 비록 인간이 타락하고 난 다음에 그 모든 피조물들은 하나님이 창조하셨다고 하는 그 흔적이 흐려졌고 인간은 죄 때문에 그렇게 빛나던 하나님의 흔적을 잘 읽을 수 있는 능력을 상당부분 잃어버렸습니다. 그렇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다시 거듭나고 회심한 사람들은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의 눈을 밝혀 다시 이 모든 세계 속에 있는 하나님의 창조주의 흔적을 뚜렷이 볼 수 있는 능력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그래서 시편 19편에서는 시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의 장막을 베푸셨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말하니 들리는 소리가 없어도 이 모든 세계는 하나님의 창조의 영광을 노래합니다. 이사야 6장에서는 성경이 말하기를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라고 노래하였습니다. 청결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의 눈을 뜨게 해 주셔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 속에 깃들여 있는 하나님의 영광의 흔적들을 보게 하십니다. 그 사람들의 눈앞에 비친 이른 아침 풀잎 끝에 달린 작은 이슬방울 하나의 반짝임도 그들에게는 예사로운 것이 아닙니다. 바로 그것을 하나님이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어린 아이의 작은 눈빛 하나, 우주를 휘도는 별들의 움직임 속에서도 마음이 청결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봅니다.
(찬양)
사랑의 하나님 귀하신 이름을
내 나이 비록 어려도 잘 할 수 있어요
어린 아이들은 비록 어리지만 마음이 청결하기 때문에 신앙이 있으면 비오다 갠 화초밭, 하늘에 뻗친 무지개 안에서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한 분이시고 사랑스런 분이신지를 발견하고 노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행복을 주신다면 그 행복은 좋은 음식을 먹고 예쁜 옷을 입는 것이 궁극적인 행복이 아니라는 사실은 너무나 분명하지 않습니까? 행복 속에 그런 요소가 전적으로 배제된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것이 핵심이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마음이 청결한 사람들에게는 만물 안에 깃들여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발견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그것을 통해서 성경을 통해서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의 세계와 인간들의 언어로 기록된 지식을 통해서도 정작 그것을 발견한 사람들은 깨닫지 못했던 하나님의 영광을 발견하고 하나님을 생각하며 하나님과 교통하고 그 안에서 행복을 누리게 해 주시는데 이것이 바로 마음이 청결한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복입니다.
역사의 숨결이 깃들어 있는 유적지를 여행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가기 전에 역사에 대해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그 현장에 가서 아주 초라해 보이는 집 앞에서 깊은 상념에 잠길 수도 있고, 작고 다 부서진 바위 무덤 앞에서도 말없이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릴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 지식이 없이 유적지를 돌아본 사람들은 커피숍이나 찾을 것입니다. 산을 오른다고 생각해 봅시다. 식물학에 해박한 지식을 가진 사람들은 지나가는 길가에 풀 한포기가 예사롭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형형색색의 꽃들은 그들에게 산을 오르는 재미를 더하여 줄 것입니다. 지질학의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깎아지는 듯한 절벽, 거기에 보이는 암석의 색깔들, 이 모든 것들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될 것입니다. 미술의 조예가 있는 사람들은 하늘 높이 솟은 봉우리, 허공을 가로지르듯이 완만하게 내려오는 산의 곡선들, 흰 빛이 감도는 높이 솟은 바위 봉우리들과 그 아래 우거진 녹음들이 이루어내는 회색빛과 푸른빛의 조화 같은 것을 발견하면서 미술을 모르는 사람들이 느끼지 못하는 수많은 정동들을 경험하며 기뻐할 것입니다. 식물이나 아니면 지질이나 미술에 대한 다른 아무 지식이 없이 산을 오르는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요? 삼겹살 구워먹기 좋은 장소를 찾는 생각밖에는 마음에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당신을 의지하고 마음이 청결한 사람들에게 이 모든 세계 속에서 만나는 수많은 인간 사회의 사건들, 사태들, 그리고 자연 세계에 펼쳐지는 이 모든 현상들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아름다운 그림책과 같습니다. 인간 사회 속에서 모두 예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때로는 나쁘게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서 그 자체는 나쁘지만 그것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선하신 손길을 읽을 수 있기 때문에 나빠 보이는 것들 속에서 좋으신 하나님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하나님이 당신이 창조하신 세계와 인간 사회 안에서 펼쳐 보이시는 당신의 성품을 모든 인간들이 발견하고 기뻐하기 위해서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까요? 두 가지가 필요한데 청결한 마음과 지식입니다. 이 청결한 마음과 지식, 두 가지가 함께 있을 때에 인간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 심지어는 인간들이 악하게 살아가는 사회 속에서도 악 자체는 깨끗하고 아름답지 않지만 그 악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손길 속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주님의 영광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아까 잠깐 말씀을 드린 것처럼 산을 오르는 사람의 마음속에 이런 저런 지식이 있으니까 다른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 보이게 마련입니다. 서양 음악사를 읽고 서양 음악을 듣는 것과 아무것도 모르면서 클래식을 듣는 것은 천지 차이입니다. 우리 가락의 역사와 우리 가락에 담긴 의미를 이해하고 국악을 듣는 것과 아무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듣는 것 사이에는 말할 수 없는 격차가 있습니다. 만약에 아무 지식이 없이 듣는다면 그냥 소음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지식을 가지고 듣게 되면 그 가락 하나하나에 깊은 의미가 있고 정서가 묻어 나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나 해박한 지식만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세계 도처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해박한 지식만이 아니라 비록 작은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청결한 마음을 가지고 있을 때에는 그 작은 지식의 범위 안에서 하나님의 많은 영광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식이 별로 없는 어린 아이들이 은혜를 받으면 지식이 많은 어른보다 하나님이 살아계신 증거를 발견하고 감격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지식이 망원경 기계라면 청결한 마음은 망원경 앞에 붙은 깨끗한 렌즈와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이 사랑하는 자녀들이 매일매일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에 대해 공부하고 알고 풍부한 지식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위에 하나 더하여 청결한 마음을 가지고 그 모든 이 세계와 자연 속에 묻어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모두 하나님을 믿는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종종 우리처럼 하나님을 믿지는 않지만 마음속으로 쉽사리 무시할 수 없는 어떤 확고한 인생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종종 봅니다. 이 사람들의 공통점은 뭐냐 하면 많은 지식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특별히 인간이 누구이고, 세계가 어떤 곳이고, 그리고 인간은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대해 많이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견해는 하나님을 믿는 나의 견해와는 완전히 다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확실한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앙의 세계에서도 통일된 생각을 가지고 어둠으로 가득찬 인생길을 뚜벅뚜벅 힘차게 걸어가기 위해서는 되는대로 사는 사람들은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원래 우리 인생이라는 것 자체가 진지함을 요구합니다. 짐승처럼 먹고 마시며 사는 것은 살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진정으로 살아있다고 말하기 위해서는 무엇엔가 질질 끌려가는 인생이 아니라 자신이 자신의 삶의 주체가 되어 하나님을 따르든지 인간의 사상을 따르든지 자기가 스스로 사상을 개척하며 살든지 그 어떤 하나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만 진정으로 넓은 의미에서 인생을 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먹고 싶을 때 먹고, 자고 싶을 때 자고, 하고 싶을 때 다 하고, 욕망대로 살고, 쾌락을 쫓고 이러면서도 그렇게 위풍당당하게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그게 인간이 가지고 있는 한계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그 길을 하나님을 믿는 신앙 안에서 발견하였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다음에 누구도 예외 없이 자신이 살아온 과거의 인생을 돌아보았을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참 신비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예전에 내 인생에 일어났던 크고 작은 많은 일들의 의미를 그때는 몰랐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다음에 돌아보면 그때 그 일이 왜 일어났는지, 왜 하나님이 나는 이해할 수 없는 길로 나를 인도하셨는지가 답이 나옵니다. 그때 우리의 마음은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을 향한 미움과 원망, 그리고 낙담으로 가득 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찬송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찬양)
신실하신 하나님 실수가 없으신 좋으신 나의 주
신실하신 하나님 실수가 없으신 좋으신 나의 주
그러면서 심지어 내가 잘못하고 실수하고 때로는 악하게 한 나의 과거의 삶 속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의 흔적이 발견되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나는 정말 어리석고 주님은 지혜로우십니다.”라고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사람들은 그래서 매일 매일 아침마다 새로운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그 영광 속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이 청결한 사람들에게 주시는 행복입니다.
C. 하나님 앞에 사는 행복을 누림
세 번째로 하나님은 마음이 청결한 자들에게 하나님을 보게 해 주시는데 그 본다는 의미는 하나님 앞에서 사는 친교의 행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간음하고 범죄 한 다윗은 가슴을 찢는 참회의 시편 속에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옵소서.”라고 말입니다. 범죄 하였을 때 시인 다윗이 경험한 것은 제일 먼저 구원의 기쁨을 잃어버린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면전에서 살고 있다는 의식이 흐려지면서 주님의 면전에서 추방당할 것 같은 절체절명의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그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사는 행복을 누리게 해 주신 분은 그와 함께한 성령님이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자신의 불결한 마음 때문에 진노하셔서 성령을 거두실 것 같은 위기를 느꼈고 그것은 곧 자신의 전임자 사울에 대한 회상을 불러일으켰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향해 진노하시자 하나님은 그에게 기름 부으실 때 주셨던 성령을 거두셨고 그렇게 되자 여호와의 부리시는 악신이 그에게 임하여 그는 미치광이가 된 삶을 살다가 죽었습니다. 커다란 두려움이 엄습했습니다. 이 범죄를 통해 시인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를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을 뵈옵는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대면한다고 하는 것은 단순히 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하나님을 뵈옵는 사람 사이에 이루어지는 친교의 행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시인은 시편 41편에서 최고의 찬송 제목을 발견하였습니다. “주께서 나를 온전한 중에 붙드시고 영원히 주의 앞에 세우시나이다.”라고 노래하였던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의미하는 것이고 이것은 곧 하나님 앞에서 사는 행복을 우리에게 주신다는 의미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우리들이 알아도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성령의 감화를 통해서 조금씩, 조금씩 하나님에 대해 압니다. 아는 것보다는 모르는 것이 훨씬 더 많고 그래서 이 세계와 우리의 인생의 존재의 의미에 있어서도 우리가 규명하지 못하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우리가 모두 부활하게 될 영광의 날에 우리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대면하여 보는 것으로 나타날 것이라고 노래합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처럼 희미하지만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 노래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당신의 사랑을 보이시고 당신이 그들을 사랑하신다고 하는 표를 나타내 보여주시는데 그게 바로 당신 자신을 보게끔 계시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자의 최고의 행복은 하나님의 면전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며 그 하나님을 누리며 사는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죄와 불행은 하나님 면전에서 행복해지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 뒤에서 하나님 모르게 행복해지려고 하는데서 하나님과 원수 맺지 않으면 안 되는 모든 갈등이 일어나고 진리의 빛을 외면하고 어둠속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는 모순을 겪게 됩니다. 인간은 살면서 절대로 자기 뜻대로 되는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없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무지무지하게 잘 믿어서 사도 바울보다 더 훌륭한 믿음을 갖게 된다고 할지라도 만사형통이라는 인생은 펼쳐지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이 만사형통한 인생을 살았습니까? 그래서 순교했나요? 그래서 핍박을 받았나요? 그래서 만물의 찌끼와 같이 여김을 받고 모든 만물 중에서 가장 비참한 자가 되어서 마음속으로 사형선고를 받은 자와 같이 되었습니까? 근심과 눈물과 고통과 격정 속에서 인생을 살아야 했나요? 아닙니다. 여러분이 무지무지하게 예수를 잘 믿어도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언제나 형통한 길만을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 잘 믿는 사람들에게도 난관과 시련을 하나님이 주십니다.
그러면 신앙의 가치는 무엇인가? 인생을 살면서 수많은 사태들을 만납니다. 대부분이 우리가 원하는 삶의 사태가 아닙니다. 그런 속에서도 우리는 우리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시고 우리 주위에 우리의 사랑하는 가족들과 그리고 우리들이 사랑하는 모든 이웃들이 있습니다. 또 교회가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어려운 삶의 사태를 만났을 때에는 그것을 어려운 사태를 만나게 되면 우리 속에 엄청난 에너지가 소비가 됩니다. 마음과 정신에 엄청난 에너지가 마치 빨려 들어가듯이 소비가 됩니다.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에너지가 빨려 들어가면 죽거나 절망하거나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신을 똑바로 차리며 살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힘이 어디에서 나오느냐 하면 하나님 면전에서 사는 기쁨 속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찬양)
고난도 슬픔도 이기게 하옵시고
주 말씀 따라서 용감하게 하소서
하나님 앞에 사는 기쁨이 없었더라면 내가 주님 안에 있고 주님이 내 안에 있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없었더라면 낙심하고 좌절해 버릴 수밖에 없었는데 바로 그런 속에서 하나님을 뵈옴으로 하나님은 이 모든 삶의 사태를 극복하며 살 수 있는 하늘의 능력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실망과 낙심으로 가득 찬 채 예배당을 찾았다가 눈물 속에 간절히 기도하고 나면 집에 돌아갈 때에는 이 고난과 시련을 이기고 살아갈 수 있는 하늘의 자원으로 채워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삶의 사태를 확 바꿔주시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 삶의 사태들을 헤쳐갈 수 있는 힘을 우리에게 주심으로써 헤쳐가게 하시고 그 헤쳐 가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나쁘지만 우리가 나쁜 것을 기회로 삼아서 하나님은 당신이 우리와 대조적으로 선하신 분이시라는 것을 아주 찬란하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에 스스로가 모두 온전한 사람인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깨닫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종종 우리의 삶의 상황들을 통해서 우리도 보지 못했던 우리의 마음을 보게 해 주시고 또 우리가 옳다고 생각했던 우리 자신의 길이 사실은 옳은 길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시기도 합니다.
IV. 적용과 결론
월요일 날 다섯 시 35분에 비상벨이 울렸습니다. 숙직을 서던 교역자들이 뛰어나가 보니까 복도에서 시작된 누전이 불이 되어 붙으면서 비서실 있는데서 불꽃이 나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문을 열고 들어가서 소화기로 뿌렸지만 이미 불길은 삽시간에 무섭게 번졌습니다. 결국 119에 연락을 했고 5분 만에 도착했는데도 2층에 있는 방 다섯 개 정도를 모두 태워버렸습니다. 한 10분, 15분 만에 불길은 잡았지만 마지막까지 불시들을 정리하고 모든 것을 확인하는데 2시간 정도 걸렸습니다. 어마어마한 물의 양을 2층에 뿌렸고 삽시간에 불붙은 곳에서 쏟아져 나오는 그 매연과 분진, 그리고 600도가 넘은 뜨거운 열기들은 이제 복도 전체를 굴뚝 삼아서 이제 건물들을 모두 파괴했습니다. 다행히 별관 쪽에는 자동 셔터가 내려오면서 불길이 번지지 않았지만 역시 엄청난 그을음과 연기, 유독가스들이 배출되었습니다. 이 연기가 2층을 타고 3층까지 올라가서 소방관들이 방마다 문을 부수고 사람이 있는지를 확인하고 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매연과 그리고 가스들이, 분진들이 흩어져 들어가면서 온 교회당이 다 오염이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와서 놀라기는 했지만 덤덤했습니다. 그리고 그렇지 않아도 다 낡아서 12년이나 돼서 교회 건물에 생각을 많이 기울였습니다. 그래서 일주일 전에 회의를 하면서 전선을 깐 지가 12년이나 되었으니까 이제 철저히 신뢰할만한 업체에 의뢰해서 본관과 교육관을 점검하고 그리고 조치를 취해서 누전 사고가 없도록 해라고 지시를 내리고 2층에 불이나면 3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거대한 굴뚝이 될 것이니까 이제껏 까지는 안했지만 3층에 자동 셔터를 만들어서 연기나 불길이 올라오면 자동으로 내려와서 3층에 있는 시설과 사람들을 보호하게 하라 그리고 지시를 내린지 일주일이 지나지 않아서 미처 이행하기 전에 화재가 났습니다.
처음에는 그냥 덤덤했고 어떤 의미에서는 잘됐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와서 보니까 이게 보통 심각한 사태가 아니고 그 다음날이 되니까 이게 얼마나 많이 손해가 났나, 불편할까 라는 문제가 아니라 그래도 사람 아무도 다치지 않은 게 너무 감사했습니다. 다 대피시켰습니다. 그런데 그때도 별로 돈이 없어서 그냥 싸게 싸게를 노래하면서 공사를 했는데 그 12년 동안에 그 복도와 그 공간에서 성도들과 나누었던 그 수많은 추억들, 그리고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이 거기서 하나님을 만나고 주님의 교회를 섬겼던 흔적들이 있었는데 이제 그게 모두 사라진다고 생각하니까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이 밀려왔습니다.
그리고는 의미를 묻게 되었습니다.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났을까?’ 내린 답은 그것입니다. ‘하나님이 교회를 정말 사랑하시지만 교회보다 우리의 마음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시기 때문에 교회의 일부분을 태워서라도 나의 마음을 청결하게 하시려고 하시는구나.’라는 깨달음이 왔습니다. 어디 이것이 나 혼자만의 생각이겠습니까? 그 동안 우리는 하나님의 많은 은혜를 입었고 이런 저런 어려움들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괄목할만한 큰 시련 없이 평화롭게 한 12년 동안을 신앙생활 해 왔습니다. 교인들이 점점 늘어서 예배당 시설이 늘 부족해서 고민하니까 옛날처럼 뼈에 사무치는 마음으로 영혼들을 전도해야 되겠다는 아주 간절한 그런 사랑의 마음도 솔직히 많이 식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은 다 평화롭게 굴러가고 늘 바쁘고 힘들기는 하지만 가슴을 에는 것같이 슬프고 가슴 저리는 일들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갈망, 이루어지지 못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애통함보다는 현실에 안일하고 안주하는 마음이 깊어져 간 것 같습니다. 모든 것을 깨닫고 나니까 마음속에서 감사한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아 그렇구나. 하나님이 교회를 사랑하시고 이렇게 교회 한 곳을 불타게 하실 때에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얼마나 마음 아파할 줄 알면서도 그 모든 아픈 과정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이 순전하고 청결해지기 원하신다는 것을 보여 주어서 보이는 교회를 잠깐 상하게 하시고서라도 보이지 않는 교회를 청결케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고백이 나왔습니다. ‘하나님 제가 죄인입니다. 모든 것이 나의 마음의 죄 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
(찬양)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갑니다
고통 가운데 계신 주님
변함없는 주님의 크신 사랑
영원히 주님만을 섬기리
하나님은 우리는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당신의 성전에 우리의 몸의 마음을 소중하게 생각하십니다. 그리고 주님의 간절한 소원은 여러분이 부요하든 가난하든 학식이 풍부하던 그렇지 못하든 여러분 마음 안에 청결함이 깃들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 청결한 마음 안에서 여러분을 하나님을 뵈옵고 하나님은 여러분을 보고 싶어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렇게 여러분의 마음에 불결을 깨닫고 깨끗케 됨으로 다시 하나님의 면전에서 사는 행복을 누리는 성도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의 복(1)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 5:9)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마음이 청결한 자에게 하나님을 뵈올 것임이요”라고 여섯 번째 복을 말씀하신 후에 예수님은 일곱 번째 복을 이렇게 제시하셨습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충만한 사랑은 관계를 통해서 나타납니다. 하나님과 관계없이 살아가던 사람이 회개와 믿음으로 하나님과 관계를 갖게 될 때에 그 충만한 하나님의 사랑은 그 사람에게 전달됩니다. 그 사랑을 받은 사람은 또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그 충만한 사랑을 드러내면서 살 때에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생활이었습니다.
오늘 여기 나오는 팔복은 결코 한 사람의 내면의 세계와 그의 실제적인 삶을 분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내면과 생활의 완전한 통합을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빛은 빛을 비추기 때문에 빛이 되어가는 것이 아니라 원래 비치기 때문에 비추는 것입니다. 무엇을 함으로써 소금이 되어가는 것이 아니라 원래 소금이 그러하기 때문에 음식의 맛을 내는 것처럼 천국 백성들도 그렇게 변화된 사람들로서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일곱 번째 복으로 제시되고 있는 화평하게 하는 자의 복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그는 이제 이 세상 속에서 평화를 이룩하기에 앞서 먼저 자기 안에 평화가 이루어진 사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II. “화평하게 하는 자”
자, 그러면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화평하게 하는 자가 누구를 의미하는지 우리의 눈길을 돌려봅시다. 우리말 성경에는 세 개의 단어가 합쳐져 하나의 구를 이루고 있지만 희랍어 성경에는 이 구절이 하나의 단어로 나타납니다. ‘에이레노 포이호이’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그리스 성경에 단 한번밖에 나오지 않는 단어인데 ‘에이레네’라는 ‘평화’, 혹은 ‘평강’이라고 번역된 이 단어와 ‘포이오스’, ‘무엇 무엇을 만드는 사람’이라는 단어가 합성된 명사의 복수형입니다. ‘포이오스’라는 단어는 ‘포에오’라는 동사에서 나왔는데 ‘포에오’라고 하는 동사는 이미 있는 재료를 사용해서 보다 유익하고 의미 있는 어떤 새로운 물건을 창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쓸모없어 보이는 철판을 불로 가공하여 칼이나 낫을 만드는 대장장이들도 바로 이렇게 포이오스에 속하는 사람이고, 머릿속에 있는 어떤 그림이나 느낌을 글로 생산해 내는 것도 포이오스입니다. 그런가 하면 마음속에 있는 예술에 대한 감각을 그림으로 표현하거나 혹은 옷감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입기 적합한 의복을 만들어 내는 사람도 포이오스입니다. 아무튼 이 포이오스라고 하는 것은 ‘생산하다, 제작하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에이레노 포이오이’라고 하는 이 단어는 문자 그대로 “평화를 만들어 내는 사람은 복이 있나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원래 이 평화는 사실은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만 있는 것입니다. 그것들을 하나님이 이 세상에 주시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인간과 그리고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통치 안에서 안정되고 조화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유지된 상태를 평화라고 말하는데 이 평화가 죄가 들어오면서 다 깨지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런 평화를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을 인간들에게 주셔서 인간들이 지성과 의지를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의 통치의 질서를 형성해 갈 때에 그들의 노력에 의해서 이 세상의 평화가 증진되기도 하고 퇴보할 수도 있는 그런 가능성을 인간에게 주셨기 때문에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라는 표현이 신학적으로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이 ‘에이레노 포이오이’라고 하는 이 단어는 희랍어 성경에는 한번밖에 안 나오는 단어지만 당시 그리스 로마 세계의 문헌에는 아주 흔하게 등장하는 용어였습니다. 로마 문맥에서 이 ‘에이레노 포이오이’라고 하는 이 단어는 우선 사회적인 어느 정도의 사회 정의에 대한 감각이 있고, 사회적인 지위도 있고, 자기를 지킬 수 있는 힘도 있고, 경제력도 있는 엘리트가 다른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이루면서 화해를 도모하면서 살 때에 그 사람을 가리켜서 ‘에이레노 포이오스’라고 그리스 시대 때에 불렀고 그런 전통들이 이제 로마의 귀족들에게, 로마의 엘리트들에게 계승이 되었던 것입니다.
A. 평화란 무엇인가?
그러면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하실 때 이 화평, 평화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 때에 많은 로마의 사람들은 전쟁과 다툼이 없는 상태이면 그것이 곧 평화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팍스로마나는 바로 이렇게 탁월한 현명한 제왕들에 통치되던 전쟁이 없는 상태의 로마의 태평성대를 가리키는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제 유대교의 전통을 따르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평화에 대해서 아주 독특한 신학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여기에서 말하는 이 평화는 ‘에이레네’는 곧 다윗 왕국의 신적 질서를 가리키는 것이라는 사상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매우 기뻐하시고 그 전에 누구에게도 주시지 않았던 매우 특별한 언약을 베푸십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다윗의 위가 영원히 계속될 것이라고 하는 약속입니다. 이것은 곧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그러므로 다윗 왕국은 망하지 않을 것이고, 영원히 다윗의 자손들이 대를 이어가며 이스라엘을 통치할 것이고 다윗 왕 시대 때에 주변의 많은 나라를 정복해서 복속시키고 그들이 조공을 드리며 이스라엘을 섬겼던 것과 같은 그런 나라의 국운성쇠가 이어지는 왕국이 될 것이라고 하는 역사적인 기대를 가졌습니다. 그러나 실제 전개된 역사는 그들의 믿음을 배반하였습니다. 결국 유대왕국은 멸망하게 되었고, 많은 사람들은 포로로 끌려가 디아스포라의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나라가 그렇게 바벨론, 메디아, 바사, 헬라에 의해서 계속해서 이민족의 지배를 받고 결국은 로마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70년경에는 이제 이 사람들이 대대적인 독립 운동을 벌렸고, 이로써 결국은 70년도에 디도라는 장군이 가서 예루살렘을 완전히 함락시켜 버리게 됩니다. 결국 그들은 오해하였습니다. 그 다윗의 위가 영영히 계속되는 것이 역사 속에서 이스라엘이라는 육적 왕국으로서 영원히 계승된다는 것이 아니라 결국 이 육적인 왕국, 이스라엘이 밀알처럼 썩고 거기에서 싹이 나와 영적인 왕국이 다윗의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영구히 지속될 것이라고 하는 이 신학적인 전망을 그들은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이 멸망되고 난 후에는 종교적으로 커다란 변화를 겪게 됩니다. 우선 제사를 드릴 수 없게 되면서 이제 제사의 종교에서 책과 교육의 종교로 넘어가게 됩니다. 그러면서 이제 이들이 가지고 있는 평화에 대한 생각이 많이 교정이 됩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이 함락된 후에는 이 유대 민족 안에서 다른 사람들과 분쟁이 없는 사회적 관계를 맺는 것을 의미하는 말로 이해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평화를 만드는 사람은, 화평하게 하는 사람들은 복이 있나니 라고 말씀하셨을 때에 아마 예수님의 말씀을 팔복산에서 듣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렇게 유대인들이 이해하던 예루살렘 함락 이후에 평화에 대한 관념을 가지고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했을 것이라고 하는 데는 하등 이의를 제기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적으로 볼 때에 예수님의 이 말씀 속에는 훨씬 더 깊은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인도주의에 대해서 말씀하시다가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 곧 이 땅에 임하는 천국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바로 이렇게 평화를 만드는 사람은 복이 있나니 하셨습니다. 이 ‘에이레네’라는 희랍어 단어의 구약의 동치어가 바로 ‘샬롬’이라는 단어입니다.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샬롬’이라는 이 구약 히브리어 단어는 바로 하나님과의 평화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사람들 사이에서의 조화롭고 평안한 관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샬롬’이라는 단어는 정신과 영혼에만 관련된 것이 아니라 육체의 상태와 사회적인 관계, 이웃들과의 관계, 심지어는 물질의 넉넉함까지를 포괄하는 전 방위적인 개념의 평화가 바로 이 샬롬이라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이 샬롬이라고 하는 단어는 원래 기본적으로 온전함을 의미합니다. 무엇이나 일그러지거나 깨어지지 않는 그런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사회적인 지위도 있고 돈이 많아도 정신적으로 끊임없이 고통을 받으며 죽음을 생각하는 사람은 이 사람은 평화의 상태에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또 정신은 맑고 자존감이 뛰어나도 먹을 것이 없어서 매일 근심해야 되는 사람도 평화의 상태에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어도 심각한 질병 상태에 있는 사람도 평화로운 사람이 아닙니다. 다른 모든 것이 다 있어도 사회적으로 다른 사람과 온전한 관계를 맺지 못하고 끊임없는 불화 속에 살아가는 사람도 온전한 사람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주식으로 먹는 음식이 빵입니다. 그 빵은 일반적으로 단 것을 많이 집어넣거나 이상한 맛을 낸 것이 아니라 그냥 평범하게 빵을 불에다가 구운 것입니다. 대게 모양이 둥그런 원형입니다. 지금도 이스라엘에 가서 빵을 먹고 싶으면 그 빵 파는 가게에 가서 “템 리.”, “나에게 주십시오.”라는 히브리어 회화입니다. “템 리 하치.”라고 이야기를 하면 칼로 절반을 잘라주고 반값을 받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배가 고파서 하나를 다 먹고 싶으면 “템 리 샬롬.” 하고 말을 하면 하나를 주는데 그때 ‘샬롬’이란 잘라 내거나 가르지 않은 생산된 원래의 그 상태의 온전한 하나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평화라고 하는 것이 결국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이 세상에 인류를 만드셨을 때, 교회를 창조하셨을 때, 가정을 의도하셨을 때에 이런 가정, 이런 교회, 이런 인류 공동체가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신 하나님 안에 있는 관념이 그것이 샬롬이 되는 것입니다. 샬롬한 인류 사회, 샬롬한 나라, 샬롬한 가정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샬롬은 자신 속에 샬롬이 이루어진 사람들에 의해서 추구되는 것입니다. 자기 안에 샬롬이 얼마나 기쁘고 이 하나님과의 화목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진정한 평화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를 아는 사람들만이 그런 평화가 내 이웃의 마음속에 실현되기를 바라고, 내 가정 속에서도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교회 속에서, 이 세계 속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라게 되기 때문입니다.
B. 평화 실현의 영역
그러면 이런 평화가 실현되어야 할 관계, 혹은 영역은 어디일까요? 제일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자신과의 관계 속에서 평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마음속에 평화가 없으면 그 사람이 다른 사람들과의 평화를 위해서 헌신한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자신도 자신을 감당할 수 없이 혼란을 느끼는 사람들이 과연 평화에 대한 간절한 갈망이 있을까요? 어거스틴은 자신의 책 속에서 인간이 범죄하게 되는 것을 가리켜 “마음의 정념이 고르지 못하고 외람될 때에 거기에서 사악한 행동을 하게 됩니다.”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즉, 마음의 많은 감정의 가능성들이 많이 있는데 이것들이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으면서 질서들을 잘 잡아 갈 때에 그때에 인간은 최상의 평화를 누리게 되고 하나님 앞에 온전한 삶을 살게 되는데 어떤 이유에 의해서 이것들이 깨지고 난폭해져서 어떤 감정들이 극단적으로 폭발하게 되면 마음의 정념들은 고른 조화의 상태가 깨뜨려지게 되고 여기에서 어떤 욕망들이 표출되어서 인간들은 사악한 행동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좋은 사람일까요? 그가 어떤 직업에 종사하거나 미모를 가지고 있거나 혹은 그가 가지고 있는 소유 때문에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악한 사람도 얼굴이 그림처럼 예쁠 수 있고, 또 선한 사람도 두 번 보기에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추남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악한 사람도 탁월한 재주를 가질 수 있고 또 선한 사람도 아무 재주가 없을 수 있습니다. 좋은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지혜와 용기와 열정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사람이 좋은 사람입니다. 선악이 무엇인지를 분별하고 그리고 사물의 이치를 정확하게 이해해서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명철한 지혜, 두 번째는 그 올바른 지혜를 따라 살아갈 때에 자신이 진리라고 믿는 것이 방해를 받거나 억압을 받을 때에 대담하게 그 진리의 가치를 알고 맞설 수 있는 용기 내지는 기개를 가진 사람, 그리고 열정이 있어서 무엇인가 하고자 하는 일이 올바르고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이 되면 주저 없이 그것을 실행에 옮기면서도 절제를 잃지 않는 사람이 바로 좋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인간이 놀라운 내면의 질서 속에서 인간의 삶을 영위해 갈 수 있도록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제일 큰 형이 지성입니다. 지성이라는 명사입니다. 지성이 그 지성 안에서 믿음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그리고 사물들의 이치를 이해해서 세계와 인간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가지면서 무엇인가를 판단을 내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 나쁜 것이라고 판단을 내리면 둘째 형이 감정입니다. ‘그것 참 안 좋네. 정말 안 좋은데 나 저것 참 싫어’ 그러면 막내인 의지에게 전달이 되어서 ‘그렇다면 내가 저 것과 맞서야지. 혹은 저것은 내가 따라가지 말아야 되지’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큰 형이 ‘야, 저것 참 좋은 것이다. 저것 참 선하구나.’ 판단을 내리면 동생은 ‘그래. 그러니까 내가 참 사랑해야지. 정말 예쁘구나.’ 그러고 마음에 열정이 일어납니다. 그러면 막내 동생인 의지가 ‘아 그러면 내가 저것을 더 많이 좋아해야 되겠구나. 저것을 위해서 뭔가 봉사를 해야 되겠구나. 저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서 이런 저런 삶을 살아가야 되겠구나.’ 이런 완전한 세 형제 사이의 조화가 이루어져 있는 상태가 인간이 맨 처음에 창조한 상태입니다. 죄가 들어오면서 큰 형을 보좌에서 끌어내렸습니다. 그리고는 둘째가 왕위를 찬탈했습니다. 이제는 옳고 그름이 문제 아니라 내가 좋으냐, 안 좋으냐입니다. 그렇게 내가 좋고 신나면 그러면 그 다음에 밑으로 끌어내린 형을 짓밟아서 그것이 옳은 것이라고 동의를 하라고 짓누르면 합리화하기 위해서 그것이 옳다는 판정을 내려주면 막내 동생은 하수인이 되어서 감정이 시키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프리드리히 니체 같은 사람은 나와서 이 질서마저 뒤집어 버렸고 의지를 맨 위로 올려버렸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삶이란 끊임없는 맹목적인 의지의 충동이라고 보았습니다. 지성과 감정의 어떤 절차와 그런 어떤 조화를 따르지 않는 의지의 충동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의지의 행사라고 하는 것은 맹목적인 충동에 불과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러면서 인간은 전체적으로 평화를 잃어버린 내면의 세계를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서른통』을 썼습니다. 그런데 지금 잘 나가고 있습니다. 일주일 만에 다시 삼천 부를 찍었습니다. 왜 그런 책은 저는 쉽게 씁니다. 한 2년씩 그렇게 고생하며 쓴 책은 안 나갑니다. 한 달에 후루룩 쓴 책들은 막 나갑니다. 한국 교회의 수준이 그런데 어떻게 합니까? 그런데 어느 날 가만히 이렇게 보니까 상당히 신앙생활도 오래 했고, 열린 교회에 와서 한 10년 생활했으면 신학책 30-40권은 읽었을 것입니다. 공과공부만 해도 40권정도 되니까 상당한 실력도 가지고 있고 성경도 아는데 이상하게 매우 현실적인 문제를 판단하는데 있어서는 매우 느리거나 혹은 부정확합니다. 이게 무엇 때문인가 봤더니 자신 속에 있는 수많은 정리되지 않은 혼란입니다. 마음속에서 하나님의 가르침과 세상의 가르침을 명확히 구분해 내지 못하는 실제 생활에서의 혼란, 또 옳은 것을 알았다고 해도 모두 그대로 살고 싶은 욕망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럴 수 있는 용기를 가진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까 그 사이에서 오히려 경계를 모르고 미적거리는 것이 자신에게 유리할 때가 많은 것입니다. 더욱이 이제 내면의 평화가 깨뜨려지고 나면 다른 사람들과의 평화를 이루면서 살아가는 일이 굉장히 힘듭니다.
어떤 사람에 의하면 청년 10명 중 2사람 내지 3사람은 성격적으로 정상적으로 결혼생활을 하기 어려운 사람입니다. 한 30년 전만해도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30년 여간 동안에 뭔가 아주 놀라운 사회적인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렸을 때에는 많은 식구들과 함께 대가족 생활을 하면서 결국은 자기라고 하는 존재를 다른 사람과의 평화의 관계 속에서 이해할 수밖에 없는 구조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한 가정에 한명, 두 명씩만 낳으면서 이런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장들이 실제적으로 깨진 것입니다. 결혼하면 내가 셋 이상 아이를 낳으라고 계속 강조하는 이유는 나도 둘 밖에 못 낳았지만 후회를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셋을 낳으라는 것은 교육학자들이 세 명이 되어야 사회가 형성이 되기 때문입니다. 둘 가지고는 안 되고 네 명이면 더욱 좋은 사회가 형성될 것입니다. 세 명이 되면 어떻게 사회가 되냐 하면 중간이 어디로 붙느냐에 따라서 이게 사회가 형성이 됩니다. 형하고 붙어서 동생을 골탕 먹이기도 하고, 그 다음에 동생 편에 붙어서 형을 한번 왕따 시키기도 하고 이러면서 자신이 어떻게 생존하는지를 배우면서 처세와 양보, 협상의 기술들을 배워 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회학적인 근거가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내면의 세계 이 평화가 깨져버리니까 다른 사람하고 관계가 맺기가 굉장히 힘든 것입니다. 더군다나 세상은 네가 주인이고 네가 이 세상에서 중심이고 네 행복이 최고라고 여과되지 않은 개인주의를 가르치고, 그것이 포스트모더니즘 사회에서 커다란 말하자면 기준점이 되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끼리 만나서 예전에 자신이 속에서 이렇게 무엇인가 깨뜨려지고 변화되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신을 맞추고 하는 것을 거의 해본 적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는 꿈꾸는 것 같은 그런 결혼을 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적으로 해보면 누가 그러더라고 혼자 살 때는 옆구리가 시렸는데 둘이 사니까 심장을 찌른다고 하는데 심장 찔리는 게 나을지, 옆구리가 시린 게 나을지 그것은 생각을 해 보십시오. 어쨌든지 간에 자신과의 평화가 제일 먼저 이루어져야 하고, 자신과의 평화는 이 내면의 온전한 질서를 회복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자기 혼자되는 일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안 되고 싶은 사람 손들어 보십시오. ‘나는 지성과 감정과 의지가 이렇게 조화되고 그 다음에 지혜와 용기와 절제와 열정이 아주 아름다운 협력 관계에 있는 인간이 절대로 되고 싶지 않습니다.’ 손들어 보십시오. 자기가 꿈꾼다고 되느냐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고는 싶지만 그러나 그것이 어떻게 이루어지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평화가 이루어져야 할 더 본질적인 관계가 대두되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의 평화입니다. 이 하나님과의 화목이야 말고 다른 모든 평화에 대한 토대가 됩니다. 우리는 원래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사람들이고, 또 하나님을 대적하면서 살던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 있는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셨고 그의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서 그가 죽으신 것은 바로 당신의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우리에게 전해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샬롬은 그리스도 예수의 인격 안에서 제시되었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자기가 죄인인 줄을 깨닫고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과의 화목을 하나님이 선물로 주십니다. 그 선물을 받으면서 우리는 용서라고 하는 커다란 감격을 경험하게 되고 그것은 곧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관념, 영광에 대한 관념, 죄에 대한 관념들을 심어줍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의 우리를 용서하시는 아가페 사랑에 대한 반응으로서 까리따스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속에 넘치게 됩니다. 이 사랑은 관계적인 사랑입니다. 하나님 때문에 이런 사랑을 입게 되었으니 이 사랑을 가지고 나를 사랑하신 하나님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 때문에 사랑해야 될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며 그 안에서 그 모든 이들이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는 그래서 온전한 행복의 질서 속에서 살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하나님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평화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한 번에 주신 것이기도 하지만 이 평화를 누리면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매일매일 그 십자가의 사랑과 은혜를 생각하면서 자기를 버리고 그리스도 예수를 쫓아가는 헌신의 생활, 믿음의 생활, 순종의 생활이 요구된다는 것입니다.
III. 평화-천국의 질서
A. 세상나라: 자기 사랑의 투쟁
요즘 최근 들어 대한민국의 건국의 비화들을 다시 캐내는 그런 강연들이 유행을 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 강연과 책들을 보면서 새로운 사실들을 많이 알게 되었습니다. 그 중에서 매우 특별한 것은 이승만이라고 하는 인물에 대한 재고였습니다. 역사적인 사실을 토대로 쓴 책이니까 거짓이라고 믿지 않지만 그 진술만을 의지해서 보면 이승만 대통령은 제가 알고 있었던 사람이 아니라 매우 특별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그는 성령의 사람이었고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 잡혔던 정말 특별한 종이었습니다. 여러분은 대한민국이 수립될 때에 그 정부 수립 시기에 일부 순서가 예배였다는 것을 기억하십니까? 그 예배 시간에 대표기도로 올라온 사람이 35분을 기도를 했습니다. 이것이 대한민국의 설립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렇게 정부를 수립한 우국 인사들 중 2/3 가량이 독실한 기독교인들이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풍운아와 같은 인생을 산 사람이었고, 당시 왕정을 종식하고 민주 국가를 만들어야 된다고 주창했으니 그것은 곧 당시 사회로 보면 왕을 향한 반역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함께 그 모의에 가담했던 사람들은 모두 참수되었고 그가 죽지 않은 것은 스스로 이씨 왕조의 왕손이었기 때문입니다. 5년 8개월 동안 형무소에 갇혀있었고 죽이지는 못했지만 온갖 고문을 가해서 양손을 쇠위에 놓고 해머로 두들겨 쳤다고 합니다. 옥을 나온 후 젓가락을 다시 들 수 있기까지 5년의 세월이 걸렸다고 합니다. 그의 마음속에는 순수한 생각, 이 나라는 대한민국은 하나님이 세우신 나라여야 한다 그리고 기독교 국가여야 한다 라고 하는 사상이 가슴에 충일했고, 그는 하버드와 프린스턴에서 공부한 탁월한 재원이었습니다. 이미 미국이 일본에게 침공받기 전에 그는 재팬 인사이드 아웃이라고 하는 일본의 제국주의의 야망을 폭로하는 책을 영어로 출간했고, 많은 사람들이 그의 책을 보면서 비웃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의 지론은 이것이었습니다. ‘이제 일본은 한국을 먹었고,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이기고, 중국과 전쟁에서 이겼으니 다음 공격대상은 미국이다. 반드시 미국을 공격할 것이다.’라고 예고하였는데 결국 그 일은 몇 년 뒤에 정확하게 현실로 나타났습니다. 미국 역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서 그가 미국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무초대사 같은 사람은 넋을 잃고 몇 시간동안이나 그의 유장한 강연을 듣고 정말 우리나라에서 그런 일이 있었느냐고 반문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해박한 역사적인 지식과 함께 목숨을 건 이 한국을 기독교 국가로 만들려고 했던 선지자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타락했습니다. 결국은 그렇게 뜻을 세웠던 사람들이 권력의 맛을 보고 돈의 맛을 보고 사람들을 지배하고 통치하는데 맛을 보기 시작하면서 처음 가졌던 그런 선교적인 구국의 일념은 스러져가게 되었고, 자기 비위에 맞지 않는 모든 역사는 다 폐기하고 은폐시켜서 이승만 중심의 역사적 자료만 남고 모든 것을 은폐시켜서 결국은 왜곡된 역사를 만들기를 마치 일본이 메이지 유신 이후에 그 다음 세대들에게 근대화의 교육을 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날 일본이 저 꼴을 하고 있는 것과 꼭 같은 역사가 이 땅에서 전개되었던 것입니다. 일본은 중세까지 밖에 가르치지 않습니다. 근대에 대해서는 가르치지 않습니다. 근대에 대해서 가르치려면 반드시 그 엄청난 제국주의에 대한 평가를 내려야 되고 무엇보다도 천왕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되는데 이것을 피해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중요한 자료들은 서고 속에 처박혀 있거나 은폐되거나 폐기되어 버리고 접근하기 어려운 자료가 되어 버려서 이렇게 군국주의의 망령들이, 과거를 반성할 줄 모르는 인종들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이 평화를 주시고 놀라운 사명을 주셔도 그것을 유지하면서 계속 살아가지 않으면 오히려 그는 그가 받은 소명과 정반대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차라리 초창기 대한민국 정부가 그냥 종교와 상관없이 양심적이고 사회 인류에 보편적인 평화의 이념을 따르는 유교 유학자들이나 아니면 기독교 사람들이나 불교 사람들이나 모두가 섞인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정부가 형성됐더라면 어쩌면 그런 독재와 끔찍한 민중에 대한 폭압적인 정치는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고 한국 민주주의의 발전은 훨씬 순조로웠을지도 모릅니다. 결국 오늘날 기독교는 수구주의 그리고 우익 그리고 독재 정권에 놀아나는 그런 종파정도로나 치부되고 있는 이 비극적인 교회에 대한 평가는 우리의 것이 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평화가 이 모든 평화의 근본이 되고 너무너무 중요한 것이지만 이 평화를 유지하면서 살기 위해서 우리는 많은 헌신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B. 하나님 나라: 하나님 사랑의 질서
여러분은 2008년에 갑자기 고린도전서 13장을 22번이나 설교하다가 멈추고 그리고 새로운 시리즈를 설교했던 사실을 기억합니까? 그때 저는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이 유장한 고린도전서 13장에 위대한 장을 설교하는 것을 들을 자격이 없습니다.”하고 불뚝 연 시리즈가 <배교적 예배에서 돌이키라>는 설교였습니다. 약 10여준 이상 계속된 그 설교 속에서 저는 여러분에 의해 쫓겨날 각오를 하고 목숨을 걸고 그 설교를 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많은 회개가 일어났고 그리고 결국은 다시 그 시리즈를 그 후에 시작하게 되었지만 말입니다. 이렇게 일주일에 한 번씩 예배에 나와서 여러분이 저절로 이 세상의 빛이고 소금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정말 여러분이 이렇게 일주일 동안 화평케 하는 일에 헌신하면서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아닙니다. 여러분이 여기에 와서 일주일 동안 형성되었던 여러분 속에 하나님을 향한 반역과 죄, 그리고 스스로 마음속에 이루어졌던 평화가 깨진 것에 대해서 회개하고 뉘우치고 하나님 사랑으로 다시 돌아가 하나님과의 평화를 회복함으로써만 앞으로 일주일 동안도 이 어두운 세상에서 빛이요 소금으로 살 수 있고 평화를 잃어버린 세상에서 평화를 만드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결국 의인인 동시에 죄인이고, 새 사람이 되었지만 필연적으로 옛사람을 짊어지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인간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를 고통 속에 두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의 스스로 부족을 알아서 그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왔지만 그 나라가 영원한 나라로 완성될 때까지는 우리들이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고 자기를 주인 삼은 삶을 이 세상에서 살지 못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주님 앞에 주님의 얼굴을 구하는 간절한 예배, 우리의 중심을 쏟아놓는 애끓는 기도, 우리의 마음을 다 드리는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간청은 우리에게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를 불러옵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에 다시 하나님과의 평화를 주고 죄 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용서하고 도탄 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구원해 주심으로 하나님의 의로움을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세상에서 평화를 위해서 헌신할 용기와 자원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속에 흐트러졌던 모든 질서들이 다시 회복될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평화를 위해 살 수 있다는 용기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하늘나라의 가치에 우리의 마음은 불붙고 이 세상에서 핍박과 시련에 굴복하지 않는 그런 용기 있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과의 평화가 수립된 사람들은 이제 두 개의 지평 속에서 이 평화를 구현하면서 살아가야 할 의무를 지니게 됩니다. 첫 번째 지평은 교회와 가정이고 또 다른 지평은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 전부입니다. 제일 먼저 가정과 교회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만약에 타락하지 않았더라면 교회와 가정은 완벽하게 하나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교회와 가정은 원래 하나입니다. 자, 그러면 생각해 보십시오. 가정에서 여러분은 평화를 이루는 사람이 되고 있습니까? 먼저 예수를 믿고 하나님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들이 가정에서는 손해를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먼저 받았으면 여러분이 누구이든지 간에 한 알의 밀알이 되어야 합니다. 모든 가족들을 불쌍히 여기고 긍휼히 여기며 자기가 그 가족의 일원이 됨으로써 가족들이 무엇인가 혜택을 누리며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때로는 그 가족에게 이용당할 수 있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어야 합니다. 반드시 그 사람이 이 세상의 자원을 다른 식구들보다 많이 가지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겠지만 적어도 그들에게는 부족하거나 없는 하늘의 자원을 소유함에 있어서는 넉넉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것들을 사람에게 나누어주고 베풂으로써 하나님 안에서 평화가 그들 속에 누려지도록 헌신해야 합니다.
교회에서 수많은 분쟁과 다툼이 일어나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그 모든 다툼의 원인과 동기는 다양할지라도 근본적인 이유는 두 가지로 집약이 됩니다. 하나는 영원에 대한 무관심과 개인만을 위하는 이기심 때문에 교만 때문에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삶이 무엇이고 교회의 생활이 하늘나라의 가치와 어떻게 맞닿아 있는지를 영원에 비추어 생각하면 결코 그럴 수 없는 일들이 교회 속에서 일어납니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 핏대를 세우고 혹은 폭력을 휘두르며 혹은 끊임없는 다툼 속에서 누가 옳은지를 겨루고 결국은 법정에 싸움까지도 갑니다만 그래서 누군가가 옳다고 인정되었을 때 아무도 그 광경을 쳐다보지 않습니다. 이미 그런 모든 분쟁과 고통의 과정 속에서 교회는 이 세상 사람들에게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자, 우리를 보십시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우리입니다. 우리는 사는 것이 이렇게 너절하고 더럽습니다. 절대 하나님을 신뢰하지 마십시오. 그 분을 믿으면 여러분도 우리 같은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교회를 불러내신 소명과는 정반대의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이런 어떤 영원에 대한 무관심과 자기의 이익만을 고집하는 이기심들이 끊임없는 분쟁을 낳고 그리고 끊임없는 다툼을 낳음으로써 하나님이 교회를 이 세상에 세워 주셨을 때에 본래의 교회의 의무를 다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평화를 실현한 사람들은 바로 이렇게 교회와 가정의 영역에서 평화를 위해서 기꺼이 자신을 내어줄 수 있는 소비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허비함으로써 교회를 이롭게 하고 다른 사람들을 유익하게 하는 그 일에 만족하면서 헌신할 수 있는 은혜의 자원들을 우리가 받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평화를 이루고 그 평화 아래서 살아가는 행복이 얼마나 큰지를 안 사람들은 이런 삶을 살면서 기쁩니다. 왜냐하면 나 같은 인간을 통해 하나님이 이 평화를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과의 평화가 수립된 사람들은 이웃과의 관계에서도 이 평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성전이 있었고, 그 성전은 이제 성전 뜰과 성소, 지성소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지성소는 대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었고, 성소는 제사장 이상이 들어갈 수 있었는데 그 성전 뜰도 여러 개의 말뚝이 쳐져 있어서 여기까지는 이방인이 올 수 있는 경계선, 여기까지는 유대인 여자만 올 수 있는 경계선, 여기까지는 유대인 남자가 올 수 있는 경계선, 여기는 제사장만이 올 수 있는 경계선, 각각의 경계를 넘는 것은 곧 죽임을 당해야 할 죄에 해당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 속에는 이러한 장벽들이 무수히 쳐져 있고 이것들이 결국 수많은 집단들을 만들고, 갈등을 야기 시키고 그 속에서 폭력과 투쟁들로 변질되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바로 이 사회의 이기심과 자만심들이 만들어낸 수많은 현상들로서 이것들을 철폐하며 부정하며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용기인 것입니다.
며칠 전 아프리카 박물관에서 노예와 다름없이 근로하던 사람들이 한국을 떠났습니다. “다시는 오지 않겠습니다. 누구보고도 한국에는 오라고 권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떠났습니다. 과연 정말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 우리보다 못 사는 나라에서 왔다는 이유 때문에 그런 식으로 인간을 억압하고 노예적인 근로를 시키는 것이 정말 민주국가에서 할 수 있는 일입니까? 문화가 다르고 못 사는 나라에서 온 노동자라는 이유 때문에 그렇게 억압하고 그리고 사회적으로 제약을 가하고 그리고 사람들이 멸시하고 하는 그런 일들이 얼마나 나쁜 일입니까? 우리는 이것을 매우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우월감을 즐기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일본 사람을 욕하고 흉보지만 결국은 그런 행동들이 예전의 일본 사람들이 했던 그 일과 무엇이 차이가 있습니까?
더욱이 어린 아이들이 다문화 가정에서 태어나서 그래서 학교에 가서 왕따를 당하고 정상적으로 적응하기 어려운 나라가 되고 있는데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책임이 매우 크다는 것입니다. 그 애들이 다문화 애들이라고 그러는데 그 애들이 왜 다문화입니까? 한국에서 태어나서 한국 밥 먹고 한국 가정에서 자라서 여기까지 왔는데 다문화라고 하면 그 애들 아빠나 엄마나 다문화일지 모르지만 그 애는 하나의 문화를 경험하면서 산 아이입니다. 그런 아이들이 학교에 가서 적응을 하지 못하고 그렇게 하면서 살아갈 때에 미래에 한국 사회에 평화가 있겠습니까? 이제 더 많은 외국 사람들이 살아가게 될 때에 그 속에서 수많은 갈등과 그런 폭력과 원한들이 맺히게 될 텐데 이것이 올바른 것이냐 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떤 외국인 근로자가 와서 취업을 하고 자기도 한국 이름을 하나 갖고 싶다고 그랬더니 거기에 같이 일하는 직원들이 이름을 하나 지어줬답니다. 그리고 그 이름을 가지고 한 5년 동안 산 것입니다. 이상하게 자기 한국 사람이름을 이야기 하면 사람들이 싱긋이 웃으면서 좋아하더랍니다. 진짜 좋아하는 줄 알았답니다. 나중에 이름을 뭐라고 지어줬는지 봤더니 김 바보라고 지어준 것입니다.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그 이름을 패스하면서 여러 해 동안 놀린 것입니다. 바보라는 말의 의미를 알고 나서야 그 사람들이 얼마나 자기에게 나쁜 일을 했는지를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것들은 얼마나 야비한 생활인지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꼭 고향이 어디냐고 집요하게 묻는 사람은 두 지역 사람들이 그럽니다. 그 손바닥만 한 나라에서 그게 그렇게 중요합니까? 내가 오죽 했으면 한참 영남 갈등이 심할 때에 나라를 가로로 나누자고 했습니다. 밑에부터 1도, 2도, 3도, 4도, 도 이름도 다 없애버리고 호적, 본적을 폐지하자는 주의자였습니다. 고향을 물으면 그냥 감옥에다가 집어넣게 말입니다. 그게 뭡니까? 손바닥만 한 나라에서 교회가 그것을 돕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제가 아는 목사님은 죽으면서 유언을 남겼습니다. 아무 도 사람들은 장로 세우지 말라고 꼴깍하고 죽었습니다. 복음으로 싸워야 할 사람들이 그렇게 세상 정신에 의해 침투 당하고 그렇게 사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다문화 가정에서 온 애들이 왕따를 당하니까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기독교인 가정의 애들이 가서 그 애들의 편을 들어주고 도와주고 그러면 어떠냐고 하니까 큰일 날 소리라고 합니다. 그 애들도 한꺼번에 왕따를 당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내가 신앙을 잘 넣어서 예수 믿는 애들이 똘똘 뭉쳐서 그 애들 잘 도와주고 이러면서 핍박 받는 것을 초등학교 때부터 좀 배우면 되지 않을까 했습니다. 그런 나라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거기에 순응하면서 그것을 즐기면서 사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빛은 비추기 때문에 겨우 비친 것도 아니고, 짠 작용을 해서 겨우 소금이 되어 가는 것이 아닙니다. 빛은 그냥 비출 수밖에 없고 소금은 음식에 들어가면 짠맛을 낼 수밖에 없습니다. 소금의 소금됨과 빛의 빛 됨, 그것을 비추는 것과 짜게 하는 그 사이의 연속성이 있습니다. 우리가 만약에 하나님과의 평화를 진정으로 누렸고 그 안에서 하늘나라의 참된 행복을 맛본 사람들이라면 우리의 현실 사회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이 수많은 장벽과 갈등, 그리고 고통들로 가득 찬 이 평화가 없는 현실을 보면서 우리가 어떻게 침묵할 수 있겠습니까? 우크라이나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나 시리아에 내전이 일어나서 몇 개의 빵을 얻기 위해서 수만 명의 사람들이 폭격으로 무너진 건축물 잔해 사이를 누비는 그 일들은 남의 나라의 일이 아닙니다. 바로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의 문제이고, 그리고 우리의 상황입니다. 북한에서 저렇게 짓밟히고 있는 인권의 문제도 사실은 평화를 잃고 살아가는 저 사람들의 겪고 있는 우리의 문제이고, 우리의 책임인 것입니다. 여러 해전 북한을 방북하였을 때 마음에 눈물이 가득 찼던 것이 그 사람들이 고난의 행군의 때를 회상하며 우리에게 이야기 해줄 때였습니다. 한두 해 사이 200만 명이 굶어 죽어나갔다고 합니다. 그때 역사는 우리에게 물을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잘 먹고 잘 살았습니다. 뜨물통에 들어가는 그 음식 값이라도 보내주었더라면 굶주림을 면했을 것입니다. 사람이 죽고 동포가 죽어 가는데 그 이념이 뭐가 그렇게 대단한 것입니까? 전 정치인은 논쟁만 하다가 그 고난의 행군 때에 수많은 동포들이 굶어죽어 나갔습니다. 지금도 북한의 땅에 들어서면서 추격을 받은 것이 북한의 군인들이 우리나라의 중학교 1-2학년 키 크기입니다. 그래서 최근에 북한에서는 1m 45cm가 되도 군대 가야 된다는 법이 통과되었습니다. 45cm면 초등학교 4학년 키입니다. 상상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회에 전공하는 사람이 의견을 내놓았습니다. 북한을 돕지 않고 저런 식으로 방치하면 통일될 때에 어마어마한 복지비용을 지출해야 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결국 하나님과 사이에서 평화가 이루어질 것을 경험한 사람은 그 평화가 이 세상에서 실현되도록 모든 사람들이 이 평화 속에서 살아가도록 이바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평화를 이루는 일중 가장 우선 되어야 할 일이 복음 전파라고 하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평화는 복음에 의하지 않고는 궁극적으로 이룩될 수 없기 때문에 사실 여러분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이웃을 향해 할 수 있는 최고의 봉사는 바로 그들을 불쌍하게 여기며 마음에 품고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해 하나님과의 평화로 돌아오게 하는 것입니다.
며칠 전 70만원의 돈을 남기고 유서를 쓰고 장애를 가진 딸과 함께 포함해서 세 명의 모녀가 자살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한동안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주위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워낙 자존감이 강하고 일체의 남의 신세를 지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이었다는 평가를 들었습니다. 결국은 그들은 돈이 없어서 죽은 것이 아니라 마음에 절망이라는 병에 들어서 결국은 죽은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그들에게 다가가서 돈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평화 그리고 그 하나님과의 평화에서 오는 기쁨이 무엇인지를 전하고 어떠한 절망도 사실은 실제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당신에게 의지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자비롭고 은혜로우신 분이시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어 그들에게 소망을 주었더라면 그렇게 절망하지 않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따뜻하게 도움을 주고 마음을 열어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절망적인 삶을 응시하지 말고 하나님과의 평화 속에서 살아가는 진정한 행복을 느끼게 만들어 주었더라면 과연 그들이 죽었을까 라고 말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무관심 속에서 쌓아올려지는 무수한 벽들이 사회 속에서 모든 요소를 나누고 사람들을 구획지어서 우리는 점점 더 가까이 살면서도 이웃이 아닌 사람들이 되게 하고 그리고 군중 속에 살면서도 외로운 존재들이 되어가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바로 이런 담을 허물어 평화롭게 하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찬양)
주는 평화 막힌 담을 모두 허셨네
주는 평화 우리의 평화
IV. 적용과 결론
유대인과 헬라인 사이에는 도저히 좁힐 수 없는 장벽이 있었지만 복음은 그것을 허물고 그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를 형제와 자매로 받아들이게 만들었습니다. 종과 자유인이 하나가 되었고, 노예와 상전이 서로를 형제라고 부를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이 세상 속에서 평화를 실현하시는 하나님의 열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주님이 이미 자기 안에 이루신 이 평화의 하나님의 나라의 자원을 가지고 평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경륜을 이룬 훌륭한 도구들이요, 종들입니다. 이렇게 사람들 속에 평화를 만들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창조 시에 만물의 순수함을 회복하고 고양해 주는 하나님의 도구입니다. 천국 백성의 소명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왕국을 실현하는 것이고 결국 그 왕국의 소명은 바로 이 세상을 사랑의 나라로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의 힘으로 오는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오는 나라이지만 주님이 이 나라를 완성하실 때까지 이 평화를 위해 헌신하고 자기를 허비하고 희생하면서도 이 평화를 이룩해 나가는 삶을 살 때에 바로 그 때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을 수 없고 그 사랑과 은혜와 진리를 탐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갈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로 그 안에서 우리들은 가장 건강하고 복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순간을 살아도 영원을 잇대어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허망하고 허탄한 일에 우리를 소비하는 일을 멈추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세상의 소비와 그리고 이 세상의 향락과 사치와 이 세상에서 하나님 없는 평안을 개인적으로 찾는 일들을 그치고 어떻게 하면 나의 마음속에 이 하나님과의 평화가 이루어지고 하나님과 나 사이의 이 평화를 토대로 교회와 이 모든 세계 속에서 이런 평화가 이루어질 지를 깊이 생각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 헌신할 때 하나님께서는 이런 놀라운 평화와 사랑을 이루는 도구로 살아가게 될 것이고 그 안에서 우리들은 가장 복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생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의 복(2)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 5:9)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화평하게 하는 것은 결국 청결한 마음의 결과입니다. 아가페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은 주님이 자신을 사랑하신 것을 본받아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이웃을 사랑하며 살고자 하는 마음이 용솟음치게 됩니다. 우리는 이러한 신자의 마음 안에 있는 사랑을 가리켜 까리따스의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지순애라고 번역될 수 있는 이 순수한 사랑이야 말로 모든 사람들 속에서 하나님의 평화를 이루며 살아가게 만드는 원동력인 것입니다. 결국 우리 안에 일어나는 많은 다툼과 분쟁, 무관심과 사람 사이에 쌓여있는 높은 장벽들은 결국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우리의 마음을 청결하게 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로서 화평하게 하면서 살아가는 삶은 변화된 내면의 성향의 발로인 것입니다.
II. 평화 - 천국의 질서
그러면 이 평화란 결국 천국의 질서라는 이야기가 성립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평화는 그저 아무런 다툼이나 괴로움이 없는 만족한 상태가 아니라 하나의 천국 질서가 사람들의 마음과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실현된 상태라고 하는 것입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의 산상수훈에 관한 설교 속에서 이 평화를 정의하였습니다. “평화란 인간의 이성적인 요소가 동물적인 요소를 지배하고 있는 상태다.”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계시의 빛과 성령의 은혜가 그의 지성을 장악하고 내면에서 지성과 정서와 의지 사이에 질서가 이루어지고 마음에서 솟구치는 하나님 없이 살아보려는 동물적인 욕구를 이런 말씀에 의해 지성적으로 장악하고 있는 상태가 바로 내면의 평화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을 사회적으로 확대해 보면 사회 속에 이러한 우월한 정신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사회 일각에서 동물적인 욕구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장악하고 지배하여 이루어진 이 질서가 바로 평화라고 정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면에 이루어진 평화가 하나님과의 평화로부터 온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하고 그 평화가 사람들 사이에 수립되고 심지어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인간이 살아가고 있는 이 세계의 자연 물질세계와도 평화를 이루면서 살아갈 때에 그것이 바로 진정한 의미의 평화라고 하는 것입니다.
A. 세상나라: 자기 사랑의 투쟁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고 당신을 닮은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태어나자마자 그 사람들은 마음속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향을 가지고 태어났고 그들의 마음과 내면의 세계는 올곧고 아주 질서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지성은 하나님을 잘 알고 있었고, 감정은 그 지식에 복종하고 의지는 이 지식과 감정에 순응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행하며 사는 것을 즐거움으로 살았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과의 평화가 있고 자기 안에 평화가 수립되어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도 평화롭게 지낼 수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다툼이 없는 상태가 아니요,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하와를 불렀던 최초의 사람 아담의 고백에서도 나타나는 바와 같이 적극적인 사랑의 힘을 가진 평화였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죄를 저지르지 않았더라면 이러한 사랑과 평화를 무한대로 확장시켜 온 지면을 사람으로 뒤덮게 하고 그 사람들이 이 평화 속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며, 사람들을 사랑하며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선량한 관리자의 의무를 다하며 섬기면서 살아가게끔 만드셨기를 원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죄가 들어왔습니다. 그러자 인간은 타락하게 되었고 하나님과의 평화는 완벽하게 부서져 버렸습니다. 그러자 사람들과의 관계가 부서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였습니다. 그리고 사람들과의 관계가 부서져 버리자 이제 이 자연은 함께 공존할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동료들이 아니라 끊임없이 자기의 욕망을 위해 파괴하고 획득하고 그리고 공격이 두려워서 그것들을 경계해야 하는 적대적인 관계로 변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프랑스의 작가, 베르베르가 쓴 제 3 인류에 보면 지구가 신음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사람들이 나의 몸에서 검은 피를 마구마구 뽑아내고 있다. 나는 병들어 가고 있다.”라고 말입니다. ‘신토불이’라고 하는 동양의 이 사상은 성경적으로도 매우 타당한 생각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흙으로 창조하시고 그 땅에서 나는 모든 실과를 먹으며 살게 하신 것은 인간의 운명이 자연의 운명과 결탁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자연세계를 선량한 임금이 백성들을 다스리는 것처럼 그렇게 돌보고 다스리도록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어제 신문에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난 후 상황이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한 특집이 어느 신문에 실렸습니다. 한 마디로 이야기해서 언제 인간이 접근할 수 있을지 모르는 끔찍한 폐허로 변해갔습니다. 나는 오늘 이 시간 여러분에게 원전의 건설을 찬성한다, 반대한다, 이러한 정치적인 견해를 표명하기 위해서 설교단에 서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한 가지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있습니다. 왜 그 끔찍하고 어마어마한 위험을 무릅쓰고 그런 원전을 건설하기 위해서 인간들이 애쓰고 있느냐 그 마지막 해답을 궁극적으로 파들어 가면 에너지에 대한 탐욕이라는 것입니다. 너무 많은 에너지를 펑펑 써서 그래서 인간의 삶을 잠시 안락하게 하기 위해서 후손들에게 몇 만 년 동안 재앙을 물려주는 것이 바로 원전 개발의 논리인 것입니다. 그리고 너무나 저렴한 돈으로 많은 에너지를 쓰려고 하는 것도 탐욕을 부추기는 것입니다. 지금 쓰는 에너지보다 1/3을 쓰고도 사실은 지금 하고 있는 일을 거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낭비합니다. 결국은 그런 인간의 마음의 방탕함이 어마어마한 자원의 낭비를 가져오고 지구의 검은 피를 빨아드리고, 지구를 망가트리고 파괴하면서 그런 평화가 모두 깨지도록 인간이 오히려 조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결국은 하나님과의 평화를 깨뜨리고 나니까 이제 자기 사랑으로 충만한 사람이 되었고 인류 최초의 살인자 가인이 자기의 아우 아벨을 쳐 죽인 것도 바로 이런 자기사랑에서 비롯되는 미움 때문이었습니다. 인간이 최초로 성을 짓고 사람의 이름을 붙인 에녹성도 결국은 하나님을 중심으로 살아야 할 사람들의 나라가 이제는 사람을 중심으로 하는 나라가 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고, 또 그의 후손 라멕이 자기에게 상처를 입힌 소년들을 죽인다는 이 끔찍한 복수의 선언은 자기 사랑의 극치를 보여주고 자기가 스스로를 주인 삼은 질서를 자기만 갖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에게 강요하면서 이루어질 파괴적인 인간의 나라, 세상 나라의 전망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세상 나라는 각자가 자기를 주인 삼으면서 사는 나라입니다. 그래서 각 사람들이 각기 자기를 주인 삼으며 살아가는데 다른 사람도 그렇게 살기 때문에 어차피 그 속에는 각각이 주장하는 질서들이 충돌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세상 나라의 모든 사람들도 평화를 바라지만 실제적으로는 그 평화가 쉽게 이루어지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 나라는 각 사람들이 자기를 주인 삼으며 하나의 왕국을 건설하고 싶어 하고 그래서 모두 깃발을 듭니다. 그런데 그 깃발을 들어서 모든 사람을 복종시키기 위해서는 권력과 자본, 그리고 커다란 지위와 힘이 있어야 하는데 그 힘이 조금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혼자서 나라를 세우고 자기가 왕이라고 하는데 신하가 없습니다. 그리고 사는 것입니다. 돈을 좀 더 벌고 지위가 올라가면 그 옆에 신하가 조금 생깁니다. 아주 많이 돈을 벌고 권력이 아주 높고 강력한 무력으로 나라를 통치하게 되면 더 많은 사람들이 외형적으로라도 자기에게 복종합니다. 어떤 사람이 깃발을 더 높이 세웠습니다. 그러면 조그만 깃발을 가지고 있던 사람은 힘으로 이 사람과 질서가 부딪힐 때 저항하다가 파멸되어 버리든지 자기 깃발을 내려놓고 복종하여 이 수하에 복종하면서 이익을 받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그러다가 더 어마어마한 크기를 가진 사람이 나옵니다. 그러면 이것도 모두 복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류 역사에서 이런 깃발을 가장 높고 힘차게 들었던 사람들이 황제들입니다. 황제들은 수많은 왕들의 깃발을 자기 아래에 꺾고 온 세계를 지배하면서 위엄과 영광을 가시화하고 그리고 그 사람들은 모두 예외 없이 자기 스스로를 신이라고 떠받들게 하였던 것입니다. 결국은 평화를 원하지만 그렇게 해서 이루어지는 것은 진정한 평화가 아닙니다.
자, 가정에서의 평화를 예로 들면 오늘 여러분의 마음에 아주 따뜻하게 와 닿을 것입니다. 자, 이제 부부가 같이 살았습니다. 남자가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3~40년을 살았습니다. 그러고 나서 이제는 권력도 잃어버렸고 은퇴도 해서 수입도 없어졌습니다. 그러고 보니까 이제 놀이터라고는 가정밖에 안 남았습니다. 그리고 아내를 이렇게 보니까 그제서야 ‘나 섬기느라고 참 고생했구나.’ 철이든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한번 잘해 보려고 요리 학원도 다니고, 그리고 집안 청소하는 것도 배우고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가 갑자기 장롱에서 서류를 꺼내더니 도장을 찍자는 것입니다. 보니까 이혼 신청서입니다. “무슨 소리냐, 우리가 이때까지 40년 동안 평화롭게 살았는데 싸움 한번 안하고 살았는데 우리가 이렇게 이혼해야 될 이유가 어디 있냐?” “당신은 이혼할 이유가 없지만 나는 이혼할 이유가 100가지도 넘는다.” 왜냐하면 그 전까지는 남편의 권력, 힘, 그리고 자식들에 대한 의무 때문에 매여서 살았습니다. 남자는 그것을 평화라고 생각했지만 아내는 한 번도 그것을 평화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몇 년 전에 5월 가정의 설교 하는데 ‘이혼을 생각하는 그대에게’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습니다. 젊은 부부가 집에 돌아가서 누구인지는 나도 모르지만 형제가 그랬답니다. 짜증을 내면서 우리 목사님은 이상하다고 우리같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누가 이혼을 생각한다고 90분간 이혼을 생각하는 그대에게 설교를 하냐고 신경을 내니까 아내가 옆에 있다가 아주 진지하게 “여보 나 많이 생각했어.” 그게 평화입니까?
B. 하나님 나라: 신적 사랑의 질서
힘센 사람이 보기엔 평화이지만 아랫사람들이 보기에는 억눌리는 고통입니다. 평화가 되려면 다툼만 없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사랑과 이해가 흘러야 합니다. 그래서 결국 이 세상에는 끊임없이 평화를 원하지만 분쟁이 그치지를 않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서 하나님의 나라는 신적 사랑의 질서입니다. 그러니까 사랑의 질서가 한 사람, 한 사람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나라가 세상 나라고, 또 하나님 사랑 하나에 의해서 질서가 이루어지는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인데 그 질서 안에서의 안식이 바로 평화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 여러분에게 한번 그림을 그려 보이겠습니다. 끝없이 넓게 펼쳐진 잔잔한 호수가 있습니다. 비행기가 낮게 뜨면 헬리콥터가 낮게 뜨면 그 바람 때문에 호수에 파문이 일겠지만 이 헬리콥터는 아주 높이 떠 있습니다. 그래서 프로펠라가 아무리 움직여도 그 바람이 수면까지 움직이지는 않습니다. 바람 한 점 없는 고요한 끝없이 넓은 호수에 집채만 한 바위 하나를 떨어뜨렸습니다. ‘슈~ 풍덩’ 할 것입니다. 호수 정 가운데 바위가 떨어지면 엄청난 물결을 일으키면서 폭포처럼 솟구쳐 오를 것입니다. 끝나고 난 뒤에는 정확하게 동그란 파문이 그려지기 시작합니다. 전후좌우 동서남북으로 똑같은 비율로 하나의 물결이 원을 그리며 더 이상 원을 펼칠 수 없는 호수 가장자리까지 확장될 것입니다. 두 개의 물결이 아니라 하나의 물결이 그대로 원을 그리며 퍼져 나갈 수 있는 데까지 퍼져 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출렁거리는 것을 사랑이라고 하고 떨어진 바위를 하나님 사랑을, 십자가 사랑을 받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이제 하나님 나라의 사랑의 질서가 무엇인지에 대한 이해가 분명해지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모두 열린 교회에 와서 목자와 왕이라는 시리즈를 예외 없이 공부했습니다. 서로 얼굴도 본적인 없는 사람들이 서로를 형제자매라고 부를 수 있고, 자기와 같이 허물이 많은 형제중의 한 사람이었는데도 그를 목자라고 부르며 자신의 영혼을 돌보도록 내어 맡길 수 있게 하는 원천이 어디에 있다고 배웠습니까? 목자는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에 목자가 된 사람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신 십자가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를 깨달았기 때문에 자기와 같은 죄인을 살려주신 그리스도 때문에 목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양떼는 목자를 존경했기 때문에 양떼가 된 것이 아니라 자기같이 방황하는 영혼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를 알고 그 분의 주권 아래 순종하며 살아가는 삶이 기쁘다고 믿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통과해서 하나님의 교회의 한 지체가 되었고, 그래서 아무 상관없는 사람들이 육신의 정을 나눈 혈육보다 더 뜨겁게 사랑하며 형제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고 그 질서 속에서 하나님이 세우신 목양의 관계를 받아들임으로 자신의 영혼을 목양하도록 내어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 사람이 형제든지 자매든지 혹은 목사든지, 장로든지, 교사든지, 집사든지, 권사든지, 외국인이든지, 자유인이든지 이스라엘 사람이든지, 아니면 헬라 사람이든지 누구든지 간에 이 그리스도 예수와 관계를 맺고 모두 동일한 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음으로써 그 출렁거리며 확장되는 하나의 신적 사랑의 물결의 일부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일정한 파문을 그리며 질서 있게 움직인다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은 각각 달라도 하나의 사랑으로 감화를 받아 마음속으로 일체를 이루었다라고 하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런데 한 사람, 한 사람이 십자가의 복음을 통해서 거듭나고 회심하지 아니하고는 이 하나님의 사랑의 질서를 받아들일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인간에게 있어서 자기를 주인 삼으며 자기를 임금 삼으며 살아가는 성향은 유전인자와 같이 뼛속 깊이 배인 특징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의 전파가 필요하고 그들이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하나님과의 평화가 수립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이루어지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왔으나 하나님의 나라가 완전히 완성된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의 통치와 세상 나라의 지배가 서로 갈등을 일으키며 한 역사 안에 있습니다. 이것을 아우구스티누스는 신국론에서 하나의 그래프로 보여주었습니다. 이 위에는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세상의 역사이고, 아래는 이 역사를 사용해서 하나님이 움직이고 계신 믿음을 갖지 않은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구원의 역사입니다. 이 두 개의 포물선 속에 두 개의 나라가 함께 공존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한 사랑을 질서로 하는 하나님의 나라와 각자 자기를 주인 삼으며 살아가는 세상 나라가 함께 공존합니다. 그러다가 종말에 이 세상 나라는 결국 파멸하고 하나님의 나라는 완성됨으로써 하나님께서 인간의 모든 죄를 종식시키시고 창조의 원래의 목적으로 돌아가게 하신다는 것이 신국론의 테마입니다.
결국 우리는 이 세상에서 우리 마음속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평화에도 불구하고 이 평화를 자꾸 훼손하려고 하는 잔존하는 죄의 세력들이 있고 교회도 이미 한 사람으로 돌아온 사람들이지만 틈만 나면 은혜가 떨어져서 다시 한 번 자기를 주인 삼은 삶을 살아보려고 깃발을 세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은혜를 받으면 다시 깃발 올린 것을 그렇게 뼈아프게 회개하고 내려놓으면서도 그 눈물이 마르면 다시 그 깃발을 만지작거리면서 이 깃발을 이렇게 크게 할 수 있는 길이 있는지 없는지 고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지혜를 아는 사람들은 오히려 이런 갈등이 너무 감사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자기 마음속에 이루어진 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때문이고, 그 이루어진 나라가 자기 안에서 그 나라를 거스르려고 하는 요소들을 계속적으로 지배하며 하나님의 나라가 내 안에서 번영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전적으로 은혜를 주셔야 된다는 사실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가난한 마음이 되고, 또 애통하는 심령이 되고, 그래서 하나님께로부터 불결한 자신의 영혼을 다시 정결케 하시는 은혜를 기대합니다. 그 사랑이 충만하게 될 때에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다운 인격이 되게 하시고 삶을 살아가게 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가 자신 안에 이루어진 성도는 애통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죄에 대해서 주님 앞에 용서를 빌게 되고 이 땅에도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갈망하며 눈물로 간구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사랑의 질서 속에서 자신이 순종하며 살고 이런 사랑의 질서로 모든 사람들이 함께 돌아와 주님과 평화를 누리고 사람들과 평화를 누리고, 또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세계와도 평화를 누리며 사는 세상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의 평화에 대한 갈망이 의미하는 바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들은 바로 이렇게 삶의 모든 영역에서 이런 평화를 추구하며 사는 사람이어야 하고 그것이 그 사람의 온화한 인격의 특징이어야 한다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평화를 위해서 얼마나 애쓰고 있습니까? 여러분 가운데 일어나고 있는 많은 분쟁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바로 그 분쟁의 한 가운데 평화를 만드는 자가 아니라 트러블을 만드는 자로 있지는 않습니까? 여러분 하나가 잠잠하고 온유한 마음을 가지면 평화로운 가정이 될 텐데 성질대로 사는 순간의 시원함을 위해서 여러분의 가정을 지옥으로 만들고 있지는 않습니까? 다른 사람들을 하찮게 여기고 다른 사람들의 행복과 권리를 우습게 여기면서 자기만을 위하는 이기심 때문에 교회에서의 화평한 관계들을 파괴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스르면 그런가 하다가도 자기의 인생관과 충돌하는 사람을 만나면 죽여 버리고 싶을 정도로 미움을 느끼는 것은 결국은 여러분이 하나님의 사랑의 질서 속에 아직 편입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 분쟁이 있고난 후 마음이 괴로워 뉘우치는 것은 그래도 여러분 속에 하나님의 사랑의 질서에 대한 그리움이 남아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리에 관한 사항이 아닌 한 할 수 있으면 모든 사람과 평화를 누리도록 노력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 평화를 위해서 내가 많은 희생을 치루고 혹은 내가 다른 사람들로부터 모욕을 받는 한이 있더라고 그렇게 해서 평화가 올 수 있다면 기꺼이 그것을 택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의 인격적인 태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III.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됨
A.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은 이렇게 자기를 희생함으로 평화의 도구로 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도저히 받을 수 없는 복을 주십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받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입니다. 여기에서 우리의 눈길을 끄는 표현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현입니다. 평범하게 생각하면 이것은 하나님의 소유가 된 그 분의 아들이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것이 문자적인 뜻입니다. 그러나 이제 이것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히브리어에는 형용사가 현저하게 부족합니다. 그래서 히브리 어법에는 형용사가 매우 부족하기 때문에 영어에서 하듯이 of + 추상명사나 혹은 또 다른 명사를 사용해서 형용사의 의미를 갖는 말로 사용하는 어법들이 매우 발달하였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문자적으로 하나님의 소유인 자식들이라는 의미보다 훨씬 풍부한 그림을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예레미야 애가 4장 2절에 보면 시온의 아들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자, 문자 그대로라면 시온이라는 지역의 아들 이렇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엄밀하게 말하면 그 의미 이상입니다. 시온은 예루살렘을 둘러싸고 있는 산지입니다. 원래 시온은 히브리어로 ‘찌온’(@/yxi)이라는 말인데 메마른 땅, 거친 땅, 혹은 요새, 이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땅이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당신을 경배할 거룩한 장소로 지명하심으로써 그 예루살렘을 둘러싸고 있는 이 산지는 하나님의 통치, 사랑, 언약적 은혜, 이런 것을 하나님이 독점적으로 부어주시는 신학적인 의미를 가진 선택된 백성의 땅이라는 사상을 갖게 됩니다. 그러면 시온의 아들 그러면 단순히 시온 지방에 사는 아들이 아니라 이런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 속에서 사랑과 영광과 은혜와 언약, 긍휼, 이 모든 것을 독점적으로 받고 누리는 특권을 가진 아들들이라고 하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이해되십니까? 설명이 친절하지 않습니까? 히브리어까지. 왜 그러냐 하면 이것을 이해하면 여러분이 성경을 읽을 때 이해가 굉장히 풍부해지게 됩니다.
몇 개만 더 들어보겠습니다. 마가복음 3장 17절에 보면 야고보와 요한을 가리켜서 그 요한은 나중에 사도 요한이 된 요한을 가리킵니다. 우레의 아들이라고 불렀습니다. 우레가 무엇입니까? 천둥과 번개입니다. 왜 그런 이름이 나왔냐 하면 복음을 전해도 말을 잘 듣지 않는 사람들이 나오니까 이 사람들이 예수님께 “천둥과 벼락을 보내서 저들을 심판해 버리십시다.” 하니까 그러니까 우레의 아들이라는 하는 것은 좋은 의미가 아니라 성질머리가 못되고 천둥 벼락을 치는 것과 같은 과격한 성품을 가진 자식들이다 그래서 우레의 아들이라고 불려지는 것입니다. 그러던 요한이 주님을 만나고 깊이 변화되어 사랑의 사도가 된 것은 놀라운 것이 아닙니까?
또, 사도행전 4장 36절에 보면 바나바라고 하는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평신도 지도자가 등장합니다. 바나바가 아니라 원래 정확한 발음은 바르나바입니다. ‘바르’는 아람어로서 아들이라는 뜻이고, ‘나바’는 위로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둘은 소유격이어서 위로의 아들이라는 의미입니다. 그것이 무슨 뜻입니까? 사람이 있는데 성품이 착하고 온유해서 슬픔과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말과 섬김으로 잘 위로해 평안케 해주는 성품을 가진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마지막 하나만 더 들어봅시다. 요한복음 12장 36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빛은 환하게 비치는 밝은 것입니다. 그 빛의 아들이 된다는 것은 설마 온 몸에다가 전구를 달고 다닌다는 의미는 아닐 것입니다. 그게 아니라 빛의 아들이 된다고 하는 것은 빛이 어두운 데를 비추어 못 보던 것을 보게 만들고 어디에 있든지 그 빛을 많은 사람들의 눈에 띠게 되는 성질을 가지고 있는데 너희들이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너희도 진리를 소유한 사람들이 되어서 다른 사람들이 너희를 보고 진리의 빛을 알게 되고, 너희들이 그 빛을 가지고 사람과 사물들을 비추어서 이것이 없었더라면 예전에는 몰랐을 새로운 사실들을 깨닫는 지혜로운 사람이 된다 라는 의미가 바로 빛의 아들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자, 이상의 논의를 다 종합해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현으로 되돌아가 봅시다. 그러면 이것은 단순히 하나님의 소유인 아들이라는 뜻이 아니라 그 아들들이 무언가 하나님과 관계하고 있는 그 무엇을 보여주는 아들들이라고 하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두 가지로 이야기하고 있는데 첫째는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의미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의미는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된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빌립보서 4장 9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즉,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했기 때문에 나의 생각이나 말이나 행동이나 모든 언어의 활동들이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레의 아들처럼 과격했던 인간이었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회개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보니까 하나님처럼 온유한 자가 되고 한번 원수 맺으면 가슴속에서 한을 품던 사람이 십자가 사랑을 깨닫고 나서는 용서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아서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고 이런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한 아들이 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마지막 때에 이 모든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끝나고 이제 모든 악한 자들은 하나님의 심판 속으로 들어가게 되고 완전한 평화가 이루어질 때에 그때에는 죽음도 없고 그리고 질병도 없고 죄와 어둠도 없는 상태가 될 것입니다. 누가복음 20장 36절은 말합니다. “그들은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라”고 말입니다. 이때에 신자는 부활한 몸과 그리고 거듭난 영혼이 완전히 성화된 영혼이 함께 만나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을 자신의 존재로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된다고 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이 현세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보여주는 사람이 되고 종말론적으로는 미래에 하나님의 그 영광에 완전한 완성체로서 그 영광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B. “일컬음 받으리라”
여러분의 가장 커다란 의무가 무엇입니까? 바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세상의 아들들 속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일컬음을 받으리라 이것입니다. 희랍어 성경에 ‘클래손타이’(κληθήσονται)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칼레오’(καλέω) 즉, ‘부르다’라는 말의 미래형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화평케 한 사람들을 당신의 아들이라고 인정을 받을 수 있게끔 해주겠다고 하는 화자이신 하나님의 의지를 반영하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아들이라는 단어가 ‘휘오스’(υἱός)인데 여기 성경에는 복수로 나옵니다. ‘휘오이’(υἱοὶ)라고 나오는데 이것은 그냥 아들이 아니라 법적인 상속권을 가지고 있는 아들입니다. 그러한 아들로서 결국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지금 받고 있고 앞으로도 그 영광에 동참할 것이라고 하는 것을 모든 사람에게 드러내 보여주는 사람이 되겠다고 예수님이 약속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신자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다고 하는 의미인 것입니다.
신자가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최고의 섬김은 자신의 존재와 삶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거룩하고 사랑스러우시며 아름다우신 분이시고 또 그 분과 관계를 맺고 그 분의 가족으로 살아가는 것이 인생에서 커다란 행복이라는 것을 깨닫게 만들어 주는 것이야 말로 신자가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최고의 섬김입니다. 그래서 신자가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최고의 봉사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앞으로 상속하게 될 나라를 현재적으로 이미 누리면서 살아갑니다. 우리 각각 자라온 삶의 배경도 다르고, 성별도 다르고, 사회적인 지위도 다르고, 성향이나 삶을 살아가는 인생의 태도도 상이하지만 하나의 하나님의 사랑으로 뭉쳐져서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나오게 되었을 때에 그것을 통해서 우리들은 우리와 다른 많은 사람들이 다른 것은 달라도 하나의 사랑의 질서 속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결국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주는 삶이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제가 총각 때 다니던 교회가 있었는데 옆에 아주 동네에서 유명하게 잘 지어진 교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가 어떻게 그렇게 예쁜 교회가 거기 지어지게 되었는지를 누군가로부터 들었습니다. 너무 감동적이었습니다. 교회 다니는 한 청년이 새벽에 등산을 갔습니다. 그런데 한 할아버지가 풀숲에 쓰러지신 것입니다. 그래서 가보니까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죽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새벽에 그 할아버지를 업고 그리고 사력을 다해서 달렸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병원으로 모셨고 병원에서는 뇌졸중으로 판명을 했는데 쓰러지자마자 이 청년에 의해서 발견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기적적으로 회생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불신자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서 이제 그 할아버지를 찾아가기도 하고 했습니다. 어느 날 이제 이 할아버지가 완쾌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 청년을 불러서 말했습니다. “너는 나를 살렸다. 소원이 있으면 하나만 말해봐라. 내가 들어주마.” 여기서부터는 동화책 같지만 실화입니다. 그런데 이 청년의 대답이 너무 황당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나는 교회를 다니는 형제인데 많은 교인들이 너무 열악한 환경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어서 할아버지가 나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다면 되실지 모르지만 예배당을 하나 지어주십시오.” 이 할아버지가 엄청난 부자였습니다. 실화입니다. 그때 돈으로 30억을 들여서 교회를 지어줬답니다. 이름대면 여러분이 거의 아는 교회입니다. 정말 예쁘게 지었습니다. 교회가 불이 나고 나니까 그 생각이 납니다. 어디 쓰러진 할아버지 없나?
말씀드리고자 하는 요지는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 세상에 살면서 다른 모든 것으로 하나님을 훌륭하게 섬겨도 다음 하나를 섬기지 못하면 섬긴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자신의 인격과 삶으로써 하나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사람들이 모르기 때문에 그 분의 성품, 그 분의 아름다운 성품을 존재를 통해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인격을 통해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 앞에 살아갈 때에 그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사실은 모든 것을 이미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IV. 적용과 결론
오늘날 가정과 교회, 그리고는 사회 속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분쟁과 다툼, 그리고 수없이 높이 쌓아져가는 담벼락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진리를 위한 싸움이 아니라면 우리는 평화하고 양보해야 합니다. 여러분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예수 믿지 않는 가족들과 함께 어울리는 것은 되게 힘들어 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지침만을 명심하면 평화를 이룰 수가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사소한 것은 다 양보하고 중요한 것 하나는 양보를 하지 않으면 됩니다.
어느 해엔가 추석 때가 됐는데 교인들이 시골 갈 궁리를 안 하는 것입니다. 요일이 이상하게 끼어 있어서 가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런데 설교 시간에 예수 믿는 사람과 가정에서의 섬김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여러분이 예수 믿는 집 며느리면 불신 며느리보다 반나절이라도 먼저 가서 손에 물을 묻히고 고생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예수 믿는 집안의 며느리면 예수 안 믿는 동기들을, 동서들을 모두 보내고 마지막에 보따리를 싸서 나와야 합니다. 불신 형제가 부모님을 50만원을 도우면 신자인 여러분은 덜 먹고, 덜 써서 60만원을 도와드려야 합니다. 불신 동기간들이 부모를 서로 모시려고 하지 않으면 예수 믿는 여러분이 양보를 해서 불신 동기간들이 볼 때에 예수 믿는 여러분 때문에 실제로 이익을 받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이웃끼리 살면서 전기세 500원 가지고 핏대를 올리면서 싸우고 그 다음날 살살 웃으면서 “예수 믿으세요.” 그러니까 짜증이 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너나 믿어라.” 심지어 그러더랍니다. “너 같이 될 까봐 못 믿겠다.” 그러면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와 정반대의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희생하고 자기 때문에 이익을 보게 만든 다음에 언젠가 정색을 하고 올바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인간의 도리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예수님을 믿어야 될 이유를 이야기할 때에 권위가 서는 것이지 티끌만큼도 양보하지 않겠다고 물고 뜯고 살다가 그러다가 마지막에 가서 예수 믿으라고 이야기를 하니까 말을 하면서도 수많은 벌레가 얼굴을 기어 다니는 것 같은 자괴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평화는 누군가가 희생하지 않고는 욕망으로 가득찬 이 세상에서 결코 평화가 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많은 불안은 사실은 진리와 비진리의 문제가 아니라 이기심과 편견, 그리고 우리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오만함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평화의 왕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의 평화의 왕으로 오셔서 모든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여 하나님과 샬롬을 회복하게 하시고, 그런 하나님과의 평화를 이룬 사람들이 사람들 속에서 평화를 이루면서 살도록 만들어 주시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자연 세계와도 평화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게끔 힘을 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하여 당신은 수많은 사람들의 시기심과 교만, 그리고 자기만을 위한 이기심의 희생 재물로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질수록 이러한 평화의 질서는 깨뜨려지게 되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간구하고 기도함으로 은혜를 받을수록 이런 평화의 질서는 우월한 힘을 얻게 되어서 우리 안에서 동물적인 요소들은 이성적인 요소들에 복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내적인 평화를 이룬 사람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관용을 보일 수 있고, 그들을 긍휼히 여기며 사랑으로 끌어안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거룩한 은혜를 우리에게 주실 때에 그것이 사랑으로 우리 안에 넘치게 하십니다. 종종 그 평화의 질서를 어긋나서 살아가는 사람을 보면서도 그가 자신에게 주는 고통보다는 그가 스스로 하나님의 사랑의 질서에서 어긋나 살기 때문에 받는 영혼과 삶의 고통을 보면서 그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갖게 하십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고 고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고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프셨던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반영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에게 하나님이 주신 그 기이한 말씀의 빛, 오늘도 이 예배 속에서 부어주시는 성령의 은혜, 그리고 예배와 함께 여러분에게 임하는 신실한 하나님의 사랑은 무엇 때문에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부어주신 것입니까? 그것을 엔조이하고 스스로 여러분이 최종적인 소비자가 되라고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을 자원으로 삼아서 여러분이 하나님의 사랑의 질서로 돌아가고 그 평화를 누리면서 또 다른 사람들에게 그 평화를 나눠주도록, 그들도 평화 속으로 들어와 화평케 되도록 만들기 위하여 은혜로 여러분에게 주신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렇게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 최고의 섬김이 화평케 하는 것임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 평화를 위해서 끊임없이 자기를 죽이고 다른 사람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세워가는 이 인격적인 섬김이야말로 여러분이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상속받을 합법적인 사람들임을 모든 사람들 앞에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때에 하나님은 여러분의 마음속에서 완전한 평화를 여러분과 함께 누리시고 여러분도 그 하나님 앞에서 사는 마음의 완전한 자유 속에 주님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때문에 이 평화가 가정에, 교회에, 온 세계에 확산되어 수많은 사람들이 시기 내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품으로 돌아오게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박해 받는 자의 복(1)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마 5:10)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열일곱 번째 시간에 와서 우리들은 드디어 팔복의 끝인 여덟 번째 복에 다다르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오늘 설교가 팔복 설교의 마지막은 아닙니다. 앞으로도 두 세주 정도 더 이어질 것으로 기대가 됩니다.
예수님은 이 여덟 번째 복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눈에 띄는 것은 여덟 번째 팔복의 복과 첫 번째 팔복의 복이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라고 하는 이 말씀은 첫 번째 복에서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이미 주신 복인데 예수님은 이 팔복을 마무리하면서 여덟 번째 복의 사람들에게 동일한 복을 주십니다. 이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여튼 분명한 신학적인 의도를 가지고 첫 번째 심령이 가난한 자들과 여덟 번째 의를 위해 박해 받는 자들의 복을 동일하게 천국을 그들에게 주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심령의 가난함, 파산 선고 받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는 자가 천국으로 들어가는 자의 자격이라면 의를 위해 박해받는 자는 천국 백성답게 불의한 이 세상에서 살 때에 당하게 되는 고난을 의미하는데 바로 그 사람에게 미래에 도래할 천국을 상속받게 해 주실 뿐만 아니라 지금도 그 천국을 누리며 살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첫 번째 복에서 존재의 변화를 말했다면 여덟 번째 복에서는 변화된 존재가 이 부도덕하고 그리스도를 미워하는 이 세상에서 그가 어떤 일을 겪으며 믿음을 배반치 않고 살아야 하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화평하게 하는 것이 천국 백성의 타인을 향한 적극적 성품이라면 박해를 견디고 참는 것은 팔복의 성품의 소극적인 측면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신자가 언제나 세상의 환영을 받지 못한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 팔복의 사람들이 박해를 받을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열일곱 번 동안의 설교가 있었습니다마는 거의 매시간 빼놓지 않고 제가 여러분에게 강조한 사실이 있습니다. 이 팔복은 무엇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또 이 팔복은 무엇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사람 됨됨이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즉, 이 팔복은 예수님이 사람을 보실 때에 바깥에서 사람을 보신 것이 아니라 사람 안에 들어가서 안에 있는 사람을 통해서 바깥을 보셨다고 말해도 좋은 그런 관점을 가지고 팔복의 사람들을 보신 것입니다. 그래서 첫 번째 복부터 여덟 번째 복까지 이것이 그 사람의 인격의 통일된 특성이 어느 국면에서 나타나느냐에 따라서 여덟 가지로 나타난 것을 여기에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박해를 받는 팔복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팔복의 사람 됨됨이가 되면 그러면 반드시 이 세상에서 박해를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II. 박해 받는 팔복의 사람
박해를 받는 자라고 하는 이 희랍어 단어는 ‘데디오그메노이’인데 ‘디오코’라고 하는 동사의 현재완료 분사 수동태 남성복수입니다. 이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패퇴시키다, 어떤 자를 물리쳐서 쫓아버리다, 혹은 구박을 하다, 악한 감정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괴롭히다’ 이런 의미를 가진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것입니다. “너희가 만약에 팔복의 사람이 되면 그러면 그것은 나를 만나고 진리와 성령으로 말미암아 영적으로 변화되었기 때문인데 그러면 사람 됨됨이가 옛날 세상 사람이었던 너희 됨됨이와는 다른 사람이 된다. 그 존재 자체가 세상 사람들에게는 미운 물건이 되느니라.” 이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시대 때에 죽음, 순교를 의미하는 단어가 있는데 순교자라는 단어가 ‘마르투스’(martus)입니다. 이 마르투스에서 ‘마터’(martyr), 순교자라는 영어가 나옵니다. 그런데 원래 이 마르투스라고 하는 희랍어 단어는 ‘증언’이라는 단어입니다. 무엇인가 법정에서 자기가 본 것을 사실 그대로 말함으로 재판에 영향을 주는 언명을 가리켜서 그것을 ‘마르투스’, ‘증언’이라고 말하고 그것을 말하는 사람을 ‘증인’이라고 부릅니다. 예를 들자면 요한복음 1장 4절 이하에 “저가 증거하러 왔나니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자기를 인하여 그를 믿게 하려 함이라” 할 때에 그 증거도 역시 이 단어가 사용이 되었습니다.
오늘은 증거하는 증인이 된다는 것과 순교한다는 것이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는 별 직접적인 연관이 없습니다. 더욱이 우리나라같이 거의 완벽하게 종교의 자유가 주어진 나라에서는 그런 것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놀라지 마십시오. 20세기에만 기독교를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순교한 사람이, 죽은 사람이 3000만 명입니다. 지금도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약 성경에서도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증인이라는 것과 순교자라는 것이 동일한 의미로 사용이 되었습니다. 계시록 2장 13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탄이 사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라고 나옵니다. 다시 말해서 안디바는 순교자였는데 그가 순교한 이유는 그리스도를 증언하였기 때문에 죽은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말로만이 아니라 존재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삶 자체로 그가 예수의 사람이라는 것을 존재 자체가 증거하고 있기 때문에 미움을 받아서 죽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가르쳐준 복음과는 다른 복음을 배우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으면 예수님 도움으로 이 세상에서 부자도 되고 잘 안 풀리던 일들도 잘 풀려서 순조로운 인생을 살 수 있을 것이라는 달콤한 소식과 함께 또 다른 의미에서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그러한 복음을 가르쳐 준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복을 받는다고 할 때에 그 복의 방점은 세상에서 번영하고 높은 지위에 오르고 이 세상에서 나 혼자 힘으로 일구던 세상의 성공을 예수 도움 받아서 이루는 그런 동기에서 예수를 믿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믿고 따르려는 사람에게 나의 제자가 되어서 나를 따를 때 상당히 많은 희생을 치러야 될 것인데 과연 너희가 그렇게 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 보라고 오히려 반대로 질문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당신을 믿고 따를 때에 세상의 영화와 복락을 미끼로 우리들을 부르시기 보다는 핍박의 불가피성을 강조하심으로써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려고 하는 우리의 결심이 진리로 말미암는, 복음으로 말미암는 순수한 결심이었는지를 예수님은 점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마태복음 16장 2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말입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하고 똑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고 그 사람들로부터 네가 참 옳다는 이야기를 들어야지 기분이 좋습니다. 반대되는 이야기를 들을 때에 마음이 편하고 기분 좋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우리 스스로 그렇게 해야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무거운 짐입니까? 거기에다가 예수님은 모든 사람이 그 당시로서는 말도 꺼내기 싫어하는 그 끔찍한 십자가까지 거론하시면서 나를 따르려거든 그것을 져야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것도 힘든데 당신을 따라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물었습니다. “예수님 어디로 가십니까?” 예수님이 어디로 가셨습니까? 디트리히 본회퍼라는 독일의 신학자는 자기의 어느 책 속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우리가 정직한 마음으로 복음서를 읽어보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얘들아 나를 따라오너라. 우리 같이 가서 죽자”라고 말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복음입니다.
혹시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어려움을 해결해 주시기도 하고 가난하고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선하게 복을 베풀어 여유로운 삶을 살게도 하시고 질병 중에 있는 사람을 낫게도 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로 말하자면 하나님의 정표입니다. 즉, 영적으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표시를 우리가 수준이 너무 낮아서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흡족하게 못 깨달을 때가 많으니까 정표로 우리에게 주셔서 그것을 보고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사랑하시는구나. 나같이 아주 미천한 존재도 하나님은 기억하시고 나의 작은 신음에도 귀를 기울이시는구나.’ 하는 것을 깨닫고 예수님의 사랑으로 돌아오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복을 하나님께로부터 많이 받으면서도 그 복만 받을 뿐 그 영적인 의미를 깨닫고 영혼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사람들은 주인이 던져준 뼈다귀를 물고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강아지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그런 수준 낮은 사람들로 부른 것이 아닙니다. 적어도 천국 백성으로 불러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제대로 된 그리스도인이라면 그의 삶을 움직이는 정신은 세상 사람들을 살아가도록 움직이는 정신과 다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의 문화를 즐기고, 또 혹은 감상하지만 마치 꿀통에 달라붙은 파리가 정신없이 꿀을 빨아먹는 것처럼 재미있어서만 그 일을 하는 것은 문화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태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저는 종종 혼자 영화관에 갈 때도 있습니다. 요즘은 바빠서 못 갑니다. 혹시 만나더라도 정말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영화 감상은 사실 혼자서 사람 없을 때 조조에 가서 조용히 앉아있으면 가장 집중력이 뛰어납니다. 어떤 때는 솔직히 말해서 별로 볼 의욕이 없는데도 갈 때가 있습니다.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세상은 무엇인가? 그렇다고 제가 포르노를 보러 돌아다니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필요합니다. 그럴 때는 항상 쿨한 마음으로 영화를 감상합니다. 그래서 삼자적인 입장에서 저 사람들이 저 영화를 통해서 말하려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명료하게 느끼고 아닌 것이 무엇이고, 동의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갈라내서 이 세상을 이해하고 한편으로는 세상의 그러한 견해에 대해서 내가 어떻게 저런 생각에 심취된 이 세상 사람들에게 기독교를 변증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문화에 대한 태도입니다. 세상의 정신과 그리스도인의 정신은 다르고 또 달라야 합니다. 세상 나라는 기본적으로 무수한 자기를 주인 삼은 사람들의 나라이고 우리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을 주인으로 삼은 백성들의 나라입니다.
오늘날처럼 기독교가 욕을 많이 먹는 때도 없습니다. 사람들은 여기에서 많은 혼란을 느낍니다. 어떤 사람은 오늘날 기독교가 너무 많이 타락했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되는 기독교 시대는 거의 없었습니다. 언제나 그랬습니다. 그 뜨거운 순교 신앙을 가지고 있다던 일제 시대에도 교회에 대못 질을 하고 예배 못 드리게 하는 사람들이 목회자와 장로 이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일본 사람들한테 돈 받고. 1920년대 새문안교회 당회록을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당회록이 아니라 형벌부입니다. 한 장 넘기면 아무개 집사가 바람을 폈는데 당회에서 몇 번이나 불러서 헤어지라고 했는데 계속 살다가 애까지 낳았다 출교, 그 다음 장 넘기면 박 아무개 권사가 최 아무개 집사에게 돈을 빌렸는데 죽어도 안 갚는다 배 째라고 그런다 제명, 그 다음에 가짜 물건을 사다가 속여서 팔았다, 교인들에게 돈을 꾸고 안 갚았다, 바람이 난 것까지는 아닌데 눈이 맞아서 계속 추문을 불러일으키고 다닌다, 한 장 넘길 때마다 계속 나오는 것입니다.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 들 중에서 그렇게 처벌 받는 사람은 또 일부였을 것입니다. 지금은 아예 너무 많으니까 포기한 상태입니다. 기독교가 타락했다라고 말하지 않아도 되는 시대는 없었습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어느 관점에 보느냐에 따라서 항상 그런 이야기를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주눅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말을 못합니다. 그리고는 어떤 마음이 싹 드느냐면 ‘아이고 힘들다 그런데 욕이나 먹지 말아야 되겠는데 어떻게 하면 저것을 따라갈 수 있을까?’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정말 윤리적으로 사는 사람들처럼 보입니까? 한 시대는 거의 대부분 그 나물에 그 밥입니다. 사람들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한구석에서 윤리적으로 되려고 애를 많이 쓰는 것입니다. 그런데 역사상 교회가 강단에서 윤리를 강조한 시대치고 윤리적이었던 시대가 없습니다. 그것은 아이러니 합니다. 오히려 윤리적이었던 시대는 거룩함과 죄에 대해서 피를 토하는 설교를 하고 그 설교를 듣던 때였습니다.
스님들이 오래 참선을 하고 수행을 하다가 덕을 쌓고 죽으면 다비식을 해서 태웁니다. 그러면 불자들이 가서 제일 먼저 확인하고 싶어 하는 게 사리입니다. 사리가 많이 나온 스님은 신령한 분입니다. 그런데 어느 의학 잡지에서 읽은 기억이 나는데 그것이 체내에 호르몬 작용하고 자세와 관계가 있답니다. 그래서 똑같은 자세로 앉아서 정신을 쭉 쏟으면서 일평생 참선을 한 스님들 몸에서는 사리가 많이 나오고, 그냥 팔랑개비처럼 돌아다니는 땡중들에게서는 이것이 안 나온답니다. 그런데 같은 자세로 기도를 많이 한 목사님도 태우면 사리가 나온답니다. 그러면 스님이 불법에 정진하고 참선을 많이 하시니까 그러다가 죽으니까 사리가 나온 거지, 사리를 만들기 위해서 정자세로 앉아서 일평생을 산 것은 아닙니다. “스님 지금 뭐하세요?” “사리 만드는 중이다.” 그러겠습니까?
하나님은 처음부터 우리를 부를 때에 세상 윤리를 실천하라고 우리를 불러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런 윤리적인 교사는 오히려 예수님 말고도 이 세상에 많습니다. 서양에 거목처럼 우뚝 서 있는 이 윤리의 교사 중 한 사람이 소크라테스 그리고 근대에 들어서는 칸트, 어마어마한 윤리철학의 거봉, 도덕 철학의 거봉입니다. 우리나라에 와서는 이황 퇴계나 율곡 같은 사람들이 윤리학의 대가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성리학, 주자학은 윤리학이라고 말해도 좋을 정도로 그렇게 철저한 것입니다. 그래서 조선 시대에는 이 오늘날 세상에서 벌어지는 썩어빠진 정치인들이 막 치부를 하고 심지어 트럭으로 돈을 받고 이런 것은 조선 시대에는 있을 수 없습니다. 혹시 그런 것 있다고 하더라도 뭐 이렇게 큰 집을 자랑하고 명품을 자랑하고 이런 것은 아주 천박한 사람으로 취급받습니다. 그런 점에서 조선 시대에는 특히 지도자 계층에 있는 사람들 대부분 그런 점에 있어서는 성리학의 영향을 받아서 깨끗한 윤리적인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윤리가 아니라 그 이상의 다른 삶의 방식을 따라 삶으로써 사람들에게 어떤 평판을 얻도록 하나님이 부르신 것입니다. 그 평판이 모두 우리를 높이는 그런 평판은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고, 박해를 받고, 핍박을 받는다고 하는 것은 오늘날 사회에서 거의 경험하지 못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한가한 시간에 기독교의 역사책을 펼치고 한권만 읽어보아도 기독교의 역사 자체가 피로 쓰여진 역사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요즘은 성경을 찾으러 가도 빨간 성경이 안 나옵니다. 다 금박입니다. 원래 빨간 성경입니다. 이 성경이 전해지기 전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증언을 하다가 목숨을 잃었다 피 뿌리고 죽었다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할 수 있으면 빨강 성경을 찾아서 다니세요.
초대교회 사람들은 기독교를 이를 갈 듯이 미워하는 세상에 에워싸여 있었고 기독교인은 죽여도 죄가 되지 않을 정도로 그렇게 기독교에 대한 반감이 팽배하고 핍박자들에게 많은 권리를 부여하는 편파적인 로마시대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그리스도인이 되고 나면 그런 모든 불이익과 박해를 받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했고,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택하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의 방식을 선택한 이상 세상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고 박해를 받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많은 사람들은 생각했습니다. 특히 그들은 모든 직업에 있어서 지독한 불이익을 받아야 했습니다. 돌을 쪼는 석수공은 언제나 일을 하고 공임을 받았지만 이방신상이나 혹은 이방의 제단을 조각할 때에는 망치와 정을 던지고 일하기를 거부하다 해고당하고 그 이유가 그리스도 때문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기도 하였습니다. 옷을 만드는 제복사들은 많은 사람들의 옷을 아름답게 만들어 주어 먹고 사는 직업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었지만 이방 제사장의 옷을 만들어 달라고 할 때에는 분명히 바늘과 가위를 던지고 거부했습니다. 직업상 불이익을 받기도 하고 관직에서 쫓겨나기도 하고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이 알려져서 핍박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삶의 모든 방면에서 그들의 매일매일은 핍박과 박해의 연속이었고, 매일 매일의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선 생활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순결을 지켰고, 박해를 받게 해 주심으로써 내가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백성이라는 것을 입증해 주신 우리 하나님께 매일매일 감사했습니다. 악의적인 비난과 모함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늘 박해를 받았기 때문에 밤 시간에 피해서 그들은 한적한 숲속에서 모이거나 동굴 속에서 모였습니다. 소리 내어 기도도 못하고 찬송도 부르지 못하는 가운데 예배를 드렸고, 끝난 후에는 사랑하는 형제자매들과 함께 성찬의 떡과 포도주를 나누었습니다. 악의적인 로마 사람들은 이것을 모든 사람들에게 소문을 내기를 밤중에 그리스도인들은 굴속에 들어가서 아기를 잡아서 살점을 뜯어먹은 후에 그 피를 빨아먹는다고 소문을 냈습니다. 이런 모든 악의적인 비난과 모함을 받을 때에 그리스도인이 호소할 법정도 없었고, 또 군인이나 무력을 가진 사람들을 동원해서 보복을 하는 것은 더더욱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 자신의 삶과 죽음을 온전히 맡기고 온유한 마음으로 인내하고 그리스도처럼 고난의 길을 가는 것 이외에는 아무도 할 일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2세기의 위대한 교부, 테르툴리아누스라고 하는 사람은 자기의 책 속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여러분이 우리를 때리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맞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칼로 우리를 찌르면 우리는 찔릴 것입니다. 여러분이 우리를 죽이면 우리는 죽어갈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러분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그 좋으신 하나님을 그렇게 대적하며 살지 말라고 말입니다.” 그는 핍박을 받을 때에 도망을 가는 것도 매우 커다란 죄라고 믿고 가르쳤습니다. 마치 일생을 순교하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처럼 용감하게 살다가 죽었습니다.
III. “의”를 위한 박해
A. “의”
그런데 이 박해가 무엇 때문입니까? 오늘 성경은 그것이 의를 위한 박해라고 말합니다. ‘의’, ‘디카이오쉬네스’라는 단어입니다. 이미 네 번째 복에서 이 의에 대해서 설명을 드렸습니다. 이 의는 대게 세 가지 성서신학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첫째는 율법에 부합한 상태입니다. 종교나 제사, 사회적 관계에 있어서 율법의 요구에 부합한 상태를 의미하고, 구속사가 진행되면서 이 의는 새로운 개념을 덧입게 되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상태입니다. 죄인인데도 하나님이 용서해 주시거나 혹은 큰 벌을 받아야 되는데도 하나님이 너그럽게 자비를 베푸셔서 은덕을 입어서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도록 된 그런 상태를 가리켜서 의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계시가 명백해지고 난 후에는 이제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대속의 은혜에 덕 입은 상태를 의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고,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은 바로 이 의에 대한 첫 번째 개념에서 두 번째, 세 번째의 개념을 발견하면서부터 일어난 운동인 것입니다. 즉, 인간이 스스로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은총에 의해서 의로워진다는 어거스틴의 사상을 새롭게 발견함으로써 로마서와 신약 성경을 새로 보게 된 것이 루터의 종교개혁의 시작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가 처음 발견한 것이 아니라 기독교 역사에서 면면히 이어져 온 성경적 진리였고, 그것을 중세의 암흑 속에서 그가 다시 찾아낸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모두 성취되는 상태가 의입니다. 그래서 의를 위해 박해를 받는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상태가 되는 것이 나 자신 뿐 아니라 나의 모든 이웃과 사회 안에서 이러한 의가 이루어지기 위해서 노력을 하다가 당하게 되는 고통스러운 박해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팔복의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그런 의로운 인격을 가진 사람인 것입니다.
B. 팔복의 사람: 그 의에 부합한 인격
한 사람이 복음과 성령으로 변화되고 하나님 사랑으로 충만해지게 되면 그가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고, 애통하는 자가 되고, 온유한 자가 되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되고, 마음이 청결한 자가 되고 이런 등등의 변화가 일어나는데 이것은 그 사람의 존재가 변화되었기 때문에 어떤 상황과 만나느냐에 따라서 팔각형처럼 그 안에 있는 성품이 다양하게 바깥으로 나오면서 발현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핍박을 받는 것은 자기 사랑의 질서와는 완전히 다른 세상 사람과 만났을 때 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항상 똑같이 예수 잘 믿고 여러분 사랑하는 사람하고 에워싸서 살면 어디를 가도 존경과 칭찬을 받지 박해받지 않습니다. 박해는 자기와 생각이 다르고 가치관이 다르고 사랑의 대상이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느껴지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의 부도덕과 비윤리적인 것을 꼬집으며 비난을 하고 욕을 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그런 꼬투리를 주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반성을 하고 우리의 삶을 개선해야 합니다. 그것은 이의의 여지가 없고 오늘같이 비난을 많이 받는 시대에는 더더욱 그래야 합니다. 그러나 더 깊이 캐 들어가 보면 결국은 마지막에 나오는 것이 뭐냐 하면 그냥 네가 그리스도인이라서 싫다 그것입니다.
개척 교회를 하려고 교회 장소를 얻어 다니는데 한 곳을 발견했는데 괜찮을 것 같았습니다. 내려가 보니까 술집 하다가 망한 지하실입니다. 그래서 오, 술집, 성령, 생각을 하니까 술집하고 망한데서 성령으로 성공을 하면 되겠다 생각을 했습니다. 옆 가게에서 예쁜 아가씨가 튀어 나오더니 생글생글 웃으면서 공손히 인사를 합니다. 복덕방 사람하고 같이 내려왔습니다. “가게 얻으시려고요? 너무 잘 생각하셨어요. 여기 사람도 많이 오고요 너무 너무 좋아요. 꼭 입주하세요.” 그래서 저는 가만히 보고만 있었습니다. “근데요. 아저씨 여기서 무슨 가게 하시려고 그래요?” “교회하려고 그러는데요.” 갑자기 똥 씹은 얼굴이 확 “교회요? 안 돼요. 여기는 세 줄 수 없어요.” 그래서 아니 주인 맘이지 당신도 세든 사람인데 그렇게 말하면 되냐고 그러니까 “그래도 안 돼요. 교회는 절대로 안 돼요.” 복덕방 사람한테 “만약에 여기 주면 주인한테 전하세요. 우리 방 뺀다고” 문을 쾅 하고 들어가는데 그 가게가 퇴폐업소였습니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데, 내가 그 애를 보고 “야 새파란 나이에 이런 퇴폐업소에 근무 하냐? 네 얼굴이 아깝다. 네 엄마가 너 이런 거 하라고 너 낳고 미역국 먹었냐. 정신 차려. 너 이래 봐야 인생 막가는 거야.” 내가 이렇게 이야기 했는데 신경질을 내고 짜증을 냈다면 듣기 싫으니까 그럴 수도 있습니다. 난 가만히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물어 보기에 나는 목회자고 우리는 교회를 하려고 한다고 말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왜 교회를 싫어하는 것입니까? 설마 교회가 자기네 집 앞에서 막 데모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술집이 있을 때는 환영했습니다. 왜냐하면 죄인들이 꼬이고 술 먹다가 보면 생각이 나면 옆집에 가는 것입니다. 동업이 잘 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은 자기네보고 뭐라고 그러지는 않지만 거기에 와 가지고 그렇게 예배드리고 찬송하고 눈물 흘리며 기도하는 것이 자기네들이 하고 있는 일들이 무엇인지 자꾸 생각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것이 싫은 것입니다. 내가 내려갔는데 부도덕해 보여서 그 여자가 화난 것이 아닙니다.
소크라테스가 아데네에서 활동할 때 명석하기는 했지만 방탕했던 친구가 하나 있었는데 그게 누구냐 하면 알키비아데스(Alcibiades)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알키비아데스가 하루는 소크라테스에게 말합니다. “나는 네가 정말 싫어. 왜냐하면 너와 함께 있지 않을 때에는 괜찮은데 너와 함께 있기만 하면 내 자신이 누구인지를 인식하게 돼. 그래서 나는 네가 싫어.” 소크라테스가 왜 사약을 받았는지는 의문입니다. 그렇게 잘못한 것이 없거든요. 일설에 의하면 어린 아이들을 학교에 가서 꼬여내서 동성애를 한 것이 아니냐 이런 이야기들을 하는데 그 당시에는 그것은 일반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신이 사람을 만들 때에 남자, 남자 만든 사람도 있고, 원래 인간이 남자 여자가 한 몸이었는데 그것을 신의 경지에까지 올라오니까 남자와 여자로 쪼개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남자 여자여서 쪼개진 사람도 있고, 여자 여자였다가 쪼개진 사람도 있고, 남자 남자였다가 쪼개진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여자 여자 혹은 남자 남자였다 쪼개진 사람들은 동성애가 되는 것이고, 그리고 둘이 갈라진 사람들은 이성을 찾아서 정상적인 사람이 되는데 그것은 삶의 한 방식이지 비난 받을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로마 황제들 중에도 동성애자들이 꽤 있었습니다. 구체적인 역사적인 이야기를 하면 정말 징글징글할 정도로 동성애를 즐기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내가 묻고 싶은 것이 그것입니다. 도대체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도덕적이 되면 이 세상 사람들이 이제는 흡족하다 말할까, 그리고 그것이 가능할까? 자기들은 그렇게 살고 있을까?
몇 년 전에 이메일을 하나 받았습니다. 그도 이름을 안 밝혔으니까 내가 이야기를 해도 프라이버시는 문제가 안 될 것입니다. 긴 편지를 고통 속에 썼습니다. “목사님 책을 종종 읽었기 때문에 사면을 돌아다봐도 이것을 상담할 분이 목사님 밖에 없습니다. 회사를 다니는 아직 결혼하지 않은 젊은이입니다.” 형식적인 신자인 것 같고 그날도 야근이 끝나고 즐겁게 술 한 잔하러 회사 친구들하고 가서 먹었습니다. 그리고는 2차를 또 갔습니다. 그리고 친구들과 함께 순간 정욕에 이끌려서 성매매를 다 같이 했습니다. 그리고 돌아왔습니다. 문제는 이튿날 터졌습니다. 회사 친구들이 손가락질하면서 “너 교회 다니지 마라. 너 어디 가서 그리스도인이라고 이야기하지 마라.” 자기들도 같이 했으면서 같이 따라가서 같이 했으면서 “너는 그리스도인이 그러면 되냐. 우리는 그래도 되지만 그래도 되냐?”
성경은 믿지 않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을 향한 적대적인 감정이 있다고 묘사를 합니다. 그게 'extra'라는 단어인데 전치사가 에이스가 사용이 됩니다. 'into'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겉 표면이나 외모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뼛속 깊이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지겨워하고 미워하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로이드존스 목사님은 그들이 하나님을 그렇게 미워하는 이유는 자기들 마음대로 못하게 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합니다. 그런데 못하게 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라는데 복음의 아이러니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누구든지 자기가 꺾여본 사람이 아니면 그리스도인이 된 적이 없는 것입니다.
C. 죄와 허물로 인함 아님
그러나 이 박해는 자기의 죄와 허물로 인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삶은 한없이 진지해야 합니다. 언제든지 주님이 네가 지금 왜 이렇게 살고 있니 라고 물으시면 그 근거를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은 결코 완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죄와 허물을 발견하게 되면 하나님에 대해서 막연하게 품고 있던 악한 감정이 그렇게 잘못한 그리스도인에게 퍼부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악의적인 공격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이것을 막는 가장 좋은 것은 완전히 그렇게 사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올바른 양심을 가지고 이 세상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지 않도록 그런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이 가지고 있는 진지성입니다. 우리가 어떤 고난이나 어려움을 불신자들로부터 당할 때에 이게 어느 만큼이 우리의 죄와 잘못 때문에 정당하게 오는 당연한 인과응보인지 또 어느 부분만큼이 부당하고 억울하게 오는 것인지가 우리가 완전히 의롭고 양심이 깨끗하기 전에는 불분명할 때가 많습니다. 그 친구도 평소에 예수 믿는다고 고백을 안했으면 아침에 와서 “야, 너 교회 다니지 마라” 그러지 않고 “야, 어젯밤에 좋았니?” 틀림없이 그랬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이라고 다닌 것입니다. “야, 너 교회 다닌다고 하지 마라. 창피하다.” 자기가 왜 창피합니까? 자기는 교회 안 다니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마음지킴과 죄와 은혜의 지배 두 권을 보내주었습니다. 편지를 몇 번 나중에 주고받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나중에 긴 편지가 왔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신앙이 이렇게 간단하지 않은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제가 열심히 믿었을 것입니다. 나는 내 마음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전혀 몰랐습니다.” 마음지킴 읽고 얘기했습니다.
어디까지가 당연한 대가를 받는 것이고 어디까지가 부당하게 박해를 받는 것인지 우리는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은 아십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삶에 대해서 진지하고, 윤리적이 되려고 노력을 하기보다는 항상 하나님의 거룩하심, 우리의 정체가 누구인지, 그리고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그것을 생각하면서 산다면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의 가문에 대한 긍지만 느껴도 우리가 함부로 행동할 수 없는데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을 받았고 앞으로 그 유업을 영구히 상속할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우리는 함부로 살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핍박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는 하나님의 말씀과 양심을 따라 사는 부끄러움이 없는 자신의 정신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너희들이 아무리 비난해도 사실이 아니다. 치사하게 그것을 토 달고 증거를 대고 그러지 않아도 어떤 비난이 오는데 나 자신을 아무리 돌아봐도 양심이 깨끗합니다. 그러면 1차적으로 두려움이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최악의 경우 죽기밖에 더하겠습니까? 그런 마음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핍박을 받을 때에는 하나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그러면 핍박받지 않는 사람들은 전혀 알 수 없는 핍박의 아픔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크고 신비한 사랑, 그리고 우리의 영혼을 어루만지시는 하나님의 그 놀라운 은혜와 자비가 우리에게 느껴집니다. 우리에게 심하게 악을 행하는 사람들에게 대해서조차도 참고 이해하고 용서할 수 있는 관용이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의 평화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양심이 우리를 현저하게 꾸짖는 죄가 있을 때에는 그런 평화가 없습니다. 그래서 핍박을 받을 때에 육신적으로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재앙이 되어서 우리를 마귀의 발아래 짓밟히는 사람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IV. 적용과 결론
우리가 불교에 귀의한다는 말은 써도 기독교에 귀의한다는 말은 잘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원래는 아주 많이 사용하던 말입니다. 특히 어거스틴이 자기의 고백 속에서 많이 말합니다. 귀의한다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불교를 가지고 이야기하자면 불자가 되기 전에 이 세상에 살면서 이 세상에 사는 사람으로서 세계관, 인생관, 행동의 규칙, 도덕에 관한 생각, 그리고 심지어는 자기와 함께 맺어온 수많은 사람들의 인연을 끊고 이것은 불필요했던 이 세상 것이라고 버리고 부처에게로 돌아가서 백지의 상태에서 세계를 어떻게 봐야 될지, 인생을 어떻게 생각해야 될지, 어떤 방식의 도덕적인 삶을 살아야 할지, 그리고 사람과의 인연을 어떻게 맺어야 될지를 제로의 상태에서 다시 배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원래의 그게 기독교의 귀의한다는 의미가 똑같은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것이 아니라 그대로 가지고 있고 여기에다가 살짝 십자가로 페인트칠 하나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늬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도 옛날 관점 그대로고, 인생을 바라보는 관점도 똑같은 관점 그대로고, 그리고 세상 것들에 대한 집착과 사랑도 옛날 똑같습니다. 차이는 하나 뭐냐 하면 주일날 교회 나오고, 예전에는 내 힘으로 해 보던 걸 예수님 의지해서 얻어 보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 차이입니다. 전에는 세상에서 자기 욕망을 이뤘는데 이번에는 예수 도움을 받아 교회 안에서 자기의 욕망을 이루어보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확한 복음을 전해주면 사람들은 감탄을 하는 것입니다. ‘아, 저런 말씀이 있었나?’ 그런 사람들을 보면 우리는 통탄하게 되는 것입니다. 너무나 오랫동안 잘못된 복음에 익숙해져 왔기 때문에 참된 복음이 들려오면 그것이 의심이 되고 누가 그렇게 믿으랴 하는 반감까지 생겨나는 사람들이 교회의 주류를 차지하게 될 때에 그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가 오는데 이바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 하나님의 나라가 오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걸림돌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하나님의 나라가 오지 못하게 가장 효과적으로 기여한 단체는 잘못 예수 믿는 큰 교회가 역사적으로 언제나 그 일을 해왔던 것입니다. 핍박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 오지 못하도록 못했습니다. 예루살렘에 모여서 사도들이 열심히 복음을 전하고 기도하니까 화가 나서 핍박을 쾅 해버리니까 이게 온 천지에 흩어져서 그래서 복음이 이스라엘 전역에 퍼지는 계기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절대 핍박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오지 못하도록 가로막지 못합니다. 일시적으로는 성공하는 것 같지만 그것은 언제나 더 강렬한 복음의 열망을 불러일으키고 그들의 신앙을 순수하게, 순수하게 만들 뿐입니다.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처음부터 예수 아닌 것과의 갈등과 투쟁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여러분이 박해가 없는 삶을 산다면 잘 살면 소금통 속에 있는 소금으로 사는 것이고, 조명 가게 속에 있는 전등으로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소금 그리고 빛으로 부름 받았을 때 예수님이 뭐라고 그러셨습니까? ‘너희는 교회의 소금이라’ 안 그러셨습니다. ‘너희는 잘 믿는 형제들 속에서 빛이라’ 안 그러셨습니다. 너희는 분명히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베드로전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그런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용기 있는 세상이 박해할 정도의 말하자면 뚜렷한 천국 백성으로서의 정치성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가? 윤리적인 삶은 일부분일 뿐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주님 때문에 죄를 미워하고 그렇게 자신을 죽여서라도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했던 그리스도의 사랑에 감읍했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면서 살다 보니까 세상 사람들이 볼 때에 우리가 윤리적인 사람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을 위해서 그것을 해준 것이 아닙니다. 신문을 보다가 교회가 어떤 교회가 착한 일을 많이 해서 가난한 자들을 돕는다고 신문에 나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것을 화제로 삼으면서 긍지를 느낍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것에 무관심해야 합니다. 교회는 이 세상에 신문지상에나 오르내리고 방송에나 인터뷰해서 우리 교회도 이렇게 제법 윤리적이다 자랑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세우신 공동체가 아닙니다.
저는 종종 불신자, 때로는 이교도이기도 한데도 마주 앉아있으면 너무너무 선하신 분이구나 라는 것이 느껴지는 그리스도인들 속에서 별로 못 느껴지는 선함을 느끼게 해주는 사람을 몇몇 만났습니다. 달라이라마 같은 분이 그런 분입니다. 그 분의 책을 읽어보면 정말 선한 사람이구나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윤리와 선함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요? 분명히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 아니더라도 자연적인 본성의 빛을 받고 어느 정도 올바르게 판단하며 사는 사람들은 아무도 방탕하게 살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조장하는 사람도 별로 없습니다. 그것은 모두 그 빛이 왜곡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오늘 우리를 의를 위해 박해받는 자로 초청하시는 것은 결국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고 팔복의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어떤 이유를 따라 살면 사람들이 우리를 보면서 우리와는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느끼게 되고 이들이 윤리적인 삶을 살지만 진정으로 그들의 관심을 끄는 것은 윤리가 아니라 이런 삶을 살아내게 하는 그게 도대체 무엇일까 그것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그것은 소극적인 것만이 아니라 그 속에 있는 사랑까지 함께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도 결국은 부패한 죄인에 불과합니다. 구원 받았고 성령의 은혜를 받았지만 완전한 인간은 아닙니다. 그래서 얼마든지 변질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팔복의 설교를 들었던 예수님의 제자들도 넘어질까 봐 조심하라는 경고도 들었고 또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사탄이라, 사탄아 물러가라는 책망도 들었고, 술 취하거나 방탕함에 빠지지 말라는 충고도 함께 들어야 했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유를 우리가 어디에서 발견하게 됩니까?
졸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예배 태도는 매우 매우 나쁩니다. 1부 시간에도 제가 한참을 할애했습니다. 열 번을 설교하면 세 번 정도가 설교를 진행하는데 지장을 받을 정도입니다. 졸음에 가득 찬 눈, 지그시 감은 눈, 아니면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눈, 오늘도 정각에 시간을 재보니까 많이 잡아줘야 70%가 도착을 했습니다. 여러분은 그게 정상적인 생활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교회에 와서 예배 시간에 졸고 있는 것은 몸은 교회에 나왔지만 몸은 파자마 바람으로 잠자리에서 뒹굴고 있는 것입니다. 그게 어떻게 예배라고 불릴 수가 있습니까? 저는 어제 단 1분도 안 잤습니다. 그런데도 설교 하는데 여러분은 왜 예배시간에 조는 것을 가지고 진지하게 회개해 본 적이 있습니까? 여러분이 대통령 앞에 초청을 받아서 잠깐 동안 그런 모습을 보였다면 여러분은 다시는 초청받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상습적으로 예배에 늦는 것은 어디에서 배운 것입니까? 여기가 영화관인줄 아십니까? 아니죠. 영화관은 여러분이 늦을 리가 없을 것입니다. 요새는 전자식이 돼서 시간이 지나면 안 들여보냅니다. 여기가 3류 배우들이 나와서 노래하고 춤추는 영화관만도 못한 곳입니까?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은 상습적으로 지각하고 예배에 대한 하나님의 면전 의식이 전혀 없습니다. 열 번 설교를 하면서 세 번을 설교 진행에 심각한 방해를 받는다고 하면 여러분이 저의 심정을 이해할 것입니다. 원고 없이 설교하지 않습니까? 왜 그런 식으로 신앙생활을 하십니까? 여러분이 예배를 드시면서 싸워야 할 것은 예배를 방해하고 진리의 빛이 여러분의 마음에 광채로 비취지 못하게 가로막는 악령의 세력들과 투쟁해야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 무엇과 싸우는지 아십니까? 졸음하고 싸우다가 결국은 지고 끝납니다. 예배 시간에 우울해 보이는 사람이 끝나고 나면 자유로워 보입니다. 텅 빈 가슴을 안고 왔다가 텅 빈 가슴을 안고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자기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겠으며, 팔복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겠으며, 핍박을 받아야 하는 환경 속에 기쁘게 자기 자신을 던지며 이 세상 사람들이 무엇을 나에게 말해도 나는 이것이 하나님을 믿고 사는 삶의 방식이라 할 수 있는 건더기가 있느냐는 이야기입니다. 진리의 빛을 받고 그 가치를 알아야지 오류가 얼마나 더러운 것인지를 알 것입니다. 성결의 기쁨을 체험해 봐야 불결한 삶이 얼마나 망측스러운 것인지를 알 것 아닙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해 봐야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소외된 체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통탄할 일인가 하는 것을 알지 않겠습니까? 이게 무슨 태도입니까? 팔복을 설교하면서 그만 설교하려고 몇 번을 덮으려고 했습니다. 왜 여러분의 목회자에게 그런 경건한 슬픔을 안겨줍니까? 무슨 태도가 그렇습니까? 오늘 처음 발견하고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심각한 상태가 도달한지는 꽤 여러 달 되었습니다. 교회가 어려움이 있고 하면 더 열렬히 기도하고 예배 시간에도 자신을 돌아보면서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려야지 심지어 20분 30분이 되어서 천천히 걸어와서 예배당을 찾는 사람들은 어디에 온 사람들입니까? 이건희 회장이 간부들과 함께 동경 유명한 일식집에 예약을 하고 스케줄이 바빠서 30분이 늦었더니 문 앞에서 쫓아내더랍니다. 우리는 시간 약속 어기는 사람에게 밥을 안 준다고 탕 닫고 들어가더랍니다. 여기가 초밥집 만도 못합니까? 무슨 어마어마한 일이 있는지 모르지만 예배 시간에 벌떡벌떡 일어나서 교회당을 떠나는 사람을 보면서 나는 마음속에 눈물이 흐릅니다. 저 사람의 마음속에 하나님과 예배는 도대체 무엇일까 라고 말입니다. 그런 식으로 사니까 지키며 살아야 할 복음적인 가치가 이 마음에 불타지 않는 것입니다. 거룩함을 추구할 수 없으니까 윤리적인 삶이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오려고 아무리 백번 노력을 해도 120kg짜리 처녀가 김연아 춤추는 것입니다. 그것은 안 되는 것입니다. 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하는 말이 하나님은 그래도 죄인들을 사랑하신답니다. 안 사랑하십니다. 회개해야 사랑하십니다. 어디서 주워들은 신학적인 지식을 아무렇게나 꿰어가지고 자기 편한 데로 귀에다 걸면 귀걸이고, 코에다 걸면 코걸이고 그런 식으로 신앙 생활하는데 마지막에 남겨주는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그리고 찾아간 교회가 이것은 병들어서 갔더니 수술해주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요리사처럼 먹고 싶다는 거나 먹여가지고 암 덩어리나 키워 죽어버리는 그런 교회까지 찾게 되면 최악의 상황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하나님이라면 그렇게 드리는 예배를 받으시겠습니까? 그게 모욕이라고 생각을 할 것입니다. 여러분 배교적 예배에서 돌이키라는 설교에서 기가 막힌 예화가 나왔습니다. 기억하십니까? 다시 들려드릴 테니까 들어보십시오. 어느 날 어떤 사람이 초대를 받았습니다. 아주 공손한 초대장과 함께 초대를 받아서 너무 기뻐서 집에 들어갔습니다. 이 끝부터 저 끝까지 끝이 어디인지 알 수 없는 상이 차려지고 온갖 사기그릇과 놋그릇이 가득 있고 맛있는 산해진미가 담겨서 뚜껑이 다 덮여 있습니다. 예쁘게 한복을 차려입은 처녀들이 와서 ‘주인님 가운데 좌정하시옵소서.’ 가운데 좌정했습니다. ‘드시옵소서.’ 첫 번째 뚜껑을 열어보니까 똥입니다. 두 번째 뚜껑을 열어보니까 콩나물에다 똥을 넣고 무친 것입니다. 세 번째 국을 열어보니까 똥 건더기로 끓인 국입니다. 네 번째 그릇을 열어보니까 똥을 말려서 분말로 무친 것입니다. 이럴 경우에는 대문서부터 맞이한 정중함이 높으면 높을수록 모욕은 증가됩니다. 제발 어디 가서 열린 교회 다닌다는 얘기 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하기 때문에 오늘 한국 교회가 욕을 먹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어떻게 윤리로 고쳐보자고 합니다. 그 얘기가 무슨 말이냐 하면 참선을 열심히 해야지 고승이 되지, 공부하고 참선을 열심히 해야 고승이 되지, 뭘 먹으면 몸속에서 사리가 많이 생길까 그리고 칼슘을 주워 먹는 거와 마찬가지란 얘기입니다. 되지도 않습니다. 해보란 얘기입니다. 기껏 해봐야 생명이 없는 플라스틱 사과 열매를 사과나무에다가 실로 매달아 놓은 격이 되는 것이지 그게 어떻게 열매가 될 수 있겠느냐는 이야기입니다. 각성을 촉구합니다.
매일매일 이 세상과 직면하면서 박해를 받습니다. 양심에 부끄러움이 있을 때에는 자기가 잘못한 것보다 더 많은 박해를 그리스도인이란 이유 때문에 받아도 할 말이 없습니다. 혈기를 부리고 폭력을 동원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겸손하게 회개하고 자기가 예수표로 살지 못했던 것을 깊이 뉘우쳐야 하는 것입니다. 양심의 부끄러움이 없이 고통을 받을 때에 보복의 감정이 생기는 것은 양심에는 거리낌이 없지만 사랑이 부족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기를 핍박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했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일체의 온유한 마음으로 당신을 십자가 못 박아 죽이는 끔찍한 악을 행하는 사람을 보면서도 당신의 고통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에게 이런 죄를 지은 저 사람의 영혼의 운명에 대해서 염려하는 기도를 하나님께 올리셨습니다. 그런 위대한 힘이 우리들은 어디에서 온다고 생각합니까? 이렇게 하나님 앞에 예배하고 진리의 빛을 받으며 오류를 미워하고 진리를 사랑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성령 안에서 경험하면서 주님은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는데 우리는 주님을 진실로 사랑하지 않았구나 하는 것을 철저히 느끼는 회개와 통회 속에서 그 눈물이 우리의 마음에 맺혔던 세상에 대한 잘못된 사랑을 지워버리고 우리의 마음이 맑은 마음이 되어서 참으로 사랑해야 할 것, 그리고 참으로 좋아해야 될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의 마음에 떠오르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의지하며 우리 자신을 돌아볼 때에 우리가 얼마나 부족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올바르게 살고 싶을 때에는 그 올바른 길이 무엇인지를 몰라서 못살고, 그 길을 모두 배우고 나니까 이제는 그렇게 살기 싫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의 밝은 빛으로 우리의 지성을 밝히는 진리와 그리고 그 삶을 진리를 따라 올곧게 살아낼 수 있는 나의 도덕심이나 윤리의식이 아니라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무한히 입었기 때문에 주님이 말씀을 통해서 살라고 하시는 의무는 절대로 무거운 것이 아니다 라고 가벼움을 느끼게 만들어 주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은혜를 받아야 된다는 표현으로 서로 통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찬양)
자기를 온전히 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
사랑이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박해를 받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을 위한 전선에 서 있다는 것이고, 박해가 없다는 것은 후방에서 놀고 있다는 것입니다. 빛들에 둘러싸인 빛, 그리고 서로를 추어주면서 ‘네 빛은 참 곱다’, 소금 통에 있으면서 서로 추어주면서 ‘네가 정말 짜구나.’ 그런 것과 꼭 같은 것입니다. 주님은 여덟 번째 복을 말씀하시면서 의를 위해 박해를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박해라고 하는 것은 별로 없는데 혹시 너희들이 받으면 복이 있다 그 뜻이 아니라 나를 믿어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 된 너희 모두에게는 내가 박해 받을 것을 기대하노라 라는 뜻입니다. 그것이 이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끊임없이 불신자들과 죄악 된 이 세상과 부딪히고 살아가면서 우리가 존재 그 자체로서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점에서 의를 위해 박해를 받고 계십니까?
박해 받는 자의 복(2)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마 5:10)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여덟 번째의 복에서 “박해를 받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복에 대해서 오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박해를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고 말입니다. 심령의 가난함이 현재 천국을 누리는 시작이라면 박해를 받는 것은 현재 뿐만 아니라 미래의 천국을 누리게 될 것에 대한 보장입니다. 팔복의 사람은 이 세상에서 살아갈 때에 존재 자체가 이질적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눈에 띄게 되고 그가 생각하는 인생과 살아가는 삶의 방식의 불일치 때문에 박해를 피할 수 없을 때가 있는 것입니다.
첫 번째 복을 해설하면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복이 있나니”라고 한 ‘마까리오스’라고 하는 이 단어는 이 세상의 물질적인 부나 사회적인 번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마까리오스’의 복은 오히려 정신적이며 영적인 하나님의 복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박해를 받는 자에게 약속된 이 복, “천국이 저희들의 것임이요”라고 하신 이 복도 우리들이 세속적이고 물질적으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이 복은 영적이고 신령한 의미로 해석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II. 천국의 두 차원
A. 지상적 차원
의를 위해 박해를 받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천국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면 지금도 의를 위해 박해를 받고 고통을 받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어떤 식으로 이 천국을 누리게 하시는 것일까요? 우리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주님이 약속하신 천국의 두 국면을 함께 생각해야 합니다. 첫째는 지상적이고 현재적인 국면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임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함께 진리의 복음과 성령과 더불어 이미 하나님의 통치는 임하였습니다. 세상 나라의 측면에서는 여전히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는 식민지에 불과했으나 이 세상 나라의 주권이 얽어맬 수 없는 영혼과 마음의 자유를 신자들에게 주셨고, 그래서 그 나라는 영적으로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임하였습니다.
의를 위해 박해를 받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그 원한을 모두 공정하게 풀어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나라의 역사를 보십시오. 일제 시대로부터 독재정권, 그리고 독재정권에서 군사정권, 끊임없이 정권이 바뀌어도 수시로 변절하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호가호위하며 이 세상에서 번영과 지위를 누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정절을 지키고 정의를 따라 박해를 받던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은 비명횡사했거나 혹은 역사적으로도 자신의 의로운 행동에 대해서 올바른 평가를 받지 못한 적이 많이 있었습니다. 세상 나라를 위해서 박해를 받던 사람들이 그러하거늘 하물며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박해를 받는 모든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정당한 보응을 받을 것이라고 우리가 어떻게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핍박과 많은 고난을 받은 후에 이 세상에서 인정을 받고 또 핍박의 고통 속에서도 해방이 되었지만 어떤 사람은 그 핍박의 칼날 속에서 죽어갔고 그리고 그들의 존재는 잊혀졌습니다. 신앙을 배반하고 교회를 배신한 사람들은 세상에서 살아남고 번영했지만 믿음으로 신앙을 지켰던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은 유명을 달리하기도 하였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이 말하고 있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사람들의 그 고난이 바로 그러한 역사의 현장을 증언해주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지금 하나님을 위해 의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영적인 방법으로 천국을 소유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이 세상에서 도덕과 양심을 따라 산 사람들은 양심의 자유를 얻었겠지만 박해를 받으며 고난을 받는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렸습니다. 박해를 받는 사람들의 그 고통은 헤아릴 수 없이 크지만 의를 위해 믿음으로 박해를 받는 팔복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도저히 알 수 없는 신비한 방법으로 위로와 용기, 사랑과 평화를 베풀어 주십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불완전한 세상에 살면서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 안에서 완벽한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고 살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의를 위해 박해 받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현재적으로 주시는 하나님의 나라의 축복입니다.
B. 천상적 차원
또, 한 가지는 의를 위해 박해받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또 다른 차원의 천국을 약속하십니다. 그것은 천상적이고 미래적인 차원의 천국입니다. 이 세상은 비록 주님의 나라가 이미 임하였으나 그 나라가 완전히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하나님의 왕권에 도전하는 마귀의 세력들과 불순종하는 인간들의 죄의 세력들이 세상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하나님의 나라와 이 세상 나라사이의 갈등과 투쟁이 있습니다. 이 싸움은 혈과 육에 속한 칼과 정치의 싸움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싸움은 혈과 육에 속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세상의 어두운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한 싸움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교회가 진리와 은혜로 왕성할 때에는 창칼로 무서울 것 같은 이 세상이 부서지기 시작하고 사람들은 하나님의 통치 속으로 들어와 하나님께 신실한 백성들로 살아가기로 결심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갈등과 투쟁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들이 아무리 많이 노력하고 애쓴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마침내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고 이 세상의 모든 악을 평정하시며 영원한 천국의 질서를 이 세상에 세우시고 모든 초자연적인 변화로 이 세상을 영광스럽게 바꾸실 것입니다. 그 나라는 천상에 속한 나라이고 실현되지 않은 미래의 나라입니다. 우리는 언제 그 나라가 이루어질지 확실한 시기와 때를 알 수는 없지만 분명한 사실은 그 나라가 매우 가까워 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나라가 매우 가까운 각양 뚜렷한 증거들이 우리의 역사와 성경의 예언 속에서 드러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이 모순된 세상에서 하나님의 의를 위해 박해를 받는 사람들은 이 세상이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위로와 은혜를 베풀어주심으로 지금 천국을 누리게 하시지만 또한 그렇게 박해를 받으며 산 사람들에게는 영원한 나라가 올 때에 그 나라의 완전한 상속자가 되게 해 주신다고 상급을 약속하십니다. 신앙은 바로 이 둘 사이에 균형을 이루는 것입니다. 역사성과 초월성이라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이미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그 십자가 사랑의 은혜와 구속의 은총, 오늘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고 우리에게 감화와 은혜를 주는 하늘의 신령한 사랑을 힘입어서 오늘 우리가 딛고 살아가고 있는 이 땅에 하나님의 통치의 질서가 이루어지도록 우리의 힘으로 완전한 승리가 쟁취되는 것은 아닐지라도 그 일을 목표로 우리에게 주신 지상과 하늘의 자원을 사용해 헌신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렇게 살도록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구원의 은혜를 주셨고 또 오늘도 은혜를 주셔서 세상을 이기며 살아가도록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세상이 전부이고 영원한 천국이 없는 것처럼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나라를 위해 애쓰지만 결국 완전한 나라는 우리의 손으로 오는 나라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도입될 초월적이고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의 실현에 있다는 사실을 믿으며 초월적인 하나님의 나라와 그 천상의 세계의 영광을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묵상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신성에 대한 중대한 모독입니다. 이 땅에 살면서 우리들이 천국을 묵상함으로써 온갖 더러운 이기심을 파쇄하고 우리의 교만을 부수며 그리고 또한 나아가서 이 세상에 대한 헛된 사랑을 십자가에 못 박아 순수한 믿음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의를 위해 박해를 받는 사람에게 이 현세의 세상에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주시고, 미래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에서도 그 나라를 상속받아 우리 주님과 함께 온 세계를 다스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III. 천국을 누리게 하심
A. “그들의 것임이요”
그러면 오늘 예수님의 말씀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을 때에 우리 예수님은 어떤 식으로 이 세상에서 천국을 누리게 하시는 것일까요? 먼저 예수님은 “의를 위해 박해 받는 자들에게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라고 말씀하십니다. 신자는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를 주님의 뜻대로 변화시키기 위해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신자는 이 세상을 남의 세상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세상이며 그래서 우리가 가꾸고 돌보아야 할 세상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재림과 함께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기 전까지 신자는 이 세상에서 정체상 나그네일 수밖에 없습니다. 어두움은 다수이고 빛은 소수입니다. 빛은 어두움을 이기지 못하지만 어두움은 빛을 박해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그 나라를 누리지만 교회 밖을 나가면 이 세상에는 죄와 하나님을 거스르는 사상들로 풍랑 이는 바다와 같습니다. 이때에 하나님의 자녀들은 비로소 이 세상에서 자신들이 나그네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나그네의 설움을 알고 계십니까? 우리의 조상들은 지역마다 씨족을 이루면서 살았고 가난과 난리 때문에 혹시 자신의 씨족 마을에서 이동하여 타성받이 마을에 살아본 우리의 조상들은 그 설움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알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러분은 아직도 경제적으로 어려워서 셋방살이를 하고 있는 사람들의 고통을 이해합니까? 지금은 혹은 2년의 계약 기간이라도 법적으로 보장을 받고 있지만 예전에는 그런 법의 보호의 장치도 없이 셋방을 사는 사람은 하층민처럼 집 주인과 거의 주종관계를 형성했고, 그의 자녀들도 그런 관계를 이어가야 했습니다. 사소한 말다툼 때문에 셋방살이에서 쫓겨나 살 곳을 찾지 못하는 나그네의 설움은 그 고통을 겪어본 사람들만이 이해하는 종류의 고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의를 위해 박해를 받는 사람들에게 이 나그네와 같은 세상에서 그 고난과 시련을 이길 수 있는 영적인 은혜와 힘을 주시기로 약속하셨고, 또 부활 때까지 잠시 세상을 떠난다 할지라도 영광스러운 부활을 기다릴 낙원에서의 안식도 약속하셨습니다. 영원히 이 세상에 이루어질 불변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미래에 소유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는 의를 위해 박해를 받는 사람들에게 보상을 약속하시기를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부분적으로는 우리의 죄 때문에, 부분적으로는 이 세상의 자원의 결핍 때문에 수많은 모자람에 시달리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는 모든 것이 풍족합니다. 먹고 입고 마시는데 하나님의 나라가 있지 아니하기 때문에 이 세상의 자원의 부족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염려의 이유가 될 까닭이 없습니다. 더욱이 하나님의 나라는 의와 진리와 평화에 있기 때문에 그 완전한 평화와 행복을 누리는 하늘나라에서는 더욱 우리의 정신과 영혼에 모자랄 것이라고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라고 말씀하셨을 때에 이것은 하나님이 주실 수 있는 모든 것을 종합적으로 당신의 자녀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B. 천국 누림의 방식
하나님은 이러한 천국을 이 세상에서 의를 위해 박해를 받는 자녀들이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면 그 천국 누림의 방식이 무엇이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은 예수를 믿으며 현세적인 축복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자비와 긍휼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굶주리고 고통 받는 우리 모두의 현세적인 삶에 대해 아버지의 심성으로 관심을 가지시고 우리를 주릴 때에 먹이시고, 헐벗을 때에 입히시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의 것들을 하나님 때문에 누리는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세상의 모든 번영과 세상의 축복은 하나님 나라 안에 있는 영적인 축복의 풍요함과 무한함을 우리에게 전달해 주는 매개체에 불과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나라에서 우리들이 누리는 하나님의 손을 떠난 복들보다는 그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그 복 안에 들어오는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도덕적인 사람들은 양심의 자유가 있겠지만 의를 위해 박해를 받는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평화에서 오는 기쁨이 있습니다. 진리를 진리대로 믿고 그 진리의 소중함 때문에 박해를 받아본 사람들이 아니면 그 진리를 누리면서 사는 것이 얼마나 크고 행복한지 모두 알지 못합니다. 핍박을 받을 때에 그 모진 고난과 어려움들을 어떻게 이길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지만 우리 주님께서는 핍박을 받을 때에 또한 그 핍박을 견디고 이길 수 있는 비밀스런 은혜와 기쁨을 함께 주시는 것입니다.
결혼하기 전 서울 변두리에 100여명 정도 모이는 교회에서 하도 일군이 없으니까 저를 집사로 임명을 했습니다. 그리고 교회가 가난하니까 교역자를 쓸 수가 없어서 집사인 저에게 80명에서 100정도 모이는 주일학교 학생들을 설교도 하고 주일학교를 지도하도록 임명을 했습니다. 저는 정말 하고 싶지 않았지만 저 아니면 아무도 할 사람이 없어서 할 수 없이 떠맡고 봉사를 하다가 주님을 깊이 만나고 목회의 길을 가기로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그 어느 해에 여름 성경학교가 있는 때였습니다. 동네에 있는 모든 교회들이 아이들이 방학한 그 다음 주일 혹은 월요일부터 일제히 성경학교를 개교하게 되었고 우리 교회도 그 시점에 맞춰서 성경학교를 열기로 하였습니다. 교회가 별로 은혜가 없어서인지 교사로 헌신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고 그나마 있는 선생님들은 직장 때문에 휴가를 낼 수가 없었습니다. 교역자도 아니고 젊은 집사가 교회를 인도하니 선생들이 고분고분 순종하지도 않았습니다. 어쨌든 성경학교를 시작하기 일주일 전에 겨우 7명의 교사들이 확정이 되었고, 우리는 각각 미취학부터 시작해서 초등학교 6학년까지 한 학년에 한 선생님이 맡기로 반을 배정하고 성경학교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직장을 다니면서 저는 일주일동안을 꼬박 금식을 하고 매일 저녁 교회에서 철야를 했습니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 하나님이 목숨을 걸 마음을 주셨고, 드디어 성경학교가 시작이 되었습니다. 예배당은 교육 시설이라고는 일체 없고 달랑 한 성도 150~200명이 앉으면 꽉 찰 나무로 만든 의지가 있는 예배당 한 칸이 교회 시설의 전부였습니다. 성경학교가 시작되었을 때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해마다 100명 정도 모이던 여름 성경학교에 340명이 몰려들었습니다. 도저히 교회 장소가 그들을 감당할 수가 없었고, 할 수 없이 예배당에 있는 모든 의자를 앞으로 쌓고 골목으로 끌어내어 바닥을 만든 다음 신문지를 깔고 아이들을 모두 가슴과 등이 맞붙게끔 예배당 안에 가득 앉히고 못 들어온 학생들은 교회 문을 활짝 열고 골목에다가 돗자리를 깔고 열린 교회 문 속으로 설교를 듣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신학도 공부한 적이 없는데 정말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많은 아이들이 회심을 하고 은혜를 받았습니다.
3박 4일로 끝나는 마지막 날에는 항상 전통적으로 1학년부터 6학년까지 학생들이 모여서 철야기도를 하는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한 200명 정도의 학생들이 손에 손에 이불과 베개를 들고 교회에 모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소란스러운 아이들을 겨우겨우 진정을 시키면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이 아이들이 십자가 설교를 듣고 한창 은혜를 받고 있던 집회가 막 마무리되어 가는 때였습니다. 갑자기 교회 문이 발길질에 부서지는 소리가 나면서 반바지를 입은 약 50대 정도의 바짝 마르고 신경질적으로 생긴 남자가 독기에 가득 찬 얼굴로 손에 무엇인가를 쥐고 흔들며 예배당 안에 슬리퍼를 신고 뛰어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작은 교회당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독한 말을 퍼부었습니다. 도대체 동네 한 가운데 교회를 세우고 이게 무슨 짓들이냐고 입에도 담을 수 없는 험한 욕을 퍼붓고 이제 조용하지 않으면 이 예배당에다가 불을 확 싸질러 버리겠다고 위협을 하였습니다. 선생님과 몇몇 어른들이 있었지만 아무도 살기등등하여 독한 말을 퍼붓는 그 사람에게 만류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잠시 후 더러운 말을 똥처럼 쏟아 붓고 이 남자는 돌아갔고 교회는 두려움으로 가득 찼습니다. 사실 그 아이들은 핍박이라는 것을 생전 처음 받아보는 아이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예배당의 단상에 다시 올랐고 작은 목소리로 설교를 계속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세상에서 우리 예수님을 믿으면서 사는 일에는 핍박과 어려움이 많단다.” 라고 했을 때 아이들은 소리가 날까봐 입을 손으로 가리며 억제한 가운데 흐느끼기 시작했고 바로 그때 아이들의 마음은 물같이 녹으며 우리 하나님과 우리를 위해 고난당하신 예수를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저는 어린 나이지만 매우 분명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성령의 뚜렷한 임재가 그 자리에 임하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아이들은 억제한 가운데 눈물로 기도하기 시작했고 교사들과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하나로 녹으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도록, 핍박을 이길 수 있는 인내와 용기를 주시도록, 그렇게 하나님을 욕한 사람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도록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다 밝히고 싶지는 않지만 그 후에 그 사람은 필설로 다할 수 없는 불행한 일을 겪었습니다. 결국 그렇게 하고 나서 하나님이 지혜를 주셔서 우리는 예배당 밑에 있는 약 10여 평의 지하실이 생각이 났습니다. 그리고 두 반씩, 세 반씩 밤새도록 교대로 지하실에 내려가서 그 속에서 기도하기 시작했고 지금은 이미 벌써 4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때인데도 나는 어른을 포함해서 어떤 회중도 복음 앞에 그렇게 순순하게 회개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본 적이 없습니다.
루마니아가 공산정권이었을 때 그 치하에서 예수를 믿는 신앙을 지키다가 박해를 받고 투옥되어 20여 년간 고문과 옥살이를 겪어야 했던 리차드 범브란트라고 하는 목사가 있었습니다. 결국 서방 세계의 많은 압력으로 이 사람을 석방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20년 만에 그는 처음 이 세상에 나와서 석방의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그때 기자가 “목사님은 지금 느낌이 어떠십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그때에 리차드 목사는 말하기를 “감옥에 있을 때에는 하늘나라였는데 석방이 되고 나니 지상에 떨어진 것 같습니다.” 라고 말입니다. 그 모진 고문과 그리고 비인간적인 핍박을 어떻게 이겼느냐고 물었을 때에 그는 말했습니다. “고문이 너무 지독하고 그리고 독방에서 너무나 외로울 때마다 지하 교회 성도들과 나누던 그 아름다운 성찬을 생각하면서 고난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라고 말입니다.
거의 같은 시대에 동유럽 공산권에서 똑같이 복음을 파수하며 고난을 받던 어느 목회자는 그를 회유하려는 정치 지도자들의 온갖 권모술수를 뿌리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만약 당신들의 회유에 굴복하여 신앙을 접는다면 나는 박해 받지 않고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껏 내가 토해놨던 수많은 설교와 내가 써 놓은 글들은 빛을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이 박해에 굴복하지 않고 당신들에게 저항한다면 당신들은 나를 죽일 것이고, 당신들이 죽이면 나는 죽음을 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들이 만약에 나를 죽인다면 내 피는 이제껏 토해놓은 내 설교 속에 스며들 것이고, 내 피는 내가 써놓은 수많은 글 속 한 줄 한 줄 베어 나는 죽어 살아서도 내가 외친 복음의 진리는 모두 일어나서 소리칠 것이고 결국은 그 진리가 당신들을 이길 것입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IV. 적용과 결론
고난, 박해, 우리에게 아직까지도 남아있는 신앙의 단어입니까? “복음 들고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라. 소돔 같은 거리에도 사랑안고 찾아가서 종의 몸에 지닌 것도 아낌없이 바치리라.”고 하는 찬송가는 이미 우리의 예배 속에서 폐기된 지 오래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신앙의 자유가 충분히 주어졌기 때문에 폐기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신앙이 핍박을 모를 정도로 이 세상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에 사실상 우리의 마음속에서 사라진 것입니다. 저는 지난주일 홀로 예배당에서 이 설교를 준비했고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많은 생각에 잠겼습니다. 오늘 여러분이 버겁도록 짊어지고 있는 인생의 무게와 번민, 상처라고 하는 것, 그리고 여러분이 자기만이 아는 무거운 인생의 십자가라고 하는 것들이 어쩌면 팔복의 관점에서 보면 너무 사치스러운 종교적으로 부르주아적인 쓸모없는 가치 없는 고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신앙의 본질을 붙들고 본질에 죽고 살았더라면 하지도 않았을 그런 고민과 괴로움들이 여러분의 온 신앙의 날개를 꺾어버리고 하늘을 향해 비상하며 날아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도록 창조된 독수리와 같은 여러분의 영혼이 이 땅에서 다리가 퉁퉁 굵어지도록 모이나 쪼아 먹고 사는 날수 없는 기름진 철새처럼 돼 버리지 않았는지 생각하게 하는 밤이었습니다.
우리는 오늘날과 같은 시대에 박해가 어디에 있으랴 하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겉으로는 이렇게 완전한 신앙의 자유가 주어진 시대에도 불평등과 그리고 극단적인 자본주의의 폭력 때문에 성경에 근거도 없는 옳지 않은 권위주의 정책성의 폭력 때문에 여기저기서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당하고 있는 사람들과 그리스도는 함께 고난을 당하십니다. 이 모든 현실들을 돌아보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계셨더라면 느끼셨을 아픔을 함께 느끼며 고통에 동참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하나님의 자녀들의 당연한 삶의 몫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눈을 들어서 자유로운 여러분만 보지 말고 박해를 받는 이웃들을 보고 자유국가의 경계를 넘어서 지금도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뜻을 따른다는 이유 때문에 개처럼 폭력을 당하고 짐승처럼 죽어가고 있는 인권이 유린되고 있는 제 3세계와 여러 나라들을 생각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비록 모든 자유를 누리며 살아도 그들이 부자유하기 때문에 부자유를 느끼고, 그들이 박해를 받기 때문에 자유로운 세상에 살면서 그 박해의 아픔을 느끼는 것이야 말로 기독교 신앙입니다. 그래서 자유로운 나라에서 모든 것을 누리며 살아도 기도할 때마다 선교의 소식을 들을 때마다 우리의 마음은 이 세상의 무지와 폭력, 고통과 결핍으로 인해서 짓밟히고 그 의를 위해 박해 받는 사람들의 고난을 영적으로 함께 느끼며 동참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아픔이 우리의 아픔이 되고, 우리의 자원이 그들의 고통을 더는데 이바지하게 되기를 우리는 진심으로 바라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믿고 변화를 받은 신실한 제자들, 당신을 믿고 따르는 무리들에게 천국의 소명을 주시면서 마지막 팔복으로 의를 위해 박해 받는 자가 되기를 기대하셨습니다. 주님 대신 박해를 받는 것이 아니라 주님은 그들의 그 박해를 통해서 교회를 순결하게 하시고 또 자신들이 박해를 받음으로써 자신들에게 전해지고 또 붙들고 있는 그 복음이 그야말로 그것과 함께 죽고 살만한 가치가 있는 하나님의 복음이라는 확신을 갖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손해 볼 기회가 온다면, 예수를 위해 희생해야 할 순간이 온다면, 심지어 그리스도를 위해 박해를 받아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이 예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사람이라는 것을 하나님이 친히 증명해 주고 계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난 받는 팔복의 사람들(1)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마 5:11)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많은 사람들이 10절부터 12절까지가 전부 여덟 번째 복에 대한 설명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물론 그렇게 볼 수도 있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팔복은 10절로서 끝나고 11절부터 12절까지는 사실상 팔복의 사람이 되어서 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 그가 이 세상으로부터 존재론적으로 박해를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팔복의 사람은 그 마음 안에 하나님의 나라의 통치의 질서가 이루어진 사람이기 때문에 세상 나라의 질서와는 다른 사람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고 거기에서 오는 고난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여러 차례 말씀드린 바와 같이 팔복의 사람은 어떤 행위를 하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무엇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 됨됨이의 인격이 팔복의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 사람들은 자신 안에 하나님의 나라의 질서가 이루어진 사람이고 세상은 여전히 세상 나라의 속한 질서를 다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에서 고난 받는 팔복의 사람들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II. 고난 받는 팔복의 사람들
A. 세상에서 의를 추구함
팔복의 사람은 그 자신이 이 세상 나라와는 다른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받는 그 나라의 백성다운 인격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 나라의 질적인 차이가 있고, 그래서 이 세상에서 고난을 받는 것입니다. 팔복의 사람은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받는 사람으로서 그는 이 세상에 살면서 필연적으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의를 추구하면서 살게 됩니다. 누구든지 자기 안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만큼 자기 바깥에서도 그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갈망하기 때문입니다. 팔복의 사람 안에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의 의는 종교적이고 신앙적이고 그리고 복음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의입니다. 사회적인 의는 법률과 양심을 따라 이루어지는 의입니다. 그렇지만 이런 종교적인 의와 사회적인 의 사이에는 일정 부분 합치되는 부분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팔복의 사람은 세상 사람들로부터 도덕적인 칭찬을 받기 위해서 이런 저런 일을 행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가 만난 거룩하신 하나님, 그분의 통치 때문에 경건하게 산 결과가 바로 도덕으로 나타나는 것이고, 일정 부분은 이 세상의 사회적인 의와 합치될 때도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영적으로는 그리스도의 교회에 속해있고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미 누리고 있고 그 하나님의 나라의 의를 따라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육신적으로는 세상 나라에 여전히 속해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한편으로는 영적으로 그리스도의 왕국에 속했으면서도 육체적으로는 세상 나라에 속해있기 때문에 이 세상 나라에 법률과 양심을 따라 살아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두 나라의 질서가 충돌할 때에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따라야 합니다. 그러나 이 하나님의 궁극적으로 성취되는 나라를 대망하면서 그는 이 세상에서도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에 부합한 의롭고 평화로운 세상이 되기를 힘쓰며 거기에 이바지하며 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하나님의 나라의 통치를 갈망하는 사람은 사회적인 의에 무관심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만약 이런 사회적인 불의와 그리고 사회적인 불공평에 대해서 항거하는 마음이 없다면 그의 마음속에 진정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진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저는 지난 주간에 법원에서 판결을 내린 한 사건을 보면서 분노가 솟구치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한 재벌그룹에 회장이 벌금을 선고를 받았습니다. 249억 원의 벌금을 선고받았고 어찌된 일인지 그 벌금을 하루만 감옥에서 보내면 5억 원씩 탕감을 받을 수 있다는 말도 되지 않는 판결을 어느 판사가 그것도 법원장이라는 사람이 내렸습니다. 우리같이 법을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도 말도 되지 않는 판결이었고 더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이 말도 되지 않은 판결을 받아든 검사는 상고를 포기하고 판결이 확정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이 전직 회장은 감옥 속에서 엿새를 보내는 동안에 30억을 탕감을 받았고, 휴일에도 탕감을 받았고, 그가 한 일이 쓰레기 분리수거와 봉투 붙이는 일이었다고 하니 어이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5억 원이라는 돈이 얼마나 큰 지 아십니까? 여러분 중에 5억 원을 현찰로 만져보신 분이 몇 분이나 되는지 궁금합니다. 여러분은 오늘날 노동자들의 법률상 정한 최소한의 매시간당 최소 임금이 5120원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17살짜리 고등학생이 5120원씩 시급을 받고 하루에 다섯 시간씩 휴일도 없이 꼬박 일해서 52년 반을 알바를 해야지 모을 수 있는 돈입니다. 그것을 이 회장은 감옥에서 하루를 개기며 5억씩 탕감을 받았던 것입니다. 정말 분노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그 판결을 내린 판사라는 그 인간입니다. 결국은 그 사람은 이 일로 인해서 사직서를 일주일 안에 제출을 했고, 어제 신문에 보니까 피고인과 무엇인가 거래 관계가 오간 듯 한 주택 거래 내역에 대한 흔적이 언론에 포착이 되었습니다. 사표로는 안 되고 끝까지 수사해서 죄가 있다면 이 판사를 감옥에 쳐 넣어야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더욱이 검사의 실명은 밝혀지지 않고 있는데 반드시 언론에 밝혀서 그의 배임 행위를 물어야 하고 죄가 있다면 그의 모든 재산 거래 내역을 파악해서 법정에 세워야 합니다. 결국 알고 보니 이것은 소위 향판이라고 하는 향판, 향검, 향변, 그리고 그 고향에 뿌리를 둔 이 부도덕한 회장의 말하자면 네 세 사람의 합작이었습니다. 그들이 생각할 때에는 지방에서 이루어지는 다 망한 그룹의 판결 정도에 누가 주목하랴 했지만 언론은 일주일 내내 들끓기 시작했고 그리고 결국은 이에 비겁하게 굴복해서 검찰은 기소를 중지시키고 그리고 이 사람의 재산을 벌금을 추징하겠다고 밝혔습니다. 그렇게 초등학생도 할 수 있는 너무나 당연한 일을 어떻게 이렇게 사회의 지도층 인사들이 결탁을 해서 법을 유린하고 그렇게 5억씩 탕감 받는 그 현실을 보면서 가난하게 사는 사람들이 느끼는 좌절과 불의,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전면적인 회의와 사회 정의에 대한 일말의 기대감의 소진 같은 것들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그런 사람들이 이런 민주국가에서 국가의 녹을 먹고 법을 집행하고 있는지 참 가관이라는 생각이 들고 감옥에 갇혀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과연 저 사람들이 정상적으로 감옥 속에 들어간 사람들인지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여러분이 법원에 보면 정의의 여신이 천칭을 들고 무게를 재고 있는 장면을 보셨을 것입니다. 예외 없이 정의의 여신은 두 눈을 가리고 있습니다. 빈부나 귀천, 출신이나 성별에 관계없이 법의 양심에 따라 재판을 하는 것이 정의의 여신이 할 일이고 그 정신을 법원이, 법 집행자들이 물려받은 것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들이 이 나라에서 버젓이 일어날 수 있고, 그리고 그런 일들을 행하고도 일말의 뉘우치는 기색이 없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지 생각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그 그룹회장은 알고 보니 여러 명의 내연의 여자들로부터 많은 자식들을 낳았고 그리고 편법적인 방법으로 수많은 유산들을 상속시켰고 석방된 그 다음날부터 이제 재산을 세탁하는 일을 착수했다는 흔적들이 언론에 보도되었으니 이 어찌 분노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겠습니까? 자본주의 사회에서 잘 사는 사람과 못 사는 사람이 있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그것이 어떻게 보면 자본주의가 가지고 있는 어느 체제도 따라올 수 없는 사회 발전의 힘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불공평한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거기에서 패배한 사람들이 승복할 수 없는 게임의 룰입니다.
얼마 전 육군 여 중위 한 사람이 자살을 했습니다. 자살의 사유를 유서를 통해서 들어보니 상관 중 소령이라는 인간이 있는데 끊임없이 업무적으로 괴롭히고 핵심은 나 하고 하룻밤만 자면 군대생활을 편하게 할 수 있는데 너는 바보같이 그 눈치도 없냐 이것이었습니다. 업무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다고 부하들 앞에 말할 수 없이 모욕을 주고 성적인 모욕적인 발언을 끝까지 하다가 결국은 견디지 못한 이 여 중위는 자살을 택했습니다. 그런데 군대라는 곳이 이 사람을 잡아다가 재판을 한 결과가 가관입니다. 초범이고 의도가 없으니 집행유예 때린다 하고 해서 결국은 석방시켜 버렸습니다. 아니 모든 증거가 있고 증언을 할 수 있는 증언들이 있는데 어떻게 한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사람이 그렇게 가벼운 처벌을 받을 수가 있겠습니까? 더욱이 그 여자는 절에 다니는 불교신자였고 그렇게 성적으로 유혹을 집요하게 하고 요구를 들어주지 않기 때문에 이 여자를 괴롭힌 이 사람이 그리스도인이었다고 하니 더더욱 가관입니다. 더 기가 막힌 것은 그 여자를 괴롭힌 이유 중의 하나가 주일날 왜 교회에 출석하지 않느냐는 걸로 괴롭혔다고 하니 도대체 이 인간은 품질이 무엇으로 만들어진 인간인지 궁금한 것입니다. 나는 이 두 뉴스를 상세히 읽으면서 정말 한편으로는 피가 끓고 한편으로는 눈물이 나왔습니다. 어떻게 세상이 이렇게 될 수 있을까? 그렇게 쓰레기를 분리수거 하면서 담장 안을 어슬렁거리며 다니는 사람 옆에 수감된 한 시간 5120원씩 시급을 받던 젊은이는 그 감옥 속에서 사회의 정의에 대해서, 민주주의에 대해서 무슨 생각을 하게 되겠습니까?
결국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한 마디로 말해서 그리스도인다운 기개를 잃어버렸습니다. 여러 해 전 중국에 있는 한인 교회에 부흥회를 갔습니다. 집회가 끝났을 때에 목사님은 교회 형편상 사례비는 드릴 수 없고 가까운 계림이라는 곳을 구경시켜 드리겠습니다 하고 우리 부부를 안내해 주었습니다. 한 이틀 계림에 묵으면서 여러 가지 풍경을 보는 가운데 정말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생각나게 하는 한 대목이 있었습니다. 백호산장이라는 곳이었고 거기에는 백호뿐만 아니라 수많은 호랑이들만 모아놓은 동물원이었습니다. 저는 거기서 생전 처음 하얀 털을 가진 호랑이들을 보았습니다. 더 마음 아팠던 것은 거의 500kg가 넘는 거구를 가진 그 하얀 호랑이들이 조련사의 호루라기 소리에 맞춰서 앞으로 굴러, 뒤로 굴러, 옆으로 취침, 우로 취침, 두발 들어, 두발 내려, 그것을 그대로 따라 하면서 할 적마다 고기 한 점씩 얻어먹고 늙어가고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나는 거기에서 그리스도인을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 예수의 구속의 은혜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 하나님께서 하늘의 자원과 이 땅의 자원을 주셔서 어두운 이 세상에 빛의 나라가 임하게 하기 위해 살도록 소명된 사자와 같은 그리스도인들이 무엇 때문인지 이 세상의 맛에 길들여져서 이제는 그 산중에서 호령하여 모든 들짐승들을 벌벌 떨게 하는 백수의 왕으로서의 위엄을 발휘하는 대신 앞으로 굴러, 뒤로 굴러, 옆으로 취침, 좌측으로 취침, 이 장단에 맞추어서 고기 한 점씩 얻어먹는 재미로 재롱을 부리고 늙어가는 그 비참한 호랑이들 속에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불의를 향해서는 입 한 번 떼지 못하는 아무 기개가 없는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는 이빨로 서로를 물어뜯어서 그래서 피를 바르는 광경은 그야말로 가관입니다. 이것은 결코 팔복의 사람이 이 세상을 사는 삶의 방식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나라가 여러분 속에 이미 임했다고 믿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완전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팔복의 사람으로 살고 싶으실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이 세상에 이루어지는 의에 대해서는 어떤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까? 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 있으면서 이런 말도 되지 않는 불법한 일들에 대해서 침묵하고 심지어는 동조하기까지 하고 이런 문제를 일으키는 근원에서 활동하면서 자기 안에 이루어졌다고 고백하는 하나님의 나라와는 정반대의 나라를 이 세상에 이루면서 살아가는 그 사람은 복이 있을진저가 아니라 화 있을진저 라고 말해야 될 것입니다. 물론 이 세상에 이루어지는 사회적인 의를 통해서 인류의 궁극적인 문제가 해결된다고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존엄과 가치, 평등,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들에게 부여하신 이 기본적인 권한과 가치들을 짓밟는 일들이 이 세상에서 일어날 때 그리스도인들이 분연히 궐기하고 그리고 분노하지 않는다면 이 세상은 희망이 없는 것입니다. 물론 나는 그 재판한 법원에 사재 화염병을 던지고, 그런 재판을 내린 법관을 개인적으로 찾아가서 테러하고, 검사들의 집에 불을 지르고, 그를 구금하고 구타하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할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사람들에게 아직까지도 시민적인 양심이 살아있고 그리고 그런 말도 되지 않는 사회의 정의를 왜곡시키는 일에 대해서 참지 못해 하는 분연한 시민들이 있고, 그러한 불의에 대해서 가장 분노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하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전히 불신 사회든지 교회든지 하나님의 진리는 서슬 시퍼렇게 살아서 지금도 우리 가운데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하고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이런 일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인 것입니다.
B. 하나님 나라를 추구함
팔복의 사람들은 이 세상에 살지만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통치의 결정적인 특징은 의입니다. 그리고 이 의는 단순히 죄인을 벌하고 선한 사람을 상주는 그 이상입니다. 이것은 사랑을 완성하는 정의이고 정의에 의해서 완성되는 사랑입니다. 천국은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요 의와 평강과 희락이니라고 로마서 14장 17절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 의야말로 하나님 나라의 특징이고 그래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의 인격은 하나님의 그 뜻이 이 세상에 이루어진 그 하나님의 법에 합치한 상태, 이것을 가장 즐거워하는 것이고 인간의 노력으로는 이러한 세상을 이룰 수가 없기 때문에 의이신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덧입혀 우리로 하여금 그 구속을 힘입어 영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함으로써 하나님의 통치가 이 세상에 이루어지게 된다는 것을 믿는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후서 1장 1절에서 베드로 사도는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밝히 말하고 있고 로마서 10장 4절에서 사도바울은 그리스도야말로 우리를 위하여 모든 율법의 마침이 되시느니라고 선언하였습니다. 결국 이렇게 하나님 자신이 우리의 의가 되시고 우리가 성취할 수 없는 그 의를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해 영적인 방법으로 성취해 가시려고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만약에 이러한 일들이 필요 없다면 정보와 나라로서 충분했을 것인데 그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교회를 세워서 그래서 교회를 통해 각 사람들 마음속에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의 통치를 구현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통치를 통해 이 세상이 그들 속에 임한 하나님의 나라와 같은 품질의 나라가 성립되도록 헌신하게끔 만드셨고 그래서 오늘도 우리가 이 거룩한 주일에 그런 소명의 헌신된 삶을 살고자 주님을 경배하기 위해 모인 것입니다.
III. 예수 닮음과 순례자의 고난
A. “나로 말미암아”
결국 여기서 말하는 팔복의 사람은 어떤 행위의 사람, 소유의 사람이 아니라 인격의 사람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 팔복의 원형은 지상 생애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당신 자신의 인격 바로 그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바로 이 팔복의 원형적인 특징을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보여주시며 일생을 사셨던 것입니다. 결국 팔복의 사람은 예수 닮은 사람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는 반드시 이 세상에서 순례자로서 고난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닮음과 순례자로서의 고난이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너희가 복음을 전하다가 이교도들의 박해를 받고 불신자들에게 핍박을 받으면 복이 있나니 라고 하는 의미가 아닙니다. 복음 전파 말로 하는 복음 전파와 선교뿐만 아니라 팔복의 사람이기 때문에 존재 그 자체가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에게 세상 나라와는 다른 질서를 보여주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핍박을 받는 존재론적인 박해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저는 지난 시간에 여러분에게 아테네의 소크라테스와 같은 시대에 살았던 명석하지만 방탕했던 알키비아데스라는 사람을 예로 들었습니다. 그가 소크라테스를 왜 그렇게 미워했습니까? 소크라테스를 미워할 이유가 소크라테스 자신에게는 없었지만 소크라테스와 대화를 하면 알키비아데스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것이 싫었기 때문에 소크라테스를 미워하였던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햇빛이 나쁜 것이 아니라 눈에 안질이 났기 때문에 그 밝은 햇빛이 눈부시고 괴로워서 어둠 속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말하는 존재론적인 박해입니다.
한 사람이 문자 그대로 팔복의 사람이 되면 그는 곧 작은 예수가 되는 것입니다. 정확히 말해서 예수의 작은 분신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계실 때에 박해와 모욕과 핍박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이 무엇을 잘못 하셨습니까? 예수님이 누구의 돈을 빼앗고 누구를 때렸습니까? 아닙니다. 주린 자를 먹이고 병든 자는 고쳐주셨고, 무지한 자들에게는 진리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외롭고 소외된 자들에게는 친구가 되어 주셨을 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예수를 그렇게 미워했을까요? 그것은 예수님을 대할 때마다 그들은 그런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들은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 그것을 예수 만날 적마다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세상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의 팔복의 인격을 필요에 따라 부분적으로는 좋아할 수 있습니다. 자기 죄 때문에 비참하게 된 사람이 팔복의 사람 중 긍휼히 여기는 성품을 만났을 때에는 구제받을 수 있는 기회가 되지 않겠습니까? 이익의 문제를 놓고 첨예하게 대립할 때 협상의 당사자가 평화를 만드는 팔복의 사람이라면 양보 받을 수 있는 절호의 이용 기회가 될 것입니다. 더러운 술수로 간사한 꾀를 부려 게임에서 불법한 방법으로 이기려고 하는 마음 더러운 사람들에게 청결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인은 속여먹기 좋은 상대가 될 지도 모릅니다. 그럴 경우에는 팔복의 사람이라 할지라도 부분적으로 일시적으로 환영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팔복의 사람 자체가 될 때에 그 사람 자체를 좋아한다는 것은 이 세상 사람들로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한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 속해서 그 사랑의 통치를 받고 그리스도를 왕으로 섬기는 사람이고 또 한 사람은 자신을 왕으로 삼으며 사는 세상 나라의 질서를 추구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의롭고 거룩했던 사람, 세례 요한의 죽음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는 헤롯왕에 대해서 직언을 하며 당신은 부도덕한 일을 행했다고 책망한 사람이었습니다. 헤롯은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를 취하여 인륜을 어기는 결혼 관계에 들어간 사람이었고, 세례 요한은 이러한 악을 저지른 헤롯을 정면으로 탄핵하였습니다. 헤롯이 하나님을 믿고 자기의 설교를 알아들을 만한 신앙을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에 통렬하게 비난한 것이 아니라 그것과는 상관없이 그의 행동이 지도자로서 이 세상에 미치는 나쁜 영향 때문에 그는 정의로운 인격으로, 거룩한 성품으로 그를 책망하였습니다. 헤로디아에게 이 세례 요한은 눈에 가시와 같았고 얼마든지 죽일 수 있을 정도로 표독스러운 여인이었지만 헤롯 때문에 죽일 수가 없었습니다. 요한의 비범한 책망을 들을 때에 정치적으로는 괴롭고 수치스러워서 이 요한을 죽여 버리고 싶었지만 백성들이 두려웠고 또 한편으로는 지적을 통렬하게 받으며 괴로워하지만 왜 그런지 자기의 행동보다는 세례 요한의 이 외침이 진리에 가깝다는 양심의 가책을 느꼈기 때문이었습니다.
B. 팔복의 사람과 그 “의”를 보임
보십시오. 옳은 이야기는 교회에서만 하라고 하나님이 입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회사에서, 사회에서 불법한 일이 자기 주위에서 즐비하게 일어나도 탄원서 한번 쓸 줄 모르는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는 입을 크게 벌리고 싸우고 성경을 들먹거리며 교회를 비난하는 것은 눈뜨고 볼 수 없는 위선적인 태도입니다. 어떻게 그 사람의 신앙적인 기개는, 용기라고 하는 것은 권력이 있는 국가나 그리고 힘 있는 사회에 대해서는 아무 효력을 발휘 못하고 양떼들이 모여 있는 교회에서만 그렇게 기개를 발휘할 수 있는지 그 거짓된 용기에 감탄할 뿐입니다.
팔복의 사람은 그 하나님의 의, 곧 그 하나님의 나라의 통치를 보여주기 위해서 이 세상에 살아있는 사람입니다. 팔복의 사람은 그 의를 보이기 위해서 이 세상에 살아가고 있고 신자로서 인간으로서 그의 존재의 가치는 바로 자기에게 이미 임한 앞으로 반드시 오게 될 그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를 이 세상에 보여주어 예수님과 세례요한이 외쳤던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워 왔으니 회개하고 예수를 믿게 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신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을 때에 그의 영혼에는, 마음에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지위에 있어서는 그는 이 세상에 죄인이었다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진노의 자식이었다가 의로운 그리스도의 백성들이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이 팔복의 상태에는 저절로 항구적으로 계속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팔복의 인격이 계속 유지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변화된 영혼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과 그리고 인격적인 덕을 매일매일 죄와 싸우며 거룩하게 함양해 가는 것과 순간 순간 결단을 요하는 하나님 나라의 질서와 세상 나라 사이의 질서 사이에서 치열한 삶으로 자기의 신앙 고백을 현실화시켜 나아감으로써만 팔복의 사람됨을 유지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복음과 성령으로써 영적인 변화를 유지해 감으로써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팔복의 사람됨은 유지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런 팔복의 사람들이 자기와는 다른 이 세상 나라의 불경건하고 악한 사회의 질서와 그 영향력에 대해서 끊임없이 분노하고 항거하고 그 망가진 세상을 부둥켜안고 그것이 마치 자신의 죄인 것처럼 가슴 아파함으로써만 팔복의 사람됨의 상태는 유지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지난 주간에 우연히 탈북하여 복음 사역을 하고 있는 조수아라는 선교사의 간증을 들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간증을 들으면서 우리가 알고 있는 북한에 대한 지식이 얼마나 파편적이고 그리고 부분적이며 그리고 또 이 세상에서 우리들이 상상할 수 없는 끔찍한 일들이 오늘도 일어나서 하나님의 나라의 질서에 반하는 가치들을 이 세상에 강요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 여성은 지금은 한국에서 결혼을 해서 복음 사역을 하고 있는 사람인데 한때 평양에서 엘리트로서 평양의과대학을 졸업한 인재였습니다. 무슨 이유인지 자세히 듣지는 못했지만 어쨌든 북한 땅이 여러 가지로 힘들었기 때문에 그는 중국으로 탈북을 했고 그리고 거기에서 탈북자의 신분이지만 여러 가지로 활동을 하며 경제적으로 안정된 삶을 살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여러 해가 흐른 어느 날인가 불현 듯 두고 온 조국이 그리워졌고 그리고 고향 산천이 그립고 가족들이 그리웠답니다. 그래서 스스로 중국 공안을 찾아가서 ‘나는 탈북자다. 그리고 나는 북한으로 돌아가고 싶다.’라고 고백을 했더니 중국 공안에서 당신 그런 상태로 자수해서 스스로 북한으로 돌아가도 당신은 죽는다 그러니 가지 말라고 인도적으로 말렸답니다. 그때 이 여성은 자기가 조국을 배반한 것도 아니고 돈 좀 벌겠다고 잠시 나왔을 뿐이고 이제 잡힌 것도 아니고 스스로 사랑하는 조국의 품으로 돌아가겠다는데 그게 무슨 큰 죄일까 그리고 그것이 죄라면 그 벌이야 얼마나 가벼울까 이렇게 생각하고 결국은 스스로 자수하여 송환되는 탈북자들 틈에 끼어서 북한으로 이송되었습니다. 자신의 이런 순진한 조국에 대한 생각이 얼마나 헛된 망상이었는지를 깨닫는 데는 단 이틀도 걸리지 않았습니다. 북한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다른 모든 탈북 하다가 붙잡힌 사람들과 꼭 같은 조국의 배반자로 취급을 받았고 더욱 매를 맞은 것은 당이 너를 위해 얼마나 많이 투자하고 엘리트 교육을 시켰는데 네가 당을 배반하고 탈북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거기서 필설로 다할 수 없는 고문을 당하고 엄청난 매를 맞았습니다. 그의 증언에 의하면 그 심문하는 장소 자체가 피바다였고, 그리고 수시로 비명 소리가 나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은 시체가 되어서 끌려갔다고 합니다. 아무리 여자의 몸이지만 26kg까지 내려갔답니다. 그리고 결국은 모진 고문 끝에 이 여자는 죽었고, 사람들이 죽었다고 확신하고 시체 더미에 버렸는데 기적적으로 오빠를 만나서 그래서 그를 끌어올려 병원에서 이제 치료를 받게 되었고 이 여성이 생각하니 치료를 받고 나면 용서라는 것 없고 반드시 다시 형벌을 받을 텐데 개죽음을 당하는 것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2층에서 그 다 부러진 몸으로 뛰어 내렸고, 그때 몰골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도록 상처와 피투성이 그리고 더러운 옷을 입고 뛰어 내리면서 뼈가 부러져서 걸을 수도 없고 땅을 엉금엉금 기어야 했는데 지나가는 사람의 눈길을 끌지 못했답니다. 그런 사람들이 그 골목에 여럿 지나다녔기 때문입니다. 기적처럼 지나가던 병원 트럭을 만났고, 트럭에 타고 있던 군의관 장교는 놀랍게도 젊은 시절 자기를 짝 사랑하던 청년이었습니다. 이 간부인 이 사람의 도움으로 12개의 처소를 모두 통과하고 결국은 강을 건너 국경을 넘을 수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 여자는 이제 북한으로 돌아갈 모든 꿈을 포기하고 남한 행을 결심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위조 여권, 위조 호적, 모든 것을 사야했고 몇 천만 원의 돈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그는 열심히 돈을 벌었고 그가 하는 주된 일은 한국 사업가들의 무역을 할 때에 통역을 하는 일이었다고 합니다.
그때 있었던 이야기 한 토막은 제 가슴을 갈기갈기 찢어놓았고 인간이 사는 세상에 과연 그런 일이 있을까 하는 눈물이 나오게 만들었습니다. 그도 울었고, 나도 울었습니다. 어느 날 한국에서 온 사업가들이 바이어들이었는데 이제 물건을 파는 사람들에 의해 안내를 받으며 접대를 받으러 어느 음식점을 향하고 있었답니다. 시내에서 40km가 넘는 길을 달리는데 자신도 가본 적이 없는 산 속으로, 산 속으로 들어가더랍니다. 과연 거기 토담으로 지은 두 개의 건물을 가진 음식점이 있었고, 그리고 그 음식점에서 이 한국 사람들은 대접을 받기로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손님들이 도착하자 뚱뚱한 주인은 나와서 “오늘이야말로 여러분을 확실하게 대접을 해 드리겠습니다.” 하더니 이 한국 사람들을 데리고 음식점 옆에 있는 토담집으로 데려갔고 1층에는 사람이 기거하는 곳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짚들이 가득 있는 마구간 같은 것들이 보였답니다. 주인이 문에서 마치 개를 부르듯이 “쯧쯧쯧” 부르기 시작하자 놀랍게도 그 지푸라기를 헤치며 다섯 명의 여성들이 나타났습니다. 손과 발을 모두 쇠사슬에 묶였고, 목도 쇠사슬에 묶여 기다란 쇠줄에 말뚝을 박아놓은 상태에서 그들은 엉금엉금 기어 나왔고 그들 앞에는 돼지 밥통처럼 음식들이 주어졌는데 두 손 발을 묶인 상태에서 개처럼 그 음식을 핥아 먹으며 살아가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19살에서 23살 먹은 북한 처녀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식사가 끝나면 이 처녀들은 성 접대용으로 주어지게끔 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도망가다가 붙들린 아이들은 손목이 끊기고 임신하고 탈출하려고 방황하는 아이들은 죽였다고 합니다. 어떻게 인간이 사는 세상에서 이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이런 일들이 남의 나라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최근에 지적인 장애가 있는 사람들을 거의 납치해서 염전에 가둬놓고 10년씩, 15년씩 노예처럼 부려먹은 사람들을 기억할 것입니다. 만약에 그 사람들이 장애가 있는 자기의 딸이었다면, 그리고 자기 아들이었다면, 그리고 자기 아버지였다면, 동생이었다면 그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15년 동안 임금을 한 푼도 주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다고 하니 이것은 선진국 같으면 거의 2급 살인죄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습니까?
저는 여러 해 전 캄보디아에 처음 갔을 때 킬링필드의 현장에 갔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거기에서 마음속으로 한없이 울었습니다. 미국의 지원을 받는 부패한 론롤 정권이 백성들을 독재하고 부정부패를 일삼다가 폴포트 정권에 의해서 축출되고 난 후 캄보디아의 비극은 시작되었습니다. 모든 농민과 노동자가 아닌 부르주아를 모두 죽이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사형장에서 손이 곱다는 이유 때문에 사형을 당했다고 하니 그 폭압적인 처벌에 그 무모함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 현장에는 지금도 비가 부슬부슬 오는 날에는 발로 땅을 차보면 70년대에 죽어간 수많은 사람들의 옷이 지금도 지천에 널려 있습니다. 수천 개의 거기서 죽임 당한 해골들이 유리탑 속에 있고 거기에는 킬링 트리라고 하는 나무가 있는데 그 나무 앞에서 가장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소위 노동자와 농민이 아닌 사람들의 아이를 두 발을 공산당들이 손으로 잡고 그리고 그 나무에다가 머리통을 부셔서 수없는 아이를 죽였기 때문에 킬링 트리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린 아이들을 군인들이 공중으로 던지면 또 다른 군인들이 그 아래서 클레이 사격하듯이 공중으로 던져진 그 아이 머리통 맞추기를 했다고 하니 이 어찌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이렇게 해서 200만 명의 사람들이 도륙을 당했고 그때 저는 그 현장에서 예전에 영화로는 봤지만 그 현장을 처음 보면서 마음속으로 한없이 울면서 대상은 없지만 외치고 싶었던 질문이 그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여기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 인류의 양심은 어디에 있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런 끔직한 일들은 40년 전에 끝난 일이 아니라 지금도 이 세상 구석구석에서 그리고 우리와 가장 가까운 곳에서 이 일들이 재현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 사건과 관련된 모 그룹은 할 이야기가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지난 두 주전에 ‘또 하나의 약속’이라는 영화를 인터넷에서 다운을 받아서 혼자 조용히 생각하며 시청하였습니다. 물론 그 사건에 대해서 우리나라 굴지의 그룹인 어느 그룹은 할 이야기가 많을 것입니다. 법을 따라서 지켰고, 또 기네스북에 오를 정도로 안전에 최선을 다했지만 노동자들이 성과를 올리기 위해서 스스로 안전장치를 풀고 그러다가 일어난 사고라고 변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부인할 수 없는 사실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 영화를 상영관에서 상영하지 못하도록 누군가에 의해서 조직적이고 아주 비열한 방해공작들이 계속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누가 있겠습니까? 그 배후에? 그리고 또 하나의 사실은 설령 그것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회사에서 작업량을 올리고 성과급을 주고 경쟁을 부추겨서 그래서 그들이 돈을 벌어보겠다는 의도로 했다면 안전장치를 해제하고 그 일을 했다면 그 현장을 묵고한 책임자를 즉시 처벌해야 했고, 하지 말았어야 합니다. 자신의 딸이, 자신의 자식이 거기에 가서 그 위험한 작업을 하면서 안전하게 되어 있어서 안전하게 하면 안전하다고 그 사람들이 주장하니까 그렇다고 믿지도 않지만 어쨌든 그렇다고 쳐도 그래서 몇 천원, 몇 만원을 더 벌기 위해서 안전장치를 풀어버리고 그 위험한 독극물들을 마시고 결국은 암에 걸려 간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자기 딸, 자기 자식, 자기 동생도 거기서 그렇게 일해서 돈 10만원이라도 더 벌라고 그렇게 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말 비열하게 느껴진 것은 그렇게 해서 결국은 수많은 증인들이 나오고, 한 공장에서 헤아릴 수 없는 사람들이 유사한 질병으로 죽어가자 결국은 결정적인 증거가 나오고 증인이 나오고 해서 재판을 뒤집을 수 없게 되자 비열하게 3억 줄게, 5억 줄게, 6억 줄게, 끊임없이 회유해서 그 재판을 가지 못하도록 한 사람, 한 사람을 다 그 더러운 돈으로 매수하는 행위는 국내의 굴지 그룹이 할 수 있는 도덕적인 행동이 아닙니다. 이 두 가지 사실에 대해서는 추호도 변명할 수 없다고 나는 생각을 합니다. 용기 있게 사실의 전부를 이야기하고 통절하게 국민 앞에 용서를 빌고, 처벌할 사람들을 처벌하고, 보상할 사람들을 정당한 방법으로 보상을 해서 자신들의 기업이 이 사회적인 불편한 현실에 대해서 책임이 있다는 것을 입증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이 설교를 하기 위해서 많이 망설였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 들 중에 그 회사를 다니는 신실한 교인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인류의 양심에 반하는 일이고 그리고 사회적인 정의의 원칙에도 위배되는 일입니다. 솔직히 우리는 마르크스의 자본론에서 이야기하는 완전 프롤레타도 아닌 사람들이 여기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저는 좌파, 우파의 논리를 떠나서 그 재판과 오늘날 최근에 일어나고 있는 이 말도 안 되는 일들을 보면서 굉장히 좌파에 있는 사람들을 동정하게 되었습니다. ‘정말 그럴 수 있겠구나. 그리고 생각을 단순화시키면 이 놈의 세상 뒤집어 엎어버려야 된다. 그리고 이 놈의 세상 엎어야 된다. 우리의 힘으로 되지 않는 이 자본주의야 말로 더러운 세상이다. 라고 하는 반감이 생기겠구나.’ 하는 것을 상당 부분 전부는 아니지만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IV. 적용과 결론
그러면 우리가 이렇게 사회적인 통념을 가지고 이야기하지 말고 오늘 이 복음을 가지고 이야기를 해봅시다. 그래 하나님의 나라의 의가 덧입혀졌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팔복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일들이 우리 앞에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가장 기본적인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부인하는 일이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부여하신 평등한 권리를 짓밟고 유린하는 사회적인 전체성의 폭력입니다. 그러면 이런 것에 대해서 성경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줄까요? 하나님의 나라가 가슴속에 임한 사람들, 그래서 그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게 해 달라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채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러한 사회적인 현실 속에서 어떻게 생각해야 될까요?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그런 말도 되지 않는 법조인들에 의해서 짓밟히는 그런 사회적 정의와 법률적 정의, 그런 것을 보면서 어떤 사람이 이 나라에 법이 살아있다고 생각을 하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계급이 상위에 있다는 이유 때문에 그 더러운 성적인 유혹을 하고 박해를 이기지 못해 여자가 죽었을 때 초범이고 의도가 없었기 때문에 풀어준다 라고 내리는 그런 판결들에 대해서 과연 군대의 위계질서는 존중할만하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최근에 자기의 딸을 성폭행 당한 아버지가 경찰에 신고하지 않고 쫓아가서 자기 딸을 성폭행한 그 아이를, 그 아이에게 따지는 자기 아내와 딸을 밀치고 폭행하는 장면을 보면서 그 자리에서 찔러서 죽였습니다. 우리는 잘했다고 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이 이해가 되십니까? 자기의 딸이었다면, 자기의 아들들이었다면 그렇게 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자기 딸이 그렇게 사슬에 묶여서 성접대나 하고 짐승처럼 살아가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으면 과연 그 사람이 제정신일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이 세상의 어느 인간, 어느 권력, 어떤 정부에게도 인간의 이런 존엄과 가치를 짓밟을 수 있는 권한을 더군다나 물질, 돈의 유무와 사회적인 지위에 의해서 이런 것들을 짓밟을 수 있는 권리를 주신 적이 없습니다. 만약에 이런 식으로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유린하는 사람이 사람이라면 그를 처단해야 하고, 왕이라고 하면 그를 사형시켜야 하고, 황제라면 단두대에 잘라버려야 하고, 그렇게 하는 것이 국가라면 그런 국가는 혁명에 의해서 분쇄되어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일들을 위한 신성한 소명을 그리스도인들은 받고 있는 것입니다.
(찬양)
이곳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부르셨네
주의 얼굴 구할 때 역사 하소서
교회를 세우시고 이 땅 고쳐주소서
주님 나라 임하시고 주 뜻 이뤄지리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현실은 이렇게 엄중한 것이고, 그래서 우리의 신앙생활은 매우 진실해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비록 그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고 할지라도 형통한 자신의 삶의 환경, 자식들이 공부 잘하고 출세하는 것, 주님께로부터 받은 돈 몇 푼에 울고 웃으며 마치 천국을 모두 소유한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팔복의 사람의 모습이 아닙니다. 자신은 복음 때문에 박해를 받고 살가죽이 벗겨져도 이 세상에서 불의한 현실에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히고 유린당하는 이웃을 보고 분노할 수 있어야 하고 그 망가진 세상의 병든 모습이 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개혁의 칼을 자기 자신의 가슴에 겨눌 수도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은 너무 태만합니다. 전방에서는 포탄이 오가고 수많은 전우들이 피 흘리며 쓰러지는데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마치 후방에 모여 앉아서 전투식량이나 까먹으며 고스톱이나 치고 있는 모습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의 수치를 안겨드리고 있다고 하는 사실은 너무나 분명하지 않습니까? 분명히 말씀드린 서너 경우의 이 사회를 흔들어 놓는 이 불편한 진실 속에서도 도처에 그리스도인들은 박혀 있었을 터인데 왜 그들 중 대부분은 침묵하며 사는 것일까요?
팔복의 사람은 이 세상에 살지만 다가올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주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참된 신자가 되어야 한다고 하는 것은 틀림이 없으나 참되고 진실한 신자가 되면 세상의 칭찬을 받을 것이라고 그런 순진한 생각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칭찬하고 싶으면 하고 욕하고 싶으면 욕하고 네 마음대로 하라고 내버려 두어야 합니다. 얼마나 못 났으면 교회가 세상의 평판에 그렇게 전전긍긍하겠습니까?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에 그렇게 전전긍긍해 본 적이 있습니까? 그렇게 전전긍긍하고 회개했다면 세상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신자의 최고의 섬김은 팔복의 사람들이 되어서 그래서 자기 안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가 그리고 앞으로 이루어지게 될 하나님의 나라가 얼마나 아름다운 지를 보여주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묻고 싶습니다. 예수 믿고 우리들이 5년, 10년, 수십 년을 살아왔습니다. 이 땅을 의로운 하나님의 나라가 되게 하는데 얼마나 이바지하면서 살았습니까? 그리고 그 신념 때문에 과연 우리는 박해를 받아본 적이 있습니까? 마음속에 솟구치는 분노와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한 의를 짓밟고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유린하는 사회 현실에 대해서 한편으로는 분노하고 결국 이 사회가 이렇게 더러운 사회가 된 것이 내가 보텐 악 때문이었다고 생각하고 통절하게 가슴을 찢어본 적이 있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이 넓어도 세상에 소망을 갖질 않으시고 교회에 희망을 두셨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서 말, 여섯 말, 아홉 말의 가루가 아니라 한 줌의 순수한 누룩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 같은 죄인을 십자가의 피로 구속해 주신 은혜를 기억하면서 이 지상에서의 나의 삶을 덤으로서의 삶이라고 생각하고 그 나라가 우리의 삶 속에 실현되기 위하여 매일매일 죽을 결심으로 매순간을 살아가라고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셔서 바로 이 세상의 현실 속에 두신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어두운 밤바다에 빛나는 한줄기 등대요, 무미건조한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맛을 낼 수 있는 소금입니다. 그리고 그 빛으로, 소금으로 남아있으려는 모든 사람들은 이렇게 박해를 받을 것이니 이 길은 이미 일찍이 예수님이 가신 길이기 때문에 우리도 주님의 나라를 위해 받는 고난이 있을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셨던 그 고난의 길을 생각하고 인내와 사랑으로 이 길을 가라고 오늘도 여러분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고난 받는 팔복의 사람들(2)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마 5:11)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말씀드린바와 같이 팔복은 실질적으로 10절에서 끝나고 11절부터 2절까지는 여덟 번째 복이라기보다는 팔복의 사람이 이 세상에서 받는 존재론적인 박해를 의미합니다. 팔복 뒤에 나오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하고 하신 이 말씀도 역시 모두 신자가 이 세상에 있는 사람과 다른 존재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결국 이것은 우리가 그 소금이시고 그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 곧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성품을 통해 우리에게 게시된 그 예수의 사람됨을 닮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 닮음의 핵심은 천국의 통치이고 그 나라 안에서 이루어지는 정의와 사랑입니다. 그리고 이 팔복에 나타난 인격은 바로 그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으며 의로운 통치를 받는 사람의 사랑의 성품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바로 이렇게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이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세상은 결국 이 신자와 다르기 때문에 신자가 그리스도 예수의 형상과 성품을 많이 반영하는 팔복의 사람이 되면 될수록 신자는 이 세상에서 박해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II. 신자를 박해하는 세상
A. 예수 때문에 당함
신자를 박해하는 세상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결국 신자가 팔복의 사람이 되어 참된 신자가 될 때에 그는 항상 모든 사람들에게 이 세상에서 환영을 받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나쁜 일을 했기 때문에, 사회에 손해를 끼쳤기 때문에 박해를 받고 미움을 받는 것이라면 예수님은 무엇 때문에 박해를 받으셨을까요? 예수를 싫어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인격과 삶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나라의 통치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가 팔복의 사람이 되면 될수록 그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며 사는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박해를 당하게 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싫어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나라의 의를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를 쏙 빼닮은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를 볼 때에 느끼는 것 같은 반감과 거부감과 그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거절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이 팔복의 사람이 됨으로써 당하게 되는 박해는 예수 때문에 당하게 되는 박해입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누군가에게 해를 끼치고, 악을 행하고, 손해를 입히며 사는 것도 아닌데 왜 이 사람들은 그렇게 신자를, 팔복의 사람을 박해하는 것일까요? 결국은 예수를 닮은 성품, 예수를 따라가는 삶의 방식에 대한 거부감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이스라엘 사람들이 박해했던 것과 꼭 같은 방식으로 예수 믿는 사람들이 박해를 받는 것입니다.
B. 핍박하는 방식
성경은 오늘 세상 사람들이 팔복의 사람을 핍박하는 방식에 대해서 다섯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제일 먼저 “너희를 욕하고” 라고 하였습니다. 모욕과 창피, 비난, 꾸중, 이런 것들을 의미하는 것인데 이것은 결국 박해받는 그리스도인들을 세상 사람들이 얕잡아 보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박해하다”라는 단어는 “핍박하다”, 혹은 “패주하다, 추격하다”라는 의미인데 결국 힘으로써 능히 이 팔복의 사람들을 이길 수 있다는 세상의 자부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모든 박해가 정당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거짓으로 이루어진다고 말하는데 희랍어 성경에 ‘슈드멘아이’(pseudomenoi)라고 되어 있는 이 단어는 ‘그릇되게, 옳지 않은 방식으로, 사실이 아닌 것으로서’ 이런 의미입니다. 즉, 팔복의 사람들을 박해하는 세상 사람들의 가치는 진실이 아닙니다. 사실, 진실, 진리, 이런 것들이 그들 안에 있지 않기 때문에 얼마든지 옳지 않은 방식으로 사실이 아닌 것들을 구실 삼아서 팔복의 사람들을 박해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진리의 빛, 절대적인 가치의 기준이 인간의 마음속에서 일단 완벽하게 사라지고 나면 그 다음에 인간은 얼마든지 인간의 사상, 생각을 뛰어넘을 정도로 악해질 수 있는 것이 인간의 존재인 것입니다.
또한 성경은 말하기를 “모든 악한 말로 너희를 거슬려서 말한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악한 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악한 일을 의미하고 저주, 악담, 모든 독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팔복의 사람들을 향한 불행을 비는 모든 말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불행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일어나기 바라는 기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 세상 사람들이 팔복의 사람을 박해하는 방식입니다.
III. 하나님의 나라에 반역함
A. 예수 고난을 보여줌
결국 이러한 모든 세상 사람들의 신자를 향한 박해는 하나님의 나라에 반역하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신자가 팔복의 사람이 되면 될수록 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칭찬과 경배와 영광을 받는 것이 아니라 순수한 팔복의 사람이 되면 될수록 고난과 박해를 받습니다. 이 세상에서만 박해를 받을 뿐만 아니라 진실한 신앙을 추구하고 타협이 없는 신앙의 양심을 좇을 때에 교회 안에서도 박해를 받게 마련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처럼 팔복의 사람이 될 때에 그것은 곧 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경배를 받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오히려 그리스도인의 정체를 분명히 함으로 이 세상과 맞서고 박해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그리스도인들이 배우게 되는 대목이 바로 여기입니다. 그들은 핍박을 받고 모욕을 받습니다. 거짓 증인들에 의해서 모함을 당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이 세상의 권력을 이들이 이길 수 없기 때문에 옳음에도 불구하고 그릇된 사람들에게 붙잡혀 저주를 받고 형벌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팔복의 사람은 자기의 고난을 생각하기보다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생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팔복의 원형으로서 이 세상을 살아가신 방식이 바로 자기가 당하고 있는 이 고난의 방식과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고결하고 순고한 분이셨으나 그러나 사람들에게 모욕과 박해를 받으셨습니다. 거짓 증인에 의해서 거짓 무고당하시고 그리고 거짓된 판결에 의해서 생명을 구하러 오신 그분이 오히려 사형의 언도를 받고 하나님의 저주를 받으셨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랑의 주님으로 이 세상에 오셨고, 당신이 가지신 것 중에서는 아무것도 아끼는 것이 없이 우리들을 위해 내어 주셨지만 이렇게 모욕과 박해를 당하고 죽으신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예수가 싫어서라기보다는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통치가 싫었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도입될 하나님의 나라의 통치가 싫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처음 외치신 그 말씀을 기억합니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마태복음 4장 17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나라는 대박의 나라였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너른 영토를 차지하고 그리고 다른 나라 모든 민족들을 짓밟고 이겨 승리하는 나라가 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이 세상의 모든 물질과 부를 풍부히 누리며 사는 강대국이 되는 것이 이 사람들이 기대하던 천국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마치 천국이 커다란 재앙 덩어리나 되는 것처럼 회개하라고 외치셨던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천국의 성격이 변한 것일까요? 하나님의 나라의 본질에 어떤 변화가 온 것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여전히 복된 나라였지만 그 하나님의 나라는 능력과 함께 오는 나라이기 때문에, 복음과 함께 오는 나라이기 때문에 그 복음을 듣고 순종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나라가 말할 수 없는 축복의 나라이지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돌이키지 않고 하나님의 통치를 거절하며 악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심판의 나라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천국이 가까웠다는 기쁜 소식을 회개하라는 외침과 함께 전하시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미워한 것은 그 분이 주신 오병이어의 기적이나 병자를 고친 커다란 기적적인 능력이나 이런 것 때문에 예수님을 미워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모두 그들에게 이익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들이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미워했던 것은 예수님이 자신들과 달랐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순전한 팔복의 사람이셨고, 예수님을 보는 모든 사람들마다 심령이 부요한 자는 자신이 잘못됐다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가난한 심령 속에서 깨달았고. 즐겁고 기쁜 사람들은 이 세상의 죄와 하나님의 의를 위해 목 놓아 우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 통곡 앞에서 자신이 잘못 되었다는 것을 깨달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완악하고 이웃에게 악을 행하는 사람들은 온유하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자신들이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절실하게 가책을 겪었기 때문입니다. 포악한 사람들은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사람조차도 불쌍히 여기시고 아버지께 용서를 비시는 그리스도의 긍휼히 여기시는 성품 속에서 그런 포악한 삶이 마지막 몰고 오게 될 하나님의 두려운 심판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불결하고 더러운 마음으로 방탕한 욕심을 따라 살던 사람은 마음이 청결한 예수 그리스도를 볼 때에 자신이 정죄 받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미워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불의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의를 위해서 박해를 받는 예수 그리스도를 뵈오면서 이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간의 삶이 아니라는 사실을 절실하게 자각했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이익을 탐하여 미워하고 시기하고 분쟁하며 사는 사람들은 자기를 온전히 줌으로써 평화의 도구로 사신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을 보면서 이것은 인간의 삶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기 때문에 그러나 자신이 거기에서 회개하고 돌이킬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미워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기원전 6세기에서 5세기에 여러분이 알고 있는 그리스 시대에는 클레이테스테라스라는 사람의 시대로부터 오스트라카 혹은 오스트라콘이라고 하는 도편추방제라는 직접 민주 정치가 있었습니다. 즉, 매년 3월경 온 아데네 시민이 모여서 그래서 도자기 쪼가리나 혹은 조개껍질에다가 우리와 함께 이 도시에 살아서는 아데네의 민주주의가 현저히 위협을 받을 것 같은 위험인물의 이름을 써내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6000표 이상을 얻게 되면 그 사람은 이유 불문하고 추방되어야 했고 10년간 아데네를 떠나도록 민회에서 결정하였습니다. 기원전 6세기에서 5세기경 아리스티데스라고 하는 훌륭한 정치가 그리고 사상가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비록 그리스도인은 아니었지만 아주 고결한 성품과 정의로운 삶을 살아가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the just 의로운 사람 아리스티데스’라고 아데네 사람들에게 불려 졌습니다. 어느 날 아데네 사람들은 모두 모여서 이제 도편 추방에 관한 투표를 하게 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이 의로운 사람 아리스티데스의 이름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글자를 모르는 어떤 사람이 곁에 있는 아리스티데스에게 물었습니다. “아리스티데스라고 이 도자기에 어떻게 글씨를 써요? 날 좀 가르쳐 주시오.”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본인인 이 아리스티데스는 물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리스티데스라는 사람이 무얼 잘못했습니까? 무얼 잘못했길래 당신은 이 도자기 쪼가리에 아리스티데스라고 써서 내려고 합니까?”라고 했더니 이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몰라요. 난 그 사람이 뭘 잘못했는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나는 그 인간이 도처에서 ‘the just’ 의로운 사람이라고 사람들이 수없이 얘기 했는데 이제 나는 그 말을 듣는 게 지긋지긋해서 쫓아내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인간의 심리에 대해서 요한복음 3장 2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염려함이라”고 말입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는 참으로 팔복의 사람이셨기 때문에 그렇게 살고 싶지 않은 더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의 나라의 통치를 받는 예수 그리스도처럼 살고 싶지 않은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그의 진리와 사랑 때문에 박해를 당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팔복의 사람이 되는 것이 지상에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인 줄을 아는 우리가 받을 고난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위선하고 타협하고 시시때때로 자기의 이익을 따라서 변절하는 사람들에게는 박해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박해자들은 그런 무가치한 자들을 핍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진리와 선이 아름답고 좋은 것이기는 하지만 모든 사람들의 것이 아닙니다. 진리는 참되고 맛스럽고 아름답고 달콤한 것이지만 그것은 그 진리를 사모하고 그 진리의 미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만 진리는 그러합니다. 선은 좋은 것이고 그리고 풍성한 것이지만 하나님의 선하심에 감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만 선은 그렇게 아름답고 좋은 것입니다. 결국 이 진리와 선의 핵심이 복음적인 거룩함이고 이 팔복의 사람이 팔복의 사람인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하나님 안에서 거룩한 사람으로 변화되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소금과 빛의 비유 앞에 나오는 이 팔복의 사람은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소금으로서 이 세상과는 다른가 그리고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빛으로서 이 세상과는 구별될 수밖에 없는 다른 존재인가 하는 것에 대한 존재론적인 근거를 이 팔복에서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너절하고 부도덕한 삶을 살다가 세상 사람들에게 욕을 먹고 세상 법정에 의해 투옥되는 사람을 가리켜서 우리는 예수 안에서 박해를 받는 사람들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자기가 행한 잘못 때문에 응당한 벌을 이 세상에서 받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박해는 그리스도인들의 부도덕이나 혹은 그리스도인들의 잘못 때문에 오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에 도대체 무슨 나쁜 일을 하셨습니까? 그 분의 사랑으로 성령을 받고 이스라엘을 뜨거운 가슴으로 사랑했던 예수님의 초대 교회의 제자들이 무슨 나쁜 일을 그렇게 많이 했습니까? 스데반은 자기를 돌로 쳐 죽이는 무리들에게 욕 한 마디 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이 하나님의 형벌을 받지 않도록 용서와 자비를 빎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본을 정확히 따랐습니다. 도대체 그들이 무슨 탈선을 했습니까? 그들이 어떤 나쁜 일을 해서 사회에 손해를 끼쳤습니까? 황제를 향해서 반역의 기치를 높이 들고 군사를 조직했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끊임없이 용서하고 사랑이고 어둠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의 빛을 비춰 주었고 하나님의 참 사랑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그의 사랑과 자비의 풍성함이 어떠한지를 그의 온 존재와 인격으로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 세상은 그들을 미워했고, 지독하게 악하게 하였습니다. 무엇 때문인지 아십니까? 그들이 세상과 달랐기 때문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세상은 불결했고 그들은 거룩했기 때문이며 세상은 세상을 사랑했고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H.B Workman이라고 하는 사람이 ‘초대교회의 박해’라는 책을 썼습니다. 거기서 그는 데오클리안 시대의 박해에 대해서 상세히 기술했습니다. 끝까지 기독교 신앙을 고집하는 여자들을 붙잡아다가 온 옷을 홀딱 벗긴 뒤에 그들을 묶어 놓고 황소들을 채찍질해서 뿔로 배를 들이받아 배에 구멍을 내버렸습니다. 끝까지 신앙을 부인하지 않으려고 하는 온유한 그리스도인을 6마리의 말로 사지, 오지, 육지를 묶어서 각각의 말들을 심하게 채찍질해 달리게 만들어서 능지처참을 하는가 하면, 위대한 교부 이그나티우스는 결국은 구명 운동을 거절하고 하나님을 위해 순교하겠노라고 다짐했을 때 굶주린 야수들에게 던져져 먹이가 되었습니다. 니옹이라고 하는 곳에서는 비얀나의 쌍투스라고 하는 사람을 모두 옷을 벗긴 후 뜨거운 불덩어리로 그의 성기를 지저 버렸습니다. 불에 녹인 납을 그리스도인의 벗은 등 위에 붓기도 했고 죽도록 두들겨 패서 온 몸이 살점이 떨어진 그 위에 식초와 소금을 뿌리기도 하였고, 어떤 사람은 아랫도리를 화형 시키며 머리에 찬물을 부었으니 이는 제발 죽지 말고 끝까지 너의 사지가 타는 것을 밑으로 내려다보라는 의미였습니다. 헤아릴 수 없는 사람이 복음 때문에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다는 이유 때문에 이렇게 핍박 속에서 죽어갔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조금도 이상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이 세상을 증오하고 저주하는 대신 오히려 이 세상이 무릎을 꿇고 승복하고 그리고 이 세상에 동정을 사는 대신 그리스도와 함께 그 고난을 당하며 거룩하다는 이유로 박해를 받는 것을 영광으로 알았던 것입니다. 결국 그리스도인의 박해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이 세상 사람들의 경외의 또 다른 표현인 것입니다. 박해 받고 있는 그리스도인은 이미 세상 사람들이 무시할 수 없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비록 폭력에 있어서는 그들이 우위에 있고 욕을 하고 그리고 저주를 퍼부으며 그리스도인은 들을 수밖에 없는 낮은 위치에 있지만 어디에 있든지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할 때마다 그리스도인들이 무시할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스스로 입증하는 것입니다.
IV. 적용과 결론
오늘날 우리에게 고난이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까? 정말 생사를 걸고 자기를 주인 삼으며 살아가는 이 사람들의 통치에 대해서 그렇지 않다, 하나님의 통치에 속한 그 나라의 사람들이 여기에 있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가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까? 예수님께서는 팔복의 사람들에게 팔복의 사람들이 되면 너희가 이 세상의 소금이고 너희가 이 세상의 빛이란다 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런데 너희가 진정한 팔복의 사람이 되면 너희는 이 세상에서 미움을 당하고 박해를 받을 것이라고 솔직히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께서는 “마까리오이 호이” “너희가 이렇게 박해를 받을 때에 복이 있나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세상의 복이 아닌 천국의 지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팔복의 사람이 되면 너희는 참 그 빛이 되고 그 소금이 될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팔복의 사람이 되면 많은 세상 사람들에게 박해를 받고 그리고 고난을 당하고 심지어는 목숨을 잃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희는 복이 있도다. 왜냐하면 나는 너희를 사랑하고 복줄 것이기 때문이다.” 라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우리를 십자가의 사랑으로 구속하실 때 우리는 참 감사가 넘칩니다.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깨닫게 하실 때에 우리의 마음은 뜨거워집니다. 그리고 죄인들이 알지 못하는 우리가 받을 가치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마음속에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마음을 녹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필요한 자원을 미리 아시고 먹을 것과 입을 것과 적절한 명예와 품위와 그리고 우리의 삶에 필요한 교육과 모든 좋은 것들을 우리에게 공급해 주실 때에 우리의 마음은 벅차고 기쁩니다. 그러나 여러분, 주님이 우리에게 이 모든 자원들을 주시는 것은 이것들을 누리고 이것들을 향유하라고 우리에게 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아니면 전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그 빛, 우리가 아니면 맛을 내게 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그 소금이 되도록 그래서 이 세상과 올바른 관계를 맺으며 살도록 하나님이 이 모든 것들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온 마음을 다해 기도하고 이 진리를 전하고 이 복음을 전할 때에 세상이 그것을 받아들이면 우리는 회개한 세상과 함께 기뻐합니다. 왜냐하면 그들도 곧 팔복의 사람들이 될 것이고 그들도 우리와 함께 그 빛의 사람, 소금의 사람들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로부터 받은 이 은혜와 사랑에 감격하며 우리의 마음을 다 쏟아 이 진리와 복음을 전하며 산다고 할지라도 언제나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인간의 악함 때문에, 때로는 하나님의 큰 섭리 속에서, 때로는 이 세상의 죄악성 때문에 참 복음을 외칠 때에 박해를 당하고 참 그리스도의 사랑을 말할 때에 짓밟히듯이 핍박을 당하는 일들이 훨씬 더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우리는 이 세상으로부터 우리가 부당한 대접을 받는다고 생각하거나 혹은 세상을 향하여 복수의 칼날을 가는 옹졸한 사람이 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뭐냐 하면 주님도 때로는 이 세상에서 그런 대접을 받으시면서 하나님 안에 있는 그 의로운 통치를 이 세상에 알리셨기 때문입니다.
(찬양)
이 곳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부르셨네
주의 얼굴 구할 때 역사하소서.
신자가 이 세상에서 받을 수 있는 최고의 복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연합의 신비가 있고, 바로 그리스도의 그 고난에 참여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가면서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부활의 위대한 능력이 무엇인지를 아는 기쁨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와 함께 모욕을 받고 짓밟혀 본 사람만이 주님의 이름이 얼마나 거룩하고 하나님의 영광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를 아는 인식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 물든 우리 시대의 교회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던 주님이 지울 수 없도록 하나님의 자녀들의 가슴속에 칼로 새겨주신 진리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이 세상을 심판하고 당신의 나라를 완전히 성취하실 때까지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들에게 핍박은 언제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이 이 핍박을 이기면서 살 수 있는 것은 자신의 강함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자기를 위해 박해 당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시는 예수님, 당신도 육체의 연약함에 싸여 온갖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에 우리같이 연약한 인간이 시험을 당할 때에도 불쌍히 여기시는 우리 예수님의 위로와 함께 하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핍박을 받고 고난을 당할 때마다 이상한 일이 일어난 것처럼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자기를 이렇게 예수를 위한 고난에 참여할 수 있도록 불러주신 것에 대해 감사하며 자신은 이 세상 사람들에게 박해를 받아도 오직 하늘의 하나님의 그 뜻이 나를 통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외치면서 사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입니다.
기뻐하는 팔복의 사람들(1)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 5:12)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유서 깊은 팔복의 마지막 절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원하는 바는 오늘과 그리고 다음에 한 주 더 설교함으로써 22번째 설교로서 팔복 시리즈를 끝낼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팔복의 사람은 이 세상에서 고난을 받을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자신이 잘못한 것 때문에 고생을 하는 것은 여기에서 말하는 팔복의 사람이 받는 고난이 아닙니다. 오히려 팔복의 사람이 받는 고난은 존재론적인 박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기 때문에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가 있다. 그때에 너희는 복되도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비록 ‘복 되도다’라는 말씀이 덧붙여지기는 하였지만 신자들의 이 세상에서의 고난에 관한 예고로서 11절이 끝납니다. 그리고 12절에 와서 갑자기 상황이 반전되듯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급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와 같이 박해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즉, 팔복의 사람이 때때로 이 세상에서 존재론적으로 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고난을 당할 수 있지만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에서 누리게 될 그 행복과 상급을 생각하면서 기쁨과 즐거움 속에서 그 시련과 박해를 견디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주를 위해 박해를 받고 사는 사람들에게 현재적인 삶 속에서도 그 천국의 기쁨과 행복이 깃들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기도 합니다.
II. 선지자들과 비교하심
A. 신정국가와 선지자
제가 두 주에 걸쳐서 최소한 두 주에 걸쳐서 12절을 설교하고자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나와 있는 한 단어 때문입니다.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에서 “선지자들”이라는 구절입니다. 이 구절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고, 팔복과 이어지는 빛과 소금과 빛의 비유, 그리고 이어지는 주기도문과 나아가서 5장부터 7장까지 모든 산상 수훈을 해석하는 해석학적인 축이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당신의 나라가 이 땅에 이미 왔고, 또 한편으로는 아직 오지 않은 이 시대에 당신께서 이 땅에 세우시려고 했던 교회와 기독교인들의 공동체가 이 세상을 향해 어떤 성격을 가진 공동체여야 하는지에 대한 예수님의 속마음을 드러내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팔복뿐만 아니라 이후에 이어지는 소금과 빛의 비유를 포함해서 모든 산상수훈의 말씀이 바로 우리들을 예수님이 선지자들의 후예로 생각하셨다는 이 신학적인 관점에 초점이 맞춰줘서 해석되어지지 않고는 이 산상수훈의 진정한 의미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아주 미묘한 말씀입니다. 즉, “너희들이 팔복의 사람이 되면 너희의 인간된 품질이 세상 사람과 달라서 박해를 받을 텐데 너희들이 지금 이 세상에서 세상 사람들에게 받는 팔복의 사람으로서의 고난은 구약에서 선지자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받았던 박해와 매우 유사하단다.” 이 의미인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선지자들도”라고 했는데 희랍어 성경에는 ‘투스프로페타스’(tous propetas) 복수로 나옵니다. “그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 말씀의 1차적인 청중은 예수님의 제자들과 마태복음 4장에서 병 고침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그들의 활동 영역은 그 당시로서는 이스라엘 안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1차적 청중으로서 그들이 진정한 예수님의 제자가 되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박해를 받을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고, 2차적인 청중인 우리들에게 적용을 하면 우리가 참 팔복의 사람이 되면 한편으로는 교회 안에서도 박해를 받을 수 있고, 교회 바깥에서도 박해를 받을 수 있다고 하는 적용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자,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약에 나오는 선지자 사상을 이해해야 하고 이것이 신약 시대의 성도들과 어떻게 신약적인 연관을 갖는 지가 검토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설교 시간은 이 모든 것을 다룰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도저히 짚고 넘어가지 않으면 이 12절에 대한 해석을 할 수 없는 그 부분에 한정해서 여러분에게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첫째는 신정 국가와 선지자의 관계입니다. 이스라엘은 신정국가였습니다. 즉, 하나님이 직접 통치하시는 제정일치의 사회였습니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보이는 나라를 통치하실 때에는 어쩔 수 없이 당신의 대리자인 사람들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위에 세 가지 직분을 세우셨습니다. 왕과 선지자와 제사장이 그것이었습니다. 이 세 직분이 솥발처럼 펼쳐져서 이스라엘이라는 신정국가를 떠받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왕은 하나님의 의지대로 나라를 다스려 모든 백성들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세우신 의도에 이바지하게끔 살게 하는 것이 왕이 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인간 존재와 이스라엘을 비교한다면 이 겉 사람의 행동과 모든 삶을 규율하는 것이 왕의 임무였고 속사람을 규율하여 겉 사람과 일치를 이루게 만드는 일들은 종교의 지도자들인 제사장과 서기관들에게 주어진 임무였습니다. 제사장들은 죄를 범해 불결해진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가 용서받고 다시 관계를 회복하게 만들어주는 중재자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백성 편에 백성들과 함께 서서 거룩하신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을 여는 인물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의 관심사는 전통에 있습니다. 그런데 선지자들은 반대로 하나님의 계시를 들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로 나아와서 하나님이 그들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지를 가르쳐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지자들은 전통보다는 지금 자신들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계시가 주된 관심사였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선지자들은 현실성이 없어 보이는 높은 기준을 가지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기도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선지자라고 하니까 미리 아는 사람이다 이렇게 해석을 하고 선지자의 역할은 미래의 일들을 예언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일들도 선지자들이 일정 부분했던 것은 사실이었는데 전체의 활동에서는 아주 작은 부분이었고 그들 대부분의 일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원하시는 불변하는 삶의 기준을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기준이 뭐냐 하면 입법자 모세가 하나님께로부터 수여받은 율법입니다. 그 율법을 그대로 전하는 것이 아니라 모세가 그 시대에 살아 있더라면 이 율법을 어떻게 자신들의 시대에 적용하며 살았을까를 설교하는 것이 선지자들의 주된 임무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언자라고 할 때의 그 예자는 미리 말한다기 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위탁받았다는 점에서 예언자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선지자는 신정 국가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실현하는 매우 중요한 인물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의 임무는 하나님의 뜻이 담긴 신적인 계시를 전달해서 그래서 그들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가르쳐 주고 그에 합당하지 않은 삶을 회개하고 합당한 삶으로 돌아오게 하는 데에 선지자의 사명이 있었던 것입니다.
B. 고난 받는 선지자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선지자의 이러한 비현실적인 외침, 즉, 자신들이 실제 살아가고 있는 삶보다는 더 높은 기준을 요구하며 하나님 앞에 구별된 삶을 살도록 촉구하는 이런 선지자의 외침을 항상 기뻐했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기뻐했던 것은 아주 극히 예외적인 일이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선지자의 외침을 싫어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고난 받는 선지자들의 모습이 구약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고난을 받았던 사람이 예레미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다, 전하다 하도 안 듣고 자기를 투옥시켜버리니까 거기서 고생하면서 예레미야가 뭐라고까지 말했냐면 내가 다시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그렇게 결심을 하니까 이 속에서 막 중심이 불타는 것 같아서 견딜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로부터 말씀을 위탁받은 말하자면 살아있는 선지자의 내면의 세계였던 것입니다.
선지자직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느냐를 성경에서 확정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닙니다. 가장 광범위하게 보면 사실은 아담 타락 이후 즉시 이런 선지자직이 셋의 후손, 그리고 노아의 후손으로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면서 하나님의 아들들 사이에 이 선지자의 전통이 유지되었다고 봐야 합니다. 특히 이런 선지자직이 조금 더 범위를 좁혀서 생각을 하면 족장 시대에 아브라함 그리고 이삭, 야곱, 요셉, 이런 사람들에게서 족장 시대에서 아주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족장은 아주 독특한 지위를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왕, 선지자, 제사장과 같은 기능을 그 축소판이 되어서 다 가지고 있으면서 언약 백성들을 이끌고 다스렸던 지도자들의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아주 고유한 의미에서 선지자로 범위를 좁히자면 그 시대는 모세의 시대로 시작점을 설정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고유한 의미의 선지자들의 비조입니다. 그래서 그 할아버지에게서부터 이제 선지자들의 전통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선지자들의 역사가 계속되다가 사무엘 때 와서 매우 중요한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소위 직임적 선지자의 시대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 전까지는 선지자들이 각자 하나님을 대면하고 소명을 받고 영광을 체험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음으로써 그 말씀을 대언하고 외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선지활동을 하도록 학식과 지식 이런 것과는 상관이 없이 다양한 직업에 있는 사람들이 소명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사무엘 시대에 와서 선지자들을 양성하는 교육 기관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런 사람들을 가리켜서 구약 성경에서 선지생도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그 선지 학교에서 선지 활동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양성이 되기 시작하면서 이제 제도로서의 선지자들의 직분이 주어지는 시대가 오게 됩니다. 물론 그들 중에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겠지만 그러나 그렇게 선지자가 될 수 있는 길이 열리면서 이제 선지자들 전통에 매우 중요한 말하자면 찢어짐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즘으로 말하자면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외쳐야 할 진리의 말씀이 별로 없이도 신학교 과정을 밟고 목사가 된 그런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하는 것과 아주 유사한 방식으로 선지자들이 양성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된 사람들이 모두 다 좋은 선지자가 되지 못했다, 됐다 그런 이야기를 여기서 할 필요는 없고 어쨌든 그런 선지자 전통의 변화가 도입되었다고 하는 것은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이런 선지자들이 신약 성경에도 펼쳐보면 선지자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선지자 누구누구라는 이야기도 나옵니다. 그리고 예언 활동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것은 신약 성경이 완성되기 전까지 한시적으로 사도직처럼 교회에서 존중을 받으며 그들의 예언 활동, 선지자적인 활동들이 교회의 인정을 받게 됩니다. 그러다가 그 전통이 이제 성경의 완성과 함께 거의 1세기 끝나고 2세기가 시작되면서 거의 끝나게 됩니다.
자, 이렇게 놓고 보면 이제 고유한 의미에서 선지자들의 특징이 세 가지가 있었는데 첫째는 소명입니다. 아주 뚜렷한 소명입니다. 이 소명에 대해서 구약의 선지자는 이렇게 기록을 합니다. 항상 앞부분에서 누구누구의 아들 누구누구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니라라고 시작이 됩니다. 그것은 마치 신약성경에 나오는 서신서에서 그리스도의 종 누구누구는 하고 시작되는 것과 아주 유사한 패턴으로 선지서들이 꼭 그렇게 시작을 합니다. 여기에서 이제 문제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니라고 한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하나님이 전달해 주시는 지식의 전달이 아니라 아주 심오한 영적인 경험과 함께 주어지는 소명의 체험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자기를 불러주셨다는 아주 초월적인 신적 의식이 있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보면서 세상과 사물과 모든 것을 보는 관점이 대대적인 변혁이 이 안에서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시각에서 이스라엘의 역사과 이스라엘과 다른 나라들의 역사를 볼 수 있는 안목이 생겨나고 그 통합된 지식의 지평 속에서 설교를 했던 것입니다.
두 번째 특징은 말씀입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모든 예언자의 말씀이 하나의 통일성을 이루고 있지만 개별적으로 보면 각기 독특한 색깔의 메시지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호세아는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에 대해서, 미가는 가난한 자와 억눌림의 정의에 대해서, 그 다음에 하박국은 믿음에 대해서 등등을 다양한 칼라를 가지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 다양한 칼라들을 통해서 선지자들은 하나님께로 받은 자신의 독특한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인식하고 있었고 그것을 일생동안 유지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의 말씀이 한번만 임한 것이 아니라 몇 번씩 때로는 에스겔 선지자 같은 경우에는 수십 번씩 하나님의 말씀이 임합니다. 그런데 그 말씀의 임함은 최초의 것과 그 이후의 것들로 나뉘어집니다. 최초의 것들은 소명과 연결이 되고 이후의 것들은 그 소명을 완수해 나가기 위한 보다 구체적인 하나님의 메시지들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런 말씀의 감화 속에서 선지자 직분을 수행했던 것입니다.
세 번째 특징은 충만한 성령의 임함입니다. 구약시대의 성령은 모든 이스라엘 사람 속에 내주하는 성령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이 필요하신 성령을 주셔서 그 성령의 충만한 은혜 안에서 성령은 두 가지 역할을 했는데 한편으로는 그 사람 자신을 정화시켜 순수하게 하나님 앞에서 서게 만들고 한편으로는 그 사람을 지혜와 능력으로 무장시켜서 말과 모든 행동에 있어서 언변과 담대함과 능력, 용기 이런 것들을 비상하게 소유하도록 만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선지자의 특성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악한 시대가 있었지만 하나님이 아무리 악한 시대라도 선지자를 보내기를 포기하신 적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악하면 악할수록 더 선명한 계시를 전달할 선지자들을 보내셨고 그 선지자들은 박해를 감수하여야 했습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의 역사 중 아합의 시대는 여러분이 잘 아는 이세벨의 시대였고 그리고 이스라엘 타락이 극심했던 배교의 시기였습니다. 이때 하나님 구약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길이 빛나는 엘리야와 엘리사와 같은 능력의 종들을 보내주어 하나님의 말씀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계시하셨던 것입니다.
이사야 5장 7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무릇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가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그들에게 정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공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라고 말입니다. 여기에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포도원으로 보시고 하나님이 포도원의 농부가 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 포도원의 주인으로서 포도원을 잘 가꿨더니 가꿀 때의 하나님의 마음은 풍성한 포도 열매를 맺는 것이었습니다. 그 열매는 바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주 친근하고 익숙했던 포도열매였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이스라엘은 물이 매우 희귀한 지역입니다. 그리고 땅을 파도 웬만큼 파서는 물이 안 나옵니다. 물이 나와도 그 물이 마실 수 없는 쓴물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그 건조한 지역에서 이 포도농사가 잘 되는 것입니다. 에스골 골짜기라는 이야기를 성경에서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에스골의 의미가 영어로 'cluster', 과일 같은 것의 덩어리를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증언에 의하면 그 당시에 에스골 골짜기에서 한 송이에 4kg-6kg정도 되는 포도송이를 흔히 볼 수 있었다고 합니다. 얼마나 큽니까? 6kg는 거의 작은 수박만한 무게입니다. 그 어마어마한 열매들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충분히 보고 있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하나님이 포도원이라고 말씀하시고 그들에게 기대하시는 바가 포도 열매라고 하셨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그 말씀이 팍팍 가슴에 꽂히도록 실감나게 다가오는 비유였다는 것입니다. 그 열매가 뭐냐 하면 정의와 공평의 열매입니다. 여기 공의라고 말했는데 이것이 사실은 사람들 속에서 실현되는 사회적 정의로서의 공평입니다. 그러면 결국 정의를 바라셨더니 오히려 포학이 일어나고 공의를 바라셨는데, 공평을 바라셨는데 그 공평하지 않은 세상에서 울부짖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께서 매우 슬퍼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그 당시에 가장 문명사회에서 번영했던 그 땅에다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심어놓으신 이유는 그들로 하여금 다른 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삶의 열매를 맺게 하심으로써 모든 나라들이 이스라엘을 보면서 정말 저들은 어쩜 저렇게 작은 나라인데도 저렇게 행복하고 정의롭게 살까, 우리나라도 저 나라처럼 됐으면 얼마나 좋을까, 너희들이 그렇게 평화롭고 사랑스럽고 행복한 삶을 사는 비결이 무엇이냐 라고 물어보고 싶은 나라가 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세우신 계획이었던 것입니다. 결국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정의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율법을 따르는 올바른 삶을 이야기하는 것이고 공평은 그 결과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이루어지는 사랑의 삶입니다. 그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결국 공평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이기심과 탐욕이 극단적으로 치우치지 않고 균형을 이루고 있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서만 그것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인류 역사 이래로 자본주의가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 가장 좋은 체제라는 경험을 인류가 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회주의 국가들이 사회주의를 포기하고 자본주의의 길을 따라왔습니다. 그런가 하면 전적으로 그렇게 못하는 나라도 자본주의를 도입하면 이상하게 나라가 잘 살게 되는 것입니다. 소련이 그런 경험을 했고, 동국권의 국가들이 그런 경험을 했고, 그것을 현대에 와서 절실하게 경험한 나라는 중국입니다. 그것을 북한도 압니다. 그래서 그것을 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확 열고 받아들여 버리면 체제가 전복이 되어 버리니까 완전히 개방을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타가 공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이 자본주의가 정의롭고 공평한 자본주의가 되어야 하는데 그것을 못하는 것입니다. 자본주의 좋은 점만 살린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가 가지고 있는 가장 비인간적인 것까지, 물질주의까지 한꺼번에 받아들이지 않을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본주의 특성이 무엇입니까? 경쟁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소비를 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아주 복잡한 구조를 따라서 사회에서 자본의 순환이 일어나면서 사람들의 물질생활이 풍부해지고 소득이 높아지면서 사람들의 육적인 삶의 수준이 말하자면 발전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본주의 구조입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달리기를 하면 모든 사람이 다 영점에서 서서 달리기를 해야 하는데 자본주의는 절대로 그렇게 안합니다. 아이스링크 같은 데서 스피드 스케이팅할 때보면 안쪽은 뒤에서 시작하고 바깥은 앞에서 그렇게 시작하는데 저쪽 끝나는 지점은 똑같이 줄이 그려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고 부모로부터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없는 사람들은 계속해서 뒤에 서서 시작을 하는 것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돈 많은 엄마, 돈 많은 아빠, 그리고 원판이 못 생겼으면 내일이라도 뜯어 고쳐줄 수 있는 돈 많은 할아버지가 살고 있는 집에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뭐 안 되는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완전히 다른 사람들하고 완전히 다른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계속해서 대물림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저 앞에서 출발을 합니다. 100m 달리기를 그 사람들은 50m 쯤 이미 갔고, 여러분은 마이너스 50m쯤에서 시작합니다. 그렇게 달립니다. 그러면 당연히 불공평하든지 무엇이든지 간에 어쨌든 승자가 생겨납니다. 그러면 모두 똑같이 시작을 해야 하는데 그래도 경쟁에서 지는 사람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9초 8에 딱 끊고 저쪽에서 막 플레시를 받습니다. 어떤 사람은 두발 짝을 가다가 주저 앉아버렸고 어떤 사람은 죽도록 땀 흘리면서 달려왔는데 마이너스 50m시작했기 때문에 이제 0을 통과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늦게 가고 실패했다고 해서 앞서 가는 사람이 그들을 짓밟고 지나가는 것은 그것은 진정한 자본주의가 아닙니다. 자본주의는 ‘후’하고 인간성의 기운이 불어 넣어진 자본주의가 진정으로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 자본주의입니다. 그러면 9초 8에 테이프를 뚫고 후레쉬를 받는 사람이 물병하고 수건하고 들고 가서 쓰러진 사람을 일으켜 세우고 물을 마시고 함께 부축하면서 가는 것이 이게 진정한 사회의 정의이고 공평입니다. 이런 것들이 이스라엘 속에서 율법이 짓밟히고 신앙심이 사라지면서 자취를 감추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공평을 잃어버린 사회인 것입니다.
이러한 포도원의 비유가 예수님에게 와서 다른 버전으로 바뀝니다. 그래서 여기에서는 농부 얘기는 안 나오고 포도원 주인이 있고 어쨌든지 간에 그 포도원을 가꾸는 이야기가 이사야서 5장에 나오는데 똑같은 비유의 반복처럼 보이는 마태복음 21장에서는 이게 버전이 바뀌어서 나옵니다. 어떻게 바뀌어서 나오냐 하면 마음씨 좋은 포도원 주인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포도 농사짓는 사람이 전혀 불편 없이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모든 시설을 완비했습니다. 그리고 아주 너그럽게 그 농토가 없어서 여기에 와서 농사짓고 하는 사람들에게 그것을 소작으로 주었습니다. 그리고 주인은 갔습니다. 이 주인이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때가되자 그 주인이 소작료를 내라고 당신의 종들을 보냈는데 이게 바로 구약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신 선지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가서 “우리 주인이 소작료를 달랍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약속한대로 소작료를 받아가지고 올 줄 알았는데 실컷 두드려서 완전히 상처투성이가 되어서 보낸 것입니다. 그럴 리가 없지 그러고 또 다른 종을 보냈더니 완전히 피범벅이 되어서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를 보냈더니 거의 죽을 정도가 되어 가지고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때 주인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럼 내 아들을 한번 보내보자. 내 아들을 보내면 저 사람들이 감히 그러지 못하고 주인의 아들이 왔구나. 잘못하면 주인이 직접 개입할 수도 있겠구나. 그러면 우리가 종에게는 함부로 했지만 아들에게는 함부로 할 수 없으니 소작료를 보내드리자’ 이럴 줄 알았더니 농부들의 생각은 완전히 다른 생각이었습니다. ‘자, 저기 온다. 저 아들이 바로 주인의 이 포도원을 주인이 죽으면 물려받을 상속자다. 저 아들을 죽여 버리면 상속받을 사람이 없지 않냐. 그러면 이 포도원이 우리의 것이 되지 않겠느냐’ 그러고 아들을 죽여 버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는 구약에서는 포도원 주인과 포도나무만 나오는데 예수님의 이 버전에서는 아주 다양하고 드라마처럼 극적인 광경이 연출됩니다. 그래서 포도원이 있고 주인이 있고 포도원 아들이 있고 주인에게 속한 종들이 있고 소작인들이 있고 포도나무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그 포도원에서 소작일을 하는 농부들이 이스라엘로 비유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당연히 세살 먹은 아이라도 그 성경 이야기를 듣고 보면 결국은 그 마지막에 소작인들 손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그 아들은 누구입니까? 그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 자신의 죽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이유가 무엇이었느냐고 물을 때 이것은 선지자들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적인 미움과 연장선상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 대목이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팔복의 사람이 누구를 닮은 사람이라고 말씀드렸죠? 예수를 닮은 사람입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그 미움의 연장선상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서 있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이지 못해서 안달을 했습니까? 민란을 일으키고 자기들 중 어떤 사람을 죽인 바라바를 놓아달라고 오히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이야기 했던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항상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수님을 그렇게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병이어로 수많은 사람을 먹고 배부르게 하였을 때에 예수님을 미워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쩔 줄 몰랐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을 임금 삼고 싶어 했습니다. 예수님이 깃발만 들면 로마에 대해서 반정부 혁명을 일으킬 준비가 된 사람들이었습니다. 병든 자를 고쳐 주셨을 때 안식일에 그 일을 할 때에는 종교 지도자들이 시기하고 미워했지만 최소한 병 고침을 받은 사람과 그 가족들은 좋아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왜 그렇게 예수님을 미워했던 것입니까? 핵심은 뭐냐 하면 그냥 예수님이 거기 있다는 것 자체가 싫었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게 싫었습니까? 예수님이 이른 아침서부터 밤까지 계속해서 설교만 하신 것만은 아닙니다. 홀로 쉬시기도 하셨고, 혼자 조용히 기도하기도 하셨고, 제자들과 사적인 대화도 나누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진리에 대해서 피를 토하듯이 설교할 때든지, 조용히 침묵하고 죄인들과 함께 포도주를 마시고, 빵을 뗄 때든지, 제자들과 있을 때이든지, 조용히 거리를 걸어갔을 때이든지 그의 존재와 인격은 입으로 소리치지 않아도 외치고 있었습니다. ‘정의롭고 공평한 삶을 살아라.’ 이것은 곧 진리를 외치고 진리와 사랑의 삶을 살라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공평은 결국은 ‘미쉬파트’라고 하는 단어인데 그 공평은 결국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는 자기의 이기적인 사랑이 제거된 상태에서의 평화를 의미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미움을 받으셨던 이유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은 선지자들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독한 미움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진 살인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C. 이스라엘: 제사장 나라 됨
그런데 성경은 이스라엘을 제사장의 나라라고 부르십니다. 우리는 흔히 요한복음 3장 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라고 하는 이 구절을 성경의 요절이라고 부릅니다. 요절인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 요절이 두 개의 토대위에 놓이지 않는다면 아무 의미가 없는 요절이 되는 것입니다. 그 두 개의 토대가 뭐냐 하면 하나는 역사적인 토대로서의 창세기 1장 1절입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그런데 그 세상이 타락했기 때문에 구원이 필요했고 그래서 하나님이 이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이것보다 더 중요한 신학적인 토대입니다. 그게 바로 출애굽기 19장 6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너희에게 너희 하나님이 되시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고 하셨습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요한복음 3장 16절은 두 개의 기초위에서 비로소 성경의 요절이 될 수 있는데 첫째는 창세기 1장 1절이고 이것이 역사적인 토대이고, 두 번째는 신학적인 토대인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되시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에게 거룩한 제사장의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옛날 방식으로 설명한 책이 구약이고, 새로운 방식으로 이루어진 것을 보여주는 책이 신학입니다. 그래서 출애굽기 19장 6절의 약속이 옛 방식으로 설명된 것이 옛날 언약 구약이고 새로운 방식으로 설명된 것이 새 언약 신약입니다. 그 새 방식의 차이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는 것입니다.
제사장의 나라는 세 가지 핵심 가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첫째는 거룩함입니다. 레위기 11장 45절에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제사장 나라의 핵심적인 가치였습니다. 똑같이 베드로전서에서도 16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핵심적인 가치는 크기와 규모에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어느 설교 시간에 이런 질문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왜 하나님이 역사적으로 가장 강대한 나라였던 로마나 중국을 택하지 않으시고 고등학교 세계사에 두 줄밖에 안 나온다는 이스라엘을 선택하셨을까? 그 이유는 그 이스라엘로 충분했기 때문입니다. 서 말의 가루에 두 말의 누룩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한줌이면 됩니다. 문제는 누룩의 품질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누룩이 품질이 전혀 누룩이 아니면 아무리 많이 집어넣어도 그 밀가루로 반죽한 빵은 먹을 수가 없습니다. 한줌이면 세말의 가루를 부풀게 하기에 충분합니다. 규모, 세력, 사회적인 지위, 이런 것들을 가지고 자랑하는 것은 바벨론의 가치이지 예루살렘의 가치가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작은 나라 이스라엘을 선택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사장 나라의 핵심 가치는 크기나 규모, 세력 이런 것이 아니라 순수성입니다. 하나님의 제사장의 나라로서의 순수성을 간직한 사람들이 되는 것, 이것을 예수님께서는 팔복의 사람이 됨으로써 그들이 모인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가 이 지상에서 아주 확실하게 전파력을 가진 그런 나라가 된다는 것을 말씀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두 번째는 헌신됨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5절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구원 이후의 삶을 덤으로 주어진 인생의 것처럼 생각하면서 그래서 자기를 구원해 주신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사랑을 간직하고 그 사랑이 이 세상에서 정의가 완성되게 하는 그 날을 위해서 헌신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의 제사장 나라 됨의 핵심 가치였던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가 중재됨입니다. 로마서 15장 16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분을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실 만하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했습니다. 신약 성경에 단 한번 나오는 복음의 제사장 직분이라는 표현입니다. 다시 말해서 헌신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해서 온전히 헌신을 하는 것입니다. 이 거룩함과 헌신은 아주 절묘한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 여러분, 구약에서 제사장이 제사를 드릴 때 무슨 복장으로 드렸습니까? 청바지와 작업복으로 일하지 않았습니다. 하얀 세마포 옷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위에는 모자를 쓰고 그 다음에는 가슴에는 에봇을 입었습니다. 치마처럼 된 하얀 옷을 입고 제사를 드렸습니다. 제사를 드리는 현장은 정결하고 깨끗한 환경이었을까요? 불결한 환경이었을까요?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죄인이 자기의 죄에 대한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하나님 앞에 용서를 빌며 제물을 가지고 나아옵니다. 그를 위해 기도를 합니다. 그리고 짐승이 거기서 죽임을 당합니다. 사지가 찢어지고 죽기 싫어서 몸부림치는 짐승들은 그렇게 몸부림치다가 배설물들을 쏟아냅니다. 그리고 결국은 갈라집니다. 그리고 거기서 피를 흘립니다. 그리고 거기서 내장들이 다 발라집니다. 그 짐승들의 시체가 산산이 헤쳐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그 짐승을 태우는 연기가 막 시커멓게 올라갑니다. 그리고 죄인은 자신의 죄에 대한 가책 때문에 울부짖습니다. 그 사이를 하얀 옷을 입고 오가면서 그 피와 배설물들을 여기 튀지 않게끔 자신을 스스로 제어하면서 그러면서 거룩한 제사를 드리던 사람들이 제사장입니다 그러니까 헌신적인 삶을 살아도 거룩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가 중보자가 되는 것인데 복음의 제사장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그래서 구약의 제사장은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 사이의 중보자가 되었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은 모르는 이방 나라와 하나님 사이의 중재하는 나라가 되었고,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인류와 하나님 사이의 중보자가 되었고, 우리는 이제 중보자가 아니라 그렇게 완전한 제사를 드려 구원의 길을 열어주신 모르는 예수님께로 하나님 모르는 사람을 데리고 가서 하나님과 화해시키는 중재자의 역할을 그리스도 예수의 구속의 행위를 공로를 기초로 그 일을 이루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중에 어떤 분들은 질문 하실 것입니다. 오늘 설교는 왜 이렇게 좌우로 맥이 없이 이렇게 오고갑니까? 왜 계속 선지자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제사장 나라, 제사장 이야기가 이렇게 많이 나오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놀라운 것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선지자 국가로 불렀다는 말씀은 안하십니다. 제사장 나라로 불렀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선지자가 중요하냐 하면 이스라엘이 하나님께로부터 많은 은혜를 받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신앙이 충만해집니다. 예를 들자면 홍해를 막 건넜을 때, 그 기적적인 구원을 얻었을 때 혹은 가나안을 정복하기 직전 정말 가난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도움을 구했을 때 이런 때에 큰 부흥이 일어나면서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어린아이처럼 순전해지는 것입니다. 이럴 때에는 그 이스라엘의 제사 속에 회복의 기능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죄를 지으면 가책을 느끼고 괴로워하면서 참회하는 마음으로 제사를 드리면 하나님 거기에서 용서를 경험하게 해 주시고 일시적이지만 그들의 영혼을 소생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워낙 뒤로 물러가서 타락과 부패가 사회적으로 고착화되어 버리면 그러면 예배에는 제사는 계속 율법에 따라 드려지는데 이게 습관화되면서 영혼을 살리는 일을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스겔서에 보면 누가 성전 문 좀 제발 닫았으면 좋겠다. 왜냐하면 저들이 늘 와서 절기를 드리고 제사를 드리는데 나에 대한 모독이다 나는 정말 싫다. 이사야 선지자도 똑같이 이야기 합니다. “죄 없는 짐승의 목은 왜 부러뜨리냐” 그러니까 쉽게 이야기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상적일 때에는 제사를 드릴 때에 그렇게 죽임당한 어린 양을 보면서 그 속에서 두 가지를 함께 느끼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오한 분노, 그리고 또 하나는 이렇게 내가 죄를 지었는데도 하나님이 내가 죽임을 당해야 하는데 제물로서 나의 죄를 용서하시고 나를 다시 용납해 주신다는 사랑에 대한 감격, 이것이 전달되어 오면서 제사 자체가 회복의 기능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좀 일주일 동안 실수를 하고 잘못된 것을 했어도 마음이 은혜 중에 있을 때에는 한번 와서 예배를 드리면 그렇게 눈물이 쏟아지면서 마음에 감화가 일어나고 정말 교회 가기 싫어서 진짜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억지로 엄마, 아빠 손에 이끌려 왔는데 진짜 오늘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는 말씀이었구나 감동을 감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워낙 뒤로 물러가서 존 오웬의 표현대로 죄의 지배아래 있게 되면 무얼 설교해도, 어떤 예배의 순서에도 정서적인 감동은 약간씩 있을지 모르지만 이 마음이 근본적으로 움직여지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도회에 참석하고 경건 서적을 읽고, 어떤 때는 의무적으로 해야 될 때가 있잖아요. 순장은 성경 다섯 장씩 읽어라, 다음 주까지 이 책 읽어오라 그러면 해야 되잖아요. 시켰으니까 하는데도 이것은 이것이고 저것은 저것입니다. 전혀 자신에게 영향을 주지 못합니다. 그때에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지자들이 그 안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계시의 말씀을 가지고 그들을 지금 하나님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를 자기는 이스라엘 속에 소속되지 않은 사람인 것처럼 국외자인 것처럼 그 말씀을 가지고 와서 선포함으로써 자기들 속에서는 들을 수 없는 이야기들을 선지자들을 통해 들으면서 그 진리의 빛이 자신의 행실을 확 드러내어서 어떤 사람은 회개하게 하고 어떤 사람은 더 강퍅하게 해서 나중에는 그를 죽여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 각도에서 볼 때에 이 선지자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제사장 나라가 된 그 상태를 건강하게 유지하게 할 수 있는 하나님의 말하자면 최후의 수단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선지자들이 피 흘리면 죽임을 당하기 시작하면 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그렇게 핍박을 받고 죽어갔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고난 받으면 죽어갔던 선지자들은 결국 이스라엘로 하여금 제사장의 나라의 정체성을 유지하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피를 토하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고 죽어갔던 인물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팔복의 사람들을 바로 그런 사람들과 역사적인 신학적인 연장선상에서 이 세상에서의 존재의 가치를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이게 어떻게 보면 엄청나게 부담스러운 해석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입니다.
여러분은 목사가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목사는 구약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피 뿌리고 죽어간 선지자들과 신약에서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파하다가 사도한 사도들의 후예다 이게 청교도들의 목사에 대한 인식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자기 인식은 목사들만의 것이 아니라 더 넓은 의미에서는 모든 신자들이 공유하여야 하는 신학적인 존재의 가치인 것입니다. 이제야 여러분, 제가 왜 이 팔복 전체를 설명함에 있어서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는 구절이 그렇게 중요하다고 말씀드리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이것을 우리에게 적용해 봅시다. 그러면 우리보고 어떤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까? 팔복의 사람이 되면 어떤 사람이 될 것이라는 뜻입니까? 결국은 최초의 청중이었던 마태복음 4장에서 병 고침을 받은 사람들과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오늘도 여러분과 내가 팔복의 사람이 되면 그러면 우리의 존재와 외침, 삶의 방식은 오늘날 뒤로 물러가고 하나님의 참된 복음과 진리에서 멀어져 간 사람들에게 우리의 외침은 아주 생경스러운 외침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름을 대면 알 수 있는 한국에서 무지무지하게 큰 교회입니다. 교단도 다른데 저를 불렀습니다. 그 교회에서 설교한 적은 몇 번 있지만 그 교회를 저를 부른 적은 처음이었습니다. 갔는데 고난 주간이었습니다. 성도들이 꽤 많이 모였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설교했습니다. 끝났는데 담임목사님이 저와 마주 앉았습니다. 그 분도 저야 직접 만난 적은 별로 없고 지금들은 다 은퇴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제 지면에서만 뵙던 분인데 “반갑습니다.” 그 목사님이 그러시는 것입니다. “아유 목사님 오늘 참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정말 목사님 설교는 독특하네요.” 그 얘기를 네 번을 하셨습니다. “정말 독특하시네요. 독특하시네요.” 그 분은 저의 설교에 감탄하셨지만 저는 통탄했습니다. 왜 이것이 독특하다고 느껴지셨을까?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시는 그 광경을 설교한 것인데 왜 그렇게 느껴졌을까?
결국 우리들이 참된 팔복의 사람이 되면 결코 보편적인 인기를 얻을 수 있는 그런 사람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확실한 것 하나는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충격적인 빛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미국에서 공부하다가 예수를 믿게 된 어느 남자 집사님이 있었는데 별로 누가 전해주는 사람도 없었는데 스스로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왜 예수를 믿었냐 그랬더니 대학에서 공부를 하는데 미국 학생들을 만났습니다. 그 사람들이 자기보고 예수 믿으라고 막 그렇게 전도하는 것은 아닌데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목사님 그 예수 믿는 사람들 때문에 제가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뭐라고 그러던가요?” “아니 말한 게 아닙니다. 그런데 그들은 달라요.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하고 달라요” 내가 다 알면서도 계속 물어보았습니다. 뭐가 다르냐 그랬더니 첫 번째 자기를 압도하는 인상은 평안이었습니다. 어디에서도 돈 많은 학생, 공부 잘 하는 학생, 거기도 얼굴이 잘 생긴 남자들은 여학생들에게 시선을 많이 받습니다. 그런 학생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평안, 그리고 평화, 여유와 부드러움, 행복, 이런 것들이 그냥 말하지 않고 가만있어도 옆에서 이렇게 곁눈질로 봐도 한 몇 달 같이 살면 전혀 질적으로 다른 사람들이다. 아니 더 좋다 나쁘다 그게 아니라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이라는 것이 느껴졌다는 것입니다. 자기도 그 세계에 가입하고 싶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되면 그런 사람들이 오면 그런 사람들에게는 우리는 너무 고마운 사람이 되고 그렇게 해서 누군가가 예수를 믿게 되면 우리들은 밤새도록 이야기해도 나눌 수 없는 수많은 이야기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싫어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냥 네가 너여서 싫다입니다. 이유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냥 싫은 것입니다. 알키비아데스가 소크라테스에게 이야기한 것처럼 ‘너는 내 앞에 있기만 하면 나로 하여금 나 자신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어준다. 그래서 네가 싫다’ 그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팔복의 사람들이 되어서 그렇게 교회를 향하여 선지자처럼 영향력을 끼치고 이 세상을 향해 선지자처럼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이 되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기 때문에 예수님이 12절에서 선지자들도 그렇게 박해를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III. 하나님의 나라와 삼직의 통합
A. 기독론적 통합
자, 이것이 이제 신약 시대에 와서 하나님의 나라가 본격적으로 도입되면서 삼직이 그리스도 한 분 인격 속으로 통합이 되게 됩니다. 이것이 기독론적인 통합입니다. 보이지 않는 햇빛이 프리즘을 통과하면서 일곱 개 무지개 색깔로 분광이 됩니다. 이 분광된 것처럼 하나님의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통치의 의지가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로 분광이 됩니다. 자연 과학적으로는 한번 분광된 스펙트럼은 다시 집광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신학적으로는 이 세 가지가 예수님 한분 인격 속으로 집광이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집광된 예수님의 존재와 삶의 방식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예수님의 지상 생애를 통해서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땅에 육신을 입고 계실 때에 왕처럼 통치하시기도 하셨고, 선지자처럼 죄인들을 깨우치시기도 하였고, 마지막 제사장처럼 그들을 위해 중보의 기도를 드리시고 당신 자신을 제물로 하나님께 바치심으로 죽으시기도 하셨던 것입니다.
B. 구원론적 적용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죽고 부활하신 후에 우리들은 구원 얻은 사람으로서 영적으로 머리되신 그리스도에게 접붙여져 교회의 몸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이제 기독론적인 통합에 이어서 구원론적인 적용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천국 백성들에게서도 삼직이 계승이 되는데 왕직은 현재적으로 계승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2장 9절에 보면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라고 말합니다. 왕 같은 이라고 말했지 왕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결국은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온전히 실현될 그때에 부활하신 주님이 이 세상을 심판하고 통치하실 텐데 어떤 식으로든지 그 심판과 통치에 우리들은 참여하게 되는데 그런 점에서 부분적으로 이 왕직이 미래에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성도들에 의해서도 부분적으로 성취가 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제사장과 선지자직은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 충분히 실현될 수 있고 실현되어야 하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결국 현재적으로 이러한 소명을 교회와 세상을 향해 실현하면서 살도록 부름 받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구속의 제사는 이미 성취되었고 그리고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원히 단번에 이루신 속죄의 제사를 기초로 구원론적인 적용의 전환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편으로 그리스도인들은 팔복의 사람이 될 때에 진정한 제사장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정상적으로 하나님의 소명이 뚜렷한 제사장이라면 당연히 범죄한 그들을 보면서 ‘저 자식 또 죄 지었군. 또 양 한 마리 잡아야 되네. 오늘은 도대체 왜 이렇게 죄 지은 사람들이 많은 거야. 힘들어 죽겠는데 왜 이렇게 양은 많이 죽여야 돼’이러지 않을 것입니다. 한 사람이 제사를 드리러 나올 때 하나님과의 관계가 철저히 깨진 그 사람이 겪고 있는 영혼의 슬픔과 눈물과 아픔을 기억하면서 그의 고통이 자신의 아픔인 것처럼 생각하면서 그의 죄가 자신의 죄인 것처럼 하나님 앞에 고백하며 용서를 빌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사랑과 긍휼이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 일을 이 세상을 향해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참된 하나님의 정의와 공평이 무엇인지를 진리의 말씀으로 보여주는 예언자적인 삶을 살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기독교의 이름을 도용하여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악이나 잘못된 일들에 대해서 독한 복수심과 미움을 품고 그렇게 사람들을 인신공격 하고 짓밟는 사람들을 봅니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잘못된 태도이고 팔복의 사람들이 해야할 그런 태도가 아닌 것입니다. 이번에 사회를 뒤흔들어 놓는 중요한 사건에 대한 보도가 있었습니다. 계모들이 자신의 자식을 폭행한 그 이야기, 한 사람은 15년, 10년 형을 선고받고 시민단체는 막 사형시켜야 된다고 들고 일어났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분노를 정당하게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정말 우리도 복음의 빛이 없고 참된 교육을 받으며 양식 속에 살지 않았더라면 그 보다도 더 더러운 일들을 얼마든지 했을 사람들이고 그들은 자식을 폭행했지만 우리는 자식보다도 더 소중한 성도들을 정신적으로 폭행했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은 그들의 죄를 그렇게 미워하면서도 사실은 그런 무지 속에서도 그렇게 자신도 교육 제대로 받지 못하고 감정 조절이 안 돼서 그렇게 야비한 폭력을 행할 수밖에 없었던 망가진 그 사람들의 영혼에 대한 불쌍한 마음이 없이 복수의 칼날을 가는 것은 그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언제나 그리스도인의 손에 들려진 이 칼은 좌우의 날선 진리의 검이어야 합니다. 그것은 휘둘러져야 합니다. 특히 사회적인 악이 있는 그곳에서는 휘둘러져야 하고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 하나님의 정의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러나 좌우의 날선 그 검은 먼저 자기반성과 죄에 대한 슬픔에서 오는 눈물이 묻은 칼이어야 하고 그런 죄와 악들을 이 세상에서 제거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처럼 피를 쏟고 기도하셨던 그 피가 묻어있는 칼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팔복의 사람은 인격과 삶으로써 하나님의 통치 아래 사는 것이 얼마나 복된 것인지를 드러내며 살도록 소명된 사람들이고 그래서 한쪽에는 뚜렷한 사상과 그리고 윤리적인 삶 두 개가 기둥이 되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로 이 두 개를 묶어 믿는 것처럼 알고, 아는 것처럼 살고, 사는 것처럼 확신하는 이러한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삶을 삶으로써 여러분을 통해서 하나님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은 선지자는 하나님의 지혜를 드러내는 직분이고 우리는 바로 그 선지자들의 후예로서 거룩하고 구별된 삶으로써 사랑과 진리를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진리가 바로 정의를 가리키는 것이라면 이 사랑은 결국 공평한 삶을 가리키는 것이고 그 공평한 삶이 소금의 역할로 비유될 수 있다면 그 정의로운 삶은 진리의 역할로 대변될 수 있는 것입니다.
IV. 적용과 결론
선지자들은 자기의 시대가 너무나 타락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 그대로 외치는 것은 무모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없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투스프로페타스’ 그 선지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선지자들은 타락한 시대에도 진리의 전달자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여야 했고, 이스라엘 백성의 타락은 그들 마음속에 불타고 있는 진리가 진실되다는 것을 드러낼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어두운 밤하늘에 충천하는 화염처럼 외치고 살다가 죽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것이 선지자의 존재의 가치이고 그리고 선지자들의 활동은 거룩한 소명의 체험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며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세상으로 평가받고 세상과 함께 타협하고 세상의 인정과 하나님의 사랑을 동시에 받아서 이 세상의 소금대신 설탕 되는 것이 목표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세상의 미움을 받으면서도 자신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존재로 이 세상에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하나님 앞에 감사해야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어차피 구원받은 이후의 삶이 덤으로 사는 인생이니 언제든지 이 진리의 나타남을 위해서는 기꺼이 죽을 수도 있다는 마음을 가지고 살고 자기 앞에 수많은 선지자들이 그렇게 살고 죽어갔고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그 선지자에 대한 이스라엘의 미움의 연장선상에서 죽임을 당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사는 사람이어야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세상의 미움이 주는 아픔보다 더 큰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하십니다. 여러분은 사람을 기분 좋게 하는 물질을 알고 계십니까? 그것이 분비되면 사람의 감정이 아주 기쁘고 행복한 감정이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엔돌핀입니다. 그런데 이 엔돌핀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오는 때가 모든 인간에게 딱 한번 있는데 죽기 직전입니다. 그래서 질병 속에서 막 고통을 받다가 마지막에 딱 죽는 그 순간에 놀라운 평화가 옵니다. 평화가 밀려와서 평안한 얼굴로 죽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확 분비되는 엔돌핀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 엔돌핀이 쏟아져 나오면서 평화를 부리게 되는 것입니다. 순교자들이 죽는 광경을 화형과 참수, 그 다음에 교수형의 모든 광경들을 지켜본 그 증언자들의 간증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놀라운 평안과 확신 그리고 용기 이것은 결국 하나님이 특별히 주시는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일반 은총 차원에서도 악인들의 죽음에도 그러한 배려를 하셨다면 당신의 이름의 영광을 위해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하나님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와 기쁨의 배려를 하셨겠습니까? 더욱이 그들을 위해 준비된 하나님의 영광은 얼마나 놀라운 것이겠습니까? 왕이심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는 제사장의 마음으로 선지자처럼 그렇게 사셨던 분이었습니다. 그리고 당신 자신이 그 미움을 받고 십자가에서 살해를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죽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빛으로 사신 삶의 마지막 결과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므로 그 모든 사람들 위에 뛰어난 이름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셔서 그래서 당신의 영광에 참여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어서 이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을 지라도 하나님의 팔복의 사람으로서 정체성을 유지하며 천국의 기쁨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기뻐하는 팔복의 사람들(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마5:12)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팔복의 사람이 되면 이 세상에서 구약의 선지자들이 박해를 받았던 것처럼 핍박을 받게 될 것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팔복의 사람이 되면 그는 어디에 있든지 지위와 그의 재산의 소유의 다과에 불과하고 하나님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뜻 안에서 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팔복의 사람이 너무 사랑스러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고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회개의 열매를 맺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거치는 돌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팔복의 사람들에게 이러한 박해와 고난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II. 신자의 삶: 기쁨과 즐거움
A. 기쁨과 즐거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예수님께서는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그들을 격려하십니다. 어떻게 기쁘고 즐거울 수 있을까요?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팔복의 사람이라는 이유 때문에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말을 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거슬러서 있지도 않은 이야기로 우리에게 악한 말로 우리에게 모욕을 하는데 어떻게 기쁘고 그리고 즐거워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기쁨과 즐거움의 이유를 하늘나라에서 찾으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팔복의 사람이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신자로서의 그의 삶이 기쁨과 즐거움의 삶이 되어야 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라는 이 희랍어 문장은 명령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카이레테 카이 아갈리아스떼”(kairete kai agalliasthe)되어 있습니다. ‘즐거워하라, 환희하라’ 혹은 ‘기뻐하라, 그리고 기뻐서 날뛰라’ 심지어 두 번째 단어인 ‘아갈리아스테’는 ‘찬양하다’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그러면 결국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 세상에서는 너희들이 팔복의 사람으로 고난을 당하지만 하늘나라에서 있을 어떤 일들을 생각하면서 지금 기뻐하고 환희하고 벅차하는 삶을 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팔복의 사람이기 때문에 당해야 하는 존재론적인 박해를 기뻐하는 삶으로서 이기며 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을 사랑하십니다. 영적으로만 그들을 사랑하고 돌보시는 것이 아니라 육적으로도 사랑하시고 돌보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는 것은 영혼만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것이 아니라 육체에까지 하나님의 형상의 개념이 확대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이만저만한 키에 몸무게를 가지신 분처럼 생기셨다고 하는 의미는 물론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영혼과 정신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우리의 삶 속에 크고 작은 섭리가 개입해서 우리에게 각양 좋은 것들을 공급해 주시는 선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많은 좋은 것들, 추위와 더위로부터 우리의 몸을 보호하고 사람들에게 품위를 유지해 보일 수 있는 우리의 의복, 건강을 위한 우리의 적절한 음식, 그리고 우정을 나눌 수 있는 사랑하는 친구들, 그리고 사랑하는 가족, 그리고 형제자매들, 선한 이웃들, 우리들이 교육을 받을 수 있는 환경, 이런 모든 것들이 다 하나님이 주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온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하나님이 주신 것들이 좋다고 그것을 누리는 일에 집중한 나머지 그것을 주신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손상된다면 그것은 그런 좋은 선물을 주신 하나님의 뜻이 아닐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우리의 소망을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에 두면 언젠가 이 모든 것들은 사라질 것이고, 사라지고 나면 우리는 사라진 것들에 대해서 우리의 사랑만 남게 될 것이고, 그리고 그것은 결코 우리의 삶을 행복하게 하지 않습니다.
살면서 우리 집안에 아이들이 개를 기르자는 이야기를 몇 번 건의를 했습니다. 우리 부부는 한사코 반대했습니다. 우리 집사람이 왜 개 기르는 것을 반대했는지는 난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내가 반대하는 이유는 아주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어렸을 적 기억에 아주 개를 좋았습니다. 그래서 우리 집안에서는 개가 떠나질 않았습니다. 그래서 늘 하나가 사라지면 하나가 오고 이렇게 하면서 계속 길렀습니다. 그런데 꼭 이 개가 죽습니다. 그런데 여태까지 기른 개는 거의 자연적으로 늙어서 죽는 개를 한 번도 못 봤고, 개를 딴 데로 어른들이 내가 없을 때 팔아 버리거나 아니면 개가 쥐약을 먹고 죽습니다. 그 당시에는 쥐약을 아주 많이 동네마다 놨기 때문에 이 개를 풀어 놓으면 돌아다니다가 쥐약을 먹고 죽습니다. 그런데 하여튼 얼마나 가슴이 아픈지 그 한 삼일 동안은 그렇게 눈물을 흘리고 생각이 나서 우는 것입니다. 그게 아주 오래 갑니다. 학교 갔다가 오면 막 꼬리치고 막 달려들면서 반가워하던 그 모습이 선해서 그 텅 빈 개집, 그 다음에 홀로 남은 개 목걸이 이것을 보면서 그 동물이 기억이 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이 나이가 들어서 또 개를 기르면 언젠가는 또 헤어지게 될 텐데 그러면 또 그런 고통을 받기가 너무 싫은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 역설적으로 말하면 개를 너무 좋아하기 때문에 사실은 안 길렀다고 말해도 되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의 모든 불행이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까지 많이는 사랑하지 말아야 하는데 자기의 모든 것을 걸고 사랑할 가치가 없는 것들을 사랑하는데서 인간의 비극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물건이든지 돈이든지, 명예든지, 사람이든지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훌륭한 선교는 신자의 삶 속에서 세상이 알 수 없는 원천의 기쁨의 근거를 두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에 그의 삶이 가장 선교적인 삶이 되는 것입니다. 돈이 많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행복해 한다면 그것은 다른 사람들도 할 수 있는 행복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돈이 많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행복해 한다면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그를 보면서 그가 진정으로 예수 때문에 행복한 것인지 또 때문에 행복한 것인지 아마 알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는 어차피 그들이 모르기 때문에 아마 돈 때문에 행복할 거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지위도 마찬가지입니다. 오히려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나님이 섭리 속에서 이런 많은 이 세상과 육체에 속한 것을 주신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추적해 들어가서 그 멀리 너머에 있는 정신적이고 영적인 것들을 보면서 그 안에서 행복해 하고 즐거워하는 것, 하나님 때문에 그게 정말 아름다운 것 아닙니까?
이틀 전에 미국에서 편지가 하나 왔습니다. 그래서 이게 뭔가 하고 보니까 아주 정성껏 펜으로 영어로 써서 보냈습니다. 그런데 열어 보니까 작년에 우리 교회에 와서 말씀을 전하고 간 더글러스 스위니 교수가 써서 보낸 편지입니다. 그런데 열어 보니까 열린 교회가 불났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 마음이 너무 아팠다고 그러면서 건물 복구에 보태 쓰라고 수표를 한 장 보냈습니다. 물론 큰 금액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것을 받는 순간에 마음이 너무 따뜻했습니다. 이렇게 먼 거리에 떨어져 있어도 그 부인하고 어디에서 한국 학생들에게 들었을 것입니다. 그 소식을 듣고 자기가 너무 마음이 아파서 부인 윌마와 함께 열심히 기도하고 있다고 그래서 교회가 오히려 더 잘 복구되기를 바란다고 그리고 가계 수표 한 장을 넣어서 보냈습니다. 그런 생각이 듭니다. 우리 모두가 저렇게 좀 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산을 옮길만한 큰 믿음, 그리고 정말 평범한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해내는 말하자면 사역의 저력, 그런 것도 물론 훌륭하지만 그러나 무엇을 하든지 정말 착한 인격이 느껴지는 그런 사람이 그게 진짜 그리스도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면서 나 자신을 돌아보았습니다. 나 자신은 이런 착한 마음으로 사람들의 가슴을 따뜻하게 한 것이 1년에 몇 번이나 될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물론 애를 썼지만 그들이 따뜻해 졌는지 가슴이 차가워졌는지 그것은 나는 모릅니다. 그렇지만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세상이 이해할 수 없는 원천에 기쁨의 근거를 두며 확신에 차서 살아갈 때 그의 존재 자체가 선교가 되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선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국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인에게 널리 알려진 속담이 있습니다. "The presence is the best proclamation.", “현존하는 것이야 말로 최고의 선포다.” 그런 뜻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그리스도인으로 만들어 주신 삶의 이유입니다.
B. 신령한 세계와 행복
그래서 우리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핍박과 고난을 받으면서도 즐거워하고 기뻐하고 환희에 벅찬 삶을 살기 위해서는 신령한 세계와 행복에 눈을 떠야 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크기 때문이다.” 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눈만 뜨면 이 세상에서 수많은 사물들과 마주하게 됩니다. 여기는 의복이 있고 이 옷을 입고 있는 나는 사람이고 여기에 있는 이것은 꽃입니다. 그리고 나무도 있고 그리고 또 다른 우리의 이웃,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수많은 사물들이 있지만 스스로 홀로 있는 것은 그 중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오직 그 모든 것들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것들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들 중 생명을 가진 것은 더욱 소중합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하나님의 자존하심을 가장 많이 닮은 모상인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그것들 중에서도 움직일 수 없는 식물보다는 움직일 수 있는 동물이, 그리고 움직이고 감각할 수는 있지만 인식할 수 없는 동물보다는 움직이고 감각하고 인식할 수 있는 의지를 결정할 수 있는 인간이 하나님의 자존하심의 특성을 가장 많이 모방하고 있기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로서 존귀히 여김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에게 여러 번 설교했지만 아무리 되풀이해도 지루하지 않은 말이 있습니다. 한 사람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깊이는 사람을 바라볼 때 그가 가지고 있는 소유나 지위나 외모의 아름다움이나 그 다음 피부 색깔이나 나이의 많고 적음이나 이런 것들을 모두 벗겨 버리고 그냥 사람 자체로서 얼마나 존귀하게 여기고 그를 향하여 예의를 갖출 수 있느냐가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가지고 있는 영적인 깊이입니다. 그것을 언제나 명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사물들 하나하나는 원래는 없었던 것들인데 하나님이 창조하셔서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들이 창조되기 전에는 이 하나하나의 사물들에 대한 관념이 하나님의 생각 안에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창조되었을 때 하나님이 세계를 바라보시면서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 라고 하실 수 있었던 이유는 창조된, 그래서 시간과 공간 안에 있게 된 모든 피조물들이 당신의 관념에 있는 그것과 일치했기 때문에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인간의 진정한 행복은 바로 이렇게 보이고 만질 수 있도록 존재하는 시간과 공간 안에 있는 모든 사물들을 보면서 이것을 추적해서 하나님 안에는 이 사물들에 무슨 생각이 있었을까를 발견하고 그 생각 하나는 어떻게 서로 연관을 이루고 작용을 해서 마지막에 시간과 공간 안에 있는 이 세계 속에서 하나님이 세계를 만드신 목적을 이루도록 작용하는가 하는 것을 발견해 가는 데에 인간의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하나하나 사물에 대한 앎을 우리는 지식이라고 부르고, 이 사물들이 서로 상호 연관을 통해서 갖게 되는 자연적 의미와 도덕적 의미를 연결할 수 있는 능력을 가리켜서 우리들은 'wisdom'(지혜)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면 인간의 참된 행복은 이렇게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의 사물들을 바라보고 탐구하면서 하나님 안에 있는 관념을 발견하고 그것들이 서로 연결되고 작용하는 그래서 창조 세계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지혜를 발견하면서 행복해 하고, 그 지식과 지혜를 발견하고 그렇게 지혜롭고 탁월하신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에 인간의 진정한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불행은 이러한 것 이외에서 행복을 찾아보려고 하는데서 인간의 불행이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행복해지는 것도 사랑 때문에 행복해지고, 불행해지는 것도 사랑 때문에 불행하게 됩니다. 하나님 이외에 모든 것들은 질서를 따라서 사랑할 가치가 있지 하나님처럼 사랑할 가치가 있는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는 자기의 책 속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하나님 이 세상에서는 우리의 눈길을 끄는 사랑스러운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많이 사랑해도 우리에게 불행을 가져다주지 않는 유일한 대상은 오직 당신뿐입니다.” 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탈 없이 사랑할 수 있는 이는 오직 당신뿐이옵나이다. 너무나 오래된 그러나 너무나 새로운 아름다운 이시여”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천국에서 누리는 행복은 먹고 마시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래서 천국에 가면 우리들이 정말 생명수 샘물을 마시고 그 강가에 수많은 열매를 먹으면서 그렇게 한적하게 휴식을 취할 것이기 때문에 천국은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나라에서 성도들이 누리게 되는 행복은 신령한 세계와 그리고 거룩하신 하나님에 대한 점증하는 지식과 사랑 때문에 누리게 되는 행복입니다. 천국에서는 앎이 증대되고, 사랑도 증대되게 됩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이 나 같은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 지를 깨닫고 나면 예전에 불순종하던 모든 삶을 버리고 눈물 흘리며 회개하고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게 됩니다. 그때 우리의 마음속에서는 해방과 큰 기쁨이 밀려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는 그런 일들이 매일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매일매일 그런 일들이 천국에 만약 아침과 저녁이 있다면 아침이 다르고 저녁때가 다를 정도로 그 지식들은 점증하고 그 점증하는 지식과 함께 하나님께 대한 감격과 사랑도 점증하게 됩니다. 그래서 천국에서는 어느 한 순간도 그저 그렇고 그런 날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날마다 새로운 날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기쁨을 경험하게 됩니다.
III. 천국에서 상급이 있는가?
A. 천국의 상급에 관한 견해들
오늘 성경은 바로 그 위에다 하나를 덧붙이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상급입니다. 예수님 말씀하십니다.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고 말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신학적인 질문을 하게 됩니다. 과연 천국에도 상급이 있는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천국에서 상급이 있느냐에 관한 견해는 크게 둘로 나뉘어지는데 첫째는 상급이 없다는 견해입니다. 그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상급에 대한 사상 자체가 인간의 공로를 축척해서 구원을 이루어 간다는 로마 가톨릭의 공로 사상으로부터 유래된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성경의 사상이 아니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 상급 사상은 성경에 나오기는 하지만 이것은 구원을 얻은 인간이 태만해지지 않도록 끊임없이 선행을 격려하시는 하나님의 “아콤모다치오”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콤모다치오”라는 것이 뭐냐 하면 인간의 이해 수준이 어린 아이처럼 낮으니까 어린 아이가 알아들을 수 있는 화법으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방식이 바로 천국에 뭔가 큰 상급이 있는 것 같은 오해를 우리에게 불러 일으켰다는 이야기입니다. 오히려 천국에서 이런 저런 상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만약에 그 이유 때문에 열심히 살아간다면 그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의 우열을 가르는 탐심을 천국의 삶에다가 심리적으로 투사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상급이 있다는 견해가 있습니다. 상급이 없다는 견해가 대단히 이성적이고 상당한 설득력을 가진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성경은 여러 곳에서 의심할 수 없는 명백함을 가지고 상급을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앞에 있는 이 본문도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고 말입니다. 누가복음 6장 23절에서는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기뻐하고 뛰놀거라 하늘에서 너희 상급이 크기 때문이다”라고 말입니다. 탁월한 지성인이었던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보내는 편지 속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해서 달려가노라.” 올림픽에 달리기 선수들이 오직 상 하나를 바라보고 온 힘을 다하여 달음질하는 것처럼 자신이 그 상을 목표로 삼고 달려가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천국에서의 인간의 각각 다른 영광을 암시하는 듯 한 구절이 고린도 전서 15장에 나오는데 이렇게 말합니다. “해의 영광이 다르고, 달의 영광이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도 다르다.” 는 것입니다. 오히려 성경은 하나님이 주시는 상급을 바라보고 달려가는 것을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간주합니다.
그러면 도대체 천국에서 우리에게 어떤 식으로 상급이 주어질까요? 어떤 사람은 설교 속에서 이야기를 하기를 열심히 주님을 섬기고 많이 헌신하면 하늘나라에서 금과 은으로 만든 매우 큰 집에서 살게 되고 겨우 구원을 얻은 사람은 개집 같은 데서 살게 된다고 하는데 천국에도 개집이 있을지 그리고 그것은 무엇으로 만든 것일지 궁금합니다. 아마 상급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렇게 집이나 차나 아니면 맛있는 먹을 것이나 혹은 입는 옷이나 이런 것으로 보상 받는 상급은 아닐 거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그런 나라가 아닙니다. 그것은 모두 이 세상 나라에서 왕들이 자기에게 충성한 사람들에게 베푸는 상급의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그 상급은 그런 물질적인 상급이라기보다는 천국에서조차도 지성의 크기와 감성의 크기에 차별이 있는 것이 아닐까 라고 조심스럽게 생각해 봅니다.
이 세상에서는 누군가가 나보다 더 많은 것을 차지하고 있고 누군가가 나보다 지성이 더 뛰어나고 예술적인 감성이 더 탁월하다면 우리는 종종 시기하기도 하고 자존심이 상하기도 하고 그런 불쾌한 감정을 겪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나라에서의 이 상급은 비록 서로 다른 차이가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영적이고 아마도 정신적인 것이 될 것이고 여기에서 상급을 받는 사람이나 덜 받는 사람이나 일체의 탐욕이 배제된 가운데 서로 상급의 크기가 다르기 때문에 오히려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그런 방식의 차등적인 상급일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이런 것은 실제 이 세상에서도 부분적으로 우리들이 경험합니다. 예를 들자면, 우리가 은혜가 떨어지고 사람이 세속적이 되면 나보다 얼굴이 예쁜 사람 만나면 짜증도 나고 옛날에 방배동에 있을 때 누가 그랬습니다. “목사님 그 아무개, 아무개 언니는 신경질 나게 예쁘게 생겼어요.” “그 애가 예쁜 게 너한테 신경질이 나냐?” “너무 예뻐요.” “너도 그 마음만 고치면 쓸 만하다.” 그랬습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때는 책을 읽다가도 너무 탁월하게 잘 쓴 사람을 보면 너무 자존심이 상합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써도 그렇게 못 쓸 거라는 것을 내가 알기 때문입니다. 제가 17, 16, 18 몇 살인지 잘 기억이 안 나는데 파바로티의 노래를 듣고 한 동안 열등감에서 헤어나지를 못했습니다. ‘어떻게 인간이 저렇게 노래를 잘할 수 있을까? 나는 왜 못할까? 열곡만 저렇게 부르고 죽어버려도 참 좋겠다.’ 생각을 했습니다. 전부다 신앙이 없고 하나님을 향한 까리따스가 없을 때에는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진짜 은혜가 마음속에서 넘치면 누군가가 그런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주님을 섬긴다고 할 때에 그렇게 하나님께 감사할 수가 없습니다. ‘야, 우리가 정말 무지하니까 하나님이 우리 형제 중 탁월한 지성을 가진 사람을 주셔서 이렇게 글을 써서 우리를 감동주고 우리를 새 사람 만드는 구나.’ 너무 감사합니다. 은혜가 정말 충만하면 나보다 정말 예쁜 사람을 만나도 물론 여러분은 그런 사람을 만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도 여러분보다 예쁜 사람을 만나도 샘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이미 오래전에 얼굴 예뻐서 달려드는 형제들에 대한 관심을 끊은 지 오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가치관 자체가 변했기 때문에 시기의 대상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은혜가 떨어지니까 시기의 대상이 그렇다고 해서 폭탄 맞은 머리하고 다니라는 뜻이 아닙니다. 가꾸되 자기 자신을 관리하는 것이지 이것을 가지고 과시하고 사람들에게 피부는 권력이다 우리는 그렇게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권력은 무슨 권력입니까?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까리따스의 사랑이 내 마음속에 가득 넘치게 되면 아무도 시기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있는 것이 너무 좋은 것입니다. 아마 천국에서의 상급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 상급은 못 받은 사람을 자존심 상하게 하고 받은 사람으로 하여금 오만하게 하고 그래서 못 받은 사람이 차라리 지옥으로 가고 싶은 그런 나라는 아닐 것이다. 만약에 그렇다면 거기가 어떻게 천국일 수가 있겠습니까?
B. 상급 받는 팔복의 사람들
예수님께서는 바로 상급을 받는 팔복의 사람들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들이 진실한 팔복의 사람들이 되어서 이 세상에서 박해를 당하고 고난을 당할지라도 그들이 그렇게 당하는 박해와 고통은 반드시 하늘나라에서 보상될 것입니다. 그들이 이 세상에서 경험했던 존재론적인 박해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은 충분히 영광을 받으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을 당신의 상급으로 갚으시는 것입니다. 선지자의 임무는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단지 말로만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그에 따라 행동하고 그에 일치하는 성품을 보임으로써 많은 사람들에게 선지자의 임무를 다함으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이 사람들이 바로 구약에서 수없이 죽어간 팔복의 사람들의 선배입니다.
우리는 고단한 우리의 일생을 마치고 하나님 앞에 섰을 때에 우리가 받게 될 상급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마음을 다하여 팔복의 사람이 되기 위해 애쓰고 고난과 핍박, 시련과 고통을 이기면서 우리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리스도의 교회를 섬겼던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결코 그들을 모른 척 하지 아니하시고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좋은 것을 주실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굳게 믿습니다. 우리는 그것이 이 세상에 있는 물질과 이 세상에 있는 헛된 명예로 갚아 주시는 보상이 아닐 것이라고는 확신합니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은 반드시 우리로 우리에게 하나님에 대한 탁월한 지식을 전달해주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들고 하나님께로부터 더 많은 사랑을 받게 해 주는 영적이고 정신적인 행복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굳게 믿습니다. 우리는 그것만 해도 충분합니다. 왜냐하면 설령 하나님이 그 하늘나라에서 아무것도 우리에게 안 주신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이미 너무나 많은 것을 받았습니다.
(찬양)
고난도 슬픔도 이기게 하옵시고
주 말씀 따라서 용감하게 하소서
예전에 우리는 하나님도 모르고 십자가도 몰랐기 때문에 어리석게도 자기를 위해 살다가 불행히 죽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수많은 사람들 중에 무엇 때문인지 우리를 선택하셔서 우리에게 그 어리석은 복음이 믿어지게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우리가 쟁취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선물이었습니다. 그래서 미력이나마 자기만을 위해서 사는 대신 주님을 위해 살고 남의 행복을 위해서 살게 하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섬김의 뒤를 따르게 만드셨습니다. 아직 온전한 팔복의 사람이 아닐 때가 너무나 많아서 그래서 우리가 이 땅에 살아 있음으로 주님이 주님을 드러내시기 보다는 나의 나됨을 드러날 때가 많지만 그러나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붙들고 계십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죄를 사랑하면서도 또 한편으로서는 그리스도를 온전히 사랑해서 변화된 성품으로 이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살고 싶어 합니다. 박해를 받으면서도 거기서 자신이 신자인 존재론적인 가치를 느끼면서 하나님을 향해 살고 싶어 하는 것이 여러분의 마음입니다. 이것은 모두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은혜를 주셨기 때문에 그만큼이라도 생각하고 사랑하고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세상이 전혀 동의할 수 없는 방식으로 행복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가진 것이 없어서 심령에 가난한 사람들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시고 기뻐하는 자들을 오히려 경고하시고 애통하는 자들을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온유하고 의에 주린 사람들을 복 있다고 말씀하시고 긍휼히 여기고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을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평화를 이루며 박해를 받는 사람들을 주님은 복 있다고 말씀하셨으니 이 세상에서는 그들이 유명한 자요, 핍박을 받는 자들이요, 짓밟히는 자들처럼 여겨지겠지만 그들은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면서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IV. 적용과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은 참 많이 변했고 사람들도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교회도 변했습니다. 교회가 전하는 복음은 변했을지라도 우리 주님이 이 세상에 들려주고 싶어 하시는 복음은 언제나 동일하고 불변한 복음인데 이는 그리스도께서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동일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구속의 은혜, 오늘도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셔서 누리며 살게 하시는 은총, 이 모든 것들은 하나의 목적을 향하고 있습니다. 이곳 어두운 세상에 소금과 빛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주님은 우리에게 너희는 팔복의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십자가의 구원의 은혜를 입은 여러분에게 우리 주님은 팔복의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께 나아갈까, 천천의 기름이나 만만의 수양일까, 아니면 내 몸의 열매를 주님께 드릴까.’ 이렇게 고민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의와 공평과 인자를 원하셨듯이 여러분에게 주님은 오직 한 가지 소원을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너희는 제발 이 세상에서 팔복의 사람이 되거라. 그리하여 너희가 이 세상에 존재함으로 나의 나라가 선포되도록 그렇게 살아다오.”라고 부탁하고 계십니다. 다른 분이 아닌 십자가에서 여러분을 위해 자신의 살을 찢으시고 온전히 피를 흘려주심으로 여러분을 구원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에게 하는 마지막 부탁입니다. 여러분은 이 부탁 앞에서 어떻게 사시렵니까?
팔복의 사람 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