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역자 수련회 2
“일어나 너의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종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그들에게 보내어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행 26:16-18)
녹취자 : 오희열
92년 겨울이었던 것 같습니다. 기도를 한다고 춘천으로 갔습니다. 차를 운전하고 가다가 도저히 미끄러워서 안 될 것 같아서 군부대가 있고 사람이 잘 안 다니는 곳이었는데 길가에 차를 세워놓고 가방을 매고 눈이 하얗게 쏟아진 길을 걸어서 기도원으로 갔습니다. 그 기도원으로 왜 갔는지 아십니까? 제가 거기서 89년도에 깊이 주님을 만났고 도움을 받고 싶었기 때문에 한 3년 만에 기도원을 찾아서 갔습니다. 갔더니 기도원에는 묵을 곳이 없고 기도원은 너무 춥다고 동네의 민박을 소개해주었습니다. 초가집이었는데 얼마나 가난한지 호롱불을 켜 놓았습니다. 그래도 손님이 온다니까 군불을 따뜻하게 지펴주고 그 방에 앉아서 문을 열면 하얀 눈밭이 보였습니다. 거기 앉아서 묵상한 것이 사도행전 26장이었습니다. 그때 얼마나 은혜를 주셨는지 정말 기도도 많이 하고 책을 써도 될 분량의 깨달은 내용들을 깨알같이 적어서 내려왔던 기억이 납니다.
사도 바울은 이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즉시 예수님께서 이방인의 선교를 위한 사명을 주십니다. 그가 전파하기를 원하셨던 가장 중요한 메시지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저께는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라고 배웠는데 여기서는 그것보다 훨씬 범위가 넓고 구체적으로 적용된 내용이 나옵니다. 그것은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종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행 26:16) 그러니까 바울에게 주신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내가 네게 나타난 것과” 무슨 뜻입니까? 언제 다른 때에 나타난 것이 아니라 지금 나타나 계신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말씀하시고 싶은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는 것. 말씀드렸지만 부활하셨다는 사실이 사도 바울에게 커다란 신학적 혼란을 주었다고 했습니다. 그것을 모두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이 왜 저주하셨으면서도 다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셔서 다시 살리셨는지, 혹은 다시 살리시는 것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받게 하셨는지, 이것을 모두 포함한 것이 “내가 네게 나타나는 일”입니다. 구속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낼 일들”, 이것은 언제입니까? 가깝게 보면 주님이 사도 바울에게 나타나셔서 뭔가를 말씀하시겠다는 것도 되지만 멀리 보면 재림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완성’입니다. 사도 바울의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이미 이루어진 구속과 이루어질 완성 사이에서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답이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인 것입니다. 정확하게, 사도 바울이 받은 소명과 사도 바울의 메시지 선포가 선명하게 연결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은 구속의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그런 회심의 마음을 가지고 일생을 살아가는 것이 종말론적인 삶입니다. 이것을 받았을 때는 이 사도 바울이 그런 신학적 의미를 다 알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중에 하나씩 깨달아가면서,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빠르게 깨달아가면서 자기가 무엇을 선포해야 하는지 알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 뿐만 아니라 사도들이 사도행전에서 선포했던 메시지들을 다 요약하고, 그것들을 서신서까지 다 연결해보면 결국은 그리스도인은 이렇게 살아야 한다, 교회에서 이렇게 저렇게 해야 한다는 모든 가르침들은 구속의 사건과 완성의 사건 사이에 자리 잡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이 본문의 뜻을 설명하기 전에 설교자가 무엇에 가슴 벅찬 사람이어야 하는가? 어떻게 해야만 모든 겸손과 눈물과 오래 참음으로 주를 섬길 수 있고, 어떤 마음이어야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그리스도 예수께 대한 믿음을 선포하는 일에 자기를 온전히 바치고, 마지막에 그 일을 마치게 함에는 생명까지도 아까워하지 않는 사람이 될 수 있는가? 그것이 바로 두 가지입니다. 영망과 전망에 사로잡힌 사람이 ‘설교자’, ‘목회자’인 것입니다. ‘영망’은, ‘회고’입니다. ‘retrospection’, 뒤로 돌아보는 것입니다. 회고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다시 사셨다는 사실을 회고하는 것입니다. 거기서 내가 누구인지를 깨닫는 것입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를 내 마음에 모시고 소명을 받았을 때 이미 나는 나의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회고 속에서 갖게 되고 전망을 향해서 바라보는 것은, 우리가 비록 이 세상에서 때로는 고난을 당하고 목회 사역이 뒤로 밀리는 것 같고 우리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지만 그러나 결국 마지막 날에 그 나라가 주님의 손에 의해서 완성될 것이기 때문에 승리를 확신하면서 그 길을 걷는 것입니다. 그 승리에 대한 기쁨을 앞당겨서 누리고 그 기쁨 속에서 오늘날 이 땅에서 겪는 많은 고통과 외로움과 시련을 이겨내는 것입니다.
이러한 두 가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영망과 세계의 완성에 대한 전망, 이 두 사이에서 가슴이 뜨거워져야만 결국 회심을 선포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다 줄 수 있습니다. 남이 신앙을 가르쳐 수도 있고 어떻게 설교 하라고 원고를 도와 줄 수도 있습니다. 한 가지 줄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가슴에 불타오르는 열정입니다. 그것은 손에서 손으로 쥐어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흉내를 낼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연설이지 설교가 아닙니다. 그래서 주님을 깊이 만나는 신앙이 모든 목회의 근본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성격이 좋고 예의 바르고 눈치 있게 하면 칭찬받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칭찬을 할 때는 심오한 것을 보면서 칭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뿐이지 뭔가를 돌파해나가는 것은 안 되는 것입니다.
엊그제 설교했던 알렉산드로스의 정신, 레오니다스 같은 그런 정신, 통치자의 정신, 군사들의 불타는 그 충성, 이런 것들은 그냥 그렇게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만든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결국 주님을 만난 깊이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깊이 만나야 합니다. 그것이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무슨 일을 하게 한다고 합니까? “그 눈을 뜨게 해서 어둠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그리고 기업을 얻게 함” 이 세 가지입니다. “어두움에서 빛으로”, 복음으로 어두움을 깨뜨리게 하는 것입니다. 그 어두움이 세 가지가 있다고 했습니다. ‘영적인 어두움(spiritual darkness)’, ‘지적인 어두움(interactual darkness)’, 마지막 세 번째 ‘도덕적인 어두움(mortal darkness)’입니다. 여기서 사람들을 건져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적인 파워, 이것 하나가 없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너무 강조되어야 할 것이지만, 영적인 어두움뿐만 아니라 탁월한 지식으로 혼란스러운 그의 마음속에서 지적인 어두움을 몰아내고 마지막에는 성령의 능력으로 그를 부패한 삶에서 확 끌어낼 수 있는 그런 도덕적인 빛이 필요한 것입니다.
두 번째는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라보실 때의 마음을 보면 많은 사람이 악의 주체가 되어서 나쁜 짓을 한다고 보셨지만 마태복음 9장 같은 곳을 보면 수동태를 사용하셔서 저들도 어떻게 할 수 없이 악에게 장악되어서 저렇게 고생하며 유리하며 방황한다고 보시기도 합니다. 그 두 시각이 성경 안에 같이 공존합니다. 그러면 설교자는 사람들을 바라볼 때, ‘저 자식이 왜 저렇게 살지? 저런 인간이 무슨 희망이 있을까?’ 해서는 설교자의 사랑이 아닙니다. 저렇게 죄에 사로잡혀서 살아가는 사람이 죄는 밉고 그 사람이 너무 불쌍하게 여겨져야 합니다. 그것이 설교자의 사랑의 정신입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셨듯이 ‘사단의 권세’에 사로잡힌 것입니다. 이렇게 철학에 천착하고 자기들의 종교, 사상, 세속주의, 하나님 없는 생각에 천착하면서 놓임 받지를 못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깨닫는 것이 설교자의 사명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서의 예언처럼 설교자의 사명은 먼저 뽑고 파괴하고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설교자의 사명이고 그 위에 다시 세우고 건설하고 심게 하시는 일입니다. 그런 점에서 설교자에게 영적인 파워가 요구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의 설교자가 설교한다는 것은 자신이 살았던 모든 삶과 하나님 앞에서의 영광을 가지고 나와서 설교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 “기업을 얻게 하려 함이라” 두 가지로 설명드릴 수 있는데 , 먼저 종말론 적으로 보면 마지막 날에 우리가 최종적인 기업을 받습니다. 불멸의 몸, 그리고 하나님과의 완전한 화목, 영생, 이런 모든 것들을 이 세상의 간섭 없이 받게 됩니다. 그것이 궁극적인 유업이지만 그 유업을 지금도 이미 앞당겨서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영생과 많은 은혜의 수단들, 그리스도의 값없는 구속, 그 안에서 이루어진 성도들 간의 연합과 교제, 이런 것들이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종류의 유업입니다. 설교자의 사명은 그것을 풍부하게 누리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역이 성공적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사람만 많이 모인다는 뜻이 아니라 자기가 목회하는 양떼들이, 물론 아무리 뛰어난 사람에게도 어딘가에는 병든 양떼가 있기 마련이지만, 하나님의 자녀로서 누릴 수 있는 유업을 현재적으로 충만하게 누리면서 사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이 목회를 잘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영혼을 불쌍히 여기게 되고 기도하게 되고 비겁하게 살지 않고 용기 있게 핍박을 받으면서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 아우라입니다. 그런 아우라를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많은 것을 누리고 있어야만 그렇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여기에서 ‘기업’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 나온 ‘기업’, 히브리말로 ‘헬렘’이라는 것이 구약에서는 무엇인지 추적해 들어가 보십시오. 그러면 이 단어가 얼마나 오묘한 뜻을 가지고 있는지 알게 됩니다. 원래 이 ‘기업’이라는 말이 본격적으로 사용된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땅을 점령하면서 부터입니다. 가기 전에 지파별로 지도를 놓고 그립니다. 그렇게 해서 할당을 다 해줍니다. 그것이 ‘기업’입니다. ‘헬레크’의 동사는 ‘제비뽑다’입니다. 거기에서 ‘헬렘’, ‘기업’이라는 말이 나온 것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그렇게 받은 것입니다. 어떻게 그 기업을 차지하게 되는지 보십시오. 성경은 두 가지 시각을 넓게 교차해서 이야기 합니다. 하나님이 너희에게 주신 것은 너희의 의로움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것이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두 번째는 그 땅을 너희에게 주셨다는 것은 완료형으로 나오는데 실제로 그 사람들은 요단강 건너편에서 지금 땅 없이 살고 있는, 그야말로 합비루 쪽이었습니다. 이민자들이었습니다. 그 기업을 주셨지만 주신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 가서 전투를 해야 했습니다. 엄청나게 많은 신학적인 그림이 이 안에서 설명되는 것입니다.
설교자의 사명은 그 기업을 성도들이 충만하게 누리며 살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우리가 다양한 연구를 하고 아이디어를 모으고 고민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주님을 깊이 만나고 좋은 설교자들이 되어서 이런 사명을 감당해 나가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