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반기 교역자 수련회 1
“여자들 중에 내 사랑은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 같도다”(아 2:2)
녹취자: 조원정
이번 수련회에서는 리더십에 대해서 연속으로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여러분도 아는바와 같이 루터와 같은 종교 개혁자에게는 아가서가 괴로운 성경책이었습니다. 과연 이것을 정경 속에서 넣어야 되는지를 고민했습니다. 후에 개혁신학자들은 이 책이 결코 외설스러운 내용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교회와 사랑이라고 해석을 하였습니다.
신부의 노래, 신랑의 노래 서로 화답하는 구조로 되어 있는 아가서에서 오늘 읽은 이 본문은 여자의 노래가 됩니다. 여자들 가운데 내 사랑은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와 같도다. 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 교회의 신자들이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을 이렇게 묘사한 것입니다.
목회자의 리더십과 관련해서 이 이야기를 한 것은 리더십에 있어서 가장 탁월한 것은 두 가지인데 그것이 바로 사랑과 진리입니다. 저는 가을 말씀 사경회에서 소금으로 산다는 것을 설교하면서 언젠가는 한번 빛으로 산다는 것을 설교했으니 소금으로 산다는 것을 설교해야 된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저도 많은 사람들이 생각한 것처럼 깊이 연구를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아마도 소금은 방부제의 역할을 하는 것이라 하고 교회역사에서 마태복음 5장의 해석사를 다 찾아보았습니다.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는데 그 소금을 방부제라고 생각한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디에이 카슨이라고 하는 현대의 학자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그렇게 해석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설교를 다하고 나서 유대인들이 그 구절을 어떻게 해석을 했을까하고 우연히 책을 보게 되었는데 거기서는 소금을 가난하고 고통 받는 사람을 돕는 사랑의 실천이라고 해석을 했습니다. 동정과 구제라고 해석을 했는데 그것을 통해서 그 사람이 의를 행하는 것이고 그 의(쩨가카)를 행함으로서 의로움(쩨덱)을 갖게 되어서 결과적으로 의로운 사람(쨔디크)이 된다는 논리였습니다. 사천년이 넘는 유대인의 해석사에서도 소금이라고 하는 것이 그렇게 해석이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고 난 이후에 예수님이 가르치신 그것도 유대인들의 소금에 대한 이해를 따라서 가르치신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엊그제 목사들 모였을 때 그 얘기를 했더니 그 중에 한 목사가 애석하다고 합니다. 방금 그 설교를 끝내고 왔답니다. 곰곰이 생각을 했습니다. 도대체 말도 되지 않는 해석이 한국 교회에 대중적인 해석이 되었을까 합니다. 아주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염장 문화에서 온 것입니다. 김장 담그고, 고추장 담그고 간장, 된장 담그는 문화에서 온 것입니다.
오늘 날 신약의 해석 가운데 가장 골 때리는 해석 가운데 하나가 부패방지라고 해석하는 그것이 염장 문화입니다. 팔레스타인은 염장문화가 없습니다. 염장문화를 하려면 우리나라처럼 겨울이 길어야 됩니다. 채소도 안 나고 무엇을 보관할 수도 없으니 염장하는데 겨울이 길어도 아주 추운 지역에서는 얼려서 먹습니다. 염장 문화를 가지고 있는 나라는 우리나라하고 중국하고 일본 정도 밖에는 없습니다. 염장문화를 가지고 마태복음 5장을 덮어씌운 것입니다. 덮어씌우고 확 비틀어서 오늘날 우리들이 알고 있는 해석을 내어 놓은 것인데 이것은 어떤 역사적인 해석가에 의해서도 소수 의견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소수 의견도 없습니다. 전무합니다.
그것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 마음 속에 하나의 커다란 빛으로 다가왔습니다. 우리는 사랑은 정의에 배치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정의를 이루는 사랑이 아니면 사랑이 아니고 사랑을 지향하는 정의가 아니면 그것은 정의가 아닙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사랑은 정의를 완성합니다. 마음을 다하여 형제를 하나님처럼 사랑하십시오. 다음엔 당신 마음대로 하십시오. 그러면 정의를 이루실 것입니다. 오해의 여지가 있을 발언인데 그런 것들이 연결을 이루면서 생각이 나게 되었습니다.
내가 얘기하는 것은 우리는 오늘날 성경을 대할 때 실존주의적입니다. 탁 펼치고 거기에서 무엇인가 번쩍 하는 것을 발견하고 막 바로 강대로 돌진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역사적인 단절입니다. 내가 번쩍하고 내게 부딪혀온 말씀이 마치 성경해석 사천년 사에서 최초의 발견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신앙을 떠나서 인간적으로 매우 교만한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되고 그 속에서 무엇인가를 발견하면 좋은 것입니다. 그것을 옆에 적어 놓고 최소한 설교해야 할 경우에는 그 구절에 대한 해석사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해석사를 살펴보면서 자기의 해석을 지지한 사람이 없다면 사천년 동안 아무도 발견하지 못한 것을 지금 발견한 것이든지 아니면 잘못된 것입니다. 둘 중의 하나입니다. 사실 전자일 경우가 별로 가능성이 없습니다. 수많은 천재들이 살다가 지나갔습니다. 첫째도 겸손, 두 번째도 겸손, 세 번째도 겸손입니다.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돌아가신 하용조 목사님과 한번 책 때문에 만나서 같이 이야기를 나누는데 당신도 소금과 빛에 대해서 이야기 나누면서 빛과 소금이라는 잡지이름을 바꿔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바꾸실 겁니까? 순서가 틀렸답니다. 소금이 먼저 나와야 하고 소금과 빛이랍니다. 썩지 않은 것을 이야기 하는데 사실은 소금을 통해서 말하고 싶었던 것이 사랑입니다. 나는 맛을 낸다고 표현을 했는데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모여서 교역자 회의를 하고 여러분들이 나가서 사역을 할 때 한 두 사람만 잘 못 행동을 하게 되면 부서 전체가 함께 모이기 싫고 교회 나오기 싫은 부서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한 사람이 잘 희생을 하고 뭔가를 베풀어 주면 정말 모이고 싶은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맛을 내는 근본적인 동기는 내 속에 있는 사랑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난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목회자의 리더십에 첫 번째는 사랑입니다. 매력이 있는 지도자의 공통점이 뭐냐 하면 그들을 사랑하고 희생할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것 하나 가지고 모든 매력이 다 갖추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바로 그런 것입니다. 오늘 여기 성경에 보면 교역자는 소금과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항상 이야기하는 것이지만 무슨 모임을 하더라도 항상 누군가는 생각을 합니다. 이번 담당은 누구니까 그런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떤 역할을 하면 우리가 모이는 모임이 좀 편안하고 따뜻할 수 있을까? 좀 일찍 가서 히터도 좀 틀어 놓고 걸레질도 하고 따뜻하게 차도 끓이고 여유가 있으면 먹을 것이라도 좀 사가지고 가고 했을 때 ‘와 참 좋다. 사랑을 받고 있다.’ 그런 느낌을 받게 하는 것, 그래서 그 모임이 따뜻해지는 것, 이런 것들이 소금의 역할인데 사랑이 없으면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랑하면 부패할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예화) 교회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아서 마음에 응어리가 진 목회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교회가 건강해지기 힘이 듭니다. 목사들이 모여서 이야기 하는데 안식년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 하다가 당신도 안식년 좀 가지하니 교회를 그렇게 비울 수 없다는 그런 얘기를 나눕니다. 누가 그러는데 ‘야 그거 다 쓸데없어. 찾아 먹을 것 다 찾아 먹어, 어느 놈 하나도 알아주는 놈 없더라. 전혀 그럴 필요 없어. 그냥 주고받는 거야. 아무도 그거 칭찬하는 사람 없어.’ 동창회 갔더니 그랬다고 합니다. 그것을 들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결국은 무엇을 보여주는가 하면 그 사람이 나쁜 것이 아니라 하루아침에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최근에 후배 하나가 12년 되었는데 700명 800명 모이는 교회에 가서 1200명 정도 모였으니 못했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12년 만에 두 달 안식년 휴가를 갔는데 교회에서 장로 몇 사람하고 집사 몇 사람하고 난리가 났습니다. 성도들은 뼈 빠지게 일하는데 목사는 뭐 하러 두 달씩이나 휴가를 가나 교회 돈 가지고 말이 되나 하며 반대합니다. 목사가 착합니다. 순종합니다. 그러면 돈이고 뭐고 다 필요 없으니 안 간다고 했습니다. 사모님이 아주 당차고 똑똑합니다. 여보 그렇게 하는 것 아닙니다. 여기서 교인들이 뭐라 한다고 안 가면 알아주지도 않고 당신만 이상한 사람 됩니다. 욕하든지 말든지 결정 내린 데로 가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보따리사서 다녀왔습니다. 그런 것이 쌓이면서 교회에 대해서 서운하고 서러운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좀처럼 재정권을 안 줍니다. 여러분들 속은 모르겠습니다. 누가 솔직히 얘기해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내가 뭐 좀 하려고 하면 교회에서 계속 제동을 건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지 나는 잘 모르겠습니다. 사실 교역자 회의하는 것 보면 항상 반대인데 무엇을 하려고 하면 하지 말라고 한다기보다는 왜 아무것도 안하느냐고 합니다. 다른 교회에서는 대개 장로들이 목사님한테 왜 그렇게 하느냐고 왜 그런 쓸데없는 일에 돈 쓰냐고 계속 그럽니다. 우리 교회에는 정 반대입니다. 왜 아무것도 안하고 그러고 있냐고 내가 장로들한테 때로는 야단도 치고 그러는 것입니다. 다른 교회에서는 그렇게 권한을 안 줍니다.
(예화) 박기철 목사님께서 내수동 교회에서 몇 년이나 계셨는지 잘 모르겠는데 25년 내지 30년 정도 목회 했을 거라 생각을 합니다. 원로목사까지 생각하면 훨씬 더 많습니다. 하정부 목사님도 아들 같이 생각하고 자주 왔다 갔다 하니 할 얘기 못할 얘기 다 하십니다. 목사님한테 사모님이 전화가 왔답니다. 은퇴하고 16년째 설교를 하고 계신데 월에 한 번씩 그 목사님이 옛날에 우리보고 그러셨습니다. 왜 은퇴한 목사들이 자기 교회에서 얼쩡거리느냐고 하며 전 은퇴하면 출석도 안할 겁니다. 해놓고 16년 동안이나 설교를 합니다. 매주 오실 때마다 담임목사님은 사택에서 쉬십니다. 담임목사 사모도 이제 오십이 되었는데 그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그만 둘 뜻이 없으십니다. 목사님이 목사님 매월 설교하신다면서요? 예. 교인들이 제 설교를 아주 좋아합니다. 사모님이 전화를 해서 하 목사님 이 정도면 아무래도 그만 설교를 해야 할 것 같은데 목사님 내가 얘기해봐야 우리 남편이 듣지 않으니 목사님이 얘기해 보십시오. 목사님 이제 그만하시죠? 박 목사도 오래 되었는데 혼자 소신껏 하게 하시고 목사님 이제 하시지 마십시오. 십 몇 여년을 했는데 그렇게 섭섭해 하시더라는 것입니다. 무슨 말이든지 하목사가 하면 들으시던 분이 나중에 그러는데 박 목사가 괜찮다고 하는데 왜 하목사가 하지 말라고 그러느냐 합니다. 대놓고 ‘목사님 세월이 다 지나갔지만요. 그게 뭔데? 우리 전도사 때 왜 그렇게 월급을 짜게 줬습니까? 그랬더니 우시더랍니다. 그렇게 더 주고 싶었는데 장로들이 권한을 안 주더랍니다. 한 교회에서 30년 가까이 했는데 안주던 장로님이 젊어서 목사님 만나고 은혜를 받고 회심을 하고는 그 목사님 가는 곳마다 따라 다녔습니다.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가 하면 지금 여러분들은 배로 말하자면 커다란 방파제에 에워 쌓인 항구에 있는 것입니다. 박헉준 목사 같은 경우는 백 명이 담임목사로 가면 한두 명 있을까 말까 한 정도의 교회입니다. 가서 깜짝 놀랐습니다. 그 정도면 지금쯤 박 목사 나가라 하는 사람이 몇 명 정도 나와야 되는 것입니다. 정말 놀라운 교회입니다. 그런 속에서 하루 이틀 지나면서 커다란 사건을 한번만 쾅 겪으면 사랑하던 마음이 확하고 꺾여 나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계속 반복이 되면 남녀관계랑 비슷한 것입니다. 사람이 이혼하는 것은 쉽지 않지만 정이 떨어지면 수시로 있는 일 아닙니까? 정 떨어지는 일이 반복적으로 일어나면 정이 회복될 새가 없는 것입니다. 아주 차가운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상황이 지금은 많지 않지만 부분적으로 조금씩 경험하겠지만 그런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얼마나 나쁜 놈들이 많은데 어떤 시비가 일어났을 때 목회자가 그 논쟁 속에 휘말리면 더 나쁜 결과를 가지고 오게 됩니다. 전에도 얘기했습니다만 오해받을 일이 있으면 사실 그것이 아니라고 해명하려면 몇 사람을 죽여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해명이 되었을 때 사람들이 ‘진실이 그런 거였구나. 야 우리 목사님이 그런 분이 아니야’ 그렇게 생각하는가 하면 그게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들의 마음에 다 생채기를 내어 가지고 사실로 무엇인가 밝혀졌어도 그것은 그것이고 그 사람에 대한 감정과 불신은 그대로 남아서 결국은 자기 하나가 오해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나머지 교회 교인들이 많은 상처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목회자는 그런 점에서 교회가 은혜가운데 있으면 아주 강한 힘이 있지만 사람들이 병든 가운데 있으면 ‘뭐 추호의 흠도 없으면 되지’ 누가 그런 사람이 있습니까? 사도 바울도 사람들한테 집혔고 손양원 목사님 따님 와서 간증하는데 그렇게 손양원 목사님 싫어하는 교인들이 여럿 있었답니다. 교회 장로들을 포함해서 말입니다. 그런 것들이 우리에게 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처지에서 사람들은 막 응어리가 지는 것입니다.
여러해 전에 영국을 갔는데 후배 하나가 왔습니다. 분노를 삼키지 못하고 장로에 대해서 말합니다. ‘내가 참아라’ 그랬는데 결국 사표치고 던지고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여러분 앞에 놓여 진 현재의 현실이고 미래에 겪게 될 현실입니다. 결국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서로 호혜적으로 주고받는 그런 사랑 이상의 그 무엇이 목회자에게 있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거기서 목회자의 시련이 시작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요즘 이 설교하고 끝나고 나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지 모른다 하는 두려움 속에 설교하지는 않지 않습니까? 내가 이 복음을 전하다가 체포되어서 투옥될 수 있다는 것 없지 않습니까? 사실은 어떤 의미에서 더 큰 십자가라는 것입니다.
(예화)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한 사람이 도덕적이 되는 것이 쉽겠습니까? 한 사람이 온전한 사랑의 사람이 되는 것이 쉽겠습니까? 하목사가 엊그제 만나서 그 얘기를 하는데 한국에서 윤리 운동을 하는 유명한 인사가 오셨는데 워낙 유명하시니까 여학생들 좀 만나고 그쪽에서 만나고 싶다고 했는지 학생들이 만나고 싶다고 했는지 이십 여명 모였답니다. 점심을 하기로 한 것입니다. 식당에서 만났는데 그 분이 유명하고 돈도 많고 하니까 당연히 후배들 점심을 사줄 거라 생각을 했는데 아무도 안 내는 것입니다. 자기가 돈을 내고 이주 동안 경제적으로 무지하게 고통을 받았답니다. 나한테 그러는 것입니다. 세상에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자기도 유학생활 해보고 다 해봤으면서 가난한 후배들 불쌍한 학생들이 왔는데 저들보고 밥값을 내라하고 회비도 안내니까 자기가 제일 선배니까 자기가 냈는데 한국에서 백 오십 만원 보내주는 것 가지고 유학생활 하고 식료품 살 때도 제 시간에 가서 산 적이 없고 항상 저녁 시간에 유통기한 넘어가는 물건들, 그러고 사는데 영국에서 이십 명이 밥을 먹으려면 어마어마합니다.
십 오년 전에 미국을 갔다가 영국을 가면서 천불을 찾아서 집사람이랑 같이 갔는데 이것을 찾아서 기회가 되면 스위스까지 갔다 와야 되겠다고 갔는데 밥 두 번 먹으니까 돈이 하나도 안 남는 것입니다. 지금도 간이식당에 못 갑니다. 식당에 가서 잘 먹으려면 한 사람 앞에 25만원씩 들어가는 것입니다. 윤리자인지는 모르지만 인간성이 아닙니다. 무슨 얘기인가 하면 그렇게 끊임없이 시달리는 상황 속에서 진짜 나쁜 사람들 속에 에워싸이고 또 아주 악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이 되어 지면 사람이 조화와 이런 것들이 확 깨져 버리고 나면 사람이 악만 남아 버립니다. 엊그제 오정현 목사가 그럽니다. 왜 몇몇 사람은 목숨 걸고 죽으라고 당신 반대한다고 소리가 들리는데 왜 그럽니까? 목사님 나도 모르겠습니다. 한 달에 450만원씩 도와준 거 밖에 없는데 열렬하게 자기한테 덤벼드는데 그렇게 기도를 했으면 더 놀라운 일이 일어 날 텐데 그럽니다.
여러해 전에 히트를 쳤던 책인데 섀클턴의 위대한 항해라는 책이 있습니다. 꽤 두꺼운 책인데 감동적입니다. 섀클턴이라고 하는 북극 탐험가가 대원들을 데리고 가다가 배가 좌초가 됩니다. 구조 요청을 하러 가야 하는데 1200㎞떨어진 곳을 발동기도 아닌 범선으로 가야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쭉 보고 가장 말썽부리고 다루기 힘든 사람들만 골라서 데리고 갑니다.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질 나쁜 사람들을 남겨두고 가면 반드시 여기서 내부 반란이 일어나서 사람들이 죽고 그럴 것이라는 겁니다. 자기가 그 사람들을 데리고 1200㎞를 항해하며 도움을 요청하게 됩니다. 남극 탐험이었던 것 같습니다. 굉장히 감동적인 이야기입니다. 다 죽은 줄 알았는데 이 사람들이 돌아오게 됩니다.
거기에서 강조하는 것이 리더의 희생하는 사랑입니다. 그것이 가장 어려운 것입니다. 교역자들도 보면 자기를 좋아하고 대접해주는 사람들하고만 어울려 다니는 사람이 있는데 그러면 안 됩니다. 오히려 그런 사람들은 경계를 해야 됩니다. 좋은 것이 아닙니다. 사랑이 골고루 많은 사람들에게 베풀어져야 합니다. 심정적으로는 사람이니까 더 좋고 안 좋고 그럴 수는 있지만 그렇게 해야 되는 것입니다.
오늘 여기 본문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자들 중에” 무슨 얘긴가 하면 예루살렘에 여자들이 많이 있는데 신랑을 향해서 대부분의 예루살렘 여자는 별로 큰 관심이 없습니다. 사랑한다고 해도 신분이 왕이니까 사람들이 저 사람하고 좀 맺어져 봤으면 말할지는 모르지만 진실한 사랑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그런 예루살렘의 여자들 중에서 내 사랑은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와 같도다. 합니다.
꽃이 향기를 내는데 향기를 내는 것이 인간을 즐겁게 하려고 내는 것이 아니라 자기 보호의 본능입니다. 꽃이 벌레나 해충,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서 향을 뿜어내는 것입니다. 문을 꼭 닫고 꽃향기를 맡으면서 자면 잠들 때는 좋은데 아침에 일어나면 머리가 띵하고 별로 안 좋습니다.
백합화가 피어 있는데 바람에 흔들리면서 가시에 툭툭 찔리는 것입니다. 꽃은 그것을 외부의 적의 공격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더욱 향기를 뿜어내는 것입니다. 자기가 손, 다리가 있어서 가시를 부술 수는 없으니까 자신을 방어하는 최선의 기지 역할로 쏟아내는 것입니다. 그것이 향기입니다. 이것을 우리에게 적용을 해 보면 이런 것 아니겠습니까? 정말 사랑이 많은 사람은 사랑할 수 있는 좋은 환경 속에서 사랑하는 것은 그것은 일종의 거래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만족적 사랑인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사랑이 하나의 성향이 되어서 그렇게 사랑하지 못하는 일들이 일어날 때에 가시에 찔린 백합화가 향기를 발하듯이 그렇게 사랑이 흘러나오는 것, 그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아가페의 사랑이고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엊그제도 설교시간에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남편이 하도 속을 썩여서 저런 인간하고 이제 내가 그만 참고 살아야겠다고 보따리 사가지고 여관으로 도망을 갔는데 며칠이 지나고 나니 남편이 불쌍한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사랑스럽다고 말할 수는 없는데 나 없으면 밥 한 끼 못 차려 먹는 저 불쌍한 인간, 꼴 뵈기 싫어도 내가 아니면 누가 거둘 것인가 하며 눈물 흘리며 보따리 사가지고 다시 들어가는 것이 박애적 사랑입니다.
그런 사랑은 어디에서 오는가하면 만족스러운 목회환경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사랑은 하나님과의 관계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사랑이 충만하게 되면 나에게 어떤 사람이 악을 행할 때 화가 나는 것이 아니라 저렇게 악을 행할 수밖에 없는 사람에 대한 연민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대하는 그 사람의 부당한 행동들을 객관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저렇게 밖에 할 수 없는 불쌍한 인간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려움이 생겨서 가시에 찔리는 것처럼 계속해서 고통스러운 어려움들이 막 생겨날 때 이 속에서 주님을 향한 사랑이 동기가 되어서 그것을 극복하게 하는 힘이 더 증진되는 것입니다. 결국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힘인 것입니다.
교역자가 목회를 하면서 수시로 당신들이 그러면 내가 목회를 그만 둘 수도 있다. 아니면 나 떠나고 싶다. 이런 것들을 교인들이 우리 목사님은 일체의 사심이 없이 목회를 하는 구나하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별로 사랑하지 않는구나 생각합니다. 거짓말이라도 여기에서 저를 내 보내시면 내가 갈 곳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러고 목회를 해야 합니다. 내가 여기 있는 것은 당신들 위해서이고 당신들이 여기서 날 버리면 나 갈 때가 많다고 하는 사람들을 원하는 교회는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그런 사랑이 꽉 차서 진심으로 성도들을 사랑하고 그리스도의 교회를 사랑할 때 향기가 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 길은 너무 어려운 길입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는 것은 자기를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자기를 끊임없이 살인해야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인간의 본성에 역행해야 되는 것이겠습니까? 사랑해야 될 자신을 끊임없이 미워해야 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어제 설교한 바와 같이 인간의 영혼이 하나님 앞에 가장 아름다울 때가 두 번 있는데 하나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가득 찰 때, 두 번째는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 회개할 때입니다. 그때에 죄는 객관화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우리의 것이라고 부르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길입니다.
이렇게 저렇게 리더십을 이야기하는데 진정한 리더십에 대한 많은 이야기가 오고간다 할지라도 하나가 없으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빛의 사람인 동시에 사랑의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나 성도들에게서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그것이 남지 않아야 됩니다. 오히려 그것이 가시가 되어서, 백합화를 찔러서 향기가 나게 한 것처럼 그렇게 사랑을 바라는 사람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려울 때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은 사람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니 이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 수 있을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지금도 그리스도와 함께 살고 있다. 그런 확신을 가지고 주님 앞에 사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