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
녹취자 : 오희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다 읽지는 못해도 조금 읽어보신 분은 손들어보십시오. 나머지 분들은 읽겠다는 것입니까? 강의를 들어보고 읽어보겠다는 것으로 알겠습니다. 강의는 별 의미가 없고 여러분이 스스로 읽으며 사색을 해야 합니다. 제가 젊은이들에게 휴대폰을 멀리할수록 행복에 가까이 다가갈 것이라고 말합니다. 휴대폰에 시간을 많이 쓰니까 책을 읽을 시간이 없는데 더 심각한 것은 책읽기가 싫어집니다. 휴대폰이 그렇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휴대폰은 넘기면서 보면 일방적으로 지식이 들어오는데, 내가 책을 읽어야만 의미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는 시간이 너무 힘들어지는 것입니다.
1.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121-180)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 대해 바로 들어가겠습니다. 이 사람은 주후 2세기에 살았던 사람입니다. 글라디에이터에서 나오는 할아버지, 그 사람이 바로 이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유명한 이유는 분류상으로 스토아학파(Stoicism)에 속하는 철학자입니다. 사실 이 사람보다 그 위에 있었던 제논(Zenon)이나 에피쿠로스(Epikuros) 같은 사람들이 훨씬 더 유명한데 대부분의 작품들이 다 흩어져서 소실되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완전한 형태로 나와 있는 스토아사상을 잘 대변하는 작품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입니다. 이 책을 쓸 때부터 철학책으로 쓴 것이 아니라 인생독본 비슷하게 쓴 것입니다. 저는 이 책을 고등학교 때 읽었고 그 후에도 읽고 이번에도 다시 한 번 읽었습니다.
2. 스토아학파(Stoicism)의 출현
스토아학파에 대해서는 고등학교 사회시간에 배웠습니까? 못 들었습니까? 스토아학파라는 것은 들어봤습니까? 사회를 선택하지 않은 것입니까? 기억이 전혀 안 납니까? 들어는 봤습니까? 못 들어봤다고 하면 재미가 없습니다. 접촉점이 없으니 말입니다.
‘스토아’라는 단어는 희랍어로 이렇게 씁니다. 우리가 건물을 보면 기둥이 쭉 늘어서 있습니다. 그것을 ‘스토아’라고 합니다. 스토아학파는 그 건물에 모여 앉아서 사람들이 떠들고 이야기하면서 생겨난 것입니다. 스토아학파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라는 황제입니다. 스토아학파의 기본 사상은 이 세상 전체를 하나의 유기체로 보고 모든 것들은 자연의 질서에 따라 움직이고 돌아가는 것으로 봅니다. 그 속에 인간도 있다고 보고 그런 구도 속에서 인간이 주체적인 인간이면서도 세계, 자연의 모든 질서 속에 속해있는 한 부분이라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거기서 사상들을 펼쳐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독특한 세계관, 인생관, 자연관 같은 것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이들의 관심사는 인간으로서 어떻게 잠시 있다가는 이 세상에서 의미를 찾으면서 살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에 몰두했는데 금욕적인 경향성을 가지고 있는 유물론적인 사고를 핵심으로 하고 있습니다.
a. 펠로폰네소스 전쟁(B.C. 5 후반)의 발현, 그리스 정신의 붕괴
학교에서 펠레폰네소스 전쟁이라는 것은 배웠습니까? 펠레폰네소스 전쟁에 대해서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왜 이 전쟁이 생겼습니까? 원래 그리스는 작은 나라들이 모여서 도시국가를 이루고 살았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폴리스’라고 부릅니다. 도시국가는 직접민주정치로 통치되었습니다. 도시국가는 보통 1만 명 내지 10만 명 정도 되는 규모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큰 폴리스는 10만 명 정도 되는 규모이었고, 도시 안에 1만 명이라면 그 중에 1천 명은 군인, 왕, 귀족, 전사, 평민들의 구조로 살아가는데 그 전체를 하나의 가족 단위로 보았습니다. 당연히 민주정치를 할 때도 직접 민주정치가 이루어졌는데 ‘오스트라카’라는 패각정치가 등장했습니다. 사람을 추방하는 정치형태입니다.
폴리스 중에서 굉장히 강한 나라가 아테네였습니다. 아테네가 계속 성장하고 번영을 하니까 페르시아가 침공을 합니다. 놀랍게도 아테네가 페르시아를 물리쳐서 전쟁에서 승리합니다. 전쟁 승리 후 아테네는 이렇게 외부로부터 대군의 공격을 받아본 것이 처음이었고 이런 상황 속에서 도시국가가 힘을 쓰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고 동맹을 맺습니다. 그것이 ‘델로스 동맹’입니다. 에게 해를 중심으로 퍼져있는 나라들이 EU처럼 델로스 동맹을 맺습니다. 동맹 맺은 국가 중에 아테네가 맏형이니까 아테네에 본부를 만들어두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아테네가 갑질을 시작합니다. 국가에 힘이 생기니까 자기네를 형님처럼 생각하라고 하고 전쟁이 일어나지도 않았는데 미리미리 대비한다면서 돈을 걷어갑니다. 그 돈을 자기네가 몰래 훔쳐서 쓰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불만이 점점 쌓이게 됩니다. 스파르타는 아테네를 아주 시기했던 국가였습니다. 아시다시피 아테네는 민주적인 나라이고 스파르타는 스파르타식으로 교육시켰습니다. 스파르타가 그런 불만을 가진 나라들을 모두 모아서 동맹을 만드는데 그것이 ‘펠레폰네소스 동맹’입니다. 이로써 두 동맹 사이에 일전이 벌어지면서 펠레폰네소스 전쟁이 발현됩니다. 30년 동안 전쟁이 일어나고 결국에는 스파르타가 이기기는 하지만 그전까지는 그리스라고 하는 폴리스 국가가 가지고 있었던 공통적인 정신적 기풍 ‘에토스’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에토스’의 기본 사상은 인간 그 자체가 만물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신을 이야기하지만 그 신은 인간을 투사한 신이기 때문에 절대적인 신이 짐승 모양을 하고 있으면서 모든 인간들을 자기 손에 움켜쥐고 공포정치를 하는 그런 신이 아니라 얼마든지 인간과 딜(deal)이 가능하고 인간과 협상도 하고 인간과 다투기도 하고 신들끼리 다투기도 하는 인간적인 개념의 신들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껍데기이고 인간이라는 것이 중심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 사상이 놀랍게 여기 그리스에서 가장 또렷하게 생겨나게 됩니다. 황하문명에서도,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도 인디아 문명에서도 생겨나지 않았던 사람 중심적인 사고가 생겨난 것입니다.
그 이유는 지도를 보시면 아테네가 나오고 에게해가 있습니다. 다른 문명들은 강과 땅을 중심으로 문명이 일어납니다. 이 사람들도 굉장히 기름지고 좋은 농토에서 식물들을 기르면서 부강해져 갔습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바다를 통해 다른 나라 사람들을 만나며 교역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문명사적으로 보면 여기에서 만났던 사람들 중에서 중요하게 그리스 문명에 영향을 끼친 사람들이 이집트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와서 크레타 섬에서 무역을 하고 이곳의 진귀한 물건을 가져가고 그쪽의 물건을 풀어놓으면서 교역이 이루어졌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글로벌한 사회가 아주 오래전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당연히 이 사람들은 다른 곳에서 그것을 사다가 중개무역을 하면서 장사를 한 것입니다. 장사하는 사람들의 관심이 하늘에 있겠습니까? 사람에게 있겠습니까? 사람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아는 것이 신의 마음을 아는 것보다 훨씬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오늘 이 사람을 잘 만나서 살짝 넘어가면 떼돈을 벌기 때문입니다. 씨 뿌리고 몇 개월씩 기다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사람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연구를 하면서 가치 기준의 척도가 사람으로 가는 것입니다. 신이 풍년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떼돈을 벌게 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도량형이 발달하고 인간중심의 사고가 여기에서 깃들게 됩니다.
그 크레타 문명이 에게 문명이 되고 에게문명이 그리스 전체에 헬레니즘이라는 정신을 퍼뜨립니다. 그 전쟁에서 비록 스파르타가 이겼지만 이긴 쪽이나 진 쪽이나 이미 다 파괴가 되고 그런 와중에 독특하게 사람을 최고로 생각하면서 사람 중심으로 사고하던 소위 인본주의적인 특성들이 붕괴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작은 나라들이 생존할 수 있다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서 제국에 대한 꿈들을 품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북쪽에서 마케도니아라는 나라에 뛰어난 임금 필리포스가 있고 그 뒤를 이어 알렉산드로스라는 사람이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11년간만 거기에 있고 나머지 자신의 생애 전부를 정복하는 것으로 보내면서 이집트까지 정복해서 대제국을 이루는데 이것을 가리켜서 마케도냐 대제국이라고 부릅니다.
한편, 이렇게 사상적으로 허물어지면서 그리스의 정신이 붕괴되고 나니까 사상적인 공백이 왔습니다. 원래 그리스의 정신은, 사람이 누구인가를 고민하고 사람이 모든 만물의 중심이 되고 척도가 되어서 나는 누구이고 어떻게 살고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덕스럽고 올바른 것인지에 대한 생각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 것이 얼마나 인간에게 있어서 기본적인 사고였는지, 그 문명을 상기하는 곳마다 혁명같은 놀라운 사상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 첫 번째가 르네상스였습니다. 르네상스는 그 헬라스 세계의 정신과 사고방식을 나타내주는 문헌들을 읽으면서 일어났고 기독교인들이 그것을 읽으면서 종교개혁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지금 다시 산업혁명 이후에 사람들이 기계처럼 내몰리는 시대에 다시 인문학에서 희망을 찾는다고 하며 돌아가는 그 고전이 바로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들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는 마케도냐 이후에 나라가 갈라지면서 망하고 그것을 로마제국이 점령했지만 문화적으로는 헬레니즘의 사상을 그대로 물려받고 언어도 코이네로 다 같이 통용될 정도로 로마는 껍데기를 차지했지만 그 속은 이미 헬라스의 정신, 그리스의 정신으로 차 있는 나라가 되었는데 로마는 폴리스가 아니라 어마어마한 대제국을 이루었으니 그런 사상들을 기초로 제국적 질서를 만들어 간 것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토착화해서 헬라스의 정신을 로마의 제국을 통치하기에 맞는 정신으로 바꾸어 간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의 정신이 붕괴되면서 크게 여기에 대한 반응으로 세 학파가 출현합니다. 첫째는 에피쿠로스 주의입니다. 에피큐리아니즘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소위 쾌락주의라고 하는데 우리가 생각하는 말초적인 쾌락이 아니라 인간이 기분좋은 것이 인생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가치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한 대안으로 제시된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시니시즘이라는 것이 있는데 “견유학파”라고 하는데 “견”자가 “개 견”입니다. “유”는 “유학자”할 때의 “유”입니다. “개같은 유학자, 유인들”인데, 이것은 세상의 쾌락과 물질적인 것을 아주 하찮게 여겨서 개처럼 아무데서나 자고 아무데서나 먹으면서 세상것들에 대한 모든 집착을 끊으면서 그들이 지혜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나온 것이 스토아학파입니다. 에피쿠로스학파나 견유학파와 비교될 수 없이 이 스토아학파는 아주 엄정한 구조의 큰 사상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학문적으로 “정합성”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딱딱 들어맞는다는 뜻입니다. 학문에 있어서는 이것이 절대적으로 중요한 가치입니다. 들어맞는 정합성, 서로 들어 맞아야 하는 것입니다. 99개를 정확하게 맞췄는데 마지막 하나를 근거도 없이 자기가 맘대로 떠드는 소리로 집어넣으면 그 자체는 학문으로서 아무 가치가 없어집니다. 여러분이 학교에서 학문의 정합성을 배우는 것입니다. 이런 사상은 두고두고 영향을 끼칩니다. 재밌는 것은, 이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니었고 역사가들 속에서는 기독교를 지독하게 핍박했던 황제들의 리스트에 올라가 있는 것을 여러분도 아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팩트가 아닐 수도 있다는 주장들이 나옵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보다는 그 밑에 사람들이 많이 했고 오히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앞에서 지독하게 기독교를 핍박하던 많은 왕들, 하드리아누스 같은 사람들이 해왔던 정책들이 아랫사람들에 의해서 그대로 이루어진 것이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특별히 기독교도들을 박해한 것은 아니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실인지를 우리가 파악하기에는 어려운 위치에 있지만 그런 설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스토아학파의 사상들은 주전 3세기, 2세기 경인데도 최근에 다시 각광을 받고 있는 스피노자나 이성주의 시대를 열었던 임마누엘 칸트같은 사람의 사상에 깊은 영향을 주게 됩니다. 칸트도 굉장히 금욕적인 삶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스토아주의의 세계관을 보면 이 사람들이 보는 우주는 이런 것입니다. 한 사람이 생각을 합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궁금한 것입니다. 계속 물음표를 던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세계는 여기 하나의 점이 있습니다. 이것이 로고스입니다. 희랍어로 이렇게 씁니다. 로고스는 “말, 이론, 학문” 이런 많은 뜻을 가집니다. “원리”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우리가 예를 들어서 사과가 있으면, 손으로 쪼개면 이렇게 잘라지고 여기에 씨가 있습니다. 이것을 희랍어로 “스페로마티코스”라고 합니다. 영어로 적었습니다. 이 씨앗이 있는 것처럼 이 로고스는 우주의 씨앗이다. 모든 우주는 이 로고스, 원리에서 약간씩 형태가 변형되어 퍼져 나옴으로 세계의 모든 만물이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이상하게 요한복음 생각이 나지 않습니까? 그때 쓰여진 것도 로고스입니다. 그때 요한사도가 이런 사상에 젖어있는 당시의 헬라정신을 가지고 있는 로마사람들에게 자기네들이 다 알고 통용되는 언어로 “그 로고스가 이 예수 그리스도시다, 성자이시다”라고 이야기함으로써 사람들의 뚜껑이 열리도록, 머리가 탁 트이도록 만들어준 묘사였습니다. 이 원리에서 모든 것들이 핏줄처럼 퍼져나오면서 세계만물들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갑니다. 하나씩 보면 우연인 것 같은데 하나는 또 다른 하나에, 또 다른 하나는 또 다른 하나에,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또 다른 하나에 물려있으면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것들로 온 우주가 꽉 차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속에 한 인간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우주 세계관의 기본은 유물론, materialism입니다. 오직 물질로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입니다.
물론, 스토아 사람들은 신을 이야기합니다. 또 신들을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신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 신이 아니라 세계전체를 포함하고 있을 하나의 위대한 원리로서의 절대자를 상상하는 것입니다. 플라톤이 상상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그 밑에 자잘한 신들이 있어서 이 신들은 그 일들이 이루어지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고 본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에게 있어서 물음표가 있는데 “아! 그런 것이구나!”하고 깨달으려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세계가 그렇게 아주 놀랍게 질서있게 정합성을 가지고 존재해서 그것들이 서로 연결하여 물고 물리면서 돌아가고 인간도 그런 커다란 설계 속에 인간이 있기 때문에 자기가 여기의 중심인 것처럼 생각하고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몇 가지 점에 있어서 사실은 기독교와 너무 일치하는 것들이 또렷하게 있었습니다. 이것이 이교도들의 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에서 이 책의 독서를 오랫동안 권장했던 이유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그럼 이 사람들은 실제 인생을 살아감에 있어서 이들이 가지고 있는 이런 세계관적인 원리를 어떤식으로 적용하겠습니까? 희랍어로, “휘지콘, 로기콘, 에티콘”입니다. 이것을 그냥 우리가 이야기하기 좋게 쓰면, 영어로는 휘직스, 물리학, 또는 자연입니다. 로기콘은 로기카, 영어로는 logic입니다. 논리입니다. 에티콘은 에틱입니다. 혹은 에티카, 윤리입니다. 로기콘은 논리인데 엄밀하게 말하면 언어를 포함한 논리입니다. 그 언어를 통해서 어떤 사물이 가지고 있는 생각들이 우리의 생각과 연결이 되게 만들어주는 우리의 정신작용입니다. 이 사람인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어떻게 이것들이 작동한다고 보았느냐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자연의 어떤 개체, 예를 들어 놀란 토끼 한 마리가 뛰어간다고 합시다. 나무 하나가 서 있다고 합시다. 이것을 이 사람이 봅니다. 보면서 이것이 어떤 개념이라고 하는 언어를 만들어내고 이 안에서 사고작용을 통해서 논리를 연결합니다. 논리를 연결한 것을 가지고 이것이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궁극적인 스토아학자들도 철학을 하는 이유는 이것이 멋있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살아가야하기 때문에 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것에 대한 답으로써 스토아 철학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여러분 모두 다 스토아 철학자들이 했던 것 같은 그런 철학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 생각이 없이 살아가고 있는 사람은 아무 생각을 하지 않고 살겠다는 철학을 가지고 생각없이 사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훌륭한 자기 삶의 방식에 대한 선택입니다. 거의 뇌를 통채로 집에 빼놓은 것입니다. 집에라도 놔 두면 집에 가면 정신이라도 생길텐데 어디 한데에 떼어놓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자기가 그런 식으로 살겠다고 선택을 한 것입니다. “공부해서 성공하고 말리라!” 하는 것은 공부가 인생에 있어서 성공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희망과 각오가 있는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은 “인생의 행복이 그런 것으로 좌우되는 것이 아니야. 공부해봐야 뭐해. 대박나려면 BTS처럼 한방에 떠야한다구!” 합니다. 옛날에 “김남준”을 검색하면 지금 방탄소년단의 리더는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내 밑으로 저 아래에 있었습니다. 이제는 내가 안 보입니다. 다 가려져서 말입니다.
어떤 식으로든지 인간은 철학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의 말도 듣지 않으면서 그 길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그것이 자신의 인생을 이끄는 것입니다. 가장 큰 힘을 발휘할 것입니다. 그러면 한 번쯤은 내 인생을 이렇게 데려가고 있는 이 철학이 무슨 철학인지, 이것을 정말 계속 따라가도 되는 철학인지 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살아갈 때 살아지니까 삽니다. 그런데 내가 원하는 삶이 아닙니다. 더 심각한 것은 내가 뭘 원하는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남이 사는 것도 아닙니다. 그냥 게임이라도 한판해서 점수를 따면 신나고 오늘 하루라도 뭐가 기쁜 일이 있고 웃기는 일이 있으면 웃고, 자고 아침에는 다시 일어나서 아무 생각없이 살고, 이렇게 사는 것입니다. 이것도 철학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인생을 살고 나면 마지막에 내 인생도 아니고 남의 인생도 아니고 한 번도 내가 스스로 주체적으로 살아본 적 없는 인생을 산 것입니다. 지금 그런 것을 고민해야 할 시기입니다. 지금 고민하지 않으면 나중에 인생 파산하는 것처럼 되어서 50살쯤 된 후에 “왜 이렇게 꼭 살아야 하나?”하고 죽어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36분에 한명씩 자살을 합니다. 그중에 대부분은 도저히 저녁 먹을 끼니가 없어서 죽는 사람은 몇 되지 않습니다. 인생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서 죽는 것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이 사람들은 사변적인 철학이 아니라 실제적인 철학이었습니다. “프로네마의 철학”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실천적 지혜를 말합니다. 책을 읽으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가 마음에 착착 다가옵니다. 우리는 그것을 기독교 신앙으로 비판하며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렇게 의미를 찾아내는 것입니다. 그렇게 찾아낸 의미를 자신의 윤리적인 삶과 연결해서 “그러므로 나는 이런 짓은 할 수 없다. 그러므로 나는 누가 보든지 안 보든지 그렇게 살 수는 없다. 나는 내가 싫어도 이렇게 살아야 한다.” 하는 결정을 내리면서 인생을 의연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뭔가 자신이 있는 것처럼 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인생에 있어서 기본입니다.
동양을 예로 들어보면, 물이 흘러갑니다. 그것을 이 사람이 봅니다. 생각합니다. “아, 이게 무슨 뜻일까? 물은 그냥 내려가는구나. 누가 막는 것 같지만 돌아서라도 내려가고야 마는구나! 아! 그렇구나!” 여기에서 법(法)이라는 글자를 발견합니다. “물이 지나간다.” 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아! 그렇구나. 나도 이 모든 것의 중심이 아니라 흘러가는 것 중에 하나구나. 그렇다면 무엇이 도리인가?” 를 생각하면서 윤리에 적용을 시키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친구를 배신하는 것은 물이 흘러가는 것이 아니다.”이런 식으로 스토아학파는 자연 모든 것으로부터 교훈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너를 불렀을 때 너는 내게 와서 꽃이 되었다.” 꽃인데 꽃을 보면서 “꽃이네.” 하는 것이 아니라, “아! 이 꽃, 이 꽃은 이 모든 우주의 일부분이구나.” 라는 것을 거꾸로 추적하며 생각하는 것입니다.
영어로 우주를 Cosmos 라고 합니다. 희랍어로 이렇게 씁니다. 가을에 피어있는 코스모스와 똑같은 단어입니다. 이것이 원래 무슨 뜻이라고 했습니까? “질서”입니다. 여기서 파생된 단어가 cosmetics, 화장품입니다. 집에 가서 보면 cosmetics 라고 써 있습니다. “질서”입니다. 화장품을 하지 않으면 얼굴에 질서가 없어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발라서 튀어나왔는데 들어간 것처럼 만들어주고 들어간 것을 나온 것처럼 만들어주고 눈이 작은데 큰 것처럼 그려주고 눈썹이 흐린데 진하게 만들어줘서 질서를 잡아주는 것입니다. 싹 지우면 다시 질서가 허물어집니다. 그리고 다시 질서를 세웁니다. 슬픕니까? 젊음에서 멀어질수록 질서는 더 많이 허물어지기 때문에 질서를 잡아주는 화장에서, 10대 때 단장으로 시작해서, 치장, 화장, 변장으로 갑니다. 완전히 변장을 해야만 겨우 질서가 있는 것처럼 착각을 하게 만듭니다.
이런 모든 우주에 질서가 있는 것처럼 만드는 것은 여기에 “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신”은 우리가 말하는 인격적인 하나님으로서의 신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가상하고 있는 절대자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까와 같은 방식으로 꽃이 가지고 있는 우주적인 의미를 성찰한 후에 이것을 다시 언어와 논리로 풀어냅니다. 그것을 연결해서 의미를 찾아내는데 이번에는 삶으로 연결을 시키는 것입니다. 꽃 한 송이가 우주를 휘돌아서 의미를 묻게 만들고 그 의가 도덕적 결정을 내리고 그 우주와 만물 앞에서 신들 앞에서 자신의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결정하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모든 삶은 하나하나가 자신에게 우주적인 교훈을 가르쳐주는 학습의 장이 되는 것입니다.
(찬양) 온 천하 만물이 그림책같으니
그 고운 그림 보아서 잘 알 수 있어요
이런 사색 속에서 시가 나오고 문학이 나오고 에세이가 나오고 살아갑니다. 저 뒤에 낙엽이 얼마나 예쁩니까? 뒤를 돌아보십시오. 기가 막힌 무대를 즐기면서 강의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런 아름다운 것을 보면서 “아, 저 쓰레기, 누가 저걸 다 치우지?” 하는 사람이 있고, 떨어진 한 장의 낙엽을 보면서 “이것은 어디에서 왔을까? 이 생명은 떨어지면 영원한 것인가? 이것은 무엇인가?” 생각하면서 우주를 생각하고, “이렇게 생명으로 충만하던 것이 결국은 시간이 지나면서 시드는구나. 그렇지만 마지막으로 자신의 생명의 기운을 뿜어내는 이 단풍은 꽃보다 더 아름답지 아니한가? 그렇다면 내가 나이가 먹고 늙어가도 꽃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단풍도 아름다울 수 있겠구나! 그러면 오늘 하루를 잘 살아야지.” 라고 생각한다면 단풍나무 잎사귀 하나가 자신의 삶에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충격을 주는 것입니다. 이번 학기에도 학교에 강의를 가서 시, 수필을 하나 썼습니다. 다음 열린 신문에 나올 것입니다.
스토아학파 사람들은 이 세상의 사물에는 세 종류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하나는 일체형입니다. 여기 짐승이 하나 있는데 이것은 따로 잘라낼 수가 없습니다. 모가지를 쳐서 떼어내면 이 짐승은 염소가 아닌 것입니다. 죽은 것은 염소 고기입니다. 그리고 다리를 뚝 잘라내서 족발을 만들어도 결국은 염소가 아니게 됩니다. 이것은 나누어질 수 없도록 일체를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일체를 이룬다는 것은 덩어리만 하나라는 뜻이 아니라 이 안에서 눈과 코, 귀 이런 것들이 상호작용을 하면서 핏줄과 신경까지 다 이어지면서 작용을 하는 나누어질 수 없는 하나라고 보는 것입니다. 두 번째, 결합형입니다. 이렇게 벽돌, 판자, 철강, 유리, 이런 것들이 결합 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모아서 군대 조직을 만듭니다. 1대대, 2대대, 이런 식으로 만듭니다. 이 온 우주는 어떻게 되었느냐? 우주는 인간을 포함해서 일체형으로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혼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로부터 영향을 받고 누군가에게 영향을 주고 육체로는 이 자연의 구조 속에 톱니바퀴처럼 얽혀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인간이 미용을 하고 노력을 하면 안티에이징의 효과를 어느 정도 봐서 40세가 넘었는데도 30세 정도로 보일 수도 있고, 최근에 나온 영화에는 30대 중반의 아줌마가 고등학생으로 나왔는데도 사람들이 다 속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동안이면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큰 세월의 흐름 속에서 인간은 태어나고 자라고 장성하고 노쇠하고 소멸하고 없어지는 존재입니다. 원소가 되어 흩어지고 그 원소들은 다시 융합되어서 나 아닌 전혀 다른 것들을 만들어냅니다. 지금의 나는 500만년 전에 살았던 들쥐의 꼬리에 붙어 있었던 원소들과 오만 잡동사니가 모여서 내가 됐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내 눈꺼풀에 있는 원소 하나에는 이순신 장군의 몸을 형성하던 한 원소가 여기에 매달려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만물이 돌아가는 화학적 순환의 끝에서 이렇게 형성되는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스토아학자들은 불교와 흡사한 윤회사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물과 세계를 보고 나니까 인간은 어떻게 됩니까? 자연 속에 있으니까 자연을 미친듯이 거스르려고 하면 안 되고 자연 속에서 함께 살아가면서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고 다른 사람이 자신 때문에 행복해지는 삶을 추구하며 사는 것이 안정된 삶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우주가 있는데 인간이 그 중심에 있다는 것이 아니라, 이런 것이 수없이 많다고 보고 그중에 하나를 확대한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인간 그 자체가 또 하나의 작은 우주입니다. 이 사람 안 구석구석에도 이런 작용이 일어나고 돌아가고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우리의 작은 이빨 하나가 심장에 영향을 끼치고 잇몸 하나가 콩팥의 건강을 좌우합니다. 우리의 코를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뇌에 치명적인 문제가 오기도 하고 손끝이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서 우리 심장에까지 문제가 될 수 있도록 모든 것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육체가 그렇듯이 인간의 정신도 이런 우주 속에 연결되어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것 전체를 움직이고 하는 하나의 법칙이 있는데 이 법칙을 사람이 수납하고 거기에 순응해야 하는데, 너무 불평하고 불만하고 몸부림치고 안타까워하는 것은 너무나 많은 욕망 때문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은 “아파데이야”의 삶입니다. 영어로는 apathy 라고 합니다. sympathy 가 무엇입니까? 동정. empathy는 무엇입니까? 공감. apathy는 무엇입니까? “a”는 없는 것입니다. “무정념”, 혹은 “무정동”입니다. 그게 이 사람들의 이상입니다. 마치 바위 같아서, 기쁜 일이 있어도 너무 웃지 않고 슬픈 일이 있어도 슬퍼하지 않고 의미있는 것에서 무의미를 찾고 무의미해 보이는 것에서 의미를 찾아서 물이 수평을 이루는 것처럼 살아가는 삶을 가장 이상적인 삶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기 위해서는 눈에 보이는 현상에 자기가 사로잡히고 마음을 다 내어줘서 잘 되면 출렁 올라가고 못되면 쾅 떨어지고, 이런 삶을 살아서는 인간은 절대 행복할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삶은 거의 짐승에 가까운 삶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공부하느라 그럴 리는 없지만 유튜브에 보면 별의 별것들이 다 나옵니다. 신나게 놀았던 이야기, 호텔에서 맛있는 것 먹은 이야기,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며 즐거워하고 부러워하고 너무 부러워서 자살해버리는 사람도 있는데 스토아학파 사람들이 보면 미친 짓들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먹고 와서 자랑하는 놈이나 그걸 보고 비관해서 자살하는 놈이나,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것도 가짜였다는 사실, 이런 것이 전부 정신나간 사람들이 동물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재밌지 않습니까? 그런 것들은 다 덧없이 흘러가는 것이라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지금 이야기한 것을 정리하면 이렇게 됩니다. 세계, 자연세계입니다. 도덕사회, 도덕 세계에 인간이 있습니다. 자연법칙은 원인이 있고 거기서 결과가 나옵니다. 결과가 다시 두 번째 나올 결과에 대해서는 원인이 됩니다. 이것을 계속해서 물고 가는 과학의 법칙을 뭐라고 합니까? 인과법칙이라고 합니다. 영어로는 causality 라고 합니다. 똑같이, 도덕사회 속에서도 원인이 있고 그 원인이 결과가 되고 그 결과는 다음의 결과에 대해서 원인이 됩니다.
그러면 자연 세계에는 왜 이런 법칙이 있겠습니까? 이것은 무신론적인 진화론자인 도킨스같은 사람이 이야기하듯이 우연히 흘러가는 우연의 일치이고 그것은 어떤 사고를 가지고 가는 것이 아니라 맹목적으로 흘러가는 것입니다. 그런 유물론의 입장이라면 여기에는 목적론이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세계가 지어지고 이 세계 전체가 존재하는 것은 어떤 목적이 있다. 인간의 목적이라는 그 전체적인 목적 속에 있다. 그리고 인간이 그 목적을 거스를 때에는 도덕법칙에 의해서 고통을 당하고 기여할 때는 선해서 상도 받고 기쁨도 있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전자보다 후자는, 기독교 사상으로 받아들기 굉장히 좋은, 칭찬할만한 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문제는, 여기에 그려놓았는데 이런 이론들을 가능하게 하는 베이스, 기초가 무엇인가? 입니다. 그것을 여기에서는 말하지 않습니다.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키케로나 세네카나 여기에 이야기하는 아우렐리우스나, 거의 같은 이야기를 하지만 마지막에 기초가 무엇이냐? 무엇이 그런 목적을 만들었고 무엇이 그런 우연을 만드느냐? 그리고 무엇이 결국은 이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필연을 만들어내느냐? 물으면 대답을 못 합니다.
다음에 나오는 구절들은, 내가 읽었을 때 명문이라고 느껴진 것들을 뽑은 것입니다. 1장 1,2,3절입니다. 처음 시작할 때 이렇게 시작합니다. “나는 할아버지 베루스에게서 선량한 행실과 격정의 절제를 배웠고 아버지의 명성과 회상에서는 겸손과 남성적인 기질을 배웠다. 어머니에게서는 경건과 덕 - 여기서의 경건은 기독교적인 경건이 아니라 그렇게 생각하면서 이 큰 우주 앞에서 자기는 아주 작은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겸손해지는 것을 말합니다. - 그리고 나쁜 행위뿐 아니라 생각까지도 버려야 할 것을 배웠으며 - 나중에 아버지, 할아버지 모두 쟁쟁한 사람들이었고 우리나라로 말하자면 정치 권력의 핵심부에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당연히 부자였습니다.- 부자들의 습성에서 멀리 떠나 소박하게 사는 법을 배웠다.”
나는 이것을 읽으면서 찬탄을 했습니다. “인간은 이렇게 태어나야 하는구나!” 태어날 때부터 다른 것입니다. 아버지가 일찍 죽고 할아버지 베루스, 베루스는 이렇게 쓰는데 “진실하다”는 뜻입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도 이런 이름을 물려받는데 할아버지는 진실한 사람입니다. 권력 핵심부에 있으면서도 선량했습니다. 그 자리에 있으면 한칼에 날려버리고 싶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리고 위협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런 격정을 절제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여러분의 할아버지께서 이런 분이셨습니까? 아버지는 명성이 어마어마해서 만나는 사람들마다 아버지를 존경합니다. 그런데 아버지를 수없이 회고하면서 지극히 겸손하고 누구에게도 굴하지 않는 남성적인 기질을 배웠습니다. 여러분의 아버지가 이런 분이십니까? 엄마는 정말 경건하고 덕스럽고 행위는 물론이거니와 생각조차도 나쁘게 하지 않는 여자였습니다. 돈이 많았는데도 소박하게 사는 것을 가르쳐주던 엄마였습니다. 태어난 바탕부터 다르다는 느낌을 받는 것입니다.
인생에 있어서 너무나 중요한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을 빌어서 나온 이야기인데, 정말 괜찮은 인간이 되려면 네 가지 조건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나라다운 나라에서 태어나야 합니다. 있는 사람들은 갑질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법이 칼 같고, 부유한 사람들에게는 솜방망이 같은 그런 나라에 태어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정말 훌륭한 사람인 부모 밑에서 태어나야 합니다. 부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훌륭한 사람, “내가 저런 아버지처럼, 저런 엄마처럼 될 수 있다면 한이 없겠다.” 할 수 있는 부모 밑에서 태어나야 합니다. 세 번째는 훌륭한 스승을 만나야 합니다. 엄청난 학문의 세계를 우리에게 보여줄 뿐만 아니라 더욱이 그 인간이 어떻게 그 배움을 삶 속에 실천해야 하는지를 몸으로 보여주는 선생님을 만나야 합니다. 마지막 네 번째, 그렇게 진리를 따라서 살고 싶어하는 친구를 만나야 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좋은 사람이 되기 쉬워진다고 합니다. 우리의 인생은 벌써부터 꼬이기 시작했습니다. 여기 넷 중에 한 가지도 해당이 안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이 꼬인 인생을 살아갈 것인지 고민을 하게 됩니다. 부모님께 그런 것을 기대할 수 없는 경우에는 부모님과 대체할 수 있는 뭔가를 찾아내야 하고 나라에게 기대할 수 없을 때는 나라를 대체할 수 있는 그 무엇을 찾아야 하고, 친구, 선생님에 대해서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결국 자기 스스로 나라가 되고 부모가 되고 선생님이 되고 친구가 되도록 살아가야 하는 그 부담이 주어지는데 우리 중에 그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 생각해보십시오. 어떻게 자기가 자기 자신의 스승이 될 수 있고 엄마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이런 고민이 여전히 숙제로 남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이런 모든 필요들, 1번, 2번, 3번, 4번 통로들은 모두 진리를 전달해주는 통로인데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그 진리의 원본을 만납니다. 그러면 이런 관계의 결핍이 있어도 서서히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빚어져 가면서 올바른 자기의 세계를 구축해 나갈 수 있게 됩니다.
16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소크라테스에 관한 기록. 많이 소유하지 못하면 견디지 못하고…” 재미가 없으니 이것을 한번 읽어보십시오. “많이 소유하지 못하면 견디지 못하고 소유하면 남용하게 마련인 재물을 그는 소유하지 않고서도 견디고 소유하고도 적절히 즐길 수 있다는 말을 아버지에게 적용해도 무방할 것이다.” 아버지를 회상하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많이 소유하지 못하면 견디지 못하고, 견디기 위해서 소유하고 나면 결국은 허투루 써서 물질을 소비하는 즐거운 향락에 빠지게 되고 이런 향락에 일단 빠지게 되면 정신은 빈곤한 길을 가게 됩니다. 그러지 않고도 적절하게 그 물질을 사용하는 것이 자신의 영혼의 건강한 성장을 방해하지 않고 살 수 있었다는 것은 엄청난 절제와 균형감각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 말을 아버지에게 적용해도 무방하다고 할 정도로 그의 아버지는 실제 삶으로 그것을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아침에는 우선 이렇게 생각하자. 즉 자기는 남의 일에 참견하는 자, 은혜를 모르는 자, 교만한 자, 사기꾼 질투하는 자, 사교성이 없는 자와 만나게 될 것이고. 이 모든 일은 사물의 선악에 대한 무지에서 일어난 것이다. 그러나 나는 선한 것이 아름답고 악한 것이 추한 데 대해 그 ?? 을 통해 통찰하고 있다.” 우리는 요즘 TV에서 보면 “아침에 일어나면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세요. 좋은 일이 생길 것입니다. 참 행복한 하루가 될 것입니다. 좋은 사람을 만날 것입니다. 복권도 당첨될 것입니다. 학교 시험은 어제 공부한 것에서 나올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을 하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살아보면 사실은 로또 당첨되는 것보다 확률이 떨어집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게 반복되면 자꾸 실망이 됩니다. 하루 살고 나면 정말 내게 일어나서는 안 되는 예외적인 나쁜 일들이 일어났다고 생각을 합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자기 자신의 생활을 보면서 많은 경험을 통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오늘 나는 남의 일에 참견하기 좋아하는 인간, 은혜를 절대 모르는 나쁜 놈, 그리고 자기만 잘난 줄 아는 교만한 놈, 살살거리고 떠들지만 사기치는 놈, 고자질해서 질투하는 놈, 사교성이 전혀없는 그런 사람과 만나게 될 것이다.” 라고 생각하고 하루를 시작하면 의외로 이런 인간을 적게 만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낫네! 아주 나쁠 줄 알았는데 살만하네!” 우리말로 하자면, “감사합니다. 주여!” 하고 시작하는 희망이 생기는 것입니다. 문제는 마취제에 속지 말라는 것입니다. “꿈을 꾸면 된다.” 그러면 모든 사람이 BTS가 되어야 합니다. 아이돌 지망생이 2만 명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꿈을 꾸어도 안 됩니다. 그러면 현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참견하지 않고 은혜를 잘 알아서 모시고 겸손하고 진실하고 질투하지 않고 사교성이 있는 사람들을 만나야만 겨우겨우 오늘 하루를 사는 것 같이 즐거울 수 있다면 그 사람의 삶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주변의 사람들에게 기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만나집니까? 안 만나집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는 그 사람도 똑같이, “저런 사람을 만나서 내 인생이 이렇게 힘들까?” 하는 그런 사람 중에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누구에게도 우리만의 인생을 확 열어서 휘젓고 들어와서 우리의 인생을 차지하게 만들면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보다 나이가 많아야 두세 살일 것입니다. 대학교 1,2학년 학생들, 3,4학년도 있고 복학생도 있겠지만 제가 이야기를 했습니다. 연애하고 싶습니까? 당연히 하고 싶을 것입니다. 살다가 이런 자매를 만날 것이다. “오빠, 나는 오빠가 너무 좋아! 오빠가 없는 세상을 상상할 수도 없어. 나는 오빠를 사랑하지 못할바엔 죽어버릴거야!” 이런 자매를 만나면 조용히 끊어라. 절대 그런 여자와는 엮이지 말라고 이야기합니다. 자매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남자가 대시해서 “난 너밖에 없어. 나는 너를 사랑하지 않을 거라면 난 파멸되어 버릴거야.” 이런 사람은 위험한 사람입니다. 우리의 세계를 그런 식으로 휘젓고 들어와서 우리와 일치가 되었을 때, 둘이 아주 아름다운 일치를 이루면서 우리가 도저히 도달하지 못할 인생을 살아갈 것이라고 하는 것은 환상입니다. 소설에서나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결혼을 해서 같이 살든지, 결혼을 하지 않든지, 그 이상의 무엇이 있다고 하더라도 내가 나인 이 고독은 상쇄시킬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그렇게 창조하셨습니다. 그게 나의 주체성입니다. 나는 나로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신앙인이니까 내가 임자가 되어서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 안에서 내가 주체가 되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다가 그 사랑이 깨어지면 어떻게 됩니까? 자기를 지탱할 수 없게 됩니다. 자살을 합니다. 유서를 써 놓고 사라져버립니다. 우리의 인생이 그렇게 시시합니까? 내가 나로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이 중요한 명제는 피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환상을 버려야 합니다. “나”라는 세계가 누구에 의해서도 그가 없으면 뿌리째 흔들리는 정도의 인연은 없어야 합니다. 물론 나도 결혼을 해서 우리 집사람이 아프거나 죽는다고 하면 너무 슬프고 나를 가늠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인생 자체에 무릎을 꿇고 포기할 정도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삶이 아닌 것입니다. 그것을 극복하고 살아야 합니다. 내가 나인 것은 양보할 수 없는 “나”입니다. 죽을 때까지 그것을 지켜야 하고 “자신”이라는 무게는 피할 수가 없습니다.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런 것을 직시하고 나면 너무 힘들어지기 때문에 타락합니다. 향락에 빠지고 정신을 빠뜨려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다음 사람이 읽어주십시오. “신들에게서 오는 것은 모두 섭리로 충만하여 있다. 우연에게서 오는 것은 자연으로부터 떠나있지 않으며 섭리에 의해 마련된 사물과 함께 하고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만물은 이 원천에서 흘러나온다. 그리고 거기에는 필연이 있으며 그것은 모두 우주의 이득을 위해 존재하고 그대는 이 우주의 한 부분이다.” 낙엽이 떨어지는 것처럼 우리는 죽고 스러지고 또 다른 사람들이 생겨나고 자연이 다시 생성되고, 이런 속에서 우리는 조용히 우리 자신의 생을 꽃피우고 죽음에 우리를 내어주고, 그리고 이 우주의 위대한 순환 속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이것보다 훨씬 더 희망적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 소망을 우리에게 줍니다.
다음 읽어주십시오. “욕망에서 행한 잘못은 분노 때문에 저지른 잘못보다 더 큰 책망을 받아야 한다.” 왜 그렇습니까? 분노 때문에 저지른 것은 의도된 것이 아니라 확 솟아나면서 억제하지 못하는 분노에 의해서 사람을 죽입니다. 그것도 물론 의도된 것이지만, 욕망은 면밀하게 계획하고 주도하면서 그렇게 하고자 하는 엄청난 힘을 발휘할 때 이것들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한 구절만 더 하겠습니다. 많이 있지만 나중에 여러분이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만물은 어떻게 신속히 사라지는가? 몸은 우주 속으로 사라지고 그에 대한 기억은 시간 속으로 사라진다. 우리가 느낄 수 있는 모든 현상이란 무엇인가? 쾌락으로 인간을 유혹하며 고통을 두렵게 하며 거품같은 명성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것들은 얼마나 무가치하고 하찮으며 사라지기 쉽고 말라버리기 잘하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예리한 지성으로서만 깨달을 수 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예리한 지성이 아니면 깨달을 수 없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만물은 얼마나 신속히 사라지는가?” 아직은 여러분이 회상할 것이 별로 없습니다. 유치부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고등부가 되었습니다. 초등부 아이들이 여러분을 보기에는 노땅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유년부 아이들이 보기에는 벌써 꼰대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말이 안 통하는 꼰대입니다. 신속하게 사라져갑니다. 세월이 좀더 흐르고 나면, 너무나 빨리 갑니다. 10대에는 시속 10km, 20대에는 시속 60km, 30대에는 시속 100km, 40대에는 시속 120km, 50대에는 시속110km 되다가 60대부터는 좀 줄어든다는데 저는 안 줄어들고 더 빠르게, 시속 150km로 가는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모든 일을 끝내고 나면 뚝 떨어지면서 40, 30, 20, 10, 시간이 적게 갑니다. 신속하게 사라집니다. 가족사진 찍어놓은 것을 보십시오. 엊그제 같습니다. 몸은 우주 속으로 사라지고 기억도 시간 속으로 없어집니다. 우리가 느낄 수 있는 눈에 보이는 현상, 눈에 보이는 이 모든 것들은 도대체 무엇인가? 그런 것들이 잠시 있다가 사라질 것인데도 영원할 것처럼 쾌락으로 인간을 유혹하고 고통이라고 우리를 겁주어 두렵게 만들고 누군가가 유명해지면 거품과 같은 명성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고, 이런 것이 무엇인가? 결국 몸이 우주속으로 사라지는 존재라는 생각을 하게 되면 말라버리기 잘하는 것인가? 하고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풀이요 그 아름다움은 풀의 꽃과 같도다.” 이런 것을 항상 생각하면서 오늘 하루를 살아야 합니다. 그림을 그리자면, 여기에 사람이 있는데 오늘 하루의 삶을 살아갑니다. 그때 이것을 꿰뚫어 보면서 이 위에 있는 우주를 보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자기라는 존재는 시간 속에서 사라져가는 존재라고 생각하고, 지금 내 앞에서 일어나는 이 일들이 내가 그렇게 안달복달하고 심지어 내 인생 자체를 부인해야 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일인지, 나는 누구를 위해서 미친듯이 공부하고 살고 경쟁하고 잠시 이긴 것 같았는데 그 다음 또 경쟁이 기다리고 있고 여기에서 승리했으나 그 다음에는 패배가 기다리고, 승리한 자나 패배한 자나 함께 사라져가는 것을 보면서 이 전체가 결국은 이것 하나에 웃고 우는, 그런 것이 인생에 최고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기 위해서는 예리한 지성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 지성이라는 것은 사물의 껍데기를 꿰뚫어서 그 배후를 보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절대로 속지 않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외에도 정말 명문이 이렇게 많습니다. 여러분도 찾아서 읽어보면 이렇게 많습니다. 이 강의를 하면서 제가 바라는 것은 이것입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기독교인이 아니었습니다. 신의 존재를 인정했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그 하나님으로서의 신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교만한 인간들이 가지기 쉬운 큰 잘못에서 벗어난 칭찬할만한 점들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온 우주 만물 안에서 지푸라기와 같은 육체를 가진 존재이고 태어났다가 스러져가는 과정을 겪어야 하는 허망한 존재이기 때문에 무엇인가 삶에 이 허무를 초극하는 우주의 궁극적인 목적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화두를 우리에게 던져준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인줄도 모르고 영원한 세계인지도 몰랐지만 그러한 우주적 목적에 대한 인식을 가지고 삶의 좌표를 정하며 살아갔기 때문에 그런 황제의 자리에 오르고 어마어마한 부와 영광을 누리면서도 평정한 생활을 해 나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철학은 자기의 친엄마라고 생각했고 황제로서의 자신의 삶은 계모라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계모로부터 생모에게로 돌아갈 수는 없다, 살아있는 한 내가 이 나라를 다스려야 하니까. 그러나 늘 그 친엄마를 생각하면서 계모 밑에서 살면서, 친엄마같은 철학의 이상을 계모같은 자신의 삶 속에서 실현해가면서 그 평정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그런 삶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우리는 기독교인으로서, 비록 기독교의 가치와 일치하지 않는 사상을 가질지라도 우리는 영원이라는 세계에 눈을 떠서 그렇게 한시적인 사물들을 바라보고 우리의 인생의 목적을 우주와 세계의 창조라는 광대한 목적, 특히 “나”라는 사회에 던져진 이 존재가 나 홀로의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사회를 만드신 거대한 목적의 네트워크 안에 내가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내가 어떻게 생각하며 믿고 행동하고 살아가고 어떤 인격의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게 해 주는 역할을 이 책이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질문 1) 저자는 인생의 허무함을 인식하며 사흘간 사는 것과 삼대에 걸쳐 사는 것이 차이가 없다고 했습니다. 삶의 가치는 시간에 있지 않고 본질에 있다는 뜻인 것 같은데 사흘만 살아도 삼대에 걸쳐사는 것보다 가치 있는 삶이 되려면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답변 1) 강의를 들었으니 이미 답이 다 나왔습니다. “가치”, value 라는 것은 주관적인 것입니까 객관적인 것입니까? 극단적으로 이야기해서, 끊임없이 사람들을 괴롭히며 나쁜 짓을 하며 사는데 그것을 자기는 가치 있다고 생각하며 그 짓을 계속 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가치있는 삶을 살고 있는 중입니까? 아닙니다. 그런데 엄마가 말합니다. “얘야, 너는 할아버지 때부터 아버지 때까지 법조인 집안이다. 그러므로 너는 로스쿨을 나와서 판사가 되거라.” 그런데 나는 애니메이션을 너무나 하고 싶습니다. 그런 것들은 다 가치없는 것이고 엄마 아빠가 후려치듯이 우겨서 공부를 하고 로스쿨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법조인의 길을 걸어갑니다. 매일매일 죽고 싶습니다. 그것이 가치있는 삶입니까?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가치라는 것은 주관적인 문제만도 아니고 객관적인 문제만도 아닙니다. 객관과 주관이 만나는 것입니다. 어떤 식으로 만납니까? 가치라는 것은 선과 악에 관련된 것을 내게로 끌어내렸다는 의미에서 주관적이라는 뜻이 아니라 어떤 가치있는 삶이 있다고 할때 그 삶이 어떻게 하나일 수 있겠습니까? 예를 들어 나라를 기준으로 말한다면 이 나라를 훌륭하게 하기 위해서는 훌륭한 군인도 필요하지만 사업가도 필요하고 묵묵히 제조업 현장에서 기계를 만드는 장인도 필요하고 기가 막히게 디자인을 잘해서 사람들이 그것을 사고 싶게 만드는 기술도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 것들 중 어느 하나를 자신이 “이것은 참 가치 있는 일이다.” 정하고, 자신의 마음도 이것을 원해서 붙들 때, 이것이 진정한 자신의 인생에 가치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구도가, 아주 기쁘게 성경이 동의할 수 있는 구도여야 합니다.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질문으로 돌아가서, 인생의 삶의 진정한 가치라는 것은 얼마나 길게 살았느냐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살았을 때 두 가지, 내가 그런 삶을 삶으로써 첫째, 내가 하나님을 향해 좀 더 나은 존재가 되고 나와 함께 만났던, 나와 관련되었던 세계가 좀 더 나은 세계, 행복한 이웃들이 되고, 내가 그 안에서 정말 보람과 행복을 느낄 수 있었던 삶이 바로 그 삶의 가치입니다. 그렇게 사흘을 사는 것이 자기에게도 행복하고 하나님을 향해서도 올바른 것이지만 그런 것이 없이 삼대를 걸쳐 살아서 아들, 손자, 증손자까지 본다고 하더라도 그 속에서 그런 가치와 보람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게 진정 행복한 삶이겠느냐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질문 2) 목사님은 큰 집단의 리더신데, (내가? 그런데 그 집단이 말을 잘 안 듣습니다. 그래서 별로 행복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작은 집단이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책에서는 교만한 사람들이나 다른 사람을 깎아내리고 자신을 더 드러내려고 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날 것이고 그런 사람들을 최대한 피해야 한다고 나와 있다고 생각하는데, 만약 리더로서 그런 사람들을 이끌어가야 하고 같이 함께 가야 하는 상황이라면 어떻게 대응해야 좋겠습니까?
답변 2) 그래서 리더는 겉으로 보기에는 화려해 보일 수도 있고 멋있어 보일 수도 있고 매력적일 수도 있고 “나도 한번 리더가 되어 보고 싶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꼭 목사를 두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의 큰 기업의 리더들이 하는 일은, 전무 이상이 되면 업무의 85%가 회의 하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결정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CEO, 탑 리더가 되고 나면 아무 것도 하지 않습니다. 골프치고 생각하고 책 읽고 말입니다. 스티브 잡스가 청소를 했겠습니까, 자동차를 수리했겠습니까, 애플 컴퓨터를 분해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리더로서 살아가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삶입니다. 내가 권하고 싶은 것은, 너무 리더가 되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굉장히 고달픕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자연인이다”의 삶이 훨씬 쉽지 않겠습니까? 산속에 들어가서 꼴보기 싫은 사람들을 보지 않고 자연과 벗하면서 개나 기르고, 개는 대들지는 않습니다. 얼마나 좋겠습니까? 닭도 대들지는 않습니다. 집단이라고 했는데, 자기가 섬기고 있는, 거느리고 있는, 혹은 자기가 이끌고 있는 공동체를 위해서 뭔가를 결단할 때는 그것이 모든 사람에게 만족을 줄 수없고 행복을 줄 수 없습니다. 모두를 만족시키면서 가면 비전있는 길을 갈 수 없고, 너무 그런 길만 걸어가면 “나를 따르라!” 하고 갔는데 마지막에 자기 혼자 깃발 흔들고 달려가는 꼴이 됩니다. 그런 것에서 리더는 굉장히 어려움을 겪습니다. 저는 리더를 세 가지의 단어로 요약을 합니다. 희랍어로 “파토스”, 열정입니다. 어떤 것에 대해서 하고싶은 사람이 아니라면 리더가 되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좋은 의자에 앉으려고 리더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열정이 있다는 것은 자신에게 부름이 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로고스”, 이론으로 그 열정을 녹여냅니다. 모든 사람이 나처럼 파도스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론으로 세워서 내가 하고자 하는 이 일이 왜 그렇게 중요한지 이론으로 설득합니다. 마지막에 “데토스”, 이것은 풍토, 혹은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그 생각이 없었던 사람이 자기와 함께 비전을 가지고 그 일에 함께 참여하게 해 주는 힘, 그것이 리더의 힘입니다. 그런데 그 길은 정말 쉬운 길이 아니고 진정한 리더는 절반쯤은 태어나고 절반쯤은 자신이 훈련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길은 매우 어렵고 힘든 길이지만 보람있는 길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리더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나를 하나님께서 리더로 부르셨다면, 내가 리더가 되어서 남들이 하지 않는 어떤 일을 하고 싶은 파토스가 내게 무엇이 있는지, 그 파토스를 내가 어떻게 이론화하고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게 할 것인가?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 위인들의 전기를 읽어보면 도움이 많이 됩니다.
질문 3) 2000년 전의 작가의 글을 읽으면서도 지성적으로는 이 사람이 우리와 대화하는 데 전혀 문제가 없다는 것을 느낍니다. 가지고 있는 지식의 양으로 보면 부족할 수밖에 없지만(누가? 아우렐리우스가?), 정보는 우리보다 적게 가진 시대에 살지 않았습니까? 제가 여쭤보고 싶은 것은, 사실 정보는 우리가 엄청나게 많이 가지고 있는데 아까 이야기하신 “예리한 지성”이 없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 같아서 우리 학생이나 믿음의 후배들이 어떻게 하면 그 예리한 지성을 훈련하며 살 수 있을지 실천적인 방법을 알려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답변 3) 참 좋은 질문입니다. 그런데 저는 질문하신 선생님의 첫 번째 전제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보다 훨씬 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다고 했는데 솔직히 말하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네이버가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어떤 판단을 내리는 데 있어서 기본 데이터 베이스가 정보라고 한다면 그 정보는 자기의 기억 안에 축적되어 있음으로 판단을 도와주는 것이지 그렇게 우리가 암기도 잘 안 하고 학습도 잘 안 하려고 하고 네이버 같은 외장장치를 믿고 있습니다. 네이버가 작동을 하지 않고 구글이 작동하지 않는 때는 없다고 하더라도 외장하드를 돌리는 것과 내 안에 cpu를 가지고 있는 것은, 컴퓨터에서는 같은 것일 수 있지만 인간 안에서는 절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저는 평생 공부를 하며 살아온 사람입니다. 그런데 지금 학교에서 가르치는 공부 방식, 신교육방식을 여러분이 따라가면 이 경쟁사회에서는 승리하는 데 도움이 될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러한 통찰과 예견, 혹은 예지를 갖는 데에는 훨씬 더 불리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예를 들어 아이폰이 떨어져 깨어졌는데 수리비가 얼마나 들어가는지에 대해서 우리에게 다 입력되어 있을 필요는 없습니다. 입력해 두어도 좋겠지만 야매로 수리받는 것과 애플 센터에서 받는 것 사이에는 돈이 10만원 이상 차이가 날 것이고 가격도 수시로 변하니까 그런 것은 찾아보면 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는 외장하드가 상당히 유용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너무나 살기 힘들어서 “선배님, 인생이 뭡니까?”하고 물었더니 “네이버에게 물어봐.”했답니다. 네이버에 “삶은 무엇인가?” 라고 검색했더니 “삶은 계란이다.”하고 나오더랍니다. 웃자고 하는 얘기지만 그런 웃지 못할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네이버는 통찰과 예지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예지 그 자체는 지식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라 지식 그 자체를 내 안에 소화함으로써 판단력이 축적되고 그 판단력때문에 보이는 사물의 현상에 속임을 당하지 않는 것이 예지입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내 안에서 끊임없이 지식이 살아있고 그 지식이 내 안에서 재료가 되어서 판단력을 길러줍니다. 그 판단력은 자기가 실제로 살아갈 때 그 판단력은 더해집니다. 이 질문과 같이 지식은 많지만 지혜가 없어지는 이런 시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요즘 세대에서는 따라갈 수 없는 다독, 다사, 다작이라고 이야기하는데, 현대에는 그 말을 하는 것 자체가 거의 불가능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저는 그렇게까지 고전적인 것을 반복하지 않고 좀 양보해서 말하자면 읽고, 생각하고, 쓰기를 노력하라. 조금이라도. 조금이라도 읽고, 읽기만 하지 말고 생각을 스스로 해서 여기에 들어온 이 지식을 소화해내서 도대체 그 지식이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다주는지 생각을 하면서 그것을 다시 토해서 자기의 글로 자기 의견을 써보는 연습을 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하기가 너무 힘들고 어렵다고 하는데 소아마비에 걸린 어떤 사람들 가운데는 불편하면서도 목발을 짚고 다니지 않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아예 목발을 짚고 다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차이는, 무거운 의족을 차고 힘겹게 걷는 연습을 하면서 긴 세월을 지내면 몸은 부자연스럽지만 의족없이 자기의 발로 걷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포기하면 이 발 자체가 퇴화되어서 도저히 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고 합니다. 지금 할 수 없다, 환경이 어렵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만약 계속 그렇게 산다면 자기는 그냥 퇴화된 채로 목발을 짚고 그냥 사는 것처럼 그렇게 판단력도 모자라고 글도 쓸 수 없고 생각도 별로 할 수 없는, 남이 던져준 생각들 중에 하나를 붙들고 사는데 그 생각을 던져준 사람들에게는 책임이 없습니다. 그렇게 살았는데 낭패를 당해도 없어져 버렸기 때문에 배상을 청구할 수도 없습니다. 그 사람들이 책임질 일도 없습니다. 그렇게 살기에는 우리의 인생이 리트머스 시험지도 아니고, 도저히 반복될 수 없는 한 번밖에 없는 우리의 인생입니다. 그럴 수는 없는 것입니다. 자기가 주체적으로 살기 위해서는 읽고 생각하고 쓰는 연습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색을 통해서 얻는 이 깨달음과 사물의 기쁨은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더구나 그것이 희미한 진리의 빛이어도 기쁜데 진리의 하나님의 말씀일 경우에는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깨달음과 지혜가 얼마나 놀랍겠는지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이 일반책도 많이 읽으시고, 특히 요즘에는 문학도 많이 읽으시기 바랍니다.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으시면 인터넷에 들어가셔서 제가 3주전에 웨스트민트터 코리아에서 마지막 시간에 했던 인문학에 대한 강의를 들으십시오. 유튜브나 학교에서 인문학을 해보라고 하는 불신자 사람들이나 선생님들 보다는 훨씬 더 중심이 잡힐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