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경과 설교 2
녹취자: 윤은정
이 주경과 설교는 최교수님이 참 애를 많이 쓰셨는데 제가 사실은 피를 말리는 일입니다. 저걸 갇다가 집에서 남 쉬고 다 놀지도 못하고, 놀지도 못하고, 다 쳐서 출판하기 전에 한번 저렇게 써 보는 게 좋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한 학기정도 수업한 다음에 보완할 것은 보완하고, 그렇게 해놓고, 그 다음에 책으로 출간하면 좋은 것 같습니다. 애를 많이 쓰셨습니다. 교수님들이 저런 것들을 많이 만들어야 됩니다. 어떤 학생 말 들으니까 2년을 공부하니까 케비넷으로 하나 까득이 들어있답니다. 책이... 그러니까 책 말고 교수님이 개인적으로 만들어서 나눠준 게... 그러니까 사실 방학 때 교수들도 열심히 연구하고 틈틈이 해가지고 이렇게 부지런히 책을 해가지고 나누어 줘야합니다. 애 많이 쓰셨습니다.
요번에 구약 강의 하던 것들은 좀 몇 개, 글이라고 할 수 없는 것들이 그중에는 들어있지만은, 어쨌든 일단 정리를 해서 한데 묶어놓는다는데 의의가 있어가지고, 한 350편 짜리 강의안을 만들었습니다. 다음 주 쯤에 나오는데, 그 작업 때문에 사실은 이쪽 크라스 강의안을 손을 못 댔습니다. 일단 350편 짜리 그리고, 에스라서에 나타난 신앙부응이 또 글로 정리를 해가지고, 짧으면 330, 길면 370페이지 되는 강의안인데 그래서 지금 그것 때문에 작업에 하도 많아져가지고 주경과 설교시간의 강의안을 따로 못 만들었는데 어쨌든 바쁜 것 한 두주만 지나 가면은 제가 참고도서 목록하고 등등 깨끗이 적어가지고 학기 중에라도 여러분께 나누어 드리겠습니다. 사실 저렇게 딱 나누어주고 크라스를 시작해야 되는데 미안합니다.
그래서 우선 시간을 이렇게 진행을 하겠습니다. 한, 두 시간에서 세 시간에 걸쳐서 주경과 설교의 현실적으로 ‘왜 이런 문제가 대두가 되는가?’ 하는 것들을 우리들이 살펴본 다음에 우리들이 주경과 설교라는 과목에 대해서. ‘그게 도대체 무엇이냐?’ 라고 하는 그런 이야기만 듣다 끝나 면은, 별로 우리에게 유익하지 않으니까 실질적으로 프락식스가 우리가 이 시간에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주경과 설교에 대해서 일단 서론적으로 세 시간에 걸쳐서 제가 강의를 하고, 그리고, 그다음에 본문을 좀 다루어 보겠습니다. 실제적으로 주경학적으로 다루어보고, 그리고, 그것들을 어떻게 메시지로 연결을 시키는가, 사실 이 작업들은 지난 학기에도 못했습니다. 사실 여러분들이 이상하게 크라스에 들어오게 됐습니다.
원래 이게 원, 투가 되가지고, 그렇게 해가지고 1학기 때 원, 2학기 때 투, 이렇게 연결이 되게 되어있는데, 1, 2학기가 안되고, 2, 1학기,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2학기는 이미 지나가 버렸기 때문에 아직 커리큘럼이 자리를 안 잡아서 그러는데, 그럼 이제 첫 학기에는 주경과 설교에 대한 이야기, 그 다음에 본문의 분석 이런 것들을 쭉 한 다음에, 그 다음에 2학기 때에는 ‘그런 결과들을 어떻게 큰층에 접목을 시킬 것인가?’ 그렇게 공부를 하면 되는데 좀 그렇게 됬습니다. 그래서 이번 학기에는 압축해가지고 일단 3시간에 걸쳐서 인트로덕션으로 주경과 설교의 문제, 그리고 주경의 위기, 설교의 위기, 이런 목록으로 한번 인트로덕션 한 다음에, 그 다음에, 우리가 몇 개의 본문을 할 수 있을지 모르는데, 실제로 한번 본문을 신약에서, 그리고 구약에서, 한 두 개씩 이라도 한번 다루어 보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우선 여러분들에게 과제 나갈 때 우선 알려주기로 하고. 우선 여러분들이 제일 먼저 읽어야 할 책이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하면, 아무 과제도 내준 적 없죠? 이 책은 레포트 쓸게 아니라 나중에 시험을 보도록 그렇게 할 테니까, 이 책은 나중에 천천히 읽으시도록 하고, 우선 이 책을 꼭 읽으시기 바랍니다. 지난 학기에도 이 책을 읽었는데, 왜 주경과 설교시간에 이 책을 읽히느냐면 좀 정확하게 이야기 하자 면은, 우리들이 아무리 좋은 이론들을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한계는 무엇이냐 면은 몇몇 사람들을 빼놓고는, 아주 특별한 사람들 몇몇 분을 빼놓고는 사실 성경에 대해서 성경적인 설교를 할 수 있을 만큼 성경과 친근하지 않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제가 지금 ‘친근’이라는 말을 쓰는 것을 여러분들이 좀 기억을 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을 많이 안다’ 그것 보다도, 성경에 대해서 애착을 느끼는 것, 이런 일들이 어려워지는 이유는 결국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사실 신학을 아무리 많이 공부를 해도 그런 문제는 사실 해결이 안됩니다. 그래서 누구라고는 지금 말씀을 안 드리겠는데, 지금은 아주 훌륭한 설교자가 됐는데, 그분의 고신해서 공부를 하고 외국으로 유학을 가면서 비행기 안에서 계속 혼잣말로 근심을 하는 것이 그것이었답니다. 이제 영어시험도 다 통과하고 이렇게 해가지고 외국어도 잘하고 그리고 머리도 있어가지고 유학을 가면서 계속 반문한답니다. ‘어떻하지?’ 대학원을 마치고 유학을 가는 사람이 ‘어떻하지? 난 성경을 모르는데’ 그러면서 계속 근심을 하면서 유학을 갔다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그것이 사실 오늘 우리들의 실상입니다.
그런데 그 이유는 엄격하게 따져서 이야기 하자면은 어디에 그런 연유가 기원 하냐 하면은, 우선, 성경이 자기 품안에 들어오는 것들을 경험을 하면은 사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사실 어떤 의미에서 성경이 자기 품안으로 들어오는 경험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솔직히 말해서 신학대학원 마칠 때 까지도 성경은 눈을 비벼도 콘크리트 덩어리였습니다. 콘크리트 덩어리, 늘 접근하기가 어렵고, 그런 콘크리트 덩어리였습니다. 그런데 이 책을 쓴 사람은 켐벨 몰간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구약을 안 익히고, 신약을 익히셨습니다. 신약은 우선 좀 얇고, 그리고 신약 성경을 볼 수 있는 눈이 열리면은 그러면은 구약성경도 같은 시각에서 볼 수 있기 때문에 그렇고, 또 하나 이유는 읽다가 만약에 이 책이 도전이 되면은 다음 책도 잘 (끊김)
그런 관계에 있기 때문에 이것을 말씀을 드리는데 우선 이 책을 읽으면서 제가 느낀 것은 뭐냐하면은 저자가 성경을 한 없이 읽었습니다. 그것이었습니다. 쉽게 이야기 하면은 마라톤 선수들이 마라톤을 하는데, 똑같은 42.195km 아니에요? 그런데 늘 경주를 하는 그 코스에 미리 도착을 해서 숙박을 하면서 그 코스를 계속 달려본다고 합니다. 그래서 왜 그러냐면은 앞에 뭐가 나오는지 모르고 달리는 것은 이상하게 힘이 들고 멀어 보이고, 똑같은 거리인데도 늘 다니던 길은 가까워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하자면은 성경을 깊이 이해하면 이해할수록 점점 ‘성경이 넓어 보인다’라고 하는 것은 성경 뿐만 아니라 모든 데에서도 그렇잖아요? 그래서 누가 그러죠? ‘바둑판에 바둑을 많이 두기 시작하면 중국 평야처럼 넓어보인다’ 저는 뭐 그런 경지에 들어가 본적도 없지만은 어쨌든 그렇게 얘기를 하더라구요. 19칸입니다. 그런데 결코, 평신도들하고는 바둑을 두지 마세요. 절대 금기입니다. 그러면은 나중에 목회적으로 유익이 없습니다. 괜히 ‘김집사 정말 이럴꺼야?’ 라고 멱살을 잡는 사태도 있습니다. ‘목사가 집사한테 이야기 하는데 안 물러 줄꺼야?’ 실제로 제가 아는 목사님 한분이 시골교회에 개척을 하셨는데, 교인이 도저히 안 모이니까, 그 동네 사람들이 바둑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바둑을 배워가지고 바둑 선교를 했습니다. ‘바둑을 두면서 교제의 길을 터서 복음을 전해야 되겠다.’ 그랬는데, 복음을 전하는 대신에, 지면은 열이 받혀가지고, 그러더니 나중에 무슨 소문이 들어오냐 면은 ‘그 교회 목사가 동네 사람들하고 마작 두러 다닌다.’ 소문이 나가지고 결코 좋지 않습니다.
그렇게 말하는데, 성경도 물론 많이 읽은 다음에 밑으로 들어 가면은 평야처럼 원시림이 보일 것입니다. 그렇죠? 물론 자주는 경험을 못하지만 그런 것이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뭐냐하면, 숲이 가슴속에 들어오지 않는 사람은 원시림에도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산이 한 눈에 들어와야지만 그다음에 원시림이 나오고 뭐가 나오는 것이지, 도대체 어디부터 어디가 복음서의 처음이고 끝인지를 모르는 난잡한 상황 속에서는 그렇게 성경을 대할 때 ‘원시림처럼 한절에서 보인다.’ 그것은 공상일 가능성이 많다 이 얘기입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에 이 책을 읽으면서 받는 도전은 뭐냐 하면은 성경을 얼마나 많이 읽었을까?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바로 이 밑에서 부목사 생활을 했잖아요?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로마서 강해에서 ‘여러분 로마서를 얼마나 읽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중에서 과연 외우시는 분이 몇 분이나 될까요?’ 그런 것 보면은 자기는 외웠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에 이 사람들은 그러한 우리들에게 있어서 요즘에 잊혀지는 그러한 설교가로서의 기본에 충실했던 사람입니다.
어쨌든 이 책을 처음 앞부분을 번역한 것은 1986년도였습니다. 그런데 엄청난 도전을 받았습니다. 어쩜 그렇게 성경이 한 주목입니다. 마가복음을 짜니까 한 주먹에 들어오게끔... 그런데, 요즘도 그런 것들을 씁니다. 간단하게 들어오는데 펴 봐도 쪼그만게 그대로 있습니다. 이런 책들은 뭐냐하면 성경을 한권을 읽고 짜 봤을 때 쪼그만데, 피면은 다시 불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창세기서부터 계시록까지 예레미야 애가만 빼놓고, 65권, 예레미야 애가는 왜 안했는지 모르겠습니다. 65권을 65번의 강의로 때렸습니다. 그런데 한번 강의에 2시간 반 정도 되겠끔 해서, 한 책씩 한 책씩 정복해 나갔는데, 책 길이와 그의 강의의 길이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창세기는 50장이고, 그리고 유다서 같은 것은 1장이잖아요. 그런데도 거의 같은 분량입니다. 거의 같은 분량으로 성경 각책을 다루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엄청나게 많은 성경을 읽은 사람이 아니면 못할 것입니다.
그것 하나였고, 또 하나는 무엇이냐 면은, 성경에 대한 깊은 애정입니다. 사실은 뭐냐하면은 오늘날 우리 가운데 있는 성경 주의는 이러한 청교도들이 가지고 있는, 이 사람은 청교도는 아니지만은 청교도들과 청교도들 후예들이 가지고 있던 성경의 사랑관은 거리가 좀 멉니다. 비블리즘, 그러니까 뭐냐하면은 성경자체에 대한 깊은 애착이 있어서 성경 주의를 부르짓는 것이 아니라, 정통 교리를 옹호하기 위해서 성경을 부르짓는 것, 그런 것은 사실은 앞뒤가 잘못된 것입니다. 정통 교리를 발견했던 사람들은 성경을 깊이 사랑하면서 장엄한 교리들을 발견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맥락이 잘 안 맞는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에 대해서 발견을 할 수 있었습니다. 어쨌든지 간에 한번 읽어보십시오. 읽고 레포트 쓰는 것에 대해서는 별로 부담을 안 드리겠습니다. 10장, 원고지 10장, 써서 소감만 제출하십시오. 소감만 제출 하시는데 두주 드리면 되겠죠? 제목은 ‘몰간 신학성경연구’ 서점에 있을 겁니다.
하여튼 저는 기독교 담역을 읽으면서도 그런 생각을 가집니다. 그것이 뭐냐하면 캘빈은 헬라어와 히브리어에 아주 능통했습니다. 특히 헬라어에 아주 능통했습니다. 그리고 캘빈은 나중에도 계속해서 자기가 파리에서 헬라어를 배웠던 것에 대해서 굉장히 감사하고, 그 스승에게 책까지 헌사 했습니다. 그 정도로 헬라어를 배우게 된 것에 대해서 감사하게 생각했는데, 그래서 캘빈 주석을 보면은 그냥 밋밋하게 쭉 번역을 해 놨기 때문에 ‘그저 평범한 설교집이겠지’ 그러는데, 때로는 아주 예리한 본문에 관한 논증들이 나옵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 많은 사본들의 증거를 제시하면서 캘빈이 독자적인 해석을 해 나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떨 때는 기가 막힐 정도로 얼토 당토한 본문이 그에게는 진실한 본문으로 채택이 되어가지고, 새로운 해석들을 해 나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주 능수능란합니다. 우리는 그런 조직 신학자가 아쉬어요. 그렇게 성경을 깊이 사랑하고, 본문에 통달한 사람... 그러니까 창세기서부터 말라기까지 거의 모든 성경을 자유자재로, 말하자면은 교리를 써내려가면서 그 교리에 기반이 되는 성경구절들을 늘 제시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상당히 정확하게 지시해놨습니다.
우선 루이스벌코프의 조직신학을 보면서도 ‘과연 이 성경구절이 그런 교리를 지지해주는 것일까?’ 하고 의문이 되는 0들이 아주 많습니다. 왜 그런 결론이 나오냐면은, 쭉 써내려 간 다음에 그다음에 거기에 맞쳐서 성경구절을 찾으니까, 그렇게 나오는 것입니다. 성경을 해석하면서 교리를 써내려 가야 되는데, 그런데 그런 면에서 볼 때에, 사실, 지금 우리들에게는 ‘그러한 세기를 움직일만한 위대한 설교자들이 왜 안나오는가?’ 그것은 사실 부흥신학시간에 얘기한 영적인 면을 많이 치중해서 얘기했지만은 사실 그것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뭐냐하면은 성경에 대해서 깊은 애정, 그리고, 깊이 성경을 많이 이해하고 있는 그런 사람들, 이 사실은 ‘준비가 돼야지 된다.’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어쨌든지 간에 목차를 우선 쓰겠습니다. 그리고 그 목차에 따라서 강의를 해나갈 테니까 서브노트를 하면서 강의를 들으시길 바랍니다.
저는 이번에 교제를 쓰고 있는 부분을 보니까 워터 카이백이책이, 저는 무슨 획기적인 책이라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그리고, 사실 추상적인 이야기도 많이 있고, 0 적 이야기라고 많이 했지만은 저는 사실, 지금 우리의 세간에 번지고 있는 귀납법적 성경연구라든지, 본문 관찰을 통해가지고 프리셉트 뭐, 이런 이야기 등등, 학교 다닐 때 역시 사람은 다 제 갈길로 갑니다. 저 같은 사람은 교수님 연구실에 앉아서 청소나 하고, 그러고 앉았더니 이제 그 학교로 가고, 맨날 책가방 싸들고 학교공부도 물론 했지만은 맨날, 그런데 가가지고 뭐, 성경공부반에 들어 가가지고 죽치고 있던 사람들은 지금 다들 프리셉트 강사가 되가지고 전국을 돌아다니고, 그리고 뭐, 이런 거 저런 거 뭐 관심이 없고, 맨날 철야기도나 다니고 열심히 기도원 오르락 내리락 하던 사람들은 열심히 목회하고 개척하고, 다 그 갈데로 가는 것 같습니다. 이것도 저것도 안하고 왔다갔다 하던 사람들은 지금도 여기 왔다갔다 하는 사람들입니다. 지금도... 지금 뭐하냐고 그러니까 ‘글쎄, 지금 뭘 할까?’ 생각중이랍니다. 어쩜 그렇게 똑같애요. 아주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한, 그 모습 그대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문록적 스터디같은 것들은 조금 너무 어렵게 썼습니다. 그리고 초신자들이 접근하기 너무 어렵게 느껴졌는데, 사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렇게 구문록적으로 분석을 해서 A, B, C, D, A, B, C, D, 이렇게 단락을 나누고, 그 다음에 거기에서 대지소들을 끌어내는 것들이 어떻게 보면은 충실하기는 하지만은, 그러나 보십시요. 설교는 항상 뭘 가지고 있냐면은 본문을 이야기 할때 본문을 다 이야기 할 수 있지만은, 그러나 설교는 본문을 가지고 설교를 전달하기 시작할 때 강조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은... 그러니까 엄격한 의미에서 설교 본문을 같은 것이라도 설교를 여러 번 해도 그것이 원고를 코앞에 놓고 하는 설교가 아닌 한은 항상 새로울 수 있는 것입니다. 사실은... 그렇기 때문에 본문을 피해서 설교를 해야 되겠다고 애쓰고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문제는 뭐냐하면은 강조점인데, 사실 그렇게 구문론적인 본문에 의해 가지고 하나 둘씩 대지소들을 가르는 것은 좋은데, 사실 성경공부하고 설교하고는 틀린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런 것들을 접목했다는 점에서 이제 다소 그런 어려움이 없지 않습니다. 프락시스, 이론상으로는 가능하지만, 프락식스의 어려움이 없지 않나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제가 이 책을 좀 높이 평가하고 있는 것은, 요즘에 성경 신학자들, 소위 얘기하는 주경과 설교를 얘기하는데, 주경을 하는 사람들이 이런 고민을 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다. 박윤선 박사님의 주석을 보면서 느끼는 제 느낌은 말입니다. 그분의 신학세계 속에서 이런 두가지의 관심이 동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주석 뒤에다가 그렇게 설교를 많이 실은 것입니다. 설교를 많이 실었는데, 그 설교는 물론 풀로된 원고가 아니기 때문에, 그것을 가지고 그분의 설교를 모두 평가한다는 것은 어렵지만은,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 높이 평가할 수 있는 사실 하나는 뭐냐하면은, 주경을 하면서도 그분은 그러한 책을 통해가지고 주경의 궁극적인 고을이 설교임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사실은 오늘날 이제 와서 신학자들이, 생각이 깊은 신학자들이 고민하기 시작하는 그런 모든 문제들을 사실은 그분은 하나의 신학 안에서 그런 문제들을 통합해서 고민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이 듭니다. 무엇보다도 그분이 계속해서 목회를 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알기로는 이분도 어느 교회를 돌본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목회에 대한 지속적인 참여가 아니고는 사실 그런 일들이 어렵습니다. 마지막 50이 훨씬 넘으시고, 60이 다돼 가실 때도 개척하셨죠? 모란봉에 성경, 찬송을 들고 새벽 4시에 올라가면 12시가 되도 안 내려오는 때가 허다했다고 그럽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신학과 신앙이 하나가되는 말하자면은 이상적인 의미의 신학자가 한사람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게 참 어렵죠. 그리고 성경에 대한 사랑이라든지, 성경에 대한 해박한 지식, 이런 것들을 전부다 기여를 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사실은 이것은 책의 학적인 가치나 이런 것들을 볼 때에는 무슨 그렇게 엄청난 것은 아니지만은 그러나 현장의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했고, 고민한 그 사람도 소위 얘기하는 프락식스를하는 프랙티컬 히얼리즘 실천신학을 하는 교수가 주경신학을 하는 교수로서 그와 같은 면들을 보였다라고 하는 것들에 대해서 전 아주 높이 평가를 합니다. 그리고 ‘참 훌륭하신 분이다’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성경의 신앙부흥 운동이라든지 그런 것들도 저자의 그런 마인드를 반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배운 것 같은 그런 어떤 부흥의 마인드를 가지고 있는 그런 사람인지는 속속들이 알 수는 없지만은, 그러나 뭔가 현실 상황에 대해서, 이 책에서도 지금 현대 설교의 위기 문제들, 그 다음에 그런 문제들을 죽 다뤄가는 것을 죽 읽으셨을 것입니다. 죽 다뤄가는 것을 보면 현실을 상당히 정확하게 직면해 내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결국은 뭐냐하면은 허공에 뜨지 않는 신학을 할 수 있는 방법이다. 그렇게 생각이 되어집니다. 어떻든지 간에 혹, 우리 워터칼즈의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한번 우리들이 생각을 해보잔 말입니다. 설교에 있어서 ‘주경과 설교에 관계다.’ 이렇게 이야기 하자면은 솔직히 말해서 주경과 설교는 엄밀히 말하자면은 구분이 되어집니다. 구분이 되어지고, 주경이라고 하는 것은 엄격하게 본문의 형식에 관계되는 문제들을 다루는 것, 그것은 사실은 주경입니다. 결국은 뭐냐하면은 익스이지니스인데, 그러니까 끌어 낸다는 것입니다. 밖으로 원래 가지고 있는 뜻을 끌어 내는 것입니다.
제일 먼저 성경을 읽을 때, 이것은 성경은 아니지만은 성경을 피게 될 때에 그때에 우리들이 생각할 바는 뭐냐하면은, 제일 먼저 이루어지는 작업은 뭐냐하면은, 이 본문을 읽는 그대로 해석해 내는 일입니다. 그런데 해석을 하는데, 사실은 이 본문을 해석한다는 말 자체가 굉장히 어려운 말입니다. 왜 그러냐면은 이 본문을 정확히 해석해 낸 사람은 누구냐면은 쓴 사람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저자는 성경을 후대에 모든 사람들이 읽고 2000년대에 기독신학교에 다니던 학생들이 설교를 하기위해서 사실은 성경을 쓴 것은 아니거든요. 모든 신약성경에 나오는 대부분의 기록들은 엄격한 의미에서 개인적인 필요에 의해서 교회를 향하여 기록한, 혹은 개인을 향하여 기록한 문서들입니다. 편지들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사도바울도 편지를 써서 빌레몬에게 보내고, 아니면 요한이 편지를 써서 장로들에게 보낼 때, 후대의 사람들이 그것을 놓고, 전치사 하나, 명사 하나를 갖다가 사전을 찾아가면서 분해를 하면서 그 난리를 치고 논쟁을 벌릴 줄은 몰랐죠. 사실은... 그렇지 않겠어요? 그러니까 여기서 우리들이 하나 깨달아야 될 사실이 뭐냐하면은, 우선 성경에 대한 정확한 이해에 대해서는 그 성경이 그 시대의 문맥에 놓여있는 그대로 전체를 먼저 이해할 수 있는 시야가 생긴 다음에, 그런 논쟁으로 들어가야지만 이것이 이해가 된다는 것입니다. 아까 했던 이야기 다시 반복되는 것입니다. 지금... 그렇지 않고 만약에 처음서부터 미시적인 분석으로 들어가게 되면은 얼마든지 오류에 빠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노튼 시페리시스책이요. 성서 유니온 출판사에 나오는 ‘성경해석의 원리’, 아주 좋은 책입니다. 아주 얇아요. 150페이지밖에 안됩니다. 값도 한 3천원 정도 할 것입니다. 그런데, 아주 잘 썼습니다. 비꼬는 이야기가 참 많아요. 성경 해석에 대해서 비꼬는 이야기도 많이 들고, 예도 많이 들고 있는데 그럽니다.
좀더 진행을 하겠습니다. 그래서 주경의 문제는 엄격하게 본문의 형식입니다. 제일 먼저 사실 이루어지는, 주경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은 커다란 막입니다. 굉장히 넓습니다. 엄격하게 얘기하면은 주석, 주해, 강해, 이렇게 나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주해나, 강해나, 등등의 모든, 마지막 설교의 모든 작업에 제일 기초는 주석입니다. 주석은 뭐냐하면은,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을 하기 전에, 그 당시 읽혀지는 저자들에게 그것이 어떻게 이해되어졌을 것이라고 하는 것을 끄집어 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부문되는 것은 역사와 문법입니다. 역사와 문법. 그렇게 성경을 우선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읽혀졌을 때에 ‘정확하게 무엇이었을 것이다’라고 하는 것들을 말하자면은 해석해 내는 것, 그것이 결국은 주석입니다. 주석.
그것을 위해서는 결국은 뭐가 필요하냐 면은, 두가지가 필요한데, 하나는 역사고, 하나는 문법입니다. 역사와 문법. 이 두가지 입니다. 무슨 말씀드리냐면은 그것을 좀 더 풀어서 설명을 하자면은, 이런 식이 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은... 다시 말씀드려서 이 하나의 성경이 있을 때, 이 성경이, 우선 그 성경을 그 당시의 사람들이 이해했던 정확한 뜻이 무엇이었는가를 갖다가 풀어내기 위해서는 우선 첫 번째 참고 자료가 뭐냐하면은 본문입니다. 그런데, 여기도 많은 어려움이 생깁니다. 이게 인제 순서적으로 설명이 아니고, 함께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많은 어려움이 생깁니다. 무슨 어려움이 생겨요? 구약에 경우, 같은 경우를 보면은, 적어도 우리 손에 지금 들어와 있는 성경이 몇 년에 걸쳐서 필사가 되어졌냐 하면은, 가장 최근에 와 있는 성경 텍스트를 참고한다고 할지라도 2500년 동안 필사되어 왔습니다. 지금 우리 현재 인쇄상의 잘못이 없다고 치더라도... 여러분, 말이 2500년이지 얼마나 엄청난 세월입니까? 그 다음에 신약성경만 해도 그렇습니다. 신약성경만 해도 2세기 때 사본까지 발견된다고 칩시다. 그러면은 지금 20세기이니까, 확장 되가지고 본문이 우리에게 읽혀진 것까지 감안을 한다고 하더라도, 몇 백년의 세월이 걸치는 동안 필사가 되어져 나온 것입니다.
그 다음에 또 문제는 뭐에요? 표준 본문이 있어가지고 전부다 내려오면 모르는데, 다양한 본문들이 존재하고, 본문들 사이에 불일치가 존재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무슨 사이에? 사본들 사이에... 우리는 지금 그런 생각을 다 짤라 버리고, 그냥 이렇게 해가지고, 라이프 성경... 여러분, 될 수 있으면 이런 성경에 길들이지 마십시오. 영역이 떨어집니다. 영역이 떨어진다는 것은 농담이었습니다. 웃어야지 농담을 하지... 이렇게 필때에 이 밑에 노트가 나오는데, 첫째는 정확하지가 않고, 두 번째는 뭐냐하면은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자꾸 이야기 하니까, 여러분의 오리지널리트가 사라집니다. 그다음에 이게 있으니까 이미 자꾸 밑으로 가면서 본문에 대해서 깊이 연구해 볼 도전을 자꾸 잊어버리게 됩니다. 그러니까 밋밋한 성경을 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 이것을 가지고 다니는데, 요새 뭐, 신학교 교수님도 이 책 가지고 다니는데, 그런데 여기 나와 있는 성경은 지금 그런 사본 사이에 논의가 거의 안 된 상태에서 그냥 확정해서 내려온 것입니다. 가끔 가다가 보면은 어떤 사본에는 이렇게 되어 있으면 그러잖아요? 그것은 수백 개의 사본 가운데 한두 개 얘를 든 것입니다. 물론 그중에 중요한 얘기만 듭니다.
그게 결국은 무슨 이야기가 나오냐 면은, 헬라어 성경이나 히브리 성경을 보면은, 성경본문이 나오고 밑에 작은 글씨로 새까맣게 기호가 나옵니다. 여러분이 잘 모르는 이상한 기호들이 막 쏟아져 나오면서... 사실은 그것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제가 이렇게 얘기 하니까 ‘저 교수가 또 현학적인 이야기를 한다’고 그럴텐데, 정말 현학적인게 아닙니다. 현학적인 것을 싫어합니다. 책도 들을 듯 말듯 그런 것 말고, 깨끗하게 크게 한 것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결코 현학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정말, 본문은 본문대로 해석을 할려고 그러다가, 원어의 필요성을 여러분들이 느끼시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 이유는 사실, 아무리 얘기를 해도 사람들이 고지를 잘 안 듣는데, 그렇기 때문에 사실은 초대교회에 최원초목사님이나 이런 분들은 보포자루 휘날리면서 걸어 다니면서 헬라어 단어를 외웠던 것입니다. 1930년대, 1940년대... 현학적인 목적을 위해서 그랬겠어요? 전혀 안 그럽니다. 번역 성경은 늘 완벽하지가 않습니다. 특별한 수작입니다. 그렇지만은, 지금 또, 번역 성경에 대해서 논증이 일어나고 있죠? 새번역성경, 정치적 문제까지 가새가 되가지고 복잡해지는데,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언제나 그런 문제들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 성경은 안 그런줄 아세요? 얼마든지 그런 문제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모든 문제들을 완벽하게 해결해 낸다는 것은 번역에서는 불가능 합니다.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바르게 돼어진 어느 하나의 원리를 취하면은 그 원리 때문에 어떤 본문들이 뜻을 못 뜯어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불완전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마지막으로 자기가 프락임에 텍스트를 대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하면은, ‘왜 헬라어 본문이 한뼘 나오고, 그 밑에 반뼘이나 될 정도로 새까맣게 주가 나오냐?’ 그것은 뭐냐하면은, 일단 성경을 편집할 때는 히브리어 성경 같은 경우에는 어떻게 해서 편집이 되냐하면은, 성경 쪼가리 쪼가리들이 많이 돌아다니잖아요? 그런데 쪼가리 쪼가리들을 모은 다면은 생산된 게 다 제각기 틀리니까, 모음 기호 표기법부터 벌써 팔레스타인이, 그 다음에 바벨론 표기방식이 다 틀립니다. 구분이 되어지면, 그러니까 안 되잖아요? 그러니까 창세기부터 말라기까지 가지고 있는 그 본문이 가장 우세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최고가 11세기 것까지 밖에 발견이 안 되었습니다. 그것이 유명한 사본입니다. 그리고 그 이전에 100년을 앞선 사본이 발견이 되었는데, 그것이 지금 알랙포 사본이라고 구약개관에서 배우셨을 것입니다. 알랙포 사본입니다. 그것이 회당에서 1940 몇 년도에 발견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감정을 해보니까 100년이 앞선 것입니다. 100년이 앞섰는데, 창세기부터 말라기까지 있는 것입니다. 굉장한 것입니다. 어마어마한 발견입니다. 100년이면 여러분 얼마나 많은 가지를 쳤겠습니까? 그런데 정확히 맛소라 본문 전통입니다. 그러니까 그 사진을 찍자고 그러니까는 못 찍게 해버렸습니다. 불이 홀랑 나버려서 타버렸습니다. 그래도 사진 찍어 놨으니까 됐죠.
그러니까 사본이 말이에요. 쭉 하면서 6세기까지 내려오다가 많은 사본들이 전해 내려왔는데, 그것이 흩어져가지고 베끼기 시작하는데, 하나의 틀린 사본은, 또 틀린 사본을 나을 것 아니에요. 자꾸... 그러니까 그 지방에서는 비슷한 오류들이 되풀이 될 거 아이에요? 이해하시겠죠? 그런 것으로 구분할 때 이것을 ‘패밀리‘라고 합니다. 패밀리... 그런 패밀리들이 여러개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까는 그 패밀리들에서 나온 사본들을 모아서 다 비교를 해 보니까 이제는 어떤 문제가 생기게 되었냐면은 중심되는 사본이 흔들릴 정도가 되버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류가 없는 듯한 사본이, 물론 우리 보수주의 입장에서의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맛소라’라고 하는 학파 학자들이 표준화 작업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냐하면은 맛소라 사본 하나 남겨놓고 싹 없애버린 것입니다. 개미자같은 데가 말하자면은 그런 문서들을 모아놓았던 하나의 보관소였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완전히 없애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다음에 이후에 다시 새끼를 치면서 다양한 본문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본문들이 다양하게 나오는데, 이 사본들이 눈앞에 볼 수 있도록 한꺼번에 쫙 펼쳐 지면은 다수결로 하든지 뭘 하든지 할텐데, 어떤 것은 있고, 어떤 것은 없고, 막 이러는 겁니다.
그러면 또 보세요. 어떤 문제가 일어나요? 이 이전에 히브리어 성경이 쭉 내려올 때에 이전에 내려왔을 거 아니에요? 역본들은 비교적 이 6세기보다도 훨씬 앞세기에 생겨났단 말이에요. 그러면 히브리어성경을 번역을 하잖아요? 번역을 하면은 무슨 시리아어로 번역을 했다든지 0로 번역을 했다든지 그럴꺼 아니에요? 그런 번역된 것을 보고 정확히는 모르지만은, 그것을 대충 거꾸로 히브리어로 번역을 하면, 옛날의 히브리어가 뭐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잖아요? 그게 지금 이거하고 많이 틀리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논증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 학기에서 1947년대까지 가장 뜨거운 논증이 벌여졌던 논쟁중에 하나가 뭐에요? 히브리어 성경이 정확하냐? 헬라어 셉추어진트가 정확하냐? 그것이 뜨거운 논쟁이었습니다. 그러면 왜 그런 문제가 생기냐면은, 지금 이렇게 세월이 쭉 흘렀는데, 지금 여기에 6세기경부터 완전히 확정이 되가지고, 모음기호가 붙어가지고 전해져 내려온 사본을 막세다 팩스트라고 하거든요? 막세다 팩스트가 여기 있는데, 그다음에 셉추어진트는 250년경에 번역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내려온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하면은 이 두 본문이 딱 맞아 떨어져야 될텐데, 안 맞아 떨어집니다. 심지어 어떤 것은 한절, 두절씩, 왕창왕창, 딴 게 나와 버립니다. 빠져버리든지, 그러니까 그러면서 이게 그렇게 나오니까 이 본문하고, 이 본문하고, 어떻게 어떤 것이 맞는다고 봐야 될 것이냐? 그래서 그 단어 몇 개의 차이로 말미암아 큰 문제를 일으키는 것들이 뭐냐하면은 출애굽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오잖아요? 히브리 성경에는 뭐라고 나오냐면은, ‘애굽에서 거한지 430년을 마치는 그날에 이스라엘 군대들이 나왔다.’ 그렇게 되어있습니다. 우리말 성경이 맛소라 본문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헬라어 성경에는 뭐라고 돼있냐면 ‘이스라엘이 애굽과 가나안에서 430년이 되는 그날에 나왔다’ 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100세에 이삭이 낳고, 그다음에 뚝뚝뚝뚝 나이를 합치고, 마지막에 야곱이 바로 앞에 섰을 때 ‘내나이 130세 이니이다.’ 라고 하는 것을 합치면 215년이 나옵니다. 그러면 이것 때문에 그들이 애굽에 거주했던 기간은 215년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하면은 ‘카이 게 카나안’ 그 말 한마디가 거기 들어감으로 말미암아 히브리성경이 없는 게 여기 들어감으로 말미암아 구약역사 전체가 200년이나 오락가락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확정이 안됐습니다. 비평주의 입장에서 선 사람들은 대부분 이 성경이 정확하다라 보고, 그러면 결국은 뭐냐하면은 15세기에 모세가 출애굽을 한 게 아니라 13세기에 출애굽을 하게 된 겁니다. 그런 많은 문제들이 복잡하게 논란을 일으키는 것도 결국은 성경본문에서 어떤 것들을 택하냐, 고고학적인 자료가 나온다고 하는데, 이 본문을 지지하는 사람은 고고학을 전부 다 옛날시대로 해석을 합니다.
이렇게 불일치할때에 그 불일치를 ‘이 성경이 이것을 번역을 하다가 잘못 번역을 했다.’ 그렇게 말해버리면 간단한데, 그런데 사실은 어떤 본문은 잘못한 게 아니라 아예, 절이 틀립니다. 그러니까 ‘잘못됐어도, 이렇게 잘못됐을 리가 없다’라고 보는 것입니다. 우리 입장에서 잘못됐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쪽을 주장하는 쪽에서는 뭘 얘기 하냐면, 맛소라 전통은 A라고 하는 라인을 따라 온 것이었고, 이것은 히브리 성경을 번역할 때에 A라인에 있는 성경을 번역을 한 것이 아니라, B라인에 있는 성경을 번역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B라인에 있는 히브리 성경이 A성경보다 훨씬 우세하기 때문에 결국은, 이것보다는 이게 더 믿을만하다고 나가는 것입니다. 그런 논쟁이 벌어지는데, 이런 논쟁들을 입증하는 과정들이 결국은 어떤 것을 통해서, 그게 소위 얘기하는 본문 비평입니다. 본문 비평을 위해서는 결국은 뭐냐하면은, 수 많은 역본들과 사본들의 이야기를 끄집어 내면서 거기에 깨알 같은 글씨를 그렇게 각주가 실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물론 다 이해해도 우리들은 결국은 2차밖에 안됩니다. 왜 그러냐면은, 우리는 우리 손으로 그 소스들을 볼 수 없으니까, 그러니까 그 소스들을 보고, 그 대신 그 소스들을 감정을 하고, 그 소스에 나오는 것들을 일단은 사실적인 분해니까 그것은 일단 우리들이 맞다고 치고, 받아들이고, 그 다음에 본문을 대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간단하지 않은 많은 문제들이 ‘본문대로만 나가면 된다.’ 그러는데, 사실 그 본문에도 많은 문제들이 깃들여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소 위안이 되는 사실은 무엇이냐 면은, 인간이 역사상 이런 식으로 사본을 장기간에 걸쳐서 베껴 써온 것이 없습니다. 이런 문서가... 그리고, 그렇게 많이 베껴 썼음에도 불구하고, 베껴 쓴 수많은 문서들이 거의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일치를 보이는 문헌도 작고, 얼마 안 되고, 거의 없다. 그러니까 성경의 부피에 비하면은 그 불일치를 이루는 부분은 적은부분이다. 적은부분인데, 적은 부분이라도 사실은, 우리에게는 깊은 문제가 된다.
얘를 들면은 복음서에 보면은 괄호가 딱 쳐져있으면서 어느 사본에는 이 부분이 없음. 그래놓고 댓절이 나옵니다. 그러면 결국은 우리는 무슨 관심을 갖냐면은, 만약에 그것이 원본에 기록되어있지 않다면은 그것은 사실 우리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받아들일 수 없는 부분입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조심스러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사실은 본문비평을 히브리어 본문이고, 헬라어 본문이고 해석을 한다고 그러는데, 사실은 해석을 하기 전에, 텍스트에 딱 가보면은, 헬라어는 그래도 그런 것들이 조금 적을 겁니다. 그런데, 히브리어 같은 경우에는 어떤 문제에 직면하게 되냐면은 해석이 안되는 본문이 많습니다. 해석이 안 되니까 결국은 이 본문이 원본이라고 볼 것이냐, 아니면은 잘못됐다고 볼 것이냐, 그걸 먼저 판단을 내려야 됩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여기에서 본문비평적인 연구가 선행돼야 된다는 것입니다. 사본비평이죠. 하든비평. 고든비평은 우리들이 믿지는 않지만은, 이런 스터디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첫 번째로 텍스트로 고정되게 됩니다. 텍스트가 고정되게 되면은, 이게 거기서 뭐가 나오게 되냐면은, 해석이 가능해지게 됩니다. 그런데 사실 해석이 가능해지게 되지만은 그러나, 그 이전에 하나 빼먹을 수 없는 작업이 하나 뭐냐하면은, 문장은 결국, 단어의 연결을 통해서 이루어지게 되는 건데, 단어의 뜻이 뭐냐하는 문제에 부딪히게 됩니다. 왜 그러면 그런 생각을 하게 됏느냐? 왜 그런 문제가 있게 됐느냐 하면은 똑같은 단어라도 어느 시대에 쓰여 졌느냐에 따라가지고, 그 뜻이 완전히 틀립니다. 그러니까 뭐에요? 지금 본문이 놓여있는 그 부분을 ‘그 저작 년대에 어떤 단어로 읽혀졌느냐?’ 이것은 지금 여러분들이 작업을 해야 된다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들을 확인할 수 있어야 된다’ 이 얘기입니다.
예를 들자면은, 빌립보서에 보면은 우리의 시민권은 어디에 있는지라? ‘하늘에 있는지라’고 그랬습니다. 여러분, 이게 무슨 단어입니까? 캄보세이션, 대화입니다. 회화. 그죠? 그런데 이게, 1611년에 발간된 킴제임스 버전에는 아까 읽어드린 성경구절,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그 시민권이란 뜻으로 쓰여 졌습니다. 지금은 물론, 이런 뜻 없습니다. 그런 뜻 없습니다. 지금 이 단어 갖다 놓고 시민권이라 하면 이해 못할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문제는 뭐에요? 결국은 우리들은 누구의 도움을 받는 거에요? 사전을 만들어 놓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을 수 밖에 없게 됩니다. 그러니까 사전을 누가 만들어 놓느냐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엄청나게 중요한 것입니다. 히브리어 성경같은 경우에는 60% 이상의 단어들의 정확한 뜻을 모릅니다. 그냥 전통적으로 그렇게 읽혀왔기 때문에 해석을 할 뿐이지, 그 당시에 정확하게 그 뜻을 의미했는가? 그것은 잘 모릅니다. 특히 그중에 역창이라고 번역된 단어 있죠? 코페르, 카파르라는 단어에서 왔는데, 그 무슨 말인지 정확하게 모릅니다. 모르는 단어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더군다나 그것이 한번밖에 안 쓰여진 단어일 경우에는, 여러번 쓰였으면 문맥을 이렇게 비교하면서 알 수 있는데, 한번밖에 안 쓰인 단어들은 모릅니다.
지금 킴제임스 버전을 믿을만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히브리어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영어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영어가 캄보세이션이라는 말이 20세기에는 우리가 읽을 때에는 회화라고 듣는데, 400년전에는 이것을 갖다가 시민권이라고 이해를 했다는 얘기입니다. 언어가 이렇게 같은 언어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그 말의 뜻이 변해진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우리 앞에 놓여있는 원래적인 성경본문도, ‘그 시대로 돌아가서 그 시대에 어떻게 읽었을 것이냐?’ 하는 것을 갖다가 추적해 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사전들을 만들어 낼 때에, 신약성경을 위한 사전, 그러면은 그 성경이 쓰여지던 시대에 방대한 문헌들을 찾으면서, 정확한 뜻을 제건 해 내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전 작업입니다.
예를 들면은 ‘아가파오’ ‘사랑하다’ 그러면은, 그것이 정말 사랑하다는 뜻인가를 확인하기 위해서 그 시대에 쓰여진, 우선 성경 내에 나오는 ‘아가파오’에 대한 모든 동사를 찾아서 ‘사랑하다’라는 말로 모두 연결이 되는가? 등등의 말이 있는가? 그 다음에 또 하나, 알기어려운 말중에 하나가 또 있습니다. 그게 뭐에요? ‘멕시피’ ‘생령이 된지라.’ ‘멕시피 하얄’ 그런데 이것은 문자적인 번역이고, 살아있다는 형용사이고, ‘멕피시’는 ‘영혼’입니다. ‘영혼’ 그러니까는 ‘생령’ 이렇게 만든 것입니다. 근원이 무슨 말이에요? ‘생령’ 그런말 없습니다. 국어사전에도 그런 말 없습니다. ‘생령’ 그것은 알 수 없는 말입니다. 결국은 뭐냐 하면은, 이 ‘멕피시’라고 하는 히브리단어를 다 찾아 보면은, 영혼이라는 뜻 하나만 들어있는 것이 아니라, 영혼, 혼, 사람, 목구멍, 뭐든지 다 들어 있습니다. 시편에 나오는 것은 ‘물이 내 영혼에까지 잠겼나이다’ 어떻게 물이 영혼으로 들어오겠어요? 목에 잠다는 건데, ‘멕피시’니까 영혼으로 보는 것입니다. 무리한 번역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생명의 산 사람이 된지라’ 이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