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강해Ⅰ
(설교모음)
설교기간|날짜 미확인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빌립보서 1:1-5 새벽예배 1
2. 빌립보서 1:6-11 새벽예배 8
3. 빌립보서 1:12-24 새벽예배 21
4. 빌립보서 1:27-2:14 새벽예배 32
5. 빌립보서 2:15-29 새벽예배 47
6. 빌립보서 2:30-3:12 새벽예배 61
7. 빌립보서 3:13-4:1 새벽예배 75
8. 빌립보서 4:4-19 새벽예배 88
9. 빌립보서 4:20-23 새벽예배 101
1. 빌립보서 1:1-5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한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 (빌 1:1-5)
빌립보서1:1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
빌립보서는 사도 바울이 옥중에서 쓴 편지이며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는 가운데 쓴 편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상황이니까 비장하고 약간 우울한 그런 분위기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빌립보서를 읽어보면 이 빌립보서만큼 기쁨으로 가득 찬 글도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짧은 편지 속에 약 19번 정도 기뻐하라는 말이 반복됩니다. 그리고 그 비결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성경은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우선 여기서 바울은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를 밝히고 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 예수의 종이라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이 어떻게 하여서 사도가 되었고 예수그리스도를 핍박하는 자에서 전파하는 자로 바뀌었고 교회를 핍박하던 자에서 교회를 위해 충성하는 자로 바뀌었는가 그 모든 질문에 대한 자 답은 오직 하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달았기 때문에 거기에서 완전히 생애적인 변화를 경험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이렇게 크고 놀라운 변화를 경험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건은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그의 인생 전체를 바꾸어서 자신이 핍박하던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음을 스스로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사람들은 인생의 목표나 구심점들이 바뀌는 역사를 경험하게 됩니다. 물론 사도 바울은 단지 다메섹에서의 경험 하나 때문에 이런 훌륭한 삶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끊임없이 자기가 죽고 자기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사는 비결을 채득해 나갔으며 늘 거룩한 긴장 속에서 쉬지 않으며 자기를 믿음의 사람으로 세우는 일에 전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알고 그 분을 경험하는 십자가의 체험이 우리의 신앙 생활에 있어서 꼭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제대로 깨달아 알면 자신의 삶에 반드시 변화가 일어납니다. 우리의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다고 말은 하는데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주인이 되시고 그 분 때문에 자신의 인생이 바뀌는 것이 너무 드물다는 것입니다. 이전의 가치도 그냥 있고 예전의 인생관도 전혀 안 바뀌고 물질이나 이 세상에 관한 세계관도 바뀌지 않고 겉모습만 예수를 믿는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스도인의 신앙 생활에서 참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종’이라고 하는 것은 정확하게 변역을 하면 노예입니다. 노예는 모든 것이 자기의 소유가 아닙니다. 심지어는 자녀를 낳아도 그것이 자신의 소유가 아니라 주인의 것입니다. 그런 그 당시에 그런 생활을 하던 사람들이 노예입니다. 더욱이 노예라고 하는 그 당시의 사람들은 주인에게 학대를 받고 고통을 받는 자기의 것이 아무 것도 없이 끌려가고 팔려가는 노예들을 길거리에서도 얼마든지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 시대에 자기를 노예라고 가르키고 종이라고 스스로 고백을 하는 것이 얼마나 큰 일이고 끔직한 일인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결국 변화된 사도 바울, 그리고 디모데의 속에 있는 그 무엇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참 사랑을 깨닫고 죽어야할 또 죽어 마땅하고 죽어있던 자신을 그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살려주셔서 이처럼 놀랍게 새 사람을 만들어 주셨으니 이제는 노예처럼 오로지 주님을 위해서 뼈가 부서지듯이 충성을 다하며 살겠다는 고백이고 그렇게 주님을 사랑하며 사는 가운데 아무것도 대접 받기를 원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를 위해 십자가지신 예수님만 기뻐하면 자기는 아무래도 좋다라는 고백이 담긴 말입니다.
바울은 이제 이 빌립보서의 첫머리를 쓰면서 바울과 자신의 믿음의 아들인 디모데가 사람들에게 자기를 어떤 사람으로 이해되었으면 좋겠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바울과 디모데는 자신들의 이름이 불리워질 때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들과 함께 기억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바울과 그리스도의 사람 디모데는 그리스도 밖에 모르던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삶, 사역 심지어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예수 그리스도가 그들의 중심되시기를 간절히 원했던 삶의 바로 그들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신앙이 필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도 우리에게 계시는 인생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으신 십자가의 고난이 어떠하고 나 같은 사람을 하나님이 구원하지 않았더라면 내가 어떤 인생을 살았을까를 생각하면서 결국 그분이 아니면 나의 인생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이었다 라는 것을 말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도 우리의 인생에 계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만 우리의 인생 가운데 계시고 우리의 인생이 예수도 위해 사는 인생이 아니라 그리스도만을 위해 사는 인생이 되고 무엇을 하든지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아가는 그런 삶이 되어서 모든 사람들이 볼 때에 우리를 보면 그리스도가 생각나고 그리스도하면 우리가 생각나는 그런 그리스도 예수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삶이 주님의 십자가의 참 도를 아는 사람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사도 바울이 편지를 쓰면서 ‘성도들과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라고 말합니다. 교회의 평신도부터 해서 교회를 목회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 교역자와 교회를 사랑하고 섬기는 집사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에게 빌립보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통해서 교회는 그 사람이 목회자이든지 평신도이든지 충성스럽게 주님을 섬기는 사람이든지 간에 모든 사람이 주님께로부터 오는 교훈을 필요로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가 누구이든지 언제나 하나님께로부터 들려오는 하나님의 교훈을 필요로 합니다. 아무리 성령충만하고 지식이 많은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주님께로부터 오는 교훈이 없이는 곧 짐승과 같은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깨어 있는 교회, 살아 있는 교회라고 하는 것은 주님이 수시로 말씀하여 주시는 교회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교회입니다. 교회가 살아있다는 것은 단지 사람이 많은 드나든다든지 교회의 많은 프로그램을 따라서 교회가 활발히 움직인다든지 많은 사람들이 열심을 가지고 교회를 위해 봉사를 하는 그런 것이 교회가 깨어있다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물론 그런 것도 포함될 수 있지만 교회 중심에는 하나님이 말씀하여 주시는 교회, 그리고 주님의 말씀을 감독이나 집사나 모든 성도들이 언제나 들을 수 있어서 주님의 뜻을 깨닫고 자신의 삶을 고치고 주님의 마음을 전수 받아서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고 헤아려서 교회 생활을 하고 또 세상을 위한 교회의 본분을 다 할 수 있는 교회가 하나님 앞에 깨어 있는 교회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이 세벽에 하나님께서 우리 모든 성도들을 예수의 사람으로 만들어 주시도록, 그리고 이 교회가 언제나 깨어 있어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 교회가 되고 어둠 속에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사람들도 이 교회에 들어와서 깜깜하고 어둡던 인생길에서 들리지 않던 주님의 음성이 들리고 하나님이 자신의 인생에 향해 지닌 마음이 느껴지는 그런 교회가 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목회자뿐 아니라 모든 성도가 이런 마음을 품고 기도하는 축복을 지닐 때 이런 교회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이고 세상을 바뀌는 교회가 되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빌1:2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찌어다
사도 바울이 서신서를 써 내려가면서 맨 앞부분에 나오는 축복 기도입니다. 그런데 이 인사말을 보면 혹은 축도를 보면 의외로 복음 진리가 충성하게 담겨 있는 것을 볼 수 잇습니다.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면서 축복 기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은 객관적으로 보면 하나님이 우리같은 죄인들에게 죄를 보지 않으시고 그 죄인에게 어울리지 않게 베풀어주시는 호의입니다. 그리고 그런 것 가운데 가장 큰 것이 구원의 은혜입니다. 아무런 공로도 없고 희망도 없는 사람들, 하나님을 스스로 찾지도 않는 하나님 자신이 오셔서 사람들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신 것이야말로 하나님 아버지의 놀라운 호의입니다. 그리고 주관적으로 보면 우리는 하나님의 이러한 놀라운 자비하심을 우리가 느끼고 체험해서 세상을 이기면서 살아 갈 수 있는 어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있는 것을 은혜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람이 자꾸 불순종하는 길을 걸어가고 하나님 거스리고 살아가면 너는 은혜가 떨어졌구나! 라고 말합니다. 이런 것을 은혜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또 평강이라는 것은 하나님과의 화목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오는 평화입니다. 이 두 가지가 우리의 신앙 생활에 얼마나 필수적인지 모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계속 은혜를 베푸어 주실뿐 아니라 우리가 그 사랑을 알고 느낄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람이 왜 자꾸 불순종하고 세상의 길로 나가려고 합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의 참사랑을 그 자신의 마음과 영혼 속에서 충만하게 느끼는 삶을 살지 못하기 때문에 불순종하고 거역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를 깨닫고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주님께로부터 부어지는 그런 참다운 사랑과 은혜를 모르고 살아가면 우리가 얼마나 비참하고 가련한 자인지를 깨닫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사모하게 됩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누구도 훌륭한 신앙 생활을 할 수가 없습니다. 신앙의 세계에서는 하나님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되고 은혜 없이 살아갈 수 있는 명장이 없다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은 한번 하나님께로부터 은혜를 받은 후에 훌룡하게 신앙의 길을 늘 걸어갈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라 매일매일 주님을 의지하고 매일매일 살아가는데 필요한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가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없으면 우리의 마음은 곧 딱딱해지고 돌같이 굳어지고 마른 땅과 같이 되어서 하나님의 참사랑을 알지 못합니다.
아주 비가 안 와서 땅이 건조해서 여러 달 동안 말랐을 때 한차례 소나기가 지나가면 우리는 엄청나게 비가 쏟아졌으니 해갈을 하였겠구나! 하고 생각하는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워낙 오랫동안 비가 안 와서 땅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기 때문에 비가 스며드는 것이 아니라 땅위에서 튀겨져 나가는 것입니다. 겉에는 젖었는데 물이 땅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다 흘러내려서 땅을 파보면 속은 돌처럼 딱딱합니다. 우리의 심령도 그렇습니다. 매일매일 우리들이 기도하면서 은혜를 받고 말씀을 보면서 은혜를 받고 또 하나님 앞에 찬송하면서 은혜를 받아야 힙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어제의 은혜가 아니라 오늘 받는 그 은혜가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일단 신자가 이렇게 매일 매일 은혜를 받지 않아도 살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의 마음 속에선 하나님 은혜 받는데 게을러지고 그의 마음이 딱딱하고 건조해 집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가 떨어지고 나면 인간의 본바탕이 드러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하나님에게 불순종하더라도 자기의 이익을 얻기 위하며 죄의 길을 걸어가면서 세상에서 이 번영하고 싶어하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밑바닥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겸손하여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이 은혜를 내려주셔야 합니다. 우리의 영혼에 은혜의 단비를 내려 주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살 수가 없는 사람입니다. 이런 간절한 고백이 있는 성도들은 늘 하나님 앞에 가난한 마음으로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은혜 외에는 우리 인생에 도움이 없다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부유해지는 것이 인간입니다. 정말 하나님의 도움 없이 우리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그렇게 많이 하나님이 깨닫게 해 주셨으면 이제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살아서 이제 하나님 앞에 매일 매일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다라는 그런 신앙의 고백으로 살아야 합니다.
두 번째의 평강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화해로 주어지는 평안입니다. 이것은 그저 배부르고 편하고 속이 상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생기는 그런 평안이 아닙니다. 이 평강은 하나님과의 평화로 말미암아 오는 평화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점검하지 않고는 평화가 올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저 혼자만 평안을 가지면 평안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아무리 평안한 삶을 살고 물질적으로 어려움이 없다고 하더라도 자식들이 속썩이고 동기간 사이가 좋지 않으면 평강이 평강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종종 우리의 평안한 삶이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들로 말미암아 흔들릴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점검하게 됩니다. 이 평안이 이렇게 흔들리는 것을 보면 하나님이 나에게 당신과의 관계를 생각나게 하시기 위해 이런 것들을 주는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단지 물질적으로 부유하고 경제적으로 부요한 것이 평안을 가져다준다 라고 생각하지 않고 진정한 평안을 위해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서야 된다는 것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누구든지 이 세상에 환란이 오든지 큰 시련이 오는 것들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죄와 불순종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깊은 골을 파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결코 평강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악을 행하고 불순종을 행하는 사람들에게는 평안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아무리 예수의 이름을 부르고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도 그의 마음 속에는 진정한 평안이 없습니다. 평안은 인격적으로 승복하고 하나님의 참사랑을 안 사람, 그래서 하나님을 누구보다 사랑하고 그의 말씀과 뜻에 순종하면서 죄로부터 떠나 하나님을 향한 마음의 결심을 지키는 사람들에게만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마음에 오늘 새롭게 역사해서 그래서 그 은혜를 통해 하나님을 새롭게 깨닫도록 하는 감격이 있도록, 그리고 우리 안에 평강이 있어서 어떠한 환경에서도 하나님을 굳게 붙들고 순종하고 죄로부터 떠난 삶을 살도록 힘쓰는 사람들이 되도록 기도하여야겠습니다.
빌1:3-5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에서 너희가 교제함을 인함이라
인사가 끝나고 사도는 빌립보 교인들을 두고 하나님 앞에 자신이 어떠한 마음인지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빌립보 교인은 옷감을 파는 루디아의 마음을 열어서 복음을 받아들임으로 시작된 교회였습니다. 그리고 이 빌립보 교회는 사도 바울의 마음에 큰 기쁨을 주는 교회였습니다. 모범적인 교회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을 생각하며 하나님께 기도할 때 감사함으로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목회자가 교인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어떤 사람들을 위해 기도 할 때는 감사합니다. 힘을 잃다가고 그 사람을 생각하면 ‘하나님이 우리 교회를 사랑하시는구나 역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용하셔서 당신의 일을 이루어 가시는구나’ 생각하면서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그런 사람을 위해 기도하면 힘이 납니다. 뭔가 낙심이 되고 깊이 마음이 상할 때도 그렇게 신앙 생활을 잘하고 복음 안에서 열매를 맺어서 훌룡히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 하나님이 역시 교회를 버리시지 않고 우리 같은 사람들을 사용하여 이렇게 성도들을 세우시는구나 하고 생각하면 감사한 마음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그 마음이 목회자의 마음만은 아닙니다. 여러분이 구역장을 하거나 교사를 하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힘을 잃고 낙심하다가도 잘 자라는 교인들을 보면 ‘하나님이 이제 나를 사용하셔서 이렇게 사람들을 세우시는 구나 아 역시 하나님이 살아계시는구나’ 하는 것을 느낍니다. 그때 그 기도가 하나님 앞에 감사함을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입니다. 그리고 이런 마음이 우리의 마음일 뿐 아니라 주님의 마음입니다. 주님께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아직까지 간구하시는데 이렇게 우리를 바라보실 때 참 믿음 안에서 잘 자라고 있구나 하는 그런 모습을 주님이 발견하실 때 주님의 마음 속에는 감사함을 우리를 위해 기도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정반대의 사람이 있습니다. 기도를 하기는 하는데 생각하면 너무너무 마음이 아프고 그 사람의 삶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않는 것이 분명하게 보이는 사람, 그런 사람을 위해 기도할 때는 기쁜 마음, 감사한 마음이 드는 것이 아니라 안타깝고 아픈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목회자를 마음 아프게 하는 그 사람이 그 목회자가 느끼는 그 마음이 결국은 주님께서 그 사람을 향해 느끼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결국은 그들이 잘못된 삶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사도가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내가 너희 무리를 생각할 때마다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는 이유는 너희들이 복음 안에서 교제함을 인함이라’라고 합니다. 이것은 두가지를 보여주는데 하나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진리에 입각한 신앙입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볼 때 이 빌립보 교회는 진리에 바로 선 교회였습니다. 여러분 골로새서나 데살로니가서나 갈라디아서를 보면 복음 안에 서지 않는 사람들을 향한 사도의 근심어린 책망이 나옵니다. 그러나 빌립보 교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이 빌립보 교회가 얼마나 복음에 선 교회였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하는 성도들이 되고 목회자의 마음에 자기를 생각 할 때에 감사할 마음이 드는 사람이 되게 하는 첫 번째 이유가 복음에 굳게 선 사람입니다. 신앙에 서야지만 그가 섬기는 것도 의미가 있고 그가 봉사는 것도 의미가 있습니다. 복음 안에 굳게 서지 않는 사람의 섬김과 봉사는 언제나 모래 위의 집처럼 불안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을 가장 기쁘게 하는 성도의 아름다운 삶을 잘 배우는 삶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유지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실제로 저도 지난 날의 신앙 생활을 함께 하던 많은 사람들의 모습을 그려보면 교회 오는 성도의 가장 커다란 의미는 잘 배우는 것인데 배우기를 포기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니까 오랫동안 교회에 나와도 복음에 굳게 선 사람들의 신앙이 아납니다. 그러니까 언제나 불안하고 핍절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복음의 터 위에 굳게 서야 생명과 은혜와 진리가 풍성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복음 자체가 아예 없거나 취약하면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께 가진 꿈과 삶들이 무너질 때 보면 더 심각하게 무너집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이 사람들을 볼 때 가장 기뻤던 것은 그들이 복음 안에서 신앙 생활을 한다는 것입니다.
정말 우리는 정결하고 깨끗한 복음 안에서 신앙 생활을 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한 3년 전에 어느 교회에 교사들을 모아놓고 강의를 한 적이 있습니다. 무공해 그리스도인이 필요할 때라는 이야기를 하는데 한 교사가 엄청난 찔림을 받고 그 다음 날 전화가 왔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정말로 되고 싶은 것이 무공해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여야 무공해 그리스도인이 됩니까? 길이 무엇입니까? 라고 묻는데 제가 간단하게 대답하였습니다. 그것은 오염되지 않는 복음을 먹고 자라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렇게 빌립보 교인들을 보고 기뻐하는 것은 너무나 깨끗한 복음 신앙에서 자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귀한지 모릅니다. 막기를 채소나 과일은 떨이로 싸게 팝니다. 그러나 무공해로 유기농을 끼운 것들은 깨끗한 한 장소에서 귀하게 팔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공해로 가득찬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정말 귀하지 않습니다. 귀한 사람들은 복음 안에서 순수한 복음으로 자란 무공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면서 또 사도 바울은 이들의 교제로 인하여 감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자녀들을 많이 데리고 있는 부모들의 마음에 가장 커다란 고통은 그 자녀들이 함께 아릅답게 살아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부모들의 커다른 기쁨은 자녀들이 서로 의지하고 사랑하고 아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자녀들이 함께 사랑하고 격려하고 서로를 위해 귀한 것을 내어주는 아름다운 관계를 본 부모들은 무자식이 상팔자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자녀들이 그렇게아름답게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께 한없이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이 있는 교제를 이 빌립보 교인들에게서 사도 바울은 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자기에게까지 사도 바울의 쓸 공급해주면서 미치게 됩니다. 이런 것을 보면서 사도 바울은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빌립보 교인을 보면서 이런 복음과 사랑 안에서의 삶으로써 주님의 마음을 감동시켜 주는 그런 성도가 되어야 겠습니다.
2. 빌립보서 1:6-11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됨이라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빌1:6-11)
빌립보서 1:6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어제는 바울이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제목 가운데 복음 안에서 교제하는 것에 대한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빌립보 교인들이 은혜를 받으니 복음 안에 교제가 생겨났서 그들끼리 서로 사랑하는 모습을 보였다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자기들을 예수 믿게 한 사도 바울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잊지 않고 그가 복음을 전하기 위해 필요한 물질을 여러 방면으로 도왔다고 뒷부분에 나오고 있습니다. 그것에 대해 사도 바울이 감사하고 대견해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오늘은 사도가 그런 교제에 기원이 무엇이고 그런 교제에 대한 앞으로의 희망을 표명하고 있습니다. 그 교제는 결국 이 구절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예수 안에서 맺어지는 성도의 진정한 교제입니다. 진정한 교제라는 것은 단지 함께 먹고 마시고 사귀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교제는 성도들이 처음에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람들이었는데 어느 순간 그들이 하나라고 생각하는 것, 또 그리스도와는 상관없이 살아가던 사람들이 모여서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고백하고 한 신앙 안에서 한 가족으로 살아가는 놀라운 일은 인간이 이루는 것이 아니라 그런 일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한사람 한사람이 모여서 정말 교제가 있는 아름다운 교회, 그리고 성도들의 신령한 교통이 있고 이 바울과 같이 복음 사역을 위해 수고하는 복음 전도자 선교사 혹은 목회자를 도우면서 모래알 같이 아무 관계도 없던 사람들이 연합을 이루어서 하나님의 거룩한 복음 사역을 성취해 가는 모습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결국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빌립보 교회 교인 한사람 한사람이 만났기 때문에 교인들 사이에서 전정한 연합이 이루어지고 교제가 있게 되고 그리고 복음을 전해 주는 바울 자신과 하나되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신령한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곳에서는 결코 신령한 교제가 성립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속된 교제는 성립할 수 있으나 신령한 교제 신령한 영적인 연합, 하나님 백성들의 사귐은 불가능 하다는 것입니다. 결국 알고 보면 이 빌립보 교인들이 그렇게 바울을 잊지 못하고 깊이 사랑하고 어떤 면으로든지 바울의 선교 사역을 돕고자하는 갸륵한 마음은 인간을 향한 동정심이나 존경심 등이 그렇게 만들어 준 것이 아니라 그들이 바울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진정으로 변화를 받는 신앙의 역사들이 일어났기 때문에 그들은 아무 관계가 없이 살아갈 사람들이 연합하고 사랑하고 함께 섬길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큰 은혜로 교회에 모인 사람들 속에 하나님께서 각자 그 사람들의 삶 속에 믿음을 시작하는 그런 변화 없이는 어떤 목양도 성립하지 않고 어떤 인격적인 복음 안에서의 교제도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한 교회 혹은 한 공동체의 신앙이 얼마나 뛰어나고 그들이 이루는 교제가 얼마나 신령한지를 알기 위해서는 그들의 교제가 무엇을 위해 사용되는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맺어진 신령한 관계이면 그 목양의 관계, 혹은 교제의 관계들이 철처하게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데 매우 유익하게 사용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한 사람 한사람이 하나님을 만나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자신들에게 주어진 삶의 목표가 분명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여도 그 사람들의 진정한 관심이 바로 그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식의 삶을 계속해서 살아가니까 그들은 정말 많이 모이면 많이 모일수록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 살 힘들이 결집되는 것입니다. 그 교제를 통해서 그 교제를 가능하게 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을 높이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교제의 목표라는 것입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그분의 이름을 경배하기 위해 모이는 것이 아니면 진정한 의미의 모임이 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식으로든지 그 교제의 중심은 하나님이시고 그 하나님이 자신들의 모임을 가능케 한 분이라는 것을 기억하면서 그 분을 이름을 높이는 그런 교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일을 하나님께서 시작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교회 안에서 이런 신령한 교제가 아름답게 유지되기 위한 가장 절대적인 조건이 한사람 한사람이 자기를 그렇게 불러주신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 교제가 건강하고 그 교제를 통해서 그 하나님이 의도하셨던 바를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대로 한 교회가 교제를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는 신령한 은혜가 계속 역사해서 그 성도들을 어두움 가운데서 건져내어서 빚의 교제 속으로 불러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런 교제 속으로 들어가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 속에 감격하는 일이 언제나 날마다 새롭게 재현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교제가 신령해 질 수가 없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사도는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확신하노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교제에 대한 사도의 소망이기도 하고 전망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결국 성도들이 종말을 지향하면서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를 만나서 그리스도로 인하여 이런 신령한 빛의 교제 속에 있는 이것이 잠시 있다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영원하다는 것을 확신하면서 종말을 바라보면서 살아가는 일에 이 교제를 활용하도록 부름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런 교제의 빛 속으로 들어간 사람들은 이 교제가 잠시 있다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관계를 끊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말씀과 은혜 속에서 살아가면 이 교제는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죽고 헤어지고 흩어지고 목회자도 사라지지만 그 교제를 맺게 하여주신 분이 하나님이시며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에 사람들이 바뀌는 것과는 상관없이 항상 새로운 교제가 이루어져 우리는 그것을 통해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을 항상 더 충만하게 느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그 진정한 세상을 이기면서 살아가는 그런 신앙 생활에 아주 중요한 자원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 볼 때 혼자 신앙 생활에 익숙한 오늘날의 편의주의적인 신앙 생활도 사실은 성경에서 말하는 신앙 생활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찬송하면서 은혜를 받고 교회 속에서 함께 성도들이 교제하면서 그 교제를 통해서 자신에게 주어지는 말할 수 없는 축복이 종말을 바라고 살아가는 성도들의 큰 원동력이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너무나 힘이 부족하다는 것을 느끼지만 그 교제의 은혜가 우리로 하여금 능히 세상을 이기면서 살아가게 만들어 줍니다.
루마니아에선가 공산공 치하에서 예수님을 믿다가 20여년 정도 옥살이를 하다가 풀려나신분이 있습니다. 누군가가 ‘어떻게 그 어둡고 고통스런 긴 세월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까?’ 라고 물으니 이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외롭고 너무 고통스러울 땐 그 지하 교회에서 형제들과 나누던 그 교제와 성찬을 생각하면서 이겼습니다. ’ 그것이 바로 진정으로 예수의 참사랑을 알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맺어진 이 거룩한 교제가 얼마나 축복된지를 아는 성도들의 모습입니다. 그것으로 인하여 우리들이 날마다 이기면서 신앙 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이 세상에서 믿음을 지키려고 살 때의 갈등과 어려움과 고통 중에 하나님이 그런 남이 알지 못하는 교제의 기쁨을 주십니다. 그러니까 고난과 시련 속에서 살다가 다시 교제 속으로 들어오면 우리는 우리와 함께 그렇게 세상 속에서 같은 목적을 가지고 분투하면서 살아가는 신앙의 동지를 만나게 됩니다. 이기며 살아온 사람들을 보면서 격려를 얻고 고난을 당한 사람들을 보면서도 이 고통이 나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구나 하면서 격려를 얻는 것입니다. 그리고 패배하는 사람들을 보면서도 이렇게 배패하는 사람들도 있구나 이만큼 승리하게 하신 하나님이 얼마나 감사한가하면서 위로를 얻고 그리고 이렇게 패배한 사람들을 돌보고 지키는 것이 우리의 몫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하게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모습을 보든지 그 교제 안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고 서로 격려하면서 믿음의 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오시는 그 날까지 이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 안에서 맺어지는 성도의 관계는 하나님 앞에 얼마나 축복된 것인지를 깨닫고 그래서 서로가 서로를 격려하고 북돋고 그들을 붙들어주고 빛 가운데 살지 않는 지체들을 긍휼히 여기며 가르치며 그들의 손을 잡아 이끌어 주는 노력들이 너무나 필요하고 그런 삶 자체를 무게로 느끼지 않고 축복으로 느끼는 신앙 생활이 우리에게는 너무나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이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빌1:9
내가 기도하노라 너히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사도는 왜 이 빌립보 교인들을 생각할 때 하나님 앞에 감사하며 그리고 또 나아가서는 그들에게 교제를 주신 하나님이 그 교제를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계속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는 것이 정당한지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도가 자신과 빌립보 교인들에게 오갔던 은혜를 회상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 교회의 영적인 변화와 그리고 교인들과 목회자의 관계입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만을 세운 것이 아니라 많은 교회를 세웠습니다. 사람이기 때문에 교회마다 느끼는 감정이 달랐겠지만 그러나 사도가 빌립보 교회를 유독 사랑하였다고는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빌립보 교회가 바울과 깊이 교제한 이유는 사도 바울이 복음을 변증하고 확증하는 이 일에 교회가 같이 참여하였기 때문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바울의 그런 복음 사역에 대한 깊은 애정 뿐 만 아니라 실제로 바울의 복음 사역에 필
요한 물품을 공급하는데 앞선 교회가 바로 이 빌립보 교회였다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을 가능하게 만든 것은 결국 교회가 영적인 변화를 깊이 받은 이후에 그런 변화들은 이 교회를 가르치고 지도하였던 바울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가지게 되었고 그의 사역을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와 함께 사역을 하는 마음으로 비록 몸은 떨어져 있지만 필요한 것과 쓸 것을 공급해 주는 이런 것들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여기서 하나 깨닫게 되는 것은 한 교회가 목회자와 교인들간의 아름다운 영적인 유대를 누리기 위해서는 진정한 영적인 변화를 경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목회자는 교인들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며 교인들은 목회자를 도울 때 바로 자신의 일처럼 도울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에 도달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넒은 의미에서는 이런 관계 자체가 목양의 관계이고 이런 관계 자체가 교인들이 목회자를 목자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관계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서신서를 시작하면서 이렇게 마음 깊이 교회를 인하여 감사하면서 서신서를 시작하는 부분도 흔하지 않습니다. 사도는 다른 교회에 대한 서신서를 쓸 때 교회에 대해 깊은 문제의 인식을 가지고 써내려 갔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에서는 종말이 가까워왔다면서 아무것도 안하고 편론을 가지고 살아가는 교인들에 대한 생각을 써내려갔고 고린도 교회는 편을 가르는 문제 등을 생각하면서 썼는데 이 빌립보 교회는 서신서의 시종일관 이 교회에 대한 칭찬이 나옵니다. 그러면서면서 사도는 이 빌립보 교회를 생각할 때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커다란 찬송이 생각이 났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결국은 이 빌립보 교회가 그처럼 영적으로 많은 은혜를 받고 말씀으로 말미암아 성도들이 변화를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 맺어진 복음의 교제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고 하나가 되어 자신에게 복음을 전하여 준 사도 바울을 돕는데 앞장을 선 것입니다. 우리들이 다시 한번 깨닫게 되는 것은 교회가 진정으로 하나됨을 유지하고 누리며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끊임없이 영혼의 변화를 주시고 그들이 정말 그 하나님의 교회가 얼마나 소중하고 그리스도로 이루어진 성도와의 관계와 목회자와의 관계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자기 스스로 터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지만 비로소 이런 복음 안에서의 아름다운 교제를 사랑하고 물질로 섬기고 그리고 자신이 소속한 교회 안의 사람들이 한 마음이 되어서 함께 하나님을 섬길 수 있기를 간절히 사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하나님께서 참된 변화를 주시고 진정한 은혜를 내려주셔서 여기에 오는 모든 성도들이 진정으로 변화를 받아서 이 세상의 어떠한 사귐보다도 교회 안에서 맺어진 지체를 사랑하고 교회 안에서 맺어진 목양이 관계와 성도들과 의 교제를 깊이 사랑해서 결국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기여하게 해 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였으면 좋겠습니다.
빌1:8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라
사람이라는 것이 느끼는 것이 많으면 결국 표현도 진실해집니다. 빌립보서를 보면 아름다운 문장이 많이 나오는데 그 중에서도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이 바로 이 구절입니다. 말하자면 목회자로서 그리고 빌립보 교회에 복음을 전해 준 사도로서 그들에게 어떤 사랑과 그리움을 품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그런 목회자와 교인들 사이에 존재하는 사랑이 어떤 종류의 것이고 또 그런 것이 어떻게 하여서 생겨났는가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런 것을 배우게 됩니다. 우선 사도 바울이 이렇게 빌립보 교회를 향해 자기가 진실한 사랑을 가지고 되고 그리고 이 빌립보 교회를 통해 가슴 깊이 젖어오는 사랑을 갖기까지 빌립보 교인들이 진심으로 사도를 도와서 그래서 그 복음을 변증하고 그리고 그 복음을 확증하는데 빌립보 교인들이 기도로 돕고 물질로 도와서 한마음으로 수고한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복음 사역을 위해 함께 애쓰는 가운데 이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을 향해 더 깊은 애착과 사랑을 갖게 되었습니다.
모든 교회가 다 그렇겠지만 특별히 이렇게 목회자가 교인들에 대해 깊은 애정을 갖기 위해서는 이 사도 바울의 경우처럼 교회가 한 마음이 되어서 주님을 섬기고 복음을 위해서 수고하는 그러한 일들이 이 사도 바울의 마음 속에 교회를 향한 사랑을 더욱 촉진하였던 것같습니다. 물론 자식을 낳으면 잘나도 자기 자식이고 못나도 자기 자식입니다. 그래서 그 자식을 건사하고 기르는 것이 다 부모의 일이지만 그러나 부모가 자녀를 길러도 기쁨으로 기르는 경우도 있고 의무감으로 기르는 경우도 있습니다. 자녀를 기르면서도 여러 가지 마음이 교차하는 것을 우리는 알 수있습니다. 목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빌립보 교회 뿐아니라 많은 교회를 사도 바울이 개척을 하였는데 이 교회에 대해 깊은 애착을 가지고 이런 편지를 나눌 수 있었던 것은 교인들이 이 사도를 깊이 사랑하고 그를 위해 수고한 과거가 있었기 때문에 복음을 향해 함게 수고한 것이 있엇기 때문에 이 교회를 더 깊이 사랑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도의 오늘 이 고백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라’ 속에 자기의 사랑을 표현하는데 자기의 인격이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 표현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얼마나 강렬한 말입니까? 이것은 결국 목회자와 교인 사이에 존재하여야 할 사랑이 어떤 사랑인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심장, 이것은 결국 주님의 마음으로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도가 가진 사랑은 사도의 인격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애정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사도의 사랑은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기 때문에 비롯된 사랑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하였더라면 이런 사랑을 나누지 못하였을 것인데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 사랑을 깊이 소유하게 되니까 그 사랑으로 이 빌립보 교인들을 정말 뜨겁게 사랑하는 이런 관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런 사도 바울 속에 있는 예수의 사랑이 이 빌립보 교인들과 만나서 이런 사랑이 교차된 것은 사도 바울 혼자 예수를 만나 변화된 것이 아니라 사도 뿐 아니라 빌립보 교인들도 예수를 만나는 신앙의 놀라운 변화가 있었기 때문에 이런 사랑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교회가 변화되지 않으면 이런 아름다운 사랑이 교회에 깃들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서 영적인 변화를 받고서 예수를 사랑하는 것과 이런 것을 통해서 지체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과 그런 변화 없이 단지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정들어 가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서 영혼의 진정한 변화를 받은 가운데 목회자와 교인인 사이에 사랑이 생기서 마음이 뜨거워져서 그 교제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어하고 많은 사람들이 이런 복음의 빛 가운데 들어오기를 사모하며 그 사람들이 자신과 같이 변화를 받아서 사람들을 사랑하고 복음을 확정하고 변증하고 전파하는데 동참하기를 간절히 바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단지 자기에게 솟아난 사랑은 자기의 욕망에 따라 기뻐하지만 그러나 신령한 변화를 받아 비롯된 사랑은 어떡하든지 예수의 이름을 높이려고 하고 신령한 빛 아래에 들어오려고 하고 그 복음의 빛 아래에 많은 사람들을 데려오는데 자신들의 이 사랑의 관계가 협력해서 하나님의 좋은 계획을 이루는데 도움이 되길 바라는 소원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여기서 바로 우리들의 교회는 이런 변화를 절실하게 필요로 한다는 것입니다. 빗나간 사랑이 아니라 바르게 된 사랑, 그리고 이런 사랑 때문에 하나님이 기뻐하실 수 있는 그런 사랑, 그런 사랑 때문에 성도와 목회자가 한마음이 되어 주님의 이름을 높이고 하나님의 복음 사역에 수종을 들 수 있는 그런 사랑을 우리들이 바라고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도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시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 속의 이런 사랑이 절대적으로 하나님께 말미암은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빌립보 교회 교인들을 뜨겝게 사랑하였기 그 때문에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께 매인 사람이 되었고 그리고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그 사랑 때문에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그런 사람으로 점차 점차 더 온전하게 변화되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빌립보 교인들이 자기의 복음 사역에 동참하고 그들이 변화되고 그런 변화된 마음으로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서 충성되게 섬기고 어려움 가운데서 자신을 물질로 도와서 선교 사역에 힘쓰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 이 사도 바울은 하나님 앞에 자신이 뿌린 것은 매우 작은 씨앗이었지만 하나님이 그 믿음을 씨앗을 자라게 하셔서 울창한 숲을 만드는 것을 감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신앙이 자라면 자라는 것과 함께 우리 안에서 이런 목양의 관계도 자라야 합니다. 신앙이 자라면 자랄수록 이제는 좀더 성숙한 사람이 되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해하고 목회자의 마음을 이해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세월이 흘러가면 흘러 갈수록 처음의 사랑과 존경의 관계가 실증이 나고 여러 가지 결함이 눈에 들어오면서 고통하는 관계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이런 좋은 관게가 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목양의 관계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가고 그리스도의 참사랑을 알아서 주님의 성품에 매료되어가는 일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깊어져 갈 때에 그 때에 목양의 관계, 목회자와의 관계도 이렇게 깊은 사랑을 가진 관계가 되어서 하나님의 나라에 유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내가 오늘도 우리를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깊이 이해하고 주님의 마음에 우리를 향해 나를 향한 사랑을 깊이 이해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과 그리고 또 하나님께서 우리가 이세상을 살아가고 이 세상에서 신앙 생활을 하는 동안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그리스도로 인하여 변화된 성도들이 되어서 성도를 사랑하고 목회자를 사랑하는 아름다움 공동체를 이루어가서 우리 모두를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그런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빌1:9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이 구절 앞에서는 이들을 인하여 하나님께 어떻게 감사하고 주님을 찬송하는지를 고백하고 자신도 얼마나 빌립보 교인들을 사랑하는지를 하나님이 증인이시라고 말할 정도로 뜨겁게 사랑하였다는 것을 말한 다음에 내가 기도하노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그 성도를 진실로 하나님 앞에서 사랑하면 기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사람의 마음입니다. 그러니까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하나님께 자신이 마음을 드리고 싶고 그러면서 이 빌립보 교인들을 진심으로 사랑하니까 이들을 위해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할 마음이 생겨났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성도의 자연스로운 사랑이고 그리스도안에 있는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기도의 교제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교제인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바울의 마음에는 빌립보 교인들을 생각하면 속이 상하거나 억눌리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생각하면 보람을 느끼고 감사하는 마음이 생겨났습니다. 이들 무리를 생각할 적마다 감사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게 되고 이 빌립보 교인들은 자기에게 복음을 전해주고 자기에게 참된 진리를 가르쳐 주어서 이제까지 믿음의 사람으로 살아오게 한 그 사도를 깊이 존경하고 사랑하며 그를 위해 기도하고 헌신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것이 바로 교회안에 이루어지는 진정한 목양의 관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사랑, 그런 사랑 안에서 사도 바울이 자기가 이들을 위해 기도한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의 기도를 과시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위해 기도하는데 내가 무엇을 기도하는 지를 보면 너희가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라는 의도에게 자기가 무엇을 위해 기도하는 지를 사도 바울이 보여줍니다.
사도는 세 가지를 위해 기도하는데 하나는 지식이고 또 하나는 진실함이고 또 하나는 열매입니다. 먼저 지식에 대한 것을 이 구절에서 살펴보겠습니다. 9절에서 사도가 ‘내가 기도하노라 너히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빌립보 교인들 속의 사랑이라는 것은 단지 사도 바울을 향한 사랑만을 가르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향한 사랑을 가르킵니다. 이전에는 세상을 쫒아살고 세상이 좋아서 세상에 얽매여 살던 사람들이 바울이 전해준 복음을 들으면서 그들이 누구를 사랑하며 살지를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를 구원하신 그리스도 예수와 그것을 통해 구원의 은혜를 주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순수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뜨겁게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자신에게 복음을 전하게 해 준 하나님을 사랑하였고 또 그 사랑이 얼마나 순수하고 뜨거웠는지는 복음을 전해주기 위해 부름을 받은 사도 바울을 어떻게 사랑하고 어떻게 도왔는지를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 진실한 마음과 그런 진실한 심령으로 이렇게 하나님께 감사하며 영혼을 향해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사랑이 그들에게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였습니다. 그 사랑이 아무리 순수하고 뜨겁고 정말 하나님의 복음에 의해 일어난 사랑이라고 할지라도 그런 사랑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위에 더 필요한 것이 지식과 총명이였습니다. 실로 지식과 총명이 없이는 그런 사랑이 계속적으로 이어질 수 없습니다. 우리는 종종 주위에서 예수 믿은지 얼마 안되거나 하나님을 만나서 변화를 받은 사람들이 정말 마음으로 뜨겁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을 찾는 그런 순수한 마음을 봅니다. 참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런 것들이 곧 사라져 버린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경험하였을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때문이냐면 그 사랑은 일종의 작은 불꽂과 같습니다. 아무리 기다란 철에다가 아무리 정성껏 불을 붙였다고 하더라도 그 촛불을 밖에 두고 그 촞불이 밤새도록 켜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쉽지않습니다. 바람이 안 불 때에야 타오를 수 있지만 바람이 불면 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언제가 집회를 인도할 기회가 있어서 포항 기도원에 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다 저녁이 되어 포항 기도원에서 잠을 자는데 몇번을 깨었습니다. 그런데 밖이 훤한 것입니다. 그 순간 새벽기도회를 인도하여야 하는데 늦잠을 잤구나 큰일났다고 시계를 보니까 새벽 2시인 것입니다. 그런데 밖이 훤합니다. 그것이 바로 포항제철 공장에서 불덩이가 하늘로 치솟는 것이었습니다. 비가 와도 커지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우리가 그리스도를 말미암아 참된 사랑의 불꽃이 우리에게 일어났다고 하더라도 그대로 내벼려 두면 곧 사라집니다. 세상이 그 불을 가만두겠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마귀가 가만두겠습니까? 무슨 방법으로든지 짓밟아서 꺼버립니다. 그런데 그런 것을 이기는 것이 필요한 것이 지식과 총명입니다. 그런 사랑이 우리 안에 일어날 때 얼마나 순수한지 모릅니다. 대학교를 나와 박사를 얻었다고 하더라도 국민학교를 나왔다고 하더라도 사람에게 느끼는 사랑의 감정이란 것은 동일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표현하는데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수준에 따라 성품에 따라 틀립니다. 그러나 기본적인 감정은 동일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안에서의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의 지식이 많이 쌓인 사람의 사랑의 감정이나 오늘 처음 교회에 나와서 회개한 사람의 사랑의 감정이나 만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마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왜입니까? 얼마전까지 그렇게 순수한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하던 사람들이 곧 잃어버립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들이 고통하는 것이고 아파하는 이유입니다. 제가 가르치는 나이든 여학생이 교회를 개척하고 교회에만 매달렸을 때에 설교를 해 달라고 하여서 갔는데 거의 울려고 합니다. 왜 그러냐니까 그렇게 하나님 앞에 기도해서 암이 낫고 죽을 병을 살려 놓고 하면 왜 그런지 넉달을 못가서 다 그렇게 교회를 떠나거나 그 마음을 잃어버리고 차가워진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결국 사랑 위에 지식과 총명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 사랑이 우리 안에 늘 있을 뿐 아니라 그 사랑이 지식에 의해서 풍성해지고 총명에 의해서 그 불꽃이 커다란 화염이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면 처음 예수를 믿은 그 사람과 하나님의 진리에 의해 묻어있는 주님을 향한 사랑이 본질에는 다르지 않지만 후자의 사랑이 전자에 비하면 비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만 있을 뿐 아니라 그 사랑 위에 지식과 총명을 많이 더하니까 그 신앙이 더 견고해지면서 불꽃과 같이 타오르는 것입니다. 누구도 이러한 변화 없이는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므로 세상을 이기고 자신을 이기는 삶을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너희는 그 사랑 위에 지식을 더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떠나 왔지만 그러나 누구를 통해서든지 너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더 깊이 깨닫고 이전에는 순수하고 사랑이 많았지만 이제는 지혜롭고 말씀에 깊이 들어가고 그리고 너희들이 지극히 총명한 가운데 너희의 사랑을 잘 지켜서 그 사랑이 지식과 총명이라는 기름을 더욱 부어 알면 알수록 주님을 더 뜨겁게 사랑하고 지혜로워질수록 하나님 한 분 이외에는 사랑할 분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 그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너희들이 불꽃같은 사람이 되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 사도 바울의 마음입니다. 오늘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 빌립보 교인이 지닌 순수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시고 그리고 그 사랑에 지식을 더하셔서 우리가 그 사랑의 작은 불꽃이 커다란 화염이 되어 우리 안에 타올라서 고난을 이기고 환경을 이기고 살아가는 삶을 살도록 도와 달라고 기도하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빌1:10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사도가 그렇게 복음 안에서 이 빌립보 교회와 더불어 아름다운 교제를 나눌 때 이 사람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 않을 수 없음과 그들을 위해 기도한 3가지가 하나는 지식과 총명을 더하시기를 또 하나는 진실하여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루기를 마지막은 의의 열매를 이루기를 기도하였습니다.
10절에는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라면서 여기서의 기도 제목은 앞의 기도 제목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인데 앞에서는 사랑에 지식과 총명을 더한다고 하였는데 그 사랑에 지식과 총명을 더하여서 이런 삶을 살기를 바란다는 것을 나탄낸 그런 진실한 고백입니다. 우리는 종종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충만하였다가 금방 뒤로 물러가는 교인들을 봅니다. 사실 대부분의 교인들이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차이는 있어도 어느 경우는 매우 심각하여서 하나님을 믿는 것 같고 사랑도 있고 충만하여 보이지만 얼마가 안되어 곧 뒤로 물러가는 이유가 신앙 생활은 사랑만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더 온전하겨 지기위해서는 온전한 지식과 총명으로 무장 되어야지 그 사랑이 온전하게 잘 보전될 수 있다라는 것입니다. 이런 비유를 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주 귀한 액체를 잘 만들어진 유리 용기에 넣고 뚜껑를 단단히 덮어주면 잘 보전될 것이지만 소쿠리 같은 것에 담을려고 부으면 부은 즉시 다 빠져나가서 없어져 버릴 것입니다. 사랑과 지식의 관계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런 지식으로 우리가 무장할 때에 우리에게 분별력이 생기는 것입니다.
여러분, 진실하다라는 것은 단지 양심에 꺼리김어 없이 살아갈 수 있는 것 같은 도의적이라는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 진실하여 지려면 단지 하나님 앞에 속이는 것이 없고 거리끼는 것이 없이는 안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진실하여지기 위해서는 그가 우선 지혜가 없이는 하나님 앞에 진실해질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참된 진리는 아는 지혜없이 그는 결코 진실해질수가 없습니다. 한 사람이 속임수가 없고 자기를 기만하지 아니하고 그리고 양심에 거리낌이 없이 정직하고 올바르게 살아가는다는 것이 하나님 앞에 진실하다라는 말과 통하기 위해서는 그가 온전한 진리의 빛 아래에서 신앙 생활을 바르게 이어나가기 필요한 모든 신앙의 제대로된 지식이 있을 때 그가 양심에 거리낌이 없이 진실하게 사는 것이 곧 하나님 앞에 진실하여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본적으로 전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내가 어떻데 살아야지 하나님 앞에 잘 살아 나가는 생각이 전혀 안되어 있는 상태에서 그가 아무리 정직하고 마음에 꺼리낌이 없어 도의적으로 산다고 하여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것은 진실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 점에 있어서 굉장히 착각을 합니다. 양심에 거리낌이 없이 바르게 살면 된다는 것이 어떻게 사는 것인지도 모르고 어떻게 살아야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인지 라는 것도 모르는데 진실해질 수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습니다.
예를 들자면 이런 이야기입니다. 사람이 분명히 저를 좋아하고 존경하는 것은 틀림이 없 습니다. 그런데 전혀 내가 무엇을 원하고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이나 신앙에 대한 견해를 전혀 모르고 단지 좋아한다는 이유 때문에 열심히 쫒아 다니면서 자기가 나를 가장 잘 아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을 수가 있잖아요? 그런데 그런 사람은 저는 정말 싫습니다. 그가 순수하다는 것은 인정을 하는데 지식이 온전히 구비되어 있지 않습니다. 한 두 가지나 발견하고 나서 자기가 누구누구와 견해가 같고 자기가 누구를 닮아있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결국은 우리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면서 하나님을 공경하고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는 우선 하나님의 마음을 잘 알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효도를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엇을 원하는지 잘 생각하고 하여야지 그렇지 않으면 크게 열심히 있는 것이 고통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하나님께 대한 사랑에 지식을 더하니까 예리한 판단력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옳은 것인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인지 슬퍼하시는 것인지에 대한 판단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판단이 생길때 비로서 허물없이 진실하여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루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 때 비로서 진실하여진다는 것입니다. 아주 우리들이 구체적으로 예를 안들어도 속임수가 있고 약삭 빠르고 야비하지는 않는데 하여튼 아닌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것이 바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이 지혜와 총명으로 말미암은 판단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정말 참된 신앙이 무엇이고 진정한 신자의 도리가 무엇이고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지만 주님의 마음에 기쁜 신앙 생활을 할 것인가 하는 이 지식 없이는 우리는 결코 진실한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사도는 그렇게 사랑이 많은 순수한 빌립보 교회를 위해 하나님 앞에 이것을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가 총명과 지식으로 그 사랑을 하나님께서 더 하시고 그리고 나아가서는 그것으로 인하여 좋은 판단력을 더하여서 허물없이 진실하여져서 주님이 오시는 날까지 그렇게 진실하게 살면 내가 얼마나 좋겠는가라면서 하나님 앞에 이것을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간에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신앙 생활이 점점 깊어질수록 단지 열심만 있는 사람이 아니라 이렇게 지식으로 말미암아 선한 것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고 흠없이 주님 앞에 살도록 도와 달라고 기도해야겠습니다. 지식은 삶을 위한 것이고 그 삶은 지식을 통해 온전히 지는 것입니다.
빌1:11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를 구하노라
사도가 빌립보 교회를 위해 기도하기를 사랑에 지식을 더하는 것과 그들이 진실해서 그 지식을 가지고 분별해서 그것을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루는 것과 마지막으로는 열매를 이루는 삶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사랑을 주시고 그 사랑 위에 지식을 더하시고 그래서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분별하게 하시고 또한 성령을 주셔서 늘 이기는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시고 고통을 받을 때 하나님의 위로를 얻게 하시게하는 하나님의 은혜 주심은 한가지를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열매맺는 백성이 되게 하시려고 함입니다.
여러분들은 성경에서 하나님이 이 열매 맺는 삶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시는지를 알 수 잇을 것입니다. 그 백성들을 애굽에서 건져 가나안으로 들여보내신 다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도 열매를 맺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서 5장에서 말하기를 하나님이 이 백성으로 하여금 좋은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해서 포도나무를 심고 좋은 장비를 다 구비하고 준비하여 주었는데 그 백성은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고 들포도를 맺은 것을 탄식하는 장면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런 열매에 대한 깊은 강조는 예수님에게서도 역시 나타납니다. 그래서 요한 복음 15장의 포도나무의 비유도 그러하며 열매맺지 못한 무화과 나무 사건도 그렇고 여러 장면 속에서 열매를 맺는 삶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왜나하면 하나님이 그렇게 우리에게 은혜 주고 정결케 하시는 것도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함을목표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만약에 교회에 와서 말씀만 듣고 기도만 하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기도 응답만 받고 우리의 삶에 열매가 없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기만하는 행위입니다. 과일 나무를 심을 때 단지 관상용으로 심은 사람은 그것은 집에 한 두그루 심는 것이지 전문적으로 땅을 사고 밭을 사서 돈을 들여서 수만평의 대지 위에 과일 나무를 심는 사람은 단지 관상용을 바라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거기에 그의 생계가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심은 것은 우리로 하여금 열매를 맺게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면 왜 그렇게 열매 맺는 것이 중요합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된 자로 마땅한 도리이기도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세상이 비로소 내 제자인줄을 알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죄악된 열매만을 맺으면서 살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 또한 실제로 그렇게 살고 있는 사람들을 예수님이 은혜를 주셔서 주님이 기뻐하시는 의의 열매를 맺게 하시는 것은 그 열매로 하여금 많은 사람들이 보고 주님을 알게 하시려고 그런 삶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 열매가 바로 의의 열매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기대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은 자신 스스로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수없이 은혜를 구하고 주님이 주시는 많은 것들을 받았으면서도 불구하고 여태까지 살아온 인생을 돌아보면 정말 하나님 앞에 열매를 드린 것이 너무나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으면서 얼마나 충성스럽게 섬기면서 일의 열매를 맺었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얼마나 열심 있는 삶을 살았고 얼마나 열심히 주님을 섬겨서 예수를 안 믿었더라면 생각도 할 수 없는 섬김의 열매를 맺었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들 가운데는 교회를 하나 지은 사람도 없고 우리들 가운데는 많은 영혼을 인도하여 하나님 앞에 인도한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오래도록 은혜를 받으면서 신앙 생활을 하여 왔지만 섬김의 열매도 적습니다.
뿐 만 아니라 주님이 우리에게 맺기 원하시는 열매 또 하나는 인격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신앙 생활을 하여 왔지만 우리가 얼마나 주님의 모습을 닮아왔는가를 처음에는 몰랐다고 하더라도 그만큼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감화를 받았고 기도하면서 우리 자신이 죽고 변화되고 새로워지고 하는 이 모든 과정을 통하여 우리를 보는 사람이 얼마나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고 우리를 보고 얼마나 주님의 성품을 닮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열매입니다. 충성스러운 삶의 섬김의 열매와 주님을 닮아가는 인격을 열매를 맺게 하시려고 주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불러 주신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맺히는 열매가 의의 열매이기 때문에 그것은 육체 가운데 살아가면서 죄 가운데 범죄하면 맺혔던 육체의 열매와는 완전히 다른 열매이고 그 열매를 통하여 많은 사람들은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불의하게 살면 안되는 것이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 열매는 의를 생각나게 하는데 그 의는 바로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의 계명을 쫓아가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열매를 맺을 때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기쁨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 불러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당신의 기쁨이 되게 하시려고 주님의 귀한 자녀 삼으시고 백성을 삼으셔서 우리를 여기까지 데려오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열매 없이는 어떠한 식으로도 하나님을 기뻐하시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단지 우리가 열광하는 신앙 생활을 가지고 기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세례 요한의 선포를 기억하십시오. 많은 사람들이 열광을 가지고 세례를 받기를 원할 때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외쳤습니다. 그 열매가 바로 옛 삶을 버리는 것입니다. 군인들이 강포를 행하고 세리들이 늑탈을 행하던 모든 삶이 결국은 옛 삶입니다. 하나님 없이 살았던 삶, 옛 삶입니다. 그것을 버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새 삶을 사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열매를 맺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끊임없이 옛 삶을 청산하려는 의지, 죄로부터 자신을 정결케 하려는 거룩한 생활의 의지 없이는 그는 결코 열매를 맺는 삶을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결국은 헐벗은 나무이며 열매 없는 나무로 남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으로 하여금 그 사람을 볼 때 속히 찍어서 불어 던져 넣어야 하는데.... 라는 갈등을 불러 일으키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다 쓸모없는 사람들입니다. 교회 나와도 그 사람은 쓸모없는 사람들입니다. 열매를 맺지 못할 뿐 아니라 자신의 그러한 삶에 대해서도 고민을 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이기심으로 가득 차고 하나님을 부르지만 그 안에 도무지 여호와를 경외함이 없는 다 쓸모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열매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때문에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새롭게 하지 않으면 그는 어떤 식으로든지 열매를 맺는 삶을 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 생활의 가장 큰 맹점 중에 하나가 기독교 신앙이 영적인 신앙이라는 사실을 간과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이 영적이라는 것을 일단 하잖게 생각하게 되면 착하게 사는 것, 좋은 사람에 되는 것에 대한 이데올로기만이 남습니다. 그런다고 해서 하나님 이 기뻐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열매라는 것은 예수님과의 생명적인 관계가 바르게 되었을 때 흘러나오는 결과적인 삶입니다. 주님이 내 안에 살아계심을 느끼고 그 분이 나에게 하늘의 신령한 은혜를 공급해서 죄를 이기고 험악한 세상에서 거룩한 삶을 살아가게 하는 영혼의 비밀을 갖지 못한 사람들에게서 무슨 영혼의 열매를 기대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서는 아무 것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가 비록 지금은 무엇인가 잘 살아보려고 흉내를 내며 애쓰며 살 지도 모르지만 그리스도와 생명적인 영혼의 관계가 풍성하지 않으면 그는 곧 쓸모없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생명적인 관계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가령 죄 가운데 살다가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게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갑자가 멀게 계셨던 것 같은 그리스도가 가까이 계신 것 같이 느껴지고 그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못한 날들을 슬퍼하고 그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게 되고 더욱 사랑하고 싶어지며 죄를 싫어하며 날마나 주님을 만나고 싶은 그런 경건한 소망을 갖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접붙인 상태에서 주님의 생명이 우리에게 전해지는 그런 모습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을 향한 사랑 때문에 경건하게 살고 주님을 향한 사랑 때문에 믿음으로 이기는 이런 삶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에 하나님 우리가 태만한 우리의 신앙 생활로 열매 맺지 못하며 살았던 것을 용서해 주시고 그리스도와의 생명적인 관계가 늘 아름답게 지속되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겠습니다.
3. 빌립보서 1:12-24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 시위대 안과 기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을 인하여 주 안에서 신뢰하므로 값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말하게 되었느니라”(빌 1:12-14)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 곳에서는 항상 사람들과의 관계가 새로워집니다. 밤에 목자와 양의 탈고를 다 끝내면서 그런 생각을 하였습니다. 책 전체의 시종일관 주제가 왜 오늘날 그렇게 목양의 관계가 잘 성립을 안하는가인데 그 이유는 영혼의 변화가 없기 때문에 자기의 인생에 있어서 커다란 영향을 주는 목회자를 못 만나고 그러니까 자기가 인격적으로 승복하는 양된 삶이 없었고 자기가 결국은 그런 분명한 체험이 없으니까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성도를 서로 존귀하게 생각하고 사랑하는 성도의 교통이 안 이루어진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실한 말씀이 있어서 영혼들이 변화되는 곳에서는 언제나 성도를 향한 사랑이 있고 목회자를 향한 사랑이 있습니다.
빌립보 교회 교인들은 우리가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바울과 특별한 관계를 갖고 있었는데 바울이 복음을 위해 옥에 갖혔다고 하는 소문을 들었을 때 빌립보 교인들의 마음이 어떻겠는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분명히 그들의 마음은 찢어지는 듯 아팠을 것이고 그리고 그들의 마음은 약간 절망을 하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 그들이 처해있을지 모른다는 마음 자체가 사도에게는 커다른 부담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사도는 인사가 끝나자마자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의 복음에 진보가 된 줄을 알라고 말하면서 그런 자기 자신이 옥에 갖힌 것 때문에 하나님의 일도 갖혔다든지 내가 고생을 많이 하게 되었다 라든지 그런 생각을 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측량할 수 없는 방법으로 하나님께서는 나의 매임을 통하여 복음이 더 훌륭하게 전파될 수 있도록 섭리하셨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일들을 이루시는 방법이 우리의 지혜로는 측량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드러난 뜻이 있고 감추어진 뜻이 있습니다. 그 드러난 뜻은 성경이지만 감추어진 하나님의 뜻은 섭리입니다. 그리고 이 섭리는 한참을 살아보아야지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사도가 옥에 갖혔을 때 사람들은 복음의 역사에 중요한 사람이 체포되었으니 복음도 바울과 함께 끝이 났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대적 자들은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우두머리 격이 묶여서 우리의 감시 아래 있으니 누룩처럼 번져가는 복음의 역사는 끝이 났을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였지만 정반대의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오히려 바울이 복음을 인하여 체포되고 투옥되었다는 사실이 전해지자 은밀하게 전해지던 복음이 담대하게 전해지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왜 복음이 사도의 투옥과 같이 기력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담대하게 전해지게 되었을까 라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그것은 당시 예수를 믿는 것 때문에 아직까지도 박해를 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담대히 밝히지 못하던 사람들이 바울의 투옥을 목격하고는 커다른 감화를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전에는 은밀하게 전하던 것을 담대하게 '예수는 그리스도이며 그를 믿고 회개하고 성령을 받는 것이 이외에 참된 생명이 없다는 것'을 전하는 담대함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처럼 한 사람의 고난과 희생은 항상 많은 감화를 불러 일으켜서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더욱 더 담대함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언젠가 공항 간판대에서 ‘설악산 백배 질기기’ 라는 책을 잠깐 보는데 놀러가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게 들었습니다. 그런데 또한 은혜로운 책을 보면 그렇게 살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누구를 바라보고 사느냐 무엇을 바라보고 사느냐에 따라서 한 인간의 다양한 속성이 부풀어 오르는 것입니다. 여러분 속에는 아주 타락하고 더럽게 살고 싶은 기질부터 성도답고 천사처럼 살아야겠다는 기질이 이 작은 몸 안에 함께 내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유혹 받는 곳에 여러분을 자꾸 집어던지면 처음에는 작은 것 같았던 욕망이 계속 자라면서 그렇게 살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룩하게 살고 싶은 그런 본성이 우리 안에서 크게 역사하여서 우리로 하여금 그런 삶을 살게 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 속에서 어떠한 모본을 보느냐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위하여 옥에 다 갖혔다는 소문이 들리고 아마 사형 당할 것이다라는 소문이 들리자 그의 가르침을 받고 복음을 들었던 많은 사람들은 그 일을 인하여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아하 그렇구나, 저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길이구나’ 라는 생각과 함께 담대함을 주고 담대히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말할 수 있는 용기를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얼마나 놀라운 섭리로서 자신의 백성들을 인도하시는지 보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상상할 수도 없는 방법으로 이 일들을 이루어 갑니다. 그러니까 우리도 이 아침에 ‘하나님, 우리의 인생이 때로는 우리의 원하는 데로 흘러가지 않아도 하나님이 선하신 분이시라는 사실을 굳게 믿고 때로는 인생이 좌절되는 것 같고 돌아가는 것 같아도 좌절되고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것 때문에 아버지의 뜻이 우리가 측량할 수 없는 방법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믿습니다’라는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환경이 우리의 마음에 들든지 그렇지 않든지 간에 역경에서나 형통할 때나 주님을 깊이 믿으면서 따라갈 수 있도록 하여 달라고 우리가 기도하여야 합니다. 또한 우리들이 이렇게 한 사람의 현신이 커다란 감화를 불러 일으켜서 많은 사람들에게 담대함을 주는 것처럼 우리가 그런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정말 사모하는 마음으로 우리가 바로 그런 사람, 주님을 깊이 알고 주님을 위해 훌룡하게 헌신하여 두려워하는 많은 사람에 게 담대함을 주는 도구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여야 하고 거기까지 미치기가 어려우면 다른 사람들의 아름다운 희생을 보면서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이 될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기도하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빌1:18
그러면 무엇이뇨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노라"
사도의 옥에 갖힌 사실은 많은 사람들에게 감화를 미쳐서 전에 숨어서 전파하던 사람들이 담대하게 전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우리 역사에서도 일제 시대에도 순교자들이 끼친 영향은 굉장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참 믿음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광경을 보면 그 자가 제대로 된 신자이면 그 자체가 커다란 도전을 불러일으킵니다. 왜입니까? 참 신자 속에는 자신도 그렇게 살고 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여러가지 이유 때문에 지금은 그렇게 살지 못하지만 참 잘 믿고 그리고 예수님의 명령을 따라서 순종하면서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그 마음이 올바른 삶을 위해, 자신은 어렵다고 생각하는 커다란 시련을 감당하면서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을 볼 때 자신 안에 바르게 신앙 생활을 하려고 하는 마음이 자극 받는 것입니다. 커다란 감화를 불러일으키는 힘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오늘 사도가 말하는 바와 같이 많은 사람들이 겁 없이 담대하게 이 복음을 전파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한 사람이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받으며 그 참 길을 걸어가는 신앙은 많은 사람들에게 감화를 불러일으킵니다.
예수의 말씀이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말씀하신 것이 자신의 죽음을 통해 드러날 많은 구원사역을 가르키는 말씀이었지만 그것은 이 신앙의 교리에서도 동일합니다. 한 사람이 죽으면 많은 사람들이 그 감화를 받고 하나님을 따르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 뿐아니라 다툼과 시기와 변명으로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자신의 마음에 고통을 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어떻하든지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이 전파되기 때문에 기뻐한다는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목표와 가치로 삼은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투옥되기 전에 이미 사도 바울은 그러한 결심을 여러 곳에서 자주 표하면서 살았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사도행전 20장입니다.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증거하여 이르길 환란과 결박이 나를 기다린다고 하여도 예수 그리스도의 받은바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에 마치려 함에는 내 생명의 조금도 아까운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이런 고백을 사도 바울이 하면서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결국 우리는 그가 얼마나 이 복음이 전파되는 것에 대해 최고의 가치를 걸고 거기에 모든 꿈을 걸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이 옥 속에 갖힌 상황에서도 자신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자기의 투옥을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된다는 것이 말할 수 없는 기쁨이며 즐거움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어떻게 되는 것을 문제로 여기지 아니하고 사도 바울은 이처럼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뻐 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가 왜 복음이 전파되는 그 자체를 가지고 이렇게 기뻐하고 행복해 할까라는 의문을 갖습니다. 그것은 이 복음이야말로 구원을 주는 능력이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무엇으로도 하나님을 떠나 있는 불행한 인간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할 수도 구원할 수도 없었지만 하나님이 이 복음을 주셔서 누구든지 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이 복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오는 많은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해 주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에,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구원의 능력이 나타났기에 이 복음이 전파되고 전파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물론 전파해도 안 믿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러나 우리는 복음을 전해 봐야 믿을 사람이 누구이고 안 믿을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있습니다. 복음을 전해 봐야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구원하시려고 준비시켰는지 복음을 전해 봐야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익은 곡식이 이 세상에서는 눈에 보이지만 이 영혼의 세계에서는 누가 익은 곡식인지 복음을 전해 봐야 드러납니다. 전하지 않으면 누가 익은 곡식인지 알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이처럼 기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기뻐하라고 많이 말하고 있습니다. 사형 당할 죄인이 그렇게 옥 밖에 자유하는 사람에게 기뻐하라고 편지 쓸 때 그 기뻐하라는 궁극적인 이유가 바로 복음이 전파됨을 인한 것이었습니다. 나는 비록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좆아서 고난을 받아 복음을 인하여 갖힌 바 되었지만 나의 매임을 인하여 복음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되는 일들이 나타나고 이 일로 하여금 더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겠구나라는 이런 생각을 하니까 자가기 당하고 있는 고난이 고난처럼 여겨지지 않았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런 기쁨에 동참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사도가 이 복음을 전파되는 것에 대하여 이처럼 기뻐하는 이유는 그가 그리 스도의 복음에 대하여 자신이 구원받은 감격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혼 생활도 그렇습니다. 제가 다니던 교회의 한 자매가 나이가 서른에 가까와도 엄마가 초조해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자매가 ‘엄마 결혼 나 하지 않겠다’고 하면 그 엄마는 그런 것을 해서 무엇하느냐고 말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자매는 그 부모님이 매일 던지고 하면서 싸우는 것을 보고 자라 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엄마 자신이 아빠하고 행복하게 살아본 기억이 없기 때문에 딸이 결혼을 안 한다고 하여도 그 결혼에 대한 기대를 본인이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행복하게 산 사람들은 혼자서 어떻게 사냐고 말합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복음도 같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구원받고 그 은혜로 깊은 감화와 감격 속에서 사는 사람들은 이 복음의 감격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너무나 불쌍하게 생각하고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을 너무나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은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이 복음의 능력이 많은 사람들에게 나타나게 하시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이 복음이 소중하고 귀하고 능력있는지를 깨닫게 되는 때에 비로소 많은 사람들에게 이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안 되는 절박한 생각을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들이 먼저는 우리에게 이 복음에 대한 감격을 주시고 주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구하신 일이 얼마나 능력있는 지를 깨닫게 해 달라고, 도와 달라고 기도하고 또 하나는 주님께서 우리들을 사용하셔서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알려 그것에 구원의 역사가 나타나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가지고 우리도 기뻐하도록 도와 달라고 기도해야 겠습니다.
빌1:19-21
이것이 너희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내 구원에 이르게 할줄 아는 고로
어제는 사도 바울의 기쁨의 이유를 말하였습니다. 참으로 하나 외모로 하나 어떻게 하든지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됨이 그 이유었습니다. 그러면서 이제 사도 바울은 이것이 너희 간구와 성령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할 줄을 믿는다고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참 놀라운 진리 하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의 구원이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지옥에서 천당 가는 것 그런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여기서의 구원은 이 감옥에서 하나님이 건져주실 것이라는 것을 믿는다는 것이고 사람이 볼 때의 절망적인 이 상황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하든지 자기를 도우셔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것을 믿는 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어떤 의미에서는 거룩에 이르는 성화에 이르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잇습니다.
그런데 사도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내가 이렇게 갖혀 있는 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뜻을 이루는데 하나님이 어떻게 나를 해 주실 지는 모르지만 나는 정말 너희를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이 좋다라는 것, 즉 주님께로 가고 싶다라는 것은 사역의 실패에서 오는 한탄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 안에 있는 이 세상에서의 주님과의 사귐은 이어지지 않고 자꾸 끊어지는 것입니다. 주님과의 사귐이 자기의 죄와 자기 안에 있는 악함과 자기 안의 것들로 자꾸 막히고 그리스도의 온전한 사귐이 어려운데 그런데 이 사도 바울의 가장 큰 원은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의 존귀함을 바라는 소원이 있었는데 이러한 시공을 뛰어넘어서 정말 그분께로 가고 싶은 그런 생각을 가진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사도 바울이 그런 소망을 가졌지만 그가 여기에서 감옥에 갖혀 있는 이것을 어떤 식으로든지 하나님이 자신을 구원하기를 바라는 것은 어찌하든지 하나님이 억압받지 않고 주님과 온전히 사귈 수 있는 그런 길로 인도하기를 바라는 개인적인 소망이 숨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소망이 너희 간구와 성령의 도우심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 빌립보 교인들이 자기를 위해 열렬히 간구하고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보십시오. 사도 바울이 이 교회를 사랑하였고 이들도 사도를 사랑하였습니다. 그리고 만날 이유도 없는 이 사람들을 만나게 된 것은 바울이 전한 복음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을 통해서 예수의 참 사람을 깨닫게 되자 그 사랑을 알게 되면서 그 사랑을 전하여 준 목자를 존귀히 여기고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어제한 신학교에서 제가 설교하면서 그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여러분들이 마음 속에 깊이 존경할만한 스승이 있습니까? 만약에 없다면 여러분은 둘 중에 하나입니다. 너무 인격이 휼룡해서 예수님에 가까울 정도로 고결해서 스승이 필요없는 사람이든지 아니면 막 사는 사람이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사랑하고 존경하게 되면 자기가 꿈꾸며 살아가는 사람을 너무 만나고 싶어합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서 그런 존재였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바울을 높인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높인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바울이 옥에 갖혔다는 소식을 접하자 간절히 기도하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게 기도하는 줄을 알고 또한 앞으로도 너희의 기도를 통해서 이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을 이룰 소망을 피력하고 있는 장면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말 하나님 앞에 변화를 받은 성도들에게는 이처럼 자신의 목자를 향한 간절한 기도가 있는 것입니다. 저는 한국 교회의 그리스도인이 주님 앞에 설 때 자신의 목회자를 위해 거의 기도하지 않은 것에 대해여 책망 받을 것을 확신합니다. 그러면서 신령한 목양을 원하는 것은 너무나 넌센스입니다. 보십시오. 복음으로 맺어진 이 사람들의 이런 기도와 간구가 있고 또 그것이 자기를 건져 주실 것이라는 것을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두 번째는 성령의 도우심입니다. 성령님께서 자신의 어려움을 아시고 적절하게 주님께서 도와주시리라는 사실을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성령이 도와주실 지는 알 수 없는 것이었지만 이렇게 성령을 담대하게 의지하게 되는 것에는 근거가 있습니다. 그가 이렇게 복음을 전하게 된 것도 성령님 때문이었고 복음을 전하다가 고난을 받고 옥 속에 갖힌 것도 성령님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성령님께 온전히 순종하여 살려고 애를 쓴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 성령께서 자기를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실 것이라는 소망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 맨 앞에 ‘이것이 너희 간구와 … 아는 고로’ 이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앞에 나온 사실을 가르킵니다. 다름이 아니라 그것은 바로 내가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결국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내가 기뻐하고 기뻐하리라는 사실입니다. 그것 때문에 너희의 간구와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이 나를 버려두시지 않을 줄을 안다는 그런 고백인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결국 하나님의 마음을 하나님과 같은 소원을 품고 주님을 위해 살려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 앞에 하나님 중심으로 살려는 그것 자체가 그를 건져주고 어떠한 상황에서건 그를 하나님께 버림받았다는 생각을 갖지 않게 만들어 준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한 사람의 중심이 정말 하나님께로 향하여 있고 자기의 모든 삶의 방향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라는 진정한 중심이 되어있으면 그러면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가 홀로 있다든지 버림받은 상태에 있는 것처럼 느낀다든지의 그런 상황을 만들어 주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도 바울이 오늘 말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뜻대로 살고 마음이 하나님께로 집중된 그런 사람이 아니면 그런 일을 통해서 그 사람의 마음이 거룩에 이르고 진실함에 이르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사도는 두려워하지 않고 낙망하지 않는 한 가지 사실이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마음이 순전하고 순수하다는 것입니다. 완전한 사람이라고 자기는 자부하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신의 마음을 아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이 내 마음을 열고 들여다보는 것이 나에게 있어서 두려움이 아니라 소망이 된다는 사실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홀로 두지 않을 것이다라는 소망이 여러분에게는 있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 앞에 이렇게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지 사도 바울처럼 어떠한 환경에서나 역경에 처해서도 우리가 일방적으로 하나님께 버림받았을지도 모른다라는 낙망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내 마음을 아시고 내가 하나님을 향해 가지고 있는 생각이 얼마나 간절하고 절박한지를 주님이 아셔서 주님이 나를 버려두지 않으시고 건져 주셔서 또 나를 고통 속에서도 시련 속에서도 행복하게 해 주실 것이다라는 그런 소망을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바울과 같이 어려움을 만나거나 뜻하지 않는 상황에 직면할 때 우리는 환경과 더불어 싸우기보다는 자신의 마음과 더불어 싸우는 사람들이 되어 자신의 마음을 깊이 들여다보면서 먼저 그 마음이 하나님 앞에 인정받을 수 있는 그런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이 세상 어떤 시련이 어려움과 고난 이런 것들이 모두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서 주님을 바라 볼 수 있는 길을 이루는 것입니다.
저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합니다. 살아온 인생을 돌아볼 때마다 하나님 앞에서 소중하게 생각하는 시간은 잘 먹고 잘 입고 형통할 때가 아니라 내가 쓰라리고 가슴에 고통이 있고 남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로 몸부림을 치며 살아오던 그때입니다. 그 순간에는 한 없이 귀한 것을 제 마음과 삶 속에 남겨 주 두었습니다. 그것은 죽음을 넘나드는 것 같은 고통을 겪어도 뭔가 내 마음이 하나님 앞에 온전해 지려고 몸부림 칠 때에는 아픔도 컸지만 그러나 그렇게 아프고 나면 하나님이 그 속에서 나를 더 순전하게 하고 온전하게 하셔서 마음이 하나님께 향하도록 인도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상황은 관계없어지고 고난을 딛고서라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그런 소망을 품게 되었습니다. 놀라운 성숙의 기쁨이 있고 감화의 기쁨이 있습니다. 사도는 내가 이렇게 주님도 아시듯이 내가 시위대에 갖혔으나 전파되는 그리스도를 기뻐하는 이것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이 고난에서 건져주시리라고 믿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렇게 하나님을 향해 마음이 새롭게 되는 시간에 되시기를 바랍니다.
빌1: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사도 바울은 이제 두 번 째로 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진정한 소망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의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기 원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사도가 생각하는 구원이 무엇인지를 보다 구체적으로 보여줍니다. 그것은 자신이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고난을 통해서라도 자신이 거룩해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죽든지 살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것은 결국 예수를 닮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국 자기의 내면의 모습이나 밖으로 드러난 외면적인 삶 모든 것을 보면서 사람들이 ‘정말 예수님이 살아계시는구나, 그 예수 그리스도는 참 거룩하신 분이구나, 그 예수님은 위대하신 분인 동시에 온전하신 분이시구나’ 이런 것을 자신의 내면의 세계를 보고 외면의 모습, 즉 사도 바울의 존재 자체를 보면서 이런 놀라운 변화를 보게 되기를 원하였던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발견하게 되기를 그렇게 변화되는 것, 그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사도 바울이 바라보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보면서 예수를 알 수 있도록 존귀하게 되는 거룩한 변화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실 사도 바울 뿐 아니라 모든 성도들이 삶 속에서 이런 모습을 보여주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받고 거듭난 모든 사람들은 이런 삶을 살 수 있는 가능성을 하나님께서 누구에게나 다 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여기에서 하고 있는 이 고백이 오늘날을 살고 있는 우리와 전혀 무관한 것이 아닙니다.
두 번째는 자기의 몸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것이 사도 바울의 마음속에서 얼마나 간절한 갈망이었는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 앞에 정말 간절한 기도와 소망을 따라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닮고 본받아 살고자 하는 간절한 소망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신앙 생활을 하면서 잃어버리지 말아야 할 기쁨이 날마다 조금씩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기쁨입니다. 왜냐하면 신앙이라는 것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고난에 기초하고 있고 그 기초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과의 더 온전한 사귐의 자리에 나아가는 것이 성경이 우리들에게 말하는 신앙입니다. 오늘날은 우리가 어떤 의미에서 이런 즐거움을 거의 잃어버렸습니다. 이런 즐거움을 얻기 위해서는 하나님과의 탄탄한 교제가 기초가 되어야 하고 매일매일 자신을 죽이는 삶이 아니면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기쁨을 발견하고 얻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날마다 날마다 하나님의 참사람을 사랑을 알게 되고 그 사랑에 감사하며 기뻐하며 나아가는 그런 생활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살든지 죽든지’라는 비장한 단서가 붙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삶을 통해서 존귀하신 분으로 드러내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거룩한 삶을 위해서는 살든지 죽든지라는 결의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그냥 대충대충 때우는 그런 신앙 생활을 통해서는 결코 우리들이 온전한 삶에 도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참다운 사랑과 은혜를 알았으면 우리들이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을 살아야겠는데 그 일을 위해서는 매일매일 자기가 죽는 일이 필요한데 그렇게 자기 속에 있는 방종하게 살아가고 자기 멋대로 살아가려는 삶의 모습을 우리들이 가지고 있다면 정말 살든지 죽든지의 각오가 아니면 그런 우리를 죽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풍부한 생명을 알아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더 온전해지는 삶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신이 변화되고 자신의 삶을 통해서 예수를 드러내는 삶을 통해서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지만 우리들의 모습이 주님을 닮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우리의 모습을 그냥 방치한다면 우리는 단지 교인일 뿐이지 정말 하나님 앞에서는 짐승과 다름없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빌1: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자기 안에서 그리스도만 존귀하게 되게 원한다는 고백이 결국 섬김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주를 위해 헌신적으로 사는 것을 가르키지만 성화의 측면에서 보면 자기가 온전히 그리스도를 본받기를 원한다는 고백입니다.
그런 말을 하면서 사도는 이제 ‘내게 사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라는 이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말은 우리들이 신앙 생활 속에서 잘 이용하는 것입니다.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라는 의미는 사도 바울의 삶 속에서 자기 중심적으로 살려는 죄악된 성품이 죽고 옛 사람에 속한 자아도, 욕심도 죽고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처럼 살려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며 살려고 하는 그 새사람은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라는 고백은 갈다리아서의 고백처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와 일치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자기를 죽으니까 그리스도가 자기를 통해서 산다는 것입니다.
‘내가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에서 죽는 것이란 말은 두 가지의 의미가 있는데 먼저는 매일매일 죽노라 하는 그의 고백과 같이 매일매일 죽는 것을 가르킵니다. 그러니 날마다 나의 옛 사람을 죽이고 옛 성품을 죽이는 이것이 내가 그렇게 죽음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시니까 사도 바울에게는 그것이 매우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 의미하는 것은 뒤편에 보면 그런 암시가 나오는데 육체의 죽음을 가르킵니다. 이제는 살고 죽는 것도 유익하다는 것은 날마다 자기를 죽이고 자기의 옛 본성을 죽이는 삶을 살아가니까 다름이 아닌 하나님이 자기를 얼마나 사랑하시는 것이 느껴지고 날마다 자기를 죽이고 죄를 죽이고 자기의 자아를 죽이니까 또 매우 주와 친밀한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런 영혼의 상태의 사람들의 죽음이라는 것은 주님을 온전히 만나지 못하게 방해하는 육신을 완전히 벗어버리고 온전히 주님과 하나를 이루는 그러한 관계로 들어가는 한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러한 자기가 죽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있을 자신의 욕망이 실현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성화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배우게 됩니다. 오늘날 사람들에게 내세에 관한 교리가 우리의 삶에 큰 위로가 되지 못하는 원인도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참된 은혜를 아는 성도들임에게도 그와 함게 있을 욕망을 갖고 그 욕망으로 인하여 이 세상을 하직하는 것을 기뻐하고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기 위해서는 날마다 죄를 죽이는 삶이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날마다 자기를 죽이고 옛사람을 죽이고 새 사람의 감격 속에서 다시 태어나서 살아나는 죄 죽이는 삶, 은혜를 살리는 삶이 날마다 날마다 바울로 하여금 자기를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날마다 자기를 새롭게 사는 삶이 사도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더 가깝게 느낄 수 있도록 만들어 준 것입니다. 그러니 날마다 자기가 죽는데 그것이 고통이 아니라 죽이면 죽일수록 더 그리스도와 온전한 사귐으로 들어가니까 그 죽는 것 자체가 매우 유익하다는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산 사람들만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기대와 소망을 따라 담대히 예수 그리스도만이 존귀히 되기를 원하는 소원을 가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리 구원을 받고 신앙의 체험을 많이 하였다고 하더라도 매일매일 자신을 죽이는 삶을 통한 신앙적인 변화와 감화없이는 우리는 어떤 식으로도 주님을 온전히 닮아갈 수 없고 그 주님을 닮아가는 기쁨이 있는 신앙 생활을 할수 없다라는 것입니다. 그런 담대함이 없기 때문에 결국은 그런 사람들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도 그런 담대함을 잃어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많은 더러운 죄와 사악한 마음들을 하나님의 은혜로 죽이는 삶을 살도록 도와 주시고 그런 삶을 살면서 죽는 것이 얼마나 유익하고 그 죽음 때문에 그리스도가 우리가 안에 사는 것이 얼마나 복된 것인지를 깨닫는 사람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겠습니다.
빌1:22-24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가릴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었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사도 바울이 그렇게 자기가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해지기를 간절히 사모하고 원하고 바라고 있는 그런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 두 사이에 끼었으나’의 그 두 가지는 삶과 죽음 사이에 끼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 더 정확히는 이 땅에 남아서 더욱 주님을 위해 헌신하고자 하는 마음과 죽음으로 인하여 자기가 사랑하는 예수 그리스도와 온전한 사귐을 가질 수 있는 죽음으로 들어가고 싶다는 이 두 가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두 사이에 끼어서 그 중에 어떤 것을 선택하고 어떻게 하여야 더 좋을지 판단이 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만을 생각한다면 이 육신을 떠나서 속히 그렇게 오랜 세월동안 내 욕망을 가지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것이 더욱 좋지만 너희들의 입장에서는 내가 이 세상에 육신을 가지고 더 사는 것이 너희에게 더 유익할 것이라는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말에서 알 수 있는 것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먼저는 주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을 갖고 사는 사람들은 주님을 닮기를 원하고 주님을 온전히 닮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또한 그런 거룩해져 가는 줄거움을 가진 사람들은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이 증폭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날마다 변함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사랑하는 그런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날마다 닮아가는 거룩한 기쁨을 아는 사람들이 그렇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기가 예수를 날마다 닮아가는 그런 즐거움이 있어야 주님을 더 깊이 사귀고 그 주님과 더 깊은 교제를 누려야 겠다는 간절함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예수를 닮아가는 성화의 모습이 자기의 영적인 삶을 더 깊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결국은 우리가 명상을 하고 금욕을 하고 이런다고 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예수를 닮아가는 길은 우리가 기도하고 그 말씀을 따라 온전히 순종함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더 깊이 온전히 닮아갈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온전히 닮아가고 승리하는 삶을 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더 지키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깊이 지키고 온전히 은혜 받고 더 많이 주님을 닮게 되고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을 더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그렇게 주를 닮아가고자 하는 사람의 섬김이 정말 주님만을 위해 섬기는 삶이 되기 위해서는 자기가 주님을 닮아가는 거룩한 교제의 기쁨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렇게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정도로 주님을 만나기를 원하고 간구하고 하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오늘 이렇게 이 땅에 살아 있으면서 이 빌립보 교인들을 위해 간절히 섬기고 싶은 마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떠나가나 이 땅에 사나 오직 자신의 삶 생애가 주님을 위한 것이었고 그리고 그것이 이 세상에 있을 때 영혼을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는 그런 분명한 인식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 그런 사모함으로 하나님앞에 살았던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그 두가지, 하나는 하나님을 온전히 사귀고 하나님께 깊이 의뢰하면서 그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교제 안에서의 기쁨이 있어야 할 것이고 또 하나는 그것이 토대가 되어서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섬기든지 하나님만을 섬기고 생명을 다해 섬기는 그런 우리의 삶을 위해 기도해야 겠습니다. 그리고 그럼으로 인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알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4. 빌립보서 1:27-2:14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에게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증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에게도 그와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빌 1:27-2:14)
빌1:27-28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를 가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일심으로 서서 한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아무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를 인하여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저희에게는 멸망의 빙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빙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
사도가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고 강력하게 권면 하고 있습니다. 그 명령에 순종하면 어떤 일이 있길래 사도가 강력하게 권하고 있습니까? 사도는 권하고 말하길 하나는 복음 신앙을 위해 협력하는 것과 그리고 그들을 훼방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사도가 옥에 갇혔어도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은 자기는 갇혔으나 그리스도의 복음은 매이지 않는 것이라는 확신 때문이었습니다. 이 복음이 매이지 않아야 사람들은 구원 얻을 수 있고 이 나라를 하나님 나라로 만들어 간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사도가 고백하고 있는 이야기는 이런 복음이 계속 전파되기 위해서는 결국 너희들이 이 복음 신앙을 위해 일심으로 합력해야 하며 이것이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사는 삶의 모습인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정으로 아는 사람들은 자기를 구원한 복음의 가치를 알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자기가 깨달은 이 복음이 전파되고 이런 것을 위해 그리스도인이 살아야 한다는 것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복음이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될 때 이 복음이 저절로 전파되는 것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은혜를 맛 본 사람들의 섬김과 헌신과 희생을 통해서 이런 복음의 전파가 이루어집니다.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시지 전에 향유를 예수님의 발 앞에 부은 여인의 이야기를 기억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향유 부음을 받으시고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는 이 여인의 행한 일도 기념이 되리라고 말씀하였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그렇게 예수님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말없이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부은 것은 예수님의 참사랑이 자기와 같은 죄인에게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깨달았기 때문에 자기의 귀한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부은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기념된다는 것은 진정으로 복음을 알게 되고 그 가치를 깨닫게 되고 복음의 핵심이신 예수님께서 자기들을 향햐여 어떠한 사랑을 주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는지 깨닫는 그 곳에서는 그 여자가 그렇게 옥합을 깨뜨려 발 앞에 부은 것처럼 예수님의 사랑에 대한 헌신이 부어진다는 것을 예수님이 말씀하시고 싶어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이름을 알 수 있고 알 수 없는 유무명의 자기를 버리는 헌신과 봉사를 통해서 이 복음이 우리에게까지 전해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철처하게 삶의 목표가 하나님이 되고 주의 일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을 위해 이 복음이 전파되고 역사되는 일에 한 마음이 되어서 모두 협력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는 방관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런 것들은 결국 얼마나 많은 교인들이 복음에 합당하게 살지 않는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복음으로 구원해 주시고 그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해 형벌 받게 하심으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는데 그 생명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놀라운 은혜도 모르고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도 살아가는 삶이 바로 오늘날의 삶이 아닙니까? 그런 것은 복음에 합당한 삶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나 고난이 닥칠 때나 좋을 때나 혹은 나쁜 때나 모두 한마음으로 이 복음의 신앙이 전파되고 전파되기 위해 온전히 협럭해서 자신들의 귀한 것으로 함께 하나님을 섬기고 이 복음의 역사를 위해 수고하는 그런 교회가, 그런 성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사도가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깊이 알고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였으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 이제는 이 복음을 널리 전파하고 이 복음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는 그 일을 위해 하나님 앞에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알고 나면 이제 우리의 꿈과 우리의 인생의 목표나 생각의 목표가 많이 달라져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좋아하시고 기뻐하시는 신앙 생활을 해 나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는 이유를 너희로 하여금 담대하려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때에 이 사람들의 좋은 신앙을 훼방하는 무리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그리스도인을 박해하고 훼방하는 그런 사람들 앞에서 그리스도인이 취해야 할 자세는 담대함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옥 속에 갖혀서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만이 내 몸에서 존귀케 하려 함이라’ 고 하며 담대함을 소유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 위기와 핍박 앞에서 취해야 할 자세였습니다. 그런 위기와 핍박 앞에의 자세가 담대함이었다고 할 것이 같으면 이 담대함은 복음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해 살고 삶의 목표가 바뀌고 예수 그리스도의 가치를 알았기 때문에 이제는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는 신앙이 있다고 할 것 같으면 어려움이 다가와도 조금도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사도를 보십시오. 그는 고난을 받지 않고 하나님이 자유를 주셨을 때에는 열심히 만천하에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갖힌자 되어서 옥 속에 갖히는 자가 되어도 그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삶과 죽음을 초월한 신앙은 이렇게 담대함을 우리에게 불러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삶과 죽음을 초월해서 대적하는 자를 만나도 담대함을 얻을 수 있기 위해서는 우리의 삶 자체가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담대한 삶을 산 사람, 죽음의 정신으로 산 사람들만이 영원히 살겠다는 정신으로 죽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담대한 신앙의 비결입니다.
로마 시대 많은 그리스도인이 생겨나니까 로마 황제가 잡아다가 반쯤 죽이라고 명령하니 그 부하가 하는 말이 ‘폐하, 그들은 그렇게 박해를 받으며 고난을 받으면 상급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더 좋아합니다. 그것으로는 막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죽이라고 말하면 부하가 그들은 그리스도를 위해 죽임을 당하면 그 들은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최고의 영예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천국에서 가장 큰 영광을 얻는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아마 죽이면 죽일수록 그들의 믿음이 더 번성할 것입니다.“ 라고 고백을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삶과 죽음을 초월한 신앙이 되고 그런 담대함을 얻기 위해서는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형식으로 가득 차고 외식으로 가득 찬 신앙에서는 이런 담대함으로 살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빌1:29-30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너희에게도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
사도가 이 빌립보 교인들을 통해 듣고 싶어했던 것이 첫째는 복음 신앙을 위해 일심으로 합력하는 것과 두번째는 대적하는 자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 이 두가지를 듣고 싶어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복음에 합당하게 사는 삶이었습니다.
이제 1장에서 사도가 갑자기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이렇게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결국 복음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것이 항상 우리에게 줄겁고 복된 일만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고난과 희생이 있습니다. 희생과 고난 없이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살 수 없고 그것 없이는 결코 복음 신앙을 위해 한 마음으로 합력하거나 대적하는 자들로 인하여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함으로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을 이 신앙 생활에서 실패하는 대부분의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고난 받기를 싫어하고 희생하기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 실패를 가져오는 가장 커다란 원인입니다. 주님도 이 땅에서 울기도 하시고 눈물을 흘리고 안타까워하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분이 이 땅에서 그렇게 고난을 받으면서 산 것은 능력이 부족하거나 죄가 있으셨기 아니라 결국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 뒤를 쫒아서 그처럼 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분과 같은 고난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참된 신앙이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고난을 당하셨으니 우리도 주님과 함께 고난을 당하는 것이 마땅하는 것이 우리의 신앙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사도가 이처럼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면서 단지 우리에게 희생만을 강요하고 고생만을 하라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앞에서 사도는 우리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너희에게 은혜를 주는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그를 위해 고난받게 하려 하심이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만 그리스도로 인한 고난을 주십니다. 예수 믿기 전에도 우리 인생에 고난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고난은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우리의 죄 때문에 우리의 유익을 위해 스스로 자처하는 그런 고난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깊이 깨닫고 나서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충만하게 느끼고 나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결심을 하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길로 걸어갑니다. 그런데 매사가 내 뜻대로 안되고 어려움이 옵니다. 그래도 그 길로 걸어가야 합니다. 내 뜻대로, 내 소원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아서 그래서 그 큰 은혜에 감사하면서 아버지의 뜻대로 살아야 할 텐데.... 그렇게 각오를하고 걸어가는 그 신앙 생활, 거기에는 기쁨과 같이 고난이 있습니다. 그런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나님이 은혜를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누구도 은혜 없이는 그런 길을 걸어가려고 꿈 꿀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고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려고 할 때 우리는 불행하게도 항상 잘못 된 생각을 하기가 쉽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길을 걸어가면서 고난이 오고 어려움이 오면 우리는 너무나 쉽게 그 길을 포기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승리하기보다도 실패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가고자 할 때 고난을 바라볼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크신 사랑을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에 우리들이 능히 이 길을 걸어갈 수 있고 내가 그리스도를 위해 받는 이 고난은 일방적으로 내게 있는 것을 다 빼앗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미 넘치는 은혜를 주셨고 그리고 지금도 그것을 우리에게 주고 계시다는 것을 생각하고 능히 이 고난을 견딜 수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십자가 없이는 면류관도 없고 주를 위해서 받는 고난과 희생이 없이는 상급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떨리는 마음으로 날마다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살도록 아버지의 뜻대로 살도록 우리들이 애쓰고 힘쓰며 이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그렇게 그리스도 예수를 위해 고난을 받아야 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자신이 이렇게 옥 속에 갖혀서 편지를 쓰는 이것도 그리스도께서 주신 사랑과 은혜에 매어서 고난을 받는 이러한 삶의 일부분으로써 옥 속에 갖혀서 편지를 쓰고 있는 것을 빌립보 교인들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이 새벽에 마음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많은 은혜는 우리에게 고난을 받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고난을 통해 하나님은 당신의 뜻들을 이루어 가십니다. 우리들이 그리스도를 통해 은혜를 받았으면 이제 고난을 받음으로 이제 아버지의 뜻들을 이루어 가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어렵고 힘들 때마다 내가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복음에 합당한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주님이 주시는 은혜를 생각하며 위로를 받으며 또 능히 고난을 받는 그런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빌2:1-2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에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여 한마음을 품어
사도가 바로 앞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고난도 받게 하기 위해 은혜를 주셨다는 것을 말을 하였고 이제 그러므로 1절과 2절 사이에서 ‘뜻을 합하여 마음을 같이하여’ 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앞에서 복음에 합당한 삶을 아야기 하면서 하나는 대적을 인하여 두려워하지 않는 것과 하나는 복음 신앙을 위해 일심으로 합력하는 것을 말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믿을 뿐 아니라 고난도 받게 하기 위해 은혜를 주셨기 때문에 함께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받는 처지에 있는 교회의 많은 교인들이 같은 뜻으로 같은 마음을 품어야 한다는 권면을 우리에게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느냐고 하면 단지 자신들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뿐만 아니라 복음 신앙을 위해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온 성도들이 교회가 왜 존재하고 우리가 왜 하나님께 은혜를 받았는지를 기억하면서 같은 생각을 가져야합니다. 하나님 앞에 많은 은혜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그 은혜에 부합한 삶을 살지 못할 때 그 은혜는 은혜되지 않습니다. 우리 주위에는 하나님께 은혜를 많이 받았는데 그것보다도 훨씬 더 뒤로 물러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매우 잘못 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은 환경이나 여러 가지 어려운 여건과 많은 힘든 상황들이 자신을 힘들게 하고 있다고 생각 하지만 사실은 하나님 하나님께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위해 살지 못하므로 그런 곤고한 삶을 계속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믿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은혜를 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이제 옛날 일을 버리고 주님을 위해 살게 하기 위해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주님을 위해 살면 살수록 점점 더 풍성해지고 그리고 우리를 점점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만들어줍니다. 그러나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도무지 주님을 위해 살지 않고 희생하지 않으며 주님을 위해 살되 정말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없는 이런 마음은 모두 우리의 신앙을 견고하게 하지 못합니다. 한 사람 한사람 그리스도인이 이처럼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통해 이 은혜를 인하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주님을 위하는 삶을 살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가지고 살수 있을 때, 이 복음을 위해 합력할 때 이 복음이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되고 이 성도들이 복음을 마음 속에 담아두고 사는 능력과 힘을 받는 이런 교회 속에서 계속 일어날 때 그 때 이 교회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명을 감당하는 교회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복음 신앙을 위해 뜻을 같이 해서 한 마음을 품기 위해서는 먼저 교인들이 은혜를 받아야 하고 그리고 교인들이 주님이 자신에게 은혜를 주신 이유가 이 복음의 사역을 위해 은혜를 주신 것이다라는 강력한 소망과 소원을 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한마음은 무조건 온 교인이 마음만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반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되어야지만 그 교회가 주님을 위해 고난을 받으면서 복음 신앙을 파수하고 전파하고 악한 대적하는 사람들을 인하여 담대함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아침에 하나님 앞에 우리에게 이런 많은 은혜를 주셨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잘 살 수 있도록 우리들이 신앙 생활을 잘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기도하고 두 번째는 온 교회가 주님이 우리 각자 각자에게 은혜를 주신 것을 기억하면서 한마음을 품어 복음에 합당한 살 수 있도록 기도하여야겠습니다.
빌2: 3-4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를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하라
1절과 2절에서는 교회가 무엇인가 선한 일을 하고자 할 때 한 마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사도가 권고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나쁜 일을 하기 위해 싸우는 적은 없습니다. 좋은 일을 하려다가 싸움이 일어납니다. 좋은 일을 하려다가 의견의 차이를 가지고 다툼이 일어납니다. 인간은 감정을 가진 동물이기 때문에 좋은 일을 교회에서 하려고 하여도 그 방법으로 인하여 다툼이 생기면 그 다음에는 그 일보다도 감정이나 마음 자체가 더 크게 떠올라서 어려움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런 것들을 다 물리치고 마음이 하나 되도록 권면하면서 그런 다툼이 사람들이 각각 헛된 영화를 추구하면서 일어난다는 것을 말하면서 겸손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겸손은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비추어 볼 때 너무나 허물이 많고 부족하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자신이 무가치함을 느끼는 그런 신앙 생활입니다. 우리가 이제 신앙 생활을 하면서 어느 순간에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깨닫고 우리가 아무 것도 아니구나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고 교회에서도 무엇인가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있어서 적용시키는 일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 것 같으면 우리로 인하여 다른 사람이 마음을 상하는 일도 없을 것이고 마음을 같이하는데 별로 어려움도 없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가 오늘 그런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일에 있어서는 매우 유능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삶에 있어서는 매우 빈곤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 생활을 매우 힘겹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한 두 가지 교회 일을 하면서 대 여섯 가지 분쟁이나 다툼을 몰고 다니는 사람이 교회 가운데 항상 많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인들은 어떤 의미에서 많은 일꾼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의 신앙의 분량대로 하나님을 섬기고 또 교회를 섬길 수 있도록 교회가 길을 열어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성숙해지는 것과 같이 주님의 일에도 능숙해지는 사람이 되어야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주님의 참사랑과 은혜를 알고 자기가 누구인지 바로 깨닫는 한없이 낮아지는 그런 겸손의 과정 없이 이렇게 다툼과 허영으로 교회의 일체를 깨뜨리는 삶은 우리들이 매우 경계해야 하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에 와서는 자기를 죽이는 이는 연습을 많이 해야 합니다. 교회는 자기는 아무 가치가 없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고백은 그렇게 하는데 만나서 모여 무엇을 하려고 하면 잘 안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를 죽이는 연습이 많이 해야 합니다. 교회에 무슨 강제적인 수단이 있습니까? 징벌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고 하더라도 출교 같은 것들이 모두 영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 사람 자신이 영적인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됩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가장 한심한 사람이 교회에 와서 객기 부리는 사람들입니다. 오죽이나 못났으면 교회에 와서 객기를 부리겠습니까? 그러니까 회의 중에 혈기를 부리고 교회에 와서 혈기를 부리는 사람은 정말 부끄러운 사람들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변을 보는 것 같은 부끄러움입니다.
교회 그런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내가 그리스도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이런 고백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자신을 철저히 죽이는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교회에 와서 그렇게 혈기 부리고 특히 하나님의 회중에서 자신의 분노를 드러내는 것은 너무나 성령께서 슬퍼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문을 들어오는 그 순간부터 여기는 술집이나 음식점을 출입하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들어오는 순간 ‘주님, 자격이 없는 사람이 들어옵니다.’ 라는 고백을 가지고 들어와야 합니다. 한 사람만이 아니라 목사부터 모든 사람이 자기 같은 죄인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가 라는 정신이 교회에 있는 동안, 또 교회와 관계되어 하나님을 섬기는 동안 시종일관 유지되어야 합니다. 가끔 교회에서 회의를 하거나 그런 석상에서 그런 사람들을 이렇게 볼 때마다 얼마나 하나님께서 마음 아파하실 것을 생각합니다. 이 빌립보 교회는 사도의 마음에 기쁨을 많이 준 교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기쁨을 많이 주고 헌신된 그런 교회도 사도로부터 이런 권면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언제나 ‘여기는 살아계신 하나님이 계신 곳이구나, 나 같은 죄인이 이렇게 구원을 받았구나, 나 같은 인간이 여기에 나와 앉아 있고 성도들과 함께 수종드는 자리에 있으니 얼마나 하나님께 감사한 일인가’라는 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문제가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낮추는 그 사람이 하나님의 교회에서는 높아지는 사람이고 자기를 높이는 사람이 하나님의 교회에서는 가장 낮아지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삶의 원리를 지킬 때 분쟁은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자기를 돌아볼 뿐더러 각각 다른 사람의 일을 돌아보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돌아본다는 것은 어머니가 자녀를 돌아보고 그리고 간호원이 병자를 돌아보는 것과 같은 그런 마음입니다. 사랑과 도와주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교회 구석구석을 돌아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지체들을 돌아보고 그리고 이웃들을 돌아보는 것은 이처럼 하나님께 큰 기쁨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참사랑과 은혜를 많이 깨닫고 매 순간순간마다 자기를 돌아볼 뿐더러 다른 사람의 일을 돌아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저의 시선을 끄는 것은 사도는 ‘자기도 돌아보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가끔 살림살이 다 팽개치고 다른 사람의 일만에 정신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교회 일을 한다고 하면서 가정은 다 팽개치고 직장에서 교회 일을 하고 직장 물건 가져다가 교회 주보를 만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것은 다 잘못된 것입니다. 자기를 돌아보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교회 생활하는 주부들이 더 집안 일도 깨끗이 하고, 자녀도 반듯하게 양육하고, 남편도 더 잘 챙긴다.’ 그리고 ‘교회 생활하는 남자들이 더 훌룡하게 직장 생활도 잘하고 반듯하더라’는 생각이 들게 하여야 합니다. 그래야지 칭찬 받는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자기를 돌아보고 다른 사람의 일을 돌아보아 모든 면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원리를 가지고 교회를 섬겨야지 그 사람도 교회도 기쁨이 있습니다.
빌 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의 죽으심이라
사도가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으라고 말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의 극치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예수 그리스도의 신분은 낮아지신 신분과 높아지신 신분을 이야기 합니다. 즉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 그리고 이 세상에서 고난 당하시면서 사는 것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다 낮아지신 것입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그 분을 버려두지 않으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셔서 그 분을 부활하게 하시고 그래서 모든 피조물로 그 분 앞에 무릎을 꿇게 하시고 하늘의 권세를 주셔서 온 땅을 다스리고 재림의 주로 오셔서 이땅을 심판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신 것이 높아지신 신분입니다.
그래서 이제 사도가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이 세상에서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낮아지신 삶으로 우리를 섬기시고 하나님 앞에 복종하는 생애를 사셨더니 하나님께서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시지 않았느냐 그러니까 우리도 그분처럼 낮아지는 삶을 살아야 사랑과 겸손을 이룰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들이 이렇게 겸비하게 낮아져서 겸손하게 사람들을 섬기고 온전히 사랑하는 모습을 가질 수 없다고 한다면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의 영광을 버리신 것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스스로 자기의 마음을 높이고 교만하게 사는 데는 밑천이 들지 않지만 그러나 겸손한 삶을 살고 사랑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깊은 인내와 사랑이 필요합니다. 많은 고통이 따를 수 있습니다. 사실 신앙의 세계에서 고통 없이 얻어지는 것은 별로 가치가 없는 것들입니다. 모든 귀한 것은 고통 속에서 얻어집니다. 변하지 않는 우리의 마음과 모난 인격도 고통을 통해서 깨트려지고 낮아진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에서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의 죽으심이라’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가 그렇게 낮아지셨고 예수님이 낮아지심으로 우리를 높이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이셨기 때문에 한없이 낮아지는 생애를 사셨지만 그것이 얼마나 고통을 동반하는 것이었는가를 말하고 그리고 그 낮아지신 예수님을 하나님이 높이시기 전에 마지막에는 생명까지 복종시키고 죽으시는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예수님의 낮아지심과 복종을 통해서 구원을 얻었기 때문에 우리가 더욱 예수님을 본받는 생애를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다 버리고 온전히 낮아진 그 정신과 마음을 본받아서 우리들도 그렇게 온전히 낮아진 가운데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를 위해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누군가를 위해서 교회 안에서 자기의 마음을 낮추고 허리를 굽혀서 사람들을 섬기는 것이 고통스럽다는 것을 느낄 때, 섬기지만 섬김의 대가가 정당하게 주어지지 않고 섬김이 우리에게 고난으로 되 갚아지고 혹은 우리가 사랑하였지만 그 사랑이 미움이나 상처로 되돌아 올때에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종된 생애를 사셨지만 그런 일들이 당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게 예수님이 낮아지신 생애를 사시고 온전히 겸비한 생애를 일평생 사셨기 때문에 그것을 통해서 우리를 위한 구원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 아침에 예수님이 우리를 섬기시고 우리의 구원을 위해 자기를 버려 십자가에 못박혀 죽기까지 복종하고 낮아지신 생애를 사셨으니 그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을 얻은 우리가또한 그런 삶을 살 수 있도록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빌 2:8-11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며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의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을 모두 무릎을 예수의 이름으로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사랑과 자기를 낮추는 겸손을 가르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우리 가운데에 오시고 그리고 우리 가운데서 어떤 일을 하셨는지를 가르치는 가운데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며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예수님의 지상 생애, 낮아지신 생애의 마지막에 대해 묘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자기를 낮추는 절정은 십자가의 죽으심입니다. 그분이 원래 생명이신 분이시고 말씀이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본성상 그가 죽을 수 없는 분이었고 또 죽어서는 안되는 분이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 오셔야지 자기를 죽음의 징벌 아래 두실 수가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많은 죄와 허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셔야 할 것 같으면 그의 낮아지심에 구원을 받았은즉 우리는 그러한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본받아서 낮아지고 겸비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들이 자신을 낮추고 겸비해지고 그리스도의 자기를 버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 같은 사랑을 가지고 지체들을 대할 것 같으면 어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겸손이 우리 안에 못 이뤄질 것이겠느냐 사도가 그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될 때에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입은 사람들이 그 사랑 때문에 살아가는 교회, 그리고 모임이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이렇게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으신 것도 자기보다도 우리를 생각하시는 그런 사랑 때문이었고 그 사랑을 이루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셨지만 죽음을 맛보는 그 비참한 낮아짐의 겸비함을 경험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우리의 삶을 통해서 온전히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이런 두 가지 정신이 필요합니다. 즉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 유익이 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주님을 높이고 내가 낮아지는 그런 겸비한 마음과 나아가서 그런 주위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하고 그를 우리보다 더 깊이 사랑하는 인내, 사랑, 이런 것들이 있을 때 그러한 삶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낮아지고 십자가에 못 박혀서 자기를 버리기까지 겸비함으로 복종하셨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죽이시기만 하지 아니하시고 그 낮아지심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를 지극히 높이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무엇보다도 부활로 높이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것의 주가 되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 부활은 죽으심의 사건의 토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죽고 부활한 다음에는 모든 권세를 주십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대신해서 온 땅을 다스리고 심판하고 통치할 수 있는 권한을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자기를 온전히 버려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의 정신으로 낮아져서 생명의 주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삼으셔서 우리의 주관자가 되게 하시고 통치자가 되게 하시고 심판자가 되게 하심은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그런 행하심을 본받아서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주를 위해 진정으로 낮아지는 자를 높이시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하기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자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보이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모본을 우리에게 제시하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가 그렇게 사셨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얻었으니 우리가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서 살아야 할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이렇게 낮아지고 겸비해지는 사람들은 반드시 그런 삶을 살 수 있도록 힘을 주시고 또 그런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는 낮아지고 버림받는 것 같지만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서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셔서 당신의 자녀로 손색없는 자로 세운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예수의 마음을 품고 살아갈 때 우리가 낮아지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며 다름 사람을 섬기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이 그렇게 고통스러운 일만은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빌 2: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그러므로’,‘그러나’ 라는 말이 나올 때는 일단은 앞뒤가 매우 밀접한 연결을 보이기 때문에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도가 무엇을 하다가 ‘그러므로’ 라고 말하였습니까? 이미 사도는 앞에서 겸손과 사랑을 말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에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의 죽으심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 앞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주로 삼으신 이러한 그분의 생애를 언급하였습니다. 결국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가 너희를 위해 행하시는 것을 보면서 그러므로 너희는 이제 구원을 이루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이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셨다는 것과 주님이 어떤 분이시다라는 것에 단지 감탄만을 하면서 바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이 많으신 분이시다는 것을 알았으면 그것이 무엇인가 우리의 삶에 영향을 주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 능력을 행하실 수 있는 분이고 하나님의 아버지의 권능을 가지고 이 세상의 만물을 다스리신다는 것을 알았으면 그것 자체가 우리의 삶에 영향을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옳게 반응하는 신앙 생활이라는 것입니다. 더욱이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과 삶이 과거의 우리의 삶의 어떤 영향을 주었다는 것을 알았으면 오늘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무엇인가를 그분을 위해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 안에 ‘그러므로’의 신앙이 안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말을 들어도 ‘그랬나 보군’ 하는 이런 식으로 반응하니까 아무리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좋은 이야기를 들어도 삶에 대한 반응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어제도 출판사에 있는 사람과 통화를 했는데 “어떻게 하여야 십자가를 경험합니까?”라고 묻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경험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하시는 일이지만 그 십자가를 경험하기 위해서는 그 십자가를 경험할 수 있는 자리에 서야 합니다. 그 자리에 선다고 하여도 모든 사람이 경험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자리에 서지 않으면 경험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는 우선 십자가가 정확히 울려 퍼지는 곳에서 깨닫는 일이어야 합니다. 그리고‘그러므로’의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지 지속적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경험됩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주시며 죽으심은 이제 우리로 하여금 우리를 위해 살게 하려 하심이 아닙니다. 깨닳았으면 이제는 주님이 나를 위해 살게 하심이 아니요 주님을 위해 살게 하시려함이고 주님이 나를 위해 버리셨으니 이제는 나도 주님을 위해 나 자신을 드려야겠구나 그러면 어떻게 하여야 주님을 위해 사는 삶일까를 고민하고 실천하는 사람의 삶 속에 진정한 십자가에 대한 감동과 감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러므로’의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니 아무 관계가 없는 주님이 무슨 일을 하셨든 나는 나대로 산다고 생각하면 아무리 예수님을 믿으면서 나는 나대로 주님은 주님대로 사는 삶이 됩니다. 그러니 아무리 예수님을 오래 믿어도 도무지 사람이 바뀌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도는 ‘나 있을 때나 너희를 떠나 있을 때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결국 신앙이라는 것은 누구에게 보이기 위함이 아닙니다. 또한 목회자의 가르침이 필요하고 절대적입니다. 그러니까 매우 특별한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불러 낸 목회자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국민학교 3학년생 30여명이 모여서 아무리 머리를 맞대고 궁리를 하여도 미적분을 풀 수가 없는 것입니다. 모르니까 안되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역의 길에 들어서기 위해서는 어느 학교를 단계를 거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깊은 신앙의 세계 속으로 들어간 사람의 경험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예전에 일제 시대 같은 때에 신학교가 없어도 그래도 한국 교회에 기록에 남는 훌룡한 목사님이 많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오늘날의 목회자를 보며 ‘금 그릇에 담긴 나무와 같은 목자들’이라고 하고 ‘예전에는 나무 그릇에 담긴 금 같은 목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외형이 문제는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오죽하였으면 일제시대 초기에는 목사들도 화장실에 가는가라는 말을 들을 정도였겠습니까? 이 세상의 학문이나 자랑이 아니라 신령하고 깊은 믿음의 사람들이 교회를 이끌어가야 합니다. 사도가 이제 “그렇게 그리스도에 대해 내가 너희에 대해 다 가르치고 옥에 갖혔고 하나님이 너희에게 큰 은혜를 주셨으니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라고 말하면서 ‘그러므로’의 신앙이 사람 앞에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개인적인 몸부림이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제 더욱 복종하면서 구원을 이루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구원이라는 것은 천국가는 것이 아니라 ‘성화의 구원’입니다. 구원이 이미 이루어진 것도 있지만 이루어 가는 것도 있다라는 것입니다. 이제 주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고 우리가 그분을 아멘하고 믿었기 때문에 주님이 즉시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입적시켜 주셨습니다. 그리고 정죄함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나라로 우리를 부르실 것입니다. 이렇게 이루어진 구원은 즉시 이루어졌지만 또 한편으로는 아직 이루지지지 않고 남은 것은 현재적으로 우리가 미래의 맛볼 하나님의 나라를 마음속에서 맛보고 또 한편으로는 구원을 이루어 가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거룩한 구원입니다. 성화의 구원입니다. 날마다 날마다 믿음 생활하면서 주님을 닮아갑니다. 포악하고 더러운 성품을 버리고 더 온전히 주님을 닮아갑니다. 결국은 거룩의 구원이고 성화의 구원입니다.
이런 것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진리, 그분의 복음 앞에 복종할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무엇인가 환경이나 하나님의 말씀이나 기도 같은 것으로 우리를 다루어 가시려고 할 때 도무지 복종하지 않습니다. 김장철에 배추가 소금 물 속에 들어가지 않고 위에만 있으려고 하여 절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온전히 복종하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순복하면서 온전히 복종하는 삶을 살아갸야 합니다. 그때 우리가 점점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을 사람으로 변해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변화되어 갈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삶을 살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 사람을 보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행복이 되고 자신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기쁨이 있으니까 행복합니다.
결론은 아무리 예수님이 여러분들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어도 막 살면 행복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래서도 안되는 것입니다. 정성이 들어가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이렇게 살면 주님이 어떻게 생각하실까 라는 고민이 끊임없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빌2:13-14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니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사도가 그렇게 자기를 낮추는 겸손과 사랑을 강조하며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본을 따라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너희가 구원을 이룸을 강조한 후에 사도가 “너희 안에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니” 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행하시고 역사하는 방법이 당신이 이루었으면 좋겠다는 뜻을 우리 안에 소원으로 두시는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 안에서 살아가고 은혜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의 소원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가 무슨 소원을 갖고 있는가가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줄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자기를 낮추고 사랑하면서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그의 은혜 속에서 살려고 하지 않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소원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가고 하나님 뜻에 순종하며 살면 하나님의 마음과 참 일치하고 맞는 그런 뜻을 우리들이 품으면서 살 수가 있고, 그런 뜻을 우리가 품으면서 살면 우리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계속 이루면서 살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에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뜻을 우리 맘에 품지 못하고 산다면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신의 뜻을 이루면서 살 가능성이 많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가 여기서 하는 이야기가 바로 이것입니다. ‘너희 안에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너희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품고 살 때 하나님께서 너희 가운데 이루고 싶어하시는 모든 일들을 너희를 통해서 하나님이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결국은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서 당신의 일을 해 나가시는 방법이 우리의 동의나 허락을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를 움직이셔야만 그 하나님의 뜻들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이 하고 싶어하는 일이 있으시다면 사람들이 결국은 그런 하나님의 하고 싶으셨던 일이 처음에는 하나님 혼자 하고 싶으셨던 일이 시간이 흐르면서 모든 사람이 정말 그렇게 일이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라는 마음을 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에 이러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이런 소원과 마음을 가지고 하루하루를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하나님이 계셔서 하나님이 자기의 뜻을 이루어 가시려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 앞에 훌륭한 도구가 되어서 그런 거룩한 성도가 되어야합니다. 여러분들도 오늘 말씀을 기억하면서 하나님이 끊임없이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뜻을 주시도록, 그래서 여러분이 마음먹고 행하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반영이 되도록 그렇게 되길 바랍니다.
5. 빌립보서 2:15-29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 내가 디모데를 속히 너희에게 보내기를 주 안에서 바람은 너희의 사정을 앎으로 안위를 받으려 함이니 이는 뜻을 같이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 그들이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버지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내 일이 어떻게 될지를 보아서 곧 이 사람을 보내기를 바라고 나도 속히 가게 될 것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그러나 에바브로디도를 너희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노니 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 된 자요 너희 사자로 내가 쓸 것을 돕는 자라 그가 너희 무리를 간절히 사모하고 자기가 병든 것을 너희가 들은 줄을 알고 심히 근심한지라 그가 병들어 죽게 되었으나 하나님이 그를 긍휼히 여기셨고 그뿐 아니라 또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내 근심 위에 근심을 면하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더욱 급히 그를 보낸 것은 너희로 그를 다시 보고 기뻐하게 하며 내 근심도 덜려 함이니라 이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그를 영접하고 또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 (빌 2:15-29)
빌2:15-16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없는 자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도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나로 자랑할 것이 있게 함이라”
(빌2:15-16)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모본을 받아서 사랑과 자기를 낮추는 복종으로 겸손하게 살아가야 할 마지막 이유는 흠없이 온전해지기 위함입니다. 물론 절대적인 의미에서 흠이 없고 완전한 사람은 이 세상에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매일매일 온전하게 살려고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룩해져가는 사람의 온전함과 막 산 사람의 인생은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거의 짐승과 인간의 차이와 같습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에게 그렇게 거룩해질 수 있는 힘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하나님이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고 정결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주님의 그런 참사랑을 우리들이 이런 거룩의 은혜 속에서 깨달아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완전해질 수는 없지만 하늘에 계신 아버지처럼 온전해지려고 애를 쓰고 주님의 모습을 더 많이 닮으려고 애를 쓰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의 삶이 조금씩 조금씩 더 온전해지는 삶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들이 더 하나님의 말씀에 감화를 받고 그리스도 예수의 모본을 생각하면서 더 낮아지고 겸비해져야 함은 말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흠없이 점점 더 온전해지면 어그러지고 거스려진 세대 가운데서 빛들로 나타났다고 사도는 말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 예수의 빛을 발한다는 뜻은 자기가 얼마나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온전히 닮아가는가에 의해서 사람들에게 빛으로 빛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중요한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개인적으로 삶이 거룩해져가는 성화없이는 우리가 이 세상에 빛들로 나타날 수 없습니다. 우리들이 빛들로 나타나면 그런 삶을 통해서 이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가 우리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가 바로 나로 자랑할 것이 있게 해 달라는 것은 그렇게 빛들로 나타나서 어그러지고 거스려진 세대 가운데서 주님을 드러내는 인생을 살게 된다면 그것은 그 인생을 돌보고 수고한 사도에게 있어서는 말할 수 없는 자랑거리라는 것입니다.
영혼을 위해 수고하고 일하는 모든 사람들의 가장 커다란 소망은 오로지 그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서 사는 많은 성도들이 자신의 가르침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대치할 수 없는 커다란 영광입니다.
빌2: 17-18
‘만일 너희 믿음의 재물과 봉사 위에 나를 관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 ’
그리스도인들이 정성을 기울여서 바르게 살아야 할 이유는 이 어그러지고 거스린 세대 가운데 빛들로 나타나기 위함입니다. 삶에 의해 입증되지 않는 모든 신앙은 참 신앙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냥 막 살면 엄청난 모순에 빠지는 것입니다. 무슨 모순이냐면 예수님이 그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그를 살려주셨고 본인도 예수님이 나같은 죄인을 살려주신 은혜를 체험하고 인정하고 구원을 받았는데 그 사람이 살아 있는 그자체가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하게 하는 요인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아서 내가 그 십자가의 사랑으로 용서를 받아 새 사람이 되었다면 내 마음 속에는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나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나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로 살았으면 좋겠다라는 소원을 갖는 것은 당연한데 그런데 실제에 있어서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다고 이야기를 하는데 사람들이 나의 삶을 보면서, 내가 막 사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이 안 계신다는 것을 확인하고 하나님이 거룩한 분이시다라는 것을 사람들이 알지 못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 교회에 열심히 많이 있어도, 많은 은혜를 경험해도 결국은 세월이 흐른 후 우리 안에 이상한 모양의 선교적인 상황이 펼쳐진 것입니다.
사도가 어그러지고 거스린 세대 가운데 빛으로 나타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시대가 어그러지고 거스린 시대입니다. 하나님이 원하고 기뻐하시는 방향과는 정면적으로 다른 시대라는 것입니다. 마치 물고기가 물을 거슬려서 헤엄을 치듯이 우리 살아있는 신자들이 근본적으로 이 세상이 흘려가는 방향과는 다르게 거스르며 살도록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절대 막 살면 안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다 거품과 같은 인생들이고 짐승과 같은 인생들입니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이 너희가 이렇게만 살 수 있다면, 너희가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그런 삶의 거룩을 위한 그런 노력 위에 내가 재물과 관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기뻐한다고 말할수 있습니다. 재물은 예물이고 관제는 뿌리는 제사입니다. 그러니까 관제에 재물은 보통 피나 포도주입니다. 이것은 너희들이 하나님 앞에서 이런 거룩한 삶을 위해 믿음으로 살고 헌신하며 희생하면서 이렇게 복음 신앙을 위해 협력하고 자신들의 거룩한 사랑과 겸손의 삶을 성취해 가는데 내가 너희들이 그렇게 살아가는 그 위에 나 자신을 무엇인가를 보태기 위해 주님이 나의 순교를 원하신다고 하더라도 나는 기뻐하고 기뻐할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결국은 너희의 희생과 수고와 내가 너희를 위해 죽는 이 거룩한 순교의 피가 너희를 어그리지고 거스린 세대 가운에서 빛들로 나타나게 할 수 있기 때문에 나 자신을 온전히 드려도 행복하고 걱정이 없으며 기쁘다는 것입니다. 나는 죽고 예수 그리스도는 너희를 통해 사시니 그것이 나는 참 기쁘고 즐겁다는 것입니다. 옥 속에 갖혀 있으니 더더욱 그런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빌립보 교인들이 이 옥에 갖힌 바울의 소식을 들어면서 얼마나 염려를 하고 걱정을 하였겠습니까? 그가 빌립보 교인들에게 참된 가치, 우리의 생명의 참된 가치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내 목숨을 보존하는 그것이 아니라 너희가 어그리지고 거스린 세대 가운데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을 본받아서 그 정신으로 낮아지고 사랑하고 온전해져서 이 어그러진 세대 가운데 빛들로 나타나서 너희들의 삶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질 수 있다면 그 너희의 헌신 위에 내가 관제처럼 쓰여져도 나는 기뻐하고 기뻐할 것이다 왜냐하면 참된 가치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고 너희의 삶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정신으로 살면 얼마나 그 사람을 하나님이 축복해 주시겠습니까? 신앙에는 회색지대는 없습니다. 중간지대는 없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자랑하거나 부끄러워하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주님을 향해 살거나 세상을 향해 살거나 둘 중의 하나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해 살거나 세상을 향해 살거나 둘중의 하나입니다.
빌2:19-22
‘내가 디모데를 속히 너희에게 보내기를 주 안에서 바람은 너희 사정을 앎으로 안위를 받으려 함이니 이는 뜻을 같이 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 밖에 내게 없음이라. 저희가 다 자기를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비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내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
사도 바울이 감옥에 투옥된 기간이 길어지니 빌립보 교인과 사도가 서로 근심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제 성경에 보면 뚜렷이 잘 나와 있지 않지만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 사람을 보내고 싶어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뭔가 사도 바울이 옥 속에 있을 때 소위 복음 사역자들에게 배신감같은 것을 느낀 것 같습니다. 이 글에서도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 밖에 내게 없음이라. 저희가 다 자기를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 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모종의 실망감 같은 것들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바울은 아마 사람들을 보내고 자기가 옥 속에 갖혀 있으면서도 선교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시키고 하였는데 그것이 잘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그 와중에서도 아주 뛰어나게 충성되게 사도 바울의 명을 따라 소식을 전하게 하고 그 일을 위해 파송된 디모데의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실망시킨 사람들이 앞에서 나온 허영으로, 다툼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아닌가 합니다. 그러면서 디모데가 최종적으로 빌립보 교회에 보냄을 받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빌립보 교회에 오고가는 것이 그렇게 간단한 일만은 아니고 어떤 위험을 있었던 것이 아닌가도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이 놀라운 능력으로 복음을 전하러 다니는 사람이었으니 얼마나 놀라운 기적과 이적이 따라다녔겠습니까? 스치고 지나가도 수많은 사람들의 영혼의 변화가 있었을 것입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전기에서 소명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서 자석에 대해 이야기를 합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지나가시기만 하여도 어부들이 예수님께 달라붙고 마태와 같은 세리도 달라붙는 이런 놀라운 일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양의 문을 통과하고 그리스도 예수를 진정으로 통과하고 주님을 위해 부름을 받고 사역을 하는 사람은 한사람 한사람 만나는 노력이 없어도 자신의 사역 길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달라붙는 것입니다. 또 사람들에게 놀라운 인생의 변화를 가져다 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통해 역사하는 하나님이 가져다 주는 것입니다. 좀 표현이 이상하지만 수많은 추종자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일을 보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나는 거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가슴 아프게하는 것은 그렇게 해서 주님을 아는 모든 사람들이 끝까지 신앙을 지키는 것도 아니고 끝까지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충성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고 충성된 삶을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목회자에게 도움을 주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도 바울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를 추종하였겠습니까? 그리고 그가 아주 탁월한 하나님의 능력, 성령의 나타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그가 지나갈 때마다 사람들의 인생이 바뀌고 그에게 달라붙는 역사가 나타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결론은 다 자기의 유익을 구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다 자기를 구하고’라고 나옵니다. 자기의 유익을 구하였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초라한 결과입니다. 그렇게 죽은 자도 살리는 놀라운 역사를 이루었지만 결국에는 다 자기의 유익을 구하였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그리스도 안에 맺어진 관계가 치사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예수의 복음을 함께 듣고 구원을 받고 예수의 일을 함께 한다는 사람들이 쉽게 이야기하면 주먹 세계의 의리만큼도 힘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일종의 그런 배신감을 느낀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이었기 때문에 과도하게 배신감을 느껴서 주의 일을 하는데 지장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도는 그런 사람들을 의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보면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데로만 산다면 얼마나 하나님의 교회가 부요해지고 하나님이 얼마나 영광을 받으시고 우리들이 얼마나 충성되게 살까를 생각합니다. 만약에 주님이 나를 판단하실 때 저희는 다 자기의 유익을 구하였고 할 때 내가 그 안에 들어간다고 하면 내가 어떻게 바로 산 인생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입니다. 사람들을 의지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목회를 하면서 이렇게 살면서 지내면서 가슴이 싸하게 식으면서 아픔을 느끼는 것은 저 지체가 어떻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이 자리에 세워주셨는데 저렇게 싸늘하게 식어가는구나! 하나님이 그렇게 자기에게 목회자를 통해서 은혜를 주시는데 그런 목양의 관계를 모두 거부하고 하나님께서 세워 주신 그 자리를 박차고 저렇게 살아가는구나 라고 생각될 때 싸하면서 아픈 마음이 생길 때 이것은 내마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이구나 하나님이 저 사람을 향해서 이런 마음을 가지고 계시는 구나라는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많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변화받고 산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사도의 눈에 ‘저희가 다 자기의 유익을 구하고’라고 보일 때 그러면 그들이 다 주의 일를 팽개치고 산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다툼과 허영으로 하였지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한다고 다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문제는 은혜를 받고 배교를 하는 것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의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신 자리에서 사도와 그러한 좋은 관계를 가지고 함께 복음을 들으면서 감격하고 감동을 받던 아름다운 하모니, 아름다운 관계가 모두 파괴된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뭔가 자기 뜻대로 주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하긴 하는데 다툼과 허영으로 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세례 요한이 세례를 주었을 때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려 할 때 세례 요한이 어떻게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줄 수가 있겠습니까? 할 때 예수님이 겸손하게 이렇게함으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이 마땅하니라 할 때의 그런 정신이 사라진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어떤 사람으로 나타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입었고 주님의 일을 안하는 것은 아니지만 주님이 판단하실 때에 자기의 유익을 위해 자기의 자리로 돌아간 사람으로 나타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어떻게 은혜를 받아서 여기에 서 있는지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우리가 막 살면서 대충 하나님께 봉사하는 이런 것을 얼마나 하나님이 아파하시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누구의 유익을 구합니까?
그때 한 사람이 있었는데 디모데였습니다. 그는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일을 진심으로 생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도는 이 디모데를 빌립보 교인들에게 보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 보실 때에 여러분들이 이런 사람이 되길 바랍니다.
빌2:21-22
‘저희가 다 자기를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비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내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
그 시대나 이 시대나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은 많지만 충성된 사람은 매우 소수였던 것 같습니다. 더욱이 하나님의 마음에 맞게 그렇게 충성된 사람은 정말 소수일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써도 그 사람이 우리의 마음에 맞기가 쉽지 않는데 하물며 완전하시며 우리 위해 아들을 주신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그런 충성된 사람이 얼마나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바울도 복음 사역을 하는 동안 많은 동역자들이 함께 있었을 것입니다. 더욱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기적과 놀라운 은혜가 나타났으며 언제든지 은혜받은 사람은 자기를 바쳐서 헌신하고 싶어 했었을 것이며 마음은 더욱 열렬하게 바울을 따르는 사람을 만들어 내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제 빌립보서를 쓰면서 바울이 자신 속에 있는 마음을 고백하면서 많은 사람들 중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고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선 우리는 이 본분에 들어가기 전에 정말 하나님 앞에 우리들이 그저 일꾼으로 남을 것인가 충성된 자로 기억될 것인가라는 선택을 강요받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기회주의적인 사람이 될 것인가 아니면 충성스러운 사람이 될 것인가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볼 때 다른 사람들은 다 자기 유익을 구하고 그리스도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고라고 말할 때 우리들이 그런 사람들의 부류에 들어갈 것인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부류에 속한 사람의 속에 들어갈 것인가는 우리들이 오늘을 어떻게 사는가에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마음에 합당하게 사는 사람들에게 당신의 뜻도 보이시고 물질도 주시고 하나님을 아는 놀라운 지식을 알 수 있는 권한을 그에게 베풀어 주십니다. 어떤 식의 삶을 살아서 하나님 앞에 인정을 받아야 할 것인가가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긴장하며 살아야 할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디모데를 예를 들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자기의 유익을 구하고 였지만 디모데는 충성스러운 사람이었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디모데가 어떤식으로 충성스러운 사람이었는지 고백하고 있는데 우선 첫재로 연단받은 사람이었다는 것이니입니다. 그러니까 디모데가 고난을 받으면서 하나님을 섬겨온 것은 하나님도 아시고 온 교회 빌립보 교인들도 알 수 있을 정도로 고난을 많이 격으면서 연단된 가운데 하나님 앞에 충성스러운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온실에서 크는 식물은 계속 온실에게서만 자라야지 밖에 내어놓으면 타 죽습니다. 그 복음의 현장, 믿음의 싸움의 현장은 엄청난 싸움이 있는 곳이어서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우리의 많은 힘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그 많은 힘과 많은 정력을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도 단거리 경주와 같은 한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언제 끝날지 모르는 싸움입니다. 한 마음으로 살기에는 너무나 긴시간입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해 질때까지 수없이 요동치는 우리의 마음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특별한 종을 미리 택하셔서 강력한 연단을 겪게 하는 것입니다. 생과 사를 넘나드는 그런 치열한 연단의 과정을 겪게 만드셔서 그 한 사람을 하나님 앞에서 충성된 사람으로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저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합니다. 영화 같은데서보면 절대 안 죽는 군인들이 나오고 그는 마치 사람 죽이는 기계 같아서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무수한 총알 속에서 살아남는 사람이 나옵니다. 처음에는 그 사람들도 우리와 같이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지독하게 생과사를 넘나드는 엄청난 훌련을 받은 후에 정말 어마어마한 저력을 가진 군인들로 다시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그런 사람들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마찬가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오게 하는 이 거룩한 사역에 많은 수단과 많은 방법, 인간이 만들어 낸 지혜 같은 것도 도움이 되지만 문제는 방법이나 좋은 도구들이 결국은 하나님 손에 붙잡힌 사람의 손에 붙잡힐 때에 유익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신의 부으심은 방법과 제도 위에 부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 자체에 부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이 하나님께 충성스럽게 살아서 주님의 나라는 위해 주님이 많은 연단을 겪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외적인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연단을 통해서 정결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문제는 한사람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능력에 붙들린 강력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그는 정결해져야 합니다. 연단을 통해서 단련되어지고 정결해지고 또 단련되어지고 정결해지는 과정을 계속 겪으면서 불로 연단된 금과 같이 정결해지는 것입니다. 단단해지는 것입니다. 그런 쇠와 같은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사용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바울과 인격적인 관계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실은 자신이 아비에게 함과 같이 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역은 혼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특별히 바울에게서 디모데는 배우고 그리스도의 모본을 익히고 어떻게 주를 위해 사는지를 배우고 습득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이 이 디모데를 가르치고 훈련시키는 통로이기도 하엿습니다. 적절한 스승을 만나 그리스도 예수를 배우고 하나님을 어떻게 섬길지를 배 운사람들은 축복받은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혼자 그리스도를 배우는 것보다 훨씬 쉽고 실제적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디모데는 결국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을 위해 충성한 사람이 아니라 복음을 위해 수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으로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결국에는 복음을 위해 쓰여진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전쟁을 한다하더라도 어떤 사람은 비행기를 몰고 가서 폭격하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비행기를 닦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그 사람들을 위해 밥해 주는 일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그 사람들이 사용하는 화장실을 청소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하나의 기능을 살펴보면 전쟁과는 상관이 없는 것 같은데 그 모든 기능이 합해져서 전쟁을 이루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의 백성도 어떤 사람은 직접적으로 어떤 사람은 간접적으로 하지만 결국은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교회가 거룩한 각성으로 하나님의 진리 앞에 깨어나는 그 일을 위해 수고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충성스럽게 살았던 사람은 함께 일하던 사람이 사라져도 변함없이 하나님 앞에 충성스럽게 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 앞에 충성하였던 사람은 사람이 사라지고 나면 어떻게 할줄 몰라서 정신을 못 차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삶을 살아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모두 합력해서 그래서 복음을 위해 사는 삶, 그 능력이 넘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빌2:23-25
‘ 그러므로 내가 내 일이 어떻게 될 것을 보아서 곧 이 사람을 보내기를 바라고 나도 속히 가기를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디모데는 연단 가운데서 주님 앞에 쓰여서 사도 바울에게 요긴한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요즘으로 말하면 전도사쯤 되는 에바브로디도를 너희에게 보내겠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에바브로디도는 빌립보 교회에서 보조적인 교역자였는데 빌립보 교회 교인들이 사도 바울이 쓸 것을 도와주는 물질을 에바브로디도가 바울에게 가지고 왔다가 무슨 병인지는 몰라도 몸이 아파서 고생하였는데 이 이야기가 빌립보 교회에 들어가서 교인들이 걱정을 하는 것을 알고 에바브로디도가 그 사람들의 근심으로 인하여 고민을 하니까 바울이 디모데를 보내기 전에 에바브로디도를 보내어 그렇게 큰 병이 아니었음을 빌립보 교인들에게 알게 하여 서로간 근심을 덜어주려고 한 것입니다.
제가 20년 전에 한 주간 동안 금식을 하면서 빌립보서를 수십번 읽었습니다. 그 때 은혜받았던 대목 가운데 한 곳이 이구절입니다. 빌립보 교회가 돈을 모아서 선교에 쓰라고 모아주니까 에바브로디도가 그것을 가지고 이곳에 와서 열심히 섬기니 아파서 누웠고 그가 아파서 누웠다는 소식을 듣고 빌립보 교회가 걱정을 하고 기도를 해주었습니다. 그런 사정을 에바브로디도가 알고 나 때문에 교회가 걱정을 하는구나 하는 생각에 다시 걱정하고 이 사람들이 서로 걱정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바울이 걱정하며 이 사람을 보내는 것입니다. 이런 아름다운 관계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도의 관계가 아니겠는가 생각하었습니다.
어디서 우리들이 이런 사랑을 쉽게 찾아볼 수 있겠습니까? 피도 살도 섞이지 않는 사람들이 이렇게 사랑하는 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도들의 참된 사랑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런 삶을 우리들이 살아야 합니다. 그 사람이 신앙 생활을 하면서 성도들 속에서 경험하는 참된 기쁨과 참된 즐거움이 없다고 할 것 같으면 그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뭔가 문제가 있고 부족한 것이 있음을 보여준느 것 입니다. 이런 관계가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는 관계인지 모릅니다.
그러면서 이 에바브로디도를 소개하는 것입니다. ‘함께 형제된 자요, 수고하는 자요 군사된 자요 사자라’고 표시하고 있습니다. 그런 것을 보면 사도 바울이 개인적으로는 박해와 고난을 많이 당한 고생길을 걸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은 언제나 혼자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정말 하나님을 만나고 충성스럽게 돕는 동역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주님이 보실 때에 이 에바브로디도를 사도는 말하길 한 형제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에바브로디도를 향하여 품었던 뛰어난 감정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형제였다는 것입니다. 즉 에바브로 디도와 사도 바울 두사람이 긴밀하게 하나로 연결되어 있고 결속되어 있는데 그것이 결국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맺어준 하나님의 자녀의 관계였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형제라고 부를 수 있는 관계가 족속하였다는 것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이 이 두 사람 속에 얼마나 깊이 박혀 있었는가를 보여줍니다. 생사를 초월해서 눈 앞에 있는 이익을 초월해서 그들은 형제였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이 각자의 마음속에 깊이 심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를 만난 사람이 각자를 형제라고 부를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이렇게 정말 영혼과 영혼이 연락된 그런 굳센 목양의 관계, 나아가서는 함께 하나님을 섬기는 기쁨을 나눌 수 있는 목양의 관계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진정한 복음에 의한 감화가 하나님의 교회에 충만해야 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알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서 각사람의 심령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진정으로 변화되어서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분명해지고 우리가 예수의 피로 사신바 된 것이 새겨지지 아니하면 우리는 먹고 마시는 관계 이외에 아무 관계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에바브로디도와의 관계가 형제의 관계였습니다.
함께 수고한 자였습니다. 그들은 서 있는 자리는 달랐지만 한가지를 위해 모두 함께 수고한 자들이었습니다. 그 사람의 인간성을 보려면 무거운 것을 들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일을 시켜보면 그 사람의 인간성이 들어납니다. 서로 힘을 다해 들어야 들리는데 무거운 것을 들 때 항상 함께 수고하지 않고 들지 않는 자가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에바브로디도는 다른 사람은 어떠하든지 자기 있는 힘을 다해 그 복음 사역이라는 무겨운 짐을 사도 바울과 함께 들었던 자로 사도 바울의 마음 속에 영원히 새겨지고 아로새겨진 사람이었습니다. 제가 전에 있던 교회에서 누군가가 그 교회에서 충성을 한다는 보고가 되고 인식이 되면 목이 메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무거운 짐을 드는 사람들 간에 끈끈한 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바라보는 마음도 사도 바울이 우리들을 바라보는 마음과 상당히 흡사할 것이라고 생각 합니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잡하시기 전에 한 여인이 향유를 부은 사건을 기억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여인이 이상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을 때 예수께서는 그 여인을 괴롭게 하지 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위해 사랑으로 쏟아부으신 사람의 편입니다. 그가 하나님을 섬기고 복음 사역을 위해 부름을 받았음에도 불고하고 최선을 다하지 않고 충성스럽지 않다면 그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는 단지 자기의 복음 사역을 밥벌이나 체면치례용으로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복음 사역에 있어서 최고의 가치는 주님을 향한 사랑이고 주님을 향한 사랑은 영혼 사랑으로 나타나서 혼신의 힘을 쏟아붓도록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가 이 에바브로디도를 생각할 때 함께 수고하는 사람이라는 고백을 가능하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빌2:25
‘그러나 에바브로디도를 너희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노니 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된 자요, 너히 사자로 나의 쓸 것을 돕는 자라’
바울에게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바울을 통해 은혜를 받고 변화를 받아 주를 위해 살아보려고 한 사람은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유익을 구해 떠나갈 때 에바브로디도가 바울에게 있어서 함께 수고하는 자로 나타났습니다.
세 번째는 바울이 에바브로디도를 평가 할 때 군사된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먼길을 마차를 타고 왔다가 병에 걸려서 죽을 정도까지 이른 사람이니까 우리가 이 사람이 육신적으로 강건한 사람은 아니었을 것이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도가 이렇게 육신적으로 연약한 자를 가르켜 군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 사람은 사람이 보기에는 육신적으로 매유 약하고 힘이 없는 자였지만 신앙적으로, 영적으로는 강건한 군사와 같은 사람이라고 인정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은혜를 받고 주님을 섬기기 위해 신앙의 길에 서 있는 사람들은 모두 군사와 같이 강건한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강한 군사가 되어서 강한 힘을 가진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일을 감당해 나갈때 그 사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 에바브로디도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냄비처럼 부글부글 끊다가 좀 있으면 푹 가라 안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 에바브로디도는 강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강한 군사로써 전투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정해주시는 그런 동역자가 되기 위해서는 바로 군사와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환경에 쉽게 굴복하고 감정과 의지에 쉽게 동요하는 삶을 살기 때문에 우리는 군사다운 삶을 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실 여기에서 보면 사도 바울이 디모데를 소개하는 가운데 다른 사람들이 다 그리스도 일을 구하지 아니하고 자기의 육익을 구하였다고 하는데 사람들이 끝까지 그리스도를 구하지 않고 자기의 육익을 구하는 이유가 충분히 강하지 않기 때문에 쉽게 그리스도의 일의 유익을 구하다가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곁길로 빠져 버리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맛설 힘만 있고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면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이 얼마나 재미있고 보람인지 모릅니다. 사람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누구든지 주님을 섬기며 사는 그 일이 기쁨이 된다는 것을 압니다. 문제는 자기가 군사와 같은 강인함이 없기 때문에 어려움이 올 때에 이기지 못하고 그 어려움이 자신에게 많은 고통을 가져다 줄 때 그런 신앙을 포기하면 얻을 수 있는 안일하고 편한 삶을 그리워하기 때문에 그런 삶을 못사는 것입니다. 바로 바울이 이 에바브로디도를 보고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다 자기의 유익을 구하였지만 이 디모데나 에바브로디도는 끝까지 주님의 일을 구하고 자기의 곁에서 섬긴 강한 군사와 같은 사람들이였다는 것입니다. 군인은 식씩하고 강한 정신을 소유한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도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에바브로 디도를 너희 무리를 위해 너희 사자로 나의 쓸 것을 돕는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에바브로디도는 빌립보 교회의 한 사자로써 물질로 사도 바울을 돕던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것을 몰라도 돈 심부름을 하였다고 것을 보면 이사람은 도덕적으로 참 깨끗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교회에서도 돈을 맡길 수 있는 사람은 신앙도 좋을 뿐 아니라 도덕적으로 깨끗하고 정직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미국을 지난 번에 갔더니 그곳에서 들은 이야기가 헌금을 계수할때 감시하는 사람을 임명하였다고 합니다. 정직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담임 목사가 그 이야기를 하였으니 그 교회의 치부를 드러낸 것이지만 정확한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서로 믿지 못하는 시대 속에 우리가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에바브로디도는 누구에게도 그런 의심을 받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많은 헌금이었을 것이라고 생각 됩니다. 그런 것을 안심하고 맡겨서 그 일을 수행할 수 있을 정도로 이 에바브로디도는 교인들에게 신임을 얻을 수 있는 도덕적으로 깨끗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들을 들어서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일에 요긴하게 하실 때 우리들은 더더욱 사람들에게 책망받을 것이 없고 흠이 없는 깨끗한 사람으로 남아야 합니다. 에바브로디도가 이런 사람이었기 때문에 바울에게 매우 큰 유익이 되었고 빌립보 교회에서도 말할 수 없이 소중한 존재가 되었고 사랑받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주님을 위해 살고자 하는 당신의 일군들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는 것은 당연합니다. 비록 양떼들이라고 하지만 양떼들도 주님을 위해 살고자하는 일꾼들을 알아보는 안목과 감각이 있기 때문입니다. 정말 주를 위해 살고자하는 사람들 곁에서는 주를 위해 살고자 하는 일꾼들이 있고 대충대충 살고자 하는 사람들 곁에는 대충대충 주님을 섬기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사도 바울이 에바브로디도를 이렇게 평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약하면 우리들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인정받는 일꾼이 되어야 하겠는가 생각해 보십시오.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봉사하며 함께 사자가 되어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는 에바브로디도와 같은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될 때 얼마나 하나님이 우리들을 기뻐하겠습니까?
빌2:26-29
‘그가 너희 무리를 간절히 사모하고 자기 병든 것을 너희가 들은 줄을 알고 심히 근심한지라. 저가 병들어 죽게 되었으나 하나님이 저를 긍휼히 여기셨고 저뿐 아니라 또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내 근심 위에 근심을 면하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더욱 급히 저를 보낸 것은 너희로 저를 다시보고 기뻐하게 하며 내 근심을 덜려 함이니 이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저를 영접하고 또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
에바브로디도는 교인들을 사랑함에 있어서 바울에게 깊이 인정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너희 무리를 사모하고 자기의 병든 것을 너희 무리가 아는 것을 인하여 많이 근심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으면서 교회를 향한 마음을 인정한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에바브로디도가 이처럼 사도에게 빌립보 교회 교인들을 사랑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사도 바울 자신도 깊이 빌립보 교인들을 사랑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께로부터 사명을 받아서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주님을 위해 사는 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아름다운 일입니까? 그러나 차가운 피를 가지고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할 뿐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함께 보낸신바 된 자기의 백성들을 사랑하신 일꾼들을 볼 때 하나님께서 얼마나 그들을 사랑하겠는가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동일한 마음으로 지체들을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지체의 모습이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성도의 모습니다. 에바브로디도가 그러한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을 섬기면서 하나님의 성도들을 사랑함에 있어서 하나님께 인정받은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두 번째는 사도 바울이 하나님께서 이를 긍휼히 여겨주셨다는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에바브로디도는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긴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이 땅의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 심지어는 하나님을 등지고 살아가는 사람들까지 긍휼히 여기시고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에바브로디도와 바울이 함께 입은 긍휼은 그런 일반적인 긍휼이 아니라 특별히 기억에 남을 만한 그런 긍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자기를 사랑하고 충성된 생애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더욱더 깊은 마음으로 그들을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긴다는 것은 너무나 잘 알려진 일입니다. 에바브로디도는 바울에게 와서 병이 걸려 자기의 사명을 다 감당하지 못할 위기에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하나님은 바라보실 때 자기의 일을 하고 당신이 맡겨주신 거룩한 일을 감당하기 위해 성도를 섬기며 그렇게 길을 다가다가 육신적으로 연약해져서 병이 들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를 얼마나 긍휼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셨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 에바브로디도를 궁휼히 여기고 에바브로디도를 보고 마음 아파하는 바울을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병에 걸려서 고통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근심하고 있는 빌립보 교인들을 긍휼히 여기셨고 또 그렇게 근심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 아파하고 있는 에바브로디도를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결국 이렇게 하나님의 넘치는 긍휼과 그리고 영혼들을 사랑하는 두 사람의 마음을 깊이 위로하기 위해 하나님이 에바브로디도에게 건강을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살아도 하나님을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는다는 그 고백이 가능한 사람들을 하나님이 얼마나 더 긍휼히 여기셨는지를 모릅니다.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얼마나 더 사랑하시는지 모릅니다. 여러분들도 하나님 보실 때 주님만을 위해 살아서 주님을 긍휼을 얻는 그런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이제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를 향해서 이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저를 영접하고 또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빌립보 교인들을 향해 사도가 너희가 에바브로디도를 보고 근심을 면하고 기뻐하라는 말과 함께 에바브로디도와 같은 사람들을 존귀히 여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사는 이 하나님의 일군들은 하나님 때문에,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을 함께 섬기면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즐거움은 하나님에게 잇습니다. 그렇지만 교회는 하나님만 위해 살고 주님만을 위해 살고자하는 그분의 복음 사역자들을 외롭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위해 사역하려고 하는 사람들을 존귀히 여기는 섬 성도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귀하게 생각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이런 결론에 도달합니다. 어디에 가든지 하나님을 섬기는 일군들은 있습니다. 목사가 아니고 전도사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헌신된 마음을 주님을 섬기는 사람들은 어디든지 있습니다. 그들이 만약에 진심으로 성도들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신앙의 지조를 가지고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을 위해 사역하는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들이라고 할 것이면 그들을 더 깊이 존경하고 그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이땅에 기여하는데 귀한 존재라고 생각하고 재산과 같이 생각하여야 합니다. 교회의 진정한 재산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심기 바랍니다. 넓은 땅이나 높은 건물이 교회가 가지고 있는 재산일 수 없습니다. 교회가 가지고 있는 재산, 진정한 부는 그런 것은 아닙니다.
교회가 존귀하고 아름다운 이유는 그 안에 참된 하나님의 사람들이 자라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뵈옵고 주님을 믿는 아름다운 신앙 안에서 성숙한 사람들이 주님을 위해 살고 주님께 영광을 돌리고 주님께 충성스러운 삶을 살려는 사람들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 것, 그런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성도를 섬기고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것, 이런 사람들이 많은 것이 교회의 진정한 자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런 일꾼들이 잘 자라도록 도와주고 북돋고 그리고 그들에게 용기를 주는 그런 성도로서의 섬김을 다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를 위한 훌륭하고 아름다운 투자입니다.
6. 빌립보서 2:30-3:12
그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아니한 것은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니라 끝으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파라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빌 2:30-3:12)
빌2:30
‘ 내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한 것은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니라.’
마지막으로 사도 바울은 에바브로디도의 헌신과 빌립보 교회의 관계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우선 사도는 에바브로디도가 어떠한 자세로 바울을 돕는 일에 임하였는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죽기에 이르도록 자기의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한 자세로 바울의 사역에 도움을 주고자 헌신하였다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에바브로디도는 죽기에 이르도록 자기의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함도록 이렇게 헌신하였습니까? 바울에 대한 인간적인 존경심 때문이었습니까? 물론 그는 바울을 깊이 존경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죽기에 이르도록 자기의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한 것은 단지 바울을 개인적으로 존경하고 인격에 깊이 감화를 받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바울을 돕고 그를 위해 수고하고 섬기는 그 사역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고 하는 것을 깊이 확신하였기 때문에 에바브로디도가 죽기에 이르도록 헌신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에서 한가지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의 일을 성취해 가는데 있어서는 거기에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합력하여 하나님의 목표를 이루어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바울대로 하나님을 만났고 에바브로디도는 그대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그 교회대로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은혜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들대로 힘을 합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앞서서 하나님을 위해 사역을 계획하고 뒤에서 빌립보 교인들이 전심으로 그를 돕고 있었습니다. 에바브로디도는 이 일에 있어서 가교의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각기 다른 은혜와 주님이 만난 배경들이 다르지만 그들은 모두 합력해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가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가시는 신비로운 일인 것입니다. 교회 그리고 복음사역을 위한 수고는 거미줄처럼, 옷감을 짜는 것처럼 씨줄과 날줄이 빈번하게 교차하여 아름다운 옷감을 만들고 무늬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개인적으로 각기 하나님을 만났고 개인적으로 하나님이 부르신 소명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한가지 일들을 위해 하나님이 우리를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런 것들을 기억하고 우리는 함께 이런 일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한 신자가 한 교회에 나와 신앙 생활을 하고 목회자에게 말씀을 듣고 감화를 받으면서 내가 열심히 이 교회가 하는 일에 협력하고 그 일을 전심으로 돕고 헌신하면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반드시 확장되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확신을 지닌 신앙생활이 얼마나 아름답고 귀한 신앙 생활인지 모릅니다. 사도 바울은 에바브로디도가 바로 이런 이유로 죽기에 이르도록 자기의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충성하고 있는 것을 우리에게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는 에바브로디도에 대한 바울의 평가를 보면서 하나님의 교회는 바로 이런 사람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언제나 이렇게 비교적 헌신된 사람, 상당히 헌신된 사람이 아니라 죽기에 이르도록 자기의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한 사람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의 역사는 비교적 헌신된 사람이 아니라 죽기에 이르도록 자기의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그렇게 자기를 모두 던진 사람들을 통해서 당신의 뜻을 이루어간 역사이며 그들이 하나님 앞에 충성된 사람들이고 그들이 하나님 앞에 쓰임받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은 한 90%, 95%의 둘이 있으면 180%나 185%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한 사람의 100%의 헌신이 있다면 말그대로 100%의 헌신이 될것입니다. 그러나 놀라운 하나님의 일은 180%나 185%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100% 한 사람의 헌신을 통해서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이 에바브로디도의 헌신을 매우 귀하고 존귀하게 생각한 것입니다.
에바브로디도의 도움 없이도 그는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를 진정으로 돕는 분은 하나님이셨고 자기를 부르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였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의 믿음으로 볼 때 그는 에바브로디도나 빌립보 교인을 의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헌신을 통해서 바울로 인하여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가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이런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필요로 하는 사람, 에바브로 디도와 같이 죽기에 이르로록 자기의 목숨을 돌아보지 않고 하나님 앞에 죽기까지 충성한 사람, 이런 사람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교회를 이루어가시고 불가능해 보이는 일들을 성취해 가시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비겹한 신자들은 물러서고 연약한 자들은 담대함을 잃어버지만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서 주님게 영광을 돌리며 살고자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죽기까지 자기의 죽음을 돌아보지 않는 자세로 용사처럼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바로 이런 사람들을 필요로 하고 교회의 역사는 이런 사람들의 믿음과 헌신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뜻들을 이루어가는 놀라운 역사입니다. 자기를 모두 하나님 앞에 전적으로 바치고 모두 드린 사람들만이 하나님 앞에 진정한 자유를 누리며 주님을 위해 기도하며 살아갈 수 있는 참된 힘을 공급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에바브로디도의 헌신을 보면서 이런 사람이 하나님의 교회에 필요하다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한 목회자의 마음에서 이렇게 죽기에 이르도록 자기의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한 많은 사람들의 이름을 떠올릴 때 그 교회는 하나님 앞에 축복받은 교회이고 그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교회가 존재할 수 있게 하는 훌룡한 재산이며 병기입니다. 왜나하면 하나님이 그들을 도우면서 역사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그가 그렇게 죽기에 이르도록 자기의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한 것은 나를 섬기는 너희의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한 사람의 놀라운 헌신이 다수의 부족함을 채우는 힘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교회를 바라보실 때 모든 사람이 부족해도 어떤 사람이 간절히 하나님 앞에 부르짖고 기도하면 그 한사람의 순전함과 간절함을 기억하셔서 그 교회를 향해 마음을 바꾸시고 오히려 은헤를 베푸시는 것을 바라보게 됩니다. 문제는 하나님 앞에 특별한 은혜를 받은 소수의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살아가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저는 목양을 하면서 성도들의 가정을 보면서 이런 것을 많이 깨닫게 됩니다. 여러분들의 가정이 복음이 들어오지 않는 깜깜한 암흑지대였다고 하여도 하나님께서 먼저 여러분들에게 깊이 은혜를 받게 하셔서 참 소망과 은혜 가운데서 여러분들이 살게 되면 이것은 여러분들을 통해 여러분들의 가정을 바꾸고 복을 주시겠다는 신호입니다. 여러분들의 가정은 하나님앞에 돌아오고 변화된 가정이 되느냐 아니면 내팽개쳐지느냐는 이제 아버지나 어머니나 동기간에게 달린 것이 아니라 그 은혜받은 한 사람에게 달린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일을 가정 속에서 이루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이제는 그 한 사람이 바르게 서서 하나님을 은혜를 기억하고 그 은혜 주심에 깃들였던 사명을 저버리지 아니하고 하나님 앞에 몸부림치며 은혜를 주실 때에 그 계획들을 성취하기 위해 죽기에 이르도록 자기의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을 통해서 당신의 놀라운 일을 이루어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정신 못 차리고 바르게 못 살면 그 사람의 가정은 소망은 없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는 반드시 하나님이 은혜를 주신 사람들이 있습니다. 목사 한 사람만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런 은혜를 주신 사람들 없이는 교회가 설 수가 없는 것입니다. 교회가 하나님 앞에 선다는 것은 그 교회가 막 되먹은 교회처럼 보여도 거기에는 반드시 하나님이 비밀스레 은혜를 부어주신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 교회는 설 수도 있고 무너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문제가 되는 것은 한 교회나 가정이 하나님의 은혜 속에 들어가지 못하고 무너진다는 것은 잠들어있는 다수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깨어있는 소수가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은혜 받지 못한 많은 사람들이 막 살았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은혜 받은 사람이 온전하고 순전하게 살지 못하었기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정말 바르게 살지 못하면 자기와 자기를 만나는 많은 사람들에게 불행의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르게 살면 자기도 복받고 주위의 많은 사람들에게 축복의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이 빌립보 교회는 참 헌신된 교회였지만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 부족함이 많은 교회였고 자신의 교회를 세운 도구로 쓰였던 바울을 돕는데 하나님의 시각으로 볼 때 완전하였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한 사람 에바브로디도가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바울을 섬기는 일에 자신을 모두 바친 일이 빌립보 교회의 부족함을 채우는 놀라운 은혜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들은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 하나님이 보실 때 그렇게 깨어있는 소수, 하나님 앞에 받은바 은혜를 간직하여 주를 위해 살고자하는 소수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매우 기뻐하셔서 당신의 일들을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빌3:1
‘종말로 나의 형제들아 주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 ’
바울이 3장을 시작하면서 기뻐하라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느닷없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기뻐하라고 말하는 것은 아마 편지를 써 내려 가다가 근심이라는 말이 나왔기 때문에 기쁨이 나오는 것 같습니다. 우리들이 이 빌립보서를 읽으면서 기억할 것은 이것이 논리적인 책 이라기 보다는 주고받은 편지였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더욱이 바울은 다메섹에서 예수를 만난 뒤 찬란한 빛을 보고 눈에 문제가 생겼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로마서에 보면 바울이 자신이 하고자하는 이야기를 불러주고 대필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그는 아마 모든 서신을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대필을 하게 하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이것은 하나의 주고 받는 편지와 동시에 쏟아져 나오는 설교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면서 가슴에 있는 것을 말하면서 드닷없이 기뻐하라는 것이 논리가 모자라는 것과 같지만 그것이 사도의 마음에 무엇인가 진리가 충만한 가운데 강력한 힘으로 역사하고 있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가 이제 기뻐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이 에바브로디도의 일로 인하여 빌립보 교인들이 근심하고 있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에바브로디도를 다시 건강한 몸으로 그들에게 돌려보내면서 기뻐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가 여기서 이야기하는 이 기뻐하라는 것은 우리에게는 좀 다른 의미로 다가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단지 에바브로디도로 인하여 기뻐하라는 뜻이라기 보다는 3장 이후 4장에 나오는 이야기로 볼 때 사도가 여기서 기뻐하라는 것은 빌럽보 교인들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두드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 속에 충만한 기쁨과 은혜 속에서 생활하는 것은 그것이 하나님과의 관계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기쁨은 세상이 주는 기쁨, 물질이 주는 만족이라기보다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속에서 비롯되는 거룩한 기쁨이고 신령한 기쁨이며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체험되는 그런 종류의 기쁨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종류의 기쁨을 가지라고 사도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는 감옥 속에 갖혀서 이제 사형을 기다리는 처지가 되었음에도 옥 밖의 사람들에게 기뻐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 기쁨이 영적인 기쁨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 하나의 커다란 신비, 내지는 비밀은 고난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고난이 오면 기쁨이 사라지고 또 기쁨이 있으면 고난이나 아픔이 사라집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삶의 경험 속에는 이 고난과 기쁨이 함께 합니다. 그래서 깊이 고통하고 아파하면서도 동시에 거기에서도 하나님의 신령한 기쁨을 함께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서도 억눌리며 고통하면서도 믿음으로 살수 있는 하나의 이유입니다. 극도로 고통을 받고 억눌림을 당하면서도, 큰 시련 속에서 자신이 찢어질 것 같은 위기와 고통을 느끼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감당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도 이 기쁨의 비밀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들이 사도 바울이 그러한 것처럼 주님을 위해 분투한 삶을 살기 위해서 애를 쓰려면 우리들은 정말 평안이 없는 삶을 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안으로 밖으로 싸움이 있고 투쟁이 있고 계속되는 도전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이 그 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는 이유는 만약에 고통과 어려움이 주님을 위해 당하는 것이고 올바른 관계 속에서 당하는 것이라면 그는 틀림없이 그 고통과는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의 기쁨을 맛볼 것입니다. 이 비밀이 있기 때문에 어려움 속에서도 이 어려움을 해치고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러했던 것처럼 우리들도 환경적으로 어렵고 고통인 상황 가운데 있더라도 그 고통 가운데 우리의 신앙이 무너지거나 좌절되는 것은 아닙니다. 고통이 너무 많아서가 아니라 이런 거룩하고 신령한 기쁨이 우리 안에 없기 때문에 우리가 쓰러지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하나님께 이런 거룩한 기쁨 희락, 환희가 우리 안에 충만하게 부어지도록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간구해야 합니다.
빌3:2-3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손할례당을 삼가라.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
1절에서 사도가 기쁨에 대해 강조한 다음 즉시 빌립보 교회가 직면한 어려움을 말하고 있습니다. 무슨 뜻이냐면 이 빌립보 교회에 고통을 주고 있는 박해하는 세력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뭔가 잘못된 교회로 인하여 무법하고 불법하게 이 빌립보 교회를 박해하고 있던 무지한 악한 세력을 2절에서 가리키고 있는 것같습니다. 그런 무리들에 대해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근신하며 잘 정돈된 사고와 생각을 가지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에는 언제나 알게 모르게 교회를 박해하던 세력이 있었습니다. 이 박해하는 세력은 정도에 있어서는 강하고 강력하기도 하였고 덜하기도 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든지 교회 주변에는 혹은 교회 안에는 참된 진리를 훼방하는 세력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할례의 이야기가 나오면서 사도는 다시 너희에게 할레의 이야기를 꺼내어 너희를 박해하는 세력이 있다고 할것 같으면 너희들이 그 기억해야 할 것은 진정한 할례당이란, 하나님의 백성의 언약의 표인 할례를 받은 사람은 이제는 율법을 따라 육체에 하나님과 언약의 표를 새긴 그들이 아니라 참된 할례당은 성령으로 봉사하고 예수를 자랑하며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우리가 참된 할례당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많이 바뀐 것입니다. 예전에는 육체의 할례의 표를 언약 백성의 보증이라고 하였는데 이제는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사도가 참되고 새로운 할례당의 표가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에 할례를 받고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바친, 예수 그리스도께 바친 참된 영적인 의미의 할례당에게는 세가지 표증이 있는데 첫째는 성령으로 봉사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 앞에서 주님을 섬기고 봉사하며 살아가는 모든 원동력이 성령에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에게는 참된 하나님 백성으로 살아가게 할 수 있는 성령이 없다는 것입니다. 성령에 대해 무지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단지 율법에 의해서만 하나님의 백성의 표로 여기고 이제는 그리스도로 인하여 새로운 시대가 왔음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열심히 하나님을 위해 살고 주님을 위해 살아도 성령을 몰랐기 때문에 죄를 이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섬기고 봉사하는 진정한 원동력이 성령이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이제는 하나님이 주시는 힘, 하나님이 성령 안에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완전한 능력, 힘없이는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고 봉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무에 사도가 제일 먼저 참하나님의 자녀에 대해 성령으로 봉사하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육체 할례 밖에는 모르고 마음의 할례를 모르는 사람들, 율법 밖에는 모르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너무나 생소한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생소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를 더 깊이 알고 마음이 변하여 변화를 받고 심령에 할례를 받아서 더 온전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면 될수록 우리는 점점 더 우리의 마음과 삶이 온전히 성령의 능력, 성령 안에서 우리에게 공급해 주는 힘으로 하나님께 봉사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참된 하나님의 자녀, 이스라엘 백성들이 육체에 표를 새기며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처럼 마음의 양피를 베고 하나님께만 속하는 사람들,그렇게 영적인 방식으로 할례를 받고 하나님께만 속하고 하나님께만 다가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주님을 섬기는 봉사의 원동력을 제공해 주시는데 그것이 바로 성령의 은혜와 성령의 능력입니다.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에게 성령의 능력을 주시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이지만 전심으로 구하는 것은 우리의 특권이며 의무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할례받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만 속하는 그런 마음의 변화를 받는 것처럼 성령님께서는 우리에게 오셔서 주님을 섬길 수 있는 원동력을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그렇게 마음의 변화를 받고 성령의 능력 속에서 살기 바랍니다.
두 번째는 그리스도로 인하여 자랑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육체의 할례를 자랑하고 모세와 아브라함을 자랑하였지만 마음의 할례를 받고 영적인 할례를 받아서 성령의 능력 안에서 믿고 섬기고 사는 사람들은 이제 자랑거리가 바뀐 것입니다.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가 자랑거리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구약의 백성이 아니라 신약시대 예수로 인하여 성령의 놀라운 축복을 누리며 죄사함 속에서 살게 만들어 준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깨닫고 십자가의 대속의 사건이 가져온 축복들은 본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는 그들에게 있어서 삶의 중심이 놀랍게 바뀐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건보다 더 큰 사건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율법 아래 살아가는 사람들은 모무지 그것을 이해 할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제 자랑거리가 바뀐 것입니다. 자랑거리는 결국은 사랑거리입니다. 그러면서 사도는 주님을 모르고 육체를 신뢰하던 때의 무엇을 자랑하였는가를 뒤에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롤 만난 다음에는 그것이 얼마나 배설물과 같이 하찮은 것이고 이제는 그것을 배설물과 같이 생각하고 해로운 것이라고 말하는 이유를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자랑하는 것이 마음에 진정으로 할례를 받은 사람의 모습입니다.
세 번째는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인 할례를 받은 하나님께만 헌신된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들은 육체를 사랑하지도 않습니다. 단지 육체는 주님을 섬기기 위한 도구일 뿐이고 그것이 영혼이 깃들였다 사라지는 장막이기 때문에 과도히 사랑하지 않습니다. 육체 자체를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명령을 준행하면서도, 율법을 지키면서도 육체를 믿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발견하고 나니까 우리의 육체가 얼마나 부패한 육체인지 알게 된 것입니다. 우리도 오늘 그렇습니다. 육체를 신뢰하여서 성공하면 자기의 의에 빠지고 실패하면 커다란 패배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육체를 신뢰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 때문이지 나 때문이 아니다 라는 고백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좋은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오고 모든 나쁜 것은 나 자신에서 솟아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육체는 단지 육체가 아니라 죄에 물들고 죄에 충동되는 하나님을 거스리고자하는 죄악된 본성의 육체를 가르키는 것입니다. 그것을 신뢰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빌3:4-8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니 내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희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그러나 무엇이든지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로 인하여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을 그리스도를 얻고’
바울이 이제 할례 이야기를 하다가 마음에 울컥하고 솟아오르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사람들이 할례를 받고 그것을 가지고 마치 참된 이스라엘 백성이 된 것처럼 삶도 없고 그리스도도 없으면서 이야기하면서 그 예수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도가 자기가 바로 그런 삶을 살고 그런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바로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도 믿지 않고 오히려 예수 믿는 사람들을 미친 사람으로 여겨 박해하고 육체의 할례의 표, 율법을 지키는 것 그리고 유대인으로써 문벌을 자랑하고 가문을 자랑하고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를 발견할 수 없는 그런 인생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사도가 누구든지 육체를 자랑할 것 같으면 나만큼 자랑할 것이 많은 사람이 있느냐 하면서 자기가 난지 8일만에 할례를 받고 엄격한 율법을 따라 살았으며 또 히브리인중의 히브리인이며 베냐민 지파에 속하는 정통 유대인이라고 하는 사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고 열심히는 교회를 핍박하는 열심히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런 모든 것은 그리스도가 없는, 의가 없는 삶이었다는 것입니다. 율법을 지키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힘으로 율법을 지키면 지킬수록 위로와 은혜를 얻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정죄 의식에 빠지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의로운 사람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로마서에는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틴 루터는 이 구절을 보면서 울부짖었다는 합니다. 하나님 어찌하여 복음 속에 칼을 두셨습니까? 의라는 것은 바울과 같은 구약시대 사람들에게는 칼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정의의 칼날 앞에 서서 누구든지 그 칼을 안 맞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누가 하나님의 거룩한 의에 합당한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저는 대한 민국의 모든 국민이 범법자라고 생각합니다. 대한민국 법령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들로 그 양이 엄청납니다. 무엇이 있는지도 다 모릅니다. 사람들이 엄격하게 심판을 받지 않으니까 그냥 그렇게 살아가지 대부분 사람들이 다 어긴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의 의는 칼입니다. 그 앞에서 인간은 절망하고 하나님의 의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서 하나님이 우리를 의인으로 만드는 길이 따로 있었구나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율법의 칼, 정의의 요구를 우리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담당하시고 우리에게는 구원을 주셨구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완전한 의를 주셔서 우리를 의인이라고 불러주셨구나라고 한없이 감격하고 있는 장면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도가 그것을 보면서 이전에 내가 유익하던 모든 것을 해로 여길뿐만 아니라 배설물과 같이 여긴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이전에 좋던 모든 것을 다 해로 여긴다는 뜻이 아닙니다. 엄격하게 해석을 하면 이전에 내게는 좋았지만 그것 때문에 예수님을 못 만나게 했던 것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배설물과 같이 여긴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난지 8일만에 할레를 받았구나 베냐민 지파구나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자로구나 열심히 교회를 박해하는 자라고 하는 쓸데없는 자부심과 육체의 자랑 이것 때문에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없었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이전의 삶이 후회가 되고 미워하는 것입니다. 육체의 자랑, 가문의 자랑, 자신을 주장하는 것을 이제는 용납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에게 너희들이 아직까지도 할례를 자랑하고 율법을 지킨 것을 자랑하는 것은 너희가 예수그리스도가 누군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고 그리고 너희가 자랑하는 그것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사도가 생각하면서 울컥하고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낀 것입니다.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못 만나게 하였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은 바울이 말하던 것과는 다릅니다. 여러분 중에 예수 만나기 전에 율법을 잘 지킨 사람은 없었을 것이고 베냐민 지파도 아닙니다. 난지 8일만에 할례를 받지도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이제야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데에는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사랑때문이었습니까? 다른 물질에 대한 사랑, 외모에 대한 사랑, 자기 일에 대한 사랑과 이 세상에 대한 사랑과 쓸데없는 집착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놀러다니는 것이 좋아서 주님을 못 만났던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제 이런 것들을 다 배설물과 같이 생각해야 합니다. 길을 걸어갈 때 커다란 거름더미가 있으면 피해 갑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이런 질문을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예전에는 자식을 사랑해서 예수님을 못 만났는데 그러면 이제는 자식을 미워해야 합니까?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원하신던 분량 밖으로의 사랑을 이제는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식을 사랑하고 가족들을 사랑하지만 마치 이제는 그 사람들밖에 세상에 없는 것처럼 여겼던 사랑은 버려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내게 있기 때문에 그 사랑으로 가족들을 사랑하고 세상과 인연을 맺고 이전에 잘못 사랑하던 것을 바로 사랑하는 길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세상 가운데 살고 있고 죄 가운데 살고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어제 선교한국에 갔더니 6000명정도의 젊은 사람이 모여 있었습니다. 근데 참 슬픈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내몬다고 해서 다 휼룡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젊을 사람에게 그런 선교의 엄청난 일을 기대하기에는 우리 젊은 사람들의 신앙이 너무나 연약합니다. 하나님을 만나서 근본적으로 변화되지 못한 세속적인 젊은이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바로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많은 것을 배설물과 같이 여기게 되었던 이유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근본적으로 그 사람의 내면의 세계가 새로워지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아는 지식이 있었기 때문에 이 고백이 가능하였던 것입니다. 주님이 아는 지식은 경험을 통해 아는 지식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를 전하고 다닐 때에는 다 잡아 가두고 싶었는데 내가 주님을 만나고 그 분이 얼마나 놀라운 분이고 우리의 모든 구원을 위해 예수님이 하나님의 의의 칼을 맞으시고 십자가의 죽음과 믿는 모든 사람의 유일한 중보자임을 알게 되자 이제는 그것보다 더 귀한 지식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된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깊이 감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자 철저하게 그리스도 예수 그분만이 내 인생의 유일한 주인이시고 나는 그에 노예일 뿐이다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포로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하고 이런 사람으로 교회가 가득 차기를 꿈꾸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알기 때문에 세상의 것들을 배설물과 같이 여기는 그런 사람이 가득차기를 바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빌3:8-9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의가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결국 인간이라는 것은 자가기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을 위해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을 희생시키는 것이 인간입니다. 이것은 믿는 사람에게나 믿지 않는 사람에게나 동일하게 나타나는 원칙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모든 사람들의 공통된 경험이 사랑은 하나라는 것입니다. 마음 속에 떠오르는 가장 귀하게 생각하고 사랑하는 그 하나가 그 사람의 모든 삶을 좌우하게 되는 것입니다. 두번째 사랑이 그의 삶을 좌우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첫 번째 사랑하는 것 이외의 다른 것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도가 이렇게 이전에 자기에게 육익하던 것을 해로 여기고 배설물로 여기게 된 이유는 바울에 의하면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든지 안 믿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지, 우리는 모두 죄인이고 그리스도가 우리와 함께하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다니면서도 성경의 핵심이고 신앙 생활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하고 또 온전히 붙들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지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에 사랑하는 것이 너무나 많고 놓을 수 없이 집착하는 것이 너무나 많은 사람들에게는 그리스도 예수가 발견되지 않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고백을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동시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발견되기 위해 이전에 유익하던 것을 해로 여기고 배설물과 같이 여긴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그 분이 누구신지 알고 그분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의 탐구에 의해서만 그분이 누구인지 알려지는 것이지 인공위성처럼 지구를 빙빙 돌면서 한번도 하나님을 만난 적이 없는 사람들,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인생에서 최고의 사랑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에 의해서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죄인인가 하는 것을 철저히 느끼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그 의가 아니면 하나님의 의는 우리에게 진노를 가져올 것을 깊이 깨닫게 될 때 그 사람은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깊이 알게 되며 깊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사도가 이야기 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내가 얻은 의는 율법에서 난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다라고 의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결국은 하나님의 의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하게 그의 뜻대로 살아가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의로우신 분이다라는 것이 커다란 힘이 되고 위로가 될 수 있지만 하나님, 당신의 의로운 성품을 발할 때 그 앞에 설 수 있는 사람이 없다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잘 지키고 하나님의 뜻대로 잘 살려고 하는 착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 진노 받아야 하할 대상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심판 받아야 할 대상으로 하나님 앞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인들에게는 무엇인가 의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로우신 하나님이 우리의 죄악된 상태를 보고 우리를 심판하실 때에 무엇인가 우리의 의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 의에는 두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인간이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의가 있고 하나님의 의가 있습니다.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그 의로는 도저히 하나님 의를 만족시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아담 이후 타락하였기 때문에 부패한 본성과 후천적인 죄를 좋아하는 성품으로 인하여 자꾸 범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두가지 범죄가 자신의 온 몸을 에워싸서 하나님 앞에 자신이 진노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때 사도 바울 자신도 그런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자기를 위해 하나님의 심판의 요구를 담당하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저주 아래 죽은 결과로 자신의 공로 없어도 예수의 공로로 자신은 예수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를 받아들일 때 그리스도 예수의 하나님의 의를 만족케 하심으로 그 피로 자신은 값없이 의로운 사람이라고 일컬음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에게 있어서는 엄청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의 관심은 구원론과 기독론입니다.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인가 이 두가지 질문이 최고의 과심사입니다. 그러니 바울의 의는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말미암은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여기에서 왜 그리스도가 신자들의 영원한 찬송의 재목이 되는지, 왜 그리스도가 신자들 가운데서 찬송받으실 만한 여호와 하나님이신지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에게 있어서는 엄청난 사건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위대한 분이심을 깨달아 그분을 위해 살고자 난지 8일 만에 할례를 받고 히브리인이고 율법으로는 흠이 없고 교회를 핍박하였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하나님 앞에 진노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모를 때에는 하나님이 의로우심으로 그 하나님이 이방인과 싸우시고 우리를 도와주기 위해 놀라운 힘을 발할 것이다라고 생각하였는데 알고보니 의로우신 하나님은 이방을 위해 싸우시는 분이기도 하지만 자기뿐만 아니라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한 진노의 대상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영혼의 숙명이었습니다. 거기서 율법을 지키고 가문과 문벌을 지키고 살았던 그 모든 삶이 자기를 하나님 앞에 의롭게 세울 수 없다라는 것과 자기가 이전에 자랑하던 모든 것이 쓸데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예수만이 자기를 진노 받아야 할 하나님의 의 앞에서 자기를 건져주셔서 구원해 주셨는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를 위해 못박혀 죽으신 희생적인 속죄에 기초해서 그 믿음을 믿는 신앙으로 그리스도의 의가 자기에게 전파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 예수가 영원한 찬송의 제목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가 아니라면 우리의 삶에 지금보다 훨씬 정성을 기울이고 몸부림치며 살고자 애쓴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백성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 우리 그리스도 예수가 우리를 위해 죽음심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그 의로운 요구를 만족시킬 수 있었고 우리는 공로 없으나 그리스도의 속죄로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의로운 자로 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우리는 형벌받을 자리에서 이처럼 교제가 있고 사랑이 있고 축복이 있는 자리로 옮겨 놓으신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의지와 모든 섬김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이 삶에 모아지는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그가 하나님을 위해 산다라는 말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주신 구원의 의가 얼마나 큰지를 알고 그것을 늘찬송하면서 주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그런 생활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찬송하고 그가 이루신 그 구원의 역사를 감격하고 그 십자가를 사랑하며 살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빌3:10-12
‘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사도 바울이 그렇게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예수가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의롭게 만들어 주신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그 의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신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가 풀리고 우리는 예수를 힘입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사람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우리를 위해 죽이시고 우리의 죄를 대속해 주신 것도 굉장히 놀라운 것인데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함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것을 믿는 즉시 구원을 얻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자기 안에 오셔서 살아계시는 현존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그럼으로 예수 그리스도를믿는 것은 단지 죄의 용서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마음 속에 오셔서 우리로 하여금 능히 죄를 이기고 어두움의 세력을 이수 있는 힘과 능력을 공급해 주십니다.
그뿐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서 사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면서 살아가는 삶의 신비함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는 장사지낸바 되고 부활한바 되어서 그리스도 예수와 더불어 신비한 연합을 이루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에는 반드시 신비적인 요소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반드시 경험적인 것입니다 오늘날은 이런 것이 철저히 무시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삶이 희망이 없는 것입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설교하고 많은 역사적인 일들이 쏟아져나고 그의 글들이 나올 때 초장기의 그는 신비주의자로 오해를 받았습니다. 얼마나 한 시대가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비밀, 신자와 그리스도가 연합한다는 것이 얼마나 신비한 일인지 철저히 모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영적으로 깊이 쇠퇴하게 되니까 그런 신비함,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인한 말할 수 없는 기쁨과 놀라운 경험들이 모두 사라지는 것입니다. 사라지고 나니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비한 성격에 대해 사람들이 모두 무지해 지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처럼 신비한 분이 없었습니다. 사도는 결코 그리스도에 대해 다 알았다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자서전에서 1950년이되기까지 사람들이 일평생 추구하는 바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할말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 후에는 분명히 자기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알고 싶다라는 것이 자신의 일생의 목표라고 말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사도의 고백이 그러한 것이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이 무엇인지 알려하여 달려간다는 것입니다. 그가 간절히 추구하고 싶었던 것은 지식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 알고 그 신비함을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사도는 더 놀랍게 자신의 삶이 변해가는 것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지식이었습니다. 그 지식은 단지 머리에서 머리를 오가는 것이 아니었음을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삶이 질적으로 더 아름다워지고 견고해지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넘치는 모든 비결은 곧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알고 사랑하고 깨닫게 되어 그와 함께 연합함에 달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영성의 심장부에는 사랑이 있고 그 사랑의 심장부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 중심의 영성이 아니면 참된 영성일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오늘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옥속에 갖혀서 자기가 정말 추구하고 싶은 것은 빨리 옥밖에 나가고 싶은 것이나 교회로 돌아가고 싶은 것이나 선교회의 꿈을 이루고 싶은 것이 아니라 사도 는 철저하게 한가지 목표에 고정되어 살았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를 더 찾고 싶은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가 누구인지 더 많이 알기 원했습니다.
그 후에 어떻게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지식을 얻는지에 대한 비결이 나옵니다. ‘내가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요,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된 그것을 잡으려고 좆아간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은 자기가 그리스도와 함께 온전해지고자 하는 분투해지는 삶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지 누군가가 가르쳐주어 손에서 손으로 전수 되어질 수 있는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하나님의 좋은 말씀을 들으러 여기저기 돌아가는 사람들을 한편으로는 불쌍하게 생각하고 그들은 그렇게 말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기 하지만 그런 사람들의 상당수는 자신의 변화가 없는 영적 생활의 원인이 외부에만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참된 말씀이 없이는 변화 될 수 없지만 참된 말씀만 있다고 하여서 완전히 변화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그리스도와 부활의 권능과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고 전심으로온전해지고 거룩해지고 모든 삶의 영역에서 주님의 표준대로 행할려는 분투하는 삶이 있었기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가 누구인지 알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런 삶을 살아가지 아니하면 그리스도 예수가 누구인지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도가 이야기하는 분투하는 삶은 특별히 성화가 관련되 삶입니다. 분투하는 삶의 현장에서 주님이 맞겨주신 일을 하기 위해 분투하고 투쟁하는 것이 삶의 현장에서 경험되는 성숙입니다.
그럼으로 부활과 권능과 고난의 참예함이 무엇인지 알려고 한다는 우리는 바울의 자세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삶과 함께 그리스도를 추구하지 아니하면 언제나 그리스도는 신비에 싸여 있을 뿐 우리는 그분이 누구인지 전혀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는 우리 자신을 채찍질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7. 빌립보서 3:13-4:1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어떤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 보라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 (빌 3:13-4:1)
빌3:13-14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사도가 일평생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것을 추구하면서 살았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면 왜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것에 자기의 모든 것을 전심으로 바쳐서 추구하여야겠다는 생각하였습니까? 그 배경에는 자기가 이전에 예수를 알기 전까지는 헛된 것들을 자랑하고 헛된 것들을 인생의 영광으로 알고 살았던 삶을 스스로 돌이킬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던 그 무지한 상황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된 배경이 있습니다.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그 고상한 지식이 사도를 사로잡자 예전에 사랑하던 것을 사랑하지 않게 되었고 예전에 영화라고 생각하던 것을 부끄러운 것으로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인생을 바로 본 것입니다. 그러고나니까 사도가 그런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내가 어떻게 다 알 수 있겠는가 내가 이만큼 예수를 알아도 인생이 이렇게 바뀌었는데 인생이 더 바뀌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더 깊이 깨달아 알면 그러할수록 나의 인생은 더 놀랍게 바뀌게 될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러기 위해서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고 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 신앙 생활하는 것이 아무리 신통치가 않다고 하더라도 예전에 주님을 전혀 믿지 않을 때보다는 바뀌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조금 알았는데도 그렇게 바뀌었는데 더 많이 알면 얼마나 더 많이 바뀌겠습니까? 우리의 모든 영혼의 변화, 우리의 모든 세상에 대한 변화 우리가 이전에 사랑하던, 이전에 영광으로 사랑하며 생각하던 것들에 대한 변화의 핵심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바뀌어서 새사람이 된 것은 목사에게 좋은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에 새사람이 된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서 눈치보기 바빠서 이만큼 변한 것이 아니고 살다보니까 좋은 사람의 물이 들어서 이만큼 바뀐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기 때문에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가운데서 우리가 이만큼이라도 바뀐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에 대해서 얼마나 알겠습니까? 한 십 년전에 열심히 말씀을 전하다가 깊은 한계를 느끼면서 이제 십자가에 대해 전하야겠다고 생각하고 나니까 제 자신이 십자가에 대해서 너무나 아는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회심한 이래 늘 십자가에 대해서 감동을 받고 눈물을 흘렸지만 사실은 아는 것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제에게는 큰 충격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내 인생에 있어서 바울이 예수님을 알고자 하였던 것처럼 저는 십자가를 통해서만 예수님을 알 수 있다라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십자가를 더 많이 알고 싶고 체험하고 싶어졌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예수를 모르는지 모릅니다.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와 부활과 그 고난에 참예하려함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알려고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얼마나 많이 알고 있습니까? 그 십자가에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을 얼마나 많이 알고 있습니까? 주님을 날마다 알아가는 일이 신비하지 않습니까? 얼마를 알아가면 우리가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완전히 파악하였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권능에 대해서 죽은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신,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권능에 대해서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더욱이 오늘 우리들이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받고 아픔을 당하면서 이 고난의 신비에 대해서 우리는 얼마나 많이 알고 있습니까? 이런 것을 알면 알수록 우리는 더 그리스도를 아는 고상한 지식이 더 많아지고 그것이 더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우리는 점점도 더 변화된 사람, 변화된 인생을 하나님 앞에 소유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전심으로 오직 한 일, 자기가 주님을 위해 분투한 일은 다 잊어버리고 자신에게 기억되어야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더 알고자 하였고 그 분의 부활의 권능을 더 깊이 체험하며 그분의 살아계심을 더 깨달아 알고자 하는 이런 간절한 소망이 있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오늘 우리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서 주님이 부르시는 푯대를 향해 달려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구절을 가만히 읽어보면 사도가 우리에게 주는 두가지 목표가 교차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부활의 권능과 고난에 참예함을 알고자 하였고 또 뒤에서는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좆아간다는 것은 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부름의 상을 위해 좆아간다는 것은 사도 바울의 헌신적인 복음 사역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도가 예수 그리스도와 부활의 권능과 고난에 참예함을 알고자는 하는 그 방법이 죽도록 주님에게 충성하면서 살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놀라운 신비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는 아는 것은 주님을 위해서 분투하는 삶 속에서 경험되는 것이지 단지 머리속에서 손에서 손으로 전수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칼빈은 기독교 강요 1권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대해서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을 섬기기 위해서 찾는 지식이 아니면 그것은 참된 지식이 아니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끊임없이 말씀의 감화를 받으면서 주님을 알아가는 놀라운 신비와 은혜 속에 깊이 들어가는 위해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매일 새로운 말씀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얼마전까지 교회에서 설교중에서 예수 믿으라는 것이 아니면 설교가 아니라고 하는 극단적인 파가 있었는데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전도 설교뿐 아니라 이미 믿은 성도들이 말씀 안에서 자라는 것을 가르쳐주는 것도 더할나위 없이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말씀을 계속 듣고 새로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계속 죽어져아 합니다. 어린애를 낳아서 모유가 먹인 후 우유를 먹이고 이유식을 먹입니다. 그런 아이를 국민학교 다닐 때까지 이유식을 먹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영양실조에 걸리는 것입니다. 질긴 고기도 먹여야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점점 딱딱한 음식도 먹고 자라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알고 제대로 가르쳐 주는 말씀이 있어야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는 안되고 말씀을 깨달았으면 자신이 예수를 위해 살아야 합니다. 자기 같은 사람에게 은혜를 주신 하나님의 계획과 그 뜻을 깨달은 다음에는 분투하는 마음을 가지고 주님이 자기에게 주셨다고 믿어지는 그 삶을 위해 분투하면 살아야 합니다. 주일날 눈물을 흘리고 은혜 받고 집에 가서는 하는 일없이 뒹굴다가 놀다고 마실이나 다니는 그런 사람의 삶에는 진전이 없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위해 살지 않고 주님을 위해 분투하며 살지 않는데 은혜에 무슨 진전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잠시는 하나님이 그들에게 은혜가 되게할지는 모르나 나중에는 그것을 걷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 기분 좋게 하고 우리의 양심의 가책을 제거하려고 주는 것이 아니라 분투하고 주님을 찾아가는 삶을 위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깊이 주님을 알고 싶어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알아가는 방법이 열심히 주를 위해 사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는 복음의 진리를 더 깊이 묵상하고 구약의 진리를 알기위해 힘쓰고 깊이 기도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일, 기도와 사색 묵상은 그 자체가 그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해 준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몸부림치며 살고자 한 그 삶이 예수 그리스도를 더 깊이 알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도 이런 마음, 이런 신앙의 인식이 필요합니다. 저는 교회를 하면서 아주 절실하게 느낍니다. 사람들이 제대로 말씀을 깨닫지 못하니까 어둠속에서 방황하고 곤고한 삶을 살아갑니다. 갈등하고 고통합니다. 그러다가 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깊이 깨어납니다. 그때에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말씀을 깨달으니 기쁨이 찾아오고 즐거움이 오지 않느냐 내가 이제껏 제대로 살지 못하는 것은 제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어서이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정말 그 경우에 해당하는 사람은 극소수입니다. 나머지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기가 그렇게 어두움 속에서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 갈등하는 이유는 말씀에 대한 무지와 자신속에 있는 하나님 앞에서 순종하지 않으려는 마음이 함께 합력하고 그런 삶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말씀을 계속 들으면서 어느정도 시간이 지나면 이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으려는 본성이 감격이 사라지면 서서히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가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살지 못하는 이유를 환경, 사람속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자신의 불신앙을 합리화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는 사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서는 항상 바르지 않고 더러운 것과 하나님을 거스리는 본성이 있음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날마다 죽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알고 싶으면 그리스도와 같이 분투하는 삶을 충성스럽게 살아야 합니다.
빌3:15-16
‘그러므로 누구든지 온전히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무슨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 내시리라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위엣 것을 바라보며 사는 길이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과 고난을 알고자함을 배워가는 길인데 그 길이 결국은 열심히 주를 위해 살면서 배워갑니다. 그렇게 주를 위해 살아가는 과정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 부활의 권능과 고난에 참예함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주를 위해 사는 분투하는 삶 없이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알수도 없고 바르게 깨달을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이 온전히 이룬 자들에 대해 말합니다. 사실 온전히 이룬 자는 없습니다. 스스로 자기가 온전히 이루었다 생각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좀더 온전히 이룬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온전히 이루지 못한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사도가 이야기하는 것은 각자가 어느 정도 하나님 앞에 온전해졌는지는 하나님이 판단할 일이시지만 자기가 도달할 그 온전한 삶에 대해서는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모르고 바로 깨닫지 못해 바르게 못 사는 것은 할수 없지만 각자가 깨달은 진리가 있고 각자가 도달한 인격적으로는 주님을 닮고 지식적으로는 그리스도를 아는 그 분량 안에서 힘을 다해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만이 자기가 하나님 앞에 변화되는 길이고 새로워지는 길이고 자기가 그리스도 앞에서 누구인지를 깨닫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자피 나는 온전하지도 않고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도 미천하고 성화에 있어서 온전하지도 못하니 막살자는 것은 짐승과 같은 사고 방식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저 사람한테 주신 은혜가 나에게 주신 은혜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고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더 온전하지 못하다고 하더라도 자기에게 주신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을 아는 지식 범위 안에서 위에서 부르는 부름의 상을 향해서 최선을 다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육상 경기에서 제일 좋아하는 것은 100미터 경기입니다. 짧은 시간 동안 옆을 돌아볼 수도 없고 옆 사람을 처다 볼 수도 없는 경기입니다. 그냥 목표점만을 바라보고 달리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자신의 목표, 주님을 알기를 원하고 닮기를 원하는 그 목표 하나를 가지고 달음질하는 것입니다. 누구와 비교할 시간도 없고 자존심 상해할 새도 없는 것입니다. 각자에게 주신 은혜가 있습니다. 나는 온전하지 못하지만 내게 주신 힘, 은혜 안에서 주님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좀더 알아가고 그리스도를 좀 더 닮아가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가는 기쁨의 변화를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최선을 다하지 않는 삶 속에는 어떠한 진보도 우리가 맛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도가 이것을 오늘 아침에 보여주는 것입니다.
3:15-16
‘그러므로 누구든지 온전히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무슨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 내시리라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여기에 나와 있는 약간은 부록과 같은 말씀의 뜻에 대해서 여러 가지 해설을 하게 합니다만 제가 보기에는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이 위에서 부르시는 부름의 푯대를 바라보며 좇아가 삶을 사는데,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와 부활의 권능과 고난에 참예함을 알기 위해서 사는데 그 지식을 찾는 자세가 전심으로 주님을 위해 분투하면서 사는 그런 삶이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 그 부활의 능력이 얼마나 놀라운지 고난에 참에함이 어떤 것인지 깨닫는 삶에는 분투하는 삶이 동반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혹시 만약에 너희가 무엇인가를 다르게 생각한다면 지금 내가 말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지식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 지식은 그리스도를 추구하는 삶 속에서 얻어지는데 너희들이 무엇인가를 다르게 생각한다면 너희의 그런 생각이 옳은지 그른지를 하나님께서 드러내 주실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내가 생각하는 것처럼 인생의 목표와 계획에 대해서 옳지 않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도 하나님이 옳지 않다는 것을 드러내 주실 것이다라는 말씀인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사도가 이야기하는 것은 너희들이 어떤 정도에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는 차이가 있고 성화에 대해서도 차이가 있지만 그러나 중요한 것은 자기가 도달한 그 상태에서는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각자의 믿음의 분량에 따라서, 모르는 것은 못한다고 하더라도 아는 것에 대해서는 최선을 다하는 모습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습니다. 그래야 주님이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삶을 사는 사람들이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깨닫고 싶어할 때 주님께서는 점점더 점점더 깨닫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온전한 삶을 사는 여러분들 되시길 바랍니다.
빌3:17-19
‘ 형제들아 너희는 함깨 나를 본받으 또 우리로 본을 삼은 것 같이 그대로 행하는 자들을 보이라내가 여러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항하느니라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의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자라 ’
사도는 자기가 그리스도 예수는를 좇아서 위에서 부르시는 상을 향해,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위해 분투하는 삶을 사는 것을 너희들이 본받으라고 말합니다. 이 편지를 쓸 때 사도는 옥 속에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를 본받으라는 말이 빌립보 교인들의 마음에 깊이 다가올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자신이 살아가고 있으면서 그것을 사람들에게 말할 때에는 감화력이 있고 권위가 있습니다. 반대로 자신은 그렇게 살지 못하면서 사람들에게 말할 때에는 감화력이 사라집니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깊이 생각하면서 전심으로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기독교 신앙을 실천해야 합니다.
사도가 이렇게 자기를 본받으라고 말하고 또 너희들 중에서 나를 본받는 자를 보이라고 말합니다. 너희들이 내게서 복음을 받고 감격하고 이만큼 교회를 이끌고 나를 돕는 일에 게으 르지 않았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나를 본받는 자를 보여 주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도 바울이 자기를 본받는다는 것은 철저하게 자기가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는 것처럼 자기를 통해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으라고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예수 닮은 사람들을 만들어내는 것이 목표입니다. 그래서 에이든 토저는 교회가 그리스도인들을 예배하게 할 때에 첫 번째 목표는 헌신된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향한 경배자가 되게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교회의 가장 큰 목표는 교인들을 세상이 필요로 하는 사람으로 만든다든지 교회가 필요로 하는 사람으로 만드는 그런 요소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니라 가장 중요한 것은 그를 예수 닮은 사람으로 만들어 내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사람으로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그 일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나를 본받은 자들을 보이라는 말이 내게 속한 사람, 나의 추종자를 보이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닮은 사람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에 훌룡하게 성공하고 싶다면 바울이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은 방법처럼 전심으로 주님을 찾는 지식이 분투하는 삶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빌립보 교회가 바울에게 바울을 닮은 많은 사람을 보여줄 수 있다면 그 교회는 가장 중요한 예수를 아는 지식이 추구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는 교회이며 또 교인들은 교회를 통해서 예수를 아는 지식을 깨달을 수 있으니 그것이 교회의 신령함과 건강함을 드러낼 수 있는 표증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의 마음 속에 순간적으로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마음 아프게 스쳐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으려고 하지도 않고 자신의 삶이 그리스도를 위하는 삶도 아니고 자기의 영광을 위해 사는 사람들의 삶이 스쳐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인하여 사도 바울이 견디지 못하며 괴로워하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사도 바울이 내가 여러번 눈물을 흘리며 말하였거니와 지금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그들은 십자가를 원수로 행하느니라라고 말할 때 이 사람들은 불신자들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긴다고 생각하는 유대인들과 오만한 이방인들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사도는 여러번 눈물을 흘리며 말하였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의 사역은 눈물이 있는 사역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기독교 신앙을 가르친다는 것은 어린아이들을 모아놓고 동화를 가르쳐 주는 것과 같은 것도 아니고 손에서 손으로 구슬을 전하여 준 것 같이 그렇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영혼들을 가르치는 사역은 눈물이 있는 사역이었습니다.
왜 눈물이 있는 사역이었습니까? 그것은 가르치고자 하는 내용이 이미 사도의 마음 속에서 역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도는 자기가 감동받은 진리를 가르쳤습니다. 사람들에게 그렇게 살지 말라고 경고하고 권면할 때 이미 사도의 마음 속에는 이미 그렇게 살지 말아야 할 길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사도 바울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고 그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니까 눈물이 있는 가르침의 사역이었습니다. 그것도 여러번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여러 번 눈물을 흘리며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일에 용사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거치는 자로 대적자로 살아가는 그 모습을 보면서 사도 바울이 여러 번 눈물을 흘리며 말하였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눈물을 흘린다는 것은 대부분 사람들이 약해질 때입니다. 극도의 공포에 휩싸일 때 은혜를 받을 때도 약해집니다. 그러니까 열받는 사람에게는 강해지기 때문에 눈물이 있지 않습니다. 열 받을 때 눈물이 난다는 것은 한 쪽에서는 열을 받지만 한쪽에서는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눈물이 있다라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약해졌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람들이 살면 안되는데 그것을 외치고 부르짓고 수없이 말하는데도 사람들은 그렇게 잘못된 길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길을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약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에서의 역설적인 모습입니다. 능력으로 충만한 사람들은 늘 깨어진 상태로 사는 것입니다. 강인하던 사람들은 언제나 이렇게 눈물을 흘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희는 십자가를 원수로 행하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좇지 않고 분투하는 삶도 없고 의지도 없이 살아가는 그들의 삶의 결국은 하나님을 말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에게 거치는 사람들이고 그리스도를 원수로 행하는 사람들이며 그들이 거두는 하나님의 일도 그것으로 인하여 오히려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바로 알지 못하는 불행한 결과를 얻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에 우리들은 우리도 잘못 믿으면 바울이 눈물을 흘리며 말해야 했던 그런 사람들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신앙의 긴장을 늦추지 말고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빚어지는 사람들이 되도록 힘써야 되는 것입니다.
빌3:19-20
‘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리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십자가를 원수로 행하는 사람들의 삶, 그 실체를 드러내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희 신은 배요 저희의 영광은 부끄러움이라는 말은 자기의 배를 신처럼 섬긴다는 것입니다. 이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의 생각에는 인간의 모든 삶을 움직이는 중심이 배에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니 이말은 뭔가 탐욕스럽게 자기가 하고 싶은 일로 욕망을 채우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많이 먹고 배부른다는 말이 아니라 자기 하고 싶은 것을 하도록 자기를 숭상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원하는데로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것을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원칙으로 삼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자기가 원하는 것을 위해서는 무엇이지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들, 신앙도 희생하고 이웃도 짖밟고 하나님도 없이 여기고 그럴 수 있는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들, 마치 좋은 그리스도인이 주님께 순종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는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들처럼 이들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이 바로 십자가를 원수로 행하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십자가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를 부인하게 만들지만 그러나 참된 복음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자기를 부인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자기가 원하는대로 하고 싶은 욕망의 노예가 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사도는 저희 영광은 부끄러움이라고 말합니다. 자기들은 대단히 자랑거리라고 생각하고 과시하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대단히 수치스러운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모여 앉아서 자기가 나쁜 일한 것을 사람들 앞에 뻐기면서 말하는 것이 부끄러움을 영광으로 생각하는 사람들과 같은 행동입니다. 이 사람들이 십자가를 거치는 사람들이고 십자가를 원수로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반드시 멸망받을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도는 우리는 그런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말합니다. 그들이 그렇게 살아가지만 우리의 소망은 하늘에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결국은 십자가를 거치는 원수로 살아가 고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 부끄러움을 자신의 영광으로 삼아 살아가는 사람들의 원인은 그 들의 모든 소망이 이 땅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그들과 같이 이땅에서 살아가지만 우리들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는 사람들이며 그 시민권이 있어서 우리가 그것을 가지고 이 세상에 살지만 하늘 나라를 위해 살고 썩을 육체를 가지고 살지만 섞지 않을 부활의 영광을 위해 사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 정말 신령한 삶을 사고 예수가 우리를 위해 죽으신 그 인생에 부합한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우리가 하늘의 거룩한 성품으로 다시 태어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소망을 하나님의 나라에 두어서 이 세상이 잠시 머물다 가는 세상이고 약간은 하잖게 생각하는 담대함이 필요합니다. 눈에 보이는 오늘의 세상은 잠시 지나가는 것이고 주님 앞에 사는 저 세상은 영원한 것이니 오늘의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은 내일 저 세상에서 주님을 만나기 위한 준비라고 생각하고 우리가 그리워 해야 할 나라가 이 세상이 아니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배를 위해 사는 사람들이 아니고 부끄러움을 영광으로 생각하고 사는 사람들이 아님을 보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빌3:20-21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자 곧 예수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사도는 우리에게 우리의 시민권에 대해 말합니다. 지금은 시민권이라는 말이 가슴에 다가오지 않습니다. 제 기억에는 주민등록증이 나오기 전에 서울은 시민증 경기도 같은데는 도민증이 있었던 것이 기억납니다. 그 때 소위 서울시민증은 도민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부러움의 대상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를 가지고 있던 때 로마의 시민권을 염두에 두고 썼을 것입니다. 로마의 시민권은 이방인들은 막대한 돈을 주고 사거나 로마에 큰 공로를 하여 얻을 수 있는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 시민권을 받으면 그야말로 권리를 인정받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로마는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민주적인 사회였고 비지배계층에게는 아주 가혹한 것이 로마의 사회었습니다. 그러니까 시민권을 가지고 있으면 죄를 지어도 야비한 고문과 신문을 당하지 않아도 되었고 황제에게까지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할 수 있는 권리가 있었습니다. 이런 것이 이방인들에게는 얼마나 커다란 부러움의 대상이었겠습니까?
그런데 사도는 말하길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 빌립보 교회도 이방인의 교회인데 복음을 따라 믿음을 따라 살려고 할 때 얼마나 많은 박해와 시련이 있었겠습니까? 그런 때에 너희들이 이 세상에게서 나그네로 대접을 받고 환영해 주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라 왜냐하면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기 때문이라고 사도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잠시 머무는 이 세상으로부터 부당한 대접을 받거나 무엇인가 선한 대접을 받지 못한다고 생각할 때 그것을 억울하고 가슴 아프게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잠시 거쳐가는 나그네이기 때문입니다. 신앙 생활에 있어서 이중 생활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완전하게 국적을 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모두 지나치고 거쳐가는 나그네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의 시민으로 대접해 주시고 그 하늘 나라에 속한 모든 신령한 축복을 나그네 대접을 받는 이 세상에서도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전혀 못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스쳐 지나가는 나그네와 같지만 외롭고 힘들 때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우리의시민권이 하늘에 있고 하나님이 우리의 진정한 주님이시요 그리스도께서 거기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으며 또 다시 오실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천국 시민의 놀라운 축복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우리의 마음에 감동과 감화를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나그네로 살아가면서도 조금도 마음 상하거나 괴로워 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 자기가 말하고 싶은 것이었고 또 체험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사도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참된 복음을 듣고도 그 복음을 진정으로 받아들이면서 사는 믿음의 사람들이 있고 그러나 그 복음을 거절하고 자기의 배를 신으로 여기고 부끄러운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는 수치스러운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교회를 핍박하는 사람들이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을 부당하게 대접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서 사도는 신자들이 그런 속에서도 낙망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게 만들어주는 진정한 참된 힘이 바로 우리의 시민권이 어디에 있는가를 깊이 생각하고 인식하는 데서 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마음으로 일평생을 살아야 합니다. 여기는 잠시 거쳐가는 나그네 길이고 우리는 하늘의 시민권을 찾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나그네는 자기가 걸어가는 길에 너무 많은 애착을 갖지 않습니다. 나그네는 지나가는 길에 집을 짓지 않습니다. 우리들도 그 시민권이 하늘에 있기 때문에 그 시민권에 애착을 두고 마음에 두고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사도 바울이 하늘을 바라보면서 위로가 되었던 것은 우리의 몸을 자기의 영광의 형체로 변하게 하시리라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부활의 영광이 거기로부터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에게로 말미암아 우리에게까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의 부활의 몸으로 승천하시고 그 몸으로 이 땅에 다시 내려 오실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왜 그런 놀라운 부활의 영광을 경험하게 되었습니까? 죽기까지 복종하고 십자가에서 죽으시니까 이로써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높이시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그 하늘나라로부터 우리에게 부활의 영광을 주시기 위해 오실텐데 우리들이 그리스도께서 그러하셨던 것처럼 더더욱 복종하고 죽음의 정신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주님의 뜻을 이루에 드리도록 살아야 합니다. 주와 함께 죽은 자들에게는 주와 함께 다시 사는 영광이 있을 것입니다. 주를 위해 자기를 버린 사람들은 주와 함께 영생의 소망이 있다고 사도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한번 이런 소망을 나눠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잠시 머물 세상에서 열심히 주를 섬기고 우리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는 줄을 알고 하나님의 나라를 사랑하고 그 나라를 위해 전심으로 섬기며 살 때 그때에 주께서 우리를 위해 고난을 당하실 때 아버지께서 그를 부활의 영광으로 살리신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뒤를 따라오는 성도들의 눈물을 닦으시고 그 모든 주를 위해 살아온 날들의 부끄러움을 영광으로 갚아주실 날들이 온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없이는 면류관도 없습니다. 그러나 주를 위해 사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부활의 영광과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빌4:1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체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자들아 이와 같이 주안에 서라’
빌립보 교회 교인들을 향한 자신의 애정을 간절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목회자였던 바울의 마음 속에 빌립보 교인들을 향한 어떤 마음이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바울에게 빌립보 교회 교인들은 기쁨이고 면류관이고 사랑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이 바울이 만약에 복음만을 위해 사는 사람들이 아니었더라면 아마 빌립보 교회 교인들을 향한 이런 마음을 느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 목양의 관계, 형제 자매의 관계가 한없이 소중하고 고결하게 느껴지고 가슴깊이 다가오는 삶이 되기 위해서는 철저하게 그의 삶이 영혼들을 위해 살고 예수 그리스도께 촛점이 맞추어지는 그런삶을 살아야지 그런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마음 속에 이 빌리보 교회에 대한 사랑하는 마음과 기쁨이 있는 마음은 단지 세상의 육신의 정이 아니었습니다. 빌립보 교인들을 가리켜서 나의 면류관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 앞에 섰을 때 빌립보 교인들이야말로 자기의 인생을 살아온 영광이고 주님 앞에 섰을 때 상 받을 것이 있다면 너희가 이렇게 복음 안에서 한 뜻을 품고 살아가는 이 사실이 나에게 면류관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것을 사도과 고백하고 있습 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을 사랑하는 것은 종말론적인 사랑이었고 예수 그리스도 앞에 섰을 때 자기들이 나눈 교제가 자기에게는 커다란 면류관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값진 것은 주님께 구원을 얻고 거역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살아가는 성도들이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기뻐할 바, 하나님이 주신 은혜에 가장 훌룡하게 보답하는 것은 바로 영혼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우리 한 사람의 헌신과 수고와 물질의 바침과 그리고 간구하는 기도를 통해서 영혼들이 그리스도를 알게 되고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진리의 빛 아래 들어와서 그래서 주님의 은혜를 모르던 사람들이 우리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서 믿고 하나님을 알게 되어서 그 은혜 아래 사는 것만큼 주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이 없습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가 아무리 많은 은혜를 체험하고 그가 많은 말씀을 듣고 스스로 많은 변화를 받았더라고 자부한다고 하더라도 그의 마음 속에 영혼을 위한 사랑이 없고 영혼을 위해 헌신하는 일이 없다면 그의 은혜는 잘못된 것이거나 그가 생각하는 것처럼 큰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가 어떤 식의 삶을 살아왔든지 그리스도의 은혜에 감화를 받고 그분을 만나고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사랑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나면 무엇을 하든지 영혼을 위해 살지 않고는 배기길 수 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자신의 섬김 속에서 영혼의 유익을 얻고 어둠 속에서 헤매던 영혼이 빛으로 나아오는 그런 진정한 축복과 참된 사랑을 모두 갈망하고 사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사도도 그런 자신의 마음의 기쁨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 그는 그 순간서부터 영혼을 위해서 살 사람이라고 주님이 낙인찍으셨습니다. 내가 네게 나타나는 것은 내가 네게 나타난 것과 장차 네게 나타날 일들의 증인과 사환을 삼고자 함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사도는 어둠 속의 사람들을 빛으로 인도하고 사단의 아래 속하던 사람들을 하나님의 유업을 잇게 하는 일에 온 마음을 기울였습니다.
여러분, 주님의 그런 참된 사랑을 깨달은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하든지 그것이 영혼을 건지고 복되게 하는데 유익한 것이 되기 때문에 섬기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한사람 한사람에게 이런 놀라운 사랑을 주셔서 주님의 기이한 은혜 속으로 들어가게 만드셨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그 큰 은혜를 받았으니 하나님 앞에 영혼을 위해 사는 사람들로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받은 은혜와 하나님이 주신 사랑을 통해서 영혼들이 살게 되었습니까? 여러분들은 지금 어떤 영혼을 품고 기도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크신 사랑이 우리를 살리셨다면 우리를 통해서 나타난 사랑이 또한 영혼을 살리는일에 사용되어야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예수 그리스도 앞에 섰을 때 무엇이 자랑거리가 될지 진지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여기서 누리던 안락한 삶, 풍족한 삶, 사람들의 좋은 대우와 심지어는 주님을 섬기던 많은 일들의 축복과 기회들을 우리는 그 날에 주 앞에 자랑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일을 단지 일 자체를 자랑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주님을 섬기고 영혼을 섬기라고 주님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날에 세상의 영광은 풀의 섶과 같이 모두 불타 없어질 것입니다. 그날의 남는 영광은 영혼을 위해 살았던 삶, 주님을 섬기며 살았던 그 삶들만이 남아서 하나님께 영광과 기쁨을 돌려드릴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사도는 그러므로 너희는 주 안에 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이야기하다가 사도가 그러므로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우리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고 그 하늘로부터 주님의 부활의 놀라운 은혜가 임한다는 종말에 대한 기대였습니다. 신자의 시민권은 하늘 나라에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 있지만 결국 이 세상에 살아 있는 것도 하나님의 나라에 가는 한 기회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여기에 완전하게 정을 두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살지만 이 나라를 위해서 존재하는 사람이 아니라 저 나라를 위해 존재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많이 정들고 익숙해져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미국에서 생활하였던 것처럼 조국이 부르면 빨리 가려고 야채 장사와 보석장사에 종사하였던 것처럼 그런 삶의 정신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곳에 너무나 많은 애정을 가지고 너무 큰 꿈을 가져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날에 주께서 우리를 영광의 부활로 새롭게 하시리라는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견고한 뿌리를 내린 주를 위한 군사와 같은 삶, 용사의 전쟁과 같은 주를 위한 충성스러운 삶은 누워서는 할 수 없습니다. 자기가 먼저 주님 앞에 서야 합니다. 자기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목표는 일어서서 주 앞에 굳게 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 앞에서 진실하게 서는 사람들이 되도록 애써야 하는 것입니다.
8. 빌립보서 4:2-19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여인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여하였으니 잘하였도다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 받는 내 일에 참여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 번뿐 아니라 두 번이나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 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풍성한 열매를 구함이라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가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빌 4:2-19)
빌4:2-3
‘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 한 자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부녀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바울의 서신에는 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나옵니다. 빌립보서에서도 예외없이 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이것은 결국 사도가 가지고 있었던 사람을 향한 따뜻한 사랑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의 그의 행동을 볼 때에는 기대할 수 없었던 인간성의 놀라운 변화입니다.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나고 영적으로 변화되었을 때 나타나는 한가지 변화는 사람들에 대한 따뜻한 사랑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새사람이 되었을 때 그 영성의 한복판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에 진정으로 주님을 만나고 변화된 사람들은 주님의 참사랑을 알기 때문에 주님의 형상을 물려받은 지체들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도가 두가지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는 한마음을 품으라고 유오디아와 순두게에 권합니다. 한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보면 그저 자세한 내막을 알수 없지만 이 빌리보 교회에서도 사도 바울이 염려하고 있었던 부분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유오디아와 순두게를 온유하게 권면하면서 하나되라고 말하는 것에서 이 사람들이 교회가 하나되는데 장애가 되는 행동을 하지 않았나하고 추측만할 뿐입니다. 어째든지 이 빌립보 교회와 같이 사도에게 칭찬을 받는 한마음이 되라는 모본적인 교회도 권면이 필요하였다는 것을 보면서 교회가 얼마나 한마음이 되는 것이 어려운지 알 수 있습니다.
열사람이면 열사람이 다 개성이 틀리고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교회에 모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모두 한마음이 되는 길은 두가지인데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가 그들에게 참된 마음을 주셔서 그들이 함께 한 은혜 안으로 들어올 때 교회는 한마음이 됩니다. 그러므로 신령한 은혜가 역사하지 않는 교회에서는 마음이 하나되는 것이 그렇게 어려울 수 없습니다. 분열과 상처가 가득한 교회가 치유되는 길은 쉽지가 않습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진정으로 하나되는 길은 세상의 단체들과 같지 않습니다. 은혜를 받고 신령한 하나님의 사랑 안으로 들어오게 되면 모두 하나가 된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자기를 죽이는 개인적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으면 저절로 하나 된다고 성경이 말하지 않고 계속해서 하나되라는 권면을 합니다. 결국 그것은 신앙 생활를 하고 교회 생활을 하면서 하나되게 하지 못하는 요소들과 더불어 끊임없이 싸우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이렇게 상처가 없고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은혜를 받고 교인들 한사람 한사람이 자기를 죽이고 순종하고 하나되고자 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회의할 때 성질을 부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도들이 모여서 회의를 하면 거룩한 하나님이 계시는 곳입니다. 동양에서는 아무리 화나는 일이 있어도 어른이 옆에 있으면 성질을 부릴 수가 없는 풍습이 있습니다. 절대로 자기를 죽여야 합니다. 아무리 마음이 언짢은 일이 있어도 온유함으로 하여야 합니다. 그런 것들을 여러분들은 지금부터 몸에 베어야합니다. 여기는 지존하는 하신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라는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마음을 하나로 합하여 교회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하나되고 한 목표를 향해 가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한 구주 밑에서 구원을 얻었고 한 성령 안에서 하나의 교회로 같은 백성으로 부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잘 지켜 나가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두 번째는 사도 바울이 도우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복음 안에서 수고한 사람들, 생명책에 그 이름이 있는 사람들이라고 말하면서 그들을 도우라고 말합니다. 결국은 교회 안에서 함께 신앙생활을 해 나가는 지체들이 한편으로는 함께 부름받은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주님을 섬기고 이 세상으로 사명을 섬기는 것을 볼 때는 동역자라는 것입니다. 그런 정신을 지녀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만나는 것이 목자와 양의 관계이지만 함께 주님을 섬긴다는 것에서는 동역자라는 것입니다. 그 두 관계가 조화를 이루어가야 합니다. 그래서 나는 그저 목자의 서비스만을 받아야 한다는 그런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한편으로는 도움을 받지만 한편으로는 훌룡하게 주님의 나라를 이끌어 가는 동역자가 되어야 한다는 그런 생각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는 젓병들고 기저귀 찬 수염난 교인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너무나 오랫동안 그저 비위나 맞추어 주고 사는 그런 교인들은 비참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빌립보 교회가 자기의 사랑을 많이 받는 자녀와 같는 교회였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자신의 동역자라고 말할 정도로 살았습니다.
주님이 우리들에게 십자가를 통해서 구원을 주시고 주님의 손에 의해 목양을 받고 주님의 손에 의해 보낸바 된 목자들을 통해 목양을 받고 이만큼 살았습니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의 동역자로서는 어떤 삶을 살았습니까? 주님의 일꾼으로는 어떤 삶을 살아았습니까? 주님이 우리를 길러주신 때도 있지만 주님을 위해 훌룡하게 섬겨서 주님이 보실 때 나의 동역자라고 말할 정도로 우리가 그렇게 살았는지 돌아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을 사도 바울이 도우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교회가 해야할 큰 임무 중에 하나는 그런 사람들을 격려하고 북돋고 도와 주어서 하나님께 봉사하고 섬기며 살 수 있도록 강하게 도전하고 새로운 힘과 용기를 주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런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빌4:4-5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들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이어서 사도 바울이 이제 완전히 실제적이고 개인적인 삶에 대해서 권면하고 있습니다. 뒤편에 가서 특별히 이런 개인적인 삶을 권면하는데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항상 기뻐하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 빌립보서를 기쁨의 서신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감옥 속에 갇혀있는 죄수의 몸으로 옥박의 자유로운 사람들에게 기뻐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마 사도가 옥에 갇혀 있지만 빌립보 교회의 이야기를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앞에서 다툼과 허영으로 복음을 전하는자들의 그런 교회 상황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교회가 훼방하는 세력에 둘러싸고 있을 때 교회가 아무것도 할지 않으려고 한다면 교회가 훼방하는 세력들과 다투거나 갈등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교회가 그런 속에서 도 그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맡겨 주신 일들을 감당해 나가려고 할때 그 때 갈등이 일어납니다. 열심히 사명을 감당해 나가는 과정 중에서 그리스도인과 교회가 기쁨을 잃어버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그러지 말라고 권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 너무 심각하게 살고 자기를 둘러싼 여러 가지 신앙적인 장애 요인들과 싸우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마음을 평정을 잃고 기쁨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기뻐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사도가 감옥속에서 체함한 바였습니다.
옥속에서 그는 다툼과 허영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함으로 자신의 마음의 아픔도 경험하였고 그 와중에서도 그리스도를 박해하는 무리의 소식도 들었을 것입니다. 그 때 마음의 평정을 잃지 않았던 이유가 기쁨 때문이었습니다.
또 사도가 모든 사람들을 관용하고 또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들로 알게 하라고 말합니다. 관용은 너그러움입니다. 바로 그 기쁨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기쁨이 있고 은혜가 있고 사랑이 넘치면 그 상황 속에서 다른 사람들을 향해 너그럽고 많이 베풀 수 있는 힘과 여유가 생겨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온유함과 모든 기쁨은 하나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귐의 기쁨에 비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가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들로 알게하라 주께서 가까워 오시니라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날이 가깝다는 것을 생각해 보라 그러면 너희가 지금 마음을 평정을 잃을 수 있는 많은 어려움들이 너희 마음을 흔들지 못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다시 오신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사귐을 누리고 기쁨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겐 진정한 소망의 이유가 됩니다. 기쁨의 이유가 충분히 될 수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큰 기쁨을 주시고 우리를 비난하거나 혹은 우리에게 이유없이 친절하게 대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너그러운 마음을 갖고 심지어는 우리를 박해하는 사람들에게 도 관용을 갖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빌4:6-7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게 아뢰라, 그러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염려라고 하는 것은 대부분 집착에서 생겨납니다. 물론 이 염려에는 경건하고 거룩한 것도 있습니다. 염려에도 경건한 염려와 세속적인 염려가 있습니다. 경건한 염려는 목적 그 자체가 거룩한 것을 위한 염려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비록 경건하고 거룩한 목적을 위한 염려라고 하더라도 살아가다보면 과도하게 자기 중심적인 애착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에게 염려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염려가 어떤 염려는 우리로 하여금 염려가 생기면 생길수록 하나님을 더 찾게 만들고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게 만들고 주님을 더 의지하게 만드는 그런 염려가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는 것의 염려는 목표도 없고 추구하는 바도 없는 그런 사람처럼 멍청하게 살라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은 그렇게 염려하고 또 걱정하고 걱정할수록 하나님을 찾게 하는 그런 종류가 아니라 근심과 염려로 마음을 둔하게 하여 하나님을 찾던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로서 멀어지게 만들고 하나님을 향해 한마음을 품고 주님께 다가가던 사람들에게 그 마음이 갈라지게 만드는 그런 종류의 염려를 가르킵니다. 희랍어에서 염려하다는 말은 마음이 나뉜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한 마음을 가지고 무엇을 찾아가다가 염려로 인하여 그 마음이 나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염려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향한 경건한 열망을 사라지게 만들고 그리고 하나님을 전심으로 추구하지 못하게 만들고 우리로 하여금 더욱 더 세속적인 인생과 추구를 만드는 힘이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야말로 염려가 태산같고 걱정이 많은 상황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자기가 세운 교회는 아직 어리고 자신은 옥 속에 갇혀 사형을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는 것은 그의 삶 자체가 주님게 모두 바쳐진 자유한 상태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사간에 모든 것이 주님의 손에 있다라고 생각하고 살면 인생의 큰 영적인 위기가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에게 인생을 맡기기 보다는 자신의 힘으로 인생을 스스로 지켜야 한다라고 생각하게 되면 우리의 인생은 매우 바빠지고 염려는 우리의 인생에서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는 말 속의 그런 담대함은 삶의 목표와 촞점이 하나님께 맞추어져야 하고 변화 되어서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야 얻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생사간에 담대함이 있습니다. 큰일이 일어나서 죽으면 주님께 가는 것이고 살면 사는 것이다라는 그런 담대함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인생을 지금은 보람있게 살고 열심히 살았다라는 그런 말은 하여도 지금은 소용이 없고 죽을 때 보면 그이 삶을 아는 것입니다. 죽을 때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리면서 죽음을 기쁨으로 기다리면 그는 삶을 거룩하게 산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그의 인생은 성공한 인생이라고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신학적으로 보면 믿지 않는 사람들의 죽음은 형벌이지만 믿는 사람들의 죽음은 형벌이 아니라 우리 주님이 우리를 완전하고 거룩하게 만들어 가는 성화의 한 과정입니다. 그러니 그것을 두려움과 견딜 수 없는 고통과 거역함으로 맞이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그를 더 온전하고 완전한 성도답게 거룩하게 만들기 위해 죽음을 거치는데 자신은 하나님을 모르고 살아가던 사람들의 두려움의 심판의 관점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르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났다고 할지라도 삶과 인생의 목표가 변화되지 않으면 죽음을 형벌처럼 두려워하며 떠는 모습으로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을 생사간에 그런 것을 초월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람이 살면 주를 위해 살고 죽으면 그와 함께 있을 욕망이 이루어졌으니 감사한 것이 아니냐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뭔가 내인생을 집착하고 내 것을 움켜지고 내가 가지고 있는 계획을 성취하여야 겠다는 자기 중심적인 생각의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함으로 모든 근심과 염려가 오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우리가 목표를 갖고 꿈을 갖고 도전하는 것은 우리의 인생을 향기나게 만들고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인생을 긴장하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있다는 증거합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은 인생의 무목표에서 오는 도전이 없기 때문에 염려가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주신 기업들을 누리고 성취하는 것이 주님의 분봉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먼저 그런 일들이 하나님께 동의를 얻어야 하고 이 세상에서 무엇을 얻고 살아가든지 주님을 위한 것이 되게끔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염려할 것이 없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도가 그런 사람도 기도하며 간구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기도는 좀더 일반적인 것이라고 말하면 간구는 일들의 특별한 성패, 하나님의 마음에 맞고 안맞음 이런 것들을 분별한 다음에 특별한 일들이 이루에 지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집중적으로 간구하는 것이라고 생각힙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고 간구하는 것은 염려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신앙이 너무 고상하기 때문에 기도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하나님과 친밀함을 누리면서 산다는 것은 거짓말이라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렇다면 예수님이야말로 신앙에 의심이 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하나님과 휠씬 더 친밀한 관계에 있으면서도 더욱더 많은 시간을 기도와 간구로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아뢰라라고 말하면서 무엇인가 너희에게 부족하고 원하는 것이 있으면 그것을 너희 아버지께 구하라는 것입니다.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하나님 앞에 아뢰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 일을 이루어 주실것이라는 말입니다. 성경이 이야기하는 것이 너희 구할 것을 기도와 간구로 감사함으로 아뢰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도, 간구, 감사는 모두 기도의 다른 형태를 나타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우리가 감사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그런 삶이 되도록 우리를 초정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기쁨의 근원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옥속에서도 감사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기쁨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간구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간구할 때마다 우리는 주님이 우리에게 이미 주신 것을 생각해 보야야 아야 합니다. 더 큰 은혜를 구할 때 마다 이미 주신 은혜에 감사함으로 하나님 앞에 믿음을 가지고 더 큰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사도가 이것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빌4:8-9
‘ 종말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만하여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여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너희는 내게 받고 듣고 본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사도 바울은 이제 종말로라고 하면서 결론을 마지막으로 쓰고 있습니다.
사도가 목회자로서 권면하고 싶은 이야기가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 많은 권면이 있지만 사도는 결국은 그것을 모두 하나로 묶어 내게 듣고 보고 본 바를 생각해야 된다는 것을 말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말합니다. 배우고 듣고 확신한 바를 이제 일깨우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들이 깨닫게 되는 것은 우리의 신앙이 어느 상황에 있든지 간에 우리를 붙들어주고 지켜주는 것은 우리가 무엇을 받고 보고 듣고 무엇을 확신하게 되었는가에 있습니다. 그것에 의해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른 신앙을 우리들이 배우고 바른 신앙의 모본을 보고 올바른 말씀을 듣고 그리고 참된 것이다라고 믿는 것을 확신하는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그로 하여금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만약에 우리가 들은 바가 없고 배운 바가 없고 본 바가 없다고 할 것 같으면 우리는 어떻게 신앙생활을 할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옛말에 부전자전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버지를 그대로 아들이 닮고 어머니를 다 그대로 딸이 닮는 것입니다. 결국은 좋은 점만 닮는 것이 아니라 나쁜 점도 자신도 모르게 닮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일단 무엇을 보면서 자라는가 무엇을 들으면서 자라는가가 사람을 엄청나게 다르게 만들어 줍니다.
이런 것들을 보면서 우리들은 신앙이라는 것은 단지 좋은 지식을 계속 주입시킨다고 해서 좋은 신앙으로 자라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지식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자녀들을 교육함에 있어서 유능한 선생님을 과외를 시켜 준다고 해서 이 아이가 좋은 아이가 된다고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좋은 지식이 없이는 좋은 아이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오늘날 가장 커다란 문제는 존경하고 따를만한 스승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모든 분야에서 이런 위기를 맞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이 빌립보 교회가 가졌던 가장 커다란 축복 가운데 하나는 바울로부터 듣고 배웠고 바울을 보면서 참된 신앙의 모본을 알았고 확신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단지 신앙을 우리 자녀들이나 우리들보다 더 연약한 지체들에게 신앙이 지식이 되어서 손에서 손으로 전수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말하는 사람은 사랑을 실천하면서 살아야 하는 삶이 필요하고 하나님의 의로움에 대해 가르치는 사람은 자기가 하나님 앞에 그 의로움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들은 부모의 면전에서 배우는 것이 아니라 뒷 모습에서 배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모본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일관된 삶을 살고 자기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가다가 이제는 옥 속에 갇혀서 사형을 기다리는 처지가 된 것입니다. 자기가 일렇게 산 삶이 있기 때문에 자기의 양 떼들을 향해 내게서 보고 듣고 확신한 바를 따라 살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사도는 마지막으로 그리하면 평강이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참된 마음의 평화는 전심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의 자유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자기의 최선을 다해 하나님을 섬기지 아니하면 마음의 평화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악인에게는 평화가 없습니다. 많은 것이 있어도 악인의 삶에는 평강이 없습니다. 가슴 깊이 밀려오는 진정한 평화는 오로지 하나님께 순종하며 사는 사람들, 하나님 앞에서 늘 배우고 배운 바를 실천하고 사는 사람들에게만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 우리가 이제껏 신앙 생활을 해 오면서 하나님 앞에 신앙을 배우고 또 누군가가 신앙을 보면서 참된 신앙을 배우겠구나하는 그런 모본을 보여햐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랑이나 정열이나 찬양이나 희생이나 물질적인 봉사나 모든것에 있어서 우리가 모본된 삶을 보일 수 있도록 하나님에게 앞에서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앞에서 항상 최선의 것을 드리면서 최선의 힘을 다해 하나님 앞에서 살아갈 때 우리에게 진정한 평화와 평강이 있고 이 평화와 평강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의연함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미국에 커다란 홀이 있었는데 그 홀에 초대받아 노래를 부른다는 것이 가수들에게는 커다란 명예가 되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흑인 가수가 그곳에서 노래를 부르게 되었는데 백인들이 몹시 불쾌하게 생각하면서 야유를 보냈다고 합니다. 그 흑인이 올라섰는데 백인들이 야유를 보내니까 그 사람의 심정이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그 사람이 사람들의 야유가 끝날 때가지 손을 모으고 기도한 다음, 그 사람들의 모든 야유가 끝나고 가수가 노래를 부르는데 그 제목이 ‘공곡이 주는 평화’였습니다. 그러니까 마음 속에 진정한 평정, 평강이 우리에게 있을 때에는 커다란 위기도 슬기롭게 극복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없으면 조그만한 위기에도 무너지고 조그마한 잘되는 일에도 기고만장해서 하나님도 눈에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닙니다. 참된 평강, 진정한 평화는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순종하는 삶에서 비롯된다는 것입니다.
빌4:10-13
‘내가 주인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는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내가 궁핍함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
바울은 편지의 말미 부분에서 자기를 물질로 도와준 빌립보 교회를 향해 감사한 마음을 표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서 선교비를 받으면서 감격해 한 것은 돈 때문이 아니라 그 자기에게 보낸 선교를 위한 물질을 보면서 교인들이 참 주님을 사랑하는구나 그리고 내가 복음을 위해 수고하고 선교하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이 사역하는 것을 교인들이 이해하는구나라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의 마음을 기쁘게 한 것입니다. 이것은 개인적인 필요를 채워 주어서 감사한 것과는 좀 다른 것입니다.
목회하는 사람의 가장 큰 기쁨은 헌금이나 선교비에 있는 물질 뿐만 아니라 무엇에든지 그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확인되는 그 순간, 그것이 가장 큰 기쁨이 되고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랑의 중심부엔 언제나 물질 사랑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물질에 대해 자유해져서 하나님의 구원의 거룩한 사역을 위해 자신의 물질을 바치게 되었다 것을 볼때 목회자의 마음에는 그들의 믿음을 그만큼 성장하게 해 준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이런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너희를 굉장히 기뻐하는데 그 이유는 나를 생각하는 것이 다시 싹이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빌립보 교회가 사도 바울의 복음 사역을 위해 연보를 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이 자기가 너희들이 보내준 물질을 고맙게 사용하지만 그러나 너희가 보낸 이 물질 때문이 아니라 너희가 나를 생각하고 있고 나에 대해서 돕고 싶은 마음이 생기고 같이 헌신하고 있는 마음이 있는 것은 주님을 위한 것이 아니냐 그 이야기를 하면서 사실은 물질 그 자체 때문만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 다.
그러면서 사도는 내가 주님을 섬기면서 일체의 비결을 배웠는데 풍부에 처할 줄도 알고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가난한 가운에 있을 줄도 알았다고 말합니다.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았다는 이야기는 단지 돈 걱정없이 부유하게 사역을 잘하게 되었다는 말은 아닙니다. 교회나개인이 물질이 없을 때 드는 시험도 있고 물질이 없을 때는 들지 않는 시험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의미에서는 풍부에 처하는 그 시험이 가난에 처하는 그 시험보다 훨씬 더 어려울수 있다는 사실에 기억해야 합니다.
물질적으로 풍부해질 때 우리는 하나님을 절실하게 의지하는 마음을 잃어버리기가 아주 쉽습니다. 그래서 물질적으로 풍부해지면 그 물질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이 사라지고 삶에 있어서의 긴장감이 떨어집니다. 가만히 보면 경제적으로 어렵고 고통받던 시절에 가족이나 교인들이 하나되고 간절히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것에는 순수함이 있습니다. 돈을 많이 번 사람들이 항상 말하길 가난하던 그 때가 좋았다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 말은 가난하던 그것이 좋았다라는 말보다는 그 시절의 순수함이 좋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난할 때 신앙이 미끄러지는 사람도 있지만 풍부할 때 미끄러지는 경우도 많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았다는 뜻은 물질적으로 풍요하고 혹은 부유할 때에도 어떻게 정결하게 하나님의 복음의 사역을 감당해 나가는가를 배웠다는 것입 말입니다. 저는 그것이 가난에 처할 하는 것을 배우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가난에 처했을 때는 최소한의 자기와의 싸움은 없는 것입니다. 가난할 때는 그냥 못 먹고 견디면 되지만 풍부에 처할 줄 아는 것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서 일체에 비결을 배웠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환경에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을 섬기는 비결을 배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물질적으로 부요할 때에도 하나님을 부유한 물질 때문에 마음이 부유해져서 하나님을 덜 의지하거나 너무 가난 하여서 가난에 마음을 뺏겨서 주님을 못 섬긴 때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그런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면서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지키고 부요한 가운데 어떻게 주님을 섬기고 가난한 가운데 어떻게 정절을 잃지 않는지 모든 것을 배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이 문맥을 보지 않고 자기가 하고 싶은 큰 일이 있으면 이 구절을 인용하기 좋아합니다. 그러나 이 말은 그 말이 아닙니다. 가난해졌을 때에도 그렇게 가난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잃어비리지 아니하고 물질이 없을 때 마음이 상하거나 그 고통 때문에 주님을 섬기지 못하는 그런 때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가난하고 물질은 없었지만 주님이 계셨기 때문에 그 주님이 공급해 주시는 힘으로 살았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하나 둘 떠나고 홀로 버려진 것과 같은 상황에서도 외롭다고 하면서 주저 앉지도 않았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위로와 평강과 사랑의 능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부유할 때에도 정절을 잃어버리 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물질보다 바울과 함께하는 주님이 너무 좋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런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살아야지 비로소 환경을 뛰어넘는 신앙의 비결을 배우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물질을 보내주신 것에 대해 감사하면서도 자신의 선교 사역에 진정한 원동력이 선교비에 있지 않고 선교에 함께 하시고 자기와 함께하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어떠한 상황에 두든지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고 이김을 주시는 분은 우리와 함께하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이 우리로 하여금 고난과 가난과 시련과 풍부 속에서도 정절을 잃지 않는 순결한 삶의 궁극적인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빌4:15-17
‘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케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받은 내 일에 참예한 교회가 너희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번 두 번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과실이 번성하기를 구함이라 '
인간의 마음에 죽도록 사랑하는 것이 사람마다 여러 가지 있지만 모든 인간에게 공통으로 하나님과 더불어서 인간을 다스리는 보좌를 차지하려고 하는 것이 물질입니다. 보십시오. 사도 바울이 이미 벌써 마케도냐를 떠날 때 상당히 복음 전파를 위해 수고한 사람이었고 여러곳에 이미 교회가 서고 뚜렷한 복음의 역사로 회심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을 물질로 돕는 곳이 많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가 여기서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마케도냐를 떠날 때 쓸 것을 도와 준 교회가 너희 밖에 없었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돈에 대한 집착은 강합니다. 물론 하나님 앞에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드리고 싶어도 드릴 것이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전에 제가 모시던 목사님의 시골에 집회를 가셨는데 한 헌금이 올라왔다고 합니다. 시골 교회였고 목회자와 합하여 9명이 있었다고 하고 돈이 없어 겨울에는 비닐로 문을 닫고 집회할 정도였으니 엄청 가난한 교회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돈이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하얀 종이에 동전이 들어있고 따뜻한 계란이 하나 들어있었다고 합니다. 계란은 목사님 드시라고 올린 것 같고 하얀 종이를 나중에 풀어보니 40원이 들어있었다고 합니다. 얼마나 하나님께 드릴 것이 없었으면 그렇겠습니까? 그런 경우도 있지만 굉장히 많은 경우에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많은 은혜를 받고도 물질에대한 집착으로 선교를 돕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웨슬레 같은 아주 강직하고 청렴하게 산 사람은 ‘당신의 지갑이 회개하지 않는 한 저는 당신의 회심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라는 유명한 말을 하였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그런 점에 있어서 사도 바울의 마음을 굉장히 기쁘게 한 교회였습니다. 사도 바울을 돕는 사람이 거의 없었던 때에 마케도냐를 떠날 때 빌립보 교회가 사도의 유일한 후원자가 되었고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한두번 바울의 일행을 돕는 교회였습니다.
그러면서 바울이 이 일을 매우 기뻐하는 이유를 이들에게 밝히고 있습니다. 바울은 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 오히려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열매가 풍성하기를 구하기 때문에 나는 이것을 하나님 앞에 감사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빌립보 교회가 이렇게 사도를 돕는 것을 보면서 사도는 직감적으로 이들에게 여전히 복음의 감격이 있구나 이들이 여전히 내가 전해 준 복음을 듣고 이전에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인해 감격하던 감격이 살아있고 저들이 보내준 선교비를 사용하여 더 많은 사람들이 이 복음을 듣고 구원의 역사 놀라운 은혜가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해주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구나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 빌리보 교회의 헌신을 매우 기뻐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미 앞에서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풍부함과 가난함속에도 어떻게 하나님을 섬길지 알아서 복음을 전하는 전도사로서의 자존심을 잃지 않는지를 신앙 안에서 일체의 배결을 배웠다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런 능력과 부요의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어도 신앙심이 깊은 사람은 가난해도 자존심을 잃지 않습니다. 어느 교회에서 현금을 많이 하는 교인이 있었는데 헌금을 많이 하니까 자연스럽게 교회에 대한 영향력이 굉장히 커졌습니다. 그러니까 나중에는 목회자를 쥐고 흔드는 상황까지 되었고 그 목회자는 그것이 문제가 되어서 교회를 떠나게 되고 다른 목회자가 왔습니다. 새로온 목회자는 이 속사정을 모두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회계 집사에게 100만원권 수표를 여러장 준비하라고 말한 다음에 부임하였을 때 그 헌금을 많이 한 사람을 불러서 100만원권 수표를 한 장씩 떨어뜨리면서 주으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그 사람이 다 줍고 나자 그것을 가지고 가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무엇인가 하나님을 온전히 의뢰하고 그 안에서 담대함을 얻는 사람은 비굴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그런 삶의 비결을 배우지 못한 사람은 비굴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 빌립보 교회를 보고 기뻐하는 것은 돈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확인되는 이 빌립보 교회의 복음의 감격과 사랑과 은혜를 보면서 감격하였던 것습니다
그리고 이 빌립보 교회가 자신을 물질로 돕는 것을 보면서 이것이 결국은 이 빌립보 교회의 열매가 되어서 축복으로 갚아 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기 때문에 이 빌립보 교회의 헌신을 기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마음이 자기에게 확정되고 자신을 위해 이 세상에서 손해보는 사람을 복 주시지 아니하시면 이것은 하나님의 성품에 어울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이 빌립보 교회가 자신과 맺은 인연을 감사하였고 변함없는 주님을 향한 사랑으로 자기를 섬기고 돕는 이 교회를 축복하고 이들의 믿음에 대해 하나님 앞에 감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이러해야겠습니다.
빌4:18-19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편에 너희의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만한 향기로운 재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에바브로디도가 바울에게 와서 병든 것도 알고 보면 이 빌리보 교회의 헌금을 바울에게 주려고 왔다가 병이 든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도의 마음이 얼마나 안쓰럽겠습니까? 빌립보 교회가 이 에바브로디도 편에 준 것을 감사하면서 하나님 앞에 이전 것에 대해서도 감사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것으로 말미암아 풍부해졌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알다시피 바울은 자기와 동행이 쓸 것을 천막을 수리함으로 조달하였던 사람입니다. 이것을 모든 목회에 적용하기는 힘이 들 것입니다. 바울의 경우에는 하나님 앞에 헌신도 특벌하였지만 이 사람은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복음 전도를 하면서 교회를 세우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런 일이 가능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당시 특별히 교회가 초기에 서게 되면서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자기의 먹고 있고 입고 쓸 것에 대해 공급받으면서 받게 될지도 모르는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 바울이 이런 일을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풍족하고 넉넉하게 되었다는 것은 그 선교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 풍부한 제정적인 상태가 되었다는 이야기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요 향기로운 제물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발견하는 것은 물질로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구나 하는 것입니다. 사실 성경을 찾아보면 물질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겠느냐라는 반론이 많이 나옵니다. 원리는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헌물을 드리는 사람과 그 드리는 물질의 내용이 일치하면 그것은 하나님을 매우 기쁘시게 하는 향기로운 제물이 되고 사람과 재물이 일치하지 않으면 매우 심각한 문제를 불러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제물과 제물을 드리는 사람이 어떻게 일치합니까? 제물을 하나님 앞에 드릴 때 냈다가 도로 달라고 할 사람도 없고 하나를 드리고 또 하나는 거짓말로 드리고 냈다가 다시 찾아가는 사람도 없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릴 때에는 흠이 없고 정결한 짐승을 드려야했습니다. 그러니까 도둑질한 것을 십일조를 드려야 하는지는 고민할 가치가 없는 질문입니다. 왜냐하면 소득 자체를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으니까 내든지 내지 않든지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이렇게 물질이 정결하고 깨끗한 것처럼 드려진 것같이 그 사람의 마음도 그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빌립보 교회는 아주 훌룡한 모본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복음안에서 교제하고 복음을 향한 뜨거움 마음을 간직하고 복음에 합당하고 선량한 삶을 살기로 애를 쓰는 사람들이 있는 교회였고 그런 교회가 마음을 다해 사도 바울의 선교 사역을 위해 드린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고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었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돈이라고 하는 것이 막벌고 부정한 방법으로 번 사람들에게는 불결한 것일 수 있지만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살면서 그 제물을 얻은 사람들에게는 그 제물은 자신의 인생의 농축입니다. 눈물, 성실함, 자기의 시간과 열정 모든 것이 거기에 들어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앞에 바쳐졌을 때 향기로운 제물이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들을 축복하는 가운데 하나님이 영광 가운데 너희 쓸 것을 채우실 것이라는 축복을 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필요한 것을 얻는 방법도 여러 가지 이지만 인간이 자신의 신앙과 자존심을 희생하고 소득을 벌어들이는 방법이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그냥 일상적으로 인간들이 몸부림치면서 벌어들이는 것이 있고 주님이 그 소득을 벌어들이는 그 모든 과정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면서 우리에게 수입을 주시는 것이 있습니다. 이런 것이 바로 하나님이 영광 가운데 우리의 쓸 것을 체우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 얻고 주님이 우리를 축복하시는데 우리에게 물질을 공급하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가 주님의 영광을 보고 그리고 또 우리가 주님께 영광을 돌려들이고 우리가 경제적으로 넉넉해지는 과정을 통해서 사람들이 우리를 축복해 주시는 하나님을 인정하는 그러한 과정과 그 속에서 우리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높인다고 사도가 우리를 축복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전심으로 향기로운 제물이 되게 살고 그렇게 자신의 소중한 것을 바친 사람들에게 언제나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과 은혜가 있다는 것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당신을 위해 가난해진 사람들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당신의 나라를 위해 고난 받고 박해 받는 사람들을 내버려 두지 않고 그들을 복 주시고 은혜를 주셔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을 위해 살도록 끊임없이 격려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도 이 말씀을 깊이 기억하면서 우리의 쓸 것을 영광 가운데 채워주셔셔 여러분들이 어떤 상황에서도 그리스도인으로서 거룩한 자존심을 잃지 않고 우리를 복주시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의 영혼도 거룩해져가고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이 우리를 복주시고 계신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도와달라고 기도하시는 사람이 되길 바랍니다.
9. 빌립보서 4:20-23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께 세세 무궁하도록 영광을 돌릴지어다 아멘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도에게 각각 문안하라 나와 함께 있는 형제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모든 성도들이 너희에게 문안하되 특히 가이사의 집 사람들 중 몇이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빌 4:20-23)
빌4:20-22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께 무궁토록 영광을 돌릴지어다 아멘,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도에게 각가 문안하라 나와 함께 있는 형제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모든 성도들이 너희에게 문안하되 특별히 가이사 집 사람 중 몇이니라’
편지를 쓴 마지막에 항상 사도의 축복기도가 나오는데 축복 기도가 나오기 전에 사람들에게 문안하라고 권면을 하고 그 앞에서는 하나님 아버지게 영광을 돌리는 송영이 나옵니다. 결국 이것을 보면서 우리들은 사도가 감옥 속에서 빌립보 교회에게 편지를 쓰며 자기의 소식도 전하고 빌립보 교회에 대한 애뜻한 마음도 전하고 빌립보 교인들이 보여준 따뜻한 마음에 대해서 감사하고 적어 내려간 마지막에 하나님 아버지게 영광을 돌릴지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위해서 살고 또 자신이 무엇을 위해 감옥 속에서 사형을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는지 궁극적인 삶의 목적을 상기 시켜주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아버지께 우리를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일꾼으로 부르시고 주님을 위해 살도록 우리를 부르셨을 때에 그때에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 수 있도록 주님이 은혜를 주셨는데 우리가 여러 모양으로 살지만 결국은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이렇게 복음을 위해 수고하는 것도 주의 영광을 위해서인 것이고 빌립보 교회가 사도를 도우는 것도 주의 영광을 위하는 것이고 연보를 해서 선교를 보낸 것도, 에바브로드도가 심부름을 왔다가 병들어 누운 것도 주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것이 다 주의 영광이 되기를 소원하는 사도 바울의 모습이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축도와 같은 송영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처지에 있든지 무엇을 하든지 어떤 모습으로 살든지 결국은 우리의 삶 자체가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이 여기에서 각 사람들에게 문안하라는 이야기를 하고 자신과 함께 있는 일행이 또한 빌립보 교인들을 문안하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들이 깨닫는 것은 성도의 교제입니다.
리처드범브란트라고 하는 동유럽 공산권하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20년 동안 옥살이를 한 목사님이 계섰습니다. 그 목사님이 풀려났을 때 어떤 사람이 그 감옥의 외로움을 어떻게 참고 보낼 수가 있었습니까? 라고 물으니 그 목사님이 외롭고 힘들 때는 지하 교회에서 형제들과 나누던 교제를 생각하였습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커다란 특권입니다.
이 세상에서 지치고 고단 할 때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 교회에서 또는 동일한 목표를 가지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형제들을 보며 교제를 나누며 자기가 가야 할 길을 다시 걸어가는 것입니다. 주를 위해 사는 사람인 줄을 다시 확인하고 하나님 앞에 다시 새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삶이 계속해서 우리 안에서 주님의 헌신된 백성으로 살아가게끔 도와 주는 힘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의 교제는 먹고 마시는 교제가 아니고 어울려 노는 교제가 아닙니다. 성도의 교제는 교제 후에는 더 손잡고 열심히 주를 영화롭게 하기 위해 살고자하는 결심이 있고 거룩한 소원이 그 교제 속에서 솟아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커다란 은혜이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커다란 특권이라고 아니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삶을 하나님 앞에서 날마나 날마다 살아가도록 우리들이 부름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는이런 권면을 하면서 우리에게 그런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깊이 마음 속에 있는 사랑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전하면서 특별히 성도들의 이름까지 거론하고 있습니다. 사도가 빌립보 교회에서 복음을 전함으로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고 변화를 받는 그런 은혜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문안할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교제는 항상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 곳에 올바른 성도의 교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런 하나님이 주신 성도의 교제 속에서 살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찬송하고 하나님을 높이며 사는 사람들이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빌4:23
‘ 주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 지어다’
이제 사도는 마지막으로 축복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여러 형태가 나오는데 여기서는 단순한 형태입니다. 우선 사도가 여기에서 주 예수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라고 축복하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심령이라는 말에 눈길이 갑니다.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신비합니다. 삶에 깊은 절망과 수렁 가운데 있어서 도저히 어떻게 자기의 힘으로 헤어나올 수 없는 끔찍한 상황에 있어서 도저의 헤어나올 수 없을 때 절망 속에서 예수를 믿게 됩니다. 마음을 열고 하나님을 믿으니 주님의 복음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은혜가 그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그런 후 시간이 흐르면 소망에 넘치고 사랑에 넘치는 사람으로 변합니다. 그러 후 뒤를 돌아보면 얼마 전에 그 환경으로 인하여 절망에 빠졌는데 그러면 그 환경이 은혜받는 동안에 변하였는가 하면 변한 것도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속썩이던 식구들은 계속 속썩이고 질병도 그대로이고 물질의 부족도 여전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환경은 변하지 않았는데 절망이 소망으로 넘치고 좌절스럽고 고통스럽던 마음이 변화서 기쁨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심령에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가 그의 심령 가운데 임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가 깊이 임하니까 환경이 변화하지 않아도 그 환경을 극복하며 이길 수 있는 원동력이 임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신앙 생활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면 태산과 같은 어려움도 물러나고 몇십년 묵은 병도 나을 수가 있습니다. 또 망가졌던 인간과의 관계도 고쳐집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먼저 우리에게 주어진 환경과 상황을 고통이 아니라 감사함으로 반응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의 은혜가 우리의 심령 속에 임하게 될 때 그 힘이 우리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삶을 움직이는 핵심부에는 우리의 심령이 있습니다. 그러니 로마서 1장에서 바울이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 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장면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심령이 무엇으로 가득차 있으며 어떤 상태가 되어 있는가가 우리의 삶의 상태와 모든 실패 여부를 만드는 것입니다.
사실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을 보면서 빌어주고 싶은 것들이 얼마나 많이 있었겠습니까? 아마 그는 빌립보 교회 교인들을 향한 사랑으로 말하자면 한없이 한없이 축복을 하여도 다 모자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 모든 것을 다 생략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라고 한가지로 말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다른 모든 축복의 진정한 비결이 심령에 그리스도의 은헤가 넘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넘치면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고난을 당하고 십자가를 지셨으니 감사함 한 마음으로 주님을 위해 고난을 감당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고난을 견디시면서도 불평하거나 누구를 원망하지 않고 기쁨으로 감당하셨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은혜가 넘치면 에수님처럼 고난을 감당하면서도 기쁨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심령에 넘치면 에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것처럼 그렇게 낮아져서 주를 섬기고 지체들을 섬기는 마음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은헤가 넘쳐나면 예수님이 자기 앞에 놓인 상급을 기억하며 기꺼이 고난을 당하셨던 것처럼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도 그 은헤가 넘치면 눈에 보이는 잠깐 동안의 고통에 마음을 뺏기지 않고 영원한 나라의 상급을 바라보면서 사는 참된 소망이 있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빌립보서를 마치면서 하나님 앞에 우리에게도 그런 축복이 임하게 하시고 주님이 내게 최고의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을 때 우리의 심령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충만하게 하셔서 우리의 인생이 주를 위한 인생이 되도록 도와 달라고 기도해야겠습니다.
빌립보서 강해 Ⅰ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