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모 인턴쉽 특강
녹취자 : 오희열
어느 날 가을에 국화 전시회가 열렸습니다. 국화 전시회에 가면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꽃들이 나옵니다. 한반도 모양으로 되어 있는 국화꽃도 나오고 수백 송이의 국화꽃이 자라는데 키가 똑같습니다. 그것은 보통 정성으로 기른 것이 아닙니다. 어떤 화분은 하나에 300만원씩이나 하는 국화꽃도 있습니다. 국화꽃이 활짝 핀 것을 보고 사람들이 감탄을 합니다. “어떻게 이렇게 멋있게 피었을까? 이 종자가 무엇일까? 누가 길렀을까? 어디서 가져왔을까? 나도 이런 국화꽃을 키워봤으면 좋겠다!” 한 시인의 말대로,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다.”
사람들은 꽃이 활짝 핀 것을 보고, “야, 누구는 진짜 설교를 참 잘한다. 목회를 참 잘한다. 누구는 글도 잘 쓴다. 능력이 있다.” 라고 말하지만, 그렇게 활짝 핀 것을 보고 부러워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으며 피우지 못한 삶을 살 것인지, 활짝 핀 삶을 살 것인지를 물었을 때 피우지 못한 삶을 살겠다고 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한 송이의 국화꽃이 활짝 필 때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 국화꽃에 시상을 주었지만 그 국화꽃의 아름다운 만개에 이르기까지는 그 스토리가 봄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알다시피 국화는 가을에 핍니다. 봄에는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이렇게 올라옵니다. 봄부터 소쩍새가 날아옵니다. 소쩍새는 올빼미과의 새 인데 낮에는 숲에 숨어있고 밤에만 나와서 다니는 새 입니다. 못 생겼습니다. 소리도 별로 안 좋습니다. 그런데 그 새가 웁니다. 그 울음소리에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는, 그 봄에는 그 국화꽃을 찾으러 구경 오는 사람이 없습니다. 꽃도 없거니와 기분 나쁘게 밤에 소쩍새가 와서 울고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는 대롱하나가 올라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봄이 옵니다. 싹이 납니다. 사람들은 쳐다보지 않습니다. 봄부터 우는 소쩍새가 그때도 웁니다. 그 뒤에 잎들이 나기 시작합니다. 그냥 퍼런 풀포기일 뿐입니다. 그런데도 소쩍새는 계속 웁니다. 고추잠자리들이 날아다니는 여름이 옵니다. 뜨거운 태양 볕 아래에서도 시퍼렇게 자라는 풀일 뿐입니다. 그렇게 가을이 옵니다. 서리가 내리기 직전까지 가을이 깊어갑니다. 어느 날 국화꽃이 활짝 핍니다. 그 국화꽃이 피었을 때, 그때야 사람들은 보기 시작합니다. “야! 국화꽃이 대단하구나!”, “저 사람은 어디서 공부를 했지?”, “저 사람은 누구야?” 하면서 사람들이 좋아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이미 그 사람들이 생각하지도 않았던 이른 봄부터 소쩍새의 우는 사연이 시작되어서 아름다운 만개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활짝 핀 국화꽃은 갖고 싶지만 소쩍새 우는 사연을 써 내려가고 싶지는 않은 것입니다. 그것은 너무 외롭고 죽을 것 같은 고통의 시기를 지나는 것입니다.
저희 아들이 공수부대 출신입니다. 지금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습니다. 자부심이 하늘을 찌릅니다. 23일 동안 공수부대 훈련을 두 번이나 받고 귀가 안 좋아서 비행기를 탈 수가 없다고 해서 다시 들어가서 훈련을 받는데 거기는 변호사, 장교, 그런 것 없이 계급장을 다 떼고 함께 훈련을 받습니다. 그런데 교관들은 훈련 중에 어디서 죽을 것처럼 힘든지를 안다고 합니다. 더 못하겠다, 죽을 것 같다고 할 때, 그때 호루라기를 불어서 쉬게 해 준답니다. 물에 집에 넣고 건져주지를 않다고 익사하기 직전에 건져준답니다. 생사를 넘나드는 훈련을 수없이 받으면서 공수부대원이 되는데 유사시에는 그 공수부대원 한 사람이 북한 군복을 입고 비행기를 타고 평양에 투입이 되는데 귀환계획은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평소에 훈련받는 것이 먹을 것 없이 산에 있는 것을 캐 먹으면서 400km를 걸어오는 훈련을 한답니다. 그 한 사람이 훈련되었을 때 800명의 적 군인들을 정신 못 차리게 하는 것이 목표라고 합니다. 800명의 군인들과 싸워서 다 이긴다는 것이 아니라, 그 한 사람이 침투했기 때문에 800명의 전력이 우왕좌왕하며 흔들리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군인이 어떻게 태어나겠습니까? 평범한 훈련을 받아서는 그런 군인이 태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일을 시작하기 전에,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사람으로 살아갈 것인지, 이것은 단순히 지휘가 높아진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내가 어디에 있든지 정말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나님의 역사에 쓰임 받는 사람으로 살다가 죽을 것인가? 아니면,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그냥 교회에서 생활비나 받아서 아이들이나 키우다가 평범하게 죽을 것인가? 이 둘 중에 어떤 삶을 진정으로 원하는지 선택을 하고 꿈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그 꿈을 위해서 자기 대... (7:14~7:30 소리가 안 남)
오늘 새벽기도가 끝나고 여기 칼빈 파크 마당에 앉아서 성경을 읽었습니다. 예고도 없이 한 후배가 거기에 찾아와서, “선배님, 좋으시겠습니다.”, “뭐가?”, “다른 사람들은 교회도 작은데 이렇게 교회도 크게 하시고 다른 사람은 남이 세워놓은 교회에 들어가서 장로들에게 치이기도 하고 그러는데 목사님은 목사님 마음대로 소신껏 하시고 장로들이 말도 잘 듣고 교회도 커지고 목사님이 책도 많이 쓰시고 돈도 많이 버실 것이고 말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야기했습니다. “그렇게 내가 부럽냐?”, “그럼요, 우리 후배들이 모두 부러워합니다.”, “야, 너는 내 자리에 데려다 놓으면 한 달 안에 사표 낼 것이다.” 했습니다.
(찬양) 뉘게나 있는 십자가 내게도 있도다
나는 양심에 손을 얹고 말하지만 35년 전에 목회를 시작했고 담임목회를 25년 했지만 이 자리가 나에게 딱 맞는 자리라는 생각을 한 번도 해 본적이 없습니다. 항상 이 목회는 내가 원하지 않는 가슴앓이고 설교는 이국어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간절한 소원은 이 모든 짐을 벗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좋아 보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저를 전 세계에서 부르니까 말입니다. 다음 주에는 미국에 가고 6월에는 영국교회가 저를 불러서 영어로 설교하고 강의하러 가야 합니다. 어디든지 오라는 곳이 있고 찾는 사람들이 있고 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전 세계를 날아다니고 맘만 먹으면 비행기를 예약해서 다음 주에는 홍콩을 갈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얼마나 화려한 삶이겠습니까? 책도 쓰고 많은 사람들이 읽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은 사람들이 바라보는 껍질의 삶입니다. 진짜 내면의 세계 속의 삶이 무엇이지가 중요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목회자가 되기 위해서 준비된 것만큼 목회자의 삶을 살게 되고 준비하던 습관이, 목회자가 된 다음에도 목회자로 계속 발전할 수 있는 추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자가 되기 위해서 준비를 할 때 공부를 하지 않으면 나중에 목회를 할 때, 100명쯤 모일 때까지는 미친듯이 전도하고 껄떡껄떡 넘어가면서 해 나갑니다. 물론 그것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렇게 한다고 해 봅시다. 그러다가 교인들이 100명을 넘어서 150명이 모이게 되면 자기가 아는 것이 너무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학교 다닐 때 공부를 좀 하라고 했더니 공부하지 않고 돌아다니다가, 이제부터 목회를 하라고 했더니 가방을 들고 공부하러 간다고 합니다. 사역을 쉬겠다고 합니다. 저는 사역을 쉰 적이 없습니다. 딱 4개월 쉬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환경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마음가짐입니다. 여러분이 보시기에 제가 지식을 굉장히 강조했다고 느껴지는 것은, 그 부분이 여러분에게 있어서 가장 큰 약점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실 저는 공정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육체적 준비와 순결로 시작해서 성품과 인격, 성경과 학문, 열정, 이렇게 차례대로 나갔습니다. 문제는 목회자가 되기 위해서는 물론 신앙적인 것이 강조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을 깊이 만나고 신앙이 견고한 사람이 목회를 하는 것이지 꿈이 있는 사람이 목회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꿈이라는 것은 버리는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야망이 살아있는 사람은 안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목회자로 빗어져 간다는 것은 하루아침에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교수가 알려준, 생선회를 뜨는 일식 단골집이 있었습니다. 가면 맛있게 초밥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이 정도 사시미를 뜨고 초밥을 만들려면 몇 년이나 배워야 합니까?” 물었더니 3년 내지 5년을 배워야 초밥을 만들 수 있다고 합니다. 그때까지는 설거지하고 파 다듬는 일을 1년 하다가 생선을 다듬는 것을 하다가 생선에 칼질을 하려면 3년을 지내야 한다고 합니다. 아니, 한 번 먹고 없어지는 초밥 만드는데도 그 시간이 걸린다는데, 어떻게 책 한 권을 달랑 읽고 “알았다!” 하고 “돌격!” 하면 뭐가 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제일 중요한 것은 지난 시간에도 이야기했지만 주님을 깊이 만나야 합니다. 주님을 깊이 만나서 내가 목회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는 필연성을 간직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치열하게 공부를 해야 합니다. 여러분도 이해하시겠지만 아이를 하나, 둘을 데리고 힘들어서 죽겠는데 보따리를 풀고 왔으면 남편도 아이를 봐 주고 가사를 도와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절대적으로 공부하고 기도할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 줘야 합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해야 할 일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다 때려치우고 남에게 돈 벌어오고 자기는 공부나 하겠다고 하면 안 됩니다. 공부를 해야 하는데, 우리에게는 공부에 대한 반감 같은 것이 있습니다. 공부를 좀 하는 사람은 은혜가 없고, 맨날 머리를 굴려서 뭘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 사람은 그가 공부한 것이 그 사람을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니라 기도를 하지 않고 성령충만하지 않고 산 것이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여기에는 둘 사이에 조화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목회사역의 최고의 재앙은, 가르칠 내용이 없는 사람들이 목회를 하는 것입니다. 맨날 불 때는 연습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권위를 세워야 하겠고 거기에서 거짓이 나오는 것입니다. 성경적으로 볼 때 참된 권위는 진리에서 나오는 것인데, 진리를 다루는 사람들이 공부를 하지 않고 진리에 접근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이 정도의 책 가지고는 안 되고 “신학공부, 나는 이렇게 해 왔다” 이 책을 여러분은 먼저 읽어야 합니다. 사모님들은 공부를 아예 포기합니다. 그러면 둘 중에 하나가 됩니다. 그냥 살림이나 하면서 식모처럼 살든지, 아니면 남편의 하수인이 되든지 둘 중에 하나가 됩니다. 둘 중 어느 것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목회자의 아내가 살아야 교회가 산다”에서 “칼을 든 천사”를 읽어보셨을 것입니다. 주기철 목사님의 사모이신 오정은 사모님 이야기입니다. 남편이 가는 길이 그것이 아니다 라고 칼을 목에 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수 있으려면 사모가 어떤 편에 서 있어야 하겠습니까? “진리”의 편에 서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그 칼을 아침 저녁으로 내밀면 안 될 것입니다. 남편이 공부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에 의하면 소명이 아닐 가능성이 많다고 합니다. 기본적으로 목회의 소명을 받은 사람은 진리에 관심이 있기 때문에 책 읽는 것을 싫어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만약 싫어한다면 소명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소명이 아니라면 괜히 고생스럽게 그 길을 가지 말고 지금이라도 빨리 정리해서 조그만 강의라도 해서 먹고 살고 취직하고 일을 해서 살아가면서 그렇게 주님을 섬기며 살다가 주님이 오시면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옛날에 선생들이 하도 속을 썩으니까 선생의 똥은 개도 안 먹는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산 속에서 호랑이를 만나면 호랑이가 어디부터 먹을 것 같습니까? 뱃살이 제일 맛있다고 합니다. 사람을 잡으면 배의 고기부터 뜯어먹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호랑이가 절대로 안 뜯어먹는 두 종류의 인간이 있습니다. 첩을 가진 남자와 목회자랍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그 속이 다 썩어버렸기 때문이랍니다. 속이 상해서 말입니다. 그래서 호랑이도 안 먹는답니다. 제가 만든 이야기입니다.
남편들이 아예 공부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당신 그렇게 공부를 안 해서 되겠어요? 공부를 하세요.” 라고 충고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한두 번은 들을 수 있지만 두 번, 세 번 들으면 반감이 생깁니다. 가장 훌륭한 방법은, 사모가 두꺼운 신학책을 놓고 읽는 것입니다. 성질을 죽이면서 시위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물어봅니다. “여보, 아브라함 카이퍼의 중생론이 칼빈과는 어떻게 달라요?” 대답을 못 할 것입니다. “아, 너무 궁금하다. 신학교에 가서 그런 자료가 있으면 알고 싶다.”, “당신이 무엇 때문에 알고 싶은데?” 하면, 조목조목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이건 이런 점에서 성경과 맞는 것 같고 저건 안 맞는 것 같다, 진실로 궁금하다.” 라고 말입니다. 애들도 엄마 따라서 책을 읽기 시작합니다. 저희 집 사람은 무수한 신학책을 읽었습니다. 제가 대충 보기에도 한 달에 여덟 권 내지 아홉 권을 읽는 것 같습니다. 웨인 그루뎀의 조직신학부터 해서 다 섭렵했습니다. 그저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같은 잡지 말고 두툼한 신학책을 펼쳐 놓고 읽는 것입니다. 이런 것부터 시작해서, 칼빈 이야기가 나왔으니 칼빈의 두툼한 책을 갖다 놓고 줄을 치며 읽는 것입니다. 책상에 펴 놓습니다. 메모지에 수많은 질문을 적어 놓습니다. 계속 공부해나가는 것입니다. 가정예배 같은 것을 드릴 때 조목조목 아이들에게 가르쳐주면 남편이 자극을 받습니다.
제가 마지막으로 이야기하자면, 여러분은 이미 결혼을 하셨습니다만, 결혼하지 않은 자매들 중에서 목회의 길을 가려는 자매들에게 저는 말합니다. “두 사람과는 결혼하지 마라. 신앙이 없는 사람과 공부하지 않으려는 사람과는 결혼하지 마라.” 신앙이 없는 사람과 공부하지 않으려는 사람과 결혼해봐야 앞날이 훤하기 때문에 그런 남자와는 결혼하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어떻게 합니까? 이미 결혼을 했으니 남편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공부를 하라고 하면 다 때려치우고 진학을 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것도 한 방법이 될 수는 있겠지만, 학교에서 학자가 되기 위해서 요구하는 공부와 목회자가 설교자가 되기 위해서 요구되는 공부는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치열하고 집요하게 공부를 해야 합니다. 늘 공부만 할 수는 없으니까 밤에 시간을 내서 공부를 한다거나 교회 사역이 없는 월요일에는 아침 새벽 4시부터 오전 시간까지 공부만 하게 한다든지 말입니다. 저는 특별한 것이 없으니까 항상 공부를 했고 지금은 건강이 안 좋고 해서 옛날 같지는 않지만 공부를 합니다. 어떤 때에는 새벽 1시까지 공부를 합니다. 직원들은 다 퇴근했습니다. 가방을 매고 내려오면 길거리에 찬바람이 싹 불고 낙엽이 날리는 가을입니다. 나의 키가 이만큼 자란 것처럼 느껴집니다. 지성의 키가 말입니다. 그리고 1년 전의 나를 만나서 너는 이렇게 믿으면 안 된다고 충고해 주고 싶은 마음이 생겨납니다.
이런 생각을 해 보십시오. 논에 물이 없을 때 지게를 지고 가서 한 양동이 물을 떠다가 부을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언제까지 그렇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리고 그것이 가능하겠습니까? 뜨거운 태양 볕 아래에서 말입니다. 좋은 방법은, 위쪽에 저수지를 만들어 놓고 평소에 비가 올 때 물을 잔뜩 받아 두었다가 필요할 때 열어서 사용하듯이 목회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공부하는 것으로 내일 설교할 때 쓰려고 공부하면 안 됩니다. 그렇게 하면 어떻게 일평생 그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탁구공이 2.5g 입니다. 내 제자 중에서 탁구 선수가 하나 있었는데 하루에 20km를 로드웍으로 달립니다. 그까짓 탁구공 하나를 가지고 경기하는데 20km를 달려야 하느냐고 물었더니 그 제자가 제 평생에 잊혀지지 않는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모든 탁구의 세밀한 기술은 체력에서 나옵니다.”
등산을 할 때 보면 올라가다가 다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내려오다가 힘이 없어서 발을 헛디뎌서 다칩니다.
학문의 체력이 견고할 때 거기에서 말씀을 쪼개고 할 수 있는 이런 것이 나오는 것입니다. 치열하게 공부를 하고 항상 남편들이 읽어야 할 책을 사는 것에 고통받지 않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공부만이 아닙니다. 이 책에서 마지막으로 전체적으로 하고 싶은 말은 광야에서 주님을 깊이 만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고통스러운 긴 세월이 있고 나서 알아가는 것입니다.
로마의 군인들을 강하다고 했습니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 이야기”에서 “유대 고대사 Antiquitates Judaicae” 라고 하는 책을 쓴 요세푸스의 이야기를 인용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로마의 군대는 강했다. 로마의 군대가 강할 때 로마는 강했고 로마의 군대가 쇠하여지면서 로마는 망했다.” 왜 그들이 강해질 수 있었겠습니까? “로마의 군인들에게 훈련은 피 흘리지 않는 전투였고 전투는 피 흘리는 훈련이었다.” 그러면서 로마다운 로마가 된 것입니다.
정신의 크기를 크게 가져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를 이야기하고 마치겠습니다. 옛날에 어떤 사람이 전설의 고향에 나온 이야기인데, 여자가 좋아서 장가를 왔는데 여자는 참 조신하고 살림도 잘 하는데 남자가 문제였습니다. 맨날 투정이나 하고 술이나 퍼먹고 돌아오고 일을 하지 않으니까 집안이 가난했습니다. 남편이 어디를 나가려면 돈이 있어야 하니까, 술 사먹게 돈을 달라고 했답니다. 농사를 짓지 않아서 집안에 돈이 없다고 해도 돈을 달라고 생떼를 부리니까 잠깐 기다리라고 하고, 대신 절대 방에 있는 동안에 문을 열어보지 말라고 했답니다. 그렇게 하고 한참을 기다렸더니 잘 그린 “화조화”, 새와 꽃이 있는 그림을 가져온 것입니다. 그걸 시장에 갖다 주면 꽤 돈을 쳐 주었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하루 종일 친구들과 술을 먹고 와도 돈이 남을 정도로 비싸게 쳐 주었습니다. 남편이 거기에 맛이 들려서 며칠에 한 번씩 그림을 그려내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내에게 그런 재능이 있으니 자꾸 요구를 하는 것입니다. 아내는 다시 약속을 합니다. “내가 그림을 그리는 동안에 문을 열어서 그림 그리는 것을 절대 보지 말아야 합니다. 만약에 본다면 내가 죽습니다.” 남편은 알았다고 하고 기다리다가 그날따라 너무 궁금했습니다. 평소에는 붓을 본 일도 없고 집필묵도 어디서 찾아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이런 그림을 그려내는지 말입니다. 결국 약속을 어기고 살며시 방문에 구멍을 뚫고 보니까 방안에 그림 그리는 아내는 없고 그리다가 만 그림 위에 새 한 마리가 쓰러져 있었습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아내가 원래 새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피를 울컥울컥 토해내면서 그 피로 그림을 그린 것입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우리 목회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지 생각했습니다. 목회에서 쏟아져 나오는 것은 들어간 것이 나오는 것이니, 원래 목회자와 목회자의 아내 속에 없던 것들을 저기서 가져다가 여기에 놓는다고 해서 목회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진리를 이쪽으로 듣고 저쪽으로 토해놓는 사람은 이 사람이 하는 얘기를 저쪽으로 패스해 주는 것인데 그것이 목회가 아니라, 그 말씀이 자신 속에 들어가서 자기를 변화시키고 그것이 피가 되고 진액이 되어서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한 편의 설교가 목숨인 것처럼 그렇게 토해 놓는 것이 목회라는 것입니다.
처음에 했던 이야기를 반복하고 싶습니다. 주님을 깊이 만나십시오. 두 번째, 목숨을 걸고 공부하십시오. 세 번째, 열렬히 기도하십시오. 하나님과 사람을 향하여 신실한 사람이 되십시오.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