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생활에 모본이신 예수님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눅 11:1)
녹취자 : 오희열
제가 서른네 살에 신학대학의 교수가 되고 2년이 지난 어느 해 가을이었습니다. 산자락을 끼고 있는 아주 작은 교수실에서 학생들의 수업이 모두 끝나고 늦은 오후 시간에 성경을 폈습니다. 그때 순서에 따라서 누가복음 11장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때 저는 이 첫 절에 깊이 은혜를 받고 세 시간 동안 이 한 절을 읽었습니다. 그때 기도에 대해 주셨던 하나님의 강한 도전이 이제까지 이나마 나를 살아오게 한 것이 아닌가 생각을 해 봅니다.
누가복음 11장은 그 유명한 주기도문을 담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은 기도의 복음이라고 불릴 정도로 기도에 관한 내용이 많이 들어있습니다. 사복음서 전체에 기도에 관한 사건이 51회 등장하는데 그중에 22회가 누가복음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특히 누가복음 11장 1절은 어떻게 해서 주기도문이 생겨나게 되었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경은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라고 말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매우 인상 깊은 도전을 줍니다. 제일 먼저 우리가 받는 도전은 “예수께서 기도하셨다.”라는 사실입니다. 기도의 주체가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하나님이셨습니다. 비록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지만 사실 그분의 본체는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엄밀한 의미에서 기도하실 필요가 없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기도하시는 것은 곧 당신 자신에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을 때, 당신의 하나님의 성품을 사람의 성품 아래 감추셨습니다. 죄는 없으시지만 인간이 진 모든 연약함을 감당하시기로 하고 하나님이 아닌 연약한 인간이 사는 방식으로 일생을 사셨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한편으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가르쳐주실 뿐만 아니라 또한 참사람이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지를 가르치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생애를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 높고 위대하심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렇게 연약한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의 발자취를 따라가면서 참사람이 어떤 존재여야 하는지를 배우는 것입니다. 주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나 그와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이 세상에 있는 가장 연약한 성도가 전심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며 사는 것처럼, 그렇게 사람처럼 주님을 전심으로 의지하며 사셨습니다. 일평생 하나님을 의지하며 어린아이처럼 사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복종의 마음은 기도를 통해 가장 풍부하게 표현되었습니다.
오늘 성경은 이 위대한 교훈을 “예수께서” 라고 시작합니다. 그 기도의 주체가 예수님 자신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수 있는 일이 있고 다른 사람에게는 도저히 맡길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데에 있어서도 우리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동역할 수 있는 사람을 불러서 내가 해야 할 일을 그 사람에게 맡기고 그 사람이 해야 할 일을 내가 또 대신 맡아주기도 합니다. 이렇게 함께 얽히면서 하나님의 교회를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해야 할 일 가운데는 도저히 남에게 위탁할 수 없는, 자신이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 있는 것입니다. 그중에 하나가 진리를 깨닫고 실천하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일입니다. 기도하는 일은 누가 대신해 줄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중보기도가 있지 않습니까?” 원래 ‘중보기도’라는 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적용될 수 있는 용어입니다. 아무튼 다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해 주는 기도, 어떤 사람은 그것을 ‘중보기도’라고 부르고 저 같은 사람은 ‘섬김기도’라고 부릅니다. 용어야 어쨌든지, 아무튼 남을 위해서 기도해 주는 것이 있다고 합시다. 이런 남을 위한 ‘섬김기도’에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지금도 누군가를 위해 기도하는 사람은 그런 놀라운 기적을 봅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렇게 남을 위해 섬김으로 기도하고 도고하고 대신 기도해 주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어떤 위대한 남을 위한 기도라고 할지라도 그 기도가 역사할 때에는 당사자의 마음을 통해서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자기를 위해서 기도해 주어도 마지막 뚜껑을 여는 것은 자신의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기도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누가 대신해 줄 수 없는 우리의 의무이고 특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이런 일에 모본을 보여주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분은 죄가 없으신 분이었습니다. 그러면 그분이 이 세상에서 욕심이 많은 분이셨습니까? 아닙니다. 그런데 왜 그분이 몸소 하나님 앞에 기도하셨습니까? 히브리서 5장 17절은 말하기를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경외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라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생애는 통곡과 눈물로 기도를 올린 생애였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찬양)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자신은 이 세상에서 세속적인 욕망도 꿈도, 그리고 소유도 원하는 것이 없었으나 통곡과 눈물로 기도를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죄인 된 우리를 하나님께 인도하시기 위함이었고 우리에게 참사람으로서 하나님을 어떻게 의지해야 하는지를 보여주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통곡과 눈물로 몸소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누구에게 미루지 말고 여러분 자신이 직접 매 순간 하나님을 의지하며 기도하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인간의 영혼이 가장 아름다울 때가 두 번 있는데 한 번은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할 때이고 또 한 번은 상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회개의 눈물을 흘릴 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가 없으셨지만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어떻게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지하며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시기 위해서 몸소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주님이 몸소 기도하셨으니 여러분은 더 많이 기도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는 항상 기도하셨습니다. 오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한 곳’ 이라는 이 구절이 희랍어 성경에는 ‘엔토포티니’ 라고 되어 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어떤 곳에서 기도하셨다’라는 뜻입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은 일정한 거처가 없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전체가, 여행하시는 생애였습니다. 그래서 그곳이 갈릴리든 사마리아든 유대 땅이든, 회당이든, 벌판이든, 성전이든, 당신의 복음 진리를 들어야 할 사람들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찾아가서 하나님이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높은 곳에서 임금의 의자에 앉으셔서 “진리가 여기있으니 원하는 사람들은 오너라.” 이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생애는 거처가 없는 생애였습니다. 예수님 당신 자신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깃들 곳이 있건만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노라.” 이것이 예수님의 생애였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기도하신 장소가 아주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마가복음 1장 35절에는 예수님이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셨다고 되어 있지만 마태복음 13장 23절에서는 산에서 기도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 3장 21절에서는 강에서 기도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기도 장소가 다양하게 나타나는 것은 예수님의 생애가 매우 유동적인 생활을 하셨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안정적이고 아주 편안하게 규칙적인 생활을 할 수 있는 일정한 거처가 있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병든 자를 고치고 주린 자를 먹이시고, 상처받은 자들을 위로하시고 진리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그 빛을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래서 죄인이 있는 곳은 어디든지 그분이 가셔야 할 곳이었습니다.
신자의 삶의 본질은 영적전투입니다. 그 영적인 전투는 홈그라운드에서 펼쳐지는 축구경기가 아닙니다. 축구경기가 우리나라에서 이루어진다며 우리 선수들은 큰 힘을 얻을 것입니다. 왜? 우레와 같은 함성으로 자신들을 응원하고 자신들과 한마음이 되어서 승리를 기원해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남의 나라에 가서 경기를 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질풍처럼 화려한 드리블로 상대의 골문을 향해 달려가면 야유를 퍼붓고 멋있는 골을 넣으면 욕설이 나오고 심지어는 콜라병이 날아옵니다. 때로는 테러의 위협까지 느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명심해야 할 것은 믿음의 싸움을 싸워가는 이 세상은 우리의 홈 경기장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저 위에는 구름같이 허다한 증인들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응원하십니다. 그러나 믿음을 가진 사람이 아니며 그 응원단들의 함성소리를 들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매일 매일 이 세상에서 욱여쌈을 당합니다. 속에 근심, 밖에 걱정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요란한 일들은 우리로 하여금 차분히 하나님을 찾아 매달리지 못하게 우리의 마음을 흔들어 놓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너무 힘들고 어렵고 너무 복잡합니다. 그러면 한 번 물어보겠습니다. 언제쯤이 되면 우리의 삶의 여건들이 기도하기에 아주 적합한 환경이 되겠습니까? 그런 때가 쉽게 오지는 않겠지만 혹시 온다고 하면 그때쯤에는 우리에게 기도할 마음이 없어질 것입니다. 기도할 마음이 있을 때는 환경이 받쳐주지를 않고 환경이 받쳐줄 때는 마음이 그렇지 않은, 끊임없는 어긋남 속에서 우리의 인생은 흘러가고, 조금 더 세월이 흘러가면 기도하고 싶어서 교회에 나오려고 해도 무릎을 꿇을 수 없는 나이가 됩니다. 그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우리 주님이 우리와 꼭 같이 연약한 인간의 몸을 입으셔서 주리시며 배고프시고 물을 안마시며 목마르시고 사랑하는 사람이 죽으면 그리우셨습니다. 그런 똑같이 연약한 인간의 육신을 지니신 예수 그리스도셨습니다. 얼마나 피곤하셨으면 폭풍이 이는 바다, 그 위에 떠 있는 작은 배 위에서 주무시고 계셨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이런 모든 환경을 바라보면서 환경을 탓하고 이런 환경 때문에 내가 기도할 수 없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연약하고 힘들 때마다 우리보다 더 힘들게 사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분도 때로는 이 세상에서 눈물을 흘리고 고난을 받으시면서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다 살펴보면 그 생애는 한 마디로 ‘액체의 생애’였습니다. 주님은 연약한 자들을 섬기기 위해서 온몸 땀으로 범벅이 된 삶을 사셨고, 하나님이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지 않는 것, 사랑하는 영혼들이 아직까지 구원받지 못한 것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신 생애였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남은 당신의 옥체를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깨뜨려 죽으신 피의 생애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전체는 땀과 눈물과 피로 얼룩진 생애였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오늘 이 기도를 듣는 여러분 중에도 지금보다 훨씬 어려웠던 과거에 하나님께 열렬히 기도했던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저는 이 남서울교회 앞에 있는 도로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제가 사당동에 살았습니다. 낮에는 교수 생활을 하고 주일은 내수동에 있는 교회에서 화목사님과 함께 섬겼습니다. 그때 저는 목사가 아니고 전도사였습니다. 일주일 동안 학생들을 대학에서 가르칠 때는 너무 신이 납니다. 어떤 강의실에 들어가도 제가 한 수 위입니다. 그래도 학생들보다 제가 아는 것 많으니까 교수가 되었을 것 아닙니까? 학생들이 너무 공손합니다. 인사를 꼬박꼬박하고 저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처음 한 5년 동안에는 있는 것 없는 것을 전부 학생들에게 쏟아주었습니다. 첫 학교에서 4년을 있었는데 그 4년 동안 제가 흘린 눈물이 열린 교회를 25년 하면서 흘린 눈물보다 많았습니다.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토요일이 되면 어두운 먹구름이 몰려오기 시작합니다. 주일에 가서 영혼들을 위해서 설교를 해야 하는데 돌덩어리 같은 영혼들이 앉아있는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은 그렇지 않습니까? 설교를 해도 듣지도 않습니다. 아이들이 하나님 앞에 변화되지 않으니까 세상에 속한 것들은 즐겁고 달콤한데 하늘에 속한 것들은 즐겁고 달콤하지 않은 것입니다. 토요일이 되면 근심이 밀려왔습니다.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토요일 밤 9시쯤 되면 보따리를 싸서 교회로 갔습니다. 항상 여기를 지나갑니다. 그때부터 마음에 눈물이 흐릅니다. ‘아! 내가 내일도 변화되지 않는 영혼들을 봐야하는구나. 신학생들을 일주일 동안 잘 가르쳤지만 가르치면 무엇 하나? 내가 돌보는 아이들이 변화되지 않는데...’ 하며 지나갑니다. 9시 반쯤 되면 차도 별로 없는 길을 좌석버스가 지나갑니다. 창문을 열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찬양)
폭풍우 흑암 속 헤치사 빛으로 손잡고 날 인도 하소서
외치는 이 소리 귀 기울이시사 손잡고 날 인도 하소서
이 반포를 지나서 한강을 건너옵니다. 손님도 별로 없습니다. 마음속으로 기도합니다. 교회에 가서 보따리를 풀고 밤새도록 기도하고 그 다음날 아침에 설교를 합니다. 한 2년을 그렇게 했습니다. 그때 깊이 깨달은 사실 하나는,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의 세계를 넓히실 때 우리의 마음의 살을 찢으시면서 넓히신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운동을 합니다. 운동을 열심히 하면 근육이 생깁니다. 근육이 생기는 원리는, 운동을 하면 근육이 파열이 됩니다. 그 파열된 사이를 영양분이 메꾸는 것입니다. 그래서 운동할 때는 단백질과 영양가 있는 음식을 먹으면서 운동하지 않으면 아무런 효과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열량만 태우고 근육이 생기지를 않습니다. 영양분을 보충해주면 속에서 근육이 찢어지고 터집니다. 그 사이에 양분이 들어가면서 근육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기도도 똑같습니다. 이렇게 물이 흘러가듯이, 야유회 하듯이, 뱃놀이 하듯이 기도의 영력을 얻는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아무도 예외 없이 그런 간절한 기도 속에서 매달릴 때에는 그렇게 살지 못하게, 그렇게 기도하지 못하게 하는 환경에 에워싸여서 그 고통 때문에 심령의 살이 찢어지는 것입니다. 찢어지는 그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먹은 영양분이 채워지면서 기도의 근육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엊그제 신문을 보면서 깜짝 놀란 것이 하나 있습니다. 르브론 제임스(Lebron James)라고 하는, 지금 NBA 미국 농구에서 전설처럼 잘하는 두 선수가 있는데 그중에 한 선수입니다. 나이가 서른네 살입니다. 사실 그 세계에서 그 정도 나이라면 퇴물입니다. 그런데 20대 초반의 선수들과 경기를 하면서도 펄펄 나릅니다. 자기의 근육을 간직하기 위해서 1년에 16억 원을 쓴다고 합니다. 별도의 영양사가 진단을 하고 음식을 만들고 트레이너를 두고 관리를 합니다. 마지막에 남긴 말이 인상적입니다. “나는 18살이 아닙니다. 그러나 나는 와인과 같은 선수가 되고 싶습니다.” 와인은 어제 담근 것은 먹지 못합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숙성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부끄럽다. 우리는 영적인 근육을 기르기 위해서 저렇게 노력을 하고 있는가?’ 세상없는 일이 있어도 열 시가 되면 불을 끄고 잔다고 합니다. 8시간 내지 9시간을 자고 일어나는데 그 이유는 아침 운동하기 위해서랍니다. 술도 거의 먹지 않습니다.
어떤 한 사람이 기도를 할 때에는 자기가 살아왔던 모든 생애를 끌어안고 하나님 앞에 갑니다. 한 사람의 사람됨은 기도할 때의 그 사람을 능가할 수 없으니 기도할 때의 그 사람이 곧 그 사람입니다. 환경을 이기며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살아왔던 수많은 날들의 고통이 그를 기도의 사람으로 만들어줍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바다 위에 떠 있는 배와 같습니다. 배가 아무리 빨리 가도 피아노만 한 배 위에 앉아있다면 얼마나 불안하겠습니까? 파도가 조금만 치면 뒤집힐 뻔한 것이 아니라 뒤집힙니다. 그런데 그 배가 만약 10만 톤짜리 항공모함 같은 배라고 한다면 그런 작은 파도는 아무 상관없이 가로지면서 바다를 향해 나아갈 것입니다. 우리를 영적인 거인으로 만드는 것 중에 하나는 하나님 앞에 자신을 드리며 분투하는 기도의 세계입니다. 그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모든 환경과 싸우면서 액체의 생애를 사시기까지 기도하셨으니 여러분도 환경을 이기며 기도하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세 번째는 오래 기도하셨습니다.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습니까?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마치시매’라고 번역된 단어가 희랍어 성경에는 ‘에파우사토’ 라는 단어로 나옵니다. 이것은 ‘휴식하다’, 혹은 ‘쉬다’ 라는 단어이고 이것과 동치어는 히브리어의 ‘사바트’라는 단어이고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안식하시니” 라고 할 때 쓴 그 단어입니다. 거기에서 ‘안식일’을 의미하는 영어단어 ‘sabbath day’가 나옵니다. 그래서 이 부분은 이렇게 번역하면 더 좋습니다. “예수께서 어떤 곳에서 기도하시고 쉬시매”
공중전화를 거는 것처럼 짤막한 기도로서는 사람이 깊어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아무리 많이 듣고 성경의 지식을 터득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은혜의 물속에 깊이 잠겨야 하는데 기도는 그 지식들을 은혜의 물에 잠기게 해 줍니다. 말씀을 많이 깨달아도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항상 요란하기만 하지만 말씀을 조금 들어도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천국의 향취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기도를 마치신 후에 육체적으로 휴식을 취하셔야 할 정도로 장시간을 하나님 앞에 매달린 기도였습니다.
예수님의 이 기도를 마가복음 1장과 연결시키면 우리는 이런 그림을 그리게 됩니다. 열심히 복음을 전하고 병자들을 고치다가 예수님과 제자들이 같이 잠들게 됩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예수님이 안 계십니다. 제자들이 일어나 예수님을 찾아 나서 보니까 저 외딴 곳에서 기도하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새벽 아직 어두울 때에 잠자는 제자들을 깨울세라 살며시 일어나 빈들에 나가 마음을 쏟아 부으며 기도하고 계셨습니다. 늦게 일어난 제자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지만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갈 수가 없습니다. 왜? 기도하고 계셨습니다. 그 모습이 너무 신령하고 범접할 수 없어서 기다리다가 예수님의 기도가 끝나셨을 때 예수님께 말을 걸기 시작한 것입니다. 정확하지는 않겠지만 이런 그림을 그려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물어보았습니다. “예수님 기도에 대해서, 어떻게 기도해야 할까요? 기도를 가르쳐 주십시오.” 그래서 주기도문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심으로 메시아로서 공적인 취임을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고 난 뒤에 그분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황금빛으로 번쩍이는 의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분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지독한 굶주림과 마귀의 도전이 있는 광야였습니다. 그렇게 기도에 당신 자신을 드리고 난 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당신의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신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누가복음 6장 15절에서는 예수님은 이제껏 제자로 데리고 다니던 사람들을 사도로 세우셨습니다. 그 전에 예수님은 밤이 새도록 간절히 기도하신 후에 제자들을 사도로 세우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그래도 성경에는 짧은 기도이면서 큰 능력을 보여준 기도가 있지 않습니까?” 물론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모세의 뒤를 이어 가나안을 정복할 때였습니다. 원주민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 그들을 추격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부족했습니다. 달은 떠오르고 있었고 해는 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가나안의 지리에 밝지 않았기 때문에 어두움이 내리고 나면 그 지리에 익숙한 원주민을 놓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께 간절한 기도를 올렸습니다. 그리고 그 기도는 변형된 형태였습니다. “달아, 거기 멎어라. 태양아, 너도 거기 서 있어라.” 하나님이 그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모세는 짧은 기도로 홍해를 갈랐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일생 전체가 그렇게 하나님께 응답받으신 생애의 연속이었습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사건이 있고 난 후,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그 명령하신 기도를 본받았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에게서 귀신이 나가고 병이 낫고 구원의 놀라운 기적을 그들에게 가져다주었습니다. 이처럼 믿음으로 드리는 짧은 기도는 위대한 능력을 이 땅으로 불러 내리는 힘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한 번 시험해 보십시오. 그것이 되는지 말입니다. 될 때도 있겠지만 안 될 때가 확률적으로 훨씬 많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한 가지 사실을 놓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짧은 기도로 하늘의 능력을 이 땅에 불러 내렸던 위대한 기도는 기도의 사람들에 의해서 이루어진 기도였습니다. 그 짧은 기도가 있기 전 그들은 아주 오랜 세월 동안 하나님 앞에 긴 시간의 기도로 자신을 바쳐왔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기도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시간이 없으니까 한 가지 증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섬기며 범죄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매우 진노하셨고 이 백성을 쓸어버리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모세가 하나님께 용서를 빌며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마음을 돌이키셨습니다. 그때 모세는 회막을 세웠습니다. 진밖에 기도할 수 있는 텐트를 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 가서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모세가 기도를 끝내고 돌아간 후에도 거기 남아서 회막을 지키며 섬기는 사람들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그 짧은 기도로 태양과 달을 멎게 했던 여호수아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정확히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 여호수아를 택하여 모세의 뒤를 잇도록 만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를 지도자로, 이스라엘 백성은 꿈에 그리던 가나안을 기업으로 받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 이것도 해 주시고 저것도 해 주세요!” 하며 막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이 다 들으시고 천국 문을 “드르륵” 여셨습니다. “네가 기도한 것에 대해서 나는 이렇게 해 주겠노라.” 하고 주님이 말씀하시는데 기도한 사람은 벌써 없어졌습니다. 기도는 청구서를 내미는 것이 아닙니다. 청구서는 회계부서에 휙 던져주고 가면 통장에 입금이 됩니다. 그러나 기도는 우리가 늘 이야기하듯이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찬양)
날 빚으소서 기도하오니
항상 진실케 내맘 바꾸사
하나님 닮게 하여 주소서
기도의 위대한 힘은 하나님을 바꾸어 놓는 것이 아닙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팔을 꺾어서 항복시키는 것이 기도가 아닙니다. 오히려 기도는 간절한 기도 속에서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 변화되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유명한 저널리스트였고 반신론자인 영국의 히친스(Christopher Hitchens)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무신론은 신이 있다는 확증이 없기 때문에 유보하는 것이고 반신론은 “신이 있어도 상관없다, 나는 내 맘대로 산다.” 는 것입니다. 그는 반신론자였습니다. 수많은 책으로 사람들을 불신으로 인도했습니다. 그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당신들이 말하는 하나님이 있다고 한다면 그 하나님의 I.Q 는 여러분보다 떨어지는 존재일 것이다. 왜? 기도해야 겨우겨우 말귀를 알아들으니 말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못 깨달으시는 것을 일깨우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칼빈 선생은 이 점에 대해서 우리에게 두 가지를 제시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아심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기도하게 하신 것은 그렇게 기도함으로 우리가 어린아이처럼 전심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순종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기도하지 않고 육이 펄펄 살아있는 사람들에게는 순종하는 일이 다리몽둥이를 부러뜨리는 일처럼 힘든 것입니다. 살을 깎아내는 것처럼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하나님께 우리가 전심으로 순종하며 사는 비결은 그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의존과 경외심의 최고의 표현입니다. 그래서 어떤 일을 할 때보다 한 사람이 마음을 쏟으며 하나님 앞에 전심으로 매달릴 때만큼 그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때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심으로 하나님을 붙들고 매달리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크리스토퍼 히친스(세미나 중에는 프란시스 허친스 라고 말씀하심)는 기도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생각을 전적으로 오해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기도하게 하시는 또 다른 이유는 모든 좋은 것들이 하나님에게서만 온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시기 위함입니다.
강남에 집을 가지고 있는 여러분은 좀 대단하신 분들 아닙니까? 어떤 두 사람이 있는데 둘 모두 집을 갖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전심으로 기도했습니다. 이 사람에게 놀랍게 집이 생겼습니다. 이 사람은 집이 생겼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영혼에서 기쁨이 폭발합니다. 왜? “하나님이 나의 기도를 들어주셔! 좋으신 하나님, 할렐루야!” 그런데 기도를 하지 않은 사람은, “우와! 행운이네! 올해는 정말 운수가 텄구나!”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작은 것을 우리에게 주실 때에도 그렇게 당신 앞에 매달리는 훈련을 시키시는 것입니다. 잘 들어보십시오. 이 세상 사람들은 간절히 매달려야 할 필요가 없이 모든 것을 갖추고 사는 사람들을 부러워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서 참으로 부유한 사람은 부족한 것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그것이 물질이 될 수도 있고 건강일 수도 있고 가족의 구원일 수도 있고, 사업이나 다른 이유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지 않을 수 없는 안타까운 것을 가지고 있는 이 사람들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이렇게 묻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면 목사님, 하나님은 저를 사랑하시지 않나요?” 아닙니다. 당신이 눈을 뜨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매달려야 할 기도의 제목을 발견하지 못할 뿐입니다. 눈을 떠 보면 먹고 입고 살고 누리는 것, 이것 말고도 우리의 인생에 너무너무 절실한 것이 얼마나 많은지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가슴이 아프도록 기도할 수밖에 없는 기도의 제목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실제로 모자라기 때문에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가 그를 그렇게 하나님 앞에 매달리며 기도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찬양)
신실하신 하나님 실수가 없으신 좋으신 나의 주
그렇게 기도하는 사람, 오랜 시간의 기도는 반드시 깊이를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깊은 모든 기도는 시간의 길이를 요구합니다. 남녀가 사랑하지 않으면 긴 시간을 만날 필요가 없습니다. 일단 사랑이 마음에 불붙으면 절대적으로 시간의 길이를 요구합니다. 만나면 헤어지지 않으려고 합니다. 8시간을 함께 있었는데 30분 지난 것처럼 느낍니다. 기도할 때는 30분이 8시간 같았는데 말입니다. 그것입니다.
기도가 제일 좋아하는 우리 마음의 환경은 세 가지 입니다. 끊임없는 하나님의 말씀의 깨우침, 두 번째는 죄와 분투하는 싸움,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 이것이 기도가 좋아하는 환경입니다. 세 가지. 말씀에 대한 깨달음, 죄 죽임,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함입니다. 이 세가 가지가 갖추어진 환경에서 기도의 불길은 계속 타오르는 것입니다.
시골에서 살아보신 분들은 너무 잘 아실 것입니다. 겨울에 장작으로 화로에 불을 땝니다. “쉬이익” 하는 소리를 내면서 장작들이 구들 속으로 빨려 들어갑니다. 불이 붙은 장작 하나를 꺼내서 바깥의 엄동설한에 눈이 쌓인 마당에 던지면 5분도 지나지 않아서 열렬하게 타오르던 장작의 불이 다 꺼져버립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은혜를 많이 받았다고 해도 우리의 마음을 어떻게 간직하고 있냐에 따라서 은혜의 지속성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짧고 간단한 기도의 반복은 기도의 경박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기도하며 장시간을 매달릴 수 있다는 것은, 그리고 비지땀을 흘리며 주님이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셨던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 앞에 매달릴 수 있는 사람이니, 그 자신이 자기의 기도에 합치하는 삶을 살려고 몸부림치는 사람을, 하나님은 기도에 관한한 사람들을 차별하시는 것처럼 대화하시는 것입니다. 마음이 하나님을 떠나간 사람이 기도의 형식을 아무리 잘 갖춘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 나타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저 한구석에서 그렇게 어린아이처럼 마음을 쏟으며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이름도 없고 빛도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나타나셔서 당신의 영광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역사를 보면 선교의 위대한 지도는 선교 계획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항상 부흥의 불씨가 되었던 기도의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한 나라에 부흥이 일어나게 하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놀라운 기도의 비밀입니다.
더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지만 저는 여기서 말씀을 정리하려고 합니다. 말씀드리고자 하는, 예수님을 통해 배우는 기도 생활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몸소 기도하셨다. 두 번째, 항상 기도하셨다. 세 번째 오래 기도하셨다. 자, 이렇게 기도가 끝나고, 얼마나 장시간 자신을 소진하셨는지 예수님은 쉬셔야 했습니다. 그때 비로소 제자들이 예수님께 말을 걸었습니다. “예수님,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옵소서.” 왜 그랬습니까?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그 모습이 자신들과 달랐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모습 속에서 기도의 위대한 감화가 흘러나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기도의 감화를 끼치셨습니다.
여러분이 인생을 지금처럼 살고 난 후에 여러분의 자녀들이 부모인 여러분을 어떤 사람으로 기억해주겠습니까? 늘 장롱 앞에서 돈을 세고 계시던 우리 엄마, 일주일에 한 번씩 집문서와 땅문서 펼쳐 보고 계산기로 두드려보시던 우리 아빠, 철철이 집을 사고팔던 우리 엄마, 그렇게 기억되겠습니까?
(찬양)
예수 세상 계실 때 많은 고생 보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일
어머님이 읽으며 눈물 많이 흘린 것 지금까지 내가 기억합니다
늘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며 은혜에 잠기시던 우리 아빠, 늘 연약한 우리를 위해 이른 새벽마다 교회의 문을 두드리시던 우리 어머니, 오늘날은 신앙의 감화가 사라진 시대입니다. 가르치는 안내자들은 있고 인도자들은 있으나 존재 그 자체로 우리에게 감화를 끼치는 사람들이 매우 적은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 누구를 기다리십니까? 누가 여러분에게 그런 감화를 깊이 끼쳐주기를 기다리십니까? 그런 사람들이 있기를 위해서 기도하십시오. 기도하는 것을 누가 말리겠습니다. 그러나 왜 여러분 자신은 그런 사람들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아직 어립니까? 기도가 약합니까? 묘목이 아니었던 거목은 한 그루도 없습니다. 어떤 큰 나무도 여리디 여린 새싹이었던 때가 있습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우리의 마음은 너무 분산되어 있습니다. 이른 아침부터 잠자리에 드는 순간까지 도무지 마음을 하나님께 모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기도가 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기도를 위해 제일 필요한 일은 혼자 있는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밀치고 외롭게 혼자 있는 것에서 기도는 시작됩니다. 그리고 마음을 모읍니다.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기도하려고 마음먹을 때 충천한 화염과 같이 기도가 쏟아져 나오시는 분들은 훌륭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으니 계속 그렇게 하십시오. 그러나 기도가 안 되는 분들, 그때는 제가 말씀드리는 이 한 그림을 그려보십시오. 여름에 날이 엄청 가물었습니다. 온 땅의 들판이 말라갑니다. 다행히 동네 중앙에 우물이 하나 있는데 조상들이 엄청 깊이 팠습니다. 그래서 물이 넉넉합니다. 그때 먼 밭에서 일하다가 달려와서 우물에 왔습니다. 두레박을 던집니다. 슉 내려가서 “첨벙!” 하는 소리가 납니다. 그리고 어떻게 합니까? 줄을 흔듭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두레박을 쓰러뜨리기 위해서입니다. 쓰러뜨리면 물에 푹 잠깁니다. 그러면 번쩍 들었다가 다시 떨어뜨립니다. 그러면 물속으로 완전히 들어가서 꽉 찹니다. 그 다음에 줄을 천천히, 천천히, 인내심을 가지고 잡아당깁니다. 그러면 마침내 시원한 물이 철철 넘치는 두레박이 올라옵니다. 땀으로 범벅된 얼굴을 하고 있다가 그 물을 벌컥벌컥 마시고 나면 생명의 기운이 몸속으로 확 퍼집니다. 기도도 그런 것입니다. 미친 듯이 막 하는 것이 아닙니다. 조용히 앉아서 언어를 길어 올리는 것입니다. 진심을 담아서, 절대로 남이 한다고 따라 하거나, 습관이 된 단어들을 나열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은 두레박을 물에 떨어뜨리지 않고 두레박을 흔들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마음 밑으로 내려가야 합니다. 마음을 담아서, “하나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오! 주님! 하나님! 당신은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이십니다. 내가 이렇게 살고 있나이다. 예수여 나를 도와주소서!” 하며 언어의 두레박으로 길어 올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음이 조금씩 움직이면서 우리의 마음이 그 언어에 묻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급기야 하나님을 멀리 떠났던 자신에 대한 후회와 깨달음, 이런 것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풍부한 기도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은 돈 없고 집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없는 사람, 그 사람이 가장 가엾은 사람입니다. 누군가가 대신 기도해 주어야 할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주님 앞에 간절히 나아가 이렇게 우물에서 물을 긷듯이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