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의 본질적 사명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불을 켜기 위하여 감람을 찧어낸 순결한 기름을 네게로 가져오게 하여 계속해서 등잔불을 켜 둘지며 아론은 회막 안 증거궤 휘장 밖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여호와 앞에 항상 등잔불을 정리할지니 이는 너희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라"(레 24:1-3)
녹취자: 오희열
신학이라는 학문과 우리의 목회가 어떻게 어우러질 수 있는지에 대해서 말씀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나눠드린 강의안은 저의 full script 입니다. 그대로 강의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에 여기를 보고 집중하면서 이해를 하시고 집에 가셔서 산책하시면서 한 시간이면 모두 읽으실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유익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시작하겠습니다.
오늘 다룰 내용은 목회자의 본질적 사명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레위기 24장의 말씀, “성막의 등불에 관한 규례”를 통해서 우리가 신학과 목회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조명해보고자 합니다. 레위기 24장 1절부터 3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불을 켜기 위하여 감람을 찧어낸 순결한 기름을 네게로 가져오게 하여 계속해서 등잔불을 켜 둘지며 아론은 회막 안 증거궤 휘장 밖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여호와 앞에 항상 등잔불을 정리할지니 이는 너희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라"
여기에 나와 있는 그림은 성막입니다. 성막은 하나님이 계시로 주신 이동식 성전이었습니다. 위에 덮고 있는 덮개는 물 돼지의 가죽으로 만들었고 당연히 온 성막을 덮고 있으니 뜰을 제외하고 그 내부는 외부로부터의 햇빛이 차단되었을 것입니다. 그 성소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대제사장은 지성소까지 들어가서 하나님을 만나는데 당연히 성막에서 섬기려면 불빛이 필요했습니다. 등잔불이 유일한 불빛이었는데 이것은 아론의 자손의 임무였다고 본문에 나타납니다. 약 63제곱미터 되는 것을 3등분하여 3분의 2가 성소이고 3분의 1이 지성소입니다. 이렇게 지성소에는 법궤가 있고, 여기는 대제사장만 1년에 한 차례 들어갈 수 있는 곳입니다. 여기에는 휘장이 쳐 있습니다. 등불이 없다고 하면 완전히 캄캄한 암흑입니다. 하나님이 이곳에 등잔불을 밝히고 그 빛을 이용해서 그 안에서 섬기도록 하셨습니다.
구약의 성전과 신약의 교회는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당연히 오늘날의 목회자가 제사장은 아닙니다. 그러나 제사장이 우리에게 보여주던 신학적인 맥락과 아무런 상관이 없느냐고 한다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인기가 요새는 어떤지 모르지만 우리가 학교 다닐 때는 베스트 저자였습니다. 이미 돌아가셨을 때지만 저도 읽으면서 많은 도전을 받고 저의 신학적 사상에도 이분의 신학에 완전히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굉장히 많은 부분에 있어서 저를 양육해준 책들의 저자 중 한 분이셨습니다. 여러분이 최소한 “목사와 설교” 정도는 읽으시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책을 손에 잡으면 내려놓지 못하고 끝까지 읽으셔야 할 것입니다. 탁월한 책입니다. 그 책에서, “설교자는 모든 그리스도인처럼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나 설교자는 그 이상의 사람이며 다른 무엇이 필요합니다. 설교자는 설교하기로 결심한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결론은 이것입니다. 설교자는 하나님이 매우 특별하게 부르신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부르심의 방식은, 신적 소명의 강제력을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소명 때문에 자신이 강제력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 강제력을 피할 수 없는 숙명(아난케)으로 받아들게 된 사람이 목회자입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그 숙명은 무엇에 매인 숙명인가? 하나님의 사랑에 매인 숙명입니다. 정말 하나님을 능가하는 숙명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그것이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숙명처럼 여겨지는 것입니다.
재밌는 이야기를 하나 해 드리겠습니다. 플라톤의 ‘이상국가’를 보시면 거기에 아나바시스와 카타바시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저에게는 굉장히 커다란 생각할 거리를 안겨주었고 플라톤은 그 옛날에 성경의 계시 없이 참 놀라운 진리에 관한 통찰을 가졌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주 간략하게 소개하겠습니다. 동굴에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동굴의 비유와 햇빛의 비유가 결합된 이야기입니다. 동굴에 모인 사람들이 앉아서 화면에 있는 그림자를 보고 있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사람들이 학습합니다. 그림자를 보면서 저것이 무엇이고 그다음에는 어떤 그림자가 나오는지를 잘 알아 맞추면 시쳇말로 출세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열심히 배울 것입니다. 그중에 한 사람이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이게 뭐지?’ 하다가 뒤를 돌아봅니다. 뒤를 보니까 그림자가 나오는 막 같은 것이 있고 뒤에 등불이 있고 자그마한 형상들이 있어서 결국 그 형상들을 비춰서 그림자가 나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것을 발견하고 난 뒤로는 화면에 비치는 그림자에는 관심이 없어졌습니다. 다른 모든 사람들은 화면의 그림자를 보고 있는데 그 한 사람만 뒤로 걸어 나와서 반대편으로 갑니다. 가다 보니 동굴 바깥의 세계로 가는 계단이 있습니다. 계단을 향해서 가는 사람은 더 이상 그 그림자들을 보지 않을 것입니다. 계단으로 올라가면서 보니까 태양의 빛이 비치고 바깥세상에 수많은 동물과 식물들이 펼쳐져 있습니다. C는 B에 비춘 그림자이고, B는 A의 형상을 본떠 만든 것이었습니다. 나무 그림자와 나무를 본뜬 작은 형상과 바깥 세계의 하늘 높이 뻗은 나무를 보는 느낌이 어떻게 달랐을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이 사람은 행복하겠습니까? 안 행복하겠습니까? 너무 충격적으로 놀랄 것입니다. 가슴이 터질 것 같은 행복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그 사람의 운명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렇게 올라가는 것을 희랍어로 “아나바시스”라고 합니다. “아나바이노이”에서 온 말입니다. 올라가서 가슴이 터질 것 같은 환희를 느낀 다음에 그 사람의 운명, 아난케는, 거기서 그것을 즐기며 있지를 못하고 다시 동굴로 내려갑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너희들이 보는 저 그림자들은 사실 본체가 아니고 뒤에 형상이 있고 심지어 그 형상도 저 동굴 밖에 있는 세계에서 본뜬 것이라는 진실을 선언합니다. 그의 운명은 거기서 사람들에게 맞아서 죽는 것입니다. 그렇게 내려가는 것이 “카타바시스”입니다. 그래서 올라간 자가 아니면 절대로 내려올 수가 없습니다.
목회자를 놓고 보면, 목회를 하기로 결심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고 그 하나님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지 않을 수 없는 아난케에 붙들린 사람입니다. “만약 그것을 느끼지 못하면 어떻게 됩니까?” 물으신다면, 그것은 소명이 아닙니다. 단연코 소명이 아니거나 혹은 그런 소명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정도와 강도는 신앙의 따라 다를 것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그 아난케를 느껴야 합니다. 그 아난케를 느낀 사람이 바로 사도바울입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너를 진멸해버릴 것이다!” 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내가 빚진 자로다.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화를 당할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이런 고백을 하게 만든 아난케가 이런 방식으로 설명될 수 있는 아난케입니다. 목회자의 운명은 남이 발견하지 못한 신령한 세계를 보고 그 찬란한 빛 때문에 저 밑에 매여 사는 사람들이 너무 불쌍해서 그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아래로 내려오고 거기서 죽는 사람이 목회자입니다. 가장 바람직한 죽음입니다.
본론으로 들어가서, 성막의 등불에 관한 규례가 무엇인지를 보겠습니다.
현대 사회의 요구에 대해서 보자면, 산업화와 과학기술의 놀라운 발전으로 인해 사회가 겪은 변화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이 안에 살면서도 글줄 꽤나 읽는 사람들도 자기 사회가 어디로 가는지를 잘 모릅니다. 최근에 전 세계에서 굉장한 인기를 얻고 있는 유발 하라리라는 이스라엘 학자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가 말하기를 30년 전에는 앞날을 예측할 수 있었는데 이제는 예측이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현대 과학에서 singularity, 특이점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특이점은 천문학에서 온 용어인데 과학기술의 특이점이 다가오고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시간(time)과 정도(degree)가 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과학기술은 당연히 이런 식으로 점진적으로 발전할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특이점이 오면 그 발전이 수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생각하는 것을 만들기 위해서 오랜 개발을 통해 이루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것들을 조합하여 한순간에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singularity라고 합니다. 그다음에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사회로 그 시각, 거의 같은 시각에 변화되어가는 것입니다. 상상하는 모든 기계가 나오면서 말입니다. 이런 사회에서는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모르게 되는 문제가 생깁니다. 사회가 무엇인지를 모릅니다. 여러분이 굉장한 식견을 갖지 않으면 안 됩니다. 시대를 분별할 수 있는 식견을 가져야 합니다. 단지 강의실에서의 열렬한 청강이나 기도원에서 부르짖는 그 기도 소리 하나만을 가지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성찰할 수 있는 지성과 학문, 신앙, 영적인 통찰력을 모두 함께 길러가야 합니다. 다변화된 사회, 심지어 자녀의 신앙교육도 집안에서 거의 포기하고 교회에 미루는데 현대인으로서의 수많은 문제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30년 전만 해도 이렇게 어마어마하게 많은 정신적 질병들이 없었습니다. 지금은 심각해서, 열 명을 만나면 그중에서 서너 명은 정신과치료를 요할 정도로 정신건강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사회가 이렇게 급변하니까 인간들이 스스로 자신의 삶을 살아낼 수가 없습니다. 자기가 누구인지를 모릅니다.
설리가 왜 자살했겠습니까? 돈이 없어서입니까? 친구가 없어서 입니까? 궁극적으로는 자기의 살아있음을 지탱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현실을 지탱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어마어마하게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 교회는 다양한 해결책을 찾습니다. 조금은 도움이 되겠지만 어떤 것도 궁극의 해결책을 가져다주지는 못합니다.
성소 내부에는 바깥의 빛이 완전히 차단되어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자연광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셨는지 고민을 한번 해볼 만합니다. 많은 의미가 있겠지만, 하나님을 섬기는 데에 이 등잔불을 사용하게 하심으로써 진리의 빛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이 성막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복음이 그토록 가치 있고 탁월하게 우리가 받아들이는 이유는 복음을 통해서 인간이 그 진리에 이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복음보다 더 큽니다. 복음을 거치지 않고 진리에 이르려고 했던 인류 지성사의 발자취가 끊임없는 자기학대와 부정 속에서 이루어지는 세계철학사입니다. 과학기술은 하나가 발달하고 뒤에 그 기술을 이어받으면서 축적이 되어 발달합니다. 트랜지스터가 없었으면 디지털이 나왔을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철학은 그렇지 않습니다. 허물어버리고 다시 쌓이는 역사입니다. 동양철학이나 서양철학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놀라운 것은 주전 5세기에서 3세기 사이에 그리스에서는 인류 지성사의 최고의 위대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마치 혜성처럼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들 중 굉장히 많은 수가 자살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지금도 모든 학문의 학자들 중에서 자살률이 엄청나게 높은 분야가 철학과 천문학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무엇을 보여주는 것입니까? 그런 빛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만약 그것으로 충분했다면 여러분이 이렇게 복잡한 부르심을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 진리의 빛이 필요한데, 이것으로써 목회자는 섬기고 밝히고 탐구하기 위해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제사장들은 결국 자기가 아무리 많은 제사의 예법을 알고 규례를 알고 있어도 일단 거기에 들어가면 빛의 신세를 져야 합니다. 그 불빛이 꺼지면 안 됩니다. 그 등불을 계속해서 관리하는 책임을 하나님께서 아론의 자손에게 의탁하신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수십 수백 년 동안 안 꺼지고 계속해서 불이 밝혀져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을 섬김에 있어서 진리가 가장 중요함을 보여준 것입니다. 진리가 무엇입니까? 라틴어로는 “베리타스”이고 그리스어로는 “알레데이아”입니다. “알레데이아”는 “의심할 수 없이 스스로 자명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I am the truth.”,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말씀하셨습니다. 놀라운 것은 “길”에 대해서는 동양사상가들이 많이 말했고 “진리”에 대해서는 서양 철학자들이 입에 거품을 물고 논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생명”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아주 중요한 “The life”, “내가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생명”이 무엇입니까? 생명에 대해서 공부해보십시오. 엄청난 유익을 줄 것입니다. “예수 생명을 전한다”고 이야기하는데, 오늘 집에 돌아가시면서 생명이 무엇인지 자문해보십시오. 우리가 많이 사용하는 단어일수록 우리는 모릅니다. 그러면서 사용합니다.
어거스틴은 아주 위대한 교부입니다. 제가 학교 다닐 때는 불행히도 어떤 선생님도 이 사람의 책을 읽으라고 가르쳐주신 분이 안 계셨습니다. 그냥 가톨릭의 우두머리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제가 이분을 만난 것은 50세가 거의 되어갈 때였습니다. 오랫동안 기도하던 제목이 있었는데, 50세가 되기 전에 내가 다시 한 번 하나님을 생애적으로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 그 기도를 들어주셨고 이분을 만났습니다. 예전에도 이분의 책을 부분적으로 좀 읽었는데 한번은 어거스틴의 “고백록”을 가지고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허리가 아파서 한 열흘을 입원했는데 갈 곳도 없고 6인실에 앉아서 휘장을 치고 “고백록”을 읽었습니다. 그때 거기서 저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 책을 읽으면서 이 사람이 천재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습니다. 내 생애 최초로 이 책을 5일 만에 아주 꼼꼼히 아침부터 밤까지 정독을 하고 거기서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고백을 했습니다. 하나님께도 무릎을 꿇었지만 한 인간의 위대한 지성의 크기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하나님, 이 사람은 천재입니다.” 6개월 동안을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 사람에게는 이런 천재성을 주시고 왜 나에게는 열심히 공부해야 겨우겨우 이해할 수 있을 정도의 지성을 주셨습니까? 어거스틴은 누구이고 나는 누굽니까?” 했더니 하나님께서 이렇게 응답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네 은혜가 족하다.” 그래서 포기했습니다. 이후로 저는 어거스틴의 책을 거의 읽으려고 노력했고 고백록만 120번을 읽었습니다. 그래서 쓴 책이 3년 전에 나온 “영원 안에서 나를 찾다”입니다. 약 10년 정도의 연구와 사색의 결실입니다.
청교도를 좋아하는 사람을 제가 좋아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어거스틴을 좋아하는 사람 중에 제가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일단 읽어보십시오. 고백록부터 손에 들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도 이해가 되지 않을 때 “내가 신대원 3학년이 맞나?”하지 마시고 그냥 그 현실을 받아들이십시오. 그리고 심각성을 느끼고 다시 공부하기를 시작하십시오. 어거스틴이 마흔여섯, 마흔일곱에 쓴 책입니다. 신학사상이 완전히 무르익었을 때 쓴 책입니다. 할 얘기가 많은데 고백록을 읽고 완벽하게 이해되면 그 사람이 쓴 모든 책은 손에 들어온 사람이 될 것입니다. 어거스틴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라틴어를 공부하십니까? 라틴어를 열렬하게 공부하면 새로운 세계가 열릴 것입니다. 저는 너무 늦게 시작해서 별로 하다가 말았지만 여러분은 해 보십시오.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진실로 진리보다 탁월한 무엇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일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보다 더 높고 위대한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바로 그 진리 자체이시다.”(Si emim est aliquid excellentius, ille potius deus est ; si autem non est, iam ipsa ueritas deus est. De Libero Arbitrio, 2.15.39) 아주 웅장한 선언입니다.
여러분이 여기서 공부하는 이유는 목회를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물론 선교사를 하려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사회사업을 하시려는 분이나 노인 요양 사업이나 기독교 문서, 언론에 종사하고 싶은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결국 목양이라는 것은 직접적으로 섬기느냐 간접적으로 섬기느냐의 차이지만 모두 한 가지 목적을 위해서 목회자는 존재합니다. 무엇인지 아십니까? 목회를 위해서 존재합니까? 아닙니다. 목회의 목표는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의 표현에 의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 아닌 다른 것을 사랑하던 사람들을 설득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것이 전도이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더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 목양, 신자에 대한 목양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로 부르실 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것은 우연이 아니라 거의 신구약 성경을 관통하는 하나님의 필연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니고는 무엇으로도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을 이룰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게 할 수 있습니까? 우리 교회가 목회자들을 아주 애타게 찾았습니다. 지금도 찾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별로 안 좋아하시겠지만 같이 목회할 부교역자들을 찾는데 가장 중시하는 능력이 그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설득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할 능력이 얼마나 있는가? 만약 그런 전도사님이 남미에 있다면 모든 비용을 대고 생활을 보장하고 한국으로 오게 해서 가족들의 생활을 책임지게 하고 유치부를 맡길 용의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학교를 다니고 있기 때문에 도토리 키 재기처럼 보이고 고만고만해 보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여러분의 능력은 이미 현저하게 차이가 나기 시작합니다. 어떤 면에 있어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데 있어서, 누군가를 설득하고 누군가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도와주지 않아도 갈 길이 있습니다. 그렇게 하지 못하는 사람은 아버지가 꽃길을 깔아줘도 가지 못합니다. 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전하게 전하고 싶다는 고민을 한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려면, 사랑하도록 설득하려면 그가 지금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별로인지를 보여주고 자기가 사랑하라고 권하는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다우신 분인지를 보여줘야 하기 때문입니다. 극미의 하나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Extrem beauty. 더 이상 하나님보다 아름다운 것이 없다는 것을 보여줘야 합니다. 그 아름다움을 사람들에게 증거 하기 위해 여기에서 공부하는 것입니다. 당연히 신학공부를 하는 사람은 심미자여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아름다움을 심미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찬양) 온 땅과 하늘 위에 계셔 홀로 영원하신 이름
너무 아름다워서, 조나단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대해 펑펑 울던 경험을 수없이 이야기했습니다. 여러분은 언제? 언제 그러셨습니까? 중심에서, “주 예수보다 아름다운 분은 없네” 눈물이 나도록 말입니다. 그래서 내 인생이 어떻게 펼쳐져도 괜찮다, 그런 감격이 언제 밀려왔습니까? 조나단 에드워즈에 의하면, 성경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에센스입니다. 설명하자면 길지만, 그 이유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빛이 가장 찬란하게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그 주제를 성경이 추적하면서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목회자의 중요한 직무는 진리를 사랑하고 그 진리를 통해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감탄하고 아름다움을 심미하게 될 때 인간은 비로소 사랑하게 됩니다. 이런 사람이 되어야 목양의 목적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여주어 사랑하게 하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성경 속에서 발견한 진리는 있는 것 중의 일부이고 바깥에 있는 일반계시는 이 하나님의 진리가 투영된 결과입니다. 하나님 이외에 이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왔기 때문에 하나님의 흔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른 것들은 희미합니다. 그 모든 것들이 성경 속을 들어올수록 찬란하게 빛납니다. 성경에서 진리를 발견하고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께로 상승하고 상승한 가운데 하강하면서 성경뿐만 아니라 모든 학문의 세계에 존재하는 이 자연에, 사회에 모든 세계와 인간의 영혼들까지를 탐구하면서 거기서 서로 연결되어 있는 빛의 찬란한 네트워크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본 사람이 바로 신학을 제대로 공부한 사람입니다.
이렇게 사람들에게 진리를 깨닫게 하고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의 존재의 의미를 알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공부를 하는 이유입니다. 당연히 신학만 하면 안 되고 일반학문의 책들로 학문의 영역들을 넓혀나가야 합니다. 성경, 조직신학, 철학, 역사, 과학, 예술, 법학, 사회, 천문학에 이르기까지, 특히 생물학, 갈 수 있는 데까지 펼쳐져 가면서 하나님이 어떻게 다른 학문의 세계 속에서 증거될 수 있는지를 하나님을 만나고 온 사람으로서 해석을 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테크니컬한 면에서는 과학자들을 따라갈 수 없을지라도 말입니다.
이 진리의 빛이 필요한 이유는, 인간에게는 어두움이 있습니다. 이 어두움은 객관적인 어두움과 주관적인 어두움이 있습니다. 객관적인 어두움은 몰라서 어두운 것입니다. 시편 119편에서, “내 눈을 열어 주의 법의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라고 기도합니다. 가르쳐주면 물러가는 어두움입니다. 주관적 어두움은 영적인 어두움입니다.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이 아닌 데에서 오는 어두움입니다. 이 어두움은 다른 것들을 사랑하는 동안, 하나님을 사랑하기 전까지는 물러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목회자는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 사랑에 의해서 모든 다른 것들이 다시 정렬된 사람이 목회자입니다. 이 진리의 빛으로 밝히는 것입니다. 성경의 진리를 통해서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신 목적이 무엇인가? 그 목적을 알아야만 이 세계가 올바로 흘러가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천지창조의 목적입니다.
역사적으로 천지창조의 목적을 가장 해박하고 놀라운 필치로 전개했던 사람이 조나단 에드워즈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예일대학의 전집 제 8권 중에 The ethical writing 이라는 표제가 붙은 700페이지 정도 되는 한 권이 있습니다. 거기 1, 2, 3부가 들어있습니다. 1부는 “천지창조의 목적”, 2부는 “참된 미덕의 본질”, 3부는 “고린도전서 13장 강해: 사랑과 그 열매”입니다. 모두 탁월한 책이지만 이 중에서 1권과 2권은 누구에게 가서 사정을 해서라도 배울 가치가 있습니다. 저의 신학적인 눈을 놀랍게 열어주었습니다. 그런데 매우 어렵습니다. 특히 2권은 철학을 하는 사람도 쉽게 읽을 수 없을 정도로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 두 권이 없이는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학의 터전이 없다고 말할 정도로 중요한 책입니다. 부흥과개혁사에서 다행히 번역이 되었습니다. 읽어보십시오. 도전해보십시오. 제가 학교 선생님이라면 이렇게 말해도 설득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목회하면서 “참된 미덕의 본질” 같은 것을 교회에서 강의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하다고 이야기하면 한 번쯤 마음이 동할 것입니다. 전집을 구입해도 되고 거기서 작게 잘라서 이 두 권을 내놓았습니다. 그리고 “천지창조의 목적”에 대한 풍부한 해설이 존 파이퍼 목사가 쓰고 백금산 목사가 번역한 “하나님의 열심”이라는 책입니다. 그것이 다시 1, 2부로 나누어지는데 1부는 성경을 사용한 논증이고 2부는 성경을 빼버리고 순수한 이성으로 하는 논쟁이 나옵니다. 2부가 1부보다 더 어렵습니다. 그런데 혹시 어디서 그런 것을 탁월하게 가르쳐준다고 하면 삼고초려를 해서라도 가서 배우십시오. 여러분의 감겼던 눈이 열리는 것 같은 충격을 받을 것입니다. 보십시오. 이번 책도 읽다가 실망하지 마시고, 어려워도 모두 다 그러려니 하시고 탈출구를 찾아보십시오. 제가 이렇게 강력하게 권하는 것입니다.
이 “천지창조의 목적”을 조나단 에드워즈는, 하나님이 당신 자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주시기 위해서 세상을 만드셨다고 보았습니다. 자연세계와 인간사회가 있는데 자연세계는 자연적 질서와 연결이 되고 인간사회는 도덕적 질서와 연결이 됩니다. 도덕적 질서는 하나님을 정점으로 하는 사랑의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이 인류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이 사람을 설득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고 그 사랑을 가지고 다시 “카타바시스”, 내려와서 그런 사랑을 모르는 사람들과 살아가면서 그들도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비전입니다. 목회자의 본질적인 사명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말로만이 아니라 삶 전체와 인격으로 구현하면서 자신과 교회와 세계를 밝히는 것입니다.
18세기 독일 교회사가 교훈을 줍니다. 종교개혁이 있었고 이성주의 시대가 옵니다. 경건주의 시대가 와서 반발을 일으키고 별로 큰 힘을 쓰지 못하고 역사의 무대는 합리주의로 넘어가게 됩니다. 이것이 18세기의 일입니다. 이때 독일은 경건주의가 매우 융성했던 지역이었는데 큰 잘못은 교리에 대해서 반 교리주의로 나간 것입니다. 덕분에 성경을 직접 본다고 했지만 이렇게 오랜 세월 동안 계속되어 온 진리의 틀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말랑말랑한 신학을 갖게 된 것입니다. 마지막에 어떻게 되었는지 아십니까? 잘 들어보십시오. 에드윈 다간(Edwin C. Dargan) 이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이분의 책 <설교학>이 나온 지 100년이 넘었는데 아직까지도 위력을 떨치고 있는 설교학 교과서입니다. 이 설교사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이런 제목의 설교들이 독일 교회에서 주일에 이루어졌다. ‘한 잔의 커피를 마시는 즐거움’, ‘짐승은 우리에서 키우는 것보다 방목하는 것이 더 좋다’, 부활주일에는 ‘사람이 생매장 당하는 위험성에 관하여’. 놀랍습니다?
오늘날의 설교가 무엇이 문제인지 아십니까? “설교를 듣는데 그 안에 불변하는 진리가 있는가?”, “본문을 읽고 설교를 하는데 설교를 듣고 나면 그 본문이 더 잘 이해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냥 감동을 주는 연설이 되어 가고 있다는 반성을 하게 됩니다. 성경을 믿고 학문을 탐구하는 이 두 가지가 함께 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성경을 주셨습니다. 한 사람이 성경을 “아멘!”하고 믿습니다. 그것은 성경이 가지고 있는 힘이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믿는 것입니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에, 인간 기록자에 의해 쓰인 성경을 하나님에 대한 신뢰 때문에 “아멘!”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없으면 성경에 제시된 명백한 진리를 내 마음속에 수용하지 못합니다. 수학으로 말하자면, 여러분이 문제집을 풀다가 뒤에 있는 답지에 있는 정답을 미리 봤을 때 풀이를 해 나가기가 쉽습니까, 정답을 모르고 풀이를 하는 것이 쉽습니까? 일단 답을 알면 풀이를 해 나가기 쉽습니다. 이렇게 풀이를 했는데 정답이 나오지 않으면 틀린 줄 알게 됩니다. 그 정답이 성경의 진리이고 신학은 그것을 풀이해 나가는 과정입니다. 탐구의 정신과 믿음의 정신이 함께 가야 하는 것입니다.
대단한 인물이 있습니다. 켄터베리 대주교 안셀름. 제가 거기 성당에 갔을 때 가이드에게 물었습니다. “안셀름의 흔적이 있습니까?” 물었더니 깜짝 놀라며, “내가 여기 오랫동안 근무했는데 우리 성당에 와서 안셀름을 물어보는 사람은 당신이 처음입니다.”하며 아주 친절하게 데리고 다니면서 설명을 해 주었습니다. 스콜라 철학의 시조로 불립니다. 이 사람이 교회사적으로 유명한 책을 두 권 썼는데 <모놀로기온>과 <프로스로기온>입니다.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유명한 말입니다. “오, 주님! 저는 당신의 높으심을 꿰뚫어 알려고 애쓰지 않나이다. 어떤 식으로든 그것을 저의 지성과 비교하지 않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제 마음이 믿고 사랑하는 당신의 진리를 어느 정도는 이해하고 싶나이다. 그래서 저는 믿기 위해 이해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기 위하여 믿습니다. 믿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나는 믿기 때문입니다.” 너무나도 유명한 명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지혜를 추구한다.” 이성과 믿음이 육적일 경우에는 충돌하지만 참된 신앙이라면 참된 지성과 충돌할 수 없다는 것이 정통주의 신학자들이 가지고 있는 신학적인 유산입니다. 인간의 지성이 잘못된 쪽으로 갔기 때문에 진리에 어긋나는 것이고, 참되게 믿는다면 참된 지혜와 같은 것입니다. 목사가 누구입니까? 제가 규정하는 정체성은 이렇습니다. “목사는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죽어간 선지자들의 후예이며, 신약 성경에서 땅끝까지 이르러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한 사도들의 후예이다.” 목사는 비즈니스를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비즈니스를 하지만 결국 이렇게 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입니다.
신학이 학문일 수 있는가?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학문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학문이라는 것은 이성적으로 자명한 원리에서 출발하지만 신학은 신앙적으로 믿는 것으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학문이 아니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런 견해는 합리주의 시대에 겨우 생겨난 것이 아니라 이미 지금으로부터 1000년 전에도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거스틴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일들에 관한 지식(이것이 신학입니다), 참된 행복으로 인도하는 지식, 곧 구원하는 믿음을 낳고 있으며 보호하고 강하게 하는 지식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학문은 완전한 학문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일에 관한 학문에 최고의 학문이다.”라고 주장합니다. 정교성이 좀 떨어지지 않습니까? 믿음에 있어서는 탁월합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더 정교하게 보여줍니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쓴 <신학대전>은 그리스 철학의 체계를 빌어서 기독교 사상을 구축했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렇게 보았습니다. 두 종류의 학문이 있는데 첫째는 자연 이성의 빛으로 알게 된 원리에서 출발하는 학문이라고 보았습니다. 또 다른 종류의 학문은 상위학문의 빛으로 알게 된 원리에서 출발하는 학문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광학을 아십니까? 빛에 대한 공부입니다. 광학은 기하학이 만들어 놓은 전제 위에 광학이 수립되어 있습니다. 음악은 수학의 수열을 전제로 음악이 이루어집니다. 구노의 아베마리아 같은 것을 보면 장단에 맞추어 놀라운 수학적 배열에 의해서 인간에게 최고의 아름다운 느낌을 주는 비율, 조화, 일치에 의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음이 상하로 쌓여서 아름다운 소리가 나는 것을 화성이라고 하고, 이것이 수직으로 펼쳐지며 연결되면서 이 토막, 이 토막이 조화를 이루는 것을 대위라고 합니다. 둘 다 엄밀한 균형과 조화에 의해서 잠재되어 있는 아름다움의 가능성의 포네틱을 만들어냅니다. 그것이 음악입니다. 수학이 없으면 음악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전 시대의 음악가들은 기본적으로 수학을 철저히 공부했습니다. 헨델 같은 사람이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신학은 얼마든지 우리가 신앙에 의해서 받아들인 진리를 토대로 학문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학문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기 나오는 내용이 이것입니다. 거룩한 학문을 열심히 탐구해야 하는데 첫째는 성경을 잘 믿어야 합니다. 매일 성경을 읽으면서 가슴이 시릴 정도로 감동을 받아야 합니다. “아멘!, 아멘! 이야, 정말 놀랍다!” 이것이 신학의 가장 중요한 토대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학문을 공부하면서 자기 시대의 사람들에게 적용하려면 그 사람들의 지식구조와 소통할 수 있는 것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설교를 들어온 사람이 아니면 들을 수 없는 설교를 하는 것은 좋은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려면 부지런히 탐구해야 합니다.
황금의 입을 가진 사람이라는 요한 크리소스톰은, 어린 나이에 수사학과 논리학에 엄청나게 헌신합니다. 다메섹의 요한의 저작을 읽어보십시오. 영어로 되어 있고 번역된 것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깜짝 놀랄 정도로 어마어마한 깊이를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사실상 동방교회의 마지막 신학자입니다. 이 사람은 젊은 시절에 철저하게 학문에 헌신합니다.
저의 스승 중 한 분인 존 오웬 목사님은 10대 때에 거의 죽음에 가까이 갈 정도로 공부에 헌신했습니다. 결국 한 시대의 복음주의의 신탁이 된 것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8살 때 유물론에 관한 견해를 글로 발표했고 16살에는 유럽의 과학 잡지에 논문을 기고합니다. 예일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라틴어로 졸업식 연설을 했습니다. 수재입니다. 그는 금식하며 “Resolution” 이라는 “결심문”을 씁니다. 100여 개가 넘는 것 중에 하나가 이것입니다. “한 순간의 시간도 절대로 낭비하지 말고 그 시간도 가능한 최대로 유익하게 사용하자.” 사도요한은 계시를 보는데 아는 것이 없어서 알지를 못해서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마지막으로 찧어낸 기름입니다. 등잔의 불빛이 진리와 지성이라면 기름은 성령의 은혜입니다. 조엘 오스틴이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거의 황금의 입을 가진 현대의 설교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고 “긍정의 힘”은 우리나라에서 160만부를 팔아서 조엘 오스틴에게 보너스를 주었다고 하니까 대단한 일입니다. 지금도 이렇게 어마어마한 사람들이 모입니다. 빌 하이블스나 새들백교회는 잊혀져가고 있지만 이 교회는 지금 뜨고 있는 교회입니다. 미국에 가서 숙소에서 TV를 켜는데 이 사람이 나왔습니다. 저 사람은 가짜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리모컨을 내려놓지를 못했습니다. 너무 재밌어서 빨려 들어가는 것입니다. 속으로는 ‘헛소리, 헛소리…’ 라고 하면서 빨려 들어갑니다. 대단하지 않습니까? 원고도 없습니다.
웨스트민스터에 갔을 때 신학자 몇 사람들과 앉아서 이야기를 하다가 우연히 조엘 오스틴의 신학으로 넘어갔습니다. 신학자들은 조엘 오스틴의 신학을 영지주의 + 펠라기안주의 + 번영주의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저는 절대 아니라고 했습니다. 조엘 오스틴이 영지주의를 공부했겠습니까? 그럴 수도 있지만 아닙니다.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했는데 학자들이 논문을 쓰다 보니 그것을 갖다 붙여서 이 사람을 그렇게 높이 띄워준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오스틴에 대해 내린 결론이 이것이었습니다. “그가 그리스도인이라면 나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내가 그리스도인이면 그는 그리스도인일 수 없다.”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것이 궁금하면 인터넷에 들어가서 래리 킴과의 인터뷰를 찾아보십시오. 기독교인이라면 그렇게 답변할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올바른 지성과 순수한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 전개되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위대한 힘 두 가지가 있는데 “사상의 힘”과 “윤리의 힘”입니다. 하나의 기둥이 있고 여기 또 하나의 기둥이 있습니다. 이 두 개의 기둥을 아치로 이어서 이 둘을 버티게 만들어주는 것이 “은혜”(gratia)입니다. 철학자들과 세상 사람들에게 이 “사상의 힘”은 보이지만 이 “윤리의 힘”은 신령한 사람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만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경건의 비밀입니다.
한 가지를 말씀드리고 마치려고 합니다. 24장 2절에 이런 표현이 나옵니다. “감람을 찧어낸 순결한 기름”(). 여러분 히브리어를 열심히 공부하십시오. 정말 보배와 같은 언어입니다. 11년 전에 제가 여기 개강 수련회에 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정말 충격적인 은혜를 주셔서 공부해야겠다는 열풍이 불었습니다. 여러 명이 병원에 실려 갔습니다. 여러분도 그런 마지막 학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무슨 질병이든지 그 병원비는 열린교회에서 모두 지불하겠습니다. 제가 보증합니다. 농담이 아닙니다. 공부의 과로로 병원에 실려 간 분은 열린교회로 연락하십시오. 열린교회 목사님의 말씀을 듣고 공부하다가 졸도했다, 영양실조가 됐다고 하십시오. 아마 “목사님은 공부하다가 쓰러져 본 적이 있습니까?” 물어보고 싶은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네. 두 번 쓰러졌습니다. 하셔야 합니다. 히브리어 그까짓 거 한 1년 공부하면 성경을 읽을 수 있는데 왜 안 하겠습니까? 제가 여러분 나이 때에 히브리어를 공부했는데 지금도 강대 옆에 히브리어 성경을 놓고 보니까 얼마나 편합니까? 틀린 번역이 뻔히 보이는데 어떻게 설교를 하겠습니까?
“세멘 자이트”, ‘세멘’은 기름이고, ‘자이트’는 올리브입니다. ‘자크’는 순전하다는 뜻이고, “까띠뜨”의 원형은 “카타트”인데, 이것은 “때리다, 깨뜨리다”입니다. 아주 심오한 의미가 이 안에 있습니다. 수동태 분사 남성형 단수입니다. 한 알갱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전체적으로 군집명사로 쓸 수 있습니다. 제가 10여 년 전에 이 성경을 히브리어로 읽다가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충격이 몇 달이 갔습니다. 아니, 지금까지 살아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것은 감람유를 착유하는 일반적인 방법입니다. 옛날 기계는 이렇게 정교하게 만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압착”입니다. 감람을 연자 맷돌 같은 것으로 찧어서 기계에 넣은 후에 프레스로 누릅니다. 그러면 많은 양의 기름이 나옵니다. 대신 단점이 있습니다. 그 유질이 별로 안 좋습니다.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나오지 않으려는 기름을 강하게 눌러서 짜내니까 거기에 불순물이 딸려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은 “세멘 자이트 자크”가 아니라고 보는 것입니다. 다른 방법으로는 깨뜨리는 방법이 있습니다. 올리브 덩어리를 놓고 절구에 찧습니다. 타격을 받으면서 깨지고 거기서 자연적으로 기름이 흘러 나오게 하여 그 기름을 모으는 것입니다. 그러면 순도가 아주 높은 기름이 됩니다. 연자 맷돌의 경우에도 마찬가집니다. 맷돌로 갈아서 가장자리 홈을 통해서 기름이 자연적으로 모입니다. 압착하여 얻은 기름은 불꽃을 붙이면 빛이 밝지 않고 무엇보다도 그을음이 많이 나옵니다. 성소에서는 그런 기름을 사용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아주 특별한 방법으로 만들어냅니다.
사람들은 묻습니다. 공부에 도전한다고 하면 모두 유학을 가려고 합니다. 갈 수도 있지만 이미 한국의 상황을 보면 요구가 달라지고 있습니다. 현대문화를 이해하고 이것을 해석하고 영적으로 도전을 주고 그러면서도 확고한 진리의 사상을 전해서 우리의 삶에 충격을 주어 우리를 견고하게 할 수 있는 그 무엇을 원합니다. 저는 거기서 가장 유리한 점에 서 있는 것이 개혁신앙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충격적인 이야기를 하나 해 드리겠습니다. 저는 영국을 자주 가는 편입니다. 친구 교회도 있습니다. 영국교회는 다 시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 스코틀랜드 쪽에 프리처치라는 교회가 있습니다. 그야말로 “알 보수”입니다. 그 교회, 교단은 계속 성장세를 거듭하고 있습니다. 완전하고 성경적인 복음이 아직도 영국인들을 깨뜨리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 시대가 지금 우리에게 물들어오고 있습니다. 진리가 멸시를 받는 시대에 대안은, 개혁주의 신앙으로 불타오르는 진리를 일관되게 소유하는 것입니다. 제가 열린교회에서 개혁주의 신앙을 가지고 26년 동안 목회를 해본 사람으로서 여러분에게 자신 있게 권하는 것입니다. 이미 사용자가 리뷰를 말하는 것입니다. 해보니까 그렇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는 단 한 번도 성공한 연예인이나 성공한 사업가가 와서 간증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진리를 알게 하고 합치하게 하고 창조의 목적에 이바지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체험된 성경진리입니다. 피 묻은 진리, 피 묻은 십자가, 그것입니다. 목회를 해보면 목회자가 눈물을 흘리면 교인은 겨우 땀을 흘립니다. 목회자가 피를 흘리면 그때야 겨우 교인들은 눈물을 흘립니다. 그래서 말씀, 복음을 전하기 전에 그 복음이 나를 어떻게 끊임없이 거듭나게 하고 나를 깨뜨리고 나를 부수어서 그렇게 순결한 기름이 나오게 하는지, 그것을 보여준 사람이 설교할 때 그 성경에 대한 설교가 진리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것입니다. 독일의 신학자 헬무스 틸리케는 복음주의자였습니다. 그는 “일주일을 성경의 진리와 몸부림치며 산 목회자만이, 주일에 그가 전하는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고 말했습니다. 자기를 깨뜨린 설교는 유창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어떤 계기로 은혜를 많이 받고 기도에 열렬한 불이 붙어서 밤마다 올라가서 기도하며 하나님의 놀라운 응답을 받았을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때는 성경을 읽으면 기도만 보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설교하라고 하면 사례금을 받는 것이 아니라 돈을 주고서라도 하고 싶을 정도로 이 속에서 기쁨이 솟아납니다. 그런데 목사는 무엇을 설교해야 합니까? 모든 성경의 진리를 설교해야 합니다. 기도 하나만이 아니라 모든 방면에서 그렇게 앞서가는 치열을 누리고 있어야만 모든 것을 설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가능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몸부림치는 것 아니겠습니까?
자기가 깨어진다고 하는데, 이것은 죄에 대한 사랑에 대해서, 자기 의에 대해서 깨어지는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가 라틴어로 글을 썼습니다. “한 사람이 신학자가 되는 것은 깨닫고 책 읽고 사색함으로써가 아니라 오히려 진리에 대해서 살고 죽고 정죄를 받음으로써 이다.” 이것이 영광의 신학을 버리고 십자가의 신학을 택한 목회자이자 신학자의 자기 고백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의 탁월한 표지는 간절한 기도입니다. 지식과 경건을 겸비하면서 하나님 앞에 살아가야 합니다. 목회자의 영광은 자신의 온몸과 마음을 말씀 탐구에 바치고 성령 안에서 자기의 모든 삶을 태워 진리의 빛을 교회와 세상에 비추다가, 그 동굴로 내려와서 죽는 것입니다. 내려와서 그렇게 섬기다가 죽는 것입니다. 그러나 외롭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동굴에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궁극적인 고통은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에 대한 무지입니다. 목회자는 어두운 세상의 빛, 양떼를 위해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부름받은 특별한 사람입니다. 본질적 사명은 진리를 따라 알게 하고 살게 하고 그럴 수 있는 힘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런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