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에 관한 Q & A
녹취자 : 오희열
첫 번째 시간에는 Q & A 를 합니다. 안다고 해서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알지 않고는 해결되지 않는 것이 신앙입니다. 아까 성도님께서 사법고시 경험을 말씀하셨는데 법대 4년이면 마인드가 생깁니까? 제가 듣기는 하루에 8시간씩 3년 정도 되면 리갈 마인드가 형성되기 시작한다고 합니다. 리갈 마인드는 모든 것을 볼 때 법적 사고를 가지고 생각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크리스챤 마인드”는 왜 생기지 않느냐고 하는데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공부의 양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것입니다. 시민으로 30년을 살아도 리갈 마인드는 생기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개념 없는 사람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게 어때서? 내가 하고 싶어서 했는데?” 엄연히 범법을 했는데도 이 사람은 자신이 죄를 짓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30년을 살아도 리갈 마인드는 생기지 않습니다. 이렇게 공부의 절대량이 적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제 경험에 의하면, 아무리 법서를 읽어도 읽는 것 가지고는 법적 사고력이 생기지 않습니다. 사고력이 생기려면 그것을 자신에게 끌어들여서 자기와 묶어서 생각하는 훈련이 될 때 독자적으로 법적 사고력이 생겨서 심지어는 대한민국 법령집을 펴 놓고 어떤 훈령을 보고 “이것은 헌법정신과는 맞지 않는 것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판단할 때도 그것을 그렇게 하는 것이 법이 아닌 것 같은데 법을 다루는 사람들도 그것에 대해서 다른 의견을 내놓는 것을 보면서 황당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묶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법적 사고력이 생깁니다.
예를 들어 공부하기 싫어하는 사람을 데려다 놓고 4년 동안 중간고사 기말고사를 보면서 법학을 가르쳐도 그 사람에게는 법적 사고가 생기지 않습니다. 법을 하나 배우면서 “아! 이런 것이구나!, 그런 거였어!”하면서 자신을 묶는 훈련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크리스챤 마인드가 생기지 않는 이유는, 첫째는 공부의 절대량이 적기 때문입니다. “사고력”은 어린 아이의 수학 사고력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재능에 속하는 것입니다. 그게 아니라 일정한 사상의 체계 안에서 해석하는 능력을 “사고력”이라고 합니다. “어떻게 이렇게 불공정할 수가 있는가? 이것은 범법행위이다.”, 혹은 “그게 법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인간의 자유인데?” 이런 판단을 할 수 있는 것은 기본적으로 인생관, 세계관, 사회관에 관한 문제입니다. “관”은 view입니다. view 가 있다는 것은 주체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첫째는 절대적인 지식의 양이 필요합니다. 지식이 많다고 관점이 생기는 것은 아니지만 절대적인 지식의 양이 없이는 관점이 생기지 않습니다. 두 번째는 그것을 가지고 자기와 독자적으로 관련을 맺는 훈련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봅니다. 수학교수가 있는데 수학적으로 살지 않습니다. 그것이 문제가 됩니까, 안 됩니까?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거스름돈은?”, “난 몰라.”, “세금 냈어?”, “두 번 냈는지 세 번 냈는지 난 몰라.” 문제가 안 됩니다. 그러나 다른 교수도 문제가 될 수 있겠지만, 법학 교수가 자신의 법적인 신념대로 살지 않으면 그것은 중대한 문제가 됩니다.
신학은 그것보다 훨씬 더 고차원적입니다. 법은 양심에 대한 문제입니다. “자기는 법학을 말할 때는 그런 식으로 말하고 행동할 때는 다르게 이야기하네?” 이것은 신념의 문제이고 양심의 문제지만, 신학의 경우에는 신학의 의미가 “하나님을 향해 사는 것”이기 때문에, 살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신학적인 마인드가 생기는 것, 크리스챤 마인드가 생기는 것, 정확하게 말하자면 Theological mind, 신학적인 사고력입니다. 이것이 생기기 위해서는 지식의 양이 필요하고 그것을 끊임없이 자신에게 묶는 사고력이 필요한데 이것은 모든 인문학에서 요구되는 바입니다.
그런데 신학은 거기에 하나가 더 들어갑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깊이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만나는 것입니다. 만나고 나면 쫙 정돈이 됩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영화를 볼 때 보통은 그렇지 않겠지만 가끔 고차원적으로 만들어진 영화를 볼 때, 주인공을 오해하고 영화를 본다면 우리는 굉장히 헛갈릴 것입니다. 우리는 주인공이 누군지를 보면서 그가 화면에서 사라져도 주인공과 연관 지어서 다른 인물들의 연기를 읽어냅니다. 마지막에는 주인공을 따라가다가 스토리가 어떻게 시작되어서 기승전결로 이루어지는지 파악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많이 공부를 하고 아무지 자신에게 묶는 연습을 많이 한다고 할지라도 성경과 신학의 중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적으로 깊이 만나지 않으면 그 모든 것은 정돈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이번 5주간의 시간 동안 세 가지를 염두에 두십시오. 첫째는 지식, 두 번째는 사고, 세 번째는 예수를 만나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가 이루어지면 아주 놀라운 신학적 사고력을 가질 수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3년까지 걸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세 가지 조건이 갖춰지지 않으면 30년을 다녀도 계속 혼란스러울 것입니다. 그러면 그 중에서 자기가 좋아하는 것 하나를 딱 붙들고 그것이 마치 기독교의 전부인 것처럼 어리석게 살아가게 되는데 거기에는 풍성한 삶이 없습니다.
Q & A 로 들어가겠습니다.
질문 1) 저는 안정적인 직장에서 나와 해외 전문직에 도전하는 일부터 계속 직장에 대한 관심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하나님의 은혜로 잘 인도함을 받았지만 지금도 이직을 생각하고 있고 이런 경우에 신앙을 지키며 근심하지 않고 기다리는 것이 옳은 방향인지, 아니면 당장은 마음이 힘들더라도 여러 사람을 만나보면서 기회를 찾는 것이 옳은 방향인지 궁금합니다. 제가 해외파견을 나갔습니다. 거기서 에너지 자원 쪽 일을 하고 있는데 이라크 가스전 사업의 경험을 쌓고 어느 회사로 스카웃되어 갔습니다. 거기까지는 아주 행복했는데 그때도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그 후 1년 반 후에 유가가 급락하는 바람에 지금은 계약이 끝나게 되었습니다. 그때도 저보다 한 달 늦게 조인한 어떤 선배와 같이 있었는데 식사도 하고 친하게 지냈는데, 그분은 골프 좋아하고 술도 좋아하고 여자도 좋아하는 보통의 안 믿는 사람이었고, 저는 같은 상황에 놓여있지만 새벽기도도 나가면서 이런 큰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할지 고민을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분은 오히려 잘 풀렸습니다. 저는 그런 것을 불만 삼는 것은 아니고, 그 후에 다시 가스공사에 계약직으로 1년 있으면서 다시 돌아갈 마음을 먹었는데 계약 연장이 안 되는 상황에 놓였었습니다. 그때 열린교회로 오면서 목사님의 말씀을 아주 많이 들었습니다. 마음의 회복도 많이 얻고 신앙을 회복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도 했던 고민이, 뭔가 열심히 노력해서 얻을 것인가, 아니면 마음의 은혜를 계속 지키는 것이 중요한 것인가였습니다.
답변 1) 하나님의 뜻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확정되어 알려진 뜻이 있고 다른 하나는 확정되어 알려지지 않은 뜻이 있습니다. 확정되어 알려지지 않았다고 해서 하나님이 아무 생각이 없으시고 알아서 되도록 놔두시는 것은 아닙니다. 첫 번째로 말한 확정되어 알려진 뜻은 이미 성경에 다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거짓말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의 상황에 처했을 때, 이것을 기도해 본다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왜? 이미 하지 말라고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어떤 마음을 갖게 되든지 그 응답과는 상관없이 확정되어 있는 것입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법에서 도적질을 하지 말라고 하면 하지 말고, 세금을 내라고 하면 내야 하는 것이지, 그것에 대해서 내가 기도해보고 결정하겠다고 하면 안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말씀하신 경우는 확정적인 것이 아닙니다. 먼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께는 과거와 미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한 번에 보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모르고 계신다고 할 수가 없고 당신의 뜻이 없을 수도 없습니다. 그것이 미확정적이고 알려지지 않은 것인데 그에 대한 가장 좋은 답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입니다. 우선 충고해드리고 싶은 말은,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후회하지 마십시오. 소용이 없습니다. 더 좋았더라면 그때 이직을 하지 않았다면 더 좋았을 것입니다. (당시에 저는 목회자분께 상담을 받았고 그분은 이직을 하는 것이 좋다고 해서 이직을 했습니다.) 그것과는 상관없이 말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저는 중국을 많이 다니는데 많은 사람들, 특히 IT업종 계통으로 중국에서 채용해갈 때 현재 연봉의 세 배를 준다고 합니다. 거기에 플러스 알파가 있습니다. 환상적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간 사람들이 채 5년이 안되어서 모두 계약이 끝나고 더 이상 재계약을 안 해준다고 합니다. 쉽게 말해서 기술을 빼먹고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넘어온 사람들에게 하는 말이, 지금 받는 연봉이 10억쯤 된다고 치고 지금보다 세 배에서 다섯 배로, 그러니까 30억이나 50억을 준다고 하면 5년 벌어서 평생 먹고 살 생각으로 그런 결정을 할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장기적으로 봐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여러분 속에 있는 아이디어이지 그것을 빼먹고 나면 중국 사람들에게 주는 임금의 다섯 배, 열 배, 열다섯 배 이상을 주고 여러분을 쓸 이유가 없다고 이야기해줍니다. 철저한 사람들입니다. 그런 저의 충고가 먹혀들어가듯이 현실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런 것들에 대해서 지금 와서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일어난 일이고 번복할 수 없는 일에 대해서는 계속 “그랬더라면 이랬을 텐데…” 하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영적회복에 도움이 안 됩니다.
그러면 두 번째로 어떻게 해야 할까? 하나님께서 내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으로 만드셨는데 이미 일어난 일이고 여기에서 빨리빨리 사람들에게 수소문해서 아는 직장을 찾을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께서 열어주실 때를 기다릴 것인지는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보고 싶어 하시는 것은, 우리를 평범하지 않은 상황에 두실 때는 반드시 하나님의 의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의도는 사람마다 각기 차이가 나겠지만 “이 시점에서 네가 나의 인도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깨달아라.” 그것을 깊이 인정하고 하나님을 간절히 의지하고 내가 사람들에게 부탁을 하거나 알아본다고 할지라도 이것이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이 아니라 여태까지 경험해 온 바와 같이 하나님이 막으시면 될 일도 안 되고 하나님이 밀어주시면 안 될 일도 된다는 것이 여태까지 경험한 것입니다. 그 경험을 살리면서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 일에 대해서 사람들에게 수소문할 것인지 말 것인지는 자신이 하나님 앞에 인도를 받으면서 해야 할 일입니다. 상식적으로 놓고 본다면, 하나님 앞에 먼저 간절히 기도하면서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입니다.
제가 교수로 있을 때의 일입니다. 유아 교육과와 영문과에 똑똑한 사람들이 많이 몰렸습니다. 그중에 기도 모임에 나오는 유아교육과에 나오는 학생 하나가 좋은 유치원에 취업할 수 있도록 40일 기도를 작정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다가 한 30일쯤 기도했는데 정말 좋은 곳에서 제의가 들어왔습니다. 나 같으면 그것이 하나님의 응답이라고 여기고 갔을 텐데 그 학생은 다른 마음이 있었습니다. 40일 기도가 안 끝났기 때문에 이것은 주님의 뜻이 아니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것은 각자 생각하기 나름입니다. 40일 될 때 응답이 있어야 합니까? 41일째에는 하루가 지나서 안 되는 것입니까? 그것은 각자 해석하기 나름입니다. 그런데 그 마음이 예뻤습니다. 그렇게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직장을, 자신은 아직 40일을 채우지 못했기 때문에 가지 않는다고 한 것입니다. 그렇게 40일 기도가 끝나고 나서 더 좋은 곳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전심으로 매달리기를 하나님은 바라십니다. 형제가 좋은 직장에 남았더라면 얻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잃어버린 그 비용보다 훨씬 더 좋은 더 좋은 것을 하나님이 주실 것이라는 신뢰인 것입니다. (약간 다르지만 제가 그 일을 후회하는 것은 아니고 그 후에 은혜를 많이 체험했고 신앙적으로 불명확했던 것도 명확해진 부분도 많은데 그 은혜를 지키는 것과, 상황은 자꾸 은혜를 무너뜨리려고 할 때 내 힘으로 상황을 바꿀 수 있다면 그렇게 노력하는 것이 맞는 것인지...) 그렇게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내버려두시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해결이 간단할 것입니다. 그렇게 뭔가는 할 수 있지만 상황이 바뀐다고 해서 문제는 상황만의 문제가 아니라 이 상황을 통해서 형제의 신앙이 어느 정도인지,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떤지, 그리고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하나님이 깨닫게 하시는 것처럼 더 넓은 목적을 가지고 계신데, 우리는 이렇게 상황을 바꾸는 것이 관심사일 수 있지만 하나님은 그 상황을 통해서 더 멀리 있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싶어 하십니다. 아마 그렇게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가 평범할 때에는 평범하게 기도하고 평범하게 신앙생활하고 평범하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아주 비상상황일 경우에는 어떤 면에서 윤리도 잠정 중단됩니다. 말하자면, 불난 집에 사람을 구하러 들어가려고 하는데 다른 사람이 방해를 한다면 그를 때리지는 않더라고 밀치고 들어가는 것은 죄가 안 됩니다. 이런 상황을 아주 심각하게 받아들이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면서 간절히 하나님 앞에 더 매달릴 비상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벼랑 끝에 선 그대에게” 같은 시리즈를 들으며 은혜를 받고 금식기도라도 하십시오.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십시오.
질문 2) 많은 사람들이 우리 교회는 성도간의 교제와 사랑이 부족하다고 합니다. 새로운 구역으로 바뀌게 되면 이전 구역의 사람들과는 거의 아는 체만 할 정도입니다. 이 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답변 2) 왜 교제와 사랑이 그렇게 필요하십니까? 모든 교인들이 다 저런 불평을 합니다. 내가 묻고 싶은 것은, 왜 그렇게 교제해야합니까? 왜 그렇게 사랑이 많아야 합니까? 그렇게 묻는 본인은 사랑이 많습니까? 교제하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십니까? 그래서 나와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에게 문자도 보내고 전화도 하고 불러내서 밥도 사주고 산책도 하고 집에 초대하기도 합니까? 아마 그러지는 않을 것입니다. 성경으로 돌아가서 보면 “소끼에따스” 라고 하는 “교제”는 society가 그 말에서 온 것인데 “묶는다”는 뜻이 있습니다. 교제는 사랑으로 서로 사귀는 것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이 서로를 사랑하시면서 서로와 교통하시는 것의 모형이 세상으로 내려와서 사람들이 그 교제를 갖는 것입니다. 정말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넘치면 누구의 관심도 받지 않아도 외롭지 않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자기가 사랑을 받아야할 필요도 느끼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은 만족적인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사법고시를 공부하셨던 백인봉 집사님께 여쭙니다. 아내와 연애하던 시절이 있었습니까? 깊이 사랑에 빠졌습니까, 아니면 마지못해 결혼했습니까? (깊이 사랑했습니다.) 그렇지요? 그때 그 마음으로 돌아가서, 아내와 사랑에 깊이 빠졌을 때, 다른 여자가 교제해주지 않는 것 때문에 화난 적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다른 여자가 필요했습니까? (아닙니다.) 답을 들으셨습니까? 그러면 하나님을 사랑하면 사람에게 무관심해도 좋으냐? 그 뜻이 아닙니다. 인간의 만족이라는 것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면 그 사랑은 누구에게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있는 것을 사람들에게 흘려보내는 자연스러운 사랑입니다. 한 여자가 깊이 사랑에 빠지면 그 여자에게는 이 세상에 “사람”과 “한 남자”만 존재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 여자는 이상한 여자입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리고 한 남자가 깊이 사랑에 빠지면 “한 여자”, 그리고 나머지는 모두 “사람”입니다. 좀 동의를 해보십시오. 동의되십니까? 그것이 한 사랑의 관계로 말미암는 만족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는 사람은, 누가 자기와 교제해 주지 않는 것 때문에 불편함을 느끼거나 고통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랑을 느끼게 되면 사람으로부터 받을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꾸 주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게 됩니다. 나의 외로움은 문제가 되지 않고 외롭지도 않습니다. 왜? 사랑을 가진 사람은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질문 3) 죄와의 갈등이 있습니다.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답변 3) 죄에 대한 갈등을 느끼신다고 했는데 어떤 종류의 것인지를 봐야 합니다. 첫째로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죄가 용서받았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느끼는 갈등인지, 아니면 이미 그것은 알고 있고 지금이라도 죽으면 하늘나라에 갈 수 있다고 믿지만 내가 알면서도 매일 매일 짓는 죄, 혹은 습관적으로 짓는 죄 때문에 느끼는 갈등인지 말입니다. 사실은 이 문제에 대한 답을 한 줄 두 줄로 드릴 수 있지만 그것은 집사님의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지식이 없어서 고민하는 10분의 1만 성경을 공부하고 신학을 공부하는 데에 사용해도 해결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치과의사가 말했습니다. “치약 광고비의 10분의 1만 올바르게 칫솔질하는 법에 대해서 공익광고를 해 준다면 국민에게 열 배는 유익할 것이다.” 치약선전을 보시면 칫솔 이 끝에서 저 끝까지 꽉 채워 짜는 것으로 보여줍니다. 심장과 신장에 모두 안 좋은 것입니다. 치약회사가 들으면 짜증나겠지만, 치약을 최소량만 사용해야 합니다. 저는 칫솔 전체의 6분의 1이나 10분의 1 정도만 씁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고 양치질을 마치고 뱉어내실 때는 최소한 열 번을 뱉어내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이 남아서 핏 속으로 들어갑니다. 신장으로 들어가서 신장을 망가뜨리고 심장을 들어가서 심장병을 유발하는 것 아십니까? 굉장히 안 좋습니다. 소금으로 씻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열 번 이상을 뱉어내고 입 안에 치약이 남아있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굉장히 많은 논의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죄와 은혜의 지배” 같은 책을 숙독하면서, 죽기 직전까지 고민해야할 문제입니다. 그것을 직접 풀어보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래도 응급처치는 필요하니까 말씀드린다면, 인간이 죄를 짓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인간이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마치 인간이 호흡하는 동안에 어떤 작은 균을 마시지 않을 것 같은 종류이 죄인지, 내가 의지를 가지고 인격적으로 결정을 해서 짓는 의지의 죄인지를 구분해야 합니다. 만일 후자일 경우에는 아주 심각하게 다루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거의 모든 사람이 몸에 암세포를 가지고 있습니다. 10만 개만 넘지 않으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지금도 엑스레이를 찍으면 이쪽 폐 한 구석이 시커멓게 나옵니다. 저도 몰랐습니다. 20대 때 어느날 건강검진을 갔는데 의사 선생님이 보시더니, “어? 환자분은 언제 결핵을 앓으셨습니까?”, “그런 적 없습니다.” 했더니 사진을 보고 다시 판독을 하시더니 언젠가 결핵을 앓았고 스스로 나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저는 음성반응이 나왔고 지금도 폐 사진을 보면 그렇게 흔적이 나옵니다. 우리 몸 자체가 그것을 회복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죄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인간이 구원받았다고 할지라도, 죄를 용서해 주셨지만 죄에 의한 오염은 남아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차를 몰고 골목길을 가다가 어떤 집의 담장을 들이받아서 와르르 무너졌습니다. 집 주인이 “누구냐!” 하면서 뛰어나왔는데 얼굴을 보니 교회의 아주 친한 집사님입니다. “집사님, 담장을 무너뜨려서 어떻게 합니까?”, “집사님, 다치지 않으셨으면 되지 걱정 마십시오. 우리가 사람을 불러서 고치겠습니다. 그냥 가십시오.” 했다면, 책임은 해결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집 담이 무너진 것도 사실이고 자신의 차도 많이 파손된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구원받을 때 죄에 대한 책임은 하나님이 해결해주십니다. 그러나 죄에 의한 결과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기도생활을 잘하고 은혜 생활을 잘 하면 저항력이 매우 강해져서 죄가 생겨나자마자 백혈구가 균을 잡아먹듯이 죄를 해결해줍니다. 그러나 저항력이 심하게 약화되면 패혈증에 걸리듯이 이 죄가 점점 심각한 증상을 일으켜서 그 사람의 인생 자체를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응급처방을 해 드리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은, 가장 큰 것이 죄에 대한 가책을 고민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 죄를 지었는데 죄에 대한 가책이 없다면 저런 고민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가책이라는 것은 인간의 의식과 양심이 딱 붙어서 작용하는 것입니다. 완벽한 망각에 걸린 사람은 자신이 사람을 죽이고도 죄책감을 느끼지 못합니다. 지식이 없어서 양심이 함께 작동할 상대가 없기 때문입니다. 양심과 지식이 함께 붙어서 작동하면서 죄책감이라는 것이 생겨납니다. 망각이나 치매는 의미는 살아있는데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이코패스는 사실은 기억하는데 의미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 처제? 내가 겁탈하고 죽였지.”, “왜 그랬어?”, “참 예뻐.”, “왜 그랬냐고?”, “예뻤다니까.” 이것이 이춘재의 반복되는 진술입니다. 사실에 대한 기억은 또렷하게 있는데 이게 없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과거에 초등학생 살해사건까지 모두 재진술하면서도 그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이것이 작동을 하면 고통스러워서라도 못할 텐데 이게 작동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이코패스입니다. 이것이 사회전체에 대해 번지게 될 때 소시오패스라고 합니다.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저렇게 죄에 대해서 고민하는 것은 죄에 대한 기억도 있고 그것과 함께 작동하는 양심도 있다는 것입니다. 정신구조가 굉장히 건강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많은 사람이 그렇게 죄에 대한 생각도 없이 사느냐?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는데, 우선 하나는 자꾸자꾸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어떤 죄를 지었는데 그 사람이 도덕적이라면 그것에 대한 의미가 마음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기억된 사실이 마음에서 떠나지 않으면서 양심을 계속 자극합니다. 그런데 그 자극도 계속 반복되면 무디어집니다. 그 자극을 견디는 정신의 크기가 매우 작을 때는 자살에 놓이는 상황까지 갈 수도 있습니다.
제가 충고드릴 수 있는 것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우선 교리적으로 죄의 문제에 대해서 정리를 하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나의 죄를 위해서 죽으시고 나를 용서하신 것을 현재적으로 경험하면서 살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을 2천 년 전이 아니라 지금 내가 경험할 때 나를 용서하시는 것을 현재적으로 경험할 수 있듯이 현재적인 은혜의 체험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세 번째는 그 죄를 이기면서 사는 원리를 찾아내라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서 어떤 죄는 우리에게 유혹으로 떠오르는데 물리치는 죄도 있지만 어떤 죄는 떠오르면 반드시 그 짓을 하고야마는 죄가 있습니다. 후자의 경우에는 영혼의 건강이 매우 나빠졌다는 것을 뜻합니다. 여러분 가운데에는 감기균을 가지고 있는 분도 계시고 기관지염이 같은 오염의 요소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의 공기가 설악산의 공기보다 좋을 리가 없습니다. 수많은 세균들이 오고갑니다. 이제는 DNA검사가 발달되어서 조금만 세월이 지나가면, 서로 악수를 하고 지나가면 그 손을 분석해서 오늘 만난 사람이 몇 명이었고 누구였는지도 분석하는 단계에 이르게 된다고 합니다. 그렇게 교류합니다. 우리 중 대부분은 이 모임에 나왔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제 경험을 보더라도 저항력이 거의 제로에 내려가면 모임에 잘못 나가면 반드시 독감에 걸리든지 몸살이 나든지 하게 됩니다. 이 속에 있는 영혼의 건강과 죄에 대한 저항력이 심각하게 훼손되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정체가 무엇이고 어떤 방식으로 훼손된 것을 복구하는지는 한 줄로 이야기할 수는 없는 없습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우리가 공부해야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한 문제만 더 풀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질문 4) 나이가 많아서 교회학교 교사를 내려놓아야 하나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이것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십니까?
답변 4) 아이들과 공감을 너무 잘 하는데도 그만 섬겨야 하는 사람이 있고 아니면 아직 섬길 때가 안 된 사람이 있고, 어떤 분은 나이가 많이 드셨는데도 아이들을 계속 섬기면서 열매를 맺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을 판단하는 가장 중요한 것은 열매입니다. 내가 이 아이들을 섬기면서 과연 열매가 있는가?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수백 명 가운데 한두 사람에게만 있을 그런 기적적인 열매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사용하신다는 것이 열매로 나타나는데, 쉽게 말하면 반 아이가 1년 동안 몇 명이 늘어났는지를 뜻하는 것이 아닌 줄 아실 것입니다. 뭔가 이 아이들에게 영향을 주고 이 아이들이 무엇인가 교류하고 아이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모든 긍정적인 요소와 영적인 변화의 요소를 열매라고 보는 것입니다.
제가 두 가지 그림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첫째는 저 자신이 학생이었을 때의 경험과 두 번째는 전도사였을 때의 그림입니다. 첫 번째 그림은, 저는 기어 다닐 때부터 교회를 다녔지만 중학교 2학년 겨울, 2월에 무신론을 결심하고 교회에 발을 끊게 됩니다. 그때 아무도 저에게 “남준아, 너는 구원받았니?”라고 물어봐준 사람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오직 한 분이 기억이 납니다. 그분도 나에게 그것을 물어보시진 않았지만 무엇인가 저분의 가르침 속에는 내가 감동받을 수 있는 요소가 있다고 느끼게 해주었는데 고등학교를 졸업하신 분도 아니었고 당시에 45세에서 46세 정도 되어 보이시는 남자 집사님이셨습니다. 그분이 유일했는데 그 시간이 너무 짧았습니다. 그분은 나에게 개인적인 관심은 별로 없으셨고 웃으며 인사하는 정도였습니다. 심방 한 번 오신 적이 없으셨습니다. 두 번째 그림은 제가 전도사였을 때입니다. 나이가 55세 이상 되신 분이셨는데 그만두셨으면 좋겠는데 사명감을 가지고 주일학교를 하셨습니다. 전도사가 교사들을 다 모아놓고 공과를 가르칩니다. 꼭 참석하라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분반공부 시간에 계시록 강의를 하셨습니다. 그 내용이 건전한 내용이 아니라 옛날에 다미선교회에서 가르친 내용들이었습니다. 몇 번이나 하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는데도 열정에 불타서 어쨌든 무슨 내용이라도 전했습니다. 그런데 아무 아이도 영향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런 분들에게는 두 가지 길이 남아 있습니다. 자기를 깨뜨리고 부수고 기도해서 어떻게 하든지 아이들에게 스며드는 교사가 되든지, 아니면 이제 때가 다 되었다고 생각하고 그만두고 지금 자기가 가진 재능과 모든 것들을 더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새로운 섬김을 찾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나이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젊은 사람들이라도 아무리 아이들과 소통을 잘 한다고 해도 떡볶이와 오뎅을 먹으며 아이들과 놀러 다닐 뿐이지 더 이상 아이들에게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면 지금 나의 예화에 해당이 되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정서적인 거리를 느끼는 것이 정말 나이 때문인지, 아니면 나에게 사랑하는 마음이 모자랐기 때문인지, 아니면 사랑하는 마음도 있고 나이 문제도 아니라면 내가 아이들에게 다가가는 기술의 문제인지,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서 결정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질문 5)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가 양립할 수 있을지 명확치 않다는 것을 예전부터 느끼고 있습니다. 교리 중에도 “유기”라는 부분이 나오는데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이라도 구원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에 구원의 여부는 알 수 없다는 내용들이 결국은 하나님의 주권을 중시한다는 것인데, 구원받은 사람이 자기가 구원받을 것을 모른다는 것입니까? 이 부분에 대해 설명 좀 해주십시오.
답변 5) 이 문제는 기독교 교리 가운데 가장 심오하고도 (설명하기가 어려운) 블랙홀 같은 교리 다섯 가지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더 공부하면서 이야기를 합시다. 지금은 결론만 이야기하자면 이 문제는 아까 말씀드린 죄에 대한 공부보다 더 많은 공부가 필요합니다. 그래도 응급처지로서 결론만 이야기하자면, 인간의 자유로운 의지와 하나님의 결정 사이에 대해서는 제가 목사가 된 후에도 그에 대한 고민을 내려놓지 못했습니다. 이제 저는 해결이 되었습니다.
결론을 말씀드리면, 하나님의 결정과 인간의 자유는 결코 충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결정하셨지만 인간은 그 결정 안에서 어떠한 제약도 느끼지 않습니다. 이것을 설명하자면 굉장히 긴 시간이 필요하고 여러분 자신이 저의 이 설명을 깊이 이해하고 받아들이시려면 사전에 많은 지식들이 준비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이렇게 묻고 싶을 것입니다. “아니 그럼 그렇게 중요한 기독교의 진리를 우리가 이해하지 못한다는 뜻입니까?”, 아닙니다. 아주 잘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기 때문에 모르시는 것이 있을 수 없고 못하실 수 있는 일이 없다는 믿음을 단순하게 받아들이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유를 주셔서 우리가 무엇인가를 결정하게 하실 수 있었다는 것을 어린아이처럼 단순하게 받아들이면 지식이 많이 없어도 충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사변적으로 생각하면 이성적으로 이 두 가지를 모두 설명해야 하는데 그것이 완벽하게 가능하지도 않거니와 그 설명을 그래도 신앙 없이 이해하려면 엄청나게 많은 사전적인 지식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결정”이란 무엇인가? “의지”란 무엇인가? “자유”는 무엇인가? 여러분이 한 번 인터넷이나 도서관에 가서 철학책을 펴 보십시오. 어마어마한 양의 담론이 나옵니다. “의지”는 더 많은 양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것을 선택하는 사람은 인간입니다. 결정하신 분은 하나님입니다. 그러면 “하나님”, “인간”, “자유”, “결정”, “의지”, “선택”, 이런 수많은 이야기들이 담론의 장 속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그래서 철학이 그렇게 어려운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드리는 설명이, 인간이 설명할 수 있는 최고의 설명이라고 자부할 수는 없겠지만 제가 마음먹은 한도 안에서는 가장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려면 여러분이 시간을 내야합니다. 며칠 시간을 내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요구하는 양의 과제들을 읽어내야 합니다. 그러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이렇게만 이야기하고 끝내면 “담임목사 성경공부 가봐야 별거 없는데, 결국 우리는 한참 멀었다는 그 뜻이네. 모르니까 왔지, 어떻게 하라는 거야?” 하실지 모르니까 평생 잊히지 않을 힌트를 하나만 드리겠습니다.
하나님처럼은 아니지만 꿈을 믿으십니까? 예를 들어 일반적으로 꿈을 꾸었습니다. 대부분 모든 사람에게 물어보거나, 혹은 물어보지 않더라도 자신이 생각하기에 굉장히 반가운 사람을 만날 꿈이라고 생각되는 꿈을 꾼 적이 있지 않습니까?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새벽에 꾼 그 꿈을 아침밥 먹으면서 잊어버립니다. 그리고 자유롭게 다닙니다. 그런데 저녁때 전철 안에서 정말 그토록 만나고 싶었던 동창을 만났습니다. 그때 비로소 그 꿈 생각이 납니다. “아! 내가 새벽에 그 꿈을 꿨는데!” 그런데 아침부터 그 친구를 만나기까지 강제력을 느낀 적이 있겠습니까? (질문자의 말… 들리지 않음) 만약 그렇다면 하나님은 기껏해야 알고리즘 정도밖에 안 되는 것입니다. 어디에 넣으면 통로를 타고 나오는 것을 알고리즘이라고 합니다.
알고리즘을 잘 해 놓으면 검색어 순위가 위로 올라간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그것만 하는 업자가 있습니다. 상당한 돈을 줘야 합니다. 그런데 네이버에서도 모릅니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끌어내립니다. 돈을 내지도 않았는데 상위로 올라갔으니 말입니다. 네이버에 반짝하고 뜨는 광고가 있습니다. 그 광고가 골든타임 한 시간에 얼마 정도 될 것 같습니까? 3800만원이라고 합니다. 골든타임 한 시간에 3800만원입니다. 골든타임을 세 시간으로 보면 1억입니다. 모르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어마어마한 수입을 네이버가 올립니다. 거의 독점하고 있습니다. 이것도 문제가 많습니다.
어쨌든지 간에, 인간은 살아보기 전에는 무엇이 결정되었는지를 알 수가 없습니다. 살아봐야 압니다. 살고 나면 이런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뭔가 하나님이 결정하셨겠지만, 어쨌든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합니다. 그러면 결국 모든 것이 잘 됐을 때는 하나님이 선하시기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는데 인간이 타락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인간이 선을 행할 능력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선을 행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악을 행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결정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인간은 항상 선한 것을 결정할 때는 할 수가 없고 나쁜 것을 할 때는 아무의 도움 없이도 합니까?” 이것을 철학적인 용어로 “작용인과 결함인”이라고 합니다. 기계가 있는데 들어가서는 안 될 부속이 하나 더 들어갔기 때문에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작용인”입니다. 그런데 어떤 부속을 납품받았는데 뇌물을 받고 들여온 부속이 있습니다. 한수원, 정말 엄청나게 문제가 많습니다. 저는 원전의 부품으로 문제를 일으키면 거의 반역죄 수준으로 다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번만 걸리면 인생이 끝나게 만들어야 합니다. 회사 자체가 공중 분해되게 만들어야합니다. 그 대신 이윤을 보장해줘야 합니다. 그런 부품에 결함이 있어서 발생하는 문제를 “결함인”이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선”이라는 것은, 인간이 어떠한 도덕적 선이라도 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질 만한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런 점에서는 작용인이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불신자도 성령님이 양심을 갖게 해 주시고 도덕심을 갖게 해 주시기 때문에 작용인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도, 암에 걸려 죽기 3일전에 경찰을 불러서 10년 전에 자기가 살해한 것과 공범이 누구인지를 모두 이야기하고 죽습니다. 그냥 눈감으면 며칠 있다가 죽을 사람이 그것을 밝히지 않게 만든 것이 대체 무엇인가? 넓은 의미에서 보면 다 성령의 작용입니다.
인간은 성령 없이는 선을 행할 수 없습니다. 신자들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을 향해 받아들여질 만한 선을 행하게 하는 것은 “작용인”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가 “은혜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은혜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고 하는 그 “은혜”가 작용인”입니다. 선을 행하며 살게 하는 “작용인”입니다. 그런데 “결함인”은 자체의 결함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누가 그것에 추가로 뭔가를 집어넣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가지고 있는 완전성의 결핍 때문에 결함이 생겨서 기계전체가 오작동하는 것을 말합니다.
어거스틴은 “신국론”에서 인간을 기간별로 네 스테이지로 나눕니다. 첫 번째는 죄가 들어오지 않았을 때, 그때의 인간은 죄를 지을 수 있는 상태에 있었습니다. 죄가 들어온 후에는 죄를 짓지 않을 수없는 상태로 들어갑니다. 이것은 죄인의 운명입니다. 거듭나고 신자가 된 후에는 죄를 안 지을 수도 있는 상태, 이것은 자신의 결심 때문에 가능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천국에 간 후에는 죄를 지을 수없는 상태가 됩니다. 첫째, 죄를 지을 수 있는, 죄가 들어온 후에는 죄를 안 지을 수 없는, 신자가 된 다음에는 죄를 안 지을 수도 있는, 천국에 간 후에는 죄를 지을 수 없는. 그러면 여러분은 지금 몇 번째 스테이지에 있습니까? 여러분이 구원을 받았다면 세 번째 스테이지에 있습니다. 여러분이 은혜 안에서 살고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고 간절한 회개 생활과 기도생활을 하면 죄를 짓지 않을 수 있고 최소한 덜 지을 수 있습니다. 최소한 양심에 거스르는 죄는 안 지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이것을 하지 않습니다.
내일 설교를 주의 깊게 들어보십시오. 존 오웬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비결 세 가지 설명이 나옵니다. 이 설명이 될 것입니다. 만일 이런 은혜 생활을 하지 않으면 밖에서 누가 나에게 죄를 짓게 해서 죄를 짓는 게 아니라 내 안에 스스로 결함인에 대한 방지책이 없어서 결함이 커지면서 스스로 죄를 짓게 됩니다. 그것은 필연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이 죄를 짓는 것이 바깥에서 들어오는 어떤 원인 때문이라고 자꾸 생각하고 하나님이 결정하셨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자유로운 의지를 가지고 죄를 짓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결정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고 하면, 이것은 차원의 문제가 됩니다. 설교를 주의 깊게 들으신 분들은 이미 들으신 예화입니다. 사각형 위에 사각형이 올라갈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모순이라는 것을 입증해드리겠습니다. 선분의 정의가 무엇입니까? 무한한 점의 연속입니다. 점은 크기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따라서 선분은 굵기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높이는? 부피는? 없습니다. 그러면 올라갈 수 없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하나의 사각형이 있는데 똑같은 사각형을 기하학적으로 위에 올리면 무한소가 되면서 그것은 하나의 정의에 불과한 것이 됩니다. 올라갈 수 없습니다. 이것이 2차원입니다. 그런데 2차원밖에 모르는 사람의 뇌로는 3차원이 올라갈 수 있다는 것을 설명하지 못합니다.
방정식에서 의 6제곱이나 𝑦의 6제곱이 나오는데 과학자 중 아무도 𝑥의 6제곱, 𝑦의 6제곱을 설명할 수 없다고 합니다. 저는 수학지식의 한계가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이야기만 듣고 이야기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알고 있는 공간개념은 3차원 + 시간, 4차원까지입니다. 5차원을 넘어서면 그것이 어떤 식으로 연결되는지를 알 수 없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뫼비우스의 띠입니다. 그리고 건축물이나 나무들을 차원이 다르게 엮어 놓았을 때는 나무의 이음새 자체가 모순이 된다고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한정된 차원에서, 제가 이야기하는 표현으로는 “이성의 한원성, 제한된 차원성” 때문에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물론 이성적으로 탁월한 사람은 다른 방면으로 설명할 수 있겠지만 말입니다. 모두 설교와 책 속에서 이야기한 것입니다. 인간의 이성은 차원의 한계에 갇힙니다. 그래서 그 이상을 설명하지 못합니다.
응급처치는 되셨습니까?
성령이 역사하셔야 합니다. 성령은 어떤 사람에게 역사하시고 어떤 사람에게 하지 않으시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우리의 마음을 항상 “내가 믿고자 하면 하나님이 나에게 믿음을 주신다. 왜?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을 믿는 것을 간절히 바라시기 때문이다.” 이것이 믿음이 가지고 있는 성격입니다. 그것을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로 표현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예를 들어, 요한복음 3장에서 나온 이야기가, 완벽하게 소음이 차단된 유리 안에서 빨래가 날리는 것을 볼 때 바람의 소리는 듣지 못합니다. 그러나 빨래가 날리는 모양을 보면서 바람이 분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압니다. 우리가 인과관계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을 받아들이는 손은 이성이라는 손을 주셨고, 이것을 넘어서서 도저히 알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손을 주셨는데 이것이 믿음입니다. 여러분이 최소한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을 것입니다. 그런데 증명하실 수 있습니까? 왜 하나님을 믿었느냐고 설명하면 안 믿는 사람이 듣기에는 황당한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아팠었는데 갑자기 병이 나았는데, 갑자기 평안이 밀려왔는데, 이렇게 하면 이성적인 설명입니까 아닙니까? 아닙니다. 그래서 일단 제가 잘 쓰는 말이 있습니다. 너무 궁금하면 하나님께 직접 물어봐라, 그것이 가장 빠르다. “제가 자유로운 의지와 하나님의 결정 사이를 이해할 수 없나이다. 예수여 나에게 답을 주옵소서.” 건성으로 하지 말고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이 어느 날 수학공식을 풀듯이 설명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이성적으로 설명하지 않아도 충분할 정도로 아멘 할 수 있게 하십니다. 그것도 지식입니다. 지식은 이성의 논리를 통해서도 들어오고 이성을 뛰어넘는 초월적인 것을 통해서도 들어옵니다. 이것이 믿음이고 이것이 이성의 손입니다. 한 가지만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왜? 항상 좋은 믿음을 가지고 있을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항상 이성으로만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두 가지를 다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만족스러우십니까? 아무리 늦어도 우리가 기도를 해야 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