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란 무엇인가 2
: 목회의 목적과 세 가지 목표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빌 1:8-11)
녹취자 : 오희열
성경구절을 한 번 더 읽고 시작하겠습니다. 9절부터 11절입니다.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
지난 시간의 강의를 간단하게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우리의 모든 복음사역은 사랑을 점점 더 풍성하게 하는 것이고, 그 사랑은 하나님께 기원을 둔, 다시 말해 하나님이 인류를 창조하실 때 바람직한 사회가 되게 하셨던 그 사랑을 뜻하는 것이다. 그 사랑이 점점 더 풍성해져서 한계를 넘어서서 넘쳐흐르는 사회를 꿈꿨는데, 그것은 자기 자신의 사랑 안에서 시작되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또 이렇게 사랑이 풍성해지는 것은 결국 ‘에피그노시스(지식)와 아이스데시스(총명)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복음 사역은 어찌하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아이스데시스와 에피그노시스를 사람들에게 제대로 전달해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것이 앞 시간 강의의 요약입니다.
목회의 세 목표
(오늘 살펴 볼) 두 번째는 이제 그렇게 함으로써 실제의 삶에서 나타나는 아주 현실적인 목회 목표를 세 가지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고, 진실하며, 허물이 없어야 함을 말합니다.
A. 분별함
성경은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라고 합니다. “지극히 선한 것”이라고 번역된 부분은 희랍어로 “디아페란타”입니다. ‘지극히 선한 것’이란 번역은 너무 앞서 간 의역이고 원래 정확한 번역은 ‘be different’입니다. “어떤 것에서 서로 다른 것들과 구별되는”이라는 뜻입니다. 이 “디아페란타”라는 부분에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는데 그래도 주류를 이루며 가장 지지를 많이 받는 해석은 “어떤 것이 다른 것에 비해서 더 나은 것, 더 가치가 있는 것”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사람들에게 넘쳐서 그것이 점점 더 풍성해졌을 때 현실적으로 그들의 삶이 어떤 삶이 되기를 원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도취적인 사랑으로 바뀌어서 뭔가 감정을 낭비하는 것 같은 사랑의 오용이 이루어지는 사회를 꿈꾼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한국 교회사 속에서 ‘이용도’라는 감리교 목사를 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단으로 정죄되었고 최근 몇 년 전에 통합측에서 이단해제를 했습니다. 이분은 아주 기이한 분이었습니다. 이분이 주장한 오류에 빠진 신학적인 개념이 “몰아적(沒我) 사랑”입니다.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는 사랑입니다. 그 몰아적 사랑에서는 선과 악의 구분이 상관이 없고, 그가 어떤 신학적 주장을 이야기하는지는 상관없이 모든 인간을 눈물겹게 사랑하는 것입니다. That’s all. 그것이 전부입니다. 나중에는 이단으로 정죄되고 신비가로서 낙인이 찍혀버립니다.
그러나 여기서 이야기하는 “사랑이 넘쳐나는” 사랑은 그런 식으로 사랑이 넘쳐난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랑은 아주 구체적이며, 단순한 감정의 소비와 낭비가 아닙니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랑 때문에 선악의 판단이 흐려지거나 도덕적인 판단을 유보해버리는, 끓어오르는 정념으로 누군가를 끌어안아버리는 그런 종류의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기독교의 사랑의 개념이 아닙니다. 우리 사이에 통용되고 있는 사랑의 개념과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사랑의 개념은 아주 현저히 다른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는 데 방해가 되는 종류의 사랑을 교회가 오히려 추구하고 있기도 합니다. 이런 문제는 사실 우리가 한번 탐구해 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의 신학. 이것에 있어서 아주 획기적인 기독교의 사랑의 기반을 놓았던 사람이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입니다. 교회사 속에서 이 사랑의 문제를 가지고 어떻게 씨름을 하였으며, 참된 사랑은 어떤 사랑이고,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이야기하는 그 사랑이 도대체 어떤 종류의 사랑인지 그 실체적인 것들을 이해하고, 그 사랑의 개념들이 어떻게 흘러 내려와서 (근대) 이성주의로 흐렀으며, 자유주의가 들어오면서 이 사랑의 개념이 어떤 식으로 그 본질이 흐려지게 되었는가를 살펴 보아야 합니다. 여기서는 그렇게 흐려진 입장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인 입장에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충만하게 되어서 “페리시오세” 곧 “울타리를 넘어서게” 될 정도로 풍성하게 될 때, 아주 현실적으로 나타나는 중요한 세 가지 특징을 목회의 목표로 제시합니다.
첫째는 서로 다른 것을 분별하는 것입니다. 보다 더 가치 있는 것과 보다 덜 가치 있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분별해내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체계 자체는 존재론적이고 가치론적인 질서입니다. 존재는 가치와 연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보다 더 높고 큰 존재에 덜 높고 낮은 존재가 가치론적으로 복종하는 가운데 세워진 질서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이 이야기하는 사랑의 질서입니다.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사랑은 아주 놀라운 질서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삼위일체 안에 가지고 계신 충만한 당신의 사랑을 천상의 세계에서 지상의 세계로 투사합니다. 투사된 사랑이 아담 안에서 넘쳐서 하와 안에서 넘쳐서 그 생육하고 번성하는 자식들 속에 계속 넘쳐서 그 사랑이 “페르시오세”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신 뜻입니다. 당연히 아담과 하와의 경우에 그 사랑은 타락하지 않았더라도 여전히 증진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종류의 사랑이었을 것입니다.
시간이 없어서 건너뛰었는데, 그렇다면 사랑은 어떤 식으로 우리 안에서 증진되겠습니까? 에피그노시스와 아이시데시스를 통해 사랑이 증진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함으로써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사역은 하나님의 아름다움(beauty)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아름다움의 문제는 오늘날 신학에서도 아주 뜨거운 주제입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것, 그것이 신학입니다. 다른 모든 학문은 신학만큼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여주지 못합니다. 신학이 가장 확실하게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대해 보여줍니다.
이 시대에 흐르고 있는 소위 미학적 신학의 조류들을 살펴보십시오.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살(Hans Urs von Balthasar)이라는 사람의 책을 읽어보십시오. 시간이 없으면 1권만이라도 읽어보십시오. 여러분이 충격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 사람의 사상에 대해서 전체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신학 그 자체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도구라는 것은 놀랍습니다. 특별히 조나단 에드워즈는 타락한 이후의 세상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눈부시게 보여주는 불꽃 놀이 같은 사건이 있는데 그것이 구속사건이라고 표현합니다. 그 구속사건은 어두운 밤하늘의 불꽃놀이입니다. 불꽃이 없어도 반딧불이 빛나고 저 멀리 초가집의 등불도 빛나지만 그것은 하늘에 퍼지는 -7월 4일에도 불꽃이 터졌습니다.- 어마어마한 불꽃놀이와는 비교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늘을 보는 누구도 그것을 외면할 수 없을 정도의 불꽃입니다. 그것을 구속사라고 보는 것입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대한 계시를 최고로 담고 있는 이유는 구속사가 성경의 관심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은 그리스도나 하나님에 대해서 설교해도 너무 예쁘지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생수를 미국에서 광고한다면 이것을 먹으면 너무 행복해질 것이라는 것, 다른 물을 먹는 것보다 이 물은 훨씬 더 당신을 건강하게 할 수 있는 것이라고 호소를 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을 보고 왠지 생수를 바꾸고 싶고 탄산음료가 아니라 저 생수를 먹고 싶은 마음이 솟아나게 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설교를 할 때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도록 설교를 하고 신학교에서 강의를 해도 공부를 하고 오면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그렇게 설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름다운 것을 발견하는 만큼 사랑하게 됩니다. 에피그노시스를 통해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고 아이시데시스를 통해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는 것입니다. 이성적으로 설득되면서 인격적인 방식으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고, 초월적인 방식으로 직관적으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관상하면서 이 세상에 있는 것들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생각에 빠지게 됩니다. 가장 이상적인 것은 하나님과 열애에 빠진 가운데 학문을 탐구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분별을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판단력에 문제가 됩니다. 현대 그리스어 성경에서는 “디아크리티아노”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네슬 알란드판(Nestle-Aland)에는 “도키마조”라는 단어를 씁니다. 이것은 시험을 해서 확인을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저 벽이 콘크리트인가 아니면 나무를 만든 벽에 페인트를 칠한 것인가? 가장 훌륭한 것은 칼로 확 긁어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긁어보면 속이 나무인지 벽돌인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아는 것을 “도키마조”라고 합니다. 어떤 일들이 더 가치 있는 것인지 도덕적인 문제를 결정할 때, 그때 뒤집힐 수 없는 방식으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정확하게 말입니다. 칼로 벽을 긁어봐서 그 속이 나무라는 것을 확인한 사람은 더 이상 자기 자신의 그 판단이 다른 사람의 말에 의해서 뒤집힐 리가 없습니다. 그런 방식으로 판단하는 것이 “도키마조”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알고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감탄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난 후에는 결국 오류와 진실이 뒤섞인 사회에 살면서 가치가 적은, 열등한 것들이 엄청난 가치가 있는 것처럼 포장을 하여 등장하고, 가치가 있고 소중한 것인데 사람들에 의해서 무시되기도 합니다. 화장품 광고, 좋은 자동차 광고, 별장, 여행, 럭셔리한 크루즈, 이런 것들을 제시할 때는 왠지 저런 것을 하지 않으면 인생을 사는 것이 아무 맛이 없도록 느끼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방식입니다. 그러면서 인간은 수없이 속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전개되는 엄청난 매스 미디어에 의해 충동질되고 있는 소비문화입니다. 이렇게 변천하는 시대 가운데, 다양한 사상의 조류 속에서 정확하게 “도키마조”하는 판단력을 갖는 것입니다. “아! 이것은 저것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이다.” 라고 명확하게 아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점점 더 풍성하게 일어나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기대하는 바 입니다. 그 사랑을 가지고 정확하게 무엇이 더 소중한 것이고 덜 소중한 것인지를 도덕적으로 판단하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계에서 일어나는 많은 어지러운 일들도 결국은 판단의 오류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다 지나가는 것들인데 이것에 집착합니다. 학문을 하는 사람들은 학문에 대한 탐욕이 있지 않습니까?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런 것도 다 세상 사랑이라고 보았습니다. 아주 훌륭한 논문을 쓰고 학계에 충격을 줄만한 작품을 남기고 싶다거나 한국에서 온 사람 중에서는 최고라는 인정을 받고 싶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 가치 있는 것들은 어떻게 하고 있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더 중요한 것들은 우리가 어떻게 다루고 있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것이 첫 번째 목표입니다.
B. 진실함
둘째는 “진실하여”라고 나옵니다. 여러분이 알고 있는 진리라는 헬라 단어로 “알레데이아”가 있습니다. 이는 감출 수 없이 드러난다는 뜻입니다. 진리가 가지고 있는 힘입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진실하다는 것은 “진리”와 관계됩니다. 진리가 참되기 때문에 그것에 영향을 받은 인격적인 결과입니다. 진실은 라틴어로 “베룬”인데 진리, 곧 “베리타세”에 기초하지 않고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마음과 생각과 정신과 행동이 진리에 부합해 있는 상태가 진실입니다. 진실한 사랑은 하나님의 속성을 자신의 삶을 통해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실입니다. 진실은 무조건 솔직해지는 것이 진실이 아니라 진리를 전제로 해야 합니다. 진리를 향하여 부합해있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이라는 것은 한 번 진리로 돌아오면 그 진리에 계속 매달려있지는 못합니다. 진리에 의해 끊임없이 감화를 받고 영향을 받고 그 진리를 사랑하게 되는 그 마음과 정신의 작용이 없이는 거기에 붙어있을 수 없습니다. 순간의 이익보다는 영원한 진리를 택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그 진리를 사랑하고 진리에 합치되어 있는 자신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것을 기뻐함으로써 그것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세상의 어떤 능력보다 소중한 것은 진실입니다. 진리에 합치되어 있는 사람은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왜? 진리와 함께 자신이 영원할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죽어도 그 진리와 함께 자신은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 진리 안에서 사는 사람들에게는 담대함과 자유가 있습니다. 모든 것을 빼앗기고 잃어버려도 나는 상관없다는 담대함이 있습니다. 그것이 사도바울이 자기의 교인들에게 갖게 하고 싶었던 삶의 모습입니다. 사역이 어떤 사람의 지위와 명예와 관련되어질 때 그것은 순수성을 읽게 됩니다. 물론 어떤 사람이 학문이 뛰어나니까 공부하고 싶은 사람은 그 사람의 이름을 그보다 못한 사람보다 더 기억하고, 또 그보다 못한 사람에게 가지 않고 그 사람에게 배우러 가는 것을 말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항상 본인은 조심해야 합니다. 유명하게 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더러운 것입니다. 그것이 중독되어서 자신이 유명해지고 사람들에게 관심을 받지 못하면 존재의 기반을 어떻게 가질 수 없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한국에서는 “관심종자”(관종)라고 합니다. “관심종자”같은 사람이 되는 것은 너무 비참한 일입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그리고 다른 사람이 나를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상관이 없이 ‘나는 자유롭다. 나는 나로서 주님 앞에 감사하고 나답지 않은 것을 끊임없이 버려서 나다운 내가 되어가고 그 과정이 한 인간이 진리에 부합하며 살아가는 과정이다’라고 여기면서 날이 갈수록 진리와 합치되어 가는 자신을 갖는 사람은 외롭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진리가 그에게서 떠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여러분의 사기를 너무 꺾어놓는 것 같아서 미안하지만 다 허무한 것입니다. 제가 이 나이가 되어보니 다 허무한 것입니다.
(찬양) 주님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주님 사랑해요
외국에 와서 그 고생을 하고 공부하면서 예수를 조금씩 닮아가는 복된 사람이 있고, 본국에 있을 때는 기도도 하고 눈물도 있는 사람이었는데 유학을 마치고 나서 말라깽이가 되어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것을 택할지는 여러분의 몫입니다. 행복은 세상에 있는 지위나 명성, 소유, 그런 것들로 채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채워지지 않습니다. 진리와 함께 있는 것, 그 안에서 인간은 한없는 자유와 사랑을 느끼는 것입니다. 참된 사랑은 마지막에 진리와 함께하는 사랑입니다. 진리를 떠난 사랑은 이미 육욕의 사랑입니다. 결국 우리의 목표는 나의 말씀사역을 통해서 사람들이 진리를 너무 사랑하고 그 진리와 함께 붙어있는 사람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나는 잊혀도 괜찮으니 그들이 진리만 기억하는 사람이 되길 바라는 것입니다.
시간이 점점 흐를수록 이런 생각이 듭니다. 내가 무엇을 가르칠 수 있는 것이 있는 사람인가? 한때는 책을 쓰면서 수많은 독자들이 그 책을 읽는 것을 보며 내가 그분들을 위해서 봉사하고 있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는데 지금은 읽어주는 사람들이 나를 위해서 봉사하는 사람이라고 생각됩니다. 너무너무 고맙습니다. 엎드려서 절하고 싶습니다. 더 많은 사람이 읽어주기를 바라지만 그렇게 되지 않아도 안타깝지는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마지막에 우리의 삶과 인격이 진리를 반영하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진리 이외에 아무것도 우리 안에 영원히 있는 것은 없습니다. 그렇게 믿었던 사람인데 배신을 하고, 그렇게 좋은 관계였는데 깨어지며, 그렇게 많은 것을 헌신해 주었는데도 은덕을 모르는 것은 우리 인간 사회에서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 것에 가슴 아파하고 일희일비하면 우리의 삶이 얼마나 비참해지겠습니까? 결국 진리가 우리에게 주는 가장 커다란 유익은 진리만이 우리를 우리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신학공부를 하면서 위대한 모델을 갖는 것은 너무 좋은 것입니다. 제가 늘 말씀드리는 것은, 신학의 세계, 목회의 세계에서는 스승이 없는 사람은 제조회사와 생산연월일이 표기되지 않은 비닐봉지에 들어있는 식품입니다. 신뢰할 수가 없습니다. “존경하는 스승이 누구냐?”고 물었을 때, “우리 아버지입니다.”라고 말하는 것 말고, “우리 교회 목사님입니다.” 물론 그럴 수 있지만 신학적인 스승을 물어보는데도 “나는 없습니다.”라고 한다면 둘 중에 하나입니다. 진짜로 감화를 받은 사람이 없든지, 스승이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인류 중에 누구도 걸어보지 않은 대가의 길을 걸어가고 있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스승을 찾으십시오. 저는 신학을 하면서 위대한 스승들을 만난 것이 제 인생의 특징을 결정해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공격하기 위해서 위인전을 읽지 말고 흠모하기 위해서 읽는 사람들이 먼저 되어야 합니다. 그 속에서 세상의 영화와 함께 살기보다는 진리와 함께 살기를 더 원했던 위대한 위인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진리가 우리에게 주는 가장 커다란 유익은 하나님을 사랑하게 할 뿐만 아니라 나를 가장 나다운 내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진리는 우리에게 있는 오류와 거짓의 껍질들을 끊임없이 벗겨냅니다. 그래서 나다운 내가 되게 합니다. 위대한 스승들을 가져야 하지만 그것도 하나의 수단에 지나지 않습니다. 궁극적으로 그 위대한 스승을 본받고자 하는 이유는 그렇게 함으로써 가장 나다운 내가 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나는 누구의 삶을 카피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이 아닙니다. 예전에도 나 같은 사람이 없었고 현재에도 없고 미래에도 나 같은 사람은 다시 태어나지 않습니다. 나라는 존재는 영원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이 세상에 단 한 번 태어나 나만의 색깔과 결을 가지고 빛나는 별이 되기 위해서 하나님이 여기에 두신 존재입니다. 그 허다한 믿음의 위인들과 함께 어깨를 겨루며 밤하늘의 빛나는 별들 중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들처럼 왕별은 아니라도 말입니다. 그렇게 어두운 밤하늘 어디에선가 자신 고유의 빛을 발하는 사람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리가 주는 힘입니다.
C. 허물없음
마지막으로 “허물이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며”라고 했습니다. 허물이 없다는 것은 흠이 없는 것입니다. 과일 같은 것으로 보면 흠집이 없는 것입니다. 크고 아주 맛있어도 흠집이 있는 상품은 최상품이 될 수 없습니다. 한국에 가도 어마어마하게 비싼 과일들이 있습니다. 사과 네 개, 배 네 개가 들어있는데 한 20만원 쯤 합니다. 과일 한 개의 가격이 2만5천 원 이상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상할 정도로 큽니다. 모양이 예쁩니다. 그리고 일체의 흠이 없습니다. 두 겹, 세 겹 쌌습니다. 그리고 먹어보면 최상의 맛입니다. 그게 바로 “허물없이”입니다.
이것은 현실적으로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현실적으로 우리 중에 누가 흠이 없겠습니까? 이미 불가능해졌는데,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그렇게 될 가능성이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능성이 없어도 있는 것처럼 사는 것을 원하십니다. 쉽게 비유를 들자면, 기록에 보면 저격수들이 1km 바깥에서 사람을 맞춘 기록이 나옵니다. 1km 거리이면 극도의 망원경이 아니면 안 보일 텐데 총열을 다른 총보다 두 배, 세 배 길게 만들어서 탄도를 안정화시키는 특수제작을 하고 그 총으로 정확하게 겨냥하면서 저격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저격수들은 1km 바깥에 표적이 있는 것을 망원경으로 보고 맞춘다고 해도 100% 모두 맞출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쏠 때는 100% 맞출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쏩니다. 그렇듯이 이것은 하나의 과정(programatic)입니다. 그렇게 살지는 못하지만 못 살 것을 미리 예상하면서 살면 그 삶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일체의 흠이 없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목표로 세우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매일매일의 삶의 목표를 갖도록 만들어줍니다. 하나님을 향한 최고의 사랑을 신학적으로 그렇게 표현하면서 신앙적으로 그것을 자신의 삶 속에서 드러내면서 사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하신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버릴 것들을 버리게 되고 포기할 것들을 기꺼이 포기할 수 있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이제는 어떤 지식을 배워서 남보다 우월한 지식의 공급자가 되어 사람들에게 그것을 나눠주며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던 시절은 지났습니다. 예전에는 지식 제공자와 지식 수혜자들의 계급이 나눠져 있었습니다. 저 같은 경우는 당시의 문맥에서 보면 지식 제공자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생산자입니다. 저마다 지식을 생산해서 책보다 인기 있는 유튜브 같은 방법으로 퍼뜨립니다. 생산자와 소비자 간의 경계가 거의 사라져버렸습니다. 그 결과 이제는 책들을 거의 읽지 않고 장시간을 앉아서 누군가의 사상을 들어주는, 여러분이 지금 하고 있는 이런 종류의 수고는 하지 않으려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공부를 하고 지식의 총량을 축적하여 그것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발휘하던 시대는 미국이나 한국이나 지나갔습니다. 여러분은 더 말할 것도 없고 이제 그런 시대는 아닌 것입니다. 그것을 자신의 방식으로 소화하고 살아냄으로써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자신의 독특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하나가 흠이 없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행복한 삶을 살게 됩니다.
목회의 궁극적 목적
긴 이야기가 있지만 마지막으로 오늘 강의의 결론을 내리면 그렇게 함으로써 궁극적으로 가고자 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
A.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함
앞의 수식 어구를 빼고 나면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입니다. 누가 말입니까? “너희가”입니다. “너희가 점점 더 사랑이 풍성해져서 도키마조 하는 삶을 살고, 진실한 삶을 살고 허물없이 살게 되어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하기를 원하노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독사”라고 하는 “영광”은 성경에서 신학적으로 세 개의 카테고리로 사용됩니다. 첫째는 본질적인 영광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동의어입니다. 둘째는 발산적 영광입니다. 이는 장소와 관련됩니다. 소위 여러분이 구약에서 기억하는 “쉐키나”입니다. 하나님의 장소적인 임재, 그 안에서 하나님이 현존하시다고 하는 것을 다른 장소와는 비교되지 않는 방식으로 발산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발산적 영광”이라고 부릅니다. 셋째는 효과적인 영광입니다. Effective glory라고 하는데 청교도들도 흔히 분류했던 방식입니다. 세 가지로 분류한 사람은 거의 없고 저는 세 가지로 분류해야 한다고 봅니다. 여기서 말하는 “Glory”는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영광입니다. 내가 아니었더라면 저 사람이 생각하기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과 자기를 찾는 이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결코 몰랐을 텐데 나 때문에 알게 되었을 때,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됩니다. 이것은 “인정”입니다. 하나님의 존재와 도덕적인 성품을 인정하게 만드는 것이고,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며, 그런 현상이 일어난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이름이 영화롭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의미를 이렇게 해석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아직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서로를 모든 인류가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처럼 생각하는 완벽한 사랑의 사회도 임하지 않았습니다. 이 사회는 이미 임한 하나님의 나라, 이미 도입된 그런 종류의 아가페의 사랑과 그렇지 않은 것이 혼재하는 속에 살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 나라의 혼재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사람들이 당신이 살아계심을 보기를 원하십니다. 성도들의 존재와 도덕적인 삶, 특별히 그들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사상을 통해서 하나님이 과연 살아 계시구나 생각하게 되는 것, 그리고 성도들처럼 생각하고 성도들의 관점을 가지고 세상을 사는 것이 참으로 행복한 삶임을 인정하게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관심사는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알아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렇게 안타까워했던 사도바울의 탄식은 그들이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와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야말로 인간으로 하여금 참 하나님과 세계와 자기의 존재가 무엇인지를 알게 해서 그 참된 지식으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인정하게 될 때 거기서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고, 인간 존재는 거기서 가장 아름답게 빛나게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과 인간의 행복은 결코 모순되지 않고, 모순되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벗어난 행복의 욕망을 가지고 있는 데서 생겨나는 갈등입니다.
그렇게 정리하고 나면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기를 원하노라”는 말씀은 그렇게 하나님이 알려지고 사람들이 그분을 찬송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시편 67편에 나오는 문맥과 아주 유사합니다. 시편 67편의 찬송시를 보면 “여호와는 주의 얼굴을 우리에게 비추사 그 얼굴 빛을 우리에게 비추시며” 그리고 “주의 도를 만방에 알리시고 만민이 주를 찬송하게 하소서”라고 하면서 세 가지 카테고리로 계속 확산되게 나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의 비전입니다. 한 사람을 변화시키고, 그것이 교회를 변화시키고, 교회를 넘어서서 이 모든 세계를 그렇게 하나님을 인정하는 지식으로 넘쳐나게 해서 모든 찬송과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게 하는 것입니다. 구약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비전을 위한 짧은 기도 안에 이것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깊은 신학적이 배경들이 이 안에 깔려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 부분은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심판하시고 그리스도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날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B. 의의 열매를 가득하게 함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고”는 어떻게 해석해야 하겠습니까? 여기서 제일 먼저 발견하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 떨어질 수 없는 운명적인 연합을 보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그리스도와의 연합”(Unio cum Christo)에 관한 사상입니다. 간략하게 설명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삼중적인 방식으로 인류와 연합되어 있습니다. 우선 가장 광범위한 관점에서의 연합은 그리스도 예수의 인성을 모든 인류가 공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종교개혁자들과 개혁신학자들에게는 기본적으로 인간의 존엄성의 근거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다는 추상적인 말뿐이 아니라 실제로 그리스도 예수의 인성과 인간의 본성이 연합되어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칭의를 통해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것입니다. 머리이신 그리스도에게 우리가 접붙여짐으로써 그분의 몸의 일부가 되어 그분과 연합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떨어져 나가는 일이 없습니다. 이렇게 접붙여진 사람이 세 번째로 성화와 영화를 통해서 점점 더 온전해져 감으로써 실제적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효과가 나타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세상은 잠시 지나가는 것들이고 우리가 돌아가야 할 그리스도 때문에 가슴 벅찬 사람이 되자!” 이것을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복음주의 신학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실제로 오늘 주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시련과 고난이 와도 두렵지 않고 기쁨의 삶을 사는 사람은 제한적인 사람만이 그런 삶을 삽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음으로 순종하며 자기 죄를 죽이고 성령 안에서 그 충만함을 누리면서 사는 사람만이 그것을 이기면서 살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성화의 중요성이 대두됩니다. 날마다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자기를 버리고 그리스도를 덧입어서 새 사람이 되어가는 만큼 그 연합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 연합을 느끼고 마지막까지 그것이 해결되지 않으니까 마지막 날에 영화될 때 모든 것을 끝내시고 우리를 그리스도와의 완전한 연합의 상태로 데려가십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와의 삼중적인 연합의 상태입니다. 모든 인류는 첫 번째 의미에서의 연합된 상태가 있기 때문에, 불신자, 혹은 이교도라고 할지라도 우리는 그 사람이 인간으로서 존엄한 존재라는 사실을 깊이 인정해야 합니다. 그것을 훼손하면 안 됩니다.
신학을 공부하면서 제일 먼저 배워야 할 것은 나와 다른 사람을 어떻게 사랑하고 공감하면서 살 수 있는가를 먼저 배워야 합니다. 그것을 배우면서 자기의 의견이 없는 사람이 되어서도 안 되고 자기의 견해를 또렷하게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들이 자신의 견해로 돌아오면 말할 수 없이 기뻐하면서도 다른 것은 다른 것으로 내버려 두는 가운데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어떤 견해를 취하든지 간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서로를 사랑하는 일에 지장이 없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진리라는 이름 하나로 사람들을 수없이 찢고 가르는 분열주의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배우는 것입니다. 나와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보다 훨씬 더 신실하게, 그리고 신뢰할만하게, 안전하게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믿는 신앙의 가치를 온몸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을 여기에서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라고 한 것입니다.
“열매”는 인격과 삶을 통해서 나타는 결과물입니다. 당연히 그 열매에는 수혜자들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은혜를 많이 받으면 교인들이 덕을 보고 아내가 은혜를 많이 받으면 남편이 덕을 봅니다. 좀 늦게까지 공부하고 들어가도 잔소리를 하지 않습니다. 아내만 그런 것이 아니라 남편도 마찬가지입니다. 남편이 은혜를 많이 받으면 아내가 좀 짜증을 내도 “유학생활이 얼마나 힘들면 저럴까, 마음이 황폐해져 있는데 그게 다 나 때문이지…” 하며 가엾게 여기면 아내가 덕을 봅니다. 이것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또 다른 영역이기 때문에 오늘 설명하지는 않겠습니다. 이것도 굉장히 신비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서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고 그것이 주님을 사랑함으로써 의로운 삶을 살게 만드는 실제적인 인격과 삶의 특성들입니다.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을 보면서 하나님께 찬송과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이것은 이미 초대교회 때부터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복음을 전하던 방식이었습니다.
이것으로 나의 강의를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질의와 응답>
질문 1) 한국적인 신학 발전에 대한 견해를 듣고 싶습니다.
답변 1) 네, 이해했습니다. 우선 가장 커다란 문제는 여기서 공부하고 돌아간 분들이 더 이상 공부를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의 경우, 여기에서 쓴 박사 논문이 학자로서의 인생의 정점이 됩니다. 그것은 미국 사람들이 볼 때는 이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미국의 수많은 학자들을 만나봤지만 자기의 박사논문을 읽어보라고 하는 사람을 한 사람도 보지 못했습니다. 그것을 시작으로 하여 계속 발전했기 때문에 예전의 박사논문을 읽어보라는 것은 쑥스러운 이야기인 것입니다. 이미 5-6년의 세월이 흐르고 현재의 견해는 그 박사논문을 훨씬 뛰어넘을 수도 있고 새로운 견해를 가졌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의 유학생들은 학위를 마친 후에 계속 공부를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정적인 측면으로 이야기하자면, 한국교회 혹은 한국의 신학교가 공부를 할 수 있는 구조가 되지 못합니다. 제가 서른네 살에 교수가 되었는데 전임강사였습니다. 일주일 총 강의 시간이 24시간이었습니다. 요즘은 전임강사가 없어졌습니다. 아침부터 밤까지 왔다갔다 하면서 50분 수업을 24시간을 해야 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그렇게 해서 무슨 시간이 나겠습니까? 그런 점에서 한국에서 그런 환경을 제공해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학교에 들어가면 공부할 여건이 되지 못하고 학교를 들어가지 못하면 생활이 불안정해서 공부할 여건이 안 됩니다. 더 큰 문제는 그렇게 공부할 수 있는 자료들을 갖추고 있는 곳이 한국에는 잘 없습니다. 공부하기 위해서는 수시로 여기로 들어와야 하는데 쉬운 것이 아닙니다. 물론 인터넷을 통해서 본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한국으로 간다는 것은 보통 노력을 하지 않고서는 학교에서 소외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안 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여기서는 자신이 계속 발전하려고 연구를 하면 그것을 들어주는 학생이 있습니다. 박사 과정에 들어오는 학생들은 들어줄 것입니다. 석사과정은 그렇지 않다고 해도 말입니다. 석사는 제자라고 생각하지 않고 박사부터 제자로 생각한다고 합니다. 제자들이 들어줍니다. 그런데 한국의 경우는 그 연구물들을 들어줄 학생이 없습니다. 저도 박사과정을 가르쳐봤는데 박사과정 속에 연구물들을 풀어놓아도 그것을 듣는 학생들이 그렇게 학문에 헌신된 사람들이 아니고 이해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저만 그런가 싶었지만 영문과 교수부터 시작해서 다른 과에 있는 교수들도 마찬가지라고 했습니다. 이공계 계통은 잘 모르겠습니다. 적어도 인문학 계통에 있는 교수는 자기도 공부를 하면서 이것을 왜 연구하는지 모르겠다고 합니다. 아무리 해도 들어주는 사람이 없는 환경입니다. 이런 것들도 한국이 불리한 조건이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조만간 그런 것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한국적인 신학이 없다고 하는 점에 대해서는, 저는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한국적인 신학의 벌전을 미국사람의 방식처럼 글로 써내고 논쟁하고 어떤 학파를 형성하는 것에 있다고 본다면 없다고 말하는 것이 거의 맞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공부하고 간 교수들은 신학교 현장에서 씨름하면서 그 학생들을 어떻게든 주님의 사람으로 길러내기 위해서 학생들과 함께 노력합니다. 저 같은 경우에는 학생들과 함께 전도도 다니고 산 기도도 드리고, 철야기도도 하였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 자체가 일종의 신학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여전히 우리는 문화수입국의 위치에 있기 때문에 좀처럼 한국의 독창적인 것을 기대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고, 만약 그렇게 한다고 하면 우리와는 사상이 많이 다른 부류의 신학이 나오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하지만 저는 더 바라지 않습니다. 우선 여기서 배운 것들을 잘 소화해서 그것을 학생들에게 제대로 가르쳐서 그들이 보다 나은 목회를 할 수 있고 설교를 할 수 있도록 돕는 것만 해도 하나님이 칭찬하실만한 일이 아니겠는가 생각을 합니다.
앞으로 본격적인 학자의 세계에 도전해서 끊임없이 새로운 논문을 써내면서 시도하고 그들과 어깨를 마주하고 주류의 담론에 참여하는 것도 소중한 일입니다. 그리고 그런 교수들이 한국에 전혀 없는 것도 아닙니다. 제가 아는 교수들은 1년에 몇 번씩 외국에 가서 발표하고 계속 새롭게 논문을 쓰기도 합니다. 그러나 미국 사회에서 이야기하는 이런 학자, 한번 모시고 오면 트리니티가 들썩들썩할 정도의 거장이 나오지 않는 것은 사실입니다. 다음 세대에 여러분이 하십시오. 그러면 될 것입니다.
질문 2) 목사님이 본받고 싶은 스승이 있습니까? 신학자이자 설교자로서 자신이 쌓아온 지식의 총량을 어떻게 성도들에게 전달할 수 있을까요? 마지막으로 미래의 한국교회에 대한 목사님의 견해를 듣고 싶습니다.
답변 2) 마지막 질문부터 답을 드리겠습니다. 우선 오늘 여러분에게 나누어드린 이 책들은 열린교회의 공과책이었습니다. <죄와 은혜의 지배>입니다. 2005년도에 나왔는데 공과책이었습니다. 저는 이렇게 봅니다. 미국은 모르겠지만 한국을 기준으로 본다면 향후 20년 후의 교세는 지금보다 훨씬 더 줄어들 것입니다. 심하면 절반 정도로 주일에 참석하는 그리스도인의 수가 줄어든다고 봅니다. 알리스터 맥그래스 박사는 이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도록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는 교파를 순복음, 즉 오순절파로 봅니다. 그것에 대해서 질문을 했더니 좀 긴 이야기를 하셨는데 대학자가 그렇게 본다는 것은 특이했습니다.
저는 조금 생각이 다릅니다. 그분은 세계 전체의 판도를 보고 말씀하셨습니다. 실제로 무슬림이 아프리카 쪽으로 전파될 때에 장로교나 복음주의는 별로 의미가 없고 순복음 교회가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특히 아프리카 사람들과는 너무 잘 맞아서 밤새도록 춤추고 노래하고 방언 기도를 합니다. 그것이 선교적으로 반드시 좋은 결과를 가져올 것인지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그분도 그렇게 보고 저도 그렇게 봅니다. 그런데 분명한 사실 하나는, 20년 후의 한국을 기준으로 볼 때는 살아남는 교회는 큰 대형교회들, 그리고 소형교회들이 남을 것으로 봅니다. 중형교회들이 거의 사라질 것 같습니다. 남아있는 교회들은 이 두 종류입니다. 하나는 교인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고 거기에 교회를 철저히 적응시킨 교회입니다. 빌 하이벨스가 목회하던 윌로우 크릭 교회가 좀 잠잠해지고 나니 릭워렌의 새들백교회가 나타났고, 떠들썩했던 그 교회가 사람들의 기억에 잊히고 나니 지금 한창 뜨고 있는 조엘 오스틴의 교회가 남아있는데 그의 설교는 사람을 거의 홀리는 수준의 설교입니다. 그런 류의 교회가 20년 후에도 한국에는 살아남을 것이고 번창할 것이라고 봅니다. 또 하나는 역으로 지성적인 기원을 강조하고 세계 전체를 볼 수 있는 관점을 심어줄 수 있는 웅장한 설교들이 이루어지는 교회가 번성할 것이라고 봅니다. 바람직한 교회입니다. 존 파이퍼 목사의 교회나 존 맥아더 목사의 교회, 신학적인 입장은 각기 다르지만 그런 유장한 종류의 설교를 하는 교회들이 웅장하게 커가고 있습니다. 영국도 다 죽어가지만 마찬가지로 그런 식으로 설교하는 교회들이 성장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그런 요구들은 분명히 생겨나게 될 것이라고 봅니다. 앞서 말씀드린 열린교회 공과책이었던 <죄와 은혜의 지배>도 그런 관점에서 선포된 말씀들을 정리한 책이었습니다. 대단히 복잡하고 논리적인 내용이지만 성도들의 신앙에 커다란 도움을 주었던 책이었습니다.
두 번째 질문에 대해 답하자면 이것입니다. 이에 대한 바람직한 가르침을 이미 17세기 개혁파 정통주의자들이 우리에게 주었습니다. 16세기의 칼빈도 따랐던 방식입니다. 심지어 마르틴 루터도 따랐던 방식입니다. 설교나 강연을 할 때 대중적으로 하는 방식과 전문적으로 하는 방식입니다. 예를 들어 존 오웬이 했던 그 많은 논쟁들이나 논쟁의 과정에서 쓴 논문들과 글들은 신학적이고 전문적인 방식으로 수행하는 것이고, 그것은 조직적이고 이론적이고 논리적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대중들에게 전해지는 방식은 논리적인 것들로 이루어지기보다는 훨씬 더 웅변적이고 감화력이 있는 방식으로 전개됩니다. 이해하실 것입니다. 논문발표와 웅변발표는 다릅니다. 훨씬 더 웅변적이고 대중적이고 감화력 있고 교화적인 방식으로 수행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어떤 자리에 섰을 때, 이 링이 어떤 링인지를 보아야 합니다. 전투장이 어디인지, 백병전이 일어나고 있는 곳인지, 미사일전이 일어나고 있는 곳인지, 내가 지금 규칙을 가지고 상대선수와 싸워야 하는 복싱 링인지, 아니면 동네에서 패싸움하는 무대인지를 빨리 파악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말씀을 전할 때도 듣는 사람들이 누구인지에 따라 전하는 방식을 파악해야 합니다. 물론 이런 식의 강의를 저는 교인들에게도 하지만 설교시간에 이렇게 복잡하게 하지는 않습니다. 복잡하게 하면 누가 알아듣겠습니까? 그러나 설교를 다 듣고 나면 여러분이 강의를 들었던 것과 비슷한 결론에 이르게 할 것입니다. 답변을 조금만 더 추가하자면, 이 점에 대해서 빙하를 머리에 그리면 됩니다. 목회자 혹은 설교자의 지식이 설교를 통해서 나타나는 내용은 빙산의 윗부분이어야 합니다. 빙산의 열 배에 해당하는 부분이 그 아래 감춰져 있습니다. 죽을 때까지 공개석상에서 한 번도 이야기하지 않고 죽을 지식이 그 안에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저력입니다. 빙산이 어떤 것입니까? 요만한 얼음을 발견했다고 해서 보트를 타고 가서 밀면 밀릴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보트보다 더 큰 것이 물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어서 움직이지 않습니다. 설교자가 무엇을 말했는데 누가 여러 방면에서 여러 차례 공격을 해도 끄떡없이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방어력이 이 안에 있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마어마한 지식의 총량을 소화한 가운데 던지는 한 마디와, 막 떠오른 것이 전부인 풍선 같은 설교자가 하는 말은 무게 자체가 다릅니다. 빙산같은 지식을 소유한 설교자는 우리에게 보편적으로 알려진 명제에 대해서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라고 하고 왜 그런지에 대해서는 별로 설명하지 않아도 왠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그 말에 엄청난 무게가 있어서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을 모두 재고해보도록 하는 어떤 힘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지식의 아우라입니다. 빙산 같은 지식을 가지고 이는 사람들만이 풍길 수 있는 독특한 아우라입니다. 어디를 공격해도 좀처럼 넘어지지 않는 그것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풍선은 떠오른 것이 전부입니다. 그러나 얼음은 떠오른 것이 10분의 1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공부해야 합니다. 보통의 얼음과 빙하와 다른 것을 아십니까? 빙하는 10분의 1보다 더 작은 부분이 올라옵니다. 빙하에는 기포가 없기 때문에 얼음이 더 무겁습니다. 12분의 1쯤 올라와 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집채만 한 빙산을 만나면 그 밑에는 작은 동산만 한 것이 있는 것입니다.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이렇습니다. 제 스승을 궁금해 하지 마시고 본인 자신에게 물어보십시오. “내 스승은 누구인가?” 저는 멘토를 나눌 때 총체적인 멘토(total mentor)와 부분적인 멘토(partial mentor)로 나눕니다. 부분적인 멘토는 많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정직성에 있어서 나에게 멘토가 되어주셨던 분, 그렇다고 해서 정직성 하나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볼 게 없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너무나 훌륭한 분들이 많았습니다. 총신에서 만나 김희보 교수님이나 이상근 교수님이십니다. 너무너무 훌륭한 분들을 하나님께서 가까이에서 만나게 해주시고 교제를 갖게 해 주셨습니다. 그렇지만 아무에게나 멘토라고 하는 것은 조심해야할 것 같습니다. 아이디어를 조금 얻고 나서 그 사람이 자신의 멘토라고 하는 것은 예쁜 여자들을 볼 때마다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말을 아껴야 합니다. 적어도 멘토라고 할 때는 일생을 대신할 수 있는 자신과의 약속이 있어야 합니다. 함부로 말하면 안 됩니다.
총체적 멘토는 신학과 목회, 모든 사역 전체에 걸쳐서 멘토가 되어 줄 수 있는 분입니다. 살아계신 분으로서는 저에게 그런 분은 없습니다. 그러나 제가 존경하는 분들은 많이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네 분을 깊이 만났는데 칼빈, 존 오웬,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 조나단 에드워즈입니다. 우선 토탈 멘토를 삼는 데 있어서 기본은 그의 모든 저작을 읽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읽는 것입니다. 그것이 토탈 멘토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입니다. 200권을 썼는데 1권 50페이지까지 읽고 그 사람이 멘토라고 하면서 돌아다니는 사람은 신뢰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우선 다 읽어봐야 합니다. 그런 멘토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너무너무 그 사람처럼 되고 싶고, 그 사람처럼 살고 싶고, 천국에 가서도 만나고 싶은 그런 멘토를 가진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신학의 세계를 볼 것이요.’라고 조언해주고 싶습니다. 아주 좋은 질문이었습니다.
질문 3) 양들을 사랑하는 일에 제한이 있습니까?
답변 3) 본질적인 좋은 질문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어떤 경우에도 사람과 죄를 구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죄를 미워하지만 사람은 사랑해야 합니다. 그 사람이 그 죄와 도저히 떨어지지 않는데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요? 그것이 가능한 정도가 영성의 깊이 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아버지에게 딸이 있습니다. 그 딸이 나가서 온갖 나쁜 짓을 다 합니다. 아버지의 마음이 너무 아프고 상처가 됩니다. 그렇게 설득하고 타일렀는데 그 죄와 결별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아버지의 명예에 커다란 노를 입히기까지 했습니다. 그래도 아버지는 그 딸을 사랑합니다. 죄를 사랑하지는 않습니다. 딸을 사랑하는 것만큼 죄를 점점 더 미워할 것입니다. 그래도 딸을 사랑합니다. 그러지 않는다면 아버지가 아닙니다. 어떤 경우에도 그 딸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자신들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까? 좋지 않은 아비가 있어서 자기 딸에게 그렇게 하지 못하고, “네가 그럴 바에야 나가서 죽든지 살든지 의절하자!” 하고 호적을 파서 던져버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아! 내가 이런 죄를 지었어. 오늘 가서 목메어 죽어야지.” 이런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내 편을 들고 어떻게 하든지 거기서 벗어나서 나에게 다시 한번 삶의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무한히, 일흔 번에 일곱 번이라도 나를 용서하면서 어떻게든지 살려고 합니다. 우리 자신에게는 그렇게 합니다. 나 자신에게는 되는데 왜 다른 사람에게 대해서는 안 됩니까? 사랑이 없어서 안 되는 것입니다. 사랑이 부족해서 안 되는 것입니다.
(찬양)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목사들이 부를 노래는 아닙니다. 목사들이 목사들에게 불러줘야 할 노래가 아닙니다. 사랑에 관한 한 위대한 명언을 말해주자면 이런 것입니다. 진짜 위대한 사랑은 자신은 이 세상의 누구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지만 자신은 아무에게도 사랑받지 않아도 괜찮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의 완성입니다. 다시 한번 하겠습니다. ‘자신은 누구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고 자신은 아무에게도 사랑받지 않아도 괜찮은 사람이 되는 것’ 그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랑을 받음으로써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목회는 내가 해봤습니다. 열린교회만 26년을 했고 다른 것까지 합하면 37년의 세월을 목회했는데 해본 사람으로서 말하자면, 성도들의 인정과 사랑, 존경을 한 몸에 받으면서 목회하는 것을 너무 꿈꾸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 세상은 별로 없습니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그 정도의 사람이라면 그 교회에 있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런 행복한 꿈을 꾸지 말고 “변함없이 신실하신 하나님 때문에 다른 것은 아무래도 괜찮습니다.”라는 꿈을 꾸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오죽했으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시면서, “양을 이리 가운데 보내는 것 같구나.” 하셨겠습니까? 그러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변화시키는 보람 속에서 살기를 바랍니다.
질문 4) 세상은 허무하지만 그 허무 가운데 살면서 어떻게 하면 허무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리고 아름다움이 무엇입니까?
답변 4)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비결은 이것입니다. 모든 허무해 보이는 것들의 의미를 찾으라는 말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거의 행복에 미친 행복론자들이었습니다. 유다이모니스트가 이야기하는 행복보다 낮은 차원의 행복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희랍 철학자들이 유다이모니스트라고 이야기했을 때는 거기에는 정신적이고 영적인 측면이 있었습니다. 지금의 행복주의자들은 훨씬 차원이 낮습니다. 그런 것들이 엄청난 지지를 얻으면서 행복론자들의 성공시대를 열어갔습니다. 지금도 우리가 행복을 모토로 세우면서 뭔가 새로운 목회 사상들을 만들어 가는데 사실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인간은 행복을 추구해서는 행복해질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이 그렇게 만만한 세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세상은 우리의 맘먹은 대로 되지 않고, 우리가 바라는 좋은 일은 자꾸 인색하게 일어나고, 우리가 바라지 않는 나쁜 일은 아주 후하게 발생합니다. 그래서 우리 앞에 끊임없는 고난이 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요즘 유튜브에 뛰어들어서 활동하고 있는 논쟁가가 있는데 조던 피터슨(Jordan B. Peterson)이라고 합니다. 그분이 그리스도인이 아닌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어디에서도 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주 폭넓게 성경을 인용하면서 논쟁을 하고 있으며, 엄청나게 폭발적 지지를 얻고 있는 토론토 신학대학의 교수입니다. 사이트에 들어가서 한 번 보십시오. 그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행복해질 수 있다는 행복주의로 사람을 유혹하지 말라. 그것은 우리의 현실이 아니다. 결국 의미로 돌아가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의미를 추구하며 살 것인가? 그 의미를 가지고 사는 인생이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는 인생이다.”라고 이야기하는데 중요한 것은 행복이라기보다는 의미라는 것입니다. 그 의미를 부여하며 살 때 우리가 현실을 극복하며 살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이것을 철학자로서 한 견해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온 몸으로 고민을 하면서 청소년 시절과 대학시절을 살아내면서 심리학과 철학 등으로 고민을 하다가 마지막에 이런 결론에 도달한 것입니다. 얼핏 보면 기독교를 엄청 옹호해주는 선구자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듯 보입니다. 도킨슨도 다 박살을 낸 사람인데 그 사람의 논변은 대단합니다. 토론토대학은 워낙 기독교 철학으로 유명한 대학이기도 합니다. 어쨌든 저는 그것이 성경적인 견해라고 봅니다.
성경은 우리가 세상에 속한 행복을 추구해야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에 사용되는 행복이라는 단어는 “베라카”와 “아쉐르”입니다. 베라카는 물질로부터 육체, 정신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개념의 복입니다. 베라카는 이방인도 받을 수 있는 복입니다. 대표적인 것인 창세기 39장에 나오는 보디발의 온 집이 히브리 노예 요셉으로 말미암아 복을 얻었다고 할 때 사용되었던 복입니다. 그에 비해서 “아쉐르”의 복이 있습니다. 이것은 시편 1편에 나오는 복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이라고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이런 이런 사람의 복이여”라고 나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언약관계 안에 있는 백성들에게 주시는 영적인 복입니다. 이것을 희랍어로 번역한 것이 마태복음 5장 3절에 나오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Μακάριοι οἱ πτωχοὶ)에서 나오는 “마까리오스”입니다. “마까리오스”는 “베라카”보다는 “아쉐르”의 전통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야기하는 행복의 개념은 다분히 “베라카”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의 첫 장을 열면서 “아쉐르”의 복을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행복에 대한 개념이 구약에서 신약을 넘어오면서 그 그림을 획일화시키는 것이 어떤 사람에게는 못마땅할 수도 있지만 이렇게 봐야 합니다. 구약에서는 베라카의 외연에서 아쉐르의 내포로 돌아오는 것이라면 신약에서는 아쉐르의 내포에서 베라카의 외연으로 뻗어나가는 것입니다. 결국 구약에서의 복과 관련된 계시의 개념과 신약에서의 계시의 개념이 현저하게 다른 것입니다. 진짜 사도가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었던 것은 신령한 복이었습니다. 그것이 아쉐르의 복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행복을 이야기할 때, 성경이 이야기하는 진정한 인간의 행복은 하나님과의 교제에 있습니다. 그의 영혼에 주시는 복입니다. 청교도들은 복을 영적인 복과 일반 섭리의 복으로 구분했습니다. 일반 섭리의 복은 하나님이 간접적으로 주시는 것입니다. 물질의 질서대로 움직여서 주시는 것입니다. 영적인 복은 하나님이 직접 터치하시는 것입니다. 당연히 이 복의 우월성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마치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이”(시133:3) 그렇게 영적인 복으로부터 외연으로 뻗어나가는 복의 개념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후자의 개념을 가지고 전자를 지배하려고 할 때 끊임없는 갈등이 생겨나고 어떤 식으로든 우리의 신학은 세속주의적으로 바꾸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렇게 하지 말고 오히려 신앙이 어렸을 때부터 의미를 찾아내는 훈련을 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고난이 내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지금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이 일들은 무엇 때문인가? 내가 여기서 핍박을 당하고 선교지에서 쫓겨나는 것에는 하나님의 어떤 의미가 있는가? 이런 것을 끊임없이 묻고 그것을 발견하는 기쁨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변하고 내 맘대로 안 되도 그 의미를 부여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을 즐거워하면서 사는 그것이 인간의 해결책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마지막 두 번째 질문, 아름다움에 대해서 답을 드립니다. 아름다움이라는 그 자체는 직관입니다. 논리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어! 저 여자 예쁘다!” 이것이 논리로 설명이 됩니까? 웃기는 것은 같이 간 일곱 명의 친구들이 모두 예쁘다고 한다면 이해가 되는데 다섯 명은 아니라고 하는데 이 사람 혼자 예쁘다고 이야기합니다.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자체가 이성의 판단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오성에 직관해서 보는 것입니다. “예쁜가 안 예쁜가? 내가 좋아할까 말까? 한번 다빈치의 비율로 재어보자.” 하면서 줄자를 가져와서 팔의 길이부터 머리통의 길이까지 재어보고 “아, 이 여자는 예쁘구나” 하고 판단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으며 그것을 허락할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렇게 비율이 뛰어난 여자가 자기처럼 비율이 안 맞는 남자를 좋아하겠습니까? 다 덧없는 것이고 아름다움은 직관입니다. 그 직관이 빗나갈 수도 있는데 그것은 주관성의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망가지는 것은 아름답지 않은 것을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도덕적 선택을 하는 것입니다. 그게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악인의 삶입니다. 선한 사람의 삶은 눈에 보이는 아름다운 것들이 사라지는 아름다움이고 잠깐 있는 것이라고 인식하면서 영원한 아름다움이 무엇인가, 거기에 나의 주관적인 아름다움의 느낌을 종속시키는 것입니다. 제가 잘 드는 예입니다. 캐나다의 어떤 목사가 박사과정을 하고 있는데 컴퓨터에 써 붙여 놓은 것을 보았습니다. “게임은 하지 말자. 절대로 하지 말자.” 아이를 둘씩이나 가지고 있는 아버지로서, 박사과정을 하고 있는데도 그 게임이 너무 재밌는 것입니다. 그게 진짜로 아름다워서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한 번 심취하니까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논문 쓰는 것보다 그것을 훨씬 더 좋아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을 바로 잡아주는 것이 진리입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진리를 통해서 내가 아름답다고 생각하던 잘못된 것이 사실은 추한 것이라는 것을 진리의 빛으로 보여주고, 진리의 빛을 가지고 내가 아직 아름답다고 생각하지 않던 것이 사실은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예를 들고 마치겠습니다. 제가 여러분을 데리고 스테이크집에 갔습니다. 보기에는 새롭지도 않고 으리으리한 식당도 아닙니다. 그 집에 앉자마자 내가 설명을 합니다. “시카고에서 제일 처음 생긴 스테이크집인데 그때 처음 생겼을 때 이 식당의 주인이 사실은 노예였었고 그 사람이 어떻게 이 식당을 하게 되었고 이 스테이크를 개발하기 위해서 얼마나 헌신적으로 노력을 하였으며 그 전통이 남아서 지금도 소고기는 주인이 직접 사러 간다고 하더라. 여기에 쓰는 불판이 8천만 원짜리라고 하더라.” 이렇게 설명을 하면 스테이크가 나왔을 때 왠지 성스러운 느낌이 들고 함부로 칼질하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지식을 주고 첨가하고 설명을 함으로써 아무것도 아닌 그 스테이크를 아주 감격스럽게 만들고 올바른 평가를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그렇게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신학 책을 읽을 때도 여기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운 어떤 것이 있는지를 찾아보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강의를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