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교리반
3과
A. 성경
지난 시간에 우리들이 계시에 대해서 공부했습니다. 계시는 하나님이 감추어져 있던 것을 펼쳐보여주는 것을 계시라고 배웠습니다. 계시에는 일반과 특별이 있으며, 일반 계시는 접근하는 면에 있어서 모든 사람들에게 일반적으로 접근을 허용한다는 점에서, 특별 계시는 국한 된 사람들에 의해서 접근을 허용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고 설명을 드렸습니다. 일반 계시는 일반적인 인간의 경험, 즉 역사, 인간의 정신과 마음의 구조, 자연 만물들을 매개체로 해서 우리에게 전해지지만, 특별 계시는 아주 특별한 것들, 즉 이적, 신현, 기적이나 하나님의 직접적인 말씀 전달등으로 특별 계시가 주어진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오늘 성서(성경)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전에 이런 문제를 다루어야 할 것입니다. 일반 계시 혹은 자연 계시와 특별 계시 혹은 초자연 계시가 있는데 일반 계시를 통해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 인간의 선악의 기준등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알려주지만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지식까지는 전달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결국 특별 계시가 없으면 인간은 자신이 누구인지 정확히 알 수 없고, 더욱이 사랑의 하나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에 이르게 되는 구원의 비밀 같은 것은 더더욱 알 수 없는 처지가 되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그렇다면 일반 계시는 어떤 종류의 효용과 가치가 있겠습니까, 지난 시간에 배운 바와 같이 선악의 기준을 알게 하고 양심 같은 것들을 작동시켜서 사회의 일반적인 질서들을 유지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효용성의 한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몰랐다고, 선악의 기준이 무엇인지 모른다고, 변명하기에는 너무나 분명해서 핑계할 수 없으리만치 명료하고, 그러나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얻는 다는 것 등은 너무나 희미한 것이 일반 계시입니다.
특별 계시는 결국 인간이 타락한 다음에 특별 계시와 일반 계시의 구별이 생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타락으로 말미암아서 주관적으로 하나님을 자연세계를 통해 올바로 알 수 없으리만치 부패하게 되었고, 자연의 모든 사물들도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서 원래의 풍부한 하나님에 관한 증거를 전해주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이중적인 제약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방법으로 인간이 누구이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어떻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는지를 가르쳐주어야 할 필요가 있게 되었는데 그것이 특별 계시의 필요성입니다. 특별 계시라고 할 때에는 반드시 구원 문제와 관련된다는 것을 먼저 염두해두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기적, 신현, 하나님의 말씀 전달, 이런 모든 것들은 시간과 특정한 공간 속에서 펼쳐졌다가 그 시간이 끝나거나 공간이 바뀌고 나면 없어지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구원의 길을 우리에게 알려주시기 위해서는 이것들을 기록으로 남기실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 기록은 문서적 기록일 수 있고, 구전을 통한 기록일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똑같은 것들이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주어져야지만 구원의 길을 알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특별 계시의 기록입니다. 특별 계시의 분량이 많다면 그 중에 기록된 것은 지극히 적은 부분입니다. “성경이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성경은 기록된 특별 계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라진 많은 것들 역시 특별 계시이기는 한데, 지금은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 지금은 성경 곧 특별 계시,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틀림없습니다. 이런 특별계시는 사도시대의 종결과 함께 끝났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인 책이 완결 되었다는 증언이 나옵니다. 계시록에는 그 말씀에 보태거나 감하면 그 자체가 하나님 앞에 커다란 죄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구원으로 된 특별 계시는 끝나고 기록으로 되었기 때문에 우리 시대에서부터는 사람이 특별 계시를 공부해야 합니다. 연구하는 추론을 통해서 또는 인간의 추론을 뛰어넘어 하나님이 비추어주시는 성령의 조명을 통해 이것은 이성으로 이것은 신앙으로 받아들임으로서 성경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올바로 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11:11)
그리고 이러한 모든 계시의 중심은 구원이기 때문에, 특별 계시에 대한 공부를 통해서 그리스도가 누구이신지를 알아가는 지식이 증대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성경은 우리의 신앙에 중심이 되니까 오늘날에는 특별한 다른 계시들은 다 사라지고 성경만 남게 된 것입니다. 결국 성경이 어떤 뜻인지를 믿고(신앙), 배우고(이성), 이것을 통해서 말씀의 뜻이 어떤 것인지를 발견하고 깨닫게 될 때, 모든 과정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우리들이 은혜를 받게 됩니다. 은혜와 지식이 합쳐짐으로서 우리의 영적 성장을 가져오게 됩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갈 지니라”(벧후 3:18) 라고 말했습니다.
B. 은혜와 진리
은혜는 하나님의 사랑이고, 지식은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영원한 지혜와 관련됩니다. 이것은 또 성령과 관련되고, 다시 또 진리와 관련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열린 교회에 와서 성장반을 통해 예배를 배울 때 ‘영과 진리 안에서’ 그리고 목양을 하는데 중요한 두 가지 요소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라고 말씀하시는 것 처럼, 교회에 와서 밝은 진리의 빛을 깨닫고 그 진리를 따라 살 수 있게 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감화가 주어질 때 우리는 풍성한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이런 것들을 전달해 주는 것이 목양의 원리입니다. 십자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의 올바른 도리인 복음을 알아야 하지만 이것만 가지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갈 수 없기에 십자가에 대한 현재적인 경험이 우리에 필요합니다. 이것을 가져 오는 것은 성령입니다. 이렇게 커다란 두 개의 기둥들이 함께 서 가는 것 입니다. 이것이 열린 교회에 있어서 중심이 되는 화두이고, 교회가 선택한 특징이 아니라, 성경 전 편에 흐르고 있는 우리 신앙의 본질적인 요소입니다.
이것이 바로 “스키엔티아”(Scientia - ‘지식’을 뜻하는 라틴어)로서 종교개혁자들이 이야기 했던 학문이고, “피에타스”(Pietas - ‘경건’을 뜻하는 라틴어) 경건입니다. 그래서 경건이 먼저 오고 그 뒤에 학문이 오는 것입니다. 최고의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어거스틴(Augustin)은 “Verus philosophus est amator Dei”(참된 철학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신국론)라고 말했고, 마틴 루터 역시 똑같은 말을 했습니다. ”당신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다면 이미 철학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도 이 교리를 여러분들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진리와 은혜를 심어주기 위함입니다. 진리와 은혜는 성경을 통해서만 나옵니다.
C. 영감과 성경의 무오성
오늘은 영감이라는 교리입니다. 영감이라는 단어는 헬라어 “데오프뉴스토스”(θεόπνευστος)이고, 라틴어로는 “데오프뉴스티에”(theopneustie), 즉 ‘데오’(theo) 하나님을 의미라고 ‘프뉴’(pneu)는 불어넣다 혹은 성령, 바람을 의미하는 명사로서 하나님이 후~하고 숨을 불어넣으셨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영감의 교리는 어떻게 사람이 기록한 문학이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 되었느냐는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인간이 있습니다. 인간이 연필을 사용해서 작품을 기록을 했습니다. 여기에는 기록이라는 것이 있고, 또 기록하기 이전의 사상이라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계신데 하나님께서 성경 기록자 에게 생각이나 사상을 주실 수 있습니다. 문제는 기록이 될 때는 언어의 형태로 기록이 되고, 사상과 기록 행위를 거쳐 언어를 통해서 저술의 형태로 남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완전한 계속성을 이루느냐는 것에 대해서는 누구도 ‘그렇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사상이라는 것은 무정형이고 형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비확정적인 비정형의 형태입니다. 있기는 있지만 가상자리가 분명하지 않은 형태입니다. 그런데 언어는 이러한 비확정적이고 비정형적인 것들을 처내버리고 틀을 만들어버립니다. 다시 말해 사상이 언어에도 영향을 미치지만 사상을 표현하기 위해서 언어를 채택하고 나면 사고가 언어에 의해 제약을 받는 것입니다.
사상이 ‘A’이고 ‘B’가 저술이라고 할 때, 이 둘이 일치한다고 ( 본다 안본다 )
비텐슈타인과 같은 언어철학자들은 인간의 언어를 그릇으로 봅니다. 인간의 언어가 그릇인데 그 그릇에 하나님의 사상과 사고를 담고, 담기는 즉시 그릇 자체가 때가 묻었기 때문에 이 자체가 오염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A’와 ‘B’사이에는 계속성이 없는 것이 됩니다. 똑같은 논리를 적용시키면, 하나님이 올바른 사상을 인간에게 주었다 할지라도 성경 기록자가 갖고 있는 죄성, 즉 인간은 죄인이고 불안전하기 때문에 의도를 잘못 기록할 수도 있고, 두 번째는 의도하지 않았지만 자신의 불안전성 때문에 단어의 자음과 모음의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의도된 또는 의도되지 않은 상태에서 잘못 기록할 수 있다. 언어가 그런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록을 한 것이 과연 사상 A를 전달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느냐 라고 묻는다면 인간의 일반적인 경험에 대해 우리는 회의적입니다. 여기서 회의적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일반적인 경험에 회의적이라는 의미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특별계시가 있는데, 이 특별계시를 만나서 사상이 되어서 다시 사상이 기록으로 남겨져 오는데 인간에게 있는 일반적인 원칙을 따르면 이 기록은 결함 있는 기록이 될 수 밖에 없다. 이러한 결함을 방지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조치가 없으면 인간의 논리적인 연결고리를 벗어날 수 없게 된다.
- 자유주의(liberalism) : 삶의 양식을 기준으로 하는 사상, 선악이나 진리의 기준이 없이 자유롭게 넘나드는 것입니다.
- 비평주의(criticism) :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비평하는 사상. 이렇게 비평하는 사람들을 비평주의자라고 부릅니다. 비평주의는 성경론에 관련된 문제이고, 자유주의는 삶의 양식에 관한 문제입니다. 사상적인 자유주의는 성서에 관한 비평적인 견해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므로 성경에 근거하지 않는 삶을 지향하므로 삶이 자유롭습니다.
이것들을 기록할때에 이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의도된 죄성이나 의도되지 않았지만 불안전정, 즉 무능 때문에 오류의 기록이 나올 가능성이 있으므로 성경을 기록하는 그 시점에 성경을 기록하는 사람을 하나님이 특별히 붙들어 주셔서 오류에 빠질 수 있는 영향으로부터 막아주셔서, 하나님이 전달하시고자 하는 사상이 그 사람 안에 있는 사상과 일치하고, 그 사람 안에 있는 사상이 기록과 일치 되도록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과 생각을 조명하시고 기억을 새롭게 하셔서 붙들어주시는 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영감이라고 부릅니다.
영감의 결과는 모든 논리적인 고리를 깨고 하나님이 전해주시고자 하시는 사상이 언어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정확하게 표현된 사상으로 남은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오류가 없는 책이 된 것이 영감의 결과입니다.
성경에 보면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딤후 3:16上 )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감동이라고 하는 것이 영감입니다. 하나님의 영적인 후 하고 불어 넣는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으로써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 3:16下 ). 그리고 그 성과는 사람으로 구원에 이르게 하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는 것입니다(딤후 3:17). 16절이 회심이라면 17절은 성화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이바지하는 것이 성경의 기능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영감의 양식을 범위에 따라서 영감의 방식에 따라서 각각 견해 차이가 나뉘어집니다.
D. 영감의 성질
1) 기계적 영감설 (Mechanical Inspiration)
이 학설은 성경의 저자인 인간으로 하여금 성서의 글 하나하나를 받아쓰게 하셨다는 학설입니다. 다른 말로 dictation theory 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즉 저자인 인간을 저술가의 손에 쥐어진 펜 처럼 하나님이 수동적으로 사용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학설에 의하면, 저자들의 마음이 그들 저서의 내용과 형식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각 저자의 독특한 특징들이 나타나는 것을 봅니다. 누가에는 병에 관한 이야기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누가의 직업이 의사였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에는 희랍의 철학적인 용어를 사용해서 기독교의 복음을 설명하려고 합니다. 이유는 요한의 마음속에 있었던 생각이 코스모폴리탄(cosmopolitan)적이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세상 사람 사람들을 향하여 전하고 싶어 했습니다. 마태복음은 유난히 구약의 윤래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왜냐하면 마태 자신이 정통적인 유대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자기의 편지를 유대인들이 읽고 예수님이 바로 하늘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기계적 영감설로 볼 수 없습니다.
2) 동력적 영감성 (Dynamic Inspiration)
이것은 하나하나가 다 정확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기보다는 사람 자신에게 천재성을 주어서 역동적으로 위임을 받아서 천재적으로 구원의 비밀에 대해서 서술해 나간 책이 성경이라고 보는 학설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성경적이라고 보지 않는 영감 이론입니다.
3) 유기적 영감설 (Organic Inspiration)
유기적 영감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영감을 하시는데 원래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결점과 단점 때문에 야기될 수 있는, 성경을 기록하는데 저해되는 것들만 막아주셨지 학식 높은 사람은 유려한 문장을 쓰도록 논리적인 사람은 논리적인 말로 성경을 기록하도록 농사짓는 사람은 농사짓는 이야기를. 고기 잡는 사람은 고기 잡는 이야기 많이 하도록 자신의 삶을 가지고 써내려가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도들 마다 각각의 특징들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흔히 용어를 사용할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감을 주셨다“라고 말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그것은 올바로 사용되는 것이 아니다. 세속 문학에서는 자기의 천재성이 발휘되거나 놀라운 생각을 가리켜서 영감이라고 사용합니다. 그래서 천재의 99%는 땀과 눈물이고 1%는 영감이라고 에디슨이 이야기 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이야기하는 영감과 신학에서 이야기 하는 영감은 틀린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세상에서 복지학을 전공하는 사람이 이야기 하는 구원과 신학을 이야기 하는 구원이 다르듯이 그것은 각각 학문의 분야에 따라서 적시한 용어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영감이라는 말은 성경을 기록하던 저자에만 한정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도의 삶 속에서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것 같아도 사실은 인간의 착각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고 할 때는 성령의 조명이(illumination)라고 부릅니다. 라틴어로 illuminatio 라고 합니다. illumination은 ‘비추다’ 라는 의미인데 캄캄하게 어두운데 빛을 비추어 주어서 그 빛이 없었더라면 발견 할 수 없었을 원래 있는 어느 사물을 발견하게 만들어 주는 작용을 가리켜 조명 즉 illumination 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런 용어를 신중하게 사용하는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E. 영감의 범위
1) 부분적 영감 (Partial Inspiration)
이것은 영감이 되었는데 성경의 기록이 전체적으로 영감되었다고 보지 않고, 부분적으로 어떤 사람은 신약만 영감 되었고 구약은 영감이 안되었다고 하기도 하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신약 중에서도 복음서만 영감되었다고 보는 사람도 있고, 또 다르게 산상수훈만 영감되었고 나머지는 다 인간적으로 해설한 것이기 때문에 권위가 떨어진다고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모두 각자 자신의 주장이고, 우리는 구약 성경 39권 신약 성경 27권 전체 66권 성경 전체가 하나님의 영감의 의해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써 두 가지 기능을 갖는데, 첫째 믿음과 두 번째 행위의 유일하고 완전한 기준이 됩니다. 무엇을 믿어야 할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가르쳐주는 유일하고도 충분한 기준이 됩니다.
2) 완전 영감 (Plenary Inspiration)
성경이 모두 하나님의 말씀으로 영감 되었다라고 보려면 언어와 사상이 분리되지 않기 때문에 한글자 한글자까지 모두 영감되었다고 봐야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한글자 한글자라고 하는 것은 우리말로 번역된 성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원래 있던 성경, 구약은 히브리어와 아람어로, 신약은 희랍어로 기록되었는데 기록된 것들 가운데 사본이 아니라, 맨 처음 성경 저자가 기록했던 원본(남아있지 않아요)은 글자 하나하나까지도 하나님께서 지도하셔서 정확하게 기록이 되어서 오류가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성경이 정확하게 언어와 사상이 일치하지 않는다면 어떤 진리를 확정할 때 성경에 호소하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게 됩니다.
F. 성경의 완전성
성경에 대한 로마 가톨릭과 개혁주의의 사상은 대조됩니다.
- 로마 가톨릭: 성경이 성경인 이유는 교회가 성경이라고 인정해주었기 때문에 성경이 되었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권위는 성경의 권위보다 훨씬 더 높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처음에 성경이라고 나온 것이 아니라 로마서는 바울이 로마 교회에 쓴 편지였고, 이사야서는 이사야 선지자가 기록한 책이었습니다. 또 히브리서는 히브리인들에게 쓴 편지였습니다. 그래서 결국에 그것이 교회의 인정을 받은 것이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섭리적인 경로였고, 이미 성경이 교회가 ‘이것은 성경 말씀이다’라고 인정하기 전에 교회 안에서 그 자체가 생명력을 가지고 많은 사람들에게 권위 있게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이미 일어나고 있는 현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이 성경의 정경화입니다. 성경 전체 즉 66권을 가리켜서 정경이라는 부릅니다. 이것을 영어로 ‘Canon‘이라고 합니다. Canon이라는 말은 히브리어 카네라는 말에서 옵니다. 카네는 갈대라는 의미입니다. 갈대를 가지고 자처럼 사용해서 기준으로 사용하며 유래된 말로 Canon 즉 정경이라고 말하게 됩니다.
“로마 가톨릭은 성경의 권위를 교회에 둔대 반해 개혁주의는 성경의 권위가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 자체에 있다고 본다. 그래서 교회가 성경을 인정해 주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의해서 교회가 형성된다고 본다. 개혁주의자들은 교회가 성서의 절대적 필요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로마 가톨릭의 주장에 반대하며, 하나님 백성의 마음 속에 역사하는 성령의 내적 조명이나 성령의 말씀을 성경보다 높이는 개혁파 일부 종파들(재침례파, 내적 광신비주의, 경건주의의 후기의 종파들)의 견해에도 반대하여, 은혜의 신적 방편으로서의 성경의 필요성을 주장한다.” 무슨 뜻이냐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실 때에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방법이 있는데 성경을 통해서 은혜를 주십니다. 성경을 풀어서 원래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깨닫는 속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사랑의 감동을 주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믿고 싶은 신앙심이 생겨나고 순종하고 싶은 의지가 생겨나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이것이 성경의 유익입니다.
“또 그들은 로마 가톨릭과는 반대로 성경의 명백성을 옹호한다.” 이것은 성경이 쉽지 않은 책인것은 분명하지만 그러나 기본적으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고 인간이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고 기본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것은 누구의 도움 없이 성경 자체만 마음을 다하여 읽어도 기본적인 구원의 도리는 깨달을 수 있는데 그것이 성경이 가지고 있는 명백성의 의미입니다.
“또 그들은 성경에는 인간이 이해하기에 너무 심오한 신비로운 진리들을 포함하고 있음을 부인하지 않으면서 구원에 필요한 지식은 성경 어디에서나 동일하게 분명하지 않지만 단순한 방법으로 전달 된 것이므로 구원의 열망하는 자라면 누구나 교회나 성직자의 해석에 의존치 않고 스스로 이 구원의 지식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그것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전문적인 훈련과 공부가 필요합니다.
“끝으로 개혁주의자들은 성경의 충족성을 옹호했으므로 로마 가톨릭의 유전(교회전통)의 필요성과 재침례파의 내적 광명의 필요성을 부인했다.”
2부 신론
G. 신론
- 신론의 구성
신론의 구성을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4과는 하나님의 본질, 5과는 하나님의 명칭, 6과는 하나님의 속성, 7과는 삼위일체가 나옵니다. 여기까지가 1부입니다. 즉, 하나님이 어떤 존재이신지가 나옵니다. 그 리고 8과부터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나옵니다. 8과는 작정, 9과는 창조, 10과는 섭리, 여기까지가 2부입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교리가 끝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관한 교리는 2부로 나뉘는데 첫째는 하나님의 존재에 관한 설명이고 둘째는 하나님의 일(사역)에 관한 설명입니다. 하나님의 일에 관한 설명은 작정, 창조, 섭리로 나뉘고, 작정은 하나님이 마음속에서 하신 것이고 시간 세계 속에서는 창조와 섭리가 이루어집니다. 더 앞으로 가게 되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대해서 나오게 되는데 하나님의 본질, 즉 하나님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답변입니다. 하나님의 존함은 우리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으로 계시 되었는가이고, 속성은 하나님이 어떤 성품을 가지신 분이신가로 되어있습니다. 정리하면, 1부에서는 하나님의 존재, 존함, 속성을 다루고, 2부에서는 하나님이 하신 일들인 작정, 창조, 섭리를 다룹니다.
1. 하나님에 관한 지식 (선천적 지식과 후천적 지식)
하나님에 관해서 알 수 있는 가능성을 완전히 부인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경적으로 보면 그것은 맞는 이론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든 인간에게 당신이 누구이신지를 알만한 지식(종교)의 씨를 주셨습니다. (칠판으로 설명하는 부분 어떻게 받아 적어야 할지 몰라 밑에 대충 요약함 - 수정필요)
예를 들어, 전에 진리를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이 진리를 본 후 ‘아 이것이 진리구나’ 하면서 깜짝 놀랍니다. 진리를 본 적이 없는 사람이 만세를 부를 때에는 언젠가 이 진리를 봤다는 거 아닌가요. 그리고 또 다른 예로 어떤 아주머니가 있습니다. 어떤 상태가 됐습니다. 그러자 아주머니는 ‘아 이거구나’ 하면서 행복해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상태가 행복한 상태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냐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놓고 아우구스티누스도 고민했고 플라톤도 고민했습니다. 결론은 이 사람이 창조되기 전이든지, 아니면 하나의 커다란 영혼 속에 집단적으로 있던 때든지 간에 뭔가 참된 것과 복된 것에 대한 지식을 하나님이 사람 속에 넣어주시지 않았더라면 진리를 보았을 때 그것이 진리라고 감탄 할 수 없고, 행복한 상태에 도달 했을 때 그것이 인간이 도달하고자 했던 행복이라고 말할 수 없다 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람들 속에 원래 주신 자기가 자각할 수 없는 종교의 씨라는 것입니다. 이것들이 적절한 환경을 만나게 될 때 진리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모든 사람들 속에 주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욕망과 부패한 기질과 무지에 의해서 더 많이 묻혀있고 어떤 사람은 그런 것들이 덜 묻혀 있기 때문에 비록 올바른 방법은 아니지만 ‘나는 돈도 싫고 쾌락도 싫고, 참되게 살고 싶다 도대체 무엇이 진리인가, 진리를 모르고 천년 동안 황제의 노릇을 하느니, 차라리 진리를 알고 노예처럼 하루를 살다가 행복하게 죽고 싶다’ 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인데 이것을 가리켜 생득적 지식, 혹은 선천적 지식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인간을 구원에 이르게 하기에는 불충분합니다. 그래서 후천적 지식이 필요합니다. 학습이나 하나님의 말씀의 제시에 의해서 깨달아가는 과정이 후천적 지식입니다. 이미 있는 생득적인 지식들을 교육과 환경을 통해서 끌어내어 풍부하게 만들어 내어 그 지식 안에 살게 하는 것이 교육의 사명입니다.
2. 특별 계시에 나타난 하나님에 관한 지식
1) 하나님은 순수한 영이시다
4과 자체가 하나님은 무엇이냐라는 질문입니다. 영어로 ‘Whatness’이고, 라틴어로 ‘퀴디타스’ (Quidditas - 사물의 본성에의 자각)“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Whatness’ 무엇이냐 라는 질문과 ‘Whoness’ 라는 질문이 있는데, 하나님의 무엇이냐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로 나뉜다. ‘Whatness‘는 성품에 관한 문제이고 ’Whoness’는 존재에 관한 문제입니다.
이렇게 물을 때에 성경이 몇 가지 답을 주신다. 첫 째는 하나님은 순수한 영이시라고 말씀하신다. “순수한 영이시다”라고 하는 것은 요한복음 4장에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고 나옵니다. “하나님이 영이시다“인데 순수한 영이신데 이것을 가리켜 단순성이라고 부릅니다. 영어로 ”Simplicity“라고 부르고 라틴어로는 ”Simplitytas“라고 합니다. 이것이 무슨 뜻인가 하면, 제 손에 펜이 들려있습니다. 근데 이 펜은 몇 가지 요소로 되어있는데 구멍이 뚫어진 통과 뒤를 감사고 있는 시커먼 캡과 통속에 들어가는 연필심, 맨 앞에는 펜을 막는 뚜껑으로4가지 요소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결국 이 4가지 요소를 조립하면 펜이 완성됩니다. 다시 말해 각 요소 중 하나의 요소가 없다면 펜이 완성될 수 없는데 네 요소는 서로를 의존합니다. 인간사회에서는 이런 구성 요소가 많을수록 제품이 값비싸고 정교해 보이는 것입니다. 예전의 비행기는 구성 요소가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요즘 비행기를 보면 구성요소가 백만개로 이루어져있고, 자동차의 부속이 이만개정도로 구성되어있다고 합니다. 즉 서로 의존하며 완성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존재에 있어서, 몇 가지 요소로 되어있다면, 각 요소는 서로 서로 의존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논리적으로 볼 때 전체적으로 하나님은 각 요소 자체만으로 하나님이실 수 없습니다. 이런 요소가 서로 의존한다면 결국 하나님은 당신 자신의 존재를 이 구성요소의 의존에 기대고 있게 됩니다. 그런데 이것을 다르게 해석하는 학설들이 존재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구성 요소가 없다고 말합니다. 나누고 서로 의존할 수 있는 구성요소를 가지고 계신분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다이어그램 설명) 하나님의 독립적 속성인데, 무한성, 완전성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다음엔 사랑, 자비, 의, 정의, 공의 등등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는 것은 엉터리같은 설명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설명할 수 없는 분이십니다. 이 하나님이 비참한 사람과 관계를 맺으십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자비가 나옵니다. 또 불의한 인간과 관계를 맺으시며 여기에서 하나님의 정의가 나옵니다. 또 하나님이 악한 인간과 관계를 맺을 때 여기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이 나옵니다. 물론 선한 인간과 관계 맺으시면서 선함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선한 사람을 선하게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태양과 같습니다. 봄이 오면 얼음이 졸졸 녹아내리지만, 얼음이 태양과 만나적도 없지만 그렇다고 만나지 않았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태양이 빛을 비추어서 얼음위에 떨어질 때 얼음이 물로 변하고 이것이 풀뿌리에 도달할 때 풀뿌리에서 새싹이 돋아나고 균과 만날 때 살균이 되고, 여성들의 피부와 만날 때 선탠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것을 가리켜 속성의 다발이라고 합니다.
(찬양) 주의 영광은 온 세계위에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정말 알고 싶어 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인생을 살아가는 것 자체가 신비로운 빛깔입니다. 내가 고난에 처할 때에도 하나님이 고난에 처한 나와 관계를 맺을 때, 내가 고난에 처하지 않았더라면 전혀 발견할 수 없는 하나님이 우리인간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놀라운 자비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악을 행하시는 자들을 징벌하시는 것을 보면서 엄위하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인간에게 머리를 주신 이유는 하나님에 대해서 공부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공부가 자연에도 묻어있으니 자연도 공부하고, 사회 속에서도 묻어있으니 사회도 공부하고, 인간에게도 묻어있으니 인간도 공부하고, 무엇보다 그리스도 십자가에 가장 많이 묻어있으니 복음도 공부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인간의 가장 큰 의무는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알아야 사랑할 수 있고 사랑할 수 있어야 순종할 수 있습니다.
(찬양) 내생에 가장 귀한 것 주 아는 것.
신학교 다니던 시절 전철에서 전도할 때 어떤 사람이 당신이 하나님을 보았느냐고 물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보았습니까? 보았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본 것은 다른 의미입니다. 사람에게 양심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디쯤 있습니까, 배를 갈라놓고 아무리 뒤져도 양심은 찾을 수 없습니다. 해부학적으로 발견되는 것이 아닙니다. 기능적으로 발견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눈으로 보았느냐고 물어보면 보았다고 말할 수 없지만 마음으로 보았느냐고 말하면 우리는 명백히 보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무도 내 입에서 나가는 바람을 본 사람은 없지만 이 바람으로 물체가 움직이는 것을 보면서 내 입에서 바람이 나갔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육신으로 보는 것은 신뢰하기 어렵습니다. 육신으로 보는 것은 봤는데 만약에 다른 것이 비추면 옛날 것을 의심하게 되는데, 그러나 정신으로 또렷하게 보는 것은 아주 놀랍게 우리의 오성을 파고 들어서 마음에 도장을 찍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가리켜 믿음이라고 합니다.
2) 하나님은 인격적이시다
하나님은 지, 정, 의를 가지고 계신 분이시기에 서로 아는 것과 느끼는 것과 의지하는 것을 교류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십니다.
3)하나님은 무한이 완전하시다
4) 하나님과 그의 완전성은 동일하시다
“단순성이란 하나님의 근본적 특성인데, 이것은 하나님이 이질적인 요소들로 이루어진 분이 아니시며, 그의 존재하심과 속성이 동일하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p 35 그래서 하나님을 안다 라고 하는 것은 첫째, 하나님의 속성을 아는 것이고 둘째. 속성이 실행되는 방식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초월적인 것을 뛰어넘어서 보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속성들을 보면서 그 속성이 사람들과 사물들과 맺는 관계 속에서 실행되는 방식에 대한 앎을 갖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이 두 가지가 신앙의 깊이를 좌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속성이 어떤 것인가, 그리고 그 하나님의 속성이 우리 안에서 실행되는 방식을 이해하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알게 될 때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다우신 분인가에 대해 감격하게 됩니다.
5장 하나님의 명칭
H. 하나님의 성함
1. 구약에 나타나는 명칭
- 엘로힘(Elohim) - '강하다'라는 뜻에서 나옵니다. 이것은 보편적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계시된 이름이었습니다.
- 야웨(Yahweh)- 이스라엘에게만 계시된 이름이 야웨입니다. 혹은 성경에서 여호와라고 나오는 이름입니다.
하나님의 성함이 다른 것들은 다 부차적인 것들이고 가장 고유한 하나님이 성함이 야웨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4글자로 됩니다. 구약 히브리어에서는 처음에 모음으로 안쓰고 자음으로만 씁니다. 하나님의 성함이 “Tetragrammaton”이라고 하는데 ‘Tetra’는 넷이고 ‘grammaton’은 글자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사자신명이라고 합니다. 사실 신명만이 아니고 인명도 사자로 되어있습니다. 이즈하크(Yitzhak) - 이삭(isaac), 아브라함(Abraham) - 아브람(Abram), 이스라엘(Israel) - 야곱(jacob), 이것들을 ‘Tetragrammaton‘이라고 합니다. 문제는 무엇이냐면 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무 거룩해서 부르지 못하게 했습니다. 여호와라는 발음은 그 이름의 네 자음문자 ’YHWH‘에 아도나이(Adonai)의 모음(ㅕ,ㅗ,ㅏ)을 붙여서 얻어진 것인데, 신성한 이름을 감히 발설 못하여 편의상 그렇게 불렀습니다. 16세기 이후 기독교인들은 유대인들의 그런 까다로운 행위를 인식하지 않고 여호와라는 혼성어를 사용하였으나 여전히 아도나이(’나의 주‘라는 뜻)로 읽는 유대인들로 인해 다른 언어의 성경에는 여호와 대신에 주(Lord)라는 용어가 이를 대체해 버렸다. 20세기 미국개정역본이 여호와(Jehovah)라는 말을 복구함으로써 전면에 다시 등장하였습니다.
6장 하나님의 속성
I. 하나님의 속성
속성이라고 하는 것은 속한 성품이라 그러는데, 영어로 “Attribute“라고 합니다. 어떤 사물의 구성 요소가 알파, 베타, 감마, 델타, 엘타, 제타...등등이 있습니다. 이 사물의 이름은 A입니다. 그런데 이 중에 알파를 빼면 A가 되지 않습니다. 이것을 가리켜 속성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자동차는 사면에 유리창이 있습니다. 그런데 정면 유리창만 있고 이외엔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도 이것은 차입니다. 그리고 자전거가 있는데, 두 바퀴로 굴러갑니다. 그런데 바퀴가 하나밖에 없다면 그래도 자전거라고 부릅니까? 외발 자전거입니다. 그래서 바퀴는 속성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냥 부분입니다. 다른 예로, 건물은 학교인데 공부를 안 가르치는 학교라고 할 때 이것은 학교입니까? 학교가 아닙니다. 그래서 가르치는 기능은 학교의 속성이 됩니다. 속성은 그걸 빼 버리면 절대로 그것이 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그럼 이 속성은 둘로 나뉘는데, 절대적 속성과 보편적 속성이 있습니다.
1. 절대적 속성과 보편적 속성
절대적 속성을 설명하면, 절대라는 말 자체가 대를 끊는 다는 말입니다. 서로 상응하는 것이 대칭이 되는데 그것을 끊어버리는 것인데, 그런 대칭이 되는 것은 없다는 것이 절대적 속성입니다. 이 절대적 속성은 하나님을 닮은 사람들에게서 발견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만 발견되는 속성입니다. 보편적 속성은 하나님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불완전하지만 모든 인간에게도 공통적으로 있는 것을 가리켜서 보편적 속성이라고 부릅니다.
- 절대적 속성의 세가지 요소
1) 하나님의 독립성 (자존성)
당신 자신의 존재의 기반을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독립성, 혹은 자존성이라고 부릅니다. 스스로 계신다. 예를 들어, 이 집은 사람이 만들었고 사람은 그럼 누가 만들었나? 사람은 하나님이 만드셨고, 그럼 하나님은 누가 만드셨나? 이것은 설명이 안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누구에 의해 만들어졌으면 그분은 하나님이실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독립성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에 의존하지 않는 독립성을 갖고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아름다우신 것입니다. 그것을 가리켜 하나님의 독립미, 혹은 하나님의 자존미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렇게 독립하면 아름다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추해보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을 의존하는 속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시고 그 인간을 양떼라고 부르신 이유입니다. 하나님을 기대고 의지하며 사는 것, 거기에 인간의 아름다움이 있는 것입니다. 그 미를 가리켜서 의존미라고 부릅니다. 이것을 알면 이제 여러분들은 『교회와 하나님의 사랑』이 막힘 없이 쉽게 읽혀질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도덕적 통치』를 읽어보면 얼마나 아름다운 책인지를 알게될 것입니다. 그 내용이 이해가 될 것입니다. 논리의 아름다움은 굉장히 아름다운 것입니다. 어려운 글 속에 있는 아름다움은 모든 사람들이 다 아는게 아니라서 더 신나는 것입니다.
(찬양) 우리 서로 받은 그 기쁨을 알 사람이 없도다
인간은 회개할 때 가장 아름답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기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갑니다. 고통 가운데 계신 주님, 변함없는 주님의 큰 사랑, 영원히 주님만을 의지합니다. 이것을 하나님은 아름답게 보십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의지할 때 하나님이 가까이 계십니다. 인간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 보일 수 있는 아름다움이 두 가지 있습니다. 깊이 회개 할 때와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할 때입니다. 이런 독립성은 인간에게는 없는 성품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의존하면서 존재하게 됩니다.
2) 하나님의 불변성
변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말합니다. 이 불변성이 아름다워서 인간들도 이것을 따라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대한 무한한 향수를 갖고 있기 때문에 하다못해 연예를 할 때에도 하나님을 흉내 내려고 하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의 선도 하나님을 본 따는 것이고, 모든 인간의 악도 하나님을 본 따는 것입니다. 선은 하나님을 올바로 본뜨는 것이고 악은 하나님을 그릇된 방법으로 본뜨는 것입니다. 인간은 사람을 용서하려 하지 않고 판단하고 정죄하려 합니다. 자기 자신을 보면 재대로 된 인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칼을 휘두를때 신나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판단을 본뜨는 것입니다. 하나님처럼 판단하는 것입니다. “내가 선고하노니 넌 인간이 아니노라. 아멘” 사치가 무엇입니까? 돈을 물 쓰듯 쓰는 것입니다. 신앙이 성숙하지 않으면 사치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에 부족함이 없으신 분입니다. 퍼서 인간에게 나누어주고 소비해도 끝이 없는 분이 하나님이 십니다. 그런 하나님을 닮을 때 신이 나는 것입니다. 방탕이 무엇입니까,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 방탕입니다. 모든 것에 있어서 하나님을 말릴 수 있는 존재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무제한의 하나님입니다. 방탕은 그런 하나님처럼 자기도 해보려고 시도하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것은 올바르지 않기 때문에 방탕이 됩니다.
그럼 반대로 다른 사람을 향한 너그러움을 생각해봅시다. 이것은 하나님의 넉넉함을 올바로 본뜨는 것입니다. 이것은 올바른 방법으로 본뜨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넉넉하게 해주고 싶은 것인데 그것은 그의 행복을 위해서 하고 싶은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 인간이 당신을 떠나 어디로 가겠습니까, 순종하고 하나님 말씀을 들으면 온화하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배우고 불순종하고 악을 행하면, 진노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뿐,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 어디로 피하겠사옵나이까” 라고 말했습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올바르게 본뜨는 것입니다. 교회와 하나님의 사랑을 배울 때, 교회 안에 있는 성도가 삼위 하나님의 교통을 본뜨는 것입니다. 이것은 올바르게 본 뜬 것입니다. 그 때 그 안에 인간의 행복이 있고 참 사랑이 있는 것입니다.
들에 핀 백합을 보면서 하늘의 구름을 보면서 공중에 날아다니는 한 마리의 새를 보면서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경을 보면서는 하나님 생각이 얼마나 많이 나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우리의 가장 커다란 의무는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을 올바르게 본받으면서 사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당신을 어떻게 본받아야 할지를 우리에게 주신 것이 성육신 하신 그리스도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가장 큰 의무입니다.
(찬양) 그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배우면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더 많이 생겨나고 사랑할수록 하나님께 순종하고 싶어서 조나단 에드워즈가 말했듯이, “이 세상 모든 사람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원하신다면 나는 한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이 다 해도 하나님이 그것을 원하시지 않는다면 나는 안한다. 만약에 이 지구상에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이 마지막 한 사람만 남는 다면 그가 내가 되도록 나는 그렇게 노력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신앙 생활입니다. 그 속에서 인간의 참된 행복이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을 갖지 않는 사람들은 기독교 신앙은 새로운 선택이 아니라 원래의 인간의 도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불변하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존재와 완전성에 있어서 동일하시며 목적과 약속에 있어서도 동일하신 분이다. 하나님이 활동하시지 않으시는 분이심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하나님은 왕래하시며 자신을 숨기시기도 하시며, 나타나기도 하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후회한다고 표현하기도 하지만 이 말은 단지 하나님에 대해 인간적 화법으로 표현한 것뿐이므로 실제로는 인간 편에서의 변화를 지적하는 것이다.” p 44
무슨 뜻이냐면 성경을 기록할 때 본질적인 기록 방식과 현상적인 기록방식이 중복이 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인데 듣는 자들이 인간입니다. 그래서 인간편에 서서 이해를 돕기위해 기록을 하기도 하고. 하나님 편에서 기록을 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해가 동쪽에서 떠서 서쪽에서 진다“는 말은 현상적인 표현이고, ”지구가 자전한다“는 것은 본질적인 표현입니다. 본질적으로 지구는 돌지만 인간의 이해를 위해서 ”해가 떠서 졌다”라고 이야기 합니다. 하나님이 후회하신다는 것은 진짜 후회하신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하나님이 그렇게 비추시기를 권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고, 인간을 돌이키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시험하십니다. 그런데 야고보서에 보면, “하나님은 친히 시험하지도 않으시고 시험 받지도 않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창세기에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신다고 나옵니다. 시험하신다고 하는 것은 현상적인 표현이고 시험하지 않으신다는 것은 본질적인 표현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하지만 이삭은 아브라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내놓으라 하시면 시험에 들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가져가서 죽이세요는 또 안됩니다. 그래서 성경이 이중적으로 묘사를 하는 것이지 모순이 아닙니다. 교리를 공부하게 되면, 모순들처럼 보이는 것들 속에서 모순이 되지 않는 것을 명쾌하게 구별할 수 있고 일관되게 보이는 사람들 이야기 속에서 어디가 모순인지를 지목해 낼 수 있는 그런 안목이 생기게 됩니다.
3) 하나님의 무한성
무한성이라는 것은 한정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모든 존재하는 것은 한정을 갖습니다. 그것을 한정자라고 합니다. 한정자여야지만 인간이 생각할 수 있고, 사유할 수 있고, 그리고 이름을 가지고 불리워지게 됩니다. 그래서 모든 것들은 한정자입니다. 한정되어진 존재, 한정자만이 인간의 사유 속에 떠오를 수 있습니다. 한정되지 않는 것은 떠오르지 않습니다. 이런 한정이 없으면 무한이 뻗어나갑니다. 그것은 피조물로서의 존재가 아닙니다. 그것을 가리켜 무한정자라고 합니다. “아페이론”이라고도 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계 안에 안 계신다고 말해도 안되고, 이 안에 계신다고 말해서도 안됩니다. 어떤 면에서는 계시고, 어떤 면에서는 안 계십니다. “있다”라고 하는 것 자체가 주어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다른 의미를 담습니다. “돌멩이가 있다”와 “공기가 있다”와 “우리 안에 사랑이 있다” 라는 것은 각각 다른 방식으로 있습니다. 공기가 있다 하면서 바닥을 뒤지면서 물기를 찾으면 없습니다. 이런 방식으론 없습니다. 그럼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한정이 없으신 무한정자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세 가지로 나누어서 설명을 합니다.
a. 절대적 완전성(존재와 관련)
b. 영원성(시간과 관련) - 『하나님의 도덕적 통치』에 보면 시간에 대해서 나옵니다. 천천히 읽어보시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에 대한 설명도 나옵니다. 하나님의 진리가 이렇게 온 세계에 통하는 구나 하면서 알수 있습니다. 또한 그 책에 보면 인간이 알 수 없는 이 영원을 아는 방법에 대해 나옵니다. 생각의 사유를 통해서는 영혼을 알 수가 없습니다. 사랑함으로 영혼을 알게 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아름다움이여, 참된 사랑이여, 그리고 영원이여 ,제가 너무 늦게야 주님을 사랑했나이다” 라며 노래합니다. 『교회와 하나님의 사랑』을 꼭 공부하기를 바랍니다. 『영원과 시간에 관하여』라는 열린 마당 세미나가 있습니다.
c. 공간과 관련해서는 무변성 (편재성) - 장소적인 변두리가 없다. 장소적인 한계가 없다. 어디든지 계시는 분이시다 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어느 곳에든지 거하시며 모든 공간을 채우시며, 결코 공간에 의해 제한을 받지 않으신다. 어디에나 하나님이 안계신곳은 없고 하나님과 똑같은 피조물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것이 이성 하나에 의지하려 할때는 구별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이성이라는 팔과 신앙이라는 팔입니다. 이성을 통해서는 추론이 오성을 통해서는 신앙이 들어오는데 이성과 오성을 합쳐서 지성이라고 부릅니다. 이렇게 하면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공부해 나가는 것입니다.
4) 단일성(단순성) - 단순성이란 하나님께서는 영과 육으로 형성된 것처럼 여러 부분의 성질로 이루어지신 분이 아니시므로, 나누이지 않으시는 분임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삼위란 하나님의 본체가 여러 부분의 본질로 구성되어진 것이라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의 완전한 존재는 각 위에 종속된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그의 속성이 하나이요, 또 하나님은 생명이시며, 빛이시며, 사랑이시며, 의로우시며, 진리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