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교리반
A. 삼위일체의 교리 개관
"성경은 가르치기를 하나님이 본질상 한분이시나, 그 분 안에는 성부, 성자. 성령이라 불리우는 삼위가 존재한다고 말한다. 이 삼위는 보편적 의미로서의 삼위가 아니다. 즉, 그것은 세 개체가 아니라, 오히려 신적 본질이 그 안에 존재하는 세 가지 양상이고 형태이다. 동시에 서로 인격적 관계를 확립할 수 있는 성질을 가지고 계시다. 삼위일체 교리의 오묘한 신비는 삼위 중 각 위가 신적 본질의 완전성을 소유하고 있으며, 삼위의 테두리를 벗어나 밖에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존재의 순서에 있어서나 그들의 사역에 반영된 순서에서 볼 때, 삼위 중 성부가 첫 번째, 성자가 두 번째, 성령이 세 번째 라고 말할 수 있지만, 이 삼위는 본질상 어느 한위가 다른 위에 종속되는 일이 없다.“ 54 p
1) 삼위일체의 교리의 성격적 증명
a. 구약의 증거
“하나님에게 한 위 이상이 존재함을 지적해주는 구절이 있다. 자신을 복수로 나타내시기도 했으며 여호와의 ( ) 한 신적 위로 나타났으며, 여호와의 영도 또 다른 위로 표현 되었다. 이 외에 메시야에 대해서 말하고 있으며, 다른 두 인격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구절이 있다.” 54 p
b. 신약의 증거
"성부는 성자를 세상에 보내시고 성자는 성령을 보내신다. 예수님의 명령, 사도의 축복 등에 잘 나타나 있다."
c. 삼위 일체 교리에 대한 그릇된 견해
(1) 소키누스
소키누스에 의해서 만들어진 학파입니다. 소키누스주의자들은 종교 개혁 당시 아주 극단적인 이성주의자이었습니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부인합니다.
(2) 유니테리안파와 현대주의자들
유니테리안파들은 삼위일체 교리를 믿지 않고,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 한 분뿐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들은 삼위일체를 성부와 인간 예수와 하나님의 영이라 칭하는 신적영향이라는 주장을 합니다. 성부 하나님, 예수는 인간, 성령은 영, 그래서 인격이 없는 영향력이라고 봅니다.
B. 삼위의 개별적 적용
a. 성부 하나님
“아버지란 말은 만물의 창조자요 이스라엘의 아버지요 성도의 아버지 되시는 삼위 하나님께 적용되는 말이다. 더 깊은 의미로 보면, 성부란 제 2위와의 관계를 표현하기 위해 1위에 적용되는 용어다. 이것은 본래부터 아버지 격이므로 지상의 모든 아버지는 그것의 희미한 반영이다. 성부의 독특한 특성은 영원으로부터 성자를 낳으신다는 것이다. 그의 구속사역은 구속사업을 개혁하시고 창조, 섭리, 그리고 삼위 일체를 구속계 안에서 나타내시는 것이다.“
b. 성자 하나님
“삼위 중 제 2위는 성자, 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리운다. 그러나 성자가 이러한 명칭을 가지게 된 것은 그가 성부의 독생자일뿐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된 메시야가 되기 때문이며, 성령의 작용으로 말미암은 그의 탄생에 의한 것이다. 삼위 중 제 2위인 성자의 특별한 특성은 그가 영원 전부터 성부에게서 출생하셨던 것이다. 영원한 출생에 의해 성부는 신적 존재에 있어서 성자의 인격적 존재의 원인이 되신다. 특별히 성자의 사역은 중재의 사역이므로, 그는 창조의 사역을 중재하셨고, 구속의 사역도 중재하신다.”
c. 성령 하나님
“소시니안파와 유니테리안파와 현대주의자들은 성령을 하나님 능력이나 영향력이라고 말하지만, 성령은 분명한 하나의 인격이라고 가르친다. 성령은 지식, 감정, 의지를 가진다.(인격의 3 요소) 성경은 말하기를, 성령이 말하시며, 탐구, 증거, 명령, 계시, 노력, 중재하시는 분으로 표현한다. 또 그는 분명히 자신의 능력과는 구별된다. 성령의 특별한 특성은 그가 성부와 성자로부터 발생된다는 것이다. 성령의 사명은 창조와 구속을 완성하는 것이
라고 할 수 있다.“
삼위 일체 교리는 기독교의 교리 가운데 아마 가장 난해한 교리일 것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가 삼위 일체에 대해서 <삼위일체론> 이라는 책을 쓰는데, 기독교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책일 것입니다. 이 책에서 삼위 일체를 논하는데, 고전적으로는 삼위 일체론 자체가 아마 삼위 일체를 우리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썻을 것이라고 보았는데, 그런데 요즘은 그렇게 생각을 안하고, 그 자체가 성도들을 영적으로 훈련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쓰였을 것이라고 봅니다.
열린 교회 게시판에 목사님의 설교가 어렵다는 지적에 대해 답장을 썼습니다. 예를 들어, 몸은 사람 몸인데 손은 쥐의 손입니다. 그래서 받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지성을 이렇게 관리하는 것은 굉장히 나쁜 죄입니다. 자기가 생각의 능력이 없는 것을 담대히 자랑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낼 때만 그러해야 합니다. 나 같은 무지한 사람도 하나님이 깨우쳐주셔서 구원해주신다고 생각해야지, 무식하다고 자랑하는 것은 두 번 잘못하는 것입니다. 우선 그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이 나쁘고,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데에 있어서 노력을 해야 합니다. 마음이 너무 아파서 14p의 답장을 4시간에 걸쳐서 썼습니다. 삼위일체론 자체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삼위일체론을 성도의 영적 훈련을 위해서 썻다고 봅니다. 고등학교때 체력장을 했습니다. 밑으로 30cm를 내려가야 하는데, 이것도 연습을 하면 됩니다. 정신의 근육을 사용하지 않고 생각 없이 살면 이해가 안 되는 것입니다. 제가 그 질문을 한 지체에게 당신은 내 책을 보면서 짜증을 내는데 나도 예전에 성경을 보면서 짜증이 났었다고 답했습니다. 신약 성경은 마태복음 읽다가 짜증이 나고, 구약 성경은 레위기 읽다가 짜증이 났습니다. 그런데 성경이 나한테 잘못한 것입니까, 나중에 은혜를 받고 정신을 차리니까 마태복음 1장이 왜 그렇게 중요한지 알게 되었다고 답했습니다. 그러니 어린 아이처럼 징징대지 말고 정신 좀 차리라고 말했습니다.
C. 삼위 일체에 대한 그릇된 견해 2
a. 본질에서 분리되는 희랍의 삼 신
삼위 일체는 우리가 완벽하게 설명한다고 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몇 가지만 설명하겠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성부가 먼저 계셨고, 그 다음에 성자가 계셨고, 성령이 계셨다고 봅니다. 이것을 삼위일체 라고 할 때, 위는 자리입니다. 그리도 일체라고 할 때는 하나의 몸인데, 단순히 하나의 덩어리를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신적 본질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서의 본질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위는 셋인데, 그 본질은 같다 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그 본질이 따로 떨어져 있어서 비어있다면 그것은 셋이 되지만, 다시 말해 본질이 아무리 같아도 이 세 분이 떨어져 있다고 세 분이라고 불러버리면 그것은 삼신이 되어버립니다. 희랍 신화에서도 많은 신들이 있습니다. 바다를 움직이는 신, 사랑을 움직이는 신, 농사를 잘되게 하는 신등이 있습니다. 이런 신은 여럿인데 본성은 다 같습니다. 그러니까 성부, 성자, 성령이 본질이 다 같고 이 셋은 완전히 떨어진 것으로 보면 삼신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b. 양태론
그 다음에 또 하나의 오류는 하나님의 본질이 있는데, 이 큰 덩어리에서 이렇게 쪼가리로 나눠서 가면 사신이 됩니다. 그 다음에 또 하나의 오류는 성부, 성자. 성령의 관계는 마치 한 사람이 회사 가서는 부장님으로, 집에서는 아버지로, 교회 와서는 장로로 불리우는 것과 같다는 오류입니다. 한 하나님인데 어디와 관계하느냐에 따라서 각각 다른 분으로 나타난다는 설명입니다. 옛날 같았으면 화형당할 양태론입니다. 대개 이 이론에 빠져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되냐면 성부, 성자, 성령은 전부 변형된 모습이고, 원래의 모습이 아니라고 보는 것입니다.
c. 삼위 하나님의 시간과 공간의 무제한적 영원성
제일 먼저 발생에 관해서 성부가 먼저 계시고, 성부에게서 성자가 낳으시고, 성부와 성자에게서 성령이 낳으십니다. 성부가 제 1위시고, 제 2위가 성자이고, 제 3위가 성령입니다.
그렇다면 삼위 하나님은 순서적으로 제 1위, 제 2위, 제 3위로 구분되기 때문에, 순서적인 구분으로 시간적인 면에서 제 1위인 성부 하나님이 먼저 나타나시고, 제 2위 성자 하나님이 두 번째로 나타나시며, 제 3위 하나님이 마지막으로 나타나신다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 삼위의 구분성에 대한 설명은 잘못된 것입니다.(이해를 돕기 위해 추가설명함 불필요하시면 삭제요망) - (칠판 설명) 삼위 하나님의 각위가 위치하시는 시간적 해석에 대한 오류
시간은 창조되면서 생겨났습니다. 그러면 하나님 자신은 영원한 존재입니다. 시간은 영원의 시간을 초월했기 때문에 그 영원 속에서는 시간의 앞 뒤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칠판 설명 - 정사각형의 선분)
사각형이 있습니다. 이것과 똑같은 사각형이 여기에 또 있습니다. 하나를 A라고 하고 또 하나는 B라고 합시다. B가 A위에 올라갈 수 있어요 없어요? B를 A위에 겹칠수 있어요? 있잖아요. 선분은 넓이와 두 깨가 없습니다. 무한대분의 일입니다. 그리고 선분은 점의 연속입니다. 점도 크기가 없습니다. 그래서 무한대분의 일 위에 무한대분의 일이 올라간 것입니다. 그래서 겹쳐진다라는 개념이 성립합니까? 평면인데 겹쳐질 수가 있겠어요. 2차원밖에 이해를 못하는 사람에게 위에 올라가도 그거는 하나일 수 있다고 설명하면 그것은 이해가 되지만, 그 위에 올라갈 수 있다는 개념은 성립이 안됩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틀립니다. 책이 있습니다. 박스 위에 책이 올라갑니다. 책이 박스 위에 올라가는 것은 2차원에서는 이해가 불가능합니다. 책이 박스 위에 올라간다는 것은 부피가 있는 3차원이니까 이해가 가능한 것입니다. 결국 시간의 문제, 공간의 문제가 두고두고 교리 공부를 하는데 있어서 중요하게 개입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성부가 먼저고 성자, 성령이 나셨지만, 성부는 성자와 성령과 함께 영원하십니다. 시간이 사라져버린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물어보겠습니다. 어제 일어난 일과 십년 전에 일어난 기억 중 어느 것이 우리의 기억 가까이에 있습니까, 십년 전의 일도 워낙 또렷한 것은 어제 일어난 일이 잊혀져도 십년 전의 일이 기억의 맨 앞부분에 있는 것입니다. 어제 저녁에 두 번째로 먹은 반찬이 무엇입니까, 기억이 안납니다. 십년 전에 헤어진 첫 사랑의 기억이 무엇입니까, 기억이 또렷히 납니다. 이것은 시간과 상관이 없이 기억이라는 평면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시간의 초월입니다. 그래서 오래전에 일어난 일이라고 해서 기억의 맨 밑에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또 금방 일어난 일이라고 해서 기억의 표면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이 시간을 초월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결론은 성부에게서 성자가, 성부와 성자에게서 성령이 나셨지만, 성자 없이 성부가, 성령 없이 성부와 성자가 계시던 때는 없다는 것입니다.
D. 삼위 하나님의 존재 양식의 독특성
성부
성부 성자 성령을 이야기 할 때, (칠판 설명 - 삼각형) 삼각형을 기억하면 좋습니다. / \ 하나님은 세 분이 아니라 한분이십니다. 그러나 이 삼위는 세 인격입니다. 그래서 세 인격이지만 / ____ \ 그 자체가 따로 떨어지지 않는 하나인 존재입니다. 이런 것들이 유사한 존재가 이 세상엔 성자 성령 없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유비를 찾아내려고 했던 모든 시도가 잘못된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의 심리학적 모델이라고 해서, 우리 안에 있는 영혼이 하나님을 가장 닮았기 때문에 그 안에 있는 작용, 예를 들면, 생각, 사랑하는 자, 사랑 받는 자, 사랑 자체, 이것을 성부, 성자, 성령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 다음에 지식, 사랑, 의지 이런 식으로 나뉘어 질 수 없으면서도 구별 되는 마음의 작용 같이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존재하신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런 하나님은 한 분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성부, 성령 없이 성자 혼자 일 하실 수 없는 것입니다. 다만 각 위와 인간은 개별적으로 교통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 사역을 하신다고 할 때, 삼위가 다 같이 하시지만 우선적으로 성부가 관여하시고, 구속하신다고 하실 때는 성자 하나님이 우선적으로 관여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적용하는 믿음 사역을 하십니다. 이럴 때에는 성령 하나님이 우선적으로 관여하십니다. 어느 위도 참여하시지 않으신 적은 없지만 주로 역사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부의 특징을 사랑이라고 하는가 하면, 성자의 특징을 은혜로, 성령의 특징을 위로로 봅니다. 존 오웬(John Owen)은 성부, 성자, 성령이 함께 관여하셔서 인간과 교통하시는데 인간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놀라운 사랑을 경험할 때에는 성부와 교통하고, 은혜를 경험할 때에는 성자와, 위로를 경험할 때에는 성령이, 즉 나뉘어지지는 않지만 우선적으로 교제하고 있는 개별적 위와의 교통이라고 보았습니다.
결국은 성부, 성자, 성령 같은 독특한 존재의 양식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하나님의 본성이 삼위로 분리되었다고 보면 안되고, 하나님의 성령은 처음부터 성부, 성자, 성령 삼위로 존재하는 것 자체가 존재의 양식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런 하나님이 한 분 하나님이시면서도 그 안에서 삼위 사이에 사랑의 교통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E. 하나님의 작정
“하나님의 작정이란 하나님께서 장차 발생할 모든 일을 미리 계획하시는 그의 영원하신 계획, 혹은 영원하신 목적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61p
이것은 시간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천지가 창조되어서 시간이 도입되기 전에, 시간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사물들의 변화가 있어야지만 파악을 할 수 있고, 그 길이를 알 수 있기 때문에, 그런 사물들이 변화되지 않으면 시간의 길이를 특정할 수 없습니다. 작정은 시간 세계 이전에 있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지혜 속에서 이루어진 작정입니다.
“이 하나님의 작정은 여러 가지 특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단일한 작정이지만, 가끔 이것을 복수형이라고 말하곤 한다. 하나님의 작정은 창조와 구속에 있어서 하나님의 모든 사역을 포함하며 인간의 죄 된 행위를 제외한 모든 행위를 내포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작정은 죄가 세상에 들어옴을 명백히 들어내주지만 하나님을 우리 인간의 범죄 행위의 책임자로 만들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죄와 관련된 하나님의 작정은 허용적인 작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61p
a. 작정의 특성
“그것은 항상 이해할 수 없으므로 하나님의 지혜에 근거한 것이다. 하나님의 작정은 영원 전에 작정된 것이므로 영원적이다. 하나님의 작정은 효과적이므로 작정 안에 있는 모든 것은 효력이 있다. 하나님의 작정은 불변적이다. 하나님은 신실하고 참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작정은 무조건적이다. 즉, 인간의 행위에 근거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명백히 하신다. 하나님의 작용은 총 포괄적이다. 선악간의 행위, 일어날 사건, 생명의 기간, 장소등까지 포함된다. 하나님의 작정이 세상에 들어온 죄와 관련될 때 허용적이다.” 62p
하나님의 작정은 영원적, 효과적, 불변적, 무조건적, 총포괄적으로 5가지로 구성된다.
b. 작정 교리에 대한 반대설
(1) "인간의 도덕적 자유와 모순된다. 성경은 하나님이 인간의 자유로운 행위를 작정하셨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자유로운 행위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가르친다. 우리는 이 양면을 함께 조화시킬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본래부터 모순되었다고 증명하지는 않는다." 62p
하나님이 정하셨다면 인간의 도덕적 자유와 모순되는 것 처럼 보이겠지만, 이것은 우리가 시간 안에서 정했다고 믿을 때,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이 문제는 순수하게 이성으로 생각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고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2) "인간으로 하여금 구원받으려고 하는 노력을 게을리하게 한다. 만일 하나님이 인간들의 구원여부를 결정하셨다면, 인간들은 인간들의 노력과 완전 무관한 것이라고 느낄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그릇된 견해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이 자기에 관해 어떻게 작정하셨는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하나님은 인간의최종적 운명을 결정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 실현되어져가는 방법까지 작정하신 것이다. 목적이란 지정된 방법의 결과로서 작정되어진 것으로 생각할 때, 하나님의 작정은 오히려 인간을 격려시켜준다." 63p
(3) "하나님을 죄의 조작자로 만든다. 그러나 작정은 도덕적 존재자들의 창조로 만들 수 있을 뿐이다. 죄가 작정 가운데 들어온 것은 사실이지만 하나님이 자신의 직접적 행위에 의해 죄를 산출하지는 않으셨다. 그러나 하나님이 죄와 관련된 문제 역시 인간으로서는 충분히 해결할 수 없는 신비로 남아있다고 보아야 마땅하다." 63p
F. 예정
“예정이란 도덕적 피조물, 도덕적 피조물의 반대는 자연적 피조물이다. 그래서 도덕적 피조물은 지성적 능력이 있는 피조물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이다. 도덕적 피조물은 모든 인류. 천사와 나비, 중보자이신 그리스도 포함한다.“ 63p
a. 선택
"예정의 두 측면이 있는데, 선택과 유기가 있다. 선택은 몇 가지로 말하고 있는데, 구약 이스라엘의 선택, 직무와 봉사를 위한 인물의 선택(왕, 제사장, 선지자), 구원받을 개개인의 선택이 있다. 선택이란 인류 중 얼마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로 말미암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64p
b. 유기
"선택 교리는 하나님이 인생 전부를 구원하기로 예정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자연히 암시한다. 하나님께서 인생 중 일부만을 구원하시기로 목적하셨다는 말은 나머지는 자연히 구원치 않기로 목적하셨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성경적 근거를 갖는다. 유기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의 작용 속에서 어떤 사람들은 간과하시고, 그들의 죄를 따라 그들에게 벌하시려는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러므로 유기는 실제로 이중적 목적이 있으니, 첫 째 구원의 은총을 베푸심에 있어서 어떤 사람은 건너뛰시고 그들의 죄를 따라서 벌하게 하려 하심이다." 64p
c. 예정론에 대한 반대설
“이 예정 교리는 하나님으로 하여금 불공평의 책임을 지게 하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이것은 그릇된 견해다. 우리 인간은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 어떤 권리를 요청할 때나 인간에게 영원한 구원을 베푸실 의무가 있다고 할 때만 불공평이라는 말을 쓸 수 있다. 전 인류가 하나님 축복을 상실해버린 마당에 상황은 다르다. 인간은 하나님을 향해 왜 어떤 사람은 선택하고 나머지는 버리셨느냐는 설명을 요청할 권리가 없다. 만약 하나님께서 한 사람도 구원하지 않으셨다 해도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공평하신 것이다.“ 64p
G. 자유의지와 필연
(칠판 설명) 인간이 살아갈 때 시간이 있습니다. 세월이 흘러가면서 한 인간의 인생 속에 어떤 일들이 일어납니다. 시간은 계속 흘러가며 인생 가운데 여러 일들이 또 일어납니다. 시간이 흘러가며 전개가 일어납니다.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가고 난 후에 뒤돌아 보면 지나간 시간을 통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게 됩니다. 이것을 거꾸로 생각해보면, 결국 인생은 시간 세계 안에서 사물들과 관계 하면서 펼쳐지는 것인데, 또 다르게 보면 시간이라고 하는 세계가 있기 전의 영원의 세계에서 보면 이렇게 일들이 일어날 것이라는 것이 하나님 마음 속에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고 말한다고 하나님께서 마치 몰랐던 일이었던 것처럼 놀라지 않으십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전지하심이 문제가 생깁니다. 하나님은 모든 시간과 공간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모르시는 것 없이 다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있는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보면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지금도 존재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자유를 주신 존재들에 대해서는 당신 자신도 잘모르고 계신다고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능력이 없으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안하시겠다고 하셔서 인간이 전개하면 마치 예상치 못했던 일을 알아가신다는즉, 하나님 자신도 인간을 통해 배워가시는 분이라고 봅니다. 그렇게 되면 완전한 신으로서의 모습을 그려낼 수 없게 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마음에는 이런 것들이 전부 다 원래 있었다고 봐야 합니다.
(칠판설명)또 하나의 문제는 하나님의 모든 것을 다 아시지만 인간의 자유에 의해서 하나님이 아시는 것들이 얼마든지 변경 될 수 있는 주장인데, 그것 역시 인간이 변경할지 안할지에 대해서 하나님이 몰랐다고 하는 것은 말이 안됩니다. 그래서 시간 안에 있는 것들을 영원 속으로 끌어들이게 되면, 점으로 표현됩니다.
(칠판 그림설명) - 전체를 한번에 보시는 하나님의 영원적 시각과 지나간 순간과 작금의 시간만을 관망할 수 있는 인간의 시간과 공간에 의한 제한된 시각의 차이
하나님의 평면 위에 인간의 인생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시간 속에서 펼쳐져 나간 모습이 이러하게 나타납니다. 이런 평면 속에 있는 것을 가리켜 신적 작정이라고 부르고, 시간 안에서 펼쳐지는 전개가 창조, 섭리, 보존, 통치 등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여기는 영원이니까 시간을 빼버리게 되면 하나님에게는 미래의 일들도 현재, 현재에 일어나는 일도 미래가 되며 하나의 평면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하나님이 아셨고 정해셨고, 그것들이 하나님의 시간 세계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 펼쳐지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하나님이 만드셨으니까 우연입니까, 필연입니까, 필연입니다. 근데 문제는 시간 속에서 전개될 때에는 필연으로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우연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자기의 의지를 어떻게 행사하느냐에 의해서 이렇게 될 수도 있고 저렇게 될 수도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인간의 의지에 의해서 다양한 선택들이 있게 되고, 결국 영향도 받고 스스로 생각하게 되어서 최종적으로 선택하게 되면 이것이 되고 이것은 하나님의 마음 안에 원래 있었던 것이 됩니다. 그래서 여기서는 우연이 되는데 여기서는 완전한 자유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한 쪽에서는 필연이 되고, 한 쪽에서는 우연이 됩니다. 이것은 신비이며, 기독교 신학에 있어서 10대 난제 가운데 하나입니다.
자유의지와 필연의 문제는 둘 다 문제가 됩니다. 인간이 워낙 자유롭기 때문에 하나님이 예측을 못하신다고 해도 문제가 되고, 하나님이 정해 놓으셨기 때문에 인간은 자기가 아무리 힘쓰고 노력을 해도 결국 정해진 운명으로 될 수밖에 없다고 말해버리면 그것도 인간의 자유를 박탈해버리니까 책임을 물을 수 없게 됩니다. 책임을 물으려면 도덕적 자율성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두 가지가 조화가 어려운 것처럼 보이는데, 성경은 이것을 필연과 우연이라고 설명하며 인간의 책임이 면죄될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ex - 자유의지와 필연에 대한 예 : 우리는 꿈을 완전히 신뢰하지는 않지만 무시하진 않습니다. 성경도 꿈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꿈에 보면 누군가를 꼭 만나기로 되어있습니다. 그러면 생각해봅시다. 우리는 아침부터 그 사람을 만나야 될 사람이다라고 하면, 만나기 위해서 노력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잊어버리고 살다가 저녁길 퇴근 길에서 만나는데, 몇 십년만에 친구를 만나게 됩니다. 집에 와서 가만히 생각해보면 어젯밤 꿈이 그거였구나 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필연적으로 어떤 것들이 정해져있어도 이 안에 살아가는 인간은 완전히 자유로운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완전히 자유로운 존재이면서도 살다보면 그것이 결국 필연이 됩니다. 결국 자기의 책임도 면할 수 없고 하나님은 정해놓으셨으면서도 인간을 완전히 자유케한 것입니다. 보헤티우스라는 신학자는 이것을 라틴어로 인트라(intra - 안쪽) 엑스트라 (extra - 바깥쪽)로 설명하며, 인트라는 내심적 혹은 내부지향적, 엑스트라는 외재적, 혹은 외부지향적이라고 설명하며, 이것을 삼위일체라고 보고, 인간에게 일어나는 일을 내심적으로는 필연이고, 외재적으로는 우연이다라고 설명합니다.
(물리학 칠판 설명) 강이 있고, 새 한 마리가 쏜살같이 날아오다가 강물 속에 있는 고기를 보았습니다. 이것을 먹으려고 달려듭니다. 그럼 이 물고기가 잡힐까요? 안잡힙니다. 왜냐면 물 표면에서 물 안의 고기가 보이는 각도는 물에 의해서 굴절되어 물 안의 고기를 보게 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물 밖에서 물 안의 고기까지의 거리는 생각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새는 그것까지 계산을 하고 공격합니다. 그래서 실제로 굴절되어서 있는 위치를 정확하게 쪼아 공격하게 됩니다. 만약에 계속 착시 현상을 일으킨다면 새는 굶어죽을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여기는시간이라는 것을 초월했고, 시간과 공간이 꽉 차있습니다. 그러면 이것이 이쪽에 비추어질때 다르게 비추어질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결국 예정과 작정의 차이는, 예정은 디크리(decree)라고 하고, 일반 용어에서는 ’명령‘이라고 해석하는데 즉, 신적 작정을 의미합니다. 신적 작정이라고 해서 디바인(divine)이라는 말이 붙습니다. 작정은 하나님이 미리 당신의 뜻을 정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이 그대로 이루어지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속에는 자연적 피조물과 도덕적 피조물 모두 다 포함해서 작정이라고 하고, 특별히 도덕적 피조물의 구원에 관한 문제가 국한될 때 이것을 가리켜서 예정(destination)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은 구원하시기로 선택하셨고, 어떤 사람들은 유기하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유기란 원래 버렸다는 의미인데, 버렸다기 보다도 타락하면서 모든 인간이 다 버림을 받은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죽어 있는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결국 자기의 죄를 따라 살다가 하나님 앞에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존재인데 그 중에서 하나님이 어떤 사람들을 건져 내시는 것입니다. 유기는 선택의 결과입니다. 선택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선택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이것을 비난할 수 없는 이유는 하나님이 이 모든 사람들을 선택하셔야 할 의무를 부과 받으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여 멸망 받을 수 밖에 없는 상태가 되었는데, 왜 그런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은 공로도 없이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마치 홍수가 나서 수많은 사람들이 떠내려갑니다. 구조대원이 사람들을 건져냈습니다. 그랬더니 따귀를 때리면서 다 죽여버리지 왜 나만 건졌냐고 항의할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선택과 유기의 교리가 나오게 됩니다. 선택과 유기 교리 때문에 칼빈주의는 비난을 많이 받습니다. 그래서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지옥, 심판의 개념들을 무시하지만 우리들은 성경이 선택과 유기의 말씀을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불가능하다고 설명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모순처럼 보여도 역시 시간과 초시간의 영원속에서의 차이라고 보고, 결국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 앞에 놀라운 조화와 질서를 이루게 됩니다.
도서관에 가면 “죄와 은혜의 지배”라는 책이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죄 때문에 넘치는 은혜”라는 항목이 있습니다. 거기를 읽어보시면 이런 모순 된 문제들에 대해서 어떻게 우리들이 풀 수 있는지에 대한 답이 나옵니다.
인간의 이러한 도덕적인 잘못을 하나님이 사용하셔서 역으로 하나님의 놀라운 성품을 드러내시도록 영광 받으십니다. 예를 들어서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을 통해서 가장 선명하게 나타납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이 무엇하실 때 하나님의 사랑이 찬란하게 드러납니까, 인간을 용서해주실 때 드러납니다. 인간의 죄가 없다면 용서해주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사실 죄가 들어온 이후에 우리 인간들이 경험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넓이와 깊이는 죄가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경험했을 그것보다 훨씬 더 높은 정도의 것입니다. 그러면 죄가 하나님의 영광을 들어내는데 기여했으니까 죄인들을 상주어야 합니까? 그럼 모순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탁월한 지혜가 이런 인간을 사용합니다.
여러분은 두부를 먹습니까? 콩으로 두부를 만드는데, 두부를 만들 때 꼭 들어가는 것이 간수입니다. 간수는 바닷물의 소금을 농축한 것입니다. 그것이 옛날에 여인네들이 살다가 살다가 시집살이 하다가 살기 싫어지면 마시는 독약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넣야지만 두부가 됩니다. 두부로 유명한 마을은 모두 바닷가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강릉에 가면 학사평 두부가 유명한데 여지껏 먹은 두부는 두부가 아닙니다. 정말 다르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두부를 그렇게 만들었을 때, 간수를 넣으니까 두부에는 독이 들어있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맞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간수를 농축했을 때는 독이 되지만 희석했을 때는 두부를 굳게 만들어주고 오히려 우리 몸을 유익하게 만드는 것이 됩니다.
그와 똑같이 하나님은 인간의 죄를 그렇게 사용하십니다. 죄라고 하는 것 자체를 하나님의 모든 우주적인 계획과 함께 전체적으로 놓고 죄에 대해서 평가 해야됩니다. 죄를 하나님의 모든 우주적인 계획과 전체적이고 입체적으로 놓고 죄를 평가하지 않고 단편적으로 보게 되면, 커다란 오류와 잘못을 만들어 내게 됩니다.
물론 하나님이 구원받기로 예정해 놓은 사람들인데, 그러면 구원받을 사람과 구원받지 못할 사람들이 다 나타나게 되는 것인데 그렇게 되면 예정 안된 사람은 죽도록 믿어봐야 소용없지 않느냐고 말할지 모르겠지만 미안하게도 예정 안된 사람은 죽도록 노력할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 여러분들에게 아주 중요한 팁을 주려고 합니다. 예정 사상이 어디에 나오냐 하면 특별히 사도행전을 비롯해서 사도 바울의 서신서에 나오게 됩니다. 그래서 예정설을 가장 많이 전개해 나간 사람이 사도 바울입니다. 아마 여러분들은 사도 바울의 서신서를 읽으면서 “만세 전에”라는 구절을 보았을 것입니다.
“만세 전에”라는 의미는 수 많은 시대 이전에 이미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정하셨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이 사도 바울이 썻던 것을 잘 돌아보면,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판단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예정을 말한 것이 아니라, 즉 전망적으로 예정을 이야기 한 것이 아니라, 이 예정을 이야기 할 수 있는 자격을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이 자기 인생 길을 걸어서 어느 정도까지 왔습니다. 자기가 구원을 받았고 난 후 자기 걸어온 길을 회고해 봅니다. 그랬더니 맨 처음에는 사도 바울이 다메섹 가는 길에서 꼬꾸라집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 때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하니까 그 때 내가 회개를 했더니 겨우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셔서 나를 복음을 전하는 자로 삼으셨는가, 그게 아니었구나를 깨닫게 됩니다.
사도 바울의 어머니가 있었는데, 그 어머니의 뱃속에서부터 하나님이 나를 예수 믿게 만드시려고 계획을 하신 것이 연결이 되어서 결국 다메섹 도상에서 내가 하나님을 믿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다가 신앙이 더 깊어진 다음에는 어머니 뱃속에서 내가 태어난 것은 우연히 된 것이고, 어머니가 나를 가지니까 하나님이 그 때서야 나를 사용하시기로 작정하신 것이고, 그리고 끝까지 유대인으로 태어나서 유대교를 믿으니까 하나님을 믿지 않을 것을 염두하셔서 다메섹 도상에서 나를 하나님을 믿게 만드신 것인가, 이건 아닌 것 같고, 마지막에 도달한 것은 영원까지 가게 됩니다. 영원 전에 우리 어머니가 아버지와 만나는 계획도 있고, 그 사이에 내가 태어나는 계획도 있고, 이 계획은 어머니, 아버지와 뒤지지 않을 정도로 한 번에 하나님이 작정하신 것이구나, 하나님의 영원의 뜻이 시간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결국 오늘 날 나에게 까지 오게 되었구나, 결국 전망적으로가 아니라 회고적입니다. 이것은 목적이 하나님을 찬송하고 높이는 경배가 목적입니다. 나의 구원은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영원 전에, 심지어는 인간이라는 것이 있기도 전에 미리 마음을 먹으시고, 그것을 시간 속에서 전개하셔서 어머니 뱃속에서, 다메섹 도상에서, 나를 사도로 만드셔서 결국은 나를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지금 복음을 전하는 자로 하나님께서 나를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과거를 회고할 때 이런 필연 속에서 전개되어 왔으니까 앞으로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소명이 있는데, 이것을 따라 간 나의 길에 어떤 어려움이 와도 결국엔 하나님이 이 전에 작정하시고 시간 속에서 전개하신 것 처럼, 이루어 가신다는 확신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전도하다가 예정도 안된 인간들한테 괜히 수고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하다가, 하나님이 미리 예정을 해 놓으신 사람이라면 내가 안간다고 구원을 못받을까,라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실제로 이런 생각은 선교 역사에 나타납니다. 윌리엄 캘리라는 사람이 18세기에 등장합니다. 이 사람이 인도 지방을 여행하고 와서 선교의 시급성을 이야기하면서 “우리는 이 사람들을 섬겨야 됩니다” 라고 이야기 했더니, 당시 이런 교리에 빠진 사람들이 “이보게 젊은이, 하나님이 만약에 그 사람들을 구원하기로 작정하셨다면 하나님이 직접하실 걸세, 나서지 말게”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정은 그런 용도로 사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된 것입니다. 돌아보면 돌아볼수록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찬송하는 마음이 우리 속에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용도로 하나님이 예정을 사용도록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제 이야기를 듣고 나서 사도행전을 읽어보십시오, 그러면 백이면 백, 예정은 하나님을 향한 찬양을 목적으로 회고적 방식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 결과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면서 강한 믿음을 갖게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예정의 목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덕적 통치』에서 천치창조의 목적이라는 장을 꼭 읽어오십시오.
“천지창조의 목적” 설교 테잎을 듣고 난 후 깨달은 점.
빨간 옷 자매님 대답
천지창조의 목적에 대해 들으며 내가 성도로서 비록 아담의 죄로 인해 범죄하게 되었지만 다시금 교회 안에서 하나님께서 창조의 목적을 회복시켜 나가신다는 것에 대해서 감사한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형제님
깊이 있게 깨달은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생각하게 된 것은, 당연히 부모님께서 나를 낳아주셔서 존재한다는 생각이 기저에 많이 깔려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시기 위해서 세상을 창조하시지 않으셨다면 저의 생각 기저에 깔려 있는 것이 터무니 없는 것이었구나 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이 스스로 영광 받으시기 위해서 세상을 창조하신 것인데, 그것과 나의 연관점에 있어서 생각을 하고 있지 않았었다. 나는 모태신앙인이기 때문에 당연시 여기며 살아왔다. 말씀을 들으면서 깊이 있게 듣지 못했지만 한 가지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며 듣게 된 것은, 하나님이 스스로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서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매님
저는 굉장히 충격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목적이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인데, 그 영광을 위한 계획 속에 우리 자신이 포함 되었다는 사실이 충격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장 행복해 지기 위해서는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야만 행복하며 하나님의 목적에 맞는 삶을 살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는 선이라는 개념을 다시 정리해주시는 것에 대해서 충격적이었습니다. 보편적인 선이라는 것이 인간 사회에서 정의되기가 어려운데, 그 보편적인 선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근거가 하나님 자신이라는 것, 즉 천지창조의 목적에서 보편적인 선이라는 것이 발생하며, 그렇기 때문에 도덕적인 기준도 그로 인해 발생하는 것이고, 우리가 그것에 맞추어 살아가는 것이 창조의 목적에 맞게 살아가는 것이 저에게는 충격적이었습니다. 또 한 가지는 하나님의 창조와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한 유기관계를 설명하시는 것이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와 그리스도의 구속이 얼마만큼의 관련성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와 하나님의 창조를 통해서 하나님의 신성이 ‘피조물 사이의 동창생’(모든 인간과 창조 속에서 하나로 묶여가는 것), 그리스도 구속을 통한 재창조 사역으로 인해서 다시금 우리가 교회로부터 시작해서 하나님께서 창조시 의도하셨던 피조물 사이의 아름다운 연합을 회복해 간다는 사실에 대해서 요즘에 강조하시는 교회관과 연관되면서 상당히 감명 깊게 다가왔습니다.
형제님
세상에서 ‘그냥’이라고 답할 수 있는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그냥 남들이 하니까라는 것들의 추상적 대답들)설교 들으면서 하나님의 영광 관련해서 뭐든지 먹든 마시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데, 세상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위해서 살고 왜 사는지에 대한 질문에 답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관련해서 굳이 창조를 하지 않으셔도 되고, 인간들을 안만드셔도 되셨을 텐데, 하나님의 사랑의 개연성이라는 것은 숨어있고 감추어져있는 것이 아니라, 나타내시고 드러나시는 하나님의 경향성이시라는 것 그리고 우리의 영혼 상태도 건강 할때는 나누어주고 섬겨주는데, 안 좋을 때는 감추려고 하고 소외되려 하는 것에 대해서 깨달았습니다.
목사님 대답
우리 교회에 지금은 대학생이 되었는데, 고등학교 때 부모님을 따라서 예배시간에 왔습니다. 그 날이 천지창조의 목적에 대한 두 번째 설교를 하는 날이었습니다. 그것을 들으며 그 아이가 회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무목적하게 느껴졌던 삶이 왜 살아야 하고, 무엇을 향하여 살아야 하는 것들을 알게 해주었습니다.
여러분들이 들어야 할 가장 중요한 시리즈가 천지창조의 목적입니다. 전부 다 듣기가 부담스러우면 2번은 꼭 듣고, 홈피에서 세미나란에 총신대학교 일반대학원 세미나에 이 문제 설교가 있고, 도덕적 통치 중에서 천지창조의 목적 부분을 꼭 들으십시오, 이것이 바탕이 되어있으면 교회와 구원까지도 이해가 갈 것입니다.
H. 창조
1. 창조에 관한 일반적 고찰
“창조란 하나님께서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기 위해 부분적으로는 먼저 있었던 물질을 사용치 않고 창조하시고, 한편으로는 불충분한 물질로부터 우주와 그 안에 있는 만물을 산출해내시는 하나님의 사역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리고 창조 사역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으로 나타난다. 성부가 주가 되시며 성자와 성령이 참여하시는 사역이다. 우리는 범신론과는 반대로 창조가 하나님의 자유로우신 행위임을 주장한다.” 68p
범신론에서는 물을 잔뜩 부으면 넘치는 것처럼 신의 충만함이 유출되어서 이 세계가 이루어진 것이라고 말합니다. 대표적인 인물로 플라톤 같은 사람들이 이런 주장을 말합니다. 이것을 유출설이라고 부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과의 의지와는 상관이 없이 비의지적으로 창조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필요치 않으셨다” 69p 이것은 굉장히 어려운 문제입니다. 세계가 하나님께 필요한가, 필요한다고 하면 하나님이 모자라신 분이 되시는 것이고, 필요 없었다고 하면 하나님이 쓸데없는 일을 하게 되십니다. 쓸데없는 일에서는 목적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철학자들이 이 두 가지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집니다.
저는 천지창조의 목적에서 저 나름대로 독특한 해석을 가합니다. 이 마음 속, 즉 창조의 정신이 별로 없는 사람들은 일생을 살면서 외상장부이외에는 글 한줄 안 쓰고 예술 작품 하나 안 만들고 시 한줄 안적고도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창조의 정신이 넘치는 사람은 그렇게 살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예술혼이 넘쳐서 모든 사람이 누구도 할 수 없는 조각, 미술, 음악 같은 것을 남겼다고 치면, 헨델의 ‘오라토리오 메시야’ 같은 것은 일주일만에 완성이 되고 이사야 53장을 헨델이 읽으면서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그리고 신들린 듯이 작곡을 하게 됩니다. 헨델은 ‘할렐루야’를 작곡하고 나서 “오~하나님 정말 이 곡을 제가 작곡하였나이까”라고 고백합니다. 그런것들이 보여주는 것은 음악을 쏟아내거나 조각을 만들 때, 그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더 모자라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안에 넘치고 있는 창조의 정신과 예술 혼, 넘치는 미에 대한 사랑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많은 것을 만들어 내는 사람들을 독립심도 없는 의존적인 인간이라고 비판하지 않고 오히려 부러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지 않으셨다면 그런 예술혼이 부족한 신이 될 수 있었다고 말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안에 있는 넘치는 사랑이 인간을 창조하게 하셨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사랑이라는 것 자체가 관계를 맺고자 하는 특성이 있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 밖의 인간과 사물들을 창조하시는 것이 관계를 맺으시는 방법이었는데, 그 관계는 하나님이 우리 없이는 못사는 모자라는 존재여서 우리와의 관계를 필요로하신게 아니라, 그 분 자신 안에 넘치는 사랑이 그것을 필요로 하게 된 것입니다. 은혜 안받았을때는 자기 혼자 잘 살면 그만이지만, 은혜를 많이 받으면 오지랖이 넓어집니다. 주변의 어려운 사람들을 돌아보고 도와주려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렇게 고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이 병든 부모를 가진 형제나 굶주린 자매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사람에게 없는 사랑의 성향이 넘치니까 오지랖이 넓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셨다는 자체가 하나님의 아주 초월적인 완전
성의 극치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지금도 관계를 맺으시고 이 세계를 다스리시고 통치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이 아무런 변화 없이 세월 떠밀려서 살게 되는 것은 정신과 영혼이 죽은 사람입니다. 살아있는 사람은 그렇게 살 수가 없습니다.
“또 우리는 자연신론에 반대하여” 69p 자연신론이라는 것이 무엇이냐하면, 18세기에 계몽주의적인 과학적 사고와 신학을 절충시킨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세상에 법칙을 만들어 놓으신 다음에 손 때셨고, 법칙으로 돌아가게 하셨다. 마치 시계공이 시계를 만든 다음에 계속 시계를 붙들고 바늘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태엽감아놓고 던져놓으면 그 시계가 저절로 돌아가듯이 하나님이 세상을 그렇게 창조하셨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간섭, 섭리 이런 것들은 필요 없게 되고 법칙에 의해서만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을 의존하므로 존속한다는 것을 주장해야만 한다” 69p 자연신론은 하나님을 인정하지만 사실은 하나님을 세상 밖으로 쫒아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안보고 항상 하나님을 의존하므로 그 법칙들이 작용한다고 봅니다. 나날이 유지해 가시는 것도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다고 봅니다.
1) 창조의 시기
아우구스티누스가 창조의 시기에 대한 질문에 이렇게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창조론을 우리가 말할 때 이렇게 반론합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면 혼자 계셨을 때는 무엇을 하셨느냐고 말입니다. 그러나 때라고 하는 것은 시간이요, 그 시간은 피조물과 함께 도입되었으니 창조가 있기 전까지는 때라고 하는 것 자체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창조는 너무 늦은 때도 아니고 너무 빠른 때도 아니고 그저 창조는 하나님이 정하신 시점일 뿐입니다“
늦다 빠르다 하는 것은 시간의 연속 길이가 있어야 하는데, 창조와 함께 시간이 시작이 되니까 하나님 혼자 무엇을 하고 있었냐고 물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때라고 하는 것 자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태초 전에는 끝없는 영혼이 존재한다고 본다. 창조 사역의 첫 부분은 엄밀히 무에서의 창조이며, 기존 재료를 사용치 않은 창조이었다. 무에서의 창조한 표현은 성경에서는 직접 찾아 볼 수 없고, 외경 중의 한 책에만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개념은 다음의 성구에 분명히 잘 나타나 있다.” 69p
여러분, 학문 중에서 가장 매력적인 학문은 화학입니다. 제가 1년 정도 천체물리학을 공부했는데, 성경을 이해하는데 생애에 잊혀 질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도움을 받았습니다. 굉장히 나의 눈을 뜨게 해준 사건이었습니다. 여기에는 수많은 물건들이 많습니다. 이 물건들은 하나의 겉으로 드러난 모양일 뿐이고, 이 속에 더 이상 나뉘어질 수 없는 원소라는 것들의 결합으로 이루어집니다. 똑같은 원소가 결합을 해도 그것은 아주 다양한 형태로 나타납니다. 예를 들자면 ‘F2’라고 하면 철입니다. 철은 철인데 산소하고 결합되면 산화철이 되어서 녹이 되어버립니다. 이런 식으로 해서 다양한 원소들과 결합이 되는 것입니다. H는 수소이고 O는 산소인데, 두 분자와 한 분자가 만나면 물이 되어버립니다. 이런 식으로 원소들이 합쳐지고 분열하면서 여러 가지 다른 물질로 만들어 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수 천년 되면서 완전히 썩어서 아무 물건이 없다고 하더라도 질량 불변의 법칙에 의해서 원소로 환원되어 에너지를 어딘가에 남기고 사라진 것입니다. 왜냐하면 덩어리진 것들이 흩어질 때에는 열과 에너지를 내고 흩어진 것들이 모일 때에는 주위의 있는 에너지와 힘을 빨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물 같은 것이 얼음이 되려면 에너지가 필요하고, 다시 녹을 때에는 어떤 에너지를 내게 됩니다. 음식물이 속에 들어가서 분해되면서 거기서 열과 에너지들이 나와서 우리가 살아가는 운동의 자원으로 삼습니다.
신기한 것은 우주 밖으로 나가보면, 이런 것들은 우주 공간 안에서 매우 독특한 특성입니다. 우리가 원소를 배울 때 160여가지를 배우는데, 어떤 사람들은 지구에 있는 160 몇 가지의 원소는 우주 어디에 가든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렇게 많은 원소들이 모여 있는 우주의 공간은 아주 독특한 공간입니다. 우주의 공간에 나가보면 H 수소밖에 없습니다. 원소라고 하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크기입니다. 그러므로 없다고 하는 것이 오히려 맞습니다. 그런데 이 수소가 3개가 합쳐지면 헬륨이 되는데, 이 떨어져 있는 3개가 합체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열입니다. 역사적으로 금을 만들려고 노력했습니다. 그것을 연금술이라고 하는데, 결국 못만들었습니다. 못 만들 수 밖에 없는 이유를 현대과학이 밝혀냈습니다. 만들 수 있는데 50억도의 열이 필요합니다. 아직까지는 50억도의 열을 만들 수 없습니다. 만들어 낸다면 금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원래 H 밖에 없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열로 만들어지면서 지구상의 160 몇 가지의 수 많은 원소들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열이라고 하는 조건의 영향을 받으면서 이런 결과들이 생겨난 것이지, 원래의 형태가 아닙니다. 우주 공간에 가면 ‘H’만 있는데, 이 ‘H’도 더 거슬러 올라가면 무언가 없는 것을 나오지 않겠습니까, 무에서 창조 되었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 명쾌한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 생각해보면 ‘H’라고 하는 것이 현대 과학으로 생각을 하니까 상정이 되는 것이지, 옛날 고대인이 ‘H’가 무엇인지 알겠습니까, 이런 것들로부터 만들어 졌을때 우리는 무로부터 만들어졌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무로부터 만들어졌다고 해야 합리적인 것이지, 유로부터 만들어졌다고 하면 굉장히 어려운 문제가 나오게 됩니다. 물질 자체가 스스로 존재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신학에서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기 어려우니까 원해물질은 신과 함께 영원히 존재했다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하나님이 물질을 의존하든지 물질이 하나님을 의존하든지 둘 중 하나이지, 둘 다 공존할 수 없습니다. 둘 다 공존한다면 어느 것도 절대적으로 필연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동양철학에서 ‘무’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 자체가 무한한 잠재력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놀랍게 사상적으로 통하는 것을 봅니다. 교리라고 하는 것 자체가 결국은 논리의 틀을 담는 것입니다. 논리의 전개를 하다보면, 마지막에는 공간, 시간, 삶의 목적, 도덕의 근원등의 문제들에 접하게 됩니다.
선악의 문제를 놓고 보면, 전 세계가 테러 때문에 골치를 앍고 있는데, 테러를 자행하는 나라에서는 자기네는 이런 식으로 테러를 하지만 미국을 비롯한 강대국들은 다른 방법으로 했을 뿐이지 더 많은 고통을 안겨주는 테러를 했다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테러리스트 한 사람이 자유국가에 테러를 일으키고 도망을 갔습니다. 도망을 가서 자기네 나라로 들어갔습니다. 도망을 갔는데 지명수배가 내리게 됩니다. 자기네 나라가 결국은 친미정권이 들어섰기 때문에 지명 수배가 됩니다. 그래서 정부는 추적을 하고 테러리스트는 산 속으로 숨어들었습니다. 그 산 속에서 옛 날에 알던 같은 민족을 만나 이야기를 하게 되고, 그 사람이 테러리스트를 숨겨주게 됩니다. 그래서 숨어 은신하게 되고, 숨겨준 사람에게 돈을 많이 주었습니다. 그런데 동네 사람이 숨겨준 사람을 신고합니다. 그래서 정부가 와서 테러리스트를 체포하고 호송이 되는데 테러리스트와 같이 있는 동료들이 와서 자기를 구원해주게 되었습니다.
다시 풀어서 하나씩 설명하겠습니다. 이 테러리스트가 자유국가에서 테러를 저질렀습니다. 선입니까, 악입니까, 그 다음에 테러리스트의 국가인 그 나라의 정부가 볼 때에 그 테러리스트가 다른 나라에 가서 테러를 저질러서 국가가 위태롭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국가가 볼 때는 그 사람이 선한 사람입니까, 악한 사람입니까, 그리고 산 속에서 만난 테러리스트를 숨겨준 같은 민족에게 그 테러리스트는 악입니까, 선입니까, 또 정부를 지지하는 동네 주민이 테러리스트를 신고했습니다. 그것은 선입니까, 악입니까, 신고가 되어서 정부로부터 호송되어가는데 그 테러리스트 동료들이 구해주었습니다. 그것은 선입니까, 악입니까,
악을 볼 때, 여기서 말하는 악은 자유민주국가 사람들이 볼 때 악입니다. 정부로 볼 때도 악입니다. 그런데 같은 민족이 볼 때 이 사람은 선입니다. 동네 사람이 볼 때는 악한 사람입니다. 또 테러리스트 동료들에게는 선이었습니다. 도대체 이 사람은 악한 사람입니까, 선한 사람입니까, 선과 악이 그 때 그 때마다 다른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그래서 결국은 관점에 따라 달라지는 것입니다. 두 개의 관점이잖아요. 이것을 통일 시키는 방법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테러리스트의 관점에 서 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내가 테러를 저지르면 선이 됩니다. 그리고 정부가 나를 잡으려 하는 것은 악입니다. 나를 숨겨준 같은 민족은 선입니다. 나를 신고한 동네 주민은 악입니다. 내가 테러리스트가 되면 정부와 동네주민이 악으로 규정됩니다. 그런데 그것을 과연 절대적으로 판단 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여러 해중에 베트남에 간적이 있습니다. 선교사 집회를 하는데 베트남 기독교연맹 대표단이 왔습니다. 그리고 우리한테 인사를 하며 200불을 월남기독교 발전을 위해서 주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 사람들을 불러서 통역하는 사람에게 말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30년 전에 당신들 민족들이 싸우는 이 땅에 엄하게 한국 사람들이 와서 고통을 안겨준 것에 대해서 한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용서를 빈다.“ 일본 사람들은 자기네들이 한 것은 생각을 안하고 우리를 죽일놈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초등학교 4학년 때 노래를 가르켜주었는데 그 노래를 부르면서 가슴이 벅찼었습니다. “조국 통일을 위해서 나라를 지키시다가 세계의 부름을 받고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서 월남으로 간다“ 이것은 거짓말이었습니다. 미군이 자기네가 싸우다 싸우다 지치니까 한국군에게 도와달라고 요청하고, 그것이 거절되니까 도와주면 무기와 북한에 대한 위협에서 보호해주며, 전쟁에 참여하는 사람에게 돈을 주고, 한국 경제발전을 도와주겠다는 말에 넘어가서 5천명의 젊은이들이 죽게 되었으며, 더 많은 베트남 사람들이 죽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무엇이냐면 신자가 양심을 따라 살아도 선악에 대한 궁극적인 원천이 무엇인가에 대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지만 휘둘리지 않고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10월 유신이 일어났을 때 찬양한다고 깃발들고 그러던 사람들이 예수 믿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이야기 합니까, 선악의 판단력이 없으니까 역사의식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휘몰려 떠내려가는 것입니다. 전두환 대통령이 들어서면 주님이 세우신 종이라고 박수치고 사진 찍은 것처럼 역사의식이 없는 행동들을 예수 믿는 사람들이 하는 이유가 이런 것입니다.
2년 전에 어느 교회에 집회를 하러 갔는데 장로님이 강사대접을 한다고 오셔서 명함을 내미는데 사법 연수원장이었습니다. 그래서 법이야기나 한번 해보자는 심정으로 “장로님, 법이 무엇입니까” 모르는 척하며 물었습니다. “하나의 법이 그 법일 수 밖에 없는 근거가 무엇입니까“ 라며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역사적으로 두 가지 학설이 있다고 말합니다. 자연법 사상과 실정법 사상입니다. 자연법 사상은 천지 창조의 목적이 있고, 즉 하나님이 정해놓은 질서가 있고 그것에 따라서 정해져있는 것을 인간 본성과 자연 속에 묻어있는데 그것을 밝은 이성으로 찾아가서 거기에 맞게끔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법은 최소한 도덕이라고 그럽니다. 그게 바로 법의 기초가 되는 것이라고 보는 자연법 사상입니다. 실정법 사상은 사회가 좋다고 생각하고 만들면 그것이 권위를 갖는다고 주장하는 것이 계몽주의 이후로부터 자유주위가 발전을 하면서 확산됩니다. 그것이 문제를 일으킨 것은 20세기에 와서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히틀러 같은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히틀러가 통치할 때 93%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히틀러 혼자 그 법을 만들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사람들이 바보짓을 해서 끔찍한 나치즘을 만들어내고 파시즘, 궁극주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해서 결국은 과연 인간이라는 집단이 합의만 하면 아무 법이나 만들 수 있는가, 그리고 그것이 법의 근거가 될 수 있는가는 것은 기독교적으로 동의가 안됩니다. 그렇게 되면 안된다는 것은 20세기에 와서 끔찍한 교훈을 통해 다시 자연법 사상으로 회귀한다는 그 장로님의 대답을 들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오늘은 선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내일은 악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 반대가 될 수도 있습니다. 선악의 판단이 그렇게 되서는 안됩니다. 그러니까 그 절대적인 기준이 무엇인지에 대한 커다란 답이 바로 천지창조의 목적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도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교회에 목적을 세워놓으셨습니다. 그래서 참된 인간으로 돌아가게 하시기 위해서 그리스도인이 되는 과정을 걷게 하십니다. 우리가 참된 인간이 되게 하시기 위해서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는 과정을 거치게 하십니다. 참된 세계로 돌아가게 하기 위해서 완전한 교회라고 하는 과정을 거치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 과정을 우리들은 구속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을 공부하면 참 기쁨이 있습니다. 나 같은 인간에게 주님을 배워서 알 수 있도록 은혜를 내려주셨다는 것이 너무나 감사한 것입니다. 하늘 나라의 기쁨이라는 것이 결국 지성의 기쁨입니다. 하나님을 참되게 알게 되면 인간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게 됩니다.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라고 말한 것은 자신의 분수를 알라고 말한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얼마나 놀라운 존재인지 알고 그 품격에 맞게 생각하고 살아 가라는 의미로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의 아름다움과 거기에 묻어 있는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며 살아가게 합니다.
찬양 -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예수님 말씀에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목숨은 제일 쉬운 것입니다. 제일 뒤에 나옵니다. 죽도록 사랑할 때 죽는 것은 쉬운 것입니다. 사랑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주신 세계는 너무 아름다운 것입니다. 아는 것 만큼만 보이는 것입니다. 시간은 무엇일까, 영원은 무엇일까, 하나님이 세계를 왜 만드셨을까, 창조된 인간은 도대체 무엇을 위해 태어났는가, 그를 살게 하는 원동력은 무엇인가, 목적은 무엇인가, 세계 속에 그는 무엇인가, 생각을 해야합니다. 생각을 안하면 우울증에 빠집니다. 왜 우울증에 빠지냐면 자기의 근거가 무엇인지 모르고, 욕망대로 살아보아도 왜 사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런 생각들을 하지 않고 먹고 마시며 사는 사람들은 편할지모르지만, 그것이 어떻게 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과 같이 “하나님은 우리의 지성에 말을 건내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지성으로 대화를 들으시는 분이십니다“라고 말합니다. 여러분들은 인생을 허비하면 안됩니다. 부지런히 공부하십시오, 그 속에서 하나님이 이런 분이시구나! 정말 놀랍다 아멘! 할 때에 눈물이 쏟아지고 주님의 아름다움을 보면 볼수록 주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형언할 수 없는 기쁨입니다. 인간의 가장 중요한 의무는 알고 사랑하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신앙에 있어서 아는 것 없이 사랑하는 것은 극장 포스터보고 연예인과 사랑에 빠지는 것과 똑같은 감정입니다.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격적 사랑이 아닙니다. 진정한 사랑이 필요합니다. 온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 먼저 회개하십시오, 공부하지 않은 것을 회개하고 주님이 주신 머리를 중심 잡는데만 썼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이제는 주님을 알고 사랑하고 순종하겠습니다. 나의 온 마음으로 주님을 찾아가서 내 마음이 돗단배와 같다면 나의 지성은 뱃머리입니다.”라고 고백하십시오. 하나님의 지식을 섭취하면서 하나님 앞에 말할 수 없이 감격하며, 그렇게 어두운 세상을 불꽃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할 수 있는 최고의 섬김은 옛날에 자기처럼 헤매는 사람에게 진리를 전해주어서 바른 길로 돌아오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온 세상에 돈을 다 모아서 건축헌금 하는 것보다 더 위대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한 인간이 천하보다 귀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참답게 알면 영혼을 위해서 봉사할 수 밖에 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무지한 사람들을 지나칠 수 없어서 그에게 참된 인생의 진실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 삶은 현장의 삶입니다. 이런 사람들만이 보혈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길이신 그분으로 말미암는 완전한 행복, 보혈의 삶을 살게 됩니다.
찬양 - 시시 때때로 주만 봅니다
여러분 살아 있는 날 동안 사람들을 주님 앞으로 인도하십시오, 그냥 교회 끌어오는 것만 하지말고 교회 안나와도 인생의 도리가 이렇다는 것을 가르쳐주어야합니다. 그 때에 그 영혼이 쓰러질듯 여러분들 품에 안기면서 나를 좀 도와달라는 고백을 하게하는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다니엘서에서는 “사랑은 옳은대로 돌아오게 하는 사람들은 별과 같이 빛나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교리를 왜 배우냐고 누가 물어보면 하나님을 위해서, 나를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이웃을 위해서 자신있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페오피아 - 사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