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로 따라간 예수
“그들이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에서 오는 것을 붙들어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따르게 하더라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오는지라”(눅23:26-27)
녹취자 : 이재호
많은 사람이 첫사랑에 대해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첫사랑의 신앙의 때 하면 크게 두가지가 생각이 납니다. 그 때는 마음이 한없이 기뻤던 때였고 한편으로는 눈물이 가장 많았던 때가 첫사랑의 때였습니다. 세상적으로는 기쁨과 슬픔이 공존할 수 없지만 그리스도 예수 안의 경건한 신자의 마음에는 슬픔과 기쁨이 공존할 수 있습니다. 단, 그 기쁨은 세속적인 기쁨이 아니고 슬픔도 세속적인 슬픔이 아니어야 합니다. 즉, 하나님이 나 같은 죄인을 사랑해 주신다는 놀라운 기쁨, 동시에 나 대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는 두렵고 떨리는 고백, 두 가지가 함께 공존하는 것이니 전자는 기쁨으로 다가오고 후자는 슬픔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영국의 청교도들은 신자가 가장 경계해야 될 삶 가운데 하나가 구원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이었습니다. 첫사랑의 때, 혹은 첫사랑의 때가 아니더라도 그 사랑을 회복할 때 우리의 마음에는 한순간도 이 십자가가 당연하다 거나 혹은 구원받은 것이 일상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던 때가 없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이 어디에서 시작했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늘을 보고 달을 보다가 신앙을 갖게 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만드신 이 세상을 보면서 하나님을 믿게 된 사람은 없습니다. 공돈이 생기고 부동산에서 부자가 되었다고 해서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믿게 된 사람도 없습니다. 신앙은 누구에게나 항상 한 지점에서 시작합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 같은 죄인을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라고 하는 이 고백입니다. ‘지극히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이 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더럽기 그지없는 이 죄인을 위해서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어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셨다’ 고 하는 이 고백에서부터 이 감동, 이 십자가 아래에서의 눈물로부터 신앙은 시작하는 것입니다. 거기서 불신앙은 끝났고 세상사랑도 끝났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시작됐고 십자가의 은혜가 시작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통해 내가 이제 더이상 세상의 자녀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든 사람들에게는 공통적인 고백이 있는 것입니다.
(찬양)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Was blind, but now I see.
예전에는 몰랐는데 십자가를 통해서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예전에 나는 정말 비참하고 쓸모없는 인간이었는데 그리스도 십자가를 통해서 내가 하나님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거기서부터 우리의 신앙은 시작이 된 것입니다.
그럼 우리 신앙의 타락은 어디에서 시작되었습니까? 어디서부터 우리의 신앙은 미끄러지기 시작했습니까? 사람들이 타락하면 간음하고 도적질하고 살인을 하고 신문지상에 오르내려야 되는 죄를 타락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그런 기준에다가 타락을 놓고 보면 우리 일생 동안 단 한 번도 타락하는 사람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타락은 그것은 이미 마음이 타락한 것이 행위로 나타난 범죄일 뿐이지 타락은 이미 저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그 타락의 시작이 무엇입니까? 십자가에 대한 감격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예수가 나를 위해 죽으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이 나의 죄를 위해 대신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메시지를 들으면서도 눈물 흘리지 못하는 사람들은 누군가가 대신 눈물을 흘려주어야 할 만큼 불쌍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가슴에 손을 얹고 한 번 여러분 자신에게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의 염려와 근심, 돈, 사업, 이런 거 말고 오직 하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 같은 죄인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구나 이 사실이 너무 감격스러워서 눈물을 펑펑 흘리셨던 때가 언젠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처형당하러 가시는 광경을 그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기 전 재판을 받으셨습니다. 원래 십자가라고 하는 이 형벌은 로마인들이 변방의 야만인이었을 때 만들어 놓은 사형집행 방법이었습니다. 그리스어로 ‘스타우로스’ 라고 하는 이 십자가에는 종교적인 의미가 없었습니다. 이 형벌은 인류가 고안해 낸 최악의 형벌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스타우로스’ 십자가라는 말만 들어도 당시 로마 사람들은 매우 기분 나빠했기 때문에 이 말 자체가 모든 사람들에게 금기어였습니다. 그래서 죄를 많이 지어도 국가에 반란을 일으키거나 아주 어마어마한 흉악한 범죄를 저지른 자 이외에는 되도록이면 십자가 형벌에 처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그 십자가의 형벌이 어떤 형벌이었길래 그렇게 그것을 만든 로마 사람들도 두려워했겠습니까? 우선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그때에는 몇 가지 종류의 십자가가 있었습니다. X형, T자형, 우리가 보는 십자가형도 있었습니다. 먼저 하나의 세로 막대를 땅 깊이 묻어서 흔들리지 않게 고정시킨 다음 가로 막대 위에 죄인을 못을 박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손바닥에 못을 박았습니다. 그 못은 여러분들이 기차 레일 위에 옛날에 쓰던 못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뼈를 깨고 으스러지면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문제가 생깁니다. 몸이 무거워서 찢어지는 것입니다. 자꾸 죄수의 몸이 십자가에서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 다음부터는 손목에다가 못을 박았습니다. 손목에다가 못을 박은 다음 그 사람을 밧줄로 고정시켜서 도르래를 이용해서 이미 세워 놓은 세로 막대기에 올려서 거기에 끼워 맞추는 형식으로 십자가에 매달았던 것입니다. 매단 후에는 다리에도 못을 박고 그래도 몸무게가 너무 무거워서 쳐지니까 다리 아래에다가 작은 발판을 만들어 놓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 형벌의 잔인함은 생명이 붙어있는 동안 최대한의 고통을 느끼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못 박히면 금방 죽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6시간 정도 만에 돌아가셨는데 어떤 사람들은 3일씩 안 죽고 매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들어갈 때 반드시 동맥을 건드리기 때문에 동맥에서 피가 나오게 됩니다. 인간이 출혈을 하게 되면 극심한 두통에 시달리게 됩니다. 그 고통을 목숨이 붙어있는 마지막 순간까지 충분히 최대한 느끼도록 고안된 것이 십자가의 형벌이었던 것입니다. 이것도 사형 집형의 한 방법이었기 때문에 이 사람이 사형에 처해야 한다는 재판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시 그 곳의 분봉왕이던 빌라도에게 끌려가서 거기서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재판은 누가 보아도 말도 안 되는 재판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재판이라는 것은 죄 있는 사람을 불러다가 심문을 해서 모든 증거를 가지고 유죄 판결을 내리는 것, 혹은 죄가 없으면 무죄로 풀어주는 것이 법의 정신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를 지으신 일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하신 일은 회개하고 하나님을 믿으라는 것이었고 천국이 가까워왔다는 것이고, 너희는 모든 죄를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좇아서 살라는 그 설교가 그 가르침을 따라 산 것이 예수님의 일생의 전부였습니다. 그러니 요즘으로 말하자면 복지부 장관이나 국무총리라 대통령이 와서 상을 주어야 마땅한 삶을 사신 분이었습니다.
증인들이 나타났는데 증인들은 모두 허위로 증언했고 증인들의 증언 내용 또한 사실에 부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기네들이 증언하는 것들이 서로 모순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 그리스도는 사형을 받으셨습니다. 더 기가 막힌 일은 재판장도 예수가 무죄라고 확신했는데 예수님에게 사형을 내렸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당시에 역사기록을 보면 그 때에 유대인들은 이미 종교지도자들을 중심으로 예수를 죽이기로 정치적인 음모를 꾸몄고 그 음모를 받아들여주지 않으면 유월절에 모인 그 수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에 의해서 예루살렘에서 폭동이 일어날 거 같은 위협을 이 재판장인 빌라도에게 가했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민란이 일어나고 무력으로 그 민란을 진압하게 된다면 당연히 로마 조정에 그 소식이 들어가게 될 것이고 빌라도는 형벌을 받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정치적으로 이득을 얻을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빌라도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어준 것입니다.
예수님은 먼저 십자가에 형벌에 처하기 전 관례를 따라서 브라이도리온이라는 왕궁 수비대가 있는 곳으로 끌려가셨습니다. 거기에서는 크게 두 가지 규례를 행하여야 했는데 첫째는 채찍에 맞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 시대 때 채찍을 연구했던 어느 고고학자에 의하면 말을 달릴 때 쓰는 그런 종류의 채찍이 아니라 채찍 가닥가닥에 갈고리 같은 것들이 달려 있어서 벗은 맨몸에 후려치면 살점이 후드득 뜯겨 나오는 그런 종류의 채찍이어서 십자가에 사형당하기 전에 채찍을 맞다가 절명하는 사람들이 속출했다고 합니다. 확신할 수 없지만 그런 종류의 채찍에 예수님은 맞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무슨 죄를 지어서 그런 채찍에 맞으셨습니까?
또 하나의 규례가 있었는데 자기가 매달릴 십자가는 자신이 짊어지고 가는 것이었습니다. 약 120~150kg 은 능히 될 무거운 십자가를 예수 스스로 짊어지고 사형장인 골고다 언덕까지 올라가야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평소 가르치신 것은 정의였습니다. 정의와 사랑, 이 두 가지가 예수님이 가르친 가장 커다란 가르침이었습니다. 그러면 이 불법한 재판을 당연히 예수님은 ‘잘못된 재판이다’라고 말씀하셨어야 했고 거기에 항거하심이 옳았습니다. 그러나 왜 그런지 예수님은 재판의 결과를 그대로 잠잠히 받아들이기를 마치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어린 양과 같이 하셨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예수님이 빌라도의 재판이 옳다고 인정해 주신 것입니까?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수많은 유대인들의 함성을 옳다고 확인해 주신 것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들의 음모 속에서 그들도 모르는 더 높은 하나님의 지혜를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저들은 모두 그 하나님의 지혜를 이루기 위한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았고 하나님은 더 큰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 계획이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실 때부터 그분은 죽으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께 죄 짓고 멀리멀리 하나님을 떠나 마귀의 지배 아래 들어갔지만 불행했지만, 비참했지만, 자기 스스로는 돌아올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서는 선한 목자의 심정으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때가 됨에 하나님은 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구원받을 우리 인류의 모든 죄를 짊어지게 하셔서 당신 자신은 죽으시고 그 십자가의 죽음 때문에 당신의 십자가를 믿는 우리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셔야 했던 것입니다. 로마서 5장 8절에서 말한 바와 같이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셨을 때에 많은 사람들이 그 십자가를 따라오던 행렬을 이루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그 당시가 유월절이었습니다. 유월절에는 이스라엘 남자 모든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올라와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 유대인들이 그 예루살렘에 가득 모였습니다. 그 사람들에게 최고의 뉴스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과연 순순히 죽을 것인가 아니면 뛰노는 파도도 잔잔케 하고 문둥병자를 고치고 죽은 자까지 살려내던 능력으로 자기를 구원해 낼 것인가 하는 논쟁이었습니다. 그것이 최고의 뉴스 토픽 거리였던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죽은 자를 살려내기도 하시고 다섯 개의 보리떡과 두 마리의 물고리로 수만명의 사람을 먹이실 수 있는 능력도 있었기에 한 때 유대인들은 예수를 임금 삼아서 로마로부터 독립하는 운동을 버리자고까지 했던 기적의 능력을 가지신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너무 실망스러웠습니다. 어떠한 기적도 일어나지 않았고 예수님은 죄인 중에 가장 더러운 죄인으로 낙인이 찍히시고 강도들과 함께 사형을 받으셨던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갈 때에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수많은 사람들이 따라오고 있었지만 오늘 성경은 그 많은 사람들을 정확히 두 부류의 사람들로 나눕니다. 그 첫 번째 사람들은 백성이라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이 말합니다.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있었다’ 라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실 때 백성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의 정체가 무엇인지 보시겠습니까? 오늘 읽은 성경 누가복음 23장 35절을 보겠습니다. 34절 하반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백성은 서서 구경하는데’ 그 다음 48절을 보겠습니다. ‘이르되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 하고 이를 구경하러 모인 무리도 그 된 일을 보고 가슴을 치며 돌아가고’ 했습니다. 이 두 구절만 보더라도 이 백성들의 정체가 분명합니다. 예수의 십자가의 형벌을 구경하러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람이 죽는 것이 무슨 그렇게 아름다운 것이겠습니까? 그러나 모든 인간의 마음에는 호기심이 있기 때문에 남들이 끔찍한 광경이라고 말해도 끔찍한 느낌을 받을지라도 그 현장으로 보고 싶어하는 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그러니 이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죽나 안 죽나 혹은 죽으면 어떻게 죽는가 하는 것을 구경하러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 이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었겠습니까? 이 사람들은 오늘날로 적용해서 말하자면 불신자들이라기 보다는 교회 나오는 사람들 중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눈물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교회 다니지만 자기가 어떻게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지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무엇 때문에 죄 있는 나를 위해 대신 죽어야 했는지 알지도 못한 채 그냥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마 이 사람들 중에도 예수님이 병자를 고쳐 주실 때 나은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고, 벳새다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그들을 먹이실 때 그 보리떡과 물고기를 먹고 배불렀던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으실 때 단지 그 예수의 죽으시는 모습을 구경하기 위해서 따라오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이 천년을 건너 뛰어서 이 현장에 있다면 여러분들은 그런 구경꾼들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실한 신앙의 감격이 있습니까? 이 사람들은 기적도 보았고 하나님의 기이한 말씀도 들었고 소문도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러나 결국 그 기적이 그 소문을 들은 것이 이들을 구원하지 못했습니다. 구원은 믿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넓은 길이고 믿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좁은 길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이 구경하러 따라오는 사람들과 대조를 이루는 또 한 종교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에 대해서는 꽤 긴 묘사가 따라 나옵니다.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오는지라’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울다’라고 하는 단어는 ‘에크라우쎈’이라는 그리스어가 쓰였는데 흐느껴 우는 것이 아니라 엉엉 소리를 내면서 우는 행동입니다. 우리말로 번역한다면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통곡하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오는지라’라고 번역이 되었어야 합니다. 그들은 진심으로 예수를 위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무엇때문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습니까? ‘그분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나쁜 일을 하신 적이 없습니다. 죄인을 용서하시고 굶주린 자를 먹이시고 병든 자는 고치시고 외로운 자를 위해서는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그분을 무엇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합니까?’ 울부짖고 통곡하며 예수를 따라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특별히 오늘 여기에는 ‘여자의 큰 무리’ 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아주 멀리서부터 온 여인들도 있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도 그런 여인 중 하나였습니다. 일곱 귀신이 들려 미친 여자로 인생을 살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그분의 은혜의 감격하며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 좋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기 때문에 그들은 가슴을 쳤습니다.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아십니까? 슬픔이 격해서 울음이 극도에 달하면 폐가 응축되면서 가슴에 고통이 찾아옵니다. 이것을 두드리면 통증이 완화되기 때문에 너무 원통하고 가슴이 아파서 울 때 자기도 모르게 가슴을 두드리게 됩니다. 그러면서 통곡하면서 격한 슬픔으로 울음을 터뜨리며 여자의 큰 무리들이 따라왔습니다. 여자들은 모두 ‘예수를 풀어주고 나를 못 박으시오.’ 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궁금한 것은 이것입니다. 똑같은 광경입니다.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사형을 당하러 올라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구경하며 따라가고 어떤 사람들은 통곡하면서 따라갑니다. 무엇이 이런 차이를 만들었습니까? 왜 남들은 구경하며 웃으며 따라갈 수 있는 이 십자가의 길을 그 여자들은 슬피 울지 않고는 통곡하지 않고는 가슴을 치지 않고는 따라갈 수 없는 길이 되었습니까? 오직 단 하나의 차이뿐입니다. 이 백성들에게 없는 그 무엇이 이 여자들의 마음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다른 것이 아닌 사랑입니다. 이 여자들은 칼빈 선생이 말한 바와 같이 예수가 이렇게 죽으시는 것이 자기의 죄 때문인지도 몰랐고 이렇게 죽고 나면 하나님이 다시 영광스럽게 부활시켜 주실 것이라는 사실도 아직 몰랐습니다. 그러나 이 여자들의 마음속에는 예수를 향한 사랑이 있었습니다. 왜냐면 그 사랑을 시작한 것이 아니라 인생말종같이 살던 자기들에게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자신들을 위해서 예수께서 직접 오셔서 흐르는 눈의 눈물을 씻겨 주시고 그들이 당하는 고통에 동참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진심으로 그들의 죄를 당신의 죄처럼 여기서 하나님께 대신 용서를 빌어 주셨고 굶주릴 때 먹이고 외로울 때 그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이 사람들은 일생의 처음으로 자신의 영혼에 목자같은 분을 만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일생 동안을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다니며 그 말씀에 은혜를 받고 그분과 함께 가난하고 병든 자들을 섬기며 복음을 전하는 것을 인생의 보람으로 알고 살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성령의 능력을 한량없이 부어 주셨던 병든 자를 고치고 귀신을 내어 쫓는 권세까지 주셨던 그 제자들은 모두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도망쳤습니다. 비겁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들은 예수의 패거리로 몰려 큰 곤욕을 치를 위험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곡하며 따라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톨스토이는 자신의 한 작품 속에서 말하기를 ‘사랑의 감정은 죽음의 공포를 능가한다’고 이야기했고 투르게네프도 같은 뜻의 이야기를 참새라는 글에서 남겼습니다. 너무 예수를 사랑했기 때문에 아무것도 무섭지 않았습니다. 다만, 내 사랑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헤어지는 것, 그 것만이 이들에게 가장 큰 슬픔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 여자들이 가슴을 치며 슬피 통곡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따라갔던 이유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사람을 원하셨겠습니까? 열두제자는 당신을 버리고 다 도망갔지만 이름도 기억할 수 없는 이름없는 여자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시던 그 광경에 동참하면서 십자가를 따라서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와 함께 부귀를 누리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예수 때문에 성공하고 싶은 사람 헤아릴 수 없고, 예수 때문에 영광받고 싶어하는 사람 아주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 위해 고난을 받으려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찬양)
오 예수님 내가 옵니다 못박히신 십자가 앞에
그 큰 사랑 눈물에 겨워 울며 울며 돌아옵니다
1904년 경의 일이었습니다. 인도 카시아라는 지방에 복음이 전파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회심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존스톤이라는 선교사가 그 지역을 방문할 때의 일이었습니다. 동네마다 가보니까 어른들은 없고 애들이 동그랗게 둘러 앉아서 울고 있었습니다. 존스톤 선교사가 물어봤습니다. ‘애들아 너희 왜 우니? 너희 부모님들은 다 어디 가셨니?’ ‘선교사님, 우리 부모님들은 모두 부흥회에 가셨습니다.’ ‘그런데 너희들은 왜 울고 있니? 엄마, 아빠가 없어서 우는 거니?’ 아이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대답했습니다. ‘아니에요. 우리는 엄마, 아빠가 없어서 우는 것이 아니에요. 예수님은 우리를 많이 사랑하셔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는데 우리는 예수님을 조금밖에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생각하니까 너무 슬퍼서 눈물밖에 나오지를 않습니다.’ 그 존스톤 선교사가 큰 감명을 받고 중국 선교사로 오게되고 그 사람에게 영향을 받았던 선교사들에 의해서 그 유명한 평양대부흥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찬양)
머리에 가시 면류관 어디에 쓰셨는가
채찍에 피 흘리심은 누구를 위함인가
마지막 피 한방울 나 위해 흘리셨네
오늘날은 이 십자가에 대한 눈물이 사라진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저마다 예수 믿고 이름 내고 싶어하고 예수 믿어서 부자가 되고 싶어하고 예수 믿어서 이 세상의 많은 것들을 누리고 싶어 합니다. 입으로는 예수를 찾으나 진짜 예수를 찾고 싶은 것이 아니라 예수를 수단 삼아 진짜 자기가 사랑하는 것을 얻고 싶어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세월은 많이 흘렀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혔던 예수 그리스도의 시신은 치워졌고 십자가도 어디론가 치워졌습니다. 지금 예루살렘에 가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올라가셨던 그 ‘비아 돌로로사’, ‘비탄의 길’이라고 하는 그 곳에는 지금도 여섯 개의 표지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첫 번째 넘어지셨던 곳, 두 번째 십자가를 지고 쓰러지셨던 곳, 표시가 되어 있습니다. 이름 모를 집과 상점들이 가득 들어서 있습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십자가는 지금도 교회 안에 우뚝 서 있습니다. 함께 믿노라고 하면서도 어떤 사람들은 웃고 떠들고 구경하며 십자가를 따라가고 어떤 사람은 가슴을 치고 슬피 통곡하며 예수의 십자가를 따라갑니다. 어떤 사람은 사랑 없이 예수를 말하고 어떤 사람은 사랑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고 그 사랑 때문에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교회를 위해 자신의 육체에 채우려고 합니다. 여러분은 두 종류의 사람들 중 어떤 부류에 속하는 사람입니까? 마지막 죽는 그 순간까지 험한 십자가를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존귀, 영광 모든 권세는 주님이 홀로 받으시라고 하고 멸시, 천대 십자가는 여러분이 짊어지시기 바랍니다. 어디서든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사랑하는 사람은 죽음이 두렵지 않을 것이니 그 십자가의 감격 속에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이 예수 그리스도를 죽는 그 날까지 사랑하고 마지막에 ‘나는 그분과 함께 일생을 행복하게 지냈노라. 나의 자랑 십자가.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그렇게 죽을 수 있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