팡세 1부
녹취자 : 김세나
[진행자] 안녕하세요. 성경을 기초로 한 명서 읽기 프로젝트 서재의 재발견의 아나운서 박아영입니다. 1956년 미국을 떠들썩하게 하였던 사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명문 휘튼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한 짐 엘리엇이 아오카 족에게 복음을 전하다가 창과 도끼로 무참히 살해를 당하였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당시 유명 일간지들은 그의 죽음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얼마나 불필요한 낭비인가!” 글쎄요. 세상이 말하는 성과를 내지 못했다고 해서 그의 선택이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60년이 지난 지금 그의 죽음이 헛되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그의 죽음이 복음의 씨앗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소개할 작품의 저자 역시 그렇습니다. 세상은 그의 선택을 두고 안타깝다고 이야기합니다. 과연 그의 선택은 무엇이었겠습니까? 오늘 우리를 그 작품 속으로 안내해줄 메인 스피커를 소개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김남준 목사님을 모시겠습니다.
[진행자] 열린교회 김남준 목사님 오셨습니다. 안녕하십니까.
[김남준 목사님] 네. 반갑습니다.
[진행자] 네 목사님 반갑습니다. 오늘 서재의 재발견에서 목사님을 드디어 모시고 시간을 진행해 보려고 합니다. 특별히 열린교회 진짜 아름다운 공간으로 초대해 주셨습니다. 너무나도 감사를 드립니다. 저희가 이 시간이 기대되는 것이 저희가 녹화 전에 목사님께서 기도를 해 주셨는데, 이 시간을 통해서 주님을 더 찾게 되는 강의가 되기 바란다고 기도를 해 주셨습니다. 저희가 그러한 기대를 가지고 강의를 시작해 보려고 합니다.
[진행자] ‘김남준 목사님’ 하면 많은 분들이 기대하고 계신 것이 책을 워낙 많이 읽으시고, 많이 쓰신 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책을 언제부터 좋아하게 되셨습니까?
[김남준 목사님] 책은 어렸을 때, 초등학교 들어갈 무렵부터 좋아하였습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닌데, 많은 사람들이 책을 좋아하지 않습니까?
[진행자] 그래도 책을 어렵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습니다.
[김남준 목사님] 네. 그 사람들은 그들의 세계가 있겠습니다.
[진행자] 네. 그 사람들은 그들 세계를 살아가겠습니다. 그러면, 목사님께서는 어렸을 때부터 책을 좋아하시고, 많이 읽으시고, 많이 쓰시는데, 이러한 질문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책이 가지는 힘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김남준 목사님] 책이 가지는 힘은 자기를 다른 방향에서 생각하게 만들어 주는 힘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보던 관점이 아닌 다른 관점에서 자기를 볼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힘에 있어서 책을 능가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진행자] 어떻게 보면 굉장히 한정적인 세계관, 이러한 시각을 열어주는 역할을 하는 하겠습니다.
[김남준 목사님] 제가 모든 사람의 삶은 다 살 수 없으니까, 책을 통해서 달리 살았던 삶, 나 아닌 다른 입장에서 나를 보는 삶, 이러한 것과 함께 소통하면서 자기가 성숙한 인간이 되어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진행자] 네. 그러한 의미에서 책이 힘을 가지고 있다고 보시는 것 같습니다. 좋습니다. 오늘 사실 많은 분들이 이 책을 정말 목사님의 도움을 굉장히 간절하게 필요로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참 어려운 책이기도 하고, 목사님께서 쉽게 풀어 주시면 훨씬 재밌게 읽어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책을 소개하기에 앞서서 함께 읽어가면 좋을 만한 책들을 가지고 오셨다고 들었습니다. 그 책들이 어떤 책인지 소개해 주시겠습니까?
[김남준 목사님] 시간이 많지 않아서 간단히 소개해 드립니다. 「팡세」이 책이 있으니까, 읽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파스칼에게 매우 많은 영향을 주었던 사람 중 하나가 몽테뉴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몽테뉴의 「수상록」에서 많은 구절들을 이 「팡세」에서 바로바로 인용을 합니다. 그러나 이제 인간관에 있어서 인간을 심도 깊게 보았던 면에 있어서는 파스칼과 몽테뉴가 매우 닮았는데, 그런데 두 사람이 내리는 결론은 매우 다릅니다. 몽테뉴는 인간은 유한하고 비참하고 무지에 쌓여 있다, 그러나 우리는 계속 알아가면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인생을 사랑해야 한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런데 파스칼은 이렇게 비참하기 때문에 아무리 알아가 봐야 소용이 없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인가 이성으로 찾아갈 수 있는 그 이상의 것을 찾아야 된다고 하면서 이 둘이 갈림길에 갈리게 됩니다. 다음으로 소개할 이것은 파스칼의 책에 나오는 기도만을 모아놓은 책이 있습니다. 「파스칼의 기도」라는 책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제 책도 살짝 끼워 넣었습니다. 「염려에 관하여」, 이 책은 인간의 실존 문제, 고독의 문제, 존엄의 문제, 이러한 것들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팡세」와 상당히 많이 결을 같이 한다고 생각해서 제가 추천서로 올려놓았습니다.
[진행자] 이렇게 세 권의 책을 함께 소개해 주셨습니다. 이 책들을 함께 읽으면서 「팡세」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받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자, 그러면 본격적으로 오늘 소개해 주실 책은 어떤 책입니까? 제목을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김남준 목사님] 블레즈 파스칼의 「팡세」입니다.
[진행자] 네, 좋습니다. 본격적으로 「팡세」속으로 여행을 떠나보도록 하겠습니다.
[김남준 목사님] 여러분들은 「팡세」라는 책을 완독을 못 하였더라도, ‘아 그 이야기가 파스칼이 한 이야기구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1cm만 낮았어도 세계의 역사가 바뀌었을 것이다.” 이 이야기는 누가 이야기하였겠습니까? 파스칼입니다. 그리고 또한 더 유명한 것이 있습니다. “인간은 갈대다. 그러나 생각하는 갈대다” 유명한 이야기는 「팡세」를 안 읽은 사람들도 알고 있을 정도로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실제로 17세기에 나온 책 중에서 「팡세」처럼 이렇게 오래도록, 어떤 사람의 조사에 의하면 17세기에 나온 책 중 가장 여태까지 많이 팔리고 있는 책이 파스칼의 「팡세」라고 불리워집니다.
「팡세」라고 하는 이름은 ‘생각한 것들’이라는 뜻입니다. ‘아이디어’입니다. 그런데 이때에는 기독교 신앙이 매우 약화되던 시기였습니다. 그때 신앙심이 뜨거웠던 파스칼은 포교, 그 당시 ‘교’라고 하는 것이 기독교밖에 없었으니까, 다 기독교 국가이니까 쇠퇴해 가는 기독교, 기독교 신앙에서 떠나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 기독교의 진리가 얼마나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가, 인간의 실존에 대한 답을 주는 것이라고 하는 것을 변증하는 목적으로 이 책이 쓰여진 것입니다. 알다시피 이 책은 900여 개의 짧은 단장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것을 모두 모아서 사실은 거대한 작품을 쓰려고 했었는데, 만약에 완성되었더라면 그것은 아마 신학대전과는 또 다른 종류의 방대한 저서로서 기독교를 변증하였을 것이라고 생각되는데, 39세 젊은 나이로 죽습니다. 그래서 완성을 못 하였습니다. 나중에 이것들이 발견이 되어서 1669년에 포르로아얄 판으로 제1판이 나오게 됩니다.
사실은 「팡세」라고 할 때, 사람들이 몇 페이지 읽다가 덮습니다. 그 이유가 어렵다고 하는데, 사실은 이 책은 그렇게 어려운 책은 아닙니다. 워낙 생각을 촉구하는 책들을 잘 안 읽다가 갑자기 이러한 것들을 대하니까, 죽 같은 것을 먹다가 갑자기 딱딱한 힘줄 들어가 있는 갈비 씹는 것 같은 느낌이 날 뿐이지 그렇게 어려운 책은 아닙니다.
[진행자] 소화하기 조금 버거울 뿐이지, 어려운 책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김남준 목사님] 네. 오히려 책이 어려우면, 이 책이 체계를 가지고 된 것이 아니라 짤막 짤막한 문장, 10페이지, 12페이지 되는 것부터 시작해서 한 줄도 안 되는 것까지 이러한 것들이 다 섞여 있는데 이것이 물론 본인이 순서를 나누어 놓은 것도 있지만 안 나눠 놓은 것도 많습니다. 후대 사람들이 오랜 연구 과정을 통해서 정리를 하였는데, 그렇게 산발적인 것들을 읽어나가려니 굉장히 힘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팡세」라고 하면 무엇이 생각이 납니까?
[청중] 기억나는 문구가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천사처럼 행하려고 하는 사람이 짐승처럼 사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큰 불행이다.”
[김남준 목사님] 굉장히 정확하게 지적을 해 주셨습니다. 「팡세」가 가지고 있는 아주 굉장히 호소력 있는 점이 바로 그러한 점입니다. 이 책은 1부와 2부로 나누어집니다. 1부는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인간의 비참함, 그리고 정확하게 말하면 미천함. 이것은 미미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명한 이야기가 “무한한 우주의 영원한 침묵은 나를 무섭게 한다.” 단순히 겁나는 정도가 아니라 공포에 질리게 만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을 우리에게 1부에서 보여줍니다. 그리고 2부는 하나님과 함께 사는 사람들의 행복, 이 두 개를 대조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2부는 썩 성공적이었던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런데 1부는 매우 성공적이었고, 심지어 후에 프리드리히 니체가, 당연히 그 사람은 무신론자입니다. 철저히 기독교에 대해서 반대하고 나중에 「적그리스도」라는 책도 씁니다. 이 사람이 인간론에 대해서 극찬한 책이 바로 「팡세」입니다. 그리고 니체가 「팡세」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를, 죄송합니다. 목사이기 때문에, 이것은 나의 견해가 아닙니다. 지금 하는 이야기는 니체의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니체에 의하면 “저 파스칼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기독교는 루터나 칼빈, 여러 소위 종교개혁자라고 하는 사람들의 상스러운 기독교가 아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진행자] 우리가 위대한 종교개혁가라고 부르는 사람들을 …
[김남준 목사님] 니체의 눈에서는 상스럽게 보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이성을 말살시킨다고 보았습니다. 그런 상스럽고 우악스러운 기독교가 아니다. 그러면 무엇인가? 이것은 끊임없이 인간 속에 파고 들어가고, 파고 들어가고, 파고 들어가서 결국 인간이 실존주의자들이 후에 고민하게 된 인간에 대한 거의 모든 것들을 다 고민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거기에서 두 가지를 발견하였던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조화를 이룰 수 없는 양면성, 이것은 아까 이야기 하였듯이 천사 같은 존재이면서 악마 같은 존재, 우주의 영광이면서 쓰레기, 온 우주를 심판할 심판자이면서 동시에 괴물. 이 양면성을 인간이 동시에 가지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결국 1부를 가장 주의 깊게 읽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은 「팡세」의 2부를 대신해서 읽을 책들은 아주 많습니다. 그런데 1부를 대신해서 읽을 책들은 많지 않습니다. 그 위대성, 거기에서 보면 실존주의 이후에 나오는 모든 작품들에 대한 눈이 확 열리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자, 우리가 간단하게 우선 이 사람(블레즈 파스칼)에 대해서 소개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사람들이 대개 문학, 예술, 과학에 대해서 천재성을 가진 사람들이 종종 있을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은 모든 방면에서 천재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모든 방면에서 천재성을 가지고 있어도 결국 어느 한 부분, 두 부분에만 발현이 되는데 그는 다 발현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영역에서도 무시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12살에 유클리티 기하학 32번 명제를 풀어냅니다. 그리고 아르키메데스의 원추곡선론의 정리를 풀어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수학에서 배웠던 파스칼의 정리라는 공식이 나오지 않습니까. 이것이 수학자, 기하학자로서의 면모라면 이 사람은 물리학자입니다. 파스칼의 원리를 만들어 냅니다. 자동차, 어마어마하게 2톤, 3톤씩 되는데 기계 하나로 올리지 않습니까. 파스칼의 원리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만들어 내는데, 그뿐만이 아닙니다. 아버지가 지방 세무법원장이었습니다. 일부러 부정을 행하였는지 우리가 판단할 수는 없겠지만, 동네에서 폭동이 일어났습니다. 왜냐하면 세금이 공정하게 부가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수학적인 문제가 있다고 파스칼은 생각을 하였습니다. 아버지는 어마어마하게 괴로워서 두 시간 이상 잠잔 적이 없을 정도로 이렇게 6개월 동안 고통을 받았다고 하는데, 파스칼이 19살에 아버지를 위해서 계산기 만들어 줍니다. 다이얼 식으로 되어 있어서 어떤 사람은 컴퓨터의 원조라고 이야기하는데, 그것까지는 아니고 수동식으로 오늘날의 전자계산기의 원조 정도는 되겠습니다. 그래서 숫자판이 있어서 그것을 돌리면 다이얼이 돌아가면서 연산이 되는 것이었는데, 정확하게 나올 것 아니겠습니까. 그 정도로 끝나지 않습니다. 심지어 그는 확률에 있어서도 굉장한 명성을 떨쳤고 그뿐만 아니라 이곳에 모인 분들 오실 때 무엇을 타고 오셨습니까?
[청중] 지하철입니다.
[김남준 목사님] 그러면 내가 가서 기다리면 지하철이 옵니다. 그러면 지하철을 가지고 가는 것이 아니라, 지하철은 누가 탈지 모르지만 지하철이 오고 내가 그것을 맞춰서 탑니다. 그것을 파리에서 제일 먼저 생각해 낸 사람이 바로 파스칼입니다. 그래서 전에는 어디에 가고 싶으면 말을 가지고 오던지, 말을 빌렸는데 마차를 운행을 시키는 것입니다. 언제는 어디를 지나갈 테니까 탈 사람은 모여라. 그렇게 해서 교통 체계를 만들었습니다. 그럴 정도로 아주 다방면의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어떤 한 인물의 사상이나, 그 사람의 한 일을 생각하려면 우리 시대에서 그를 보아야 하겠습니까. 먼저 그 사람의 시대에서 보아야 하겠습니까.
[진행자] 먼저 그 사람이 어떤 시대를 살았는지 보는 것이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김남준 목사님]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먼저 그 사람이 시대에서 그를 정확하게 읽어내고 그 다음에 시대가 바뀌어도 적용될 수 있는 원리들을 꺼내어서 우리 시대에 그가 살았더라면 어떻게 하였을까, 그 생각과 사상과 태도는 나와는 어떻게 달랐는가에 대해 생각함으로써 우리가 과거의 사람을 통해서 수 백 년 후에 살고 있는 우리가 지혜를 얻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읽는 방식입니다. 그래서 제일 먼저 필요한 것이 파스칼이 살던 시대가 어떤 시대였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먼저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대게 시대를 여러 가지 방법으로 나누지만, 기독교 국가였다는 것을 고려하면 ‘고대’, ‘교부들의 시대 –중세’로 들어가는 길목에 아우구스티누스라는 거목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중세가 허물어지면서 ‘르네상스’가 옵니다. 이것은 다시 태어난다는 뜻인데, 유명한 르세상스가 옵니다. 르네상스를 여러분들이 공부를 하면 아주 흥미진진하고 이것이 우리의 인생을 살찌우는 학문이구나를 알 수 있습니다. 르네상스 앞에서 눈물을 흘려보지 않은 사람은 다시 태어나지 않은 사람과 같습니다. 그 다음에 르네상스가 끝나면서, 끝난다기보다는 르네상스가 ‘근대’로 이어지고, 그 다음이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인 ‘현대’라고 이야기합니다. 흔히 ‘모던-modern’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현대’가 아니라 ‘근대’입니다. ‘contemporary’가 현대입니다. ‘모던하다’라고 하는 것은 ‘새 거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사이에 중세와 우리로 말하자면, 파스칼은 여기쯤(중세와 근대 사이) 살았던 사람입니다. 이미 그 전에 여기에서 커다란 역사의 어마어마한 변혁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사람들의 생각, 사고방식, 생활양식, 이 모든 것들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의 가장 중심측이 옛길과 새길이라는 두 단어로 요약이 됩니다. 옛길은 라틴어로 비아 안티쿠아(via antiqua), 비아는 길입니다. 옛길입니다. 여기에서 길은 사람 다니는 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고방식, 학문의 방식, 생활방식, 그리고 특별히 인간이 사물을 보는 관점에 대하여 옛 관점, 새 관점 이와 같이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옛 관점은 무엇인가 생각해 보겠습니다. 옛 관점은 실재론과 형이상학 중심이었습니다. 그래서 지상의 세계가 있고, 천상의 세계가 있고, 거기에는 실재가 있습니다. 우리들이 예를 들자면, 사람이 있습니다. 김 아무개, 박 아무개, 최 아무개. 그런데 이런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실재가 있다, 그리고 그 실재에서 사람들이 하층 아래 계층으로 개별자들이 나오는 거다, 그래서 개별자와 보편자라는 여러분들이 고등학교 다닐 때 들어봤던 그러한 개념이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이제 이 두 사람이 나타납니다. 둔스 스코투스(1266-1308)와 윌리엄 오컴(1285-1347)이라는 사람이 나타나니까, 둔스 스코투스는 13세기 때의 사람이고, 윌리엄 오캄도 13세기 사람이고 뒤에는 니콜라우스 쿠자누스라든가 브레드 워딘 같은 사람들이 14세기, 15세기, 16세기 계속 나타납니다. 그러면서 완전히 사물을 보는 새로운 관점들을 내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윌리엄 오컴 같은 사람은 철학사에서 유명하게 따라다니는 용어가 ‘오컴의 면도날’이라는 별명이 따라다닙니다.
[진행자] ‘오컴의 면도날’ 그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김남준 목사님] 면도날은 무엇입니까? 통나무를 자를 때 면도날로 자르지는 않습니다. 그런 것은 도끼로 하고, 몇 분의 몇 밀리미터까지 정밀하게 잘라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반 토막만 내면 됩니다. 그런데 만약에 모눈종이 같은 것을 정확하게 잘라야 하는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부엌칼이나 전기톱 같은 것으로 안 됩니다. 당연히 면도날과 같이 세밀한 것으로 잘라야 합니다. 그래서 ‘오컴의 면도날’이라는 말의 뜻은 어떤 사물을 말할 때, 아직 입증되지 않은 너무 많은 가정을 세워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면 이러한 것입니다. 신문에 이러한 보도가 났습니다. ‘승용차 전복되어 전원 사망’ 이 기사가 났습니다. 다른 기사를 보면 ‘승용차가 앞에 있는 차를 피하려다가 뒤집어지고 뒤집어져 다시 미끄러져서 사람이 죽었다.’ 이렇게 복잡하게 기사가 나왔습니다. 이것이 복잡해지면 복잡해질수록 아닐 개연성이 많다고 하는 것입니다. 앞차를 피했는지 안 피했는지 이것은 또 다른 판단입니다. 무슨 이야기인지 아시겠습니까? 이것은 사실을 조사해 봐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문기사는 그렇게 써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자기 생각을 집어넣으면 안 됩니다. ‘사람이 죽었다.’고 이야기 해야지, 자살인지 타살인지도 안 밝혀졌는데 괴로워했던 것을 보니까 자살한 것 같다고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을 다 깎아 내 버리는 면도날, 그래서 이 사람은 맨 위에 있는 ‘자동차가 전복되어 전원 사망’ 이런 식으로 하는 것이 가장 믿을 만하고, 가정이 따라붙을수록 이것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많다고 하는 것을 잘라 낸 것입니다.
왜 이런 이야기 나왔는가 하면, 중세 시대에는 이성을 너무 신뢰한 나머지 신을 이성으로 증명해 볼 수 있다고까지 생각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수많은 가설들을 세워야 했습니다. ‘오컴의 면도날’에 의하면 모두가 설 자리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될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생각을 하게 했던 오컴의 생각은 기고만장한 이성의 시대를 좀 접고 신앙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이성으로 알 수 있는 것과 알 수 없는 것의 구분을 명확하게 하고, 알 수 있는 것은 이성으로 알아야 하지만 이성으로 알 수 없는 것을 무모하게 이성을 사용해서 수많은 가정을 만들어서 입증할 수 있는 것처럼 그렇게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쳐낸 것입니다. 그렇게 놓고 보니까, 한 시대를 장식하던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에서 나왔던 어마어마한 중세의 신학책들이 졸지에 어떤 의미에서 가치를 재평가를 받아야 하는 상황이 온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바로 ‘새 길’입니다. 새 길에서는 출발할 때, 예를 들어서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이 빨간 책, 노란 책, 다양한 책이 있을 때 ‘책이란 무엇일까?’ 생각하면서 고민을 합니다. 그것에서 내려와야지만 정상적인 사고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새 길’ 방식에서는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이 책 여기에서부터 시작을 할 수 있다고 봅니다. 왜? 어차피 ‘책’이라는 추상명사는 우리가 무엇이라고 상정할 수 없는 것이니까, 이것을 통해서 거꾸로 올라가는 것이지 우리가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형이상학보다는 인간의 경험과 감수성을 훨씬 중요하게 여기는 풍조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기운들이 르네상스에서 폭발하듯이 뛰쳐나오면서 한 시대를 이루어가게 되었습니다.
한 가지 더 질문해 보겠습니다. 우리의 인류의 역사에서는 우리가 여태까지 우리가 생각하던 틀을 완전히 깨뜨려서 완전하게 새로운 생각을 하게 되는 전환을 가져올 때 우리가 흔히 뭐라고 합니까? 힌트를 드리면 과학사의 어느 인물을 짚습니다. 내가 그 책을 읽었는데, 무슨 무슨 발견이었습니다. 생각의 전환. ‘코페르니쿠스적 발상의 전환’이라고 말합니다. 이 시대가 얼마나 격동하는 시대였는지 보여드리려고 표를 만들었습니다. 사상사적으로 이미 옛것이 다 뭉개지고 처참하게 폭격을 맞아 부수어진 것 같은 상태이고, 새것은 아직 안 세워진, 새것이 밀고 들어오는 상황입니다. 코페르니쿠스 이전까지는 천동설이었습니다. 그는 지동설을 주장하였습니다. 당시 교황청에서 난리가 났습니다. 갈릴레이가 그 100~200년 후에 나타나서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 맞다고 증명해 내었습니다. 엄청나게 교황청에서 핍박하고 유명한 이야기 있지 않습니까. “그래도 지구는 도는데….” 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마키아벨리, 그는 군주론으로 유명한 사람입니다. 마키아벨리 하면 뭐가 떠오릅니까? 우리가 흔히 정치와 관련되어서 마키아벨리 하면 좋은 의미입니까, 나쁜 의미입니까?
[진행자] 질문이 어렵습니다.
[김남준 목사님] 정치학에서는 마키아벨리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집니다. 마키아벨리 이전까지는 ‘정치’라고 할 때 비록 따라가지 못해도 항상 선이 있고, 왕은 정의와 선을 따라서 나라를 운영해 가야 합니다. 그러면서 ‘대의’를 갖출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마키아벨리는 이것을 쓰레기통에나 던져 벌리라고 하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때그때 국가의 이익을 따라 통치자는 카멜레온처럼 변신하면서라도 국가를 존속시키고 부강하게 하고 왕권을 강화하는 것이 그것이 훌륭한 통치자라고 보았습니다. 문학을 보겠습니다. 셰익스피어가 나타났습니다. 문학에서는 셰익스피어 이전과 이후로 나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교회는 이미 옛날의 우주적인 하나의 교회라고 하는 것이 종교개혁을 통해서 심각한 타격을 입고 두 개의 세계, 개신교의 세계와 천주교의 세계로 양분되어 버린 것입니다. 예전의 절대적인 것들이 모두 무너지면서 이것들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속에서 아직 평범한 사람들이야 관성에 의해서 그렇게 살아가고 있을지 모르지만,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이미 옛날에 있는 모든 것들대로 생각할 수 없는 시대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모든 것이 깨져 버린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근대’라는 시대를 철학적으로 기가 막히게 정리해서 디자인했던 사람이 르네 데카르트입니다. 그런데 파스칼이 무지하게 싫어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둘 다 프랑스 태생이었고, 둘 다 수학자였고, 둘 다 천재였습니다. 여러분, 오늘날 핸드폰을 무엇을 사용하고 있습니까?
[청중] 아이폰 사용하고 있습니다. … 갤럭시 사용하고 있습니다.
[김남준 목사님] 여러분들이 그러한 핸드폰을 사용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 데카르트에게 감사해야 합니다. 데카르트가 없었다라면 여러분들이 그러한 핸드폰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였을 것이라고까지 말해도 좋을 정도입니다. 왜냐하면 르네 데카르트는 철저한 이성을 강조하였습니다. 아까 보다시피, 이러한 시대였습니다. 그러면 결국 마지막에 예전에 다 떠받들고 믿었던 진리의 기둥들이 영원할 것이라고 믿었던 것들, 우리의 삶을 맞추었던 것들이 다 무너지고 처참한 광경을 목격하였던 것입니다. 그 다음에 새것이 세워져야 할 텐데, 이렇게 묻습니다. “누가 세우는가?” 천사들이 내려와서 세워 줄 것이다. 그것 아니다. 그러면 누가 세워 줄 것인가. 그러고 나서 생각해 보니까, 마지막에 모든 것은 다 상대적인 것입니다. 지구를 중심으로 한 모든 세계가 움직인다고 믿었는데, 태양의 주위를 돌고 있는 작은 콩알만 한 행성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지구까지도 돌고 있고, 우리가 생각했던 절대적인 것들은 다 상대적인 것이 되었으니까 그 다음에 무엇이, 무엇을 세워야 할 것인가 생각할 때 당연히 중심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신에게서 인간으로 이동하게 되었습니다. 절대적인 선에서 상대적인 선으로 이행이 되고, 이렇게 이행이 되면서 그 중심에 데카르트가 딱 근대라고 하는 그것을 어떤 원리에 의해서 새 길을 걸어야 할 것인가 보여준 것입니다.
그가 보여준 것은 인간의 정신의 커다란 능력은 두 가지입니다. 지성과 감성입니다. 지성은 논리적으로 생각하고 인식하는 것이고, 감성은 느끼고, 경험하고, 몸에 익숙해지는 것들입니다. 이 사람은 철저하게 이성을 믿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지성 중에서도 이성. 고전철학에서는 지성을 이성과 오성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성은 1+1=2. 원인이 있으니까 결과, 결과가 있으니까 원인, 이렇게 나가는 것이고, 오성은 단번에 탁 깨닫는 것입니다. ‘나 그 사람 보자마자 나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어.’ 이러한 식으로 어느 한순간에 탁 깨우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연역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위에서부터 생각하고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데카르트의 저서 「방법서설」에 보면 가장 중요한 인간이 오류에 빠지지 않는 법칙이 있습니다. 의심할 수 있을 때까지 의심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잘 몰라도 그것만은 압니다. ‘생각하는 갈대’ 만큼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생각하다의 말은 라틴어로 cogito(코기토)인데, 이것은 원래 ‘생각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의심하다’, ‘회의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생각을 하는데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비판적으로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 사고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 말도 이 사람이 만들어 낸 말이 아니라, 사실 그 형식 자체가 어거스틴이 이미 한 말입니다. “스이 뽈리오르 에르고숨-내가 오류에 빠진다면, 나는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을 이제 패러디 한 것입니다. 패러디하지 않았느냐고 집요하게 질문을 하였는데 결국 ‘아니다!’ 라고 확연하게 대답을 못 할 정도로 어거스틴의 말을 패러디한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무슨 뜻인가 하면, 이렇게 생각해 보면 되겠습니다. 생각하니까 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다 부인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다 인정하지 않을 수 있는데, 모든 것을 다 의심해도 도저히 의심이 안 되는 마지막 지점이 있습니다. 의심하고 있는 내가 있다는 것입니다.
[진행자] 다 의심하는데, 의심하고 있는 내가 있다는 것을 …
[김남준 목사님] 그것은 너무 분명하고, 그것은 데카르트에 의하면 증명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의심하고 있는 내가 있다는 것은 증명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말의 심오한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제, 이 사람(데카르트)의 이러한 생각이 블레이즈 파스칼에게는, 우선 정리를 하자면 연역적이고 이론적이고 이 사람은 신의 존재를 반대하지는 않았습니다. 진리의 존재를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메르센에게 보내는 그(데카르트)의 서신에 보면 ‘신이 영원 전에 진리를 창조했다.’고 밝힙니다. 그 진리가 있기 때문에 사실은 그 진리가 자연적인 진리가 되어서 우주와 모든 것들이 돌아가는 것이고, 도덕적인 진리가 되어서 인간의 양심을 비추면서 움직이는 하나의 원천이 되고 있다고 본 것입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특별한 신앙의 경험들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신앙에 대해서 회의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인간의 영혼을 ‘사유하는 실체’라고 보았습니다. 생각의 기능을 가진 실체. 그래서 생각의 기능 중 가장 우월한 것이 뭐냐 하면, 원인과 결과를 이야기하면서 이성적으로 따져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심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은 끝까지 받아들이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더 이상 의심할 수 없을 때까지 의심하고, ‘명석판명’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더 이상 분석할 수 없을 정도로 자명하고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것들만을 받아들이라. 그러면 당신은 오류에서 벗어날 것이고, 당연히 중세 때와 같은 끔찍한 신앙의 미명하에 인간에게 폭력을 행하고 이성을 자살시켜야 하는 어리석은 상황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질문해 보겠습니다. 파스칼은 데카르트와 같았겠습니까, 달랐겠습니까?
[진행자] 아까 목사님께서 말씀해 주신 것을 들어보면, 공통점은 많았지만 달랐다라고 힌트를 주셨던 것 같습니다.
[김남준 목사님] 네. 팡세에서 데카르트가 마음에 안 든다고 표현을 합니다. 매우 해로운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단언을 하고, 사실은 데카르트는 파스칼을 좋아했습니다. 데카르트는 파스칼보다 23살 위입니다. 그런데 연대가 조금씩 다르지만, 23살에서 27살 차이가 날 것으로 봅니다. 그런데 파스칼이 18살에 중병에 걸리고 항상 골골하면서 살았습니다. 아파서 파리에 누워 있을 때, 암스테르담에서 데카르트가 문병을 와서 이틀 동안 머물며 대화를 나눌 정도로 사실은 데카르트는 파스칼과 대화를 하고 싶어 하였습니다. 그런데 파스칼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어떻게 다른가 하면 이제 사고가 우선 데카르트는 연역적인 데 비해서 파스칼은 실험적이었습니다. 또한 이론적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파스칼)은 아까 말씀드린 듯이 보면 확률을 주사위 놀이 하는 데에 대입하고, 심지어 인간의 영원한 운명을 이야기할 때에도 유명한 ‘내기 이론’이라는 확률 이론을 동원해서 신을 믿어야 할 것이가, 말 것인가를 이론을 제기하는 데 사용하고 그 다음에 교통체계를 만들고, 수학기를 만들어서 전자계산기를 만듭니다. 이러한 것에서 무엇을 보여주는가 하면, 데카르트는 정신은 가장 지면 위에 있는 사람이면서 항상 생활방식은 하늘에서 노는 사람이었고, 파스칼은 정신은 하늘에 있는 사람이었지만 항상 삶은 땅을 디디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진행자] 실용적인 사람이었다는 말씀입니까?
[김남준 목사님] 실용적일 뿐만 아니라 인간을 향한 따뜻한 마음, 그리고 그가 나중에도 단장에 나오는데, 이성에도 논리가 있고 인간의 마음에도 논리가 있다. 인간의 심정이라고 번역합니다. 그래서 두 가지인데, 하나는 ‘르꿰흐’, 인간의 마음-심장이라고 번역되고, 하나는 ‘라 레종’, 이성입니다. 두 개가 이 논리로 저 논리를 재단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성에도 논리가 있는데 이 심정에는, 느낌, 심정, 정서, 여기에는 이것으로 설명할 수 없는 또 다른 논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연해 해 봤습니까? 그러면 이제 만났을 때 좋아한다는 감정을 느꼈습니까?
[청중] 네.
[김남준 목사님] 그러면 명확하게 모든 사람이 동의하게끔 이론적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까?
[청중]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김남준 목사님] 그렇습니다. 이 학생이 너무 홀딱 반해서 여자 친구를 데리고 왔는데, 대화를 다 한 다음에 “너 왜 그런 여자랑 사귀냐?” 이럴 수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다른 사람은 싫다고 하는데, “세상에 그런 여자가 어디 있냐?” 그럴 수 있지 않습니까. 이것이 뭐냐 하면, 만약에 이성의 논리로 해석이 해결이 된다면 내가 이 여자가 참 좋은 사람이라고 하는 것을 이론으로 설명하면 모든 사람이 다 동의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마음의 논리는 이성의 논리와 다른 것입니다.
제 친구의 이야기입니다. 아주 옛날이야기입니다. 노총각인데 40살이 넘도록 장가를 못 갔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자매가 돈도 많고 증권회사 다니고, 모든 것이 다 갖춰져 있는 자매가 노총각인 그 친구에게 계속 접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 친구에게 미안하지만, 먼저 하늘나라에 갔습니다. 장가도 못 들고 갔는데, 미안하지만 사실은 제가 그랬습니다. “너 볼 게 뭐가 있냐. 네가 좋은 대학을 나왔냐. 공무원 직장 튼튼한 거 가지고 있다는 것 제외하고 연봉이 많냐.” 게다가 그 친구가 키가 작습니다. 그런데 그만큼 지성으로 따라오면 괜찮을 것 같은데, “그런데, 그것을 설명할 수가 없어.” 이성적으로 그만한 사람이 없다고 생각이 되는데, 마음에 사랑이 안 생긴다는 것입니다.
논리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 사람(파스칼)이 간파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확실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인생 자체가, 사실은 둘 다 정규적인 교육을 잘 못 받은 천재입니다. 그래서 둘이 어떤 면에서 통하는 면들도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파스칼은 계속 죽음에 대해서 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자신의 건강부터 시작해서, 건강이 매우 안 좋았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차이는 뭐냐 하면 파스칼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당신 말에 의하면 영혼이 생각하는 실체라고 하는데, 결국 실체인데 생각하는 실체야. 그런데 그것이 영혼의 가장 중요한 핵심인데, 영혼이 하는 일이 사유하는 것밖에 없겠어?’ 물어보는 것입니다. “영혼이 사유하는 것밖에 없겠는가?” 그러면서 이제 무슨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인간은 단지 이성으로 사유하는 실체일 뿐만 아니라 만물에 대해서 느끼는 실체다. 그리고 느끼는 것과 지식을 얻는 것 사이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에 사실은 느끼는 것이 제대로 안 되면 이성으로 아는 것이 제대로 아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이러한 논리는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실질적으로 보면 이러한 것입니다.
데카르트는 말은 그럴듯하였습니다. 예를 들어서 오류에 너무 빠져서 유럽 전체가 말하자면 불행을 겪는 것들을 보고 심지어 30년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독일을 중심으로 신교와 구교가 갈라져서 30년 동안 전쟁을 하고, 데카르트는 심지어 참전을 하게 되는 경험까지 하게 됩니다. 전쟁에 대한 끔찍한 경험을 하면서 철학적인 천재가 ‘이게 도대체 뭔 미친 짓인가.’ 신교, 구교 나눠 놓고 순수하게 신앙이 아니라 이것을 군주들이 이용을 해서 자기의 정치적인 이용에 따라서 자기의 신앙적인 확신과 아무 상관 없이 나는 신교 편, 너는 구교 편 나누면서 민중들을 동원해서 전쟁을 벌여서 30년 동안 독일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유럽 전체 나라들이 거의 다 이 전쟁에 참여할 정도가 되는 끔찍한 상황을 겪으면서, 이것이 결국 무엇 때문입니까. 남의 이야기 듣고 부화뇌동해서 이런 일까지 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네가 판단한 것이다. 네가 끝까지 의심할 수 있는 끝까지 의심하고, 그것을 믿고 따르지 않아야지만 이러한 불행에 빠지지 않는 것이다.’라는 논리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 말이 맞긴 맞습니다. 맞는데 현실은 너무 달랐습니다. 왜냐하면 예를 들어서 돌아갈 데 무엇을 타고 갑니까?
[청중] 대중교통. 버스타고 갑니다.
[김남준 목사님] 어디서 탑니까?
[청중] 버스정류장에서 탑니다.
[김남준 목사님] 버스정류장에서 타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데카르트에 의하면 그것도 의심해 봐야 하는 것입니다.
[진행자] 버스정류장이 버스정류장인지 말입니까?
[김남준 목사님] 버스정류장이 버스정류장인지, 다른 사람이 몰래 가져다가 정류장이라고 속이려고 세운 것은 아닌지, 오늘 파업은 없는지, 그리고 내가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든 것을 점검해봐야 합니다.
[진행자] 그는 참 지독한 분이었습니다.
[김남준 목사님] 그러니까, 현실적으로 그렇게까지 생각을 하면서 사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진행자] 불가능합니다.
[김남준 목사님] “오늘 저녁에 눈이 온 대.”라고 하면 내가 가서 위성지도를 봐야지만 믿는 것이 아니라, 우리 집사람이 “여보, 오늘 밤에 눈이 온 대. 차 가지고 갈 때 조심해.”라고 하면 “응, 알았어.” 그리고 조심하는 마음을 가지고 가는 것이고, 오늘 밤에 대관령을 넘을 때 눈이 많이 쏟아진다고 할 때, ‘아, 그렇구나.’ 체인을 뒤에 가져가는 것이지, 위성사진을 놓고 위성사진도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판독하는 것도 몇 년 배워야 합니다.
[진행자] 그리고 위성사진이 아닐 수도 있지 않습니까.
[김남준 목사님] 맞습니다. 어느 해커가 골탕 먹으려고 살짝 띄어 놓은 솜털 집의 솜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실질적으로 파스칼은 그랬습니다. 이론적으로는 그러한 주장을 할 수도 있지만, 실제적으로 사람들은 그렇게 살아가지 않는다고 하면서 유명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선생님은 자기를 사랑합니까?”
[진행자] 의심해 봐야 할 것 같지만, 네! 사랑합니다.
[김남준 목사님] 사랑합니다. 원수를 사랑합니까?
[진행자] 아, 노력은 합니다.
[김남준 목사님] 원수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주 정연한 논리가 있습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것은 논리가 없습니다.
[진행자] 그런 것 같습니다. 누구는 이래서, 이래서 싫어! 라고 이야기할 수 있지만,
[김남준 목사님] 모든 사람에게 묻고 싶습니다. 본인의 어디가 그렇게 사랑스럽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내가 싫다는데 어디가 그렇게 예쁩니까? 공정하려면 예쁠 때도 있고 미울 때도 있고, 또한 어느 정도껏 예뻐해야 합니다. 그런데 온 천하를 주고도 자기를 사고 싶을 만큼 자기를 사랑합니다. 그것이 파스칼에 의하면 논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실존 자체가 그러한 논리를 따르는 존재가 아니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움직이는 게 무엇인가? 마음입니다. 심정이라고 번역을 합니다. 심정. 그래서 결국 파스칼은 데카르트를 비판하면서 인간은 너무 비참한 존재다, 그래서 인간이 우주를 한 번 봐라! 캄캄한 밤하늘을 서서 봅니다. 이미 밝혀졌습니다. 나라고 하는 것은 알고 보니까 온 우주의 중심인 줄 알았더니 지구는 태양의 주위를 돌고 있는 것입니다.
칼 세이건이라는 코스모스의 저자에 의하면 우리 은하계 안에 4조 개의 별이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태양처럼 빛을 발하는 항성만 2천 억개입니다. 그런데 이 은하계는 우주 전체에 얼마나 있을지 아무도 모르는데 측정할 수 있는 범위가 160억 광년 정도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안에 약 2천 억개의 은하계가 있지 않을까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4조 곱하기 2천 억을 계산을 해 보고, 그 다음에 우리 은하계가 은하계 중에서 절대로 큰 은하계가 아닙니다. 최근에 발견된 것 하나에 의하면 지구의 천 배가 목성이고, 목성의 천 배가 태양, 태양의 백만 배인데 태양이 수천억 개 이상 들어갈 수 있는 별이 발견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우주계의 넓이는 가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한데 거기에 내가 우주를 보고 서 있는 것입니다. 별들의 나이는 수백 억 년을 지나가는 것입니다. 내 눈앞에 들어오는 저 멀리서 오는 불빛 하나가 1억 광년을 왔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는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사라져 갔고, 그것을 보는 것입니다.
파스칼의 논리는 이것입니다. 그렇게 네가 우주를 보고 있으면 너는 미친다. 그런데 네가 안 미칠 수도 있거든. 네가 미쳤기 때문에 안 미친 거다. 그것을 보고 안 미치는 것은 정상적인 정신으로는 안 미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미쳐야 하는데, 네가 안 미친다고 하는 것은 그게 미친 증거라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 정신이 똑바르더라도 미친 것이고, 정신 이상이 되어도 미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결국 인간의 실존이라는 것입니다. 그게 제일 커다란 것이 뭐냐 하면 결국 그러한 점에서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타타닥 타타닥 타타닥 모닥불이 탄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요만한 불꽃 알갱이가 연기를 타고 올라가잖아요.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게 1초도 안 됩니다. 우주에서 인간이라는 존재는 그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