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게으름
녹취자: 백지영
지금으로부터 약 18년 전에 게으름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정말 가벼운 마음으로 썼는데 의외의 일이 일어났습니다. 202쇄에 거쳐서 약 40만부라는 책이 팔린 것입니다. 저 정도의 나이에 이렇게 변신하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다 그랬는데, 어쨌든 독자들에 대한 애정으로 어떻게든지 다가가는 글을 쓰고 싶다는 일념이 저로 하여금 이런 변신을 하게 했습니다.
옛날에 매우 게으른 농부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일은 나가지 않고 마루에 누워서 계속 잠만 자고 있었습니다. 어? 그런데 이게 웬일이지요? 도둑이 들어오는 것 아니겠습니까? 담장을 살금살금 넣고 있었습니다. 너무 졸렸던 농부는 말했습니다. "이놈! 들어오기만 해 봐라!" 드디어 담을 쿵 넘었습니다. 그러더니 성큼성큼 걸어서 안방으로 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어허? 안방으로 향하네. 안방에 들어오기만 해 봐라." 너무 졸렸습니다. 안방에서 이 물건 저 물건 챙겨서 가지고 나오는 도둑을 보면서 "네가 나오기만 해 봐라" 그랬습니다. 드디어 이 도둑은 유유히 짐을 짊어지고 대문 밖으로 사라졌습니다. 졸려서 이리저리 뒤척이던 농부는 말했습니다. "이놈! 다시 오기만 해 봐라!"
게으름은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유전인자 같은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더 많이 게으르고 어떤 사람들은 덜 게으르게 마련이지요. 그런데 사람들은 이 게으름의 해악을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 여러분과 함께 이 게으름에 관해서 쓴 '다시, 게으름'이라는 신간을 가지고 여러분과 한번 이야기를 나눠보고자 합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열린교회의 담임목사인 김남준목사입니다. 오랫동안 신학교에서 교수로 섬겼고 또 많은 책으로서 여러분들을 만나 뵙게 되었는데, 이렇게 C채널을 통해서 여러분과 함께 영상으로 만나 뵙게 되어서 얼마나 반가운지 모릅니다. 오늘 이 강의를 통해서 우리 모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생활이 무엇인지를 새롭게 깨닫고 보람 있는 삶을 살 수 있다면 참 얼마나 좋겠습니까?
자, 그러면 제가 왜 이 책을 쓰게 되었을까요? 사실은 지금으로부터 약 18년 전에 ‘게으름’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화면에서 지금 보고 계시는 책입니다. 이 책을 그저 가벼운 마음으로 저는 썼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 너무 게으른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고, 그래서 이들에게 무엇인가 적절한 조언을 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정말 가벼운 마음으로 썼는데 의외의 일이 일어났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요? 202쇄에 걸쳐서 약 40만부라는 책이 팔린 것입니다. 얼마나 대단하지 모르시지요? 당시 기독교 시장은 일반 책 시장의 1/10 크기였습니다. 그러니 이것을 일반시장으로 데리고 나간다면 약 4백만 부의 책이 팔린 셈이 되는 것입니다. 굉장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고, 그 후로도 끝나지 않고 사람들이 계속 이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많이 흘렀고 이제 생각하는 것도 다르고 문화도 많이 달라졌습니다. 저는 왜 현대인들이, 특히 젊은이들이 책을 읽지 않을까 곰곰이 생각하다가 하나의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18년 전에 비해서 많은 사람들의 생각이 달라졌고 취향이 바뀌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어떻게 취향이 바뀌었을까요? 예전에는 긴 문장, 화려한 수식어, 이런 것 붙은 문장들에 대해서 감동을 많이 받았다면, 요즘은 많이 달라져서 이제는 아주 짧고 세련된 문장을 좋아하고, 군더더기가 없고 논리적인 문장보다는 감성적인 글을 좋아하는 세대가 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깨닫게 되었느냐 하면 한 1년 동안 SNS와 현대소설을 읽으면서 본격적으로 연구를 했습니다. 저는 사실은 카톡도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덕분에 이제 연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저 정도의 나이에 이렇게 변신하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다 그랬는데, 어쨌든 독자들에 대한 애정으로 어떻게 하든지 다가가는 글을 쓰고 싶다는 일념이 저로 하여금 이런 변신을 하게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이 책을 쓰게 된 동기입니다.
사람들은 사실 게으름의 위험을 잘 모릅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 시대에 텔레비전이나 혹은 인터넷이나 매체들을 통해서 게을러야 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적으로 보면, 특히 여러분이 잠언을 읽어보면, 사실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게으름을 얼마나 커다란 악으로 보시는지에 대한 것을 보지 않고는 아마 잠언을 넘길 수 없을 정도로 나오는 책일 것입니다. 잠언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지혜롭게 하는 책입니다. 그 책은 인생을 슬기롭게 살기 위해서 꼭 우리들이 따라야 할 인생의 지침 같은 것들을 모아놓은 것인데, 그 중에서 게으름이라는 것이 얼마나 우리 인생에 방해가 되었던지 그 게으르지 말라는 당부를 하는 구절을 빼놓고는 잠언을 넘길 수 없을 정도로 수없이 제시되고 있는 것이 바로 게으름에 대한 경고, 부지런함에 대한 권고입니다. 그리고 게으른 사람과 부지런한 사람을 끊임없이 대조하면서 게으름에 빠지지 못하도록 우리에게 격려를 하고 있는 것이지요.
자, 그러면 이제 오늘 우리들이 살고 있는 한번 사회를 볼까요? 오늘날 사회에서 여러분들이 이런 광고 문구, 혹은 많은 사람들에게 호소하는 이야기들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부지런하게 살 필요 없다.", "너무 애쓰며 살 필요 없다!", "한번밖에 없는 인생이다!", "욜로, 한번밖에 없는 인생이니까 우리 즐거워하는 것을 하면서 지내자."
여러분 혹시 파이어(FIRE)족이라고 알고 계십니까? 40세밖에 안됐는데 목표한 돈을 모은 다음에 자기 자신을 스스로 fire, 해고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직업이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지요. 그 다음에는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사는 것입니다. 캠핑카를 타고 전국을 다니면서 살거나, 아니면 아내와 남편, 아이들과 함께 1년, 2년짜리 배낭여행을 떠나는 것이지요. 아니면 히말라야에 가서 1년 살기, 이렇게 하면서 특별히 인생의 목표가 없이 삶을 영위해 가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이런 것을 보면서 여러분 마음에 그림 같은 것이 생겨나지 않습니까? "아! 나도 한번 그렇게 살아보고 싶다." 그런 마음이 들지 않습니까?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게으르게 살아도 좋다”, “열심히 일할 필요 없다”, 대개 밑바닥에서 간신히 사는 사람들은 그런 말 안합니다. 대부분 자기 인생에서 어느 정도 성공하고 그래도 될 만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경쟁력도 없는 사람들이 그대로 받아들일 때, 계속 인생에 있어서 패배자가 되기 아주 십상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매스미디어나 많은 매체들을 통해서 어떤 인생에 관한 견해들이 들려올 때는 마음을 열고 감동되는 쪽으로 따라가면 안 되고, 누구 이야기도 쉽게 듣지 말고 그것을 가지고 정말 그것이 그런가 하는 것을 객관적으로 생각하면서 주관적으로 자기가 다시 주체적으로 판단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제가 오늘 아픕니다. 그래서 무슨 약이 좋다고 해서 막 약을 먹습니다. 그렇게 되면 되겠습니까? 안되지요. 여러분, 진시황이라는 사람 아시지요? 세상의 모든 부를 누렸던 사람입니다. 사인(死因)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놀라지 마십시오. 매일 수은을 먹었습니다. 중금속 수은. 왜 그랬느냐고요? 서역(西域)에서 처음 발견돼서 들어온 수은이 중국에 있는 의학자들 사이에서 장생불로의 약이라고 오해를 받았던 것이지요. 그래서 매일 수은으로 환을 지어서 황제께 드렸더니, 결국 황제는 아직 그렇게 돌아가실 정도의 나이가 아닌데 정신착란 증세가 왔습니다. 중금속에 몸이 오염 되어가지고 정신병자처럼 결국 일생을 마치게 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인생에 대한 견해도 그렇게 누구 이야기를 간단하게 들으면서 우리의 인생을 맡기기에 우리의 인생은 너무나 소중하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자, 그러면 이제 저와 함께 게으름의 세계를 우리 같이 한번 탐구해 들어가 볼까요? 여러분들에게 팁을 드리자면 여기에 이렇게 '다시, 게으름'이라는 책이 있는데 이 책에 대해서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좀 더 잘 이해하고 싶으시다면, 1권이 있는데 '게으름' 그 1권의 책을 다시 한 번, 혹은 읽으신 후에 그리고 이 책을 읽으신다면 훨씬 이해가 빠르실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이 됩니다. 1권의 책은 나레이티브 중심으로, 이야기 중심으로 글을 끌어갔다면, 이것은 이제 시도 아니고 산문도 아니고 시조도 아닌 아주 독특한 문체로 빨려들듯이 읽히게끔 만들었고, 그렇지만 한 챕터를 읽고 나면 어떤 문장이 머릿속에 뱅글뱅글 돌면서 여러분들에게 무언가를 스스로 생각하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이 책이 쓰였다는 것을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면 이제 함께 여행을 떠나보실까요?
자, 여기에 담배 파이프가 여러 개 있고 근엄한 아저씨 한분이 계시지요? 여러분들이 잘 아는 버트란트 러셀이라는 사람입니다. 저는 고등학교 다닐 때 이 분 책에 빠져서 그래서 책을 참 열심히 읽었습니다. 당연히 무신론자입니다. 그 사람이 쓴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이런 책들은 하여튼 제 마음을 많이 울려서 그래서 제가 그 당시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으로 살아가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나중에 이런 분들의 사상이 얼마나 그릇된 사상인가를 깨달으면서 돌아서게 됐습니다. 이 분이 여기 표지에 나오는 책을 쓰게 됩니다. '게으름에 대한 찬양'이라는 책입니다. 우리말로도 물론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런 책을 읽으면서 "아! 버트란트 러셀이 게으름을 찬양했구나. 이런 훌륭한 철학자가 게으름을 찬양했으니까 우리도 찬양하자." 그런 생각을 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 분이 1872년생입니다. 19세기를 살았잖습니까? 한창 영국과 유럽에서 기술문명이 발달하면서 산업생산 능력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됩니다. 그런데 버트란트 러셀이 가만히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니까 손으로 하루에 100개의 물건을 만들었습니다. 기계로 하니까 여덟 시간 일하던 것을 네 시간만 하니까 백 개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차피 이제 목표를 다 채운 것입니다. 그러면 4시간만 일을 시켜야 되는데 이 공장 주인이 계속 더 돌려가지고 이백 개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버트란트 러셀이 하는 말은, "100개만 팔아도 먹고 살지 않았느냐? 그러면 백 개만 만들자. 그러면 네 시간만 일해도 되지 않겠는가?" 그러면 나머지 네 시간은 게으름 피고 놀고 자고 먹고 마시고 그러자는 것이냐? 그게 아니라, 기계가 대신 해 준 남은 시간 동안에 더 많이 공부하자 이런 뜻이었습니다. 여러 학문을 공부하고 인생에 대해서 생각한다면 인생이 보다 더 보람 있고 풍부해 질 것이 아니냐? 이런 뜻으로 이야기를 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사람들의 한 두 마디를 듣고 부화뇌동하는 것이 얼마나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지도 한번 생각해 보게 되는 대목이지요?
'진화한 마음'이라는 책입니다. 이런 책들 많이 나오는데, 여기서는 또 새로운 과학이론을 가지고 게으른 삶을 정당화 합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게으른 것은 본질적으로 필요 없는 에너지를 절약하려는 본능이다. 그리고 그렇게 자기 자신을 낭비하지 않고 보존했기 때문에 종족을 보존하고 퍼뜨렸다. 그러니까 게으름이야말로 인류발전의 원동력이었다." 이렇게 해석하는 것입니다. 당연히 물론 그런 측면이 왜 없겠습니까? 우리들이 걸어가는 것보다는 자전거 타는 것이 좋고 자전거 타는 것보다는 택시 타는 것이 편합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 몸의 에너지는 한정되었으니까 그것을 절약하면서 사용하는 그것은 우리의 거의 본성에 가까운 것이고, 그것이 우리의 건강을 보존하고 종족들을 퍼뜨리게 되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게으른 삶을 정당화하는 것은 근거가 매우 약합니다.
"부지런하게 살 것이냐, 게으르게 살 것이냐?"하는 이 문제를 놓고 사실은 저 옛날 고대로 거슬러 올라가서 고대 그리스 때부터 두 가지 견해가 있었습니다. "인생 뭐 있냐? 그냥 나편하게 그리고 살자." 이런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고, "인생? 뭐 있지. 분명히 뭔가 의미가 있는 거야. 그러니까 우리는 그렇게 함부로 우리의 인생을 살면 안 돼지."하면서 이제 인생을 목표를 가지고 부지런하게 살아야 된다는 두 가지 견해가 함께 있었던 것입니다. 신의 존재를 인정하건 안하건 그것과 상관없이, 그렇게 "인생에는 영원하고 깊은 의미가 있으니까 부지런히 살아야 된다, 그런 것 없으니까 그냥 재미있게 자기 좋은 것 하면서 힘들지 않게 살아라"하는 두 가지 사상이 함께 있었던 것입니다.
그 중에서 여기에 나오는 사람 호라티우스라고 하는 고대 그리스의 시인입니다. 이 사람이 오다이(les Odes), 라틴어로 오다이, 영어로는 오즈라고 하는 송가라는 시를 씁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유명한 이야기 '카르페 디엠(Carpe diem)'이라는 게 나옵니다. 여러분, 커피 집 이름 중에 '카르페 디엠' 굉장히 많습니다. 그렇지요? 그런데 원래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디엠(diem)’이라는 것은 ‘날(Day)’ 그런 뜻입니다. '날'의 목적격입니다. ‘카르페(Carpe)’는 명령형인데 ‘잡으라’라는 뜻입니다. '카르패레'에서 왔습니다. 그래서 '한 날을 잡아라.' 이런 뜻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우리가 이야기하는 동안에도 시샘하는 시간은 흘러갈지니 이 날을 붙들라. 가능한 한 내일을 적게 믿으면서.” 왜? 내일은 올지 안 올지도 모르고, 내가 살아있을지 안살아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오늘이라는 그 날을 즐기고 네 만족을 얻으면서 살아라, 이런 견해가 이제 이쪽에 있는 견해였습니다.
그러면 모든 사람이 이렇게 게으름을 찬양하고 게을러도 좋다고 말하고, 또 오늘 하루만 생각하면서 살라고 이야기하는 것으로 만족했을까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존 로크라는 사람이 있는데, 물론 이분은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이분이 '존 로크의 교육론'이라고 하는 책에서, 영국 사람들이 고전으로 치는 매우 중요한 책이고 교육이론의 근본적인 토대를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게으름이야말로 아주 커다란 질병과 같은 것이고, 그리고 그 질병과 함께 인간은 행복해 질 수 없기 때문에 그 질병을 고쳐야 된다고 그렇게 이야기하면서 게으름을 아주 강력하게 탄핵을 했습니다. 격몽요결(擊夢要訣)이라고 하는 책은 우리나라의 율곡 이이 선생이 성리학자로서 쓴 책인데, 여기에서는 군자가 되는 지침, 그래서 존 로크의 책은 젠틀맨, 신사가 되는 규칙이 어떤 것인가를 가르쳤다면 격몽요결은 군자가 되는 길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가르쳤습니다. 여기서 역시 게으름을 아주 강력하게 비판하면서 진짜 군자가 되기 위해서, 말하자면 큰 사람이 되기 위해서, 보람 있는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결코 게으른 삶과 타협해서는 안 된다고 단언을 했습니다.
그 뿐만 아닙니다. 이 사람은 그리스도인은 전혀 아니었지만 세네카라는 인물입니다. 이 사람은 여러분도 잘 아는 바와 같이 스토아철학자이고 그 유명한 나쁜 황제 네로의 선생님이었습니다. 결국은 황제음모사건에 연루가 되어서 자살을 명령받게 되는데, 엄청난 학자였고 철학자였습니다. 그가 호라티우스와는 정반대의 사상을 이야기합니다. 이것이 바로 존 로크나 혹은 율곡 이이나 이런 분들과 결을 같이 하는 것이지요. 인용문을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인생의 짧음, 혹은 인생의 덧없음에 관하여’라는 책인데 1장 4절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실은 이러하다. 우리가 받은 인생이 짧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인생의 시간이 모자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낭비하는 것이다.”라고 했으니, 이런 분들은 굉장히 부지런한 삶을 살면서 인생의 보람을 찾으려고 애를 썼겠지요?
자, 여러분은 둘 중에서 어떤 견해를 선택하시겠습니까? 여러분들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면 이것저것 선택하실 수 있겠지만 여러분들이 그리스도인이라면 성경에 입각해서 결코 게을러도 좋다, 게으름을 찬양하는 인생을 살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나태하고 게으른 삶에는 신령하고 아름다운 정신이 깃들 수가 없기 때문이지요.
자, 여기한번 보십시오. 이게 뭘까요? 묘지입니다. 누가 아주 정성껏 묘비를 세웠습니다. 그런데 묘비에 뭐라고 나오지요? 한번 읽어볼까요? “사람으로 태어나 그냥 있다가 죽다” 만약에 내가 죽었는데 이런 비문이 새겨져 있다면 얼마나 슬플까요? 무슨 뜻입니까? 인생의 길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시간의 길이가 아니라 의미의 길이도 포함하는 것이다, 그런데 시간의 길이가 꼭 의미의 길이는 아니다, 그래서 시간과 의미의 길이 시간의 길이와 의미의 크기는 일치하지 않는다, 그래서 굵고 짧게 사는 사람은 많은 의미를 가진 사람이고 가늘고 길게 산 사람은 길게 살았지만 의미라는 면에서는 아주 작은 인생을 산 사람이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겠지요? 여러분들이 죽은 후에 여러분들의 무덤의 묘비는 뭐라고 새기면 좋을까요?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들이 산 인생을 어떻게 나의 자식들이 자손들이 기려주었으면 좋을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자, 이제 그림이 나오지요? '전도자'라고 나옵니다. 전도자는 우리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전도서를 쓴 저자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솔로몬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사람에게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인생을 지혜를 가지고 바라보니까 의미가 있고, 또 지혜를 가지고 바라보니까 인생이 허무합니다. 그러니까 인생에는 허무와 의미가 교차하는 것이지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인생을 보면 인생은 놀라운 의미가 있고, 세상을 사랑하면서 인생을 바라보면 그냥 허무한 것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의미와 허무가 겹칩니다. 그래서 성경이 이야기하고자 한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뭐냐 하면, "만약에 너희가 세상을 사랑하면서 인생을 산다면 그것은 허무하게 될 것이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산다면 의미 있는 인생을 살게 될 것이다." 그래서 '허무하다, 허무하다'라고 자꾸 이야기하는 것은 진짜 허무하니까 아무렇게나 살자고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없이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허무한지를 아니까 하나님 사랑의 빛 안에서 인생의 의미를 찾아라, 그리고 부지런히 살아라, 그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자, 여기 그림에 보면 지구가 두 개가 나옵니다. 여러분들이 보실 때에 왼쪽에 있는 그림은 창조된 세계입니다. 아무 것도 없었는데 하나님이 창조하십니다. 창조하셨는데, 하나님이 현실적으로 모든 것을 창조하셨지만 그러나 또 가능성 있게 창조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는 창조되었지만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세계로 창조되었다 이런 뜻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선함과 아름다움인데, 그 선함과 아름다움을 점점 더 증진해서 그래서 더 아름답고 더 좋은 세계를 만들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의 인생이라는 것은 이것과 무슨 관련이 있느냐? 그 아래 그림을 보면 노동하는 인간이 나옵니다. 열심히 노동을 하고 있습니다. 이러면서 인간은 노동하고, 또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은혜를 주실 때에 창조된 세계를 더 선하고 아름다운 세계로 바꾸어갈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나쁜 세상에 사는 게 행복할까요, 좋은 세상에서 사는 게 행복할까요? 또 흉한 세상에서 사는 것이 즐거울까요, 아름다운 세상에서 사는 것이 즐거울까요?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래서 그 세상을 조금씩 조금씩 바꾸어가면서 살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인간의 노동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자, 여기한번 그림을 보십시오. 문제가 하나 생겼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이 최초의 인류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셨는데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게 됩니다. 이 이야기가 여기에서 왜 나올까요? 이게 이제 인간의 노동, 게으름, 부지런함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보면 두 남녀가 천사에 의해서 쫓겨나는 장면이 나타납니다. 마사초라고 하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의 작품인데, 많은 미술 비평가들은 인류 역사 이래 인간의 절망적이고 비참한 모습을 이 그림만큼 생생하게 그린 것이 없다고 할 정도로 격찬하는 작품입니다. 에덴에서 쫓겨나는 아담과 하와의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실제로 여러분 여기 한번 (보시면) 얼굴부분이 굉장히 커다란 절망감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지요.
이게 우리가 오늘 하고자 하는 이야기와 관련이 있습니다. 이렇게 인간이 죄를 지음으로 말미암아서 이제 이 세상에 고통이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생각합니다. 우리가 만약에 죄짓지 않고 낙원에 있었더라면 그냥 과일이나 따먹으면서 띵가띵가하면서 놀았을 것이라고.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죄가 들어오지 않았어도 인간은 노동을 하여야 했습니다. 그 대신 그 노동이 지겹고 고통스러운 노동이 아니라 아주 재미있고 즐겁고 보람을 느끼게 하는 그런 노동이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이제 죄와 함께 이 노동에 고통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제일 먼저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가 깨지게 됩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모르고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멀어진 삶을 살게 됩니다. 두 번째 사람과의 관계가 깨집니다. 그래서 결국은 사람들이 서로 사랑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외로운 존재가 됩니다. 또 자기 자신도 육체에 결함이 들어오게 됩니다. 그러니까 조금만 일해도 피곤하고 힘들고 고생스러운 마음이 들게 되는 것이지요. 고통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연도 결국은 결함이 생겨서 많이 일해도 결실이 매우 적은 것이지요. 이런 비극들이 일어나면서 자연과의 관계까지 깨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게으름이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이제 이해되시지요? 게으름이 원래 있었던 것이 아니라 타락과 함께 들어오게 되는데, 이 게으름의 정체가 빗나간 자기 사랑입니다. 그릇된 자기 사랑. ‘그릇되다’는 말은 자기를 사랑한답시고 하는데 그렇게 해서는 결국 자기를 행복하게 할 수 없다 그런 뜻에서 그릇된 자기사랑이다 이런 뜻입니다.
자, 여기 임명장이 있습니다. “임명장, 아무 아무개, 위의 피조물을 사람으로 임명함. 하나님." 그랬습니다. 우리가 살다가 직업을 가집니다. 제가 공무원이었습니다. 공무원이 너무 따분하면 사표 낼 수도 있습니다. 또 최근에 보니까 일류기업에 다니던 사람이 비트코인을 해서 돈을 억수로 많이 벌었다고 합니다. 아주 젊잖게 사표내면서 회사에다 커다란 현수막을 하나 만들어서 걸었습니다. "그동안 돌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회사 떠납니다." 직업은 바꿀 수 있습니다. 그렇지요? 그리고 또 어린 사람이 자라서 청년이 될 수 있고, 청년이 늙을 수도 있고, 어쨌든지 간에 모든 게 바뀝니다. 그런데 사람이라는 사실은 안 바뀝니다.
여기 보십시오. 축구선수는 뭘 잘하는 사람입니까? 축구를 잘하는 사람입니다. 도예공은 무엇을 잘 하는 사람일까요? 도기를 잘 만드는 사람이지요. 배우는 연기를 잘 하는 사람, 군인은 전투를 잘 하는 사람, 이렇게 될 것 아닙니까? 그러면 축구만 잘 하면 축구선수는 최고입니다. 얼굴 못생겨도 큰 상관없습니다. 얼굴 잘생기고 맨날 골만 먹는 축구선수보다는 얼굴 못생겨도 화려하게 골을 넣으면 그 다음에는 스타가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축구선수가 만약에 축구를 그만 둔다면 공을 잘 차는 것이 소용이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사람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겠는가?” 그것을 누가 규정하느냐 이것입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성경은 ‘됨’, ‘삶’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진짜 좋은 사람이라는 것은 사람 됨됨이가 좋고 그다음에 살아가는 생활이 좋을 때 그렇다고 이야기하는데, 그럼 그 기준은 누가 세울까요? 당연히 그 기준은, 사람이라는 그 기준은 하나님에 의해서 세워지게 됩니다.
세상이 전부인줄 알고 살아갈 동안에는 세상의 의미가 뭔지 잘 모릅니다. 자기하고 싶은 대로 사는 것이지요. 남의 이야기도 듣고. 그런데 하나님을 믿고 나니까 '아!'하고 깨닫게 됩니다. 이 존재에도 질서가 있고 가치에도 질서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제일 중요하고 그 다음 인간, 그 다음 무엇, 무엇, 무엇, 이렇게 깨닫게 되면서 무엇을 위해서 열렬히 살아야 되는가 하는 그런 질서가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자의 삶과 불신자의 삶이 다른 것입니다.
불신자의 삶은 이런 것이지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될까요? 자기가 제일 꼭대기에 있고 자기가 이런 질서를 다 정합니다. 그런데 이게 진짜 올바른 질서이냐에 대해서는 우리들이 그렇다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이 질서가 이렇게 뒤바뀐 삶을 살게 되니까 어떻게 되겠습니까? 불안한 것입니다. 인간의 건강을 왜 해치게 됩니까? 자연의 질서를 어긋나게 사니까 건강을 해치게 되는 것입니다. 똑같이 하나님이 세우신 인생의 질서들을 해칠게 될 때, 인간은 행복한 줄 알지만 인간을 불행으로 달려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이런 사람은 온 세계에 자기가 제일 중심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 자체가 성경이 이야기하는 것은 바로 불행의 비결인 것입니다.
이에 비해서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진리이시고 자신은 그 아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자기를 버리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발견하는데, 이것을 가리켜서 지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지혜는 부지런한 삶과 연결이 되고, 그리고 미련함은 게으른 삶과 연결이 되는 것이지요. 그렇게 하면서 온 세계가 이렇게 있고 '나'라고 하는 존재는 이런 속에 어디엔가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이 질서 속에서 내가 누구인지를 객관적으로 보면서 나의 있는 위치와 나의 역할들을 판단하게 될 때 그때 비로소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 제가 좋아하는 어거스틴의 ‘고백록’ 11권 29장 39절에 아주 아름다운 문장이 나옵니다. 그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이던 시절에 예수를 믿고 주님이 자녀가 됩니다. 그런데 여전히 자기 안에 있는 죄를 발견합니다. 그 죄가 바로 결국 질서를 올바로 발견하지 못하게 하는 이러한 것들로 발견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고통 받던 자신의 심경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제가 한번 읽어 드릴 테니까 들어보십시오. “지금 나의 세월은 신음 속에 흘러가고 있사옵나이다. 당신만이 나의 위로이시며 주님이시며 내 영원한 아버지시니이다. 당신 사랑의 불로 정화되고 녹아내려서 당신과 하나 되기까지 나는 질서를 알 수 없는 시간 속에 산산이 부서져 있고 나의 저 깊은 심령은 생각들 곧 여러 가지 혼란스러운 것들로 인해 산산이 찢기고 있나이다.”
온갖 사물들이 산산이 흩어져 있으니 의미가 무엇인지도 잘 모르겠고 무엇이 더 가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느끼는 것은 극도의 혼란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인생이 힘들어서 죽는 게 아니라 혼란스러워서 죽는 것입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내가 엄마다. 나에게 자식이 있다.", "나에게 가정이 있다.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한다.", "나는 아빠다.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한다." 이게 있는 사람들은 힘들어도 인생의 끈을 못 놓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혼란스러워질 때 인생의 끈을 놓고 싶은 그런 유혹이 생겨나는 것이지요.
그에 비해서 이 사람은 어떻습니까? 이렇게 하나님이 계시고 온갖 사물들이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의미와 가치를 "아, 이거구나! 아, 맞아. 이거야!" 그리고 깨달아 아니까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될지에 대한 분명한, 말하자면 그림이 그려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아야 된다."라는 그림이 또렷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현실의 세계와 의미의 세계를 연결하면서 사는 것이 인생입니다. 보십시오. 우리에게는 항상 편안하고 좋은 일만 일어나기를 바라지만 우리 마음대로 인생이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마음대로 됐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강력하게 가지면 가질수록 사실 우리는 더 많이 실망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주문을 겁니다. "꿈은 이루어진다. 이루어진다." 진짜 이루어집니까? 뭘 이루어집니까? 이루어지기는. 연초에 여러분들은 다이어트해서 날씬한 몸매를 가져야 된다는 꿈을 가졌습니다. 거울 보십시오. 안 이루어졌잖습니까. 돈 많이 벌고 싶었습니다. 이루어졌습니까? 뭐가 이루어졌습니까? 이루어지기는. 이루어 진 것도 있겠지요. 그런데 이루어진 것 하나만을 가지고 활짝 꽃을 피우듯이 마치 모든 게 다 그렇게 이루어진 것처럼 강조하는 것은 ‘가짜 뉴스’입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 솔직히 말해서 이루어질 때도 있고 안 이루어질 때도 있는데 내가 바라던 대로 이루어지는 때는 아주 드물고 내가 원하지 않게 되는 쪽이 훨씬 더 많습니다.
제가 여기 그림을 그렸는데, 물결 타고 배가 이렇게 흘러갑니다. 이런 때가 있고, 반쯤 빠져가지고 완전히 물에 잠길 때가 있는 것이지요. '살려주세요.' 그리고 난리를 치는 것입니다. 이런 때도 있고 편안한 때도 있고 다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이런 때에 무서워하고 이런 때에 절망하고 이런 때에 교만하고 하면 인간은 계속 이런 감정 속에서 살아야 됩니다. 행복합니까?
엊그제 제가 어느 의사를 만났는데 정신과 의사분이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목사님, 사람이 불행해야지만 스트레스를 받는 게 아니라 뜻밖의 기쁜 일이 생길 때에도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그게 몸이 나중에 기억을 한다고 합니다. 그래도 우리는 기쁜 일이 더 일어나기를 바라지만요. 그래서 기쁜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것을 탓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그분에 의하면 슬프고 괴로운 일만 아니라 기쁜 일도 스트레스를 준다 그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만약에 이런 식의 인생이라면 아무리 행복한 때가 가끔 있다고 하더라도 이런 삶이 행복할 수 있다고 여러분 생각하십니까?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결국은 이러한 현실을 해석하면서 무엇인가 인생의 의미를 가져서 무서운 때에도 무서워하지 않고, 절망적인 때에도 희망을 갖고, 잘 되고 있는 때도 교만하지 않고 평상심을 유지하면서 사는 그것이 행복의 비결이라는 사실은 쉽게 인정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것을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은 철학에서 그 힘을 찾으려고 했고,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신앙 안에서 그것을 찾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제가 총각 때였습니다. 아직 결혼하기 전이었는데, 신앙에 열심히 있었으니까 그래서 직장 다닐 때인데 동두천까지 기도하러 갔습니다. 그래서 거기서부터 일주일동안 출근을 하면서 기도원에서 내가 자면서 기도하리라 이런 마음을 먹었습니다. 끝나고 나서 미친 듯이 달려가면 거기에 한 8시 반 이렇게 도착합니다. 그러면 간단하게 먹고 그리고 성전에서 기도하는데 한 밤 12쯤 되었을까요? 한참 열렬히 기도하다가 권사님들, 나이 드신 분이 모여서 장작 난로에 모여서 대화를 꽃피웠습니다. 그때 권사님 한 분이 이런 찬송을 부르셨습니다.
(찬송)
이 풍랑이면 하여서 더 빨리 갑니다.
그러니까 인생이 하늘나라를 향해 가는 항해와 같은데 그런데 풍랑이 일어나면 그게 나쁜 것인 줄만 알지만 그 풍랑이 불어서 더 빨리 하나님께로 간다는 그런 뜻인데, 그 찬송을 부르시면서 그러셨습니다. "나는 이 찬송 부를 때마다 사랑하는 딸을 여의던 때가 생각이 납니다." 딸이 죽은 이야기를 하면서 신앙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평상심을 유지하면서 사는 비결이 인생의 의미를 생각하는 것이지요. 현실 안에 매몰하는 사람이 되지 말고 말입니다
자, 여기에 보면 이렇게 그림이 나옵니다. 갓난아이로 태어나서 어린이가 되고, 청년이 되고, 장년이 되고, 배가 불뚝 나온 아저씨가 됩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이렇게 지팡이를 짚고 가야 되는 늙은 때가옵니다. 그러면 육체라고 하는 것을 보면 그냥 허무합니다. 왜냐하면 결국은 살다보면 청년기까지는 계속 상승하지만 딱 그 나이가 되면 거기서부터는 내려가기 시작하잖아요. 마치 산 올라갔다가 내려가는 것처럼 기력이 쇠하고 마지막에는 숨 쉴 기력이 없어서 돌아가시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서 정신은 얼마든지 새로울 수 있는 것입니다. 죽기 직전까지 하나님을 사랑하는 열정으로 새로워질 수 있고, 진리를 새롭게 깨달으면서 더 큰 열정이 솟아날 수 있습니다. 분출하는 화염과 같이 그렇게 열정을 쏟아 놓다가 죽는 사람은 그렇게 살지 못한 젊은이들보다 육체는 늙었지만 더 많은 열정을 지니고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다양한 일들을 겪습니다. 그런 것에서 의미를 발견하고 하나님께 그것을 드리면서 기쁨과 보람을 느끼면서 사는 것이 그것이 인생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결국은 인간은 게으름을 미워하고 부지런한 삶을 삶으로서 이런 인생의 보람에 도달할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5장, 6장, 7장 마태복음에서 산상수훈을 다 말씀하신 후에 집 짓는 이야기를 하십니다. 마태복음 7장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반석 위에 세워졌습니다. 웬만큼 파도가 치거나 해도 결코 바람이 불어도 무너지지 않겠지요. 그런데 이것은 모래 위에 지었습니다. 홍수가 나면 이게 기초가 없으니까 쓸려 내려가지 않겠습니까? 결국은 게으른 사람이 사는 삶은 이렇게 기초가 없는 삶입니다. 그러나 부지런한 삶은 이렇게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사람, 듣기 위해서도 에너지가 필요하고 행하기 위해서도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그런 에너지를 드려서 부지런하게 살 때 탄탄한 삶의 기초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자, 이제 드디어 우리가 결론을 내릴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한번 보겠습니다. 영어로 현재와 선물이라는 뜻이 아주 놀랍게 같은 단어입니다. 같은 스펠을 가지고 있습니다. 의미는 다르지요. 현재는 지금이라는 뜻이고 선물은 누군가로부터 대가가 아니라 예상치 못했던 것을 받을 때 그때 선물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친구에게 아주 착한 마음이 생겼습니다. "아, 제가 얼마나 힘들까?", "우리의 우정이 얼마나 소중할까?"하고 아주 소중한 물건을 백화점에서 사서, 그것도 집에서 하면 돈도 안들 텐데 포장센터에 가서 2만원씩이나 들여서 예쁜 꽃까지 달아서 그렇게 해서 주었는데, 친구가 그 받은 선물을 받자마자 휙 집어던진다든지 발로 차 버린다면 절교하지 않겠습니까? 절교할 것입니다. 이제 친구와의 관계는 끝나는 것과 마찬가지지요.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 있습니다. 이게 현재입니다. ‘오늘!' 내일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 것이 아니고, 어제는 이미 흘러갔기 때문에 우리 것이 아닙니다. 오늘만 우리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어제 죽은 사람이 그렇게 살고 싶어 했던 날이 내일이었습니다. 어제 죽어간 사람의 내일이 오늘 여러분이 살고 있는 오늘입니다. 선택된 사람만 현재를 가질 수 있다 이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한번밖에 없는 인생을 어떻게 사시렵니까? 나태와 게으름 속에서 그냥 있다가 죽으시렵니까, 아니면 '정말 잘 살았다' 이렇게 고백을 하면서 '감사합니다'라고 눈을 감으시겠습니까?
여러분들에게 마지막으로 선물처럼 이 책의 마지막 에필로그에서 쓴 저의 시 한편을 감동적으로 읽어드림으로서 이 강의를 마치고 싶습니다.
꽃잎이 떨어진다.
길과 하늘 사이를 연분홍빛으로 물들이던 벚꽃들.
그 꽃들은 피어 있는 때가 아니라,
허공에 흩날리는 시간이 절정이다.
생명ㅇ르 끝내며 떨어지는 꽃잎들의 떼춤은
낙화암에서 떨어지는 삼천 궁녀가 아니다.
그것은 경사스러운 날 밤하늘에 작렬하는 불꽃놀이다.
늦겨울부터 생명을 잉태했다.
봉오리 맺고 꽃 피던 때.
꽃샘추위와 비바람을 견뎌왔나니, 이 한순간을 위함이었다.
수많은 관객들이 환호해도 무대의 막은 내린다.
이 길 끝에서, 내 인생의 막도 내릴 것이다.
걸쳤던 무대 의상을 벗고 화장도 지우고 나면
거기는 홀로 던져지는 우주 공간.
있었던 것들은 없고 없었던 것은 나타날 것이니,
그때 몸 안에 쏟아지는 엔도르핀은 은퇴식장의 꽃다발이다.
하나님, 내 영혼을 받으소서!
인생나무, 꽃잎 되어 떨어지는 순간.
아무나 이런 기도를 들릴 수 있을까?
잘 살려고 애쓴 사람만이 그럴 수 있으리라.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렇게 산 사람.
그때 나도 한 장의 예쁜 꽃잎이 되고 싶다.
그대로 나와 함께 푸른 하늘에 나부끼는
어여쁜 꽃잎이 되어지이다.
살아야 할 이유가 죽을 이유만큼 분명한 사람으로 사소서.
그래야 그대 행복할 것이기에.
저 멀리 아이들 뛰노는 소리.
어느새 봄날이 저물어 가는군요..
아아, 누군가에겐 마지막 봄이겠지요?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오늘 하루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오늘 이 하루를 어떻게 사용하시겠습니까?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아름다운 인생을 사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