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가정에 관하여
녹취자: 김정호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다루는 주요한 주제들은 독신, 결혼, 이혼, 재혼, 기타입니다. (먼저) 소개를 하고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질문이 나오면 좀 더 자세한 답변을 하겠지만 점점 비혼자들이 늘어가고 있지 않습니까? 뜻을 세우고 독신으로 사시는 분도 있겠지만 특별히 뜻을 세운 건 아닌데 마땅한 인연이 닿지 않아서 비혼이 늘어가고 있고 또 현실적으로는 결혼을 하기에 경제적인 문제부터 가치관의 변화까지 사회적인 많은 제약들이 많아서 비혼자들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이런 때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가 하는 문제들을 좀 생각해 봐야 될 것 같습니다. 성경적으로 보면 뭔가 모순처럼 비치는 것이 있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담이 홀로 있는 것이 별로 좋지 않아 보여 하와를 창조하셔서 결혼제도가 생겨나게 됐다고 말하는데 사도 바울의 서신으로 넘어가면 혼자 사는 게 좋다. 내가 너희에게 강요하지 않는데 혼자 (사는 것이 좋다). 자기가 혼자 살았으니까 그렇게 독신을 권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모순처럼 보이는 것들을 우리가 어떻게 해석을 해야 될 것인가 이런 질문들이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이혼의 문제는 너무 가슴 아픈 이야기지만 이혼의 기준은 무엇인가, 요즘은 무슨 기준을 따지고 이혼하기보다는 살다가 너무 힘들면 이혼하는 추세입니다. 너무 재미있는 것은 예전에는 헤어지려고 해도 양쪽 부모들이 나서서 헤어지지 말라고 말리고 했는데 지금은 둘이 어떻게 살아보려고 해도 부모들이 나서서 헤어져 버리라고 하는 것이 오늘날 현실입니다. 이런 것들은 우리들이 어떻게 받아들여야 될 것인가 생각해 봐야 될 것이고 이혼을 하면 당연히 재혼도 늘어날 것입니다. 재혼은 또 어떻게 해야 되는가. 그리고 오늘날은 굉장히 사회적으로 이혼도 너그럽게 보고 재혼도 너그럽게 보는 상황인데 실질적인 어려움들은 많이 감춰져 있습니다. 재혼을 해서 잘 된 이야기를 많이 하지만 재혼을 해서 어려운 것들은 스토리 자체가 잘 안 되기 때문에 많이 묻혀 있습니다. 실질적으로 많은 암초와 같은 어려움이 도사리고 있는데 그런 것들을 어떻게 극복해야 될 것이냐. 재혼을 하고 나면 예전에 있던 자녀들과는 관계가 아주 끊어지는 것이냐. 어떻게 할 것이냐. 그리고 가족이라는 것을 어떻게 규정해야 될 것이냐. 이런 문제들이 자연스럽게 떠오르게 됩니다. 그리고 기타 여러 가지 문제들이 나오는데 여기서 제가 강의내용을 미리 말하기보다는 일단 질문을 보면서 구체적인 내용들을 하나씩 엮어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첫 번째 문제부터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정영희 자매부터 시작하시면 되겠습니다.
질문1 : 독신에 관하여 바울이 독신이 좋다는 의미로 이야기한 것과 함께함이 좋다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 사이에 모순이 느껴집니다. 독신에 대한 성경적인 시각이 궁금합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 환경이나 경제적 상황이나 스스로의 의지와는 다르게 외부적인 요인으로 어쩔 수 없이 독신일 경우가 있는데 가까운 지인 아니면 가족의 입장에서는 어떻게 바라보고 조언을 해주어야 할지 궁금합니다.
우선 하나씩 짚어갑시다. 우선 성경에서 결혼제도가 맨 처음에 성립할 때 혼자 있는 것이 좋지 못해서 하나님이 하와를 창조하셔서 결혼을 하게 하셨다는 대목이 나오고 뒤에 사도 바울의 독신을 권장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어떻게 이해해야 하냐면 문맥이 중요합니다. 사도 바울이 독신을 이야기하던 그 문맥은 종말이 가까워져 왔다는 것과 우리가 주님 오실 날을 기다리면서 살아야 되는 임박한 종말론에 대한 의식을 이야기하다가 독신을 언급하게 됐습니다. 결혼을 하게 되면 얽매인 것들이 많고 하니까 자기처럼 독신으로 살아서 주님을 섬기고 주님을 기다리면서 종말론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이 좋지 않냐. 분명히 말하는 건 그것이 자기가 강요하는 것이 아니다. 또 주께로부터 받은 것도 아니다. 이렇게 설명을 하고 자기 개인적인 의견임을 표명하고 있습니다. 그럼 결론은 무엇이냐. 둘 다 성경이 인정하는 삶의 형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는 결혼을 하는 것, 결혼을 하고 인생을 살아가는 것, 그리고 독신으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중심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독신으로 살 때 그냥 결혼을 안 하는 게 아니라 아주 분명한 목표 의식을 가졌을 경우에 독신으로 사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충분히 결혼할 수 있지만 나 자신이 주님께로부터 독신으로 살도록 어떤 소명을 받았고 그렇게 사는 것이 내가 받은 소명을 따라서 살아가는 데에 유익하다고 생각되는 신앙적인 판단이 있어 독신을 하는 경우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특별히 받는 은사입니다. 그래서 독신의 은사를 어떻게 확인하는지 사람들이 자꾸 물어보는데 독신의 은사는 우선 혼자 사는 게 너무 외롭고 힘겹고 그 자체가 무게로 다가오는 사람은 독신이 소명이 아닙니다. 그래서 독신으로 살 사람들은 혼자서 살아가는 것 자체가 자기에게 맞는다고 느껴지는 것이 소명의 아주 중요한 증거입니다. 그래서 외로움을 너무 많이 느끼고 독신으로 사는 것 자체가 엄청난 짐처럼 느껴진다면 그것은 독신의 소명이 아닙니다.
두 번째는 결혼을 하지 않고 살아야 할 정도의 특별한 부르심이 있는 것입니다. 소명으로서의 독신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경우에 대부분 소명이 아니라 그냥 때가 됐으니까 결혼하는 사람이 대부분인 것처럼 소위 비자발적 독신입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스스로 독신을 선택한 게 아니라 어떻게 하다가 보니까 혼기가 늦춰지면서 가끔 선도 보고 했겠지만 마음에 드는 사람도 별로 없고 저 사람하고 살아봐야 혼자 사는 게 더 낫겠다는 판단을 하면서 비자발적 비혼, 비자발적 독신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가? 처음에는 결혼에 대해 먼저 이야기하고 자발적 독신, 비자발적 독신 이렇게 세 토막으로 나누어서 이야기하겠습니다.
우선 첫째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결혼에는 무슨 특별한 소명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임에도 불구하고 행복한 가정을 못 이루고 살고 또 이혼도 하게 되는 중요한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결혼의 소명이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결혼을 하려면 우선 신체적으로 성숙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아주 어렸을 때 결혼할 수 없습니다. 두 번째는 경제적으로 성숙해야 합니다. 그리고 인격적으로 성숙해야 하고 영적으로 성숙해야 하고 사회적으로 성숙해야 합니다. 특히 이 중에서 사회적인 성숙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사회적인 성숙이라는 것은 다른 사람과 소통하고 인격적인 관계를 나누면서 살 수 있는 능력이 배양되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근데 너무나 많은 사람이 그 일생을 뒤흔들어 놓는 엄청난 사건인 결혼을 하는데 결혼이 무슨 의미인지 잘 모른 채 결혼을 합니다. 여기에서부터 어려움이 생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혼할 사람들은 결혼의 성경적인 의미를 깊이 이해하고 한 사람의 아내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천금과 같은 무게인가. 그리고 태어날 아이들의 엄마가 되고 아빠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커다란 무게이고 또 구체적으로 그 위치에 있을 경우에는 어떤 삶을 살아가야 되는가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이해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사실 결혼한 사람들이 결혼에 대해서 공부를 하는 것이 아니라 결혼하지 않은 사람들이 먼저 결혼에 대해서 공부를 해야 합니다. 왜냐면 결혼한 사람을 무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 정도로 내 인생의 헌신을 요구한다는 것을 미리 충분히 공부를 하고 사랑과 헌신이 항상 함께 따라오면서 결혼이라는 제도를 받아들여야 된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자발적인 독신의 경우에 자기가 독신으로 살겠다고 결심을 하게 되면 독신의 삶을 살면서 하나님을 어떻게 섬기고 살아갈 것인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가치가 되어서 독신의 소명을 받았다면 그에게 있어서 그 소명을 따라 사는 것은 결혼 못지않게 중요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주 구체적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일생 동안 어떤 일에 헌신하면서 주님을 섬기며 살아갈 것인가 그것이 자신을 독신으로 부른 하나님의 중요한 이유라는 생각을 하고 독신으로 살아가는 것, 그 섬김을 하면서 살아가는 데 이바지하도록 전적으로 헌신하면서 살아가는 삶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목회이든지 사회사업이든지 교육이든지 상담이든지 무엇이든지 꼭 교회 안에서의 전도사로서의 사명에만 국한될 필요는 없습니다. 어느 것이든지 그것을 무거운 사명으로 받아들이고 독신으로 있는 것이 바로 그 소명을 이루는 데 큰 도움이 되도록 헌신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어떻게 그 헌신을 유지할 수 있는 살아갈 수 있는가는 은혜의 문제일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 비자발적 독신은 가장 해당자가 많은 상황이라고 보는데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굳이 신앙을 안 가진 사람들은 결혼해야 될 필요를 못 느낍니다. 결혼하는 즉시 더 빈곤해지고 더 많은 짐을 짊어져야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아이 하나 낳으면 대학 졸업시킬 때까지 5년 전을 기준으로 2억 5천만 원 정도가 들어간다고 하니까 만약에 좀 더 나은 양질의 교육을 시키려고 하고 좀 더 좋은 환경 속에 아이들을 살게 하려면 훨씬 더 기하급수적으로 많이 늘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주택의 문제를 비롯해서 많은 문제들이 있고 그러면서 결혼이 자꾸 연장되는 것입니다.
저는 26세, 우리 아내는 24세에 결혼을 했는데 아주 골든 에이지였습니다. 그 당시 1980년도에 가장 이상적인 커플의 나이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애들 취급합니다. 보통 결혼이 32∼34세 정도까지 뒤로 밀립니다. 아이가 제때 안 생기는 문제도 생겨나고 가족 계획을 하다가 보면 임신 시기를 놓쳐서 결국 아이를 갖지 못하는 부분들이 굉장히 많이 생겨나게 됩니다. 이런 문제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혼 시기를 놓치면서 비혼에 접어드는데 안 믿는 사람들도 점점 결혼을 기피하는 추세로 접어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조금 생각을 달리 해야 될 것 같습니다. 현실적인 문제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지만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을 가지고 결혼을 하면 가난해질지도 모른다거나 더 고달파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지 말고 결혼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인가를 생각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확신이 들면 믿음으로 결혼을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면서 경제적인 문제 등을 해결해 나가겠다는 믿음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결혼을 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지만 비혼인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비혼으로 살 때 나오는 여러 가지 많은 문제들입니다. 경제부터 모든 것들을 자기 스스로 해결을 해야 되는 문제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중요한 것은 내가 일생 동안 보람 있게 살아갈 수 있는 직업, 건강, 경제력, 친구들과의 관계입니다. 결혼하면 둘이 같이 돌봐주지만 결혼을 안 했으니까 반드시 생명처럼 교제를 나눌 수 있는 친구들에게 에워싸여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부부가 서로에게 헌신하는 것 못지않게 친구들에게 헌신해야 합니다. 그래서 생사를 함께해 줄 친구들이 항상 주위에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행복에 굉장히 중요한 조건입니다. 그리고 건강도 자기 자신이 잘 챙기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게 그렇듯이 결혼한 사람들이 많이 공부를 해야 결혼 생활을 할 수 있듯이 비혼인 사람들도 이런 것에 대한 진지한 숙고와 공부가 많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계획성 있게 인생을 살지 않으면 어느 날 갑자기 갱년기가 지나고 정신적인 황폐함이 찾아오고 신앙으로는 그걸 감당할 수가 없고 사회적으로도 자신이 모아놓은 것이 없고 건강도 받쳐주지 않고 교우관계도 원만하지 않아 결국 전성기가 지나고 나면 고립되어 아주 불행한 처지에 떨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결혼한 사람들이 행복하게 못 사는 것 못지않게 비혼과 독신으로 사는 것이 인생에 엄청난 무게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슬기롭게 준비를 해야 된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두 번째로 넘어가겠습니다.
질문2 : 독신으로 사는 이유가 여러 가지일 텐데 외부적인 요인이 아니라 스스로 독신에 대한 확신은 어떻게 갖게 되나요? 성경적인 기준은 무엇일까요?
이것은 말씀을 드렸기 때문에 그냥 넘어가겠습니다.
질문3 : 젊을 때는 독신이 편하고 자유로웠는데 중년이 되고 지병이 생기면서 노년과 중증 질병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걱정입니다. 독신으로 살면 독거사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또는 중풍과 같은 응급 상황이 생겼는데도 아무도 몰라서 집에서 혼자서 방치되는 등의 일들이 생길 것 같아 두렵습니다. 이마저도 다 생겨날 수 있는 일이고 독신으로 살면서 담담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사회적인 관계망으로 친구나 교회 관계를 적극적으로 만들어서 이러한 응급 상황을 대처해야 할지 고민입니다. 독신의 경우 어떻게 노후를 준비하면 될까요?
아까 이야기가 잠깐 나왔지만 이게 비혼으로 있을 때 제일 어려운 점입니다. 목회를 하다 보면 혼자서 변을 당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서 집에서 혼자 있었는데 의자를 놓고 옷장 위에 있는 걸 꺼내다가 떨어진 것입니다. 떨어진 상태에서 며칠 아무도 연락이 안 되는 상태로 방치된다면 죽거나 아니면 옆에 누가 있었더라면 금방 병원에 가서 해결될 수 있는 혈액 같은 것들이 골든타임을 놓쳐서 굳어서 중풍이 된다거나 이런 많은 어려움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혼자 산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것입니다.
근데 요즘 이은혜 사건 같은 것을 보면 같이 산다는 것도 매우 위험한 것입니다. 어떻게 만나는 남자마다 죽습니까? 섬뜩하지 않습니까? 나는 우연일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조사해 봐야 알겠지만 우연일까 그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복어 독을 그렇게 했는데 왜 안 죽는 거야 이런 문자가 오고 가는 것은 혼자 살았으면 그런 변을 당할 리가 없는데 같이 살았기 때문에 그러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삶의 명랑함에 관하여’에서도 설교했지만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이 내가 있어야 할 자리를 완벽하게 대신해 주는 건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부부, 가족끼리 함께 살면 좋은 점은 누군가가 항상 자기를 서로 지켜보고 있는 것입니다. 쉽게 얘기하면 가족하고 사는데 (새벽) 1시가 넘어 (집에) 안 들어오면 찾을 것이지만 혼자 살면 아무도 나를 찾는 사람이 없습니다. 왜냐면 1시에 들어왔는지 8시에 들어왔는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게 굉장히 어려운 것입니다. 그런데 조금만 마음을 열고 생각해 보면 혼자 사는 것도 위험하고 둘이 같이 사는 것도 위험하고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위험이 아닌 게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매우 조심스러운 것입니다. 그래서 비혼으로 살게 되면 그런 어려움이 있다는 것은 단점으로 작용을 하는데 넓게 보면 모든 인간이 결국 어느 정도는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을 해야 합니다. 결혼한 사람도 마찬가지니, 해당이 안 된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비혼으로 살다가 자기가 몸이 안 좋으면 자기 하나의 일로 끝나지만 자녀들이 아직 어리고 남편이 젊은데 내가 만약에 문제가 생기면 이것은 나머지 가족들에게 치명적으로 죽을 때까지 씻을 수 없는 어떤 상처를 남기게 되니 모두 해당되는 것입니다.
비혼으로 살 경우에 더욱 중요한 것이 건강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비혼으로 행복하게 사는 것은 성격이 안 맞는 사람 둘이 만나서 모든 걸 극복하고 행복하게 사는 것만큼 힘이 들지만 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자기의 건강을 가장 우선순위에 놓고 남에 의해서 관리되는 게 아니라 자기 스스로 의학 공부를 많이 하면서 건강에 대한 철학을 가지고 식이요법, 운동, 고정적인 질환들의 예비, 정기적인 검진 같은 것들을 통해서 가장 많이 투자를 해야 될 부분이 건강입니다. 살다가 어느 순간에 교통사고를 당하거나 갑자기 치매가 오거나 중풍에 걸리거나 하는 것들은 어떤 경우에는 피할 수가 없습니다. 다만 건강을 잘 관리하면 확률적으로 그런 위험에 빠질 확률이 낮아지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고 우리들이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열심히 운동하고 자기는 혼자라고 하는 것과 자기가 자신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을 항상 명심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건강이 나쁘면 누가 돌봐주겠습니까? 가족이 있다고 해도 가족이 무한적으로 돌봐줄 수 있겠습니까? 안 그렇습니다. 나이 많이 들어서 한 1년 이상 계속 아프면 가족들 중에 80% 이상은 다 요양원으로 보냅니다. 그러니까 그 처지는 결혼한 사람이나 결혼 안 한 사람이나 다르지 않습니다.
그리고 예를 들어 나부터라도 내가 치매가 오거나 문제가 오면 나 때문에 아내나 가족들이 삶을 거의 포기하고 나를 돌봐야 되는 상황에 처하기를 원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가족(자녀)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내가 만약에 정신 상태에 이상이 오면 한시도 지체하지 말고 엄마한테 나를 위탁하지 말고 병원으로 보내라(고 말입니다). 가족이 그런 말을 들을 수 있느냐는 별개의 문제지만 어쨌든 결혼한 사람들도 여러분도 해당되는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주위에서 보면 부모를 자녀들이 한없이 그렇게 돌봅니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전에 그런 시설이 없을 때에는 뒷방에 가둬 놓고 거의 감금하다시피 하거나 아주 효심이 뛰어난 사람들은 그렇게 했지만 지금 안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결국 결혼한 사람들도 지금 이야기한 이 위험은 정도의 차이만 약간 있을 뿐이지 아무도 책임져주지 않는다는 면에 있어서는 동일합니다.
자기 건강을 자신이 지켜야 하고 운동(을 해야 하고) 병원을 교회처럼 가까이 지내야 합니다. 젊었을 때는 병원 같은 곳에 안 찾아가도 되지만 40세가 넘어가면 제일 지혜로운 건 혼자 있는 게 아니라 습관적으로 무슨 문제가 생기면 병원에 가야 합니다. 병원에 가면 항상 하는 얘기가 “왜 이제야 오셨어요?”입니다. 예를 들면 자동차를 사면 한 4년 동안은 카센터를 안 가고 살지만 (지금은 자동차를 잘 만들어서 사실 6년 되도 카센터를 안 갑니다) 중고차를 운전하면 늘 카센터를 드나들면서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자신에게 익숙해져야 됩니다. 부지런히 병원에 다니는 것이 자기에게 가장 경제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경제생활을 하되 자기 건강의 유지를 위해 먹는 것에 대해서는 투자를 아끼지 말고 엄청난 호위호식을 하라는 뜻이 아니라 항상 좋은 것을 먹고 이것이 나의 몸속에 쌓인다는 의식을 가지면서 식생활을 자연에 가깝게 하고 양질의 음식을 섭취하면서 건강을 유지하는 것(습관)을 체득해야 합니다.
그리고 경제적으로도 노년을 위해서 준비해야 합니다. 왜냐면 내가 이 세상에 사람으로 태어나서 가장 하지 말아야 될 것이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 때문에 누구에게 민폐를 끼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상황이 그렇다면 얼마나 힘이 들겠습니까? 더군다나 여러분들이 너무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기쁘게 그 짐을 짊어지겠지만 사랑도 별로 안 하는데 그 짐을 져야 된다고 하면 여러분들의 인생에 너무 무거운 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짐을 남에게 지우지 말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비혼으로 사는 모든 사람들은 마지막에 죽을 때 자신이 장례를 지낼 모든 비용까지 다 마련하고 자신의 마지막 사후까지도 누구에게 누를 끼치지 않는 방식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경제력이 있어야 합니다. 제가 그런 의식이 없이 막 살아온 대표적인 사람이었습니다. 특별한 후회는 없고 지금도 교회에서 생활비를 받으면서 살고 있지만 (여러분들은) 젊어서 전문가에게 차례대로 배우고 인생과 돈에 대한 설계를 같이 해나가면서 자기 인생 계획을 세우는 것이 너무 좋습니다. 그래서 그것도 끊임없이 학습해야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전문가들에게 학습을 하면서 장기적으로 여러분들의 인생을 어떻게 계획하면서 살아갈 것인가. 뜻밖의 일이 일어나더라도 누군가에게 민폐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떤 식으로 경제적인 준비를 해야 하는가 이런 것들을 잘 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직업의 문제입니다. 반드시 돈만 버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의 보람을 느낄 수 있는 두 가지가 양립할 수 있는 직업을 택하십시오. 돈만 버는 것에 초점을 맞추면 언젠가 사람이 직업 활동을 하면서 지치게 됩니다. 그러니까 돈이 약간 적더라도 정신적으로 보람을 많이 느낄 수 있는 일들을 선택해서 돈과 보람이 함께 갈 수 있는 직업을 택할 때에 가장 지속 가능성이 높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친구의 문제인데 친구는 너무너무 필요합니다. 쉽게 얘기하면 내 인생을 살기 위해서라도 친구가 필요합니다. 자기가 그런 친구만 요구하면 안 되고 자기가 누군가에게 그런 친구가 되어줘야 합니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죽을 때까지 헤어질 수 없는 친구가 최소한 서너 명 정도가 있어서 아주 정겹게 살고 가능하면 가까운 지역에 같이 모여서 살아서 가족들이 해주는 그런 섬김을 서로 주고받으면서 사는 것, 너무 마음에 맞아서 한 집에서 2∼4명이 같이 살거나 한 아파트 안에 각자 독립된 삶을 살지만 같은 층에 있거나 같은 동에 살 수 있다면 가장 이상적입니다. 그것은 거리만의 문제가 아니라 좋은 친구를 사귀어서 서로가 자신의 인생의 영원한 동반자가 되게끔 해서 생사를 함께 할 수 있는 친구들을 신앙 안에서 마련하고 그 친구들이 서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 도전을 주면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이 독신을 위한 가장 중요한 생태계입니다. 지금 이야기한 네 가지 중에 하나만 없어도 굉장히 힘든 비혼의 삶이 되는 겁니다.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다음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질문4 : 결혼을 하지 않아서 부모님과 같이 살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면에서 부딪히는 부분이 있고 부모님이 연세가 드시면서 대화가 잘 통하지 않고 고집이 세신 것 같습니다. 저를 애 취급하시고 독립적인 어른으로 인정을 잘 안 하십니다. 지금 독립하기에는 부모님이 연세가 드셔서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독립 얘기를 꺼내면 섭섭해하십니다. 몇 년이라도 독립해서 제 뜻대로 살아보는 것이 좋을지 아니면 연세 드신 부모님을 모시면서 살아야 할지 고민이 됩니다.
둘 다 고민일 것입니다. 제가 너무 냉정하지만 딱 잡아서 얘기하면 헤어지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연로하신 부모님을 그냥 서울에 놔두고 자기는 부산으로 가버리면 돌볼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지 마시고 독립 살림을 하십시오. 그리고 가까이 사십시오. 아침, 저녁으로 돌봐 드리십시오. 밥 먹을 기회가 있어서 엄마 집에 가서 밥을 해서 같이 먹고 오더라도 잠은 따로 자고 경제도 따로 하십시오. 왜냐하면 그렇게 안 하면 연세 드신 분들은 자신의 삶의 방식을 고치기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나중에 딸이 점점 나이가 들어서 갱년기 증상까지 오게 되면 서로가 서로를 감당하지 못합니다. 관계에 파국이 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안 되는 부모하고도 대화를 해서 부모의 태도를 조금씩 바꾸는 것도 필요합니다. 저는 갈라지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만약 저라면 형편이 허락되어 엄마가 206동 503호에 산다면 저는 502호에 살면서 급한 일이 있으면 전화하여 “나 너무 아프다. 나 지금 쓰러졌다” 이런 연락 정도를 받을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또 요새 CCTV 같은 것이 너무 잘 나오니 설치해 놓고 휴대폰으로 실시간으로 움직임까지 볼 수 있으니 그렇게 해 놓고 사는 게 낫습니다. 지금 부모님이 벌써 다 굳어지셔서 계속 애 취급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용돈을 많이 주시든지 그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어려워집니다. 이것은 아닙니다. 이렇게 하다가 결국 부모님하고 같이 늙어가고 서로를 간수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면 관계가 더 나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부모님께 “어디 안 가요.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아침도 집에 와서 먹고 저녁도 먹을게요. 잠깐 제집에 가서 잘게요.”하고 독립적인 경제생활을 하십시오. 부모의 도움을 받아야 되는 게 필요하다면 “제가 와서 어머님, 아버님 이렇게 도와드릴 테니까 그럴 형편이 된다면 차라리 저를 데리고 있는 비용을 좀 주세요. 그러면 저는 독립적인 생활을 해나가겠습니다.”(라고 말하십시오.) 그런데 자기가 벌이가 있으면 도움받을 필요 없이 독립적인 생활을 해나가야 됩니다. 그러면 부모님들도 차차 적응하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부모가 나이 들어서 자녀를 과도하게 의지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도 병적입니다. 너무 안 좋습니다. 결국 자기 혼자 어느 정도 삶을 살아가실 수 있도록 독립심을 길러 드려야 합니다. 그런데 전세가 비싸고 강남 같은 곳에 가면 두 집 살림하는 게 쉽지 않을 것입니다. 강남에 아파트가 있어서 부모와 이런 갈등이 있으면 팔아서 평촌으로 가서 두 채 마련해서 엄마 옆에 붙어서 살다가 물려받으면 나쁜 거 아니지 않겠습니까?
질문5 : 독신의 은사를 가졌다고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오래전부터 수녀와 같은 삶을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기독교인도 수녀와 같은 삶을 살 수 있는 수도원 같은 곳이 한국이나 해외에 있을까요?
개신교에서는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수녀 같은 삶을 사는 사람들이 사실 별로 신앙은 안 좋습니다. 그게 문제입니다. 신앙이 진짜 좋은 사람들은 수녀 같은 삶을 살아야 될 필요를 못 느낍니다. 질문하신 분이 수녀라고 그랬으니까 당연히 남자가 아니라 여성일 것입니다.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수녀와 같은 삶을 사시고 계시다고 말씀하셨는데 마음이 수녀인지 묻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 수녀와 같다는 삶이 또 뭘 의미하는지는 정확하게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영화관도 안 가고 화장품도 안 바르고 피트니스도 안 하고 파인다이닝에 가서 식사도 안 하고 화려한 운동복도 안 사 입고 자동차도 없이 그렇게 수수하고 털털하고 소박하게 살아간다는 의미라면 그런 삶을 그렇게 권장하고 싶진 않습니다.
‘삶의 명랑함에 관하여’(설교)를 들으셨으니까 이해하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은 하나님이 영광만 받으시려고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신 게 아니라 행복하게 살게 하시기 위해서 보내신 것입니다. 수녀 같은 삶을 살고 있다는 말속에는 약간 자조적인 느낌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인생의 즐거움에 대해서 눈 뜨지 않으려고 하는 질문자만의 어떤 편견이 아니겠습니까? 아름다운 세상을 느끼고 그 아름다운 자연을 느끼고 먹고 싶은 것을 먹고 보고 싶은 것을 보고 그 속에서 살아있는 것에 대한 고마움을 느끼고 친구들을 사귀고 만나고 그렇게 하면서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아름다운 삶입니까? 그래서 삶이 수녀적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그 사람이 수녀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넓게 사랑하면서도 얼마든지 이 세상에서 기쁘고 즐겁고 행복하고 살아 있는 순간이 너무나 가슴 뛰고 즐거운 그런 삶을 살아가는 것이 성경적으로 볼 때 우리 인간이 이 세상에서 진정으로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수녀 같은 삶을 권하고 싶지 않습니다. 오히려 도시에 살면서 (도시나 시골 마찬가지지만)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면서 사람들 속에서 서로를 부대끼면서 사람들을 사랑하고 그 속에서 울고 웃고 즐거워하며 그렇게 살아가는 지극히 인간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에 인간의 참 행복이 있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으로 만드신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너무 좋지 않겠습니까? 엊그제 공원에 나갔더니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벚꽃길을 걸으며 꽃비가 내리는 광경을 살았을 때 몇 번이나 볼 수 있겠습니까? 1년에 한 번씩 본다면 30년을 더 살아도 30번밖에 못 보고 10년을 살 사람은 10번밖에 못 봅니다. 그걸 보면서 살아 있는 날 동안에 주님이 내게 주신 생명을 아주 깊이 호흡하면서 즐거워하고 감탄하면서 사는 게 기독교인의 영성입니다.
질문6 : 결혼의 준비와 풍습이 이제 너무 물질적이면서 보여주기식이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상대 집안을 평가하는 기준들이 되기도 하고 부모님들의 개입으로 인해 결혼 준비 기간 중에 파혼하는 사례도 많습니다. 이는 기독교 집안이든 아니든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이에 대하여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떤 생각을 품고 어떻게 대처하며 살아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궁금하실 것입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입니다. 자기 자신의 가치관이 뚜렷하고 둘이 서로 사랑한다면 저런 문제점을 극복할 수 있고 극복하지 못한다면 신앙이 부족하거나 인격적으로 미성숙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조심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결혼은 아직까지 우리나라에서 사랑하는 두 사람 사이의 일일 뿐 아니라 서로 다른 문화를 가진 두 가정의 만남입니다. 그래서 문화가 너무 다른 가정이 둘은 서로 사랑해서 뭐든 이해할 수 있는데 두 가정의 문화가 너무 다를 경우에는 만나는 것이 엄청난 문화적인 충격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하고 견고한 확신을 갖는 게 제일 필요하고 서로가 열정만 갖지 말고 지혜를 가지고 상대방의 문화에 대해서 서로 충분히 소통하면서 맞춰줄 수 있는 부분까지 맞춰주십시오. 그래서 두 가정의 문화가 어느 한쪽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충격을 받게 하지는 마십시오. 무슨 뜻인지 잘 이해가 안 가실 것입니다.
실제로 있었던 일인데 교회에서 형제, 자매를 맺어줬습니다. 그래서 결혼을 했는데 형제 집안 쪽에서 굉장히 많은 혼수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매 쪽에는 그렇게 할 능력이 없다기보다도 그런 문화가 아닌 것입니다. 팔려 가는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해서 가야 되겠냐는 것입니다. 문화가 서로 달라서 소통이 안 되는 것입니다. 이쪽에서 요구하는 걸 하려니까 자매는 직장생활도 별로 많이 하지가 않아서 벌어놓은 돈도 없는데 그 얘기를 집에 가서 했다가는 집에서 당장 때려치우라고 그럴 것 같다는 것입니다. 형제는 자매 집안의 문화를 이해했지만 (부모님께) 그 집에는 그렇게 하는 문화가 별로 없다고 얘기하면 “아니, 그 많은 혼처를 내버려 두고 네가 뭐가 못났다고 그런 집으로 가냐고 때려치워라”라고 할 것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둘이 눈이 퉁퉁 부어서 고민하고 온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아니 뭐 그렇게 고민하나요? 그러지 말고 양쪽을 다 만족시키면 되지 않겠습니까?” (형제가) “어떻게 그렇게 만족시킬 수가 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제가) 형제한테 돈이 있냐고 물어보니 돈이 있다고 답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부모님이 모르게 자매한테 한 천만 원 주세요. 그래서 그걸로 형제는 부모님께 얘기하지 말고 (혼수를) 다 하세요.” 그래서 한 방에 해결해 줬습니다. 그런데 “둘이서 결혼했는데 왜 너한테 천만 원을 줘?” 이러면 이게 안 되는 것입니다. “그건 네가 해야지. 왜 나보고 하라고 그래?” 그러면 안 됩니다. 둘이 사랑하지만 문제는 이 집에 지금 1천만 원이 없어서 못하는 게 아니라 부모의 뇌 속에 그런 그림이 안 나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나에게 딸이 와서 저 집에다 이렇게 해주자고 하는데 돈이 문제가 아니라 나는 그렇게 할 마음이 1도 없는데 그걸 해야 된다고 할 때 부모는 돈의 문제가 아니라 자존심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왜 뒤집어 놓아서 결국 파투에 이르게 합니까? 그러면 형제가 천만 원을 주십시오. 집에 가서 절대 시집에 이런 거 해줬다는 이야기하지 마십시오. 그냥 혼자 조용히 가서 그들이 필요로 하는 거 다 형제한테 받은 돈으로 해결해 주고 이쪽에 가서는 아무것도 안 해준 것처럼 하고 저쪽에 가서는 집안에서 다 해준 것처럼 하고 정리해서 그냥 한 번에 다 끝냈습니다. 그런데 형제가 정색을 하고 내가 왜 너에게 천만 원을 줘야 되냐고 하면 이제 안 되는 것입니다.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두 사람의 신뢰가 제일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자라온 환경에 따라서 각기 다릅니다. 저 같은 경우는 마음을 먹으면 하는 성격이니까 그냥 제가 해야 되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남자가 그런 정도 성격이 안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해서 책임지고 부모를 다 설득하십시오. 얘기하지 마시라고 결혼만 형식적으로 승낙을 받는 것이고 나머지는 알아서 할 텐데 지금 나이가 서른이 넘었고 경제력도 있고 모든 것을 하는데 도와주는 것도 필요 없고 알아서 할 테니까 그렇게 내 결혼에 자꾸 감 놔라, 팥 놔라 참견하지 마시라고 딱 막으십시오. 양쪽 다 막을 수 있으면 최고입니다. 그런데 대부분 남자가 그럴 능력이 안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부모로부터 특히 도움을 많이 받은 남자 또는 앞으로도 유산을 받을 가능성이 있는 남자들은 의외로 부모와의 관계에서 약합니다. 양쪽 모두 마찬가지지만 그럴 경우에는 우리 둘만 좋으면 됐다고 양쪽 가정에 상처를 주지 말고 자기 둘이 좋으면 된다는 것을 확고하게 맞춘 다음 최소 공배수를 찾아서 상대 가정과의 만남이 다른 문화와의 만남이라는 것을 충분히 인정하면서 충격을 덜 주는 방면과 타협적인 방법을 선택해서 지혜롭게 가는 것이 좋습니다. 왜냐하면 심지어 양쪽 사돈이 만나서 삿대질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둘이 결혼하면 안 볼 수 없습니다. 그 집에 상이 나거나 결혼식이 있으면 만나야 하니까 생각을 좀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될 수 있으면 관계가 최악까지는 안 가도록 하고 결혼을 하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질문7 : 결혼이 정말 필수인가요? 결혼을 통해 누릴 수 있는 참된 자유 혹은 그와 같은 것들이 무엇이 있을까?
결혼은 필수가 아닙니다. 누가 그렇게 얘기를 합니까? 제가 늘 결혼과 비혼은 삶의 양상이지 삶의 본질은 아니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더군다나 결혼을 했다고 해서 무슨 인생의 문제가 다 해결되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할 필요는 없고 설교 시간에도 제가 가끔 이야기했지만 혼자서 행복하게 사는 사람이 결혼을 할 때 행복하지 혼자서 행복하지 않은 사람이 결혼을 해서 행복할 가능성은 매우 더 드뭅니다. 그래서 솔직히 말하면 결혼의 필요를 별로 못 느끼는 사람하고 결혼을 해야 행복하지 결혼으로 도피하려는 사람하고 결혼을 해서 행복하기는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인격적으로 성숙하고 자기 인생에 대해서 책임을 진다는 이야기는 자기 혼자서 살아가는 자신의 삶을 지탱할 수 있는 사람, 나름대로 그 안에서 보람을 찾고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정신적인 준비들이 되어 있는 사람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냥 한순간에 꽂혀서 막 사랑에 눈이 멀어서 결혼하는 사람은 어떤 의미에서 도박을 하는 것입니다. 잘 될 수 있지만 잘 안 됐을 경우에 엄청난 인생의 쓰라린 경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진짜 조심해야 합니다. 그래서 제가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 항상 자매들에게 충고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난 너 아니면 못 살아. 나 너 아니면 죽어버릴 거야.”(라고 말하는) 그런 남자와 절대 엮이지 마라. 굉장히 위험하다. 오히려 쿨한 사람하고 엮이는 게 좋다. 그래. 네가 나를 사랑한다고? 나도 네가 싫지 않은데 우리 한번 노력해 볼까? 이런 사람하고 교제를 하고 결혼을 해야 확률이 높지 푹 빠져서 그냥 너 아니면 죽어버린다고 하는 사람은 (위험합니다.) 예전에도 그런 얘기를 몇 사람한테 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게(너 아니면 못 산다고 말하는 것이) 자기가 처음도 아니고 마지막도 아닙니다. 어디 가서 또 그런 얘기를 죽을 때까지 하고 다닐 사람도 많습니다. 그런 감정만을 너무 쉽게 하는 것은 별로 좋지 않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결혼은 필수가 아닙니다. 답이 됐습니까?
그리고 결혼을 통해서 누릴 수 있는 자유가 있을까요?(라는 질문을 하셨습니다.) 전도사님, 결혼하니까 자유를 느낍니까? 자유가 끝납니다. 자유는 없습니다. 혼자 살 때가 오히려 더 자유롭지 않을까요? 늦게 들어가고 싶으면 늦게 들어가고, 사고 싶으면 사고, 먹고 싶으면 먹고, 가꾸고 싶으면 가꿀 수 있습니다. 결혼하면 모든 게 제약을 받지 않겠어요? 뭘 하나 사려고 해도 남편 허락받아야 되고 남편도 아내 허락받아야 되기 때문입니다. 요즘 결혼 생활을 참 재미있게 하는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결혼 생활을 하면 기본적으로 자기 번 돈을 한 통에 다 넣고 썼습니다. 돈통이 세 개입니다. 아내 돈통, 남편 돈통, 공동 돈통. 저희 딸도 보니까 둘이 수입을 투명하게 밝힌 다음 당신 용돈 한 달에 50만 원, 내 용돈 한 달에 50만 원 이렇게 딱 정하고 그것을 제외한 금액은 모두 공통으로 내놓는 것입니다. 그래서 개인적인 것 예를 들어서 아침에 가서 해장국을 먹고, 점심때 친구들하고 회식을 하는 것은 자기 경비에서 쓰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동차세, 보험료, 임대료, 관리비 등은 공동경비에서 쓰는 것입니다. 공동으로 쓸 때는 항상 서로 허락을 받고 해야 되는 것입니다. 심지어 그런 개념이 없는 지체들도 남편하고 작정을 해서 20만 원 이상 지출할 때는 모두 배우자에게 허락을 받기로 합니다. 구두를 사는데 10만 원이면 자기가 결제해도 되는데 30만 원짜리면 아내한테 허락을 받고 쓰고 아내가 코트를 사러 갔는데 25만 원짜리는 별로인데 35만 원짜리는 너무 좋더라도 35만 원짜리 살 때는 남편한테 허락을 받아야 하는데 남편이 이렇게 비싼 것을 사냐고 하면 접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는 자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유라기보다도 혼자 사는 것은 그것대로 속박이 있습니다. 집에 들어가면 쓸쓸합니다. 같이 사는데 들어가도 쳐다보지도 않으면 더 쓸쓸합니다. 혼자 사는 게 덜 쓸쓸합니다. 이러나저러나 쉬운 게 없습니다. 그러니까 일장일단이 있는데 독신으로 사는 것은 독신대로 기쁨과 즐거움이 있고 결혼 생활하면서 사는 것은 나름대로 열매가 있습니다. 어거스틴의 표현처럼 달콤한 것과 쓰디쓴 것이 항상 겸하여 있으니 독신의 나무에서 쓴 것과 달콤한 것을 먹을 것인지 아니면 결혼의 나무에서 달콤한 것과 쓴 것을 함께 먹을 것인지 그것은 여러분들이 결정해야 될 문제입니다. 질문이 아기 같지 않습니까?
질문8 : 신앙과 인품 외에 배우자를 생각할 때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목사님 : 지금 읽으신 분이 한번 대답해 보십시오. 두 가지 이외에 중요한 게 뭘까요? 너무 잘 알 것 같습니다. 인품도 해결됐고 신앙도 해결됐으면 그다음에 뭐가 있을까요?
질문자 : 인품과 신앙이 해결됐으면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아요. 그거면 정말.. 그 두 가지면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습니다.)
목사님 : 정말 그럴까요? 외모가 너무 없는 사람도 신앙과 인격만 해결되면 결혼할까요?
질문자 : 네. 저는 결혼할 때 얼굴을 안 보고 해서... 사실 저의 이상형은 신앙이 있는 사람 그리고 솔직하고 정직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을 만났다고 생각해서 결혼을 했으나...
목사님 : 살아보니까?
질문자 : 네.(웃음) 그래서 저는 만약에 청년분들께서 한 질문이라면 그 두 가지면 충분하다고 얘기해 드리고 싶습니다. 살아본 사람으로서.
권위가 있네요. 제가 신학교 다니는 형제들에게 얘기해주는 것이 있는데 사랑을 할 마음을 가져야 결혼을 하잖아요? 사랑할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이 안에서 화학 작용이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화학 작용이 안 일어나면 인품도 눈에 안 들어오고 신앙도 눈에 안 들어옵니다. 일단 좋아하는 감정이 여기 있으니까 신앙도 눈에 들어오고 인품도 눈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사람 자체가 보기가 싫은데 그게 왜 눈에 들어오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저는 자매님이 외모를 보지 않고 결혼했다는 말에 대해서 별로 그렇게 신뢰하지 않습니다. 결혼하기 전에 아무도 안 만났을 때 그렇게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나는 외모는 중요하지 않고 신앙과 인품만 있으면 된다.’ 그렇게 생각했을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남편 된 사람을 딱 만났는데 어떻게 저런 얼굴로 세상에 태어났을까 그런 생각을 가졌다면 결코 그 인품과 신앙 그런 것도 눈에 안 들어왔을 것입니다. 그래서 신학생들에게 외모의 유효 기간은 6개월밖에 안 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6개월만 지나면 내 아내가 얼굴이 예뻐서 자랑스럽거나 (그러지 않습니다.) 아주 특별한 정신 구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럴지 모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6개월이라고 했더니 어느 자매가 신혼여행 갔다가 대판 싸우고 와서 목사님 설교 중에서 틀린 게 있는데 그 유효 기간이 6개월 아니고 4박 5일이라고 한 일이 있었습니다. 결혼하고 나면은 그런 거 필요 없고 그냥 점점 정이 들면서 살게 됩니다. 정이 안 생기게 되면 불행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형제들에게) 외모 보지 말고 신앙을 보고 자매를 골라라. 만약에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많은 연단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하니까 평범하게 생기고 신앙 좋은 사람 만나서 평탄한 길을 걷기보다는 예쁜 자매를 만나서 연단을 받고 싶다고 말한 형제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연단이 뭔지를 아직 몰라서 그렇고 코에서 단내가 나오고 거의 심장이 마르고 쥐어뜯는 것처럼 그렇게 고통을 당해봐야 안다고 했습니다. 결혼한 남자들이 대부분 경제적으로 비관하는 등의 이유도 있지만 아내와의 관계가 힘들어서 자살하는 남자들도 많습니다. 아내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자매에게 물어보겠습니다. 두 가지가 해결되면 무엇을 볼 것 같나요? (자매 대답 – 들리지 않음)
가정환경. 그렇군요. 그런데 신앙이 이미 좋고 인품이 있는데 가정에 상처가 있는 사람들은 너무 희망이 없지 않습니까? 그거 말고도 중요한 거 많습니다. 외모도 있고 경제력도 있습니다. 여성들에게 남성의 경제력은 남성들에게 여성의 미모만큼이나 중요합니다. 여성들 중에서도 유난히 외모에 예민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상당히 많은 비율의 사람(여성)이 남자의 경제적인 능력만이 아니라 능력 그 자체.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데이트를 했는데 자기 마음을 모두 알아서 계획을 완벽하게 세워서 물 흘러가는 것처럼 하고 마지막에 집 앞에서 헤어질 때 그때 여자들은 그 속에서 권위를 느끼는 것입니다. 그것은 경제적인 능력과 사교적인 능력, 인간의 심리를 파악하는 인지 능력 이런 모든 것들이 다 결합된 것입니다. 그 모든 면에 있어서 여성들은 남자의 능력을 굉장히 중요시한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능력이 좀 없는 남자를 만났을 때 여자에게 그 남자 어때요? 물어보면 계속해서 순해. 순해.(라고 대답합니다.) 외모가 별로 없는 여자를 만났을 때 그 여자 어때요? 자꾸 물어보면 착해. 착해.(라고 대답합니다.)
질문9 : 결혼하지 않고 동거를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결혼을 비롯해서 출산에 대한 중요도도 점점 떨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부분들을 시대의 흐름으로 이해하면 될까요?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바라보면 좋을까요?
우리의 기준은 성경이니까 성경을 놓고 가정의 제도를 이야기하면 사실 동거는 매우 나쁜 것입니다.
그런데 동거도 두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부득이한 사정으로 결혼식을 올리지 못하고 둘이 혼인신고를 하고 같이 사는 경우, 아예 그렇게 하지 않고 사는 경우로 동거를 나눌 수 있는데 어느 것도 바람직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결혼이라고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전에 가톨릭에서는 그것이 일곱 성사 속에 들어갑니다. 세례부터 시작해서 견진, 죽음 등 모두 7가지 성사가 있는데 그 성사 중의 하나가 혼인 성사 또는 혼배 성사입니다. 그렇게 기독교에서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기 때문에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동거의 이유를 잘 살펴보면 무슨 현실적인 것들이 계산된 것이 아니라 정욕이 개입하는 것입니다. 요즘은 옛날하고 달라서 조금 사람을 사귀고 나면은 육체관계를 요구합니다. 남성들도 요구하고 여성들도 요구합니다. 유튜브에서 보니까 기독교적인 배경은 전혀 없는 젊은 패널들이 모여서 요즘 세대를 감안할 때에 몇 번째 만났을 때 성관계를 갖는 것이 일반적이냐고 얘기하는데 깜짝 놀랐습니다. 한 달이었습니다. 저희 때는 상상할 수도 없었고 그런 부류가 따로 있었습니다. 정상적인 관계에서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만큼 세태가 바뀐 것을 보여주는 것이고 심지어 응답자 가운데 20% 이상은 일단 성관계를 해봐야 교제를 할 것인지 말 것인지 결정할 수 있다고 답했습니다. 교회 속에 있는 우리 지체들에게 굉장히 충격적으로 들리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심각하게 불신자 혹은 같은 신자인데도 신앙이 별로 없는 사람하고 교제할 때 대두되는 어려움 중 가치관의 현저한 차이입니다. 우리는 그것은 아니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에 하나님이 진정으로 그 사람들을 맺어주셔서 결혼할 마음을 주셨다고 하면 자기 일생을 의탁하고 일생을 서로에게 헌신하는 겁니다. 그런데 상대방을 비참한 자책감에 몰아넣으면서 그런 식으로 자신의 정욕을 채우는 것은 말도 안 됩니다.
제가 섬기던 교회에 둘이 너무 사랑하는 청년들이 있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자매가 혼전에 임신을 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임신이 완전히 드러나기 전에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자매가 말하기를 자신이 그 가책으로부터 벗어나기까지 무수한 세월이 걸렸다고 합니다. 가정을 이루고 아이들까지 낳고 아이들이 잘 자라고 남편이 더 없이 가정에 헌신적이었는데 결혼하고 10년이 지났는데도 그 가책에서 자기가 벗어날 수 없었고 10년 이상의 세월이 걸렸다고 얘기를 했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예수 믿는 형제들에게는 그렇게 하지 말고 자매들에게는 단호하게 거절하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런 사람이 하나님이 주신 사람일 수 없습니다. 결혼에 대해서 충분히 헌신 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동거는 여러 가지 현실적인 이유를 포장한 개소리입니다. 마지막에 정욕을 통제하지 못하는 것이 동거의 가장 까다로운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섹스 없이 동거하면 됩니다. 그것이 가능합니까? 만약에 그런 동거라면 남자 쪽에서 원하겠습니까? 그건 고문이지 왜 그런 삶을 선택하겠습니까? 그러니까 동거는 아예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하십시오. 너무나 참지 못하겠고 너무나 빨리 살고 싶으면 그냥 간단하게 목사님 모셔다가 가족들 모아놓고 예배드리고 혼인신고하고 사십시오. 그러면 됩니다.
출산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요즘은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별로 없지만 제가 젊어서 신앙생활을 할 때만 해도 극단적으로는 피임 자체를 비성경적이라고 강단에서 공격하는 사례가 굉장히 많았습니다. 그러니까 주시는 대로 낳아야 된다고 했는데 사실 말이 안 됩니다. 가임기가 일주일 정도 되니까 만약에 계속해서 부부 생활을 하면 아이들을 태어나는 수를 감당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저희 장인·장모님이 10명을 낳으셨습니다. 5명은 죽고 5명이 남았는데 그때 피임이나 산아 제한이라는 개념이 전혀 없는 때였습니다. 그럼 그렇게 될 텐데 그게 좋은 것입니까? 그러면 가임기를 피해서 부부관계를 갖는 방식은 죄가 아닙니까? 임신을 피한다는 생각 자체가 옳은 것일 수 있냐는 논리인데 극단적으로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의 견해에 대해서는 별로 동의하지 않습니다. 가족 계획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기본적으로 아이를 낳지 않는 동기 자체가 너무 세속적일 경우입니다. 건강 같은 것들은 고려할 수 있겠지만 자녀를 낳지 않는 이유가 거의 세속적인 이유 때문이라면 그렇게 썩 성경에 부합하는 것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양쪽 극단 사이의 어느 지점을 선택을 하고 아이를 기르는 것은 정말 어렵습니다.
저는 너무 힘이 들어서 첫째를 낳고 둘째를 가질 엄두를 못 냈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용기를 내서 둘째를 갖게 되었습니다. 요즘은 아들이나 딸이 하나 더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들 둘, 딸 둘이었으면 참 좋았을 텐데 (생각합니다.) 그러면 사위도, 며느리도 서로 경쟁시키고 뭔가 우열을 좀 가려보고 할 텐데 유일하니까 선택의 여지가 너무 없이 불리하다는 그런 우스갯소리도 합니다. 정말 힘들지만 아이들을 기르는 기쁨도 있습니다. 너무 큰 기쁨과 가슴 아픈 일도 있지만 보람도 있으니 해볼 만한 도전이라고 생각합니다.
질문10 : 결혼 후에 직장으로 인해 주말 부부를 하고 있습니다. 둘 중의 한 명이 양보하면 같이 살 수 있지만 둘 다 직업적인 부분을 포기하기 어려워 수년째 주말 부부를 하면서 혼자 아이 둘을 돌보면서 직장을 다니고 있습니다. 남편은 주말에 한 번 지방에서 올라오긴 하나 아이들이 크는 것을 거의 보지 못하고 육아는 제가 거의 분담하고 있으니 화도 많이 나고 저도 점점 이런 생활이 맞는 건지 회의가 듭니다. 제 직업을 포기하고 지방 소도시의 연고도 없는 곳에 내려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요?
요즘 저런 고민들을 하는 사람들이 무척 많습니다. 그리고 점점 주말 부부 하는 것을 그냥 자연스러운 현실로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어차피 둘을 다 가질 수 있으면 너무 좋겠지만 예를 들어 (집이) 서울이라고 하면 남편이 기도 많이 하면서 직장을 서울로 옮겨보는 것을 고민하는 것입니다. 남편이 그렇게 쉽지 않을 경우도 있습니다. 공무원 같은 경우는 전근을 신청하면 되는데 서울에 있는 공무원이 지방으로 내려가는 것은 쉽지만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도저히 못 옮길 상황이라고 하면 자매가 기도하면서 남편이 있는 쪽으로 온 가족이 이사를 가고 그것을 기정사실로 하여 자기의 재능이나 경력을 가지고 일자리를 찾아보면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런데 서로 좋은 직장이고 나름대로 충분한 대접을 받고 있다고 하면 손해를 감수하는 게 쉽지 않을 것입니다. 남성들의 경우에는 가족을 부양을 해야 되니까 지금 나이는 모르겠지만 수년째 (주말부부를 한다고) 했고, 아이가 둘이라고 하니까 결혼한 지 최소한 한 6년 정도 되었을 것 같습니다. 33세쯤 결혼했다고 하면 40세쯤 된 부부 같은데 남자가 40세에 20대부터 다닌 직장을 포기한다면 안정성 같은 것들이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매도 (직장을) 포기한다는 게 쉽지 않을 것입니다. 커리어도 끊어지고 경력단절 여성이 되는 문제가 있고 또 실제로 아이들이 어느 정도 다 크고 나면 직장을 그만둔 것을 후회하는 자매들도 굉장히 많습니다. 굉장히 어려운 문제입니다. 그런데 자매가 직업을 포기하고 지방에 내려가느냐 형제가 직업을 포기하고 서울로 올라오느냐 하는 문제보다도 그렇게 가족이 합쳐졌는데 맨날 싸운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우선 중요한 것은 정신적인 결합 같습니다.
지금 서로 떨어져 있으면서도 충분히 부부로서의 정신적인 결합을 누리고 있느냐는 것을 먼저 돌아봐야 합니다. 두 번째는 아이들 문제입니다. 저는 우리 부모님이 잘못됐다고 생각하는 것이 저를 6살 때에 서울로 유학을 보낸 것입니다. 할머니 집에 두고 좋은 교육을 시키려고 했는지 두 분이 귀찮아서 보냈는지는 아직까지도 미스터리입니다. 제 생각에는 할머니가 저를 너무 예뻐하셔서 데리고 있고 싶어 하시는 변수와 자녀가 셋이나 되니까 부모님이 귀찮아서 나를 하나라도 떼어놓고 싶어서 보내 버린 것, 그래도 서울에서 공부를 해야 큰 인물이 되지 않겠냐는 교육에 대한 기대 세, 네 가지가 합쳐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떤 경우를 보든지 그건 부모님의 매우 큰 실수였다고 생각합니다. 어렸을 때는 무조건 부모와 같이 있으면서 부모로부터 충분한 사랑과 교감을 받아야 합니다. 그렇게 해도 아이들이 성장하고 나면 부모와의 거리감이 생깁니다. 저는 회심하고 나서도 아버지와의 거리를 좁힐 수가 없었습니다. 참 그게 마음대로 안 되었습니다. 제가 사랑하기는 했지만 사랑한다는 것과 너무 친하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지 않습니까? 너무 좋고 편하고 친하다고 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도 별개의 문제이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사랑하면서도 어려운 사람이 있고 불편한 사람이 있듯이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더 늦기 전에 가족이 합쳐보십시오. 합쳤는데 맨날 싸울 것 같으면 합치지 마십시오. 먼저 부부로서 정신적인 연합을 이루고 있는가를 충분히 검토하십시오. 궁극적으로는 가족들이 함께 사는 것이 가장 바람직합니다. 아마 경제적으로는 금방 답이 안 나올지는 모르고 두 분이 같이 벌지 않으면 도저히 끼니를 해결할 수 없을 정도라면 어쩔 수 없고 경제적으로 보는 손해도 있겠지만 가정이 함께 삶으로써 (유익이 있습니다.) 여러분, 집 가(家)라는 한자는 돼지를 형상화한 것입니다. 돼지가 새끼들을 젖을 물리고 있는 그림이 갓머리 밑에 나옵니다. 어미 돼지가 누워서 새끼들에게 젖을 물리고 있는 그림입니다. 가족이라는 말 자체 속에 이미 함께 산다는 말이 포함된 것입니다. 그래서 같이 살아야 됩니다. 한번 진지하게 고민해 보십시오.
그리고 부부가 성격검사 같은 것도 받아보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정말 충분히 서로를 이해하고 있습니까? (질문을) 보면 화도 나고 억울하기도 하다고 하는데 검사를 받아보십시오. 성격검사도 받아보시고 억울한 느낌이나 우울감 같은 것들이 너무 심하다면 정신과 검사도 받아보시면서 부부가 대화를 많이 해서 어떻게 가족으로서 하나의 유니티를 이루면서 살 것인가 고민하는 가운데 필요하다면 지방으로 내려갈 결심 아니면 남편이 올라올 결심, 손해가 나는 걸 감수하고도 그렇게 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부부가 열심히 젊은 시절에 일해서 돈을 모으고 기반을 갖추는 것은 말할 수 없이 중요하고 때가 따로 있는 것이기 때문에 소홀히 해서는 안 되는 일인데 아이들이 잘못 자라면 경제적인 문제를 가지고 아이들의 미래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충분한 사랑 속에서 부모가 화목하고 가족 간의 일치와 단합을 이루면서 살아가는 자체가 아이들에게 참된 인간성을 길러주고 참된 신념을 갖게 하는 가장 중요한 비결이 아니겠습니까? 부부가 충분히 대화를 나눠보시기를 바랍니다.
질문11 : 신앙적인 부분의 충돌, 인격적인 부분의 충돌, 배우자의 술, 도박, 외도 등 이혼을 결정할 때 반드시 알아야 할 성경적인 기준이 있을까요? 이혼에 대한 성경적인 시각이 궁금합니다.
성경적으로 보면 이혼이 허락되는 단 하나의 사례는 성적인 부정입니다. 나머지에 대해서는 성경이 침묵하고 있는데 그 당시에는 컴퓨터도 없었고 물론 중독이 있었겠지만 지금처럼 약물 중독, 게임 중독이라는 용어도 없을 때였습니다. 그 당시에도 알코올 중독이 어느 정도 있었겠지만 크게 사회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근본적인 원리는 결혼에 있어서 부부의 성적인 부정이 있을 때 성경적으로 아주 명백하게 이혼이 허락되는 사유인데 그 기준은 시대마다 어느 정도 문화적인 배경들을 가지고 좀 더 적극적으로 해석을 합니다. 예를 들어 놀라운 부분이 청교도들이 굉장히 성경적인 삶을 살았었는데 그걸 읽으면서 저도 굉장히 뜨악했습니다. 그 사람들이 얼마나 휴머니스트가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청교도 부부가 있는데 어느 한쪽이 성적인 불능 상태가 되거나 심지어 적극적으로 성관계를 거부하는 경우 교회에서 이혼을 허락해줬습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저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이혼을 할 수 있다는 것이지 해야 하는 조건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적인 부정의 경우에 피해를 당한 쪽은 교회에 이혼의 허락을 요청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혼하는 것만이 최선은 아니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청교도들은 정신병이 있어서 도저히 부부 사이에 정신적인 결합을 이룰 수 없을 때도 이혼을 허락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로 얘기하고 싶습니다. 성적인 부정만이 아니라 심한 중독으로 현저하게 결혼 생활을 지속할 수 없을 정도의 사유를 제공한다면 이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가정 폭력(의 문제가 있습니다.) 우발적이 아니라 아예 성격으로 고착화되었을 경우에 이혼을 허락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질문의 내용은 애매한 부분이 있습니다. 신앙적인 부분의 충돌이 뭔지 잘 모르겠는데 예를 들어 아내에게 신앙을 버리라고 요구하거나 자기가 이단에 빠져서 아내에게 강요할 경우에는 이혼 사유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애매한 것이 인격적인 부분의 충돌인데 이것은 목사 부부에게도 있습니다. 세상의 이혼 사유 중에 제일 애매한 것이 성격의 차이라고 하는데 세상에 성격이 같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차이가 나기 때문에 결혼을 하는 것이지 자기와 판박이인 사람을 만난다면 마음에 끌리겠습니까? 아마 안 될 것입니다. 사랑이 있었을 때에는 성격이 차이나는 것이 매력의 원인이었는데 사랑이 식고 나면 미움의 원인이 됩니다. 배우자의 술도 마찬가지인데 불신자거나 예수를 믿어도 술을 마시는 사람은 있을 수 있는데 문제는 정도입니다. 알코올 중독 상태가 되어 사리 분별을 못 하고 폭행을 행하는 경우에는 곤란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경우에도 기다렸다는 듯이 그런 상황이 만족이 되면 이혼을 해야 된다는 것이 아니라 결혼 생활을 지속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치료하고 고치려고 생각을 해야 되겠습니다. 그래도 도저히 회복이 불가능하다고 할 경우에 이혼을 고려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혼에 대한 성경적인 시각은 대개 그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 너무 쉽게 결혼 생활을 포기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여러분, 부모하고 사는 것이 쉽습니까? 안 쉽습니다. 자기를 낳아준 부모와 똑같은 문화 속에서 일평생을 살았습니다. 엄마 품에서 태어났으니까 그 문화 속에 내가 살았고 그 문화의 창시자가 엄마, 아빠이고 동일 문화권에서 혈육을 나눈 사람도 이렇게 같이 살기가 힘든데 30살에 결혼한다고 하면 30년 동안 완전히 문화도 다르고 피와 살도 안 섞인 사람들이 만나서 살아가는 게 그게 쉽겠습니까? 쉽지 않습니다. 한 사람이 사회적으로 아무리 많은 존경을 받아도 그 평가는 틀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가족들이 존경하면 그 평가는 틀릴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삶을 지켜보는 사람들이 좋은 사람이라고 하고, 사랑이 많은 사람이라고 할 경우에 틀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좋은 엄마, 아빠가 되고 좋은 자녀가 되고 좋은 며느리가 되면 그는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수없이 이루어 온 사람이 아니겠는가 하고 생각합니다. 사랑이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질문자 : 위와 같은 갈등이 있을 때 이혼이 아니라면 신앙인으로서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이혼이 아니라면 결혼 생활을 유지해야 합니다. 질문만큼이나 대답이 너무 짧지만 유지해야 합니다. 유지하려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사랑해야 합니다. 미운 마음을 가지고 평생을 살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사랑해야 합니다. 설교시간에 했던 이야기인데 오래된 일입니다. 약 15년쯤 지난 것 같습니다. 가정 시리즈 설교가 진행되던 때였는데 이혼하려는 여성 친구를 생각하니까 너무 가슴이 아팠습니다. 남편이 못되게 행동했다고 합니다. 너무 마음이 아프니까 전화를 해서 일요일에 밥을 사주기로 하고 약속 장소를 평촌으로 정했습니다. 밥을 먹고 예배를 드리고 가자고 권유하여 예배를 드리러 왔습니다. 하필이면 그날 설교 제목이 ‘이혼을 생각하는 그대에게’였습니다. 자매는 생전 처음 교회를 왔는데 그 설교를 듣고 펑펑 울고 갔습니다. 그리고 집에 가서 자기 남편을 불렀습니다. 이혼을 위해 자기는 도장을 찍었고 남편 보고 찍으라고 강요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남편은 또 (아내가) 바가지를 긁으려나 보다 생각하고 갔더니 아내가 무릎을 딱 꿇는 것입니다. (아내는) 막 울면서 지금까지 우리 가정이 망가진 것은 완전히 100% 당신(남편) 책임이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오늘 교회에 가서 설교를 듣고 보니까 내 잘못도 너무 많았고 당신이 나 같은 사람 만나서 정말 힘들었겠다면서 미안하다고 용서를 빌었습니다. 남편이 뭐라고 그랬겠습니까? 이제야 깨달았어? 바보야? 그랬겠습니까? 아니라고 그랬습니다. 여성의 예를 드는 것이 남성에 대한 편들기(로 보일 수 있지만) 그런 의도는 전혀 없고 다만 남자에 대한 사례가 아직 없었기 때문에 그 장면이 예를 드는 것입니다.
인간의 감정이라는 것이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만큼이나 굉장히 직관적입니다. 사랑할 때 수첩에 빼곡하게 사랑할 만한 이유를 적었기 때문에 사랑하는 게 아니듯이 미워하는 것도 근거가 없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을 내려놓고 서로를 사랑할 수 있는 그런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조심해야 할 것은 결혼 생활을 지속하는 데 늘 눈물로 기도만 하면서 모든 것을 당하기만 하고 감당해야 하는 그런 사람은 되지 마십시오. 하나님 앞에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가정을 위해서 시련을 참고 견디는 것은 물론 해야 하지만 소통을 해야 됩니다. 자기의 생각을 끊임없이 배우자에게 알리고 배우자의 생각을 이해하려고 노력을 하는 가운데 가지고 있는 생각들이 서로 흘러서 이해하게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서로 미워하는 감정을 가지고 있는 동안은 소통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미움)을 하나 내려놓고 소통하기 시작하면 마치 댐 구멍이 터질 때는 바늘 같은 물이 나오는데 계속 나오면서 물이 커져서 둑을 무너뜨리듯이 그렇게 시작되는 의사소통이 처음에는 미미할 정도지만 계속 신뢰 속에서 키워 가면 훨씬 더 자기가 완고하게 붙들고 있던 부분들과 소통할 수 있게 됩니다. 18세기나 19세기 조선시대 여성처럼 인고의 길을 눈물로 가는 그런 여자들은 되지 마시고 운명 타령하면서 한 여자에게 매여서 사는 그런 남자가 되지 마시고 소통을 하십시오.
결혼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조건이 신앙과 인품을 이야기하는데 서른 살에 만났는데 신앙이 깊으면 얼마나 깊고 인품이 뛰어나면 얼마나 뛰어나겠습니까? 어떤 자매들은 자기는 다 필요 없고 진짜 자기를 진심으로 한없이 사랑해주고 이해심이 많은 남자, 존경할 만한 남자하고 결혼하고 싶다는데 30년 연상쯤에서 찾아봐야 됩니다. 30년 연상으로 찾든지 위인들의 전기를 읽으면서 젊은 시절을 보낸 독신으로 살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20∼30년 정도 연상에서 찾으면 그런 사람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마흔통에 대해서 공부하는데 여러분들은 40대에서 깨달은 게 없습니다. 20대들 모아놓으면 할 얘기가 되게 많습니다. 여러분은 40대인데 지금 안개 속을 지나가고 있습니다. 저희 나이는 되어야 40대에 이렇게 살았어야 했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항상 후발적입니다. 그러니까 40대의 비혼 여성을 품에 안고 한없이 너그러운 마음으로 존경받을 만큼 살 수 있을 정도가 되려면 최소한 60대 중반이지 않습니까? 그러면 존경할 만한 인격이 가능할 것입니다. 그런데 존경할 만한 인격이 기운이 없어 곧 수발을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매들도 그렇지 않습니까? 안 그런 사람도 있지만 60세가 넘으면 부부 사이에 인류애가 생깁니다. 우스갯소리가 아니라 동포로 여기면서 살게 됩니다. 한 인간으로서 얼마나 가여운지 그런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 나이에도 전혀 못 깨달은 사람들이 정말 많습니다.
질문12 : 이혼 사유에 해당되는 문제가 생길 경우 용서하고 다시 기회를 주는 게 맞을까요? 아니면 이혼하는 게 맞을까요? 만약 기회를 준다면 몇 번이나 기회를 줘야 할까요?
참 어렵습니다. 이혼 사유가 생기면 이혼을 청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을 좀 많이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단둘이서 같이 살고 아이도 없고 재산 문제도 없고 문제 될 게 하나도 없다면 이혼하는 게 비교적 가벼울 수 있지만 아이들이 있다면 부부가 둘이 잘못해서 찢어지는 건데 아이들은 순수하게 피해자가 되는 것이지 않습니까? 그 상처는 굉장히 큽니다. 아마 일생을 좌우하게 될 것입니다. 각별한 하나님의 은혜가 없는 한 자녀들이 부모 이상의 삶을 사는 것이 아마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혼은 진지하게 종합적으로 생각을 해봐야 되겠습니다. 가장 좋은 것은 이혼할 만한 상황이 오히려 합력해서 선을 이루어서 부부의 관계가 더욱 견고해지고 성숙으로 나아가는 게 더 좋겠습니다. 선택지는 자기 자신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상황을 딱 접했을 때 그것들을 냉정하게 바라보면서 선택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혼하기 직전에 있는 경우에 자매들의 마음은 죽이고 싶도록 밉지 않겠습니까? 저 인간을 안 볼 수 있다면 어떤 희생도 감내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사실 공정한 생각과 판단을 하기 매우 어렵습니다. 신중하게 생각을 해야 합니다. 제가 어떻게 하든지 참으면서 살아가라고 하지 않는 케이스가 몇 개 있는데 그중에 하나가 가정 폭력입니다. 정신과적인 치료를 받아서 회복되기 전에는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끊임없는 외도입니다. 한 번이 아니라 끊임없는 외도입니다. 거의 성적인 중독 상태 같은 것은 해보기 쉽지 않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반드시 이혼하라기보다는 그만큼 치료가 쉽지 않다는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몇 번이나 기회를 줄 수 있을까요? 그것은 정해진 규칙이 아닐 것입니다. 본인이 감당할 수 있는 능력, 가족들의 안정 등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오래된 일이지만 교회 안에서 한 자매가 고등학교 3학년 때까지 너무 아무것도 모르는 순수 덩어리로 살다가 한 형제를 만났는데 완전히 맛이 간 것입니다. 결국 가출했고 집안에서 보니까 너무 아니라서 절대 결혼은 안 된다고 했는데 이미 때가 늦었습니다. 할 수 없이 결혼을 허락해줬는데 무지막지한 폭력이 행해지는 것입니다. 폭력이 조금 있는 게 아니라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였습니다. 제가 잘못하면 딸이 죽고 살인 사건이 일어날 수도 있다고 당장 헤어지라고 했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100% 즉각적인 이혼을 요구해야 합니다. 나중에 모든 일이 정돈되고 다시 결혼을 하는 일이 있더라도 일단은 분리되고 봐야 합니다. 고쳐지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신중과 결단 사이에서 잘 판단하기를 바랍니다.
질문13 : 배우자와 사별하거나 이혼하게 되면 주위에서 재혼을 많이 권합니다. 재혼을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일까요? 재혼을 하게 된다면 재혼 과정을 세워가기 위해 필요한 것들은 무엇이 있을까요?
재혼의 문제는 이혼보다 훨씬 더 어려운 것이라고 봅니다. 이혼은 자기가 혼자서 결심을 하면 됩니다. 재혼은 그 정도 결심을 가지고 안 되고 그 사람과 함께 살아가야 되고 더 큰 문제는 그 사람들의 가족들입니다. 더군다나 자녀가 있을 경우에는 그 자녀들과의 관계를 평생 풀지 못하는 경우들도 많이 있습니다. 물론 의외로 자녀들의 수용성이 뛰어나서 현실을 받아들이고 새엄마 혹은 새 아빠와 함께 잘 사는 경우도 없는 건 아니지만 쉬운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가 「가슴이 시리도록 그립다, 가족」책에서 권한 것은 이혼했으니까 결혼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대신 신중하고 기도 많이 해야 합니다. 아무 조건도 없는 상태에서 남자를 만나서 첫 번째 결혼을 할 때에 들어갔던 것보다는 훨씬 더 많은 에너지가 들어간다는 것만은 명심을 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재혼할 수 있지만 경솔하게 할 일은 아닙니다.
다른 문제는 자기가 낳은 자녀들의 문제입니다.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확률적으로 보면 계속해서 독신으로 살면 자기 자녀들과의 관계가 그나마 계속 유지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런데 결혼을 해버리게 되면 엄마하고 관계가 유지될 가능성이 뚝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 것 모두 필요 없고 자녀들은 이혼과 함께 나와의 관계가 끝난 것이고 나는 내 인생을 가겠다고 결심하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녀들과의 관계에 대한 미련이 많다면 이것은 더욱 신중하게 생각해야 되는 문제입니다. 궁극적으로 모든 선택지 가운데 먼저 해결해야 될 것이 있는데 결혼과 이혼, 재혼을 반복하면서 살아가게 하는 그 사람의 마음의 상태는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 인한 만족,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겠다는 확고한 인생관, 신앙관 등이 없는 가운데 계속 결혼 생활 하나에 자신의 인생 전체가 휘둘리면서 행복과 불행을 오가는 것이 마지막에 바람직한 노년을 맞게 해줄 것인가는 생각을 많이 해봐야 하는 것입니다.
질문자14 : 사춘기 자녀의 이성 교제와 성에 대해 어떻게 신앙적 테두리 안에서 지도를 하고 허용을 해야 할까요? 장애 자녀 포함.
굉장히 어려운 문제입니다. 극단적으로는 아이들에게 성에 대해서 지식을 주면 반드시 눈을 뜨니까 아예 가르쳐주지 말아야 된다고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견해를 주장하는 것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동의를 하는데 그 의견에 완전히 찬성표를 던질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실질적으로 그런 무지 속에서 아이들이 임신부터 낙태에 이르는 수많은 문제들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좀 의견이 다릅니다. 저는 오히려 아이들에게 성에 대해서 가르쳐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있는 그대로를 아이들에게 솔직하게 설명해주고 그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동시에 잘 가르쳐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안 가르쳐준다고 그런 위험에 안 빠지는 것도 아니고 가르쳐준다고 모두 빠지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식이 타락을 하려고 마음을 먹으면 아무도 못 말립니다. 부모도 말릴 수가 없습니다. 지금 학교마다 좀 다르겠지만 도시를 놓고 볼 때 통계적으로는 소도시가 훨씬 성적으로 문란합니다. 그다음에 중도시가 좀 낫고 대도시가 또 문란합니다. 지금부터 한 10여 년 전의 통계라서 지금은 또 많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여자고등학교를 기준으로 보면 성 경험을 가진 학생들이 30%가 넘은 것이 벌써 한 15년 전의 이야기니까 지금은 비율이 훨씬 더 높아졌을 것입니다. 식품이나 호르몬 분비 같은 것 때문에 성적으로도 아이들이 훨씬 조숙해지고 사회 문화가 성에 대해서 굉장히 자극적입니다. 더 빨리 눈을 뜨게 하는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어렸을 때 일부러 접하려고 용을 쓰지 않으면 그것을 접할 수 있는 통로들이 다 차단이 됐습니다. 영화 같은 것도 저희 중고등학교 다닐 때는 기준이 너무 엄격해서 허벅지 정도 나온 것까지만 허락이 됐고 허락을 안 했습니다. 회심하고 극장을 안 가서 굉장히 많은 세월이 지났고 결혼 후 한 번 갔는데 충격을 받았습니다. 상반신이 모두 노출되는 것이 법적으로 허락이 되는 것입니다. 그날 저녁에 그 변화의 충격을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저희 고등학교 때는 일부러 자기가 돈을 주고 그런 사진을 사거나 외국에서 잡지 같은 것들을 몰래 사서 보기 전에는 볼 수 없는 부분이었습니다. 그런데 문화가 관대해지고 혼전 동거부터 순결의 개념 같은 것들이 무가치한 것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지금은 그 통계를 기준으로 한다면 40∼50%가 훨씬 넘지 않을까 추측을 합니다.
그러니까 그런 상황 속에서 자녀들을 통제한다는 것이 사실 불가능하니까 아주 솔직하게 성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고 그것이 어떤 점에서 우리의 책임을 동반하는지 그것을 남용했을 때 어떤 불행한 일들이 생기는지 하는 것을 솔직하게 알려주고 아이들로부터 호기심을 떨어뜨려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아이들은 초등학교에서 중학교 올라갈 때 타락의 봇물이 터지고 대학교 들어갈 때 다시 한번 그렇게 됩니다. 시쳇말로 발랑 까진 아이들은 그런 연대(?)가 필요 없지만 평균적으로 도덕성을 가지고 있는 집안의 아이들의 경우에는 그렇게 두 번 봇물이 터집니다. 중학교 때는 휴대폰하고 관계도 많이 되고 대학에서는 성인이 되었으니 자유와 (관계가 됩니다) 그런 것을 오히려 정확하게 가르쳐주고 그것이 어떤 책임을 우리에게 요구하는지를 이해하게 해야 합니다. 저는 아이들에게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아예 초등학교 때부터 노래방을 데리고 다녀서 중학교, 고등학교에 가도 신비감이 하나도 없게 하고 술을 마시는 것을 권하지 않지만 아이들에게 사실 그것도 별 게 아니라는 것을 미리 보여줘서 그것이 아이들에게 새로운 환경이 될 때 유혹이 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경험한 것에 대해서는 자극성이 낮지 않습니까? 그래서 저는 그렇게 가르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부모와 함께 노래방을 다니고 부모와 함께 그런 문화를 접하면서 그것이 가지고 있는 은폐성들을 많이 차단하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아이가 성적으로 잘못됐을 경우에도 이것을 엄마한테 다 털어놓으면 세상에 한 사람 엄마는 다 이해할 것이라는 정도의 신뢰를 갖게 해주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기준을 제시하고 여기에 미치지 못하면 밀어붙이거나 정죄를 하는 그런 것만으로는 교육이 안 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아이들이 그런 문제가 생겼을 때 누군가 한 사람을 찾아가서 그것을 털어놓을 수 있으면 내 짐이 덜어질 것이라는 뭔가를 주는 사람이 있어야 될 것입니다. 부모가 아니면 어디 가서 찾을 수 있겠습니까? 상상하기 싫은 이야기지만 모든 나쁜 일이 나의 자녀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항상 마음에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심성을 가지고 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도록 가르쳐야 된다고 봅니다.
장애인의 경우에는 문제가 좀 큽니다. 왜냐하면 정신적으로는 장애가 없고 육체적으로만 장애가 있을 경우에는 육체적인 문제뿐인데 정신적으로 자기를 책임질 수 없는 장애를 가지고 있는 아이들이 성관계를 가져서 아이 낳게 되면 자기들이 그 아이를 책임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고스란히 조부모의 몫이 되거나 사회 기관에 보내게 되는 것입니다. 굉장히 조심스러운 것입니다. 그 아이들의 성욕을 어떻게 처리할 것이냐는 것들은 전문가의 면밀한 상담이 필요합니다. 굉장히 어려운 문제이지만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현실이니까 어떻게 하든지 버텨내며 살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자녀들에게 솔직하게 털어놓고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아이들이 부모와 성에 대한 생각들을 솔직하고 충분하게 대화하는 것이 좋고 그것이 어려우면 친구들 간에라도 충분히 대화하면서 신앙적으로 그것들을 소화해낼 수 있는 그런 역량들을 미리 길러가는 것이 훨씬 좋습니다.
질문15 : 부모의 기준에 못 미치는 자녀를 볼 때면 마음에 화가 생깁니다. 물론 예수님께 용서받은 사랑으로 자녀를 용납하고 허용해야 하는 것을 알고 부단히 애를 쓰려 노력하지만 무너지는 순간들이 많이 있습니다. 부모로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부모의 기준으로 생각할 때 그 기준을 통과하는 자녀들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제가 묻고 싶은 것은 지금 말을 하고 있는 본인은 부모의 기대를 통과했습니까? 그분(질문자)이 어렸을 때 부모님도 저런 상담을 어디에 가서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사랑은 언제나 계획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하면 계획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자녀를 향해서 계획을 갖는 것은 사랑을 표시하고 기대를 갖는 것이지만 집착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것은 옳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 지난 시간에 다루지 않았습니까? 세상 교육을 따라가려고 하면 신앙 교육이 안 되고 신앙을 따라가려고 하면 아이가 아무 능력이 없는 사회인이 될까 봐 걱정되는 심리(에 대한) 분석까지 하지 않았습니까? 여기도 똑같습니다. 부모의 기준에 못 미치는 자녀를 볼 때는 마음에 화가 생깁니다. 그때 제가 심리 분석에 들어간 것입니다. 이 기준이 무엇입니까? 이런 것입니까? 쟤는 왜 15살이나 되었는데 예수님을 조금도 안 닮은 걸까? 나는 그 기준에 못 미치는 걸 보고 화가 나. 내가 15년을 키웠는데 예수를 전혀 안 닮았어. 어떻게 저런 새끼가 나에게서 태어났지? 그런 심정이 느껴지십니까? 대답해 보십시오. 심정이 느껴지십니까? 아닌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러면 도대체 기준이 무엇입니까? 두 번째. 아니 우리 아들을 내가 16년이나 키웠는데 어쩜 저렇게 사랑이 없을까? 저렇게 사랑이 없는 마음으로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남에게 베풀며 살아갈 수 있을까? 저건 내가 기르려고 했던 아이가 아니야. 내 기준에 못 미쳐. 그런 것입니까? 제가 보기에는 그것도 아닐 것 같습니다. 그럼 무엇입니까? 공부가 제일 크게 좌우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러면 제가 묻고 싶습니다. 그렇게 화가 나는 본인은 공부 잘하셨습니까? 그렇다고 할 수 있는 부모들도 있겠지만 10명 중의 2명도 안 됩니다. 공부 좀 하라고 하도 엄마가 잔소리를 하니까 어느 날 고등학생 아들이 “엄마, 엄마는 공부 좀 했어?” 엄마가 주춤합니다. “엄마가 공부 좀 했는데 왜 대학은 거기 나왔어? 이 정도 하면 내가 잘하는 거 아니야? 엄마도 못한 걸 왜 나보고 자꾸 강요해?” 엄마가 한순간에 할 말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냥 생긴 것만큼 공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난 시간에 얘기했지만 공부 못하는 아이들은 없습니다. 공부가 국·영·수라고 할 경우에는 잘하는 애들 있고 못하는 애들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뭐든 마찬가지입니다. 그림을 그리기를 해보면 모든 애들이 똑같이 그림을 잘 그립니까? 그런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노는 것도 잘 노는 애들이 있습니다. 어떤 애들은 절대 못 놉니다. 진짜 잘 노는 애들은 10명 중 한두 명밖에 안 됩니다. 결국은 자기 아이가 어느 방면에서 가장 좋은 재능을 타고났고 학습 능력이 있는가를 찾아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동의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모두 국·영·수를 잘해서 좋은 대학교를 들어가서 소위 유명한 그룹이나 직장에 들어가면 확률적으로 행복하게 살 가능성이 높고 경제적으로 안정될 가능성이 높기는 하지만 그게 행복의 전부는 아니라는 것은 여러분들이 이해할 것입니다. 그리고 주위에 보면 공부 못했는데도 유재석같이 다른 방면에 재주가 뛰어나서 저렇게 돈 많이 벌고 잘 살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우리 아이가 어떤 점에 있어서 재능을 가지고 있는지 발견하게 해주면 좋습니다. 학교 공부를 못한다고 해서 완전히 열등생이 취급하는 것은 올바른 교육이 아닙니다.
저는 진짜 자존감이 낮았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어렸을 때 ‘나는 도대체 잘하는 게 뭐가 있나. 나는 왜 이렇게 공부를 이것밖에 못할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국어는 너무 재미있었습니다. 국어는 초등학교 5∼6학년 때 항상 탑이었습니다. 1등이었습니다. 수학은 너무 지겨워서 하기 싫었습니다. 나중에서야 수학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되고 수학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닫게 되는데 일반적으로는 그렇게 공부를 썩 잘하지 못했습니다. 12년 동안 하루도 학교 가는 날이 재미있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공부를 못한다는 거를 입증해 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우리나라의 교육이 안 맞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의 자녀들이 공부를 잘하지 못할 때 항상 이 결과를 놓고 자녀가 굉장히 머리가 나쁘거나 노력을 안 한다고 몰아붙이지 말고 우리나라 교육의 시스템이 우리 아이에게는 전혀 안 맞을 수도 있다는 걸 생각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럴 경우에 외국으로 유학을 보내면 좋겠지만 그렇게 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이 아이의 잠재적인 능력을 개발할 수 있는 것을 찾아야 합니다. 그러면서 아주 많은 것들을 접촉하게 만들어줘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읽기, 쓰기, 말하기, 공작하기, 만들기 등 정신적인 활동부터 육체적인 활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경험들을 하다 보면 어느 순간에 피식하고 스파크가 튀는 그 지점이 있습니다. 그것이 학문, 예능, 문학일 수도 있고 혹은 건축이나 이런 것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아이가 그 방면에 스파크가 일어나면서 뭔가 불똥이 튄다고 하는 것은 그 아이 속에 가지고 있는 잠재성과 만났다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 해봤는데 아닌 경우도 있겠지만 그 경험은 모두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기회)을 마련을 해주는 것이 부모가 해야 될 일입니다. 맹모삼천지교에 나오는 가르침도 엄마가 환경을 끊임없이 바꿔주면서 스파크가 일어나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육입니다.
그리고 부모들이 공부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합니다. 그러면 목사님은 버렸냐고 묻습니다. 네. 저는 버렸습니다. 저는 아주 진작 버렸습니다. 아이들 초등학교 때 버렸습니다. 계기는 못하니까 버린 것입니다. 저는 처음에 수재를 낳은 줄 알았습니다. 천재를 낳은 줄 알았습니다. 나중에 보니까 평범 이하였습니다. 그래서 접었습니다. 아들이 하는 말이 우리 아버지는 내가 하나님만 사랑하면 모든 것을 용서해 주는 사람이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실제 제 마음이 그랬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대학교 졸업할 때까지 한 번도 성적표를 보지 않았습니다. “자유롭게 살아라. 무엇을 해야 될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네가 자유롭게 살아라. 목사의 아들이라는 것, 딸이라는 것에 너무 신경 쓰지 말고 너 자유롭게 살아라.”(라고 말해줬습니다.) 그렇게 기회를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수준의 문제를 설정하지 마십시오. 어느 정도 수준이면 만족을 하겠습니까? 반에서 중간? 5등 안에? 4등 안에? 인 서울? 아니면 서울에 들어가면 스카이? 뭐 어디 무슨 과? 그런 기준이라고 그러는데 아이들이 그냥 자유롭게 자라게 두십시오. 그리고 공부 안 하려고 하는 아이들은 공부 억지로 시킬 수 없습니다. 때린다고 되고 강요한다고 됩니까? 스스로 자신이 자각을 가지고 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으로 자녀를 용납하고 허용해야 하는 걸 알고 애쓰고 노력하지만 무너지는 순간들이 많습니다. 결국은 자기 자신에게 실망하고 꺾이는 그런 심리를 보여주고 있는 것 아닙니까? 왜 화를 냈습니까? 아이들을 사랑하고 공부를 잘하든지 못하든지 각자 재능의 문제이니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음 안에서 살려고 애쓰는 자녀가 되도록 마음을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반드시 좋은 결과가 나올 겁니다. 뭘 하든지 자유롭게 자기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살도록 (하십시오.)
제일 중요한 건 지난 시간에 얘기했지만, 자녀와의 사랑의 관계를 깨뜨리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네가 뭘 해도 나는 너를 사랑한다고 많이 표현하십시오. 표현을 너무 못합니다. 다 큰 아이들은 좀 쉽지 않겠지만 어린아이들을 가진 부모들은 많이 안아주십시오. 스킨십을 많이 하십시오. 사랑한다. 사랑한다. 네가 이 세상에서 제일 예쁘다. 얼핏 보면 모르지만 자세히 보면 예쁘다. 나태주 시인(의 시)처럼 자세히 보면 예쁘다. 사람들은 다 얼핏 보는데 자세히 보면 엄마는 우리 딸이 (제일 예쁘다.) 어제도 그 얘기했는데 (딸이) “엄마가 맨날 나보고 너는 예쁘다고 해서 나는 대학교 1학년 될 때까지 제가 진짜 예쁜 줄 알았어요.”(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결국 나중에 예쁘지 않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정신적인 것이니 많이 사랑해주세요. 그리고 더 많이 사랑해주지 못하는 것을 고민하십시오. 성적표 한 장에 일희일비하지 마십시오. 어떤 청년이 자기 엄마가 얼마나 자기 성적에 무관심했는지 항상 성적표를 받아 가면 생선 굽는 데 쓰셨다고 합니다. 딱딱하고 빡빡해가지고 기름도 잘 스며들고 해가지고 생선 위에다 올려놓았습니다. 얼마나 멋있습니까? “70점? 생선이나 굽자. 사람은 되어야 하느니라. 그리고 네가 공부를 못해도 잘해도 너를 향한 엄마의 사랑은 변함이 없다. 그리고 문제가 안 된다. 이걸 놓고 어디 대학교 갈래 그러지 말고 네가 하고 싶은 걸 찾아라. 컴퓨터 게임을 하고 싶다면 게임학과에 가라고 건축해서 집을 짓고 싶다면 건축학과를 가라. 이 세상에 태어났으니까 돈벌이 얼마나 잘할지 그런 거 생각하지 말고 한 번밖에 없는 인생이니까 진짜 네가 해보고 싶은 것을 해라. 그러면 아이들이 공부할 이유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등불학교는 초등부, 세빛교실은 미취학이고, 이제 우리가 중고등부 등대학교를 기획하고 있습니다. 등대학교에서 계획하는 것은 수많은 직업군들을 만나는 것입니다. 세계관, 성경, 신앙, 경건 등 프로그램이 많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연예인, 법조인, 건축가 등을 많이 만나게 해줘서 스파크가 튀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부분이 자기의 가슴에 다가오는 것인가 (경험하고) 아이가 자기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자유롭게 살도록 (하는 것입니다.) 단, 내가 어떤 처지에 있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부모를 보면서 느낄 수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정말 부모님은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모든 것을 용납해 주는 사람이고, 내가 아무리 훌륭한 것을 해도 그렇지 못하다면 부모님은 나를 기뻐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자신의 온몸으로 보여줘야 되는 것입니다. 부모로서의 가장 중요한 조건은 순수하게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능력입니다.
화를 가라앉히시고 역으로 생각해 보십시오. 진짜 자녀가 너무 꼴 보기 싫을 때 자녀에게 가장 좋은 것을 해주십시오. 내가 너에게 오늘 사랑으로 복수를 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성적이 개떡같이 나왔을 때 “우리 오랜만에 외식하러 갈까? 너 좋아하는 삼겹살집에 가자.” 그리고 그냥 한없이 먹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억누르십시오. 억누르십시오. 남편이나 아내가 밉고 섭섭할 때 백화점에 가서 그 마음을 억누르면서 장시간에 걸쳐서 선물을 고르십시오. 그리고 선물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관계를 자기 자신이 스스로 소화시키면서 나가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공부 못한다고 너무 닦달하지 마십시오. 아이는 안 하고 싶어서 안 하겠습니까? 안 되니까 안 하는 것입니다.
질문16 : 주위에 보면 임신을 했는데 아이가 장애로 태어날 확률이 높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을 우리가 선택할 수 없고 또 자연 유산이 되지 않는 이상 생명을 주신 하나님이시기에 키워야겠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을 보았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어려운 일들을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선택을 해야 할지 목사님 의견이 궁금합니다.
가장 성경적인 의견을 지금 본인이 얘기하신 것입니다. 생명은 주님의 주권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아이가 다운 증후군이라는 판정이 미리 나오는데 낳는 것이 성경적입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오늘날의 기독교 윤리에서는 결정권이 부모에게 있다고 봅니다. 무슨 뜻이냐면 의사의 소견이 있을 경우에 그렇게 봤다고 하면 사람들이 그렇게 봅니다. 그런데 어려운 일이긴 하지만 우리 목회자들은 모든 생명이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니까 태어나면 그 아이는 다운증후군 같은 경우 한 30살 정도 되면 아이들이 가지 않습니까? 부모로서 너무 가슴 아픈 일이지만 어차피 우리의 인생은 좋은 일만이 아니라 나쁜 일까지 함께 엮어지면서 결국 좋은 것을 드러내 주시기 때문에 믿음으로 살지 않는다면 아무리 훌륭한 아이를 낳아도 불행할 것이고 믿음으로 산다면 그 아이는 그 나이대로 쓰임을 받으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않겠느냐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런 희망을 가진 장애인의 부모님들 중에서 그런 희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기쁨으로 자신의 자녀를 돌보면서 일생동안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생각을 합니다. 그렇지만 누구도 그것을 남이 강요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들이 여지를 남겨줘야 될 것 같습니다.
질문17 : 공교육이 성경에서 가르치는 진리와 위배되는 현실이 크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주위에 많은 부모님들이 대안학교, 홈스쿨링, 조기 유학 등을 알아보고 동경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리고 교회들 가운데도 기존에 대안학교를 갖추고 있기도 하고 대안학교를 설립 혹은 고민하고 있는 교회들도 생겨나고 있다고 들었는데 이에 대한 열린 교회의 교회적 설명은 없을까요? 열린교회의 다음 세대를 위한 비전과 힘쓰는 부분들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요?
여러분들이 함께 저와 생활해 보셨으니까 아마 차세대 교육에 대해서는 우리 교회가 결코 다른 교회에 뒤지지 않는 열심으로 투자를 하고 있고 또 마음을 기울이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실 겁니다. 그러나 대안학교를 세우는 문제는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돈이나 무슨 그런 문제가 아니라 과연 우리 교인들이 원하는 사람이 모두 들어올 수 있는 규모의 대안학교를 만들 수 있겠습니까? 어차피 그것도 다양한 경쟁을 통해서 소수의 사람들이 들어와야 합니다. 또 예를 들어서 열린교회에서 대안학교를 세우는데 한 달 학비가 250만 원이라고 하면 그것도 특권층만을 위한 것이 되지 않습니까? 만약에 그렇지 않고 무료로 교육시켜준다고 하면 현실적으로 (필요한) 어마어마한 비용은 선교 등 굉장히 많은 부분을 포기하고 투입해야 합니다. 그것은 교회가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교회의 재정적인 역량 중 3분의 1, 4분의 1을 몇십 명 교육시키는 일에 쓴다는 것은 교회가 가지고 있는 다른 모든 상황들과의 균형적인 면에 있어서 공정성의 원칙이 어긋나는 것입니다. 대안학교를 세우고 싶다는 생각을 안 해본 것은 아니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교회가 가지고 있는 사명들을 균형 있게 이루어가기 위해서는 우리 정도의 규모를 가진 교회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고 그렇게 하고 싶은 뜻도 별로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마음을 먹으면 좋은 대안학교를 찾아서 학생들을 보내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대안학교가 두 개의 문제가 있습니다. 아주 좋은 대안학교는 들어가기가 굉장히 어렵고 굉장히 많은 돈을 지출해야 합니다. 물론 사교육비와 비교하면 얼마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발도르프 (대안학교)가 한 4∼5년 전에 150만 원 이야기가 나왔으니 (지금은) 훨씬 더 올랐을 것입니다. 그런 정도로 학비를 받지 않고는 학교가 운영이 안 됩니다. 그렇게 교육을 잘 받는 것은 좋겠지만 돈 없는 사람들은 그림의 떡일 것입니다. 교회에서 그런 것들(대안교육)을 전액 무료로 해준다고 하더라도 몇 명이나 그런 교육을 시킬 수 있겠습니까? 아마 우리 교인들도 모두 교육을 다 못 시키고 수요를 아마 충족하지 못할 것입니다. 불가능합니다. 이미 수원중앙침례교회에서 유치원부터 초등학교, 중학교까지 설립했는데 거기도 경쟁률이 어마어마하게 치열하고 만여 명 되는 교인 가운데 극히 일부분의 사람들만 혜택을 보고 있습니다. 그것도 엄청 치열한 경쟁을 통해서 들어가야 합니다. (다른 대안학교들은 학비를) 200만 원 가까이 받는데 열린교회가 그런 학교를 세워서 자기의 자녀가 들어갔고 학비를 안 받는다고 하면 교인 입장에서 너무 좋겠지만 몇 사람이나 그런 혜택을 줄 수 있겠습니까?그것은 어려운 것들이고 항구적으로 지속 가능한 사업도 아닙니다. 아이들이 잘 자라기 위해서 학교 교육만 필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오히려 그 막대한 예산을 교육의 다른 부분에 투자(할 필요가 있습니다.) 학교 교육만 필요하다면 교회 학교가 뭐가 필요하겠습니까? 그런 균형을 찾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러분들이 대안학교를 정하셨을 텐데 제대로 교육시키고 있는 학교는 굉장히 비쌉니다. 제대로 못 시키고 있는 학교들은 대안학교라는 미명하에 기존 학교에서 문제를 많이 일으키는 아이들을 뒷문으로 받아서 학교의 수업 분위기와 아이들의 정신적인 상태가 일반 학교만도 못한 대안학교가 많습니다. 그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대안학교는) 각자의 선택이지만 성경적인 원리도 아니고 한 부모로서의 의견을 이야기하자면 저는 대안학교를 그렇게 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학교 교육이 아이들의 질이 나쁘고 너무 세속적이라고 하는데 어차피 아이들이 살아야 될 곳은 성스러운 땅이 아니라 세속이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을 고등학교 때까지 (세상으로부터 분리해서) 가둬 논다고 하더라도 대안 대학교는 없고, (대안) 대학교가 생긴다고 해도 대안 직장은 없습니다. 대안학교까지 있을 뿐이지 대안 가정이라는 게 있습니까? 대안 교회도 없습니다. 결국 어느 순간에 이 벽을 허물고 세상 속으로 나가야 합니다. 나쁘게 보면 이미 순수한 아이들이 물든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것은 자기 아이들에 대한 편견입니다. 우리 아이는 순수하고 남의 집 아이들은 다 타락했다는 이중 구도로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남의 집에서 보면 우리 애들이 자기네 아이들을 망치고 있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일방적으로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결국 주장하는 바는 어렸을 때 수위 조절을 해야 되겠지만 적당히 타락에 노출돼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과 더불어 갈등하고 부모와 학교 선생님들의 도움을 받고 교육자들의 도움을 받고 친구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그것을 스스로 금지해서 보호한 것이 아니라 섞어놨는데도 그것이 옳지 않다는 걸 깨닫고 자기가 스스로 그것을 버리고 멀어지고 자기의 주체성을 갈등하는 가운데 주체성을 세워가면서 신앙을 찾아가게 만들어 가고 보다 더 값진 인생이 무엇인가를 고민하도록 만들어 갈 때에 내성이 길러진 사람들이 되어서 사회에 나갔을 때도 그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아이들을) 가둬 놓는다고 해서 언제까지 가둬 놓을 수 있으며 대안학교에 천사들만 모였겠습니까? 천사들만 모였다면 자기 아이가 들어가는 순간 그곳이 천사들의 집단이 안 될 텐데 그렇게 너무 결벽주의적으로 생각할 것은 아니라고 보는 것입니다.
수위 조절은 해야 합니다. 친구들도 가려서 사귀게 해야 하지만 그 속에서 생존하는 법들을 터득하고 오히려 신앙의 필요성들을 깨달으면서 자기 스스로 그렇게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고등학교 다닐 때 보면 아예 일찍 담배를 배우는 애들은 일찍 끊었습니다. 저는 1학년 때부터 담배를 피우고 2학년 때부터 엄마가 그냥 담배를 사다 주셨는데 까불고 늦게 담배를 배워온 애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그렇게 합니다. 그런데 중학교 때 담배 피던 애들은 고등학교 3학년쯤 되면 담배를 권하면 끊었다고 합니다. “그거 하지 마. 그거 하나도 안 좋아. 내가 담(?)이 나와서 못 피겠더라.” 고등학교 3학년의 대화 내용입니다. 이 아이들은 이제 그런 것에 안 젖습니다. 그리고 술도 먹어본 아이들은 대학교에서 미팅하고 뭐 한다고 해도 책상에 엎드려서 그냥 잠자거나 책을 봅니다. 그것이 별로 새로운 것이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반드시 아이들을 악으로부터 떼어 놓는다고 해서 아이들이 순결해지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이상의 무엇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 교육이 존재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다음 세대를 위해 어떤 비전을 가지고 애쓰는지는 여러분들이 너무나 잘 아실 것입니다.
질문18 : 혼전 성관계에 대해 문제없다고 생각하는 의식을 바로잡을 수 있는 조언 부탁드립니다.
문제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회심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중에는 아마 없을 겁니다. 그리고 철학자들에 따라서는 니체 같은 경우도 도덕 그 자체가 지배의 논리에서 나온 것이고 문화에서 나온 것이고 생리적인 욕구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 맞서서 항거하면서 사는 것이 진정한 자연의 삶이라고 얘기했지만, 니체 자신은 수도사 같은 삶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니체는 말년에 ‘나는 내 가슴에 손으로 얹고 대답하는데 나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돈과 여자와 명예를 탐내본 적이 없다고 고백합니다. 그런 니체를 인용해서 방탕의 길을 가는 사람들은 니체가 보기에 더 라스트맨, 인간 말종들입니다. 결국 이 자체가 하나님이 우리 양심에 새기신 율법이기 때문에 정도의 차이는 있고 문화가 이것들을 어느 정도 감소시키지만 가책감은 누구도 피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게 은밀한 곳에서 일어나는 범죄라는 걸 보면 알 수 있지 않습니까? 문제없다고 생각하는 의식은 자기가 바깥으로 표현하는 것이지 자기 자신이 진정으로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진짜 영혼이 병들고 죽은 사람 이외에는 없습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운 가책감 속에서 지내게 됩니까? 그래서 그런 것들이 정상적으로 작동하게 되는 것이 너무 중요합니다. 세상은 어느 시대든지 성에 대해서 너그러워지려고 애를 썼습니다. 아이들에게 왜 그것이 아닌가에 대한 가치관들을 잘 심어줘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에 과도하게 몰입하는 사람들의 특징이 뭐냐면 소통에 문제가 있고 삶의 즐거움을 얻는 통로가 다양하지 않은 사람들이 정신이 한쪽으로 집중되면서 습관적으로 깊이 빠져들게 됩니다. 그래서 그런 성적인 탐닉에서 오는 문제 같은 것들을 미리 잘 이해하고 깨달으면 자기 자신을 절제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심하면 정신과의 도움을 받아야 됩니다.
질문19 :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소비의 기본 철학은 무엇일까요? 소비는 개인 영역이기도 하지만 점점 사회적 영역이 커지는 것 같아요. ‘돈쭐 낸다’와 같이 요즘 가심비, 가치 소비, 윤리 소비 등의 말도 많은데 목사님께서 생각하시는 그리스도인의 소비 정신이 궁금합니다.
우리들이 피해야 될 것은 소비제일주의와 소비를 죄악시하는 것의 두 가지인데 양쪽 극단을 피해 가야 합니다. 어느 것도 성경적인 견해가 아니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선, 소비 자체를 죄악시하는 것은 일종의 금욕주의에서 나오는 것인데 그것은 성경적이지는 않습니다. 인간의 삶 자체가 끊임없는 소비 속에서 연속되도록 만들어진 것입니다. 내적인 생리적인 구조로 볼 때에도 끊임없이 에너지를 일으키고 그 에너지를 소비해 가는 가운데에 우리의 인생이 영위되는 것입니다. 자동차에 시동을 거는 순간부터 연료가 소모되면서 자동차가 가기도 하고 달리기도 하고 서기도 하고 히터도 들어오고 에어컨도 들어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람 자체가 끊임없이 소비하면서 영위되는 것입니다. 정신적이고 감정적인 소비든지 물질적인 소비든지 소비 없이는 우리 인생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특별히 정신의 소비 같은 것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특별히 문제를 삼지 않습니다. 그런데 정신의 소비가 물질의 소비 못지않게 죄를 구성하는 요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예를 들면 여러분들이 자녀 교육에 사명을 맡았는데 정신이 다른 곳에 다 소비가 되어서 가족을 돌볼 수가 없게 된다고 하면 몸은 집 안에 있지만 마음은 자녀들의 엄마도 아니고 아빠도 아닙니다. 끊임없이 자기 정력에 빠져 있어서 자기감정을 소비해 버리는 사람이거나 자기 인생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서 모든 걸 다 소진해버리고 자녀들을 돌볼 수 있는 어떤 여유도 없다면 같이 산다고 말할 수가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들이 이런 정신적인 소비 같은 것들은 굉장히 너그럽습니다. 사실 정신적인 것들이 소비되고 나면 껍데기와 우리 몸은 살아 있지만 우리 인생은 살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죽은 자와 방불하다고 성경에서 이야기하는데 자신이 인간으로 살 수 있는 정신의 힘이 남아 있지 않을 때 그게 인생을 사는 것이겠습니까? 사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보면 결국 정신의 소비도 우리들이 굉장히 문제로 삼아야 됩니다. 정신을 절약하면서 살고 그 정신을 소비하지 않는 것이 미덕이라는 뜻이 아니라 가치가 있는 것에 더 많이 소비하면서 사는 그런 정신의 소비 구조를 가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제 물질적인 소비인데 우리는 모든 것들이 물질적인 소비에 너무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그래서 심지어 거의 소비하지 않으면서 사는 것 자체가 그리스도인의 덕스러운 삶, 거룩한 영성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인데 성경을 전혀 잘못 해석하고 있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소비 그 자체는 삶의 원리이고 삶을 지탱해 나가는 수단이기 때문에 소비와 멀어질 수 없습니다.
반대는 소비제일주의입니다. 소비에서 오는 즐거움 자체를 인생의 목표로 환치시켜서 거기에 몰입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전부 하루살이, 나방 같은 사람들입니다. 소비의 즐거움에 매몰되어 버리고 그것이 인간의 목표로 등장하게 되면 소비하기 위해서 물질이 필요하고 맘모니즘이 나오는 것입니다. 물질에 탐닉하는 이유는 현재와 미래의 소비를 확보하기 위해서 더 많은 재물을 가지려는 것입니다. 그것은 더 많은 마음의 욕심을 따라서 소비할 수 있는 것인데 그렇게 될 때에 우리의 인생은 궤도를 이탈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그 사이 둘 중 어디에선가 우리의 길을 정해야 됩니다. 소비에서 즐거움을 누리는 것 자체를 죄악시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소비의 즐거움이 없었다면 주님이 무엇 때문에 최후의 만찬을 나누셨겠습니까? 소비의 즐거움이 없었다면 우물가에서 여인에게 왜 물을 구했겠습니까? 희로애락에 빠질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물질을 소비함으로써 즐거움을 누리는 것 자체를 죄악시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봅니다. 폭넓은 자유가 그 안에 허락되어 있다고 봅니다.
항상 소비에서 오는 즐거움이 나의 정신을 탐닉하게 만들고 정신이 세상의 것들로 가득 채워져서 신령한 목표를 향해 가는 그 길을 방해할 정도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소비를 많이 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세상을 많이 사랑하는 것도 아니고 소비를 못 하고 있는 사람들이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돈에 대한 욕심은 돈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이 많은 것이 아니라 돈을 못 갖고 있는 사람들은 못 갖고 있기 때문에 나름대로 욕심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탐심을 물리치라고 하시는 말씀은 부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삶은 기본적으로 자유입니다. 자신이 자유롭게 살되 자기의 마음속에서 추를 가지고 자기 자신을 면밀하게 성찰하면서 나의 소비가 지금 나의 영적 생활을 심각하게 방해하고 있는가라는 것을 스스로 감시할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역량이 되면 소비 영역이 좀 더 넓어질 수 있는 것이고 그게 안 된다면 그보다 훨씬 더 소비와 소비하고자 하는 마음 자체를 줄여야 되는 것입니다.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고 소비에서 오는 즐거움들을 신앙으로 승화시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름다운 풍경을 볼 때 감각의 만족을 느끼면서 ‘야∼ 정말 아름다운 곳에 왔구나! 이런 아름다운 곳을 만드신 하나님은 얼마나 아름다우신 분이실까!’ 이렇게 사고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도 ‘하나님께서 나에게 건강을 주시고 함께 밥을 먹을 수 있는 친구를 주시고 나에게 경제적인 여유를 주셔서 오늘 이런 아름다운 식탁을 친구와 함께 마주할 수 있게 해주셔서 너무 감사하다. 더군다나 오늘 밥값은 내가 내는데 이런 경제적인 여유가 있는 것 그리고 이렇게 섬길 수 있는 마음을 주신 것에서 너무 감사하다.’ 이런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밥 한 끼를 먹고 나면 마음의 재충전이 되고 인생을 살아야 되겠다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옷도 마찬가지고 외모에 관한 것도 마찬가지고 내면의 세계를 바꾸는 책이나 독서나 정신적인 것을 고양시키는 예술이나 문화에 대한 고상한 소비도 마찬가지입니다. 궁극적으로 그 소비에 의해서 쉼을 얻고 즐거움을 누려서 우리의 마음이 활기차져서 하나님을 찾아가는 데 도움이 되는 그런 삶을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비의 즐거움에 눈 뜨지 못한 사람은 소비의 즐거움에만 눈을 뜬 사람만큼 불행합니다. 왜냐하면 일생을 끊임없이 절약하고 모으지만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사용하지 않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은 인생에 있어서 어떤 의미에서 활기를 빼앗아 가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웃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소비에 전혀 마음이 없이 살아가는 그런 타고난 사람이 있다면 칭찬받을 일이겠지만 그것도 어떻게 보면 균형을 잃은 게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그 둘 사이에서 (균형을) 적절하게 잡아가면서 (살아야 합니다.) 소비가 또 중요한 것은 소비함으로써 비로소 문화에 눈을 뜨게 되고 문화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재물을 번 사람들은 소비하면서도 소비지상주의에 빠지지 않기 때문에 항상 여력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 여력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이웃을 도우면서 살아가게 만들고 돕는 것도 그 사람으로 하여금 그 소비에서 자신의 삶을 보다 더 윤택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들이 베푸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 점에서 소비는 우리의 인생과 구분하여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젊은 나이에 너무 빨리 소비에 눈을 뜨고 소비 없이 자신을 지탱할 수 없는 공허한 사람이 되는 것은 자본주의가 가지고 있는 매우 위험한 문화적인 중독입니다. 그런 점을 조심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먹는 것을 예로 든다면 가끔 평범한 날에 도저히 갈 수 없는 아주 조용한 식당에 가서 비싼 값을 내고 아주 질 좋은 음식을 먹으면서 감탄하는 것도 문화를 즐기는 것일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저는 요즘 그런 것보다 어느 식당에 가서 막국수를 먹는데 국수 길이보다 긴 스토리가 음식점에 따라 나올 때 만족감이 쭉 올라갑니다. 제가 그 음식점에 갔다는 자부심도 느껴지고 다음에 사람을 데리고 그 식당에 가서 시커먼 막국수를 먹으면서 자분자분하게 이야기를 쭉 해주면 사람들이 계속 고개를 끄덕이면서 막국수 한 젓가락을 새롭게 느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태국음식, 인도음식, 중국음식을 놓고 어떻게 이 요리가 유래하게 되었고 이 집이 왜 그렇게 유명한지 (말해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떡볶이의 유래를 아실 것입니다. 신당동에서 할머니가 떡을 꺼내다가 고추장 빠뜨렸습니다. 너무 아까워서 꺼냈는데 씻어버리자니 고추장이 너무 아깝고 떡은 버릴 수가 없으니까 한번 그냥 철판에다가 볶아보다가 떡볶이가 생겨난 것입니다. 그런 설명을 안 듣고 먹으면 맛이 없다 없다고 할 수 있지만 신당동에 가서 떡볶이 먹으면서 이 집이 바로 떡볶이가 생긴 집이라고 얘기하고 떡볶이가 역사의 흐름에 따라서 어떻게 변천하고 그것이 어떻게 내려와서 오늘날까지 오게 되었고 떡볶이가 있기 전에 궁중에도 이미 떡볶이 비슷한 게 있었다고 이야기하면서 그것과 그것이 어떻게 다른지를 설명하고 오늘날의 치즈떡볶이, 까르보나라 떡볶이, 자장떡볶이까지 변천하게 되는 과정들을 설명하면서 먹는 것(입니다.) (그것은) 한 그릇의 음식에서 문화를 먹는 것입니다. 저는 그런 것들이 만족감이 되게 높고 그런 식당을 자꾸 찾게 됩니다. 단순히 고급 음식을 비싼 값에 주는 집이 아니라 스토리가 있는 집, 그 집이 아니면 그 맛이 안 날 것 같은 그런 집에서 밥을 먹고 이야기를 듣고 나오면 밥 한 그릇에 배만 나오는 게 아니라 정신적으로 뭔가 좀 얻어가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저만의 착각입니까? 그렇게 하면서 무엇인가 삶의 원기를 찾고 그런 것입니다.
제가 「다시 게으름」에 썼지만 1,000곳 넘는 짜장면집을 다녔던 사람이 있는데 그것도 허무한 거 아니겠습니까? 그렇지만 우리들이 접촉할 수 있는 부분 안에서 그냥 한 끼를 간신히 먹고 때우는 그런 것이나 맛에 심취해서 미친 듯이 비싼 값을 주고 무조건 좋은 것만 먹으려고 하는 것 양쪽을 절제하면서 뭔가 문화가 있는 것을 찾아내면서 육체와 정신이 아울러 만족을 얻는 그런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예전에는 무조건 싸고 많이 주면 잘 됐고 그다음엔 맛있는 집이 잘 됐고, 맛있는 걸로 안 되고 옆에 아름다운 정원과 카페가 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시대도 지나고 요즘은 스토리텔링이 함께 들어오는 음식점들이 굉장히 유행합니다.
이천에 있는 비빔밥집에 가면 서빙하는 종업원이 모두 군복을 입고 군화를 신고 있습니다. 애인하고 같이 가면 군대에서 사용하는 반합을 하나씩 줍니다. (음식이) 뷔페로 차려져 있는데 밥과 반찬을 담은 다음에 스테이지로 올라갑니다. 그리고 신나는 음악을 들으면서 춤을 추는 것입니다. 군대에서 비빔밥을 먹을 때도 그렇게 흔들어서 먹습니다. 그 집의 특징은 자기가 먹은 그릇은 자기가 씻고 가야 하고 1,500원을 할인해주는 것입니다. 밥을 먹고 애인하고 수돗가에서 고무장갑을 끼고 음악을 듣고 춤을 추면서 그걸 다 깨끗이 닦아서 놓는 것입니다. 자발적으로 닦으니까 가게 종업원들이 닦는 것보다 훨씬 더 깨끗하다고 합니다. 그렇게 1,500원을 할인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남자는 군대 문화부터 시작해서 할 얘기가 많은 것입니다. 여자들이 제일 싫어하는 군대 이야기지만 좀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문화가 함께 들어오는 것이 오늘날의 외식 트렌드입니다. 지금은 맛있는 것만으로는 롱런을 못합니다. 사람들이 몇 번 가면 맛에 질립니다. 맛있게 한다는 것은 음식이 단순해야 롱런하는 것인데 지금처럼 복잡하고 서구화된 문화에서 롱런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진짜 100곳이면 1곳이 될까 말까 할 정도로 어렵고 명성이 있어도 그것을 유지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물질적 소비와 정신적인 소비를 무조건 양분하지 말고 함께 고려하고 소비 속에서 정신적인 보충을 얻을 수 있는 그런 소비 구조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서울시청 앞에 가면 플라자호텔이 있습니다. 제가 직장 다닐 때부터 있었던 호텔인데 2층에 가면 짜장면집이 있습니다. 그곳은 정주영 회장이 일주일에 4일을 가던 짜장면집입니다. 항상 현대 사옥에서 가면 다른 것도 안 시키고 항상 짜장면을 시켰다고 합니다. 물질을 엄청나게 소비하는 것이 우리의 효용을 좌우하는 게 아니라는 문화적인 측면에 눈을 뜨라고 이야기하고 싶은 것입니다. 참 주관적이지만 저는 불과 만 원, 만 오천 원을 내고 밥을 먹으면서도 스토리가 아주 탄탄한 문화를 모두 음미하면서 생각하게 만드는 그런 소비의 패턴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굉장히 교양이 있고 매력적이지 않을까 생각을 합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즉석에서 나온 질문이 있으면 한번 받아볼까요? ZOOM으로 들어오신 분들도 질문이 있으면 받겠습니다. 없으면 여기서 질문을 받아보겠습니다.
질문자 : 저는 가정 경제에 대해서 궁금한 게 있는데 부부가 재정적인 것을 어디까지 서로 공개해야 하는지, 배우자의 비상금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비상금이 가정을 위한 게 아니라 본인의 개인 취미에 사용되는 부분들에 대한 의견을 좀 듣고 싶습니다.
저는 젊었을 때는 안 그랬는데 세월이 흐르고 나이가 들면서 열정적인 주장할 가치가 있는 것들에는 항상 한쪽으로 치우칠 위험이 있다는 것을 많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배우자의 비상금이라는 용어 자체가 웃깁니다. 비상금에 ‘비’는 아니라는 것이고 ‘상’은 일상적이라는 것이니 일상적이지 않은 용도에 쓰는 돈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일상적이지 않을 때가 얼마나 있겠습니까? 대부분 비상금을 쓰는 일도 사실 일상적인 일입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경제에 대해서는 부부가 투명한 것이 좋다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중요한 것은 아내나 남편에게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여유나 완충지대가 주어지는 것이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좋은 것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제가) 교수로 임용된 후의 일이었는데 19세였던 조교가 용돈을 얼마 받는지 물어서 아내가 매주 2만 원 준다고 하니 자기 용돈하고 똑같다고 답했습니다. 그래서 그날 집에 가서 항의했습니다. 조교가 자기와 (내가) 용돈이 똑같았다고 하는데 내가 아이들 밥도 사줘야 하는 교수인데 이건 너무 심하지 않으냐고 했더니 아내가 지금 노동 운동하냐고 (했습니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그런 적이 있었는데 저는 상대방을 너무 유리알 들여다보듯이 하는 것은 좋은 점도 있지만 좋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아까 같은 경우도 보면 형제가 결혼하기 전이었지만 천만 원 여유가 없었으면 어떻게 그 자매를 도와줄 수 있었겠습니까? 만약에 부모님이 다 알고 있었다면 그것을 허락하겠습니까? “아니, 네가 뭐가 모자라서 돈까지 갖다 바치면서 장가를 가니” 그렇게 하지 않겠습니까? 누구나 자기가 아무하고도 의논하지 않고 쓸 수 있는 여지(돈)들을 (가지고 있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 건 충분히 해도 된다고 선언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남편들이 그것을 엄청나게 이용합니다. 안 된다고 말을 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내가 어느 정도는 이해해 주는 아량을 가지고 있는 것이 좋습니다. 넉넉하게 인센티브를 받아왔을 때 “당신 나 모르게 (돈을) 쓸 때도 있는데 좀 부족하지 않아? 인센티브를 많이 받아왔는데 내가 이번에 100만 원 당신 주려고 하는데 어때?” 그렇게 줄 수 있는 정도의 아량은 갖추고 있는 것이 가정 평화를 위해서 좋지 않겠습니까?
아내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집안에서는 시부모님에게 뭘 해드리고 친척에 몰래 뭘 해줬다고 싸우는데 중립 지대가 없어서 다툼이 난 것입니다. “남편에게 이야기하면 안 해줄 리 없지만 내가 엄마 코트 하나 사줄게. (그런 것 때문에 너무 보기 예민하면) 엄마만 알고 있어.” 그렇게 하면서 서로 뭔가 완충지대를 놓고 사는 것이 좋은 것이지 않겠습니까? 사람의 마음이 항상 똑같지 않습니다. 내가 내 부모를 생각하는 것과 내 남편이 내 부모를 생각하는 것이 그 이상이면 좋겠지만 (똑같지 않습니다.) 우리 엄마한테 그렇게까지 해줄 필요가 없다고 하는 자매들도 있지만 안 그런 집안이 더 많습니다. 하나하나를 너무 다투고 싸우면 갈등이 일어나게 되는데 중립 지대로 남겨두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액수가 얼마냐고 물어보면 복잡한 얘기가 나오지만 수익같이 많은 것을 고려를 해야 합니다.
한 분만 더 질문받겠습니다. 없으면 마치겠습니다. 제가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장시간 동안 우리들이 여러 가지를 대화하였는데 주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저희에게 순전한 믿음과 함께 또한 거룩한 지혜를 주셔서 슬기롭게 우리의 인생의 난관들을 극복하며 혹은 비혼으로 혹은 결혼한 사람으로서 가족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의 은혜를 내려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