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과 비혼 Q&A
녹취자: 이재호
#1 결혼과 비혼
질문1. 결혼상대를 고르는 법
Q. 배우자를 고려할 때, ‘가장 중요하게 고려되어야 할 덕목’은 무엇일까요? 또, 결혼할 때 나름의 ‘조건’을 따지는 것은 신앙이 부족한 것일까요? 비기독교인과의 결혼을 해도 될까요?
비독교인과 결혼할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조건이 있습니다. 그가 예수를 믿을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그래서 최소한 교회에서 학습이상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결혼할 수 있습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우리 교회에서 불신자를 만났는데 그렇게 전도해서 결혼을 해서 아주 아름답게 열매를 맺은 케이스가 여러 케이스 있습니다. 그런데 반대로 자매의 입장에서 혹은 형제의 입장에서 안 믿는 상대보다 자기가 더 많이 빠졌고 결혼이 더 급합니다. “나랑 결혼하려면 너는 교회에 와서 출석하고 예수를 믿고 학습을 받은 다음에 나랑 결혼을 해야 된다.” “나는 싫어. 결혼 못하더라도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아.” 이럴 경우에는 이야기가 복잡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형제자매들이 기도 많이 하면서 데리고 와서 예수를 믿게 해서 결혼한 케이스가 많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그러면 불신자하고 결혼하게 되는 것입니다. 불신자와의 결혼하는 것이 죄냐 아니냐 이 문제를 이야기하기 전에 완전히 그 사람이 불신자면 가족도 불신자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면 완전히 불신 가정에 시집을 가거나 장가를 가서 살아야 되는데 그 속에서 자기가 완전히 불신앙의 가족들 속에 둘러 쌓여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많은 눈물의 고난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질문은 그럴 수 있습니다. 조건을 따지는 것 자체를 완전히 불신앙의 소산이라고 보기에는 어렵지 않겠습니까? 결혼을 하게 되면 사회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남성이 아무 가정을 부양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럴 경우에는 매우 어려운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 것도 봐야 할 것입니다. 결혼을 해야 되겠는데 부모님이 병석에 누워 계셔서 결혼하자마자 양쪽 시부모님의 생활비와 병원비를 데야 하는 그런 구조입니다. 그럴 경우에 많은 경제적인 고생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 것과는 상관없다. 나는 믿음으로 결혼하겠다.’ 그것은 본인 의사입니다. 그러나 조건을 보는 것 자체를 ‘모두 신앙의 부족이다.’ 이렇게 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결혼을 하면 현실의 전개가 되기 때문입니다. 다만, ‘조건을 보고 결혼을 한다.’ 그럴 경우에는 그것이 진정한 사랑일 수 있겠습니까? 그 정도로 답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가장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덕목은 신앙 아니겠습니까? 비록 가정환경이 불우하고 좀 어려움이 있어도 남자가 확실한 직업이 있고 투철한 신앙이 있으면 그 신앙을 계속 잘 간직하고 살아간다는 가정하에 모든 어려움들을 신앙으로 극복해 갈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됩니다. 신앙이 가장 중요하다고 봅니다. 신앙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성품입니다. 인품 혹은 성격의 결. 그래서 신앙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내가 소통할 수 있는 사람인가?’ 그게 제일 중요합니다. 사랑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사랑은 순간의 감정일 수 있습니다. 소통은 일생을 살아가야 할 문제입니다. 소통을 잘 될 수 있다면 그러면 함께 결혼해서 부딪치는 많은 문제들을 극복해 갈 가능성이 대게 많은 것입니다. 소통, 성격, 내가 가지고 있지 않은 장점을 가지고 있을 때, 그런 것들이 결혼의 조건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요소가 아닐까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일단은 신앙과 소통, 두 가지만 된다면 결혼해서 행복해질 가능성이 훨씬 더 다가가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이 흔히 농담반 진담반으로 ‘쟤는 4차원이야!’ 이런 사람들이 있잖습니까? 자기가 생각할 때 그 사람이 4차원이라고 생각이 되어서 소통이 잘 안될 경우에 그때 맺어지면 어렵습니다. 그런 정도를 고려하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질문2. 배우자에 대한 확신
Q. ‘이 사람과 반드시 결혼해야겠다!’는 확신은 어떻게 분별해야 하는 것일까요?
사랑의 감정에 빠지게 되잖습니까? 그러면 좋다는 느낌이 들게 되면 사랑이 푹 빠지기 전에 기도를 해야 되겠습니다. 기도를 하는데 기도라는 것이 어떤 면에서 자기 감정에 충실할 때도 있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좋아할 때 그 좋아하는 감정이 일단 자신의 마음에 개입을 하게 되면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어서 원하는 것인지 아니면 내가 좋아하는 감정이 있어서 내가 이쪽으로 기우는지 판단이 안 서게 됩니다. 그 때에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사실은 어려운 것은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마음의 욕심을 버리는 것이 어렵습니다. 그래서 비유를 자주 드는데 호수의 수면이 있고 바람이 하나도 안 불면 주위에 있는 나무 이파리들이 반짝임까지도 모두 수면에 비쳐서 실물과 수면 위의 이미지가 데칼코마니처럼 됩니다. 호수를 바라보고도 풍경을 다 읽어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람이 불기 시작해서 물결이 치면 아무 것도 비치지 않습니다. 알아낼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누군가를 좋아하는 감정이 생겨나면 여러분들은 믿음의 자녀들이니까 당연히 기도부터 할 것 아닙니까? 기도할 때 최대한 하나님의 뜻을 찾고 싶다는 마음을 가지고 욕심을 내려 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만약 간절히 반복해서 간절히 오래 기도하면 처음에 들었던 감정이 하나님의 뜻일 경우에는 그 좋아하는 감정이 강화가 되고, 하나님의 뜻이 아닐 경우에 모든 것을 내려 놓고 간절히 기도하면 처음에 있었던 그 뜨거운 열망이 점점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빌립보서 1장을 보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한 것을 행하게 하시는 방법이 우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신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간절히 기도하면 우리의 소원이 하나님의 뜻을 반영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런 과정이 없이 자신의 감정에 무조건 충실해서 기도도 안 해보고 결혼을 하게 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저는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에는 결혼하기 6개월 전에는 연애도 하지 말라고 그렇게 주장했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도 알다시피 연애를 하다 보면 즐겁고 참 재밌는 것도 많은데 많은 무거운 짐들이 뒤따르게 됩니다. 그래서 엄청나게 많은 시간과 에너지가 들어가게 됩니다. 그 다음에 형제들, 자매들 요새는 더치페이 한다고 하지만 경제적인 에너지도 굉장히 많이 소비하게 됩니다. 그리고 더 큰 것은 성적인 문제가 개입이 됩니다. 엄청나게 들어가는 에너지를 다 감당하고 나머지 생활을 잘 조화롭게 해 나갈 수 있느냐 라는 것을 잘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너무나 유혹이 많기 때문에 ‘결혼하겠다는 뜻을 세우고 그 다음에 연애를 해라’ 사실 청교도들이 했던 방법입니다. 그리고 청교도들은 결혼할 때 뜨거운 사랑으로 결혼을 확인한다든지 그것 보다는 자기와 배우자를 너무나 잘 아는 객관적인 사람들의 추천을 많이 받았습니다. 가족과 지인들. 그래서 남이 볼 때 둘이 굉장히 좋아하는 데 ‘너희 둘은 안 맞아.’ 그럴 때 그 말은 상당히 일리 있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제 3자가 보는 것이 정확한 측면이 많습니다. 그래서 어른이나 지인이나 친구들이 소개를 해주면 그렇게 교제를 하면서 ‘일생을 신앙의 친구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을 결혼의 가장 중요한 조건으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사랑의 감정은 전혀 사랑없이 결혼할 수 없지만 뜨거운 사랑의 감정은 결혼하면서 가꾸어 가는 것이라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결혼해서 실패할 확률이 훨씬 줄어드는 그러한 요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잘 생각해야 됩니다. 요즘에는 성격 테스트를 하는 것들이 많습니다. 저는 그런 것을 꼭 권하고 싶습니다. 지금은 생각이 좀 달라져서 연애를 늦게 한 다음에 결혼을 하라고 권합니다. 어느 정도냐 하면 딱 잘라서 말 할 수 없지만 1년 반 정도, 길면 3년, 그 이상은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 딸도 1년 연애하고 결혼을 결정했고, 우리 아들은 그것 보다는 좀 더 짧았는데 서로를 알아가기 위해서 사계절은 바뀌어 봐야 되지 않는가 생각합니다. 그리고 1년에서 2년 정도 사이 어간에 그 사람이 딱 맞는 사람인가를 결정하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생각합니다.
질문3. 부모님들의 반대
Q. 결혼은 하나님과의 관계와 당사자들 간의 신뢰가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부모님들의 심한 개입으로 결혼하기 어려운 경우도 종종 보게 됩니다. 이럴 경우, 부모님들의 의견을 따라 결혼을 중단해야 하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혼을 진행해야 하는지 알고 싶습니다.
자기 마음입니다. 한 번 자기가 태어나서 한 번 하는 결혼인데 자기 좋은 사람하고 결혼하는 것이지 부모가 아주 집요하게 반대할 때 그 반대하는 동기와 이유가 무엇인지 살펴보기 바랍니다. 살펴보고 최대한 감정을 가라앉히고 부모님의 그 말이 타당한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여러 번 생각해 봐도 이유가 너무 말이 안 된다고 생각될 때, 예를 들면, 자매를 데리고 왔는데 형제 아버지가 ‘저 여자랑 결혼하지 마라.’ ‘왜요?’ ‘딴 것은 모르겠는데 인상이 너무 안 좋다.’ 또는 ‘못 생겼잖아.’ 그런 경우도 있습니다. ‘가난하지 않냐.’ 그것은 이유가 될 수 있지만 주관적이지 않습니까? 못 생겨도 내가 데리고 살 것이지 아빠가 데리고 살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 다음에 형제를 데리고 왔는데 반대를 합니다. ‘직업이 너무 불안정하지 않냐? 프리랜서인데 돈을 벌 때는 벌고 못 벌 때는 못 벌지 않냐!’ 부모님 입장에서는 자녀들이 안정적인 삶을 살기를 원하니까 그렇잖습니까? 그러니까 안정적인 직업을 갖기를 원할 것입니다. 심지어는 ‘그 집안은 엄마 아빠가 이혼해서 결혼하면 안 될 것 같다.’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사실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합리적인 지를 공정하게 따져보되 ‘아! 이것은 이유가 타당하지 않다.’ 그러면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말에 그런 말이 있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이기는 부모는 없다.’ 자기가 확신을 가지고 잘 살면 부모를 설득할 수 있지 않나 그렇게 생각합니다. 막 싸우고 부모와의 관계를 깨뜨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검토해 보고 결심이 딱 서면 통보를 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결혼을 합니다. 제가 결정을 합니다. 절 위해 기도를 해 주십시오. 저를 통해 제 결혼이니까 하나님이 응답하셔도 제 마음을 통해 응답하실 것입니다. 이 결혼을 하고 안 하고 상관없이 나는 나와 새롭게 만나는 형제 혹인 자매가 부모님과 좋은 관계를 끝까지 잘 유지하기를 원합니다. 협력해 주십시오.’ 이렇게 통보하고 자기 갈 길 가면 되는 것입니다.
질문4. 결혼을 위한 재정준비
Q. 결혼준비를 생각하면 현실적인 문제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목사님께서 생각하시기에 결혼을 위한 최소한의 경제적인 기반은 어느 정도 준비가 되어야 하는지 ‘현실적인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이 질문에 대해서는 내가 할 이야기가 없습니다. 내가 우리 집사람하고 결혼을 했을 때 저는 26세에 결혼을 했습니다. 우리 집사람은 24세에 했는데 저는 그 때에 공무원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34세에 장가를 가고 싶었습니다. 그 때 34세이면 지금 40세하고 맞먹는 수준이었습니다. 왜 그랬냐 하면 신학공부를 다 하고 목사되고 내가 데리고 올 자매를 고생시킬 시절이 다 지나가고 난 다음에 결혼하고 싶었습니다. 나이를 계산해 보니까 신학대학원 졸업하고 목사가 되면 34세였습니다. 그렇게 했는데 26세에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결혼 생각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나는 이제 믿음이 좋아서 총각이었는데 교회에서 집사 직분을 주었습니다. 주일학교를 맡겼고 교역자가 없어서 집사로서 주일학교 설교까지 해야 되는 100여명 정도 모이는 교회였습니다. 거기에 유치원 선생님으로 오셨습니다. 지금으로는 유치부를 맡아서 담당하기로 하고 전도사님은 아니고 유치원 선생님으로 오셨습니다.
지금도 그 감정은 설명할 수 없습니다. 얼마큼 시간이 흘렀는데 ‘이 사람하고 결혼을 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사실, 제가 원하는 스타일의 여성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기도를 했습니다. 한참 신앙이 좋았을 때입니다. 그 때에 ‘내가 이 결혼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닌데 내 욕심에 이끌려서 결혼을 한다면 나는 남은 인생이 불행해질 것 같다.’ 그런 생각이 들었고 ‘나는 정말 그렇게 하기 싫다.’ 그런데 내 마음에 떠오르고 있는 이 정념은 무엇인가 하고 금식기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는 무기한으로 금식기도를 스스로 선포를 하고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서로 소통하지는 않았지만 보면 느낌을 알지 않습니까? ‘저 집사님이 나에 대해서 무엇인가를 느끼고 있다.’ 그런데 우리 집사람은 다른 사람하고 선을 보고 80%쯤 마음이 기울어 져서 그 집 가서 인사도 하고 마지막으로 자기 집만 데리고 가면 날짜를 잡을 그런 상황이었는데 오래 사귀지는 않았습니다. 그 집은 아버님이 목사님이시고 집안도 좋고 그런 집안이었습니다. 저희 집은 가난하고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저 분이 좀 이상하다’ 그러고 자기도 금식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그러고 나는 ‘하나님이 뜻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십시오.’ 그렇게 기도를 한 것이고 본인은 저 분 마음을 돌이켜서 나하고 엮이지 않게 해 달라고 금식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금식기도하고 이틀째인데 주일이었습니다. 항상 담임목사 사모님이 사택에서 점심을 대접했습니다. 사모님이 식사하러 오라고 해서 ‘사모님, 저는 아주 중요한 일이 있어서 금식기도 중입니다.’ ‘언제까지 하세요?’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응답을 주실 때까지 저는 금식기도 합니다.’ 우리 집사람은 거기에 갔습니다. ‘사모님, 저도 금식기도 중입니다.’ 그러니까 짜장면이 메뉴였습니다. 짜장면을 비비면서 ‘금식은 뭐 아무 때나 하는 줄 알아? 잔소리 말고 얼른 먹어.’ 하고 젓가락을 팍 집어 주었는데 우리 집사람이 이틀만에 금식을 깨고 짜장면을 너무 맛있게 먹었습니다. 그 때부터 승패는 이미 예고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일주일을 금식했는데 10kg 빠졌습니다. ‘저는 죽어도 좋고 살아도 좋으니 저는 여기서 하나님의 뜻을 정말 찾고 싶습니다.’ 그러고 기도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집사람은 더 이상 저항할 기도가 없는 것입니다. 기도를 하는데 ‘나는 저 분한테 갔다가는 개고생 문이 열렸고 더군다나 신학을 공부하겠다고 하는데’ 어쨌든 이야기를 해야 되기 때문에 우선 만나자고 했습니다. 그러고 시내에서 콜택시를 타고 수원까지 내려갔습니다. 그래서 내가 밤새도록 써 가지고 두통의 편지를 선물박스에 넣어서 주었습니다. 펼쳐 읽고 얼굴이 백지장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나는 통보했으니까 나는 답을 기다리겠다.’ 그러고 헤어졌습니다.
하나님이 엄청나게 다루셨습니다. 최종적으로 일주일만에 나는 일주일 금식기도하고 본인은 일주일만에 항복을 하고 그러고 하나님이 아주 확실하게 ‘저 사람하고 결혼을 해라’ 그렇게 사인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마음은 아직 안 따라온 것입니다. 그래서 2년 동안은 매일 꿈을 꾸는데 신랑이 어디 있는지 모르는 꿈을 꿨다고 합니다. 어땠든지 간에 그렇게 해서 결혼에 관한 기도는 저의 승리로 끝났고 그러고 나서 한 달쯤 있다가 약혼 날짜, 결혼날짜 다 잡았습니다. 결혼을 할 때 나는 사실은 돈 좀 모아서 1년 반 후에 결혼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집사람은 ‘1년 돼봐야 더 나아지는 것도 없으니까 그냥 결혼하자’ 그러고 결혼하자고 했을 때 제 주머니에 있는 돈이 딱 300원이었습니다. 그래도 그냥 결혼을 했습니다.
지금은 그 때하고 좀 다르지만 중요한 것은 생활력이 없으면 진짜 고생합니다. 그런데 일단 고정적인 수입이 있고 자기 생활력이 있으면 그러면 그냥 어떻게 하든지 결혼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고 돈을 모으면 어느 정도까지 입니까? 집 한 칸 사는 것? 언제? 환갑 되어서 결혼하려고 합니까? 사랑하면 헤쳐 나가면 되지 않겠나 그렇게 생각합니다. 금식기도 기간은 사람마다 다를 것입니다. 인생에 있어서 너무너무 중요한 순간이니까 그 때는 ‘하나님의 뜻이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을 정도까지 기도하는 것이 맞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질문5. 결혼식의 필요성
Q. 경제적인 여건이 충분하더라도 과도한 형식에 대한 회의로 인해 혼인신고만 하는 커플들도 있습니다. 결혼식의 필요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알고 싶습니다. 꼭 필요하지는 않다고 생각하시더라도 결혼식의 의의와 고민해야 할 것들을 나눠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결혼식이 허례허식에 치우치는 것에는 반대합니다. 그래서 만약에 자기가 ‘스몰 웨딩’ ‘스몰리스트 웨딩’을 하고 싶다하면 아무도 초청하지 않으면 됩니다. 그리고 본인 두사람과 양쪽의 부모님과 형제간 그정도 딱 초청하고 목사님 초청하고 그렇게 해서 주례를 해도 훌륭한 결혼식이 되는 것입니다. 용기가 없어서 그런 것이지 그렇지만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다면 혼인신고를 하고 살아도 법적으로는 문제가 없겠지만 교회의 역사에서 결혼예식이라고 하는 것은 공적인 선포의 특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둘이 결혼을 했습니다. 굉장히 성스러운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결혼식을 안 합니까? 허례허식을 버리고 ‘스몰 웨딩’을 하면 됩니다. 그대신 들어오는 것도 없지만 나가는 것도 없습니다. 어짜피 들어올 것이 없는 사람은 ‘스몰 웨딩’을 추천합니다. 진짜 20명만 모여서 결혼식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순간을 남겨놓고 무슨 돈이 들어가겠습니까? 약식으로 하려고 하면 교회에 평일에 와서 작은 방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점심을 먹는 정도인데 그것이 무엇이 나쁘겠습니까?
결혼식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은 안 가지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 대신 허례허식에 치우치지 말고 부담이 되지 않는 그런 결혼식을 하면 되지 않겠나 생각합니다. 예식장에서 천편일률적으로 막 찍어내는 것처럼 결혼하는 것은 우리 딸도 그렇게 결혼하고 갔지만 저는 꼭 그래야 하나 하는 마음은 좀 있습니다. 얼마든지 이것은 경제적인 문제가 도입된다면 얼마든지 될 수 있고 허례허식으로만 볼 문제는 아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모든 성도들에게 구김없는 축하를 받으면서 하객으로 참석하는 것만이 아니더라도 모두에게 알려서 ‘부부가 됩니다.’ ‘부부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훨씬 아름답고 ‘우리의 결혼이 하자가 없는 당당한 결혼입니다’는 표현도 될 수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질문6. 자녀를 원치 않는 결혼
Q. 결혼은 원하지만 자녀를 원하지 않은 결혼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우리 교회도 권사님이나 이런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며느리가 시집을 와서 선언을 한다고 합니다. ‘어머님, 우리는 결혼을 하면서 아이를 안 갖기로 했으니까 절대 저보고 손자타령 하지 마십시오.’ 이렇게 하는 부부도 있다고 합니다. 한 편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이를 낳았는데 엄청난 많은 희생이 요구가 되는 것입니다. 독박육아 그런 정도가 아니라 지금 현재 재정적으로 2억 5천만 원 정도 한 사람을 대학 졸업시킬 때까지 들어간다고 합니다. 특수과외 이런 것 하지 않고 일반적인 교육비용으로 볼 때입니다. 그것뿐이겠습니까? 아이를 나으면 어렸을 때 아이 키우느라 고생하고 경력이 단절되고 하는 등등의 수많은 난관들이 있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남자 혼자 벌어서 먹고 사는 것이 상식처럼 여겨지던 사회였기 때문에 사실은 여성에게 좀 여력이 있었는데 현재 여성도 같이 직장생활을 하지 않으면 많이 힘든 사회적인 구조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아이를 육아하는 쓸 에너지가 너무 모자란 것입니다. 엄청나게 고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사회적으로 좀 잘못된 것이라 생각합니다.
제가 지난 설교 시간에 프랑스의 교육제도인 ‘에꼴 마테르넬(Ecole maternelle)’에 대해서 이야기했었습니다. 만 2세가 되면 의무교육화 해야 된다고 봅니다. 휴직을 2년정도 주고 휴직기간 동안에 아이를 양육한 다음에 복직할 때는 에꼴 마테르넬에 맞길 수 있게, 지금 우리는 일년 밖에 안된 아이를 그런 식으로 맡기면서 하니까 너무 불안하잖습니까? 그래서 의무교육으로 시켜서 그 아이들을 잘 기를 수 있고 경력이 단절되지 않고 사회생활을 할 수 있게 해 줘야 되는데 어렵잖습니까? 그러니까 아이를 안 낳는 계획을 하는 것입니다. 이해가 가는 측면도 있지만 성경적으로 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인류를 창조하신 다음에 하나님께서 ‘생육하고 번성하라. 충만하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을 ‘무작정 낳아라’ 이렇게 해석하는 것은 어렵다고 하더라도 결혼을 통해서 자녀라는 열매를 주시는 그것을 결혼의 중요한 목적 중의 하나인데 ‘그것은 싫다.’라고 할 경우에 그 생각이 성경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는 말입니다. 예외도 있을 수 있습니다. 나와 남편이 매우 희귀한 질환을 가지고 있는데 아이가 태어나면 90%이상 이 아이가 심각한 결함을 가지고 태어날 수 있는 아이일 경우에 본인의 선택에 맡겨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 단순히 편리를 위해서 ‘아이를 낳지 않겠다’ 이렇게 결심하는 것은 성경적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는 안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 생각하는 것은 결혼하기 전에 자매들의 입장에서 보면 아이를 나을 때 희생하는 것만 수없이 떠오릅니다. 사실 아이를 기를 때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직장을 다닐 때 저보다는 세 살 정도 많은 누나였는데 따뜻하게 격려하고 그러던 사이였는데 그 옛날 70년대 초인데 인생관이 아주 확실합니다. ‘자식은 아무 소용이 없고 고통만 주는 존재다. 나는 자식이 싫다.’ 무자녀주의였습니다. 그런데 열렬히 따라다니는 형제가 있어서 결혼에 골인하게 되었는데 결국은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런데 막 주고 못사는 것입니다. ‘내 인생의 유일한 기쁨이고 아이가 없었다면 내 인생이 정말 황량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결혼 이편에서 보는 것과 결혼해서 아이를 낳아서 길러보면 받는 고통과 고난도 많이 있지만, 그러나 아이를 통해서 받는 그 즐거움과 기쁨은 이 세상에 어떤 것과 비교될 수 없는 그런 종료의 기쁨을 하나님이 주십니다. 여러분 생각할 때, 초등학교 때 유리상자에 곤충을 넣고 기를 때 기쁜 마음이 있는데 사람을 자기 배속으로 낳아서 둘이 같이 길러 가면서 아이가 사람이 되어가는 그 과정이 얼마나 큰 기쁨이 있겠습니까? 그것은 상상할 수 없는 기쁨이고 엄마의 기쁨, 아빠의 기쁨은 세상 모든 것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그런 기쁨이 있습니다.
그런데 결혼하기 전에 비혼의 상태에서 혹은 결혼하고도 자녀를 낳지 않는 상태에서는 그 기쁨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를 잘 모릅니다. 더군다나 그런 기쁨을 느끼는 사람들을 주위에서 못 봤을 경우에는 더더욱 그런 것입니다. 너무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녀를 낳으면 너무너무 기쁘고 그 자녀가 또 자녀를 낳으면 10배쯤 더 기쁩니다. 그러면서 하나를 낳고 너무 고생해서 ‘다시 아이를 안 낳겠다.’ 그러다가도 아이가 한 세 살쯤 되면 다른 아이를 갖고 싶은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런 것이니까 너무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나중에는 남편보다 더 예쁘게 됩니다. 남편보다 더 사랑스럽고 아내보다 더 사랑스럽고 폭 빠지게 됩니다. 그것이 인생의 기쁨입니다. 나중에 해 보시기 바랍니다.
질문7. 연애와 결혼의 목표
Q. 목사님께서는 결혼의 유무에 관계없이 거룩한 목표를 따라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해주셨습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연애나 결혼에 있어 어떤 목표를 거룩한 목표로 삼으면 좋을지 알고 싶습니다.
결국은 돈을 벌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세상에서 출세를 하고 하는 것들은 인생 안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근본적인 질문은 ‘왜 사냐? 무엇 때문에 사냐? 무엇을 위해서 사냐?’ 그런 질문하고 맞물려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 번 생각해 봅시다. 결혼하고 안하고 하는 것은 삶의 양태입니다. 그런데 ‘내가 왜 사냐?’는 것은 인생의 본질입니다. 본질이 더 중요합니까? 양태가 더 중요합니까? 본질이 더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인생의 진정한 가치는 양태에서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 본질에서 찾아지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내가 출세를 했기 때문에 인생을 정말 살만하고 내가 돈을 정말 많이 벌었기 때문에 인생을 정말 살만하고 내가 예쁜 여자를 얻어서 장가를 갔기 때문에 정말 인생을 살만하고 내가 진짜 능력있는 남자를 만나기 때문에 인생을 살만하다고 대답하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래서 출세의 자리에서 떨어지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인생을 살만하지 않다는 것은 인생의 본질의 문제가 아니라 양태의 문제입니다. 결국은 우리를 진정으로 행복에 이르게 하는 것은 우리 인생의 양태가 아니라 우리 인생의 본질에 속한 문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시간을 빌어서 말하고 싶은 것은 비혼의 상태에 있는 자매들이 요즘은 많이 줄어들었는데 부모나 본인 자매나 본인이나 이 나이에 이르기까지 비혼에 있다는 것이 인생의 실패의 한 부분인 것처럼 마치 시장에 물건을 내다 놓았는데 자기는 안팔렸다는 것처럼 그것처럼 자존감이 떨어지는 해석이 없습니다. 왜 그렇게 해석을 합니까? ‘내가 결혼이던지 비혼이던지 상관없이 나는 행복하게 살고 싶고 나는 하나님을 위해 살고 싶다.’ 그런 마음을 가져야 되잖습니까? 그런 마음을 가지면 달리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내가 결혼하고 안하고 상관없이 내가 무엇을 목표로 인생을 사는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인생을 사는가? 이것은 각자 여러분들이 인생의 성숙한 만큼 거기에 대한 확고한 답을 갖는 것입니다. 매일 설교시간에 설교하고 강조하고 아사밤에서도 이야기하고 수없이 주체적인 삶을 살라고 쫄지 않는 주체로 살라 등등의 많은 강의나 세미나나 설교나 모든 것들이 그것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가 하나님 앞에 물어야 하는 질문입니다. 내가 왜 살아 있는가? 내가 무엇을 위해 사는 인생이 나의 인생인가? 어떻게 살아야지만 살아가는 동안에도 허무하지 않고 죽는 순간에도 나는 정말 이어령 교수님이 돌아가실 때 마지막 남긴 말이 ‘참 아름다웠다.’ 그러시고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너무 멋있지 않습니까? 임마누엘 칸트가 ‘에스 이스트 구트’ 했던 것이 어떤 윤리적인 유언이었다면 이것은 굉장히 미학적인 유언입니다. 그것은 아름다웠다. 독일어는 ‘에스 이스트 쉔’ ‘이것은 참 아름다웠다.’ 문학가다운 그런 것이고 한 사람은 철학가다운 것입니다. 마지막에 죽을 때 여러분들도 똑같이 ‘참 좋았다.’ ‘정말 눈부시게 아름다운 내 인생이었다.’ 그렇게 말하다가 죽기 위해서는 내가 무엇을 추구하며 살아야 할 것인가? 그것은 여러분 스스로 답을 해 보라는 것입니다. 돈을 많이 벌면 그렇게 될 수 있습니까? 성공하면 그렇게 될 수 있습니까? 그런 것들이 아니라 그런 것들보다 훨씬 더 영원한 가치를 찾아서 살아오고 자기 신념대로 사는 사람들만이 마지막에 그렇게 유언을 남길 수 있지 않을까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것을 여러분들은 철학이나 사상에서 배우는 것이 아니라 신앙 안에서 배우는 것입니다. 내 인생은 하나님이 너무 소중하게 나를 창조하셨고 나를 이 땅에 보내셨기 때문에 결코 하나님이 목적없이 쓰레기 버리듯이 세상에 던져버린 그런 존재는 아니다. 나는 하나님의 아주 현명한 목적을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났다. 그 목적을 내가 발견하고 그 목적을 따라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인생의 보람과 가치와 의미를 찾을 때 그것이 진정한 행복이 아닌가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것이 우리의 말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과 내가 행복한 것이 결코 분리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내가 살아 갈 수 있다. 나의 이 꿈은 세상에 한정된 꿈이 아니라 죽음 넘어서까지도 의미를 갖는 꿈이다. 그럴 수 있는 그 목표를 가지고 인생을 살 수 있을 때 그 때에 당연히 결혼도 둘이 함께 그 목표를 향해 가게 될 것입니다. 얼마나 좋겠습니까? 자기를 완성하고 하나님의 뜻을 함께 이루면서 살아간다고 할 때 그 때 후회하지 않는 결혼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2 캐치마인드
문제1. 아담과 하와
문제2. 사도 바울
문제3. 정조
문제4. 그리스도의 신부
#3 성
사회자: 다들 열정적으로 참여해주셔서 이곳의 열기가 아주 후끈후끈한데요. 이 열기를 이어서 2부를 시작해볼까요? 네. 그러면 시작하겠습니다. 첫 번째 질문은 개인의 성적 욕구에 관련된 질문입니다. 비혼을 선택할 경우 인간의 성적 욕구를 어떻게 해소하는 것이 좋을까요? 또 일각에서는 음란물을 보지 않고 음욕만 해소하는 행위를 해도 괜찮다는 주장도 있다고 합니다. 이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요?
목사님: 비혼을 선택할 경우에 이제 성적인 욕구가 남는데 결혼을 하면 성적인 욕구가 완전히 해소가 되느냐? 그건 그럴 수는 없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한 사람은 배우자의 성적인 욕구를 해소해주는 도구가 아닙니다. 그래서 결국은 성적인 결합은 두 사람의 진심의 결합에 의해서 이루어져야 되는것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결혼을 하고도 이런 성적인 문제들이 계속 그치지 않는 이유도 이런 성적 생활의 부조화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쉽게 이야기하면 여러분 연애할 때 뭘 하자고 그럴때 의견이 딱딱 맞아요? 안 맞죠? 성적 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남자가 오늘은 부부생활을 하고 싶다 이렇게 의견을 가져도 거기에 진짜 동의를 해줄거냐 라고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고 또 아내가 그런 욕구를 느꼈다고 하더라도 남편이 그날 그 욕구를 같이 느끼느냐 하는 그건 별개의 문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꼭 필요한 것은 뭐냐하면 인간으로 살기 위해서 이 성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결혼을 하던 안하던 이 성적인 욕구의 문제는 항상 남아있는 것입니다.
그래도 결혼하기 전에 있는 사람이 결혼한 후보다 유리한 점도 있고 또 결혼한 사람이 결혼하기 전에 있는 사람보다 더 유리한 점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것들이 있느냐 하면 하면 예를 들자면 결혼하기 전에는 물론 인제 갈 때까지 다 가보고 성생활에 탐닉해버린 사람은 예외입니다. 그런 사람은 이미 우리 재껴놓고 이야기하는 것이고 그런 사람들의 경우는 뭐 어차피 끊임없이 자기 성적인 욕구를 발산하면서 살아야 되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것은 뭐 연애중 이던지 결혼중 이던지 그런 자신의 본성을 버리기 쉽지 않다 그렇게 봅니다. 그렇지만은 이제 일반적으로 본다면 결혼하기 전에는 아직 성에 대한 호기심이나 이런 것들을 많이 가지고 있지만 문이 확 열린 것은 아닙니다. 그렇죠? 또 혹시 예수 안 믿은 사람들 가운데 그 결혼하기 전까지 혼전순결을 못 지켜서 혹은 이렇게 그런 성적인 관계를 했다고 하더라도 그게 아직 뭐 수문이 열리듯이 막 밀려들어온 것은 아니고 절제하면서 살아야 된다는 그런 처지에 있다는 점에서는 결혼한 사람들보다는 유리한 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결혼한 사람들은 또 그런 것에 비하면 결혼한 사람들이 불리한 점이 뭐냐하면 이미 여성들과 아내와 함께 오래 살면서 이게 정신적으로 느끼는 사랑의 감정과 육체적인 결합의 경험이 항상 결합되어 있기때문에 그래서 결혼한 사람이 누군가 이성에게 사랑을 느낄때에는 플라토닉 러브로 끝날 가능성은 매우 적습니다. 무슨 얘기인지 알죠? 그런데 결혼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플라토닉 러브로 끝나게 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잖아요? 있을 수 있다고 저는 봅니다. 그러나 결혼한 사람들에게는 그게 굉장히 어렵다 그런점에서는 결혼하지 않은 사람이 유리점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반면에 결혼한 사람에게 유리점도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하면 일단 자기가 원하는 만큼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어쨌든지 간에 성적으로 해소할 수 있는 관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으니까 그러니까 어떤 의미에서 절제할 수 있는 그런 어떤 가능성을 더 많이 가질 수 있는거 아닐까요? 그렇지만은 남자들의 성적인 요구 곡선은 남자들은 결혼하고 그 통계가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결혼하고 일년 안에 일생 전체 할 성관계에 쓸 수 있는 횟수의 삼분의 일을 쓴다고 합니다. 그런가하면 여자는 결혼하고 나서는 사실은 특별히 결혼하기 전에 이렇게 성적으로 개방된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 아닌 사람들은 성적인 즐거움에 아직 눈을 못 뜹니다. 그런 즐거움에 눈을 뜨는 것은 결혼하고 나서 한 십년정도 흘렀을 때 사람마다 개인차는 있지만 그래서 곡선이 남자는 이렇게 해서 이렇게 떨어지고 여자는 늦게 시작해서 이렇게 해서 떠오릅니다. 그래서 이제 이 곡선이 딱 맞아 떨어지면 너무 좋은데 그러면 이제 금욕도 같이 하고 그 다음에 즐기는 것도 같이 즐기면 되는데 이게 사이클이 잘 안맞습니다. 그래서 이젠 이것도 결혼하고 어떤 단계가 되면은 사실은 이런 교육도 좀 필요합니다.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그런 교육도 필요합니다.
그런데 어쨌든 많은 사람들이 잘 좀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일생을 살다가 갑니다. 그래서 이런 성적인 부조화 같은 것들은 어디가서 함부로 말을 못하잖아요? 자기 마음속으로 삭히고 이렇게 하는데 그런데 이제 문제는 뭐냐하면 성적인 욕구를 해소하는 것을 성으로 해소할려고 할 때는 사실은 죄가 안되는 것이 없습니다. 고린도전서에서 행음을 피하라 음행을 피하라고 할 때 그 음행에는 남자 여자가 성적으로 부적절한 결합을 하는 것 이외에 그런 성적인 희롱이나 아니면 그런 심지어는 말이나 유사 성행위나 자위나 모든걸 다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점에서 사실은 합법적으로 성적 욕구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은 없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해야 될 것이냐 할 때 우선 먼저 간접적인 것부터 생각을 해야 될 것 같습니다.
그게 뭐냐하면 우선 성적 에너지는 그것을 느끼는 것은 사실 남녀의 몸이 건강하다는 증거입니다. 그건 굉장히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욕구가 일어나는 것 자체를 죄악시 할 필요는 없다. 그런데 문제는 절제하지 않으면 매우 불행하게 된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게 굉장히 어려운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렇게하기 위해서 추천할 만한 방법은 뭐냐하면 우선 육체적이고 정신적이고 영적인 이 세 방면에서 이루어져야되는데 육체적인면에 있어서는 좀 이렇게 충분히 에너지를 발산할 수 있는 그런 운동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특히 남성들의 경우에는 그런 욕망에 여성들보다 훨씬 더 많이 시달리는데 집중해서 운동을 하세요. 운동을 해서 굉장히 많은 에너지를 운동으로 발산하세요. 그것이 경건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됩니다.
그 다음에 정신적인 것은 뭐냐하면 어떤 그 음행에 빠져서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은 즐거움의 포커스(Focus)가 섹스(sex)에 맞춰져 있습니다. 말하자면 뭐라고 그럴까, 다이얼 자체가 거기에 딱 맞춰져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뭐냐하면 틀면 다른 방송국은 전혀 안나오고 섹스만 딱 맞았을 때에만 방송이 나오는 것처럼 정신구조가 그렇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사실은 누가 살아있는 사람이 뭐 숟가락 들 힘만 있어도 바람을 핀다라고 하는 옛어른들의 말이 있는데 근데 누가 거기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가 있겠어요? 그렇지만 ‘모든 사람이 자유로운 사람이 없기 때문에 내가 뭘 하든지간에 나도 용납되어야 된다’ 이런 식의 생각을 가지면 그러면 기독교에 있어서 모든 덕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세상에 거짓말을 안 하고 사는 사람이 있을까? 그렇다면 뭐 내가 지금 거짓말 하는 게 무슨 문제가 될까? 이렇게 살게 되면 그럼 결국은 자유, 도덕이 없는 자유로운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께 헌신할 때에 그 마음에 각오와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예를 들자면 우리들이 거짓말 하지 않는 사람은 절대적인 의미에서 한 사람도 없지만, 그러나 이제 우리가 거짓말이 잘못이라는 것은 아주 또렷하게 알고 있고, 그리고 현실적으로 살고 보면 일 년 동안에 거짓말을 한 번도 안 했을 수는 없지만 그렇게 하려고 애를 쓰면서 노력하는 게 그리스도인의 삶이잖아요? 그러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죄가 되지 않고 성욕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제 이것은 그런 점에서 정신적인 분산을 하라 그래서 뭐냐하면 ‘Stop Thinking’입니다. 성에 대해서 계속 생각을 계속하는 것을 끊고 멈출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 때에 이제 감정들을 조절할 수 있게 되지 성범죄를 하는 사람들을 보면 비상하리만큼 집중을 하는 것입니다. 집요하게 그러면서 결국은 나머지 것들은 ‘nohting’입니다. 아무 의미가 없어집니다. 그 포커스가 거기 딱 하나에 맞춰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가지고 미친 듯이 돌진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제 거기에 또 하나 필요한 게 뭐냐 하면 정신적인 말하자면 관심사를 정신적으로 이렇게 나눌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뭐냐 하면 대개 저한테 그런 성중독 상담 같은 거 많이 들어옵니다. 어마어마하게 들어옵니다. 그러면 이제 막 어떤 때는 한 사람한테 막 여섯 번 일곱 번씩 메일을 보내기도 하는데 제가 하는 이야기가 그것입니다. 즐거움이 당신에게는 세상에서 즐거움이 그것밖에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사실은 이 세상에 즐거운 일이 너무 많다 그걸 눈을 뜨지 못하기 때문에 못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적절한 취미생활 그리고 아름다운 것을 자연 속에서 예술 속에서 문학 속에서 그렇게 발견하면서 살아가는 정신적인 교양의 풍요함 그런 속에서 느끼면서 살아가는 그런 것이 말하자면 간접적으로 정욕을 해석하는데 도움을 주는 것입니다.
세 번째 영적인건데 그건 뭐냐 하면 이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그런 거 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결국은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멀어졌을 때에 그런 것들에 대해 붙잡히고 막 끌려가게 되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은 안 그러는 것입니다. 근데 여러분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민망한 이야기지만 예를 들자면 자매들이 아주 멋있는 정말 내가 좋아하는 형제를 만났습니다. 그래서 사랑에 빠졌습니다. 너무너무 사랑해 그래서 어느 정도로 사랑하냐면 그 사람이 6개월밖에 시한이 남지 않은 시한부 생명을 가진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나는 이 사람과 결혼하고 싶다 그럴 때 그 여성의 마음에 다른 남성하고 침대에 올라가고 싶은 상상이 떠오를까요? 어떨 것 같아요?
사회자: 아니요.
목사님: 그렇게는 안 될 것 같지 않나요? 그렇죠? 그러면은 결국 뭐냐 하면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너무 사랑하고 그 사랑이라는 거 자체는 매일매일 신비한 금가루가 뿌려지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항상 좋은 일만 있다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하면 매순간 매순간 사랑하는 사람들 이외에는 알 수 없는 어떤 신비한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것이 사라져버리면 그것은 사랑하는 사이가 아닌 것 입니다. 근데 그것이 이제 10대에서 뿌려지는 금가루가 무엇이냐 20대에 무엇이냐 30대, 40대, 50대, 60대 서로 다르게 되겠죠? 다르겠지만 동일하게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데에는 항상 사람과 함께 기쁨이 따라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순결이라고 하는 것은 사랑의 결과입니다. 사랑하면 순결을 따로 배우지 않아도 사랑하면 순결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가끔하는 말로 진짜 사랑에 빠지고 나면 세상에는 여자 한 사람하고 나 사람하고 두 종류 밖에 없습니다. 그게 진짜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에 빠지게 되면 남자는 한사람이고 나머지는 모두 인간입니다. 그런 감정이 드는 거잖아요? 아무리 가까이에서도 그렇게 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하나님을 계속 사랑하는 영적인 상태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은 극복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모든 사람이 매일 매일 끙끙 앓고 신음을 하면서 그렇게 그 성적인 욕구에 막 헐떡거리면서 그렇게 사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젊어도 경건하게 살고 믿음으로 살고 하면 상당 기간을 성적인 상상을 없이 혹은 상상이 와도 그것을 쳐 내면서 살아갈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건 저의 은혜받았던 경험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연히 은혜 못 받으면 그리스도인과 그리스도인을 가리지 않고 얼마든지 그런 상상이나 죄 속에 빠질 수 있지 않아요? 그리고 지금 휴대폰만 열면 막 정욕이 가득찬 세상의 문이 확 열리잖아요? 여러분 네이버에 막 맨날 웹툰 선전 올라오고 성인앱 올라오고 막 맛보기로 올라오고 이런 것들을 보면은 결국은 문이 활짝 열려있는 것입니다. 맘만 먹으면 톡톡톡톡 몇 번만 치면은 얼마든지 그런 그 말하자면 건전하지 않은 사이트 속에 들어가서 그런 속에서 사람들이 활기치면서 살아가는 그런 모습들을 보게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이제 우리가 항상 생각해야 될 것은 ‘우리는 그냥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다. 그러니까 그 사람들은 그 사람들 사는 대로 방식이 있고 우리에게는 우리의 윤리가 있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될 것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실제로 계명을 범하고 섹스를 하는 것은 간음을 하는 것입니다. 몸과 마음 전체로 그러나 이제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은 자는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예수님이 말씀하셔서 얼핏 보면 두 개가 다 사춘간이다 마찬가지다 우리말로 고부고부다 이러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라 예수님이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는 마음으로 간음하였느니라 몸으로가 아니라 마음으로, 마음으로 간음한 것도 그것도 죄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몸까지 함께 간음한 것 보다는 훨씬 헤어나오기가 쉬운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남성들의 경우에는 자위 문제가 나오는데 한마디로 얘기하면 그 간음한 것과 똑같은 죄다라고 말할 수는 없고 너무 지나친 정죄의식에 시달리는 것도 잘못이지만 그러나 그것을 너무 가볍게 여기고 습관화되는 것도 절대로 좋은 것이 아니다. 그리고 결국은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그런 인간의 성적인 욕망을 극복하면서 살지 않고는 우리가 덕스러운 삶에 도달할 수 없다. 그러니까 내가 쉽게 이야기하면 백번 정도 내 마음에 정욕이 일어나면 그것을 백번을 모두 다 피할 수 없을지는 모르지만, 그러나 백번이 일어났을 때 거의 구십 번을 굴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될 경우에는 결코 그것이 그 사람으로 하여금 자위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또 다른 범죄로 그 사람을 데려갈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래서 어쨌던지 우리는 상당히 많은 정도 내 마음에서 일어나는 이런 정욕들을 늘 자신의 통제 아래 있을 수 있도록 자기가 훈련되어져야 한다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남성이나 여성이나 똑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이제 그런 것을 굉장히 뭐 이렇게 성에 대한 어떤 68혁명 이후에 성에 대한 해방 없이는 인간의 해방이 있을 수 없다라는 이런 사상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면서 이제 선구적인 활동들이 이루어지게 되는데, 그런데 이제 그런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굉장히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이미 그것이 옳지 않다라고 하는 것들이 여기에 새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뭐가 잘못되었느냐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대개 익명의 공간 속에서 그렇게 이야기하지 떳떳하게 나와서 이렇게 이야기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심지어 결혼할 때 신부가 들어오면서 나는 일생 살면서 삼천 번을 성관계를 했습니다. 푯말을 가지고 들어오는 사람은 없단 말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그것은 무엇 때문인가라고 우리는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은 인간이 그렇게 성에 대해서 절제하지 못할 때 그 치러야 할 대가는 굉장히 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개인적으로 아무리 세상 사람들이 성적으로 자유로운 견해를 가졌다고 하더라도 자기와 결혼한 아내가 그런 자유로운 성에 대한 윤리를 넘나드는 것을 용납할 남자들이 얼마나 될까? 서로 감춰져 있다면 사실은 모르니까 약이지만 그러나 알게 되었을 때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그리고 만약에 두 사람이 서로 그런 성적인 자유로운 생활을 서로 용인하면서 그렇게 산다면 그걸 과연 우리가 부부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그리고 과연 그런 도덕을 자녀들에게까지 가르칠 수 있을 것인가 이런 건 뭐 선구자적인 위치에 서 있는 몇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그렇다라고 단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성경은 그런 것들을 어두움의 일이라고 딱 잘라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화두는 뭐냐 하면 그런 음란한 생각들이 불쑥불쑥 떠오르는 것 자체를 죄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내 의식이 그것을 꽉 붙들 때 그때 그것은 내 마음 안에서 뿌리를 내리고 아이를 품고 있는 것처럼 그 안에서 계속해서 죄가 자라게 된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제 절제를 배워야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어떤 경우도 성욕을 성적인 방법으로 해소하는 그 죄가 되지 않는 방법은 없다. 다만 자위의 경우에 막 엄청나게 심한 자책감에 시달리는 그런 병적인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제가 서울에 있는 어느 한 교회에 집회갔을 때가 있는데 형제를 상담하려고 데려왔는데 정신과적인 문제가 아주 심각한 형제였습니다. 그 형제에게는 자기 하체를 볼 수 없는 그런 의식 정신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원인이 말하자면 자위행위에 대한 오래된 자책감이었습니다. 그것을 마귀가 이용해가지고 그렇게 이제 그 아이를 막 심한 정죄의식 속에 몰아넣고 몰아넣고 해 가지고 완전히 짓밟아버리는 그러한 광경도 봤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젊은 사람들이 특히 남성의 경우 자위를 피할 수는 없다고는 하지만, 그러나 그것이 무한정으로 좋은 것처럼 그렇게 받아들이면서 살아서는 안 된다 피할 수는 없을지 모르지만 너무 아까 말한 것 같은 극단적인 죄책감과 그 다음에 자유로움, 그 어느 쪽도 우리들이 즐겨서 선택할 것은 아니다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결국 싸워야 되는 것입니다. 결국 그리고 이제 성경을 보면 ‘너무 참을 수 없으면 결혼을 해라’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데 그것도 이제 모든 것에 대한 완전한 해결은 아닙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이 결혼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결혼의 가치를 크게 세 가지를 이야기하는데 용도를 하나는 음욕으로부터 우리를 일단 보호해주고 그 다음에 자녀를 생산하고 부부 사이에 정신적인 결합을 이루는 것으로 설명을 합니다. 그런데 어떤 경우도 그러면 결혼을 하면 어쨌든지 간에 성적으로 해소할 수 있는 탈출구가 열리니까 사람들은 성적으로 훨씬 더 건강하고 거룩해져야 될 거 아니에요? 그런데 현실은 안 그렇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결국은 그 절제의 문제는 결혼하기 전뿐만 아니라 결혼 후에도 계속 유지되어야 할 문제다. 그건 자기가 살아있는 동안에 성욕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까지는 자기가 유지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거기까지만 하겠습니다. 네.
사회자: 네. 감사합니다. 그런 욕구가 일어났을 때 생각을 멈추고 뛰어서 교회에 오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교회에 와서 기도하면 좋겠죠? 애국가를 부르던지) 영적으로 육체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우리가 되도록 하겠습니다. 두 번째 질문의 테마는 죄책감입니다.
목사님: 그런데 결국은 조금만 더 보태서 말하면 여러분도 경험에서 느낄 것입니다. 매일매일 간절히 기도하고 말씀을 들으면서 은혜를 받고 그 다음에 예배를 드리면서 주님을 만나는 감격이 있고 눈물이 있고 할 경우에는 사실은 정욕이 내게 정말 있나? 할 정도로 아주 저 구석에 찌그러져 있습니다. 언제든지 통제가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죄에 빠지거나 유혹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또 저 쓸데없는 짓 하고 앉아있네’ 하는 아주 현재스러운 마음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런데 경건이 무너지고 기도할 시간에 포르노그라피나 접촉을 하고 그 다음에 예배의 시간에 은혜를 못 받고 그 다음에 친구들하고 어울려서 다니는 곳이 그런 밤문화와 가까이 있는 곳으로 접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경우에는 이제 그것이 저 구석에 홀로 찌그러져 있는게 아니라 엄청나게 가까이 와서 자기를 누르는 목을 누르는 엄청난 힘으로 작용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문화로부터 어느 정도 거리감을 두고 살아가는 것, 그리고 너에게 우리에게는 다른 즐거움이 있다라고 하면서 살아가는 것, 그런 것들이 굉장히 필요한 것입니다. 적극적으로 그래서 교양의 즐거움 예수를 뭐 등등의 학문의 즐거움, 교제의 즐거움, 자연에 관한 즐거움, 그런 것들을 적극적으로 느끼면서 정신을 분산시키면서 살아가는 것 그것이 절제력을 증진시키는 한 방법인 것입니다. 그리고 한 번 절제를 해서 이기고 나면 그 기쁨과 내가 이길 수 있다라고 하는 가능성에 대한 이 놀라운 기쁨과 자신감이 생겨나게 되는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죄에 습관적으로 빠져있는 사람들은 패배의식이 굉장히 짙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벗어나야 됩니다. 그 다음 질문이 더 결정적인 것 같은데요?
사회자: 네 두 번째 질문, 이미 성적인 죄를 범했습니다. 죄책감으로 지체들을 만나는 것도 예배를 드리는 것도 괴롭습니다. 저는 앞으로 어떻게 신앙생활을 해야할까요? 라는 질문입니다.
목사님: 굉장히 애석한 일입니다. 왜 그러셨어요? 그렇게 되리라는 것을 성경이 수없이 경계하고 있는 것이죠. 우리에게 들어오는 정보들은 너무 한쪽에 치우친 것입니다. 뭐냐 하면 일체의 부담과 도덕적인 죄의식 없이 아무리 엔조이(enjoy)해도 그 즐거움이 그치지 않는 성으로만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제 사람들에게 sns나 인터넷에 혹은 그런 것들을 공공연하게 공개할 때에 그때에 자기가 느꼈던 희열과 기쁨은 공개를 하지만 그 일이 일어나기 전에 자기 마음속에 있던 깊은 자책감과 괴로움 이런 것들은 좀처럼 고백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일방적인 정보들만 우리에게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결국은 우리의 마음속에서 나는 굉장히 훌륭한 즐거움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구나, 그리고 도덕적인 기준 자체가 사회에서 이렇게 흔들리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그런것들이 자기의 확고한 사상적인 기반이 없기 때문에 계속해서 오래도록 접촉하다가 보면은 자기도 모르게 그 뚝이 무너지듯이 그런 도덕적인 확신들이 붕괴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자기가 이렇게 정절을 지키면서 순결하게 살아야 될 어떤 확고한 이유를 신앙안에서 발견하지 못할 때 그때 뭐 쉽게 이야기하면 ‘내 사전에 도둑질은 있을 수 없다. 그게 말이 되냐 그것은 가문에 먹칠을 하는 것이고 그것은 인간이 할 짓이 아니다. 어떻게 남의 물건을 도둑질 하냐’ 이렇게 확고하게 사는 사람들은 유혹받을 일이 적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점점 흐르면서 완화되면서 너무 힘들면 도둑질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을 하게 되면 언젠가는 남의 물건에 손을 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얼마나 많은 세상에 남자들이 교묘하게 파고들면서 그래서 여성들로부터 성적인 즐거움을 얻으려고 하고 여성도 반대로 남자로부터 그런 것을 얻으려 하고 그런 시대 속에서 우리들이 살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거기서 선악 간의 분별을 확실하게 해야되는 것입니다. 지금 이분은 굉장히 후회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 자기가 이 죄를 범한 것에 대해서 뭐 전까지는 죄는 항상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결과를 감추면서 다가옵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 죄에 빠질 때가 되면 죄를 짓게 될 때에 찾아오게 될 그 비참과 절망과 그 무시무시한 고립감에 대해서 그 결과를 모두 보여주면서 오면은 죄 지을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딱 감추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감추고 들어오기 때문에 욕망이 아주 심하니까 그러니까 그 결과에 대해서 진지하게 숙고를 하지 않고 그거 하나에 꽂혀서 온전히 거기에 올인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결국은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죄를 짓고 나서 마지막에 뭐가 있어요? 사랑이 있어요? 누구하고 사랑을 나눴어요? 대상이 누군지 여기 안 나왔지만 이 사람이 차라리 술집 여자나 사창가의 여자면은 괜찮습니다. 괜찮다기보다는 좋다는 게 아니라 이것은 자기한테만 남아요. 그런데 만약에 서로 좋아하는 사이던지 뭐 아니면 인척관계에 있다든지 뭐가 관계를 끊을 수 없는 사람 사이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면 이건 이제 내 문제만이 아니라 저의 문제가 되고 그 다음에 저 사람의 문제만이 아니라 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것들이 막 복잡한 파장을 그리면서 이게 이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까지 영향을 미치면서 엄청난 삶의 질서를 뒤흔들어 놓는 것입니다. 거기서 찾아오는 그 고통은 잠깐 동안의 이런 타락이 가져다주는 즐거움 그 몇 초 동안의 즐거움하고는 비교될 수 없는 어마어마한 고통이 따라오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우리에게 정치인이나 이런 사람들 속에 그 스캔들이 일어나가지고 심한 험한꼴을 당하는 사람들을 보면은 그 사람들이 그 결과를 모두 예측했더라면 그런 선택을 했겠어요? 안 했겠죠? 그래서 이제 굉장히 잘못된 선택을 했다 이것입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 지금 현재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냐하면은 지체들 만나는 것도 힘이 들고 예배를 드리는 것도 너무 괴롭다 그 이유는 자책감입니다. 그게 좀처럼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다윗같은 훌륭한 사람도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라고 이야기할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이제 뭐냐 하면 심지어는 하나님은 용서해주실 수 있는데 자기 자신이 자기가 용서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게 자책감입니다. 그럴 경우에 이제 엄청난 무기력한 상태에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은 뭐냐 하면 꼭 어떤 느낌이냐면 기도를 하고 예배를 드리고 찬송을 하는데 두 발에 무거운 쇠구슬을 달고 물속에서 몸부림치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 것입니다. 기도하려고 예배를 드리려고 교제를 하려고 막 애를 쓸수록 더 한없이 밑으로 가라앉는 것 같은 그런 비극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고통을 느끼고 비참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당히 많은 사람이 아예 못 헤어나옵니다. 그럼 어떻게 되느냐. 그냥 뭐 어떤 사람은 신앙을 버리거나 여러 가지 경우가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만큼 이제 그 결과가 너무 무섭다라는 것을 기억하라는 것이고 그러면 마지막 세 번째로 마지막으로 어떻게 해야될 것인가 이것은 굉장히 어려운 길입니다. 그러면서 또 어떻게 보면 단순한 길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인데 지체 한 사람이 어쨌든 그런 상황에 휘말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취리까지 했는데, 그런데 결론적으로 이야기하면은 그래도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40일 동안을 교회에서 철야를 하더라고요. 그러니까 처음에 그런 죄를 짓고 나서 철야 아니라 금식을 한들 금식을 하지도 못하죠. 마음에 구조 자체가 금식이 안 됩니다. 그러니까 마음의 초점이 모아져야 되는데 안 되는 거죠. 그런데 어쨌든지 간에 하나님이 마음을 움직이셔서 40일 동안 철야를 하면서 매일 교회에 와서 기도하면서 하나님 앞에 은혜를 구하고 하는데 주님을 깊이 만나더라구요. 그렇다고 해서 이것을 40일 철야를 내가 그게 어떤 공식인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건 하나의 자기 마음을 오롯이하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 문제를 해결해야 되겠다라고 하는 그 간절한 열망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게 어떤 방법인지는 여러분이 생각을 해보십시오.
그런데 확실한거 하나는 목회자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혼자 헤어나오기에는 너무 어렵습니다. 그래서 꼭 목회자의 도움을 받으십시오. 저도 여러 명을 돌봤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대부분이 헤어나왔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걸립니다. 그리고 내버려두면 해결이 되겠는가 이렇게 그냥 시간이 지나면은 그 사람과의 문제는 해결이 될 수도 있겠죠. 뭐 떠나던지 어떻든지 하면 사랑했던지 간에 그런 감정은 또 시간이 지나면 또 사라지는 거니까 안 잊히는 첫사랑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건 되는데 하나님 앞에 무기력한 것은 은혜를 받지 않으면 해결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뒤로 물러서지 마세요. 반드시 회복의 길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간음하다 잡혀 온 여자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말씀하시잖아요? 하나님에게 용서받기에 너무 어려운 죄다, 그리고 이 죄는 결코 용서받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그래서 그러나 이제 고도로 집중된 가운데 하나님 앞에서 이 문제의 해결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하나님 앞에 집중해야 된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삶의 명람함에 관하여 설교했을 때에도 이야기했지만 이미 일어난 일입니다. 그러니까 일어난 그 일 자체를 가지고 후회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이미 일어난 날이니까 그 현실을 받아들이고 그 다음에 이 문제 때문에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런식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자기가 해야할 마땅한 일을 모두 감당하면서 목회자의 영적인 도움을 받으면서 그러면서 이 문제를 풀어가도록 해야됩니다.
우선 경건생활을 회복해야됩니다. 그래서 그런 죄에 빠진 사람들을 제가 다뤄보는 가운데 한 케이스는 “너는 기도해야된다.” 그런데 뭐라고 하냐면 “저도 그러고 싶어요” 그리고 눈물을 흘리는데 이렇게 너무 서러워서 울다가도 기도하러 교회에 오면 기도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방법을 가르쳐줬습니다. 네가 그렇게 하지 말고 저녁때 자기 전에 삶 자체를 다 고쳐줬습니다. 너의 방도 수리를 하고 그 다음에 옛날 그 남자와 있었던 생각나게 하는 물건도 모두 치우고 그 다음에 오디오도 들여놓고 이렇게 제가 그 집에 가보지는 않았지만 어쨌든지 간에 조언을 해줬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너에게 어쨌든 그 사건을 생각나게 하는 물건들을 치우고, 그리고 기분을 전환해라. 그리고 그 다음에 충분히 새 삶을 살 수 있다는 의지를 가져라. 그리고 기도가 안 되면은 밤에 하나님께 너의 기도를 써라” 쓰고 아무리 기도가 안 되도 읽는 건 할 수 있잖아요? 그리고 “쓰고 그 다음날 교회에 나와서 네가 그것을 기도시간에 정 기도가 안 되면 그것을 읽어라” 그랬는데 그 기도문을 읽으면서 하나님이 어느 순간에 기도의 문을 열어주셨습니다. 회개가 나오고 기도가 되고, 그리고 나중에 잘 해결되어서 결국은 결혼도 하고 그렇게 잘 되었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기도를 하고 그 다음에 어떻게 하든지 수시로 막 그런 기억들이 떠오르면서 말할 수 없는 자책감과 함께 또 그 한번 그런 죄에 빠지고 나면 나는 이 죄가 너무 무서워서 나는 짓고 싶지 않다 이렇게 되는 게 아니라 이게 힘든 게 이런 후회의 감정에 비례해서 또 그 죄가 주는 즐거움이 자기 속에 상상 속에 떠오르면서 그래서 그 욕구가 또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게 굉장히 어려운 것입니다. 양쪽에 다 시달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네가 어떻게 해야될 것인가 그것을 이제 배워야되는 것입니다. 반드시 혼자 일어서는 것보다는 나는 목회자나 아니면 아주 뛰어난 신앙의 선배의 집중적인 돌봄을 받으면서 회복의 시간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어쨌든 그에 관한 신앙적으로 지침이 될만한 그런 책들을 읽으면서 나가고 다시 경건생활을 다시 리빌드업해야 된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쉬운 길은 아니지만, 그러나 어려운 길도 아니고, 그리고 절대로 회복될 수 없는 길도 아닙니다. 오히려 잘 벗어나고 나면 오히려 그 벗어나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얼마나 소중한가 하는 것을 깨닫고 인생의 소중한 그런 깨달음의 기회가 되리라고 그렇게 생각됩니다. 네.
사회자: 절대 저희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믿으며 하나님께 나아가라. 네. 아쉽지만 마지막 질문입니다. 성문화 변혁에 관련된 주제인데요. 소극적으로 개인적인 성욕을 억제하는 차원을 넘어 적극적으로 세속적인 성문화를 바꾸기 위해 기독청년들이 할 수 있는 문화적인 행동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목사님: 그게 그렇게 쉽게 바뀌어질까요? 인간에게 있어서 성적인 타락의 역사는 이미 인간이 타락하면서부터 거의 동시에 일어난 사건이고 그게 막 뿌리깊이 깔려 있는 그런 사상인데 그것을 우리가 문화운동 몇 가지 한다고 그것을 바꿀 수가 있을까요? 아마 그렇지는 않을 거라고 봅니다. 중요한 건 뭐냐 하면 세상 사람들에게 그거 말고도 이 세상에는 너무 아름다운 즐거움이 많다 그것을 본인도 느끼고 남도 느끼게 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이 나는데 퇴계 이황이 그 자기의 글 속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데 ‘학문을 깨우치는 이 즐거움은 돼지고기보다 훨씬 더 맛있다’ 그러니까 얼마나 가난했으면 돼지고기에 비교를 했겠어요. 그 당시에 사람들이 그 당시에 소고기는 감히 생각도 못하고 돼지고기에 선비들이 막 술 한잔에 취하는 그것을 즐거움으로 삼았는데 그런 고기가 주는 그 맛 여러분 지금도 삼겹살은 맛있지 않아요? 삼겹살을 대접했을 때 짜증내는 청년은 한 번도 못 봤어요. 만인이 좋아하는 음식이잖아요? 그렇지만 학문을 통해 깨닫는 즐거움은 훨씬 크다. 그래서 다양한 교양과 문화를 통해서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신앙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느끼면서 사는 그런 것들이 좋고 친구들 간에도 이렇게 대화를 나누거나 할 때 그런 성적인 것들을 연상시키고 정당화하는 그런 행동 메시지 그 다음에 그런 걸 부추기는 것, 이런 것들은 세상 사람들하고 아주 뚜렷하게 선을 그으면서 여러분들 주체성을 가지고 살 수 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염려되는 것은 한 삼십 년 전에 비해서 지금은 사회적으로도 이런 정절에 대한 관념들이 많이 무너져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그런 문화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껍데기는 그리스도인이지만 속에 사상은 세상에 물들어있는 가치관에 물들어있는 사람일 수 있거든요. 그러지말고 정말 그런 경건하게 살면서도 인생을 아름답게 살고 경건하게 살면서 결혼의 행복을 누리면서 사는 그런 긍정적인 모습들을 많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아주 비참한 일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지혜롭게 행동하면서 살아가야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지금 성적인 문제를 이미 범했습니다,
그 다음 세 개의 질문에 맞춰서 여러분들에게 영상을 하나 준비했습니다. 한번 보실래요? 틀어주시나요? 아 주일날 틀어준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제 설교시리즈에 들어가보면은 사운드클라우드에 저장되어 있는 건데 시편 6편 강의가 있습니다. 열여섯 개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것을 들으면서 많은 사람들이 회복했습니다. 그래서 좀 길기는 하지만 그 정도는 할 수 있지 않나 저는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네. 많이 했네요.
사회자: 네. 삶으로 살아내라 즐겁게. 죄송해요. 네. 너무 아쉽지만 벌써 토크쇼를 마칠 시간이 됐습니다. 제가 시간이 가는지 정말 몰랐어요, 목사님. 늦은 시간까지 저희 청년들을 위해서 시간을 내주신 목사님께 감사의 박수 부탁드립니다. 마지막으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년들을 위해서 해주고 싶으신 한 말씀 있으시다면 부탁드려도 될까요?
목사님: 우선 이제 우리가 뭐 이번에 설교 두 개가 이제 결혼과 비혼, 그 다음에 성에 관한 것 거기에 집중된 질문을 드렸는데 마지막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그거에요. 뭐냐하면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의 인생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달아야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동의가 잘 안되더라도 여러분 자신을 향해서 ‘나는 정말 소중한 사람이다. 내 인생은 너무 아름다운 인생이어야 한다. 그리고 나는 내 인생에 나는 주체성을 가진 사람이다.’ 그것을 거울을 보면서라도 여러분 스스로 여러분들에게 일깨워줘야합니다. ‘나는 너무 소중한 사람이다. 그리고 내가 결혼 상태에 있던 비혼에 있든지 간에 나의 아름다움은 하나님과 관계를 맺은 나의 영혼에 있다 내 영혼에 아름다움에 있다. 그리고 나는 하나님 앞에 바쳐진 순결한 신부다. 나는 그분의 사랑을 받고 나는 그분을 사랑하며 살도록 부름받은 그리스도의 신부다.’ 그런 마음을 먼저 가지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는 뭐냐하면 자기가 하고 싶은걸 하면서 사세요. 그러니까 ‘어떻게 하든지 미친 듯이 돈을 벌어서 어떻게 하든지 소비를 해야되겠다’ 그렇게 살지 말고 하고 싶은 거 여러분들이 정말 하고 싶은 거 그게 무엇이든지 간에 여러분들이 정말 하고 싶은 것을 발견하고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일에 종사하면서 사십시오. 그러면 돈을 조금 덜 벌어도 거기서는 자기를 실현해가는 기쁨이 있고 하나님이 자기를 그 일을 위해 불러주셨다라고 하는 자부심이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그렇지 않고 여러분들이 무언가 치여서 떠밀리듯이 인생을 살면 그런 보람과 자긍심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원하는 것을 하면서 살아라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성에 대한 고민은 모든 사람에게 있는 것이다. 그 누구도 예외는 없다. 그리고 이것은 결국 내가 일생 동안 싸우면서 살아가야 될 것이지만 확실한 것은 내가 이 정욕에 굴복된 상태로 살아가서는 내가 진정으로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없다 그래서 우리가 목표로 하는 것은 하얀 옷을 위 아래로 한복을 입고 그 먹물 하나도 튕기지 않은 완전한 순결한 그런 삶을 사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그런 것이 목표가 아니라 그런 삶을 살려고 노력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나는 날마다 죽노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요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저내랴’ 그런 탄식을 함께 하면서 그러면서 자신의 정욕에 시달릴 때마다 자기가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 안에 살지 않으면 안 되는 불완전한 존재인가를 깨닫고 하나님 앞에 몸부림 칠 수 있는 사람이 되라는 것 그리고 그 음행의 죄는 손 한번 만져볼게 하면 손만 만져보는 게 아니라 손을 깨물어요. 한마디를 짤라먹어요. 그리고 하나만 먹고 말게 그리고 주면 팔을 다 잘라먹어요. 한팔을 먹고 나면 그다음 팔을 먹겠다. 그다음 다리를 먹고 그다음에 마지막 한다리를 먹고 나중에 몸 전체를 먹겠다고 덤벼드는 것이 음행입니다. 그것은 결국 만족시켜줄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게 자기를 모두 바쳐도 만족이 안 되는 것입니다.
목숨이 끊어지는 날까지 그러니까 정욕에 굴복한 삶을 사는 것으로서는 어떤 자유도 없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이 나에게 은혜를 주시면 마치 사랑에 깊이 빠진 여인이 저절로 순결해지는 것처럼 나도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러한 것들을 충분히 이겨낼 수 있는 힘을 하나님이 주신다. 그것을 믿어야됩니다. 그럼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그렇게 이겨내는 사람은 자기 인생을 자율적으로 살아가고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자유를 가진 사람입니다. 그렇게 살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사회자: 감사합니다. 다시 한번 큰 박수 부탁드립니다. 네. 끝까지 함께 해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리며 지혜롭게 연애도 결혼도 승리하는 저희 청년부가 되길 저도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이상으로 저는 오늘의 MC를 맡았던 청년2국 김지은이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목사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