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교리반
녹취자 : 양일구
I. 본문해설
인간이 태어난 목적은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에 대해서 공부하기 위해서 태어났습니다. 이 세 대상에 대한 지식은 그리스도를 통해 가장 잘 알수 있으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에 대해서 공부하기 위해 태어났습니다. 인간에는 보편적 존재로서의 인간 일반과 개별적 존재로서의 내가 있습니다. 공부하는 것 하나하나를 전부 연결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도움이 되도록 살아가는 것이 인생의 목적입니다. 그래서 신앙이 필요합니다. 제가 예전에 신학을 배우다가 천문학을 공부한 적이 있었습니다. 정말 놀라웠습니다. 자연적인 사실들에 대한 의미는 전공한 사람들이 많이 알지만,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물을 때에는 잘 몰랐습니다. 그 의미를 알려주었을 때, 그 때 비로소 깨닫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적인 지식, 즉 자연과학이나 인문학이나 자연을 통해 탐구하는 학문에 대해 지식적으로 아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그런다고 해서 그 사람들이 모두 하나님을 참답게 아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지식들을 참 하나님을 아는 것과 연결시키는 것은 이 세계에 있는 학문 자체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세계에서 얻어지는 것입니다. 자연이나 사회 속에서 발견된 학문들을 신앙과 잘 연결된 책을 읽으면 흔들리지 않는 신앙을 갖게 됩니다.
A. 성화와 성도의 견인
1. 성화의 본질과 특성
앞에서부터 우리가 구원을 되돌아보면, 제일 먼저 성경의 일반적 적용이 나오고 부르심과 중생, 회심과 믿음, 칭의와 성화와 성도의 견인이 나옵니다.
“성화란 죄인을 순결케 하시며 죄인이 전 성질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새롭게 하시며 죄인으로 하여금 선행을 행할 수 있도록 하신 성령의 계속적이고 은혜로운 작용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178p
칭의는 바깥에서 법정적으로 의롭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세상에서 욕을 먹어도 법적으로 무죄를 선언하면 누구도 그 사람을 벌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칭의입니다. 그런데 성화는 내부에서 오는 것입니다.
“성화는 인간의 내부생활에서 일어난다는 점으로 볼 때 칭의가 아니다. 성화는 법적행위가 아니라 재창조의 행위이며 장기적 과정이며 현세생활에서는 완전에 도달할 수 없다” 178p
칭의는 덜 칭의되고 더 칭의되는 것이 없지만, 성화는 더 성화된 사람이 있고, 덜 성화된 사람이 있습니다. 교회의 사명은 의롭다 칭함받지 못한 사람들은 구원으로 인도하고, 구원받은 사람들은 거룩해 가도록 돕는 것이 교회의 사명입니다.
“성화는 결정적으로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사역이지만, 신자는 하나님의 그의 뜻대로 정해주신 시간을 부지런히 사용함으로서 성화에 있어 하나님과 상호협력할 수 있으며 또 그래야 한다.” 178p
하나님께서 주도권을 같고 계시지만 성화는 신인 협력적인 사역입니다.
“성화란 중생에서 이미 주어진 것들로부터 저절로 단순히 초래되는 것이 아니라, 새생활에 힘을 돋으며 증신시키며 견고케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성화는 두 부분으로 구성되는데 하나는 인간성의 오염과 타락의 점진적 제거이며, 하나님께 헌신하도록 하는 새생활의 점진적 발전이다.” 179p
소극적으로는 죄책과 오염이 있는데, 죄책은 칭의에 의해서 해결되고, 오염, 곧 부패성의 문제는 성화에 의해서 해결이 됩니다. 한편으로는 죄를 멀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은혜에 참여하려고 하는 신앙생활을 하려고 노력해야합니다.
“성화는 인간의 마음에서 일어나므로 자연히 전생애에 영향을 준다. 내적인간의 변화는 외적생활의 있어서 변화를 동반해야 한다. 상호협력해야 한다는 사실은 악과 유혹에 대한 경고, 거룩한 삶에 대한 권고로부터 오는 것이다.” 179p
2. 현세에 있어서의 성화의 불완전성
“성화가 영향을 주지만 영적 성장은 현세에서 불안전한체 남아 있다고 볼 수 있다. 신자는 죄와 더불어 투쟁해야만 한다. 신자의 생활은 육과 영사이에 함구적인 투쟁의 생활인데, 가장 잘 믿는 자라도 죄를 고백해야하며, 용서를 위해 기도하며 완전하게 디기 위해 노력해야한다.” 179p
누구도 성화를 생각하면 교만할 수 없습니다. 어느 정도 성화되었으니 더 성화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야말로 성화되어야 합니다. 누구도 ‘내가 온전히 이루었다, 다 되었다’ 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은혜 가운데 있고, 성령의 충만한 은혜의 인도를 받으면 자기의 결점과 단점이 잘 보이지만, 그렇지 않고 은혜에서 멀어지게 되면, 인간은 필연적으로 자기 사랑에 빠질 수 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라 자기를 사랑하면 자기 허물을 계속 덮어주고 자기를 두둔하게 됩니다. 이것을 청교도들은 “Self Flattering” 자기아첨이라고 했습니다.
예화
어떤 사람이 동네에서 테니스를 치러갔습니다. 그런데 잘 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과 테니스를 치게 되었는데, 그는 “전광석화와 같은 스매싱에 날카로운 서브, 세계적인 선수와 비할 때 손색이 없는 선수”였는데 ‘자신이 간신히 이겼다’라고 말합니다. 결국 타인을 한없이 치켜세우면서 자신을 높이는 것입니다.
누구도 성화에서 충분하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완전하게 도달할 수 없게 하신 이유는 가장 뛰어난 신자라도 당신을 의지하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인간 스스로 완전에 도달할 수 없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매일매일 자신을 보면서 절망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도록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이 진리는 소히 완전주의자들에 의해서 부인되는데, 웨슬리주의자들은 인간이 현세에서 완전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성경이 성도들에게 완전하게 된다고 말하며, 죄를 짓지 않는다고 언급한 사실에 근거해서 말한다.” 180p
완전주의자들의 견해는 성경과 거리가 멉니다. “우리 영원히 사랑하자”라고 말하는 것은 죽을 때까지를 말합니다. “우리 모두 북두칠성을 향해 갑시다”라고 말하는 것은 공중에 붕 떠서 우주로 날아가자는 것이 아니라 방향성을 의미합니다.
진정으로 거듭나면 어떤 상황에서든지 죄를 짓길 원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죄를 지을 때 조차도 마음 한 구석에는 안짓고자 하는 성형이 있습니다. “죄와 은혜의 지배”를 공부하면서 비중생자가 죄를 짓는 것은 단일의지로 죄를 짓는 것이고, 중생자가 죄를 짓는 것은 복합의지로 죄를 짓는 것입니다. [롬 7장]에서 바울 사도는 선을 행하고자 하는 소원은 내게 있으나 악을 행한다라고 말합니다. 그것을 갈라놓아서 악은 나에게 속한 것이 아닌 것처럼, 또는 선도 그렇게 갈라놓아서 나 자신이 선하게 투쟁한 희생양인 것처럼 생각한 것이 마니교의 사상입니다.
완전한 사람이 있다고 하는데 그 완전은 상대적인 의미입니다. 노아가 당대에 의인이며 완전한 사람이라고 하지만 그 뒤에 타락하게 됩니다. 상대적인 것입니다.
“요한 사신이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다고 말해준다”
진리는 빛과 같은 것입니다. 개판을 하고 다녀도 거울 없으면 자신이 개판인지 모릅니다, 그러다가 누가 가르쳐주어야 자신이 개판인 줄 압니다. 자신이 죄가 없다고 하는 것은 빛이 어둠을 비추는 거울이 없기 때문입니다.
3. 성화와 선행
“성화는 자연히 우리를 선행의 생활로 인도합니다. 이러한 선행의 생활은 성화의 열매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선행은 완전한 행위가 아닙니다. 하나님께 대한 사람의 원리와 신앙의 원리에서 솟아나오는 행위이며, 하나님의 뜻을 의식적으로 순종하므로서 행해지는 행위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궁극적으로 목적삼는 행위입니다.” 180p
우리들이 선행이라고 할 때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한 말이 생각납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히 깨하고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기 위함이라” “성경은 너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나니” 성경의 목적은 두 개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을 구원에 이르게 하고, 구원받은 사람을 온전한 사람이 되게 하고 온전히 선행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자의 직무와 교회로의 사명도 이 두가지를 위해서 존재해야합니다. 한편으로는 사람들을 구원에 이르게 하고, 구원받은 사람을 온전한 사람이 되게 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은 것만으로 만족을 얻게하는 목회사역은 잘못된 것입니다.
여기서 선한 일은 무엇입니까, 일반은총적 차원에서 보면 하나님의 율법에 부합한 모든 선행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좀 더 좁은 의미에서 본다면, 그런 일반적인 양심의 빛으로 행하는 인도주의적 선행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께 영광을 돌리고자 하는 마음에서 비롯되는 창조 목적에 부합하는 선입니다.
구원과 하나님의 계획, 조나단 에드워즈의 “천지창조의 목적 1, 2부”, 전집 8권 참된 “미덕의 본질“, 존 파이퍼 ”하나님의 열심”을 읽을 것.
"이런 의미의 선행은 성령에 의해 중생한 자들만이 할 수 있습니다. 비중생자도 일반은총에 따라 외적으로 율법에 맞는 행위를 할 수 있으며, 훌륭한 목적에 이바지 할 수 있다. 그러나 불안전 한 것이다. 그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영적 뿌리로부터 분리되며,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진정한 내적 순종을 나타내지 못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목적으로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로마 가톨릭과는 반대로 신자의 선행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값없는 은혜를 참으로 주시기는 약속했지만, 그것이 우리에게 공로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우리가 주장해야 하며, (율법폐기론자들은 그런 선행을 굳이 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 율법폐기론자들에 대해서는 선행을 주장해야 한다.“
시험 문제 - 이 말이 비중생자는 어떤 의미에서도 선행을 행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 x
인간이 중생했다 하더라도 바탕자체는 여전히 부패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자가 어떤 선행을 했을 때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주도권을 잡고 그 일을 행한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가 선행을 행해도 자랑할 것이 없고, 하나님이 은혜로 나로 하여금 선행을 하게 하였기에 감사하게 됩니다. 그래서 선행을 행하고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이 됩니다. 악을 행했을 때는 순전히 자기의 힘으로 행합니다. 인간은 악을 행하는데에서는 대단한 능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악을 행한 후에 인간은 그 책임을 누구에게도 전가할 수 없습니다.
찬양 - “찬양하라 내 영혼아”
이 세상에는 샘솟듯 솟아나는 기쁨이란 없습니다. 우리의 시선과 소망을 하나님께 두며 살아야 합니다. 주님과 함께 손잡고 동행하면서 사는 것이 신자에게 가장 큰 기쁨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여기에 보내신 목적이 무엇인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그것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5. 성도의 견인
“성도의 견인이란, 자연히 신자들이 구원의 길에서 인내하는 계속적인 활동을 암시해 주는 것이다. 견인의 은혜란, 심중에 일어난 심적은혜가 계속되고 완성되도록 역사하는가, 신자 내부에서의 성령의 계속적인 작용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성경은 분명히 이 교리에 대해서 가르쳐준다. 우리가 현세에서 구원의 확신을 얻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이러한 견인의 은혜를 믿을 때 뿐이다. 이 교리는 개혁주의 노선 외에서는 찬성을 못받는다. 이 교리는 배교에 대해 경고하는 말씀과 신자들에게 구원의 길을 계속 유지하도록 권고하는 말씀과 심지어는 배교의 경우를 기록한 말씀과 모순된다고 한다. 그러한 권고와 경고는 타락할 가능성을 가정하는 것 같으며, 배교의 신뢰는 그 가능성을 완전히 증명해주는 것 같다. 그러나 사실상 그 경고와 권고는 다만 하나님이 간접적으로 역사하시며 인간에게 견인 은혜의 사역의 협력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성경에 기록된 배교자 참신자들이었다는 증거가 없다.” 181p
견고하게 인내한다라는 뜻입니다. 성도의 견인은 하나님의 견인입니다. 하나님은 당신 자신을 붙들고 인내하려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붙들어 주십니다. 성도의 견인은 하나님의 견인에서 비롯되는 견인입니다.
“구원과 하나님의 계획“ 전인편에 들어가보면, 누가티아누스와 키프리아누스의 논쟁에 관한 대화가 나옵니다.견인을 인정하지 않으면, 인간이 신앙이 좋을 때도 있고 나쁠 때도 있는데, 신앙이 좋을 때는 그리스도의 몸에 붙어있고, 안좋으면 떨어지는 붙었다 떨어지는 과정을 거칩니다. 그 때 주님이 붙었다 떨어졌다 할 때, 하필이면 잠깐 떨어져있을 때 그 때 와버리신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여지껏 붙었던 때는 아무런 소용이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떨어져서 놀다가 다시 붙었다가 하는 도중 다행이도 붙었을 때 주님이 오셨다, 이런식의 붙었다가 떨어졌다는 논리는 전혀 맞지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한 번 구원하기시로 끝까지 구원하신다고 봐야하는데, 그 사람이 끝까지 주님을 잘 믿는다고 한다면 주님을 의지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이 주님을 믿기로 한사람들이 잘 믿을 것인데, 그 원인은 주님이 그들을 붙잡고 계시기 때문에 잘 믿는다고 해석을 해야 옳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잘 믿는 사람도 주님을 의지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무것도 의지할 것이 없이, 하나님 한 분만을 의지하고 주님의 은혜 없이 살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신앙이 깊어지고 능력이 많아질 수록 절실하게 깨닫게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경륜이고 섭리입니다. 주님만 의지하고자하는 마음 때문에 어린 아이같이 눈물이 흐릅니다. 한 순간도, 주님이 절대 그러실리 없지만 ”주님 제발 저를 버리지 마시옵소서. 주님 저를 붙든 손을 놓지 말아주시옵소서, 주님 이외에는 날 도울 것이 없습니다“ 그렇게 주님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 그래서 우리는 비록 약하고 시시때때로 고난을 당하고 때로는 정욕에 시달리는 인생을 살지만, 우리가 믿음으로 주님을 꼬 붙들고자 할 때, 주님께서 우리를 붙들어주심으로 우리로 당신을 붙들게 하신다는 사실을 굳게 믿으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나는 약하지만 주님을 의지할 때, 주님이 나의 약함도 붙들어 주셔서 강하게 해주신다는 사실을 믿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개혁신학의 전체적인 구조는 인간으로 하여금 모든 주권을 가진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며 살도록, 그렇게 계획되어 있는 것입니다.
B. 교회론
1. 교회에 대한 일반적 고찰
“교회에 관해 구약에서 사용된 용어는 ‘부르다’라는 뜻에서 파송된 것이며, 신약 용어는 ‘불러내다’ 라는 동사에서 나온 것이다. 모두가 교회를 하나님에 의해 부름 받은 회중으로 표현한다. 이 용어는 예배를 목적하고 모였든 아니든 간에 지교회를 의미한다. 이 용어는 가정적 교회를 의미한다. 포괄적인 의미로 이 말은 하늘에서나 지상에서나 불문하고 믿는 자의 모든 무리를 표현하는 것이다.” 188p
1) 신약용어의 다양한 의미
장로교회에서는 노예제도를 택하는데, 사실은 여기서 이야기하는 지교회는 노예와 비슷한 것입니다. 처음에 갈라디아교회는 지금처럼 갈라디아 지방에 신자들이 모일 수 있는 엄청난 크기의 예배당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갈라디아지역에 있는 예수 믿는 사람 전체를 가르켜서 갈라디아 교회라고 말한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들은 어떻게 모였겠습니까, 기본 단위가 가정입니다. 그 사람들이 날을 정해서 로마의 박해를 피해서 모였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역에 있는 교회들 전체가 하나의 성경적인 기본 단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정신들을 우리들이 본 받아야 합니다.
2) 교회의 본질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는 본질에 관한 견해에 차이가 있다. 구교는 주교, 대주교, 추기경, 교황과 같은 고위 성직자와 함께 사제들로 구성되고 있는 외부적이고 유형적인 조직체로서의 교회에서 본질을 찾는다. 신교는 이런 외적 관념을 깨고, 성도들의 무형적이고 영적 교통에서 교회의 본질을 찾는다.” 189p
“교회는 그 본질적 성질에서 볼 때, 모든 시대의 성도들 이외는 아무도 포함하지 않는다.”
3) 교회의 구별
a. 투쟁적 교회와 승리적 교회
투쟁적 교회는 지상에 현존하는 교회, 승리적 교회는 천상 교회입니다.
b. 유형교회와 무형교회
이 구별은 지상에 존재하는 교회에 적용되는 것인데, 영적 성질에 관계되는 한에 있어서 무형적이다. 그렇지만 신앙 고백, 행위, 말씀, 성례, 사역, 교회의 외적조직, 정치면에서는 유형적이다.“ 189p
영적 교통에서는 보이지 않는 것이니까 무형적이지만, 교회의 권력을 행사함에 있어서 어떤 방식을 취하는지에 따라서 장로교제도, 감독제도, 회중제도로 나뉩니다,. 그것은 눈에 보이는 유형적인 교회입니다.
c. 유기체로서의 교회와 조직체로서의 교회
“이 구별은 유형적 교회들만 적용된다. 유기체로서의 교회는 성도들의 교제와 세상에 대한 공동적인 단행에서 유형적이며, 또 조직체로서의 교회는 직무와 형체의 면에서 유형적이다.” 190p
교회가 똑같은 유형교회인데, 장로든, 권사든, 집사든 상관없이 죄악된 세상과 더불어서 투쟁합니다. 또 불신자들을 주님께로 인도해야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유기체를 이루지만, 직무와 형체의 면에서는 조직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성례는 목사가 하고, 교회를 치리하는 것은 장로와 목사가 하고, 가르치는 것은 교사가 하는 식으로 조직으로서 구별되어있습니다. 교회의 다양한 국면들을 여기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4) 교회의 정의
“무형적 교회란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부름받아 선택된 자들의 영적무리라고 할 수 있으며, 또는 단순히 성도들의 영적 회합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2. 교회의 속성과 표지
1) 교회의 속성
a. 교회의 통일성
“로마 가톨락의 주장에 따르면 전 세계에 퍼져있는 교회를 가르키는데, 신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적인 몸의 통일성을 의미한다.”
b. 교회의 거룩성
“로마 가톨릭은 교회의 거룩성을 교리, 교훈, 예배, 권징에서 찾으려는 거셍 반해,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완전한 성결로 이끄는 새생활을 영위함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고 은혜로 인해서 거룩한 교회의 회원들 가운데 둔다.”
c. 교회의 보편성
“로마 가톨릭은 교회의 보편성을 주장하는데, 이유는 구교가 점진상에 퍼져있으며, 모든 종파들의 총수보다 많은 회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신교는 무형적 교회를 진정한 보편적 교회로 보는데, 이유는 교회가 모든 시대와 신자들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191p
2) 교회의 표지 혹은 외적 특성
“교회의 속성이 원래 무형 교회에 속하는데 반해, 교회의 표지는 무형교회에 속하며, 참 교회를 구별해 내는데에는 세 가지 특성이 있다.” 191p
a. 말씀의 참된 전파
이것은 종교 개혁자들 속에서 의견들이 많이 갈리게 됩니다. 1 표지설부터 3 표지설까지 다양합니다. 1 표지설은 말씀의 참된 선포가 있으면 교회라고 보고, 2 표지설은 말씀과 성례, 3 표지설은 말씀, 성례, 권징이 교회의 참된 특성이라고 봅니다. 개혁파권안에서는 다양한데, 루터파같은 경우는 두 개만 인정하고 마지막 세 번째는 인정을 하지 않습니다. 개혁파에서는 3가지로 보는데, 참된 말씀의 전파가 가장 중요한 표지이다. 이 말은 말씀 전파가 안전하고 절대 순수하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 근본에 있어서 참되어야 하며, 믿음과 행위에 지배적인 영향을 끼쳐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얼만큼 전해야만 참된 ( ) 완벽하게 참될 수 는 없지만, 선포된 말씀을 다 들었을 때 기독교 신앙의 기본진리에 대해서 알 수 있게끔 선포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참된 교회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올바르게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면 성령 안에서 모두는 아닐지라도 반드시 믿을 사람들을 하나님이 주십니다.
b. 성례의 정당한 집행
"로마 가톨릭처럼 성례가 말씀과 분리되어서는 안된다. 합법적 성직자들에 의해서 성도와 자손들에게만 집행되어야 한다." 191p
성례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세례와 성찬입니다. 자격 없는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거나 성찬을 주어서는 안됩니다.
c. 권징의 신실한 시행
이것은 잘못된 교리를 믿고 가르치거나 혹은 올바른 도덕생활을 영유하지 않는 사람들을 징계하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로마 가톨릭이 권력이 있으니까 잡아서 가두기도 하고 너무 심하면 죽여버리고도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날은 교회 권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로마 가톨릭과 달리 성례의 순수성을 보호하는데에 목적으로 합니다. 자격이 없는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거나, 자격이 없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기리는 현장에 참여하지 못하게 하므로 교회의 거룩성을 보호하게 하는 것입니다.
C. 교회의 정치와 권세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의 머리이시며 모든 권위의 근원이 되신다. 교회를 다스리시되 강제로 하지 않으시고, 말씀과 성령에 의해 다스리신다.” 196p
1) 교회의 직원
예배에 있어서 본질적인 두 요소가 진리와 성령입니다. 목양 역시 진리와 성령으로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가르치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 사람이 온전해져 가는 것입니다. 영적 생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영원 전에 지혜와 사랑으로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지혜는 말씀으로 사랑은 성령으로 창조하셨습니다.
a. 사도
"교회의 직원은 두 종류로 나타나있다. 가장 중요한 직원은 사도직이다. 예수님에게 직접 택함을 받은 제자 바울에게만 적용되지만 이 충언은 사도의 인물에게도 적용된다. 사도는 특별 자격을 가진자. 그리스도에 의해 직접 부름을 받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로 보았으며, 영감을 의식했고, 기적을 행했으며, 사역을 행하는데 있어서 충만한 축복을 받았다.” 197p
b. 전도자
“전도자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데 이들은 사도들의 일을 돕는 자들이었다“
오늘날의 전도자하고는 틀립니다. 예수님 당시에 전도자로서 72명의 전도대처럼 그것도 당대로 끝납니다. 오늘날의 이러한 특수 직원은 아니고 사람에 의해서 새워진 사람들입니다.
c. 보통 직원
“사도행전은 장로에 대해서 언급한다. 감독이라는 칭호가 사용되는데 동일한 직원이다. 장로란 나이를 강조한 것이고 감독이란 감시자로서의 직무를 강조한 것이다. 장로는 본래 교사가 아니지만 가르치는 직무가 그들의 직책과 관련되어있다.”
2) 교회의 회의
“개혁교회는 많은 정치체제를 가지고 있다. 사도의 관계는 순서에 의해 구분된다. 여러 회의는 당회, 노회, 총회를 말하는 것이다. 당회는 지교의 목사와 장로로 구분되고, 노회는 일정한 지원내에 각 지역교회 목사일인과 장로 일인으로 구성된다. 총회는 각 노회에서 파송된 같은 수의 목사와 장로로 구성된다." 197p
“정치”라고 불리는 것은 폴리티라고 불리는 것인데,, 이것은 권력이 어느 한 단체에서 행사되는 방식입니다.
a. 지교회의 정치
“지교회의 정치는 전형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 당회를 구성한다. 장로교의 정치는 대의정치이다. 장로는 교인들에 의해서 선택되나, 그들의 권위를 인간에게서 받은 것이 아니라, 교회의 주가 되시는 그리스도의 정치 의해 충분히 구비된 하나의 완성적인 교회이다. 그러나 지교회는 공통적 일치점을 근거로 해서 다른 교회와 관련을 맺음으로 지교회 완전히 독립할 수 없다.”
b. 주요의회
“지교회가 연합성을 이룩하기 위해 맺는 경우, 노회대회와 같은 대회의가 필요하다”
3) 교회의 권세
“교회의 권세는 영적이다. 이유는 교회의 권세와 성령에 의해 주어지며, 성령 권세의 표명인 동시에 신자들에게만 관계되며, 영적인 방법으로만 집행되기 때문이다. 또한 교회의 권세는 대리적인 권세인데, 이 권세는 그리스도에 의해서 나오는 것이며, 그의 이름으로 시행된다. 이 교회 권세는 세 가지로 나누어진다. 교리, 치리, 봉사이다. 교리권은 진리를 수호하며 ( )세대의 진리를 신실하게 전하고 불신의 세력으로부터 보호하도록 위임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말씀을 끊임없이 전파해야하고, 신자와 신앙 고백을 작성해야 하며, 장래 사역자들을 훈련시켜야 한다.” 199p
a. 교리권
결국은 교리권이라는 것은 교회의 중요한 진리와 관련된 사명으로서, 다시 말해 조상들이 만들어 놓은 것을 잘 전수 받고, 자기 시대에 더 연구하고 살아서 진리의 풍성함을 발전시키며 완성된 형태로 후손들에게 전수해주는 것입니다. 후손들은 그것을 잘 전수 받아서 자기 세대에 발견한 하나님을 보태어서 더 풍성한 교리를 자손들에게 전수해주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회가 신학의 지적활동, 하나님과 세계를 연구하는 학문의 활동, 그러나 그것을 하나님과 연관시키는 활동, 등을 연구하면서 창조 속에 나타나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증진하려고 도와주어야 합니다. 기도해주고, 격려해주고, 후원해주고 좋은 학자들을 교회에서 길러내야 합니다. 신학만이 아니라 여러 학문들을 통해서 하나님과 연결시키는 것이 교회의 사명입니다.
b. 치리권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므로 교회의 모든 것들이 단정하고 질서있게 되기를 원하신다.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은 교회의 일들을 적절한 규정을 제시해 주셨고, 그리스도의 법을 실행할 교권을 교회에 주셨다. 권징의 권한도 포함이 된다. 교회의 권징의 목적은 두 가지인데, 하나님 교인의 입교와 출교에 관한 그리스도의 법을 시행하는 것과 다른 하나는 교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법에 순종하게 하므로 그들의 영적 교훈을 촉진시키려는 목적이다.“
c. 봉사권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제자들을 전도만 하게 하실뿐 아니라, 모든 질병들을 낫게 하기 위하여 활성하셨다. 초대 교인들 중에는 신유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있었다. 이러한 특별한 사람들은 사도가 시작된 후로는 중단 되었다.”
특별한 은사로서 사람들의 병을 고치는 것은 중단되었다고 봅니다. 여기서 핵심적인 것은 누가 기도해도 병이 나을 수는 있지만, 어떤 사람에게 특별히 은사를 주셔서 그 사람의 기도로 병이 낮는다는 그런 개념의 은사는 우리들이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오히려 기도의 응답으로서 누구나 하나님과 친분이 있고, 하나님이 그를 고치고자 하는 섭리가 계실 때에는 누가 기도하든지 병을 하나님이 낮게 해준다는 것이 우리들의 신앙 고백입니다.
집사를 영어로 ‘디콘’인데, 이것은 ‘디아코니아’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디아코니아는 ‘봉사하다’라는 뜻입니다. 봉사중에서도 "디아코네인 트라페자이스"(희랍어 διακονείν τραπεξαις, 그리스어 Diaconie Trapeza)라고 하면 식탁을 차리는 것인데, 대게 식탁을 차리는 것은 노예들이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집사라고 하면, 명함을 내미는 것이 아니라, 노예처럼 봉사하는 사람들을 가르킵니다. 우리 속에는 노예 유전자 같은 것이 배어있습니다. 자기가 치우고 싶고, 자기가 허리를 굽혀 봉사해서 다른 사람을 편하게 해주고 싶은 좋은 의미에서의 노예의식이 배어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나 때문에 행복했으면 하는 마음으로 내가 조금 불편해도 봉사하는 것이 봉사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