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시련의 골짜기에서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 23:4)
녹취자: 배미라
1절에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고 고백을 한 시인은 왜 하나님이 자신의 목자가 되시는지 2절에서는 공급하시는 은혜 때문에, 3절에서는 영혼을 소생시켜주시기 때문에, 4절에서는 사망의 골짜기에서 구원해주시기 때문에 그렇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3절까지는 승리의 노래를 부르는 것 같지만 4절은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고 우리를 아주 음산한 골짜기로 데려갑니다. 그런데 바로 그렇게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그 사망의 골짜기에서 시인은 하나님이 정말 자신을 보호해 주신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됩니다. 그래서 오히려 우리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더욱 깊어지게 된 것입니다.
우선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지라도’ 했습니다. 이 사망의 골짜기라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우선 목동 시절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양떼들을 데리고 목초지가 있는 곳을 찾아서 다니게 됩니다. 때로는 이쪽 풀밭에서 한가롭게 풀을 뜯지만 목동은 여기의 풀이 다하고 나면 어디로 이동해야 될지를 언덕 위에 올라가 사면을 두루 봅니다. 양떼를 이끌고 가야할 새로운 곳을 찾았습니다. 거기를 가려면 골짜기를 통과해야 합니다. 팔레스타인의 이런 골짜기는 물이 흐르고 나무가 많고 새들이 노래하는 그런 골짜기가 아닙니다. 때로는 바위로 높이 치솟은 그런 좁은 협곡사이를 지나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 길이 지름길이기 때문에 종종 그런 길을 이용합니다.
이런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는 사망의 위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거기에서는 강도를 만날 위험이 있고, 맹수를 만날 위험이 있습니다. 그런데 자신은 양을 사랑하는 목자로 또 양을 넉넉히 지킬 수 있는 용사로 수많은 양떼들을 안전하게 인도 했습니다. 자기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양들을 데리고 지날 때에는 어느 때보다도 긴장하고 이 양떼를 보호하기 위해 각별히 신경을 쓰는 것처럼, 하나님은 자기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같은 인생의 상황을 지날 때 거기서 함께 해주시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이 시인에게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가깝게 하는 커다란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닙니다. 그런 때가 있다고 할지라도 해를 당할까봐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 골짜기에서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성경 전체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는 이야기로 기록이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맨 처음에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신 후에는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 있었습니다. 늘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살았고, 하나님은 그렇게 임재 속에서 자기와 만날 장소를 선택하셨는데, 그곳이 바로 에덴동산이었습니다. 죄를 짓고 나서는 하나님이 떠나신 것이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을 버렸고 하나님은 에덴에서 아담과 하와를 추방시킴으로써 하나님 임재 앞에 사는 행복을 상실하게 됩니다.
그런 하나님은 그렇게 인간이 당신을 완전히 멀리 떠나 어떤 구원의 소망도 없이 살아간다면, 인간을 창조하신 것이 의미가 없어집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인간에게 당신과 만날 한 장소를 준비하십니다. 그곳이 바로 성소입니다. 성막입니다. 그것을 오랜 세월 후에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탈출할 때 지어주셨으니, 이 성막은 바로 에덴동산을 뒤를 잇는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두 번째 장소입니다.
이 성막은 성전이 되고, 후에 이 성전은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써 실현이 됩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라, 에덴동산이 아니라 성막이 아니라,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임재와의 만남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사는 동안에 하나님이 그렇게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사람들의 모임을 만드십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리고 이 교회는 마지막에 결국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어질 하나님 백성들의 공동체의 그림자입니다. 거기서 항상 하나님과 만나면 하나님의 임재를 누리는 것으로 인류의 구속의 역사는 끝이 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 전체가 가르치고 있는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실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하나님 자신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주실 수 있는 최고의 선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 이것은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행복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의 최대한의 표현입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사람에게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냐하면 하나님과의 평화를 열렬히 원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면서 삽니다. 이 하나님과 평화라는 것은 ‘샬롬’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찌그러지거나 망가진 부분이 없이 그렇게 온전한 사랑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 누리는 ‘샬롬’입니다. 그 ‘샬롬’의 힘을 가지고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풀며 사는 것이 그것이 신앙생활이고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이유입니다.
계명은 간단합니다.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고 둘째도 이와 같으니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세상에 그것보다 어려운 계명이 없습니다.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을 다해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을 가지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며 사는 것 그것은 더욱 쉽지 않습니다. 결국은 하나님과의 평화가 있으면 이것이 가능하지만, 하나님과의 평화가 없으면 이것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 평화 그것이 ‘샬롬’입니다.
이스라엘에 가면 빵이 주식입니다. 빵이 큽니다. 빵을 하나 통째로 사고 싶으면 히브리말로 ‘텐리 샬롬’ 이라고 말합니다. ‘텐리’는 ‘나에게 주십시오. 샬롬을 주십시오.’ 그러면 빵집 주인이 빵 전체 한 덩어리를 줍니다. 그게 ‘샬롬’입니다. 그런데 나는 혼자입니다. 도저히 이것을 먹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텐리 하찌’라고 얘기합니다. ‘저에게 반쪽을 주세요.’ 그러면 반을 잘라서 반쪽짜리 빵을 줍니다. ‘샬롬’은 아주 온전한 것, 조금도 상하거나 깨어지거나 흠집이 나지 않은 온전한 것, 그것을 가리켜서 ‘샬롬’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들 중에서도 사람과 ‘샬롬’을 누리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을 아닐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아내가 남편을 너무 사랑하고,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기 때문에 마음에 어떤 감추는 것이나 찌그러진 것이 없습니다. 잘못한 것이 없지 않지만 다 용서하며 살았고 언제든지 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기쁩니다. 그것은 남편과 아내 사이에 ‘샬롬’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또 아이들이 너무 보고 싶습니다. 아이들을 위해서 뭐든지 해줄 수 있습니다. 너무 그립습니다. 그리고 아이들도 부모를 그리워합니다. 보고 싶어 합니다. 감추고 있거나 속으로 계산을 하거나 갈등을 느끼는 것 전혀 없고 엄마 아빠한테 마음을 열어 다 보여줘도 상관이 없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것은 부모와 자식 간에 ‘샬롬’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런 샬롬을 모든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면서 사는 그 마음은 사실은 어제 말씀드린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이 충만한 상태입니다. 그것으로써 원수도 사랑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사랑의 삶입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릴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기꺼이 정의로운 삶을 살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특별한 열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함께 해주시는 사람의 인격적인 특징입니다. 그것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더 상세하게 설명하신 것이 있습니다. 그게 바로 팔복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며,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며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얻을 것임이요 등등등으로 이루어지는 팔복의 사람이 바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자기는 비록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들어간다고 할지라도 해를 받을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 목자이신 하나님이 자기를 지켜주실 것이기 때문에, 이 시인은 그것을 확실하게 믿는 것입니다.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는 양떼를 몰고 다니던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보다도 더 커다란 현실로 시인에게 다가왔습니다. 어떻게? 다윗은 왕이 되겠다는 야망을 품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그를 왕으로 불러주셨고, 그리고 하나님이 그에게 기름 부으셔서 임금 삼으셨습니다. 그 이후로 그에게는 시련과 고통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사울의 시기와 박해 때문이었습니다. 끊임없이 자객을 풀어 자기를 죽이려고 했고, 다윗은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도 있었지만 그를 기름 부은 하나님의 종으로 알고, 하나님께 처분을 맡겼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악을 행하지 않았습니다. 거기부터 시작을 해서 압살롬의 반란으로부터 시작을 해서 수많은 시련을 겪고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간음했을 때에는 원수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다윗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두들겨 팼습니다. 그 살 소망까지 거의 끊어질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도 하나님이 함께 하셨습니다.
(찬양)
어두움의 밝은 빛을 비춰주시고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만 바라볼지라.
다윗은 그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한 가지를 배웠습니다. 생사 간에 자기가 의지할 분이 오직 하나님 밖에 없다는 사실과 자신은 죄를 사랑해 하나님을 버려도 하나님은 자기를 버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경험했습니다. 그러면서 거기서 그가 깨달은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함께해 주시는 지를 설명합니다.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십니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에게 위로가 되나이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하나님이 함께해주시기는 하는데 어떤 방식으로 함께 해 주시는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방식으로, 지팡이와 막대기를 사용하시는 방식으로, 하나님이 신과 함께 해주신 것을 경험하고 나니까 그 지팡이와 막대기를 생각하면서 곤고한 영혼이 위로를 받습니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지팡이와 막대기가 무엇을 가리키는 것입니까?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그 당시의 목동들의 문화를 좀 이해해야 됩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양떼를 쳤습니다. 이 목자들이 사용하는 지팡이는 우리나라에서 산신령이 사용하는 것 같은 그런 지팡이나 혹은 우리들이 등산 갈 때에 짚고 다니는 그런 스틱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꽤 길이가 길었습니다. 자기 키보다 큰 지팡이이고 끝이 둥그렇게 휘었습니다. 그런 지팡이를 이용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성화를 보면 목동들을 그릴 때 반드시 자기 키보다 높은 지팡이가 나옵니다. 이 지팡이의 용도가 무엇이냐면 자기 길을 걸어갈 때에 넘어지거나 다치지 않기 위해서도 지팡이를 쓰지만 양이 종종 풀을 뜯고 정신없이 행동하는걸 보면 무리에서 자꾸 이탈을 하는 것입니다. 양은 지독한 근시이기 때문에 일단 무리에서 떨어져서 자기 혼자 풀을 뜯겠다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면 길을 잃어버릴 염려가 많습니다. 일일이 가서 잡아오기가 힘드니까 양이 이탈을 하면 지팡이를 사용해서 지팡이의 여기에다가 양의 목을 겁니다. 어디를 가려고 그러면 지팡이를 거꾸로 들고 쭉 뻗어서 둥근 부분에다가 양의 목을 걸고 땡깁니다. ‘이리와라 가면 안 된다.’ 그렇게 수시로 다니면서 양들을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지팡이의 용도입니다.
이것은 결국 무엇을 보여주냐 하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혹시 내가 정신을 잃고 딴 길로 갈지라도 하나님은 나를 인도해주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분별력이 떨어지거나 혹은 꼭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아주 놀라운 방법으로 우리를 가르쳐주셔서 우리로 깨닫게 하셔서 그래서 옳은 길로 돌아오게 하십니다. 다양한 방식으로 하나님은 우리를 옳은 길로 돌아오게 하십니다. 그런데 그 설득하시는 방식이 모두 인격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하나님을 경배하기 싫다는 사람의 정강이를 구둣발로 차셔서 주저앉히시고 절하기 싫다는 인간의 머리끄댕이를 끌어서 땅바닥에 처박고 군화발로 뒷통수를 밟으면서 당신에게 절하라는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신앙은 인격적인 것입니다. 내가 주를 알고 주님이 나를 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리고 그 하나님을 사랑함이 자신의 행복이라는 사실을 알면서 행함이 그것이 진정한 신앙입니다.
시인은 그렇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 같은 인생의 위기를 수없이 지났는데 그때마다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자기를 인격적으로 설득하시고 그렇게 말씀으로 자기를 옳은 길 가도록 인도해주시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가 또 있다고 할지라도 나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지팡이가 나를 인도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의 벼랑 끝에 서서 더 이상 앞으로 갈수도 없고 물러설 수도 없는 지경에 있을 때 신기하게 하나님이 말씀의 은혜를 받게 하시고 그리고 깨달으면서 회개하게 만드시고 그래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의 길을 걸어가도록 하나님이 이끄십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두 번째 시인에게 위로가 되었던 것은 막대기였습니다. 막대기는 무엇인가? 이것은 양떼를 인도하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가 아니라 끝이 뾰족한 무기입니다. 그래서 수시로 맹수들이 밤이면 양떼를 노립니다. 목동은 밤이면 그 양떼를 지킵니다. 다윗은 양들을 물어가는 사자와 올라타고 싸워서 그 입에서 양을 꺼낸 적이 있을 정도로 용맹스런 사람이었습니다. 이 목자는 목동인 동시에 용사여야 했습니다. 언제든지 맹수와 더불어 싸울 수 있는 그런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바로 그러셨습니다. 다윗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친구가 되어 주셨지만 다윗을 헤치려는 사람들에게는 용사가 되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시인이 그렇게 수많은 원수들에게 시달리면서도 위로를 받았던 것이 하나님이 항상 자기와 함께 하시면서 자기의 편을 들어주시는 것이었습니다.
비록 하나님이 이 시인이 잘못했기 때문에 꾸짖을 때조차도 원수들이 이 시인을 헤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야단을 치더라도 하나님이 야단을 치셨지 다윗을 헤치는 무리들을 절대 내버려 두지 않으셨습니다. 시인은 그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경험했던 것입니다. 어디에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때로는 자신의 죄 때문에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들었고, 수많은 원수들에게 에워싸였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을 야단치시면서도 이 시인을 괴롭히는 원수들을 하나님이 박살을 내셨습니다. 무엇으로, 막대기로 맹수를 물리치는 것처럼, 그렇게 양떼를 보호하기 위해 싸우는 목동처럼, 그렇게 하나님은 원수들을 쳐 무찌르시고 그리고 다윗에게 커다란 위로가 되어주셨던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어머니와 같은 손길로 사랑해주시고 또 한편으로는 용사와 같은 권능으로 헤치는 모든 무리들을 위해서 싸우시는 하나님, 그 두 그림이 지팡이와 막대기라는 단어 속에 녹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인이 그 지팡이와 막대기를 생각하면서 위로를 받았다라고 고백을 합니다. 위로가 뭐입니까? 위로는 너무 슬프고 아파서 자신을 가눌 수가 없을 때에 살 힘을 주는 것이 위로입니다. 그리고 그 위로는 성령으로부터 옵니다. 하나님의 사랑 경험과 함께 위로를 받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세상을 이기며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어차피 세상은 끊임없는 고뇌의 연속입니다. 이 세상 자체가 불안전하기 때문에 이 세상은 끊임없는 고통의 연속이고 또 그런 세상을 살아가는 자기 자신도 불완전 합니다. 그래서 끊임없는 고통의 연속입니다. 나이가 들어서 젊었을 때 그렇게 살지 말았어야 되는데 하고 깨닫지만 이미 살아버린 것은 다시 되돌릴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때로는 나에게 고통이 되어서 돌아옵니다. 그것이 인생입니다.
쇼펜하우어 같은 사람은 왜 인생의 고뇌가 그치지 않는지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인간에게 고통이 끝나지 않는 이유는 인간의 끊임없는 욕망 때문입니다. 처음에 이러이러한 욕망이 있습니다. 이만큼을 살고 싶습니다. 막 괴롭습니다. 어떻게 해서 그 꿈을 이루었습니다. 이루어지자마자 그것은 당연한 것이 되고 그다음에는 더 큰 것을 꿈꿉니다. 현실은 거기에 미치지 못합니다. 그 사이에서 인간은 끊임없이 염려하고 고뇌하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그렇게 될까요? 죽는 순간까지 현실보다는 바라는 것이 더 많은 게 인간입니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고뇌가 끝이 없습니다. 그런 고통과 고뇌로 가득 찬 세상을 살면서 우리는 위로가 필요합니다. 한편으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이세상이 얼마나 허무한지를 깨달으면서 우리의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욕심을 버리고 자기를 많이 내려놨는데도 끊임없는 고통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럴 때 필요한 것이 하나님의 위로입니다.
(찬양)
주님의 사랑이 내 마음 중심에 있음이
유혹이 흔들어도 무너지질 않네
주님과 함께 있을 때 두려움 사라지네
주님이 항상 나를 지켜주시니
그런 하나님의 큰 위로로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위로는 아무도 모릅니다. 내가 이런 위로를 받고 있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말씀 속에서 기도 속에서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주시고 나는 비록 부족하지만 하나님이 지팡이로 나를 인도하시고 막대기로 나를 보호하신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시인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죽을 것 같은 위기를 겪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언제나 말씀으로 그를 다루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가 미처 깨닫지 못하고 그런 길로 갈 때에는 인격적으로 그를 설득하셔서 지팡이로 인도해주셨고, 악한 자들에게 공격을 받을 때에는 시인이 도망 다닐 수 없을 때에는 하나님이 당신의 능력으로 막아주셨습니다.
(찬양)
저 위험한 곳 내가 이를 때면
큰 바위에 숨기시고
그 손으로 덮으시네.
그것을 경험하면서 사는 것이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 같은 인생의 상황을 지날 때에 별의별 생각을 다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는가, 이제는 은총이 다했는가, 그리고 나는 이제 희망이 없는가, 아 죽고 싶다. 눈을 감고 뜨지 말았으면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때에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그것을 깨닫는 것은 믿음이 깨닫게 해줍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이 함께 하시는 것을 믿음을 가지고만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도망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영혼을 소생시키는 것입니다.
내가 왜 인생의 이 힘든 골짜기를 지나야 하나, 끊임없이 계속 되는 시련과 고통 그 속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가 생각하면서 믿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원수와 더불어 막대기로 싸우시고 지팡이로 나를 인도하시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경험합니다. 어차피 꽃길만 걷는 인생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종종 우리를 광야 같은 세상을 지나게 하시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게 하시고 때로는 가시밭길을 걷게 하십니다. 거기서 자신이 얼마나 아무것도 아닌 인간인가 하는 것을 깨닫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 밖에 의지할 데가 없다는 사실을 깊이 인정하며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우리를 훈련시키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어떤 어려움을 만나든지 간에 잘 들으십시오. 두 가지만 기억하면 헤어 나올 수 있습니다. 첫째는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은 선하시다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선하시기 때문에 결코 나에게 나쁜 일을 하실 수 없다 그것을 굳게 믿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나에게 나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나쁜 것을 제자리에 돌려놓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좋아 보이는 것을 통해서만 좋은 것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나빠 보이는 것을 통해서 좋을 것을 주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믿으며 살아간 우리가 경험한 바입니다.
두 번째 하나는 하나님은 선하실 뿐 아니라 우리가 어떤 처지에 있든지 간에 말씀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지성에 말을 건네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경외할 때 우리의 몸 중에 제일 먼저 하나님 앞에 바쳐져야 될 부분이 머리입니다. 머리부터 밀고 들어가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을 건네실 때에는 우리의 지성에 손을 내미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하나님이 말씀을 주십니다. 그 말씀을 생각으로 깨닫습니다. 그것이 심장까지 내려옵니다. 온몸에 피가 되어 퍼집니다. 그 말씀대로 복종할 수 있는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시간에 여러분 설교를 듣는 태도를 보니까 괜찮습니다. 아주 좋으십니다. 목사님이 행복하시겠습니다. 설교시간에 설교를 제대로 안 듣고 산만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깔보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일 수가 없습니다. 주일학교 애들도 여기 가득 모이면 손 하나 까딱 안하고 무릎위에 두 손을 올려놓고 40분, 50분, 70분 설교를 듣는데 어른들이 왜 그러는지 모르겠습니다. 기본적인 자세가 안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계속 어수선하게 돌아다니고 정신 딴 데 팔고 꺼떡거리고 졸고 아니면 쓸데없는 생각이나 하고 앉았으니 하나님의 말씀이 깨달아질 리가 있겠습니까? 깨달아지지 않습니다. 어려움에서 못 벗어납니다. 모든 은혜는 지성의 깨달음을 통하여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나올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아주 맑은 정신을 가지고 나오는 것입니다. 찬양을 할 때에도 우리의 지성으로 그것을 이해하며 찬양하고, 기도할 때에도 우리의 지성으로 이해하며 하나님 앞에 기도 하고, 설교를 들을 때에도 우리의 지성으로 이해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하나님은 그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며 이제껏 살아왔고 야곱이 바로 앞에 고백한 것처럼 ‘내 나이가 백 삼십이오. 조상의 연수에는 미치지 못하나 심히 험악한 세월을 보냈나이다.’ 한 것과 같이 온갖 시련과 역경을 겪으면서 우리가 살아왔습니다. 앞으로도 그럴지 모릅니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 이제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목자이신 하나님이 그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나를 붙들고 계신다는 사실, 나와 함께 하셔서 어떤 경우에도 나를 떠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시련의 골짜기에 접어들면서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찬양)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라
구원의 샘에서 나의 샘을 기르리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하나님과 함께하는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주님을 굳게 믿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꿈을 꿨습니다. 그리고 막 도망을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새카맣게 군사들이 무슨 이유 때문인지 나를 추격해서 오는 것입니다. 나는 혼자입니다. 그런데 싸울 수도 없습니다. 워낙 사람들이 많아서입니다. 그리고 군인들이 창과 칼을 들고 나를 죽이기 위해 미친 듯이 밀려오는 것입니다. 드디어 벼랑 끝에까지 섰습니다. 꿈에서도 신앙이 있었나봅니다. 벼랑 끝에 섰는데 이제는 둘 중에 하나입니다. 군인들에게 창에 찔려 죽든지 칼에 맞아 죽든지 아니면 절벽으로 떨어져서 죽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그런데 도저히 칼에 찔려서 죽기는 싫었습니다. 그래서 끝이 보이지 않는 깊은 계곡입니다. 거기서 얼굴을 두 손에 딱 대고 ‘주여!’ 그리고 뛰어내렸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땅에 떨어지질 않습니다. 무슨 일인가하고 했더니 꿈에 나 자신이 보이는데 떨어지는 그 순간에 하나님이 날개를 달아주셨습니다. 그래서 계곡 위를 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딱 둘 중에 하나 밖에 모릅니다. 인생의 벼랑 끝에서는 둘 중에 하나라고 여깁니다. 원수에 찔려 죽거나 아니면 뛰어내려서 떨어져 죽거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바로 그 인생의 벼랑 끝에서 날개를 달아주십니다. 그러니까 제 3의 방안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절벽 위를 날면서 저기서 닭 쫓던 개가 된 원수들이 보이고 여기는 이 계곡을 넘어서 하늘나라가 보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절망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신앙은 믿음으로 자신을 설득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더 이상 자기를 설득할 수 없는 것이 절망입니다. 그래서 키에르케고르는 절망이 영적인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했습니다. 이 절망은 영혼의 깊은 질병입니다. 희망으로 자신을 설득하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찬양)
주 내안에 늘 계시고 나는 주님 안에 있어
저 포도비유 같으니 참 좋은 나의 친구
그렇게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실 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는 거기서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깨닫게 되는 한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주님의 것입니다 내가 지명하여 너를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주님을 의지하며 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