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곡교회 사모영성세미나
녹취자 : 박나리
코로나가 나오기 전, 3년 전에 뵙고, 오늘 처음 뵙는 것 같습니다. 코로나가 끝나가는 것은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오늘 여러분들에게 드리고 싶은 말씀은 행복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누가 저기서 주무시는 것 같습니다. 인류 역사에서 아마도 모든 사람의 관심에서 벗어나본 적이 없었던 주제가 있다면 아마 행복일 것입니다. 마치 문학에서 남녀 간의 사랑이 한 번도 지루한 소재가 된 적이 없는 것처럼 철학 사회에서는 인간의 행복이라는 이 주제가 사실은 가장 커다란 주제였고 그리고 재밌는 것은 누구도 그 행복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답을 찾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는 그럽니다. 우리 자신이 행복한가, 한번 물어보는 것입니다. 행복하십니까? 행복한데 왜 어제 또 남편하고 싸우셨습니까? 아침에는 애들한테 잔소리하셨습니다.
그래서 행복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행복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사실 오늘 여러분들에게 드리려고 (책을 가져왔습니다) 코로나 기간에 나온 ‘예배의 감격에 빠져라’가 80쇄 기념으로 새로 찍었습니다. 그래서 그 예쁜 책을 가지고 왔는데, 사실은 오늘 여러분들에게 나눠드리고 싶었던 책은 가장 최근에 쓴 ‘여덟 가지 복’이라는 이 책(입니다.) (이 책)에서 행복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교회에서 여러분들에게 사서 나눠드리려고 그랬는데 책이 다 팔렸습니다. 한 달 약간 전에 나왔는데 다 팔리고 미처 책을 찍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책이 없어서 못 가지고 왔습니다. ‘예배의 감격에 빠져라’라는 완전히 새롭게 쓴 책입니다. 그래서 아주 편안하게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 책이 없습니다. 서점에 가면 아마 간신히 구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책 180권을 전부 다 수집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포기하고 오늘 다른 책을 가져왔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이 책에서 쓴 내용이 오늘 강의의 중심이 되겠습니다.
그런데 너무 재밌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사실 제가 무신론자였습니다. 그리고 어릴 적부터 교회를 다녔는데 부모님은 불신자였습니다. 고모와 할머니하고 같이 살았습니다. 그래서 늘 어려서부터 업고 교회 예배당을 다녔습니다. 제가 중학교 2학년까지 교회를 다녔습니다. 중학교 2학년 때쯤 되었을 때 하루는 성경, 찬송을 들고 교회당을 가던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어느 순간에 슬픔이 확 밀려오는 것입니다. 서울 외곽에 있는 아주 가난한 동네였는데 교회까지 철길을 따라서 25~30분 걸어가야 나오는 교회였습니다. 둑 밑에 엎드려서 한없이 울었습니다. 펑펑 울었습니다. 그때 제 나이 14살 2개월 되던 해였습니다. 막 우는데 내가 왜 이렇게 울고 있나 생각을 해보니까 내 질문은 다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난 어떻게 살아야 되나, 나는 누군가, 그리고 이 세상은 무엇인가, 그리고 신은 정말 존재하는가. 눈물을 씻고 저는 그때 무신론자로 살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신은 없다, 설령 신이 있다고 하더라도 내 인생에 간섭할 권리는 없다.” 그래서 나는 내 자신이 주체적으로 인생을 살겠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 안에서 대답을 찾아보려고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제가 보기에 교회 안에 사는 사람들은 별로 아무 생각이 없었고, 솔직히 말해서 교회 안에도 행복한 사람들이 아주 소수였습니다. 분명히 일부는 있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혀 행복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무신론자의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사실 이때의 이야기를 코로나 시작하기 직전인 2020년 12월쯤에 김영사에서 ‘아무도 사랑하고 싶지 않던 밤’이라고 책에 나온 그때 거기에 나온 내용이 바로 이런 내용을 담은 것입니다. 무신론자의 삶을 살면서 제가 책을 많이 읽었습니다. 저는 학교 다니는 것은 재미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12년 동안, 초등학교 1학년부터 고3까지 하루도 학교 가고 싶은 날이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학교를 안 나갔느냐, 그건 아닙니다. 나가긴 나가는데 하루도 학교 가고 싶은 날이 없었고 학교가 행복하다고 느낀 적은 단 하루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책 읽는 재미로 살았습니다. 그래서 문학책을 읽었습니다. 내 자신의 생각을 다른 사람하고 이야기를 해서는 말이 안 통하는데, 문학책을 읽으니까 나처럼 이렇게 고민하던 사람들이 굉장히 많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위로를 받았습니다. 책을 아무리 읽어도 계속해서 인생에 대한 질문만 던져주지, 문학책은 답이 없습니다. 그래서 철학과 사상에 관한 책을 읽기 시작하고 하면서 저의 생각을 넓혀갔습니다. 많은 책들을 읽고 했지만, 마지막에 도달한 결론은 인생은 의미가 없다, 그리고 목숨을 끊고 이 세상을 떠나야 하겠다, 그게 제가 내린 마지막 결론이었습니다.
그런데 기적처럼 살아나고, 그리고 제 마음을 하나님이 움직이셔서 내가 전도하는 사람 없이 스스로 교회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때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것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려고 예수 믿은 게 아니라, 내가 행복하려고 예수를 믿은 것입니다. 나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그렇습니다. 그래서 제가 늘 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예수 안 믿어도 되는 사람 치고 예수를 믿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모두 다 예수를 안 믿으면 살 수가 없어서, 할 수 없이 예수를 믿은 사람이지, 행복하고 모든 것이 만족했던 사람 중에는 예수 믿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것이 제 지론입니다. 그래서 행복하기 위해서 예수를 믿었습니다. 교회 안에 들어왔습니다. 두 가지 사실에 깜짝 놀랐습니다. 교회 안에 왔는데 행복한 사람이 너무 소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놀라운 것은 사람이 행복해지기 위해서 노력도 별로 안 한다는 것을 보면서 깜짝 놀라게 됐습니다. 이렇게 열심히 교회 나와서 박수도 치고 찬송도 하고 하지만, 그러나 그것이 행복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를 잘 모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제가 기독교에 귀의하고 제가 경험한 가장 이상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을 쓰면서 느끼게 되는 또 놀라운 것은 뭐냐 하면, 사람들이 행복을 이야기할 때 팔복이 행복과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별로 없더라는 것입니다. 팔복은 그냥 예수님이 하신 명령이고 행복이 따로 있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 행복이 무엇인지를 아는 그리스도인도 적지만, 또 설령 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실제로 누리고 있는 사람들은 너무나 소수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원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인간이 철이 들기 시작하면서부터 인간은 이 행복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고민을 많이 합니다. 그래서 저 멀리 주전 5세기~3세기의 그리스 철학자들이 행복이 무엇일까에 대해서 고민을 하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도달한 결론이 뭐냐 하면, 행복이라는 것은 잘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려운 게 뭐냐 하면, 사는 거라는 건 이해가 되는데 잘 사는 것이 뭐가 잘 사는 것이냐는 겁니다. 잘 살아야지 행복하다는 건 알겠는데, 무엇이 잘사는 것입니까. 잘 사는 것은 잘 못 사는 것의 반대인데, 그럼 무엇을 기준으로 잘 사는 것과 잘 못 사는 것을 나눌 수 있느냐 하는 의문들이 드는 것입니다. 그때부터 철학자들이 고민하게 됩니다. 여기서 도달하는 결론은 르네상스 때까지만 하더라도 사람들이 행복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대개 이런 합의를 이루었던 것입니다. 신을 향하여는 자기가 순전한 사람이 되고, 그리고 모든 공동체에 대해서는 자신이 그들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이바지하는 것, 그래서 자기도 행복한 것, 그것이 행복이라고 여겨졌던 것입니다.
그런 생각들이 지지되고 있었는데, 종교개혁이 일어나고 그다음에 계몽주의 시대에 접어들면서 신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는 사조들이 많이 생겨나는 그러니까 뭐냐 하면 신 앞에 순전해진다고 하는 이 생각이 흐릿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흔들리기 시작하니까 그다음에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올바르게 살아간다고 하는 것도 그 기준이 모호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19세기 자유주의 시대가 되면서는 사람들이 기독교의 심리한 성격들을 대부분 다 부인합니다. 그러니까 성경에 나오는 기적들이나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 동정녀 탄생부터 시작해서 심지어는 성경 그 자체도 과연 믿을 수 있을까 하고 사람들이 부정하는 시대가 오게 됩니다. 그렇게 되고 그것은 교회 바깥에서는 더 극단적으로 신 같은 것은 없다고 무신론이 엄청난 힘을 얻기 시작하면서 인간이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이성밖에 없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의 도움 없이 신이 우리에게 명령하지 않아도 인간이 충분히 합리적이기 때문에 생각을 하면서 이성적으로 살아가면 행복한 세상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행복에 관한 생각들을 인본주의적으로 정리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아시다시피 18세기에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유럽 각국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하고, 그리고 19세기에 미국에서 산업혁명의 뒤를 이으면서 산업부흥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고 나서 전 세계는 예전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물건을 생산할 수 있는 힘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전까지는 구두 같은 것도 다 장인이 손으로 두드리고 가죽을 무두질해서 수제품으로 다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공장에 함께 모여서 가내 수공업을 하다가 나중에는 산업혁명이 일어나면서 공장에서 신발을 찍어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됩니까? 옛날에는 1만 원이나 들여야지 만들던 신발이 이제는 불과 2천 원만 드려도 만들 수 있게 물가가 떨어지고 대량 생산이 이루어졌습니다. 사람들은 그것들을 소비하기 위해서 또 다른 물건들을 만들어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잘 사는 나라에서는 어마어마하게 많은 물건을 만드는데 그 물건을 팔 데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식민지를 만들어서 그 식민지에서 자원을 갖다가 물건을 만들어서, 비싼 물건으로 바꾸어서 식민지에 수출하고, 그 사람들의 경제를 전부 다 쓸어서 본국으로 다시 가져가는 그런 구조가 됩니다. 생산 능력이 늘어나니까 시장이 점점 더 필요해집니다. 그런데 이게 한정된 것입니다. 그래서 시장 때문에 서로 싸우기 시작해요. 그게 2차 세계대전입니다. 인간의 이성이면 행복하게 살 수 있고, 실제로 인간이 신을 의지하고 종교를 의지했기 때문에 일어났던 불행한 과거의 일들을 생각하면서, 오히려 인류 역사의 신, 종교는 우리에게 굉장히 많은 불행을 가져다주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종교가 없는 종교가 아닌 신을 떠난 행복을 인간이 찾을 수 있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거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경도 아니고 인간의 이성이라고 생각하고 인간의 이성을 제일 위에다 올려놓은 것입니다. 충분히 인간은 그 이성을 가지고 세상을 행복하게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이후에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그 사람 다음에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어마어마한, 7천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죽는 그런 전대미문의 전쟁에 휩싸이고 핵폭탄까지 투하가 되는 광경을 보면서, 많은 사람이 인간이 이성을 의지하며 산다는 것 자체에 대해서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이성에게 이러한 우리 인생과 세계 전체를 지배할 수 있는 권위를 주는 것이 과연 좋겠느냐, 이렇게 생각을 하고 종교로 돌아온 것이 아니라면서 오히려 인간의 감정이나 의지, 이런 것이 훨씬 더 중요한 것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이제는 오히려 인간의 욕망을 숭배하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도덕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종교와 밀접한 관련이 있고 어떤 신념을 가지고 이루어지는 건데, 그런 절대적인 기준 자체가 없다고 거부를 하게 되니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우주의 중심이 되고 자기 최고의 가치를 각각 자신의 행복이라고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제는 그런 도덕의 가치 기준 같은 것들이 다 무너진 시대를 20세기에서 21세기까지 통과되어 살아온 것입니다. 이제 새삼스럽게 도덕을 이야기하는 것은 굉장히 구시대적인 것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어제도 텔레비전을 틀어보니까 ‘결혼보다는 동거’라는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예전에는 그런 것들을 다 사람들이 부끄럽게 생각했는데 이제는 그 동거라는 것 자체가 아무 문제가 없는 것처럼 되었습니다. 그런 것을 문제 삼는 건 구닥다리 식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면서 도덕적인 기준들이 다 이렇게 무너져 버리면서 결국은 사람들이 각자 자신의 욕망을 따라 사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도 인간이 더욱 강렬하게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행복해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지금은 한물갔습니다만, 코로나 나기 전까지 있기 전까지 ‘욜로(YOLO)’라는 단어를 들어봤을 것입니다. ‘You Only Live Once’, 당신은 한 번밖에 없는 인생을 산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경 쓰지 말고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네가 만족할 것을 찾아서 살면 된다, 그리고 그것을 도덕이 규제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좀 귀엽긴 하지만 ‘소확행’이라는 것도 있습니다. 그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 그런 것들을 찾으면서 살았습니다. 그런 것들에 대해서 위로를 받으면서 사람들이 살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3년 동안에 생각지도 못했던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코로나가 덮쳤습니다. 코로나가 덮친 지 6개월 만에 전 세계에서 사라진 돈이 3만 2천 6백조입니다. 그 돈이 숫자로 사라진 게 아니라, 다 누군가의 주머니에서 돈이 없어져 버린 것입니다. 이런 일이 있을 줄이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한 것입니다. 6개월 만에, 그런데 6개월이 아니라 3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우크라이나하고 러시아하고 전쟁하면서 전 세계의 경제에 미친 영향이 아주 적게 잡아도 3천조 원을 날려버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앞으로 얼마나 계속될지를 모릅니다. 그런데 이런 쓰나미 같은 것들이 닥치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2021년도에는 건설 현장의 쇠 값이 70%가 올랐습니다. 그래 10만 원이면 사던 쇠붙이를 이제 17만 원을 줘야지 사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이번에도 대우건설이 아파트 수천억짜리를 계약했습니다. 로비도 하고. 얼마나 치열하게 경쟁했겠습니까. 그런데 위약금을 440억 원을 물어내고 우리는 공사 안 하겠다고 빠졌습니다. 그것을 공사해서 엄청난 손해를 볼 것을 생각했기 때문에, 차라리 440억 원을 쏟아붓고 그냥 그걸로 묻어버리고 손을 떼는 게 낫겠다는 상황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실질적으로 서민들은 지금 엄청난 일을 당한 것입니다. 아파트를 재건축한다고 계약을 했는데 시세가 지금 그거보다 더 쌉니다. 그런데 아파트 시공사는 그 돈으로는 아파트를 못 짓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돈을 더 내놓으라고 그러는 것입니다. 이런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면서 이번에 나온 전세 사기 같은 사건들이 일어나고 수많은 사람이 거리로 내몰리고 영끌을 해서 마지막 막차를 타고 부동산을 구입했던 사람들은 월급을 모두 갖다 이자로 집어넣어도 돈이 모자라는 이런 전대미문의 상황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이런 속에서 결국은 하나 새롭게 깨닫게 되는 게 뭐냐 하면, 어느 때보다도 인간이 행복해지기를 갈망하지만 그 행복은 너무나 멀리 있고 현실에서 조여 오는 이 엄청난 사건들로 인해서 사람들은 수없이 자살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34분 만에 한 사람씩 자살합니다. OECD 국가에서 자살률이 1위입니다. 자영업자들도 코로나 나고 나서 불과 몇 달 만에 23명의 자영업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자살합니다. 결국 알 수 있는 것은 뭐냐 하면, 행복에 대한 갈망은 크지만 실제로 그런 걸 갈망하면 갈망할수록 불행하다는 사실을 절실하게 느끼기 때문에 사람들이 죽는 것입니다. 죽음을 택하는 것입니다. 사실 자살하는 것은 죽고 싶어서 죽는 게 아니라 너무나 다르게 살고 싶어서 죽는 것입니다. 삶에 대한 기대가 현실과 너무나 다르기 때문에, 절망감 때문에 죽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는 것은 죽는 걸 원하는 게 아니라 다르게 살고 싶은데 도저히 다르게는 살 수가 없기 때문에 그것이 절망스러워서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것, 그것이 자살의 본질입니다.
이런 상황이 되니까 이건 꼭 뭐하고 비슷하냐 하면, 요즘에 음악을 다 들어보면 안 그랬던 시대가 별로 없긴 하지만 만날 노래하는 것이 사랑에 대한 노래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요즘처럼 사랑이 인스턴트였던 적이 없습니다. 현대인이 말하는 그 사랑 속에는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견디고 이기고 하는 그런 것들에 대한 개념이 거의 없습니다. 그냥 나방이 그 불을 향해 날아들 듯이, 그리고 부딪히고 돌아와서는 다시 잊어버리고 불빛을 향해 날아가듯이 그렇게 사람들이 거의 본능적인 사랑에 매몰되어 있습니다. 이런 사회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의 가장 중요한 선교적인 사명이 뭔지 아십니까. 예수를 잘 믿는 것도 사실은 더 높은 목적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를 믿는 걸 보고 감동을 받는 게 아닙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살아내야 할 선교적인 삶이라고 하는 것은 행복입니다. 예수를 믿어서 자신이 행복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 그것이 최고의 선교적인 사명입니다. 그 사람이 행복한 것을 보면서, 내가 살아가는 삶 말고 또 다른 삶의 가능성이 있구나 하는 것을 생각나게 해 주는 존재가 그리스도인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한 번 주일에 눈을 들어서 교회 안을 봤습니다. 예배를 드리러 오는 사람들이 막 쏟아져 들어옵니다. 코로나가 거의 끝났으니까 옵니다. 오면 화난 사람들처럼 예배당에 들어옵니다. 그리고 예배드릴 때는 골난 사람처럼 예배를 드립니다. 그리고 예배가 끝날 때는 행복하게 교회를 떠납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유명한 얘기를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주일날 왜 교회에 나오는지 아십니까? 예배 끝나고 집에 가기 위해서 교회 오는 것입니다. 진짜 행복하지 않습니다. 행복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소수입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말이라도 걸으면 금방 싸울 것 같은 표정으로 예배당에 앉아 있습니다. 그 사람이 일주일 동안 행복한 삶을 살다 왔을 리는 전혀 없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예배드리고 가는 사람이 행복한 삶을 살게 될 가능성도 별로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을 어떻게 생각해야 합니까?
초대 교회에 말키온이라고 하는 이단이 있었습니다. 초대 교회의 큰 이단이 세 개가 있었는데, 영지주의와 말키온과, 마니교라는 세 개의 이단이었습니다. 그 사이 사이에 도나스트파도 있었고 몬타노파도 있고 여러 가지 이단들이 있었지만, 굵직한 세계의 거물급 이단들이 바로 그렇게 세 개였습니다. 그런데 그중에 그 한 이단, 말키온 이단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이 말키온 이단은 성경을 읽으면서 의문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 의문은 도대체 구약을 읽어보니까 이 신이 너무 신경질적입니다. 그래서 잘못했다고 금방 불태워서 죽여 버리고, 그다음에 마음에 안 든다고 땅을 갈라서 다 쓸어 집어넣고 땅을 다시 닫아버립니다. 그다음에 역병이 일어나서 수만 명의 사람이 한 번에 죽어버립니다. 그런 끔찍한 일을 하는 신을 보면서 자비의 하나님을 발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신약에 와 보니까 전혀 그 신의 다른 모습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간음하다가 붙잡혀 왔는데 돌로 쳐서 죽이는 게 구약의 하나님이 시키는 거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라고 오신 예수는 그 여자를 용서해 주시고 돌려보냅니다. 그리고 탕자가 아버지의 재산을 갖다 다 털어먹고 돌아왔는데도 아버지가 풍악을 울리면서 맞아주고, 그리고 다시 반지를 끼워주는데 그 반지는 재산권을 행사할 수 있는 반지입니다. 자기 유산을 다 가지고 가서 털어먹었는데 다시 유산을 물려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위를 회복해줍니다. 보면서 이 두 신은 절대로 같은 신일리가 없다고 이렇게 생각합니다. 구약의 신은 가짜고 아주 저급한 신이고, 진짜 우리가 믿어야 할 신은 신약의 신이라고 그렇게 생각을 하고 신약에서 모든 책이 아니라 일부 책만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말키온이라는 이단입니다. 이런 생각은 그 후에도 계속됩니다. 특히 계몽주의가 일어나고 자유주의가 성행하면서부터 이런 모든 허무맹랑한 이야기로 가득 찬 성경은 다 무시하고, 우리가 진짜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여야 할 책은 따로 있다 합니다.
그렇게 하면서 기독교의 적대적이었던 사람들조차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인정한 성경의 유일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이 산상수훈입니다. 그 수훈이라는 말은 후대의 길이 남길 가치가 있는 가르침이라는 뜻입니다. 산상에서 예수님이 그런 가르침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산상수훈 전체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이 누구이고 그가 어떻게 믿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딱 세 가지를 이야기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나라는 무엇인가, 두 번째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누구인가, 하나님의 백성은 어떻게 믿어야 하는가, 하나님의 백성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 네 가지가 산상수훈의 핵심입니다. 그 산상수훈을 펼친 것이 신약 성경이고, 더 넓게 펼친 것이 신구약 성경 전체입니다. 그게 바로 산상수훈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그 산상수훈의 시작이 바로 오늘 사회자께서 읽어주신 성경 본문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고 시작을 하면서 마지막에 ‘박해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고 끝나는 여덟 가지의 복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걸 칠복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는데 전통적으로 여덟 가지의 복이라고 알려진 그 복이 산상수훈에 제일 먼저 나옵니다. 이것이 굉장히 충격적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산상수훈을 주신 이유는 당신이 무얼 취하기 위해서 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 주신 말씀이 산상수훈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일 먼저 나오는 것이 ‘복이 있나니’라는 말씀으로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우리말로 정확하게 말하면 행복입니다. 그 이러이러한 자는 행복하나니, 이렇게 되는 말씀이 산상수훈의 구조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성경에는 행복을 가리키는 그 ‘복이 있나니’라는 말씀이 사실 구약의 뿌리를 두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약에 인간의 행복을 이야기할 때 크게 두 단어가 나타납니다. 하나는 히브리어로 ‘베라카’라는 단어에요. 그런데 이 단어는 행복은 행복인데, 하나님을 믿는 것부터 시작해서 그다음에 농사가 잘되고 사람 덕을 보고 건강하고 자녀를 많이 낳고 돈을 많이 벌게 되는 육신의 복까지 모두를 망라하는 복이 ‘베라카’의 복입니다. 그런데 이 ‘베라카’의 복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만 받는 게 아니라, 이방인들도 받을 수 있는 복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39장에 보면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 갔을 때 ‘하나님이 요셉을 기억하사 보디발의 온 집안에 복을 내리시니라’ 할 때 그때의 보디발의 집안이 받았던 복이 바로 이 베라카의 복입니다. 이에 비해서 시편 1편 같은 데 보면 ‘복이 있나니’라고 되는데 이게 히브리어로 ‘에쉐르’의 복입니다. ‘에쉐르’의 복은 언약 관계 안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주어지는 복입니다. 이 복은 신령한 복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면 결코 누릴 수 없는 그런 영적인 의미의 복입니다. 그것이 말하자면 계란의 노른자이고, 그 복이 확장된 것이 ‘베라카’의 복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쓰인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즉 ‘심령이 가난한 자는 행복하나니’라고 할 때 그 행복이 바로 첫 번째 행복이 아니라 두 번째 행복입니다. 그것이 구약에서 제일 대표적으로 쓰인 것이 시편 1편입니다. ‘복이 있는 자는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않고 아니하고 오만한 자리에 앉지 아니하느니라.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며 시냇가에 있는 나무가 열매를 늘 푸르고 열매를 맺는 것 같이 만사의 형통하리로다.’ 할 때, 그때의 그 복이 에쉐르의 복이고, 그것을 그대로 그리스로 옮겨 놓은 것이 바로 지금 사회자가 읽어주신 성경에 나오는 ‘마카리오스’라고 하는 그 복입니다.
이렇게 놓고 보면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사실 하나는 모든 인간의 불행이라고 하는 것은 행복하려고 하다가 불행해지는 거지, 불행해질 각오를 하고 가다가 불행해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안 되는데 투기를 합니다. 법을 어기고 투기를 합니다. 그 동기가 무엇입니까? 단기간 내에 돈을 많이 벌어서 먹지도 못해보던 음식도 먹고 못 입던 옷도 입어보고, 그리고 강남에 빌딩도 사고 누구 말 따라 강남에 빌딩을 사서 세도 받아보고 싶어 합니다. 그러면 자기가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렇게 불법으로 투기를 합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매우 안 좋게 돌아와서 불행해지는 것입니다. 모든 불행한 사람은 행복해지려다가 불행해진 사람입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됐냐 하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올바른 질서를 따라서 행복을 찾아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잘못된 방법으로 잘못된 질서를 따라서 행복해지려고 하다가 마지막에 돌아오는 것이 불행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행해진 모든 사람은 행복을 찾으려다가 불행해지는 사람들이라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은 이 행복을 뭐라고 말해야 하느냐, 그리고 어떻게 이 행복을 생각해야 하느냐, 하는 질문을 우리들이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자신의 책, ‘인생의 행복’이라는 책에서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행복하기를 원하는가, 이렇게 물어보는 것입니다. “행복하기를 원합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모두 행복한 사람은 아닙니다. “행복하길 원합니다.”라고 하면 지금은 그 행복을 아직은 못 가지고 있다는 답이 되기 때문에, “행복하기를 원합니다.”라고 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할 수 있는 이야기지만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현재 행복한 사람이 아닙니다. 또 현재 행복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행복이 영원히 계속된다는 보장이 없다면 그도 행복한 사람이 아닙니다. 돈이 있고, 아니면 예쁜 여성을 만나고, 능력 있는 남편을 만나고, 모든 것을 가지고 있으면 사람들이 부러워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영원히 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닐 경우에는 언제든지 빼앗길 수 있으니까 그것은 행복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진짜 행복하다면 그걸 지금 내가 누리고 있어야 하고, 동시에 그것이 영원히 누구에 의해서도 빼앗길 수 없는 그런 종류의 것일 때에 인간은 진정 행복에 도달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까지 놓고 보면 그런 의문이 드는 것입니다. 도대체 그렇게까지 엄격하게 이야기하고 나면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이렇게 행복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 문제를 풀어야 할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현재의 삶과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끊임없이 사람들은 행복을 미래로 미루어놓고, 그리고 끊임없이 그 미래는 행복해질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물질적으로, 나의 육체적인 형편이 나아지면, 행복해질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계속 살아가서 살기 때문에 결국 인간은 현세에는 살지를 못하고 끊임없이 흘러간 것을 다시 소환해서 후회합니다. 그리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는데 미리 앞당겨서 염려합니다. 그래서 지나갔는데 다시 소환해서 후회하고, 오지 않았는데 미리 염려하고 그러느라고 현재는 살지를 않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흘러가 버리면 또 후회하는 과거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바보 같은 삶을 계속 살아서 과거에 대해서는 후회하고 미래에 대해서는 염려합니다. 아니면 과거에 대해서 아무것도 배우지를 못하거나 미래에 대해서 허황된 꿈을 가지고 살아가느라고 현재를 안 삽니다. 행복은 사실은 현재의 우리가 누리는 데에 진정한 행복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렇게 놓고 본다면 그럼 우리가 어떻게 이 행복을 생각해야 될 것이냐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번영주의적인 복음이 한창 유행하던 60년대, 70년대, 80년대까지는 나라가 너무 가난하고 국민소득이 1974년도에 겨우 천 달러가 넘었습니다. 사람들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볼 수가 없었고, 그냥 끼니를 겨우 이어가기만 해도 추위를 피할 수 있는 집만 있어도 다행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그렇게 극도로 가난하던 시절에는 행복이라고 하는 것을 물질적인 것에서 찾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때문에 그렇게 번영주의적인 신학이 많은 사람들에게 호응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고 한번 복을 받아서 잘살아 보자고 하는, 어떻게 보면 그 복의 개념이 성경과 세속적인 것들이 막 뒤섞인 그 가운데 사람들이 행복을 찾아온 것입니다. 그리고 나라는 발전해서 지금 현재 4만 달러에 이르기까지 국민소득이 폭발적으로 성장을 했고, 밖에 나가보면 우리나라의 위상이 얼마나 달라졌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왜냐면 우리나라 여권 하나로 무비자로 갈 수 있는 국가가 전 세계 198개국입니다. 일본 다음으로 가장 많은 나라를 비자 없이 갈 수 있는 나라의 여권이 대한민국 국민의 여권입니다. 얼마나 잘 사는지 모릅니다. 최근에 제가 영국을 갔다 왔는데 깜짝 놀랐습니다. 영국에서 최근 6개월 동안에 영국 국민 여섯 명 중 한 명은 돈 때문에 끼니를 굶어본 적이 있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저한테는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그 영국의 경제는 지금 말이 아닙니다. 영국만이 아니라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지만 우리는 그 정도는 아니잖습니까. 구매력을 기준으로 하면 벌써 이미 작년에 일본을 우리나라가 추월했습니다. 그렇게 잘 삽니다. 그래서 말씀드리고자 하는 건 이제는 물질적인 부를 누리는 것에서 행복을 찾는 것은 그렇게 우리에게 커다란 공감을 안 줍니다. 그렇게 커다란 공감을 주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이 잘사는 것을 보면서 감동을 받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때는 아닙니다.
현대인은 한없이 외롭고 고립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소위 얘기하는 고독사라는 것이 지금 많이 나오잖습니까. 1인 가구들이 많으니까 언제 죽었는지도 모릅니다. 그 사람들이 죽습니다. 죽으면 가서 집 안을 청소해보면 이게 언제 죽었는지 구더기가 가득하고 온 집안이 다 썩어가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현실입니다. 우리가 그 안 믿는 사람들에게 행복이라는 것을 보여줄 때 물질을 자랑하면서 ‘봐라. 나도 예수 믿고 부자가 됐다. 나도 예수 믿고 먹고살 만해졌다’라는 것으로는 60년대, 70년대에 사람들에게 다가갔던 호소력은 지금 거의 없습니다. 이러한 시대의 사람들이 더 소외되고 더 외로운 채 살아옵니다. 최근에 한 2년 전쯤 베스트셀러로 팔리던 책이 있었는데 ‘죽은 자의 집 청소’라는 책이 있습니다. 작은 책인데 쓴 사람이 누구냐면 사람이 죽고 나면 가서 집 청소해주는 사람이었습니다. 돈을 조금 받고 안 합니다. 왜냐하면 죽은 지 한 달씩 두 달씩 되는 사람이고 구더기들이 막 쏟아져 나오고 그런 것을 누가 그렇게 알바비를 받고 청소를 해주겠습니다. 다 사체를 들어내고 그다음에 그 집을 청소하면서 느끼는 그 인생에 대한 삶과 죽음에 대한 느낌을 적어놓았습니다. 고독사라고 그러는데 원래는 고립사입니다. 참 재밌는 것은 그렇게 고립해서 죽어간 사람들의 책꽂이에는 항상 이런 책들이 꽂혀 있다는 것입니다. ‘너는 소중해, 너는 할 수 있어, 꽃길만 걸을 거야’ 이런 책들이 몇 권씩은 꽂혀 있다는 것입니다. 그걸 읽는 것이 인생의 행복에 아무 도움이 안 됩니다. 그리고 결국은 죽어갑니다. 그런 사람들이 지금 우리 가족 중에도 있고, 오늘 여기 온 사모님들 중에도 그런 분이 있을 수 있고, 주위에도 그런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최고의 선교는 자기가 진정한 행복을 누리면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그것이 가장 커다랗게 울려 퍼지는 선포입니다. 그것이 우리에 있어서 너무너무 소중하고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산상수훈이라고 하는 기독교의 가장 소중한 교훈을 가르쳐주시면서, 성경 전체의 거의 뼈대가 될 정도의 가르침을 주시면서, 그 첫 자리에다가 행복에 대한 관심, 행복에 대한 이야기로 그 소중한 가르침을 풀어 가시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리 보고 예수를 믿으라고 하는 것, 우리 보고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고 종말을 바라보며 살려고 하시는 모든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무언가를 착취하시기 위함이 아니라, 이 죄와 고통이 가득 찬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길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그것이 내가 너희에게 이 산상에서 가르쳐주는 기독교의 핵심적인 메시지의 한복판에 있다고 하는 것을 가르쳐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팔복에 대해서 즉 인간의 행복에 대해서 먼저 말씀하시면서 이 산상수훈을 시작하신 이유라는 것입니다.
오리게네스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한 3세기경에 살았던 사람인데 아주 어마어마한 천재였습니다. 아버지가 순교자였고, 온 가족이 독실한 희망을 가졌습니다. 아버지가 순교할 때 그 감옥에 계신 아버지에게 편지를 쓴 그 아들입니다. “아버지, 거기서 죽으세요. 나는 아버지가 배교하고 돌아와서 그 더러운 손으로 우리를 먹여 살리는 아버지를 갖기보다는 거기서 깨끗이 순교하시고 승리하신 아버지를 마음에 모시고 살고 싶습니다.” 별로 감탄도 안 하십니까. 그리고 아버지가 순교했다는 소식이 들려왔을 때 박수를 쳤다고 합니다. 우리 아버지가 승리하셨다고 했답니다. 그리고는 그다음부터 순교할 기회만 찾으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엄마는 가슴이 미어지는 것입니다. 동생이 여섯 명이 있었습니다. 자는데 동생들을 보여주면서 엄마가 얘기하는 것입니다. “오리겐아, 네가 신앙을 따라서 순교하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지만 그럼 아빠도 갔는데 너도 가면 이 동생들은 누가 돌보냐, 제발 죽을 궁리하지 말고 살아서 하나님을 섬길 궁리를 해라” 그 말에 큰 감동을 받고 공부를 열심히 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훌륭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종이 됩니다. 얼마나 천재였는지 일생동안 그분이 지금 나이가 정확히 기억이 안 나는데 아마 오십 대 후반 정도까지 사셨는데 열여덟 살에 교리문답 학교의 교장이 되는데 그 40년 동안에 쓴 책이 2천 권입니다. 2천 권의 책을 쓸 정도로 천재였습니다. 사실은 베껴도 그렇게 못 베낍니다. 그래서 학자들이 추측하기에는 글 쓰는 방이 있고 여기 필경사들이 있고, 그 필경사들마다 각각 책을 쓰고 시간 날 때마다 가서 “어디까지 했지?”, “지금 원리 각론을 쓰고 있는 중입니다. 거기에서 신에 대해서 하다가 마셨습니다.” 그러면 그다음에 “자. 써라.” 그러면 속기를 합니다. 파피루스 같은 데에다가 속기합니다. 그리고 그다음에 그걸 잘 보면서 양피지에다가 정확하게 쓰는 것입니다. 그것을 할 동안에 옆에 가서 또 다른 사람에게 불러주면서 책을 쓰고 이렇게 메뚜기처럼 뛰어다니면서 책을 썼을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어쨌든 2천 권의 책을 씁니다. 그 천재가 누가복음 설교에서 무엇이라고 얘기하는지 읽어드리겠습니다. 라틴어로 썼는데 우리말로 읽어드리겠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이 모든 팔복을 당신 자신 안에서 우리에게 보여주셨다. 그것을 담기 위해 오셨으니 이는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애통하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라고 하셨음이며 또한 팔복의 기초들을 놓으시기 위함이었다.
원래는 사실 이분이 라틴어로 쓴 게 아니라, 그리스어로 씁니다. 그런데 나중에 라틴어로 번역이 되었고 그 책은 모두 다 불태워지고, 일부만 남게 되는데 거기에서 팔복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상의 어떤 사람을 놓고 이런 사람이 된다면 복이 있다고 그렇게 말씀하신 게 아니라, 당신 자신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당신 자신이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었고, 당신 자신이 애통하는 사람이었고, 당신 자신이 온유한 사람이었고, 당신 자신이 의에 죽이고 목마른 사람이었고, 당신 자신이 마음이 청결하여 하나님을 본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모두 자신의 인격에 관해서 말씀하신 거였다는 이런 얘기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이 행복하셨겠습니까, 불행하셨겠습니까? 이 세상에 사시는 동안에 예수님이 행복하셨겠습니까, 행복하지 않으셨겠습니까? 행복하지 않았다고 그러면 기독교는 중대한 모순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에서 설명할 때 대개 인간은 죄 때문에 불행하게 된다고 이렇게 설명하는데,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사람일 뿐이지만 예수님은 하나님 자신이셨습니다. 그런데 그분도 세상에 사실 때 행복하지 않았다고 그러면 기독교는 사실상 행복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모든 인류에게 사기를 치는 것입니다. 신조차도 도달해 본 적이 없는 행복을 이 세상에서 가능한 것처럼 이야기하기 때문에 그건 사기라는 얘기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격하게 공감을 하셔야 됩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면 중요한 반전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행복하셨다고 여러분들이 답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진짜 예수님의 인생이 꽃길만 걸어간 인생을 사셨는가, 그것은 아닙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이 중요한 답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행복하셨습니다. 윤동주의 십자가라는 시가 있습니다. 그 시에서 윤동주가 ‘고난받던 사람, 고통받은 사람, 그러나 행복했던 사나이, 예수’ 이렇게 얘기합니다. 쉽게 얘기하면 예수님은 행복했지만 예수님의 생애가 고통이 없는 생애가 아니라 오히려 고통으로 가득 찬 생애를 사셨는데 예수님은 행복하셨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확 깨지 않습니까?
(찬양)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무슨 뜻이냐 하면 기독교에서 말하는 행복은 고통이 삭제된 상태의 행복, 불행이 소거된 상태의 행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성도들이 누리도록 허락을 받은 그런 종류의 행복이 아닙니다. 그런 행복이었다면 예수님은 이 세상에 하나님의 완전한 아들로 오셔서 우리에게 행복을 보여준 분이 아니라, 불행을 보여준 분이라고 이야기해야 합니다. 이렇게 놓고 나면 정신이 확 들면서 우리가 생각하는 행복의 개념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성경이 가르쳐주는 행복의 개념으로부터 멀리 떠나가 있는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은 고통의 바다고 인생은 그 고통의 바다를 항해하는 것입니다. 그 바다에는 불행의 파도가 그칠 날이 없습니다. 때로는 잔잔한 물결이 일기도 하지만, 때로는 집채만 한 파도가 치면서 배를 뒤집어 놓을 것처럼 위협을 하는 일들이 일어나기도 하는 것이 세상입니다. 이러한 세상의 현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행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되는 이유는 하나님의 자녀가 이 세상에서 누리는 행복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종류의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가르쳐주시는 이 팔복은 사람됨에서 오는 행복입니다. 흔히 물건이나 재물이나 이런 것들을 소유해서 행복해질 것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우리나라 사람이 특히 강합니다. 전 세계에서 행복의 순위를 이야기할 때 가족보다 돈이 더 행복에 영향을 끼친다고 대답한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습니다. 그럴 정도로 물질적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쐐기를 박으시는 것입니다. 너희의 행복은 무엇을 소유하는 데 있는 게 아니라고 하십니다. 또 사람들은 열심히 삽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너희의 행복은 무엇을 행하는 데 있는 것도 아니라고 하십니다. 특히 남성들이 그런 경우가 많은데, 젊은 시절에 아이들하고 놀아줄 시간도 없이 미친 듯이 일에 빠져서 자기 성공을 위해서 나쁘게 얘기하면 살아남기 위해서 막 몸부림치면서 삽니다. 요새 ‘갓생’이라고도 그럽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다 살고 나니까 아무도 자기에게 관심 갖는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생의 행복은 뭘 하는 데 있는 것도 아닙니다. 진정한 행복은 어디에 있냐면 어떤 사람이 되느냐에 대한 것입니다. 그래서 가짐의 행복도 아니고, 행함의 행복도 아니고, 사람됨의 행복입니다. 사람이 된 것만큼 행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의 성품을 가지신 분이었기 때문에 이 팔복을 누릴 수 있었고,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당신을 닮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로버트 머리 맥체인이라는 청교도가 이야기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신자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은 그리스도를 많이 닮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을 닮으면서 그 천국을 누리는 겁니다. 그래서 이 세상을 살면서 힘든 일이 생기고 사랑하는 사람이 죽고 내 몸이 병들고 자녀들이 속을 썩이고 하는 일은 얼마든지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이고 그런 것이 없는 세상은 없는 것입니다.
교인들은 모아놓고 성경 공부를 하는데, 어려운 게 뭐냐고 이야기를 했는데 사춘기에 있는 아들이 자기를 너무 힘들게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또 하나는 남편이 너무 힘들게 한다고 합니다. 시어머니가 자기를 너무 괴롭혀서 자기는 행복할 여유가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내가 물어보는 게 그것입니다. 사춘기 아들이 똑바로 자라주는 거는 굉장히 좋은 게 아닙니다. 왜냐면 애들은 모두 태어날 때 지랄 총량의 법칙으로 태어납니다. 그래서 이게 사춘기 때 지랄을 떨지 않으면 간직했다가 대학교 가서 터뜨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대학도 착실하게 다니면 시집을 가서 터뜨리는 겁니다. 그러면 이것은 더 큰 대박 사건입니다. 그래서 내가 얘기합니다. 사춘기 때 애들이 그렇게 속을 썩이는 것은 그거 굉장히 좋은 현상입니다. 왜냐하면 제때 터진 것입니다. 제때 딱 터져서 지금 그렇게 그 난리를 치는 겁니다. 그 지랄 총량의 법칙에 의해서 지금 빼내는 중입니다. 그러면 걔가 대학 들어가고 시집간 다음에 장가간 다음에는 정상적으로 살 가능성이 되게 많은 애라는 얘기입니다. 그것을 간직했다가 나중에 터트려서 사니 못 사니, 애들을 고아원에 보내느니 마느니, 엄마가 키워라 아빠가 키워라, 이거보다는 지금 난리 치는 게 낫지 않습니까. 그리고 걔한테 분명히 얘기하십시오. “너 인생은 네가 결정하는 거다. 너 학교 다니기 싫으냐?” 그러면 우리 애들은 그런 적 없습니다. 그러니까 손잡고 가서 “그냥 자기 지장 찍고 자퇴하라” 그러십시오. 그리고 처음부터 애들에게 “네 인생은 네가 결정할 수 있다. 엄마, 아빠가 최대한 도와준다. 그런데 마지막 결정하는 건 네가 하는 거다. 그 대신 책임은 아무도 나눠서 지지 않는다. 너 혼자 다 져야 한다.” 그런데도 자퇴한다고 하면 나는 손잡고 가서 지장 찍고 합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냥 하도 말려도 안 되면 하게 두고, 한 것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는 거라는 것을 기어 다닐 때부터 느끼게끔, 기어 다닐 때부터는 거짓말이지만 하여튼 어떻게 일어서서 정신이 들어올 때부터는 책임지는 것을 하게끔 그렇게 교육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걔는 걔의 인생이라고 생각을 하십시오. 남편도 있으면 남편에게 호소할 수 있겠습니다. “여보 우리 잘해봅시다.” 라든지, “그렇게 술만 먹고 다니지 마시오.”라든지, 아니면 “용돈 좀 줄여 쓰시오. 나도 힘들어 죽겠소.” 이렇게 얘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거 그렇게 살아도 그 마지막 자기 선택입니다. 그런데 그 대신 그 일에 대해서 책임을 지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것이 다 잘 됐다고 칩시다. 이게 인간입니다. 자식도 잘 자라주고 남편도 더 없는 남편이 되고 그다음에 경제 사정도 너무 좋아지고 세계정세도 너무 좋아지고 경기도 너무 좋아집니다. 모든 게 바랄 것 없이 좋아집니다. 인생이 지루해져서 스스로 붕괴하게 됩니다. 그리고 인간이 그러면서 타락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생에 있어서 문제가 없는 것은 마치 작은 쪽배를 타고 바다를 지나가면서 바닷물이 자기에게 튀지 않기를 바라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어차피 그런 일은 만납니다. 그리고 어려운 일이 일어나면 사람들은 말합니다. Why me?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냐고 그럽니다. 그러면 난 뭐라고 하냐면 Why not you? 왜 너한테만 그런 일이 일어나면 안 되냐고 합니다. 지금 네 사람 중의 한 사람은 암으로 죽습니다. 걸렸다고 막 난리를 치는 것입니다. 아니면 우리 식구가 걸렸다고 난리를 치는 겁니다. 모든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이 내게 일어났을 뿐입니다. 그러면 이것을 받아들이고 어떻게 내가 이걸 극복하면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갈 것인가 그런 생각을 해야 합니다. 이제 와서 그런 이야기를 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냐는 것입니다. 감사함으로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보면 그렇게 먹지 못하고 가난하고 머리 둘 곳 없는 생애를 사셨음에도 불구하고 당신 자신의 행복한 사람으로 사신 것입니다. 우리가 찾아야 할 행복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러니까 바보같이 도달할 수도 없는 기준에다가 놓고, 그리고 그것들도 영적인 것이 아니라 육적인 것들로 가득 채운 행복의 상태를 설정해 놓고, 거기에 미치지 못했다고 자기 혼자 불행한 것처럼 그렇게 슬프게 사는 사람은 그러는 동안에 인생의 시간은 흘러가고 살지 못한 오늘은 내일이면 후회할 과거가 됩니다. 또다시 다가올 내일을 오늘로 살지 못하는 불행한 인생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끊임없는 염려와 근심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 염려에 대한 건 제가 ‘염려에 관하여’라는 책에서 아주 상세하게 썼습니다. 그 책을 쓰기 위해서 병원에서 다섯 번을 링거를 맞으면서 쓴 책입니다. 좀 어렵다고 사람들이 잘 못 읽는데 그것도 어려우면 인생을 어떻게 살아갈지 모르겠습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고 싶은 게 이것입니다. 행복에 대한 것을 천국에 가면 물질과 이런 모든 고통이 하나도 없는 그런 완전한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그런데 그건 거기서나 누릴 수 있는 것이지, 이 세상에서 성취 가능하지 않습니다. 우스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강남의 그 아줌마들이 모여서 한 사람이 자랑을 합니다. 우리 남편 이번에 승진했다고 합니다. 모인 사람이 다 자기 남편이 그 남편보다 훨씬 더 잘났다고 자랑을 합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갑자기 화제를 돌려서 “우리 남편은 돈도 많이 벌어오고 다 좋은데, 난 너무 괴로워. 바람을 피우고 있어” 그러면 그다음 사람들이 그 남편보다 자기 남편이 훨씬 더 나쁘다는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모두 울음바다가 됩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을 보면서 자신과 그를 비교하면서 내가 더 행복하다고 느끼는 그런 것들이 다 부질없는 것입니다. 사람의 속사정은 사람의 마음 이외에 알 사람이 없습니다. 자기 이외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그런 데에 기준을 놓지 말고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서 사명을 따라 살면서 많은 고통을 당하셨지만, 그러나 그분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분이셨기 때문에 이 하늘의 복을 모두 누리면서 사셨기 때문에 거기에서 모든 관용이 나오고 십자가에 대한 담대한 마음도 나올 수 있었던 것처럼 사는 것입니다.
(찬양)
내 생애 가장 귀한 것 주 닮는 것
내 생에 가장 귀한 것인 주 닮는 것
주님을 닮기를 간절히 원하네
내 생에 가장 귀한 것 주 닮는 것
그러면서 피할 수 없는 불행이 오면 오라고 하십시오. 그리고 갈 수밖에 없는 고난의 길이라면 기쁜 마음으로 사명을 바라보고 이미 내게 주신 이 행복 때문에 감격하면서 그 길을 죽지 못해서 가는 사람이 아니라, 옛날 찬송가에 나오는 것처럼 즐겨 고난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된다면, 마침내 모든 것을 완벽하게 누릴 수 있는 행복의 나라가 그를 위해 준비되어 있을 것입니다. 이 행복의 견해를 가지고 승리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