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역자수련회 개회예배
“에스라가 하나님의 성전 앞에 엎드려 울며 기도하여 죄를 자복할 때에 많은 백성이 크게 통곡하매
이스라엘 중에서 백성의 남녀와 어린 아이의 큰 무리가 그 앞에 모인지라”(에스라 10:1)
녹취자: 백지영
제가 말도 안 되게 젊은 나이에 교수로 임명된 것은 88년도 3월 1일이었습니다. 그 학교에서 4년을 봉직하고 이제 교수 생활에 회의를 느껴서 목회를 하고 싶어 하던 그때 지금의 백석대학에서 저를 콜링했습니다. 그래서 파격적인 대우로 콜링을 하고, 이제 그 신학교에서 강의를 하기 시작한 것이 91년도 한 학기 시간강사하고 그리고 92년도 1월 1일자로 발령을 받았습니다. 선택과목에 학생들이 450명이 수강 신청을 해서 교실에 학생을 (집어넣을 수 없는) 상황이었고, 출석을 부르면 시간이 지나가는 기이한 풍경이 계속 되었습니다. 그때 제 교수실에서 겨울방학 때에 몇 명의 학생들이 모여서 에스라서를 저하고 같이 공부를 했습니다. 에스라서는 여러분 알다시피 앞부분 조금을 빼놓고 4장부터는 아람어로 되어 있는데, 제가 아람어를 열심히 했었으니까 어쨌든 오리지널 텍스트를 읽고 풀면서 해설을 하다가 10장에 이르게 됐습니다. 10장 1절을 제가 3시간 반을 강의를 했습니다. 저는 책상에 앉고 학생들은 교수실에 일곱, 여덟 명, 많으면 열 명 정도, 거기서 한 여학생이 고개를 못 들고 세 시간 내내 흐느끼면서 울던 여학생이 있었습니다. 그분이 은퇴하신 김경해 전도사입니다.
이때는 시기적으로 언제였느냐 하면, 다니엘이 포로로 끌려가던 때를 기준으로 하면 130년쯤 지난 뒤고, 580년에 유다왕국이 완전히 멸망당한 것을 기준으로 하면 그저 약 100년 정도 아마 시간이 흐른 후였을 것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이제 학사 에스라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세 번째 바벨론 포로 귀환을 실행하게 됩니다. 처음에 그 바벨론 포로시대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이 일에 사람들이 모집을 내걸었을 때 거기에 응한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벌써 포로로 끌려간 지 사람마다 좀 달랐겠지만 긴 세월이 흘렀고, 그리고 그들은 정책적으로 사민정책을 펼쳤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을 국제화할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을 예루살렘에서 내보내고 이방민족들을 예루살렘에서 살게 하는 그런 정책을 썼고, 그것은 사마리아를 그렇게 해서 이제 이스라엘의 독특성의 흔적을 지워버린 그런 성공사례도 아마 그들의 기억 속에 있었을 것입니다.
어쨌든 그렇게 해서 남의 나라 땅에 가서 이미 벌써 그 긴 세월동안 뿌리를 내리고 있는 사람이 예루살렘 성을 수축하고 성전을 짓기 위해서 내가 고향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겠노라고 손을 드는 것은 삶의 뿌리를 단절하는, 조상들의 삶의 뿌리를 단절하는 것인 동시에 어떠한 안전도, 왕의 칙령은 있었지만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까웠으니까, 그러니까 그 이외에 아무 것도 안전장치가 없는 속에서 이제 가족의 운명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는 결단이었습니다.
저는 그 사람들 믿음이 보통이 아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신에 감동된 사람들이 따라나섰다고 그랬습니다. 우리가 아프리카 저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불안한 나라의 선교사로 가는 것보다 몇십 배의 힘든 결정이었다고 생각하시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을 미워하는 족속들이 실지로 예루살렘에 많이 있었고, 그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박해했기 때문입니다.
학사 에스라는 경건하고 학문이 깊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영리한 사람이었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세월이 흐르고, 어떻게 보면 골방에 갇혀 있는 선비 같은 모습의 그런 경건한 지도자가 아니었을까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세상 돌아가는 것을 너무 몰랐습니다.
그래서 오늘날도 목회의 어려움이 뭐냐 하면 제가 요새 현대 정신에 대해서 새롭게 공부를 하고 미셀 푸코나 그 다음에 자크 데리다, 토마스 쿤이나 이런 사람 이전에 어떤 사람들에게 영향을 받아서 이러한 해체주의가 생겨나게 됐는가 하는 것을 공부하고 있는데, 그중에 한 사람이 보르헤스라는 인물입니다. 그것을 죽 보면서, 굉장히 난해한 소설입니다. 시간과 공간이 없는 소설입니다. 그러니까 굉장히 헷갈리고 어렵습니다. 그런데 단편소설이 이렇게 난해한데, 읽는데 저는 그냥 한방에 이해가 됐습니다. 하나도 어렵지 않은 느낌이 들고, 무릎을 치면서 “아, 이게 지금 읽으면 하나도 새로울 것이 없고, 우리는 포스터모더니즘과 그 다음에 탈구조주의에 대해서 알고 있기 때문에 사실 이게 별게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처음 읽은 사람들은 엄청 충격을 받았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미셀 푸코가 그 책을 읽고 자기 인생에 어마어마한 충격을 받아서 자기의 정신을 흔들어 놓았다고 고백할 정도의 책이었는데, 그런 정신이 지금 현대에서는 아주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현대철학에서는 ‘현실은 없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현실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니까 그런 가상과 현실, 꿈과 현실 그 다음에 실제와 삶 이런 것들을 부정하고, 결국은 진리의 요소를 다 삭제한 그런 상태에서 세계를 정직하게 보면 ‘카오스’, ‘혼돈’이라는 것입니다. 원래 그런 거란 것입니다. “질서가 있다고 하는 것은 인간들이 끊임없이 만들어낸 환상이고 원래 무질서하다, 그러면 어떻게 질서를 잡을 것이냐? 네가 각자 알아서 할 일이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네가 선택하면 그것이 진리다. 각자 자기의 질서를 찾아서 가는 거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제가 왜 하느냐 하면, 이분은 너무 경건하셔서 세상 돌아가는 것을 거의 모르셨습니다. 세월이 어느 정도 흐르고 약간의 평화가 왔을 때 타락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목숨 걸고 포로 귀환한 사람들이 타락했는데, 백성의 지도자들이 으뜸이 되어서 타락했습니다. 제일 큰 타락이 경건한 신앙을 버리고 자기의 자녀들을 이방 아들딸들과 혼인시키는 것이었고 이방의 여인들을 첩으로 맞아들여서 그래서 가족관계를 맺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세상 다 알고 있는 것을 에스라는 전혀 몰랐습니다. 너무나 하나님께만 몰두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누가 와서 하도 답답하니까 에스라에게 일러주었습니다. “이만 저만한 죄악이 지금 이스라엘에 가득하고 그 죄악에 으뜸인 사람들이 백성의 방백과 지도자들이다.”
아직도 해결해야 할 숙제가 어마어마하게 많이 남아 있는데 에스라는 청천벽력과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할 말을 잃어버린 채 넋이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있다가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이 하나님의 전이었습니다. 그리고 너무 두려워서 감히 거기를 들어가지도 못하고 문 앞에서 엎드렸습니다. 구약에서 엎드린다고 하는 것은 굴복 내지는 겸비의 상징입니다. 물론 경배의 의미도 있지만, 그러니까 복종하고 굴복하는 것입니다. 서렌더(surrender)하는 것입니다. 다 맡기고 “엎드려 울며 기도하여” 그랬는데, 이 ‘울다’라는 단어가 흐느끼는 것을 나타내는 단어가 아니라 소리를 내어서 통곡하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통곡하면서 기도하는데,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죄를 자복하는 것입니다. 사실은 에스라는 그 죄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에스라는 남의 죄를 자복하는 게 아니라, 남의 죄는 자복할 수가 없습니다. 자기의 죄를 자복하는 것이지요. 자기의 죄를 자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복이라는 말 자체가 스스로 고백을 하며 용서를 비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소유격은 안 나왔지만 ‘그 죄를 자복하여’ 그랬습니다.
무슨 의미냐 하면 연합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고, 또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성도들이 연합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시대 때의 말로 하자면, 모세의 언약이 있고 그 언약 때문에 그 피로, 그 언약의 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두 한 몸을 이루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에스라는 그 죄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하나님 앞에 나아갔을 때 자신의 죄와 이스라엘의 죄가 나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자신의 죄라고 여기며 하나님 앞에 엎드려 울며 기도하며 용서를 빌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우리의 죄를 모두 짊어지고 대제사장으로서 하나님 앞에 용서를 빌었던 것과 마찬가지이고,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위해서 하나님의 사죄를 간구하였던 것과 꼭 같은 모형을 에스라가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에스라는 하나님 앞에 예수 그리스도의 아주 훌륭한 모형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살고 있는 세상과 하나님이 계신 거룩한 성전 그 사이 경계선에 서서,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점에서는 하나님 편에 서 있지만 이 백성들을 위해 통곡한다는 점에서는 백성들의 편에 서 있는, 그런 중보자로서 엎드려 지금 통곡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목회에서 무엇이 제일 어려우냐고 물으면 사람들이 다양한 대답을 할 것입니다. 제 경험에 의하면 어려움이 참 많습니다. 우선 돈이 없어서 빚에 시달리는 것도 굉장히 어려운 것이고 너무너무 고통스러운 것이고, 은혜를 많이 받은 교인이 마음이 변심해서 교회에 상처를 주는 것도 너무 힘든 일입니다. 또 너무너무 은혜를 많이 받고 교회를 사랑하고 목회자를 존경하던 교인이 불치의 병으로 잠깐 사이에 세상을 떠나는 광경을 지켜보는 것도 너무 괴로워서, 사실은 장례식에 갔을 때 하나님이 저 사람 대신 나를 데려가시면 참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몇 번 있었습니다. 그것도 너무 힘든 일입니다. 말로 할 수 없이 힘든 일이 많습니다. 그런데 가장 어려운 일은, 이렇게 아주 자연스럽게 지체들의 죄가 자기 죄처럼 여겨져서 가슴 아파하고 통곡하는 그것을 유지하면서 사는 일이 가장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행정이 밝은 사람이었으면, 정치에 눈이 뜬 사람이었으면 소식을 들었을 때, “뭐라고? 이런 사람들이 있나. 명단을 조사해 오라.”하고 치리에 들어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에스라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그렇게 해서 몇 사람 정리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 두루두루 퍼져있는 하나님을 향한 경건의 상실이었고, 까리따스 사랑의 실종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가슴 통곡하며 울 때 에스라의 마음에는 두 가지 광경이 겹쳤습니다. 편안한,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수십 년, 일이백 년 동안 조상 대대로 안정된 삶을 살고 있던 사람들이 어떠한 안전도 보장되지 않는 예루살렘으로의 귀환의 길을 택했을 때 그들의 마음에 솟구치던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열정의 그 그림과 그리고 완전히 타락해 버린 이 두 가지 그림이 동시에 떠올랐고, 두 그림의 교차가 이 에스라의 심장을 육포를 찢듯이 찢어놓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통곡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저는 믿습니다. 그가 비록 설교가 조금 어눌하고 행정이 조금 미숙하고 정치적으로 어떻게 교인을 다루는지를 조금 잘 몰라도, 매일 누군가의 죄 때문에 애통하는 사람, 통곡할 수 있는 기도의 자리를 가지고 있는 그 사람은 반드시 목회를 잘 할 것입니다. 큰 교회를 만든다는 보장은 내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정결한 마음으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증거를 매 순간 보는 목회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이제 이것을 보면서 느끼는 것입니다.
아무에게도 말 안 하고 누구에게도 자기가 왜 성전으로 가는지를 알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왜 거기서 통곡하는지도 누구한테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거기서 가슴을 열고 피를 쏟듯이, 내장을 다 쏟아내듯이 하나님 앞에서 통곡하며 백성들의 죄를 자기의 죄와 똑같이 여기며 용서해달라고 통곡하며 울었습니다. 얼마큼 시간이 지나갔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아무 말 없이 사람들이 하나씩 둘씩 모이기 시작해서 엄청나게 큰 무리가 성전 앞에 모인 것입니다. 그 모임에는 어떠한 웅성거림이나 토론 그리고 심지어 사회자의 선언도 없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본 것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이 완전히 무너져버린 에스라의 통곡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존경하는 지도자 에스라가 가슴을 찢으며 슬피 우는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은 누구도 시키는 자가 없는데 하나씩 둘씩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이심전심으로 그 통곡하는 마음이 거기 모인 큰 무리들에게 모두 전해졌고, 거기에는 어른들 뿐만 아니라 아이들까지 있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함께 아마 통곡하는 일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몇 사례되지 않는 참된 부흥입니다. 다시 말하면 영적인 각성입니다. 예전에는 보지 못하던 것을 어떤 큰 충격을 받으면서 그 실체를 보게 되는 그 사건이었습니다. 마음은 누구를 원망하거나 복수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매아 골파 막시마 골파”(32.48), “나의 죄입니다. 나의 큰 죄이옵나이다.”라고 하는 그 유명한 어거스틴의 고백을 생각나게 하는 순결한 회개의 각성이었던 것입니다.
청교도의 속담에 “설교자의 입에서 출발한 언어는 성공하면 회중의 귀에까지 도달할 수 있다. 그러나 설교자의 마음에서 출발한 말은 회중의 마음까지 도달할 수 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마음이 설교자를 통해서 전달되는 것, 그것은 설교자에게 한 주간의 설교 준비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매순간 그렇게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자기의 책에서 인상 깊은 말을 남기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30대의 저에게는 충격이었습니다. 그리고 처음에는 이해가 잘 되지 않았습니다. 그분이 아마 그 설교를 하셨을 때의 연세가 60세 넘으셨을 때 일인 것 같은데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만약 어느 한 설교자가 설교를 통해 나에게 희미한 진리의 빛이라도 내 마음에 보여줄 수 있다면 나는 그의 모든 것을 용서하겠습니다.” 그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그렇게 진리를 전달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빛은 빛을 내는 물질이 있기 때문에 빛이 나오는 것입니다. 발광체가 아니면 암체 둘 중의 하나인데, 발광체의 경우에는 빛 자체를 품고 있지 않으면 빛을 발할 수가 없습니다. 모든 진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와서 체스터턴이 말한 난파선과 같은 세계의 비밀들을 모두 질서 있게 해석하게끔 만들어 줍니다. 그런데 그 진리의 빛이 그렇게 하나님께로 비치는 것은 하나님 자신이 진리이시기 때문이라는 말 이외에는 설명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에스라는 비록 아주 영리하여 세상 물정을 환하게 알아서 미리 조처하지는 못한 사람이었지만, 그러나 하나님 앞에 때 묻지 않은 마음을 가지고 언제든지 당신의 마음을 자신에게 담아 누구에게도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존재 자체가, 에스라가 흐느끼고 울고 있는 모습 그 자체가 그 많은 사람들에게는 울리는 종소리와 같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이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항상 그 옆에는 손수건이 필요한 사람이 되어야 됩니다. 기독교 교양론에서 어거스틴이 남긴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삶의 방식이, 혹은 삶의 형태가 가르침의 풍부함을 결정한다.” 그래서 전도에 꽂혀서 일주일 내내 미친 듯이 살았던 사람들은 전도에 대해서 말할 때 가르침이 제일 풍부합니다. 그러나 또 어떤 사람은, 가난한 사람을 위해 눈물을 흘리고 구제하며 일평생을 살아온 사람은 그 얘기를 할 때 가르침이 제일 풍부합니다. 그러면 우리 설교자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솔라 스크립투라’, “오직 성경” 말씀에 대해서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정말 어려운 것입니다.
저의 30년 목회 경험에 의하면, 일주일 동안 강대상에서 목회자의 눈물이 마르면 주일날 목에 핏줄을 세우며 설교를 해도 성도들의 마음은 좀처럼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강대가 눈물로 흠뻑 적셔질 때, 그때 가르침의 풍부함이 결정됩니다. 그래서 나는 너무 단순한 예를 들었을 뿐인데, 아주 짤막한 구절을 이야기했을 뿐인데, 성도들의 가슴에는 롱기누스의 창처럼 그렇게 옆구리를 깊이 찌르고 거기서 물과 피를 모두 쏟아내어 새사람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손에서 손으로 쥐어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확실한 것 하나는, 설교를 들으면서 눈물을 흘렸던 사람, 성경을 읽으며 흐느꼈던 사람은, 설교 속에서 그렇게 해야 한다. 내가 온 마음으로 설교하면 저 영혼들이 그렇게 흐느낄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과 소망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제가 아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 가운데 항상 빼놓지 않는 기도가 여러 개도 아니고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깊이 경험하고 능력 있는 설교자가 되게 해 주십시오.” 주님을 깊이 만나면 여러분이 울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불쌍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너무 거룩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한 말씀도 안 하셨는데, 백성이 죄를 지어서 울고 있는 게 아니라 백성이 죄를 지어서 울고 있다면 죄를 지은 당사자들이 울어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지금 그 죄하고는 아무 상관도 없는 에스라가 울고 있는 이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 때문에 울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 때문에 통곡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죽고 싶었을 것입니다. 이런 세상을 보느니 ‘차라리 내 생명을 거두어가소서’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깊이 경험하는 일주일의 삶을 살아야 됩니다. 그러면서 많은 눈물 속에서, 그래서 마치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울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처럼 그렇게 한 주간을 보내고 일평생을 보낼 때, 그때 짧은 한 마디의 말이 한 사람의 인생의 항로를 바꾸어놓는 나침반이 되는 것입니다.
나는 조수미의 시디(CD)를 거의 다 샀습니다. 그런데 한 여덟 장 사고 나니까 그다음에는 이제 그분의 한계를 알게 됐습니다. 그래서 안젤라 게오르규도 그렇고, 안드레아 보첼리도 그렇고, 요나스 카우프만도 그렇고 어쨌든 한계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탈리아 로마 스칼라좌라는 그 극장에서 여덟 번의 노래를 부른 사람은 동양인으로서는 조수미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조수미 씨가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저는 노래하기 위해 무대에 섰을 때 마음에 목표를 가지고 노래를 시작합니다. 내 노래를 듣고 모든 사람이 쓰러질 것을 기대합니다.”
설교자가 그래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온 힘을 다해서 성도들의 눈에 설교자는 안 보이고 거기서 흐느끼시는 하나님, 나에게 가슴 깊이 말씀하시는 하나님, 교만하던 나를 롱기누스의 창, 롱기누스의 창 아십니까? 내 입술을 찌르는 그 창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롱기누스의 창으로 나를 찌르시는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러면서 그 사람들이 그렇게 쓰러질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온전한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편의 설교는 한 사발의 피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목회는 토혈의 목회, 피를 토하는 목회, 마지막 죽을 때 피를 토하면서 유언을 남기고 죽는 것이 토혈의 목회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여러분의 부서에서 에스라와 같은 인물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