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수주일 특강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되어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계 1:10)
녹취자 : 오희열
그냥 설교를 하려고 하다가 아무래도 여러분은 들을 기회가 없고, 한 번쯤은 정리를 해 드리는 것이 여러분의 목회에 큰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해서 오늘 주일성수라는 것이 무엇이고, 우리가 어떻게 주일성수를 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지금 한국 교회는 주일성수의 문제가 잘 정리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하고, 같은 보수적인 교단 내에서도 의견들이 많기도 해서 갈등이 있는데, 그런 것을 한 번 정리해 보려고 합니다. 우리가 교단은 각기 다르겠지만 청교도들이 주일을 어떻게 지켰는지, 그 청교도들의 주일성수 중에서 어떤 것들을 우리가 받아들이고 어떤 것들을 이 시대에 새롭게 해석해야 할지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순서는 우선 주일의 규정과 성수방식, 청교도들의 주일 성수, 전통에 대한 평가, 그리고 제언, 이 순서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우선 첫 번째로 보면 우리 시대에 주일을 지키는 방법이 크게 네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편의적 자유주의 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복음의 시대가 되었는데 그까짓 거 아무렇게나 하면 어떠냐?”하면서 자기 편한 대로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보수적인 신학교의 졸업생 하나가 우리 교회의 교역자가 되겠다고 지망을 했습니다. 그래서 주일에 대해서 물어보았습니다. “주일에 놀러가도 됩니까?”, “갈 수 있습니다.”, “쇼핑을 해도 됩니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주일에 댄스장에 가는 것은 어떻습니까?”, “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당신은 주일에 못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했더니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것이 편의적 자유주의입니다. 이런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 다음으로는 치우친 일원론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꼭 11시에 모여서 드리는 예배만 예배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 전체를 드리는 것을 예배라고 로마서 12장에서는 말합니다. 우리가 사실은 하나님 앞에서 직장생활 잘 하고 농사를 잘 짓고 부모를 공경하고 자녀를 잘 기르는 것도 예배입니다. 그런 점에서 주일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일주일 내내 주님을 섬기며 살아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주일과 평일의 차이가 없다고 하는 것이 일원론입니다.
그런가 하면 이원론이 있습니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는 세상에서 일하는 날이고 주일은 주님의 날이기 때문에 철저히 이것들을 나누어서 주일에는 차를 운전하다가 기름이 떨어지면 그냥 그 자리에 차를 세워놓고 온다거나, 더 심한 경우는 주일에는 바퀴달린 것은 아무것도 타지 않는다, 심지어는 주일에는 외출하지 않는다, 주일에는 멀리 가지 않는다, 그리고 주일에는 생수도 사 먹지 않는다는 식으로 이야기 하는 것이 치우친 이원론입니다.
네 번째 경험적 축복론은 무조건 무식하게 주일을 지켰더니 하나님이 복을 쏟아부어주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에 대해서 모두 성경이 이야기하는 올바른 주일성수의 방식이 아니라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주일성수와 관련된 쟁점은 크게 세 가지 입니다. 일요일이 정말 주일이 맞는가? 안식교에서는 이런 말을 합니다. “원래의 Sunday라는 것은 태양신을 섬기는 날이었기 때문에 우리가 주일을 그런 날로 할 수 없다. 이것은 로마의 이교적인 풍습에 기독교가 물든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이 그들의 핵심적인 주장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당시에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신과 관계가 없는 날이 로마시대에는 하루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월요일은 달과 관계가 있고, 화요일은 전쟁의 신 ‘티르’에서 왔고, 수요일은 ‘오딘’, 혹은 ‘우든’이고, 목요일은 ‘토르’, 금요일은 오딘의 처인 ‘쁘레야’, 토요일은 땅의 신인 ‘사르투누스’와 관련됩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구약의 안식일을 토요일로 삼는 안식교에서는 안식일을 토요일로 지키는 것이 ‘사르트누스’를 기념하여 지키는 것입니까? 그렇게 말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로마시대 때 신들을 섬기는 풍습이 있어서 우리가 마치 농사의 절기를 정하는 것처럼 자기들이 정한 것입니다. 그것은 기독교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기독교는 일요일을 주님께 예배하는 날로 정한 후에, 당시에 태양신이 최고의 신이었기 때문에 형식은 일요일인데, 그 공휴일 자체를 기독교인의 휴일로 삼아서 하나님께 예배하는 날로 만들어서 내용은 남아있지만 그 속에 전체를 기독교로 채운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회갑’은 틀린 것이다, ‘회갑’은 ‘주역’에 나오는 동양의 사상에 대한 것이고 성경적으로는 ‘회갑’이라는 것이 없다고 말입니다. 성경에 ‘회갑’이 없으면 ‘칠순’도 없습니다. ‘팔순’은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를 않습니다. 회갑의 ‘갑’이라는 것이 열두 번이 돌아오는 것을 염두해두고 그런 주장을 하는데 사실 그것은 잘 모르고 하는 것입니다. 회갑이 있어도 우리는 가서 하나님께 예배하고 그를 축복함으로써 그렇게 60년 동안을 살아오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영광을 돌리며 그 명칭이 회갑이든 60회 생신이든 그게 뭐가 그렇게 중요하겠냐는 것입니다.
그 다음의 쟁점은 주일과 안식일의 연속성입니다. 우리는 자꾸 “안식일”, “안식일”하는데 이것은 견해가 나누어집니다. 주일이 구약의 안식일과 연속되어 있는 것이다, 혹은 불연속되어 있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연속되어 있다고 보는 사람들은 구약의 제사는 드릴 필요가 없지만 구약의 안식일이 마지막에 이루어지는 것은 종말에 이루어지는데 신약 때는 그 두 사이에 걸쳐있기 때문에 구약의 안식일을 계승하고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주장은 사실 일부의 주장이고 오히려 마틴 루터나 존 칼빈을 비롯한 유수한 개혁신학자들은 주일과 안식일이 불연속적인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이 사람들이 이렇게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중요한 이유가 있었는데 그것은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직전에는 “날”들을 수없이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365일 중에서 절반 이상이 많은 이름을 가진 절기, 날들이 된 것입니다. 그 절기마다 온갖 미신적인 일들이 행해졌습니다. 그래서 주일이 그런 많은 절기 중의 하나가 되는 것에 대해서 이 종교개혁자들은 단호한 반대 의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신약의 주일은 예수님에 의해서 이미 이루어진 구원을 기념하는 날이기 때문에 이 천지창조를 이루고 쉬는 것을 기념으로 하는 안식일과는 다른 것이라고 선을 그었습니다. 그래서 마틴 루터가 아주 충격적인 이야기를 합니다. “만약에 주일이 안식일이기 때문에 우리가 못하는 것이 있다면 나는 주일에 술도 마시고 춤도 추고 파티도 하고 다 하겠다.” 이렇게 이야기 할 정도로 강조하는 것은, “어디서든지 그날이 단순히 그날이기 때문에 거룩하게 된다면, 어디서든지 유대교적 근거를 두고 그것을 준수하게 된다면 나는 그날에 일하고 말타고 춤추고 연회를 열어서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을 제거하기 위해 어떠한 일이든지 하라고 명할 것이다.” 라고 충격적인 이야기를 합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마틴 루터가 주일을 짓밟아 버린 사람이라고 생각하라는 것이 아니라, 핵심은, 날이 날이기 때문에 거룩하게 되겠느냐, 천지창조가 이루어질 때 마지막 날, 그날이 토요일이니까 안식일로 정한다고 되는데, 그러면 제가 묻고 싶은 것이 이것입니다. 그러면 태양이 있는데 여기가 토요일이라면 반대쪽은 금요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6개월 동안 낮이 계속 되는 백야가 있는 북극에서는 날을 어떻게 계산을 할 것입니까? 그래서 이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들의 미신에 빠질까봐 주일이 주일인 것은 첫째날이냐 여섯째 날이냐 하는 것 때문에, 무슨 요일이기 때문에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이날은 우리 모두 하나님께 예배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의 가르침을 받아 우리의 영혼을 살찌게 하자고 정한 날이기 때문에, 그날에 주님께 예배하고 경배하기 때문에 그날이 거룩해진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비판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안식이 제도가 폐지되었다는 주장을 칼빈이 합니다. 날들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반대합니다. 그래서 구약에 나오는 모든 안식일의 율법을 그대로 주일에 지켜야한다는 것에 대해서 반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히려 칼빈의 경우는, 주일은 마지막에 이루어질,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고 이 세상에 완전히 천국이 실현 될 때에 완전한 안식을 누리게 될 텐데 그 날이 얼마나 행복하고 기쁘고 즐거운 날인지를 미리 앞당겨서 맛보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렸을 때가 기억나십니까? 먹을 것도 없고 가난할 때 가위를 짤랑거리며 엿장수가 옵니다. 코 흘리게 아이들이 새카맣게 모입니다. 그러면 호박엿을 잘라서 주는데 많이도 아니고 요만큼씩 잘라서 입에 넣어줍니다. 그리고는 “가서 고물을 가져와라.” 합니다. 그러면 할머니의 떨어진 신발, 구멍 뚫린 냄비, 형이 쓰다버린 책, 이런 것을 다 가져옵니다. 아이들이 먹을 것 없이 골목에서 딱지나 치고 놀다가 이 엿을 맛보고 나서 눈이 뒤집히는 것입니다. 개밥그릇, 형이 쓰는 책, 할머니가 벗어놓은 고무신, 뭐든지 다 가져와서 엿 바꿔먹고 그날 저녁에 얻어맞는 소리가 동네에 가득 들립니다. 그것이 바로 맛보기 입니다. 이처럼 천국이 그렇게 놀라운 날인데 그것을 미리 맛보게 해 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일입니다.
만약 어떤 성도가 주일을 지내고 나서, “아, 미치겠다. 정말 힘들다. 주일이 오는 게 무섭다.”고 한다면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제가 그럽니다. 왜냐하면 주일에 네 번, 다섯 번, 외부집회까지 나가면 여섯 번을 설교했었습니다. 나중에는 혀가 꼬여서 말이 잘 나오지를 않습니다. 젊었을 때는 다 했는데 나이가 드니까 주일에 그렇게 에너지를 쏟고 나면 수요일까지 몸이 회복이 되지를 않습니다. 수요일 오전까지 말입니다. 예전에는 새벽기도에 빠지는 것을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는데 월요일 새벽기도에는 나올 수가 없습니다. 월요일에 무리해서 새벽기도에 나오면 화요일까지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헤맵니다. 그럴 때에는 담임목사가 예배를 두 번 정도 인도하도록 줄여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도 계속해서 네 번 합니다. 교회를 새로 지었는데도 말입니다. 주일이 오면 걱정이 됩니다. 그래서 설교를 막 하면 안 되고 1부에 쓸 에너지 25%씩 나눠서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마지막에 가서는 잘 못하고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혀가 꼬여서 설교를 덮어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안 되잖습니까? 이런 것은 좋은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주일에 교회에서 하는 일들이 너무 많고, 특히 우리는 도시에 사니까 주일에 와서 모든 것을 다 해치우고 가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안 되고 그 날도 쉼이 있어야 합니다. 영적으로 육체적으로 말입니다.
그 다음으로 안식일에도 영속론이 있습니다. 아까 말씀드렸듯이 청교도들이 이런 영속성을 주장했습니다. 여기에는 배경이 있습니다만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사람들은 아주 상세하게 해야 할 일들과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을 규정했습니다. 그래서 안식일 제도의 영속론자들은 구약에 나온 제사만 빼고 안식에 하지 말게 되어 있는 것들을 지금도 그대로 지켜야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닌 것입니다.
다음으로 청교도들의 주일에 대한 신앙고백이 웨스트민스터에 나옵니다. 이것이 작성될 때의 역사적인 배경이 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우리 합동 측 교단에서 받아들이고 있는데 그런데 거기에 보면 주일 성수에 대한 기록들이 아주 엄격하고 자세합니다. 그것은 청교도들의 전통을 따른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문제가 있었습니다. 당시의 역사적 배경이 있었는데, 제임스 1세라는 영국의 왕이 “스포츠 선언”을 합니다. 1617년의 일입니다. 당시 많은 영국 목회자들은 철저한 청교도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그래서 목회자들이 주일을 엄격히 지키도록 꽉 붙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거기서 신앙이 좀 없거나 신앙심이 깊지 않은 사람들은 숨이 막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일에는 절대 다트 같은 게임이나 축구 같은 구기 종목의 운동을 못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왕에게 탄원을 보냈습니다. “못살겠다. 우리는 다른 날은 다 일하고 이날 딱 하루 쉬는 날인데 예배만 드리고 나면 오후에는 사냥도 나가고 파티도 하고 공도 차고 게임도 하게 해주지, 왜 우리를 이렇게 힘들게 하느냐?”고 말입니다. 그 당시 청교도들은 왕실과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왕실에서 개신교 신앙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고 가톨릭 쪽으로 기울어 있었습니다. 크롬웰 때에 약간 바뀌기는 하지만 그 후 헨리 8세 때 앤 볼린의 외도 문제를 가지고 이혼하겠다고 했는데 가톨릭에서 허락하지 않으니까 그냥 성공회를 만들어버리는 사건까지 일어납니다. 이런 역사를 볼 때, 왕실과 청교도와의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이 스포츠 선언이 발표되자 청교도들은 하나님의 교회에 대한 엄청난 도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래서 여기로부터 반대로 더욱 주일을 엄격하게 규정해버린 것입니다.
그러면서 엄격적인 주일 성수를 이야기하는데, 아주 핵심적인 내용은 청교도들은 주일 성수의 개념을 엄수주의에서 가져왔으며 이는 그들이 당시에 처한 정치적인 상황아래에서 주일이 신학적으로 특별은총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일반은총의 빛 아래에서 해석되어야 한다는 신학으로 나아갔습니다. 이때 청교도들의 시대는, 영국의 산업혁명이 1700년대에 일어나고 다른 나라보다 가내수공업이 발달하고 수출까지 이루어지게 됩니다. 계속되는 흉년과 농지문제로 농사를 짓는 일이 원만하지 않고, 농한기에 유휴인력들이 공장으로 대거 취업하게 됩니다. 거기서 가내수공업제품들을 만들어서 외국에 수출하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이때 영국의 인구가 520만정도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종사하면서 많은 일을 합니다. 그러다가 시대가 흐르면서 많은 사람들이 농촌을 버리고 도시로 모이게 됩니다. 그러다보니 공장은 한정되어있고 일하겠다는 사람들은 많아진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그들의 품삯이 떨어지게 됩니다. 밥만 먹여줘도 일하겠다는 사람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저는 아직도 기억합니다. 우리가 아주 어렸을 때, 열 살 미만의 때쯤에는 하루 세끼 밥만 먹여주면 하루의 노동력을 제공했습니다. 해 뜰때부터 해 질 때까지 말입니다. 그런 정도로 가난했던 나라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영국에서도 일을 하겠다는 사람이 많으니까 불평을 하면 내보내는 것입니다. 하루에 열여섯 시간씩 노동을 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청교도들은 주일, 안식일의 문제를 그냥 주일에만 특별 은총적으로 볼 게 아니라 일반은총에 까지 확대해서 봐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주일은 일하면 안 된다고 강력하게 이야기하고 목회자들이 시장통행금지령까지 내리게 됩니다. 만일 교인이 시장을 통행하면 교회에서 징계를 하는 것입니다. 만약 노동자라면 밥을 먹고 살기위해서 어쩔 수 없지만 사업가인데 은혜를 받고 목사님이 주일에는 절대 일하지 말고 일을 시키지 말라고 이야기를 하면 이 사업가의 공장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공장을 쉬고 사람들을 쉬게 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또 생기는 문제가 과연 월급을 주면서 쉬게 했을지 말입니다. 그것은 또 별개의 문제입니다. 어쨌든 이 목회자들은 이렇게 강력하게 교회에서 나갈 때 최소한 교인들은 이것을 지킬 것이고, 그러면 노동자의 복지증진에 기여를 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지금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그 당시에는 너무 비참하게 노동자들이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해석을 한 것입니다. 안식일과 주일이 단절되었다고 하는 종교개혁자들의 의견으로는 이런 적용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시대가 달랐습니다. 종교개혁시대와 이때는 100년 정도 차이가 나니까 각기 자기가 살던 시대가 달랐기 때문에 주일 문제에 대해서 각기 다른 견해를 가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청교도들은 청교도들의 시대대로 이해가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찰스 1세가 불을 질러 놓습니다. “왕이 명령하니까 오전에 예배를 드리고 나서 오후에는 공도 차고 고기도 잡으러 가고 사냥도 하고 댄스파티도 하자! 왕이 시키는 대로 하자!”하면 거의 신앙을 포기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 것입니다. 그 수는 정확하게 기록에 나오지 않지만 어떤 학자들에 의하면 1천명 이상의 사람들이 목회지를 잃어버리고 쫓겨나게 되었다고 합니다. 왕명에 거역했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투옥되고 고문당했습니다. 이런 끔찍한 상황에서 자기들의 엄격한 주일 성수개념을 양보하면 그것이 곧 배교로 인식되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청교도들이 일부러 주일을 엄청나게 강하게, 어떤 면에서는 종교개혁자들에게 물려받은 것 이상으로 강력하고 엄격한 주일성수의 규정을 만들었고 그것이 우리 합동측 같은 경우에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으로 전해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지금은 유명무실해졌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런 것은 아닙니다.
다음으로, 종교개혁자들과 신학적인 미세한 차이점들이 있습니다. 아까 말씀드렸듯이 종교개혁자들과 청교도들의 똑같은 점은 안식일과 주일이 똑같이 연결된 것이 아니라 잘라졌기 때문에 주일은 아무렇게나 지켜도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이 불연속성을 강조했어도 확실한 것은 두 가지가 핵심이었는데 주일은 이유여하를 불문하고 노동으로부터 쉬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쉽게 말해서 주일에는 일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번만 일을 하면 어마어마한 징계를 내린다고 한다면 사안에 따라 다를 것입니다. 교회의 지도자인 목사나 장로가 그랬다면 용납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교인들은 해도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주일에는 노동으로부터 쉬어야 한다. 그리고 몸과 마음을 모두 하나님께로 모아 그분께 예배하고 그분께 말씀으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영혼의 재충전을 받는 말로 그날이 구별되어야 한다는 이 두 가지가 핵심이었습니다. 첫 번째, 노동으로부터 쉬어야 한다. 두 번째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에 충만한 충전을 받는 날로 구별되어야 한다. 이 두 가지는 종교개혁자들이나 청교도들이나 양보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여기서 명확하게 찾을 수 있습니다. 어제도 제가 집회를 다녀왔는데 한 주일은 교회를 나오고 한 주일은 직장 가는 사람을 장로로 세웠습니다. 그게 말이 됩니까? 그러고 나서는 그것을 문제 삼아서 그 장로를 치리를 한 것입니다. 치리를 하려면 세우지를 말아야하고 세웠으면 치리를 하지 말아야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 자기모순이 어디 있습니까? 절대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이런 얘기를 합니다. 어쩔 수 없이 주일에 해야 하는 직업들이 있습니다. 소방서, 경찰, 직장에서의 당직, 이런 것은 어떻게 합니까? 군인, 60만 군인이 모두 주일이니까 편히 쉬고 예배당으로 가고 보초도 없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주일에 사고가 나서 피를 철철 흘리면서 병원에 갔는데 놀랍게도 우리나라의 모든 의사들이 그리스도인들이라 모두 예배드리러 교회에 가서 병원에 아무도 없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것은 우리 기독교 전통에서도 허락을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허락을 하지만 그게 권장 받을 만한 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자기가 의사이기 때문에 매주 병원에 가서 일을 봐야하기 때문에 예배를 못 드린다고 하면 자기 영혼에 유익이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허셀 포드 목사님의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어떤 장로가 주일에 교회를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장로님 왜 주일에 교회를 안 나오셨습니까?”, “목사님, 제가 안 온 게 아니라 못 왔습니다.”, “왜요?”, “아니, 목사님 입장을 바꿔 놓고 생각해보십시오. 교회를 가려고 성경을 들고 나오는데 송아지가 웅덩이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성경을 내려놓고 일꾼들과 그 송아지를 끌어내다보니 예배시간이 다 지나버렸습니다. 제가 죄를 지은 것입니까? 주일에 그것을 내버려 두어야 합니까? 예수님도 구해주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했더니 허셀 포드 목사님께서, “아닙니다. 그것은 죄가 아닙니다. 빠졌으면 구해내야지요. 그런데 장로님, 그놈의 송아지가 자주 빠지면 팔아버리십시오.”하고 명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우리 교회에서 이 강의를 산상세미나에서 했습니다. 강의를 듣고 도전을 받은 의사 선생님 한 분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한 달에 한 번씩 꼭 주일에 출근을 해야 했습니다. 그러다가 이 강의를 듣고 나서 너무 괴로워서 사표를 써 냈습니다. 그리고 믿음대로 살면 하나님께로 인도해 주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표를 받은 원장은 일 잘하던 젊은 의사가 사표를 내는 것을 보고, “왜 그러느냐? 월급이 적어서 그러느냐?”, “아닙니다. 월급하고는 상관이 없습니다. 저는 주일에 교회를 가야해서 주일에 근무를 못하겠습니다.” 했더니 원장이 한참 생각하더니, “그래? 그런 당신은 주일에 근무하지 말고 교회에 가라.” 했답니다. 보십시오. 믿음으로 살면 하나님이 길을 열어주십니다.
그 다음에 주일에 대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많은 생각들이 있습니다. 음식을 사 먹지 말라거나, 물건을 사지 말아야 한다는 것 등등 말입니다. 별의 별 것들이 다 있습니다. 제가 전도사 때, 목사님께서 이런 탁자를 사 놓으라고 토요일 밤에 명령을 하셨습니다. 토요일 밤에는 살 수가 없어서 사지를 않았습니다. 그랬더니 주일에 야단을 치셨습니다. 그래서 “목사님, 주일에 어디에 가서 사옵니까?” 했습니다. 그때는 주일에도 가구점이 모두 문을 열었습니다. “너는 어찌 그리도 융통성이 없니? 일단 가져오고 돈은 월요일에 주면 되지 않니?”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이게 맞습니까? 그게 뭡니까? 사서 가져오면 가져오는 것이고 말면 마는 것이지, 돈은 월요일에 주고 물건은 가져옵니까? 더 웃기는 것은 화폐개혁을 했을 때, 연세 드신 분들은 기억이 날 것입니다. 1962년도에 환에서 원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런데 그 마감하는 날이 일요일 12시였습니다. 엄청나게 많은 교회들이 이것을 가지고 고민을 한 것이었습니다. 헌금이 들어왔는데, 이 헌금을 월요일에 가져가서 바꾸었으면 좋겠는데 12시가 마감이니까 그 주에 들어온 헌금이 모두 휴지조각이 될 지경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겠습니까? 신앙이 좋은 사람들은 그것을 휴지조각 만들 각오를 하고 열심히 기도하고 끝냈습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들은, 교회에서 그것을 가지고 가서 바꾸었습니다. 이것은 제가 진심으로 말씀드리는 것이 아니라 시니컬하게 얘기하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목사님은 그 두 가지 방법 다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가서 바꾸는 것은 안식일 위반이고, 안 바꾸는 것은 교인들이 낸 이 엄청난 헌금을 휴지조각으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번 주에는 헌금을 하지 말고 다음 주에 새 돈으로 바꿔서 하라는 것도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예배시간에 헌금시간이 없어지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그걸 들고 은행에 가서 11시 59분까지는 있다가 12시까지는 제출을 하지 않고 12시 1분에 제출을 했답니다. 그것은 율법주의적인 요소가 남아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일성수의 문제와 많은 문제가 되는 것들이 ‘아디아포라’의 영역에 속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일에 물건을 사도되는가?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주일에 1부 예배를 드리고 하루 종일 물건을 사러 쇼핑을 다닌다면 이것은 안 되는 일입니다. 그럼 몇 가지 사는 것까지 허용이 되겠느냐? 그것을 누가 정할 수 있겠습니까? 몇 시까지 사면되느냐? 어디까지 정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것을 얼마까지 쓸 수 있겠냐? 누가 그것을 정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이러한 많은 아디아포라에 대해서 청교도들은 제임스 1세의 선언을 배경으로 해서 아주 엄격하게 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은 좀 달랐습니다. 그래서 그날이, 주일이 언제냐, 이것은 한 주간의 마지막 날인데 이것은 안식일의 개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빛부터 창조를 하시고 6일을 일 하신 다음에 쉬셨다고 해서 그날이 안식일인데, 안식일에서는 이 안식의 개념이 한 주일의 마지막입니다. 그런데 신약에서는 그 주일이 한 주의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구속의 개념과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안식은 창조와 관련이 있고 주일은 구속과 관련이 있는데 구속이 날의 시작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그것이 계기적인 날이 아니라 그냥 ‘하루’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날을 초대교회가 정했고, 우리는 그것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절대적인 것이라고 보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한 날을 정하면 그 날에 교회가 하나님을 기념하고 예배하는 날이 되면 되는 것입니다. 그 대신 요즘 이런 일도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토요일에도 예배를 드립니다. 주일에 멀리 가실 분들은 토요일에 예배드리고 가세요.”하는 교회도 신문에서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은 아닙니다. 교회가 공교회적으로, 전체적으로 합의를 해서 이것을 지켜야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는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안식일이라는 말이 희랍어 성경에 ‘사바티스모스’와 ‘카타파오시스’라고 나오는데, ‘사바티스모스’는 ‘육체적인 쉼’입니다. ‘카타파오시스’는 ‘영적인 쉼’입니다. 그래서 주일은 일단 몸도 좀 쉬는 날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영적으로도 하나님을 만나고 그 은혜 안에서 쉬는 날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다음 주부터 시작되는 한 주를 살아갈 수 있는, 육체의 자원과 영적인 자원을 함께 공급받는 날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교육을 시킬 때, 용돈을 줄 때도 주일에, 예쁜 옷을 사서 선물을 줄 때도 주일에, 그래서 주일에 뭔가 기쁘고 기대되는 일이 있도록 해야 합니다. 똑같은 잘못을 했는데도 주일이기 때문에 엄마가 놀랍게 용서해 주고 문제로 삼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다고 그 아이가 주일만 골라서 나쁜 일을 하면 안 되겠지만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아이들이 주일에는 놀라운 혜택을 본 다는 것을 아이들이 알게 해 주면서, 만약 주일이 이렇게 기쁘고 기다려지는 날이라면 마지막 날은 우리에게 얼마나 기쁘고 좋은 날이겠는지를 생각하게 해 주는 것입니다.
넘어가서, 이 당시에 노동자들이 고단하게 16시간씩 일하고 있었는데 이런 상황에서 청교도들은 주일에 노동자에게 쉼을 주어야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문제는 우리에게 두 가지 난점이 있습니다. 방종주의와 바리새주의입니다. 방종주의는 주일에 뭐든지 하는 것입니다. 제가 한 번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어느 교단이라고는 말하지 않겠지만 전도사 때였는데 굳이 주일예배에 와서 설교를 해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가서 점심을 먹으러 음식점에 갔는데 옆에 그 교회의 재정집사들과 장로들이 앉아서 식사를 하는데 우리는 물통에 든 물을 따라서 마시는데 그 분들은 주전자에서 물을 따라 마시는 것이었습니다. ‘단골이라서 따로 대접을 해 주는가보다.’ 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그 주전자 속에 맥주가 있었습니다. 그것도 참 비겁한 것입니다. 먹는 것이 자유롭다고 생각되면 그냥 맥주병을 올려놓고 따라 마시면 되는데 치사하게 밥상 밑에 주전자를 놓고, 거기에 OB맥주를 옮겨 넣고 주전자 뚜껑을 닫고 물 컵에 따라 마시는 것입니다. 그게 뭡니까? 주일이 그런 것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뭐든지 다 하고, 아침 일찍 예배드리고 놀러가는 일들은 비일비재합니다. 그런 것이 방종주의입니다.
그리고 바리새주의는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옛날에 우리는 주일에는 아궁이에 불도 떼지 않았다.” 그게 어쨌다는 것입니까? “나는 일평생 주일에는 바느질도 하지 않았다.” 이런 것들이 바리새주의입니다. 청교도들이 많은 유산들을 남겼는데 그 청교도들이 주일성수에 대해서 엄격한 견해를 이야기할 때에는 바로 그러한 역사적인 배경이 있었습니다. 그 정신을 우리들이 이어받아서 그 정신을 어떻게 우리의 삶에 구현할까를 생각해야지, 그것을 똑같이 흉내 내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종교개혁자들도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임스 패커라는 사람은 이런 얘기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청교도들이 자기시대의 표현으로 해석했던 제 4계명의 적용을 우리에게 엄격하게 부과한다면 우리는 율법주의를 늘리고 영속 시킬 뿐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이 기성의 적용을 물려받으라는 유혹에 거부하고 율법을 자신의 상황과 현실에 적용하려고 한다면 이 문제들을 판단하도록 인도해주는 적극적인 원리들이 청교도들의 해석에서 풍부하게 계시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면 이제 앞으로 주일 성수에 대해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입니다. 첫 번째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물려받지 말고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이 모여서 우리는 이 시대에 주일을 어떻게 지켜야할 것인지에 대한 신앙고백을 작성해야합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지금 여러분들에게 책을 한 권씩 나눠드렸는데, 그 책을 잘 읽으시고 이해한 후에, 주일학교 어린이부터 어른들에 이르기까지 주일이 신학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잘 가르쳐야합니다. 왜냐하면 주일이 어떤 날인지를 잘 알아야만 내가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를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차근차근 잘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한편으로는 율법적 바리새주의, 주일에 나는 이것도 안 했고, 저것도 안 했다고 하는 이런 율법적 바리새주의를 경계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조금만 주일을 자기와 다르게 지켜도 그 사람을 정죄합니다. 그래서 이런 것은 안 되는 것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주일에 물건을 가져오고 돈은 다음날 주라는 것은 대표적인 바리새주의입니다. 매매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면 가져오지를 말아야하는 것입니다. 매매(賣買)니까, 가져오고 돈을 주는 것이니까, 이 매(賣)도 하지 말고 이 매(買)도 하지 말아야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다 신학이 없어서 생기는 것입니다.
자유주의 방종은 더 나쁩니다. 주일이 무슨 특별한 날이냐고 하면서 주일에 교회 오고 싶으면 오고 오기 싫으면 안 옵니다. 심지어 요즘에는 “주일 지켰습니다. 너무 힘들어서 쇼파에 기대서 인터넷으로, 스마트폰으로 들었습니다.”합니다. 스마트폰으로 듣다가 전화 오면 전화 받고, TV나오면 TV보다가 합니다. 그게 무슨 예배겠습니까? 잘못된 것입니다.
그 다음에 더 중요한 것은 주일이 주일되기 위해서는 신자들이 영적으로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신자들이 주님을 깊이 만나서 은혜를 받으면 주일을 너무 사랑하게 됩니다. 제가 한 700명 모이는 곳에서 전도사 사역을 했는데, 구원받은 아이들이 없을 정도로 회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고 부흥을 주셨습니다. 그랬더니 얼마나 놀랍게 변하는지 40분 예배도 못 견디던 아이들이 180분 설교를 매주일, 몇 달 동안 들었습니다. 제가 180분을 설교했습니다. 90분하고 10분 쉬었다가 90분을 했습니다. 그런데 미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끝나고 나면 통곡하며 기도하고 점심먹고 와서는 모여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빌었습니다. 그렇게 교인들이 은혜를 받을 때 주일을 잘 지키고 주일에 하나님이 은혜를 충만히 받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주일에 환자들을 심방하고 가난한 자를 섬기고 영혼들에게 말씀을 가르치고 설교들은 말씀을 되새기고 경건서적을 읽고 가족들이 모여 예배를 드리면서 주일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이 영적인 변화를 받아야 생긴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그러한 변화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성령의 각성케 하시는 놀라운 영적인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체계적인 교리 교육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왜 세상을 창조하셨고 우리 종교의 도리가 무엇이고 주일이 무엇이고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야하고 마지막에 진짜 성도들이 은혜를 받으면 주일을 그리워하게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은혜 받았을 때 다 그렇지 않았습니까? 주일을 기다리고 있다가 깨끗이 옷을 갈아입고 아침에 일찍 가면 저녁예배 끝나고 어두워질 때까지 교회에 있어도 그렇게 행복하고 즐겁지 않았습니까? 그것은 교회에서 재밌는 프로그램을 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참된 부흥을 통해서 그 사람들이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는 것은 지금 나누어 드린 그 책을 꼼꼼히 읽으시고 이 책이 모자르다고 생각되신다면 인터넷으로 열린교회 홈페이지에 들어오셔서 세미나를 긴 시간 동안 한 영상이 있으니 그것을 들으시고, 이 내용을 잘 풀어서 교인들에게 가르치십시오. 이 책을 한 권씩 주고 가르치시면 좋고 그렇지 않으시면 부분적으로 복사를 해서 나눠주고 주일은 이런 날이라는 것을 잘 가르쳐서 주일을 혼란스럽지 않게, 주일을 좀 지킨다는 사람은 안 지키는 사람을 정죄하고 또 안 지키는 사람은 지키는 사람을 바리새인이라고 해서 자기 마음대로 주일을 안 지키고 마음대로 뭐든지 다 하고 그렇게 개념 없이 사는 일이 없도록, 그리고 주일을 잘 지키면 어마어마하게 복을 받을 것이라고 거짓말을 해서 성도들이 실족을 하기도 합니다. 내가 이렇게 오랜 세월 주일을 잘 지키는데 왜 사업도 잘 안 되고 아이들은 학교도 자꾸 떨어지고 힘든 일만 생기냐고 합니다. 그런 마음으로 주일을 지키면 안 됩니다. 주일은 하나님이 우리를 구속해 주신 은혜에 너무 감사하고 하늘의 신령한 것으로 자신을 가득 채우는 이런 은혜로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주일을 지키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