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목회자컨퍼런스
내가 간구하는 날에 주께서 응답하시고 내 영혼을 장려하여 강하게 하셨나이다. (시138:3)
녹취자: 김경애
오늘 이 시를 지은 사람은 다윗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한없는 감사를 드리면서 지난날들을 회고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회고하는 가운데 오늘 3절은 무엇을 회고하느냐 하면 하나님이 자기로 하여금 어려움 가운데 있게 하셔서 그래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게 되었던 때를 회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간절히 하나님 앞에 매달려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던 시련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기도했더니 두 가지 유익을 얻게 되었는데 첫째는 하나님이 그 기도에 응답해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 말고 또 한 가지 시인이 기대하지 않았던 것을 주셨는데 그것이 오늘 우리들 강의의 초점이 되겠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영혼을 장려하여 강하게 하셨나이다.’ 라는 말씀입니다.
로이드존스 목사님이 살아계실 때에 기자가 와서 물었답니다. ‘목사님! 설교와 기도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그랬더니 이 설교의 대가가 뜻밖에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설교는 항상 쉽고 기도는 언제나 어렵습니다.’ 우리는 설교의 대가가 아니니까 감히 설교가 쉽다고 말할 수 없겠지만 이분이 쉽다고 말한 뜻은 설교가 하찮다는 뜻이 아닙니다. 설교는 주님을 깊이 만나야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합니다. 공부를 안 하고 설교를 잘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씨를 뿌리지 않고 곡식을 거두려고 하는 사람처럼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가운데 어떤 분들은 이렇게 물으실 것입니다. ‘아, 공부를 많이 한 박사들을 불러다가 설교를 시켜보니까 별거 아니던데요.’ 그런 종류의 공부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 안에서 전심으로 주님을 추구하여 주님을 만나는 신앙의 감격이 있고 그 감격을 잘 성경적으로 풀어서 사람들에게 전달할 수 있는 지식이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단순한 이론적인 지식이 아니라 이론적인 지식인데 내 마음속에서 솟아난 주님과의 놀라운 만남을 전달해줄 수 있는 지식이 필요한 것입니다. 고기를 굽는 기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서울에서 어느 집에 패밀리 레스토랑이 있는데 그 집에 가면 고기를 구워서 스테이크를 주는데 고기가 그렇게 비싼 고기같이 생각되지는 않는데 참 맛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이렇게 맛있습니까?’ 그랬더니 이 고기를 굽는 석쇠가 팔천만원이랍니다. 그런 석쇠가 어떻게 생겼는지 나는 보지 못했지만 그러면서 그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면 기본적으로 굽는 석쇠 자체가 틀리기 때문에 고기 맛이 똑같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지식이라는 것, 이론이라는 것은 고기를 굽는 석쇠와 같습니다. 그래서 아주 좋은 석쇠를 갖다 놓았다고 칩시다. 그런데 올라갈 고기가 없습니다. 그러면 그 석쇠는 쓸모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해도 정말 주님을 만나 신앙의 감격을 누리는 이 영적인 기쁨이 없다면 전할 내용이 없는 것입니다. 반대로 만약에 우리들이 자신은 나름대로 무엇을 신앙에서 날마다 체험한다고 해도 공부하지 않는다면 그러면 자기가 만난 하나님을 올바르게 잘 증거할 수 없을 것입니다. 대부분 이단에 휘둘리거나 교회가 불건전하게 병드는 교회를 보면 은혜도 못 받고 공부도 안한 목사님이 아니라 공부는 안 해도 체험이 있는 사람들의 교회가 병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이 두 가지를 항상 유지하면서 일평생을 살아야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설교는 자신이 어느 정도 주님을 만나고 열심히 공부를 하고 이 두 가지를 결합시켜서 자신의 설교를 지속적으로 발전시켜 가면 설교를 하는 그 모든 과정에서 자신이 점점 더 설교에 능한 사람이 되어갑니다. 그렇게 되면 설교가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설교가 그렇게 어렵지 않거니와 설교를 잘하게 된 사람이 어느 날 한번쯤 실수하는 적은 있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설교 전체가 퇴보해서 지난달까지는 참 은혜로운 설교를 하다가 이번 달부터는 말도 안 되는 설교를 하고 그러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기도는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어제까지는 정말 충만하게 기도를 했는데 오늘 아침에 일어나보니까 마음이 싸늘하게 식고 도저히 기도할 수 없는 영혼의 상태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설교에는 대가라는 것이 있지만 기도의 대가라는 이야기는 여러분들이 들어본 적이 없을 것입니다. 기도의 대가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왜? 그 사람이 지금은 그렇게 기도를 잘해도 내일은 기도를 못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로이드존스 목사님이 ‘설교는 항상 쉽고 기도는 언제나 어렵습니다.’ 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목회생활에 있어서 묘미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이제 점점 기도하지 않는 세대가 되어갑니다. 예전에 우리들이 어렸을 때에 주일학교 다닐 때에 어렴풋이 기억해보면 목사님들이 목회라는 자체를 아주 원색적으로 원리적으로 정형화해서 생각했습니다. 목회의 길은 잠시 화면에 나온 것처럼 십자가를 지는 길이고 죽는 길이다. 한사람이 신학교를 가기로 결심한 것은 가난해지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박해와 핍박이 있고 심지어는 집안에서도 내어 쫒기기도 했습니다. 어디를 가도 사회적으로 목사가 대접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러던 때에는 오직 목회의 일념이 하나님 앞에서 이 복음을 위해서 사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이런 저런 생각하고 이런 일 저런 일을 하다가 안 되니까 목회의 길에 들어선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었고 뻔한 고생과 시련이 기다리는 길이었기 때문에 강력한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는 사람이 아니고는 감히 그 배고프고 춥고 힘든 길을 가겠다고 작정하지 않는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다릅니다. 저희가 신학대학원을 다닐 때만 해도 여학생들의 수를 한 학년에서 열서너 명밖에 안되어서 한 2년 다니면 얼굴을 다 외울 정도였습니다. 요즘은 어떠냐고 물었더니 여학생들이 80명에서 100명이랍니다. 그것도 한 학년에서 말입니다. 그러니까 엄청나게 많은 학생들이 특별한 목적의식이 없어도 신학교에 들어오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이런 때에 우리들이 점점 복음의 원래의 이치에서 멀어져서 목회를 하나의 사업처럼 생각하거나 그리고 직업처럼 생각하는 일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소위 이야기하는 마케팅교회라든지 아니면 교회를 성장시켜야 되겠다는 그런 많은 구체적인 계획들은 바로 이 사회에 있는 사업의 논리, 경영의 논리를 교회에 가지고 들어온 것입니다. 물론 교회도 사람과 그리고 경제적인 힘을 합쳐서 어떤 결과를 산출해낸다는 면에 있어서는 효율이 필요하고 조직도 필요하고 행정도 아주 중요합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 돕는 보조적인 역할에 불과한 것이지 그것이 마치 교회의 성패를 좌우하는 것처럼 중심에 서서 그래서 경영의 효율에 적합하지 아니하면 신앙의 본질까지도 내치는 이런 것들은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엊그제 우리 교인 하나가 와서 저한테 아주 굉장히 심각하게 흥분하면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자기의 친척인가 누군가가 다니는 교회가 있는데 자기네 교회의 변화를 이야기하면서 그 교회 자랑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담임목사님이 은퇴를 하고나서 젊은 목사님이 오셨는데 제일 먼저 하신일이 교회에 흡연실을 만드는 것이었답니다. 왜 그러느냐고 나이 드신 분들이 그러니까 교회가 담배 피는 사람은 못 온다고 하는 이러한 인상이 불신자들로 하여금 교회의 장벽을 높게 생각하도록 만든다는 것이라고 그래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은 그냥 교회에 와라. 그 대신 예배당에서 피면 냄새가 나니까 담배 피는 방을 만들어 줄 테니까 거기서 담배를 피워라.’ 그랬답니다. 그래서 우리 교인이 하는 이야기가 ‘아니 담배 피는 사람은 교회에서 담배를 피우면 되는데 술을 먹는 사람은 어떻게 합니까? 술 마시는 곳도 만들어 주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원래 우리의 목회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본받는 목회입니다. 그것이 바로 액체의 생애입니다. 저는 이제까지 60여권의 책을 썼다고 남들이 그러는데 의외로 제 책의 독자들 가운데 젊은 사람도 많지만 연세 드신 목사님들이 많습니다. 그 이유 중 하나가 무엇이냐 하면 저는 현대적인 목회의 방법을 신뢰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언제의 목회? 고전적인 목회입니다. 온 마음을 다해서 자기가 만난 하나님을 전하기 위해서 설교 준비를 하고, 그리고 뜨거운 사랑으로 심방하고, 설교를 할 때는 피를 토하듯이 외치고,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 그리고 원칙대로 교회를 이끌어가는 담대함, 그런 것들이 제가 좋아하는 목회의 방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는 액체의 생애였습니다. 그분의 생애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도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사람들을 위해 섬김을 받으신 것이 아니라 섬기기 위해서 땀을 흘리신 액체의 생애이셨습니다. 주님이 웃고 떠드셨다는 이야기는 성경에 한절도 안 나오는데 우셨다는 이야기는 세 번이나 나오고 히브리서에서는 심한 통곡과 눈물을 흘리셨다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러한 눈물의 목회였습니다. 마지막 액체의 생애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그분의 피의 목회였습니다.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죽으신 그 목회였다는 것입니다.
목회의 영광은 큰 교회를 짓고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오고 목사가 신문지상에 오르내려 TV프로그램에 나와서 저명인사가 되는 것 그것이 목회의 성공이 아닙니다. 목회의 성공이라는 것은 사람의 공력을 모아서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것이 아니라 자기는 사람들에게 잊히고 하나님의 뜻이 드러나서 그 사람이 아니었더라면 이루어지지 않았을 하나님의 뜻이 그의 액체의 생애 위로 성취되어 강물처럼 흐르는 것이 목회의 비전입니다. 우리가 이 길을 들어섰을 때 우리들이 성공하려고 들어섰습니까? 그러면 세상에서 잘나가던 사람들이 왜 그 직업을 그만두고 신학을 공부하게 되었을까요? 만약에 우리들이 목회를 하는 동기가 이 세상에서 받던 대접들보다 더 좋은 대접을 받기 위해 목회의 길에 들어섰다면 그것은 직업을 잘못 선택한 것입니다. 그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입니까? 우리가 종자가 달라서 처음부터 우리 어려서부터 하나님이 우리를 목회자의 집안에서 태어나게 하셔서 목회자의 길을 가게 하셨습니까? 물론 그런 분도 계실 것입니다. 저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목회자의 길이 따로 있었던 것이 아니라 남이 못 본 하나님을 만나고 남에게 보여주시지 않은 사랑을 보여주셨기 때문에 우리들이 목회의 길을 걸어가게 된 것입니다.
자꾸 소명이 무엇이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는데 소명은 우리의 무의식 세계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의식의 세계 속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비전이 소명이 아닙니다. 소명은 자신도 도저히 거부할 수 없고 회피할 수 없는 부르심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의식 속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을 해도 안 되고 저것을 해도 안 되니까 결국은 ‘하나님의 사인이다.’ 그것은 소명이 아닙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서 사업에 실패하고 학교에 들어가지 못한 모든 사람들이 다 소명 받은 사람들입니까? 아닙니다. 그럼 소명이란 무엇입니까? 그 소명이란 자신이 소명을 먼저 만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같은 죄인을 구원해주신 십자가의 은혜가 너무 크고 감당할 수 없어서 이게 은혜가 적을 때는 어떻게 그냥 주님을 생각하고 섬기면서 살았는데 이 은혜가 너무 크게 임하니까 이제는 도저히 정상적으로 이 세상에서 다른 직업에 종사하면서는 살 수 없는 것입니다. 누가 그렇게 하라고 시킨 사람이 있어서가 아니라 내가 만난 예수 그리스도, 이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마음을 가득 채워서 그래서 당장 그들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돕지 아니하고는 어찌할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소명이 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모든 소명의 첫출발이 ‘이런 일을 하면 성공을 하겠구나!’ 그렇게 해서 시작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세상도 없고 나도 없고 오직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입니다.
(찬양)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Was blind but now I see.
눈이 딱 뜨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만나고 인생의 진실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전에 자신이 인생의 꿈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정말 무가치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주님의 충만한 사랑 속에서 망아의 길을 걸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사랑은 끊임없이 자기를 생각하게 만드는데 비해서 우리를 감동시키는 하나님의 사랑, 십자가의 사랑은 망아의 삶을 살도록 만듭니다. 나를 잊어버리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소명입니다. 그때에 우리의 신앙생활에 놀라운 특징이 네 가지 정도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영혼에 대한 뜨거운 사랑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전도하는 것입니다. 어떤 영혼이 곤고하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 마음에 견딜 수 없는 연민이 솟구쳐 오릅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아주 뜨거운 사랑입니다. 중국의 어느 선교사는 중국에 갔는데 그렇게 중국 사람들이 모여서 설교를 해달라고 그래서 무엇을 해주었으면 좋겠느냐고 그랬더니 아무것이나 상관이 없고 길게만 해달라고 그랬답니다. 그래서 이 양반이 6시간 30분을 설교를 했답니다. 그분이 얼마나 훌륭한 분이신지는 모르지만 6시간 30분을 성경 한절을 가지고 계속 쏟아내는데 어느 정도의 깊이가 있겠습니까? 탁월하신 분이 아니면 말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너무 허기가 지니까 그 말씀이 그리워서 사무쳐서 그럽니다. 저도 미국에 가서 4시간 15분을 쉬지 않고 설교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 말씀에 대한 간절한 사랑이 사람들에게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세 번째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 앞에 깨끗한 신자가 되고 싶은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깊이 만난 사람의 결정적 특징입니다. 오늘 강의와 관련해서 마지막 네 번째 특징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넘치는 기도의 영입니다. 기도의 영은 사랑의 영입니다. 사랑하는 사람하고는 마주앉아서 잠깐 얼굴을 마주보고 이야기했는데 6시간이 흐르는가 하면 빚쟁이하고 만나는 것은 15초가 지났는데 3년은 함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기도의 은혜가 아주 넘쳐나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거의 기도하지 않는 세대입니다. 예배당을 가득 메우는 여러분들의 교인들 가운데 절반 이상이 지난주에 10분도 무릎을 안 꿇은 사람들입니다. 왜 그렇게 기도를 안 할까요? 안 해서 안하는 것이 아니라 못해서 안하는 것입니다. 기도가 되면 합니다. 얼마나 기도의 시간이 달콤합니까? 경험해보지 않으셨습니까? 기도의 시간이 달콤하기 때문에 기도가 되면 합니다. 정말 그래서 엎드려서 간절히 기도를 하면 시간이 잠깐 지난 것 같은데 세 시간, 네 시간, 그렇게 시간이 지나갑니다. 그런데 오늘날 그렇게 기도를 안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기도가 안 되기 때문입니다. 왜 안 되는 것입니까? 주님을 향한 사랑이 성도들의 마음속에서 많이 식었습니다. 그래서 기도가 안 되는 것입니다. 사랑의 정으로 우리의 마음이 움직이면 우리의 마음의 언어가 가득 차야지만 기도가 됩니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에 아무것도 없는 고요한 호수 같은 마음에 언어가 막 용솟음치게 하는 비결이 둘이 있는데 하나는 사랑에 사로잡히든지 분노에 사로잡히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여러분들, 목회를 하든지 무엇을 하든지 화가 나서 마음이 부르르 떨리면 수많은 말들이 솟아납니다. ‘저놈이 이렇게 말하면 나는 이렇게 말할 것이야!’ 실제로는 아직 그렇게 말도 안했는데 말입니다. ‘저 사람이 이렇게 말하겠지 그러면 나는 이렇게 말할 것이야!’ 이 말이 얼마나 언어가 많은지 밤에 잠을 잘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에 사로잡혀도 그런 언어가 생겨납니다. 그러면서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게 됩니다. 그럴 때 이 속에서 막 언어가 솟아나는 것입니다. 그때에 가장 기도를 잘할 수 있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들을 우리들이 밀어라고 그럽니다. 정말 사랑하는 사람과 이야기할 때에는 논리를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마음에서 솟아나는 대로 계속 퍼내면 퍼내는 것만큼 새로운 말이 계속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치 그때에는 내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인 것처럼 언어를 그렇게 쏟아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기도생활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기도의 유익을 두 가지로 이야기합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첫째는 간구에 응답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정말 간절한 목표가 있어서 하나님 앞에 몸부림치면서 기도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안 들어주실 때도 있지만 그게 사실은 안 들어주시는 것도 들어주시는 것입니다. 들어주십니다. 그럼 왜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데 모르신다면 말이 안 되지 않겠습니까? 알고 계시는데 그러면 왜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라고 그러실까?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이냐 하면 모든 좋은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가르쳐주기 위함입니다. 자,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목회를 하다가 교회에 돈이 없어서 간절히 기도를 했는데 돈이 생겼습니다. 그러면 그 기도한 사람은 즉시 주님께 감사합니다. 왜냐하면 기도했기 때문에 그것이 응답인 것을 압니다. 그런데 기도하지 않고 걱정을 했던 사람은 재수가 좋았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결핍 속에서 시달렸지만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기 때문에 돈이 생겼을 때에 반사적으로 하나님이 보내주셨다는 그 마음속에 확신이 오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해서 하나님은 기도하는 가운데 그것을 얻어내게 하시면서 우리를 계속 훈련시키시는 것입니다. 모든 좋은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오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사람들에게 주님이 좋은 것을 주신다는 것을 훈련시키도록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아시면서 기도할 때까지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나오는 구원의 역사를 보면 모두 예수님이 간절히 기도하신 꼭짓점들을 이으면서 구원의 역사가 전개됩니다. 예수님이 공생애 들어서셔서 제일 먼저 하신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갈릴리 회당에 오셔서 천국복음을 능력 있게 전해서 많은 사람에게 충격을 준 사역이었습니다. 언제 그 일이 일어났습니까? 광야에서 40일 동안을 금식하시면서 기도하실 때에 그 일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의 생애에 분기점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제자들을 사도로 삼으신 것이었습니다. 언제 그런 일들이 일어났습니까? 밤새워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내려오신 후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사도로 삼으셨습니다. 부활하고 승천하신 후에 약속대로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말씀하셨는데 사도들이 모여서 기도를 하니까 놀랍게 그 기도의 응답으로 성령은 보냄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복음이 유대인들에게 전해지자 당시의 사람들의 편견을 깨고 이방인들도 하나님이 사랑하신다고 하는 이 충격적인 사실을 깨닫게 된 것도 기도하던 고넬료와 기도하던 베드로를 통해서 하나님이 이상을 보여주셔서 알려주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아시아에 복음을 전하려고 몸부림을 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새롭게 복음을 전할 곳을 보여주신 것이 바로 유럽대륙이었습니다. 전파되는 복음의 경로마다 하나님은 먼저 기도하게 하시고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게 하셨습니다. 마치 기차가 어디든지 다 갈 수 있지만 철길이 깔린 곳을 향하여만 갈 수 있듯이 그렇게 기도를 깔고 그리고 그 기도의 철길로 하나님이 구원의 역사를 흘려보냈던 것입니다.
목회도 사람이 하는 것이니까 방법이 필요하다는 것은 충분히 인정할 수 있는 바이고 그리고 부지런히 좋은 목회의 방법이 무엇인지를 생각해야합니다. 여러분 어떤 사람들은 목수는 연장을 탓하지 않는다고 그런데 거짓말입니다. 정말 장인들이 쓰는 도구는 다릅니다. 저도 어디서 들은 이야기인데 미장원을 아주 크게 하는 사람이 있었답니다. 그래서 자기 친구가 와서 미장원에 놀러 와서 가위를 가지고 거울을 보고 코털을 자르려고 했더니 그 친구가 달려오더니 손목을 붙들면서 그것을 뺏더라는 것입니다. 이것가지고 왜 그러느냐고 그러니까 ‘너 그 가위가 얼만지 아느냐?’ 가위 4개에 천이백만 원짜리랍니다. 마지막 못쓸 때까지 이 가위는 절대로 갈 필요가 없는 가위입니다. 놀랍습니다. 전문가는 다릅니다. 그렇게 정말 목회를 하면서도 우리들이 지혜를 가지고 방법들을 가지고 잘 생각해야 된다는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놀라운 성령의 기름 부으심은 방법이나 제도위에 부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도구일 뿐이지 언제나 사람위에 부어집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사모하고 열망하는 그 사람위에 하나님이 부으셔서 그 사람을 새로운 정신과 능력으로 태어나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시인은 기도하니까 하나님이 응답해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안타깝게 여기시는 것이 당신의 사랑하는 종들의 몸부림치는 기도입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기억하시고 놀랍게 들어주십니다. 저도 교회를 개척하고 18년째 들어섰는데 사람의 생각으로는 아무런 길이 없는데도 하나님 앞에 상한 마음으로 매어달려 기도하면 주님이 놀랍게 들어주십니다. 그리고 그것은 아무리 지혜가 뛰어나도 미리 예측할 수 없는 방법으로 하나님이 역사하셔서 응답해주시는 적이 참 많습니다. 그것은 신앙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오래도록 기도하셔야합니다.
그런데 이 시인이 이런 것들은 남들도 다 발견하는 것이었는데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이 영혼을 장려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히브리말로는 ‘히트하르베니’ 라는 단어인데 이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이 영혼을 억세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이 우리들의 영혼을 간절히 부르짖는 기도를 통해서 우리의 영혼이 평소에는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을 감당할 수 있게 하고 이전에 영혼이 가지고 있었던 기능보다 더 최고의 기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단련시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말입니다. 한계 안에서 행동하는 것은 힘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번 다리를 벌리고 평소에 안하던 것 텔레비전에 가끔 나오는 운동선수들이 하는 것처럼 다리를 한번 벌려보려고 하면 찢어지는 것처럼 아픕니다. 폐도 마찬가지입니다. 숨을 쉬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힘껏 들이마시면 허파의 공기주머니 하나하나가 뜯어지는 것처럼 통증이 느껴집니다. 그런 것들을 통해서 안 쓰던 근육을 쓰면서 이 근육이 발달되어서 다른 사람이 도저히 할 수 없는 일들을 해내게 되고 호흡의 폐활량이 많아져서 달리기나 마라톤을 해도 충분히 산소를 공급할 수 있는 용량의 상승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시인이 깊은 고통 속에서 하나님 앞에 몸부림치면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여러분, 기도가 정말 간절해지면 호흡이 곤란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기도하면서 가슴을 치는 이유는 다른 사람이 보라고 때리는 것이 아니라 호흡이 어려워서 감정적으로 격해지면 핏줄에 피가 모이면서 이 속에서 통증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가슴을 쳐서 충격을 주면 그 핏줄이 확장되면서 답답한 기운이 덜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슴을 치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오늘날과는 얼마나 거리가 먼 일인지 한번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일제 강점기 있었던 일입니다. 평양의 아주 커다란 교회가 있었는데 이름만 대면 한국교회에서 다 알 수 있는 유명한 분입니다. 그 당시로써는 사실은 유학을 한다는 것은 30년대에 꿈도 못 꾸던 일이었는데 이 분은 그 당시에 동경에서 신학으로 유학을 하고 교회에 부임을 하셨습니다. 저는 직접 목격한 분들에게서 들은 증언입니다. 그런데 이분이 오시고 나서 이상하게 교회의 교인이 점점 줄었습니다. 은혜도 떨어지고 말입니다. 사실 그 교회 교인들은 자부심이 대단했습니다. 30년대에 외국에서 신학으로 유학을 하고 온 목사를 모시고 있는 교회가 신학교 다닌 목사도 많지 않았는데 얼마나 어려운 때였습니까? 급기야는 교회가 소속된 시찰회에서 왜 교회가 저렇게 잘 안되고 교인들이 줄고 있는지를 조사하자는 결정이 내려졌습니다. 그런데 주일날은 다 각각 자기 교회에서 설교를 하니까 평일 날 시찰위원 목사님들이 그 교회를 방문했는데 목사님은 안계시고 빈교회당에 갔는데 왜 교인이 점점 줄고 교회가 은혜가 떨어지는 지를, 그것을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빈 예배당에서 말입니다. 그리고 나오다가 교회에서 청소하는 사찰 집사를 만났습니다. 그래서 목사님들이 물어보았습니다. ‘이 교회가 이 목사님 오시고 나서 그렇게 교인들이 좋아하고 자부심을 느꼈는데 왜 자꾸 교인이 줍니까?’ ‘아 목사님 교회에서 쓰레질이나 하는 나 같은 사찰이 무엇을 알겠습니까? 저는 모릅니다.’ ‘참, 왜 그럴까?’ 그러면서 목사님들이 돌아서서 나가려는데 뒤에다 대고 ‘아참, 다른 것이 하나는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전에 있는 목사님은 새벽에 나와서 오래 기도하셨는데 이 목사님은 잘 안 나올 때도 있고 왔다가도 금방 들어가십니다.’ 그때에 거기에 모였던 목사님들이 깊이 동의할 수 있었답니다. ‘아, 그렇구나! 전의 목사는 큰 신학교를 나오지 못했어도, 그 목사님처럼 유식하지 못했어도 간절히 기도하면서 목회를 했더니 주님이 이만큼 복을 주셨고 이분은 공부를 많이 하고 오셨지만 결국은 기도를 많이 안하기 때문에 교회가 가라앉는 것이구나!’ 결정을 내렸답니다. 영국 청교도의 역사에 보면 교회가 어렵고 핍박을 받으니까 성도들과 목회자들이 모여서 교회당에서 기도를 했습니다. 그때 그 기도회를 시작하면서 사회자가 어느 청교도 목사 한분을 대표 기도를 해달라고 지명했습니다. 모두 그 목사님이 기도할 때만을 기다리고 무릎을 꿇고 눈을 감았는데 기도가 안 나와요. 아무리 기다려도 기도가 안 나와요. 사람들이 눈을 뜨고 서로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한참 지난 후에 목사님이 기도는 안하고 신음을 토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신음소리가 있고나서 또 한참 지난 후에야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탄식으로 ‘오호, 주님!’ 바로 그때에 성령이 강력하게 임하면서 사람들이 회개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오늘날 우리시대의 조국교회를 바라보시면서 정말 안타까워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없습니다. 간절한 몸부림이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 주범은 사실은 목사와 장로입니다. 어떻게 갈망이 없는지 해볼까요? 주일 11시면 예배를 드립니다. 극장 구경 갈 때는 15분전에 도착합니다. 그래서 팝콘도 사고 콜라도 삽니다. 그런데 예배당에는 5분전에 옵니다. 그리고 주차하느라고 씨름을 하고 그리고는 영화관도 영화가 상영을 하면 표를 안 파는데 교회는 예배가 시작되었는데도 사람들이 꾸역꾸역 들어옵니다. 하나님께는 고사하고 사람들에게도 미안하지가 않은 모양입니다. 그렇게 들어옵니다. 그리고 설교가 시작될 때까지도 계속 사람들이 들어옵니다. 그리고는 드디어 일어났다 앉았다 예배의 순서가 진행이 되고 설교가 시작됩니다. 우리 어렸을 때에는 목사님이 ‘여러분들이 두 시간 와서 예배를 드린다고 교인인줄 압니까?’ 그러셨습니다. 그러다가 중학교쯤 될 때에는 ‘여러분들이 1시간 40분 예배를 드린다고 신자입니까?’ 그랬습니다. 지금은 1시간 40분을 예배드리는 교회는 찾아보기 쉽지 않습니다. 제가 전도사로 있을 때 600~700명이 모이는 교회였는데 그 교회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언제든지 항상 11시에 시작해서 12시 3분에 마칩니다. 이 시간을 맞출 수 없으면 사회를 보시는 목사님이 ‘찬송가 378장 1절만 부르고 마치겠습니다.’ 이렇게 해서라도 시간을 맞춥니다. 목표가 무엇이냐 하면 예배가 끝나는 것이 목표입니다.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예배가 끝나는 것이 목표입니다. 그러니까 예배의 순서는 한없이 길어지니까 많아지고 시간은 짧아졌습니다. 그러니까 설교시간이 20분밖에 안됩니다. 그런데 그 20분의 시간을 사람들이 어떻게 보내는지를 2층에서 내려다보면 기가 막힙니다. 어떤 사람은 앉아서 아예 성경을 읽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아예 옆의 사람하고 주보에다가 써가며 필담을 나누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이미 다 인쇄되어서 나온 주보를 빨간 펜을 들고 교정을 봅니다. 그것 교정을 보면 무엇 합니까? 틀린 글자를 찾아내는 교정을 봅니다. 또 주보에는 읽은 것도 많습니다. 시도 실리고 그리고 그 다음에 헌금이 얼마 나오니까 세로로 몇 명 가로로 몇 명 곱하기해서 총액하고 나누어보기도 하고 곱해보기도 하고 그리고 주보 광고란에 들어가면 이제 교인들의 동정이 나옵니다. ‘아이 이집 아이 백일이구나! 아이 그 할머니 벌써 환갑이네!’ 그래도 아직 설교가 안 끝납니다. 그러면 도대체 예배시간에 하나님보다 높은 어디서 전화가 왔는지 핸드폰을 들고 밖으로 뛰는 것입니다. 그렇게 바쁘신 분이 뭐 하러 굳이 예배를 드리시려고 하는지 그렇게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또 예배당 뒤에서는 의자 밑으로 내려가서 고개를 숙이고 전화 통화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는가하면 뭐 졸다가 성경을 떨어뜨리는 사람, 별의별 사람이 다 있습니다. 제가 목사로서의 명예를 걸고 말하는데 그곳에 하나님은 안계십니다. 다 삽질하고 있는 것입니다. 절대로 하나님을 못 만납니다. 만약에 거기에 하나님이 오신다면 내가 제일 먼저 말리겠습니다. 거기에는 가시지 마시라고 말입니다. 뭐가 우스우십니까? 그것도 예배라고 인도하고 만면에 웃음을 띠고 검은 가운을 뒤집어쓰고 또 교인들하고 인사를 나눕니다. 장로와 목사들이 말입니다. 양심이 있는 사람들입니까? 아니 예배시간에 성도가 주님을 못 만났으면 만나게 해주고 성도들을 회개시키든지 그것을 못했으면 목사가 엎드려서 회개를 해야지 그것도 예배라고 인도를 해놓고 검은 가운을 입고 만면에 미소를 띠면서 악수를 하고 성도들을 보냅니까? 통계를 냈습니다. 예배를 드리고 나오는 100명에게 대문 앞에서 물어보았습니다. ‘오늘 예배를 드렸습니까?’ ‘네.’ ‘무슨 설교를 목사님이 어디에서 하셨습니까?’ 그랬더니 100명의 교인 중 95명이 모른다고 그랬습니다. 한번 해볼까요? 평신도들을 모아놓고 주일날 예배드린 설교 본문이 어디냐고 물어보면 서울 강남을 기준으로 20명중에 아는 사람이 4명밖에 안됩니다. 지방에 내려오면 더 심합니다. 그렇게 해서 어떻게 목회가 되겠습니까?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을 느낄 수가 없는데 시장에서 장사를 하고 회사를 다니고 애들 기저귀를 빨고 공부하러 학원을 보따리를 싸서 뛰어다니면서 생생하게 하나님을 만난다고요? 그런 거짓말이 어디 있습니까? 그래서 결국은 생각 속에는 하나님이 계시지만 삶속에, 마음속에는 하나님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도 목회자인 우리는 교회를 성장시키려고 혈안이 되어있습니다. 성장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목회의 영광은 한 사람이 진실하게 회개해서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목회의 영광입니다. 정말 시골에서 목회를 하는 친구가 있습니다. 그 친구를 만났습니다. 목회를 열심히 했습니다. 교역자를 못 구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기도하면서 해봐.’ 그리고 ‘서울에서 누가 여기를 내려오겠나?’ ‘그러면 교통비를 따로 준다고 그래봐.’ 그랬더니 그것을 교통비를 왜 따로 주느냐고 장로들이 못주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생각해봐라. 여기가 제주도인데 그러면 서울에서 교육전도사 월급 오, 육십만 원을 주는데 비행기를 타고 매주 내려오라고 그러면 누가 내려오겠느냐?’ 그러면 뭐라고 그러느냐하면 ‘김 목사! 여기는 비전이 없어!’ ‘아유 비전은 무슨 얼어 죽을 비전이냐?’ 그러니까 ‘아니 그럼 김 목사는 비전이 없냐?’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내 전공은 비전을 헐러 다니는 사람이다.’ 그랬습니다. ‘그러면 당신도 비전이 있으니까 방배동에서 땅을 사고 교회를 새로 짓고 이사를 하고 그러지 않았느냐?’ 그래요. ‘비전은 무슨 얼어 죽을 비전이야? 남의 교회 세를 들어 살다가 사람이 하도 모여서 갈 데가 없으니까 근처로 가려니까 땅이 하도 비싸서 시골 평촌으로 내려간 거지! 무슨 비전이냐?’ 그랬습니다. ‘나는 지금도 교회의 교인이 절반으로 줄면 나는 절반 팔아버린다. 뭐 모이지도 않는데 땅을 넓게 차지하고 앉아서 빈 건물을 놀리면서 엄청난 헌금을 거기에다가 쓸어 붓고 있느냐?’ ‘그래도 비전이 있겠지?’ 시골에 젊은이가 없다고 자꾸 그러는데 그렇게 젊은이가 탐나면 신촌에 가서 개척을 하지 왜 시골에 있습니까? 아니 없는 젊은이는 하나님도 못 보내주십니다. ‘아니 농촌에 봉사활동이야 보내주실 수 있겠지만 아무리 성령이 역사해도 서울의 대기업에 다니던 젊은이들이 은혜를 받고나서 나는 시골에 내려가서 채마밭이나 일구면서 살겠다고 그러는 감동을 주시겠냐? 그 사람도 도시에서 할 일이 있는데 말이야.’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되지요. 그게 부러우면 다 집어치우고 신촌에 와서 그래서 한번 커다란 교회하고 어깨를 겨루면서 해보든지 젊은이가 많은 강남에 가서 그러면 큰 교회 사이에 깃발을 올리고 한번 씨름을 해보든지 할 것이지 말입니다. 죽을 때까지 청년이 없습니다. 그게 만약에 목회에 낙심이 된다면 그 사람은 목회의 본질을 잘못 생각한 것입니다. 그럼 또 어떤 사람은 그럽니다. ‘아 당신은 도시에 있으니까 그렇지!’ 아 내가 언제 도시에 있겠다고 하나님 앞에 주장을 했습니까? 소명을 받고 제 생각에는 시골에 내려가서 봉사하려고 그러는데 안보내주셨습니다. 가기 싫어서 안간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아니 없는 청년들을 가지고 청년이 없어서 비전이 없다고 그러면 노인네들이 얼마나 실망하겠느냐?’
우리가 여름이면 교인들이 천명 내지 천백명이 시골교회로 전도를 갑니다. 목사님들이 교인들이 너무 없어서 전도를 못하니까 거기 가서 전도를 합니다. 30명씩 흩어져서 40개로 나누어서 전도를 합니다. 그것을 보면 열심히 전도를 합니다. 그러면 정말 할머니 할아버지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놀라운 것이 무엇이냐 하면 그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영혼이잖아요. ‘저것을 전도해서 어디다가 써먹을까? 헌금도 안하고 허리는 꼬부라져서 교회에 봉사도 못할 텐데.’ 그것이야말로 비즈니스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내가 시골목회자들에게 그랬습니다. ‘우리는 당신들을 섬길 테니까 당신들은 시골사람들을 섬겨라.’ 사람이 없다고, 젊은이 없다고, 인구 없다고 그러지 말고 원래 없는 것을 어떻게 하냐? 그게 부러우면 바글거리는 명동에 가서 개척을 해라. 그런데 그것이 아니면 감사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하고 기동 못하는 노인네들에게 가서 복음을 전합니다. 맨 처음에는 도회지 것들, 버르장머리 없는 것들 왔다고 작대기를 휘두르고 뜨물을 끼얹습니다. 그래도 살살 웃으면서 ‘할머니 왜 그러세요? 젊으셨을 때는 예쁘셨을 것 같은데.’ 그러면서 가까이 다가가서 마루 위에 걸터앉았다가 마루위에 올라가서 어깨를 주물러요. 노인네들은 어깨 주물러주는 것을 되게 좋아하십니다. 한번 주물러주기 시작하면 그만하라는 소리를 안 합니다. 한 사람은 뒤에서 어깨를 주무르고 한 사람은 앞에서 계속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이 지혜를 주셨습니다. 그것 가지고는 충분하지 않고 팔도 너무 아파요. 그래서 뜸을 뜨는 것입니다. 뜸을 뜨는 것을 좋아하십니다. 눕혀놓고 배를 걷고 할머니는 수족이 냉하니까 이 뜸을 떠야 된다고 그러면서 뜸을 뜨면 30분 동안 못 움직입니다. 요새는 더 좋은 것을 개발했는데 링거전도법입니다. 그래서 의사가 따라가서 할머니들을 다 진찰해보면 영양이 모자랍니다. 영양제를 걸어 놓아줍니다. 그러면 1시간 내지 두 시간은 조절하기 나름입니다. 바늘을 꽂아서 움직이면 안 된다고 가만히 계시라고 그럽니다. 그러면서 창세기부터 시작해서 계시록까지 계속해서 이야기합니다.
(찬양)
우리 죄와 강퍅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하시네.
놀랍게도 쭈글쭈글한 할머니들이 눈물을 확 쏟으면서 우시는 것입니다. 왜 그러느냐하면 영감도 죽었지요. 애들은 서울에 갔는데 연락도 없습니다. 혼자 살아가는 것입니다. 너무 외롭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다만 며칠이라도 매일 찾아가서 머리를 감겨드리고 어깨를 주물러드리고 뜸을 뜨고 발마사지 해주고 가지고 간 것 중에 내복이라도 하나 드리고 거기서 아예 양어머니를 맺어버리는 것입니다. 눈물을 막 흘리는 것입니다. ‘너희들은 참 나쁜 애들이다.’ ‘할머니 왜요?’ ‘그렇게 좋은 예수를 왜 이제야 와서 전해주니?’ 그 광경을 보면서 그 동네에 있는 목회자가 자기가 목회를 어떻게 해야 될지를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 사람들을 잘 돌보아서 그렇게 해서 섬기고 봉사하고 그러니까 도시교회에 도와달라고 그래서 햅쌀도 사주고 그러면서 도와주고 그러다가 마지막에 하나씩 하나씩 눈을 감기어서 천국에 보내면 되는 것입니다. 이제 아무도 사는 사람이 없다. 그러면 떠나면 되는 것입니다. 누구를 하나님이 크게 보시겠습니까? 그런 일들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세상의 어느 인간이 고생이 좋겠으며 인간으로 태어났는데 어느 사람이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사는 것이 행복하겠습니까? 그런데 기도는 그것을 버리고 내가 좋은 것을 버리고 주님이 좋은 것을 붙들고 살 수 있게끔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매달리는 것입니다. 그때에 정말 빛나는 가치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한때 80년대에 모이기만 하면 불렀던 찬송가 가운데 요새는 절대로 안 부르기고 결정한 찬송이 있습니다. 무엇인지 아십니까?
(찬양)
복음 들고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소돔 같은 거리에도 복음 들고 찾아가서 종의 몸에 지닌 것도 아낌없이 드리리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라. 존귀영광 모든 권세 주님 홀로 받으소서. 멸시천대 십자가는 제가 지고 가오리니
그런 찬송 이제는 거의 안 부릅니다. 가사 자체가 너무 부담스러운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의 변질된 상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면 그것은 무지하게 고통스럽습니다. 그런데 그 사용하지 않던 영혼의 근육을 하나님이 잡아당겨주십니다. 그래서 이 영혼과 정신을 강하게 만들어줍니다. 이 정신의 크기가 큰 사람이 영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작은 일에 달달 떨고 놀랍니다. 어느 병원에서 수술실에서 바깥에서 사람들이 귀를 기울이니까 대화소리가 들립니다. ‘너무 걱정 마세요. 맹장수술일 뿐입니다. 너무 겁먹지 마시고요. 괜찮습니다. 2㎝만 찢으시면 꿰매지 않아도 됩니다. 그렇게 너무 떨지 마세요.’ 이 사람들이 구멍으로 이렇게 들여다보니까 간호사가 달달 떠는 의사를 세워놓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환자에게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렇게 해서 목회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교인들이 큰일 났다고 콩 튀듯이 그래도 ‘괜찮다.’ ‘이러이러 합니다.’ ‘내가 안다.’ ‘어떻게 할 수가 없는데요?’ ‘할 수 있다.’ 떨고 두려워하고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을 때에 하나님께만 보여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실은 제가 큰 소리를 쳤지만 정말 저도 두렵습니다. 어린아이같이 어립니다. 나의 갈 길을 나는 모릅니다. 하나님 제가 어떻게 혼자서 이 일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매달리는 것입니다.
지하실에서 교회를 개척했는데 저는 일 년만 열심히 하면 300명이야 안모이겠는가? 그랬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겸손하게 해주셨습니다. 하여튼 떡을 치듯이 목회를 했는데 1년 했더니 50명이 조금 더 모였습니다. 그런데 참 신기한 것이 설교를 하면 사람들이 펑펑 울고 은혜를 받습니다. 그런데 두 가지는 절대로 안합니다. 헌금과 등록은 안합니다. 그래서 어느 날 이렇게 해서는 안 되겠다고 뜻을 세웠습니다. 새벽기도에 가서 뜻을 세웠습니다. ‘낮 12시까지 이 기도자리에서 일어나면 내가 사람이 아니다. 누가 이기나 한번 해보자!’ 그렇게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면 내가 지금 목회가 안 되는 어려운 이유를 환경, 사람, 이런데서 많이 찾았던 것을 기도하면서 하나님이 마음을 바꾸어주실 때 그것을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생각하도록 마음이 바뀌는 것입니다. 그리고 특히 예수님의 생애를 생각합니다. 만약에 이 길이 승승장구하는 길이라면 그리고 정말 노래 부르며 콧노래 부르며 걸어갈 수 있는 신나는 길이라면 그것을 왜 주님의 핏빛 십자가 사랑에 사무친 사람들만 가라고 그랬겠습니까?
오늘날 한국교회는 깊이 회개해야하는데 그중의 하나가 기도하지 않는 것입니다. 모든 설교의 힘은 목회자의 실천적 경험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목사님은 무엇을 설교하든지 마지막 결론은 성경 좀 읽으라는 것입니다. 전도를 열렬히 하는 목사님은 어디 성경을 읽어도 마지막 결론은 ‘그러므로 전도하자.’ 입니다. 강력하게 교인들을 꾸짖고 기도하지 않는 교인들에게 회초리로 때리고 나무라지 않는 오늘날의 안일한 강단은 무엇을 말해주고 있을까요? 일천한 경험이지만 18년 동안을 교회를 개척해보니까 교인들의 마음은 참 단단합니다. 목회자가 땀을 흘리며 기도하면 교인들은 겨우 몸을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목회자가 눈물을 쏟으면 교인들은 겨우 땀을 흘립니다. 교인들의 마음에 감동을 주어 뜨거운 눈물이 흐르게 하고 쇳덩어리처럼 그렇게 굳어진 그 뺨에 두 줄기 눈물이 흘러내리게 하려면 목회자가 이 강단에 엎드려서 피를 흘려야 됩니다. 목회자가 쏟아 내리는 기도의 눈물은 교회 밑바닥 속에 스며들어서 구석구석 흐릅니다. 쓴 뿌리는 말려 죽여 버리고 주님의 뿌린 씨앗들은 싹을 틔게 만들어줍니다.
영국에 가면 전설적인 목회자 요한 웨슬레가 목회했던 기념 예배당이 아직도 있습니다. 정말 어마어마한 선교와 목회의 업적을 이루었던 인물이기 때문에 이 감리교사람들에게는 존경심이 대단합니다. 거기를 목회자들 일행이 방문하게 되었답니다. 그래서 그 교회를 안내하는 사람에게 목사 한사람이 물었습니다. ‘여기서 우리 웨슬레 선생이 그렇게 큰 목회를 하고 영혼을 많이 구원했는데 그 비결이 무엇입니까?’ 그랬더니 ‘제가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쭉 돌면서 질문한 그 목사님보고 ‘강대에 올라가십시오.’ 올라가서 서보니까 ‘아니요, 아니요 뒤돌아서십시오.’ 뒤돌아서니까 웨슬레가 앉아서 설교할 때 앉던 의자가 있는데 ‘거기에 무릎을 꿇으십시오.’ 무릎을 꿇었습니다. ‘손을 모으십시오.’ 모았습니다. ‘그리고 무릎에 이마가 닿도록 굽혀보십시오.’ 굽혔습니다. ‘자 이제 다 되었습니다. 이제 우십시오. 그게 바로 웨슬레 선생이 여기에서 목회를 성공한 비결입니다.’ 무릎을 꿇는 것까지는 따라했는데 우는 것은 울어라. 그런다고 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목회를 하면서 만나는 어려움과 제약들은 너무 많습니다. 못된 교인들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그 사람들은 또 못되게 하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 같습니다. 돌아가신 이중표 목사님이 한번 그런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시골에서 목회를 하는데 장로 한사람이 어떻게나 젊은 목사인 자기를 괴롭히는지 미치겠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 장로 좀 바꿔주십시오. 제가 너무 고달파서 목회를 못하겠습니다.’ 며칠을 그렇게 울면서 기도했더니 하나님이 응답해주시더랍니다. ‘중표야!’ ‘네!’ ‘걔는 나도 못 바꿨다. 네가 변해라.’ 그 이야기를 다 신뢰하지는 않지만 정말 그것이 목회의 길입니다. 그때에 우리 목회자들의 유일한 무기는 예수님이 하신 그 뒤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찬양)
날이 어둡고 괴로울 때 주님 예수님을 나 생각해요 머리 둘 곳조차 없으시던 혼자 기도하시던 주님 생각해요.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래서 목회의 진액을 모두 쏟아 부으면서 기도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정결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주실 뿐만 아니라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던 우리들을 다르게 살 수 있도록 우리를 새사람 만들어주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입니다. 그래서 나는 오늘 여러분들이 제가 일평생 공부하고 지금도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데 무엇을 이야기하면 여러분들에게 강의를 못하겠습니까? 그게 그렇게 좋은 도움을 줄 것이라는 확신이 안 들었습니다. 뜻을 세우십시오. 내가 이제 하나님 앞에 목회자로서 기도의 삶을 살겠다. 내가 비록 지식과 세상의 지위에 있어서는 교인들에게 내노라 할 것이 없지만 온 마음을 다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의 모본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려 기도하면서 우리는 주님 자신을 추구하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중세에 경건했던 수도사 가운데 토마스 아퀴나스라는 수도사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하늘에서 보시니까 매일 그렇게 눈물을 흘리며 금식하면서 장가도 안가고 기도를 합니다. 이 사람이 아주 굉장히 부잣집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이 아이가 잘 자라서 아버지의 사업을 물려받고 귀족처럼 살기를 바랐는데 너무 일찍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오직 공부만 하고 예수님만을 위해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빠가 미인계를 썼습니다. 그래서 그림같이 예쁜 자매를 어디서 하나 불러다가 자기 아들의 공부하는 방에다가 유혹하라고 살짝 집어넣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림 같이 예쁜 자매가 들어오니까 깜짝 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혹에 빠지는가? 했더니 웬걸? 훨훨 타고 있는 난로의 뚜껑을 열더니 거기에서 타고 있던 나무토막 하나를 꺼냈습니다. 그러더니 불붙은 나무로 ‘사탄아 물러가라.’ 막 내쫒았어요. 그리고 그것으로 벽에다가 십자가를 그려놓고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그 사람이 쌓아올린 신학의 체계가 어마어마한 유산입니다. 어쨌든 그 사람이 기도를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아퀴나스야!’ ‘네?’ ‘네가 그렇게 매일 금식하며 눈물로 나한테 기도하는데 무슨 소원이 있니?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주랴?’ 아퀴나스가 대답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아무것도 필요한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눈물을 흘리며 애닮은 기도의 제목이 있는 사람처럼 금식하며 나를 부르느냐?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주랴?’ 그때 이 사람이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 나는 아무것도 필요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만일 주님이 나에게 무엇을 주시려거든 주님 자신을 저에게 주시옵소서. 주님은 저의 것이고 저는 주님의 것이옵니다.’
(찬양)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갑니다. 고통가운데 계신 주님! 변함없는 주님의 크신 사랑 영원히 주님만을 섬기리.
기도의 사람은 형통할 때에는 마음이 평안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집중할 수 있고 고난과 시련이 올 때에는 이 세상에서 받은 상처 때문에 우리 주 예수님을 더 간절히 바라보게 됩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평안할 때는 정욕에 시달리기 때문에 기도할 수 없고 시련과 고난이 올 때는 근심과 걱정으로 마음이 찢어지기 때문에 기도할 수 없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에게 기도할 수 있다고 하는 이유가 기도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기도할 수 없는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러한 심오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한 사람의 설교자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우기 전에 먼저 주님의 은혜로 채우고 그리스도의 눈물을 알고 마음속에서 솟아나는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은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모든 능력보다 뛰어나고 교회를 지혜롭게 경영해나가는 능력보다 훨씬 가치 있는 것입니다. 천국의 이슬로 흠뻑 젖은 가운데, 기도 속에서 아름다운 영혼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목회자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겸손하게 주님을 깊이 의지하며 아버지와 동행하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기도 많이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면서 우리의 모든 섬김의 사역에 우리의 눈물이 배일 수 있도록 그렇게 기도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반드시 생명을 살리는 목회가 될 것입니다. 우리 한마음으로 같이 기도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