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과 목자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23:1)
녹취자: 김경애, 조원정
시편 23편은 다윗의 시입니다. 다윗이 이 시를 언제 썼는지는 누구도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 시는 우리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목동시절에 양떼를 치면서 지은 시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뒤편으로 가보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라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보아서 많은 학자들이 이 시는 다윗이 인생의 말년에 산전수전을 다 겪고 쓴 시라고 봅니다. 이 23편은 크게 세 토막으로 나눠집니다. 1절은 전체 시의 총론을 보여주고 그 제목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다.’ 라는 것입니다. 2절부터 5절까지는 두 번째 토막인데 왜 하나님이 이 시인의 목자이신가 하는 근거를 하나씩 하나씩 보여줍니다. 세 번째 토막은 6절인데 여호와를 목자로 모신 사람이 미래에 대해 어떤 결단을 내리고 살아가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저에게 세 번 설교할 기회가 주어졌기 때문에 이 6절을 모두 설교할 수는 없고 가장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는 1절과 3절과 5절을 오늘과 내일 모레에 걸쳐서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우선 시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어렸을 때부터 늘 찬송으로 부르던 시편 23편입니다.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라고 말입니다. 왜 이 시인은 이 위대한 시의 첫 절을 ‘하나님은 나의 목자시니’ 라고 말하지 않고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라고 했을까? 라고 묻는 것은 사소한 질문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왜냐하면 이 하나님이라는 성함과 여호와라는 성함이 똑같이 그 주님을 가리키지만 그러나 그것이 강조하는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성함이 아주 여러 종류로 나옵니다. 그렇지만 그 많은 하나님의 존함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여호와’와 ‘하나님’입니다. 히브리어로 말하자면 ‘야훼’와 ‘엘로힘’이라는 단어입니다. 우리말 성경에서 하나님이라고 번역된 엘로힘은 유래가 어디일지에 대해서 많은 학설들이 있지만 그래도 비교적 많은 학자들의 지지를 받았던 이론 중에 하나가 엘로힘이라는 단어는 ‘울’이라는 단어에서 나왔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도토리나무를 가리킵니다. 바람이 많이 불고 기상의 이변이 일어나도 좀처럼 뿌리가 꺾이거나 쓰러지지 않는 강인한 나무의 상징이 바로 이 상수리나무였습니다. 여기에서 아마 신을 상징하는 말이 왔을 것이고 그것의 복수형태가 엘로힘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물론 다른 이론들도 있습니다. 어쨌든 이 하나님이라는 성함은 모든 인류에게 계시된 하나님의 존함이고 그 가장 중요한 의미는 하나님은 모든 만물들 위에 가장 강한 힘을 가지신 그런 위대한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엘로힘이라는 하나님의 성함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아니라 모든 이방사람들에게도 계시된 성함입니다. 이에 비해서 야훼라는 네 글자로 되어있는 소위 ‘테트라그라마튼’ 이라는 것은 사자로 된 하나님의 성함은 하나님의 본명과 같아서 이것은 오직 이스라엘 백성들에만 계시된 하나님의 존함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있는 독특한 언약관계를 지시하는 하나님의 성함입니다. 그러니까 이 하나님의 본명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관계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계시된 독특한 성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출애굽기 6장에 모세에게 하나님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계시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러면 그 앞에 나와 있는 여호와라는 이름은 어떻게 된 것일까?라는 또 다른 문제와 변론이 있지만 어쨌든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 선택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계시된 독특한 하나님의 성함입니다. 그러니까 시인들이 여호와라고 하나님을 부를 때 그것은 이미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있는 독특한 은총의 언약관계를 신학적인 배경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여호와라고 이름을 불리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를 우리가 말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눈으로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종종 어떤 나라를 방문할 때 거대한 유적지를 돌아봅니다. 그러면 그 옛날에 그 조상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를 막연히 짐작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건설하는 도시나 유적지 그리고 예술작품들을 통해서 그들의 정신과 혼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당신의 그런 하나님의 정신과 혼을 우리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 속에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요즘 우리는 하나님을 뒷집 아저씨처럼 부르고 심지어 농담 속에서도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이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눈에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 한분 밖에는 원래 아무도 없었고 모든 사물은 하나님께로부터 왔습니다. 모든 지식의 근원도 하나님 한분이고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학문, 지식과 지금도 알아가고 있는 모든 지식과 우리 머릿속에 있는 관념까지도 원래 하나님 안에 있던 것입니다. 잘못 안 것들은 하나님 안에 원래 있던 관념과 지식들을 우리들이 오해한 것입니다.
우리는 밤하늘을 바라봅니다. 그러면 수많은 별들이 하늘에 떠있습니다. 우리가 육안으로 하늘에서 관측할 수 있는 별들의 수는 6,000개쯤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이 우주는 신비하기 짝이 없는 곳이고 방대하기 이를 데 없는 곳입니다. 그 우주의 크기는 얼마나 되겠습니까? 우리는 그것을 예측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과학자들은 우주의 이 끝에서부터 저 끝까지의 거리가 160억 광년쯤 될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그러나 어떤 과학자들은 900억 광년이 넘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가봐야 소용없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1초마다 2,000㎞씩 우주가 폭발과 함께 팽창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이 어디입니까? 과학시간에 중학교 학생이 선생님께 물어보았습니다. ‘선생님 우주가 얼마나 넓어요?’ 선생님이 말했습니다. ‘그것을 내가 알면 여기서 너희들을 가르치고 있겠느냐? 그렇지만 이렇게 생각해보아라. 너희 집이 강남의 아파트라고 치고 온 지구가 아파트로 뒤덮여있다고 치자. 그때 너희 화장실에 빨간 전깃불이 들어오고 그리고 8개의 날파리가 그 빨간 전구 주위를 돌고 있다고 치자. 거기에 세 번째 날파리가 지구다. 그리고 너는 그 날파리 등에 붙어있는 세균만도 못한 존재다. 우리들이 태양 주위를 돌고 있는 별들의 가족을 태양계라고 부르고 수, 금, 지, 화, 목, 토, 천, 해, 명인데 명왕성을 잘려나갔습니다. 학자들이 이제는 태양계 가족에서 떼어냈습니다. 8개로 이루어져 있고 8개 주위를 도는 또 다른 위성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달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달 주위를 도는 위성들이 있습니다. 그 가족들이 모두 합쳐서 약 260개쯤 됩니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별은 항성을 가리킵니다. 항성은 항상 불덩어리가 되어서 빛나고 있는 별입니다. 그 260개의 별 중에 진짜 항성은 태양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런 태양같이 빛나 불타오르는 항성만 모여 있는 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제일 작은 단위를 은하계라고 부릅니다. 우리 은하계라고 부릅니다. 우리 은하계는 이 끝에서 저 끝까지의 거리가 약 100,000광년 정도 되고 옆으로 깔아놨을 때 두께는 약 900광년이 되고 중심은 훨씬 더 깁니다. 별들의 수는 약 1,000억 개쯤 된다고 추측하고 바람개비처럼 되어있는 모양 중에서 좌측 하단 정 중앙에서 약 26,000광년 떨어진 곳에 태양이 빛나고 있습니다. 칼 세이건 이라는 유명한 천문학자는 우리 은하계 별들의 수를 약 4조개라고 추산했습니다. 이런 은하들이 모여서 은하단을 이룹니다. 은하단들이 모여서 우주를 이루는데 우주에는 아마도 추측하기를 그런 은하가 약 1,000억 개 내지 2,000억 개가 있는 곳이 우주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도 폭발과 함께 수많은 별들이 생겨나고 사라지고 합니다. 그런 끊임없는 유구한 세월 속에서 잠시 태어나 100년도 채 살지 못하다가 사라지는 것이 우리의 인간입니다. 그러면서 그 드넓은 우주를 바라봅니다.
(찬양)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그 끝없는 우주의 무한한 크기를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인간은 얼마나 하찮은 존재입니까? 그래서 파스칼은 자신의 책 ‘팡세’에서 말했습니다. ‘우주의 무한한 공간의 침묵이 나를 두렵게 한다. 인류를 파멸시키기 위해서 온 우주가 무장할 필요는 없다. 수증기 한 방울이라고 충분하다.’ 라고 말했습니다. 신앙의 첫 출발은 이렇게 인간이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사실을 알고 또 하나는 하나님이 너무 너무 위대한 분이시라는 사실을 알고 두려워하는 것부터 신앙은 출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두려움은 공포에 사무치고 질린 두려움이 아니라 떨릴 정도로 두려우면서도 이상하게 도망치고 싶지 않고 점점 더 그 하나님께 이끌리고 싶은 사랑을 동시에 느끼는 것입니다. 떨리는 두려움과 이끌리는 사랑을 동시에 경험하면서 그 하나님의 위대하심 앞에서 자신이 이 온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행복이 이 온 우주의 가장 중요한 가치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나라는 존재는 그저 이 무한한 우주의 흐름 속에서 잠시 태어났다가 태어나고 흘러가고 변하고 소멸하고 사라지는 존재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에서부터 신앙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 위대하고 높으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비천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두 번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과 같이 더러운 인간을 하나님이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 없이는 자신의 존재를 생각할 수 없다는 마음으로 어린아이처럼 그분을 전심으로 의지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지금은 어떤 신앙입니까? 하나님을 깔봅니다. 그리고 막봅니다. 그리고 자신이 하나님과 같은 자리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을 하나님이라고 부르지만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은 입헌군주국의 실권 없는 왕 같은 존재이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대접은 해드릴 테니까 실제 권한은 행사하지 마십시오.’ 이것은 기본적으로 성경이 가르치는 신앙의 첫 번째 단계에서 단추를 잘못 끼우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정말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신 분이신가를 알고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까? 두 번째는 그런데 그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이 자기같이 미천한 인간을 사랑하셔서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기까지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 사랑에 이끌린 적이 있습니까? 이것은 기독교신앙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자, 그래서 시인이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그 하나님이 온 땅과 만물 위에 그렇게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인데 오늘 시인은 ‘my shepherd’ 1인칭 단수 소유격을 사용합니다. 감동입니다. 그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이 한 인간에게 1인칭 단수 소유격으로 불려 주실 수 있을 정도 수준의 존재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수준이 누구인지를 알려면 그 사람이 노는 사람을 보면 압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불려 질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이 시인은 그것을 굳게 믿습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너무 너무 두렵고 무서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아는데 그 하나님이 자신의 인생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면 그는 유신론자일수는 일지만 그리스도인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혹은 사랑은 여기에 있나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자기 외아들을 우리를 위한 화목제물로 주신 것입니다. 신앙은 그렇게 높고 위대해서 절대로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나 먼 그분을 가슴 벅차게 자신과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만들어주는 힘이 신앙에서 나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지 14년 3개월 된 어린아이가 어느 추운 겨울날 교회를 가다가 논둑에 엎드려서 통곡을 하며 울었습니다. 물론 가난했지만 그것은 가난하거나 이 세상의 어떤 것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제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기어 다닐 때부터 교회를 다녔습니다. 그런데 14년 3개월 되던 해 중학교 2학년 때였습니다. 주일날 교회를 가다가 논둑에서 엎드려서 울었습니다. 그 울음은 ‘나는 누구인가?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 어린 나이에도 죽는 것은 하나도 무섭지 않았습니다. 무서운 것은 매일 매일 사는 것이 무서웠습니다. 그것도 눈을 뜨면 사람으로 살아가야한다는 현실이 무서웠습니다. 그리고 ‘이 세계는 나에게 무엇인가? 우리는 무엇인가? 신은 정말 존재하는가?’ 엎드려서 통곡을 하면서 울었습니다. 오래 교회를 다녔지만 교회에서는 이에 대해서 아무 대답도 주지 않았습니다. 한참을 통곡하며 울고 이 아이가 일어나서 두 손으로 눈물을 씻었습니다. 그리고 결심했습니다. 평생을 무신론자로 살기로 결심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지금도 교회에 많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고민을 교회에서 답을 주지 않는 것은 죄입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일평생 인간으로 태어난 이유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인간의 제일 중요한 의무는 밥을 벌어먹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일을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럼 무엇입니까? 인간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서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계속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의무는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중요한 것은 그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아는 것과 함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찬양)
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라고 우리를 사람으로 지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인간의 진정한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인이 그 신앙 때문에 온 땅과 만물위에 높고 뛰어나신 하나님이 자신의 목자가 되시는 것입니다. 목자라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소위 두 개의 유비를 동시에 보여줍니다. 즉 시인이 언젠가 양떼를 치는 목동이었습니다. 그것을 생각하면서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니까 자기가 양떼를 돌보던 방식이 하나님이 자기를 돌보시던 방식과 유사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아닌 다윗이 하나님을 목자시라고 부를 때에는 느낌이 다른 것입니다.
그런데 목자라는 말에는 목자는 짐승을 치는 사람입니다. 그럼 소를 치는 사람도 목자고, 말을 치는 사람도 목자고 양을 치거나 염소를 치는 사람도 목자인데 우리는 이것을 읽을 때마다 항상 자신을 양이라고 생각합니다. 시편 23편을 눈을 씻고 다 읽어보아도 직접적으로 양이라는 말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읽으면서 자신을 소나 돼지나 개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리고 항상 자신은 양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의 문맥에서 보면 양은 긍정적인 짐승입니다. 그래서 ‘저 사람의 성품이 양 같아.’ 그러면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온순한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 글이 쓰인 팔레스타인의 문맥에서 보면 항상 양이 긍정적인 짐승만은 아닙니다. 제 가까운 지인이 이라크에서 오래 근무를 했는데 이라크 사람들이 하는 제일 험한 욕 가운데 하나가 ‘양 같은 놈’입니다. 그 사람들은 일꾼들을 쓸데에 다른 욕은 참아도 ‘양 같은 놈’이라는 욕은 못 참는답니다. 그들에게서 양 같은 놈이라는 것은 더럽고 분별력이 없고 머리가 나쁘고 이런 모든 모욕의 총체입니다. 성경이 양을 긍정적인 짐승으로 그리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조용한 순종과 바쳐지는 제물로서의 양입니다. 오히려 이사야 53장 같은 데서는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각기 제 길로 갔거늘’ 불순종하고 제멋대로 행하는 것이 양의 특성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라고 말입니다.
그러면 이 모든 것들을 고려해볼 때 우리는 이런 의문을 갖게 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양떼로 비유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꼭 믿는 사람만 하나님이 양떼라고 부르시는 것은 아닙니다. 불신자들도 인간이라는 이유 때문에 양떼로 불립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이 ‘내게는 아직 우리에 들지 않은 양들이 있으니 저들도 인도하여 우리 안에 있게 하여야 할 것이니’ 라고 말씀하시면서 불신자나 이교도들도 양이라고 칭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의문이 듭니다. 성경은 그리고 자연 속에 수많은 동물들이 있는데 왜 하나님이 꼭 우리를 넓은 의미에서는 우리 인류를, 좁은 의미에서는 우리 믿는 사람들을 왜 양이라고 부르셨는지 궁금하시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세계의 동물들은 각기 자기를 보호할 수 있는 기능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주 빠른 다리를 가지고 있든지, 기린처럼 목이 길어서 먼 거리에서 자기의 적들을 파악할 수 있든지, 말처럼 빠른 다리가 있든지, 아니면 맹수처럼 싸워서 이빨로 물어뜯을 수 있는 힘이 있든지, 카멜레온처럼 변신을 하든지, 하다못해 스컹크처럼 방귀를 뀌어서라도 자기를 보호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있습니다. 그런데 양은 그런 것이 없습니다. 제가 생생하게 내셔널 지오그라픽에서 봤습니다. 크기가 요정도 되는 아주 작은 염소만한 짐승인데 사파리에서 조용히 풀을 뜯고 있는데 사자를 만났습니다. 사자가 발견하고 포복으로 기어가는 것입니다. 엄청 배가 고팠던 것 같습니다. 드디어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작은 짐승이 깜짝 놀라서 미친 듯이 도망을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자가 전속력으로 질주하면서 덮치는 것입니다. 도저히 안 되니까 도망을 가다가 몸을 확 틀었습니다. 그런데 이 염소같이 생긴 짐승의 머리에 60센티 정도 되는 뿔이 달려있습니다. 몸을 돌리니까 전속력으로 달려오던 사자와 충돌했습니다. 그런데 그 뿔이 여기를 뚫고 뒤로 나와 버렸습니다. 그리고 사자는 쓰러졌습니다. 이 작은 짐승은 미친 듯이 몸부림을 치다가 사자의 피를 뿔에 묻힌 채 도망했습니다. 이 광경을 보던 사진기자들이 가서 팩을 붙이고 추적을 했습니다. 결국 한 두 달 있다가 사자는 죽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짐승이 자기를 보호할 수 있는 무슨 기능이든지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양은 그런 기능이 없습니다. 그리고 양이 근시인 것을 아십니까? 그리고 물을 엄청 무서워하는 동물입니다. 그래서 제가 읽은 자료에 의하면 흐르는 물은 마시지 못합니다. 그게 바로 2절에 나오는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이것은 번역을 전적으로 잘못한 것입니다. 히브리어 원문성경에 보면 ‘움직이지 않는 물 가장자리로 인도하시는도다.’ 이렇게 번역되어야합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흐르는 물은 마시지 못하기 때문에 왜? 물에 대한 극도의 공포심이 있어서 헤엄을 치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흐르는 물을 목동들이 흙이나 바위로 막아서 흐르지 않고 댐을 형성해서 고이게 만든 다음에 물을 먹이는 것입니다. 아무튼 양은 그런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무슨 메시지냐 하면 처음부터 이 양은 인간 곁에 살면서 인간의 보호를 받도록 만들어진 짐승입니다. 그러면 어떤 인간은 말합니다. ‘아니 그것 말고 야생 양 즉 산양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는데 전 세계적으로 산양이 멸종위기의 동물입니다. 산양이 혼자 산을 돌아다닐 때 맹수들의 포식자들의 도시락입니다.
그러면 뭔가 놀라운 메시지가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습니까? 인간은 만물의 영장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어떠한 커다란 덩치를 가진 짐승도 인간에 의해 포획됩니다. 몸무게가 10톤, 15톤씩 되는 고래도 인간에 의해 잡힙니다. 몸무게가 5톤씩 나가는 코끼리도 인간에 이해 포획되고 인간에 의해서 훈련되어서 땅을 갈고 짐을 나르는 교통수단이 됩니다. 인간의 키는 불과 170㎝정도 밖에 안 되고 시대를 더 거슬러 올라가면 110㎝밖에 안 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수많은 맹수들의 표적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존재는 생각하는 존재입니다. 그런 점에서 인간은 위대합니다. 그래서 모든 짐승 중에 어떤 짐승보다 가장 불안하고 불행한 짐승이 됩니다. 이 세상에서 자살을 하는 동물은 없습니다. 인간이 자신의 고통을 이기지 못해서 온갖 정신세계의 혼란을 경험하며 지금도 사이코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게 무슨 메시지냐 하면 ‘인간 너희는 기억해라. 너희는 처음 만들어질 때부터 독립해서 살도록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 가까이에서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며 하나님의 보호를 받으며 살도록 창조된 존재다. 마치 양들이 너희 인간에 대하여 그러하듯이.’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제일 인간에게 싫어하시는 일이 무엇이냐 하면 씩씩하게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씩씩하게 사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이 아닙니다. 인간이 그렇게 아름다울 때가 언제인가 하면 하나님을 의지하는 때입니다. 언제 기도가 잘 됩니까?
(찬양)
주님 없는 세상 평화 없네
오, 주 없이 살 수 없네
그때 기도가 잘됩니다. 마음이 제일 기뻤을 때가 언제입니까? ‘나는 나를 믿을 수 없어. 나는 나보다는 우리 예수님을 의지할거야.’ 그때 우리들이 가장 행복하고 평안한 사람이 됩니다. 나는 이것을 인간의 영혼의 아름다움과 연관을 짓습니다. 그래서 뭐냐 하면 하나님은 온 땅과 만물 위에 가장 뛰어나셔서 비교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아름다우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beauty of independent’, '독립미'입니다. 그에 비해서 인간은 그렇게 살 때 가장 추한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온 땅 위에 가장 높은 줄 알고 그리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돈이나 지위, 가문, 학벌, 이런 것들을 근거로 자신이 아주 뛰어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하나님을 덜 의지하고 살아갈 때 그 인간은 그런 동물은 인간에게 추함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세상의 일들이 모두 내 마음대로 안 된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자신이 그런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서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주님을 깊이 어린아이처럼 의지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의존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독립에 있고 인간의 아름다움은 의존에 있습니다. 그때 인간의 영혼이 가장 아름다운 상태가 됩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 이외에 하나로 존재하는 것은 없습니다. 모든 것들은 상호간에 서로를 의지하며 존재합니다. 물방울 하나도 수소 둘과 산소 하나가 합쳐져서 물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눈에 들어오는 모든 사물 가운데 심플한 것은 없습니다. 모든 composite 합니다. 요소와 요소들이 어우러지면서 어떤 사물들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상적으로 잘 조화를 이루고 있을 때 그것이 인간의 신체면 건강하고, 정신이면 온전하고, 사회면 행복한 사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모든 것들이 의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이 가르쳐주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의존하는 것은 너무 주체성이 없는 추한 것이기 때문에 네가 이 온 우주의 중심이고 네 행복이 이 세계에서 가장 고귀한 가치임을 알고 너는 독립하라고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이외에 어떤 소유나 쾌락이나 지위에 오르거나 지식을 소유하거나 함으로써 본격적인 행복에 도달하려고 하는 사람은 아직 한 인간으로서 철이 덜 든 것입니다. 쇠가 아니라 지각이 덜 된 것입니다. 그리고 신은 그런 지각이 들게 해주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단 무식하게 괭가리나 치면서 예수를 믿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머리가 하얗게 되어도 철이 들지 않는 것입니다. 호세아 선지자가 말했습니다. 이스라엘은 백발이 희끗희끗해도 아직까지도 철이 들지 않았다고 호세아 선지자가 한탄했습니다.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은 모두 명심해야할 것이 무엇이냐 하면 예전에도 자기 마음대로 살았고 왜 살았는지 몰랐지만 구원을 받고 예수를 믿은 다음에 이 사람이 사는 이유는 알고 사랑하기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우리 교인들에게 공부를 많이 시킵니다. 교리반 때마다 외우게 하는 라틴어가 있습니다. ‘스투데오 에르고숨’ ‘나는 공부한다. 고로 존재한다.’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 진리를 탐구하지 않는 사람은 짐승의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러면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것을 여러분의 인생의 이유라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 여러분의 인생에 중요한 관심사입니까?
자, 오늘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목자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면 목자라고 고백하니까 자기는 무엇이라는 것입니까? 대답을 해보십시오. 하나님을 목자라고 고백하니까 자기는 누구라는 것입니까? 왜 자꾸 그렇게 경계를 합니까? 눈치를 볼 시간이 없습니다. 두 번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마음을 안 열고 경계하면 여러분 손해입니다. 이 시인이 ‘하나님은 나의 목자이십니다.’ 라고 고백을 하니까 자신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까? 양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으로 돌아가 보십시오. 그러면 양이라고 자신을 생각하는 것은 곧 무엇을 보여주느냐 하면 그렇게 온 땅과 만물, 1,000억 2,000억 개가 넘는 은하로 이루어진 우주 그것도 항성의 수만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거기에다가 항성의 수가 아닌 위성의 수를 계산한다면 아마 우리가 알고 있는 수의 단위로는 표현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 어마어마한 이 우주를 하나님이 어떻게 창조하셨습니까? 말씀 한마디로 하셨습니다. ‘거기 있으라.’ 하고 하나님이 생각하시니까 모든 것들이 창조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 모든 것들을 지금도 이끌고 계십니다. 그래서 이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그 장악하는 힘에서 이러한 우주의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인터스텔라 라는 영화가 여기서도 상영이 되었습니까? 대답을 해보십시오. 어떤 사람들이 와서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고 합니다. 내가 그랬습니다. ‘거기서 이해하지 못할 것이 무엇이 있느냐?’ 우리 인간의 인식하는 차원에서 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이해가 가지 않지만 인간이 인식하는 차원과 하나님의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해하지 못할 것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 위대한 세계를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 위대한 세계를 하나님이 아니라 그것도 ‘있을지어다.’ 라는 한마디 말씀으로 창조하신 것입니다.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좁힐 수 없는 무한한 질적인 차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에 대해 전적인 타자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하나님이 그래서 인간에 대해서 전적인 타자이기만 하시다면 하나님이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시지만 하나님이 인간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인간이 알 수 있는 근거가 없는 것입니다.
최근 한 달 사이에 전 세계 물리학계를 뒤흔들어 놓은 엄청난 발표가 있었습니다.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이론에서 가설로 내세웠던 중력파가 hypothesis로 제시를 했는데 실험 속에서 관측이 된 것입니다. 발칵 뒤집혔습니다. 나는 그 기사를 신문과 잡지에서 읽으면서 뭐라고 그랬는지 아십니까? ‘당연하지’ 왜? 하나님이 당신의 위대한 힘을 이 모든 우주와 만물과 공간에 행사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그것을 설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모든 만물과 관계를 맺으시면서 그 힘을 가지고 하나님이 이 모든 세계와 우주를 통치하시는 것입니다. 한국에서 아주 세계적으로 저명한 과학자를 만났습니다. 그래서 내가 물어보았습니다. What is the energy? 에너지가 무엇입니까? 이 세계적인 과학자가 대답을 못합니다. 일상적인 이야기를 해서 그것이 아니라고 했더니 설명할 수 없다고 합니다. 왜? 하나님의 힘입니다. 설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셨습니다. 영국에서 리처드 도킨스 같은 사람이 나타나서 2층 버스에 광고를 했습니다. ‘하나님은 없을걸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있는 게 왜 걱정거리가 됩니까?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Dont worry there is probably no God.’ 썼습니다. 4주 동안에 2억 6천만 원이 광고비로 모금이 되었습니다. 알빈 플랜팅가라는 미국의 유명한 분석철학자는 아주 놀라운 변증을 제시했습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근거로 내세우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신이 있다는 세상이 이따위로 엉망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데 이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왜 너는 이 세상이 좋은 상태여야 되어야한다고 생각하느냐? 그것 자체가 네 의식 속에서 신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왜? 신이 없으면 세상이 엉망일수도 있다고 생각해야하는데 세상이 엉망인 것은 신이 없는 증거이고 세상이 잘되어야지 신이 있는 증거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고 인정을 받은 논리입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위대한 세계 앞에서 결국 인간이 그 하나님을 알고 사랑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일까? 그 똑똑한 사람이 그 모든 생물학과 그 모든 학문을 통달해서 마지막에 그 사람이 쓴 소위 논문 ‘시계공’ 이라는 책을 썼는데 그 모든 눈앞에 벌어지는 아주 기가 막힌 법칙처럼 보이는 놀라운 이 일치성은 무의식적인 진화의 힘이다. 신이 있는 증거일수 없다고 말입니다. 그것을 얼마나 결국은 이 세상에 있는 탁월한 학문이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증거를 하나님이 이 세계를 통해 아무리 많이 보여주셔도 한 가지가 없으면 그 하나님을 알 수도 없고 사랑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신앙입니다. 보이지 않는 그 위대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아 모실 수 있는 것은 신앙의 힘입니다.
그러면 오늘 이 시인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라고 했는데 이것은 무엇을 보여주느냐 하면 하나님이 어떤 방식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게 무엇이냐 하면 목자들이 양을 인도하는 방법입니다. 팔레스타인을 여행하고 온 어느 여행가가 글을 썼습니다. 목동이 양떼 한 1,000마리쯤 몰고 이쪽 풀밭에서 저쪽 풀밭으로 이동하는데 가운데 도로를 지나는 것입니다. 양들이 도로에 걸쳐있는데 소변이 마려운 것입니다. 목자가 어디론가 뛰어갔는데 양들이 움직이지 않고 서있는 것입니다. 차들이 경적을 울리면서 라이트를 깜박였지만 양들은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목동이 돌아와서 양떼들에게 소리를 내면서 가자고하니까 양들이 이 목동을 조용히 따라오는 것입니다. 짐승들은 막 겁을 주고 위협을 주면서 몰아가는 짐승이 있고 목동이 앞에서 이끄는 짐승이 있습니다. 소나 말은 전자처럼 인도하지만 양은 후자처럼 인도합니다. 그것은 무엇을 보여주느냐 하면 하나님은 여러분을 다루실 때에 인격적으로 다루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신앙은 머리에 드릴을 뚫어서 구멍을 파서 깔때기로 집어넣어서는 신앙이 들어가지 않습니다. 믿기 싫으면 안 믿어지는 것입니다. 믿고 싶다고 해서 믿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셔야 믿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성령은 안 믿으려는 사람에게 믿음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믿으려는 사람에게 믿음을 주십니다.
그러니까 제가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것이 그것입니다. 믿기 싫으면 그만두라는 것입니다. 그 대신 비겁하게 살지는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결론을 내리고 신앙을 내려놓든가 그것을 못하겠으면 진짜 예수님을 믿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예수를 믿으라는 것입니다. 자동차 면허시험을 볼 때 공부를 열심히 하십니까? 세례를 받을 때 공부를 열심히 하십니까? 여러분도 생각해보니 우스우실 것입니다. 자동차 운전면허시험은 늙어서 수족에 힘이 없을 때가지 자기 육체를 한 공간에서 또 다른 공간으로 이동하는 수단에 대한 면허입니다. 그런데 세례의 자격은 자신의 인생 자체를 움직일 수 있는 면허증입니다. 그런데 공부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것도 세례라고 받고 그리고 포도주 한잔 마시고 빵 조금 먹었는데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는 모릅니다. 그것이 무슨 신앙입니다. 제가 항상 질문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조금 정직해지고 용기 있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신앙이 아무리 노력하고 탐구하고 하나님께 기도해본 결과 신이 없다고 결론을 내리면 그만두라는 것입니다. 그 대신 그만둘 수 없으면 도대체 신앙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내가 무엇을 믿어야할지를 배우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논리적으로 맞는 것 아닙니까? 애매모호한 상태에서 마치 살기 싫은 부부가 자식 때문에 억지로 사는 것처럼 신앙생활을 하는데 자신도 행복하지 않고 교회도 행복하지 않고 아무도 자기가 신앙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행복한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무슨 그런 신앙이 있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인격적인 신앙으로 오십니다. 그 인격적인 신앙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고 그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사랑 때문에 순종하고 자기 행할 바를 행하면서 사는 신앙이 인격적인 신앙입니다. 얻어 맞을까봐 무서워하는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아가는 그런 신앙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도하시는 것은 사실이지만 어떤 방식으로 인도하시는지는 사람마다 조금씩 다릅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이런 방법으로 인도하시고 또 어떤 사람은 저런 방법으로 인도하시고 마지막에 내린 결론은 항상 하나님은 우리를 인격적으로 대하신다는 것입니다.
인격적이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하면 한 사람의 개인이 개인으로서 가지고 있는 존엄과 고귀성 토대위에서 상대방을 이해하고 자기를 이해시킬 수 있는 관계를 형성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위해서는 자신을 정확하게 상대방에게 알릴 수 있고 상대방이 누구인지를 공감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여기 영국도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의 아픔과 고통을 공감할 수 없는 소시오패스 등이 많이 생겨났습니다. 한국과 특히 미국에 그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최근에도 총기난사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인간이 다른 사람의 고통이나 슬픔, 기쁨 같은 것들을 공감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이 에너지를 축적한 훈련이 안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에너지가 고갈되어 버립니다. 심리학에서 번아웃 신드롬이라고 합니다. 어떤 끔찍한 일이 일어나거나 저질러도 죄책감이 없는 것입니다. 결국 한 인간으로서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영적이고 정신적인 자원이 완전히 고갈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행복할 수 없습니다. 야수와 같은 삶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조폭이 되기 위해서서는 공감능력이 현저히 떨어져야 합니다. 그래야만이 끔찍한 일을 저지를 수 있습니다.
자녀를 양육할 때 자녀와 부모인 여러분이 인격적이기 위해서 뭐가 필요합니까? 자녀와 자기가 이 자식! 너 죽어! 이게 아니라 엄마로서 왜 그렇게 시켜야 되는지 아이들에게 설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심정을 전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이는 부모의 심정을 헤아려서 듣고자 하는 의지와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양자 사이에 서로 능력과 의지가 있을 때 비로소 상호작용을 하면서 교육이 이루어지고 소통이 이루어지면서 인격적인 관계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신앙도 똑같습니다.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강조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하나님의 말씀을 습득하는 것이 하나님이 자기를 향해 가지고 계신 신경을 전달받을 수 있는 유일한 통로입니다. 기도는 자신의 그것을 하나님께 전달하는 방법입니다. 이것이 이루어 질 때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생각이 내게 전달되면서 그것들이 자기를 빚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빚어가면서 마지막에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형상 그 이미지를 갖게끔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격적인 관계입니다.
인격과 인격이 만나는 신비는 그 인격과 인격이 함께 관계를 맺으면서 희로애락을 모두 느끼는 것입니다. 문제는 희로애락은 신앙이 없을 때도 느꼈던 건데 희로애락의 방향이 자기중심적이었습니다. 신앙을 가지면서 희로애락의 중심이 하나님입니다. 분노하는 것도 자기가 침해받은 이유 때문에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때문에 분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때문에 사랑하고 슬퍼하고 기뻐하고 환희에 찬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향한 분노는 비열한 복수를 꿈꾸지 않습니다. 오히려 오래 참고 자기에게 악을 행하는 원수조차도 하나님이 바꾸어 놓으실 것이라고 하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언제나 오래참고 라고 말합니다. 인격적으로 하나님 앞에 설득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칼이나 도끼보다 훨씬 더 무서운 것입니다.
(찬양)
우리 죄와 강퍅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허락하시네
저에게는 아들 하나와 딸 하나가 있습니다. 제가 할아버지가 됐습니다. 2년 지났습니다. 아들이 내년에 목사가 되는데 착합니다. 엄마가 너무 속상해서 야단을 칩니다. 야단을 치면 자기 방에 가서 한참을 웁니다. 왜 우냐고 나중에 물어보면 자기가 엄마 마음을 저렇게 아프게 한 걸 생각하면 자기가 너무 괴로워서 자신의 마음이 아프답니다. 그 아픈 마음의 고통은 엄마한테 회초리를 맞는 고통보다 훨씬 큰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때 벌을 주시고 사업을 망하게 하시고 자동차를 뒤집어서 다 죽이고 자기 혼자 불구가 되게 하시고 이런 것에서 겨우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것은 유치찬란한 것입니다. 크리스천과 무신론자가 싸웠습니다. 무신론자가 말했습니다. 내가 하나님이 없는 것을 10초 안에 증명해 보마. 그걸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깜짝 놀랐습니다. 하늘에다가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을 하나님께 퍼붓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증명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욕을 했는데 너희 하나님이 000가 없지 않느냐? 옆에 있는 크리스천이 대답했습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이 살아 계신 증거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기 때문에 너 같이 무지해서 막말을 쏟아 붓는 인간이 회개할 날을 기다리시며 참으시는 것이다. 신앙은 인격적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영혼을 받고 기도로 하나님의 마음에 움직이는 이 두 개의 축이 없는 신앙생활을 거짓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자신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입니다. 인격적인 신앙생활입니다.
두 번째 보여주는 것은 목자는 양을 압니다. 그의 약함이 무엇인지를 압니다. 그리고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목동은 말을 몰 때 소를 몰 때 양떼를 몰 때 각기 다른 방식으로 몹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양떼와 같이 자기를 인도하시는 것을 발견합니다.
(예화) 제가 전도사 생활 할 때인데 그 교회는 유난히 공부 잘하는 사람이 모여 있었습니다. 그중에 제가 가르치는 청소년들의 선생님이 하나 있었습니다. 정말 똑똑했습니다. 지금 서울대 교수가 되었습니다. 자기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 시험이라는 것이 한 번도 떨어진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자동차 면허도 떨어져 본적이 없답니다. 그래서 시험에 떨어졌을 때 사람들이 어떤 비참한 마음이 되는지를 모르는 겁니다. 하루는 저 뒤에서 학부형 엄마하고 이야기를 합니다. 왜 그렇게 긴 이야기를 하냐고 했더니 그 아들이 하도 공부를 안 하니까 속상해가지고 선생님께 털어 놓는 것입니다. 선생님 공부 잘 하는 것 아니까, 그렇게 공부를 못한답니다. 나한테 물어봅니다. 전도사님? 애들이 왜 그렇게 공부를 못할까요? 일부러 노력을 하지도 않는데 왜 공부를 못할까요? 자기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 시험에 떨어져 본 적이 없답니다. 그리고 공부할 때 이해 안 되는 것이 없었답니다. 우리는 그게 이해가 안 됩니다. 자기는 고등학교 3학년 때도 8시간씩 잤답니다. 학원은 근처도 안 갔답니다. 책에 다 나와 있고 모르는 것이 있으면 선생님께 물어보면 다 가르쳐 주는데 어떻게 모를 수가 있냐는 것입니다. 저는 공부 못하는 애들이 이해가 잘 되었습니다. 그리고 두 달 정도 흐른 뒤였습니다. 그 당시 한국에서는 테니스가 유행했습니다. 표정이 굉장히 어두웠습니다. 왜 그래? 아 정말 살맛이 안 납니다. 왜? 공부를 너무 하니까 체력이 너무 떨어져서 테니스를 배우러 다녔답니다. 한 달 다녔는데 코치가 가르치다가 막 신경질을 내더랍니다. 어떻게 그렇게 못하느냐고? 7년 동안 가르쳤지만 당신 같이 못하는 사람 처음 봤다고 합니다. 여기 책에 다 나오고 물어 보면 가르쳐 주는데 그때에 생각이 드는 게 아 사람이 공부를 못할 수도 있겠구나. 될 거 같아서 때렸는데 항상 허탕이랍니다.
세상에서는 우리를 절대적으로 비교합니다. 얘는 이렇게 교육비를 들여서 가르쳤는데 훌륭하고 얘는 그렇게 투자를 했는데 왜 못하냐? 너무 열등한 거 아니냐고 보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다루시지 않습니다. 약점을 알고 그 사람에게 맞는 방법으로 그를 인도해 가십니다. 그것을 발견하면서 정말 하나님의 인격적인 사랑, 어떠한 경우에도 하나님이 우리를 아무렇게나 다루시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잘 들으십시오. 하나님은 무릎 꿇을 의지가 없는 사람에게 정강이를 구둣발로 걷어차서 무릎을 꿇게 하거나 엎드려 절할 뜻이 없는 사람에게 머리끝을 잡고 땅 바닥에 쳐 박아서 뒤통수를 구둣발로 밟아서 절하게 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다루시기에는 인간이 너무나 고귀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기다리십니다.
(찬양)
때리시고 어루만져 위로해 주시니
우리 주의 넓은 품으로 어서 돌아오오 어서
신앙은 어느 순간에 그렇게 한 사람의 마음을 가슴이 저미도록 녹이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 위대해서 그 사랑 때문에 마음에 고통을 느끼는 것이 신앙입니다. 곡괭이 자루에 두들겨 맞은 것처럼 고통을 느끼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에 반응입니다. 연애 해 보셨습니까? 자기가 평생 처음 만나서 뜨겁게 사랑하던 연인과 처음 키스를 하고 돌아오는 그 사람의 마음은 어떨까요?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게 인격적인 관계입니다. 물어보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신앙생활은 노예적입니까? 기계적입니까? 인격적입니까? 주님을 만나는 인격적인 기쁨이 있습니까?
하나님 때문에 너무 기뻐서 눈물 흘려본 적이 있습니까? 너무 가슴 아파서 울어본 적이 있습니까?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의 프러포즈를 받아 주었을 때 저 산꼭대기라도 올라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 내 사랑이 성공했다고 외치고 싶지 않습니까? 그것은 희열과 기쁨 감격입니다. 그런 것이 있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매순간마다 없을 수는 있습니다. 그렇지만 거의 그런 것이 없다고 할 때 사랑하는 사람이 맞느냐고 묻고 싶습니다.
(예화)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동생이 하소연하는 편지를 써서 보낸 것입니다. 자기 언니에게 보냈습니다. 언니가 하소연하는 것이 사귄지 일 년이 되었는데 손목 한번 안 잡는 것입니다. 스킨십을 하고 싶고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는 것을 손이라도 잡고 싶고 포옹이라도 하고 싶고 키스라도 하고 싶은데 수도사처럼 접근을 안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여자가 각오를 하고 오늘은 키스를 해야겠다고 대시를 했는데 남자가 차갑게 고개를 돌렸습니다. 언니가 너무 상처를 받고 왔기에 동생이 간절히 편지를 쓴 것입니다. 오빠 왜 그러셨어요? 나중에 찾아가서 물어봤습니다. 이 남자 대답이 웃깁니다. 입에서 냄새가 나서랍니다. 그것은 사랑안하는 것입니다. 입에서 가글 하고 갔으면 좋았지만 기본적으로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니까 하고 싶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은 끊임없는 어팩션을 가지고 옵니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을 출렁거리면서 다가옵니다. 그 출렁거리는 마음으로 세계를 바라보면 그 출렁거림이 없던 어제와는 다른 세상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어제까지는 새들이 그냥 지저귀었는데 어제 그 사랑에 눈을 뜨고 오늘 아침에 보면 새들이 노래하는 것입니다. 어제 그냥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시냇물이 흘러갔는데 사랑에 빠지고 숲속에서 들어보면 수많은 사랑의 밀월을 나누면서 물이 흘러가는 것입니다. 그게 신앙입니다. 숲길을 걷다가 들판이 나오고 들판이 나오다가 언덕을 지나고 강가를 지나고 하면서 끊임없는 어팩션 속에서 새로운 삶의 지경을 보면서 인간이 누구인지에 대한 이해를 하며 증진시켜가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것만큼 인간과 세계에 대한 앎이 증진하는 것, 마지막에는 그 아름다움이 너무 위대하고 커서 무지개를 보면 가슴이 뛰며 노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을 가진 사람은 언제나 좋은 일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언제나 행복합니다. 기쁨과 사랑이 시련의 고통과 괴로움을 언제나 이기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시인은 목자이신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그런 것들을 경험합니다. 그러면서 깨달아집니다.
미학이란 학문이 17세기에 태동되기 시작하는데 고전적인 미학은 이미 오래전에 있었습니다. 시발점이 설명할 수 없는 숭고한 것에 대한 경외심입니다. 숭고의 미에서부터 미학이 출발합니다. 숭고하다는 것이 초기의 미학자들은 그런 식으로 모호하게 밖에 설명 못했지만 신학을 하는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는 그것은 간단하게 설명 하면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감각입니다. 온 땅과 만물위에 모든 것들에 뛰어나셔서 독립하는 아름다움을 가지고 계시지만 그렇게 모든 것들에 뛰어나면서도 비천한 인간과 관계를 맺으시면서 하나님이 우리를 의지하시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처럼 느끼게 만드시는 아름다움입니다.
미학의 기원은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그 미가 무엇인지 말입니다. 그런 것을 마지막에 모든 것을 추적해 갈 때 설명할 수 없이 찬란한 태양처럼 아주 눈부시게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엇으로 비추시는 그 분이 하나님입니다.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마음에 말할 수 없는 기쁨과 희열이 꽉 차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목숨을 걸고 사랑해 본 사람들은 저의 설명을 이해합니다. 그런 기회를 못 가지신 분들을 지금도 안 늦었으니까 가져 보십시오. 그것이 인간으로서 성숙한 길입니다. 쓰레기 같은 사람 말고 고귀한 사랑을 가져 보십시오. 거기서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설명할 수 없습니다. 왜 이 사람을 사랑하는지 설명할 수 없어야 합니다. 너 나 좋아? 그럼. 사랑해? 그럼. 왜 날 좋아하는데? 몰라. 그렇게 대답을 해야지 네 아버지가 부자잖아. 그렇게 대답을 하면 안 된단 말입니다. 설명할 수 없어도 괜찮습니다.
(찬양)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 주시고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만 바라볼지라.
눈물이 확 쏟아집니다. 궁금하죠? 14년 3개월 된 아이가 일평생 무신론자로 살기로 결심하고 그 다음에 무슨 일을 했는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책을 읽었습니다. 문학작품을 읽어보니까 나처럼 고민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어서 위로가 되었지만 많은 의문들을 문학이 제시한다는 것을 보면서 내가 잘못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지만 답을 주는 것은 문학가들이 아닙니다. 사상가를 읽었습니다. 답을 주는 것 같았지만 그 사람 자신도 행복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프리드리히 니체였습니다. 어린 나이에 니체를 너무 좋아했습니다. 마지막에 그가 죽는 모습은 그가 내게 가르친 모든 것에 회의를 느끼게 했습니다. 자기 제자를 사랑하다가 그 늦은 나이에 거절당하고 마지막에 토리노 광장에서 객사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위대하게 모든 것을 극복한 인간으로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만족이 없습니다.
매일매일 눈을 뜨면 죽음을 생각했습니다. 마지막에 알게 된 것은 이런 것들은 인생을 살아가게 하는 위대한 자원이 아니다. 6년이란 긴 세월을 삶과 죽음을 오가는 방황을 하고 마지막에 조용히 어느날 무릎을 꿇고 주님을 받아들였습니다. 지금도 잊혀 지지 않습니다. 21살 되던 어느 해 가을이었습니다. 전도하는 사람 없이 혼자 조용히 예배당을 찾았습니다. 저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 많은 책을 그때까지 읽었지만 톨스토이 책을 읽으면서 겨우 마음의 평화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 평화의 근원이 어디에서 오는지 잘 몰랐습니다. 하나님이었습니다. 조용히 무릎을 꿇고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그 다음 형언할 수 없는 방법으로 하나님은 내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나라는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하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그렇게 방황하던 때조차도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셨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이런 것이 인격적인 신앙입니다. 설명할 수 없지만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그런 사랑의 힘이 느껴집니다. 이런 의미가 하나님 나의 목자 되십니다. 내 인생의 가장 곤고한 날에 하나님이 나의 목자이십니다.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것은 하나님이 사랑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잃은 양의 비유가 나옵니다. 백 마리 양이었는데 목동이 저녁에 들어와서 우리에 들어간 양을 계수해 보니까 한 마리가 없었습니다. 그 양을 찾아서 길을 떠납니다. 그 양을 찾습니다. 너무 기쁜 나머지 그 양을 어깨에 메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왜 그랬습니까? 양 한 마리에 얼마인데 그 양을 찾기 위해서 어스름이 깔려 오는 저녁에 강도를 만날 줄도 모르고 넘어져서 다칠 수도 있고 맹수를 만날 수도 있는데 양을 찾아 나가는 이유가 무엇 때문일까요? 양 한 마리의 가격 때문에 양을 찾은 것이 아니라 자기의 보호를 떠나서 그가 어느 곳에서 추위와 두려움과 배고픔 속에서 떨고 있을 것을 생각하니까 너무 마음이 아프고 견딜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입니까? 그 목자가 그 양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런 감정을 느끼는 것입니다.
(예화) 제가 아는 사람이 길거리를 지나가다가 눈앞에서 고양이가 차에 탁 치는 것을 발견합니다. 차는 가버리고 고양이는 쓰러졌습니다. 도둑고양이입니다. 웬만한 사람 같으면 고양이가 죽었네. 아휴 더러워 하며 갔을 것입니다. 가까이 가서 고양이를 보니까 차가 다리를 밟고 지나간 것입니다. 고양이를 싸 가지고 피 흘리는 애를 데리고 동물병원으로 뛰어 간 것입니다. 의사한테 보여 주면서 고양이 좀 살려 줄 수 있느냐고 했더니 의사가 선생님 고양이냐고 묻습니다. 아니에요 길가다가 차에 치였습니다. 그냥 안락사 시키십시오. 불쌍하니까 살려 주세요. 수술하면 살릴 수 있습니다. 천 파운드입니다. 이 사람이 죽이고 그냥 왔겠습니까? 아니면 자기 신용카드를 끊고 수술 했겠습니까? 수술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들이 그 얘기를 들으면 미쳤다 그랬지 않겠습니까? 한국에서도 천 파운드면 작은 돈이 아닙니다. 도둑고양이를 왜 그랬습니까? 사람이 어진 것입니다. 차마 동물이 피 흘리고 죽어가고, 동물도 아플 때 눈물 흘립니다. 그걸 볼 때에 “에이씨, 내 것도 아닌데.” 하며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게 동물을 불쌍히 여기는 사람의 마음이라면 이렇게 차에 친 것보다도 더 비참하게 죄에 치여서 망가진 인간이 인간답게 못 살고 있는 이 비참한 현실을 바라보니 그 인간을 어떤 인간보다도 더 뜨겁게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어떻겠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은혜는 무엇입니까?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심지어는 그리스도인이라고 이름 불리는 사람조차도 이런 하나님에 대해서 알지 못하거나 알 마음도 없거나 그게 자신하고 무슨 상관이 있는지조차 생각 안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많은 것입니다. 그건 신앙이 아닙니다. 그런 신앙은 없습니다. 신앙의 코어에는 언제나 지식이 있는 것입니다. 그 지식이 사랑으로 확장된 형태가 신앙입니다. 처음부터 신앙은 분리되지 않는 지식과 사랑을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그것 없이 교회 다니는 것은 무엇입니까? 종교입니다. 문화입니다. 교회 나오고 아들 딸 시집갈 때 교회에서 결혼식하고 애들 태어나면 세례 받게 하고 죽으면 목사님 모셔서 장례하고 그건 문화입니다. 그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그것을 깊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말할 수 없는 위대한 사랑을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시는지를 알고 싶으면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어떻게 울고 사랑하고 가슴 아파하고 모든 것을 주고 희생하며 사셨는지를 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했는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이 요구조건이 많으신데 이것도 하지마라, 저것도 하지마라, 이거해라, 저거해라, 하며 요구조건이 많습니다. 우린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너무 요구 조건이 많고 이기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위대한 성인이라고 불리는 히포의 어거스틴이 자기의 책 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님 당신은 왜 우리보고 당신을 사랑하라고 명령하십니까? 우리가 당신 같이 무한한 분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당신에게 무슨 손해가 됩니까? 우리가 하나님 사랑 안했더니 하나님 외로우시고 손해를 보셨다. 그러면 하나님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셀프 서피션트 해야 하니까, 자기 충족적이어야 하니까 말입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라고 하십니까? 마치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당신이 커다란 손해나 되는 것처럼 왜 우리를 사랑하라고 하십니까? 그리고 사랑하지 않으려고 하려고 하면 큰 벌을 내리실 것처럼 우리를 경고하시기까지 우리보고 당신을 사랑하라고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질문만 했지만 그 질문 속에는 이미 답이 들어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하나님 때문에 우리 보고 자기를 사랑하시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자기 자신 때문에 우리보고 자기를 사랑하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할 때만 가장 행복한 상태에 있을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Love your self. 라는 말이 안 나옵니다. 우리는 요즘 셀프 러브를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렇게 이야기 안 합니다. 한 인간이 사람으로 태어나서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면 그 안에서 인간은 가장 사랑을 이미 받고 있는 것입니다. 따로 러브 유어 셀프라고 이야기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렇게 할 때에 자기는 진정한 의미에서 사랑을 못 받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이 자기의 책 속에서 하나님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자기를 진실로 사랑하는 것이며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옵나이다.
목자는 그런 무한한 사랑으로 양을 돌보고 소중히 여기는 사람입니다. 그것을 다윗이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그렇게 다루는 것을 경험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아무리 오래 교회 다녀도 하나님을 믿어도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나지 못하면 그것은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엄마가 믿는 하나님, 아빠가 믿는 하나님을 믿는 대신 신앙이 아닙니다. 그 집안에 믿는 종교를 따라 가는 것입니다. 내가 만난 내 하나님, 그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고 알고 기뻐하는 것, 그것이 신앙입니다. 바로 이런 사람이 되게 하시려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인격적인 신앙을 갖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마지막으로 고백합니다. 나는 모자라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결핍이 없을 것입니다. 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히브리어 보면 미래에 대한 고백이기도 하지만 현재에 대한 고백입니다. 히브리어에는 시제가 없습니다. 그것은 현재이고 또 미래이기도 하고 과거 진행형이기도 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하는 고백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이시니 지금 나는 모자라는 것이 없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라는 고백입니다. 다른 사람이 이 이야기를 하면 어느 정도는 설득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이기 때문에 우린 설득되지 않습니다. 왜? 다윗은 상처와 불행의 계곡을 지난 사람입니다. 우리가 볼 때에는 성공한 임금입니다. 큰 나라를 일군 임금입니다. 어마어마한 보화를 가지고 성전을 지을 준비를 했던 임금, 위대한 시를 지은 사람, 전쟁의 영웅으로 기억될지 모르지만 개인적으로는 불행한 사람입니다. 성경에 엄마 이야기가 거의 안 나옵니다. 아빠 이야기는 나오는데 다윗은 이새의 집안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아들이었습니다. 자기는 형들을 좋아했지만 형들은 자기를 멸시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지만 그 여자는 자신의 신앙의 위대한 세계를 이해 못하는 영적으로 수준이 안 맞는 사람이었습니다.
자식들을 많이 두었지만 그들은 서로 전쟁을 하며 싸우며 불행한 삶을 살았고 자기 뱃속으로 낳았던 딸이 강간당했던 소식이 전해졌는데 놀랍게도 그 강간범은 자기 아들이었습니다. 반역의 무리들이 반란을 일으켜서 자기를 죽이려고 한다던 소문이 들렸는데 그 두목이 자기가 낳은 아들이었습니다. 반란군이 토벌되었다는 소식은 그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과 함께 전해졌습니다. 그는 울면서 말했습니다. 압살롬아, 압살롬아.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사랑하는 압살롬아. 내가 널 대신하여 죽었더라면 하고 통곡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인생을 살다가 너무나 외로웠을 때 자기의 마음을 뜨겁게 해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불륜의 관계였습니다. 가혹하리만치 긴 세월을 영혼의 어둠 속에서 보내고 구원의 기쁨을 잃어버리고 하나님의 성령을 거두실 것 같은 공포를 느꼈습니다.
수없는 상처와 시련의 인생을 살아온 이 사람이 나는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친구가 많거나 돈이 많거나 건강하거나 얼굴이 예쁘거나 권력이 있어서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때문입니다. 그 언약의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이 시인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노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만족을 어디에서 찾으십니까? 그런 인격적인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를 믿고 알고 사랑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