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소생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시23:3)
녹취자: 김경애, 장주은
하나님은 나의 목자시라고 시인이 고백을 했고 2절부터는 왜 하나님이 자신의 목자이신지를 말씀해나가고 있습니다. 2절에서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주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자신의 목자이심을 고백합니다. 3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라고 말입니다. 여기서는 하나님이 자신의 영혼을 소생시키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자신의 목자이심을 고백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소생시키신다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원래 이 구약성경이 쓰인 언어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금 사용하고 있는 히브리어입니다. 거기에 보면 이 단어는 ‘살아있다’ 라는 단어로 나옵니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그것은 ‘자신의 영혼을 살아있게 하시고’ 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자신의 영혼을 살아있게 하셨다는 뜻은 이미 언제인가 자신의 영혼이 죽은 것 같은 때가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혼이 죽은 것 같이 되었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우리의 육체는 일정기간을 살고나면 죽습니다. 생명의 기운이 다해서 힘이 없어서 죽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고를 당해서 생명의 기능이 졸지에 끊어지게 됩니다. 우리는 이것을 가리켜서 죽음이라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육체와는 달리 영혼은 그런 식으로는 죽지 않습니다. 그래서 죽음이라는 말이 육체가 죽는다는 말과 영혼이 죽는다는 말은 다릅니다. 그래서 육체가 죽으면 아무 행동도 할 수 없지만 영혼이 죽으면 오히려 더 많은 행실들을 만들어 냅니다. 그것을 성경은 죽음의 행실이라고 말합니다. Dead Works 라고 말합니다. Dead These 라고 말합니다. 영혼이 죽은 상태에서 행하는 많은 일들은 죄를 짓고 육신의 정욕을 따라 행하는 수많은 죄악들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영혼의 죽음이라고 이야기할 때 이것은 소멸되거나 멸절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영혼의 죽음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인간에게 영혼을 부여하셔서 그래서 인간은 흙으로 하나님이 육체를 빚으시고 생기를 불어넣으심으로 영혼을 주셔서 영혼과 육체가 만나 살아있는 인간이 됩니다. 그때 하나님이 인간에게 영혼을 주실 때 그 영혼에게 기대하셨던 바대로 작동하고 기능하지 않는 Function 을 하지 않는 것이 죽음의 상태입니다. 이해되십니까? 다시 말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영혼을 주셨을 때 그 주신 의도대로 Working하고 Function하지 않는 상태를 영혼이 죽은 상태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어려운 주제이지만 우리 신앙생활에 있어서 매우 유익하고 중요한 주제이기 때문에 조금만 더 생각해보겠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왜 영혼을 주셨습니까? 우선 우리는 영혼이 있다는 사실은 우리 모두가 믿음으로 받아들입니다. 만약에 영혼의 존재를 부인하면 동물에 대한 인간의 우월성은 발달한 문명과 그들보다 비교적 뛰어난 지능이 전부 다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단순히 지능이 다른 동물에 비해 뛰어나기 때문에 존엄하고 위대한 존재가 아닙니다. 만약에 그렇게 말한다면 치매에 걸려서 지능이 쇠퇴하거나 아니면 너무 어려서 사물을 판단할 수 없을 정도로 지적인 능력이 성숙하지 않은 사람은 존엄성이 없는 것입니까? 그렇게 말해야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말하면 됩니까? 안됩니까? 그렇게 말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그 근거를 어떻게 말할 수 있습니까? 많은 이야기를 신학적으로 할 수 있지만 그냥 평신도들이 알아듣기 쉽게 이야기하려면 인간이 존귀한 이유는 하나님이 주신 영혼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 영혼을 주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영혼을 가진 인간만이 유일하게 자기를 반성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무슨 의미냐 하면 동물들도 눈으로 사물들을 쳐다봅니다. 인간의 시력보다 동물들이 훨씬 더 뛰어난 시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후각은 개는 인간과 비교될 수 없을 정도의 후각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청각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이런 육체적인 기능이 인간의 밖에 있는 사물들을 인식하는 기능은 다섯 가지에 의존합니다. 보고, 듣고, 접촉하고, 냄새 맡고, 입맛을 느끼는 것을 통해서 밖에 있는 정보들을 인간이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다섯 가지 통로 이외에는 없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어떤 물건이 딱딱한지 물렁한지 확인하고, 노란색인지 하얀색인지 확인하고, 큰지 작은지 멀리 있는지 가까이 있는지 확인하면서 외부에 있는 사물에 대한 수많은 정보들이 이 다섯 개 창문을 통해서 인간의 정신 속으로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동의하실 수 있습니까? 들어옵니다. 그런데 이런 다섯 가지 창문의 능력이 정말 모든 동물에 비해서 뛰어나느냐 하면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의 위대함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라는 질문이 떠오릅니다. 놀랍게도 인간은 자기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물론 자기를 그렇게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능력은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그런 능력은 천성적으로 타고나는 것이기도 하지만 교육과 오랫동안 자신의 삶의 방식을 통해서 훈련되어지는 측면도 아주 많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자신을 자기 자신이 아닌 것처럼 가끔 유체가 이탈된 상태에서 자기를 내려다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반성하는 방식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나를 버려도 끝까지 나를 버리지 않는 내편이 있습니다. 누구입니까? 자기 자신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말씀합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무엇이냐 하면 자기부인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쫒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첫 번째는 자기 부인입니다. 내가 내 자신의 편이 되지 않고 나 자신으로부터 뛰쳐나와서 내가 남인 것처럼 생각하면서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반성의 능력입니다. 그런 반성을 잘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자기 자신의 빛이 아닌 밖으로부터 어떤 빛을 계속 받아야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자기는 자기가 정말 좋은 사람인줄 알았는데 나보다 더 훌륭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비춰보니까 나는 정말 인간이 아직 덜된 인간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기적인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것이 관상입니다.
그런데 그런 빛은 부분적입니다. 그런데 진리의 빛은 총체적입니다. 그래서 그 진리의 빛을 보면서 내가 생각하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과 내가 사랑하는 것이 올바른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사랑하는 방식이 바르지 않다는 것 등등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을 신뢰하는 마음을 자꾸 버리고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것을 배우는 것이 신앙입니다. 영혼이 그런 삶을 가능하게 합니다. 뿐만 아닙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만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도 존재합니다. 그리고 때로는 그것이 눈에 보이도록 존재하는 모든 것에 존재의 기반이 되기도 합니다. 무슨 이유입니까? 만약에 이런 것들 중 녹음기가 여기에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사람에게는 양심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습니다. 외과의사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사람을 해부를 했습니다. 결론을 내렸습니다. ‘양심은 없다.’ 동의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왜? 양심은 우리 안에 있지만 허파나 심장이나 간이나 콩팥과 같은 방식으로 우리 인체 안에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있다고 말할 때 ‘To Be’ 라고 말할 때 그 주체가 무엇이냐에 따라서 있는 방식은 다른 것입니다. 여기 녹음기가 있다고 할 때는 이렇게 있는 것이지만 우리 안에 사랑이 있다고 이야기할 때는 크기와 색깔을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안에 사랑이 있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여기에 공기가 있다는 사실보다도 더 확신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영혼의 존재도 우리는 그런 식으로 이런 것을 보는 기준을 가지고 우리 안에 사랑이 있느냐?, 영혼이 있느냐고 측정하면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미 사랑이나 영혼은 이런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것을 보는 방식을 가지고 있다, 없다고 이야기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과학적으로 증명해 보겠습니다. 모든 소리에는 파장이 있습니다. 그 파장은 극초단파부터 초장파까지 있습니다. 그 많은 소리의 대역중 인간의 귀에 들리는 소위 이야기하는 가청대역은 아주 미미합니다. 파장이 너무 작아도 인간은 들을 수 없고 파장이 너무 커도 들을 수 없습니다. 초음파 같은 것이 그런 것입니다. 벌레가 많이 끼면 초음파 발생기를 코드에 끼면 곤충들이 다 사라집니다. 왜? 초음파는 우리 귀에 들리지는 않지만 여기에 기어 다니는 벌레에게는 매일 기차가 지나다니는 것 같은 엄청난 굉음을 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뭐라고 말하느냐 하면 벌레들은 그 소리를 들으면서 기겁을 하고 다 도망을 가는데 우리는 소리가 나지 않는다고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객관적인 사실이 아니라 주관적인 인식입니다. 우리의 영혼의 존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영혼을 만질 수 있고, 없고 그리고 우리 몸의 어느 부분에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내 안에 있습니다. 그러면 예를 들어봅시다. 내가 이렇게 말랐다가 잔뜩 먹어서 120kg쯤 되었습니다. 살이 쪘습니다. 그러면 옛날 몸속에만 영혼이 있고 늘어난 50kg에는 영혼이 없이 비어있습니까?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또 제가 지금보다 훨씬 더 뚱뚱했습니다. 18kg는 더 뚱뚱했었습니다. 몸무게가 줄었습니다. 그러면 남은 내 영혼은 지금 밖에서 돌아다니는 것입니까?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영혼은 늘었다 주었다 하고 몸무게에 따라서 그 크기가 조절되는가 하면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몸무게 150kg 마음속에 있는 사랑의 크기와 그 사람이 45kg가 되었을 때의 사랑의 크기를 비교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것은 없습니다. 그러면 모두 그 사물이 무엇이냐에 따라서 각각 있다는 개념은 다른 것입니다. 그런데 확실한 것 하나는 영혼은 우리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출장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잠시 출장을 갔다가 영혼이 다른 사람 속으로 들어가서 그 사람은 영혼이 두 개가 되고 나는 영혼이 하나도 없는 상태가 되거나 그러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항상 내 영혼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굉장히 재미있고 깁니다. 여기서 끝내고 돌아갑니다.
그 영혼을 하나님이 소생시켜주십니다. 히브리말로 ‘하야’인데 살아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영혼을 살아나게 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나의 목자시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시인이 하나님이 자기의 영혼을 살아나게 하셨다고 이야기한다면 언젠가는 그 영혼이 죽은 것과 같았던 때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시인같이 위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그랬을까?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께로부터 모든 죄를 용서받은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그가 하나님 앞에 믿음과 순종의 삶을 사느냐 불순종과 믿음 없는 생활을 하느냐에 따라서 영혼은 충만하게 살아있기도 하고 죽어있기도 한 것입니다. 이렇게 신자의 영혼이 죽어있는 상태처럼 된 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은 Spiritual Depression 영적침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 Depression 이라는 말은 우리나라에서 정신과에서 사용될 때에는 우울증입니다. 뭐냐 하면 무엇인가 꽉 눌려있는 생명의 기운이 억압된 상태에 있는 것을 Depression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하면 영적인 활기 Vitality 가 현저히 사라지고 죽음의 기운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죽음의 기운이 들어온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인간은 일정한 나이까지 육체가 절정에 다다르고 그 다음부터 늙습니다. 여자를 기준으로 이야기하면 23살입니다. 23살이 인체의 나이의 하이라이트입니다. 23살부터 서서히 늙어갑니다. 그리고 허무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23살부터 늙어가고 넓은 의미에서 갱년기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생명의 충만한 상태에서 곡선의 기울기에서 이만큼 빠져나가면 빠져나가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죽음의 기운이 그만큼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됩니까? 젊었을 때에는 친구들과 노닥거리면서 많이 먹어도 살이 찌지 않습니다. 기초대사량이 왕성하기 때문에 다 태워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너무 많이 먹어서 살이 쩌도 골고루 살이 붙습니다. 그래서 조금 통통하지만 예쁩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 특정부위로 살이 몰립니다. 아무리 덜먹고 운동을 해도 그 부위는 안 빠집니다. 그리고 쳐지기 시작합니다. 죽음의 기운이 들어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 죽음의 기운에 미친 듯이 항거하기 위해서 사람들이 기초화장품을 바르는 것입니다. 도저히 그것이 어렵다고 생각할 때 색깔로 화장을 해서 변신을 꾀하는 것입니다. 생명이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영어로 화장품을 뭐라고 합니까? Cosmetic 이라고 하는데 희랍어로 Cosmos에서 온 것입니다. Cosmos는 무슨 뜻입니까? 우주 혹은 질서라는 뜻입니다. 화장품은 질서가 없는 얼굴에 질서를 부여하는 것이 화장품입니다. 항상 화장품을 볼 때마다 질서를 부여한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 질서로부터 죽음의 기운이 들어올수록 멀어지는 것입니다. 죽음의 기운입니다. 육체에만 그런 기운이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영혼에도 그런 기운이 들어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죽음의 기운이 엄습합니다. 영국은 모르겠는데 미국을 기준으로 보면 한때 음악을 장식했던 톱스타 중 특히 여자들은 어느 한순간에 싹 사라지고 죽을 때까지 나타나지 않습니다. 물론 그렇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줄리 앤드루스 같은 사람들은 끝까지 얼굴을 드러내고 돈도 벌고 하지만 어느 한순간에 사라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전성기 때의 자기얼굴을 팬들에게 마지막 기억으로 남기고 죽음이 침투해 들어온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 입니다. 그렇게 침투해 들어올 때 ‘늙는 것이 아름답다.’ 심지어 혜민 스님은 ‘곱게 잘 물 들은 단풍은 꽃보다 더 아름답다.’ 고 하는데 대게 늙은 사람들이 그렇게 이야기하지 젊은 사람들은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렇게라도 위로를 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온 과학의 힘을 빌어서 Anti Ageing을 연구하는 것입니다. 화장품 속에 Anti Ageing의 Technology를 도입해서 죽어가는 세포들을 Vitalizing 할 수 있는 방법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하다가 안 되면 엉덩이 살을 뜯어다가 얼굴에 바르는 것입니다. 생명 있는 것처럼 만드는 것입니다. 모든 것들을 이런 관점에서 보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본질이 무엇이냐 하면 죽음의 기운이 계속 침투해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죽음의 기운이 무엇입니까? 없는 것으로 돌아가려는 힘입니다. 처음에 인간은 흙으로부터 창조되었습니다. 그래서 창조된 모든 것은 없는 상태로 돌아가려는 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죄가 들어온 다음부터는 허물어지면서 그렇게 됩니다. 거기에 항거하는 것입니다. 화장을 잘하고 얼굴에 신경을 많이 쓰는 것입니다. 유럽 사람들은 자기 얼굴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지 않습니까? 한국 여자들은 예쁘게 하고 다니기 위해서 엄청나게 심혈을 기울입니다. 자기 얼굴을 가꾸는 것이 소명인 것처럼 심혈을 기울입니다. 엄마하고 딸하고 나타나면 헷갈리는 것입니다. 언니인지 동생인지 모를 정도로 젊게 하고 다니는 사람들이 한국 사람들에는 있습니다. 물론 일부의 사람들이지만 있습니다. 왜? 그렇게 온 Anti Ageing Technology를 동원해서 살아있게 하고 싶은 것입니다. 문제는 뭐냐 하면 그리스도인이 과연 자신의 영혼을 위해서 그렇게 하느냐고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심지어는 그 영혼의 본질이 무엇이고 그 영혼이 어떨 때 살아나고 죽는 것인지 조차도 모른 채 자신의 인생을 이끌어가는 영혼인데도 그냥 내팽개친 채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상에 불쌍한 영혼입니다. 마치 버림받은 애완견처럼 그렇게 내동댕이쳐진 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럼 다윗도 언젠가는 영혼이 죽은 것처럼 된 때가 있었다는 것 아닙니까? 물론입니다. 그래서 그가 이런 고백도 합니다. 자신이 죄 가운데서 주님 앞에 고백하는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이 자신에게서 성령을 거두어 가실 것 같은 두려움을 느끼고 그리고 구원의 기쁨이 모두 사라지는 것을 경험한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그런 역할을 하느냐? 성경은 여러 가지 요인들을 이야기하지만 그 모든 뿌리에는 딱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죄입니다. 그러면 죄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범법행위를 한 것이 죄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죄가 아니라 악입니다. 영어로는 죄는 뭐냐 하면 Evil입니다. 죄는 뭐냐 하면 그런 악을 가능하게 하는 경향성 혹은 밑바탕에 있는 정신의 성향입니다. 그것이 죄입니다. 그래서 Crime과 Sin은 다릅니다. Crime은 법률을 어긴 것입니다. Sin은 표현되지 않았어도 모든 Crime을 가능하게 하는 그 사람 속에 있는 잠재적인 힘입니다. 그것을 죄라고 부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무슨 죄를 지었기에 영혼이 그렇게 생명을 잃어버린 침체의 상태에 빠지게 되었을까?’ 라고 생각합니다.
한번은 죄수들이 모여 있는 교도소에 설교를 하러갔습니다. 그곳의 교도관이 재미있는 이야기를 합니다. 나라에서는 이 사람이 죄인이라고 해서 사회로부터 격리시키는데 이 안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가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자기들은 재수가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진짜 죄인들은 저 교도소 담장밖에 다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말이 맞을 수도 있겠지만 그만큼 죄에 대한 생각이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어느 개울가에서 군인들이 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상관처럼 보이는 사람이 이야기했습니다. 3명의 부하에서 자루를 하나씩 나누어주면서 ‘너희들을 가서 이 자루에 돌멩이를 50kg씩 담아오너라.’ 세 사람이 각기 자루를 들고 가서 돌멩이를 주우러 갔습니다. 한 사람은 50kg짜리를 주워서 자루에 넣었습니다. 두 번째 사람은 20kg짜리와 30kg짜리 두 개를 넣어서 50kg를 채웠고 세 번째 사람은 자잘한 돌멩이 천개를 주워서 50kg를 채웠습니다. 그 다음 명령이 군인들을 황당하게 했습니다. ‘모두 돌멩이를 제자리에 갖다 둔다. 실시!’ 한 개를 가지고온 사람은 너무 확실하니까 제자리에 갖다 두었습니다. 두 개를 가지고 온 사람은 약간 헷갈렸지만 그러나 찾아서 제자리에 갖다 두었습니다. 천개를 가지고 온 사람은 한 개도 제자리에 갖다 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느 대학 실험실에서 비커에 물을 담고 개구리 한 마리를 올려놓았습니다. 물론 차가운 물이었습니다. 그리고 밑에다가 알코올램프에 불을 붙였습니다. 정말하게 조정해서 1초에 0.02도씩만 올라가도록 조정했습니다. 1시간 20분후에 개구리가 푹 삶아졌습니다. 만약에 물이 미지근했을 때 개구리를 물에 넣었으면 개구리가 뜨거워서 팔짝 뛰어나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천천히 물이 더워지면서 거기서 죽는 것입니다. 죄는 크기도 문제가 되지만 질이 더 큰 문제입니다. 한국도 많이 발전을 해서 이제는 사람들의 똥을 퍼가는 것이 점점 없어지고 별도의 수로를 만들어서 처리를 해버립니다. 그리고 요금을 얼마씩 냅니다. 지저분한 이야기를 해서 미안한데 옛날식으로 된 곳은 아직도 건물의 정화조에 똥이 찹니다. 구청에 이야기하면 용역업체차가 옵니다. 이 차가 낮에는 냄새가 나니까 오지 못하고 항상 새벽에 옵니다. 6시쯤 옵니다. 참 기구한 것이 뭐냐 하면 이 똥차가 올 때에는 베토벤의 ‘엘리제를 위하여’를 울리면서 옵니다. 베토벤은 그럴 때 틀라고 한 것이 아닐 텐데 ‘띠리리리 리리리’ 그러면서 옵니다. 그리고 거대한 호수를 집어넣고 빨아들이면서 메타기가 올라갑니다. 몇 리터 그러면서 요금이 부과됩니다. 그것을 출렁거리면서 싣고 갑니다. 냄새가 나니까 모든 사람들이 눈살을 찌푸리고 고개를 돌립니다. 왜 그렇습니까? 똥이라서 그렇습니다. 한국에서 10년 전에 똥 전시회를 했습니다. 그 포스터가 재미있습니다. ‘똥이 더럽다는 너의 생각에 똥침을 박아주마’ 여러분 지금은 미국을 비롯한 몇 개의 나라에서 똥을 식품화 하는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아십니까? 왜? 영양분과 모든 것에 거의 40% 이상을 그냥 내보내는데 미래의 식량위기가 닥쳤을 때 아주 중요한 대안이라고 연구를 하는 것입니다. 어쨌든 그것은 객스러운 이야기이고 예를 들자면 그것 중의 일부를 퍼서 믹서에 곱게 갈았습니다. 몇 번의 필터링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아주 색깔도 예쁜 노란 물이 되었는데 그것을 고급 스프레이에 넣었습니다. 그것을 허공에 뿌렸습니다. 자잘한 예쁜 알갱이가 되어서 노르스름하게 공중에 확 퍼집니다. 저기는 건더기를 출렁거리면서 도로를 지나갑니다. 저것은 더러워 보이고 이것은 예뻐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입자를 분석해보면 성분은 완벽하게 똑같습니다. 그것이 죄입니다. 그것이 커다란 크기로 자행되는가 아니면 작은 크기로 실행되는가에 따라서 사람들에게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하고 때로는 재판에서 종신형이나 사형을 언도받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질에 있어서는 똑같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자녀들이 살아있는 영혼의 상태에서는 그 모든 것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똥이 더럽다는 사실이 학습되었다면 그 더러운 똥들을 커다란 차에 싣고 출렁거리면서 지나갈 때는 더럽다고 하고 그 고운 분무기로 뿌린 그 고운 물체가 본질이 무엇인지 알았다면 여러분이 가서 빨아들이겠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진지한 문제입니다.
(찬양)
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 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죄를 미워하고 크기와는 상관없이 싫어하는 것입니다. 영혼이 생기를 잃어버리면 이런 것들을 좋아 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영혼 속에 죽음의 기운이 들어오는 것이 여러 가지 모양으로 나타납니다. 그럴 경우에는 하나님께 뜨겁게 기도할 수도 없고 말씀을 통해서 진리를 경험하기도 어렵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인격적으로 경험하고 감화를 받는 일도 힘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은 영적인 활기를 잃어버린 채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거듭난 신자의 영혼은 하나님과 교제하고 그 충만한 생명을 받아서 살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자신은 그런 삶이 싫어서 죄와 영혼의 깊은 침체에 빠진 상태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결국은 생명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사는 것이 불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한번쯤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욕해보았을 것입니다. ‘저 사람은 교회에서 목사라고하면서 장로라고 하면서 교인이라고 하면서 왜 저따위로 살까?’ 하며 욕해보지 않은 사람이 우리 중에 누가 있겠습니까? 그중에는 처음부터 그렇게 살고 싶어서 그런 사람도 있지만 그렇게 안하려고 하는데 결국은 해보니까 그렇게 밖에 안 되어서 그렇게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의 영적인 측면입니다. 그 영적인 측면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매순간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 자신의 영혼이 새로워지고 은혜를 받고 주님 앞에서 새 생명을 얻고 살아가는 그 무엇이 그 사람 안에 없을 때 자신은 그런 삶을 원하지 않아도 자신도 모르게 그런 삶을 계속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면 그것은 그 사람도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희랍시대 헤라클레이토스라는 사람은 ‘한 사람의 본성은 운명이다.’ 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신앙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그렇게 우연처럼 부여된 자신의 본성, 불행해지고 나쁘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악한 본성을 고침으로써 삶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가는 것이 기독교신앙입니다.
여러분이 아주 이해하기 쉽게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이런 것입니다. 목이 붓습니다. 기침이 납니다. 콧물이 흐릅니다. 그리고 머리가 터질 것처럼 아픕니다. 체온계로 체온을 재보니 몸이 불덩이처럼 오릅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슨 생각을 합니까? 감기에 걸렸다고 생각합니다. 바이러스는 여러분이 육안으로 볼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볼 필요도 없이 내 몸이 지금 심각하게 감기 바이러스에 오염되었고 그 바이러스의 개체수가 우리 몸 안에서 빠른 속도로 늘어나고 있는 것을 느낍니다. 뼈마디가 막 쑤십니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병원에 가거나 약국에 가서 감기약을 사서 먹습니다. 예를 들어서 콧물이 쏟아지는데 콧구멍을 막아버리면 입으로 숨을 쉬면 콧물이 꽉 차서 목구멍으로 넘어갑니다. 열이 나는데 얼음으로 찜질을 해서 이것을 냉장고에 들어가서 온도를 낮추었다고 칩시다. 목이 부은 것을 목구멍을 마비시키는 것 같은 약을 먹어서 통증이 못 느끼게 한다면 그것이 해결됩니까?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단지 밖으로 드러난 신드롬 일뿐이고 그 근본적인 원인은 바이러스입니다. 그러면 바이러스를 죽여야 합니다. 그래서 개체수를 줄여야 합니다. 그리고 완전히 박멸해 버려야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렇게 감기를 치료해야합니다.
마찬가지로 기독교는 삶의 외관을 바꾸는 종교가 아닙니다. 그런 가르침도 필요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근본적으로 그런 것들은 이 세상도 어느 정도는 해줄 수 있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도 보면 삶에 있어서 Attitude 즉 태도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식당에 가서도 Waitresses들이 태도를 좋게 하면 팁이 계속 올라갑니다. 한국의 시쳇말로 싸가지 없이 굴면 주고 싶다가도 돈을 도로 집어넣습니다. 그런 태도들은 사람들이 중요하지만 그것도 우리의 인생에 많은 영향을 끼치지만 그래서 인생을 한참 살다가 친구가 하나도 없고 자기를 이해해주는 사람이 없다고 할 때는 그 사람도 누구를 이해해준 사람이 별로 없는 사람입니다. 소통을 못한 사람입니다. 누군가 남을 위해 봉사하고 그 사람을 이해하는데 기쁨을 느끼며 인생을 살았던 사람들은 외롭지 않습니다. 왜냐 하면 자신은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자시의 태도들이 많은 친구들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우리 부부생활의 이야기를 예를 들어봅시다. 요즘은 같이 못살고 이혼을 많이 합니다. 심지어 두 번 세 번도 이혼을 합니다. 그런데 어느 할아버지가 있었는데 할머니 할아버지가 결혼하고 65년을 같이 살았는데 25살에 결혼을 했으면 90세가 된 것인데 태어나서 한 번도 안 싸웠답니다. 너무 화목하게 사니까 그 동네 있는 젊은 부부들이 그 할머니 할아버지를 초청해서 어떻게 우리들은 매일 싸우면서 사는데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할아버지가 대답했습니다. 자기네는 65년 전에 결혼할 때 서로 합의를 봤답니다. 그래서 싸우지 않을 수 있었답니다. 무슨 합의를 보았느냐고 했더니 중요한 일은 남편이 결정하고 사소한 일은 아내가 결정해서 다 알아서 한답니다. 그래도 65년 동안 한 번도 다툰 일이 없었느냐고 하니까 그랬더니 할아버지가 하는 말이 65년 동안 중요한 일이 한 번도 없었다고 합니다.
뭐냐 하면 삶의 태도도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인생에 불행해지는 사람을 보면 삶의 태도가 잘못된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그렇지만 태도를 바꾸는 것이 인생의 모든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느냐하면 그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 있는 어떤 것들도 해결해줄 수 없습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신앙입니다. 그것이 그 사람의 영혼의 상태를 바꾸는 것입니다. 영혼에 침투한 기운을 회복시켜서 침투한 죽음의 기능을 회복시켜서 다시 생명으로 넘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삶을 살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영혼이 침체 속에서 살아서는 안 되는 이유입니다. 어제 제가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평생에 처음 첫사랑에 빠진 사람이 자기가 너무 사랑하는 사람과 생애 최초로 키스를 하고 그날 밤 집으로 돌아갈 때 그 마음은 어떤 마음입니까? 우리교회에서 이렇게 설교를 했더니 앞에 앉아있던 나이 많은 여자 청년 둘이서 자기네끼리 말하기를 ‘우리는 모르지!’ 마치 British Got Talent에서 ‘I have dream.’ 노래를 불러서 대상을 받은 수잔 보일이 42살이 될 때까지 한 번도 키스를 못해봤다고 고백을 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애도했는데 그 마음을 모릅니다.
(찬양)
예수의 넓은 사랑을 어찌 다 말하랴
그 사랑 받은 사람만 그 사랑 알도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그러한 충만한 사랑 속에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 세상에 있는 과학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삶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 영혼의 생명이 넘치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그 생명은 북 치고 장구 친다고 해서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있는 것은 있는 것이고 없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그런 충만한 생명으로 살아갑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이 시인의 영혼을 회복시켜주실 때에 시인이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것들을 가로막는 것이 죄라고 했는데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이 무엇입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그것에 대한 두 개나 세 개의 길을 제시하지 않고 딱 한 가지의 길을 제시합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회개입니다. 회개. 회개라는 것은 첫째 자신을 객관적으로 인식하면서 자기의 행위가 그리고 생각이 어떻게 하나님의 법에 어긋나는지를 인식하고 둘째는 그것을 슬퍼하고 셋째는 거기서 자신의 삶을 돌이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회개입니다. 그래서 회개는 항상 아픕니다. 그런데 그렇게 아픔으로써 아픔을 느끼는 것이 우리 안에 있는 옛사람입니다. 우리 안에는 두 사람으로 대변되는 두 본성이 있습니다. 하나는 옛 본성인데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자기가 온 우주의 중심인 것처럼 생각하고 자기의 행복이 최고의 가치인 것처럼 생각하면서 살아가려는 본성입니다. 죄를 짓고 악을 행합니다. 새 본성은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을 때에 부여받은 본성입니다. 그 본성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리고 거룩하게 살고 싶고, 그리고 하나님께 순종하고 싶고, 그리고 거기서 행복을 느끼는 본성입니다. 그렇게 아파하고 통증을 느끼는 것은 새 본성이 아니라 옛 본성이 아파하는 것입니다. 거기서 죽을 때 그 죽은 비율만큼 새 본성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이 경황을 아주 아름답게 표현한 사람이 누구냐 하면 사도 바울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 내가 산 것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죽은 만큼 살아나는 것을 경험한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도 정말 순결한 하나님의 사람이었지만 일평생 하나님 앞에 매우 심각한 죄를 짓고 그것이 언제든지 죄가 없었던 적이 없었겠지만 아주 심각하게 죄를 짓게 된 것이 그래서 영혼이 죽음의 상태에 들어가게 된 것이 두 번이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금하신 인구조사를 한 사건입니다. 왜 그것이 그렇게 큰 죄였느냐하면 하나님이 인구조사를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꼭 하고 싶었습니다. 그 당시의 인구조사는 단순한 인구조사가 아니라 전쟁에 나갈 군인들의 수와 이런 것들을 재는 것입니다. 한 나라가 얼마나 강한 나라인지를 통계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것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왜? 이스라엘은 창이나 칼, 병사의 수, 병거, 마차 이런 것들의 숫자로 지탱되는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이 지켜주시는 나라임을 알게 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결국은 인구조사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큰 진노를 내리십니다. 수많은 사람이 재앙으로 죽어갑니다. 두 번째는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의 간음사건이었습니다. 다윗은 아주 영적인 감수성이 뛰어난 사람이었고 그랬기 때문에 그의 아름다움의 관점들은 아주 탁월합니다. 그래서 다윗의 시가 쓰였던 시를 히브리어로 읽어보면 정말 감동적입니다. 영어 번역이나 우리말로는 이해할 수 없는 감동이 있습니다. 그런 말할 수 없는 뛰어난 감각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 어저께 말씀 드렸듯이 상처투성이의 인생을 산 것입니다. 그러다가 정말 좋아하는 사람을 만납니다. 불행히도 이 사람은 남편이 있는 여자입니다. 사실 세상 나라의 관점에서 보면 일도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왕이 원한다는데. 그런데 이스라엘은 일반적인 왕의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그 왕 위에 더 뛰어난 왕이 통치하는 나라여야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셨습니다. 죄를 지었습니다. 심각한 영혼의 죽음이 시작되었습니다. 가혹하리만치 긴 세월 동안에 영혼의 어둠 속에서 지냈습니다. 구원의 기쁨 다 사라지고 자신의 뼈가 녹는 것 같은 가혹하리만치 깊은 영혼의 침체를 경험했습니다. 그러면서 이 시인이 그 속에서 어떻게 헤어 나왔는지를 성경은 보여줍니다. 그것이 대표적으로 시편 6편 같은 곳에서 아주 깊은 참회의 시가 나온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자기를 용서하셨다는 것을 경험합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사랑을 아주 위대하게 경험한 위대한 성경의 인물들은 모두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체험한 모든 사람의 공통점은 자신의 큰 죄를 용서받는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크기와 넓이를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사도바울입니다. 다윗도 다음도 똑같습니다. 정말 순종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았지만 큰 죄를 통해서 깊은 어두움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래서 시편 51편 같은 곳에서는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죄를 지었습니다. 걱정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죄를 해결할 길을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그것이 제사입니다. 제사를 드렸습니다. 제사 드려줄 제사장이 없었겠습니까, 제물이 없었겠습니까. 그 날에 하나님이 그 제사를 받지 않으신다는 것은 체험적으로 알게 됩니다. 그러면서 놀라운 신앙의 고백을 합니다. 하나님은 제사의 기뻐하는 신이 아니시니 기뻐하셨더라면 내가 드렸을 것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는 산 심령이라. 충격적인 고백입니다. 복음의 시대에 알 수 있는 그런 놀라운 비밀들을 다윗의 시대가 지금으로부터 3천년전인데 그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자기가 죽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것입니다. 그 설교를 통해서 영혼이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외가 있을 수 없습니다.
회개가 없이 이렇게 정신이 새로워지고 그럴 순 있습니다. 삶의 의욕이 하나도 없이 죽고 싶었는데 정말 친한 친구가 찾아왔습니다. 너무 좋아서 같이 차를 타고 나가서 어디 좋은 식당에 가서 밥 한끼만 맛있게 먹어도 다시 살 수 있을 것 같은 의욕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일생을 살아가는 삶이 그렇게 자기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자기를 주는데서 삶의 보람을 느끼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그런 것들이 바로 죄를 깊이 회개할 때 하나님이 영혼에 이런 놀라운 생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난생 처음 사랑하던 그 사람과 어디 골목길에서 생애 최초의 키스를 하고 돌아오는 가슴 벅찬 젊은이의 그 감격, 어둡고 칙칙하고 끈적끈적한 사랑이 아니라 그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랑에 감격하면서 사는 삶이 그리스도인의 윤리적인 삶의 동기여야 합니다. 그런 것들이 회개를 통해서 가능해 집니다. 오늘날 회개라는 것을 알고 있을까요? 회개가 무엇인지 모르니까 가슴 벅찬 환희, 그런 것도 모릅니다.
어떤 남자 여자 어린 아이들이 막 사귀었습니다. 언제서부터 이 남자친구에게 연락이 안 왔습니다. 오빠 뭐해? 대답이 없습니다. 오빠 어디 있어? 대답이 없습니다. 내가 뭐 잘못했어? 화났어? 이틀 동안 문자를 보내도 대답이 없습니다. 그러더니 틱 하고 문자가 왔습니다. 다음 말을 영어로 번역해 볼 수 있겠니? 너무 반가웠습니다. 오빠 그게 뭔데? I was car. 나는 차였다. 맞아. 너는 차였어. 이해를 못했습니다. 왜? 한 번도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사랑했던 사람과 헤어질 때도 그렇게 유치한 농담으로 헤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에 있어서 가장 더러운 변화, 사랑에 있어서 가장 치욕적인 변화는 그 사랑이 변하거나 사라지는 것입니다. 무슨 얘긴지 이해되십니까? 그 이상은 없습니다. 분명히 내가 사랑했었는데 맘이 변했습니다. 그것이 가장 추한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더러운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의 감격이 없이 살아가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사람들은 자신이 워낙 죄를 많이 짓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뭐도 안하고 뭐도 안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성경에 보면 죄를 많이 지은 사람도 하나님이 뜨겁게 사랑하십니다.
마태복음 26장에 나오는 죄 많은 여자. 진지한데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회개가 없는 것입니다.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 최근에 회개한 적 있습니까? 내가 정말 나를 변함없이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배반했구나. 죄를 지었다는 이유 때문에 가슴이 아파본 적 있느냐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영혼의 침체의 상태에서 회복이 안 되는 것입니다. 물론 그 사람이 돈을 많이 벌수도 있고 사업이 잘 될 수도 있고 망할 수도 있고 세상에 그림같이 예쁜 애인을 만날 수도 있고 집을 팔수도 있고 좋은 직장에 취직할 수도 있고 새 옷을 사 입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성형수술을 해서 얼굴을 못 알아볼 정도로 젊어질 수 있습니다. 묻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그래서 어땠는데? so what? 그래서 인생이 바뀌었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땠는데? 뭐가 바뀌었는데? 그것이 인생에 있어서 본질적이고 근본적인 문제라고 굳게 믿었으면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가 묻고 싶은 것입니다. 우리는 운명을 관리하고 사는 사람들입니까?
저와 오랫동안 같이 있었던 비서실의 간사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다른 일을 합니다. 오늘도 졸업한 친구들이 15년 만에 만났답니다. 그런데 중학교 다닐 때부터 유별을 떠는 애들이 있었답니다. 그래서 애들이 굉장히 싫어했답니다. 뭐냐 하면 중학생밖에 안됐는데 맨날 미스트를 갖고 다니면서 얼굴에 수분을 보충하고 매일 선크림을 바르고 다니고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저 모양이었습니다. 15년 후에 만났는데 완전히 다른 고민을 했답니다. 생각 없이 그냥 사는 애들하고 15년 동안 이걸 갖고 다니면서 관리한 애들하고 다르답니다. 비교가 안 되더랍니다. 그 얘기를 들으면서 나는 목사지 않습니까. 나는 얼굴 생각을 한 게 아니라 이야, 얼굴도 그런 것을 지속적으로 관리한 것에 따라서 과장하자면 아무렇게나 산 애들하고 15년, 20년 동안 유별을 떨면서 자기를 관리하면서 산 애들하고 이모와 조카가 만난 것과 비슷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영혼을 그냥 내버려두고 사는 그리스도인과 자신의 영혼을 끊임없이 관리하면서 사는 사람들의 차이는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가슴에 새기십시오. 기록을 하셔도 좋습니다. 체험에서 우러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또 말씀이기도 합니다. 한 일련의 아름다움은, 한 인간의 아름다움은 영혼의 아름다움입니다. 한 인간의 가치는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선한 의지의 크기입니다. (우리는) 정말 얼굴 하나에 푹 빠지는 사람은 자기 같은 수준의 사람들만 그렇습니다. 진짜 영혼의 아름다움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들은 그 사람의 영혼의 아름다움에 반하는 것입니다. 그 아름다운 영혼에 대한 사랑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일치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면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 회복된 영혼으로 살아야 할 것인가. 그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걸레같이 그렇게 너저분한 영혼으로 사는 것은 부끄러운 것입니다. 비록 나의 몸을 수천 파운드짜리 옷으로 둘러싸지는 못했고 고액의 화장품을 사용하거나 값비싼 장신구를 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그 인간 속에서 비치는 매력은 그런 게 아닙니다. 한 인간 안에 마음을 끌게 하는 한 인간으로서의 아름다움, 그런 것은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의 인격과 삶 전체를 통해서 선교적인 존재로 살아가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애드워드 힐러리인가, 그런 영국 사람이 있었습니다. 에베레스트 산을 처음 정복한 사람이었습니다. 기자가 물었습니다. 그때에는 이런 높은 산을 오른다는 것이 지금보다도 정복할 확률이 적었습니다. 왜냐하면 과학도 발달되지 않았고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굉장히 기술이 발달했기 때문에 많이 올라가고 1년에 에베레스트 산에 올라가는 사람이 5백 명이 넘는답니다. 돈 주고 업어다 갖다놓기도 합니다. 1억 5천만 원 주면 업어다 갖다 주고 사진 찍고 온답니다. 그 당시만 해도 거의 손 안에 꼽았습니다. 그 사람은 거기에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엄청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습니다. 그렇게 위험한데 왜 산에 오릅니까? 그 이야기를 어렸을 때 읽었는데 대답은 ‘Because there is.’ 산이 거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부름을 받은 것은 우리는 하나님에게 누군가가 이렇게 물어보는 것입니다. 하나님, 왜 이 세상이 아름답습니까? 그렇게 말씀드릴 때 나의 자녀들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존재가 되게 하시려고 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높은 지위나 위대한 업적이나 더군다나 재산의 소유나 젊음과 늙음에 달려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참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사람들에게 existence 혹은 present 자체로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존재의 울림이 그 떨림이 그 사람들이 되어서 누군가에게 인생의 의미를 묻는 사람에게 말하지 않아도 그것을 느끼게 해줄 수 있는 존재들이 되게 하도록 하나님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불러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진정한 의미는 이 세상에서 어떤 지위를 갖느냐 높아지느냐 낮아지느냐 그런 것이 아닙니다. 원숭이가 높은 꼭대기에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보이는 것은 00합니다. 근데 그런 것들이 모두 다 지나가는 것입니다. 한 인간으로서 하나님 앞에 얼마나 하나님이 의도하셨던 온전한 인간의 삶을 살았느냐를 보여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무엇인가 침체 속에 있는 영혼을 다시 살아나게 해주셨을 때 궁극적으로 의도하시는 바가 있을 것 아닙니까? 그것을 오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다시 말해서 의의 길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내 영혼을 소생시키셨다는 이야기입니다. ‘길’이라는 단어가 히브리말로 ‘데크’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가 성경에 아주 많이 나옵니다. 이것은 성경에 보통 의미로 사용되면 그냥 길입니다. 이 길은 사람이 다니는 길이든 짐승들이 다니는 길이든 상관없고 그냥 무조건 통행을 위해 생긴 길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은유적으로 사용이 되면 이것은 인생의 길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왕이 훌륭한 삶을 살았을 때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일평생 다윗의 길로 행하였더라. 믿음으로 산 사람이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이야기 하는 의의 길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의라고 하는 것은 영어로 righteousness입니다. 쩨대 혹은 쩨다카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그 의의 길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간단히 이야기하면 불의의 길과 반대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의의 길이 무엇이냐.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성경이 의에 대해서 뭐라고 말하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긴 얘기 할 필요 없이 핵심만 간추려서 이야기하면 성경에 여러 가지 의에 대한 용례가 나오지만 여기서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율법에 부합한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율법이 무엇이냐.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렇게 살아라, 하는 표준을 제시하셨습니다. 그런 것들이 많습니다. 그것들을 가장 요약된 형태로 축약한 것이 십계명입니다. 그 계명에 부합한 상태가 의로운 상태이고 어긋난 상태는 불의한 상태입니다. 그런데 그 열 가지 계명이 사람들은 1번부터 10번까지 차례대로 기록이 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그것은 수직적인 계명이 아니라 이렇게 함께 순환하면서 도는 원형의 계명입니다. 나 외에 다른 신을 네게 있게 하지 말라. 1번 계명입니다. 마지막 계명은 10번에서 탐내지 말라고 이야기하고 골로새서에서 탐심이 우상숭배니라 하면서 10번째 계명이 다시 1번 계명으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결국 그 많은 율법들이 10개의 계명으로 축약이 되고 그 10개의 원형으로 되어있는 계명의 핵심부로 들어가면 그 계명은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그 계명으로 요약됩니다. 거기에 부합하는 삶이 의로운 삶입니다. (그럼 우리는) 이 세상의 특징은 그런 하나님의 뚜렷한 삶의 기준을 절대적인 것이라고 받아들이지를 않습니다.
어저께 시내를 걷다 보니까 웨딩촬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둘이 다 남자였습니다. 여러분은 웃습니다. 그런데 영국 사람들은 여러분이 웃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피타 지노라라고 하는 미국의 학자는 사람이 사람과 결혼을 해야 한다는 것도 편견이다. 동성애를 넘어선 것입니다. 소도 당신의 부인이 될 수 있고 말도 당신의 남편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느냐, 합니다. 왜? 그런 절대적인 기준은 없다, 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불의하다’라는 개념, ‘선하다, 악하다’라고 하는 개념 자체가 인간의 거대한 편견 속에서 특정 계층의 이익을 위해서 형성된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 일들을 획기적으로 행한 사람이 누구냐 하면 여러분이 어렸을 때 배운 스피노자라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쓴 책 가운데 에티카 라는 책이 있습니다. 오늘이라도 집에 가서 한번 읽어보십시오. 어떤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내가 그 책을 샀다. 읽기 시작하는 순간 왜 이 비싼 돈을 주고 이런 책을 샀을까 하고 생각했다. 다 읽고 책을 덮는 순간 나는 놀랐다. 나에게 마법의 양탄자가 생긴 것이다.’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양탄자를 타고 다니지 않습니까. 스피노자는 예전까지 의미를 말할 때 사람들이 두 개를 대척점에 놓았습니다. 이쪽은 굿, 이쪽은 이빌. 이것을 와해시켜 버렸습니다. 그럼 무엇이냐 하면 good의 반대는 evil이 아니라 bad라는 것입니다. good과 bad는 누가 결정하느냐. 내가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진정한 행복은 무엇이냐. 분위기, 기분, 어떤 활기스러움, 활력 있는 생각들, 그런 것들이 많은 상태가 되는 것이 인간의 행복이다. 코나투스라고 합니다.
그런 사람에 의하면 만나서 자기를 자꾸 우울하게 만들고 힘들게 하는 사람은 피하면서 사는 것이 행복이라고 봅니다. 그렇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사람은 화란에서 파문당했습니다. 지금은 화려하게 부활한 이 시대의 각광받는 사상가가 되었습니다. 인터넷에 들어가서 스피노자 쳐보십시오. 스피노자의 부흥시대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왜 이렇게 현대인들이 스피노자에 빠지는지 모르겠다고 합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사고와 딱 맞아 떨어지는 탄탄한 이론적인 기초를 제공하는 사상이 동양사상과 너무 비슷합니다. 이 얘기는 그만 하겠습니다. 재밌습니다. 어렵지만 재밌습니다.
그런 것을 그리스도인들은 안 믿는 것입니다. 도덕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의지에 달린 것이고 시대에 의해서 어느 정도는 변천하지만 그 근본적인 것은 이미 인간의 양심 속에, 미덕 속에 주어진 것이다, 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 도덕의 근본은 왜 라는 질문이 성립이 안 되는 것입니다. 왜 엄마하고 결혼하면 안 되나.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묻는 것입니다. 근데 우리는 그것이 질문이 안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왜? 성경에서 그렇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도덕감정이 그것은 악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정답을 딱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성에 호소하는 능력은 이성만을 가지고 말하는 사람이 믿음을 함께 가지고 말하는 사람보다 훨씬 더 훌륭하기 때문에 이기기 힘듭니다.
오늘 시인이 이야기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을 다시 살려서 활기를 갖게 하시는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길을 걸어가게 하심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두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그리스도인의 삶은 확고한 가치의 지배를 따르는 삶이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공산주의자의 신념이 있습니다. 그리고 삶이 동반됩니다. 그것이 공산주의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냥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따라야 할 독특한 삶의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자신의 인생관과 세계관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고는 그것이 없다, 진짜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독특한 세계관과 인생관을 가지고 거기에 목숨을 걸고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군자불유’ 라는 말이 있습니다. 공자는 흘러가지 않는다. 흘러간다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흐르는 강물 위에 배를 띄우고 돛대도 내리고 삿대도 젓고 그 배에 앉아서 술이나 거나하게 마시면서 배가 떠내려가는 대로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유’입니다. 공자는 도덕적 인생을 추구했던 지성인입니다. 그 사람이 그런 인생을 사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사람입니다. 왜. 공자가 배를 띄웠을 때에는 가고자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자기가 가고자 하는 방향에서는 노를 젓고 자기가 가고자 하지 않은 방향에서는 뱃길을 틀어야 합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유’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러면 어떠하리 저러면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친구가 나쁜 일에 빠져도 따끔하게 충고를 안합니다. 내가 그런 일에 휘말려서 신경쓰기 싫다 그런 밑바탕에는 어떤 심리가 있냐하면 비겁함, cowardly.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자기가 어떤 세상이 됐으면 좋겠다, 그리고 내가 살아가는 이 삶은 어떤 삶이어야 한다, 내가 몸담고 있는 직장은 이런 직장이 되었으면 좋겠다, 가정이었으면 좋겠다, 라고 하는 것들에 대한 확고한 가치부여가 안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삶은 회색의 삶입니다.
동양에서 선비가 될 때 학문에 헌신하는, 15세에 뜻을 세우고 학문에 정진하는 때에 제일 먼저 결심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죽음입니다. 언제든지 대의를 위해서는 죽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죽음을 친구처럼 옆에 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이 세상의 빛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그것을 의의 길이라고 가르칩니다.
한번은 오래전 일입니다. 한 55년? 한 30년? 30년까지는 안되고 24,5년 전에 제가 34살에 대학 교수가 되었고 학교를 옮겼는데 그 학교에서 저를 부르더니 그렇게 누추한 집에서 어떻게 연구를 하겠냐 하면서 좋은 집을 마련해서 여기서 사시라고 하고 돈을 무이자로 빌려줬습니다. 처음으로 굉장히 좋은 강남에 있는 집에 들어가서 살게 되었습니다. 얼마 있다가 맞은편 집에 있는 빌라인데 그 분이 집사님인데 찾아왔습니다. 제가 기도하다 보니까 하나님이 사모님에게 이 집을 팔랍니다.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아니 하나님도 이상하시지. 살 사람에게 말씀하시지 팔 사람에게 말씀하십니까? 어쨌든지 집을 사라 해서 어떻게 하다가 집을 싼 값에 사게 됐습니다. 사고 깜짝 놀란 게 무엇이냐 하면 세금이 엄청나게 비싸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우리 집사람이 법무소에 갔더니 세금이 얼마나 나오냐고 물어봤더니 이만큼 나와요, 그 조그만 집이 무슨 세금이 이렇게 비싸냐 하니까 비싸요? 비싸지 뭐 조그만 집에 그렇게 세금을 무냐, 했더니 그럼 반만 내세요. 무슨 세금이 또 그런 세금이 다 있습니까. 집 사는 사람하고 파는 사람하고 계약을 작성하고 자기한테 제출할 때는 가짜 계약서를 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집값을 실제보다 한 1/3정도 낮춰서 거래하는 것으로 쓰면 그게 요즘 나오는 다운계약서입니다. 그러면 세금을 줄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집사람이 갖고 와서 나한테 이야기를 하는데 내가 그랬습니다. 아니 집 사는 사람이 목사고 파는 사람이 집사인데 둘이 앉아서 그런 가짜 계약서를 쓰면 하나님이 정말 기뻐하시겠다. 로마서 13장을 봐라. 공세를 바칠 자에게 공세를, 국세를 바칠 자에게 국세를 바치라. 결국 다 내기로 했습니다. 박박 긁어서 우리 아이들 저금통까지 찢어서 더 보태서 가지고 갔습니다. 세금 내러 왔는데요. 계약서 써오셨어요? 아니요. 어떡하시려고요? 그냥 다 내려구요. 그때 그 여직원의 눈빛이 우리를 어떤 눈으로 쳐다봤겠습니까? 정말 존경스러운 분들이시구나. 이렇게 생각을 하고 자기를 반성했겠습니까, 이 븅신 했겠습니까? 전자입니까 후자입니까. 그것이 세상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은 즉각적으로 어떤 도움을 받으려고 생각하는 것은 바보 같은 생각입니다. 죽을 때까지 보상을 못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순교자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삶의 표징입니다. 그렇게 살다가 가는 것입니다.
한번은 충신동에 있는 어느 대학에서 특강을 초청했습니다. 그때는 운전해주는 사람도 없고 내가 차를 몰고 출발했는데 고속도로에서 사고가 나서 차가 밀렸습니다. 톨게이트를 나와서 지방도로로 들어설 때에는 시간이 빠듯했습니다. 빨리 달렸습니다. 그랬더니 저 멀리서 파란 옷을 입은 경찰관이 있었습니다. 속도를 줄였습니다. 그러더니 차를 세웠습니다. 면허증을 보여주십시오. 해서 왜 그러세요, 했더니 속도위반 하셨습니다. 과속하셨습니다. 언제 속도위반 했습니까. 저 산등성이에서 위반했다는 것입니다. 산등성이에서 위반한 걸 당신이 여기서 어떻게 아냐 했더니 거기에 자기 친구가 있는데 스틱으로 찍어서 자기한테 무전을 쳤다는 것입니다. 할 말이 없었습니다. 이 대학에서 나를 강연에 초청을 해서 빨리 가다가 그랬다, 얼른 끊으라고 했습니다. 뭐하시는 분입니까. 대학에서.. 아 교수님이시군요. 교수님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벌점 약한 걸로 끊어드리겠습니다. 무슨 소린지 모르고 빨리 가야된다는 생각에 받아가지고 햇빛가리개에 딱 넣고 잘 하고 밤중에 올라왔습니다. 아침이 됐는데 그 딱지 생각이 났습니다. 빨리 가서 돈을 내야지 하고 직원을 시킬까 하다가 내가 가자 하고 갔습니다. 딱 열어보니까 이상한 것입니다. 오래전 일입니다. 99년도의 일입니다. 벌금은 너무 적습니다. 6천원이 나왔습니다. 보통 그때도 2만원은 내야 했었습니다. 6만원인가 했더니 자세히 보니까 6천원 이었습니다. 이렇게 싼 게 없는데, 왜 그러지 하다가 그때가 생각난 것입니다. 걱정 마세요, 싼 걸로 끊어드릴게요. 그걸 요금을 내려고 대체 뭔가 하고 들여다봤더니 벌금 6천원, 범칙사실 금연 장소에서 담배 피우다 걸렸음. 만약에 그걸 교회 직원이 가지고 갔으면 우리 목사님 어디서 담배 피다가 걸리셨나 할 것입니다. 그 때 처음 생각했습니다. 아 이건 아니다. 이건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말 할 수 없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 원칙을 세웠습니다. 될 수 있으면 교통 법규를 지킨다. 그러나 걸렸을 때에는 법대로 처벌을 받자.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조금만 타협을 하고 의를 양보하면 쉬운 인생을 살아갈 수 있지만 그것을 의로운 길을 똑바로 걸어가려고 할 때에는 감당할 수 없는 시련과 어려움을 만나는 경우를 수시로 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의 삶은 밤하늘의 불꽃놀이와 같은 것입니다. 불꽃놀이 하시죠? 어두운 밤하늘에 불꽃이 확 올라가서 빵 터집니다. 근데 진짜 멋있게 터지는 불꽃은 한발을 쏘는데 400만원짜리도 있답니다. 1방에 2천 300파운드 정도. 밤새도록 쏘면 한 7억 8억원어치를 쏘는 것입니다. 밤새도록도 아닙니다. 그거 한 한시간반 정도 됩니다.
낮에 불꽃놀이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두워 질 때까지 기다립니다. 왜. 그 어두운 밤하늘을 배경으로 불꽃이 장렬하듯이 폭발하는 장면, 그 아름다움을 연출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아름다운지 아십니까? 화약이 폭발하면서 화약과 작용하는 매지에 따라서 다양한 색깔을 넣는 것입니다. 그 성분이 뭐냐에 따라서 그래서 어떤 것은 초록빛이 나고 어떤 것은 빨간 빛이 납니다. 그런 것을 정교하게 섞어서 폭탄을 만들어서 팡 하고 터뜨릴 때 오색 빛이 찬란한 불꽃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다 그렇다, 썩었다, 그리고 살기가 힘들다고 이야기 합니다. 근데 세상은 원래 그렇습니다. 언제든지 그렇지 않은 세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우리보고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리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어두운 세상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들에게는 기회입니다. 그런 어두운 세상에서 빛을 발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찬양)
이 곳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부르셨네
주의 얼굴 구할 때 역사하소서
그러면서 자기가 믿는 신앙을 따라 살다가 자기의 신앙과 현실을 조화시키고자 애를 쓰다가 도저히 조화를 시킬 수 없는 현실이 왔을 때 장렬하게 그 믿음을 따라서 밤하늘에 불꽃이 산화하듯이 그렇게 사라지게 하시려고 우리를 이 곳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을 살면서 두 가지 생각의 균형을 이룹니다.
한편으로는 이 세상에 살아있게 하신 것을 감사하면서 모든 매사를 긍정적으로 봐야 합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이 세상은 어차피 완전하고 영원한 세상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나그네와 같이 지나는 사람들이다, 기회가 주어져서 이 세상에 살 때는 영원히 살 것처럼 살지만 그러나 어느 한 순간 우리들이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이 올 때는 죽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처럼 죽어갑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그러니까 눈에 보이는 이 현실이 모든 희망인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에서 제시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뭐라고 주님이 말씀하십니까?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한 알이 그대로 있으면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의 현실이 자신의 희망의 모두인 사람처럼 비참한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 현실 너머에 또 다른 세계에 대한 희망이 현실 속에 침투해 들어와서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그 희망을 현재적으로 경험하면서 그 기쁨 속에서 고난과 시련을 이기고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기꺼이 사랑하고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면서 사랑하면서 진정한 인간의 아름다운 삶이 무엇인가 그리고 진정한 인간의 삶의 현존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라고 여러분을 그리스도인들로 부르신 것입니다.
그 기쁨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은 죽을 때까지 시련의 기쁨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살기 싫은 부부가 억지로 사는 것처럼 뭔가 자신의 몸에 맞지도 않은 옷을 입고 부자연스럽게 살아가서 자기가 예수 믿기 때문에 하나님도 행복한 적이 없고 하나님 때문에 자신도 행복한 적이 없는 어거지와 같은 삶을 살다가 인생이 끝나는 것입니다. 마음대로 타락하고 죄를 짓자니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있고 하나님을 온전히 따르자니 세상이 너무 좋은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으로 가도 이방인이고 신앙의 세계에서도 이방인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에 있어서 중간이라고 하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려고 그 길로 가려고 애를 쓰든지 아니면 신앙 없이 살든지 둘 중의 하나여야 합니다.
오늘날의 우리의 신앙생활은 자기소비적인 신앙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은혜를 받고 싶답니다. 그것은 나쁜 고백이 아닙니다. 그런데 왜? 그래야 좀 마음이 편할 것 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적으로 활동하면서 신앙에서 얻는 많은 유익들의 목표가 자기소비적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그것을 그대로 받는 은혜를 가지고 자기 소비적인 삶을 살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가지고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의로운 세계의 구현을 위해서 살도록 하나님이 부르신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살라는 것입니까? 공부하십시오. 성경이 가르치는 것입니다. 너 자신을 위해서 공부하는 것이 아닙니다. 공부해서 자기와 같은 지식이 없는 사람을 무릎을 꿇고 섬겨서 그 무지한 사람의 영혼을 아름답게 하고 삶의 질을 개선하게 하기 위해서 공부할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공부를 해서 안락한 삶을 살고 수입이 많은 편안한 삶을 살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미 그리스도인으로서 삶의 방향 설정이 잘못된 사람입니다.
사업을 하고 돈을 법니다. 그럼 어차피 경쟁사회니까 도둑질해서 뺏거나 쾌걸조로나 홍길동같이 그러지 않는 한 경쟁을 해야 할 것입니다. 공정하게 경쟁을 해서 승자가 되어야 합니다. 자신이 자신의 부를 얻어야 합니다. 신앙적으로 동의하진 않지만 캐드버리의 생애를 오늘 아침에 누가 안내해줘서 돌아봤습니다. 한 사람이 올바른 생각을 가지고 삶의 가치를 설정하고 살 때에 온 도시가 그 혜택을 누리는 것입니다. 왜. 그의 지혜와 그의 능력이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입니다. 돈을 법니다. 그렇게 버는 돈은 남 주려고 버는 것입니다. 남 주려고. 그것을 가지고 자신이 휘황찬란한 옷을 걸치고 자신의 영혼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과다한 소비생활을 할 때에 그 사람이 아름다워질 수가 있겠냐는 것입니다. 돈을 벌고 공부하고 높은 지위에 오르고 모든 것들이 다 결국은 남 좋은일 하기 위해서 그 길을 걷는 것입니다. 사업하는 사람들에게 항상 물어보는 것이 있습니다. 당신의 이상이 무엇입니까? 전 세계의 돈의 절반을 당신 사업에서 당신이 승자가 되어서 손에 넣었다고 생각할 때에 당신의 인생은 어떻게 전개될 것 같습니까? 대답할 말이 없다면 사업을 하지 마십시오. 그 사람은 절대 사회를 행복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나는 학문을 하는 사람으로서 강철왕 카네기를 높이 평가합니다. 여러분 1800년대 중반만 해도 미국은 형편없는 나라였습니다. 1800년대 후반부터 산업혁명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사실 가난한 나라였습니다. 카네기가 강철 사업을 해서 천문학적인 액수의 부를 모읍니다. 그것을 가지고 무엇을 했는지 아십니까? 모르시죠? 도서관을 지었습니다. 도서관에다가 책을 가득가득 채워서 길거리에서 흙이나 파고 놀던 할 일없는 동네의 아이들이 도서관으로 몰려가게 만들었습니다. 그 책 읽는 재미에 빠지게 만들었습니다. 그것을 3400개를 만들었습니다. 거기서 책을 읽은 학생들이 다음세대의 미국을 위대한 나라로 바꾼 것입니다. 경제적으로 산업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어떤 인생관을 가지고 의의 길을 걸어가느냐에 따라 세상은 바뀝니다. 그런 가치와 보람으로 사업을 하고 공부하고 실제 집안에서 아이들을 양육하고 그렇게 사는 것이 인생입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하나의 수상을 만들기도 하시고 거부를 만드시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백화점 같은 곳의 주인이 되게도 하시고 어떤 사람은 그 앞에서 빗자루질 하면서 인생을 살게도 하십니다. 그것은 모두 삶의 양상에 불과합니다. 본질이 무엇인가. 내가 왜 여기 사람으로 살아서 죽지 않고 매 순간 무슨 가치관에 의해서 먹고 마시고 숨 쉬고 똥 싸고 오줌 누고 인생을 살아가는가. 답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답을 찾았다고 말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그런 의로운 길을 걸어가는 것은 항상 수많은 사람의 박수소리와 찬양소리만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것을 누가 못합니까. 엄청 정직하게 세금을 갖다내는데 병신 소리를 들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도 자기의 신념과 가치에 어긋남이 없이 뚜벅 뚜벅 인생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어느 날 맹자를 읽다가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 중 한 구절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이 세상에 가장 넓은 집에 살며 그 집이라는 것이 사람을 이야기합니다. 인. 가장 올바른 곳에 서며 가장 큰 길, 대도로 걸으며 뜻을 얻으면 다른 사람들과 함께 그 길을 걷고 뜻을 얻지 못하면 혼자서라도 그 길을 걷나니 부귀가 그의 마음을 어지럽게 못하며 비천이 그의 뜻을 옮기게 하지 못하고 무력과 위협이 그를 굴복하게 하지 못하니 우리는 이런 사람을 가리켜 대장부라고 부른다. 이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한 인간으로서 딱 서서 내가 누구인지 내가 여기에 왜 살고 있는지 그러면 무엇을 위해서 살고 죽어야 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인식을 가지고 언제나 죽을 준비를 하면서 사는 사람, 이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거기에서 그 모든 격변하는 삶의 사태, 우리가 내일이라도 암 선고를 받고 석 달 후에라도 죽을 수 있고 너무 사랑하는 우리 엄마나 내 사랑하는 남편과 헤어질 수도 있고 가슴 아픈 일이긴 하지만 많은 부모들 중에 자기가 너무 사랑하는 아이를 죽음 저편으로 떠나보내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 속에 일어나는 어떠한 사건이라도 우리의 삶을 뿌리 채 뒤흔들지는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이 무엇 때문에 이 인생을 살고 자신이 걸어가야 할 인생의 길이 무엇인가에 대한 명료한 의식이 있어야 하고 그리고 그 길이 옳은 길이고 그것이 정말 걸을만한 길이라고 하는 그런 보람과 기쁨이 자신 속에, 정신세계 속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우리에게 매일매일 체험하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 우리가 쉽게 하는 말로 은혜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은혜는 항상 진리에 대한 깨달음과 함께 오는 것이지 그것 없이 우리에게 오는 것이 아닙니다.
어차피 우리의 인생은 우리 마음대로 안 되는 일이 훨씬 더 많습니다. 그럴 때에 그것을 고요히 받아들이게 하고 어떤 일에 의해서도 우리의 인생의 주체성을 잃지 않고 삶의 기반 채 뒤흔들리는 일 없이 그렇게 인생을 살기 위해서 우리에게 신은 필요하고 그리고 그것은 매일매일 자신의 영혼을 소생시키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에 의해서 갱신되어야 하고 그것이 자신의 삶속에 체화되어서 그것을 누리면서 사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 표준이 바로 의로운 길을 걸어가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도저히 이것은 신앙이 없는 사람들은 흉내 낼 수 없는 그런 확고한 삶 그리고 영어로 오러 라고 이야기 합니다. 라틴어로 아우라가 있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렇게 살지 않는 사람들이 그런 삶을 보면서 부끄러워하고 저 사람은 돈이 많다는 이유 때문에 내 머리가 숙여지는 것이 아니라 예쁘다는 이유 때문에, 높은 지위가 있다는 이유 때문에 권력이 있다는 이유 때문에 머리가 숙여지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보기만 하면 내가 한 인간으로서 부끄럽다는 느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조용히 자기의 길을 걸어가는데 나는 자꾸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인생을 이렇게 살아도 되는가.
(찬양)
너를 보는 이마다 주 생각하리
그런 사람을 이 세상은 눈물겹게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어느 세상의 한 구석에서 여러분이 이런 사람이 되라고 하나님이 아직 살아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사는 날 동안 주님을 마음에 모시고 있는 사람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