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대학교 집회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바 되시고 영광가운데서 올리우셨음 이니라(딤전3:16)
녹취자 : 이경순
오늘날은 이미 한국에서 기독교 신앙이 환영받던 시대는 지나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들은 어떻게 하던지 교회가 살아남고 또 사람들을 모으고 모인사람들을 흩어지지 않게 하는 일에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한번 중요한 질문을 해 보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그리스도인이거나 혹은 그리스도인이 되려하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한 가지 중요한 질문이 있으니 그리스도인이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질문은 바로 우리가 누구이며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인지에 대한 답을 가르쳐 주는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누구인지가 규정되면 도대체 기독교 신앙은 무엇인가가 규정 될 것입니다. 우선 누가 그리스도인이 아닌지에 대해서 먼저 생각 봅시다. 교회에 출석하고 있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아니죠. 예수 믿는 가정에서 태어나 기독교 문화에 익숙해진 사람을 성경은 기독교인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기독교란 종교에 대해서 우호적인 사람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서 우리는 기독교인이라고 부르지 않고 신의 존재를 막연하게 인정하는 사람들도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이란 도대체 누구일까요.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본문에 의하면 경건의 미스터리를 안 사람 그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오늘날 기독교가 양적인 팽창과 함께 도덕수준의 심각한 저하로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이것은 가톨릭이나 기독교나 마찬가지입니다. 최근 몇 년 사이에 미국에서만 가톨릭이 성직자의 성추행과 관련에서 지불한 위자료만 오천억 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이러한 기독교의 도덕적 수준의 현저한 저하는 남의 나라에서 일어나는 일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오늘 이 설교를 듣는 여러분들 중에 이러한 선악의 문제에 대해서 단호한 태도를 가지고 있는 학생들이 몇 퍼센트나 되는지 묻고 싶습니다. 혹시 여러분들은 교양시간에 학점을 얻기 위해서 믿는 것은 창조론을 믿는데 진화론으로 답안을 써 낸 적 없습니까 또 대리출석과 리포트 베끼기 심지어는 시험에 부정행위 이중 삼중으로 장학금을 타는 행위들 그 이외에도 이세상사람들은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만 신앙의 사람들은 해서는 안 되는 그러한 부도덕한 일들을 여러분들이 해 오지 않았는지 한번 돌아보십시오. 이러한 모든 것들은 단지 도덕적 개선을 위해서 상황을 바꿔놓을수 있는 성질의 것만은 아닙니다. 물론 우리는 그러지 말자고 다그쳐야 하고 그리고 학교에서도 잘못된 것에 대해서는 엄중하게 제제를 하고 선악의 질서들을 배우고 세우고 또 기독교 학생들은 그런 일에 있어서 모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오늘 이 문제를 근원서부터 집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들 중에도 인터넷에 중독에 빠져있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고 어쩌면 약물중독의 상태에 있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사회 보신 교수님 기도하신 교수님 교제하신 교수님 20%정도의 학생이 우울증에 걸려있다고 하는데 조금도 저는 그러한 통계를 의심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제가 만나보면 젊은이들이 정상적인 사람들이 몇 안 됩니다.이러한 혼탁한 상황 속에서 우리들이 이 질문을 던지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는 질문이라고 여겨지는 것입니다. 인간의 몸에 일어나는 많은 병의 증상들은 그 증상들을 치료하므로 서 뿌리를 고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 병원에서는 콧물이 나고 재채기가 나는데 입에 바르거나 코에 치료하는 약을 주는 대신 먹어서 삼키고 푹 자야하는 감기약을 주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코를 고치고 입을 고쳐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 감기라는 바이러스 균에 감염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로 하여금 이러한 혼란에 빠지게 하는 진짜 근본적인 원인이 무엇인가 하는 이 질문과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 관련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이 문제를 오늘 성경말씀에 입각해서 하나씩 풀어봅시다. 희랍어 성경에서 경건이라는 단어는 유 세배이야 라는 단어입니다. 유는 좋은 굿 세베이야는 두려움입니다. 그러니까 바람직한 두려움 좋은 두려움이 바로 경건이라고 하는 것이죠. 그런데 오늘 성경은 이 경건에 대해서 말하기를 비밀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선악의 감정을 일깨워서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도 행할 수 있는 도덕적인 행동은 엄격하게 말하면 도덕이지 경건이 아닌 것입니다. 불경건한 사람도 충분히 도덕적일 수 있고 또 경건해야하는 사람이 부도덕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경건이라고 하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냐 라고 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이 경건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핵심적으로 이해하기 쉽게 두 가지로 설명한다면 첫째로 하나님의 어미에 대한 두려움으로 떨리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에 대해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 이것이 경건의 첫 번째 요소 인 것입니다. 오늘날은 하나님을 뒷집에 있는 아저씨같이 그렇게 가볍게 생각하고 자기들의 친구처럼 여기는 가벼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는 가장 중요한 증언은 하나님은 어떤 의미에서든지 우리인간과 비교될 수 없는 존재론적으로 탁월한 질적 타자라는 사실입니다. 어떠한 의미에서든지 우리인간과 동일하게 다루어지거나 취급될 수 없는 그러한 존재시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시간과 공간에 묶여 있는 유한자인 인간이 질적으로 전적인 타자이며 무한이 높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좁힐 수 없는 존재의 격차를 깨닫고 그 분 앞에 떨리는 두려움으로 엎드려 부복하는 것 그리고 그 무한한 두려움 속에서 굴복하는 것 이것이 신앙의 시작입니다. 파스칼은 팡세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영원한 우주의 무한한 침묵은 무한한 우주의 영원한 침묵은 나를 두렵게 합니다. 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존재가 티끌 같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
(찬양)
온 땅과 하늘위에 계서 홀로 영원하신 이름
그것을 경험하고 그리고 그 분 앞에 떨리는 두려움으로 무릎을 꿇는 것 그것이 신앙의 출발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성경이 말하는 경건을 충족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 필요한 것은 이끌리는 사랑입니다. 여러분들은 18세기 이후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근대 미학의 근원이 숭고미에서 출발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미학의 출발점은 인간이 접할 수 있는 그런 주변에 있는 아름다운 것들로부터 출발한 것이 아니라 좁힐 수 없는 존재의 격차지에서 오는 그 숭고한 아름다움에서 이 자잘한 미의 근원을 찾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존재의 격차지요. 여러분들은 혹시 만년설이 쌓인 높은 록키산맥 같은 곳에 올라보셨습니까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우리나라 백두대간이라도 겨울에 한번 올라보셨습니까 수천 미터의 영봉들이 끝없이 펼쳐져있고 내가 산중에 있는지 없는지 느껴지지 않을 정도의 지극히 작은 존재감을 체득할 때 그때 우리는 거기에서 정말 자신이 티끌 같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데 바로 그것이 아름다움의 근원 이예요. 그런 아름다움을 경험하면서 이끌리는 사랑을 느끼는 것 이것이 경건의 또 한 측면 이예요. 두려운데 공포심에서 무서워서 도망치고 싶은 그런 종류의 두려움이 아니라 두려우면서도 그 속으로 이끌려 들어가고 싶은 사랑 이 두 가지가 경건의 양면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모든 인간들에게 이 두 가지를 알게 하시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자연의 세계에 눈을 뜨면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에 대해서 새로운 인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얼마전 신문에는 지구에서 7천오백년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는 거대한 별 먼지의 군을 발견했습니다. 허블 망원경이 아주 신비한 장면을 찍어서 지구로 전송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하늘의 별은 그러한 별 먼지 속에서 생성이 됩니다. 우주 공간에는 에이 취밖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한곳에 뭉치게 되고 이것들은 대부분 폭발하며 사라지는 별의 폭풍에 의해서 일어납니다. 이때에 많은 원소의 변화가 일어나게 되고 다양한 원소들이 생겨나게 되며 그것이 하나의 거대한 구름을 형성 하는 것입니다. 그것들이 뭉치고 중력에 의해서 핵반응을 일으키면서 장구한 세월이 흐르는 동안 별 구름 속에서 수많은 새끼 별들이 폭발을 일으키며 떨어져 나오는데 이것이 신성의 이러한 별 구름이 어마어마한 크기로 전개되고 있었는데 둥주리처럼 그 속에서 수많은 작은 별들이 만들어 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 별구름의 길이가 약 3광년이라고 하니 우리는 도대체 생각할 수 없는 규모의 거리이죠. 그러한 위대한 우주를 보면서 인간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과 그 하나님이 자신과는 비교될 수 존재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타락하고 죄가 들어온 뒤로는 인간이 이런 것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지성의 능력을 현저하게 상실한 것입니다. 영원에는 어두움이 깃들고 지성은 눈멀고 감정은 이기적인 욕망에 충동받고 그리고 의지는 헛된 것에 굴복하는 뒤틀린 인간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어떤분 이신지를 이 세상에 한 사람을 택하고 한 가정을 택하고 한 민족을 택하고 한 국가를 택하여 우리 이 세상에 알려오셨고 그들은 그 지식을 통해서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그리고 자기를 향한 사랑을 깨달으며 구원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을 전달하기에 충분한 지식이 아니었습니다. 마침내 하나님께서는 보이지 않는 당신의 거룩함과 그리고 그 사랑을 볼 수 있는 방법으로 전해주시기 위해서 당신 자신이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이 이 세상에 오셔서 33년 동안 사시는 동안 고난과 시련을 당하시고 병든 자를 고치고 주린 자를 먹이고 그리고 무지한 자를 일깨워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섬김은 하나로 귀결되는 준비의 섬김이었습니다. 그 하나의 귀결이 바로 십자가의 사건이고 이 십자가의 사건은 경건의 두 요소인 하나님을 향한 이 거룩하심을 향한 인간의 경건의 비밀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핵심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은 이제 이 세상의 별자리를 보며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를 보면서 시작 됩니다. 그분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그것을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을 거역하고 죄를 범한 인간들을 향해 부들부들 떠시는 하나님의 진노를 보는 것입니다. 이 모든 세계를 창조하시고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의 진노와 분노를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서 발견하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죄라곤 지은 일이 없고 옳지 않은 것이라고는 행한 적이 없는 그분이 부끄럽게도 죄수들이 매달려 죽는 치욕스러운 십자가에서 못 박히셨습니다. 강도중 한 사람으로 받아들여지면서 십자가에서 가장 부끄러운 죽음을 그것도 가장 치욕스러운 방법으로 죽었습니다. 십자가는 인류가 만들어낸 가장 잔악한 사형 방법입니다. 바로 그 나무에 매달려 그분이 십자가에서 죽으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우리 모든 인간들이 지은 죄를 그분이 짊어지셨기 때문에 그것을 짊어지고 있는 동안은 하나님 앞에 그분은 사랑스러운 당신의 아들이 아니라 구원받을 인간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매달리신 희생양 이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의 모든 죄에 대한 진노를 그리스도예수의 육체위에 퍼부으셨고 그래서 그분은 십자가에서 짓이김을 당하셨던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맨 처음은 바로 이 십자가의 형벌의 사실에 눈을 뜨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 죄에 대한 형벌이 나의 죄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은 항상 회개로부터 시작을 하는 것입니다.
(찬양)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영문)
그런데 바로 그 동일한 십자가에서 그분이 못박혀죽으신 이유가 형벌 받아 마땅한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서 대신 죽으신 것임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떨리는 두려움으로 부복하던 바로 그 십자가에서 동시에 자기 같은 인간을 뜨겁게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눈물겨운 사랑에 눈 뜨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 신앙의 시작인 것입니다. 매우 한정된 지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한다면 누구든지 이러한 죄에 대한 심오한 회개와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믿음 없이는 결코 구원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이제 정리가 됐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떨리는 하나님의 두려움과 이끌리는 사랑을 경험하고 거듭나 회심한 사람입니다. 영적으로는 그리스도 교회의 공동체적으로 에 접붙여지고 하나님의 생명을 분여받은 사람 그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고 경건은 바로 그 인간을 그리스도 되게 하는 영적인 비밀입니다. 교회는 바로 이런 참된 그리스도인들의 영적인 연합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구원해주신 사람에게는 본질적으로 우리들이 볼 수없는 영혼의 변화가 일어난 사람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에 대한 두려운 마음을 갖게 되고 나아가서 이끌리는 사랑에 감격하게 되는 것은 죽었던 영혼을 다시 살아나게 하신 것의 의식세계에서의 결과입니다. 그러면 그 영혼 안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요. 이것이 바로 중생입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동물을 참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늘 집에 강아지가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안 기르기 시작했어요. 왜냐하면 죽을 때 너무 마음을 아프게 하고 죽는 거예요. 며칠씩 밥도 안 먹고 그 개를 생각하면서 울고 그래서 그담부터는 개를 안 기르게 되었어요. 그리고 취미를 붙인 게 병아리였어요. 병아리는 죽었을 때 그 정도 슬픔은 아니더라고요. 또 우리에게 고기를 남기니까 그런데 학교 오고가는 길에 부화장이 있었어요. 그 부화장에 가끔 갔었는데 보면 은 따뜻한 방안에 계란을 쫙 깔아 놓습니다.21일쯤인가 지나면 거기서 병아리들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나올 때 속에서 병아리가 다 만들어졌어요. 그런데 계란에서 소리가 들려요. 톡톡 톡톡하면서 소리가 들려요. 이놈이 달걀 껍데기 속에서 이미 다 병아리가 된 거예요. 그래서 눈을 떠보니까 허연 것밖에 없는 거예요. 그 껍질이 자기가 태어나서 만나는 최초의 세계야 그래서 어떻게 할까 하고 생각하다가 본능적으로 주중이로 툭툭 찍어보는 거예요. 그리면 결국 그것이 쫙 깨지는 거예요. 그러면 병아리는 반쯤 깨지면서 생전보지 못했던 세계에 등장하게 되는 거죠. 모든 병아리의 공통점이 몇 초 동안은 충격을 받아서 어릿어릿하는 거예요 못 떠나고 모든 병아리의 공통 점이예요. 그것은 그 알속에다 아무리 소리를 들려주고 학습을 시켜줘도 그 알이 깨졌을 때 충격을 받는 그 모습은 피할 수가 없는 현상 이예요. 똑 같이 우리의 영혼이 다시 살아나면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두 가지 놀라운 변화를 가져다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는 존재론적인 변화이고 또 하나는 인식론적인 변화입니다. 존재론적인 변화는 존재자체가 변화되게 만드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는 공학도가 계시지요. 존재를 공학에서는 무엇이라고 이야기 하는지 모르겠지만 존재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나는 이 존재가 힘과 경향성들을 본질로 한다고 생각을 해요. 그러니까 그 물체가 가지고 있는 성질이 경향이 독특한 성향이 그 물질의 본질이 되는 것이죠. 물은 흐르는 성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바위는 움직이지 않죠. 그래서 물은 흐르는 그 성향 자체가 하나의 본질이 되는 것이죠. 그러면 인간의 존재라고 하는 것은 여러분들이 원판을 밀고 눈을 찢고 코를 늘리고 볼을 깎는다고 해서 새사람이 되는 것이 아녜요. 자연산이나 인공산이나 어느 형제가 결혼을 했는데 딸을 낳았는데 아무도 안 닮았데요. 아무리 자기 딸이지만 정말 봐 줄 수가 없을 정도라는 거예요. 그래서 이 아이를 위한 성형적금이라도 들어야 겠다 이러고 그리고 처갓집에 놀라갔는데 밥을 차리는 동안 우연히 앨범 책이 하나 있어서 넘겨봤는데 자기한테는 인사를 시켜주지 않은 그 집 식구가 하나 있더래요. 그런데 자기 딸하고 쏙 빼닮았더래요. 저 뒤편에서는 우리가 왜 웃는지 모르고 있어요. 여러분들은 무슨뜻이지 알고 웃는 거죠. 웃고나 서 나중에 물어보면 모르겠다고 그러더라고요, 그 자매가 성형수술을 하고 시집을 온 거예요. 그래서 딸을 낳았는데 성형수술 하기 전에 엄마를 닮은 거예요. 그렇게 난리를 해도 사람이 변하는 게 아녜요. 그래서 변하는 것이 존재가 변했다고 하는 것은 무슨뜻이냐면 그 자체의 본질이 변했다는 거예요. 그 본질은 성향이 변한 거예요. 그럼 도대체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았을 때 무슨 성향이 변했느냐 사랑의 성향이 변한 거예요. 이전에는 자기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자기애적 존재였는데 주님을 믿고 주님이 그의 영혼을 사랑하게 사실 때 그래서 하나님의 두려움과 이끌리는 사랑에 눈뜨게 되었을 때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향을 부여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느 한순간에 밀려오게 됩니다. 확 밀려오게 되는 겁니다.
저는 인생의 벼랑 끝에 있던 젊은이들이 주님을 만나는 광경을 많이 봤거든요. 그런데 지긋지긋하도록 이를 갈고 미워하던 사람들이 꼭 있어요. 인생의 마지막 벼랑 끝에 간 사람들에게는 항상 그런 사람들이 있어요. 아버지일수도 있고 엄마 일수도 있고 남편이나 혹은 형제일수도 있고 등등 정말 많아요. 그런데 그들이 정말 주님을 만나고 변화가 되면 그런 사람들을 용서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그 큰 사랑이 자기를 용서했기 때문에, 그런데 이 자기사랑의 특성은 오그라드는 사랑 이예요. 그런데 하나님사랑의 특성은 확산되는 성질을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나는 이런 하나님 사랑을 교통 애라고 불러요.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사람이 오지랖이 넓어져요. 아 저 친구 오늘 굶지 않았을까 밥은 먹었나. 은혜를 받고 사랑이 있게 되면 저 친구 어머니가 편찮으시다고 그러던데 괜찮나 내가 아르바이트를 해서 약값이라도 보태야 되는 거 아니야 이게 뭐냐면 사랑이 시키는 겁니다. 확산되면서 시키는 거예요 그래서 어디까지 가냐면 가보지 않은 나라 사람들이 굶고 예수님을 모른다는 것 때문에 가보지도 못한 나라 피부색갈도 다른 자기가 오늘 이 교회당에서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께서 저들을 버리지 말아달라고 기도할 마음까지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사랑 이예요. 그리고 주님이 마지막에 건설 하시려고 하는 하나님의 나라의 본질이 그러한 사랑의 나라예요. 이에 대해서 자기사항은 안으로 오그라들어요. 그래서 이 사랑이 아주 극단화되면 부모도 없고 자식도 없고 남편과 아내도 없고 동료는 물론 없고 자기밖에 없는 거예요. 그것이 바로 자기사랑의 특징 이예요. 그래서 오늘날 여러분들에게 힌트하나 줄게요. 공부하면 충분히 밥벌어먹고 사는 분야가 있어요. 심리학과 인간의 정신치료학에 관한 것을 공부하면 되는 거예요. 물론 의대를 가야된다는 것이 좀 부담스럽긴 하지만 여러분 실력이면 한번 해 볼 수도 있죠. 귀중한 공학인재를 빼서 그리고 보내면 안 되겠지만 불루오션 이예요. 무엇하든지 심리와 치료라는 간판을 걸면 돈은 저절로 들어옵니다. 아마
잘해서 가업을 물려주면 손자 때까지는 잘 먹고 살수 있을 거예요. 왜 자기애에 빠지게 되니까 점점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는데 자기가 누구인지 정체성에 대해서 도저히 알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심리학이 폭발적으로 발전하고 발전 한다기 보다는 유행하게 되는 거고 최근에 깨달은 사실인데 정신의학적으로 분류하는 질병 중에 정상증후군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모든 것에서 너무 정상적이면 그게 정신질환의 일종이라는 거예요. 그런 사람을 구원의 은혜는 바꿔놔요. 그래서 인간은 자기를 위해서 살아서는 절대로 행복할 수 없는 존재예요. 하나님이 인간을 그렇게 만들어 놓으셨어요. 그래서 성경이 그렇게 두꺼운 책인데 너 자신을 사랑하라는 말은 한구절도 나오지 않아요. 왜냐하면 그렇게 해서 인간이 행복해 질수 없고 또 하나는 하나님을 참답게 사랑하는 본성을 부여받게 되면 자신을 올바로 사랑하게 되기 때문이예요. 그래서 여러분들은 남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되요. 공부를 할 때 남 주려고 공부를 해야 돼요. 남 주려고 돈을 벌되 다른 사람들을 주려고 돈을 버는 사람이 되자 그것이 중생이 가져오는 존재론적인 변화예요 사랑의 변화 두 번째가 뭐냐면 인신론적인 변화인데 이것은 예전에는 전혀 볼 수 없었던 것들을 인식하게 되는 능력이 주어져요. 그것은 하나님의 아름다움 이예요. 우리는 자연의 세계 속에서도 이런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것은 하나님 자신의 아름다움의 희미한 반영에 지나지 않아요. 우리는 뉘 집안에 가서 예쁘게 꾸며 놓은 집안의 환경을 보면 그 주인의 심성을 알게 되요. 마찬가지로 이 자연의 창조세계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한 표현 이예요. 그래서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가 이렇게 말했어요.
(찬양)
온 천하 만물은 그림책 같으니 그 고운 그림보아서 잘 알 수 있어요
그러면서 하나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찬양)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별 볼일 없는 도시에 살지만 밤에 시골의 빈들에 서서 하늘을 쳐다봐요. 찬란한 별들의 향연이 펼쳐져요. 북쪽하늘에 떠 있는 국자모양의 북두칠성 한 면에 나란히 서있는 별처럼 보이는 다정한 국자 네 번째별과 다섯 번째별 사이는 구백만광년이래요. 그런 것을 보면서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다우신분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요. 12세기에 어떤 이탈리아 수학자는 말하기를 피보나치란 사람이었을 거야 아마 그는 말했어요. 이 우주가 무어냐고 말한다면 누군가가 피고나치의 수열로 장난을 친 것이다. 바닷가에 아무렇게나 조개껍질 속에 있는 문양도 수열 이예요. 허공중에 액체로 떨어지는 방울방울은 수열로 떨어져요. 17세기에 케플러라는 사람이 우주에 떠 있는 별들을 특별히 태양계를 도는 위성들을 거리를 측정하고 이 모든 운동들을 오선지에 옮겼을 때 건반을 누르니까 들어본 적도 없는 아름다운 하모니가 나오더래요. 우연히 아녜요. 그런 것들이 이 세상 온 우주에 작은 미생물부터 시작해서 우주 전체에 가득해요. 그런데 사람들은 그 아름다운 것을 볼 수 있는 눈을 잃어버린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 아름다움을 농축시켜서 엑기스로 만들어서 우리에게 쉽게 볼 수 있도록 주신 것이 있어요. 그것이 바로 성경 이예요. 그래서 이 성경을 중심으로 우주와 인간과 이 세상 속에 펼쳐져 있는 모든 조각난 지식들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것으로 성서로 수렴하고 성서 속에 있는 아름다움의 이 엣센스는 이것이 우주와 인간과 그리고 하나님 자신에게로 확산되어 가는 거예요. 그래서 이 두 세계를 넘나들면서 학문을 하는 것 그래서 하나님이 누구이고 세계는 무엇이고 인간은 누구이며 그래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것을 배우는 것이 그것이 기독교 신앙 이예요. 그런 아름다움의 엑기스들이 성경에 녹아 있는데 그 엑기스 중에서도 정수가 뭐냐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 우주와 세계에 대한 모든 하나님의 계획들이 그분 한 인격 속으로 수렴되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그분을 아는 그 지식에 사도바울이 목숨을 걸었던 이유가 그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그래서 인간의 가장 큰 의무는 그분을 알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찬양)
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 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하나님 앞에 구원이라는 것이 바로 이렇게 우리가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고 그리고 예전에 우리들이 볼 수 없었던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인식할 수 있게 우리를 재창조하신 것이 구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완성된 완전한 새사람이 아니라 여전히 그 안에 부패성이 남아있기 때문에 매순간 하나님 앞에서 그 십자가를 통해 우리 하나님을 만났던 그 경험을 반복하면서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신분이신지를 깨닫고 두려워하며 동시에 그 하나님이 자기 같은 인간을 위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을 기억하면서 이 천 년 전에 이루어진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고난이 오늘 나의 의식 세계 속에서 재현되어서 현재화 되는 그 경험을 사도바울이 바로 이렇게 묘사한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 못 박혔나니 가 희랍어로 현재완료예요. 그래서 예전부터 십자가에 못박혀왔었나니 라고 번역되요.과거에 일어난 사건이지만 그러나 지금까지도 그 사건의 영향력이 계속되고 있는 것 바로 그거예요,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그래서 그 사랑이 막 밀려들어서 그래서 인생을 살아가는 그것이 주님의 그 큰 사랑에 대한 반응으로서 살아가는 거예요. 나는 기독교인인 것이 인간인 것만큼 자랑스러워요. 정말이에요. 그래서 아 정말 우리는 얼마나 복 받은 사람들인가 그리고 어둠속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 그 사람들이 얼마나 불쌍한 사람들인가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은 전도해야 합니다. 전도안하면 죄입니다. 그래서 온 마음을 다해서 공부하면서 공부안하면 전도도 안 돼요. 농땡이나 치는 학생들의 복음은 신뢰를 못 받아요.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합니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대학교육의 기회를 제공받았으면 십대때 이십대 초반 이십오 세 되기 전까지 건강에 심각한 위협을 느낄 정도까지 공부를 해야 됩니다. 그 정도는 해야지 그러면서 문을 열고 이렇게 봐요. 전부다 불안한 학생들 투성이예요.
며칠 전에 이어령 교수님이 책을 한권 냈어요. 기독교인이 되고 나서 지은 첫 번째 고백록 이예요. 고맙게도 제 이름을 친필사인을 해서 보내주셨어요. 읽으면서 참 공감한 내용 중에 하나가 그거예요. 하나님 제가 예수를 믿었더니 사람들이 저보고 예수장이라고 놀립니다. 50년 글을 썼습니다. 그 인간들중 누구도 나보고 글쟁이라고 놀린 적이 없는데 예수를 믿었더니 자기 무신론자 들를 배신했다고 나를 예수장이라고 놀립니다. 그러나 주님 무신론이라는 것이 얼마나 우스운 것입니까 그들은 그렇게 씩씩하고 용기 있는 것 같아도 누군가 다가가 어깨를 두드리며 힘들지 라고 위로하면 눈물을 왈칵 쏟는 연약한 무신론자들입니다.
(찬양)
주님 없는 세상 평화 없네. 오 주 없이 살수 없네.
신앙생활 잘 하면서 부지런히 공부하세요. 그리고 10년이나 20년 후에 다시 이 대학에 갖다 놓아도 더 이상은 할 수 없을 정도로 공부하세요. 항상 그 공부의 목적이 하나님이 되게 하 세요. 그리고 열심히 눈물 흘리며 인생의 벼랑 끝에서 방황하는 친구들을 붙들어 주세요. 그리고 그들에게 예수의 사랑을 전하세요. 그 능력이 없으면 술 마시면서 펑펑 울 때 옆에라도 있어주세요. 그러면 언젠가는 돌아올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