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회 개혁주의 목회세미나 질의응답
녹취자: 김경애
(질문) 스위니 교수님께 김경원님께서 질문하신 내용입니다. 에드워즈는 정의는 차이가 있지만 용어적으로는 같은 단어를 종종 사용합니다. 최종심판의 행위, 주입 은혜, 내재적 의와 같은 로마 가톨릭적 용어를 사용하여 개혁주의적인 정의를 밝히는데 이와 같은 그의 신학적 표현이 의아합니다. 당시의 신학계와 교회 역시 에드워즈가 사용한 단어를 일차적으로 로마 가톨릭적으로 해석하고 이해했을 것인데, 이는 오히려 새로운 용어나 전통적 신학용어를 사용하는 것만 못한 느낌을 줍니다. 에드워즈가 혹 로마 가톨릭의 신학용어를 개혁주의적으로 바꾸려 했더라도 이는 많은 혼란을 주는듯합니다. 로마 가톨릭적 용어를 재정의 한다고 하더라도 분명히 그 해석이 상충될 텐데, 굳이 로마 가톨릭의 용어를 차용한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스위니 교수님께서 답변을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답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에드워즈가 사역하고 살던 시대의 뉴잉글랜드는 가톨릭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미 그것이 없는 사회에서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마 로마 가톨릭이 뉴잉글랜드에 들어와서 자기네들이 뭔가를 하려고 했다면 아마 사형에 처해졌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뉴잉글랜드 지방에서 일차적으로 로마 가톨릭주의는 전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반면에 에드워즈에게 정말 문제가 되었던 것은 무엇이냐 하면 이미 생각조차도 안하던 로마 가톨릭이 아니라 성도들의 삶에서 과연 신앙이 제대로 드러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대해서 강한 부담감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가야한다고 아주 법적으로 정해져있었습니다. 그래서 에드워즈는 분명히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성도들이 교회에 오는 이유가 법적인 의무 때문에 오는 것인지 정말로 그 속에 신앙이 있는 것인지를 구별해주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시대에 살던 사람들은 로마 가톨릭 때문에 혼동을 일으킬만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은 우리의 관점에서 보니까 가톨릭처럼 들리거나 혹은 안 들린다고 혼돈스럽지만 그 사람들은 아예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이고 오히려 에드워즈가 그런 용어들을 사용했던 이유는 그것이 유익했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의 진정한 신앙과 명목적인 신앙을 구별하기 위해서 도움이 되겠다 싶었기 때문에 전혀 오해의 소지가 없게 사용했던 것입니다. 만약에 에드워즈가 뉴잉글랜드가 아니라 로마 가톨릭에 아주 가깝게 접할 수 있는 그런 지역에서 살았고 사역했더라면 그런 용어들을 사용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질문) 김병훈 교수님께 질문합니다. 박상우님께서 질문한 내용입니다. 강의 초두에 말씀하신 의롭게 함의 교리가 한국교회에 어떻게 적용되고 있어서 오늘날의 한국교회에 병폐들이 나타나고 있는지를 진단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선교사들이 잘못 전해주신 것인지, 아니면 목회자들이 제대로 전달을 못해준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전적으로 교인들이 몰라서 그런 것인지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답변) 사실 이 질문은 통계조사를 해서 아는 문제는 아니고 결과로 우리가 생각해보는 것인데 병폐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은 사실로 인정됩니다. 왜냐하면 제가 신학교에서 강의를 하다가 목회의 부르심이 있으셔서 목회를 하는데 실상 모든 교인들이 다 그렇다고는 말할 수는 없지만 신학계가 상당히 빈곤합니다. 빈곤한 이유 중의 하나는 학습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학습을 해야겠다고 방향을 결정하니까 교회가 신학교냐는 강한 저항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실제로 주일에 교회에 오는 것 이외에는 그나마도 늦게 오고 예배가 한 시간이 넘으면 짜증을 내고 그렇게 되는 신앙생활 20년, 30년이 그런 결과를 나타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목사님들이 그것을 문제의식을 갖고 수정할 의지가 있었으면 수정되었어야 마땅한 것인데 수정이 안 되고 있는 상황은 목회자 자신이 복음의 이해를 어떻게 갖고 있느냐와 맞물려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목사님들이 복음의 이해를 왜 그렇게 가지고 있었을까 생각해보면 그들에게 가르쳐준 신학교 교수님들에게 문제가 있는 것인가 하는데 그렇게 생각되어지지는 않습니다. 교수님들을 잘 가르쳤을 것 같은데 그것을 받고 이해하는 자기 학습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교실에서 코스에 따라서 3년을 배우는 MD과정 속에 배우는 신학적 이해는 아무도 깊이 들어갈 수 없고 또 개괄적인 전개밖에 할 수 없습니다. 그런 상태 속에서 그것을 깊이 천착하여 자기 이해를 가지고 실제로 신앙고백으로 삼는 데까지는 목회현장 안에서 자기 학습이 있어야하는데 여기에 살아있는 본이 있습니다. 김남준 목사님 같이 사실 그런 자기 학습이 있어야하는데 그런 일들이 거의 없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환경적으로 성장이라는 추구목표가 그것과 하나를 포기해야하는 상황으로 나왔을 것이고 의도적 포기도 있겠고 사실은 모르기 때문에 더 이상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죄송한 말씀이기는 하지만 한번, 두 번까지는 이야기를 하면 아시는 것 같은데 세 번, 네 번 질문을 던지면 답을 안 하신다는 것입니다. 목회자의 일반이 학습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하나 이야기 하고 싶고 따라서 교인들이 모른다가 정답인 것 같습니다. 알면서 배웠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는 경우보다는 한국교회의 오늘날의 현상은 잘 가르치지 않았다. 까닭은 잘 모르고 있다가 더 답일 것이라고 안타깝지만 감히 그렇게 생각해봅니다. 제 개인적인 소견입니다. 여러분들의 생각을 다를 수 있습니다.
(질문) 추가로 스위니 교수님께 한 문제를 더 질문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피터 김께서 스위니 교수님께 질문을 드립니다. 강의안 35쪽의 문단에서 에드워즈 목사님은 우리가 죽기 전에 우리가 얼마만큼 사랑을 실천하는지에 따라 상급과 위치가 다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가톨릭의 교리처럼 들립니다. 비록 사랑 그 자체가 에드워즈에 의해 강조되지는 않았지만 여하튼 에드워즈는 상급과 Position이 다르다는 것에 동의하셨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아이러니하게 들리는 이유는 사랑과 의와 선의 행위가 우리 자신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령님에 의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상급을 받을만한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 교수님의 입장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천국에서 다른 상급과 다른 포지션을 갖는 것입니까? 교수님께서 답변을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답변) 지금 질문하신 분이 혹시 교수님의 입장을 질문하신 것입니까? 에드워즈의 입장을 질문하신 것입니까? 교수님의 입장이나 에드워즈의 입장이나 비슷하겠는데 매우 어려운 질문임에는 사실입니다. 성경에 예수님의 가르침처럼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고도 하고 고린도 성경에서 분명히 어떤 상급이 있다고 말씀하시는데 분명히 교수님이 믿거나 에드워즈가 믿는 것은 분명히 상급이 있게 된다는 것인데 그것은 어떤 재물적이거나 물질적인 것이나 계급적인 그런 상급의 등급이 아니라 누가 주님께 더 가까이 있으면 누가 주님과 더 친밀한 관계며 누가 더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을 더 retract를 많이 할 수 있는가하는 것이라는 그런 류의 상급이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에드워즈는 그레고리 니사의 의견에 동의하는 것 같은데 천국에서의 우리의 상태라는 것이 정적이라든가 아니면 어떤 획일적인 상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금 이 땅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도 성화의 정도에 있어서 저마다 차이가 있는 것처럼 천국에서도 우리는 계속해서 영원토록 지속적으로 주님께 더 가까이 가고 더 가까이 가는 그런 일이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지금은 죄가 있는 상태에서 성화가 되어가지만 그때는 죄가 없는 그 상태에서도 정적으로 머물러있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을 덧붙이십니다.
(질문) 마지막 질문입니다. 스위니 교수님께 이종원이라는 분이 질문을 드렸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와 청교도들이 지상에서 천년왕국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구약의 예언의 문자적인 성취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지금은 여기에서 천년왕국에 대한 교리와 성경의 문자적 의미에 있어서 조나단 에드워즈와 청교도들의 신학적인 연관성이 있습니까?
(답변) 천년왕국설에 대해서 에드워즈와 청교도들 사이에 분명한 Connection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것을 생각할 때 21세기 관점에서 생각하면 굉장히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무천년설, 전천년설, 혹은 후천년설에 대한 구분은 19세기에 만들어진 것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 계시는 제프리 주 교수님이신데 그분이 이 문제에 대해서 잘 설파하셨습니다. 17세기의 청교도들이 가지고 있었던 천년왕국설은 굉장히 문자적으로 이해하는 경향들이 있었습니다. 카트 마더 같은 경우에는 우리가 전천년주의자라고 부르는데 우리가 조나단 에드워즈는 후천년주의자라고 부릅니다. 그 당시에 전천년주의자라고 불리는 코튼 마더나 우리가 후천년주의자라고 불리는 에드워즈나 동일하게 관심을 가진 것이 무엇이냐 하면 주님이 재림하기 전에 이스라엘의 회심이 있을 것이라는 것에 관심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에드워즈를 우리가 후천년주의자라고 부르는 것은 그 당시의 부흥을 경험한 사람으로서 부흥이 일어나고 또 부흥이 일어나고 그래서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가져오고 그것이 끊임없는 부흥으로 이어진다면 주님이 오시기전에 그런 천년왕국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후천년주의를 그렇게 이해하는 사람들은 지금은 거의 없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더 많은 질문들이 있으나 시간관계상 이것으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