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반기 교역자 수련회 3
곧 짐승중에 가장 강하여 아무 짐승 앞에서도 물러가지 아니하는 사자와
(잠언 30:30)
녹취자 : 조원정
종종 사람들은 사자와 호랑이가 싸우면 누가 이길까 저도 어려서부터 참 궁금했습니다. 몇 년 전에 동물 연구가가 그에 대해서 자세히 이야기 하는 것을 들었는데 승패를 가리기가 어렵답니다. 사자 호랑이가 누구냐에 따라서 사자가 이길 수도 있고 호랑이가 이길 수도 있는데 사자와 호랑이가 만나서 싸울 가능성은 전혀 없답니다. 왜냐하면 호랑이는 홀로 생활을 하고 사자는 군집생활을 하고 한 20마리씩 떼를 지어서 생활을 하기 때문에 그런 상황에서 개념 없는 호랑이가 덤벼든다면 그것은 백전백패 물려죽고 말거라고 그럽니다. 그러니 사자가 얼마나 대단한 짐승입니까? 혼자 호랑이를 꺾을 수 있는 강인한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또한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군집생활을 해서 그 위엄을 갖추고 있으니 그래서 사람들이 사자를 백수의 왕이라 이렇게 불렀던 것입니다.
어제도 우리가 예배를 드리면서 오래 참아야 된다 또 주님을 사랑하는 인격 등등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지만 그것만 있고 강함이 없다면 아마 목회사역은 성공할 수도 없거니와 그 사람의 삶 전체가 하나님 앞에 아름답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아름다운 것은 결국 살아남아야 아름다운 것이지 아주 쉽게 말해서 혼자는 하나님 앞에 그렇게 아름답고 강함이 없어서 험한 목회현장에서 사람들에게 쉽게 짓밟히고 자그마한 일에 꺾어져서 낙심해서 눈물이나 흘리고 있다면 그 사람을 어떻게 지도자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이 신앙이 깊고 연단된 인격이 깊으면 강함이 감추어지지만 그렇지 못할 때에는 강함이 자꾸 밖으로 나옵니다. 그래서 내적으로는 강해도 외적으로는 부드러워서 자기와 생각이 다른 사람도 자신에게 기댈 수 있고 또 자신과 조금 다른 스타일의 사람도 그 사람을 따뜻하게 생각해서 가까이 기대서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 본인도 모르게 그 지도자를 닮아가고 변화되어 가고 그래야지 한 모임이 제대로 되어가는 모임이 될 거 아닙니까?
어떤 사람들은 겉으로는 강하지만 속이 약합니다. 결국은 뭔가 원칙을 지키고 그러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게 너무 자의적이고 겉으로는 그러는 것 같지만 뒤에서는 다 타협을 하고 두려워해서 용납을 하고 원칙을 훼손합니다. 그렇게 되면 온전한 지도자로서 신뢰를 얻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강해야 됩니다.
동양에서는 부모가 자식들에게 눈물을 보이는 것이 커다란 수치입니다. 그 이유는 부모는 울어도 자식들 앞에서 울지 않아야 되지만 자식들이 그 부모를 법이라고 생각하고 따를 수가 있는 겁니다. 부드럽고 온유하고 따뜻하고 오래 참는 것만 있고 강함이 없다면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리더십일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강해야 한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강함을 사자가 잘 보여주는 것입니다.
동물 연구가는 아니지만 사자든 호랑이든 간에 짐승을 자신의 힘으로 사냥해서 먹고 사는 동물들의 특징이 있습니다. 뭐냐 하면 물면 놓지를 않는 겁니다.
(예화) 저는 중국 계림에 갔을 때 호랑이가 소를 물어 죽이는 광경을 보면서 참 많은 생각을 했는데 육교 같은데 사람들이 막 건너가는데 중국이니까 그런 것들이 가능하죠. 호랑이를 굶겨서 내보낸 답니다. 문이 열리고 호랑이가 뛰어 나오니까 풀 뜯어 먹던 소가 깜짝 놀랍니다. 서두르지를 않고 천천히 걸어가다가 갑자기 달려와서 어깨를 두발로 치니까 그 큰 소가 쓰러집니다. 두발차기에 쓰러지니까 딱 목을 무는 겁니다. 목을 물고 가만히 있는 겁니다. 그런데 소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습니다. 몸부림을 치면 이빨로 목을 문채로 요동 치는 데로 자기 몸을 굴립니다. 그대로 따라갑니다. 한 20분 정도 하니까 숨이 끊어집니다. 한번 물면 놓지를 않는 겁니다. 그것이 맹수들의 공통된 특징입니다. 진정한 강함은 밖으로 다 드러내고 말로 하는 강함이 아니라 속에서 자기가 목표한 바를 굳게 붙들고 그것을 놓지 않는 강함입니다. 그것이 사실은 소명의 깊이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이 이 세상에 계실 때에 핍박 받은 때도 있었고 환영을 받으시던 때도 있었고 멸시를 받으시기도 하고 어떤 때는 또 큰 영광을 받으셔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임금 삼으려고 떠받들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래도 예수님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이 당신을 이 세상에 보내신 목표에 대한 인식을 한 번도 놓으신 적이 없으십니다. 그것이 바로 인자는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요 오히려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을 위해 대속물로 주기 위해서 이 세상에 왔노라 하는 그것이었습니다. 바로 그것을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셔서 일생을 사시면서도 그 목표 하나를 놓지 않았던 것입니다.
나도 이제 목회를 하고 지내오면서 연단을 많이 받고 지혜를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사자가 자기 먹이를 물고 결코 놓지 않는 것처럼 그렇게 꽉 붙들고 끝까지 이길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내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내가 완벽하게 이기려고 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항상 거기에는 가치도 별로 없는 일에 대한 분쟁들이 생겨나고 그리고 진정으로 강한 사람은 강하다고 소문이 나면 안 됩니다. 사람들이 약하다고 속아야지만 진정으로 강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강함을 감추면서 살기 위해서는 필요한 것이 뭐냐 하면 사소한 것을 사람들에게 과감히 양보하고 희생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작은 이익에 교역자들이 밝고 그것 때문에 맘이 상하고 에너지를 거기에 쏟아서 온갖 상상을 하면서 그렇게 밀고 당겨서는 사역에 집중할 수가 없습니다. 사소한 것에 대해서 또 어떻게 보면 그건 사소하다 라고 생각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여러분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까지 사소한 겁니다. 그것을 과감하게 내려놓고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고 오히려 나는 더 불편하더라도 다른 사람을 세워준다 그렇게 생각하며 양보하는 겁니다. 그리고 아주 양보할 수 없는 중요한 가치 그것을 굳게 붙드는 것입니다. 그런 생활의 원칙이 가정생활 속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화되지 않는 가정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갈등의 문제가 이익의 문제입니다. 사소한 이익 때문에 갈등을 일으키고 절대 가족들을 예수 믿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소한 것들을 과감하게 양보하고 본질적인 것들을 굳게 붙들어서 설득하고 그리고 양보하지 않고 그 사람들이 굴복하게 만드는 그것이 교회에서 중요합니다.
사역을 하면서 이제 여러분들은 교회의 장로님들이나 중직들도 있을 거고 또 같이 일하는 열심히 섬기는 지체들도 있고 작은 것들을 과감하게 양보하고 나를 하나님께서 여기에 세우신 목표와 계획에 대해서 인식하고 그것을 굳게 붙들어야 합니다. 어떤 때는 A라는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 1번이 가장 좋다고 생각하는데 따라오는 사람들이 굳이 2번으로 가자고 하면 방법은 양보하되 목표는 더욱 굳게 붙들어서 그들이 원하는 방법으로 갈수 있도록 그렇게 배려를 해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놓지 않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이 사자에게서 끈질김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한번 정하고 온유하고 부드러운 것 같지만 그러나 끝까지 놓지 않는 지도자의 강인함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 목표의식이 우리에게 살아있을 때 우리의 마음이 뜨거워지고 하나님 앞에 매달릴 수 있는 마음이 되는 겁니다.
어저께도 우리가 회의하면서 오숙녀 전도사님께서 간증을 하셨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무엇이든지 꼭 해야 되는 일은 없습니다. 그런 상황이 제일 싫어하는 상황입니다. 이번에는 굳이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미리 판단을 해서 안하겠다고 판단을 내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안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러나 일단 해야 되겠다고 판단을 내리면 사람들이 안 모이기 때문에 접어버리는 공신력도 없고 상황에 계속 밀리는 목회가 되는 겁니다. 해야 되겠다고 마음을 먹으면 오히려 사람들을 독려하고 기도를 많이 해서 그 사람들이 우리가 원래 정한 목표대로 그 길을 갈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 길이 어려운 것입니다. 상황에 따라서 움직이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목표를 정해놓고 그리 가도록 강하게 하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것입니다.
어느 리더십 전문가가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리더십이 있나 없냐는 여러 가지 얘기를 하지 말고 1번의 검증 상황이 있는데 모여 할 때 모이면 리더십이 있는 거고 모여 할 때 싫어하면 리더십이 없는 겁니다. 아주 간단하게 얘기합니다. 그 모이는 것이 리더십의 모든 것을 말해주는 겁니다. 놀러가자 그래도 모여 할 때 일사분란하게 모이면 그 사람은 이미 리더십을 행사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것이 굽힐 상황에 의해서 쉽게 굽히지 않는 꺾이지 않는 그런 리더십이 꼭 필요한 것입니다. 나는 이런 사자에게서 강함을 그런 상황에서 꺾이지 않는 한번 정한 목표를 잃지 않는 것에서 배우게 됩니다.
두 번째는 결단을 내릴 수 있는 용기입니다. 여러분 사자의 몸집을 보시면 알겠지만 모든 짐승이 그렇겠지만 평소에 상황이 벌어지지 않을 때에는 사자처럼 게으른 짐승이 없습니다.
천천히 걸어가면 이쪽 뼈가 불끈 불끈 하면서 올라오잖아요. 천천히 그리고 왜 그네들은 그렇게 누워있는걸 좋아하는지 몰라요. 늘 이러고 있어요. 마치 병든 닭 모양 가만히 누워서 머리도 무거우니까 머리도 발위에 올려놓고 가만히 침 흘리면서 자듯 합니다.
(예화) 아프리카를 관광하던 어느 선교사 부부가 사파리에 들어갔답니다. 원래 거기에서 내리면 안 되는데 내린 겁니다. 그런데 옆에서 사자가 그렇게 얌전하게 다리를 뻗고 턱을 괴고 졸고 있는 겁니다. 내리니까 눈을 게슴치레 뜨더니 또 감고 떴다 감다 그렇게 평화롭더랍니다. 그 선교사님이 “여보, 나 사진 한 장 찍어줘.” 하고 사자 곁으로 간 겁니다. 그래도 가만히 있더랍니다. 사진을 찍는데 어떻게 실수해가지고 후레쉬가 터진 겁니다. 단숨에 사자가 일어나서 그 자리에서 선교사를 찢어 죽여 버린 겁니다. 그 광경을 다 본겁니다. 그 뿐만 아니라 곰 있잖아요. 곰이 캐나다나 이런 곳에 가면 저기가지 내려오고 왔다 갔다 하는데 거기 써 붙여 있습니다. 곰을 느리다고 생각지 마세요. 달릴 때는 말같이 달립니다. 그런데 정말입니다. 어슬렁어슬렁하고 그러면 우린 곰이라고 놀리잖아요. 그런데 얼마나 빠르고 영리한지 모릅니다. 단번에 찢어 죽여 버린답니다. 사자의 그런 모습을 눈여겨보면서 그런 생각을 합니다. 저렇게 게으르고 평상적이면서 이렇게 사는 것 같지만 어느 순간에 행동해야 될 때는 아주 결연하고 신속하게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바로 용맹스러운 결단이요 용기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도 자기에게 영향을 끼쳤던 암브로시우스에 대해서 회상하기를 늘 언제나 온유하고 온화한 사람으로 묘사합니다. 그렇지만 그 사람도 정말 사자 같은 삶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엄청난 신앙 논쟁 속에서 꿋꿋하게 싸웠던 교부중의 한 사람입니다. 박학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도 그런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어느 한 순간에 평상적으로 움직이다가도 비상한 상황이 되면 결연히 신속하게 움직일 수 있는 순발력 그리고 어떤 일들이 흘러가는 것을 보면서 이 상황에서 그건 아니다 라고 할 때 용기 있게 결단을 내릴 수 있는 그런 것들이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제가 한 15년 정도 지나고 나니까 장로님들이나 안수집사님들이나 또 심지어 여러분들이나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그런 지혜들이 생겨나는 것 같습니다. 늘 살아가는 태도가 짜증이 섞이고 투덜대고 불평이 많고 그러면 중요한 일을 가지고 책망을 하거나 야단을 쳐도 그게 짜증 중에 하나로 생각이 되지 상황이 심각하고 중요하거나 그런 생각이 들지를 않는 겁니다. 장로님들과의 관계에서도 그러지만 늘 항상 웃고 평안하고 좀 안 좋은 일이 있어도 얼굴에 내색하지 말고 그러고 있다가 결정적으로 이건 아니다 생각할 때 그때에는 정색을 하고 책망을 하고 이래야지만 권위도 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사역 속에서도 그런 것들이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지도자의 결단과 책망은 움직이는 공동체의 브레이크다.
애들이 막 까불고 놀다가도 엄마가 “스읍”하면 딱 멈추잖아요. 그것이 경고거든요. 부모에게 그런 권위가 안 서있게 되면 엄마가 “스읍”이러는데 애가 아이고 또 꼴값하네 그래봐요. 집안의 꼴이 되겠어요? 그런 것들이 권위 있게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용기와 결단이 필요한 것입니다. 결단과 용기도 지혜가 없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대나무를 자를 때에 마디에다 칼을 대고 자르면 쉽게 잘라지지만 마디가 아닌 곳은 절대 안 잘라집니다. 손가락만한 대나무에 남자들 몇 명 매달려도 안 부러집니다. 그게 대나무의 특성입니다. 어느 지점에서 자기가 결단을 내려야하는 가를 정확히 헤아려야 하고 그것을 판단해서 결단을 내릴 수 있는 용기가 있을 때 정말 지도자다운 사람입니다.
세 번째는 아무리 결단을 내리고 용기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실행할 수 있는 힘이 없으면 그 용기와 결단은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사자를 생각해 보세요. 자기를 대적하는 동물과 싸울 때 붕 뛰면서 사자나 호랑이나 공통점이 앞발로 친답니다. 칠 때에 450키로급 되는 사자가 한번 칠 때에 이 압력이 2톤이랍니다. 한방 맞으면 대부분의 사람이나 짐승이 기절하는 겁니다. 그렇게 어마 어마한 힘으로 치는 겁니다. 가까이에서 보면 근육과 뼈가 장난이 아닙니다. 통뼈라 그러잖아요. 엄청난 근육과 힘이 있는 겁니다. 그런 힘이 있기 때문에 용기 있게 결단을 내릴 때 그것을 집행할 수 있는 능력이 되는 겁니다. 그가 가지고 있는 바른 다리, 강한 힘, 한번 물면 도저히 뺄 수 없는 그 이빨, 그런 것들이 전부 다 무기가 되어서 자기가 내린 것들을 실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근력이나 혹은 자기가 마음먹은 것을 집행할 수 있는 행할 수 있는 근력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 근력이 첫 번째가 뭐냐 하면 영적인 근력입니다. 그런 영적인 근력이 어떤 것입니까? 상황이 벌어졌는데 말 한마디로 사람을 제압할 수 있는 커다란 영적인 힘, 논리는 없지만 사람들을 제압하는 영적인 강한 영향력, 그가 무릎을 꿇었을 때 나타나는 하나님의 신비한 인도와 강권적인 역사, 이런 것들이 영적인 근력입니다. 그런 영적인 근력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세레요한이 맨 처음에 광야에 등장했을 때 그 사람을 누가 알아줬습니까? 제사장 집안의 레벨이지만 역사에 제사장 집안이 만팔천명이나 됐다는데 별 대단한 게 아니었습니다. 광야에서 30년 가까이 자라다가 어느 날 약대 털옷을 뒤집어쓰고 촌뜨기 같이 나타나서 뭐라고 외칠 때에 그 모습을 보면 뭐가 그리 대단했겠습니까? 그런데 그의 말에 사람들이 굴복하고 회개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영적인 근력입니다. 강한 영적인 근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건 하루아침에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늘 얘기하기를 항상 책상에서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 우리들이 늘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만 특별히 매달려야 될 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 앞에 프로그램과는 상관없이 간절히 매달리고 어제도 양목사가 해마다 오면 벌떼기도 간증해서 맨날 날 나쁜 사람으로 만드는데 그렇게 자신에게 밀려오는 커다란 고통에 대한 인내, 그 한계상황에서의 몸부림, 그런 것들을 통해서 거기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매달리는 이 모든 것, 이런 것들을 통해서 영적인 근력은 아주 조금씩 천천히 천천히 자라는 겁니다. 그게 바로 파이디온 이라고 하는 작은 아기 시절부터 나이 30이 다 되어 나타나야 했던 세레요한의 출현의 이유를 알게 됐습니다. 영적인 근력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화) 아는 목사님 가운데 한분이 계셨는데 상의군인이셨는데 사당동쪽에서 목회를 하셨는데 그분도 초창기에 믿음으로 사역을 하셨는데 그분 친구가 있는데 장님이셨답니다. 장님 목사님이 헌신 예배에 초청을 받았는데 부목사가 사회를 봤답니다. 담임목사는 앉아서 듣고 부목사가 사회를 보면서 오늘 설교할 본문은 하면서 설교를 읽었답니다. 무슨 구절 몇장 몇 절부터 몇 절까지 쭉 읽었고 목사님이 설교를 했답니다. 예배가 끝났으니까 응접실 같은 데를 갔습니다. 오늘 사회를 보신 부목사님이 누구십니까? 왜요 목사님 제가 사회를 봤는데요. 연령으로는 훨씬 어리죠. 목사님은 앞으로 목회를 할 겁니까? 안 할겁니까? 그러더랍니다. 당연히 부목사까지 되어가지고 사회까지 봤는데 목사 안할 사람이 거기에 왜 있겠습니까? 그래서 목회를 해야죠. 했더니 목사님 그렇게 해서는 목회를 못합니다. 아니 생전 만나지 않은 초면인데 그것도 눈도 안 보이니까 얼굴도 못 봤는데 그래서 왜 그러십니까? 했더니 성경봉독 하는 것을 보니 당신은 아직 목회하기 멀었습니다.
무슨 얘기냐 하면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영적인 근력은 그것이 기도를 하든 성경을 읽든 설교를 하든 느껴지는 것입니다. 여러 번도 필요 없고 한 번의 설교면 저 사람이 정말 사역에 합당하게 주님을 만난 사람인가 확인하기에 충분합니다. 그것은 숨길 수 없이 그의 설교와 기도, 심지어는 아무 말 안하고 가만히 서 있는 그의 모습 속에도 그것은 묻어 나오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오늘도 조전도사님이 강도사 시험보고 왔다고 그러는데 전도사, 강도사, 부목사, 수석 부목사, 담임목사도 되고 그렇겠죠. 그건 이 세상에서 주어지는 질서일 뿐입니다. 그 자체가 영적인 근력에 대한 질서가 아니라는 겁니다. 위계질서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 영적인 근력이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또 어떤 근력이 필요한가 하면 또 하나의 근력은 지적인 근력입니다. 사자가 짐승들을 잡을 때 모든 짐승이 그렇지만 자신이 사냥하고자 하는 대상에 대한 완벽한 지식을 가지고 사냥하는 겁니다. 오랜 세월을 통해서 혹은 본능에 의해서 짐승의 움직임과 특질, 성질, 그런 것까지 다 감안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 먹잇감이 있고 여기 사자가 있습니다. 바람이 이렇게 불 때에는 절대 사자가 접근하지 않습니다. 왜 그러겠습니까? 냄새가 바람을 타고 가니까 항상 맞바람을 받고 공격을 하는 겁니다. 사실 우리가 공부하지 않으면 잘 모르는 원칙인데 그거는 정확하게 누구도 실수하는 짐승이 없는 겁니다. 완벽하게 자기를 감추면서 접근하는 것을 배워나가는 겁니다.
중요한 것은 자꾸 사람들이 보면서 공부에 대한 도전을 많이 받는데 그게 결국 하나를 잘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 모든 것들이 어우러지면서 같이 해야 되는 것입니다. 어느 날 무슨 목회를 저렇게 하려면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하구나 하면서 다 때려치우고 보따리 사가지고 유학을 갔다 이겁니다. 근데 정확한 적용이 아닌 것입니다. 그게 꼭 나쁘다는 게 아니라 정확한 적용이 아닙니다. 지적인 근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내가 얘기하지만 열심히 공부하라 그래서 지적인 근력이 튼튼해져야 된다는 겁니다. 겨우 몇 가닥 가지고 그렇게 하면 강한 상대를 만나든지 설명하기 어려운 목회 상황을 만나게 되면 상대방을 확 깨물었을 때 작은 것들은 와지직 했는데 큰 적수를 만나 꽉 깨물었는데 사자가 이빨이 우두둑 부러졌다고 생각을 해봅시다. 얼마나 황당하겠습니까? 이놈 그러고 탁 쳤는데 발목에 골절이 저기 김성구 강도사 마냥 발목에 골절이 생겼다고 쳐봐요 탁 쳤는데 우지직 하면서 골다공증으로 발 부러진 것처럼 부러져가지고 절름절름하면 그게 되겠습니까? 아 저기 먹이구나 결단을 내리고 휙 달리려고 하는데 갑자기 허리가 우두둑 하고 으악 하고 쓰러졌다면 사자일수가 없지 않습니까? 지적인 근력이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닙니다. 계속해서 말씀을 연구하고 소화시켜서 생으로 가지고 있는 것 말고 이걸 소화 시켜서 이 안에서 그걸 활용하고 그런 근력들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그게 첫째가 영적근력이고 지적근력인 것입니다.
마지막에 또 하나가 필요한데 도덕적 근력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완전한 사람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가 참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서 정직하고 올바르다 또 모든 기준에 다 맞출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붙들고 우린 그 길을 걸어가면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우릴 좋아하겠죠. 어떤 사람은 우리를 싫어하고 어떤 사람이 우릴 A 때문에 싫어한다고 그래도 마음속에는 사실 A때문에 싫어하는 게 아니라 B 때문에 싫어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것들을 다 신경 쓸 거 없고 하나님 앞에서 살면서 도덕적으로 올바르게 살아가서 그 근력이 우리 안에 형성될 때 그때 우리는 담대하게 목회사역을 감당해 나갈 수 있는 겁니다.
사단에게 사로잡히고 어두움에 붙잡혀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영적인 근력이 필요하지만 오류에 빠진 사람들을 위해서는 지적인 근력이 필요합니다. 이제 부패한 사람들을 책망하기 위해서는 이 두 가지를 자기가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자신에게 도덕적인 근력이 없으면 그걸 올바르게 다룰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책망 받을게 없는 사람으로 삶을 살 때 그래서 마지막 받는 교훈이 뭐냐 하면 뭉쳐서 살 때 그런 사람들이 함께 뭉쳐서 연대를 이루면서 사는 겁니다.
제임스 파커 박사가 자기의 어몽드 자이언트 책속에서 그런 말을 합니다. 캘리포니아에 있는 우드렉 나무를 연상시키면서 110m가 넘고 1200년이 넘는 나무들이 속에서 전부다 뿌리의 뿌리가 연결이 되어서 온 산을 감싸고 있는 겁니다. 높이가 110m면 뿌리도 거의 100m가량 됩니다. 그것들이 서로 엉키는 거죠 하나를 잡아 댕겨 부러뜨릴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뿌리 채 뽑는 것은 불가능 한 것입니다. 그렇게 연결이 되어서 그렇게 사역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자처럼 한번 살 때 여우처럼 그렇게 살지 말고 사자 같은 사람이 되어 여우같은 사람들 많잖아요? 살살살 거리고 변신하고 그렇게 살지 말고 진짜 사자 같은 사람이 되어 그래서 한번 이 어두운 흑암과도 같은 세상에서 주님과 더불어 포효하며 그렇게 사역을 하며 한사람의 삶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생각하여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