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TS 수련회
주 안에서 수고한 드루배나와 드루보사에게 문안하라 주 안에서 많이 수고하고 사랑하는 버시에게 문안하라(롬 16:12)
녹취자: 이새봄
사도바울이 선교사역을 많이 했고 또 신학자의 삶을 살았고 개척전도자의 삶을 살았지만, 그의 본질이 목회자다, 라고 하는 것을 이 로마서 16장을 읽을 때마다 느낍니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로마 교회를 향하여 유장한 기독교의 교리와 그 위대한 교리를 따라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고 난 후에 16장에서 사랑하는 로마 교회의 성도들 얼굴이 하나하나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이미 아마도 사도바울은 시력이 매우 안 좋았기 때문에 이 편지를 쓸 수 없어서 ‘더디오’라는 사람에게 이 편지를 대필하도록 불러주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 유무명의 성도들의 이름을 거론하였습니다. 자기처럼 위대한 사도나 어마어마한 일꾼들이 아니라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자기와 함께 그리스도를 섬겼던 사람들의 이름을 거명했습니다. 나는 지하실 교회에 있을 때 이 본문을 읽으면서 정말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특별히 “주안에서 많이 수고하고 사랑하는 버시에게 문안하라”.
우리들이 사역을 하다보면 세월이 많이 지나가도 ‘누구’ 그러면 떠오르는 인상이 있습니다. 3년, 4년 일하다가 헤어지거나 오늘날 우리교회 부목사님들처럼 11년, 12년, 13년, 14년씩 함께 주의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언젠가 헤어지잖습니까. 그동안에 있었던 일들과 사연들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떠나가고는 항상 뚜렷한 인상 몇 가지를 남겨놓고 나머지는 잊혀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도 목회자로서 많은 사람을 상대하면서 버시라는 이 일꾼과 함께 주님의 교회를 섬겼습니다. 그런데 그에 대한 인상이 남은 것입니다. 인상이 남았는데 그게 뭐냐하면 ‘많이 수고한 사람이다’라는 인상이 남았습니다. 그런데 사도가 그것을 의식하고서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드루배나와 드루보사라는 사람 앞에는 ‘많이’라는 부사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 두 사람들을 꼭 비교하려고 한 것은 아니겠지만 그 앞에 있는 두 사람보다도 더 뛰어나게 많이 주님을 섬기면서 고생을 한 사람이라고 사도바울에게 각인이 된 것입니다.
왜 그렇게 각인이 되었는지는 우리가 이 자료를 가지고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추측을 해볼 수가 있지 않습니까. 절대적인 의미에서 버시가 많이 일한 사람일 수도 있고, 그렇지는 않은데 앞에 나온 두 사람에 비해서는 환경 자체가 너무 열악해서 도저히 그만큼은 주님을 섬길 수가 없는 사람이여요, 그런데 그렇게 섬기면서 살았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많은 고생을 한 사람으로 기억될 수 있잖아요.
내가 아는 한 사람이 찬양을 너무 좋아해서 열심히 찬양을 인도하는데 기관지 확장증에 걸렸습니다. 그 의사의 진단은 “당신 계속 노래하면, 잘못하면 영원히 소리를 못낸다, 위험하다” 그런데도 하나님을 계속 찬양하는 것입니다. 나는 지금으로부터 6년 전에 편도선 수술을 하였습니다. 목회하면서 “목사님 우리 구역원이 편도선 수술을 하였습니다.” 해도 심방도 안 갔습니다. 아니 암을 잘라내고 수술하는 사람에게도 심방을 못 가는데 이건 뭐, 신경도 안 썼습니다. 그런데 내가 해봤는데 온 교회 중에서 내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아는 사람이 딱 한 사람이더라구요. 그 사람 나하고 똑같은 상태에서 수술을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뭐냐하면 열꽃이 번져서 이 목 전체로 번진 것입니다. 그런데 이 편도선은 이비인후과에 갔더니 그 의사가 자긴 20년 의사 생활 했는데 선생님처럼 큰 편도는 처음 봤다고, 이것을 달고 어떻게 사시냐고. 나 이 두 개가 붙어버립니다. 그런데 이것을 잘라낸 것입니다. 얼마나 아픈지.. 제가 잘 참거든요. 얼마나 아픈지 밤중에 건넌방으로 기어가서 그 서랍을 열고 진통제를 주사로, 내가 너무 아파하니까 주사를 줬거든요. 나 혼자서 바지를 벗고 진통제를 맞아야지만 잠을 잘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정확하게 8kg이 날라가더라구요. 불과 몇 주 사이에, 한 달 사이에. 그런데 의사가 경고를 했습니다. 절대 설교하면 안된다. 그런데 한 주를 딱 쉬었는데. 개척하고 나서 두 주를 연속으로 강단을 비운 적이 없었는데, 난 그럴 수 없다. 남들은 목숨을 걸고 설교를 하는데, 그러고 설교를 했습니다. 그러고 설교 끝나고 그 다음날 길거리를 걸어가는데 편도선을 잡아맸던 줄이 끊어져버린 것입니다. 확 쏟아져서, 피가 이만큼 쏟아진 것입니다. 그래서 그 다음에 두 주를 설교를 못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내가 건강할 때 그 까짓것 설교 한편 하는 것이 뭐 그렇게 대단합니까. 그런데 이게 엉켜가지고 말을 못할 정도에서 설교를 하는 것은 고생하는 것입니다. 이 버시가 그런 사람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랬을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사도바울의 인상 속에 다 남은 사람은 ‘많이 수고한 사람’. 그래도 은혜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가만 안두시고 쓰시잖아요. 그 사람들에겐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랑 일을 했는데 세월이 많이 지나갔는데 이런 생각은 하나도 안 나고 ‘말이 많았던 사람’, 혹은 ‘문제를 많이 일으켰던 사람’, ‘함께 일하는 사람들을 힘들게 했던 사람’으로 기억에 남는 것, 그런데 이 버시는 많이 수고한 사람으로 기억 남았던 것입니다.
우리 열린 빌딩을 가지고 있었던 사장하고 세 시간 동안 내가 담판을 지어서 빌딩을 사기로 했습니다. 이 사장이 불신자입니다. 나하고 얘기를 하는데, “어휴, 목사님 회사에 와서 돈을 벌겠다고 놈은 많아도, 나와 함께 고락을 같이하며 이 회사를 이끌어가겠다는 사람은 없습니다”. 드물게 그런 사람이 있는데 수고하는 사람이 있는데, 정말 그가 간이 필요하다면 간도 잘라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게 뭐냐하면 정말 사랑하는 사람, 수고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일꾼 많이 세우지요. 목회자도 세우고, 여러분처럼 선교사들도 파송하고. 안찰스라는 선교학자가 우리교회에 와서 다 돌아보고 그 때 교회가 2200명이던 시절이었습니다. 자기가 선교학자로써 세계에 많은 교회를 돌아다니는데 이 사이즈에서 이렇게 엄청난 일을 하고 있는 교회는 자기는 못 만났다는 것입니다. 과장이 아닙니다. 이렇게 돌아가는 게 교역자들의 헌신 때문만은 아닙니다. 수많은 평신도들이 있어서 그 자리가 자기의 최고의 자리인 줄 알고 지성으로 섬기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남들이 보기에는 담임목사의 지휘봉 하나에 움직이는 것 같지만, 지휘봉을 흔들어도 안 움직이면 그만 아니겠습니까.
안양샘병원에서 열린교회를 아주 소중하게 생각하고 일꾼들을 아끼는데, 어느 정도냐 하면 그 말기암 환자들을 돌보는데 이 환자들을 도우미로 돌보는데 갑자기 이 사람 일으켜 세우는데 똥을 싼 것입니다. 그것을 손으로 받아낸 교인들입니다. 그 얘기를 내가 들으면서 마음에서 눈물이 나더라구요. 많이 수고하는 사람. 사람은 모릅니다. 다 몰라요. 그런데 주님은 기억하십니다. 사도바울의 마음속에 버시, 그러면 고난 속에서도 많이 수고한 사람이구나, 이렇게 남았던 것입니다.
그러면 한번 우리 자신에게 되물어봅시다. 김 목사가 어느 날 정년을 하고 혹은 마음이 바뀌어서. 내년이면 내가 20년 되는 거 아시죠? 특선 할 때 20년만 하고 그만둔다고 내가 노래를 했거든, 그런데 그게 내년이야. 그런데 그러고 나면 나는 사라집니다. 그러면 함께 하나님을 섬겼던 장로님과 집사님들이 김 목사에 대해서 무슨 인상을 가지고 있을까. 뺀질뺀질 대던 김 목사, 늘 기회만 있으면 교회에다 돈 타서 놀러다니고 싶어하던 김 목사, 아니면 가능하면 외국에 나가서 아귀라도 하나 받아보고 싶어하던 김 목사로 기억에 남을 것이냐, 아니면 정말 주님을 위해서 많이 수고한 목사님으로 기억에 남을 것이냐.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항상 그 자리에 있는 것 아닙니다. 언젠가는 여러분도 모든 사역을 접을 때가 있고 또 접지 않아도 열린교회와 인연이 끊어질 때도 있겠죠. 그 때에 여러분들을 잘 알고 함께 섬겼던 사람들의 가슴 속에 여러분들은 어떤 사람으로 남을까요. 버시처럼 그 열악한 환경 속에도 많이 수고한 사람으로 이렇게 기억에 남는 사람이 될 것인지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지금도 뭐 그렇지만. 방배동 예배당에서, 제가 교회 안에서 10년을 살았거든요. 방배동 교회에 있을 때 4층이 우리 집이었습니다. 밤중이면 사택에서 저녁 먹고 책 좀 보다가 연구실에 가서 공부하거나 혹은 저녁 때 되면 이제 예배당에 가서 기도를 했습니다. 밤 열시 쯤 되면 기도하러 왔던 교인들도 다 기도하고 가고 저 구석에서 교역자 몇 사람 한두 사람이 매번 나와서 그렇게 흐느끼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영혼들을 위해서. 그러면 내 마음 속에서 그가 잘못했던 모든 것이 모두 용서가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돌보는 영혼을 위해서 잘 섬기겠다고 저렇게 매일 밤, 남들이 편안하게 누워서 텔레비전이나 보는 그 시간에 이 교회당 차가운 바닥에 와서 엎드려서 하나님께 저렇게 눈물을 흘리는데. 나는 그것이 나의 마음이 아니라 우리 예수님의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많이 수고한 사람. 떠나갔는데 여러분들의 인상이 실망감이나, 그렇게 맛있는 음식 좋아하던 사람으로 그렇게 기억에 남아서는 안되겠지요.
두 번째는, 이 버시는 많은 성도들에게 사랑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여기서 ‘사랑받은’은 영어로는 beloved입니다. 사랑 받은 사람이지요. 여러분, 많이 수고한 사람은 대부분 많이 독선적입니다. 그리고 항상 자기가 주장하려고 하고 선두 서려고 하고 영광 받으려 하고 주장하는 권세를 가지고 사람들 위에서 자기가 인정받으려 하고 그러는 것입니다. 돈을 낼 때에도 생색이 날 때에만 돈을 내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많이 일할지는 모르지만 사람들에게는 사랑받지 못합니다. 교회에서는 일 많이 하는 사람이 사랑도 많이 받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무엇인가 이해관계에 의해서 얽히고 충돌하기 때문에. 그런데 이 버시는 많은 성도들에게 사랑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어디에서 그런 것이 나왔을까요? 인격과 삶, 아닙니까? 마음 아닙니까? 연애하는 사람도 아닌데 얼굴 예쁜 성도들을 사랑하겠습니까? 아닙니다. 이런 얘기 들으면 좀 이상할지도 모르겠지만 나도 사람이니까, 교역자와 직원들이 있는데,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 어디있냐 그러는데 엄지손가락이나 엄지발가락은 덜 아픕니다. 새끼손가락이나 새끼발가락 깨물어보세요. 자지러지게 아픕니다. 그걸 표시는 안하지, 아버지 같아야 되니까. 마음속에 있는 것입니다. 누가 아프다 그러면 그 왜 아픈가, 아이고 그러면 안되는데. 열심히 심방다니고 금식하고 그러더니 그 다음에 눕다니.. 마음의 눈물이 흐르죠. 그 사람은 더 많은 사랑을 받는 사람입니다. 한 사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그런 목회자가 되어야 합니다. 사역자가 되어야 합니다.
일을 시켜보면 열심은 있는데 들어가서 조직을 전부다 갈등덩어리로 만들어놓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제일 중요한 일을 맡기면 안됩니다. 아무리 열심이 있어도 그렇게 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정말 사랑을 받습니다. 함께 일하던 사람들이 아무개 집사님, 마음 깊이까지 이야기합니다. 사랑받는 사람들입니다.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됩니까. 성화된 인격과 사랑, 그리고 삶에서 흘러나오는 이 내적인 경향성에 대해서 사람들에게 항상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제가 항상 이야기하는데요. 설교를 잘해야지 교회도 잘 되고 (파일 끊김) 한 인간으로써 매력이 있는 인간이 되어야 합니다. 왠지 향기가 나는 사람, 그 사람과 있으면 왠지 좋은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루아침에 (파일 끊김) 그런데 버시는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그래서 여러분들이, 또 이런 사람이 있습니다. 항상 어느 속에 들어가면 줄을 세우는 사람이 있습니다. 내편, 여긴 내편 아니야, 이 사람은 (파일 끊김) 돈먹고 놀러다니고 이야기하고 형제의 뜨거운 사랑 나눠, 여기는 완전히 커트해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이 길게(파일 끊김) 그 사랑이 뭐냐하면 에드워즈의 설명에 의하면 끊임없이 관계를 맺고자 하는 내적 성향입니다. 그래서 사랑을 하게 되면 오지랖이 넓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일이 아닌데도 다 참여하고 싶어지고 그를 도와주고 그를 섬기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교역자들에게도 항상 하는 얘기가 이 안에 골수 깊이 사역자들은 노예의 유전자가, DNA가 배어있어야 합니다. 요즘 여러분 보면 교역자회의 하는 아침마다 교구별로 빵을 하나씩 주거나, 떡을 하나씩 줍니다. 어떻게 생겼는지 아세요? 매일 교역자회의 있을 때마다 새벽에 일찍 하니까 밥 못먹을 테니까, 내가 파리바게뜨에 들러서 교역자 수만큼 따뜻한 빵을 매주 사왔습니다. 그것을 두 달 가까이 했습니다. 그러니 이제 내가 도저히 안 되겠으니까 회의를 해서 첫 주, 둘째 주, 셋째 주, 넷째 주 돌아가면서 이제 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얘기했습니다. 우리 영래보고. 아침에 나오면서 “네가 막내 교역자라서 그러는 게 아니라, 다른 교역자보다 20분이라도 먼저 가서 걸레질이라도 해놓고 따뜻한 커피라도 끓일 마음을 갖는 노예의 유전자가 네 속에 흘러야 한다, 그래야지 네가 목회를 할 수가 있다” 그런 사람들이 사랑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 번째 요소가 나오는데 그 모든 섬김이 주 안에서, “엔 크리스토” 하는 섬김이었습니다. 성경에서 “스윗 크리스토” 그리스도와 함께, “엔 크리스토” 그리스도 안에. 이것은 매우 특별한 영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구절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지시할 뿐만 아니라 동기와 모든 행함에 있어서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제가 어떤 조직에 담임목사가 있고 최종적인 지도자가 있을 것 아닙니까. 학교에는 학장이 있고, 교회에는 담임목사가 있고, 그 다음에 교단에는 총회장이 있을 것 아닙니까. 그 사람을 열심히 보필해, 그런데 그것이 그리스도 바깥이면 그것을 가리켜서 똘마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똘마니입니다. 다른 사람으로 지도자가 바뀌면 그 사람은 함께 폐기처분 되는 것입니다. 쓸모가 없는 사람입니다.
포드 시절에, 요즘은 모르겠습니다. 포드 시절에 경호방법이 어떻게 되는지 아세요? 열여섯 명의 사람을 구합니다. 대통령이 취임을 하면. 똑같이 얼굴이 생긴 사람을. 에워싸는 것입니다. 분간할 수가 없습니다. 머리 벗겨진 것까지 똑같고 옷도 똑같습니다. 언제부턴가 그것을 안하더라구요. 그 사람들은 포드가 물러나면서 자기들도 같이 물러나는 것입니다. 그 얼굴 가지고는 다른데서 경호할 수가 없습니다. 지도자를 따르는데 지도자에게 복종하고 지도자가 잘 일할 수 있도록 잘 보필한다는 것은 얼마나 좋은 것입니까. 그런데 그게 그리스도와 상관없으면 그것을 똘마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게 잘해주는 것, 섬김이라고 하지 않고 아부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의 섬김은 주 안에서의 섬김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동기가 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능력의 근원이 되고 사역의 동기가 되고 섬김의 이유가 되고 목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사도바울의 목회사역을 섬겼지만 선교사역을 섬겼지만 이 예수를 위해서 섬겼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역자의 최고의 자격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예수님의 질문에 대답한 사람, 그 사람들이 예수 때문에 만나는 조직이 되어야 합니다. 세 개 했지요?
마지막 네 번째가 무엇이냐 하면, 그 사람 이름이 버시입니다. 이것은 히랍어에서 여성 이름이었습니다. 이 버시가 자매였습니다. 그런데 많은 학자들은 이 버시가 그 당시 로마에서 흔한 이름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페르시아 사람들이 쓰던 이름이었다고 합니다. ‘버시’라는 것에서 보여지잖아요. 페르시아 여자입니다. 로마 제국이 이미 제국가에 있어서 유통이 이루어진다고 해도 이 사람은 정통적인 로마인도 아니고 그렇다고 헬라인도 아닌, 헬라인과 그 다음에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이 주류라면, 우리로 말하자면 다문화 사회에서 온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교회에서 언급되는 열여섯, 열일곱 명 정도 되는 사람 속에 호명될 정도로 사도바울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준 일꾼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정말 이 사람이 그렇게 주류 속에도 들지 못하는 인종으로써 그리스도에 매여서 얼마나 로마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이 바울과 함께 한마음이 되어서 당신의 교회를 섬기는, 그리스도의 교회를 섬기는 가운데에 사도바울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나는 이 버시라는 설명을 주석 속에서 읽으면서 가슴이 마구 벅찼습니다. 야, 이것이 복음의 능력이구나, 복음은 유대인에게 뿐만 아니라 헬라인에게 뿐만 아니라, 이것은 헬라인도 아니고 유대인도 아니고. 그런데 페르시아 사람이, 이 다문화 사회에서 온, 오늘날로 말하자면, 이런 여자의 마음속에 복음이 역사하니까 이렇게 친구처럼 주님을 섬기는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일꾼의 최고의 자격은 이 안에서 복음이 뜨겁게 용솟음치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에 개혁주의 설교와 연구를 했는데 한문관 목사님이 자기가 책을 하나 번역했는데 제목을 뭐라 해야할지 모르겠다고. 원서제목이 청교도 책인데, “earnest ministry"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는 ‘간절 목회’라고 말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어법은 없다고, 그것은 ‘당신의 목회를, 목회가 간절 목회가 되게 하라’, 라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정말 아니라고, 문학을 하는 사람으로서 그것은 아닙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다 부숴버리고 그 개념만을 가지고 한국적인 익스프레션을 이야기하십시오. 그런 게 뭐가 있겠는가, 뭐 나는 깊이 생각 안 해봤는데, ‘목회, 목숨을 건 섬김’ 이러든지 ‘당신의 목회에 피를 발라라’, 그러면 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렇게 우리로 하여금 용솟음치는 피로 주님을 위해 확 쏟아버리게 하는 그 피 끓는 헌신이 어디에서 나옵니까. 한순간에 열 받는데서 나오는 게 아니라 복음 앞에서 내가 받은 이 복음의 은혜가 얼마나 놀랍고 주님의 이 십자가의 은혜가 얼마나 소중하다는 것을 아는 그 감격 안에서 자신이 티끌처럼 느껴질 때 주님이 그것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나는 열정이 없는 목회사역이나 선교사역을 냉담병이라고 부릅니다. 그것은 영적 질병입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시대에 두 파가 정치적으로 경쟁하고 있었을 때, 양쪽에서 바둑의 도사들을 내보내서 둘이 힘겨루기를 하면서 바둑으로 승부를 둔 것입니다. 그 때 한 사람이 집니다. 거기에서 딱 지게 되자 그 자리에서 피를 확 반상에 토하고 죽습니다. 그 기보가 아직도 전해 내려오는데 토혈국이라고 합니다. 한편의 바둑을 두다가도 지니까 피를 토하고 절명을 해버리는데, 복음사역을 하면서 뜨뜻미지근하게, 20년을 섬겼는데 18년을 갈등하면서 세월을 낭비한 것이라면 그것은 섬긴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사역의 기간은 시간의 길이에 비례하는 게 아닙니다. 30년 섬겼는데 거의 하나님을 섬긴 적이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나는 너희를 도무지 모르노라, 히랍어 성경에 보면 에그넘이라고 부정과거가 나옵니다. 잘 알다가 나중에 모르게 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몰랐다는 것입니다. 시간의 문제가 아닙니다. 단 1년을 섬겨도 하나님 앞에 정말 섬긴 사람이 있고 30년을 질질 끌어도 29년을 갈등하면서 보내요.
나중에 우리교회에서 훌륭한 사역자가 되었는데, 이 친구를 내보내야지 내보내야지, 라는 생각을 매주 하게 만들던 친구가 있었습니다. 나중에 이제 그 마음이 변화되면서 자기간증을 하는데 충격이었습니다. 열린교회 교역자로 임명받고 들어왔는데 2년 동안을 내가 여기 계속 있어야 되나 떠나야 되나를 가지고 고민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사역을 안 한 거지. 그렇게 해서 더 오래있었으니까 회복이 되었지, 2년 만에 떠났으면 그는 교회에서 월급이나 받았지 하나님 위해 봉사한 적이 없는 사람 아닙니까. 바로 그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복음만이 우리를 그렇게 하도록 만듭니다. 그래서 사역은 바깥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이 안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내 안에서. 가슴에 깊이 새기고 여러분들이 이런 사역자들이 되어서 중국선교를 위해서 자기 자신을 쏟아 붓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