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수 없을 때에 나타나는 충성
수 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들린지라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그들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 무리들 때문에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 내리니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막 2장 1-5절)
녹취자: 장미연
아마 중풍병은 전신이 못 움직이는 질병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마가는 고침을 받은 기적을 기록을 하면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보여줍니다. 이것을 읽으면서 우리가 개신교도로서 의문이 되는 것은 이게 가톨릭에서 이야기 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의 공로가 전가되어서 구원을 받는 게 아닌가? 하는 점입니다. 본문에서의 상황은 중풍병자의 이야기는 하나도 안 나오고, 네 사람이 병자를 지고 예수님의 치료를 받으려고 하는데 차례가 도저히 안 되는데다가 가까이 갈 수 조차 없는 상황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네 사람이 이 사람을 침대에 매어서 들고 지붕을 올라가서 지붕을 뜯었다고 하는데, 옛날 이스라엘 시대 때에 지붕의 구조가 -아주 부자는 달랐지만- 대개 보통 사람들은 ‘ㄱ’자 집이었습니다. 집의 위쪽은 흙 같은 것으로 기둥을 세우고, 그 위를 판자 같은걸 놓고, 또 그 위에 햇빛이 너무 많이 내리 쬐니까 진흙을 놓고, 진흙 위에다 나뭇가지나 또 –우리로 말하자면- 대나무나 이런 것들을 풀, 이파리 달린 것들을 쭉 펴놓고, 위에 다시 진흙을 덮고 해서 사람이 밟고 다닐 정도는 아니지만 진흙이 두께가 두꺼워지면서 직사광선과 더위를 피할 수 있게 만든 집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사실 맘만 먹으면 뜯어내는 것은 굉장히 쉬웠습니다. 그래서 지붕을 뜯어서 중풍병자를 줄에 달아 내려서 차례를 무시하고 예수님 앞으로 내려오게 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그 네 사람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의 죄를 용서해주셨다는 이야기가 초점입니다. 개신교도들의 관점에서 보면 굉장히 해석이 어렵게 느껴집니다. 사실은 그렇게 해석하기 보다는 예수님께서는 (병자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의 믿음을 기뻐하셨던 것 같습니다. 네 사람이 ‘예수님이면 이 사람을 치료할 수 있을 것이다.’ 라고 하는 마음을 가졌는데, 그 병자를 정말 사랑하는 마음과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신뢰하는 마음 모두를 보시면서 믿음이라고 하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여기는 지금 안 나오지만 ‘그들의’ 라고 하는 속에 ‘중풍병자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고 해석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니까 중풍병자가 어느 정도 중풍이 걸렸는지는 모르지만 그 사람도 역시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자신을 예수께 데려가 달라고 간절히 원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다섯 사람의 마음 모두 합치된 가운데 이 사람을 달아 내린 것이고 그것을 보면서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셨다.”라고 하셨고, “중풍병자에게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는 말씀을 볼 때에 이 사람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회개와 믿음이 있었다는 것을 우리들이 추측할 수 있습니다.
이 설교를 제가 맨 처음 들은 때가 제가 전도사였을 때입니다. 그때 박희찬 목사님이 교역자회의를 하실 때 늘 사역에 열심을 내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서 안타까워하는 마음으로 이 말씀을 여러 번 들려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말씀의 관심사가 무엇일까요?
목표 없이 일을 하면 그렇지 않은데 목표를 세워놓고 뭘 좀 잘 해보려고 하면 많은 난관에 부딪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목표가 없다면 되면 하고, 안되면 그만 두거나 돌아가거나 타협을 하고, 힘들면 포기하고 마니 이런 경우에는 갈등이 작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으면 많은 갈등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리고 좋은 목표를 세우면 세울수록 그것이 이루어지지 못하게 하는 요인들이 내 안에 내 밖에 너무 많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흔히 “너무 좋은 게 있는데 왜 앞의 사람들은 못했을까?”라고 생각합니다. 그중에 어떤 것들은 앞의 사람이 나만 머리가 똑똑하지 못해서 못한 것도 있지만 그들도 나처럼 생각은 했는데 해보니까 너무나 힘들고 어려워서 결국은 포기한 것들입니다. 그러한 처지에 있을 때마다 제가 생각하는 성경구절이 이 구절입니다.
여기에 보면 “없어서”, “없으므로”가 두 번이나 나옵니다. 그러니까 환경이 이 사람을 정상적으로 예수님 앞에 가서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길을 막히게 했다는 것을 두 번이나 이야기합니다. “없으므로”, “없어서” (라는 단어를 보면 이들의 상황이) 어렵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거기서 물러서지 않고 치료를 받고자 하는 중풍병자와, 이 사람을 너무 사랑해서 예수님께 고침을 받게 해주고자 하는 네 사람도 똑같이 그 갈망이 너무나 컸기 때문에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랬더니 그 네 사람은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상상을 했습니다. 평상시라면 사람들은 질서 상에 다른 사람이 줄을 서 있으면 가서 이렇게 사정을 해서 앞으로 갈 거 아닙니까? 근데 그게 아니라 그들은 문 앞에까지 만이라도 가고 싶은데 그 문 앞에 조차도 들어설 수 있는 자리가 없이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뤄 꽉 차 있었고 예수님을 정상적으로 얼굴도 볼 수 없는 거리에 있었습니다. 그렇게 된 상황 속에서 많은 사람들은 ‘아, 오늘은 안 되겠구나.’ 포기할 텐데 그 사람들은 옥상으로 올라가서 지붕을 뜯고 그 사람을 달아 내릴 생각을 해냈습니다. 이처럼 그 어떤 일을 ‘꼭 이루어야겠다.’라고 하는 열망을 품은 사람들은 가장 창조적인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모든 창조성의 어머니는 열정입니다. 열정이 있는 사람들만 창의적으로 일 할 수 있고, 열정이 식으면 창의적으로 일 할 수 없습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만약 교회일이 아니라면 어땠을까 하고 말입니다. 우리가 교회를 섬기기 위해 이렇게 모이지 않았다면, 저도 목사가 안됐고 여러분도 여기에 오지 않았으면, 각자 어디선가 생업의 종사하고 살았을 것입니다. 여기는 학원 선생님을 했고, 여기는 음악치료를 했을 거고, 여기는 화장품 회사의 홍보실에서 일하였을 것이고, 각자, 각자가 어디엔가 있었을 거 아닙니까? 그러면 24시간 중에 직장과 관련되지 않고 사용하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요? 직장에서 8시간 근무하고, 왔다 갔다 하는 게 2시간이라고 하면 대략 10시간을 사용합니다. 회사에서 정시에 칼 퇴근 한다고 해도 직장에 10시간을 사용합니다. 24시간 중에 10시간을 쓰고, 잠자는 시간을 8시간만 빼고 나면 남는 시간은 6시간 밖에 없습니다. 잠자는 시간은 우리가 별도의 의미를 발견할 수 없지만, 내가 이 직장을 다니든지 저 직장을 다니든지, 뭘 해서 먹고 살던지 간에 그것은 내 인생의 의미와 직결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 가운데서 내가 왜 이 일을 하고 있고, 이 일을 하는 것이 하나님과 함께 동행 하면서 살아가는 삶에 있어서 무슨 의미를 갖는지를 찾아내지 않으면 우리는 성공한 인생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게 꼭 교회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 아닙니다. 직장 다니면서 저는 항상 그 생각을 했습니다.
(예화) 직장 생활을 학교에서 하는 것 말고 직장생활을 7, 8년 정도 했는데 3년은 상상하기 싫을 정도로 괴로운 직장생활을 했습니다. 직장을 다니면서 3년은 사표를 써 가지고 다녔습니다. 직장 다니는 게 그렇게 불행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직을 위한 공부도 하고 그랬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4년은 정말 주님과 함께 동행 하면서 다녔습니다. 그때 내가 늘 들었던 질문이 뭐냐면 예전에는 -기준이 내가 변화 받지 못할 때는- ‘나는 여기 직장 다니는 게 싫다. 나는 행복하지 않다. 저 사람은 실력 없어서 들어왔고 나는 재수가 없어서 여기 들어온 거 같다. 나는 다른 일을 하고 싶다.’ 그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내 인생에 있어서 여기는 뭔가 잘못 들어온 막다른 골목 같았습니다. 그런데 변화를 받고 나니까 비로소 내 인생의 의미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직장을 다니면서 저는 우리 선배들의 모습을 많이 봤습니다. 대개 직장에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사람은 직장에서 대부분이 다 쳐진 사람들 같아 보였습니다. 저는 그런 것을 다 포기하고 신학교 가기 전까지는 열심히 직장 생활 했습니다. 인정도 받았습니다. 직장 그만두고 5년 후까지 우리 집에 후임자들이 찾아와서 일을 가르쳐 달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저는 직장생활 하면서 의미를 발견했습니다. 그러고 나니까 매일 매일 살아가는 삶이 너무 너무 행복하고 직장 다니는 게 교회 가는 것보다 덜 기쁘지 않았습니다. 그만두기 직전까지 그렇게 다녔습니다. 마지막으로 작정하고 그만뒀지만. 중요한 것은 그 의미를 찾은 사실입니다. 거기서 만약 이런 생각을 한다면 내가 얼마나 비참합니까? ‘내가 한 달에 얼마 주는 월급을 받고 그걸로 먹고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거기를 다녔다.’ 그건 너무 비참한 생각입니다. 그러므로 그 이상의 의미를 우리가 찾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진짜 승리한 사람들입니다.
그게 이 교회가 아니더라도 어디에 가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여기가 하필이면 교회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의미에서 보면 굉장히 불리한 위치에도 있고 유리한 위치에도 있습니다. 유리한 위치에 있다는 것은 내가 여기서 하는 일이 정말로 대부분 특별은총에 관한 일입니다. 성도들이 교회에 오고 은혜를 받고 변화되고 하는 일들입니다. 한번은 심방을 하는데 우리교회 어느 교인에게 직업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문화관광부 산하에서 일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너무 괴롭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알고 보니 그 사람이 음란물 등급 심사하는 부서에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침에 출근하면서부터 그것을 봐야한다고 합니다. 토할 거 같고 미치겠더랍니다. 그것을 보면서 불법들을 가려내는 일들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괴롭게 생각하지마라. 사명감을 가지고 봐라. 누군가가 그 자리에 있어서 그런 사회에서 쓰레기 같은 문화들을 법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청소해줘야 하는데 당신을 하나님이 거기에 왜 세우셨겠느냐? 기도 많이 하고 가서 항상 사회를 위해 기도하면서 당신의 직업에 충실하면 당신은 근무시간 중에 음란물을 보고 있어도 하나님이 그걸 통해서 영광을 받으실 거다.”라고 말했습니다. 굉장히 많이 그 교인이 격려를 받았습니다. 중요한 문제는 어떤 식으로든지 우린 그 안에서 의미를 발견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여러분들이 그런 위치에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보통 신앙이 아니면 얘기만 하는데도 토할 거 같은 느낌이 드는데 익숙하지도 않은 사람이 아침부터 그런 영상들을 보니, 게다가 그리스도인이 보고 있자니 어떻겠습니까? 당장 직장 그만두고 싶을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여러분들은 굉장히 유리한 입장에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불리한 위치에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의 영혼이 제일 위험합니다. 왜냐면 내가 설교하면서 사람들이 은혜를 받으면 내 안에도 똑같은 게 있다고 생각하고 책을 만들어서 사람들이 은혜를 받았다고 하면, 그 책을 만든 내 속에도 똑같은 게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 착각에 빠지기 쉽기 때문에 사실 그런 면에서 굉장히 불리한 위치에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어떻게 보면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더 많이 기도해야하고 더 많이 말씀에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교역자들도 보면 사경회나 수련회를 하면 누가 나왔나 안 나왔나, 누가 은혜를 받았나 안 받았나에 다른 사람을 신경을 쓰지만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굉장히 힘들어 합니다. 그래서 이번 몇 년 전부터 주일학교도 수련회 가면 전부 아이들을 모아 놓고 교역자들이 직접 가르칩니다. 어느 해에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너희들은 모든 업무를 그만두고 청년 수련회에 가서 그 말씀의 은혜를 먼저 받고 소화시키고 와서 그 다음에 봉사를 해라.” 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번 청년 수련회도 교회학교 교역자들이 다 따라갔습니다. 청년부와는 아무 상관이 없으니 아무것도 안하고 조용히 앉아서 기도하고 말씀 듣고 또 쉬었습니다. 그러면서 은혜를 받게 했습니다. 그것은 각별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에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러 나올 때 이외에는 사실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느낌이 안 들게 교회와 세속이 딱 구별된 삶을 삽니다. 우리는 그렇지 않잖습니까? 우리가 불리한 위치에 있기 때문에 더 많이 기도하고 은혜를 받고 그래야 합니다. 항상 피아노 반주하고 이러는 사람들은 50퍼센트는 더 노력을 해야지 자기가 은혜를 받습니다. 안 그러면 산만해집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유리한 위치에도 있고 불리한 위치에도 있습니다.
확실한 사실 하나는 “주님 앞에 충성스럽다.”는 것은 할 수 있다는 것은 하고 안 되는 것은 안 한다는 태도는 충성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한 나라의 대통령이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사람들을 이렇게 조각을 하게 해서 어떤 사람들을 데리고 내각을 짜겠습니까? 세 가지 조건이 있는데 하나는 자기하고 사상이 같아야 하고 두 번째는 그 일을 잘 할 수 있어야 하고 세 번째는 “잘 해야겠다.”라는 열의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사상도 자신과 똑같고 게다가 너무 똑똑하고 일을 잘합니다. 그런데 조금만 자기에게 불리하거나 힘들면 그만 둘 사람들과 손잡지는 않습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무엇을 할 때에 내가 하고자 하는 일에 있어서 순풍에 돛 단 것 같이 모든 게 잘 되어간다고 할 때 이상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좋게 생각하면 사람들의 생각과 관점이 모두 다르기 때문에, 나쁘게 생각하면 세상이 악하기 때문에 우리가 선한 뜻을 세우고 그 길을 가려고 하면 오만 군데서 하고자 하는 일을 거스르는 것들이 생겨납니다. 그러므로 이상하게도 한참 동안 순풍에 돛 단 듯이 일이 진행되면 그것을 정상적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우리가 기도를 많이 해야 될 때구나라고 여겨야 합니다. 물론 감사하지만 말입니다. 반대로 어려움이 일어나면 원래 이런 거지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섬기면서 순풍에 돛 단 듯이 사는 사람들은 없습니다. 모두 눈물 흘리고 괴로워하고 힘들어하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그러면서 이것을 헤쳐 나아갑니다. 그 힘이 우리들이 생각하는 힘입니다.
(예화) 한 15년 전에 열린교회가 처음에 여기에 왔습니다. 2002년도였습니다. 그때는 직원들이 그렇게 많지 않았습니다. 오면서 내가 생각하기를 열린공간에 1명, 서점에 1명 정도 직원을 뽑을까 했는데 그 수가 점점 많아졌습니다. 중간에 10명 이상 줄어든 적이 있었습니다만 많았습니다. 그때는 모두 다 젊었습니다. 그러니까 20대 중반이 기준이었습니다. 그럼 어떻습니까? 사람들 보기에도 교회가 생생하겠지요. 그때와 지금을 생각합니다. ‘그때엔 나도 15년은 젊었으니까 지금보다 열정은 훨씬 더 있었지만 미숙했다. 그때 있던 사람들을 내가 정말 힘들게 했구나.’라는 생각을 요즘도 종종 합니다. 꼭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었는데 왜 내가 그렇게 힘들게 했을까? 그런 생각도 합니다. 그러나 직원들도 나를 힘들게 했습니다. 우리 모두 다 공감을 하는 부분인데, 그때에는 너무 너무 일을 못했습니다.
교인들이 젊었을 때에는 어디를 가든지 다 ‘YES’입니다. 그런데 항상 미숙합니다. 육체적인 힘은 있었지만 말입니다. 교회에 헌신해 줬던 많은 형제, 자매들은 정말 주님을 사랑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대체적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어려워도 눈물을 흘리면서 극복해 갈 수 있었고 열악한 조건에서도 살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 옛날을 마냥 부러워하지는 않습니다. 저더러 15년 전으로 돌아가게 해 줄테니 어디로 가서 다시 사역하겠냐고 한다면 단호하게 ‘NO“입니다. 더 나아가 25년 전, 회심할 때 즈음의 인생으로 돌아가게 해줄테니 그렇게 하겠냐고 묻는대도 저는 단호하게 거절하겠습니다. 다시 그렇게 가서 거기서 인생이 무엇인지 고민하면서 삶과 죽음 사이를 오고가고 싶지 않습니다. 지금이 낫습니다. 우리는 그런 의미에서 그러한 젊음들은 갔지만 지금 그때와 비교될 수 없는 원숙함들이 있습니다. 지혜와 경험이 있습니다. 비록 육체적인 힘과 이런 힘들은 떨어졌을지 모르지만 일을 잘 알고 왜 목사님과 함께 일을 하는 것에 대한 꿰뚫어볼 수 있는 능력 등이 굉장히 상승되었습니다. 그래서 솔직히 얘기하면 -여러분 듣기 좋으라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후배들이 사역하는 교회에서 젊은이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헌신하는 것을 보면 그렇게 부럽지 않습니다. 지금 얼마나 힘든 시절들을 보내고 있을까라는 것을 너무 잘 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입니다. 세월이 지나면서 우리 젊음이 사라지는데 우리가 만약에 지혜롭지도 않고 충성스럽지도 않다면 우리는 진짜 쓸모없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살았던 날이라고 하는 것은 매일 매일의 삶이 대나무처럼 마디가 이어지면서 펼쳐진 것이고, 그 살았던 삶으로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판단을 받는 거 아닙니까? 우리의 삶을 모든 사람이 다 좋아하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내가 어떤 목표를 세우고 길을 갔고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이렇게 하는 것이 제일 좋다고 생각하고 갔기 때문에 그 속에서 자기가 충돌을 일으키면서 자기를 싫어하는 사람도 있고 자기를 미워하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겠습니까?
(예화) 옛날에 충현교회 담임목사님 바뀌고 나서 테러 사건까지 났었습니다. 난 눈을 의심했습니다. 곤봉을 사택에 가지고 들어와서 그 목사님 죽이려고 내리 쳤다고 하는 유명한 사건이 있습니다. 어떻게 교회에서 왜 그런 일이 일어날까? 그게 뭐냐면 수십일 동안 그 교회에 납품해오던 사람들이 있는 겁니다. 온갖 여러 가지 문제들이 얽혀 있는 겁니다. 목사 세워서 이거 왜 이렇게 하냐고 내리 친 겁니다. 그 놈들이 10년씩, 20년씩 그렇게 거기서 대놓고 뭘 하면서 밥을 벌어먹고 살았는데 하루아침에 다 떨어지게 생겼습니다. 거기서 무시무시한 폭력들이 일어나고 갈등들이 일어났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가고자 하면 결국 우리가 존재감이 없는 사람이 아닌 한 싫어하는 사람도 있고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나 때문에 인생이 바뀌었다는 사람도 있고 나 때문에 인생을 망쳤다는 사람도 있고 나를 정말 훌륭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나쁜 사람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별 사람이 다 있습니다. 거기서 우리는 중심을 잡는 게 불가능합니다. 왜냐면 모든 사람에게 완벽하게 만족을 주면서 우리의 인생을 걸어가는 것은 사실 불가능합니다. 우리 중 아무도 그렇게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만약에 그렇게 한다고 하면 모든 사람을 다 잃어버릴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잘 할 때도 있고 잘 못할 때도 있으며, 굉장히 잘했다고 생각해도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거였는데’라는 것들도 있습니다. 그런 것들을 다 고려하면서도 우리로 살아있게 하는 힘은, 때로는 우리들이 넘어지기도 하고 쓰러지기도 하지만 언제든지 하나님을 의식하면서 우리가 잘못 했을 때는 하나님께 뉘우치고 잘 했을 때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 앞에서 매일 매일 살아가는 것, 그 속에서 신앙과 양심이 지시하는 바를 따라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하면서 가는 것 이외에는 없습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들이 모든 것을 다 그만두고 저기 산꼭대기에 가서 초막이나 하나 짓고 혼자 거기서 조용히 앉아 “나는 자연인이다”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풀뿌리나 캐서 먹으면서 닭이나 길러서 잡아먹으면서 산다면 누가 여러분들 가지고 뭐라 그러겠습니까? 불법 건물만 짓지 않는다면 군청에서도 뭐라 안 그럽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살 순 없잖습니까?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사는 사람들이. 그러니까 매 순간 나에 대해서 하는 평가들을 우습게 여기지도 않고 그렇다고 그것에 휘둘리지도 않고 때로는 우리들이 힘들고 어려울 때도 있지만 매 순간 똑바로 걸어가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를 보실 때에는 평가하시는 것은 결국 이 사람이 내 앞에 살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열정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의 커다란 목표는 ‘열린교회’라고 하는 배 자체가 쭉 항진을 계속 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때론 파도를 만납니다. 그러나 어쨌든 그 모든 파도를 뚫고 마지막 귀향지까지 가도록 우리는 힘을 합쳐야 합니다. 어떠한 사람은 배 위에서 진두지휘하며 운항하는 선장의 역할을, 또 어떤 이는 배의 키를 붙들고, 또 어떤 이는 보이지 않는 갑판 속에서 기관이 잘 돌아가는지 맨날 닦고 조이고 기름치는 일을, 또 어떤 사람은 날마다 갑판을 청소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며, 또 어떤 사람은 주방에서 계속 뚝딱 거리면서 선원들을 위해서 매일 밥을 만들어야 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모든 사람들이 봉사하는 것이 다 합쳐져서 교회라고 하는 배를 가게 만듭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이 교회라는 배를 바라보시면서 무슨 생각을 하겠습니까? 이 사람들이 하는 일은 모두 달라도 결국은 그 배를 항구로 가게 만드는 일에 이바지하면서 사는 삶이 아닙니까? 밥을 안 먹고 어떻게 항해를 계속 할 수 있겠으며, 기관을 잘 돌보지 않고 어떻게 배의 엔진이 계속 돌아갈 수 있겠습니까? 청소를 안 하고 그 배에 있는 사람들이 쾌적한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모든 것들이 합쳐지면서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저기서 어려운 일들, 힘들 일들이 생겨납니다. 그때 마음에 또렷하게 하나님이 나를 여기 세우신 목표가 무엇인가를 생각을 하면서 안 되는 것을 극복하며 나가려고 힘쓰는 사람들이 되어야겠습니다. 그래야지만 하나님께도 인정받고 사람에게도 인정받는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안 되는 환경을 헤치고 온 사람들은 아우라가 있습니다. 여러분 텔레비전이나 라디오에 나와서 뭔가 자기 사업이나 전 분야에 대해서 말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수많은 안 되는 난관을 거친 사람들입니다. 그것을 극복한 이야기들을 할 때 놀라운 힘을 얻게 됩니다.
(예화) 어제는 tv를 잠깐 보는데 기업체에 사업을 하다가 망했습니다. 망하고 부도가 나서 모든 걸 잃어버렸는데 지인들이 백만원 걷어준 게 전부였다고 합니다. 그걸 가지고 청소하는 걸 시작한 겁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얼마나 우습게봤겠습니까? 그런데 이 사람이 부인과 함께 청소업을 시작해서 지금은 원전까지 청소를 한다고 합니다. 1년에 매출이 2억인데 계속 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 사람이 자기가 살아온 이야길 하는 겁니다. 아우라가 느껴집니다. 그게 뭐냐면 온갖 실패를 다 경험한 겁니다. 집 안 청소를 해 주는 아주머니들이 있지 않습니까? 아파트를 딱 가면 이것은 얼마, 저것을 얼마라고 딱 걸고 청소를 한다고 합니다. 대개 비쌉니다. 아파트 하나 청소하는데 75만원인가 한다고 합니다. 예를 들자면 냉장고에 있는 것까지 다 꺼내서 베이킹파우더로 다 닦고 그릇까지 닦고 모든 것을 완벽하게 청소 하는 데에 노하우가 있습니다. 이 사장이 청소를 해주다 보니 그 노하우를 도저히 알 수가 없어서 청소하는 회사에 직접 들어가서 거의 날품으로 팔다 시피하면서 고수들에게 청소를 배운 겁니다. 집에 책이 꽂혔는데 청소에 관한 책이 책꽂이에 가득 꽂혀 있습니다. 아우라가 느껴집니다. 세상의 모든 전문가들은 안 되는 상황을 수없이 겪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일반인들과 그들과의 차이는 실패한 사람은 거의 주저앉은 사람이고 성공한 사람은 그것과 싸워서 마지막에는 이긴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인생에 있어서도 승자가 됩니다.
저는 말하고 싶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했습니다. 실상이라는 것은 ‘보증’이라는 뜻입니다. 믿음은 무언가를 바라는 것인데, 그것도 주 안에서 약속을 따라서 바라는데 그게 지금 보증수표처럼 내 안에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게 믿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어디에 세워주셨는지를 생각하면서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그것을 극복하면서 나가려고 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신앙을 가진 사람인지 그렇지 않은지가 판별이 됩니다. 신앙이 있고 주님을 사랑하면 뭐가 안 되고 힘들 때 그때 이걸 신앙화합니다. 그래서 늘 하는 이야기가 내가 일하는데 가장 신경을 쓰이는 그것이 나의 기도제목에도 가장 중요한 기도 제목이 될 때 일이 신앙화 된 것이고 신앙이 일이 된 것이지 고민하는 문제와 기도하는 문제가 완전히 달라질 때는 일 하는 것이 신앙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사소한 문제들도. 그렇게 하면서 안 되는 문제들을 극복하고, 극복하고, 극복하면서 나아 갈 때 그때 언젠가는 같은 일을 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이야기할 때 그때 그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자기가 그 이야기는 단순히 일을 해온 인생의 역사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자기가 살아온 역사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올 상반기동안에 많은 애를 쓰면서 사역을 했는데 이제 우리가 한 번 다시 자신을 돌아보면서 힘을 얻어 하나님 앞에 뜨거운 마음으로 감당해 나갈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