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나단 에드워즈와 나의 목회
녹취자 : 조원정
조나단 에드워즈가 누구이기에 새로운 것을 좋아하는 오늘날 이미 벌써 1703년에 태어나고 58년에 죽었으니까 310년 이고 돌아가신 것으로 따지면 255년 정도 되는데 300년 전에 사람이 오늘날 엄청난 각광을 다시 받고 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에 관한 관심사는 미국뿐만 아니라 유럽, 한국, 중국, 루마니아, 체코슬로바키아, 러시아 많은 개발도상국에 이르기 까지 조나단 에드워즈는 다시 연구되고 있고 조나단 에드워즈의 붐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어떤 학자는 조나단 에드워즈를 가리켜서 미국에서 태어난 모든 인물 가운데 ‘Great’라는 형용사를 붙일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라고 까지 얘기 했습니다. 우선 이 사람의 사상이 무엇인가를 알기 전에 도대체 이 사람이 누군지 알아야겠습니다. 열린교회 다니는 사람이야 좀 들었겠지만 대부분 모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에드워즈는 1703년에 태어납니다. 아버지도 목사님이었고 어머님도 두 분 모두 아주 신앙이 깊은 집안의 출생이었습니다. 지금 보는 것은 에드워즈의 태어난 생가입니다. 1716년 13살의 나이에 예일대학에 입학을 합니다. 아주 명석하고 모든 사람이 천재라고 부르는 인물이었습니다. 세 살부터 글 쓰는 연습을 시작 하고 여섯 살 때 자기의견을 글로 발표하고 신화적인 내용들이 많이 내려옵니다. 여덟 살 때 유물론 논문을 발표를 했다고 하는데 과장도 좀 있다는 반성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특한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1720년에 예일대를 수석으로 졸업을 합니다. 그 후 2년 동안 대학원에서 공부를 하고 교수가 되는데 교수라기보다는 엄격하게 말하면 강사입니다. 1720년에 맨하탄 장로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하면서 열아홉 살 밖에 안 되는 1722년부터 나는 하나님 앞에 이렇게 살겠다고 하는 결단을 내리는 결심문을 작성을 합니다. 작성을 시작하고 영적일기, 미셀러니 같은 것들을 저술을 하게 됩니다. 27년 23살 되던 해에 안수를 받고 ‘사라 피에르폰트’(Sarah Pierrepont)라는 여자와 결혼을 합니다. 둘은 나이 차이가 많이 납니다. 청혼을 했을 때 사라 피에르 폰트가 열 세 살쯤입니다. 미국의 청교도 지도자 가운데 ‘토마스 후커’(Thomas Hooker)라는 굉장히 중요한 인물이 있습니다. 유명한 신학자이고 목회자입니다. 이분의 가문의 증손녀였습니다. 1729년에 외할아버지가 목회하던 교회에 담임목사로 갑니다. 여기서 긴 세월 동안 목회를 하게 됩니다. 그림에 나오는 교회가 노샘턴 교회입니다.
1734년에 신적이고 초자연 빛이라고 하는 글을 출판을 하고 조나단 에드워즈 하면 떼어 놓을 수 없는 것이 영적 대각성 운동이라는 것입니다. 미국 역사에서 영적 대각성 운동이 두 번 있는데 18세기 한번 19세기에 한번 있었습니다. 19세기에 일어난 부흥은 챨스 피니라고 하는 인물이 지도적인 역할을 하는데 굉장히 감동적이고 선교적인 삶을 살았던 인물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원래 변호사였다가 성령을 깊이 체험하고 잃어버린 영혼들을 구원하는 전도에 헌신하게 됩니다. 결혼식 가다가 어느 마을에 들렀는데 그 사람이 너무 불쌍해서 결혼식은 안가고 전도했다는 유명한 사람입니다. 신부가 혼자 황당하게 기다리게 한 그런 인물이었습니다. 신학적으로는 굉장히 결함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원죄, 성령의 역사 이런 것 다 부정했고 인간의 능력을 한껏 믿는 펠라기우스 주의자였습니다. 그러나 확실하게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 우리에겐 그를 믿을 수 있다는 능력이 있다는 것,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 이런 것들을 알고 있었습니다. 많은 복음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굉장히 안 좋은 후유증을 미국 교회 역사 속에 남기게 됩니다.
그 이전에 18세기에 부흥이 있었는데 1736년 처음 부흥이 일어났는데 이때에 지도적인 역할을 했던 사람이 조나단 에드워즈였습니다. 커다란 부흥이 일어나고 조나단 에드워즈의 부흥에 관한 책들은 시중에 많이 나와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강력한 회심을 경험하고 주님께로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계속해서 글을 쓰고 마지막에는 노샘턴 교회와 성찬 논쟁으로 갈등을 일으킵니다. 확실하게 회심하지 않은 사람은 성찬에 참여할 수 없다. 외할아버지 때부터 내려오는 ‘Half-Way Covenant’라고 해서 반쪽만 언약 상태에 있어도 즉, 부모가 예수를 믿으면 약속의 자녀로 인 쳐져서 성찬에 참여할 수 있다고 하는 정책에 융합이 안 되면서 성도들과 갈등을 일으킵니다.
하나님은 공평하십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아주 천재적인 사람이었고 학문적으로 탁월한 사람이었고 목회를 하면서 하루에 열세 시간씩 공부를 했다고 하니 대단했습니다. 사교적이지 않고 눈초리도 얼마나 무서웠는지 교회에 종탑의 줄이 어느 날 뚝 끊어졌습니다. 종만 떨어졌는데 사람은 없어서 다치지는 않았는데 어떤 교인이 “저게 왜 떨어졌나?” 했더니 에드워즈 목사님이 째려봤기 때문에 떨어졌다고 할 정도로 사교적이지 못했습니다. 심방도 시도를 했는데 자신에게 적합한 재능이 없다는 것을 알고 공부에 전념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같이 심방도 잘하고 상담도 잘하는 사람은 머리는 안 주시고 그런 것을 못하는 에드워즈에게는 특별한 머리를 주시고 저는 주님의 주권을 크게 불평하지는 않습니다.
에드워즈를 보면서 처음에는 속도 상하고 누구는 이렇게 천재적인데 나는 왜 이럴까 했지만 그 사람이 못한 걸 보면서 위로를 받으면서 에드워즈는 이런 산상세미나 같은 것도 계획 할 아이디어가 없었을 겁니다. 하나님 공평하십니다. 이렇게 와서 강의 내용은 탁월한 게 없어도 지금 돌아가도 남는 게 있습니다. 맛있는 거 먹고 시원한 가을공기에 열린 음악회도 한번 했고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조나단 에드워즈는 한국에 어떻게 소개가 되었냐면 한국에 제일 먼저 알려진 것이 신학 쪽에서 알려진 것이 아니고 일반 학문 쪽에서 알려졌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자료에 의하면 조나단 에드워즈의 『Freedom of Will』이라고 하는 전집 제 1권이 어떤 분이 번역에 품질은 썩 좋지 않는데 1975년도 번역입니다. 이전서부터 조나단 에드워즈는 철학이나 교육학 특히 미국 문학을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문학사에도 남을 만한 글 쓰는 사람이었습니다. 미국 문학을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에드워즈 강독은 필수입니다. 이런 루트를 통해서 에드워즈가 다가왔던 것입니다.
에드워즈는 한마디로 설명하기 힘들 정도로 아주 포괄적인 그래서 목회자, 설교자, 부흥운동가, 철학자, 신학자이며 동시에 미학, 자연과학, 교육학자, 역사학자인 다양한 측면을 모두 갖고 있는 종합백과 사전적인 인물이었고 실제로 18세기까지 신학교육의 지향점이 엔사이클로피디아(encyclopedia) 교육이라고 해서 모든 것을 아는 지성인들을 길러내는 것이 신학에서 뿐만 아니라 모든 대학교육의 목표였습니다. 엔사이클로피디아(encyclopedia)는 영어로 사전입니다. 무엇인가 하나 안에 모든 것들이 돌아가면서 우리에게 가르침을 준다고 하는 것입니다. 18세기만 해도 벌써 계몽주의가 일어나면서 이런 교육의 통일성이 이미 위협을 받고 있던 때였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2013년 5월을 기준으로 지금까지의 에드워즈의 작품은 『속죄자』를 포함해서 40권 정도 번역이 되었고 11권의 전기 조그마한 비전문가적인 전기부터 조지 마즈던(George Marsden) 같은 커다란 평전에 이르기까지 11권 이상이 저술이 되었고 에드워즈에 관한 연구도서가 한글로 혹은 번역으로 저술되었고 230편 정도의 논문이 한글로 발표되었습니다. 제가 1940년대부터 나온 에드워즈 박사 논문을 다 수집을 했는데 그때 120권정도 수집을 했습니다. 그보다 훨씬 더 많은 논문들이 있을 거라고 봅니다.
우리나라에는 이분을 소개한 사람이 로이드 존스 목사님입니다. 이분이 로마서 강해를 한국에서 번역을 하게 되었고 에베소서 강해 등등 번역을 하게 되고 부흥에 관한 책들도 많이 나오는데 당신이 에드워즈를 얼마나 존경하고 위대한 사람인지 알고 있는지 서술을 합니다. 자주 등장하는데 이분은 영국의 보석 방에서 에드워즈의 오래된 전집 낡은 것 두 개를 입수를 합니다. 돋보기를 쓰지 않으면 안보일 정도로 아주 작은 글씨로 빽빽하게 두 권의 책으로 만들었습니다. 읽을 때 저는 복사를 해서 확대를 해서 읽을 정도로 글씨가 작습니다.
에드워즈에 대해서 로이드존스 목사님이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두렵고 참으로 유감스럽지만 나는 그를 ‘다니엘 로울랜드’(Daniel Rowland) 유명한 설교자인데 다니엘 로울랜드 보다 또한 조지 휘필드 18세기 영국 부흥을 주도한 전설적인 설교자였습니다. 조지 휘필드 보다 앞에 두어야 되겠습니다. 정말이지 어리석을지 모르지만 저는 청교도들이 알프스, 루터와 칼빈이 히말라야 산맥이라면 조나단 에드워즈는 에베레스트 산에 비유하고 싶은 유혹을 받습니다. 그분이 에드워즈 전집을 읽으면서 자기 자신이 에드워즈가 만난 하나님은 정말 높고 위대하고 자기는 에드워즈가 만난 하나님 앞에서 티끌같이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고 고백을 합니다. 그러나 저는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에드워즈의 모든 책을 다 탐독을 하셨을까? 에드워즈를 존경하고 높이는 것은 사실이지만 모든 에드워즈의 저작들에 대해서 모두 동의를 할까에 대해서는 여전히 물음표로 남아 있습니다. 왜냐하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에드워즈의 인용을 보면 대부분 부흥과 설교, 역사 이런 성경해석 쪽에 국한되어 있지 에드워즈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철학이나 심리학이나 계몽주의와의 싸움 같은 장대한 영역들에 대한 언급들은 거의 발견하지 못하였습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과 관심사가 좀 다르다는 느낌을 많이 받게 됩니다. 누군가가 상관관계를 연구하면 좋은 과제가 되리라고 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다 지평적인 인물인데도 한국에 소개될 때는 부흥과 대각성운동, 피를 토하는 설교, 무시무시한 지옥에 관한 설교, 특별히 여러분이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손안에 붙잡힌 죄인들이라고 하는 역사적으로 유명한 설교가 있습니다. 1740년 8월 달에 엔필드라고 하는 작은 교회에서 설교된 것이고 이 설교를 통해서 어마어마한 부흥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내용을 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과 자비심 때문에 겨우 그들이 멸망당하지 않고 있는 것을 설교 속에서 이야기했습니다. 설교학적인 구성으로 보면 엑설런트라는 설교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런데 역사적인 면에서 보면 이 설교가 균형을 잃은 것처럼 보이지만 그 당시 영적인 태만함과 죄가 편만했던 뉴잉글랜드 지방에 하나님이 꼭 주시고 싶은 말씀이었기 때문에 이 설교를 사용해서 놀라운 대각성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 하면 대각성 설교자 피를 토하듯이 외치는 부흥운동가 이런 이미지로 국한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나온 책들도 번역된 책들도 부흥과 개혁사에서 전집을 번역해 내기 전까지는 그런 책들이 주로 소개가 되었습니다. 이건 마치 리처드 백스터의 경우와도 마찬가지입니다. 리처드백스터는 존 오웬과 같은 시대 인물이었고 존 오웬과 논쟁을 많이 하던 사람이었지만 리처드 백스터는 우리에게 실천적인 책들로 알려져 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참 목자상 정확하게 말하면 개혁파 목사입니다. 회심, 성도의 영원한 안식 같은 책들은 경건 서적들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분은 신학적으로 칼빈주의라기보다는 알미니우스 주의의 라인을 따르는 청교도였습니다. 청교도 안에서도 율법주의의 청교도, 알미니우스적 청교도, 신비주의적 청교도, 복음주의적 청교도 이런 것들이 있었습니다. 복음주의의 청교도들이 리폼드의 신학을 계승하고 있는 사람들이고 존 오웬이나 윌리엄 퍼킨스(William Perkins)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리처드 백스터가 그렇게 소개가 되었는데 리처드 백스터는 탁월한 사변의 능력을 가진 개혁파 정통주의시기에 신학자였습니다. 이분이 대학은 못나왔는데 독학으로 공부를 무지하게 많이 했습니다. 영어로 된 신학대전이라고 할 수 있는 그의 보편신학, 기독교 신학, 방법론, 이런 책들을 보면 중세신학자와 철학자들에 대한 수많은 인용과 참조들은 그가 얼마나 사변적인 신학자인지를 보여주는데 그런 것들은 소개가 안 되고 한쪽만 소개가 되어서 그 사람에 대한 인상을 국한시켰는데 에드워즈가 그런 점이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를 굉장히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이유는 그의 사상에 가장 커다란 특징 하나 때문인데 모든 학문을 이루는 통합적인 사상의 체계로서의 기독교 신앙, 거기에서 나오는 경건한 삶, 이런 것들이 오늘날과 같이 이렇게 파편화된 지식을 찾는 시대에는 매우 중요한 대안이 될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에드워즈의 사상은 그의 전집 중 몇 권만 읽으면서 공부하고 파악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많이 읽어야 됩니다. 우리보고 많이 읽으라는 겁니까? 그렇다는 겁니다. 하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하되 여러분이 무슨 신학자가 될 사람들도 아닌데 그렇게 하지 말고 어차피 누가 따라오는 사람 없는데 언제까지 안 읽으면 혼난다, 벌금 낸다, 그런 것 없으니까 여러분 가운데 대부분은 그런 정도를 읽을 수 있는 지적인 능력은 대부분 되는 사람입니다. 영어로 읽는다면 생각을 많이 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300년 전의 영어입니다. 어렵습니다. 초 신자들이 처음 접근할 때는 도대체 문장이 어디에서 끊나나 할 정도로 열줄 씩 열 다섯줄 씩 한 문장으로 나가고 의미도 알 수 없는 데트가 끊임없이 나오고 영문학을 한 사람에게도 조나단 에드워즈의 문장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존 오웬과 비교하면 친절합니다. 존 오웬은 400년 전 사람이니까 거기는 영어가 더 어렵습니다. 심지어 단어 열 개 중에서 찾으면 두 개는 사전에서 아예 안 나옵니다. 할 수 없이 17세기와 18세기 책을 읽으려면 그때 사전을 갖고 있어야 됩니다. 그런 어려운 점들이 있습니다. 한글로 된 것이라도 읽으십시오. 부흥과 개혁사 같은 곳에서 전집이 나오고 있는데 6개월에 한권씩 나오면 좋겠는데 번역하는 일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 가운데 영어가 잘 되서 그런 것 정도 극복할 수 있다 해서 읽기 시작하면 놀라운 일입니다.
에드워즈는 이미 한국교회와 만났습니다. 에드워즈의 사상이 한국에 잘 알려지고 영향을 끼쳤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에드워즈와 나의 학문에 대해서 생각을 해 보겠습니다. 맨 처음 조나단 에드워즈의 책을 손에 쥐게 된 것은 신학대학원을 졸업을 하고 교수가 된 다음에 89년도에 영적으로 깊은 변화를 체험하고 90년도쯤에 조나단 에드워즈의 너덜너덜한 두 권으로 된 전집을 복사를 해서 그의 글을 손에 넣게 되었고 역사 시간 속에 잠깐 그 사람에 대해 이야기는 들었지만 잘 몰랐는데 조나단 에드워즈의 극찬하는 얘기를 들으면서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지금 그림에 보면 조나단 에드워즈의 전집이 나오는데 두 권 자리는 빠진 것들이 많고 그림에 보이는 저것이 예일대학에서 나오는 것이고 27권으로 알고 있는데 완간이 되었습니다. 그 이외에 책들은 잡다한 기록들이어서 책으로 펴내기에는 가치가 떨어지는 것들이어서 예일대학의 조나단 에드워즈 센터에 온라인상으로 올라와 있습니다. 저런 것 보면 저 속에 무슨 내용이 들어있을까 생각나는 게 아니라 저게 얼마일까 그러는 겁니다. 한권에 백 불 정도라고 보면 됩니다. 전집이 이백칠십만원 정도 된다고 보시면 됩니다. 전집을 구하실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에드워즈를 접하면서 저도 역시 위필드와 함께 경험했던 미국의 대각성운동과 부흥 그의 영적인 일기, 일기를 매일 매일 쓴 게 아니라 무엇인가 강렬한 느낌이 있을 때 일기를 적어 내려가서 일기의 내용은 집에서 일어났던 일상사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영적인 성장에 관심을 가지고 쓴 신앙일기였습니다. 후에 시간이 지나면서 조나단 에드워즈에 더 깊은 관심을 가지면서 그의 사상들을 읽기 시작을 하였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전집들을 읽어가면서 나의 어떤 신앙과 목회, 설교는 더 말할 필요도 없고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과 신학을 바라보는 모든 관점 특별히 에드워즈를 통해서 배운 것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신학이 성경을 중심으로 하면서도 다른 학문들을 어떻게 해석해서 성경의 가르침 안에 굴복시키는가 하는 지성의 사용방법에 대해서 커다란 감명을 받았고 조나단 에드워즈는 어떤 면에서 칼빈과 함께 아우구스티누스의 훌륭한 제자였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에 대한 존중심은 대단했고 교회 역사상 아우구스티누스 이래로 에드워즈와 같은 방식으로 학문을 추구한 사람들은 쉽게 발견할 수 없을 정도로 광대한 지성의 세계를 갖춘 인물이었습니다. 이미 17세기에 사서삼경을 모두 읽었습니다. 그땐 이미 17세기 후반에 와서는 중국 철학서들이 거의 번역이 되어서 읽을 수 있을 정도였고 상당한 영향을 서구철학에 중국철학이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다방면에 독서가였습니다. 아주 광대한 지성의 세계를 경험하면서 제가 받은 유익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제가 조나단 에드워즈와 어떤 책을 가지고 사랑에 빠졌는지 한권씩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제일 먼저 나에게 조나단 에드워즈의 사상을 가지고 눈을 열어준 것은 예일판 전집을 기준으로 네 권으로 된 화면에 나오는 『미셀러니』(miscellany)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정확하게 번역을 하면 ‘잡문론’ 혹은 ‘잡기론’ 이렇게 되는데 잡문, 잡기라고 하기에는 우리들이 흔히 오늘날의 용어로 내리는 판단은 에세이는 논문이 바쳐진 글이고 미셀러니는 생각가는대로 쓴 글이라고 하는데 그런 의미의 미셀러니는 아닙니다. 미셀러니는 일종의 진리에 대한 묵상집입니다. 어떤 사실 하나를 발견하면 그것을 나름대로 해석하고 정리하면서 하나님 앞에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진리와 연결시켜서 써 내려간 건데 어떤 것은 몇 줄 되는 것도 있고 어떤 것은 몇 페이지씩 연결되는 장대한 것도 있습니다. 서로서로 연관관계는 없고 후세의 사람들이 그것을 저작년도별로해서 네 권의 책으로 모은 것입니다. 아직 번역이 안 되었습니다.
이것이 감동을 준 이유는 자연과학에 관한 것들뿐만 아니라 역사, 성경해석, 철학, 미학, 음악, 물리학, 천체, 이런 모든 것들에 대한 묵상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생각가는대로 쓴 것이 아니라 아주 논리적이고 계몽주의 시대를 살았던 사람답게 이성적이고 논리적으로 글을 쓰면서 한편 안에서 무엇인가 말하고자 하는 분명한 메시지를 가지고 있는 겁니다. 이런 신앙 묵상집이라고 할 수 있는 미셀러니를 에드워즈가 작성한 이유는 19살 때부터 거의 죽을 때까지 썼는데 작성을 해서 마지막에 모아가지고 기독교에 관한 중요한 책들을 쓰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런 비슷한 일을 한 인물이 있는데 ‘블레이즈 파스칼’이라고 있습니다. 학창시절에 강력한 추천도서로 제시되고 있는 책이 있었는데 『팡세』입니다. ‘팡세’라고 하는 프랑스 단어가 ‘아이디어’라는 뜻입니다. 모두 모은 다음에 기독교에 대한 변증서를 쓰려고 했던 것이 파스칼의 목표였습니다. 완성하지 못하고 죽습니다. 그런 점에서 파스갈의 팡세 하고 조나단 에드워즈의 미셀러니하고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에드워즈는 파스칼보다 훨씬 더 깊은 통일적인 사상을 가진 사람입니다. 내용이 굉장히 깊습니다. 시간이 없으면 몇 개라도 쭉 읽으면 굉장히 좋으리라 생각이 됩니다.
에드워즈는 기록의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청교도가 말하기를 “나의 기억력은 나를 한번 도 실망시킨 적이 없었다. 왜냐하면 내 기억력을 한 번도 믿은 적이 없기 때문에.” 에드워즈는 천재적인 사람이었는데도 자기 기억을 의존하지 않고 기록을 의존했습니다. 생각나는 모든 것을 메모를 했고 그때 종이가 귀하니까 이미 쓴 종이 뒤편에 써서 쓴 다음에 계속 핀으로 꽂는 것입니다. 말 타고 다니면서도 메모를 했어 꽂고 집에 돌아오면 온 옷에 종이가 꽂혀 있으면 아내가 그것을 하나씩 다 빼서 모아주는 것입니다. 이런 특성 때문에 미셀러니는 미학, 철학, 성경, 윤리, 과학, 역사, 이런 것들의 학문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거기서 발견한 어떤 학문적인 사실들을 신학과 연결시키고 성경과 연결시켜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말하는 증거들을 그 안에서 찾으려고 노력을 했던 것입니다.
비록 구성의 통일성은 결핍되어 있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미셀러니를 통해서 많은 다양한 주제들에 대해서 에드워즈가 얼마나 깊이 있는 사색을 하고 있었는가 하는 것들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조나단 에드워즈가 어떤 인물인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하면 제일 먼지 미셀러니를 읽으라고 권합니다. 미셀러니를 읽을 때 조나단 에드워즈가 누군가인가를 아는 하나의 척도도 되지만 너의 학문적인 수준이 어디쯤 되는지도 척도가 됩니다. 읽었는데 80%가 이해가 안 된다면 아직 멀었습니다. 공부와 상식, 학문들을 더 공부를 해서 읽었는데 60%정도 이해가 된다면 평균입니다. 80~90%이해가 된다면 상당히 열심히 공부를 한 사람이라고 얘기할 정도로 미셀러니는 철학뿐만 아니라 심리학 물리, 역사, 예술, 자연과학까지 다루고 있습니다.
에드워즈가 추구했던 신학이라고 하는 것이 이 세계의 모든 지식 근원이 하나님이신데 그래서 모든 지식은 하나님의 흔적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모두 모아서 하나의 신학과 성경으로 묶어서 하나님을 보여주고 싶어 했던 에드워즈의 특성을 미셀러니가 가장 잘 보여 줍니다.
두 번째 『구속사』란 책이 있습니다. 구속사란 타락한 인간을 시간과 공간으로 이루어진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다루시고 결국은 그들을 구속하시고 마지막에 당신이 이 세계를 창조하신 뜻을 완성하는가 하는 것을 우리들이 통칭해서 구속사로 부르는 것입니다.
에드워즈의 구속사는 에드워즈의 저작 중에서 역사 서술에 관한 책입니다. 에드워즈의 전집 속에 역사 서술이 두 권이 실려 있는데 구속사와 구속사의 저술을 위한 노트입니다. 대개 구속사 하면 성경의 구속사를 다루는데 성경의 구속사는 제일 먼저 시작이 인간이 타락을 하면서 구속사는 시작이 됩니다. 완성은 새 하늘과 새 땅으로 구속사가 완성이 되는 것이 끝입니다.
에드워즈는 성경을 너무 봅니다. 요한계시록이 기록이 되고 성경 이후의 시대의 역사를 교회사적으로 개관을 하면서 그런 시대의 교회들이 어떻게 흥망성쇠를 경험하게 되었는가? 그 뒤에 집요하게 그리스도의 교회를 박해하고 파멸시키고자하는 사단의 공격이 어떻게 있었는가? 하나님이 어떻게 그것들을 막아주시고 보호해주셔서 그리스도의 교회가 잠시 박해는 받을지 모르지만 결코 멸망하지 않는다는 것이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에 기초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구속사의 서술방식에서 당시의 많은 학자들에게 비판도 받습니다. 성경 안에 있는 역사는 성경에 그 역사에 대한 평가가 있으니까 구속사에 대한 해석을 한다고 할지라도 성경이 끝난 이후에 전개된 교회의 역사라고 하는 것을 누가 자신 있게 하나님의 세계의 경륜의 완성과 이런 식으로 관련된다고 단언할 수 있겠는가 입니다. 그런 점에서 에드워즈의 성경 이후에 구속사적에 대한 해석은 너무 자기적이라고 비판을 많이 받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드워즈가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구속사라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 구원의 계시를 전달해주기 위한 구속사는 성경 안에서 국한되지만 성경의 주어진 약속들이 세계의 완성이라고 하는 종착역을 향하여 달려간다고 하는 면에서는 지금 우리도 구속사의 전개 속에서 살고 있는 겁니다. 그것도 해석이 필요하다해서 자기의 가까운 시대까지 다 해석을 해 버립니다. 이 세상의 집요한 공격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교회는 영원히 번영할 것이고 인류를 모두 구원하여 하나님이 새로운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선택한 자들을 살게 하시는 위대한 구원의 역사는 결국 일어날 것이고 영원한 멸망에 처해질 자들을 위한 심판과 영원한 복락을 누릴 자들도 이루어 질것이라는 확고한 생각을 가지면서 후 천년설적인 입장을 갖게 됩니다.
이런 각도에서 구속사는 굉장히 놀라운 역사서술의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역사 해석이 유세비우스(Eusebius)의 『교회사』에서나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 특히 신국론은 영원한 고전입니다. 열린교회 다니는 사람은 그 정도는 읽을 만합니다. 드라마 좀 안보면 읽을 수 있는데 주원이가 나오는 그런 것만 보지 말고 이천페이지 정도 되는데 그럴 시간에 읽으십시오. 인류 최초의 역사 철학서입니다. 그런 것들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는 것을 우리들이 발견할 수 있다는 겁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신국론을 쓸 때에 그 당시 마니교, 펠라기우스주의, 도나투스주의라고 하는 이단들에 대항해서 초기 기독교의 전통 신앙을 수호하고자 역사 서술을 시도했다면 에드워즈는 18세기 문명에서 소키누스주의 아주 극단적인 이성주의입니다. 종교개혁 때 생겨난 이단인데 아리우스주의 이것은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이단인데 알미니우스주의 구원에 의해서 신인협력설을 주장하고 데이즘, 하나님을 하나의 철학적인 신으로 격하시켜버리는 이런 시대의 정신과 맞서서 그 일을 하였던 것입니다.
에드워즈의 저작을 읽으면서 받는 공정한 인상은 칼빈처럼 에드워즈도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심지어는 에드워즈가 쓴 어느 책에 한 페이지 반은 아우구스티누스 책의 내용과 똑같은 내용을 반복을 해서 쓸 정도로 아우구스티누스의 철학적 신학에 깊이 심취한 인물이었고 그 흔적이 가장 최대의 소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교회 역사 속에서 에드워즈가 자기와 같은 방식으로 신학을 전개했던 거의 유일한 인물이 아우구스티누스가 아닐까 생각을 합니다. 그런 점에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철학적인 신학이 이 사람을 계승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사람의 구속사와 견줄만한 책이 한권 있는데 존 오웬의 성경적 신학이란 책이 있습니다. 원래는 존 오웬이 라틴어로 쓰는데 팔백페이지나 되는 두꺼운 책인데 어렵습니다. 존 오웬의 성경적 신학은 오늘날 이야기하는 성경 신학이 아니라 언약신학에 대한 해설입니다.
존 오웬의 작품을 보면 충격적인 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해설하면서 수많은 인용문들과 참고서들이 등장을 하는데 그리스 시대의 수많은 고전 문헌들이 인용이 됩니다. 두 개를 다 읽고 한번 생각을 해 봤습니다. 존 오웬의 성경적 신학은 경비행기를 타고 아마존 위를 1800m위에서 날면서 굽이치는 아마존을 거슬러 올라가는 방식의 구속사에 대한 조감이라면 에드워즈는 배를 띄우고 아마존 강에서 배를 타고 강을 따라가면서 아마존을 감상하는 그런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느 것이 더 좋으냐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만큼 두 책이 가지고 있는 광활한 역사 개관적 특성을 우리들이 확인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존 오웬이나 조나단 에드워즈를 두고 칼빈주의자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는데 간다하게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 같은, 오웬과 같은 대학자, 개인적으로는 성경을 파 들어가면서 전개하는 깊이는 에드워즈보다는 존 오웬이 탁월한 깊이가 있다고 보고 다만 존 오웬은 살았던 시대가 달랐기 때문에 계몽주의가 시작은 되었지만 엄청난 충격을 주던 시대는 아니었습니다. 철학적인 지식이나 이런 것들을 방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절제하면서 성경에 몰두합니다.
에드워즈는 성경을 가지고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하고만 싸운 게 아니라 교회 밖에 쓰나미 처럼 밀려오고 있는 계몽주의의 사조, 인본주의적 사고방식, 뉴턴 이후로 과학주의가 나오는데 자연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물들 사이의 관계는 수학적 법칙으로 설명이 가능하다고 하는 것이 뉴터니즘의 핵심이고 그것을 보여준 첫 번째 시도가 『프린키피아』라고 하는 책입니다. 자연 사물의 수학적 법칙들이라는 책입니다. 모든 관계들을 수학으로 계산하는 혁명적인 생각입니다. 이런 것들이 확 밀려오면서 신비해 보이는 것이 신비한 것이 아니라 다 수학으로 설명되고 자연과학으로 설명이 되는 겁니다. 그 일을 해내는 사람도 없는데 이 사람은 뛰어나가서 온 몸으로 거대한 계몽주의 물결과 싸우는 겁니다. 뭐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샅샅이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들을 공격하면서 해내는 면에서 에드워즈는 우주적인 신학자였다고 우리는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칼빈은 많은 신학자 중에 한사람일 뿐이지 거의 한 사람에게 매달려 영향을 받는 그런 것은 아닙니다. 세월이 흐르고 나면 제가 존 오웬 목사님을 깊이 존경을 하지만 오웨니스트라는 소린 듣고 싶지 않습니다. 에드워즈를 좋아하지만 에드워지안이라든지 어거스틴을 좋아했지만 어거스티니안이라든지 그냥 저로서 남아 있고 싶습니다.
구속사는 성경과 역사 속을 흐르고 있는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사역, 구원사역이 중요한 이유가 뭔가 하면 에드워즈에 있어서 중요한 관심사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입니다. 저는 이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학문이 신학입니다. 여러분에게 양해를 구해야 하는 게 뭐냐 하면 교리반에서도 얘기를 하는데 신학 그러면 신학교에서 목사 되려고 배우는 학과목을 자꾸 생각하는 겁니다. 그것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여기서 일반적으로 신학 이야기 하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총체입니다. 신학을 공부하는 의무가 목사 될 사람만 공부한다고 하는 사상은 18세기 이후에 생겨난 것입니다. 그 이전에는 모든 사람이 신학자였습니다. 신자만이 아니고 불신자도 신학자입니다. 불신자가 어떻게 신학자가 되는가 하면 신학을 하긴 하는데 재료가 성경이 아니고 인간의 이성과 자연의 세계, 인간의 이성으로 만들어 낸 학문들을 통해서 신이 누군가를 설명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그런 신은 없다”라고 얘기하는 신을 부정하는 신학이 되는 것이고 신은 법칙에 불과하다고 하는 신을 하나의 원리로 만들어 버립니다. 맨 이성과 이미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 안에 있는 사물, 인간의 이성으로 구축한 학문을 가지고는 제대로 된 신학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엉터리 신학이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를 안 믿는 사람들은 엉터리 신학을 해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신이 없다고 말하는 것도 엉터리 신학입니다. 일단 신이 있나 없나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데 그 자체가 신학을 하고 있는 겁니다. 불신자들도 신학을 하고 신자들도 신학을 하는 겁니다. 신자들에게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자원이 주어집니다. 중요한 자료가 뭔가 하면 성경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이 세계와 맺으시는 관계가 무엇이고 하나님이 세계와 맺으시는 관계를 통해서 하나님의 성품이 드러나는데 지난주 설교 시간에 그런 얘기를 했는데 비참한 자가 있어야지만 하나님의 자비가 나타나고 죄지은 사람이 있어야지만 용서가 나타나고 어둠이 있어야지만 빛이 무엇인지를 보여줄 수 있듯이 이처럼 하나님은 당신의 속성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정 반대에 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사용해서 당신의 역사를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에드워즈의 유명한 논문 중에 하나를 읽어보면 인류의 구원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위대한 지혜라고 하는 건데 죄가 들어온 것은 매우 잘못된 것이었지만 그러나 죄 때문에 죄가 들어오지 않으면 드러나지 않았을 하나님의 위대한 영광이 드러나게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죄를 짓고 인간이 비참해지고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가 나타나고 죄를 짓고 희망이 없는데 용서를 받아야 하는데 하나님의 용서가 나타나고 인간이 결국 죄를 짓고 그 대가를 받아야 되는데 인간에게는 파멸밖에 없는데 하나님의 대속이라는 것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엑기스인 이유가 성경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말해주는 계시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엑기스가 되는 것입니다.
금세기에 조나단 에드워즈에 관한 가장 탁월한 연구가 중 한분이 조지 마즈던 교수입니다. 에드워즈의 평전을 읽으려면 조지마스턴 교수의 평전을 읽는 것이 가장 정확하고 풍부합니다. 이분을 3년전 에 만났습니다. 강가에 앉아서 같이 식사를 하면서 두 시간 동안 대화를 했습니다. 오늘날의 기독교의 현실들이 너무 잘못되었다는 겁니다. 깊이가 없는 겁니다. 교회 와서 문외한 종교가 되는 것입니다. 문외 종교입니다. 아무 생각이 없는 겁니다. 그냥 먹고 놀고 교제하고, 세상을 어떻게 극복해 나가야 할지를 사상이 없는 것입니다. 에드워즈로 돌아가야 한다고 하시면서 당신 자신도 에드워즈의 모든 것에 동의를 하지 않는데 그중의 하나가 종말론에 있어서 점증하는 심판의 교리 같은, 너무 무시무시한 교리입니다. 하나님이 지옥 불에서 인간들을 심판하실 때 세월이 흘러가면서 점점 더 강력한 하나님의 진로를 드러낸다는 심판인데 목회가 어떤 것이 되어야 되겠느냐 나의 생각은 목회라고 하는 본질은 이것을 하라 저것을 하라는 것이 목회가 아니고 목회라는 것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것이며 하나님이 얼마나 예쁜 분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름다움을 보여 주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제일 기쁜 일이 되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여기 우리 교역자들도 있고 신학생들도 있겠지만 평생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여줄 수 있는 목회자, 성도들이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장 중요한 존재론적인 선교입니다. 나의 목회의 본질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했더니 굉장히 흡족해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조나단 에드워즈의 사상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성경에 보여주는 이유는 구속사의 물줄기를 통해서 보여 주는 것입니다. 구속사의 물줄기의 정점에 누가 계십니까? 예수그리스도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가 그렇게 아름다운 분이라고 성경이 칭송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희망이 없는 이 세상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구원에 정점에 서 계신 분이 예수그리스도십니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그것이 그렇게 아름다운 것입니다.
에드워즈의 과학철학에 관한 것입니다. 동영상을 15초 감상하시겠습니다. 천둥치는 것을 보여드렸는데 자연학에 관해서 깊은 관심을 가진 사람이었고 뛰어난 관찰자였습니다. 유럽에서 첫 번째 논문을 발표하는데 신학논문이 아니라 곤충에 관한 논문이었습니다. 유럽 학회지에 실립니다. 굉장히 재미있는 관찰 논문입니다. 자연학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진 사람이었고 뛰어난 관찰자였고 무엇인가 섣불리 자기의 견해를 말하기 전에 객관적인 자연의 현상들 곤충이라든지 빛이라든지 아니면 사물의 운동이라든지 이런 것들을 철저히 관찰해서 정확하게 팩트를 찾아내는 그런 능력과 취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자연학에 대한 그의 관심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연을 통해서 하나님의 충만한 능력과 아름다움을 드러낸다는 신학적인 확신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미국은 뭐든지 큽니다. 천둥 번개 같은 것도 여기서 치는 것은 잘잘합니다. 바람이 분다고 그래도 미국에서는 탱크로리 같은 것이 수백 미터 올라갈 정도로 토네이도 같은 어마 어마한 바람이 붑니다.
에드워즈가 이런 말을 남깁니다. 동영상 봅니다. “자연의 모든 역사 중 천둥과 번개만큼 달콤함은 없다. 이전에는 나에게 그렇게 끔찍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천둥을 몹시 무서워하던 사람이었고 뇌우가 일어나는 것을 보면 공포에 사로잡히곤 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반대로 그것이 즐거움이 되었다. 나는 벼락이 시작되면 하나님을 느낀다. 그런 때에는 구름에 시선을 고정하고 번개의 연주를 보면서 장엄하고 두려운 하나님의 천둥 음성을 듣는 기회를 가지곤 한다. 이것은 종종 나를 위대하고 영광스런 하나님에 대한 달콤한 묵상으로 인도하는 엄청난 즐거움이 된다. 그래서 그것을 감상하면서 시간을 보내곤 하는데 이는 내가 묵상한 것을 노래하는 것이 내가 생각하는 것을 독백으로 노래하고 음성으로 말하는 것이 내가 보기에는 언제나 당연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찬양)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그리스 시대의 사람들 로마시대까지 기본적으로 모든 지식이 하나라고 보았습니다. 자연학, 논리학, 윤리학, 서로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연결이 되어서 마지막에 그러면 나는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동양에서는 일찍이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물이 흘러가는 그 흐름을 보면서 법이라는 한자어가 나옵니다. 물수 변에 지나갈 거자가 나오는 겁니다. 법이 뭐냐 하면 자연의 이치를 따라서 본성에 맞게끔 흘러가는 것이 법이다. 물이 흘러가는 것을 보면서 “시냇물이 흐르네.(피지카) 이것은 세월이 많이 변해도 높은데서 낮은 데로 이렇게 흘러가는구나.(로기카) 아 이것이 자연의 이치이구나. 그러면 나도 순리대로 살아야지.(에티카)” 이게 사실은 동북아 철학이 가지고 있는 강점입니다.
퇴계 이황이 쓴 『성학십도』라는 책이 있습니다. 굉장히 충격을 받았습니다. 신학생들에게 꼭 읽혀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 공부를 하고 무엇에 대해 공부를 하고 공부할 때는 마음가짐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이야기 해주는데 결국 하나님 없이 경건과 학문을 노래하고 있는 책이었습니다. 하나님 대신에 자연의 이치 인간의 본성 이런 개념을 가지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공부를 삶과 자신의 마음 자연세계에 대한 지식과 인간 사회에 대한 지식 하나님에 관한 모든 지식이 아우러진 공부를 하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신학 공부입니다. 항상 신학공부 이러면서 우리를 신학생으로 만들려고 그러나 어디에서든 그런 소리 하지 마십시오. 설교를 단 한편도 정신 차려 안 듣고 딴 소리 하는 것입니다.
에드워즈의 책 중에서 『과학 철학서』란 책이 있습니다. 700페이지 정도 되는 책인데 읽으면서 굉장히 많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과학도가 아닌데 과학을 이야기 하는데 노력을 하지만 과학전공자가 아닙니다. 과학에 있어서 300년이란 시간이 얼마나 많은 발전을 했는데 어떤 해석은 웃음이 나옵니다. 순 엉터리 같은 해석도 있고 거의 공상에 가까운 수준인 것도 있는데 그 당시 있는 사람들은 그런 생각은 안했을 겁니다. 그때 우리는 천연두 예방 주사가 처음 나왔던 시절이었으니 그 전까지만 해도 인간의 질병이 병으로부터 오는 게 아니라 귀신들이 전해준다고 믿는 그런 시대입니다. 사실은 우습게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깊은 인상을 받은 것이 무엇인가 하면 무엇을 탐구하던지 간에 그것을 하나님의 존재와 연관시키고자 했고 이 세계에 있는 모든 자연현상까지도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분이고 하나님이 그것들을 움직이고 계시다고 하는 것들을 어떻게 하든지 설명해서 당시에 하나님은 없다. 세상에는 법칙만 있을 뿐이라고 하는 계몽주의 사상이 팽배해지고 있을 때에 바로 그 법칙 안에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 것을 하나님이 역사하고 계시다고 하는 것을 온 힘을 다해 증거 하려고 하는 지성적인 노력, 그래서 과학적인 시대로 접어드는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해서 뉴턴을 완벽하게 이해했던 유일한 신학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저 사람들이 내어 놓은 것과는 다른 뉴턴에 대한 해석을 내어 놓았는데 그런 것들이 깊은 감동을 주었고 자연과학에 대해서 공부라고 하는 수준까지 미치지 못하지만 틈나는 대로 자연과학에 대한 이해를 넓히는 것이 저에게도 커다란 기쁨이 될 수 있는 방식이 무엇인지를 에드워즈가 저에게 가르쳐 준 것입니다.
지금도 공부하다가 피곤하거나 해외여행가면 비행기 안에서 비디오로 나오는데 재미도 없고 잘 안보입니다. 아이패드 열어 놓고 거기에서 양자역학, 최근의학 어디까지 왔나? 그 다음에 곤충의 세계, 백 년 전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아마존 탐험, 아이슬란드의 지질학 이런 것들을 보면서 상식을 넓혀 가는 것입니다. 의문이 나면 책을 좀 더 보고 시간이 되면 하는데 노는 것 보다 낫습니다. 코미디나 한 편 보면 뭐하겠습니까? 그러면서 넓혀 가는 것입니다. 에드워즈의 과학 철학에 대해서 깊은 인상을 받으면서 개인적으로 과외비 많이 썼습니다. 한주에 삼십 만원씩 썼으니까 돈이 꽤 들어갔습니다. 천문학, 생물학, 심리학 이런 것들을 조금씩이라도 공부할 수 있었던 것도 에드워즈가 나에게 준 지적인 자극이 많이 도움이 되었다고 말씀드립니다.
네 번째가 『윤리학』입니다. 사진에 보면 18세기 시대의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18세기 때 산업혁명이 영국에서 막 일어나고 있는 때였고 미국은 백년 지나서 19세기 중반에 산업혁명이 시작이 됩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사회를 형성하고 사니까 나 혼자 사는 것은 아니고 서로 서로 같이 행복해지며 살아야 하니까 윤리 문제가 등장을 합니다. 팔 권인데 부흥과 개혁사에서 번역을 했습니다. 쉬운 책은 아닌데 번역이 나오고 난 다음에 굉장히 애석해 하는 교수님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강의에 신비감이 사라졌다고 이 책을 가지고 정리하면서 강의를 했는데 한글로 번역이 나오니까 계속 할 수가 없지 않습니까?
우주적 신학과 철학을 통해서 그것이 기반이 되어서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하여 제시한 책이 윤리학입니다. 여기에 세권의 책이 실려 있는데 천지창조의 목적인데 여덟 편의 설교를 통해서 시리즈로 들었을 것이고 지금도 설교 시간에 천지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아니면 창조의 목적이 기준이 된다고 설명할 때 뭔 소린지 모르는 분들은 깊이 각성을 하시고 인터넷에 들어가셔서 천지창조의 목적, 여덟 개로 된 시리즈를 반드시 읽으십시오. 열린교회에서 신앙 생활할 때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 가서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가르침을 주시는 목적이 무엇인가를 이해하는데 커다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쌍둥이 논문인데 『천지창조의 목적』하고 『참된 미덕의 본질』입니다. 천지창조의 목적은 2부로 되어 있는데 1부는 이성만을 사용한 철학적인 논증으로 천지창조의 목적을 설명을 하고 하나는 성경과 신약을 사용한 것인데 이것이 훨씬 쉽습니다. 머리에 쥐가 날 정도로 어려운 논문입니다. 두 논문을 이해하는 것은 기독교 신앙을 탄탄하게 세우는 매우 중요한 논문입니다. 지금 교리반 하는 것도 허덕거리기는 하지만 천지창조의 목적 하고 참된 미덕의 본질 이 두 권을 묶어서 기독교 교리의 철학적 기초를 공부하는 클래스를 만들면 정말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글로 번역이 되었고 작은 책으로 분책도 되었는데 사서 읽어 보십시오. 이해가 잘 안가지만 천지창조의 목적이라고 하는 여덟 개의 시리즈를 들으신 다음에 읽으면 이해가 잘 가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참된 미덕이라고 하는데 미덕이 뭔가 하면 영혼의 힘입니다. 타자와 좋은 관계를 맺는 영혼의 힘입니다. 그것이 바로 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덕스럽다고 할 때 항상 무인도에서 혼자 살고 있는 사람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 관계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의 영혼의 힘이 아주 큽니다. 덕이 많은 사람은 상대방이 좀 잘못하고 그래도 사랑의 관계가 안 깨어집니다. 박덕한 사람은 그렇게 잘하다가도 한번 실수했는데 보통 성질이 아니라고 하면서 한칼에 잘라 버립니다. 그 집뿐만 아니라 그 집 자손도 안 쳐다봅니다. 그런 사람은 덕이 없는 사람입니다. 우리들이 성화 생활을 하는 것은 덕을 강화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나오는 덕을 그런 개념에서 이해를 해야 하는데 기본적인 기독교 덕론의 기초를 이 책이 놓아 주게 됩니다. 얇은 논문인데 쉽지는 않습니다. 씨름하고 읽으면서 교역자들의 도움도 조금 받고 하면 정신의 근육이 강해지는 것을 느낄 겁니다.
참된 미덕의 본질과 천지창조의 목적은 쌍둥이 책이기 때문에 뭐하고 비슷하냐 하면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이란 유명한 책이 있습니다. 니코마코스가 누구냐에 대해서 말이 많은데 아리스토텔레스의 아버지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아들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데 니코마코스란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윤리학을 배우고 가르치는 내용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직접 쓴 것이 아니라 강의를 했고 학생들이 요약하고 받아 적은 것을 묶어서 이 책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니코마코스의 윤리학은 우리에게 선이 무엇이고 인간은 왜 살아야 되고 인간의 윤리적인 판단은 어떻게 해야 하는 것들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책인데 그것은 하나님 없는 관점에서 가르쳐 준 책이라면 에드워즈의 이 책은 확고한 성경적 기반위에서 총체적인 사고를 하는데 있어서 보편적인 사고가 어떻게 구비되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윤리학과 관련해서 말해주는 책입니다.
팔 권에 실려 있는 책이 『사랑과 열매』라는 이름으로 우리나라에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고린도 전서 13장을 설교한 것입니다. 이 책은 안 읽었는데 워낙 대가이기 때문에 읽고 나면 이 사람 설교 재탕할 거 같은 느낌이 들어서 안 읽고 저 나름대로 13장을 설교를 했습니다. 월요일마다 신학생을 가르치는데 그 중에 한 학생이 매주 내 설교 테이프를 듣고 와서 함께 나누는데 내 설교를 듣고 에드워즈 책을 읽고 비교를 해서 나한테 이야기를 해 주어서 정보를 들었습니다. 에드워즈는 그 책을 다 번역을 하면 450페이지 정도 되는데 14번 정도 설교를 했고 저는 30번 설교를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책을 출간한 다음에 읽으려고 합니다. 혹시 중복된 것이 나왔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에드워즈를 뺏긴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 드립니다. 지금 초고를 작성을 해 놨는데 천 페이지 정도로 마무리를 할까 합니다. 지금 쓰고 있는 책이 끝나면 고린도전서 13장을 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입니다.
제가 죽은 후에라도 김남준 목사가 어떤 사람인가 무슨 사상을 가진 사람인가 할 때에 고린도전서 13장을 읽으면 나를 가장 잘 알 수 있는 그런 방식으로 쓰려고 하고 있습니다. 생각날 때마다 기도해 주시고 책이 나올 때마다 사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다섯 번째로 『삼위일체론』입니다. 제 21권인데 삼위일체만 다룬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 은혜, 믿음, 세 가지를 다루었습니다. 에드워즈는 여기서 삼위일체, 은혜, 칭의, 이런 것들을 다루고 있는데 에드워즈는 은혜 그 자체가 성령이라고 합니다. 에드워즈의 은혜론은 곧 성령론에서 보면 신론의 진수 대부분이 성령론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에드워즈의 삼위일체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삼위일체론 같이 총체적인 저술은 아니고 이미 나와 있는 것들 중에 자신이 생각을 새롭게 한 것들만 모아서 만든 얼마 안 되는 분량인데 에드워즈의 신론 해석은 제가 보기에는 17세기 한 세대 앞에 개혁파 정통주의 신론 진술에 비하면 그렇게 탁월해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특히 용어와 진술, 정교함, 깊이, 이런 면에서는 그들에게 미치지 못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진술을 보면 아우구스티누스, 피터 룸바르두스(Petrus Lombardus), 아퀴나스, 잔키우스(Jerome Zanchius), 마트슈리어트, 콕세이우스(Johannes Cocceius), 이런 사람들의 삼위일체론으로부터 다양한 내용들을 포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성령론 중심의 해석을 따르는 에드워즈의 삼위일체론이 성령하나님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내적인 사역과 외적인 사역에 있어서 교통의 주된 위격으로 이해되어서 상당히 ?
다음에 도표를 보면 삼위일체를 이해하는 방식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삼위일체에 관한 것도 제가 여기서 강의를 한번 하고 교회에서 두 번하고 세 번에 걸쳐서 삼위일체 교리를 일곱 시간 해서 소개를 했습니다. 그런 강의는 인터넷에 들어가셔서 일삼아서 들으시기 바랍니다.
삼위일체에 대한 접근 방식이 라틴 교부들, 즉 서방 교부들은 일체라고 하는 것에서 시작을 해서 삼위 쪽으로 갔습니다. 삼위일체라고 할 때 위는 위격을 이야기 하는 것이고 일체라고 할 때 체는 몸체 자를 쓰는데 몸체라고 하는 것이 하나의 몸에 머리가 세 개 달린 그런 형상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체라고 하는 의미가 신적 본질입니다. 하나님은 하나의 신적본질로 되신 분이다. 그런데 삼위가 계시다. 그럼 하나의 신적본질이 어떻게 삼위로 계실 수 있는가? 위라고 하는 것은 각자 인격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해를 할 때 우리는 한 존재가 한 인격을 가지고 있는데 삼위라고 할 때 사람들은 세 분이라고 이해하기 쉬운 것입니다.
하나님에 관해서 말할 때에 ‘인격’ 혹은 ‘위격’이라고 하는 ‘person’이라고 하는 것과 인간에게 부여하는 인격이라고 하는 것은 다릅니다. 우리 인격은 어떤 식으로든지 독립적일 수밖에 없고 여기는 독립성과 함께 서로 관계적인 특성으로서 위격을 이야기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이 세 인격이 모이면 세 사람이 모인 것으로 사고방식을 가지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의 신적본질을 가진 것이다. 이것을 가장 첫 번째로 놓고 그런데 하나의 신적본질을 가지신 분이 어떻게 성부, 성자, 성령으로 서로 다른 구별되는 위격으로 존재할 수 있는가를 설명하는 것이 서방교회의 전통이었다면 동방교회는 반대입니다. 삼위 서로 다른 위격이라는 데서부터 먼저 출발을 합니다. 서로 다른 위격을 가지신 그분이 어떻게 하나이실 수가 있는가에 설명을 할 때 그것은 동일한 신적 본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 어떻게 서로 다른 위격을 가지신 분이 똑같은 신적본질을 공유할 수 있는가에 페리코레시스의 교리가 등장을 합니다. 삼위가 있는데 물리적으로 설명을 하자면 통로가 있는데 통로를 통해서 신적본질이 함께 흐르면서 세 위격 모두에게 동일한 본질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서방교회는 일체에서 출발을 했고 동방교회는 삼위에서 출발을 했을까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서방교회는 철학적 전통이 굉장히 강했습니다. 신이라고 하는 존재를 생각할 때 하나라는 생각이 분명하고 하나님을 신관으로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한 하나님일수밖에 없는 것이기에 철학적인 전통을 반영을 해서 일체부터 먼저 시작을 하는 것입니다. 일체에 대한 사상을 가지고 시간과 역사 속에서 일하신 하나님이 성부, 성자, 성령이 서로를 배제함 없이 일하셨기 때문에 역사 속에서 전개된 하나님의 뜻은 삼위로 나타납니다.
이에 비해서 동방교회 전통은 성경에서 시작이 됩니다. 이 말을 들으면서 동방교회는 성경적이고 서방교회는 철학적이구나 생각하면 안 되고 관점의 차이입니다. 동방교회는 성경 속에서 전개되는 것이 한 하나님으로 나오는 게 아닙니다. 물론 한 하나님이지만 나올 때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창조하시고 구속하시고 구속을 적용하시는 전개과정이 나옵니다. 성경만을 놓고 성경에 있는 데로 역사를 해석하게 되면 삼위가 먼저라고 하는 동방 교회의 관찰이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서로 다른 분으로서 성경에 등장을 하고 역사 속에서 당신의 구속을 이루어가는 분이 하나의 신적본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지 그리고 이것을 기초로 해서 철학적인 사상을 덧붙여서 ‘페리코레시스’의 교리를 만든 것입니다. 페리코레시스는 그리스어인데 상호교통, 상호유통, 상호관계, 이런 의미입니다. 페리코레시스의 교리를 가지고 일체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에드워즈는 두 가지 설명 가운데 서방교회의 전통이 아니라 동방교회의 전통을 따르고 있습니다. 에드워즈를 지배했던 사상이 서방교회의 강력한 철학적 신학이었다는 사실은 의심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에드워즈가 두 번째 동방교회의 전통을 따라서 삼위일체에 대한 논의를 전개했기 때문에 오늘날 많은 적응성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2000년대 이후로 들어서면서 신학계에 최대의 화두는 삼위일체입니다. 삼위일체 신학 안에서 인류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모든 답들이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소피아 성당에 가보면 예배당이 하나의 둥그런 지붕으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작은 동그라미들이 여러 개 만납니다. 그러면서 교회당을 형성하는데 그것이 교회의 지체됨입니다. 하나하나의 원들이 모여서 만들어진 것인데 이런 개념이 삼위일체 개념에서 오게 된 것입니다.
에드워즈는 동방교회 해석의 모델을 따르면서도 아우구스티누스의 상호 사랑에 삼위일체를 벗어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에드워즈의 삼위일체론에 대해서 삼중성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이 사람이 삼신론자가 아니냐는 공격을 당대에도 많이 받았습니다. 항상 이런 것들을 해석할 때에는 에드워즈가 살았던 계몽주의 시대, 봇물처럼 밀려오는 쓰나미 같은 새로운 사상들 앞에서 하나님에 관한 교리를 가지고 현실 문제들을 다루려고 했던 그의 시대적인 정황을 고려하면서 이해를 해야 된다는 것을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에드워즈의 삼위일체와 사랑의 교리는 그림에서 보는 것처럼 아주 정교합니다. 동방교회의 전통을 많이 반영하고 있는데 저 그림을 보시면 제일 먼저 삼위일체 하나님이 계시고 삼각형이 있는데 성부, 성자, 성령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오늘날 우리들은 내가 직접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받는다는 개인주의적 생각들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공동체 속에서 녹아서 서로를 섬기고 하나가 되게 해서 사랑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성도 모두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가고 섬김을 받아가는 공동체적 구조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이런 것들을 제대로 안 가르치고 현실은 개인적인 풍조가 물질주의와 함께 강력하게 밀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정확한 가르침이 뭐라고 하는 중심이 안 잡힌 속에서 개인주의와 물질주의 이런 것들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오니까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정신에 감염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우리 교회 오셔서 아직 공부 안하신 분들은 기본적으로 교회론에 관한 세 시리즈를 공부해야 됩니다. 교회와 하나님의 사랑, 교회의 질서와 하나님의 통치, 성도의 공동생활, 여러분이 꼭 공부해야 할 내용들입니다. 지금 충고하는 것을 우습게 생각하지 마시고 이런 것 제대로 안하면 삼사년에 교회 옮기고 돌아다닙니다. 젊었을 때는 동정이 가지만 머리 하얘가지고 오갈 때도 없이 그러면 되겠습니까? 도대체 이런 삶들이 무엇인지 확고한 교리를 세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림을 다시 보겠습니다.
개인적으로 그렇게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성부, 성자, 성령 안에서 서로 교통하는 그 사랑을 하나님이 아들에게 부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사랑을 받은 것도 아들이고 삼위일체 속에 있는 아들도 아들일수 있는가 인데 사실입니다.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신성의 신비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라고 할 때 성부를 가리키는 적도 있고 삼위일체 전체를 가리키는 적도 있습니다. 심지어 아버지라고 부를 때 성부일수도 있고 신적본질로서의 아버지일 수도 있습니다. 그럴 경우 삼위일체 전체가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이 하나님께 기도할 때 그 하나님은 성부하나님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입니다. 예수님이 기도할 때 예수님은 당신을 포함해서 삼위하나님께 기도를 올리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기도를 올릴 때 기도를 듣는 대상은 예수님이 아버지라고 불러도 성부가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기도를 올리고 있을 때 성자이시지만 이 기도를 들으시는 분은 성자 자신을 포함한 하나님입니다.
그림을 보겠습니다. 삼위일체 사랑이 아들에게 주어집니다. 아들에게 사랑이 주어지고 아들은 신랑이고 교회는 그와 함께한 신부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아들에게 부어준 그 사랑은 신부와 맺은 영적인 관계를 통해서 교회에 부어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해서 교회가 몸을 이루기 때문에 머리에게 부어진 사랑이 몸으로 전달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교회를 사랑하신다는 증거이고 교회가 사랑을 받는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아들을 사랑하신다는 증거입니다.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공동체를 형성하게 하고 그것이 개인적인 체험이 아니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예수의 영적인 교회에 접붙인 지체가 되었기 때문에 우리가 그 사랑에 참여하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삼위일체론에서 모두 이야기 하는 것이지만 삼위일체가 기초가 되어 그의 교회론, 하나님과 그리스도, 그리스도와 교회, 교회와 신자, 신자와 신자, 이런 관계를 설명하는데 모두 동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제게 매우 유익했습니다.
다음에 매우 어려운 책 하나가 등장하는데 『신앙 정동론』입니다. 부흥과 개혁사에서 신앙 감정론이라고 번역이 되었습니다. 영어로 ‘affections’라고 하는데 정서, 감정, 사랑이라고 이야기 하는데 은밀하게 말하면 이것은 정동입니다. 정동은 인간의 정이 출렁거리면서 움직이고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잔잔한 호수가 있는데 헬리콥터가 떠서 커다란 돌을 떨어뜨리면 풍덩하고 빠지면서 출렁거리는 물결이 일어나는데 인간이 아무것도 자기의 마음을 자극하는 것이 외부적으로 없고 인간의 마음은 수면처럼 고요한 것인데 그렇지만 않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어둠 속에서 나를 괴롭혔던 어떤 인간을 생각하면 분노가 솟구치고 맥박이 빨라지면서 아무것도 보지도 않고 누구도 자극을 안했는데 이 속에서 출렁거리면서 감정이 일어나고 눈물이 쏟아지고 당장 가서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정동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외부적인 사물이나 혹은 자기 안에 있는 상상의 작용을 통해서 무엇인가 감정이 일어나는 것이 affection의 본뜻입니다. 이것이 사랑으로 일어날 때에는 사랑의 감정이 되는 것이고 미움의 감정이 일어나면 혐오의 감정이 되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것을 보면 사랑의 감정이 생겨나고 추한 것을 보면 혐오의 감정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신앙적인 정동,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은혜를 받았다고 할 때 마음에서 출렁거림이 일어나고 하나님이 많이 느껴지고 눈물이 나고 이제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고 이런 정동이 없을 때는 감히 결심할 수 없던 것을 결심하는 용기가 생겨나고 하는 것이 신앙의 정동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상세하게 이 책을 썼는데 에드워즈의 책 중에서는 아마 『의지의 자유』 다음으로는 어려운 책이라고 생각될 수 있습니다.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만족스럽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설교로 전달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좀 더 상세하고 어렵게 썼더라면 우리가 이해하기 훨씬 쉬웠을 텐데 쉽게 하려고 하다 보니 굉장히 어려워 졌습니다. 어렵게 이야기 하는 것이 사실은 쉬운 것입니다. 쉽게 얘기하면 빠진 것도 많고 모호한 것도 많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어떤 것을 발견했나 하면 우리들은 대충 넘어갑니다. 은혜를 받으니까 기쁘고 감사하고 성령 충만하구나. 우리는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하는데 에드워즈는 어떻게 해서 그렇게 은혜의 작용이 우리 안에 일어나고 우리로 하여금 인간의 이기심과 악에 대한 욕망을 버리고 하나님의 선을 따라가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가를 설명합니다.
설명할 수 있는 방식을 제공해 준 사람들이 있었는데 18세기에 있었던 영국의 신플라톤주의와 도덕 심미주의 연구가들이었습니다. 영국 경험주의 계열의 사람들입니다. 그 당시 철학 사조가 17세기 후반부터 시작해서 계몽주의와 맞물리면서 플라톤의 부흥이 일어나게 됩니다. 영국의 경험주의와 함께 플라톤의 새로운 해석들이 이루어지게 되고 이 영향을 받으면서 기독교권에서는 플라톤의 철학을 상당부분 받아들이면서 신학의 도움을 받았던 아우구스티누스의 대부흥이 일어납니다. 경험주의에 영향을 에드워즈가 많이 받았다고 보는 것입니다. 압도적인 영향을 받았다는 그런 것은 아니고 상당히 많은 영향을 받았고 로크의 『오성론』이라는 책, 이름은 들어보셨을 겁니다. 인간 오성론에 대한 책을 예일에 있을 때 이 사람이 읽습니다.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풍부하게 만난 체험을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에 경험주의 안에서 자기의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논거들을 많이 발견하고 특히 이 사람들이 도덕 심미주의라고 하는 것들을 추구했는데 아름다운 것을 인간에게 잘 가르쳐서 마음이 움직여서 선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가르쳐서 마음에 감동을 받아서 그것에 의해서 선을 선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들이 경험적으로 보더라도 선을 행하는 사람들은 이성적으로 판단을 해서 행하는 사람도 대부분 있지만 마음에 감동을 받으면 선한 일을 할 마음이 생깁니다. 그런 것들을 어떻게 심리학적으로 규명을 하는지를 찾아내었던 것입니다.
인간이 사물을 보고 인식하면 사실에 대한 팩트가 들어옵니다. 팩트가 들어오면 그 지식과 인간 안에 있는 그것을 좋아하는 성향이 만나면서 불꽃이 튀어서 감정을 출렁거리게 하는 것입니다. 출렁거리는 감정들은 또 다른 새로운 지식들을 생산해 내는 것입니다. 매일 걷는 비 내리는 길이지만 부부싸움을 하고 걸을 때는 비 내리는 길이 새로운 의미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내가 이 나이에 이렇게 구박을 받으면서 살아야 되는가 하면서 수많은 언어들이 떠오릅니다. 부부싸움을 해서 정동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그냥 비 내리는 길일뿐인데 대판 싸우고 걸어보니까 눈물이 흐르고 내 나이에 이렇게 구박을 받으면서 살아야 되는지 일평생 가족들을 위해서 헌신했는데 내가 이렇게 외롭게 우산도 없이 밤길을 홀로 걸어가는데 나는 왜 태어났나하며 수많은 생각이 들어옵니다. 그런 것들을 굉장히 세밀하게 사람들이 연구를 합니다.
에드워즈가 얘기하는 어떻게 인간에게 은혜의 정동이 일어나고 이것들이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선한 사람으로 살아가게 만드는가 이런 것들은 훨씬 정교합니다. 왜냐하면 경험주의 철학자들은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를 상당히 피동적인 존재로 봅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 ‘tabula rasa’ 백색서판의 상태에서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환경과 모든 것들이 거기에다 수많은 그림을 그리고 지나가는데 낙관적인 그림을 그려놓고 지나가면 이 사람은 낙관적인 사람이 되고 비관적인 그림을 그리고 지나가면 비관적인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외부에 의해서만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자체 안에서 무엇인가 상념들을 만들어 내고 개념들을 산출해 내고 그것들로 인해서 이 속에서 스스로 정동을 일으키는 창조적인 사고의 기능이 인간의 영혼에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경험주의 사람들이 정확하게 설명을 못합니다.
여기에서 에드워즈의 인식론과 관련한 중요한 사상들이 등장을 합니다. 체계들이 갖추어 지는데 우리들이 지식 우선주의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에겐 무조건 잘 가르치면 선한 삶을 살 것이라 하고 그렇게 못 사는 사람은 제대로 안 가르쳤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에드워즈는 정확하게 하나님에 관한 진리를 이성을 통해 전달하는 것이고 은혜를 받는 가장 중요한 비결이고 이것만으로는 될 수 없으면 정확한 지식과 함께 안에서 정동이 감정이 일어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이야기할 때 가슴이 뛰고 감동이 되어야 됩니다. 이것은 인간의 정서 안에서 일어나는 일인데 이것을 일으켜서 평범하게 늘 듣던 말씀이 가슴을 때려 이 속에서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게 살고자 하는 정동이 일어나게 하는 역할을 누가 하시냐 하면 성령님이 하신다고 합니다. 그 지식과 정동이 딱 만나서 형성을 할 때 이 사람의 마음을 강력하게 움직이는 것이 되고 이것이 반복해서 일어날 때 성향이 형성된다고 봅니다. 굉장히 많은 이야기를 이 안에서 다루게 됩니다. 그것을 잘 이해하게 되면 내가 왜 이렇게 잘 미끄러지는가 하는 것들, 미끄러지는 것이 어디에서 오는가에 대한 것들을 여러분이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는 일평생 자기 마음의 탐구자이어야 합니다. 자기의 마음을 객관적으로 들여다 볼 수 있는 탐구자적인 안목을 가지고 있을 때 자기의 삶을 성찰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자유의지론』이라는 책이 나오는데 사실은 저를 굉장히 고통스럽게 한 책이고 두 번을 읽었는데 아직까지 잘 모르겠습니다. 어떤 사람은 미국 역사상 가장 어렵게 쓴 책이라고 말합니다. ‘마크 트웨인’이라는 미국의 소설가가 이 책을 밤새도록 읽고 술 취한 미치광이가 쓴 책이라고 했습니다.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고 집어 던져 버렸습니다. 매우 난해한 문제입니다. 에드워즈가 자유의지의 문제를 가지고 천착을 했던 이유가 알미니우스 주의자들이 단추를 제공한 건데 알미니우스 주의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내가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하며 그것을 믿고자 하는 선택을 스스로 실행할 수 있는 의지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알미니우스 주의자 뿐만 아니라 이성주의자들도 그렇게 생각을 할 때 에드워즈가 자유의지론을 통해서 설명하고자 했던 것이 기본적으로 인간의 의지는 타락한 이후에 노예상태에 있기 때문에 악을 행하는 데는 자유롭고 할 능력은 있지만 선을 행하는데 있어서는 그것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없으며 하나님이 그렇게 할 수 있게끔 해 줘야 만이 된다는 것을 이야기 했습니다. 이것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전통을 계승한 것입니다.
에드워즈가 비난을 받는 이유는 이런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너무 탄탄히 묶어놨기 때문에 이것이 결국 인간의 자유를 극심하게 제한을 해서 하나님에 의해 결정되어지는 소위 얘기하는 데터미니즘이라고 해서 철학에 의지사용 문제와 관련해서 결정론이라는 게 있습니다. 결정론은 개혁주의 신학입장에서는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런 결정론에 흐른 것이 아니냐는 비난을 받게 되는데 여러 학자들과도 대화를 해 보았지만 나는 아직까지도 이 문제에 대해서 뭐라고 확고하게 이야기할 정도로 학문이 깊지 못하다는 사실을 고백을 합니다.
이것을 읽은 것이 저에게 계기가 되어서 의지의 자유문제를 언젠가 한번 산상세미나에 한번 하려고 합니다. 현실적인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작정으로 된 것이냐 아니면 내가 한 것이냐 하면서 자기의 잘못을 주님께 전가하거나 혹은 주님의 뜻으로 이루어진 것을 자기의 공로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런 것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고민을 본격적으로 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주제는 매우 난해한 철학적인 입장이었기 때문에 개혁신학을 최대한 발전시킨 17세기의 정통 신학자들도 세부적인 상황에까지 의견의 일치를 보진 못했습니다. 도표를 보며 세 사람의 대표적인 사람을 보여 드립니다.
우선 ‘잔키우스’(Jerome Zanchius)라는 인물이 있고 ‘유니우스’(Franciscus Junius)라는 인물이 있는데 아주 유능한 신학자였습니다. 그리고 ‘고마루스’(Franciscus Gomarus)라는 인물이 있는데 굉장히 중요한 화란의 신학자입니다. 모두 17세기 사람들입니다. 잔키우스는 자유선택은 곧 자유의지라고 보았습니다. 자유의지라고 말하는 것이 자유선택을 말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유니우스는 좀 다르게 보았습니다. 자유선택하고 자유의지는 다르다. 저도 잔키우스의 의지는 동의를 안 합니다. 자유선택과 자유의지는 다른 것입니다. 자유의지는 지성과 의지로 구성이 되는데 지성은 자유롭다. 타락했어도 인간의 지성은 상당히 살아있어서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실행할 수 있는 의지는 무능하다. 도덕적인 것에서이다. 고마루스는 비슷한 이야기지만 좀 다르게 설명했습니다. 타락전이든지 후든지 모두 의지의 자유는 있다.
타락 후에는 외적이고 자연적인 것에 대해서는 자유가 있지만 도덕적이고 하나님을 섬기는데 있어서는 인간은 여전히 무능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정리를 하면 타락했어도 선을 선택할 것인지 악을 선택할 것인지 인간은 누구의 구애도 받지 않고 자유롭게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선을 해야 되겠다고 선택을 할 수는 있는데 문제는 선택된 것을 이행할 수 있는 능력은 없습니다. 죄가 들어온 이후의 인간의 상태입니다.
똑같은 자유의지론을 아우구스티누스가 쓰는데 정확한 내용은 의지의 선택의 자유의 개념인데 의지의 선택은 자유롭다. 지성의 선택은 자유롭게 선한 것을 선택할 수 있지만 그것을 이행할 능력은 인간에게 없다. 악을 행한 것은 하나님께 핑계될 수 없고 자기가 자유로운 존재였기 때문에 그런데 선을 행한 것은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지 않으면 인간에게 그럴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선을 행하였을 경우에는 그 영광을 하나님께 돌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악을 행한 것은 무슨 힘에 의해서 된 것이냐? 힘에 의해서 된 것이 아니라 은혜가 모자라는 상태였기 때문에 악을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선을 행한 것은 작용의 힘이지만 악을 행한 것은 무엇인가 빠졌기 때문에 원래 인간은 빠지게 되어 있고 결함이 있는 존재라고 하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잘못된 것을 반복하게 되면 습관이 형성이 되는데 습관이 형성이 되면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하게 되는데 이것을 도덕적 필연성이라고 하는데 이 필연성은 완벽한 인간의 자유라고 봅니다. 자기 스스로 그것을 쉽게 선택하게 되는 것이지 자기 본성에 거슬러서 인간에게 강요하게 되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다음으로 『원죄론』이 나오는데 예일판 전집 제 3권인데 에드워즈가 유장한 원죄론을 전개해 나가는데 어떤 의미에서 칼빈보다 더 칼빈적일 정도로 철저하게 인간의 무능, 뼈 속 깊이 파고 들어가는 인간의 타락을 절대적으로 강조하면서 그것이 기반이 되어서 오직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말미암는다는 은혜의 솔라그라티아의 사상을 세울 수 있는 기초를 여기에서 제시를 하게 됩니다. 원래 원죄론을 쓰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는 존 테일러라는 사람이 등장을 하는데 미국의 비국교도 설교자이자 신학자였습니다. 인간의 자유와 선천적인 도덕성이 있다고 강조하면서 칼빈주의를 반대하는 가르침을 가지고 영국교회를 공격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영향이 생각보다 크니까 에드워즈가 여기에 반박하는 논문을 쓰게 됩니다. 논쟁서가 바로 원죄론입니다.
원죄론을 쓰고 뉴잉글랜드에도 팽배해진 이런 사상에 대해서 변증서를 썼는데 원죄론, 참된 미덕의 본질, 천지 창조의 목적, 이 세 개가 세쌍둥이로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원죄론에서 에드워즈는 모든 인류가 아담의 죄책과 오염된 본성을 전가 받았고 인류는 타락했고 인류가 총체적으로 불의하고 인간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는 무능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성경의 주장은 인류의 일상적인 생활에서도 이성적으로도 인간의 경험으로도 입증이 되는 것이라는 것을 강조를 합니다. 원죄론이 동기와 목적에서 이러한 목표에서 저술되었기 때문에 논쟁에 있어서는 아주 깊이가 있지만 원죄의 문제를 골고루 다룬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고한 에드워즈의 사상이 여러 가지 철학이나 이런 것에 있어서 과연 칼빈주의적인가 라고 이야기 하는 사람들도 원죄론에 있어서는 철저하게 칼빈주의 교리를 따른 개혁신학자 학자라는 확신을 갖게 되는 것이 원죄론입니다.
다음에 『설교집』입니다. 에드워즈에게 설교집이 전집 속에 7-8권입니다. 에드워즈의 설교집을 읽는 것은 상당히 유용하고 그 사람이 가지고 있었던 신학과 신앙, 철학과 목회가 일치하는 것을 설교 속에서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에드워즈가 가르치는 방식은 크게 둘로 나누어집니다. 논쟁적 방식으로 진리를 가르치는 것, 대중적 방식으로 진리를 가르치는 것으로 나뉘는데 논쟁적 방식으로 가르쳐 주는 것은 스콜라 주의적입니다. 스콜라 주의적이라는 것은 히랍어 ‘스콜레’에서 옵니다. ‘스콜레’라는 뜨시은 한가한 이라는 뜻이고 여기서 스쿨 이라는 학교가 옵니다.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학교라고 하는 것은 한가하고 여유로운 사람들이 할 일 없이 다니는 것이 그 당시에 학교라고 보는 것입니다. 스콜라주의의 특징은 문답입니다. 문답을 하면서 아주 세밀하게 다시 어떤 논제에 대해서 하부적으로 하부의 논제를 만들어 가고 그것을 공격하면 다시 답을 하는 그런 방식으로 해서 탄탄한 논리의 구조 속에 자기의 주장을 정초시키는 것이 스콜라주의입니다. 스콜라주의는 내용이라기보다는 학문을 하는 방식입니다. 논쟁적인 저술들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다음에 신학자, 목회자들을 대상으로 하는데 이에 대해서 설교는 대중적인 방식입니다. 교화적입니다. 치열하게 찢어놓은 것들을 설교시간에 다 모아서 이해하기 좋게 두루뭉술하게 만듭니다. 교훈을 주고 교훈적인 저술을 하고 듣는 대상은 성도들입니다. 슬기롭게 사용을 합니다. 설교시간에 머리에 쥐가 날 정도로 하면 가방끈 짧은 사람들은 얼마나 고통을 받겠습니까? 우리교회처럼 설교시간에 쉽게 교화적으로 교훈적으로 대중적으로 이렇게 하면 얼마나 좋습니까? 에드워즈가 그런 노력을 많이 했습니다.
에드워즈를 연구함에 있어 깊이 도움을 받았던 것이 그 후에도 계속 공부를 했지만 에드워즈를 처음에 읽었더라면 그렇게 도움을 못 받았을 텐데 이미 앞에 읽었던 위대한 신학자들, 아우구스티누스, 칼빈, 존오웬, 이런 사람들에 대한 학습이 있었기 때문에 조나단 에드워즈를 이해하는 것이 굉장히 쉬웠고 그런 사람들의 도움이 아니었으면 미쳐 파악할 수 없었던 에드워즈 사상의 결함이나 장점들도 함께 파악할 수 있었던 것이 나에게 굉장히 좋았고 에드워즈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대신 에드워즈를 보면서 그의 훌륭한 것들을 찾아내서 나의 무기로 삼고 약간 결함이 있다고 생각되는 것을 다시 재해석해서 볼 수 있는 그런 여유를 갖게 된 것도 하나님의 은혜였다라고 생각을 하게 됩니다.
신학적으로 보면 에드워즈는 우리하고 훨씬 더 문맥이 가깝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미 기독교가 국교화가 된 세계 속에서 산 사람이고 칼빈은 카톨릭과 적대관계에 있던 사람이고 존 오웬은 알미니우스주의와 치열한 논쟁상태에 있었던 사람들인데 어찌하든 기독교 권내에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에드워즈는 이미 벌써 인본주의, 하나님을 부정하려고 하는 사상들이 쓰나미 처럼 밀려오는 시대에 몸부림쳤던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훨씬 더 적응성이 많다는 것입니다. 가슴에 와 닿는 신학적인 내용들이 훨씬 더 많았습니다.
그림을 보면 에드워즈가 있는데 칼빈의 입장에서 보고 아우구스티누스 입장에서 평가하고 오웬의 입장에서 16세기 개혁파 정통주의 입장에서 그리고 이번에 휴가 중에도 르네상스를 공부하려고 했는데 지난번 말씀 드린 것같이 공부는 거의 못했고 기도만 하다가 왔는데 다시 한 번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르네상스를 공부해야지만 종교개혁이 보이고 종교개혁을 알아야지만 계몽주의가 보이고 계몽주의를 알아야지만 에드워즈가 계몽주의 사조 속에서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몸부림쳤는가 하는 것들이 여기에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부분적이긴 하지만 르네상스와 이런 것들에 대한 최근의 연구가 에드워즈를 애해 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으며 끊임없이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에드워즈의 사상들이 사상을 이야기 할 때 다른 학문들이 에드워즈의 사상을 이야기 하는데 매우 큰 도움을 주었는데 그중에 하나가 미학적 신학입니다. 미학이라는 것이 열등한 철학적 인식론이라고 생각을 하면 됩니다. 철학에서의 인식론은 진리, 어떤 사물들을 어떻게 인식하고 인간이 그것에 대해서 어떤 이해를 갖는가라고 하는 것들이 관심의 대상이라면 미학은 어떤 것을 볼 때 어떤 느낌을 받는데 느낌의 원인을 규명하고 일어나고 있는 어떤 감정의 느낌들을 어떤 사물을 지각하고 있는 것과 어떤 연관관계에 있는지를 찾아내는 것이니까 감각에 속한 현상들을 설명하는 하등적인 것이라고 생각을 하면 됩니다.
미학이 17세기 경험주의, 낭만주의와 함께 생기기 시작하는데 미학의 기본적인 시작은 숭고함입니다. 자연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장엄한 현상들을 보면서 어떤 숭고함을 느끼면서 그 속에서 아름다움의 원인을 찾아내는 것이 미학적인 관찰의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굉장히 의미가 깊은 것입니다. 그런 아름다움의 원인도 결국은 하나님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어떤 질서가 있고 이 질서가 인간의 이성에 의해서 정리되어서 법칙들을 찾아내는 것이 철학이고 학문이라고 말한다면 그것들을 감각으로 찾아서 감각 속에서의 질서를 설명할 수는 없지만 우리가 즐기는 것들이 예술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술 활동을 가볍고 하찮은 것으로 생각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올바른 질서를 찾아갈 때에 인간의 영혼은 진리에 다가가기에 굉장히 유익한 환경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에드워즈가 활동하던 시대에는 근대 미학이 태동되는 시대이었고 바흠, 가르텐이라든지 기함바티스타비코라든지 조셉 에디슨, 이런 사람들이 영향을 끼치고 있었고 과학계에도 영향을 많이 끼쳐서 미학이 과학과도 연관이 됩니다. 질서, 조화, 균형, 합리성, 이런 것들을 특징으로 하는 고전주의를 거부하면서 18세기 말에 일어나는 낭만주의 운동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에드워즈의 미학적 신학의 증거는 그의 글들에 보면 체험적인 요소들을 미학으로 승화 시킨 것들이 굉장히 많이 나타나는데 달콤함, 탁월함, 아름다움, 알맞음, 감각, 조화, 사랑스러움, 균정, 규칙, 관계, 어울림, 일치, 사랑, 이런 체험적인 단어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이것들이 에드워즈의 미학적 신학과 관계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에드워즈의 신학의 특징 중의 하나가 존재에 관한 형이상학입니다. 에드워즈는 사물 존재의 본질을 성향이론으로 설명을 했습니다. 에드워즈가 정말 그렇게 설명을 했는지 안했는지에 대해 논쟁을 많이 하는데 이상현 박사님이란 분이 계십니다. 한국학자로서 아주 공부를 잘하신 분이고 조나단 에드워즈의 세계적인 연구가이시고 지금은 은퇴하셨는데 프린스턴 대학교에 계셨습니다. 조직신학 교수입니다. 이분이 에드워즈가 성향이론을 가지고 존재를 해석한 아주 혁신적인 이야기를 내어 놓았다고 합니다. 사실은 새로운 것이라곤 별로 없습니다. 스티븐 홈즈 같은 사람은 에드워즈의 성향이론은 독창적인 것이 아니라 이미 기독교의 전통 안에 있던 내용들을 다시 정리해서 반복한 것입니다.
도표를 보면 존재, 본질, 실존과의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피조물들은 존재가 다르고 본질이 다르고 실존이 다릅니다. 예를 들면 물이 있다. 물의 본질은 액체 상태인데 물로서 존재하는 것은 실존이고 수분이라고 하면 본질이 되겠지만 본질은 H2O가 됩니다. 존재와 실존이 각각 다릅니다. 존재는 본질하고 또 다른데 존재는 본질 자체를 포괄하고 있는 어떤 존재를 상정하는 것이고 이것은 모두 시간과 공간, 색깔, 형태, 이런 것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변하는 것입니다. H2O가 어떤 때는 물이 되고 수증기가 됩니다. 세 가지로 실존은 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에 묶이는 한정적인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의 경우에는 존재, 본질, 실존, 이런 것들이 구별이 없이 하나이신 분입니다. 그런 점에서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본질은 일관된 성향이라고 본 것입니다. 이 세계도 타자와 끊임없이 관계를 맺고자 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성향에 의해서 하나님 자신이 인간이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그런 사랑의 성향 때문에 당신을 닮은 인간을 창조하게 되었고 그들을 사랑하시게 된 것들을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 영혼을 부여받아서 스스로 자유함 가운데 사유하고 판단할 능력이 없다면 하나님을 닮은 형상이라고 말할 수 없다고 합니다. 중생과 회심의 관계를 도표와 같이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중생은 하나님의 동력적인 사역이고 회심은 하나님을 믿고 회개하려고 하는 인간의 의지와 하나님이 그를 회심시키는 역사가 함께 어우러지면서 이 일을 이루는데 이것은 합작품으로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쪽에 보면 인간이 협력하는 것 같은데 이쪽에서 보면 하나님의 주권에서 일어나는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겁니다. 거듭나는 것은 하나님이 혼자 하시는 것이고 그러면서도 인간은 하나님을 믿고 성화의 삶을 살고 하나님께 순종하라고 하는 강력한 촉구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과 영혼의 변화도 도표처럼 되는 것입니다. 영혼의 기능에는 마음과 지성과 의지가 있는데 구원받음으로서 영혼은 사랑의 경향성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자아를 사랑하던 경향성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경향성으로 바뀌게 되고 영혼이 가지고 있는 기능, 마음, 지성, 의지에도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은 행동을 산출하는 기능인데 지성은 지혜,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을 갖추게 되는 것입니다. 의지는 선한 것을 선택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받게 되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음으로서 자기의 의지의 성향이 변하고 자신이 하나님의 뜻대로 할 수 있는 능력이 증가됨으로서 영혼의 기능이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을 따라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변화들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에서 일어나고 은혜에 참여하는 인간의 자유로운 도움을 받으면서 인간은 끊임없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을 따라서 이 모든 것들이 이루어지게 된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조나단 에드워즈를 통해서 목회에 있어서 깊이 배우게 된 것이 도표로 나옵니다. 네 가지입니다. 회심 목회의 중요성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만나고 진실로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 뜬 물 통에 생수를 붓는 것과 같습니다. 절대로 새로운 그 무엇이 산출되지 않습니다. 여러분 교회에서 보면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무엇이고 아무것도 관심 없는 사람들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 대부분 거듭나지 못하고 회심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철저하게 구원받았는지를 집요하게 묻고 그가 정말로 거듭나서 자기를 사랑하던 사람이 하나님 사랑하는 사람으로 바뀌었는가? 이것이 굉장히 강조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이 사람이 거듭났다고 하더라도 끊임없이 부패하기 쉬운 음식처럼 변질되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 사람을 은혜 안에서 머물기 위해 필요한 것이 개인적인 경건의 생활과 함께 교회에서 가르치는 신앙교육이 체계적으로 이루어 내야 합니다. 교회에서 7년 14년 21년 이렇게 듣는 설교의 목록을 만들고 읽어야 할 책의 목록들을 만들고 클래스를 만들고 계속해서 공부를 가르치는 이유도 바로 이런데서 오는 확신입니다.
세 번째로 설교사역의 중요성입니다. 예배를 통해서 선포되는 설교를 듣고 사람들이 은혜를 받을 때에 마음에 거룩한 정동이 일어나서 열렬히 신앙교육도 참여하고 나아가서 자신의 구원문제로도 고민합니다. 설교를 통해서 은혜 받지 못한 사람들이 일상적인 생활을 하다가 자기의 영혼에 대해서 근심하게 되는 경우는 있을 수는 있지만 극히 드뭅니다.
네 번째로 우리가 이런 모든 일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모든 일들 중심에는 성경이 있어야 하고 성경의 진리를 가르치고 배우는 현장에 하나님의 부흥이 부어질 때 폭발적인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지성이 우리의 영혼을 변화시키지는 않지만 지성의 이해 없이 우리의 영혼이 변화되는 경우는 없습니다. 성화 생활에 있어서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모든 성경 진리에 대한 이해가 우리를 영혼의 변화로 이끌지는 않지만 이해가 없이는 우리의 영혼이 변화될 수 없습니다. 이해하기 위해서 노력을 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거룩하게 정동시키시는 성령의 강력한 사역이 우리에게 있도록 간절히 매달리는 기도와 탄원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 두 개가 합치될 때 드디어 우리의 마음속에서는 인식하는 것과 정동하는 것이 합쳐지면서 사상의 힘과 윤리의 힘, 지성의 힘과 의지의 능력이 함께 작용하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갈 수 있는 용기 있는 그리스도인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위에는 이런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도 이렇게 조나단 에드워즈의 발자취를 따르면서 부지런히 진리를 탐구하고 은혜를 받으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 된다면 에드워즈가 그토록 그리워했던 그리스도의 교회의 영적인 번영과 하나님 나라의 건설이 이 땅에 속히 이루어지리라고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