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려를 극복하는 길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시 23:2)
녹취자 : 오희열
이렇게 해서 시인은 상처밖에는 없는 곤궁한 인생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서 “내게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경지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이 시인은 2절부터 차례대로 자신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서 하나님이 자신의 목자라는 생애적인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는지를 서술해 나가고 있습니다.
2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엄밀하게 말하면 “여호와께서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고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이것이 바로 첫 번째 이유였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크게 세 가지의 그림을 보여주는데 하나는 휴식 또는 안식, 공급, 인도라는 세 가지 그림입니다.
첫 번째는 공급하심입니다. 우리에게 풀밭은 그저 쉬기 좋고 또 보기 좋은 경치를 구성하지만 양떼들에게 이 풀밭은 식탁입니다. 풀을 먹고 사는 양떼들에게 이 풀밭은 그야말로 밥상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주께서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라고 이야기했습니까? 팔레스타인은 목초지가 어디를 가든지 푸르게 이어지는 그런 땅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조상 때부터 유목 생활을 했습니다. 만약에 한 곳에 엄청나게 많은 풀이 있고 사시사철 부족한 것이 없다면 왜 이동을 하겠습니까? 한 곳에서 정착해서 그 풀을 먹이면서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양떼들이 풀을 뜯으면 그 목초지에 한계가 있고 또 그 풀밭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일정시간 그 풀을 먹고 나면 목자는 그 양떼들을 이끌고 또 다른 목초지를 찾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긴 거리를 여행하며 그렇게 양떼들을 먹였습니다. 그래서 좋은 목자는 양떼들이 풀을 뜯을 때에 자기도 함께 쉬는 것이 아니라 높은 산에 올라가 사면을 두루 살피며 이 양떼들이 여기서 풀을 먹고 나면 그 다음에 이 양떼들을 어디로 데리고 가서 가서 먹일지를 생각하는 사람이 선한 목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신앙의 단계마다 우리를 다르게 인도하십니다. 신앙이 어렸을 때에는 어린대로 하나님이 우리를 다루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무엇이 부족하고 모자라서 하나님께 기도를 하면 하나님이 응답해 주심으로써 믿음이 연약한 우리에게 과연 하나님은 살아 계시다는 은혜와 감화를 받도록 만들어주십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인간들의 가장 어려운 점은 끊임없이 불안하고 염려하는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염려와 근심 속에서 자신의 뼈를 말리고 살을 찢는 고통을 경험하면서도 그 염려와 근심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지를 못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어느 권사님이 등 뒤에 커다란 망태를 매고 지고 가는 꿈을 꾸었다고 합니다. 망태를 아십니까? 옛날에 넝마주이들이 가지고 다니던 대나무나 싸리로 엮은 커다란 것으로 사람이 몇 사람 들어갈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큰 바구니입니다. 그것을 어깨에 지고 기다란 집게를 가지고 넝마를 줍거나 캔이나 휴지를 잔뜩 주워서 고물상에 그것을 쏟아 놓고 정리해서 넘기는 일을 했습니다. 그때 사용하는 커다란 바구니를 망태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권사님이 망태를 매고 가는데 저 앞에서 시커먼 옷을 입은 사람이 계속해서 시커먼 보자기를 던지더랍니다. 그것을 던지는 대로 계속 집어서 자기 망태에 집어넣는데 나중에는 이 망태가 꽉 차서 도저히 짊어질 수가 없을 정도가 되자 쓰러져 그 망태에 눌려서 죽을 지경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그 집게로 그 검은 헝겊을 주워서 계속 자기 망태에 담는 꿈을 꾸다가 깼답니다. 그게 무엇이겠습니까? 신령하지 않은 사람이라도 그게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시커먼 마귀가 끊임없이 성도들에게 근심과 걱정, 염려를 계속 뿌립니다. 그리고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자신의 마음속에 가득가득 담을 때, 도저히 그리스도인으로서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없을 지경에 이르게 되는데도 끊임없이 불안한 염려를 짊어지고 사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래서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인간의 실존을 불안이라는 개념과 함께 엮어 놓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 불안을 통해서 인간은 자신의 실존을 확인하게 된다고 해석했던 것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보면, 우리가 염려하고 근심하는 것은 크게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거룩하고 신령한 염려입니다. 마치 주기도문에서 나오는 것처럼 하나님이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지 못하는 현실 때문에 슬퍼하는 것, 하나님이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지 않는 것에 대한 슬픔, 하나님의 나라가 아직까지도 임하지 않은 것에 대한 깊은 고통에서 오는 아픔, 이런 것들입니다. 성경은 말하길 그러한 염려는 이 죄악 된 세상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살아가는 표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기 원하는 성도의 갈망은 자신 속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만큼만 밖에서도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심령의 변화를 받아서 하나님 앞에 변화된 삶을 사는 것이 이 세상을 위해서도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또 다른 종류의 염려는 하나님께서 죄악시 하시는 근심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는 염려는 우리의 영혼으로 하여금 질식하게 만들고 하나님을 향해 살 수 없도록 우리의 영혼을 억압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어느 의학자가 쓴 책을 읽었습니다. 그분 이야기는, 스트레스는 어쨌든 우리의 몸과 마음에 매우 나쁜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얘기를 읽을 때, 좀 썰렁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제 자신의 생애를 돌아보며 생각해 보니, 스물한 살에 지독한 무신론에서 돌아와서 다시 예수님을 믿기 시작하고, 그리고 스물여섯 살에 소명을 받아서 신학을 공부하고 목회자가 되겠다고 마음을 먹은 후부터 이제까지 마음 편하게 살아본 적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지금은 성격이 많이 변했지만 젊었을 때는 대범하지 못했습니다. 늘 고민하고 걱정하고 무엇을 해도 완전하게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까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날이 하루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은혜를 많이 받았을 때는 이 세상을 보면서 어떻게 이 세상이 변화될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서 참 많이 울었습니다. 신학교에서 교수로 지낼 때에도 하루 종일 강의하고 오후 시간이 되면 언덕 아래로 시가지가 쭈욱 펼쳐진 것을 보면 그렇게 눈물이 날 수가 없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그렇게 하나님을 모르고 살아가고 있고 또 하나님을 알려고도 하지 않는데 우리의 힘은 너무 연약합니다.” 하면서 학교 담장 아래에 쭈그리고 앉아서 간절히 기도를 하곤 했습니다.
그렇게 살아오면서 저는 염려와 떼어 놓을 수 없는 인간이었는데 이게 모두 건강에 좋지 않다고 한다면 나는 진작 죽었어야 했는데 어떻게 된 것일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책을 쓴 의사도 크리스챤이었습니다. 그 책을 꽤 읽었는데 그 말이 맞는지 아닌지 아직도 모르겠지만 맞다고 믿고 싶습니다. 우리 몸이 염려를 하면 그것이 모두 다 몸에 다 해로운 것이 아니라 무엇 때문에 염려하는지를 몸이 먼저 파악한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의 이론에 따르면,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마실까 하는 세속적인 근심을 가지고 사람을 원망하며 보이지 않는 경쟁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고민하면 그것은 몸에 해로운 기운을 가져다준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아, 이 나라를 어찌 할까?”, “하나님의 영광이 왜 이렇게 도처에서 짓밟힐까?”, “내가 어떻게 해야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을까?”, “내 안에 있는 이 죄는 어떻게 할 것인가?”와 같은 것을 가지고 고민을 하면 그 스트레스가 우리의 몸과 마음을 깨워서 건강에 유익을 준다는 것입니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하나님의 섭리하심은 참으로 신묘막측 하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사실 처음에는 그 이야기에 동의가 되지 않았지만 깊이 생각을 해보니까 이해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염려하거나 혹은 나를 이렇게 고민하게 만든 어떤 사람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끝이 없습니다. 그러다가도 또 이런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우리 구역, 혹은 순에서 방황하는 사람들을 신앙적으로 붙들어주기 위해서 고민하면서 그들을 위해서 애타게 기도하고 눈물로 봉사합니다. 놀라운 것은 그렇게 고민하고 염려하면서 마음이 아픈데도 신령한 것을 위해 고민하고 아파할 때는 항상 신령한 위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우리의 마음의 염려와 근심을 사라지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시인은 한 나라의 위대한 왕이 되었지만 정말 배고프고 가난한 시절을 지냈습니다. 오죽했으면 제사장 이외에는 먹을 수 없는 성소의 진설병을 먹기까지 했겠습니까? 전쟁을 하면서 군인들이 늘 시달리는 것은 적군의 공격만이 아니라 식량의 부족이었습니다. 그런 고통을 늘 경험하면서도 자신의 인생길을 걸어오는 동안에 하나님이 언제나 먹이고 입히시는 것을 경험하면서 인생을 살아왔던 것입니다.
오늘 여기에 나온 여러분도 여러가지 많은 근심과 염려들로 속을 끓이시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생각합니다. ‘내가 이렇게 염려하는 것은 돈이 없기 때문이야.’, ‘내가 이렇게 염려하는 것은 무슨 어려운 일이 생겼기 때문이야.’, ‘내가 이런 염려를 하는 것은 누구누구 때문이야.’ 라고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 대답은 다 틀린 것입니다. 모든 염려는 사실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가 부족하기 때문에 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라고 깊이 인정하는 마음, 그분이 나와 함께 해 주신다는 인격적인 동행에 대한 신뢰가 사라졌기 때문에 염려하고 근심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그렇게 염려하는 것이 정말 괴롭고 힘든데도 그것을 통해서 겨우 자신의 존재를 확인합니다. 예배에 나오거나 기도회에 나오면 마음이 슬퍼지면서 하나님 앞에 이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나를 좀 살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리고 갈 때는 다시 그 보따리를 챙겨서 짊어지고 나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의 염려와 근심은 인생을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니까 생겨나는 것이지, 단순하고 간단하게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저는 마흔여덟 정도 될 때까지 내 평생의 소원이 병원에 한 번 입원해 보는 것이었습니다. 하얀 침대에 우아하게 힘없이 누워서 사람들이 손을 잡아줄 때 링거 꽂힌 손을 힘없이 내밀어보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저는 평생 다섯 시간 이상을 자본 적이 없습니다. 여섯 시간 이상 자면 죄라고 믿었던 사람이었습니다. 해야 할 일이 태산 같은데 잘 시간이 어디 있으며, 낮에는 눕거나 조는 일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리고 마흔다섯에 허리가 아프기 전 까지는 뭘 해야 하겠다고 마음을 먹으면 힘이 저절로 솟아났습니다. 그래서 그때 설교를 들어보면 속도가 훨씬 빨랐고 분량도 엄청나게 많았습니다. 설교하면 보통 100분이었고 60분 만에 내려오면 교인들이 불안해했습니다. “우리 목사님 어디 아프신가보다. 큰일 났다.”고 말입니다. 교인들 앞에서 설교한 가장 긴 기록이 5시간 15분 이었습니다. 쉬지 않고 말입니다. 미국에서 집회할 때에 기록이 쉬지 않고 4시간 15분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제 평생소원이 병원에 한 번 입원해 보는 것이었습니다. 병원에 문병 갈 때는 이런 생각도 했습니다. 어마어마한 수술을 한 사람에게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지만, 대수롭지 않은 일로 휴가 보내듯 입원한 사람을 보면 부럽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젊어서 낭비한 건강은 30년 후에 갚기로 하고 쓰는 어음입니다. 30년 후에 돌아오는 것입니다. 엊그제 제가 계산해보니까 11년 동안에 9번 입원을 하고 6번 수술을 했습니다. 그런 것을 겪으면서 어떤 때는 낙심도 됩니다. 그런데 사실 그럴 것 없습니다. 2년 전에 심장과 폐 사이에 혹을 제거하는 수술을 할 때는 한 20%정도는 내가 이 수술실에서 나오지 못 할 것이라고 생각도 했습니다. 저는 마취도 잘 안 되서 오래 걸렸습니다. 그래서 마취시킬 때는 눈을 똑바로 뜨고 ‘마취되지 말아야지!’하며 대항을 합니다. 그러면 자꾸 깊이 들이마시라고 하고 스르륵 꺼지듯이 수면에 들어갑니다. 눈을 뜨니까 병실에 와 있었습니다. 줄이 대여섯 개 꽂혀서 피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눈을 탁 뜨면서 그때부터 한편의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퇴원할 때 한 권의 책을 쓰고 나왔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말뚝을 박고 생각해보면 잃어버릴 것이 너무 많지만, 죽음이라는 한계 선상에서, 또 영원이라는 관점에서 우리의 인생을 생각하면 잃어버릴 것도 없고 가질 것도 없고 변명해야 할 것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 한 분외에는 잃어버릴 것도 없고 누가 빼앗아 갈 것도 없고 간직할 것도 없습니다. 다 있다가 사라져가는 것입니다. 젊어서 남편이나 아내가 죽으면 까무러치고 뒤집어지고 웁니다. 물론 사이가 좋지 않은 부부는 돌아서서 슬며시 웃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나이가 많이 들어서 80이 넘어서 남편이 죽으면 아내가 별로 울지 않습니다. 그리고 남편도 별로 울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랑하지 않아서 입니까? 아닙니다. 그 긴 세월을 살면서 결국 인생의 본질을 보는 것입니다. “아, 이게 다 지나가는 것이구나!”
지금까지의 여러분의 삶을 생각해보십시오. 인생을 살면서 매 순간 수많은 삶의 시련들을 만나고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 같은 위기를 만났을 때 누가 도와주셨습니까? 정신 차리고 과거를 돌아보면 그때는 내 힘으로 사는 것 같았는데 알고 보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살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도와주셔서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 앞에 사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목회자가 되기로 결심한 후에 자신 있는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다른 것은 자신이 없는데 단 하나, 가난하게 사는 것만큼은 자신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뭔가 나에게 여유가 있어도 너무 분에 넘치게 뭔가를 하면 마음이 불편합니다. 아무 희망이 없어 보이는 때도, 이 세상의 삶의 자원이 끊어진 것 같은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도와 주셨기 때문에 이제껏 산 것입니다.
(찬양) 오늘 피었다지는 들풀도 입히는 하나님 하물며 우리랴 염려 필요 없네
푸른 하늘을 나는 새들도 먹이는 하나님 진흙 같은 이 몸을 정금 같게 하시네
그래서 우리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느냐 공중에 나는 새를 봐라. 곡간에 쌓아두지 않아도 하늘 아버지께서 저것들을 먹이지 아니하시느냐, 들에 핀 백합을 보아라. 길쌈 수고를 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입히시지 않느냐, 저런 새들과 들풀도 하나님이 사랑하셔서 먹이고 입히시는데 너희는 얼마나 사랑하시겠느냐?”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의 문제를 그분께 온전히 맡기고 “주님이 나를 어떻게 인도하시든지 하나님만 나를 버리지 않으시면 나는 괜찮습니다.” 하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삶의 모든 조건이 갖추어진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신뢰하고 그분과 교제하는 인격적인 관계를 통해서 그런 삶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염려하는 이유는 내가 뭔가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우리 교회 앞에 수십 층짜리 빌딩이 몇 년 전에 지어졌습니다. 빌딩은 지었다는 것은 그것을 소유한 사장이 그 빌딩을 지을 재력이 있었다는 것이고, 건축 후 빌딩 분양도 잘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장이 자기가 지은 건물 꼭대기에서 투신자살해서 죽었습니다. 사실 굶어죽을 정도로 가난한 사람은 아니었는데도 말입니다. 어떤 부자가 사업이 쫄딱 망해서 자살을 했습니다. 빚이 20억이 있어서 자살을 했는데 그가 죽은 후에 재산을 다 정리해보니까 40억이었습니다. 이 이야기에 놀라는 사람들은 다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우리처럼 가난한 사람들은 ‘바보, 40억 정리해서 20억 갚고 20억을 통장에 넣어두면 최소한 1년에 6천만 원 정도 받을 텐데, 그것 가지고 살면 되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부자는 자기가 그 많은 재산을 투자해서 20억이나 잃어버린 것에 너무나 자존심이 상하고 인생이 비극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몇 년 전 불법 로비의혹으로 압박을 받아 자살했던 성완종씨의 재산은 1조원이 넘는다고 합니다. 1조원을 정리하고 형무소에 살다가 나오면, 형무소에 있는 동안에도 이자는 나오니까 그렇게 살면 될 텐데 왜 죽었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절망이라는 것은 굉장히 주관적인 측면이 많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신앙입니다. 돈이 있든지 없든지 상관없이 우리는 그렇게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주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야 할 존재입니다. 주님을 의지하며 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는 휴식입니다.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라고 합니다. 휴식입니다. 양들이 배가 부르도록 실컷 풀을 뜯다가 이제는 거기에 누워서 쉬고 있는 장면을 생각해보십시오.
초등학교에서 선생님이 1, 2학년 아이들에게 오늘 숙제는 각자 자기 아빠를 그려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어떤 아이가 숙제를 해 왔는데 사각형에 다리 두 개를 매달아 놓은 것을 그려왔습니다. 선생님이 보고 황당해서 “이게 뭐냐, 이게 니네 아빠니?” 했더니, “선생님, 우리 아빠에요. 우리 아빠가 일요일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자면서 발만 내 놓은 것에요.”, “왜?”, “공휴일에 엄마와 우리가 아빠에게 놀러가자고 하면 이불을 점점 위로 뒤집어쓰고 발만 내 놓으면서 피곤하다고 하세요.”
사실 많은 사람들이 요새 적당한 직업을 갖지 못해서 고민을 하고 있지만 다행히 제대로 된 직장을 얻었다는 사람들은 그 직장이 거의 종교단체 수준이라 말도 못하게 힘듭니다. 직장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근무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뜻과 성품과 내 목숨을 다하여 회사를 사랑하고 사업도 이와 같으니 회사 일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견뎌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과로사하고 돌연사하고 어느 날 쓰러져서 죽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비인간적인 것입니다. 회사 다니고 직장 다니는 것이 자기 인생을 살아가기 위해서 필요하니까 그렇게 하는 것인데 이제는 거의 종교단체 수준의 것을 요구합니다.
오래 전 저의 목회 비서로 섬기던 자매가 오랜만에 저를 찾아 왔습니다. 결혼해서 이제는 아이를 둘 가진 아줌마가 되었는데 이 친구는 조금만 방심하면 살이 막 쪘습니다. 자기 남편은 대그룹의 사원으로 일하는데 근래 어떤 프로젝트를 맡아 두세 달쯤 진행하고 있는데 살이 7kg나 빠졌다는 것입니다. 자기는 그렇게 번 돈으로 살 빠지는 약을 사서 먹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게 뭔가 좀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남편은 살이 빠지도록 돈을 벌면 아내는 그것으로 살 빠지는 약을 사서 먹고 살을 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저녁에 집에 가서 남편이 자는 모습을 위에서 내려다보십시오. 그러면 정말 애처롭습니다. 평화? 그런 것은 남편의 얼굴애 애당초 없습니다. 밤에 잘 때 얼굴이 평화로운 것은 유치원 들어가기 전에 끝납니다. 유치원만 들어가도 아이의 자는 얼굴에 평화가 없어지고 초등학교 들어가면 더더욱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렇게 잡니다. 남편 얼굴을 보십시오. 왜 그렇게 자면서도 인상을 쓰고 침을 흘리고 꿈에서 무슨 나쁜 사람을 봤는지 이까지 바득바득 갈면서 잠꼬대를 합니다. 평화, 그런 건 없습니다. 아내의 얼굴을 들여다보십시오. 이게 시체인지 사람인지 모를 정도입니다. 낮에는 뭐라도 그리고 있었는데 밤에 다 지우고 자는 것을 보면, 하얀 옷만 입히면 영락없는 영안실의 시체 같은 것입니다. 그러면서 코까지 고는, 정말 보고 싶지 않은 모습을 보게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살아가는 것이 너무 피곤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영혼의 안식을 주시는 분입니다.
저는 14년 2개월 되었을 때 무신론자로 살기로 결심을 하고 내가 치사해서도 하나님은 안 믿는다고 했습니다. 성경을 보니까 성경은 모두 꼼수로 가득 찬 책이었습니다. “주님을 보여주십시오.”, 그럼 보여주면 되는데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이게 뭡니까? “내가 어려움 속에 있으니 나를 구해주십시오!”, 그러면 구해주면 되는데, “환란을 당할 때 기뻐하라.”합니다. 그런 꼼수를 막 깔아 놓았다고 느껴졌습니다. 그때도 성경을 읽었습니다. 담배피우면서 말입니다. 그렇게 교만을 떨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나한테 붙잡혀서 두 시간만 이야기하면 교회를 그만 다니게 할 수 있을 정도로 달변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온갖 문학과 철학과 사상서들을 읽어왔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내 마음에 평화가 없는 것입니다. 6년 동안 그렇게 지내다가 21살이 되었을 때 고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집에서 멀리 떨어진 밭 한 가운데 교회가 있었습니다. 밤 새워서 공부를 하다가 새벽에 나와서 담배를 한 대 피우다보면 “뎅그렁, 뎅그렁”하며 새벽 종소리를 듣곤 했습니다. 그런데 그날따라 그 소리에 그렇게 마음이 평안할 수가 없었습니다.
(찬양) 깊이 스며와 닿는 구원의 저 종소리
형언할 수 없이 마음이 이끌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강퍅하던 마음들을 하나씩 둘씩 내려놓으면서 나를 인도하는 사람 없이 내 발로 교회를 찾아 걸어갔습니다. 한 20명 정도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아주 작은 예배당이었습니다. 수요일이었는데 가서 저 귀퉁이에 무릎을 꿇고 앉았는데 삐거덕거리는 풍금으로 반주를 했습니다.
(찬양) 돌아와 돌아와 맘이 곤한 이여
태어나서 처음으로 평화를 느꼈습니다. 마치 오랫동안 유랑을 하다가 고향집에 온 것 같은 평화를 느꼈습니다. 그러면서 마음으로 많이 울었습니다. 그리고 그 복된 회심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놓고 보니까 하나님이 자기의 아들까지도 십자가에 못 박혀 처참하게 죽게 만드시기까지 나를 사랑하셨다고 생각하니까 내게 없는 것은 하나님이 아까워서 안 주시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신뢰하게 되니까 근심이 사라졌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이 주는 유익입니다. 그것을 오늘 성경에,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고”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를 하다보면 어떤 사람은 인생의 치열한 시련을 겪다가 교회에 옵니다. 그리고 은혜를 받습니다. 그리고 이야기 합니다. “목사님, 제가 뭘 해야 하겠습니까?” 그것도 강박관념입니다. “좀 쉬십시오. 그렇게 여러 해 동안 방황하고 죄 가운데 살며 고통을 받고 근심걱정 속에서 살았으니까 당분간 한 1년 정도 쉬십시오. 그냥 말씀 듣고 은혜 받고 간절히 기도하고 전도하면서 좀 쉬십시오. 그러다보면 하나님께서 할 일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우선 좀 쉬십시오.” 제가 즐겨하는 이야기입니다. 정말 그런 쉼, 이 세상에서 육체로는 그런 쉼에 도달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영혼의 휴식입니다. 그래서 잡스럽고 속된 모든 욕망을 끊고 인격적으로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의 품안에서 쉼을 얻는 그런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마지막으로 인도하심입니다. 시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이것은 번역이 잘못되었습니다. 쉴만한 물가가 아닙니다. 전적으로 잘못된 번역입니다. “움직이지 않는 물 가장자리로 인도하시는도다”라고 해야 합니다. 구약성경은 히브리어로 쓰여 졌는데 거기에 보면 메누홋()이라고 나옵니다. 그것은 “움직이지 않는”, 혹은 “멈추어 있는 물 가장자리로 인도하시고”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배경이 있습니다. 양들은 물에 대한 극도의 공포심을 가진 짐승입니다. 소나 말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데 양은 극도의 공포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렸을 때 서울에서 공부하다가 방학 때 시골에 내려가 보면 여름에 홍수가 나는 것을 봅니다. 그때는 산에 나무가 없이 민둥산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나무를 베어다가 땔감으로 사용하다보니 엄밀히 말하면 산이 아니라 민둥산이었습니다. 그 민둥산이 지금은 푸르고 푸른 산이 된 것입니다. 예전의 산은 그렇게 민둥산이다보니 비가 쏟아지면 산이 물을 저장하지 못하고 토사가 쏟아져 내리는 것입니다. 삽시간에 물이 불어납니다. 그러면 실제로 목격한 광경인데 소가 떠내려 옵니다. 소는 헤엄을 잘 칩니다. 돼지도 궁금하실텐데 돼지도 헤엄을 잘 쳐서 가라앉지 않습니다. 소리를 꽥꽥 지르면서 떠내려 와도 가라앉지 않습니다. 개도 물에 빠지는 경우가 있는데 개는 개헤엄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수영을 잘합니다. 오리는 물에 뜨니까 잘 떠내려 옵니다. 닭은 어떻습니까? 닭도 물에 빠져서 죽지 않습니다. 그냥 떠내려 옵니다. 그런데 한 번 물에 빠지면 전혀 나오지 못하는 짐승이 양입니다. 털이 길기 때문에 물에 흠뻑 젖어서 그것이 아래로 잡아당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양은 생래적으로 물에 대한 엄청난 공포가 있습니다. 그래서 목이 마를 때 물을 먹어야 하는데 움직이면서 흐르는 물은 마시지를 못합니다. 그러면 목자가 얕은 개울에 풀뿌리와 돌멩이로 댐을 쌓습니다. 그러면 물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이 그림이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영어 성경에 보면 “still waters”, 혹은 “quiet waters”라고 번역합니다. 그렇게 물이 움직이지 않게 만들고 양떼를 데려가서 물을 먹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인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종종 시련도 주십니다. 허락을 하십니다. 그렇지만 그 시련은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시련을 주십니다. 때로는 우리의 힘으로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시험이라고 할 때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피할 길을 주십니다. 그래서 지혜를 배우도록 만들어주십니다.
이것이 시인이 살아오면서 하나님을 “나의 목자”라고 부르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였습니다. 그렇게 가난하고 굶주리고 연약한 날에, 먹고 입고 마시고 누릴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시시때때로 공급해주시고, 나보다 더 뛰어난 지식으로 내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헤아리며 나의 영적인 자원, 나의 육적인 자원을 공급해주시고, 피곤하기 이를 데 없는 인생을 주님의 품 안에서 쉴 수 있도록 인도해주시고, 나의 약점까지 모두 헤아리셔서 시시때때로 갈한 나의 목을 적셔주시기 위해서 은혜의 생수를 우리에게 먹이시던 그 모든 경험을 회상하면서 결국 시인은 “이런 하나님은 없다, 이런 하나님 아버지는 어디에도 없다. 내가 주님을 떠나서 어디에 가서 이런 사랑을 받을 수 있을까?”하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의 많은 날들을 염려와 근심 속에 흘려보내버렸습니다. 건강도 있고 자원도 있고 쇄락한 정신도 있어서 우리 주님을 섬길 수 있는 좋은 시간들이었지만 마음을 파고드는 근심과 염려 때문에 마음은 세상일에 바쳐지고 우리 주님께 드릴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원인이 마지막에 보니까 하나님을 내가 인격적으로 사랑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티끌과 같이 아무것도 아닌 존재인데 이런 나를 위해서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시면서 까지 나를 사랑하신 하나님, 이렇게 당신의 소중한 아들도 나를 위해서 주신 하나님이신데 하나님이 나를 위해서 무엇을 아끼실까 생각하면서 우리 자신을 다 드릴 때, 결국은 그 안에서 우리는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염려와 근심 가운데 있는 여러분, 염려와 근심 때문에 내가 지금 고통을 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면서 오늘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고 막힌 담을 헐고 주님을 다시 뜨겁게 사랑하며 살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아버지 앞에 매달려 평화를 누리며 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같이 기도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