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더욱 넘치는 은혜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시 23:5)
녹취자: 장미연
밤하늘에 불꽃놀이를 보신 적이 있지요? 어두운 밤하늘에 불꽃이 하늘을 향해 쾅 하고 쏘아 올려집니다. 처음에는 그 불꽃이 보이지 않습니다. 가느다란 선을 그리며 하늘 높이 올라갑니다. 그리고 정점에서 찬란한 불꽃을 하늘에 수놓으며 폭발합니다. 그리고 떨어집니다. 시편 23편을 불꽃놀이라고 한다면 5절은 정점에 올라서 장렬하듯 불꽃으로 하늘을 수놓는 그 지점이 바로 5절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목자십니다.” 라고 고백한 시인이 왜 하나님이 자신에게 그런 존재인지를 2절부터 논증합니다. 2절에서는 공급해주시는 은혜 때문에 3절에서는 영혼을 소생시켜 주시는 은혜 때문에 4절에서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지켜주시는 은혜 때문에 그리고 5절에서는 빈 잔을 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이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시편 23편 5절은 특히 잔칫집의 문맥으로 이해해야합니다. 신랑 신부의 혼인이 있고 친지와 온 가족과 이웃들이 모여서 그 결혼을 축하합니다. 이때 주인은 오랫동안 묵혀두었던 질이 좋은 포도주를 가져오고 그 포도주를 잔에 넘치도록 따라줍니다. 그 잔과 잔이 맞부딪히며 건배하는 소리가 들리고 모든 하객들이 웃음꽃이 만발하여 결혼한 부부와 그 부모와 가족을 축복하는 근심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아주 가슴 벅찬 기쁨의 자리가 바로 이 5절의 문맥입니다. 그런데 오늘 시인은 왜 그 하나님이 자신의 목자가 되었는지를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말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문학입니다. 이러한 잔칫집 문맥에서 시인은 기쁨의 잔칫날이기 때문에 빈 잔에 포도주가 꽉 차고 거품이 넘치는 것처럼 더 이상 필요 없을 정도의 기쁨이 자신의 마음속에 차고 넘치는 것을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나에게 이런 기쁨을 주셨기 때문에 시인은 “주님은 나의 목자이십니다.” 라고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이 “빈 잔”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문학적인 표현으로써 인간 내면에 있는 하나님이 아니면 채워질 수 없는 영혼의 어떤 공허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가득 채워야합니다. 사람들은 인간의 존재가 육체와 영혼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육체는 지상의 자원을 사용하고 영혼은 천상의 자원 곧 진리를 사용하여야 한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그래서 결국 모든 인생의 관심사가 오직 돈 벌어서 물질을 모으고 먹고 살고 그것으로 더 많은 즐거움과 향락을 누리는 것이 인생의 행복을 절대적으로 좌우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 그렇지 않다는 것은 너무 분명합니다.
(예화) 제가 요 가까운 동네의 한 교회에서 전도사 생활을 할 때의 일이었습니다. 교회하고 담장을 마주하고 있는 커다란 저택이 있었습니다. 그 저택 안에는 항상 검은 옷을 입은 경호원들이 돌아다니고 집안에 농구 경기장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신문에 그 집에서 자살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 사람은 지금 이야기 하면 여러분들이 ‘아, 그 사람’ 할 정도로 거의 모든 분이 아실 수 있을 정도로 국내 굴지의 회장입니다. 그분이 부족한 것 없이 일생을 살았을 텐데 어느 날 가족들이 집에 들어가 보니 그 분이 웃통을 벗고 칼로 자신의 온 몸을 찔러서 피투성이가 된 채 발견됩니다. “그렇게 돈 많은 부자가 왜 죽었을까?” 이렇게 묻는 사람들은 대부분 돈이 없는 사람입니다. 진짜 부자들은 그런 식으로 질문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한 20-25년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미아리를 지나서 의정부 쪽으로 가다 보면 수여동이라는 동네가 있습니다. 옛날에는 수유리였습니다. 서울의 끝자락이었습니다. 거기에서 의사 한 사람이 신문에 글을 썼습니다. 당직을 서고 있는데 어느 날 새벽에 양복 입은 신사들이 택시를 타고 왔더랍니다. 환자를 끌어내리면서 ‘이 사람이 방금 심장마비로 쓰러진 거 같은데 살려주십시오.’ 하고 데려왔더랍니다. 의사가 진찰해보니 한 참 전에 죽었다고 합니다. “의학적으로는 손 쓸 것이 없습니다. 이미 운명하셨습니다.” 그러고 하얀 보자기를 덮어서 유족들을 불렀는데 한 시간쯤 지나니까 유족들이 와서 울고불고 하는데 의사는 가만히 죽은 사람의 시체를 보니까 자기가 의사생활을 20여년 했는데 이렇게 기묘한 자세로 죽은 사람은 처음이랍니다. 죽을 때는 펴고 죽는데 한 손은 움켜쥐고 한 손은 쫙 펴고 죽었습니다. 가족들은 울고불고 난리를 쳐도 의사야 ‘저게 왜 저렇게 죽었을까? 의학적으로 저런 자세로 죽은 게 가능할까? 움켜쥐고 죽은 저 손엔 뭐가 들었을까?’ 가족들이 나간 다음에 의사가 손을 펴 봤습니다. 펴니까 화투 두 장이 툭 떨어집니다. 펴보니깐 38광땡 입니다. 그래서 사연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봤더니 밤새도록 상가집에 가서 친구들하고 화투를 친 겁니다. 계속 돈을 잃었는데 새벽에 끝발이 붙어서 돈이 이만큼 쌓였습니다. 근데 탁 열어 보니 38광땡이 들어온 겁니다. 저는 사실 화투하고는 별로 상관이 없는 사람입니다. 민화투는 어떻게 기억을 더듬으면 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그래서 화투 잘 치는 사람한테 물어봤습니다. “그게 뭐냐고?” 그랬더니 배팅을 하고 이게 패를 돌린다고 합니다. 두 장씩 그러면 예를 들어 만원씩 냈다 그러면 8명이면 8만원이 모이는 겁니다. 약속을 정하기에 따라서 2번 혹은 3번을 배팅할 수 있습니다. 자신 있는 사람은 만원을 더 내는 겁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배팅을 안 하면 자기가 다 가져가는 겁니다. 펴볼 필요도 없이. 그런데 어떤 사람이 난 두 번째 세 번째 배팅을 할 경우 이게 올라갑니다. 마지막에 깝니다. 똑같은 끝수가 두 개가 나오면 땡인데 38 광땡은 아주 최상위에 랭크되어있는 순위입니다. 그러면 약속하기에 따라서 자기가 여태까지 배팅한 모든 금액의 3배까지 내야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계속 돈을 잃다가 마지막에 38광땡이 들어오니깐 당신 뭐야라는 물음에 “3.. 3..” 그러다 심장마비로 죽어버렸다고 합니다. 사람이 태어날 때는 어디서 태어나도 그거 묻는 사람이 없습니다. “너희 아버지 어디서 태어났어?” 그렇게 묻지 않습니다. 그러나 죽을 때 “우리 아버님 어떻게 돌아가셨어요?” 아이가 물을 때 그럴싸해야지 이거 쪼다가 38광땡 나와 가지고 너무 충격 받아 심장마비로 죽었다고. 그거 어떻게 하겠습니까?
우리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모두 웃었고 우리 중엔 아무도 화투를 치다가 심장마비를 걸릴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생각해보십시오. 화투보다 좀 더 큰 땅 문서, 집문서, 주식 하다가 너무 올라서 너무 좋아 죽는 사람도 있고 복권 맞아서 심장마비 돼서 죽은 사람도 가끔 나오잖습니까? 그거 가지고 떨어졌다고 고민하다 죽는 사람도 나오고 그러면 한 사람은 조그만 동양화 가지고 만지작거리다 죽었지만 다른 사람은 그거 보다 약간 좀 크기가 크고 형식이 다를 뿐이지 그걸 붙들고 이러다가 충격 받아 죽기도 하고 좋아서 죽기도 합니다. 그것을 한 번 영원이라는 빛으로 우리의 인생을 비춰서 보면 너무 하잘 거 없습니다. 강남에 어떤 말이 유행 하냐면 50세 되면 아주머니들이 학력 평준화입니다. 여기는 이대, 서울대, 지방대 고졸인데 다 깜박깜박합니다. 학력 평준화입니다. 머리 좋은 사람도 없고 나쁜 사람도 없습니다. 60세 되기 전까지는 그래도 심혈을 기울여서 바르고 꾸미면 젊어 보이는데 60세부터는 외모 평준화입니다. 그다음에 70세 부터는 경제 평준화입니다. 왜냐면 돈이 있어도 힘이 없어서 여행을 못갑니다. 집에서 강아지나 보고 지냅니다. 그럼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잠깐 왔다가 그저 한 송이 꽃처럼 잠깐 폈다가 피었을 때는 자기는 피는 줄도 모릅니다. 그 젊음이라는 시기를 지나는 것이 너무 힘겹습니다. 나는 누군가가 나에게 “너를 10대로 돌려줄 테니 인생을 다시 살아봐라.” 그럼 난 “No thank you”입니다. 나는 절대로 원하지 않고 그러실 리도 없지만 하나님이 너 한 번만 더 살도록 특권을 주마. 그럴 때 저는 사양합니다. 한 번 산 것으로 충분합니다. 진짜 추호도 20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습니다. 왜냐면 얼굴은 좀 젊고 젊음은 있을지 모르지만 그렇게 하면서 온몸으로 피투성이가 돼서 부딪히면서 또 인생을 살아야 된다고 생각을 하는데 그걸 한 번 했으면 됐지. 뭘 또 하냐 이겁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신앙생활 하면서도 잃어버린 단어들이 있습니다. 기쁨, 희열, 환희, 감격 그런 거 있습니까? 그런 게 없으니까 오늘날 텔레비전을 틀면 별로 우습지도 않은 것을 막 억지로 웃기려고 하는 것들이 나와서 그러고 돌아다닙니다. 보는 사람도 가엾고 하는 사람도 너무 가엾습니다. 될 수 있으면 웃어주려고 노력을 합니다. 왜? 웃을게 너무 없는, 기쁨이 너무 없는 세상입니다.
그런데 이 시인을 지금 이렇게 하나님 앞에 너무 좋으면 왜 우리들이 너무 좋으면 어우, 정말 더 이상 바랄게 없어. 심지어 우리나라 사람들이 잘 쓰는 표현이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그렇잖습니까? 그런데 한 번 가봤냐 이겁니다. 이제 저는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하나님 정말 감사합니다. 가슴이 벅찹니다. 가슴에 희열이 가득합니다. 감당할 수 없는 기쁨, 성경이 말하는 말할 수 없는 기쁨을 우리들이 느껴봤느냐 이겁니다. 그게 이 세상에 있는 자원으로 그런 것들이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시인에게 땅이 없었겠습니까? 권세가 없었겠습니까? 어느 목사님이 할 일 없으니까 다윗이 성전을 짓기 위해서 내놓은 금이 요즘 화폐로 얼마쯤 되나 계산을 했습니다. 정확하게 2.5톤 트럭으로 80대분이고 시가로 계산하면 약 30조원정도 된다고 합니다. 금만 그렇고 은은 또 따로 있고 백향목 등등.. 돈이 없었겠습니까? 모든 것을 자기가 원하는 대로 자기가 다 가질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사람을 그렇게 가슴 벅차게 만든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아내에게도 별로 사랑을 받지 못했습니다. 부모에게도 사랑을 받지 못했습니다. 형제에게도 미운 물건이 되었습니다. 자식들도 자기를 버렸습니다. 그리고 한 사람 정말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는데 불륜이었습니다. 그래서 가혹할 정도로 긴 세월을 어둠속에서 보내게 됩니다. 아마 그는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살고 싶지 않은 세상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도대체 무엇이 이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 이제 됐습니다. 전 이제 더 이상 여한이 없습니다. 내 마음에 빈 잔이 하나님이 주신 기쁨으로 가득 찼습니다.” 이렇게 만든 것이 무엇입니까? 예쁜 여자? 어마어마한 금? 그리고 전쟁에서 이겼다는 승리의 소식? 늘어나는 백성들의 숫자? 아니면 작은 나라들이 바리바리 싸가지고 갖다 바치는 조공? 아닙니다. 자기의 목자 되시는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 속에서 누리는 행복입니다. 그 속에서 꽉 차오르는 이 기쁨과 희열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럼 궁금한 것은 도대체 무엇이 이 시인의 마음을 이렇게 말 할 수 없는 기쁨으로 가득 차게 만들었을까?
우리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이 영혼의 빈 잔이 있어서 우리의 영혼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자신에게 필요한 양식을 달라고 소리칩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있는 것들에 대한 욕심으로 눈이 멀고 육체에서 솟구치는 수많은 욕망들의 소리가 귀를 너무나 시끄럽게하기 때문에 영혼이 피 맺히도록 나를 좀 살려달라고 울부짖는 그 소리가 안 들리게 됩니다. 그리고 그 소리를 듣는 게 매우 불편하기 때문에 그것을 잊어버리기 위해서 매일 매일 즐거움에 빠지고 물질을 소비하고 향락하는 것 속에서 자신의 인생을 허비하면서 지냅니다. 그러니까 혼자 있을 수가 없습니다. 너무 외롭고 힘듭니다. 신앙생활을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 속에서 그 분을 향한 사랑이 깊어가고 심화 되어가는 기쁨 속에서 살지 않으면 어느 날 우리 자신이 믿음에서 파산한 사람들이 됩니다. 마지막에 깊은 공허감과 외로움이 밀려들어옵니다. 이렇게 나이가 먹고 보면 다 떠나갑니다. 부모님이 떠나갑니다. 슬하에 자식들이 키우고 걔네들 사랑하는 재미로 살았는데 떠납니다. 이 세상에 바보 같은 여자가 둘 있는데 그 여자 중에 하나가 며느리의 남편이 아직도 자기 아들인줄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자식도 떠나갑니다. 자기도 부모한테 그랬습니다. 그것을 떠나가게 놓아줄 수 있는 그 과정이 인간이 되어가는 과정입니다. 하나씩 둘씩 떠나갑니다. 그때도 도대체 ‘내가 그렇게 얘네 들을 위해서 희생을 했는데 혹은 남편을 위해서 온전히 봉사했는데 나는 마지막에 이게 무엇인가?’ 이런 생각을 하면 그것은 잘 산 게 아닙니다. 다 떠나가도 자신은 그 모든 것이 떠나가도 여전히 자신과 함께하는 그 하나님 때문에 자신의 빈 잔이 가득 차는 기쁨이 있을 때 그게 진짜 하나님의 성도입니다. 성도의 삶입니다.
무엇 때문에 이 시인이 자신의 영혼의 빈 잔이 가득 찼다고 고백을 하는가? 오늘 성경은 두 가지를 이야기 합니다.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두 번째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기 때문에 나는 빈 잔이 넘치나이다.”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차려주신다는 게 무엇일까요? 이 번역이 이번 성경에서는 고쳐졌지만 옛날 성경에서는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시고.”이랬습니다. 성도들 중에 절반 이상이 졸업식 때 받는 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아니라 원래 이 말은 히브리어로 “슐한”()이라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히브리 사람들이 밥 먹을 때 사용하는 식탁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밥을 먹을 때 소파같이 나지막한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어 티 탁자같이 낮은 탁자에 음식을 차려 놓고 손을 뻗으며 먹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전통입니다. 아마 날이 너무 덥고 그러니 사람들이 그런 습관을 갖게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래서 정확하게 말하면 원수라고 했는데 원래 히브리어성경에는 복수로 나옵니다. “나를 괴롭게 하는 자들의 면전에서 나를 위하여 한 밥상을 차리시고.” 이렇게 됩니다. 하나님이 밥상을 차려 주시는 그것이 자신에게 너무 커다란 감격이 되었기 때문에 영혼의 빈 잔이 차고 넘치는 희열을 환희를 경험하게 되는 겁니다.
(예화) 집에 손님이 온다고 할 때 그 오는 손님이 중요한 손님인지 하찮은 손님인지는 식탁을 준비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딸이 하나 있었는데 시집을 갔습니다. 어디서 사귀는 사람이라고 결혼을 하겠다고 데려왔는데 엄마가 보니까 딸이 처음부터 끝까지 절대 아닌 놈을 데려왔습니다. 어떤 생각이드냐면 차라리 ‘내 딸이 혼자 사는 게 낫겠다.’ 할 정도로 진짜 아닌 녀석을 데려왔습니다. 그래서 남편과 함께 깊이 실망을 했습니다. 그래도 자식 이기는 부모가 없기 때문에 둘은 혼인을 했습니다. 그리고 신혼여행을 떠났다가 돌아왔습니다. 남편이 아침에 말합니다. “자기 배고파 우리 밥 먹자.” “조금만 참아봐 이제 우리 집에 인사를 갈 거잖아 엄마가 잔뜩 차려 놓고 우리를 기다릴 거야.” 그러고 전화를 해서 “엄마 우리 어젯밤에 돌아왔어요.” “어, 그래” “어제 말씀드린 대로 오늘 점심 때 인사하러 가려고 해요.” “그래 와라.” 엄마가 힘이 없어요. “엄마 우리 가면 점심 줄 거지?” “그럼, 와라.” “12시에 마쳐서 갈게.” “그래 와라.” 그래서 이제 남편을 데리고 친정으로 갔습니다. 이모랑 와 가지고 전을 부치고 음식을 만들 줄 알았는데 조용합니다. 번호를 누르고 들어가 보니 아무도 없습니다. 보니까 안방 문이 이만큼 열렸는데 엄마 혼자 낮잠을 주무시고 계십니다. “엄마, 우리 왔어.” “어, 그래” “장모님 절 받으십시오.” “절은 뭐.” 일어나서 머리를 부스스하고 절을 받았습니다. “엄마, 아빠는 어디 가셨어?” “볼 일 있다고 나가셨다.” “엄마 우리 점심 줄 거지?” “그럼 줘야지.” 그러더니 엄마가 아무 음식 냄새도 안 나는데 밥상을 차리러 가더니 2분 만에 상을 차려서 왔습니다. 보니까 소반에다 얼마나 오래된 소반인지 한 쪽 끝이 떨어졌습니다. 거기에다 밥 두 그릇하고 냉수 두 개하고 그 다음에 무수한 젓가락에 공격을 당한 흔적이 있는 고추장 하나 딱 얹어서 갖다가 “이거 좀 먹게. 차린 건 없지만 많이 들게” 탁 내려놓는데 물이 찍 하고 옆에 쏟아졌습니다. 그 상을 딸하고 사위하고 받았을 때 무슨 뜻입니까? “난 네가 싫어. 왜 너하고 우리 집안이 엮였는지 이해할 수 없어. 딸 너도 싫어. 어떻게 내가 널 길렀는데 이렇게 결혼을 하니? 빨리 먹고 사라져라. 다시 보고 싶지 않다.”라는 모든 언어가 그 밥상에 담겨 있습니다. 저는 가정주부들이 얼마나 고생을 많이 하는지를 압니다. 그래서 될 수 있으면 집안일을 도우려고 하는 사람인데 그래서 심방을 갈 때 집에서 밥하는 걸 정말 싫어합니다. 못하게 합니다. 왜냐면 그냥 갈비탕이나 하나 먹고 그게 섭섭하면 조그만 거 하나 먹고 집에 들어가서 예배드리고 오면 돼지. 그거 한 접시 하려고 수없이 다듬고 양념을 하고 그게 너무 미안합니다. 예배는 20분 밖에 안 드리는데 밥을 한 시간씩 먹고 오니까 얼마나 힘들까? 그래서 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데 한 15년전 인가 50대된 부인이 교회 와서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그리고는 그분이 자신의 집을 심방해달라고 교역자를 통해서 요청해 왔습니다. “그러자. 그러고 그런데 밥은 하지 말라 그래라.” “예, 알았습니다.” “한답니다.” 그래서 “하지 말라” 그러는데 “그래도 한답니다.” 그래서 “알았다.” 그러고 갔습니다. 11시인가 도착해서 은혜롭게 예배를 드렸습니다. 옛날 평범한 주택인데 조금 앉아있었더니 “목사님, 이제 식사 준비하겠습니다.” 그러더니 시간에 딱 맞춰서 상을 가지고 안방으로 가지고 들어오는데 태어나서 그런 상 처음 받아봤습니다. 3명이서 들고 오는데 반찬이 똑같은 게 중복되지 않고 교자상에다가 꽉 차렸는데 젓가락 들고 아무리 손을 뻗어도 사정거리 안에 안 들어옵니다. 그래서 이렇게 식탁을 보는데 보통 정성을 기울인 식탁이 아닙니다. 마음이 좀 상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아니 왜 이렇게 쓸데없는 일을 하냐? 이게 얼마나 힘이 들었을 텐데.. 이 시간에 성경 한 장을 더 보고 기도를 하지. 이게 한 끼 먹으면 사라지는데 이게 뭐하는 짓이냐?” 그랬더니 이 성도님이 마음이 상했습니다. “기도도 하고 성경도 읽었거든요. 드세요.” 그러고 이제 먹기 시작했습니다. 한 달 전에 그 식사준비에 계획을 완성했답니다. 그리고 2주전부터 장을 보기 시작하고 열흘 전부터 김치와 밑반찬을 만들기 시작하고 3일전에 2틀 전에 하루 전에 마지막 요리해야 될 것은 새벽 6시에 자기 언니들을 다 불러서 재료를 완벽하게 준비해놨다가 식사 시간에 맞춰서 만들어서 따끈따끈하게 차려서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목사님이 우리집에 평생에 두 번 오실일은 없고 제가 하나님께 받은 은혜가 너무 감사해서 차렸습니다.” 그런데 나는 태어나서 그런 밥상을 받아 본 적이 없습니다. 아마 앞으로도 못 받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 속에 담겨진 깊은 마음을 보게 됩니다.
제가 히브리어 성경으로 시편 23편을 읽다가 너무 감격스러워 가슴에 안고 방안을 한 참 돌아다녔습니다. 그게 뭐냐면 “차려주시고” 라는 단어입니다. 히브리어로 “타라크”()라는 단어입니다. 이거는 원래 구약성경에서 군대들이 전쟁에 나갈 때 대열을 짓는 것을 가리키는데 사용되는 단어고 여러 개 물건을 질서 있게 배치할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이 시인을 위해 밥상을 차려 주셨는데 그 밥상이 그냥 먹다 남은 밥에다 숟가락 하나 꽂아서 고추장하고 내놓은 그런 밥상이 아니라 “타라크의 밥상”입니다. 제가 받은 상처럼 저 끝서부터 저 끝까지 반찬의 중복이 없이 그 산해진미로 정성껏 꽉 채워진 상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원수들 -다윗을 괴롭히는 모든 사람들-의 면전에서 그 밥상을 차려 주셨다고 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많은 원수들이 다윗에게 ‘저, 자식은 저거 아무것도 아니야. 저거는 이미 하나님도 버리신 인간이야. 저 인간은 쓰레기야. 지금 아무것도 아니니까 우리가 저 인간을 정리해버리자.’라고 하며 온갖 모욕과 괴로움을 주면서 그에게 핍박을 가했습니다. 그래서 이 시인을 공격하기 위해서 원수들이 구름떼처럼 모였는데 달려가 보니 이 시인이 밥을 먹고 있습니다. 시인 하나라면 한 번에 쓸어버릴 한줌꺼리도 안된다고 생각했는데 누구하고 겸상을 하고 있습니다. 그 밥상을 차려주신 주인이 어디에서 많이 뵌 분입니다. 하나님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너희 놈들은 틀렸다”라고 하나님이 말을 하지 않아도 이 시인들이 그렇게 무시했던 이 다윗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가 하는 것을 한 순간에 느끼게 만드셨습니다. 이 이야기를 했다고 해서 여러분들이 설마 다윗이 언젠가 하늘에 낚시 줄 4개에 매단 상에 온갖 반찬이 차려진채로 구름을 타고 땅으로 내려오는 밥상을 받았다고 생각할 정도로 문학적 상상력이 빈약한 분은 없겠지요? 그런 기적이 일어나진 않습니다. 문학입니다. 하나의 비유입니다.
(찬양)
어두움의 밝은 빛을 비춰 주시고
너의 작은 시름에도 응답하시니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만 바라볼지라.
하나님이 시인이 그 곤고한 인생을 지날 때, 자신의 영혼이 고통과 원수들의 박해로 영혼이 깊은 침체에 빠졌을 때 하나님이 시인을 위해서 차려주신 밥상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그것이 성대한 만찬입니다. 그것을 받으면서 시인은 놀라운 위로를 받습니다. ‘아, 내가 정말 쓸모없는 인간이 어둠속에서 홀로 우는 존재인줄을 알았는데 하나님 앞에 하나님에게 내가 이렇게 소중한 존재였구나. 내가 혼자 있다고 생각하고 어둠 속에서 흐느껴 우는 데도 주님은 작은 신음에 귀를 기울이시고 나에게 말씀하시는 분이시구나.’ 시인은 그것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여전히 원수들이 자신을 에워싸고 있어도 이 상황 속에서는 말할 수 없는 신령한 기쁨이 시인의 빈잔에 가득차고 넘칩니다. 이 시인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면서도 주님의 지팡이와 막대기 때문에 위로를 받았습니다. 이것은 이 세상에서 번영을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실 수 있는 복이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일반 섭리의 복입니다. 이것은 이 세상에 있는 물질이나 사물들을 움직여서 우리에게 주심으로서 우리가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들입니다. 아이를 낳았는데 생각 없이 아이를 낳았는데 이상하게 똑똑합니다. 그래서 좋은 대학을 갔습니다. 나는 진짜 성질이 못된 애미인데 이건 내 피가 아닌 것 같이 아이가 선량합니다. 그 다음에 공부도 못했는데 어떻게 또 그렇게 훌륭한 형제가 아이한테 푹 빠져서 그 사위 덕분에 내가 세계 여행을 다닙니다. 이런 것들이 일반 섭리의 복입니다. 사업을 했는데 놀랍게 성공을 했다더라. 등등. 이런 일반섭리의 복이 있는데 또 하나의 복이 있습니다. 그것은 영적인 복입니다. 일반섭리의 복은 하나님이 사물들을 움직여서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런데 영적인 복은 하나님이 이것들을 움직여서 주시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 그의 영혼을 진리의 말씀과 성령으로 어루만져주심으로 복을 주십니다. 그러니까 신령한 기쁨이 샘솟듯 솟아나는 것은 바로 이 시인이 그러한 영적인 복을 경험한 것입니다. 대부분의 학자들이 이 시는 다윗이 왕이 된 것은 물론이고, 저는 다윗이 이 시를 쓰고 그렇게 오랜 세월이 지나기 전에 숨을 거두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그때는 이미 모든 걸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금을 조금 더 주시거나 아니면 궁녀를 더 주시거나 궁궐을 좀 더 지어주신다고 해서 이 시인이 그렇게 “내 잔이 넘치나이다.”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시인에게 영적인 복을 주신 것입니다.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그걸 거의 죽어가는 사람을 살게 만들고 도저히 자신의 삶을 이어갈 수 있는 기력이 없는 사람들에게 살 수 있는 놀라운 힘을 주십니다. 그게 생명입니다. 영적인 생명을 부어 주십니다. 그 생명이 넘쳐나는데 그 생명이 넘쳐날 때에 그것이 관계에 적용이 되면 그 생명이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예화) 한 7-8년쯤 전에 일이었습니다. 5월 달이면 저도 한 달 반에서 두 달 정도 가정에 대해서 설교를 합니다. 그때 일입니다. 어느 날 매년 부모, 부부, 형제, 자녀에 대해서 설교를 했는데 그 해에는 왜 그런지 이혼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도 상당수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해에는 이혼을 하려는 사람들을 상대로 설교를 했습니다. 그런데 한 자매가 교회를 처음 찾아왔습니다. 너무 곤고하게 사니까 친구가 우리 교회 교인인데 “일요일인데 와서 밥이나 먹자.” 교회 근처에서 만나서 밥을 먹이고 예배 시간에 맞춰서 “교회도 가까운데 예배나 드리고 가자.” 그러고 데리고 들어왔습니다. 이 자매는 생전 처음 교회에 나온 겁니다. 앉았는데 이 자매는 누구냐면 남편하고 너무 갈등을 겪다가 결국 이혼을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이혼 서류를 다 써놓고 남편에게 도장을 찍으라고 장롱위에 올려놓은 상태입니다. 한 여자가 아이도 있는데 ‘남편과 그만 살아야겠다.’고 결심할 때는 얼마나 괴로웠으면 그랬겠습니까? 그날 이 자매가 왔는데 하필이면 그날 설교 제목이 “이혼을 생각하는 그대에게”였습니다. 아마 50분 내지 한 시간 정도를 설교 했습니다. 그 자매가 회심을 했습니다. 펑펑 울면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러고는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집으로 가서 남편을 불러 “여보, 나 좀 봐.” 남편은 생각했겠지요. ‘이 마누라가 도장 찍으라고 난리 치는구나.’ 그러고 들어갔습니다. 두 사람이 마주보고 섰습니다. 그렇게 표독스럽던 아내가 갑자기 흐느끼기 시작하더니 무릎을 딱 꿇었습니다. 울기 시작했습니다. “여보, 정말 미안해. 나는 일평생 살아오면서 당신이 우리 가정을 파괴시킨 주범이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잘못 한 거였어. 정말 미안해.”하고 울었습니다. 남편이 위에서 내려 보면서 “당연하지. 이것아. 그걸 이제 깨달았냐? 바보같이 원래 네가 문제였어.” 그랬겠습니까? 아닙니다. 같이 무릎 꿇고 “아니야. 여보, 내가 당신을 너무 아프게 했어. 미안해.”
이게 생명입니다. 그렇게 영혼이 진리에 말씀에 식탁을 거의 못 받은 상태에서 힘겨운 인생을 살아가니까 도저히 다른 사람을 용서하고 이해하고 품고 자기 상황을 사랑으로 헤쳐 나가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언제입니까? 다른 이유 말고 예배가 끝나고 말씀을 듣고 나서 가슴이 정말 벅차서 ‘아, 정말 이 세상에서는 내가 멸시를 받은 외로운 사람 같았는데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사랑하셔서 말씀의 성찬을 나에게 베푸시는구나.’ 그러고 ‘주님, 내가 주님이 주시는 말씀의 은혜로 내 영혼의 빈 잔이 가득 찼습니다. 아멘.’ 그리고 하나님 앞에 가슴 벅찬 희열과 감격을 느낀 적이 언제입니까? 있는 건 있는 거고 없는 건 없는 겁니다. 아무리 있는척해도 없는 건 원래 없는 겁니다. 아무리 없는척해도 있는 사람은 있는 겁니다. 그러면 전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은 정말 요즘에 삶이 말씀의 풍성한 식탁을 누리는 삶입니까? 이 시인은 그렇게 우리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인생의 비극적인 길을 지나고 원수들의 표적이 되고 멸시와 욕을 한 몸에 받으며 그렇게 다시 살고 싶지 않은 고통스러운 인생길을 지나면서 가슴 벅찬 희열을 느끼며 “나의 빈 잔이 가득 찹니다.” 라고 노래했습니다. 이 세상의 환경이나 형편, 물질이나 인간관계가 가져다주는 기쁨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야망이 성취되고 자신의 인간적인 욕심이 성취되는 일시적인 희열이 아니었습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이 시인을 시련가운데서 그 기쁨을 유지하게 만들었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하나님의 위로를 받도록 만들어 주었습니다. 이게 바로 주님을 목자로 모시며 살아가는 성도의 행복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이 진리의 붙들려 사는 것, 이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에 사로잡혀서 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목회를 해보니까 가끔 보면 성품이 정말 좋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연적인 성품 자체가 아무리 좋아도 말씀의 은혜를 받지 않으면 언젠가는 그 사람의 굽은 성품을 결국은 드러내게 됩니다. 그리고 아무리 사람이 좀 거칠고 못됐어도 말씀의 은혜를 받으면서 매일 매일 깨뜨려지고 눈물을 흘리고 회개하는 사람들은 언젠가는 소중한 사람으로 변화가 됩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성대한 말씀의 식탁으로 영혼의 부를 누리는 사람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그 다음에 이 시인의 영혼의 빈 잔이 가득 찼던 두 번째 이유는 ‘기름으로 머리에 바르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구약시대에 이스라엘은 신정 국가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나라의 최종적인 권한이 왕이나 군주에게 있는 나라가 아니라 신 곧 하나님께 있는 나라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당신의 나라를 친히 통치하시고 그 당신의 통치를 이스라엘 속에 구현하기 위해서 3가지 중요한 직분을 가진 사람들을 사용했습니다.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입니다. 왕은 한 사람이지만 선지자는 여럿이고 제사장의 수는 훨씬 더 많았습니다. 그러면 이 세 사람은 각 각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은 사명이 다릅니다. 다르면서도 서로 협력함으로써 하나님의 통치가 이스라엘 속에 구현되게 하는 것이 사명이었습니다. 왕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회 질서가 국가라고 하는 이 제도 속에 수립되게 하는 것이 사명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회의 질서가 선택된 나라인 이스라엘 속에 제도와 법속에서 확실하게 구현되게 하는 것이 왕의 사명이었습니다. 그러나 선지자의 사명은 하나님의 뜻을 받아서 그것을 왕이든 정치가든 일반 백성이든 상관하지 않고 모두를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대상들이라고 보고 하나님의 뜻을 외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의 사역은 굉장히 수직적이었습니다. 주님께로부터 오는 말씀을 받아서 그것을 사람들에게 외치는 것이었습니다. 선지자라는 말은 그 이름 자체가 “미리 아는 사람이다.” 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선지자의 중요한 의무는 “앞으로 일어날 일을 예언하는 것이다.”라고 생각하는데 사실 그 기능은 선지자의 기능 중 일부 기능에 불과했고 오히려 선지자의 훨씬 더 많은 기능은 하나님의 말씀을 해설해주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선지자의 모든 관심은 선지자가 주전 10세기에 부름을 받았던지 8세기에 부름을 받았던지 7세기에 부름을 받았던지 이 백성들이 어떻게 하면 모세의 율법의 정신대로 현시대를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경건한 사람들이면 우리 시대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합니다. ‘예수님이 살아 계시다면 이 사회에 대해서 뭐라고 말씀하실까? 동성애에 대해서는 어떤 판단을 가지고 행동 하셨을까? 이 수많은 이주민들이 한국에 와서 많이 불이익을 당하고 한국 사람들이 노동자들을 천대하고 하는 이런 광경을 예수님이 보셨더라면 어떻게 생각하셨을까? 오늘날 이루어지는 학교 폭력이나 혹은 컴퓨터에 의한 범죄, 오늘의 금융 시스템, 재벌문제, 정치가들과 언론인들의 유착, 정경 유착의 문제 이런 불의한 사회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어떤 판단을 가지고 계셨을까?’ 그렇게 생각하면서 우리가 신학적인 고민을 합니다. 그때도 경건한 사람들은 똑같이 모세가 율법을 써놓고 죽기는 했지만 만약에 모세가 지금 다시 환생해서 여기에 살아있다면 우리에게 뭐라고 가르칠까? 15세기 문맥이 아니라 그로부터 5세기 8세기 혹은 7세기가 지난 지금 나라와 모든 국적 환경들이 변화되고 문명도 발달한 이 시대에는 모세가 뭐라고 우리에게 가르쳤을까를 고민하면서 모세의 율법을 풀어서 설명하던 사람들이 선지자입니다. 그것이 선지자의 중요한 사명입니다. 선지자는 항상 수직적인 계시에 관심을 가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그 시대에 사람들의 고민을 이해하면서 답을 주는 사람들이 선지자들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스라엘 속에 이루어지게 하는 부류의 사람이 선지자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 사람들이 제사장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앞에 두 사람과는 좀 다릅니다. 이 사람들의 관심사는 하나님은 너무 거룩하신 하나님이신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현실적으로 죄가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들이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그 죄를 용서받고 주님 앞에 나아갈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이들을 도울 것인가가 관심사였기 때문에 계시가 아니라 제사라는 전통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사장의 임무는 백성들 편에 서서 백성들을 대신해서 하나님께 용서를 빌며 그 죄인이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중재자가 되는 것이 제사장들의 관심사였습니다. 여태까지 언급한 세 가지의 일들이 쉬운 일일까요? 어려운 일일까요?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 일을 맡기실 때는 하나님이 매우 특별한 그 무엇을 그들에게 주시지 않으면 이 사명을 감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예전에 없었던 탁월한 지혜, 용기 그리고 굳건함, 담대함 이런 것들을 주시지 않으면 그 일을 감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소위 “기름부음”이라고 하는 제도를 통해서 주시는 겁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선택을 하면 그 사람에게 선지자들이 기름을 붓습니다. 그때 사용되었던 기름은 올리브유입니다. 감람유 그것을 붓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형식적인 예식이 아니라 실제로 기름을 부을 때 성령님이 임하십니다. 그래서 그를 예전에 자신과 구별하고 성결하게 만들고 그 다음에 담대하고 지혜롭고 용기가 충만하고 사랑이 충만한 사람으로 만들어서 하나님이 맡겨주신 그 세 가지 직무를 훌륭하게 감당할 수 있도록 그를 변화시켜 주십니다.
자,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들이 구약시대의 성령이 역사하시는 것과 신약시대의 성령이 역사하시는 그 경륜의 차이를 이해해야 합니다. 신양시대에는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을 때 성령이 그에게 오셔서 항상 그와 함께 하십니다. 그것을 우리들이 “성령의 내주”라고 부릅니다. 한 번 신자 안에 오신 그 성령님은 어떤 경우에도 그를 버리시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그는 성령과 함께 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가 믿음으로 순종하며 살면 그 성령은 우리 안에서 충만하게 역사해서 영의 속한 일들을 행하며 살게 되고 우리가 반대의 삶을 살 때는 우리 안에 죄가 번성해서 육에 속한 일에 종사하면서 살게 됩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한 번 신자 안에 오신 성령님은 떠나시지 않습니다. 그런데 구약 때는 좀 다릅니다. 그 때에 성령님은 하나님이 어떤 일을 시키시려고 할 때 그 필요에 따라서 오셔서 그와 함께 하셔서 그를 구별하고 그 일이 끝나면 그 성령님이 떠나시기도 하고 때로는 그가 너무 죄를 짓고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면 징벌로서 당신 자신이 떠나시기도 하는 그런 것이 구약 시대의 성령 역사의 경륜입니다. 다윗은 일생에 기름부음을 세 번 경험합니다. 그 세 번 중에서도 특히 다윗의 생애에 잊혀 지지 않는 기름부음은 첫 번째였습니다. 이새의 아들로서 처음 왕으로 선택이 되어 사무엘 선지자에 의해서 기름을 부을 때 그때에 성령이 임하셔서 그를 충만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다윗을 우리가 아는 다윗으로 만들었습니다. 아주 지혜롭고 사랑이 충만하며 순결하며 담대하고 용기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이끌어 나가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질서를 이스라엘 사회 속에 구현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에 이 시인이 경험한 것은 말할 수 없는 기쁨이었습니다. 그 충만한 성령의 역사로 시인의 가슴이 터질 듯한 신령한 행복을 경험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누구도 성령을 받지 않고는 그리스도를 주라 고백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도들마다 그 성령을 경험하는 정도는 각각 다릅니다. 그런데 그런 성령의 은혜에 충만함을 경험하고 그 속에서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아주 절실하게 경험한 사람들은 이렇게 자신의 영혼의 빈 잔이 가득 차는 희열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그런 사랑을 경험하고 나면 그런 사랑 속에서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며 살고 싶은 열망이 생겨나게 됩니다.
(예화) 부부가 같이 삽니다. 안 헤어지고 삽니다. 그런데 딱히 둘이 같이 살아야 할 이유도 없는 거 같습니다. 그냥 별로 소 닭 보듯이 살고 부인들은 매일 곰국이나 끓이고 남편들은 직장 다니는 동안에는 가정을 내팽겨 쳤다가 퇴직 할 때쯤 되니까 정신이 차려집니다. ‘내가 가정을 너무 소홀히 했구나.’그래서 마누라만 열심히 따라 다니는데 마누라는 이제 싫은 겁니다. 왜 그럴까요? 젊었을 때는 남편 하나 보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너무나 오랜 세월동안 외롭게 방치해 놓고 지 멋대로 인생을 살고 나니까 이제는 남편 없이 훌륭하게 살 수 있는 독립정신이 충만해진 겁니다. 그러니까 마지막에 구박을 받으면서 살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늘 얘기 합니다. 젊었을 때 아내들에게 잘해주는 것은 보험에 드는 겁니다. 그런데 그 보험료를 젊었을 때부터 계속 꾸준히 내야지 그게 보험 효과가 있지 막판에 가서 자기가 불리해지니까 한 번에 낸다고 해서 보험 회사에게 받아주지 않습니다. 50대, 60대, 70대, 80대 남자가 요양병원에서 만났답니다. 모두 다 이렇게 타박상을 심각하게 입고 붕대를 감고 병원에서 만났습니다. 공통점이 모두 마누라에게 얻어맞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당신은 왜 그랬냐?” 물어보니까 50대가 “아무 잘못도 없고 아침에 아내가 고운 옷을 입고 차려 입고 화장을 하길래 어디 가냐”고 물어봤더니 그렇게 때리더라는 겁니다. 옆에 있는 사람이 “그건 당연하지. 어떻게 감히 고운 옷을 입고 나가는 아내에게 행선지를 묻냐? 그러면서 나는 그렇게 맞았으면 억울하지도 않겠다. 나는 그냥 아침에 일어나서 여보, 밥 줘 그 말 한 마디 했는데” 타박상을 입었습니다. 옆에 있는 사람이 “잘못했네. 아니 어떻게 그렇게 담대하게 자기가 차려 먹어야지 밥을 달라고 그러냐? 나는 그런 말도 안하고 그냥 아침에 눈을 뜨니까 때리더랍니다. 지겹다.” 고 때리더랍니다. 마지막에 80대 할아버지는 “그 눈을 아내 없을 때 떠야지. 난 눈도 못 뜨고 가만히 있었는데 아내가 아침에 일어나더니 코에다가 귀를 대보더랍니다. 숨을 쉬니까.” 때리더랍니다. 어젯밤에도 안 죽었다고. 살기는 삽니다. 그런데 언제든지 죽음이 둘을 갈라놓아도 해방감을 느낄 사람처럼 그렇게 사는 겁니다. 진짜 헤어지고 싶은데 애들 때문에 이 나이에 또 뭘 하랴. 그래서 사는 부부들처럼 신앙생활을 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를 믿습니다. 딱히 믿어야 될 어떤 필요성이 있는 것 같질 않습니다. 교회는 나왔는데 이 나이에 주일날 교회 안 가고 뭘 하겠어? 그러고 꾸역꾸역 와서 예배드리고 가는데 뭘 사모해서 온 게 아니라 그냥 자식 땜에 할 수 없이 사는 부부처럼 그렇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되어서야 되겠습니까? 그게 다 성령의 충만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 앞에 간절히 이제껏 내가 경험한 그 하나님의 사랑 그 은혜를 기억하면서 그것은 내가 변함없이 주님을 사랑하고 그 은혜 안에서 성령으로 충만한 삶을 살 게 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빌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 없이 방황하다가 21살에 회심을 했습니다. 회심을 하고 교회를 특별히 인도하는 사람도 없이 혼자 타박타박 걸어서 어느 수요일 날 동네로부터 멀리 떨어져있는 작은 교회에 스스로 걸어갔습니다. 한 20평정도 될까 말까한 조그만 2층 예배당에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에 두꺼운 헝겊으로 여러 조각을 기운 방석위에 앉아서 한 20명의 교인이 수요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와서 그 뒤에 조용히 앉았습니다. 하나님을 멀리 떠난 지 7년 만에 일이었습니다. 얼마나 가난한 교회인지 피아노도 없어서 풍금이 삐걱삐걱 소리를 내면서 어느 여학생이 반주를 하고 거기에 맞춰서 교인들이 찬송을 부르고 있었습니다. 톱밥 난로가 타서 난방을 하고 희미한 형광등불 몇 개 아래서 풍금 소리가 들리는 겁니다.
(찬양) 돌아 와 돌아 와 맘이 곤 한 이 여 길이 참 어둡고 사납기도 하니 집을 나간 자여 돌아 와 돌아 와 어서 와 주께 오라
저는 태어나서 생전 처음 평화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날 밤에. 그렇게 주님을 만나지도 못한 채 주님을 떠났고 무신론자라고 살기로 어린 나이에 결심을 하고 수많은 책들을 읽으면서 교만에 빠지고 그렇게 기독교를 깔보면서 방황을 했는데 어디에도 쉼이 없었습니다. 항상 죽음은 내 친구 같았습니다. 언제든지 정말 죽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형언할 수 없는 그 삐그덕 거리는 풍금소리에 모인 사람들 중에 절반 이상이 노인네들이어서 박자도 잘 맞지 않는 그 “돌아 와 , 돌아 와” 라는 찬송소리를 들으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당신이 살아 계시다면 나를 구원해주소서.” 그리고 그 교회를 두 달 석 달 채 안 다녔을 때였습니다. 할아버지 목사님이 계셨는데 부르셨습니다. “청년, 자네는 이번 추수 감사절 때 세례를 받거라.” “목사님 제가 학습도 안 받았는데 어떻게 세례를 받겠습니까?” 그러니까 목사님이 “아니다. 너는 갓난아기 적부터 교회 다녔고 은혜도 많이 받았으니 세례를 받아라.” 어떻게 목사님 말씀을 거역하겠습니까? 그날부터 고민이 생겼습니다. 내가 도저히 다른 길이, 길이 아니기 때문에 예수님께 까지는 돌아올 수 있었다고 치자. 내가 예수님과 혼인을 해? 그게 가능할까? 물론 내가 그 나이에 아주 표독스러운 죄악에 빠지고 방탄하게 산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볼 때는 영적으로 굉장히 불결하게 살았습니다. 무신론에 심취하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철학적인 말로 속삭여서 신앙을 버리게 하고 그렇게 걸레처럼 살았던 내가 어떻게 우리 주님의 신부가 될 수 있을까? 매일 밤마다 한 30분되는 길을 걸어서 교회에 왔습니다. 그리고 불 꺼진 예배당에서 촛불을 켜 놓고 매일 밤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건 아닌 거 같습니다. 제가 주님을 믿겠습니다. 그러나 제가 혼인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고 일주일이 지났습니다. 결국은 세례를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문답을 토요일에 마치고 돌아와서 자고 아침에 깨끗이 목욕을 했습니다. 좋은 옷은 없지만 빨아놓은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예배당에 갔습니다. 목사님이 세례를 주실 차례가 됐습니다. 장로님이 물그릇을 들고 목사님이 세례수에 손을 집에서 내 머리에 얹으셨습니다. “내가 예수를 믿는 자 김남준에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 그 순간에 생전 경험하지 못했던 일이 일어났습니다. 형언할 수 없는 느낌이 들어오는 겁니다. 위에서부터 따뜻한 기운이 쭉 내려오면서 온 몸을 모두 뒤덮는 겁니다. 그리고는 눈물이 쏟아집니다.
(찬양)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Was blind but now I see
눈물이 막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고는 깊은 굴곡 속에서 14살 2개월 된 어린 나이에 교회 가는 논둑길에 엎드러져서 통곡을 하며 울었던 때부터 시작해서 무신론으로 돌아선 때 그리고 그 이후에 삶의 굴곡에 이르기까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습니다. ‘아, 하나님이 나를 당신의 품으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그 모든 시련에 길을 지나오게 하셨구나.’ 그러면서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이렇게 쓸모없는 인간을 위해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기 까지 나를 사랑하셨을까? 그러고는 2000년 전에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고 죽으신 예수의 고통 가슴속에 밀려들어오며 내가 매달려야할 그 십자가를 이 더러운 인간을 위해서
(찬양) 멸시와 욕 가시관 쓰셨네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그러고 한 참 동안을 기도하고 났는데 눈을 떠보니까 사람들이 다 흩어졌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내 몸에 무게가 느껴지질 않는 것입니다. 깃털처럼 가벼워서 공중에 떠 있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그때 11월에 추운 겨울이었습니다. 그래서 교회 유리창에는 성에가 끼었습니다. 거기서 오후에 햇살이 들어왔습니다. 마음속에 이전에 하고 싶었던 것, 되고 싶었던 것, 갖고 싶었던 것들에 대한 모든 욕망이 사라지고 한 가지 소원, 내가 얼마나 인생을 살다가 죽을지 모르지만 주님이 나를 사랑하신 거처럼 나도 그 주님을 순전하게 사랑하며 그렇게 살다가 그 분께 가고 싶었습니다. 이런 경험을 오늘 이야기 하면 12시까지 이야기해도 못하겠지요. 그런데 그 60평생을 살아오면서 회심 이후에 그 모든 걸 경험하면서 성령의 강한 은혜가 있을 때 공통된 경험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밖에 사랑하는 대상이 없어지는 것 그리고 나 자신을 모두 버려서라도 아주 순결한 사람으로 주님 앞에 살고 싶은 그래서 더 이상 하나님 앞에 요구할 것도 바랄 것도 없는 상태 그게 바로 성령의 충만한 은혜가 주어졌을 때 경험이었습니다. 이 시인이 바로 그런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경험하면서 이런 은혜가 없었더라면 결코 느낄 수 없었을 하나님의 성품 그리고 하나님의 성품이 시행되는 방식 이런 탁월한 지식을 갖게 되면서 시인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잠시 있다 사라질 세상의 정욕과 욕망들이 사라지면서 온 땅과 만물위에 높으신 그 아름다우신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는 누군가에게 첫 사랑을 고백하고 그것이 받아들여진 경험을 가지고 있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너무 너무 사랑해서 “당신을 사랑합니다. 나와 함께 같이 특별한 관계를 가지고 삽시다.” 이렇게 얘기 했을 때 “제가 당신의 그 요청을 받아들이겠습니다.” 그 얘기를 듣고 돌아올 때의 기분을 생각해 보십시오. 세상의 모든 것이 다 변했습니다. 모든 것이. 발아래 구르는 돌멩이 하나, 길 가에서 우연히 마주친 풀 한포기도 어제의 풀, 그 돌멩이가 아닙니다. 왜냐면 그 사람과 함께 세상이 바뀐 것입니다. 그게 사랑입니다. 그런데 어쩜 그렇게 기독교 신앙 안에서의 사랑이 시시 하냐 이겁니다. 살기 싫은 부부가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못 헤어지고 간신히 사는 부부처럼 그렇게 자기도 하기 싫은 신앙생활을 하는 것처럼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기쁨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 가지 이유를 얘기 할 수 있겠지만 본질적으로 하나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이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은 사라지는 것들입니다. 그리고 나를 자신의 뼈처럼 살처럼 사랑해주던 부모님들도 가시고 또 설령 부부가 그렇게 뜨겁게 사랑했다고 할지라도 결국 누군가는 누군가를 두고 떠납니다.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은 모든 이치가 그렇습니다. 그래서 인생의 마지막성숙은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모두 보내주는 것입니다. 보내 주면서도 그것 때문에 자신의 인생이 휘청거리지 않고 보내주면서도 원망을 하며 보내는 게 아니라 “나를 버려라. 그리고 떠나라. 그러나 나는 너희들을 향한 내 사랑은 언제나 내 마음속에 남아 있을 거야.” 그리고 보내주는 겁니다. 홀로 되었는데도 주님 때문에 외롭지 않은 사람이 그게 성도입니다.
(찬양) 잠시 머물 이 세상은 헛된 것들뿐이니 주를 사랑하는 마음 금보다도 귀하다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가장 아름다운 삶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그래서 한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을 살면서 그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선교가 존재의 선교입니다. 존재의 울림이 있는 것입니다. 말하지 않아도 호들갑 떨지 않아도 그렇게 꿋꿋이 인생을 살아가고 우리 같았으면 낙심하고 절망했을 상황 속에서도 어디에서 오는지 모르는 그 놀라운 기쁨 속에서 자기도 많은 시련을 겪으면서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하기 힘든 사람을 사랑하고 자기도 종종 넘어지지만 넘어진 자들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우고 이렇게 하면서 어두운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한 영적인 기쁨을 이 시인이 기름 부음을 통해서 충만하게 경험하면서 그것들이 이 시인 안에서 유지되면서 지금 느끼는 놀라운 희열과 환희의 시작점이 바로 기름부음의 사건입니다. 그때 내게 임하시는 그 성령이 지금 내 안에 충만히 계시기 때문에 배고픈 시절을 지날 때 공급해주시는 은혜를 경험했고 영혼이 침체되어 죄 가운데 있을 때 그 영혼을 살리시는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는 외로운 때에 하나님이 자기를 거기서 보호해주시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원수의 욕설과 모욕이 가득할 때에 그 원수 앞에 성대한 밥상을 차려주시면서 이 시인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이 시인은 나 하나님이 특별히 인정하는 사람이라고 보여주셨습니다. 거기에서 말할 수 없는 감격을 느끼면서 시인은 그 길을 지났습니다. 때로는 울기도 하겠지요. 때로는 웃기도 하겠지요. 시련도 만날 수 있습니다. 고난도 있겠지요. 그러나 원래 인생이 그렇습니다. 우리 맘대로 안 되는 게 인생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지납니다. 그러나 이렇게 인격적으로 주님을 목자로 모시고 그 분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 모든 시련 속에서도 언제나 그 두려움이 변하여 기도가 되고 그 한 숨이 변하여 하나님을 향한 찬송이 됩니다. 비록 우리에게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없고 천사의 말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없어도 그렇게 어린 아이처럼 순전한 마음으로 그 분을 사랑하며 그 사랑에 감사하며 성령의 충만함 속에서 목자 되신 주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