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세미나
(1998, 2006년 설교모음)
설교기간|1998, 2006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7월 19일
목 차
1. 예배의 본직적 요소의 회복에 관한 연구 1998.5.4 청년세미나 1
2. 젊은이의 독신, 연애 그리고 결혼(창 2:18) 2006.5.21 청년세미나 29
1. 예배의 본질적 요소의 회복에 관한 연구
우리가 설악산을 찾아 간다면 크게 세 가지의 길이 있을 것입니다. 어느 길을 택하든지 간에 정확한 약도를 가지고 있다면 부정확 한 약도를 가지고 있는 사람보다 빠른 시간안에 정확하게 찾아 갈수 있습니다.
언제인가 제가 차를 가지고 지방에 집회를 갔는데 결정적인 지점에서 실수를 한 것 입니다. 길 저편에 있는 것을 이쪽 편에 있는 것 처럼 그려 놓은 것입니다.
약도를 보고 수십 키로를 달렸는데 목적지가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약도 전체가 맞고 딱 하나가 잘못되었는데 도 그렇게 큰 혼선을 불러 일으킨 것입니다.
약도가 틀렸을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약도를 본다면 어떻게 찾아가야 되는지 크다란 혼란이 생길 것입니다. 재 해석 해야 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내가 여러분들 에게 당부를 드리는 것은 신앙 생활을 하면서 너무 빨리 뜨거워 질려고 애를 쓰지 말라는 것입니다. 뜨겁게 주님을 사랑하면서 사는 것이 신앙 생활의 마지막 지점이란 것은 틀림 없습니다. 그러나 옳바른 방법으로 하나님 앞에서 뜨거워 지지 않는다면 그 뜨거워 지는 것이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 해 주신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에 적합하게 기여 하는 삶을 보장 하지 않습니다.
누군가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요즘과 같은 때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어렵지만 그보다 더 어려운 것은 하나님을 옳바로 사랑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만큼 많은 오해와 시대에 잘못된 정신에 물들어 있기에 우리들이 그런 식으로 신앙을 아전 인수 격으로 해석을 해서 잘못된 길로 걸어 갈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신앙적인 영혼, 인생의 모든 곤고함과 괴로움은 신앙의 도리가 무엇인지 모르기에 일어나는 일 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이냐....?
그것과의 지루한 긴 싸움이 결국은 저의 설교 사역이고 저의 많은 책에서 다루고 있는 것들입니다.
그런 것 가운에 예배의 문제에 집중해서 오늘 이 문제를 다루고자 합니다.
예배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10여년전 서울 시내 300명 이상 모이고 800명 미만이 되는 소위 중형 교회가 되려면 최소한 교회가 세워 진지가 8년에서 10년 정도가 되야 했습니다.
그런 교회에 다니는 30대 평신도들을 대상으로 앙케이트를 냈는데 1000명중에서 780명이 놀랍게도 주일날 드리는 예배가 나의 신앙과 별로 상관이 없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주일날 목사님 설교와 자기의 신앙이 상관이 없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묻고 싶은 것은 왜 주일날 예배 드리는 것이 자기와 상관이 없는데 꾸역 꾸역 교회는 나오는가 입니다. 그기에 대해서 누구도 시원하게 대답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안 나오면 찜찜해서.... 그것은 기본이 아닙니까..?" 이런 이야기들을 하지만 그것은 정확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전국에서 예배를 마치고 나오는 사람 100명을 대상으로 앙케이트 조사를 했더니 예배를 마치고 교회 문밖으로 나가는 사람들 의 질문지 가운데서 이런 내용이있었습니다. "방금 드린 예배에서 목사님은 어느 성경 본문을 가지고 설명을 했습니까? 95퍼센트가 난 모른다"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5명이 안다고 대답을 했는데 그 다음날 전화해서 물어보니 그 중에 세 사람은 기억하고 두 사람은 잊어 버린 것입니다.
나는 처음에 그런 것들을 믿지 않았습니다. 당시 내가 강의를 하고 있었는데 강의를 하다 말고 그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그곳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부목사, 전도사..... 다들 그런 사람들 이었습니다.
"그날이 월요일 이었는데 주일날 낮 예배 설교 본문이 어디였냐고 하니 12명에게 물었더니 2명이 대답을 했습니다. 두 명중에 한 명은 정확하게 대답을 하고 한 명은 계시록에 뭐 말타고 지나간 이야기 였는데 생각이 잘 안난다는 것입니다. 또 한 사람은 아이 보느라고 못봤다고 하고 한 사람은 차 빼느라고 못들어다는 것입니다."
교육자들이 그러니깐 그 밑에 평신도 들은 말할 필요 없을 정도의 수준 이하의 예배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냥 웃고 있지만 그냥 웃고 지날 얘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강의를 실감 나게 하기 위해서 현실을 좀더 짚고 넘어 가겠습니다.
영화 구경 갈 때는 15분 먼저 가서 로비에서 영화 끝나기를 기다립니다. 왜냐면 처음부터 안보면 재미 없으니깐..........
예배는 그렇게 강조를 해도 15분 전에 와서 기도 하면서 예배를 준비하는 것이 몸에 베여 있는 그리스도인이 오늘 강의를 듣는 여러분들 가운데도 몇 분이나 되는지 저는 의심스럽습니다. 수요일 같이 어짜피 직장 끝나고 오면 여기에 일찍 올수 밖에 없도록 운명 지어진 경우를 제외하고 일찍 오기 위해서 잠을 줄이고 화장을 일찍 해야 하는 수고를 마다 하지 말아야 하는 주일 오전 예배를 말합니다.
정말 한심 할 정도 입니다. 제가 생각 하기에는 15분 전에 교회당에 나와서 예배를 준비하는 사람이면 1000명 교인 가운데 불과 5-60명 정도 될까 말까 할 것 이라 생각 합니다.
일찍 온다고 문제가 아닌게 아닙니다. 일찍 온 사람들도 교회당에 와서 가만히 보면 영화 상영을 기다리는 것인지 급식을 기다리는 것인지....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는 태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앉아서 옆 사람과 잡담하고 이야기 하고 .....뭔가 하나님께 대한 거룩한 갈망과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는 두려움에 떨리는 마음의 준비가 전혀 안된 상태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백화점에서 물건만 싸게 판다고 해도 박 터지는 인생들이 예배당에는 항상 예배 대접 하기를 기차 대접하기 만도 안 한다는 것입니다. 기차 시간이 늦으면 기차는 떠납니다. 예배도 시간되면 시작합니다. 그런데 예배야 떠나든 말든 난 늦게 가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러면서 예배를 드린다고 하는데......
예배가 시대의 흐름에 따라서 점점....퍼펙트 하게 시간이 짧아져 가고 있습니다.
제가 국민 학교 다닐 때 어른들 예배에 가보면 목사님이 이렇게 말씀 하신적이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일주일에 두 시간 나와서 주일 예배 드린다고 그것이 신자인줄 압니까?" 그랬는데 중학교 때쯤 가니깐 목사님이 언제가 설교 하는 것 들으니깐 "여러분들이 1시간 40분 예배 드리면 그게 신자 인줄 압니까?" 했는데...
요즘은 " 여러분이 1시간씩 예배 드리면 그게 신자인줄 압니까..? 이렇게 도전하는 사람도 그렇게 흔하지 않지만 ... 그렇다는 것입니다.
제가 이 교회 오기 전에 부교육자로 몸담았던 교회에서는 많이 모이면 700명 이고 예전에 더 많이 모일때는 1200명 까지 모이든 교회였는데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교회였습니다.
65분에 모든 예배를 마쳤는데 예배 순서가 23가지 입니다. 이 이야기는 찬송 한 장 두 장 이런 얘기가 아니라 종류가 23가지 라는 것입니다.
예배시간은 짧아져 가면서 종류가 아주 많아져서 .. 예를 들면 개신교 교회 인데 카토릭 흉내를 내서 공동 기도문을 써서 공동으로 낭독을 하는 것도 있고 성가대 찬양을 하고 헌금 시간이 있고 또 무슨 시간에 솔로가 독창을 하고 장로님들이 광고를 하고.......... 굉장한 순서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순서는 그렇게 많아져 가는 데 시간은 짧은데 참 재밌는게 장로교 감리교, 순복음교 모든 교회의 교단장들이 모여가지고 무슨 카르테를 맺은것도 아닌데 어떻게 예배가 모두 끝나는 시간이 대부분 12시 10분 입니다.
그렇게 예배를 드리기에 다른 순서를 줄일수는 없는 것입니다. 물론 줄일수는 있겠죠.
어떤 식으로 하냐면 찬송가 460장 1절만 부르고 마치겠습니다.
그렇게 찬송가를 1절만 부르고 허겁 지겁 마치는 사람들이 뭐 그렇게 중요한 일이 있냐면 교회 식당에서 밥 먹으려고 줄 서있지 않으면 로비에 앉아서 노닥 거리지 않으면 자기 승용차 타고 주일날 오후에 볼일 보러 나간다는 것입니다.
제가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그것입니다. 찬송을 1절만 부르고 마칠 정도로 그렇게 귀하신 분들이 뭘 굳이 예배를 드리러 나와서 예배를 드리냐 는 말입니다.
예배에 참석하고 예배를 드리는 목표 자체가 끝 나는게 목표 인 것 입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사람들이 주일 낮에 왜 그렇게 교회로 모임니까? 자기가 그렇게 물어 놓고는 대답하기를 예배 빨리 마치고 집에 가기 위해서 모이는 것 입니다" 올때부터 내 평생 소원 이것뿐 "빨리 마치고 집에 가는 것" 그것인 것입니다.
그러고는 늦게 들어오는 것입니다. 15분이 넘었는데도 고개를 숙이고 들어 오고...예배 시간은 짧은데 순서가 그렇게 많다는 것입니다. 순서가 많다 보니 이제는 순서를 알리는 종이 없이는 예배 드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 외우기 힘드니깐....
그래서 순서지가 만들어 지는 것입니다. 다른 순서는 교인이 다 동참하는 순서입니다.
일어서고, 교독문, 찬송... 예배 자체가 하나님 앞에 드리고 뭔가 하나님과의 만남을 기대한다기 보다는 예배를 견디는 것입니다. 예배 견디기 극치는 설교 견디기 입니다.
설교 시간이 되면 그 예배는 절정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면 사람들이 설교를 안 듣는 것입니다. 전에 있던 교회 2층에서 내려다 보면 과간입니다. 한심합니다.
사람들은 고개를 다 숙이고 있는데 목사님 혼자서 설교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목사님 자신도 설교를 하면서 설교 자체가 인격 적인 교류가 되어야 한다는 개념 자체가 없는 것입니다.
설교가 우리 국민 학교 때는 그저 한 시간 정도라고 봤습니다. 이제는 한 시간 설교하면 완전히 원시인 입니다. 제가 이번에 한국 복음 주의 신학교에 가서 논문 발표를 하는데 질문을 했습니다. 예배시간이 어떻게 되냐고....
"우리는 아주 특별한 경우에는 두 시간 반 세시간 반 되는 경우도 있지만 보통 두 시간 정도면 마칩니다. 이런 설교를 얼마나 하냐고 물었습니다. 짧으면 70분이고 길면 90분인데 아주 길면 120-180분 된적도 있다고 하니깐 사람들이 뱃살을 잡고 웃는 것입니다."
참 이상한 람보와 같은 사람을 만났다는 듯이 그렇게 웃었습니다.
난 속으로 당신들은 날 보고 웃지만 날보고 웃는 당신들이 난 웃긴다" 마음 속으로 그랬습니다. 예배 시간에 예배가 시작 되면 사람들은 주목합니다. 그러나 이미 벌써 처음 부터 설교를 들으려고 하는 의지가 희박한 것입니다.
들려오면 들리겠다" 그런 태도 인 것 입니다. 천천히 주보를 읽기 시작 합니다. 우리교회 는 주보를 만들지 않습니다. 그거 보기 싫어서...
설교 시간에 주보 안 본다는 보장이 있으면 주보를 만들수도 있습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무엇을 하냐면 설교를 회피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예배 순서 다 보고 뒷편으로 넘어가면 뭐가 나오냐면 광고가 나오는데 광고 다 읽고 그 다음에 헌금 낸 내역을 보는 것입니다. 가로로 몇 명인지... 세로로 몇 명인지... 나누어 보면 평균 얼마인가.. 아! 감사 헌금을 평균 3만원씩 했구나. 그러면 나는 어떻게 되나 2만원만 했는데...
그래도 설교가 안 끝나면 다시 돌아가서 주보를 읽습니다. 틀린 글자가 나오니 호주머니 뒤져서 빨간 펜을 꺼내서 교정 보기 시작 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설교가 아직 안끝나....지금 제가 하는 얘기는 35분 설교를 얘기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할수 있는 일은 팔짱을 끼고 무거운 다리를 다른 다리에 걸치고 조용히 묵상에 잠기는 것입니다. 허공을 응시 하거나 눈은 뜨고 있지만 이미 초점은 없습니다. 그냥 멍하니 쳐다 본다든지 시계를 본다든지.... 상하 좌우.... 졸다가 성경 떨어트리는 사람, 졸다가 떨어트린게 아니라고 폼을 잡는 사람... 총 천연색 입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그기에는 하나님이 안 계십니다. 여러분들이 지금까지 배운 하나님의 성품과 기독교의 진리에 대해서 깊이 묵상하면서 과연 그곳에 하나님이 계신가 생각 해보세요.
우리가 배운 하나님은 그곳에 계실수 없는 분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오실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안 나타 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볼 때 나도 목사 입니다. 나도 다리 달린 사람인데... 단란 주점엔들 룸 싸롱엔들 못들어 가겠습니까? 술 먹으러야 안들어 가겠지만 전도 하러는 들어 갈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여러분들이 저를 볼 때 만약 단란 주점에서 나를 만났다면 "아마 아니겠지" 일단 그렇게 생각을 하겠지만 저녁때만 되면 김 목사는 꼭 그곳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 하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죄악의 시궁창에도 하나님은 나타 날수 있습니다. 바울과 같은 사람에게도 나타 나셨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그런 곳에 하나님은 나타 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과 경외하는 마음이 없고 하나님에 대한 갈망이 없는 예배의 현장에 나타 나겠냐는 것입니다.
그러고 예배를 드리다가 많이 졸던 사람 아주 신실하게 졸던 사람들도 설교가 끝나고 "다 같이 기도 하겠습니다" 하면 그때는 딱 깨는 것이죠. 졸음은 이제 완전히 깬 것 입니다.
왜? 이제는 예배가 끝날 소망이 보이니깐.. 설교가 끝나면 후다닥 헌금하고 찬송하고 축도하고 마칩니다. 그러고는 밖으로 쏟아져 나오는 것이죠
예배 중 에 은혜를 깊이 체험 한 다음에 하나님의 참사랑을 깨닫고 그 진리에 대한 깨달음을 통해서 마음에 그리스도의 은혜로 인한 감격의 눈물이 흐르면서 참회의 슬픔으로 볼에 흐르는 눈물을 닦으면서 " 그렇습니다, 하나님 지금 까지는 하나님의 뜻을 몰라서 그렇게 살았습니다. 오늘 예배 시간에 주님을 만나고 보니 내가 살아온 것이 모두 불순종과 죄악으로 일관된 생활 이었습니다. 나를 그리스도의 피로 용서 하시옵소서, 내가 주님의 뜻대로 살겠습니다....." 그렇게 흐르는 눈물을 닦으면서 예배당을 걸어 나와도 험한 세상이 변할까 말까인데 또 우리 자신이 얼마나 변하지 않는 다는 것을 잘 알지 않습니까...?
우리가 변하는 것이 흐르는 눈물 한 두번으로 해결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안 변하는데 예배당을 걸어 나오는 사람들은 예배 끝난지 5분 밖에 되지 않았는데 설교 본문도 기억을 못하고 걸어나오면서 과연 그들의 마음속에 무슨 생각이 있겠습니까?말은 하지 않지만 예배가 끝나고 걸어 나올떄 예배 때 보여줬던 얼굴 모습과는 다르게 그렇게 행복해 보이는데.... 그 얼굴이 보여 주는 것은 이것입니다. "휴!! 예배가 끝났다. 남은 시간은 숨을 좀 돌릴수 있겠구나. 어짜피 주일 오후는 모든 사람이 참여 하는 것이 아니니깐....." 그런것이 결국은 신앙 생활에서 예배를 드리는 모습인데 그런 사람들이 성경의 본문도 제대로 기억을 못하는데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거룩한 의지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어제 읽었어도 어디 까지 읽었는지도 기억을 못하고 예배를 드렸어도 하나님과의 진정한 만남이 없는 이런 식의 예배를 계속 하는 것이 정상적인 예배생활을 계속 이어 가게 할수 있는가 하면 불가능 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기억 해야 합니다.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계속 만나면 우리의 죄가 은혜의 비를 맞으면서 죽습니다.
그리고 우리 속에 거룩한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소원들이 싹이 나고 자랍니다.
그런데 이런 것 들이 그치고 나면 예전에 자기가 어떤 신앙의 경험을 가지고 있던 것과는 상관 없이 마음이 강퍅해 지고 그 사람의 영혼 속 에서는 죄악이 무성하게 자라게 됩니다.
예배의 기대감이 점점 사라져 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성경에 가까운 교회의 시대였다고 인정되는 청교도 시대에 거룩한 언약 도 들이 가지고 있었던 굳건한 확신이 무엇이냐면 "예배는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은혜를 주시는 가장 중요한 통로 였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움직일수 없는 거룩한 법칙이었습니다"
그것을 굳게 신뢰 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이 그러면 이렇게 물을수 도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배를 통해서만 은혜를 주시나요? 우리는 그렇게 말 할수 없습니다.
어거스틴 의 회심을 생각 해보십시오. 그는 그렇게 많은 예배를 드렸지만 예배 속에서 회심을 한 것이 아니라 동네 아이들이 고무줄 놀이 하는 것을 보면서 회심을 했던 것입니다. 들어라,읽어라, 집어라, 읽어라... 그소리가 가슴에 와 닿아서 성경 책을 펴서 로마서를 읽다가 회심을 경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유명한 요한 웨슬레는 예배를 드리다가 성령 세례를 경험 한 것이 아니라 알드 스케이트 가에서 마틴 루터 의 로마서 주석 서문을 읽다가 불을 받았습니다.
챨스 피니는 변호사 사무소 옆방에서 기도 하다가 성령의 강력한 권능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회심 시키시고 은혜를 주시는 방법은 다양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이것을 기억 해야 합니다. 그런 다양한 방법으로 하나님이 성령의 은혜를 주시지만 그것은 모두 특별한 것이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은혜를 주셔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는 일반적인 가장 중요한 원리는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라는 것입니다.
비유를 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군대 간 아들을 만나는 방법은 여러 가지 일 것 입니다. 어떤 때 는 사역을 나가다가 우연히 만나기도 하고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메 달리면서 만나기도 할 것 입니다. 가장 정상적인 방법은 정해진 날 정해진 장소에 가면 모든 사람들이 자유롭게 만날수 있습니다)
왜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이 있는 예배를 드리면 하나님이 찾아 오시고 그 백성들이 하나님을 만날수 있고 만나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거룩한 삶을 살아갈수 있는 깨달음과 은혜를 주시기로 약속되어 있는 방편들이 있는데 왜 그런 것 들을 버리거나 하찮게 생각하고 미친듯이 찬양을 불러야 된다든지, 아님 뜨겁게 기도 생활을 해야 한다든지..... 신앙 생활에 어떤 특정한 한 방편을 가지고 하나님을 만나는 수단으로 삼으려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잘못 된 것입니다. 모든 방법을 하나님이 사용하시지만 교회를 움직여 나가시고 당신의 백성들을 위해서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죄악에서 용서하시고 모든 허물에서 구속하시고 그들에게 참된 하나님의 뜻을 보이시고 식어진 그들 가슴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경외심을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녹슬지 않는 방편이 바로 예배 라고 하는 것입니다. 청교도 들은 그런 점에 있어서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결국 성경 전체를 보면 하나님의 나라의 회복은 예배의 회복을 지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아담과 하와가 처음 창조 되었을 때 하나님과 온전히 예배하는 관계..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살았고 그때는 죄가 없는 시대 였습니다. 완전한 예배의 영적인 상태에 살았던 것입니다.
죄가 들어오면서 이 예배가 파괴 되어버렸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배 하여야 할 백성들이 하나님을 훼방하고 감사치 않고 영광도 돌리지 않게 된 것 입니다.
그런 세상을 처음 창조 하실 때 백성과 함께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을 경배하던 그런 경배의 관계로 돌이킬 날들을 꿈꾸시면서 하나님께서 당신을 아는 백성들 가운데 예배를 심어 놓은 것입니다. 처음에는 제사로 시작 되는 것 이었습니다. 그것이 신약에 예배로 이어졌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상 백성과 어떻게 차이가 나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생생한 장면이 바로 예배의 현장인 것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한 말 가운데 이런 말이 있습니다.
"봐라,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민족 가운데 하나님이 이렇게 기도를 들어준 민족이 어디에 있었느냐? 이렇게 가까이에서 하나님을 누릴수 있었던 그 민족이 어디에 있었느냐?"다시 말하면 선택된 거룩한 백성의 가장 영광 스러운 특권은 그분을 찾을 때 그분이 찾아 오시고 이 낮고 천한 피조물인 우리들을 그리스도 예수의 구속의 은혜 때문에 우리같이 비천한 죄인 가운데 찾아오셔서 당신의 영광을 보여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 이었습니다. "쉐키나, 샤칸(거하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임재가 드러 나는 것입니다. 쉐키나의 특권을 가졌던 백성들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시편을 읽어 보면 아니 모든 구약을 읽어 보면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시도다, 계시도다... 하는 히브리말로 "야샤브" 라는 단어가 5000번 이상 쓰여진 단어 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시도다 하는 것은 상징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이 진짜로 계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인격적으로 훌륭한 분과 마주 앉아 있으면 그분이 없이 혼자 앉아 있는 것과는 다른 그 무엇을 느낄수 있을 것입니다. 그분이 거기 없으면 능히 할수 있는 행동도 그분이 계시므로 못하거나 혹은 그분이 없으면 먹을수 있는 나쁜 마음도 그분의 인격에 영향을 받아서 그 마음이 다른 마음으로 변하는 것을 충분히 상상 할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분이 인간이 아니라 완전하고 거룩하신 하나님 이라고 한번 생각 해 보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 백성들이 영향을 받지 않을수 있겠습니까?
그 백성들이 그런 하나님의 찾아 오심을 통해서 깊은 영향을 받을 때 그 예배의 현장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기가 이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특별한 대접을 받고 있는, 하나님과 매우 독특한 관계를 맺고 있는 선택된 백성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깨달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예배중에 찾아오셔서 그 백성들을 깨닫도록 은혜를 주실때에 그들은 비로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아야 할 삶이 이런 것이라는 것을 실제로 알고 살아갈수 있는 힘을 공급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청교도 들이 가지고 있는 확신 이었습니다.
청교도 가운데 데이비드 클락션 이라는 사람은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예배는 공적인 예배와 사적인 모든 예배를 포괄하는 넓은 의미가 있습니다. "라트레이야" 란 말로 예배란 말이 번역 되었습니다. 이 말은 쉽게 생각 하면 11시에 예배 하는 것만 가르키는 것이 아니라 전 삶을 모두 포괄하는 그런 단어의 의미 입니다.
예배 자체가 하나의 11시부터 12시30분 사이에 드리는 한정된 예배의 개념이 아니라
예를 들면 삶 전체... 로마서 11장에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할 때 그것은 11시 예배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그 앞에 보면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이것이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이것은 분명히 11시 예배 만을 얘기 하는 것이 아니라 인생 전체를 포함하는 예배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 해야 할 것 이 있습니다. 두 가지 극단을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는 예배의 개념 자체를 아주 넓게 보면서 넓은 예배 안에 모든 것이 다 통합 되기 때문에 공적으로 정해진 시간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여서 예배 드리는 것이 개인 적으로 하나님을 찬송하고 기도한다는 것과 , 직장이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면 산다는 것과 전부가 울타리로 모두 한가지다 이렇게 울타리 자체를 허물어 버리는 사상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젊은이들이 그런 사상에 굉장히 매료 되어 있습니다. 그런 결과를 통해서 얻게 되는 것이 무엇이냐면 삶이 예배처럼 바뀌는 것이 아니라 예배가 삶과 하향 평준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쉽게 말씀 드리면 아까 말씀드린 것과 거의 하나님 자신이 없는 것 처럼 마치 국민 학교때 조회 하는 것 처럼 , 민방위 교육을 하거나 중고등 학교때 담임 선생님 종례 하는 것 처럼 ... 그런 식으로 예배를 드리는 태도는 그들이 밖에 나와서 그렇게 살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넓은 의미에 예배라고 하는 삶을 능가하는 좁은 의미에 예배도 없고 좁은 의미에 예배가 갖는 영성을 능가하는 넓은 의미에 예배로서 삶도 존재 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증거 되는데 와서 졸고 떠들고... 그렇게 하는 것은 세상 살아 갈 때 성경 말씀과 상관 없이 살아 가는 그 사람의 삶에 연장 선상이지 예배 시간에만 그런 일들이 일어 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런 예배의 현장을 보면서 굳이 한 사람 한 사람을 흥신소를 붙혀서 예수 믿는 사람 처럼 사나 안 사나 조사 해보지 않아도 이미 우리는 그 사람의 삶의 수준을 금방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어떻게 보냐면 아예 예배와 삶을 이월론으로 생각 해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예배 드리는 이것만 중요하고 나머지 삶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 하면 예배를 마치고 세상에 나아갈 때 지극히 우울한 태도를 가지고 나간다는 것입니다. 왜냐면 "예배시간에는 신비한 체험도 있고 하나님의 은혜도 있고 찬송도 있어서 참 즐겁고 행복했는데 아! 이제는 내가 다시 세상으로 나가는 구나. 하나님! 다녀 오겠습니다. 실패 할거야 뻔하지만 그래도 한번 가보고 회개 할 제목을 만들어 오겠습니다"
그러고 가서 직장을 다니면서도 늘 기다리는 것은 주일 예배 아니면 수요예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고는 직장에서 무슨 일을 시키면 " 아! 더디어 마귀가 역사하는구나"
이런 것은 이원론 적인 태도 인 것 입니다. 신앙 자체가 현실 도피 적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신앙 생활은 기쁨이 없고 늘 우울 하다는 것입니다. 다 잘못 된 것입니다. 정상 적인 방식은 무엇이냐면 넓은 의미로서 삶의 예배를 인정하는데 넓은 의미의 예배와 좁은 의미의 예배... 좁은 의미의 예배라는 것은 이렇게 모여서 정해진 시간에 하나님의백성들이 하나님을 경배 하는 것입니다. 그 두개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 하냐면 계란과 같이 이해 하는 것입니다. 넓은 삶의 원이 있고 그 안에 좁은 의미 로서의 공적인 예배가 있습니다. 넓은 의미의 예배로서의 큰 원과 좁은 의미로서의 고유한 공적인 예배 둘 사이에 아주 원활한 교통이 흐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세상에서 믿음으로 신실하게 주님을 경배하고자 하는 예배의 정신이 하나님께 대한 경배 입니다.
하나님을 경배하고자 하는 정신을 가지고 투철하게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을 살다가 그런 정신을 가지고 돌아와서 고유한 의미에 좁은 예배에서 마음을 다하여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경배하며 예배를 드릴 때 거기에서 하나님이 자신의 삶에 있어서 판단하는 말씀을 듣고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은혜와 능력을 경험하고 말씀을 깨닫고 감화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새롭게 하고 죄를 참회하고 그런 예배의 정신으로 삶의 현장으로 나오는 이런 넓은 의미의 예배와 좁은 의미의 예배가 교통하는 그런 것이 바로 성경이 얘기하는 예배의 정신 이라는 것입니다. 예배 하기 위해서 살고 살기 위해서 예배 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공식이 언제나 되어져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역시 엄밀하게 이야기 하면 결국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이 비로소 삶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로 인생을 살아 갈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착하게 사는 사람들이 교회에 들어온다고 해서 그들이 곧 하나님 앞에 변화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고유한 예배의 공적인 예배 "퍼블리 서비스, 퍼블리 워십" 이것이 가장 중요한 우리의 고려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데이비드 클락션은 이런 의견을 개진 하는데 상당히 가슴에 와 닿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 하나님은 개인 적으로 하나님을 높이고 찬송 할 때 도 경배를 받으시지만 그것보다는 많은 다수의 의해서 경배를 받으실 때 하나님의 이름이 더 영화 로워 진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 마음에 이런 의문을 가질수 있을 것입니다.
그 청교도는 물량주의 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요? 그것은 아닙니다.
물량주의 적인 사고방식 때문에 그런 말을 한 것이 아니라 이 땅은 결국 하나님이 창조 하신 땅이고 이 땅이 하나님의 나라가 된다는 의미는 하나님이 한 사람 한 사람 의 마음속에서 그에게 온전히 왕이 되어서 지배하시고 한 사람 한 사람들을 주님이 신령한 은혜로 그들을 통치하고 말씀으로 다스리기 때문에 그런 다스림이 온 땅에 충만하게.... 하박국 선지자의 말처럼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온 땅을 뒤 덮는 경배하는 예배가 실현 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실현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반드시 다수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영역 안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하나님을 경배 하는 것이 마지막 하나님 나라의 비젼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얘기하는 것은 물량주의 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인격 속에 주님이 오셔서 그를 진정으로 통치하시고 은혜를 주셔서 그가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할 때 그가 무엇을 하고 싶겠습니까?
주앞에 나와 경배 드리리다. 주 계신 곳에 기쁨 가득 누구와도 무엇과도 바꿀수 없는 예배 드림이 기쁨 됩니다~~
청교도들의 저자 가운데는 달콤함이란 말이 많이 나옵니다. 데이비드 브레너 라는 사람의 일기를 읽어 보면 번역된 일기 가운데 달콤함 이란 표현이 많이 나옵니다.
우리는 사탕을 먹을때나 남녀가 만날 때 그런 말을 합니다.
조나단 에드워드의 저작에 보면 스위트 니스" 라는 단어가 엄청나게 많이 나옵니다.
그런 대부분을 어디에서 맛 보았냐면 기도, 예배, 설교 성도의 교제 속에서 나왔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달콤함의 체험을 성도들이 예배 속에서 많이 경험 한 것입니다.
"그런 것을 보면 저도 여러분 들 만큼 불행해요. 20살 때 회심을 해서 신학교에 들어갈 때 까지 우리 예배에 주님이 오셨구나, 정말 황홀하구나, 정말 달콤하구나, 이것이 예배의 즐거움이구나...... 이런 것들을 성령으로 충만 할때도 느껴 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얘기하면 이런 의문이 생길 것입니다. " 그럼 당신도 예배와는 상관 없이 성령 충만 해 졌는데 우리가 굳이 예배라는 주제에 가망성이 없는 거의 빈사 상태에 가있는 예배를 우리가 설친다고 해서 살아 날것도 아닌데 어떻게 합니까...? 그런데 그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원리적으로 옳바르지 않으면 성령 충만 하지 않으면 그 성령 충만 한 것이 항상 하나님의 뜻을 옳바르게 해석 하지 못하는 누를 범하게 됨니다. 성령 충만 하면 착각 하지 않을수 있어요? 그것은 이런 이야기 입니다. 영적인 수준과 상태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공부를 할때도 운동 할때도 최고의 컨디션이 좋아서 운동하는데 제가 죽어도 못하는 체력 테스트가 4-5개가 있었는데 가능 했다는 것입니다.
이봉주가 있고 내가 있다고 합시다. 둘이 같이 뛰면 이봉주는 완주 하지만 나는 42키로가 아니라 4.2키로도 못 간다고 확신 합니다. 무슨 말이냐면 아무리 상태가 성령 충만해도 충만한 상태에서 꿈꾸고 판단하고 이해하는 것은 충만한 상태에 영향을 받는게 아니라 수준에 영향을 받는 것입니다.
배운 것이 예수 믿으면 복 받고 성령 충만 하면 운수 대통한다. 그런 것 밖에 못 받은 사람은 성령 충만 하였을 때 생각하는 것이 그런 정도밖에 안된다는 것이죠.
죄에 대한 감각도 생겨 날수 있지만 그러나 모르는 것은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제가 주장 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찬양을 하면서 굉장히 뜨거워 보이는데 가서 뜨겁게 설교 하는데 설교 하면 할수록 차갑게 빛나는 교회를 많이 보아 왔습니다.
그것이 바로 묘미 입니다. 결국 예배 속에서 하나님을 경험 하고 변하는 놀라운 변화를 사람들이 경험 하게 될 때 신앙에 의한 인식에 지평들이 변하고 확장되어 가는 역사들이 나타 나는 것입니다.
결국은 예배 자체가 하나님 나라가 오게 하는 중요한 방법이고 하나님의 나라의 비젼은 예배하는 온 세상의 비젼과 통한다는 것입니다.
성도의 삶은 두 가지로 요약 할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절대 순복하고 두려워 하는 마음으로 예배 드리면서 그러나 두려워 하는 것이 단순한 두려움이 아니라 그 두려움 속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감격을 맛보는 것입니다.
두려움과 감격이 뒤섞인 놀라운 체험이 있는데 이것이 경외의 체험입니다.
경외의 체험을 하고 하나님의 성품과 경험을 반영하는 삶을 이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을 두려워 하는 마음으로 "미시파트" 의로운 길을 걷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체험 했기에 그런 사랑을 베푸는 "헷세드" 즉 자비의 삶을 살고 하나님과 동행 하는 것이 하나님 백성의 거룩한 삶이고 거룩한 삶을 통해서 이세상이 하나님이 누구인지 깨닫게 되고 자신들이 살고 있는 거룩한 삶이 온 세상에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찬송하고 거룩해 지기를 꿈꾸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비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 지기 위해서는 하나님 나라의 씨앗들이 자신의 내면에서 먼저 경험 되어 져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였을 때 하나님의 나라가 어떠한 나라 라고 하는 것을 맛 볼 수가 있어야 합니다. 만약 맛 볼 수 없다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기대감을 가지고 언제 올지도 모르는 하나님의 나라의 꿈을 가지고 편하게 살수 있는 길을 버리고 고달프게 살고 핍박을 받지 않고 환영을 받을수 있는 길이 있는데도 핍박을 받고 세상에 꿀이 될수 있는데도 소금이 되어서 버림을 받는 길을 걸어 가려고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데이비드 크락션의 지론처럼 모든 넓은 의미가 중요하지만 그러메도 불구하고 가장 중요한 것은 정해진 시간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여 드리는 공적인 예배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장 하나님 앞에 중요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모이기만 한다고 해서 무슨 일이 일 이 일어나는 것은 물론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놀라운 일을 행할 때는 그 백성들이 모두 모였을 때 그 일들이 이루어 졌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성회도 사람들이 모여 졌을 때 놀라운 일들이 일어 났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이 모세에게 전수 된 것은 대표자에게 전수 되었지만 그 율법이 반포 된 것은 모든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선포에 믿음으로 반응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회중 속 에서 제시 된 것 입니다.
이런 것들이 성경 속에 면면히 흐르는 정신입니다.
느혜미아서에 나오는 부흥이나 에스라서에 나오는 부흥도 모두 사람들이 모였을 때 그런 일들이 일어 났습니다.
특별히 에스라가 하나님의 율법을 낭독할 때 수 많은 사람들이 통회 자복하고 자신의 모든 과오를 하나님 앞에 뉘우치고 삶을 개혁하는 놀라운 결단들이 일어났는데 그것도 모두 그들이 예루살렘에 모였을 때 그런 일들이 일어 났다는 것입니다.
물론 모인다고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당신의 일들을 행하시고 당신의 백성들 가운데서 하나님 자신이 매우 특별한 창조주 이시라는 사실을 수많은 백성들에게 심어 주시는 방법은 각자 안방에서 누워 있고 책보고 졸고 성경 읽고 ....그러다가 한 사람 한 사람을 찾아가서 역사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백성들이 모두 모였을 때 그때 하나님이 누구신지 장엄하게 경험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두가지 유익을 갖는데 하나는 자신이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는 하나님의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하시고 두 번째로는 공동체가 하나님 앞에 하나의 몸으로 취급되고 있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에서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인도해 가시는 원리였다는 것입니다.
예배가 무너지니깐 사람들이 공동체에 대한 사랑이 현저하게 식어 가는 것입니다.
예배가 하나님의 신령한 은혜로 넘치는 것과 그 예배에 모이는 회중들이 뜨겁게 사랑하는 것은 비례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이야기 하는 것은 예배 속 공동체에서 나누는 진정한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가 사람들을 찾아가서 의도적으로 사람들을 사귀는 그런 종류의 사회적인 코이노니아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예배를 드리면서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매우 특별한 사랑을 받는 존재라는 사실을 예배를 통해서 경험하고 자기가 하나님을 경험할 때 나 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존귀하고 귀한 영혼들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은혜 받은 사람들은 사람에 대한 가치가 달라 지는 것입니다.
자기가 하나님을 만났다고 하면서 영혼을 하찮게 여기고 지체들을 우습게 여긴다면 그 사람의 영성은 진정한 기독교 신앙이 얘기하는 영성이 아닙니다.
고린도 전서 13장을 강의 하면서 모든 기독교의 영성의 심장부에는 결국은 사랑이 있다는 표현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그렇게 경험 할 때 예배 속에서 공동체에 대한 사랑 공동체가 가지고 있는 놀라운 결속력들을 발휘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것들을 깊이 고려하면 예배가 범상치 않는 것이라는 문제를 접하게 되는 것입니다. 공적인 예배가 우리의 모든 신앙 생활에 있어서 유일하게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가장 중요 한 것 이다. 그리고 그것이 살아야지만 다른 모든 것이 산다고 결론 내릴수 있습니다.
물은 저수지에서만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저수지에 물이 마르면 논에도 물이 마르고 밭에도 물이 마른다는 것입니다. 왜냐면 모든 물길이 저수지에 대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물길의 흐르는 물을 보면서 "뭐 우리 논과 저수지가 무슨 상관이 있을까?" 이렇게 생각 하는 것입니다. 보이지도 않는 저수지가 바닥이 나면 결국은 멀리 떨어진 논과 밭이 가뭄에서 벗어 날수가 없는 것과 같이 가장 중요한 것은 예배 중에 하나님을 만나는 깊은 살아있는 예배가 우리 신앙 생활에 중심 자리에 서야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의지해서 단언해서 말 할수 있습니다. 살아있는 예배를 드리고 있는 한 그 영혼은 절대 절망 할 필요가 없고 그는 희망이 있는 사람 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방면에서 그가 살아 있는 것 같고 무엇인가 대단한 사람 같아도 예배가 죽어 있으면 언제인가는 그 영혼은 죽은 자와 같은 핍절한 상태에 도달하게 될 것 입니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는 게 아닙니다
(서점가에서는 5월이면 파리체 들고 있는 때입니다. 5월 에서 8월까지 거의 파리체 들고 있다가 9월부터 파리채를 놓기 시작해서 그 다음 해 3월까지 많이 팔려 나갑니다. 그때 시기적으로 가장 않좋은때 아마도 이때쯤(5월10일쯤) 이었던 것 같습니다. 예배의 감격에 빠져라를 썻는데 많이 팔렸습니다. 41630부 정도 팔렸다고 연락이 왔는데 그것을 일반 서적 시장하고 비교를 하면 곱하기 10을 하면 됩니다. 일반 서적 의 시장에서 41만부 이상 나갔다고 생각 하면 됩니다.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이 읽었던 것 같습니다. 저를 잘 아는 사람 한사람이 그 책을 읽고 자기가 감동을 받고 자기의 친구를 줬습니다. 친구라는 사람이 열심히 교회 다니면서 봉사 하는 분이셨는데 그 책을 읽고 크게 깨달음을 얻고 결론을 내린게 "내가 여태껏 예배 생활 한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너무 교만한 예배 생활 이었다. 그렇게 내가 성의 없이 예배 생활을 했기에 예배의 감격에 못 빠졌다고 생각을 하고 태도를 완전히 바꾸었습니다. 가족들에게도 다 그 책을 읽게 하고 15분 전에 교회 가고 헌금도 일주일 전에 준비하고 맨날 뒤에서 다리 꼬고 앉다고 이제는 정성껏 옷을 차려 입고 앞자리에 앉아서 단정하게 예배를 드렸는데 (6개월을 그렇게 예배에 드렸슴) 이 사람의 이야기가 자기는 여태 예배의 감격에 빠지지 못한 모든 원인이 성의 없는 예배 생활에 있다고 생각을 하고 회개하고 고쳤다는 것입니다. "예배의 감격에는 내가 빠지고 싶다고 해서 빠져 지는게 아니구나. 나는 빠질 준비가 되어 있는데 무엇인가 나를 예배 속으로 빠트리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했습니다" 그 사람은 틀림없이 그 책을 읽기 전보다 큰 혼란을 경험 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된다는 것입니까?
예배시간 15분 전에 오고, 삐삐를 꺼놓고 나면, 주보를 안보면........ 저절로 하나님이 만나지고 은혜가 되는지......... 이런 식으로 묻는 것은 어린 아이와 같은 질문입니다.
제가 있던 교회에서 전교인 새벽 기도를 했습니다. 광고를 하는데 "누가 오겠냐" 교회가 은혜가 넘쳐야지 사람들이 모이지 했는데 예상을 뒤업고 700명이 채 모이지 않는 교회에 새벽에 460명 정도가 모였습니다. 천안에서 새벽 3시에 출발해서 온 사람도 있었고..... 강단이 가득 찼습니다. 충격을 받았습니다. 은혜가 없는 교회에서 이럴 수도 있구나.....
더 큰 충격은 그 후로부터 일어 났습니다. 5시에 시작해서 15분 정도 예배를 드리고 기도 했는데 잠깐 기도 하는 소리가 나더니 주변이 조용해 져서 눈을 떠서 돌아보니 460명의 거의다 빠져 나간 것 입니다. 시계를 보니 5시30분 이었습니다. 그때 제가 깨달은 것이 있는데 사람을 모으는 것은 하나님의 도움 없이도 어느 정도는 가능하지만 모이는 그 사람들을 예배에 감격에 빠지게 하고 기도의 감격에 빠지게 하는 것은 인간의 프로그램 가지고는 안되구나 하는 것입니다. 요즘 새벽기도 큰 교회 유행이 뭔지 아십니까? 새벽 성가대가 유행입니다. 왜 그러냐면 쉽게 얘기하면 모이는 것은 우리가 하는데 깊은 기도로 채우는 것은 그런 프로그램 가지고 안되는 것입니다. 형식은 있는데 내용으로 그 형식을 채울수 없으니 자꾸 그런 이상한 것들이 들어와서 시간을 메우는 것입니다.
예배에 있어서도 마찬 가지입니다. 예배의 감격에 빠지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인도 카하시 지방에서 일어난 부흥처럼- 7-8살 먹은 아이들이 둘러 앉아서 기도 하면서 그렇게 우는 것이었습니다. 어른 들은 아이들 다 내버려 두고 은혜 받으러 갔는데...... "왜 우니?" 쬐금한 아이가 예수님은 우리를 이렇게 많이 사랑하셨는데 우리는 그 예수님을 이렇게 쬐금밖에 사랑하지 못하니까 이것이 그렇게 마음이 아파요" 그러면서 고사리 같은 손으로 가슴을 치면서 흐느껴 우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감격에 빠져 보고 싶지 않는 사람들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어떻게 해야만 예배의 감격에 빠지겠냐는 것입니다.
결정적인 대답은 요한 복음 4장24절" 에 신약의 예배의 가장 뛰어난 두 정신이 나옵니다.
"예배하는 자가 이렇게 예배 할지니 하나님은 이렇게 예배 하는 자를 찾으시니라. 그 앞에 나오는 예배하는 자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 할지니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가 주목해야 할 말은 "이렇게, 찾으시느리라" 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향한 경배 이지만 그 예배를 통해서 진정한 하나님을 향한 경배가 이루어 지고 우리가 그 예배를 통해서 하늘의 신령한 은혜를 받아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답게 사는 원동력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찾아 오시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예배 하는 자를 찾아 오신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뒤집으면 저렇게 예배 하면 하나님은 그곳에 나타 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배라는 것은 신령과 진정이라는 것입니다.
90퍼센트가 넘는 그리스도인들이 신~령~하게.., 진~정~으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히랍어 본문은 그런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번역 성경의 한계 인것입니다. 히브리 성경은 그 영과 그 진리 안에서 예배 하여라 로 되어 있습니다.
예배의 두 요소를 보여 주는 데 하나는 "영" 이라는 요소이고 또 하나는 "진리" 라는 요소입니다. "영" 이라는 요소는 세 가지와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라 는 성품을 상기 시켜 주면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 할지니라 라고 했습니다. 예배 자가 가슴에 깊이 새겨야 할 사실은 하나님이 존재가 영 이시라는 것을 상기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배에 있어서 가식적이고 외모 적인 것들이 아니라 하나님이 영이신 존재라는 방식에 어울리는 것으로 예배가 드려 져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고 인간은 영혼을 가진 존재 들이고 이 인간이 영혼을 가진 존재인 인간과 영이신 하나님과 교통이 이루어 지게 하는 분은 성령 하나님 이시고 성령 하나님의 교통 하시게 하는 사역은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기초로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영이신 하나님이 계시고 영혼을 가진 인간이 있고 둘 사이에 교통이 이루어 지게 하는 사역을 성령님이 하시고 성령님의 교통이 이루어 지게 하는 사역은 속죄 사역에 기초를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배는 엄격히 말해서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경배 입니다.
하나님의 영 이시라는 사실과 우리가 영혼을 가진 피조물이라는 사실과 이 사이에 교통을 가능하게 하시는 분이 성령이라고 하는 ... 이것들이 시사하는 것이 무엇이냐면 예배중에 임하셔서 예배를 구별되게 만들어 주시는 성령에 대한 이해로 시선을 우리에게 모으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인간은 죄가 들어온 다음부터는 하나님의 거룩한 영과 교통 할 수가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구원 받지 못한 사람들에게만 일어 나는 것이 아니라 구원 받은 사람들도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속죄 해 주셨지만 하나님을 믿는 사람도 얼마든지 범죄 할수 있으므로 죄가 있게 되면 인간과 거룩한 하나님 사이에 거룩한 교통은 수시로 방해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예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특징 은 참회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세상에 살던 사람들은 누구도 죄로부터 완전히 자유 로울수 없습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 누구든지 때묻은 영혼으로 하나님 앞에 예배 하러 나오는 것입니다. 예배 하러 나왔을 때 먼저 예배 행위를 통해서 깊이 받아야 할 것은 자기가 죄인 이라는 사실을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가운데서 깊이 느끼고 자기와 같은 비천한 인생이 거룩한 하나님 앞에서 용서를 받고 싶다는 참회의 마음이 예배에 앞서서 생겨야 합니다.
참회는 오직 성령만이 하게 하십니다.
이시대 교회에서 예배 속에서 참회의 정신이 살아 있는지 생각 해 보아야 합니다.
저는 회심을 하고 신학교 갈 때 까지 예배 중에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내가 죄인 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달아서 깊이 참회 한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회개 하게 되었냐고 묻고 싶겠지요? 찬송을 부르다가... 그때 좋아하던 찬송이... 그 참혹한십자가에 주 달려 흘린 피 샘물같이 늘 흐르니 죄 많은 형제여~~~ 그런 찬송을 부르면서 많이 울었습니다. 나는 참회 하게 하는 그 어떤 메시지들을 찬송을 통해서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한계가 많다는 것입니다. 너무 단편적이고 간단하기에 결국은 우리로 하여금 장엄한 진리가 무엇이고... 그 기독교의 진리는 우리로 하여금 구체적으로 어떤 삶을 살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인지.... 문제가 많고 혼동 스러운 나의 삶에 있어서 결국은 복음이 어떻게 나의 갈 길을 제시 해주는가 하는 전체적인 전망을 찬송에서 그 가사를 통해서 전체적으로 파악 한다는 것은 불가능 한 것 입니다.
그랬다면 예수님 께서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에게 성경을 해설 해 주셨겠습니까?
어쨌든 성령의 역사가 사라지고 있다는 증거 입니다.
여러분들이 드리는 예배 가운데서 자신이 죄인이라는 깊은 참회의 마음으로 녹아내려서 여러분들이 드리는 예배의 자리가 눈물로 흠뻑 젖었는 때 가 언제인지 기억 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당신의 백성들 답게 살아가는 원동력을 제공해 주시기로 한 은혜의 방편인 예배 속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살아 계심을 경험하고 참회 하지 않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계속해서 하나님의 영적인 민감함을 앗아가고 죄에 대해서 둔감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신령한 것에 대해서는 둔감하고 세상에 유혹에 대해서는 민감한 마음으로 우리를 계속 병들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실패 하게 만든 결정적인 이유는 예배 중에 오시는 성령의 역사하심.." 그것이 문제입니다.
제가 꿈꾸는 것은 " 우리의 예배가 권세가 느껴 지게 하옵소서" 라는 것입니다.
다른 곳에서는 못 느끼던 하나님을 예배당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장엄한 영적인 힘이 그를 위압하는 것을, 자유 하게 하는 것을 경험 하는 예배의 현장이 되어야 합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간증에서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테임즈 강은 아주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자살 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입니다.
한 중년의 신사가 인생이 완전 끝났다고 생각하고 죽으려고 테임즈 강으로 가다 생각 하니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로이든 목사님이 유명하다고 하는데 가서 한번 만나보고 죽자고 생각하고 저녁 예배의 자리에 참석하기 위해서 계단을 오르고 있었습니다. 그때 목사님의 기도 소리를 듣게 된 것 입니다.
...... 주님은 미끄러지는 자들의 발을 붙드시며.......... 그 기도 소리를 듣는 순간 성령께서 강력하게 역사 하셔서 그 계단에서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그것은 예배속에 깃드는 장엄한 하늘의 능력입니다. 성령의 능력이라고 말하지 않고는 설명이 안되는 것입니다.
제가 경험한 바에 의하면 성령이 예배 중 에 강력하게 임하시면 모인 사람들은 예배에 대해서 무관심 할 수가 없습니다. "예배 시간에 조는 사람들을 가르쳐서 몸은 교회 와 있으나 마음은 침대에서 딩구는 자라고 했습니다" 그런 자를 만나 주시겠습니까?
그런 사람들이 존재 할수 없다는 것이 저의 경험 입니다.
둘 중에 하나입니다. 은혜를 받고 하나님 앞에 크게 새로워 지든가 아니면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성령이 함께 하는 그 예배 속에 자기가 동화 되지 않으면 그 예배는 한없이 고통 스러워 지게 되는 것입니다.
형식적으로 예배에 참석하는 사람들에게는 성령이 역사하는 예배 보다는 성령이 찾아 오시지않는 그 예배가 훨씬더 참석 하기가 쉽습니다. 영적인 싸움이 예배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역사 하지 않으면 참회 하지 않습니다. 성령이 하시는 우선 적인 일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일을 깨닫게 하시고 우리의 죄를 알게 하시고 그로 하여금 뉘우치게 하는 일이 성령이 하는 일중에 가장 우선 적으로 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을 생각 할 때 우리는 언제나 "오소서, 우리를 깨닫게 하시고 거듭나게 하소서, 우리의 죄를 자각 하게 하소서. 참회 하게 하소서.........이런 식으로 기도 해야 하는데 그런 것은 바라지도 않고 혹시 성령이 오셔서 길 걸어 가는데 "얘야, 풀빵 장수 집어치우고 호떡 팔아라..." 이렇게 역사 하실 것이란 생각에 사로 잡혀 있는 것입니다.
예배의 성령이 강력하게 임하시면 놀라운 일들이 일어납니다.
저는 진정한 예배가 두번 밖에 없었다고 생각 합니다. 그것을 경험 하면서 이제껏 까지 배워던 신학이 그런 하나님을 담기에는 얼마나 초라한 그릇인가를 알게 된 것 입니다.
그것이 제 인생의 커다란 전환점이 된 것 입니다. 사도 바울의 다멕섹 사건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10년 전인 것 같은데 수련회 가서 예배를 인도하기 위해서 준비하는데 갑자기 내 온 전신이 하나님의 신에 사로 잡혔다고 하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분명하게 이 예배는 매우 특별한 예배 일것이라는 확신이 생겨 났습니다. 밖에서 들어오는 사람들이 다 들어오고는 모든 문을 잠그게 했습니다. 7월26일쯤으로 기억합니다. 폭우가 엄청 나게 쏟아지는 때 였습니다.
하천이 일곱게가 생겨 날 정도의 폭우였습니다. 군부대에다 구조 요청을 해 놓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집으로 갈수 있을지 못갈지...........
캄캄한 밤중에 희미한 형광등 몇 개를 켜놓고 패교된 교실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찬양을 드리고 설교를 하기 시작하는데 말이 날아가서 창과 같이 회개 하여야 할 사람들에게 꽂이는 장면이 보이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면서 그 자리에서 쓰러지기 시작 하는데 그곳에서 귀신이 나오는 것입니다. 사도 행전에 나오는 일들이 그대로 그곳에서 되풀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일을 크게는 두번 작게는 여러 번을 경험 했습니다.
설교가 끝났는데 하늘이 열리는 것 처럼 엄청난 회개의 역사가 일어 났습니다.
자발적으로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폭탄 맞은 것 처럼 사람이 걸어 나왔습니다. 자기의 죄를 고백 하는 것입니다. 회개 하다 하다 .... 졸다 해 버렸습니다. 프로그램이 있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강하게 임재 하시니깐 사람들로 하여금 그런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게 한 것 입니다. 두 시간 반정도 회개를 하고 질서 있게 예배의 분위기가 흘러 갔습니다. 참회가 끝나고 나니깐 강력하게 은사와 기쁨이 임하는 것이었습니다.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바뀌어 간 것 입니다. 저녁 7시30분에 예배를 시작 했는데 새벽 1시가 넘었는데도 예배가 끝나지 않았습니다. 두시쯤 되어서 예배를 전체적으로 정리를 했습니다.
끝나고 나서도 잠을 자는 것이 아니라 구석 구석에서 기도로 밤을 새웠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 놀랍게 변화 된 것은 예배에 태한 태도였습니다.
목마르게 하나님을 갈망할 때 어떻게 되는지 경험 했기 때문에 180분씩 예배를 해도 거의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기도하고 권면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교회당을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성령이 함께 하는 예배를 드린 결과 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이 오실 때 진정한 참회가 이루어 지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어떠한지 생각 해 보세요 설교 듣고 교회당 밖으로 나와서 오늘 들은 말씀의 본문도 기억을 못한다는데......... 있을수 있는 일입니까?성령이 오실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데 하나님이 찾아 오시는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성령이 함께 해야 합니다.
그것만으로 다는 아닙니다.
영과 진리 였습니다. 히랍어의 "알레데야" 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의 여인을 만나면서 예배의 심각한 결함을 보시고 유대인들이 드리는 예배의 결함도 함께 보신 것입니다.
존메가드 같은 사람은 이 문제를 이렇게 표현 합니다. 예수님이 이 여인에게 말씀 을 하신 것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드리는 예배의 방식이 열광적인 이단 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유대인들이 상종을 하지 않으므로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릴수가 없었습니다.
그리심상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 갔을 때에 축복을 선포하는 ...
그리심상에서는 축복을 선포하고 에발산에서는 저주를 선포 하는 것이었습니다. 축복을 선포하는 산을 예배의 장소로 삼고 성경 중에서도 모세 5경만을 인정을 하고 자신들 나름데로 신학적인 사고를 가지고 다듬어서 사용하는 경전을 사용 했습니다. 그들의 예배는 열광적인 이단의 요소를 가지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드리는 예배는 황폐한 전통주의 예배 였습니다. 죽은 전통 주의 예배와 펄펄 끓는 이단적인 예배 사이에서 참된 예배가 되기 위해서는 성령과 진리 안에서 드리는 예배가 되어야 했습니다. 진리의 요소를 얘기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가 되기 위해서는 거대한 성가대를 동원하거나 악기를 동원하거나....... 바람몰이 식으로 하는 예배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악한 것입니다.
근본적인 정신을 회복하지 못하게 하는 요소가 됩니다.
영국에서 미국으로 건너갔던 청교도들이 절대로 악기를 사용하지 않았던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문헌들을 보니깐 교회 음악의 기본이라는 오르간이 사용 된것도 13세기경부터 였다고 합니다. 그 이전 까지는 중세 시대인데도 사용 하지 않았습니다.
3-6세기 까지만 올라가도 모든 교부가 예배 속에서 음악의 위험을 실랄하게 지적했습니다.
진정 하나님앞에 올리는 찬양은 깨달은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심정으로 올리는 아름다운 찬양으로 만족을 했습니다. 청교도들은 찬양도 1부2부... 화음을 내서 기교있게 부르는 것에 대해서 거부감을 가졌습니다. 악기를 그렇게 좋아했던 사람들임에도 예배당에서는 악기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예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외부적인 자극에 의해서 어떤 감정을 불러 일으킨 것이 예배의 근본 정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당시로 보면 이방 신들이 섬기는 사람들이 하는 것이었습니다. 춤을 추면서 ....스스로 열광하는.... 인디언 들이 하는........ 그 사람들은 음악과 제사가 아주 밀접하게 연관 되어있습니다. 청교도 들은 신약 시대에 새 방식의 예배가 무엇인지 보여 주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신약 예배의 뿌리를 구약의 제사에서 찾는 것은 옳은면도 있지만 바로 이어 받아서 안되는 것도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속죄 사역이 완성 되었습니까...?
예를 들어 성가대의 기원을 구약의 다윗의 성가대를 끼워 맞추는 것은 부적절 하다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교회에서 옳바른 예배의 방식을 구현하기 위해서 성가대를 동원하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 합니다. 하고 있는 것을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원리적으로는 하지 않는 것이 맞다는 것입니다. 저의 소견입니다.
찬양의 기본은 모든 회중들이 하나님 앞에 함께 드리는 찬양 이었습니다.
교회의 역사를 보면 예배 의식이 화려해 져는 것과 영적인 상태는 반비례하는 곡선을 만들고 있습니다. 교회가 영적으로 바닥을 헤멜 때 예배는 공교하게 나타나는 공식을 보는 것입니다. 초대교부들이 교회 음악에 대해서 그렇게 과민한 반응을 보였던 것들이 다수 지나친 면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이 근본적으로 경고 하고자 했던 것들은 하나님의 진리 없이 열광하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예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찬양 집회 같은 것들이 진정으로 하나님 품으로 돌아가게 하는데 얼마나 기여 하겠냐 하는 것입니다. 물론 나름대로 기여하는 바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최종적인 방법 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열광하고 느끼고 싶어하는 위험한 충동적인 자극을 받아 들일려고 하는 마음은 어떤때 생겨 나냐면 역사적으로 보면 차갑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진정한 하나님의 인격을 만나고자 하는 감격이 예배 속 에서 사라질 때 사람들의 진리를 제쳐놓고 뒷구멍으로 자극적인 체험을 하기를 목말라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그리스도인이요ㅡ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때 사람을 고민하게 되는 것입니다. 엄마 아빠가 나에게 뽀뽀하고 사랑의 표현이 충분할 때 는 가끔 "너는 내가 낳지 않았단다. 다리 밑에서 주워 왔단다...." 그 말이 가슴에 와 닿지 않는데 뭔가 엄마 아빠로부터 섭섭한 일을 당하거나 동생들 과 비교할 때 자기가 소외 될 때 .... 그때는 "그래, 내가 정말 다리 밑에서 주워 왔나보다..." 그런 상상을 하게 되는 것과 마찬 가지 원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마찬 가지 입니다. 그 인격을 가까이에서 체험하고 느끼는 것 없이는 사랑의 관계를 지속하기 힘듭니다. "어떤 소설을 보면 한 사람은 미국에 한 사람은 한국에 떨어져 살면서 목마르게 그리워 하면서 긴 밤을 지냈다................" 특수한 경우에 그런 예가 없을 수는 없겠지만 인간과의 관계에서도 인격이 오고 가는 경험을 해야지 사랑이 유지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 가지입니다. 그런것을 경험하게 하는 방편은 하나님의 진리를 깨달음으로 그 깨달음이 성령과 함께 함으로써 통로로 해서 인격적인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 지고 그곳에는 정서적인 변화가 있습니다. 신앙의 회복이 있는 곳에는 항상 종교적인 감정의 회복이 있습니다. 냉냉하던 사람이 하나님께로 돌아가면 눈물이 많아지고 기쁨이 샘솟듯 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고백들이 넘쳐나는 정서의 놀라운 변화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 것 들이 이루어 지기 위해서는 그 자체를 목표로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예배는 자극이 가장 작은 예배 입니다. 오직 예배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예배가 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개신교의 예배의 정신을 회복해야 하는데 그것은 "단순성과 자유" 입니다.
단순하고 틀은 가지고 있으면서 구체적인 순서에 메이지 않는 것이 중용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령이 자유롭게 역사 할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11시에 예배를 시작하는데 1시에 제직회로 모인다면 밥 먹고 하려면 12시 10분에 예배가 끝날 각오를 가지고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날도 성령은 오시지 않을 것이라고 굳게 믿고 예배를 시작 하는 것입니다. 모든 일들이 종식 되기 위해서는 예배중에 정직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정직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설교자가 없이는 불꽃처럼 예배를 드리기는 어렵습니다.혼자서 불꽃 같은 예배를 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그 예배 속에는 성령도 계시고 축복해주시는 하나님도 계시고 갈망하는 마음을 가지고 나오는 회중들이 있고 .......
누군가가 정직하게 예배 속에서 참된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이고 참된 신앙의 도가 무엇이고 이 상황에서 하나님의 공동체 에게 하나님이 어떻게 살라고 하시는지 진실한 때묻지 않은 증언이 없는 예배는 하나님을 만나기 힘든 예배 인 것 입니다. 이것이
나는 예배의 감격에 빠질 준비가 되어 있는데 감격에 빠지지 않은지..... 에 대한 답 입니다.
예배에 있어서 진리의 요소는 설교에 의해서 충족 되어 지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많은 것을 노력하지만 여전히 갈급하고 목말라 하면서 살아가는 이유는 예배라는 샘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버리고 싶어서 버린 것은 아니지만 ....은혜의 수단이 있어도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지 못한다면 형식을 지탱하기 힘든 것입니다.
왜 기도 하면 하나님이 나와 교통 해 주시겠다는 약속이 있는데 기도를 해도 나는 아무런 응답도 없고 기도라는 형식 자체를 계속 할수 없게 되었는가?
예배에는 그런 약속이 명시 되어 있는데 드려도 우리는 이렇게 무미 건조한가..?
성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왜 이렇게 되었는지.... 삶을 고쳐야 한다면 고치고 , 태도를 고쳐야 한다면 고치고...... 그렇게 기초부터 더듬어서 진단해서 고쳐 가야지만 진정한 예배가 회복될 가능성이 보입니다.
한국 교회가 오랫동안 예배의 장엄한 축복을 누리지 못 한채 상당히 오래 동안 고전을 하게 될 것 입니다. 예배가 예배 다워 지기 위해서는 설교자 자신이 변해야 하고 교회의 단단하게 누러 붙은 인식이 바뀌어야 하고 장로님들이 바뀌어야 하고...... 그런 사고 방식을 고치지 않는다면 어떤 근본적인 일이 일어 날수 없는 것입니다.
근본적인 것들이 고쳐지고 수정 되기 위해서는 정말로 고민을 해야 합니다.
성경에 예배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기로 한 축복과 현재 로 맛보고 있는 비참한 실패 사이를 무엇으로 설명해야 하는 것 으로 고민 해야 합니다.
교회 전체가 참회하는 정신을 가져야지 자신의 영혼이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감격을 하든지 , 못 만났으면 억울해서 통회 하든지... 둘 중에 하나가 되야 합니다. 오가는 교회 생활을 통해서 마음만 강퍅해 지고 위선만 늘어나는 것을 제외하고 무엇이 하나님 앞에 선한 것이 있겠냐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예배는 하나님이 주신 가장 중요한 은혜의 방편이고 하나님의 은혜를 전달해 주는 도구 로서의 기능을 잃어 버렸다는 것이 한국 교회 위기라는 것이고 이런 것 들을 새롭게 회복 하기 위한 중요한 것은 본질적인 요소 두 가지 영과 진리의 문제를 해결 해야 하는 것입니다.
_ 강의 끝 -
질문 1
답: 찬양대를 다윗의 시대에 있었던 것을 지금하고 직접적으로 연관 시키는 것은 신학 적으로 무리가 있다는 얘기 였습니다.
구약에서 신약으로 넘어 올 때 연속성이 있고 비 연속성이 있는데 이 두 가지를 잘 추려 내야지 옳바로 성경적으로 연관된 정신을 탈수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찬양 하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의 가장 큰 것이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말하기를 하나님의 백성들을 만들어 놓은 것은 찬양 받으시기 위함이고 42장에서 보면 당신을 위한 찬양을 우상에게 주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 하시잖아요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 굉장한 경배의 수단 이었는 것은 분명 합니다. 우리는 음악 자체에 대해서 적대감 갖는 것은 신학적으로 매우 위험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찬송하고 살고 모였을 때 깊이 경험 하고 났을 때 즉시 일어나는 현상은 감사의 기도와 장엄한 찬송입니다.
출애굽기 15장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넌 다음에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300만명의 회중들이 장엄한 성가대가 되어서 미리암의 소고에 맞춰서 장엄하게 찬송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음악을 예배속에 축제적인 요소와 관련 시킨다면 축제적인 분위기가 먼저 있는 것이 아니라 죄에 대한 진실한 참회 와 하나님이 그 백성들에게 나타 나셔서 내가 어떤 일을 하는지 보라...는 놀라운 은혜를 주셨을 때 그 우울했던 공동체는 즉시 축제적인 공동체로 바뀌게 된 것 입니다. 제가 경고 하는 것은 공적인 예배 가운데서 음악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자극을 주려고 하는 것은 잘못 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참된 신약의 예배의 정신과 어울리는 것이 아닙니다. 저도 예배중에 모든 악기를 사용 할수 없다는 것은 ...정신 자체는 좋지만 당시는 로마 시대와 영국에서 건너온 청교도 들의 시대 인데 그 사람들이 단호 할 수밖에 없는 배경이 있었습니다. 로마의 시대에는 음악이 신상들을 섬기는 데 있어서 아주 밀접한 ..... 혼합 현상이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런데서 오는 반발이었고 청교도 들의 경우 영국 국교도 들의 반발이었습니다. 그것을 다소 감안하고 위치를 잡을 때 단순한 악기 ... 많은 사람들을 자극 하지 않을 악기는 사용 하지 않을수 있냐 생각 합니다.
로이드 존스 같은 목회자도 예배당에서 오르간 정도는 사용 한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제가 지적 하려고 한 것은 찬양이 가지고 있는 부패성이라든지 문제를 지적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예배 중에 도입 되어서 예배를 엔조이 하는 요소가 되어서는 안되고 깨닫는 요소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음악에 의해서 사람을 정서적으로 자극하고 사람들의 분위기를 뛰우려고 하는 음악적인 목표가 쉽게 예배에 있어서 우선 되어야 할 진리를 깨닫고 깨닫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인격을 경험하게 하는 예배의 중요한 목표에 거침 돌이 될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 음악이 되려면 곡조 자체에 사람들이 빠져 들게 하는 것은 찬송가 곡이 실패 한 것 이라 생각 합니다. 가사를 통해서 사람들에게 전달 되어지는 것이 중요한 초점이 되어져야 하고 그것이 전달 하기 위한 그릇이 리듬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랩으로 복음 성가도 만들고 실제로 공연 하는 사람들.... 저의 판단으로는 세상과의 접촉점을 만든다는 것으로는 어떨지 모르지만 정말 찬양 일수 있겠냐는 것은 회의 적입니다.
질문2
답: 교회 강단 자체가 피를 흘리면서 싸우고 파수하고 고쳐야 할 선포의 제목들을 잃어 버린 것이 예배를 빈사 상태로 오게 했다고 생각 합니다. 교회 계시록 회복이라는 책을 봐도 설명이 충분 할 것 같습니다.
질문3
답: 성경이 경배를 얘기 할 때 예배를 얘기 할 때 넓은 의미에서 하늘에 달과 별도 예배 하는 것입니다. 12세기 성자 프란시스의 설교 가운데 새들을 향하여 설교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늘을 나는 새들이여! 그대들도 하나님을 에배 해야 합니다........
1975년 이후로 독일에서 나오고 있는 사상가운데 하나가 동물 예배 입니다. 신학적으로 납득이 되는 부분도 있고 무리가 되는 부분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지어 놓으신 피조물들은 모두 인간과 함께 하나님을 경배 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데 찬송을 하는데 있어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이 말리니깐 저들이 찬송하지 않으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다소적인 비유적인 표현 이기는 하지만 .... 사도 바울의 표현에서 우리의 구속을 기다리면서 피조 셰계가 흐느끼는 것이라고 탄식하면 기다리는 것이라고 ....
인간이 타락했을 때 우리만 저주 받고 변한 것이 아니라 피조 세계 모두가 저주를 받고 변한 것입니다. 그것도 결국은 인간이 모두 하나님 앞에 구속함을 입을 때 땅도 새 하늘과 새 땅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어떤 식으로든 경배 할 것 입니다.
그런 점 에서 본다면 처음 교회 문을 두드린 사람이 왜 하나님께 예배 할수 없냐는 결론이 나옵니다. 보다 고유한 의미에서 예배는 교회를 처음 찾은 사람들이 드리는 예배가 아니라 이미 하나님이 누구인지 아는 지식이 있는 자들이 무릎을 꿇고 드리는 예배가 진정한 의미에서 경배라는 것입니다.
구도자 예배가 예배냐 아니냐 하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예배라고 할수 없습니다. 교회 전체를 이어가는 예배의 통로를 이어 간다는 것은 매우 위험 한 것입니다. 왜그러냐면 다락방.... 이런 것들로 미국 같은 곳도 뒤집힌 곳이 많았습니다. 그렇게 되면 안됩니다. 복음에 굻주려 있기에...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당신이 그리스도 인 입니까? 이렇게 하는 것이 어느 정도 가능 할수도 있지만 매일 그렇게 물어서 성도들의 생활이 변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이 누구인지도.... 사도 바울의 서신서를 읽어 보세요 광범위 하고도 종합적인 인생의 문제들을 가지고도 십자가의 정신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거듭났어?예수님 영접 할거야 안할거야...? 이런것들이 중요하지만 이런 것들로만은 절대 교회가 교회의 모습을 만들어 갈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그런 예배의 필요성은 인정을 하지만 예배가 아니라 그것은 집회 입니다.
질문4
답: 교육에서 기대 할수 없습니다. 한국에 늘 와서 강해 설교 하시는 데니스 레인 목사님 에게 물었습니다. "남이 체험 하지 못한 특별한 하나님을 만나셨습니까?" 로이드 존스에게 심취해 있으니 그런식으로 물어 본것입니다. 그 목사님은 아니라고.......
그 말에 질문을 한 사람은 엄청나게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렇게 될수 있습니까? 저는 어려서부터 설교 같은 설교는 한번도 들어보지 못하고 자랐습니다...."
로이드 존스와 제임스 페커 목사의 설교를 들으면서 자라 난 것입니다.
설교 잘 할수 있는 방법을 말해 달라는 강의는 절대 응하지 않았습니다. 설교를 배우는 가장 훌륭한 방법은 좋은 설교를 들으면서 자신이 그 안에서 깨트려 지고 변화 되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 설교를 들을수 없는 상황이라면 책을 읽으면 됩니다. 스펄즌 전집.... 아주 훌륭한 책입니다. 파고 들어가서 심취하는 것입니다. 사상을 물려 받고 .... 나머지는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질문:
답: 예배의 상황을 정확하게 다 접할수 없겠지만 획일적으로 18세기에는 말씀에 의한 부흥이었고 19세기에는 찬양에 의한 부흥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곤란 합니다.
왜냐하면 18세기에는걸출한 설교자들을 태어나게 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19세기 부흥이 그냥 기도와 찬송만 해서 부흥만 해서 일어났다고 말하는 것은 곤란 합니다.
신학적으로 완전하지 않지만 찬송과 기도가 특징을 이루기는 했지만 모든 교회가 복음으로 돌아가기에 분명한 메시지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그것들을 사용해서 돌아오게 하신 것입니다. 19세기가 역사적으로 보면 인간의 이성을 절대로 절대 과신을 하면서 모든 기적들, 종교적인 현상들을 인간의 진화론과 철학을 가지고 종교로 설명 할수 있다고 생각 했던 것입니다. 이때 선명한 복음의 메시지가 인간의 무능과 인간이 하나님 앞에 피 묻은 십자가 앞에 구원 받아야 할 절대적인 요청... 이런 것들을 상기 시켜서 복음으로 돌아가게 했기에 단순히 18세기에는 말씀의 부흥의 시기 였지만 19세기에는 찬양 속 에서 부흥이 왔다고 획일화 시켜서 말할수 없다.... 실제적으로도 19세기 때 에도 걸출한 설교가들이 많이 배출 되었습니다. 스펄젼.....
경건주의 에서도 부흥은 일어 날수 있습니다. 당연한 얘기 입니다.
부흥이라고 하는 것은 전통적인 교리를 가진 곳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이단에서는 부흥이 없습니다. 캐톨릭에서도 없구요. 분명히 복음주의 권에서 부흥이 일어납니다.
문제는 심각한 이단이라고 불리워 질 정도의 심각한 결함을 가진 교리를 가질수 있고 예를 들면 삼위 일체를 부인 한다든지, 그리스도의 속죄를 부인 한다든지.... 그러나 같은 복음주의 권 내에서도 교리적인 근소한 차이를 보이는 면은 있는데 그런 것 과는 상관 없이 하나님의 부흥의 역사는 일어 납니다. 부흥이라고 하는 것은 교리의 줄을 타고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 적인 역사라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부흥이 일어나도 인간이 기본적으로 사고 자체가 똑바른 사고가 심겨 지지 않는 사람이 성령 충만 받은 것과 성경적인 인식이 살아 있는 사람이 받은 성령 충만은 엄청난 차이를 보여 줍니다. 한국 교회가 세상을 향해서 무기력 해 진 것은 전자와 같은 성령에 취한 것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 합니다. 성령의 충만은 있어도 거룩한 삶에 대한 인식이 없고 무엇인가 열광은 해도 역사의 소명이 없는 것은 참된 진리의 이해가 잘못 된데서 오는 것입니다.
개혁 주의 측면에서 보면 문제가 많은 것을 내포 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일정한 조건을 갖추면 부흥이 온다는 피니의 주장이나 피니가 이야기 하고 있는 교리, 인간의 원죄를 부인 하는 것은 상당한 결함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메도 불구하고 피니나 18세기의 부흥을 보면 여러가지 결함이 있지만 인간적인 열광적인 면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그 운동을 통해서 많은 사람을 구원하시는데 기뻐 하신데는 모든 교리적인 균형 있는 감각을 가진 사람들이 따라오기 어려운 복음에 대한 강력한 열정과 강조점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멘하탄 거리에 챨스피니가 주저 앉아서 엉엉 울면서 "하나님 이 영혼들이 지옥으로 가는데 나는 지금 어찌 해야 합니까?" 잃어 버린 영혼들이 구원 받아야 한다는 열망 그리고 원죄 문제에 대해서도... 인간은 결국은 죄인이고 그리스도 예수 앞에 진정으로 회개하고 구원받기 전까지는 희망이 없다는 강력한 복음이 사용 된 것 입니다.
18세기에 일어난 부흥이나 19세기 일어났던 부흥은 순도가 다릅니다. 미친 영향도 다릅니다. 스펼젼을 가능하게 만들었던 것들도 결국은 18세기 청교도 들의 만남이 결국은 스펄젼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2. 독신, 연애 그리고 결혼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창2:18)
I. 들어가면서
많은 사람들은 나이가 차면 결혼을 합니다. 그리고 결혼에 대해서 갖는 꿈들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습니다. 현실은 어떻습니까? 예전과 달리 결혼에 있어서 행복은커녕 결혼생활 자체가 유지되는 것이 아주 힘겨운 그런 시대를 살고 있고 이런 사실은 나날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는 이혼율을 통해서도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런 현상이 개발도상에 있는 나라들의 경제적 번영의 과정에서 오는 미성숙의 소산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이미 그렇지 않다고 하는 것을 바로 20세기 후반에 우리의 역사가 증명을 해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맨 처음에 그렇게 생각했겠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이미 경제학적으로 고도대중 소비단계에 들어간 국가들 속에서 이 이혼율이 절대로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더 높아지고 있다고 하는 것을 보면서 이런 생각들이 잘못된 것이라는 사실을 서서히 인식하게 된 것입니다.
지금 중국은 경제성장의 일로에서 많은 후유증들을 낳고 있습니다. 저는 경제전문가는 아니지만 중국을 볼 때마다 조금 천천히 발전을 해야지 되는데 하는 마음을 늘 갖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급속한 발전이 사람들의 삶을 윤택하게 할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그 윤택해져가는 물질성장에 과정에서 아무리 많은 돈을 주어도 살수 없는 그 아름다운 고유한 가치를 상실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벌써 우리가 7-80년대를 지나면서 경험한 것들입니다. 중국에서 사회적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문제가 바로 이 이혼의 문제입니다. 이런 문제들은 결국은 우리의 결혼의 현실이 꿈은 많지만 현실적으로는 얼마나 행복에 이르기 어려운 결혼의 제도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점에서 여러분들은 아직 결혼하지 않은 사람들이 대부분이니까 오늘 여러분들에게 맞추어서 정말 근본적인 질문, 정말 삶의 양태는 결혼 하나밖에 없는가, 독신은 어떨까? 그리고 만약에 결혼에 이르러야 한다면 그러면 연애는 또 무엇이고 연애기간은 뭘 기대하고 그리고 연애는 뭘 지향하면서 가야지 되는가. 이 모든 양태들의 다양성 속에서 우리들이 끝까지 잃지 말아야 할 일양성은 무엇인가? 그래서 우리의 삶 전체가 이 결혼과 독신, 연애 이런 부속품들을 사용해서 마지막에는 어디로 가야지 되는 것인가, 그 개별적인 사건들이 우리의 인생 전체가 하나의 목적을 향해 굴러가도록 도움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어떤 원리들을 유지하면서 이 일들을 수행해야지 될 것인가 하는 문제들을 다루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전시간보다 훨씬 눈빛이 빛나시는 것 같습니다. 뭐 자식도 없는데 자식 사랑에 대해서, 그런데 그렇게 설교한 사람도 웃기지만 울면서 기도한 사람은 또 어디다 자식을 숨겨놓으셨는지 이해가 안 갑니다. 태어날 자식이 불쌍해서 아마 우신 모양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에 보면 우리에게 사유에 있어서 의구심을 불러일으키는 내용들이 이 18절 안에 많이 실려 있습니다. “아담이 독처하는 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지 못하니” 이게 사실은 말이 안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세상을 보시면서 틀림없이 심히 좋다고 그러셔놓고 어떻게 아담을 하나밖에 안 만드셨는데 독처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담이 홀로 있는 것을 보면서 좋지 못하다. 이렇게 성경이 말하고 있으니 뭔가 하나님의 창조의 흠집이 있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트집을 잡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 사람들에게 설득시킬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담이 창조되어서 하나님이 창조의 모든 것을 마치셨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창조가 모두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니까 인간 중에서 특별히 하와를 더 창조하심으로서 이 창조의 모든 것들은 완전히 끝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아담은 창조해놓고 뭐가 부족하니까 사은품처럼 새로 만든 게 하와가 아니라 그러면 하와가 너무 비참해집니다. 그게 아니라 원래부터 하나님이 이 세상을 향한 창조의 계획안에 있었던 것입니다. 즉 아담이 홀로 있기에 좋아 보이지 아니한 것은 하나님이 경험을 통해서 알게 되셨다기보다는 오히려 아담 편에서 이 성경을 기록했다고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아담으로 하여금 혼자 거하는 기간을 약간 둠으로 아담으로 하여금 혼자 거하는 것이 완전하고 좋은 것이 아니라고 하는 갈증을 느끼게 한 후에 하나님께서 하와를 창조하심으로 가난한 마음이라는 그릇에 사랑이라는 행복을 담게 하신 것입니다.
II. 결혼과 연애
A. 남녀 창조와 결혼
자, 이런 정도로 우리들이 배경설명을 해놓고 그렇다면 이 결혼과 연애를 우리들이 어떻게 생각해야지 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선 먼저 보면 남녀의 결혼 이야기가 여기에 나옵니다. 인간의 모든 제도는 사람의 경험을 통해서 만들지만 이 결혼의 제도는 인간의 경험을 통해서 인간이 수립한 제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담 혼자 밖에 없으셨을 때 이미 결혼의 제도를 만드시고 그 제도의 기획 안에서 여성인 하와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남녀 창조의 원리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아담이 홀로 독초 하는 것, 홀로 있다는 것입니다. 히브리 성경에는 “홀로 있다.” 이렇게 나옵니다. 아담이 홀로 있다. 혹은 홀로 살아가는 것, 홀로 존재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지 못했다고 하니까 그러면 하와를 창조하셔서 아담 곁에 있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보기에 좋게 되신 것입니다. 이것으로서 천지 창조가 모두 종료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우리들이 이것을 날짜로 계산을 한다면 하와의 창조는 일일 창조를 이야기한다고 하더라도 마지막 육일 속에 들어가야지 되고 또 창조를 시대로 이야기한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마지막 시대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어떻든지 간에 하와의 창조까지 모두 된 후에 그다음에 만들어진 세상을 하나님이 보시면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라고 이렇게 말씀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1. 아름다움의 성취, 보완
그러면 이제 여기에서 우리들이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이 남녀의 결혼이라고 하는 그 자체가 결국은 동기가 아름다움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결혼이라는 제도를 만들어놓으신 미학적 동기는 아름다움이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아담 홀로 있는 것이 좋아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하와를 만드심으로 하나님 보시기에 아주 적합하고 좋은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물론 그 상태는 이후의 결혼이라는 틀을 통해서 이루어질 많은 일들을 본성적으로 배태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보고 하나님께서는 좋아하시는 것입니다. 이야기를 하자면 길어지지만 하나님께서는 시간을 초월하시는 분이시니까 아담과 하와의 결혼 이 자체가 하나의 접힘이라면 그 접혀진 결혼이라고 하는 제도와 결합을 통해서 이후에 펼쳐져서 이루어질 그 두 사람의 결합을 통해서 일어날 모든 결혼에 결과물들을 하나님이 알고 계시기 때문에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보시면서 그렇게 이후에 나타날 결과들을 하나님께서 보시면서 좋아하시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결혼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함께 존재하고 함께 결합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아름답게 생각을 하셨다는 것을 우리들이 기억하면 이 결혼의 관계가 결국은 보완의 관계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담이 하와를 하나님이 창조하셔서 아담 곁에 있게 하셨다고 할지라도 아담의 본성과 삶 안에 무슨 변화가 일어난 것은 아닙니다. 아담은 하와를 창조하기 전에도 그 아담이고 하와를 창조한 후에도 바로 그 아담입니다. 그 동질성이 계속 유지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와를 창조하고 난 다음에 아담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훨씬 아름다운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자, 예를 들어봅시다. 이것이 아름다움에 있어서의 조화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데 아래다 청바지를 입고 위에다 예쁜 저고리를 입었습니다. 아무리 예쁜 고급 브랜드를 붙인 청바지와 그 다음에 기가 막히게 예쁜 저고기를 입었어도 아름답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 청바지를 벗고 그리고 예쁜 한복치마로 갈아입었습니다. 윗도리는 동질성을 조금도 변경하지 않았는데 그 아래 어울리는 치마 때문에 그 저고리는 아주 예쁜 저고리가 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하와의 창조를 통해서 아담이라는 존재가 이렇게 빛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결혼이라고 하는 제도 자체가 보완 속에서 이루어지는 존재라고 하는 것을 하나님이 이미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희랍의 신화에 보면 역사 초기에 고대에 인간들이 이 결혼과 남녀 성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한 흔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희랍신화에 보면 원래 인간은 남녀가 한 몸을 이루고 있었다고 그렇게 상정을 합니다. 위에서 신들이 이렇게 내려다보니까 인간들이 아주 육욕적이고 방탕한 것을 버리고 이성의 관심사가 어떻게 하면 참된 가치와 덕을 향해 살 것인가에 집중됩니다. 그러다보니까 인간들이 나날이 고상해서 조금만 더 내버려두면 고상함의 정도가 자기의 신들인 자신의 세계를 위협할 정도까지 발전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들이 이제 어떻게 하는가 하면 반씩 쪼개자 그래서 반을 뚝 잘라버립니다. 그래서 남성과 여성으로 쪼갭니다. 그러니까 이게 어렸을 때는 그렇지 않은데 철이 조금 들고 이제 턱에 솜털이 날만하면 짝을 찾느라고 정신을 못 차리는 바람에 이게 인간으로서 아주 고상한 가치를 따라 덕성스러운 삶을 사는 일에 대한 지성의 관심사가 쇠퇴해버립니다. 그래서 결국은 신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한 인간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거기에 덧붙이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때 다 남녀 성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은 두개가 붙어있는데 남남으로 된 사람이 있었고 여자로만 된 사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쪼갠 것입니다. 그래서 고대 사회에서는 이 동성애는 조금도 흠이 아닙니다. 어느 정도 신빈성이 있는 이야긴지 모르지만 소크라테스의 죄목이 젊은 미소년들을 미혹하게 한다는 것인데 동성연애자였다는 학설이 우세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남녀로 된 사람이 쪼개졌을 경우에는 남녀를 찾는데 이게 남남으로 되었던 사람은 쪼개졌는데 남자를 찾는 것인데 이게 바로 호모, 게이들이 되는 것입니다. 여자는 쪼개진 사람은 여자를 찾아서 레즈비언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것이 바로 고대 사람들 속에 있는 성에 대한 생각이었습니다. 인간이라는 것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 인간이 이런 고대의 신화들을 우리들이 신뢰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모든 진리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에 가만히 주위에 보면 성경에 나오는 성과 인간에 대한 견해를 비교해봅니다. 그때 많은 통찰들을 제공해줍니다.
성경적으로 보면 이제 인간이 쪼개진 것은 아니지만 인간 자체가 만들어질 때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을 가지고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은 남자 여자가 독특한 성적 동질성을 가지게 된 것도 그 형상 어딘가에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 하나님 자신은 남성도 아니고 여성도 아닙니다. 언어적으로는 남성을 대부분을 언어에서 사용하지만 그것은 이제 인간들의 언어가 그렇게 된 것을 하나님이 사용하셔서 전해준 것이고 그런 언어라고 하는 것은 체계화하는 이런 모든 주도적인 것을 남성들이 했으니까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원래 의미로 말하자면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남성이다, 여성이다.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 모든 것들을 갖고 계시는 아주 가장 이상적인 인간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형상의 본체입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은 아주 뛰어난 모든 인간성들의 본체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흔히 아버지라고 부르지만 우리들이 이 땅에서 경험하는 아버지의 개념을 가지고 그 하나님께로 가지고 들어가면 안 됩니다. 오히려 하나님에게는 어머니라고 부르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하는 대목들이 훨씬 많습니다. 예를 들자면 탕자가 집을 나갔을 때 그것을 그렇게 허락해주는 것 자체가 사실 아버지의 본성이 아닙니다. 우리의 고전적인 아버지라면 아버지가 살아있는데 돈을 나누어달라고 하는 것은 당신 죽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작대기로 때려주어야지 그것을 왜 재산을 나누어줍니까? 그러니까 그렇게 약간은 부도덕해 보이는데 전혀 이끌리는 것처럼 자식 편에 서서 자식을 인격적으로 대하고 요구를 들어주는 이런 것들이 사실은 부성보다는 모성입니다. 자식에게 지는 그런 모성입니다. 자식을 그렇게 내보내놓고 그리고 동구 밖에서 눈이 짓무르도록 기다리는 그 모습은 더더욱 어머니의 모습의 극치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때리시면서 다시 싸매시는 그것, 호세아 6장에 나오는 바로 그것, “그가 우리를 때리셨으나 우리를 싸매실 것이오,” 고칠 것이라고 하는 이 대목들도 결국은 아버지의 모습이 아니라 어머니의 모습입니다.
여러분들은 인생을 돌아보면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아주 델리케이트하게 세밀하게 인도하신 과거의 경험들을 가지고 계실 것입니다. 이 속에서 우리들이 경험하는 것은 어머니 같은 하나님입니다. 이것을 입증이나 하듯이 아주 놀라운 사실이 있는데 인간 안에 이게 남자에게는 남성호르몬, 여자에게는 여성호르몬이 있어야 되는데 남자에게는 여성호르몬이 있고 여성에게도 남성호르몬이 있습니다. 우리 흔히 머리가 벗어진 사람들을 보면서 공짜를 많이 바랬다고 그렇게 생각을 하는데 사실은 공짜를 바래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어느 집에서 아버지가 나이에 비해서 너무 늙어 보이고 대머리가 벗겨졌으니까 하루는 물었습니다. 엄마, 우리 아빠는 왜 저렇게 머리에 털이 없으셔, 왜 저렇게 반짝반짝 해. 그러니까 너희 아버님이 생각하시는 것이 좀 많니. 너희들을 양육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세계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생각하시는 것이 많아서 그렇단다. 애가 그렇구나. 그런데 엄마는 아무 생각 안 해.
그러니까 이게 사실은 공짜를 바라고 생각을 많이 하고 그래서가 아니라 호르몬입니다. 그래서 보면 남자들도 어떤 사람들이 머리가 잘 벗겨졌는가 하면 가부장적인 태도를 가진 사람, 에헴, 그래도 내가 남자인데, 여자가 어디, 이런 사람들이 잘 벗겨집니다. 공짜를 바라는 사람이 아니라. 그리고 괜히 여성들 앞에서도 살살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잘 챙겨주고 김밥도 잘 싸고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머리가 덜 빠집니다. 이게 여성호르몬이 그렇게 그 사람에게 영향을 주어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남자와 여자는 보완의 관계가 처음부터 창조된 것입니다. 남자는 일 중심적이고 그리고 개척적이고 모험적입니다. 여자는 일보다는 관계 중심적이고 모험 중심적이기보다는 개척정신이라기보다는 현재 이루어진 일에 안주하려고 하고 모험정신보다는 이미 이루어지고 자기 안에 일을 가꾸려고 하는 형입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이런 이치들을 이해하지 않고 결혼을 하게 되면 여자가 결혼과 함께 자기 자신이 발전하지 못하도록 계속 자기의 발목을 잡고 방해를 한다고 생각하고 여성들의 경우에는 이런 것들을 이해하지 못하면 남성이 결혼과 함께 자신에 대한 모든 관심을 서서히 잃어가고 밖으로만 나돌려고 한다고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지혜는 이렇게 서로 맞지 않는 것들을 기가 막히게 융합시켜서 그래서 이것들을 통해서 보완의 관계를 이루게 함으로 말미암아 각각의 인간들을 부족하지만 그 결합을 통해서 서로가 보다 더 나은 완전성을 갖도록 경륜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제 그렇게 하는데 이게 사랑이라는 것 자체가 하나님이 왜 그런 식으로 인간을 만드셨는가 하면 사람이라는 것 자체가 의존하지 않으면 사랑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도 이렇게 보면 사랑받는 자매들은 사랑을 받고 또 형제들에게 관심을 끄는 자매들이 누군가 하면 혼자서도 잘하는 자매가 아닙니다. 뭔가 늘 사람을 의존하기를 좋아하는 돈 꿔달라는 그런 것 말고 뭔가 사람에게 의존하고 도움을 받으려고 하는 그런 사람들이 사람들의 시선을 많이 받고 의존하는 사람을 향한 지지의 감정을 불러일으킵니다. 그 대신 늘 그런 모습만 늘 보이면 그것은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개기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추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여성이 남성이 할 수 없는 여성이 할 수 있는 섬세함을 필요로 하는 그 일에 뭔가 그 일로 인해서 도움을 주고 그래서 형제들이 자기가 할 수 없는 그 일이 자매를 통해서 도움을 입어서 잘 이루어지고 만족이 되었다고 생각될 때 그때 이제 그 자매가 자기를 필요로 하고 의존하는 마음을 갖게 해줄 때 소속감을 느끼고 친근감을 갖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남자들은 산소 같은 여자를 싫어합니다. 산소 말고 산~소, 살아있는 소, 못 알아듣습니까? 그렇게 씩씩하고 그런 사람은 싫어합니다. 혼자서도 다 척척 하고 그리고 힘도 더 세고, 대게 그런 자매들이 결혼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보완의 관계로 이제 인간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게 바로 왜 그렇게 하셨는가 하면 의존의 감정이 없으면 사랑이 유지가 안 됩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의존의 감정이 없이는 사랑의 감정이 유지가 안 되는 것입니다.
2. 의존적 존재
그래서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말과 사랑한다는 말은 동의어입니다. 같은 말입니다. 내가 주를 의지합니다.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님만 의지합니다. 주님밖에는 제가 사랑하는 대상이 없습니다. 그 이야기하고 일치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성이 남성과 만나서 연애를 할 때 내가 형제 말고 의지할 사람이 누가 있겠어. 그것은 최고의 사랑의 고백입니다. 있으나 없으나 똑같아. 그게 어떻게 사랑의 고백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사랑해. 그게 말이 됩니까? 사랑 자체가 의존의 감정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일부러 사람을 그렇게 달리 만드셔서 아담이 하와를 필요로 하고 하와가 아담을 필요로 할 수밖에 없게끔 그래서 그 결합 자체를 통해서 하나의 미를 이루도록 하나님께서 그렇게 경륜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입니다.
3. 다양성과 평등
그런데 이제 문제는 남성과 여성이 창조될 때부터 각각 다르게 창조됩니다. 보완의 관계라고는 하는데 그 사실은 외적인 면에서 보면 남성이 훨씬 더 많은 힘을 필요로 합니다. 개척을 하고 새로운 일에 도전을 하고 정복하고 그런 일에 종사해야지 되니까 더 많은 완력과 힘,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더 많은 투머스, 열정이라고 부릅니다. 열정이나 욕망 그런 것, 그런 튜머스가 그 남성에게 더 많이 필요합니다. 그런 것들이 이제 부족할 경우에는 어려서는 엄마 치마폭에서 살고 나이가 들어서는 아내의 치마폭에서 살고 이런 식으로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이제 남성에게 하나님께서 더 많이 주신 것입니다. 그러다보니까 이제 어떤 식이 되는가 하면 사회질서를 이루어 가는데 있어서 남성들이 주도권을 쥐게 된 것입니다. 특별히 부계사회에 접어들면서 이제 인류가 어느 정도까지 번성하기 전까지는 모계사회인데 번성하고 나서 이게 부계사회가 되면서 남성들의 권력이 굉장히 강해지는데 실제적으로, 그런데 이때는 이미 인간이 타락한 때입니다. 그리고 타락한 인간들이 각각 자기 사랑에 빠져서 사는 때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자기 사랑과 남성에게 부여된 권력들이 결탁을 하면서 남성위주의 아주 못된 질서들을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창조의 정신과는 위배되는 그런 질서들을 인간들이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남성들이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어려서부터 본위 자체를 남성중심의 깃발을 꽂고 도덕을 형성하고 윤리를 형성해서 그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조선시대 때 칠거지악이니 뭐니 하면서 남자가 다른 여자를 데리고 와서 바람을 피고 그래도 질투하면 여자로서 아주 덕이 못된 것이고 남자가 그렇게 못된 짓하고 가정의 의무를 이행하지 못하고 돌아다녀도 가문을 잘 지키고 부모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기까지 하면 열녀문을 세워주었습니다. 다 미친 짓입니다. 성경이 이야기하는 그런 질서가 아닙니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그런 생각들이 이게 쉽게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굉장히 많이 남아있습니다. 이렇게 남성 설교자로서 정직하게 이야기하기 쉽지 않습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오늘 형제들은 그렇게 이야기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에 보면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고 이렇게 되어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사실 그 복종이라고 하는 것도 오늘 오전에 한 설교가 매우 중요한 설교였는데 그래서 테입을 들어보든지 인터넷으로 들어가 보십시오. 거기에 그릇이라는 말을 제가 설명하면서 연약한 그릇이라고 아내를 설명했는데 그릇이라고 표현한 자체가 독립적 사명체입니다. 독립적이고 인격적인 사명체라는 뜻입니다. 이 그릇이라고 하는 것이, 한 그릇이 아니라 두개의 각각의 그릇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질서상 남편에게 복종한다고 하더라도 그 여자의 인생과 존재라고 하는 것은 남성을 위한 보완제가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보안의 관계에 있지만 그것 자체가 하나님께서 개별자에게 각각 주신 사명을 따라서 사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여자들은 자존감을 회복하고 그런 속에서 의식적으로 벗어나서 성경적인 사상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오늘 여기에 보면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니” 그렇게 나옵니다. “돕는다.”는 말과 “배필”이라는 말이 문제가 되는데 이것도 아주 남성우월주의가 개입한 성경번역입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돕는” 이라는 사실은 “그를 위하여” 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그런데 사실 이게 히브리어 성경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케네게드 라는 단어인데 이 도는 그 남자라는 뜻이고 네게드 라는 것은 앞에 케는 어코든 투입니다. 그래서 이게 두개가 함께 결합해서 하나의 전치사처럼 쓰이는데 영어로 정확하게 번역을 하면 According to입니다. According to 그런데 보다도 corresponding to 무엇 무엇에 상응하는 무엇 무엇과 짝을 이루는 무엇 무엇과 대응하는 이런 뜻입니다. 그래서 영어로 펜팔을 할 때 펜팔을 주고받는 상대방을 가리켜서 correspondent to 라고 합니다. 이쪽에 외무장관이 저쪽 외무장관을 만나면 이쪽 외무장관이 correspondent to 를 만났다고 표현합니다. 그러면서 corresponding 이 나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상응하는 그 남자와 상응하는 배필을 지으리라” 이렇게 나옵니다.
그러니까 돕는 배필이라는 단어가 히브리어의 두 단어가 아니라 한 단어로 나옵니다. 그것은 “에제르” 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이 에제르가 이미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데 에벤에셀 할 때 그 에셀이 바로 이 에제르입니다. 이 에제르라는 단어가 많이 쓰여진 곳이 시편입니다. 시편에 보면 도움이라고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그 도움이 누군가 하면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로소이다.” 그러면서 그 도움 자체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또 뭐라고 표현하는가 하면 “여호와는 나의 도움이시며” 그래서 하나님과 동격으로 사용이 됩니다. 시편에 보면 “도움”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배필이 아니라 도움, 그 도움이 누군가 하면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그러면서 그 도움 자체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또 뭐라고 표현하는가 하면 “여호와는 나의 도움이시며” 그래서 하나님과 동격으로 사용이 됩니다. 하나님에 대한 동격보다도 동격적 서술로서 묘사가 됩니다.
원래 이 에제르라는 단어는 전쟁하는 상황에서 군대에게 많이 쓰인 단업니다. 싸울 때 전황이 기울어져 가는데 그때 이제는 전쟁이 패색이 짙어져서 병사들의 사기가 다 떨어졌는데 저 지평선에서 뿌연 연기가 일어나면서 응원군이 말굽소리를 지평선 가득히 몰려오는 것입니다. 그게 에제르입니다. 그것을 여기다 쓴 것입니다. 이 “돕는” 이라는 말을 빼고,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자,” 혹은 “그를 위하여 그에게 상응하는 배필,” “그에게 상응하는 응원군” “그에게 상응하는 도움을 만들리니” 이렇게 번역이 되어야 합니다. 잘 확정되지는 않았지만 그런 식의 의미입니다. 이 자체가,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실 때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지만 두 사람의 일이 같을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다양성 속에서 그 다양성이 서로를 보안함으로서 하나의 아름다운 인간의 두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서 하나님의 양성을 보여주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아이들에게 그대로 전해져야 합니다. 가만히 생각해보십시오. 아버지가 엄합니다. 너 왜 그렇게 했어, 잘못했습니다. 그래도 네가 책임을 져야지, 넌 맞아야 돼 그게 남성성이라면 여성성은 그래도 한번 봐주지 그래요. 여보, 그렇게 얘기해야지 너 이럴 수 있어 하고 때리는데 그것도 때리는 것이야 하며 가서 야구방망이를 들고 오면 애들이 그 속에서 뭘 배우겠습니까?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부모가 서로 싸울 수는 없지만 그러나 그렇게 하면 남편이 그날 저녁에 불러서 여보, 애들을 그렇게 야단치면 어떻게 좀 봐주지. 당신 그렇게 하면 아이들이 얼마나 상처를 받겠어. 이러면서 고약이라도 떼어주면서 당신이 때렸으니까 당신이 약이라도 발라줘, 이렇게 하는 게 이게 여성성입니다. 그 두 가지를 아이들이 엄마 아빠를 통해 함께 배우면서 엄마 아빠를 통해 인간의 삶 속에 그대로 투사된 그 하나님의 성품을 본받게 하시는 것이 이게 가정 속에서 생육의 방법을 통해 아이들을 주신 이유입니다.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엇인가 하면 애들이 모두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서 성화되어가는 참 신자가 되는 궁극적이 되는 목적이 참 사람이 되기 위함인데 그런데 이것은 통합된 하나의 모습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여성이 하나님의 참 신자가 되어간다고 할 때 이것은 여성으로서의 그 아름다운 다양성을 그대로 복원한 과정입니다. 여성이 참 신자가 되면 남성이 참 신자가 되면 둘 다 가장 아름다운 남성과 여성이 되는 것이지 두 개가 통합이 되는 그런 것은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부패성들은 이 성적인 혼돈까지 가지고 온 것입니다. 그래서 분명히 이렇게 다정다감하고 델리케이트한 여성인데 은혜가 떨어지면 아주 포악하고 못된 사람이 되고 남성들도 이렇게 꿋꿋하고 진취적이고 이런 기상을 하나님이 주셨고 개척할 수 있는 기상들을 주셨는데 이게 부패하게 되면 아주 이런 정신들이 부패하고 쇠퇴해져서 그래서 남성으로서의 기백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그 두 가지를 같이 조합시켜서 그래서 가정에서 그 하나를 보여주는 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런 모습입니다.
B. 결혼을 위한 연애
그래서 내가 이따가 결론을 다시 한번 이야기하겠지만 중요한 문제는 인간이라고 하는 것이 너나할 것 없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죄 때문에 망가진 가정에서 양육을 받습니다. 그리고 망가진 세상에서 영향을 받습니다. 또 자기 안에 있는 선천적이고 그 다음에 절망적인 부패성으로 인해서 하나님이 심지 않은 또 다른 본성들이 심겨져나가고 그것을 따라서 인간이 행동하게 됩니다. 그렇게 된 인간이 결국은 참다운 여성을 보여줄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참다운 남성을 보여줄 수 있는가. 둘이 결합되었을 때 그것이 정말 서로의 존재를 아름답게 빛내는 그런 종류의 사람이 될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는 우리들이 쉽게 대답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저는 성경의 견해에 입각해서 본다면 답은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아주 놀라운 기적이 그 사람 속에 일어나지 않는 한 사실은 그들은 정말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의 견해입니다. 인간에 대해서 성경은 그만큼 비관적으로 봅니다. 그런 비관적인 인간존재를 향한 유일한 희망은 그리스도 예수를 통한 구속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 구속을 통해서 인간 자신을 새롭게 갱신하는 하나님의 시가 그 인간 속에 심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인간을 본래의 인간으로 돌아가도록 이것들을 다 벗겨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 보면 바다 속에서 옛날에 금속제품들을 막 건져 올립니다. 차마 볼 수가 없습니다. 그것을 몇 년에 걸쳐서 5년 이상 걸쳐서 많은 약품 처리를 하고 이러면서 엄청난 돈이 들어갑니다. 그래서 그것들을 벗겨내어서 그 본래의 화려한 금속제품들의 모습이 햇빛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벗겨내는 그런 일들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우리들이 살펴보게 되는 것입니다. 어떻든지 간에 그렇게 되어서 결국은 그렇게 변해가는 가운데 두 사람이 하나의 가정을 이루어가게 되는데 그렇다면 이제 연애라고 하는 것은 그럼 결국 무엇인가? 사실 이 결혼의 기초는 인격적인 사랑이 가장 기초입니다. 그런데 이제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는 사랑이 결혼의 기초라고 이야기를 할 때 너무나 결혼의 동기로서의 사랑에 집중되어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랑하면 결혼해야지 되고 결혼을 하려면 서로가 뜨겁게 사랑하는 사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사실 성경적으로 보면 오히려 이 결혼은 그런 것도 중요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런 사랑이 없고 정약에 의해서 결혼한 것도 잘못된 것이지만 오히려 무게의 중심은 결혼을 하고 살아가는 이후의 삶의 과정에 이 사랑에 대한 중요성이 훨씬 더 많이 강조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을 보더라도 결혼을 하기 위한 동기와 확인의 조건과 토대로서 사랑을 강조하는 그런 것보다는 그런 것은 거의 찾아볼 수 없고 오히려 많이 언급된 것이 무엇인가 하면 이 결혼생활을 이루면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그 육신적인 결합의 토대가 사랑이어야 된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뭐와 관계 지어 보면 잘 알 수 있는가 하면 남녀의 결합이 교회와 그리스도의 결합하고 성경에서 여러 번 유비로 나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렇게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딱 그 분께 회심해서 그분의 품에서 구원을 얻을 때 그때도 물론 우리가 자기 사랑을 깊이 회개하고 주님 앞에 뉘우치면서 그분을 뜨겁게 사랑하게 되지만 신자의 일생에 있어서 이 사랑이 강조되는 지점은 사실은 구원받기 직전에 얼마나 사랑했는가가 그게 문제가 아니라 구원받은 후에 그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향한 인격적인 사랑을 많은 유혹과 환경 속에서 그것들을 지키고 이기며 간직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가. 그래서 지속적으로 혼인언약을 유효하게 할 수 있는가, 그 혼인 언약을 지속할 수 있는가, 충실할 수 있는가? 하는 것에 성경의 관심사가 더 많이 집중되어있는 것을 보면 결국은 이 사랑이 오늘날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뜨겁게 결혼 전에 원 없이 사랑해보는 것, 그리고 뜨겁게 사랑해서 결국은 열매로서 결혼에 골인하는 것, 그 다음에 싫증과 권태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이런 것은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치관이 잘못되어있습니다.
그래서 드라마나 문학작품이나 모든 것들이 포커스가 결혼을 한 후에 어떻게 두 남녀가 하나의 변화무쌍한 개체로서 서로를 죽이고 서로를 뜨겁게 사랑하고 극복하고 살아가는가에 대해서는 포커스가 별로 없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관심을 별로 못 받습니다. 모든 사랑의 포커스가 어디에 꽂히는가 하면 결혼하기 직전, 천신만고 끝에 남자를 빼앗고 여자를 빼앗고 목숨을 걸고 죽고 살고 거기에만 집중적으로 꽂혀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성경이 보고 있는 남녀의 사랑에 관한 초점과는 많이 빗나간 것입니다. 정말입니다. 내가 할 말은 많지만 진도를 나가겠습니다. 굉장히 그런데 빠지면 안 됩니다.
그래서 결국은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이제 이 연애에 몇 가지 원칙이 있는데 첫째는 결혼할 계획이 없으면 연애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면 고등학교 애들이 연애를 합니다. 대학교 이제 1학년 밖에 안 되었는데 연애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10년 연애한 끝에 결혼했다고 합니다. 사실은 뿌리 깊은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다고 10년 동안이나 서로 사랑하고 그렇게 연애하는 기간들을 가졌으니까 참 좋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그러면 서로 많이 알았을 것이니 좋을 것입니다, 어제 만나고 오늘 결혼하는 것보다 훨씬 나을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그런 것을 볼 때마다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럼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소비했을까? 라고 생각됩니다. 자기 좋아서 하는 일인데 어떻게 에너지의 소비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얘기하면 할말이 없습니다.
1. 결혼의 목적
그런데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이제 남자든지 여자든지 간에 이제 사회에서 뭔가 기여하면서 자기를 완성하며 살아야 하려면 준비를 해야지 됩니다. 그 준비에 있어서 이 10대와 20대 초반까지는 엄청난 에너지를 자기완성을 위해서 준비에 쏟아 부어야 할 집중적인 쏟아 부음의 시기입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정신이 갈립니다. 그래서 연애에 빠집니다. 이게 무슨 1년이나 2년 있다가 결혼할 계획이 있으면 그쪽을 목표고 하고 가면 되는데 아무 대책이 없습니다. 군대에 가고 군대가면 자매가 고무신을 거꾸로 신을지도 모르고 돌아와 보면 그러다 다른 사람을 만날지도 모르고 수많은 변수들이 있는데 그렇게 합니다. 그러면 연애하는 그 기간들이 반드시 행복한가 하면 그런 것은 아닙니다. 두통 나고 속박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런데도 그 속박을 당하는 사람들은 의기당당하고 그 속박이 없는 자유스러운 사람들은 구속받는 것 같은 표정을 하고 다닙니다. 그게 결국 무엇인가 하면 왜 그러면 그렇게 합리적으로 생각해보면 사실 그것보다도 오히려 결혼할 목표가 없는 때는 혼신의 힘을 부어서 자기 자신을 발전시키고 자기완성을 이루고 준비하는 시기로 삼아야지 되는데 왜 그렇게 연애를 하는가 하면 무슨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 충동이 그것을 원하니까 그것을 하는 것입니다. 물론 개중에는 여러분들 중에 어떤 분들은 그런 교제를 지속하면서도 아주 뛰어나게 자기를 잘 절제하면서 그러면서 오히려 상대방의 자극을 받아서 자기완성과 발전에 더 매진하는 그런 별종들도 없는 것은 아닙니다.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야말로 소수의 사람들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굉장히 혼란스러워합니다.
여러분, 같이 사귀는 자매가 아주 꽤 좋아하는데 어느 날 성질을 내고 다시 전화하지 마. 그리고 돌아갔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문자를 몇 번 날렸는데 답장이 없고 전화를 하니까 지금은 전화를 받을 수 없으니 삐! 소리가 나면 소리 샘으로 연결됩니다. 잠시 후에 요금이 부과됩니다. 이렇게 나옵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 속이 막 타들어가지 않겠습니까? 그래도 아무렇지도 않으면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지 않으니까 또 그런 것도 할 짓이 없는데 그래도 그런 일을 하고 있는 셈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서 막 많은 에너지를 소비합니다. 그런 속에서는 학문에 열중할 수도 없고, 자아실현에 몰두할 수도 없고 물론 그런 경험을 통해서 인생을 알게 되는 것이 있다고 그러는데 사실은 그것보다도 쉽게 알 수 있는 방법들이 많은데 그런 식으로 소량의 정보를 채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을 버리고 세상에서 막 돌아다니다가 가장이 깨지고, 사업이 박살나고, 애들 병들고, 자기도 교도소 왔다 갔다 하다가 그러다가 깨달았습니다. 놀랍게, 그래서 뭘 깨달았는가 하니 하나님이 날 사랑하시는 것을 깨달았다고, 그거 하나 깨달으려고 그렇게 많이 과외비를 내냐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오면 매일 가르쳐주는 것이 그것인데 그래서 내가 얘기하는데 말로 가르쳐줄 때 눈물 뚝뚝 흘리며 은혜를 받는 게 인생을 수없이 절약하는 것입니다. 과외비를 안 내도 됩니다. 그렇게 잘하는데 죽을 고비를 넘겨봐야지 비로소 아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채집된 것이 귀할 수는 있지만 양이 얼마나 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그렇게 예기하는 게 그러니까 결혼할 계획이 세워지고 그 다음에 연애를 하십시오. 그러면 연애를 하지 말라는 애기냐, 하지 말라는 얘기입니다. 결혼할 계획이 없으면 연애를 하지 마십시오.
그런데 나는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목사님이 결혼하기 전에는 연애하지 말라. 결혼의 계획이 있기 전에는 연애를 하지 말라. 그런데 나이와 모든 것을 계산할 때 결혼의 계획을 세울 수가 없어. 그래서 연애를 안했어. 난 그것만 잘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연애는 안 하는데 이 사람이 무슨 자신의 생애를 걸고 추구할 목표가 없어, 그러면 그거 하나마나 마찬가지입니다. 관심이 없습니다. 하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하라고 하십시오. 어차피 1시까지 비디오나 보다가 아침에 9시 되어서 11시에 목욕탕에 갔다가 그 다음에 친구 만나서 저녁때 영화나 한편 보다가 그 다음에 돌아가서 또 TV를 보고 그러다가 12시쯤 자빠져 자고 아침에 늦게 일어나고 기도도 안하고 무슨 공부하는 목표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사회사업을 하는 것도 아니고,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봉사하는 것도 아니고, 자기 자신의 인격을 위해서 집요하게 진리를 추구하는 것도 아니고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고 그 하나만 들은 것입니다. 결혼할 계획이 없으면 연애하지 말라고 그랬으니까 그것이라도 순종해야지, 그렇게 해서 그래서 그 정욕을 아껴서 뭘 할 것입니까? 그래서 비디오나 보고 구경이나 다니고 친구들하고 만나서 노닥거리고 그게 뭡니까? 그러니까 삶의 초점이 없는데 안 꽂혀진 사람은 삶의 양태가 문제가 아닙니다. 그까짓 것, 아무렇게나 살든지 어차피 그것은 별로 그렇게 쓰레기 같은 인생입니다. 그렇게 살면 안 됩니다.
그래서 제가 항상 이야기합니다. 뭔가 이렇게 가슴을 에이는 듯한 목표가 있어야 합니다. 삶에 있어서. 가슴을 에이는 것 같은 그런 목표, 신앙적으로는 내가 어떻게 주님을 닮아야 될 터인데, 그리고 더 큰 목표를 설정해놓고 내가 금년에 꼭 이것을 이루어야지 될 터인데, 이 제는 내가 이것을 위해서 전력해야지 될 터인데, 금주에는 내가 이것을 위해서 혼신의 힘을 쏟아 부어서 어떻게 하든지 이것을 완성해야지 될 터인데 뭐가 있어야 됩니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그렇게 살아갑니다. 물론 그런 사람들이 사고만 안 나면 오래는 삽니다. 왜 그렇게 불꽃처럼 살고 자기를 온전히 태우면서 열렬하게 살고 뭐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통곡하고 이루어졌을 때 뛸 듯이 기뻐하고 이렇게 튜머스에 넘치는 삶을 사는 사람은 대게 일찍 죽습니다. 그런데 인생의 가치라고 하는 것은 시간의 길이에 비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해서 좋은 것도 없고, 싫은 것도 없고, 되는 것도 없고, 안 되는 것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안 된 것도 없고 된 것도 없고 그렇게 인생을 지리멸렬하게 길게 사는 게 그게 무엇입니까? 무슨 인생의 의미가 있습니까? 생명이 없는 인생입니다. 아무 희망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혼할 목표를 딱 세워놓고 그리고 연애를 하는 것입니다. 그 기간이 얼마면 좋을까? 저는 처음에는 대게 박했습니다. 6개월 정도 밖에 안주었는데 요즘에는 하도 밀린 사람들이 많아서 조금 후해졌습니다. 그래서 1년 반 정도, 최대한 많이 양보하면 1년 반 정도, 이 기간만 해도 많은 유혹을 경험하면서 흔들리기에 충분한 기간입니다. 그렇게 딱 정해놓고 마음껏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그러면서 자신들의 만남이 이 결혼으로 들어가기에 합당한지 그렇게 하고 실제적으로 그 사람의 인격을 경험하면서 그 사람 자신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모든 과정들이 다 포함해서 6개월이면 좋고 많이 양보하면 1년 6개월 정도의 기간을 두고 그 일들을 이루면서 그 에너지를 잘 집약해서 그 젊고 귀한 때 자기를 다 쏟아 부어서 치열하게 자신의 완성을 위해서 준비해야지 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정서적으로 사회적으로 인격적으로 준비되어야 합니다. 하나하나를 다 말씀드릴 수없지만 영적으로 잘 준비되어서 한 가정을 이루어서 하나님의 형상을 이렇게 담지 할 수 있는 그런 인격자들이 되어가야지 됩니다. 그 초석들이 놓여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를 5-10년이나 다녔는데 머리가 텅 비고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습니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노래 부르고 박수치고 그냥 펄펄 뛰고 깃발이나 들고 다니고 때가 되면 여기저기 몰려다니고 그렇게 하면 이게 나중에 그 사람이 결혼생활을 이루어도 그런 식의 신앙생활이 양자가 결합해서 하나님의 자식들에게 보여주는데 있어서는 절대로 도움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그렇게 준비되고 정신적으로도 준비되어야 합니다. 이성이라고 하는 것의 정의가 무엇인가 하면 사물들의 관해서 파악된 사실들을 조합하고 결합하는 기능이 이성입니다. 이게 이성의 형이상학적 정의입니다. 그래서 이런 이성을 계속 개발해서 이성이 발달해서 그래서 삶의 과정에서 만나는 수많은 사실들의 결합들이 이게 지혜 없는 방법으로 결합해서 우리를 현혹시키려고 합니다. 그때 이것들을 올바르게 결합하고 해치할 수 있는 연관된 것 같은데도 끊고 끊어진 것 같은데도 연관을 발견할 수 있는 이런 추론작용들이 이 안에 있을 때 이때 우리의 총명들이 계속 개발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총명에 의해서 영향을 받기도 하고 그때 비로소 그 아내를 혹은 남편을 비롯해서 자신의 온 가족을 데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따라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여러분 자매들에게 이야기하는데 의존적인 것들이 사랑을 불러일으키는데 좋지만 그것도 한도가 있는 것입니다. 결혼을 하면서 하는 말이 이제 내 인생은 형제에게 다 맡겨, 아니 형제가 자기 하나님이야. 무슨 형제에게 맡겨, 주님께 맡겨야지. 그렇게 해놓고 자기는 딱 눈감아버리고 그리고 온전한 의존 속에서 살아간다면 그러면 그 형제를 자기의 하나님으로 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언젠가는 그 형제에게 아주 실망을 하게끔 만듭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 자매로 하여금 하나님을 의존하도록 만듭니다. 그러니까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절대로 무비판할 정도로 남편의 편이 된다든지 그 다음에 아무 생각 없이 아내의 견해를 따라가는 그런 동류를 이루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연애 기간을 줄여서 그 다음에 혼신의 힘을 쏟아서 자기의 발전, 영적이고 정신적이고 그리고 또 사회적인 발전을 위해서 노력해야지 됩니다.
형제가 있는데 하는 일이라고 교회에 나가는 일 말고 없습니다. 교회에 와서 기타치고, 교회에 와서 먹고, 교회에서 오락도 하고, 교회에서 성경도 보고, 교회에서 놀고 그러면 사회적으로 그게 무일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어두운 세상에 나아가서 흘러가야지 될 터인데 젊은 시절에 그렇게 나태하게 보냈기 때문에 흘러갈 자원이 없습니다. 이렇게 해서 언젠가는 자원이 부족하다고 그러면 이런 사람들에게는 신앙이 있으면서도 요행수를 바랍니다. 그러면 그 다음부터 그의 인생은 하나님의 정도를 따라서 사는 인생이 어려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능히 상대방과 싸워서 이기는 힘이 있으면 반칙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반칙은 언제나 내가 불리하거나 내게 있는 자원으로 이길 수 없을 때 공정한 경쟁에서 자신이 승리할 자신이 없을 때 반칙하게 만듭니다. 반칙을 하면서 살게 됩니다. 그러면서 자신의인간관계도 상처를 입고 자기도 망가집니다. 그런 식으로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그러니까 철저히 노력해서 그래서 자기 자신이이 세상에 흘러갈 수 있는 그 소명을 이룰 수 있는 사회적인 준비들을 자신들이 해야지 됩니다. 꼭 훌륭한 학교에 들어가든지 돈을 많이 벌어야 된다든지 그 뜻이 아니라 어째든 사회적으로 자신을 책임질 수 있는 가정을 책임질 수 있는 그런 준비가 안 된 사람은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그것은 아닙니다. 생식능력이 있어서 결혼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이고 지성적이고 사회적인 준비가 되어 있을 때 그 사람이 결혼할 때가 된 사람입니다. 나이가 문제가 아닙니다. 제 나이가 얼마인데. 나이가 들었는데 사회적인 능력이 안 갖추어졌으면 아직 결혼할 때가 안 된 것입니다. 만약에 그런 상태에서 결혼을 한다면 자매가 버는 것 갖고 먹고 사는 그런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내가 여러분들에게 이야기하는 게 젊은 시절에 열심히 가치 있는 일들을 위해서 자기의 자아완성을 위해서 영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학문적으나 사회적으로나 힘을 다해서 쏟아 부어야 합니다. 이것 안 하면 젊은 시절에 낭비한 이 시간은 30년 후에 갚기로 되어 있는 지불만기 어음입니다. 이 수표가 30년 후에 다 돌아옵니다. 그러면 그다음 50살 때 파산해버립니다. 우리는 그렇게 되면 안 됩니다. 그래서 은혜를 많이 받았으면 교회에 모여서 박수치고 가스펠송만 부르지 말고 공부하던 사람은 빨리 돌아와서 무릎이 짓무르도록 앉아서 학문에 몰두하십시오. 돈버는 사람들은 남보다 더 많이 은혜를 받은 에너지를 쏟아 부어서 하나님께 철저히 기도해서 사업의 완성도를 높이고 그렇게 해서 여러분들이 사회적으로 성숙해져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한정 긴 연애기간, 이런 것들은 안 됩니다.
제가 아는 한분이 키신저 박사님 밑에서 박사 논문을 쓰고 미국계 아주 고위 관리를 지냈습니다. 하버드 출신인데 1학년 때 하버드에 들어가서 갈래야 간 것이 아니라 궁금해서 갔습니다. 갔더니 맥주집이 하나 있더랍니다. 거기에 들어갔더니 여러 학생들이 앉아서 맥주를 마시고 있더랍니다. 그런데 좀 늙스래해 보이더랍니다. 그래서 들어갔더니 너 몇 학년이냐. 그러기에 1학년인데요. 그랬더니 빨리 뛰어나가라고 그래서 미국사회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까 하고 쳐다봤더니 여기는 너희들이 오는 곳이 아니라고 하면서 지금은 너는 공부할 때다, 여기는 다 4학년이다. 그러니까 치열하게 매달려서 자기완성을 이루기 위해 몸부림을 쳐야지 됩니다. 정말입니다. 젊은 시절에 그것을 쏟아 붓지 않고 에너지 없이 사는 사람들은 이미 벌써 인생을 실패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가망성이 매우 희박해진 것입니다.
두 번째는 연애에 있어서 상대를 고르는 것 자체가 믿는 사람이라면서도 너무나 안목의 정욕에 치우쳐있습니다. 그래서 예쁜 자매, 부잣집 형제, 아니면 부잣집 형제가 아니더라도 콧날이 오뚝한 형제, 얼굴이 예쁘게 생기고 이런 사람들에게 마음이 많이 끌립니다. 그런데 이제 문제는 그 형제, 자매들이 어떤 영적인 상태였을 때 상대방을 고르는가도 굉장히 많이 중요합니다. 영적으로 침체에 떨어져서 바닥에 들어갔을 때 고루면 꼭 옛날에 자기 같은 사람을 고릅니다. 기준이 그렇게 내려가니까. 충만하고 은혜가 가득한가운데서는 사고방식 자체가 이게 신령한 방식으로 사고가 됩니다. 그래서 신령한 가치의 기준을 그래도 현실적으로 유지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선택합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다 사라지고 나면 아주 세속적인 사람이 되어버립니다. 그런 과정에서 신앙도 뛰어나고 인격도 놀랍고 성화도 많이 되고 믿음도좋고 돈도 많고 얼굴도 예쁘고 그런 사람이 왜 자기 차지가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대부분의 경우에는 뭔가 무엇을 위해서 희생을 해야 될 상황으로 선택이 주어진 경우가 많이 있는데 그때 은혜가 충만하면 신앙을 희생하지 않게 됩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신앙을 굉장히 많이 희생하게 됩니다.
2. 구도의 동지
그런데 사실 성경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 아내는 구도의 동지와 같은 것입니다. 이런 정신을 잘 구현했던 사람들이 청교도들입니다. 그래서 청교도들은 결혼하기 전에 이 사람을 사랑하는가 하는 것보다도 사랑이라는 것은 결혼을 출발점에서 계속해서 가꾸어가야 할 하나의 의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아내를 일생에 같은 구도의 길을 걸어가는 동지라고 생각하면서 함께 하나님을 알아가고 아는 것만큼 서로를 사랑하는 그래서 서로의 존재를 통해서 서로가 신자로서 완성되어가는 이런 방식의 결혼을 택했습니다. 그래서 중매결혼이 굉장히 많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모범들을 청교도들이 보였습니다. 그러니까 일시적으로 내 안에서 일어난 어떤 사람을 향한 강력한 끌림, 그런 끌림으로서의 열정과 인격적인 사랑 사이에 구분이 명확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래서 일생동안 부부로서 그 형제, 자매가 함께 일구어가야 할 사랑은 어느 순간에 울컥 솟아오르는 그런 충동적인 사랑이 아니라 인격적인 사랑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경험하는 것 같은 그런 종류의 인격적 사랑, 포기할 수도 없고 포기되어서도 안 되는 계속해서 그것들을 함께 가꾸어가야 하는 그런 관계라고 하는 것에 대한 자기 인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것들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진리의 빛과 성령의 은혜의 열이 필요하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구도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택의 범위가 점점 좁아지기는 하는데 가정 이상적인 것은 결혼을 할 때 그냥 믿는 사람이기 때문에만 결혼하지 말고 서로 이렇게 신앙적이고 영적인 대화가 가능한 그래서 서로를 격려하고 그 사람과 이런 영적인 대화를 나누고 진리를 교류하고 그럴 때 구도자로서 성도의 기쁨을 서로에게 줄 수 있는 그런 대상을 배우자로 맞이하는 것이면 최상의 선택입니다. 더군다나 그 배우자가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그런 모든 면에 있어서 모두 구비되고 사회적으로 잘 준비된 사람일 경우에는 더 훌륭한 것입니다. 그런 기준을 가지고 배우자를 골라야 합니다. 아니면 영적으로 깊은 변화를 받기까지 기다리든지 하는 것, 이렇게 되면 아주 가정공동체 자체가 진리를 서로 케어 할 수 있는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럴 경우에는 가정에 많은 문제들이 생겨나도 항상 그 진리를 공유할 수 있으니까 말씀에 의해서 문제를 풀어가면서 서로 서로가 온전해질 수 있습니다. 이런 과정의 경우에는 절대로 아내이기 때문에 전폭적으로 추종하거나 남편이라는 사실이기에 그의 추종자가 되거나 그런 아내는 생겨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중심축을 항상 잡아주십니다. 그래서 서로서로를 사랑하면서 공정하게 볼 수 있는 안목들을 갖게 된다는 점에서 이 구도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결국은 이런 것을 놓고 보면 결국은 현실적으로 보면 사실은 이런 조건을 다 갖추고 결혼하는 사람도 쉽지 않지만 또 설령 이런 조건을 어느 정도 갖추고 결혼했다고 하더라도 우리 인간이라고 하는 자체가 가변적입니다. 한때는 눈물을 흘리며 예수님밖에 사랑하는 사람이 없다고 그러다가 어느 한순간은 돌변해서 예수님이 자기의 인생의 가장 큰 걸림돌인 것처럼 생각하는 신자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늘 언제나 변함없이 그 자리에서 신실하게 자기를 대해주시는 그리스도를 향하고 하나님을 향해서도 그런 마음을 가질 수 있다면 늘 가변적이고 감정의 체계가 뒤흔드는 인간을 향해서는 얼마나 그런 마음들이 자주 많이 발생하게 되겠는가를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혼은 하지만 사랑의 관계기 때문에 서로 의존은 하지만 상대방이 각각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최종적인 의존자가 되는 것은 하나님이 원치 않으십니다. 그렇게 아내가 남편을 너무 신뢰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 남편에게 실망하게 만드십니다.
(예화: 전도하신 어느 부인의 이야기: 남편의 완벽한 사랑으로 만족하며 살았던 부인이남편이 자신을 배반하므로 남편에게 너무 깊은 상처를 경험하면서 인간이란 불안전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을 믿게 되고 인격적인 하나님을 경험하고 나니까 과거에 자기에게 상처를 준 남편을 용서하였다는 내용)
3. 자기 깨어짐
그러니까 결혼과 함께 남편의 사랑, 아내의 사랑이 되면 안 되고 예수의 사랑이라는 정체성을 유지한가운데 그 정체성 안에서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 정체성을 유지하는 비결이 무엇인가? 그게 결국 자기 깨어짐 없이는 안 됩니다. 자기를 끊임없이 깨트리는 것 없이는 안 됩니다. 그래서 내가 여러분들에게 실망을 주는지 모르지만 결혼식 주례를 할 때 요즘 꼭 하는 이야기가 무엇인가 하면 자기 깨어짐의 생애를 살아라. 그리고 결혼을 할 때 결혼의 진정한 행복을 아내가 남편인 나의 질서 밑에 굴복해서 나에게 봉사함으로 내가 이 결혼 때문에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지 말고 이렇게 사랑하는 내 남편이 결국은 내 질서 아래서 복종해서 나를 떠받들어줌으로서 내가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마라. 인생의 행복을 만약에 기준에 둔다면 남편과 아내가 서로 실망하는 기간은 1년도 많이 참은 것입니다. 훨씬 더 짧은 시간 안에 실망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인생의 참된 결혼의 보람을 어디에 두는가 하면 나를 깨트려서 나를 만나기 전에 혼자 살았더라면 도달할 수 없는 그 아름다움과 그 완전함, 그 탁월함의 상태에 내 아내가 이르도록 나를 공유한다. 내가 결혼을 통해서 저 형제가 혼자 살았더라면 결코 도달할 수 없었을 그 아름다운 상태에 도달하고 완성된 상태에 이르도록 내가 나를 깨트려서 공유하는데 나는 없고 아내는 있다. 나는 없고 남편만 있다. 그래서 내가 나를 깨트려서 저 사람이 정말 완성된 사람이 될 수 있다면 그래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사람이 될 수 있다면 나에게는 아무 영광이 없어도 나는 기쁘다. 그게 진정한 사랑의 고백입니다. 그러니까 진정한 사랑은 종교적이어야 합니다. 이런 사랑의 고백이 까리따스의 주님 앞에서 고백입니다. 나는 필요 없습니다.
제가 한 20년 전에 설교자로 부르심을 받으면서 큰 은혜를 받고 눈물로 쓴 한편의 글이 있었습니다. 그게 “거룩한 부흥”이라는 책으로 나왔는데 거기에다 내가 쓴 게 그것입니다. 그것은 아주 진심입니다. 어떤 때 이런 기도가 나왔습니다. 하나님, 저희를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 너무 신경을 쓰지 마십시오. 아무렇게나 살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럴 시간에 하나님은 당신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일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때 진심에서 우러나온 기도였습니다. 이게 하나님을 향한 사랑입니다. 그런 똑같은 수준의 사랑은 아니지만 그것과 유사한 사랑이 그 부부가 서로를 향해 하나님 앞에서 깨트려져야 할 그때 고백되어야 할 사랑입니다. 그렇게 될 때 아내를 향한 사랑과 남편을 향한 사랑이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의 질서 안에 통합을 이루어서 주님을 전심으로 추구하며 살아가는데 가정이 방해가 되지 않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목표 자체가 빨리 결혼을 해서 아파트를 장만하고 그렇게 해서 좀더 많은 재산을 가지고 큰집을 늘리고 애들 좋은 교육시키고 이러면서 좀 안락한 삶을 살고 그게 뭐가 행복하겠습니까? 진짜 행복하지 않다는 것은 여러분이 이미 다 경험해보셨습니다. 그렇게 잘산 적은 없지만 우리가 은혜를 받고 나면 그런 것들이 우리들에게 진정한 행복을 줄 수 없다고 하는 것은 배웁니다. 결혼 후에 꿈꾸는 많은 성공의 양상도 그것의 연장선상입니다. 진정으로 행복하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끊임없는 자기 깨어짐입니다. 그래서 아내가 좀 부족해도 자기 깨어짐이 늘 있는 자매라면 그 깨어짐을 통해서 주님께 더 가까이 가게 됩니다. 형제가 좀 부족하고 남편이 부족해도 자기 깨어짐이 있으면 정말 주님을 그렇게 닮아가면서 그 사랑의 질서 안에서 아내를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면서 많은 자매들이 적령기가 되면 초조해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불신결혼을 넘보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매우 불행한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 이 시간에 다 논쟁할 시간은 없습니다. 시간이 나면 다른 때 또 이야기하겠지만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이것은 결혼의 근본적인 원리에 있어서 잘못된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은 그렇게 될 때 용기를 얻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그렇게 결혼해서 아주 잘 살아가고 신앙 안에 들어온 가정을 보는데 그것은 여러분들의 눈에 비친 빙산의 일각이고 그렇게 비친 사람보다는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고통 가운데서 상처를 받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기억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되는가 안 되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자체를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오늘 제 설교를 들으면서 이런 생각을 할 것입니다. 점점 문이 좁아지네요, 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에 이 결혼이 사람의 일이라면 이런 모든 강론들이 결혼의 범위를 점점 좁게 하기 때문에 사실상 결혼을 점점 힘들게 할지 모르는데 믿음으로 하는 이런 확률에 의존해서 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에게는 어려운 일도 없고 쉬운 일도 없습니다. 하나님에게는 모든 일들이 다 똑같습니다.
문제는 믿음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많은 형제, 자매들의 문제가 무엇인가 하면 결혼 때문에 고민을 많이 하는데 실제로 기도하는 것은 고민하는 것에 비례하지 않습니다. 많은 세월을 가슴을 썩이며 고민은 많이 하는데 기도하지 않습니다. 기도하지 않는데 기도는 할지 모르는데 문제는 여러분들이 결혼을 위해서 기도하는 과정을 통해서 여러분 자신을 바꾸고 쇄신하시기를 원하십니다. 되면 되고 말면 말고 그런 식으로 하면 안 됩니다. 만약에 결혼을 해야지 되겠다는 소명을 느끼면 여러분들이 열심히 기도하십시오. 목숨을 걸고 전심으로 하나님 앞에 결혼을 위해서 기도를 하셔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놀라운 방법으로 문을 열어주셔서 그래서 여러분들이 결혼하게끔 만들어주십니다. 그런 증거를 보고 결혼 속으로 들어갈 때 우리는 이 가정이 하나님에 의해서 세워진 가정이라고 하는 확신들을 갖게 되니까 결혼의 시작의 출발이 굉장한 영적인 유익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결혼을 위해서 기도하지만 결혼을 위해서 기도하다가 자기가 깨트려지는 사람은 너무나 소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로 그것을 원하십니다.
III. 독신: 삶의 한 방식
마지막으로 시간이 많이 갔습니다. 그럼 독신은 어떨까? 라고 생각을 진지하게 하시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독신은 두 종류가 있는데 혈육적 독신과 신령한 독신이 있습니다. 혈육적 독신은 둘로 나누어지는데 자의적 독신과 타의적 독신이 있습니다. 자의적 독신은 그냥 자신이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더 잘하기 위해서 자기의 직업 활동 같은 것을 잘하기 위해서 결혼을 끔찍하다고 안 해버리는 것입니다. 이게 혈육적 독신 가운데 자의적 독신입니다. 이름을 대면 다 아는 외국의 유명한 여배우가 아주 어린나이에 결혼하고 한 1-2년도 안되어서 결혼생활을 접어버렸습니다. 그래서 기자가 물어봤습니다. 그렇게 결혼하셨는데 왜 그렇게 빨리 결혼생활을 접으셨냐고 다시 결혼하실 생각이 없는가 하고 물으니까 그런 말 하지 마십시오. 결혼을 몰랐는데 한번 해보니까 끔찍합니다. 말도 붙이지 마십시오. 독신으로 살 것입니다. 그런 게 결국 무엇인가 하면 자의적 독신입니다. 그러니까 커리어우먼 같은 사람들에게서 많이 보게 됩니다.
A. 세속적 독신
타의적 독신은 못한 것입니다. 혈육 중에서 타의적 독신에 속한 것입니다. 뭐 하고자 하는 마음은 늘 있었지만 하나님 앞에 딱 부러지게 목숨을 걸고 기도한 적도 없고 또 그렇게 하고 싶지도 않고 하다가 보니까 점점 유통날짜 지난 날짜를 자꾸 앞에다 놓다가 한계가 있는데 놓다가 20일이 만기인데 21일이 되면 그 다음에 수거해서 가져가버리듯이 쇼윈도에서 퇴장하듯이 그런 식으로 해서 결국은 결혼을 할 수 있는 인생의 진열대에서 사라진 것입니다. 그게 결국 타의적 독신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그냥 그런 것입니다. 세속적인 것입니다.
B. 신령한 독신
그러면 이제 시간이 없으니까 신령한 독신은 무엇인가? 소명 받은 독신입니다. 오늘날은 많이 나아졌는데 우리는 이 독신이라는 삶의 양태에 대해서 너무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그 나이에 아직 장가도 못 갔으면 뭔가가 고장 난 사람이겠지. 그 나이에 시집을 못 갔으면 뭔가 사연이 있는 사람이겠지. 이렇게 생각하는데 성경적으로 볼 때는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오히려 독신도 그것이 신령한 독신이라면 하나님이 정해주신 하나의 삶의 양태라고 사도는 오히려 권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거스틴 같은 사람은 이런 것을 가리켜서 거룩한 동정성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래서 결혼을 하지 않고 살아가는 신령한 이 독신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단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것이 신령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바쳐진 일생이어야 하고 동기 자체가 하나님께 자기 자신을 바치기 위해서 결혼보다는 독신으로 사는 것이 훨씬 유용하다고 소명을 느껴야 합니다. 자신이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알고 주님을 섬기면서 살아가다가 보니까 내가 결혼을 해서 가정에 매이는 것보다는 내가 자유로운 몸으로 그리고 나의 영혼과 온 마음이 나누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가정을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직접 나 자신을 전적으로 헌신하고 그래서 일생동안 내가 주님의 신부로서 살아가야지 되겠다는 소명입니다. 그런 소명을 느낀 독신은 당당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천국에서도 상급이 클 것입니다.
그 대신 지난번에 이야기했듯이 연애기간을 줄이라고 해서 그것을 순종했다고 하더라도 목표가 없는 삶을 사는 것은 아무 유익이 없듯이 그렇게 혼자 사는데도 여전히 정욕이 마음에 불붙는 것 같아서 결혼한 지체들을 넘나들고 그런 꿈을 계속 접지 못하고 자신의 가슴 속에서 다시 일구어내고 기회를 넘보고 유혹을 받고 그렇게 사는 것은 그것은 더 추루한 삶입니다. 그래서 결국 이런 것들은 하나님 앞에 자신의 인생을 향한 분명한 소명을 자신이 받도록 하나님 앞에 독대가 필요한 지점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 앞에 전적으로 바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결혼생활이 하나님 앞에 아름답고 행복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을 위해서 바쳐야 하는 에너지는 작은 것이 아닙니다.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필요로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소명만 해주신다면 그런 어마어마한 많은 에너지를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 온전히 바치면서 사는 것은 나쁘다고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물론 또 독신으로 살면 그 독신으로 사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지불해야 하는 그 에너지들이 또 어마어마합니다. 이 길을 택하든지 저 길을 택하든지 항상 십자가는 있습니다. 그리고 이 길을 택하든지 저 길을 택하든지 정답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우리들이 행복할 수 있고 그 안에서 보람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혈육적인 독신을 스스로 강요받도록 그렇게 자기가 타의적으로 독신의 삶을 들어서는 것들은 부끄러운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똑같이 생각 없이 나이가 찼기 때문에 생식능력을 가지고 결혼하는 것이나 똑같습니다. 그래서 성경에도 보면 결혼하는 것을 굉장히 신령한 일로 묘사하기도하고 가장 세속적인 일로 묘사하기도 합니다. 소돔과 고모라 심판을 이야기하면서 그때까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갔다. 아주 세속적인 일입니다. 바로 앞에 다가온 하나님의 심판을 눈멀게 만드는 아주 세속적이 육체의 일입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 보면 굉장히 신령한 일입니다. 그것은 결혼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그 결혼할 자신이 무슨 목적을 위해서 사용하는가에 달린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나이가 차서 그냥 떠밀리고 떠밀려서 집에서 박해를 받으면서 시집가고 장가가버리는 것은 마치 하다가 보니까 목적도 없이 무슨 특별하게 의도하는 것도 없이 저절로 그저 나이가 많아서 데리고 가는 사람이 없어서 결국은 시집도 못가고 장가도 못 갔다. 둘 다 다 세속적인 것입니다. 무엇인가 하나님과의 독대가 반드시 필요한 것이고 그 속에서 결혼을 해도 소명을 가지고 결혼을 합니다. 그래야지만 선한 부모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영적 의부 부모나 아니면 삭군 부모밖에 될 수 없습니다. 똑같은 것입니다. 소명 받지 못한 목회자 아무리 잘하려고 애를 써도 정말 선한 목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소명이 없는데,
독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아주 분명하게 하나님 앞에 하나님 나는 이런 삶의 양태를 기뻐한다. 그러나 뒤돌아보지 않겠다. 그리고 나는 거룩한 동정성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산다. 이렇게 혼자 살아가는 이 삶의 양태 안에서 나는 결혼할 사람이라면 도저히 할 수 없는 그 어떤 일을 위해서 나는 나 자신을 헌신하겠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해서 나는 뒤돌아보지 않고 하나님을 섬기다가 평안히 갈 것이다. 주님만이 나의 참 신랑이시다. 이렇게 살아가는 삶이 또 하나의 삶의 선택이 되는 것입니다. 어느 것을 선택할 것인가 하는 것은 여러분 자신의 몫입니다. 다만 생각 없이 세월의 물결에 떠밀리듯이 살아가지는 말라 이것은 나중에 매우 후회스러운 일이 될 것이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IV. 결론과 적용
하나님은 어느 천지에 있든지 당신의 얼굴을 구하며 당신 안에서 희망을 발견하는 사람들의 편입니다. 갈 길을 묻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길을 보여주시고 길을 알지만 갈 힘이 없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구하면 은혜를 주셔서 그들로 하여금 돌아갈 힘을 얻게 만들어주십니다. 그래서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들의 결혼에 대해서, 독신에 대해서 하나님이 지대한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문제는 여러분들이 마음을 다 모으고 하나님 앞에 무엇인가 여러분들의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을 들을 마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 과정을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쇄신된 사람들이 되기를 기대하십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청년 세미나 1